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출26:1, 31)
출26:1, 31이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가장 안쪽의 증거궤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에 접근하는 모든 과정과 경계를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막의 휘장은 단순히 공간을 나누거나 성막을 덮는 천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성막 전체가 천국과 교회, 그리고 거듭난 사람을 표상하며, 성막 안의 여러 공간과 기물은 사람 안에 있는 외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내적인 것에 이르기까지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휘장은 서로 다른 영적 상태와 단계를 구분하는 경계를 뜻합니다. 사람은 외적인 상태에서 곧바로 가장 내적인 거룩함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따라 단계적으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휘장들 위에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AC.308은 이 사실을 통해, 거룩한 것에 대한 주님의 보호가 증거궤나 지성소와 같은 가장 내적인 곳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처음 접하는 외적 단계에서부터 가장 깊은 천적인 것에 가까이 가는 단계까지 모든 과정에 함께합니다. 사람이 어느 단계에서든 자신의proprium과 감각 및 기억 지식으로 거룩한 것을 침범, 왜곡하거나profane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것입니다.
출26:1의 열 폭 휘장은 성막 전체를 이루는 가장 안쪽의 휘장들입니다. 이 휘장들 위에 그룹들이 정교하게 수놓아졌다는 것은, 성막 전체, 곧 천국과 교회의 질서 전체가 주님의 섭리 아래 보호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룹들은 어느 한 출입구에만 서 있는 문지기가 아니라, 거룩한 질서 전체에 두루 존재하는 보호의 표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것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것을 보존하고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도 함께 있습니다.
출26:31의 휘장은 특별히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입니다. 지성소는 주님의 가장 직접적인 임재와 가장 내적인 천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휘장 위에 그룹들이 수놓아졌다는 것은, 사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장 깊은 신적, 천적인 것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막혀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막힘은 사람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알고도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은 창3:24의 ‘생명나무의 길’과 같은 기능을 합니다. 창3에서는 그룹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으며, 출26에서는 그룹들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에 수놓아져 있습니다. 두 장면 모두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지성으로 가장 내적 거룩함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생명나무의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듯이, 지성소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휘장 뒤에서 보호되고 있습니다.
휘장에 사용된 재료와 색들도 이 의미를 더 깊게 합니다. 가늘게 꼰 베 실은 선에서 나온 순수한 진리를, 청색은 천적인 것에 대한 애정을, 자색은 천적 선을, 홍색은 영적 선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휘장들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선과 진리로 이루어진 천국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선과 진리의 조직 속에 그룹들이 함께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선과 진리의 질서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 자체 안에 내재하여 거룩한 것을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그룹들이 휘장 위에 ‘정교하게 수놓아졌다’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그룹들은 완성된 휘장 위에 나중에 붙인 별도의 장식물이 아니라, 휘장의 직조 과정에서 그 무늬 안에 함께 짜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사후에 덧붙여진 임시 조치가 아니라, 천국과 교회의 질서 안에 처음부터 마련되어 있는 보호의 원리임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악이 생긴 뒤에야 뒤늦게 대응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모든 상태와 가능성을 보시고, 사람을 보호하는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출26:1의 휘장들과 출26:31의 휘장은 서로 다른 범위에서 같은 진리를 보여줍니다. 열 폭의 휘장 위에 그룹들이 수놓아진 것은 성막 전체와 그 안의 모든 거룩한 것이 주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나타내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 위에 그룹들이 수놓아진 것은 특별히 가장 내적 거룩함에 대한 접근이 주님의 질서에 따라 제한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는 전체적인 보호를, 다른 하나는 가장 내적 경계에서의 보호를 보여줍니다.
이 인용은 유대교회의 상태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유대인들은 성막과 휘장과 그룹들을 외적으로는 보고 사용하였지만, 그것들이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의 내적인 것들을 표상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AC.308에 따르면, 이것은 그들에게 내적 진리를 주시지 않은 냉혹한 처분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profane하지 않도록 하신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외적 표상과 의식은 허락되었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주님의 오심, 사후의 삶, 속 사람, 말씀의 속뜻에 관한 명백한 지식은 감추어졌습니다.
이러한 감춤은 휘장의 기능과 정확히 상응합니다. 휘장은 지성소를 없애지 않으면서도 보이지 않게 하며, 동시에 아무나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도 내적인 거룩한 것들은 존재하고 있었지만, 휘장 뒤에 있는 것처럼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그 거룩한 것들과 표상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을 명백히 이해하고 소유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악한 상태에서 더 깊은profanation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신 보호였습니다.
그러므로 휘장은 단순한 차단이나 단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휘장은 한편으로는 경계를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경계 안쪽에 있는 거룩한 것을 보존합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에는 가리고 막지만, 주님께서 정하신 때와 질서가 되면 열릴 수 있는 경계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강림과 인성의 신성화가 완성되었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가장 내적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열렸음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그 길 역시 사람의proprium과 감각적 추론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통하여 열립니다.
또한 그룹들이 휘장 위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섭리가 단지 거룩한 것을 사람에게서 감추는 데만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만큼은 받게 하시고, 받을 수 없는 것은 감추시며, 그가 더 준비되면 다시 더 내적인 것을 열어 주십니다. 거듭남의 모든 과정은 이러한 열림과 감춤의 반복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천적인 아르카나를 모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외적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며, 체어리티 안에 들어간 뒤에야 더 내적 진리가 열립니다.
따라서 그룹들이 휘장 위에 수놓아졌다는 것은 거듭남의 각 단계 사이에 주님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단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기억 지식을 많이 쌓았다 해서 곧바로 내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신앙에 관한 많은 교리를 안다고 해서 천적 사랑 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만 그다음 단계의 것을 열어 주십니다. 이것이 그룹들이 휘장의 경계마다 있는 이유입니다.
AC.308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직접적인 목적은 ‘그룹들’이 사람의 신앙 탐구 자체를 막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proprium으로부터’, 그리고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광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있습니다. 휘장 위의 그룹들은 사람이 주님의 질서를 거치지 않고, 가장 내적 거룩함에 접근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거룩한 것은 연구의 대상이기 이전에 삶으로 받아야 할 것이며, 자기 지성으로 소유할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출26:1, 31이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성막 전체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경계에 새겨져 있음으로써, 주님의 섭리가 거룩한 것을 보호하고, 사람의 접근을 질서 있게 조절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룹들은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쫓아내는 표상이 아니라, 그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룩한 것을profane하지 않도록 지키며, 장차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합당한 상태가 되었을 때, 더 내적인 것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 거룩함을 보존하시는 자비의 표상입니다.
18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21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출25:18-21)
출25:18-21이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밀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룩한 것에 함부로 접근, 그것을profane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그룹들이 어디에 놓였으며, 무엇을 덮고 있고,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가 매우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 모든 배치가AC.308의 중심 메시지를 드러냅니다.
먼저 그룹들은 증거궤 위의 ‘속죄소’(on the mercy seat over the ark)두 끝에 놓였습니다. 증거궤 안에는 증거판, 곧 십계명이 들어 있었으므로, 증거궤는 말씀의 신적 진리와 더 깊게는 신적 진리이신 주님을 표상합니다.AC.308은 이 증거궤가 창3의 ‘생명나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밝힙니다. 곧 생명나무와 증거궤는 모두 주님과 오직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들, 다시 말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생명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룹들이 증거궤 위에 놓였다는 것은, 주님과 주님께 속한 가장 거룩한 것들이 주님의 섭리로 보호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룹들이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그룹들은 속죄소와 별도로 만들어져 나중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속죄소 자체에서 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는 섭리가 주님의 자비와 분리된 별도의 조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속죄소(the mercy seat)는 주님의 자비와 죄 사함을 표상하고, 그룹들은 거룩한 것을 지키시는 섭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그룹들의 보호는 냉혹한 차단이나 배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보호입니다. 사람이 거룩한 것을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접근을 제한하시는 것 자체가 속죄소가 나타내는 주님의 자비에 속합니다.
또한 그룹들은 날개를 높이 펴서 속죄소를 덮고 있었습니다. 말씀에서 ‘날개’는 보호와 능력을 뜻하며, 여기서는 특별히 주님의 섭리가 거룩한 것을 덮어 지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덮음’은 거룩한 것을 완전히 없애거나 영원히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의proprium과 감각, 그리고 기억 지식으로 거룩한 것 안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진리를 주시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상태와 질서에 따라 진리를 열어 주십니다.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깊은 진리가 감추어지는 것은 벌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그룹들의 얼굴이 서로를 향하면서 동시에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도 같은 의미를 강화합니다. 그들의 시선은 바깥을 향하거나 사람을 위협하는 방향을 향하지 않고, 속죄소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룹들의 기능이 사람을 공격하거나 정죄하는 데 있지 않고, 속죄소가 표상하는 주님의 자비와 거룩함을 섬기고 보호하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룹들의 모든 자세와 방향은 주님의 자비를 중심으로 정돈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룹은 단순한 심판의 표상이 아니라, 자비로운 섭리의 표상입니다.
속죄소가 증거궤 위에 놓이고, 증거판이 궤 안에 들어 있다는 구조도 중요합니다. 가장 안쪽에는 증거판이 있고, 그 위에는 속죄소가 있으며, 속죄소 위에는 그룹들이 있습니다. 이는 신적 진리의 가장 내적 거룩함이 주님의 자비로 덮여 있고, 그 자비의 질서 안에서 섭리로 보호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곧바로 가장 내적인 신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와 섭리를 통하여 접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지성과 감각으로는 증거판이 표상하는 신적 진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자비와 질서 안에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또한 그룹들이 단순히 접근을 막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과 만나시고 말씀하시는 장소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다음 절인 출25:22에서 주님께서는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를 만나고 말씀하시겠다 하십니다. 따라서 그룹들이 있다는 것은 계시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시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보호되고 전달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의own으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를 침범해서는 안 되지만, 주님께서는 그룹들 사이에서, 곧 주님의 섭리가 정한 질서와 한계 안에서 사람이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AC.308이 특별히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유대교회의 상태와도 관련됩니다. 유대인들은 성막과 증거궤와 속죄소와 그룹들을 외적으로는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주님과 천국, 그리고 말씀의 속뜻을 표상한다는 사실은 명백히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 내적 의미를 분명히 알면서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한 외적 예배를 계속하였다면, 그 거룩한 진리를profane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상은 허락하셨으나 그 속뜻은 감추셨습니다. 속죄소 위의 그룹들은 바로 이러한 보호를 가시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창3:24의 그룹들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창3에서는 그룹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고, 출25에서는 그룹들이 생명나무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증거궤와 속죄소를 덮어 지키고 있습니다. 두 장면 모두 사람이 자신의own으로부터 주님과 천적인 것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섭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듯이, 증거궤의 거룩함도 파괴되거나 제거된 것이 아니라 그룹들 아래에서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보호하면서도, 장차 주님의 질서 안에서 다시 그것을 받을 가능성을 보존하시는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출25:18-21이AC.308에 인용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증거궤와 증거판은 주님과 주님께 속한 신적, 천적인 것들을, 속죄소는 주님의 자비를, 그 위에서 날개로 덮고 있는 그룹들은 사람이 자신의proprium(own)과 감각, 그리고 기억 지식으로 그 거룩함을 침범하여profane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합니다. 더욱이 그룹들이 속죄소와 한 덩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러한 제한과 보호가 주님의 자비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비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구절은 그룹이 단순한 금지와 차단의 표상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보호하시는 자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AC.308에 인용된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과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의미를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 다시 오래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룹들’(cherubim) 말인데요, 이것은, 만일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자신의 own으로부터, 그리고 감각과 기억 지식에 속한 것들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the mysteries of faith) 안으로 미친 듯이 들어가 그것들을 profane,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막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그룹들’이 언급되는 모든 구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quality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만일 주님의 오심, 교회의 표상, 모형들이 주님을 상징함, 사후의 삶, 속 사람과 말씀의 속뜻 등 이런 것들에 관하여 밝히 알게 되는 순간, 이들은 분명 그것을 profane, 그렇게 해서 결국 영원히 멸망하였을,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궤 위 속죄소(the mercy seat over the ark)에 있는 ‘그룹들’(cherubim), 성막 휘장들(the curtains of the tabernacle)에 있는 그룹들, 휘장(the veil)에 있는 그룹들, 그리고 성전(the temple)에 있는 그룹들로 표상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지켜 보존하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As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and of the “garden of Eden” were given above, it is needless to dwell longer on them; but that “cherubim” denote the providence of the Lord lest man should insanely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from his own, and from what is of the senses and of memory-knowledge, and should thus profane them, and destroy himself, is evident from all the passages in the Word where mention is made of “cherubim.” As the Jews were of such a quality that if they had possessed any clear knowledge concerning the Lord’s coming, concerning the representatives or types of the church as being significative of him, concerning the life after death, concerning the interior man and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they would have profaned it, and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therefore this was represented by the “cherubim” on the mercy seat over the ark, upon the curtains of the tabernacle, upon the veil, and also in the temple; and it was signified that the Lord had them in keeping. (Exod. 25:18–21; 26:1, 31; 1 Kings 6:23–29, 32)
18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출25:18-21)
1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출26:1, 31)
23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 24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부터 저쪽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며 25다른 그룹도 십 규빗이니 그 두 그룹은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이요 26이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요 저 그룹도 같았더라 27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28그가 금으로 그룹을 입혔더라 29내 외소 사방 벽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새겼고, 32감람나무로 만든 그 두 문짝에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곧 그룹들과 종려에 금으로 입혔더라(왕상6:23-29, 32)
증거판(the testimony)이 들어 있던 궤는 이 구절(창3:24)의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와 같은 것을 의미하였는데, 곧 주님과 오직 주님께만 속한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자주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God of Israel sitting on the cherubim)으로 일컬음을 받으셨고, 또한 그룹들 사이에서(between the cherubim)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For the ark, in which was the testimony, signified the same as the tree of lives in this passage, namely, the Lord and the celestial things which belong solely to him. Hence also the Lord is so often called the “God of Israel sitting on the cherubim,” and hence he spoke with Moses and Aaron “between the cherubim” (Exod. 25:22; Num. 7:89).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민7:89)
이것은 에스겔에서 분명하게 묘사되는데, 거기 보면, This is plainly described in Ezekiel, where it is said: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겔9:3-7)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was uplifted from upon the cherub whereon he was, to the threshold of the house. And he called to the man clothed with linen, and said unto him,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set a mark upon the foreheads of the men who groan and sigh for all the abominations done in the midst thereof. And to the others he said, Go ye after him through the city, and smite; let not your eye spare, neither have ye pity; slay to blotting out the old man, and the young man, and the virgin, the infant, and the women; defile the house, and fill the courts with the slain (Ezek. 9:3–7).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7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겔10:2, 7) He said to the man clothed in linen, Go in between the wheel to beneath the cherub, and fill thy palms with coals of fire from between the cherubim, and scatter them over the city; the cherub put forth his hand from between the cherubim unto the fire which was between the cherubim, and took thereof, and put it into the palms of him that was clothed in linen, who took it and went out (Ezek. 10:2, 7).
이 구절들을 통해 ‘그룹들’(cherubim)은 사람들이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the providence of the Lord)를 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광적 욕망(insane cupidities)에 내맡겨졌는데, 이것을 여기서는 ‘성읍 위에 흩어질 불’(fire that was to be scattered over the city)과 ‘아무도 아끼지 말라’(none should be spared)는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From these passages it is evident that the providence of the Lord in preventing men from entering into the mysteries of faith is signified by the “cherubim”; and that therefore they were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here also signified by the “fire that was to be scattered over the city,” and that “none should be spared.”
해설
AC.308은 창3:24의 ‘그룹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의 여러 구절을 통해 본격적으로 밝히는 글입니다. 앞의 AC.306에서는 그룹들이, 거룩한 것에 사람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한다 간단히 설명하였고, AC.307에서는 홍수 직전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이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잃고, 광적 욕망과 persuasion에 내맡겨진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이제 AC.308은 왜 거룩한 것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자비로운 보호인지를 성막과 성전, 그리고 에스겔의 환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먼저 이 글에서 ‘그룹들’은 어떤 특별한 계급의 천사들을 단순히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proprium과 감각적 사고, 그리고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 그것들을 모독, 즉 profanation 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한다는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proprium으로부터’,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겸손과 선한 애정 없이 자기 지성과 감각적 판단만으로 거룩한 것들을 장악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룩한 진리를 자기 안에서 받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고 지배 및 이용하려 합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에 속한 것들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겉 사람에게 속한 유용한 수단이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속 사람의 빛을 섬길 때에는 진리를 확인하고 삶에 적용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순서가 뒤집혀 감각적 증거와 기억 지식이 신앙의 진리를 재판하는 최종 기준이 되면, 사람은 천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 아래에 두게 됩니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 것은 부정하고,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거짓이라 여기며, 자기 지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거룩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러니까 자신의 proprium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가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진입을 ‘광적으로’, 그러니까 미친 듯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히 열심히 연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사랑과 거짓된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거룩한 것을 자기 소유로 삼고, 자기 판단에 복종시키며, 자기 목적에 이용하려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거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악한 삶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진리를 이용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아르카나는 그 사람 안에서 모독, 곧 profanation 됩니다.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단순히 모르거나 부정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입니다. profanation은 사람이 먼저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인 뒤, 다시 그것을 부정하거나 악한 삶과 뒤섞을 때 생깁니다. 거룩한 것과 불결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결합되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서로 분리되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이 그런 상태에 이를 위험이 있을 때, 오히려 더 깊은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하시고, 더 깊은 거룩한 것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것이 그룹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의미는 유대인들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AC.308은 유대인들이 만일 주님의 오심, 교회의 표상과 모형들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사실, 사후의 삶, 속 사람, 말씀의 속뜻에 관하여 명백한 지식을 가졌더라면 그것을 profane 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유대 민족 전체를 단순히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그러니까 유대교회의 표상적 기능과 그들의 내적 상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들은 외적 예배와 의식은 매우 철저히 지켰지만, 그 안에 있는 주님과 천국, 그리고 거듭남의 의미를 받아들일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 내적 의미가 분명하게 열렸다면, 그들은 외적으로는 거룩한 것을 행하면서 내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하여 그것을 이용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더 깊은 profanation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상적 예배는 허락하셨지만, 그 표상들의 깊은 속뜻은 감추셨습니다. 성막과 성전의 모든 기물과 의식은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관한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외적인 명령과 의식으로만 알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진리를 주지 않으신 냉혹한 처분이 아니라,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알아 나중에 profane 하지 않도록 보호하신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룹들이 속죄소 위에, 성막 휘장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 그리고 성전 벽과 문에 새겨졌습니다.
특히 궤 위 속죄소의 두 그룹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궤 안에는 증거판, 곧 십계명이 들어 있었고, 궤 위에는 속죄소가 있었으며, 그 위에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증거궤는 말씀과 신적 진리를, 더 깊게는 주님 자신과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AC.308은 이 궤가 창3의 생명나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생명나무가 주님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생명을 뜻하는 것처럼, 증거궤도 주님과 오직 주님께만 속한 천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그룹들이 속죄소를 날개로 덮고 그 얼굴을 속죄소를 향한 것은, 신적 거룩함이 주님의 섭리로 보호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그룹들은 거룩한 것을 주님으로부터 떼어 내어 사람에게 감추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룩한 것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표상입니다. 동시에 두 그룹 사이에서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거룩한 진리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와 방법에 따라 전달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함부로 거룩한 것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막으시지만, 사람이 겸손히 주님으로부터 받고자 할 때에는 필요한 만큼 말씀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이 점에서 그룹은 단순한 차단의 상징이 아니라, 계시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입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습니다. 궤도 감추어져 있지만, 그룹들 사이에서 주님의 음성은 들립니다. 그러므로 그룹의 기능은 사람을 영원히 진리 밖에 두는 데 있지 않고, 그 사람이 진리를 profane 하지 않으면서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 거룩한 것을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성막의 휘장들과 성전 벽에 그룹들이 수놓아지고 새겨진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휘장은 성소의 여러 단계와 경계를 나타내며, 무엇이 더 내적인 것이고, 무엇이 더 외적인 것인지를 구분합니다. 그룹들이 그 경계에 놓였다는 것은 사람이 외적 상태에서 곧바로 가장 내적인 거룩함 안으로 뛰어들 수 없으며,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따라 점차 준비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거듭남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은 기억 지식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체어리티에서 주님 사랑으로 한 단계씩 인도됩니다. 자기 지성으로 이 질서를 건너뛰려 하면, 거룩한 것을 이해하는 대신 왜곡하고 모독하게 됩니다.
AC.308이 겔9와 10을 인용하는 이유는 그룹들의 보호 기능이 단순히 평화로운 성전 장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겔9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은 그룹 위에서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가고,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표가 그어집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임합니다. 여기서 이마의 표는 사람의 사랑과 의지 안에 주님의 선이 남아 있음을 뜻합니다. 겉으로는 같은 성읍과 성전에 있어도, 속으로 악을 슬퍼하고 거부하는 사람과 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전혀 다른 상태에 있습니다.
겔10에서 그룹들 사이의 불이 성읍 위에 흩어지는 장면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불은 그 본래 의미에서는 사랑을 뜻하지만, 악한 사람에게 임할 때에는 자기 사랑과 그 욕망의 불을 뜻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악한 사람 안에 들어가면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뒤집혀 자기 사랑의 불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므로 성읍 위에 흩어지는 불은 주님께서 악을 만들어 보내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광적 욕망에 내맡겨진 결과 그 욕망이 그들을 심판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AC.308의 마지막 문장은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받았고, 그 결과 자신들의 광적 욕망에 내맡겨졌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악을 원하시거나 그들을 악으로 밀어 넣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미 거룩한 것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므로, 더 깊은 진리를 열어 주어 profanation을 증가시키기보다 그들이 선택한 외적이고 자연적인 욕망의 수준에 머물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같은 지옥 상태로 향하더라도 더 깊은 profanation으로 인해 더욱 악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제한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아끼지 말라’는 표현도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가혹한 심판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악과 거짓이 완전히 성숙하여 더 이상 선과 진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긍휼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긍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소멸시킨 것입니다. 심판은 주님에게서 오는 분노가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글은 또한 왜 세상에서 악이 곧바로 제거되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빛을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없애면서까지 악을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자유가 사라지면 회개와 거듭남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악을 허용하시되, 그 악이 무한히 커지지 못하도록 제한하시고, 사람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파멸을 가능한 한 줄이시며, 더 깊은 profanation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십니다. 그룹들은 바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섭리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창3:24의 그룹들은 단순히 타락한 인간을 생명나무에서 쫓아내는 무서운 문지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함부로 다루어 자기 자신을 영원히 파멸시키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 길은 닫힌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으며, 사람은 자기 지성과 감각으로 그 길을 침범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질서 안에서는 다시 그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AC.308의 중심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사람에게서 빼앗기 위하여 그룹들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 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룹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룹은 심판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자비의 표상이고, 차단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보존의 표상이며,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그 자유가 영원한 파멸로 치닫지 않도록 끝까지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