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05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교회의 일곱 성사는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전달한다’ - 은총의 통로는 일곱 가지 성사인가, 주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인가?

 

해설

천주교 신앙에서 일곱 성사는 교회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중요한 제도입니다. 천주교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교회에 맡기신 거룩한 성사로 가르칩니다. 신자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고, 견진을 통하여 신앙을 굳게 하며, 성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하고, 고해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으며, 병자성사를 통하여 고통 가운데 특별한 은총을 구합니다. 성품성사와 혼인성사는 각각 교회의 직무와 부부의 결합을 거룩한 소명으로 이해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성사 체계는 인간의 출생과 성장, 죄와 회개, 질병과 죽음, 결혼과 공동체적 봉사에 이르기까지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포괄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신앙이 단순한 생각이나 고백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의 은총은 일곱 가지 성사라는 특정한 의식들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일까요? 그러한 성사를 집전하고 관리하는 교회는 인간의 구원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성사의 거룩함과 그 성사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이루는 영적인 변화는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천주교의 성사 체계를 단순히 부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다시 살펴보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113–1134항은 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교회에 맡기신 은총의 유효한 표지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단순한 ‘표지’가 아니라 ‘유효한 표지’라는 점입니다. 천주교에 따르면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만 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사 안에서 친히 역사하시며, 그 성사가 나타내는 은총을 실제로 베푸십니다. 특히 교리서 1128항은 성사가 ‘행위 자체로’(ex opere operato) 효력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이 라틴어 표현은 성사적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효력이 발생한다는 뜻이지만, 그 행위 자체에 주님과 독립된 신비한 능력이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성사의 효력이 집전자인 사제의 개인적인 거룩함이나 성사를 받는 사람의 공로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과 그분의 능력에 근거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합당한 조건과 교회의 의도에 따라 성사가 거행될 때 그리스도께서 그 성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성사의 객관적인 효력과 그 성사가 인간 안에서 맺는 열매를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성사의 열매가 그것을 받는 사람의 내적인 준비와 태도에도 달려 있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성사를 받기만 하면 누구나 자동으로 거룩해지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일곱 성사 모두를 모든 신자가 빠짐없이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성사론을 단순한 의식주의나 종교적 마술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성사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객관적인 은총의 수단이며, 그 성사적 행위 안에서 실제적인 영적 효력이 발생한다고 보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일곱 성사의 체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중요합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는 이미 세례와 성찬, 죄의 고백과 용서, 병자를 위한 기도와 안수, 교회 직무를 위한 안수와 혼인에 관한 여러 신앙적 실천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들이 처음부터 오늘날 천주교가 가르치는 일곱 가지 성사라는 완성된 체계로 정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사에 관한 신학적 이해는 여러 세기에 걸쳐 발전했고, 중세 서방교회에서 일곱 성사의 체계가 정착되었습니다. 특히 12세기 신학자 페트루스 롬바르두스는 일곱 성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중요한 인물이며, 이후 교회의 공의회들을 거쳐 이 체계는 공식적인 교리로 확립되었습니다.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의 성례전 이해에 대응하여 신약의 성사가 일곱 가지이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가르침을 확정했습니다. 물론 천주교는 이러한 발전을 인간이 임의로 새로운 성사를 만들어 낸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신앙의 유산을 성령의 인도 아래 점차 명확하게 이해하고 정식화한 과정으로 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어떤 교리 체계가 발전했다는 사실과, 그 체계의 모든 내용이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신적인 질서라는 주장은 서로 구별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에 어떤 거룩한 행위가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독립적인 은총 전달의 성사로 제정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곱 성사 체계의 신학적 정당성을 판단하려면 그 역사적 형성뿐 아니라 성경의 실제 가르침과 그 의식들의 영적인 의미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성경에서 세례와 성찬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는 분명합니다. 마28:19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고, 눅22:19에서는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자신을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고전11:23-26에서 바울은 주님의 만찬을 교회가 계속 지켜야 할 거룩한 일로 전합니다. 물론 다른 다섯 성사와 관련된 성경적 근거들도 존재합니다. 약5:14-15에는 병든 사람을 위하여 장로들이 기도하고 기름을 바르는 일이 나오고, 요20:23에는 죄의 용서에 관한 사도적 직무가 언급됩니다. 사도행전에는 안수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거나 교회의 직무를 맡기는 장면들이 등장하며, 혼인의 거룩함은 창2:24와 마19:4-6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각각의 행위가 성경에 나타난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모두 동일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일곱 가지 성사라는 결론 사이에는 추가적인 신학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천주교는 교회의 성전과 교도권을 통하여 그 결론을 정당화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성경의 영적 의미와 주님께서 세우신 의식의 실제적인 쓰임을 기준으로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성경의 거룩한 행위를 후대의 제도적 질서와 동일시할 때에는, 그 행위가 지닌 본래의 영적인 목적이 제도 자체의 권위에 가려지지 않는지 주의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667–691에서 세례를, TCR.698–752에서 성찬을 설명합니다. 그는 TCR.667에서 기독교회의 두 성사인 세례와 성찬의 의미와 효력을 이해하려면 말씀의 영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TCR.669에서는 이 두 성사가 기독교회에서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 쓰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단지 거룩한 의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성사를 단순한 인간의 종교적 관습이나 상징적인 기념행위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세례와 성찬이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자연계와 영계의 상응을 통하여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가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일곱 성사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세례는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과 거듭남의 길에 관계되고, 성찬은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하는 일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두 성사는 단지 교회의 의무적인 예식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출생과 성장, 그리고 주님과의 결합을 나타내고 섬기는 특별한 수단입니다. 여기서 천주교와의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천주교는 일곱 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객관적인 은총의 수단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성사의 특별한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의미와 효력을 말씀의 영적 의미, 상응, 거듭남,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사의 숫자가 일곱인가 둘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은총의 전달과 인간의 영적 변화가 어떤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세례의 경우 스베덴보리는 TCR.677–687항에서 세 가지 쓰임을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이며, 두 번째는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따르게 하는 것이고,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거듭남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 쓰임과 세 번째 쓰임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과 그 사람의 내면에서 거듭남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세례의 물은 영적으로 진리를 통한 정결을 나타내지만, 자연적인 물이 인간의 머리를 씻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의지와 이해에 자리 잡은 악과 거짓이 모두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을 점차 변화시키십니다. 그렇다고 세례가 단순한 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가 사람을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하는 실제적인 쓰임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의식의 시행 자체를 거듭남의 완성과 동일시하지 않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거룩한 시작이며, 그 시작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실제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성찬은 이러한 거듭남과 주님과의 결합을 더욱 깊이 드러냅니다. TCR.698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상응을 알지 못하면 성찬의 쓰임과 유익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성찬의 빵은 주님의 사랑에서 오는 신적 선을, 포도주는 주님의 지혜에서 오는 신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자연적인 육체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신적 선과 진리를 인간이 자신의 영적 생명 안에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찬이 단지 신적 선과 진리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적인 의식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TCR.716에서 스베덴보리는 성찬 안에 주님께서 그분의 모든 구속과 함께 온전히 현존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725에서는 합당하게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그들 안에 계시며, 그 결과 주님과의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찬은 단순히 외적인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과 실제로 결합하시는 특별한 거룩한 수단입니다. 다만 그 결합은 성찬의 자연적인 빵과 포도주가 독립적인 신적 능력을 갖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성찬 안에 현존하시며, 인간이 신앙과 체어리티 안에서 그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성사 이해를 천주교의 성사적 실재론에 대한 단순한 상징주의적 반박으로 이해한다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찬의 실제적인 거룩함과 주님의 현존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자연적인 물질의 실체 변화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 그리고 인간과 주님 사이의 실제적인 영적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천주교의 ‘행위 자체로’라는 성사 효력의 원리와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을 비교하면 두 전통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두 전통 모두 성사의 거룩함이 집전자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공로에서 발생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내적인 상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가 올바르게 거행될 때 그리스도께서 그 성사 안에서 객관적으로 역사하시며, 각 성사에 고유한 은총을 베푸신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세례와 성찬의 실제적인 영적 효력을 인정하면서도, 자연적인 표지와 영적인 실재 사이의 상응을 통하여 그 쓰임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상응은 자연적인 물질이 자동으로 영적인 실재로 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물과 빵과 포도주는 각각 영적인 진리와 선을 나타내며, 이러한 상응을 통하여 자연계의 예배와 영계의 질서가 연결됩니다. 따라서 성사의 실제적인 영적 효력이 있다는 사실과 성사 자체가 독립적인 은총 전달 능력을 가진다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천주교 역시 성사가 그리스도와 독립된 능력을 가진다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성사적 행위의 객관적인 효력과 일곱 성사의 신적 제정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스베덴보리와 차이를 보입니다. 결국 핵심 쟁점은 주님께서 성사를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일곱 가지 성사적 행위를 구원에 필요한 객관적인 은총의 수단으로 제정하셨다는 주장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다섯 성사는 영적인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견진은 신앙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주님의 진리에 충실하게 살아가겠다는 결단의 기회가 될 수 있으며, 고해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는 고통 가운데 주님의 자비와 섭리를 신뢰하도록 도울 수 있고, 성품은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를 섬기는 직무의 중요성을 일깨울 수 있으며, 혼인은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충실하게 살아가야 할 거룩한 책임을 확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들은 실제로 인간의 신앙생활에 유익한 쓰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익함을 인정하는 것과, 이 모든 의식이 각각 고유한 성사적 은총을 전달하는 신적으로 제정된 수단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회개는 고해성사의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09–570항에서 참된 회개가 자신의 악을 살피고 인정하며, 그것을 죄로 여겨 주님의 도움을 받아 실제로 피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제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죄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속 행하려 한다면, 그 사람 안에서 참된 회개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진리 앞에서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진심으로 돌아서는 사람에게는 실제적인 회개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혼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의 참된 사랑은 혼인 예식 자체에서 자동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위하여 살아가는 가운데 깊어집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의식이 영적 성장을 돕는다는 사실과 그 의식 자체가 독립적인 은총의 질서를 이룬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의 바탕에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71–99는 인간이 합리성에 따른 자유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원리를 설명하며, DP.100–128은 사람이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구원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이 인간의 자유로운 수용과 협력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사랑과 진리의 생명을 주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까지 그 생명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악을 행하고 있는지 살피며,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적인 의식도 이러한 내적인 회개와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성사적 질서가 얼마나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질서가 사람들을 실제로 주님께 인도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교회는 말씀과 예배와 거룩한 의식을 통하여 주님을 증언하고 인간의 영적 성장을 도울 수 있지만,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교회의 직무는 그분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섬기는 것이지, 그 역사를 교회의 제도적 권한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떤 천주교 신자가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견진을 받았으며, 평생 미사와 고해성사에 충실하게 참여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그가 주님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웃을 사랑하도록 돕는 귀중한 수단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가족을 멸시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을 행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성사생활에 충실하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같은 성사에 참여하는 다른 신자는 그때마다 자신의 악을 돌아보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가족과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씩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외적으로 동일한 성사에 참여하지만, 그 성사가 각자의 실제적인 삶과 맺는 관계는 서로 다릅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영원한 운명은 오직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사생활의 풍부함이 반드시 내적인 거듭남의 정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은 천주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세례를 받았거나 정기적으로 성찬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영적인 안전의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례와 성찬을 단순한 기념행위로 축소하여 그 안에 담긴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양쪽 모두를 경계하게 합니다. 성사는 인간을 자동으로 구원하는 의식도 아니지만, 단순히 인간의 기억을 돕기 위한 상징적 행위에 불과한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세례와 성찬은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가지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주님과 결합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은총 자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총을 어떤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할 때 외부에서 주어지는 특별한 영적 혜택처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은총은 그러한 특정한 순간에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과 지혜를 주시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만큼 그분과 결합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는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변화시키며, 자신만을 사랑하던 마음을 점차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갑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은총의 본질은 종교적인 의식이 완료되었다는 사실보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이 인간 안에 실제로 받아들여져 새로운 사랑과 삶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주님께서 세우신 성사의 특별한 쓰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례와 성찬의 목적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세례는 인간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의 길로 인도하고, 성찬은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거룩한 의식은 언제나 그것이 나타내는 영적 실재를 향하여 인간을 인도해야 합니다. 표지가 실재를 대신할 수는 없으며, 외적인 형식이 그 형식의 궁극적인 목적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도 적용됩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은총을 소유하고 분배하는 독립적인 권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쓰임에서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15:4-5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당신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아무도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가지가 살아 있는 것은 어떤 외적인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포도나무와 실제로 연결되어 생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적 생명은 그가 얼마나 많은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실제로 결합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 결합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거룩한 의식을 세우시고 교회를 통하여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그 의식은 언제나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세례는 거듭남을 향한 거룩한 입문이며, 성찬은 거듭나는 인간이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하는 특별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순히 ‘나는 어떤 성사를 받았는가?’가 아닙니다. ‘그 성사가 나타내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로 내 삶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가? 나는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피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종교적인 의식을 축적하여 얻는 특별한 신분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적인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생명 안에서 인간은 주님과 결합하며, 그 결합이 점차 깊어지는 가운데 천국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SL.RC.005 해설)

 

요약

‘교회의 일곱 성사는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전달한다’는 명제에는 주님께서 인간의 자연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을 통하여 영적인 생명을 가르치시며, 거룩한 의식을 인간의 신앙과 거듭남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천주교가 성사의 효력을 집전자의 개인적인 거룩함이나 인간의 공로에 의존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역사에 근거한다고 가르치는 점과, 성사의 열매를 얻기 위하여 수령자의 합당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점도 정확히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일곱 가지 의식 모두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독립적인 성사적 은총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사를 특별히 가르치며, 그 실제적인 영적 효력을 자연계와 영계의 상응,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거룩한 의식이 영적인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일곱 성사라는 특정한 제도적 체계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구원적 은총 전달의 질서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데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체계를 인간의 구원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제도적 경로로 절대화한다면, 주님의 직접적인 구원 역사와 교회의 봉사적 역할을 혼동하게 됩니다. 다만 천주교가 모든 신자에게 일곱 성사 전부를 요구하거나, 교회가 그리스도와 독립적으로 은총을 소유하고 분배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결국 구원의 유일한 근원은 주님이시며, 성사의 참된 목적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거듭나고 그분과 결합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려는 가장 귀중한 은총은 단순히 거룩한 의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받아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천국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거듭남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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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4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 - 성모 승천은 특별한 육체적 영화인가, 주님의 유일한 부활과 구별해야 할 교리인가?

 

‘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 이것은 천주교의 대표적인 마리아 교리 가운데 하나인 ‘성모 승천’(聖母昇天, Assumption of Mary)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뒤 영혼만 천국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은총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에 다른 신자들보다 앞서 참여했다는 신앙적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리를 접하면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은 죽은 후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데, 마리아만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몸은 지상에서 사용하던 자연적인 육체일까요, 아니면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일까요? 마리아의 특별한 승천은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닌 영적 몸으로 살아간다고 가르치는데, 이러한 사후세계의 이해와 천주교의 성모 승천 교리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이 질문은 마리아의 특별한 지위에 관한 문제를 넘어 인간의 죽음과 부활,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신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가 무엇인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성모 승천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교황령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확정한 교리입니다. 그 정의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평생 동정녀이신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선언합니다. 이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66항에도 나타납니다. 교리서는 마리아의 승천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특별하게 참여한 사건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이루어질 몸의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승천과 마리아의 승천은 구별해야 합니다. 영어에서 주님의 승천은 ‘어센션’(Ascension), 마리아의 승천은 ‘어섬션’(Assumption)이라고 부릅니다. 전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하늘에 오르셨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마리아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천상의 영광에 올림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에게 예수님과 동일한 신적 권능을 부여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모 승천을 자연적인 육체가 아무런 변화 없이 물질적인 공간을 이동한 사건으로 단순화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몸이 영화되어 천상의 영광에 참여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핵심은 바로 이러한 특별한 육체적 영화가 실제로 계시된 진리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정확하게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천주교가 1950년에 확정한 교리의 정의문은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쳤다고 선언하지만, 그가 반드시 죽은 뒤 부활했는지, 아니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에 올림받았는지를 신앙의 교리로 확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지상 생애를 마친 뒤’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톨릭과 동방교회의 오랜 전통에서는 마리아가 실제로 죽음을 경험했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이어져 왔습니다. 동방교회는 이를 ‘성모 안식’(Dormition of the Theotokos)이라고 부르며, 마리아가 죽음의 잠을 거쳐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이해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1997년 7월 2일의 교리교육에서 마리아가 죽은 뒤 그 몸이 영화되었다는 전통적인 이해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1950년의 교리 정의문이 마리아의 죽음 여부를 신앙의 진리로 결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는 죽지 않았다고 가르친다거나, 반대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세부 과정까지 공식적으로 확정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교리가 실제로 확정한 내용과 그 주변에서 발전한 신학적 설명 및 전승을 구별해야 합니다.

 

성모 승천은 앞서 살펴본 ‘무염시태’(無染始胎, Immaculate Conception) 및 마리아의 평생 동정과 연결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히 준비되었으며, 원죄에서 보존되는 은총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러한 특별한 은총이 지상 생애의 마지막에도 이어졌다고 이해합니다. 비오 12세는 마리아의 몸이 무덤의 부패에 맡겨지지 않고 천상의 영광에 들어간 것을 그의 특별한 신학적 지위와 연결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의 몸이 반드시 다른 모든 인간보다 먼저 영화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모 승천은 무염시태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 자체로 별도의 계시적 근거를 요구하는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그 근거를 성경의 직접적인 사건 기록에서만 찾지 않고 교회의 전통과 전례, 성경의 여러 예표와 상징을 종합하여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문제를 검토할 때에는 그러한 신학적 연결이 실제로 말씀의 속뜻과 주님의 부활에 관한 가르침에 부합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과, 그 몸이 다른 인간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방식으로 영화되었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과 지상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지만, 그가 언제 어디에서 지상 생애를 마쳤으며 몸이 어떤 방식으로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는지는 직접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행1:14에는 마리아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이 나타나지만, 그 이후의 죽음이나 승천에 관한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계12:1에 나타나는 해를 입은 여자, 창3:15의 여자와 뱀 사이의 적대 관계, 그리고 구약의 언약궤에 관한 말씀들을 성모 승천과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마리아의 역할과 구원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연결하여 생각하게 하지만, 마리아의 육체가 실제로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사건을 직접 서술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계12:1의 여인을 마리아 개인과만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의 상징적 성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 해설’(Apocalypse Revealed, AR, 1766) 533항에서 해를 입은 여인이 새 하늘에 있는 주님의 새 교회와 땅 위에 세워질 새 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여인은 우선 교회와 그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이를 마리아의 육체적 승천을 직접 증명하는 본문으로 사용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과 후대의 교리적 적용을 혼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데려가신 사람들에 관한 기록도 있습니다. 창5:24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고 기록하며, 왕하2:11은 엘리야가 회오리바람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이 곧 마리아에게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초기 인물들의 이야기 안에 교회의 영적 상태와 변화에 관한 깊은 속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에녹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여 마리아의 승천과 직접 연결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사람을 데려가실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의 문제와, 마리아에게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계시되었는가 하는 증거의 문제를 구별하는 일입니다. 성경에 어떤 종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록되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의 성모 승천 역시 이러한 구별 아래에서 검토해야 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을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445–452항에서 인간이 죽는 순간의 상태와 영계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그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육체와 분리되어 영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물질적인 육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 안에 있으며, 육체는 영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기능이 멈추더라도 인간의 생명은 계속됩니다. 또한 HH.453–469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능력을 계속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후의 인간이 단순히 형체 없는 의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실제로 몸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몸은 자연계의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가 아니라 영계에 속하는 ‘영적 몸’(靈的身體, spiritual body)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성모 승천 교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마리아가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의미라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것은 마리아만의 특별한 특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죽은 후에도 영적 몸을 지닌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성모 승천은 단순히 마리아가 영계에서 인간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장차 모든 의인에게 이루어질 몸의 부활과 영화에 특별한 방식으로 미리 참여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는 사후에도 인간이 몸을 지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몸이 무엇이며 자연적인 육체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의 문제에서 드러납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LJ, 1758) 36항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는 자연계의 인간은 자연적인 몸을 입고 있지만 영계의 인간은 영적인 몸을 입고 있으며, 두 몸은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눈은 자연적인 것을 보고, 영적인 눈은 영적인 것을 봅니다. 따라서 영계에 들어간 인간이 완전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상에서 입었던 자연적인 육체가 그대로 영계로 옮겨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연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자신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영원한 삶을 계속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물질적인 육체가 다시 살아나야 비로소 인간이 완전해진다는 생각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의 차이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천주교는 마지막 날에 모든 인간에게 이루어질 몸의 부활을 믿으며, 마리아는 그 영광에 특별히 앞서 참여했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은 후 이미 영적 몸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간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마리아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하여 자연적인 육체의 특별한 영화까지 필요로 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기서 더욱 결정적인 본문은 HH.316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 영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몸까지 부활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지상 생애 동안 자신의 인성 전체를 영화하여 신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신성 자체였으며, 그분의 인성은 그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일반 인간과 달리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일반 인간은 영으로 부활하지만 주님은 몸까지 부활하셨다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몸의 부활을 자연적인 물질의 몸이 아무런 변화 없이 보존된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인성을 온전히 신적으로 영화하셨으며, 그 영화된 인성은 자연적인 물질의 한계에 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은 일반 인간의 사후 각성과 동일한 사건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이루신 유일한 영화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마리아가 자신의 몸까지 특별히 영화되어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천주교의 교리는 중요한 신학적 긴장을 일으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만이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셨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두 전통의 용어를 무조건 같은 의미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가 말하는 마리아의 몸의 영화는 피조물에게 베푸신 은총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인성의 영화는 신성 자체가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신 사건입니다. 두 설명은 동일한 종류의 영화가 아니므로, 단순히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모순이라고 단정하기보다 두 전통이 몸의 부활과 영화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사후에 어떤 존재로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27항에서 마리아와 관련된 특별한 영적 경험을 기록합니다. 그는 흰옷을 입은 마리아를 보았으며,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시고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 기록에서 마리아는 주님과 동일한 신적 권위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한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료의 성격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TCR.827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의 자연적인 육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마리아와 영계에서 만났다는 기록만으로 성모 승천의 역사적 사실이 반박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기록은 스베덴보리가 마리아를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직접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는 모든 인간이 사후에도 영적 몸을 지닌 존재로 살아간다는 그의 사후세계론과 일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성모 승천을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사건으로 이해하며, 장차 모든 신자에게 이루어질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보여 준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천국의 영광은 자연적인 육체가 얼마나 특별한 방식으로 보존되거나 변화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천국의 상태는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그 사랑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천국의 모든 천사는 영적 몸을 지니고 있으며, 각 사람은 자신의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따라 서로 다른 천국의 상태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육체가 특별한 방식으로 영화되었다는 사실이 천국에서의 더 높은 영적 상태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실제적인 천국의 상태를 인간이 임의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내면과 영원한 상태에 대한 최종적인 앎은 오직 주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에게 어떤 특별한 영광이 주어졌는가보다, 천국의 모든 생명과 영광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은 특별한 몇 사람의 신체적인 특권에 의하여 성립하는 세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인 삶의 세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모 승천 교리에서 인정해야 할 진리와 다시 검토해야 할 주장을 구별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또한 주님께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죽음 이후에도 인간이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에서도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후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 안에서 살아간다는 이해 자체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다른 모든 인간과 달리 자신의 자연적인 육체와 연결된 특별한 육체적 영화를 미리 누렸다는 주장은 별도의 계시적 근거를 요구합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건을 직접 기록하지 않으며, 스베덴보리의 저작 역시 그것을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죽은 후 자연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간다고 설명하며, 주님께서 자신의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신 사건을 일반 인간의 부활과 구별합니다. 따라서 성모 승천을 반드시 믿어야 할 신앙의 교리로 확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에서 직접적인 뒷받침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리아의 사후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역사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더욱 중요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푸시며, 그들을 자신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천국의 삶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가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하늘에 들어갔는가보다, 죽음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모든 구원의 근원이 되신 주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결국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천국의 영광은 마리아의 특별한 승천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모든 인간에게 천국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 한 분에게서 비롯됩니다. (SL.RC.034 해설)

 

 

‘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며,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 오직 주님의 은총과 구속에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성모 승천을 마리아가 자신의 능력으로 하늘에 올랐다는 뜻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하여 몸과 영혼이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마리아가 죽음을 경험했는지의 여부는 1950년의 교리 정의문에서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자신의 몸까지 특별히 영화되어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주장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넘어서는 교리적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HH.445–469와 LJ.36에서 인간이 죽은 후 자연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간다고 설명하며, HH.316에서는 주님만이 자신의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영계에서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살아간다는 사실과, 다른 모든 인간과 구별되는 특별한 육체적 영화를 미리 누렸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과 일치하지만, 후자는 그의 가르침에서 직접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특히 천주교의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몸에 관한 가르침은 인간의 사후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다만 이러한 신학적 차이가 마리아의 지상 육체에 실제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가 천국에서 살아간다는 믿음이나 그의 특별한 소명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에서 확증되지 않는 특별한 육체적 승천을 모든 신자가 반드시 믿어야 할 신적 진리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천국의 생명은 자연적인 육체의 특별한 보존에 달려 있지 않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영적 상태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특별한 육체적 지위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죽음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의 유일한 신성과 구속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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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 - 주님의 동정녀 탄생과 마리아의 평생 동정은 같은 신앙의 진리인가?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 이것은 천주교가 가르치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終身童貞, Perpetual Virginity of Mary)에 관한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남자와 관계없이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사실을 믿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그의 동정성이 보존되었으며, 출산 이후에도 요셉과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영원한 동정녀’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이파르테노스’(Aeiparthenos)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성육신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역사였으며, 마리아의 몸과 삶이 그 특별한 소명을 위하여 온전히 봉헌되었다는 신앙적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때 동정녀였다고 분명히 증언하지만, 출산하는 순간의 신체적 상태와 그 이후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정도로 분명하게 가르칠까요?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자매들은 누구였을까요? 무엇보다 마리아의 평생 동정이 주님의 신성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진리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마리아와 요셉의 사생활에 관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성경이 직접 증언하는 사실과 교회가 후대에 확정한 교리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그리고 동정과 결혼을 어떤 영적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번 명제를 검토하려면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성경의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 및 상응의 가르침을 차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496–507항에 나타납니다. 496항은 예수님께서 인간 남성의 개입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다고 설명합니다. 499항은 마리아의 동정성이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보존되었다고 가르치며, 500항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이 마리아가 낳은 다른 자녀들이 아니라 친족들이었다고 해석합니다. 501항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유일한 아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평생 동정은 세 가지 주장으로 구별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기 전까지의 동정(virginitas ante partum)이고, 둘째는 예수님을 출산하는 과정에서도 보존된 동정(virginitas in partu)이며, 셋째는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도 지속된 동정(virginitas post partum)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의 교리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성경적 근거와 신학적 의미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특히 첫째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직접 연결되는 반면, 둘째와 셋째는 마리아의 출산 과정과 이후 삶에 관한 추가적인 주장입니다. 천주교는 세 가지 모두를 신앙의 진리로 고백하지만, 이를 검토하는 우리는 각각의 근거와 의미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천주교가 평생 동정을 단순한 신체적 순결 문제가 아니라, 마리아의 믿음과 주님께 대한 전적 헌신의 표지로 이해한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교리서 506항은 마리아의 동정성을 의심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믿음과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바친 상태의 표지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교리를 단순히 신체적인 동정 여부에 집착하는 가르침으로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출산 전 동정에 관해서는 성경의 증언이 매우 분명합니다. 마1:18은 마리아와 요셉이 함께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마1:20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가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눅1:34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고 묻고, 눅1:35에서 천사는 성령이 그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잉태가 일반적인 인간의 출생과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증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DL.48과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92에서 이러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특별한 질서를 설명합니다.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신성 자체였으며, 마리아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한 자연적 인성을 제공한 어머니였습니다. 주님은 인간 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으신 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시고, 마리아에게서는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은 단순히 놀라운 기적이나 마리아의 순결을 보여 주기 위한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기원과 직접 연결되는 성육신의 본질적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사실을 부정하면 주님의 출생을 일반 인간의 출생과 구별하는 중요한 근거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기 전까지 동정녀였다는 사실은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출산하는 순간에도 마리아의 신체적 동정성이 온전히 보존되었다는 두 번째 주장은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는 주님의 탄생이 마리아의 동정성을 손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거룩하게 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출생이 일반적 출산과 달랐다는 특별한 신학적 이해입니다. 그렇다고 천주교가 주님께서 실제 인간의 몸을 취하지 않으셨다거나 출생 자체가 단순한 환상이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주님께서 참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출생이 마리아의 동정성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실제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증언할 뿐, 출산 순간의 구체적인 신체적 과정이나 마리아의 신체 상태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눅2:7은 마리아가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기록하지만, 그 출산이 일반적인 신체적 출산과 어떤 점에서 달랐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의 동정녀 잉태와 신적 기원을 중요하게 설명하지만, 확인되는 주요 직접 본문만으로는 마리아가 출산하는 순간에 어떤 신체적 상태를 유지했는지에 관한 별도의 교리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출산 중 동정이 반드시 거짓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지만, 이를 주님의 성육신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신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할 직접적인 근거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과 교회가 신학적으로 확정한 내용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인 출산 후의 평생 동정은 성경 해석에서 더욱 직접적인 논쟁을 일으킵니다. 마13:55-56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자매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막6:3에도 같은 취지의 기록이 나타나며, 막3:31-35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을 찾아온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1:19에서 바울은 야고보를 ‘주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표현을 일반적인 가족관계의 문맥에서 읽으면 예수님께 실제 형제자매들이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들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다른 자녀들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성경의 친족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엄밀한 가족관계의 용어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가까운 친족을 형제라고 부르는 관습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리서 500항은 야고보와 요셉이 다른 마리아의 아들들이라고 설명하면서, 복음서의 형제자매 언급이 마리아의 다른 출산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역사적으로는 그들이 요셉의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들이었다는 해석도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형제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는 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그 표현만으로 논쟁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이들이 모두 친족이었다는 천주교의 해석 역시 성경이 직접 명시한 관계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결국 복음서의 가족관계 표현을 해석할 때에는 그 문맥과 언어적 관습을 함께 고려해야 하며, 어느 한쪽의 결론을 처음부터 확정된 사실로 놓고 본문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마1:25 역시 중요한 논쟁의 대상입니다. 이 말씀은 요셉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낳기까지’라는 표현을 근거로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부부관계를 맺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특정 시점까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이후에는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마1:25는 예수님의 출생 이전에 요셉과 마리아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지만, 출산 이후의 결혼생활을 확정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닙니다. 눅2:7의 ‘첫아들’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아들이라는 말이 반드시 둘째나 셋째 아들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유대 율법에서 처음 태어난 아들은 후속 자녀의 유무와 관계없이 특별한 지위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들은 마리아가 이후 다른 자녀들을 낳았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지만, 그 가능성을 곧바로 역사적으로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평생 다른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주장도 이 본문들만으로 직접 증명할 수 없습니다. 교회 역사에서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지지하는 전통이 일찍부터 발전했으며, 2세기의 ‘야고보 원복음서’(Protoevangelium of James) 같은 외경 문헌에서도 마리아의 특별한 동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은 정경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지 않습니다. 4세기에는 헬비디우스가 예수님의 형제들에 관한 본문을 근거로 마리아의 출산 후 결혼생활을 주장했고, 히에로니무스는 이에 반대하여 평생 동정을 옹호했습니다. 이 논쟁은 후대 교회에서 동정과 결혼의 영적 가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평생 동정은 천주교만의 독특한 교리가 아니라 오래된 기독교 전통에 속하지만, 오랜 전통 자체가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사실과, 마리아의 출산 중 및 출산 후 동정까지 직접 확정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에 관한 교리’ DP.48과 TCR.92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설명하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들에서 마리아가 이후에도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마리아의 동정성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되었는가보다, 주님께서 인간 아버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셨으며, 마리아에게서는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인성을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영화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의 본질적인 진리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에 있으며, 마리아의 출산 이후 생활에 관한 추가적인 가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평생 동정의 세 측면을 동일한 수준의 신적 진리로 확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직접적 가르침에서 도출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것은 마리아가 실제로 평생 동정녀였을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의 가능성과 신앙적으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교리의 확실성은 서로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볼 문제는 성경에서 ‘동정녀’(童貞女, virgin)가 지니는 영적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3081에서 창24:16에 등장하는 리브가가 동정녀이며, 남자가 그를 알지 못했다는 말씀을 해설합니다. 그는 동정녀가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나타내며,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결합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남자가 알지 못했다’는 표현은 거짓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동정녀는 단순히 육체적 성경험이 없는 상태를 넘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의 순수한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설명은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이해할 때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주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신적 생명의 근원이 인간 남성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동정녀의 상응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해석의 범위를 정확하게 지켜야 합니다. AC.3081은 리브가에 관한 말씀의 속뜻을 해설하는 본문이지 마리아의 평생 동정 여부를 직접 판정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를 마리아 교리에 적용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근거한 신학적 적용이지, 그가 마리아의 출산 후 동정을 직접 인정하거나 부정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이처럼 문자적인 역사적 사실과 말씀의 속뜻을 구별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반드시 지켜야 할 해석의 원칙입니다.

 

이러한 영적 의미를 이해하면 육체적인 동정과 영적인 순결을 반드시 동일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동정생활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자동으로 거짓과 악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결혼하여 배우자와 사랑을 나누고 자녀를 낳았다고 해서 영적 순결을 잃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결혼애’(Conjugial Love, CL, 1768) CL.154에서 결혼을 부정한 상태로 여기는 사람들은 참된 순결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CL.155에서는 평생 독신을 서약했다는 사실 자체가 참된 순결을 보증하지 않으며, 참된 결혼생활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CL.156에서는 결혼생활이 독신생활보다 선호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결혼애가 영적 선과 진리의 결합에 상응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한 사랑이라는 그의 결혼관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결혼은 인간의 영적 삶을 더럽히는 낮은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사랑과 지혜가 결합하는 중요한 삶의 형태입니다. 물론 독신이나 동정의 삶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선한 쓰임 가운데 살아간다면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정생활 자체가 결혼생활보다 본질적으로 더 거룩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 교리는 중요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만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요셉과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었다면 그의 거룩함이 훼손되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참된 결혼애는 거룩한 사랑이며, 정상적인 부부관계 자체는 죄나 영적인 오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도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결혼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부관계를 본질적으로 부정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혼인을 ‘성사’(聖事, sacrament)로 인정하며, 배우자 사이의 사랑과 자녀의 출산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한 질서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 교리를 결혼에 대한 멸시로 규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동정을 일반적인 결혼생활에 대한 부정으로 설명하기보다, 주님의 성육신이라는 유일한 사건에 온전히 봉헌된 특별한 소명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의도에는 인정해야 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소명을 설명하기 위하여 출산 중의 신체적 상태와 출산 이후의 모든 부부관계까지 신앙의 필수적인 진리로 확정해야 하는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거룩함은 외적 신체 상태나 결혼 여부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막3:31-35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영적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이 말씀은 자연적 가족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참된 관계가 혈연이나 외적 조건보다 깊은 영적 차원에 있음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존중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그의 신체적 상태에 관한 추정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믿음을 본받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교리가 오늘 우리의 신앙에 던지는 질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은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성육신의 중요한 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시고,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신 분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분께서는 일반 인간과 달리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인성을 영화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마리아가 어떤 신체적 상태를 유지했으며, 요셉과 어떠한 결혼생활을 했는지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인성 영화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같은 방식으로 요구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은 주님께서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사실이며, 마리아의 출산 순간과 이후 생활에 관한 세부 사항은 그만큼 직접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무조건 입증하거나 반박하는 데 있지 않고, 동정녀에게서 인간으로 오신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올바르게 아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각 사람 안에 이루고자 하시는 영적 출생 역시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인간이 거짓과 악에서 돌아서고 순수한 진리에 대한 애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사람 안에 천국의 생명을 이루십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순결은 단순한 육체적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거짓과 악으로 더럽히지 않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마음의 순결입니다. (SL.RC.033 해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라는 명제에는 구별하여 판단해야 할 세 가지 주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인간 아버지의 개입 없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다는 출산 전 동정은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하며,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에서도 중요한 신적 진리입니다. 둘째,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신체적인 동정성을 보존했다는 출산 중 동정은 천주교의 공식 교리이지만, 성경은 그 구체적인 출산 과정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셋째,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도 요셉과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출산 후 동정 역시 오랜 교회 전통에 근거하지만, 성경만으로 그 역사적 사실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음서의 형제자매 언급은 마리아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는 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친족관계에 관한 다른 해석도 존재하므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가르침 역시 이 문제를 명확히 해결한다고 주장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가 실제로 평생 동정녀였을 가능성을 인정하거나 그의 특별한 소명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증언하는 동정녀 잉태와, 출산 중 및 출산 후 동정에 관한 후대의 교리적 확정을 동일한 수준의 직접적 신적 증언으로 취급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육체적 동정 자체를 결혼생활보다 자동으로 더 높은 거룩함의 조건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동정녀의 속뜻은 거짓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상태와 선과 진리의 결합에 관계되며, 참된 거룩함은 외적 신체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내적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출산 전후 생활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오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의 유일한 신성과 구속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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