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90.심화

 

6. ‘4: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4:34) And at the end of the days I, Nebuchadnezzar, lifted up my eyes to the heavens, and my knowledge returned to me, and I blessed the Most High and I praised and honored Him who lives to eternity, whose dominion is an eternal dominion, and His kingdom is with generation and generation (Dan.4:34);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주님을 ‘영생하시는 이(Him who lives to eternity)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90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 모든 생명은 그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그 진리를 증언하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교만 때문에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살다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이 지난 뒤 다시 총명을 회복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와 영광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깨닫게 된 후 비로소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특히 주목하는 표현은 ‘영생하시는 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주님께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생명을 오래 유지하시는 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명 자체이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영생하시는 이’라는 이름은 사람이나 천사에게는 결코 사용할 수 없는, 오직 주님께만 속하는 이름입니다.

 

또한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는 말씀도 AC.290의 내용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의 총명이 회복된 것은 단순히 정신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생명과 권세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깨닫는 상태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후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권세와 주님의 권세를 대조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생명과 권세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지만, 주님의 생명과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생명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데 있지 않고, 영생하시는 주님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절은 AC.290에서 계속 이어지는 ‘살아 계신 여호와’,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이라는 표현들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말씀이 주님을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는 모두 하나입니다. 곧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시며, 천사와 사람은 모두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간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단4:34를 인용하는 이유는, 느부갓네살의 회개 자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을 ‘영생하시는 이’라고 고백한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며, 모든 생명과 모든 권세는 그분으로부터 나온다는 AC.290의 핵심 사상을 성경적으로 확증해 주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AC.290, 심화 7, ‘계4:10’

AC.290.심화 7. ‘계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계4:10) the twenty and four elders fell down before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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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심화 5, ‘겔5:11’

AC.290.심화 5. ‘겔5:11’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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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심화

 

5. ‘5:11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 (겔5:11) Therefore, as I live, says the Lord Jehovih, shall it not be, because thou hast defiled My sanctuary with all thy detestable things, and with all thine abominations, that even I shall diminish thee; and My eye shall not spare, and even I will not have pity (Ezek. 5:11).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두고 말씀하시는 표현이 나오며, 이를 통해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심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영어의 as I live’는 개역개정의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에 해당합니다.

 

AC.290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단지 살아 계시는 한 존재가 아니라 생명 자체(Life Itself)시라고 설명합니다. 사람과 천사는 생명을 받아 살아가지만, 주님은 누구에게서도 생명을 받지 않으십니다. 모든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나오므로, 주님께서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의 말씀이 생명 자체의 권위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예루살렘과 성소(sanctuary)의 모독에 대한 심판입니다. 백성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주된 목적은 성소의 모독이나 예루살렘의 심판을 자세히 해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구절 가운데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는 표현에 주목, 말씀이 주님께만 고유한 생명을 증언한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다만 이 구절의 문맥은 AC.290의 생명에 관한 가르침을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서 성소의 모독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거룩한 것을 더럽히는 일이 곧 생명의 근원을 거부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성소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있어야 할 곳인데, 그 자리를 악과 거짓으로 채우면 사람과 교회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과의 연결을 스스로 끊게 됩니다.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라는 말씀도 주님께서 자비를 잃으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결과에 따라 그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끝까지 거부하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보호와 생명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영적으로 약해지고 황폐해집니다. 마치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생명의 유입을 스스로 막은 것, 즉 자초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 인용한 렘5:2, 12:16, 16:14-15, 23:7과도 같은 흐름에 있습니다. 예레미야에서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는 표현이 나왔고, 5:11에서는 주님께서 친히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표현은 생명이 오직 주님께 있으며, 주님의 생명이 모든 신적 말씀과 심판, 그리고 구원의 근원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겔5:11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오직 주님만이 스스로 살아 계시며, 생명 자체시라는 사실을 말씀 자체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과 천국, 그리고 교회가 살아 있는 것은 그들 자체에 생명의 근원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과의 연결 안에 있는 사람은 산 자’가 되지만, 거룩한 것을 더럽히고 주님의 생명을 거부하는 사람은 몸은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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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3:7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23:7) Therefore, behold, the days come, says Jehovah, that they shall no more say,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 (Jer. 23:7);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말씀이 주님을 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90의 중심 주제는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생명이 오직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여호와의 사심으로’라는 표현이 바로 영어 본문의 Jehovah lives’,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에 해당합니다.

 

23:7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렘16:14와 거의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두 본문 모두 과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자신들을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기억하며,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였으나, 장차 주님께서 더 크고 새로운 구원을 이루실 것을 예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지 과거의 출애굽을 회상하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께서 시대마다 자기 백성을 속박에서 건져 내시고, 생명의 상태로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살아 계신 여호와’라는 표현은 단순히 여호와께서 존재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십니다. 사람과 천사는 생명을 받아 살아가지만, 주님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는 고백은 모든 생명과 구원, 그리고 회복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렘23:7만 짧게 인용하였지만, 그 의미는 이어지는 렘23:8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북쪽 땅과 그들이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다시 그들의 땅에 살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사적으로는 흩어진 백성의 귀환을 가리키지만, 내적 의미로는 악과 거짓 가운데 흩어졌던 사람을 다시 모아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구원 역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살아 계신다’는 것은 정지된 속성이 아니라 실제로 구원하고 회복시키시는 신적 활동과 연결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은 사람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깨우시며, 악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시고, 선과 진리 안에서 다시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생명 자체이시라는 사실은 이처럼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역사 속에서 나타납니다.

 

또한 출애굽과 포로에서의 귀환은 모두 거듭남의 과정을 나타냅니다. ‘애굽 땅’은 사람이 자연적 지식과 외적인 것에 매여 있는 상태와 관련되고, 흩어졌던 여러 나라에서 돌아오는 것은 악과 거짓으로 분산되었던 생각과 애정이 주님의 질서 아래 다시 모이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모든 회복을 이루시는 분이 살아 계신 여호와’이시므로, 사람은 자기 능력으로 영적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납니다.

 

이 구절은 렘5:2와도 의미 있는 대조를 이룹니다. 5:2에서는 사람들이 입으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면서도 실제로는 거짓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렘23:7-8에서는 살아 계신 여호와께서 실제로 백성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일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참된 고백은 단지 주님께서 살아 계신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생명 자체이신 주님의 구원을 받아 그분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렘23:7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주님만을 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한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이실 뿐 아니라, 악과 거짓 가운데 흩어진 사람을 다시 모으고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구원자이심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교회 자체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 계신 여호와, 곧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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