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4)

 

AC.488

 

‘날들’(days)이 일반적으로 상태들을 의미하고, ‘해들’(years)이 특별한 의미에서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에스겔에서 That “days” signify states in general, and “years” states in special,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22:4) Thou hast caused thy days to draw near, and art come even unto thy years, (Ezek. 22:4)

 

라고 말하는데, 이는 가증한 일을 행하여 죄악의 분량을 채운 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그들의 전반적인 상태를 ‘날’(days)로, 특별한 상태를 ‘연한’(years)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 곧 시편에서도 speaking of those who commit abominations, and fill up the measure of their sins, of whose state in general are predicated “days,” and in special “years.” So in David: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61:6) Thou shalt add days to the days of the king, and his years a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Ps. 61:6)

 

라고 하는데, 이는 주님과 그의 나라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도 ‘장수’(days)와 ‘나이’(years)는 그의 나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speaking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where also “days” and “years” signify the state of his kingdom. Again: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77:5) I have considered the “days of old,” the years of the ages, (Ps. 77:5)

 

에서는 ‘옛날’(days of old)은 태고교회의 상태들을, ‘지나간 세월’(years of the ages)은 고대 교회의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where “days of old” signify state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years of the ages,” states of the ancient church.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라고 말하는데, 이는 마지막 때들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원수 갚는 날’(day of vengeance)은 정죄의 상태를, ‘구속할 해’(year of the redeemed)는 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speaking of the last times, where the “day of vengeance” signifies a state of damnation, and the “year of the redeemed” a state of blessedness. Again: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61:2) To proclaim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and the day of vengeance of our God; to comfort all that mourn, (Isa. 61:2)

 

에서도 ‘날’(days)과 ‘해’(years)는 모두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애가에서는 where both “days” and “years” signify states. In Jeremiah: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분명히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where state is plainly meant.

 

[2] 요엘서에서는 In Joel:

 

1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2:1, 2) The day of Jehovah cometh, for it is nigh at hand,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a day of cloud and of obscurity; there hath not been ever the like, neither shall be after it, even to 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Joel 2:1–2)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날’(day)은 각각 어둠과 캄캄함, 구름과 흑암의 상태를 의미하며, 개별적으로도, 전체적으로도 그러합니다. 스가랴서에서는 where “day” signifies a state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of cloud and of obscurity, with each one in particular, and with all in general. In Zechariah:

 

9내가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10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3:9, 10) I will remove the iniquity of that land in one day; in that day shall ye cry a man to his companion under the vine, and under the fig tree. (Zech. 3:9–10)

 

라 하고, 또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14:7) It shall be one day which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Zech. 14:7)

 

라고 말하는데, 이는 분명히 상태를 뜻합니다.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neither day nor nigh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하는 날은 시간으로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실은 십계명에서도 나타납니다. where it is plain that state is meant, for it is said that there shall be a day that is “neither day nor nigh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The same appears from expressions in the Decalogue: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5:16; 25:15) Hono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prolonged, and that it may be well with thee upon the ground, (Deut. 5:16; 25:15)

 

여기서 ‘생명이 길다’, ‘날이 길다’(days prolonged)는 것은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where to have the “days prolonged” does not signify length of life, but a happy state.

 

[3] 문자적 의미에서는 ‘날’(day)이 시간처럼 보일 수밖에 없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상태를 뜻합니다. 내적 의미에 있는 천사들은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해와 달이 없어 시간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들은 날들과 해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오직 상태들과 그 변화들만을 압니다. 이로 인해 천사들 앞에서는 물질, 공간, 시간에 관한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이 점은 에스겔 말씀의 겉뜻에서도 드러납니다. In the literal sense it must needs appear as if “day” signifies time, but in the internal sense it signifies state.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do not know what time is, for they have no sun and moon that distinguish times; consequently they do not know what days and years are, but only what states are and the changes thereof; and therefore before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everything relating to matter, space, and time disappears, as in the literal sense of this passage in Ezekiel:

 

그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 (30:3) The day is near, even the day of Jehovah is near, a day of cloud; it shall be the time of the nations, (Ezek. 30:3)

 

에서 ‘구름의 날’(day of cloud)은 거짓의 상태를, ‘여러 나라들의 때’(day of the nations)는 악의 상태를, ‘여호와의 날’(day of Jehovah)은 황폐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요엘서에서도 where a “day of cloud” signifies a cloud, or falsity; the “day of the nations” signifies the nations, or wickedness; the “day of Jehovah” signifies vastation. and of this in Joel:

 

슬프다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1:15) Alas for the day! For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and as vastation shall it come, (Joel 1:15)

 

시간 개념이 제거되면, 그 자리에는 그때 존재하던 사물들의 상태에 대한 개념만 남습니다. 본 장에서 자주 언급되는 ‘날들’(days)과 ‘해들’(years)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When the notion of time is removed, there remains the notion of the state of the things which existed at that time. The case is the same with regard to the “days” and “years” that are so often mentioned in this chapter.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8에서 ‘(days)과 ‘(years)가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 거듭 확증합니다.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창세기 5장의 족보를 시간표로 읽으려는 모든 시도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치밀한 논증입니다. 그는 예언서와 시편, 율법서 전반에 걸쳐 동일한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주며, 성경의 언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상태의 언어’임을 밝힙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과 ‘’가 함께 쓰일 때 그 역할이 항상 구분된다는 점입니다. ‘’은 어떤 상태가 전반적으로 어떠했는지를 말하고, ‘’는 그 상태가 어떤 성질을 띠고 있었는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정죄의 상태는 ‘원수 갚는 날’로, 구원의 상태는 ‘구속할 해’로 표현됩니다.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고, 그 상태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가 핵심입니다.

 

스가랴서에서 말하는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 날’,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는 날’은 이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시간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상태로 이해하면 분명해집니다. 진리와 거짓이 혼재되어 있으나, 끝내 주님의 빛이 드러나는 상태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를 ‘한 날’(one day)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십계명에서 ‘날이 길다(days prolonged)는 약속 역시 같은 원리입니다. 이는 수명의 연장을 약속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안정되고 복된 상태를 뜻합니다. 만일 이것을 시간으로만 읽는다면, 말씀은 현실과 맞지 않는 약속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상태로 읽을 때, 이 약속은 지금도 살아 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천사들의 관점입니다. 천사들은 시간 개념을 갖지 않으며, 오직 상태와 그 변화만을 압니다. 그래서 내적 의미에서는 시간, 공간, 물질과 같은 개념들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사랑과 진리의 상태만이 남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성경의 모든 시간 표현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외적 옷에 불과합니다.

 

이 원리가 창세기 5장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곳에서 말하는 ‘몇 날을 살았다’, ‘몇 해를 살았다’ 같은 표현들은 연대기가 아니라,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었고, 그 상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숫자는 시간의 계산이 아니라, 상태의 질서에 대한 표시입니다.

 

결국 AC.488은 우리에게 성경 읽는 눈을 다시 훈련시킵니다. 시간이 보이면 상태를 물어야 하고, 연수가 나오면 그 안에 담긴 성질을 찾아야 합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족보는 더 이상 건너뛰어야 할 난해한 기록이 아니라, 교회가 걸어온 길을 가장 정밀하게 보존한 영적 연대기로 드러납니다.

 

 

 

AC.489, 창5:4,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진리들과 선들을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그들이 퍼셉션하였던 진리들과 선들, 곧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들’(daughters)은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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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7, 창5:4, '날'(day), '해'(year), 단순 숫자, 복합 숫자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 ‘날들’(days)이 일반적으로 시간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첫째 장에서 이미 보인 바 있는데, 거기서 창조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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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4)

 

AC.487

 

‘날들’(days)이 일반적으로 시간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첫째 장에서 이미 보인 바 있는데,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말씀에서는 모든 시간을 ‘날들’이라고 부르는 일이 매우 흔하며, 이것은 현재 절과 그 뒤에 이어지는 절들(5, 8, 11, 14, 17, 20, 23, 27, 31)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시간들의 일반적인 상태들 또한 ‘날들’에 의해 의미됩니다. 여기에 ‘해들’(years)이 더해질 때에는, 해의 계절들에 의해 상태들의 성질들이 의미되며, 따라서 특별한 의미에서의 상태들이 의미됩니다. 태고 사람들에게는 교회와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하는 그들만의 숫자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셋’(three), ‘일곱’(seven), ‘열’(ten), ‘열둘’(twelve)과, 이것들과 다른 숫자들이 결합된 많은 숫자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숫자들을 통해 교회의 상태들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 안에는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아르카나(arcana, 秘義, arcanum의 복수)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교회의 상태들에 대한 하나의 기록이자 계산이었습니다. 같은 일이 말씀의 많은 부분들, 특히 예언서들에서도 나타납니다. 유대 교회의 의식들 안에서도 시간과 분량에 관한 숫자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제사, 소제, 봉헌물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적용되는 방식에 따라, 어디에서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팔백’(eight hundred)이라는 숫자와, 다음 절에 나오는 ‘구백삼십’(nine hundred and thirty)이라는 숫자, 그리고 이어지는 절들에 나오는 연수의 숫자들 속에 포함된 것들, 곧 그들의 교회의 상태 변화들이 그들의 전반적인 상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너무 많아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이 작업의 뒤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열둘’까지의 단순한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일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이 숫자들의 의미를 알기 전에는, 결합된 숫자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That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was shown in the first chapter, where the “days” of creation have no other signification. In the Word it is very usual to call all time “days,” as is manifestly the case in the present verse, and in those which follow (5, 8, 11, 14, 17, 20, 23, 27, 31); and therefore the states of the times in general are likewise signified by “days”; and when “years” are added, then by the seasons of the years are signified the qualities of the states, thus states in special.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heir numbers, by which they signified various things relating to the church, as the numbers “three,” “seven,” “ten,” “twelve,” and many that were compounded of these and others, whereby they described the states of the church; wherefore these numbers contain arcana which would require much time to explain. It was an account or reckoning of the states of the church. The same thing occurs in many parts of the Word, especially the prophetical.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lso there were numbers, both of times and measures, as for instance in regard to the sacrifices, meat offerings, oblations, and other things, which everywhere signify holy things, according to their application. The things here involved, therefore, in the number “eight hundred,” and in the next verse, in the number “nine hundred and thirty,” and in the numbers of years in the verses following—namely, the changes of state of their church as applied to their own general state—are too many to be recounted.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ake occasion to show what the simple numbers up to “twelve” signify, for until the signification of these is known, it would be impossible to apprehend the signification of the compound numbers.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7에서 다시 한번 ‘’과 ‘’, 그리고 숫자에 관한 성경적 언어의 본질을 정리하며, 창세기 5장이 결코 연대기적 기록이 아님을 확증합니다. 그는 이미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날들’이 문자적 하루가 아니라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을 보였다고 상기시키며, 같은 원리가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곧 성경에서 ‘’은 언제나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어떤 상태가 지배하고 있는가’를 가리키는 언어입니다.

 

말씀에서 모든 시간을 ‘날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매우 흔하다는 설명은, 창세기 5장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의 모든 날들’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가 됩니다. 이 표현은 그 사람이 며칠을 살았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가 어떤 성격으로 존재했는지를 요약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날들’이 시간들의 일반적인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전체적인 분위기, 방향, 중심 성질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여기에 ‘해들’이 더해질 때, 의미는 한층 더 구체화됩니다. ‘’는 계절을 포함하는 시간 단위이기 때문에, 상태의 ‘성질’, 곧 그 상태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났는지를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날들’이 큰 틀의 상태를 말한다면, ‘해들’은 그 안에서 일어난 ‘세부적인 변화와 국면’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날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상태들이고, ‘해들’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상태들이라고 구분합니다.

 

이제 논의는 숫자 자체로 옮겨갑니다. 태고 사람들에게는 교회와 관련된 의미를 담아 표현하던 숫자 체계가 있었습니다. ‘’, ‘일곱’, ‘’, ‘열둘’과 같은 숫자들은 단순한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적 언어’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숫자들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수들 역시 교회의 상태 변화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숫자들 안에 많은 비의(秘義, 숨은 뜻)들, 곧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숫자들이 하나의 ‘기록’이자 ‘계산’이었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상태가 무질서하게 흘러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정확한 질서와 단계’를 따라 변화해 갔음을 뜻합니다. 숫자는 그 질서를 인간의 언어로 남긴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의 숫자들은 생물학적 수명이 아니라, 교회가 거쳐 간 상태들의 질서를 기록한 표식들입니다.

 

이와 같은 숫자의 사용은 예언서들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나며, 유대 교회의 의식들 안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제사와 소제, 봉헌물에 사용된 시간과 분량의 숫자들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들을 의미했습니다. 숫자는 적용되는 방식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지만, 언제나 교회의 내적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동일한 상징 언어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팔백’, ‘구백삼십’과 같은 큰 숫자들, 그리고 이어지는 절들에 나오는 연수의 숫자들에 담긴 의미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은 각각 교회의 상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그리고 그 변화가 전체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숫자들은 단독으로 이해될 수 없고, 전체 구조 안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예고를 합니다. 곧 ‘열둘’까지의 단순한 숫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는 단순 숫자의 내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합된 숫자들의 의미를 결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숫자 언어는 임의적인 암호가 아니라, ‘체계적인 질서 언어’이며, 그 기초를 알 때에만 비로소 전체를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AC.487은 창세기 5장을 읽는 우리의 태도를 완전히 재정립합니다. 숫자는 연대가 아니라 상태이며, 길이는 중요하지 않고 질서가 중요합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족보는 더 이상 낯선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태어나고, 머물고,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정밀한 영적 기록으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AC.488, 창5:4, '날'(day) 상태, '해'(year)는 거기 담긴 성질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 ‘날들’(days)이 일반적으로 상태들을 의미하고, ‘해들’(years)이 특별한 의미에서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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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6, 창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 ‘아담은 팔백 년을 지내며’(the days of man were 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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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5:3)

 

AC.486

 

‘아담은 팔백 년을 지내며’(the days of man were eight hundred years)의 영어 표현에 나오는 ‘날들’(days)은 일반적으로 시간(times)과 상태(states)를 의미하고, ‘해들’(years)은 특별한 의미에서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며,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그들이 인식, 즉 퍼셉션하였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by “years,” times and states in special;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perceived.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6에서 창세기 5장의 표현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며, 시간 및 생육과 번성에 관한 언어가 결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아담은 팔백 년을 지내며(the days of man were eight hundred years)의 영어 표현에 나오는 날들(days)과 ‘해들(years), 그리고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모두 외적으로는 시간의 흐름과 가족의 확장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 상태 안에서 무엇이 인식되고 보존되었는지를 말하는 언어입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5장을 역사로 읽으려는 시도를 단호히 차단하고, 상태의 역사로 읽도록 방향을 고정합니다.

 

먼저 ‘날들’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포괄적입니다. ‘날들’은 어떤 특정한 순간이나 길이를 가리키기보다, ‘하나의 전반적인 상태’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하루, 여러 날, 혹은 어떤 날이라는 표현은 언제나 그때의 내적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창세기 5장에서 말하는 ‘그의 모든 날들(the days of man)은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가 어떤 성격으로 존재했는지를 요약하는 표현입니다.

 

반면에 ‘해들’은 그 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날들’이 전체적인 분위기와 방향을 말한다면, ‘해들’은 그 안에서 드러난 ‘특정한 국면과 변화의 단계’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앞서 ‘’가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명확히 하며, 창세기 5장의 숫자들이 모두 상태의 차이를 표현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몇 해를 살았다’는 표현은, 교회가 어떤 상태를 얼마나 오래 유지했는지를 말하는 언어입니다.

 

이제 ‘아들들과 딸들’, 곧 ‘자녀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자녀들’은 생물학적 자녀가 아니라, ‘그들이 퍼셉션하였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 교회 상태에서 ‘자녀들을 낳았다’는 말은, 그 교회 안에서 새로운 진리의 퍼셉션과 선의 퍼셉션이 계속해서 생겨났음을 뜻합니다. 이는 교회가 살아 있었고, 단순히 유지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풍성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이 점은 창세기 5장의 족보 전체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족보가 단지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반복’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생물학적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보면, 이 족보는 각 교회 상태가 어떤 진리와 선을 퍼셉션했는지, 그리고 그 퍼셉션이 얼마나 풍성했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아들들’은 이해력 안에서 형성된 진리의 퍼셉션들이고, ‘딸들’은 의지 안에서 형성된 선의 퍼셉션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진리들과 선들이 ‘배워서 축적된 것’이 아니라,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와 그 계승 교회들의 특징은, 진리와 선이 외부에서 주입된 교리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퍼셉션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퍼셉션으로 알았던 진리들과 선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퍼셉션이 사라질 때, 교회는 더 이상 ‘아들들과 딸들’을 낳지 못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자녀들’을 낳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활동과 프로그램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진리의 퍼셉션과 선의 퍼셉션이 실제로 태어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교회의 생명력을 숫자나 규모로 판단하지 않고, ‘퍼셉션의 출산 여부’로 판단합니다.

 

또한 ‘날들’과 ‘해들’의 구분은 우리의 신앙 여정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흔히 긴 시간의 신앙생활을 자랑하지만, 성경은 묻습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그리고 그 상태 안에서 어떤 진리와 선이 퍼셉션되었는가를 묻습니다. 짧은 날들이라도 깊은 퍼셉션의 상태에 있었다면, 그 교회는 살아 있었던 것이고, 긴 해들이었더라도 퍼셉션이 없었다면, 그것은 공허한 시간이었을 뿐입니다.

 

결국 AC.486은 창세기 5장의 언어를 완전히 전환시켜 줍니다. 시간은 연대가 아니라 상태이고, 출산은 생물학이 아니라 퍼셉션이며, 족보는 혈통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기록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우리는 창세기 5장을 더 이상 건너뛰고 싶은 장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이 장은, 교회가 살아 있었던 시절의 ‘가장 섬세한 생명 기록’으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AC.487, 창5:4, '날'(day), '해'(year), 단순 숫자, 복합 숫자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 ‘날들’(days)이 일반적으로 시간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첫째 장에서 이미 보인 바 있는데, 거기서 창조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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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5, 창5:3, 창4, 창5에 반복되는 '셋', '에녹', '라멕'이라는 이름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 여기서 ‘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앞서 위에서(창4:25)말한 교회와는 다른 교회임은 A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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