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이것들을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birds of the heavens)라고 합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해설

 

다섯 번째 상태는 창1다섯째 날’, 즉 ‘물고기와 새들이 등장하는 날’의 영적 의미입니다.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1:20-23)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전 단계(AC.10)에서는 사랑이 감동되고, 신앙의 빛이 비추기 시작하며, 두 광명체(해와 달)가 속 사람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더니 여기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여기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는 진리를 믿기 때문에 말하고,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하며, 진리에 의해 생각하고, 진리 자체가 사고의 원천이 되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이전 단계에서는 경건한 말과 선행이 주로 시련이라든지 감정적 경건함, 혹은 억지춘향식 신앙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진리 자체가 내부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

 

여기서 말하는 ‘확증(confirm)은 다음을 뜻합니다. 곧 진리를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마음에 새겨 삶의 원칙으로 삼아 선과 진리를 스스로 지지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인격 안에 뿌리내리는 것 말이지요. 그러니까 ‘신앙의 확신이 내부에서 형성되는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내적 인간, 곧 속 사람의 확증’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이 단계에서 선행과 말, 행동은 이전보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크게 다릅니다. 첫째, 이제 선행은 ‘자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에서 나온 것이며, 둘째, 그래서 그 선행은 ‘살아 있는 선(living good)이 됩니다. 셋째, ‘생기 있는 것(animated)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실제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즉, 이 단계의 선행은 단순한 도덕적 선행이 아니라 ‘영적 생명(spiritual life)이 깃든’ 선행입니다.

 

말씀에서는 이것들을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이라고 부릅니다

 

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에 나오는 수중 생물, 곧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다음을 상징합니다. 바다의 물고기는 감각적이고 지식적인 진리들, 외적 진리, 지식 기반의 이해 및 자연적 판단력, 그리고 말씀에 대한 외적 지식 등을 말이지요. 그런가 하면, 하늘의 새는 이해력에서 솟아오르는 생각들, 내적 사유, 영적 이해 및 고양된 사상, 그리고 진리에 대한 직관적 깨달음 등, 그러니까, 바다의 물고기는 이해의 ‘낮은 단계’의 진리를, 하늘의 새는 이해의 ‘높은 단계’의 진리를 각각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이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이 ‘두 영역의 진리들이 모두 살아 움직이는 상태’가 되는 단계입니다.

 

요약

 

다섯 번째 상태는, 진리(신앙)로부터 말하고 생각하며, 그로 인해 선과 진리를 확신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때 사람 안에서 생겨나는 진리와 선은 생명을 갖게 되며, 말씀에서는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로 상징됩니다.

 

신학적 정리

 

속 사람의 신앙이 실제로 사고와 말에 작용하기 시작할 때가 바로 다섯 번째 단계입니다. 지식의 진리(물고기)와 직관적, 영적 진리(새)가 모두 살아나 움직입니다. 이 단계에서 비로소 사람의 선행은 ‘생기 있는 선’(living good) 이 됩니다. 앞선 단계에서는 주로 감정적 경건이나 시련 속에서 행동했지만, 이제는 진리가 사람을 움직입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내적 확증’(confirmation) 의 단계이며, 이것이 없으면 여섯 번째 상태(선의 성숙)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AC.10, 창1, '네 번째 상태' (AC.6-15)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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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스베덴보리는 왜 복음서 주석은 하지 않았나요? 주님의 육성이 담긴 복음서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분들조차 평생 품고 있는 핵심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선택’이며, 그의 전체 신학 구조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공백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복음서 주석을 ‘안 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한 것’

 

복음서에 대한 직접 주석은 없지만, 복음서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참 그리스도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등에서 전면적으로 풀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방식은 ‘본문을 따라가는 주석 방식(exegesis)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 내재된 구조적, 보편적 진리를 다시 전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신적 진리의 충만한 계시’로서, ‘그 동일한 내적 의미가 구원론, 기독론, 재림론, 연합론 전체에 이미 녹아 있도록 하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굳이 복음서 본문을 한 절씩 풀지 않아도 그 내적 의미 전체가 그의 저작들 전체 속에 재구성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해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복음서 자체를 ‘신학 전체’로 펼쳐 놓은 것’입니다.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직접적 이유들

 

첫째, 복음서는 ‘말씀’(Word)의 범주가 창세기, 출애굽기, 선지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두 범주로 나누는데요, 하나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 heavenly sense, arcana, 속뜻)를 가진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오경과 선지서들, 그리고 시편 일부 및 계시록을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구절 하나하나가 상징과 표상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실제 기록을 기반으로 하나, 그 자체가 상징계는 아닌 ‘복음서의 문자’입니다. 복음서 역시 ‘말씀’이지만, 그러나 다른 종류의 말씀입니다. 그 안의 상징성은 예수님의 생애와 직접 결합되어 있으며, 그래서 창, 출 같은 방식의 상징 주석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즉, 복음서는 ‘예수님의 실제 행적’이자 ‘내적 의미의 직접적 실현’이기 때문에 ‘상징 해석’을 위해 존재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이후 존재하던 성막과 제사가 주님 오신 이후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성막과 제사는 주님을 표상하던 것들인데 정작 그 실체인 주님이 오시자 더는 그런 도우미들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창세기, 출애굽기처럼 절대적 상징 주석을 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둘째, 복음서는 예수님의 ‘육신으로의 신성화 과정’(glorification)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의 성화 과정(신성화, glorification)’이 복음서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곧바로 ‘내적 의미 자체’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험’, ‘기적들’, ‘설교’, ‘십자가’ 및 ‘부활’ 등, 이것들은 ‘상징의 외피가 아니라 내적 의미 그 자체의 역사적 구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건 주석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애는 문자, 상징을 넘어 바로 ‘신적 실체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모든 문자와 상징, 표상, 상응이 가리키는 본체, 실체이신 분이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이미 ‘보충 주석’ 형태로 곳곳에서 해설

 

주석서는 아니지만 복음서 본문을 해설한 문단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시험받으심에 대해서는 지옥 전체와의 전투로(AC, TCR 다수),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천국적 삶과 진리의 질서로, 기적은 선과 진리의 표상으로, 십자가는 마지막 시험과 완전한 연합, 부활은 인간 구원의 원형 등, 즉, 절대적으로 해설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문 주석의 형태가 아닌, 신학 체계 속의 해설’로 그의 저작들 여기저기에서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재림기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처럼 정의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는 일’과 특히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통해서’라고 말입니다. 왜 이 두 곳일까요? 왜 복음서는 아닐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미 복음서 속에서 ‘자신을 직접 계시하심’

 

복음서는 그 문자 의미 자체가 ‘신성의 직접 계시’이므로 ‘상징을 벗기기 위한 해설(exegesis)이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는 상징과 표상으로 감추어져 있어 재림 시기에야 드러낼 수 있는 구조

 

창세기의 아담, 노아, 아브라함, 출애굽기의 애굽, 홍해, 시내산 등 이 모든 것이 인간 영적 발전의 ‘내적 단계’이므로, 재림 때 완전히 드러내야 했습니다. 즉, 창세기, 출애굽기, 계시록은 재림을 위해 봉인된 책들이지만, ‘복음서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핵심’이라는, 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서 주석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스베덴보리는 복음서의 핵심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의 삶, ‘사랑, 자비, 용서, 겸손’은 천국의 질서, ‘십자가’는 인간 구원의 전체 과정, ‘부활’은 삶의 변형, 변모 등, 따라서 그는 말합니다. “사람이 복음서를 ‘해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복음서는 지성의 책이 아니라, 생명의 책이다.” 그는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는 대신, 그 복음서의 내적 의미를 ‘삶의 길(way of life)로서 제시했습니다.

 

요약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복음서는 상징적 기록이 아니라, 신적 인간의 직접 계시이기 때문에, 둘째, 내적 의미는 이미 전체 신학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셋째, 주석의 대상은 ‘봉인된 말씀’인 창, 출, 계인 반면, 복음서는 그 자체로 개방된 말씀, 넷째, 복음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 목적이기 때문에, 다섯째, 그의 사명 자체가 복음서 주석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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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타오르게 되며, 말씀에서는 이 둘을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부릅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해설

 

이 글 AC.10은 거듭남의 ‘네 번째 단계’, 즉 창1 ‘넷째 날’인 해, 달, 별을 설명하는 핵심 본문입니다.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이전 단계(AC.9)에서 나타난 선행은 대체로 ‘나로부터’ 나온 줄 알고 한 ‘생기 없는 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 대한 사랑(선)이 마음에서 실제로 불붙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한 체어리티가 진심으로 움직이며, 선한 행동을 ‘해야 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게 됩니다. 즉, ‘사랑이 생겨난 것’입니다.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

 

여기서 신앙이란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진리 속에서 주님을 보는 마음, 진리가 나를 안내하는 빛이 되는 체험, 그리고 진리가 영혼의 눈을 밝히는 실제의 광명을 뜻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신앙의 내적 조명’을 체험합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스베덴보리는 매우 신중하게 말합니다. 이전 단계(회개의 단계)에서 나타난 경건한 말, 선한 행동도 분명 귀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진정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지

 

즉, 어려움, 슬픔, 절박함, 마음의 공허, 외적 곤궁 때문에 경건해지고 착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발적 선’이 아니라 ‘내적 압박 속에서의 선’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겉 사람의 선’이라 부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아주 명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어떤 선을 그 근원을 ‘주님’으로 알고 행한 것이면 그 선은 ‘살아 있는 선’이지만, 그렇지 않고 그 근원을 ‘자기 자신’으로 알고 행한 것이면 그 선은 ‘생기 없는 선’이라고 말입니다. 전 단계에서의 선은 후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타오르게 되며

 

이것은 거듭남 전 과정의 중대 전환점(turning point)입니다. 이전까지는 리메인스(유아기 기억), 회개, 시련, 약한 선행 같은 준비 단계였다면, 이제는 ‘속 사람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실제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부터 선과 진리는 ‘나한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됩니다.

 

말씀에서는 이 둘을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부릅니다

 

1:14-19의 ‘해와 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해(sun)는 사랑(선, 체어리티), 달(moon)은 신앙(진리), 그리고 별들은 진리의 세부 항목들입니다. 빛을 내는 근원은 ‘사랑’(해)입니다. ‘신앙’(달)은 사랑의 빛을 반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해가 먼저, 즉 사랑이 우선하는 것이죠. 달은 해의 빛을 받아야만 빛나듯 신앙도 사랑으로라야 참 신앙인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사랑과 신앙이 조화를 이루는 내적 광명’을 경험합니다.

 

요약

 

네 번째 상태는 속 사람 안에서 사랑(체어리티)과 신앙(진리)이 실제로 타오르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전까지의 선행과 경건에는 생기가 없었으나,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빛으로 인해 참된 내적 선과 신앙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두 광명체’, 곧 해(사랑)와 달(신앙)입니다.

 

신학적 정리

 

참된 선은 사랑에서 나오며, 사랑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신앙은 사랑의 빛을 받아 비취는 것이며, 사랑 없이 신앙은 없다. 초기의 회개와 선행은 귀하지만, 종종 고난의 압력에서 나온 것이다. 속 사람에서 사랑과 신앙이 타오를 때, 비로소 ‘해와 달’이 생긴다. 이 단계는 거듭남의 ‘본격적 시작’이며, 이후 단계인 다섯째, 여섯째 날의 기초가 된다.

 

 

 

AC.11, 창1, '다섯 번째 상태' (AC.6-15)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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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세 번째 상태' (AC.6-15)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행위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선들을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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