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4:25)

 

AC.436

 

그녀가 셋이라 이름 지은 ‘아들’(son)이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내용과 가인에 대해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는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가인’(Cain)으로, 체어리티는 ‘아벨’(Abel)로 상징하였습니다. 그리고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 그리고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어주시기 위해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신 것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That by her “son,” whom she named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ay be attai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tated, as well as from its being relate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For the subject as it stands in a series is as follows: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signified by “Cain”; charity, by “Abel”; and that faith in its separated state extinguished charity was signified by Cain slaying Abel. The preservation of faith in order that charity might be thereby implanted by the Lord was signified by Jehovah’s setting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lay him.

 

그 후에 주님께서 신앙을 통해 사랑의 거룩함과 그로부터 비롯된 선을 주신 것을 아다가 낳은 야발을 통해 상징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신앙의 영적인 것이 주어진 것을 그의 형제 유발을 통해, 그리고 이들로부터 자연적인 선과 진리가 나왔는데, 이것을 실라가 낳은 두발가인을 통해 상징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의 이 두 결론 구절에서 우리는 이 모든 사항의 결론, 즉 요약을 볼 수 있는데요, 즉, ‘남자와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는 이전에 아다와 실라라고 했던 새로운 교회를, ‘셋’(Seth)은 체어리티가 심기는 신앙을,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에노스’(Enosh)는 신앙을 통해 심기는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That afterwards the holy of love and the good thence derived were given by the Lord through faith was signified by Jabal whom Adah bare; and that the spiritual of faith was given, was signified by his brother Jubal; and that from these there came natural good and truth was signified by Tubal-Cain whom Zillah bare. In these two concluding verses of Genesis 4 we have the conclusion, and thus the summary, of all these matters, to this effect,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at new church which before was called Adah and Zillah, and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harity is implanted; and in the verse which now follows, by “Enosh” is signified the charity that is implanted through faith.

 

해설

 

AC.436은 창세기 4장의 마지막을 결론(conclusio)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단순한 마무리가 아니라, 지금까지 전개된 모든 상응의 사슬을 한 문장으로 압축해 보여 주는 요약입니다. 다시 말해, 가인으로 시작된 분열의 문제, 표를 통한 보존, 아다, 씰라의 회복적 징후, 그 자녀들, 곧 야발, 유발, 두발가인으로 나타난 단계적 회복이 하나의 목적인 체어리티의 회복으로 수렴함을 밝힙니다.

 

먼저 가인과 아벨의 분리와 상실의 핵심 문제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그러니까 신앙이 자기 목적화된 상태인데요, 이런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서술은, 신앙이 사랑과 분리될 때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실제로 소멸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중심 질서가 붕괴되는 영적 사건입니다.

 

가인의 표’가 의미하는 바는 제거가 아니라 보존의 섭리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계속해서 그럼에도 주님은 가인을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심’은 분리된 신앙 자체를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신앙은 사랑의 대체물이 아니라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은 체어리티를 다시 심기 위한 수단으로 남겨져야 하기 때문인데요, 여기서 이미 본문의 목적이 제시됩니다. 보존된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다시 심는 것, 바로 이것이 주님의 일관된 섭리입니다.

 

아다, 씰라와 그 자녀들인데요, 회복의 단계화를 말합니다. 이후의 전개는 회복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아다에게서 야발, 즉 천적이지요, 사랑의 거룩함과 선이, 그리고 유발, 영적이지요, 신앙의 진리와 선이, 계속해서 씰라에게서 두발가인, 이번에는 자연적인데요, 자연적 선과 진리가 태어났다는 서술은, 체어리티 회복이 천적→영적→자연적으로 단계화되어 진행됨을 뜻합니다. 이는 감정의 폭발이나 단번의 변화가 아니라, 질서 있는 재건입니다.

 

셋의 의미는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입니다. 이 모든 흐름의 요지가 셋입니다. 셋은 ‘새 신앙’을 표상하지만, 그 신앙은 가인의 신앙과 다릅니다. 셋은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 즉, 사랑을 목적으로 하고 사랑으로 귀결되는 신앙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자리가 바로잡힙니다. 신앙은 중심이 아니라 길이며, 그 길의 끝에는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즉 체어리티를 위해 신앙을 하는 것입니다.

 

에노스인데요, 이는 목적, 곧 체어리티의 실현을 말합니다. AC.436은 다음 절을 미리 밝혀 줍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6)

 

셋 다음에 에노스가 나오는데,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실제로 심어진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곧, 셋이라는 수단을 통해 에노스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구조이지요. 이것이 창4의 최종 결론입니다. 신앙은 보존되었고, 그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가 다시 실재화됩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 역사뿐 아니라 개인 거듭남의 질서를 그대로 비춥니다. 주님은 신앙을 폐기하지 않으시고 정렬하셔서, 마침내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십니다.

 

AC.436은 단언합니다. 체어리티는 결코 최종적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신앙이 왜곡되면 사랑은 가려지지만, 주님은 그 신앙을 보존하여 다시 사랑을 심으십니다. 이것이 창세기 4장의 결론이며, 모든 교회와 모든 신자의 희망입니다.

 

 

 

AC.437, 창4:25, ‘셋’(Seth)은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

bygrace.kr

 

AC.435, 창4:25, '사람(아담)과 그의 아내'라는 표현의 반복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 여기서 ‘남자’(man)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4:25)

 

AC.435

 

여기서 ‘남자’(man)와 그의 ‘아내’(wife)가 위에서 아다와 실라가 상징했던 새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아무도 겉 글자로만 봐서는 알거나 추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자와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는 전에 있었던 태고 교회와 그 후손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 곧 속뜻과 바로 다음 장(1-4)에서 남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이 낳은 셋이 완전히 다른 표현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이는 매우 분명합니다. 이 경우에는 태고 교회의 첫 번째 후손을 상징합니다. That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no one could know or infer from the literal sense, because the “man and his wife” had previously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ts posterity; but it is very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mmediately afterwards, in the following chapter (verses 1–4), the man and his wife, and their begetting Seth, are again mentioned, but in entirely different words, and in this case there is signified the fir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1-4)

 

앞의 구절에서 다른 의미가 없었다면 여기서도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첫 장에서 인간과 땅의 소산과 짐승의 창조가 다루어진 것과 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 장에서 그것들이 다시 다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첫 장에서는 영적인 사람의 창조가 다루어지는 반면, 두 번째 장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가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언급에서 이러한 반복이 있을 때마다, 그것은 항상 의미의 차이를 동반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내적 의미, 곧 속뜻으로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연결 자체가 주어진 의미를 확증하며, ‘남자[homo]와 아내’라는 표현은 문제의 모 교회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그러니까 관용적인 용어라는 점을 추가로 고려해야 합니다. If nothing else were signified in the passage before us, there would be no need to say the same thing here: in like manner as in the first chapter the creation of man, and of the fruits of the earth, and of the beasts, is treated of, and then in the second chapter they are treated of again, for the reason, as has been said, that in the first chapter it is the creation of the spiritual man that is treated of, whereas in the second chapter the subject is the creation of the celestial man. Whenever there is such a repetition in the mention of one and the same person or thing, it is always with a difference of signification, but what it is that is signified cannot possibly be known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Here, the connection itself confirms the signification that has been given, and there is the additional consideration that man [homo] and wife are general terms which signify the parent church that is in question.

 

해설

 

AC.435에서 스베덴보리는 독자들이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문자적 혼동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즉, ‘사람(아담)과 그의 아내’라는 동일한 표현이 앞에서는 태고 교회를 뜻했고, 여기서는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 교회를 뜻한다는 점입니다. 문자적 의미만 붙들고 있다면, 이것은 명백한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차이는 결코 우연도 오류도 아니며, 오히려 말씀의 본질적 구조를 보여 주는 증거라고 말입니다.

 

그는 먼저, 이 사실이 문자 의미로는 절대 알 수 없고, 오직 ‘내적 의미(internal sense, 속뜻)로만 분별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표현 ‘사람과 그의 아내’가 이미 앞부분에서는 태고 교회와 그 후손들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표현이 여기서도 동일한 교회를 뜻한다면, 성경은 불필요한 반복을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말씀은 결코 그렇게 쓰이지 않습니다. 같은 표현이 반복될 때에는, 언제나 다른 영적 상태가 다루어집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바로 다음 장, 창세기 51–4절을 지목합니다. 거기서도 다시 ‘사람과 그의 아내’와 셋의 출생이 언급되는데, 그 표현과 문맥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분명히 태고 교회의 첫 후손, 곧 가장 오래된 교회의 계보가 다시 다루어집니다. 만일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가 태고 교회라면, 창5에서 같은 내용을 다시 반복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 사실 자체가,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가 다른 교회, 곧 새 교회를 가리킨다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예로 듭니다. 두 장 모두 ‘사람의 창조’를 말하지만, 전혀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1장은 영적인 사람의 창조를, 2장은 천적인 사람의 창조를 다룹니다. 표면적으로는 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영적 차원과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4와 창5에서 반복되는 ‘사람과 그의 아내’ 역시 서로 다른 교회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해석 원리가 하나 분명히 드러납니다.

 

말씀에서 동일한 인물이나 사물이 반복될 때, 그것은 항상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다른 상태의 기술’이다.

 

이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성경은 모순으로 가득 찬 책이 됩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의 관점에서 보면, 이 반복은 오히려 질서 있고 정밀한 영적 서술 방식입니다. 말씀은 사건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는 책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 내면의 상태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AC.435의 마지막 문장은 이 해석을 결정적으로 확증합니다. ‘사람(homo)과 아내’라는 표현은 특정 개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언제나 그때그때 문제 되는 ‘부모 교회(parent church)를 가리키는 일반적, 관용적 용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동일한 교회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씀의 언어를 자연적 언어로만 오해한 결과입니다.

 

정리하면, AC.435는 이렇게 말합니다.

 

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 교회이며, 창5:1 이하의 ‘사람과 그의 아내’는 태고 교회의 첫 계보를 뜻하고, 이 둘은 시간적으로 이어진 반복이 아니라, 영적으로 서로 다른 층위의 교회 상태입니다.

 

이 설명은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가 병행했다는 해석’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말씀은 먼저 겉으로 드러난 붕괴의 역사(가인)를 끝까지 보여준 뒤, 그와 병행하여 보존되고 있던 생명의 계보(셋)를 다시 꺼내어 조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지만, 그 의미는 그때그때 다루는 교회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결국 AC.435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경의 반복은 중복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으로 내려가는 문이며, 그 문은 내적 의미 없이는 결코 열리지 않는다.

 

성경은 사건을 반복하는 책이 아니라 사람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겹겹이 비추는 책’입니다.

 

 

 

AC.436, 창4:25, '창4 전체 흐름과 결론'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 그녀가 셋이라 이름 지은

bygrace.kr

 

AC.434, 창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AC.434-437)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4:25)

 

AC.434

 

여기 ‘아담’(man)과 그의 ‘아내’(wife)는 위의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로 상징된 새 교회를, 이름이 셋(Seth)인 그녀의 ‘아들’(son)은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신앙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라는 표현은, 체어리티, 곧 가인이 분리, 소멸시킨 것을 이제 주님이 다시 이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and by her “son,” whose name was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ight be obtained. By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is signified that charity, which Cain had separated and extinguished, was now given by the Lord to this church.

 

해설

 

AC.434에서 스베덴보리는 창4:25의 문장을 교회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담이 자기 아내와’는 단순히 한 부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앞서 상세히 해석된 새 교회 전체를 뜻합니다. 곧 ‘아담’과 ‘그의 아내’는 AdahZillah로 표상된 교회, 다시 말해 천적, 영적, 자연적 차원이 모두 회복되어 질서를 갖춘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교회는 사랑(천적)과 신앙(영적), 그리고 삶의 실천(자연적)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결합된 상태로 서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태어난 ‘아들’, 곧 Seth은 ‘새 신앙’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가인의 신앙처럼 사랑과 분리된 교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으로 규정합니다. 즉, 이 신앙은 스스로 목적이 되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이자 수단입니다. 이는 신앙의 자리를 바로잡는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다시 가능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은, 단순한 대체나 보충이 아닙니다. Abel은 체어리티 자체를 표상했고, 그는 Cain—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중심에 섰던 비극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체어리티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같은 방식으로 즉각 되돌려 놓지 않으시고, 새 질서로 다시 주셨습니다. 그 새 질서가 바로 셋으로 표상된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가 회복되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깊은 섭리가 드러납니다. 태고 교회처럼 사랑이 즉각적으로 살아나는 상태는 더 이상 인류에게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신앙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신앙의 자리를 ‘수단’으로 재배치하셨습니다. 셋은 아벨의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아벨이 다시 살 수 있도록 길을 여는 신앙입니다. 이로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경쟁이나 대체가 아니라, 질서 있는 협력으로 재정립됩니다.

 

또한 ‘다른 씨(seed)라는 표현은 교회의 보존과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씨는 즉각적인 열매가 아니라, 미래를 담은 시작입니다. 주님은 체어리티를 씨로 다시 주셔서, 시간이 지나 자라고 열매 맺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와 성장을 존중하는 방식이며, 동시에 체어리티가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하는 길입니다. 셋의 계보가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씨로 보존되어, 황폐의 시대를 지나 새 교회의 근간이 됩니다.

 

결국 AC.434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새 교회는 체어리티를 잃지 않았고, 다만 얻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사랑이 곧바로 지각되던 시대에서, 이제는 신앙을 통해 사랑에 이르는 시대로 전환되었습니다. 셋은 이 전환의 이름이며,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주셨다는 은혜의 표지입니다. 이로써 말씀은 선언합니다. 체어리티는 제거될 수 없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살리기 위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