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구원받으면끝,무슨일이있어도구원은유효한거아닌가.’ 이 말은 많은 개신교인에게 상당히 익숙합니다. ‘한번구원은영원한구원’, 혹은 영어로 ‘Oncesaved,alwayssaved’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귀중한 신앙적 확신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이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이나 매일의 성적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한번 붙드신 사람을 쉽게 버리시는 분도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내가그들에게영생을주노니영원히멸망하지아니할것이요또그들을내손에서빼앗을자가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28). 그러므로 신자가 죄를 지을 때마다 ‘오늘구원을잃었나?다시구원받아야하나?’ 하며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건강한 신앙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아주 작은 문장 하나가 덧붙을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이후에어떻게살아도구원에는아무문제가없다.’ 이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무도주님의손에서나를빼앗을수없다’와 ‘내가끝까지악을사랑하고그것을선택하며살아도천국에간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주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말이고, 후자는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구원의 확신을 주는 말씀과 함께 놀라울 정도로 많은 ‘끝까지’, ‘거하라’, ‘열매를맺으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끝까지견디는자는구원을얻으리라’고 하셨고(마24:13), ‘내안에거하라나도너희안에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5:4). 특히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주님은 이미 가지로 불리는 사람들에게 ‘내안에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도 ‘두렵고떨림으로너희구원을이루라’고 했습니다(빌2:12). 이런 말씀들은 구원이 인간의 공로로 유지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원을 어느 과거 시점에 취득한 뒤 금고에 넣어 둔 증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구원은 어떤 사람의 법적 신분만 바뀌는 사건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실제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거듭남’(regeneration)의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안에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을 선택합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사람의 사랑 자체가 점차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핵심을 ‘내이름이구원자명단에올라갔는가?’로 생각하기보다 ‘나는주님께서나를거듭나게하시는일을받아들이고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구원을 취소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치 어떤 날 인간이 큰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네구원은오늘부로취소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없애고 강제로 선하게 만드신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도, 선도, 천국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님을 향할 수도 있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도 있으며, 선을 반복하여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자신의 사랑으로 만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한번구원받았으니끝’이라는 표현에는 뜻밖의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은나를끝까지붙드신다’는 신뢰라면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러므로이제내가어떤사람이되어도상관없다’는 안전보장이 된다면 ‘프로프리움’(proprium)이 신앙의 언어를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나는이미구원받은사람’이라는 자기 규정이 현재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품고 살아도, 거짓을 일삼아도, 탐욕을 사랑해도, 다른 사람을 짓밟아도 ‘그래도나는30년전에예수님을영접했고구원받았다’고 한다면 구원의 확신이 오히려 회개를 막는 기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큰 죄를 한 번 지으면 구원을 잃는 것일까요? 이것 역시 아닙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 번의 범죄와 그 사람의 ‘지배적사랑’(rulinglove)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붙잡히신 결정적인 순간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가 그의 전 존재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통곡했고 다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다윗의 경우처럼 성경에는 심각한 악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번넘어졌는가?’만이 아니라 그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며 자신의 삶으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것을 죄로 깨닫고 주님께 돌아섰는가입니다.
그래서 ‘구원을잃는다’는 표현 자체도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지갑에 넣어 둔 구원증을 실수로 떨어뜨리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본질적인 질문은 ‘나는구원을가지고있는가,잃어버렸는가?’보다 ‘나는지금어느방향으로내사랑을형성하고있는가?’입니다. 천국은 외적으로 배정되는 장소이기 전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질서이며, 지옥 역시 외부에서 억지로 던져지는 형벌의 장소이기 전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삶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결국 사후에 드러나는 것은 과거 어느 날 내가 받은 자격증이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통하여 내가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형성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확신’은 없어지는 것일까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확신의 근거가 바뀝니다. ‘나는그날영접기도를했으므로무슨일을해도안전하다’가 아니라 ‘주님께서는나를포기하지않으시며오늘도나를악에서건져선으로이끄신다.그러므로나는그분을신뢰하며오늘도그인도를따르겠다’가 됩니다. 전자의 확신은 과거의 사건을 붙들지만, 후자의 확신은 살아 계신 주님을 붙듭니다.
여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끝까지 붙드시지만 인간을 억지로 붙잡아 두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에게 주신 자유 역시 거두어 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구원은 ‘주님이나를사랑하시느냐,사랑하지않으시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구원을 원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며 그분이 나를 변화시키시도록 허용하느냐입니다. 이것이 자유와 섭리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이 때문에 ‘끝까지견디는것’도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나는죽을때까지신앙을잘지켰으므로구원받을자격이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남 전체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돌이나 기계처럼 구원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선과 진리에 응답하도록 하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지만, 그 싸움의 능력과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한번구원받으면끝,무슨일이있어도구원은유효한거아닌가?’라는 질문에는 ‘주님의사랑과구원의의지는끝까지변하지않습니다.그러나그것이내가이후어떤악을사랑하며살아도상관없다는보증을뜻하지는않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취소하려고 인간의 실수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인간을 구원하려 하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그분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므로, 인간이 일생 동안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실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구원은아직유효한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오늘도나를구원하고계실때나는그분의손길을받아들이고있는가?’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한번발급받으면어떤삶을살아도효력이유지되는자격증이아니라,끝까지우리를붙드시는주님을자유롭게받아들이며실제로천국에적합한사람으로거듭나가는삶입니다.’
그리고 ‘한번구원은영원한구원’이라는 말을 꼭 살려서 표현한다면 저는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한번구원하신주님이변하시는것이아니라,그주님의구원을끝까지받아들이는것이우리의거듭남입니다.’
이 말에는 분명 복음의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요한복음도 ‘영접하는자곧그이름을믿는자들에게는하나님의자녀가되는권세를주셨으니’(요1:12)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영접하는것’ 자체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영접’의 의미를 어느 순간 드린 기도나 입술의 고백 하나로 축소하고, 그때부터 자신의 영원한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이해할 때 생깁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훨씬 더 깊고 삶 전체에 걸친 일입니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흔히 ‘예수님을마음속에영접하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주예수님, 저는죄인입니다. 예수님을나의구주로영접합니다’라고 기도했다면 그 날짜를 자신의 구원받은 날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런 기도는 매우 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돌아서서 주님을 향하기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특정한 형식의 ‘영접기도’를 한 번 했다는 사실 자체를 영원한 구원의 보증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영접기도는 주님을 향한 삶의 ‘시작’이 될 수 있지만, 그 기도 자체가 거듭남(regeneration)의 전 과정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나더러주여주여하는자마다다천국에들어갈것이아니요다만하늘에계신내아버지의뜻대로행하는자라야들어가리라’(마7:21). 여기에서 주님은 입술로 주님을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구별하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까지 행했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알고 주님의 이름으로 종교적인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문제 삼으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구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장부에서 죄인의 신분을 의인의 신분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외적 법적 선언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영접한다’는 말도 결국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사랑과 생각, 행동을 새롭게 하시도록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유명한 말씀도 있습니다. ‘볼지어다내가문밖에서서두드리노니누구든지내음성을듣고문을열면내가그에게로들어가그와더불어먹고그는나와더불어먹으리라’(계3:20). 이 말씀도 흔히 영접기도의 근거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원래 문맥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은 예수를 전혀 모르는 불신자가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미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문 밖에 주님께서 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나는이미예수님을영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문을 두드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입술로는 주님을 영접했지만 삶의 어떤 방들은 여전히 열어 드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믿습니다. 그러나돈문제는제가원하는대로하겠습니다. 주님은사랑합니다. 그러나저사람만은미워할권리가있습니다. 성경은믿습니다. 그러나내욕망을건드리는말씀은따르고싶지않습니다.’ 이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영접했다는 과거의 고백과 현재 내가 실제로 주님께 내어 드리고 있는 삶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생깁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아주 미묘한 형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30년전에예수님을영접했다. 그러므로나는구원받았다.’ 처음에는 주님을 의지하는 신앙고백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소유한 ‘구원자격증’처럼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 악을 붙들고 있는지,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심지어 삶이 주님의 말씀과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도 ‘그래도나는구원받은사람이야’라는 확신이 자기 성찰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향했던 믿음이 역설적으로 자기 확신을 지키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러므로행위를많이해야구원받는다’는 말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행을 쌓아 천국 입장권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할 일은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 안에서 악을 죄로 알고 물리치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지만, 참된 신앙 안에서는 그 힘과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냐행위냐’의 단순한 양자택일보다 ‘주님에게서받은믿음이실제삶에서어떤사랑과행위가되었는가’를 묻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야고보가 ‘행함이없는믿음은그자체가죽은것이라’(약2:17)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위가 믿음에 추가되어 구원의 점수를 높여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삶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는 것은 사과를 달아서 사과나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생명이 나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참으로 받아들인 믿음은 체어리티(charity), 곧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한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영접했으니나는구원받은거아닌가?’라는 질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과거형 ‘영접했으니’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적 신앙은 ‘언젠가주님을영접했는가?’뿐 아니라 ‘오늘도주님을영접하고있는가?’를 묻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 미움을 보여 주실 때 그것을 내려놓는 것, 내 거짓을 드러내실 때 인정하는 것, 내 욕심과 교만을 말씀으로 비추실 때 돌이키는 것, 그리고 이웃에게 해야 할 선을 보여 주실 때 행하는 것, 이것 역시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접은 한 번의 사건인 동시에 일생에 걸친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의 확신을 없애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가충분히거듭났나? 선행을충분히했나? 이정도면천국에갈수있나?’ 하며 끊임없이 자기 상태를 측정하는 것도 결국 시선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머무는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소망은 내가 몇 점짜리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에 있지 않고 나를 끝까지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그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서나를구원하실테니나는변하지않아도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나를변화시키시는일을나는거부하지않겠다’는 신뢰를 포함합니다.
결국 질문은 ‘나는언제영접기도를했는가?’에서 한 걸음 더 깊어져야 합니다. ‘내가영접했다고고백한그주님께서지금내삶을실제로다스리고계시는가? 나는주님께서악이라고하시는것을악으로여기고있는가? 주님께서사랑하시는것을나도사랑하는사람이되어가고있는가?’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과거 어느 날 받은 증명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살아 있는 결합이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영접했으니나는구원받은거아닌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영접한것은구원의길에들어서는너무나귀한일입니다. 그러나주님을영접한다는것은한번입술로그분을받아들였다고고백하는데서끝나는것이아니라, 그분의선과진리를내삶안으로계속받아들이며그분이나를실제로변화시키시도록하는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참된영접은한번의기도로주님을내구원자로선언하는것에서끝나지않고, 일생의거듭남을통하여주님이내사랑과삶의주인이되시도록받아들이는것입니다.’
그리고 더 짧게 말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구원은‘나는예수님을영접했다’는과거의기억보다,내가영접한주님께서지금나를어떤사람으로만들어가고계시는가의문제입니다.’
※오늘(2026/10/25)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소리있어’, 찬132, ‘주의영광빛나니’입니다.
오늘은창5절별 주석 그 세 번째, 15절로 20절, AC글 번호로는 510번에서 515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