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교의 성경적 출발점은 사사기 3장 1절의 매우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시려고’ 몇몇 민족을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에서 곧바로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명제를 끌어내고, 그것을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안보 현실, 북한과 공산주의, 주한미군,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대결에 연결합니다. 이어 사사기 전체를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다시 번성’이라는 순환구조로 설명하고, 이것을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에 적용합니다. 설교의 성경적 골격 자체는 분명히 사사기의 중요한 특징 하나를 포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남, 압제당함, 부르짖음, 사사가 일어남, 구원받음, 다시 타락함이라는 반복 구조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사사기 3장의 ‘전쟁을 알게 하심’은 설교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가리킵니다. 말씀에 기록된 전쟁은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전쟁이지만, 말씀의 속뜻에서 전쟁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 곧 시험을 표상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려면 반드시 이 싸움을 통과해야 합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고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악한 욕망이 일어날 때 그것을 거절하고, 거짓된 생각이 밀려올 때 진리를 붙들며,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전쟁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본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졌지만, 모든 적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민족들은 그대로 남겨졌습니다. 자연적 의미만 보면 ‘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셨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놀랍도록 정확한 인간의 영적 현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처음 주님께 돌아왔다고 해서 자기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악을 보게 하시고, 싸우게 하시며, 이기게 하십니다.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악은 당분간 잠잠하게 남겨 두십니다. 그것까지 한꺼번에 드러난다면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악을 좋아하셔서 보존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영적 성장을 위해, 시험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난 여호수아 설교에서 살펴본 ‘허용의 섭리’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지만, 악이 사람에게 드러나고 그것과 싸우는 과정까지 섭리 안에 사용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악이 있는지도 모른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은 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숨어 있던 악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사기 3장 1절의 ‘전쟁을 알지 못한 자에게 전쟁을 알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은 외부의 군사전쟁보다 먼저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설교자가 ‘전쟁을 모르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하게 표현했는데, 그 표현을 영적으로 바꾸어 보면 오히려 깊은 진리가 됩니다. 거듭남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 싸움을 알게 됩니다. 자기애와 이웃 사랑이 충돌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가 충돌하며, 탐욕과 정직이 충돌하고, 자기 지혜를 믿고 싶은 마음과 주님의 지혜를 의지해야 한다는 신앙이 충돌합니다. 이 싸움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악을 아직 심각하게 대면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전쟁’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다만 그 적은 먼저 북한이나 공산주의자나 특정 정당의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번 설교와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중요한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설교자는 성경의 ‘가나안 전쟁’을 거의 즉시 대한민국의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옮겨 갑니다. 6·25전쟁, 북한, 주한미군, 특정 대통령과 정치세력, 광화문 집회가 계속해서 사사기의 ‘전쟁’과 겹쳐집니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말씀은 밖의 적을 찾아내기 전에 내 안의 적을 찾아내도록 사람을 이끕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블레셋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오늘날의 어떤 정치세력이나 종교집단을 지목하기 시작하면, 말씀은 쉽게 타인을 공격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내 안의 블레셋은 무엇인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말씀은 나를 회개시키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이 일관되게 후자를 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주님의 나라와 지옥 사이의 싸움입니다.
설교자가 제시한 ‘사사기의 사이클’도 이 관점에서 읽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설교에서는 ‘번성하면 부패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잘되고 형편이 좋아지면 교만해지고, 심지어 ‘여자 하나 가지고 못 살고 바람을 피게 된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예도 듭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께서 ‘매를 때리시고’, 징계를 받은 사람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사사를 보내 회복시키며, 다시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반복되는 타락을 아주 쉽게 기억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실제 영적 사이클은 단순한 ‘경제적 번성→도덕적 부패→재난→기도→경제적 회복’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보면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김→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거짓과 악에 사로잡힘→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음→주님께 도움을 구함→진리를 통한 구원→새로운 영적 자유’의 순환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번성’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번성이 언제나 돈이 많아지고 사업이 잘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번성과 증가는 선과 진리가 많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이웃을 섬기는 기쁨이 늘어나며, 말씀을 이해하는 빛이 밝아지는 것이 진정한 번성입니다. 그러므로 ‘번성하는 상태에 계속 있으라’는 설교자의 권면을 영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대단히 좋은 권면이 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말고 계속 주님께 돌려드리라’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타락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평안해지면 여호와를 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생활에서도 반복됩니다. 시험 가운데 있을 때는 간절히 기도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자기 힘으로 해결한 것처럼 느낍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선을 자기 성품과 능력으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proprium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마침내 자기가 선하고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지닙니다.
따라서 ‘번성하면 부패한다’는 설교자의 관찰은 영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번성 그 자체가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풍성함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내 것’으로 돌리는 순간입니다. 천사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과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주 가진 것이 적은 사람도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며 교만하면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패의 원인은 풍요가 아니라 appropriation, 곧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어 ‘부패하면 하나님이 때리신다’, ‘뒤지도록 맞는다’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성경의 문자에는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가 그렇게 표현되는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분노하시거나 사람을 해치기 위해 매를 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며 자비 그 자체이십니다. 사람이 악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 악 자체가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가능한 한 사람을 구원 쪽으로 돌리십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때리셨다’고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결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게 압제당하는 것도 같은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욕망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욕망이 나를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화를 필요할 때만 낸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분노가 나를 끌고 갑니다. 처음에는 돈을 필요에 따라 추구하지만 나중에는 탐욕이 모든 판단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이방 민족의 압제’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적에게 넘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악이 마침내 그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스라엘은 ‘부르짖습니다’. 설교자가 ‘부르짖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사기의 문자적 흐름을 잘 포착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의 한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주님을 진실하게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주님의 도움을 입술로만 구할 수 있지만, 자신의 무능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면 기도가 깊어집니다. 이 점에서 설교자가 ‘부르짖으라’고 반복하는 데는 목회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큰소리로 주여를 외치면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음량에 있지 않습니다. 통성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고, 아무 소리 없는 묵상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의지의 방향입니다. 말없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한 사람의 마음이 수천 명의 함성보다 더 깊은 기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크게 ‘주여’를 외쳐도 자기 악을 그대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 외침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또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다’는 표현도 내적으로는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향한 주님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입니다. 변하는 것은 사람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등지고 있을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심판처럼 느껴지고, 사람이 돌아서 주님을 향하면 같은 사랑이 자비와 평화로 경험됩니다. 태양이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늘에서 햇빛 쪽으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었다’기보다 사람이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더 깊은 설명입니다.
사사기의 다음 단계는 ‘사사를 보내 주심’입니다. 설교에서는 이것을 ‘오늘날의 선지자’를 보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하고, 선지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선지자의 본질은 미래 사건을 예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선지자가 ‘진리의 가르침’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사사는 그 진리에 따라 악과 거짓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주님의 구원 능력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사사를 보내신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카리스마적 지도자 한 사람을 보내신다는 뜻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말씀 한 구절을 통해서도, 양심을 통해서도, 한 사람의 조용한 충고를 통해서도, 때로는 실패와 고난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구원의 진리를 보내십니다. 핵심은 그 사람을 특정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설교를 해설할 때 특별히 중요합니다. 예배 전 기도에서부터 특정 목회자를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특정 날짜의 광화문 집회와 정치적 승리를 하나님의 뜻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어 설교 중에도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신다는 말과 현재의 정치운동 지도력이 서로 가까이 놓입니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 회중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성경의 사사·선지자→오늘의 특정 지도자’라는 연결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구약의 사사나 선지자의 표상을 오늘날 특정 개인에게 직접 이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씀의 표상은 먼저 주님 자신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인간 지도자는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자기애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해도 말씀의 ‘사사’나 ‘선지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선지자는 앞으로 될 것을 미리 다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한 부분 역시 수정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참된 예언은 미래의 정치 사건을 맞히는 능력보다 훨씬 깊습니다. 말씀은 ‘악을 계속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의 종이 된다’, ‘회개하면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자기 사랑의 마지막은 지옥이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마지막은 천국이다’라는 영원한 미래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말씀의 예언적 성격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본문 자체가 놀랍도록 선명하게 ‘영적 전쟁’을 말할 수 있는 본문인데도, 그 전쟁이 거의 전부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밖을 향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사사기 3장 1절은 ‘전쟁을 알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깊이 파고들었다면 ‘왜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이 필요한가’, ‘왜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악한 성향을 한꺼번에 없애주시지 않는가’, ‘왜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반복해서 같은 악과 싸우는가’, ‘시험 가운데 천사들과 악한 영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람의 자유는 어떻게 보존되는가’ 같은 매우 깊은 영적 주제들이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에서는 이 놀라운 내적 전쟁이 6·25전쟁과 북한, 주한미군, 특정 정치인, 광화문 집회로 빠르게 치환됩니다. 정치와 국가 문제를 설교에서 전혀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의와 자유, 국가의 평화와 국민의 안전 역시 이웃 사랑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영적 전쟁을 특정 정치세력과의 전쟁으로 동일시하는 순간,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편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반대편은 가나안 족속이나 마귀의 세력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내 안의 무엇이 주님을 거역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저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내 안의 간첩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자기애와 탐욕과 거짓과 교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외부의 실제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면 말씀은 자기 성찰의 거울에서 정치적 무기로 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설교에서는 정치적 상대를 향한 매우 강한 욕설과 모욕적 표현이 반복됩니다. 특정 인물을 향하여 ‘개자식’, ‘늙은 새끼’, ‘죽은 놈’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일부 정치인이나 공직자에게 극형이 필요하다는 발언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을 단지 설교자의 독특한 화법이나 정치적 열정으로만 넘기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설교의 본문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과 싸우면서 내가 그 악과 같은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과 싸우다가 증오에 빠지고, 불의와 싸우다가 모욕과 복수를 사랑하게 된다면, 외적으로는 적과 싸우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그 적이 상징하는 악에게 패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천국의 선은 악에 단호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거짓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데서 기쁨을 얻지 않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매우 엄하게 책망하셨지만 그들의 영원한 멸망을 즐거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전투성’은 증오가 강한 상태가 아니라, 악을 향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
설교 중 ‘성경 전체가 다 정치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도 위대한 정치가이고 모세도 정치가’라는 주장은 설교자의 정치신학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물론 성경에는 왕과 국가, 전쟁과 법, 사회질서와 권력이 많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중심이 정치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본질을 지나치게 외적 차원으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중심은 주님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국가와 왕, 전쟁과 평화도 결국 이 영적 실재를 표상하기 때문에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모세는 말씀 자체 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율법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단순한 정치 지도자로 읽히지 않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과 그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되어 가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이 인물들을 곧바로 현대 정치 지도자의 모델로 읽는 것은 말씀의 깊이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설교 후반에 다시 등장하는 ‘천년왕국’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전천년·후천년·무천년설을 설명하면서 천년왕국을 매우 강조합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말했듯, ‘천년왕국을 죽은 뒤에만 기다리지 말고 이 땅에서부터 체험해야 한다’는 직관 자체에는 중요한 영적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천 년’을 문자적인 천 년짜리 정치 체제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하고 충만한 어떤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어느 정당이 집권하거나 어떤 국가 체제가 세워졌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이 왕이 되실 때 시작됩니다. 자기애가 내려가고 주님 사랑이 올라오며,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다스리며, 복수하고 싶은 욕망보다 용서와 정의가 우위를 차지할 때 그 사람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가 교회의 내적 모습이며, 궁극적으로 천국의 질서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반복되는 ‘회복’과 ‘번성’도 이 관점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나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나를 번성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인도합니다. 이것이 건강과 물질, 사회적 성공의 회복을 뜻한다면 신앙의 범위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회복은 인간 안에 잃어버린 천국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 거짓말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이 진실을 사랑하게 되는 것, 자기 이익밖에 모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사기의 사이클을 끝내는 길입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사이클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또 타락하고, 부르짖고 또 구원받고, 다시 타락합니다. 사사기 마지막에 가면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결국 인간 사사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구원이 필요합니다. 말씀 전체의 흐름으로 보면 이 반복은 궁극적으로 참된 구원자이신 주님을 기다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거듭남의 과정과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한 번의 회개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더 깊은 악이 드러나고 또 싸웁니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원을 무한히 도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순종한다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험마다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외적인 행동의 악과 싸우고, 다음에는 생각의 거짓과 싸우며, 더 나아가 그 밑에 있는 자기애와 지배욕의 뿌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사이클은 절망의 사이클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주님을 잊어버리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사람이 아무리 반복해서 넘어져도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는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다는 자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설교자가 반복해서 강조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메시지는 소중한 복음적 요소를 지닙니다. 다만 그것을 ‘큰소리로 기도하면 원하는 상황을 바꾸어 주신다’는 차원보다,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 악의 속박에서 건져 주신다’는 차원으로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의 찬송과 통성기도에서도 상당한 생명력은 느껴집니다. 설교자가 ‘찬송은 곡조 있는 설교’라고 표현한 것도 기억할 만합니다. 실제로 찬송은 진리를 정서와 결합시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음악과 노래는 정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가 단지 머리에만 있을 때보다 사랑과 정서에 결합될 때 사람의 생명에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이런 면에서 이 예배가 지적인 강의에 머물지 않고 회중의 정서 전체를 움직이려 한다는 점은 분명한 특징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분별이 필요합니다. 찬송과 통성기도로 마음이 강하게 고양된 직후 특정 정치적 주장과 집단행동이 하나님의 명령처럼 제시되면, 회중은 자신이 느끼는 종교적 감동과 특정 정치적 판단을 구분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강한 정서적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반드시 승리한다’는 표현이 반복될수록 그 위험은 커집니다. 영적 감동이 있다고 해서 그 감동과 함께 제시된 모든 인간적 판단까지 신적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계속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자유와 이성의 보존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믿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이성을 압도하고 자유를 빼앗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여 삶으로 선택할 때 그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 역시 회중에게 강한 감동을 주면서 동시에 각자가 말씀 앞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분별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끝으로 이번 설교 전체에서 가장 아깝게 느껴지는 것은 설교자가 잡은 본문의 핵심 자체는 상당히 좋았다는 점입니다. ‘사사기는 사이클로 되어 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 ‘번성 가운데 부패하지 말아야 한다’, ‘징계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시고 회복하신다’는 각각의 명제에는 깊이 발전시킬 수 있는 영적 씨앗들이 들어 있습니다. 자막에서도 설교자는 이 순환을 반복해서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번성’으로 요약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단계 더 안으로 들어가면, 이 사이클의 무대가 먼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전쟁은 내 안의 선과 악의 전쟁이며, 가나안 족속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악과 거짓이고, 압제는 내가 사랑한 악이 도리어 나를 지배하는 상태이며, 부르짖음은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회개이고, 사사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진리이며, 회복은 주님께서 내 의지와 이해성을 다시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사기는 정치적 전투의 교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책이 됩니다. 왜냐하면 적을 밖에서 찾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가 문제다’, ‘저 정치인이 문제다’, ‘저 세력이 문제다’라고 말하기 전에, 말씀은 ‘네 안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족속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다른 사람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과장은 용납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치인의 교만은 비난하면서 자신의 영적 교만은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반대편 사람을 증오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사사기 3장이 가르치는 가장 깊은 ‘전쟁을 아는 법’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는 사람은 적을 향해 가장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입니다. 강한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외부의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믿고 자신은 선과 진리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지난 여호수아 설교가 ‘땅을 분배받는 것’이었다면 이번 사사기 설교는 그 땅을 받은 뒤 ‘그 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거듭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더 깊은 싸움이 시작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계속 주님의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자기 것으로 취하여 우상을 섬길 것인가 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새롭게 만든다면,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겠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과 악이 싸우는 영적 전쟁을 반드시 알게 되며, 그 싸움에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사이클’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릴 때 사람은 악의 지배 아래 들어가지만,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는 진리를 보내어 그를 다시 영적 자유와 선의 삶으로 회복시키십니다.’
※ 여기1강,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3강1부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과 심판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번 3강은 찬송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로 문을 엽니다. 강사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이어지는 기도에서도 ‘진리의 영으로 저희들을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전개되는 복잡한 종말론적 도식보다 먼저 붙들어야 할 이 강의의 영적 중심입니다. 강사가 무엇보다 주님을 삶의 가장 귀한 분으로 모시고자 하며, 말씀을 통해 자신과 청중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출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중심은 어떤 종말 시간표를 정확하게 아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해석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견되더라도, 이 강의의 첫 고백 자체는 소중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앞서 살펴본 요한계시록 4장을 ‘총사령부’, 5장을 어린양이신 ‘총사령관’이 등장하는 장으로 정리한 뒤, 6장을 ‘무엇으로 심판하실 것인가’, 곧 ‘심판의 재료’를 보여 주는 장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일곱 인을 떼는 과정 자체를 7년 대환란으로 보지 않고, 대환란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봅니다. 첫째부터 넷째 인에서는 백마·홍마·흑마·청황마라는 네 가지 심판의 재료가 제시되고, 다섯째 인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채워지며, 여섯째 인에서는 천재지변 가운데 고통받는 인류가 나타나고, 일곱째 인이 떼어질 때 비로소 일곱 나팔과 함께 본격적인 7년 대환란이 시작된다는 구조입니다. 강사는 이를 스가랴 6장의 네 종류의 말과 요한계시록 7장의 ‘사방의 바람’까지 서로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는 강사 자신의 계시록 독법입니다. 이 해석 안에는 주목할 만한 장점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한 절씩 고립시켜 읽지 않고, 4장부터 8장까지의 구조와 스가랴의 환상을 함께 놓고 성경 전체의 연결을 찾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말’, ‘바람’, ‘인’, ‘나팔’과 같은 이미지가 서로 무관한 장식물이 아니라 어떤 영적 의미를 전달한다고 보는 태도는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도 일정 부분 접점을 가집니다. 성경의 환상적 이미지에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찾으려면 다른 말씀과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강사의 해석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갑니다. 차이는 ‘상징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상징을 인정합니다. 진짜 차이는 ‘그 상징이 무엇과 상응하는가’에 있습니다. 강사는 백마·홍마·흑마·청황마를 앞으로 자연계에서 일어날 공의의 심판·전쟁·기근·사망이라는 사건들과 연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말들을 인간의 영적 상태, 더 정확히는 교회 안에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문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부터 같은 요한계시록 6장을 바라보면서도 두 해석은 전혀 다른 풍경을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은 말씀에 대한 이해, 곧 진리를 이해하는 지적 능력과 상응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6장에 갑자기 만들어진 해석 원리가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서 말이 지닌 상응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19장의 백마도 같은 원리로 풉니다.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라는 환상은 단순히 미래 어느 날 주님께서 실제 흰색 말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광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의 속뜻을 열어 주시고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를 회복시키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백마’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이며, 그 위에 타신 분은 말씀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이 점에서 흥미롭게도 강사와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6장의 백마 탄 자를 ‘사탄’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서는 만납니다. 강사는 백마 탄 자를 공의로 심판하시는 예수님과 연결하면서, 이를 사탄으로 해석하는 일부 종말론적 해석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백마를 악한 존재의 상징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이유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흰색은 진리를 나타내고, 말은 말씀의 이해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째 인을 뗄 때 나타나는 백마는 ‘전쟁을 시작하는 어떤 존재’라기보다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은 각각 따로 떨어진 네 사건이라기보다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쇠퇴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이번 3강 1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스베덴보리의 렌즈’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합니다. 이것이 백마입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선과 사랑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붉은 말입니다. 이어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빈곤해지고 왜곡됩니다. 이것이 검은 말입니다. 마침내 선도 진리도 사라져 영적 생명 자체가 죽은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이 청황색 말입니다. 그러므로 백마 → 홍마 → 흑마 → 청황마의 진행은 외부 세계에서 ‘공의 → 전쟁 → 기근 → 죽음’이 차례로 일어나는 시간표라기보다, 교회가 말씀의 참된 이해로부터 점차 사랑과 진리를 잃어 마침내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둘째 인의 ‘붉은 말’도 훨씬 내면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본문은 붉은 말을 탄 자가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한다고 말합니다. 강사는 이를 실제 전쟁으로 읽고, 나아가 미래의 세계적 전쟁 및 아마겟돈과 연결합니다. 물론 전쟁은 인류의 악이 자연계에 나타나는 참혹한 결과이므로 영적 의미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전쟁’은 더 근본적으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을 나타냅니다. 특히 ‘땅에서 화평을 제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사라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같은 성경을 가지고도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진리는 상대를 살리는 빛이 아니라 상대를 정죄하는 칼이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백마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사랑이 떠나면 신앙의 언어는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 안에서 ‘화평’이 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면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확증과 정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붉은 말은 단지 먼 미래의 세계대전을 예언하는 그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영적 사건입니다.
셋째 인을 떼었을 때 나타나는 ‘검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사는 검은색을 기근과 연결하고,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말씀을 실제적인 흉년과 식량 부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으로 보면 여기서 기근은 단순히 먹을 양식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핍입니다. 성경에서 ‘먹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이며, ‘양식’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영적인 기근은 성경책이 없어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은 여전히 있고 설교도 계속되고 신학도 풍성한데, 그 말씀을 통해 실제로 사랑과 선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를 돌아볼 때 매우 엄중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책이 넘쳐나고 설교와 강의가 인터넷에 가득하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 풍년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악을 보고 회개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실제 삶을 고쳐 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보는 풍성하면서도 영적으로는 기근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경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알고 있는 진리 하나를 붙들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보다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삶이 되었는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계시록 6장을 ‘심판의 재료를 보여 주는 장’이라고 표현한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달리 받아들이면 뜻밖에도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재료’가 자연계의 전쟁·기근·천재지변이라기보다, 심판 때 드러나는 인간과 교회의 내적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외부에서 갑자기 어떤 재앙을 던져 사람을 파괴하시는 행위가 아니라, 그동안 사람 안에 형성되어 온 것이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사랑했는지,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였는지,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살았는지가 드러나는 것이 심판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인을 떼신다’는 표현도 중요해집니다. 봉인된 것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인이 떼어지면 감추어져 있던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린양께서 인을 떼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파괴하기 위한 재앙을 하나씩 방출하신다는 뜻이라기보다, 말씀과 교회의 내적 상태를 밝히 드러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 앞에서는 감추어진 것이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좋아 보였지만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 진리를 말했지만 그 진리를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했는지, 혹은 부족한 지식 가운데서도 선을 사랑하며 살았는지가 드러납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심판은 ‘폭로’이면서 동시에 ‘분별’입니다.
이 지점은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말씀대로 실제로 살아야 한다’는 수도적 영성과도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받은 말씀을 삶에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과 상당히 가까이 다가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말씀을 삶으로 옮기는 과정 자체가 인간 안의 영적 질서를 변화시키는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를 반복할 때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점차 질서 안에 놓으십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6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제3차 세계대전은 언제 일어나는가?’, ‘7년 대환란은 언제 시작되는가?’, ‘첫째 인은 이미 떼어졌는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지금 내 안의 말은 무슨 색인가?’입니다. 나는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진리를 사랑과 결합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과의 화평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혹은 진리를 많이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영적인 기근 가운데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자기 밖의 미래 사건으로만 돌려놓으면 우리는 구경꾼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비추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요한계시록은 갑자기 현재의 말씀이 됩니다.
또 하나 조심스럽게 짚어야 할 부분은 강사가 말하는 ‘7년 대환란은 모든 인류의 죄를 없이 하시는 7년간의 번제 기간’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표현은 강사의 종말론 체계 안에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죄는 외부의 환난을 겪는다고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고난 자체가 악을 제거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선해지고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 속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며, 그 악을 실제 삶에서 피하려 하는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인간의 악을 강제로 뽑아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진리를 보여 주시고 악을 보게 하시며, 사람이 자유롭게 그 악을 거부하도록 끊임없이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목적을 파괴 그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신적 질서의 회복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옥에 보내기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천국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끝내 사랑하는 악을 놓지 않으면, 사후에는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가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결국 사람이 평생 무엇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았는지가 완전히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강의 중에는 또 ‘성도들의 기도의 분량이 다 차야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행하신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강사는 요한계시록 8장의 향과 성도들의 기도를 근거로 이것을 심판이 시작되는 조건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도 문자적으로 ‘기도가 일정량 누적되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시작하신다’고 이해하기보다는, 기도가 나타내는 영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향은 예배와 기도, 특별히 주님께 올라가는 영적 애정과 상응합니다. 따라서 향연이 올라간다는 것은 단순한 기도 횟수의 축적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 선과 진리를 향한 애정이 주님께 향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읽으면 요한계시록의 장면은 훨씬 내면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결국 3강 1부에서 강사는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을 앞으로 임할 심판의 네 가지 ‘바람’, 곧 공의·전쟁·기근·사망의 심판으로 읽으며 이를 7년 대환란 직전의 준비 과정에 배치합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같은 네 말을 교회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상태의 변화로 읽습니다. 백마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 붉은 말은 선과 사랑의 상실, 검은 말은 진리의 황폐, 청황색 말은 마침내 선과 진리가 모두 사라진 영적 죽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두 해석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렸다’는 식으로만 다루기보다, 강사가 외적 역사 속에서 발견하려 한 심판의 질서를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내면과 교회의 영적 역사 속으로 더 깊이 가져간다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차이가 이번 사경회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이유를 가장 잘 보여 줍니다. 강사는 우리에게 ‘다가올 환난에 준비되어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질문을 없애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가져옵니다. ‘그 환난이 오기 전에 준비되어 있는가?’를 넘어 ‘오늘 주님께서 네 안의 인을 떼어 네 내면을 보여 주신다면 무엇이 드러나겠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내고 있는가, 신앙을 고백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렇게 보면 요한계시록의 심판은 먼 미래의 공포스러운 사건만이 아닙니다. 말씀의 빛이 오늘 나에게 임하여 내 속의 거짓과 악을 드러내고, 그것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매일의 작은 심판이 먼저 있습니다. 이 심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지막 심판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밝히시는 것은 멸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며, 드러내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3강 첫머리에서 함께 부른 찬송의 고백이 오히려 이 모든 복잡한 종말론을 꿰뚫는 가장 단순하고 깊은 결론이 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사람이 실제로 이 고백대로 살아간다면, 요한계시록이 궁극적으로 준비시키려는 사람도 바로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3강2부
씨 뿌리는 비유와 네 가지 마음밭
이번 3강 2부에서는 강사가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배운 ‘핵심진리’를 종합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를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로 읽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서론,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가라지 비유를 본론, 그물 비유를 결론처럼 배열하고, 이것이 앞으로 공부할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과 666을 이해하는 준비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이 사경회의 독특한 종말론적 체계가 이미 상당히 들어와 있습니다. 특히 ‘14만 4천’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성장한 성도들로, ‘666’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어두운 영혼들과 연결하려는 방향이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가운데 먼저 귀하게 받아들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사가 성경 공부의 목적을 단순한 지식 습득에 두지 않고 ‘영적인 목표’, ‘신앙의 방향’, ‘영적 가치관’을 분명히 하는 데 둔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무엇을 추구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세상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영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지배적 사랑, 곧 생명의 중심을 이루는 사랑에 따라 형성되며, 사후에도 바로 그 사랑이 그 사람의 영적 방향을 결정합니다.
다만 마태복음 13장을 곧바로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 대 666’을 해석하기 위한 일종의 암호표로 사용하는 부분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요한계시록 사이에 깊은 내적 연결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연결은 ‘겨자씨 비유 = 14만 4천의 성장’, ‘누룩 비유 = 14만 4천의 행실’, ‘가라지 = 666’과 같이 인물 집단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방식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영적 상태,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따라서 어떤 비유를 특정 종말 집단의 정체를 밝히는 열쇠로 제한하면, 오히려 그 비유가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보편적인 영적 의미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부분의 핵심인 ‘씨 뿌리는 비유’로 들어오면 오히려 강사의 설명과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가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강사는 씨를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 씨가 떨어지는 밭을 ‘사람의 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길가·돌밭·가시밭·좋은 밭이라는 네 상태를 사람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마음 상태로 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비유의 문자적 의미에 충실한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씨’라는 표현 자체가 매우 깊습니다. 씨에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땅에 받아들여져야 하고, 뿌리를 내려야 하며, 자라고 마침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듣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기억하는 것도 시작입니다. 이해하는 것도 아직 완성이 아닙니다.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되고, 그 진리로부터 선이 행해질 때 비로소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는 사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이라고 부르는 과정 전체를 놀랍도록 간결하게 보여 주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밭’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하면,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되는 인간의 내면입니다. 같은 씨가 뿌려집니다. 씨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다릅니다. 어떤 씨는 새가 먹고, 어떤 씨는 잠깐 자랐다가 말라 버리고, 어떤 씨는 가시에 눌리며, 어떤 씨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합니다. 차이는 씨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그릇’에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동일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강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말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밭이 어디에 해당하는지 스스로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험을 영적 성장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상당히 깊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는 표현의 의미를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적 시험, 곧 temptation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공격을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가운데, 인간 안에 이미 존재하던 것이 드러나고 주님께서 그것을 이기도록 인도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평안할 때에는 자신이 어떤 밭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나는 세상보다 천국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심하게 상했을 때, 손해를 보게 되었을 때,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돈과 명예와 안락함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할 때 비로소 마음밭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가 말하는 ‘시험을 통해 자신의 밭이 드러난다’는 설명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네 가지 밭을 반드시 세상 사람들을 네 부류로 영원히 고정하여 나누는 분류표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넷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어느 시점에서 사람의 주된 상태를 그렇게 구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네 밭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아직 길가 같은 부분도 있고, 돌밭 같은 부분도 있으며, 가시떨기가 우거진 부분도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오래 갈아엎고 준비하셔서 좋은 땅이 된 부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씨 뿌리는 비유가 타인을 분류하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추는 말씀이 됩니다. ‘저 사람은 길가다’, ‘저 사람은 돌밭이다’, ‘나는 좋은 밭이다’라고 판정하는 순간 이 비유의 칼날이 밖으로 향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떤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였다가 어려움이 오자 버렸는가?’, ‘내가 알고 있는 말씀 가운데 세상 염려와 자기애 때문에 열매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이 비유는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먼저 ‘길가’는 말씀이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강사는 길가가 사람들이 계속 밟고 다녀 딱딱해진 땅인 것처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강퍅한 마음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것은 진리가 내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기억의 표면을 스쳐 지나가고 자신의 삶과 무관한 정보로 머문다면, 씨는 아직 ‘땅속’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성경에서 새는 문맥에 따라 생각과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좋은 의미의 새도 있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된 사고, 곧 진리를 빼앗아 가는 잘못된 추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들은 직후 자신의 기존 욕망에 맞추어 ‘그 말씀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요즘 세상에 그렇게 살면 손해만 보지’, ‘그건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야’라고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막 뿌려진 진리가 내면에 들어가기 전에 거짓된 추론에 의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새가 씨를 먹는’ 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다음의 ‘돌밭’은 더욱 미묘합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문제는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상당히 자주 볼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하고,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어떤 진리를 발견하고 크게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자신의 사랑과 의지를 바꾸는 데까지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말씀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견디지 못합니다. 진리가 감정에는 닿았지만 생명에는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뿌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식물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뿌리가 식물 전체를 지탱합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종교 활동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혼자 있을 때 무엇을 사랑하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진리를 따르는가 하는 내면의 상태입니다. 거기에 진리가 뿌리를 내릴 때 신앙은 외부 환경에 따라 쉽게 말라 버리지 않습니다.
강사가 좋은 밭을 설명하면서 ‘더 겸손하고, 더 충성하고, 더 인내하고, 더 온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부분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또한 ‘적당히 천국만 가면 되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세상의 쾌락이나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말고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표현의 체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이 실천적 강조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다만 강사가 이것을 ‘생명책이라는 저금통장’에 선행과 인내가 상급으로 적립되는 것처럼 설명하는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달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의 상태는 선행을 많이 해서 점수를 많이 쌓은 결과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형성하신 사랑과 지혜의 상태입니다. 선한 행위는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위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천국의 공로를 적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 속에서 사람의 사랑이 실제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한 것과 이웃의 유익을 사랑해서 한 것은 외적으로는 같아 보여도 내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행위’ 또는 ‘일’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공로 사상을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얼마나 많이 했는가’만 계산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부터 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했는가,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원하여 했는가입니다. 결국 행위는 사랑의 외적 형상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실제 행위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말하는 ‘밝은 빛’도 이렇게 이해하면 한층 깊어집니다.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단순히 신앙적 업적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그의 이해를 밝히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생활로 흘러나오는 사람입니다. 빛은 진리이고, 그 빛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빛만 있고 따뜻함이 없다면 겨울 햇빛과 같을 수 있습니다. 진리는 많이 알지만 체어리티가 없다면 영적 생명을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거듭남은 이 둘, 곧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열매’가 최종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땅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하시면서 그 결과를 ‘결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씨가 목적이 아니며 싹도 목적이 아니고 줄기와 잎도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열매가 목적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듣는 것, 공부하는 것, 이해하는 것, 교리를 정리하는 것 모두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사람이 선하게 되고, 주님의 사랑이 그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강의가 계속 강조하는 ‘영적 성장’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매우 아름답게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은 특별한 체험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며, 비밀스러운 종말론적 지식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중심성이 조금씩 물러가고 주님의 뜻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던 사람을 용서하게 되고, 자기 자존심 때문에 참지 못하던 것을 진리를 위해 참게 되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보다 그 사람에게 실제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가 바로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번 3강 2부에서 특별히 소중한 것은 ‘14만 4천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려는 종말론적 도식 자체라기보다, 그 도식 아래에서 강사가 계속 붙들고 있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강사는 가장 밝은 빛을 따라 살고, 좁은 길을 선택하며, 세상적 가치보다 영적 가치를 추구하고, 인내와 겸손과 사랑 가운데 성장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 대목을 더 깊이 붙듭니다. 그리고 ‘특별한 종말의 성도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 살아야 한다’기보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원하시는 거듭남의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좋은 밭’도 특별한 소수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우월한 마음이 아닙니다. 밭은 갈아야 합니다. 돌을 골라내야 하고 가시를 뽑아야 하며 굳은 땅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을 통하여 그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악을 죄로 알고 피하려고 힘쓰며,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읽으면서 ‘나는 네 밭 가운데 어디인가?’라고 묻는 것도 필요하지만, 거기에서 멈출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오늘 주님께서 내 밭의 어느 부분을 갈고 계시는가?’일 것입니다. 아직 딱딱한 길가가 있다면 부드럽게 하시고, 돌이 있다면 드러내어 치우게 하시며, 가시가 있다면 뽑게 하시고, 이미 좋은 땅이 된 곳에는 더 많은 씨를 심으십니다. 거듭남은 단번에 ‘좋은 밭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평생에 걸쳐 인간의 내면을 천국에 적합한 땅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번 3강 2부의 중심은 의외로 단순해집니다. ‘나는 14만 4천에 속하는가?’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가?’입니다. ‘마지막 때 시간표를 얼마나 정확하게 아는가?’보다 먼저 ‘오늘 내게 주어진 진리를 얼마나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사가 서두에서 말한 ‘영적인 목표와 방향’, ‘영적 가치관’이라는 표현과도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결국 좋은 밭의 가장 깊은 특징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씨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씨의 생명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열매를 가능하게 하는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할 일은 그 생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주님께서 일하실 길을 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밭을 내어 드릴 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라는 차이는 있어도 주님께서는 각 사람 안에서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의 천국을 이루어 가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는 종말을 계산하기 위한 비유를 넘어, 지금 이 순간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듭남의 비유’가 됩니다.
3강3부
돌밭과 가시떨기에서 좋은 땅으로 : 말씀의 뿌리, 시험, 세상 염려와 참된 결실
3강 3부에서는 앞서 살펴본 씨 뿌리는 비유가 한층 더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2부에서 길가와 돌밭, 가시떨기와 좋은 땅이라는 네 가지 마음밭의 큰 구조를 살펴보았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왜 어떤 사람에게서는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가’, ‘왜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시험이 오면 넘어지는가’, ‘왜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열매가 막힐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사가 이 비유를 단순히 불신자와 신자를 나누는 비유로만 다루지 않고 영적 성장과 시험, 그리고 실제 삶의 열매라는 방향으로 가져가는 것은 이 사경회의 전체적인 영성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곳에서 반복되는 ‘연단’, ‘인내’, ‘순종’, ‘좁은 길’, ‘사랑의 실천’이라는 언어가 씨 뿌리는 비유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돌밭의 특징은 씨를 받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길가와 돌밭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길가에서는 씨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지만, 돌밭에서는 싹까지 납니다. 외적으로 보면 상당히 좋은 신앙의 시작처럼 보입니다. 말씀을 듣고 감동하고, 기도하기 시작하며, 새로운 결심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집회나 수련회에서 큰 은혜를 경험하고 자신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상태에 대해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처음의 기쁨이 거짓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기쁨이 아직 충분히 깊은 곳까지 내려가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뿌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기억에 들어가는 것과 이해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마침내 의지와 사랑에 들어가는 것은 서로 다른 단계입니다. 어떤 진리를 듣고 ‘맞다’고 인정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 진리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 때문에 자기 욕망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대할 때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아멘 하는 것과 자신의 이익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후자를 선택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여기까지 내려오면 비로소 뿌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험은 말씀을 파괴하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이 어디까지 뿌리내렸는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평안할 때에는 자기 신앙의 실제 깊이를 알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말할 수 있고, 겸손을 말할 수 있으며, 주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욕을 받았을 때에도 상대를 악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는지, 자신의 옳음이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평안을 지킬 수 있는지, 예상하지 못한 손해가 생겼을 때에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할 수 있는지를 통해 그 진리가 단순히 기억과 이해에 있는지 아니면 의지 안으로 내려가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연단’은 씨 뿌리는 비유의 ‘뿌리’와 깊이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시험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더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악을 보내 시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시험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공격이며,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허용하시고 그 가운데 사람을 지키시며 선한 결과를 이루십니다. 인간에게는 시험이 마치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그 시험 가운데 싸울 힘과 진리, 보호와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귀하게 여긴다고 해서 고통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거나 일부러 고통을 찾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고난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주님을 의지하고 악과 거짓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선과 진리를 붙들 때 고난이 거듭남의 쓰임으로 바뀝니다.
이 구별은 수도적 영성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금식과 절제, 침묵과 순종, 불편을 감수하는 훈련 자체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외적 훈련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다루고,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구하며, 이웃을 더 사랑하도록 돕는다면 귀한 쓰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만큼 견뎠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희생했다’, ‘나는 더 깊은 영적 훈련을 받았다’는 자기 공로로 바뀌면 바로 그 수도적 훈련이 새로운 proprium의 토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단의 결과를 판별하는 가장 좋은 기준은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으로부터 이어진 이 사경회의 수도적 강조를 존중하면서도, 그 연단의 내적 목적을 거듭남의 관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돌밭 다음에는 가시떨기가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씨가 싹만 내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 자랍니다. 그러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상태는 어쩌면 돌밭보다 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돌밭에서는 환난이나 박해가 왔을 때 곧 넘어지므로 문제가 비교적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가시떨기에서는 신앙생활 자체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읽으며, 교회생활도 합니다. 씨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른 것들이 함께 자라서 말씀의 생명을 압박한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라는 말도 세상일을 걱정하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자녀를 돌보고, 직업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노후를 준비하는 것은 자연계에서 필요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 삶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영적 삶을 섬겨야 할 질서입니다. 문제는 질서가 뒤집힐 때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목적이 되고 영적인 것이 수단이 되는 순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사업이 잘되기 위해서이고, 기도하는 이유가 건강과 성공을 얻기 위해서이며, 교회생활의 목적이 사회적 관계와 자기 평판을 위한 것이라면 외적으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실제 중심에는 세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돈은 자연계에서 수많은 쓰임을 가능하게 하는 유용한 수단입니다. 가족을 돌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선한 사업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재물의 유혹’, 곧 재물이 주는 안전감과 우월감과 자유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재물을 소유하는 것과 재물이 사람을 소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재산이 많으면서도 그것을 주님께 받은 쓰임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고, 반대로 가진 것이 많지 않으면서도 온 마음이 돈을 향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은 통장 잔액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입니다.
가시떨기의 또 다른 특징은 ‘말씀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세상 사랑과 자기애가 반드시 말씀을 공개적으로 부정해야만 진리를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인정하면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뒤로 밀어낼 수 있습니다. ‘맞는 말씀이지. 하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그렇게 살겠다’, ‘지금 이 문제만 해결되면 그때 주님께 더 충실하겠다’고 하면서 진리에 따른 삶을 계속 연기할 수 있습니다. 씨는 살아 있지만 가시가 더 빨리 자랍니다. 그렇게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면 신앙의 언어는 남아 있어도 열매가 매우 적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가시떨기를 단순히 ‘세상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판정하기보다 우리 각자의 삶 속에 들어와 보게 합니다. 목회자에게도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성장과 사역의 성취가 어느 순간 주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보다 ‘내가 더 깊은 것을 안다’는 만족이 커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당연히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를 발견하는 기쁨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고 자신이 더 높은 진리를 가졌다고 느끼는 데 머문다면 귀한 진리의 씨 주변에 아주 미세한 가시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다른 사람을 확대해서 보는 렌즈이기 전에 자기 자신을 비추는 렌즈여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를 해설하는 작업에서도 계속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도식과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다른 곳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의 영적 우월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진리를 접했다면 그만큼 더 겸손하고, 더 온유하며, 더 체어리티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높은 진리가 높은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진리는 지식으로만 남을 수 있습니다.
이제 좋은 땅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좋은 땅은 처음부터 아무 돌도 없고 아무 가시도 없는 완벽한 인간을 의미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에서도 좋은 밭은 농부가 손을 대지 않아도 저절로 만들어지는 땅이 아닙니다. 굳은 땅을 갈고,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으며, 물을 대고, 씨를 심고, 오랜 시간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매우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인간의 마음도 주님께서 그렇게 경작하십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악을 드러내시고, 말씀의 진리를 통해 그것이 악임을 알게 하시며, 실제 생활에서 그것을 피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악을 거절할 때 조금씩 돌이 치워지고 가시가 뽑힙니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내가 노력해서 나를 좋은 밭으로 만들었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을 설명할 때 반복하는 중요한 원리는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하지만, 실제 능력과 선은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가 없으면 사랑이 형성될 수 없고, 주님의 힘이 없으면 인간은 어떤 악도 실제로 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땅에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이 있다는 것도 경쟁적 상급표처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천국에는 모두가 똑같은 정도의 선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획일성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주님께 받을 수 있는 그릇과 쓰임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삼십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백 배를 맺지만 중요한 것은 각자가 주님께 받은 것에 따라 충실하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천국의 완전함은 모든 천사가 똑같아지는 데 있지 않고, 서로 다른 수많은 선과 쓰임이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더 밝은 빛’, ‘더 큰 상급’을 향해 나아가라고 권면하는 부분을 이해할 때에도 유익합니다. 그 권면을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영적 경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나는 삼십 배가 아니라 백 배짜리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 속에 자기 우월감이 들어오면 좋은 밭을 만들려다가 오히려 새로운 가시를 심을 수 있습니다. 참된 천국적 열망은 ‘내가 더 높은 사람이 되겠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하나도 헛되게 하지 않고 가능한 한 온전히 받아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지옥적 사랑도 높은 곳을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기 위해서’ 높은 곳을 원합니다. 천국적 사랑도 더 큰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유용하게 섬기기 위해서’ 원합니다. 겉으로는 둘 다 열심이고 희생적일 수 있지만 내적 동기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십니다.
강의에서 강조하는 ‘좁은 길’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면 좋습니다. 좁은 길은 일부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길이 아닙니다.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거스르는 길이 좁게 느껴집니다. 복수하고 싶은데 용서하는 길, 인정받고 싶은데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섬기는 길, 자기 이익을 챙길 수 있는데 정직을 선택하는 길,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데 관계의 선을 위해 말을 절제하는 길이 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길을 오래 걸으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좁았던 길이 점점 자유의 길이 됩니다. 악의 욕망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에서 일어나는 ‘즐거움의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이고 자기부인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 의지를 형성해 가시면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용서하는 것이 억지가 아니라 평안이 되고, 섬기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기쁨이 되며,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억압이 아니라 자유가 됩니다. 그때 좋은 땅은 단순히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의 상태를 넘어, 말씀대로 사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상태가 됩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이 강조해 온 ‘연단’도 그 최종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연단의 목적은 평생 이를 악물고 자신을 억누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기 욕망을 거슬러 싸워야 하지만, 주님께서 거듭나게 하실수록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결국 천국에서는 아무도 억지로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수도적 훈련의 가장 아름다운 결실은 ‘나는 이렇게 많이 참았다’가 아니라 ‘이제는 예전과 달리 이것이 기쁘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리메인스’와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이 경험한 순수한 사랑, 선한 정서, 말씀을 통해 받은 진리, 부모나 교사에게서 배운 선한 것들을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보존하십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러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을 악과 거짓에서 끌어내실 때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현재 마음밭이 매우 굳어 보인다고 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 안에 무엇을 보존하고 계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를 크게 바꿉니다. ‘저 사람은 길가니까 안 된다’, ‘저 사람은 돌밭이라 오래 못 간다’, ‘저 사람은 가시밭이다’라고 판정하기보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밭을 어떻게 경작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합니다. 오늘은 돌밭처럼 보여도 내일 큰 시험을 통해 돌이 드러나 제거될 수 있고, 오랫동안 가시에 눌려 있던 씨가 어느 순간 주님의 섭리 가운데 다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씨 뿌리는 비유는 사람을 네 종류로 나누는 비유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오래 참고 경작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비유로도 읽힙니다.
그렇게 보면 이번 3강 3부에서 강사가 강조하는 영적 성장과 연단, 좁은 길과 결실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하여 더욱 깊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씨가 들어오고, 시험을 통해 돌이 드러나며, 세상 염려와 자기애라는 가시가 드러나고, 사람이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그것들을 피할 때 밭이 조금씩 좋은 땅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좋은 땅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삶의 열매가 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 앞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지금 좋은 밭인가 아닌가?’라는 자기 판정만은 아닐 것입니다. 더 살아 있는 질문은 ‘주님께서 오늘 내 안에서 어떤 돌을 보여 주고 계시는가? 어떤 가시를 뽑으라고 하시는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진리를 이제 실제 삶으로 옮기라고 하시는가?’일 것입니다. 바로 그 질문에 하루하루 응답하는 것이 밭을 내어 드리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강사의 권면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히 가까운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더 겸손하고, 더 충성하고, 더 인내하고, 더 사랑하라’는 권면을 자기 공로를 쌓기 위한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께서 내 안에 심으신 씨가 충분히 열매 맺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라는 초청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십 배든 육십 배든 백 배든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 열매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좋은 밭은 ‘나는 좋은 밭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께 자기 밭을 내어 드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돌이 드러나면 인정하고, 가시가 보이면 뽑으려 하며, 말씀이 자기 욕망과 충돌할 때 말씀 편을 선택하고,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해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안에서 말씀은 더 이상 머리에만 있는 씨가 아니라 의지에 뿌리를 내리고 삶으로 열매 맺는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사경회가 강조해 온 ‘연단을 통과한 신앙’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깊고 아름다운 의미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3강4부
겨자씨와 누룩,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 영적 성장의 본질
3강 4부에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시작된 ‘영적 성장’이라는 주제가 겨자씨와 누룩,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를 통하여 더욱 깊어집니다. 앞에서 네 가지 마음밭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질문은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어떻게 자라는가’, 그리고 ‘그 성장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를 서로 연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무엇을 가장 귀한 가치로 발견하며, 결국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해 온 ‘영적 목표’, ‘연단’, ‘좁은 길’, ‘온전한 사랑’이라는 주제가 여기에서 보다 적극적인 성장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겨자씨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시작할 때에는 매우 작지만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게 됩니다. 강사는 이것을 성도의 영적 성장과 연결합니다. 처음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에는 작고 연약하지만 말씀을 받고 순종하며 시험과 연단을 통과하면서 점차 성장하여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까지 유익을 주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듭남 역시 처음부터 완성된 천국적 인간이 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께서 작은 시작으로부터 사람 안에 새로운 생명을 형성하시고 그것을 점차 자라게 하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작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 지식이 적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거듭남의 시작은 인간에게 매우 미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행동을 어느 날 ‘이것이 정말 주님 앞에서 옳은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작은 양심의 움직임, 미워하던 사람에게 악으로 갚지 않으려는 작은 결심,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기보다 인정하려는 작은 움직임도 겨자씨와 같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 것이고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인다면 그 안에는 천국 전체를 향하여 자랄 수 있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 성장을 평가하는 기준도 바꾸어 놓습니다. 사람은 흔히 눈에 띄는 변화와 특별한 체험을 영적 성장으로 생각합니다. 기도를 오래 하고, 성경을 많이 알고, 큰 사역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성장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근본적인 성장은 사람의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던 사람이 조금씩 이웃의 선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이 주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주 작은 변화처럼 보여도 영계에서는 이것이 훨씬 큰 변화일 수 있습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에서 나무는 사람의 지각과 지식, 그리고 그로부터 형성되는 영적 생명과 관련됩니다. 씨였던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자라 하나의 질서를 이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각각 떨어져 있던 진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연결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라’, ‘용서하라’, ‘정직하라’는 말씀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생명 체계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왜 이것을 해야 하지?’를 일일이 계산하지 않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하기 시작합니다. 씨가 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는 말씀도 아름답습니다. 앞서 길가의 씨를 먹어 버린 새는 반대 의미에서 거짓된 사고와 추론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좋은 의미입니다. 말씀에서 새는 사고와 이해에 속한 것들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나무의 가지에 새들이 깃든다는 것은 사람 안에 선한 생명이 형성되면서 수많은 진리와 생각들이 그 생명 안에서 제자리를 찾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영적 성장은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과 지식과 이성이 선한 사랑을 섬기도록 질서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적 영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점입니다. 자기부인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개성을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해와 재능과 개성을 자기애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선한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개성이 제거된 사람들의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각 사람이 지상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한 고유성을 가지면서도 그 고유성이 공동의 선을 섬깁니다. 따라서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은 ‘작은 나’가 ‘대단한 나’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생명이 충분히 성장하여 다른 생명들을 품을 수 있는 쓰임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강사가 다루는 누룩의 비유는 영적 성장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어 ‘전부 부풀게’ 합니다. 겨자씨가 눈에 보이는 외적 성장의 이미지라면 누룩은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누룩은 반죽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작용하지만 마침내 반죽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강사는 이것을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행함으로써 사람 전체가 변화되는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 역시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좋은 이미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거듭남은 사람의 종교적 영역 하나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는 부분, 성경 읽는 부분, 기도하는 부분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의 생각과 감정, 인간관계, 직업생활, 돈을 사용하는 태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누룩이 반죽 전체로 퍼지듯 진리가 사람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는 매우 경건하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면 아직 누룩이 반죽 전체에 퍼졌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변화의 주체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뜯어고쳐 천국적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진리에 반대되는 악을 발견할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때 실제로 사람 안의 질서를 변화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변화에 대해 자랑하기보다 더욱 주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 수련해서 이렇게 되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셨다’는 고백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매우 중요한 접점과 동시에 경계선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자기부인과 절제, 순종과 인내를 강조해 온 전통은 사람의 삶 전체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통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훈련이 ‘내가 나를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자기 공로로 돌아가는 순간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참된 수도적 훈련이라면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는 의식보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깊어져야 할 것입니다. 연단이 깊어질수록 proprium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져야 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눈보다 이해하고 품는 사랑이 깊어져야 합니다.
이어서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 두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만큼 귀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상인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 가치관의 문제와 연결합니다. 무엇이 정말 귀한 것인지 발견한 사람은 이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경회가 반복해서 강조해 온 ‘세상적인 가치와 영적인 가치’라는 구분이 다시 나타납니다. 사람이 세상의 성공과 재물과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힘을 사용합니다. 반대로 천국과 영원한 생명, 주님과의 관계를 가장 귀한 것으로 발견하면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집니다. 강사가 좁은 길과 희생, 자기부인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가치의 전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보화’와 ‘진주’를 더욱 깊이 말씀의 선과 진리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진주’는 진리를 나타내는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가치는 단순히 희귀한 지식을 알게 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그의 삶을 선하게 만들기 때문에 귀합니다. 따라서 가장 귀한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은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알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새롭게 질서 지을 만큼 주님의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알게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인물과 장소와 숫자가 인간의 거듭남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정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소유를 다 파는’ 것입니다. 곧 기존의 자기중심적 가치와 생각을 내려놓고 발견한 진리에 따라 삶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아는 것보다 그 아르카나 때문에 한 가지 악이라도 실제로 피하게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표현도 문자적으로 모든 재산을 처분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에서 소유는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붙들고 있는 생각과 사랑까지 포함하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버리기 어려운 소유는 때로 돈이 아니라 ‘내가 옳다’는 생각입니다. 자기 명예, 자기 공로, 자기 판단, 자기 방식, 심지어 자기가 오랫동안 붙들어 온 종교적 확신도 주님의 진리 앞에서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가 proprium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과 지혜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느끼고 싶어 합니다. ‘내 생각’, ‘내 선’, ‘내 신앙’, ‘내 의’, ‘내 공로’를 붙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가장 깊은 질서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팔아 값진 진주를 산다’는 말씀은 가장 깊게는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는 질서를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변화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때 ‘기뻐하여 돌아가’ 자기 소유를 판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천국적 자기부인은 이를 악물고 모든 것을 빼앗기는 상태가 아닙니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전의 것을 기꺼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손에 쥔 돌멩이를 억지로 빼앗기면 울지만, 더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면 스스로 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방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단순히 ‘세상을 사랑하지 마라’, ‘자기를 부인하라’고 강제로 빼앗으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적 사랑의 더 큰 기쁨을 조금씩 맛보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전에 그렇게 중요했던 것들이 점차 덜 중요해집니다.
이것은 앞서 3부에서 살펴본 ‘즐거움의 변화’와도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악을 포기하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복수하지 않는 것이 억울하고,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 손해 같으며, 자기 뜻을 포기하는 것이 죽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선한 사랑을 형성해 가시면 그보다 더 깊은 평안과 기쁨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부인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더 귀한 것을 얻기 위한 자유로운 내려놓음이 됩니다.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기뻐하여’ 모든 것을 판다는 말씀은 바로 이 천국적 자유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수도적 자기부인의 건강한 기준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이 사람을 점점 어둡고 경직되고 타인에게 엄격하게 만든다면 그 열매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부인을 통하여 더 자유로워지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워지고, 자기 명예가 손상되어도 이전보다 평안하며, 주님과 이웃의 선을 더 기뻐하게 된다면 그 훈련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빈 껍데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옥적 즐거움을 비우고 천국적 즐거움으로 채우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누룩, 보화, 진주를 하나의 흐름으로 놓으면 이번 3강 4부의 구조가 매우 아름답게 보입니다. 겨자씨는 ‘생명의 시작과 성장’을 보여 줍니다. 누룩은 ‘그 생명이 사람 전체로 퍼지는 변화’를 보여 줍니다.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는 ‘그 변화가 가능해지는 가치의 전환’을 보여 줍니다. 결국 사람이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무엇을 선택할지가 결정되고, 반복된 선택이 그의 사랑을 형성하며, 그 사랑이 그의 영적 생명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사후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살아온 사랑이 사후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지금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지가 중요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이 가장 귀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실제 선택에서는 계속 자기 명예와 이익을 먼저 선택한다면 아직 보화를 충분히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완전하지 않고 자주 넘어지더라도 선택의 방향이 점차 주님과 이웃의 선을 향한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사랑을 변화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영적 목표’를 반복하여 강조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표가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목표를 ‘가장 높은 등급의 성도가 되는 것’이나 ‘특별한 14만 4천에 들어가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가장 높은 목표는 주님과 결합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자기 생명이 되며, 그 생명으로 이웃에게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위대함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지 않고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은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백 배의 결실’도, ‘가장 밝은 빛’도, ‘값진 진주’도 모두 다른 사람보다 높은 영적 지위를 얻는 언어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에게서 더 많은 선과 진리를 받아 더 온전히 살아내는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강사가 강조하는 ‘최선을 다해 영적으로 성장하라’는 권면의 힘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자기 공로나 영적 경쟁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목표는 ‘내가 얼마나 높은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이 얼마나 자유롭게 흘러가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하나의 접점이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으로부터 이어져 온 이 수도적 전통이 ‘세상보다 영적인 것을 택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좁은 길을 가라’, ‘연단을 통과하라’고 반복해 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언어를 거듭남이라는 더 내적인 구조 안에 놓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자연계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 아래 두는 것이고,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를 내려놓는 것이며,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고통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거슬러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수도원에 들어가느냐 세상 가운데 사느냐가 가장 중요한 구분도 아닙니다. 사람은 수도원 안에서도 자기애와 명예욕을 키울 수 있고, 세상 한가운데서 직업과 가정을 돌보면서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외적 장소보다 내적 질서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정한 ‘세상 포기’는 세상의 쓰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랑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천국적 인간일수록 자연계의 맡겨진 책임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그것을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3강 4부를 읽으면서 ‘나는 겨자씨가 얼마나 크게 자랐는가?’라고만 묻기보다 ‘내 사랑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물어야겠습니다. ‘내 안에 누룩이 얼마나 퍼졌는가?’, 곧 신앙이 예배 시간뿐 아니라 가정과 인간관계와 돈과 말과 생각에까지 들어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보화와 진주로 여기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기꺼이 다른 것을 포기하는지를 보면 그가 실제로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겨자씨의 비밀은 크기에 있지 않고 그 안의 생명에 있습니다. 누룩의 비밀은 양에 있지 않고 안에서부터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에 있습니다. 보화와 진주의 비밀은 값비싸다는 데만 있지 않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가치체계 전체를 바꾸어 놓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비유의 중심에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씨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고, 누룩처럼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진리의 힘도 주님에게서 오며, 우리가 발견해야 할 궁극적인 보화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성장이란 결국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었는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처럼 시작된 주님의 진리가 내 안에서 자라고, 누룩처럼 삶 전체로 퍼지고, 마침내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다른 모든 것보다 귀한 보화가 되어 삶의 우선순위 전체가 달라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사람은 억지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여’ 내려놓습니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변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거듭남이며, 이번 3강 4부에서 강사가 말하는 ‘영적 성장’을 가장 깊은 자리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3강5부
‘이긴 자’, 인 맞은 종, 14만 4천과 생명수 : 가장 밝은 빛과 주님과의 결합
3강 5부에 이르면 강의의 무게중심이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를 설명하는 데서, 그 비유들을 통해 지금까지 말해 온 ‘영적 성장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쪽으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앞선 강의에서 다룬 ‘영적 성장론’과 성화된 신앙인들의 생애를 다시 불러오면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 반복되는 ‘이기는 자’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특히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권면이 일곱 번 반복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것은 교회 시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긴 자’를 연단을 통과하여 정결해진 성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간 성도,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의 ‘인 맞은 종’과 14만 4천에 연결합니다.
여기서 먼저 이 강의의 중심 의도를 충분히 살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14만 4천이라는 숫자 자체에 호기심을 집중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14만 4천에 들어가는가?’라는 질문 아래 실제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말씀을 인내로 지키고, 시험과 연단 가운데 악과 싸우며,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마침내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성화된 신앙인들의 삶을 ‘이렇게 살아라’고 보여 주는 모델로 제시하고, 영적 성장의 길에는 출애굽에서 완덕에 이르는 과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해설할 때 14만 4천의 숫자 해석만 놓고 스베덴보리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강사가 전달하려는 실천적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다만 누구를 이기는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이겨야 할 대상은 밖에 있는 세상이나 다른 종교인이나 다른 교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스르는 악과 거짓입니다. 그리고 그 악과 거짓의 뿌리에는 proprium, 곧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며 자기를 중심에 놓으려는 인간의 고유한 자기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이기는 자’라는 말은 영적 경쟁에서 다른 성도보다 높은 등급에 올라간 사람이라기보다,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대적하여 그것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가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욱 깊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아주 현실적인 예를 듭니다. 자신이 ‘이긴 자’인지 알려면 극단적으로 말해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해 보면 알 수 있다는 취지의 설명입니다. 평소에는 자신이 상당히 성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생기면 즉시 내면의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표현은 다소 익살스럽고 강하지만, 그 안에 담긴 영적 통찰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는 평안할 때의 자기평가보다 자기 사랑이 공격받을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통해 더 잘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살펴본 ‘시험’의 의미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말씀을 듣고 ‘나는 용서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모욕을 당했을 때 용서하는 것은 다릅니다. ‘나는 겸손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었을 때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다릅니다. ‘나는 주님만 의지한다’고 고백하는 것과 모든 자연적 안전망이 흔들릴 때에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은 다릅니다. 시험은 사람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사랑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이러한 드러남이 필요합니다.
다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참았다’는 외적 행동만으로 이김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악을 이긴 것은 아닙니다. 속에서는 증오와 복수심을 품으면서 체면 때문에 참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분노가 올라왔지만 그것이 죄임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상대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려 싸울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아직 분노를 느꼈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그곳에서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악한 충동이 한 번도 올라오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올라오는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진리에 따라 거절하는 데서 진행됩니다.
따라서 ‘이긴 자’는 한 번도 넘어져 본 적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넘어질 때마다 자기 악을 보고 주님께 돌아가 다시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이 거듭될수록 처음에는 억지로 참던 사람이 점차 참는 것을 덜 힘들어하고, 마침내 상대의 선을 실제로 원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기통제와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자기통제는 겉 행동을 억제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사랑 자체의 방향을 변화시킵니다.
강사는 이어서 이러한 ‘이긴 자’를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 곧 ‘인 맞은 종’과 연결합니다. 특히 자신이 강조하는 ‘생명수의 부어짐’ 또는 생명수의 강력한 영적 체험을 인 맞은 종의 중요한 표지로 제시하며, 그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대목에서는 허드슨 테일러가 주님과의 깊은 일치와 내면에서 강물처럼 흐르는 생명을 경험했다고 고백한 내용을 소개한 뒤, 이를 ‘생명수 유입’을 경험한 인 맞은 종의 사례로 해석합니다.
바로 이 부분은 이번 재해설에서 상당히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생명수’는 주님과의 깊은 결합에서 오는 영적 생명과 충만을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 자체에는 매우 귀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이 단순한 교리적 동의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실제 자기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상태를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안다’에서 ‘주님으로 산다’로 나아가려는 갈망입니다. 수도적 영성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외적 금욕 자체가 아니라 이런 주님과의 깊은 결합이라면, 그 방향은 충분히 존중할 수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생명수’가 매우 중요한 상응이라는 점입니다. 물은 일반적으로 진리를 나타내며, 특히 ‘생명수’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 그리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영적 생명을 나타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그러므로 ‘생명수가 흐른다’는 이미지는 상응의 관점에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생명수의 유입은 반드시 어떤 특별한 감각적·신비적 체험을 경험해야만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내면에서 강물이 흐르는 것 같은 압도적인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의 영적 등급이나 천국의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체험은 실제일 수도 있고, 사람에게 큰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안전하고 본질적인 기준은 그 체험 이후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세계와 인간의 내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강렬한 감정, 환상, 음성, 황홀감, 몸의 특별한 감각이 반드시 그 자체로 천국적 상태를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그런 체험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조용히 자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행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선을 선택해 온 사람이 오히려 매우 깊은 천국적 생명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 맞은 종’을 특정한 신비 체험을 가진 극소수와 동일시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록의 ‘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어떤 외적인 표식이나 일회적 영적 체험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생명 안에 받아들여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마’ 역시 중요합니다. 얼굴은 인간의 내적 애정을 나타내고, 특히 이마는 사랑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보이지 않는 표식이 영적 신체에 찍혀 있다는 것보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진리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생명의 성격이 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더 내적입니다.
‘이름’도 말씀에서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질과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성품, 곧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그들의 사랑 안에 새겨져 있다는 뜻이 됩니다. 강사는 필라델피아 교회의 이긴 자와 14만 4천을 연결하면서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아름다운 이미지를 외적 신분 표시에서 내적 생명의 형성으로 가져갑니다.
그러면 ‘14만 4천’이라는 숫자도 자연스럽게 다시 보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14만 4천이 교회 시대 가운데 가장 밝은 빛으로 살고 연단을 완성하여 큰 환난을 면제받으며 휴거되는 특별한 성도들의 집단입니다. 강사는 이들을 천국에서 가장 큰 상급을 받는 사람들로 설명하고, 시온산 및 새 예루살렘과 연결합니다. 이 체계 안에서 14만 4천은 사실상 영적 성장의 최고 단계에 도달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숫자를 전혀 다르게 읽습니다.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은 자연적 산술로 정확히 144,000명의 특별한 사람을 세는 숫자가 아닙니다. 12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 곧 교회의 모든 것을 나타내며, 12에 12를 곱한 144는 그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여기에 천이 결합되면서 그 의미가 더욱 충만하게 표현됩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특정한 소수 엘리트 성도들의 정원이라기보다, 주님의 새 교회에 속하여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의 완전한 총체를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숫자 해석의 차이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14만 4천을 ‘가장 높은 극소수의 영적 엘리트’로 이해하면 신앙생활이 자칫 등급 경쟁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반 구원만 받아서는 안 된다. 14만 4천에 들어가야 한다’는 열망은 처음에는 거룩한 열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미세하게 자기 우월감과 결합할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다른 성도보다 더 연단받았다’, ‘나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 ‘나는 더 밝은 빛 가운데 있다’는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영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proprium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강사가 말하는 ‘더 높은 것을 사모하라’는 권면 자체를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방향을 바꾸면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은 천국에 가기 위해 더 거룩해져야 한다’가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더 많은 진리를 받아들이며, 더 온전히 이웃에게 쓰임 있기 위해 거듭나기를 원한다’가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자기의 높음을 바라보고, 후자는 주님의 선이 더 많이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큰 자’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높음은 지배의 높음이 아니라 사랑과 쓰임의 깊이입니다. 더 높은 천사는 더 많은 사람을 자기 아래 두는 천사가 아니라, 더 큰 사랑과 지혜로 더 넓은 쓰임을 행하는 천사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선과 지혜가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더욱 분명히 압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높아질수록 오히려 겸손해집니다.
이 원리를 적용하면 강사가 반복해서 말하는 ‘가장 밝은 빛’도 더욱 아름답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나는 남들보다 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더 잘 보는 사람입니다. 자연계에서도 밝은 햇빛이 들어오면 어두울 때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듯, 주님의 진리가 밝게 비칠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미세한 자기애와 거짓을 더 분명히 발견합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성장은 자기 확신을 크게 만들기보다 회개를 깊게 합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 가운데 특별히 필라델피아 교회를 높이 평가하면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큰 환난의 면제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의 이긴 자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받는 것을 14만 4천과 연결합니다. 이 해석의 역사적·종말론적 도식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다르지만,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부분은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진리를 삶에 보존하는 것입니다. 특히 시험 가운데 진리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사랑하기 어려운 순간에 사랑의 편을 선택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거짓말하면 유리한 순간에 정직을 선택하며,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복수하고 싶은 순간에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때 진리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행위 안에 ‘새겨진’ 말씀이 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참된 ‘인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사가 ‘나는 세 번까지 참는데 네 번째에는 못 참는다. 이제 네 번째까지 참아 가야 한다’는 식으로 인내를 설명하는 것도 재미있으면서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참는 횟수를 하나씩 늘려 천국 점수를 올리는 과정은 아닙니다. 더 깊은 목표는 ‘참아야 하는 나’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나’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참습니다. 다음에는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참습니다. 더 깊어지면 상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예전 같으면 상처받았을 일에도 자기 자존심이 덜 반응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랑 자체를 변화시키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긴 자’의 가장 깊은 표지는 초자연적 능력이나 특별한 체험보다 사랑의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만 사랑했는데 이제는 불편한 사람의 선도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이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했는데 이제는 이름 없이 섬기는 것을 기뻐하며, 이전에는 자기 옳음을 증명해야 했는데 이제는 상대의 구원과 공동의 선을 위해 자기 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이런 변화가 가장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번 3강 재작업에서 특별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후의 가르침’ 문제로 들어갈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지상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정도의 교리적 지식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깊은 신학을 공부하고, 어떤 사람은 매우 단순한 신앙만 알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환경 자체가 달라 기독교의 교리를 제대로 접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이 지상에서 정확한 교리 지식을 얼마나 많이 습득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사후 중간영계에서 선한 영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은 바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지상에서 몰랐던 ‘구원 공식’을 죽은 뒤에 처음 듣고 그것에 지적으로 동의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사후에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근본적으로 뒤집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계는 의지와 사랑의 기본 방향이 형성되는 곳입니다. 사후의 가르침은 이미 선을 사랑하는 사람 안에 있는 선과 그에 맞는 진리를 결합하여, 그가 천국의 질서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지상에서 단순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정직하고 자비롭게 살았지만 복잡한 교리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선한 사랑이 형성되어 있다면, 사후에는 그 선과 조화되는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은 진리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 성경과 신학을 많이 알았지만 실제 사랑이 자기애와 지배욕에 있었다면, 사후에 더 많은 진리를 설명해 준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에 맞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가르침은 ‘몰랐던 정답을 외우게 하는 보충수업’이 아닙니다. 이미 사람 안에 형성된 선한 사랑이 그 사랑에 합당한 진리를 만나 완전해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의 결합을 그렇게 중요하게 말하는 이유입니다. 선만으로는 방향을 분명히 알기 어렵고, 진리만으로는 생명이 없습니다. 선은 진리를 원하고 진리는 선을 향합니다. 천국은 바로 그 둘이 결합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오히려 이번 사경회가 그토록 강조해 온 ‘삶’의 중요성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줍니다. 사후에도 가르침이 있다고 해서 ‘그럼 이 땅에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죽은 다음 배우면 되겠네’가 되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 자체가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어떤 것을 반복하여 선택하고 사랑했는지가 사후에 어떤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자연계의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연단을 통하여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조와 스베덴보리의 사후 교육은 서로 뜻밖에 깊은 접점을 가집니다. 강사는 지상에서 연단을 통과하여 정결해지고 좋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지상에서 사람의 사랑과 의지가 형성되는 것을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봅니다. 다만 ‘완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지상에서 모든 교리적 이해와 영적 성장을 완전히 끝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향하고 선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생명의 방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후에도 천사들은 영원히 지혜와 사랑 가운데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졸업장을 받은 완성품들이 들어가는 정지된 박물관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더 많은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살아 있는 나라입니다. 천사도 영원히 더 지혜로워질 수 있고 더 깊은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기쁨은 ‘내가 얼마나 높은 천사가 되었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더 많이 받아 더 온전히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14만 4천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꾸어 놓습니다. ‘나는 그 특별한 수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나 영적 경쟁보다 ‘나는 지금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수 체험을 했는가?’보다 ‘생명수가 내 삶에서 실제 열매가 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생명수가 정말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왔다면 그 물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의 말이 부드러워지고, 판단이 자비로워지고, 자기 고집이 약해지고,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함께 깊어져야 합니다.
이 기준은 신비 체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해 줍니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깊은 기도 가운데 주님의 임재와 생명을 강력하게 경험했다면 그것은 귀한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을 자기 영적 신분을 증명하는 훈장으로 삼지 않고, 그 경험으로 인해 더 겸손하고 더 사랑하며 더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비로소 그 체험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체험은 씨가 될 수 있지만 열매는 삶에서 확인됩니다.
또한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과 같은 수도적 공동체의 역할을 생각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강사는 혼자서 영적 싸움을 잘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사경회에 다시 모여 ‘충전’하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다시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실제적입니다. 사람은 혼자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그것을 살아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공동 예배와 말씀, 서로의 간증과 권면, 함께하는 기도는 사람이 다시 방향을 주님께 돌리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은 철저히 공동체적입니다. 천사는 혼자 완전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각 천사는 자신과 상응하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천사들과 연결되고, 공동의 쓰임 안에서 더 큰 한 사람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숙을 ‘나 혼자 높은 단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미 천국의 질서와 어긋납니다. 참된 성숙은 사람을 고립시키지 않고 더 깊은 관계와 쓰임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다만 공동체 역시 사람을 대신하여 거듭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충전’되어 돌아가도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악을 만나고 그것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일은 각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강사가 ‘각자 처소에 가서 열심히 영적인 싸움을 해서 이기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집회가 목적이 아니라 삶이 목적입니다. 수도원이 목적이 아니라 거듭남이 목적입니다. 말씀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그 말씀이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3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종합하면, 강사가 말하는 ‘이긴 자’, ‘인 맞은 종’, ‘14만 4천’, ‘생명수’, ‘가장 밝은 빛’이라는 여러 표현은 모두 한 중심으로 모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 들어와 그의 사랑과 생각과 삶을 점차 변화시키고, 마침내 그 사람의 생명의 성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인’은 외적인 신분표가 아니라 생명에 새겨진 주님의 질서가 되고, ‘생명수’는 특별한 체험만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삶으로 흘러드는 것이 되며, ‘이긴 자’는 다른 성도보다 우월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해 온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기는가’입니다. 인간의 의지력이 최종적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심에는 언제나 어린양이 계십니다. 사람이 싸우기는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이기게 하는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참된 이김의 마지막 고백은 ‘내가 이겼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밝은 빛’을 추구한다는 말도 전혀 다른 울림을 갖습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주님의 빛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이며, 그 빛으로 남을 비추기 전에 먼저 자기 안의 어둠을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인 맞은 종’이 되고 싶다는 갈망도 특별한 신분을 얻으려는 갈망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곧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자기 생명에 깊이 새겨지기를 원하는 갈망이 됩니다. ‘생명수’를 원한다는 것도 특별한 신비 체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자기 안으로 흘러와 말과 행동과 관계와 쓰임 전체를 살려 내기를 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3강 5부의 가장 깊은 질문은 ‘나는 14만 4천에 속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이 지금 내 이마, 곧 내 사랑에 새겨지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특별한 생명수 체험을 했는가?’보다 ‘주님의 생명이 오늘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이긴 자인가?’보다 ‘오늘 드러난 이 악 하나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고 있는가?’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강사가 그토록 강조하는 ‘이긴 자가 되라’는 권면의 힘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가까워집니다. 종말의 어느 날 특별한 성도가 되기 위한 명령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싸움에서 주님 편에 서라는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승리들이 거듭될 때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시고, 생명수를 흐르게 하시며, 마침내 그 사람을 천국의 선과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시키십니다. 사후의 가르침조차 그때 전혀 낯선 무엇을 억지로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지상에서 주님께 향하기 시작한 그 사랑을 더욱 밝은 진리로 완성해 가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이번 3강 5부에서 ‘이긴 자’와 ‘인 맞은 종’을 바라볼 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열어 주는 가장 깊은 지평이라고 하겠습니다.
3강6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세 차례의 영적 싸움과 ‘이기는 자’ : 거듭남의 전 과정
3강 6부에서는 지금까지 다루어 온 ‘영적 성장’이 출애굽의 여정과 본격적으로 결합됩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겪은 싸움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고, 이것을 성도의 영적 성장 단계와 연결합니다. 첫 번째는 바로의 군대에 쫓기는 단계, 두 번째는 아말렉과 직접 싸우는 단계, 세 번째는 아모리 왕들과 바산 왕 옥을 비롯한 강한 세력들과 싸우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이를 요한일서의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의 단계와 연결하면서, 처음에는 악의 세력 앞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던 사람이 점차 싸울 수 있게 되고, 마침내 강한 적과도 싸워 이긴 뒤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을 ‘이기는 자’가 되어 가는 영적 성장으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이번 3강 전체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가장 흥미롭게 만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강사가 제시하는 ‘바로의 추격 = 아이 단계, 아말렉 = 청년 단계, 아모리·바산과의 전쟁 = 아비 단계’라는 일대일 도식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역사를 단순한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 이동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영적 성장과 싸움의 과정으로 읽으려 한다는 방향에서는 놀랄 만큼 가까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출애굽기는 그 깊은 속뜻에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악과 거짓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수많은 시험을 통과하여 마침내 선과 진리가 결합된 거듭난 상태로 인도되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강사의 해석을 먼저 충분히 따라가면서 그 아래에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겹쳐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첫 번째 상태는 바로의 군대에 쫓기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싸우지 못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군사적 훈련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합니다. 백성은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아직 영적으로 어린 성도가 악의 세력 앞에서 제대로 싸울 힘이 없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장면이 거듭남 초기의 인간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은 진리를 처음 받아들이고 ‘이제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전의 악한 습관과 사랑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받아들인 뒤에야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악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는 바로의 지배가 일상이었지만, 나오기 시작하자 바로가 추격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거듭남을 시작했기 때문에 싸움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싸움이 생겼다는 것이 반드시 뒤로 물러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악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싸울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 이제 서로 반대되는 두 질서가 만나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갖기 시작한 뒤 자신의 악이 더 많이 보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화를 내면서도 그것이 크게 문제라고 느끼지 않았는데, 말씀을 받아들인 뒤에는 작은 분노까지 마음에 걸립니다. 예전에는 자기 명예를 위해 행동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여겼는데, 이제는 그 동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악이 갑자기 더 많아졌기 때문이라기보다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어둠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모르면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서 ‘나는 왜 신앙생활을 할수록 더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느껴질까?’ 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거듭남의 초기에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악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배우게 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분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이어서 백성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길을 여시고 인간은 그 길을 걸어갑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이루시지만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열어 주신 길로 자유롭게 걸어가는 응답이 요구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아말렉이 공격해 왔을 때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일방적으로 도망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사람들을 선택하여 직접 싸웁니다.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들고 있고, 여호수아와 백성은 아래에서 전쟁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여 이제 악과 직접 싸울 수 있게 된 ‘청년’의 단계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악 앞에서 두려워 도망치던 사람이 이제는 훈련을 받아 싸워 이기기도 하고 때로는 지기도 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매우 중요한 거듭남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에서 반복되는 핵심 원리입니다. 사람이 ‘주님이 다 하시니까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하면 자유와 이성이 사용되지 않으며, 악을 자신의 선택으로 거절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 의지력으로 이 악을 이기겠다’고 하면 proprium에 의존하게 됩니다. 올바른 질서는 ‘나는 최선을 다해 싸우지만 실제 힘은 주님에게서 온다’입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은 이 두 요소를 아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아래에서는 여호수아가 실제로 칼을 들고 싸웁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모세의 손이 들려 있어야 합니다.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기고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깁니다. 문자 그대로만 보면 기이한 전쟁 장면이지만, 상응으로 읽으면 인간의 실제 노력과 주님에게서 오는 능력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은 아래에서 싸워야 하지만 승리의 능력은 위에서 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악습을 끊는 문제를 매우 실제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악습은 성령의 도움으로 비교적 쉽게 끊어지지만, 어떤 악습은 우리의 의지를 들여 계속 싸우면서 끊게 하시는 훈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라는 말씀을 들고, 주일 설교를 들은 뒤 제목조차 잊어버리는 데서 끝나지 말고 한 주간 그 말씀을 계속 되새기고 묵상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만합니다. 특히 ‘악습에 따라 싸움의 양상이 다르다’는 관찰은 실제 거듭남에서도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악을 한꺼번에 인간에게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차례로 드러내십니다. 어떤 외적 악은 비교적 빨리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 아래 숨어 있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뿌리는 훨씬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이라는 외적 행동을 끊는 것보다 ‘나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깊은 명예욕을 다루는 것이 훨씬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분노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내가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 사랑을 다루는 것이 더 깊은 싸움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싸움이 반드시 쉬워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은 악이 드러나면서 전쟁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강사가 말하는 세 번째 단계와도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 같은 강력한 적들과 싸웁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성숙한 ‘아비’의 단계, 곧 더욱 깊은 연단과 싸움을 통과하는 단계로 설명합니다. 초기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과 싸웠다면, 성장할수록 인간의 더 깊은 사랑과 동기 속에 숨어 있는 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초신자보다 자기 자신을 더 부족하게 느끼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상합니다. 더 오래 신앙생활을 했으니 자신이 더 거룩하다고 느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 깊은 영적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반대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이 더 깊이 들어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애와 자기 의, 자기 공로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장은 ‘나는 이제 꽤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자기 확신을 키우기보다 주님의 자비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더 깊이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이라는 강사의 구분도 영적 우열의 계급표처럼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국의 성장은 누가 더 높은 계급인가를 겨루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더 깊은 것을 열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어린 단계에는 어린 단계에서 필요한 보호와 은혜가 있고, 청년 단계에는 싸움과 힘이 있으며, 아비의 단계에는 더 깊은 지혜와 사랑이 있습니다. 어느 단계에서도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나안’의 의미가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세 차례의 싸움을 통과하고 가나안에 들어간 성도를 ‘이기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가나안은 매우 중요한 표상입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나라와 교회, 인간 안에서는 천국적·영적 생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간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의 생명의 중심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모든 싸움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넌 뒤에 오히려 가나안 족속들과 계속 싸워야 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어느 순간 완덕에 도달하면 더 이상 악과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로 이해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사람은 지상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거듭납니다. 더 나아가 사후 천국에서도 영원히 사랑과 지혜 가운데 완전해져 갑니다.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하신 주님의 선과 지혜를 끝까지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종착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기는 자’도 완성된 무결점 인간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긴 악보다 내일 더 깊은 악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악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나타날 때 누구의 편에 서는가입니다. 악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고 변호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주님의 질서에 반대됨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하는가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씀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더욱 깊어집니다. 영적 싸움에서는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proprium은 놀라울 만큼 자기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것은 ‘정의감’이라고 부르고, 내 고집은 ‘신념’이라고 부르며, 명예욕은 ‘사명감’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은 단순히 싸울 때 힘을 주는 격려문이 아니라 무엇이 실제 선이고 진리인지를 밝혀 주는 빛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에서 ‘발’이라는 표현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발은 인간의 가장 바깥 자연적 삶, 곧 실제 행위의 차원과 관계합니다. 말씀이 ‘발의 등’이라는 것은 진리가 단지 높은 신학적 사색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오늘 내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빛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이 관계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이 욕망을 따라가야 하는지 거절해야 하는지와 같은 실제 삶의 자리에서 말씀이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강사가 주일에 들은 말씀을 한 주간 계속 되새기라고 권하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영적 훈련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말씀을 단순히 반복해서 기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진리를 기억에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을 실제 상황에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어느 순간 ‘아, 바로 이 상황에서 내가 이 말씀대로 해야 하는구나’ 하는 때가 옵니다. 그때 진리가 기억에서 삶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 진리를 따라 실제로 행동할 때 진리는 선과 결합합니다.
이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입니다. 말씀을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선행만 있으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통해 방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게 하시며, 마침내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이 결합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거듭납니다.
이렇게 보면 출애굽 여정 전체는 단순한 ‘연단 코스’보다 훨씬 풍성한 의미를 갖습니다. 애굽은 속박입니다. 홍해는 이전 상태와의 결정적 분리입니다. 광야는 진리를 배우고 시험을 통하여 그것을 삶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만나와 물은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선과 진리입니다. 아말렉과 여러 적들은 거듭남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요단은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경계이고, 가나안은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형성되는 상태입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주체는 인간의 의지력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계속 반복되는 ‘여호와께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지혜로 길을 찾아 가나안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앞서 갔습니다. 만나도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반석의 물도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싸움에서는 그들이 칼을 들었지만 승리는 여호와께로부터 왔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전 과정이 주님의 역사임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애굽에서 나와야 했고, 홍해 앞에서 앞으로 걸어가야 했으며, 만나를 거두어야 했고, 아말렉과 싸워야 했으며, 요단을 건너야 했습니다. 이것이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하는 인간의 자유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돌처럼 끌고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선택하고 선을 행하게 하시며, 그 자유 안에서 주님과 결합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하는 ‘악습을 끊는 훈련’도 매우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직 마음으로는 이것을 좋아하니까 억지로 끊는 것은 위선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악을 좋아하는 욕망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이 죄임을 알고 행하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처음에는 의지와 행동 사이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싸움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해 가시면 언젠가는 이전에 좋아했던 악 자체를 싫어하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 악을 끊었다고 해서 거듭남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술이나 도박이나 음란 같은 눈에 띄는 악습을 끊는 것은 매우 귀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지배욕과 자기애, 교만, 타인에 대한 멸시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외적인 애굽에서 끌어내신 뒤 광야를 지나 더 깊은 적들과 만나게 하십니다. 이 과정이 때로 길고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영적 성장에는 ‘세월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강의 첫머리에서도 복음의 씨가 싹이 되고 이삭이 되고 마침내 익은 열매가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거듭남은 조급하게 완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시면서 수많은 상태와 경험을 통하여 사랑의 질서를 바꾸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은 기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땅 위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겨울 동안에도 뿌리에서는 일이 일어나듯,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도 계속됩니다.
이 점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중요합니다. ‘왜 저 사람은 아직 저 모양인가’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영적 여정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로의 군대 앞에서 떨고 있는 단계인지, 아말렉과 싸우다가 넘어지는 단계인지, 아니면 겉으로는 평범해 보여도 매우 깊은 내적 싸움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보존해 두신 리메인스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론은 다른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를 오래 참고 돕게 하는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이번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연단’, ‘좁은 길’, ‘자기부인’, ‘싸워 이김’을 강조해 온 것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을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하려는 강한 실천적 영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강사 자신도 성결수도회 수도사로서 공용복 선생 시절부터 이 전통 안에 함께해 온 분이라는 배경을 알고 들으면, ‘광야’와 ‘연단’이라는 말이 단순한 강단의 수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삶으로 붙들어 온 언어일 수 있음을 존중하게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수도적 연단을 한 가지 방향으로 더 깊게 가져갑니다. 연단의 목적은 ‘강한 영적 전사’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 의지가 강해져 웬만한 고난은 다 버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 깊이 알고 주님의 힘에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이 악을 이겨야 한다’고 싸웠다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 아니시면 나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때 더 힘 있게 싸울 수 있습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를 한 사람의 거듭남으로 읽으면 이것이 선명해집니다. 처음에는 바로가 너무 커 보이고 이스라엘은 너무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정이 계속될수록 사람이 강해진다기보다 ‘여호와께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점점 배우게 됩니다. 아말렉과 싸우면서도 모세의 손이 들려 있어야 하고, 여리고 앞에서는 인간의 군사 전략보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기 능력을 더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시록의 ‘이기는 자’와 다시 만납니다. 이기는 자는 자신의 영적 근육이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린양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기는 사람입니다. 계시록 전체가 결국 보여 주는 승리는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입니다. 사람은 그 승리에 참여합니다. 주님 편에 서서 싸우고, 진리를 선택하고, 악을 거절하면서 주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자기 생명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바로의 추격을 받고,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며, 더 강한 적들과의 전쟁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의 여정은 단지 성도가 몇 단계의 연단 코스를 통과하여 영적 강자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한 인간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속박에서 끌어내어 진리를 가르치시고, 시험 가운데 그 진리를 삶으로 만들게 하시며,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과 거짓을 거절하게 하시는 가운데 실제 모든 승리는 주님께로부터 받게 하시고, 마침내 선과 진리가 결합된 천국적 질서를 그 사람 안에 이루어 가시는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그리고 이 해설의 끝에서 가장 오래 남았으면 하는 것은 강사의 매우 소박한 권면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훈련을 해야 된다.’ 이 말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생명줄입니다. 광야에서는 길을 잃기 쉽고, 자기 생각이 주님의 뜻처럼 느껴질 때도 있으며, 악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그때 우리의 ‘발에 등’이 됩니다. 아주 먼 미래를 한꺼번에 비추는 탐조등이라기보다, 오늘 내딛어야 할 한 걸음을 보여 주는 등입니다. 오늘 이 사람에게 화를 낼 것인가 참을 것인가, 이 일을 정직하게 처리할 것인가 편법을 택할 것인가, 내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관계의 선을 지킬 것인가, 받은 상처를 붙들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를 비춥니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을 주님의 힘으로 옮길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애굽에서 멀어지고 가나안을 향해 갑니다.
결국 ‘이기는 자’가 되는 길은 어떤 거대한 마지막 시험에서 한 번 영웅적으로 승리하는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작은 진리 하나를 실제로 살아내고, 내일 또 하나의 악이 드러나면 그것을 주님 앞에 인정하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그러면서 점점 자기 힘보다 주님의 힘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을 오래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가나안을 향해 걸어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자기 손을 꼭 붙잡고 이끌고 계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강의 첫머리에서 함께 부른 ‘예수님 내 손을 꼭 잡아 주소서’라는 찬송이 그래서 3강 6부 전체의 영적 내용을 뜻밖에 정확하게 압축하고 있습니다.
3강7부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시온산, 14만 4천 : 천국의 장소와 상태, 그리고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
3강 7부에서는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이기는 자’의 문제가 계시록 3장 12절의 약속 가운데 특히 ‘새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집중됩니다. 강사는 생활 속의 작은 일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강조한 뒤,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 이것이 열매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넘어가, 이기는 자에게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는 약속을 풀이하기 시작합니다. 이 흐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강사에게 ‘새 예루살렘’은 단순한 종말론적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실제로 연단을 통과하고 이긴 사람이 마침내 들어가게 되는 최고의 천국적 목적지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앞부분에서 강사가 ‘이김’을 거창한 순교나 위대한 업적보다 일상생활의 작은 사랑과 연결한 것은 이번 3강 가운데서도 특히 귀하게 받아들일 만한 대목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났을 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반갑게 인사하는 것, 가족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 오히려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 배우자가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했을 때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 같은 매우 구체적인 예를 듭니다. 강사는 이것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바로 이런 작은 승리들이 쌓여 ‘익은 열매’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큼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대부분 거대한 사건보다 아주 작은 선택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평생 한두 번 경험할 극적인 사건보다 매일 수십 번 만나는 작은 선택들이 그의 사랑을 형성합니다. 말을 한마디 더 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상대의 허물을 들추어낼 것인가 덮어 줄 것인가, 나에게 돌아올 이익을 먼저 생각할 것인가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생각할 것인가, 인정받지 못했을 때 마음속으로 상대를 깎아내릴 것인가 자기애의 움직임을 보고 거절할 것인가 하는 선택들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작은 선택이 단순한 ‘착한 행동 점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 안에는 어떤 자극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반응하려는 오래된 proprium의 경향이 있습니다. 무시당하면 화를 내고 싶고, 손해를 보면 보복하고 싶으며, 자존심이 상하면 상대를 낮추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 순간 말씀의 진리가 떠오르고, 사람이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자기 욕망을 거절한다면 아주 작은 사건 속에서 실제 영적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밖에서 보면 인사 한 번 하고 지나간 일에 불과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자기애가 한 걸음 물러나고 주님의 질서가 한 걸음 들어온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큰 것보다 생활 속의 작은 것으로 승부를 보자’고 말한 것은 상당히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적 성격은 추상적인 신앙 고백이 아니라 반복되는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의지 안에 형성됩니다. 진리를 한 번 아는 것과 그 진리를 반복하여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기억에 있고, 다음에는 이해에 있으며, 실제로 행하기 시작하면 의지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기쁨이 되면 진리와 선이 결합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이런 흐름 뒤에서 강사는 계시록 3장 12절의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를 다룹니다. 강사는 이 가운데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특별히 천국의 특정한 장소와 연결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가나안 전체가 천국을 표상한다면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왕이 거하는 도성, 곧 수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역시 천국 전체가 아니라 ‘천국의 수도’이며, 이기는 자들이 특별히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상당히 구체적인 공간적 천국관을 제시합니다.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말씀을 정육면체의 실제 공간적 구조로 이해하고, 그것을 천국 안의 특별한 중심 도성으로 봅니다. 이어서 구약의 모리아산, 시온산, 예루살렘을 동일한 장소가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 설명하면서, 이것을 천국에도 적용합니다. 지상의 모형에서 모리아산이 시온산이 되고 예루살렘이 되었듯, 현재 천국의 수도가 ‘시온산’이며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면 그것이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강사의 해석 사이에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어느 쪽을 공격하거나 재단하는 방식보다 ‘말씀의 표상을 어디까지 자연적 공간으로 읽고, 어디서부터 영적 상태로 읽을 것인가’라는 차이로 설명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강사는 가나안과 예루살렘의 지리적 구조를 천국의 실제 지리적 구조에 비교적 직접적으로 대응시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가나안과 예루살렘, 시온을 모두 상응에 따라 영적인 상태와 교회,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읽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새 예루살렘’은 특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천국 안에 있는 거대한 정육면체 형태의 수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교회’를 표상합니다. 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도 어떤 물질적 도시가 우주 공간을 통과하여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이름 자체의 상응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교회를 나타내며, 특히 교회의 교리와 진리의 측면을 나타냅니다. 그곳에 성전이 있고 예배가 이루어지며, 율법과 가르침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새롭게 세우시는 교회, 곧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참된 이해와 그 이해에 따른 생명이 새롭게 형성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먼저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야 할 도시라기보다 ‘어떤 상태인가?’를 물어야 할 영적 실재입니다.
이 차이는 계시록 전체를 읽는 방법과 직결됩니다. 계시록의 성, 문, 성벽, 보석, 금, 강, 생명나무, 숫자와 치수를 자연계의 건축물과 동일한 방식으로 읽으면 계시록은 미래 천국의 지리와 건축을 묘사하는 책이 됩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읽으면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와 인간의 상태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영적 그림이 됩니다. 성벽에도 의미가 있고, 열두 문에도 의미가 있으며, 열두 기초석과 각종 보석에도 의미가 있고, 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것에도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것은 정육면체의 천국 건축물을 정확하게 측량하도록 주어진 정보라기보다, 새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완전하고 조화로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더 가깝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자연적 산술을 위한 숫자가 아니라 영적 질과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을 몇 리, 몇 킬로미터 크기의 실제 도성으로 계산하기 시작하면 문자적 형상은 선명해질 수 있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아르카나는 오히려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온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사는 시온산을 현재 천국의 수도 이름으로 이해하고, 장차 그것이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시온은 예루살렘과 아주 가까우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일반적으로 ‘시온’은 교회와 천국 가운데에서도 사랑의 선, 특히 주님을 향한 천적 사랑과 관련되고, ‘예루살렘’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교리에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시온과 예루살렘은 단순히 같은 장소의 옛 이름과 새 이름이라기보다 선과 진리,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가르침이라는 서로 구별되면서 결합되는 영적 실재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매우 아름다운 부분입니다. 성경에서 ‘시온과 예루살렘’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단순한 시적 반복만은 아닙니다. 시온은 선과 사랑에 속한 것을, 예루살렘은 진리와 신앙에 속한 것을 나타내며, 둘이 함께 언급될 때에는 교회의 선과 진리가 결합된 전체 상태가 표현될 수 있습니다. 결국 천국의 본질도 장소보다 이 결합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합당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가 천국입니다.
따라서 ‘시온산에 선 14만 4천’이라는 장면도 훨씬 깊어집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14만 4천을 ‘교회 시대 이긴 자들’, 곧 ‘인 맞은 종들’로 이해합니다.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계시록 3장 12절에서도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기록하겠다고 했으므로 양쪽을 동일한 집단으로 연결합니다. 이 논리 안에서 강사는 결국 ‘이긴 자 = 인 맞은 종 = 14만 4천 = 시온산에 서는 사람 =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하나의 체계를 세웁니다.
이 체계는 강사의 ‘핵심진리’ 전체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단순히 ‘스베덴보리와 다르다’고 지나가면 강의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강사가 왜 그토록 ‘연단’, ‘이김’, ‘완덕’, ‘익은 열매’를 강조하는지 여기에서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 위한 덕목이 아니라, 그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는 실제로 14만 4천의 ‘이긴 자’가 되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보완을 제공합니다. 계시록의 14만 4천은 정확히 그 숫자만큼의 특별한 사람을 선발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12’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 따라서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수입니다.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이 모두 이 구조 안에 있습니다. 144는 12 곱하기 12이고, 144,000은 그 의미가 충만하게 확대된 것입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구원받은 최고 등급의 정확히 144,000명’이라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새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충만한 전체를 표상한다고 보는 것이 상응에 더 가깝습니다.
강사는 실제로 ‘14만 4천이면 너무 적지 않느냐’는 질문을 예상하면서 ‘적지 않다’고 말하고, 그 숫자를 실제 예정된 수로 이해합니다. 또한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고 광야 과정에 있는 사람들과, 가나안에 들어간 14만 4천의 ‘인 맞은 종’을 구별합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체계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당히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성장을 자연적 숫자의 정원과 결합하는 순간 ‘나는 그 수 안에 들어가는가?’라는 경쟁적·선발적 신앙이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초점은 천국의 정원 제한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사람을 일정 숫자까지만 받아들이고 문을 닫는 사랑이 아닙니다. 천국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몇 명을 받아 주시는가가 아니라 사람이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었는가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기뻐하는 사람은 천국의 분위기를 기뻐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가장 깊은 분별은 ‘명단에 들어갔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랑이 그 사람의 생명이 되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계시록 3장 12절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말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나 신분증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어떤 존재의 ‘이름’은 그 존재의 질, 곧 그 성품과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에게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문자적 이름 몇 글자가 영적 이마에 쓰인다는 의미를 넘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생명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는 말씀 역시 ‘새 예루살렘에 입장할 자격증을 붙여 주겠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새 예루살렘이 주님의 새 교회와 그 교회의 진리와 선을 나타낸다면, 그 이름이 사람에게 기록된다는 것은 그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질이 그 사람 안에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 자신이 ‘새 예루살렘적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전환입니다. 질문이 ‘나는 죽어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을까?’에서 ‘새 예루살렘이 지금 내 안에 내려오고 있는가?’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1장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합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위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와 그의 생각과 사랑과 행위를 새롭게 질서 지을 때, 작은 의미에서 새 예루살렘이 그 사람 안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과 ‘새 예루살렘이 사람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면 사후에는 그 내적 상태와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천국에서 장소는 상태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영계에서는 비슷한 사랑과 진리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가까이 있고, 다른 상태의 사람들은 멀리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영계의 공간은 자연계의 물리적 공간과 동일하지 않고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공간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강사가 말하는 ‘천국의 수도’라는 표현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자연계의 서울이나 워싱턴처럼 중앙정부가 위치한 물리적 수도로 상상하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가장 중심적인 선과 진리가 가장 충만하게 나타나는 영적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는 실제 공동체들이 있고 장소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치는 거리와 좌표보다 사랑과 지혜의 상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중심’이라는 말 역시 영적으로는 주님과의 결합 상태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다’는 표현이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시온산의 주소가 어디인가?’가 아니라 ‘어린양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 것은 황금길도, 보석 성벽도, 거대한 도성도 아닙니다. 주님의 임재입니다. 그리고 그 임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14만 4천이 시온산에 서 있다는 말씀의 중심은 특별한 엘리트들이 최고급 천국의 수도에 입성했다는 데 있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교회의 충만한 전체가 어린양과 결합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또 그들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마는 얼굴 가운데에서도 특히 사랑과 의지의 상태와 관련됩니다. 얼굴이 인간의 내적 애정을 나타낸다면 이마는 그 중심적인 사랑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지적 기억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에게서 오는 선이 그들의 지배적 사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3강 7부 앞부분의 ‘작은 승리’와 뒷부분의 ‘이마에 기록된 이름’이 사실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전혀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한쪽에서는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라고 하고, 배우자가 기분 나쁘게 맞는 말을 했을 때 참으라고 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시온산과 새 예루살렘과 14만 4천이라는 거대한 계시록의 환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둘 사이에 놀라운 연결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은 바로 그런 작은 선택들을 통해 사람 안에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영적 이마에 도장이 ‘꽝’ 찍혀 천국의 특별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싶은 순간에 사랑을 선택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고 싶은 순간에 이웃의 선을 생각하고,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순간에 진리를 선택하고, 자기 공로를 주장하고 싶은 순간에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선택들이 쌓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선과 진리가 조금씩 인간의 의지 안에 새겨집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작은 게 쌓이고 쌓이고 쌓여 가지고 익은 열매가 된다’고 말한 것은 오히려 ‘이름이 기록된다’는 계시록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매우 좋은 실천적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은 단순히 적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집니다. 주님의 이름을 입술로 부르는 것과 주님의 성품이 사람의 생명에 새겨지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의 이름을 생명에 기록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정직과 겸손과 쓰임의 질서가 사람의 실제 선택 속에서 자기 것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자기 것이 된다’는 표현은 조심해야 합니다. 선 자체가 인간의 소유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선은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천사들도 자기 안의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사가 천사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기 안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것을 기쁘게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선이 ‘생명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자기 공로로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이기는 자’ 개념도 한층 부드럽고 깊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영적 전쟁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14만 4천의 제한된 정원 안에 선발되는 사람이기 전에, 날마다 자기 안의 proprium과 싸우면서 주님께서 이기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가장 큰 승리는 ‘내가 이겼다’는 의식마저 내려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승리자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영성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과도 아주 깊은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의 최종 목적은 고통을 많이 견디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영적 등급을 획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질서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중심이 되시는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광야 연단’도 자기 의지를 강철처럼 단련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자기 의지를 주님의 질서 아래 놓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됩니다. 이 사경회의 오랜 수도적 전통을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깊이 보태 줄 수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강사는 이어 ‘광야 연단 과정 속에서 자기 옷, 자기 행실을 깨끗하게 빨아서 정결해진 행실이 되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권세를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매우 귀한 핵심이 있습니다. 계시록의 ‘옷’이 인간의 삶과 관계된다는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의복은 인간의 내적인 것을 감싸고 표현하는 진리, 그리고 그 진리에 따른 외적 삶과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옷을 깨끗하게 한다는 이미지를 실제 삶의 정결과 연결하는 방향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그 옷을 사람이 자기 힘으로 깨끗하게 만들어 입장 자격을 획득한다고 이해하면 자기 공로의 위험이 생깁니다. 계시록의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합니다. 중심은 언제나 어린양입니다. 인간은 회개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악을 제거하시고 선을 주시는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나는 광야에서 충분히 연단받아 이 자격을 얻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께서 나를 수없이 넘어지는 가운데 붙들어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익은 열매’의 의미도 바꾸어 놓습니다. 익은 열매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실제 행위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자기 자신에게 먹이려고 맺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존재에게 양식이 됩니다. 따라서 영적 열매의 가장 분명한 표지는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연단을 받았는가보다 그 연단을 통해 내가 얼마나 더 온유하고 자비롭고 정직하고 유용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높은 곳’을 생각할 때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천국의 수도이고 14만 4천의 이긴 자들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높음은 지위의 높음보다 사랑과 쓰임의 깊이입니다. 가장 높은 천사는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천사가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 때문에 가장 넓은 쓰임을 기쁨으로 행하는 천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가장 낮게 여깁니다. 자기 안의 모든 선이 주님의 것임을 가장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약속은 어떤 의미에서는 ‘천국 시민권’보다 훨씬 더 큰 약속입니다. 단순히 좋은 장소에 보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와 상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사람을 외적으로 집어넣는다고 천국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안에 천국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선과 진리의 결합이 그 사람의 생명이 되어야 그 사람은 천국의 분위기 속에서 숨 쉬듯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가장 깊은 준비는 새 예루살렘이 먼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내 이해를 새롭게 하고, 그 진리에서 오는 선이 내 의지를 새롭게 하며, 그 선과 진리가 결합하여 내 실제 삶을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먼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작은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하신다는 말씀은 연단을 완성한 정확히 14만 4천 명의 특별한 성도가 천국의 물리적 수도에 입성할 자격을 얻는다는 뜻으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자기애와 거짓을 이기시고 그 사람이 자유롭게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새 교회의 질서가 그의 사랑과 삶에 새겨지며, 마침내 그 내적 상태와 상응하는 천국의 공동체 안에서 어린양과 결합하게 된다는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7부에서는 뜻밖에도 강사가 앞에서 한 아주 소박한 말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작은 게 쌓이고 쌓이고 쌓여 가지고 익은 열매가 된다.’ 이것은 거대한 새 예루살렘 환상을 우리의 오늘 하루와 연결해 줍니다. 새 예루살렘은 계시록 마지막 장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하는 그 순간, 배우자의 옳은 말을 자존심 때문에 거부하지 않는 그 순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하는 그 순간, 내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선을 먼저 생각하는 그 순간,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한 뒤 ‘내가 잘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도우셨다’고 마음을 돌리는 그 순간, 새 예루살렘의 한 조각이 우리 안으로 내려옵니다.
그렇게 작은 선택이 쌓이고,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선이 점차 사랑이 되어 갈 때 주님의 ‘이름’은 더 이상 성경책의 글자에만 있지 않고 사람의 생명에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기는 자에게 내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는 약속의 가장 아름다운 성취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새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를 새 예루살렘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3강8부
천년왕국, 첫째 부활과 ‘왕 노릇’ : 주님의 나라와 부활의 참된 의미
3강 8부에서는 앞서 다룬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14만 4천에 관한 설명에서 자연스럽게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광야의 연단 가운데 ‘자기 옷’, 곧 자기 행실을 깨끗하게 하여 익은 열매가 된 이기는 자에게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가 주어진다고 정리한 뒤, 계시록 20장 1절 이하의 천년왕국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종말론적 체계에서는 예수님께서 지상 재림하시고 아마겟돈 심판을 행하신 뒤 이 땅에 실제적인 ‘천년 그리스도 왕국’, 곧 메시아 왕국을 세우십니다. 따라서 이번 8부는 앞서의 개인적 영적 성장론이 본격적인 미래 종말론의 시간표와 결합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눈여겨볼 것은 강사가 ‘천년왕국’을 말하면서 지상의 천국을 주장하는 여러 이단적 재림주 운동과 자기 해석을 분명하게 구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이단들이 쓰는 단골 메뉴’ 가운데 하나가 영계의 천국은 말하지 않고 ‘내가 재림 메시아로 왔으니 이 땅에 지상천국을 이루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의 주님의 승천과 재림 말씀을 근거로 그러한 자칭 재림주들을 배격합니다. 이 부분은 중요합니다. 강사의 천년왕국론을 단순히 ‘지상천국론’이라는 한 단어로 묶어 버리면 강의 자체가 의도적으로 구별하고 있는 지점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여기서 한 걸음 더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참된 재림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님의 나라는 어디에 어떻게 임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재림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주님께서 자연계의 구름을 타고 지상에 다시 나타나시는 사건이고, 그 뒤 실제적인 메시아 왕국이 이 땅에 천 년 동안 세워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주님께서 다시 육체를 입고 자연계에 오시는 두 번째 성육신이나 자연적 구름을 타고 물리적으로 내려오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의 속뜻이 열리고 그 안에 계신 주님께서 신적 진리로 새롭게 나타나시는 영적 강림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큽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어느 해석은 틀리고 어느 해석은 맞다’는 식으로 처리하기보다, 두 해석이 계시록의 언어를 바라보는 층위가 다르다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강사는 계시록의 사건들을 미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날 일들의 모형과 예언으로 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사건들의 자연적 형상 안에서 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 그리고 주님의 신적 질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봅니다. 앞서 새 예루살렘을 실제 천국의 수도로 보는 것과 주님의 새 교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생겼습니다.
계시록 20장의 ‘천 년’도 같은 원리로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말씀의 숫자는 대부분 자연적 산술을 목적으로 주어진 숫자가 아닙니다. 특히 ‘천’은 정확히 1,000년이라는 시간 단위를 가리키기보다 많음, 충만함, 완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천년왕국’을 달력으로 정확히 1,000년 동안 존속하는 미래의 지상 정치체제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숫자 ‘천’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의 충만함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계시록을 읽는 방향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질문은 ‘천년왕국은 언제 시작되는가?’, ‘휴거 전인가 후인가?’, ‘누가 그 왕국에 들어가는가?’, ‘그곳에서 누가 왕 노릇하는가?’가 됩니다. 그러나 속뜻으로 들어가면 질문은 ‘주님의 통치가 인간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악과 거짓의 세력이 결박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첫째 부활은 무엇인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로 바뀝니다. 계시록의 관심이 미래 연표에서 현재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강사가 지금까지 반복해서 강조한 ‘연단’과 ‘이김’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 내적 독법이 강의의 실천적 중심을 더 깊게 살려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나라가 먼 미래에만 세워지는 것이라면 지금의 영적 싸움은 그 미래 왕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한 준비가 되기 쉽지만, 주님의 나라가 지금 인간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영적 싸움 자체가 이미 그 나라가 임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기애의 요구를 거절하고 주님의 진리에 순종할 때, 바로 그만큼 내 안에서 자기의 왕국이 물러나고 주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은 먼저 장소이기 전에 상태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사랑과 생각을 다스리는 상태가 천국이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지배하는 상태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왕이 되신다’는 것은 단지 먼 미래에 예루살렘에 왕좌를 설치하신다는 의미에 앞서, 인간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지배적인 원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왕 노릇한다’는 계시록의 표현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왕 노릇은 다른 사람 위에 서서 명령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왕 노릇’은 그런 지배와 정반대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의 권세는 다른 사람을 자기 뜻 아래 굴복시키는 권세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로 악과 거짓을 다스리고, 그 진리를 통해 선한 쓰임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리라’는 말씀을 어떤 특별한 성도들이 미래 천년왕국에서 정치적 통치권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다스린다는 그림으로만 읽으면 천국적 ‘왕권’의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은 먼저 자기 밖의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무질서를 주님의 진리 아래 두는 것입니다. 분노가 올라와도 분노가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명예욕이 올라와도 명예욕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하며, 탐욕이 올라와도 그것이 삶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다스리고 사랑이 목적이 되는 질서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강사가 강조해 온 ‘이기는 자’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진정한 왕은 다른 사람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실제 승리자는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적 진리로 악과 거짓을 굴복시키십니다. 인간은 주님의 편에 서서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웁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이 가장 깊이 아는 것은 ‘이 권세는 내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시록의 ‘보좌’도 단순한 왕실 의자로만 볼 수 없습니다. 보좌는 심판과 통치, 그리고 그 통치를 이루는 신적 진리와 관련됩니다. 사람이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권력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 악과 거짓을 분별하는 상태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천국마저 지상의 권력구조처럼 상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천국은 지상 왕국을 크게 확대해 놓은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질서와 등급과 통치가 있지만, 그 모든 질서는 사랑과 쓰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높은 천사는 낮은 천사를 지배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높은 사랑과 지혜를 가진 만큼 더 넓은 쓰임을 행합니다. 천국의 통치는 자기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가장 높은 자들은 자신을 가장 낮게 여깁니다.
이 점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영성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과도 아주 중요한 접점을 가집니다. 자기부인이 깊어질수록 ‘내가 남보다 높은 영적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욕망까지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일 연단과 금욕과 순종을 오래 한 결과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 ‘나는 이긴 자다’, ‘나는 더 높은 천국에 갈 사람이다’라는 의식이 강해진다면, 외적인 proprium은 억제했을지 몰라도 더 미세한 영적 proprium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깊은 연단을 거친 사람이 갈수록 부드러워지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이해하며,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 연단은 천국적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가 이번 사경회 전체에서 반복하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개회기도에서도 ‘자기와의 싸움’, 환경과의 싸움 가운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고, 순간순간 회개하며 감사함으로 봉사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드려집니다. 이 기도에는 이 사경회의 영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종말론적 시간표가 아무리 상세하더라도 이 공동체가 실제로 요구하는 삶은 결국 자기와 싸우고, 회개하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봉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실천적 중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 공정한 해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계시록 20장의 ‘첫째 부활’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문자적 미래주의에서는 첫째 부활을 미래 어느 시점에 죽었던 특정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먼저 부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강사의 천년왕국 체계에서도 부활은 종말의 시간표 속에 배치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부활 자체를 먼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봅니다. 인간은 자연적 육체가 죽은 뒤 오랜 세월 무덤에서 무의식적으로 기다렸다가 먼 미래에 다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적 몸이 죽으면 영은 영계에서 깨어나 계속 살아갑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 역시 무덤 속 육체가 먼저 일어나는 장면만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깊게는 사람이 자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일어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를 형성하시고, 사람이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영적 죽음과 영적 생명은 자연적 심장이 뛰느냐 멈추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가 영적 죽음이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생명이 되는 상태가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가 하나의 부활입니다. 사람이 회개할 때마다 죽은 부분에서 일어납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옮겨 갈 때 일어나고, 거짓에서 진리로 옮겨 갈 때 일어나며, 자기 공로에서 주님의 은혜로 옮겨 갈 때 일어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시록의 부활은 먼 미래의 기적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야 할 영적 현실입니다.
이것은 강사가 앞서 ‘구원이 완성되었다’, ‘광야 과정을 통과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표현한 것과도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어느 순간 인간이 완덕의 선을 넘어 더 이상 거듭날 필요가 없는 완성품이 된다고 보기보다, 주님께로 향하는 지배적 사랑이 형성되고 그 사랑이 계속해서 더 깊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천사들조차 영원히 사랑과 지혜에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구원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상당히 중요합니다. 만일 ‘나는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확신이 ‘이제 나는 익은 열매이며 저 사람은 아직 광야에 있다’는 판단으로 이어지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동기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주님만이 그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자기 위치를 확정하는 것보다 오늘 주어진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강사가 ‘14만 4천도 많은 숫자’라고 하면서 그 수를 실제로 예정된 수로 이해하는 부분도 앞서 살펴본 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응적으로 다시 읽게 됩니다. 천년이 정확한 1,000년을 반드시 뜻하지 않는 것처럼 14만 4천도 정확한 인원수를 반드시 뜻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영적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표현합니다. 이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면 계시록은 ‘몇 명’, ‘몇 년’, ‘몇 달’, ‘몇 나라’의 계산에서 벗어나 훨씬 더 깊은 영적 구조를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계시록에서 역사적 사건의 차원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계시록이 교회의 역사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도래를 다룬다고 봅니다. 다만 그 사건들은 자연계의 국제정치 시간표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심판과 교회의 영적 상태 변화라는 차원에서 이해됩니다. 이 점은 강사의 미래주의적 계시록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가장 큰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마지막 심판’은 자연계의 지구가 불타 없어지고 모든 죽은 육체가 무덤에서 일어나 한 장소에 모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심판은 영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죽은 즉시 영으로 살아 있으며, 자신의 지배적 사랑이 드러남에 따라 결국 자신과 상응하는 천국이나 지옥으로 갑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마지막 심판은 영계에 오랫동안 형성되어 있던 거짓된 영적 사회들이 분리되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사건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천년왕국을 지상의 국제정치적 왕국으로 세밀하게 구성해야 할 필요도 줄어듭니다. 주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영적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의 나라가 인간 안에 임하면 자연계에도 결과가 나타납니다. 더 정직한 사회, 더 자비로운 관계, 더 정의로운 제도, 더 선한 쓰임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천국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외적 제도를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도 인간의 사랑이 자기중심적이면 그 제도는 결국 변질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지상천국’에 대한 강사의 경계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뜻밖에 만납니다. 강사는 자칭 재림주가 나타나 ‘내가 이 땅에 지상천국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을 이단의 전형적 주장으로 경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외적 사회체제를 바꾸는 것만으로 천국을 만들 수 없다고 봅니다. 천국은 인간의 내면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기애와 지배욕이 그대로인데 완벽한 제도만 만들면 그 제도는 결국 그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나라는 먼저 ‘누가 통치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내 삶에서 돈이 왕인가, 명예가 왕인가, 내 의견이 왕인가, 아니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왕인가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는 천년왕국이 더 이상 먼 미래의 종말론적 호기심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내 안에서 어느 나라가 세워지고 있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강사가 개회 설교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를 중심으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리고 빛의 열매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강조한 것도 다시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사실 천년왕국의 가장 깊은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왕이신 나라는 사람들이 종말론적 지식을 많이 가진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빛이 그들의 삶에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나라입니다.
강사는 또한 성령께서는 ‘진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강조하고, 흐리고 세상적이며 기복적이고 정욕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순수하고 누룩이 섞이지 않는 밝은 진리’를 통해 영성이 살아나고 삶이 밝아지며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가까운 지점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고 선한 삶으로 인도하는 빛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알았는데 삶이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쉽게 정죄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아직 생명과 결합되지 못한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밝은 진리’를 무엇으로 판별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더 세밀하고 비밀스러운 종말 시간표를 알고 있다는 것이 반드시 더 밝은 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밝음은 그 진리가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얼마나 분명히 드러내고, 인간을 악에서 떠나 선한 삶으로 인도하는가와 관계합니다. 높은 진리는 높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는 오히려 자기 지성의 우월감을 키우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번 사경회 전체를 해설하면서 계속 붙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이 사경회에는 강한 종말론적 확신과 독특한 계시록 해석이 있습니다. 동시에 자기부인, 회개, 사랑, 봉사, 연단, 성결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요청도 있습니다. 이 둘 가운데 후자를 가볍게 여기면서 전자의 교리적 차이만 비판하면 이 사경회의 실제 영성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반대로 실천적 열심이 귀하다고 해서 모든 종말론적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할 일은 좋은 것은 충분히 알아보고, 문자적 해석이 속뜻을 가릴 수 있는 곳에서는 조용히 더 깊은 층을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3강 8부의 ‘천년왕국’은 폐기해야 할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주제입니다. ‘천 년이 정말 1,000년인가?’만 묻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의 통치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누가 그때 왕 노릇하는가?’에서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왕 노릇하고 있는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은 언제 일어나는가?’에서 ‘나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년왕국은 갑자기 오늘의 문제가 됩니다. 화를 내고 싶은 순간에 주님의 진리가 내 분노를 다스리면 그 작은 영역에서 주님께서 왕이 되십니다. 돈 때문에 진리를 타협하고 싶은 순간에 정직을 선택하면 그 자리에서 주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내 의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상대의 선을 먼저 생각하면 자기 왕국이 조금 무너지고 주님의 왕국이 조금 더 세워집니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을 거절할 때 첫째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강사가 말한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 익은 열매가 된다’는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천년왕국과 새 예루살렘이라는 거대한 계시록의 환상이 결국 한 사람의 작은 일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미래에 주님께서 왕이 되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먼저 오늘 자기 안에서 주님께 왕좌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먼저 말씀의 신적 진리가 자기 생각과 사랑 안으로 오시도록 받아들여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새 예루살렘의 선과 진리가 자기 삶 안으로 내려오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천년왕국의 문자적 그림을 내적 의미로 옮기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종말의 긴장감을 약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종말을 훨씬 더 가까이 가져오기 위해서입니다. 자연적 미래주의에서는 종말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날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종말’은 낡은 자기중심적 질서가 끝나고 주님의 새로운 질서가 시작될 때마다 우리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교회 전체에도 그러하고 개인에게도 그러합니다.
3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과 첫째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한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미래 어느 시점에 자연계로 다시 내려오셔서 정확히 천 년 동안 지상 정치왕국을 세우시고 특별히 선발된 성도들에게 통치권을 나누어 주신다는 시간표로만 읽기보다, 마지막 심판을 통하여 악과 거짓의 거짓된 지배가 무너지고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에서 오는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세워지며, 개인 안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일어나 주님의 선과 진리가 다스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그 속뜻이 더욱 깊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8부에서 특히 귀하게 남길 것은 ‘왕 노릇’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높은 영적 단계에 올라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지옥적 사랑들이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거듭납니다. 그러고 나면 놀랍게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도 점차 잃어버립니다. 천국적 사랑은 지배하려 하지 않고 섬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깊이 거듭난 사람은 ‘나는 왕이 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만이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 지혜도, 자기 의도, 자기 공로도 왕좌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앉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합니다. 자기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왕이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년왕국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언제입니까?’보다 ‘누가 지금 나를 다스리고 있습니까?’일 수 있습니다. 그 답이 조금씩 ‘나’에서 ‘주님’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강사가 말하는 광야의 연단과 이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욱 깊이 읽었을 때 보이는 거듭남의 길이며, 계시록의 천년왕국이 우리의 오늘과 만나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3강9부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그리고 천년왕국의 ‘세 부류’ : 부활, 천국의 다양성, 그리고 쓰임의 질서
3강 9부에서는 앞서 살펴본 천년왕국의 논의가 한층 더 구체화됩니다. 강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고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라는 말씀을 근거로 부활의 순서를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이시며, 그 다음에는 주님의 강림 때 그분에게 ‘붙은 자들’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는 자신이 앞서 세운 ‘공중 강림’과 ‘지상 재림’의 구분을 적용하여, 공중 강림 때 휴거되는 성도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이들이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한다고 설명합니다. 나머지는 둘째 부활에 속한다고 구별합니다.
이어서 강사는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세 부류’로 나눕니다. 이 구분은 그의 ‘핵심진리’ 체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왕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 왕들을 보필하는 사람이 있으며, 일반 백성으로서 땅을 분배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형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갈 때의 구조에서 찾습니다. 곧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는 일반 백성’이라는 세 부류가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세 종류의 성도들을 미리 보여 주는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번 3강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천국에 서로 다른 상태와 쓰임이 있다’는 강사의 기본 직관은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왕-왕을 보필하는 자-일반 백성’이라는 지상 왕국의 신분구조로 이해하는 데서는 상당한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질서정연하지만, 그 다양성은 특권과 신분의 서열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종류, 그리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쓰임’의 차이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먼저 강사의 논리를 조금 더 충분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에 있는 14만 4천을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부르는 데 주목합니다. 만일 익은 열매가 한 종류뿐이라면 굳이 ‘처음’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가 있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익은 열매도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그 수가 세 종류인 이유를 구약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에서 찾습니다.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은 일반 백성이라는 세 종류가 있었으므로 천국에도 세 종류의 익은 열매가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두 번째 익은 열매를 순교자들과 연결합니다.
이러한 해석법의 장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구약과 신약, 특히 출애굽-광야-가나안의 구조와 계시록을 하나의 구속사적 그림으로 연결하려고 합니다. 구약의 사건을 단순한 과거 역사로 끝내지 않고 신약의 영적 실재를 미리 보여 주는 모형으로 읽으려는 것입니다. 이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와 성막, 제사장, 레위인, 가나안, 예루살렘 등을 모두 더 깊은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표상한다’는 것이 곧 자연적 구조가 미래에 그대로 재현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한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제사장과 레위인과 일반 백성이 있었으므로 천년왕국에도 정확히 그에 상응하는 세 계급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읽는 것은 ‘모형’을 자연적 차원에서 반복시키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표상의 핵심은 자연적 형상 안에 감추어진 영적 실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질문은 ‘천국에서 누가 제사장 계급이고 누가 레위인 계급인가?’보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각각 어떤 영적 선과 진리, 그리고 쓰임을 표상하는가?’가 됩니다.
특히 말씀에서 ‘제사장’과 ‘왕’은 매우 중요한 두 축을 이룹니다. 제사장적인 것은 선과 사랑에 관계하고, 왕적인 것은 진리와 신앙에 관계합니다. 주님께서 왕이시며 동시에 제사장이신 것도 그분 안에 신적 선과 신적 진리가 완전히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표현 역시 천국에서 다른 사람 위에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특별 계급을 뜻하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왕 노릇’이라는 표현을 다시 정확하게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8부에서도 살펴보았듯, 천국적 왕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더 이상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주님의 진리가 다스리는 상태입니다. 자연적 왕은 백성을 지배하지만 영적 의미의 왕은 진리로 거짓을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은 천국에서 많은 부하를 거느린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 안에서 악과 거짓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만일 천국을 지상의 왕국처럼 상상하면 신앙생활의 동기 속에 아주 미세한 야망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반 백성보다 높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나는 첫째 부활에 들어야 한다’, ‘나는 14만 4천 안에 들어야 한다’, ‘나는 새 예루살렘의 더 높은 자리에 가야 한다’는 식입니다. 처음에는 거룩한 열심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 자기 높임이 숨어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천국에서 높아진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 위에 올라간다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길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쓰임이 넓어지고, 지혜가 클수록 다른 사람의 선을 더 섬세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높은 천사일수록 자신을 높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모든 선과 지혜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압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세 부류’라는 직관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계급’에서 ‘쓰임’으로 옮겨 읽으면 매우 풍성해집니다. 천국에는 실제로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공동체와 쓰임이 있습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천사도 있고, 어린아이를 돌보는 천사도 있으며, 새로 영계에 온 사람을 돕는 천사도 있고, 다른 공동체와 연결되는 쓰임을 맡는 천사도 있습니다. 천국 전체가 한 사람과 같은 ‘가장 큰 사람’, 곧 막시무스 호모(Maximus Homo)를 이루기 때문에 각각의 공동체는 서로 다른 기관과 기능에 상응합니다.
사람의 몸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심장과 폐와 눈과 손과 발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심장이 손보다 ‘높은 계급’이고 발이 눈보다 ‘낮은 계급’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몸의 질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 생명을 위해 서로 필요합니다. 손이 눈이 되려고 하지 않고 눈이 심장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쓰임을 완전하게 수행할 때 전체 몸이 건강합니다. 천국의 질서도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제사장, 레위인, 일반 백성이라는 구약의 세 구분 역시 ‘누가 더 높은가?’보다 ‘각각 어떤 쓰임을 맡았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사장은 성소의 예배와 관련된 쓰임을 맡았고, 레위인은 성막과 제사장의 봉사를 돕는 여러 쓰임을 맡았으며, 각 지파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자기 기업을 받아 생활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이스라엘을 이루었습니다. 누구 하나만으로 이스라엘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강사의 모형론이 훨씬 천국적으로 열립니다. ‘천국에는 세 계급이 있다’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에는 서로 다른 선과 진리와 쓰임들이 질서 있게 결합되어 있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바로 시흥영성수련원과 같은 실제 신앙 공동체를 생각할 때도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씀을 가르치고, 누군가는 기도하고, 누군가는 식사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청소하고, 누군가는 방문자를 맞으며,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동체를 유지합니다. 천국적 관점에서는 어느 쓰임이 더 화려한가보다 그 쓰임이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에서 이루어지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점은 수도생활에도 특히 중요합니다. 수도적 공동체에서는 오랜 연단을 받은 사람, 가르치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권위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공동체에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천국적 권위는 언제나 쓰임을 위한 권위여야 합니다. ‘내가 오래 연단받았으므로 너보다 높다’가 아니라 ‘내가 더 많이 받았으므로 더 많이 섬겨야 한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외적 질서가 내적 천국의 질서와 상응하게 됩니다.
이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강사는 첫째 부활을 휴거 성도들, 특히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할 어린양의 신부들과 연결하고, 그 밖의 부활을 둘째 부활로 구별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종말 시간표 안에서는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부활 자체에 대한 전제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람은 죽은 뒤 육체와 함께 무덤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마지막 날에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 육체가 죽으면 영은 영계에서 깨어나 계속 살아갑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자기 자신임을 알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말하고, 다른 영들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온전한 인간적 감각과 사고를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었던 자연적 육체가 먼 미래에 다시 살아나는 것에 중심이 있지 않고, 사람이 자연계의 몸을 벗고 영적 생명으로 일어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20장의 ‘첫째 부활’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특히 중요합니다. ‘첫째 부활’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저 무덤에서 일어나는 한 집단의 육체 부활이라기보다, 주님께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아 천국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부활의 핵심은 몸의 재조립보다 생명의 방향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표현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사람이 자연적으로 살아 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만을 생명으로 삼고 있다면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사람이 되어 갈 때 그는 영적으로 살아납니다.
따라서 거듭남 자체가 이미 ‘부활’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부활을 사후의 일에서 현재의 삶으로 끌어옵니다. ‘나는 첫째 부활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는 지금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뀝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자기중심성에서 쓰임으로, 자기 공로에서 주님의 은혜로 옮겨 가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한 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강사가 계속 강조하듯 광야 여정이 있습니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고, 어떤 시험을 통과한 뒤 더 깊은 시험을 만나며, 한때 이긴 줄 알았던 악이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강의에서도 성도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해야 하며, 오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신앙의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권면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직선적인 상승이 아닙니다.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가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고, 밝은 상태 뒤에 어두운 상태가 오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의 교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사람이 언제나 동일한 영적 고양 상태에 있다면 자신의 자유 안에서 선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때로 주님의 임재가 선명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상태를 지나면서 사람의 자유가 보존되고 그의 사랑이 실제로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드러납니다.
강사가 ‘열 개 중 하나도 응답이 없으면 주님이 싫어질 때도 있다’고 상당히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이런 인간의 실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신앙은 언제나 감정적으로 뜨겁고 확신에 가득 찬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기도 응답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붙들고, 선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과정에서 신앙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첫째 부활’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영적 특권이라기보다 사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지배적이 되어 가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예전에는 자기 뜻이 거절되면 곧바로 화를 냈지만 이제는 잠시 멈출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이제는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 하나하나가 영적 생명이 죽은 proprium을 밀어내며 일어나는 작은 부활입니다.
강사는 또한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세 번째 부류 가운데 ‘살아서 육체를 가지고 들어가는 성도들’을 말하고, 이들을 통해 천년왕국의 백성이 다시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는 강사의 천년왕국이 얼마나 구체적인 자연계의 왕국으로 이해되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부활체를 입은 사람들과 자연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한 왕국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자연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자녀를 낳아 인구가 증가한다는 그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 역시 자연적 미래 사건으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계에서는 자연계와 같은 방식의 생물학적 출산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결혼은 존재하지만 자연계처럼 육체적 자녀를 출산하는 결혼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결혼의 결실은 선과 진리의 새로운 출생, 곧 사랑과 지혜와 쓰임의 증가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열쇠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자녀가 많아지는 것을 뜻하지만 속뜻에서는 선과 진리의 증가를 나타냅니다. ‘생육’은 선의 증가와, ‘번성’은 진리의 증가와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사람들에게 자녀와 후손의 언어가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태어나고 증가하는 것을 표상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에서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것을 영적으로 읽으면 매우 아름다워집니다.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세워질수록 사랑에서 더 많은 선이 태어나고, 그 선을 섬기는 더 많은 진리가 생겨납니다. 한 가지 참된 사랑에서 수많은 선한 행동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사랑에서 인내도 나오고, 용서도 나오고, 배려도 나오고, 정직도 나오며, 필요한 때에는 바르게 권면하는 지혜도 나옵니다. 하나의 선한 사랑이 수많은 ‘자손’을 낳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근거로 ‘대환난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몰두할 때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적용하는 부분은 강사의 강한 임박한 종말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은 강의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지만, 보편적인 신앙생활의 원리로 곧바로 확대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바울의 특정 권면을 모든 시대의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한 일반적 축소 명령으로 읽으면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결혼과 가정의 선한 쓰임을 충분히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결혼 자체를 매우 높은 영적 표상으로 봅니다. 참된 결혼 사랑은 선과 진리의 결합에 상응하고, 더 깊게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부부 사랑과 가정은 단지 종말이 가까우므로 가능한 한 줄여야 할 자연적 부담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거듭남의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통해 자기애가 드러나고, 용서와 인내와 책임과 섬김을 배우며, 자녀를 통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번 강의 전체에서 강사가 가장 실제적인 연단의 예로 자주 드는 것도 부부와 가족관계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고, 배우자가 맞는 말을 했을 때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고,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이김’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정은 종말을 기다리느라 영적 삶에서 밀어내야 할 영역이라기보다 바로 그 ‘이김’이 가장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광야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둘째 부활’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특별한 성도들과 나머지 둘째 부활 사이에 시간적·신분적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계시록의 ‘첫째’와 ‘둘째’를 단순한 시간표의 두 시점으로만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은 영적 상태의 질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둘째 사망’이라는 표현과 함께 읽으면 이것이 더 분명해집니다. 자연적 죽음은 모든 사람이 겪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자연적 몸의 죽음이 아니라 악과 거짓을 자기 생명으로 선택함으로써 천국의 생명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의 복됨도 자연적 몸이 남보다 먼저 일어나는 특권보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 둘째 사망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은 서로 대조되는 영적 언어가 됩니다. 한쪽에서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나고, 다른 쪽에서는 자기애와 거짓이 그의 지배적 생명이 됩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날마다 이 두 방향 가운데 하나를 향해 자기 생명의 성격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전혀 낯선 판결이 갑자기 외부에서 내려오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평생 자유롭게 사랑해 온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임의로 천국에 넣고 다른 사람을 지옥에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 자신이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그 사람의 영원한 방향을 결정합니다. 다만 그 자유와 생명과 선을 선택할 모든 능력 자체는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원리는 강사가 말하는 ‘세 부류의 익은 열매’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열매의 차이는 천국의 계급장을 의미하기보다 사람이 받아들인 선의 서로 다른 질을 생각하게 합니다. 천국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와 형태의 사랑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이 중심인 천적 선에 속하고, 어떤 사람은 이웃 사랑이 중심인 영적 선에 속하며, 또 어떤 사람은 보다 외적인 순종과 쓰임 가운데 선을 받아들입니다. 천국에는 이러한 무수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세 천국, 곧 천적 천국,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강사의 ‘제사장-레위인-일반 백성’과 기계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두 체계의 출발점과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천국은 단조로운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깊이의 사랑과 진리를 가진 무수한 공동체들이 완전한 질서를 이루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중요한 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경쟁을 만들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는 높은 자리를 보면 올라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각 사람이 자기 사랑과 쓰임에 가장 알맞은 공동체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영적 천사가 천적 천사의 상태를 억지로 차지하려 하지 않고, 어느 공동체도 다른 공동체의 쓰임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쓰임을 행하는 기쁨 자체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급’을 이해할 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좁은 길을 가는 어려움과 함께 ‘상급의 진리’를 강조하는 흐름이 나타납니다. 상급을 말하는 것 자체는 성경적입니다. 문제는 상급을 세상의 보상체계처럼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더 많이 희생했으므로 더 높은 자리와 더 많은 권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급에 자기 공로가 섞입니다.
천국의 참된 상급은 선 자체를 행하는 기쁨입니다. 이웃을 사랑한 사람이 천국에서 받는 상급은 ‘사랑했으니 이제 특별한 지위를 받는다’가 아니라, 더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 사람의 상급은 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쓰임을 사랑한 사람의 상급은 더 넓고 깊은 쓰임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상급은 천국적 사랑의 능력이 더욱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왕 같은 제사장’의 가장 큰 상급도 왕좌가 아닙니다.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지혜롭게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의 왕과 천국의 왕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입니다. 지상의 왕은 많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지만 천국적 왕은 더 많은 사람을 섬깁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 원형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여기서 3강 전체의 ‘연단’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왜 광야에서 연단받는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왜 자기부인을 하는가? 영적 강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proprium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지배하려는 힘을 잃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말씀을 배우는가? 남보다 더 많이 알아 우월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여 실제로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 중 ‘성경은 밀어붙이는 게 아니에요. 자기를 죽여야 돼’라고 말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설교가 맞는지 틀리는지만 검사하는 신앙을 경계하면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축적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자기를 죽인다’는 표현은 다시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인격과 개성, 자유와 이성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유한 개성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보존됩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고,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며, 자기 지혜를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으려는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이 내려갈수록 오히려 주님께서 주신 참된 인간성이 살아납니다.
강사가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성경 책 가지고 싸우고 신학 가지고 싸우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진리와 교리는 중요합니다. 잘못된 진리는 삶의 방향도 잘못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목적이 사랑과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사람의 외적 기억에 머물 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생명책도 실제 천국 어딘가에 놓인 거대한 명부에 사람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책’은 사람의 내적 상태가 기록된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이 사랑하고 의도하고 생각하고 행한 모든 것은 그의 영에 새겨집니다. 그래서 사후에는 숨길 수 없습니다. 자기 생명 자체가 책이 됩니다. 어떤 외부의 심판자가 증거자료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어떤 명단에 등록되었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그 사람의 성품에 새겨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7부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질을 나타냅니다. 결국 문제는 ‘내 이름이 어느 명단에 있는가?’만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내 삶에 얼마나 기록되고 있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도, 생명책도, 왕 같은 제사장도, 세 부류의 익은 열매도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종말론의 모든 그림이 결국 인간의 생명으로 돌아옵니다.
이 점에서 이번 3강의 강사가 천년왕국과 14만 4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매우 구체적인 미래 시간표로 설명하면서도 계속해서 ‘오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라’, ‘작은 죄까지 철저하게 회개하라’, ‘자기를 죽여야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라’고 삶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교리적 구조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실제 목회적 권면에서는 다시 거듭남의 핵심에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해설할 때 어느 한쪽만 보면 안 됩니다. 천년왕국의 자연적 시간표만 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와의 차이가 매우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표를 통해 강사가 성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보면 ‘끝까지 악과 싸우라’, ‘자기를 부인하라’, ‘작은 죄도 회개하라’, ‘주님을 사랑하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라’는 실천적 중심이 보입니다. 이 중심은 충분히 존중하면서, 그 실천을 떠받치는 계시록의 문자적 도식은 상응의 빛 아래에서 한층 깊게 읽어 볼 수 있습니다.
3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왕 같은 제사장과 그를 보필하는 자와 일반 백성, 그리고 세 종류의 익은 열매라는 강사의 천년왕국 구조는 미래 지상왕국의 신분과 부활 순서를 문자적으로 확정하는 도식으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서로 다른 사랑과 진리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각각의 쓰임에 맞게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일어나 주님의 선과 진리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서로 다른 쓰임을 통해 하나의 천국을 이루게 하시는 영적 질서의 표상으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9부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것은 어쩌면 ‘세 부류’가 아니라 ‘한 나라’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제사장도 있고 레위인도 있고 땅을 분배받은 백성도 있지만 모두 하나의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몸에는 눈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지만 모두 하나의 몸입니다. 천국에도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과 자연적 천국이 있고 그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지만 모두 하나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표는 ‘나는 어느 등급까지 올라갈 것인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선과 진리를 가지고 나는 어떤 쓰임을 할 것인가?’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쓰임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쓰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잊을수록 더욱 천국적이 됩니다.
강사가 말한 ‘왕 같은 제사장’도 이렇게 읽으면 전혀 다른 빛을 띱니다. 왕관을 쓰고 다른 사람 위에 앉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먼저 자기 안의 악을 다스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왕관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영광의 왕관이 아니라 주님께 돌려 드릴 왕관입니다.
결국 첫째 부활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남보다 먼저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무엇으로 살아났는가?’일 것입니다. 자기애로 살아 있는 사람인가,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나는 사람인가. 다른 사람 위에 서고 싶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고 싶은 사람인가. 자기 공로를 쌓는 사람인가,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인정하는 사람인가.
그렇게 보면 천년왕국의 ‘세 부류’는 경쟁의 세 등급이 아니라 천국의 놀라운 다양성을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고유한 성품과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서로 다른 선과 진리와 쓰임 안에서 완성해 가십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다름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동일한 계급도, 동일한 지식도, 동일한 수도적 훈련도 아닙니다. 오직 한 분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왕’은 섬기고, ‘제사장’은 자기 공로를 내려놓으며, ‘백성’은 자기 쓰임을 기뻐합니다. 바로 그때 서로 다른 모든 사람이 한 천국을 이루게 됩니다.
3강10부
‘세 종류의 익은 열매’에서 두아디라 교회의 약속까지 : 추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
3강 10부에서는 지금까지 길게 이어져 온 ‘이기는 자’, ‘광야 연단’, ‘14만 4천’, ‘순교자’, ‘천년왕국’의 논의가 ‘세 종류의 익은 열매’라는 구조로 최종 정리되고, 이어서 계시록 2장의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약속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을 ‘처음 익은 열매’, 교회 시대와 대환난 가운데 순교하는 이들을 ‘두 번째 익은 열매’,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하여 지상 재림하신 주님께 추수되는 성도들을 ‘세 번째 익은 열매’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 세 부류를 구약의 가나안에 들어간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은 일반 백성이라는 세 부류와 연결합니다. 그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목적이 익은 열매를 추수하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도 처음이나 두 번째나 세 번째나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3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가 지금까지 왜 그토록 ‘익어야 한다’, ‘연단받아야 한다’, ‘이겨야 한다’,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는지가 여기에서 하나로 모이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체계에서 신앙생활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어느 정도까지 익었느냐에 따라 마지막 때의 추수와 천년왕국에서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는 이 강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이 핵심을 충분히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신앙의 목적은 단순히 교리를 알고 입으로 믿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가 삶 속에서 선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씨가 뿌려졌다고 농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며, 싹이 났다고 추수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되고,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시험 가운데 그것을 따라 살며, 마침내 선한 삶이 그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하는 ‘익음’은 거듭남과 매우 가까운 실천적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익은 열매’를 세 종류의 종말론적 신분집단으로 고정하기보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실제 생명으로 결합되는 것으로 읽습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매우 자주 선한 행위와 쓰임, 더 깊게는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표상합니다. 나무가 그 본질을 열매로 드러내듯 인간의 내적 사랑도 결국 삶의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신 말씀은 사람의 신앙이 무엇인지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생명을 사는지를 통해 드러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익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아직 설익은 열매와 익은 열매의 차이는 단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진리가 얼마나 의지와 결합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처음에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압니다. 다음에는 그것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말씀 때문에 억지로라도 선하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매우 귀한 시작입니다. 그런데 오랜 거듭남을 거치면서 어느 순간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그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한 것입니다. 열매가 익어 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익음’은 완벽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완덕’, ‘익은 열매’, ‘이기는 자’를 이해할 때 꼭 붙들어야 할 구별입니다. 익었다는 것은 더 이상 결점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는 방향이 주님께로 향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약함이 있고 실수도 할 수 있지만,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의 도움으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선을 억지로만 행하는 데서 조금씩 선 자체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옮겨 갑니다. 강사는 첫 번째 익은 열매인 14만 4천이 추수된 뒤 두 번째 익은 열매인 순교자들이 추수되고, 마지막으로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한 세 번째 성도들이 추수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오순절 이후 교회 시대 동안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했으나 14만 4천의 처음 익은 열매 반열에는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며, 그들의 수가 채워질 때까지 기다린다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천국의 가장 거룩한 곳부터 채워 가시는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강사의 천국관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천국이 일정한 공간적 구조와 등급을 가지고 있고, 그 높은 곳부터 자격을 갖춘 성도들이 차례로 채워진다는 그림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수도’, ‘14만 4천은 그곳에 들어가는 이긴 자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설명도 모두 이 구조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에는 분명히 높고 낮음이 있으며 세 천국과 무수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지상의 신분계급처럼 외적으로 부여되는 차이가 아닙니다. 각 사람이 받아들인 사랑과 지혜의 질에 따른 내적 차이입니다. 더 깊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랑과 상응하는 천국에 있고, 보다 외적인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 선과 상응하는 천국에 있습니다. 어느 누가 행정적으로 사람을 등급별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적 상태 자체가 그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게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거룩한 곳부터 채워진다’는 표현도 ‘먼저 선발된 엘리트들이 최고층 천국의 정원을 채운다’는 방식보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사랑과 선의 질에 따라 가장 적합한 천국의 쓰임과 공동체로 인도하신다는 방향으로 읽으면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천국의 차이는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상응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적 삶에서는 ‘저 사람보다 더 높은 곳에 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천국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을 원하는 사랑은 이미 자기 우월과 지배의 요소를 포함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자기보다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를 시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선과 쓰임 안에서 완전한 기쁨을 누립니다. 이 원리를 ‘익은 열매’에 적용하면 경쟁의 문제가 사라집니다. 사과가 포도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포도가 무화과가 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선이 충분히 열매 맺는 것입니다. 천국은 똑같은 열매만 가득한 창고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선들이 하나의 주님 아래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특히 ‘순교자’를 두 번째 익은 열매라는 고정된 신분으로 이해하는 문제도 여기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순교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숭고한 신앙의 증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 생명까지 내어놓으면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은 사람들의 충성은 가볍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죽음의 방식 자체가 자동적으로 영적 등급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그 행위가 어떤 사랑에서 나왔느냐입니다. 겉으로 같은 순교처럼 보여도 사람의 내면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것과, 자기 종교집단의 명예나 자기 의를 증명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은 내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외적 사건보다 그 안의 사랑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순교의 영적 가치는 죽음 자체에 있다기보다 그 죽음 안에 있는 사랑과 충성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순교’에는 일상적인 영적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문자적으로 목숨을 잃는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모든 거듭나는 사람은 자기 proprium의 어떤 것을 날마다 죽이는 경험을 합니다.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도 작은 죽음이고,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작은 죽음이며, 미움을 품고 싶은 욕망을 거절하는 것도 자기중심적 생명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반드시 문자적 순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는 삶 전체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이 의미에서 수도적 전통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은 거듭남과 매우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 사랑을 방해하는 자기중심적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강사는 세 번째 익은 열매를 ‘7년 대환난을 인내하고 말씀을 지키며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채 살아남아 육체로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첫째, 둘째, 셋째 익은 열매가 차례로 추수되어 천국이 채워진다고 정리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강사의 핵심은 결국 ‘끝까지 지키는 신앙’입니다. 이 실천적 중심은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끝까지’라는 말은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한때 뜨거운 신앙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평생 형성하는 지배적 사랑이 중요합니다. 한때 선한 감정을 느꼈다는 것, 한때 큰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 한때 열심히 봉사했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형성하시는 선이 그의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딘다’는 것도 인간의 이를 악문 의지력만을 의미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나는 반드시 끝까지 버티겠다’고 하면 그 힘 자체가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강의의 시작 기도에서 ‘헌신과 수고를 통한 주님의 나라에 봉사할 때 하늘로부터 주시는 새 힘으로 하게 하시고 자기 의지로 하지 않도록 붙잡아 달라’고 기도한 것은 그래서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하게 붙들 수 있는 표현입니다. ‘자기 의지로 하지 않도록.’ 수도적 연단에서 이 한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금식도 자기 의지로 할 수 있고, 철야기도도 자기 의지로 할 수 있으며, 오랜 수도생활도 자기 의지로 견딜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부인조차 ‘나는 이만큼 나를 부인했다’는 새로운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연단보다 더 깊은 연단은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해야 하지만, 실제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이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거듭남에 필요한 자유로운 협력이 사라지고, ‘내가 해냈다’고 하면 자기 공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악과 싸우면서도 승리 후에는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익은 열매’의 매우 중요한 표지일 수 있습니다. 덜 익었을 때에는 자기 선을 자랑하기 쉽습니다. ‘나는 이것을 끊었다’, ‘나는 이 시험을 이겼다’, ‘나는 이만큼 기도한다’, ‘나는 이런 깊은 진리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분명히 압니다. 열매가 익을수록 가지가 오히려 아래로 숙여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와 겸손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익은 사람은 자기가 익었다고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악을 더 섬세하게 보며 주님의 자비를 더 필요로 합니다. 다른 사람의 미숙함을 보아도 쉽게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얼마나 오랜 시간 주님께 붙들려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이번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중요한 분별 기준이 됩니다. 연단의 결과가 사람을 강퍅하게 하고 다른 신앙인들을 쉽게 ‘덜 익은 사람’, ‘광야에 있는 사람’, ‘낮은 반열’로 분류하게 한다면 그 연단에는 다시 살펴볼 부분이 있습니다. 반대로 연단을 오래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약함에 더 인내하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적게 자기 공로를 말하며, 더 많이 섬긴다면 그 열매에는 천국적인 것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공동체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연단’과 ‘자기부인’을 가장 선한 방향으로 이해하려면 결국 이 열매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강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전환을 합니다. ‘요렇게 해서 이제 살펴봤습니다’라고 지금까지의 세 종류의 익은 열매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두아디라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주신 약속으로 넘어갑니다. 두 가지 축복, 곧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계시록 2장 26절 이하의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전환은 3강 전체의 주제인 ‘이기는 자’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누가 익은 열매인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는 ‘이긴 자에게 무엇을 주시는가?’를 다루는 것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 권세가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실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역시 먼저 내적으로 읽습니다. 말씀에서 ‘나라들’, 곧 ‘만국’은 좋은 의미에서는 선들, 반대 의미에서는 악들과 관계합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영적 의미에서 진리로 악과 거짓을 질서 아래 두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은 다른 민족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받는다는 의미에 앞서, 주님의 진리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다스릴 능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서 ‘왕 노릇’의 의미와 같습니다. 천국적 권세의 첫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안에 들어오는 지옥의 영향, 곧 악과 거짓입니다.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자기 분노 하나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천국적 왕권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으면서 명예욕의 명령에는 꼼짝없이 복종한다면 그는 실제로 왕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종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아무 직위도 없는 사람이 자기 안의 탐욕과 미움과 복수심을 주님의 진리로 거절할 수 있다면 영적으로는 왕의 권세를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능력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이 권세를 이기는 자가 ‘얻어낸다’고 하기보다 주님께서 ‘주신다’고 합니다. 이어 ‘철장으로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는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미래의 성도들이 철장으로 이방 나라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는 장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열립니다. ‘철’은 자연적 차원에 있는 진리, 곧 삶과 행위에 적용되는 강한 진리를 나타낼 수 있고, ‘막대기’ 또는 ‘지팡이’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철장’은 자연적 삶의 차원에서 악과 거짓을 제어하는 진리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질그릇’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릇은 무엇인가를 담는 것이며,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진 가장 외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질그릇을 깨뜨린다는 것은 사람을 폭력적으로 파괴한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외적이고 거짓된 형식들이 무너지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자기 합리화, 잘못된 신앙의 형식, 악을 감싸고 있던 거짓된 논리들이 주님의 진리 앞에서 깨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의 거듭남에 적용하면 아주 실제적입니다. 사람은 자기 악을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질그릇’을 만듭니다. ‘다들 그렇게 산다’, ‘나는 원래 성격이 그렇다’, ‘저 사람이 먼저 잘못했다’, ‘이 정도는 죄가 아니다’, ‘목회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 ‘좋은 목적이니까 괜찮다’와 같은 합리화들입니다. 악한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는 동안 사람은 그 그릇을 소중히 지킵니다.
그런데 말씀의 진리가 강하게 들어오면 그 그릇이 깨집니다. ‘아, 이것은 상황 때문이 아니라 내 자존심 때문이었구나.’ ‘나는 정의를 위해 화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무시당한 것이 싫었던 것이구나.’ ‘사명을 위한 열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구나.’ 이런 깨달음이 일어날 때 질그릇 하나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장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무서운 통치의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의 매우 정밀한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때때로 우리를 위로하지만 때로는 아주 단단하게 우리의 거짓을 깨뜨립니다. 말씀은 언제나 부드러운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거짓을 깨뜨려야 할 때에는 철장처럼 단호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얽매고 있는 거짓을 파괴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와 가르침에서도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철장’을 문자적으로 모방하여 지도자가 사람들에게 강압적 권위를 행사하면 위험합니다.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너희를 다스릴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종교적 지배욕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드러내지만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인정하고 버리도록 이끄십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권위는 사람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힘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께 자유롭게 순종하도록 돕는 힘입니다. 좋은 목회자는 성도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좋은 영적 스승은 제자가 평생 자기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 앞에 서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수도적 전통의 ‘순종’ 역시 세심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적 순종은 훈련의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최종 목적은 인간 지도자의 뜻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순종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인간의 권위는 그 순종을 돕는 한에서만 영적 권위입니다. 이것이 지켜지면 수도적 순종은 proprium을 내려놓는 귀한 훈련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이 뒤집히면 사람을 지배하는 종교적 권력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의 두 번째 약속이 ‘새벽별’입니다. 이 표현은 이번 3강 전체의 마지막 부분을 아주 아름답게 밝힐 수 있는 상징입니다. 계시록 22장에서 주님께서는 친히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새벽별은 주님 자신과 관련됩니다.
새벽별은 밤이 완전히 끝난 뒤 뜨는 별이 아닙니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을 때 나타나 곧 아침이 올 것을 알립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상응입니다.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은 아직 완전한 낮에 있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의 어둠이 있고, 주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며, 무엇이 어떻게 될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둠 가운데 작은 빛이 나타납니다.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고 희망이 생기며 주님의 임재가 다시 느껴집니다. 이것이 새벽별의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별’은 천사적인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빛과 관련됩니다. 별이 밤하늘을 비추듯 진리의 지식은 아직 완전한 영적 낮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새벽별’은 단순한 지식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에도 이런 새벽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어떤 악과 싸웠는데 전혀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같은 시험이 반복되며, 자신이 정말 변하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전 같으면 크게 화냈을 상황에서 마음이 조금 덜 흔들립니다. 예전에는 미워했던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예전에는 억지로 했던 선을 조금 기쁘게 행합니다. 아직 대낮은 아니지만 새벽별이 뜬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새벽별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매우 개인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기는 사람에게 단지 외적 상급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진리와 사랑, 궁극적으로는 주님 자신의 임재를 주십니다. 상급의 본질이 주님입니다.
이것은 ‘상급’에 대한 이번 사경회의 강조를 매우 아름답게 보완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좁은 길을 걸으면 상급이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그 말 자체는 충분히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천국적 상급의 가장 깊은 형태는 더 높은 지위나 더 큰 통치권이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결합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왕좌’가 아니라 ‘새벽별’, 곧 주님 자신입니다. 이렇게 보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이라는 두 약속의 순서도 의미심장합니다. 먼저 악과 거짓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고, 그 다음 새벽별이 주어집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이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거절할수록 내면이 깨끗해지고, 깨끗해진 만큼 주님의 빛을 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악을 버리는 것과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과정의 두 면입니다.
단순히 악을 끊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은 아닙니다. 빈집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들어오시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미움을 버리는 목적은 단지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거짓을 버리는 목적은 단지 오류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애의 지배를 내려놓는 목적은 자아가 텅 빈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자리를 채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수도적 자기부인 역시 ‘없애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자기 욕망을 끊고, 자기 뜻을 내려놓고, 세상 즐거움을 절제하는 것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가가 중요합니다. 더 많은 주님 사랑, 더 깊은 이웃 사랑, 더 넓은 쓰임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부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업적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3강 처음부터 이어져 온 ‘광야’의 의미도 완성됩니다. 광야는 사람이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지나가는 곳입니다. 연단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사랑이 목적지입니다. 자기부인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주님과의 결합이 목적입니다. 싸움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평화가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싸움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평화와 다릅니다. 악을 모르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 아니라, 악과 싸우면서 주님만이 승리자이심을 배운 뒤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평화입니다. 이것이 거듭남 이후의 안식이며, 창세기의 일곱째 날과도 연결되는 천국적 평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3강을 통해 계속 말해 온 ‘익은 열매’는 매우 좋은 표현입니다. 다만 ‘어느 반열에 들어갈 만큼 익었는가?’보다 ‘무엇으로 익어 가고 있는가?’를 물으면 더욱 깊어집니다. 지식으로 익는가, 자기 확신으로 익는가, 종말론적 정보로 익는가가 아니라 사랑과 쓰임으로 익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무의 크기를 보시기보다 열매를 보십니다. 얼마나 오래 교회에 다녔는지, 얼마나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특별한 체험을 했는지, 얼마나 혹독한 연단을 받았는지 그 자체가 마지막 기준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더 정직해졌는가, 더 온유해졌는가, 더 쉽게 용서하게 되었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더 기뻐하게 되었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이것이 ‘익음’입니다.
그래서 3강 10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 14만 4천, 순교자인 두 번째 익은 열매,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하는 세 번째 익은 열매라는 구분과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다는 말씀은 미래 천년왕국에 들어갈 성도들을 세 신분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높은 반열에 특별한 통치권을 부여하는 종말론적 구조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고유한 선과 쓰임에 따라 거듭나게 하시고, 말씀의 진리로 그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를 깨뜨리시며, 마침내 그 모든 싸움과 자기부인의 목적이 다른 사람 위에 높아지는 데 있지 않고 새벽별이신 주님 자신과 더욱 깊이 결합되는 데 있음을 보여 주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10부에서, 더 나아가 이번 3강 전체에서 가장 귀하게 남길 수 있는 것은 강사의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절박함 자체를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절박함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줍니다. ‘나는 첫째인가, 둘째인가, 셋째인가?’를 묻기보다 ‘오늘 내 안에서 주님의 진리가 선한 열매가 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 질문은 훨씬 조용하지만 훨씬 피하기 어렵습니다. 종말 시간표는 공부할 수 있지만, 보기 싫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14만 4천의 정체를 논할 수 있지만, 내 자존심 하나 내려놓는 것은 어렵습니다. 천년왕국의 세 부류를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하기는 어렵습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구별할 수 있지만, 오늘 내 안의 죽은 사랑 하나가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의 최종적인 표지는 지식의 많음보다 사랑의 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익을수록 사람은 이상하게도 자기를 덜 높입니다. 가지가 열매 때문에 아래로 숙여지듯, 주님의 선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도 안전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싶은 욕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새벽별’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빛으로 빛나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고 오직 주님의 빛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3강이 처음부터 말해 온 ‘이기는 자’란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끝까지 버틴 사람도 아니며, 남보다 높은 영적 반열을 차지한 사람도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 앞에서 주님의 진리를 선택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며, 선을 행하되 그것을 자기 공로로 여기지 않고, 마침내 자기 삶의 중심에서 proprium이 내려오고 주님께서 왕이 되시도록 허용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단지 ‘무엇’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십니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이 약속을 그렇게 읽으면 3강 전체를 관통했던 연단과 자기부인과 이김과 익은 열매와 상급이 마지막에 한곳으로 모입니다. 광야의 끝에 있는 것은 높은 지위가 아니라 주님이며, 이김의 상급도 주님이고, 천국의 기쁨도 주님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마침내 알게 되는 가장 깊은 사실은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붙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았는데, 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of thos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thought otherwise.
해설
AC.323은 한 문장으로 된 매우 짧은 글이지만, AC.320-322에서 다룬 내용을 다음에 이어질 실제 영계 경험과 연결해 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여기서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지금과 같은 인간으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완전한 감각과 사고 능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지상 생애 동안 믿지 않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간 직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삶의 연속성이 완전하다는 것을, AC.321에서는 영의 감각과 사고와 말하는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AC.322에서는 그것을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애정, 사고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AC.323은 이제 이러한 설명을 교리적 진술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사례를 통하여 확인하겠다고 예고하는 글입니다.
특히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를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이라고 옮긴 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abode’에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살았다’는 것보다 잠시 ‘머물렀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지상의 육체적 삶은 인간 존재의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삶의 첫 단계입니다. 사람은 잠시 자연계에 머물면서 자신의 사랑과 삶의 방향을 형성하고, 육체를 벗은 뒤에는 그 생명이 영계에서 계속됩니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단절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영계로 삶의 장이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AC.320에서 사람이 사후에도 자신을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느끼는 이유도 바로 이 생명의 연속성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주장을 단순한 추론이나 신학적 사변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322에서 그는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그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AC.323에서는 지상에 있을 때, 영의 실재와 사후의 감각적 삶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사후에 어떤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를 제시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믿지 않았으니 벌을 받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관념에 갇혀 있던 사람이 육체를 벗은 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며 살아 있음을 직접 경험하면서 기존의 관념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23은 AC.320-322 전체의 중요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영을 육체보다 덜 실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영을 연기나 기운처럼 막연한 것으로 상상하거나, 사후의 삶을 의식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상태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영계는 정반대입니다. 육체가 더 실제적이고 영이 덜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영이 본래적인 인간이며, 육체는 그 영이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잠시 사용하는 가장 바깥 형체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는 것은 인간적인 감각과 사고를 잃는 일이 아니라, 그것들을 제한하던 자연적 조건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바로 앞 AC.322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육체의 눈과 귀가 실제로 보고 듣는 주체가 아니라 영이 그것들을 통하여 보고 들었던 것이라면, 육체를 벗었다고 해서 시각이나 청각 자체가 사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적 기관의 제한이 사라지면서 영적 감각은 더욱 분명하고 완전하게 활동합니다. 그래서 사후에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상에서 ‘육체가 감각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자신의 옛 관념을 바로잡는 직접적인 경험이 됩니다.
따라서 AC.323의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는 짧은 표현에는 상당히 넓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후세계를 부정했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은 존재하더라도 육체가 없으면 인간다운 감각과 사고를 할 수 없다고 여겼던 사람들까지 포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들이 저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생생한 존재를 통하여 무엇을 깨닫게 되는지를 실제 사례로 보여 주려 합니다. AC.323은 짧지만, AC.320-322의 ‘사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이며, 오히려 더 분명하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메시지를 실제 영계 경험으로 넘겨주는 하나의 문턱과 같은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