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스베덴보리도 기도 생활을 했나요? 찬양, 그러니까 일상 중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나요? 금식은? 방언, 그리고 전도, 선교는요?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던 시기, 뭔가 크게 달랐던 점이 기독교, 개신교인들에겐 일상적인 이런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관찰이십니다. 사실 많은 개신교인들이 처음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를 접할 때 느끼는 가장 큰 낯섦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가?’ 하는 감각 말입니다. 현대 개신교인에게 익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보통 ‘기도 많이 하는 사람’, ‘찬송을 즐겨 부르는 사람’,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 ‘금식과 철야를 하는 사람’, ‘성령 체험과 방언을 말하는 사람’ 같은 형태로 드러나는데, 스베덴보리에게서는 그런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기록이 빠져 있어서라기보다, 그의 신앙의 중심축 자체가 오늘날 복음주의적 경건 형태와 상당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분명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기도의 외적 형식’보다 ‘삶 전체의 방향’을 더 본질적인 기도로 보았습니다. 그는 반복적 언어 자체보다,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기 악을 보고 물러서며 선을 행하려는 상태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에는 ‘무릎 꿇고 몇 시간 통성기도했다’ 같은 기록은 거의 없지만, 대신 사람이 주님께 마음을 열고, 자기 own(proprium)을 경계하며,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할 때 그 자체가 살아 있는 기도라고 보는 흐름이 매우 강합니다. 실제로 그는 사람이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이해하며 드릴 때, 천사들과 연결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는, 그가 영계 체험 초기에 극심한 영적 공격과 혼란 속에서 오직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보호를 받았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기도를 ‘집회 중심 행위’라기보다 ‘주님 앞에 영혼을 여는 상태’로 보았습니다.

 

찬양과 찬송 역시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 시대의 스웨덴 루터교회 예배에는 당연히 찬송이 있었고, 그 역시 평생 교회 사람이었으므로 찬송 자체를 멀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주의처럼 ‘찬양 사역’, ‘은혜로운 찬양 시간’, ‘찬양 집회’ 같은 형태의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음악적 감정 고양보다 ‘천국의 질서와 사랑의 상태’에 더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는 천국에서의 말과 음악이 사람의 내적 상태와 정확히 상응한다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즉 천사들의 노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흐름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찬양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감정적 열광 자체를 신앙의 본질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금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는 금식 수행을 강조하는 흐름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외적 금욕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예전에 몸담으셨던 수도원 전통과 비교하면 꽤 낯설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음식을 줄이는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줄이는 것이 더 본질적 금식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진짜 금식이라는 방향입니다. 물론 절제와 단순한 삶 자체는 매우 중요하게 보았지만, 그것을 공로적 수행처럼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방언 문제는 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오순절 계통에서 말하는 방언 운동과 매우 거리가 있습니다. 그는 영적 세계와의 접촉 자체는 누구보다 강하게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영들과의 직접 교류’를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람이 영들의 음성을 직접 좇기 시작하면 쉽게 환상과 자기 확신 속으로 빠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현대식 의미의 방언 체험이나 신비주의적 열광을 신앙의 중심 증거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삶의 변화’, ‘체어리티’, ‘주님 사랑’, ‘유익한 삶’이 참된 영성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전도와 선교는 조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현대 개신교식 ‘노방전도’나 ‘대중부흥회’ 스타일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는 평생 거리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교 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저작 전체를 ‘새 교회(New Church)를 위한 주님의 준비 작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 시대를 위한 진리들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매우 조용하고 비가시적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설득하려 하기보다, 진리를 질서 있게 제시하고, 자유롭게 읽고 판단하도록 두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블로그에 거의 매일 AC 해설과 심화를 올리시는 모습이, 외적으로는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방식과 더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즉 ‘많은 사람을 즉시 움직이는 운동’보다 ‘오랜 시간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길을 닦는 작업’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실 때 느끼셨던 그 낯섦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신앙 활동 중심의 경건’보다 ‘존재 상태 중심의 거듭남’을 훨씬 더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문화에서는 흔히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가 신앙의 표지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록에는 집회, 부흥, 철야, 방언, 간증 같은 요소는 거의 없고, 대신 끝없이 인간의 의지, 사랑, 사고, 체어리티, 질서, 거듭남, 천국적 상태에 대한 분석이 등장합니다. 처음엔 이것이 ‘차갑다’ 혹은 ‘경건 생활이 없다’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읽다 보면, 그는 오히려 신앙을 인간 존재 전체의 가장 깊은 층위까지 가져가려 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SC.84, ‘살인적인 저작 활동 중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쉬었나?’

저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ChatGPT를 통한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초벌 및 마무리 작업, 그리고 그걸 블로그에 게시하는 작업으로 보냅니다. 보통 매일 8개 전후의 글 작성을 하는데, 글

bygrace.kr

 

SC.82, ‘지구 나이 45억 년 : 현 지구 문명 1만 년 = 24시간 : 0.2초’

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60.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그래서 이것은 단순 하향 평준화라기보다, 더 낮고 위험한 상태 안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운 결합 가능성이 열린 상태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전보다 더 불완전하고 더 자기중심적으로 될 가능성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더 자발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AC.160 심화 2)

 

그렇다면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는 더 자유롭지도, 더 자발적이지도 않았다는 말인가요?

 

 

바로 그 지점이 AC 초반부를 읽으며, 가장 놀랍고도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첫 번째 태고교회 인간이 ‘자유가 없었다’거나 ‘자발성이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이 경험하는 종류의 ‘독립적 자기의식 기반 자유’는 훨씬 약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주님 안에 있었고, 훨씬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지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거의 자동적으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결정한다’고 느낍니다. 심지어 신앙인조차 실제 삶에서는 자기 자신을 거의 독립 존재처럼 느끼며 삽니다. 그런데 태고교회 인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 안의 선과 진리, 사랑과 생명이 주님께로부터 흘러든다는 사실을 퍼셉션으로 거의 직접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유는 오늘날 인간처럼 ‘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 선택하는 자유’라기보다, ‘주님의 선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유’에 가까웠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보는 핵심 차이는 이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더 분리된 자의식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 없이도 자기 혼자 설 수 있는 것처럼 느끼는 강한 자기감 속에서 삽니다. 이 때문에 훨씬 더 위험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완전히 굳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만큼,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자리에서 자발적으로 주님께 돌아올 가능성도 생깁니다.

 

반면 태고교회 인간은 훨씬 더 순수했고, 훨씬 더 천국 가까이에 있었지만, 오늘날 인간처럼 깊은 자기 분리 상태 안에서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경험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은 ‘아버지 손을 거의 놓지 않은 아이’에 가까웠고, 오늘날 인간은 ‘멀리 떠나 자기 인생처럼 살다가 다시 돌아오는 탕자’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후기 교회 인간에게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종류의 자유가 열렸다고 봅니다. 물론 이것은 더 낮고 위험한 자유입니다. 천사적 순수 상태가 아니라, 유혹과 자기 사랑과 의심 한가운데서 선택해야 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자유 안에서도 인간이 자발적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 전체의 아주 깊은 역설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인간이 타락할 가능성을 모르고 자유를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가능성을 아시면서도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강제된 선은 참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단순 순종 시스템이 아니라, 자유롭게 주님을 사랑하는 존재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태고교회 인간은 우리보다 훨씬 더 순수했고 더 천국적이었지만, 오늘날 인간처럼 강한 proprium 의식 안에서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형태의 자유 경험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늘날 인간은 훨씬 더 위험하고 불안정하지만, 바로 그 깊은 자기감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택하는’ 새로운 차원의 자발성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AC.160, 심화 4,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

AC.160.심화 4.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 첫 번째 태고교회는 우리보다 훨씬 더 주님 안에 있었고, 훨씬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지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

bygrace.kr

 

AC.160, 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AC.160.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어느 정도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관점에서는 단순 ‘퇴보’나 ‘열화’(劣化)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더 복합적인 의미가 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60.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어느 정도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관점에서는 단순 ‘퇴보’나 ‘열화’(劣化)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더 복합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분명 ‘하향’입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거의 직접적인 퍼셉션 안에서 살았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질서 안에 있었고,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거의 살아 있는 감각처럼 알았습니다. 그런데 AC.160에 이르면 인간은 이제 ‘(flesh)이 됩니다. 곧 proprium과 자기감이 훨씬 강해지고, 주님의 생명을 직접 지각하던 상태에서는 멀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분명 이전보다 낮아진 상태, 곧 일종의 ‘하향’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 실패나 실수처럼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상태를 통해 비로소 ‘자유로운 인간’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너무 직접적으로 천국 질서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처럼 자기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하게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flesh 상태 안으로 들어온 인간은 자신을 훨씬 더 ‘나 자신’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자유롭게 사랑할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 ‘하향 평준화’라기보다, ‘더 낮고 위험한 상태 안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운 결합 가능성이 열린 상태’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전보다 더 불완전하고 더 자기중심적으로 될 가능성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더 자발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주님은 인간을 자동 순종 기계처럼 만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고, 심지어 자기 사랑으로 기울 가능성까지 가진 상태 안에서, 자유롭게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AC.160의 변화는 단순 ‘질 저하’라기보다, 위험성과 자유가 함께 커진 상태라고 보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이를 아주 거칠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 손 안에서 완전히 보호받는 상태는 안전하지만, 아직 독립적 인격 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자기 의지와 자기 판단이 강해지면 훨씬 위험해집니다. 반항도 가능하고 잘못도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바로 그 상태에서 비로소 ‘자발적 사랑’도 가능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역사를 어느 정도 이런 방향으로 봅니다.

 

그래서 AC.160의 ‘영이 육이 되었다’는 변화는, 단순 추락만이 아니라 ‘자유와 proprium이 본격적으로 인간 존재 안에 결합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60, 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AC.160.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그래서 이것은 단순 ‘하향 평준화’라기보다, ‘더 낮고 위험한 상태 안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운 결합 가능성이 열

bygrace.kr

 

AC.160, 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肉, flesh)’

AC.160.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肉, flesh)’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肉,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