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9:3)

 

 

기쁨이 없는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니고, 생명이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은 기쁨으로부터 나오고, 그것이 이른바 즐거움이다.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자체로 물질이고, 생명이 없는 것이며 죽은 것이다. 그러나 질서에 따라 내적인 것에서 비롯한 기쁨과 그 기쁨에 바탕은 둔 즐거움은 생명을 지닌다. (천국의 비밀 995, 이순철 역) Pleasure without delight is not pleasure, but is something without life, and only from delight is and is called pleasure. Such also as is the delight, such is the pleasure. Corporeal and sensuous things are in themselves only material, lifeless, and dead; but from delights which come in order from the interiors, they have life. (AC.995)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창9:3 중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에 관한 주석 내용 일부입니다.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서울 새 교회 전 담임 이순철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아주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선친께서 저와 동생을 앉혀 놓고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가끔 물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동생은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물쭈물하며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지요. 장래에 뭐가 되겠다든가, 해 보고 싶다든가 하는 꿈을 꿔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시절에 우연히 친구의 집에 갔다가 일제 릴 테이프 녹음기로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일반 녹음기와는 소리가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인생의 꿈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좋은 음향기기로 음악을 듣겠다는 꿈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그렇게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취미일 수도 있고, 일일 수도 있고, 또는 거창한 무슨 이상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에 끌리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기쁨이나 즐거움 때문입니다. 기쁨이 없다면 일도 인생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쁨이나 즐거움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저의 경우는 어릴 때의 꿈을 한동안 좇다가 어느 시점에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꿈을 좇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는데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눈이나 귀, 입 같은 감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새 교회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물질이나 감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차원이 낮은 기쁨, 즉 외적인 기쁨이고, 그보다 차원이 높은 기쁨이 있는데, 그것은 선과 진리로부터 얻는 내적인 기쁨이다. 외적인 기쁨은 내적인 기쁨과 연결될 때 진정한 기쁨이 된다.

 

그러니까 내적이지 않고 그저 외적이기만 한 기쁨은 찰나적이고 공허한 기쁨이며, 그러므로 죽은 기쁨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창세기 9장 3절의 말씀은 바로 이런 것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영어 성경의 번역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땅을 기는 모든 살아있는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먹을 수 있는 풀도 내가 다 너희에게 주노라 Every creeping thing that liveth shall be food for you; as the esculent herb have I given it all to you.

 

이 말씀은 홍수가 끝난 뒤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노아’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아담교회, 즉 태고교회가 무너지고 새로 생긴 고대교회와 그 교회의 사람들을 뜻합니다. 홍수가 끝난 후, 그들이 방주에서 나왔다는 것은 고대교회 사람들이 영적 시험을 모두 이기고 거듭난 것을 의미합니다. ‘홍수’는 거듭나는 과정에서의 시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거듭난 노아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두 가지 먹을거리를 주셨다고 하는데요, 하나는 ‘모든 산 동물’(Every creeping thing that liveth)이고, 다른 하나는 ‘채소’(the esculent herb)입니다.

 

먼저 ‘모든 산 동물’(creeping thing, 땅을 기는 동물)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가장 차원 낮은 기쁨, 즉 감각의 기쁨을 뜻합니다. 땅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몸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감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 그래서 사람을 이루는 몇 가지 중 감각과 관련된 것(the sensuous part)을 ‘’(창3:1)이라 하였고, ‘발꿈치’ 역시 그래서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창25:26) 등이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각의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요? 예를 들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한다든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음악을 듣는 것처럼 오감으로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들은 자칫하면 신앙인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노아교회 사람들에게 그러한 기쁨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들은 저속한 외적 기쁨을 내적 기쁨으로 승화(昇華, 한 단계 더 높은 상태가 됨)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땅을 기는 살아있는 동물을 먹을거리로 삼는다는 것은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 감각의 기쁨까지도 내적인 것, 즉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감각의 즐거움이 그렇게 내적인 것을 위해 쓰임 받을 때 그것은 살아있는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냥 땅을 기는 동물이라고 하시지 않고, 땅을 기는 살아있는 동물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신 것입니다. 먹을거리로 주신다는 것은 그러한 기쁨을 마음껏 즐기도록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통해 주님과 이웃을 섬기려고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좋은 음식이나 좋은 옷, 좋은 집을 주시고, 때로는 좋은 곳을 여행하게도 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에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을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앙인들에게 물질이나 감각의 기쁨을 어느 정도 허락하십니다. 마치 광야를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때로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 즐거움을 허락하십니다.

 

최근 어느 스님이 젊은 나이에 좋은 집에 살면서 값비싼 전자기기를 가지고 일을 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는데 그것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성직자가, 종교인이 무소유의 삶을 살지 않고 호사를 부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새 교회 교리의 관점에서 보면, 성직자라도 지나치게 재물을 많이 모으거나 사치를 부리지만 않는다면 재산이 있다는 게 큰 흠이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일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안락한 삶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인들 가운데는 세속의 것들에 담을 쌓고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누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물질 자체에 빠지면 안 되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데 그것들을 선용해야 합니다. 인생의 홍수를 통과하면서 거듭난 사람들은 이 단계의 삶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김은경 역) 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The Rich and the Poor in Heaven)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먼저 얘기해 둘 것은, 사람은 술책이나 사기가 아니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부를 얻고 쌓아도 되며, 너무 빠져들지 않는 한 고급 음식을 즐겨도 되고, 조건에 따라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조건이 같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오락을 즐기고 세상사를 얘기해도 된다는 사실이다. 또 경건한 사람처럼 슬프고 애통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즐겁고 활기에 넘칠 수 있다. 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것을 주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사람이 세상 사람과 겉으로 보기에 똑같이 살아도, 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올바로 가지며, 이웃에게 신실하고 공정하게 대하기만 하면,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HH.358)

 

사람이 신을 인정하고, 이웃을 선의로 대하기만 한다면, 겉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도 되고, 부자가 될 수도 있으며, 형편과 역할에 따라 풍성한 식탁과 우아한 집과 좋은 옷을 갖추고 살 수도 있고, 즐거움과 만족을 누려도 되며, 직무와 사업을 위해, 그리고 정신생활과 육신 생활을 위해 세상일에 종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결론을 낳는다. 즉 천국에 가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일한 어려움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저항하고, 그 두 사랑이 지배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 두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주의 말씀은 이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 30)

 

주의 멍에는 쉽고 주의 짐은 가볍다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에 저항하는 정도만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물리치고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HH.359)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선한 쓰임새란, 자신과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 그리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선한 쓰임새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사람이 나태한 생활에 빠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나태한 생활은 사람의 생각을 그 타고난 악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에 해롭다. 쓰임새는 그 안에 신성을 담고 있는 만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신과 천국을 바라보고, 이 쓰임새에서 유익을 찾으며, 재물은 오직 부수적 유익으로 여기는 정도만큼 선하다. (HH.361)

 

가난한 사람은 그들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생활에 따라서 천국에 간다. 모든 사람의 생활은 부자이건 가난하건 상관없이 그 사람을 따른다. 어느 한쪽을 선호하는 특별한 자비는 없다. 선하게 산 사람은 들어가고, 선하게 살지 않은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가난도 재물과 전혀 다름없이 사람을 천국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자기 형편에 불만하고,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쓰며, 재물이 축복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재물을 얻지 못하면 화를 내며, 신의 섭리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품는다. 또한 그들은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을 질투하고, 기회만 오면 누구든 속일 태세이며, 불결한 쾌락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와 다른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자기 형편에 만족하고, 성심껏 부지런히 일하며, 태만함보다 일을 사랑하고, 정직하고 신용 있게 행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때로 이 세상에 살 때 하나님을 믿었고, 공정하고 바르게 자기 일을 행한 농부들이나 서민층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았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체어리티와 신앙에 대해 계속 질문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는 신앙에 대해서, 저세상에서는 체어리티에 대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었다. ‘체어리티는 모두 생활에 속한 것이고, 신앙은 모두 교리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체어리티란 모든 일에 있어서 공정하고 바른 것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이며, 신앙은 공정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리와 그에 따른 생활처럼, 또는 생각과 의지처럼 서로 결부되어 있다. 사람이 그가 생각하는 공정하고 올바른 것을 의도하고 행할 때, 신앙은 비로소 체어리티가 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그 사람들은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매우 기뻐했다. 믿는다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생활임을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HH.364) //

 

다음은 ‘채소’(the esculent herb), 즉 먹을 수 있는 풀도 함께 주셨습니다. ‘’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풀을 먹을거리로 주시는 것은 진리를 배우는 기쁨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미 거듭난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선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배우는 기쁨은 거듭난 사람에게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지요. 늘 말씀드리지만,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다음에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거듭나게 되면 먼저 선을 행하고 그러다 보면 진리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진리를 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는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노아에게 풀을 주셨을까요?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냥 풀이라고 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풀’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기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고 ‘살아있는 기는 동물’을 주셨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먹을 수 있는 풀은 내적 기쁨과 연결된 진리의 기쁨을 뜻합니다. ‘내적인 기쁨’이란 쓰임(use)의 기쁨, 쓰임 받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진리의 기쁨은 진리 자체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려고, 쓰임 받으려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그럴 경우, 주님께서는 거듭난 사람이라도 진리의 기쁨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먹을 수 있는 풀을 양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사용하려는 목적이 아니면, 쓰임 받기 위해서가 아니면 진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선을 행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 위 인용글들 중 특히 쓰임새가 나오는 다음 글처럼 말입니다.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들의 모든 기쁨은 감각의 기쁨이든 진리에 대한 기쁨이든 반드시 내적인 것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기쁨이 됩니다. 모든 내적인 것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기쁨을 살아있게 만드는 내적인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인애(仁愛), 즉 이웃에 대한 사랑,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체어리티는 가난한 사람, 소외된 이웃에게 필요한 걸 베푸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기꾼이나 도둑처럼 악한 사람들까지도 포용하는 것이 체어리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 교회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새 교회에서는 진정한 체어리티는 이웃의 진실과 선을 사랑하는 것이지 악과 거짓까지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의 근원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어리티는 한편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체어리티는 또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면서 동시에 체어리티를 행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체어리티를 행한다면 그건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진정한 체어리티는 마음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하고 진리와 선을 사랑해야 합니다. 체어리티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체어리티의 마음을 가지고 물질을 사랑하고 감각에 속한 걸 사랑해야 합니다. 만약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면 겉으로 보여지기 위한 사랑입니다. 또한 체어리티 없는 상태에서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라 지식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것은 읽지 않는 책을 사 모으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일입니다. 또 체어리티 없는 상태에서 감각의 기쁨을 추구하면 영적으로 피폐해집니다. 그럴 경우, 점점 더 자극적인 기쁨을 원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결국 타락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쁨을 추구하든 체어리티의 기쁨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그때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 또는 체어리티와 신앙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몸의 감각과 서로 연결 되어 죽어있던 감각의 기쁨이 살아있는 것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부디 새 교회 모든 성도는 주님 주시는 세상 기쁨을 누리고 즐기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체어리티로부터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아멘

 

2020-11-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16(D1)-주일예배(2589, 창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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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3-16(D1)-주일예배(2589, 창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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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4:14-22)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인성에 있어서는 신적 진리 자체이셨고, 생명의 본질에 있어서는 신적 선 자체이셨다. 그리고 신적 선은 사람에게 아버지의 혼이라 불리는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은 여호와로부터 잉태하셨으며, 말씀에서 ‘여호와’는 모든 생명의 본질인 신적 사랑에서 비롯한 신적 선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본질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셨다. 왜냐하면 신적 선이 주님 안에 있었고, 그 선에서 발현되는 신적 진리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주님의 인성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AC.9954:11,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9954번 글 11번 항에 대한 Clowes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For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in respect to the human, the Divine truth itself; and in respect to the very being of his life, he was the Divine good itself, which with man is called the soul from the father; for he was conceived from Jehovah, and in the Word ‘Jehovah’ denotes the Divine good of the Divine love, which is the being of the life of all. From this it is that the Lord alone was ‘the Anointed of Jehovah’ in very essence and in very performance, because the Divine good was in him; and the Divine truth proceeding from this good was in his human while he was in the world (see the places cited in n. 9194, 9315). (AC.9954:11, Clowes 역)

 

이는 출애굽기 28장 41절,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에 관한 주석 중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40일간 광야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경 구절을 읽으시고, 사람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사실 이 말씀 뒷부분에는 갈릴리 사람들이 주님을 모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렇게 말씀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차이가 있는지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과 다음 주 두 주에 걸쳐 한 구절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4절입니다.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주님은 광야에서 돌아오셨을 때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광야에서 돌아오셨다는 것은 시험에서 이기고 돌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이 시험이 겉으로는 세상 계실 때 주님이 당하신 시험이지만, 속뜻으로는 거듭나는 사람의 내면에서 그 사람과 함께 싸우시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돌아오실 때 주님은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위 광야 시험의 속뜻을 생각할 때,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거듭나는 사람이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주님께서 그들의 겉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속뜻으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거듭나는 사람 안의 겉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잠깐, 겉 사람, 속 사람 등의 용어 정리를 좀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이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아직은 육(肉)을 입고 살아 있는 상태이기에 ^^,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간단하게는 inmost(가장 안쪽), internal(속), external(겉), body(몸)라는 이 네 가지를 이해하시면 되며, 좀 더 명확성을 위해 영어를 그대로 쓰겠습니다. 여기서 앞의 세 개까지가 영, 나머지인 body는 육, 우선은 이렇게 이해하고 계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참고로, 이들 네 가지는 사람 생전엔 모호하지만, 일단 사후, 영이 되면 그때는 아주 명료해지는 그런 거라고 합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영과 육의 분리가 일어나고요, 그때 제일 먼저 body가 분리됩니다. 즉 body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를 그대로 가지고 영계에서 깨어나게 되지요. 사후 첫 번째 상태는 준비상태로, 그동안 bodyinternal 사이에서 수고한 external이 정리, 휴면 상태에 들어갈 준비를, 그리고 internal이 전면에 드러날 준비를 하는 상태입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계의 영원한 삶은 이 internal로 살아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상태 때는 아직은 생전 식구들이나 친구, 지인들이 서로를 알아봅니다. 알아보고 아주 반가워들 하지요. 사후 두 번째 상태가 되면, 이제 external은 휴면 상태로 들어가고, internal 상태가 되는데, 이때는 살아생전 한 식구였던 사람들끼리도 서로 못 알아봅니다. 본인은 물론, 식구들 역시 서로의 영, 그러니까 internal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요, 생전 식구들이 본 서로의 모습은 external이지 internal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말이, 지상 혈연은 지상으로 끝, 영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말씀을 그동안 드린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inmost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네, 우선은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이 처음 거듭날 때는 먼저 속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것을 우리는 개혁(reform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속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졌지만, 겉 사람의 상태는 아직 교회 밖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이를테면 속 사람은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지만, 겉 사람은 주님을 믿지 않고, 심지어 주님을 배척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겉 사람은 마치 이방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다가 겉 사람이 시험에서 한 번 이깁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선 끝에 가까스로 주님 손잡고 시험에서 이긴 것이지요. 그때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교회의 작은 초석을 하나 세우십니다. 그런 과정이 수없이 되풀이되어야 궁극적으로 겉 사람 안에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돌아오시면서 다른 곳으로 가시지 않고 갈릴리로 오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회당’은 속뜻으로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유대 교회의 회당은 교리를 가르치는 곳이었고요, 또 교리의 해석이 다를 때, 그것을 조정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당은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오셔서 새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또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는데, 뭇사람은 겉 사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선한 애정들과 생각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칭송했다’는 것은 애정들과 생각들이 주님이 가르치시는 교리를 잘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지각이 흘러들어올 때, ‘이것이 참 진리로구나!’ 하고 공감하는 것이고요, ‘이제부터는 이대로 살아야 하겠구나’ 하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뭇사람들이 칭송하는 모습입니다. 16절입니다.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셨다’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역시 갈릴리 지역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겉 사람 안의 어느 부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는 말은 주님은 겉 사람 안에서 성장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어떤 분에게는 구유에 갓 태어나신 주님이 계시고요, 어떤 분에게는 성전에서 랍비들과 진리를 토론하는 주님이 계십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청년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각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은 그렇게 성장 정도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성장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이 악을 끊고 선을 행할 때마다, 그것에 비례해 주님도 조금씩 자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나사렛을 주님이 자라나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셨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본래 완전히 거듭나서 더 이상 시험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식일’은 하나의 시험이 끝나고 다음번 시험이 올 때까지의 잠시 동안의 평화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그 기간 동안 주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실까요? 우리에게 말씀을 읽어주시고, 말씀을 통해서 교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시는 교리는 어떤 것입니까? 삶의 다양한 상황에 맞게 진리를 올바르게 적용하는 지혜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원론이라면, 원론에서 파생되는 수없이 많은 각론이 있습니다. 그 각론들이 주님께서 오늘 회당에서 가르쳐 주시는 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사야서 61장을 펴시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17절로 19절입니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하십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은, ‘선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잉태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기름’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럼에도 고대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직분을 받을 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주님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당신 스스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오신 이유에 대해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십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는 누구며, 눈먼 자는 누구일까요? 기본적으로 이들은 모두 선과 진리에 대해 무지하여 악과 거짓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다르게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영적 상태가 조금씩 다르고, 그러므로 구원의 처방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난한 자’는 자신에게 진리와 선의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진리와 선에 대한 지식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고자 했던 나사로와 같은 사람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에 비해 ‘눈먼 자’는 진리와 선을 모르기는 가난한 자와 마찬가지이지만, 주님을 믿지도 않고 진리를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르쳐 주면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포로 된 자’는 악과 거짓의 유혹에 넘어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 중에는 진리를 전혀 몰라 그렇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알면서 악에 빠진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포로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눌린 자’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거짓이 거짓인 줄 모르고, 진리가 진리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진리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눌린 자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진리로 알고 신봉하면서, 진리를 말하면 배척하고 심지어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눌린 자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르지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깨닫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오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참 빛이시기 때문이지요. 참 빛이 있어야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주님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20절입니다.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0절에서 주님은 책을 덮어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셨습니다. 여기서 ‘맡은 자’는 영어 성경의 표현으로는 minister, 즉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실 때, 반드시 섬기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는 우리 안에 있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 섬기는 자들은 주님께서 우리 속으로 오시는 것을 원하며,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 적극적으로 시중을 듭니다. 주님은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말씀을 읽어주시거나 교리를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섬기는 자들이 성경을 주님께 갖다 드려야 읽어주시고요, 그리고 그때 그 말씀에 있는 내적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주님의 모든 선한 역사는, 주님과 우리 안에 있는 섬기는 자와의 교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섬기는 자가 성경을 가져다 드리자 주님께서 성경을 읽으셨고, 성경을 다 읽고 덮으셨을 때, 다시 섬기는 자에게 맡기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앉다, 서다, 걷다라는 말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앉는 것’은 가장 내적인 상태, 그러니까 의지의 상태를 나타내고요, ‘서는 것’은 의지로부터 무엇인가를 의도하는 것을, 그리고 ‘걷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리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겉 사람의 의지 가운데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의 의지 가운데 계실 때, 겉 사람은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습니다. 21절입니다.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앉으셨다’는 말과 ‘너희 귀에 응하였다’는 말은 서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귀에 응하였다’는 것은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귀에서 이루어졌다’입니다. ‘’는 아시는 바와 같이 순종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은 주님의 가르침을 머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제 의지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시험에서 이기고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실 때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시험을 이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끝으로 22절입니다.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이 증언했다’는 것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를 인정하고 고백했다는 뜻입니다. 또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했는데, 이때 ‘요셉’은 신성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요셉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아닙니다. 그러면 야곱의 아들 요셉과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이 사람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고, 이 사람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세상 관점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가 야곱의 아들인지, 마리아의 남편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천사들은 그냥 요셉이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갖는 내적 의미에만 집중합니다.

 

※ 아래는 이런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합니다.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그리고 사도들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갔는지 천사들에게 물어보았다. 천사들은 대답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그렇게 천국에 간 사람은 없고, 모두 이 세상에서의 삶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존경받지 않는다. 그들이 말씀 안에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내적 의미로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을 의미하고, 다윗은 주님의 신적 왕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주의 신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이 사람들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천국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이름을 천사들은 방금 설명한 대로의 주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천국에 있는 말씀(259항 참조)에는 그런 이름들이 나오지 않는다. 천국에 있는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성경 말씀의 내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HH.526:4, 김은경 역) //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요셉과 야곱의 아들 요셉은 천사들이 볼 땐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한 것은, 세상 시각에서 볼 때는, ‘목수 요셉의 아들에게 어떻게 이런 지혜가 있느냐?’라는 뜻입니다만,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진리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나타내고, 아들은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분으로부터 모든 진리와 선이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도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이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광야에서 돌아오신 주님은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나사렛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그런 모습은 우리가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그곳에 교회를 세우시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겉 사람의 의지 안에 말씀의 진리를 심는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을 읽어주시면서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의지 가운데 심어졌다는 뜻입니다. 시험을 이긴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모든 진리가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진리는 최초의 신성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와, 마지막 신성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올 때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세상 자연적인 것 안에 담길 때 가장 힘이 있습니다. 그 자연적인 것이 바로 주님의 인성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두 번째 말씀은, 주님의 인성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능력이 모든 가난한 자와 눈먼 자, 포로 된 자와 억눌린 자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눈먼 자, 포로 된 자, 억눌린 자가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어느 만큼은 가난한 자이고 눈먼 자이며, 그리고 포로 된 자이며 억눌린 자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이가 주님이시고, 치유하시는 이 또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그런 능력이 우리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5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5-36)

 

아멘

 

원본

2017-07-0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2(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2. 2023-03-22(D4)-매일예배(2439, 눅4,14-22), ‘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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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2)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눅4:5-13)

 

주님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人性, this human)을 벗으셨을 때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을 입으셨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신약 성경에 여러 번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을 ‘인자’(the son of man)라 부르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 부르셨다. ‘인자’로서 주님은 진리 자체를 뜻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은 선 자체를 뜻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인간 본질(human essence)이 신성하게 되었을 때 그 본질에 속한 것이었다. ‘인자’의 상태는 주님의 겸비(謙卑)와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상태는 주님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 (AC.2159:2,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2159:2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nd when he had put off this human, he put on the Divine human, from which he called himself the ‘son of man’ as we find many times in the Word of the New Testament; and also the ‘son of God’; and by the ‘son of man’ he meant the truth itself, and by the ‘son of God’ the good itself, which belonged to his human essence when this was made Divine. The former state was that of the Lord’s humiliation, but the latter that of his glorification (treated of before, n. 1999). (AC.2159:2, Clowes 역)

 

이는 창세기 18장 3절,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에 관한 주석 중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다음은 창14:1-11입니다.

 

1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4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5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8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9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10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창14:1-11)

 

여기 보면, 아브라함의 아브람 시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연합군과 소돔 왕 베라의 연합군이 싯딤 골짜기에서 전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전쟁은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그돌라오멜을 12년 동안 섬기다가 이듬해 배반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돌라오멜은 주변의 다른 왕들과 손을 잡고 그들을 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돌라오멜의 연합군과 소돔 왕의 연합군이 싯딤 골짜기에서 만났는데, 결과는,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즉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이 소돔 왕의 연합군을 이긴 것입니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 대해 설명하면서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 전쟁이 단순히 가나안 땅에 있었던 왕들의 전쟁만 말하는 게 아니고요, 그 속뜻으로는 어린 시절 주님의 내면에서 벌어진 영적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40일간 광야 시험으로 압축해서 표현한 주님의 시험 안에는 당연히 이 전쟁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주님에게 어떤 시험이었는가를 속뜻을 통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그돌라오멜 왕과 그 친구들은 어린 시절 주님 안에 있었던 선과 진리들인데, 진정한 선과 진리는 아니고 외견상 선과 진리입니다. 그리고 소돔의 왕들은 외견상 선과 진리 안에 감추어진 이기적인 성향을 나타냅니다. 외견상 선과 진리라는 건 이를테면, 젖먹이들의 천진난만함 같은 것이 외견상의 선과 진리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순수하고 선하게 보이는 그것을 외견상의 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천진함 속에 이기적인 것이 숨어있으며, 그러므로 진정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그돌라오멜 왕을 섬겼던 기간은, 이기적인 성향들이 천진난만함 속에 가려져 있는 기간입니다. 그러다가 지각이 점점 발달하면서 이기적인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기적인 것이란, 자기 것을 챙기려 하고, 다른 친구들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것이 이기적 성향이 드러나는 것이고, 소돔의 왕들이 그동안 섬기던 그돌라오멜에게 반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때부터 당신 안의 이기적인 성향과 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일찍부터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의 신성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가르침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당신의 인성(인간성) 안에 이기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 이기적인 것들과 치열하게 싸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돌라오멜 왕의 승리는 그 싸움에서 주님이 승리하신 것을 의미하고요, 그리고 외견상의 선 안에 감추어진 이기적인 것들이 정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소돔 왕의 군대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말씀에는 그들이 산으로 도망했다고 합니다. ‘’은 본래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만, 여기서는 반대로 자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산으로 도망했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들이 그 근원인 자아 사랑으로 돌아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완전히 이기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이런 시험들이 있었다는 것을 배경으로 아시고, 오늘 본문으로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5절로 7절까지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한글 성경에는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로 되어 있습니다. ‘’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산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마귀가 주님의 인성 안 자아에 대한 사랑을 시험하는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시험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가 시험할 단서, 꺼리가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귀가 주님을 산으로 데리고 간 것은 주님의 자아에 대한 시험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 주면서, 그 권위와 영광을 모두 주겠다고 합니다. 여기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라는 말은, 시험은 아주 순간적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생각하면 고맙고 마음이 울컥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다른 마음이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보다 세상 돈이나 명예, 쾌락이 더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마음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잠깐씩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는데요, 그런데 그것이 모두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이 들 때,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그 마음을 덥석 붙잡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마귀에게 절하는 것이 되며, 그래서 그것은 지옥의 노예가 되는 일입니다.

 

※ 가령, 로또의 유혹 같은 것도 여기 해당되지 싶습니다. ‘만약 내게 수억의 현금이 생기면 나는 그 돈을 참 은혜롭게 주님 영광 위해 잘 사용할 텐데...’ 하면서 말이지요...

 

마귀는 주님께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지만, 지옥의 노예가 되는 삶에 무슨 권위와 영광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귀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시험하는 마귀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8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3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 마귀는 주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능력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공격이 좌절되자 마귀는 지체함 없이 바로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합니다. 그 시험에 대해서 9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한글 성경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첨탑 위에 주님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성전’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를 ‘새 예루살렘 교회’라고 부를 때는 그냥 새 교회라는 뜻이 아니고, 이 교회의 교리가 전혀 새로운 교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성전 위의 탑’은 ‘자아에 대한 사랑’, 또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앞 절에서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간 것과 여기서 성전 탑 꼭대기에 주님을 데리고 간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높은 산이나 탑은 모두 우리의 자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자아가 높은 산이나 첨탑과 같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주님을 성전 위 탑 꼭대기로 데리고 간 것은, 주님의 인간 안에 있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안으로 마귀가 들어와 주님을 유혹하는 모습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 표현에는 그냥 뛰어내리라고 한 것이 아니고, 아래로 몸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548번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이 내세에 들면 먼저 천사들이 맞아들여 모든 선한 도움을 주고, 주님과 천국, 천사의 삶에 대해 들려주며 진리와 선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세상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그것을 부인하고 무시해왔으면, 몇 마디 나눠본 후에 그 천사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것을 감지하자마자 천사들은 그를 떠나게 된다.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여러 번 거치고 나서 마침내 그는 자기와 같은 악 안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이렇게 되고 나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돌아서고, 자기가 세상에서 연결되어 살던 바로 그 지옥을 바라본다. 그 지옥 안에는 자기와 비슷한 악에 대한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다. 주께서는 천사를 통해서 그리고 천국에서 나오는 입류를 통해서 모든 영을 당신께로 이끄시지만, 악 안에 있는 영들은 거세게 저항하고, 마치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찢어내듯 하며, 밧줄에 끌려가듯 자기 자신의 악에, 즉 지옥에 끌려간다. 그렇게 끌려가기 때문에, 즉 그들의 악에 대한 사랑이 거기 따라가길 원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자유로 지옥에 뛰어든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그들의 관념 때문에 이것을 믿지 못한다. 사실, 저 세상에서 지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오직 지옥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사람들 자신에게만 그렇게 보인다. 이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악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은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한 채 뛰어드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런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힘에 의해 지옥으로 던져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상 모든 내용은 주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던지지 않으시며, 이 세상에 살 때나 죽은 뒤 영이 된 후에나 사람이 스스로 지옥에 뛰어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HH.548, 김은경 역) //

 

따라서 성전에서 몸을 던지라는 말은 예루살렘 성전, 즉 ‘교회의 교리에서 이탈하라’는 것이고, 그러므로 ‘지옥을 향해 몸을 던지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종종 이와 같은 유혹을 합니다. 마치 뱀이 하와를 시험하듯이 ‘네가 지키려고 힘쓰는 교회 교리는 너를 구속할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 즐거움에 몸을 던져라. 그리하면 네가 자유를 얻을 것이다’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살지 않고 세상의 쾌락에 몸을 맡겨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기록되었으되’라고 한 것은 아래 시편 91편 11, 12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91:11-12)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편의 이 말씀은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 때, 하나님의 영원한 보살핌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금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진리에서 뛰어내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아무 탈 없이 지켜 주실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요, 또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발이 돌에 부딪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발은 우리 몸의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가장 낮은 의식, 또는 가장 바깥쪽의 의식인 자연적인 의식, 즉 겉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돌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마귀는 왜 발에 대해 말했을까요? 사람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은 모두 겉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은 ‘성전, 즉 교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더라도 겉 사람이 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돌에 부딪힌다’ 그랬는데, 영어식 표현은 against stone입니다. stone은 돌이기 때문에 이 말은 돌, 즉 진리에 반(反)한다는 뜻이지요. 즉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은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아무렇게나 행동을 해도 진리에 반(反)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거듭나게 되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더라도 진리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소위 공자가 말하는 ‘종심(從心)의 경지’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동안에는 마음이 원한다고 그대로 하면 안 됩니다. 철저히 진리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금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1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을 달라고 모세를 다그쳤을 때, 그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신6:16)

 

신앙인들은 언제나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뜻대로 해달라고 주님을 다그칩니다. ‘하나님께서 설마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시겠어?’라고 생각하며 진리를 어기려고 합니다.

 

※ 저는 비교적 꽤 최근까지도,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를 알기 전까지는 위와 비슷한 생각과 태도가 제게도 있었는데요, 그것은 주님의 뜻을 잘 모르겠는 일이 생기면 그걸 가지고 충분히 기도하며 주님 뜻 알려고 하는 대신, ‘나는 주의 자녀이니 혹시 내가 하는 이 결정이 잘못된 선택이어도 주님이 수습해 주실 거야’ 하며 어떤 중요한 걸 결정하는, 좀 어처구니없는 태도들이었습니다. 물론 주님은 끝까지 저를 돌보셨지만, 조금 착하고 겸손했더라면,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뜻 구하는 사람이었더라면 훨씬 질러갈 길을 굳이 꾸역꾸역 빙 돌아온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시며,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시험을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서에서는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또는 인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속뜻으로는 선 측면에서 본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인자’는 진리 측면에서 본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인자로서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진리는 공격할 수 있지만, 선은 공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진리를 가지고 따지는 사람들은 자주 시험에 듭니다. 왜냐하면 진리만 가지고는 거짓을 이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이 많은 사람들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선 안에는 주님이 주시는 모든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과 부딪치면 언제나 이깁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시험을 받으실 때 인자의 상태, 즉 진리의 상태로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에서 마귀는 계속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라고 말하면서 주님에게 절을 요구하고, 성전 첨탑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인자의 상태에 계신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직 진리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님을 이미 선의 상태가 되었다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당신은 이미 전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자기에게 절을 해도,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아무 해가 없을 것이라고 주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선의 상태가 되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진리에 어긋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에게 있는 자아 사랑을 흔드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자신이 많이 거듭났다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유혹이 올 때, ‘잠깐 이것을 즐기자. 그렇더라도 나는 언제든지 다시 본래(진리)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라고 하며, 쉽게 생각하고 자신 있어 하는데요, 그것은 마치 몸에 해로운 기호품을 끊었던 사람이 ‘나는 언제든지 이것을 끊을 수 있어’라고 하면서 다시 그걸 가까이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고요, 교만한 마음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도 그런 생각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자의 상태에 계신 주님에게 ‘당신은 이미 선의 상태이니 아무 일이나 해도 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유혹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물리칩니까?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기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하고요, 그리고 시험에서 이기겠다는 결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씀 안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이 흘러들어와 모든 부정한 생각들을 흩어버리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와, 또 진리 안에 있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42:1)

 

아멘

 

원본

2017-06-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1(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1. 2023-03-21(D3)-매일예배(2438, 눅4,5-13),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2)'.pdf
0.53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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