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3 심화

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에서 스베덴보리는 호6:2-3을 인용하면서 천적 인간의 이 상태가 ‘셋째 날’에 이루어지며, ‘셋째 날’은 말씀에서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숫자로 보면 3과 7은 전혀 다른데, 어떻게 둘이 같은 것을 뜻할 수 있을까요?

 

먼저 ‘같은 것을 뜻한다’는 말을 숫자 3과 7의 모든 상응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93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숫자가 이 특정한 상태를 나타내는 점에서 서로 만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앞에서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여섯 날 동안의 싸움이 끝나고 주님께서 쉬시는 날이며,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의 안식입니다. AC.84-88에서 이 일곱째 날은 싸움의 종결, 주님의 안식, 그리고 주님 홀로 이루신 거듭남의 완성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AC.93에서 인용한 호세아에서는 ‘셋째 날’에 이와 매우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셋째 날은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생명을 얻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사는 새로운 상태와 연결됩니다. 이어서 주님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과 같고, 그분은 땅을 적시는 ‘비’와 같이 오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93의 문맥에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 만나는 지점은 새로운 생명의 상태입니다. 일곱째 날에는 싸움이 끝나고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시작되며, 셋째 날에는 사람이 살아나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삽니다. 둘 다 이전 상태가 끝나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명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의 숫자를 단순한 산술적 수량으로만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 안에서 사람이 거듭나는 상태를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3 = 7’이라는 새로운 상응 공식을 만들어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AC.93이 직접 말하는 범위는 이 천적 인간의 상태와 관련하여 ‘셋째 날’이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호세아의 인용은 단순히 ‘셋째 날’이라는 숫자의 증거 구절이 아닙니다. ‘살리심’, ‘일으키심’, ‘주님 앞에서 삶’, ‘새벽’, ‘비’가 한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이것들은 AC.84 이후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안식과 평화, 그리고 AC.90-92에서 설명한 비와 평화의 생명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AC.93에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 같은 것을 뜻한다는 말은 두 숫자의 모든 의미가 동일하다는 선언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 둘 다 주님께서 사람을 새로운 생명의 상태로 이끄시는 완성과 일으키심을 나타낼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 세밀한 차이는 이후 스베덴보리가 각 숫자를 설명하는 곳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하지만, AC.93을 읽는 독자는 적어도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AC.93 심화 1)

 

 

 

AC.93 심화 2, 왜 ‘새벽’, ‘비’, ‘들의 성장’이 천적 인간의 상태를 함께 묘사하는가?

AC.93 심화2. 왜 ‘새벽’, ‘비’, ‘들의 성장’이 천적 인간의 상태를 함께 묘사하는가? AC.93에 인용된 말씀들을 보면 서로 다른 선지서에서 ‘새벽’, ‘비’, ‘들의 성장’, ‘여호와께서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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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창2:5-6, ‘평화의 언약과 복된 비, 셋째 날에 일으켜지는 천적 인간’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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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심화

2.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AC.92의 마지막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나는데, 그것들은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합니다. 진리와 선이 이미 진리와 선이라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앞에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어떻게 구별했는지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AC.81에서는 영적 인간이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하지만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에서’ 그렇게 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AC.83에서도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진리들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진리가 이전에는 거짓이었다가 이제 참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이미 진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 안에서 어떤 근원으로부터 살아 움직이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단순히 알고 인정하는 내용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사랑의 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선과 진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그것들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AC.87-88에서 싸움을 수행하고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은 주님 홀로라고 했습니다. AC.91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신다고 했고, AC.92에서는 그것을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과 진리가 생명을 얻는 근원 역시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평화에서’가 아니라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순종이 억지 복종이 아니라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AC.85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바람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행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바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질서에 따르는 것이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그의 사랑과 바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평화와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 ‘평화의 즐거움’은 단순한 기분 좋은 감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싸움이 그치고,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며,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루는 질서에서 오는 즐거움입니다. 그 질서 안에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AC.92는 ‘진리를 알고 있는 것’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것’ 사이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진리를 기억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여기서 말하는 천적 생명의 전부가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루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평화의 생명이 사람의 겉 사람에까지 미칠 때 진리와 선은 그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AC.92 심화 2)

 

 

 

AC.92, 창2:5-6, '평화는 싸움의 그침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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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심화 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 심화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의 평화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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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심화

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의 평화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평화를 갈등이나 불안이 없는 상태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평화 자체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먼저 AC.92가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 상태가 아닙니다. 그 직전까지 사람 안에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AC.91에 따르면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그 결과 싸움이 그치며 평온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평화는 단순히 싸움 하나가 없어졌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 안의 질서가 달라진 결과로 찾아오는 상태입니다.

 

AC.92가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싸움이 그쳤기 때문에 생명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는 싸움과 저항 때문에 충분히 나타나지 못하던 것이 이제 겉 사람에게까지 미치기 시작합니다. AC.91에서는 이것을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에 비유했습니다. 평화는 텅 빈 고요가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생명이 미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4부터 계속 나온 ‘안식’도 주님께서 피곤하여 일을 중단하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고 그 일이 완성되어 싸움이 그쳤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완성된 질서 안에서 이제 평화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자연의 모습으로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폭풍이 그쳤다고 해서 자연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요한 비와 이슬이 땅을 적실 때 식물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AC.90-91에서 ‘비’와 ‘안개’가 평화의 평온을 뜻하고, 그것에 의해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산출된다고 한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평화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공백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 곧 생명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상응 공식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92의 표현은 더 정확합니다. 그것은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가 어디에서 오며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그것은 사람 자신이 만들어 내는 편안함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나와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거기에서 선과 진리가 살아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AC.92에서 말하는 평화는 싸움의 부재보다 훨씬 적극적인 상태입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친 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자유롭게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 생명으로 인해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살아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단순한 ‘쉼’이 아니라 생명으로 충만한 안식입니다. (AC.92 심화 1)

 

 

 

AC.92 심화 2,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AC.92 심화2.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AC.92의 마지막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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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창2:5-6, '평화는 싸움의 그침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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