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30 심화

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1:6은 읽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말씀입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표현은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온몸이 상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어 상처와 타박상과 새로 생긴 종기가 등장하고, 그것들을 짜내거나 싸매거나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431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설명합니다.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 신체적 상처의 묘사가 라멕의 영적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연결을 이해하려면 먼저 라멕의 말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라멕은 사람을 죽였고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AC.42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431에서는 사람에게 연결된 상처가 신앙의 황폐를, 어린아이에게 연결된 타박상이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라멕의 말에서 상처는 단순히 살인을 저지른 뒤 자신이 입은 육체적 부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이러한 상태를 더 넓은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상처가 한 곳에만 있다면 몸의 다른 부분은 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읽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발바닥과 머리의 개별 상응을 새로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몸 전체에 성한 곳이 없다는 묘사가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얼마나 심각한 상태로 나타내는지 살펴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상처’, ‘타박상’, ‘종기를 구별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상처를 신앙에, 타박상을 체어리티에, 종기를 그 둘 모두에 연결합니다. 우리 눈에는 모두 몸이 상한 모습을 나타내는 비슷한 말로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들이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을 알면 이사야의 말씀이 단순히 고통스러운 장면을 반복해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함께 나타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한 곳이 없다는 말을 읽는 우리는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요? 우선 이것을 자신이 겪는 모든 신앙의 흔들림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하거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는 경험이 곧 라멕의 황폐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431은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와 그 상태를 설명하는 말씀의 표현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연약함을 이 본문만으로 최종 판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상처를 싸매거나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AC.431이 그 상태의 회복 가능성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번호에서 상처와 타박상과 종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밝힙니다.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혹은 특정한 상태가 회복될 수 있는지에 관한 판단은 이번 번호의 직접적인 설명과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황폐의 심각성을 충분히 받아들이되, 본문이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덧붙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말씀은 AC.431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보여 주는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라멕의 상처타박상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나타내며, 이사야의 종기는 그 둘 모두에 관해 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따로 떼어 놓은 채 교회의 온전함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AC.431 심화 1)

 

 

 

AC.431, 창4:23, ‘상처와 타박상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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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4:23)

 

AC.431

상처(wound) 타박상(bruise) 이상 성한 곳이 없음을 뜻하고, 상처(wound) 신앙이 황폐해졌음을, 타박상(bruise) 체어리티가 황폐해졌음을 뜻한다는 사실은 상처 사람(man) 관해, 타박상 어린아이(little one) 관해 쓰였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신앙의 황폐와 체어리티의 황폐는 이사야에서도 같은 표현들로 묘사됩니다. That by awoundand abruiseis signified that there was soundness no longer, by awoundthat faith was desolated, and by abruisethat charity was devastat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woundis predicated of aman,andbruiseof alittle one.The desolation of faith and the vastation of charity are described in the same terms in Isaiah: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1:6) From the sole of the foot even unto the head there is no soundness in it; but wound and bruise and a fresh sore they have not been pressed out, neither bound up, neither mollified with oil. (Isa. 1:6)

 

말씀에서 상처(wound) 황폐해진 신앙에 관해, 타박상(bruise) 황폐해진 체어리티에 관해, 종기(sore) 모두에 관해 쓰였습니다. In this passagewoundis predicated of faith desolated, “bruiseof charity devastated, andsoreof both.

 

해설

AC.431은 라멕이 내가 사람을 죽여 내게 상처를 입혔고, 어린아이를 죽여 내게 해를 입혔다고 한 말의 마지막 부분을 설명합니다. 앞의 AC.429에서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는 근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두 표현에 각각 연결된 상처타박상의 의미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표현이 더 이상 성한 곳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며,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어 하나만 떼어 놓고 의미를 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상처사람에 관해 쓰였고, ‘타박상어린아이에 관해 쓰였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앞에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으므로, 그들에게 연결된 상처와 타박상도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의 속뜻을 이해할 때 개별 표현뿐 아니라 표현들 사이의 관계도 함께 살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1: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고 상처와 타박상과 새로 생긴 종기뿐인 모습을 묘사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온몸이 상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가 묘사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인용은 라멕의 말에 나오는 상처와 타박상이 단순한 육체적 부상을 넘어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 세 표현은 서로 구별됩니다. ‘상처는 황폐해진 신앙을, ‘타박상은 황폐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종기는 신앙과 체어리티 둘 모두에 관해 쓰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비슷해 보이는 상처의 표현들을 하나의 뜻으로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서로 다른 표현이 사용된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미의 구별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세 상처가 실제로 어떤 순서로 발생하는지, 각각 어떤 구체적인 악이나 거짓에 대응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이사야의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상처가 한 부분에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에 성한 곳이 없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용하면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고백을 단순히 신앙의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체어리티가 잠시 약해진 상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427에서도 그는 상처와 타박상이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상처들을 짜내지도, 싸매지도,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다고 이어집니다. 이러한 표현은 상처가 돌봄을 받지 못한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AC.431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풀이하는 것은 상처와 타박상과 종기의 의미입니다. 짜내는 일이나 싸매는 일, 기름을 바르는 일의 개별 속뜻까지 이 번호에서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표현들을 곧바로 특정한 회복 과정에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우선 이사야가 묘사하는 상처의 심각성을 함께 읽는 것이 원문에 충실합니다.

 

이번 번호를 읽을 때 황폐와 일상적인 영적 연약함을 구별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거나 이웃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31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 곧 신앙과 체어리티에 더 이상 성한 곳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말씀을 자신의 모든 부족함에 즉시 적용하여 회복할 수 없는 상태라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특히 AC.431은 황폐의 의미를 밝히는 번호이지, 어떤 개인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번호가 아닙니다.

 

결국 AC.431은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상처타박상이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바탕으로 두 상처를 구별하고, 1:6에서 같은 표현들이 사용된 사실을 통해 그 해석을 확인합니다. 이사야의 성한 곳이 없다는 말씀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가 교회의 영적 온전함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AC.431 해설)

 

심화

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1 심화 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0 심화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1:6은 읽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말씀입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표현은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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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창4:24, ‘라멕의 일흔일곱 배 보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2-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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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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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3. 주님은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되었다고 말하며, 그분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아이라고 불리시는 이유를 주님이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살펴본 어린아이의 의미를 주님 자신에게 연결합니다.

 

우리가 아이라는 말을 들을 때 흔히 떠올리는 것은 작고 연약하며 아직 자라는 중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아이로 불리시는 이유를 미숙함이나 부족함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주님을 아이라고 부르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어린아이의 외적인 모습뿐 아니라 그 표현이 나타내는 순진무구와 사랑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 점은 같은 구절에 나오는 주님의 이름들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이로 불리시는 분이 동시에 기묘자와 모사, 하나님과 용사,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이라고 불리십니다. 그러므로 아이라는 표현이 주님의 신적 능력이나 지혜를 낮추는 말일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했습니다. 마지막에 주님 자신을 아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인용한 것은 이러한 의미를 주님께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진무구와 사랑을 설명하는 표현이 주님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이 이번 번호의 마지막 논거가 됩니다.

 

이것은 눅18:15, 17을 읽을 때에도 도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AC.430의 흐름에서 이 말씀을 읽으면,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를 단순히 나이가 어리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어린아이의 속뜻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이며, 주님은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며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그리워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번 번호가 밝히는 순진무구와 사랑의 의미를 주님 자신에게 연결하여 생각하는 일입니다. 다만 AC.430은 주님의 탄생과 신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주님이 아이라고 불리시는 이유를 순진무구 자체와 사랑 자체라는 두 표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AC.430의 마지막 인용은 어린아이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내며, 주님께서는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아이라고 불리십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아기에 관한 말씀은 어린아이의 속뜻이 단순한 연령이나 외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AC.430 심화 3)

 

 

 

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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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 심화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는 그 단계들을 ‘젖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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