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6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다’ - 주님이 명하신 선한 삶을 왜 경계하게 되었는가?

 

해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면 뜻밖의 반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웠습니다’, ‘착하게 사는 것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셨겠습니까?’라는 질문들입니다. 이러한 반응에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지키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심이 지나쳐 선행 자체를 강조하는 것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역설에 직면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치셨는데, 정작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선한 삶을 강조하는 일을 신학적으로 경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행을 강조하는 것과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과연 같은 일일까요?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선행은 인간의 공로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요?

 

먼저 ‘행위구원’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선행이나 율법 준수, 종교적 공로를 통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비판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위구원을 경계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행이 구원의 대가가 될 수 없다는 주장과 선행이 구원에 본질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6장은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라고 설명하며, 선을 행할 능력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엄밀한 개혁주의 신학 자체가 선행을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교리적 구별이 신앙생활에서 단순화되면서 선행을 강조하는 설교까지 행위구원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형성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식 교리가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과 그것이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마5:16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7:21에서는 자신을 향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요14:15에서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마25:31-46에서는 굶주리고 목마르며 병들고 갇힌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강조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삶을 단순히 신앙의 장식이나 선택적인 열매로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야고보 역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합니다(약2:17). 그러므로 선행을 강조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행위구원이라고 비판한다면,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말씀까지 같은 비판을 받아야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문제는 선행의 중요성을 인정하느냐가 아니라, 그 선행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어떤 목적으로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422–424항은 체어리티의 본질을 사람이 자신의 직무와 사업과 일에서 정의롭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것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선행에 관한 우리의 통상적인 이해를 크게 넓혀 줍니다. 많은 사람은 선행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고, 헌금을 드리며,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특별한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일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그러한 특별한 활동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정당하게 대우하고, 노동자가 자신의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며, 공직자가 사적인 이익보다 공공의 선을 우선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과 지혜로 돌보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체어리티는 나타납니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외적으로 정의롭고 성실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 행위가 언제나 영적인 체어리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TCR.424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 사람을 지배한다면, 겉으로는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더라도 내적으로는 참된 체어리티가 없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그 행동을 이끄는 내적인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행과 자기 공로를 추구하는 행위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TCR.439–442에서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사람이 자신의 선행을 공로로 여기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고 그 대가로 천국의 높은 자리를 기대한다면, 그의 행위에는 자기 사랑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같은 일을 하면서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이웃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일 자체를 기뻐한다면, 그 행위는 전혀 다른 내적 성격을 지닙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TCR.435–438에서 체어리티의 첫 번째 일이 악을 멀리하는 것이며, 그다음이 이웃을 위해 선한 쓰임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자신의 탐욕과 거짓과 불의를 그대로 사랑하면서 외적으로 자선을 베푼다고 해서 그 자선이 자동으로 영적인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악한 삶 위에 선행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악을 멀리함으로써 주님의 선이 실제로 흐를 수 있는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도 결국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닐까요?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00–128항은 이 문제를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마치 스스로’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선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와 합리성을 통해 역사하시므로, 인간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실제로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짓말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나는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주님께서 언젠가 고쳐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거짓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여 악을 멀리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거짓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자기 공로로 구원을 획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가 선행을 가르치고 평가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선행과 헌신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헌금 액수, 전도 실적, 봉사 시간, 교회 행사 참여 횟수 등을 중심으로 신앙의 열심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활동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 시간과 재물을 드리는 일도 귀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영적 성숙이나 구원의 공로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면 선행의 본래 의미가 왜곡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서 자신의 직업을 정직하게 수행하고, 가정에서 가족을 성실하게 돌보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삶이 특별한 종교적 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볍게 여겨진다면, 그 역시 체어리티의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특정한 종교 활동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일상적인 삶 전체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정의롭고 성실하게 수행할 때 나타납니다. 그 쓰임이 주님을 향한 신앙과 결합될 때 일상의 도덕적 삶은 영적인 생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목회자가 선행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선행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그 근원과 목적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일입니다. ‘선을 많이 행해야 천국에 갈 자격을 얻는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면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므로 우리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이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요15:5에서 자신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같은 장에서 제자들이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참된 영적 선을 행할 수 없지만, 주님과 결합하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으로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373–377에서 체어리티와 믿음이 선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행위는 믿음에 덧붙이는 외적인 장식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 실제 삶에서 하나로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이때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열매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결국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다’라는 말에서 보존해야 할 진리는 인간이 자신의 선행이나 종교적 공로로 구원을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지키겠다는 이유로 선행 자체를 의심하거나,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자신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삶은 특별한 종교적 활동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정직하게 말하고,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기심과 교만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천국의 생명이 지금 이 땅에서 우리 안에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 되는가?’가 아니라, ‘내가 행하는 선의 근원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를 위해 그 선을 행하고 있는가?’입니다. 참된 선행은 은혜와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가 인간의 생명 안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구체적인 자리입니다. (PR.006 해설)

 

요약

선행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행위구원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선행과 공로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지만,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일을 구원과 무관하게 여기는 것 역시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선행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일상적인 직무와 관계 속에서 정의롭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과 깊이 연결되지만, 그 행위가 영적인 선이 되려면 주님을 인정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멀리하는 내적인 삶이 함께해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실제적인 실현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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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6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세례는 원죄를 씻어 주고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 물로 씻는 의식과 실제적인 거듭남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해설

‘세례는 원죄를 씻어 주고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이것은 천주교의 ‘세례성사’(洗禮聖事, Sacrament of Baptism)에 관한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천주교는 세례를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첫 번째 성사이며,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의 통로라고 가르칩니다. 아직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아기에게도 세례를 베푸는 것은 이러한 이해와 관계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의 상태에 있으므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죄에서 벗어나거나 구원받을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의지가 실제로 변화되는 것일까요?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는 아기도 세례를 받으면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를 주님께서 제정하신 중요한 성례로 인정하면서도, 참된 거듭남은 주님의 능력으로 인간의 악이 제거되고 선과 진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세례의 성사적 의미와 실제 거듭남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이번 명제는 세례의 필요성을 단순히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의 본질과 주님의 은총, 그리고 인간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이해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213항은 세례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의 기초이자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인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1262–1263항은 세례의 중요한 효과가 죄의 정화와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출생이며, 세례를 통하여 원죄와 이전의 개인적인 죄가 용서된다고 설명합니다. 1265항은 세례받은 사람이 은총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는 세례를 단순히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거나 교회에 가입하는 의식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은총을 베푸시는 성사이며, 그 안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영적 생명이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모든 악한 성향이 사라지고 이후에는 죄를 지을 위험도 없어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서 1264항은 세례 이후에도 죄로 기우는 성향인 ‘사욕편정’(邪慾偏情, concupiscence)이 남는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272항은 세례의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표지가 남더라도 죄로 인하여 그 구원적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입장을 ‘세례만 받으면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세례 이후의 회개와 영적 성장, 사랑의 실천을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례 자체를 통하여 죄의 용서와 은총에 의한 새로운 출생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원죄’(原罪, original sin)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는 원죄를 각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실제로 저지른 개인적인 죄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404–405항은 원죄를 원래의 거룩함과 의로움이 결핍된 상태로 설명하며, 그것은 자신이 직접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 본성 안에서 전해진 상태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동시에 천주교는 이러한 상태가 인류 최초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520항에서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달되었다는 전통적인 설명을 비판합니다. 그는 아담을 인류 최초의 한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를 나타내는 표상적 인물로 해석하며, 에덴동산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말씀도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설명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악한 성향을 지니는 이유를 아담 한 개인의 범죄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 선천적인 악의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악을 향한 성향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사실과, 그 성향을 아담 한 사람에게서 유전된 원죄의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21에서 인간이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악을 ‘유전악’(遺傳惡, hereditary evil)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유전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실제로 저지른 죄가 아니라 악을 향한 성향입니다. 인간은 부모와 조상에게서 여러 가지 악한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 모든 악을 자신이 실제로 행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후에 유전악 자체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받아들이고 행한 악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의 성향은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을 통하여 제어되고 변화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유전된 죄책을 어떤 의식으로 제거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존재하는 악의 성향이 어떻게 주님의 능력으로 다스려지고 그 사람이 실제적인 선의 삶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천주교 역시 원죄를 물로 씻어 내는 물질적인 오염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원죄의 상태가 제거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차이는 물에 어떤 물리적 능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의 기원과 세례의 성사적 효력, 실제적인 거듭남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신학적 차이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천주교의 원죄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거나,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타락한 성향 자체를 부정했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가 세례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TCR.667–691에서 세례를 하나의 독립된 장으로 다루며 그 영적 의미와 쓰임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세례를 무의미한 종교 의식으로 여기거나 폐기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세례를 성찬과 함께 주님께서 제정하신 중요한 성례로 인정합니다. 다만 TCR.670–673에서 세례의 물로 씻는 행위가 나타내는 것은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는 ‘영적 씻음’(spiritual washing)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물은 인간의 몸을 씻을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과 의지에 자리 잡은 악을 직접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몸을 아무리 씻어도 그 사람 안에 있는 도둑질과 강도질의 성향까지 씻겨 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673에서는 내면이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지 않는다면 외적인 씻음만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그의 비판은 세례를 베푸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외적인 의식이 인간의 내적 변화와 관계없이 죄를 제거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세례의 참된 의미는 물에 어떤 독립적인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화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례가 단순히 인간의 결심을 보여 주는 상징에 불과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가 영계의 질서와 연결되는 실제적인 쓰임을 지닌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677–687에서 세례의 세 가지 쓰임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첫째, 세례는 사람을 기독교회에 입문시키며 동시에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되게 합니다(TCR.677–680). 둘째, 세례는 사람이 구속주이자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따르도록 하는 쓰임을 지닙니다(TCR.681–683). 셋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그 사람이 주님에 의하여 거듭나는 것입니다(TCR.684–687). 이 세 가지는 서로 독립된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연결됩니다. 교회에 입문하는 것은 주님을 알고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주님을 인정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거듭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단순히 교회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의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 자연계와 영계가 연결되는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러한 쓰임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내적인 악이 제거되어 거듭남이 완성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특히 TCR.684–685에서는 세례의 궁극적인 목적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통하여 실제로 거듭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세례의 세 가지 쓰임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향하여 연결되며, 앞선 두 가지 쓰임은 궁극적인 거듭남 안에서 그 의미를 완성합니다. 따라서 세례의 가치는 외적인 의식이 지닌 영적 질서와 그 의식이 가리키는 실제적인 거듭남을 함께 이해할 때 분명해집니다.

 

이러한 이해는 유아세례에서 더욱 중요해집니다. 천주교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1250항에서 유아도 원죄의 상태로 태어나므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TCR.677에서 유아가 아직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믿음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유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의 내적인 이해와 의지가 이미 새로워졌으며 거듭남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유아세례를 무의미하게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세례를 통하여 유아가 기독교회에 입문하고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되며, 주님께서 천사들을 그 아이에게 배정하여 주님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보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세례를 단순한 인간의 종교적 선언보다 깊은 영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영계의 연결이 장래의 구원과 거듭남을 자동으로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게 될 때에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거듭남을 위한 중요한 시작이 될 수 있지만, 그 시작을 곧 완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천주교의 성사적 새 출생과 스베덴보리의 실제적인 거듭남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성경 역시 세례의 외적인 씻음과 실제적인 영적 출생의 관계를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요3:3-8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세례성사의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말씀에서 ‘물’은 진리를 나타내며,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의 역사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은 외적인 물의 의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진리와 사랑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영적 과정을 드러냅니다. 행2:38에서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며, 벧전3:21은 세례를 단순히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와 연결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세례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세례가 외적인 씻음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도 성경 본문과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석을 구별해야 합니다. 요3장의 물과 성령을 영적인 진리와 주님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근거한 해석이며, 그 자체가 천주교의 세례 해석을 역사적으로 반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의 외적인 표지가 실제로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는 내적인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죄의 용서와 거듭남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611–614에서 죄의 용서와 제거가 거듭남의 과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죄의 용서는 인간이 행한 모든 악이 단순히 사라져 과거의 상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멀어지게 하시고 선 안에 머물게 하시는 과정과 관계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피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만큼 그 악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유 가운데 진리를 받아들이고 마치 자기 자신이 행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며 선을 실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죄의 용서와 거듭남은 인간의 사랑과 의지, 이해와 삶이 실제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천주교 역시 세례 이후에 회개와 성화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세례 때 원죄와 이전의 죄가 실제로 용서되고 은총에 의한 새 출생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죄의 제거와 영적 출생의 실제적인 성취를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지속적인 과정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차이는 세례 이후에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세례 자체에 어떤 영적인 효력을 부여하고 그 효력과 실제 거듭남을 어떻게 연결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세례 이후의 신앙생활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자신의 악을 돌아보거나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세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교만과 탐욕, 이기심과 분노를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같지만,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러한 차이는 중요합니다. 참된 거듭남은 과거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현재 그 사람 안에서 어떤 선과 진리의 삶을 이루고 계시는가와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례를 받은 사람의 내면을 다른 사람이 임의로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과 영적인 상태는 주님께서 아십니다. 다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이미 모든 영적 과정을 완성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자신을 어떤 삶으로 부르셨는지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례는 주님을 알고 인정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부르는 거룩한 시작입니다. 그 시작이 참된 열매를 맺으려면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세례의 참된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를 주님께서 제정하신 중요한 성례로 인정하며, 그 안에 교회로의 입문과 영계의 질서, 주님을 인정하고 거듭남으로 나아가는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세례를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 낸 형식이나 불필요한 의식으로 여기는 것은 그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모든 악이 제거되고 거듭남이 완성된다고 믿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외적으로 깨끗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내적으로 선과 진리를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23:25-26에서 주님께서는 잔과 대접의 겉만 깨끗하게 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시면서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세례의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적용됩니다. 겉 사람의 씻음은 속 사람의 정화를 가리켜야 하며, 그 외적인 표지는 실제로 거듭나는 삶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세례받은 사람은 자신의 과거 세례를 구원의 완성으로 여기기보다, 주님께서 자신을 악과 거짓에서 정화하시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참된 가치는 물로 씻는 외적인 행위와 그 행위가 나타내는 영적인 정화를 구별하면서, 그 둘을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 안에서 함께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세례는 거듭남의 길을 가리키는 거룩한 입문이며, 그 길에서 실제로 인간을 정화하고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RC.006 해설)

 

요약

‘세례는 원죄를 씻어 주고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라는 명제에는 인간이 주님의 은총으로 죄에서 정화되고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세례를 통하여 원죄와 이전의 개인적인 죄가 용서되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출생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례 후에도 죄로 기우는 성향이 남으며 지속적인 회개와 성화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므로, 이를 세례만 받으면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천주교의 원죄는 개인이 직접 저지른 죄가 아니라 원래의 거룩함과 의로움이 결핍된 상태를 의미하므로, 스베덴보리의 유전악과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20–521에서 아담 한 개인의 죄가 모든 인간에게 전달되었다는 전통적인 설명을 비판하며, 인간이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것은 자신이 실제로 저지른 죄가 아니라 악을 향한 성향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670–673에서는 세례의 물로 씻는 행위가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는 영적 씻음을 나타내지만, 외적인 씻음 자체가 인간의 내적인 악을 제거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세례를 무의미한 의식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TCR.677–687에서 세례의 첫째 쓰임은 기독교회로의 입문과 영계의 기독교인들과의 연결, 둘째 쓰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따르는 것, 셋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주님에 의한 거듭남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세례가 거듭남과 관계된다는 사실이나 세례를 통하여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지 않습니다. 세례의 외적인 의식 자체에 원죄의 제거와 새로운 영적 출생을 직접 성립시키는 성사적 효력을 부여하고, 그것을 실제적인 악의 제거와 구별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천주교가 세례에 의한 은총의 새 출생과 그 이후의 지속적인 성화를 구별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세례는 거듭남의 시작과 목적을 가리키며 영계와 연결되는 실제적인 쓰임을 지니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세례받은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죄의 용서와 거듭남은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와 의지, 사랑과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시는 과정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참된 가치는 외적인 의식의 효력만이 아니라 그 의식이 가리키는 영적 정화와 거듭남의 삶에 있으며, 인간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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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5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어’ - 믿음에서 삶을 떼어 놓을 때 사라지는 구원의 본질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거나 종교적 행위를 통해 구원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교만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다’는 생각으로 발전한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집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자기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며, 악을 죄로 여기지도 않는다면, 과연 그의 믿음은 그를 구원하는 참된 믿음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질문은 단순히 믿음과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묻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란 무엇이며,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먼저 이 명제를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개혁 전통의 ‘오직 믿음’(sola fide)은 일반적으로 선행이 칭의의 근거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뜻이지, 선행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2항은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안에서 그 믿음은 홀로 있지 않고 다른 구원의 은혜들과 함께하며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제16장에서는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다’는 말은 엄밀한 개혁주의 교리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기보다, 칭의와 성화의 구별이 일상적인 신앙 언어 속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와 종교개혁 신학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도 남아 있습니다. 종교개혁 전통이 칭의를 설명할 때 믿음과 행위의 역할을 엄격하게 구별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참된 믿음 자체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특정 교단을 잘못 이해하여 비판하는 데 있지 않고, 구원의 본질에서 믿음과 삶을 분리할 수 있는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이 문제의 출발점은 로마서 3장 28절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 역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율법을 준수하거나 자신의 종교적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율법의 지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문맥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읽으면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곧바로 ‘어떤 선한 행위도 구원과 관계없다’는 결론으로 확대하면, 바울의 의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바울 자신도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하며, 로마서 2장 6절로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바울에게도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언어적 고백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새로운 생명과 관계되며, 그 생명은 실제 삶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서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할 말씀이 야고보서 2장 14절로 26절입니다.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특히 가난한 형제나 자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라고 말하는 사람의 예를 통해, 실제 사랑이 없는 믿음의 공허함을 드러냅니다. 이어 17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고,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 없는 믿음도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선행의 점수를 쌓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이라면 그 믿음 안에 실제로 살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의 고통을 보면서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즐거워하면서도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야고보는 그 믿음의 생명 자체를 질문합니다. 문제는 선행이라는 외적인 증거가 충분한가를 넘어,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108항은 이 문제를 매우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믿음의 본질도 알 수 없으며,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체어리티와 믿음이 선과 진리처럼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09항에서는 체어리티와 믿음의 관계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에 비유합니다.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두 능력이 함께 인간의 생명을 이루는 것처럼 체어리티와 믿음도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믿음이 먼저 생기고 그 결과로 선행이 뒤따라온다는 시간적 순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믿음이 된다는 존재론적 설명입니다. 이해 속에만 머물러 있는 진리는 아직 그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의지 안에 받아들여져 사랑의 대상이 되고,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선한 행위로 나타날 때 비로소 그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가 없는 믿음은 다소 부족한 믿음이 아니라, 구원하는 믿음으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336항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믿음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가 하는 오래된 논쟁을 다루면서, 시간상으로는 믿음이 먼저이지만 목적상으로는 체어리티가 먼저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먼저 진리를 배우고 이해한 다음,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면 믿음이 선행보다 먼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진리를 삶으로 실현하여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집을 짓는 일에 비유합니다. 시간상으로는 기초를 놓고 벽을 세우며 지붕을 만드는 일이 먼저이지만, 집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진리를 배우는 것은 체어리티의 생명에 이르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선행보다 앞세울 수는 있어도, 선행과 무관한 독립적인 구원의 수단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목적이 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부차적인 일이 되는 순간, 신앙의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욱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행위’의 의미입니다. 행위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행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그 행위를 일으키는 의지와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같은 돈을 기부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이웃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덜어 주고 싶어서 기부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부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행동은 같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랑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471–476항에서 인간의 삶이 그의 사랑에 따라 형성되며, 행위에는 그 사람의 의지와 생각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보신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행동의 숫자를 세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어떤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이 어떠한 삶을 형성했는지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구원과 관련된 것은 행위의 외적인 양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악을 멀리하려는 내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인 상태는 실제 삶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행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행위는 사랑을 실현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행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은 결국 행위구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 질문은 개신교 신자들이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을 접할 때 가장 먼저 제기할 수 있는 반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선을 만들어 내거나 자신의 공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고 자신의 행위를 구원의 공로로 삼는다면, 오히려 그 안에는 자기 사랑과 ‘프로프리움’(proprium)이 개입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행동 안에서 실제로 작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00–128항은 사람이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그 악을 실제로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심을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께서 자신을 변화시키실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노력으로 거듭남을 완성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께 협력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 주님의 신성한 능력이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와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은혜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은혜가 인간의 생명 안에서 어떻게 실제로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실제적인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잘 알고, 구원의 확신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가족을 함부로 대하고, 직장에서 약한 사람을 괴롭히며,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자신의 탐욕과 교만을 조금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받았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그의 신앙 이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인지, 아니면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종교적 안심을 얻는 일인지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자신을 향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25장 31절로 46절에서는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병든 사람과 갇힌 사람을 돌보는 일을 통해 마지막 심판의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인간의 종교적 고백만이 아니라 그 고백이 이웃을 향한 실제 사랑으로 나타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믿음과 삶의 결합을 강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끊임없이 평가하면서 ‘나는 오늘 충분히 선하게 살았는가? 이 정도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거듭남은 인간이 자신의 선행을 계산하여 합격점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시고, 그 사람이 점차 악을 미워하며 선을 사랑하도록 새롭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발견하는 것은 절망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주님께 더욱 나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아직 이기심과 교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죄로 여기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선행을 쌓았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확신도 자신의 공로나 과거의 신앙고백에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자신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신뢰하는 데서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의 설교와 양육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교회가 구원의 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삶의 변화와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한다면, 성도들은 교리를 정확히 알고 신앙고백을 바르게 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선행과 봉사만을 강조하면서 주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심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자신의 헌신과 공로를 통해 구원을 확보하려는 또 다른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믿음과 행위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누구이신지, 무엇이 선하고 참된 것인지를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사랑이 되어 실제 삶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 243항에서 교리는 교회를 이루는 데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지는 않으며 그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교회의 본질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해 주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삶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문제를 주님 자신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같은 장 21절에서는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하여 올바른 생각을 갖거나 감정적으로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이 선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선으로 받아들이고, 악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악으로 인정하며, 자신의 삶을 그 말씀에 따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삶과 행위는 관계없다는 생각은 결국 주님을 믿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분리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이 분리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사랑하며, 마침내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질문은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가, 행위로 구원받는가?’라는 양자택일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의 믿음은 실제로 주님을 향하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내 사랑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그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믿음이라는 이름의 종교적 자격이 아니라, 믿음과 체어리티가 하나가 되어 살아 움직이는 천국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PR.005 해설)

 

요약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말에는 인간이 자기 공로나 행위로 구원을 획득할 수 없으며,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므로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가면 오류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믿음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인간의 실제 생명이 됩니다. 선행은 구원을 구매하는 공로가 아니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삶으로 나타나는 본질적인 자리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삶의 관계는 구원의 원인과 부차적인 결과라는 구별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참된 구원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믿음과 체어리티를 결합하시고 새로운 사랑의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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