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4:21)

 

AC.418

 

앞 절에서는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다면, 본 절에서는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다루면서, 이를 ‘수금과 퉁소’(harp and orga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프 같은 현악기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상응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면 분명한데요, 표상 교회(the representative church)의 예배에서 볼 수 있는 비슷한 악기들과 찬양이 상응하는 바가 이것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 예배에 그렇게나 많은 싱어와 뮤지션이 있었던 건데요, 그 모든 것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바로 천국의 모든 기쁨은 마음의 즐거움을 낳는다(all heavenly joy produces gladness of heart), 즉 천국의 기쁨을 즐거운 마음으로 표현하고자 함이며, 그걸 찬양, 즉 성가대와 이를 돕는 현악단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노래(singing), 즉 찬양이라는 게 시작되었고, 계속해서 뭔가 이 찬양을 도울 수 있는 걸 고안하다 보니 현악기(stringed instruments)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의 애정(The affection of the heart)은 천적이지만, 그로 인한 찬양은 영적입니다. 노래, 즉 찬양과 이와 유사한 것들은 영적인 걸 가리킨다는 사실이 천사 성가대들(the angelic choirs)을 통해 제게 분명해졌는데요, 이 천사 성가대는 두 종류, 곧 천적 성가대와 영적 성가대가 있습니다. 영적 성가대는 천적 성가대와 쉽게 구별되는데, 그들이 찬양할 때 내는 바이브레이션 [sono canoro alato] 때문이지요. 이는 현악기 소리와 비슷한데요, 이런 내용에 대한 더 깊은 언급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the Divine mercy of the Lord)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태고인들(太古, The most ancient people)은 천적인 건 심장 영역(the province of the heart)과, 영적인 건 폐(the lungs) 영역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고, 그 결과 폐에 관한 걸 노랫소리와 그 유사한 것들로 상응하는 것이며, 그래서 목소리나 그런 악기들의 사운드로 그런 상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내용은 단지 심장과 폐가 일종의 결혼, 그러니까 사랑과 신앙의 결혼 같은 그런 결혼을 표현할 뿐 아니라, 또한 천적 천사들은 심장 영역에, 영적 천사들은 폐 영역에 속한다는 것도 보여 주었습니다. 지금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것이 이런 거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또한 알 수 있는데요, 이는 주님의 말씀(the Word of the Lord)이며, 그저 유발이 그런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의미밖에 뭐 더 다른 아무것도 없다면 거기엔 무슨 생명이라는 게 없으며, 이런 건 알아도 아무한테도 아무 소용도 없는 거라는 사실입니다. The former verse treated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but this verse treats of spiritual things which are of faith, and these are expressed by the “harp and organ.” That by stringed instruments, such as harps and the like, are signified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many considerations. Similar instruments, and also the singing, in the worship of the representative church, represented nothing else, and it was on this account that there were so many singers and musicians, the cause of this representation being that all heavenly joy produces gladness of heart, which was expressed by singing, and in the next place by stringed instruments that emulated and exalted the singing. Every affection of the heart is attended with this: that it produces singing, and consequently what is connected with singing. The affection of the heart is celestial, but the consequent singing is spiritual. That singing and that which resembles it denote what is spiritual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angelic choirs, which are of two kinds, celestial and spiritual. The spiritual choirs are easily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by their vibrant singing tone [sono canoro alato], comparable to the sound of stringed instruments, of which,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we shall speak hereafter. The most ancient people referred what was celestial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what was spiritual to that of the lungs, and consequently to whatever pertains to the lungs, as do the singing voice and things like it, and therefore the voices or sounds of such instruments. The ground of this was not merely that the heart and lungs represent a kind of marriage, like that of love and faith, but also because the celestial angels belong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the spiritual angels to that of the lungs. That such things are meant in the passage before us, may also be known from the fact that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and that it would be destitute of life if nothing more were implied than that Jubal was the father of such as play upon the harp and the organ; nor is it of any use to anyone to know this.

 

 

해설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본문이 다루는 주제가 앞 절과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먼저 밝힙니다. 앞선 절이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다면, 이 절은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다룹니다. 그리고 이 영적인 것들이 ‘수금과 퉁소’로 표현됩니다. 이는 성경이 음악적 도구를 언급할 때, 결코 문화사나 예술사의 기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표상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현악기, 곧 수금과 같은 악기들이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구약의 대표적 교회, 곧 표상적 교회에서 음악과 노래가 예배의 핵심을 이루었던 이유는, 그것들이 하늘의 기쁨을 자연계에서 상응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기쁨은 곧 마음의 즐거움으로 나타나고, 이 즐거움은 먼저 노래로 표현되며, 이어서 노래를 북돋우고 고양하는 현악기로 확장됩니다. 이 질서 자체가 이미 천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흘러가는 구조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마음의 애정 자체는 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애정이 소리와 음성, 곧 노래로 표현될 때, 그것은 영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즉, 사랑은 내적인 불이며, 노래는 그 불이 밖으로 울려 퍼지는 진동입니다. 그러므로 음악은 사랑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표현, 곧 영적인 상태의 표상입니다. 이 때문에 음악과 노래는 언제나 신앙의 진리와 선, 그 감응과 기쁨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을 덧붙여, 이 사실이 단지 추론이 아니라 영계의 실제 질서임을 밝힙니다. 그는 천사들의 합창을 관찰했으며, 그 합창이 천적인 합창과 영적인 합창으로 구분됨을 증언합니다. 특히 영적인 합창은 ‘날개 달린 듯한 진동하는 노랫소리’를 내며, 이는 현악기의 울림과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적인 합창이 더 깊고 내적인 감동을 주는 반면, 영적인 합창은 분명한 음성, 질서 있는 진동, 전달되는 진리의 성격을 띤다는 점입니다. 이는 신앙의 영적 차원이 갖는 특성과 정확히 상응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해하던 심장과 폐의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그들은 천적인 것을 심장의 영역, 영적인 것을 폐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심장은 사랑과 생명의 중심이며, 폐는 호흡과 음성의 기관입니다. 노래와 말, 소리는 모두 폐의 작용에 속합니다. 따라서 노래와 악기는 자연스럽게 영적인 것, 곧 신앙의 영역을 표상합니다. 이 질서는 단순한 생리학적 비유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인체 안에서 상응적으로 드러난 구조입니다. 사랑이 심장이라면, 신앙은 폐이며, 둘은 분리될 수 없으나 구별됩니다.

 

이 모든 설명을 통해 스베덴보리는,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이 만일 문자적 사실에 그친다면, 성경은 생명 없는 기록이 되고 만다”고 말합니다. 누가 최초의 음악가였는지를 아는 것은 영혼의 구원이나 신앙의 삶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주님의 말씀인 이상, 그 안에는 반드시 교회와 인간 내면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생명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 생명이, 음악이라는 표상을 통해 신앙의 영적인 기쁨과 진리의 조화로 드러납니다.

 

결국 AC.418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새 교회가 회복될 때, 사랑의 거룩함(천적인 것)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의 영적인 질서도 함께 회복됩니다. 그 영적인 질서는 차갑고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노래처럼 울리고, 음악처럼 조화를 이루는 신앙입니다. 수금과 퉁소는 바로 그 상태를 표상하며,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지 않고, 사랑의 기쁨을 진리의 언어로 노래하는 교회가 어떤 모습인지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AC.419, 창4:21, '영적인 것' - 신앙의 진리와 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 천적인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 인한 선이듯, 영적인 것은 신앙의 진리와 선입니다. 참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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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7, 창4: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AC.417-420)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창4:21) AC.417 ‘그의 아우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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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4:21)

 

AC.417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his brother’s name was Jubal)은 그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독트린(the doctrine of the spiritual things of the same church)에,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은 신앙의 진리와 선(the truths and goods of faith)에 각각 상응합니다. By “his brother’s name was Jubal”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the spiritual things of the same church; by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해설

 

AC.417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의 동생 ‘유발(Jubal)을 통해, 새로 시작되는 교회 안에서 영적인 것들의 교리적 측면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서 야발이 장막과 가축으로 표상된 천적인 것(사랑의 거룩함과 그로부터 나온 선)을 대표했다면, 유발은 그와 형제 관계로 소개되며, 같은 교회 안에 속한 영적인 차원, 곧 신앙의 진리와 선에 관한 교리를 대표합니다. ‘형제’라는 표현은 두 요소가 서로 경쟁하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 안에서 서로를 전제로 공존하는 관계임을 나타냅니다.

 

성경은 유발을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음악은 단순한 예술 활동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영적 상태가 진리와 선의 질서 속에서 조화롭게 표현되는 방식을 표상합니다. 수금과 퉁소 같은 악기는 소리를 통해 감정을 일으키고 마음을 움직이는데, 이는 진리가 단순한 지식으로 머무르지 않고 선과 결합되어 삶을 울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음악은 영적인 것들이 교리로 정리되고, 동시에 삶의 감각과 정서에까지 스며드는 상태를 상응적으로 보여 줍니다.

 

특히 ‘조상, 곧 아버지’라는 표현은, 유발이 음악의 역사적 창시자라는 뜻이 아니라, 영적 교리가 정식으로 자리 잡아 이후의 모든 신앙적 표현의 근원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진리와 선이 교리로 체계화되지 않으면, 사랑은 방향을 잃고 감정적 열심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반대로 교리가 사랑과 분리되면, 그것은 가인의 길처럼 생명 없는 지식이 됩니다. 유발은 이 두 극단을 피하여, 천적인 사랑(야발)에서 나온 영적인 교리가 올바른 질서 안에서 형성되었음을 표상합니다.

 

또한 음악의 특징은 질서와 비례, 리듬과 조화에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진리와 선이 무질서하게 흩어진 정보가 아니라, 서로 상응하며 조화를 이루는 체계임을 보여 줍니다. 수금과 퉁소가 각각 다른 음색과 역할을 가지면서도 하나의 음악을 이루듯, 교회의 진리와 선도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되 하나의 신앙 고백과 삶의 방향으로 수렴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발은, 새 교회가 단지 사랑의 열정만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바르게 인도할 영적 교리를 함께 회복했음을 나타냅니다.

 

AC.417의 핵심은, 새 교회의 회복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균형 있는 재건이라는 점입니다. 야발이 사랑의 거룩함과 선의 삶을 대표한다면, 유발은 그 사랑이 진리의 언어로 노래 되고, 교리로 가르쳐질 수 있게 되는 상태를 대표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으며, 형제라는 표현 속에 이미 그 질서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유발을 통해, 참된 교회는 사랑만 있는 교회도 아니고, 교리만 있는 교회도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교리가 진리와 선의 조화로운 ‘음악’처럼 울리는 교회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AC.418, 창4:21, '수금과 퉁소' -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8 앞 절에서는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다면, 본 절에서는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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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6, 창4:20, '야발'과 '아벨'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 본절,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가 사랑의 거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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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4:20)

 

AC.416

 

본절,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가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 인한 선(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을 상응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dwelt in tents and in folds of cattle)의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벨의 경우 때문인데요, 그는 아담과 이브의 둘째 아들로, ‘양 치는 자’(a shepherd of the flock)였기 때문입니다. 야발은 가인으로부터 세어 일곱 번째 후손이었습니다. That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abal was not the first of those who “dwelt in tents and in folds of cattle,” for it is said likewise of Abel, the second son of Adam and Eve, that he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Jabal was the seventh in the order of descent from Cain.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16에서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 하나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바로, ‘야발(Jabal)이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로 불린 것이, 역사적, 연대기적 최초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이미 창4:2에서 아벨을 ‘양 치는 자’, 곧 목자로 소개합니다. 만일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직업의 기원이나 생활 방식의 최초 기록으로 이해한다면, 야발은 결코 ‘조상, 곧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야발은 가인의 계보에서 일곱째에 해당하는 인물로, 시간적으로도 훨씬 뒤에 등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이 표현들이 역사적 사실을 배열한 연대기가 아니라, 영적 상태와 교회의 변화를 표상적으로 배열한 구조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야발이 ‘아버지’로 불린 이유는, 그가 처음으로 장막 생활이나 목축을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새 교회가 회복되는 국면에서 ‘천적인 것과 그로부터 나온 선’이 다시 정식으로 자리 잡았음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조상’, 곧 ‘아버지’라는 표현은 시간적 기원이 아니라 질서적, 본질적 기원을 가리킵니다.

 

아벨과 야발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벨은 태고교회 초기에 있었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사랑의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를 표상합니다. 그에게서 ‘목자’라는 표상이 사용된 것은, 그 시대에 사랑과 선이 본성적으로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는 가인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후 교회는 황폐의 길을 걸었습니다. 야발은 그 황폐 이후,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 국면에서의 사랑과 선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같은 상징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영적 국면을 대표합니다.

 

이 점에서 ‘야발이 가인의 계보에서 일곱째’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숫자 ‘일곱’은 언제나 완결, 거룩, 한 주기의 끝과 새 시작의 문턱을 의미합니다. 야발이 일곱째에 등장한다는 것은, 가인의 계보로 대표되는 신앙 중심, 사랑 상실의 흐름이 완전히 소진된 이후, 그 잔해 위에서 사랑과 선의 회복이 다시 나타났음을 뜻합니다. 마치 여러 날 산불로 산 전체가 완전히 타버려 다시는 초록 식물을 볼 수 없을 것 같아도 그러나 놀랍게도 이듬해 봄처럼 잠시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새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지요. 그러므로 야발은 타락의 연속선상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황폐 이후에 허락된 회복의 표상입니다.

 

따라서 AC.416은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를 읽을 때 반드시 경계해야 할 한 가지를 분명히 합니다. 즉, ‘누가 먼저였는가’, ‘무엇이 처음 시작되었는가’라는 자연적, 연대기적 질문으로 본문에 접근하면, 본문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인류 문명의 연표를 주려는 책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 내면의 상태가 어떻게 생성, 타락, 황폐, 보존, 회복되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입니다.

 

결국 AC.416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야발이 ‘장막과 가축의 아버지’로 불린 것은, 아벨보다 늦게 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온 선이, 새 교회의 질서 안에서 다시 아버지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주님께서 교회를 다루시는 방식이 언제나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417, 창4: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AC.417-420)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창4:21) AC.417 ‘그의 아우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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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5, 창4:20,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father of cattle)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로 말미암는 선(the good that is derived 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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