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시140:3)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Ps. 140:3).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시편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뱀’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에 근거한 추론’ 또는 ‘신앙의 진리를 공격하는 추론’을 상징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한다’는 표현은 단순히 말을 험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추론을 날카롭게 벼려 진리를 공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혀’에 주목합니다. 혀는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상응적으로는 사고와 추론이 밖으로 드러난 것을 뜻합니다. 뱀의 혀가 날카롭다는 것은 감각과 외적 경험에 근거한 논리가 매우 설득력 있고 교묘하게 작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거짓은 대개 처음부터 거짓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창3의 뱀도 처음부터 ‘하나님을 거역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정녕 그러하냐?’고 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 속에는 이미 신앙을 감각의 법정에 세우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독사의 독이 그 입술 아래 있다’는 표현은 더욱 중요합니다. 독은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입술 아래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몸 안으로 들어가면 생명을 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적 추론의 위험성에 비유합니다. 감각적 추론은 처음에는 지혜처럼 보이고 상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신비를 그것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결국 영적 생명을 마비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독’이라고 부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단순히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판단하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때문에, 영적인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독은 남을 죽이는 것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마비시킵니다.
이 때문에AC.195에서 시편140편은 단순한 도덕적 경고가 아니라 영적 경고로 사용됩니다. ‘뱀의 혀’는 감각적 추론을, ‘독사의 독’은 그 추론이 영혼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을 뜻합니다. 즉,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신앙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과 ‘신앙의 진리를 감각으로 재판하는 것’을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 시편 구절은 단순한 ‘이성’이 아니라 ‘이성질’의 위험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성이 진리를 섬길 때는 유익한 도구가 되지만, 진리를 심판하는 자리에 올라앉을 때는 ‘독사의 독’처럼 영적 생명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AC.195는 이 시편 구절을 통해 창3의 뱀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작동하는 잘못된 추론의 원리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또한 감각의 증거에 근거,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 것들,곧 이성질(理性질)하는 것들을‘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했고,그러한 이성질 하는 자들 자신을‘뱀’(serpents)이라 했습니다.Hence also reasonings concerning the mysteries of faith,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were called by them the “poison of a serpent,” and the reasoners themselves “serpents”; (AC.195)
감각적인 것,곧 보이는 것,물질적인 것,자연적인 것들로부터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할 때,그 추론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비시키는 독이 됩니다.이러한 추론을 하는 자들 자신이‘뱀’이라 불린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AC.195해설)
여기서 주님 주신‘이성’(理性)을 저런 식으로 사용하는 걸 저는‘이성질’이라 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도둑질,이간질처럼‘이성’에‘...질’을 조합,제가 만들어 봤습니다만...
저는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이 꽤 직관적이고 전달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말하려는 의도, 곧 ‘이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이성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꼬집고 싶다는 취지는 충분히 전달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약간의 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결코 이성 자체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AC.195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이성의 오용’입니다.
그래서 만일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면, 듣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아,목사님은 이성을 나쁘게 보시는구나’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AC.203에서 영적 천사들이 이해와 이성을 사용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확인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성으로 신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신앙을 재판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이 만약 이 표현을 사용하신다면, 예를 들어, 이렇게 설명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는 이성질은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이성을 주님 위에 앉혀 놓고 주님을 심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의해 두면 오해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참된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앙의 종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분명히 보고, 더 질서 있게 정리하는 것이 이성의 역할입니다. 반면AC.195가 말하는 뱀의 길은 이성이 종의 자리를 떠나 왕좌에 앉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이 만들어 내신 ‘이성질’은 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이성 사용’이 아니라 ‘이성을 휘두르는 짓’이라는 뉘앙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운전’과 ‘난폭운전’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스베덴보리의 의도에 가장 가까운 의미로 정의한다면, ‘이성질’이란 ‘이성을 진리를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진리를 심판하는 재판관으로 사용하는 행위’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앞으로 설교에서 사용하신다면, 저는 이런 식의 문장이 떠오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이성질을 합니다.이성은 주님을 이해하라고 주신 것인데,우리는 그 이성으로 주님을 심사하려 합니다.이것이 창3의 뱀이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설명하시면 듣는 분들도 금방 의미를 이해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도둑질’, ‘이간질’, ‘생떼질’처럼 ‘...질’에는 원래 주어진 것을 비뚤게 사용하는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성질’은AC.195가 경고하는 ‘이성의 오용’을 표현하는 목사님식 신조어로는 꽤 적절한 것 같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의도와 충돌하지 않도록, ‘이성 자체’가 아니라 ‘이성의 월권 행위’를 가리킨다는 설명을 한 번 덧붙이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창3:1)
AC.195
태고의 사람들은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짐승과 새에 비유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명명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말하는 관습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에도 남아 있었고,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보존되었습니다. 사람 안의 감각 파트를 그들은 ‘뱀’(serpents)이라고 했는데, 이는 뱀이 땅에 바짝 붙어 살아가듯이, 감각적인 것들이 육체에 가장 가까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또한 감각의 증거에 근거,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 것들, 곧 이성질(理性질)하는 것들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했고, 그러한 이성질 하는 자들 자신을 ‘뱀’(serpents)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 곧 보이는 것들, 즉 땅의 것, 몸의 것, 세상의 것,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많이 이성질을 하기 때문에,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한 것입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did not compare all things in man to beasts and birds, but so denominated them; and this their customary manner of speaking remained even in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nd was preserved among the prophets. The sensuous things in man they called “serpents,” because as serpents live close to the earth, so sensuous things are those next the body. Hence also reasonings concerning the mysteries of faith,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were called by them the “poison of a serpent,” and the reasoners themselves “serpents”; and because such persons reason much from sensuous, that is, from visible things (such as are things terrestrial, corporeal, mundane, and natural), it is said that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 주님 주신 이성(理性, reason)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걸 저는 앞으로 ‘이성질’이라 하겠습니다. 도둑질, 이간질처럼 말입니다. 우리말 표현이 없어 제가 만들었습니다.
[2]이와 같이 시편은 추론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자들, 곧 이성질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하기를And so in David, speaking of those who seduce man by reasonings: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시140:3)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Ps. 140:3).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주1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시58:3-5) They go astray from the womb, speaking a lie. Their poison is like the poison of a serpent, like the deaf poisonous asp that stoppeth her ear, that she may not hear the voice of the mutterers, of a wise one that charmeth charms [sociantis sodalitia]1 (Ps. 58:3–5).
여기서 지혜로운 자의 말이나 지혜의 음성조차도 들으려 하지 않는 그러한 이성질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합니다. 이로부터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뱀은 귀를 막는다’(The serpent stoppeth the ear)는 말이 속담이 되었습니다. 아모스서에는Reasonings that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 men will not even hear what a wise one says, or the voice of the wise, are here called the “poison of a serpent.” Hence it became a proverb among the ancients, that “The serpent stoppeth the ear.” In Amos: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암5:19, 20) As if a man came into a house, and leaned his hand on the wall, and a serpent bit him. Shall not the day of Jehovah be darkness and not light? even thick darkness, and no brightness in it (Amos 5:19–20)?
여기서 ‘벽에 손을 댄다’(hand on the wall)는 것은 자기에게서 나온 힘과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신뢰를 뜻하며, 거기서 여기 묘사된 눈멀음(blindness)이 나옵니다. The “hand on the wall” means self-derived power, and trust in sensuous things, whence comes the blindness which is here described.
[3] 예레미야서에서는 In Jeremiah: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렘46:22-24) The voice of Egypt shall go like a serpent, for they shall go in strength, and shall come to her with axes as hewers of wood. They shall cut down her forest, saith Jehovah, because it will not be searched; for they are multiplied more than the locust, and are innumerable. The daughter of Egypt is put to shame; she shall be delivered into the hand of the people of the north (Jer. 46:22–24).
여기서 ‘애굽’(Egypt)은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로부터 신적인 것들에 대해 이성질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추론들을 ‘뱀의 소리’(voice of a serpent)라 하며, 그로 인해 생기는 눈멀음을 ‘북방 백성’(people of the north)이라 합니다. 욥기에서는“Egypt” denotes reasoning about Divine things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Such reasonings are called the “voice of a serpent”; and the blindness thereby occasioned, the “people of the north.” In Job: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욥20:16, 17) 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 the viper’s tongue shall slay him. he shall not see the brooks, the flowing rivers of honey and butter (Job 20:16–17).
‘꿀과 버터의 강들’(Rivers of honey and butter)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며, 추론, 즉 이성질만 하는 자들은 이것들을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추론들을 ‘독사의 독’(poison of the asp), ‘살모사의 혀’(viper’s tongue)라 합니다. 뱀에 관해서는 아래 14절과 15절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Rivers of honey and butter” are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cannot be seen by mere reasoners; reasonings are called the “poison of the asp” and the “viper’s tongue.” See more respecting the serpent below, at verses 14 and 15.
해설
이 단락은 ‘뱀’이라는 상징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에 실제로 사용되던 언어 체계였음을 밝힙니다. 태고의 사람들은 인간 안의 기능들을 짐승이나 새에 ‘비교, 비유’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곧바로 그렇게 ‘불렀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의 언어가 표상적 사고 그 자체였음을 뜻하며, 자연과 인간의 내적 상태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체계로 인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감각적인 것을 ‘뱀’이라 부른 이유는 매우 질서 정연합니다. 뱀이 땅에 가장 가까이 사는 존재이듯이, 감각은 인간 안에서 육체와 가장 가까운 층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감각은 본래 악한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차원의 기능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감각이 상위 질서를 대신하여 신앙의 판단 기준이 될 때, 그것은 곧 ‘독’이 됩니다. 그래서 감각의 증거에 근거한 신앙의 추론을 ‘뱀의 독’이라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추론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디로부터 추론하는가’입니다. 감각적인 것, 곧 보이는 것, 물질적인 것,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할 때, 그 추론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비시키는 독이 됩니다. 이러한 추론을 하는 자들 자신이 ‘뱀’이라 불린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시편과 예언서들의 인용은, 이러한 이해가 스베덴보리의 독창적 해석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상징 언어임을 보여 줍니다. ‘뱀의 독’, ‘귀를 막는 독사’, ‘뱀의 소리’라는 표현들은 모두, 지혜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는 완고한 감각 중심의 추론을 가리킵니다. 특히 ‘뱀이 귀를 막는다’는 속담은, 감각적 추론이 자기 폐쇄성을 지닌다는 점을 매우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아모스서의 ‘벽에 손을 댄다’는 표현은 자기에게서 나온 힘과 감각에 대한 신뢰를 뜻합니다. 이는 인간이 주님의 보호가 아니라 자기 판단에 기대는 상태를 말하며, 그 결과는 빛이 아니라 어둠, 곧 영적 눈멀음입니다. 이 어둠은 외적 무지가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상태에서 오는 어둠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애굽’이 감각과 기억 지식에 근거한 신적 추론을 뜻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애굽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이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사용되는 방식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추론의 결과가 ‘북방’, 곧 빛이 없는 방향으로의 인도라는 점은, 감각 중심의 사고가 필연적으로 영적 냉기와 어둠으로 향함을 보여 줍니다.
욥기의 ‘꿀과 버터의 강들’은 영적, 천적 선과 진리를 뜻하지만, 단순한 추론자들, 곧 이성질만 하는 자들은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지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감각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추론은 다시 한번 ‘독사의 독’과 ‘살모사의 혀’로 규정됩니다.
AC.195는 결국 창3의 ‘뱀’을 악마적 존재로 단순화하지 못하게 합니다. 뱀은 인간 안에 있는 감각적 사고이며, 그것이 신앙의 주도권을 잡을 때, 가장 간교한 것이 됩니다. 이 단락은 창3:1의 배경에 깔린 인간 인식 구조 전체를 해부하듯 드러내며, 이후 이어질 ‘저주’와 ‘형벌’의 의미를 올바르게 읽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