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8.심화

 

7. ‘9:3-7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9:3-7)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was uplifted from upon the cherub whereon he was, to the threshold of the house. And he called to the man clothed with linen, and said unto him,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set a mark upon the foreheads of the men who groan and sigh for all the abominations done in the midst thereof. And to the others he said, Go ye after him through the city, and smite; let not your eye spare, neither have ye pity; slay to blotting out the old man, and the young man, and the virgin, the infant, and the women; defile the house, and fill the courts with the slain (Ezek. 9:3–7).

 

 

9:3-7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그룹이 단순히 거룩한 장소를 장식하는 존재가 아니라, 교회의 가장 거룩한 것들을 보호하시며, 동시에 심판과 구원의 질서를 집행하시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표상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3:24에서는 그룹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성막과 성전에서는 언약궤와 속죄소를 지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겔9에서는 타락한 교회 가운데서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시는 주님의 역사와 함께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다양한 장면들이 모두 하나의 동일한 영적 원리를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에 이 본문을 AC.308에 함께 인용한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 위에서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주님의 임재가 그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으로는 그룹이 주님의 영광을 대신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가 거룩하게 보존되고 나타나는 영역을 지키는 신적 섭리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과 함께 언급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임재가 언제나 섭리의 보호 아래 역사하심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은 예루살렘 가운데를 다니며,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해 탄식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그립니다. 그 후 다른 자들은 표 없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집행합니다. 이러한 장면은 겉으로 보면 무서운 심판처럼 보이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심판 이전에 먼저 보존이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먼저 보호받을 사람들이 구별되고, 그다음에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룹이 표상하는 신적 섭리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은 먼저 자신의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그 후에 악을 분리하십니다.

 

이 원리는 창3:24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 역시 먼저 생명나무를 보호하였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을 영원히 내쫓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겔9에서도 같은 원리가 나타납니다. 먼저 표를 받은 사람들이 보호되고, 그 후에 심판이 시행됩니다. 따라서 그룹은 단순히 심판의 상징이 아니라, 심판 가운데서도 선한 것을 먼저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나타냅니다.

 

특히 이마에 표를 받는 장면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이마는 말씀의 속뜻으로 사랑과 의지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마에 표를 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외적 표시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랑과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의 섭리 가운데 보호받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룹을 신적 섭리의 표상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처벌하는 데 먼저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을 보존하는 데 먼저 목적을 두십니다.

 

본문에서 성전까지 더럽혀지고 뜰이 시체로 가득 차는 모습도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역사적인 학살 장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의 내적 거룩함이 완전히 황폐해졌음을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거룩한 것이 스스로 거룩함을 잃었을 때에는 그것이 더 이상 거룩한 것으로 남지 못하도록 분리하는 것 역시 신적 섭리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더 큰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보호입니다. 이 점에서도 에덴동산의 그룹과 같은 원리가 나타납니다.

 

25:22와 민7:89에서는 그룹들 사이에서 주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거기서는 보호와 계시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겔9에서는 같은 그룹이 보호와 심판의 질서를 함께 나타냅니다. 이 두 모습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참된 계시를 보존하는 것도,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모두 동일한 신적 섭리의 서로 다른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08은 여러 본문을 나란히 인용, 그룹의 기능을 하나의 일관된 원리로 설명합니다.

 

또한 이 장면은 최후의 심판의 원리와도 연결됩니다. 주님의 심판은 선과 악을 뒤섞인 상태로 두지 않습니다. 먼저 선한 것을 보호하고 분리한 다음, 악한 것을 악한 것끼리 모이게 하십니다. 이러한 분리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 모두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신적 섭리입니다. 그룹은 바로 이러한 분리와 보호의 질서를 대표합니다.

 

9:3-7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그룹이 거룩한 장소를 지키는 존재라는 좁은 의미를 넘어, 교회의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선한 사람들을 먼저 보존, 마지막에는 선과 악을 질서 있게 분리하시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창3의 에덴동산, 출애굽기의 성막, 솔로몬 성전, 그리고 에스겔의 환상은 모두 서로 다른 시대와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말씀의 속뜻에서는 한결같이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고, 사람을 모독으로부터 지키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AC.308, 심화 8, ‘겔10:2, 7’

AC.308.심화 8. ‘겔10:2, 7’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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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8, 심화 6, ‘민7:89’

AC.308.심화 6. ‘민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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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7:89)

 

 

7:89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출25:22에서 주신 약속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출25에서는 주님께서 모세를 속죄소 위, 두 그룹 사이에서 만나 말씀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민7에서는 그 약속이 역사 가운데 그대로 성취됩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갔을 때, 실제로 주님의 음성이 바로 그곳에서 들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룹이 단순한 장식이나 성막의 예술적 요소가 아니라, 주님의 임재와 계시가 질서 있게 이루어지는 거룩한 영역을 보호하는 표상임을 실제 사건을 통해 증명하는 본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주님의 음성이 들려온 위치가 매우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은 단순히 모세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음성은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들려왔습니다. 이는 주님의 임재가 언약궤 자체나 그룹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표상하는 속죄소와 그것을 보호하는 그룹들이 이루는 거룩한 질서 가운데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룹은 계시의 근원이 아니라 계시가 거룩하게 보존되도록 하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표상합니다.

 

이 점은 AC.308의 중심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룹의 의미를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는 주님의 신적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은 보호를 곧 접근 금지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민7:89는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음성은 바로 그룹들이 지키는 중심에서 들립니다. 이는 그룹의 역할이 사람을 주님에게서 영원히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참된 계시가 이루어지도록 보호하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구절은 창3:24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들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습니다. 겉으로는 길을 막는 것처럼 보이지만, AC.308은 그것이 영원한 차단이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보호라고 설명합니다. 민7:89는 그 보호의 참된 목적을 실제 사건으로 보여줍니다. 그룹들이 지키는 곳은 사람이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께서 준비된 사람과 만나 말씀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룹은 생명의 길을 폐쇄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길이 거룩하게 보존되도록 지키는 존재입니다.

 

25:22와 민7:89의 관계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출25:22는 주님의 약속이고, 민7:89는 그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는 앞으로 이루어질 질서를 선언하고, 다른 하나는 그 질서가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가 AC.308에서 두 본문을 함께 인용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는 단순한 상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룹이 표상하는 신적 섭리가 실제 계시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참된 계시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그룹이 아니며, 속죄소도 아닙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룹은 그 거룩한 임재와 계시가 사람의 proprium이나 감각적 추론에 의해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따라서 계시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시며, 그룹은 그 계시가 순수하게 보존되도록 하는 신적 섭리를 표상합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 주님께 말씀드리려 했을 때, 그는 자기 생각이나 추론 속에서 답을 얻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응답은 주님께서 정하신 거룩한 질서 안에서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모든 참된 진리가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온다는 상응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proprium으로 거룩한 것에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호하고 계시는 거룩한 질서 안에서만 참된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민7:89 AC.308의 의미를 가장 실제적으로 입증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는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하기 위한 장벽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 profanation 되지 않도록 보존함으로써 사람이 올바른 상태에 이르렀을 때, 안전하게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자비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두 그룹 사이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건은, 그룹이 단순한 수호의 상징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사람과 교통하시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증언하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308, 심화 7, ‘겔9:3-7’

AC.308.심화 7. ‘겔9:3-7’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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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8, 심화 5, ‘출25:22’

AC.308.심화 5.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25:22) 출25:22가 AC.308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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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25:22)

 

 

25:22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장소가 바로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였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룹들이 단순한 장식이나 수호 천사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면서 동시에 사람과 교통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308은 그룹들의 본질적인 의미를 ‘주님께서 사람이 거룩한 것에 무질서하게 접근, 그것을 profane 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신적 섭리’로 설명하는데, 이 구절은 그 섭리가 단순히 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오히려 사람과 주님을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증거궤 안에서’ 말씀하시겠다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룹들에게’ 말씀하시겠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속죄소 위, 곧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를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룹들이 주님의 임재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거룩한 영역을 보호하는 표상임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계시는 그룹들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룹들이 지키고 있는 거룩한 중심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속죄소(the mercy seat)는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속죄소는 말씀의 속뜻으로는 주님의 신적 자비와 신적 인성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속죄소 위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은, 모든 신적 계시와 모든 진리는 심판이나 정죄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의 자리를 그룹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그 자비가 profanation 되지 않도록 주님의 섭리가 항상 함께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두 그룹 사이에서’ 말씀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만일 그룹들이 사람을 무조건 내쫓거나 접근을 영원히 차단하는 존재라면, 주님의 음성도 그들 밖에서 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바로 그룹들이 지키는 그 중심에서 들립니다. 이는 그룹들의 기능이 사람을 주님에게서 떼어 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만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도록 보호하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점에서 창3:24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들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길을 막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AC.308은 그 의미를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룹들은 생명나무를 없애거나 접근을 영원히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proprium과 감각적 추론으로 생명의 거룩한 것을 profane 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출25:22는 바로 그 보호의 적극적인 목적을 보여줍니다. 그룹들이 지키는 곳이야말로 주님께서 사람과 만나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주님의 섭리가 언제나 ‘보호를 위한 제한’이라는 원리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사람은 흔히 제한을 자유의 박탈로 생각하지만, 말씀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거룩한 것 안으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그룹은 길을 닫는 존재가 아니라, 길을 보존하여 지키는 존재입니다. 출25:22에서 주님의 음성이 그룹들 사이에서 들렸다는 것은, 보호와 계시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섭리 안에서 함께 작용함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유대교회의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와 속죄소, 그리고 그룹들을 볼 수 있었지만, 누구나 마음대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도 정해진 질서와 의식을 따라야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멀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보존하시기 위한 질서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 질서 안에서 주어졌으며, 그 질서를 벗어난 접근은 거룩한 것을 profane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25:22는 또한 왕상6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광야 시대의 언약궤와 속죄소, 그리고 그 위의 작은 금 그룹들이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위를 다시 거대한 감람나무 그룹들이 내소 전체를 덮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임재는 여전히 속죄소와 그룹들 사이에서 상징되었지만, 이제는 내소 전체가 거대한 그룹들의 보호 아래 놓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계시와 임재가 여전히 같은 중심에서 나오지만, 그 거룩함을 보호하시는 섭리가 더욱 풍성하고 완전하게 표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라는 말씀은 AC.308의 핵심을 가장 잘 설명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거룩한 것 밖에 영원히 머물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거룩한 곳을 마련하시고, 그 거룩함이 훼손되지 않도록 그룹들로 지키게 하십니다. 만일 거룩한 것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그것을 받아 생명을 얻는 대신 오히려 profane, 더 큰 영적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룹들의 보호는 계시를 막는 장벽이 아니라, 참된 계시가 계속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거룩함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입니다.

 

25:22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단순히 거룩한 것을 지키는 상징이라는 사실을 넘어서, 바로 그들이 지키는 중심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사람이 장차 안전하게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자비의 섭리임을 가장 아름답게 증언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308, 심화 6, ‘민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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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8, 심화 4, ‘출25의 그룹과 왕상6의 그룹’

AC.308.심화 4. ‘출25의 그룹과 왕상6의 그룹’ 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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