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4 심화

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에는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것은 겉 사람을 형성하신 것이며, 그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겉 사람도 분명 그 사람의 일부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할까요?

 

먼저 이것은 그 사람이 이전까지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AC.94의 문법상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바로 앞의 ‘그의 겉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근거로 창2:5의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을 듭니다. 따라서 질문의 초점은 ‘인간이 언제 인간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왜 겉 사람을 아직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그 답을 이해하려면 AC.90-93의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일 때의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겉 사람이 여기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겉 사람이라는 기능이나 기관이 처음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참으로 살아 있는 인간적인 것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을 지칭하는 말보다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겉 사람은 감각과 이성과 기억지식 등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속 사람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아직 AC.94가 말하는 의미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 생명에 따라 활동할 때 비로소 겉 사람도 살아 있는 인간적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겉 사람을 멸시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주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겉 사람을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AC.94의 마지막은 ‘그의 겉 사람도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감각과 이성과 기억지식과 외적인 삶 자체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아 참된 질서 안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표현은 인간의 존엄이나 인간됨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사람 안의 어떤 것이 단지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해서 곧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속 사람과 하나의 질서 안에서 활동할 때, 겉 사람까지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창2:5의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면’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과 연결되고, 이제 그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형성됩니다. 결국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사람의 내면 어느 한 부분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그의 겉 사람과 실제 삶까지 생명 있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AC.94 심화 1)

 

 

 

AC.94, 창2:7,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다’ (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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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심화

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에서 스베덴보리는 호6:2-3을 인용하면서 천적 인간의 이 상태가 ‘셋째 날’에 이루어지며, ‘셋째 날’은 말씀에서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숫자로 보면 3과 7은 전혀 다른데, 어떻게 둘이 같은 것을 뜻할 수 있을까요?

 

먼저 ‘같은 것을 뜻한다’는 말을 숫자 3과 7의 모든 상응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93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숫자가 이 특정한 상태를 나타내는 점에서 서로 만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앞에서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여섯 날 동안의 싸움이 끝나고 주님께서 쉬시는 날이며,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의 안식입니다. AC.84-88에서 이 일곱째 날은 싸움의 종결, 주님의 안식, 그리고 주님 홀로 이루신 거듭남의 완성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AC.93에서 인용한 호세아에서는 ‘셋째 날’에 이와 매우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셋째 날은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생명을 얻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사는 새로운 상태와 연결됩니다. 이어서 주님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과 같고, 그분은 땅을 적시는 ‘비’와 같이 오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93의 문맥에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 만나는 지점은 새로운 생명의 상태입니다. 일곱째 날에는 싸움이 끝나고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시작되며, 셋째 날에는 사람이 살아나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삽니다. 둘 다 이전 상태가 끝나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명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의 숫자를 단순한 산술적 수량으로만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 안에서 사람이 거듭나는 상태를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3 = 7’이라는 새로운 상응 공식을 만들어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AC.93이 직접 말하는 범위는 이 천적 인간의 상태와 관련하여 ‘셋째 날’이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호세아의 인용은 단순히 ‘셋째 날’이라는 숫자의 증거 구절이 아닙니다. ‘살리심’, ‘일으키심’, ‘주님 앞에서 삶’, ‘새벽’, ‘비’가 한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이것들은 AC.84 이후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안식과 평화, 그리고 AC.90-92에서 설명한 비와 평화의 생명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AC.93에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 같은 것을 뜻한다는 말은 두 숫자의 모든 의미가 동일하다는 선언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 둘 다 주님께서 사람을 새로운 생명의 상태로 이끄시는 완성과 일으키심을 나타낼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 세밀한 차이는 이후 스베덴보리가 각 숫자를 설명하는 곳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하지만, AC.93을 읽는 독자는 적어도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AC.93 심화 1)

 

 

 

AC.93, 창2:5-6, ‘평화의 언약과 복된 비, 셋째 날에 일으켜지는 천적 인간’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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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심화

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의 평화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평화를 갈등이나 불안이 없는 상태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평화 자체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먼저 AC.92가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 상태가 아닙니다. 그 직전까지 사람 안에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AC.91에 따르면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그 결과 싸움이 그치며 평온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평화는 단순히 싸움 하나가 없어졌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 안의 질서가 달라진 결과로 찾아오는 상태입니다.

 

AC.92가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싸움이 그쳤기 때문에 생명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는 싸움과 저항 때문에 충분히 나타나지 못하던 것이 이제 겉 사람에게까지 미치기 시작합니다. AC.91에서는 이것을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에 비유했습니다. 평화는 텅 빈 고요가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생명이 미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4부터 계속 나온 ‘안식’도 주님께서 피곤하여 일을 중단하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고 그 일이 완성되어 싸움이 그쳤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완성된 질서 안에서 이제 평화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자연의 모습으로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폭풍이 그쳤다고 해서 자연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요한 비와 이슬이 땅을 적실 때 식물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AC.90-91에서 ‘비’와 ‘안개’가 평화의 평온을 뜻하고, 그것에 의해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산출된다고 한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평화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공백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 곧 생명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상응 공식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92의 표현은 더 정확합니다. 그것은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가 어디에서 오며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그것은 사람 자신이 만들어 내는 편안함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나와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거기에서 선과 진리가 살아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AC.92에서 말하는 평화는 싸움의 부재보다 훨씬 적극적인 상태입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친 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자유롭게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 생명으로 인해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살아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단순한 ‘쉼’이 아니라 생명으로 충만한 안식입니다. (AC.92 심화 1)

 

 

 

AC.92, 창2:5-6, '평화는 싸움의 그침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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