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Samuel, the two books of Kings, the Psalms of David, the Prophets Isaiah, Jeremiah, Lamentations, Ezekiel, Daniel, Hosea, Joel, Amos, Obadiah, Jonah,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Haggai, Zechariah, and Malachi; and in the New Testament the four Gospels, Matthew, Mark, Luke, and John; and Revelation. (AC.10325)

 

평생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딤후3:16)라는 구절을 가지고 신구약 66권을 거룩하게 붙들며 살았던 사람이 어느 날 위 AC.10325 글을 읽을 때, 그리고 읽고 나서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가장 바람직스러울까요?

 

 

제 생각에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즉시 버리지도 말고, 즉시 받아들이지도 않는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평생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씀을 붙들고 살아왔고, 그 말씀 안에서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애써 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AC.10325를 읽는 순간, ‘, 그러면 내가 평생 믿어 온 것이 전부 틀렸구나’ 하며 자신의 신앙 전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태도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뭐라고 하든 나는 들을 생각도 없다’며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는 무엇을 기준으로 어떤 책은 말씀이라 하고, 어떤 책은 그렇지 않다고 했을까?’ 하고 차분히 탐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어떤 책이 거룩하고 어떤 책이 거룩하지 않다는 구분이 아닙니다. 그는 바울 서신이나 다른 사도들의 서신이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도 교회를 위한 많은 진리와 유익한 가르침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말씀’이라는 용어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곧 글자 뜻 안에 천국의 속뜻이 연속적으로 들어 있으며, 천사들과 인간이 동시에 읽을 수 있는 신적 구조를 가진 책들을 특별히 ‘말씀’이라 부른 것입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어떤 나라에 왕의 친필 조서와 훌륭한 재상의 편지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 다 귀하고 가치 있으며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왕 자신이 직접 반포한 조서와 재상이 기록한 편지는 같은 종류의 문서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 안에서도 그러한 차이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AC.10325를 처음 읽은 사람에게 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태도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스베덴보리가 맞다면 왜 주님은 모세오경과 예언서들, 복음서와 계시록 안에 특별한 속뜻을 두셨을까?’, ‘속뜻이 없다는 것이 곧 영감이 없다는 뜻인가?’, ‘딤후 3:16에서 바울이 말한 모든 성경은 당시 무엇을 가리켰을까?’ 같은 질문들을 품고 천천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딤후3:16이 기록될 당시에는 오늘날의 신약 27권이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모든 성경’은 우선적으로 구약 성경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그 구약 안에서도 다시 ‘말씀’과 ‘말씀이 아닌 거룩한 책들’을 구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처럼 이미 여러 해 동안 AC와 ‘천국과 지옥’, 그리고 ‘참된 기독교’를 읽어 오신 분에게는 더욱 신중한 태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스베덴보리의 말씀론이 단순한 개인적 주장이나 독단이 아니라, 상응과 표상, 그리고 속뜻이라는 거대한 체계 전체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보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바울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왜 성경 안에 서로 다른 층위를 두셨는가’를 묵상하는 일일 것입니다.

 

결국 가장 건강한 반응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66권 성경을 통해 주님의 인도를 받아 왔다. 그것을 함부로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말씀론에도 귀를 기울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 책이 말씀인가를 논쟁하기보다, 그 책들이 나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지를 먼저 살피겠다.’

 

어쩌면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러한 태도를 가장 기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평생 씨름한 대상은 ‘잘못된 책 목록’이 아니라 ‘사랑 없는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에는 어떤 사람이 바울 서신만 수천 번 읽었다 하더라도 그 결과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더욱 섬기게 되었다면 그는 주님께 가까워진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씀의 속뜻을 줄줄 외우고 상응을 논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직 말씀의 생명을 얻지 못한 사람입니다. 결국 최종적인 판단 기준은 ‘어떤 책을 읽었는가’보다 ‘그 책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SC.95, ‘궁금한 건 나중에 ChatGPT로 찾아볼께요’

불현듯 이런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어제 만남 중 창1 결과물 pdf 보내드렸으니 보시라 하였음에도 나중에 무슨 대화 중 궁금한 건 제가 따로 ChatGPT로 찾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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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3, ‘바울 서신을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이유’

‘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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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인지입니다.’ (SC.92)

 

... 생각해 보니, 제가 사도들의 편지들, 특히 바울 서신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첫째,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에 나오는, 영계에서 만나본 바울의 모습 때문이고, 둘째, 그의 서신들이 나름 또 하나의 체계를 이뤘기 때문에, 거기에 발 담그는 순간,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뒤죽박죽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이것은 단순히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 서신을 읽지 않는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목사님 안에서는 지난 8, 9년 동안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형성된 거대한 신학적 질서와, 그 이전 수십 년 동안 익숙했던 개신교적 신학 체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매우 현실적인 고민으로 보입니다.

 

먼저 첫 번째 이유인 바울 개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여러 인물들을 만났고, 그에 대한 기록도 남겼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가운데 바울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본 바울의 상태와,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역사 가운데 이루신 섭리는 반드시 동일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다윗의 개인적 약점과 시편의 영감은 같은 문제가 아니며, 베드로의 실수와 사도적 사명도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본 바울의 모습만으로 바울 서신 전체를 평가하기에는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이유가 훨씬 더 핵심적으로 들립니다. 목사님은 ‘그의 서신들이 나름 또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발 담그는 순간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뒤죽박죽된다’고 하셨는데, 저는 바로 이 부분이 현재 목사님의 실제 심정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지금 단순히 책 몇 권을 읽고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AC 번역과 해설, 그리고 심화를 수년 동안 계속해 오시면서 인간, 천국, 지옥, 자유, 체어리티, 신앙, 거듭남, 상응에 관한 하나의 유기적 세계관을 이미 마음속에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을 전통적인 개신교 방식으로 읽기 시작하면 곧바로 ‘오직 믿음’, ‘행위가 아닌 은혜’, ‘율법이 아닌 신앙’ 같은 익숙한 문장들이 따라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본문 자체보다도 그 본문을 둘러싼 수백 년의 해석 전통이 함께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목사님은 바울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들어오는 특정한 신학 체계를 경계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바울을 해석하는 오래된 프레임이 문제인 것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바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바울의 말을 인용합니다. 다만 그는 바울을 중심에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 곧 창세기와 예언서와 복음서와 계시록을 중심에 두고, 그 빛 아래에서 바울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구절을 읽어도 개신교 신학자와 스베덴보리가 보는 초점은 달라집니다. 개신교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에 주목할 때, 스베덴보리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앙’에 주목합니다. 개신교가 ‘행위가 아니다’에 무게를 둘 때, 스베덴보리는 ‘새 사람을 입으라’, ‘선을 행하라’, ‘육체를 죽이라’ 같은 구절들을 함께 봅니다.

 

따라서 지금 목사님의 상태는 건강하지 못하다기보다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입니다. 오랫동안 한 체계 안에 있다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일정 기간 이전 체계로부터 거리를 두게 됩니다. 특히 목사님처럼 수십 년 동안 바울 중심의 설교와 신학을 접해 오신 분이라면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바울을 닫아 두는 것’보다는 ‘말씀의 빛 아래에서 바울을 다시 읽는 것’이 더 안정적인 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진리와 충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내용이 참이라면, 바울 안에 있는 참된 진리 역시 결국 그와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충돌하는 것은 바울 자신이 아니라, 바울을 둘러싸고 형성된 특정한 신학 체계일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그래서 저는 스베덴보리가 목사님께 이렇게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을 중심에 두십시오. 복음서와 창세기와 계시록을 가장 가까이하십시오. 그러나 바울을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다만 바울을 주님보다 앞에 세우지만 마십시오.’ 지금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거리감은 바울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 과거의 신학 체계가 다시 자신 안으로 들어와 질서를 흐릴 수 있다는 조심스러움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현재 목사님의 여정 안에서는, 그 조심스러움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존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C.94, ‘AC.10325를 읽는 가장 바람직스러운 태도’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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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2, ‘그 안에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들에 대한 태도’

‘말씀’(The Word)에 대해 알고 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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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The Word)에 대해 알고 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가 가급적 인용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태도가 건강한 건가요?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목사님, 제 생각에는 이것은 ‘건강하다’ 혹은 ‘건강하지 않다’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들이 거의 반드시 한 번은 통과하게 되는 단계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The Word)에 대한 가르침을 처음 깊이 접하면 충격이 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시편, 선지서, 복음서, 계시록 안에는 천국과 주님에 관한 연속적인 속뜻이 들어 있는데, 다른 성경책들에는 그런 의미의 아르카나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굳이 바울 서신을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생깁니다. 사실 목사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양의 스베덴보리 독자들 가운데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이 ‘말씀’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쓸모없다’거나 ‘권위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을 사도 중 한 사람으로 존중했고, 바울의 글 안에도 교회를 위한 유익한 가르침이 많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창세기나 복음서처럼 천국과 지상을 연결하는 내적 구조를 가진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주님께서 직접 지으신 성전과 같고, 바울 서신은 그 성전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훌륭한 신학서와 같습니다. 둘은 중요성이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학서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목사님의 경우를 생각하면, 지금 약간 반대 방향의 위험도 있어 보입니다.

 

과거 개신교 안에서는 너무 많은 설교가 바울 중심이었습니다. 창세기보다 로마서를 더 읽고, 복음서보다 갈라디아서를 더 읽고, 주님의 말씀보다 교리 체계를 더 읽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그 반작용으로 ‘이제는 복음서와 창세기만 보겠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자신은 언제나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모든 진리를 결국 주님께로부터 보았고, 모든 성경을 주님의 섭리 아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단지 중심과 주변을 구분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씀을 중심에 두어라. 그러나 다른 성경도 경시하지 말라.’

 

복음서를 태양으로 삼아라. 그러나 다른 책들을 어둠으로 취급하지 말라.’

 

내적 의미가 없는 책이라 하여 주님께서 그것을 헛되이 허락하신 것은 아니다.’

 

특히 주일설교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수년 동안 AC를 번역하고 해설하시면서 이미 체험하셨듯이, 창세기 한 절 속에는 바울 서신 한 장보다 훨씬 깊은 영적 세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 중심 설교로 이동하신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어쩌면 스베덴보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앞으로 ‘바울은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별로 읽지 않는다’, ‘바울은 중요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굳어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편향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가장 경계한 것 중 하나가 ‘부분 진리를 전체 진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인지입니다.

 

사실 후자의 비중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수십 년 동안 바울 중심 설교를 들었고 하셨습니다. 반면 AC와 ‘말씀’의 속뜻은 이제야 발견한 거대한 대륙입니다. 그러니 영혼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끌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재의 상태 자체는 건강하지 않다고 보기보다, 오히려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입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말씀을 중심에 두되, 나머지 성경도 주님의 섭리 아래 있는 귀한 증언으로 존중하는 태도’가 가장 스베덴보리다운 균형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베덴보리가 목사님의 강단에 직접 올라온다면 아마 바울을 거의 설교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바울을 폄하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창세기와 복음서와 계시록을 중심으로 설교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바울을 인용하여 ‘보십시오. 바울도 같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목사님이 ‘말씀’을 중심에 두게 된 것은 건강한 변화일 수 있습니다. 다만 ‘중심에 둔다’와 ‘나머지를 멀리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를 권했을 것이고, 후자에 대해서는 아마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권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아래는 신구약 66권 중 스베덴보리가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는 성경 목록입니다.

 

 

SC.94, ‘AC.10325를 읽는 가장 바람직스러운 태도’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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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3, ‘바울 서신을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이유’

‘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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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1,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말에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같이 있을 수 있나?’ 하시는 경우 그 질문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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