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4:20)

 

AC.413

아다(Adah)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의 맏아들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이자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and of cattle)이라고 불리는 데서 분명해집니다. 이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의미하므로 천적인 것입니다. That byAdahis signified the mother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her firstborn Jabal being called the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which are celestial because they signify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해설

AC.413은 앞 번호에서 밝힌 야발의 속뜻을 근거로, 그의 어머니 아다가 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AC.412에서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거꾸로 따라 올라갑니다. 야발이 뜻하는 것들이 천적이기 때문에, 그를 낳은 아다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중심은 새로운 상응을 하나 더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아다와 야발의 의미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히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들이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아다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신앙이나 성품을 평가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 아다는 야발의 어머니이고,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자 관계를 새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것들의 관계로 읽습니다. 아다가 어머니라는 것은 그녀에게서 태어나는 것으로 표현된 것들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야발의 속뜻을 살펴보면 아다가 의미하는 바도 더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야발이 뜻하는 것은 왜 천적인 것입니까? AC.413은 그 이유를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 천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고상하거나 종교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번 문맥에서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 관계된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이 천적이므로, 그것들에 관한 교리를 뜻하는 야발도 천적인 것과 관련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천적이라는 이름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천적인지를 사랑과 선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특히 그로부터 나오는이라는 표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선은 사랑과 무관하게 따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이 무엇을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에 관계된다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은 그것이 실제로 나타나는 모습과 관계됩니다. 물론 겉으로 비슷한 일을 한다고 해서 언제나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까지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선을 말하면서도 그 근원인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이번 번호의 순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먼저이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이 그다음입니다.

 

이 설명은 앞서 가인의 계보를 읽으며 반복해서 살펴본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가 깊어져 마침내 신앙마저 소멸하는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새 교회의 계보에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가 등장합니다. 다만 AC.413이 새 교회의 모든 성격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번호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의 천적인 성격과, 그 성격을 통해 밝혀지는 아다의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이 대목에서 아다가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낯선 상응 하나로만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곧 야발이 의미하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이 천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의 연결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사랑과 선을 함께 말하되, 선이 사랑에서 나온다는 질서를 기억해야 합니다. AC.413은 아다와 야발의 관계를 통해 새 교회의 천적인 것들이 무엇과 관련되는지를 한층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AC.413 해설)

 

 

 

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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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2, 창4:20,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야발 -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20) AC.412‘아다’(Adah)는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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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4:20)

 

AC.412

아다(Adah) 앞에서와 같이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야발(Jabal),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이자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and of cattle)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하며, 이것들은 천적인 것입니다. ByAdahis signified, as before, the mother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byJabal,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is signified doctrine concerning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which are celestial.

 

해설

AC.412는 창4:20에 등장하는 야발의 속뜻을 밝히는 첫 번째 번호입니다. 앞서 AC.405에서 아다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아다의 아들 야발에게서 그 가운데 천적인 것에 관한 교리를 봅니다. 4:20은 야발을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고 소개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장막 생활과 목축의 시작을 알려 주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를 새 교회 안에서 어떤 가르침이 생겨났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조상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때에는 한 생업의 최초 발명자라는 문자적 의미와 함께, 그에 해당하는 교리가 시작되는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장막에 거주하는 일과 가축을 치는 일이 왜 사랑과 선에 관한 교리와 연결됩니까? AC.412는 그 대응 관계를 먼저 제시할 뿐,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각각 입증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번호만으로 장막은 언제나 이것, 가축은 언제나 저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번 문장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말하고, 이어서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말합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선이 그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놓치면 야발의 의미를 단순히 종교적 지식이나 선행의 기술에 관한 가르침으로 축소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이 사람의 삶에 나타내는 선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라는 표현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함은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사랑에 덧붙이는 성질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 있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에 속한 것들이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스스로 훌륭한 사랑을 만들어 있는가?를 가르치는 교리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알고 받아들이며, 그 사랑이 자신의 삶을 이끌도록 하는 일과 관련된 가르침입니다. 성도들이 여기서 사랑을 단지 따뜻한 감정이나 사람 사이의 호감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번 번호의 사랑은 교회의 천적인 것과 관련된 사랑이며,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까지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선은 같은 말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사랑이 사람의 내면에서 무엇을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와 관계된다면, 선은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와 관계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행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이 무엇인지는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AC.412는 이 모든 문제를 상세히 풀이하지는 않지만, ‘사랑의 거룩한 것들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사랑과 선을 떼어 놓지 않도록 이끕니다. 사랑은 선의 근원이며, 선은 사랑이 삶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야발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나 선 자체가 아니라 왜 그것들에 관한 교리입니까? 이 구별은 새 교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필요합니다. 사랑과 선의 근원은 주님이시지만, 교회는 그 사랑과 선에 관하여 배우고 가르칩니다.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인지, 그 사랑에서 어떤 선이 나오는지,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삶으로 나타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와 삶은 동일하지 않지만 서로 무관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에 관한 교리는 사랑의 삶을 대신할 수 없고, 사랑의 삶 또한 무엇이 참된 선인지 알려 주는 진리의 가르침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야발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새 교회 안에 사랑과 선에 관한 가르침이 있다는 뜻이지, 교리를 아는 것만으로 이미 사랑과 선을 소유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대목은 가인의 계보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흐름과 나란히 놓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에게서 시작된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앞서 지배하도록 한 데 있었습니다. 그 분리는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의 계보를 설명하면서 야발에게서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봅니다. 여기서 곧바로 야발이 가인의 모든 잘못을 바로잡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계보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문제였다면, 이제 새 교회에 관한 설명에서는 사랑과 선에 관한 교리가 등장한다는 대비는 분명히 살펴볼 만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지를 다시 묻게 되는 자리입니다.

 

성도들이 AC.412를 읽고 기억해야 할 것은 야발이라는 이름에 낯선 뜻 하나를 더 외우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배우는 신앙의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알도록 이끄는가? 사랑이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도록 돕는가?라는 질문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동시에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이번 번호에서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의 전체 내용을 먼저 밝히고 있으며, 그 표현들이 왜 그러한 뜻을 지니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AC.412는 새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출발점입니다. 그 출발점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입니다. (AC.412 해설)

 

 

 

AC.413, 창4:20, ‘아다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인 이유 - 야발이 뜻하는 사랑과 선’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3‘아다’(Adah)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의 맏아들 야발이 ‘장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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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1, 창4:19,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왜 황폐의 마지막 때가 오는가? - 예언서에 나타난 황폐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1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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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11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서 자주 밝히신 바입니다. 그곳에서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이를 황폐(vastation) 또는 황폐하게 (laying waste)이라 부르고,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황량(desolation)이라 부릅니다. 또한 완결(consummation) 끊어 버림(cutting off)이라고도 말합니다. 6:9, 11-12, 23:8-, 24, 42:15-18, 25, 8, 9:24-, 1, 32, 15-16 이후의 장들을 보십시오. That the last time of vastation must exist before a new church can arise, is frequently declared by the Lord in the prophets, and is there calledvastationorlaying waste,in reference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desolation,in relation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t is also spoken of asconsummationandcutting off.(See Isa. 6:9, 1112; 23:8 to the end; 24; 42:1518; Jer. 25; Dan. 8; 9:24 to the end; Zeph. 1; Deut. 32; Rev. 15; 16; and following chapters.)

 

해설

AC.411은 앞의 AC.408-410에서 설명한 교회의 황폐와 새로운 시작의 질서를 말씀의 예언서들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이전 교회의 황폐가 마지막 때에 이르러야 한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것이 가인의 계보에만 적용되는 해석이 아니라, 주님께서 예언서들에서 거듭 밝히신 교회의 상태와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다니엘서와 스바냐서, 신명기와 요한계시록의 여러 대목을 제시합니다.

 

먼저 황폐(vastation)황폐하게 (laying waste)은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천적인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에 생명을 주어야 할 사랑과 선이 사라지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는 앞에서 가인이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운 데서 시작된 분리가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진행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한편 황량(desolation)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영적인 것은 신앙의 진리와 그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황량은 교회 안에서 신앙의 진리가 더 이상 살아 있는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두 용어의 관계를 짧게 구별할 뿐, 각각에 해당하는 모든 영적 상태를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황폐와 황량을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사건으로 나누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측면에서 구별하여 표현한 것으로 읽는 편이 적절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완결(consummation)끊어 버림(cutting off)이라는 표현도 덧붙입니다. 이 말들은 교회의 이전 상태가 끝에 이르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들입니다. 특히 이번 문맥에서 완결은 교회가 충만하고 온전해졌다는 긍정적인 뜻이 아니라, 이전 교회의 상태가 그 끝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이 두 표현의 세부적인 차이까지 정의하지 않으므로, 각각의 의미는 인용된 본문과 이어지는 AC의 설명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용어 구별은 말씀에 나타나는 심판과 종말의 표현을 읽을 때 중요합니다. 예언서에서 땅이 황폐해지고 성읍이 무너지며 모든 것이 끝나는 듯한 말씀이 나올 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외적인 재난의 묘사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 말씀에 교회의 내적인 상태, 곧 사랑과 선, 신앙과 진리가 어떻게 쇠퇴하고 끝에 이르는가에 관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언서의 모든 황폐와 멸망의 표현을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뜻으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각 말씀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문맥 안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이번 번호에 인용된 사6:9, 11-12는 그 연결을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됩니다. 이사야가 전하도록 명령받은 말씀에는 백성이 듣고도 깨닫지 못하며 보고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이어 이사야가 언제까지 그러한 일이 계속되는지를 묻자, 성읍들이 황폐해지고 주민이 없어지며 땅이 황무해질 때까지라는 대답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인용한 이유는 단순히 황폐라는 낱말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진리를 듣고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가 교회의 황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앞의 AC.410에서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고,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상태를 설명한 내용과 맞닿아 있습니다.

 

9:24 이하의 말씀도 이번 논의와 연결됩니다. 그곳에는 허물이 그치고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일과 함께, 정해진 기간과 끝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대목을 인용하는 것은 이전 상태의 끝과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 서로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411은 다니엘서의 각 구절을 하나씩 풀이하지 않으므로, 이 인용만으로 다니엘서의 모든 예언을 특정한 역사적 시기나 사건에 대응시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 15장과 16장 및 그 이후의 장들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그곳에는 재앙과 심판, 이전 상태의 끝을 나타내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 역시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이해하는 데 관련된다고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앙의 장면 자체에만 시선을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11이 인용하는 목적은 교회의 황폐가 마지막 때에 이른 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는 앞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들은 AC.408에서 말한 새로운 아침과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다른 인용 본문들도 각각의 문맥은 다르지만,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제시하는 공통된 논점은 분명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는 말씀에서 여러 표현으로 선포되며, 그 상태가 끝에 이르는 일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이 모든 인용 구절이 동일한 사건을 똑같은 방식으로 묘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각각의 예언을 자세히 해설하기보다, 말씀 전체에 이러한 질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AC.408-411의 흐름을 함께 보면 논의가 정리됩니다. 이전 교회가 황폐해지기 전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어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새로운 빛, 아침이 밝아 오고 새 교회가 일어납니다. AC.409는 이를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의 출현과 연결했고, AC.410은 새 교회가 진리를 알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아직 진리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AC.411은 이러한 질서가 예언서들에서도 거듭 선포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인간이 일부러 신앙과 체어리티를 잃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황폐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황폐해진 교회의 마지막 상태와 그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는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빛은 황폐 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AC.407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의 어떤 핵심이 보존되고, 주님께서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결국 AC.411은 라멕에게서 드러난 황폐를 말씀 전체의 교회 역사와 연결하는 번호입니다. ‘황폐황폐하게 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황량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며, ‘완결끊어 버림역시 이전 교회가 끝에 이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예언서들에 거듭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해, 이전 교회의 마지막 때와 새 교회의 출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말씀은 교회의 황폐를 말하면서도 그 이후에 비칠 새로운 아침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AC.411 해설)

 

 

 

AC.412, 창4:20,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야발 -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20) AC.412‘아다’(Adah)는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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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0, 창4:19, ‘교회의 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 알면서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알지 못하는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0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거나,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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