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5:29)

 

AC.530

 

이 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들을 의미하며, 같은 말로 하면 교리들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교리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그 이름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아(Noah)는 고대교회를, 곧 태고교회로부터 남아 있던 교리를 의미합니다. 교회나 교리가 어떠한 과정을 겪는지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데, 그것은 점차 쇠퇴하여 마침내 신앙의 선과 진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며, 그때 말씀에서는 교회가 황폐화되었다(to be vastated)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남은 것들, 곧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신앙의 선과 진리가 남아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보존됩니다. 만일 이러한 신앙의 선과 진리가 이들 소수 안에라도 보존되지 않는다면, 하늘과 인류 사이의 결합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 한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이 적을수록 그가 지닌 이성과 지식에 관한 것들이 덜 밝아지는데, 이는 선과 진리의 빛이 주님한테서 리메인스로부터, 또는 리메인스를 통해 흘러들어 오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 안에 리메인스가 전혀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보다도 훨씬 더 비천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리메인스가 적을수록 그는 덜 사람이고, 리메인스가 많을수록 그는 더 사람입니다. 리메인스는 마치 하늘의 별과 같아서, 적을수록 주는 빛이 적고, 많을수록 더욱 많은 빛을 줍니다. 태고교회로부터 남아 있던 소수의 것들은 노아라 불리는 교회를 이루던 사람들 안에 있었으나, 그것들은 퍼셉션에 관한 리메인스가 아니라 완전성에 관한 리메인스였고, 또한 태고교회의 퍼셉션에서 유래한 교리에 관한 리메인스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제 전혀 다른 본성을 지닌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는데, 이 교회는 태고교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므로 고대교회라 불립니다. 이 교회가 고대교회라 불리는 이유는, 홍수 이전 시대들의 끝 무렵에 존재하였고, 홍수 이후의 첫 시기 동안에도 존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더 많은 말씀이 이어질 것입니다. By the names in this chapter, as we have said, are signified churches, or what is the same, doctrines; for the church exists and has its name from doctrine; thus by “Noah”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or the doctrine that remained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How the case is with churches or doctrines has already been stated, namely, that they decline, until there no longer remains anything of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and then the church is said in the Word to be vastated. But still remains are always preserved, or some with whom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main, although they are few; for unles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were preserved in these few, there would be no 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kind. As regards the remains that are in a man individually, the fewer they are the less can the matters of reason and knowledge that he possesses be enlightened, for the light of good and truth flows in from the remains, or through the remains, from the Lord. If there were no remains in a man he would not be a man, but much viler than a brute; and the fewer remains there are, the less is he a man, and the more remains there are, the more is he a man. Remains are like some heavenly star, which, the smaller it is the less light it gives, and the larger, the more light. The few things that remained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among those who constituted the church called Noah; but these were not remains of perception, but of perfection, and also of doctrine derived from the thing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churches; and therefore a new church was now raised up by the Lord, which being of an entirely different native character from the most ancient churches,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ancient from the fact that it existed at the close of the ages before the flood, and during the first period after it. Of this church,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more will be said hereaft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5장을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이후 전체 전개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교회론적 원리’를 정리해 주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름, 교회, 교리라는 세 가지를 하나의 선 위에 놓습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상태의 표시이고, 그 상태의 실질은 교회이며,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는 근거는 교리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해석하는 일은 곧 교리를 읽는 일이 되고, 교리를 읽는 일은 곧 교회의 상태를 분별하는 일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와 교리가 반드시 쇠퇴의 과정을 거친다고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 타락이나 제도적 붕괴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선과 진리가 점차 힘을 잃고, 삶을 비추는 빛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말씀은 그 교회를 ‘황폐화되었다’라고 말합니다. 황폐화란 더 이상 생명이 흐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영적 용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결코 절망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교회가 황폐화될 때에도, 항상 남은 것들, 곧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것들이 보존된다고 말합니다. 이 리메인스가 바로 하늘과 인류를 잇는 마지막 연결 고리입니다. 만일 이 리메인스마저 완전히 사라진다면, 하늘과 인간 사이의 결합 자체가 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소수 안에라도 선과 진리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이 원리는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람 안에 리메인스가 많을수록, 그의 이성과 지식은 더 밝아집니다. 이는 지식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빛이 리메인스를 통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리메인스가 적을수록,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어둡고 생명 없는 형태로 머무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람 안에 리메인스가 전혀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의 인간다움이 지능이나 문명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가, 곧 남아있는 리메인스에 달려 있음을 뜻합니다. 리메인스가 많을수록 그는 더 사람이며, 적을수록 그는 덜 사람입니다.

 

리메인스를 하늘의 별에 비유한 대목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별은 밤을 낮으로 바꾸지는 못하지만, 방향을 잃지 않게 해줍니다. 리메인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밝히지는 못해도, 완전한 어둠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 줍니다. 이 별이 클수록, 즉 리메인스가 많을수록, 삶은 더 밝은 방향을 가집니다.

 

노아의 교회 안에 있던 리메인스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의 리메인스가 아니었습니다. 퍼셉션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에게 있는 리메인스는 완전성의 흔적, 그리고 퍼셉션으로부터 유래한 교리의 형태였습니다. 즉, 직접 아는 인식은 사라졌지만, 그 인식이 남긴 구조와 가르침은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이 교회는 태고교회와 전혀 다른 본성을 지닌 교회입니다. 퍼셉션의 교회가 아니라, 교리의 교회이며, 직접 아는 교회가 아니라 배우고 따르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고대교회라 불리는 이유는, 태고교회 이후의 모든 교회가 이 교회를 뿌리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이후 홍수 이야기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심판과 파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존과 연결의 이야기로 노아를 읽게 만드는 결정적인 안내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529, 창5:29, ‘노아’(Noah), 고대교회, 곧 홍수 이후에 이어지는 세 교회의 부모가 되는 교회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5:29) AC.529 ‘노아’(Noah)가 고대교회, 곧 홍수 이후에 이어지는 세 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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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5:29)

 

AC.529

 

노아(Noah)가 고대교회, 곧 홍수 이후에 이어지는 세 교회의 부모가 되는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후의 글들에서 노아가 자세히 다루어질 때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That by “Noah”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or the parent of the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ill appear from the following pages, where Noah is largely treated of.

 

 

해설

 

이 글은 새로운 해설을 시작하기보다는, ‘앞으로 전개될 논의의 방향을 미리 밝혀 주는 예고문’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노아를 단순히 하나의 교회 상태로 언급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가 이후에 등장하는 여러 교회의 ‘부모’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노아의 교회가 일시적인 과도기가 아니라, 이후 교회들의 공통된 토대가 된다는 뜻입니다.

 

앞서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중심으로 한 교회였고, 그 흐름은 라멕에 이르러 사실상 끝났습니다. 노아의 교회는 그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님과 연결되는 교회입니다. 퍼셉션이 아니라 교리를 중심으로, 직접 아는 인식이 아니라 배우고 기억하며 따르는 신앙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점에서 노아의 교회는 단순한 다음 단계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시대의 출발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노아를 ‘고대교회’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인류 최초의 교회였다면, 고대교회는 퍼셉션 이후 인류 전체를 위한 새로운 표준을 제시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고대교회 안에서 다시 여러 교회들이 갈라져 나옵니다. 홍수 이후에 언급되는 세 교회는 모두 노아의 교회를 뿌리로 삼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부모’라는 표현은 혈통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 계승의 의미’입니다. 노아의 교회는 이후 교회들이 공유하는 기본 구조, 즉 교리 중심의 신앙 형태를 마련했습니다. 이후의 교회들은 이 구조 위에서 각기 다른 강조점과 상태를 드러내지만, 근본 방식은 노아적 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직접적 후예가 아니라, 노아의 교회를 통해 형성된 신앙 전통 위에 서 있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익히며, 그것을 삶에 적용해 가는 방식은 모두 노아적 교회의 유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자세한 설명을 일부러 미룹니다. ‘뒤에서 크게 다룰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노아 이야기가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니라, 교회 전체 구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미리 암시합니다. 이는 독자에게 이후 본문을 가볍게 넘기지 말고, 지금까지의 흐름과 연결해 깊이 읽으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AC.529는 짧지만, 방향성이 분명한 글입니다. 태고교회의 끝과 고대교회의 시작이 어디에서 갈라지는지, 그리고 홍수 이후의 모든 교회가 어떤 뿌리를 공유하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줍니다. 이 이해를 가지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노아 이야기는 심판의 서사가 아니라 ‘보존과 계승의 이야기’로 읽히게 됩니다.

 

 

 

AC.528, 창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AC.528-531)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And he called his name Noah, saying, He shall comfort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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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And he called his name Noah, saying, He shall comfort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5:29)

 

AC.528

 

노아(Noah)는 고대교회를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comforting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는 말은, 왜곡되었던 것을 회복하게 하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By “Noah”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By “comforting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is signified doctrine, whereby what had been perverted would be restored.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가 끝난 뒤, 인류 영적 역사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핵심 문장입니다. 앞서 라멕이라 이름한 교회는 퍼셉션이 거의 사라진 상태, 곧 황폐화에 이르렀습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노아’는 같은 방식의 회복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보존과 회복’을 맡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를 고대교회로 규정합니다. 이 고대교회는 태고교회처럼 선과 진리를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퍼셉션의 교회가 아닙니다. 대신 이 교회는 ‘교리를 통해’ 선과 진리를 배우고, 그 교리를 기준 삼아 삶을 정돈해 가는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 노아의 교회는 ‘직접 아는 교회’가 아니라 ‘가르침을 통해 아는 교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라는 표현은, 더 이상 퍼셉션에 의해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지 못하게 된 인간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선을 행하는 일이 더 이상 기쁨과 생명에서 흘러나오지 않고, 노력과 부담, 그리고 분투가 된 상태입니다. 이는 타락의 결과라기보다는, 인식 방식이 바뀐 이후의 필연적인 인간 조건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기서 땅은 물질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외적 차원, 곧 자연적 마음의 영역을 뜻합니다. 이 영역은 더 이상 내적 빛에 의해 곧바로 질서가 잡히지 않기 때문에, 왜곡과 혼탁이 쉽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주’라는 표현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상태의 결과를 말하는 언어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위로’는 감정적 위안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위로는 ‘교리를 통해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교리는 인간이 다시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외적 기준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자리에서 교리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가 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교리가 ‘왜곡되었던 것을 회복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노아의 교회가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태고교회와 그 뒤를 잇는 교회들에서 이미 주어졌으나, 인간의 상태 변화로 인해 뒤틀리고 흐려졌던 선과 진리를 ‘바르게 정돈하여 다시 제자리에 놓는 역할’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오늘날 교회의 정체성을 깊이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노아교회의 후손입니다. 퍼셉션으로 즉각 분별하지 못하고, 말씀과 교리, 가르침과 훈련을 통해 신앙을 배웁니다. 이는 열등한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심판의 상징이기 전에, ‘보존과 회복의 상징’입니다. 방주는 파괴를 피하기 위한 도피처가 아니라, 다음 시대를 위한 저장고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여기서 말하는 교리는 생명을 억압하는 규칙이 아니라, 왜곡된 상태 속에서도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 주는 도구입니다.

 

이 글을 이렇게 읽으면, 창세기에서 노아가 차지하는 위치가 훨씬 또렷해집니다. 그는 태고교회의 영광을 되살리는 인물이 아니라, 퍼셉션 이후의 인간을 위해 준비된 ‘새로운 교회 질서의 대표자’입니다. 그리고 AC.528은 그 전환의 의미를 가장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요약해 주는 구절입니다.

 

 

 

AC.529, 창5:29, ‘노아’(Noah), 고대교회, 곧 홍수 이후에 이어지는 세 교회의 부모가 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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