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6, 4,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 - 속죄제에 감추어진 악의 인식과 정결의 아르카나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3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4 수송아지를 회막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5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6 제사장이 손가락에 피를 찍어 여호와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뿌릴 것이며 7제사장은 피를 여호와 회막 향단 뿔들에 바르고 송아지의 전부를 회막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8 속죄제물이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0화목제 제물의 소에게서 떼어냄 같이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11 수송아지의 가죽과 모든 고기와 그것의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12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 13만일 이스라엘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14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15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16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17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여호와 , 휘장 앞에 일곱 뿌릴 것이며 18 피로 회막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 뿔들에 바르고 전부는 회막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19그것의 기름은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르되 20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 21그는 수송아지를 진영 밖으로 가져다가 첫번 수송아지를 사름 같이 불사를지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 22만일 족장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23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없는 숫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24 숫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지니 이는 속죄제라 25제사장은 속죄 제물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26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27만일 평민의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28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예물로 삼아 29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 30제사장은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전부를 제단 밑에 쏟고 31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32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제물로 가져오려거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33 속죄제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죄제물로 잡을 것이요 34제사장은 속죄제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피는 전부 제단 밑에 쏟고 35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떼낸 같이 떼내어 제단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4)

 

해설

레위기 4장에 들어서면 제사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1의 번제에서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보았고, 2의 소제에서는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삶의 예물이 되는 모습을 보았으며, 3의 화목제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하여 주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결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레4에서는 처음부터 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그리고 이 한 장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 이스라엘 온 회중, 족장, 평민 한 사람의 경우를 차례로 다룹니다.

 

그렇다면 속죄제는 무엇을 표상할까요? 이 문제에서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매우 직접적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29:14)속죄제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이라고 설명하면서, 바로 그 근거로 레4:3, 8, 14, 20, 21, 24, 25, 29, 33, 34를 직접 열거합니다. 따라서 레4를 읽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처음부터 분명합니다. 속죄제는 단순히 형벌을 면제받기 위한 제사가 아니라 악과 거짓으로부터 인간이 정결하게 되는 을 표상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죄는 어떤 법적 장부에 기록된 항목만이 아닙니다. 죄는 인간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며, 그것이 인간을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죄의 기록만 지워지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AC.10122(29:36)는 속죄제가 자연적 인간 안의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을 계속해서 제거하는 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은 완전히 없어져 인간 자신의 본성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물러나 있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에서 말하는 정결입니다.

 

4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부지중에범한 죄입니다. 제사장도, 온 회중도, 족장도, 평민도 처음에는 자신이 범한 것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족장과 평민의 경우 특별히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악을 회개할 수 없습니다. 먼저 악이 악이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인간의 삶을 비추면서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생각과 욕망과 행동이 주님의 질서에 어긋난다는 것을 깨닫게 할 때 비로소 실제적인 회개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죄를 깨닫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책감이 없는 상태를 평안이라고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보지 못하던 악을 보게 되는 것이 주님께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시는 시작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내 안의 교만을 발견하고, 어떤 관계를 돌아보다가 내가 품어 온 미움을 발견하며, 선을 행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불편하지만 바로 그 발견에서 회개의 문이 열립니다.

 

흥미롭게도 레4에서는 죄를 범한 사람의 위치에 따라 제물과 피의 처리 방식이 달라집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했을 때와 온 회중이 범죄했을 때에는 수송아지를 드리고, 그 피를 회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들에 바릅니다. 반면 족장이나 평민 한 사람이 범죄했을 때에는 피를 회막 안으로 가져가지 않고 번제단 뿔에 바릅니다. 이 차이는 우연한 의식상의 변형이 아닙니다. 대표교회의 모든 세부에는 서로 다른 영적 상태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나치게 빨리 제사장 = 이것, 회중 = 저것, 족장 = 이것, 평민 = 저것이라고 세밀한 상응을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현재 확보한 원전이 확실하게 보여 주는 핵심은 죄와 정결이 인간의 서로 다른 차원에 영향을 미치며, 그에 따라 정결의 표상도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특히 제사장과 온 회중의 경우 피가 성소 깊숙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그 죄의 영향이 예배와 교회의 더 내적인 차원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뿌립니다. ‘일곱은 말씀에서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AC.716(5:24)은 바로 레4:2-3, 6의 속죄제를 인용하면서, 피를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도록 한 것은 속죄가 오직 주님에게 속하며 따라서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죄를 씻는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휘장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AC.9670(26:31)은 성막의 휘장이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나누면서 동시에 이어 주는 결합의 중간 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지성소가 가장 내적인 천국과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을, 그 바깥 성소가 영적 천국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한다면 휘장은 그 둘을 이어 주는 중간입니다. 따라서 레4에서 피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려지는 장면은 정결하게 하는 신적 진리가 인간의 내적 삶 깊은 곳까지 미치는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어 피는 향단의 뿔에 발라집니다. 이것 역시 매우 분명한 상응이 있습니다. AC.2832(22:13)이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능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바로 레4:3, 7의 제사장 속죄제와 레4:22, 25의 족장 속죄제, 4:27, 30, 34의 개인 속죄제를 직접 인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성별과 정결과 속죄가 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진리가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악은 막연한 종교적 감정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진리가 필요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이것은 악이다’, ‘ 생각은 주님의 질서와 맞지 않는다’, ‘ 행동은 이웃을 해친다고 구체적으로 보여 줄 때 인간은 비로소 악과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단의 뿔,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능력에 피가 발라지는 장면은 속죄와 정결에서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16(5:6) 역시 레4:7, 25, 30, 34를 직접 인용하면서, 속죄와 정결이 제단의 뿔에서 이루어진 이유는 모든 속죄와 정결이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향단 자체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높여지는 것을 표상하고, 그 뿔은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레4의 피는 단순히 죽음의 형벌을 대신 치렀다는 표지로만 읽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피의 긍정적이고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입니다. AC.4735는 구약의 성별과 속죄와 정결에서 피가 사용된 수많은 경우 가운데 레4:6-7, 17-18, 25, 30, 34도 직접 열거하면서, 피가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것, 곧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제 레3에서 살펴보았던 기름이 다시 등장합니다. 속죄제에서도 내장의 기름, 콩팥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을 떼어 번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3에서 확인했듯 기름은 선을 표상합니다. 이것은 속죄가 악을 찾아내고 제거하는 부정적인 과정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을 물러나게 하신 뒤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주십니다. 정결의 목적은 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채워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악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도둑질하지 않는 것에서 정직으로, 미워하지 않는 것에서 체어리티로, 거짓말하지 않는 것에서 진실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은 선이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것이며, 그 자리에 주님께서 선을 심으십니다. 그래서 속죄제에서도 기름은 여전히 제단의 불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온 회중을 위한 수송아지의 나머지는 전혀 다른 처리를 받습니다.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까지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밖 정결한 곳으로 가져가 불사릅니다. 이것 역시 매우 강한 원전 근거가 있습니다. AC.10038(29:14)은 이 수송아지의 살과 가죽과 똥을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것이 그것들이 표상하는 악들을 지옥으로 내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므로 진영 은 천국과 교회가 아닌 곳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속죄의 또 하나의 중요한 면을 봅니다. 악은 거룩하게 만들어 제단에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악으로 인식되어 물러나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선으로 변장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리하여 제거하십니다. 반면 그 인간 안에서 주님께 속한 선은 보존되고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같은 수송아지 안에서도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지고, 악을 표상하는 나머지는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실제 회개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악을 설명하고 합리화합니다. ‘성격이 원래 그렇다’, ‘상대가 먼저 그렇게 했다’, ‘다들 그렇게 산다’, ‘ 정도는 죄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악을 드러냈을 때 필요한 것은 악을 자기 안에 계속 보관하면서 종교적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악을 죄로 인정하고 피하며, 주님께 그것을 제거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4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죄를 범한 사람이 누구이든 속죄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도 죄를 범할 수 있고, 온 회중도 잘못될 수 있으며, 족장도, 평민 한 사람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직분이 높다고 죄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공동체 전체가 동의한다고 그것이 반드시 진리인 것도 아니며, 평범한 개인의 죄가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는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동시에 각 사람에게 요구되는 제물이 다릅니다. 제사장과 온 회중은 수송아지, 족장은 숫염소, 평민은 암염소 또는 암양을 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서로 다른 동물이 서로 다른 선과 진리의 상태를 표상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각 동물을 레4의 네 계층에 기계적으로 대응시켜 세부 의미를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은 외적 방식으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상태와 책임에 맞게 정결의 길을 마련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마지막에는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여기서 사함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장부에서 죄목을 지워 주시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레4 전체의 긴 정결 의식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속죄제가 표상하는 것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입니다. 따라서 사함은 악을 붙들고 있으면서 법적 선언만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 악에서 돌이킬 때 주님께서 그 악을 물러나게 하시고 인간을 선과 진리 안으로 이끄시는 구원의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4의 영적 질서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입니다. 처음에는 부지중입니다. 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죄를 깨닫습니다’. 진리가 비춥니다. 그다음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남의 것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피가 뿌려지고 제단의 뿔에 발라집니다. 신적 진리가 정결하게 하는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회복됩니다. 악에 해당하는 것은 진영 밖으로 내보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옵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놀라운 그림입니다. 죄를 보지 못하던 사람이 말씀의 빛에서 죄를 보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피하며, 악과 거짓이 물러난 자리에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4의 속죄제는 죄책감에 인간을 붙잡아 두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발견한 인간에게 여기에서 나올 길이 있다고 보여 주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레4를 읽으며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죄인인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어떤 악을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보여 주고 계시는가?’, ‘그것을 정말 죄라고 인정하는가?’, ‘나는 그것을 설명하고 합리화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영 밖으로 내보내려 하는가?’, ‘ 악이 물러난 자리에 어떤 선을 주님께서 심기 원하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4에서 가장 희망적인 말은 어쩌면 죄를 범하지 않으리라가 아니라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보지 못하는 악이 있다는 사실은 두렵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보여 주시는 순간부터 정결의 길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진리도 주님에게서 오고, 악과 거짓을 제거하시는 능력도 주님에게서 오며, 그 자리에 선을 심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말씀은 선언합니다.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이것이 속죄제 안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SW.6 4 해설)

 

심화

1. 부지중에 지은 죄도 속죄가 필요할까?’

 

레위기 4장을 읽으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일부러 지은 죄도 아닌데 속죄해야 하는가?입니다. 4는 반복해서 부지중에 범하여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도, 온 회중도, 족장도, 평민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여호와의 계명을 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지중에 지은 라는 말은 인간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죄로 계산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관한 매우 깊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생각보다 잘 모릅니다. 어떤 행동을 선한 의도에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바르게 가르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상대를 지배하고 싶었던 마음이 섞여 있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의견을 사랑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 사람에게 그 악은 상당 부분 부지중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은 내가 그것을 미움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사랑이 되지 않으며, 교만은 내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겸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주십니다. 진리는 단지 교리를 많이 알게 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 빛이 삶에 들어오면서 어느 날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4가 반복해서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깨닫는 순간은 정죄의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4의 속죄제 규정들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목적은 인간을 죄책감 속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 악과 거짓에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깨닫기 깨달은 입니다. 아직 보지 못할 때와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의 상태는 같지 않습니다. 보지 못했던 악을 보게 된 뒤에도 그것을 붙들고 정당화한다면 이제 문제는 더 깊어집니다. 반대로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하기 시작하면 거듭남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영적 성장은 나는 이제 죄가 별로 없다는 느낌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미세한 동기와 욕망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퇴보의 표시가 아닙니다. 더 밝은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발견했을 때 낙심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이런 것이 안에 있는가?라는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것을 지금 보여 주셨는가?입니다. 보여 주셨다면 피할 수 있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4의 속죄제는 바로 그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먼저 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진리를 통하여 정결하게 되고 악이 물러나며, 마침내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부지중에 지은 죄도 속죄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 때문에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악에서도 우리를 건져 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보게 하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말씀의 빛에서 보게 되는 순간, 거듭남의 새로운 문이 열립니다. (SW.6 4 심화 1)

 

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SW.6 심화 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SW.6 심화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레위기 4장의 속죄제를 읽을 때 기독교인은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죄를 범한 인간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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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송아지의 기름은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는 진영 밖에서 불살랐을까?’

 

SW.6 심화 3, ‘왜 수송아지의 기름은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는 진영 밖에서 불살랐을까?’

SW.6 심화3. ‘왜 수송아지의 기름은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는 진영 밖에서 불살랐을까?’ 레위기 4장의 속죄제에는 얼핏 보면 매우 이상한 대비가 있습니다. 같은 수송아지인데 일부는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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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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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심화

3.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 하셨을까?’

 

레위기 3장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매우 강한 명령으로 끝납니다. 더구나 이것은 한 번의 제사에만 적용되는 임시 규정이 아니라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기름과 피를 특별히 먹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는 스베덴보리가 놀랄 만큼 직접적인 답을 줍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3(29:22)은 제사와 번제에서 모든 피를 제단에 붓고 모든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살랐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레3:17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를 직접 인용합니다. 즉 레3 마지막 절의 의미를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피가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상응입니다. 주님의 피 역시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와 관계합니다. 기름은 신적 선, 곧 신적 사랑의 선과 관계합니다. 따라서 피와 기름은 제사의 수많은 요소 가운데서도 특별히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먹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실제 음식 규정이었지만 그 안의 영적 의미는 훨씬 깊습니다. 신적 선과 신적 진리는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생각하고 원하고 행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생명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선을 행하고 나면 내가 했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내가 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올바르게 살면 자신의 선함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과 봉사와 체어리티까지 자기 공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3은 말합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선은 네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선도 주님의 것이며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을 행할 힘과 진리를 볼 수 있는 빛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니 나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내가 선을 행했으니 이것은 선이다라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인간은 전력을 다해 선을 행하되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진리를 열심히 배우고 이해하되 그 빛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다는 규정은 매우 깊은 겸손을 가르칩니다. 겸손은 나는 아무 가치가 없다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내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레3의 마지막 한 절이 장 전체를 닫는 완벽한 결론이 됩니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내장과 콩팥과 간 주변의 기름을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른 모든 과정이 결국 한 고백을 향합니다. ‘선은 주님의 것입니다.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정 안에서 참된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선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과 진리의 주인이 되려는 교만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내 안에서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 있습니다. 선을 행하되 그 선을 먹어 자기 공로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되 그 진리를 먹어 자기 지혜의 소유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를 받아 삶으로 살되 언제나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3의 마지막 고백은 그래서 아주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내가 행한 선 가운데 참으로 선한 것은 주님에게서 왔고, 내가 깨달은 진리 가운데 참으로 진리인 것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주님과의 화목과 결합을 보존하는 깊은 겸손입니다. (SW.5 3 심화 3)

 

 

 

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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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심화 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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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심화

2.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레위기 3장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가장 낯선 부분은 아마 제물의 내장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내장에 덮인 기름’,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 콩팥과 위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이 소와 양과 염소의 제사에서 거의 똑같이 반복됩니다. 현대 독자에게는 굳이 성경이 이런 해부학적인 세부까지 기록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곳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이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57(29:19)은 제사와 번제의 수많은 세부 규정을 열거하면서 누가 조금이라도 계몽된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세부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감추어져 있음을 보지 못하겠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는 특별히 내장의 기름, 간의 기름,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제단에서 불사르는 규정을 직접 언급합니다.

 

먼저 기름은 선을 표상합니다. AC.10029(29:13)는 제물의 기름을 선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제사의 문맥에서는 인간의 자연적 또는 겉 사람 안에 받아들여져 진리와 결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름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동물의 가장 좋은 지방 부위를 요구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의 선이 그 근원인 주님께 돌려지는 것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기름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더 세밀해집니다. AC.10072(29:22)내장을 덮은 기름가장 낮은 것들 안에 있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내장은 인간의 가장 낮고 바깥쪽 자연적 삶과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내장의 기름은 주님의 선이 인간의 고상한 종교적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온 상태를 보여 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생각하면 이것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경건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가족에게 거칠 수 있습니다. 교리는 정확히 설명하면서 돈 문제에서는 자기 이익만 좇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를 말하면서 운전할 때나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쏟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영역들이 바로 우리의 자연적 삶의 낮은 입니다. 거듭남은 이런 곳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간에 덮인 꺼풀은 또 다른 층위를 보여 줍니다. AC.10073(29:22)은 이것을 정결하게 자연적 인간의 내적 이라고 설명합니다. 간은 피를 정화하는 기관이므로 상응에서도 정결과 관계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그 행동을 낳는 자연적 인간 안쪽의 정서와 동기까지 정결하게 하십니다.

 

콩팥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AC.10074(29:22)는 콩팥을 정결하게 자연적 인간의 내적 진리와 연결하고, 그 위의 기름을 그 진리에 속한 선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AC.10032은 콩팥이 몸 안에서 걸러 내고 정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영적으로는 살피고, 정결하게 하고, 바로잡는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주님께서 콩팥과 마음을 살피신다는 식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마음이 사랑의 선과 관계한다면 콩팥은 인간 안의 진리를 살피고 분별하는 것과 관계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만이 아니라 그 행동 속에 어떤 진리와 어떤 동기가 있었는지가 주님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제 레3의 장면을 다시 바라보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제사장이 내장과 콩팥과 간 주변의 기름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장면은 단순한 도축 과정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연적 삶의 가장 깊고 낮은 곳까지 주님의 선과 진리가 들어가 살피고, 정결하게 하고, 바로잡는 거듭남의 과정을 표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정결하게 된 것들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제단 위의 불로 올라간다는 점입니다. 자연적 인간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과 감각과 일상생활과 직업과 인간관계를 버리고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정결하게 되어 주님의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레3의 반복은 오히려 아름답습니다. ‘내장의 기름도, 간의 꺼풀도, 콩팥과 위의 기름도.주님께서는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보여 드리는 종교적 모습만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생각과 욕망과 습관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화목은 표면적인 평온이 아닙니다. 인간의 깊은 곳과 낮은 곳까지 선과 진리가 정결하게 되고 서로 결합하여, 속과 겉이 함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3의 낯선 내장 규정은 오히려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깊고 가장 낮은 곳까지 정결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SW.5 3 심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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