SWC.2 심화

3.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와 레위기 2장의 소제 사이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래서 레1에는 반복해서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레2에서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 가운데 일부만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돌립니다. 왜 하나님께 드린 예물을 사람이 다시 먹는 것일까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18:6)은 이 부분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소제를 먹는 것이 인간 편에서의 상호성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을 표상하며, 그로 말미암아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은 인간이 선과 진리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인간의 바깥에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원하고, 행함으로써 마치 자신의 것처럼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야 실제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식탁 위에 놓여 있어도 바라보기만 해서는 몸의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먹고 소화하여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책 안에 있는 진리, 설교에서 들은 진리, 머릿속으로 이해한 교리는 아직 완전히 우리의 삶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 실제로 살아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는 것과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실제로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진리를 아는 것과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다는 교리를 이해하는 것과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실제 선을 행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의지와 행동으로 내려와 삶이 될 때 비로소 영적으로 먹은 이 됩니다.

 

그런데 소제의 일부는 먼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인간이 진리와 선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질서가 먼저 서 있습니다. 내가 선을 행했다고 해서 그 선의 근원이 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그 진리를 내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에는 매우 아름다운 왕복 운동이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가 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삶의 선을 다시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께서 주시고, 인간은 받아 응답하며, 그 응답을 통해 다시 주님과 결합합니다.

 

AC.2177이 이것을 상호성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과 인간의 결합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물론 모든 선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인간이 그 사랑에 응답하며,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인간이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찬과도 매우 깊은 연결을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소제와 전제가 교회와 천국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며, 성찬의 떡과 포도주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10137, 29:40). 성찬에서도 떡을 바라보기만 하지 않고 먹습니다.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자신의 영적 생명으로 삼는다는 표상입니다.

 

그래서 레2에서 제사장이 남은 소제를 먹는 장면은 사소한 제사 규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의 진리가 어떻게 인간의 삶이 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읽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해하는 데서도 끝나서는 안 됩니다. 먹어야 합니다. 곧 받아들여 의지하고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1의 번제가 나의 전부가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2의 소제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내가 실제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과 주님에게서 받아 먹는 것이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순환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그것을 살아 내고, 다시 주님께 돌리는 것, 바로 그 안에서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소제의 남은 것을 먹는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말씀을 읽고 있는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말씀을 먹고 있는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오늘 나의 말과 선택과 관계와 행동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이 될 때,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 살아 있게 됩니다. (SWC.2 심화 3)

 

 

 

SW.4, 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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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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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드시 넣도록 한 것입니다. 특히 꿀까지 금지했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성경에서 꿀은 흔히 좋은 것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규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37(29:40)은 레2:11-13의 규정을 직접 다루면서 누룩은 악에서 나오는 거짓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악이 먼저 있고 그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제에 누룩을 넣지 않는 것은 주님께 드리는 예배 안에 악에서 나온 거짓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꿀은 조금 다릅니다. 꿀은 그 자체로 언제나 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꿀이 자연적 인간의 즐거움, 외적인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의 즐거움에 오염되어 거룩한 것과 섞이는 경우입니다. AC.5650(43:11)은 바로 레2:11을 인용하면서 꿀이 세상에서 감각을 통해 오는 외적 즐거움과 관계하기 때문에 소제에서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에는 깊은 기쁨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 때문에 기쁜가?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 기쁜 것인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서 기쁜 것인지, 종교적인 일을 통해 명예나 영향력을 얻어서 기쁜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웃에게 실제 선이 이루어져서 기쁜 것인지가 다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예배와 선행이라도 그 안에 이 섞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칭찬을 기대하고 행하는 선, 자기 의를 즐기는 봉사, 인정받지 못하면 금세 낙심하거나 분노하는 헌신이라면 외적인 즐거움이 예배의 동기 속에 깊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2는 그런 것을 제단의 불에 올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누룩과 꿀을 빼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AC.9207(22:22)은 레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소금이 진리가 선을 갈망하고 선이 진리를 갈망하는 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언약의 소금이라고 부릅니다. 언약은 결합이고, 소금은 그 결합을 향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참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진리는 실제 용서의 선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실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반대로 참된 선은 진리를 원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무엇이 상대방에게 실제로 유익한지 알지 못한다면 선한 의도만으로 잘못된 일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은 진리를 통해 형태와 방향을 얻습니다.

 

그래서 소금은 단순히 변하지 않게 보존한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소금의 핵심은 결합을 향한 갈망입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예물에 있어야 합니다.

 

2의 이 세 가지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누룩은 빼라. 꿀도 제단의 불에 올리지 말라. 그러나 소금은 절대로 빼지 말라.악에서 나오는 거짓은 버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물든 외적 즐거움도 예배의 동기로 삼지 말되, 선과 진리가 결합하려는 갈망만은 절대로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와 신앙생활을 돌아보며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 신앙에는 어떤 누룩이 들어 있는가?’, ‘내가 주님을 섬기면서 은밀히 맛보고 싶은 꿀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 소금이 있는가? 내가 아는 진리가 실제 선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가?

 

주님께서 찾으시는 소제는 겉으로 화려한 소제가 아닙니다. 거짓이 섞이지 않고, 자기 사랑의 즐거움이 지배하지 않으며,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기를 갈망하는 소제입니다. 그래서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는 짧은 말씀은 우리의 모든 예배와 삶을 관통하는 명령이 됩니다. (SWC.2 심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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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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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레위기 2장의 소제를 가장 짧게 표현한다면 고운 가루 + 기름 + 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를 함께 드리도록 하셨을까요? 단순히 향기롭고 좋은 제물을 만들기 위한 조리법이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세 가지의 결합 속에서 소제의 핵심적인 영적 질서를 봅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5:8)은 놀랍게도 레2:1-2를 직접 인용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고운 가루가 진정한 진리를 의미하고,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소제의 세 재료는 단순한 음식 재료가 아니라 진리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함께 있는 예배를 보여 줍니다.

 

고운 가루부터 살펴보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95(29:2)는 고운 가루를 선에서 나오는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진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선에서 신적 진리가 나오며, 인간 안에서도 참된 진리는 결국 선을 섬기고 선으로 인도합니다. 따라서 고운 가루는 단순히 많이 배운 교리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선하게 만드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고운 가루만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위에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기름은 사랑의 선을 표상합니다. 진리에 사랑이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진리라도 사랑과 분리되면 사람을 살리는 진리가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한 진리,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진리, 지적 우월감을 위한 진리는 고운 가루만 있고 기름이 없는 상태와 비슷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사랑 안에서 사용될 때 그 본래의 목적을 이룹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향이 더해집니다.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과 관계합니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이웃 사랑과 체어리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제 안에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사랑의 선이 오고, 그 선에서 진리가 나오며, 그 사랑과 진리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을 점검하는 매우 좋은 기준이 됩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 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 진리에는 기름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향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더 온유하고 정직하며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는 신앙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면 메마른 지식이 되기 쉽고, 사랑이라고 하면서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으로 선한 것인지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주님 사랑을 말하면서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 사랑 역시 삶에서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한 소제 안에 함께 놓이는 것은 그래서 매우 아름다운 상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사람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고,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은 하나의 소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사랑과 삶도 하나가 됩니다. (SWC.2 심화 1)

 

 

 

SW.4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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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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