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4:25)

 

AC.435

 

여기서 ‘남자’(man)와 그의 ‘아내’(wife)가 위에서 아다와 실라가 상징했던 새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아무도 겉 글자로만 봐서는 알거나 추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자와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는 전에 있었던 태고 교회와 그 후손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 곧 속뜻과 바로 다음 장(1-4)에서 남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이 낳은 셋이 완전히 다른 표현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이는 매우 분명합니다. 이 경우에는 태고 교회의 첫 번째 후손을 상징합니다. That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no one could know or infer from the literal sense, because the “man and his wife” had previously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ts posterity; but it is very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mmediately afterwards, in the following chapter (verses 1–4), the man and his wife, and their begetting Seth, are again mentioned, but in entirely different words, and in this case there is signified the fir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1-4)

 

앞의 구절에서 다른 의미가 없었다면 여기서도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첫 장에서 인간과 땅의 소산과 짐승의 창조가 다루어진 것과 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 장에서 그것들이 다시 다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첫 장에서는 영적인 사람의 창조가 다루어지는 반면, 두 번째 장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가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언급에서 이러한 반복이 있을 때마다, 그것은 항상 의미의 차이를 동반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내적 의미, 곧 속뜻으로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연결 자체가 주어진 의미를 확증하며, ‘남자[homo]와 아내’라는 표현은 문제의 모 교회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그러니까 관용적인 용어라는 점을 추가로 고려해야 합니다. If nothing else were signified in the passage before us, there would be no need to say the same thing here: in like manner as in the first chapter the creation of man, and of the fruits of the earth, and of the beasts, is treated of, and then in the second chapter they are treated of again, for the reason, as has been said, that in the first chapter it is the creation of the spiritual man that is treated of, whereas in the second chapter the subject is the creation of the celestial man. Whenever there is such a repetition in the mention of one and the same person or thing, it is always with a difference of signification, but what it is that is signified cannot possibly be known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Here, the connection itself confirms the signification that has been given, and there is the additional consideration that man [homo] and wife are general terms which signify the parent church that is in question.

 

해설

 

AC.435에서 스베덴보리는 독자들이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문자적 혼동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즉, ‘사람(아담)과 그의 아내’라는 동일한 표현이 앞에서는 태고 교회를 뜻했고, 여기서는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 교회를 뜻한다는 점입니다. 문자적 의미만 붙들고 있다면, 이것은 명백한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차이는 결코 우연도 오류도 아니며, 오히려 말씀의 본질적 구조를 보여 주는 증거라고 말입니다.

 

그는 먼저, 이 사실이 문자 의미로는 절대 알 수 없고, 오직 ‘내적 의미(internal sense, 속뜻)로만 분별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표현 ‘사람과 그의 아내’가 이미 앞부분에서는 태고 교회와 그 후손들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표현이 여기서도 동일한 교회를 뜻한다면, 성경은 불필요한 반복을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말씀은 결코 그렇게 쓰이지 않습니다. 같은 표현이 반복될 때에는, 언제나 다른 영적 상태가 다루어집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바로 다음 장, 창세기 51–4절을 지목합니다. 거기서도 다시 ‘사람과 그의 아내’와 셋의 출생이 언급되는데, 그 표현과 문맥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분명히 태고 교회의 첫 후손, 곧 가장 오래된 교회의 계보가 다시 다루어집니다. 만일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가 태고 교회라면, 창5에서 같은 내용을 다시 반복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 사실 자체가,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가 다른 교회, 곧 새 교회를 가리킨다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예로 듭니다. 두 장 모두 ‘사람의 창조’를 말하지만, 전혀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1장은 영적인 사람의 창조를, 2장은 천적인 사람의 창조를 다룹니다. 표면적으로는 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영적 차원과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4와 창5에서 반복되는 ‘사람과 그의 아내’ 역시 서로 다른 교회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해석 원리가 하나 분명히 드러납니다.

 

말씀에서 동일한 인물이나 사물이 반복될 때, 그것은 항상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다른 상태의 기술’이다.

 

이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성경은 모순으로 가득 찬 책이 됩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의 관점에서 보면, 이 반복은 오히려 질서 있고 정밀한 영적 서술 방식입니다. 말씀은 사건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는 책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 내면의 상태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AC.435의 마지막 문장은 이 해석을 결정적으로 확증합니다. ‘사람(homo)과 아내’라는 표현은 특정 개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언제나 그때그때 문제 되는 ‘부모 교회(parent church)를 가리키는 일반적, 관용적 용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동일한 교회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씀의 언어를 자연적 언어로만 오해한 결과입니다.

 

정리하면, AC.435는 이렇게 말합니다.

 

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 교회이며, 창5:1 이하의 ‘사람과 그의 아내’는 태고 교회의 첫 계보를 뜻하고, 이 둘은 시간적으로 이어진 반복이 아니라, 영적으로 서로 다른 층위의 교회 상태입니다.

 

이 설명은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가 병행했다는 해석’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말씀은 먼저 겉으로 드러난 붕괴의 역사(가인)를 끝까지 보여준 뒤, 그와 병행하여 보존되고 있던 생명의 계보(셋)를 다시 꺼내어 조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지만, 그 의미는 그때그때 다루는 교회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결국 AC.435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경의 반복은 중복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으로 내려가는 문이며, 그 문은 내적 의미 없이는 결코 열리지 않는다.

 

성경은 사건을 반복하는 책이 아니라 사람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겹겹이 비추는 책’입니다.

 

 

 

AC.436, 창4:25, '창4 전체 흐름과 결론'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 그녀가 셋이라 이름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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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4, 창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AC.434-437)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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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4:25)

 

AC.434

 

여기 ‘아담’(man)과 그의 ‘아내’(wife)는 위의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로 상징된 새 교회를, 이름이 셋(Seth)인 그녀의 ‘아들’(son)은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신앙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라는 표현은, 체어리티, 곧 가인이 분리, 소멸시킨 것을 이제 주님이 다시 이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and by her “son,” whose name was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ight be obtained. By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is signified that charity, which Cain had separated and extinguished, was now given by the Lord to this church.

 

해설

 

AC.434에서 스베덴보리는 창4:25의 문장을 교회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담이 자기 아내와’는 단순히 한 부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앞서 상세히 해석된 새 교회 전체를 뜻합니다. 곧 ‘아담’과 ‘그의 아내’는 AdahZillah로 표상된 교회, 다시 말해 천적, 영적, 자연적 차원이 모두 회복되어 질서를 갖춘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교회는 사랑(천적)과 신앙(영적), 그리고 삶의 실천(자연적)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결합된 상태로 서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태어난 ‘아들’, 곧 Seth은 ‘새 신앙’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가인의 신앙처럼 사랑과 분리된 교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으로 규정합니다. 즉, 이 신앙은 스스로 목적이 되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이자 수단입니다. 이는 신앙의 자리를 바로잡는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다시 가능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은, 단순한 대체나 보충이 아닙니다. Abel은 체어리티 자체를 표상했고, 그는 Cain—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중심에 섰던 비극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체어리티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같은 방식으로 즉각 되돌려 놓지 않으시고, 새 질서로 다시 주셨습니다. 그 새 질서가 바로 셋으로 표상된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가 회복되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깊은 섭리가 드러납니다. 태고 교회처럼 사랑이 즉각적으로 살아나는 상태는 더 이상 인류에게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신앙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신앙의 자리를 ‘수단’으로 재배치하셨습니다. 셋은 아벨의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아벨이 다시 살 수 있도록 길을 여는 신앙입니다. 이로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경쟁이나 대체가 아니라, 질서 있는 협력으로 재정립됩니다.

 

또한 ‘다른 씨(seed)라는 표현은 교회의 보존과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씨는 즉각적인 열매가 아니라, 미래를 담은 시작입니다. 주님은 체어리티를 씨로 다시 주셔서, 시간이 지나 자라고 열매 맺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와 성장을 존중하는 방식이며, 동시에 체어리티가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하는 길입니다. 셋의 계보가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씨로 보존되어, 황폐의 시대를 지나 새 교회의 근간이 됩니다.

 

결국 AC.434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새 교회는 체어리티를 잃지 않았고, 다만 얻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사랑이 곧바로 지각되던 시대에서, 이제는 신앙을 통해 사랑에 이르는 시대로 전환되었습니다. 셋은 이 전환의 이름이며,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주셨다는 은혜의 표지입니다. 이로써 말씀은 선언합니다. 체어리티는 제거될 수 없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살리기 위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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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를 위하여 오신 참 빛 되신 주님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0, 11)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9)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115,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125, ‘천사들의 노래가’입니다.

 

 

오늘은 성탄절 당일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먼저 1225일이 성탄절이 된 유래와 그 의미를 살핀 후, 이어서 오늘 본문을 살피고자 합니다.

 

 

우선 왜 1225일인가입니다. 정말 그날 주님이 태어나셨을까요?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날짜는 나오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1225일은 초대 교회 이후 형성된 전통적 기념일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로마 문화적 배경이 있는데요, 로마에는 ‘동지’(冬至) 전후에 열리던 ‘무적의 태양(Sol Invictus) 축제라는 게 있었습니다. ‘동지’는 어둠이 가장 깊은 날이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다시 낮, 곧 빛이 길어지는 날이지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빛이 어둠을 이기는 시점으로 본 것입니다. 주님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1:9)으로 본 초대 교회는 그래서 동지의 이런 상징을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과 연결한 것입니다. 즉, ‘동지’의 특징과 로마의 ‘축제’라는 상징을 차용, 이날을 주님 오신 성탄절로 삼은 것이지요. 날짜의 정확성보다 의미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 오신 그 실제 시기를 짐작할 때도 12월 설은 좀 무리가 있는데요, 그 이유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2:8)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유대 지역에서 12월은 우기, 한랭기이며, 밤에 들에서 양을 치는 것은 봄에서 가을 사이가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만 특별히 당시 호적 명령으로 대규모 이동도 있었고요. 이런 현실적 이유로 주님의 탄생을 12월, 그것도 25일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주님 탄생의 그 가장 유력한 시기를 유대 절기와 연결지어 생각할 때, 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절기는 바로 ‘초막절(Sukkot, 티쉬리월 / 9-10)인데요,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라는 말씀에서 이 ‘거하시매’라는 말이 바로 ‘장막을 치다, 초막을 세우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은 바로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거하심, 곧 ‘임마누엘’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계심을 선포하는 절기이지요. 이 절기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는 ‘강생’(降生, 신이 인간으로 태어남)의 핵심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또한 이 절기는 ‘빛의 절기’이기도 합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대한 등불 점화가 있기 때문인데, 이는 ‘나는 세상의 빛(8:12)이라 하시는 주님의 선언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초막절에 오셨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견해가 매우 강하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실제 역사 연대기보다 섭리의 질서입니다. 주님의 강생은 자연의 한 날이 아니라 인류의 영적 밤의 한가운데에 비추어진 ‘새 날’이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1225일은 역사의 어떤 한 날짜라기보다는 인류의 ‘어둠이 가장 깊을 때 오신 빛’이라는 상응적 표지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특정 날짜보다, 인류가 가장 어두워진 ‘’에 오신 것이지요.

 

참고로, 이 ‘어둡다’는 것은 어떤 한 시대가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 완전히 깜깜한 상태를 말합니다. 교회 밖 세상인 로마는 그때가 가장 찬란한 시절이었지만, 정작 교회 안은 그때가 가장 어두운 때였습니다. 주님이 누구시며, 언제, 왜 오시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또 관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적으로 ‘새 교회’는 항상 이전 교회의 종말의 때에 일어납니다. 가인 계보의 라멕 때가 그랬고, 셋 계보의 라멕 때가 그랬지요. 태고 교회에서 고대 교회로, 고대 교회에서 유대 교회로, 그리고 유대 교회에서 기독 교회로 이어져 온 이 교회 시대마다 이런 종말과 일어남은 반복되었고, 그것이 주님의 오심, 곧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의 강생, 주님의 초림으로 지금 유대 교회에서 기독 교회로 새 교회 시대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지난 2천 년을 이어온 현 기독 교회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주님의 재림으로 종말을 고하고, 지금은 이후 영원한 ‘새 교회’로 옮겨 가고 있는 중이며, 주님 초림 당시에 침례 요한을 통해 그 준비를 하셨다면, 주님 재림의 지금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그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0, 11)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신다면, 보통은 하나님은 신이시므로 그 권능과 위엄을 떠올립니다. 과거 세상을 호령한 왕과 황제들, 영웅들의 개선이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성탄의 주님은 가장 연약한 모습, 말도 못 하는 아기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상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삶 안으로 실제로 들어오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참 역설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께서 이토록 조용히, 심지어 들에서 밤에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을 상대로 참 초라하게, 그것도 여관에 빈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 구유에 누이시다니요! 주님의 방식은 참 다릅니다. 세상 방식과 정말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주님이 부여하신 쓰임새의 삶을 살 때 주님이 일하시는 이런 방식을 반드시 따라야 하겠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경하러 오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 안에서 다시 시작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인간 안에서 하늘과 땅을 다시 연결하시는 사건, 즉. 외적 역사보다 내적 탄생이며, 또한 빛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다음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탄은 ‘하늘과 땅이 다시 이어진 날’

 

천사는 말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2:11)

 

이 말씀은 단지 한 아기의 출생을 알리는 소식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끊겨가던 하늘과 인간의 연결이 다시 열렸다는 선언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를 지은 창조주와 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존속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그저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 줄 알지만 말입니다. 존속이란 존재를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후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순간순간 존속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연결되어 자신의 생명을 공급받아 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 연결되어 있어야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창조주이신 주님과 연결된다는 것은 주님의 성품, 곧 그 신성과 연결된다는 말이며, 이는 곧 그분의 선과 진리로 연결되는 걸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세상은 그 반대인 악과 거짓으로 정반대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세상에는, 그리고 우리 안에는 더 이상 주님의 신성이 남아있지 않게 되어 인류의 생명 유지 장치가 곧 ‘삐...’ 소리를 낼 단계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이때입니다. 주님이 우리 중에 한 아기로 오신 때가 말입니다.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창조주이신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질락 말락 하는 순간에 그 연결을 다시 잇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를 다시 창조주의 생명으로 계속해서 살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이 다시 이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성탄의 빛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1:9)

 

이 빛은 머리를 밝히는 정보가 아니라, 삶을 바꾸는 빛입니다. 전자는 오용(誤用)될 경우, 세상살이에만 능하게 할 뿐이지만, 후자는 속 사람을 변화시켜 천국으로, 그래서 주님께로 인도하는 영원한 빛입니다. 그래서 성탄의 빛은 학자보다 목자에게 먼저 비쳤고, 성전보다 들판에 먼저 임한 것입니다. 주님의 빛은 많이 아는 사람보다, 살고자 하는 마음, 선해지고자 하는 작은 의지 안으로 먼저 들어옵니다. 빛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가 결과를 초래하는, 자초하는 것입니다. 햇빛이 방안에까지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햇빛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직 커튼을 걷지 않았기 때문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어찌 보면 하나의 그릇입니다. 영을 몸 안에 담고 다니는 그릇, 주님을, 그리고 주님의 빛을 담고 다니는 그릇 말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4-16)

 

우리는 생명 되신 주님을 담고 사는 생명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성탄은 ‘주님이 우리 안에 태어나시는 시작’

 

성탄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주님은 한 번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끝나신 분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이 낮아질 때, 우리 삶이 주님을 모실 자리를 낼 때, 그분은 우리 안에 다시 태어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움 대신 용서를 선택할 때, 이익보다 선을 택할 때, 진리를 알고 나서 그것을 살아내려 할 때 말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 안에서 아기로 오셨다가, 점점 주님으로 자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성탄의 비밀입니다. 구주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점점 주가 되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 곧 사랑, 빛, 선, 생명, 말씀 안에는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탄은 하루의 절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주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바라만 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특별히 오늘 주님 오신 성탄절에 저희 가운데 오셔서 저희 생각을 비추시고, 저희 선택을 인도하시며, 저희 삶 안에서 저희의 주님이 되어 주세요.

 

그때 성탄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가 되고, 주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구주가 되십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의 참된 빛이 여러분의 삶 전체에 머물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2025-12-25(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4. 2025-12-25(D5)-성탄절예배(눅2,10-11, 요1,9), ‘오늘 우리를 위하여 오신 참 빛 되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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