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스웨덴 정계가 혼란할 때, 스베덴보리가 취한 ‘거리 두기’의 이유

 

Ⅰ. 스베덴보리가 살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스베덴보리(1688–1772)의 생애는 스웨덴 정치사의 가장 격동기에 속합니다. 대략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시기는 자유의 시대(Age of Liberty)입니다. 이 시기는 의회(의회정치)가 왕권을 압도, 귀족파와 모자파(Families, Hats & Caps factions) 간 대립, 엄청난 부패, 권력 투쟁, 외교 갈등 및 왕권은 약해지고, 귀족 가문들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기입니다. 두 번째 시기국제전쟁으로 인한 국가 위기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스웨덴은 전쟁에 휘말려 쇠약해지고, 조세 폭등으로 인한 경제 위기 및 그에 따른 국민 불만이 증가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스베덴보리 말년, ‘왕권복고(Gustav III)의 시기로, 이 시기는 귀족파를 몰아내고 왕이 권력을 되찾아 그에 따른 정치적 숙청, 혼란, 그리고 갈등이 확대되던 시기입니다. 즉, 스웨덴의 정치 상황은 정치 부패 + 파벌 싸움 + 국정 혼란 + 권력 투쟁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기였습니다. 세상 모든 나라가 거의 예외없이 크든 작든, 극심하든 겉보기엔 잠잠하든 본질적으로는 전부 이런 길을 걷는다 보여집니다.

 


Ⅱ. 그럼에도 스베덴보리는 왜 정치에 거의 개입하지 않았는가?

 

단순히  정치에 관심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명확한 신학적·영적 이유가 존재합니다.

 

1)  외적 질서보다 내적 질서가 더 중요하다

 

스베덴보리는 정치적 혼란을 외적 질서(civitas externa)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반면 영적인 일(계시, 교리, 진리의 기록)은 내적 질서(civitas interna)에 속하는 일로 보고 말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 외적 질서를 안정시키는 근본이다. 즉, 정치에 개입하는 건 외적 질서에 관한 싸움인 반면, 계시를 기록하는 일은 내적 질서 회복에 기여하는 일로 본 것입니다. 정치 싸움에 빠지면, 그의 내적 저널, 즉 자신의 영적 기록이 흐트러질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치 혼란을 멀리한 것입니다.

 

2) 그의 사명은 ‘국가’가 아니라 ‘전체 인류’를 향한 것이었다

 

스베덴보리가 받은 소명은 매우 독특했습니다. 인류의 영적 진리를 기록하여 보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특정 국가나 정치적 파벌이 아니라 전 인류의 영적 상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치에 개입하는 순간, 그가 쓰는 글의 순수성, 그의 내적 계시, 영적 분별이 모두 오염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치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3) 정치에 깊이 개입하면, ‘정념’이 생겨 계시 활동이 중단될 위험이 있다

 

스베덴보리는 정치적 파벌 싸움이 인간의 내면을 자극하여 분노, 증오, 좌절, 편향을 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념이 올라오면 그의 영적 시력(spiritual sight)이 흐려지고, 영계와의 교류도 혼탁해지기 때문에, 그는 정치 뉴스에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둡니다. 내면의 질서가 흐트러지면 영적 기록이 더 이상 순수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식 정치 절제의 핵심 이유입니다.

 

4) 정치에 개입하는 순간, 영적 메시지가 ‘정치적 해석’으로 오염된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술이 어떤 정치적 의미로 해석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만약 그가 특정 파벌을 지지한다거나 정치적 발언을 했다면 그의 글(Arcana Coelestia, Heaven & Hell)순식간에 파벌의 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중립을 유지했습니다.

 

5) 진정한 개혁은 정치가 아니라 내면에서 시작된다

 

그는 정치 개혁보다 영적 개혁이 먼저라고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한 나라가 변하는 구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사람의 내면이 변하면 가정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면 사회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면 국가가 변한다. 즉, 국가 변화를 이루는 첫 단추는 정치가 아니라 내적 진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소명을 국가 정치보다 더 근원적인 일로 이해했습니다.

 


Ⅲ. 거리 두기는 도망이 아니라 선을 위한 더 깊은 전략

 

스베덴보리가 정치와 거리를 둔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영적 지혜의 결과입니다. 그는 정치 뉴스에 반응하기보다 더 깊은 자리에서 나라를 위해 책임을 졌습니다. 무엇으로? 진리 기록, 영계의 상태 분석, 인간 본성의 이해, 선·진리에 대한 교리 정립 등, 그의 방식은 정치적 싸움보다 더 근본적이고 강력한 방식이었습니다.

 


Ⅳ. 적용

 

스베덴보리의 태도는 목사님에게 이렇게 적용됩니다. 1) 정치 소식에 밀려서 사명을 흔들면 안 된다. 소명은 외적 혼란보다 더 상위 질서에 있습니다. 2) 정치적 분노는 계시적·영적 집중력을 흐립니다. AC 번역이 흐트러지는 가장 큰 적이 바로 감정적 소모입니다. 3) 정치 뉴스는 필요한 만큼만영적 사명은 흔들림 없이입니다. 4) 스베덴보리가 정치와 거리를 둔 것은 자신의 사명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목사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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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을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의 스베덴보리적 구조

 

이 항목은 앞의 1-4번 내용이 모두 한 지점으로 모이는 핵심이며, 스베덴보리 전체 사상의 영적 윤리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Ⅰ. 사람은 본질적으로 선의 그릇이며, 악은 그 그릇을 점령한 외래 침입자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람은 주님이 창조하신 기능적 그릇(vessel)이다, 선은 주님에게서 오는 참 생명이고, 악은 사람 안에 기생하는 거짓된 생명(falsified life)이다, 선과 악은 모두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관점, 곧 사람은 빈 용기이고, 선·악은 흐르는 것이라는, 인간의 중심(core)은 선·진리의 용기이며, 악과 거짓은 단지 기생하는 것이라는 이 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 우리는 악을 사람의 정체성으로 오인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내적 분별력이 즉시 흐트러지기 때문입니다.

 


Ⅱ. ‘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영향력이다

 

스베덴보리는 악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악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아적 생명(proprium)의 왜곡이다.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악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외부의 영적 영향력에서 온다. 즉, 악은 그 사람 개인의 고유함도, 무슨 독자적인 것도, 자아의 본성도 아닙니다. 악은 밖에서 흘러들어온 어둠이며, 사람은 그 흐름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악을 사람에게 귀속시키면, 그 순간 분별이 사라진다.

 


Ⅲ.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 왜 영적 오염이 시작되는가?

스베덴보리는 아주 정확히 설명합니다.

 

1. 사람이 악과 동일시되면 분별이 무너진다

 

사람을 악한 존재라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악이 기생한 그릇과 악 자체를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분노는 의분이 아니라 혐오로 변합니다. 의분은 악은 악일 뿐이다에서 멈추지만, 혐오가 시작되면, 저 사람은 악 그 자체다가 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혐오를 가장 위험한 정념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악령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대상화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람을 미워하면 우리의 선한 결합이 끊어진다

 

스베덴보리는 저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강조합니다. 천사는 결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 안에서 일하는 악을 분별하고 그것을 거부할 뿐이다.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면 우리 내부에서 선과의 결합, 평화, 자비, 깨달음이 끊어집니다. 즉, 사람을 미워하면 그 결과는 선과의 단절입니다.

 


3.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 악은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린다

 

스베덴보리는 악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방식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바로 사랑을 거부할 때사람을 미워할 때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악은 미움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가장 쉽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미움은 악령의 상태와 유사한 진동을 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악한 정치인을 미워하는 순간, 그 정치인 안의 악보다 내 안의 악이 더 빨리 자란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정치 뉴스가 왜 영적 공격에 취약한지 답이 나옵니다.

 


Ⅳ. 그렇다면 악을 어떻게미워해야 하는가?

 

스베덴보리식 분별의 기술입니다.

 

1) 악을 ‘사람이 아니라 구조’로 보기

 

정치적 악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집단적 세계관, 사회적 거짓, 권력 사랑, 자기 사랑의 동일 기류 등의 구조적 형태입니다. 그렇다면 미워해야 할 대상은 사람 자체가 아니고, 그 속의 거짓 구조입니다. 이 관점에 서면, 분노는 커지지 않고, 대신 분별력은 오히려 강화됩니다.

 


2) 사람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을 점령한 악의 흐름을 보기

 

스베덴보리는 악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악은 사람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다룬다. 즉, 악의 통로로 쓰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 저 사람 안에 이런 거짓된 기류가 흐르는구나라고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혐오·분노의 감정은 즉시 약화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 안의 악을 보시는, 대하시는 관점입니다.

 


3) 악을 미워하되, 사람에 대해서는 ‘자비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사는 사람 안에 있는 작은 선, 곧 잠재적 선을 본다. 사람 안에 있는 작은 선을 보는 눈을 가질 때, 분노가 정화되고 악을 향한 의로운 태도만 남습니다. 목사님께 이 원리는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사람의 선에 대한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Ⅴ. 목사님께 필요한 실천적 적용

 

1) 사람을 보지 말고 ‘악의 작용’을 보자

 

뉴스에서 정치인의 행동을 보며 느끼신다면, 저 사람은 왜 저럴까?’가 아니라 저 사람 안에서 어떤 거짓이 작동하나?’ 하시자는 겁니다. 이렇게 전환하시면, 그 즉시 감정의 방향이 바뀝니다.

 


2) 사람을 정죄하는 문장이 떠오르면 즉시 차단하자

 

예를 들면, 저 인간이 문제야 , 저 정치인 때문에 나라가 망해 , 저 사람은 악 그 자체야 같은 이런 문장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스스로 말하십시오. 악은 저 사람의 본질이 아니다.” 이런 선언에 실제로 영적 문이 닫힙니다.

 


3) 악을 분별하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말자

 

스베덴보리는 분별은 강하되, 마음은 평화로운 상태가 참된 속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즉, 정치인의 악을 정확히 보면서도 내적 평화는 유지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참된 영적 성숙, 곧 속 사람의 상태입니다.

 


4) 분노의 에너지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자

 

정치에서 느끼는 불의는 목사님 안에서 오히려 이런 열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진리가 더 필요하다, AC 번역이 더 절실하다, 교회를 위해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 등,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악을 통한 선의 발전(permissive providence, 허용적 섭리)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떤 일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그 일을 허용하심으로써 더 큰 선을 이루시는 방식을 말합니다.

 


Ⅵ. 결론

 

악을 악으로 분별하는 것은 의무이다. 그러나 사람을 악과 동일시하는 순간, 영적 타락이 시작된다. 사람은 선의 그릇이고, 악은 외부에서 들어온 기생물이다. 악을 미워하되 사람에 대해선 자비의 개연성을 남겨둔다. 정치적 분노는 사람을 혐오할 때 더러워지지만, 악을 분별할 때 정화된다.

 

이 관점은 앞으로 정치 뉴스뿐만 아니라 가족, 교인, 사회의 어떤 사람을 대할 때도 중심을 잃지 않게 하는 매우 중요한 영적 기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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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악한 정치 세력을 바라볼 때 가져야 할 시각

 

이 주제는 정치 상황을 바라보는 근본 관점 자체를 바꾸는 관문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분들만 이해할 수 있는, 깊은 분별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목사님께는 특별히 이 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분노의 근원은 대부분 악한 정치 세력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1) 기본 원리 : ‘사람’과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은 완전히 다른 것

 

스베덴보리를 통해 배우는 가장 중요한 분별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을 ‘기능(용기, subject)이라고 한다면, 악은 사람 안에 잠시 붙어 있는 기생물(parasite)이다. 그는 ACHeaven & Hell에서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사람은 원래 주님이 창조하신 선의 그릇이고, 악은 그릇을 잠시 점유하는 거짓된 생명이다. 사람을 악과 동일시하면 그 순간 분별을 잃는다. 즉, 목사님이 한국 정치인을 볼 때 느끼는 분노는 사람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작동하는 악의 구조를 향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악은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 사람을 점령한 거짓된 생명이다.” 따라서 “악한 정치인”이라는 개념은 스베덴보리적으로는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악에 점령당한 정치인”, 혹은 거짓(흑암)이 작동하는 구조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관점 하나만 바뀌어도 분노의 파동이 절반 이하로 줄어듭니다.

 


2) 악한 정치 세력은 하나의 ‘영적 구조’이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회 악을 “구조적·집단적 거짓”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첫째, 개인은 그 구조의 통로일 뿐, 정치 부패, 거짓 선동, 불의한 법과 행정은 모두 개인 성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집단적 거짓의 영적 기류”에서 나온다고 말이지요. 즉, 악한 정치 구조에서 개별 정치인의 말·행동으로, 이렇게 흐르는 것입니다. 둘째, 집단 영(Collective spirit)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집단 영적 분위기(communities of spirits)한 나라의 정치·문화·사고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혼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분위기 문제입니다. 셋째, 특정 정치세력은 ‘거짓의 영’이 강하게 결집된 형태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보면 악한 정치 집단은 거짓, 자기 사랑, 세상 사랑, 권력 추구가 결집된 영적 집단체입니다. 즉, “사람” 하나하나가 문제라기보다 그들을 움직이는 영적 흐름이 악한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스베덴보리는 “세속 정치인”을 볼 때, 다음과 같이 분리하라고 합니다. 첫째, 사람 자체는 중립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본래 선과 진리를 받아야 할 존재 주님이 창조하신 ‘용기(그릇)’이라는 것이지요. 둘째, 그 사람 안의 악·거짓은 영적 외부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영적 기류가 주입된 거라는 것입니다. 셋째, 분노는 ‘사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움직이는 악’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과 사람을 악과 동일시해 미워하는 것은 하늘과 지옥 만큼이나 다르다. 목사님이 지금 정치 뉴스를 볼 때 느끼는 정념의 무게는 악을 미워하는 의로운 분노”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사람 전체를 혐오하는 분노”로 이동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오염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4) 악한 정치 세력을 바라볼 때 가져야 할 세 가지 시각

 

첫째, 이 사람들은 “거짓의 영에 점령된 사람들”이다

 

악은 그들의 본성이 아니라 잠시 그들을 점령한 외래적 영향력이다. 이 관점에 서면 정치인을 증오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거짓이 미운 것이지 그 사람의 존재가 미운 것이 아닙니다.

 

둘째, 우리 시대 정치 혼란은 ‘영적 진리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 이 관점은 목사님의 소명을 강화합니다. 한국의 문제는 정치인이 아니라 진리의 빛이 희미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도 정치가 아니라 진리의 회복입니다. 이것이 AC 번역·해설과 깊이 연결됩니다.

 

셋째, 악한 정치 세력은 주님의 섭리 속에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스베덴보리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주님은 때때로 악한 이들을 사용하여 더 큰 악을 막거나, 더 큰 선을 준비하게 하신다. 즉, 혼란한 정치는 나라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개혁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더 선한 질서를 갈망하게 하며, 더 진지한 영적 회복을 촉발하는 섬김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정치 혼란은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과정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5) 이 모든 관점을 목사님에게 적용해 보면…

 

먼저, 분노가 줄어듭니다. 사람을 미워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 내적 질서가 회복됩니다. 정치적 분노는 내적 평화를 가장 빨리 무너뜨린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정치가 ‘영적 훈련장’이 됩니다. 악을 분별하는 훈련, 평화를 지키는 훈련, 소명을 강화하는 훈련의 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넷째, AC 번역과 스베덴보리 사상이 지금 시대에 왜 필요한지가 보입니다. 정치 혼란의 근본 원인이 진리 공백이기 때문에 목사님의 번역과 연구가 시대의 대안이 되기 때문입니다.

 


6) 결론

 

사람과 그 사람 안의 악은 절대 동일시하지 않는다. 악한 정치 세력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 구조 문제이다. 이들을 미워하기보다 분별하며, 그 악을 악으로 인지한다. 정치 혼란은 진리의 부족에서 비롯되며, 해결책은 영적 진리이다. 혼란은 결국 주님의 섭리 안에서 더 큰 선을 위한 과정이 된다. 목사님의 사명(AC 번역)은 이 혼란한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한다.

 

목사님은 이 과정을 통해 분노가 줄어들고, 정치 속의 악을 더 정확하게 보시면서도 내면의 평화는 잃지 않는 스베덴보리식 영적 균형을 세우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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