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제목을 보면, 이미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고자 함인지 다들 아시겠지요? 맞습니다. 바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방법인데요, 가짜들은 평소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해오던 말이 실제로 일어나면 안 믿습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인데요, 평소 그리스도, 그리스도 이미 오랜 세월 온 국민의 수 대, 수십 대, 수백 년을 이어온 염원이었지만, 정작 주님이 실제로 오시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 유대인들 거의 전부가 몹시 불편해했어요. 이런저런 핑계들이 있겠지만, 일단 저들은 가짜여서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겁니다.
※ '가짜'라는 거북한 표현을 써서 좀 그러시지요? 많이 미안합니다...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10:25-27)
말씀처럼 말입니다. 주님도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 즉 너희는 가짜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
이 말씀도 같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십니다. 너희 역시 가짜다 하고 계십니다.
이런 케이스가 성경에 참 많이 나옵니다. 거의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 그리고 그 속사도들, 즉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 또한 그랬는데요. 어쩌면 태고교회부터 고대, 유대, 기독 등 교회사 전체를 이 주제로 기술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짜와 진짜의 차이는 그 숨은 동기에 있습니다. 가짜는 그 모든 겉보기와는 달리 그 숨은 동기가 자기 사랑입니다. 진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역시 그 모든 겉보기와는 달리 그러나 그 숨은 동기는 주님 사랑입니다. 천사들은 사람의 겉을 보지 않습니다. 내적 존재인 천사들한테는 사람의 겉은 안 보이고, 사람의 속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볼 때 사람은 곧 그의 의지이며, 어떤 일을 하는 그 숨은 동기입니다. 사람들은 겉만 보지만, 천사들은 속, 곧 그 숨은 동기를 봅니다.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주님에 관해서는 가짜들도 좀 그 혀가 뻣뻣해지는지 주님에 대한 직접적인 사랑의 고백 같은 거를 어색해 합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주님은 저런 분이십니다’ 하는 얘기를 잘 못해요. 아마 주님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대신 ‘아무개가 주님에 대해 이런 책을 썼는데 저는 그 책을 읽었습니다. 아무개는 평생 주님과 동행했는데, 그 기록을 저는 읽어 보았습니다’ 식으로 그 핀트를 살짝 틉니다. 그리고 그런 책 많이 읽은 걸 자랑합니다. 본의 아니게 가짜가 되셨겠지만... 문제는, 이런 분들의 많은 말과 글을 접하고 나면,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향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하게 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 천국 해서 정말 천국에 대해 알고픈 모양이구나 싶어 주님의 허락으로 천국을 오랫동안 왕래한 사람이 천국에 대해 알려주려고 하면, 정작 이 사람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천국을 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천국에 대해 연구하고, 기술한 책만 잔뜩 읽고 있습니다. 엉뚱합니다. 천국, 천국 하는 그 숨은 동기가 정말 천국을 사랑하여 거기 가 살고픈 게 아니라 천국을 통해 얻고자 하는, 자기도 잘 모르는 무슨 목적들이 있었나 봅니다. 이런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혀 그럴 생각도, 그럴 마음도 없었는데 제 나이 57세 되던 어느 날 주님이 천사를 보내어 저를 부르시더니 이렇게 무려 27년간 영계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 중 기록으로 남기라 하신 것만 이렇게 적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말입니다. 강문호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은 자원병을 쓰지 않으시고, 차출병을 쓰신다는 적확한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고 없는 지금, 주님의 지시와 허락으로 그가 남기고 간 책을, 특히 그중에 ‘천국과 지옥’을, 신기하게도 저 역시 57세 때 접한 이후, 지난 8년 여의 세월, 집안 행사 등 부득이한 날만 빼고, 거의 하루도 낭비 없이 이 길을 달려왔습니다. 마치 뭐에 이끌리듯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 주변, 가족이며, 친지며, 교계 지인들이며...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 우리 큰아들 포함, 몇 분 계시군요. 다행입니다. 그러나 1%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디에 적기를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천 명 중 한 사람도 쉽지 않다 했다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몇몇 분한테서는 주님이 서둘러 저를 떼어놓으셨고, 대부분은 선량하신 분들입니다. 그 가운데 온유하신 분들과 다소 강한 분들의 차이만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것과 이건 다른 건가 봅니다.
각 사람의 거듭남의 여정은 각 사람에게 맞춘 철저한 맞춤식이라 절대 획일적일 수도, 일률적일 수도 없습니다. 또한 각 사람이 붙들고 있는 나름의 교리적 입장은 그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같아 주님조차 그걸 무조건 새것으로 가시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큰일나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지금은 그의 생명이기 때문인데요,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을 헤아려 그에게 무슨 표를 주어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의 이단적 입장 역시 나중을 위해, 후손을 위해, 인류가 결국은 신앙에서 사랑을 분리하는 길로 걸어갈 걸 아시고, 그런 가인을 보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게 무슨 주님의 섭리 있으시지 싶고, 그래서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나 더 지상에 머무르게 될까요? 사실 천국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주님을 향한 경외감이 말할 수 없이 깊어지며, 그래서 그냥 오늘 밤에라도 훌쩍 떠난들 무슨 아무 미련도 없고, 후회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이 처음 얼마 동안 좀 힘들어할까요? 제가 그동안 가정경제에 거의 보탠 게 없어 그 부분은 참 많이 미안합니다. 그래서 요즘 이 부분을 많이 주님께 구하고 있어요. 제 아내와 두 아들, 특히 작은아들에게 주님이 경제적으로 조금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말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신 주님 말씀이 전에 제게 들렸듯 오늘도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께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And he said, Returning I will return unto thee about this time of life; and behold Sarah thy wife shall have a son. And Sarah heard at the door of the tent, and it was behind him. (창18:10)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신성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것들은 인간의 진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겉 사람 안의 기억 지식과 소통하며,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자신보다 높은 것을 바라보면 그만큼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2196:2, 이순철 역) Human rational truth does not apprehend Divine things, because these are above the sphere of its understanding, for this truth communicates with the memory–knowledges which are in the natural man, and in so far as it looks from these at the things which are above itself, so far it does not acknowledge them. (AC.2196:2)
※ 위는 오늘 본문 중 ‘그 뒤’(And it was behind him)에 관한 풀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생의 목표가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돈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돈이나 지위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모든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안정된 미래를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돈이나 지위 같은 것으로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안정된 미래를 얻을 수 없습니다. 당장의 상황 수습, 그리고 당면한 필요들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여러모로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거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가 궁핍했던 196, 70년대보다 더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게 됐을지 모르지만, 빈부의 격차나 계층 간의 차별로 인한 억압과 불화는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21년 10월 설교이지만 2025년 4월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 아래는 소유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천사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제가 참 좋아하는 글입니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김은경 역) They live contented with their own, whether it is little or much, because they know that they receive just as much as is good for them— those receiving little for whom a little is useful, and those receiving much for whom much is useful; also they do not themselves know what is good for them, the Lord alone knowing this, who looks in all things that he provides to what is eternal. (HH,278)
이는 ‘천국과 지옥’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The State of Innocence of the Angels of Heaven, 276-283)에 나오는 글입니다. //
※ 그리고 다음은 같은 책 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The Rich and the Poor in Heaven, 357-365)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이 장을 통해 저는 많은 편견을 교정할 수 있었습니다. 내용이 좀 길지만 숙려 끝에 그대로 싣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일부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들어가고 부자는 못 들어간다고 하고, 또 일부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들어간다고 하고, 일부는 부자는 그들의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해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 모든 주장이 전부 말씀을 근거로 한 신념이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데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은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말씀은 그 속뜻으로 보면 영적이고, 글자의 뜻으로는 자연적이다. 따라서 말씀을 영적 뜻으로 보지 않고, 오직 그 글자의 뜻으로만 이해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오류가 생긴다. 예를 들어,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가 특히 그렇다.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처럼 어렵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에 쉽게 간다고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는 말씀에 아래의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3)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
그러나 말씀의 영적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국은 가난하건 부자이건 간에 신앙과 사랑의 생활을 한 모든 사람을 위한 곳임을 안다. 그렇다면 말씀에 나오는 부자와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가를 이제 설명하겠다. 천사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그들과 함께 지낸 결과, 내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과 똑같이 쉽게 천국에 간다는 것이며, 사람은 재산 때문에 천국에 못 가거나 가난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 천국에 가고, 부자들 중 많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보다 더 큰 영광과 행복을 누린다. (HH.357)
먼저 얘기해 둘 것은, 사람은 술책이나 사기가 아니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부를 얻고 쌓아도 되며, 너무 빠져들지 않는 한 고급 음식을 즐겨도 되고, 조건에 따라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조건이 같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오락을 즐기고 세상사를 얘기해도 된다는 사실이다. 또 경건한 사람처럼 슬프고 애통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즐겁고 활기에 넘칠 수 있다. 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것을 주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사람이 세상 사람과 겉으로 보기에 똑같이 살아도, 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올바로 가지며, 이웃에게 신실하고 공정하게 대하기만 하면,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어떠한가는 그의 애정과 생각이 어떠한가, 즉 그의 사랑과 신앙이 어떠한가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든 외적 행동은 그 두 가지 것에서 생명을 얻는 까닭이다. 사람은 의지로 말미암아 행동하고, 사고로 말미암아 말하므로 행동은 곧 의지이고, 말은 곧 생각이다. 따라서 말씀에 사람은 그의 행위대로 심판받고, 일한 대로 상을 받는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 그의 행위의 근원인, 즉 행위 안에 들어 있는 생각과 애정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뜻이다. 행위는 생각과 애정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그 두 가지에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주233 따라서 어떤 결과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외면이 아니라 오직 그 외면의 근원인 내면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사람이 정직하게 행하고 남을 속이지 않는 이유가 단지 법이 두렵고 평판을 잃을까 봐, 그래서 명예와 이득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라면, 그 두려움에 의해 제지당하지 않는다면 기회 있을 때마다 남을 속일 것이다. 비록 그의 행동이 겉으로는 정직해 보이더라도 그의 사고와 의지는 속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정직하지 않고 속이고자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 안에는 지옥이 있다. 반면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남을 속이는 행위를 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은 기회가 주어져도 남을 속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생각과 의지는 그의 양심이며, 그 사람 안에는 천국이 있다. 이 두 사람의 행위는 외적 형태는 같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주233. 사람은 그의 행위와 한 일에 따라 심판받고 상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 말씀에 자주 나온다 (AC.3934). ‘행위와 일’이라 하면, 그 내적 형태의 행위와 일을 의미하지, 외적 형태의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악인에 의한 외적 형태의 선한 일도 겉보기에는 똑같기 때문인데, 내적, 외적 형태가 같은 행위와 일은 오직 선인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AC.3934, 6073). 모든 활동처럼 일도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존재와 결과, 그리고 퀄러티를 가지는데, 이는 사람의 사고와 의지에 관한 것이다. 일은 이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면이 어떠하면, 그 일도 그러하다 (AC.3934, 8911, 10331). 즉, 그 내면은 사랑과 신앙에 관한, 그런 것이다 (AC.3934, 6073, 10331, 10332). 그렇게 일에는 사랑과 신앙이 들어있으며, 실제로도 일이라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다 (AC.10331). 그러므로 행위와 한 일에 따라 심판하고 상을 준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에 따라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AC.3147, 3934, 6073, 8911, 10331, 10332). 일이라는 것이 자신과 세상을 주목하는 한, 그 일은 선하지 않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주목하는 한, 그 일은 선하다 (AC.3147). (HH.358)
사람이 신을 인정하고, 이웃을 선의로 대하기만 한다면, 겉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도 되고, 부자가 될 수도 있으며, 형편과 역할에 따라 풍성한 식탁과 우아한 집과 좋은 옷을 갖추고 살 수도 있고, 즐거움과 만족을 누려도 되며, 직무와 사업을 위해, 그리고 정신생활과 육신 생활을 위해 세상일에 종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결론을 낳는다. 즉 천국에 가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일한 어려움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저항하고, 그 두 사랑이 지배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 두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주234 다음의 주의 말씀은 이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 30)
주의 멍에는 쉽고 주의 짐은 가볍다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에 저항하는 정도만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물리치고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주234. 모든 악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다 (AC.1307, 1308, 1321, 1594, 1691, 3413, 7255, 7376, 7488, 7490, 8318, 9335, 9348, 10038, 10742). 모든 악이란 다른 사람을 향한 경멸, 원한, 증오, 복수, 잔인, 속임이다 (AC.6667, 7370–7374, 9348, 10038, 10742). 그런 사랑들 가운데 인간은 태어나며, 그래서 인간의 유전한 악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AC.694, 4317, 5660). (HH.359) //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사람입니다. 전자의 사람을 자연적인 사람(the natural)이라 하고, 후자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the spiritual)이라 합니다. 자연적인 사람들에게 있어 지식을 배우는 목적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좋은 학교에 진학, 출세하고 돈 많이 벌기 위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 그렇다고 영적인 사람은 돈, 명예, 좋은 학교 진학, 출세 및 부자가 되는 걸 죄악시 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앞 인용글들에서도 읽으셨겠지만, 단지 이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지상에서 주님의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이런 것들이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닌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이고, 반대로 그저 목적이기만 한 사람들이 자연적인 사람들입니다. 참고로, 천국의 부(富)는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부자는 주님의 진리를 많이 소유한 사람들, 주로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지식, 즉 세상 지식에 대한 애정을 말씀에서는 이스마엘을 낳은 애굽 여인 하갈로 표현합니다. 영적 의미, 곧 속뜻으로 애굽은 세상 지식을 뜻하고, 여자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 여인 하갈은 세상 지식에 대한 애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갈에게서 태어나는 이스마엘은 누굴까요?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 창세기 본문에서는 주님의 첫 번째 합리적 능력(The Lord’s first rational)을 말합니다.
합리적 능력이란 지식이나 진리를 바탕으로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 말이 좀 어려우시면 추론하는 능력이나 이성(理性)으로 이해하셔도 되겠습니다.
이스마엘로 표현되는 첫 번째 합리적 능력(the first rational)이 열릴 때, 사람들은 그동안 세상 지식을 가지고 물질만을 좇았던 자신을 반성하고, 비로소 영적인 걸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결코 간단치 않은 시간입니다. 많은 역경과 좌절이 있고, 그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은 이번에는 본처 사라로부터 두 번째 아들 이삭을 얻습니다.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생기는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을 뜻합니다.
※ 역시 창세기 본문에서는 주님의 두 번째 합리적 능력, 곧 주님의 신성한 합리적 능력(the Lord’s Divine rational)을 말합니다.
사라는 지식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애정(affection)을 뜻합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삭이라는 합리적 능력이 어떤 성격인지 짐작할 수 있는데요, 즉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인 이스마엘이 인간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라면,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인 이삭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탕으로 한 거룩한 합리적 능력인 것입니다. 바로 그 거룩한 합리적 능력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진리인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arcana)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 후자는 너무 높고 깊어 전자로는 쳐다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그 태생적 인성(human)을 신성(Divine Human)으로 갈아입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주님에 관한 모든 것, 곧 모든 신령한 진리, 천국에 속한 진리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신 후, 부단한 영적 전투를 통해 마침내 십자가에서 이기심으로써 영광의 몸, 곧 신성으로 갈아입으셔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이삭을 얻은 후에 아브라함은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냅니다.
8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창21:8-14)
문자적으로만 보면, 참 냉정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의 영적 의미는, 거듭나는 동안 첫 번째 합리적 능력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합리적 능력을 그대로 두면,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합리적 능력을 대적하거나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누구나 때가 되면,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을 버려야 합니다.
※ 즉, 세상 지식과 세상 경험을 가지고 주님의 일, 주님의 신비를 살피려는 태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말씀하신,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비유인데요, 대부분의 신학교 교수, 그리고 유튜브에 나와 대담하는 많은 신학자 류(類)의 경우, 일단 해당 주제에 관한 많은 견해, 입장들을 좍 나열한 후, 끝에 자기 생각을 보탭니다. 연역이든 귀납이든 뭐, 하나의 방법론이니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보다는 ‘자, 나는 이렇게 이 주제에 대한 열린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저는 극단적이지 않습니다’라는 사실에 더 초점을 맞춘듯하다는, 그러니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공감을 더 많이 끌어낼 수 있을까에만 초점을 맞추는듯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제게 나타나신 신은 이런 신이셨습니다’하는 신학자는 거의 보질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생기기 직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바로 앞 절인 9절 말씀,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창18:9)
에 의하면, 여기서 말을 하는 사람들, 즉 ‘그들’은 한 분 주님을 이루는 세 가지 본질을 나타내는데요, 이를 최대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이 세 본질은, 사실은 신성 자체(Divine itself)이시며, 신적 인성(Divine Human)이시고, 신성의 활동(Holy proceeding)이신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성 자체라는 말은 존재 자체이시며, 동시에 사랑과 선 그 자체이신 여호와를 뜻합니다. 그리고 신적 인성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여호와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신적 인성이신 예수는 본질적으로는 존재 자체이신 신성의 드러나심이며, 동시에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진리이신 분입니다. 신성의 활동은 신적 인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신성의 능력, 즉 성령을 뜻합니다. 성령을 다르게 표현하면 진리를 통해 발현되는 선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의 능력이 곧 성령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19-22)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그들’은 사실은 셋이 아닌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세상에 오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로 돌아오겠다는 말씀은 주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신 신성과 예수 그리스도이신 인성이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이루시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사람이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인간들이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고, 그래야 신적 진리들을 이해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이 되시는 과정은 혹독한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 복음서에 보면, ‘주님이 시험받으시는 장면은 몇 없는데 왜 혹독한 시험의 연속이라 하는가?’ 하실 텐데요, 사실은 주님의 어린 시절 및 청소년, 청년기 모든 과정이 창세기 12장 이하에 속뜻으로 다 기술되어 있어 그러는 것이고요, 그 시험이 혹독하다고 하는 건, 사람이 받는 시험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기껏해야 자기 사랑, 혹은 가족을 포함한 주위 몇 사람이 전부이지만, 주님은 인류 전체를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지옥도 우리한테는 몇 명의 악령이면 충분하지만, 주님께는 지옥 전체가 달려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시험을 ‘혹독한 시험의 연속’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을 이길 때마다 주님의 겉 사람인 인성은 속 사람인 신성과 하나가 되어 갔습니다.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주님의 겉 사람을 이루는 모든 생각과 의지들이 신성한 진리와 선 그 자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몸 안에 신성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 그 자체가 신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그래서 주님의 영화는 인간의 거듭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을 닮는 것이지만, 주님의 영화는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은 주님의 영화의 과정에서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곧 열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때는 주님에게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이 열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은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잔재가 섞인 순수하지 않은 인간적 합리적 능력입니다. 반면, 이제 이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열린다는 건 신성에서 비롯한 순수하고 거룩한 합리적 능력이 열리는 걸 의미합니다. 그 거룩한 합리적 능력이 열릴 때, 그것을 통해 주님의 인성은 빠르게 신성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여 주는 중간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영적 지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두 번째 합리적 능력이 생기기 전이라는 것은 주님의 인성이 아직은 신성과 결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거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말씀에는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라고 합니다.
사라는 주님의 합리적 사람 안에 있는 진리, 즉 합리적 진리(rational truth)를 뜻합니다. 그리고 사라의 남편 아브라함은 주님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합리적 진리와 결합한 합리적 선(rational good)을 뜻합니다.
※ 여기 이런 표현들, 즉 ‘주님의 합리적 사람 안에 있는 진리, 즉 합리적 진리’ 같은... 이런 표현들이 좀 어려우시지요? 네, 저도 이런 게 많이 마음에 걸립니다. 거의 다들 이런 설교는 어렵고 지루하실 것 같아서지요. 이 말씀의 속뜻을 풀어드리는 설교는 참 귀하고 좋은데, 딱 한 가지, 우리한테는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준비하는 저도 결코 쉽지가 않아요. 아마 제 역량의 한계이지 싶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이나 강문호 목사님 같은 이름난 설교가들이시라면 아마 이런 설교도 참 재미나게 잘 전하실 것 같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창12 이후 등장인물들은 주님을 표상합니다. 다들 자기 인생을 살다 갔지만, 사실은 자기도 모르게 주님 역할을 하다 간 것이지요. 그중엔 선인도 있고, 악인도 있어요. 그리고 많은 전쟁도 있지요. 이런 것이 모두 주님과 주님의 내면에서 있었던 영적 전투를 표상하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인성(human)을 입고 태어나신 주님은 여전히 그 속 사람은 신성(Divine), 즉 금수저 중에서도 금수저이셨으면서도 결코 쉬운 길을 안 가시고, 대신 철저히, 아주 철저히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영적 전투를 다 치루신 후,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날레인 십자가에서도 완벽하게 이기신 것이고요. 인간으로서 치룰 수 있는 모든 시험을 남김없이 통과하셨으므로, 그때 주님은 그 인성을 벗고 신성으로 옷 입으셨으며, 그 몸 또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몸의 부활은 오직 주님께만 가능한 것이었다고!
우리는 오직 영으로만 부활합니다. 바울의 서신서 중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지요.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17)
이런 구절들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몸의 부활을 믿고 사모하는데요, 그러나 사실은 몸의 부활은 주님한테서 한번 일어나는 걸로 끝입니다. 만일 우리한테도 주님처럼 저런 몸의 부활이 일어나면 오히려 큰일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임종 후 사흘이 지나 영계에서 눈을 뜨는데요, 그게 곧 우리의 부활이며, 그때 우리한테는 영의 몸이 주어져 눈뜰 때 이미 자신이 영체를 입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오직 영, 곧 속 사람으로만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지상 물질은 일체 반입 금지이며, 우리는 신이 아니므로 우리 몸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들은 성경에는 포함되어 있지만, 주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 안에 속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속뜻 없는 글들까지 성경에 포함시킨 건, 오늘의 성경 66권이 있기까지 구약은 구약대로, 그리고 신약 역시 역사적으로 수차례 있었던 카톨릭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인데, 그때 참여한 추기경들이 아직 말씀의 속뜻에 대해 그 내면이 열리지 않았고, 단지 자기들이 정한 몇 가지 기준에 부합하는 여부만 살폈기 때문입니다. 속뜻이 있는 성경은 천사들이 읽을 수 있지만, 없는 성경은 천사들은 읽을 수 없습니다. 겉뜻만 있기 때문이지요. 신구약 66권 중 구약은 29권, 신약은 5권에만 속뜻이 있으며, 그러므로 이들만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그냥 바울의 사견일 뿐입니다.
천국을 다녀왔다는 많은 사람이 유튜브나 인터넷에 있는데 특이한 건, 그들이 진술하는 천국이 조금씩 다 달라요. 이상하지요? 제 생각에 이것은 천국의 그 모든 외관은 보는 자의 역량에 맞추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그리고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한테는 사람의 부활에 대해 평소 저런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혹시 바울이 저 진술을 영적 체험을 하고 나서 한 거라면 틀림없습니다. 바울처럼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은 천국도 자기가 보고픈 대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정말 천국을 있는 그대로 보기 원한다면, 그리고 알기 원한다면 어린아이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걸 허락하시거든요. 스베덴보리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어떤 걸 인용하는 건 안전하지 않은 일입니다. 될 수 있으면 피하시길 권하며, 꼭 인용하셔야 한다면, 신약에서는 복음서들과 계시록에서만, 구약에서는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에서만 하시기를 권합니다. 아래 내용은 바울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기록입니다. 참고하세요.
...복음을 전하기 전에 그가 올무에 빠져있던 자아애가 그 후에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의 대부분의 시기도 그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아애와 자기의 기질에 휘둘려, 격동의 장(場)에 있기를 원하였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고, 이스라엘 족을 심판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그는 모든 것을 했다. 그가 그 후에도 그러한 상태에 머물렀다는 것은 매우 많은 경험으로 분명하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이보다 더 많이 그와 대화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는 그러한 자였기 때문에, 그곳 다른 사도들은 그를 벗 삼으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일원으로도 여기지 않고 있다... 그가 신약성서의 서간을 쓴 것은 그의 내면도 그와 같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건치 못한 자도 좋은 설교를 하고, 서간을 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해진 것처럼, 말하고 쓰는 것과 그 사람이 어떠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게다가 그는 그의 서간 중에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의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으며, 주님의 비유의 말씀 중 한 가지도 인용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 그는 주님의 생애나 그 말씀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바울의 사도서간이 속뜻이 없다는 것은 영계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속뜻이 담긴 주님의 말씀에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교회 안에 허락되어 있다. 만약 사람이 악한 생활을 하면서도 거룩한 말씀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바울의 편지가 허락되어 있으나, 바울 자신에게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이나 주님께서 가르치신 교리 중 하나라도 그것을 들어 설명하거나 밝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취했다. 교회는 분명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고는 있으나 바울의 서간을 수단으로 함으로 교회 도처에서 사랑의 선을 떠난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오직 인애의 선이 모든 것이 되도록 하는 길로만 가르치셨다... //
사람의 마음을 이루는 생각(understanding)과 의지(will)는 본질적으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good)과 진리(truth)이거나 지옥에서 오는 악(evil)과 거짓(falsity)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등차(degree)가 다른 수많은 선과 진리들이 있습니다. 속 사람(internal man)의 선과 진리가 있고, 겉 사람(external man)의 선과 진리가 있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합리적 사람(rational man)을 이루는 선과 진리가 있습니다. 그 합리적 선과 합리적 진리가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로 표상되는 선과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곧 아브라함 뒤에서 들었다고 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 뒤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합리적 진리가 합리적 선과 아직 결합하지 못하고 분리된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이처럼 주님의 겉 사람 안에서 합리적 진리가 온전한 상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렇게 해서 거룩함이 떨어지는 이유는,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인간의 합리적 능력(human rational) 때문입니다. ‘천국의 비밀’ 2196:2항은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 신성한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신성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것들은 인간의 진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합리적 진리는 겉 사람 안의 기억의 지식과 소통하며 그러므로 그 상태에서 자신보다 높이 있는 것을 바라보면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같은 글 4항 이하에서는 인간적 합리적 능력이 신성한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몇 가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인간적 합리적 능력은 겉으로 나타나는 외관(appearance)만 보고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람에게서는 어떤 선도 나오지 않고 악만 나올 뿐이다.
둘째, 인간적 합리적 능력은 사람이 선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구원받을 공로를 얻는다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람에게는 구원에 관한 어떤 공로(merit)도 없고 오직 주님에게만 공로가 있다.
셋째, 인간적 합리적 능력은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보다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고, 모든 사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지만, 천국의 사랑 안에는 자아에 대한 사랑은 조금도 없다.
주님의 안에도 아직 인성이셨을 때는 이스마엘로 표상되는 이런 순수하지 않은 진리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사라로 표상되는 합리적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합리적 능력이 자기보다 높은 차원의 합리적 능력을 방해하고 심지어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아래 말씀처럼 말입니다.
8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창21:8-10)
그렇기 때문에 거듭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때가 되면 인간적인 합리적 능력을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합리적 능력을 새롭게 입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억압과 불화 부조리가 있고, 그로 인한 고통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들을 물질이나 인간의 지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구원은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물질은 또 다른 억압을 낳고, 인간의 지식은 또 다른 굴레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젠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이나 인간의 지식이 삶의 목적이 될 때, 그것은 결국 불의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위한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모든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며 습득한 모든 세상 지식과 경험 또한 그렇습니다. 그동안은 이것들이 우리의 주인이었다면, 이제는 새롭게 주님이 우리의 주인 되시고, 이것들은 주님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복되고 안전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천국에 대해 더욱 알아갈수록 시야, 그러니까 세상일에 대한 시야가 점점 또렷해지고, 그에 따른 마음이 더욱 평안하여짐을 뚜렷하게 느낍니다. 주님 말씀하신,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비로소 이 말씀들의 의미를 알 것도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근심하고 걱정, 염려하는 것들을, 그러나 하늘의 천사들은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할 수도 없는 게, 그들은 삼위일체 전능하신 하나님을 주님으로 매 순간 그분의 면전에서 살며, 그분에 관한 신성을 호흡, 곧 선과 진리로 가득한 천국의 대기 가운데 호흡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단 한 순간도 주님을 떠나 살 수도, 깜빡 주님을 까먹고 뭘 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루 24시간 주목하는 대상과 천사들이 주목하는 대상의 차이가 이런 차이를 가져옵니다. 주목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그럼, 세상 직업 버리고, 산속이나 골방에서 신령한 책만 읽고, 수도 생활만 하라는 말이겠습니까? 그게 아닌 게, 오히려 세상 등지고 산속에 들어간 사람들 중 상당수가 겉보기와는 달리 그 속은 여전히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봉쇄 수도를 한다고 해서 저 천사들처럼 저절로 주님과 연결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우리의 신앙이 참 신앙이 되려면, 이 말씀처럼 세상 지식으로 충만할 게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 한 가지 방법은 천국을 아는 것인데요, 그러면 그런 천국을 설계하신 분 또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방법이라 했지만, 사실은 아마 거의 유일한 방법일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직접 알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천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아는 게 아마 가장 확실한, 그리고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을 알 수 있는, 역시 거의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허락으로 천국을 가 본, 그리고 역시 주님의 허락으로 지상 언어로 기술한 사람이 남긴 기록을 접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기록이 있겠지만, 저의 경우는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 스웨덴)라는 사람이 남긴 기록으로, 그의 수많은 저서 중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 1758, 라틴, 김은경 역)이라는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물론 주님의 허락으로 직접 천국을 다녀오는 방법도 있으나 이건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서 좀...
이 글 제목처럼 세상일에서 한발 물러나는 걸 익히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요, 바로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두 종류의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는 밑에서 위를 추구하는 게 있고,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 곧 위에서 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질서가 있습니다. 후자가 참 질서이며, 거룩한 질서, 신성한 질서(Divine order)입니다. 바로 그 근원이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반면, 전자는 진리를 역행함, 곧 주님이 ‘바늘귀로 들어가려는 낙타’(마19:24)로 표현하신 불가능한 질서입니다. 이는 그 근원이 인간의 자아이며, 이 세상이어서 그 결과는 지옥입니다. 후자는 천국이지만 말입니다.
분명, 세상 지식이 전혀 없으면 우리는 이 땅에 살 수도 없고, 거듭남의 첫발도 뗄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처음 세상 지식을 통해 이 세상 삶 걸음마를 떼도록 하신 것은 우리를 거듭남 전 과정에 입문케 하시기 위함이었고, 그러므로 그 역할을 다했으면 이제 세상 지식은 옆으로 비켜나고, 우리는 주님의 인도를 받아 거듭남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것이 주님의 질서이며, 주님 또한 이런 순서를 밟아 그 처음 인성(human)을 거룩한 인성(Divine Human)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주님의 질서는, 주님을 근원으로 출발, 천국을 적시고, 우리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의 속 사람으로, 그리고 최종 겉 사람에 종착하는 질서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이 주님 신성이 흘러들어오는 속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 이것이 주님의 질서입니다. 사람이 이 질서 안에 있게 되면, 세상일에서 한발 물러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일에서 물러나는 만큼, 그는 주님의 임재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일에 붙잡혀 있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심지어 나라 사랑도 그 안에 주님이 안 보이실 경우는 말입니다.
천국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래서 그런 천국을 설계하신 분의 어떠하심을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세상 근심 걱정이 희미해져 갑니다. 참 질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위 요한복음 말씀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하셨어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말입니다. ‘나 떠나고 큰 환난이 올 텐데 너희는 나의 제자이니 내가 특별히 너희만큼은 환난을 피하게 해주마...’
제가 참 좋아하는, ‘천국과 지옥’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The State of Innocence of the Angels of Heaven, 276-283) 중 278번 글 일부 인용으로 마칩니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They live contented with their own, whether it is little or much, because they know that they receive just as much as is good for them— those receiving little for whom a little is useful, and those receiving much for whom much is useful; also they do not themselves know what is good for them, the Lord alone knowing this, who looks in all things that he provides to what is eternal. (HH.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