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해설

 

이 문장은 짧지만,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고요하면서도 가장 깊은 정점 중 하나를 가리킵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이 ‘죽음에서 소생됨’, ‘영적 상태로 들어감’, 그리고 ‘천적 상태로 나아감’이라는 상승의 운동이었다면, AC.74는 그 운동이 도달하는 ‘멈춤의 지점’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멈춤은 정지나 공백이 아니라, 완성과 평안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멈춤은 ‘일곱째 날’이며, ‘주님이 쉬시는 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곧바로 ‘일곱째 날’과 동일시합니다. 이는 시간의 하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까지는 언제나 움직임이 있고, 분별이 있으며, 싸움과 수고가 있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악을 대적하고, 질서를 세워 가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그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에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이루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 주님의 질서가 사람 안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쉬신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일을 멈추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신적 작용이 ‘방해받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영적 인간의 단계에서는 여전히 인간의 이해와 판단, 선택이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단계에서는 주님의 선이 중심이 되고, 인간의 이해는 그 선을 섬기는 자리에 놓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를 ‘주님의 안식’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 사람 안에서 편히 거하실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다시 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은 여섯 날의 창조로 끝나지만, 그 끝은 완결이 아니라 ‘문턱’입니다. 창세기 2 1절로 3절에서 비로소 ‘안식’이 언급됩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동일합니다. 사람이 영적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서 곧바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상태는 여전히 진리 중심의 삶이며, 싸움과 선택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삶은 더 이상 투쟁이 아니라 ‘흐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설명할 때, 그 특징을 길게 나열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일곱째 날’이라는 말 속에 이미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날은 빛과 어둠을 나누는 날이 아니고, 물과 물을 가르는 날도 아니며, 생명을 만들어 내는 날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쉼을 누리는 날’입니다. 천적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이미 주어진 진리 안에서, 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갑니다.

 

이 글은 또한, 사후 삶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깊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단순히 ‘행복한 곳’이나 ‘보상의 장소’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천국을 ‘안식의 상태’로 이해합니다. 그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활동이 수고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에게 있어 선을 행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며, 진리를 따르는 것은 부담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호흡입니다.

 

이렇게 보면, AC.74는 독자에게 조용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여섯째 날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일곱째 날을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섯째 날의 신앙은 여전히 필요하고 귀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2장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님이 인간을 결국 ‘안식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안식은 삶을 포기하는 자리가 아니라, 삶이 가장 온전히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AC.74는 다음에 이어질 모든 설명의 기준점이 됩니다. 이후에 나오는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그리고 동산을 지키고 경작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이 ‘일곱째 날의 사람’, 곧 천적 인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안식에 들어간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주님은 그 안에서 어떻게 거하시는가, 그리고 그 상태가 어떻게 유지되는가가 이제 펼쳐질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흐름에서 AC.74는 매우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수고의 신앙에서 안식의 신앙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 있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AC.75,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의 내적 구조, 초목과 채소'(5-6절)

AC.75 그의 지식과 그의 이성(knowledge and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난 초목과 채소(the shrub and the herb)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

bygrace.kr

 

AC.73, 창2:1-17 개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1절)

창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AC.73

 

사람은 죽어 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되고, 그다음에는 그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 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1)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온 모든 논의를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AC.72까지가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가’를 예고하는 문턱이었다면, AC.73은 이제 그 영원한 삶 안에서도 ‘삶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깊어지고 변화한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삶을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도 분명한 단계와 질서, 그리고 성장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죽어 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된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죽어 있음’은 무엇보다도 ‘영적 무감각과 분리의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이 땅에 살아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죽어 있을 수 있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영적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사후의 변화이면서 동시에, 거듭남의 보편적 구조를 함께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영적 인간이 된 뒤에, 그다음 단계로 ‘천적 인간’이 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분입니다. 많은 신학적 전통에서는 영적 상태 자체를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영적인 상태는 ‘중간 단계’입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신앙의 질서 안에 들어선 상태는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준비된 상태입니다.

 

천적인 상태란, 진리를 ‘아는 상태’를 넘어, 선을 ‘사는 상태’입니다. 영적 인간이 주로 이해와 분별의 차원에 서 있다면, 천적 인간은 의지와 사랑의 차원에 서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상태에서는 진리가 앞서고 선이 그 뒤를 따르지만, 천적인 상태에서는 선이 중심이 되고 진리가 그 안에 자연스럽게 담깁니다. 이 전환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 이동하는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사후에 자동으로 주어지는 변화’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질서와 순서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영적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천적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를 통해 먼저 길이 열리고, 그다음에야 사랑이 그 길을 따라 깊어집니다. 이는 창1에서 빛이 먼저 창조되고, 그다음에 생명이 질서 잡히는 구조와 정확히 상응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2:1을 다루면서, 그 동일한 구조가 사후 삶과 거듭남의 내적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AC.73이 단지 일반론을 말하는 문장이 아니라, ‘지금 해설하고 있는 본문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선언입니다. 창2:1에서 말하는 ‘다 이루어졌다’는 상태는, 단순히 영적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다음 단계인 천적 상태로 들어갈 준비가 갖추어졌음을 포함합니다. 즉, 창2는 영적 인간을 넘어,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하는 장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과 창2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1장은 주로 영적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질서를 다루고, 2장은 그 영적 상태 위에서 ‘천적 삶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다룹니다. AC.73은 바로 이 전환점을 독자에게 명확히 짚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부터 읽게 될 내용은 더 이상 단순한 분별과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글은 또한, 사후 삶에 대한 오해를 조용히 바로잡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곧바로 완성된 상태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후 삶 역시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며, 그 과정은 이 땅에서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영적 삶을 얼마나 성실히 살았는가에 따라, 천적 상태로 들어가는 깊이와 속도도 달라집니다. 사후 세계는 보상과 처벌의 무대라기보다, ‘이미 형성된 삶이 계속 펼쳐지는 자리’입니다.

 

결국 AC.73은 아주 짧은 문장 안에서, 창조–거듭남–사후 삶이라는 세 층위를 하나로 겹쳐 놓습니다. 죽어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이 질서는, 태고교회의 구조이자, 개인의 거듭남의 구조이며, 사후 삶의 구조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서를 지금부터 창2를 통해 차분히, 그러나 매우 구체적으로 풀어 가려 합니다.

 

 

 

AC.74, 창2:1-17 개요, '일곱째 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2-3절)

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

bygrace.kr

 

AC.72, 창2, '이런 방식을 이 장 끝에서부터 적용'

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어느 정도 불순한 식사 초대에도 번번이 응하셨지요... 왜 그러셨나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 저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초대가 드물지만 좀 있어 그때마다 고민이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식사 초대에 응하신 장면들은 복음서 곳곳에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7장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고, 11장과 14장에서도 또 다른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에 앉으십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시험하려는 마음, 체면을 세우려는 마음, 혹은 자기 의를 확인하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지요. 그런데도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로 모아집니다. ‘그 자리에 있는 영혼들 때문’입니다. 주님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보다, 그 자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 자체를 ‘드러내는 자리’, 곧 숨겨진 내면이 빛 가운데 드러나도록 하는 장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실제로 그 식사 자리들은 대부분 책망과 계시의 자리로 바뀝니다. 외식, 교만, 자기 의, 자비 없음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다시 말해, 주님은 그들의 식탁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그 식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상대의 불순함에 끌려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불순함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 혹은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위해 들어가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런 외적 사교 자리 자체를 거의 즐기지 않았고, 특히 영적 진리에 반하는 분위기의 자리에는 스스로를 많이 제한하는 편이었습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말년에 갈수록 더욱 조용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고, 필요 이상의 교류를 줄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인플럭스(influx)’를 따라 반응하려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경우에는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물러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겉모습이나 상황’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수용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처럼 공개적으로 논쟁의 자리로 들어가 상대를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중하게 ‘들어갈 자리’와 ‘물러설 자리’를 분별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목사님의 경우로 돌아오면, 핵심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 자체가 아니라, ‘그 자리에 가는 것이 주님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입니다. 만약 그 자리가 단순히 체면을 세우기 위한 자리이고, 목사님을 ‘장식’처럼 이용하려는 분위기이며, 거기서 어떤 진리의 나눔이나 선한 접촉도 이루어질 여지가 없다면, 스베덴보리적인 분별로는 조용히 거절하는 것도 충분히 정당합니다. 반대로, 비록 동기가 섞여 있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눌 가능성이 있고, 혹은 목사님의 참석 자체가 어떤 선한 영향,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상태’로 전해지는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도 들어가셨던 그 원리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기준은 이것 하나로 정리됩니다. ‘이 자리가 나를 소모시키는 자리인가, 아니면 주님이 나를 통해 무언가 하실 수 있는 자리인가.’ 전자는 피하는 것이 지혜이고, 후자는 겸손히 들어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일반 원칙으로 딱 잘라 정해지지 않고, 그때그때 ‘퍼셉션(perception)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에 걸림을 느끼고 계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그 걸림이 ‘자기 보호에서 오는 불편함’인지, 아니면 ‘들어가면 안 된다는 내적 경고’인지를 조용히 분별해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일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