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5전반부에는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후반부의 속건제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성물에 잘못을 범한 사람은 그 잘못을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일을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실제 손상이 발생했다면 실제 회복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회개를 마음의 상태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내가잘못했다는것을깨달았고하나님께용서를구했으니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의 악이 다른 사람이나 어떤 질서에 실제 손상을 입혔다면 그 결과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훔친 물건은 여전히 상대에게 없고, 거짓말로 훼손된 명예는 여전히 손상되어 있으며, 내가 회피한 책임은 누군가가 대신 짊어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회개는 가능한 경우 그 손상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 점에서 속건제는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제사입니다. 회개가 진실한지는 감정의 강도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많이 흘리고 죄책감을 크게 느끼면서도 실제 행동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감정 표현은 크지 않아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돌려줄 것을 돌려주며 다시 같은 악을 행하지 않도록 삶을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레5의 속건제는 후자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특히 ‘오분의일을더하여’라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49(창6:15)는 레5: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보상 후 더해지는 오분의 일을 말씀에서 ‘다섯’이 어떤 것 또는 조금을 의미하는 사례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548(계9:5)은 레5:16을 비롯하여 율법에서 오분의 일을 더하도록 한 여러 경우를 직접 열거하면서, 양과 관련된 이 ‘오분의일’이 ‘충분한만큼’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규정을 단순한 고대의 벌금제도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잘못을 대충 덮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기에 충분하도록 회복하려는 태도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잘못에는반드시20퍼센트를더갚아야한다’는 식으로 오늘날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상응의 핵심은 숫자를 현대의 계산식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가 최소한의 면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과했으니됐지’, ‘원금은돌려줬으니됐지’가 아니라 내가 일으킨 손상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가능한 범위에서 충분히 바로잡으려는 마음입니다.
물론 모든 손상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직접 사과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오래전의 말 한마디가 남긴 상처를 완전히 없앨 수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찾는 것입니다. 같은 악을 반복하지 않고, 비슷한 상황에서 이제는 진실을 선택하며, 과거에 해쳤던 종류의 이웃을 이제는 돕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과거 복원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유 안에서 삶의 방향이 실제로 바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레5에서 ‘자복’과 ‘보상’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자복은 속의 인정이고 보상은 가능한 경우 그 인정이 겉의 삶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속 사람에서 ‘내가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한 것이 겉 사람의 행동에서는 ‘그러므로내가바로잡겠습니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입니다.
레5의 속건제는 우리에게 아주 간단하지만 피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용서를구한그일가운데아직내가바로잡을수있는것이남아있는가?’입니다. 있다면 회개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의 사함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고 가능한 것을 바로잡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힘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에서 시작된 회개가 ‘잘못을보상하되’에까지 이르는 것, 그것이 레5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SW.7레5심화2)
레5의 속죄제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 가운데 하나는 제물이 사람의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형편이 되는 사람은 어린양이나 염소를 드리지만, ‘그의힘이어린양을바치는데에미치지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조차 감당할 수 없으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가져오면 됩니다. 실제로 레5:7과 11은 경제적 능력에 따라 이 대체 제물을 명시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이 가진 외적인 재산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어린양을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비둘기의 길이 있고,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고운 가루의 길이 있습니다. 제물의 외적 크기는 달라도 ‘제사장이그를위하여속죄한즉그가사함을받으리라’는 결론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가진 상태 안에서 당신께 돌아올 길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833(창15:10)은 레5:7-8을 직접 인용하면서 속죄제에 사용된 비둘기 역시 제사의 상응 질서 안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값싼 제물을 드린 사람의 예배가 값비싼 제물을 드린 사람보다 영적으로 열등하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각 제물은 서로 다른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가격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실제로 응답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지막 단계입니다. 동물도 새도 없이 ‘고운가루’만으로 속죄제가 됩니다. 이것은 레위기의 제사에서 피가 매우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개별 속죄제에 반드시 동물의 피가 있어야만 사함이 가능했다고 단순화할 수 없음을 본문 자체가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레5:11-13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며, 제사장은 그것의 한 움큼을 제단에서 불사르고 그를 위하여 속죄하며, 본문은 똑같이 ‘그가사함을받으리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속죄 이해와도 잘 어울립니다. 구원의 능력이 동물의 물질적 피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제사가 주님의 신적 구원 역사와 인간의 정결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제물은 달라질 수 있지만 실제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라고 해서 주님의 정결과 사함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무엇인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더 좋아져야 하고, 마음이 더 깨끗해져야 하고, 기도도 더 잘해야 하며, 회개도 더 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완성된 사람이 주님께 가져가는 제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완성해 가시도록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그분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5의 제물은 점점 작아지지만 사함은 작아지지 않습니다. 어린양을 가진 사람에게도 길이 있고, 비둘기밖에 없는 사람에게도 길이 있으며, 한 줌의 고운 가루밖에 없는 사람에게도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제물의 시장가격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진실하게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오는가입니다. 거듭남의 문턱에는 ‘이만큼가진사람만들어올수있다’는 표지판이 없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까지 정결과 사함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 레5의 아름다운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입니다. (SW.7레5심화1)
레위기 5장은 4장의 속죄제를 이어가면서 거듭남의 길을 한층 더 실제적인 삶 속으로 끌어옵니다. 레4에서 반복된 핵심 표현은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이었습니다. 인간은 먼저 자기 안의 악을 보아야 하며, 말씀의 진리가 그것을 비출 때 비로소 회개가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레5에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중하나에허물이있을때에는아무일에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 깨닫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죄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 후반의 속건제에 이르면 한 걸음이 더 이어집니다. 잘못으로 손상된 것을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레5전체에는 ‘깨달음→자복→정결→보상→사함’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흐름이 있습니다.
1절로 4절은 그 회개가 필요한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을 보여 줍니다. 알고 있는 사실을 증언하지 않는 것, 부정한 짐승이나 사람의 부정에 접촉하는 것, 함부로 맹세하는 것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문제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죄는 단지 눈에 띄는 악행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침묵에도, 자기도 모르게 접촉한 부정에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도 영적인 결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1절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거짓말을 직접 하지 않았다고 해서 언제나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알고도 침묵함으로 거짓이 힘을 얻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4절의 함부로 한 맹세 역시 말의 책임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예배 시간의 종교적 상태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보고도 침묵하는지, 무엇에 접촉하는지, 어떤 말을 생각 없이 내뱉는지까지 다룹니다.
그런데 2절과 3절에는 레4에서 보았던 ‘부지중’이라는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인간은 어떤 부정에 접촉하고도 그것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깨달았을때에는허물이있을것이요’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이 알지 못한 것을 빌미 삼아 정죄하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의 영향이 있으며, 주님께서 말씀의 빛으로 그것을 보여 주실 때 새로운 책임과 새로운 회개의 가능성이 시작된다는 데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는 것은 정결의 시작입니다. 아직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인간은 그것을 숨기거나 변명할 것인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피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5절의 ‘자복’이 등장합니다. 레4에서는 주로 ‘깨달음’이 강조되었다면 레5에서는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서 잘못된 것을 발견하는 것과 ‘이것은나의죄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악을 발견하고도 환경 탓, 다른 사람 탓, 성격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사람이먼저그랬기때문에’, ‘나는원래성격이이렇기때문에’, ‘상황이어쩔수없었기때문에’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복은 그 모든 설명을 넘어 ‘이것은내가주님앞에서피해야할악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죄를 입술로 열거하는 행위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그것을 피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레5의 자복은 단순한 종교적 죄책감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출발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레5는 매우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속죄제물을 드려야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형편이 되는 사람은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의힘이어린양을바치는데에미치지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마저 힘들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실제 본문 자체가 제물의 경제적 차등을 분명히 규정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대의 복지 규정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줍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정결의 길이 재산에 의해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비둘기의 길이 열리고,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한 줌의 곡식으로 나아갈 길이 열립니다. 누구도 ‘나는가진것이없어서주님께돌아갈수없다’고 말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비둘기가 등장하는 것도 레1에서 이미 보았던 상응과 연결됩니다. AC.870(창8:8-9)은 비둘기를 거듭나는 사람 안의 신앙의 진리와 선에 연결하며, 제사에서 비둘기가 사용된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AC.1833(창15:10)은 레5:7-8의 속죄제까지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에서 새를 완전히 둘로 나누지 않았던 규정에 영적 의미가 있음을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이 더 낮은 가치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소나 양이 표상하는 선의 상태와 새가 표상하는 진리와 신앙의 상태가 서로 다를 뿐,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실제로 받을 수 있고 응답할 수 있는 상태에서 정결의 길을 여십니다. 거듭남에는 획일적인 한 가지 외적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놀라운 것은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고운 가루를 속죄제물로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레2에서 고운 가루는 소제의 중심이었고, 거기에는 기름과 유향이 함께 놓였습니다.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는 레2:1-2를 직접 인용하면서 고운 가루는 순수한 진리를,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을,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레5의 가난한 사람의 속죄제에서는 같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면서도 ‘기름을붓지말며유향을놓지말라’고 합니다. 본문도 그 이유를 단호하게 ‘이는속죄제인즉’이라고 밝힙니다. 여기서는 레2의 소제처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기쁨의 예배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드러나 정결되어야 하는 상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 확보한 스베덴보리 원전에서 레5:11의 ‘기름과유향의부재’를 각각 직접 해설하는 대목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그 세부를 지나치게 확대하여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같은 고운 가루라도 제사의 문맥이 달라지면 그 전체적인 의미와 쓰임도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레위기의 제사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상응은 사전처럼 ‘고운가루=진리,기름=선,유향=이것’이라고 낱말을 대입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각각의 상응은 전체 계열과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레2에서는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이 더해져 선과 진리의 결합과 예배를 나타냈지만, 레5에서는 같은 고운 가루가 죄로부터의 정결이라는 전혀 다른 제사 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제사의 세세한 규정마다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다고 말한 이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한 가지 재료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과 함께 있고, 무엇이 빠져 있으며, 어떤 제사 안에서 사용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14절부터는 새로운 제사인 ‘속건제’가 시작됩니다. 첫 경우는 ‘여호와의성물에대하여부지중에범죄’한 경우입니다. 흠 없는 숫양을 가져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잘못한 성물에 대해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속죄제와 구별되는 속건제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죄는 인간의 내면에 부정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 관계와 질서에 손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런 경우 회개는 ‘잘못했습니다’라는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가능한 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빼앗은 것이 있으면 돌려주고, 손상시킨 것이 있으면 회복하며, 잘못된 관계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면 그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레5의 속건제는 회개가 실제 삶의 회복으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오분의일을더하여’라는 규정은 그냥 임의의 벌금이 아닙니다. AC.649(창6:15)는 레5: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보상 후 더하는 ‘오분의일’을 최소한의 추가분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말씀에서 ‘다섯’이 ‘어떤것,조금’을 의미하는 용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계시록해설’ 548(계9:5)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레5:16을 비롯한 여러 ‘오분의일’ 규정을 직접 열거하면서, 양과 관련된 문맥에서 ‘오분의일’이 ‘충분한만큼’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5의 보상은 단지 원상복구를 계산적으로 해 놓고 끝내는 최소주의적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을 바로잡기에 충분하도록 회복하려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AC의 모든 ‘오분의일’ 용례를 곧바로 동일한 세부 상응으로 합쳐서는 안 됩니다. 레5:16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보상이 실제적이어야 하며, 거기에 추가분까지 요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회개를 매우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해 놓고 하나님께만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남의 것을 부당하게 취하고도 마음으로 회개했다고 끝낼 수 있을까요? 거짓말로 관계를 손상시켰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진실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모든 잘못을 과거 그대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건제가 보여 주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참된 회개에는 ‘내가할수있는회복은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사함은 책임을 없애는 핑계가 아니라 책임을 정직하게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은혜입니다.
17절로 19절에서는 다시 ‘부지중’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여호와의계명중하나를부지중에범하여도허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레4와 레5전반의 주제를 다시 확인합니다. 인간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악이 선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을 깨닫게 하실 때 정결의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 장 전체를 지나며 그 길은 점점 구체적으로 깊어집니다. ‘몰랐다’에서 ‘깨달았다’로, ‘깨달았다’에서 ‘자복한다’로, ‘자복한다’에서 ‘속죄한다’로, 그리고 실제 손상이 있는 경우에는 ‘보상한다’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죄책감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실제로 자유롭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레5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회개는진실해질수록구체적이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 안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게 됩니다. 그다음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내가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형편과 상태에 맞게 정결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내 죄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손상시켰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 모든 과정의 끝에 반복되는 말씀은 레4와 같습니다. ‘제사장이그의허물을위하여속죄한즉그가사함을받으리라.’ 사함은 현실을 외면하는 선언이 아니라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건져 내어 다시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레4가 우리에게 ‘그가범한죄를깨달으면’이라고 말했다면 레5는 묻습니다. ‘깨달은다음에는무엇을할것인가?’입니다. 레5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잘못하였노라자복하고’, 그리고 바로잡을 것이 있다면 바로잡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악을 인정하고 피하며, 손상시킨 것을 가능한 만큼 회복하고, 다시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속죄제에서 속건제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회개는 마음속 후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는 마침내 삶의 방향을 바꾸고, 가능한 곳에서는 깨어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SW.7레5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