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개인적으로는 창세기 2장 3절까지를 창세기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바로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들(창1:2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이거나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창1:3-2:3)한테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가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것이 창세기 2장 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2장 4절부터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창1:1-창2:3까지가 하나, 창2:4부터가 또 하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 하지만 그럼에도 아래 말씀처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 또한 분명히 나오는 걸로 보아 그렇다면 분명 천적 인간의 시작이기도 하여 좀 어리둥절한 게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이 함께 쓰인 데에는 무슨 아르카나가 있는 건지 아직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공유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두 호칭, ‘여호와’와 ‘하나님’은 각각 선(good)과 진리(truth) 혹은 사랑(love)과 신앙(faith)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 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1-3) 1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Gen. 2:1-3)
※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2장 3절까지를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이거나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한테는 주님의 신성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가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게 이 2장 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4절부터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참고로 이 두 호칭은 각각 선과 진리 혹은 사랑과 신앙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 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첫 시간, 천지창조 일곱째 날, 곧 거듭남 일곱 번째 상태인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 여전히 주석 원본은 볼드체로, 메시지를 겸한 설명, 곧 추임새는 ‘※’로 구분합니다.
시작합니다.
1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C.82-83)
이 말씀은 인간이 이제 영적으로 ‘여섯째 날’이 되었음을, 즉 ‘여섯째 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충분히 영적임을 의미합니다. ‘천’(天, heaven)은 그의 속 사람(internal man), 곧 내적 존재(inner being)를, ‘지’(地, earth)는 그의 겉 사람(external), 즉 외적 존재(outer being)를 말합니다. ‘만물’(the army of them)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에 대한 지식을 말하며, 이는 앞서 큰 광명체들과 별들로 상징된 것입니다...
(AC.82)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라고 합니다. 이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기 때문, 즉 협력, 제휴, 힘을 합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사랑, 즉 천적 원칙(the celestial principle)이 주요 원리(the principal)가 되기 시작합니다. 신앙이나 영적인 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보다는 사랑이, 영적인 거보다는 천적인 거가 주도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것, 곧 천적인 걸 우선하는 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AC.83)
2-3절,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AC.84-88)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 heavenly person)이 ‘일곱째 날’입니다. 주님이 육 일간 일하신 결과이기에 이 천적 인간을 가리켜 ‘그가 하시던 일’(his work)이라고 합니다. 그때 모든 전투, 곧 갈등, 충돌이 그치며, 그 결과 그런 주님의 상태를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시니라’(to rest from all his work)라고 하는데, 이런 이유로 이 일곱째 날을 특별히 성별(聖別), 히브리어로 ‘안식’(rest)이라는 뜻의 ‘שבת’(샤바트, the sabbath)라고 합니다. 이런 과정으로 사람은 창조되고(created), 형성되며(formed) 만들어집니다(made). 이 모든 것이 말씀들로부터 아주 분명합니다.
(AC.84)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래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일이라 하셨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밝혀진 적 없는 아르카나(arcana, 秘義)입니다.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고, 영적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 거의 없습니다. 앞서 81번 글을 보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 이런 무지의 결과 사람들은 이 둘을 동일시했습니다. 일곱째 날 관련,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혹은 ‘안식일’(sabbath)인 것과 관련, 주님은 자신이 진정한 안식일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8)
이는 주님이 참 인간이시며, 진정한 안식일이심을 의미합니다.
※ 49번 글(창1:26)에,
주님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그 교회 구성원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더 많은 깊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고요, 이런 이유로, 그들은 아무한테도 ‘사람’(man)이라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주님한테만, 그리고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만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한테도 이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요. 대신 다만 자기들한테 있는 것들 중 모든 사랑의 선과 모든 신앙의 진리 같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고 지각된(perceived) 것들에 한해서만 사용했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 참 인간, 참 사람은 오직 홀로 주님 한 분뿐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그분의 나라를 안식일, 곧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라 하십니다.
[2]여기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는 이후 이 교회를 계승한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도 더 가장 주님의 안식일(the sabbath of the Lord)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주님의 안식일을 후대의 모든 교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모든 이어지는 가장 내적(inmost) 교회들, 즉 후대 교회들의, 주님과 가장 가까운, 가장 깊은 부분 역시 안식일이었다는 말이지요. 모든 거듭나는 사람 역시 그가 천적이 되면, 즉 그가 천국 본성을 발전시키면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그가 주님의 모양(a likeness of the Lord)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먼저 육 일간의 전투 혹은 수고가 선행합니다.
※ 59번 글(창1:30) 일부 인용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전투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며,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거듭나기 전엔 탐욕이 지배적이기 때문인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전반적으로 그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인데,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 그를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끊임없이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그런 걸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져서 결국은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은 개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이런 것들이 유대교회에서 육 일간의 수고와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상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도입된 어느 것 하나 주님과 주님 나라에 대한 표상(representative) 아닌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설명이 궤(the ark, 여호와의 법궤)로도 표상되었습니다. 궤가 나아갈 때와 궤가 쉴 때로 말이지요. 궤가 광야를 이리저리 다니는 것으로는 영적 전투와 시험(combats and temptations)을, 그리고 궤가 쉬는 것으로는 일종의 평화의 상태(a state of peace)를 표상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궤가 나아갈 때, 모세는 말하기를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10:35-36)
위 민수기 본문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을 떠나 ‘그들의 쉴 곳을 찾은’(민10:33) 것은 바로 여호와의 언약궤라 하였습니다.
[3]천적 인간의 쉼(The rest of the celestial man)을 이사야에서는 안식일을 가지고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58:13-14)
이것이 천적 인간의 질(質, quality)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적 욕구(his own desire), 즉 욕망이 아닌, 주님의 선하신 즐거움(good pleasure), 곧 그분의 뜻을 따르는데, 이것이 그의 ‘즐거움’(desire)입니다. 그 결과, 그는 내적 평화와 행복(internal peace and happiness)을 누립니다. 이것이 위 말씀,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의 의미이며, 동시에 그는 겉으로도 평온과 큰 기쁨(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을 누리는데, 이것이 바로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의 의미입니다.
※ 천사들한테서 볼 수 있는 이 상태는 천국 그 자체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이 상태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평화와 쉼 가운데 있으며, 주님도 쉼 가운데 계십니다. 그들이 주님과 이미 결합하였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수고롭게 일하지 않는데요, 이는 그들이 모두 이때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천적 인간의 다른 표현입니다.
(AC.85)
‘여섯째 날’이 된(has become) 영적 인간이 이제 천적 인간이 되려고 하는(is beginning to be) 상태를 여기서 먼저 다루고 있는데, 이때가 유대교회에서 말하는 ‘안식일 저녁’(the eve of the sabbath)입니다. 안식일의 거룩함을 저녁부터 지키는 것으로 표현했지요. 천적 인간은 이제 말씀드릴 ‘아침’입니다.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눅23:54)
※ 유대인의 안식일은 여섯째 날인 금요일 일몰부터 일곱째 날인 토요일 일몰까지입니다. 이와 관련된 걸 하나 말씀드리면, 유대 지역 일몰이 보통 오후 5시라고 할 때, 주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때가 오후 3시쯤이라 두 시간 만에 장례를 치러야 하는 아주 촉박한 상황임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 관련 본문들을 읽으시면 한결 와닿으실 겁니다. 하나 더, 유대인들은 결코 월요일, 화요일... 같은 요일 명칭을 쓰지 않습니다. 그 영어식 표현의 유래가 고대 앵글로 색슨계 신들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단순히 창세기 1장 표현대로 첫째 날, 둘째 날... 같은 명칭을 사용합니다.
(AC.86)
천적 인간을 가리켜 ‘안식일’(the sabbath) 또는 ‘쉼’(the rest)이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천적이 될 때 전투가 그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다가옵니다. 이들이 있으면 악한 영들은 도저히 머무를 수 없어 멀리 달아납니다. 전투를 치른 장본인, 당사자가 이 사람 본인이 아니라 홀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안식하시니라’ 하는 것입니다.
※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의지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그리고 이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각각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은 이렇게 천국과 지옥 두 곳에서 각각 파송된 천사들과 지옥의 영들로 이루어지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최소 천사 둘과 지옥의 영 둘이 와 있는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와 이해로 매 순간 일평생 천국 또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다가 이때, 즉,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거듭남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옥의 영들이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입니다.
(AC.87)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일’(the work of God)이라 합니다. 주님 홀로 그를 위해 지금까지 싸워오셨고(has fought for), 지금까지 그를 창조해 오셨으며, 지으시고 만들어 오셨기(has created, formed, and made)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하는 것이며, 한 번 더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지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으로 한 일’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사야에,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5:11-12, 18, 21)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새 창조, 혹은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AC.88)
이상으로 창세기 2장 첫 번째 시간인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을 다루었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안식일 관련, 우리가 흔히 오해할 수 있는 한 가지를 바로잡으면서, 이것을 오늘의 결론 삼아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25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렘17:24-25)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절대로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고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해야 한다. 천국 천사들의 상태가 바로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즉 자기들로 말미암아서는 그 어떤 것도 의도하거나 행하지 않는다. 심지어 더 나아가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말이다. 그들과 주님과의 결합은 이런 걸로 되어 있다’라는 뜻입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사람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악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선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한테는 모든 것이, 심지어 생명의 지적, 의지적 둘 다 아주 작은 데까지 흘러들어오며, 그 결과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개별적, 전반적인 것들한테까지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모든 것이 말입니다.
오늘 전체 본문입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1-3)
창조의 육(六) 일, 곧 사람의 거듭남 여섯 단계 중 셋째 날 풀, 채소, 나무 창조에서 다섯째 날 수중 생물과 공중의 새, 그리고 여섯째 날 땅의 짐승 창조로 바로 넘어가지 않고, 중간인 넷째 날에 두 큰 광명체를 창조하신 이유는, 머리 신앙, 지식 신앙,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신앙, 그러니까 잘난 체하는 신앙에서 가슴 신앙, 고백 신앙, 모든 공을 주님께 돌리는 신앙, 그러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과 애정의 신앙으로 넘어가려면 중간에 사랑과 신앙이라는 불이 궁창이라는 속 사람 안에 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 사람 안에 일단 이 두 큰 광명체, 곧 사랑과 신앙의 불이 켜지면, 그때부터 그동안 차갑고 냉랭하던, 그래서 못 움직이던(inanimate) 식물 신앙이 이제는 따뜻하고 온기 넘치는, 움직이는(animate) 신앙, 살아있고 생기 넘치는 동물 신앙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의 모든 힘과 능력이 우리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그리고 우리 몸 각 지체와 부분 및 각종 장기로 흘러들어오며, 영육 간 우리 몸 전체가 천사의 돌봄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의 각종 장애와 질병, 묶임과 매임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말씀이지요. 아멘, 할렐루야!
아, 그리고 한 가지! 그런데 이 두 큰 광명체가 속 사람 안에 창조되는 것은 본인이 원해야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저 식물 신앙에만 머무를 뿐, 주님의 이 두 큰 광명체, 곧 사랑과 신앙을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아무리 주위에서 무슨 중보 기도를 해도 소용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런저런 영적 전투란 전투는 다 겪은 후, 그러니까 갈 데까지 다 간 후에야 겨우 원하게 됩니다. 이마저도 사실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이지만요. 그러니까 질러가면 되는 길을 괜히 빙 돌아가지 마시고 얼른 하루속히 주님께 엎드리시고, 주님의 두 큰 광명체,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 내 속 사람 안에 창조되어 불이 환하게 켜지기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귀신이 들렸거나 거의 식물인간이 되어 몇 년째 누워계시는 등 그러니까 얼핏 우리 보기에 자력으로는 주님을 구하실 수 없을 것 같은 분들도 주님 보시기에는 그 속 사람이 준비되어 주님의 말씀, 곧 천국의 능력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 분들한테서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복음서 수많은 사례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속 사람이 중요합니다. 천국도, 치유도, 묶임과 매임에서 풀림도 모두 속 사람의 상태와 그 역량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중보 기도는 그저 거들 뿐입니다. 본인이 원해야 합니다. 특히 속 사람이 말이죠.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15: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