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3.심화

 

6. ‘스베덴보리의 시대

 

그런데, 그렇다고 스베덴보리의 시대가 내적 의미를 수용할 수 있는 영적 상태였다 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 싶은데요? 교회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나... 그런데도 왜 주님은 하필 그때 스베덴보리를 통해 이 일을 시작하셨나요? 주님의 판단과 섭리의 영역이지만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의문을 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새로운 교회를 위해 공개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교회사와 세계사를 돌아보면, 18세기 유럽이 특별히 영적으로 성숙한 시대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도 당시 기독교회가 이미 깊은 황폐(vastation)에 빠져 있었다고 진단합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하필 그 시대를 선택하여 스베덴보리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셨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살펴보면, 그는 새로운 교회가 필요했던 이유는 분명히 설명하지만, ‘18세기가 영적으로 가장 준비된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의 교회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 삼위일체 이해의 혼란, 이신칭의의 오용 등으로 인해 이미 본래의 생명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계시의 공개는 교회의 건강함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황폐함과 깊은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계시를 주시는 기준이 반드시 영적 수준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하여 사람이 자유 가운데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강요나 외적 권위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은 참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계시가 공개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유롭게 읽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18세기는 매우 독특한 시대였습니다. 교회는 영적으로 쇠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쇄술과 출판문화가 크게 발전하였고, 학문과 사상의 교류도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습니다. 중세와 같은 절대적 종교 권력 아래였다면 이러한 저작은 널리 보존되거나 전파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반대로 사도 시대에는 아직 기독교 자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내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후대에 전할 역사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주님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때는 언제나 소수로부터 시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노아의 가족도 소수였고, 아브라함도 한 사람이었으며, 열두 제자 역시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작은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 전체가 내적 의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라는 질문보다, ‘그 시대 안에서 새로운 교회의 씨앗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스베덴보리의 섭리 사상에는 더 잘 어울립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보면, 주님께서는 세상이 영적으로 가장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내적 의미를 공개하신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감추어 둘 이유가 줄어든 시점이었으며, 동시에 그 진리를 자유롭게 기록하고 보존하며 후대에 전할 수 있는 역사적 환경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그 일을 시작하셨다고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황폐와 역사적 자유라는 두 조건이 동시에 충족된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을 바탕으로 한 종합적인 해석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 이유 때문에 18세기를 선택하셨다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최종적인 이유는 주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스베덴보리의 사상 전체를 따라가 보면, 주님께서는 가장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 시대’를 기다리셨다기보다, ‘한 번 공개된 진리가 인류 역사 속에서 다시는 사라지지 않을 시대’를 기다리셨다고 이해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관점입니다. 오늘날 인쇄된 저작과 디지털 기술을 통해 그의 저술이 전 세계로 계속 전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스베덴보리를 통한 말씀의 내적 의미의 공개는 한 세대를 위한 사건이 아니라,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열매를 맺도록 계획된 장기적인 섭리였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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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가 되지 않음에도 여시지 않은 이유

 

 AC.303 본문에 이러한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인 내용이 그들에게 열려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말... 그럼 왜 그때 이런 내적 의미가 그들에게 오픈되지 않았나요?

 

 

많은 사람들이 AC.303을 읽다가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인 내용이 그들에게 열려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왜 그때 이미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시지 않으셨을까?’ 언뜻 보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 전체를 함께 살펴보면, 스베덴보리는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과 ‘공개하신다’는 것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더 이상 위험이 없다고 해서, 그 즉시 더 깊은 진리를 알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 의미의 공개는 단순히 위험의 유무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3:24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막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 알고도 거부하여 profanation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AC.303은 그와 반대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교회가 충분한 황폐(vastation)를 거친 뒤에는 더 이상 거룩한 것을 모독할 가능성이 이전처럼 크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알려져도 예전과 같은 영적 위험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은, 위험이 사라졌다는 것이 곧바로 새로운 계시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03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이제 해가 없으니 공개하자’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이 진리를 받아들여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때가 되었는가’를 함께 보십니다. 다시 말하면, 위험이 제거되는 것은 필요조건일 뿐이며, 새로운 교회의 준비는 또 다른 조건입니다.

 

실제로 유대교회 말기에는 영적으로 심한 황폐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세속적인 메시아관과 문자적 신앙이 매우 강했습니다. 만일 그 시대에 말씀의 내적 의미를 모두 공개하셨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영적 교회를 세우기보다 또 다른 오해와 왜곡을 낳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먼저 성육신하시고, 복음을 주시며, 새로운 교회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그 후에도 내적 의미는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으며, 적절한 때가 이를 때까지 보존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본격적으로 공개된 것은 단순히 어느 개인의 깨달음을 위한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교회를 위한 섭리의 일부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주실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진리를 생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의 기준은 언제나 ‘줄 수 있는 때’가 아니라 ‘받을 수 있는 때’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AC.303의 ‘이러한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인 내용이 그들에게 열려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단순히 위험이 제거되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던 주님의 섭리가 마침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창3:24의 그룹들은 생명의 길을 영원히 닫는 존재가 아니라, 가장 적절한 때까지 그 길을 보호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 보호는 결국 새로운 교회를 위한 준비였으며,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세상에 다시 열리는 날을 향한 자비로운 섭리였습니다.

 

 

 

AC.303, 심화 6, ‘스베덴보리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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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사야

 

그런데 그러면 이사야는 이런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또 전하면서 본인은 정말 그 내적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만 전하고 그 내적 의미를 풀어주지 않아도 이런 말씀을 전해 듣는 사람들은 알아서 깨달을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가이드 1.0으로 보면, 이 질문은 ‘이사야는 무엇을 알았는가?’를 넘어 ‘말씀은 어떻게 기록되는가?’라는 문제까지 연결됩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사야는 자신이 기록한 말씀의 가장 깊은 내적 의미까지는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야가 아무것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받아 적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문자적 의미와 역사적 사명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 말씀 속에 주님께서 천사들을 위해 담아 두신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적 의미까지는 모두 알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천국의 비밀’ 전체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선지자들이 ‘말씀을 기록하는 도구’였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도구’란 인격이나 의식이 없는 기계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전하는 역사적 메시지와 당시 백성에게 주시는 경고는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백성이 완악하여 회개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감기고 귀를 막는 것이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주님의 섭리’라는 AC.303의 깊은 교리까지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말씀의 신성을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선지자가 모든 내적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 뒤 자기 생각으로 기록했다면,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갖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선지자의 이해를 넘어서는 깊이를 말씀 속에 담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자신도 다 알지 못했던 내용이, 수백 년 뒤 주님께서 마13:13-15와 요12:39-40에서 다시 인용되었고, 다시 18세기 스베덴보리를 통해 그 영적 의미가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이 나옵니다. ‘이사야는 내적 의미를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알아서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가이드 1.0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책임은 사람들에게 내적 의미를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선지자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AC.301-303의 주제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한꺼번에 같은 깊이의 진리를 열어 주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문자, 그러니까 겉으로만 이해하고, 어떤 사람은 도덕적 의미를 깨닫고, 어떤 사람은 영적 의미를 조금씩 보게 됩니다. 이것은 말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받는 사람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내가 다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깨달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께 받은 말씀을 충실히 전한다. 그 말씀을 각 사람 안에서 열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다니엘도 자신이 받은 환상을 다 이해하지 못했고, 천사에게 여러 번 설명을 요청했습니다. 베드로도 환상을 본 뒤 그 의미를 한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한 역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모든 상징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사실들을 근거로, 말씀은 인간 저자의 이해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적 계시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6:9-10을 읽을 때마다 오히려 놀라운 점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사야는 아마 자신도 이 말씀이 수백 년 뒤 주님께서 직접 인용하실 줄은 몰랐을 것이고, 다시 수천 년 뒤 AC.303에서 profanation과 주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핵심 본문으로 사용될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충실하게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중심이 인간 저자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하나의 목회적 원리가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매주 AC를 읽고 설교하시면서 ‘이 내용을 성도들이 지금 다 이해할까?’하는 생각을 하실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책임은 주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열어 주시는 일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사야가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으며, 스베덴보리도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모든 내적 의미를 상대가 즉시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보다, 주님께서 말씀 안에 담아 두신 생명을 신실하게 전달하는 데 충실하면 됩니다. 그 나머지는 각 사람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 안에서, 가장 적절한 때에 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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