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심화

 

4. ‘32:7-8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7, 8) 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 (Ezek. 32:7–8).

 

 

이 구절이 AC.31에 인용된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넷째 날의 해, 달, 별이 각각 사랑, 신앙, 그리고 신앙의 지식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말씀 전체를 통해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AC.30에서는 해를 사랑으로, 달을 신앙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어 AC.31에서는 그 반대 상태, 곧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교회가 황폐해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때 사랑은 사라지고, 신앙은 빛을 잃으며, 진리의 지식들도 어두워집니다. 바로 이것을 에스겔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이 구절은 우주적 재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연계의 파괴가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영적 상태에 관한 예언으로 봅니다. 만일 실제 태양과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특정 지역인 애굽 왕 바로에 대한 심판 예언의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의 해와 달과 별은 영적인 것들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해가 구름에 가려진다는 것은 사랑이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은 영계의 태양과 같기 때문입니다. 달이 빛을 내지 못한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오는 빛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 별들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신앙의 지식들과 진리들이 더 이상 사람을 인도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AC.31의 논지에서 중요한 것은, 신앙은 사랑에서 빛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달이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이, 신앙도 사랑에서 생명과 빛을 받습니다. 따라서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도 함께 어두워집니다. 이것이 에스겔의 해와 달과 별이 모두 함께 어두워지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심판을 말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넷째 날의 광명체들을 설명하면서, 왜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며, 별이 지식인지를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 구절로 사용된 것입니다. 만약 해와 달이 실제 천체만을 의미한다면, 사랑과 신앙이 사라진 상태를 설명하는 수많은 선지서의 표현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AC.31에서 겔32:7-8은 ‘사랑이 소멸되면 신앙도 빛을 잃고, 진리의 지식들도 어두워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넷째 날의 해, 달, 별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긍정적인 측면이 아니라 ‘그 빛이 꺼졌을 때의 상태’를 통해 역으로 증명하는 구절입니다.

 

 

 

AC.31, 심화 5, ‘사13:9-10’

AC.31.심화 5. ‘사13:9-10’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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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위 AC.31 [3]의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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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 [3]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키고자 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이 규례의 상응, 상징, 그 내적 의미는 몰랐다고 어디서 읽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요?

 

실제로 스베덴보리도 같은 질문을 여러 곳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어떻게 사람이 어떤 규례를 그렇게 철저히 지키면서도 그 내적 의미는 전혀 모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이 특별히 이상해서라기보다 ‘주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역사적 섭리의 한 형태’였습니다. 유대교회는 처음부터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교회’가 아니라 ‘표상 교회(representative church), 곧 ‘상응을 행위로 보존하는 교회’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유대교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를 ‘representative church’라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거룩한 내적 상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외적 행위와 의식이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조직된 교회’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제사, 절기, 성막, 등불, 제사장 의복, 번제, 향, 절기 등은 모두 천국의 것들을 상징하는 ‘살아 있는 상징 체계’였습니다. 그런데 이 상징 체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이 점이 처음에는 조금 역설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약 그들이 그 상징의 내적 의미를 알았다면, 그들은 그것을 자기 욕망과 결합시키거나 왜곡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러면 그 표상 기능 자체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단지 ‘외적 규례를 문자 그대로 지키도록’ 하셨고, 그 의미는 천사들이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은 행위를 하고, 천사는 그 의미를 이해하는 식으로 ‘지상과 천국이 연결되는 구조’가 형성된 것입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등불을 켜 두라’는 규례(27:20, 21, 24:2-4)가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단순히 ‘성막에서 꺼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의식 규례’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제사장들은 밤새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채우고 심지를 관리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 장면을 전혀 다른 의미로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계속 유지되는 신앙의 빛’, 곧 교회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진리의 빛을 의미했습니다. ‘저녁’은 신앙이 약해지는 상태를, ‘아침’은 신앙이 다시 밝아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등불이 밤새 타는 것은 ‘교회가 어둠 속에 있어도 진리의 빛이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주님이 보존하신다’는 상징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그렇게 의미도 모르면서 규례를 지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다시 남습니다. 사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흔한 현상입니다. 인간은 종종 어떤 제도나 의식을 ‘그 의미보다 전통 때문에 지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면서 그 상징적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결혼식의 여러 의식, 장례식의 절차, 심지어 교회의 예배 형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깊이 이해하지 못해도 전통과 권위를 따라 계속 행합니다.

 

유대교회에서는 이 현상이 훨씬 강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절대적인 명령’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규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보다 ‘그것을 정확히 수행하는 것 자체’가 더 중요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바로 유대 민족의 특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외적 규례를 매우 엄격하게 지켰지만, 내적 의미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외적 엄격함 때문에 오히려 ‘표상 기능은 완전히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섭리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상태가 충분히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았을 때는, 진리를 직접 가르치기보다 ‘상징과 표상을 통해 보존’하십니다. 그러다가 인간이 그것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내적 의미를 드러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역할을 자신이 맡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AC에서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상을 행했지만, 천사들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고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창세기 AC를 읽을 때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이 생깁니다. 말씀의 문자적 사건이나 규례들은 단순히 과거의 종교 제도가 아니라, ‘천국과 연결된 상응 체계’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체계를 외적으로 유지했고, 천사들은 그 내적 의미를 보았으며, 오늘날 우리는 스베덴보리를 통해 그 의미를 다시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이라도 시대에 따라 ‘외적 실행  상징적 보존  내적 이해’라는 다른 단계로 나타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지키면서 의미를 몰랐을까?’ 하는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표상 교회의 본질을 정확히 짚은 질문’입니다. 그들은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표상을 보존할 수 있었고, 그 표상 덕분에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 등불은 단지 성막의 등불이 아니라, ‘말씀 속에 숨겨진 진리의 빛이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보존된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AC.31, 심화 4, ‘겔3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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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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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심화

 

2. 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 [2]에서 사60:1-3, 20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회라고 하는데, 만일 이 교회를 말하는 거라면, 어휴, 그 시기가 너무도 앞서는 것 같아요...

 

AC.31 [2]에서 이사야 60장을 인용하며 말하는 ‘새 교회’라는 표현은 처음 읽을 때, 많은 분들이 당혹스럽게 느끼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 특히 ‘새 예루살렘 교리’나 ‘참된 기독교’ 등을 떠올리면 곧바로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새 교회(New Church)’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AC 초반부 문맥에서는 이 표현을 조금 더 넓고 원리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교회’는 반드시 역사적으로 아직 오지 않은 특정 교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다시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 곧 ‘빛이 다시 시작되는 영적 시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먼저 AC 전체에서 ‘교회(church)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순히 어떤 제도나 교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교회는 ‘주님을 알고 그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 다시 말해 ‘사람 안에 진리와 선이 살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역사적으로 여러 번 존재했습니다.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 고대교회(Ancient Church), 히브리교회, 유대교회, 그리고 기독교회가 차례로 나타났다고 설명합니다. 이 교회들은 각각 하나의 시대를 이루다가 점차 쇠퇴하고, 그다음에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사야 60장의 예언은 단순히 특정 시대의 예언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를 새롭게 하실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영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사야 60 1–3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문자 그대로 어떤 도시나 민족의 번영으로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은 진리를,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나라들’과 ‘왕들’은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어둠 속에 있던 교회에 다시 진리의 빛이 들어오는 상태’, 곧 교회가 새롭게 되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1에서 말하는 ‘새 교회’는 반드시 먼 미래에만 나타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회가 무너지고 난 뒤 주님이 다시 진리의 빛을 일으키실 때마다 나타나는 교회의 새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도 여러 곳에서 이사야의 예언들이 한 번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의 시대 속에서 반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예언의 가장 깊은 의미는 특정 역사 사건이 아니라 ‘영적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새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체계 전체를 보면, 이사야 60장의 예언은 결국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는 ‘주님이 세우실 마지막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AC 초반부에서는 아직 그 역사적 적용을 강조하기보다, 창세기 창조 이야기가 ‘한 사람의 거듭남과 교회의 regeneration을 동시에 묘사한다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새 교회’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빛이 시작되는 교회의 상태’를 말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변화가 항상 ‘사람의 거듭남과 평행’한다고 설명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어둠 속에 빛이 나타나는 장면은 한 개인의 거듭남의 시작을 나타내는 동시에,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AC.31에서 이사야 60장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빛이 있으라’라는 사건이 단순한 자연 창조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재창조’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읽을 때 ‘아직 오지 않은 어떤 먼 미래의 교회를 말하는 것인가?’라고 너무 좁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교회’는 더 근본적으로 ‘주님이 진리의 빛을 다시 일으키시는 상태’, 곧 ‘교회가 새롭게 되는 영적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 원리는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나타났고, 스베덴보리는 그 원리가 마지막으로 완전히 나타나는 형태를 ‘새 예루살렘 교회’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AC.31의 문맥에서는 이렇게 이해하시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창세기에서 ‘’이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거듭남의 시작을 말할 뿐 아니라, ‘어둠에 빠진 교회 가운데 주님이 다시 진리의 빛을 일으키시는 사건’, 곧 교회의 새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의미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60장을 인용하여 그것을 ‘새 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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