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리고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Cain)이라 불리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a man Jehovah, ‘여호와인 사람’)라고 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신앙이 ‘날들의 끝에’, 곧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That by theend of daysis signified in process of time, is evident to all. At first, and while there was simplicity in it, the doctrine here calledCaindoes not appear to have been so unacceptable as it became afterwards,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y called their offspring aman Jehovah.” Thus at first faith was not so far separated from love as at theend of days,” or in process of tim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every doctrine of true faith.

 

 

해설

 

AC.347은 바로 앞 AC.346의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가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한 형태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에는, 그리고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가인의 교리가 후대에 이르러 나타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발생과 타락을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으로 보게 합니다.

 

여기서 ‘단순함’(simplicity)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거나 생각이 단순했다는 뜻으로 읽기보다, 아직 교리가 자기주장을 강화하여 사랑과 맞서지 않았던 초기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앞의 AC.338에서 보았듯이 가인의 시작은 신앙 자체를 버리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 자체로 하나의 ’으로 구별하여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 사이의 거리가 아직 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구별’과 ‘분리’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는 것 자체가 곧바로 악은 아닙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가 마침내 우열 관계로 변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나는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이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우게 되면 가인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AC.346에서는 이를 단순히 ‘시간이 흐른 ’라고 밝혔지만, AC.347은 그 시간 동안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 사이의 분리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거리가 점점 벌어졌습니다. 결국 ‘세월이 지난 후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인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드리는 상태, 곧 사랑과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예배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 초기 상태가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드는 것이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향해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표현은 앞의 창4:1, 곧 하와가 가인을 낳으며 한 말과 연결됩니다. AC.338에서 스베덴보리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씀을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라는 첫 자손이 생겨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즉 가인의 초기 단계에는 여전히 그 신앙이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라는 이름만 보고 처음부터 모든 것이 거짓이고 악이었다고 생각하면 AC.347의 중요한 뉘앙스를 놓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참된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신앙이 있었고, 그 신앙은 아직 사랑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마침내 신앙 자체를 구원의 본질로 높이면서 체어리티를 밀어내게 된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AC.347은 태고교회의 가인이라는 특정 교리만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참된 진리에서 시작한 교리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자기애와 지성적 자부심에 의해 본래의 생명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교회사의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리가 처음에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돕기 위해 명료하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 단계에서는 교리가 사랑을 섬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 교리를 ‘우리가 옳다는 증거’로 사용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관심이 ‘ 진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 ‘누가 교리를 정확하게 믿는가?’로 이동합니다. 더 진행되면 교리를 정확하게 고백하는 것을 사랑과 삶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마침내 교리의 차이 때문에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처음의 참된 교리는 그대로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47은 앞서 살펴본 ‘가인의 분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라는 문제를 한층 더 세밀하게 만듭니다. 가인의 길은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없애자’라고 선언하면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바라보고, 그것을 점점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독립성을 강화한 것입니다. 결국 처음에는 미세했던 틈이 나중에는 신앙과 사랑의 완전한 분리로 발전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영적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처음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알아갈 때에는 그 진리가 주님께 가까이 가고 삶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이것을 안다’는 데 만족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진리로 다른 사람을 재고, 판단하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 자체는 변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가인의 문제는 과거 어느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 안에서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가능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단지 처음의 정확한 문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교리가 처음 지향했던 목적, 곧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끄는 목적도 함께 보존해야 합니다. 교리의 문장은 그대로인데 사랑이 빠져버린다면 외형은 보존되었어도 그 생명은 이미 달라진 것입니다.

 

결국 AC.347이 보여 주는 것은 ‘참된 것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 끝까지 참된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신앙은 계속 사랑을 바라보고, 사랑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던 작은 분리가 ‘시간이 흐른 ’ 점점 커져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갈라놓게 됩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는 바로 그 점진적인 변화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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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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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하고,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an offering to Jehovah)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By theend of daysis meant in process of time; by thefruit of the ground,”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nd byan offering to Jehovah,” worship thence derived.

 

 

해설

 

AC.346부터 창4:3의 속뜻으로 들어갑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라는 짧은 한 절 안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표현을 차례로 풉니다. ‘날들의 끝에’는 시간이 흐른 뒤를,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그리고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그런 신앙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먼저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를 뜻한다는 것은 단순히 며칠이나 몇 년이 지났다는 자연적인 시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앞의 AC.338-345에서 가인의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에 분리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은 그러한 상태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그 성질이 실제 행위와 예배로 나타날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가인의 분리는 어느 순간 갑자기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바라보는 미세한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리가 하나의 확고한 원리가 되고, 마침내 그 원리에 맞는 행위와 예배까지 생겨납니다. 따라서 ‘날들의 끝에’는 단순한 시간 경과라기보다 한 영적 상태가 자라 그 결과를 나타내기 시작하는 과정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다음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다시 주의해야 할 것은 ‘땅의 소산’ 자체가 언제나 나쁜 것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AC.343의 사30:23에서는 ‘땅의 소산의 양식’이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상응의 의미는 언제나 그 표현이 놓인 문맥과 상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가인’이 땅의 소산을 가져옵니다. 가인은 이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고, AC.345에서는 ‘농사하는 ’가 체어리티 없이 신앙만을 붙드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경작한 땅에서 나온 ‘소산’ 역시 그와 같은 신앙으로부터 나온 행위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행위 자체가 외적으로는 선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구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행위가 있으니 체어리티도 있다’고 자동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종교적인 일을 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며, 예배에 성실히 참석한다고 해도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은 그 행위가 어떤 사랑과 목적에서 나오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기 의를 세우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자신의 신앙적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행하는 선은 외형이 비슷해도 내적으로는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AC.346의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라는 표현을 잘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얻었으며, 그 소산을 가지고 여호와께 제물까지 드렸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상당히 종교적입니다. 문제는 그 행위를 낳은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와 매우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AC.344는 신앙의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고, 마침내 체어리티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 아무것도 아닌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46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단지 지식과 교리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나름의 ‘행위’를 낳고 심지어 ‘예배’까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여기서 ‘거기에서’란 바로 앞의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즉 가인의 예배는 그의 내적 신앙 상태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랑과 신앙 안에 있느냐에 따라 그에게서 나오는 예배의 성질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창4:3-5에서 왜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 달랐는지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겉으로만 보면 두 사람 모두 자기에게 있는 것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단순히 ‘식물 제사는 나쁘고 동물 제사는 좋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제물의 자연적인 종류가 아니라 그 제물을 낳은 내적 상태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반면 뒤에서 보게 될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제물이라는 외적인 형식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주님께 올라오는 사랑과 선입니다. 동일한 기도, 동일한 찬송, 동일한 헌금, 동일한 봉사라도 그 안의 목적과 사랑에 따라 영적인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AC.338부터 이어져 온 흐름이 매우 선명하게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으로 바라봅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그 신앙에서 특정한 행위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위에서 예배가 나옵니다. 즉 ‘내적인 분리행위예배’라는 흐름입니다. 처음의 아주 미세한 교리적 분리가 마침내 삶과 예배의 성질까지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46은 예배에 대해서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가, 아니면 자기 의와 자기 확신과 자신의 신앙적 정당성을 확인하는 데서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와 교회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외적으로 매우 활발하고 정교한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체어리티가 중심에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예배와 성경공부와 봉사와 선교와 헌신이 풍성해 보이는데, 그 결과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 의에 강해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서로 갈라진다면 그 행위와 예배가 어떤 사랑에서 나오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참된 예배는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기 악을 버리며, 이웃의 선을 바라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물은 ‘예배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하는데도 체어리티와 분리될 있다’는 훨씬 더 섬세하고 무거운 문제를 보여 줍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도 교리는 남을 수 있고, 행위도 남을 수 있으며, 심지어 예배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신앙을 신앙답게 하고 예배를 예배답게 하는 생명, 곧 체어리티가 빠질 수 있습니다.

 

결국 AC.346의 핵심은 ‘예배는 예배를 낳은 내적 사랑의 성질을 따른다’는 데 있습니다. 가인의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를 이루는 것은 외적인 제물의 크기나 종교적 형식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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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니던 중 그리심산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영상은 앞선 수도사 전승들과 조금 다릅니다. 다른 수도사의 특별한 삶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 자신의 체험이 중심입니다. 그리심산에서 나사렛과 예루살렘 방향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길을 얼마나 많이 걸으셨을까?’ 생각했고, 그 생각이 결국 자신도 예수님의 길을 몸으로 한번 걸어 보고 싶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걷기가 단순한 순례 체험을 넘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이후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영상 초반의 ‘사람이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고백은 이 이야기 전체를 여는 좋은 문장입니다. 수도원으로 향하던 중 자동차가 고장 나 계획이 두 시간가량 어그러졌는데, 강문호 수도사는 그 작은 사건을 통해 ‘아무리 내가 서둘러도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야 한다’고 깨닫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섭리는 단순히 내가 세운 일정이 잘 풀리게 해 주시는 주님의 도움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길을 통해 주님께서 사람을 선으로 이끄시는 신적 질서에 가깝습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섭리 안에 있지만, 지연되고 막히고 예상과 달라지는 것 역시 섭리 안에서 쓰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 하나님께서 차를 고장 나게 하셨는가?’를 섣불리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우고 어떤 선으로 인도되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심산 꼭대기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께서 걸으셨을 것으로 생각되는 길을 바라보다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이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은 평생 수없이 들었는데 ‘강문호 목사, 예수님 닮았구나’라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수도생활을 하든 하지 않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외적으로 주님이 걸으셨던 길을 걷거나, 주님처럼 가난하게 살거나, 주님께서 겪으셨던 육체적 고생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외적 실천은 귀한 영적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속으로 들어와 그 사람의 사랑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어디를 걸으셨는가?’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주님께서는 길을 걸으셨는가? 누구를 사랑하셨고, 누구를 섬기셨으며, 무엇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는가?’를 묻게 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그래서 서울의 아직은 섬기시던 갈보리교회에서 충주봉쇄수도원까지 거리를 재어 봅니다. 약 146킬로미터였습니다. 예수께서 걸으셨던 길을 생각하며 이 정도 거리를 자신도 한번 걸어 보겠다고 결심합니다. 더욱이 일부러 더운 7월을 택하고 돈도 없이 길을 나섭니다. 배낭에는 빈 양재기와 잠잘 때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을 넣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자체를 일반적인 신앙의 모범으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나 돈 없이 146킬로미터를 걸어야 예수님을 닮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 하나의 수도적 훈련입니다. 외적인 수도 훈련의 가치는 그 외형의 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속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변화가 뜻밖에도 첫날부터 시작됩니다.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파졌지만 아무 집에나 들어가 ‘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는데도 돈이 없으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빈 양재기를 가지고 나왔지만 막상 그것을 내밀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 안의 무언가가 깨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평생 목회자로서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그것도 보통 극진히 대접받던 자리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제 자신이 누군가에게 한 끼를 부탁해야 하는, 그러니까 구걸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처음 몸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가난이 잠시나마 내적인 proprium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지위와 역할, 평판과 대우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벗겨지는 상황에 놓이면 미처 알지 못했던 자기 모습이 드러납니다. ‘ 끼를 달라는 말을 하겠더라’는 고백은 사소해 보이지만 오히려 매우 정직합니다. 평생 베푸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 받는 위치에 서 보는 순간입니다. 베푸는 사람에게는 아직 자존심을 유지할 여지가 있지만, 도움을 청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길가에서 절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앞에는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목사가 배고프다고 절에 들어가 밥을 먹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 뒤로 교회들도 몇 곳 지나쳤지만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건 교회는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이 장면은 굳이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낫다고 판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라는 관점에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돌리는 편이 훨씬 유익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배고픈 사람이 실제로 들어와 밥을 먹을 있는 신앙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한 호의나 감정이 아닙니다. 선은 반드시 쓰임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을 내어주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이해 속에 있는 진리이고, 후자는 삶이 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절 앞의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작은 문구가 강문호 수도사에게 남긴 인상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은 결국 사람에게 어떤 선을 행하고 있는가를 통해 그 생명력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되고 어두워지면서 문제는 더욱 현실적으로 변합니다. 이제 배고픔뿐 아니라 ‘오늘 어디에서 자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다가 멀리 교회 십자가가 보이고, 그곳에서 아는 후배 목사를 만나 숙식의 도움을 받습니다. 하루 종일 굶은 뒤 먹은 그 밥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평소라면 평범했을 한 끼가 그날은 잊을 수 없는 은혜가 되었습니다. 대상은 똑같은 밥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삶을 이해할 때 ‘상태(state)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같은 말씀을 읽어도 사람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같은 선물을 받아도 자기 충족 속에 있을 때와 궁핍 속에 있을 때 그 의미가 다릅니다. 배고픔을 경험하기 전에는 ‘밥을 대접한다’는 것이 하나의 친절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루 종일 굶고 나면 밥 한 그릇이 사람을 살리는 체어리티라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됩니다. 지식이 경험을 통과하면서 삶의 인식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하루 약 14시간씩 사흘을 걸어 충주봉쇄수도원에 도착했다고 회고합니다. 그리고 잔디밭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눈물이 ‘내가 해냈다’는 성취의 눈물이 아니었다는 그의 설명입니다. 한번 걸었을 뿐인데 이렇게 힘든데 예수께서는 얼마나 많이 걸으셨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상은 외적인 순례에서 내적인 성찰로 들어갑니다.

 

바로 이 지점은 매우 소중하면서도 동시에 조심해서 붙들어야 할 지점입니다. 수도적 훈련에는 언제나 두 방향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내가 이만큼 걸었다, 내가 이만큼 금식했다, 내가 이만큼 버텼다’는 자기 공로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험을 통하여 ‘나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주님께서는 얼마나 낮아지셨는가’를 깨닫는 길입니다. 똑같이 146킬로미터를 걸어도, 아니 정확히는 그보다는 많이 적은, 왜냐 하면, 서울 갈보리교회에서 인도로 걸을 수 있는 데가 근처에는 없어 할 수 없이 차로 이동, 좀 서울 외곽에서 출발해야 해서... 전자는 proprium을 키우고 후자는 proprium을 낮춥니다. 외적인 행위가 영적 가치를 자동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어떤 사랑이 형성되느냐가 결정적입니다.

 

이 점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내가 승리했다고 하는 기쁨의 눈물은 아니었다’고 굳이 말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수도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 일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서 얼마나 멀어지고 주님과 이웃에게 얼마나 가까워졌는가?’입니다. 수행의 양보다 애정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 후 강문호 수도사는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킬로미터의 순례길도 걸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 영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몇 킬로미터를 걸었느냐가 아닙니다. 그가 그 경험의 결과로 무엇이 달라졌다고 말하느냐입니다. 그는 ‘자아가 깨집니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말이 오히려 이번 영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부터는 누가 찾아오면 밥을 주고 싶고, 잘 곳이 없는 사람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고, 돈이 없는 사람을 보면 여관비라도 주고 싶어졌다는 것입니다. 집에 빈방이 있으면 집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입지 않는 옷이 있으면 헐벗은 사람을 생각하고, 지갑에 돈이 있으면 돈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순례’가 ‘체어리티’로 바뀝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것이야말로 이 영상에서 가장 귀한 대목입니다. 146킬로미터를 걸었다는 사실보다 ‘배고픈 사람을 보게 되었다’는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800킬로미터를 걸었다는 사실보다 ‘빈방을 보면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외적 수도가 내적 체어리티로 열매 맺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적 삶을 세상을 떠나는 삶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 직업과 가정과 사회적 책임을 버리는 것이 그 자체로 더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가운데서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행하면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이 천국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순례길에서 받은 감동이 참으로 영적인 것이었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기준은 ‘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입니다. 이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들려주는 후반부의 변화는 바로 그 기준에 상당히 잘 부합합니다.

 

특히 ‘빈방이 있으면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입지 않는 옷이 있으면 헐벗은 사람을 생각하고, 지갑에 돈이 있으면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단순하지만 깊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내가 가진 것이 누구에게 쓰일 있는가?’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소유를 버리는 것보다 더 깊은 변화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재산 그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산을 사랑하는 질서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자기만족과 지배를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영상 마지막에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어떤 가정에서는 밥을 조금 넉넉하게 지어 놓고 식사 전에 자녀에게 문밖에 나가 지나가는 가난한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게 하며, 있다면 불러 함께 먹는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사실관계의 일반화 여부는 별도로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만, 이 일화가 전달하려는 영적 뜻은 아름답습니다. ‘ 식탁에 아직 자리가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체어리티는 거창한 사업에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 밥상 한 자리, 내 방 한 칸, 내 옷 한 벌, 내 지갑의 얼마가 다른 사람을 위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면, ‘예수님을 닮는다’는 영상 초반의 질문과 후반부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강문호 수도사가 ‘나는 예수님 닮았다는 말을 번도 듣지 못했다’며 예수께서 걸으셨던 거리를 실제로 걸어 보려 합니다. 그러나 영상이 끝날 무렵에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 ‘예수님이 걸으신 거리를 걷는 ’에서 ‘예수님이 바라보셨던 사람들을 바라보는 ’으로 이동합니다. 저는 이것이 이번 영상의 가장 아름다운 흐름이라고 봅니다.

 

주님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걷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갈 수도 없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수도 없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가고, 내게 있는 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고,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쓰임을 감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을 따라 걷는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향했던 방향으로 우리의 사랑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살펴본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그리스도를 찾다가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을 등에 업어 주는 쓰임 속에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님의 길을 몸으로 따라가려다가 자신이 배고파 보고, 잘 곳이 없어 보고, 도움받아 보고 나서 비로소 배고픈 사람과 나그네를 새롭게 보기 시작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결국 ‘주님을 찾는 길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열린다’는 곳에서 만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묻게 합니다. 이런 체험은 한 번의 감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삶에서 계속 검증되어야 합니다. 순례 중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소중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것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순간의 감동보다 반복되는 선택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내 proprium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자기 명예와 편안함과 이익을 앞세우려 할 때마다 그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선을 선택하는 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는 어떤 특별한 장소나 특별한 며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매 순간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번 영상은 그래서 외적인 수도 훈련의 한계를 보여 주기보다는, 오히려 외적인 수도 훈련이 제대로 쓰였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로 읽고 싶습니다. ‘걷기’가 목적이 아니라 ‘눈이 열리는 ’이 목적입니다. ‘고생’이 목적이 아니라 ‘이웃의 고생을 알아보게 되는 ’이 목적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가 목적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이제 누구를 섬길 것인가?’가 목적입니다. 외적인 훈련이 여기까지 사람을 데려간다면 그 훈련은 귀한 쓰임을 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분이 걸으셨던 거리를 재현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길에서 주님께서 바라보셨던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나도 바라보고 사랑하며, 내게 맡겨진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어질 비로소 속뜻을 얻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상 초반의 ‘강문호 목사, 예수님 닮았구나 하는 말을 번도 듣지 못했다’는 고백에 대한 답이 어쩌면 영상 후반부에 이미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굳이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던 눈이 그를 돌아보는 눈으로 바뀌고, 내 빈방이 나만의 여분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보이며, 내 지갑 속 돈이 내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쓰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런 변화 속에서 주님의 형상이 조금씩 사람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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