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어떤 수도사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강문호 목사님이 왜 수도원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에서 무엇을 인상 깊게 보았는지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강 목사님은 은퇴를 앞두고 기도하던 중 수도원의 영성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받았다고 이해했고, 그 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직접 찾아다니며 수도 전통을 공부했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곳이 그리스의 아토스산(Mount Athos)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토스산은 그리스 영토 안에 있으면서 특별한 자치권을 가진 정교회 수도 공동체이며, 현재 20개의 주요 수도원이 있습니다. 수도 전통은 적어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여성의 출입을 제한하는 ‘아바톤(avaton) 전통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키백과)

 

강 목사님은 아토스산을 ‘수도사들의 나라’처럼 묘사합니다. 표현 자체는 다소 과장될 수 있지만, 그곳이 일반적인 수도원 하나와 다른 독특한 공동체라는 점은 맞습니다. 아토스산은 하나의 반도 전체에 여러 수도원과 스케테, 은수처가 분포하며, 행정적으로도 자치적인 수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약 20개의 수도원이 존재하고, 천 명이 넘는 수도사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UNESCO도 아토스산을 오랜 정교회 수도 전통의 중심지로 소개합니다.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영상에서 강 목사님이 특히 놀라워하는 것은 ‘여성이 들어오지 않는 남성 수도 공동체가 천 년 넘게 유지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아토스산에는 여성의 출입을 금지하는 전통이 있으며, 이는 중세부터 제도화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위키백과)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즉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여성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외적 환경은 수도자의 정결을 돕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정결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음란과 욕망은 외부의 대상이 있기 때문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애정과 사랑의 질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전혀 없는 장소에서도 사람은 음란한 상상과 자기 사랑을 품을 수 있고, 반대로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도 주님으로부터 순결한 결혼애와 절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상에서 어떤 수도사가 ‘하와 한 명만 들어와도 이곳은 무너진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이야기는 수도 전통 안에서는 이해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성을 남성 수도자의 영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외적 위험 요소처럼 보는 순간, 인간 안의 욕망에 대한 책임이 외부 대상에게 옮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란의 근원은 ‘여자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순결은 여성을 보지 않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욕망의 대상으로 소유하려는 사랑이 변화되어 상대를 하나의 인격과 영적 존재로 존중하게 되는 데서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특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는 남녀의 차이를 창조질서 안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참된 결혼애를 천국의 가장 깊은 사랑 가운데 하나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성 자체를 영적 위험으로 이해하는 수도적 감수성과 스베덴보리의 결혼 이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수도자의 독신은 개인의 소명과 훈련이 될 수 있지만, 남녀의 결합 자체가 더 낮은 영적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결혼애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천국의 질서와 깊은 상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상에는 아토스산 수도사들이 죽으면 일정 기간 매장한 뒤 뼈를 다시 꺼내 납골당에 보존하는 관습도 소개됩니다. 이러한 관습은 실제 아토스산의 수도 전통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육체의 덧없음을 기억하고 죽은 수도사들을 공동체 안에서 계속 기억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인스타그램)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해골과 뼈는 인간의 참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는 영으로 계속 살아가며, 자연적 육체만 세상에 남습니다. 그러므로 수도자의 뼈를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도 언젠가 뼈가 된다’가 아니라 ‘내가 이 육체를 벗은 뒤에도 그대로 가지고 갈 사랑은 지금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강 목사님은 아토스산 수도자들의 모습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모습’으로 이해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상당히 귀한 면이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재물과 명예에서 거리를 두고 하나님께 집중하려는 삶은 우리 자신의 욕망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을 더 소유하고, 더 경험하고, 더 유명해질 것인가가 삶의 중심이 되기 쉽기 때문에, 그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살아가는 수도자의 모습은 사람에게 강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은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루 종일 기도하면서도 옆 사람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영적 수준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정죄한다면 그 기도는 아직 사랑과 결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생활 속에서 맡은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자신의 악을 피하는 사람은 외적으로 수도원에 살지 않아도 실제로 주님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아토스산의 수도 전통을 바라볼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외적 극단성을 영적 깊이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천 년 동안 여성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 수도사들이 평생 독신으로 산다는 사실, 죽은 뒤 뼈를 다시 거두어 납골당에 둔다는 사실, 세상과 단절된 산속에서 기도한다는 사실은 모두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의 영적 수준을 판단하는 기준은 이런 외적인 희생의 크기가 아닙니다. 그 안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실제로 얼마나 약해졌으며,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얼마나 자라났는가가 기준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떠나면서도 세상 사랑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수도원 안에서 재산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명예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은수자가 되면서도 ‘나는 특별한 수도자’라는 자기 의식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proprium의 매우 미세한 모습입니다. 반대로 큰 도시에서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며 살아도 자신의 재물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여기고, 정직하게 사용하며, 이웃을 위해 유용하게 쓴다면 그 사람의 자연적 삶 안에는 천국적인 질서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강 목사님 자신이 ‘한국 사람으로서 이곳을 밟은 최초의 사람’이라는 말을 수도원마다 들었다고 소개합니다. 이 부분은 영상 자체에서 단순한 여행 경험이나 놀라움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러한 종류의 경험에서도 아주 조용한 경계를 하나 세웁니다. 영적인 길에서 ‘내가 최초다’, ‘내가 특별한 곳에 갔다’, ‘나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영성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할수록 그것을 자기 특별함의 근거로 삼지 않도록 더 깊은 겸손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경험을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선한 쓰임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영적 질서에 맞습니다.

 

영상에서 언급되는 ‘성 뽀르피리오스’는 아마 현대 정교회에서 널리 존경받는 성 포르피리오스(St. Porphyrios)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강 목사님은 그의 수도생활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아토스산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어떤 수도자의 비범한 체험이나 영적 능력 자체보다, 그 삶을 통해 주님과 이웃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수도자의 신비한 체험을 동경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쉽게 특별한 현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실제로 보고 천사와 영들과 대화한 사람이었지만, 흥미롭게도 자신의 독자들에게 그런 체험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가장 안전한 길은 말씀을 읽고, 계명을 따라 악을 피하며, 자신의 직업과 관계 속에서 선한 쓰임을 행하는 것이라고 반복합니다. 영적 세계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연계에서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이런 점에서 수도사들의 신비 체험 역시 ‘어떻게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을까?’보다 ‘그 체험 때문에 그 사람은 더 겸손하고 더 선한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강 목사님은 영상 마지막에서 아토스산과 같은 수도 영성이 한국 교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소개하고 싶어 이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취지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의 전통에 익숙한 반면, 그보다 훨씬 오래된 동방교회의 수도 전통이나 초기 기독교의 금욕적 영성은 상대적으로 낯설기 때문입니다. 다른 기독교 전통을 접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전통이 오래되었다거나 낯설고 신비롭다는 이유로 자동적으로 더 깊은 영성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전통은 결국 말씀과 주님의 질서라는 기준 아래에서 분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수도원 영성이 한국 교회에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질문은 ‘우리도 수도원에 들어가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세상 사랑에 얼마나 붙들려 있는가?’일 것입니다. 수도자들이 재산과 명예와 결혼을 포기한 모습을 보며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나는 내가 가진 재산과 지위와 관계를 어떤 사랑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수도자의 외적 포기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형식이 아니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내려놓는 내적 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됩니다.

 

그리고 아토스산의 가장 깊은 영성을 스베덴보리식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며 사는 것’보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것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삶이어야 합니다.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더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토스산의 천 년 수도 전통과 철저한 금욕은 현대의 신앙인에게 강한 질문을 던지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참된 수도의 깊이는 얼마나 세상과 단절했는가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강 목사님이 감탄했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이라는 말을 조금 더 깊게 다듬는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을 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 모든 사람과 모든 쓰임을 주님의 질서 안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SY.65, 강문호 목사, ‘이영길 수도사’ (20191210)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이영길 수도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수도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전남 화순의 깊은 산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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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밝혀졌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그 교회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잉태와 출생 역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태고인들에게는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뭔가를 의미하게 하며, 그렇게 해서 계보를 구성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교회에 속한 것들은 서로 이런 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곧 자연적인 출생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도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는 교회에 속한 것들을 잉태(conceptions), ‘출생(births), ‘자손(offspring), ‘갓난아이(infants), ‘어린아이(little ones), ‘아들(sons), ‘(daughters), ‘청년(young men)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말씀의 예언적 부분에는 이와 같은 표현들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In the three foregoing chapters it has been sufficiently shown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so that it cannot be doubted, and this being admitted, it is evident that the conception and the birth effected by that church were of the nature we have indicated. It was customary with the most ancient people to give names, and by names to signify things, and thus frame a genealogy. For the things of the church are related to each other in this way, one being conceived and born of another, as in generation. Hence it is common in the Word to call things of the church “conceptions,” “births,” “offspring,” “infants,” “little ones,” “sons,” “daughters,” “young men,” and so on. The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abound in such expressions.

 

 

해설

 

AC.339는 앞으로 이어질 창4의 이름과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바로 앞 AC.338에서 스베덴보리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태고교회로, 그 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상태를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가 어떻게 ‘잉태’하고 ‘낳으며’, 신앙이나 교리가 어떻게 그 교회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39는 바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인들은 어떤 영적 실재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그것의 성질을 나타내며, 서로에게서 생겨나는 것들을 마치 부모와 자녀처럼 연결하여 계보를 구성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계보’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 족보와 성격이 다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태어나듯, 교회 안에서도 하나의 교리와 신앙의 모습이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고, 그것이 다시 또 다른 교리와 신앙의 모습을 낳습니다. 태고인들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발생과 파생의 관계를 ‘잉태’와 ‘출생’, ‘부모’와 ‘자녀’, 그리고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 점은 창4의 이름들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기 부분에 대해 제시한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가인과 아벨, 에녹과 이랏, 므후야엘과 므드사엘, 라멕 등을 오늘날의 역사책에 등장하는 개인들의 연속적인 가족사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이름들은 태고교회 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영적인 변화, 곧 교리와 신앙의 여러 모습에 붙여진 이름들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계보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 사람은 역사적으로 누구였는가?’가 아니라 ‘이 이름은 무엇을 나타내며, 이것은 앞의 것으로부터 어떻게 생겨났는가?’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실제 역사가 아니므로 단지 지어낸 비유일 뿐이다’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깊습니다. 역사적 인물들의 가족사를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들이 나타내는 영적 현실은 실제였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달라졌고, 하나의 교리가 다른 교리를 낳았으며, 어떤 교리는 점차 왜곡되어 여러 이단과 분파로 갈라졌습니다. 말씀은 이러한 실제적인 교회의 변화를 사람의 잉태와 출생, 이름과 계보라는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이 아닌 이야기에 영적인 뜻을 나중에 붙인 것’이라기보다, 영적인 사실을 이야기와 계보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잉태’와 ‘출생’이라는 표현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어떤 교리나 신앙의 모습은 아무런 원인 없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사람들의 내면에서 어떤 생각이나 원리가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점차 하나의 확고한 관점이 되며, 마침내 교리와 가르침으로 밖에 나타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이 잉태되어 자라다가 때가 되면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내적으로 어떤 새로운 생각과 원리가 형성되는 것은 ‘잉태’에, 그것이 교리와 삶의 형태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출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앞 AC.338의 ‘가인의 분리’에 적용하면 더욱 잘 이해됩니다. 태고교회에는 본래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새로운 원리가 ‘잉태’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리가 점차 확고해져 하나의 교리와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그것이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다시 말해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는 것은 한 여인이 한 남자아이를 출산했다는 역사적 사건을 속뜻으로 다시 해석한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어떤 새로운 교리적 흐름이 생겨나는 것을 출생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가인’은 다시 자기와 같은 성격의 것들을 낳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이 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한 번 자리 잡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원리를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또 다른 생각들이 생기고,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교리들이 파생되며, 그것들이 계속 갈라지면서 여러 이단과 분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오고,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계보가 이어지는 것은 단순히 여러 세대에 걸쳐 자손들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적 원리에서 다른 것들이 계속 파생되어 나가는 관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39는 우리가 앞서 창4와 창5를 읽으면서 중요하게 살펴본 문제에도 빛을 줍니다.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을 두 집안의 연대기처럼 놓고 ‘어느 집안이 먼저였는가?’, ‘가인 계열이 끝난 다음 셋 계열이 시작되었는가?’라고 읽으면 말씀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 계보들은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서로 다른 영적 흐름을 각각 보여 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나란히 이어진다’고 말할 때에도, 두 실제 가문이 역사적으로 같은 시기에 병존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서로 다른 교리와 신앙의 흐름을 말씀이 각각의 계보라는 형식으로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서 ‘잉태’, ‘출생’, ‘자손’, ‘갓난아이’, ‘어린아이’, ‘아들’, ‘’, ‘청년’ 같은 표현들을 열거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말씀에서 이러한 가족과 출생의 언어는 자연적인 가족관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가 어떻게 생겨나고 자라며, 서로 결합하여 또 다른 영적인 것을 낳는지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도 ‘잉태하다’, ‘낳다’, ‘아들’, ‘’, ‘자녀’ 같은 표현들이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자연적인 출생이 생명의 이어짐을 보여 주듯, 영적으로도 선과 진리, 또는 반대로 악과 거짓은 서로에게서 생겨나며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의 원리는 혼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으로 살아가면 그 진리에서 또 다른 선한 생각과 애정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다시 선한 말과 행동을 낳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거짓된 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그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이 필요해지고, 그것은 다시 다른 악과 거짓을 낳습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잉태하고 낳는’ 것입니다.

 

바로 이 원리가 가인의 계보를 무겁게 만듭니다. AC.338에서 살펴본 시작은 매우 작아 보였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핏 보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339는 우리에게 그 작은 원리가 혼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자손을 낳습니다. 하나의 분리가 또 다른 분리를 낳고, 하나의 교리적 왜곡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른 왜곡을 낳으며, 그렇게 이어지다 보면 처음에는 작았던 변화가 마침내 전혀 다른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의 계보는 단순히 과거 태고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각 사람 안에서도 이러한 ‘잉태’와 ‘출생’은 계속 일어납니다. 어떤 생각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고, 그 생각들은 애정과 행동으로 이어지며, 결국 하나의 삶의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도 날마다 어떤 ‘계보’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받아들인 하나의 진리가 내일의 선한 선택을 낳을 수도 있고, 오늘 허용한 하나의 거짓이 또 다른 자기 합리화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39는 창4의 낯선 이름들을 읽기 위한 단순한 사전 설명이 아닙니다. 앞으로 가인의 계보를 읽을 때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름을 보면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표현된 교리와 신앙의 모습을 보고, 출생을 보면서 생물학적 혈통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계보 전체를 통하여 하나의 영적 원리가 어떤 결과들을 계속 낳아 가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AC.339를 읽고 난 뒤 창4의 계보 앞에서 우리가 계속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일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부터 태어났으며, 또 무엇을 낳고 있는가?’ 이 질문을 붙들고 가인의 계보를 읽으면, 창4는 더 이상 낯선 고대 이름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독립하기 시작한 작은 변화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가 되고, 그 교리가 다시 다른 교리들을 낳으며, 마침내 교회 전체의 모습을 바꾸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영적 계보가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오늘 우리 안에서 어떤 생각과 사랑을 ‘잉태’하고 있으며, 그것이 장차 어떤 ‘자손’을 낳게 될 것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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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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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미 그 작은 변화가 장차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창4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 분리는 점점 깊어져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처음 그런 움직임이 나타났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막지 않으셨을까요? 아직 작은 싹에 불과했을 때 그 방향을 돌려놓으셨다면 그렇게 심각한 결과까지 가지 않았을 것처럼 보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방치’하신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주님의 섭리에서 주님은 인간이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사람이 돌이킬 수 있도록 진리를 보여 주십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을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에는 ‘막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막지 않으셨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유 가운데서만 사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생각과 의지를 직접 통제하여 사랑에서 벗어나는 생각 자체가 생길 수 없도록 하셨다면, 겉으로는 태고교회의 아름다운 질서가 계속 유지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유지되는 사랑은 더 이상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체어리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행동을 강제로 통제하여 선한 행동을 하게 할 수는 있지만, 강제로 이웃을 사랑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선한 행동을 하도록 프로그램된 인간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하는 인간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허용’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는 한, 그 자유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과 함께 그것을 거절할 가능성도 따라옵니다. 만일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 자체가 없다면 자유도 실제적인 자유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자유 가운데 잘못된 방향을 선택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허용’과 ‘방치’는 전혀 다릅니다. 방치는 ‘네 마음대로 하라’며 떠나는 것이지만, 주님의 허용 안에는 끊임없는 억제와 인도가 함께 있습니다. 사람이 악으로 향할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악이 가능한 한 더 멀리 진행되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호하시며, 그 사람이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허용은 무관심한 허용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가능한 한 생명 쪽으로 이끄시는 섭리 안에서의 허용입니다.

 

실제로 창4의 가인 이야기에서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가인의 분노가 일어나고 그의 안색이 변했을 때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4:7)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된 방향을 알고 계셨고, 그가 더 멀리 가기 전에 다시 선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셨습니다. AC.328에 따르면 체어리티는 신앙이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지만 않는다면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신앙을 버려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신앙을 다시 선과 체어리티에 연결하라’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기에서도 마지막 선택을 가인에게서 빼앗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려 할 때 그의 의지를 강제로 정지시키거나, 그가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마음을 조종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가 거듭남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을 보여 주시고, 진리로 깨우치시며, 악을 억제하시고, 양심을 통하여 경고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입니다. 속뜻으로 보면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다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를 주어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잘못된 상태에 있는 가인을 보호하신다는 것은 처음 읽을 때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AC.330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훗날 바로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것이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 자체가 완전히 없어져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방식과 다른 중요한 지점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면 그것을 통째로 없애 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잘못된 것 안에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가인으로 표현된 분리된 신앙은 잘못되었지만 ‘신앙’ 자체는 버리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랑에서 떼어 낸 신앙을 주님께서는 훗날 다시 체어리티와 연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실패 안에서도 다음 회복의 가능성을 남겨 두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창3부터 계속 나타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떨어졌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생명나무에 함부로 접근하여 더 깊은 모독에 빠지지 않도록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길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창4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을 때에도 신앙 자체를 없애지 않고 보존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태고교회의 옛 질서가 마침내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를 위한 리메인스를 보존하셨습니다. 인간은 계속 주님의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주님께서는 그때마다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으면서 남아 있는 것을 붙드시고 다음 구원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왜 주님께서는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왜 주님께서는 인간을 애초에 잘못 선택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대답은 ‘사랑’에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려면 주님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사랑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면서 선을 선택하는 자유만 남겨 두는 것은 실제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되, 그 자유가 파멸로 향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안에서 역사하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선을 향해 이끄십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적극적인 개입’보다 훨씬 더 깊고 섬세합니다. 눈앞에서 기적을 일으켜 잘못된 길을 강제로 차단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큰 섭리는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신의 자유와 이성으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서, 그 안에서 선한 애정을 일으키고 진리를 만나게 하며, 악의 결과를 통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고, 다시 돌아설 기회를 마련하며, 심지어 잘못된 선택 이후에도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에게는 때로 그것이 우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역사하시는 이러한 인도가 오히려 섭리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초신자의 눈으로 ‘주님께서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으면 안 되었을까?’라고 묻는 것은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다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주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인간이 더 이상 인간답게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할 수 없게 되는 방식으로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을 보여 주시고, 경고하시고, 억제하시고, 돌아올 길을 열어 두셨으며, 인간이 끝내 잘못 선택했을 때조차 그 실패 속에서 구원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셨습니다.

 

결국 ‘방치’와 ‘섭리’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방치는 인간을 내버려 두는 것이지만,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면서도 한순간도 그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가인이 될 자유까지 빼앗아 버리지는 않으셨지만, 가인이 다시 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도 끝까지 닫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길을 거절했을 때조차 다음 회복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한 번도 넘어지지 않도록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생명을 향해 일어설 수 있는 길을 끝까지 마련하시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분리를 허용하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방치하지 않으신 주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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