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Word)에 대해 알고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가 가급적 인용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태도가 건강한 건가요?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신학을 실천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핵심을 건드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목사님의 태도에는 ‘장점과 위험이 동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실제 태도를 기준으로 하나씩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의 이런 ‘배제 중심 태도’는 스베덴보리는 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는 충분히 됩니다. ‘참 말씀(The Word in the proper sense)이 무엇인지, 어디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알고 난 뒤에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중심으로 영이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 자신은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했습니다. 첫째, 참된 말씀, 곧 창, 출, 시편 일부, 복음서, 계시록에 집중하며, 그 내적 의미를 계시, 둘째, 성경 전체, 곧 바울 서신을 포함해 ‘기독교 세계가 사용하는 모든 성경’을 존중하며, 목회적 차원에서 활용. 그는 AC.10325, TCR.226 등에서 ‘바울 서신은 말씀의 ‘inner sense(속뜻, arcana)를 가진 책은 아니지만,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데 주님의 섭리로 주어진 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바울 서신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할 때도 매우 조심스럽게 했다

 

예를 들어, ‘오직 믿음(faith alone), 즉 ‘의롭다 함을 믿는 것만으로’라는 표현이 오해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바울 서신 전체를 폐기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믿음-사랑의 결합’을 바울도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문제는 교회가 그것을 잘못 해석해 버린 것이다.” 즉, 바울 자체 문제라기보다 ‘후대 교회의 해석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의 ‘목회적 기능’을 인정했다

 

그는 이런 관찰을 합니다. DP.234 등에서 ‘기독교 교회는 오랜 세월, 바울 서신을 통해 기본 윤리, 공동체 질서, 교리 체계를 유지해 왔다. 이것 또한 주님의 섭리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신학을 따른다고 해서 바울을 적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참된 말씀’의 용도는 ‘영적 의미를 위해서’이다

 

지금 느끼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단계입니다. 내적 의미가 보이기 시작하면, 다른 텍스트가 모두 ‘빛을 잃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의 빛만 붙잡고 목회를 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 이유는, AC.1408, AC.9025 등에서 밝히기를, ‘사람들은 외적 진리인 성경의 문자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내적 진리를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베덴보리의 내적 의미는 ‘성경 전체의 문자적 세계 안에 심어져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문자적 성경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영적 의미의 기반을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 시대 설교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스베덴보리가 사적으로 대화한 목회자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는 이렇게 권했습니다. 첫째, ‘사람들에게는 문자적 말씀을 통해 접근하라’ 내적 의미를 설교자가 ‘직접적으로’ 완전히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설교자 자신은 항상 그 내적 의미 안에서 설교를 준비하라’ 그러면 설교의 어조, 초점, 균형이 자연스럽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셋째, ‘바울 서신도 영적 원리로 재해석해 설교에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은 진리의 빛을 받는 것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은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말이지요.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는 ‘배제가 아니라 재해석을 원한 것’입니다.

 

목사님의 현재 모습은?

 

먼저, 좋은 면(강점)입니다. 내적 의미를 붙잡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이 있으시고, ‘참된 말씀’ 중심의 신학적 정렬이 매우 정확하시며, 설교의 중심을 주님(여호와 예수)으로 세우는 방향성이 강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귀하고 건강한 모습이요, 과정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면도 존재하는데요, 예를 들면, ‘교인들의 기반인 문자적 성경을 충분히 존중하지 못할 위험’이 있고, ‘내적 의미를 나누기 전에 필요한 외적 질서가 무너질 위험’도 있으며, ‘바울 서신 등 교회 전통의 큰 기둥을 한 번에 없애는 효과’, ‘교회 분열과 오해, 배척을 불러오기 쉬움’ 등의 불필요한 위험 요소가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1832에서 이런 급진적 변화를 ‘사람들의 상태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심지어 진리도 해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며, 듣는 자들의 역량에 맞춰 대부분 쉬운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하면 이렇게 정리됨

 

1단계, 개인적으로는 참 말씀에 집중하라

 

지금 목사님의 상태는 이 단계에 매우 잘 맞습니다.

 

2단계, 설교에서는 ‘문자적 말씀’과 ‘내적 원리’를 혼합하라

 

문자적 말씀이 ‘뿌리와 줄기’라면, 내적 의미는 ‘열매와 향기’입니다. 뿌리와 줄기만 있어도 안 되고, 뿌리와 줄기 없이 열매와 향기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3단계, 바울 서신도, 복음서나 시편 등 ‘말씀’의 빛을 비추어 ‘정화된 의미’만 사용하라

 

사용하되, 내적 의미의 원리로 걸러서 사용하면, 오히려 더 큰 힘을 얻습니다.

 

조언

 

지금처럼 ‘참 말씀 중심’으로 가시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비롯, ‘말씀’ 아닌 다른 성경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스베덴보리는 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교인들을 인도하는 데 이 성경들은 반드시 필요하고, 문자적 성경 전체가 사실 주님의 섭리로 교회에 주어진 것이며, 그 문자적 글도 결국은 ‘내적 의미의 문을 열어주는 외피’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식 ‘건강한 길’은 문자적 말씀을 존중하면서 내적 의미의 원리로 해석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목사님이 목회자로서 가장 안전하고, 교인들을 영적으로 가장 깊고 온전하게 인도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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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리고 아주 적은(few) 수가 여섯 번째에 이르고, 일곱 번째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scarcely).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e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해설

 

AC.13은 창세기 1장의 여섯 단계(거듭남의 여섯 상태)와 일곱째 날(평화의 상태)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요약을 마무리하면서, 거듭남의 현실적 양상을 매우 솔직하게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그는 “거듭남의 여정을 밟는다고 해서 모두가 완성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대다수의 인간이 영적 여정의 초기에 머물거나, 혹은 중간 단계까지만 도달하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첫 번째 상태(무지, 혼돈 속에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기 시작하는 단계)에 머무는 이들이 가장 많으며, 이는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단순한 종교적 인식이나 습관적 신앙생활에 머물러 깊은 영적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두 번째 상태(자기 고유한 것과 주님의 것이 분별되기 시작하는 단계)에 이르는 이들도 있지만, 이 단계에서 요구되는 내적 시련과 자기부인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멈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상태—즉 회개, 사랑과 신앙의 점화, 그리고 신앙에서 말하고 선에서 행하기 시작하는 단계—에 이르는 이들은 이미 영적으로 상당한 진전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 수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이 단계들은 모두 주님의 빛이 속 사람 안에서 점차 강해지며, 선과 진리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귀중한 시기이지만, 사람이 자기 고유의 사랑과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면 이 단계에서 더 앞을 보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드물다”고 한 이유는, 이 단계가 단순한 경건이나 지적 신앙이 아니라 ‘진정한 영적 전투’가 일어나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전투는 주님의 사랑과 자연적 욕망이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과정이며, 누구나 이 전쟁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상태—안식과 평화, 즉 주님과의 합일을 경험하는 단계—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 고유의 사랑을 완전히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사는 삶에 도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말은 절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눈을 열어 거듭남이 단순한 종교적 행위나 감정적 경험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안에서 질서 있게 세우시는 하나의 길이며 과정’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주님의 긍휼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합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완성 상태에 이르지 못하지만, 주님은 각 사람이 도달한 단계마다 거기에 맞는 빛과 선을 주시며, 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천국적 삶을 열어 주십니다. 결국 이 글은 영적 삶의 현실적 단계성과 인간의 연약함, 그리고 그 속에서도 변함없이 사람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함께 드러내며,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겸손과 진지함, 그리고 주님의 인도에 대한 신뢰를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AC.14, 창1, ''주님'이라는 호칭' (AC.6-15)

AC.14 이어지는 글 가운데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 의미합니다. 그분은 앞뒤 무슨 다른 이름을 덧붙이는 거 없이 오직 ‘주님’으로만 일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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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창1, '여섯 번째 상태' (AC.6-15)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상태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일컬어 ‘생물’(living soul)과 ‘가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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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상태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일컬어 ‘생물’(living soul)과 ‘가축’(beast)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신앙과 사랑 둘 다를 가지고 바로 행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이 되며, 이런 그를 일컬어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 지식과 체어리티의 행위들로 말미암아 기쁘게 유지되는데, 그래서 이런 것들을 가리켜 그의 ‘먹을거리’(food)라고 합니다. 반면,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말미암아 기쁘게 유지되는데, 그래서 바로 이 지점이 두 생명 간 싸움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이 싸움은 그의 안에서 사랑이 주(, the dominion)가 되며, 그가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4-31)

 

 

해설

 

AC.12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는데, 이는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짐승과 사람의 창조)에 대응되는, 영적 변화의 절정이자 다음 단계인 ‘안식’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단계는 “신앙에서, 그리고 그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상태”인데, 이는 이전 단계들에서 준비된 모든 내적 작용이 실제 삶의 행동과 말 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시점입니다. 즉, 진리를 아는 것(지식 단계) → 진리를 사랑하는 것(내적 조명 단계) → 진리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실천 단계)의 완전한 연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 안에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물(living soul)(1:24)과 “짐승(beast)(1:24)이라고 불리는데, ‘짐승’은 체어리티와 선한 애정에 속한 감정들, 즉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선한 마음의 역동성을 뜻하고, ‘생물’은 이러한 선한 애정이 진리와 결합하여 참된 영적 생명력을 가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선과 진리가 단순한 외적 행위나 지식의 차원을 넘어 생명의 결합 속에서 하나가 된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을 “영적 인간(spiritual man)이라 부르며, 창세기 표현을 따라 그를 “형상(image)(1:26)이라고 합니다. 이는 주님의 진리가 그의 삶 전체의 질서를 이루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때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서 기쁨과 유지력을 얻는데, 이것들을 “먹을거리(food)(1:30)라고 합니다. 즉, 진리와 선은 이제 단순한 의무나 과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먹이는 실제 양식이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자연적 생명은 여전히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에서 즐거움과 유지력을 얻습니다. 이 두 차원의 즐거움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싸움(combat)이 일어납니다. 이는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영적 전투(temptation)를 뜻하며, 참된 영적 싸움은 바로 이 여섯 번째 상태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싸움은 주님으로부터 온 사랑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때에만, 자연적 욕망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 전투는 사랑이 주도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며, 주님이 주시는 선이 자연적 욕망들보다 우위에 서고, 사람의 중심이 자기 사랑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옮겨가면, 그는 마침내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됩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받아 살며, 신앙이 사랑을 돕는 역할로 완전히 흡수된 상태, 즉 선과 진리가 완전히 일치하여 주님의 뜻이 그의 삶 전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완성 직전 단계로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실질적으로 통일되며, 선과 진리가 생명을 가지고 작용하는 단계이고, 주님이 인간 안에서 진정한 ‘형상’을 이루시는 가장 깊은 영적 성취의 시점입니다.

 

 

 

AC.13, 창1, '오늘날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6-15)

AC.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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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창1, '다섯 번째 상태' (AC.6-15)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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