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9.심화

 

4. ‘1: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이 구절은 AC.49의 그 문장, 곧 ‘주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를 성경적으로 가장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겉으로는 환상 장면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이것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이 인간적 형상 안에서 나타나는 방식’을 보여 주는 핵심 증거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26 보좌 위 사람의 모양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사람의 형상(Divine Human)으로 계시며, 인간은 그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거듭남은 그 형상으로 다시 회복되는 과정임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구조를 보겠습니다. ‘궁창 위에 보좌’가 있습니다. 여기서 ‘궁창(expanse)은 앞에서 보셨듯이 ‘구별과 질서가 이루어진 영역’, 즉 진리의 질서가 펼쳐진 상태를 뜻합니다. 그 위에 ‘보좌(throne)가 있다는 것은, 그 질서 위에서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보좌는 언제나 통치와 주권의 상징입니다.

 

그다음 ‘남보석 같은 모양’이 나옵니다. ‘남보석(sapphire)은 말씀에서 ‘맑고 투명한 진리의 빛’, 특히 하늘적 차원의 빛을 상징합니다. 즉, 이 통치는 어둡거나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의 빛 속에서 이루어지는 통치’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다스림은 사랑과 함께하는 ‘밝은 이해와 질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제 핵심입니다. ‘그 보좌 위에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추상적 힘이나 형체 없는 존재로 나타나지 않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인간적 형상(Divine Human)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도,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근거를 가진 표현’이 됩니다.

 

이 점이 AC.49와 연결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은, 어떤 임시적인 환상이 아니라, ‘주님의 본질적 나타나심의 방식’입니다. 즉, 주님은 본래 그렇게 나타나실 수 있는 분이며, 태고교회는 그만큼 ‘내적으로 열려 있어서 그것을 인식할 수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이걸 거듭남과 연결하면 더 깊어집니다. 사람은 거듭남을 통해 점점 ‘주님의 형상에 가까워지는 존재’입니다. 즉, 단순히 도덕적으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의지, 사랑과 진리가 주님의 질서와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하나님이 이렇게 보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궁극적으로 무엇으로 회복되는가를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중심으로 살다가, 점점 주님의 진리와 선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의 생각은 더 밝아지고, 그의 마음은 더 부드러워지고, 그의 삶은 더 질서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사람다워집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가장 완전한 질서와 생명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니라, 우리가 닮아 가야 할 참된 인간의 모습으로 계신 분입니다.’

 

1:26 보좌 위 사람의 모양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인간적 형상으로 계시며, 인간은 그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거듭남은 그 형상으로 회복되는 과정임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하나하나 짚어 가시는 이 인용 구절들이, 결국 한 방향, 곧 ‘주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으로 모이고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또렷해지실 것입니다.

 

 

 

AC.49, 심화 5, ‘단7:13-14’

AC.49.심화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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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3, ‘사45:11-12’

AC.49.심화 3. ‘사45:11-12’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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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5:11-12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이 구절은 AC.49의 문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앞서 보신 렘4의 ‘황폐 상태’와 대비되면서, ‘주님이 어떻게 사람 안에 다시 질서를 세우시는가,  창조와 재창조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45:11-12는 사람 안의 속 사람(하늘)과 겉 사람(땅), 그리고 그 위의 사람’(참된 인간 상태)까지 모두 주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선언하는 말씀이며, 따라서 거듭남은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라는 것을 밝히는 구절’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계속 보신 것처럼 ‘진리 안에 있는 사람, 혹은 교회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지으신 이(former)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히 처음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 안에 질서를 세우고 형상을 갖추게 하는 분’을 뜻합니다. 즉, 주님은 단순한 창조자가 아니라, ‘지금도 사람을 계속 형성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제 핵심 선언이 나옵니다.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 여기서 ‘(earth)은 ‘겉 사람, 외적인 삶의 자리’이고, 그 위에 ‘사람(man)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겉 사람이라는 기반 위에, 비로소 ‘참된 인간 상태, 즉 진리와 선이 결합된 상태’가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보신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과정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다음 ‘내가 하늘을 펴고, 그 모든 군대를 명령하였다’입니다. ‘하늘(heavens)은 ‘속 사람, 내적인 영역’, 그리고 ‘하늘의 군대’는 그 안에 있는 ‘모든 진리와 선, 혹은 생각과 애정의 질서’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우주 창조가 아니라, ‘사람 안의 내적 구조 전체, 즉 생각, 이해, 애정, 질서를 주님이 배열하고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전체를 하나로 묶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은 사람의 겉 사람(삶의 자리)을 마련하시고, 그 위에 참된 인간 상태를 창조하시며, 동시에 속 사람(내면의 하늘)을 펼쳐 그 안의 모든 질서를 다스리신다.’ 즉, 위와 아래, 안과 밖, 시작과 완성까지 ‘전부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앞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묻고,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이것은 일종의 책망입니다. 즉,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려는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곧 ‘거듭남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사람을 새롭게 하는 일은 너희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사람은 협력하고 응답할 수는 있지만, ‘창조와 형성의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애쓰고, 결단합니다. 이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반드시 깨닫게 됩니다. ‘이 변화는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다.’ 바로 그 깨달음이 이 구절이 말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변화되기 위해 애쓰지만, 실제로 우리를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45:11-12는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그 안의 모든 질서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심을 선언하며, 거듭남이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임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AC.49, 심화 4, ‘겔1:26’

AC.49.심화 4. ‘겔1: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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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2, ‘렘4:23, 25’

AC.49.심화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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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 구절은 겉으로 보면 단순히 폐허와 심판의 장면처럼 보이지만, AC.49의 문맥에서는 ‘거듭남 이전, 혹은 교회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  내면의 빛이 꺼진 상태’’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4:23, 25 혼돈, 공허, 빛 없음, 사람 없음, 새가 날아감,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 그리고 그 작용들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단계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먼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입니다. 여기서 ‘(earth)은 앞서 계속 보신 것처럼 ‘사람, 혹은 그의 삶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혼돈(void)과 ‘공허(emptiness)는 창세기 1장의 첫 상태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 선과 진리가 전혀 자리 잡지 못한 상태’로 봅니다. 즉, 단순히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정돈되지 않은 상태’, 혹은 다시 무너져 그 상태로 돌아간 상태입니다.

 

그다음 ‘하늘에 빛이 없다’입니다. ‘하늘(heavens)은 ‘속 사람, 내적인 영역’, ‘(light)은 ‘진리의 인식과 이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사람 안의 내적 영역에서 더 이상 진리가 비추지 않는 상태’, 다시 말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분별할 빛이 완전히 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문제보다, ‘내적 빛이 꺼지는 것이 더 근본적인 붕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이 없으며’가 나옵니다. 여기서 ‘사람(man, homo)은 단순한 인간 존재가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진리와 선이 결합된 상태, 곧 ‘참된 인간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물리적으로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더 이상 사람다운 상태’, 곧 진리와 선의 결합이 없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겉으로는 사람처럼 살아도, 영적으로는 ‘사람이 아닌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입니다. ‘(birds)는 앞서 계속 보셨듯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 곧 생각과 이해의 작용’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새들이 ‘날아갔다’는 것은, 단순히 약해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라진 상태’입니다. 즉, 더 이상 진리를 생각하거나 분별하는 능력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진리를 생각하려는 힘 자체가 떠난 상태’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됩니다. ‘삶의 자리(땅)가 무너지고  내적 빛이 꺼지고  참된 인간 상태가 사라지고  생각과 분별의 기능까지 떠난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황폐’, 곧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vastation’(황폐)의 상태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진리를 알고, 양심도 있고, 선을 행하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사로잡히면서, 진리를 무시하고, 양심을 거스르고, 결국에는 무엇이 옳은지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는, ‘옳고 그름 자체가 의미 없게 느껴지고’, 마음도 굳어지고, 생각도 흐려집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이 말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왜 이런 구절이 AC.49에 등장하느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무서운 상태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이 태고교회와 같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시는가’를 설명하는 배경이 됩니다. 인간이 이처럼 내적으로 어두워진 상태에서는, 설령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도 그것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방식, 곧 말씀과 진리를 통한 인도라는 방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위험한 상태는 고통받는 때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더 이상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상태입니다.’

 

4:23, 25는 사람 안에서 진리의 빛과 선의 상태,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기능까지 모두 사라진 영적 황폐의 상태를 묘사한 말씀입니다.’

 

 

 

AC.49, 심화 3, ‘사45:11-12’

AC.49.심화 3. ‘사45:11-12’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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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8.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 AC.49 본문 중,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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