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상태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일컬어 ‘생물’(living soul)과 ‘가축’(beast)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신앙과 사랑 둘 다를 가지고 바로 행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이 되며, 이런 그를 일컬어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 지식과 체어리티의 행위들로 말미암아 기쁘게 유지되는데, 그래서 이런 것들을 가리켜 그의 ‘먹을거리’(food)라고 합니다. 반면,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말미암아 기쁘게 유지되는데, 그래서 바로 이 지점이 두 생명 간 싸움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이 싸움은 그의 안에서 사랑이 주(, the dominion)가 되며, 그가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4-31)

 

 

해설

 

AC.12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는데, 이는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짐승과 사람의 창조)에 대응되는, 영적 변화의 절정이자 다음 단계인 ‘안식’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단계는 “신앙에서, 그리고 그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상태”인데, 이는 이전 단계들에서 준비된 모든 내적 작용이 실제 삶의 행동과 말 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시점입니다. 즉, 진리를 아는 것(지식 단계) → 진리를 사랑하는 것(내적 조명 단계) → 진리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실천 단계)의 완전한 연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 안에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물(living soul)(1:24)과 “짐승(beast)(1:24)이라고 불리는데, ‘짐승’은 체어리티와 선한 애정에 속한 감정들, 즉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선한 마음의 역동성을 뜻하고, ‘생물’은 이러한 선한 애정이 진리와 결합하여 참된 영적 생명력을 가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선과 진리가 단순한 외적 행위나 지식의 차원을 넘어 생명의 결합 속에서 하나가 된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을 “영적 인간(spiritual man)이라 부르며, 창세기 표현을 따라 그를 “형상(image)(1:26)이라고 합니다. 이는 주님의 진리가 그의 삶 전체의 질서를 이루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때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서 기쁨과 유지력을 얻는데, 이것들을 “먹을거리(food)(1:30)라고 합니다. 즉, 진리와 선은 이제 단순한 의무나 과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먹이는 실제 양식이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자연적 생명은 여전히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에서 즐거움과 유지력을 얻습니다. 이 두 차원의 즐거움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싸움(combat)이 일어납니다. 이는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영적 전투(temptation)를 뜻하며, 참된 영적 싸움은 바로 이 여섯 번째 상태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싸움은 주님으로부터 온 사랑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때에만, 자연적 욕망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 전투는 사랑이 주도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며, 주님이 주시는 선이 자연적 욕망들보다 우위에 서고, 사람의 중심이 자기 사랑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옮겨가면, 그는 마침내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됩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받아 살며, 신앙이 사랑을 돕는 역할로 완전히 흡수된 상태, 즉 선과 진리가 완전히 일치하여 주님의 뜻이 그의 삶 전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완성 직전 단계로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실질적으로 통일되며, 선과 진리가 생명을 가지고 작용하는 단계이고, 주님이 인간 안에서 진정한 ‘형상’을 이루시는 가장 깊은 영적 성취의 시점입니다.

 

 

 

AC.13, 창1, '오늘날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6-15)

AC.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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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창1, '다섯 번째 상태' (AC.6-15)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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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이것들을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birds of the heavens)라고 합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해설

 

AC.11은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며, 네 번째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점화된 사랑과 신앙이 이제 실제로 ‘사람의 사고와 말, 그리고 삶의 원리’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시기를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단계”라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경건한 말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리가 실제로 그의 사고를 이끌고 판단을 형성하며, 삶의 기준이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전 단계에서는 사람이 선을 행하고 경건하게 말했지만, 그것은 주로 시험과 고난, 내적 압박 가운데서 생겨난 반응적인 경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진리 자체가 사람의 내면에서 살아 움직여, 그 사람을 이끌고 그의 언어와 행동의 근원이 됩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자신이 믿는 진리를 스스로 확증하게 되는데, 여기서의 ‘확증’은 단순히 머리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그 진리를 경험하고, 그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체험하며, 그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마음과 행동으로 지지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이 산출하는 영적 산물들은 이제 ‘생기를 가진 것들(animated)이라고 불립니다. 즉, 이전 단계의 선은 여전히 자기 의지에서 나온 ‘생기 없는 선’이었다면, 이제는 ‘주님의 생명이 선과 진리 속에 실제로 흐르기 시작하여 살아 있는 선과 살아 있는 진리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창1:20에서는 이러한 산출물을 ‘수중생물’, 곧 물고기와 ‘하늘의 새’라고 부르는데, 물고기는 감각적, 지식적 차원의 진리(외적 진리)를, 새들은 이해력에서 솟아오르는 더 높은 차원의 진리(내적 사유와 통찰)를 상징합니다. 즉, 이 단계에서는 인간 안에서 지식 기반의 진리와 이해 기반의 진리가 모두 살아 움직이며, 영적 생명력—주님으로부터 오는 생기—을 갖게 됩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거듭남 과정에서 결정적인 중간 단계로, 신앙이 단순한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사람 전체를 움직이는 내적 힘’이 되는 시점이며, 이후 여섯 번째 상태(신앙과 사랑의 결합으로 살아 있는 선이 완성됨)로 나아가기 위한 본격적 준비가 이 단계에서 이루어집니다.

 

 

 

AC.10, 창1, '네 번째 상태' (AC.6-15)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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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스베덴보리는 왜 복음서 주석은 하지 않았나요? 주님의 육성이 담긴 복음서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분들조차 평생 품고 있는 핵심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선택’이며, 그의 전체 신학 구조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공백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복음서 주석을 ‘안 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한 것’

 

복음서에 대한 직접 주석은 없지만, 복음서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참 그리스도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등에서 전면적으로 풀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방식은 ‘본문을 따라가는 주석 방식(exegesis)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 내재된 구조적, 보편적 진리를 다시 전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신적 진리의 충만한 계시’로서, ‘그 동일한 내적 의미가 구원론, 기독론, 재림론, 연합론 전체에 이미 녹아 있도록 하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굳이 복음서 본문을 한 절씩 풀지 않아도 그 내적 의미 전체가 그의 저작들 전체 속에 재구성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해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복음서 자체를 ‘신학 전체’로 펼쳐 놓은 것’입니다.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직접적 이유들

 

첫째, 복음서는 ‘말씀’(Word)의 범주가 창세기, 출애굽기, 선지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두 범주로 나누는데요, 하나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 heavenly sense, arcana, 속뜻)를 가진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오경과 선지서들, 그리고 시편 일부 및 계시록을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구절 하나하나가 상징과 표상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실제 기록을 기반으로 하나, 그 자체가 상징계는 아닌 ‘복음서의 문자’입니다. 복음서 역시 ‘말씀’이지만, 그러나 다른 종류의 말씀입니다. 그 안의 상징성은 예수님의 생애와 직접 결합되어 있으며, 그래서 창, 출 같은 방식의 상징 주석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즉, 복음서는 ‘예수님의 실제 행적’이자 ‘내적 의미의 직접적 실현’이기 때문에 ‘상징 해석’을 위해 존재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이후 존재하던 성막과 제사가 주님 오신 이후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성막과 제사는 주님을 표상하던 것들인데 정작 그 실체인 주님이 오시자 더는 그런 도우미들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창세기, 출애굽기처럼 절대적 상징 주석을 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둘째, 복음서는 예수님의 ‘육신으로의 신성화 과정’(glorification)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의 성화 과정(신성화, glorification)’이 복음서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곧바로 ‘내적 의미 자체’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험’, ‘기적들’, ‘설교’, ‘십자가’ 및 ‘부활’ 등, 이것들은 ‘상징의 외피가 아니라 내적 의미 그 자체의 역사적 구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건 주석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애는 문자, 상징을 넘어 바로 ‘신적 실체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모든 문자와 상징, 표상, 상응이 가리키는 본체, 실체이신 분이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이미 ‘보충 주석’ 형태로 곳곳에서 해설

 

주석서는 아니지만 복음서 본문을 해설한 문단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시험받으심에 대해서는 지옥 전체와의 전투로(AC, TCR 다수),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천국적 삶과 진리의 질서로, 기적은 선과 진리의 표상으로, 십자가는 마지막 시험과 완전한 연합, 부활은 인간 구원의 원형 등, 즉, 절대적으로 해설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문 주석의 형태가 아닌, 신학 체계 속의 해설’로 그의 저작들 여기저기에서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재림기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처럼 정의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는 일’과 특히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통해서’라고 말입니다. 왜 이 두 곳일까요? 왜 복음서는 아닐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미 복음서 속에서 ‘자신을 직접 계시하심’

 

복음서는 그 문자 의미 자체가 ‘신성의 직접 계시’이므로 ‘상징을 벗기기 위한 해설(exegesis)이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는 상징과 표상으로 감추어져 있어 재림 시기에야 드러낼 수 있는 구조

 

창세기의 아담, 노아, 아브라함, 출애굽기의 애굽, 홍해, 시내산 등 이 모든 것이 인간 영적 발전의 ‘내적 단계’이므로, 재림 때 완전히 드러내야 했습니다. 즉, 창세기, 출애굽기, 계시록은 재림을 위해 봉인된 책들이지만, ‘복음서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핵심’이라는, 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서 주석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스베덴보리는 복음서의 핵심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의 삶, ‘사랑, 자비, 용서, 겸손’은 천국의 질서, ‘십자가’는 인간 구원의 전체 과정, ‘부활’은 삶의 변형, 변모 등, 따라서 그는 말합니다. “사람이 복음서를 ‘해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복음서는 지성의 책이 아니라, 생명의 책이다.” 그는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는 대신, 그 복음서의 내적 의미를 ‘삶의 길(way of life)로서 제시했습니다.

 

요약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복음서는 상징적 기록이 아니라, 신적 인간의 직접 계시이기 때문에, 둘째, 내적 의미는 이미 전체 신학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셋째, 주석의 대상은 ‘봉인된 말씀’인 창, 출, 계인 반면, 복음서는 그 자체로 개방된 말씀, 넷째, 복음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 목적이기 때문에, 다섯째, 그의 사명 자체가 복음서 주석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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