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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3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고, 아버지만을 인정하며, 그 신념을 스스로 굳힌 자들은 천국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만이 예배받으시는 천국으로부터 어떠한 유입(influx)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점차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도 참된 것을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마침내는 벙어리와 같이 되거나, 어리석은 말을 하며, 관절에 힘이 없는 사람처럼 팔을 축 늘어뜨리고 흔들며 비틀거리게 됩니다. 또한 소키니안들(the Socinians)처럼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분의 인성만을 인정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천국 밖에 있습니다. 그들은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지며, 이렇게 하여 기독교 세계에서 온 다른 이들과 완전히 분리됩니다. 마지막으로, ‘우주의 영혼(the soul of the universe [ens universi])이라 부르는 보이지 않는 신적 존재(an invisible Divine)를 믿는다고 고백하며, 모든 것이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서 주님에 대한 모든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은, 결국 자기들이 아무 하나님도 믿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보이지 않는 신성은 그들에게 있어 자연의 최초 원리와 같은 어떤 속성에 불과하며, 생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주14). 이러한 자들은 이른바 자연 숭배자들 가운데 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 곧 이방인이라 불리는 자들은 이와 다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Those within the church who have denied the Lord and have acknowledged the Father only, and have confirmed themselves in that belief, are not in heaven; and as they are unable to receive any influx from heaven, where the Lord alone is worshiped, they gradually lose the ability to think what is true about any subject whatever; and finally they become as if dumb, or they talk stupidly, and ramble about with their arms dangling and swinging as if weak in the joints. Again, those who, like the Socinians, have denied the Divinity of the Lord and have acknowledged his humanity only, are likewise outside of heaven; they are brought forward a little toward the right and are let down into the deep, and are thus wholly separated from the rest that come from the Christian world. Finally, those who profess to believe in an invisible Divine, which they call the soul of the universe [ens universi], from which all things originated, and who reject all belief in the Lord, find out that they believe in no God; since this invisible Divine is to them a property of nature in her first principles, which cannot be an object of faith and love, because it is not an object of thought.14 Such have their lot among those called nature worshipers. It is otherwise with those born outside the church, who are called the heathen; these will be treated of hereafter.

 

 

14. 어떤 생각으로도 지각될 수 없는 신성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A Divine that cannot be perceived by any idea cannot be received by faith (n. 4733, 5110, 5663, 6982, 6996, 7004, 7211, 9356, 9359, 9972, 10067, 10267).



해설

 

HH.3HH.2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앞 절에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오직 주님 한 분만이 하나님으로 인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원리에 비추어, 주님을 부인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특정 집단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연결이 어떻게 끊어지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천국은 주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주님과의 연결이 차단되면 그 세계와의 유입도 차단됩니다.

 

첫 번째 유형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고 아버지만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하나님을 주님과 분리된 존재로 생각하며, 주님을 단지 중개자나 도덕 교사 정도로 여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런 관념은 천국의 실제 질서와 맞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신성이 주님 안에 있다고 지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천국의 영향, 곧 영적 유입을 받을 통로가 열리지 않습니다. 유입이 끊기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는 ‘참된 것을 생각하는 능력을 점차 잃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 지식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분별하는 내적 힘이 약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마침내 그는 벙어리처럼 되거나, 말이 어눌해지고, 몸이 힘없이 흔들리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 장면이라기보다, 내적 생명력이 빠져나간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빛이 차단되면, 생각과 의지가 힘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소키니안들처럼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만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집단 그 자체보다, ‘주님의 신성을 거부하는 관념’입니다. 주님을 단지 위대한 인간, 도덕 교사, 혹은 예언자로만 인정하고, 그 안에 신성이 거하지 않는다고 보는 관념은 천국의 하나님 이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 세계에서 온 다른 영들과 분리된다고 묘사됩니다.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진다’는 표현 역시 영적 분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빛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더 철학적인 형태입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우주의 영혼’ 혹은 ‘절대적 원리’를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격적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의 최초 원리와 같은 추상적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신앙은 생각의 대상, 곧 인격적 대상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이지 ‘어떤 원리’가 아닙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신 개념은 결국 자연 숭배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자연의 속성으로 환원하면, 신앙은 사라지고 철학적 추상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에서 태어난 이방인들은 이와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출생이나 문화가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고도 주님을 의식적으로 부인한 경우와, 복음을 알 기회가 없었던 경우는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이후에 이방인들이 어떻게 천국에 받아들여지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배타적 선언이 아니라, ‘빛을 알고도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빛을 알지 못한 상태’를 구분하는 설명입니다.

 

결국 HH.3의 중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천국은 주님을 중심으로 한 질서이며, 주님을 부인하는 관념은 그 질서와 연결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추상화하거나, 주님을 단지 인간으로 축소하거나, 신성을 분리된 존재로 상상하는 관념은 영적 유입을 차단합니다. 그리고 유입이 끊기면 진리를 생각하는 힘도 약해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의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경고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단순한 교리 선택이 아니라, 영적 생명과 직접 연결된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심화

 

1.그들은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지며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공간 이동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영계 묘사에서는 ‘공간은 곧 상태(state)’인 점을 감안하면, 이 표현은 지리적 이동이라기보다 ‘영적 상태의 변화와 분리’를 묘사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먼저 큰 원리를 하나 정리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는 우리가 아는 물리적 공간 개념이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가까움’과 ‘멀어짐’은 사랑과 진리의 유사성 혹은 차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빛 쪽으로 간다는 것은 더 큰 진리 인식 상태로 나아감을 뜻하고,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은 더 외적이고 자연적이며, 진리의 빛이 약한 상태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이제 문제의 표현을 보겠습니다.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진다’는 말은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째, ‘오른쪽’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반에서 오른쪽은 보통 ‘진리의 빛’ 혹은 ‘지적 측면’을 상징합니다. 천국에서도 오른편은 진리에 더 밝은 영역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온다’는 것은, 그들의 사상이 어느 정도 진리의 빛에 비추어져 시험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이 가진 ‘주님은 단지 인간일 뿐이다’라는 생각이 천국의 빛 앞에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둘째, ‘조금’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완전히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그 빛에 노출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빛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계에서는 상태가 맞지 않으면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셋째,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진다’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에서 ‘아래’ 혹은 ‘깊음’은 더 외적이고 자연적이며, 때로는 거짓과 자기 확신 속에 머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빛과 조화되지 않는 상태는 자연히 더 낮은, 즉 더 어두운 영역과 결합합니다. 이것은 형벌을 받는 장면이라기보다, ‘유사한 것끼리 모이는’ 영계의 질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 임의적 처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밀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사랑과 신념이 그들을 그에 상응하는 영역으로 이끕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 아래’는 도덕적 서열이라기보다 사랑의 질에 따른 상태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들은 천국의 진리의 빛에 잠시 비추어지지만,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빛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과 상응하는 더 낮은 영적 상태로 분리된다.

 

이 장면은 교리적 정죄의 그림이 아니라, 영계의 ‘상응과 유입의 법칙’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2.생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은 HH.3 전체의 철학적 핵심에 해당합니다. 단순히 ‘추상적 신은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본질 구조’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먼저 하나의 기본 원리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앙은 단순한 동의가 아닙니다. 신앙은 ‘진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향해 마음이 결합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어떤 대상을 향해 의지가 나아가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둘 다 반드시 ‘대상(object)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고, 인식 없는 신앙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제 문제의 표현을 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우주의 영혼(the soul of the universe [ens universi])이라는 개념은 인격적 존재라기보다 철학적 원리입니다. 일종의 ‘자연의 최초 원리’ 혹은 ‘우주적 에너지’ 같은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계 맺을 수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설명을 위한 ‘어떤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논지가 시작됩니다.

 

생각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구체적 인격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함’이라는 추상 개념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선함이 구현된 인격이나 행위를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원리’나 ‘우주의 영혼’은 사고의 구조 속에서 붙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향한 관계적 애정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사랑은 결합을 지향합니다. 사랑은 서로를 향해 나아가고, 응답을 받고, 상호작용을 이루려는 성질입니다. 그런데 비인격적 원리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지를 가지지 않고, 사랑을 돌려보내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개념은 영적 결합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하나님 이해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인격적이십니다. 사랑과 지혜를 가지신 분이며, 관계를 맺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생각될 수 있고, 사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분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단지 ‘자연의 속성’이나 ‘비인격적 절대자’로 이해한다면, 인간의 신앙은 곧 철학적 관념으로 바뀌고 맙니다. 철학은 사유를 자극할 수는 있지만, 사랑을 결합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런 사람들이 결국 ‘아무 하나님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신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연의 질서를 신격화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연은 생각될 수는 있지만, 사랑의 응답을 주는 인격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신은 신앙과 사랑의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생각 속에서 인격적으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사랑과 결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부분은 현대인들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에너지’, ‘우주적 힘’, ‘자연의 법칙’을 말하면서도 인격적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HH.3은 이미 18세기에 그 문제의 영적 구조를 정확히 짚고 있는 셈입니다.

 

 

3.교회 안에 있으면서도’,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

 

HH.3에서 스베덴보리가 굳이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와 ‘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을 구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구원론과 책임 개념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서 ‘교회’는 단순히 제도적 교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란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주님을 알 수 있는 계시의 빛이 주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복음과 말씀을 통해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는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이라는 말은 지리적 소속보다도 ‘계시의 빛 아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구분이 필요한가? 이유는 ‘책임의 정도’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판단됩니다. 더 큰 빛을 받았는데 그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면, 그 거부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 분리’가 됩니다. HH.3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문제 되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고, 이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확정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방향 선택입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 곧 이방인들은 주님에 대한 명확한 계시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경우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들은 빛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빛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이방인들 가운데 선을 사랑하고 양심에 따라 살았던 이들은 사후에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알 기회가 주어지며, 많은 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분은 배타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의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동일한 기준으로 기계적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빛을 알고 거부한 상태와, 아직 빛을 듣지 못한 상태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외적 소속이 아니라 ‘내적 상태’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교회의 내적 본질과 분리된 상태입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 태어났어도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적으로는 교회의 본질에 가까운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에 대한 설명을 뒤로 미루면서, 먼저 ‘빛 아래 있으면서도 그 빛을 거부한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교회 안’은 계시의 빛을 받은 상태를 의미하고, ‘교회 밖’은 그 빛을 아직 받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빛을 받은 후의 거부는 책임이 따르지만, 빛을 받지 못한 무지는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HH.3에서 그 구분을 두는 이유입니다.

 

 

 

HH.2, 1장,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HH.2-6)

1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2무엇보다 먼저,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 다른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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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2

무엇보다 먼저,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 다른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온 천국에서는 오직 주님 한 분만을 천국의 하나님으로 인정합니다. 거기에서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바와 같이, First of all it must be known who the God of heaven is, since upon that all the other things depend. Throughout all heaven no other than the Lord alone is acknowledged as the God of heaven. There it is said, as he himself taught,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10:30, 38);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9-11);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16:13-15) That he is one with the Father; that the Father is in him, and he in the Father; that he who sees him sees the Father; and that everything that is holy goes forth from him (John 10:30, 38; 14:9–11; 16:13–15).

 

저는 이 문제에 관하여 천사들과 자주 대화하였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천국에서는 신성(the Divine)을 셋으로 나눌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성은 하나임을 알고 지각하며, 그 하나가 주님 안에 계심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이 세상에서 온 교회 사람들 가운데 신적 존재(Divine beings)를 셋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가진 자들은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한 신적 존재에서 다른 신적 존재로 옮겨 다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셋을 생각하면서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13) 허용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생각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는 말은 생각이 직접 나오는 거, 즉 말하는 생각(the thought speaking)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신성을 셋으로 나누고, 각각에 대해 서로 다른 관념을 가지며, 그것을 하나로 만들어 주님 안에 집중시키지 않은 자들은 천국에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생각이 서로 쉐어링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셋을 생각하면서 하나라고 말한다면, 그는 즉시 드러나 거절될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진리와 선을 분리하지 않았던 자들, 곧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지 않았던 자들은, 저 세상에서 가르침을 받은 후, 주님이 우주의 하나님이시라는 천국의 관념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삶과 분리한 자들, 곧 참된 신앙의 계명에 따라 살지 않았던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I have often talked with angels on this subject, and they have invariably declared that in heaven they are unable to divide the Divine into three, because they know and perceive that the Divine is One and this One is in the Lord. They also said that those of the church who come from this world having an idea of three Divine beings cannot be admitted into heaven, since their thought wanders from one Divine being to another; and it is not allowable there to think three and say one,13 because in heaven everyone speaks from his thought, since speech there is the immediate product of the thought, or the thought speaking. Consequently, those in this world who have divided the Divine into three, and have adopted a different idea of each, and have not made that idea one and centered it in the Lord, cannot be received into heaven, because in heaven there is a sharing of all thoughts, and therefore if anyone came thinking three and saying one, he would be at once found out and rejected. But let it be known that all those who have not separated what is true from what is good, or faith from love, accept in the other life, when they have been taught, the heavenly idea of the Lord, that he is the God of the universe. It is otherwise with those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ife, that is, who have not lived according to the precepts of true faith.

 

 

13. 그리스도인들은 저세상에서 유일신 사상(唯一神, the idea of the one God)에 대한 조사를 받게 되는데, 일단 그들을 조사해 보면, 그들은 삼신 사상(三神, the idea of three Gods)을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Christians were examined in the other life in regard to their idea of the one God and it was found that they held the idea of three Gods (n. 2329, 5256, 10736, 10738, 10821). 주님의 신적 삼위일체(A Divine trinity in the Lord)가 천국에서는 인정되고 있다. A Divine trinity in the Lord is acknowledged in heaven (n. 14, 15, 1729, 2005, 5256, 9303).



해설

 

HH.2에서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바로 아는 일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을 먼저 장소로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빛의 세계, 죽음 이후의 평안한 처소처럼 상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어떤 공간 이전에 ‘누구와 함께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세계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천국 이해 전체를 결정합니다. 하나님 이해가 흔들리면 천국 이해도 흔들립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의 구조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문제를 제시합니다.

 

그는 단언합니다. 천국에서는 오직 주님 한 분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파적 주장이나 단순한 신학적 선택이 아니라, 천국의 실제 상태에 대한 증언입니다. 천사들은 신성을 셋으로 나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신성을 하나로 ‘알고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 논리적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경험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세 중심이 아니라 한 중심이며, 그 중심이 곧 영화로우신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말씀은 천국에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아버지라는 또 다른 분리된 신적 인격을 따로 상상하지 않습니다. 신성 전체가 주님 안에 있다고 지각합니다.

 

이 지점에서 지상의 일반적 관념과 차이가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사고 속에서는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각각 다른 존재처럼 떠올립니다. 겉으로는 하나를 말하지만, 내적 상상에서는 셋으로 분리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이런 분리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는 생각과 말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는 생각을 숨길 수 있고, 말은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말이 곧 생각의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생각이 곧바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셋을 생각하면서 하나라고 말하는 상태는 즉시 모순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교리 시험에서 탈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 자체가 천국의 질서와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내적 일치의 세계이며, 하나님 이해에서도 동일한 일치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전통적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배제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진리와 선을 분리하지 않은 자들’, 곧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지 않은 자들’은 사후에 가르침을 받아 천국의 관념을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마음으로 선을 사랑했고, 삶 속에서 계명을 따르려 했던 사람은 더 깊은 진리를 기꺼이 수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내적 구조가 이미 하나됨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신앙을 말로만 고백하고 삶에서는 따르지 않았던 사람, 곧 신앙을 삶과 분리한 사람은 천국의 관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합니다. 문제는 지적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분리된 상태이며, 분리는 곧 천국과 어긋나는 구조입니다.

 

결국 HH.2의 중심 메시지는 삼위일체 논쟁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됨’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 한 분이 주님 안에 계시고, 천국은 그 한 분을 중심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인간 역시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 생각과 말, 고백과 삶이 하나가 될 때, 그 질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단지 신학적 선택이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분열된 사고와 분열된 삶 속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주님 안에서 점점 하나로 통합될 것인가.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본 사람으로서, 천국의 질서는 철저히 ‘하나’의 질서라고 증언하며, 그 하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결합된 인격, 곧 주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심화

 

1. 무엇보다 먼저,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 다른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단순히 신학적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묻는 선언입니다. 왜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인가’가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 이해가 곧 현실 이해, 인간 이해, 행복 이해,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비유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나라의 법과 질서는 그 나라의 최고 권위자가 어떤 존재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정의로운 왕인가, 폭군인가, 무관심한 통치자인가에 따라 나라의 분위기와 삶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중심이 누구인가’에 대한 관념은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이 멀리 떨어진 추상적 절대자인지, 세 인격으로 분리된 권위 구조인지, 아니면 사랑과 지혜가 하나로 결합된 인격적 중심인지에 따라 인간의 삶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천국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로 알지 못하면, 천국을 잘못 상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지배적 권력자로 생각하면 천국도 권력의 질서로 상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비인격적 원리로 생각하면 천국도 감정 없는 철학적 상태로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과 진리의 완전한 인격이라면, 천국은 그 사랑과 진리 안에서의 공동체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궁극적 기준으로 삼느냐가 삶의 방향을 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을 궁극적 기준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인정과 명예를 삼습니다.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선택과 판단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이 그 궁극적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따라 인간의 행복 이해와 윤리, 삶의 목표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궁극적 중심을 하나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자아일 수도 있고, 사회적 성공일 수도 있고, 어떤 이념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중심이 주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하나 된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중심이 분열되어 있다면, 삶도 분열됩니다. 하나님을 셋으로 나누어 사고하면, 인간의 내면도 쉽게 분리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한 중심으로 이해하면, 인간의 내적 통합도 가능해집니다.

 

신앙이 없는 분들에게는 ‘천국’이라는 말을 빼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인생의 마지막 기준을 무엇으로 두고 있는지가 당신의 삶 전체를 결정합니다. 그 기준이 흔들리면 모든 판단이 흔들립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이 그 기준이며, 그 하나님이 주님이라는 점을 바로 세우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모든 것이 여기에 달려 있다’는 말은 교리적 위계가 아니라, 존재의 중심 문제입니다. 하나님 이해는 단순한 종교 정보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근원적 질문이라는 뜻입니다.

 

 

아래는 아직 신앙생활을 안 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한 해설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설명하려면, 먼저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신 인생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중심을 하나 두고 살아갑니다. 어떤 이는 성공을 중심에 두고, 어떤 이는 돈을, 어떤 이는 인정과 명예를 중심에 둡니다. 겉으로는 여러 가치를 말하지만, 실제 선택의 순간마다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 곧 그 사람의 하나님입니다. 꼭 종교적 의미의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가장 궁극적인 판단 기준이 그 사람의 신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내 삶의 궁극적 중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중심이 권력이라면, 삶은 경쟁과 비교로 흐릅니다. 만약 중심이 인정이라면, 타인의 시선이 나의 기쁨과 절망을 좌우합니다. 만약 중심이 물질이라면, 소유의 증감이 곧 존재 가치의 증감이 됩니다. 중심이 무엇이냐에 따라 생각이 조직되고, 감정이 반응하고, 인간관계가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모든 것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단지 교리 선택이 아니라, 삶 전체의 구조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떨어진 추상적 존재로 이해하면, 신앙은 철학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심판자로만 이해하면, 종교는 불안과 복종의 체계가 됩니다. 하나님을 세 권위의 분리 구조처럼 상상하면, 인간의 내면도 쉽게 분열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하나 된 인격적 중심이라면, 인간도 그 안에서 통합을 배웁니다. 사랑과 진리가 갈라지지 않고, 믿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으며, 생각과 말이 점점 일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해는 인간 이해와 직결됩니다.

 

신앙이 없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당신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흔들리는 것을 중심에 두면 삶도 함께 흔들립니다. 변하는 것을 중심에 두면 결국 허무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는 변하지 않는 중심, 사랑과 진리가 하나로 결합된 중심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바로 주님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사후 세계에 대한 호기심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중심을 따라 살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중심이 바뀌면 가치 판단이 바뀌고, 가치 판단이 바뀌면 삶의 방향이 바뀌며, 삶의 방향이 바뀌면 존재의 상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서두에서 이 문제를 먼저 세우는 이유는, 중심이 바로 서지 않으면 그 위에 쌓는 모든 설명이 결국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문장은 이렇게 풀 수 있습니다.

 

당신 인생의 최종 기준이 누구인가, 무엇인가가 당신의 생각과 선택과 행복을 모두 결정한다.’

 

그리고 그 기준이 주님일 때, 인간은 분열이 아니라 통합으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경쟁이 아니라 유익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2.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생각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는 말은 생각이 직접 나오는 거, 즉 말하는 생각(the thought speaking)이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Heaven and Hell’ 전체에서 반복되는 영계의 기본 법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겉으로는 단순한 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천국 존재 방식의 핵심 구조’를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먼저 가장 기본 원리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는 ‘내면이 곧 외면으로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지상에서는 생각과 말이 분리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다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예의, 계산, 두려움, 체면 등 여러 이유로 생각을 감추고 말로는 다른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말이 반드시 생각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말이 곧 생각의 직접적 발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은 생각의 직접적 산물’이라고 할 때, 이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 상태를 말합니다. 천사들은 먼저 문장을 조립해서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그대로 소리로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the thought speaking’, 곧 ‘말하는 생각’이라고 표현합니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생각입니다. 둘 사이에 간격이 없습니다.

 

왜 이런 구조가 가능한가? 그 이유는 천국에서는 내적 인간, 즉 속 사람과 외적 인간, 즉 겉 사람이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는 외적 자아와 내적 자아 사이에 간극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존재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진리와 선이 분리되지 않고, 의지와 이해가 조화를 이루며, 사랑과 사고가 일치합니다. 이런 통합 상태에서는 생각이 왜곡 없이 바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HH.2에서 왜 중요한가 하면, ‘셋을 생각하면서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천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논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상에서는 삼위를 각각 다른 신적 존재처럼 상상하면서도,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만약 내면에서 세 존재를 따로 떠올리고 있다면 그것이 즉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셋을 생각하고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그 세계의 질서와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도 있습니다. 천국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세계가 아니라, ‘내적 진실성과 존재의 일치가 완성된 세계’입니다. 생각과 말이 하나라는 것은 도덕적 정직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가 통합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며, 말하는 것을 그대로 사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생각과 말이 분리되는 것은 아직 내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지상의 삶을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하나로 결합되어 가는 과정’으로 봅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이 분리를 점점 줄여 가는 과정입니다. 천국에서는 그 과정이 완성됩니다.

 

따라서 ‘말은 생각이 직접 나오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단순한 언어학적 묘사가 아니라, 천국의 존재론을 설명하는 선언입니다. 천국은 생각과 말이 하나인 세계이며, 그래서 하나님 이해 역시 분열될 수 없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HH.3, 1장, '주님을 부인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

1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3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고, 아버지만을 인정하며, 그 신념을 스스로 굳힌 자들은 천국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만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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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1,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HH.1주께서 제자들 앞에서 ‘세상 끝’(the consummation of the age, 시대의 종말, 완성, 마지막 때), 곧 교회의 마지막 시기에 대하여(주1) 말씀하시면서, 사랑과 신앙에 관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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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HH.1

주께서 제자들 앞에서 세상 끝(the consummation of the age, 시대의 종말, 완성, 마지막 때), 곧 교회의 마지막 시기에 대하여(1) 말씀하시면서, 사랑과 신앙에 관한 그 연속적 상태들을 예언하신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2) The Lord, speaking in the presence of his disciples of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ich is the final period of the church,1 says, near the end of what he foretells about its successive states in respect to love and faith:2

 

 

1. [별도 언급이 없는 한, 이번 판의 모든 참조는 엠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에 관한 것이며, 스베덴보리가 작성한 것이다. References in this edition, unless otherwise noted, are to Emanuel Swedenborg’s Arcana Coelestia and were made by Swedenborg.] 시대의 종말(완성)은 교회의 마지막 때이다.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s the final period of the church (n. 4535, 10622).

 

2. 주께서 마지막 때와 주님의 오심(His coming), 그리고 결과적으로 교회가 어떻게 황폐해져 갈 것과 최후의 심판(the final judgment) 등에 대해 예언하신 내용(24, 25)이 창세기 26장에서 40장까지 각 서문에 설명되어 있다. The Lord’s predictions in Matthew (24 and 25), respect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and His coming, and the consequent successive vastation of the church and the final judgment, are explained in the prefaces to chapters 2640 of Genesis (n. 33533356, 34863489, 36503655, 37513757, 38973901, 40564060, 42294231, 43324335, 44224424, 46354638, 46614664, 48074810, 49544959, 50635071).

 

 

29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4:29-31) Immediately after the tribulation of those days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 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 And then shall appear the sign of the Son of man in heaven; and then shall all the tribes of the earth mourn; and they shall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And he shall send forth his angels with a trumpet and a great sound; and they shall gather together his elect from the four winds, from the end to end of the heavens. (Matt. 24:29–31)

 

이 말씀을 문자적 의미(sense of the letter), 그러니까 기록된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the final judgment)이라 불리는 그 마지막 시기에 이 모든 일이 문자 그대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곧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주의 표적이 하늘에 나타나고, 주께서 천사들과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 가운데 친히 나타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른 곳에 예언된 바와 같이, 눈에 보이는 온 우주가 멸망하고, 그 후에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생겨날 것이라고 여깁니다. 오늘날 교회 안의 대부분 사람들의 견해가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말씀의 각 부분 속에 감추어진 아르카나(arcana)를 알지 못합니다. 말씀의 모든 부분에는 영적이며 천적(天的, heavenly)인 것들을 다루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 속뜻)가 있습니다. 문자적 의미인 겉뜻이 다루는 자연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문장 전체의 의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낱말 하나하나에도(주3) 해당합니다. 말씀은 전적으로 상응(correspondences)(4)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내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 출 속뜻 주석,  10,837개 글)에서 말하고 보여 준 모든 것들로부터 알 수 있으며, 또한 백마(白馬, White Horse, 1758), 곧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흰말에 대한 소책자와 거기 나오는 그 모든 인용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Those who understand these words according to the sense of the letter have no other belief than that during that latest period, which is called the final judgment, all these things are to come to pass just as they are described in the literal sense, that is, that the sun and moon will be darkened and the stars will fall from the sky, that the sign of the Lord will appear in the sky, and he himself will be seen in the clouds, attended by angels with trumpets; and furthermore, as is foretold elsewhere, that the whole visible universe will be destroyed, and afterwards a new heaven with a new earth will come into being. Such is the opinion of most men in the church at the present day. But those who so believe are ignorant of the arcana that lie hidden in every particular of the Word. For in every particular of the Word there is an internal sense which treats of things spiritual and heavenly, not of things natural and worldly, such as are treated of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this is true not only of the meaning of groups of words, it is true of each particular word.3 For the Word is written solely by correspondences,4 to the end that there may be an internal sense in every least particular of it. What that sense is can be seen from all that has been said and shown about it in Arcana Coelestia [published 1749–1756]; also from quotations gathered from that work in the explanation of the White Horse [of the Apocalypse, published 1758] spoken of in Revelation.



3. 말씀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속뜻, 혹은 영적인 뜻이 있다. Both in the wholes and particulars of the Word there is an internal or spiritual sense (n. 1143, 1984, 2135, 2333, 2395, 2495, 4442, 9048, 9063, 9086).

 

4. 말씀은 오직 상응으로만(solely by correspondences)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말씀은 그 안에 개별적이든, 전체적이든 어떤 영적인 의미들을 갖게 된다. The Word is written solely by correspondences, and for this reason each thing and all things in it have a spiritual meaning (n. 1404, 1408, 1409, 1540, 1619, 1659, 1709, 1783, 2900, 9086).

 

 

위에 인용된 구절에서 주께서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하신 말씀은 이러한 내적 의미에 따라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는 사랑에 관한 주님을(5) 뜻하고, 은 신앙에 관한 주님을(6), 별들은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7),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는 신적 진리의 나타남을,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는 진리와 선, 곧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들을(8),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은 말씀 안에서의 주님의 현존과 계시를(9) 뜻합니다. 여기서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10),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11) 뜻합니다.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는 하늘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를(12)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교회의 마지막 때, 곧 사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 결과 신앙도 없는 때에, 주께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여시고, 천국의 아르카나를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음 페이지들에서 밝히려는 아르카나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사후 인간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속한 사람은 천국과 지옥, 그리고 사후의 삶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 안에 제시되고, 묘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태어난 많은 사람들조차 마음속으로 그 세상에 가 보았다가 우리에게 말해 준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며, 믿기를 거부합니다. 특히 세상적 지혜를 많이 가진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부정의 영(spirit of denial)이 지배적입니다. 이러한 부정의 영이 마음이 단순한 자들과 신앙이 단순한 자들까지 감염, 타락시키는 걸 막게 하시려고, 주님은 저를 불러 저로 하여금 천사들과 함께 거하며, 사람과 사람이 말하듯 그들과 대화하는 것을 허락하셨고, 또한 천국과 지옥에 있는 것들을 직접 보는 것을 허락하셨는데, 이런 경험이 지난 십삼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저로 하여금 제가 보고 들은 바를 따라 이것들을 기술하도록 허락하셨는데, 이는 무지가 밝혀지고, 불신이 흩어지기를 바라셔서입니다. 오늘날 허락된 이러한 즉각적 계시는, 이것이 곧 주님의 오심(the coming of the Lord)으로 의미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It is according to that sense that what the Lord says in the passage quoted above respecting his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is to be understood. The “sun” there that is to be darkened signifies the Lord in respect to love;5 the “moon” the Lord in respect to faith;6 “stars”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or of love and faith;7 “the sign of the Son of man in heaven” the manifestation of Divine truth; “the tribes of the earth” that shall mourn, all things relating to truth and good or to faith and love;8 “the coming of the Lord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lory” his presence in the Word, and revelation,9 “clouds” signifying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10 and “glory”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11 “the angels with a trumpet and great voice” signify heaven as a source of Divine truth.12 All this makes clear that these words of the Lord mean that at the end of the church, when there is no longer any love, and consequently no faith, the Lord will open 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and reveal arcana of heaven. The arcana revealed in the following pages relate to heaven and hell, and also to the life of man after death. The man of the church at this date knows scarcely anything about heaven and hell or about his life after death, although all these matters are set forth and described in the Word; and yet many of those born within the church refuse to believe in them, saying in their hearts, “Who has come from that world and told us?” Lest, therefore, such a spirit of denial, which especially prevails with those who have much worldly wisdom, should also infect and corrupt the simple in heart and the simple in faith, it has been granted me to associate with angels and to talk with them as man with man, also to see what is in the heavens and what is in the hells, and this for thirteen years; so now from what I have seen and heard it has been granted me to describe these, in the hope that ignorance may thus be enlightened and unbelief dissipated. Such immediate revelation is granted at this day because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coming of the Lord.

 

 

5. 말씀에서 는 사랑 관점에서 본 주님을 상징하며, 그 결과,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을 상징한다. In the Word the “sun” signifies the Lord in respect to love, and in consequence love to the Lord (n. 1529, 1837, 2441, 2495, 4060, 4696, 7083, 10809).

 

6. 말씀에서 은 신앙 관점에서 본 주님을 상징하며, 그 결과,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을 상징한다. In the Word the “moon” signifies the Lord in respect to faith, and in consequence faith in the Lord (n. 1529, 1530, 2495, 4060, 4696, 7083).

 

7. 말씀에서 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상징한다. In the Word “stars” signify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n. 2495, 2849, 4697).

 

8. 모든 족속들은 세상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 관련 모든 것을 상징한다. Tribes” signify all truths and goods in the complex, thus all things of faith and love (n. 3858, 3926, 4060, 6335).

 

9. 주의 오심은 말씀 속 현존과 계시(His presence in the Word, and revelation)를 상징한다. The coming of the Lord signifies His presence in the Word, and revelation (n. 3900, 4060).

 

10. 말씀에서 구름은 겉 글자에 들어있는 말씀이나 겉뜻(the sense of its letter)을 상징한다. In the Word “clouds” signify the Word in the letter or the sense of its letter (n. 4060, 4391, 5922, 6343, 6752, 8106, 8781, 9430, 10551, 10574).

 

11. 말씀에서 영광은 천국 및 말씀의 속뜻으로서의 신적 진리(Divine truth)를 상징한다. In the Word “glory” signifies Divine truth as it is in heaven and as it is in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n. 4809, 5922, 8267, 8427, 9429, 10574).

 

12. 큰 나팔은 천국 및 천국으로부터 계시된 신적 진리를 상징한다. A “trumpet” or “horn” signifies Divine truth in heaven, and revealed from heaven (n. 8158, 8823, 8915); 소리역시 같은 걸 상징한다. and “voice” has a like signification (n. 6771, 9926).

 

 

해설

 

 HH.1은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이라는 책을 왜, 어떤 문제의식으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쓰는지를 ‘서문 한 장’ 안에 다 압축해 둔 글입니다. 처음 접하는 분들이 가장 먼저 걸려 넘어지는 지점은 보통 이것입니다. ‘24에 나온 말씀이면, 세상 끝날 때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진다는 말 아닌가요? 그러면 실제로 그런 우주적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대부분의 교회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읽는다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방향을 틀어, ‘그렇게 읽는 것은 말씀의 속뜻’(내적 의미)을 모르는 데서 오는 오해’라고 말합니다. 즉, 이 글의 출발점은 ‘문자 그대로의 종말론’을 논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문자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원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핵심 원리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말씀(성경)은 낱말 하나하나까지도 내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 둘째, ‘그 내적 의미는 상응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상응(correspondence)이라는 말이 낯선 분들은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안전합니다. ‘성경의 자연적 표현(해, 달, 별, 구름, 나팔 같은 단어들)은 단지 자연 현상을 말하려고 들어간 게 아니라, 그 자연 현상이 표상하는 영적 현실을 함께 담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세상 이야기처럼 보이는 겉옷 아래에 영적 상태를 말한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우주 과학책’이나 ‘미래 예언의 천문학 보고서’처럼 읽지 않고, ‘인간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계시’로 읽습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24장의 장엄한 종말 언어를 ‘물리적 파괴’로만 읽으면, 성경이 실제로 말하려는 핵심에서 벗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끝’이 무엇인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마지막 시기’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교회’는 단순히 건물이나 교단이 아니라, ‘사람 안에, 공동체 안에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의 질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끝’은 ‘지구의 끝’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답지 않게 되는 끝’입니다. 즉, 사랑이 식고, 그러니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꺼지고, 그 결과로 신앙도 껍데기만 남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을 언제나 붙여 말합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서 살아납니다. 사랑이 죽으면 신앙은 지식이나 주장으로만 남고, 결국 분열과 논쟁과 자기 확증의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 HH.1은 바로 그 상태를 ‘해가 어두워짐, 달이 빛을 내지 않음, 별이 떨어짐’으로 풀어 읽습니다.

 

여기서 상징 해석이 시작됩니다. ‘’는 사랑에 관한 주님을 뜻합니다. ‘’은 신앙에 관한 주님을 뜻합니다. ‘’은 선과 진리의 지식들,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뜻합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해가 밝다’는 것은 사랑이 살아 있고 따뜻하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살아 있으면 사람의 내면이 따뜻해지고, 그 따뜻함 속에서 진리가 ‘’으로 보입니다. 반대로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사랑이 식어 차가워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사람은 진리를 진리 자체로 사랑하기보다, 자기 입장을 지키는 도구로 쓰기 쉽고, 신앙도 살아 있는 신뢰라기보다 ‘말과 주장’으로 남기 쉽습니다. 그러면 ‘’, 즉 신앙의 빛도 희미해집니다. ‘’, 즉 지식들은 더 심각합니다. 별은 ‘하늘의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하는데, 영적으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삶을 인도합니다. 그런데 사랑과 신앙이 약해지면 그 지식이 ‘머리 속 정보’로만 남거나, 왜곡되거나, 아예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이것이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입니다. 그러니 이 문장은 ‘천문학적 재난’이 아니라 ‘영적 내전’에 가깝습니다.

 

그다음 ‘인자의 표적, 징조가 하늘에 보인다’는 구절을 스베덴보리는 ‘신적 진리의 나타남’이라고 풉니다. ‘인자’는 성경에서 ‘진리’의 측면, 곧 ‘말씀의 진리’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래서 ‘인자의 표적’은 ‘진리가 다시 나타나고 드러나는 징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공간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시야’, ‘영적 시각’을 뜻하는 말로도 쓰입니다. 즉 ‘하늘에 보인다’는 것은 ‘영적 차원에서 드러난다’, ‘내적 의미에서 드러난다’와 맞물립니다.

 

또 ‘땅의 모든 지파가 애통한다’는 말은 흔히 ‘세상 사람들이 슬퍼한다’로만 읽히지만, 스베덴보리는 ‘지파’를 ‘신앙과 사랑의 모든 요소들’의 총합으로 봅니다. ‘지파’는 ‘교회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입니다. 사랑에 속한 것, 신앙에 속한 것, 선에 속한 것, 진리에 속한 것들이 다 ‘지파’로 표상됩니다. 그러니 ‘모든 지파가 애통한다’는 것은 ‘교회 안의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슬퍼할 상태가 된다’, 또는 ‘진리와 선이 상실되어 그 결핍이 드러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다시 말해 감정적 장면이 아니라, 상태의 진단입니다.

 

가장 핵심은 ‘구름을 타고 오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주님의 오심’을 ‘말씀 안에서의 주님의 현존과 계시’로 정의합니다. 초심자들이 제일 혼란스러워하는 대목인데, 차근히 풀면 이렇습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입니다. 구름은 빛을 가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빛을 담아 전달하기도 합니다. 문자적 의미는 때로는 거칠고, 역사 이야기 같고, 서로 모순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면 진리를 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문자 속에 ‘영광’이 있습니다. ‘영광’은 내적 의미입니다. 즉, ‘구름 + 영광’은 ‘문자 속에 감춰진 내적 빛’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은 ‘주님이 성경의 문자 속에 임재하시며, 그 문자를 통하여 내적 의미를 계시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이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재림’의 핵심 정의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이 열리는 사건’이 재림입니다.

 

나팔과 큰 소리로 천사들을 보낸다’도 같은 흐름입니다. 나팔은 ‘하늘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진리의 선포’를 뜻합니다. ‘하늘이 증언하는 진리’, ‘더 높은 차원에서 내려오는 분명한 알림’입니다. 그러니 천사들은 ‘하늘의 매개’, ‘하늘의 증언자’ 역할을 합니다. 결국 이 전체 장면은 ‘교회의 마지막 때에, 주님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하늘의 진리를 다시 들리게 하신다’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이런 계시가 필요하다고 하나요?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천국과 지옥’, ‘사후의 삶’에 대해 사실상 무지해졌다고 진단합니다. 더 놀라운 건, 성경 안에 그것들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데도, 교회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조차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신의 대표 문장을 하나 제시합니다. ‘누가 저 세상에서 와서 말해 주었느냐?’ 이건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겠다’는 냉소이기도 하고, ‘현세만이 현실’이라는 실용주의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세상적 지혜(worldly wisdom)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태도가 강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세상적 지혜’는 학문 자체를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보이는 것만을 현실로 인정하는 사고’로 굳어졌을 때의 위험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위험이 ‘단순한 마음’, ‘단순한 신앙’을 오염시켜 버릴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독특한 위치를 밝힙니다. ‘저는 천사들과 교제했고, 천국과 지옥을 보았고, 이것이 십삼 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래서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합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이게 자기주장 아닌가?’라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반응을 예상하듯, 이 체험을 ‘자기 명성’의 재료로 내놓는 대신, ‘무지를 밝히고 불신을 흩기 위한 허락’이라고 규정합니다. 즉, 개인의 특별함을 강조하는 장치가 아니라, 교회의 시대적 상태, 즉 사후를 부정하는 분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결정적입니다. ‘이러한 즉각적 계시가 오늘날 허락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의 오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곧 ‘이 시대에 허락된 즉각적 계시, 곧 내적 의미의 개방’입니다.

 

이 글을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해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성경의 종말 예언은 우주 파괴의 예고장이 아니라, 교회의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영적 상태를 말하며, 주님의 재림은 물리적 강림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려 하늘의 진리가 다시 계시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저서, ‘천국과 지옥’을 바로 그 ‘계시의 내용’으로 제시합니다. 이 책이 단순한 교리서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 결과로 ‘천국, 지옥, 사후 삶’을 밝혀 주려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성경은 겉으로는 역사와 비유와 예언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옷 아래에 인간의 내면과 천국의 질서를 말하는 살아 있는 뜻이 숨겨져 있다. 구름은 옷감이고, 영광은 그 옷 속에서 비치는 빛이다. 재림은 하늘 어딘가에서 새로운 장면이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의 안쪽이 열려 빛이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하늘의 먹구름도 비록 이쪽은 흐리지만, 저쪽은 햇빛으로 빛납니다. 이편은 보이는 쪽으로 말씀의 겉뜻이라면, 저편은 비록 우리 눈엔 안 보이지만, 주님의 신적 진리로 빛나는 속뜻입니다.  

 

 

심화

 

1.그러나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말씀의 각 부분 속에 감추어진 아르카나(arcana)를 알지 못합니다. 말씀의 모든 부분에는 영적이며 천적(天的, heavenly)인 것들을 다루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 속뜻)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어 사용에서 ‘아르카나(arcana)와 ‘내적 의미(internal sense)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정확히 같은 말은 아닙니다. ‘내적 의미’는 구조이고, ‘아르카나’는 그 구조 안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은 두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겉은 문자적 의미, 즉 겉뜻이고, 속은 내적 의미, 즉 속뜻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자연적 표현, 역사적 이야기, 비유, 예언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다루는 더 깊은 층위가 있습니다. 이것이 ‘내적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는 말씀 안에 항상 존재하는 구조적 차원, 즉 ‘속뜻의 차원’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르카나’는 무엇인가요? ‘arcana’는 라틴어로 ‘감추어진 것들’, ‘비밀들’, ‘숨겨진 진리들’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쓴 ‘Arcana Coelestia’라는 책 제목 자체가 ‘천적(하늘에 속한) 비밀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밀’은 신비주의적 암호가 아니라, 문자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영적 진리들을 뜻합니다.

 

이제 둘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말씀에는 ‘내적 의미’라는 층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적 의미’ 안에 담겨 있는 구체적인 영적, 천적 진리들이 바로 ‘아르카나’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는 차원이고, ‘아르카나’는 그 차원 안의 내용입니다. 집에 비유하면, ‘내적 의미’는 집 안쪽 공간이고, ‘아르카나’는 그 안에 놓여 있는 보물들입니다.

 

HH.1에서 스베덴보리가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말씀의 각 부분 속에 감추어진 아르카나를 모른다’고 할 때, 그는 이런 뜻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문자적 의미만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 있는 영적 상태, 천국의 질서, 사랑과 신앙의 관계, 교회의 쇠퇴 과정 같은 깊은 진리들, 곧 ‘아르카나’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드러나는 통로는 어디인가 하면, 바로 ‘내적 의미’입니다. 내적 의미가 열릴 때 아르카나가 보입니다.

 

또 한 가지 구분이 도움이 됩니다. ‘내적 의미’는 말씀 전체에 항상 존재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본질적 성격입니다. 그러나 ‘아르카나’는 특정한 진리 내용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더 유동적으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해는 사랑에 관한 주님을 뜻한다’는 해석, ‘구름은 문자적 의미를 뜻한다’는 해석, ‘주님의 오심은 말씀 안에서의 현존과 계시를 뜻한다’는 해석, 이런 것들이 각각 하나의 ‘아르카나’입니다. 이 모든 아르카나가 모여서 말씀의 내적 의미를 구성합니다.

 

조금 더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말씀은 상응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문자와 영적 실재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습니다. 이 상응 체계 전체가 ‘내적 의미’라는 구조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상응을 통하여 드러나는 영적, 천적 진리의 구체적 내용이 ‘아르카나’입니다. 그러므로 아르카나는 내적 의미의 산물이며, 내적 의미는 아르카나가 자리하는 틀입니다.

 

목사님 번역 사역과 연결해서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창세기 한 절 한 절을 번역하시면서 ‘아브라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삭은 무엇을 뜻하는가, 애굽은 무엇을 뜻하는가’라고 풀어 가실 때, 그 작업 전체가 ‘내적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하나 밝혀지는 영적 진리들, 곧 사랑과 신앙의 질서, 거듭남의 단계, 교회의 상태 변화 같은 구체적 통찰들이 바로 ‘아르카나’입니다.

 

따라서 두 용어는 겹치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내적 의미’는 말씀 안에 항상 있는 구조적 차원이고, ‘아르카나’는 그 차원 안에 담긴 감추어진 영적 진리들입니다. 이렇게 구분해 두시면, HH.1에서 스베덴보리가 왜 ‘아르카나’와 ‘내적 의미’를 나란히 말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2.말씀은 전적으로 상응(correspondences)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내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말씀은 전적으로 상응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문장은 스베덴보리를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자명하게 들리지만, 반감을 가진 사람에게는 곧바로 ‘자의적 해석 체계 아닌가?’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설득의 출발점은 ‘스베덴보리가 맞다’고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어떤 책인가를 차분히 짚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 성경은 처음부터 ‘상징적 언어’를 사용해 왔다는 점은 스베덴보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23)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읽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양을 치는 직업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보호와 인도라는 관계를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15)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식물학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미 교회는 오래전부터 이런 표현들을 ‘비유’나 ‘영적 의미’로 읽어 왔습니다. 즉, 성경 안에 자연적 표현을 통해 영적 관계를 말하는 방식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상응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입니다.

 

둘째, 성경의 예언서나 묵시문학을 생각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마태복음 24장의 ‘해가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진다’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천문학적 사건으로만 읽는 해석은 역사적으로도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많은 주류 신학자들조차 이것을 ‘상징적 종말 언어’로 봅니다. 이사야, 에스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짐승, 뿔, 용, 큰 음녀 같은 표현들도 문자 그대로의 동물학적 묘사로 읽지 않습니다. 이미 기독교 전통 안에는 ‘자연적 이미지가 영적 현실을 가리킨다’는 인식이 널리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원리를 체계화한 것일 뿐, 전혀 새로운 발명을 한 것이 아닙니다.

 

셋째, 성경의 일관성을 생각해 보면 이 문장은 오히려 합리적입니다. 성경은 수천 년에 걸쳐 다양한 저자들이 서로 다른 시대, 다른 문화 속에서 기록한 문서들의 집합입니다. 그런데도 ‘구원’, ‘언약’, ‘’, ‘’, ‘’, ‘’, ‘광야’, ‘성전’ 같은 이미지들이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여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반복은 단순한 우연이나 문학적 취향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조직적입니다. 마치 하나의 공통된 상징 체계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성경이 단순한 역사 기록이나 도덕 교훈집이라면, 이런 상징적 일관성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물과 영적 실재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다고 본다면, 그 반복은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넷째, ‘가장 작은 부분까지 내적 의미를 지닌다’는 표현도 과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문학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 시나 고전 문학 작품을 분석할 때, 단어 선택 하나, 색채 하나, 숫자 하나가 작품 전체의 구조와 연결된다고 보는 해석 전통이 있습니다. 하물며 성경이 ‘계시’라는 이름을 가진 책이라면, 단어 하나도 우연히 들어갔다고 보지 않는 태도는 오히려 경전적 존중의 한 형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존중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모든 단어가 상응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성경의 표현이 단순한 표면 정보 전달을 넘어선다’는 점은 쉽게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다섯째, 경험적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읽을 때와, 상징적, 영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전혀 다른 깊이의 이해가 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 이야기를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 이동사로만 읽을 때와, 그것을 ‘인간의 영적 해방 과정’으로 읽을 때, 독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달라집니다. 상응이라는 틀은 이런 ‘영적 독서’가 자의적 공상이 아니라 일정한 체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문장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한 가지는 남습니다. 성경이 단순한 자연적 사실 전달서라면, 마태복음 24장이나 요한계시록은 거의 이해 불가능한 텍스트가 됩니다. 그러나 자연적 이미지가 영적 상태를 말한다고 가정하면, 그 난해함이 상당 부분 풀립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상응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명제는 최소한 ‘성경을 더 일관되고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하나의 설명 가설’로는 충분히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성경이 상징과 비유, 예언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며, 그 표현들이 단순한 문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공헌은 그 직관을 ‘상응’이라는 개념으로 조직화하고, 그 결과 ‘말씀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영적 의미가 스며 있다’고 일관되게 주장한 데 있습니다. 이 명제는 그의 권위를 먼저 인정해야만 가능한 억지가 아니라, 성경 자체의 문학적, 신학적 성격을 깊이 생각해 볼 때 충분히 논의 가능한 주장입니다.



3. 오늘날 교회에 속한 사람은 천국과 지옥, 그리고 사후의 삶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 안에 제시되고, 묘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 지옥, 사후 삶이 말씀 안에 다 제시되어 있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 개신교인의 질문은 정당합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시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 본문 자체를 차분히 보여 주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먼저, ‘천국과 사후 의식의 지속성’에 대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최소한 ‘죽은 뒤에도 의식이 지속된다’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또 변화산 사건(17)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은, 이미 죽은 인물들이 여전히 인격적 존재로 나타난다는 서술입니다. 바울도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한다(고후5:8),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1:23)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즉각적이고 인격적인 상태’를 전제합니다. 단순히 ‘무의식적 잠’이라면 이런 표현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지옥과 심판 이후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16:19–31)는 매우 구체적입니다. 죽은 후 부자는 고통 가운데 있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습니다. 양쪽 모두 의식과 기억, 그리고 대화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라 해도, 예수님은 완전히 허구적이고 존재하지 않는 구조를 빌려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적어도 ‘죽은 후의 의식적 상태’라는 전제를 공유하지 않았다면 이 비유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또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요한계시록 20–22장은 ‘생명책’, ‘불못’,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합니다. 요5:29에서도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절들은 사후 상태, 심판,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분명히 전제합니다.

 

개신교인들이 “그건 상징적 표현 아니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많은 부분이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상징이 있다고 해서 실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표현은 상징이지만,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징은 ‘방식’이지 ‘허구’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묘사가 상징적일 수는 있지만, 그 배후의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신약 전체가 ‘이 세상만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긴장 위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3, 4장은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난해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본문들은 단순히 ‘죽은 후 무의식 상태’로 정리하기에는 너무 풍부합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교회 사람들은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라고까지 말했을까요? 이것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그 실질적 성격, 곧 천국이 무엇이며, 지옥이 무엇이며, 사후의 삶이 어떤 질서로 진행되는지 등에 대해 매우 막연하고 추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비판에 가깝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죽으면 천당 간다’는 말은 하지만, 천국이 어떤 상태인지, 사랑과 신앙의 질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왜 어떤 이는 지옥에 이르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설명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막연함’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개신교인에게 답할 때는 이렇게 정리하시면 안전합니다.

 

천국과 지옥, 사후의 삶에 대한 기본 전제는 성경 전체에 분명히 있다. 다만 그 구체적 성격과 구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 전통이 존재한다. 스베덴보리는 그 구체적 구조를 더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성경의 권위를 먼저 세우면서도 스베덴보리를 ‘성경을 대신하는 인물’로 오해받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핵심은 이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죽음 이후의 의식적 존재’, ‘천국과 지옥의 구분’, ‘최종적 심판과 상태의 지속’을 말합니다. 다만 그 구체적 모습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는 해석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해석을 상응과 내적 의미의 틀 안에서 풀어냈고, 그 결과가 그의 저서, ‘Heaven and Hell’입니다. 상대가 스베덴보리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성경이 사후 세계를 실재로 전제한다는 점 자체는 함께 확인할 수 있습니다.

 

 

 

HH.2, 1장,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HH.2-6)

1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2무엇보다 먼저,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 다른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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