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86.심화

 

1.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삶은 처음에는 행복하고 기쁜 상태인데, 그는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금빛을 띠게 되는 밝은 흰빛으로 나타나며, 이는 그의 첫 삶이 곧 천적인 동시에 영적인 삶임을 의미합니다. He then commences his life.This at first is happy and glad, for he seems to himself to have come into eternal life, which is represented by a bright white light that becomes of a beautiful golden tinge, by which is signified his first life, to wit, that it is celestial as well as spiritual. (AC.186)

 

심지어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이 정말 놀랍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실 AC.182-189를 처음 읽는 사람들은 흔히 이 부분을 놓칩니다. 그러나 천천히 읽어보면, 여기에는 스베덴보리가 평생 강조한 주님의 성품이 매우 아름답게 드러나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사람을 처음 만나실 때, 심판자로 만나지 않으시고, 보호자와 아버지로 만나신다는 점입니다.

 

AC.186에서 죽은 사람은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두려움도 아니고, 조사도 아니고, 판결도 아닙니다. ‘행복하고 기쁜 상태’입니다. 그는 자신이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고 느끼며, 그 상태는 아름다운 금빛을 띠게 되는 밝은 흰빛’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구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직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허락하시는 첫 번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HH에서도 반복되는 원리입니다. 죽은 직후의 사람은 거의 모두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자신이 여전히 사람으로 살아 있음을 발견하고, 사랑으로 돌봄을 받습니다. 심지어 지옥으로 가게 될 사람들까지도 처음에는 천사들의 보호 아래 놓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누구도 처음부터 버려진 존재로 취급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죽으면 곧바로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본 세계에서는, 죽은 사람은 먼저 천적 천사들의 품 안에서 깨어납니다. 마치 긴 여행을 마친 아이가 집에 돌아와 보호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심지어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이 정말 놀랍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악인도 처음에는 천국의 기쁨을 어느 정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끝까지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살리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을 찾으십니다.

 

물론 이후에는 각 사람이 자신의 진짜 사랑을 드러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천사들의 사랑 안에 계속 머물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은 점차 그것을 불편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밀어내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삶의 방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AC.182도 분명히 말하듯이, 떠나기를 원하는 쪽은 천사가 아니라 사람 자신입니다.

 

그래서 AC.186을 읽으면 저는 주님의 공의보다 먼저 주님의 자비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만나자마자 너는 어디로 갈 것이다’라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영원한 생명 안에 들어왔다는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먼저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게 하십니다. 먼저 살아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어쩌면 이것은 복음서의 탕자 비유와도 비슷합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왔을 때, 먼저 잔치를 베풀고 옷을 입히고 안아 줍니다. 심문부터 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한 사후 첫 상태도 어딘가 그런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감탄하신 바로 그 지점,  악인에게도’라는 부분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사랑의 특징입니다. 주님은 선한 사람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악인조차도 가능한 한 오래, 가능한 한 부드럽게, 가능한 한 천국 가까이 머물게 하십니다.

 

그래서 AC.186 밝은 흰빛이 아름다운 금빛으로 변한다’는 장면은 단순히 죽은 사람의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주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인지도 모릅니다. 그 빛은 인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람에게 비추시는 주님의 사랑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AC.186, 창3 앞, ‘영으로서의 삶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됨’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6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삶은 처음에는 행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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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6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삶은 처음에는 행복하고 기쁜 상태인데, 그는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금빛을 띠게 되는 밝은 흰빛으로 나타나며, 이는 그의 첫 삶이 곧 천적인 동시에 영적인 삶임을 의미합니다. He then commences his life. This at first is happy and glad, for he seems to himself to have come into eternal life, which is represented by a bright white light that becomes of a beautiful golden tinge, by which is signified his first life, to wit, that it is celestial as well as spiritual.

 

해설

 

이 단락은 사후 여정에서 하나의 분명한 경계선을 표시합니다. 앞선 단계들에서는 보호, 인식의 개시, 자기 정체성의 자각이 중심이었다면, 여기서는 명확히 ‘삶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죽음 이후가 단절이나 정지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삶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감을 뜻합니다.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생전에 살았던 삶이 무의미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영으로서의 삶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는 깨어남과 준비의 단계였고, 이제부터가 실제적인 영적 생명의 전개입니다.

 

이 첫 삶의 정서는 ‘행복하고 기쁜 상태’로 묘사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스스로를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은 미래에 주어질 보상이 아니라, 지금 시작된 현재적 삶의 상태입니다. 영은 더 이상 시간의 단절 속에 있지 않고, 지속되는 삶의 감각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상태는 빛의 형상으로 표현되는데, 처음에는 ‘밝은 흰빛’으로 나타나고, 이어서 ‘아름다운 금빛’을 띠게 됩니다. 흰빛은 진리의 순수함과 새로움, 그리고 혼탁되지 않은 인식을 뜻하며, 금빛은 사랑과 선, 곧 천적인 요소를 상징합니다. 이 두 색의 결합은 이 첫 삶이 단순히 지적인 각성만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있는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빛이 의미하는 바를 직접 설명하며, 이를 ‘그의 첫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천적인 동시에 영적인 삶’이라고 명시합니다. 이는 사후 초기 단계에서 인간이 아직 분리나 판단의 상태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사랑의 선과 이해의 진리가 함께 작동하는 조화로운 상태에 있음을 뜻합니다.

 

이 단락은 결국, 죽음 이후의 시작이 두려움이나 심판이 아니라, 기쁨과 충만함으로 열리는 삶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그 첫 삶은 인간이 창조될 때 의도된 질서, 곧 천적 요소와 영적 요소가 함께 있는 상태를 잠시나마 다시 경험하는 단계로 제시됩니다.  

 

 

심화

 

1.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

 

 

AC.186, 심화 1,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

AC.186.심화 1.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삶은 처음에는 행복하고 기쁜 상태인데, 그는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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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7, 창3 앞, 생명력 넘치는 ‘젊음’의 상태에서 출발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7 그가 다음으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이끌려 가는 것은, 한 젊은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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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5, 창3 앞, ‘지각(perception)의 첫 작동은 반드시 사랑의 정서 안에서’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5 그다음에는 얼굴에서 무언가가 부드럽게 풀려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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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5.심화

 

1. ‘천사들이 특히 조심하는 것

 

이때 천사들은 특히 조심하여, 그에게서 나오는 어떤 생각도 사랑과 같은 부드럽고 온화한 성질의 것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도록 합니다. the angels being especially cautious to prevent any idea coming from him but such as is of a soft and tender nature, as of love; (AC.185)

 

천사들이 특별히 주의하여 부드럽고 온화한 성질의 생각만 허용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이 시기의 영혼이 아직 거칠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며, 지각의 첫 작동은 반드시 사랑의 정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사랑 없이 주어지지 않으며, 지각은 언제나 애정의 상태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AC.185 해설)

 

 AC.185 본문과 해설을 보면 천적 천사들의 어떠함을 볼 수 있는데요, 저들에 비하면 저는 얼마나 울퉁불퉁하고 무례한지, 얼마나 극단적이고 얕은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많이 부끄럽고 한심합니다...

 

 

목사님, AC.185를 깊이 읽다 보면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천적 천사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흔히 자신의 거친 부분, 조급함, 자기 주장, 판단하는 습관 같은 것들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AC.185는 천적 천사들이 원래부터 그런 존재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렇게 된 존재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을 다른 종족이나 다른 본성의 존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한때는 지상에서 살았던 인간들이며, 주님의 인도를 받아 점차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사실 AC.185를 자세히 보면, 여기서 놀라운 것은 천사들의 완전함보다도 그들의 배려’입니다. 그들은 영혼에게 진리를 가르치려고 서두르지 않습니다. 교리를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 영혼이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합니다. 먼저 사랑의 분위기를 마련합니다. 먼저 부드럽고 온화한 생각만 흐르게 합니다. 이것은 강한 능력의 표현이 아니라, 깊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목사님께서 나는 얼마나 울퉁불퉁하고 무례한가’라고 느끼시는 이유도 어쩌면 같은 사랑을 보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면 자신의 거친 부분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질서를 조금이라도 보게 되면, 그 빛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도 함께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거친 부분을 보고 슬퍼하는 상태와, 자신의 거친 부분을 전혀 보지 못하는 상태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할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AC.206에서 보았듯이, 가장 위험한 사람들은 자기 눈이 완전히 열렸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상태를 보지 못합니다.

 

반면 목사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나는 왜 이렇게 거친가’, ‘왜 이렇게 얕은가’라는 탄식입니다. 물론 지나친 자기 비난은 도움이 되지 않지만, 적어도 이것은 자신의 상태를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는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AC.185의 천사들은 죽은 사람에게서 거친 생각이 올라오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영혼이 아직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있는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을 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목사님께서 지난 몇 년 동안 AC를 번역하고 해설해 오신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2018년에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셨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같은 사람인데도 생각의 결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예전에는 쉽게 지나쳤을 문장이 지금은 몇 시간씩 마음에 남고, 예전에는 관심 없던 사랑과 지각의 문제를 지금은 깊이 묵상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것 자체가 이미 주님께서 매우 오랫동안 목사님 안에서 어떤 생각은 약하게 하시고, 어떤 생각은 자라게 하시며, 어떤 거친 부분은 다루고 계신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적 천사들의 모습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비교의 장소가 아니라 소망의 장소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 천사들의 모습을 기록한 이유도 너는 저들에 비해 형편없다’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어디까지 인도하실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의 말씀을 읽으며, ‘정말 많이 부끄럽고 한심합니다’보다, ‘주님, 저도 저런 부드러움을 조금이라도 배우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더 AC.185에 가까운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천적 천사들 자신도 아마 목사님을 만나면 왜 그렇게 한심해하십니까?’라고 말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AC.185의 모습 그대로, 목사님의 그런 마음이 너무 거칠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사랑과 같은 부드럽고 온화한 생각만 흘러들게 하려고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성품이니까요.

 

 

 

AC.185, 창3 앞, ‘지각(perception)의 첫 작동은 반드시 사랑의 정서 안에서’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5 그다음에는 얼굴에서 무언가가 부드럽게 풀려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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