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5:29)

 

AC.531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comforting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는 말씀이, 왜곡되었던 것을 회복하게 하는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뒤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또한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수고(work)는 진리를 인식하는 일이 수고(labor)와 고통(distress) 없이는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the toil of the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은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라멕(Lamech), 곧 황폐화된 교회(the vastated church)의 상태가 묘사됩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는 자기 것(their own)에서 진리를 찾고 선을 행해야 할 때, 거기에는 ‘수고롭게 일하는(work and labor of the hands)이 따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인데, 거기서는 거짓과 악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신다(Jehovah cursing)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앞서 AC.245에서 보았습니다. ‘위로하다(to comfort)라는 말은 ‘아들(the son), 곧 노아와 관련되며, 이것은 새로운 거듭남(a new regeneration), 곧 고대교회라고 하는 새 교회(a new church)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 즉 ‘노아(Noah)는 쉼(rest)을 의미하고, 쉼에서 오는 위로(comfort)를 의미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에 대해 일곱째 날에 주님께서 쉬셨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AC.84-88 참조) That by “comforting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is signified doctrine, whereby what had been perverted would be restored, will also appear,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 following pages. By “work” is signified that they could not perceive what is true except with labor and distress. By the “toil of the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is signified that they could do nothing good. Thus is described “Lamech,” that is, the vastated church. There is “work and labor of the hands” when, from themselves or from their own, men must seek out what is true and do what is good. That which comes of this is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that is, nothing comes of it but what is false and evil. (But what is signified by “Jehovah cursing,” may be seen above, n. 245.) To “comfort” has reference to the “son,” or Noah, whereby is signified a new regeneration, thus a new church, which is the ancient church. By this church, or “Noah,” is therefore likewise signified rest, and comfort that comes from rest, just as it was sai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it was the seventh day, in which the Lord rested. (See n. 84–88.)

 

 

해설

 

이 글은 라멕으로 대표되는 황폐화된 교회의 상태와, 노아로 대표되는 새 교회의 도래를 가장 구체적으로 대비시키는 설명입니다. 앞서 ‘위로’라는 표현이 단순한 감정적 위안이 아니라 교리를 의미한다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그 이유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수고와 고통 속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고(work)는 단순한 노력이나 성실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가 더 이상 내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외적 사고와 추론을 통해 겨우 접근해야 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진리가 즉각적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제는 그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안다는 일 자체가 짐이 되고, 마음의 고통을 동반하게 됩니다.

 

손의 고됨(the toil of the hands)이라는 표현은 선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알기 어려워진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불가능하다는 말은, 외적으로 선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는 쓰임새가 더 이상 내적 생명에서 나오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억지로 만들어 내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선은 오래 지속되지도 못하고, 결국 왜곡되기 쉽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스베덴보리는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땅은 인간의 자연적 마음을 뜻하고, 저주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결과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자기 지식과 자기 의지에서 진리와 선을 만들어 내려 할 때, 그 결과는 거짓과 악으로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라멕, 곧 황폐화된 교회의 실상입니다.

 

이 지점에서 ‘위로(comfort)가 등장합니다. 이 위로는 라멕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the son), 곧 노아에게서 옵니다. 이는 황폐화된 교회가 스스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남으로써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새로운 거듭남, 새로운 교회라고 부릅니다.

 

노아로 대표되는 고대교회는 퍼셉션을 회복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교리를 통해 질서를 회복합니다. 이 교리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멈추고,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교리는 억압이 아니라 위로가 됩니다. 더 이상 수고와 손의 고됨으로 버티지 않아도 되는 길을 열어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노아가 ‘(rest)과 연결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 쉼은 퍼셉션 안에서의 완전한 일치와 생명을 뜻했습니다. 고대교회에서의 쉼은 그와 같은 차원의 쉼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쉼입니다. 이것이 교리에서 오는 위로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상태를 매우 정확하게 짚어 줍니다. 우리는 라멕의 상태처럼, 자기 힘으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려 할 때 깊은 피로를 느낍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식, 곧 교리를 통해 주님의 질서 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쉼과 위로를 경험합니다. 이 쉼은 모든 문제가 사라져서 오는 쉼이 아니라, 방향이 바로잡혀서 오는 쉼입니다.

 

그래서 AC.531은 황폐화와 회복, 수고와 위로, 자기 자신과 주님의 질서를 선명하게 대비시키며, 노아 이야기 전체의 신학적 중심을 다시 한번 분명히 세워 줍니다.

 

 

 

AC.530, 창5:29, ‘이름, 교회, 교리’, 그리고 ‘리메인스’(remains)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5:29) AC.530 이 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들을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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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5:29)

 

AC.530

 

이 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들을 의미하며, 같은 말로 하면 교리들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교리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그 이름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아(Noah)는 고대교회를, 곧 태고교회로부터 남아 있던 교리를 의미합니다. 교회나 교리가 어떠한 과정을 겪는지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데, 그것은 점차 쇠퇴하여 마침내 신앙의 선과 진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며, 그때 말씀에서는 교회가 황폐화되었다(to be vastated)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남은 것들, 곧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신앙의 선과 진리가 남아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보존됩니다. 만일 이러한 신앙의 선과 진리가 이들 소수 안에라도 보존되지 않는다면, 하늘과 인류 사이의 결합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 한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이 적을수록 그가 지닌 이성과 지식에 관한 것들이 덜 밝아지는데, 이는 선과 진리의 빛이 주님한테서 리메인스로부터, 또는 리메인스를 통해 흘러들어 오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 안에 리메인스가 전혀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보다도 훨씬 더 비천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리메인스가 적을수록 그는 덜 사람이고, 리메인스가 많을수록 그는 더 사람입니다. 리메인스는 마치 하늘의 별과 같아서, 적을수록 주는 빛이 적고, 많을수록 더욱 많은 빛을 줍니다. 태고교회로부터 남아 있던 소수의 것들은 노아라 불리는 교회를 이루던 사람들 안에 있었으나, 그것들은 퍼셉션에 관한 리메인스가 아니라 완전성에 관한 리메인스였고, 또한 태고교회의 퍼셉션에서 유래한 교리에 관한 리메인스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제 전혀 다른 본성을 지닌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는데, 이 교회는 태고교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므로 고대교회라 불립니다. 이 교회가 고대교회라 불리는 이유는, 홍수 이전 시대들의 끝 무렵에 존재하였고, 홍수 이후의 첫 시기 동안에도 존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더 많은 말씀이 이어질 것입니다. By the names in this chapter, as we have said, are signified churches, or what is the same, doctrines; for the church exists and has its name from doctrine; thus by “Noah”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or the doctrine that remained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How the case is with churches or doctrines has already been stated, namely, that they decline, until there no longer remains anything of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and then the church is said in the Word to be vastated. But still remains are always preserved, or some with whom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main, although they are few; for unles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were preserved in these few, there would be no 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kind. As regards the remains that are in a man individually, the fewer they are the less can the matters of reason and knowledge that he possesses be enlightened, for the light of good and truth flows in from the remains, or through the remains, from the Lord. If there were no remains in a man he would not be a man, but much viler than a brute; and the fewer remains there are, the less is he a man, and the more remains there are, the more is he a man. Remains are like some heavenly star, which, the smaller it is the less light it gives, and the larger, the more light. The few things that remained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among those who constituted the church called Noah; but these were not remains of perception, but of perfection, and also of doctrine derived from the thing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churches; and therefore a new church was now raised up by the Lord, which being of an entirely different native character from the most ancient churches,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ancient from the fact that it existed at the close of the ages before the flood, and during the first period after it. Of this church,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more will be said hereaft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5장을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이후 전체 전개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교회론적 원리’를 정리해 주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름, 교회, 교리라는 세 가지를 하나의 선 위에 놓습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상태의 표시이고, 그 상태의 실질은 교회이며,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는 근거는 교리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해석하는 일은 곧 교리를 읽는 일이 되고, 교리를 읽는 일은 곧 교회의 상태를 분별하는 일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와 교리가 반드시 쇠퇴의 과정을 거친다고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 타락이나 제도적 붕괴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선과 진리가 점차 힘을 잃고, 삶을 비추는 빛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말씀은 그 교회를 ‘황폐화되었다’라고 말합니다. 황폐화란 더 이상 생명이 흐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영적 용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결코 절망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교회가 황폐화될 때에도, 항상 남은 것들, 곧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것들이 보존된다고 말합니다. 이 리메인스가 바로 하늘과 인류를 잇는 마지막 연결 고리입니다. 만일 이 리메인스마저 완전히 사라진다면, 하늘과 인간 사이의 결합 자체가 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소수 안에라도 선과 진리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이 원리는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람 안에 리메인스가 많을수록, 그의 이성과 지식은 더 밝아집니다. 이는 지식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빛이 리메인스를 통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리메인스가 적을수록,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어둡고 생명 없는 형태로 머무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람 안에 리메인스가 전혀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의 인간다움이 지능이나 문명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가, 곧 남아있는 리메인스에 달려 있음을 뜻합니다. 리메인스가 많을수록 그는 더 사람이며, 적을수록 그는 덜 사람입니다.

 

리메인스를 하늘의 별에 비유한 대목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별은 밤을 낮으로 바꾸지는 못하지만, 방향을 잃지 않게 해줍니다. 리메인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밝히지는 못해도, 완전한 어둠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 줍니다. 이 별이 클수록, 즉 리메인스가 많을수록, 삶은 더 밝은 방향을 가집니다.

 

노아의 교회 안에 있던 리메인스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의 리메인스가 아니었습니다. 퍼셉션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에게 있는 리메인스는 완전성의 흔적, 그리고 퍼셉션으로부터 유래한 교리의 형태였습니다. 즉, 직접 아는 인식은 사라졌지만, 그 인식이 남긴 구조와 가르침은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이 교회는 태고교회와 전혀 다른 본성을 지닌 교회입니다. 퍼셉션의 교회가 아니라, 교리의 교회이며, 직접 아는 교회가 아니라 배우고 따르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고대교회라 불리는 이유는, 태고교회 이후의 모든 교회가 이 교회를 뿌리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이후 홍수 이야기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심판과 파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존과 연결의 이야기로 노아를 읽게 만드는 결정적인 안내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529, 창5:29, ‘노아’(Noah), 고대교회, 곧 홍수 이후에 이어지는 세 교회의 부모가 되는 교회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5:29) AC.529 ‘노아’(Noah)가 고대교회, 곧 홍수 이후에 이어지는 세 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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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5:29)

 

AC.529

 

노아(Noah)가 고대교회, 곧 홍수 이후에 이어지는 세 교회의 부모가 되는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후의 글들에서 노아가 자세히 다루어질 때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That by “Noah”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or the parent of the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ill appear from the following pages, where Noah is largely treated of.

 

 

해설

 

이 글은 새로운 해설을 시작하기보다는, ‘앞으로 전개될 논의의 방향을 미리 밝혀 주는 예고문’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노아를 단순히 하나의 교회 상태로 언급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가 이후에 등장하는 여러 교회의 ‘부모’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노아의 교회가 일시적인 과도기가 아니라, 이후 교회들의 공통된 토대가 된다는 뜻입니다.

 

앞서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중심으로 한 교회였고, 그 흐름은 라멕에 이르러 사실상 끝났습니다. 노아의 교회는 그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님과 연결되는 교회입니다. 퍼셉션이 아니라 교리를 중심으로, 직접 아는 인식이 아니라 배우고 기억하며 따르는 신앙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점에서 노아의 교회는 단순한 다음 단계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시대의 출발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노아를 ‘고대교회’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인류 최초의 교회였다면, 고대교회는 퍼셉션 이후 인류 전체를 위한 새로운 표준을 제시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고대교회 안에서 다시 여러 교회들이 갈라져 나옵니다. 홍수 이후에 언급되는 세 교회는 모두 노아의 교회를 뿌리로 삼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부모’라는 표현은 혈통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 계승의 의미’입니다. 노아의 교회는 이후 교회들이 공유하는 기본 구조, 즉 교리 중심의 신앙 형태를 마련했습니다. 이후의 교회들은 이 구조 위에서 각기 다른 강조점과 상태를 드러내지만, 근본 방식은 노아적 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직접적 후예가 아니라, 노아의 교회를 통해 형성된 신앙 전통 위에 서 있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익히며, 그것을 삶에 적용해 가는 방식은 모두 노아적 교회의 유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자세한 설명을 일부러 미룹니다. ‘뒤에서 크게 다룰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노아 이야기가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니라, 교회 전체 구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미리 암시합니다. 이는 독자에게 이후 본문을 가볍게 넘기지 말고, 지금까지의 흐름과 연결해 깊이 읽으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AC.529는 짧지만, 방향성이 분명한 글입니다. 태고교회의 끝과 고대교회의 시작이 어디에서 갈라지는지, 그리고 홍수 이후의 모든 교회가 어떤 뿌리를 공유하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줍니다. 이 이해를 가지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노아 이야기는 심판의 서사가 아니라 ‘보존과 계승의 이야기’로 읽히게 됩니다.

 

 

 

AC.528, 창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AC.528-531)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And he called his name Noah, saying, He shall comfort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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