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눅5:1-11)

 

 

물고기는 지혜로워지기 위한 수단으로, 영적 사람을 섬기는 자연적 사람에 속한 지식과 인식을 뜻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어부는 단순히 지식 안에만 있는 사람들, 자신을 위해 지식을 획득하는 사람, 또한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그들의 의식을 새롭게 하는 사람을 뜻한다. (AE.513:11,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위 513번 글 11항에 대한 Ager 영역 및 Whitehead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Because “fishes” signify the knowledges and cognitions belonging to the natural man that serve the spiritual man as means for becoming wise, so “fishers” mean in the Word those who are merely in knowledges, also those who are acquiring knowledges for themselves, also those who teach others and by means of knowledges reform them. (AE.513:11, Ager 역)

 

이는 계시록 8장 9절,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 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 분의 일이 깨지더라’에 관한 주석 중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 분의 일이 죽고’(And there died the third part of the creatures in the sea having souls,)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날 신약 서신서들 중 가장 많이 읽히는 것은 바울 서신서들입니다. 바울은 유대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학파인 힐렐 학파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교육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탁월한 설교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바울 서신은 문체가 대단히 유려(流麗)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울 서신에 빠져드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반면, 바울에 비해서 오늘 말씀드릴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바울과 베드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그 학식이나 배경에 있어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지요. 그럼에도 베드로 서신 역시 읽어 보면, 바울 서신과는 또 다른 영감으로 가득합니다. 베드로 서신의 몇 구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베드로 전서 1장 22절로 25절입니다.

 

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1:22-25)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갈릴리 어부에 불과했던 베드로가 이렇게 깊고 명료한, 진솔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어부였던 그가 주님의 특별한 섭리 있으셔서 주님의 위대한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음도 느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먼저 그럼, 주님은 왜 물고기를 잡는 어부 베드로를 당신의 사도로 택하셨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말씀에서 ‘바다’나 ‘호수’는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옥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선과 진리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는 것은, 각 사람에게 있는 진리와 선의 지식 안으로 주님께서 임하시는 걸 말합니다. 우리가 학문을 배우거나, 또는 신앙의 교리를 공부하는 것은 주님을 받아들일 그릇을 준비하는 행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의 지식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배우고, 종교의 교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 여기서 잠깐, ‘종교’라는 용어를 쓰신 이유는, 기독교회 밖의 사람들, 그러니까 타 종교인들까지 포함, 폭넓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온 인류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누구는 기독교 가정에, 누구는 불교나 이슬람 등, 또는 무교 가정에 태어납니다만, 그러나 그건 그 사람 본인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면서 유대인이거나 나면서 기독교 국가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 처음부터 말씀 생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특별히 더 겸손해야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유대교 포함)는 그 비율이 30% 정도로 열에 셋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이렇듯 다양한 배경 가운데 태어나며, 그러나 그들 또한 모두 주님으로 말미암았으므로, 그래서 주님은 모든 민족에게 저마다의 종교가 일어나도록 허락하셨고, 저마다의 종교에 주님의 신성이 스며들게 하셨으며, 그래서 자기 종교의 교리 중 선한 교리를 따라 나름의 선과 진리의 하나 됨을 위해 성실하게 사는 걸로 주님 사랑을 표현하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그 종교의 교리를 통해 나름의 선한 삶을 살며,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나름 성실히 살아간다면 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만 기독교와 여타 종교와의 차이는 말씀의 유무에 있으며, 그것은 밝은 빛 가운데 사는 것과 주변 희미하고 어슴푸레한 등잔불 빛 아래 사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어느 누가 진리, 곧 살아계신 주님 만나기를 정직한 심령으로 평소 간절히 구했다면 그는 자기가 무슨 종교를 믿느냐와는 상관없이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받을 때, 매우 호의적이며 반갑게 반응할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지식이 있다고 주님은 아무한테나 오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오십니까? 2절과 3절에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이 말씀에서는 주께서 교리의 진리를 가르쳐 주실 때 어떤 사람에게 오시는지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주님은 영적인 어부에게 오십니다. 둘째는 어부 중에서도 자신의 그물을 씻는 사람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셋째는 시몬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오십니다. 먼저, 주님이 어부에게 오시는 이유는 ‘어부’는 속뜻으로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낚아 올리는 사람들이며, 그 진리를 통해 거듭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어부가 있습니다. 즉 진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그들로 거듭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부는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흔히 자신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자칫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구원만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웃이 진리를 원하지 않는데도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 할까요?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이웃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웃이 진리 알기를 원할 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또 진리에 따라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고 진실한 삶을 살면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이 전해집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보다 높은 차원의 영적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부의 배에 오르셔서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이웃이 ‘진리 알기를 원할 때’는 쉽지 않습니다. 교회 안 다니는 이웃은 고사하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물론 목회자나 사모, 교회 리더십들 역시 게 중에 참으로 ‘진리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입니다. 대부분 자연적이기 때문인데, 그러니까 말씀의 겉면만, 즉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살펴 그저 지식으로만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 그러니까 내적 의미에 마음을 쏟으며 실제 생활과 삶, 인격에 적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오늘날 아주아주 희귀합니다. 고민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주님 계신 곳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처럼 지금도 제 안에, 우리 참된 그리스도인 안에 주님이 계시면 그곳엔 사람들이 모일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주님은 그물을 씻는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얻기 위해 내면의 어떤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를 습득하려면 어떤 것이 있어야 할까요? 우선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그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물을 씻는 것은 내면의 애정을 순수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 밝아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추구할 때, 그 애정이나 동기가 주님과 이웃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내면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을 때는 우리 내면에 천국과 통하는 문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면의 그물을 씻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주님은 시몬의 배로 들어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시몬에게 가신 이유는, ‘시몬’은 속뜻으로는 순종하는 신앙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믿으면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것보다 세상적인 것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나라보다 세상을 더 사랑할 때 내면에 천국과 통하는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의 배에 오르신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후,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십니다. 시몬은 오래 고기를 잡은 베테랑 어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 때, “주님, 제가 이 부분은 잘 압니다. 그러니 제게 맡기십시오.”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시몬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깊은 데는 어디입니까? 영적으로 깊은 곳은 높은 곳과 통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깊은 곳(inmost)은 천적인 등차(等差, degree), 단계, 즉 사랑의 단계를 뜻하고, 보통 깊은 곳은 영적인 단계, 즉 진리의 단계를 뜻합니다. 그리고 얕은 곳은 자연적인 단계를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 하시는 것은 사랑으로 진리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구할 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구하지 말고,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요, 거기서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2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는 것과 오른편으로 던지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오른편도 사랑이요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러자 시몬이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진리에 순종하는 순간입니다. 시몬과 동료들이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다고 했는데, 밤은 무슨 뜻입니까? ‘’은 사랑이 없는 때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신앙인의 영적 상태는 항상 일정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크기에 따라 아침과 낮, 저녁과 밤으로 수시로 변합니다. 그래서 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없고 오직 자아에 대한 사랑만 있는 때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진리의 고기를 잡으려 할 때는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몬의 일행은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시몬이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깊은 곳에 던졌습니다.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진 것은 자기 사랑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를 구하는 행동입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쏟아붓듯이 진리의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내면에 있던 그물이 찢어집니다. ‘그물이 찢어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동안의 진리에 대한 불순한 애정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순한 애정이 깨질 때 진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력이 생깁니다. 그물이 찢어진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진리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아니면 어떤 영적 성취도 이룰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려고 하자 시몬이 다른 배에 있던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동료들이 와서 거들자 두 배에 물고기들이 가득하여 배가 가라앉을 정도가 됐습니다. ‘두 배에 물고기가 가득 찼다’는 것은 교리의 선과 교리의 진리가 하나로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둘이란 수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교리 중에는 진리도 있고, 선도 있습니다. 그러면 교리의 진리는 무엇이고, 교리의 선은 무엇일까요? 명확하게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렇습니다. 선은 본질에 있어 밖으로 뻗치는 성질이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는 안으로 단속하고 절제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계명 가운데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교리의 진리에 가깝다고 보고요,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은 교리의 선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십계명에도 열 가지 계명 중에 아홉 가지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행해야 하는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먼저 계명에 반하는 악을 행하지 말고, 그런 다음 계명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 배에 물고기가 가득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두 배에 가득 물고기를 채웠더니 배가 가라앉으려 했습니다. 배가 가라앉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좀 전에 그물이 찢어지는 것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즉 주님이 주시는 진리와 선의 결합을 통해서 내면의 교회가 개혁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개혁된다는 것은 이전 낡은 교회가 새로운 교회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깊은 데로 그물을 내리라 하셨을 때에 신앙이 깊은 시몬조차 긴가민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시몬은 놀라 주님 발 앞에 완전히 엎드렸습니다. 8절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자아 사랑이 아닌 주님 사랑으로 참 진리를 얻고, 그것으로 거듭나기 시작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진리는 선이 없는 진리였고, 그래서 그것으로는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몬이 주님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복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참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를 받았을 때, 비로소 자아 사랑으로 했던 모든 일들이 주님께 큰 죄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9...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있는 시몬에게 주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聖) 문서에서는 시몬이 느낀 두려움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합니다. 말씀에는 거룩한 두려움을 느꼈던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다니엘이 주님을 뵈었을 때, 죽은 자처럼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계시록을 받는 순간, 요한도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들이 느낀 두려움이 모두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것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주님에 대한 지극한 겸손과 공경에서 나오는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에 의해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겸손함을 보시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실 때 우리의 죽었던 영성이 소생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주님께서 다시 시몬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셨습니다.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이후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란 어떤 것입니까? 이웃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 입니다. 11절에는 시몬 베드로와 동료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을 따라나서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주님께서 시몬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하시자 시몬뿐만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말씀에는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섰다고 합니다. 대단한 신앙이고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저는 36세이던 젊은 시절, 대학 후 입사하여 잘 다니던 대기업을 퇴사, 어느 교회의 교회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린 두 아들과 아내의 희생을 마다하고 말입니다. 그 결정으로 이후 저희의 삶은 매우 고단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미숙하고 안타깝습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모든 일을 선으로 돌려 오늘의 저와 저희 가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특히 제게는 저 표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라는 표현이 정말 가슴에 와닿습니다.

 

주님은 왜 시몬뿐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함께 제자로 받아들이셨을까요? 그 세 사람을 통해 주님의 제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 그리고 체어리티의 삶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도 없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만 있어도 안 되고, 체어리티만 있어도 안 되며, 체어리티의 삶만으로도 안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구체적인 삶이 함께 있어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하셨을 때, 시몬과 야고보, 요한이 모두 주님을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몬과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제자인 시몬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모두 어부였습니다. ‘어부’는 속뜻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통해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쳐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어부는 나의 구원과 이웃의 구원을 함께 생각하는 사람이며, 나아가서 이웃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어부를 제자로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제자가 된 어부들은 어떤 자질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첫째, 그물을 씻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는 것은 내면의 애정을 살피면서 그 속의 악하고 거짓된 것을 씻어내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시몬과 같이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베테랑 어부였을 시몬은 목수 출신이셨을 주님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에 토 달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이렇듯 훌륭한 자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질은 잠재적인 것이며,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여러 차례 기록된 베드로의 성정(性情)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들 역시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고, 소득 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도 처음 진리를 배울 때는 자아 사랑으로 시작했고, 그래서 참 진리를 얻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택하셔서 훗날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위대한 사도로 키우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어떤 면을 보시고 우리를 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의 약점을 덮으시고, 장점을 키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할 때 주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필요한 어부로 키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님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3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시107:23-24)

 

아멘

 

원본

2017-09-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7(D2)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6. 2023-03-27(D2)-매일예배(2443, 눅5,1-11),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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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1.36.318-328.'천국의 비기독교인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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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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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질병과 주님의 병 고치심

 

 

38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0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42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눅4:38-44)

 

 

질병(diseases)이라는 것은 영적 삶과 관련된 해롭고 악한 것들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주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신다는 것은 교회와 인류에게 우글우글 들러붙어 그들을 영적 죽음으로 이끄는 다양한 종류의 악과 거짓들로부터 그들을 자유하게 하심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신적 기적들(Divine miracles), 주님의 미러클들은 교회와 천국의 상태들을 포함하고, 그들에 대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기적들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기적들은 주로 병 고치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4-5) (AC.8364:6, 변일국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위 8364번 글 6번 항에 대한 Clowes 영역 및 Potts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s diseases represented the hurtful and evil things of the spiritual life, therefore by the diseases which the Lord healed is signified liberation from various kinds of evil and falsity which infested the church and the human race, and which would have led to spiritual death. For Divine miracles are distinguished from other miracles by the fact that they involve and have regard to states of the church and of the heavenly kingdom. Therefore the Lord’s miracles consisted chiefly in the healing of diseases. This is meant by the Lord’s words to the disciples sent by John:

 

Tell John the things which ye hear and see: the blind see, and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leansed, and the deaf hear, the dead rise again, and the poor hear the gospel (Matt. 11:4, 5).

 

이는 출애굽기 15장 26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에 관한 주석 중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지난 시간에는 주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특별한 점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는데 주님께서 그 병을 낫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38, 39절입니다.

 

38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주님께서 회당에서 나오셔서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주님께서 회당에서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이동하신 것이지만, 속뜻으로는 다른 의미인데요, 우리의 내면으로 임재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이성 가운데 계시다가 우리의 의지 안으로 이동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회당’은 신앙인의 이성을 뜻하며, ‘’은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까 ‘속뜻’이란 천사들이 읽는 말씀을 말합니다. 천사들은 영적 존재라 사람의 육이 아닌 영을 보는데요, 그런 것처럼 말씀도 지상 언어로 된 말씀이 아닌 거기에 담긴 영을 보는 겁니다. 우리가 천사들처럼 말씀을 속뜻으로 볼 줄 아는 게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 엉뚱한 해석으로 인생을 우왕좌왕 낭비하지 않고, 그대로 천국에서도 통하는 말씀 이해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게 그 말씀의 속뜻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 지점에서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중요해지는 겁니다. 주님이 이 일을 위해 그를 불러 말씀의 속뜻과 그 원리를 오픈하셨거든요. 그가 여러 해에 걸쳐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라틴어로 풀어 기록했는데요, 그 글의 수만 10,837개나 되며,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만,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이 계시하시는 걸 곁에서 받아적기만 한 것입니다. 그럼, 성경의 나머지 말씀들은 왜 안 했냐면, 이 두 책에 나오는 원리들과 그 인용 구절들로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의 많은 저작 중, 특별히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그리고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이 두 권은 꼭 좀 읽으시라 권하는 것입니다. 전자를 통해서는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후자를 통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고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들의 시각과 마음을 가지고 남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 아래 링크로 가시면 구하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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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은 본래 교회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의 내면에서 주님께서 교리를 가르치시는 곳, 즉 인간의 이성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누구입니까? 말씀에서 ‘어머니’나 ‘아내’는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내면에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디에 세워집니까? 사람의 의지 속에 세워집니다. 말씀 지식이 많다 해서 그 사람 내면에 교회가 있는 건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들여 그것을 의도하고, 삶으로 옮길 때라야 비로소 그 사람 내면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교회를 뜻하는 ‘시몬의 장모’와 ‘시몬의 집’은 그런 뜻입니다. 의지 가운데 교회가 세워진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지금 병을 앓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 병이 들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는데, 보통은 신앙인들이 악의 유혹에 넘어가 헤어 나오지 못할 때이거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고, 그 거짓을 믿을 때 교회는 중병에 걸립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장모가 지금 열병을 앓고 있는 상태는, 신앙인들이 어떤 종류의 악이나 거짓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주님 앞에 그를 위하여 구합니다. 말씀에서 ‘사람’은 보통 진리에 대한 애정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주님께 구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진리이신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영적 질병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영적 질병을 고치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열병을 꾸짖어 주십니다. ‘꾸짖으신대’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 악들과 싸우시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병을 꾸짖으시자 악한 영이 떠나고, 시몬의 장모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병이 나은 시몬의 장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께 수종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주님께 ‘수종드니라’는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수종을 드는 것’은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병이 낫기 전에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진리에 순종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악과 거짓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자 악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그렇게 해서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장모가 주님께 수종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교회가 진리이신 주님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주님께 왔습니다. 40절입니다.

 

40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해 질 무렵은 어떤 때입니까? 신앙인들의 마음에 사랑이 없고, 그러므로 지혜가 없는 때입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는 항상 일정하지 않습니다. 아침일 때가 있고요, 한낮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일 때가 있고, 밤일 때도 있습니다. 아침이나 낮처럼 햇빛이 밝을 때는 마음에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넘칠 때입니다. 그러나 저녁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고, 교회에 대한 애정도 없으며, 그러므로 지혜가 없는 때입니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 질 무렵은 시험의 기간이며, 영적 질병에 걸리기 쉬운 때입니다. 본문에서 해 질 무렵에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왔다 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온갖 병자를 데리고 왔다는 것은 신앙인들이 안고 있는 영적인 문제가 그만큼 다양하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직면하는 영적인 문제들이 다 다릅니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애정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애정의 다양성에 대해 성(聖) 문서에서는 수만, 또는 수만 곱하기 수만 개만큼이나 많다 합니다.

 

※ 위 ‘(聖) 문서’라는 용어는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 이후부터 기록한, 그러니까 주님이 그의 손을 빌려 기록하신 저작들(Writings)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천국에서 듣고 본 모든 경험과 남기는 이 모든 기록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 하는 것이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은 오직 주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을 자기는 성경 한 권만 가지고 받아 적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프린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그가 남긴 기록들에 대하여 ‘’(聖, Divine)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안 되죠. 감히 말입니다! 이 형용은 오직 주님 한 분께만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얼굴의 생김새가 모두 다른 것처럼, 각자의 애정이 모두 다르고, 그러므로 직면하고 있는 영적 문제가 다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온 것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영적 질병을 주님 앞에 진심으로 고백하고, 치유 받기를 원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 생각하는 한,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려 해도 개입할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온전히 비우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환부에 당신의 손을 얹으시고, 병을 고쳐 주십니다. 환부에 손을 얹으실 때, 주님과 우리 사이 소통이 일어납니다. 소통이란 어떤 것입니까? 소통이란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마치 몸 안 혈액이 각 장기와 조직, 세포 속을 원활하게 흐를 때, 병에 안 걸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병자들의 내면에 있던 귀신들이 나가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소리를 질렀고, 그러자 주님은 그들을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악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 고백은 순수한 고백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혐오이며 적대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때문인지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란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셨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 가야바가 네가 그리스도인지 말하라 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직접적 대답을 피하시고, ‘네가 말하였느니라’ 하실 정도였습니다. 아마 악한 사람들에게 진리가 들어가면 진리를 더럽히거나 파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폭행, 십자가에 매다는 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악인들이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 위 ‘병자들의 내면에 있던 귀신들’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을 참고하세요.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지옥과 교통하는 영들 역시 사람에게 와있는 이유는, 사람이 모든 악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며, 따라서 사람의 생명이 전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동질의 영이 함께 있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도 없고, 사실상 그의 악에서 떠날 수도, 개선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악한 영들에 의해서 자아의 생명 안에 머물고, 동시에 선한 영들에 의해서 거기서 물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양쪽에 의해 균형이 유지되고, 균형이 유지되기 때문에 자유가 있다. 따라서 악에서 떠날 수 있고, 선 쪽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선이 사람 안에 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자유가 없으면 전혀 불가능하다. 그리고 사람은 지옥측 영들이 한쪽에서 작용하고, 천국측 영들이 다른 한쪽에서 작용하는 그 중간에 있을 때만 자유로울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생명이 그 타고난 것에 들어 있고, 따라서 자기 본성에 들어 있는 한, 만일 악 안에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면, 그에게 생명이 있을 수 없다. 또 사람에게 자유가 없으면 생명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강제로 선해질 수 없다. 강제로 하는 것은 오래 남지 않는다. 사람이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는 선은 그의 의지 안에 심어져 그 자신의 것처럼 된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지옥과 교통하고, 또 천국과 교통하는 것이다. (HH.293)

 

이 글들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3장, ‘천국과 인류의 결합’에 나오는 글들로서, 모든 사람에겐 최소한 천국 측 선한 영 둘, 지옥 측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글들을 통해 ‘사람’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더 이상 무슨 귀신이니, 악령이니, ‘누구는 귀신 들렸다’ 하는 것들에 관해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다음 42, 43절입니다.

 

42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조금 전에 ‘해 질 무렵’이 사랑이 없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날이 밝으매’는 무슨 뜻입니까? 날이 밝았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오는 영적 상태이며, 그래서 사랑과 지혜가 풍성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한적한 곳’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요, 영어 성경 번역은 ‘황무지’ 또는 ‘사막’입니다. 황무지는 진리가 없고, 그러므로 선한 삶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날이 밝은 것과 황무지의 상태는 정반대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날이 밝았을 때 황무지로 가셨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은 우리 내면의 황무지를 진리로 개간하시는데 한 번에 하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미 옥토로 변한 곳도 있을 것이고, 여전히 황무지와 같은 곳도 있을 것입니다. 저 스스로도 그런 걸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비교적 합리적인데, 다른 어떤 면에서는 전혀 합리적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수도 하고 후회도 합니다.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그 부분에 있어서는 진리가 없다는 것이고, 황무지와 같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날이 밝았을 때 주님께서 황무지에 가신 것은, 주님이 사람의 내면 어떤 부분을 치유하신 후에, 이번에는 황무지와 같은 곳으로 이동하셔서 그곳을 다시 변화시키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을 찾던 무리가 주님을 발견하고는 떠나지 마시라 붙잡습니다. 주님을 찾는 무리처럼 우리도 주님의 부재(不在)를 느낄 때, 주님을 찾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의 의도와 생각을 살피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되 스스로 하듯 자신의 의지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라고 무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어떤 문제에 대해 주님의 지혜를 구할 때마다 교리적인 답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동네’는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른 동네’는 삶의 어떤 문제에 대해 특별한 교리적 해법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삶의 모든 상황에서 다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우리는 애정을 가지고 주님께 특별한 진리를 구합니다. 그것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물을 향해 뿌리를 뻗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원천이신 주님께 닿으려는 수많은 뿌리는 주님이 복음을 전하실 다른 동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오신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진리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그냥 진리가 아니고, 선을 동반한 진리입니다.

 

끝으로 44절에서는 주께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라고 합니다. ‘갈릴리’는 이방을 뜻합니다. 그러면 우리 내면에 있는 이방 지역은 어떤 곳입니까? 주님으로부터 가장 먼 곳이며, 가장 나중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곳, 그곳이 이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갈릴리는 겉 사람입니다. 따라서 주께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는 것’은 앞에서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즉 주님께서 겉 사람 안의 여러 애정과 소통하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시몬의 집을 방문, 열병을 앓고 있는 그의 장모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그런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 역시 거듭나는 과정에서 수많은 병치레를 합니다. 때로는 죽을 것 같은 열병을 앓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은 병의 치유를 위해서 우리의 의지 속으로 오십니다. 영적 질병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고,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주님께 소상하게 고(告)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자신의 문제를 소상하게 고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그냥 ‘주님, 도와주세요’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님께 구체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자기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 질병을 치유 받으려고 주님께 구체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시몬의 집에 있던 사람들이 장모의 병을 낫게 해달라 주님께 간청하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위에 손을 얹으시니 질병의 원인인 악한 영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신앙인의 질병은 각자의 애정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고,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그 문제를 그동안 어떻게 다루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주님께 말씀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할 때 주님께서 그 질병들 위에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렘17:14)

 

아멘

 

원본

2017-09-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5. 2023-03-26(D1)-주일예배(2442, 눅4,38-44), '우리의 질병과 주님의 병 고치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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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리지 않으려면

 

 

31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눅4:31-37)

 

 

거듭남의 첫 번째는 진리를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진리를 믿는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다음의 사실로 알 수 있다. 즉 가장 나쁜 사람들도 진리를 알 수는 있다. 그러나 인정하지는 않는다. 유대인이나 그럴듯한 논리로 교리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진리를 인정하기는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진리를 강론하고, 입증하며 열정적으로 설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리를 믿지 않으면 누구도 신앙을 가질 수는 없다. (AC.896,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라틴) 위 896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 및 Potts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o know is the first thing of regeneration, to acknowledge is the second, to have faith is the third. What difference there is between knowing, acknowledging, and having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worst men may know, and yet not acknowledge, like the Jews and those who attempt to destroy doctrinal things by specious reasoning; and that unbelievers may acknowledge, and in certain states preach, confirm, and persuade with zeal; but none can have faith who are not believers. (AC.896, Clowes 역)

 

이는 창세기 8장 13절,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에 관한 주석 중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And Noah removed the covering of the ark and saw.)에 대한 내용입니다. //

 

 

지난 시간에는 주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에게 큰 화를 당할 뻔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을 조용히 떠나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주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31절입니다.

 

31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갈릴리 가버나움의 동네란, 속뜻으로는 이방인의 교리를 뜻합니다. 동네는 진리나 교리를 뜻하고, 갈릴리는 이방 지역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서 가르치신다는 것은 이방인의 진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건 아니고, 주님께서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전파하신 말씀이 유대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마치 이방인의 진리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말씀은 그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진리였습니다. 그러한 사정은 어쩌면 오늘날 새 교회가 부딪치고 있는 현실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새 교회 진리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이 진리가 기독교 주류 교회들의 교리와 많이 다르다는 걸 금방 느끼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독교회가 아닌 다른 종교의 교리와 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순수한 종교의 교리는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직 믿음’, 곧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 가르치는데요, 그것은 신앙과 사랑이 하나라는 걸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기독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새 교회 가르침은 이단 종교, 종파 가르침 같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걸 주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서 가르치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양쪽을 다 있어 본 사람으로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양쪽을 다 있어 봤다’ 하는 이유는, 저 자신 현재 개신교 침례교 목사이면서, 그러나 한편으로 스베덴보리의 글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았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튜브나 인터넷상에 떠도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직접 읽고 확인하면서 번역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비록 ‘오직 믿음’ 교리를 배운 개신교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참으로 의롭고 올바름의 사람이라면 본인이 직접 이 글들을 읽어 주님을 만나게 될 줄 저는 믿습니다. 그가 참으로 진리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누구의 글이나 의견, 기사나 소문이 아닌, 본인이 직접 일대일로 주님께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며, 주님은 그런 사람을 예외 없이 만나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이지요.

 

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29:13)

 

스베덴보리(1688-1772) 시절 유럽 기독교와 개신교처럼 지금도 특히 한국 기독교와 개신교는, 그러니까 가톨릭은 ‘행위’에다 이것저것 뭘 좀 교리적으로 섞었고요, 개신교는 ‘오직 믿음’으로 일단 구원은 받아놓고, 그러고 나서 그에 합당한 체어리티의 ‘행위’로 삶을 받쳐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입장이지요. 실상은 전도와 선교에 더 힘을 쓰고 있지만 말입니다. 마치 속 사람은 뭐 잘 모르겠고, 일단 전도 많이 하면, 선교 많이 하면 하늘 상급이 많으니까... 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히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의 ‘오직 믿음’ 교리에 대한 확고한 태도가 주님의 신성(Divine)인 ‘’(good)과 ‘진리’(truth)를, 그리고 ‘체어리티’(charity)와 ‘신앙’(faith)이라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을 부인하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뭐 그렇게 거창한 사람은 못 되어서 이렇게 요약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 등을 포함한, 좀 더 큰 카테고리입니다. //

 

본문에서는 또 주님께서 안식일에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안식일 관련한 말씀들은 아래와 같이 엄중합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31:15)

 

그래서인지 유대 율법 가운데서도 이 안식일 법은 아주 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에 대한 속뜻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그것은 무슨 일이든 자신의 자아로부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가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주님 말씀을 따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대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만 생각했지요. 그래서 언젠가 주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 이삭을 따 먹었을 때, 어떻게 안식일을 어길 수 있는가 하고 주님을 질책했습니다. 본래 안식일의 의미는, 주님께서 지옥의 시험을 모두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인성과 내면에 계시는 신성, 곧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걸 의미하지요. 그리고 그렇게 되셨을 때의 주님의 상태, 곧 더 이상 지옥의 도전이 없는, 주님 안 평화의 상태가 바로 안식의 상태, 그러니까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영화(榮化)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그동안 주님을 나타내던 모든 표상이 사라졌습니다. 빛 자체이신 주님이 오시자 더 이상 그 빛을 대신하던 역할 대행들은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안식일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우고, 이웃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를 실천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진리를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신 것은, 안식일에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모범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런 안식일에 대한 속뜻을 전혀 몰랐고, 그저 겉으로만 지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안식일’이 나와서 잠깐 다루었습니다.

 

32절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32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이 말씀에서 ‘놀라니’는 사람의 내면 영의 상태가 바뀌는 걸 의미합니다. 영의 상태가 바뀐다는 건 예를 들면, 아주 이기적이던 사람이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영이 변한 것입니다. 또 자기도 몰랐던 단점을 깨닫고,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한다면, 영이 변한 것입니다. 또 큰 잘못을 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게 된다면 그 역시 영의 상태가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상태가 변한다는 건 영적으로 한 단계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놀랐다고 했습니다. 주님 말씀의 능력으로 그들의 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영이 바뀔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주님 말씀에 놀라고, 그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사랑이 없지만,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안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그것은 겨울의 햇볕은 능력이 없지만 따뜻한 봄볕은 만물을 생장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버나움 사람들의 영이 바뀌고 있을 때, 한 귀신 들린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에 대해 33절과 3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3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여기서 ‘귀신’은 진리를 왜곡하는 지옥의 영을 말합니다. 지옥의 영들은 말씀의 진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왜곡, 곡해해서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꾸밉니다. 왜곡된 진리로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귀신 들린 자는 진리를 왜곡하는 영에게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영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스스로 대단한 지적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말씀의 의미를 마음대로 왜곡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진리 가운데는 그렇게 왜곡된 진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가 주님을 향해 큰 소리로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앞부분에서는 ‘우리’라고 했고요, 뒷부분에서는 ‘’라고 했습니다. 귀신 들린 자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앞에서 ‘우리’는 귀신 들린 자를 사로잡고 있는 지옥의 영들을 나타냅니다. 그의 내면에 지옥의 영들이 한 둘이겠습니까?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소리 지른 것은, 주님, 또는 진리에 대한 반감을 나타냅니다. 거짓 진리를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참 진리가 나타날 때 진리를 혐오합니다. 둘은 본질적으로 서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 다른 종교나 교회에 계신 분들과 진리에 대해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먼저 말하는 경우는 없고, 그분들이 당신의 교회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물어오면서 대화가 시작되는데, 그때 저희 교회의 가르침을 설명하면 조금 놀라거나 거리를 두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어쩌면 그런 분들의 반응이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우리’라고 한 것은 지옥의 영들이 하는 말이고, 주님에 대한 반감, 또는 진리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뒷부분에 ‘’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귀신 들린 사람, 자신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천사 또는 지옥의 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33장 ‘천국과 인류의 결합’(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Human Race) 292번 글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김은경 역) //

 

지옥의 영이 지배할 때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말을 해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교묘하게 남을 속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지옥 영들이 하는 장난입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가 귀신 들린 자가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들려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기는 하지만 진리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자가 그렇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주님께서 바로 그의 내면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35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3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아야 그것을 인정하고, 자기의 신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첫 번째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신 들린 자가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즉시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진실을 왜곡하는 영들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진실은 진실이라 하고 거짓은 거짓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옥 영들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십니다.

 

주님이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나오면서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렸습니다. 귀신이 사람을 넘어뜨리는 모습은, 참된 진리가 나타났을 때, 그 앞에서 거짓 진리가 수치를 당하는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는 자기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믿었는데, 그것이 참된 진리 앞에서 거짓이라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니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그것이 귀신이 주님 앞에서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는 모습입니다.

 

※ 이쯤에서 떠오르는 제 영적 체험이 하나 있는데요, 과거 정원 목사의 저서, ‘대적기도’를 읽고, 잠자리에 누워 ‘귀신아!’ 따라 해 보다가 내 안에 숨어든 악령을 어렴풋이 보게 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 15일 주일 밤에 있었던 일인데, 다음은 그날의 일지에 적힌 내용입니다.

 

자정 즈음, 다시 치통 시작, 잠결에 ‘귀신아!’ 하였더니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오래도록 지속, 정원 목사님이 대적기도 책에서 기술한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 내 안에 뭔가가 숨어있다가 들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느낌 받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데 혀가 꼬여서 발음이 잘 안됨, 아내, 내가 잠꼬대를 하는 줄 알고 대적기도 중인 나를 계속 흔들어 댐... 전율이 잦아들 즈음, 치통도 사라짐, 책의 내용 그대로여서 너무 신기, 아내에게 자초지종 설명

 

제 안에서 몰래 활동하던 악한 영이 그만 갑자기 들키는 바람에 저쪽 주방 정수기 쪽으로 황급히 숨는 무슨 다급함이었지요. 형체는 그냥 검은 그림자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참 놀라운 건, 이 체험 후, 저를 평생 괴롭히던 혈기가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이 혈기는 저뿐 아니라 저희 집안의 내력 중 하나이기 때문에 더욱 신기했습니다. //

 

악령들은 항상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리고 떠날 때는 결과를 모두 그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마치 부메랑처럼 죄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죄는 그냥 없어지지 않습니다. 수치심을 느끼고 철저하게 자신을 자책하는 그런 과정이 반드시 있습니다. 어떨 때는 그 곤욕과 수치의 시간이 길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악령이 떠나면서 우리를 무리 중에 심하게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성을 하되 너무 자책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건 모두 지옥 영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악령은 사람에게 물리적인 고통을 줄 뿐이고요, 영을 해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이 주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사탄이 욥에게 한 짓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몸을 아프게 하고, 재물을 잃게 했습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 그러한 것들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잃는 것이 영을 다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인정하는 한, 악령은 우리의 영을 손상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36절 말씀입니다.

 

36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주님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냈을 때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말씀의 능력을 인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의 능력’이란 세상적 능력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죽은 자와 같았던 우리가 살아나는 것, 짐승처럼 살던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 이것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 들린 자가 진리이신 주님을 진리라고 인정했을 때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진리가 진리인 줄을 모르고 거짓이 거짓인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마치 귀신 들린 자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저는 가급적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정치 상황을 보면 안타까운 점이 많습니다. 정치가 무엇입니까? 정견이 달라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때에 따라서는 대의(大義)를 위해 연합하고 협력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에 협력이 있습니까, 조화가 있습니까? 무섭게 상대를 적대하고 증오할 뿐입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모함하고 처절하게 죽이고 했던 것이 조선의 역사였습니다. 서로 타협하고 조화를 이루며 싸우다가도 손을 잡은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라도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그들 역시 정치인들에게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증오와 살의가 가득 찬 이 나라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기서 말씀하시는 ‘오늘’은 지난 2017년도 8월을 말합니다. 지난 2017년도에 있었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 파면(3/10)과 문재인 대통령 당선(5/9)일 것입니다. 만 5년이 지난 지금은 세월호 촛불 및 박근혜 대통령 탄핵 등이 모두 조작이요, 기획 선동인 것으로 점점 밝혀지고 있어 그때 덩달아 촛불을 지지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원망했던 저는 너무나도 미안, 부끄러워 고갤 못들 지경입니다만... 네, 하여튼 당시 상황을 돌이켜볼 때, 정말 역사의 큰 변곡점의 시기였음은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대의를 위해 상대방의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라면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의를 위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선이며 진리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교회 안에서도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서로를 증오하십니까? 우리는 자신의 이해와 관계없이 진리를 진리라고 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적어도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거나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를 사로잡고 있을지도 모를 악한 영을 쫓아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능력으로 우리 안에 어둡고 불결한 것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말씀의 능력이 이 교회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신념으로 우리 함께 주님을 위해서 싸웁시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님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아멘

 

원본

2017-08-2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4(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4. 2023-03-24(D6)-매일예배(2441, 눅4,31-37), '귀신 들리지 않으려면'.pdf
0.55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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