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강의는 ‘천년왕국’을 단순한 종말론의 한 주제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줄거리로 제시하려 합니다. 강연자는 천년왕국이 실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미래의 왕국이며, 오늘날의 국제 정세와 이스라엘의 회복이 그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을 소개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은 문자적인 천년왕국을 전제로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방향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가장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요한계시록의 천년’이 시간을 말하는가, 아니면 상태를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에는 역사와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인간의 영적 상태와 교회의 내적 역사가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년’이라는 수 역시 단순히 1,000년이라는 연대기를 가리키기보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충만한 영적 상태와 일정한 완성의 시기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숫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숫자가 본래 상응적 의미를 지닌다는 관점입니다.

강의에서는 ‘천년왕국이 실제 정치 체제를 가진 국가인가’에 큰 관심을 둡니다. 결혼, 출산, 화폐, 노동, 정부, 경제 구조까지 미래 사회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합니다. 천국은 외적인 정치 제도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질서가 인간의 내면에 회복되는 상태입니다. 천국은 공간보다 상태이며, 왕국은 영토보다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왕이 되신다’는 것은 먼저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의 사랑과 진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개인 안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축은 ‘아담이 사탄에게 통치권을 넘겼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회복하신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에는 분명 성경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법적 권리 이전에 영적 질서의 문제로 봅니다. 사탄이 어떤 법적 왕권을 획득했다기보다,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그 사랑들과 결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지옥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통치권의 문제는 외부의 정치 권력이 아니라 인간 사랑의 방향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어떤 영토를 탈환하신 것이 아니라, 지옥 전체를 질서 아래 두시고, 인간이 다시 자유롭게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강의는 창1:28의 ‘다스리라’를 왕권의 개념으로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이 창조 당시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존재였음을 인정하지만, 그 통치는 지배가 아니라 질서의 보존이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다스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자신을 통하여 자연계까지 흘러가도록 하는 통로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은 정치적 왕권의 상실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influx가 자기 사랑(proprium)에 의해 차단된 사건’입니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타락의 본질은 외적 권력의 이동이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바뀐 것입니다.

또한 강의는 오늘날의 국제 정세와 이스라엘 국가의 성립을 종말의 중요한 표지로 해석합니다. 물론 현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관심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이스라엘’을 혈통보다 교회의 상태로 이해합니다. 예루살렘은 참된 교리, 시온은 사랑의 교회, 성전은 인간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회복은 단지 중동의 정치적 사건만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참된 진리가 다시 세워지는 영적 회복을 함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외적 예루살렘, 곧 겉만 바라보면 말씀의 절반만 보는 것이고, 내적 예루살렘, 곧 속까지 볼 때, 비로소 예언은 온전히 이해됩니다.

강의자는 스가랴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미래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감람산, 예루살렘, 성전, 새 예루살렘 모두를 주님과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응으로 풀이합니다. 특별히 새 예루살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도시가 아니라, 주님께서 새롭게 세우시는 교리와 교회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계21-22장의 묘사는 건축 설계도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완전한 질서를 이루는 교회의 영적 구조를 보여 주는 계시입니다.

강의에서 반복되는 ‘왜 지금 천년왕국을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다만 그 이유는 국제 정세를 예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적 상태를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에게 ‘시대를 분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분별해야 할 시대는 내 마음속의 시대입니다. 내 안에서 아직도 자기 사랑이 왕 노릇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사랑이 왕좌에 오르셨는가 하는 것이 진정한 종말론의 출발점입니다.

결국 이 강의는 성경을 매우 진지하게 연구하고, 문자 그대로의 미래 성취를 강조하려는 열정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모든 예언은 반드시 인간의 내적 거듭남과 연결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의미를 갖습니다. 천년왕국은 단순히 미래 어느 시점에 시작될 정치적 왕국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통치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를 다스리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그 씨앗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단순히 세상의 마지막이 아니라, 한 사람이 거듭남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하는 영적 완성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종말을 미래의 사건만으로 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이루어지는 주님의 구원 사역으로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SY.21, ‘퐁퐁남 될뻔한 사연’, 30대 결혼 D-14 극적인 파혼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사례는 사실 여부를 떠나 오늘날 결혼을 둘러싼 불신과 경제적 긴장을 극적으로 압축한 이야기입니다. 영상은 ‘예단 5천’, ‘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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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19, ‘휴거는 있습니다. 휴거는 곧 됩니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의 중심 주장은 휴거가 실제로 매우 가까이 왔으며, 국제정세와 정치, 종교, 사회의 여러 현상이 그 징조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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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의 중심 주장은 휴거가 실제로 매우 가까이 왔으며, 국제정세와 정치, 종교, 사회의 여러 현상이 그 징조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성도는 그날을 준비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설교는 성도들에게 ‘깨어 있으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라’는 권면에서는 귀한 요소를 담고 있지만, 말씀을 대부분 외적 사건과 미래 예언의 시간표로 읽는다는 점에서 말씀의 가장 깊은 목적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예언을 단순히 미래의 정치적 사건을 알려 주기 위한 암호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은 언제나 인간의 영혼과 교회의 상태를 다루며, 외적 역사보다 먼저 내적 역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의 ‘난리와 난리’, ‘민족과 민족’, ‘거짓 그리스도’, ‘멸망의 가증한 것’은 물론 역사 속에서도 여러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진리가 무너지고 선과 진리가 서로 싸우며, 거짓 교리가 참된 신앙을 대신하는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은 우주가 끝나는 날보다, 먼저 사랑과 신앙이 사라져 가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의미합니다.

 

설교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순식간에 변화된다’는 말씀을 휴거의 핵심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보면, 인간은 죽는 순간 육체를 벗고 영의 몸으로 계속 살아가며,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처음에는 거의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영계로 들어갑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설명하듯이 죽음은 존재의 단절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입니다. 따라서 ‘변화’는 물리적인 공중 이동보다 영적 상태의 전환에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을 그 사랑의 상태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으로 인도하시며, 그 과정은 주님의 질서 안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는 현대 복음주의가 말하는 대규모 집단 휴거가 구원의 중심 교리가 아닙니다.

 

설교는 에녹과 엘리야를 휴거의 예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는 에녹은 단순히 죽지 않고 올라간 한 인물을 가리키기보다, 태고교회의 중요한 교리를 후대에 보존하기 위해 모아 둔 교회의 기능을 상징합니다. 엘리야 역시 한 개인의 승천보다 말씀 자체와 말씀의 예언적 기능을 대표, 즉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현대적 의미의 휴거 예언으로 연결하는 것은 말씀의 표상성과 상응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설교는 세계 전쟁, 이슬람 사원, 제3성전, 적그리스도, 세계정부, 단일화폐 등을 하나의 종말 시간표 안에 배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특정 시대의 국제정치 예측서를 제공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속뜻에서는 인간의 마음과 교회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제3성전을 반드시 예루살렘의 실제 건축물로 이해해야 한다는 필연성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전이란 주님께서 거하시는 인간의 내면과 참된 교회를 의미하며, 그것이 무너지거나 더럽혀지는 것이 더욱 중요한 영적 문제입니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역시 차이가 있습니다. 설교는 미래의 특정 인물, 특정 정치 체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적그리스도란 무엇보다 주님을 부인하고 사랑 없는 신앙을 세우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진리를 왜곡하는 모든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교회 안에 퍼져 있는 거짓 교리와 왜곡된 신앙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먼저 겨냥합니다.

 

설교에서는 공산주의와 좌파 정치를 종말의 핵심 징조 가운데 하나로 매우 강하게 연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특정 현대 정치 이념을 예언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은 정치 성향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가가 본질입니다. 동일한 정치 체제 안에서도 천국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가장 종교적인 공동체 안에서도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현대 정치 구도로 직접 치환하는 것은 상응적 해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나 특정 국제단체를 종말 예언과 직접 연결하는 부분도 같은 이유로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시대의 세부 사건을 예언으로 확정하려는 태도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악과 거짓을 분별하는 일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역사 속 정치 지도자는 끊임없이 바뀌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진리를 지배하려는 영적 원리는 모든 시대에 반복됩니다. 말씀은 그 반복되는 영적 원리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설교 후반부로 갈수록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가까워지는 부분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불법을 포기하라’, ‘매일 성실하게 살아라’,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으라’, ‘종말 날짜에 집착하지 말라’는 권면은 외적인 종말 계산보다 내적인 거듭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종말론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현실의 책임을 버리지 말라는 권면은 매우 균형 잡힌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은 자신의 직업과 가정과 사회 속에서 충실하게 선을 행할 때, 주님께서 그 일상 속에서 거듭남을 이루신다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설교의 가장 큰 장점은 ‘깨어 있으라’, ‘회개하라’, ‘성실하게 살아라’, ‘주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라’는 실제적인 권면입니다. 반면 가장 큰 한계는 말씀의 예언을 현대 국제정치와 미래 사건의 연대표로 해석하면서, 말씀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려는 인간 내면의 변화와 교회의 영적 상태라는 중심축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무엇보다 말씀의 속뜻이 열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사건이며, 종말은 세상이 먼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무너진 교회의 시대가 끝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휴거는 어느 날 갑자기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는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자기 사랑에서 주님 사랑으로 들어 올려지는 영혼의 변화이며,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가장 깊은 ‘거룩한 변화’라고 스베덴보리는 이해합니다.

 

 

 

SY.20, ‘천년왕국 시리즈 1강, 당신이 몰랐던 천년왕국 7가지 비밀’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강의는 ‘천년왕국’을 단순한 종말론의 한 주제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줄거리로 제시하려 합니다. 강연자는 천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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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18, ‘이렇게까지 몸매 관리했는데 왜 남자들은 다 도망갈까?’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겉으로는 ‘눈이 너무 높은 38세 여성의 연애 실패담’처럼 보이지만, 말씀의 속뜻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훨씬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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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겉으로는 ‘눈이 너무 높은 38세 여성의 연애 실패담’처럼 보이지만, 말씀의 속뜻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훨씬 깊은 영적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여성은 자신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규정합니다. 운동, 피부 관리, 식단, 의복, 경제적 투자까지 모두 철저합니다. 이러한 자기관리는 그 자체로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질서를 사랑하는 것은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관리’가 ‘사랑’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상대의 선함이나 진실성보다 자신의 기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먼저 판단합니다. 그래서 낡은 구두 하나, 편한 옷차림 하나, 주말에 쉬고 싶다는 말 하나만으로 사람 전체를 평가합니다. 외적 질서가 내적 사람, 그러니까 속 사람의 척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 말합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그를 지배하는 사랑(dominant love)입니다. 겉모습은 그 사랑을 담는 그릇일 뿐입니다. 물론 외적 질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적 선을 섬길 때만 가치가 있습니다. 이 여성은 외적 질서를 내적 선보다 앞세웠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만났고, 인격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만났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남성입니다. 그는 그녀와 거의 똑같은 수준으로 자기관리를 합니다. 처음에는 그녀가 평생 찾던 이상형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그 남성이 그녀를 평가하기 시작합니다. PT를 권하고, 식단을 통제하고, 옷을 고르고, 팔 라인을 지적합니다. 그 순간 그녀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야기의 전환점이 나타납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장면입니다. 그녀가 평생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던 잣대가 이제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입니다. 말씀의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는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영적 교육의 원리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자기 눈으로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때때로 동일한 원리를 자신이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통제받는 사람’의 마음을 체험합니다. 이것은 섭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완전히 깨닫지는 못합니다. 친구가 ‘그 사람도 그게 기본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잖아’라고 말했을 때 잠시 마음이 찔리지만 곧바로 자기 논리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proprium의 특징입니다. 자기 사랑은 잠시 흔들릴 수는 있지만, 스스로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 냅니다.

 

후반부에 대학 동창 현우를 만나는 장면 역시 의미가 큽니다. 현우는 그녀에게 ‘예전에는 더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외모가 아니라 분위기를 말합니다. 즉, 생명력이 인공적인 관리보다 자연스러운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현우가 선택한 여성 역시 화려한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입니다. 이는 천국적 사랑의 중요한 특징과도 연결됩니다. 천국에서는 완벽함보다 서로를 편안하게 하는 선과 진실의 조화가 더 큰 아름다움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마지막입니다. 그녀는 수많은 경험을 했고, 여러 사람의 말을 들었으며, 자신의 외로움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결론은 다시 ‘나는 틀리지 않았다’입니다. 그러나 곧이어 아주 작은 질문이 마음속에서 떠오릅니다. ‘혹시 내가 이상한 걸까?’ 영적으로는 바로 이 작은 질문이 희망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거듭남은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바꾸겠다고 결심하는 순간보다 먼저, 자신의 확신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아직 회개는 아니지만, 자신의 proprium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지 않기 시작하는 첫 단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기준이 높아서 결혼을 못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문제는 기준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상대를 사랑하기 위한 기준인지, 상대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인지가 결정적입니다. 천국의 사랑은 상대를 자신의 기준에 맞게 만드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 안에 있는 선을 기뻐하며 함께 성장하는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여성은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실하고 절제력도 뛰어나며 자신을 함부로 방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의 질서는 아직 ‘사람을 위한 질서’가 아니라 ‘질서를 위한 사람’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관리라는 선한 도구가 어느새 사람을 재는 저울이 되었고, 그 저울은 결국 자신까지도 끊임없이 평가하는 감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거듭남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이루시려는 변화는 기준을 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준의 중심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가’보다 먼저 ‘나는 어떤 사랑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질문이 시작될 때 비로소 사람은 외적인 완벽함보다 내적인 생명을 먼저 보게 되고, 평가보다 사랑이 앞서는 천국의 질서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합니다.

 

※ 다음은 proprium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은 라틴어인데 영어로는 own이 가장 근접합니다.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뜻으로,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나온 것이라 여겨지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자아, 본성보다 더 크고 깊은 개념으로, 여기에 딱 맞는 우리말 표현이 없습니다.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악한 proprium으로, 자신의 모든 걸 자기한테서 나온 걸로 믿는 것입니다. 지상 거의 모든 인간한테서 볼 수 있지요. 이들은 주님의 것을 가로채 마치 제 것인양 쓰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선한 proprium입니다. 이것은, 지금 나의 모든 것은 사실은 주님한테서 왔지만, 주님의 허락으로 마치 내 것처럼 느끼며 살아도 좋다 하신 것이 있습니다. 천사들 모두와 아주 희귀한 몇몇 인간한테서 볼 수 있으며, 이들은 절대 주님의 것을 가지고, 마치 제 것처럼 자랑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SY.17, ‘충격적인 영적 세계를 봤어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간증의 핵심은 크게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가 영계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에 대한 개인적 체험이며, 둘째는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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