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6 심화

1. 왜 ‘콧구멍’은 퍼셉션을 뜻하는가?

 

AC.96에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와 말씀에서 ‘콧구멍’으로 냄새로 말미암아 기분 좋은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이것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합니다.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뜻밖의 상응입니다. 눈이 이해나 인식과 관계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만, 왜 코와 냄새가 퍼셉션과 연결되는 것일까요?

 

우선 AC.96이 직접 제시하는 연결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콧구멍’에서 곧바로 퍼셉션으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콧구멍 - 냄새 - 기분 좋은 것 - 퍼셉션’이라는 흐름이 있습니다. 즉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코라는 신체기관 자체보다 냄새를 통하여 어떤 것을 기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작용입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설명된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잘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결론을 얻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내적으로 퍼셉션합니다. AC.95에서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고 했고, AC.96에서는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퍼셉션은 사랑과 신앙의 생명과 분리된 지적 판단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냄새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은 어떤 향기를 맡을 때 매번 논리적 추론을 거친 뒤에야 그것이 향기로운지 불쾌한지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냄새는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성질이 감지됩니다. 물론 자연적인 후각과 영적인 퍼셉션이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가 고대의 표현과 말씀에서 냄새와 퍼셉션을 연결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현대적인 의미의 ‘직감’이나 ‘느낌’을 곧바로 퍼셉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어떤 것에 좋은 느낌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것은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그의 사랑과 신앙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안에 놓여 있는 가운데 주어지는 퍼셉션입니다.

 

따라서 ‘콧구멍이 퍼셉션을 뜻한다’는 말을 신체기관 하나와 영적 개념 하나를 기계적으로 짝짓는 상응표로 이해하기보다, 말씀 안에서 냄새와 향기로움이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그 성질을 퍼셉션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AC.96은 그 연결을 통하여 창2:7의 ‘콧구멍’이 단순한 해부학적 표현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생명과 퍼셉션에 관계된 표현임을 밝혀 줍니다. (AC.96 심화 1)

 

 

 

AC.96, 창2:7, ‘콧구멍과 향기와 퍼셉션,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불어넣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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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5 심화

1. 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할 뿐이고,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가?

 

AC.9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하지만,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만으로는 왜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왜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일까요?

 

이 말을 신앙의 가치를 낮추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생명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사람을 ‘준비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준비는 없어도 되는 단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이해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배우며, 주님과 말씀에 속한 것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거듭남의 실제 과정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진리를 이해하고 믿는 것과 그 진리가 그의 의지와 사랑의 생명이 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선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이해 안에 있지만 아직 사람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사랑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합니다.

 

앞의 AC.83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95의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은 신앙이 없어지고 사랑만 남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사람이 알고 믿는 진리가 그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과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AC.91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와도 연결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할 때 싸움이 그칩니다. 단지 이해로 ‘순종해야 한다’고 아는 것만으로는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바람 자체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 순종은 억지 복종이 아니라 삶이 됩니다. AC.85에서 주님의 뜻이 천적 인간의 ‘바람’이 된다고 했던 것도 이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사랑은 여기서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자신의 삶으로 삼는가와 관련됩니다. AC.95가 사랑을 의지와 나란히 놓아 ‘사랑 또는 의지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이 점을 보여 줍니다. 진리가 이해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의지와 사랑 안에서 살아날 때, 그것은 실제 삶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생명은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은 사람을 ‘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은 신앙과 사랑의 경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말합니다. 진리는 사람을 준비하고 인도하지만, 마침내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의 생명이 되어 사람이 그것을 원하고 살아갈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룹니다. AC.95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을 비로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명의 질서가 겉 사람에까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AC.95 심화 1)

 

 

 

AC.95, 창2:7, ‘신앙의 생명은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은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을 다룹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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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심화

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에는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것은 겉 사람을 형성하신 것이며, 그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겉 사람도 분명 그 사람의 일부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할까요?

 

먼저 이것은 그 사람이 이전까지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AC.94의 문법상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바로 앞의 ‘그의 겉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근거로 창2:5의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을 듭니다. 따라서 질문의 초점은 ‘인간이 언제 인간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왜 겉 사람을 아직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그 답을 이해하려면 AC.90-93의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일 때의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겉 사람이 여기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겉 사람이라는 기능이나 기관이 처음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참으로 살아 있는 인간적인 것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을 지칭하는 말보다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겉 사람은 감각과 이성과 기억지식 등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속 사람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아직 AC.94가 말하는 의미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 생명에 따라 활동할 때 비로소 겉 사람도 살아 있는 인간적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겉 사람을 멸시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주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겉 사람을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AC.94의 마지막은 ‘그의 겉 사람도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감각과 이성과 기억지식과 외적인 삶 자체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아 참된 질서 안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표현은 인간의 존엄이나 인간됨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사람 안의 어떤 것이 단지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해서 곧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속 사람과 하나의 질서 안에서 활동할 때, 겉 사람까지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창2:5의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면’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과 연결되고, 이제 그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형성됩니다. 결국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사람의 내면 어느 한 부분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그의 겉 사람과 실제 삶까지 생명 있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AC.94 심화 1)

 

 

 

AC.94, 창2:7,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다’ (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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