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합니다. In the present passage it denotes accusation.
해설
AC.375는 바로 앞 AC.373에서 ‘피들이부르짖는것’이 ‘죄책의고발’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보충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부르짖는소리’라는 표현 자체가 언제나 죄책이나 고발을 뜻한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부르짖는소리’와 ‘부르짖음의소리’는 매우 넓게 사용되며, 소음이나 소동이나 혼란이 있을 때뿐 아니라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사용된다고 먼저 밝힙니다. 그런 다음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한다’고 범위를 한정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과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를 보여 줍니다. 어떤 단어나 표현에 하나의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놓인 문맥과 그것이 결합하고 있는 다른 표상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출32:17-18을 인용하는 이유는 ‘소리’가 반드시 한 종류의 영적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산에서 내려올 때 진영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가 있었고, 여호수아는 그것을 싸우는 소리로 생각했지만 모세는 승리하거나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노래하는소리’라고 말합니다. 즉 ‘소리’는 어떤 집단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한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소리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무엇 때문에 그 소리가 일어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습1:9-10과 렘48:3에서는 소리가 재앙과 파괴와 혼란에 연결됩니다. 심판과 황폐의 상태가 ‘부르짖는소리’로 표현됩니다. 반면 사65:19에서는 정반대의 문맥이 나타납니다. 새롭게 된 예루살렘에서는 ‘우는소리와부르짖는소리가그가운데에서다시는들리지아니할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소리와 부르짖음은 어떤 내적 상태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결정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네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독립적인 새로운 교리를 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부르짖음’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여러 상태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10의 ‘네아우의핏소리가땅에서부터내게호소하느니라’에서 ‘부르짖는소리’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하는 이유도 단어 하나만 떼어 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 것은 바로 아벨의 ‘피들’입니다. 앞의 AC.374에서 보았듯이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 특히 미움과 그 미움에서 솟아나는 온갖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내고 고발한다는 뜻이 됩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부인했지만, 그가 소멸시킨 아벨의 피들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행해진 악의 영적 성질 자체가 그 죄책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고발’ 역시 주님께서 어떤 외부의 증언을 들어야 비로소 가인의 죄를 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가 이미 드러나 있으며,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그 자체의 결과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들의부르짖음’은 주님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고발이라기보다, 가인이 부인하고 감추려 한 악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말로 ‘알지못합니다’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사랑하고 의도하며 행한 것은 그의 영적 상태 안에 남아 있습니다.
AC.375는 짧지만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중요한 점도 가르쳐 줍니다. ‘소리= 고발’, ‘부르짖음= 죄책’이라고 사전식으로 외워서는 안 됩니다. 같은 표현도 문맥에 따라 싸움이나 소동, 혼란, 슬픔, 기쁨 등 서로 다른 상태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상응은 단어와 뜻을 일대일로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암호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의 연결과 그 안에서 표현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피는 것입니다. AC.375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에서는여러경우에사용되지만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한다’고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을 잘 보여 줍니다.
결국 AC.375의 핵심은 마지막 한 문장에 있습니다.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합니다.’ 창4:10에서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흘리게 된 ‘아벨의피들’이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AC.373이 ‘피들의부르짖음= 죄책의고발’이라는 뜻을 먼저 제시하고, AC.374가 ‘피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했다면, AC.375는 이제 ‘부르짖는소리’가 왜 이 문맥에서 고발이 되는지를 확인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지만,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결과 자체가 그의 죄책을 드러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4
‘피들의소리’(voiceofbloods)가체어리티에폭력이가해졌음을의미한다는것은말씀의많은구절에서분명합니다.그구절들에서‘소리’(voice)는고발하는어떤것을,‘피’(blood)는온갖종류의죄,특히미움을의미합니다.누구든지자기형제를미워하는사람은마음으로그를죽이는것이기때문입니다.주님께서다음과같이가르치십니다. That the“voiceofbloods”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Word, in which“voice”denotes anything that accuses, and“blood”any kind of sin, and especially hatred; for whosoever bears hatred toward his brother, kills him in his heart; as the Lord teaches:
이말씀은미움의여러정도를의미합니다.미움은체어리티와반대되는것이며,할수만있다면어떤방식으로든죽입니다.손으로죽이지못하더라도영으로는죽이며,외적인제약에의해서만손으로행하는것이억제됩니다.그러므로모든미움은‘피’(blood)입니다.예레미야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by which words are meant the degrees of hatred.Hatred is contrary to charity, and kills in whatever way it can, if not with the hand, yet in spirit, and is withheld only by external restraints from the deed of the hand.Therefore all hatred is“blood,”as in Jeremiah:
[2] 그리고‘피’(blood)가미움을의미하므로,마찬가지로온갖종류의불의를의미합니다.미움은모든불의의근원이기때문입니다.호세아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And as hatred is denoted by“blood,”so likewise is every kind of iniquity, for hatred is the fountain of all iniquities.As in Hosea:
[3] 마지막때의무자비함과미움역시계시록에서는‘피’(blood)로묘사됩니다(계16:3-4). The unmercifulness and hatred of the last times are also described by“blood”in the Revelation (16:3, 4).
‘피들’(bloods)이복수형으로언급되는것은사랑에서모든선하고거룩한것들이솟아나오듯이,미움에서는모든불의하고가증한것들이솟아나오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이웃을미워하는사람은할수만있다면그를죽일것이며,실제로자기가할수있는모든방식으로그를죽입니다.이것이그에게폭력을가하는것이며,바로이것이여기서‘피들의소리’(voiceofbloods)가본래의미하는것입니다. “Bloods”are mentioned in the plural, because all unjust and abominable things gush forth from hatred, as all good and holy ones do from love.Therefore he who feels hatred toward his neighbor would murder him if he could, and indeed does murder him in any way he can; and this is to do violence to him, which is here properly signified by the“voiceofbloods.”
해설
AC.374는 바로 앞 AC.373에서 제시한 ‘피들의소리는체어리티에폭력이가해졌음을의미한다’는 해석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입증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논증을 따라가 보면 ‘피’의 속뜻이 단순히 살인이나 유혈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피’가 온갖 종류의 죄, 특히 ‘미움’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누구든지자기형제를미워하는사람은마음으로그를죽이는것이기때문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가인이 아벨의 피를 흘린 사건은 속뜻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사건이며, 그 뿌리에는 체어리티와 정반대되는 미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인용하는 말씀이 마5:21-22입니다. 주님께서는 ‘살인하지말라’는 계명을 단순히 육체적인 살인 행위에만 한정하지 않으시고, 형제를 향한 분노와 멸시와 모욕의 내적 상태까지 들어가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미움의여러정도’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살인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내적 원인 없이 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체어리티가 이웃의 선을 바라는 사랑이라면 미움은 그 반대입니다. 이웃에게 선이 있기를 바라지 않고, 그의 선을 싫어하며, 더 나아가 그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살인이 실행되지 않았더라도 그 내적 의지 안에는 이미 살인의 본질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미움은할수만있다면어떤방식으로든죽인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이것을 모든 순간적인 화나 불쾌감까지 곧바로 영적인 살인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분노가 일어날 수 있고,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이웃의 악을 미워하는 것과 이웃이라는 사람 자체를 미워하여 그의 선과 행복을 원하지 않는 상태를 구별하지 않은 채 모든 분노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이웃을 향한 악의가 의지 안에서 자리 잡아 그를 해치고 제거하기를 원하는 ‘미움’입니다. 외적인 법과 체면과 두려움 때문에 손으로 실행하지 않을 뿐, 기회가 주어지면 해치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 미움 안에는 살인의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모든미움은피’라고 말합니다. 렘2:33-34에서 옷단에 가난하고 죄 없는 자들의 피가 발견된다는 말씀은 바로 그러한 내적 악이 외적인 삶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어 호4:2-3에서는 거짓 맹세, 거짓말, 살인, 도둑질, 간음과 함께 ‘피가피를뒤잇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피’가 미움뿐 아니라 ‘온갖종류의불의’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미움은모든불의의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이웃의 선을 원하여 여러 형태의 선한 행위로 흘러나오는 것처럼, 미움은 이웃의 선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형태의 불의와 가증한 것으로 흘러나옵니다.
겔22장과 겔7:23을 인용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피흘린성읍’, ‘피흘리는죄가가득한땅’, ‘포악이가득한성읍’이라는 표현에서 피와 포악이 함께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실제 살인 사건의 통계로 읽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함과 미움이 지배하는 영적 상태로 읽습니다.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이웃은 더 이상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위해 이용하거나 방해가 되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 AC.372의 ‘신앙은체어리티를섬겨야한다’는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를 섬기기를 거부한 신앙은 결국 이웃을 향한 살아 있는 사랑을 잃고, 그 자리에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무자비함과 미움이 들어설 수 있습니다.
애4:13-14와 사4:4, 사59:3역시 같은 논증 안에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의인의 피를 흘렸다는 것, 예루살렘의 피가 씻겨야 한다는 것, 손과 손가락이 피와 죄악으로 더러워졌다는 것은 ‘피’가 단순한 육체적 유혈보다 넓은 영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특히 사4:4에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의피’를 씻으신다는 표현은 피가 제거되어야 할 죄악과 불의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각각 별개의 주제를 말하는 인용들이 아니라 ‘피=미움과거기서나오는불의’라는 하나의 상응을 여러 방향에서 입증하는 증거들입니다.
겔16:6, 22의 ‘피투성이가되어’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루살렘의 가증한 것들을 ‘피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도 피는 한 가지 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증한 악들이 한꺼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AC.374마지막에서 ‘왜피가복수형bloods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솟아 나오듯이 미움에서는 모든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솟아 나오기 때문에 ‘피들’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AC.373에서는 이 복수형의 이유를 아직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제 AC.374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 이유를 밝혀 줍니다.
이 대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한쪽에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미움’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의 내적 근원이지만 거기에서 자비, 용서, 섬김, 정직, 인내, 선한 행위와 같은 수많은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흘러나옵니다. 반대로 미움 역시 하나의 내적 근원이지만 거기에서 거짓, 모욕, 보복, 기만, 폭력, 무자비함과 같은 수많은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단수 ‘피’가 아니라 복수 ‘피들’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가한 폭력은 단 하나의 잘못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반대인 미움에서 흘러나오는 악의 전체 계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계16:3-4을 인용하여 마지막 때의 무자비함과 미움 역시 ‘피’로 묘사된다고 하는 것도 이 원리를 말씀 전체에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피’의 상응이 선지서에 나타나고 다시 계시록에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창4:10의 아벨의 피는 고립된 고대 살인 사건의 이미지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파괴될 때 말씀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영적 표상입니다. 사랑이 사라지고 미움이 지배할 때 그 결과는 ‘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이 솟아 나온다고 할 때 그 사랑의 최초 근원은 인간의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만큼 체어리티 안에 있게 되고, 그 체어리티에서 여러 선한 쓰임이 흘러나옵니다. 반대로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거부하고 자기 사랑을 중심에 놓을수록 이웃을 경쟁자나 방해물로 보기 쉬워지고, 그 상태가 굳어지면 미움과 거기서 나오는 여러 불의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사랑과 미움의 대조는 단순한 감정의 대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근원과 질서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374는 앞의 가인 이야기를 더욱 내면으로 가져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쉽게 ‘나는사람을죽인적이없으므로이말씀은나와거리가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5:21-22에서 계명을 마음의 상태까지 가져가십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을 통해 미움 자체가 체어리티에 대한 폭력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단지 ‘나는누구에게물리적인폭력을행사했는가?’가 아니라 ‘내마음속에서누구의선을원하지않고있는가?누구의실패를기뻐하고있는가?누구를마음에서지워버리고싶은가?’가 됩니다. 다만 이런 자기 성찰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잣대가 아니라 자기 안의 미움을 주님 앞에서 발견하고 피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결국 AC.374의 마지막 문장이 전체를 압축합니다.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은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죽이며, 실제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를 죽입니다. 이것이 이웃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피들의소리’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했지만, 피들은 부르짖습니다. 체어리티를 거부하는 교리가 아무리 자신을 정당화해도 그 안에서 발생한 미움과 불의는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단지 손으로 살인하지 않는 데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마음속의 미움까지 보게 하실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피하며,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가 자리 잡도록 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AC.373
‘네아우의피들의소리’(voiceofthybrother’sbloods)는체어리티에폭력이가해졌음을의미하고,‘피들이부르짖는것’(cryingofbloods)은죄책의고발을의미하며,‘땅’(ground)은분열또는이단을의미합니다. The“voiceofthybrother’sbloods”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the“cryingofbloods”is the accusation of guilt, and“ground”signifies a schism or heresy.
해설
AC.373은 창4:10의 ‘네아우의핏소리가땅에서부터내게호소하느니라’의 속뜻을 아주 압축적으로 제시합니다. 앞에서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이어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속뜻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나아가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한다는 질서 자체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네아우의피들의소리가내게부르짖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AC.373부터는 단순히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넘어, 그 소멸이 가져오는 죄책과 그 죄책이 드러나는 상태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먼저 ‘네아우의피들의소리’는 ‘체어리티에폭력이가해졌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은 계속해서 체어리티를 표상하므로 아벨의 피는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의 흔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분리하고 마침내 소멸시켰다는 것이며, 이제 흘려진 아벨의 피는 바로 그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나타냅니다. ‘폭력’이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가 저절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가인의 교리적 원리가 결국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침해되고 파괴된 결과를 보여 줍니다.
특히 원문이 ‘blood’가 아니라 ‘bloods’, 곧 복수형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AC.373자체는 아직 왜 복수형인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피들의소리’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의미한다고만 밝힙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복수형의 세부적인 상응을 미리 단정하여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번역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붙들고 있는 복수형을 보존하고, 그 의미가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 지켜 온 원칙과도 맞습니다. 현재 번호가 직접 말하는 범위는 분명히 말하되, 뒤의 설명을 앞당겨 과도하게 넣지는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피들이부르짖는것’은 ‘죄책의고발’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시다가 땅에 흘린 피의 소리를 듣고 범죄를 발견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르짖음’은 이미 행해진 악 자체가 그 악의 성질과 죄책을 드러내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말했지만, 아벨의 피는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행한 악을 부인하고 합리화하며 감추려 할 수 있지만, 영적 질서 안에서는 그 악이 실제로 무엇을 파괴했는지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피들의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입니다.
여기서 ‘고발’이라는 말을 주님께서 인간의 죄를 찾아내어 처벌할 근거를 모으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큰 틀에서 주님은 인간을 파멸시키려는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악에서 건져 선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 가운데 실제로 악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교리 안에 굳히면 그 악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그 결과가 드러나는 것을 말씀은 마치 피가 소리를 내어 하나님께 고발하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따라서 ‘죄책의고발’은 변덕스러운 신적 분노가 새롭게 일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악의 실상이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땅’(ground)은 ‘분열또는이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ground’의 의미를 가인의 상태에 맞추어 읽어야 하는 대목입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둘을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교리를 만든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땅’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단순히 한 사람의 개인적 감정이나 행동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시킨 교리적 토대 안에서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AC.370의 마지막 문장 ‘그들의교리는이와같이되었습니다’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여기서 ‘이단’이라는 표현 역시 오늘날의 교파적 의미로 성급하게 옮겨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73이 말하는 ‘heresy’는 이 문맥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살아 있는 결합에서 떨어져 나와 한 부분을 독립시키고 그것을 절대화하는 교리적 왜곡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정 교단이나 사람에게 곧바로 ‘가인의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이 번호의 목적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어떤 진리 하나를 전체 질서에서 떼어 내어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신앙의 정확성을 강조하면서 그 신앙의 생명인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73은 이렇게 앞의 흐름을 세 단어로 압축합니다. ‘피들’, ‘부르짖음’, ‘땅’입니다.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그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을, ‘땅’은 그러한 폭력이 일어난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앞에서는 가인의 교리가 ‘신앙이지배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아벨이 죽었습니다. 이제 그 결과가 사라지지 않고 ‘피들의소리’가 되어 부르짖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그렇게 함으로써 생긴 영적 파괴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결국 창4:10의 ‘네아우의핏소리가내게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그 일이 주님 앞에서 감추어질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했지만 피들은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교리와 논리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여 사랑을 훼손한 결과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참된 신앙은 아벨의 피를 흘리는 신앙이 아니라 아벨을 ‘아우’로 인정하고 그의 ‘지키는자’가 되는 신앙입니다. 곧 체어리티를 섬기고 보호하며, 그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