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

 

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ternal man)과 외적 사람, 곧 겉 사람(external man), 이렇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단지 몸, 그러니까 육체일 뿐이며, 그러므로 죽은 상태입니다. 분리되었다 했으니까요. 겉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은 속 사람 때문인데, 이 속 사람이 곧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글자만을 놓고 보면, 영혼 없는 몸과 같은 것입니다. Without such a life, 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 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 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 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 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해설

 

이 단락은 ‘말씀의 구조’와 ‘인간의 구조’를 완전히 평행하게 연결하는 핵심 비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비유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는 ‘영혼’이며, 문자적 의미는 ‘’이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죽은 상태입니다

 

앞글(AC.2)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생명은 주님을 향한 내적 의미’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내적 의미 없이 문자를 읽는 것은 영혼이 빠진 육체, 곧 죽은 몸뚱이만 보는 것과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이는 문자, 곧 겉뜻의 역할은 내적 의미, 곧 속뜻을 담는 그릇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구조를 예로 듭니다. 속 사람은 영혼, 사랑, 신앙, 의도, 지각을 말하고, 겉 사람은 육체, 감각 기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속 사람이라는 영혼이 떠나면 겉 사람이라는 몸은 살아 있을 수 없는데, 말씀도 똑같다는 것이죠. 말씀도 내적 의미인 속뜻이 영혼이고, 문자적 의미인 겉뜻이 몸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문자만 보면 말씀은 겉으로는 살아 있지만 실제로는 죽어 있는 상태와 같다는 것입니다.

 

문자 자체도 필요하지만, 지상 언어인 문자의 목적은 ‘영혼을 담는 그릇’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의미를 무가치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 없이는 내적 의미가 드러나지 못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본질은 ‘내적 의미, 곧 속뜻이라는 생명을 담는 그릇, 용기’인데요, 이는 영적 의미를 도외시하는 ‘문자주의(literalism)는 실제로는 죽은 몸을 붙들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기독교 세계가 흔히 문자주의와 역사적, 전통적 해석에 사로잡혀 있고, 구약을 무시하며, 규례와 사건 중심의 단편적 해석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자 함이며, 그러므로 참으로 살아 있는 말씀을 보려면, 그 안에 있는 주님, 즉 말씀의 속뜻을 보아야 한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말씀’은 단순한 문자의 집합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드러나는 신성한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속뜻 없는 말씀은 영혼 없는 몸과 같습니다. 문자, 곧 겉뜻은 몸, 속뜻은 영혼입니다.

 

 

 

AC.4, 서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아르카나(arcana)' (AC.1-5)

AC.4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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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 (AC.1-5)

본문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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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그 안에 그런 것들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거의 돌보아지지 않는 상황이지요. 그러나 말씀의 성격이 본래 이러하다는 사실은 단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인 것이, 곧,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그 안에는 천국과 교회,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라 불릴 수 없고,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요. 말씀의 생명은 오직 생명에 속한 것들에서만 옵니다. 즉, 그 안의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생명이신 주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말씀 중 어떤 표현이든 그 안에 주님을 품고 있지 않은 것, 곧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분을 가리키지 않는 것은 ‘신성하다’(Divine) 할 수 없습니다. The Christian world, however, 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 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to the church, and to religious belief, 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 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 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 that is to say, 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 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 that is, 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 is not Divine.  

 

 

해설

 

 2번 글은 ‘말씀의 영감’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으로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글 중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현실을 냉정하게 지적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말씀의 ‘모든 부분’, 그러니까 아주 작은 단어, 철자 하나까지도 영적 의미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며, 그래서 구약이 무시되고 있다고 말이지요. 오늘의 현실과도 매우 비슷한데요, 오늘날도 보면, 이사야, 예레미야의 묵시는 ‘어렵다’ 하여 멀리하고, 레위기의 제사 규례는 ‘오늘날과 무관하다’며 거의 다루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말씀의 진짜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그 안에는 천국과 교회,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이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 명제입니다. 말씀이 신성한, 곧 신이 하신, 주님이 하신 말씀이라면, 그 속에는 필연적으로 천국의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이 논리는 매우 선명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생명 그 자체이시고, 말씀은 주님의 발현이며, 따라서 말씀 안에는 ‘생명을 주는 것’, 곧 주님을 향한 내적 의미가 없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생명이신 주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데요,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신적 영감(Divine inspiration)을 결정하는 기준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 구절이 주님을 내적으로 가리키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신성하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만이 ‘신성’합니다. 아무리 바울 서신이 은혜롭고 영감이 넘쳐 보일지라도 그 자체가 주님에 대한 내적 계시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면, 스베덴보리는 그런 성경은 ‘말씀(Word)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구약의 역사서, 제사 규례까지 왜 신성한가 하면, 바로 그 안에 주님에 대한 내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도, 이삭의 우물 이야기도, 그리고 기름 부음의 규례 등도 모두 주님의 구원 사역, 인간의 재창조, 교회의 상태를 가리키는 영적 의미의 외적 형태이기 때문에 신성합니다.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헬라어 iota, 히브리어로는 ‘י’(요오드)에 해당하는데요, 예수님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5:18) 하셨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철자 하나, 단어 하나, 문장의 배열, 등장순서 등, 이 모든 것이 하늘의 질서를 반영한 신적 구성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AC 전체가 그렇게 많은 번호와 구조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신 주님을 향한 내적 의미를 가질 때에만 살아 있으며, 그렇기에 말씀의 모든 부분, 즉 단어 하나, 글자 하나까지도 주님을 품고 있다.

 

 

 

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육체와 영' (AC.1-5)

본문AC.3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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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 (AC.1-5)

본문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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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걸 가리킨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곧 겉 글자만으로는,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저 유대교회의 외적 의식들과 규례들만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실상은 그 말씀 전체 곳곳에는 외적인 것들, 곧 그런 겉 글자 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어떤 내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다만 극히 일부만이 주님에 의해 사도들에게 드러나고 설명되었을 뿐인데요, 예를 들면, 희생 제사들은 주님을 상징하며,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천국의 가나안’, ‘하늘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낙원도 그렇고요. From 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no one would ever discern the fact that this part of the Word contains deep secrets of heaven, and that everything with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to his heaven, to the church, to religious belief, and to all things connected therewith; for from the letter or sense of the letter all that anyone can see is that—to speak generally—everything therein has reference merely to 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 Yet the truth is that everywhere in that Word there are internal things which never appear at all in the external things except a very few which the Lord revealed and explained to the apostles; such as that the sacrifices signify the Lord; that the land of Canaan and Jerusalem signify heaven—on which account they are called the heavenly Canaan and Jerusalem—and that paradise has a similar signification.

 

 

해설

 

1번 글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여는 열쇠입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Internal Sense, 속뜻)가 왜 필요한가를 결정적으로 밝히는 첫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mere letter’(글자 자체, 외적 의미, 겉 글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구약을 문자적으로만, 그러니까 기록된 겉 글자 그대로만 읽으면, 유대인의 의식 규례, 제사 제도, 일상적 역사 서술, 성막, 음식법, 절기 등, 이런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즉, ‘말씀은 이중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은 글자만으로는 절대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그렇게 속뜻과 겉뜻으로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걸 가리킨다’는 말은, 이 다섯 가지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 전체는 주님에 관한 책이며, 인간 영혼의 구원 과정에 관한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씀의 속뜻이 이렇게 감추어져 있는 이유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그의 전체 저작을 통해 일관되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적 의미는 언제나 존재했지만,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보호 차원에서 감추어져 있었고, 주님의 재림을 통해 비로소 열린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주님의 재림’은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이 열리는 사건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막과 같다’ 할 때, 여기 겉으로 보이는 성막의 휘장과 기구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이고, 휘장 뒤에 있는 지성소의 속 내용은 영적, 내적 의미이며, 지성소 중심에 계신 임재하신 여호와는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는 말로 이 ‘말씀의 이중 구조’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말씀의 겉모습은 역사와 규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주님과 천국, 교회와 신앙의 질서가 담겨 있고, 그것이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입니다.

 

 

 

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 (AC.1-5)

본문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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