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60-468 심화

‘창5의 이름들은 왜 사람이 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하는가?’

 

창5를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족보입니다. ‘아담은 셋을 낳고, 셋은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는 게난을 낳고...’ 하는 식으로 이름과 나이, 출생과 죽음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읽을 때 이 이름들을 사람의 이름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AC.46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이 장의 이름들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들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교리들 또는 교회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창5의 문자적 형태를 부정한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말씀의 속뜻으로는 이 족보가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일까요?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본문이 족보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과 ‘속뜻으로 그 이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AC.460-468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이름들을 통하여 태고교회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했는지를 읽습니다. 따라서 AC.461의 ‘사람’은 천적이었던 태고교회 그 자체를, AC.462의 ‘셋’은 그보다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를, AC.463의 ‘에노스’에서 ‘므두셀라’까지는 세 번째에서 여덟 번째 교회를, AC.465의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를, AC.466의 ‘노아’는 열 번째 교회이자 새로운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창5의 족보 전체가 속뜻으로는 ‘교회의 계승과 상태 변화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와 창5를 읽을 때 생기는 중요한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4에서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등장한 뒤 마지막에 아담과 하와에게 셋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창5의 속뜻에서는 셋이 태고교회에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교회’라고 합니다. 만일 창4와 창5를 하나의 평면적인 연대기적 족보로만 읽으면서 동시에 각 이름을 교회의 순번으로 대응시키려 한다면 이 둘은 쉽게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읽는 속뜻의 층위에서는 창4와 창5가 각각 교회의 서로 다른 영적 역사를 펼쳐 보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어떤 이름이 먼저 나오고 나중에 나온다는 문자적 서술 순서를 그대로 창5의 ‘첫 번째 교회, 두 번째 교회...’라는 영적 계승 순서에 옮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AC.468은 이 문제에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앞 장, 곧 창4에서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이미 나타났으며, 그로부터 창5의 이름들 역시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것들’, 여기서는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 이름으로 표현되는 영적 성질과 상태를 담을 수 있다는 상응의 원리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에녹’, ‘라멕’, ‘노아’라는 이름을 만날 때 속뜻이 묻는 첫 질문은 ‘이 사람에게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이 이름을 통하여 말씀은 어떤 교회 상태를 나타내는가?’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그러므로 아담, 셋, 에녹, 노아라는 역사적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AC.460-468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속뜻으로는 이 이름들이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성 자체에 관한 질문과 속뜻으로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을 구별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우리가 AC를 따라갈 때 우선 붙들어야 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문자적 본문은 족보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속뜻은 교회와 교리의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창5의 놀라울 정도로 반복적인 형식도 새롭게 보입니다. 이름이 나오고, 나이가 나오고, 낳았다고 하고, 다시 살았다고 하고, 마침내 죽었다고 하는 동일한 구조가 계속됩니다. 문자적으로는 족보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에서 시작된 어떤 영적 상태가 다음 교회로 전달되고 변화하며 마침내 쇠퇴해 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각 이름과 수, 그리고 ‘낳음’과 ‘죽음’의 표현은 이후 본문 해설에서 각각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라는 관점에서 풀리게 됩니다.

 

결국 창5의 이름들을 교회와 교리로 읽는 것은 문자적 본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담긴 더 깊은 말씀의 흐름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표면에는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낳는 족보가 있고, 그 안에는 한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의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긴 흐름의 끝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노아’라는 리메인스가 남습니다. 이것이 창5의 족보를 단순한 고대인의 명단이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이어 가시고 쇠퇴 가운데서도 어떻게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게 하는 열쇠입니다. (AC.460-468 심화)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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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상당히 자극적인 대비로 시작합니다. 같은 남자가 한국에서는 늘 부족한 남자 친구가 되었는데 일본에서는 작은 행동에도 고마움을 받는 남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픈 남자 친구에게 한국인 여자 친구는 ‘괜찮아? 근데 오늘 내 친구 생일 모임은 어떡하지?’라고 묻고, 일본인 여자 친구는 죽과 음료를 들고 찾아옵니다. 영상은 이 두 장면을 출발점으로 삼아 ‘눈치 주던 한국 여자’와 ‘감동 주던 일본 여자’를 대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먼저 한 가지를 걷어내야 합니다. 이것은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는 본질적으로 이렇다’는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영상이 제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두 여성과 한 남자의 사례이며, 국적이나 민족 전체의 영적 성향을 이것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사례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을 받는 방식과 사랑을 주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영상 속 첫 번째 관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랑에 끊임없이 ‘정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100일에는 꽃다발이 아니라 목걸이를 알아서 준비해야 했고, 친구 모임에 가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상대의 말이 아니라 표정과 분위기로 알아내야 했으며, 조용하면 ‘어렵다’고 하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오버한다’고 합니다. 남자가 행동을 고쳐도 그 변화 자체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고 새로운 부족함이 다시 발견됩니다. 영상은 이를 매우 정확하게 ‘연애를 하는 건지 매일 시험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반면 두 번째 관계에서는 요구가 비교적 명확하고, 상대가 베푼 작은 행동을 알아보고 ‘고맙다’고 표현하며, 잘못했을 때도 무엇이 서운했고 다음에는 어떻게 해주었으면 하는지를 직접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상대에게서 무엇을 받아내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선을 원하고 그에게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천국적 사랑과 자기 사랑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끊임없이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계산하지만, 천국적 사랑은 ‘나는 상대에게 어떤 선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의 연애와 결혼에서 사랑받고 싶은 욕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관계의 중심이 될 때입니다. 그러면 상대의 행동은 어느 순간부터 모두 사랑을 측정하는 시험지가 됩니다.

 

영상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이 바로 ‘사랑을 확인받으려는 사랑’입니다. 은정 씨 역시 성우 씨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영상은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좋아하는 만큼 바라는 것이 많았고, 그 바람을 직접 말하기보다 상대가 알아서 맞혀주기를 원했습니다. 맞히면 당연한 것이 되고 틀리면 서운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연애에서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proprium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이것쯤은 알아야지’, ‘나를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다른 남자 친구들은 한다는데 왜 당신은 못 해?’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 안에 자기중심성이 섞여 있습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상대의 행동을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라는 척도로 계속 환산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에서 반복되는 ‘비교’는 영적으로도 주목할 만합니다. ‘친구 남자 친구는 이것을 해줬다’, ‘다른 남자들은 다 한다’, ‘언니 남자 친구는 이것도 보냈다’는 말입니다. 비교가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고유한 한 사람이 아니라 타인과 경쟁하여 일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은 ‘당신이어서’ 기뻐하는 것인데, 비교는 ‘다른 사람보다 당신이 얼마나 잘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비교가 지속되면 선물도 선물이 아니게 되고, 배려도 배려가 아니게 되며, 사랑에서 자발적으로 하던 행동조차 점차 의무가 됩니다.

 

반대로 두 번째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거창한 희생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김치 먹고 싶다고 하셔서요’, ‘오늘 우산 씌워줘서 고마워요’, ‘예약까지 알아봐줘서 고마워요’ 같은 아주 작은 반응입니다. 상대가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하고, 우산을 씌워주느라 젖은 어깨를 알아보고, 맛없는 식당에서도 결과보다 예약하고 준비한 마음을 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성우 씨가 일본인 여자 친구와의 차이를 ‘그 사람은 내가 한 걸 알아봐줘’라고 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알아봐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깊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의 선을 가장 쉽게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고마웠던 출퇴근길 배려가 몇 년 뒤에는 당연한 일이 되고, 처음에는 감사했던 식사 준비와 설거지와 육아와 경제적 책임이 시간이 흐르면 ‘원래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이 됩니다. 영상도 정확히 이것을 지적합니다. 월급이 들어오는 것,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 명절에 운전하는 것 등이 어느 순간 모두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감사는 단순한 인간관계 기술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받은 선을 ‘내가 당연히 받을 몫’으로 보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성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일입니다. 배우자가 밥을 해주는 것도, 돈을 벌어오는 것도, 차로 데려다주는 것도, 아플 때 돌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서 자동으로 발생하는 기능이 아닙니다. 한 인격이 나를 위해 시간과 힘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상대는 ‘내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람’에서 ‘나에게 선을 베풀고 있는 한 사람’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마워’라는 짧은 말은 관계 안에서 proprium의 지배를 약하게 만드는 매우 작은 체어리티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는 이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남자가 처음 만든 김치찌개가 맛이 없었는데 유이 씨는 한 그릇을 다 먹고 ‘한국 사람이 해준 김치찌개 처음 먹어 봐요. 다음에 또 해 줘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남자는 유튜브를 보며 요리를 연습하고 나중에는 된장찌개와 제육볶음까지 만들게 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남자를 움직이는 여자 화법’ 정도로 읽으면 너무 얕습니다. 사랑이 상대 안의 선을 발견하고 인정해 줄 때 그 선이 더욱 자라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는 비난 속에서도 변할 수 있지만, 자신 안의 작은 선을 누군가 알아봐줄 때 훨씬 자유롭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유이 씨처럼 무조건 칭찬하고 참고 맞춰주는 것이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상에는 오히려 매우 중요한 반례가 있습니다. 성우 씨가 약속을 잊고 술자리에 가서 한 시간을 기다리게 했을 때 유이 씨는 ‘괜찮아요’라고 덮어버리지 않습니다. ‘어제는 조금 서운했어요. 다음에 늦으면 먼저 연락해 줘요’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또 일본 전철에서 전화 통화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사실도 알려줍니다. 다만 ‘틀린 것을 알려주되 창피하지 않게’ 알려줍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사랑은 상대의 잘못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진리를 사랑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핵심은 ‘남자는 칭찬해야 말을 듣는다’도 아니고 ‘일본 여자는 한국 여자보다 남자를 잘 다룬다’도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선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부족한 것만 찾고 있는가?’입니다. 상대에게 열 가지 선이 있고 한 가지 부족함이 있을 때 proprium은 이상하게도 그 한 가지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이 채워지면 잠시 감사하는 대신 열한 번째 부족함을 찾아냅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보다 계속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남녀 어느 한쪽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편도 아내의 수많은 수고를 ‘원래 아내가 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아내도 남편의 수고를 ‘원래 남편이 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녀의 효도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고, 자녀도 부모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교인의 섬김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으며 교인도 목회자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당연함’은 감사가 사라지는 자리이며, 감사가 사라지면 관계는 조금씩 권리와 의무의 거래로 변하기 쉽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상대의 반응에 따라 성우 씨 자신이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서울에서는 ‘안 하면 서운하다고 할까 봐’ 행동했지만 도쿄에서는 ‘하고 싶어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데려다주고 싶고, 맛있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요리하고 싶어졌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행동은 비슷합니다. 데려다주고, 선물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기념일을 챙깁니다. 그러나 내적 동기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는 두려움과 의무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자유와 기쁨에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만이 아니라 ‘어떤 사랑에서 그것을 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영상은 결혼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합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결혼적 결합은 상대를 이용하여 나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선을 기뻐하면서 점차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관계입니다. 참된 결혼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한쪽이 다른 쪽의 기대를 완벽하게 읽고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내면을 알려고 하고, 필요한 것은 정직하게 말하며, 받은 선에는 감사하고, 잘못은 사랑 안에서 바로잡으면서 두 사람 모두 조금씩 자기성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상 제목의 ‘감동 주는 일본 여자와 눈치 주는 한국 여자’라는 구도는 ‘스베덴보리의 렌즈’ 앞에서는 결국 사라져야 합니다. 국적을 떼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두 종류의 사랑입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사랑’과 ‘상대에게서 오는 작은 선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랑은 한국인 안에도, 일본인 안에도, 남자 안에도, 여자 안에도 모두 있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한 사람 안에서도 이 두 모습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배우자가 해준 작은 일을 보고 진심으로 ‘고마워’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날에는 ‘그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에는 상대의 실수를 부드럽게 알려주다가도 어떤 때에는 ‘그것도 몰라?’라며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영상은 ‘어떤 여자를 만나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을 때 훨씬 깊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비추는 마지막 지점은 주님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에게서 작은 선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습관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넘어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게 합니다. 배우자가 오늘도 수고했다는 것, 나를 기다려 주었다는 것, 아픈 나를 돌보았다는 것, 서툰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내 말을 기억해 주었다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에 들어오는 선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남자는 거창한 대접을 받고 싶은 게 아니다’라는 결론도 조금 넓혀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베푼 작은 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닿았음을 알고 싶어 합니다. ‘고마워’, ‘오늘 수고했어’, ‘당신이 해줘서 좋았어’, ‘그때 내가 힘든 걸 알아줘서 고마웠어.’ 이런 말은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의 존재와 선을 ‘내가 보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어쩌면 오래된 관계가 메말라가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싸움이 많아졌을 때보다 ‘고마운 것이 없어졌을 때’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고마운 일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해져 당연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은 거창한 곳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 곁의 사람이 해준 아주 작은 일을 다시 발견하는 데서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왜 이것밖에 못 하지?’에서 ‘이것도 해주었구나’로 시선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결국 이 영상에서 가장 오래 남겨둘 문장은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는 다르다’가 아니라 이것일 것입니다. ‘은정 씨는 사랑을 확인받으려 했고 유이 씨는 사랑을 알아봐줬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문장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놓습니다. ‘나는 지금 사랑을 확인받으려고 하는가, 아니면 내 곁에 이미 와 있는 사랑을 알아보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 사랑을 내려놓으며 서로의 선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 가는 두 사람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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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104 심화

1.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

천사들은 악령들과 어떻게 싸우나요? 직접 1:1로 마치 칼싸움하듯 싸우나요, 아니면 천사들의 아우라 범위를 악령들이 침범하지 못하는 건가요?

 

스베덴보리의 묘사를 종합하면 ‘둘 다 아니고, 훨씬 더 내적인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천사와 악령이 마치 육체를 가진 병사들처럼 칼을 들고 1:1로 싸우는 것이 기본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천사의 아우라가 강해서 악령이 접근하지 못한다’ 정도도 아닙니다. 핵심은 ‘선과 진리의 입류(influx)를 통한 영적 전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 천사와 영들은 모두 자신들의 사랑과 사고에 따른 ‘스피어(sphere, 영역·기운)’를 발산합니다. 천사에게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의 스피어가 나오고, 악령에게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 거짓과 악의 스피어가 나옵니다. 그래서 서로 반대되는 스피어가 가까워지면 실제적인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랑과 생각이 자연계의 물리적 힘보다 훨씬 직접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사들이 악령과 싸울 때 중요한 것은 ‘천사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합니다. 악령은 그 진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진리를 말하거나 천사의 스피어가 임하면 악령이 고통을 느끼고 물러가거나 도망치는 일이 생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까이 접근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그림, 즉 ‘천사들의 아우라 범위를 악령들이 침범하기 어렵다’는 표현이 1:1 칼싸움보다는 훨씬 가깝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방어막’처럼 이해하면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천사 개인의 초능력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천사를 통해 임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의 전투를 때때로 ‘전쟁’, ‘무기’, ‘칼’, ‘방패’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영계에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들이 실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표상적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의 실체는 물리적인 근육과 철제 무기의 충돌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충돌’입니다. 성경에서 ‘칼’이 진리를,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뜻하는 것도 이 상응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영계에서 칼싸움 같은 장면이 보인다 해도 ‘천국에는 실제 무기고가 있고 천사들이 칼을 차고 출동한다’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영계론과는 상당히 멀어집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천사들은 악령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싸우지 않습니다. 영은 죽일 수도 없습니다. 천사들의 역할은 악령의 공격을 억제하고, 공격받는 사람이나 영을 보호하며, 악령이 주입하는 거짓에 맞서 진리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시험(temptation)을 겪을 때 이 구조가 선명합니다. 악령들은 인간 안의 악과 거짓, 과거의 기억과 욕망을 자극하고, 천사들은 그 반대편에서 선과 진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싸움이 ‘내 생각과 내 갈등’처럼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의 놀라운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가장 가깝습니다.

 

‘악령 → 인간 안의 악·거짓·두려움·절망을 자극 → 인간 ← 선·진리·소망을 일깨움 ← 천사 ← 주님’

 

그러나 이것조차 최종적으로는 ‘천사 대 악령’의 대등한 전쟁이 아닙니다. 천사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악령이 천사를 두려워하는 것도 천사라는 존재 자체가 무서워서라기보다 그 천사를 통하여 임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능력을 잃는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이걸 조금 전 ‘시티즌 비질란테’와 연결하면 아주 흥미로운 차이가 드러납니다. 비질란테의 방식은 ‘악인을 파괴하여 악을 제거하려는 방식’입니다. 반면 천국의 방식은 ‘악이 더 이상 다른 존재를 해치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분리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천사는 악령을 증오해서 두들겨 패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질서가 임하면 악이 그 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라’라는 표현을 조금 다듬는다면 ‘천사의 스피어(sphere)’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천사의 스피어’조차 천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천사를 통하여 흘러드는 주님의 선과 진리의 스피어’입니다.

 

 

 

SY.104, 씨네마톡, ‘시티즌 비질란테’(Citizen Vigilante, 2026) - 정의가 복수가 되는 순간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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