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7

 

천적 인간을 ‘안식일(the sabbath), 곧 ‘(rest)이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천적 상태가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이때에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뿐 아니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옵니다. 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고 멀리 도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사람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하신 것이므로, 주님께서 ‘쉬셨다(rested)고 합니다. Another reason why the celestial man is the “sabbath,” or “rest,” is that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 evil spirits retire, and good ones approach, as well as celestial angels; and when these are present, evil spirits cannot possibly remain, but flee far away. And since it was not the man himself who carried on the combat, but the Lord alone for the man, it is said that the Lord “rested.”

 

 

해설

 

이 글은 안식의 본질을 다시 한번, 그러나 이번에는 ‘영계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명확히 드러냅니다. 앞선 글들에서 안식은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완성된 상태로 설명되었는데, AC.87에서는 그 결과가 영적 교통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즉, 안식은 단지 인간 내부의 심리적 평온이 아니라, ‘영계와의 관계 자체가 달라진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안식이라 불리는 이유를 ‘싸움의 종식’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싸움이란, 앞서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던 유혹과 시험, 곧 악과 거짓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차지하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 싸움이 필연적이며 지속적입니다. 그러나 천적 상태에 이르면, 그 싸움은 더 이상 중심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더 이상 위협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질서가 이미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이 변화는 영계의 움직임으로 표현됩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더 나아가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옵니다. 이는 천적 상태가 단지 ‘조금 더 선한 상태’가 아니라, ‘전혀 다른 교통의 영역’에 속함을 뜻합니다. 천적 천사들이 임재할 때에는, 악한 영들이 머물 수 없습니다. 이는 힘의 대결 때문이 아니라, 성질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그들이 붙들 수 있는 공명점이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진술이 나옵니다. 싸움은 사람이 수행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싸운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스베덴보리 영적 인간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혹의 시간에 인간이 느끼는 긴장과 고통은 실제이지만, ‘결정적인 힘은 언제나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저항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이며, 싸움 자체의 수행은 주님께서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안식은 인간의 성취가 아닙니다. 사람이 모든 싸움을 잘 해냈기 때문에 오는 보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싸움을 끝내신 결과’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이 쉬셨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활동을 중단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저항할 것이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자리를 잡았기에, 주님의 일하심이 방해받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안식에 대한 인간 중심적 오해를 단호하게 교정합니다. 안식은 내가 편안해졌다는 느낌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안정되었다는 표지’입니다.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는 말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이제 하늘의 질서와 직접적으로 호응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안식은 심리 상태가 아니라, 존재 상태입니다.

 

또한 이 설명은 천적 인간의 겸손을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그가 안식에 이르렀다고 해서, 자신을 싸움의 승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싸움이 끝났음을 알지만, 그 싸움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선과 생명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의 내적 평화입니다.

 

AC.87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안식은 악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자리는 주님으로 채워졌고, 주님의 임재가 충만할 때, 싸움은 자연스럽게 끝납니다.

 

이 지점까지 오면, 안식일은 더 이상 계명의 항목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하도록 창조된 궁극의 상태’임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말해지는 ‘’은, 가장 깊은 생명의 활동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온전한 생명이 아무런 방해 없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AC.86, 창2:2-3, ‘안식일 저녁’(the eve of the sabbath)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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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먼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구절은, 가인을 보호하기 위한 과도한 형벌 경고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살인자를 편들기 위해 더 강한 보복을 선언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아르카나의 관점에서 이 말씀은 ‘형벌의 크기’가 아니라 ‘영적 파괴의 깊이와 범위’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의 초점은 ‘가인’이 아니라 ‘가인을 죽이려는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에 있습니다.

 

아르카나에서 ‘가인’은 한 개인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진리’, 곧 ‘신앙은 있으나 사랑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분명 타락한 것이며, 교회의 온전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는 이 상태를 즉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이 상태가 비록 왜곡되어 있을지라도, 여전히 교회 안의 어떤 질서와 연속성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인에게 ‘’를 주어, 그 상태가 더 이상 다른 것을 ‘죽이지 못하도록’ 제한하시되, 성급하게 없애지는 않으십니다.

 

이 맥락에서 ‘가인을 죽인다’는 것은, 잘못된 신앙 상태를 주님의 섭리 안에서 기다리며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과 열심으로 단절하고 제거하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아직 회복 가능성이 있는 것, 혹은 다른 선과 진리와 느슨하게나마 연결된 상태까지 함께 끊어 버리는 행위입니다.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에서 ‘’이라는 수 역시 문자적인 숫자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은 반복적으로 ‘완전함’, ‘충만함’, ‘끝까지 간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형벌이 일곱 배 더 무겁다’는 뜻이 아니라, ‘그 결과가 전면적이고 회복이 극히 어려운 상태로까지 간다’는 의미입니다.

 

아르카나의 논리에서 보면, 사랑 없는 진리라는 하나의 왜곡된 상태 자체보다, 그것을 잘못 다루어 교회의 남아 있는 선과 진리까지 함께 파괴해 버리는 일이 훨씬 더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상태는 ‘표를 받아 제한’되지만, 가인을 죽이려는 행위는 ‘칠 배의 벌’, 곧 완전한 황폐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섭리의 원리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악이나 왜곡을 다루실 때, ‘즉각적 제거’보다 ‘점진적 제한’을 먼저 행하십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보존되어야 할 리메인스(remains)’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 과정을 대신하여 정리하려 들 때, 특히 분노나 의로움의 확신 속에서 판단할 때, 그 판단은 거의 언제나 주님의 섭리를 넘어섭니다.

 

그래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겉으로는 정의를 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이 보존하고 계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가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칠 배의 벌’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더 세게 때리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더 깊고 광범위한 영적 붕괴를 낳는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풀어 줄 때에는, 도덕적 위협이나 공포의 언어보다는 다음과 같은 방향이 가장 적절합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신앙 상태를 옳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를 인간의 판단으로 성급하게 제거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아직 살아 있는 선과 진리까지 함께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악을 즉시 없애기보다, 먼저 그 작용을 제한하시고, 회복 가능한 것들을 조용히 보존하십니다. 이 질서를 무시하고 우리가 대신 정리하려 들 때, 그 결과는 처음 문제보다 훨씬 더 큰 영적 황폐로 이어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칠 배의 벌은 바로 그 결과를 가리킵니다.’

 

정리하면, 창4:15의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씀은, ‘사랑 없는 진리’라는 왜곡된 상태보다도, 그 상태를 주님의 섭리 없이 인간의 판단으로 제거하려는 태도가 훨씬 더 깊은 영적 파괴를 낳는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처벌의 위협이 아니라, 교회를 다루시는 주님의 인내와 섬세함, 그리고 인간 판단의 위험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SC.12, 기독교인들은 로또하면 안 되나요?

오늘날 로또하는 기독교인들, 특별히 뭘 좀 해 볼려고 해도 종잣돈 자체가 없어 힘들어하는 아들들을 위해 로또 생각을 하는 기독교인, 그러나 한편으로 아들들을 향하신 주님의 계획에 혹시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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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mark)가 영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나 작용을 의미하나요? AC.392-394를 참조해 주세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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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2

 

천국의 성질을 알게 하기 위하여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는 이들은, 육체적인 것들과 공상적인 생각들이 잠잠해진 상태에 놓이게 되거나—이는 누구도 이 세상에서 지니고 온 육체적 성향과 공상적 관념을 그대로 지닌 채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혹은 불순하고 불일치를 일으키는 것들을 기이하게 완화해 주는 영들의 영역(a sphere of spirits)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내면이 열리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방식들을 통해, 그들은 각자의 삶과 그로부터 형성된 성질에 따라 준비됩니다. They who are taken up into heaven in order that they may know its quality either have their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lulled to quiescence—for no one can enter heaven with the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that they take with them from this world—or else they are surrounded by a sphere of spirits who miraculously temper such things as are impure and that cause disagreement. With some the interiors are opened. In these and other ways they are prepared, according to their lives and the nature thereby acquired.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제시된 사례들을 ‘원리의 언어로 정리’해 주는 대목입니다. 앞에서는 개별 영들의 체험이 서술되었고, 여기서는 그 체험들이 어떤 질서와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접근이 결코 우연적이거나 일률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강조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형성된 ‘육체적인 것들’과 ‘공상적인 생각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육체적인 것이란 단순한 신체 감각이 아니라, 감각 중심의 욕망과 자기 만족을 기준으로 한 사고방식을 뜻합니다. 공상적인 생각들은 현실과 분리된 상상, 자기 방식으로 꾸며 낸 영적 기대를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는 천국의 질서와 근본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먼저 이러한 요소들이 잠잠해지도록 허락됩니다. 이는 제거라기보다 ‘가라앉힘’에 가깝습니다. 즉, 그것들이 더 이상 주도권을 쥐지 않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천국의 영향이 고통이 아니라 기쁨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식은, 영들의 영역에 둘러싸이는 것입니다. 이 영역은 불순한 것과 불일치를 일으키는 것들을 기이하게 완화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기이하게’라는 표현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섭리를 가리킵니다. 즉, 이는 인간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제공되는 보호적 환경’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내면이 직접 열리기도 합니다. 이는 외적 조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 주님께서 더 깊은 차원의 준비를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모든 준비는 각자의 삶과 그로부터 형성된 성질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문장은 신앙의 여정이 얼마나 개인적이면서도 질서 정연한지를 보여 줍니다. 천국으로의 준비에는 하나의 공식이 없습니다. 동일한 체험을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통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준은 하나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삶, 그리고 그 삶이 만들어 낸 내적 성질입니다.

 

이 점에서 AC.542는 매우 중요한 균형을 보여 줍니다. 천국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총으로 열리지만, 그 은총은 인간의 삶과 무관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견딜 수 있는 깊이까지, 가장 안전한 경로로 준비시키십니다.

 

또한 이 글은 천국 체험을 어떤 특별한 선택이나 특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교육이며, 학습이며, 적응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천국의 성질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 지상이나 중간 상태로 돌아가더라도, 그 사람 안에 참된 기준이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AC.542는 그래서 이렇게 읽힙니다. 천국은 닫힌 곳이 아니라, ‘질서가 있는 곳’입니다.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배척 때문이 아니라, 상태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불일치를 치유하고 조율하는 모든 과정은, 각 사람의 삶을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의 섬세한 배려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글은 결국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를 형성하고 있는가. 그 상태는, 주님께서 천국의 기쁨을 맡기실 수 있는 상태인가.

 

 

 

AC.541, 창5 뒤, ‘천국 기쁨에 비하면 더럽기까지 한 이 세상 쾌락’

AC.541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던 어떤 영들이, 그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 곧 육체적인 것들(bodily things)과 공상적인 생각들(fanciful notions)이 잠잠해진 상태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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