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The Word)에 대해 알고 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가 가급적 인용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태도가 건강한 건가요?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목사님, 제 생각에는 이것은 ‘건강하다’ 혹은 ‘건강하지 않다’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들이 거의 반드시 한 번은 통과하게 되는 단계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The Word)에 대한 가르침을 처음 깊이 접하면 충격이 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시편, 선지서, 복음서, 계시록 안에는 천국과 주님에 관한 연속적인 속뜻이 들어 있는데, 다른 성경책들에는 그런 의미의 아르카나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굳이 바울 서신을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생깁니다. 사실 목사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양의 스베덴보리 독자들 가운데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이 ‘말씀’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쓸모없다’거나 ‘권위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을 사도 중 한 사람으로 존중했고, 바울의 글 안에도 교회를 위한 유익한 가르침이 많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창세기나 복음서처럼 천국과 지상을 연결하는 내적 구조를 가진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주님께서 직접 지으신 성전과 같고, 바울 서신은 그 성전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훌륭한 신학서와 같습니다. 둘은 중요성이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학서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목사님의 경우를 생각하면, 지금 약간 반대 방향의 위험도 있어 보입니다.

 

과거 개신교 안에서는 너무 많은 설교가 바울 중심이었습니다. 창세기보다 로마서를 더 읽고, 복음서보다 갈라디아서를 더 읽고, 주님의 말씀보다 교리 체계를 더 읽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그 반작용으로 ‘이제는 복음서와 창세기만 보겠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자신은 언제나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모든 진리를 결국 주님께로부터 보았고, 모든 성경을 주님의 섭리 아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단지 중심과 주변을 구분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씀을 중심에 두어라. 그러나 다른 성경도 경시하지 말라.’

 

복음서를 태양으로 삼아라. 그러나 다른 책들을 어둠으로 취급하지 말라.’

 

내적 의미가 없는 책이라 하여 주님께서 그것을 헛되이 허락하신 것은 아니다.’

 

특히 주일설교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수년 동안 AC를 번역하고 해설하시면서 이미 체험하셨듯이, 창세기 한 절 속에는 바울 서신 한 장보다 훨씬 깊은 영적 세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 중심 설교로 이동하신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어쩌면 스베덴보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앞으로 ‘바울은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별로 읽지 않는다’, ‘바울은 중요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굳어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편향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가장 경계한 것 중 하나가 ‘부분 진리를 전체 진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인지입니다.

 

사실 후자의 비중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수십 년 동안 바울 중심 설교를 들었고 하셨습니다. 반면 AC와 ‘말씀’의 속뜻은 이제야 발견한 거대한 대륙입니다. 그러니 영혼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끌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재의 상태 자체는 건강하지 않다고 보기보다, 오히려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입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말씀을 중심에 두되, 나머지 성경도 주님의 섭리 아래 있는 귀한 증언으로 존중하는 태도’가 가장 스베덴보리다운 균형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베덴보리가 목사님의 강단에 직접 올라온다면 아마 바울을 거의 설교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바울을 폄하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창세기와 복음서와 계시록을 중심으로 설교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바울을 인용하여 ‘보십시오. 바울도 같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목사님이 ‘말씀’을 중심에 두게 된 것은 건강한 변화일 수 있습니다. 다만 ‘중심에 둔다’와 ‘나머지를 멀리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를 권했을 것이고, 후자에 대해서는 아마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권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아래는 신구약 66권 중 스베덴보리가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는 성경 목록입니다.

 

 

SC.94, ‘AC.10325를 읽는 가장 바람직스러운 태도’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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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3, ‘바울 서신을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이유’

‘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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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1,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말에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같이 있을 수 있나?’ 하시는 경우 그 질문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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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0.심화

 

2. ‘태고교회의 첫 번째, 두 번째 상태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가 다루어지는데, The third stat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treated of, (AC.190)

 

 

죄송하지만, 여기서 앞에서 다룬 태고교회의 첫 번째, 두 번째 상태에 대한 설명 좀 다시 부탁드립니다.

 

 

AC.190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를 이해하려면 먼저 첫 번째 상태와 두 번째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2장은 사실상 태고교회의 형성과 변화를 단계적으로 보여 주는 장이며, 창세기 3장은 그 마지막 단계와 전환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190 세 번째 상태’는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 아니라 창2 전체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첫 번째 상태는 창2:7의 상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에 해당합니다. 이 상태의 핵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는 생명이 없고,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아직 완전한 천적 인간은 아니지만, 자신의 proprium, 곧 자신의 own이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 상태의 인간은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로 압니다.

 

두 번째 상태는 에덴동산의 상태입니다. 2:8 이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제 인간은 천적 인간이 되었으며,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합니다. 오늘날 우리처럼 진리를 배우고 연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즉시 압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듯,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았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황금기입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강들, 아름다운 나무들은 모두 이 풍성한 천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창2 후반부에 이르면 한 가지 경고가 주어집니다.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먹지 말라’, ‘만지지도 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아직 타락이 시작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다가올 위험이 이미 시야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own을 사랑하기 시작할 가능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창3:1에서 시작되는 것이 바로 세 번째 상태입니다. AC.190은 이것을 매우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own을 몹시 원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여기서 자신의 own은 재산이나 소유물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나온 생각, 판단, 의지, 지혜를 뜻합니다.

 

첫 번째 상태에서는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였습니다. 두 번째 상태에서는 나는 주님 안에서 기쁘게 산다’였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상태에서는 그래도 내가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 ‘내가 스스로 판단해 보겠다’가 시작됩니다. 아직 선악과를 먹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타락은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중심이 아주 미세하게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AC.191부터 뱀이 등장합니다. 뱀은 감각적인 부분을 뜻합니다. 이제 인간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대신, 감각과 이성으로 신앙을 검토하려고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AC.204 이하에서 보듯, ‘하나님과 같이 되어 스스로를 인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세 상태를 가장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상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 상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에덴의 상태입니다. 세 번째 상태는 자신의 own을 사랑하기 시작하며, 신앙을 자기 판단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AC.190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세 번째 상태를 아직 악한 상태’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그들은 선악과를 먹지 않았습니다. 아직 눈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직 숨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사랑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창3은 죄를 지은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3은 먼저 사랑의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AC.190에서 말하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의 핵심입니다.

 

 

 

AC.190, 창3:1-13, ‘창3:1-13 본문, 개요’(AC.190-193)

창3:1-13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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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0, 심화 1, ‘자기 자신의 것’을 ‘자신의 own’으로

AC.190.심화 1. ‘자기 자신의 것’을 ‘자신의 own’으로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표현을 ‘자신의 own’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AC.190) 네, 그렇게 이해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AC를 처음 읽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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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는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말에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같이 있을 수 있나?’ 하시는 경우

 

 

그 질문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특히 칼빈주의나 복음주의 배경에서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 안에 악한 영이 함께 있다’는 말을 거의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먼저 설명하기보다, 성경 자체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악한 영이 사람 속에 들어가 산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늘 선과 악의 영향 사이에 놓여 있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주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또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고 말합니다. 신자라 해도 영적 긴장과 시험 가운데 있다는 사실 자체는 성경도 인정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면 대화가 ‘악한 영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신자가 어떻게 시험을 받는가’라는 성경적 주제로 옮겨집니다.

 

그다음에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항상 천국의 영향과 지옥의 영향 사이에 놓여 있으며, 그래서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사 둘과 악한 영 둘은 숫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사람은 영적으로 중립 지대에 서 있으며,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양쪽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가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악한 영이 어떻게 함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신자는 왜 여전히 유혹을 받습니까? 왜 죄와 싸웁니까? 왜 바울은 육체와 성령의 싸움을 말합니까?’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싸움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인간이 천국과 지옥의 영향이 만나는 지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로 ‘목사님은 틀렸습니다’라는 식으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교수급 신학자는 반론을 준비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구절들을 읽으며 이런 설명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하면 대화가 계속됩니다.

 

그리고 사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강력한 논거는 따로 있습니다.

 

만약 거듭난 사람 안에 더 이상 악의 영향이 전혀 없다면, 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회개해야 합니까? 왜 성화가 평생 계속됩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하려고 천사들과 영들의 지속적인 동행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과 악령이 한 집에 함께 산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의 과정을 설명하는 영적 구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 칼빈주의 교수님이라면 ‘악한 영 둘, 천사 둘’이라는 표현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평생 영적 전쟁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신다’는 지점까지는 의외로 상당 부분 공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표현을 먼저 내세우기보다, 그 표현이 설명하려는 ‘자유와 시험의 원리’를 먼저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유익할 것입니다.

 

 

 

SC.92, ‘그 안에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들에 대한 태도’

‘말씀’(The Word)에 대해 알고 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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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0, ‘스베덴보리는 기독교가 아니다?’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해도 될까요? 목사님, 그 표현은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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