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08-410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알면서 그것들을 인정하고 믿은 뒤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는 상태를 매우 위험하게 설명하는 한편, 그것들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모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진리를 배우지 않는 것이 안전한 것 아닐까요? 주님과 말씀에 관하여 적게 알수록 모독할 위험도 줄어든다면, 무지가 오히려 유리한 상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408의 요점은 ‘무지가좋은상태’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모독’이 단순한 무지나 불신앙과 같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거룩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자기 안에서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가 다시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는 방식의 모독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 사람이 진리를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신앙의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그 반대되는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면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이 그의 내면에서 뒤섞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모르는사람’과 ‘알면서거부하는사람’ 사이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AC.410은 황폐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알면서도알려하지않고,보면서도보려하지않는’ 상태이며, 다른 하나는 무지 때문에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후자의 사람에게 진리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완성된 영적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진리를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이미 알고 보면서도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교회가 때때로 이전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까? AC.408-410의 문맥에서는 이미 계시된 거룩한 것들을 알고도 계속 거부하고 뒤섞어 온 곳보다, 아직 그것들을 알지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민족이나 종교 집단 자체가 다른 집단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교회의 ‘상태’입니다. 어느 곳이든 진리를 알고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가 될 수 있고, 어느 곳이든 아직 알지 못했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복음을듣지않는것이더안전하다’거나 ‘진리를배우지않는것이영적으로유리하다’는 결론으로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거듭나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문제는 진리를 ‘아는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인 뒤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입니다.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위험 자체가 아니라 큰 선물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라는 부르심입니다. 위험은 빛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여 빛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어둠과 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408의 ‘새로운아침’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지를 보존하기 위해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빛을 주시기 위해 일으키십니다. 이전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여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아직 그렇게 뒤섞이지 않은 곳에서 다시 진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는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출발 상태일 뿐입니다. 목적은 결국 진리를 알고, 인정하고, 믿으며, 그것을 체어리티의 삶과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목회적으로도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우리는 ‘모르면책임이적으니차라리모르는것이낫다’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빛을 주실 때 그 빛을 감사히 받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동시에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진리를 알고도 거부한다는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AC.408-410은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를 얼마나 세밀하게 구별하시며, 황폐 가운데서도 다시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하여 새로운 아침을 여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AC.408심화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더이상아무런신앙도남아있지않을만큼황폐해졌을때,그때비로소,그이전이아니라,교회는새롭게시작됩니다.곧새로운빛이비치기시작하는데,이것을말씀에서는‘아침’(morning)이라고부릅니다.교회가황폐해지기전에는새로운빛,곧‘아침’(morning)이밝아오지않는이유는신앙과체어리티에속한것들이모독적인것들과뒤섞여있기때문입니다.이러한상태가지속되는동안에는빛이나체어리티에속한어떤것도그안에스며들게할수없습니다.‘가라지’(tares)가모든‘좋은씨’(goodseed)를파괴하기때문입니다.그러나신앙이더이상남아있지않으면신앙을더이상모독할수도없습니다.사람들이자기들에게전해지는것을더이상믿지않기때문입니다.앞에서살펴본것처럼,인정하고믿지는않으면서단지알고있기만하는사람들은모독할수없습니다.오늘날의유대인들이그러합니다.그들은기독교인들가운데살기때문에기독교인들이주님을자신들이기다려왔고지금도계속기다리는메시아로인정한다는사실을알고있을것입니다.그러나그들은이것을인정하거나믿지않으므로모독할수없습니다.주님에관하여들은무슬림들(Mohammedans)과이방인들(gentiles)의경우도마찬가지입니다.유대교회가아무것도인정하거나믿지않게될때까지주님께서세상에오시지않은것도바로이러한이유때문입니다.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morning.” 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 “morning” 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 “tares” destroy all the “goodseed.” 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해설
AC.408은 교회의 황폐와 새로운 시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07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르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회의 어떤 핵심은 보존된다고 했습니다. 태고교회의 남은 부분이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었으며, 그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른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제 AC.408은 왜 이전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더 이상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비로소 새롭게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하는 이 상태를 말씀의 ‘아침’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아침은 단순히 어둠이 끝난 다음의 시간대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아침은 교회의 영적 상태가 새로워지는 일과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전 교회가 완전히 황폐해지기 전에는 새로운 아침이 밝아 올 수 없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거짓된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고 믿으면서도 그것을 모독적인 것과 결합시키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새로운 빛이나 체어리티를 그 안에 스며들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가라지’가 모든 ‘좋은씨’를 파괴한다고 말합니다. 가라지와 좋은 씨는 서로 다른 성격의 것들이 한곳에 뒤섞여 있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번 문맥에서 좋은 씨는 새롭게 받아들여질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관련되며, 가라지는 그것들을 파괴하는 모독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핵심은 교회 안에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인 상태에서는 새로운 영적 생명이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에는 그것을 더 이상 모독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별은 ‘아는것’과 ‘인정하고믿는것’의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진리에 관하여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진리를 자기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알고 있을 뿐 인정하거나 믿지 않는 경우에는 이번 문맥에서 말하는 모독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모독은 단순한 무지나 불신앙과 구별됩니다. 거룩한 것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독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논지는 거룩한 것을 실제로 인정하고 믿는 상태와 그것을 모독적인 것에 결합시키는 상태 사이의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져 더 이상 신앙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상태도 지속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에 기독교인들 가운데 살던 유대인들을 예로 듭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은 그것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그 신앙을 모독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에 관하여 들은 무슬림들과 이방인들도 같은 원리의 예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려는 것은 특정 집단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어떤 진리를 외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인정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 대목의 ‘오늘날’은 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또한 그가 유대인과 무슬림과 이방인을 예로 든 것은 그의 신학적 관점에서 모독의 조건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오늘날 해당 종교에 속한 모든 사람의 실제 신앙 상태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 판단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사람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인정하며, 실제로 무엇을 믿는지는 외적인 종교적 소속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유대교회가 아무것도 인정하거나 믿지 않게 될 때까지 세상에 오시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강림 시기를 교회의 황폐와 모독의 문제에 연결하는 그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전 교회가 거룩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새로운 빛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그 상태가 끝난 뒤에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당시 모든 유대인이 아무런 종교적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역사적 진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주님에 관한 참된 신앙이라는 자신의 신학적 기준으로 유대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AC.407과 AC.408을 함께 읽으면 교회의 황폐와 보존,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이전 교회는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집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 어떤 핵심이 남아 보존됩니다. 그리고 이전 교회의 황폐가 끝에 이르러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열릴 때,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아침’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황폐를 그 자체로 좋은 일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하는 것은 교회의 비극적인 상태입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상태에서도 교회의 남은 부분을 보존하시며,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인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때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십니다. 따라서 새로운 아침은 인간이 신앙을 잃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찾아오는 결과가 아니라, 황폐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핵심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빛을 주시는 주님의 섭리와 관련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거듭남을 생각할 때에도 조심스럽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신앙이 없다고 느끼거나 영적으로 메마른 시기를 겪는다고 해서 반드시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교회의 황폐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더 깊이 무너져야만 주님께서 새롭게 하신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408은 우선 교회 전체의 상태와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설명하는 번호입니다.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는 거룩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악과 결합시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러한 결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원리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결국 AC.408의 중심은 ‘황폐가끝나야아침이시작된다’는 말에만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런 질서가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면서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신앙이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모독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새로운 시작의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아침’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AC.408해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
교회전체의상태는이와같습니다.교회는시간이흐르면서참된신앙에서떠나마침내신앙이완전히없어지는데이르며,이때그교회가‘황폐해졌다’(vastated)고합니다.태고교회에서가인파(Cainites)라불린사람들에게도그러했고,홍수후고대교회에도그러했으며,유대교회에도그러했습니다.주님께서강림하실당시유대교회는이처럼황폐한상태에있었으므로,주님께서자신들의구원을위하여세상에오실것이라는사실을전혀알지못했고,주님을믿는신앙에관해서는더욱알지못했습니다.주님의강림후에존재했던초기기독교회도그러했으며,오늘날에는신앙이전혀남아있지않을만큼완전히황폐해졌습니다.그러나교회에는언제나어떤핵심(nucleus)이남아있으며,신앙에관하여황폐해진사람들은그것을인정하지않습니다.태고교회에서도그러했습니다.그교회의남은부분(remnant)은홍수때까지존속했고,그사건이후에도계속되었습니다.이교회의남은부분을‘노아’(Noah)라고부릅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 “vastated.” 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 “Noah.”
해설
AC.407은 앞의 AC.405-406에서 설명한 라멕의 황폐를 교회 전체의 역사라는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라멕은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며, 그가 사람과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황폐가 가인의 계보에서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날 때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이번 문맥에서 교회가 참된 신앙을 잃어 마침내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황폐를 단순히 교회의 외적인 쇠퇴나 건물과 제도의 소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존속하더라도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된 참된 신앙이 사라진다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는 황폐한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규모가 작아졌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가 다루는 것은 교회의 내적인 신앙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황폐의 사례로 태고교회에서 가인파라 불린 사람들, 홍수 후 고대교회, 유대교회, 그리고 초기 기독교회를 차례로 언급합니다. 여기서 태고교회 전체와 가인파를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처음 사례로 지목하는 것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가인파라불린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계열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태고교회의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가인과 같은 상태였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 고대교회와 유대교회에 관한 언급도 같은 논지를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처음의 참된 신앙에서 점차 떠나 황폐에 이르는 일이 여러 교회에서 반복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주님의 강림 당시 유대교회가 주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을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에 관해서는 더욱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이 주님에 관한 동일한 지식과 태도를 가졌다는 역사적·사회적 일반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 기독교회에 관한 설명에서도 시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에 존재했던 초기 기독교회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에 이르렀으며, 자신의 시대에는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다고 진술합니다. 여기서 ‘오늘날’은 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별도의 검토 없이 오늘날의 모든 기독교회와 모든 신자에 대한 현재적 사실 판단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교회의 황폐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쇠퇴를 설명한 직후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교회에는언제나어떤핵심이남아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nucleus)은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해서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황폐해진 사람들은 그 핵심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들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교회의 남은 부분은 존속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황폐와 교회의 완전한 소멸을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이번 번호의 ‘핵심’(nucleus)과 ‘남은부분’(remnant)은 서로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교회에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고 말한 뒤, 태고교회에서도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이 홍수 때까지 존속했고 홍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노아는 이번 문맥에서 단순히 홍수 이야기의 한 인물을 넘어, 황폐해진 태고교회로부터 보존되어 이어지는 교회의 남은 부분을 나타냅니다.
다만 여기서 ‘남은부분’을 곧바로 개인의 거듭남에서 말하는 기술적 의미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번호는 교회 전체의 황폐와 그 가운데 보존되는 교회의 핵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 안에 보존되는 리메인스와 연결하여 생각할 여지는 있지만, 그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관련 AC본문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사용한 ‘핵심’과 ‘교회의남은부분’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살리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제 가인의 계보와 노아의 관계도 조금씩 드러납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라멕에게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역사는 그 황폐로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이 보존되어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며, 그 남은 부분이 노아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은 교회의 황폐와 보존이라는 두 측면에서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지더라도 주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것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새로운 교회로 이어질 수 있는 핵심을 보존하십니다. 물론 이번 번호는 그 핵심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보존되었는지, 홍수 이후의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내용은 노아와 홍수에 관한 이어지는 AC에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황폐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남은 부분이 존속한다는 사실만큼은 이번 번호에서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따라서 AC.407을 읽을 때에는 교회의 황폐에 관한 진술만큼이나 그 뒤에 나오는 ‘그러나’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교회의 황폐를 열거한 뒤에도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고 말합니다. 황폐해진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핵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남은 부분은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었고,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릅니다. 결국 AC.407은 한 교회의 쇠퇴를 설명하면서도, 그 쇠퇴를 넘어 계속되는 교회의 보존을 함께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AC.407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