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4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죽기 직전에라도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 천국 간다’ - 마지막 고백이 평생의 사랑을 바꿀 수 있는가?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평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거나 심지어 악하게 살았더라도,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특히 임종을 앞둔 사람을 위해 기도하거나 복음을 전할 때 강하게 나타납니다.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회자는 병상 곁에서 복음을 전하고, 환자가 짧게라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구원의 확신을 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랑과, 인간의 어떠한 죄보다 주님의 자비가 크다는 귀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어떤 삶을 살았든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공식으로 굳어진다면,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놓치게 됩니다. 과연 천국은 마지막 순간에 특정한 신앙고백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들어가는 장소일까요? 그리고 인간이 평생 사랑하며 형성해 온 내면의 생명은 죽기 직전의 몇 마디 말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 문제에서도 개신교의 모든 전통을 하나로 묶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주의 신앙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며,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회개의 기회가 열려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진실한 회개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을 동일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참된 회심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내적 변화라고 보며, 웨슬리안 전통에서도 회개와 믿음의 진정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다만 실제 전도와 목회 현장에서는 이러한 신학적 구별이 단순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죽기 전에 예수님만 영접하면 된다’는 말이 반복되면서, 마치 마지막 순간의 신앙고백 자체에 구원을 보장하는 특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검토하려는 것은 임종 직전의 진실한 회개가 가능하냐는 질문을 넘어, 그 회개를 한순간의 언어적 고백으로 축소하고, 인간의 실제 내적 상태와 분리해 이해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가장 대표적인 성경적 근거는 눅23:39-43에 등장하는 십자가 위의 행악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다른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낙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장면은 기독교 역사에서 마지막 순간의 회개와 구원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본문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이 말씀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주님의 자비가 닫혀 있지 않다는 강력한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행악자가 단순히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한 형벌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고 인정했고, 예수님께는 잘못이 없다고 고백했으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자신의 죄에 대한 인정,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신뢰가 함께 나타납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완전하게 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근거로 어떤 사람이든 죽기 직전에 신앙고백만 하면 그 내면의 상태와 관계없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은 인간이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생명을 계속 지니며,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이 사후의 삶을 결정한다고 설명합니다(HH.470–484). 특히 HH.476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온 신앙을 지니며, 그것들이 그의 행위와 삶 안에 실제로 담겨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어지는 HH.477은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이란 사람이 일시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나 순간적 결심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자신의 의지와 선택을 통해 형성해 온 생명의 중심적인 방향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해치는 것을 즐거워했다면, 그러한 사랑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생명의 성향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했다면, 그 사랑 역시 그의 내면에 형성된 생명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과 지옥은 외적 신앙고백의 유무만으로 결정되는 보상과 처벌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어떠한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였는가에 따라 들어가게 되는 영적 상태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볼 때, 죽기 직전의 신앙고백은 그것이 아무리 진지하게 들리더라도 그 사람의 내면 전체를 자동으로 변화시키는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에서 입술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설명합니다(TCR.516–519). 특히 TCR.529에서는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슬퍼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 사람 안에 자리 잡은 악한 사랑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악을 살피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TCR.528–53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요소인 새로운 삶입니다. 단순한 후회와 회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것과, 자신의 악이 주님의 뜻에 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악 자체를 미워하게 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전자는 자신의 고통이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될 수 있지만, 후자는 선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애정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임종 직전의 고백을 평가할 때도 그 사람이 얼마나 절박하게 말했는가보다, 그 고백이 어떠한 내적 사랑에서 나왔는가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참된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뜻일까요? 반드시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내면을 완전하게 알지 못하며, 주님께서 그 사람의 생애 전체에 걸쳐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오랫동안 주님을 거부하며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양심과 선한 애정,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보존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보존하시며, 이것들이 이후의 영적 생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AC.561, 661). 이러한 리메인스(remains)의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순간에 드러나는 신앙고백이 반드시 그 순간 처음으로 생겨난 내적 변화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거나 억눌려 있던 선한 애정과 진리를 향한 마음이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드러날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특정한 임종 고백이 실제로 그러한 상태에서 나왔는지를 우리가 판정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무엇이 보존되어 있었으며, 마지막 순간의 고백이 얼마나 진실한 내적 응답이었는지는 오직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마지막 순간에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아무런 내적 과정 없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HH.480에서 인간이 죽은 뒤에는 지상에서 형성한 지배적인 사랑이 지속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사후에는 지상에서처럼 외적 삶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형성하는 개혁과 거듭남의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면, 지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자유와 합리성을 주시고, 자연계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진리를 배우고 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할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사랑이 형성되고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평생 악을 사랑하며 살아온 사람이 죽기 직전에 천국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순간 자신의 악한 사랑을 모두 버리고 천국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존재로 바뀌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천국은 특정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들어갈 수 있는 외적 장소가 아니라, 천국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생명이 있어야 참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이 생깁니다. 만일 평생 악하게 살았던 사람이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 고백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천국에서 그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지상에서 즐거워하던 악한 욕망과 이웃을 해치려는 사랑을 그대로 지닌 채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는 천국의 삶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국의 기쁨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데서 비롯되며, 지옥의 영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사랑입니다(HH.481). 따라서 악한 사랑을 그대로 지닌 사람이 천국의 환경에 놓인다고 해서 천국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 천국의 선과 진리는 자신의 내적 성향과 충돌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을 받아들이기 싫어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지만, 인간이 스스로 사랑하게 된 생명의 성향을 무시하고 천국의 기쁨을 강제로 주입하지는 않으십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천국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면 무엇이든 가능하지 않은가?’라는 반론을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주님의 신성한 능력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전능하심을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이라는 질서를 무시하는 능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는 주님께서 인간을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개혁하시고 거듭나게 하신다고 가르칩니다(DP.71, 82–86).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사랑을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원하지 않는 사랑을 억지로 그 사람의 중심적 사랑으로 만들어 놓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일 인간이 평생 악을 사랑하도록 자신을 형성했는데도 죽기 직전의 고백 한마디로 그 사랑이 강제로 제거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면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섭리와 조화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인간의 실제 생명을 변화시키는 은혜이지, 변화되지 않은 생명을 변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외적 선언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무한함을 믿는 것과 구원의 영적 질서를 무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죽기 직전의 신앙고백을 가볍게 여기거나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불필요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임종의 순간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이 붙들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지 깨달으며, 주님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들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던 진리가 그 순간 비로소 마음에 깊이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남아 있던 신앙과 양심이 마지막 순간에 다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돌아보며 주님께 마음을 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람에게 특정한 신앙고백을 받아 냈다는 사실만으로 천국행을 보증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환자의 의식이 흐려져 있거나 말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구원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의지와 생각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임종의 자리에서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구원을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증언하고 그 사람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유가족을 위로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다면, 우리는 그 고백을 귀하게 여기고 주님께서 그 사람의 내면에서 역사하셨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그 사람이 반드시 천국에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반대로 평생 교회를 다니지 않았거나 마지막 순간에 신앙고백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HH.318–328에서 지상에서 기독교를 알지 못한 사람도 자신의 종교와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왔다면 주님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은 구원이 인간의 외적인 종교적 소속이나 특정한 언어적 고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러한 이해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자동으로 보장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실제 내면을 아시며, 그 사람이 자신에게 허락된 진리와 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완전하게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위로는 ‘마지막에 영접기도를 했으니 무조건 천국에 갔다’거나 ‘그 기도를 하지 못했으니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완전한 사랑과 지혜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결국 ‘죽기 직전에라도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 천국 간다’는 말에서 우리가 보존해야 할 진리는 주님의 자비에는 인간이 정해 놓은 시간적 한계가 없으며,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주님께 나아갈 소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잡아야 할 오류는 마지막 순간의 언어적 고백이 평생 형성된 내면의 사랑과 관계없이 천국을 보장한다는 생각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마지막 말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체를 보시고 그 안에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는지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언젠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오늘의 삶을 미루어도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늘의 삶은 단순히 죽음을 준비하는 대기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며, 어떤 악을 멀리하고, 어떤 선을 행하는가를 통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형성되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구원의 공식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은 마지막까지 미루어 둘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시작해야 할 일입니다.

 

죽기 직전에도 주님께 나아가고 진실하게 회개할 가능성을 인간이 일률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실제 내적 상태와 관계없이 천국에 간다는 주장은 스베덴보리의 구원론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외적 신앙고백의 유무보다 인간 안에 형성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된 삶에 관계되며, 참된 회개는 입술의 고백에 그치지 않고 악에서 돌이키는 내적 변화를 포함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여 천국의 사랑을 강제로 주입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임종자의 최종적 영적 상태는 인간이 판단할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의 완전한 사랑과 지혜에 맡겨야 합니다.

 

 

 

PR.003,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SL.PR.003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인간의 자유를 혼동하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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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3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 말은 천주교 신앙생활에서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가르침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단순히 신앙 공동체에 가입하는 의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원죄가 씻기고, 새로운 생명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유아 세례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신앙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아이라도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은총을 베푸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들을 때 우리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세례라는 외적 의식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사람의 내적 생명에도 실제로 영적 출생이 완성되는 것일까요? 물로 머리를 씻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과, 인간의 내면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것은 과연 같은 사건일까요?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종교적 신분이 부여되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실제로 주님의 생명을 받아 그분을 닮은 존재로 변화되어 간다는 뜻입니까? 이번 주제의 핵심은 세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가리키는 참된 영적 출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분별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1265항은 세례가 모든 죄를 씻을 뿐 아니라 세례받은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 하느님의 양자,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성전으로 만든다고 가르칩니다. 제1266항은 세례를 통하여 성화의 은총과 의화의 은총이 주어지며,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할 능력과 선을 행할 영적 능력이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제1272항은 세례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지워지지 않는 영적 인호를 남긴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천주교가 세례를 단순한 상징적 의식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 실제로 역사하는 성사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천주교는 세례받은 사람이라면 이후 어떻게 살아도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례의 은총은 신앙생활 속에서 성장해야 하며, 죄는 그 은총의 열매를 가로막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유효한 세례를 받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다고 인정하며, 세례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자비를 통한 구원 가능성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실제 쟁점은 ‘천주교 신자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가?’라는 단순한 배타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세례라는 외적 성사가 그 자체로 인간의 영적 신분과 내적 생명에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고 이해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성경은 세례와 새로운 출생을 긴밀하게 연결하면서도, 그 출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이 구절을 세례의 필요성과 은총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합니다. 실제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에는 외적 정결과 내적 새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어지는 6절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영적 출생이 단순히 외적 사건이나 자연적 신분 변화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은 주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이들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근원은 인간의 혈통이나 제도적 소속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세례는 그 출생을 가리키는 거룩한 표지가 될 수 있지만, 그 표지가 가리키는 실제적인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세례와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을 서로 무관한 것으로 분리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외적 물세례와 내적 거듭남을 동일한 사건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이 구별을 분명히 할 때 비로소 세례가 가리키는 영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667–691에 걸쳐 세례의 의미와 쓰임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세례에 세 가지 쓰임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첫 번째 쓰임은 사람을 기독교회 안으로 인도하고 동시에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하는 것이며(TCR.677–680), 두 번째 쓰임은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따르게 하는 것이고(TCR.681–683),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인간이 거듭나는 것입니다(TCR.684–687). 이 세 가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스베덴보리가 세례를 단순한 인간의 종교적 관습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세례가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자연계에서 행하는 세례가 영계의 질서와도 실제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례의 첫 번째 쓰임과 마지막 쓰임을 엄격하게 구별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주님의 진리와 선을 받아 실제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새로운 영적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고, 후자는 그 입구를 지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변화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을 그 궁극적인 목적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세례의 참된 가치는 그 의식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인도하며 어떤 새로운 생명을 향하여 준비시키는가에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유아 세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TCR.677에서 그는 유아들이 아직 신앙에 관한 것을 이해하거나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지만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이 세례가 교회로 들어가는 표지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하거나 의식적으로 회개할 능력이 없는 아기가 세례받는 순간 이미 성인의 의미에서 거듭남을 완성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아 세례에는 아무런 영적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받은 아이들이 영계에서 기독교인들과 연결되고,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그 아이들이 장차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보호하고 준비시키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세례가 영계와 전혀 무관한 단순한 표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결정적인 구별이 있습니다. 아이가 성장하여 자기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는 점차 자신이 무엇을 믿고 사랑하며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와 깊이 연결됩니다. 세례받았다는 사실이 이후의 모든 삶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유아 세례는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거듭남을 향한 출발이며, 장차 주님을 알고 그분의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거룩한 시작입니다. 따라서 세례받은 어린아이를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를 때에도, 그 표현이 가리키는 은총의 시작과 장차 이루어져야 할 실제적인 영적 성장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TCR.677–680 해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4255에서도 세례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세례가 교회와 교회에 속한 것들로 들어가는 입문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남과 거듭남에 속한 것들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세례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는 그 거듭남을 나타내는 표지라는 구별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물은 말씀의 진리를 상응적으로 나타내며, 물로 씻는 행위는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악과 거짓이 제거되는 영적 정결을 뜻합니다. 그러나 물이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낸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미움과 탐욕, 교만과 악한 욕망을 씻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내적 악은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할 때 점차 제거됩니다. 이 과정에서 진리는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 주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물이 가리키는 참된 씻음은 물이라는 자연적 요소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이 상응하는 신적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서 역사할 때 이루어집니다. 세례가 거룩한 이유는 물 자체에 독립적인 영적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인간에게 거듭남의 길과 목적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세례의 표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의식 자체에 지나친 구원적 효력을 부여하는 것은, 외적 표지와 그것이 나타내는 내적 실재를 혼동하는 문제가 됩니다. (AC.4255, 10239 해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세례의 목적을 설명하는 TCR.681과 684, 그리고 성찬과 거듭남의 관계를 설명하는 TCR.728과 729에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신분이 변경되거나 교회의 회원 명부에 이름이 올라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로 새롭게 형성된다는 뜻입니다. 특히 TCR.729에서 스베덴보리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주님의 인도 아래 천국에서 양육받으며 점차 거듭나 주님의 자녀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유아 세례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세례받은 아이가 주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놓인다는 사실은 참으로 귀중하지만, 그것을 곧바로 영적 성장의 완성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기독교회 밖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어떤 특정한 교회의 제도적 의식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며, 사람이 태어난 종교적 환경에 따라 그분의 사랑을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의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생명으로 새롭게 하시고, 그 사람이 자유롭게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존재로 자라나도록 인도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 신적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반영하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TCR.681, 684, 728–729 해설)

 

이제 이러한 가르침을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평생 천주교 신자로 살아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례명을 기억하고, 세례받은 날짜를 소중히 여기며, 주일마다 미사에 참여하고, 여러 성사생활에도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의 신앙생활에 귀중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 이익을 위하여 거짓말하며, 가족에게 분노와 폭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세례받은 하느님의 자녀다’라는 사실에 안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사람이 반드시 지옥에 간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내적인 상태와 최종적인 운명은 오직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세례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복적인 확인이 아니라, 세례가 가리키는 참된 회개와 거듭남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반대로 아직 세례받지 않았거나 특정 교회에 소속되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의 삶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가 역사할 가능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세례는 신앙생활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세례받은 날이 중요한 것은 그날부터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의 거룩한 표지가 평생의 삶을 통하여 실제적인 영적 생명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라는 선언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라는 가르침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천주교만을 비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개신교 신앙에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구원받았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천주교에서 세례가 새로운 신분의 출발점으로 강조된다면, 일부 개신교에서는 영접기도나 회심의 고백이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물론 두 전통의 구원론과 성례전 이해는 서로 다르지만, 신앙인이 외적 종교 행위나 과거의 한 사건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확실한 보증으로 삼으려는 위험은 공통으로 존재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신이 세례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고, 상응론을 배우고, 거듭남과 체어리티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신자들보다 더 높은 영적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지식과 생명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프로프리움’(proprium)은 심지어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도 자기 우월감과 영적 교만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내가 세례를 받았는가?’, ‘내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질문은 ‘나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따라 실제로 악을 피하고 있는가?’, ‘나의 사랑은 이전보다 자신에게서 이웃에게로 향하고 있는가?’, ‘나는 주님의 생명을 내 삶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참된 열매는 사람의 이마에 남아 있는 보이지 않는 종교적 신분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자라나 삶으로 나타나는 사랑과 선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명제에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진리는 세례가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과 장차 이루어질 거듭남의 중요한 표지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인간을 신앙의 공동체와 연결하시고, 영계의 질서 안에서도 그 사람을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수정되어야 할 부분은 외적 세례의 시행 자체를 인간의 내적 거듭남과 동일시하거나, 그 의식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영적 상태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천주교 역시 세례받은 이후의 성장과 은총에 대한 협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단순한 오해를 공식 교리 전체의 입장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례가 그 자체로 새로운 영적 신분과 지워지지 않는 인호를 부여한다는 성사적 이해는, 세례를 거듭남의 표지와 입문으로 구별하는 스베덴보리의 설명과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떤 종교 조직에 가입하거나 특정한 의식을 치렀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그분의 진리와 사랑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살아 있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세례가 가리키는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은 한 번 머리 위에 부어질 수 있지만, 주님의 진리가 인간의 마음을 씻고 새롭게 하는 일은 평생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속적인 거듭남 속에서 인간은 점차 주님의 자녀다운 존재로 형성되어 갑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세례는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거룩한 입문이자 거듭남의 표지이지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참된 영적 생명은 외적 세례의 시행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받아들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실제적인 거듭남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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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인간의 자유를 혼동하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말은 많은 신자에게 깊은 위로와 확신을 주는 표현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므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실패와 죄를 경험하더라도 최종적으로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특히 자신의 연약함과 반복되는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신자들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사랑하신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인간의 부족함 때문에 자신의 구원 약속을 철회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에는 분명 귀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이후에 어떤 삶을 살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은 확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간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실제 상태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원을 과거 어느 시점에 획득한 영원한 자격으로 이해하면, 성경이 그토록 강조하는 회개와 거듭남, 끝까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구원의 본질이 아니라 부차적인 문제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먼저 이 명제를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흔히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고 부르는 교리를 가르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7장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완전히 또는 최종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끝까지 보존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된 신자도 심각한 죄에 빠지고 한동안 그 죄 가운데 머물 수 있으며, 그 결과 양심이 상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엄밀한 개혁주의 견인 교리는 ‘한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이후에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무조건적인 면죄부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반면 웨슬리안·알미니안 전통은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먼저 역사하지만 인간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을 거부하고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개신교 안에서도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관한 이해는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이 글에서 검토하려는 것은 이러한 교리적 차이를 무시한 채, ‘한번 구원받았으면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모든 것이 확정되었다’고 받아들이는 신앙적 통념입니다.

 

성경에서 영원한 구원의 확신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말씀은 요한복음 10장 28절로 29절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며 그들을 자신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 역시 사망이나 생명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들은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능력이 인간의 연약함이나 세상의 위협보다 무한히 크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같은 요한복음 10장 27절에서 자신의 양들이 자신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15장 4절로 6절에서는 자신 안에 거하라고 명하시며,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양들을 지키시는 능력과 그 양들이 실제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상태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진리와, 사람이 주님을 떠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문제는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6장 4절로 6절과 10장 26절로 29절에는 한때 영적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도 의도적으로 진리를 거스르고 악으로 돌아설 때 발생하는 심각한 위험이 경고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20절로 22절 역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사람이 다시 그것에 얽매이는 상태를 경고합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러한 본문들을 참된 중생자의 구원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외적으로 신앙에 참여했으나 참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 관한 경고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반면 다른 개신교 전통에서는 실제 신자에게도 배교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이처럼 해석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어느 입장에서든 성경의 경고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약속은 회개와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허가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구원의 의미 자체가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는 주님의 섭리가 지향하는 목적이 인간의 구원이며, 인간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개혁되고 거듭나야 한다고 설명합니다(DP.71, 82–86). 여기서 구원이란 단순히 인간의 이름이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의 명단에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 의해 변화되고,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며, 거짓을 즐기던 사람이 진리를 기뻐하는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내면에서 실제로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여 강제로 천국의 생명을 주입하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자유롭게 받아들이지 않은 사랑은 그 사람 자신의 사랑이 될 수 없고, 이해를 거치지 않은 진리는 그 사람의 생명과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부여하시는 외적인 신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한번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인간이 거부할 수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결코 인간에 대한 구원의 뜻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주님은 모든 사람을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와 합리성은 구원의 첫 순간에만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 전체에서 존중되어야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한때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행하기 시작했더라도, 이후 자신의 자유로 악을 사랑하고 진리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통해 주님의 인도를 거스르는 방향을 선택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DP.100–128).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분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구원을 단번에 획득한 뒤 잃어버릴 수 있는 물건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명제가 구원을 영구적인 소유물처럼 이해하는 위험을 지닌다면, 반대로 ‘죄를 지을 때마다 구원을 잃었다가 회개하면 다시 얻는다’는 생각 역시 구원의 본질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에 구원을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으며 그 사랑이 어떠한 삶을 만들어 내고 있느냐입니다. 사람이 악을 행했다고 해서 그 순간 곧바로 모든 영적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며, 그 과정에는 수많은 시험과 넘어짐, 회개와 회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복되는 연약함 때문에 자신의 구원이 매번 취소되는 것처럼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과거의 신앙고백 하나만을 근거로 자신의 현재 삶을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에 나타나는 지배적인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은 뒤에도 지상에서 형성한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지니고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HH.476). 특히 HH.477에서는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계속되며, 그 사랑이 그의 영원한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지배적인 사랑이란 그 사람이 일시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나 특정한 순간의 생각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삶 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자신만을 사랑하고 이웃을 지배하며 해치는 것을 즐거워한다면, 그 사람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신앙고백의 내용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많은 실패와 연약함이 있더라도 악을 죄로 여기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선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전혀 다른 내적 생명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은 단순히 어느 날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이루어 가신 생명이 실제로 어떤 사랑으로 자리 잡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표현 자체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취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유효하다고 선언하신 구원을 인간의 잘못 때문에 나중에 철회하시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기로 하셨다가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뜻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내적 상태입니다. 마치 태양이 끊임없이 빛과 열을 보내지만 창문을 닫거나 빛을 가리는 쪽으로 돌아서면 그 빛과 열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비유가 인간의 자유와 구원의 신비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께서 사랑을 거두시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사랑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생명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적절한 질문은 ‘한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생명을 사람이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신자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반복적인 죄와 악한 습관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에게 ‘한번 구원받았으니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만 말한다면,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실제로 악을 멀리하도록 돕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계속 그렇게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는다’고만 말한다면, 그는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구원 상태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쪽도 충분한 목회적 돌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다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자신의 악을 정직하게 살피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의 힘으로 조금씩 그 악에서 벗어나십시오’라고 권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주님의 사랑을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회개와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진리는 우리가 그분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따르도록 격려하는 말씀이어야지, 그 손길을 외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보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명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이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실패 때문에 사랑을 거두시는 분이 아니며, 한때 죄에 빠졌다고 해서 돌아오는 사람을 거절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인간이 이후에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살든 그 내적 상태와 관계없이 천국의 생명을 영원히 보장받았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구원을 지나치게 외적인 것으로 이해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단지 우리가 죽은 뒤 천국이라는 장소에 들어가도록 허락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천국의 생명을 이루시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확신은 과거에 어떤 종교적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에만 근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그 사랑에 응답하여 살아가는 데서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이미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구원의 자격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구원하고 계시는 주님 자신입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명제에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귀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신앙고백이나 회심 경험만으로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영원한 구원이 확정된다고 이해한다면 오류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구원은 인간의 내면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져 거듭남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인간의 자유와 그 안에서 형성되는 지배적인 사랑을 제외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지만,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주님께서 구원을 취소하시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구원하시는 생명을 실제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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