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5:5)

 

AC.493

 

‘날’(days)과 ‘해’(years)가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숫자를 적용할 수 있는 시간과 분량(measures)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만 덧붙일 수 있는데, 이는 그것들이 자연의 최외층(the ultimates of nature, 맨 끝단)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숫자들이 적용될 때에는, 날과 해의 숫자들뿐 아니라 분량의 숫자들까지도 시간과 분량에서 추상(abstractedly), 즉 물러날 때 그 숫자가 지닌 속뜻에 따라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면,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이 거룩하다고 말하는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또 희년이 마흔아홉째 해마다 선포되고 쉰째 해에 거행되어야 했던 것,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둘이었고 주님의 사도들도 그와 같았던 것, 칠십 인의 장로들이 있었고 주님의 제자들도 그 수만큼 있었던 것, 그리고 이와 유사한 많은 경우들에서 숫자들은 그것들이 적용된 대상에서 물러나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러날 때, 숫자들의 속뜻에 의해 상태들이 의미됩니다. 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days)과 ‘(years)가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반복해서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말하며, 논의를 한 단계 더 깊은 곳으로 옮깁니다. 이제 질문은 ‘왜 성경이 굳이 숫자를 사용하는가’로 이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자연의 최외층(the ultimates of nature, 맨 끝단), 곧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시간과 분량(measures), 그리고 숫자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고하기 때문에, 말씀도 그 틀을 빌려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성경이 숫자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 숫자가 세속적 계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씀 안에서 숫자는 시간과 분량에서 ‘추상(abstractedly), 즉 물러납니다. 다시 말해, 숫자는 그것이 적용된 외적 대상과 분리되어, ‘그 자체의 의미’를 드러내는 표지가 됩니다. 날과 해, 길이와 무게는 외적 형식일 뿐이며,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많은 제도와 규례는 이해 불가능한 부담으로 남게 됩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노동 규칙이나 휴식 제도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들이 상태를 향해 물러날 때, 여섯은 준비와 수고의 상태를, 일곱은 완성과 거룩의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면 안식일은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완성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지가 됩니다.

 

희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흔아홉 해마다 선포되고 쉰째 해에 거행되는 희년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고대 사회의 독특한 사회 제도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들이 물러날 때, 희년은 해방과 회복, 곧 교회 상태의 새출발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연도가 아니라, ‘회복의 상태가 도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희년은 숫자로 기억되지만, 그 본질은 상태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주님의 열두 사도 역시 같은 원리로 이해됩니다. 이 숫자는 우연이나 행정적 편의의 결과가 아닙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교회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파의 수와 사도의 수가 같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교회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질서 위에 서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교회 상태의 완전성’입니다.

 

칠십 장로와 칠십 제자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숫자는 충만함과 확장을 의미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장로들이든 제자들이든, 그 숫자가 말하는 것은 조직의 규모가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사역의 범위와 충만함입니다. 숫자는 그 사역의 성격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성경 전반에서 숫자가 적용된 많은 사례들을 열거하며, 공통된 원리를 분명히 합니다. 숫자는 외적으로는 시간과 분량에 붙어있지만, 내적으로는 언제나 상태를 의미합니다. 숫자가 대상에서 물러날 때, 비로소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깊이가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끝없는 규칙과 계산의 집합으로 오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원리는 창세기 5장의 족보를 읽는 데 결정적인 기준을 제공합니다. 그곳에 나오는 날과 해, 그리고 수백 년에 이르는 숫자들은 인간의 수명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떤 상태를 거쳐 왔는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숫자는 그 상태들의 질서와 흐름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시한 기호입니다.

 

결국 AC.493은 성경을 읽는 우리의 시선을 다시 한번 교정합니다. 성경의 숫자를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보다 ‘어떤 상태로 지속’이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합니다. 그럴 때 숫자는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라, ‘말씀의 깊이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숫자가 시간과 분량에서 물러날 때, 성경은 비로소 살아 있는 영적 언어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AC.494, 창5:5, '죽었더라', 해당 교회의 퍼셉션이 끝난 상태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 그가 ‘죽었다’(died)는 말의 의미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임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집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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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2, 창5: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 여기서도 ‘날’(days)과 ‘해’(years)는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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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5:5)

 

AC.492

 

여기서도 ‘날’(days)과 ‘해’(years)는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더라’는 말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해설

 

이 짧은 문장은 창세기 5장, 더 정확히 말하면 태고교회의 종말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여러 글에서 ‘(days)과 ‘(years)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증해 왔고, 여기 AC.492에서는 그 논의를 한 지점으로 수렴시킵니다. 이제 더 이상 숫자나 기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태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과 ‘’가 상태를 의미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었더라’는 표현 앞에 자연스럽게 생물학적 죽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호하게 방향을 바꿉니다. 창세기 5장에서 말하는 ‘사람의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퍼셉션의 소멸’을 뜻한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를 특징짓던 즉각적이고 분명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이 점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정의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퍼셉션을 통해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고, 그 퍼셉션이 그들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퍼셉션이 사라지는 순간, 성경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육체는 여전히 존재하고, 사회와 문화도 지속되었겠지만, 교회의 생명은 그 시점에서 끝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태고교회의 종말을 어떤 갑작스러운 재앙이나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죽음’은 한순간에 일어난 붕괴가 아니라,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고 흐려진 끝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창세기 5장은 바로 그 과정을 ‘’과 ‘’라는 언어로 천천히 보여 주다가, 마침내 ‘죽었더라’는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것은 연대기의 마침표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의 종결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절망의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이미 앞에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셨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셋의 교회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주님의 섭리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한 형태의 교회가 끝나고 다른 형태의 교회가 시작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구절은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서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은 단순히 활동이 줄어들거나 제도가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곧 진리와 선을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고 분별하는 내적 능력이 사라질 때, 성경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규모가 작고 외적으로 미약해 보여도, 퍼셉션이 살아 있다면 그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태고교회의 죽음은 외형의 붕괴가 아니라, 퍼셉션의 소멸이었고, 오늘날 교회의 생명 역시 같은 기준으로 판단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5장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 중 하나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개인의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도 태고교회적 상태가 있을 수 있고, 그 상태는 퍼셉션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러나 그 퍼셉션이 사라지고,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살아 있는 현실로 느껴지지 않을 때, 그 상태는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다른 방식의 인도, 다른 단계의 신앙이 시작됩니다.

 

결국 AC.492는 창세기 5장의 한 절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죽음의 기준을 분명히 합니다. 생명은 퍼셉션이며, 죽음은 퍼셉션의 상실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우리는 족보의 끝에 나오는 ‘죽었다’는 말을 더 이상 두려운 말로 읽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한 상태의 완결’을 알리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AC.493, 창5:5, '숫자'의 겉뜻에서 물러나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 ‘날’(days)과 ‘해’(years)가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숫자를 적용할 수 있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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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1, 창5:4, '자녀들'은 해당 교회의 퍼셉션을 반영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 이 장(4, 7, 10, 13, 16, 19, 26, 30절)에서도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은 동일한 것들을 의미하는데, 곧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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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4)

 

AC.491

 

이 장(4, 7, 10, 13, 16, 19, 26, 30)에서도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은 동일한 것들을 의미하는데, 곧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 다시 말해 선들과 진리들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은 분명히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인데, 이는 그것들이 태고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태고교회는 모든 다른 교회들과 그 뒤를 잇는 교회들의 주된 교회요 부모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The same things are signified by “sons” and “daughters” in this chapter (verses 4, 7, 10, 13, 16, 19, 26, 30), but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that is, such are the goods and truths; the truths and goods here spoken of are such as were distinctly perceived, because they are predicate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선 AC.489AC.490에서 설명한 내용을 창세기 5장 전체에 직접 적용합니다. 즉, ‘아들들’과 ‘딸들’이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는 원리는 부분적인 해석이 아니라, 이 장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 전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창세기 5장 곳곳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자녀(子女)’, 즉 ‘아들들과 딸들’이라는 표현은 모두 같은 의미 울타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의미는 언제나 교회의 상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문장이 있습니다.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도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이는 진리와 선이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리와 선은 항상 어떤 교회 상태 안에서 태어나고, 그 교회의 성질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에서는 순수한 진리와 선이 퍼셉션되지만, 다른 교회에서는 혼합된 진리와 왜곡된 선이 나타납니다. ‘아들들과 딸들’은 교회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지표입니다.

 

특히 AC.491은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이 ‘분명히 퍼셉션되었던 것들’, 즉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의 독특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대목입니다. 태고교회의 진리와 선은 추론이나 학습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퍼셉션된 것이었고, 그 퍼셉션은 매우 분명하고 생생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아들들과 딸들’은 흐릿한 개념이나 불완전한 교리가 아니라, 살아 있고 분명한 진리와 선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는 ‘모든 다른 교회들과 그 뒤를 잇는 교회들의 주된 교회요 부모 교회’라고 불립니다. 이는 연대기적 의미에서의 첫 교회라는 뜻을 넘어, ‘질적인 기준점’이라는 의미입니다. 이후의 모든 교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태고교회의 상태에서 멀어지거나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후 교회들의 진리와 선은 점점 덜 퍼셉션되고, 점점 더 외적 형식과 교리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러나 이 ‘부모 교회’라는 표현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진리와 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의 교회, 그 이후의 교회들 역시 여전히 진리와 선을 가졌지만, 그것들은 더 이상 동일한 강도의 퍼셉션 안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의 진리와 선은 태고교회라는 원형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AC.491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을 다시 점검하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의 건강성을 외적 활동이나 조직, 영향력으로 판단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그 교회 안에서 어떤 아들들과 딸들이 태어나고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떤 진리와 어떤 선이 실제로 퍼셉션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는 규모나 전통도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개인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도 하나의 ‘교회 상태’가 있으며, 그 상태에 따라 그 사람 안에서 태어나는 진리와 선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진리와 선이 분명하고 생동감 있게 형성되지만, 퍼셉션이 약해질수록 그것들은 점점 개념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쌓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퍼셉션이 살아 있는가’에 있습니다.

 

결국 AC.491은 창세기 5장을 하나의 거대한 생명 기록으로 보게 합니다. 그 기록은 개인들의 출생과 사망을 나열하는 문서가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부모 교회로부터 시작된 진리와 선의 퍼셉션이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계보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우리는 이 족보를 더 이상 멀게 느끼지 않고, 오늘 우리의 교회와 신앙을 비추는 거울로 읽게 됩니다.

 

 

 

AC.492, 창5: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 여기서도 ‘날’(days)과 ‘해’(years)는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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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0, 창5:4, ‘딸’(daughter)을 교회라고 하는 이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 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시에서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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