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1.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profanation은 꼭 종교적,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하고만 관련되어야 성립하나요? 세상, 세속 진리, 그러니까 이중 첩자라든지, 이런저런 배신자들의 경우는 설령 그 행태가 유사, 비슷할지라도 그냥 세상 죄일 뿐, profanation은 아닌 건가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의 정의에 따르면 ‘profanation’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따라서 세속적 배신이나 이중 첩자 행위 자체는 아무리 악해도, 그것만으로는 ‘profanation’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profanation’이라는 말 자체가 ‘거룩한 것(sacred things)을 속된 것(profane things)과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C.301에서도 계속 ‘holy’와 ‘profane’의 결합을 말하지, ‘’과 ‘’ 일반의 결합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국가 기밀을 적국에 넘긴 이중 첩자는 매우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는 충성심을 배반했고,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앙의 거룩한 것과 직접 관련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악한 죄이고 배신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의미에서 ‘profanation’은 아닙니다.

 

사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함께 일한 동업자를 속여 회사를 빼앗거나, 친구를 배신하여 큰 이익을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심각한 악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세속적 탐욕과 배신의 문제라면, 아직 AC.301이 말하는 ‘profanation’은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배신이라도 양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회자가 성경 말씀을 이용하여 신자들의 신뢰를 얻고, 그 신뢰를 발판으로 거액의 헌금을 가로채거나 자신의 권력을 세우는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때 그는 단순히 돈을 훔친 것이 아니라, 거룩한 말씀과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배신’이면서 동시에 ‘profanation’이 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짓 예언을 하여 사람들을 조종한다면, 그것 역시 단순한 거짓말을 넘어 거룩한 것을 악의 도구로 사용하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두려워한 경우입니다.

 

그래서 저는 ‘profanation’을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profanation’은 죄이지만, 모든 죄가 ‘profanation’은 아닙니다.

 

모든 ‘profanation’은 악이지만, 모든 악이 ‘profanation’은 아닙니다.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알고, 어느 정도 인정한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악과 결합시키는 특수한 죄’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개념은 매우 좁고도 엄격합니다. 그는 사람을 쉽게 ‘profanation’의 상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301에서 강조하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때로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profanation’은 일반적인 죄보다 더 깊고 특별한 영적 상태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특별한 섭리로 그것을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3:22-24는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신 것은 단순히 죄인을 막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거룩한 것’을 ‘’과 영구히 결합시키는 ‘profanation’에 빠지는 것을 막으신 주님의 자비로운 보호였다는 것이 AC.301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01, 심화 4, ‘태고교회 후손들’

AC.301.심화 4. ‘태고교회 후손들’ 태고교회 후손들은 비록 타락은 했어도 종교적이었나 봅니다. 타락 후 바로 profanation 문제가 대두되는 걸 보면 말입니다. 네, 바로 그 점을 보신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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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 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AC.301.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중세 교황들 및 그 계급 구조 아래서 겉과 속이 다르게 산 많은 성직자들, 그리고 오늘날 뉴스에 나오는 많은 목회자들도 어쩌면 저런 경우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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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세 교회와 오늘날

 

중세 교황들 및 그 계급 구조 아래서 겉과 속이 다르게 산 많은 성직자들, 그리고 오늘날 뉴스에 나오는 많은 목회자들도 어쩌면 저런 경우일 수 있겠네요...

 

 

네, 충분히 그런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만 AC.301의 기준에 따르면, 특정 집단 전체를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준은 직분이나 교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일부 교황들과 고위 성직자들 가운데는 말씀과 교회의 거룩한 것들을 충분히 알면서도 그것을 권력과 재물, 정치적 지배를 위해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진리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자기애와 세속적 야망의 도구로 사용하였다면, 그것은 AC.301이 말하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결합시키는 상태’에 가까운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아래에 있던 수많은 사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같은 상태로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단지 잘못된 교리 속에서 태어나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살았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여러 곳에서, 잘못된 교리 안에 있어도 선한 삶을 산 사람들은 사후에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직분만으로 AC.301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뉴스에 등장하는 일부 목회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들이 말씀을 깊이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재산을 위해 복음을 수단으로 삼는다면, AC.301의 설명과 상당히 가까운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거룩한 말씀을 이용하여 악을 정당화하거나, 자신의 탐욕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포장하는 일은 스베덴보리가 가장 심각하게 본 ‘profanation’의 방향과 일치합니다.

 

반대로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린다고 해서 모두 AC.301의 상태라고 판단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내면과 그가 알고 있는 진리의 정도, 그리고 얼마나 의식적으로 행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최종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주님께 속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AC.301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기보다 자신을 살피는 기준입니다. ‘나는 말씀을 배우는 만큼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는가?’, ‘혹시 내가 아는 진리를 내 자존심이나 명예, 유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무지보다도 ‘알면서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창3:22-24를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조차 심판이 아니라 자비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더 큰 책임도 함께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목회자, 신학자, 성직자뿐 아니라 스베덴보리를 연구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경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01, 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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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 심화 1, ‘prof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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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rofanation

 

마침내는 거룩한 것들과 속된 것들을 서로 뒤섞는 일조차 거리낌없이 행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다른 삶에서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을 정도로 정죄됩니다. 이는 profanation으로 인해 한 번 뒤섞인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계속 뒤섞인 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과 결합된 속된 것에 대한 생각도 동시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정죄 받은 자들의 사회 외에는 어느 사회에도 있을 수 없게 됩니다. (AC.301)

 

 AC.301에 나오는 내용이 좀 알쏭달쏭합니다. 그러니까 지상 생활 중 어떤 상황, 어떤 경우가 이런 케이스가 될까요?

 

 

AC.301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fanation’은 단순히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충분히 알고, 어느 정도 인정하고 경험한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악과 결합시키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 일상에서 어떤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인지 이해하면 AC.301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말씀을 배우고, 그것이 참이라는 것도 마음으로 인정하며, 주님의 임재까지 깊이 경험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자기 욕망을 버리지 못해 ‘말씀은 참이지만, 나는 내 욕심대로 살겠다’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말씀을 이용, 자신의 탐욕과 명예욕을 정당화하기 시작합니다. 이 경우에는 거룩한 진리를 단순히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fanation’은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말씀을 깊이 알고 설교도 합니다. 그는 사랑과 겸손을 설교하지만, 실제로는 교회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는 말씀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자신의 야망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속에서는 거룩한 말씀과 자기애가 서로 결합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301이 말하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뒤섞이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는 늘 ‘용서하라’, ‘사랑하라’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미움과 복수를 즐기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아이들에게 가르친 거룩한 진리와 자신의 악한 삶이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존재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곧바로 AC.301이 말하는 ‘profanation’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진리를 충분히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면, 점점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심하여 한동안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 또는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해 의심하는 사람은 AC.301의 대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이런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봅니다.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진리를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악을 위해 이용하는 상태’입니다.

 

본문에서 특히 어려운 표현은 ‘거룩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속된 것도 함께 떠오른다’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을 이용하여 평생 남을 속이고 권력을 얻었다면, 사후에는 ‘말씀’이라는 생각 자체가 곧 자신의 탐욕과 연결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거룩한 진리만 따로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거룩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과 결합된 악도 동시에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분리될 수 없다’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창3:22에서 주님께서 사람이 생명나무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심판이 아니라 보호로 이해합니다. 이미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 깊은 신앙의 신비까지 알게 되면, 그것마저 자신의 악과 결합시켜 훨씬 더 심한 ‘profanation’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허락하지 않으심으로써, 오히려 그들을 더 큰 영적 파멸에서 보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AC.301의 핵심은 ‘죄를 많이 지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거룩한 진리를 충분히 알고도 그것을 자기 악과 의도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가장 위험한 영적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진리를 허락하시며, 때로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조차 자비의 한 형태라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이는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AC.301, 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AC.301.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중세 교황들 및 그 계급 구조 아래서 겉과 속이 다르게 산 많은 성직자들, 그리고 오늘날 뉴스에 나오는 많은 목회자들도 어쩌면 저런 경우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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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 창3:22, 두 번째 아르카나,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1 또 하나의 아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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