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신앙의 지식들을 뜻하며, 그것들은 저장되어 있다가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이때까지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으며,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보존되어 온 것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state)를 첫 번째 상태와 분명히 구별합니다. 첫 상태가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가 어둠 위에서 운행하는 준비 단계였다면, 두 번째 상태는 인간 안에서 ‘구별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단계’입니다. 이 구별이란 선과 악의 윤리적 분별 이전에,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이고 무엇이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구별하는 인식의 시작을 뜻합니다. 이 구별 없이는 거듭남은 결코 진행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로 착각하는 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고 합니다. 리메인스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스스로 축적한 종교 지식이나 도덕적 자산이 아니라, ‘주님이 유아기부터 사람 안에 조용히 저장해 두신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기초적 지식들, 선한 감정의 흔적들, 순수한 애정, 주님을 향한 어린 마음의 인상들이 포함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리메인스가 평소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그것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오직 이 두 번째 상태에 이르러서야 그것들이 작동할 준비를 갖춥니다.

 

이 상태가 오늘날에는 거의 항상 시험, 불행, 슬픔과 함께 온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주님이 고통을 기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지 않고서는 속 사람이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고유한 것,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욕망과 판단은 평소에는 매우 활발하여, 속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을 완전히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섭리 안에서 외적 삶이 흔들리거나 제한되는 상황을 허용하시는데, 이로 인해 겉 사람의 활동은 약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조용해집니다.

 

이 과정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황폐(vastation)의 초기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의 것들이 약화되고 무력해질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힘과 지혜에 의존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때 속 사람 안에 저장되어 있던 리메인스가 깨어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겪는 슬픔이나 시험은 거듭남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이 단락의 핵심 결과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분리입니다. 이는 인간이 둘로 쪼개진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 질서가 처음으로 형성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는 겉 사람의 사고와 욕망이 인간 전체를 지배했다면, 이제는 속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중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속 사람 안에 바로 리메인스가 있으며, 그것들은 주님께서 오랫동안 이 시점을 위해 보존해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신 것이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이 상태는 또한 인간의 신앙이 본격적으로 현실성을 갖기 시작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전까지 신앙이 있었다면 그것은 주로 외적 습관이나 전통, 혹은 지적 동의에 머물렀지만, 이제 신앙은 내면에서 삶과 연결될 가능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직 구별의 시작일 뿐입니다.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인지, 무엇이 자기에게 고유한 것인지에 대한 이 구별은 이후의 모든 상태를 관통하는 기준이 됩니다.

 

결국 AC.8은 거듭남이 감정적 각성이나 도덕적 결심으로 진행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먼저 ‘구별의 눈이 열리는 사건’이며, 이 구별은 종종 고통과 침묵, 상실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언제나 주님의 섭리가 있으며,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인간을 새롭게 하시려는 오랜 준비가 놓여 있습니다. 두 번째 상태는 그래서 고통의 단계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오랜 인내가 처음으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거룩한 전환의 단계입니다.

 

 

심화

 

1.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AC.8 본문에 나오는 위 문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 부탁합니다. 왜 시험, 불행, 슬픔들이 있어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나요? 안 그런 사람들도 제법 있던데...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AC.8의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 매우 현실적이고도 예민한 지점입니다. 먼저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사람을 괴롭혀야만 거듭남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시험, 불행, 슬픔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더 거듭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 곧 몸과 세상에 붙어 있는 자기 확신, 자기 의지, 자기 만족, 자기 판단의 소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와 주님의 조용한 인도를 거의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시험, 불행, 슬픔이 그 시끄러운 바깥층을 잠잠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고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겉 사람의 지배력이 약해지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왜 하필 시험, 불행, 슬픔이 이런 역할을 하느냐 하면, 평소 인간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너무도 당연하고, 강하게 붙들고 살기 때문입니다. 건강, 체면, 성공, 인정, 계획, 통제감, 내 판단의 옳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풀려야 한다는 기대, 이런 것들이 겉 사람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런데 사람이 형통하고 자기 뜻대로 되는 동안에는 이것들이 거의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가 주도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산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더 깊은 선과 진리가 있어도, 그것이 거의 드러나지 못합니다. 반면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이 찾아오면, 그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던 바깥 질서가 흔들립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옳다는 생각, 세상적 안전이 나를 붙들어 준다는 생각이 약해집니다. 바로 그때 겉 사람의 주장들이 ‘잠잠해지고’, 그래서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 곧 주님께서 미리 보존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이 좀 더 앞으로 나올 수 있게 됩니다. AC.8이 말하는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말은 바로 이 의미입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실제로 제거되거나 파괴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한동안은 그 지배권이 멈추고, 절대적인 주도권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 불행, 슬픔’이 언제나 자동으로 사람을 더 좋게 만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사람은 고난을 겪고도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더 원망하고, 더 자기중심적이 되고, 더 비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고난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사람의 겉 사람을 느슨하게 하셔서, 속 사람 안의 더 깊은 것을 건드리실 수 있다는 것이 정확한 뜻입니다. 다시 말해, 변화의 원인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입니다. 고난은 수단일 수 있지만,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큰 시련 없이도 겸손해지고, 어떤 사람은 큰 시련을 겪고도 전혀 부드러워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마지막에 말씀하신 ‘안 그런 사람들도 제법 있던데...’라는 관찰은 아주 정확합니다. 실제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평탄한 삶 속에서도 자기 고집이 약해지고, 진리를 듣고 순순히 받아들이며, 주님의 인도를 따르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 안에 이미 강한 리메인스가 있고, 양심과 겸손이 비교적 일찍 형성되어 있어서, 큰 충격 없이도 겉 사람의 소음이 과도하게 커지지 않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평탄해 보여도, 그 사람 안에서는 이미 깊은 내적 씨름과 조용한 슬픔, 숨은 깨짐이 오래 진행되고 있는 경우입니다. 겉으로는 ‘시험 없이 잘 자란 사람’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매우 섬세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겉 사람을 다루고 계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의 문장은 ‘반드시 모두가 큰 불행을 겪는다’는 예외 없는 공식이 아니라, ‘오늘날 대체로는 이런 방식이 많다’는 관찰로 이해해야 맞습니다. 실제로 본문도 ‘거의 없다(seldom exists without...)고 말하지, ‘절대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문제인가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들을 죄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도 필요하고 세상 속 삶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도권’을 잡을 때입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은 본래 겉 사람의 도구여야 하는데, 타락한 인간 안에서는 그것들이 왕이 되려 합니다. 편안함, 인정, 소유, 비교우위, 안정, 자기 이미지, 이런 것들이 인간을 끌고 가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의 빛보다 바깥 조건의 변화를 더 강하게 따라갑니다. 시험과 슬픔은 바로 이 잘못된 왕좌를 흔듭니다. 그래서 사람이 처음으로 ‘나는 내 힘으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 ‘내가 붙들던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구나’, ‘참된 선과 진리는 다른 곳에서 오는구나’를 배울 여지가 생깁니다.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 비유의 둘째가 스스로 돌이키는 장면이 바로 이런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AC.8의 논리는 ‘고난이 좋아서’가 아니라, ‘겉 사람의 폭주가 멈출 때 속 사람의 질서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입니다.

 

초심자에게 이 부분을 설명하실 때는 이렇게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일부러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바깥 것들에 붙잡혀 있을 때 그것들이 잠잠해질 틈을 통해 더 깊은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 시험을 통해, 어떤 사람은 조용한 양심의 깨달음을 통해,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이나 자신의 한계를 통해 그 길을 배웁니다. 핵심은 고난의 크기가 아니라, 겉 사람의 소리가 줄어들고 속 사람의 문이 열리는가에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시면 AC.8의 엄중한 표현도 훨씬 바르게 전달될 것입니다.

 

 

 

AC.9, 창1 개요, '세 번째 상태'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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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창1 개요, '첫 번째 상태'

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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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state)를 정의하면서, 인간의 영적 삶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를 매우 솔직하고도 철저하게 드러냅니다. 이 첫 상태는 거듭남 이후의 어떤 성취나 빛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의 모든 상태를 포괄하는 단계입니다. 여기에는 유아기의 상태와, 성인이 되어 거듭남 직전에 이르는 상태가 함께 포함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아기를 무죄의 상태로 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이미 거듭난 상태로 보지는 않습니다. 유아기는 악을 의식적으로 행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선과 진리를 의식적으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아기와 거듭남 직전의 상태는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모두 아직 영적 생명이 실제로 형성되기 이전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첫 상태로 묶입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과 ‘공허(emptiness)라 하는 이유는, 사람 안에 아직 참된 선과 참된 진리가 심기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혼돈’은 선의 부재를, ‘공허’는 진리의 부재를 가리킵니다. 이는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평가라기보다, 영적 구조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가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자연적 근원에서 나온 것들이며, 주님의 선과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상태를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도 합니다. 이 어둠은 단순한 무지나 지식 부족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것들, 곧 주님과 천적, 영적 삶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핵심은 인간의 상태를 어둡게 묘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어둠 속에서 ‘첫 번째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선언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움직임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자비이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표현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운행하다’라는 말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보호하고 품으며 생명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뜻합니다. 이는 마치 어미 새가 알 위에 머물며 그 안에서 생명이 형성되도록 따뜻함을 전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대상은 ‘수면’, 곧 ‘물들의 얼굴’입니다. 이 ‘물들’은 이후에 밝혀지듯이, 주님이 사람 안에 미리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remains), 곧 선과 진리의 지식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의식적으로는 완전히 공허하고 어두운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면 깊은 곳에는 주님이 유아기부터 보존해 오신 선한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첫 상태에서 사람은 이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자비는 이미 그 위에서 조용히 움직이며, 거듭남의 가능성을 준비합니다. 이 점에서 첫 상태는 절망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창조 사역이 막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이 단락은 또한 거듭남이 인간의 결단이나 종교적 열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은 첫 상태에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은 시작되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가 먼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 상태는 인간 쪽에서 보면 수동적이고 무력한 상태이지만, 주님 쪽에서 보면 가장 적극적인 창조의 출발점입니다.

 

결국 AC.7은 거듭남의 출발을 인간의 빛이나 선에서 찾지 않고, 철저히 주님의 자비에서 찾도록 시선을 돌려줍니다. 인간의 영적 여정은 언제나 ‘혼돈’과 ‘공허’, ‘흑암’에서 시작되지만, 그 어둠 위로 주님의 영이 먼저 운행하십니다. 이 질서는 이후의 모든 상태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래서 첫 상태는 단지 과거의 한 단계가 아니라, 사람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갈 때마다 다시 경험하게 되는 근원적 상태이며, 주님의 자비가 언제나 먼저이고, 인간의 응답은 그다음이라는 영적 질서의 원형을 보여 줍니다.

 

 

심화

 

1.앞서는(precede) 상태

 

AC.7에서 말하는 ‘앞서는 상태(preceding states)는 단순히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만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조금 더 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인간의 거듭남을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어떤 상태가 나타날 때, 그것은 항상 그 이전에 있었던 상태들 위에서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preceding states’는 ‘현재 상태보다 앞서 있었던 모든 상태들’, 곧 그 상태를 가능하게 만든 이전 단계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거듭남 이전의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 과정 속에서 서로 이어지는 단계들 전체를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상태(states)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삶은 일정한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여러 상태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상태는 이전 상태에서 자라나고, 다음 상태의 기초가 됩니다. 그러니까 한 상태가 나타날 때, 그것은 그 이전 상태들과 완전히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지는 것이지요. AC.7에서 말하는 ‘preceding states’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앞서 있었던 상태들’을 말합니다. 즉 지금 설명되는 상태보다 먼저 있었고, 그것을 준비하거나 가능하게 만든 상태들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 설명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창세기의 여섯 날은 각각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가 다음을 준비하는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예를 들어 첫째 날의 ‘’은 진리의 첫 인식을 의미하고, 그다음 상태들이 그 위에서 발전합니다. 따라서 둘째 날, 셋째 날 등 뒤의 상태들은 모두 앞선 상태들에 의존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preceding states’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지금 설명되는 상태는 이전 상태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 위에서 더 발전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전 상태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상태 안에 어떤 방식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인간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며 축적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앞선 상태들은 단순히 지나가 버린 과거가 아니라, 이후 상태 안에 기초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preceding states’는 단지 시간적으로 앞선 단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태의 토대가 되는 상태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따라서 AC.7의 ‘앞서는 상태’라는 표현은 ‘거듭남 이전 상태’라는 의미로만 좁히면 조금 부족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설명되는 상태보다 먼저 있었고, 그것을 준비하고 가능하게 만든 모든 이전 상태들’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창조 서술을 통해 인간의 거듭남이 이런 연속적인 상태들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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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창1 개요, '전체 개요' (AC.6-15)

창1 개요 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날’(days), 곧 여섯 ‘시기’(periods)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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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days), 곧 여섯 시기(periods)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해설

 

이 문장은 ‘Arcana Coelestia’ 전체의 해석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선언으로서,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한 문장으로 규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시간의 흐름이나 물리적 우주 창조의 단계로 보지 않고,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 상태로 정의합니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그는 ‘(days)이라는 표현에 곧바로 ‘시기(periods)라는 설명을 덧붙이는데, 이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시간표가 아니라 내적 상태의 변화에 대한 기록임을 명확히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창세기 1장을 역사서나 자연과학적 기원 서술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재창조에 관한 계시로 읽도록 방향을 전환시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강조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연속적(successive)이라는 표현입니다. 거듭남은 단번에 완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이 질서와 순서에 따라 사람 안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각 ‘’, 각 ‘시기’는 서로 분리된 독립적 단계가 아니라, 앞선 상태에 기초하여 다음 상태가 열리는 필연적 연속을 이룹니다. 이 질서는 영적 생명이 형성되는 데 본질적인 구조로, 어떤 단계를 건너뛰거나 임의로 재배열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의 순서는 곧 거듭남의 질서이며, 이는 주님의 신적 질서 자체를 반영합니다.

 

이 문장은 또한 ‘창조’와 ‘거듭남’을 동일한 틀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창조는 과거에 한 번 일어난 우주적 사건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실제로 ‘새로 창조’되며, 그래서 거듭남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1장은 인류 최초의 사건을 기록한 문서가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영적 현실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각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마다, 그 사람 안에서 창세기 1장의 여섯 ‘’, 여섯 ‘시기’가 다시 전개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여섯 상태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을 인간의 자기 수련 단계나 심리적 성장 도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주님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상태들이며, 사람은 이 과정에서 협력할 수 있을 뿐, 그 질서와 생명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여섯 시기는 인간 중심적 영성의 단계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와 진리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를 보여 주는 신적 사역의 단계들입니다.

 

문장 속 ‘전반적으로(in general)라는 표현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여섯 ‘’의 질서가 보편적이라는 점을 말하면서도, 각 개인의 삶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어떤 이는 특정 단계에 오래 머물고, 어떤 이는 중간 단계까지만 이르며, 또 어떤 이는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의 기본 구조와 순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은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포괄하는 거듭남의 틀을 제시합니다.

 

이 한 문장은 이후에 이어질 모든 세부 해설의 문지방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곧 이어서 빛의 창조, 궁창의 분리, 식물의 발아, 광명체의 배치, 생물의 생성, 사람의 창조를 차례로 설명하며, 이 모든 것이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6은 단순한 개요 문장이 아니라, 창세기 1장을 ‘거듭남의 지도’로 읽게 하는 해석의 출발점이며, 주님이 인간을 어떻게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자기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끄시는지를 보여 주는 대서사의 첫 문장입니다.

 

 

 

AC.7, 창1 개요, '첫 번째 상태'

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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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이 모든 말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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