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가인의 분리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자체로 하나의 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미 그 분리가 장차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창4의 흐름을 따라가면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 분리가 처음 나타났을 때 강제로라도 막지 않으셨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서 주님은 인간이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사람이 돌이킬 수 있도록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을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따라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막지 않으셨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려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제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사람의 행동을 외적으로 통제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전혀 할 수 없도록 의지와 사고가 강제된다면, 겉으로는 질서 있는 행동이 나타날지 몰라도 자유로운 사랑의 결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원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가운데 그 자유가 잘못 사용되는 것까지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허용방치는 전혀 다릅니다. 방치는 인간을 내버려 두는 것이지만, 주님의 허용 안에는 끊임없는 억제와 인도와 보존이 함께 있습니다. 사람이 악으로 기울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악이 가능한 한 더 멀리 진행되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4의 가인 이야기에서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가인이 분하여 안색이 변했을 때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가인이 더 멀리 나아가기 전에 다시 선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AC.328에 따르면 체어리티는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삼아 체어리티보다 높아지지만 않는다면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신앙을 버려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다시 선과 체어리티와 올바른 관계 안에 놓이도록 부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지막 선택을 강제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내면을 강제로 조종하시거나 다른 생각밖에는 할 수 없도록 만드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유가 거듭남과 결합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을 보여 주시고 진리로 깨우치시며, 악을 억제하시고 내적으로 경고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한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고, 속뜻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매우 깊은 실패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AC.330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것이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존된 것은 분리된 신앙의 잘못된 상태 자체가 승인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장차 선한 목적에 사용하실 수 있는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방식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면 그것을 통째로 없애 버리고 싶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왜곡한 것 가운데에서도 장차 구원의 질서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은 잘못되었지만 신앙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그것을 사랑에서 떼어 냈지만 주님께서는 신앙이라는 수단 자체를 버리지 않으시고, 이후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될 수 있도록 보존하십니다.

 

이 점은 바로 뒤의 셋과 에노스에서도 보게 됩니다. AC.335에서는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시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신앙을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신앙 자체를 폐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 넓은 이후의 AC 문맥에서는 태고교회의 종말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마침내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도록 준비하시는 흐름도 나타납니다. 다만 이것은 AC.338 한 번호가 직접 말하는 내용이라기보다 이후 AC에서 더 넓게 전개되는 섭리의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패와 주님의 섭리는 동시에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오용하여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한 악을 억제하시고,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새로운 회복의 길을 준비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에게 잘못 선택할 있는 자유까지 허용하셨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유가 주님과의 결합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반드시 실제로 악을 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유란 악을 행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인간이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악을 선택할 가능성은 자유의 오용에서 따라오는 것이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한 번도 잘못 선택하지 못하도록 모든 길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면서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잘못 선택했을 때에도 가능한 한 회개의 길을 열어 두십니다. 이것이 허용방치의 차이입니다. 방치는 인간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한순간도 구원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인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억지로 없애지는 않으시지만, 동시에 그가 다시 선으로 돌아설 길도 계속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섭리를 강제로 개입하지 않으셨는가?라는 기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깊은 섭리는 때로 인간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안에서 선을 향해 이끄시고, 인간의 실패 가운데에서도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여 다시 구원의 질서 안에서 사용하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사랑과 신앙을 분리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 자체를 선이라고 하시지 않으면서도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시고,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될 길을 마련하십니다. 인간의 실패는 실제이지만, 그 실패보다 주님의 섭리가 더 깊습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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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 심화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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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번째 자손, 처음 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신앙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태고교회에도 신앙은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방식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별개의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알았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한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그런데 AC.338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갑자기 신앙을 버렸거나 처음부터 거짓된 신앙을 만들어 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하나의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8에서 가인=신앙이라고 한 말과 앞에서 가인=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한 말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가인은 참된 것인 신앙을 붙들고 있지만, 그 신앙을 본래의 사랑의 질서에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세우는 교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이 처음에는 완전히 정상적인 신앙이었다가 나중에 분리된 신앙으로 변했다고 너무 선명하게 시간적 단계를 나누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338의 바로 이 시점에서 이미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정하는 분리의 성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분리의 결과가 처음부터 모두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4의 뒤를 따라가면 신앙이 점차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질을 드러낸다는 질서를 거부하며,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진행됩니다. 따라서 AC.338은 분리의 원리가 처음 드러나는 지점을 보여 주고, 후속 본문은 그 원리가 어디까지 발전하는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이 구별분리의 차이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신앙이고 무엇이 체어리티인지, 진리와 선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분명히 배우는 것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을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것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전자는 이해를 위한 구별이지만 후자는 생명의 질서를 깨뜨리는 분리입니다.

 

부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차이를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배려와 존중과 신실함의 원칙은 사랑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그 원칙을 글로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사랑을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서로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원칙들만 정확히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원칙은 사랑을 섬기는 자리에서 벗어나 사랑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원칙 자체가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참된 것이 본래의 관계에서 분리된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중요하다’, ‘교리는 정확해야 한다’, ‘진리와 거짓을 분별해야 한다는 말 자체는 모두 옳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과 교리와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가인의 질서가 나타납니다.

 

이 때문에 가인의 문제는 매우 미묘합니다.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참된 것 하나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로 높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단 역시 반드시 처음부터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를 지나치게 높이고 다른 선과 진리와의 살아 있는 결합을 끊을 때에도 왜곡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37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는 설명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 자체를 가인의 상태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채 독립적인 최종 목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진리를 배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진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38의 핵심은 가인은 신앙이다가인은 분리된 신앙이다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하지만, 바로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독립된 것으로 인정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창4의 뒤는 그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았고, 나중에는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38은 분리가 처음 드러나는 아주 중요한 지점입니다. 신앙 자체는 참된 것이지만, 그것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살아 있는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지만, 사랑에서 떨어져 자기 자신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신앙은 가인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신앙을 쉽게 가인이라고 판정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악을 더 잘 보고 피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자기 옳음을 증명하고 다른 사람을 낮추며, 사랑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면 우리는 신앙이 그 생명의 자리에서 분리되기 시작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남을 정죄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입니다.

 

 

 

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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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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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은 ‘이영길 수도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수도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전남 화순의 깊은 산속에서 오랫동안 홀로 수도하던 이영길 수도사를 찾아가 만났고, 그에게 함께 수도하며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영길 수도사는 ‘수도가 완성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수도의 완성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기 안의 ‘음란의 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죄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눈물이 나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런 모습을 ‘수도사의 영성’으로 높이 평가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영길 수도사가 오랫동안 여성을 전혀 만나지 않고 살아왔음에도 ‘아직 내 속에서 음란의 영이 빠지지 않았다’고 고백했다는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외적 환경과 내적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통찰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을 만나지 않는다고 음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혹의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그 욕망 자체가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악이 외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기보다 사람의 내적 사랑과 애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들어가 외적인 자극을 차단했다고 해서 내적인 악이 자동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십 년 넘게 여자를 보지 않았는데도 아직 내 안에 음란이 남아 있다’는 고백은 오히려 자기 상태를 정직하게 바라보려는 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음란의 영이 완전히 빠져야 수도가 완성된다’는 표현을 조금 다르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욕망은 어떤 외적 영이 몸속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물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의 악한 애정에는 지옥의 영들이 인플럭스를 주지만, 그들이 사람 안에 어떤 독립된 실체로 ‘들어앉아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어떤 악을 즐거워할 때, 그 악과 같은 사랑을 가진 영적 공동체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그 악을 죄로 인식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기 시작하면 그 연결이 약해지고, 선한 영들과 천국의 인플럭스를 더 자유롭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음란의 영을 빼내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음란한 욕망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거절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순결한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단순한 억압과도 다릅니다. 어떤 욕망이 떠오르지 않도록 환경을 차단하는 것과 그 욕망 자체가 변화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사람은 수도원에 들어가 외적 유혹을 거의 경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악이 내면에 그대로 잠복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한복판에 살면서도 그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이것은 주님의 질서에 반한다’고 인식하고 자유롭게 거절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점차 그 악의 즐거움 자체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이 실제적인 영적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이영길 수도사의 고백에서 귀하게 볼 부분은 ‘나는 이미 수도자가 되었으니 순결하다’고 스스로 완성된 사람처럼 여기지 않고, 오랜 수도생활 후에도 자기 안의 남은 악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악이 완전히 없어져야 수도가 완성된다’는 생각에는 한 가지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거듭남은 이 세상에서 한순간에 끝나는 완제품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거듭나며, 천국에 들어간 뒤에도 영원히 더 완전한 선과 지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어느 날 ‘이제 내 안에는 음란도 없고 자기 사랑도 없고 모든 악이 사라졌으니 수도가 완성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종착점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proprium이 남아 있는지를 더 섬세하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참된 성숙은 ‘나는 완성되었다’는 확신보다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인식의 깊어짐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기준으로 제시된 것은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이영길 수도사는 자신이 본래 죄인이며,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오고, 그렇게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의 눈물이 흐르는 때가 수도의 완성이라고 말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이러한 십자가 사랑과 감사 자체는 귀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와 주님의 구원을 깊이 느끼면서 마음이 녹아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실제적인 종교적 체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눈물이 난다는 현상 자체를 영적 완성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감정의 강도와 영적 상태의 깊이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쉽게 눈물을 흘리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분노와 지배욕과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거의 눈물을 흘리지 않지만,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오랫동안 악을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의 기준은 감정 표현의 강도가 아니라 지배적인 사랑과 실제 삶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십자가를 생각한 결과 내가 악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는가?’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셔야 하는데 그 형벌을 예수님께 대신 내리셨다’는 단순한 형벌 대속의 구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옥 전체와 마지막으로 싸우시고, 그것을 완전히 정복하신 가장 큰 시험이었으며, 동시에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신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깊이 묵상한다는 것은 ‘내가 받을 벌을 주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감격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를 악과 지옥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어떤 싸움을 치르셨는지를 바라보고, 우리 역시 주님의 힘으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우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영상 중 강문호 수도사는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수정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법적 죄책으로 전가되어 모든 사람이 그 죄 때문에 정죄된다는 전통적인 원죄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책 자체가 아니라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 곧 유전악입니다. 사람은 조상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자유롭게 악을 사랑하고 선택하여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때 그 악과 결합합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유죄가 되었다는 식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는 다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인간의 근본 문제를 ‘아담이 저지른 죄의 형벌을 내가 대신 뒤집어쓴 것’으로 이해하면 구원도 그 법적 형벌을 누군가 대신 해결해 주는 구조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실제적인 악의 사랑과 그로 인해 뒤틀린 삶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구원 역시 단순히 죄책의 장부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악의 권세에서 실제로 건져 내어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 역시 죄책감과 눈물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의 질서가 실제로 바뀌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영상에서 이영길 수도사가 산속에 자신의 무덤을 미리 파 놓고 ‘내가 죽으면 여기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소개됩니다. 이것은 죽음을 기억하며 세상의 소유와 욕망을 내려놓으려는 수도 전통의 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 자체를 반복해서 바라보는 것이 영성의 목적은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끝이 아니라 영계에서의 삶으로 넘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언제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죽은 뒤에도 그대로 가지고 갈 사랑은 지금 무엇인가?’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 재산과 지위와 육체를 모두 남겨 두고 갑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한 것은 가지고 갑니다. 돈을 사랑했다면 그 사랑을 가지고 가고, 지배를 사랑했다면 그 욕망을 가지고 가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했다면 그 사랑 역시 가지고 갑니다. 그러므로 무덤을 파 놓고 바라보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죽음의 준비는 매일 자기 안의 악한 사랑을 살피는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은 결국 ‘지금 내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영길 수도사의 모습을 ‘사람 같지 않은 수도사의 모습’으로 묘사하며 큰 감동을 표현합니다. 깊은 산속에서 휴대전화조차 터지지 않는 곳에 십 년 넘게 홀로 머물고, 여성을 만나지 않으며, 자신의 무덤까지 준비해 놓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삶은 분명 현대인의 눈에는 놀랍게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외적 극단성에 대한 감탄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사람이 재산을 모두 버려도 ‘나는 모든 것을 버린 수도자’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자기 생각을 사랑할 수 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도 자기 우월감을 사랑할 수 있으며, 무덤을 파 놓고 죽음을 묵상하면서도 자신의 영성을 특별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재산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며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알고, 자기 이익보다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금욕의 양은 영성의 높이를 측정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영길 수도사의 수도생활을 낮추어 볼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영상에서 아름답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오랫동안 수도했음에도 아직 자기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고백했다는 부분입니다. 만일 그 고백이 진실했다면, 그것은 자기 완성을 과시하는 말보다 훨씬 수도적입니다. 십 년을 수행한 뒤에도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살피는 태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사람이 거듭날수록 자신에게 있는 선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더 많이 보고, 자기 의보다 자신의 proprium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더 깊이 보게 됩니다.

 

다만 이 영상 전체에서 수도의 완성이 ‘음란의 욕망이 완전히 없어지고,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 상태’로 압축되는 것은 조금 아쉽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 존재 전체에 관한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음란도 중요한 악이지만, 교만, 지배욕, 자기 공로, 복수심, 탐욕, 거짓, 타인을 업신여기는 마음 등도 모두 거듭남의 대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적 욕망에서는 매우 자유로워졌어도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하다면 아직 깊은 거듭남의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눈물은 거의 없지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매우 깊은 영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의 완성’은 특정 욕망 하나가 사라지거나 특정 감정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상태라기보다,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이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옮겨 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는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완전한 종착점이 없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도 천사들은 완성된 채 멈춰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사랑과 지혜에서 자라갑니다.

 

이 영상은 수도가 단순한 외적 형식이 아니라 자기 내면과 싸우는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귀합니다. 깊은 산속에 십 년 넘게 홀로 살았어도 자기 안의 음란을 문제 삼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고백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졌을 때에도 같은 사람인가? 외적 환경이 바뀌었을 뿐인데 그것을 내적 변화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악을 정직하게 보고 있는가?’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마지막에 다시 주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수도의 목적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완벽한 수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악을 죄로 인식하고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거절하되, 실제로 악을 이길 힘과 선을 행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수도자는 자기 자신을 정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정화하시도록 자유롭게 협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말하는 ‘수도의 완성’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수도의 완성은 어떤 욕망이 전혀 느껴지지 않거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특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점점 더 정직하게 보고,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면서, 자기 사랑이 차지하던 자리에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점점 더 들어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영길 수도사의 이야기에서 가장 오래 기억할 만한 장면은 어쩌면 깊은 산속 생활이나 미리 파 놓은 무덤보다 ‘십 년 넘게 수도했지만, 아직 내 안에 이것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된 영성은 ‘나는 여기까지 왔다’고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보다, ‘주님, 제 안에는 아직도 주님께서 고쳐 주셔야 할 것이 이렇게 많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더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SY.66, 강문호 목사, ‘아토스 수도 자치국’ (201912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어떤 수도사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강문호 목사님이 왜 수도원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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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50, 강문호 목사, ‘이스라엘 첫 수도원, 채리톤’ (20191208)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 이야기 : 채널설립이유’라는 제목으로, 강문호 목사님이 앞으로 자신이 접한 수도사들의 삶과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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