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8

 

이로부터 사람이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있을 때가 분명해집니다. 이때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그것들을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fishes of the sea),하늘의 새(fowl of the heavens)라 합니다. 사람이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을 생물(living soul),가축(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신앙으로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하므로,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 of the sea,” and the “fowl of the heavens.”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of 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의미를 한 번에 정리해 주는 요약이자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각 단계를 분리해서 설명해 왔지만, 이 글에서는 그 단계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지고, 무엇이 결정적인 차이인지 명확히 드러냅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신앙의 원리로 말합니다. 이 신앙은 이해력에 속하며, 사람은 그 신앙을 통해 진리와 선을 확인하고 확증합니다. 이때 그의 사고와 말은 더 이상 무생물, 곧 못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 곧 움직이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래서 ‘물고기’와 ‘’가 등장합니다. 이는 기억-지식과 이성적, 지적 사고가 이제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여전히 그 중심이 이해력에 있습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사람은 이해력의 신앙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나온 의지의 사랑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단지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을 통해 삶으로 내려옵니다. 이때 등장하는 상징이 ‘생물’과 ‘짐승’(‘가축’)입니다. 이는 삶의 중심이 생각에서 애정과 행위로 옮겨졌음을 뜻합니다.

 

이 글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여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이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표현입니다. 앞선 단계들에서도 사람은 무언가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이해력의 차원, 곧 신앙의 확증과 말의 차원이었습니다. 이제는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 곧 의지 차원에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생명의 실제적인 시작입니다.

 

그래서 이 단계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 곧 ‘영적 인간’이라 하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형상이라는 말은 단순한 닮음이 아니라, ‘작동 방식의 닮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사랑으로 진리를 통해 행하시는 것처럼, 이제 이 사람도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 움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신앙만으로 말할 때는 아직 다섯 번째 상태이고,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여 삶으로 드러날 때 여섯 번째 상태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사람은 주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사람답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임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글입니다.  

 

 

심화

 

1.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

 

 

AC.48, 심화 1,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

AC.48.심화 1.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 AC.48에 의하면,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 하고, 여섯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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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대가  아직 나한테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어도?

 

 

AC.48, 심화 2, ‘상대가 나한테 아직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다면’

AC.48.심화 2. ‘상대가 나한테 아직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다면’ 상대가 아직 저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있는데, 무조건 제 쪽에서 먼저 용서해야 하나요? 이건 매우 현실적인 질문이고,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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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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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심화

 

4. 갑작스런 repentance의 등장

 

AC.29 두 번째 단락에,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좀 어리둥절합니다. 갑자기 repentance가 나오기 때문인데...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가요?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tree bearing fruit’—를 하다가 갑자기 ‘repentance의 상태’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에 논리 점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1장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은 갑작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앞 단계에서 준비된 상태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 연결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거듭남의 초기 단계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첫 부분을 인간 거듭남의 초기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대략 이런 흐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완전히 혼돈과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다음 진리의 빛이 조금씩 들어옵니다. 그리고 진리와 거짓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 사람 안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 곧 식물로 상징되는 단계가 나타납니다. 바로 여기서 ‘herb’와 ‘tree’가 등장합니다. 즉 사람 안에 처음으로 선과 진리의 싹이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자신의 생각과 삶이 괜찮다고 여겼던 것들이 진리의 빛 속에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바꾸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repentance입니다.

 

여기서 repentance라는 말을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의미—큰 죄를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연결이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repentance는 훨씬 더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돌아본 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고,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맞추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의 식물 비유와 repentance는 실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tender herb’는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herb yielding seed’는 그 진리가 생각 속에서 자라 다른 진리를 낳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tree bearing fruit’는 그 진리가 실제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기 시작하는 바로 그 과정이 ‘repentance’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식물 단계 전체를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다가 ‘나는 지금까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듭니다. 이것이 tender herb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더 배우면서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 행동은 옳았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이 herb yielding seed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실제 행동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쉽게 화를 냈다면 이제는 참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전에는 남을 비판했다면 이제는 말을 조심합니다. 이것이 tree bearing fruit입니다. 바로 이 전체 과정이 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에서 repentance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의 성장 비유가 바로 repentance의 실제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그 순간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회개를 거듭남의 매우 초기 단계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거듭난 상태는 아니지만,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삶을 진리의 빛 속에서 고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떤 특별한 감정 사건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자기 삶을 그 진리에 맞추어 바꾸기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식물이 처음 자라는 장면이 바로 그 회개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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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3,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AC.29.심화 3.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위 심화 1의 세 번째 단계인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 즉 ‘진리가 삶의 성품이 되며, 선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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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심화

 

3.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단계에서도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

 

위 심화 1의 세 번째 단계인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  진리가 삶의 성품이 되며, 선한 행동이 열매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단계에서도 여전히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일 수가 있나요?

 

이 질문은 사실 창세기 1장 해석에서 매우 미묘하지만 핵심적인 지점을 건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에서도 여전히 어느 정도 inanimate’, 곧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먼저 ‘inanimate’라는 표현의 의미를 정확히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nimate’와 ‘inanimate’는 단순히 활동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다고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진리를 말하며 실제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고 있어도, 그 사람이 그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선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나의 선’이라는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상태는 완전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자기 생명처럼 보이는 상태’, 곧 어느 의미에서는 ‘inanimate’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1장의 식물 단계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식물들을 설명할 때 ‘‘living sou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herb’, ‘tree’, ‘fruit’ 같은 식물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식물은 생명이 있지만 ‘자기 스스로 움직이거나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 의미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선한 삶을 살고 있어도 아직 그 선이 ‘자유로운 사랑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이 단계는 선이 존재하지만, 아직 완전히 ‘animate’ 상태는 아닌 단계로 이해됩니다.

 

어떤 성도가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매우 성실하고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정직하며 교회에서도 헌신적으로 봉사합니다. 그의 삶에는 분명히 ‘fruit’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런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꽤 선하게 살아왔다’, ‘내가 이렇게 봉사해 왔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자기의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상태에서도 여전히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이유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식물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living soul’, 즉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동물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동물은 ‘사랑과 애정(affection)을 상징합니다. 즉 사람이 선과 진리를 단순히 알고 실천하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사랑 자체로 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짜 ‘animate’ 상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걸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tree bearing fruit’ 단계는 매우 중요한 단계이지만 아직 최종 단계는 아닙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실제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만, 사람은 여전히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이 그 선을 행한다고 느끼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단계로 들어가면 사람은 점점 더 분명히 깨닫습니다. ‘내가 하는 선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하시는 선이구나.’ 그때 선은 더 이상 식물처럼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구조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먼저 진리가 싹트는 단계가 있고, 그다음 진리가 열매를 맺는 삶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이 완전히 살아 있는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선이 ‘사랑에서 나오고, 또한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식물의 상징이 끝나고 ‘living soul’이 등장합니다.

 

사람은 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이 아직 ‘내가 하는 선’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열매가 맺힌 단계이지만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점점 더 빛 속으로 들어가면, 그 선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알게 되고 그때 선은 진짜 생명처럼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의 식물에서 동물로 넘어가는 변화가 바로 이 차이를 보여 준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9, 심화 4, ‘갑작스런 repentance의 등장’

AC.29.심화 4. ‘갑작스런 repentance의 등장’ AC.29 두 번째 단락에,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좀 어리둥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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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2, ‘각기 종류대로’

AC.29.심화 2. ‘각기 종류대로’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요, 그냥 다양한 종류의 채소, 나무라는 단순한 의미만은 아니겠지요?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창세기 1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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