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1:27)

 

AC.53

 

여기서 ‘형상(image)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이해력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his image)이라 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서 나옵니다. The reason why “image” 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 “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 “image of God.”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스베덴보리 인간학의 핵심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해 놓은 단락입니다. 여기 ‘형상’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단순한 문체상의 반복이 아니라, ‘인간 안에 두 중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 두 중심이 바로 이해력과 의지이며, 각각 신앙과 사랑의 자리입니다.

 

먼저 이해력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이라 하는 건, 영적 인간이 아직 ‘주님을 바라보고 닮아 가는 상태’에 있음을 뜻합니다. 신앙은 진리를 통해 주님을 인식하고, 그분의 뜻을 이해하며, 삶을 그에 맞추려는 방향성을 제공합니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여전히 ‘형상’ 안에 있지만, 그 형상은 아직 완성된 닮음, 모양이 아닙니다. 그래서 표현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자기 형상’에 머뭅니다.

 

반면 의지에 속한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이라 불립니다. 이는 사랑이 주님의 본질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는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인간 안에서 주도권을 가질 때, 인간은 단순히 주님을 닮아 가는 존재를 넘어,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작동하는 형식’이 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글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다시 한번 ‘순서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그다음에 옵니다. 그는 먼저 옳고 그름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따라 사랑을 형성해 갑니다. 그래서 사랑은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 구조는 거듭남의 필수 단계이며,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강하게 작동하는 구간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순서가 바뀝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는 더 이상 ‘이것이 옳은가’를 계산하지 않고, ‘사랑에서 나온 것이 곧 옳은 것’이 됩니다. 이때 이해력은 의지를 통제하지 않고, 의지를 밝히는 빛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앞서고’, 신앙은 그 사랑을 설명하고 드러내는 수단이 됩니다.

 

이 글이 말하는 ‘형상’의 이중 언급은, 인간 안에 두 개의 형상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형상이 ‘성장하고 깊어지는 두 단계’를 가리킵니다. 처음에는 신앙의 형상으로 시작하고, 그다음에는 사랑의 형상으로 완성됩니다. 이 전환점이 바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본문 심화 해설

 

이 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는, 스베덴보리가 결코 신앙을 경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해력에 속한 신앙도 분명히 ‘형상’입니다. 즉 그것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며, 인간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만 그 형상은 아직 ‘매개적 형상’입니다. 진리를 통해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 있는 형상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매개가 아닙니다. 사랑은 직접적인 결합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주도권을 잡을 때, 형상은 더 이상 ‘자기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이라 불립니다. 이는 인간이 신격화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서 왜곡 없이 흐른다’는 뜻입니다.

 

이 구조를 놓치면, ‘왜 형상을 두 번 말하는가’라는 질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해력–의지, 신앙–사랑, 영적 인간–천적 인간이라는 축을 함께 놓고 보면, 이 짧은 문장은 놀라울 정도로 정밀한 인간 구조도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AC.52, 창1:26, ‘사람이 영적이면 그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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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AC.52

 

사람이 영적일 동안에는, 그의 다스림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그러나 사람이 천적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시편에서 자신을, 그리고 그분의 모양인 천적 인간을 이렇게 묘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So long as man is spiritual,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as is here sai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and does good from love, then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as the Lord, in David, describes himself, and thereby also the celestial man, who is his likeness: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6-8)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the flock and all cattle,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s,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th through the paths of the seas (Ps. 8:6–8).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짐승(beasts)이 언급되고, 그다음에 ‘(fowl), 그리고 그 뒤에 ‘바다의 물고기(the fish of the sea)가 언급됩니다. 이는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영적 인간과 다릅니다.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에는 이해력과 신앙에 속한 ‘물고기(fishes)와 ‘(fowl)가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 ‘짐승(beasts)이 언급됩니다. Here therefore “beasts” are first mentioned, and then “fowl,” and afterwards the “fish of the sea,” because the celestial man proceeds from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differing herein from the spiritual man, in describing whom “fishes” and “fowl” are first named, which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nd this to faith; and afterwards mention is made of “beasts.”

 

 

해설

 

이 글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다스림의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두 사람 모두 다스림을 받으며, 또한 다스림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 다스림이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향하는가’가 전혀 다릅니다. 이 차이가 바로 형상과 모양, 영적 상태와 천적 상태를 가르는 핵심 기준입니다.

 

영적 인간은 아직 겉 사람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이해력과 신앙을 통해 삶을 정돈해 갑니다. 그래서 먼저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다음에 사랑과 행위가 뒤따릅니다. 이 구조에서는 이해력에 속한 것들이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짐승’, 곧 의지와 애정의 영역이 나옵니다. 이 다스림은 위로 올라가려는 다스림이며, 질서를 세워 가는 다스림입니다.

 

그러나 이 다스림의 방향은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겉 사람에서 출발한다는 말은, 여전히 외적 사고와 분별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상태도 거듭남의 실제적이고 필수적인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를 낮추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다스림의 방향이 완전히 바뀝니다. 이제는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다스림이 흘러갑니다.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을 묘사할 때는 ‘짐승’, 곧 애정과 사랑의 영역이 가장 먼저 언급됩니다. 그다음에 ‘’, 그리고 마지막에 ‘물고기’가 나옵니다. 이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모든 것을 이끌고, 이해력과 지식은 그 사랑을 섬기는 위치에 놓였음을 뜻합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의 다스림이 ‘강압이나 통제가 아니라 질서’라는 사실입니다. 시편에서 말하듯, 만물이 ‘발 아래’ 놓인다는 표현은 억압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가장 낮은 것들까지도 사랑의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즉 감각, 습관, 기억, 일상의 행동까지도 사랑에서 흘러나온 방향에 맞게 움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통해 인간 삶의 근본 구조를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은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묻고, 천적 인간은 ‘무엇이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가’를 살아냅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에게는 분별과 훈련이 중요하고, 천적 인간에게는 일치와 평안이 특징이 됩니다.

 

결국 이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스림의 완성은, 이해력이 의지를 다스리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이 이해력을 밝히고 인도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닮음’, 곧 ‘모양’의 상태이며, 주님의 형상이 인간 안에서 가장 깊이 실현된 모습입니다.



 

인용구절 해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6-8)

 

이 시편은 문자적으로 보면 인간의 존엄성과 위엄을 노래하는 찬가입니다. 그러나 AC.52에서는 이 구절이 단순히 ‘인간 일반’이 아니라, ‘주님 자신과 그분의 닮음, 모양인 천적 인간’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다스림은 오직 사랑에서 나오며, 그 사랑의 근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셨다’는 말은, 주님께서 신적 사랑으로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움직이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발 아래 두셨다’는 표현은, 가장 낮은 차원의 것들조차 그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억압의 의미가 아니라, ‘완전한 조화’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나열 순서입니다. 시편에서는 먼저 양 떼와 가축, 곧 애정과 사랑에 해당하는 것들이 나오고, 그다음에 새와 물고기가 나옵니다. 이는 천적인 상태의 질서를 정확히 반영합니다. 사랑이 먼저 서고, 이해력과 지식은 그 사랑을 섬깁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의 다스림이며, 주님의 다스림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이 AC.52에서 인용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의 ‘다스림’이 단순한 인간 우월 선언이 아니라, ‘거듭남의 단계에 따른 내적 질서의 변화를 말하는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위로 향한 다스림이 필요하고, 천적 단계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다스림이 완성됩니다.

 

 

 

AC.51, 창1:26, 영적 인간은 ‘형상’(an image), 천적 인간은 ‘모양’(a likeness)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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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AC.51

 

형상(the image)에 대해 말하자면, 형상은 닮음(a likeness) 그 자체가 아니라 닮음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라고 말합니다. 영적 인간은 ‘형상(an image)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a likeness), 곧 닮음(similitude)입니다. 이 장에서는 영적 인간을, 다음 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룹니다. ‘형상(an image)인 영적 인간을 주님은 ‘빛의 아들(a son of l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As regards the “image,” an image is not a likeness, but is according to the likeness; it is therefore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The spiritual man is an “image,” and the celestial man a “likeness,” or similitude. In this chapter the spiritual man i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the celestial. The spiritual man, who is an “image,” is called by the Lord a “son of light,” as in John: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12:35, 36) 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 While ye have the light, believe in the light, that ye may be sons of light (John 12:35–36).

 

또한 ‘친구(a friend)라고도 하십니다. He is called also a “friend”: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5:14, 15) 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 (John 15:14–15).

 

그러나 ‘모양(a likeness), 곧 닮음인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a son of God)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But the celestial man, who is a “likeness,” is called a “son of God,” in John: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4)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12, 13)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who were born not of bloods,4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 (John 1:12–13).

 

4, 헬라어는 ἐξ αἱμάτων입니다. 아래 AC.374 [3]번 단락을 보세요. [편집자] The Greek is ex haimat¯on. See below, at n. 374[3]. [Revis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매우 정밀하게 분해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형상’과 ‘모양’을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의도적으로 구별합니다. 여기서 형상은 ‘닮아 가는 과정에 있는 상태’, 모양은 ‘완성된 일치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형상’대로 창조되지만, 곧바로 ‘모양’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이 구분은 인간의 거듭남 구조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주님을 닮아 가는 상태에 있고, 천적 인간은 사랑 자체가 되어 주님과 일치된 상태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인간은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크지만, 단절이 아니라 연속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형상’만 말하고, ‘모양’은 다음 단계로 남겨 둡니다. 이것은 인간이 처음부터 완성된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완성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생명이 온전히 흐르는 상태입니다.

 

이 글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 ‘각각 다른 호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인간은 ‘빛의 아들’, ‘친구’라 불리고,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립니다. 이 호칭들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관계의 깊이를 나타냅니다.

 

빛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 사람이 여전히 빛에 의해 인도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빛을 가지고 있지만, 그 빛은 여전히 위에서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라’, ‘걸으라’라는 표현이 함께 나옵니다. 이는 아직 ‘의식적 선택과 분별이 필요한 상태’임을 뜻합니다.

 

또한 영적 인간을 ‘친구’라 한다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친구란, 명령을 이해하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즉, 영적 인간은 주님의 뜻을 듣고 이해하며, 그것을 따라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 뜻과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구이지, 아들은 아닙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립니다. 여기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관계가 담겨 있습니다. 자녀, 곧 아들은 명령을 외부에서 받아 실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혈통이나 인간적 의지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랑의 근원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영적인 사람, 곧 영적 인간은 형상으로서 주님을 닮아 가는 중이며, 천적인 사람, 곧 천적 인간은 닮음으로서 주님과 일치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다른 인간 유형이 아니라, 거듭남의 서로 다른 깊이를 나타냅니다.



 

인용구절 해설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12:35, 36)

 

이 구절에서 ‘’은 진리이며, 더 정확히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조명’입니다. ‘어둠에 다닌다’는 것은 진리가 없는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영적 인간은 이미 빛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 빛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서 ‘믿으라’는 권면이 주어집니다. 이는 영적인 상태가 ‘지속적인 선택과 응답을 요구하는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빛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 사람이 빛으로부터 태어났고, 빛에 의해 살아가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빛은 ‘근원’이 아니라 ‘비춤’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5:14, 15)

 

여기서 ‘친구’라는 말은 단순한 친밀감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의식적 동의와 이해가 가능한 관계’를 뜻합니다. 주님은 더 이상 종처럼 명령만 내리지 않으시고, 뜻을 설명하시며, 그 뜻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세우십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뜻을 듣고, 이해하고,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뜻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것’입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12, 13)

 

이 구절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모든 자연적 근원들이 부정됩니다.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은 모두 배제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천적 인간이 더 이상 자기중심의 생명에서 살지 않음을 뜻합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 자체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와 그 사람의 본성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빛을 믿으라’는 권면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빛 안에 있으며, 빛과 함께 움직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닮음이라고도 하는 ‘모양’, 곧 주님의 형상과의 일치입니다.

 

 

정리하면, ‘형상은 길 위에 있는 상태이고, 모양은 그 길이 삶이 된 상태’입니다. AC.51은 이 차이를 성경 전체와 연결하여 가장 정교하게 설명하는 단락 중 하나입니다.

 

 

 

AC.52, 창1:26, ‘사람이 영적이면 그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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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창1:26, ‘우리의 형상'(the image of the Lord)의 속뜻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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