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1.심화

 

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자살에 대한 답변과 달리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서는 자살을 매우 어둡게 기술하고 있는 걸로 읽었던 것 같아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반드시 부딪히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그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로 읽어보면, AC 천국과 지옥’, 그리고 결혼애’의 서술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보완합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는 어디에서도 자살하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일반 원칙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결혼애’에는 자살자들에 대한 매우 어둡고 음침한 영계의 모습이 묘사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얼핏 보면 두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이 대개 한 부류의 사람들’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데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어떤 지옥 영들의 모습을 묘사한다고 해서 모든 악인이 똑같은 상태라는 뜻이 아니듯,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도 모든 자살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내적 상태를 가진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례로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언제나 외적 행위보다 그 행위를 낳은 내적 사랑과 의지가 더 중요합니다. 같은 자살이라도 그 원인은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극심한 우울과 정신적 혼란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어떤 이는 불치병의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며, 또 어떤 이는 깊은 죄책감과 절망 속에서 무너집니다. 반면 어떤 이는 교만과 분노, 복수심, 자기애 때문에 자살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마지막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낳은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결혼애’에 묘사되는 어두운 자살자들은 대부분 이미 자기애와 절망, 증오, 복수심 같은 지옥적 사랑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자살은 지옥 상태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내적 상태가 마지막에 드러난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주는 것은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를 낳은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반대로 AC.182 이하와 천국과 지옥’에서 제시되는 원리는 훨씬 더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죽는 모든 사람을 천사들을 통해 맞이하시고,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호하시며, 평생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에 따라 그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이 원리에는 자살자만을 예외로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상위 원리라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혼애’의 사례를 AC 천국과 지옥’의 보편 원리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자살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며, 대부분 매우 심각한 영적, 정신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한 번의 행위만으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애’가 특정한 상태의 자살자들을 보여주는 사례집이라면, AC 천국과 지옥’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주님의 섭리와 심판의 원리를 설명하는 교리서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애’를 읽다가 자살자들의 어두운 모습을 보더라도 그것을 모든 자살자의 운명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장면은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그 지경까지 이르게 한 내적 사랑이 얼마나 어두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계의 사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종합하면, 최종적인 판단은 언제나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평생 형성된 지배적 사랑과 삶 전체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메시지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AC.301, 심화 8, ‘blasphemy와 profanation’

AC.301.심화 8. ‘blasphemy와 profanation’ 이 둘은 서로 관련은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blasphemy’는 보통 ‘신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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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 심화 6, ‘자살’

AC.301.심화 6. ‘자살’ ‘자살’의 경우, 사후 ‘이 사람은 참 괜찮은 삶을 살았는데 순간 판단 실수로 자살했으니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여 구원받는 경우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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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자살

 

자살의 경우, 사후 이 사람은 참 괜찮은 삶을 살았는데 순간 판단 실수로 자살했으니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여 구원받는 경우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종합해 보면, 오히려 그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후에 들어가는 상태는 죽는 마지막 몇 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dominant love)에 의해 결정된다고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죽음은 그 상태를 드러내는 계기이지, 그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살았으며, 선량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극심한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혼란, 극도의 절망 속에서 순간적으로 자살했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한순간만으로 그의 평생의 내적 상태가 모두 무효가 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후에 그는 처음 며칠 동안 천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점차 평정을 되찾고, 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혼란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AC.182 이하에서 보듯이, 주님은 사람이 죽는 순간의 충격 속에서도 사랑의 가장 내적인 부분을 보호하십니다. 그 보호는 죽음의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무엇이 살아 있었는가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자살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악한 삶을 살다가 자연사한 사람과, 평생 선하게 살다가 마지막에 극도의 절망 속에서 자살한 사람을 비교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기준은 사망 원인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사랑입니다.

 

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일부 교회에서는 자살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처럼 가르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후 세계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언제나 그 사람의 전체 삶과 의지의 방향에 둡니다.

 

물론 이것이 자살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자살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며, 많은 경우 깊은 절망과 혼란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비극 자체가 곧 영원한 정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일반 교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보십니다. 어떤 이는 순간의 극심한 절망 속에서 자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평생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한 양심이 살아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후에는 지상의 혼란에서 벗어나 참된 상태가 드러나며, 모든 판단은 완전한 공의와 동시에 완전한 자비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이 답변은 AC.182 이하에서 보이는 ‘죽은 직후 이어지는 천사들의 보호’, HH에서 반복되는 ‘지배적 사랑에 따른 사후 상태’, 그리고 스베덴보리 전체 신학의 큰 원리와도 잘 일치합니다. 오히려 이런 관점은 유가족들에게도 막연한 정죄가 아니라, 주님의 공의와 자비를 함께 바라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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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룟 유다

 

가룟 유다의 죄는 profanation으로 보아야 하나요?

 

 

스베덴보리의 profanation 개념에 비추어 보면, 가룟 유다의 죄는 단순한 배신을 넘어 profanation의 성격을 매우 강하게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만 ‘유다라는 개인의 영원한 내적 상태가 profanation의 최종 단계였다’고 우리가 단정하기보다는, ‘복음서에 기록된 그의 행위가 profanation을 대표적으로 드러낸다’고 설명하는 편이 정확하고 안전합니다.

 

가룟 유다는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은 외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직접 부름받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주님의 이적과 삶을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또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 권능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거룩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범죄한 사람이 아니라, 매우 가까운 자리에서 주님의 거룩하심을 접하고, 어느 정도 인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로 그 거룩한 관계를 이용하여 주님을 넘겨주었습니다. 특히 배신의 표로 ‘입맞춤’을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입맞춤은 본래 사랑과 친교, 결합을 표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사랑의 표지를 배신의 신호로 바꾸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사랑과 존경을 표시하면서, 속으로는 주님을 원수들에게 넘겨주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표상과 악한 의도를 하나의 행위 안에 결합했다는 점에서, 이는 profanation의 구조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은 삼십을 받고 주님을 판 것은 단순히 스승 한 사람을 배신한 사건만이 아닙니다. 유다는 자신이 가까이에서 알고 따랐던 주님을 세속적 이익과 맞바꿨습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것을 탐욕 아래에 두고, 주님과의 관계를 돈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것을 부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거룩한 것을 악한 사랑에 종속시킨 일이므로 profanation의 성격을 가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행위’가 profanation의 표본이라는 것과, 그의 내면 전체와 사후의 영원한 상태를 우리가 확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profanation은 단 한 번의 외적 행동만으로 기계적으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 얼마나 알고 인정했으며, 그것을 어떤 의도에서 악과 결합했는가 하는 내적 상태와 관련됩니다. 그 깊이는 오직 주님만 아십니다.

 

유다가 뒤에 뉘우쳐 은 삼십을 돌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도 신중히 보아야 합니다. 그의 후회가 참된 회개였는지,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와 공포를 견디지 못한 절망이었는지는 복음서의 기록만으로 완전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참된 회개는 악을 미워하고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지만, 절망은 자기 행위의 결과에 압도되어 자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지막 행동만으로 구원이나 멸망을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설교나 교인들과의 대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 좋겠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일반적인 세속적 배신과 다릅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에서 알고 따랐으며, 사랑의 표인 입맞춤을 사용하여 주님을 팔았습니다. 따라서 그의 행위는 거룩한 것을 탐욕과 배신에 결합한 것으로서 profanation을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유다 개인의 내면과 영원한 운명에 대한 최종 판단은 주님께 속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유다만을 정죄하는 데서 끝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다의 사건은 오늘날에도 사람이 주님의 이름과 말씀, 그리고 교회의 신뢰를 자기 명예, 재물,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 동일한 profanation의 방향으로 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가룟 유다의 죄가 두려운 까닭은 그가 멀리서 주님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 곁에 있으면서 그 거룩한 가까움을 악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점이 AC.301의 경고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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