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8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된다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be a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means as before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해설

AC.388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된다는 것이 앞에서와 같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을 의미한다고 짧게 확인합니다. 여기서 앞에서와 같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이미 AC.380에서 처음 제시되었고, AC.382에서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자세히 확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고 그 의미를 창4:14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바로 앞의 AC.386-387과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86에서는 지면에서 쫓겨나는 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고, AC.387에서는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88에서는 그 결과를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이라고 합니다. 즉 진리에서 분리되고 선에서 분리되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할 방향 자체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신앙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교리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무엇이 참된 진리이고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인 유리함입니다.

 

따라서 피하며 유리한다는 것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라 영적 중심과 방향을 잃은 상태입니다. AC.382에서 물을 찾아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계속 진리를 찾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진리가 지향해야 할 선을 잃었기 때문에 어디에서 참된 만족을 얻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AC.388이 이 설명을 길게 반복하지 않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충분히 확증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결과를 전체 흐름 속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됨’, ‘사랑의 신앙의 선에서 분리됨’,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함은 서로 별개의 세 가지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붕괴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는 연속된 상태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결과 신앙이 더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진리 모두를 잃고 방향 없이 유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짧지만 분명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서만 선과 진리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형태를 얻습니다. 이 둘의 결합이 깨어지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영적으로는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유리함은 바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결국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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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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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7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hid from thy faces)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얼굴(faces of Jehovah)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얼굴 자비이며,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의 얼굴(faces) 신앙의 선들을 의미합니다. That to behid from thy faces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faces of Jehovah. Theface of Jehovah,as before said, is mercy, from which proceed all the goods of the faith of love, and therefore the goods of faith are here signified by hisfaces.

 

해설

AC.387은 창4:14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말을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이라고 해석하고, 그 근거를 여호와의 얼굴의 상응에서 찾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를 의미하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얼굴이라는 한 상응어를 설명하는 짧은 문장이면서도,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주는 번호입니다.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표현에서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며, 얼굴을 사람에게 향하시거나 돌리시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며 자비이십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어느 순간 자비를 거두시고 가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이 그 자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를 설명하면서 계속 지켜 온 원리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과 거짓으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태양은 계속 빛을 비추고 있지만 사람이 등을 돌리거나 문을 닫으면 어둠 가운데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해를 위한 비유일 뿐이지만,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상태가 주님의 자비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그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라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AC.387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여호와의 얼굴이 자비일 뿐 아니라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번 번호에서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참된 선의 근원을 사람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여호와의 얼굴, 곧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사람이 선을 의도하고 행한다고 해서 그 선의 최초 근원이 인간의 proprium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자기 삶에서 의지하고 행할 때 그것이 사람 안에서 신앙의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종교적인 위로가 사라졌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훨씬 깊게는 신앙에 생명을 주는 선의 근원과의 결합을 잃은 상태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두려 했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표상된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체어리티를 제거한 결과는 신앙만 깨끗하게 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고, 결국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신앙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신앙은 사랑과 독립하여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신앙에 속한 이라는 표현은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것으로 놓은 뒤 나중에 결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신앙 자체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 신앙 안에서 선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장했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정반대입니다.

 

AC.386AC.387을 나란히 놓으면 창4:14의 두 표현도 아름답게 대응합니다. ‘지면에서 쫓겨남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진리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 측면입니다. 결국 가인의 길은 진리만 잃는 것도 아니고 선만 잃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결과 선과 진리 모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어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되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는 설명은 바로 이 두 가지 분리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85-387의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자,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유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킬 위험에 놓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하나의 교리적 오류가 점차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를 흔드는 결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을 주님의 거절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다음 전개가 그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 줍니다. 가인은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졌다고 느끼고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만, 주님은 그를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주님의 얼굴이 자비라는 AC.387의 선언은 이후 가인의 를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인간이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어도 주님의 자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AC.384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이 남아 있었다고 한 것도 여기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 선의 근원이 가인 자신에게 있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가 모든 선의 근원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며,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하도록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의 가인의 표를 단순한 형벌의 완화가 아니라 주님의 보존 섭리와 연결하여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AC.387의 중심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짧은 선언에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단지 주님을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에서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반대로 그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그 자비에서 나오는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비극은 주님께서 자비를 거두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그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데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가인에게도 주님은 보존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곧이어 나타날 가인의 를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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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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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6

지면에서 쫓겨나는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ground)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순수한 의미에서는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앞에서 보여 것처럼 교회가 고백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말의 의미는 반드시 다루는 주제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잘못 고백하는 자들, 분열 또는 이단을 고백하는 자들도 역시 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면에서 쫓겨나는 (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That to be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i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ground,which, in the genuine sense, is the church, or the man of the church, and therefore whatever the church professes, as shown above. The meaning of a word necessarily varies with the subject treated of, and therefore even those who wrongly profess faith, that is who profess a schism or heresy, are also calledground. Here however to be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signifies to be no longer in the truth of the church.

 

해설

AC.386은 바로 앞 AC.385에서 지면에서 쫓겨나는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 출발점은 의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수한 의미에서는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교회가 고백하고 가르치는 것들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장소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교회의 진리가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더 이상 그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문장은 어떤 말의 의미는 반드시 다루는 주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땅은 언제나 교회다’, ‘물은 언제나 진리다’, ‘빛은 언제나 신앙이다라는 식으로 하나의 자연적 대상에 하나의 영적 의미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상응의 중심은 있지만, 실제 본문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그 단어가 놓여 있는 전체 문맥과 현재 다루고 있는 영적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바로 이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순수한 의미에서 을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곳이며, 교회의 사람 역시 선과 진리가 심어지는 하나의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앞의 AC.377에서도 사람 자신이 이며 또한 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안에 선들과 진리들이 심어지면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이 심어지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땅이라는 상응의 중심에는 무엇인가가 심어지고 받아들여지는 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가인의 분열이나 이단도 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바로 이번 번호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앙을 잘못 고백하는 자들, 곧 분열 또는 이단을 고백하는 자들도 하나의 이라고 불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어떤 교리적 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배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선한 교회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그 땅에 심어져 있으며, 어떤 교리가 그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1에서 땅을 간다는 표현이 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었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가는 것은 좋은 씨를 심고 열매를 얻기 위한 긍정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문맥의 은 이미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간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열된 교리를 계속 배양하고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경작이라는 이미지도 현재 다루는 주제가 무엇인가에 따라 속뜻의 성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상응의 의미가 문맥에 따라 아무렇게나 바뀐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만일 상응의 의미가 아무런 질서 없이 매번 달라진다면 말씀의 내적 의미를 객관적으로 읽을 수 없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런 임의성이 아닙니다. ‘에는 여전히 교회, 교회의 사람, 그리고 그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는 교리와 같은 일관된 의미망이 있습니다. 다만 그 교회나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인지, 아니면 그것을 왜곡하여 분열과 이단을 받아들인 상태인지에 따라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응은 고정된 낱말사전도 아니지만 무제한적인 상징 놀이도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의미망과 현재의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AC를 읽는 데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번호에서 =교회라고 배웠다고 해서 이후 모든 을 무조건 교회라는 한 단어로 바꾸어 읽으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처럼 교회의 사람’, ‘교회가 고백하는 ’, 심지어 왜곡된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까지 그 의미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응어를 만날 때 단어는 무엇을 뜻하는가?만 묻기보다 바로 문맥에서 의미로 사용되는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이제 이러한 원리를 현재 구절에 적용하면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다시 여기서는이라고 범위를 한정합니다. 여기서 그것은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을 의미합니다. 즉 가인은 단순히 자신이 살던 토지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교회의 진리 안에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단이나 외적인 교회 조직에서 제명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교회는 사람 안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살아갈 때 그 사람 안에 교회가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여전히 교회에 속해 있고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며 교리를 고백하더라도,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진리를 삶에서 거부한다면 내적으로는 교회의 진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가인의 추방은 바로 이러한 내적인 분리를 보여 줍니다.

 

또한 여기서도 주님께서 먼저 가인을 진리 밖으로 내던지셨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저주가 선에서 돌아선 상태를 의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인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확증한 분열 때문에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됩니다. 진리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면 진리의 생명을 잃고, 결국 무엇이 진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AC.382피하며 유리함과 이번 번호의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됨은 같은 영적 쇠퇴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AC.386은 짧은 번호이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칩니다. 하나는 가인의 지면에서 쫓겨남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상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의 상응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원리입니다. 같은 단어라도 다루는 주제에 따라 의미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상응을 기계적인 일대일 대응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변화도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일관된 상응 질서와 현재의 문맥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상응어의 뜻을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 그 상응이 지금 이 문맥에서 왜 그렇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이해하는 것입니다.

 

 

 

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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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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