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59.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를 읽다가 상당히 중요한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를 설명하면서 아주 분명하게 conscience dictated’,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AC를 읽으며 배운 교회의 영적 역사를 생각하면 이 표현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conscience)이 아니라 퍼셉션(perception)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심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홍수 이전인 가인에게 어떻게 양심’이 있을 수 있을까요?

 

먼저 가장 분명한 원칙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내적 구조는 같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오늘날 사람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을 사랑하면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이 천적 구조를 잃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10에서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천적 씨가 아니라 영적 씨가 있으며,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진리의 지식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선에 기초하여 양심을 심어 주심으로써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홍수 이전과 이후의 인간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 퍼셉션, 고대교회 = 양심’이라는 기본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앞서 AC.224를 해설하면서도 이 문제를 한 번 만났습니다. 3의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두고 양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표현하면 시대가 뒤섞인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도 양심의 흔적’보다는 퍼셉션의 잔재’, ‘남아 있는 지각’, ‘약해진 퍼셉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정리했습니다.

 

그렇다면 AC.359에서는 왜 스베덴보리 자신이 conscience’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첫 번째로 주의할 것은 가인’을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4에서 다루는 것은 이미 타락이 시작된 이후의 태고교회 후손들과 거기서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입니다. 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하나로 존재하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 점차 독립된 것으로 여겨지고, 마침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되어 가는 과정을 표상합니다. 즉 가인은 퍼셉션이 가장 충만했던 태고교회의 전성기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천적 질서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 안에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359 conscience’는 노아 이후 영적 인간의 양심이 이미 가인에게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AC.310에서 스베덴보리가 매우 분명하게 설정한 홍수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무너집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실수로 conscience라고 썼으니 사실 perception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AC.359의 문장은 분명히 conscience dictated’입니다. 따라서 두 진술을 모두 보존하면서 그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실마리가 앞의 AC.224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곳에서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  여호와의 얼굴들’이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딕테이트(dictate) 원인이 되며,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합니다. 즉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시지만 그 내적 딕테이트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퍼셉션을 가진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의 방식으로,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AC.359에 비추어 보면, 여기서 핵심은 conscience’라는 단어 하나를 시대 구분의 기술적 용어로만 읽기보다 Jehovah said’, 곧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가 아직 가인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왜 여기서 특별히 perception dictated’가 아니라 conscience dictated’라고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AC.359 자체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것 이상을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전체 문맥에서 한 가지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이미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에서 상당히 멀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독립되기 시작했고, 그 분리가 교리로 굳어지고 있으며,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고 자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하고 그의 내적인 것들까지 변합니다. 따라서 AC.359의 가인은 태고교회의 온전한 퍼셉션을 가진 사람의 상태를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가인은 오히려 매우 흥미로운 과도기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가인에게 퍼셉션이 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고까지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홍수 후 인간에게 마련된 새로운 영적 구조와 양심의 형성을 명백히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AC.310에 따르면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나 선한 의지가 본래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진리를 이해하고 신앙할 능력은 남아 있으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진리의 지식에 기초하여 양심을 심어 주십니다. 이것이 고대교회와 오늘날 영적 인간에게 속하는 본격적인 양심의 질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conscience’와 홍수 후 영적 인간의 conscience’를 완전히 동일한 구조라고 단정하는 것보다는, AC.359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멀어져 가는 가인에게도 아직  잘못을 내적으로 알리는 딕테이트가 있었다’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습니다. 그의 내적인 것들도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AC.359가 강조하는 결정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의 가인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에서 죽은 행위와 예배가 생기고,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분노가 일어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을 때에도 주님의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 말씀을 따라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는 길로 돌아서지 않았고,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라는 더 깊은 원리도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강제로 선하게 만든다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이 사라지고, 따라서 진정한 거듭남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행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통하여 경고하시고, 돌이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십니다.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러한 장면입니다. 강제가 아니라 딕테이트이고, 심판에 앞선 경고이며, 자유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하도록 하시는 자비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다시 시대를 건너와야 합니다. 우리는 가인 시대의 홍수 이전 인간이 아닙니다. AC.310이 설명하듯 우리는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 구조에 속하며, 주님께서는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이것이 정말 진리를 위한 분노인가, 아니면  proprium 상처받았기 때문인가?’, ‘내가 옳음을 주장하는 동안 체어리티가 떠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내적으로 살피게 될 때, 그 양심의 딕테이트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359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양심의 소리를 반복해서 거스르면 처음에는 잘못인  알면서 하는 ’이었던 것이 점차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는 ’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경우에도 분노 그 자체가 마지막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분노에서 돌이키지 않자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영적으로는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단순히 죄를 지은 뒤 우리를 괴롭히는 기능이 아니라, 악이 아직 행위와 습관과 지배적 사랑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결국 AC.359의 이 작은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전체를 다시 보게 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고, 그 퍼셉션은 교회가 타락하면서 점차 쇠퇴했습니다. 홍수 후에는 인간의 구조가 달라졌으며, 주님께서는 진리의 지식을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AC.359 conscience dictated’를 이 두 시대의 구별을 무시한 채 단순하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표현을 지워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구별을 하고 나면 AC.359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가인의 내적 딕테이트를 정확히 어느 시대의 기술적 범주에 넣을 것인가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 , 그러니까 안색이 변한 뒤에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어도 주님의 자비는 먼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악을 향하여 가는 바로 그 길목에서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시고, 보게 하시고,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든,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이든, 그 모든 선한 내적 딕테이트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중요한 순간은 바로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가인처럼 자기 분노를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자기 상태를 보고 체어리티로 돌아서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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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합니다. 그의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 앞에서와 같이 체어리티가 떠났으며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that his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signifies as before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해설

 

AC.359는 짧은 글이지만 매우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앞 AC.357-358에서 가인의 ‘분하여 ’은 체어리티가 떠난 것을, ‘안색이 변함’, 원어로는 ‘얼굴이 떨어졌다’는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그 상태가 최종적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의 경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가 ‘양심이 말해 주었다(conscience dictated)는 뜻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것은 얼핏 보면 지금까지 배운 내용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인은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후손을 다루는 계열에 속하는데,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이 아니라 퍼셉션이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과 진리를 외부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양심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이러한 퍼셉션 대신 진리의 지식을 기초로 양심이 형성됩니다. AC.310은 이 차이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359의 ‘conscience’를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에 속한 영적 인간의 양심과 똑같은 것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conscience’라는 말을 임의로 ‘perception’으로 고쳐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분명히 ‘conscience dictated’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가인이라는 상태가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도 다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가인은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를 표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과 하나였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되고, 점차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리가 되어 가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시대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온전히 보존된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점차 쇠퇴하고 무너져 가는 과정에 속합니다. 앞서 창3을 살펴볼 때에도 타락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퍼셉션이 크게 약해졌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이 점에서 AC.359의 ‘양심이 말해 주었다’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에게 아직 홍수 후 영적 인간에게 주어질 새로운 질서의 양심이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체어리티에서 벗어나고 있는 그에게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내적으로 알리고 제지하는 어떤 딕테이트(dictate)가 있었다는 뜻으로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제로 앞의 AC.224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와 평화와 모든 선이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내적 딕테이트의 원인이 되고,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가 인간의 서로 다른 영적 상태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짐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4:6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가인의 상태를 모르셔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의 내적 상태가 잘못된 방향으로 변하고 있음을 스스로 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분노가 일어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지만, 그에게는 아직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고 돌이킬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분노하지 못하도록 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아무 말씀 없이 내버려 두시지도 않습니다. 분노가 일어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라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악이 실제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AC.359의 중심은 ‘가인에게 양심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체어리티에서 떠나고 있는 가인에게도 주님의 내적 경고가 계속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 경고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가인은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결정적인 틈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여기서 시대적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아니므로 그들의 퍼셉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를 통하여 형성하시는 양심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분노와 질투와 자기 의가 일어날 때, ‘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지금 내가 지키려는 것이 주님의 진리인가, 아니면 나의 proprium인가?’, ‘ 안에서 체어리티가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묻게 하는 양심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다만 이것은 AC.359의 가인이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종류의 양심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씀의 원리를 오늘날 우리의 영적 구조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AC.359는 매우 중요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났습니다.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해서 주님의 자비와 섭리가 먼저 그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선택하기 전에 그것을 보게 하시고 돌이킬 길을 마련하십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이제 그 경고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의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

AC.359.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를 읽다가 상당히 중요한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6의 ‘여호와께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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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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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심화

 

1.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6:26; 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Jer. 3:12)

 

 

6:26의 제사장 축복과 시4:6의 기도에는 공통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이해합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AC.358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 안에 한 걸음 더 깊은 속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얼굴을 드심’이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을 뜻할까요? 그 열쇠는 먼저 말씀에서 ‘얼굴’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AC.358에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내적인 것들을 상징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마음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랑하면 얼굴이 달라지고, 기뻐하면 밝아지며, 슬퍼하면 어두워지고, 분노하면 또 다른 모습이 됩니다. 특히 태고시대의 사람들은 내면과 얼굴이 완전히 일치하여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과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얼굴’은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존재의 내적인 상태를 표상하기에 매우 적합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얼굴’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얼굴이 인간의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면, ‘여호와의 얼굴’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내적인 것, 곧 신적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AC.358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간단하게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가장 내적인 것은 인간처럼 여러 감정이 서로 교대하는 상태가 아니라 변함없는 신적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이 인간을 향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을 향하여 흘러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민6:26의 의미가 깊어집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다가 어느 순간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비로 인간에게 사랑을 주시고, 그 사랑이 인간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AC.358은 ‘주님께서  얼굴을 사람에게 드시는 것은 자비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52-353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AC.352에서는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AC.353에서는 ‘기름’이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하며,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58에서는 그 사랑이 인간에게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주님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주님의 얼굴에서 자비가 나오고, 그 자비를 인간이 받아들일 때 인간 안에 체어리티가 생기는 것입니다.

 

4:6은 여기에 ‘’이라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표현을 더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주님의 얼굴은 단지 우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비춥니다.’ 이것은 AC.358 첫머리의 설명과 놀랍도록 잘 맞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난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서도 내적 애정이 얼굴을 통해 빛난다면, 말씀에서 주님의 얼굴이 비춘다는 것은 주님의 내적인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 저를 좋게  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와 우리가  사랑을 받아들이고 체어리티 가운데 살게 하소서’라는 깊은 기도가 됩니다. 주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칠 때 우리도 그 사랑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그의 선을 원하며,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여기에서 ‘평강’까지 연결하면 민6:26의 구조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얼굴을 드심과 평강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사랑이 체어리티가 되어 인간의 내적 질서를 바로잡을 때 평강이 뒤따릅니다. 이 평강은 단순히 외부에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얼굴을 든다’는 표현을 자연적인 의미와 혼동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고개를 들다’, ‘얼굴을 들다’라고 하면 자신감이나 당당함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358의 속뜻은 오히려 자기 높임과 반대입니다. 인간의 얼굴이 참으로 들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높일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실 때입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은 영적으로 얼굴이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그의 내면을 밝히고 그 사랑이 외적인 삶에 나타날 때 비로소 얼굴이 들립니다.

 

이제 이와 반대 방향의 표현인 렘3:12을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개역개정은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는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입니다. 직역하면 ‘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라’입니다. 바로 AC.358에서 설명하는 ‘얼굴이 들림’과 ‘얼굴이 떨어짐’의 대조가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다음 이유입니다.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얼굴과 ‘긍휼’, 곧 자비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얼굴을 드시는 것은 자비에서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이며, 얼굴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그 반대의 외관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의 얼굴은 실제로 들렸다가 떨어지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어떤 때에는 자비로운 얼굴로 인간을 바라보다가 인간이 잘못하면 노한 얼굴로 바꾸시는 것일까요? AC.358의 결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의미심장하게 ‘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실제로 변하는 쪽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57에서 살펴본 ‘여호와의 진노’와 동일한 원리입니다.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처럼 표현되지만, 실제 분노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사랑에서 분노로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주님의 질서에 반발할 때, 그 결과가 마치 주님의 진노처럼 경험됩니다.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중단되어 얼굴이 실제로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가 변함으로써 주님의 변함없는 자비를 다르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가 바로 그 예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인에게 얼굴을 떨어뜨리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AC.357에서 설명했듯이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자기주장을 강화하고,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에 분노하면서 가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 내적 변화가 ‘얼굴이 떨어짐’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렇게 민6:26과 창4의 가인을 나란히 놓으면 매우 선명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주님은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시며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체어리티를 거부하고 자기 사랑으로 돌아설 때 인간 자신의 얼굴이 떨어집니다. 주님의 얼굴은 사랑과 자비로 인간을 향하지만, 인간의 얼굴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들리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시4:6의 기도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주님에게 ‘마음을 바꾸어 우리를 다시 사랑해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미 끊임없이 인간을 향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얼굴, 곧 우리의 내적인 것이 주님을 향하도록 열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여 그 자비가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에는 ‘유입’과 ‘수용’의 질서도 들어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사랑과 선은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들어 비추시는 것은 신적 사랑과 자비의 유입을 나타내고, 인간의 얼굴이 들리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여 체어리티 가운데 들어가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간이 자기 사랑과 악을 선택하면 주님의 빛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얼굴이 들리는 삶은 결국 체어리티의 삶입니다. AC.351에서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58에서는 그 자비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주님의 얼굴이 인간에게 향합니다. 주님의 자비가 인간에게 흘러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 안에 체어리티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의 얼굴과 말과 행동과 쓰임을 통하여 이웃에게 나타납니다. 주님의 얼굴에서 시작된 자비가 인간의 삶을 통해 이웃에게 전달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얼굴’의 상응은 매우 아름다운 순환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드시면 그 자비에서 인간에게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인간이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그의 내적인 것이 변화하고, 그 체어리티가 다시 그의 얼굴과 삶을 통하여 빛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의 내적 상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속에 있는 사랑이 겉으로 그대로 빛났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떠나면 얼굴이 떨어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질서가 변한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경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에 반발하면서 내면이 변했고, 그 변화가 ‘안색이 변했다’는 말씀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얼굴의 들림과 떨어짐은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자기 사랑으로 그것을 거부하는가를 보여 주는 상응입니다.

 

따라서 민6:26의 축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축복입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단순히 일이 잘되고 어려움이 없어지기를 비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인간에게 임하고, 그 자비가 인간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며, 그 체어리티로 인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가 평강을 누리기를 바라는 축복입니다.

 

4:6의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역시 같은 깊이를 가집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도록 그분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우리를 향하여 계시는 주님의 얼굴, 곧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내적인 것이 돌이켜져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우리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렘3:12은 바로 그 사실을 반대 방향에서 확인해 줍니다. ‘나의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긍휼이 있는 자임이라.’ 그 이유는 주님 자신이 ‘긍휼이 있는 ’, 곧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는 있어도 주님 안의 자비가 그 반대의 것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세 구절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아름다운 질서가 드러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그분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 얼굴을 인간에게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이며, 그 얼굴이 ‘비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선이 인간의 내면에 임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얼굴이 ‘떨어진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는 주님의 자비를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시고,  자비가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며,  체어리티가 우리의 얼굴과 말과 행동과 모든 쓰임을 통하여 이웃에게 다시 빛나게 하소서.’ 이것이 AC.358이 ‘주님의 얼굴’이라는 말씀 속에서 열어 보여 주는 깊은 아르카나입니다.

 

 

 

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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