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61.심화

 

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겉 사람 안,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하였고, 이것이 주님에 의해 허락되었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AC.161)

 

위 본문에서 그들은 겉 사람 안,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하였고 말인데요, 이것이 악한 거 아닌가요?

 

 

바로 그 지점이 AC.161의 핵심 긴장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아니, 겉 사람 안에서, 자기 own 안에서 살고 싶어 한다면 그게 이미 악 아닌가?’라는 감각은 사실 매우 자연스럽고, 스베덴보리도 결국은 그 방향이 타락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evil)을 단순 충동 발생 자체로 보지 않고, 그것이 굳어져 의지의 중심이 되는 상태로 본다는 점입니다.

 

AC.161에서 말하는 이 후손들은 아직 ‘악한 자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중심 자체가 완전히 자기 사랑으로 굳어진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선을 사랑했고, 여전히 주님과의 연결 안에 있었습니다. 다만 이제 이전 태고교회처럼 ‘주님 안에서만 살고 싶다’는 상태보다, ‘나 자신 안에서도 살고 싶다’, ‘ own 안에서도 느끼고 움직이고 싶다’는 방향성이 강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문제는 아직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 자체라기보다, 자기 자신 안에서 살고자 하는 경향의 강화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즉시 끊어버리지 않으시고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자리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면 자유와 자발성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태고교회 초기 인간은 자기감을 거의 ‘투명한 그릇’처럼 가졌습니다. 자기 자신을 느끼더라도 즉시 그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AC.161의 후손들은 점점 그 자기감을 더 독립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가 너무 자명했는데, 이제는 ‘나도 나 자신처럼 살고 싶다’는 방향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직 완성된 악이라기보다, 악의 방향성(direction)의 시작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마치 병이 아직 몸 전체를 장악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중심 방향이 바뀌기 시작한 상태와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들을 여전히 ‘good’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선을 미워하지 않았고, 진리를 조롱하지도 않았으며, 자기 사랑 속에 굳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점점 ‘주님 안의 삶’에서 ‘자기 own 안의 삶’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 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안에서 살고 싶다’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에, 거짓이 그 안에서 공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AC.161은 굉장히 미묘한 상태를 다룹니다. 완전히 악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순수한 천적 상태에서 방향이 틀어지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마치 아주 미세하게 나침반 방향이 틀어졌는데,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거리 차이가 생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타락은 대개 이렇게 시작됩니다. 갑작스러운 폭발적 악이라기보다, ‘주님 중심’에서 ‘자기 중심’으로 무게 중심이 조금씩 이동하는 것입니다.

 

 

 

AC.161, 심화 2, ‘공명’

AC.161.심화 2. ‘공명’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 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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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창2:24,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를 푸는 열쇠, influx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 이 태고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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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24)

 

AC.16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겉 사람 안,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하였고, 이것이 주님에 의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자비로 그 안에 주입되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하는지, 혹은 어떻게 하나로 보이게 되는지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흘러드는 influx, 곧 유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그래서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이나 신앙의 열매라 불릴 수 없다고 말입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what is spiritual celestial, however, 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해설

 

AC.161은 창2의 마지막 상태를 ‘정확히 평가하는 균형의 문장’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이미 악해진 존재’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선했다고. 이 진술은 이후의 타락을 단순한 도덕적 실패로 오해하지 않게 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이 후손들이 문제를 안게 된 이유는 악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자 했는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겉 사람,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은 이 욕구를 즉각적으로 거부하지 않으시고,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동시에,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자비로 그 안에 주입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 상태는 방임이 아니라 ‘보호가 동반된 허락’이었습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유입(influx)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작용하거나 보이게 되는 것은, 둘이 동일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무엇이 어떻게 흘러들어오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유입의 질서가 유지되는 한, 겉 사람 안에서의 삶도 여전히 선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행위’를 예로 듭니다. 어떤 행위가 겉으로 보기에 선해 보여도, 그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그래서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도, 신앙의 열매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는 외적 형식과 내적 근원의 차이를 분명히 가릅니다.

 

이 예시는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구조적 비유’입니다. 겉 사람의 행위는 속 사람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을 때만 살아 있습니다. 유입이 끊기면, 동일한 행위라도 그 성질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AC.161은 따라서 창2의 마지막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아직 선했고, 주님은 그들이 자기의 own 안에서 살도록 허락하셨으며, 동시에 그 안에 영적, 천적 생명을 계속 주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조는 ‘유입에 대한 의존성’ 위에 서 있었고, 바로 그 지점이 다음 절에서 다룰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었다’는 마지막 보호 상태로 이어집니다.

 

다음 AC.162에서는 이 상태가 왜 아직 무너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무엇이 마지막으로 그들을 지켜 주고 있었는지가 밝혀지게 됩니다.

 

 

심화

 

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AC.161, 심화 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AC.161.심화 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겉 사람 안,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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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명

 

 

AC.161, 심화 2, ‘공명’

AC.161.심화 2. ‘공명’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 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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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nflux

 

 

AC.161, 심화 3, ‘influx’

AC.161.심화 3. ‘influx’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하는지, 혹은 어떻게 하나로 보이게 되는지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흘러드는 influx, 곧 유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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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nflux로 보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열매

 

 

AC.161, 심화 4, ‘influx로 보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열매’

AC.161.심화 4. ‘influx로 보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열매’ 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그 안에 주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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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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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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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ChatGPT를 통한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초벌 및 마무리 작업, 그리고 그걸 블로그에 게시하는 작업으로 보냅니다. 보통 매일 8개 전후의 글 작성을 하는데, 글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지쳐 중간중간 누워 쉬어야 하며, 그럴 때면, 하릴없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웹툰을 보거나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다 합치면 몇 시간씩 된다는 것이며, 더욱 심각한 건, 제 시야가 자꾸 세상사를 향하게 되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AC, 그리고 천국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어땠나요? 그의 전체 저작량을 보면 하루하루가 거의 살인적인 시간 사용이었을 것 같은데, 그는 지치지 않았나요? 갈수록 6, 7, 8학년이 되어 심신이 예전 같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지금 목사님이 단순히 ‘글을 많이 쓰느라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는 ‘두 세계 사이를 하루 종일 왕복하고 계시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C 본문을 붙들고 내적 의미를 따라가며, 그것을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까지 풀어낸다는 건, 단순 지적 노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수준의 정신 집중과 내적 긴장을 요구합니다. 특히 목사님처럼 단순 번역이 아니라 ‘상태 안으로 들어가며’ 작업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러니 중간중간 몸이 꺼지듯 누워야 하는 것도, 정신이 자동적으로 가벼운 영상이나 웹툰 쪽으로 도피하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반작용입니다. 사람이 높은 긴장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낮은 감각 자극으로 균형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사님이 정확히 보신 것도 있습니다. 문제는 ‘쉬는 것 자체’보다, 그 쉬는 방식이 점점 시야를 세상으로 끌고 내려간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단순 휴식이었는데, 어느 순간 마음의 초점 자체가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도 인간이기에 피곤함 자체는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후기 저작들을 보면, 인간적 체력으로는 거의 설명이 안 될 정도의 작업량입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는 단순 집필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절 단위로 따라가며 영적 의미를 풀어내는 작업이었으니, 오늘날 기준으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노동입니다. 게다가 그는 50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영계 체험과 저작에 들어갔고, 60대와 70대에 가장 방대한 책들을 써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으로 지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목사님과 조금 다른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두 세계 중 어느 쪽이 실재인가’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했습니다. 우리처럼 ‘천국을 믿는 사람’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영적 세계가 더 실재적이라는 감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경우는 세상 자극이 지금 우리에게 스마트폰처럼 강한 흡인력을 갖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후기에 점점 더 세상 사교와 오락, 명예 경쟁, 학문적 과시에서 멀어집니다. 대신 아주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식하지 않았고, 밤늦게까지 무리하지 않았으며, 산책과 휴식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즉, 그 엄청난 저작량은 ‘광적인 몰아치기’라기보다, 오히려 놀라울 정도의 규칙성과 집중의 반복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목사님은 지금 거의 ‘전투 모드’로 작업하고 계신 느낌이 강합니다. 하루 8개 전후의 글을 매일 생산한다는 건, 실제로는 일반적인 연구자나 목회자의 작업량을 이미 훨씬 넘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목사님께 필요한 것은, ‘더 몰입해야 한다’보다, ‘내적 시야를 흐리지 않는 방식으로 오래 가는 법’을 배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목사님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사역으로 부르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자꾸 ‘AC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인데’라고 느끼시지만, 인간 정신은 계속 최고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문제는 휴식이 아니라 ‘휴식의 질서’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라면, 휴식을 완전히 세속적 감각의 홍수 속으로 던져 넣기보다, 정신의 결을 크게 흐리지 않는 방향을 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용한 산책, 가벼운 독서, 자연 관찰, 기도 속 멈춤 같은 것 말입니다. 반면 오늘날 스마트폰 알고리즘은 사람의 ‘주의력 자체’를 계속 밖으로 끌어당기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몇 시간 웹툰과 유튜브를 보고 나면, 단순히 시간이 아까운 게 아니라, 마음의 방향 자체가 아래로 끌려 내려간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목사님이 너무 자신을 정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은 이미 상당 부분 ‘자기 own과 싸우며’ 이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왜 또 무너졌나’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방향을 돌리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 의지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이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려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목사님도 지금부터는, ‘유튜브를 완전히 끊어야 한다’보다, ‘내 영의 초점을 크게 흐리지 않는 휴식 구조’를 만드는 게 더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완전히 감각적 영상 대신 자연 다큐, 조용한 클래식, 천국과 지옥 관련 지도, 미술, 역사 탐색, 혹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눈 감고 쉬는 시간 같은 방향입니다. 인간 정신은 쉬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쉬느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자꾸 ‘내가 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 속에만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이 하고 계신 AC 작업은, 사실상 한국어권에서는 거의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규모입니다. 당장은 조회수도 적고 반응도 미미하지만, 스베덴보리 자신도 생전에는 자기 저작이 이렇게 오래 읽힐 줄 인간적으로는 다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씨를 뿌렸고, 열매는 훨씬 뒤에 나타났습니다. 목사님 역시 지금 ‘즉각적 반응’보다 ‘미래 세대를 위한 길 닦기’에 가까운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속도를 더 올리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고 오래 가는 것입니다.

 

 

 

SC.83, ‘스베덴보리와 개신교의 기도, 찬양, 금식, 방언, 전도’

혹시 스베덴보리도 기도 생활을 했나요? 찬양, 그러니까 일상 중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나요? 금식은? 방언, 그리고 전도, 선교는요?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던 시기, 뭔가 크게 달랐던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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