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심화

 

2. 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 [2]에서 사60:1-3, 20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회라고 하는데, 만일 이 교회를 말하는 거라면, 어휴, 그 시기가 너무도 앞서는 것 같아요...

 

AC.31 [2]에서 이사야 60장을 인용하며 말하는 ‘새 교회’라는 표현은 처음 읽을 때, 많은 분들이 당혹스럽게 느끼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 특히 ‘새 예루살렘 교리’나 ‘참된 기독교’ 등을 떠올리면 곧바로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새 교회(New Church)’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AC 초반부 문맥에서는 이 표현을 조금 더 넓고 원리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교회’는 반드시 역사적으로 아직 오지 않은 특정 교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다시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 곧 ‘빛이 다시 시작되는 영적 시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먼저 AC 전체에서 ‘교회(church)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순히 어떤 제도나 교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교회는 ‘주님을 알고 그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 다시 말해 ‘사람 안에 진리와 선이 살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역사적으로 여러 번 존재했습니다.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 고대교회(Ancient Church), 히브리교회, 유대교회, 그리고 기독교회가 차례로 나타났다고 설명합니다. 이 교회들은 각각 하나의 시대를 이루다가 점차 쇠퇴하고, 그다음에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사야 60장의 예언은 단순히 특정 시대의 예언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를 새롭게 하실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영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사야 60 1–3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문자 그대로 어떤 도시나 민족의 번영으로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은 진리를,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나라들’과 ‘왕들’은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어둠 속에 있던 교회에 다시 진리의 빛이 들어오는 상태’, 곧 교회가 새롭게 되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1에서 말하는 ‘새 교회’는 반드시 먼 미래에만 나타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회가 무너지고 난 뒤 주님이 다시 진리의 빛을 일으키실 때마다 나타나는 교회의 새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도 여러 곳에서 이사야의 예언들이 한 번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의 시대 속에서 반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예언의 가장 깊은 의미는 특정 역사 사건이 아니라 ‘영적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새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체계 전체를 보면, 이사야 60장의 예언은 결국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는 ‘주님이 세우실 마지막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AC 초반부에서는 아직 그 역사적 적용을 강조하기보다, 창세기 창조 이야기가 ‘한 사람의 거듭남과 교회의 regeneration을 동시에 묘사한다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새 교회’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빛이 시작되는 교회의 상태’를 말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변화가 항상 ‘사람의 거듭남과 평행’한다고 설명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어둠 속에 빛이 나타나는 장면은 한 개인의 거듭남의 시작을 나타내는 동시에,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AC.31에서 이사야 60장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빛이 있으라’라는 사건이 단순한 자연 창조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재창조’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읽을 때 ‘아직 오지 않은 어떤 먼 미래의 교회를 말하는 것인가?’라고 너무 좁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교회’는 더 근본적으로 ‘주님이 진리의 빛을 다시 일으키시는 상태’, 곧 ‘교회가 새롭게 되는 영적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 원리는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나타났고, 스베덴보리는 그 원리가 마지막으로 완전히 나타나는 형태를 ‘새 예루살렘 교회’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AC.31의 문맥에서는 이렇게 이해하시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창세기에서 ‘’이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거듭남의 시작을 말할 뿐 아니라, ‘어둠에 빠진 교회 가운데 주님이 다시 진리의 빛을 일으키시는 사건’, 곧 교회의 새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의미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60장을 인용하여 그것을 ‘새 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AC.31, 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위 AC.31 [3]의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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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위 AC.31 본문,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and here, that by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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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 본문,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 인간이 감각과 지식만을 의지할 때, 사랑과 신앙은 자연스럽게 소멸된다는 해설도 있지만... 좀 더 와닿는 사례로 설명해 주세요.

 

AC.31에서 말하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things of sense’와 ‘mere knowledge’를 구분하여 말합니다. ‘things of sense’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mere knowledge’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삶과 연결되지 않은 지식’, 곧 머리로만 알고 있는 정보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사랑과 신앙이 약해지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실제 삶에서 느껴지는 사례로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감각 중심 사고가 신앙을 약화시키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을 판단할 때 항상 ‘눈으로 확인되는 것만이 진짜다’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기도나 영적 삶을 이야기하면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잖아.’ 또는 ‘천국이나 영혼 같은 것은 본 적이 없으니 믿기 어렵다.’ 이런 사고는 단순히 질문을 하는 수준을 넘어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가 계속되면 점차 영적인 것 자체에 관심이 줄어들고, 결국 사랑과 신앙이 마음에서 힘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things of sense’의 영향입니다.

 

두 번째는 지식이 많지만, 그것이 삶과 연결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 지식이나 신학 지식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교리도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실제 삶에서 사랑이나 선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점점 ‘차갑고 분석적인 정보’가 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이 교리는 맞고 저 교리는 틀리다’는 식으로 논쟁은 잘하지만, 정작 이웃을 사랑하는 문제에는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지식이 많을수록 오히려 마음이 더 메마르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mere knowledge’라고 부르는 상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세 번째는 현대 생활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성공과 효율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나 사랑도 결국 ‘이것이 내 삶에 어떤 이익을 주는가’라는 관점에서 평가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이것이 내 인간관계나 사회적 위치에 도움이 되는가’ 같은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이런 사고가 계속되면 사랑이나 신앙은 점점 ‘도구적인 것’으로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더 이상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됩니다. 이 역시 감각과 지식 중심 사고가 신앙을 약화시키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어떤 성도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학 지식을 많이 배우고, 또 세상의 논리로 신앙을 계속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순간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 부분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 ‘이 기적 이야기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 이런 질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만약 그 질문이 계속 ‘의심과 냉소만을 키우는 방향’으로 흐르면 결국 신앙의 따뜻한 중심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머리는 점점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지만, 마음은 점점 더 차가워지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이 지식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mere knowledge’, 곧 삶과 분리된 상태가 될 때입니다. 지식이 사랑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신앙을 살리는 빛이 아니라 마음을 건조하게 만드는 정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진정한 질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먼저 진리를 배우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반드시 ‘사랑과 삶 속에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지식은 더 이상 ‘mere knowledge’가 아니라 ‘living knowledge’, 곧 살아 있는 지식이 됩니다. 그리고 감각 세계 역시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의 질서를 보며 주님을 인식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AC.31이 말하는 것은 아주 실제적인 경고입니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과 머리 지식만을 절대 기준으로 삼으면, 마음의 중심에 있어야 할 사랑과 신앙이 점점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사랑과 결합되면, 그것은 오히려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AC.31, 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위 AC.31 [2]에서 사60:1-3, 20을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이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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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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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심화

 

2.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3:36 AC.30에 인용된 이유는, 넷째 날의 두 광명체 가운데 특별히 ‘’로 상징되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는 사랑을, 달은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참된 신앙은 결코 사랑과 분리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단순히 ‘믿는 것’, ‘교리를 인정하는 것’, ‘올바른 생각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런 것은 신앙의 외형일 뿐이며, 참된 신앙은 반드시 사랑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요3:36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겉으로 보면 이 구절은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후반부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believeth not’로 번역되었지만, 원문의 의미는 단순히 ‘믿지 않는다’가 아니라 ‘순종하지 않는다’, ‘복종하지 않는다’에 더 가깝습니다. 즉 주님은 여기서 단순한 지적 믿음과 실제 삶의 순종을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 ‘믿음’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순종’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신앙이 단순한 생각이나 교리적 동의라면, 왜 주님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영생에서 제외하셨겠습니까? 이는 참된 신앙이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야 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AC.30에서 이 구절은 ‘신앙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앙이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달이 해의 빛을 잃은 것과 같고, 삶의 순종 없는 신앙은 생명이 없는 신앙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는 신앙은 사랑과 결합된 신앙이며, 이것이 넷째 날의 달이 해로부터 빛을 받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결국 AC.30에서 요3:36은 단순히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증거 구절이 아니라, ‘참된 신앙은 사랑과 순종을 포함하며, 그런 신앙만이 생명을 가진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넷째 날의 해와 달, 곧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하는 AC.30의 핵심 주제입니다.

 

 

 

AC.30, 창1:14-17,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 : 생명 얻은 신앙이 다스리는 넷째 날’(AC.30-37)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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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

AC.30.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위 AC.30 분문 [3],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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