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78.심화

 

3. ‘정죄(condemnation)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정죄(condemnation)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화를 내시거나 벌을 선고하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에서는 정죄를 하나님의 심판이나 형벌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전혀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에게 정죄란 사람이 자신의 사랑과 삶을 통하여 스스로 지옥을 선택한 결과이며, 그 선택에 따라 자신의 상태가 확정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자비 자체이시므로,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사람뿐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보내시며,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따라서 정죄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끝까지 거부한 결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정죄를 하나의 판결’이라기보다 상태의 귀결’로 이해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사랑하고 선택하며 살아온 모습 그대로 영계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는 겉으로 감추어졌던 사랑과 의도가 모두 드러나고, 각 사람은 자신과 같은 사랑을 가진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갑니다. 선을 사랑한 사람은 천국을, 악을 사랑한 사람은 지옥을 자신의 집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정죄의 실상입니다.

 

정죄가 스스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자유와도 깊이 관련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강제로 천국에 들여보내지 않으십니다. 만일 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억지로 천국에 데려간다면, 그는 천국의 사랑과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오히려 자신과 같은 사랑이 지배하는 지옥을 더 편안하게 여기며,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정죄란 주님께서 밀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따라 스스로 머물 곳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또한 정죄는 한순간의 실수나 죄 하나 때문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거듭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비록 많은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정죄의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악을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선이라고 정당화하고 끝까지 붙드는 사람이 스스로 정죄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나오는 심판’도 주님께서 사람을 임의로 구분하시는 행위라기보다,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주님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비치지만, 선한 사람은 그 빛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악한 사람은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빛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빛 앞에서 사람의 본래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심판과 정죄도 이와 같은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정죄는 두려움의 교리가 아니라, 자유와 책임의 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사람 자신의 자유에 맡기십니다. 결국 정죄란 주님께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끝까지 주님을 거부한 결과 자신이 사랑하는 삶과 공동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구원이란 주님께서 특별히 몇 사람만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이 그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278, 심화 4, ‘지옥 상태’(infernal state)

AC.278.심화 4. ‘지옥 상태’(infernal state)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옥 상태’(infernal state)는 단순히 사람이 죽은 뒤 가는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과 삶이 지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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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8, 심화 2, ‘시104:29’

AC.278.심화 2. ‘시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시104:29) Thou hidest thy faces, they are troubled; thou takest away their breath,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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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104:29) Thou hidest thy faces, they are troubled; thou takest away their breath, they expire, and return to their dust (Ps. 104:29),

 

 

AC.278에서 스베덴보리가 시104:29을 인용하는 이유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return to their dust)는 말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돌아섬으로써 영적 생명을 잃고 정죄 받은 상태에 이르게 되는 의미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3:19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를 해석하면서, 같은 상징이 사용된 시편의 말씀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먼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실제로 얼굴을 돌리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얼굴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생명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께서 낯을 숨기신다’는 것은 사람 편에서 주님의 사랑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지만, 사람이 주님에게서 돌아설 때, 마치 주님께서 멀어지신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어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호흡’은 단순한 공기의 숨결이 아니라 생명의 유입(influx)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것은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흘려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 생명을 거부하고 자신만을 의지하게 되면 영적으로 죽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의 죽음’을 육체의 죽음보다 영적 죽음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먼지(dust)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앞서 창세기에서 뱀이 흙을 먹게 된 것처럼, 흙은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 곧 주님과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먼지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가 흙으로 분해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 갇혀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핵심 이유는 바로 본문 자체가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호흡을 거두신즉’, ‘죽어 먼지로 돌아간다’는 세 단계를 연결하여 말합니다. 즉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생명의 유입이 거절되며, 그 결과 영적 죽음과 흙의 상태’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278에서 설명하는 흙으로 돌아감’의 의미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시편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창세기의 ’이 물질적인 흙이 아니라 영적 상징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주님의 얼굴에서 돌아설 때, 그는 생명의 근원과 분리되고, 결국 먼지로 돌아감’, 곧 영적 생명을 잃고 정죄 받은 상태, 지옥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증거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AC.278, 창3:19,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8‘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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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8, 심화 1, ‘시22:29’

AC.278.심화 1. ‘시22:29’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시22:29) All those who go down to the dust shall 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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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8.심화

 

1. ‘22:29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22:29) All those who go down to the dust shall bow before Jehovah, and those whose soul he hath not made alive (Ps. 22:29).

 

 

AC.278에서 스베덴보리가 시22:29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dust)이 단순한 땅의 흙이나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생명을 잃은 상태, 곧 정죄를 받아 지옥 상태가 된 걸 의미함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3:19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를 설명하면서, 같은 의미로 사용된 다른 성경 구절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시편은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를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와 나란히 언급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만일 ‘’이 단순히 육체의 무덤을 의미한다면 모든 사람이 결국 흙으로 돌아가므로 특별한 구별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가 특별히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흙은 단순한 물질적 상태가 아니라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은 ‘다 그(Jehovah) 앞에 절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통치와 심판 아래 모든 사람이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자도 있고, 스스로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있습니다. 후자에 대해 ‘진토 속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그들이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에 머물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은 생명이 없는 것, 가장 낮은 것, 그리고 뱀이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창3에서 뱀이 ‘흙을 먹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흙은 자기 사랑과 감각적인 것만을 따라 살아가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인간은 영적으로 ‘’의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흙으로 돌아간다’는 창세기의 말씀을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으로 이해합니다. 곧 사람이 주님의 생명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만을 따라 살게 되면, 그는 영적으로 생명을 잃고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이 시편 구절은 AC.278의 논지를 직접 뒷받침합니다. 즉 ‘’은 단순한 자연적 물질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생명을 잃은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 창3의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가 육체의 종말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 곧 정죄를 받아 지옥 상태가 된 걸 의미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78, 심화 2, ‘시104:29’

AC.278.심화 2. ‘시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시104:29) Thou hidest thy faces, they are troubled; thou takest away their breath,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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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8, 창3:19,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8‘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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