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9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이 창조된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참된 목적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은 신앙생활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 명예나 만족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가정을 이루며 교회에서 예배하고 봉사하는 모든 활동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더 높은 목적 아래 놓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삶의 절대적인 중심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찬양과 예배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더 크게 만드시는 분이십니까? 만일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에는 무엇인가 부족함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행복과 자유, 사랑과 기쁨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창조 목적을 다시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영광을 인간의 찬양과 인정으로 더욱 높아지는 신적 명예처럼 이해하는 것은 주님의 본성과 창조의 목적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며, 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가장 깊은 목적은 무엇일까요?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기쁨이 처음부터 함께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답은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명예를 높이는 도구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과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삶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이해합니다. 고전10:31에서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하며, 롬11:36에서는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인간의 삶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갇혀서는 안 되며,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창조 목적으로 강조하는 전통적인 개신교 신앙 자체를 곧바로 오류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가르침을 실제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광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영광이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충분히 구별하지 않으면 중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흔히 인간 사회의 명예와 영광을 떠올립니다. 왕은 백성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권력자는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게 하며, 성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통해 자신의 명예가 높아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경험을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하면, 하나님께서도 많은 사람이 자신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자신의 위대함을 인정해 주기를 원하시는 분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많을수록, 예배가 더욱 화려할수록, 더 큰 교회와 더 많은 신자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도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한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 인간의 인정이나 찬양이 부족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에도 완전하셨으며,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도 신적 사랑과 지혜의 충만함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명예욕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예배와 찬양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찬양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찬양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찬양과 감사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앞의 이해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채워 드리는 존재가 되지만, 뒤의 이해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베푸시고, 인간이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DLW.47에서 사랑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사랑의 본질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사랑으로 그와 결합하며, 그 존재의 행복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사랑뿐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신적 사랑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더욱 높이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한다면, 자칫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신적 사랑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충만함을 더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다른 존재를 사랑하시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나누어 주시며, 그 존재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43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의 본질이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 되기를 원하며, 자신의 것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 목적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증가시키기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만한 신적 사랑을 다른 존재에게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창조 목적은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27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신적 섭리가 지향하는 목적이 인간으로 이루어진 천국이며, 인간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어떤 물리적 공간이나,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존재들이 모여 하나님의 위대함을 끝없이 선언하는 장소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인간들이 사랑과 지혜 안에서 서로 결합하여 이루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처음부터 인간과 별개의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다가 사후에 천국에 들어간 존재들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국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창조 목적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에게서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마련하시며, 그가 자유롭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 영원한 천국의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창조의 목적은 인간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 드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인간에게 나누어 주시고, 인간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임으로써 주님과 상호적인 사랑의 결합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위한 복종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생명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영원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5922에서 ‘영광’이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신적 진리, 곧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천국의 영광은 그 신적 진리를 받아들인 천사들의 지혜와 이해, 그리고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관계됩니다. 여기서 영광은 누군가가 하나님을 칭찬함으로써 외부에서 더해지는 명예가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가 천국과 인간에게 나타나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존재들이 사랑과 지혜 안에서 살아가는 영적 현실입니다. 요1:14에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으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광을 주님 안에 나타난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또한 마5:16에서 주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신자가 하나님을 얼마나 크게 찬양하는지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주님의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아가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자신의 이익보다 선한 것을 선택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과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우리의 삶에 나타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배와 찬양의 의미도 더욱 깊어집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고백하고, 기도를 통해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예배를 통해 삶의 중심이 주님께 있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의지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주님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배와 찬양의 횟수나 열정, 외적인 규모가 곧바로 하나님께 돌려 드린 영광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222-227에서 천국의 예배와 설교를 설명하면서, 천사들의 예배가 진리의 가르침과 사랑의 삶에 깊이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천국의 참된 예배는 예배 장소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만 한정되지 않고, 천사들이 살아가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 전체와 관계됩니다. 이는 지상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찬양과 경건한 기도로 예배하면서도 일상에서는 가족을 무시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한다면, 그의 외적인 예배가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종교적 활동이 눈에 띄지 않더라도 자신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의 삶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실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배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배의 참된 목적은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여 그 진리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쓰임’(use)의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쓰임을 통해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 DLW.241은 사랑과 지혜와 쓰임의 관계를 목적과 원인과 결과에 비유합니다. 사랑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며, 지혜는 그 목적을 실현하는 길을 밝히고, 쓰임은 사랑과 지혜가 실제로 열매 맺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활동을 종교적인 형식으로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고, 직장인이 정직하게 일하며, 교사가 학생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의료인이 환자를 성실하게 보살피며, 이웃이 서로의 어려움을 살피고 돕는 일에서도 주님의 선과 진리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이 곧 참된 영적 쓰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일한 직업과 활동을 통해서도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이웃의 유익과 공동체의 선을 위해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위의 크기만이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입니다. 인간이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대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기쁨으로 행할 때, 그 삶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드러내는 쓰임이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정직하고 선한 삶의 자리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지나치게 외적인 성과와 연결하면 신앙생활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크게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이 번창하고, 자녀가 좋은 성적을 얻고, 교회가 성장하며,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때 그것을 주님의 은혜로 인정하고 감사하는 일은 귀합니다. 그러나 성공 자체를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시하면 실패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것처럼 느끼기 쉽습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 오랫동안 돌봄의 부담을 감당하는 사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 세상에서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적인 성공이나 외적인 규모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며, 가능한 선한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일을 통해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가족과 이웃을 돌보며 깊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관점에서 이러한 삶의 가치는 세상의 명예와 인정을 기준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어떤 처지에서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라는 부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 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와 양심을 억압하는 일입니다. 종교 지도자나 공동체가 자신들의 사업이나 계획을 하나님의 영광과 직접 연결하면,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취급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나 특정한 사역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시할수록,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고통과 부당한 요구가 정당화될 위험도 커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 DP.71-99에서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잃고 강제로 복종하는 것을 참된 영적 결합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며, 자신의 의지로 선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을 억압하고,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며, 자신의 권위와 목적을 절대화하는 것은 오히려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에 반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인간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명예와 권력, 공동체의 외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경우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의 참된 의미는 인간이 자신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에서 비롯되는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살피고,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이웃을 자유롭게 사랑하고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이 질문에서 우리는 다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 번째 대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두 표현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참되게 이해할수록 인간이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을 찬양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인간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선한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의 신적 진리는 그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 안에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기쁨은 자기 욕망이 충족될 때 느끼는 일시적인 만족과 구별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기쁨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의 행복을 기뻐하며, 천국의 삶은 그러한 사랑이 공동체 전체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서로 경쟁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베푸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여 주님과 결합하며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참된 행복과 함께 나타납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이 창조된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까? 이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개신교의 신앙고백도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원한 기쁨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증가시키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원부터 완전한 사랑과 지혜이시며, 인간의 찬양과 인정에 의해 더 완전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그 인간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나누어 주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그분과 결합하여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높여 드리기 위해 자신의 삶을 소모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사랑의 목적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실천할 때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납니다. 결국 참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였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사랑의 목적에 얼마나 응답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사랑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주님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삶은 서로 다른 두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사랑이 선한 쓰임으로 열매 맺을 때, 인간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가며 그 삶 자체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창조 목적,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참된 삶의 의미입니다. (PR.009 해설)

 

요약

전통적인 개신교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가르치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나 영광을 더욱 크게 만들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 DLW.47과 ‘참된 기독교’ TCR.43에 따르면 신적 사랑의 본질은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들과 결합하며, 자신의 사랑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신적 섭리’ DP.27은 인간으로 이루어진 천국과 주님과의 영원한 삶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증가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천국의 비밀’ AC.5922에서 영광은 가장 높은 의미로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를 가리키며, 천국에서는 그 진리를 받아들인 존재들의 지혜와 체어리티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단순히 찬양과 예배의 양을 늘리거나 외적인 성과를 이루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나타나고, 그 사랑이 이웃의 행복을 위한 쓰임으로 열매 맺을 때 인간은 자신의 참된 창조 목적을 이루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PR.008.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질 것을 요구한다’

SL.PR.008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질 것을 요구한다’ - 하나님의 공의는 형벌의 집행인가, 무너진 신적 질서의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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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BU.008 | 불교(Buddhis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 - 불교의 중도와 선과 진리의 신적 질서

 

해설

사람은 흔히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결정하려 합니다. 한쪽에서는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쪽에서는 욕망과 즐거움을 철저히 억제해야 거룩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욕망을 무조건 따라가는 삶도, 인간의 자연적인 필요와 기쁨을 모두 부정하는 삶도 온전한 자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불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라는 길을 제시합니다. 중도는 흔히 양쪽의 극단을 피하고 적당한 가운데를 선택하는 태도로 이해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단순한 절충이나 타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고’(苦, dukkha), 곧 고통과 근본적인 불만족에서 벗어나게 하는 바른 수행과 지혜의 길입니다. 역사적 석가모니의 수행을 전하는 불교 전통에서는 그가 왕자로서 풍요로운 삶을 경험한 뒤 출가하여 극심한 고행을 했으나, 어느 쪽에서도 궁극적인 해답을 얻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경험을 배경으로 제시된 중도는 감각적인 쾌락에 빠지는 삶과 자신을 지나치게 괴롭히는 고행이라는 두 극단을 넘어서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참된 행복을 얻으려면 욕망에 끌려가거나 육체를 학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바르게 이해하고 다스리는 길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이러한 중도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경전은 감각적인 즐거움에 탐닉하는 길과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고행의 길을 모두 피해야 할 극단으로 제시하고, 부처가 깨달은 중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haṅgika magga)라고 밝힙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인 정견, 바른 의도인 정사유, 바른 말인 정어, 바른 행동인 정업, 바른 생계인 정명, 바른 노력인 정정진, 바른 알아차림인 정념, 바른 집중인 정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인간의 생각과 말, 행동과 생활, 마음의 훈련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중도의 목적은 그저 지나친 행동을 삼가고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갈애’(渴愛, taṇhā), 곧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목마름과 ‘집착’(執著, upādāna), 곧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으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열반’(涅槃, nibbāna)에 이르는 데 있습니다. 열반은 갈애와 무명이 소멸하여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중도는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절제하라는 생활의 지혜를 넘어, 고통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수행의 질서입니다. 때로는 매우 엄격한 계율과 지속적인 수행이 요구되기도 하므로, 중도를 언제나 편안하고 쉬운 길이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불교의 중도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 12.15에 수록된 ‘가전연경’(迦旃延經, Kaccānagotta Sutta)은 세계를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견해와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라는 두 극단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부처는 이 양극단을 떠나 모든 현상이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연기는 존재가 아무런 근거 없이 생겨난다는 뜻도 아니고, 모든 것이 영원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러한 사상은 후대 대승불교의 ‘중관’(中觀, Madhyamaka) 사상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인도의 불교 사상가 용수(龍樹, Nāgārjuna)는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 24장 18게송에서 연기와 ‘공’(空, śūnyatā), 곧 모든 현상이 독립적이고 고정된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중도와 연결합니다. 이는 현상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존재를 독립적이고 영원한 실체로 붙잡는 견해를 비판하는 설명입니다. 물론 초기불교의 수행적 중도와 대승불교의 철학적 중도가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인간이 어느 한쪽의 견해에 집착하여 그것을 절대화하는 태도를 경계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중도를 이해할 때에는 쾌락과 고행 사이의 수행적 중도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서는 철학적 중도를 함께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불교의 통찰은 기독교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누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인간의 자연적인 삶 자체를 악하다고 규정하지도 않고,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필요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먼저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1번에서 사랑이 인간의 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것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랑이 없다면 생각과 행동도 생명력을 잃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삶은 욕망과 사랑을 모두 제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상과 질서가 바르게 세워지는 데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건강을 돌보며, 직업에 충실하고, 정당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보다 앞세우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중도는 지나친 욕망과 고행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유익한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불교의 중도와 새 교회의 신적 질서를 단순히 같은 원리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의 중도는 고통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수행과 지혜의 길인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며 그분의 사랑과 지혜 안에서 삶의 질서가 바로잡힌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1번에서 밝힌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되며, 종교적인 삶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원리는 이 문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합니다. 참된 신앙은 무엇이 옳은지를 생각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진리를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양쪽의 의견을 적당히 절충하거나 모든 갈등을 피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악이라면 분명하게 악을 멀리해야 하고, 어떤 일이 이웃에게 유익하다면 그 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같은 저작 Life.21–22는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 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악을 죄로 여긴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사회적으로 비난받기 때문에 피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과 신적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에 멀리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적 삶의 기준은 언제나 두 극단의 한가운데에 놓이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적당한 중간을 선택할 수 없고, 선과 악을 조금씩 섞는다고 해서 참된 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의 중도 역시 진리와 오류를 절반씩 섞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두 전통 모두 무분별한 절충을 경계할 수 있지만, 불교는 바른 견해와 수행을 통해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함으로써 거듭나는 길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더욱 깊이 살펴야 할 것은 인간이 무엇을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불교의 중관사상은 어떤 현상도 독립적이고 고정된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의 통찰을 강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창조된 모든 존재는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유한한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 4번은 주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생명 자체가 아니며, 자신이 가진 사랑과 지혜의 궁극적인 근원도 아닙니다. 이 점에서 불교가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독립적인 생명 소유라는 착각을 경계하는 것 사이에는 비교할 만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설명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공은 연기에 따라 성립하는 현상들의 자성 없음을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전제하고 모든 피조물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독립적인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으로 여기는 자아적 성향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절대화하면서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빛에서 참된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러한 점에서 중도를 둘러싼 두 전통의 비교는 단순한 생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생명의 근원에 관한 근본적인 신학적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 문제는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나타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요구를 들어주거나, 반대로 자녀를 바르게 키운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정죄하거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이유로 잘못된 행동을 아무런 분별 없이 용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필요한 것은 양쪽의 행동을 산술적으로 절반씩 섞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그 사람에게 참으로 유익하며, 어떤 행동이 선과 진리의 질서에 부합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불교의 중도는 극단적인 집착에 사로잡혀 자신의 견해와 행동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말하는 사랑은 진리 없는 무조건적인 허용이 아니며, 진리 역시 사랑 없는 정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 47번에서 사랑의 본질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으로 결합하는 데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상대방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는 사랑은 자기만족에 머물 위험이 있고, 상대방의 삶을 세워 주려는 목적 없이 행사하는 진리의 판단 역시 자기 우월감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단호하게 악을 거절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중간 선택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작용하는 삶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중도를 기독교의 사랑과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두 가르침이 동일한 교리를 전한다는 결론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결국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이지만, 그 의미를 단순한 절충이나 적당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불교의 중도는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삶과 자신을 괴롭히는 고행을 넘어 팔정도에 따라 ‘해탈’(解脫, vimutti)을 추구하는 길이며, 대승불교의 중관사상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 연기와 공의 의미를 밝히는 길입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고,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며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에서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곧 진리라는 결론은 옳지 않습니다.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차이는 인간의 편의에 따라 절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사랑과 삶의 질서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중도가 인간을 속박하는 극단적인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가장 사랑해야 하며 어떤 생명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극단을 피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희석해서도 안 되고,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랑을 버려서도 안 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하나를 이룰 때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판단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중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혜를 존중하면서도, 말씀의 빛에서 분명하게 구별해야 할 참된 영적 질서입니다. (BU.008 해설)

 

요약

불교의 중도는 극단을 피하여 적당한 중간을 선택하라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초기불교에서는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을 넘어 팔정도를 실천하는 길이며, 대승불교의 중관사상에서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 연기와 공을 이해하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자기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고 바른 삶과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도를 모든 진리와 오류의 절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참된 영적 삶은 선과 악을 적당히 혼합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중도에 담긴 집착 극복과 바른 삶의 통찰을 인정하되, 모든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시며, 사랑과 진리가 결합된 삶이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임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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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8 | 이슬람(Isla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 - 신적 이름과 신적 본질

 

해설

이슬람은 하나님께 아름다운 이름들이 있으며, 그 이름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屬性, attributes)을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름들을 ‘알아스마 알후스나’(al-asma al-husna), 곧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라고 부릅니다. 꾸란 7:180은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 하나님께 속하므로 그 이름들로 그분을 부르라고 가르치며, 17:110은 ‘알라’라고 부르든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부르든 그분에게 아름다운 이름들이 속한다고 선언합니다. 꾸란 59:22–24에는 자비로우신 분, 거룩하신 분, 평화의 근원이신 분, 창조하시는 분, 형상을 주시는 분 등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슬람에서 이러한 이름들은 서로 다른 신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인간이 이해하고 경외할 수 있도록 그분의 여러 완전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해되는 분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지혜와 거룩함 등 그분의 신적 본성을 통하여 알려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 같은가, 그리고 여러 신적 속성은 하나님의 본질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99가지 아름다운 이름이 특별히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사히흐 알부하리’(Sahih al-Bukhari) 2736에는 하나님께 99개의 이름이 있으며 이를 알고 헤아리는 사람이 낙원에 들어간다는 전승이 나옵니다. 다만 꾸란이 99개의 이름을 하나의 목록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그 이름들의 구체적인 목록과 범위를 설명하는 방식에도 전승과 학파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이 이름들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아랍어 명칭을 소리 내어 반복하는 행위만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이슬람의 영적 전통에서는 그 이름들의 뜻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허용된 범위에서 자비와 정의와 관대함을 실천하는 삶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부르면서 이웃에게 잔인하게 행동하거나, 정의로우신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불의를 행한다면, 그 이름을 안다는 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는 모순이 생깁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이름에 관한 이슬람의 신앙은 단순한 명칭의 수집이나 암송을 넘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이름에 관한 가르침과 중요한 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009항에서 말씀에 등장하는 ‘이름’(name)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성질(quality)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신적 성질, 곧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포함합니다. 영계에서는 어떤 존재를 단순한 이름이나 외적 명칭보다 그 존재의 내적 성질에 따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저작 2724항에서는 고대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단순히 특정한 명칭을 발음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그분을 예배하는 모든 것과 연결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의 내적 생명이 약해지고 외적 형식만 남자, 사람들은 이름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고 그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 특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름만을 예배하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며, 그 이름이 나타내는 사랑과 신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들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볼 때에도 중요한 것은 이름의 수나 발음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들이 어떤 신적 성질을 나타내며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本質, essence)의 관계라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28항에서 신적 본질 자체는 사랑과 지혜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36–38항에서는 하나님이 사랑 자체와 지혜 자체이시며, 사랑에서 선이 나오고 지혜에서 진리가 나온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거룩함과 선하심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때때로 경쟁하는 속성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신적 사랑과 지혜라는 하나의 본질에 속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를 이해하는 여러 측면에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할 때에는 신적 사랑이 인간을 구원하려는 성질을 생각하게 되고, 지혜로우신 분이라고 할 때에는 그 사랑이 신적 진리와 질서에 따라 역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 이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안에 여러 독립된 본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과도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이름들이 가리키는 신적 본질과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서는 신학적 차이가 남습니다.

 

그러한 차이는 특히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을 나타내는 이름들에서 드러납니다. 꾸란에는 자비와 용서의 이름뿐 아니라 절대적 권능과 주권, 심판과 위엄을 나타내는 이름들도 등장합니다. 이슬람은 이러한 이름들을 모두 하나님의 완전성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며, 자비와 정의가 신적 본성에 함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신적 권능은 신적 사랑과 지혜에서 분리되어 작용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시거나 보복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것처럼 나타나는 표현도 주님의 실제 본성과 인간이 악을 사랑하여 경험하는 결과를 구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해석할 때에도 인간적인 분노와 지배욕, 보복심을 무한하게 확대하여 하나님의 속성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러한 구별이 이슬람의 권능과 심판에 관한 모든 해석을 인간적인 보복의 관념으로 환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슬람 안에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피조물의 감정이나 행동과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신학적 전통이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을 사용하느냐보다 그 이름을 통하여 어떤 하나님을 이해하고 예배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마6:9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 2724항에서 이 말씀의 이름이 단순한 발음이나 명칭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요17:26에서 주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리셨다고 말씀하신 것도 단순히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호칭을 가르쳐 주셨다는 의미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계시의 충만함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납니다. 주님은 하나님에 관한 여러 진리를 전달하신 예언자에 머무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 주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신적 사랑과 지혜이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성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결정적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입장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지식과 참된 신앙의 삶은 구별되면서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하게 살고 어려운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전자는 이름을 알면서도 그 이름의 내적 성질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이며, 후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선을 실천하려는 상태입니다. 물론 선한 행위의 궁극적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묵상하는 일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나 종교적 만족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제 삶에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 우월성으로 삼거나, 자신이 사용하는 신적 명칭만이 참된 신앙의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름의 본질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이 자랑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나타내는 신적 사랑과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시더라도 한 분이시며, 그 이름들은 인간이 그분의 자비와 거룩함과 지혜를 이해하고 경외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름에서 본질로, 지식에서 사랑으로, 외적 예배에서 내적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며, 그 이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실제로는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다고 고백하면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하나님이 진리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그 이름이 나타내는 신적 성질을 얼마나 사랑하고 받아들이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모든 신적 사랑과 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하나님을 얼마나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내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IS.008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들이 그분의 속성을 나타내며, 인간은 그 이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분의 성질과 그분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암송하거나 속성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참된 신앙의 완성은 아닙니다. 또한 신적 속성들은 서로 분리된 독립적인 본질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본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계시되며, 그분의 이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에 관한 신앙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들의 신적 본질을 이해하는 방식과 성육신하신 주님에 대한 인식에서는 중요한 교리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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