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

 

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세상의 창조, 낙원이라고 하는 에덴동산, 그리고 처음 창조된 사람이라는 아담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누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뒤따르는 페이지들에서 충분히 입증될 텐데요, 곧, 이 내용들 안에는 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비밀들(arcana)이 들어 있으며, 실상 창세기 1장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새로운 창조, 즉 그의 거듭남에 관한 것을,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그 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이런 내용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속에 품고 있을 정도라는 사실입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4번 글은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주석 전체를 여는 ‘정문’(正門)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다음은 그의 성경 해석이 어떤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지에 관한 설명입니다.

 

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주 현실적인 얘기를 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혹은 역사, 지리, 윤리적 관점에서만 읽는데, 그러면 당연히 그 속뜻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 자체가 감추어져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한 층위에만 붙어 있어서 발생하는 제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까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서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본래 이중 구조를 갖지만, 사람의 관점이 외적 수준에 고정되어 있으면, 내적 의미, 곧 속뜻은 결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창세기 처음 장들에서 문자적으로 보이는 것들, 즉 겉 글자로 읽을 수 있는 것들은 천지창조라든지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 뱀의 범죄, 가인과 아벨, 그리고 노아의 홍수 같은 것밖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누가 문자 이상의 무언가를 상상이라도 하겠는가?” 즉, 겉으로 보이는 내용이 너무 평이하기 때문에, 내적 의미를 떠올리기조차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들 안에는 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에서 대단히 강한 어조를 씁니다. ‘have never yet been revealed’(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비밀들)이라고 말이지요. 그가 하려는 말은 거기에는 어떤 단순한 심리적 삶의 교훈 정도가 아닌, 천국의 교회, 인간의 거듭남, 천적 질서에 관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새로운 창조, 즉 그의 거듭남에 관한 것을

 

성경의 첫 성경, 그 성경의 처음 장인 창세기 1장은 겉으로는 모두가 ‘천지창조’를 다룬 장으로 알고 있지만, 속으로는 한 사람의 영혼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새 창조’, 곧 ‘거듭남(regeneration)이라는, 그러니까 아무도 이런 식으로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던, 그런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 전편이 풀어내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1장 전체와 2장 첫 부분에서 처음 6일간의 창조는 거듭남의 여섯 단계를, 그리고 일곱째 날 안식일은 ‘새 사람’, 곧 ‘천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11장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문자적으로는 창조의 역사, 족보이지만, 내적 의미로는 태고교회와 그 후손들의 영적 상태이며, 더 깊은 내적 의미로는 인간 영혼의 생성과 타락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창1의 ‘빛이 있으라’는 물리적 빛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는 첫 영적 지각의 탄생, 곧 인간의 거듭남 첫 움직임, 더 나아가 태고교회의 첫 형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그 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스베덴보리는 아주 과감한 말을 합니다.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아주 작은 표현 하나도...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표상하고, 의미하고, 그 안에 품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이는 곧, 성경의 모든 단어, 구절, 순서가 신적 질서로 짜여 있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잠깐, 위 본문에 나오는 ‘arcana’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잠시 머물겠습니다.

 

arcana’(아르카나)는 라틴어 복수형이며, 단수형은 ‘arcanum’입니다. 뜻은 ‘비밀’, ‘숨겨진 것’, ‘은밀한 것’, 즉 ‘비의’(秘義)입니다. 영어 성경 번역에서는 종종 ‘mystery’(신비)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이 arcana는 단순한 신비나 비밀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rcana의 특별한 의미

 

성경(말씀)의 문자 아래 감춰진 ‘내적 의미’, 즉, 말씀의 ‘속뜻’, ‘심중의 뜻’, ‘천국적 의미’입니다. 성경은 문자만 읽으면 이해되지 않지만, 그 이면에는 주님과 천국, 인간의 영적 삶에 관한 ‘엄청난 진리들이 감춰져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 감춰진 진리들이 바로 ‘arcana’입니다.

 

천사들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열린 말씀의 의미

 

천사들은 성경을 문자로 읽지 않고, ‘상징, 표상(symbol, representative)으로 된 ‘영적, 천적 의미’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들과 직접 교통하며 듣고 본 내용이 바로 ‘천국의 아르카나’, 곧 이 책의 제목인 ‘Arcana Coelestia’(天界秘義)입니다.

 

주님의 섭리와 인간 내면의 작용에 관한 보이지 않는 질서

 

예를 들면, 영계의 구조, 악과 거짓이 인간 내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천사와 영들의 실제 상태, 말씀 구절의 영적 관계, 사람의 거듭남에 일어나는 내적 변화들 같은 이런 모든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통틀어 ‘arcana’입니다.

 

 

 

AC.5, 서문, '주님의 허락으로 사후 세계에서 경험한 모든 것' (AC.1-5)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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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육체와 영' (AC.1-5)

본문AC.3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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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ternal man)과 외적 사람, 곧 겉 사람(external man), 이렇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단지 몸, 그러니까 육체일 뿐이며, 그러므로 죽은 상태입니다. 분리되었다 했으니까요. 겉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은 속 사람 때문인데, 이 속 사람이 곧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글자만을 놓고 보면, 영혼 없는 몸과 같은 것입니다. Without such a life, 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 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 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 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 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해설

 

이 단락은 ‘말씀의 구조’와 ‘인간의 구조’를 완전히 평행하게 연결하는 핵심 비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비유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는 ‘영혼’이며, 문자적 의미는 ‘’이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죽은 상태입니다

 

앞글(AC.2)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생명은 주님을 향한 내적 의미’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내적 의미 없이 문자를 읽는 것은 영혼이 빠진 육체, 곧 죽은 몸뚱이만 보는 것과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이는 문자, 곧 겉뜻의 역할은 내적 의미, 곧 속뜻을 담는 그릇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구조를 예로 듭니다. 속 사람은 영혼, 사랑, 신앙, 의도, 지각을 말하고, 겉 사람은 육체, 감각 기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속 사람이라는 영혼이 떠나면 겉 사람이라는 몸은 살아 있을 수 없는데, 말씀도 똑같다는 것이죠. 말씀도 내적 의미인 속뜻이 영혼이고, 문자적 의미인 겉뜻이 몸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문자만 보면 말씀은 겉으로는 살아 있지만 실제로는 죽어 있는 상태와 같다는 것입니다.

 

문자 자체도 필요하지만, 지상 언어인 문자의 목적은 ‘영혼을 담는 그릇’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의미를 무가치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 없이는 내적 의미가 드러나지 못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본질은 ‘내적 의미, 곧 속뜻이라는 생명을 담는 그릇, 용기’인데요, 이는 영적 의미를 도외시하는 ‘문자주의(literalism)는 실제로는 죽은 몸을 붙들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기독교 세계가 흔히 문자주의와 역사적, 전통적 해석에 사로잡혀 있고, 구약을 무시하며, 규례와 사건 중심의 단편적 해석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자 함이며, 그러므로 참으로 살아 있는 말씀을 보려면, 그 안에 있는 주님, 즉 말씀의 속뜻을 보아야 한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말씀’은 단순한 문자의 집합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드러나는 신성한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속뜻 없는 말씀은 영혼 없는 몸과 같습니다. 문자, 곧 겉뜻은 몸, 속뜻은 영혼입니다.

 

 

 

AC.4, 서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아르카나(arcana)' (AC.1-5)

AC.4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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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 (AC.1-5)

본문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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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그 안에 그런 것들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거의 돌보아지지 않는 상황이지요. 그러나 말씀의 성격이 본래 이러하다는 사실은 단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인 것이, 곧,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그 안에는 천국과 교회,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라 불릴 수 없고,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요. 말씀의 생명은 오직 생명에 속한 것들에서만 옵니다. 즉, 그 안의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생명이신 주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말씀 중 어떤 표현이든 그 안에 주님을 품고 있지 않은 것, 곧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분을 가리키지 않는 것은 ‘신성하다’(Divine) 할 수 없습니다. The Christian world, however, 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 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to the church, and to religious belief, 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 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 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 that is to say, 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 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 that is, 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 is not Divine.  

 

 

해설

 

 2번 글은 ‘말씀의 영감’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으로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글 중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현실을 냉정하게 지적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말씀의 ‘모든 부분’, 그러니까 아주 작은 단어, 철자 하나까지도 영적 의미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며, 그래서 구약이 무시되고 있다고 말이지요. 오늘의 현실과도 매우 비슷한데요, 오늘날도 보면, 이사야, 예레미야의 묵시는 ‘어렵다’ 하여 멀리하고, 레위기의 제사 규례는 ‘오늘날과 무관하다’며 거의 다루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말씀의 진짜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그 안에는 천국과 교회,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이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 명제입니다. 말씀이 신성한, 곧 신이 하신, 주님이 하신 말씀이라면, 그 속에는 필연적으로 천국의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이 논리는 매우 선명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생명 그 자체이시고, 말씀은 주님의 발현이며, 따라서 말씀 안에는 ‘생명을 주는 것’, 곧 주님을 향한 내적 의미가 없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생명이신 주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데요,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신적 영감(Divine inspiration)을 결정하는 기준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 구절이 주님을 내적으로 가리키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신성하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만이 ‘신성’합니다. 아무리 바울 서신이 은혜롭고 영감이 넘쳐 보일지라도 그 자체가 주님에 대한 내적 계시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면, 스베덴보리는 그런 성경은 ‘말씀(Word)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구약의 역사서, 제사 규례까지 왜 신성한가 하면, 바로 그 안에 주님에 대한 내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도, 이삭의 우물 이야기도, 그리고 기름 부음의 규례 등도 모두 주님의 구원 사역, 인간의 재창조, 교회의 상태를 가리키는 영적 의미의 외적 형태이기 때문에 신성합니다.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헬라어 iota, 히브리어로는 ‘י’(요오드)에 해당하는데요, 예수님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5:18) 하셨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철자 하나, 단어 하나, 문장의 배열, 등장순서 등, 이 모든 것이 하늘의 질서를 반영한 신적 구성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AC 전체가 그렇게 많은 번호와 구조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신 주님을 향한 내적 의미를 가질 때에만 살아 있으며, 그렇기에 말씀의 모든 부분, 즉 단어 하나, 글자 하나까지도 주님을 품고 있다.

 

 

 

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육체와 영' (AC.1-5)

본문AC.3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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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 (AC.1-5)

본문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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