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5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어’ - 믿음에서 삶을 떼어 놓을 때 사라지는 구원의 본질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거나 종교적 행위를 통해 구원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교만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다’는 생각으로 발전한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집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자기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며, 악을 죄로 여기지도 않는다면, 과연 그의 믿음은 그를 구원하는 참된 믿음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질문은 단순히 믿음과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묻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란 무엇이며,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먼저 이 명제를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개혁 전통의 ‘오직 믿음’(sola fide)은 일반적으로 선행이 칭의의 근거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뜻이지, 선행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2항은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안에서 그 믿음은 홀로 있지 않고 다른 구원의 은혜들과 함께하며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제16장에서는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다’는 말은 엄밀한 개혁주의 교리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기보다, 칭의와 성화의 구별이 일상적인 신앙 언어 속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와 종교개혁 신학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도 남아 있습니다. 종교개혁 전통이 칭의를 설명할 때 믿음과 행위의 역할을 엄격하게 구별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참된 믿음 자체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특정 교단을 잘못 이해하여 비판하는 데 있지 않고, 구원의 본질에서 믿음과 삶을 분리할 수 있는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이 문제의 출발점은 로마서 3장 28절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 역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율법을 준수하거나 자신의 종교적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율법의 지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문맥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읽으면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곧바로 ‘어떤 선한 행위도 구원과 관계없다’는 결론으로 확대하면, 바울의 의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바울 자신도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하며, 로마서 2장 6절로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바울에게도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언어적 고백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새로운 생명과 관계되며, 그 생명은 실제 삶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서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할 말씀이 야고보서 2장 14절로 26절입니다.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특히 가난한 형제나 자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라고 말하는 사람의 예를 통해, 실제 사랑이 없는 믿음의 공허함을 드러냅니다. 이어 17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고,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 없는 믿음도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선행의 점수를 쌓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이라면 그 믿음 안에 실제로 살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의 고통을 보면서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즐거워하면서도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야고보는 그 믿음의 생명 자체를 질문합니다. 문제는 선행이라는 외적인 증거가 충분한가를 넘어,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108항은 이 문제를 매우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믿음의 본질도 알 수 없으며,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체어리티와 믿음이 선과 진리처럼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09항에서는 체어리티와 믿음의 관계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에 비유합니다.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두 능력이 함께 인간의 생명을 이루는 것처럼 체어리티와 믿음도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믿음이 먼저 생기고 그 결과로 선행이 뒤따라온다는 시간적 순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믿음이 된다는 존재론적 설명입니다. 이해 속에만 머물러 있는 진리는 아직 그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의지 안에 받아들여져 사랑의 대상이 되고,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선한 행위로 나타날 때 비로소 그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가 없는 믿음은 다소 부족한 믿음이 아니라, 구원하는 믿음으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336항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믿음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가 하는 오래된 논쟁을 다루면서, 시간상으로는 믿음이 먼저이지만 목적상으로는 체어리티가 먼저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먼저 진리를 배우고 이해한 다음,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면 믿음이 선행보다 먼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진리를 삶으로 실현하여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집을 짓는 일에 비유합니다. 시간상으로는 기초를 놓고 벽을 세우며 지붕을 만드는 일이 먼저이지만, 집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진리를 배우는 것은 체어리티의 생명에 이르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선행보다 앞세울 수는 있어도, 선행과 무관한 독립적인 구원의 수단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목적이 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부차적인 일이 되는 순간, 신앙의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욱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행위’의 의미입니다. 행위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행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그 행위를 일으키는 의지와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같은 돈을 기부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이웃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덜어 주고 싶어서 기부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부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행동은 같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랑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471–476항에서 인간의 삶이 그의 사랑에 따라 형성되며, 행위에는 그 사람의 의지와 생각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보신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행동의 숫자를 세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어떤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이 어떠한 삶을 형성했는지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구원과 관련된 것은 행위의 외적인 양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악을 멀리하려는 내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인 상태는 실제 삶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행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행위는 사랑을 실현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행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은 결국 행위구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 질문은 개신교 신자들이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을 접할 때 가장 먼저 제기할 수 있는 반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선을 만들어 내거나 자신의 공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고 자신의 행위를 구원의 공로로 삼는다면, 오히려 그 안에는 자기 사랑과 ‘프로프리움’(proprium)이 개입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행동 안에서 실제로 작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00–128항은 사람이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그 악을 실제로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심을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께서 자신을 변화시키실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노력으로 거듭남을 완성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께 협력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 주님의 신성한 능력이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와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은혜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은혜가 인간의 생명 안에서 어떻게 실제로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실제적인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잘 알고, 구원의 확신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가족을 함부로 대하고, 직장에서 약한 사람을 괴롭히며,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자신의 탐욕과 교만을 조금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받았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그의 신앙 이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인지, 아니면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종교적 안심을 얻는 일인지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자신을 향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25장 31절로 46절에서는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병든 사람과 갇힌 사람을 돌보는 일을 통해 마지막 심판의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인간의 종교적 고백만이 아니라 그 고백이 이웃을 향한 실제 사랑으로 나타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믿음과 삶의 결합을 강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끊임없이 평가하면서 ‘나는 오늘 충분히 선하게 살았는가? 이 정도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거듭남은 인간이 자신의 선행을 계산하여 합격점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시고, 그 사람이 점차 악을 미워하며 선을 사랑하도록 새롭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발견하는 것은 절망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주님께 더욱 나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아직 이기심과 교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죄로 여기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선행을 쌓았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확신도 자신의 공로나 과거의 신앙고백에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자신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신뢰하는 데서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의 설교와 양육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교회가 구원의 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삶의 변화와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한다면, 성도들은 교리를 정확히 알고 신앙고백을 바르게 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선행과 봉사만을 강조하면서 주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심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자신의 헌신과 공로를 통해 구원을 확보하려는 또 다른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믿음과 행위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누구이신지, 무엇이 선하고 참된 것인지를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사랑이 되어 실제 삶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 243항에서 교리는 교회를 이루는 데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지는 않으며 그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교회의 본질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해 주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삶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문제를 주님 자신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같은 장 21절에서는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하여 올바른 생각을 갖거나 감정적으로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이 선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선으로 받아들이고, 악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악으로 인정하며, 자신의 삶을 그 말씀에 따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삶과 행위는 관계없다는 생각은 결국 주님을 믿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분리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이 분리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사랑하며, 마침내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질문은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가, 행위로 구원받는가?’라는 양자택일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의 믿음은 실제로 주님을 향하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내 사랑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그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믿음이라는 이름의 종교적 자격이 아니라, 믿음과 체어리티가 하나가 되어 살아 움직이는 천국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PR.005 해설)

 

요약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말에는 인간이 자기 공로나 행위로 구원을 획득할 수 없으며,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므로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가면 오류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믿음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인간의 실제 생명이 됩니다. 선행은 구원을 구매하는 공로가 아니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삶으로 나타나는 본질적인 자리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삶의 관계는 구원의 원인과 부차적인 결과라는 구별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참된 구원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믿음과 체어리티를 결합하시고 새로운 사랑의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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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40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 영적 체험의 유익함은 그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증거인가?

 

해설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것은 천주교의 마리아 신앙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모 발현’(聖母發現, Marian apparition)과 ‘사적 계시’(私的啓示, private revelation)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에는 마리아가 특정한 사람들에게 나타나 기도와 회개, 평화와 보속을 권고했다는 오랜 전승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루르드와 포르투갈의 파티마는 널리 알려진 사례이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메주고리예 역시 많은 신자가 순례하는 장소입니다. 이러한 발현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리아가 자신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증언하며, 그 메시지를 접한 신자들 가운데 신앙을 회복하고 회개와 기도생활에 새로운 열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례들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메시지를 통하여 회개했다는 사실이 그 메시지를 전한 존재가 실제로 마리아였다는 증거가 될까요? 특별한 모습이나 음성을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현상이 객관적인 영계의 사건이라고 확정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 역시 영계를 보고 천사와 영들을 만났다고 기록했는데, 그의 영적 경험과 천주교의 성모 발현을 어떤 기준으로 비교해야 할까요? 이번 명제는 영적 체험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체험의 진실성과 메시지의 신학적 정확성, 그리고 그로부터 나타나는 회개와 사랑의 열매를 구별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67항은 교회 역사에서 여러 사적 계시가 보고되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인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공적 계시와 동일한 권위를 지니지 않으며, 새로운 구원의 진리를 추가하거나 기존의 계시를 완성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사적 계시는 특정한 시대에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의 모든 발현과 메시지를 성경과 동일한 신적 권위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교회가 어떤 발현과 관련된 신심을 인정하더라도 모든 신자가 그 발현을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구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진리는 이미 주님의 계시 안에 있으며, 특별한 체험이나 새로운 메시지가 그 계시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별도의 질문이 남습니다. 어떤 메시지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메시지를 실제로 마리아가 전달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적 계시의 권위를 성경보다 낮게 인정하더라도, 그 발현의 초자연적 출처가 실제로 확인되었는지는 다시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2024년 5월 17일 바티칸 신앙교리부가 발표한 ‘초자연적 현상으로 추정되는 사건의 판별을 위한 규범’(Norms for Proceeding in the Discernment of Alleged Supernatural Phenomena)은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 규범은 발현이나 환시, 특별한 메시지를 검토할 때 그 내용이 신앙과 도덕에 부합하는지, 체험자의 진실성과 태도는 어떠한지, 그리고 회개와 기도, 이웃 사랑과 같은 실제적인 열매가 나타나는지를 살피도록 합니다. 특히 ‘장애 없음’(Nihil obstat)이라는 긍정적인 결론은 관련 신심과 순례를 허용하거나 장려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 그 발현이 실제로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확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천주교가 스스로 긍정적인 영적 열매와 초자연적 출처의 진실성을 구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원칙은 2024년 9월 19일 발표된 메주고리예 관련 문서 ‘평화의 모후’(The Queen of Peace)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신앙교리부는 메주고리예를 통한 회개와 화해, 기도와 신앙의 회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발현 자체의 초자연적 진실성을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메시지라고 전해지는 내용 가운데 일부에는 신학적으로 부정확하거나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신자가 특정한 순례지에서 참된 회개를 경험했다는 사실과 그곳에서 보고된 모든 발현과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적 유익함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발현의 모든 세부 내용과 초자연적 출처를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역시 특별한 영적 현상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분별하도록 가르칩니다. 요일4:1은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라고 권합니다. 살전5:20–21은 예언을 멸시하지 말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마24:24에서 주님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어떤 현상이 놀랍고 특별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출처를 신적으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영적 현상을 분별한다는 것이 그와 관련된 사람을 곧바로 거짓말쟁이나 악한 사람으로 규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체험자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진실하게 증언할 수 있지만, 그 체험의 원인과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과 감각, 기대와 신앙적 배경은 체험을 해석하는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험자의 진실성과 체험의 객관적인 사실 여부, 메시지의 신학적 타당성을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특별한 체험 안에 참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그 전체를 참되다고 인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분별은 놀라운 현상 자체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의 진리와 일치하며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지 살피는 데 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영적 발현의 가능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에서 인간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영계에서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영계의 천사와 영들은 서로 보고 듣고 말하며 실제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계의 인간이 영적인 존재를 지각하거나 영계와 관계된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 자신은 오랫동안 영계의 여러 존재와 만나고 대화한 경험을 기록했으며,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27항에서는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를 보았다고도 전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을 따른다는 이유로 모든 영적 발현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직접적인 기록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능성과 실제적인 진실성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리아를 보았다고 기록했다는 사실이 후대에 보고된 모든 성모 발현의 진실성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빛나는 여인의 모습을 보았거나 자신을 마리아라고 소개하는 존재의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경험만으로 실제로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타났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존재의 모습과 정체, 그 존재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출처는 각각 검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HH.249는 중요한 직접 근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인간이 영들과 직접 대화하도록 허락되는 일이 드물며, 그러한 교통에는 위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영들이 자신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특히 악한 영들이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교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내적인 체험에 사로잡히는 상태도 주의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적 환시나 특별한 체험이 반드시 악령에게서 비롯된다고 판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특별한 모습을 보거나 메시지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참된 천국의 계시라고 받아들이는 일에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영계와의 교통은 인간의 호기심이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허락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모 발현을 신앙의 특별한 은총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 현상을 어떤 근거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체험을 추구하는 태도 자체가 올바른 영적 질서에 속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특별한 체험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 체험을 무조건 추구하거나 신적 진리의 확실한 근거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일기’(Spiritual Diary, SD) 1647항은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그는 자신이 표상과 환시, 영들과 천사들의 대화를 통하여 여러 가지를 경험했지만, 실제로 자신에게 진리를 가르치신 분은 영이나 천사 자체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영들이 여러 가지를 가르치려 할 때 거짓된 내용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진술은 스베덴보리가 영적 체험을 했다는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영계의 존재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그 말이 곧바로 신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TCR.779에서 그는 새 교회의 교리를 어떤 천사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말씀을 읽는 가운데 받았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영적 경험을 근거로 성모 발현의 메시지 역시 특별한 신적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적용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나타났으며 얼마나 놀라운 체험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경험을 통하여 주장되는 진리가 실제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기록에서도 영적 경험과 그 안에서 받아들이는 신적 진리는 구별되며, 모든 참된 진리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이 원칙은 발현 메시지의 내용을 검토할 때도 중요합니다. 성모 발현으로 전해지는 메시지들에는 기도와 회개, 죄에서 돌아서는 삶, 사랑과 평화, 이웃을 위한 희생을 강조하는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권고는 그 자체로 성경의 가르침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 안에 참된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과 그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내용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으며, 어떤 체험에 대한 해석이 부정확하더라도 그 안에 성경과 일치하는 진리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회개와 사랑을 권고하는 메시지 안에 특정한 발현 장소나 발현자에게 지나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거나,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신앙을 흐리게 하는 내용이 함께 들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메시지를 통째로 받아들이거나 통째로 부정하기보다 개별적인 내용을 분별해야 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은 특별한 감동이나 종교적 열정을 경험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거듭남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배우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발현 메시지를 듣고 눈물을 흘리거나 특별한 평안을 느낀 것이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실제적인 영적 변화는 그 이후의 삶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체험의 감동보다 그 체험 이후에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거듭남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 문제는 발현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그 메시지를 따르는 신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반드시 거짓말을 하거나 사람들을 속이려 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매우 경건하고 겸손하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체험을 신적인 사건이라고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일을 진실하게 설명하면서도 그 의미나 원인을 잘못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발현과 관련된 신심 가운데 실제적인 회개와 사랑의 열매가 나타났더라도, 그러한 열매가 발현의 모든 세부 내용과 메시지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의 진실성과 메시지의 정확성, 그리고 영적 열매의 가치를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과 의도를 완전하게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그가 전하는 내용 가운데 말씀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은 인정하고 일치하지 않는 것은 분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요구하는 태도는 모든 특별한 체험을 조롱하거나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에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진리와 선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맡기되,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신학적 주장은 말씀에 따라 검토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특별한 영적 현상에 대한 관심이 말씀 자체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어떤 신자는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보다 새로운 발현과 메시지에 더 큰 열정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또한 특정한 시기와 장소에 주어진 경고나 약속을 신앙의 중심에 놓고,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중요한 영적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생명을 위한 가장 중요한 진리는 이미 주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 살아가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더라도 그것이 말씀을 대신하거나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영적 체험이라면 인간의 시선을 체험 자체나 특정한 전달자에게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향하게 해야 하며, 새로운 신비에 대한 호기심보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요2:5에서 하인들에게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한 것처럼, 신앙의 올바른 방향은 특별한 전달자에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결국 발현과 메시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놀라운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에 부합하며 인간을 회개와 사랑, 거듭남의 삶으로 이끄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한 열매가 나타났더라도 발현의 초자연적 진실성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특별한 체험을 성급하게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그것을 말씀보다 높은 권위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참된 신앙은 새로운 메시지를 찾아다니는 데 있지 않고,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SL.RC.040 해설)

 

요약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라는 명제는 그 가능성 자체에서 반드시 오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발현과 관련된 메시지나 신심을 통하여 신자가 자신의 악을 돌아보고 기도생활을 회복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역시 사적 계시를 그리스도의 완성된 공적 계시와 동일한 권위로 가르치지 않으며, 2024년의 판별 규범에서는 긍정적인 영적 열매와 발현 자체의 초자연적 진실성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모든 성모 발현을 반드시 믿어야 할 신앙의 진리로 선언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가 신자들에게 유익했다는 사실만으로 실제로 마리아가 나타나 그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HH.249에서 영들과 직접 교통하는 일의 위험을 경고하며, SD.1647에서는 영들이 전달하는 내용을 그대로 믿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779에서는 새 교회의 교리를 천사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말씀을 통하여 받았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회개와 신앙의 회복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발현의 초자연적 출처를 충분한 근거 없이 확정하거나, 그 메시지를 말씀과 동일하거나 더 높은 권위로 받아들이며, 특정한 발현자나 장소에 특별한 영적 권능을 부여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모든 성모 발현이 실제로 거짓이거나 악한 영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별적인 체험의 출처와 성격은 충분한 근거 없이 단정해서는 안 되며, 그 안에 담긴 진리와 오류도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와 거듭남은 특별한 현상을 경험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실천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모 발현과 메시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은 체험자의 확신이나 현상의 신비로움보다, 그 내용이 주님의 말씀에 부합하며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모든 영적 체험과 메시지는 말씀의 진리 아래에서 분별해야 하며,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유일한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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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9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 – 공경과 흠숭의 구별은 실제 신앙의 내면에서도 유지되는가?

 

해설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 이것은 천주교가 마리아 신심을 설명할 때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성인들에게 표하는 공경을 구별하며, 마리아에게는 다른 성인들보다 특별한 공경을 드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기도를 청하거나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그것만으로 그 사람이 마리아를 하나님과 동등한 신으로 숭배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흠숭과 공경의 차이는 사용하는 명칭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누구를 모든 생명과 구원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는가에 있는 것일까요? 특별 공경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올바른 것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예배가 외적인 의식보다 그 안에 담긴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 공경의 의미와 한계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이 문제는 단순히 천주교의 종교적 관습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인간에 대한 존경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그리고 그 구별이 실제 신앙의 삶에서도 유지되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에서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欽崇, latria), 천사와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恭敬, dulia), 그리고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特別恭敬, hyperdulia)을 구별합니다. 흠숭은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모든 생명과 구원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드리는 예배를 뜻합니다. 공경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신 은총과 그들이 보여 준 거룩한 삶을 존중하는 것이며, 특별 공경은 주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의 독특한 역할과 복됨을 특별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흠숭과 공경이 단순히 경배의 강도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공경이 아무리 특별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흠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공경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창조주나 신적 존재로 인정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천주교의 특별 공경은 일반적인 역사적 인물에 대한 존경보다 넓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며, 성모 축일과 묵주기도, 전구 요청 등의 신심 행위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공경과 흠숭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을 인정하는 것과 그 원칙 아래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올바르다고 판단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66항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 항목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공경을 받지만, 그 공경은 성육신하신 말씀과 성부와 성령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오히려 그 흠숭을 증진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67항은 마리아에 관한 가르침과 신심에서 지나친 과장과 편협한 축소를 모두 피하고, 참된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헛된 믿음을 경계하도록 권고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71항 역시 마리아에 대한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1997년 10월 22일의 교리교육에서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다른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보다 특별하지만,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가르침에는 인정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속하는 영광과 권능이 있으며, 아무리 복된 인간이라도 창조주와 동일한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이러한 구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실제 신심 행위가 언제나 그 원칙에 일치한다고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의 내용과 개인의 신앙적 이해, 그리고 구체적인 종교 행위는 각각 살펴야 합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와 인간에게 표할 수 있는 존경을 구별합니다. 출20:3–5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고 우상을 만들어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며, 마4:10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분만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모든 참된 예배의 궁극적인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심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에 대한 존경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과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하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는 히13:7의 권고는 인간에게 표할 수 있는 올바른 존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으며, 눅1:48에서 이후의 모든 세대가 자신을 복되다고 일컬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복되다고 인정하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일 자체를 우상숭배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복되다고 일컫는 것과 그에게 기도하며 특별한 영적 보호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동일한 행위가 아닙니다. 성경이 어떤 사람을 존경하도록 가르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종교적 청원을 드려도 된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공경과 흠숭을 구별하는 문제는 외적인 명칭을 넘어 실제로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영적 권능을 기대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차이는 성모상과 성화 앞에서 이루어지는 신심 행위를 살펴볼 때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천주교는 성모상 자체를 신으로 섬긴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모상과 성화는 마리아의 믿음과 주님의 성육신을 기억하도록 돕는 종교적 표상이며, 형상에 표하는 존경은 궁극적으로 그 형상이 나타내는 인물을 향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어떤 신자가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외적인 모습만으로 그가 실제로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긴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무릎을 꿇거나 절하는 행위는 문맥에 따라 예배뿐 아니라 존경과 간청을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상이 기억과 묵상의 도구라는 설명과 그 형상에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특정한 성모상이나 성지에 독립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형상 앞에서 기도하면 마리아가 자신의 필요를 특별하게 해결해 준다고 기대한다면 그 믿음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나 몸의 자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에게 능력을 기대하고 그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겉으로 비슷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믿음과 의도는 다를 수 있으며, 인간은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외적인 신심 행위의 의미를 검토하되,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까지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참된 예배가 단순한 기도문이나 찬송, 몸의 자세와 종교적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인 행위 안에 담긴 사랑과 신앙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구별은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의 관계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겉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추구할 수 있으며, 반대로 짧고 단순한 기도 안에서도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믿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종교 행위의 영적 가치를 판단하려면 그 행위가 겉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향하여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2–12에서 천국의 하나님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가 그분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천사들은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성인의 믿음과 사랑을 존중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그들에게 주님께만 속한 신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그들을 구원의 근원처럼 의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참된 공경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선과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참된 예배는 그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께 자신을 열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존경과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 신심에 대하여 강한 비판도 남겼습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94에서 마리아를 다른 모든 성인보다 높이고 여신이나 성인들의 여왕처럼 받드는 신심을 비판합니다. 또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기보다 마리아의 아들로 이해하는 경향이 주님의 참된 신성에 관한 이해를 흐리게 한다고 지적합니다. 다만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평가와 천주교의 공식 교리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실제로 여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TCR.94를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여신으로 인정했다는 증거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비판은 마리아의 자연적인 모성을 지나치게 높이는 과정에서 주님의 유일한 신성이 흐려지고, 인간이 주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과 의존을 피조물에게 옮길 위험에 관한 것입니다. 그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마리아에게 어떤 명칭을 사용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실제적인 중심이 주님께 있는가, 아니면 마리아라는 특별한 피조물에게 옮겨 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특별 공경이라는 명칭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신심의 모든 내용과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앞서 살펴본 마리아의 전구 및 묵주기도와도 연결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에게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행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공경과 흠숭이 교리적으로 구별된다는 사실과 그러한 청원이 실제 영계의 질서에 부합한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4–825에서 지상의 사람들이 천국의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그 성인들이 알고 듣는다는 생각을 직접 비판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드리는 청원을 흠숭이 아니라 특별 공경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타당성이 입증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천주교는 모든 전구와 은총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속에 종속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2025년 바티칸 신앙교리부의 ‘신자들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 역시 마리아를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는 구원자처럼 이해하거나, 주님의 자비가 부족하므로 마리아가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설명을 넘어, 천국의 특정한 인간에게 직접 종교적 청원을 드리는 행위 자체가 참된 영적 교통의 질서에 부합하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이처럼 마리아를 존중하는 일반적인 태도와 마리아에게 직접 기도를 청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구별하여 평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를 특별히 존중한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할까요? 성경은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중요한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2:5에서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합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특별한 신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사람들이 자신에게 머물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권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존중하는 가장 분명한 길은 그가 보여 준 믿음과 순종을 기억하고 본받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존중이 그에게 독립적인 영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직접적인 종교적 청원을 드려야 한다는 뜻으로 확대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운 믿음을 인정하는 것과 그 인간을 영적인 의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위대함은 특별한 호칭이나 독립적인 거룩함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의 복됨 역시 이러한 영적 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경과 흠숭의 구별을 실제 신앙의 내면에 적용해야 합니다. 어떤 신자가 하나님께만 흠숭을 드린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마리아가 주님보다 더 자비롭고 자신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며 특별한 능력으로 자신을 보호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신앙에는 공식적인 교리와 실제적인 의존 사이의 긴장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을 근거로 모든 천주교 신자가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긴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마리아를 기억함으로써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그분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신앙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구별하되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강조하는 참된 예배의 중심은 주님 한 분을 향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인간에게 표하는 공경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 구별은 이름을 다르게 붙이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실제 기도의 대상과 영적 의존의 방향에서도 유지되어야 합니다. 결국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올바르게 존중하는 길은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모든 예배와 구원의 소망을 주님 한 분께 돌리는 데 있습니다. (SL.RC.039 해설)

 

요약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라는 명제의 기본적인 구별 자체는 오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과 인간에게 표하는 존경은 본질적으로 달라야 하며, 이러한 원칙은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도 부합합니다. 천주교는 ‘흠숭’(latria), ‘공경’(dulia), ‘특별 공경’(hyperdulia)을 구별하고, 마리아를 하나님과 동등한 신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모든 마리아 공경을 신적 숭배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구별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마리아에게 드리는 모든 종교적 청원과 신심이 자동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HH.2–12에서 천국의 모든 생명과 권능이 주님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치며, TCR.94에서는 마리아를 지나치게 높이는 당시의 신심을 비판합니다. 또한 TCR.824–825에서는 천국의 성인들에게 직접 기도를 드리는 관행이 영계의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기억하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특별 공경이라는 이름 아래 그에게 주님께만 속한 영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주님께 돌려야 할 실제적인 신앙적 의존을 다른 피조물에게 옮기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모든 마리아 공경을 반드시 우상숭배라고 판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의 내면은 주님께 맡기되, 그가 믿고 실천하는 교리와 행위는 말씀의 진리에 따라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제는 ‘공경과 흠숭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에서는 참되지만, ‘따라서 마리아에게 드리는 모든 특별 공경과 종교적 청원은 올바르다’는 결론으로 확대할 때에는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인간에게 표하는 존경을 구별하고, 모든 선과 진리와 구원의 근원을 주님 한 분에게서 찾으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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