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인(Cain)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합니다.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offering not being looked to) 것은 앞에서와 같이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었음을 상징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그의 안색이 변했다(Cains anger being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alling) 것은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합니다. 분노(anger)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하고, 안색(faces) 내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그것들이 변할 안색이 떨어졌다(fall) 말합니다. ByCain,as has been stated,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such a doctrine as admits of the possibility of this separation; by hisoffering not being looked tois signified as before that his worship was unacceptable. ByCains anger being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alling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Byangeris denoted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by thefaces,the interiors, which are said tofallwhen they are changed.

 

 

해설

 

AC.355부터 창4:5의 속뜻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앞의 AC.346-354에서는 가인과 아벨이 각각 무엇을 드렸으며, 왜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여지고,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말씀의 초점은 ‘ 결과 가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감정적 분노가 아니라, 교회의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과정으로 읽습니다.

 

먼저 ‘가인’에 대한 정의가 조금 더 정밀해졌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상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도 상징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이 사랑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상태를 넘어,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도 참된 신앙일 있다’고 교리적으로 인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처음부터 가인이 극단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AC.347에서는 처음에는 가인이라 불리는 교리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에서 지금처럼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작은 구별이 점차 실제적인 분리가 되고, 이제는 그 분리 자체를 하나의 교리로 인정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따라서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AC.349에서 ‘제물’은 예배를 상징한다고 했으므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는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예배의 형식을 갖추고 있어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생명이 없다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가인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스베덴보리는 이 ‘분노’를 단순히 기분이 상했다거나 질투했다는 자연적인 감정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분노는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인 이야기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왜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나타낼까요? 체어리티가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웃의 선을 기뻐하고 그의 선을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사랑보다 높이고, 자신의 교리적 위치를 지키려 할 때, 체어리티는 점점 설 자리를 잃습니다. 특히 자신의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벨의 예배는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가인이 아벨을 향하여 분노한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이제 그것을 적대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몹시’라는 표현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분리는 이제 단순한 개념상의 구별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뒤, 체어리티를 불편하게 여기고, 마침내 그것을 향해 분노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처음에는 ‘신앙도 사랑과 별개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아닌가?’라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했지만, 그 질서가 계속 뒤집히자, 이제 사랑과 체어리티 자체가 신앙의 자기주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안색이 변했다’는 말씀은 이 변화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나타냅니다. 영어 원문은 ‘his faces falling’, 문자적으로는 ‘그의 얼굴들이 떨어졌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얼굴(faces)을 인간의 ‘내적인 것들’로 해석합니다. 얼굴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애정과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기뻐하면 얼굴이 밝아지고, 슬프거나 분노하면 얼굴이 달라지는 것처럼 얼굴은 내적 상태의 외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가인이 화난 표정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의 관계에 관한 교리적 변화로 시작했지만, 이제 그 잘못된 질서가 인간의 내면 자체를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흐름을 AC.338부터 연결해서 보면 가인의 타락 과정이 상당히 선명하게 보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합니다. 그다음 신앙이 사랑에서 점차 분리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집니다. 그러자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가 나오고, 이제 그 결과로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내적인 것들까지 변합니다. 이후에는 결국 아벨을 죽이는 단계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영적 파국이 아닙니다. AC.355는 그 직전의 내적 과정을 보여 줍니다. 먼저 질서가 생각과 교리에서 뒤집히고, 그 뒤 애정이 변하며, 마침내 삶의 행위로 나타납니다. 잘못된 교리가 단순히 머릿속의 잘못된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면 인간의 애정과 의지까지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는 것은 단지 신학 시험에서 답 하나를 틀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바른 교리를 믿고 있으므로 어떻게 살아가든 신앙 자체는 온전하다’는 생각이 굳어지면, 처음에는 작은 교리적 분리처럼 보여도 점차 삶과 애정의 질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옳음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오히려 방해물처럼 여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분노를 돌아볼 때 AC.355는 날카로운 기준을 제공합니다. 물론 모든 분노가 곧 체어리티의 상실이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악과 불의에 대한 의로운 분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 신앙과 교리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선이 오히려 인정받기 때문에’, ‘내가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분노라면 그 안에 가인의 상태가 들어오고 있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의 분노에서 특히 두려운 것은 그가 여전히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예배를 폐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그 종교성 안에서 체어리티가 떠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외적 종교생활이 계속된다는 사실만으로 내적 상태가 안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진리를 말하고,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체어리티가 떠날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비극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핍니다. 내가 진리를 더 알게 될수록 이웃을 더 사랑하는가, 더 자비로워지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할 수 있는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낮아질 수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는 주님의 선과 결합하고 있다면 사람의 내적인 것들도 점차 주님을 향해 열립니다.

 

결국 AC.355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분노’보다 그 뒤에 있는 ‘내적인 것들의 변화’입니다. 가인의 얼굴이 변하기 전에 그의 내면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면이 변한 근본 이유는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가 교리로 굳어지며, 그 교리에서 예배하고,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향하여 분노하게 될 때, 인간의 내적인 얼굴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AC.355는 가인의 타락이 본격적으로 외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직전의 결정적인 지점을 보여 줍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중립적인 상태로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체어리티가 떠나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합니다. 그리고 다음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내면이 변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주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돌이킬 길을 열어 두고 계심을 이후의 글에서 살펴볼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 ‘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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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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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는 아벨(Abel) 그의 제물(offering) 관하여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That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signifies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therein, are pleasing to the Lord, has been explained before, as regards bothAbel,and hisoffering.

 

 

해설

 

AC.354는 매우 짧으며, 사실상 앞의 AC.350-353을 마무리하는 결론 역할을 합니다. 새로운 상응을 제시하기보다는 창4:4의 마지막 부분인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의 속뜻을 다시 확인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체어리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지 않고 예배의 근거, 곧 예배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9에서 말한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는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외적인 예배의 형식이 아무리 온전해 보여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살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 자체의 근원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AC.352에서는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고, AC.353에서는 ‘기름’이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것을 나타내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이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에게서 어떤 훌륭한 것을 만들어 주님께 바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체어리티의 삶과 예배로 다시 주님께 돌려드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여호와께서 돌아보셨다’는 표현도 주님께서 가인이라는 사람보다 아벨이라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셨다는 뜻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돌아보시는’ 것은 아벨이 표상하는 체어리티와 그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제물에 대한 주님의 서로 다른 반응은 사람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두 종류의 내적 상태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점은 곧 이어질 가인의 반응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가인 역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외적으로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예배는 체어리티에 기초했습니다. 결국 두 제물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을 드렸는가?’보다 ‘어디에서부터 드렸는가?’입니다. 한쪽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고, 다른 한쪽은 체어리티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창4:4의 ‘돌아보셨다’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어떤 형식으로 예배하는가, 얼마나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는가, 얼마나 많은 종교적 활동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의 내적 근원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예배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고, 진리를 알수록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 예배에는 아벨의 생명이 있습니다.

 

AC.354는 짧지만 AC.350-353 전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아벨 = 체어리티’, ‘처음 =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 ‘기름 = 주님께 속한 천적인 사랑의 ’,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 드리는 ‘제물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결국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체어리티가 되고, 체어리티에서 예배가 나오는 질서’를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 살펴온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다시 가장 단순한 자리로 돌려놓습니다. 문제는 신앙이냐 행위냐의 대립이 아닙니다. ‘신앙과 예배 안에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받고, 예배가 체어리티에 기초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돌아보시는’ 살아 있는 신앙과 예배가 됩니다.

 

 

 

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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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 ‘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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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당히 강한 긴장 속에서 진행됩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의 지구촌교회 창립기념 설교를 계기로, 떼제 공동체와 관상기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일치, 에큐메니즘, 유진 피터슨과 레노바레 운동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비판합니다. 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 방법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에게 이것은 결국 ‘다른 복음’의 문제이며, 교회가 성경에서 떠나 종교통합과 신비주의로 이동하는 ‘배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의 ‘다른 복음’, 고린도후서 11장의 ‘다른 예수, 다른 , 다른 복음’, 요한이서의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져와 자신의 비판을 뒷받침합니다.

 

이처럼 정동수 목사의 문제의식 자체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사랑’, ‘화해’, ‘포용’, ‘넓은 마음’이라는 아름다운 말 아래서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종교적 차이를 지워 버리고 ‘무엇을 믿든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식의 무차별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선과 진리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선만 있고 진리가 없어도 안 되고, 진리만 있고 선이 없어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제기하는 ‘넓은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진리의 경계까지 없애도 되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반드시 진지하게 받아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정동수 목사와 스베덴보리의 길은 크게 갈라집니다. 정동수 목사는 ‘진리의 경계’를 거의 교리적 소속과 정통성의 경계로 설정합니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가 함께 예배하는 것을 종교통합으로 보고, 그것을 사실상 ‘다른 복음’과 연결합니다. 더 나아가 강의 마지막에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경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경계는 사람이 어느 교단 명부에 속해 있는가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를 읽는 데 가장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방대한 기록에서 사람을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방인’이라는 지상의 명칭만으로 나누어 구원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각 종교 안에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으며,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거나 자신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것은 매우 심각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어떤 교회적 환경에서 태어났고 어떤 교리를 배웠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는 구별합니다. 그의 저서,‘천국과 지옥’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원리도 결국 사람이 사후에 자기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지상에서 가입했던 교파의 연장선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동수 목사의 ‘가톨릭 신자는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없다’는 식의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 상당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먼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그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는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는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리는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삶을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교리적으로 많은 것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자기애와 세상 사랑 속에서 사는 사람보다, 제한된 진리밖에 모르면서도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먼저 세워 놓고 이동원 목사의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표현을 보아야 합니다. 이 표현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아름다운 진실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만든 교파의 울타리보다 훨씬 큽니다. 주님은 개신교라는 명칭 아래 있는 사람만 돌보시는 분이 아니며,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 합니다. 심지어 참된 종교에 관하여 거의 아무것도 알 기회가 없었던 사람에게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의 교파적 마음보다 넓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한 문장이 뒤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넓다는 것과 주님께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영원히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를 동일하게 참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넓은 마음’은 아닙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사이에 실제 교리적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교황권, 성인에 대한 기도, 성찬 이해, 칭의, 교회론 등에 실제 차이가 있는데 ‘우리는 똑같으니 아무 차이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화해라기보다 진리 문제의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떼제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 문제에서도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했으니 모든 교리가 참이라고 인정한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함께 기도했으니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임이 실제로 무엇을 고백하고 무엇을 지향하며, 참여자가 그 가운데서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떼제를 ‘가짜들끼리 같이 모이는’ 곳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이렇게 집단적으로 판정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외적 형식만 보고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우리가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예레미야 24장의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가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끌어낸 것을 ‘설교 왜곡’이라고 비판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보내신 목적이 ‘넓은 마음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을 정해 놓은 다음 성경 본문을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설교 왜곡’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지적은 상당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본문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은 경고를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라고 해서 어느 본문에든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집어넣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문자의 뜻을 정직하게 읽어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본문의 직접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 뒤에야 말씀의 속뜻을 살펴야 합니다. 속뜻은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주님께서 넣어 두신 더 깊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4장에서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나쁜 무화과는 남아 있거나 심판 아래 놓인 이들을 가리킵니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눈에는 정반대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포로가 된 사람들이 실패자이고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이 살아남은 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포로로 끌려간 이들을 오히려 ‘좋은 무화과’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징계를 통하여 보존하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인간이 불행이라고 판단하는 사건이 반드시 영적 파멸은 아니며, 인간이 안전이라고 생각하는 상태가 반드시 영적 안전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서 ‘무화과’라는 표상은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무화과는 대체로 자연적 선, 곧 사람의 외적·자연적 삶에서 나타나는 선과 관련됩니다. 포도나무가 보다 영적인 선과 연결되고 올리브가 보다 천적인 선과 연결되는 것과 비교하면, 무화과는 인간의 자연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대비는 단순히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도덕적 구분보다 더 깊게, 사람의 자연적 삶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선하게 형성되었는가 아니면 부패했는가 하는 문제까지 열어 줍니다.

 

그렇게 보면 바벨론 포로라는 사건도 색다르게 보입니다. 포로 생활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유다의 오랜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십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다시 교회를 일으킬 수 있는 남은 것을 지키십니다. ‘좋은 무화과’는 바로 그런 보존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 악의 결과 가운데서 선을 끌어내십니다.

 

이 점에서는 이동원 목사가 고난을 통하여 더 넓은 시야를 배우는다는 방향으로 적용한 것이 본문의 문자에 직접 쓰여 있지는 않더라도, ‘고난을 통한 변화’라는 적용 자체를 곧바로 성경 왜곡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조금 더 살펴볼 여지가 있습니다. 설교에는 본문 해석과 오늘의 적용이라는 두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은 본문의 문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적용이 본문의 중심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가, 아니면 본문을 발판으로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동원 목사의 실제 설교 전체 문맥을 놓고 따져야 공정합니다. 이번 원고가 제시한 비판자의 설명만으로 그의 설교 전체를 최종 판정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히려 정동수 목사 자신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본문에 없는 것을 가져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설교 왜곡’이라고 매우 좋은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후 예레미야에서 ‘하늘의 여왕’을 가져와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 칭호와 직접 연결하고, 따라서 예레미야를 설교한다면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와 종교통합을 버리라고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당시 말한 ‘하늘의 여왕’과 후대 가톨릭에서 마리아에게 사용된 ‘하늘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두 대상을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본문 밖의 역사적·신학적 연결을 사용한 ‘적용’입니다.

 

이것은 정동수 목사의 결론이 반드시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일관성입니다. 이동원 목사가 본문에서 현대 교회의 화해를 적용하는 것은 ‘본문에 없는 것을 넣은 ’이라 비판하면서, 자신은 같은 예레미야에서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론을 끌어오는 것이 자동적으로 허용된다면 해석 기준이 비대칭적이 됩니다. 설교자를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해석 원칙을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매우 유익한 제3의 길을 제공합니다. 역사적 문맥은 역사적 문맥대로 존중하면서, 그 안에 있는 영적 의미는 인간의 자의적인 연상으로 찾지 않고 말씀 전체의 상응을 통해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하늘의 여왕’을 단순히 2천여 년 뒤 특정 교단의 명칭으로 바로 점프시키는 것보다, 우상숭배가 인간 내면에서 무엇인지 먼저 묻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 속해야 할 사랑과 경배를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어떤 대상에게 돌릴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것이 모든 시대의 사람에게 적용되는 속뜻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강의에서 계속 등장하는 ‘배도’ 역시 단순히 교단 이동이나 에큐메니즘 참여보다 훨씬 깊은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심각한 배도는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교리가 아무리 정통이어도 체어리티가 죽어 있으면 신앙도 살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천국의 비밀’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반복해서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하면 결국 아벨, 곧 체어리티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을 경계하는 사람은 동시에 ‘나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지는 않은가?’도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언어를 돌아보게 합니다. ‘가짜 목사’, ‘쓰레기’, ‘마귀가 만든 ’, ‘가짜들끼리 모인다’, ‘침례교의 침자도 모르는 사람’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교리적 오류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과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진리를 위한 열심도 그 안의 정서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보호하면서도 사람의 구원을 원합니다. 자기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방패 삼아 상대를 공격하고 이기는 데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매우 강한 말을 할 수 있지만 속의 불은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고 ‘사랑해야 하므로 오류를 지적하지 말자’는 뜻도 아닙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의 말을 인정하는 온순함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도 이웃 사랑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사람을 영적으로 해친다면 그것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다만 목적이 중요합니다. ‘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거짓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여야 합니다. 이것이 논쟁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이제 관상기도 문제를 보겠습니다. 강사는 관상기도, 침묵기도, 향심기도, 호흡기도 등을 거의 하나의 범주로 묶고, 불교·힌두교의 명상 및 만트라와 연결합니다. 반복적인 말을 계속하면 이성적 사고가 정지되고 의식을 잃게 되며, 수동적인 상태가 되어 외부 영적 존재에게 열리고 결국 ‘마귀가 들어온다’고 설명합니다. 촛불을 바라보거나 호흡을 조절하는 것 역시 같은 위험의 통로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매우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계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혼자 생각하고 느끼는 독립된 섬이 아니라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영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영향’이라는 개념 자체를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부분만 보면 강사의 경계심이 스베덴보리와 접점을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평상시에도 영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정 기도법을 사용해야 비로소 영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이 자유와 이성 안에서 보존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촛불을 켰다는 사실, 몇 분 침묵했다는 사실, 짧은 기도문을 반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마귀가 들어오는 통로가 열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정말 중요한 경계선은 ‘자유와 이성을 훼손하는가’입니다. 사람을 무비판적 수동성으로 몰아가고, 자신의 이성을 내려놓게 하고, 어떤 내적 음성이나 느낌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 계시라고 믿게 만드는 수행이라면 분명 위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파괴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그것을 삶으로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침묵’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잠시 침묵하면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 역시 그 자체로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침묵 속에서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자기 생각을 완전히 제거하여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려 하는 것과, 방금 읽은 말씀을 주님 앞에서 조용히 되새기며 자신을 살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외형은 둘 다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일 수 있지만 내적 활동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반복기도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헛된 반복’을 경계하신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반복이 곧 ‘헛된 반복’은 아닙니다. 같은 시편을 반복해서 읽는 것,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진심으로 여러 번 기도하는 것, 찬송의 후렴을 반복하는 것을 그 자체만으로 힌두교 만트라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핵심은 말의 횟수보다 그 말 안에 있는 의도와 의식입니다. 의미를 제거하고 의식을 변형시키기 위한 기계적 반복과, 마음을 주님께 돌리며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기는 반복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의도’와 ‘목적’에 관한 가르침으로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같은 외적 행위라도 목적이 다르면 영적으로 전혀 다른 행위가 됩니다. 한 사람은 침묵 속에서 자기 안의 신성을 발견하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침묵 속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반복을 통해 의식을 지우려 하고, 다른 사람은 같은 말씀을 반복하며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길 수 있습니다. 외적 형식만으로 내적 상태를 판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떼제 찬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의 구조가 단순하고 짧은 문장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 구조 자체가 곧 악령을 불러들이는 장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음악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선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 찬양이 사람의 애정을 어디로 이끄는가? 주님을 향한 겸손과 사랑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자기 감정의 황홀경 자체를 사랑하게 하는가? 그리고 정서가 이후의 삶에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가?

 

이 기준은 통성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조용한 기도만 위험하고 큰소리 기도는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큰소리로 열정적으로 기도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도취될 수 있고, 조용히 침묵하면서도 깊은 회개 가운데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외적인 기도 형식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본질입니다.

 

강의에서 ‘설교 없는 예배’에 대한 비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로마서 10장의 ‘신앙은 들음에서 난다’를 근거로 말씀 선포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성경을 읽고 5~10분 침묵하는 것을 ‘설교’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적 설교관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워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적 체험만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 자체는 인간 설교자의 설명보다 더 근원적인 거룩함을 지닙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봉사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봉독한 뒤 잠시 조용히 그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씀 선포를 폐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설교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도록 인도받고 있는가’입니다. 훌륭한 설교도 사람을 자기 숭배로 이끌 수 있고, 짧은 말씀 봉독 하나가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역설적으로 이번 강의 자체에도 적용됩니다. 강사는 성도들에게 ‘유명한 목사가 말한다고 무조건 아멘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칙은 이동원 목사에게만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강의를 하는 강사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이동원 목사가 유명하다고 믿지 말라’가 옳다면 ‘이동원 목사를 비판하는 유명한 목사가 말한다고 그대로 믿지도 말라’ 역시 옳습니다. 모든 주장을 말씀과 사실과 이성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분별의 원칙입니다. ‘누가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말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말했는가?’보다 ‘ 말이 참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연결하고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이러한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강사는 유진 피터슨을 ‘신비주의자’,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메시지’를 ‘쓰레기’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한 사람의 저작과 신학 전체를 특정 연관관계 몇 가지로 한꺼번에 판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저자의 특정 주장에 문제가 있다면 그 주장을 구체적으로 살피면 됩니다. 리처드 포스터나 댈러스 윌라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사람과 관계가 있으므로 사람도 잘못되었다’는 연쇄적인 방식보다 각각의 가르침을 실제 내용에 따라 검토하는 편이 더 공정합니다.

 

특히 ‘누구 이름이 나오면 가지 말라’는 방식의 분별은 성도들에게 단기적으로는 편리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분별력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이름 목록만 외우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분별은 ‘ 사람은 금지된 사람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 가르침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존중하는가,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가, 말씀의 진리와 조화를 이루는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열매 맺게 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번 강의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인 가톨릭과 구원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권과 성인 숭배, 인간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문제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밝히기’에서 바벨론에 관한 해설을 읽어 보면 그 비판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영혼과 천국에 대한 권세를 자기에게 돌리는 사랑을 심각한 악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포용적이니까 가톨릭 교리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큰 오해입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가톨릭 신자는 모두 지옥 간다’는 결론과 전혀 같지 않습니다. 교리 체계의 오류를 비판하는 것과 그 안에 태어나 살아온 개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판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부분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진리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받은 빛과 기회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십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뿐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등 기독교 밖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적용됩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의 민족들, 곧 이방인들의 구원 가능성을 분명히 다룹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종교 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선한 삶을 살며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면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 강의 마지막의 ‘구원은 기독교 안에만 있다’는 문장은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중요한 수정이 필요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도 단호합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을 통해 구원받는다’와 ‘지상에서 특정한 기독교 교리 체계에 소속된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 기회를 얻지 못했더라도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입니다. 그리고 사후에 그 근원이 누구인지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은 놀랍도록 넓으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주님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이번 논쟁의 표현이 다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정말 넓습니다. 그러나 ‘아무거나 괜찮다’는 의미에서 넓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선과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려 하기 때문에 넓습니다. 불교인도, 무슬림도, 가톨릭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사랑하시지만 그들 안에 있는 모든 거짓을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하시되 거짓에서는 건져 내시고, 선을 보존하시며, 더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에큐메니즘과 잘못된 종교통합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교리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모두 똑같다’고 하는 것은 진리를 희생한 통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고, 함께 대화하면서 무엇이 참인지 찾고, 가능한 선에서는 협력하며, 최종적인 심판은 주님께 맡긴다’는 태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는 후자와 훨씬 가깝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번 강의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장점은 매우 분명합니다. 교회의 화해와 포용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진리의 문제를 덮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설교자가 본문을 자기 주장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유명한 목사의 말도 성도가 분별해야 한다는 경고, 감정적·신비적 체험이 말씀의 진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가 지나치게 확대되면서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침묵을 곧 관상기도로, 관상기도를 곧 동양 종교의 명상으로, 반복 찬양을 곧 만트라로, 만트라적 반복을 곧 의식 상실로, 의식의 이완을 곧 마귀의 침입으로 연결하는 일련의 논증에는 단계마다 별도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또한 떼제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짜’로 묶고,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사람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분별’에서 ‘심판’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영적 세계는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경외심과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은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내적 사랑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누가 천국에 속했고 누가 지옥에 속했는지는 주님께서 아십니다. 우리는 교리를 살필 수 있고 행동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으며 위험한 가르침을 경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 자체를 최종적으로 판결하는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기존 기독교의 여러 교리가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경험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믿음만의 구원, 속죄, 부활, 천국과 지옥, 최후의 심판, 말씀의 속뜻 등 거의 모든 핵심 주제가 새롭게 보입니다. 바로 그때 가장 조심해야 할 유혹이 ‘나는 이제 알았고 저들은 모른다’는 우월감입니다. 그것이 들어오는 순간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proprium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여 주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 사람이 틀렸는가?’가 아니라 ‘ 말씀이 안에서 무엇을 드러내는가?’입니다. 예레미야 24장의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도 결국 내 안의 문제입니다. 내 자연적 삶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는 선은 무엇이며, 이미 부패하여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붙들고 있는 예루살렘은 정말 주님의 도성인가, 아니면 내가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proprium의 성인가? 때로는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는 ‘바벨론 포로’ 같은 경험을 통해 주님께서 오히려 내 안의 리메인스를 보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좋은 무화과 광주의 소망’이라는 본문은 특정 목사의 에큐메니즘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되기 전에 우리 자신의 거듭남을 비추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열어 보이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판정하는 책이기 전에 나를 심판하고 고치고 거듭나게 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넓은 마음이냐, 진리 수호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는 사랑과 진리가 결코 싸우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하나이며, 선은 진리와 결혼해야 합니다. 진리를 버린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고, 사랑을 잃은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리적 차이를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영성을 경계하면서도 침묵과 묵상 자체를 악마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톨릭의 교리적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가톨릭 신자의 영혼을 우리가 대신 심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에큐메니즘의 위험을 살피면서도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 자체를 배도로 규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분별하라고 가르치면서 그 목사를 비판하는 또 다른 유명한 목사의 말 역시 똑같은 기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말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 넓음은 진리를 희석시키는 넓음이 아니라, 진리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넓음입니다. 주님은 거짓을 참이라고 부르실 만큼 넓으신 분이 아니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까지 버리지 않고 참으로 이끄실 만큼 넓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분별도 바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에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에는 우리가 함부로 그을 있는 경계가 없습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잃으면 한쪽에서는 무차별적인 종교혼합으로 흐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교리적 정죄와 영적 우월감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 시간의 강의를 다 듣고 난 뒤 우리에게 남아야 할 질문은 ‘이동원 목사는 배도한 목사인가?’ 하나만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을 경계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오류를 찾고 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진리의 차이를 흐리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를 사랑하면서도 진리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주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 두 질문 사이에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넓지만 흐리지 않고, 분명하지만 정죄하지 않는’ 분별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 논쟁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붙들고 싶은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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