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Kenan” is signified a fourth church, and by “Mahalalel” a fifth.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태고교회의 전개 방식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게난(Kenan)과 ‘마할랄렐(Mahalalel)을 개인 이름으로 취급하지 않고, 앞선 경우들과 동일하게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로 이해합니다. 이는 창세기 5장의 이름들이 일관되게 교회들의 연속을 가리킨다는 해석 원리가 여기서도 흔들림 없이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게난으로 상징되는 네 번째 교회는, 에노스 이후에 나타난 상태를 대표합니다. 앞선 글들에서 이미 밝혀졌듯이, 태고교회의 흐름은 퍼셉션이 점차 덜 분명해지고 더 일반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게난의 교회 역시 이 흐름 안에 있으며,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에 속하지만, 퍼셉션의 즉각성과 선명함은 앞선 교회들보다 더 약화된 상태에 해당합니다.

 

마할랄렐로 상징되는 다섯 번째 교회는 그 다음 단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 이유는, 이미 충분히 확립된 해석 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은 이전 교회의 상태로부터 연속적으로 나타나며, 각 단계는 퍼셉션의 정도와 작동 방식에 차이를 가질 뿐, 동일한 생명 흐름 안에 있습니다.

 

이 간결한 진술은 태고교회의 쇠퇴가 급격한 단절이나 붕괴가 아니라, 매우 점진적인 변화였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교회라는 표현은 단순한 번호 매김이 아니라, 퍼셉션이 중심에서 바깥으로 이동해 가는 과정을 표시하는 표지와 같습니다. 각 교회는 이전 교회가 지니고 있던 생명의 흔적을 여전히 품고 있으며, 다만 그것이 더 외적인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이 글은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줍니다. 신앙과 교회의 변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서서히 진행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느 번호의 교회에 속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상태 안에서 퍼셉션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 있는가입니다.

 

또한 이 글은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성급하게 의미를 과도하게 채워 넣지 말라는 암묵적인 가르침도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이름들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고, 어떤 이름들에 대해서는 한 문장으로만 처리합니다. 이는 모든 교회 상태가 동일한 비중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각 상태가 전체 흐름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관점을 드러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구조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상태는 삶의 방향을 크게 바꾸는 전환점이 되지만, 어떤 상태는 그 전환 이후의 지속과 정착을 보여 주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게난과 마할랄렐은 바로 그러한 지속과 진행의 상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AC.506은 태고교회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아주 간결하게 확인해 줍니다. 네 번째 교회와 다섯 번째 교회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태고교회의 생명이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짧은 글은 그 연속성을 놓치지 말라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안내입니다.

 

 

 

AC.507, 창5:12, ‘게난’,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창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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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5, 창5:10-11, ’에노스‘, '셋', '사람'(아담)의 퍼셉션 차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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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셋’(Seth)의 교회보다 덜 천적이며, 그 결과 퍼셉션도 더 적습니다. 또한 이 셋의 교회 역시 ‘사람’(man)이라 불리는 부모 교회만큼 천적이지도 않고 퍼셉션이 풍성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세 교회가 태고교회를 이루는 것들이며, 이들은 뒤이어 나타난 교회들에 비하면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와 같고, 그 이후의 교회들은 이에 비해 막질로 된 부분들과 같습니다. Enosh,” as before observed, is a third church,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but less celestial, and consequently less perceptive, than the church “Seth”; and this latter was not so celestial and perceptive as the parent church, called “man.” These three are what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relatively to the succeeding ones, was as the kernel of fruits, or seeds, whereas the succeeding churches are relatively as the membranaceous parts of these.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내부 구성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정리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 셋, 사람(아담)이라는 이름을 통해 세 교회를 구분하지만, 동시에 이 셋이 함께 태고교회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는 태고교회가 하나의 동일한 상태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퍼셉션의 정도가 서로 다른 여러 상태들이 함께 존재하며 형성되었음을 뜻합니다.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와 아들 부부, 딸 부부 세대, 그리고 손주 세대가 같이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이라 불리는 부모 교회는 가장 천적인 상태였고, 퍼셉션이 가장 분명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인식되었고, 그 인식은 삶 전반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습니다. 셋의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에 속하지만, 이미 퍼셉션은 이전보다 덜 즉각적이 되었고, 조금 더 매개된 방식, 그러니까 뭔가 보조 설명이 필요한 방식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노스의 교회에 이르러서는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고,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분명함도 더 줄어들었습니다.

 

이 차이는 가치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차이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교회도 부정하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는 각 교회가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고유한 위치를 지니며, 그 위치에 맞는 퍼셉션과 역할을 지녔다고 봅니다. 덜 천적이고 덜 퍼셉션적이라는 말은, 생명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이 작동하는, 즉 움직이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열매와 씨앗의 비유를 다시 사용합니다. 태고교회의 세 교회는 이후 교회들과 비교할 때 알맹이에 해당합니다. 알맹이는 생명의 중심이 자리한 곳이며, 이후의 모든 전개는 이 중심으로부터 나옵니다. 반면, 이후에 나타난 교회들은 막질과 같은 부분으로 비유되는데, 이는 알맹이를 감싸고 보호하며 생명이 바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지요. 여기에는 각기 다른 쓰임새가 있을 뿐, 우열의 판단은 없습니다.

 

이 비유는 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균형 있게 잡아 줍니다. 태고교회의 알맹이적 상태는 가장 분명한 퍼셉션을 지녔지만, 그것만으로 인류 전체의 영적 여정을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더 많은 외적 구조와 매개가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교회의 형태도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타락의 이야기라기보다, 인간 상태에 맞추어진 섭리의 전개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볼 때, 이 글은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을 다시 묻게 합니다. 교회가 알맹이에 해당하는 상태에 있느냐, 막질에 해당하는 상태에 있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그 막질이 여전히 알맹이를 품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외적인 제도와 형식이 중심이 되더라도, 그 안에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생명의 핵심이 살아 있다면, 그 교회는 여전히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신앙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시기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퍼셉션이 매우 분명하게 느껴질 수 있고, 어떤 시기에는 더 많은 생각과 규칙, 형식을 통해 신앙을 유지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형식들이 여전히 안쪽의 생명을 보호하고 있는지, 아니면 형식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는지입니다.

 

결국 이 글은 태고교회의 세 교회를 하나의 연속된 생명 흐름으로 보게 합니다. 사람, 셋, 에노스는 서로 다른 퍼셉션의 정도를 지녔지만, 함께 태고교회를 이루었고, 이후 교회들의 생명적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 연결이 유지되는 한, 교회는 형태가 달라져도 생명을 잃지 않습니다.

 

 

 

AC.506, 창5: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창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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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4, 창5:10-11,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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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nine hundred and five years, and he died. (5:10, 11)

 

AC.504

 

여기서도 이와 같이 ‘날’(days)과 ‘해’(years)의 숫자들, 또한 ‘자녀들’(sons and daughters), 그리고 그가 ‘죽었더라’(dying)는 말은 앞에서와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Here in like manner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and also “sons and daughters,” and his “dying,” signify like things.

 

 

해설

 

이 글은 새로운 설명을 더하기보다, 지금까지 확립된 해석의 ‘일관성을 다시 확인하는 결론 문장’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5장의 각 절을 해석할 때마다, 혹시라도 독자가 어느 지점에서 문자적 이해로 되돌아갈 여지를 차단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이와 같이’라는 표현으로, 동일한 해석 원리가 예외 없이 적용됨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days)과 ‘(years)의 숫자들은 앞서 누차 설명된 대로, 연대적 시간의 길이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교회가 거쳐 간 ‘상태의 지속과 변화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AC.504는 이 원리가 이미 충분히 확립되었음을 전제하고, 더 이상의 반복 설명 없이도 독자가 동일한 틀로 읽어야 함을 요구합니다. 이는 해석의 피로를 줄이기 위한 배려이자, 동시에 해석의 엄격함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자녀들’, 그러니까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 역시 동일합니다. 여기서도 그것들은 개인의 자녀가 아니라, 해당 교회 상태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들’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진리와 선들이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상응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교회가 낳는 진리와 선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AC.504는 이 상응 원리가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으므로, 다시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진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반복하면서도, 점점 더 간결하게 처리합니다. 이는 독자가 이제 이 표현을 들을 때마다 자동적으로 ‘퍼셉션의 소멸’을 떠올리도록 훈련시키는 효과를 냅니다.

 

이 글의 특징은, 설명의 축소가 곧 의미의 축소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AC.504는 앞선 해석들이 단편적 설명이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해석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날, 해, 자녀들, 그리고 죽음이라는 네 가지 요소는 더 이상 각각 따로 설명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의 언어 체계 안에서 함께 작동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문단은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설교자는 모든 구절을 매번 새롭게 설명하려는 유혹을 받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반복 속에서 형성된 이해를 신뢰합니다. 이미 충분히 설명된 원리는, 이후에는 간결하게 확인하는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태도입니다. 이는 청중을 존중하는 해석 방식이기도 합니다.

 

또한 AC.504는 창세기 5장이 단조로운 족보처럼 보이는 이유를 역설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반복되는 표현들은 지루함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같은 영적 구조가 여러 교회 상태에 걸쳐 적용됨’을 보여 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반복은 변화 없음의 표시가 아니라, 동일한 생명 원리가 서로 다른 상태들 속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창세기 5장을 하나의 긴 이야기로 읽게 됩니다. 각 인물, 각 교회 상태는 다르지만, 그들을 관통하는 해석의 열쇠는 동일합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 교회는 자녀들을 낳고, 퍼셉션이 흐려질 때 교회는 죽음에 이릅니다. 날과 해는 그 과정을 표시하는 표지일 뿐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반복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신앙의 상태가 달라질 때마다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기준이 다른 상황에 적용’됩니다. 무엇이 생명인가, 무엇이 죽음인가라는 기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기준은 퍼셉션이며, 퍼셉션의 분명함과 소멸 여부가 모든 것을 가릅니다.

 

결국 AC.504는 말수가 적지만, 그만큼 강력한 확인을 제공합니다. ‘여기서도 이와 같이’라는 한마디 안에, 창세기 5장을 관통하는 모든 해석 원리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문단을 지나며 독자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같은 눈으로 다음 절들을 읽을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AC.505, 창5:10-11, ’에노스‘, '셋', '사람'(아담)의 퍼셉션 차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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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3, 창5:9, ‘태고교회 퍼셉션 능력의 비밀’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부터 생겨나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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