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550,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과 찬553, ‘새해 아침 환히 밝았네’입니다.

 

 

2026년 첫 주일입니다. 보통은 신년 주일이라 하여 설교도 그에 맞게 준비하지만, 저희는 당분간 아주 특별한 절기 외에는 오직 이 AC에만 전념하기로 한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5장입니다. 오늘부터 6주에 걸쳐 창세기 5장을 살피게 되며,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 1절로 3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1-3)

 

위 본문을 아래

5 아담 계보의 속뜻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겉으로 보면 무슨 가계 족보의 서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 전체에서 인간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아담의 계보’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이는 한 개인의 혈통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최초의 교회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다음 상태로 넘어갔는지를 말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인간의 기원이 아니라, ‘사람됨의 기원’, 곧 교회의 기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혀 새로울 수 있는 이 관점을 아래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본문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떤 한 사람의 족보를 떠올리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그 기대를 깨뜨립니다.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을 뜻하는 말이며, 성경은 이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복수로 취급합니다. 이는 분명히 어떤 한 개인,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 것이지요.

 

성경에서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 상태를 뜻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 다시 말해 교회가 존재할 때, 그 상태를 성경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곧 ‘사람’이었고, 그 교회에 속한 이들은 개인이기 이전에 교회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의 사고, 사랑, 퍼셉션(perception), 삶 전체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아담의 계보’로 시작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계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상태의 계승’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 ‘그 이름으로 불리던 교회가 어떤 상태로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가’를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며, 나 자신을 한 개인으로 보기보다, 지금 나는 어떤 교회 상태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모양은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뜻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외적으로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살도록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참인지를 배움과 학습을 통해서 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인식, 곧 지각(perception,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라 부릅니다. 아래는 관련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483에서 창세기 5장에 나열된 이름들, 곧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라멕’(Lamech), ‘노아’(Noah)라는 이름들을 다시 한번 분명히 정리합니다. 셋에서 노아에 이르는 모든 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들 가운데 첫째이자 중심이 되는 교회를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는 앞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가장 온전하게 반영했던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이후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은 이 ‘사람’의 상태에서 파생된 변형들이었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 특징은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이란, 지식이나 판단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내적 지각’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를 배워서 알지 않았고, 명령을 통해 분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곧바로 퍼셉션, 곧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 교회들 사이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나 제도의 차이가 아니라,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이 퍼셉션의 삶은 율법 이전의 삶이었고, 교리 이전의 삶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로 계산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직관적으로 알았던 삶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규범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사랑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인간이 그와 같은 질서 안에 놓였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모양은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 퍼셉션의 삶은 점차 약해졌고, 결국 다른 방식의 교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먼저 이 가장 완전한 상태를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상태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성경은 여전히 그 방향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셋째, ‘셋을 낳았다는 것은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음을 뜻합니다

 

본문 3절에서 갑자기 시간이 흐르고,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Seth)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한 사람이 나이 들어 아들을 낳은 것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새로운 교회 상태의 출현’을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완전한 퍼셉션의 상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주님께서는 그 리메인스(remains)를 보존하시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으로 대표, 표상됩니다. 이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동일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이 여전히 중요했으나, 더 이상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했고, 신앙이 점점 더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순수한 상태가 지나가도, 주님은 언제나 그다음 상태를 준비하십니다. 셋은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 ‘섭리의 응답’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교회는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 역시 셋의 교회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살지 못하지만, 사랑과 신앙의 결합 안에서 여전히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사랑이 신앙과 분리되지 않을 때, 교회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무너져도 끝나지 않고, 언제나 다음 상태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계보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삶은 다음 상태를 낳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이 말씀 앞에서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속 사람의 상태’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모두 이 속 사람의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무슨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무엇보다도 자기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매진해야 합니다. 대신 ‘나는 교회 몇 년 다녔어’, ‘나는 예수님 영접 기도한 지 벌써 30년이나 된 사람이야’, ‘나는 교회에서 목사로, 장로로, 권사, 집사로 평생 섬겼어’ 등등 이런 다분히 겉 사람에 치우친 공로에 의지하시다가는 나중에 큰일 납니다.

 

동일한 원리로 우리는 성경도 이제는 겉이 아닌 속으로, 아니 겉도 보고 속도 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삼천포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겉도 중요하지만, 속으로 읽는 훈련, 곧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읽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사랑의 주님,

 

오늘 신년을 맞아 창세기 5장 첫 본문으로 주님 음성에 귀 기울였습니다. 다소 생소하고 낯선 내용들이 혹시 있었을지라도 반발심 대신 주님을 사랑하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저마다 자기 내면을 들을 귀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자 힘써 노력하는 심령들에게는 주님, 아낌없이 놀라운 하늘의 계시를 부어주시옵소서. 그래서 놀라운 일, 곧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의 기적들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렇지 못한 심령들에게도 주님, 저들을 어루만지사 부드러운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그래서 다들 올 한 해 능히 주님의 계시를 받기에 합당한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다음 본문은 창5:4-20(AC.486-515)입니다.

 

 

 

설교

2026-01-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2, 25. 창5.1, 2026-01-04(D1)-주일예배(창5,1-3, AC.469-485, 성찬), ‘창5 아담 계보의 속뜻’.pdf
0.33MB
성찬.pdf
0.14MB

 

 

https://youtu.be/ATzHWYj8mBA

 

 

주일예배(2025/12/28, 창4:25-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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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가 AC.470에서 ‘이 장부터 11장, 곧 에벨의 때까지 이름들은 결코 사람을 뜻하지 않고 실제적인 것들, 곧 상태들을 뜻한다’고 단언하는 것은, 창세기 1–11장을 해석하는 데 있어 하나의 명확한 경계선을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단순한 주석 상의 편의가 아니라, 말씀의 표현 방식과 인간의 인식 구조가 바뀌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리키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를 순수한 ‘상태의 역사’로 읽어야 하고, 어디서부터 점차 ‘역사와 계보의 언어’로 내려오는지를 가르는 기준이 바로 에벨이라는 뜻입니다.

 

에벨이 그 기준이 되는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시대가 보편적 교회 시대의 마지막 경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와 그 이후의 고대교회 초기까지는, 인류가 아직 하나의 비교적 공통된 인식 구조 안에 있었습니다. 지역과 문화의 차이는 있었지만,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근본 방식은 크게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시기의 교회들을 ‘사람 이름’으로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 상태 전체를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이름은 곧 상태’라는 관계가 거의 완전하게 유지됩니다.

 

그러나 에벨의 시대를 지나면서, 이 보편성은 점차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 결정적인 표지가 바로 바벨탑 사건(11)입니다. 언어가 갈라지고, 인식이 분열되며, 교회는 하나의 중심에서 여러 갈래로 흩어집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즉각적 인식은 사라지고, 각 집단은 자기 언어와 자기 이해 방식, 자기 교리 체계를 갖게 됩니다. 이 지점부터 성경은 더 이상 ‘이름 하나’만으로 교회의 상태를 충분히 전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에벨 이전까지는 이름이 순수하게 상태를 뜻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이름이 점차 실제 인물과 혈통, 역사적 계보와 함께 읽히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에벨이 히브리 계통의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에벨은 단순한 족보상의 한 인물이 아니라, ‘히브리’라는 명칭이 유래하는 인물입니다. 이는 혈통적 의미를 넘어서, 주님께서 계시를 보존하실 특정 계열이 분리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이전까지는 교회가 비교적 넓고 느슨하게 퍼져 있었다면, 이 시점부터는 계시가 점점 한 계보, 한 줄기로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에벨 이후의 족보는 단순한 상징의 연속이 아니라, 실제 계시 보존의 역사로서 점점 구체성을 띠게 됩니다.

 

이 변화는 말씀의 수준이 낮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수용 능력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에벨 이전에는 인간이 하늘적인 방식, 곧 상태 중심의 언어를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 그 방식이 유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점차 역사, 민족, 언약, 표징 같은 외적 장치를 통해 전달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이름은 더 이상 단독으로 의미를 유지하지 못하고, 다른 요소들과 결합하여 의미를 형성합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점은, 에벨 이후에는 동일한 이름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 초기에는 하나의 이름이 하나의 교회 상태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대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식이 분열된 이후에는, 같은 이름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교리적, 영적 상태를 가리키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후로 갈수록 이름만으로 말하지 않고, 그 이름이 속한 땅, 민족, 언약의 맥락을 함께 제시합니다. 이는 말씀의 혼합이 아니라, 인간 인식의 분열에 대한 주님의 배려입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에벨을 기준으로 분명한 선을 긋습니다. 에벨 이전까지는 ‘이름 = 상태 = 교회’라는 공식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고, 에벨 이후부터는 ‘이름 + 혈통 + 역사’가 함께 작동하는 혼합 국면으로 들어갑니다. 이 경계선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창세기 1–11장은 끝없이 논쟁적인 역사 문제가 되지만, 이 기준을 붙들면 그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영적 역사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AC.470에서 말하는 ‘에벨의 때까지’라는 표현은 임의적인 구분이 아니라, 인류 인식 구조의 변화, 교회 형태의 변화, 말씀 전달 방식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난 지점을 정확히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기준을 가지고 창세기 초반을 읽을 때, 왜 앞부분은 유난히 상징적이고, 왜 중반부부터 점점 민족사처럼 보이기 시작하는지, 그리고 왜 바벨 이후의 족보는 이전과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지가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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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녁’은 모든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 상태가 그늘의 상태, 곧 거짓의 상태이며 신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이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빛의 상태, 곧 진리의 상태이며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무엘서에서 다윗을 통해 하신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며, 그가 오신 그때는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저녁’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니엘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이와 같이 말씀에서 ‘아침’은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곧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을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언어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원리를 제시합니다. ‘저녁’은 언제나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빛이 약해진 상태, 곧 그늘과 혼합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는 거짓이 섞여 있고 신앙이 부재한 상태로, 인간의 내면이 아직 주님의 빛에 의해 질서 잡히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아침’은 이후의 상태로, 주님의 빛이 비추어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하루의 경과가 아니라, 거듭남이 반드시 거치는 영적 이동의 방향을 나타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저녁’을 사람 자신의 것, 곧 본성(proprium)에 속한 모든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자신의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며, 주님의 빛이 없을 때에는 그것이 선처럼, 진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은 신앙이 없는 상태이며, 영적 실재에 비추어 보면 어둠입니다. 반대로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으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상태입니다. 이 구분은 도덕적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주님에게서인가 사람 자신에게서인가의 문제이며, 거듭남은 바로 이 근원 인식이 점점 명료해지는 과정입니다.

 

다윗의 예언에서 묘사되는 ‘아침 빛’은 이 상태를 매우 풍부하게 설명합니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 구름 없는 밝은 빛, 비 뒤에 돋아나는 연한 풀은 모두 주님의 임재로 인해 생명이 새롭게 발생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퍼셉션으로 인식되는 상태입니다. 이때 진리는 외부에서 주입된 교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빛이 됩니다. 연한 풀이 돋아난다는 표현은, 주님의 빛 아래에서 선한 삶의 움직임이 자발적으로 시작됨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주님의 세상 오심을 ‘아침’이라 부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는 ‘저녁’이며, 바로 그 상태 속으로 주님이 오시기 때문에 그때는 동시에 ‘저녁’이라고도 합니다. 다니엘서의 ‘주야’라는 표현은, 교회가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에서 다시 빛을 받기까지의 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따라서 ‘아침’은 단지 과거의 탄생 사건만을 가리키지 않고, 신앙이 없는 상태 속으로 주님이 새롭게 임하시는 모든 순간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아침’이라는 표현이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은 언제나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는 우주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재창조, 곧 거듭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오늘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는 주님의 창조 사역의 리듬을 드러냅니다. AC.22는 이처럼 성경의 시간 언어를 상태의 언어로 전환함으로써, 말씀이 언제나 현재형으로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살아 있는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21, 창1:4, 5,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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