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6)

 

AC.440

 

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call upon the name of Jehovah)이 주님을 예배하는 모든 예식에서 관례적이고 일반적인 말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또한 이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여호와’(Jehovah)가 ‘하나님’(God)이라고 불렸던 앞 구절과 달리 여기서는 ‘여호와’로 언급되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또한 주님은 체어리티로만 예배받으실 수 있다는 사실로도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예배는 체어리티 아닌 신앙에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예배는 단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call on the name of Jehovah)이 주님을 예배하는 모든 예배에서 관례적인 말투라는 것은 말씀에서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That by the words just quoted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and general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nd that this worship was from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ehovah” is here mentioned, whereas in the preceding verse he was called “God,”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the Lord cannot be worshiped except from charity, since true worship cannot proceed from faith that is not of charity, because it is merely of the lips, and not of the heart. That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a customary form of speech for all worship of the Lord, appears from the Word; thus it is said of Abraham, that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12:8);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13:4)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and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Gen. 12:8; 13:4)

 

그리고 또, 그 and again, that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21:33) he “planted a grove in Beersheba, and called there on the name of Jehovah, the God of eternity” (Gen. 21:33).

 

이 표현이 모든 예배를 포함한다는 것은 이사야서에서 분명합니다. That this expression includes all worship, is plain from Isaiah:

 

22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23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사43:22, 23)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hath said, thou hast not called upon me, O Jacob, but thou hast been weary of me, O Israel. Thou hast not brought to me the small cattle of thy burnt offerings, neither hast thou honored me with thy sacrifices. I have not caused thee to serve with an offering, nor wearied thee with incense, (Isa. 43:22–23)

 

그 본문에는 모든 표상적 예배에 대한 요약이 나와 있습니다. in which text a summary is given of all representative worship.

 

해설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이 특정 기도문이나 한순간의 행위를 뜻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이는 성경 전반에서 주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 전체를 가리키는 관용적, 총칭적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말로 부르는 행위만이 아니라 삶, 제사, 신뢰, 순종이 함께 어우러진 전인적 예배를 뜻하는 것이지요. 이 표현은 예배의 범위가 아니라 본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12:8; 13:4; 21:33)는 구절들은, 단순한 호칭이나 발성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신뢰가 주님께로 향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처럼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예배의 형식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 상태를 요약합니다.

 

AC.440은 왜 여기서 ‘하나님(God)이 아니라 ‘여호와(Jehovah)가 사용되는지를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례에서 ‘하나님’은 진리와 신앙의 측면, ‘여호와’는 사랑과 자비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앞 절에서는 신앙의 질서가 다뤄졌기에 ‘하나님’이 쓰였고, 이제 체어리티가 중심이 된 예배가 시작되었기에 ‘여호와’가 쓰입니다. 이 명칭의 전환은 예배의 질적 전환, 곧 입술의 신앙에서 마음의 사랑으로라는 전환을 표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언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다. 그것은 말과 형식은 있으나 마음의 결합이 없는 예배입니다. 참된 예배는 오직 체어리티에서만 흘러나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의 섬김 아래 있을 때에만, 예배는 생명을 가집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사43:22-23을 인용합니다. 그 본문에서 주님은 번제, 제사, 향 등 모든 대표적 의식을 열거하시며 ‘너희가 나를 부르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 문제는 의식의 부재가 아니라, 체어리티의 부재였습니다. 예배의 총량이 아니라 근원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선언은, 이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오는 예배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의무나 전통이 아니라, 사랑의 질이 예배를 규정합니다. 이때 예배는 삶과 분리되지 않고, 삶 자체가 예배의 자리로 확장됩니다.

 

AC.440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창4:26의 말은 시간상의 시작이 아니라 본질상의 시작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의 길로 정렬되었고, 그 결과 예배는 입술에서 마음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C.441, 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처음이 아니라 재개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때에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어떤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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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9, 창4:26, 에노스는 ‘참된 영적 인간’(human spiritual man)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 ‘셋’(Seth)이 체어리티가 오는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 구절에서 드러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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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6)

 

AC.439

 

‘셋’(Seth)이 체어리티가 오는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 구절에서 드러났습니다. 그의 ‘이름이 에노스인 아들’(son, whose name was Enosh)이라는 표현이 체어리티를 신앙의 중심으로 여기는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내용과 그 이름이 ‘에노스’(Enosh)라고 불린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데요, 이 이름은 ‘사람’(man), 곧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아닌 인간적 영적 인간(human spiritual man)을 의미합니다. 이런 인간을 여기서 ‘에노스’라고 하는 것이지요. 바로 뒤에 이어지는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라는 말씀에서도 동일한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was shown in the preceding verse. That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that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befor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t is called “Enosh,” which name also means a “man,” not a celestial man, but that human spiritual man which is here called “Enosh.”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words that immediately follow: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해설

 

AC.439는 앞선 AC.438의 내용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의미를 더 정밀하게 고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나아가게 하는 신앙,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삼은 교회입니다. 이는 단순한 세대 구분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어디에 놓이는가에 대한 결정적 구분입니다. 이 반복은 중복이 아니라, 독자가 놓치기 쉬운 핵심을 다시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서는 이름입니다. ‘에노스(Enosh)는 히브리어로 ‘사람’을 뜻하지만, 그 의미는 ‘아담’이나 ‘이쉬’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명히 구분하여 말합니다. 에노스는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아니라, 영적 인간(spiritual man)을 뜻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처럼 사랑을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상태가 아니라, 신앙을 통해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간 상태를 가리킵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 진리를 통해 선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점은, 에노스로 표상된 교회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principal)으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 즉, 진리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기준이 사랑과 이웃에 대한 선입니다. 신앙은 여전히 필수적이지만, 더 이상 중심이 아닙니다. 이는 가인의 신앙, 그러니까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스스로 중심이 된 신앙하고는 정반대의 구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가 ‘사람’을 뜻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 ‘사람’이 완전한 천적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 영적 인간(human spiritual man)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인간의 상태가 타락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상태에 맞는 교회 질서가 확립되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에노스의 교회는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지속 가능한 상태입니다.

 

AC.439는 에노스의 의미가 단지 이름 분석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가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는 이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오는 예배임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사랑과 자비의 신적 본질을 강조하는 이름이며,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사랑의 질에 따라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도 예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노스의 시대에 이르러, 예배는 더 이상 형식이나 두려움, 의무가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됩니다.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면, 참된 예배는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시점을 예배의 ‘시작’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시간상의 시작이 아니라, 본질상의 시작입니다.

 

이 구조는 교회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셋), 그 사랑이 삶의 기준이 될 때(에노스), 사람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즉, 말과 의식 이전에 삶이 예배가 됩니다.

 

AC.439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참된 ‘사람’은 체어리티를 신앙의 중심에 두는 영적인 사람이며, 그 삶은 자연스럽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로 드러난다.

 

셋은 이 길을 열었고, 에노스는 그 길 위에 선 인간의 이름입니다. 이로써 창세기 4장은 신앙의 회복을 넘어, 사랑이 중심이 된 교회의 탄생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AC.440, 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 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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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8,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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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26)

 

AC.438

 

‘셋’(Seth)은 위에서 말했듯이 체어리티가 나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그의 ‘아들’(son)의 이름은 ‘에노스’(Enosh)인데, 체어리티를 믿음의 원리로 여긴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그 교회의 예배를 상징합니다.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as was said above;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by 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해설

 

AC.438은 셋이 표상하는 것이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임을 다시 확인한 뒤, 그의 아들 에노스를 통해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끄는 수단으로서의 신앙이라면,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해 실제로 형성된 체어리티를 중심에 둔 교회를 표상합니다. 즉, 셋은 ‘’이고, 에노스는 ‘도착’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바르다 해도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교회의 질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에노스가 셋의 ‘아들’로 소개되는 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단절되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합법적으로 태어난 결과임을 뜻합니다. 이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대체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제 자리를 지킬 때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구조는 가인의 오류, 즉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상태와 정확히 반대입니다.

 

AC.438의 핵심 문구는 에노스로 표상된 교회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여겼다는 진술입니다. 여기서 ‘주된 것(principal)이란 단순히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 삶의 방향, 예배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에서 신앙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체어리티를 섬기는 위치에 있습니다. 진리는 사랑, 즉 체어리티를 설명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체어리티 없는 진리는 더 이상 신앙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에노스 시대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표현은 단순히 기도의 시작이나 호칭의 변화를 뜻하지 않습니다. 내적 의미, 즉 속뜻으로 ‘이름’은 질과 본질을 뜻하고, ‘부른다’는 건 그 질에 따라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오는 예배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즉, 의무나 전통이 아니라 체어리티라는 사랑에서 우러난 예배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례에서 ‘여호와’는 사랑과 자비의 근원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한 교회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배의 초점이 진리의 정확성보다 사랑의 실천과 자비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배의 질적 전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변화는 예배의 외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생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면, 말씀은 논쟁의 재료가 아니라 삶의 등불이 되고, 교리는 판단의 무기가 아니라 섬김의 지침이 됩니다. 에노스로 표상된 교회는 바로 이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때를 예배의 ‘시작’으로 기록합니다. 이전에도 예배는 있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참된 의미의 예배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는 개인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배워야 하고(셋), 그 신앙을 통해 삶이 바뀌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삶의 기준이 될 때(에노스),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호흡이 됩니다. 그때 사람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 즉, 사랑의 질에 따라 살고 예배합니다.

 

AC.438은 창세기 4장의 마지막을 이렇게 봉인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낳기 위해 주어졌고, 체어리티가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예배는 살아난다.

 

셋은 이 길을 열었고, 에노스는 그 길의 목적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주된 것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삶의 고백입니다.

 

 

 

AC.439, 창4:26, 에노스는 ‘참된 영적 인간’(human spiritual man)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 ‘셋’(Seth)이 체어리티가 오는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 구절에서 드러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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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7, 창4:25, ‘셋’(Seth)은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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