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3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인간의 자유를 혼동하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말은 많은 신자에게 깊은 위로와 확신을 주는 표현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므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실패와 죄를 경험하더라도 최종적으로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특히 자신의 연약함과 반복되는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신자들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사랑하신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인간의 부족함 때문에 자신의 구원 약속을 철회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에는 분명 귀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이후에 어떤 삶을 살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은 확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간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실제 상태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원을 과거 어느 시점에 획득한 영원한 자격으로 이해하면, 성경이 그토록 강조하는 회개와 거듭남, 끝까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구원의 본질이 아니라 부차적인 문제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먼저 이 명제를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흔히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고 부르는 교리를 가르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7장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완전히 또는 최종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끝까지 보존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된 신자도 심각한 죄에 빠지고 한동안 그 죄 가운데 머물 수 있으며, 그 결과 양심이 상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엄밀한 개혁주의 견인 교리는 ‘한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이후에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무조건적인 면죄부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반면 웨슬리안·알미니안 전통은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먼저 역사하지만 인간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을 거부하고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개신교 안에서도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관한 이해는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이 글에서 검토하려는 것은 이러한 교리적 차이를 무시한 채, ‘한번 구원받았으면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모든 것이 확정되었다’고 받아들이는 신앙적 통념입니다.

 

성경에서 영원한 구원의 확신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말씀은 요한복음 10장 28절로 29절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며 그들을 자신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 역시 사망이나 생명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들은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능력이 인간의 연약함이나 세상의 위협보다 무한히 크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같은 요한복음 10장 27절에서 자신의 양들이 자신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15장 4절로 6절에서는 자신 안에 거하라고 명하시며,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양들을 지키시는 능력과 그 양들이 실제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상태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진리와, 사람이 주님을 떠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문제는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6장 4절로 6절과 10장 26절로 29절에는 한때 영적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도 의도적으로 진리를 거스르고 악으로 돌아설 때 발생하는 심각한 위험이 경고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20절로 22절 역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사람이 다시 그것에 얽매이는 상태를 경고합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러한 본문들을 참된 중생자의 구원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외적으로 신앙에 참여했으나 참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 관한 경고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반면 다른 개신교 전통에서는 실제 신자에게도 배교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이처럼 해석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어느 입장에서든 성경의 경고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약속은 회개와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허가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구원의 의미 자체가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는 주님의 섭리가 지향하는 목적이 인간의 구원이며, 인간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개혁되고 거듭나야 한다고 설명합니다(DP.71, 82–86). 여기서 구원이란 단순히 인간의 이름이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의 명단에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 의해 변화되고,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며, 거짓을 즐기던 사람이 진리를 기뻐하는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내면에서 실제로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여 강제로 천국의 생명을 주입하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자유롭게 받아들이지 않은 사랑은 그 사람 자신의 사랑이 될 수 없고, 이해를 거치지 않은 진리는 그 사람의 생명과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부여하시는 외적인 신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한번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인간이 거부할 수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결코 인간에 대한 구원의 뜻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주님은 모든 사람을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와 합리성은 구원의 첫 순간에만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 전체에서 존중되어야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한때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행하기 시작했더라도, 이후 자신의 자유로 악을 사랑하고 진리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통해 주님의 인도를 거스르는 방향을 선택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DP.100–128).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분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구원을 단번에 획득한 뒤 잃어버릴 수 있는 물건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명제가 구원을 영구적인 소유물처럼 이해하는 위험을 지닌다면, 반대로 ‘죄를 지을 때마다 구원을 잃었다가 회개하면 다시 얻는다’는 생각 역시 구원의 본질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에 구원을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으며 그 사랑이 어떠한 삶을 만들어 내고 있느냐입니다. 사람이 악을 행했다고 해서 그 순간 곧바로 모든 영적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며, 그 과정에는 수많은 시험과 넘어짐, 회개와 회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복되는 연약함 때문에 자신의 구원이 매번 취소되는 것처럼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과거의 신앙고백 하나만을 근거로 자신의 현재 삶을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에 나타나는 지배적인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은 뒤에도 지상에서 형성한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지니고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HH.476). 특히 HH.477에서는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계속되며, 그 사랑이 그의 영원한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지배적인 사랑이란 그 사람이 일시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나 특정한 순간의 생각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삶 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자신만을 사랑하고 이웃을 지배하며 해치는 것을 즐거워한다면, 그 사람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신앙고백의 내용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많은 실패와 연약함이 있더라도 악을 죄로 여기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선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전혀 다른 내적 생명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은 단순히 어느 날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이루어 가신 생명이 실제로 어떤 사랑으로 자리 잡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표현 자체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취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유효하다고 선언하신 구원을 인간의 잘못 때문에 나중에 철회하시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기로 하셨다가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뜻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내적 상태입니다. 마치 태양이 끊임없이 빛과 열을 보내지만 창문을 닫거나 빛을 가리는 쪽으로 돌아서면 그 빛과 열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비유가 인간의 자유와 구원의 신비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께서 사랑을 거두시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사랑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생명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적절한 질문은 ‘한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생명을 사람이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신자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반복적인 죄와 악한 습관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에게 ‘한번 구원받았으니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만 말한다면,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실제로 악을 멀리하도록 돕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계속 그렇게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는다’고만 말한다면, 그는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구원 상태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쪽도 충분한 목회적 돌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다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자신의 악을 정직하게 살피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의 힘으로 조금씩 그 악에서 벗어나십시오’라고 권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주님의 사랑을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회개와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진리는 우리가 그분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따르도록 격려하는 말씀이어야지, 그 손길을 외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보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명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이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실패 때문에 사랑을 거두시는 분이 아니며, 한때 죄에 빠졌다고 해서 돌아오는 사람을 거절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인간이 이후에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살든 그 내적 상태와 관계없이 천국의 생명을 영원히 보장받았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구원을 지나치게 외적인 것으로 이해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단지 우리가 죽은 뒤 천국이라는 장소에 들어가도록 허락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천국의 생명을 이루시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확신은 과거에 어떤 종교적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에만 근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그 사랑에 응답하여 살아가는 데서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이미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구원의 자격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구원하고 계시는 주님 자신입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명제에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귀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신앙고백이나 회심 경험만으로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영원한 구원이 확정된다고 이해한다면 오류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구원은 인간의 내면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져 거듭남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인간의 자유와 그 안에서 형성되는 지배적인 사랑을 제외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지만,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주님께서 구원을 취소하시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구원하시는 생명을 실제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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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 짧은 문장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교회론적 명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틴어로는 ‘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3세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와 관련하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명제는 본래 교회의 일치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강조하는 신학적 맥락에서 발전했지만, 역사 속에서는 종종 눈에 보이는 교회 조직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배타적인 주장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천주교회의 입장에서 이 말은 단순한 신앙적 구호가 아닙니다. 교회가 구원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 교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교리적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명제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즉각적인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가 아닌 개신교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 다른 종교 안에서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 심지어 교회를 알면서도 그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여 떠난 사람들은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라는 제도에 속하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단순히 천주교의 배타성을 비판하는 문제를 넘어, 우리가 교회와 구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먼저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날 천주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공식 해석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846항은 이 명제를 긍정적인 형태로 다시 설명하면서, 모든 구원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온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제847항은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은총의 도움을 받아 양심을 따라 그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들도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밝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제14항과 제16항 역시 이러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다만 천주교회가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필요한 교회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 교회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거나 그 안에 머물기를 거부한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공식 입장은 무조건적인 제도적 배타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과 가톨릭교회의 구원적 필요성을 동시에 주장하는 구조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상대방이 실제로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먼저 만들어 놓고 비판하는 것은 진리를 분별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신학적 질문이 생깁니다. 천주교회가 자기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구원이 궁극적으로 가톨릭교회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과, 그 구원이 반드시 하나의 역사적 교회 제도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동일한 명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주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특정 교회 조직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교회의 제도적 유일성으로 옮겨 놓을 때, 구원의 근원과 구원을 전달하도록 맡겨진 수단이 서로 혼동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가 말씀을 보존하고 주님을 증언하며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곧 교회가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독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참으로 주님의 교회라면, 교회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 묶어 두기보다 주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치는 교회 자체의 권위가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얼마나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에서 매우 분명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는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고,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견해를 소개한 뒤, 그러한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주님의 자비가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주님의 자비가 모든 개인에게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특정한 종교권에서 태어나게 하셨다는 이유로 구원에서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태어난 나라와 시대, 부모의 종교와 문화, 복음을 접할 수 있었던 환경은 인간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적 조건이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면 주님의 사랑과 공의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역사적 우연에 종속되고 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의 본성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의 본질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을 직접 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가진 종교와 양심을 통하여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선하게 살아갈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똑같이 참되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종교적 환경에 놓였든 주님의 구원하시는 섭리가 그 사람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HH.318 해설)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HH.308과 HH.328에서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주님의 교회는 말씀을 소유하고 주님을 명시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종교 안에서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에 속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의 역할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교회는 인체의 심장과 폐에 해당하고,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인체의 여러 기관과 지체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심장과 폐가 온몸의 생명 유지에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듯, 말씀이 있는 교회도 인류 전체의 영적 생명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비유 때문에 어느 한 기관도 몸 전체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심장이 중요하다고 해서 손과 발이 몸 밖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폐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해서 다른 모든 기관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몸과 같으며, 각 부분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따라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다면, 참된 교회가 주님의 사랑과 진리의 생명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공동체라는 의미에서는 일정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특정한 역사적 조직과 동일시하는 순간, 그 명제는 주님의 보편적 구원 섭리를 좁히는 오류로 변할 수 있습니다. (HH.308, 328 해설)

 

이 문제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032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지닌 모든 사람과 결합하시며, 여기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포함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그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 교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구원을 부정하는 경향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신앙 지식을 구원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그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교리적 명칭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그 사람 안에 실제로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그 방향을 발견하고, 진리는 선을 통하여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잘못 없이 더 밝은 진리를 배우지 못한 경우, 주님께서는 그가 알고 있는 진리와 선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를 이끄실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이러한 인도는 계속됩니다. HH.321–325는 다른 종교권 출신의 사람들이 사후에 주님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고, 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구원은 특정 종교의 이름을 붙이는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사랑이 진리를 받아들여 주님과 결합하는 과정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천주교나 개신교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AC.1032, HH.321–325 해설)

 

그렇다고 해서 이 가르침을 ‘선하게만 살면 어느 종교를 믿든 상관없이 모두 천국에 간다’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비롯되며,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주님의 생명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외적 친절이나 자선행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어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내적 삶의 성향입니다. 따라서 종교 밖에 있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은 선과 악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며, 구원의 기준이 느슨해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종교적 소속보다 인간의 내적 삶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은 더 많은 진리를 배울 기회를 얻은 만큼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할 책임도 커집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판단받으며, 주님께서는 그가 처했던 환경과 알 수 있었던 진리,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반응을 온전히 아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할 수 없지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를 어떻게 살아 내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저 사람은 우리 교회 밖에 있으므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쪽 모두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 곧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또한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접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러한 구원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관련하여 이해하고, 가톨릭교회 안에 구원의 수단들이 온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교회를 처음부터 전 인류에 걸친 영적 실재로 이해하며, 교회에 속한다는 것의 본질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데서 찾습니다. 이 차이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역사적 교회와 그 성사적 질서가 구원론에서 본질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반면, 스베덴보리에게는 주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결합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아는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은 구원의 독점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섬기는 영적인 쓰임입니다. 따라서 두 입장의 차이는 단순히 ‘천주교는 배타적이고, 스베덴보리는 포용적이다’라는 정도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교회의 본질을 어디에 두고,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제도적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섬기는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구원이 교회의 제도적 질서를 통해서만 완성된다고 보는 것인지, 바로 이 문제가 핵심입니다.

 

이제 우리는 처음의 명제로 돌아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 말은 ‘주님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시며, 누구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없이 천국의 행복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참된 교회가 주님과 결합한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영적 공동체라는 의미에서도,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특정한 역사적 교회 조직의 회원 자격이나 제도적 권위에 종속시키는 순간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의 조직보다 크고,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설정한 종교적 경계보다 넓으며,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구원의 경로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거나 교리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진리를 배운 사람일수록 그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하며, 교회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돕는 거룩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너는 어느 교회에 속해 있었느냐?’라는 외적 소속의 확인이 아니라, ‘너는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준 진리를 사랑하였으며, 그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살아왔느냐?’라는 내적 삶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 마지막 질문은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오늘의 신앙생활에 적용하여 표현한 것이며, 주님의 실제 심판을 인간의 언어로 단순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의 구원을 판정할 권위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겸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교회의 참된 목적을 발견합니다. 교회는 구원의 문을 자기 소유로 선언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주님을 증언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의 참된 핵심은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데 있으며, 그 구원을 특정한 교회 제도에 대한 소속으로 제한하는 것은 주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교회의 영적 본질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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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하나의 기도문에 가두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영접기도’만큼 익숙하면서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은 기도는 흔치 않습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설명한 뒤 상대방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겠느냐고 묻고, 상대방이 동의하면 정해진 기도문을 한 문장씩 따라 하도록 인도합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저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기도가 끝나면 전도자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축하하며, 때로는 그날의 날짜를 기록해 두라고 권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자체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본래 주님께 나아가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기도가 어느새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특정한 기도문을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을까요?

 

먼저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 널리 사용하는 영접기도, 곧 ‘죄인의 기도’(Sinner's Prayer)는 초대교회부터 동일한 형식으로 전해 내려온 기도가 아닙니다. 회개와 신앙고백의 전통은 초기 기독교부터 존재했지만, 전도집회에서 결신을 요청하고 일정한 기도문을 따라 하도록 하는 방식은 근대 부흥운동과 복음전도 문화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특히 19세기 이후의 부흥집회와 20세기 대중전도 활동을 거치면서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모든 개신교 교단이 영접기도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개신교 신학자와 목회자도 기도문을 따라 하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검토하려는 것은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라기보다, 특정한 전도 방식이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신자들의 의식 속에 사실상 구원의 필수 절차처럼 자리 잡은 현상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도행전 2장 37, 38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자,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사도행전 16장 30, 31절에서 빌립보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대답합니다. 로마서 10장 9, 10절 역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어디에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문장으로 영접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성경은 회개와 믿음, 주님을 향한 고백과 삶의 변화를 가르치지만, 구원을 특정한 기도문을 암송하거나 따라 말하는 행위에 결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접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조건을 인간이 덧붙이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살펴볼 본문은 누가복음 23장 39–43절에 등장하는 십자가 위의 강도입니다. 그는 전도자의 안내를 받아 영접기도를 드리지 않았고, 교회의 정식 절차를 거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낙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본문은 구원을 받기 위해 정해진 기도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반대편 극단으로 넘어가, 죽기 직전 몇 마디 고백만 하면 그 사람의 실제 내적 상태와 관계없이 구원이 자동으로 확정된다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강도의 내면을 아셨지만,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강도의 짧은 고백 안에 어떤 참된 회개와 신뢰가 있었는지 그 깊이를 완전히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의 핵심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구원 공식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절차에 갇히지 않으시며, 그 사람의 실제 내면을 아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는 이 문제를 더 깊은 차원에서 조명합니다. 그는 구원하는 신앙이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라고 설명하며(TCR.337), 사람이 주님께 나아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갈 때 신앙이 형성된다고 가르칩니다(TCR.343–348). 여기에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시작이며,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는 것은 그 시작을 밝히는 과정이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배운 진리가 인간의 생명과 결합되는 과정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나머지와 완전히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영접기도는 주님께 나아가는 마음을 표현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문을 따라 말한 사실 자체가 참된 믿음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입술로 주님을 부르면서도 실제 의지로는 여전히 악을 사랑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아직 기독교 언어와 기도 형식을 배우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아는 진리에 충실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 신앙 형식 자체보다 그 형식을 통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스베덴보리의 회개론에서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는 TCR.510–511에서 회개를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는 첫 번째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16–519에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회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TCR.528–531에서는 실제적인 회개란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기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죄책감이나 종교적 감정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며,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 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기도는 결코 불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일은 회개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참된 의미는 정해진 문장을 정확히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삶을 실제로 주님께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입술의 고백과 생명의 회개를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영접기도를 한 번도 드리지 않은 사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의 구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이 전통적인 배타적 구원 이해와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328에서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도 자신의 종교에 따라 선하게 살고,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신성, 그러니까 신적인 것을 인정하며, 양심에 따라 살아간다면 천국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친다거나, 주님을 믿는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는다면 그 역시 주님에 의해 구원받습니다. 다만 지상에서 특정 종교에 속했는지, 특정 기도문을 사용했는지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자동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섭리는 인간이 태어난 시대와 지역, 종교적 환경이라는 외적 조건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역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접기도가 무의식 속에서 교리화될 때 발생하는 또 하나의 문제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교회가 정해 놓은 절차를 통과해야만 작동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아직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믿거나,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은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한다면, 이미 구원을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보다 인간의 종교적 형식에 더 강하게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마련한 형식에 의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과 진리의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하시며, 각 사람이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와, 진리를 알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서로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차이를 모두 아십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구원을 판단할 때 단지 영접기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보시는 인간 내면의 깊이를 외적인 한 가지 사실로 축소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영접기도를 없애야 한다거나 전도 현장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진지하게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용서와 인도를 구하도록 돕는 것은 얼마든지 유익합니다. 처음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요청한다면, 목회자가 함께 기도문을 만들어 주거나 한 문장씩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기도 자체가 아니라 기도에 부여하는 의미입니다. 기도가 끝난 뒤 ‘이제 영접기도를 했으니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과, ‘이제 주님께 마음을 열었으니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해 갑시다’라고 권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기도라는 사건을 구원의 완성처럼 받아들이게 만들 위험이 있지만, 후자는 기도를 거듭남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전도와 목회의 목적은 사람에게 어떤 종교적 절차를 완료했다는 안도감을 주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것은 기도의 중요성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이해입니다. 주님께 나아가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구원을 간구하는 일은 분명히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행위가 하나의 필수적인 종교 형식으로 절대화될 때, 우리는 그 형식이 본래 가리키던 실체를 놓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입술에서 특정한 기도문이 한 번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삶이 실제로 그분을 향해 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부르시며, 각 사람이 자신의 형편과 이해의 수준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듭남의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영접기도를 했는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지금도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내 입술의 기도가 내 의지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가? 내가 고백한 주님께서 실제로 내 삶의 주님이 되어 가고 계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구원의 본질은 인간이 어떤 기도문을 완성했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영접기도는 주님께 나아가고 믿음을 고백하는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성경적 절차는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그 구원은 믿음과 회개, 체어리티와 거듭남을 통해 인간의 실제 생명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기도문을 사용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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