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눅23:1-2)
일단 저들의 고발은 사실이 아닙니다. 주님은 위 제목처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는 하셨지 금하신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바리새인들이 놓은 덫 때문에 할 수 없이 하신 말씀이시고요.
저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소위 가짜 뉴스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원수처럼 여기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지금은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저들이 이러고 있는 이유는, 예수를 죽이고는 싶은데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인 지금은 자기들한테는 사형집행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성전 뜰 안으로 무단침입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마침 이 유명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가 나왔으니 이 말씀의 속뜻, 그 내적 의미를 잠깐 살피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적어봅니다.
가이사, 즉 케사르(Caesar, 라틴)는 당시 로마 황제를 일컫는 호칭입니다. 헬라어 카이사르(Καῖσαρ)를 라틴으로 읽은 것이지요. 말씀에서 왕이나 황제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는 세상 진리, 법 따르는 것, 곧 자연적 삶을,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는 하늘 진리, 법 따르는 것, 곧 영적인 삶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하늘을 담는 그릇입니다. 마치 우리 육체가 영을 담는 그릇인 것처럼, 또는 진리는 선을 담는 그릇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하신 이 말씀은 세상에서 세상 법도를 따라 자연적 삶을 살되 그 안에 하늘의 법, 곧 영적인 삶을 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둘의 조화를 말씀하신 것이지, 결코 둘 중 하나를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 법도를 따라 살되 반드시 그 안에 하늘의 법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선택, 무슨 행위를 했으면, 그 이유와 동기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신 말씀처럼 말입니다.
아, 그리고 참고로, 말씀에서 ‘하나님’은 주님의 신성 중 진리 관련 호칭이고, ‘여호와’는 선 관련 호칭입니다. 주님의 신성은 선과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 호칭 관련, 창1과 창2를 유심히 비교해 보세요. 거기 보면 창1에는 ‘하나님’만 나오는 반면, 창2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오는데요, 여기엔 정말 깊은 아르카나(라틴, Arcana, 秘義)가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 되면 나누지요.
1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눅23:1-12)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까지 당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병자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보이신 후에는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기도 하셨고요. 심지어 변화산에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셨고, 그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음에도, 그런데도 주님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17:9) 제자들에게 당부하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만약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도 전에 유대의 대제사장들의 무리에게 붙잡혀 해를 입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과 같은 메시아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당신에 대한 성경의 예언들을 빠짐없이 이루셨습니다. 어떤 것은 문자적인 뜻 그대로 이루셨고, 또 어떤 것은 문자의 뜻 안에 있는 내적 의미로 이루셨습니다. 문자의 뜻 안에 있는 내적 의미로 이루셨다는 건,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이사야 63장 4절에는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이 지옥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기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는 시험 가운데서 주님 홀로 싸우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예레미야 46장 10절에는 ‘그 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쪽 유브라데 강 가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것임이로다’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주님이 이루셨다는 구약의 예언들은 대개는 내적, 외적으로 닥치는 수많은 시험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이 있기까지 당신이 메시아이며 왕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셨습니다.
그러셨던 주님이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이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눅22:70)라고 묻자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라고 간접적으로 시인하신 것이지요. 그러자 이들은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라면서 주님을 죽이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총독 빌라도에게 주님을 데려가 고발합니다.
※ 이들이 주님을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데려간 것은,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비록 나름의 자치권을 인정받았으나 이방인이 성전 안뜰을 함부로 들어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형 집행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는 마침 유월절이라 평소엔 저쪽 지중해 해안가 가이사랴에서 대왕 헤롯의 궁전을 관저로 삼아 지내지만, 이 기간엔 예루살렘에 와 전반적인 치안 살핀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총독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와 지내는 건 유독 이때 참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이며, 만에 하나 이때 로마에 대항하는 민란이라도 나는 날이면, 총독의 목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본문 1, 2절입니다.
1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그들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백성을 속이시거나 미혹하신 적이 없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신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마22:17)라고 물었고, 주님은 그 질문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대답하셨지요. 가이사는 로마의 왕입니다. 그러므로 가이사를 섬기는 건 세상 법도를 따르는 삶, 즉 자연적 삶입니다. 그에 비해 하나님을 섬기는 건 하늘의 법을 따르는 삶이며, 영적인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가 조화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삶을 위해 자연적 삶을 버려서도 안 되고, 자연적 삶을 위해 영적 삶을 버려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연적 삶은 영적 삶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신 것이고,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신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곧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가 바로 자연적 삶 속에 담아야 할 영적 생명이라는 것이지요.
3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주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말씀에서 왕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유대는 주님에 대한 사랑, 또는 선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선에 대한 사랑이 같은 뜻인 이유는,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한 것은 속뜻으로는 ‘네가 선으로부터 빛나는 진리이냐’ 또는 ‘네가 선을 동반한 진리이냐’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선 그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잉태된 진리이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빌라도의 물음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빌라도가 볼 때 아무리 봐도 주님에게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고발한 자들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심하게 소리 지르며,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 여기 이 ‘무리’는 두 부류, 곧 하나는 아까 새벽녘 급히 소집된 산헤드린 공의회 사형 의결 정족수인 23명과, 미리 매수해 놓은 시정잡배들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산헤드린의 경우, 총 71명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귀족 가문 계열인 사두개 제사장 그룹과, 서민, 즉 흑수저 출신인 바리새 그룹의 두 파가 서로 오랜 세월 대립, 원수처럼 지내오던 터라, 그리고 바리새들 중엔 주님께 무척 호의적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던 터라 아무래도 바리새쪽 의원들을 부르기엔 좀 껄끄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며, 거리 불량배들이야 뭐 부리기가 손쉬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인, 즉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유대는 여기서는 유대교회 사람들을 뜻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말씀의 맥락에 따라 그 속뜻, 그러니까 내적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주님이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대교회 사람들에게까지 잘못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주님을 재판하는 것이 내심 부담스럽고 불편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주님은 의로운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무슨 형사 사건이 아니라 단지 무슨 신학적, 철학적인 문제요, 저들의 그저 질투심 어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주님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는 당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왕에게로 주님을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6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 이 헤롯은 아버지 대왕 헤롯의 아들로서 헤롯 안티파스를 말합니다. 아버지 대왕 헤롯이 다스리던 유대 땅을 그가 죽은 후, 로마는 삼 분할, 세 아들에게 나눠 주었고, 그중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지역을 맡았으나 이 기간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다는 걸 빌라도는 알고 있습니다. 전에 세례(침례) 요한의 목을 잘라 헤로디아의 딸에게 준 자가 바로 이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을 심판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 즉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사람들, 그리고 총독 빌라도, 끝으로 헤롯 왕은 영적으로는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겁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는 이들이 누군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대제사장들 무리와 빌라도, 그리고 헤롯은 세상을 다스리는, 등차(等差, degree)가 다른 세 가지 진리를 나타낸다고 이해합니다. 이를테면 대제사장들의 무리는 교회의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하고, 총독 빌라도는 세상을 다스리는 진리, 즉 세상의 법을 뜻하며, 갈릴리의 왕 헤롯은 이방 종교의 진리, 또는 도덕적 진리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 새 교회 가르침들 중 ‘말씀에 관한 교리’ 27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있다. 처음의 것은 중간의 것을 거쳐 마지막의 것에 이르러 실체가 드러나며 존재한다. 그래서 마지막의 것은 기초이며 그릇이다. (이순철 역) In every Divine work there is a first, a middle, and a last (or ultimate); and the first passes through the middle to the last (or ultimate), and so comes into manifest being and subsists. Hence the last or ultimate is the basis. But the first is in the middle, and through the middle in the ultimate; so that the ultimate is the container. And as the ultimate is the container and the basis, it is also the support. (SS.27)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할 때는 교회의 진리가 처음 것이 되고, 도덕적 진리는 중간 것, 그리고 마지막에 세상의 법이 있습니다. 진리의 질서가 그러할 때, 하나님의 진리가 도덕적 진리를 거쳐 세상 법 안으로 흘러 들어가 그것을 통해 세상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차 하나님의 나라로 변합니다. 반대로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그 질서가 반대가 됩니다. 즉 가장 낮은 진리인 세상 법이 처음의 것이 되고, 도덕적 진리가 중간 것, 교회의 진리가 가장 마지막 것이 되지요. 이런 경우에는 교회의 진리가 세상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나쁜 풍조가 교회를 지배하게 됩니다. 참된 진리이신 주님이 대제사장들의 무리와 빌라도, 헤롯에게 차례로 심판받고 모욕을 당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그렇게 참된 진리가 거짓 진리에 의해 박해를 당합니다.
헤롯은 주님에게 궁금한 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여러 가지를 묻습니다. 그것에 대해 9절과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8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교회가 부패하면 사회의 도덕이나 윤리 또한 부패하게 됩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빛이 교회를 통해 윤리와 도덕 속으로 흘러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주님으로부터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결국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빛나는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다시 보냈습니다. 말씀에서 옷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헤롯이 주님께 빛나는 옷을 입혔다는 것은 얼핏 보면 주님을 인정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패한 윤리와 도덕이 그들 앞에 나타난 참된 진리를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모습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생애 동안 참된 진리를 만난다는 건 정말 큰 행운입니다. 그럼에도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 업신여기고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문득 서울교회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교회 건축이 시작될 무렵인데 좀처럼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알아보니 주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건축을 반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문제가 풀리긴 했으나 그로 인해 8개월이면 끝날 공사가 3년을 끌었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진리가 견뎌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나 종교가 어지러워지면 세상의 법이나 풍조 또한 어지러워집니다. 진리의 질서가 거꾸로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교회를 통해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진리의 질서가 있습니다. 마치 심장과 폐로부터 흘러나오는 깨끗한 피가 인체의 말단까지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은 그런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는 그 질서가 거꾸로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대제사장들의 무리와 빌라도, 그리고 헤롯에게 차례로 불려 다니며 심판받고 모욕당하는 것은 진리의 질서가 거꾸로 될 때 생기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각자의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가장 낮은 진리는 더 높은 진리를 섬겨야 합니다. 일을 하면서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뿐 아니라 일하는 방법과 목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상의 모든 행위는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부터 시작해 진리를 수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한 진리의 질서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건강한 교회, 건강한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삼상2:10)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3-5)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겉뜻들과는 달리 어떤 속뜻들이 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가령, 3이라는 숫자, 7이라는 숫자, 10이라는 숫자, 12라든지, 40이라든지, 100이라든지, 더 나아가 계시록에 나오는 1,000, 144,000 등... 1에서 9까지의 숫자들의 의미는 두 자릿수, 세 자릿수 등 복합수가 되면서 그 의미가 확장, 예를 들면, 책 한 권 분량의 의미가 어떤 큰 숫자 하나로 표현될 정도로 깊은 의미들을 지니게 됩니다. 천사들한테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 우리가 사는 이 시공간의 나라와는 달리 천국은 상태와 그 상태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저 숫자들 역시 어떤 상태와 그 변화를 나타내는 쓰임새를 가지며, 그래서 말씀 역시 천사들은 그렇게 이해하며 읽는데요,
그러니까 이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의 의미는, 아담이라는 첫 번째 태고교회에 ‘구백삼십’(930)으로 표현되는 어떤 수많은 상태와 그 변화가 있었으며, 그후 이 교회의 퍼셉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이 퍼셉션으로 늘 주님과 연결된 상태가 살아있는 상태인데, 그러므로 교회에 이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곧 그 교회는 죽었다, 그 교회의 쓰임새가 다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참고로, ‘퍼셉션’(perception)이란 천국에서 주님과 천사들 간에 있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내적 음성(an internal dictate)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창3:8) 같은 것이지요. 이런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 아직까진 그래도 존재했던 시기를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라 하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이 시작된 때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라 합니다. 새로운 방식은 ‘양심’(conscience)입니다. 즉 노아의 홍수를 기점으로 그 이후 사람들은 이전 선조들이 누렸던 방식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저급한 방식으로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내면이 열린 사람들, 즉 삶이 받쳐주는 신앙인들은 이 퍼셉션으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은, 특별히 어디 가서 누구에게 학습하지 않고도 지금 이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았는지 여부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신,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처럼 말입니다.
이 ‘구백삼십’을 비롯, 노아의 홍수 전까지 존재했던 태고교회 전체 기간이 실제로, 그러니까 지구 나이로 얼마만큼 존속했는지는 모릅니다. 지구의 나이가 45, 6억 년이나 되고, 그 사이 오늘날 고고학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한 소위 오파츠(Out-of-place artifacts, OOPARTS)라는 것들이 발견되는 걸 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리고 주님도 굳이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주시지는 않는, 그런 어떤 장구한 세월이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입니다.
첫 번째 태고교회인 아담은 그동안 지상에 존재했던 모든 교회 중 주님이가장 사랑하신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천적(celestial) 교회, 천적 인간이었기 때문이지요. 창세기 2장 3절에 나오는 ‘일곱째 날’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반면, 창5에 쭉 나열되는,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및 므두셀라 등 이후 노아로 연결되는 교회들은,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점점 황폐해져서 결국 대홍수, 노아의 홍수로 표현되는 첫 번째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교회들입니다. 교회가 황폐해진다는 건, 교회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