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7

 

광명체들로 하여금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고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문자적 의미만 보면 그런 깊은 뜻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이것만 말씀드리는 걸로 충분한데요, 곧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일반적으로도, 또 개별적으로도 교대(alternations)라는 게 있으며, 이것이 날과 해의 변화(changes)에 비유된다는 점입니다. 날의 변화는 아침에서 정오로, 다시 저녁으로, 그리고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진행합니다. 해의 변화도 이와 같아서, 봄에서 여름으로, 다시 가을로, 그리고 겨울을 지나 다시 봄으로 진행합니다. 여기서 열과 빛의 변화가 생기고, 또한 땅의 산물들도 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 역시 이러한 변화에 비유됩니다.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 나아가 퍼셉션, 곧 지각될 수도 없습니다. 이런 교대를 선지자들은 규례(ordinances, [statuta], 법도, 법칙)라 하는데, 예레미야에 보면 나옵니다. It is said that the luminaries shall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 although in the literal sense nothing of the kind appears. Suffice it here to observe that there ar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which are compared to the changes of days and of years. The changes of days are from morning to midday, thence to evening, and through night to morning; and the changes of years are similar, being from spring to summer, thence to autumn, and through winter to spring. Hence come the alternations of heat and light, and also of the productions of the earth. To these changes are compared th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 These alternations are in the prophets called “ordinances” [statuta], as in Jeremiah: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5, 36) Said Jehovah, who giveth the sun for a light by day, and the ordinances of the moon and of the stars for a light by night, . . . these statutes shall not recede from before me (Jer. 31:35–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f I have not appointed the 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 (Jer. 33:25).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창세기 822절에서 더 말씀드릴 것입니다. But concerning these things, of the Lord’s Divine mercy, at Genesis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8:22)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에서 광명체들이 맡는 역할을 시간 측정의 기능으로 축소시키는 해석을 분명히 넘어서게 합니다. ‘징조’, ‘계절’, ‘’, ‘’라는 표현은 단순한 천문학적 주기가 아니라, 영적 생명 안에서 반복되는 상태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한 문장 안에 매우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고 말하면서, 그 전부를 지금은 펼치지 않고, 핵심 원리만 제시합니다.

 

그 핵심은 이것입니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에는 반드시 교대(alternations)가 있으며, 이 교대는 날과 해의 변화와 정확히 대응된다는 점입니다. 아침에서 밤으로, 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자연의 변화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태 변화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빛과 열이 증감하듯이 신앙과 사랑도 강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합니다.

 

이 교대는 퇴보나 실패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필수 조건입니다. 만일 이런 변화가 없다면, 삶은 하나의 평면으로 굳어버리고, 생명이라 부를 수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조로움은 곧 무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우리는 흔히 항상 밝고 항상 뜨거운 상태를 이상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상태는 실제로는 분별도 성장도 낳지 못합니다.

 

선과 진리가 인식되고 구별되며, 더 나아가 퍼셉션되기 위해서는 대비가 필요합니다. 낮이 있어야 밤을 알고, 겨울이 있어야 봄의 생명을 압니다. 영적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빛의 상태와 그늘의 상태가 교차하면서 비로소 사람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교대를 선지자들은 ‘규례(ordinances)로 부른다고 말합니다. 규례란 인간이 임의로 정한 법칙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와 섭리 속에 세워 두신 변하지 않는 질서입니다. 낮과 밤의 교대, 하늘과 땅의 규례는 단순한 자연법칙이 아니라 영적 생명에까지 미치는 주님의 질서입니다.

 

예레미야의 인용은 이 점을 강하게 확증합니다. 해와 달과 별의 규례가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지 않는다는 말은, 영적 상태의 교대 역시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불안해할 수는 있지만, 그 질서 자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낮과 밤의 언약을 깨지 않으시듯 영적 생명의 교대도 중단시키지 않으십니다.

 

이 글은 영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신앙이 약해지는 시기, 사랑이 식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의 ‘’ 혹은 ‘겨울’일 수 있습니다. 그 상태는 규례 안에 있으며, 다시 아침과 봄으로 이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그 교대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주님의 질서 안에서 통과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를 창세기 822절에서 다시 자세히 다룰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거기서 씨 뿌림과 거둠, 더위와 추위, 낮과 밤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바로 여기서 말한 교대의 질서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선언입니다. AC.37은 그 선언을 준비하는 기초로서, 광명체의 역할을 생명의 리듬이라는 관점에서 확정해 줍니다.

 

 

심화

 

1.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AC.37 본문에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의 현 역량과 상태가, 펼쳐 보여도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역량이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럼에도 혹시 한두 가지만 좀 보여 주실 수 있나요?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는 말씀과,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라는 창8:22 말씀을 좀 더 와닿게 이해하고 싶어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다’고 한 것은 어떤 비밀을 숨기기 위함이 아니라, 이 말씀이 단순한 시간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의 리듬과 질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만 풀어 보아도, 단순한 ‘시간 표시’가 아니라는 것이 금방 드러납니다.

 

먼저 ‘징조(signs)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표식이나 신호가 아니라, ‘상태를 알아보게 하는 표지’입니다. 인간의 영적 삶에서도 이런 ‘징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말이나 행동이 어느 날 마음에 걸리기 시작합니다. 혹은 말씀을 들을 때, 전에는 들리지 않던 내용이 갑자기 깊이 와닿습니다. 이런 변화들은 외적으로 보면 작은 일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상태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을 ‘징조’로 봅니다. 주님이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실 때, 반드시 이런 표지들이 나타납니다.

 

다음으로 ‘계절(seasons)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절’은 단순한 자연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니라, ‘사람의 영적 상태의 변화 주기’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시기에는 말씀이 잘 이해되고,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나 ‘여름’ 같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시기에는 마음이 메마르고, 기도도 잘 되지 않고, 의욕도 떨어집니다. 이것은 ‘겨울’과 같은 상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비정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단번에 완성시키지 않으시고, ‘이런 계절의 반복을 통해 서서히 변화시키십니다.’

 

(days)과 ‘(years)도 같은 맥락입니다. ‘’은 비교적 ‘짧은 상태의 변화’, 즉 하루하루 속에서 겪는 기쁨과 침체, 깨달음과 혼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는 더 긴 흐름, 곧 ‘삶 전체의 큰 단계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신앙이 몇 년에 걸쳐 깊어지는 과정, 혹은 오랜 시간에 걸친 방황과 회복 같은 것들이 ‘’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시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성장의 리듬 전체를 설명하는 구조’입니다.

 

이제 창8:22를 보면 이 구조가 더 분명해집니다. ‘심음과 거둠’은 너무나 중요한 상응입니다. ‘심음’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 곧 말씀을 듣고 배우고 마음에 두는 상태입니다. ‘거둠’은 그 진리가 삶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마음에 담는 것이 ‘심음’이라면, 실제로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거둠’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둘 사이에 시간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종종 심자마자 거두기를 원하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반드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합니다.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은 조금 더 깊은 상태를 말합니다. ‘더위’나 ‘여름’은 ‘사랑이 활발하게 작용하는 상태’, 곧 마음이 뜨겁고 주님과 가까이 있는 느낌이 있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추위’나 ‘겨울’은 ‘사랑이 식고, 신앙이 약해지고, 시험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이 둘을 모두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여름’만으로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겨울’ 같은 시기를 통해 자기 사랑이 약해지고, 더 깊은 의존을 배우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낮과 밤’입니다. ‘’은 ‘진리가 분명히 보이는 상태’, ‘’은 ‘혼란과 어둠 속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 반복됩니다. 우리는 늘 밝은 상태에만 있고 싶지만, 실제로는 낮과 밤이 번갈아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중요한 원리로 설명합니다. ‘밤이 있어야 낮이 더 분명해지고, 낮이 있어야 밤을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으면, 이 두 구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적 삶은 직선이 아니라 ‘리듬과 순환 속에서 자라는 생명’입니다. 기쁨과 침체, 깨달음과 혼란, 사랑과 냉담, 심음과 거둠 등, 이 모든 것이 교차하며,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그리고 ‘땅이 있을 동안에는...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이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이 질서가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내가 겨울 상태에 있어도 이상한 것이 아니며, 괜찮습니다. 지금은 심는 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2.삶은 단조로워지고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 나아가 퍼셉션, 곧 지각될 수도 없습니다.’(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진술은 참 놀랍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천국은,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 삶이 늘 행복, 만수무강, 무사형통하게 될 줄,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줄 알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흔히 ‘좋은 신앙생활’이나 ‘천국 같은 삶’을 생각할 때, 늘 밝고, 늘 평안하고, 변화 없는 상태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변화와 교대가 없으면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철학적 표현이 아니라, 생명 자체의 구조에 대한 설명입니다.

 

먼저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아닌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명이란 항상 ‘움직임과 변화’를 포함합니다. 심장도 수축과 이완이 반복되기 때문에 살아 있고, 호흡도 들이마심과 내쉼이 있기 때문에 유지됩니다. 만약 이 리듬이 멈추고 하나의 상태로 고정되면, 그것은 안정이 아니라 곧 죽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생명도 똑같다고 봅니다. 기쁨만 계속되고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이 무뎌지고, 결국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선과 진리가 분별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좋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다른 상태와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의 소중함은 병을 겪어본 사람에게 더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빛의 소중함은 어둠을 경험해 본 사람에게 더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삶에서도 ‘어두움과 혼란의 상태가 있어야, 빛과 진리의 상태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항상 같은 상태만 있다면, 그것이 좋은 것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 곧 지각이 등장합니다. 퍼셉션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이것이 선이다, 이것이 진리다 하고 느끼고 아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퍼셉션도 대비 속에서 더 또렷해집니다. 사람이 시험과 갈등을 겪으면서, ‘, 이것은 아닌데’라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이것이 옳다’는 감각이 훨씬 깊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퍼셉션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생각과 연결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 항상 평안해야 한다’, ‘천국은 늘 같은 기쁨의 상태일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조차도 ‘다양성과 변화 속에서 더 깊어지는 기쁨의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천사들도 하나의 단조로운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천국의 기쁨은 반복되어도 지루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음이 메마르거나, 기도가 잘 안 되거나, 혼란이 올 때 많은 사람들이 ‘내가 잘못된 길에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그런 상태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태 속에서도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대 속에서 점점 더 깊은 이해와 사랑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이 진술은 우리에게 기대를 바꾸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그 모든 교대와 변화 속에서 점점 더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침체도 있고, 때로는 혼란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더 깊은 생명으로 이끌리는 과정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진짜 생명은 단순한 ‘항상 좋음’이 아니라, ‘다양한 상태들이 조화를 이루며 더 깊어지는 살아 있는 흐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어두움이나 흔들림이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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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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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6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주님을 향한 생각이라고 여기며, 또 어떤 이들은 신앙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 교리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 곧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셔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앞의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시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라고 하십니다 (22:37-41).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는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합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 “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Matt. 22:37–41) The “law and the prophets” 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해 온 전통적 이해를 근본에서부터 해체합니다. 신앙을 단지 생각, 주님을 향한 생각, 혹은 교리 체계로 이해하는 모든 방식은, 신앙의 본질을 비껴간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이런 오해는 우연이 아닙니다. 사랑이 신앙에서 분리될 때, 신앙은 필연적으로 지적 활동으로 축소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앙을 사변적 사고로 여기고, 어떤 사람은 경건한 생각이나 태도로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소유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이해는 공통된 한계를 갖습니다.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핵심을 ‘순종(obedience)이라는 말로 단정합니다. 신앙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앎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교리가 가르치는 바를 실제 삶에서 따르지 않는다면,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히 알고 있어도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순종은 외적 규율 준수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 교리가 가리키는 사랑의 질서와 일치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신앙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주저 없이 두 가지를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이 둘이 신앙의 중심이며, 이것이 빠지면 신앙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 주장은 윤리적 강조가 아니라, 구조적 진술입니다. 신앙의 모든 내용은 이 두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인정하고 그 질서 안에 머무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질서가 삶의 관계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이 둘이 분리되면, 신앙은 머물 곳을 잃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자신의 해석으로 주장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 자체로 확증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의 첫째와 둘째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계명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 전체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나란히 놓인 두 규범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 질서의 두 측면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더 나아가 ‘온 율법과 선지자’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약 전체, 곧 말씀 전체가 이 사랑의 질서를 설명하고 인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별개의 체계가 아니라, 사랑을 향해 흐르는 하나의 강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율법과 선지자’를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자 말씀 전체라고 정의합니다. 신앙의 교리는 복잡한 체계로 흩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사랑을 가르치고, 사랑으로 살도록 이끄는 하나의 목적을 가집니다.

 

AC.36은 신앙을 다시 삶의 자리로 돌려놓습니다. 신앙은 고백이 아니라 순종이며, 순종은 두려움에서 나오지 않고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글은 독자에게 묻습니다. 내가 신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나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심화

 

1.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랑에 대해 어디를 보니 charity를 쓰던데,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 해도 되는지요? 그리고 왜 주님 사랑은 전치사 to를 쓴 반면, 이웃 사랑toward를 쓰나요?

 

아주 근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AC.36에서 말하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의 중심축이기 때문에, 이것이 또렷해지면 이후 내용들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먼저 개념부터 단순하게 잡고, 그 다음에 영어 표현까지 연결해 보겠습니다.

 

먼저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주님을 좋아한다’거나 ‘주님께 감정적으로 끌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 사랑’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분의 뜻을 가장 높게 여기며, 그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삶 전체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감정만이 아니라 ‘경외, 순종, 신뢰, 기쁨’이 모두 포함된 상태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 삶의 중심을 내가 아니라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선택을 할 때, ‘이게 내가 원하는 것인가?’보다 ‘이것이 주님의 뜻에 맞는가?’를 먼저 묻는 상태, 그것이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다음으로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이것도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거나 친절하게 대하는 정도를 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웃’은 단순히 옆집 사람이나 친한 사람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필요로 하는 모든 대상’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그 사람의 영적, 도덕적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여기에는 도움, 정직, 공정함, 용서, 배려 같은 모든 실제 삶의 행위가 포함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웃 사랑을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봅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이 두 사랑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따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속에서 주님 사랑이 실제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주님 사랑의 ‘열매’입니다.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로는 주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입장입니다.

 

이제 ‘charity’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 사랑’을 말할 때, 매우 자주 ‘charity’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래서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매우 전통적인 표현입니다. 다만 영어에서 ‘charity’는 단순한 ‘구제’나 ‘자선’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charity는 ‘이웃을 향한 사랑 전체’, 곧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그 행위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하나의 단어로 옮기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전치사 문제를 보겠습니다. 왜 ‘love to the Lord’이고, ‘love toward the neighbor’일까요? 이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to’는 보통 ‘직접적인 향함과 결합’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love to the Lord’는 주님을 향한 직접적인 사랑, 곧 ‘근원과 중심을 향하는 사랑’을 표현합니다. 반면 ‘toward’는 약간 방향성과 확장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love toward the neighbor’는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 이웃에게 향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아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뉘앙스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은 삶의 중심을 주님께 두고, 그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랑이고, ‘이웃 사랑’은 그 사랑이 실제 삶 속에서 사람을 향해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charity’는 바로 이 이웃 사랑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입니다. 전치사 ‘to’와 ‘toward’의 차이는, 하나는 근원과의 직접적 관계를,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이 밖으로 향하는 방향을 은근히 드러낸다고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주님 사랑은 뿌리이고, 이웃 사랑은 열매입니다. 뿌리가 건강하면 열매가 나오고, 열매가 없으면 뿌리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2.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에 나오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를 좀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이 말씀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감각이 무뎌지기 쉬운 구절입니다만, 사실은 인간 전체를 어떻게 주님께 향하게 하는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해 놓은 매우 깊은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마음, 목숨, ’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인간의 서로 다른 층위와 기능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풀어 설명하면 단순히 ‘열심히 사랑하라’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사랑하라’는 뜻이 됩니다.

 

먼저 ‘마음을 다하여’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의지와 사랑의 중심’, 곧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단지 존경하거나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리에 주님을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이나 인정이나 자기 성공을 가장 사랑하면, 그는 결국 그것을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면, 선택과 방향이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라는 말은 ‘사랑의 중심을 완전히 주님께 옮기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목숨을 다하여’입니다. 이 표현은 조금 더 실제적입니다. ‘목숨’은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만이 아니라, ‘내 삶 전체,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에너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목숨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 사랑이 단지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시간이 어디에 쓰이는지, 힘을 어디에 쓰는지, 무엇을 위해 애쓰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목숨’이 어디에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내 삶의 실제를 주님께 드리는 것’, 곧 ‘삶의 방향과 행동까지 포함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뜻을 다하여’입니다. 이것은 이해와 생각의 영역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곧 무엇이 참인지 분별하고, 그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판단 속에서도 주님을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문제를 판단할 때, ‘이게 내게 유리한가?’가 아니라 ‘이것이 주님의 진리에 맞는가?’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생각까지도 주님께 순종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합치면 매우 중요한 그림이 나옵니다. ‘마음’은 사랑의 중심, ‘목숨’은 삶의 실천, ‘’은 생각과 이해입니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이루는 세 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순히 ‘나를 사랑하라’ 하지 않으시고, ‘이 세 영역 모두를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와닿게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짜로 무언가를 사랑하면, 세 가지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마음으로 좋아하고, 시간을 들여 그것을 위해 살고, 생각 속에서도 그것을 중심으로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녀를 사랑하면, 마음으로 사랑할 뿐 아니라 시간을 쓰고, 삶의 방향을 바꾸고, 생각 속에서도 늘 자녀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주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단지 예배 시간에만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 생각 전체가 주님을 향하게 되는 상태’가 바로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 말씀은 곧 ‘의지(마음), 행위(목숨), 이해(뜻)’가 하나로 결합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마음으로만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행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만 있는 것도 아니라,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연결될 때, 비로소 참된 신앙과 사랑이 완성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무엇을 기준으로 생각하는가, 이 세 가지가 모두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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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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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역량(faculties), 곧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이 둘은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어긋날 때에는, 그러니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인데요, 이때는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 곧 이해는 스스로를 하늘로 높이려 하고, 다른 하나, 곧 의지는 지옥을 향해 기울어지지요. 그런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동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 전체는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해설

 

이 글은 앞선 AC.34의 논의를 인간의 내적 구조 차원으로 더욱 구체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라는 말은 추상적인 선언이 아니라, 인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두 기능, 곧 의지와 이해의 관계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감정과 이성의 단순한 결합체로 보지 않고, 의지와 이해라는 두 작용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존재로 봅니다.

 

이해가 의지에 의해 다스려질 때, 사람 안에는 하나의 마음이 형성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이 원하는 것, 행하는 것, 생각하는 것, 의도하는 것이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삶은 일관되고, 내면과 외면이 갈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신앙이 결합한 상태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생명의 구조입니다.

 

반대로, 이해가 의지와 분리되거나 의지에 맞설 때, 인간의 내면은 분열됩니다. 신앙을 말로는 고백하지만, 삶으로는 부정하는 상태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때 이해는 하늘을 말하고, 의지는 땅을 향하거나 그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합니다. 사람은 머리로는 옳은 것을 알고 말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는, 그러니까 실제 삶은 그와 정반대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분열을 단순한 모순이나 미성숙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극도로 위험한 상태로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움직이고 결정하는 주체는 이해가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이해는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의지입니다. 그래서 의지가 사랑 없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으면, 이해가 아무리 하늘을 말해도 사람 전체는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의지와 이해가 분열된 상태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사람 전체는 머리를 곤두박질치듯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위협의 언어가 아니라, 영적 질서에 대한 냉정한 진술입니다. 생명은 사랑이 있는 곳으로 흐르며, 의지는 그 흐름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를 분명히 언급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상태만으로 판단된다면, 의지와 이해가 어긋난 대부분의 사람은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즉시 버리지 않으시고, 자비로 붙들어 주십니다. 이 자비는 이해를 통해 의지를 서서히 교정하고, 사랑과 신앙이 다시 하나로 결합하도록 이끄는 힘입니다.

 

AC.35는 결국 인간의 신앙 문제를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다룹니다. 신앙이 말에만 머무를 때 왜 위험한지, 사랑 없는 신앙이 왜 겨울과 같은지를, 의지와 이해의 관계를 통해 명확히 보여 줍니다. 이 글은 독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지금 내 이해와 내 의지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도록 말입니다.  

 

 

심화

 

1.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 한 문장은 짧지만, 사실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을 건드립니다. ‘만일 주님께서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와 주님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주님의 생명과 자비의 흐름 속에서만 유지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항상 이미 주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점을 조금 더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비’를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용서해 주시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mercy’는 훨씬 더 깊고 근본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단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감정적 행위가 아니라, ‘타락하고 자기중심으로 기울어진 인간을 계속해서 선과 진리 쪽으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지속적인 작용’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어지기 쉽기 때문에, 만약 아무런 제어도 없다면 그 흐름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곳에서 ‘주님이 매 순간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즉시 더 깊은 악으로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붙들어 주신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밖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서 은밀하게 방향을 돌려 주시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떤 악한 선택을 하려는 순간, 마음 한편에서 그것을 멈추게 하는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어떤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일이 틀어져서 더 큰 잘못을 피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까지도 넓은 의미에서 ‘주님의 자비의 작용’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우연이나 자기 판단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깊은 차원의 인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비는 단지 ‘용서’만이 아니라, ‘보존과 인도와 회복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것, 조금이라도 선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하시는 것, 진리를 들을 기회를 주시는 것, 심지어 고통이나 시험을 통해서라도 방향을 돌려 주시는 것 등, 이 모든 것(all of these)이 다 자비의 범주 안에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자비는 단순히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끊임없는 신적 작용’입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신 그 감탄이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옵니다. 만약 하나님이 단지 공의만을 기준으로 인간을 대하신다면,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은 한순간도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의 자체이시면서, 동시에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에, 공의로만 심판하시지 않고 자비로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본질을 설명할 때 자주 ‘사랑과 자비’를 중심에 둡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을 돌아보며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는가?’, ‘왜 여전히 같은 문제를 반복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AC.35의 이 한 문장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 여전히 말씀을 듣고 고민하고 주님을 찾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주님의 자비가 당신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신앙의 중심적인 위로이자 확신’이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직시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 연약함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주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어떤 특정한 순간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고백은 아주 깊은 신앙의 자리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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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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