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렘51:57)
이 구절이AC.150에 인용된 이유는, ‘잠든다’는 표현이 단순 육체적 수면이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진리와 선에 대한 영적 지각(perception)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특히 여기서는 단순 일시적 무감각이 아니라,자기 지성과proprium안에 완전히 갇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강조됩니다.
예레미야서51장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인데,스베덴보리는 바벨론을 단순 고대 국가로만 읽지 않습니다.그는 그것을‘자기 자신을 높이고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상태’,곧 자기 사랑과 지배욕이 극대화된 영적 상태로 봅니다.따라서 여기서 고관,지혜 있는 자,용사들이 취하게 되고 영원히 잠든다는 것은,단순 정치 몰락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기능 전체가 영적으로 마비된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지혜 있는 자들’까지 잠든다고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이것은 단순 무식함이나 정보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스베덴보리에게서 가장 위험한 상태는,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proprium을 섬기게 되는 상태입니다.그런 경우 인간은 오히려 자기 지성 안에 더 깊이 갇히게 됩니다.그래서 여기서‘잠’은 무지보다 더 깊은 상태,곧 진리를 거부하는 영적 혼미 상태를 뜻합니다.
또‘취하게 하리니’라는 표현도 상응적으로 중요합니다.말씀에서 술 취함은 종종 거짓과 왜곡된 추론에 의해 정신이 흐려진 상태를 뜻합니다.즉,인간이 자기 지성과 자기 사랑 안에 빠져 진리의 질서를 잃어버린 상태입니다.그렇게 되면 결국‘깊은 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곧,영적 현실에 대한 감각 자체가 닫혀 버립니다.
이것이AC.150과 연결되는 이유는,스베덴보리가 지금 퍼셉션의 상실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원래 태고교회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선과 진리를 지각했습니다.그러나 인간이 자신의proprium을 원하고 자기 지성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점점 내적 시야가 닫히고 결국 영적 잠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렘51:57은 바로 그 최종적 상태를 강렬하게 보여 주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여기‘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는 표현도 문자 그대로 영원한 무의식 상태를 뜻한다기보다,자기 사랑과 거짓 안에 끝까지 머물기를 원하는 상태가 굳어졌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스베덴보리에게 지옥은 주님이 강제로 잠재워 버린 상태가 아니라,인간이 스스로 자기proprium안에 머물기를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AC.150에 인용된 이유는,인간이 자기 지성과proprium안에 깊이 빠질 때 결국 퍼셉션과 영적 지각이 완전히 마비되어‘깊은 잠’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사29:10)
이 구절이AC.150에 인용된 이유는, ‘깊이 잠들게 하는 영’(spirit of deep sleep)이 단순 육체적 잠이나 피곤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지각(perception)과 영적 인식이 닫혀 버린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150의 흐름은 인간 안에서 퍼셉션이 어떻게 약화되고, 결국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하던 상태가 사라져 가는지를 설명하는데, 사29:10은 바로 그 영적 혼미 상태를 예언자의 언어로 묘사하는 대표 구절입니다.
사29:10에서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부으셨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보면 마치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들을 어둡게 만드신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들을 항상 상응으로 읽습니다. 즉, 주님께서 직접 악이나 무지를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proprium과 자기 지성 쪽으로 기울어질 때, 그 결과로 내적 시야가 닫히는 상태를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잠’(sleep)은 매우 중요한 상응입니다. 말씀에서 잠은 종종 영적 무감각 상태, 곧 진리와 선에 대한 내적 지각이 멈춘 상태를 뜻합니다. 반대로 깨어 있음은 영적 각성과 지각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깊은 잠’은 단순 무지가 아니라, 영적 감각 자체가 무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눈을 감기셨다’, ‘선지자들과 선견자들을 덮으셨다’는 표현도 같은 흐름입니다. 말씀에서 눈은 이해와 통찰을, 선지자와 선견자는 진리를 보는 기능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 육체적 시각 문제가 아니라, 인간 안의 영적 이해 기능이 어두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곧, 진리가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주님의 것이 드러나 있어도 지각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AC.150과 연결되는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지금 태고교회의 퍼셉션 상실 과정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거의 즉각적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나proprium이 커지고 자기 자신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해질수록, 인간은 점점 그 퍼셉션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외적 지식과 추론뿐이고, 결국 내적 시야는 ‘잠든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사29:10은 단순 심리 상태 묘사가 아니라, 퍼셉션이 사라지고 영적 감각이 닫힌 인간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으로AC.150에 인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경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든 상태라는 것은 다시 깨어날 가능성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거듭남은 결국 이 잠든 인간이 다시 주님의 생명 안에서 깨어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창2:21)
AC.150
사람이 own 안에 있을 때, 곧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길 때의 상태는 ‘깊은 잠’(deep sleep)에 비유되며, 실제로 고대인들은 이 상태를 깊은 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사29:10)라고 하며, 또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렘51:57)라고 합니다. The state of man when in his own, or when he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compared to “deep sleep,” and indeed by the ancients was called deep sleep; and in the Word it is said of such that they have “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 (Isa. 29:10), and that they sleep a sleep (Jer. 51:57).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렘51:57)
사람의 own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누구도 자기로부터 생명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계에서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own만을 사랑하고, 완강하게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주장하던 악한 영들조차도,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이 아님을 납득하게 되었고, 마침내 자기로부터 살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특별히 사람의 own이 어떠한지를 알도록 허락받았으며, 그 결과 나는 내가 스스로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생각의 모든 관념이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각, 그러니까 퍼셉션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어떻게, 또 어디서부터 흘러들어오는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것은 거짓된 상태에 있는 것이며,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믿음으로써, 본래라면 결코 자기에게 귀속시키지 않았을 모든 악과 거짓을 스스로에게 귀속시키게 됩니다. 만일 그의 믿음이 사태의 참된 실상과 일치하였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That man’s own is in itself dead, and that 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 has been shown so clearly in the world of spirits, that evil spirits who love nothing but their own, and obstinately insist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were convinced by sensible experience, and were forced to confess that they do not live from themselve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해설
AC.150은 앞선 AC.147-149에서 설명된 ‘own’ 교리를 ‘의식의 상태’라는 관점에서 정리해 주는 매우 결정적인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를 단순한 오류나 무지로 설명하지 않고, ‘존재 전체가 잠든 상태’, 곧 ‘깊은 잠’으로 규정합니다.
이 ‘깊은 잠’은 육체적 수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자각의 상실’을 뜻합니다. 사람은 여전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스스로 살아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이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깨어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는 줄 알지만, 실상은 생명이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조심스럽게 증언합니다. 그는 자신이 아무 생각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할 수 없다는 것을 지각, 곧 퍼셉션으로 알도록 허락받았다고 말합니다. 생각 하나하나가 흘러들어오며, 심지어 그 유입의 경로까지도 인식할 수 있었다는 이 고백은, 앞선 교리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경험적 인식’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 줍니다.
특히 중요한 대목은, 악한 영들조차도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진술입니다. 이는 자신의 own을 사랑하는 정도가 극단적인 존재들조차도, 실제 경험 앞에서는 더 이상 그 주장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생명’이라는 관념은 ‘지적 오류’이기 이전에 ‘의지의 집착’이며, 그것이 무너질 때 비로소 진실이 보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단락의 윤리적, 영적 핵심을 짚어 줍니다. 사람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믿는 순간, 그는 모든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킵니다. 왜냐하면 그 출발점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참된 인식 위에 서 있다면, 그는 악과 거짓을 자기의 본질로 붙들지 않게 됩니다. 책임은 사라지지 않지만, ‘귀속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AC.150이 말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근원을 바로 인식하는 전환’을 뜻합니다. 이것이 곧 이어질 본문에서, ‘여자’와 ‘자신의 own’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