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1

아벨(Abel)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뜻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ThatAbelsignifies charity has been shown before. By charity is meant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for he who loves his neighbor as himself is also compassionate toward him in his sufferings, as toward himself.

 

해설

AC.351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지금까지 계속 아벨이라고 불러 온 체어리티가 실제로 어떤 사랑인지를 매우 따뜻하고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여기서는 그러면 체어리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자비가 무엇인지를 다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신학 용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선이 나와 무관하지 않게 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체어리티를 단순히 선행이라고 번역하거나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행은 체어리티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이지만 체어리티 자체는 그보다 더 안쪽에 있습니다. 바로 앞 AC.348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가 나올 수 있으며 그러한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까지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날 때 살아 있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와 선행은 분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완전히 같은 말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선한 행위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사랑이고, 행위는 그 사랑이 자연계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AC.351은 여기에 자비(mercy)를 곧바로 연결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다른 사람의 모든 감정과 고통을 문자 그대로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성격과 감수성은 다르며,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동일하게 체험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일이니 나와 상관없다고 외면하지 않고 그의 어려움과 선을 자신의 관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단순한 감상이나 순간적인 연민과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마음이 아픈 것은 귀한 출발일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가?를 묻게 합니다. 때로는 위로하고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자비이고,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자비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길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한 체어리티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사랑도 아니고, 고통을 없애 주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진리는 무엇이 이웃에게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도록 하고, 체어리티는 그 선을 실제로 바라며 행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은 여기에서도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AC.348-351의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가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AC.350에서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51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체어리티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것을 체어리티 행위 예배라는 기계적인 단계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대조도 훨씬 실제적으로 보게 합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단지 아벨=이라는 추상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아벨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돌아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속뜻도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소멸시키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라는 신학 용어 하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교회의 생명입니다. 교리가 남고 신앙 고백이 남고 예배까지 남아 있으면서도 이웃의 고통과 선에는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감정을 많이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체어리티가 없다고 할 수 없고, 눈물을 잘 흘리거나 공감을 잘 표현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깊은 체어리티 안에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AC.351의 핵심은 감정 표현의 정도가 아니라 이웃의 고통과 선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랑입니다. 조용히 필요한 일을 해 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더 큰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단호하게 돕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외적인 모습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원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350에서 떼의 처음 이 의미하는 거룩한 것도, ‘기름진 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도 오직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마음을 짜내어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물리치는 거듭남의 과정을 통하여 조금씩 이웃의 선을 자기 일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했을 때에도 나는 원래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자기에게 공로를 돌리기보다 그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 체어리티의 질서와도 맞습니다.

 

AC.351은 목회와 교회의 삶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실제적인 기준을 줍니다. 교회는 진리를 가르쳐야 하고 바른 교리를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람을 이웃의 고통에 더 무감각하게 만들고,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쉽게 멸시하게 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형편보다 자기 입장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 더 몰두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말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중요하지 않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참된 사랑은 이웃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지를 알아야 하며, 그 분별에는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특히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만 적용하기 쉽습니다. 가족이나 친한 사람의 아픔에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이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의 고통에는 훨씬 쉽게 무관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연적 호감과 같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뜻도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방을 하나의 영혼을 가진 이웃으로 보고 그의 참된 선을 바라는 데까지 우리를 이끕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체어리티는 자연적인 인정이나 친밀감을 넘어 영적인 사랑이 됩니다.

 

결국 AC.351아벨이라는 이름에 담긴 체어리티를 아주 실제적인 언어로 풀어 줍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감정적 연민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며, 진리의 인도를 받아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위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은 두 신학 개념을 올바르게 배열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마침내 다른 사람의 선과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AC.351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내게 이웃의 고통은 여전히 남의 일인가, 아니면 그의 참된 선이 나에게도 중요해지고 있는가?입니다.

 

 

 

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이 오직 주님께만 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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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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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4:4)

 

AC.350

여기서 아벨(Abel)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떼의 처음 (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새끼’)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기름진 (fat, 기름’) 천적인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음을 뜻합니다. ByAbelhere as before is signified charity; and by thefirstlings of the flockis signified that which is holy, which is of the Lord alone; byfat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also is of the Lord; and by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 were well-pleasing to the Lord.

 

해설

AC.350은 창4:4의 아벨의 제물을 개괄하면서 바로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 정반대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AC.346-349에서는 가인의 땅의 소산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행위이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 역시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예배가 아닙니다. 이제 아벨의 제물에서는 그 반대편이 나타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 떼의 처음 은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 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은 단순히 가인의 것보다 더 좋은 물질을 드린 제사가 아니라 체어리티에 기초한 살아 있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먼저 아벨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을 단순히 착한 사람’, 가인을 나쁜 사람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그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두 형제의 제물은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두 개인이 서로 다른 물건을 하나님께 바친 사건의 차원을 넘어, 서로 다른 내적 근원에서 나오는 두 종류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가인의 예배에는 외적 행위와 제물이 있었지만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었고, 아벨의 예배는 체어리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곡식과 양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거룩한가가 아니라 그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생명이 무엇인가입니다.

 

떼의 처음 에서 스베덴보리는 처음 이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곧바로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짧은 말은 AC.350 전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참된 선과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다면 그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거룩함을 생산하여 그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면서, 그 선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처음 을 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드러내는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거룩함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선을 행하면서 내가 선하다고 자기에게 돌리는 것과,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기름진 천적인 자체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다시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이라고 강조합니다. ‘처음 의 거룩함도 주님의 것이고 기름진 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이 문맥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 속한 선이라는 중심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그 기름진 것을 드렸다는 것은 단순히 가장 좋은 부분을 골라 바쳤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배의 내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함과 사랑의 선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도 자연적인 제물의 품질보다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이 중심입니다.

 

이것은 AC.349의 핵심 원리와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AC.350의 아벨의 제물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외적으로는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기름진 것을 드리지만, 그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체어리티와 천적인 선이며 그 모든 것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를 서로 대립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고 표현하는 그릇이며, 내적인 것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때 그 외적인 예배 역시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문제는 외적인 예배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외적인 것 안에 무엇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도 이 질서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어떤 종류의 제물을 보시고 마음이 바뀌어 아벨에게는 호의를 보이시고 가인에게는 호의를 거두셨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은 변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주님 쪽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 쪽의 받아들임에 있습니다.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예배라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생명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원문의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예배를 드린 뒤 별도로 추가하는 선행 하나가 아닙니다.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토대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웃에게 착하게만 하면 예배나 신앙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체어리티 자체도 주님에게서 오며, 진리는 무엇이 참된 선이고 참된 이웃 사랑인지를 가르칩니다.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결합되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 안에서 표현될 때 예배는 살아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50은 신앙을 체어리티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의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둘 다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으므로 차이는 예배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체어리티에 기초하여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창4:3-4를 곡식 제사와 동물 제사의 우열로 읽는 것은 속뜻의 중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곡식과 첫 열매 역시 거룩한 제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양고기를 곡식보다 좋아하셨기 때문에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물질에 있지 않고 그것들이 표상하는 내적 상태에 있습니다.

 

AC.348-350을 함께 놓으면 이 질서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을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습니다. AC.349에서는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50에서는 아벨의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합니다. 다만 이것을 체어리티 행위 예배라는 기계적인 세 단계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모두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과 살아 있는 행위와 살아 있는 예배의 생명은 서로 다른 세 근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예배에도 직접적인 자기 성찰의 기준이 됩니다. 예배의 형식과 말씀의 정확성, 기도와 찬송, 헌금과 봉사는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의와 경건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예배는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하기보다 그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게 하고, 자기 안의 악을 살펴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을 드린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무엇인가 특별한 종교적 행위를 더 많이 드린다는 뜻보다 내가 가진 선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고 그 선에 따라 살아가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50의 중심은 아벨의 제물을 주님께서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아벨이라는 개인을 편애하셨기 때문도 아니고, 양의 제물이 땅의 소산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 떼의 처음 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 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의 질서와 합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와 거룩함과 천적인 선의 근원 역시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를 가르는 가장 깊은 차이이며, 동시에 살아 있는 예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AC.350의 핵심입니다.

 

 

 

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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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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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9

제물(offering)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모든 소산의 열매, 그리고 처음 것을 드리는 것도 제물(offerings)이라 불렀으며, 그들의 예배는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모두 주님을 가리켰으므로, 이러한 제물들이 참된 예배를 상징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 죽은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표상교회의 모든 제물은 주님을 향한 예배를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앞으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각각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물(offerings)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선지서 전반에서도 분명합니다. 말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 by anofferingis meant worship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ves of the Jewish church, in which sacrifices of every kind, as well as the first fruits of the earth and of all its produce, and the oblation of the firstborn, were calledofferings,in which their worship consisted. And as they all represented heavenly things, and all had reference to the Lord, it must be obvious to everyone that true worship was signified by these offerings. For what is a representative without the thing it represents? Or what is an external religion without an internal but a kind of idol and a thing of death? The external has life from things internal, that is, through these from the Lord. From these considerations it is evident that all the offerings of a representative church signify the worship of the Lord; and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reat in particular in the following pages. That byofferingsin general is meant worship, is evident in the prophets throughout, as in Malachi: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3:2-4) Who shall abide the day of his coming? He shall sit as a refiner and purifier of silver, and he shall purify the sons of Levi, and purge them as gold and silver, and they shall offer unto Jehovah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Then shall the offering of Judah and of Jerusalem be pleasant unto Jehovah, as in the days of eternity, and as in ancient years. (Mal. 3:24)

 

공의로운 제물(offering in righteousness) 내적 제물이며, 레위 자손(sons of Levi),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드릴 것입니다. 옛날(days of eternity) 태고교회를, 고대(ancient years)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offering in righteousnessis an internal offering, which thesons of Levi,that is, holy worshipers, will offer. Thedays of eternity,signify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eancient years,the ancient church. In Ezekiel: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이 땅에 있어서 거룩한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20:40) In the mountain of my holiness, in the mountain of the height of Israel, there shall all the house of Israel, all that land, worship me; there will I accept them, and there will I require your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your offerings, in all your sanctifyings. (Ezek. 20:40)

 

예물(Oblations) 너희가 드리는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역시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행위를 뜻합니다. 스바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blationsand the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are likewise works sanctified by charity from the Lord. In Zephaniah:

 

내게 구하는 백성들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3:10) From beyond the rivers of Ethiopia my suppliants shall bring mine offering. (Zeph. 3:10)

 

구스(Ethiopia) 천적인 것들,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Ethiopiadenotes those who are in possession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love, charity, and the works of charity.

 

해설

AC.349AC.346에서 제시한 세 번째 표현, 곧 가인이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다는 말씀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제물이 그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고 간단히 밝혔습니다. 이제 AC.349는 왜 말씀에서 제물이 예배를 의미하는지를 유대교회의 표상들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그 모든 소산의 첫 열매,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도 모두 제물이라고 불렀고, 그러한 것들이 유대교회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외적인 제물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궁극적으로 모두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에 예배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제물이 예배인 까닭은 제단 위에 어떤 물질을 올려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거룩한 실재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표상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외적인 의식이 사랑과 체어리티와 주님을 향한 예배를 표상한다면, 그 안에는 실제로 그 내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질문은 더욱 강합니다.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 죽은 외에 무엇이겠습니까?이것은 바로 앞 AC.348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고, 이제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를 죽은 이라고 합니다. 행위든 예배든 외적인 형식 자체가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외적인 예배는 중요하지 않다거나 내적인 마음만 바르면 예배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외적인 것을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외적인 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349의 핵심 문장은 바로 이것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질서는 주님에게서 시작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사람의 내면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와 행위 가운데 표현될 때 외적인 것은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는 서로 경쟁하는 두 종류의 예배가 아니라,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표현되고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하나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가인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예배가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46에서 이미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보았고, AC.348에서는 가인의 땅의 소산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죽은 행위를 뜻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AC.349에서는 그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겉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외적 예배의 존재만으로 참된 예배가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외적인 것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이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3:2-4, 20:40, 3:10의 인용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여러 방향에서 뒷받침합니다. 말라기의 공의로운 제물은 스베덴보리에게 내적 제물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드리는 레위 자손은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며, ‘옛날은 태고교회, ‘고대는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제사 형식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내적 본질입니다. 특히 레위가 등장하는 것은 앞의 AC.34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했고 그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와 체어리티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외적인 의식의 정교함이 예배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그 안에 있을 때 예배가 살아 있게 됩니다.

 

20:40은 이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물 열매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행위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AC.348AC.349를 연결하는 중요한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AC.348에서는 살아 있는 열매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했고, 이제 AC.349에서는 그 체어리티의 행위가 다시 주님으로 말미암아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인간 자신의 선한 성품이나 공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참된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참된 예물이 되고 그 행위와 결합된 외적 예배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3:10구스에 대한 설명도 같은 논증을 마무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스가 천적인 것들,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49에 인용된 여러 말씀을 각각 별개의 주제로 떼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라기의 공의로운 제물’, 에스겔의 예물과 열매’, 스바냐의 예물은 모두 제물의 참된 영적 실재가 사랑과 체어리티와 그 행위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함께 인용되었습니다. 외적 제물이 참된 예배를 의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내적 실재를 담고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46부터 AC.349까지의 흐름도 매우 선명해집니다. AC.346날들의 끝에’, ‘땅의 소산’, ‘제물을 각각 시간의 경과,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개괄했습니다. AC.347은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리 분리되는 상태를 설명했고, AC.348은 그 상태에서 나온 땅의 소산이 왜 죽은 행위인지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AC.349는 이제 그러한 행위에서 나온 외적 예배 역시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결국 창4:3 전체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낳고, 더 나아가 예배의 형태까지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가인의 제물 이야기를 가인은 나쁜 것을 드렸고 아벨은 좋은 것을 드렸다는 물질적 차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곡식을 드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땅의 소산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고, 곡식 제물이 본질적으로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제물이 어떤 내적 상태에서 나왔는가입니다. 바로 다음 AC.350부터는 아벨의 제물이 다루어집니다. 가인과 아벨 모두 외적으로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두 제물의 차이는 제단 위에 놓인 물질보다 그 예배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의 차이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를 돌아볼 때도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헌금하고 성찬에 참여하며 설교하고 봉사하는 외적 예배는 모두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자동으로 예배에 영적 생명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AC.349가 묻는 것은 예배 형식을 갖추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외적인 것에 무엇이 생명을 주고 있는가?입니다. 예배가 우리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 예배는 정교하게 유지하면서도 자기 의와 지배욕과 다른 사람에 대한 멸시를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가인의 제물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예배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AC.349의 중심은 예배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한 질문으로 압축됩니다. 외적 형식이 스스로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이것이 이 번호의 중심 문장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외적인 것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외적인 형식만 충실하게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내적인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외적인 행위와 예배 가운데 표현되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바로 그 질서가 깨어졌을 때 외적 예배가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절의 아벨의 제물은 그와 반대로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게 됩니다.

 

 

 

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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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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