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7

어떤 초보 영(novitiate spirit)이 내가 영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자신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영이란 무엇입니까?’(What is a spirit?)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모든 사람 안에는 영이 있으며, 사람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고, 몸은 단지 사람이 땅 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살과 뼈, 곧 몸 자체는 전혀 살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기에, 나는 그에게 영혼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영혼이란 무엇입니까?’(What is a soul?)라고 되물으며, ‘나는 영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I do not know what a soul is)라고 대답했습니다.그때 나는 그에게 지금 그 자신이 영혼, 곧 영이라는 사실을 말해 줄 수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가 내 머리 위에 있으며 땅을 딛고 서 있지 않다는 사실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것을 지각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달아나면서 ‘나는 영이다! 나는 영이다!’(I am a spirit! I am a spirit!)라고 외쳤습니다. A certain novitiate spirit, on hearing me speak about the spirit, asked, “What is a spirit?” supposing himself to be a man. And when I told him that there is a spirit in every man, and that in respect to his life a man is a spirit; that the body is merely to enable a man to live on the earth, and that the flesh and bones, that is, the body, does not live or think at all; seeing that he was at a loss, I asked him whether he had ever heard of the soul. “What is a soul?” he replied, “I do not know what a soul is.” I was then permitted to tell him that he himself was now a soul, or spirit, as he might know from the fact that he was over my head, and was not standing on the earth. I asked him whether he could not perceive this, and he then fled away in terror, crying out, “I am a spirit! I am a spirit!”

 

어떤 유대인은 자신이 전적으로 몸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좀처럼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영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는데도,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자기는 사람이라고 고집했습니다.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몸에 몰두하여 살아온 사람들은 이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를 훨씬 더 많이 덧붙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사람 안에서 감각을 행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 몇 가지 사례만 제시했습니다. A certain Jew supposed himself to be living wholly in the body, insomuch that he could scarcely be persuaded to the contrary. And when he was shown that he was a spirit, he still persisted in saying that he was a man, because he could see and hear. Such are they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ve been devoted to the body. To these examples very many more might be added, but these have been given merely in order to confirm the fact, that it is the spirit in man, and not the body, which exercises sensation.

 

해설

AC.447은 AC.443부터 계속되어 온 논의를 매우 직접적인 명제로 모아 줍니다. 앞에서는 사후의 삶이 희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유기적 실체라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실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 안에서 실제로 감각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 그 답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사람 안에서 감각을 행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영’입니다.

 

첫 번째 사례의 ‘초보 영’(novitiate spirit)은 사후 세계에 막 들어온 영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미 몸을 떠나 영으로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여전히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영에 관해 이야기하자 ‘영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 부족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바로 자신이 영인데도 영을 자기 자신과는 별개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영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만큼 생전의 영혼과 영에 대한 관념도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모든 사람 안에는 영이 있다’고 한 뒤, 더욱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몸은 사람이 땅 위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살과 뼈로 이루어진 몸 자체가 독립적으로 살거나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몸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오히려 몸에는 분명한 역할이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지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과 사고와 감각의 주체가 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 이 글의 요점입니다.

 

초보 영이 ‘나는 영이다! 나는 영이다!’라고 외치며 달아나는 장면은 이 차이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죽은 뒤에도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느끼고 있었고, 생각하고 대화하며 주변을 지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육체를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지금까지 ‘나’라고 느끼며 보고 듣고 생각하던 존재가 바로 영이었다는 사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AC.443에서 사후의 삶이 희미해지지 않는다고 했던 이유와 AC.444에서 영을 단순한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던 이유가 이 사례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두 번째 유대인의 사례도 같은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그는 사후에도 보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보고 듣는다’는 것과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너무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이 사례를 제시하는 이유는 정반대의 결론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몸을 떠난 뒤에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설명 안에서는 감각의 근원적 주체가 육체 자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몸에 몰두하여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모든 육체적 삶이나 육체에 대한 관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사례에서 문제는 인간 자신을 사실상 몸과 동일시하여, 몸을 떠난 뒤에도 살아 있고 생각하며 감각하는 영적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생전에 ‘나는 곧 이 몸’이라는 관념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으면, 사후에도 자신의 감각이 계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몸을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AC.447 전체를 읽는 열쇠입니다. ‘감각을 행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영’이라는 말은 눈이나 귀 같은 육체의 감각 기관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몸은 영이 이 자연계에서 보고 듣고 느끼기 위한 기관으로 기능합니다. 그러나 감각 기관 자체가 지각의 최종 주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이 ‘보는 나’인 것도 아니고 귀가 ‘듣는 나’인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는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듣는 주체가 사람의 영이며,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벗은 뒤에도 영은 자신의 세계에서 계속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443-447은 하나의 질문을 점점 더 깊게 파고들고 있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삶이 희미해지는가, 영은 단지 생각에 불과한가, 보이지 않는 영을 실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는 주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47의 답은 매우 선명합니다. 인간은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며, 육체는 지상 생활을 위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나’라는 감각하고 생각하는 주체가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라, 그 주체가 지상 생활을 위해 사용하던 육체를 벗는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바로 이것이 초보 영이 자신이 이미 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토록 놀랐던 이유이며, 스베덴보리가 이 사례들을 통해 확인하려는 사후 인간의 연속성입니다. (AC.447 해설)

 

 

 

AC.448, 창4 뒤, ‘육체의 삶보다 더 밝고 분명하게 이어지는 사후의 삶’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8나는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bygrace.kr

 

AC.446, 창4 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실재를 부정하는 오류’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6나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곧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6

나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곧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as])으로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존재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에 관하여 영들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영에게 연장(extension)이 있다는 것뿐 아니라 영이 실체(substance)라는 것까지 부정하며, 실체가 무엇인지를 두고 논쟁합니다. 그리고 영에게 연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실체에 대해서도 논쟁하기 때문에, 영이 어떤 장소에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하며, 그 결과 영이 인간의 몸 안에 있다는 것도 부정합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자기 몸 안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자, 비교적 단순한 영들이었던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그렇게 어리석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부분 없는 부분들’(parts without parts)과 그 밖의 이와 비슷한 논쟁의 표현들을 듣고는, 그런 것들을 터무니없고 우스우며 익살스러운 말이라고 하면서, 그런 것들은 지성을 향한 길을 막기 때문에 마음을 조금도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I have discoursed with spirits concerning the common opinion that prevails among men at the present day, that the existence of the spirit is not to be credited because they do not see it with their eyes, nor comprehend it by their memory-knowledges [scientias], and so they not only deny that the spirit has extension, but also that it is a substance, disputing as to what substance is. And as they deny that it has extension, and also dispute about substance, they also deny that the spirit is in any place, and consequently that it is in the human body; and yet the most simple might know that his soul or spirit is within his body. When I said these things, the spirits, who were some of the more simple ones, marveled that the men of the present day are so foolish. And when they heard the words that are disputed about, such as “parts without parts,” and other such terms, they called them absurd, ridiculous, and farcical, which should not occupy the mind at all, because they close the way to intelligence.

 

해설

AC.446은 AC.444-445에서 다룬 ‘영의 연장’과 ‘영의 실체’ 문제를 한 단계 더 밀고 나갑니다. 앞에서는 영을 아무런 연장도 없는 ‘추상적 생각’으로 보는 관념을 다루었다면, 여기서는 왜 사람들이 그런 관념에 이르게 되는지를 지적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영을 육안으로 볼 수 없고 자신들이 가진 기억 지식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존재 자체를 믿기 어려워합니다. 곧 감각으로 확인하거나 기존 지식의 틀 안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만 실재한다고 여기는 태도가 문제의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as])이라는 표현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식이나 학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감각을 통해 얻고 기억 속에 축적한 지식의 범위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영적 실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연장이 없고, 연장이 없으니 실체라고 할 수 없으며, 실체가 아니니 어떤 장소에도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논리가 이어집니다. AC.446은 바로 이러한 추론의 연쇄를 보여 줍니다.

 

특히 ‘연장 → 실체 → 장소’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사람들은 영에게 연장이 없다고 전제한 뒤 영이 실체라는 것도 의심하고, 다시 영이 실체가 아니라면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자기 몸 안에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마저 철학적으로 설명하기 곤란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가장 단순한 사람’도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복잡한 추상적 논의가 오히려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점에서 AC.446은 단순한 사람과 학식 있는 사람을 흥미롭게 대비시킵니다. 여기서 ‘단순한’ 사람이나 영은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추상화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제 삶과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문맥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영이 존재하고 자신이 영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영의 실체와 장소를 끝없이 논쟁한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이상하게 여깁니다. 학문적 정교함이 언제나 더 분명한 이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부분 없는 부분들’(parts without parts)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런 추상적 논쟁의 한 예로 제시됩니다. AC.446 자체는 이 용어가 어떤 철학적 전통에서 어떤 엄밀한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 배경을 임의로 덧붙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어떤 목적으로 인용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교적 단순한 영들은 이런 표현들을 듣고 ‘터무니없고 우스우며 익살스럽다’고 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특정 철학 용어를 하나하나 논박하는 데 있기보다, 그런 추상적 논쟁이 오히려 영적 실재를 이해하는 길을 막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의 ‘지성을 향한 길을 막는다’(close the way to intelligence)는 말이 이 글의 중요한 결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생각이 깊어지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AC.442에서는 오히려 태고 시대 사람들이 오늘날보다 훨씬 깊이 사고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비판하는 것은 실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사고가 아니라, 말과 개념을 계속 추상화한 끝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오히려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사고입니다. 영은 보이지 않으므로 연장이 없고, 연장이 없으므로 실체가 아니며, 실체가 아니므로 어디에도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면 결국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없고, 살아 있지만 아무런 실체도 없는 영’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념만 남게 됩니다.

 

AC.444-446을 함께 읽으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바로잡으려 하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이며, 아무런 실체도 없는 추상이 아니라 ‘유기적 실체’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실재성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후의 인간은 자신을 실제 존재로 경험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글의 초점은 철학을 배척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철학과 지식이 실제 영적 존재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 주는가, 아니면 지나친 추상화로 오히려 그 길을 막고 있는가를 묻는 데 있습니다. (AC.446 해설)

 

 

 

AC.445, 창4 뒤, ‘영혼을 추상적 생각으로만 여길 때 생기는 문제’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5더 나아가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학자들은 죽은 뒤에도 살아갈 영혼, 곧 영을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5

더 나아가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학자들은 죽은 뒤에도 살아갈 영혼, 곧 영을 ‘추상적 생각’(abstract thought) 외에 다른 것으로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연장(extension)과 연장에 속한 것을 암시하는 어떤 표현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데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어떤 주체(subject)에서 떼어 내어 추상적으로 생각한 생각 자체에는 연장이 없지만, 생각의 주체와 생각의 대상에는 연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연장이 없는 대상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경계를 정하고 연장을 부여합니다. 이것은 학자들이 영혼 또는 영을 단지 생각으로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사람이 죽으면 그것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It was further remarked, that the learned have no other belief than that the soul which is to live after death, that is, the spirit, is abstract thought. This is very manifest from their unwillingness to admit of any term that implies extension and what belongs to extension, because thought abstractedly from a subject is not extended, whereas the subject of the thought, and the objects of the thought, are extended; and as for those objects which are not extended, men define them by boundaries and give extension to them, in order that they may comprehend them. This shows very clearly that the learned have no other conception of the soul or spirit than that it is mere thought, and so cannot but believe that it will vanish when they die.

 

해설

AC.445는 바로 앞 AC.444에서 한 사람과 나눈 대화를 보다 일반적인 문제로 확대합니다. AC.444의 사람은 영을 아무런 연장도 유기적 실체도 없는 ‘생각’이라고 여겼는데, AC.445에서는 이러한 관념이 그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당시 학자들에게 널리 나타나는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핵심은 영혼의 존재를 말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추상적 생각’(abstract thought)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추상적 생각’이라는 표현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하는 ‘누군가’와 그가 생각하는 ‘무엇’을 모두 떼어 낸 채 ‘생각’ 자체만을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생각은 반드시 생각하는 주체에게 속한다고 봅니다. 생각 자체를 주체로부터 추상하면 연장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생각하는 주체와 그 생각이 향하는 대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을 단순히 ‘생각’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생각하고 지각하며 살아 있는 실제 주체로서의 영은 설명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이 때문에 AC.445에서는 ‘생각의 주체’(subject of the thought)와 ‘생각의 대상’(objects of the thought)을 구별합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44와 직접 연결됩니다. 사후의 영은 단순히 ‘생각이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하는 주체입니다. AC.444에서 영이 ‘유기적 실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각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며, 스베덴보리는 그 주체를 아무런 실체도 없는 추상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연장이 없는 대상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경계를 정하고 연장을 부여하여 이해한다’는 말은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사고가 어떤 것을 이해할 때 그것을 전혀 무규정적인 상태로 두기 어렵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직접 공간적 연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대상조차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경계를 지어 하나의 구별되는 대상으로 파악합니다. 즉 인간의 이해는 어떤 것을 파악하려면 그것을 다른 것과 구별되는 일정한 것으로 생각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을 아무런 형체나 구별도 없는 순수한 추상으로 생각하는 데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445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사고방식이 사후의 삶에 대한 믿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지적합니다. 영혼이나 영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긴다면 육체가 죽을 때 그 생각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실제로 살아 있는 영적 주체의 활동으로 보지 않고 육체에 붙어 있는 추상적인 현상처럼 생각한다면, 육체가 사라진 뒤에도 그 생각의 주체가 계속 살아간다는 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을 추상적 생각으로만 이해하는 관념 안에 이미 사후 존속을 믿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 AC.443-445는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AC.443에서는 육체가 사라지면 영의 삶이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다루었고, AC.444에서는 영이 연장도 유기적 실체도 없는 단순한 생각이라는 관념을 한 사람의 사례를 통해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AC.445에서는 그것을 학자들의 일반적인 관념으로 확대합니다. 세 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육체에는 강한 실재성을 부여하면서 영에는 그와 같은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사후 세계 체험을 통해 바로 이 관념을 뒤집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말하는 ‘연장’의 문제는 단순히 영이 공간을 얼마나 차지하는가를 묻는 철학적 호기심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밑에는 ‘영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인가, 아니면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나타나는 추상적인 생각에 불과한가?’라는 훨씬 근본적인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AC.445에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영을 지나치게 ‘비물질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결국 아무런 실재성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설명에서 사후에 살아가는 영은 생각 그 자체가 아니라 ‘생각하는 존재’이며, 바로 그 존재가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감각과 욕구와 사고를 가지고 계속 살아갑니다. (AC.445 해설)

 

 

 

AC.446, 창4 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실재를 부정하는 오류’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6나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곧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bygrace.kr

 

AC.444, 창4 뒤, ‘영은 단지 생각일 뿐이며 아무런 형체도 없는가?’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4이 세상에 살 때 영은 아무런 연장(extension)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으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