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19)



AC.276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to eat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의 의미가 천적인 것(celestial things)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먹을 것(bread)의 의미로부터 분명합니다. ‘먹을 것은 모든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천사들의 양식입니다. 만일 그것이 박탈된다면 천사들은 사람이 빵(bread, 먹을 것, 떡, 양식)이나 음식을 빼앗기면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또한 천국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땅의 빵과 상응하며, 그래서 말씀의 많은 곳에서 빵으로 표상됩니다. 주님께서 친히 먹을 것’,이신 이유는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인데,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That to “eat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 signifies to be averse to what is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bread.” By “bread” is meant everything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is the food of the angels, on the deprivation of which they would cease to live as certainly as men deprived of bread or food. That which is celestial and spiritual in heaven also corresponds to bread on earth, by which moreover they are represented, as is shown by many passages in the Word. That the Lord is “bread,” because from him proceeds whatever is celestial and spiritual, he himself teaches in John: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6:58) This is the bread that cometh down from heaven; he that eateth of this bread shall live to eternity (John 6:58).

 

그러므로 성만찬에서도 빵과 포도주가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또한 이 천적인 것은 만나로도 표상되었습니다.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천사들의 양식이라는 사실은 주님의 다음 말씀으로도 분명합니다. Wherefore also bread and wine are the symbols employed in the holy supper. This celestial is also represented by the manna. That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constitutes the food of angels is manifest from the Lord’s words: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4)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eth out of the mouth of God (Matt. 4:4),

 

곧 사람은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며,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그 생명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that is, from the life of the Lord, from which comes everything celestial and spiritual.

 

[2] 홍수 직전에 존재했던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 곧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 주님이 누구이신지, 그분께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조차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제가 언급되면 그들은 등을 돌렸습니다. 이러한 혐오와 반감이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천적인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직 세상적, 세속적 메시아만을 원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표상하는 만나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하찮은 음식이라고 불렀고, 그 때문에 불뱀들이 그들 가운데 보내졌습니다 (21:5-6). The la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existed immediately before the flood, and is here treated of, had become so thoroughly lost and immersed in sensuous and bodily things, that they were no longer willing to hear what was the truth of faith, what the Lord was, or that he would come and save them; and when such subjects were mentioned they turned away. This aversion is described by “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 So also the Jews, in consequence of their being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did not acknowledge the existence of heavenly things, and desired only a worldly messiah, could not help feeling an aversion for the manna, because it was a representation of the Lord, calling it “vile bread,” on which account fiery serpents were sent among them (Num. 21:5, 6).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21:5, 6)

 

또한 사람들이 환난과 비참함 가운데 있어 눈물로 천적인 것들을 받게 될 때, 그것들은 그들에 의해 환난의 떡(the bread of adversity), ‘고난의 떡(the bread of misery), ‘눈물의 양식(the bread of tears)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혐오감을 가지고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얼굴에 흘린 땀의 빵(the bread of the sweat of the face)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Moreover the heavenly things imparted to them in states of adversity and misery, when they were in tears, were called by them the “bread of adversity,” the “bread of misery,” and the “bread of tears.” In the passage before us, that which was received with aversion is called the “bread of the sweat of the face.”

 

 

※ 아래는 저런 여러 종류의 표현들이 나오는 구절들의 예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the bread of adversity)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30:20)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the bread of misery)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 (왕상22:27)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the bread of misery)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16:3)

 

4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5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the bread of tears)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80:4, 5)

 

 

해설

 

AC.276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3:19)의 의미를 매우 깊이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노동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훨씬 깊은 영적 의미에서 해석합니다. 여기서 ‘먹을 것’은 육신의 음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 곧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6:58)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떡은 단순히 주님을 상징하는 표지가 아니라, 모든 선과 사랑, 모든 영적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또한 성만찬의 떡과 광야의 만나도 모두 같은 천적인 것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떡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문제는 떡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에 있습니다. 태고교회 초기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것을 기쁨과 평안 가운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교회 말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감각과 육체적인 것에 사로잡혀 신앙의 진리와 장차 오실 주님에 관한 말씀을 듣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만나를 싫어했던 사건을 예로 듭니다. 만나는 주님을 표상하는 하늘의 양식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하찮은 음식(21:5)이라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음식 자체가 아니라, 그 음식이 상징하는 하늘의 생명이었습니다. 이것은 홍수 이전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의 상태와 본질적으로 같은 모습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언제나 생명이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오히려 부담스럽고 싫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환난의 떡’, ‘비참의 빵’, ‘눈물의 양식’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천적인 것 자체가 고난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평안 가운데 받아들이지 못하고, 환난과 눈물, 비참함을 통하여서야 비로소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30:20의 ‘환난의 떡’, 시80:5의 ‘눈물의 양식’은 모두 그러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특정한 표현을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나타나는 이러한 상징을 종합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이 순조롭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길 때에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패와 상실, 질병과 유혹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될 때, 이전에는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던 말씀이 위로와 생명의 양식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달라지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입니다.

 

AC.276의 핵심은 ‘’보다 ‘먹을 것’에 있습니다. 먹을 것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양식이며, 주님께서는 그것을 끊임없이 사람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생명의 떡은 기쁨이 아니라 부담으로, 평안이 아니라 수고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환난과 눈물마저도 섭리 가운데 사용하셔서, 사람이 다시 생명의 떡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AC.276이 전하는 가장 큰 소망입니다.

 

 

심화

 

1. ‘6:58

 

 

AC.276, 심화 1, ‘요6:58’

AC.276.심화 1. ‘요6: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6:58) This is the bread that cometh down from heaven; he that eateth of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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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4

 

 

AC.276, 심화 2, ‘마4:4’

AC.276.심화 2.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4) Man shall not 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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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1:5-6

 

 

AC.276, 심화 3, ‘민21:5-6’

AC.276.심화 3. ‘민21:5-6’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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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7, 창3:19, ‘내적 의미, 곧 말씀의 속뜻’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7이것이 내적 의미, 곧 말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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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5, 창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AC.275-27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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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return unto the ground; for out of it wast thou taken; for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3:19)



AC.275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By 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는 천적인 것(celestial things)을 싫어하고 멀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to return to the ground from whence he was taken)는 거듭나기 이전에 그러하였던 것과 같은 겉 사람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는 그가 정죄된 상태, 곧 지옥적 상태에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By “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 is signified to be averse to what is celestial; to “return to the ground from whence he was taken,” is to relapse into the external man, such as he was before regeneration; and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signifies that he is condemned and infernal.

 

 

해설

 

AC.275는 창3:19에 대한 내적 의미를 간결하면서도 매우 강하게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인간의 노동, 죽음, 그리고 육체의 흙으로의 귀환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적으로 영적 상태의 변화로 해석합니다.

 

먼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생계를 위한 고된 노동을 뜻한다고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먹을 것’을 천적 선,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으로 이해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그러한 천적 생명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선과 진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그것이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니라 수고와 저항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생명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저항하고 멀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천적인 것에 대한 반감과 소외를 뜻합니다.

 

다음으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라는 말씀은 육체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퇴보로 이해합니다. 원래 인간은 거듭남을 통해 겉 사람이 속 사람의 지배 아래 놓이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타락이 진행되면 반대로 겉 사람이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고, 사람은 거듭나기 이전의 자연적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라는 것은 영적 상승의 반대 방향, 곧 겉 사람 중심의 삶으로의 회귀를 의미합니다.

 

특히 마지막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에 대한 해석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육체적 죽음에 대한 선언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볼 때, 인간은 결코 소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dust)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흙은 생명이 없는 것이며, 바람에 날리는 것이고, 발 아래 밟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함으로써 영적으로 가장 낮고 생명 없는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정죄(condemnation)와 ‘지옥적 상태(infernal state)로 설명합니다. 물론 이것도 주님께서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269에서 설명했듯이, 인간이 스스로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 그 결과로 그러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생명과 천국을 주시지만, 사람이 그것을 거부하면 결국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 남게 되고, 그것이 바로 지옥의 본질입니다.

 

AC.275는 창3의 심판 선언이 단순한 육체적 노동과 육체적 죽음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겪게 된 영적 쇠퇴의 마지막 단계를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천적인 것을 싫어하게 되고, 거듭남 이전의 겉 사람 상태로 되돌아가며, 마침내 생명의 근원과 분리된 ‘’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인간 존재의 비극이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주님과의 분리에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74, 창3:18,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3:18)AC.274‘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o eat the herb of the field), 곧 거친 음식(wild food)을 먹는다는 것은, 들짐승처럼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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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4.심화

 

2. ‘37:26-27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27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37:26, 27) Hast thou not heard how I have done it long ago, and from the days of old have I formed it; now have I brought it to pass, and it shall be to lay waste bulwarks, fenced cities, in heaps; and their inhabitants, short of hand, were dismayed and put to shame; they were made the grass of the field, and the green [olus] of the herb, the grass of the housetops, and a field parched before [coram] the standing corn (Isa. 37:26–27).

 

 

스베덴보리가 AC.274에서 사37:26-27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이 영적으로 자연적 생명만을 따라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는 ‘들의 풀’, ‘푸른 나물’, ‘지붕의 풀’, ‘자라지 못한 곡초’라는 여러 식물 비유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잃은 사람과 교회의 상태를 단계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식물 종류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점차 쇠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먼저 ‘들의 풀’과 ‘푸른 나물’은 쉽게 자라고 쉽게 시드는 식물입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깊은 생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감각과 기억 지식에만 의존하는 자연적 생명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맺는 열매는 자라나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지붕의 풀’은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지붕 위에는 흙이 거의 없기 때문에, 풀이 잠시 돋아날 수는 있어도 오래 자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의 내적 연결 없이 외적 지식과 형식만으로 유지되는 신앙도 잠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 유혹과 시련을 만나면 쉽게 메말라 버립니다. 이는 겉 사람은 활동하고 있지만, 속 사람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또한 ‘자라지 못한 곡초’는 영적 성장의 중단을 의미합니다. 곡식은 본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자라야 하지만, 아직 익기도 전에 말라 버리면 아무런 결실도 남기지 못합니다. 이처럼 사람 안에 심겨진 선과 진리도 주님으로부터 계속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면 거듭남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중도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이것이 영적 황폐(vastation)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 본문의 ‘태초부터’와 ‘상고부터’라는 표현에도 주목합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히 먼 옛날을 뜻하는 시간 표현으로 보지 않고, 홍수 이전 태고교회 말기를 가리키는 상응적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곧 이사야는 당시의 역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된 교회가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영적으로 메말라 갔는지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37:26-27은 창3과 직접 연결됩니다. 창3에서는 사람이 타락한 결과 ‘밭의 채소를 먹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사37에서는 그 결과가 ‘들의 풀’, ‘푸른 나물’, ‘지붕의 풀’, ‘자라지 못한 곡초’라는 다양한 상징으로 더욱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잃을수록 점점 깊은 영적 황폐 속으로 들어가며, 결국 열매 없는 생명만 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37:26-27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이 단순히 자연적인 음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적 생명을 잃은 사람의 상태를 뜻한다는 사실을 성경 전체를 통하여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들의 풀’, ‘푸른 나물’, ‘지붕의 풀’, ‘자라지 못한 곡초’는 모두 생명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참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하며, 이를 통하여 스베덴보리는 타락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더욱 선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AC.274, 창3:18,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3:18)AC.274‘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o eat the herb of the field), 곧 거친 음식(wild food)을 먹는다는 것은, 들짐승처럼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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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4, 심화 1, ‘단4:25’

AC.274.심화 1. ‘단4: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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