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6)

 

AC.439

 

‘셋’(Seth)이 체어리티가 오는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 구절에서 드러났습니다. 그의 ‘이름이 에노스인 아들’(son, whose name was Enosh)이라는 표현이 체어리티를 신앙의 중심으로 여기는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내용과 그 이름이 ‘에노스’(Enosh)라고 불린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데요, 이 이름은 ‘사람’(man), 곧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아닌 인간적 영적 인간(human spiritual man)을 의미합니다. 이런 인간을 여기서 ‘에노스’라고 하는 것이지요. 바로 뒤에 이어지는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라는 말씀에서도 동일한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was shown in the preceding verse. That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that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t is called “Enosh,” which name also means a “man,” not a celestial man, but that human spiritual man which is here called “Enosh.”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words that immediately follow: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해설

 

AC.439는 앞선 AC.438의 내용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의미를 더 정밀하게 고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나아가게 하는 신앙,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삼은 교회입니다. 이는 단순한 세대 구분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어디에 놓이는가에 대한 결정적 구분입니다. 이 반복은 중복이 아니라, 독자가 놓치기 쉬운 핵심을 다시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서는 이름입니다. ‘에노스(Enosh)는 히브리어로 ‘사람’을 뜻하지만, 그 의미는 ‘아담’이나 ‘이쉬’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명히 구분하여 말합니다. 에노스는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아니라, 영적 인간(spiritual man)을 뜻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처럼 사랑을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상태가 아니라, 신앙을 통해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간 상태를 가리킵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 진리를 통해 선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점은, 에노스로 표상된 교회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principal)으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 즉, 진리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기준이 사랑과 이웃에 대한 선입니다. 신앙은 여전히 필수적이지만, 더 이상 중심이 아닙니다. 이는 가인의 신앙, 그러니까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스스로 중심이 된 신앙하고는 정반대의 구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가 ‘사람’을 뜻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 ‘사람’이 완전한 천적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 영적 인간(human spiritual man)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인간의 상태가 타락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상태에 맞는 교회 질서가 확립되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에노스의 교회는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지속 가능한 상태입니다.

 

AC.439는 에노스의 의미가 단지 이름 분석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가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는 이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오는 예배임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사랑과 자비의 신적 본질을 강조하는 이름이며,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사랑의 질에 따라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도 예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노스의 시대에 이르러, 예배는 더 이상 형식이나 두려움, 의무가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됩니다.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면, 참된 예배는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시점을 예배의 ‘시작’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시간상의 시작이 아니라, 본질상의 시작입니다.

 

이 구조는 교회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셋), 그 사랑이 삶의 기준이 될 때(에노스), 사람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즉, 말과 의식 이전에 삶이 예배가 됩니다.

 

AC.439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참된 ‘사람’은 체어리티를 신앙의 중심에 두는 영적인 사람이며, 그 삶은 자연스럽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로 드러난다.

 

셋은 이 길을 열었고, 에노스는 그 길 위에 선 인간의 이름입니다. 이로써 창세기 4장은 신앙의 회복을 넘어, 사랑이 중심이 된 교회의 탄생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AC.440, 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 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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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8,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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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26)

 

AC.438

 

‘셋’(Seth)은 위에서 말했듯이 체어리티가 나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그의 ‘아들’(son)의 이름은 ‘에노스’(Enosh)인데, 체어리티를 믿음의 원리로 여긴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그 교회의 예배를 상징합니다.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as was said above;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by 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해설

 

AC.438은 셋이 표상하는 것이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임을 다시 확인한 뒤, 그의 아들 에노스를 통해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끄는 수단으로서의 신앙이라면,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해 실제로 형성된 체어리티를 중심에 둔 교회를 표상합니다. 즉, 셋은 ‘’이고, 에노스는 ‘도착’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바르다 해도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교회의 질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에노스가 셋의 ‘아들’로 소개되는 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단절되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합법적으로 태어난 결과임을 뜻합니다. 이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대체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제 자리를 지킬 때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구조는 가인의 오류, 즉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상태와 정확히 반대입니다.

 

AC.438의 핵심 문구는 에노스로 표상된 교회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여겼다는 진술입니다. 여기서 ‘주된 것(principal)이란 단순히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 삶의 방향, 예배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에서 신앙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체어리티를 섬기는 위치에 있습니다. 진리는 사랑, 즉 체어리티를 설명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체어리티 없는 진리는 더 이상 신앙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에노스 시대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표현은 단순히 기도의 시작이나 호칭의 변화를 뜻하지 않습니다. 내적 의미, 즉 속뜻으로 ‘이름’은 질과 본질을 뜻하고, ‘부른다’는 건 그 질에 따라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오는 예배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즉, 의무나 전통이 아니라 체어리티라는 사랑에서 우러난 예배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례에서 ‘여호와’는 사랑과 자비의 근원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한 교회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배의 초점이 진리의 정확성보다 사랑의 실천과 자비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배의 질적 전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변화는 예배의 외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생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면, 말씀은 논쟁의 재료가 아니라 삶의 등불이 되고, 교리는 판단의 무기가 아니라 섬김의 지침이 됩니다. 에노스로 표상된 교회는 바로 이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때를 예배의 ‘시작’으로 기록합니다. 이전에도 예배는 있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참된 의미의 예배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는 개인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배워야 하고(셋), 그 신앙을 통해 삶이 바뀌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삶의 기준이 될 때(에노스),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호흡이 됩니다. 그때 사람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 즉, 사랑의 질에 따라 살고 예배합니다.

 

AC.438은 창세기 4장의 마지막을 이렇게 봉인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낳기 위해 주어졌고, 체어리티가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예배는 살아난다.

 

셋은 이 길을 열었고, 에노스는 그 길의 목적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주된 것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삶의 고백입니다.

 

 

 

AC.439, 창4:26, 에노스는 ‘참된 영적 인간’(human spiritual man)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 ‘셋’(Seth)이 체어리티가 오는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 구절에서 드러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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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7, 창4:25, ‘셋’(Seth)은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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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이 다음과 같은 이유, 곧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는 것 때문에 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로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appointed another seed)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씨’(another seed)는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씨’(seed)가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위 AC.255번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That “Seth” here signifies a new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is explained by his name, which it is said was given him because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That God “appointed another seed” means that the Lord gave another faith; for “another seed” is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That “seed” signifies faith may be seen above (n. 255).

 

해설

 

AC.437은 ‘’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그의 영적 의미를 설명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에 대한 설명 속에서, 셋은 단순히 잃어버린 아들을 보충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서 새로운 질서를 공식적으로 세우셨음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여기서 ‘대신’이라는 말은 동일한 것을 반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회복하신다는 뜻입니다. 곧, 주님은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같은 자리와 같은 방식으로 되돌려놓지 않으시고, 신앙을 통해 다시 심기게 하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죽은 아벨을 다시 살리는 것과 같은 어떤 신기한 방식으로 쉽게 이 문제를 해결하실 것 같은데 말입니다.

 

본문은 다른 ‘(seed)가 곧 신앙임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AC.255번 글을 인용하며, 말씀에서 ‘’는 상응적으로 신앙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씨는 땅에 심겨 자라 열매를 맺는 시작점이듯, 신앙은 체어리티가 자라나도록 하는 영적 시작점입니다. 중요한 점은, 씨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씨는 열매를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씨로서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낳기 위해 주어진 신앙입니다.

 

셋이 표상하는 신앙은 이전의 신앙, 곧 ‘가인(Cain)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가인의 신앙은 스스로 목적이 되었고, 그 결과 체어리티를 제거했습니다. 반면 셋의 신앙은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목적으로 갖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AC.437은 셋을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으로 규정합니다. 이 표현은 신앙의 자리, 즉 신앙이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를 정확히 규정하는 결정적 문장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의 ‘주셨다(appointed)라는 표현에는 주님의 주권적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새 신앙을 발명하거나 선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교회의 붕괴 속에서도 신앙의 올바른 형태를 지정하고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셋의 신앙은 인간의 사상적 선택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질서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 그 자체를 표상했고, 가인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셋은 아벨의 단순한 복원판이 아닙니다. 아벨은 직접적 사랑의 상태였고, 셋은 사랑으로 이끄는 신앙의 상태입니다. 이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태고교회처럼 사랑이 곧바로 지각되던 시대가 지나간 이후, 주님은 신앙을 매개로 사랑이 형성되는 질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셋은 이 새로운 시대의 표상입니다.

 

신앙을 ‘’로 주신 이유에는 인간의 자유가 존중됩니다. 씨는 강제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토양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셋으로 표상된 신앙은 사람 안에 체어리티가 자발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듭니다. 이는 강요된 선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자라나는 선입니다. 주님은 이 질서를 통해 체어리티를 보다 견고하게 회복하십니다.

 

AC.437의 논지는 교회 역사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동일합니다. 먼저 왜곡된 신앙(가인)이 드러나고, 사랑이 상실된 아픔(아벨의 죽음)을 겪은 후, 주님은 새 신앙(셋)을 주셔서 다시 사랑이 자라게 하십니다. 이때 신앙은 중심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AC.437은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체어리티를 직접 강제로 주시지 않고, 그것을 낳을 수 있는 ‘신앙의 씨’를 다시 주신다.

 

셋은 이 씨의 이름이며, 교회와 인간에게 주어진 희망의 질서입니다. 신앙은 목적이 아니라 길이고, 체어리티는 그 길의 끝에 맺히는 열매입니다.

 

 

 

AC.438,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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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6, 창4:25, '창4 전체 흐름과 결론'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 그녀가 셋이라 이름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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