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21:19)Jesus seeing a fig tree in the way,came to it,but found nothing thereon save leaves only,and he said unto it,Let no fruit grow on thee henceforward forever;and presently the fig tree withered away(Matt. 21:19),
이 구절을AC.217에서 인용한 이유는, 무화과나무가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며, 특히 잎은 있으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가 선의 실제 삶은 사라지고, 외적 형식만 남은 교회의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말씀 속 나무들은 단순한 식물이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자연적 선의 열매, 곧 정직함, 공정함, 자비, 이웃 사랑, 양심적인 행동 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신 무화과나무에는 잎만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체계에서 잎은 흔히 지식, 교리, 외적 신앙고백, 종교적 형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다는 것은, 아는 것은 많고, 종교적 외형도 갖추고 있지만 실제 삶 속 선은 없다는 뜻입니다.
AC.217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을 단순히 한 그루 나무에 대한 저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당시 교회 전체의 상태를 보여 주는 표상적 사건으로 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알고 있었고, 율법을 말할 수 있었으며, 종교의식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이미 영적으로 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AC.216과 연결해서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창3에서 타락한 인간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것은 순진무구함은 잃었지만 아직 자연적 선은 남아 있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마21에 이르면 이제는 그 자연적 선마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즉 인간과 교회의 쇠퇴가 더욱 깊어진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단순한 신앙 지식이 아니라 선의 열매임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교리를 말할 수 있고, 성경을 인용할 수 있으며, 신학적 논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잎만 있는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AC.217에서 이 구절은 무화과나무가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중요한 증거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조차 상실한 교회와 인간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겉으로는 살아 있고 풍성해 보이지만, 주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보실 때는 정작 찾으시는 열매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더 깊이 보면, 이 구절은 단순한 심판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잎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열매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무화과나무는 모든 시대의 교회와 모든 신앙인에게 ‘내 안에는 과연 열매가 있는가,아니면 잎만 있는가?’를 묻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런 내적 의미를 보기 때문에 이 구절을AC.217에서 무화과나무의 상응을 설명하는 대표적 예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AC.217
말씀에서 ‘포도나무’(vine)가 영적 선(spiritual good)을, ‘무화과나무’(fig tree)가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완전히 알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잃어버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들이 나오는 곳마다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거나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포도원’(vineyard)과 ‘무화과나무’(fig tree)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길가에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까이 가셨으나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버렸습니다(마21:19). That the “vine” is used in the Word to signify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becaus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has been lost; nevertheless, wherever these expressions occur, they signify or involve this meaning; as also in what the Lord spoke in parables concerning a “vineyard” and a “fig tree”; as in Matthew: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21:19) Jesus seeing a fig tree in the way, came to it, but found nothing thereon save leaves only, and he said unto it, Let no fruit grow on thee henceforward forever; and presently the fig tree withered away (Matt. 21:19),
이것은 땅 위에서 어떠한 선도, 심지어 자연적 선조차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의 의미도 비슷합니다. by which is meant, that no good, not even natural good, was to be found upon the earth. Similar is the meaning of the “vine” and “fig tree” in Jeremiah: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렘8:12, 13) Were they ashamed when they had committed abomination? Nay, they were not at all ashamed, and they knew not how to blush; therefore I will surely gather them, saith Jehovah; there shall be no grapes on the vine, nor figs on the fig tree, and the leaf hath fallen (Jer. 8:12–13),
이것은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모두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 타락하여 부끄러움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악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호세아에서는by which is signified that all good, both spiritual and natural, had perished, since they were so depraved as to have lost even the sense of shame, like those at the present day who are in evil, and who, so far from blushing for their wickedness, make it their boast. In Hosea: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 (호9:10) I found Israel like grapes in the wilderness; I saw your fathers as the first ripe in the fig tree in the beginning (Hos. 9:10).
요엘에서는And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hall bear its fruit, the fig tree and the vine shall yield their strength (Joel 2:22).
여기서 ‘포도나무’(vine)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fig tree)는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The “vine” here denotes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해설
이 본문은 AC.216의 ‘무화과 나뭇잎’ 해설을 더 넓게 확장하는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무화과나무를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자연적 선’을 상징하는 대표적 표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포도나무는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영적 선’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체계에서 자연적 선과 영적 선은 구별됩니다. 자연적 선은 부모를 사랑하고, 이웃을 배려하고, 정직하게 살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과 같은 자연적 차원의 선입니다. 반면, 영적 선은 주님과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선입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그 근원과 동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가 무화과나무보다 더 안쪽 차원의 선을 상징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21:19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도 새롭게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행동을 이상하게 느낍니다. 열매철도 아닌데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실제 나무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를 보여 주는 표상 행위로 이해합니다. 잎은 있지만 열매가 없다는 것은 외적 종교성은 있지만, 선의 열매가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면, 그 사건은 세상에 자연적 선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8장도 같은 원리입니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는 말은 단순한 농작물 흉작 예언이 아닙니다. 영적 선도 없고, 자연적 선도 없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부끄러워할 줄도 몰랐다’는 구절입니다. AC.213과 AC.216에서 본 것처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아직 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호9:10과 욜2:22는 회복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광야에서 포도를 발견한 것,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를 본 것,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힘을 내는 것은 모두 선의 회복을 뜻합니다.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따라오신 AC.213-217의 흐름을 보면, 하나의 아름다운 연결이 보입니다. 창2의 순진무구함이 사라진 뒤, 사람들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립니다. 그것은 완전한 선은 아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의 흔적입니다. 그리고 AC.217에서는 바로 그 무화과나무가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창3:7의 무화과 잎은 단순한 임시 옷이 아니라, 순진무구함을 잃은 뒤에도 주님께서 인간 안에 남겨 두신 마지막 보호막과 같은 자연적 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17은 단순한 식물 상징 해설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선의 여러 층위를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선,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이며, 두 나무가 모두 열매를 맺을 때, 사람의 삶은 건강해집니다. 그리고 둘 다 말라 버릴 때, 교회와 인간은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응을 통해, 성경 곳곳에 흩어져 있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언급들이 사실은 인간의 내적 상태와 교회의 상태를 말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AC.216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나뭇잎을 엮어’(sew leaves together)는 스스로를 변명하는 걸 의미합니다. ‘무화과나무’(fig tree)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하며, ‘치마로 삼았더라’(make themselves girdles)는 수치를 느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고, 이렇게 교회의 이 후손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누리던 순진무구함 대신 오직 자연적 선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자연적 선으로 자기들의 악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연적 선 안에 있었기 때문에, 수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To “sew leaves together” is to excuse themselves; the “fig tree” is natural good; and to “make themselves girdles” is to be affected with shame. Thus spoke the most ancient people, and thus they described this posterity of the church, signifying that instead of the innocence they had formerly enjoyed, they possessed only natural good, by which their evil was concealed; and being in natural good, they were affected with shame.
해설
이 본문은 창3:7의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는 표현을 해설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단순히 벌거벗음을 가리기 위해 옷을 만들어 입은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 타락 이후의 영적 상태를 읽어 냅니다.
우선 ‘잎들을 엮어 꿰맨다’(to sew leaves together)는 것을 ‘변명한다’(excuse themselves)라고 해석하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이것은 매우 깊은 통찰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면 보통 두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합니다. 하나는 주님 앞에 그대로 인정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변명하는 길입니다. 아담이 ‘하와가 주어서 먹었습니다’라고 하고, 하와가 ‘뱀이 꾀어서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 같은 흐름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을 엮는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자신의 상태를 감추고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의미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무화과나무(fig tree)를 ‘자연적 선’(natural good)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자연적 선이란 완전히 악한 상태는 아닙니다. 사람에게 남아 있는 도덕성, 예의, 가족애, 사회적 책임감, 타인에 대한 배려 같은 자연적 차원의 선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여전히 가치가 있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태고교회가 가졌던 순진무구함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전의 순진무구함 대신 자연적 선만 남았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흘러 들어오는 선 가운데 살았지만, 이 후손들은 이미 그 상태를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악해진 것도 아닙니다. 아직 자연적 선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어느 정도는 질서를 지키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무화과 잎은 매우 흥미로운 상징이 됩니다. 무화과 잎은 벌거벗음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합니다. 단지 가릴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선도 인간의 악을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단지 외적으로 억제하고 덮어줄 뿐입니다. 사람은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의 자기 사랑과 교만이 근본적으로 제거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들이 자연적 선 안에 있었기 때문에 수치를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연적 선마저 없었다면 그들은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자연적 선이 남아 있었기에 자신들의 상태를 어느 정도 의식할 수 있었고, 그래서 수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AC.213에서도 보았듯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영적으로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보고 괴로워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양심과 내적 빛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무화과 잎은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완전한 타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 주는 마지막 보호막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결국 AC.216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순진무구함을 잃었고, 그 대신 자연적 선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주님 앞에서 투명하게 살지 못하고, 자기 상태를 가리며 변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연적 선 덕분에 자신들의 상태를 부끄러워할 수 있었고, 바로 그 점에서 아직 회복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무화과 잎은 인간의 불완전한 변명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타락을 막고 있는 마지막 남은 선의 흔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