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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머리에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강의는 삼위일체를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려는 진지한 시도라는 점입니다. 강사는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모호한 표현들을 정리하고, 삼신론과 양태론, 아리우스주의와 예수 유일주의를 구분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노력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일은 신앙의 기초이며, 잘못된 하나님 이해는 결국 잘못된 신앙생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바로 이 점에서는 강사와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단순한 신학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다만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는 전통적인 조직신학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강의는 처음부터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구분하면서 삼위일체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이며 매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한 하나님 안에 세 위격(Persons)이 영원부터 존재한다’는 전통적 표현 자체가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세 하나님을 연상시키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는 저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에서 니케아 이후의 삼위일체 교리가 아무리 ‘한 하나님’을 말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결국 세 분을 각각 생각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머리로는 하나라고 말하지만, 기도할 때는 성부 따로, 성자 따로, 성령 따로 생각하게 되고, 결국 의식 속에서는 세 신(神)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입술은 하나를 말하지만 생각은 셋을 만든다’는 역설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삼위일체는 부정되어야 할 교리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할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 삼위는 세 위격이 아닙니다. 그는 저서, ‘주님(The Lord)과 ‘참된 기독교’에서 삼위는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세 가지 신성한 본질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신성 자체(Divine Itself)로서의 성부, ‘신적 인성(Divine Human)으로서의 성자, 그리고 ‘신적 흘러나옴, 활동(Divine Proceeding)로서의 성령입니다. 이 셋은 세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서 영원히 하나를 이루는 신성의 세 가지 본질적 구별입니다. 그는 인간을 비유로 들어 영혼과 몸, 그리고 활동이 서로 구별되지만 한 사람을 이루듯이, 주님 안에서도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 그리고 신적 작용, 활동이 하나를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 비유조차 완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세 사람을 연상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성경적이라고 그는 판단합니다.

 

강의에서는 성경 번역의 문제를 상당한 비중으로 다룹니다. 특히 영어의 ‘one’을 ‘한 분’으로 번역하느냐 ‘’으로 번역하느냐에 따라 교리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언어의 미묘한 차이가 신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번역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을 것입니다. 말씀은 문자만으로는 결코 완전히 이해될 수 없으며, 문자 안에는 언제나 더 깊은 영적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저서,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에서 성경의 문자, 즉 겉 글자만 가지고 교리를 세우면, 서로 다른 구절을 근거로 얼마든지 상반된 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말씀 전체를 비추는 하나의 중심 원리가 필요한데, 그 중심은 언제나 ‘주님’ 자신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어느 구절이든 결국 주님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특정 번역어 하나만으로 삼위일체를 결정하려는 접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 전체가 누구를 계시하고 있는가를 묻는 일입니다.

 

강의는 아리우스주의와 양태론을 모두 비판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낮추는 아리우스주의를 분명히 거부합니다. 주님은 단순한 최고의 피조물이 아니라, 인간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양태론 역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삼위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 가면만 바꾸어 쓰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단순한 역할 놀이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신성의 구별입니다. 따라서 그는 아리우스주의와 양태론 모두를 넘어서려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이 독특한 이유입니다. 그는 전통적 삼위일체와 양태론 사이의 절충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제시합니다.

 

특히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세 위격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말씀하시며, 서로 교제하신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와 가장 크게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그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순종하시는 장면을 결코 두 신적 인격 사이의 대화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화(榮化)가 완성되기 이전, 곧 아직 완전히 신성과 하나 되지 않은 인간성을 입고 계시던 주님의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의 비밀’과 ‘주님’에서 그는 주님의 생애 전체를 인간성을 점차 신성으로 완전히 하나 되게 하시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전의 기도와 순종은 영원히 독립된 두 인격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인간성을 영화시키시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내적 싸움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부활 이후에는 그 영화가 완성되어, 주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신다고 설명합니다.

 

강의는 니케아 공의회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니케아와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교회가 점차 사도적 단순성을 잃었다고 봅니다. 그는 초대교회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예배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철학적 개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하나님 이해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으로 변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평범한 신자들은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신비’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신학자들은 끝없는 논쟁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새로운 계시를 통해 가장 먼저 바로잡으려 했던 것도 바로 이 하나님 이해였습니다.

 

강의 후반부에서는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 삼위일체를 증명하려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 마28:19, 요14, 고후13:14 등은 전통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본문들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구절들을 모두 인정합니다. 다만 그는 이 본문들이 세 인격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성의 삼중성을 보여 준다고 읽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세 이름이 아니라 ‘이름’이 단수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와 본질과 권능 전체를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세 이름을 나열하신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성령에 대한 이해도 전통 신학과 다릅니다. 그는 성령을 제3의 독립된 신적 인격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부활하시고 영화되신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발출되는, 흘러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능력이며, 천사들과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임재입니다. 마치 태양과 빛과 열이 분리될 수 없듯이, 주님과 성령 역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령이 단순한 힘이나 영향력만도 아닙니다. 성령은 주님 자신의 신적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제3의 인격을 따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영화되신 주님께서 직접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삼위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이 질문으로 모입니다. 그는 저서, ‘주님’을 통해 구약의 여호와께서 신약에서 인간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고 증언합니다. ‘참된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결국 한 분 주님께로 귀결된다고 말합니다. ‘천국과 지옥’에서는 천국의 모든 천사들이 오직 한 분 주님만을 하늘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천국의 비밀’ 전권을 통해 성경 전체가 바로 그 한 분 주님만을 증언한다고 해설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삼위일체는 결코 세 인격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과 지혜와 작용이 완전히 하나 되신 한 분 주님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교리입니다.

 

따라서 이 강의는 삼위일체를 성경적으로 설명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시선에서 보면, 여전히 니케아 이후의 전통적 틀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새로운 계시가 요청된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한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세 신’을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새로운 계시를 통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의 참뜻을 다시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최종 목적은 세 위격의 관계를 분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저서, ‘주님’, ‘참된 기독교’, ‘천국의 비밀’을 통해 일관되게 증언한 핵심이며, 동시에 오늘날 삼위일체를 다시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Y.31, ‘방언기도할 때, 3가지 생각하며 기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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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29, ‘삼위일체, 잘못돼서 어려운 겁니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강의는 처음부터 매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미 어떤 ‘안경’을 쓰고 있으며, 그 안경이 바로 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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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는 처음부터 매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미 어떤 ‘안경’을 쓰고 있으며, 그 안경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강연자는 자신이 성경 자체를 다시 읽은 결과,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이 아니라 후대의 신학이 만들어 낸 틀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흥미롭게도 ‘교리라는 안경이 성경 이해를 좌우한다’는 문제의식 자체는 스베덴보리 역시 매우 강하게 제기했던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저서,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과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곳곳에서, 사람들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형성된 교리와 자기 이해를 통해 말씀을 읽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언제나 사람의 애정과 사고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말씀의 속뜻을 새롭게 열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안경’이라는 비유 자체는 상당히 의미 있는 문제 제기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기존 교리를 부정하기 위해 새로운 논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내적 일관성 속에서 모든 교리를 다시 재정립하려 했다는 점이 이 강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입니다.

 

강연자는 이어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지만 한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단정합니다. 즉 두 하나님이며 두 인격인데, 다만 목적과 뜻이 같기 때문에 ‘하나’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강연자와 일정 부분 겹치면서도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전통적인 ‘세 인격이면서 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실제로는 세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심어 준다고 반복해서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상이 교회의 가장 큰 혼란 중 하나가 되었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보이지 않는 신성인 아버지와, 나타난 신적 인성, 그리고 발출, 즉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시는 신성이 하나로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에게 영혼과 몸, 그리고 활동이 분리될 수 없듯이, 주님 안에서도 신성과 인성, 그리고 활동, 즉 흘러나오시는 신성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반대한 것은 ‘삼위’ 자체가 아니라 ‘세 하나님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삼위의 이해’였습니다. 그는 삼위를 ‘한 인격 안의 삼위’로 재해석합니다. 이 점에서 강연은 전통 교리를 비판하는 데까지는 스베덴보리와 일부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그 대안으로 두 하나님을 세우는 순간 스베덴보리의 중심 교리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강연은 예수님의 순종을 중요한 논거로 사용합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들어, 뜻이 둘이므로 두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마리아에게서 받은 인간성, 그러니까 인성을 입으셨으며, 그 인성 안에는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시험과 유혹을 실제로 겪을 수 있는 상태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겟세마네에서 나타난 두 뜻은 두 하나님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영화되지 않은 인성과 그 안에 내재한 신성 사이에서 일어난 마지막 시험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외부의 다른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성을 끝까지 신성에 복종시키심으로써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즉 Divine Human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화(Glorification)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두 신격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을 신성으로 변화시키는 구속 과정의 일부입니다.

 

강연은 또 예수님께서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하셨으며, 태초에 아버지 안에서 혼으로 계시다가 몸을 입고 나오셨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매우 독창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설명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원부터 존재하신 것은 ‘신적 진리’ 곧 말씀(Logos)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분리된 또 하나의 존재가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신적 진리가 인성을 입고 세상 가운데 오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태초 이전에 ‘아들’이라는 독립된 존재가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영원부터 존재하신 것은 신성 자체이며, ‘아들’이라는 표현은 시간 속에서 성육신하신 이후의 주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니케아 이후 형성된 ‘영원한 아들의 출생’ 개념을 비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영원한 출생이라는 개념이 성경보다 철학적 추론에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원부터 두 번째 하나님이 존재했다고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성령에 대한 강연자의 설명 역시 흥미롭습니다. 그는 성령은 별도의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며, 아버지께서 직접 오실 수 없는 곳에서 대신 역사하시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성령을 제3의 독립 인격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을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활동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주님의 역사하심이며,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신적 영향력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또 하나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도 거부합니다. 그러나 강연이 성령을 오직 아버지의 영으로만 설명하는 반면, 스베덴보리는 성령은 영화되신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설명합니다. 부활 이후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영화된 인성으로부터 신적 진리가 직접 흘러나오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아버지와 분리된 존재도 아니지만, 단순히 아버지만의 영도 아닙니다. 영화되신 주님의 신적 활동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강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하나다’라는 표현을 ‘한 존재’가 아니라 ‘뜻과 목적의 일치’로 해석하는 대목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께서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는데, 이 논리는 일정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결합될 때, ‘하나’라고 표현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사랑과 진리의 일치가 단순한 협력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완전한 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사랑과 지혜가 부분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주님 안에서는 신성과 인성이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하나됨과 주님의 하나되심은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동일한 수준의 하나는 아닙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구별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강의는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던 여러 난제를 정면으로 다루려는 진지한 시도를 보여 줍니다. 또한 삼위일체를 둘러싼 전통적 설명이 일반 신자들에게 논리적으로 매우 어렵게 들린다는 문제의식도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시각에서 보면, 이 강의는 전통 교회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는 상당한 통찰을 보이지만, 그 대안을 세우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분리를 만들어 냅니다. 세 하나님을 거부하려다 두 하나님을 세우는 결과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참된 해결은 하나님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신성과 보이는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성육신의 신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본 자는 나를 보았다’는 말씀을 가장 결정적인 선언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은 아버지를 대표하는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이 강의는 기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중요한 문제 제기를 담고 있으나, 그 문제의 최종 해답은 ‘두 하나님’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계시 속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SY.30, ‘하나님의 속성 중 삼위일체는 정확히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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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28, ‘이게 교회입니까, 카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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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교회를 떠난 아들과 뒤늦게 깨닫는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이것은 단순히 세대 갈등이나 교회 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진리의 질서’가 ‘사랑의 질서’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이란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과 진리를 바라보는 중심 자체가 바뀌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진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실은 자신이 세워 놓은 질서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원고의 강인호 장로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성실하고 충성스럽고 책임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듯, 지옥은 악한 의도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선이라고 믿는 것 안에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사랑이 섞여 있을 때도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악인과 선인의 대결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신앙’과 ‘자신이 만든 신앙’을 구별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원고는 매우 의도적으로 ‘3040 세대가 조용히 사라진다’는 현실에서 시작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가장 흔히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초점이 젊은 세대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로를 따라갑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조입니다. 우리는 흔히 ‘왜 젊은 사람들이 떠나는가’를 묻지만, 이 이야기는 ‘왜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를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자기 사랑 안에서만 세상을 본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곧 자신의 눈이 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교회를 보아도 청년은 다른 교회를 보고, 장로는 또 다른 교회를 봅니다. 문제는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강인호 장로는 처음부터 거의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새벽기도 20년 개근, 가장 먼저 교회 문을 열고, 보일러를 켜고, 헌금을 관리하고, 회의록을 검토하고,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봉사합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본받을 만한 신앙인입니다. 실제로 이런 분들이 한국교회를 지탱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외적인 선행 자체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선행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인지, 아니면 자신의 proprium이 만들어 낸 질서인지는 오직 시험이 올 때 드러납니다. 시험이 없을 때는 둘 다 거의 똑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반드시 사람에게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시험이란 악인을 벌주는 시간이 아니라 선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시는 시간입니다.

 

이 장로가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행동은 ‘항상 같은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원고는 이것을 단순한 습관처럼 묘사하지만, 상응적으로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에서 ‘자리’는 단순한 의자가 아니라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영적 상태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가장 편안한 자리에 머무르려 합니다. 장로는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지 않습니다. 대신 성경과 찬송가를 올려놓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적인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곳은 내 자리입니다’라는 무언의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자기애는 대개 매우 공손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큰소리치지 않아도 자기 중심성은 충분히 작동합니다. 오히려 예의 바른 자기애가 더 깊고 교묘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전통’입니다. 장로는 ‘전통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즉시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전통인가?’ 전통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전통을 보존한다면 이미 전통은 껍데기가 됩니다. 천국에서는 질서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 질서는 사랑을 위한 질서입니다. 사랑을 억누르는 질서는 이미 천국의 질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장로가 지키고 있던 것은 질서였지만, 주님이 세우시는 질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질서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도사의 청년부 개편안은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시험으로 등장합니다. 영상 설교, 소그룹, 청년들의 참여, 질문 가능한 구조 등은 원고 안에서는 단순한 프로그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프로그램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들을 수 있는가’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유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당회에서는 가장 먼저 ‘안 된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놀라운 것은 반대 이유가 악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proprium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자기애는 언제나 자신을 정의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람을 상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아들 도훈은 끝까지 아버지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틀린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는 사랑 없이 전달되면 닫히지만, 사랑 안에서 전달되면 스스로 사람의 양심 속에서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도훈은 아버지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변화가 시작됩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장로는 끝까지 방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것을 보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아버지의 양심을 건드립니다. 사랑은 언제나 방어막을 통과합니다.

 

이야기의 전환점은 손자의 질문입니다. 아빠는 왜 교회 안 가요?어린아이의 질문은 신학도 아니고 논쟁도 아닙니다. 그런데 장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아이는 천국에서 오는 순수한 상태를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어린아이의 질문은 논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진실만 요구합니다. 그래서 장로는 처음으로 자신 안의 모순을 마주하게 됩니다. 시험은 언제나 가장 순수한 질문의 형태로 찾아옵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아들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예배당에서 다시 읽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원고는 매우 아름다운 상징을 사용합니다. 인쇄된 종이를 성경책 안에 끼워 두었다는 것입니다. 상응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경험이 말씀 앞에 놓이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전까지 장로는 말씀으로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의 고통을 가지고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이 순서가 바뀌는 순간 거듭남은 시작됩니다.

 

카페입니까?라고 말했던 자신의 음성이 되돌아오는 장면은 심판의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은 하나님이 정죄하시는 심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 심판이란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장로는 처음으로 자기 말을 자기 귀로 듣습니다. 그래서 무너집니다.

 

그가 무릎을 꿇으며 드리는 기도는 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주님, 제가 지킨 게 뭡니까? 교회입니까, 제 자리입니까?이 질문은 사실 모든 종교인에게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만든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스베덴보리는 모든 거듭남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선이라고 믿는 동안은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주님이 실제로 역사하십니다.

 

이어 등장하는 시편 127편,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은 단순한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원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운다’는 이미지를 반복합니다. 장로는 교회를 세운다고 믿었습니다. 전통도 세우고, 질서도 세우고, 권위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야 그는 자신이 세운 것은 구조였고, 주님이 세우시는 것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전환입니다.

 

이후의 변화는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장로는 갑자기 개혁가가 되지 않습니다. 새벽기도도 계속하고, 가장 먼저 교회 문도 엽니다. 달라진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은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먼저 말했고, 이제는 가장 마지막에 말합니다. 이전에는 빨간 펜으로 수정했고, 이제는 검은 볼펜으로 청년들의 말을 적습니다. 이전에는 사람을 교회에 맞추려 했고, 이제는 교회가 사람의 마음을 들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외형은 거의 같지만 내면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장로가 결국 아들이 등록한 교회를 묻지 않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포용이 아닙니다. 그는 이제 교회를 자기 소유로 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는 조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안에 있다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면 됐다라는 장로의 마지막 마음은 비로소 보편교회의 관점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는 자기 교회보다 주님의 교회를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원고를 읽으며, 한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가 곧 청년들이 원하는 대로 교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읽혀서는 안 됩니다. 원고가 말하려는 핵심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도 그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에는 엄격한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질서 자체가 아니라, 그 질서가 사람을 살리는 질서인가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청년들의 요구 역시 모두 옳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진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진리를 전달하는 사랑과 경청의 방식은 끊임없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 원고가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전통을 버리라도 아니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도 아닙니다. 먼저 들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먼저 들으셨고, 들으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제목은 ‘교회를 떠난 아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난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가 떠난 것은 교회가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주님의 집을 세우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야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손자의 질문을 통해, 귤 한 봉지를 들고 찾아온 친구를 통해, 아들의 담담한 메시지를 통해 이미 집을 세우고 계셨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의 방식입니다. 주님은 거대한 기적보다 일상의 작은 사건들을 엮어 한 사람의 사랑의 질서를 바꾸십니다. 그래서 참된 거듭남은 언제나 밖에서 보면 아주 조용하지만, 하늘에서는 한 영혼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히는 가장 큰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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