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겉으로는 ‘눈이 너무 높은 38세 여성의 연애 실패담’처럼 보이지만, 말씀의 속뜻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훨씬 깊은 영적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여성은 자신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규정합니다. 운동, 피부 관리, 식단, 의복, 경제적 투자까지 모두 철저합니다. 이러한 자기관리는 그 자체로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질서를 사랑하는 것은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관리’가 ‘사랑’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상대의 선함이나 진실성보다 자신의 기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먼저 판단합니다. 그래서 낡은 구두 하나, 편한 옷차림 하나, 주말에 쉬고 싶다는 말 하나만으로 사람 전체를 평가합니다. 외적 질서가 내적 사람, 그러니까 속 사람의 척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 말합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그를 지배하는 사랑(dominant love)입니다. 겉모습은 그 사랑을 담는 그릇일 뿐입니다. 물론 외적 질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적 선을 섬길 때만 가치가 있습니다. 이 여성은 외적 질서를 내적 선보다 앞세웠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만났고, 인격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만났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남성입니다. 그는 그녀와 거의 똑같은 수준으로 자기관리를 합니다. 처음에는 그녀가 평생 찾던 이상형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그 남성이 그녀를 평가하기 시작합니다. PT를 권하고, 식단을 통제하고, 옷을 고르고, 팔 라인을 지적합니다. 그 순간 그녀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야기의 전환점이 나타납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장면입니다. 그녀가 평생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던 잣대가 이제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입니다. 말씀의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는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영적 교육의 원리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자기 눈으로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때때로 동일한 원리를 자신이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통제받는 사람’의 마음을 체험합니다. 이것은 섭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완전히 깨닫지는 못합니다. 친구가 ‘그 사람도 그게 기본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잖아’라고 말했을 때 잠시 마음이 찔리지만 곧바로 자기 논리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proprium의 특징입니다. 자기 사랑은 잠시 흔들릴 수는 있지만, 스스로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 냅니다.

 

후반부에 대학 동창 현우를 만나는 장면 역시 의미가 큽니다. 현우는 그녀에게 ‘예전에는 더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외모가 아니라 분위기를 말합니다. 즉, 생명력이 인공적인 관리보다 자연스러운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현우가 선택한 여성 역시 화려한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입니다. 이는 천국적 사랑의 중요한 특징과도 연결됩니다. 천국에서는 완벽함보다 서로를 편안하게 하는 선과 진실의 조화가 더 큰 아름다움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마지막입니다. 그녀는 수많은 경험을 했고, 여러 사람의 말을 들었으며, 자신의 외로움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결론은 다시 ‘나는 틀리지 않았다’입니다. 그러나 곧이어 아주 작은 질문이 마음속에서 떠오릅니다. ‘혹시 내가 이상한 걸까?’ 영적으로는 바로 이 작은 질문이 희망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거듭남은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바꾸겠다고 결심하는 순간보다 먼저, 자신의 확신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아직 회개는 아니지만, 자신의 proprium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지 않기 시작하는 첫 단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기준이 높아서 결혼을 못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문제는 기준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상대를 사랑하기 위한 기준인지, 상대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인지가 결정적입니다. 천국의 사랑은 상대를 자신의 기준에 맞게 만드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 안에 있는 선을 기뻐하며 함께 성장하는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여성은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실하고 절제력도 뛰어나며 자신을 함부로 방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의 질서는 아직 ‘사람을 위한 질서’가 아니라 ‘질서를 위한 사람’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관리라는 선한 도구가 어느새 사람을 재는 저울이 되었고, 그 저울은 결국 자신까지도 끊임없이 평가하는 감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거듭남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이루시려는 변화는 기준을 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준의 중심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가’보다 먼저 ‘나는 어떤 사랑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질문이 시작될 때 비로소 사람은 외적인 완벽함보다 내적인 생명을 먼저 보게 되고, 평가보다 사랑이 앞서는 천국의 질서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합니다.

 

※ 다음은 proprium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은 라틴어인데 영어로는 own이 가장 근접합니다.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뜻으로,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나온 것이라 여겨지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자아, 본성보다 더 크고 깊은 개념으로, 여기에 딱 맞는 우리말 표현이 없습니다.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악한 proprium으로, 자신의 모든 걸 자기한테서 나온 걸로 믿는 것입니다. 지상 거의 모든 인간한테서 볼 수 있지요. 이들은 주님의 것을 가로채 마치 제 것인양 쓰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선한 proprium입니다. 이것은, 지금 나의 모든 것은 사실은 주님한테서 왔지만, 주님의 허락으로 마치 내 것처럼 느끼며 살아도 좋다 하신 것이 있습니다. 천사들 모두와 아주 희귀한 몇몇 인간한테서 볼 수 있으며, 이들은 절대 주님의 것을 가지고, 마치 제 것처럼 자랑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SY.17, ‘충격적인 영적 세계를 봤어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간증의 핵심은 크게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가 영계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에 대한 개인적 체험이며, 둘째는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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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증의 핵심은 크게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가 영계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에 대한 개인적 체험이며, 둘째는 열왕기하 6장의 엘리사 이야기를 통해 영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간증자는 자신의 체험을 여러 차례 소개하면서 그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고, ‘개인적인 체험’으로만 참고해 달라고 스스로 전제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수많은 영적 체험을 기록했지만, 언제나 그것을 말씀의 내적 의미와 주님의 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다면, 가장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은 ‘영적 현상’과 ‘영적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서 영계를 보는 능력은 거듭남의 본질이 아닙니다. 천사들이 위대한 이유는 영안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상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악한 영들도 영계를 봅니다. 따라서 영계를 본다는 사실 자체는 결코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영계의 광경은 언제나 사람의 사랑과 목적을 위해 허락되는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며, 구원의 본질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간증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아이를 둘러싼 황금빛 보호막’에 대한 체험입니다. 간증자는 많은 사람의 중보기도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보호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의 ‘빛줄기’나 ‘에너지’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섭리 안에서 천사 사회들이 한 사람을 보호하는 실제 영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어린이는 특별한 천사들의 보호 아래 있으며,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끊임없이 인간을 지키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체험이 상징하는 핵심은 ‘기도의 에너지’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와 천사들의 보호’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간증자가 ‘기도가 중간에서 끊어져도 하나님은 모두 받으신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상과 상당히 조화를 이루는 면이 있습니다. 주님은 입술의 문장보다 마음의 애정을 보십니다. 진실한 선을 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기도는 말이 서툴고 생각이 흐트러져 있어도 주님께 도달합니다. 반대로 아무리 유창하고 장엄한 기도라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면 영계에서는 거의 아무 생명도 갖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도의 능력을 언어보다 의지와 사랑의 상태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기도줄이 굵어져 마귀의 칼이 부러진다’는 표현은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모든 형상은 사랑과 생각이 외형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굵은 밧줄이나 황금줄 같은 모습이 실제로 존재한다기보다, 주님과 더욱 깊이 연결된 신앙과 사랑의 상태가 그러한 형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중요한 것은 줄 자체가 아니라, 주님과 결합된 내면의 상태입니다.

후반부에서 간증자는 엘리사의 영안을 통해 열왕기하 6장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매우 흥미로운 빛을 던져 줍니다. 엘리사가 본 불말과 불병거는 단순한 초자연적 군대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불은 신적 사랑을, 말은 말씀에 대한 이해를, 병거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본 것은 단순히 천사 군대의 숫자가 아니라, 진리를 지키시는 주님의 권능이었습니다. 제자의 눈이 열린 것은 새로운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영적 실재를 잠시 볼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입니다.

간증의 마지막 결론은 상당히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간증자는 은사가 개인의 미래를 맞히거나 길흉화복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며, 교회와 성도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와도 일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미래를 미리 아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해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섭리 안에서 대부분 감추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만일 사람이 미래를 확실히 안다면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필연성 속에서 행동하게 되고, 거듭남의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한 가지를 더 덧붙였을 것입니다. 영적 체험은 아무리 놀랍더라도 결코 신앙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체험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자신의 악을 버리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갑니다. 영안이 열리는 것보다 훨씬 큰 기적은 자기 사랑을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천사들이 가장 놀라운 존재인 이유는 수많은 신비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의지 전체가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간증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기도는 어떤 신비한 영적 에너지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인간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섭리에 자신을 기꺼이 연결시키는 삶의 표현이며, 영적 체험의 가치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데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의미를 갖는다.’

 

 

 

SY.18, ‘이렇게까지 몸매 관리했는데 왜 남자들은 다 도망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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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16,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사탄을 창조했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매우 극적인 서사 구조를 사용하여 ‘사탄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용해 하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했지만, 십자가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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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매우 극적인 서사 구조를 사용하여 ‘사탄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용해 하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했지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전시키셨다’는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복음주의 설교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구성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이야기에는 성경적 통찰과 함께 수정되어야 할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사탄의 관계, 십자가의 의미, 인간의 자유, 구원의 방식 등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는 매우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우선 이 영상은 루시퍼가 하나님보다 먼저 거대한 전략을 세우고, 하나님은 그것을 뒤늦게 뒤집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영원부터 무한한 지혜와 사랑 자체이십니다. 악은 결코 주님의 계획을 앞설 수 없습니다. 지옥의 영들은 자신들이 매우 영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악한 사랑에 이끌려 움직일 뿐이며, 그 모든 움직임조차 주님의 섭리 안에서 제한되고 조절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원하시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 악이 일정 범위 안에서 활동하도록 허용하십니다. 이것은 허용(permission)이지, 결코 승인(approval)이 아닙니다.

또한 영상은 하나님께서 사탄을 즉시 제거하지 않는 이유를 ‘아직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역시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단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게 주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끝까지 보존하십니다. 만일 악과 거짓이 완전히 제거된다면 인간은 선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강제로 선해지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사랑은 자유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주님은 인간의 영적 자유를 위해 지옥의 활동까지도 제한적으로 허용하십니다.

루시퍼에 대한 설명 역시 스베덴보리의 관점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영상은 루시퍼를 원래 가장 완전한 천사였으나 인간을 질투하여 타락한 존재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루시퍼’는 이사야에서 바벨론 왕을 상징하는 표현이며, 후대에 사탄의 이름처럼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탄과 마귀는 특정한 한 존재의 이름이라기보다 지옥 전체와 그 안의 악한 공동체들을 가리키는 대표적 명칭입니다. 즉, 하나의 초월적 악당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힌 영들의 집단입니다.

영상은 사탄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용하여 하나님을 궁지에 몰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서로 충돌하는 속성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는 사랑과 지혜, 자비와 공의가 완전하게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공의를 포기하거나, 공의 때문에 사랑을 억누르시는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공의 자체가 사랑의 질서이며, 사랑은 언제나 지혜를 통해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두 속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셨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신학과는 다릅니다.

십자가의 의미도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영상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십자가를 형벌 대속의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대신해서 벌받으신 것이 아니라, 지옥 전체와 마지막까지 싸우셔서 그것을 완전히 제압하시고, 인간과 천국 사이의 길을 다시 여셨습니다. 십자가는 그 마지막 승리였으며, 주님의 인성이 완전히 신성화되는 최종 과정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법정에서 형벌이 이전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도 인간 안에서 악과 싸우실 수 있도록 길이 열린 사건입니다.

하와의 유혹에 대한 설명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잘 연결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영상은 사탄이 완전한 거짓말보다 ‘진실을 조금 비튼 거짓’을 사용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에서 반복해서 설명되는 ‘persuasion(확신에 찬 거짓)’과 매우 비슷합니다. 악은 언제나 선처럼 보이고, 거짓은 언제나 진리의 옷을 입습니다. 뱀은 노골적인 부정을 말하지 않고, 말씀에 작은 의심을 심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라는 질문은 오늘날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시험은 결국 주님에 대한 신뢰를 흔드는 데 목적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영상에서 아담이 하와를 사랑해서 함께 죄를 지었다는 설명은 감동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닙니다. 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아담과 하와는 각각 한 개인보다 태고교회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진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선악과 사건은 한 부부의 심리 드라마가 아니라, 태고교회 전체가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 시작한 영적 타락의 과정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속뜻입니다.

영상은 ‘하나님이 침묵하셨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은 결코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주님은 가장 깊은 시험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흘려보내고 계십니다. 다만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 그것을 강제로 느끼게 하지 않으실 뿐입니다. 시험의 때에는 주님께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시험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루시퍼의 함정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는 길이 되었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섭리 사상과 상당히 가까운 부분입니다. 주님은 악을 만드시지 않지만, 악이 만들어 놓은 결과마저도 선을 위한 도구로 돌리실 수 있습니다. 인간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과거의 실패와 상처는 오히려 더 깊은 겸손과 사랑을 배우는 계기가 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악 자체를 선으로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악의 결과를 선을 위한 재료로 사용하시는 섭리입니다.

그러나 영상 말미의 ‘죄를 지은 사람이 죄짓기 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표현은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죄 자체가 유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는 언제나 파괴적입니다. 다만 사람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올 때, 그 과정에서 더욱 깊은 겸손과 주님 의존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죄가 좋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죄 이후의 회개를 통해 더 큰 선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영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승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많은 은혜로운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을 법적으로 궁지에 몰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형벌 대속이었다’, ‘루시퍼는 가장 높은 천사가 인간을 질투해 타락했다’와 같은 핵심 구조는 스베덴보리의 신학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창세기와 십자가는 법정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깊은 ‘영적 전쟁’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그를 지배, 주도적이었던 지옥의 세력을 직접 정복하시고, 자신의 신적 인성을 완전히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자유 가운데 다시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영원히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바라보는 십자가의 중심 의미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가 가장 찬란하게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SY.17, ‘충격적인 영적 세계를 봤어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간증의 핵심은 크게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가 영계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에 대한 개인적 체험이며, 둘째는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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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15, ‘교역자 회의에서 쌍욕을 들었습니다’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글은 단순히 ‘교회 비판’으로 읽기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인간과 교회, 그리고 주님과의 관계를 구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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