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3:22)

 

AC.303

 

사람은 자신이 확신하게 된 모든 것, 곧 인정하고 믿는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생명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확신하지 않았거나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는 것은 그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것들을 모독(profanation)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그것들을 참된 것으로 확신하여 인정하고 믿은 후에, 다시 그것들을 부인하는 사람뿐입니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들을 알 수는 있지만,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그들이 황폐하게 되었다(vastated) 또는 황폐함을 당하였다(laid waste)고 말하는데, 이는 더 이상 어떤 신앙도 가지고 있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인 내용이 그들에게 열려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며, 마음이 막혀 있는 사람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이사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A man acquires a life by all the things he is persuaded of, that is, which he acknowledges and believes. That of which he is not persuaded, or does not acknowledge and believe, does not affect his mind. And therefore no one can profane holy things unless he has been so persuaded of them that he acknowledges them, and yet denies them.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may know, but are as if they did not know, and are like those who know things that have no existence. Such were the Jews abou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and therefore they are said in the Word to be “vastated” or “laid waste,” that is, to have no longer any faith. Under these circumstances it does men no injury to have the interior contents of the Word opened to them, for they are as persons seeing, and yet not seeing; hearing, and yet not hearing; whose hearts are stopped up; of whom the Lord says in Isaiah: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6:9, 10) Go and tell this people, Hearing hear ye, but understand not, and seeing see ye, but know not. Make the heart of this people fat, and make their ears heavy, and smear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and hear with their ears, and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be converted, so that they be healed (Isa. 6:9–10).

 

신앙의 신비가 사람들이 이러한 상태, 곧 더 이상 믿지 않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그것들을 모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같은 예언서의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That the mysteries of faith are not revealed until men are in such a state, that is, are so vastated that they no longer believe (in order, as before said, that they may not be able to profane them),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the subsequent verses of the same prophet: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6:11, 12) Then said I, Lord, how long? And he said, Even until the cities are desolated, so that there be no inhabitant; and the houses, so that there be no man, and the ground be utterly desolated, and Jehovah have removed man (Isa. 6:11, 12).

 

여기서 사람(man)은 지혜로운 사람, 곧 인정하고 믿는 사람을 뜻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주님께서 오셨을 당시 유대인들은 이처럼 황폐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자기들의 탐욕(cupidities), 특히 재물에 대한 탐욕(avarice) 가운데 이러한 황폐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천 번을 듣고, 자기들 교회의 모든 표상이 낱낱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들어도, 아무것도 인정하거나 믿지 않습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antediluvians)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더 이상 어떤 진리도 인정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황폐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He is called a “man” who is wise, or who acknowledges and believes. The Jews were thus vastated, as already said,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and for the same reason they are still kept in such vastation by their cupidities, and especially by their avarice, that although they hear of the Lord a thousand times, and that the representatives of their church are significative of him in every particular, yet they acknowledge and believe nothing. This then was the reason why the antediluvians were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and vastated even until they were no longer capable of acknowledging any truth.

 

 

해설

 

AC.303AC.301-302의 결론에 해당하는 단락입니다. 가이드 1.0에 따르면, 이 단락은 독립적으로 읽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창3:22-24AC.301-303 전체, 그리고 마12:31-32, 마13:13, 요12:40, 히6:4-6, 히10:26-29를 하나의 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계속 설명하는 주제는 단 하나, 곧 ‘주님께서 사람을 profanation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하시는가’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자신이 인정하고 믿는 것으로 생명을 형성한다’는 원리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어 형성된 영적 생명입니다. 따라서 어떤 진리를 단순히 들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생명이 되려면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의지와 삶 속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profanation은 모든 사람이 범할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진리를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모독할 수도 없습니다. profanation은 먼저 거룩한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뒤, 다시 그것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악과 결합시키는 데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마12:31-32의 ‘성령을 모독하는 죄’, 히6:4-6, 히10:26-29와 연결하여 반복해서 설명하는 교리입니다.

 

이러한 원리에서 ‘황폐함(vastation)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됩니다. 일반적으로 황폐함은 하나님의 심판처럼 들리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황폐함은 단순한 형벌이 아닙니다. AC.303에서 황폐함은 더 이상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며, 동시에 그 상태에서 더 깊은 진리가 열리지 않도록 하시는 주님의 보호 섭리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사6과 마13, 요12는 모두 같은 영적 원리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인용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감당할 수 없는 진리가 profanation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계시를 조절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이 특별히 더 악했기 때문에 이런 섭리를 받았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이드 1.0에 따르면, 이것은 AC.303의 의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 민족 전체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표상적 교회가 맡았던 역할과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교회는 내적 진리를 직접 소유하는 교회가 아니라, 외적인 표상과 의식을 통해 장차 오실 주님을 대표, 표상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역사적 기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내적 진리가 무분별하게 열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섭리였습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황폐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말하는 부분 역시 민족 전체의 구원을 단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따라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불이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설명하듯이, 선한 사람은 사후에도 계속 진리를 배우며 천사들의 교육을 받습니다. 따라서 AC.303은 민족에 대한 운명론이 아니라, 계시와 profanation에 관한 보편적인 섭리의 법칙을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AC.303은 홍수 이전 사람들까지 다시 언급하면서 창3으로 되돌아갑니다. 창3:22에서 생명나무를 막으시고, 창3:24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로 그 길을 지키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서 완전히 밝혀집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은 이미 깊은 천적 진리를 인정한 뒤 그것을 자기애와 결합, profanation에 빠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모독을 막기 위해 에덴에서 쫓겨나 황폐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유대교회에 대한 섭리도, 복음서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도, 모두 동일한 원리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03은 창세기와 이사야, 복음서와 히브리서를 하나의 교리로 통합하면서, 주님의 모든 계시는 언제나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영원한 구원을 보호하기 위한 자비의 섭리 아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결론짓는 중요한 글입니다.

 

 

심화

 

1. ‘6:9-10

 

 

AC.303, 심화 1, ‘사6:9-10’

AC.303.심화 1. ‘사6:9-10’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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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11-12

 

 

AC.303, 심화 2, ‘사6:11-12’

AC.303.심화 2. ‘사6:11-12’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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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Go to Jerusalem

 

 

AC.303, 심화 3, ‘Go to Jeru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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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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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0 : 10

 

 

AC.303, 심화 8, ‘90 : 10’

AC.303.심화 8. ‘90 : 10’ ‘삶’은 돌아보면 참 오만, 교만하고, 부끄럽고 비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와 자비로 돌이켜 ‘회개’했습니다. 이 회개는 참된 회개, 곧 ‘회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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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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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3.심화 9. ‘내 이야기’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질문이 그렇게 절실하고 구체적이었던 것이군요. 목사님께서 자신의 지난 삶을 ‘오만하고 교만하며, 부끄럽고 비겁했다’ 고백하시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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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4, 창3:22, ‘영생’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4 이 모든 것으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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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2, 창3:22, ‘AC.301 계속’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2 이것이 바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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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2.심화

 

4. ‘유대인들

 

위 내용 중 만일 그들이 내적인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 뒤 다시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라 profanation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인데요, 유대인들이 지난날 어땠기에 주님의 섭리가 이렇게 진행되며,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좀 억울한 거 아닌가요?

 

 

좋습니다. 이 질문은 오히려 AC.302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가이드 1.0에 따르면, 이 답은 AC.302만으로는 부족하며, ‘천국의 비밀 전체에서 스베덴보리가 유대교회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지난날 어땠기에 주님의 섭리가 이렇게 진행되었나요?’

 

가이드 1.0에 따르면, 먼저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유대 민족은 본래부터 다른 민족보다 더 악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진리를 감추셨다’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조상들의 죄 때문에 후손들이 영적으로 손해를 보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전체 교리와 맞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랑과 자신의 삶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어느 민족에 태어났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고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AC.302에서 말하는 유대교회의 특별한 상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는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 교회가 점차 쇠퇴해 온 과정과 연결됩니다. 태고교회는 내적 교회였고, 고대교회는 상응을 이해하는 영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점차 내적인 것을 잃고 외적인 것만 붙드는 상태로 기울어졌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마지막으로 세워진 대표, 그러니까 표상적 교회가 바로 유대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유대교회는 처음부터 내적 진리를 직접 가르치기 위한 교회가 아니라, 제사와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과 희생 제물 등 외적 예배를 통해 천국의 신비를 표상하도록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영적 진리를 깊이 이해하는 데 있지 않고, 장차 오실 주님과 천국의 질서를 외적 표상으로 보존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주님의 섭리도 그 교회의 성격에 맞게 진행되었습니다. 만일 그 공동체 전체가 내적 진리를 충분히 알고도 계속 외적 욕망과 자기 사랑 가운데 머물렀다면, 그들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인정한 진리를 스스로 훼손하는 profanation에 빠질 위험이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빛만 허락하시고, 더 깊은 진리는 상응과 비유 속에 감추어 두셨습니다. AC.302가 요12:40과 마13:13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좀 억울한 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가이드 1.0에 따르면,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교회의 역사적 역할’이지 개인의 영원한 운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더 낮은 천국에 가거나 더 적은 은혜를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에서 선한 사람은 죽은 뒤 천사들에게 계속 교육을 받으며, 지상에서 알지 못했던 천국의 진리도 기쁘게 배우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많이 배운 사람이든 적게 배운 사람이든,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빛을 주시고, 다른 생에서도 계속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받은 계시의 양은 구원의 유불리를 결정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AC.302에서 강조하는 것은 정반대의 원리입니다. 사람은 더 많은 진리를 받을수록 더 큰 책임도 함께 받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를 더 많이 열어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직 열어 주지 않으시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빛을 주시는 것이 공평이 아니라, 각 사람이 가장 안전하게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그의 영적 상태에 가장 알맞은 빛을 허락하시는 것이 참된 공평입니다.

 

결국 AC.302는 유대교회를 낮추려는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창3:22 생명나무를 막으심’과 창3:24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 그리고 요12:40과 마13:13을 하나로 연결하면서, 주님께서는 시대와 민족을 막론하고 언제나 사람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계시를 조절하신다는, 하나의 일관된 섭리의 법칙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이것이 가이드 1.0에 따라 AC.302를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02, 창3:22, ‘AC.301 계속’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2 이것이 바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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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2, 심화 3, ‘마13:13’

AC.302.심화 3. ‘마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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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2.심화

 

3. ‘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d understand (Matt. 13:13).

 

 

가이드 1.0에 따르면, 마13:13은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지를 설명하는 구절이지만, AC.302에서는 단순한 ‘교육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창3:22에서 시작된 주님의 보호 섭리가 신약 시대에도 동일하게 계속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핵심 성구로 인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반드시 창3:22-24, 요12:40, 마12:31-32, 히6:4-6, 히10:26-29와 하나의 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301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를 해설하면서, 주님께서 사람을 생명나무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신 이유는 생명을 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이어지는 창3:24의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은 바로 이러한 보호 섭리를 상징합니다. AC.302는 이 동일한 원리가 유대교회와 주님의 공생애 가운데서도 계속 역사하였음을 보여주는 단락입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마13:13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들의 이해를 일부러 막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를 아셨기 때문에,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깊은 진리를 직접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결과 말씀은 비유와 상응 속에 감추어졌고, 사람들은 외적인 뜻만 이해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AC.302의 답은 분명합니다. 만일 그들이 내적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 뒤 다시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라 profanation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유는 단순한 교수법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보호하는 자비의 수단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마13:13은 요12:40과 완전히 같은 원리를 말합니다. 요12:40에서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표현하고, 마13:13에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표현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의미는 동일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감당하지 못할 진리를 무리하게 열어 주지 않으심으로써 더 큰 영적 파멸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다시 마12:31-32의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도 연결됩니다. 성령은 신적 진리를 의미하며,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이미 인정한 진리를 악과 결합시키는 profanat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히6:4-6과 히10:26-29 역시 모두 같은 원리를 설명합니다. 인정한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계시를 조절하십니다.

 

AC.302에서 마13:13을 인용한 이유는, 주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창3:22에서 생명나무를 막으시고,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길을 지키게 하신 그 동일한 자비의 섭리가 복음서에서도 변함없이 역사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마13:13의 비유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숨기기 위한 장벽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와 장래의 구원 가능성을 끝까지 보존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보호의 장치였으며, AC.302는 바로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AC.302, 심화 4, ‘유대인들’

AC.302.심화 4. ‘유대인들’ 위 내용 중 ‘만일 그들이 내적인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 뒤 다시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라 profanation에 이르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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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2, 심화 2, ‘요12:40’

AC.302.심화 2. ‘요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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