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3:1)

 

AC.197

 

태고의 사람들, 곧 천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serpent)은 신중함을 의미하였고, 또한 해(injury)를 입지 않기 위해 그들이 그 신중함을 행사하던 감각 파트를 의미하였습니다. 이러한 (serpent)의 의미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celestial men, by the “serpent” was signified circumspection, and also the sensuous part through which they exercised circumspection so as to be secure from injury. This signification of a “serpent” is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to his disciples: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10:16)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s; be ye therefor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 (Matt. 10:16).

 

하신 말씀에서 그렇습니다. 또한 광야에 세워졌던 놋뱀(brazen serpent)에서도 그러한 의미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오직 천적 인간이신 주님 안에 있는 감각 파트를 의미하며, 그분만이 모든 것을 돌보시고 공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라본 모든 자들이 보존되었습니다. And also from the “brazen serpent” that was set up in the wilderness, by which was signified the sensuous part in the Lord, who alone is the celestial man, and alone takes care of and provides for all; wherefore all who looked upon it were preserved.

 

※ 놋뱀 에피소드는 아래 민수기 본문에 나옵니다.

 

4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4-9)

 

 

해설

 

이 단락은 앞선 AC.195–196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다루어진 ‘’의 상징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본래부터 악한 상징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며, 태고교회, 곧 천적인 사람들의 상태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창3의 타락을 이해할 때, 감각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균형 장치입니다.

 

태고의 사람들에게서 ‘’은 신중함, 곧 해(injury)를 분별하고 피할 줄 아는 지혜를 뜻했습니다. 이 신중함은 추론이나 의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내적 결합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보호적 기능이었습니다. 그 신중함이 작동하는 통로가 바로 감각 파트였으며, 이 감각은 상위 질서에 순종하는 도구로서 사용되었습니다. 즉, 감각은 주도권을 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본래적 의미를 전제합니다. 여기서 뱀의 지혜는 간교함이나 속임이 아니라, 상황을 분별하고 해를 피하는 신중함입니다. 동시에 비둘기의 순결이 함께 언급됨으로써, 이 신중함이 자기 사랑이나 계산에서 나오지 않고, 선함과 결합되어야 함이 분명히 됩니다. 이 두 가지가 분리될 때, 뱀은 지혜가 아니라 독이 됩니다.

 

광야의 놋뱀은 이 의미를 가장 결정적으로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놋뱀은 감각 파트 그 자체를 뜻하지만, 그것이 주님 안에 있을 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오직 유일한 천적 인간이시며, 그분 안에서는 감각조차도 완전히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놋뱀은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보존과 치유의 표징이 됩니다.

 

놋뱀을 바라본 자들이 보존되었다는 것은, 감각적인 것을 부정하거나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주님께 속한 것으로 바라보고, 질서 안에 둘 때 생명이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인간이 감각을 버려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AC.197은 결국 창3의 뱀을 악마적 존재로 단순화하는 해석을 완전히 차단합니다. 뱀은 인간 안의 감각이며, 그것은 본래 신중함과 보호의 기능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타락은 뱀이 존재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뱀이 신앙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이 단락은 감각의 회복 가능성을 열어 두며, 모든 질서의 회복이 오직 주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심화

 

1. ‘10:16

 

 

AC.197, 심화 1, ‘마10:16’

AC.197.심화 1.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10:16)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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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1:4-9

 

 

AC.197, 심화 2, ‘민21:4-9’

AC.197.심화 2. ‘민21:4-9’ 4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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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6, 창3:1, ‘뱀’의 시대적 확장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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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태고교회는 석기시대였을까?

 

저는 태고교회라고 무조건 석기시대 비슷한 문명일 거라는 생각 대신 어쩌면 오늘날에 버금가는 찬란한 문명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지구 나이 45, 6억 년이라면 그 장구한 세월 동안 태고교회 역시...’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생각은 좀 무리겠지요?

 

 

반드시 무리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저작에 근거하여 말한다면, 그 가설을 지지할 만한 직접적인 근거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에 대해 매우 많이 말하면서도, 그들의 기술 문명이나 물질 문명의 수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태고교회의 위대함을 설명할 때, 언제나 그들의 지각(perception), ‘주님과의 교통’, ‘천사들과의 교류’, ‘사랑과 신앙의 일치 같은 영적 상태로 설명합니다. 만일 그들에게 오늘날에 버금가는 과학기술 문명이 있었다면, 스베덴보리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태고교회가 반드시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원시 부족 수준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AC를 읽어보면,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을 매우 높은 지혜를 가진 존재들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자연 속의 모든 사물에서 영적인 의미를 보았고, 상응을 통해 생각했으며, 후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영적 문명’이라는 의미에서는 현대 인류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생각이 나오는 이유도 이해가 됩니다. 지구의 연대를 수십억 년으로 보는 현대 지질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류 문명이 겨우 수천 년 또는 수만 년에 불과하다는 것은 매우 짧아 보입니다. 그래서 그 긴 세월 동안 여러 차례 고도의 문명이 있었다가 사라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실제로 그런 가설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의 초점이 조금 다릅니다. 그는 문명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보다 사람이 주님께 얼마나 가까웠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설령 태고교회가 오늘날 수준의 기술 문명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의 본질적 특징이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런 첨단 기술이 없었다고 해도, 그들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다면 스베덴보리에게는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한 사실입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정반대의 가능성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인간처럼 자연 세계를 정복하고 조작하려는 욕구가 상대적으로 약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은 바깥 세계를 지배하는 데 있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를 지각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대문명이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면, 태고교회는 내면의 지혜와 영적 지각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생각을 조금 수정해 본다면, ‘태고교회가 오늘날에 버금가는 기술 문명을 가졌을 수도 있다’보다는 태고교회는 현대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영적 문명을 가졌을 수도 있다’가 스베덴보리의 묘사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상상으로는 충분히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 자신도 태고교회 이전의 인류 역사나 지구의 물질적 연대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적은 거의 없기 때문에, ‘태고교회 시대의 물질 문명 수준’에 대해서는 사실상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공정할 것 같습니다.

 

결국 AC를 따라가다 보면, 태고교회의 위대함은 그들이 무엇을 만들었느냐보다 무엇을 지각했느냐에 있었습니다. 현대인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우주망원경을 만들 수 있지만,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했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후자를 더 놀라운 문명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AC.196, 창3:1, ‘뱀’의 시대적 확장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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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6, 심화 2, ‘지식들’(knowledges, [scientifica])

AC.196.심화 2. ‘지식들’(knowledges, [scientifica])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지식들[scientifica] knowledges [scientifica] unknown to the ancients, (AC.196)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45, 6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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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식들(knowledges, [scientifica])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지식들[scientifica] knowledges [scientifica] unknown to the ancients, (AC.196)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45, 6억 년을 기준으로 하면, 인간의 문명시대를 훨씬 넓게 잡아 1만 년으로 해도 고작 0.2초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사람들은 혹시 과거 지구 자체가 문명사적으로 몇 차례 리셋된 게 아니냐, 지금도 가끔 도저히 설명 불가한 것들이 땅속 고대 지층에서 발견되는 것들(오파츠, Out-Of-Place Artifacts)을 보면 말이다.’라고 합니다. 이런 오늘날 분위기에서 저 인용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이 대목은 문자 그대로 읽으면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AC.196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지식들’은 오늘날 말하는 고고학, 지질학, 물리학, 유전학 같은 현대 과학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 당시의 인간들이 고대인들보다 훨씬 더 방대한 자연 지식과 학문 체계를 갖게 되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AC.196의 초점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지식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잃어버린 고대 문명’, ‘문명 리셋’, ‘설명하기 어려운 유물 같은 논의는 흥미로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AC.196의 핵심과는 조금 다른 방향입니다. 설령 과거에 지금보다 더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문명의 발전 정도가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전혀 몰랐지만, 천적인 지각을 가졌습니다. 반대로 현대인은 엄청난 과학 지식을 가졌지만,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거의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AC.196의 기준은 기술 수준이 아니라 영적 상태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라면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습니다. ‘그 고대 문명이 실제로 있었는가?’보다 왜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에 끌리는가?’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현대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사례를 발견하면, 그것을 곧바로 영적인 것의 증거로 삼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은 AC.194-196이 말하는 동일한 구조일 수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증거가 나와야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방향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감각적 증거를 최종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영혼은 없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고대 유물 가운데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영혼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결론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보이는 증거가 최종 판단 기준’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AC.196은 바로 그 태도 자체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AC.196을 읽으실 때는 고대인들이 몰랐던 scientia가 무엇이었는가?’보다 지식이 신앙의 종이 되는가, 아니면 주인이 되는가?’에 초점을 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과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습니다. 문제는 과학이나 지식이 주님의 창조를 이해하는 도구’에서 주님을 재판하는 도구’로 바뀔 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2026년은 오히려 AC.196을 더 절실하게 읽어야 하는 시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 시대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AI, 양자물리학, 유전체학, 우주망원경, 빅데이터 등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scientia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AC.196의 질문은 여전히 같습니다. ‘그 지식들이 우리를 더 겸손하게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더 자기 확신에 차게 만들고 있는가?’

 

결국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고대에 더 발전한 문명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인간이 지식을 통해 주님께 더 가까워지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own을 더 신뢰하게 되는가?’에 있습니다. AC.196을 읽을 때 그 기준을 붙들고 있으면, 잃어버린 문명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본문의 핵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식은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지 않다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뱀의 독’은 18세기보다 2026년에 훨씬 더 정교한 형태로 작동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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