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창5:25)
AC.523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Lamech)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Methuselah” is signified an eighth church, and by “Lamech” a ninth.
해설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계보 설명처럼 보이지만, 창세기 5장을 관통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인명으로 보이는 이름들을 개인이 아니라 ‘교회 상태’로 읽어야 한다는 원칙을 유지합니다. ‘므두셀라’와 ‘라멕’은 각각 독립된 인물의 생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말기에 이르러 점점 달라져 가는 영적 상태의 연속을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앞서 ‘사람’(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이미 퍼셉션은 점차 희미해지고, 직접적인 인식보다는 더 일반적이고 외적인 형태로 이동해 왔습니다. ‘므두셀라’와 ‘라멕’은 바로 그 흐름이 더욱 진행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전히 태고교회 계열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 생명력과 즉각성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므두셀라’가 여덟 번째 교회로 언급된다는 것은, 교회의 연속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고, 주님과의 연결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결은 점점 더 길어지고, 느슨해지며, 직접적인 퍼셉션보다는 전해진 것, 보존된 것, 기억된 것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는 ‘살아 있는 분별’이 아니라 ‘아직은 붙들고 있는 신앙의 잔향’에 가까운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좀 미안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비유하자면, ‘생명 연장 장치로 의학적 수명만 유지하는 상태’에 가깝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로 소개됩니다. 숫자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점이 태고교회의 말기라는 점은 분명해집니다. ‘라멕’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이후 곧바로 ‘노아’가 이어진다는 점을 떠올리면, 여기서 말하는 상태는 이미 큰 전환을 앞둔 긴장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퍼셉션은 거의 사라졌고, 교회는 더 이상 내부의 빛으로 움직이지 못한 채 외적 질서와 보존된 가르침에 의존하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이제 곧 그 장치를 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과정을 ‘타락’이나 ‘실패’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 전체의 상태 변화이며,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된 흐름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지는 대신, 이후 인류는 교리, 규범, 제도, 법, 문자에 의존해 살아가게 됩니다. ‘므두셀라’와 ‘라멕’은 바로 그 문턱에 서 있는 교회 상태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이 한 문장은 단순히 ‘여덟 번째, 아홉 번째’라는 정보를 주고 있는 게 다가 아니라, 태고교회가 끝을 향해 가고 있으며, 곧 전혀 다른 방식의 교회 시대가 열릴 것임을 조용히 예고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가 지루한 연대기가 아니라, 인류 영적 상태의 미세한 이동을 기록한 장이라는 사실이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게이, 레즈비안 같은 성적 편향이나 혹은 성형이나 성전환 등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나요? 이런 주제에 대해 성도들에게 뭐라고 답을 주어야 할까요?
1.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 : 윤리가 아니라 ‘존재’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는 죄인가요?’, ‘성전환은 어떻게 봐야 하나요?’라는 질문은 겉으로 보면 윤리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성도들이 묻고 있는 것은 그보다 훨씬 깊은 차원입니다. 이 질문의 핵심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물음이 숨어 있습니다.
‘나는 이런 상태로도 주님께 갈 수 있는 사람인가?’
즉, 문제는 행동의 옳고 그름 이전에 ‘구원의 가능성’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해 단순히 ‘된다 / 안 된다’, ‘죄다 / 죄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답하면, 성도는 잠시 침묵할 수는 있어도 결코 마음이 열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침묵은 단절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이 이 질문에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그가 인간을 ‘행위의 목록’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 속에 있는 존재’로 보기 때문입니다.
2.스베덴보리는 성적 정체성을 말하지 않고, ‘사랑의 근원’을 말합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동성애자, 이성애자, 트랜스젠더’ 같은 범주를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범주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반복해서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이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사랑은 두 근원 중 하나에서 나옵니다.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솟아나는 사랑’입니다. 그는 후자를 ‘자기 사랑’이라 부르며, 이것이 인간 내면의 거의 모든 왜곡의 뿌리라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동성 간의 사랑이든 이성 간의 사랑이든, 결혼 안의 사랑이든 결혼 밖의 사랑이든, 질문은 동일합니다.
‘이 사랑이 나를 주님과 이웃 쪽으로 열어 주는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 더 깊이 묶어 두는가?’
이 기준은 매우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준 앞에서는 ‘정상’이라 불리는 사람도 결코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 기준은 매우 공정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태생적 상태만으로 배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3.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는 제도가 아니라 ‘천국의 구조’입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결혼애는 부차적인 주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인간 이해와 천국 이해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축입니다. 그는 결혼을 사회 제도나 윤리 규범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결혼을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영적 실재로 봅니다.
이때 ‘남자와 여자’는 단순한 생물학적 구분이 아닙니다. 남자는 ‘진리의 형상’으로, 여자는 ‘선의 형상’으로 설명됩니다. 이 둘의 결합은 곧 천국 그 자체의 형식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무수한 결혼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묘사합니다.
이 구조 안에서 볼 때, 동성 간의 성적 결합은 단순히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영적 형식이 외형적으로 표현되지 못한 상태’로 이해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곧바로 ‘정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외형보다 내적 상태를 먼저 봅니다.
4.성전환과 성형에 대한 스베덴보리적 이해의 핵심 원칙
스베덴보리는 성형이나 성전환 수술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저작 전반을 관통하는 한 문장은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기준을 제공합니다.
‘영이 육체를 만드는 것이지 육체가 영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그 파장은 큽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볼 때, 내적 영적 불일치나 고통은 외형을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외형의 변화는 내적 상태의 표현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치유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함께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왜곡된 성향, 상처, 불균형을 지닌 존재임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그런 상태 자체가 죄의 증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의 삶 전체를 ‘점진적 회복의 과정’으로 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신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해결책이 외형의 변화에 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5.성도들에게 답할 때 지켜야 할 네 가지 원칙
첫째, 정체성 논쟁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누구인가’를 규정하려는 순간, 대화는 닫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묻습니다.
둘째, 사랑의 방향을 질문으로 제시해야 합니다.
‘이 사랑이 당신을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합니까, 아니면 더 고립되게 합니까?’
이 질문은 공격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셋째, 고통에는 충분히 공감하되, 질서를 흐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의 질서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민과 상대주의는 다릅니다.
넷째, 변화는 언제나 ‘거듭남’의 문제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여기서 ‘거듭남’은 성적 취향의 즉각적 변화가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서서히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6.스베덴보리가 오늘 이 질문을 받았다면
아마 그는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천국은 특정 성적 상태에 속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천국은 주님을 중심에 두는 사람들이, 각자의 왜곡을 주님께 맡기며 살아가는 공동체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을 것입니다.
‘주님께 가는 길은 닫혀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길은 언제나 질서를 통과한다.’
이 말은 동시에 위로이자 요청입니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지만, 누구도 자기 방식으로 천국을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7.목회자의 자리에서 드리는 마지막 한 마디
이 주제에서 목사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에게 깔끔한 도덕 판결문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방향을 줍니다.
‘사랑이 어디서 왔는지 보라.’
‘그 사랑이 너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보라.’
이 정도만 흔들리지 않고 말해 줄 수 있다면, 성도는 적어도 혼자 싸우고 있다는 느낌에서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목회의 첫걸음일 것입니다.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표상으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어, 더욱 생명력을 갖게 했는데, 이런 방식은 그들에게 더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스타일을 가리켜 한나는 예언 가운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 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 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 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이 너무 엉뚱하지요? 번역자들이 이런 배경지식 없이 번역한 결과입니다.
이러한 표상들은 시편에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78:2-4)Such representatives are called in David, “Dark sayings of old” (Ps. 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시78:2-4)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한 이 모든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 스타일로,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나타납니다. 이 책들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 그대로 나타나 있지만, 그 안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전혀 다른 것들이 내적 의미 안에 담겨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차례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셋째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은 태고교회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겼던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스타일처럼 연속적이고 역사적인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가장 깊은 비밀들이 담겨 있는데, 그것들은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이어지며,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교회의 다양한 상태들, 하늘 자체,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넷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로,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다윗이라는 왕의 인격 아래에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 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 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 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이 글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결정짓는, 매우 구조적인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말씀을 하나의 동일한 스타일로 보지 않고,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성경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 전환을 요구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모든 본문을 읽으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스타일로 소개되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오늘날 우리가 ‘신화적’이라고 부르기 쉬운 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신화가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언어입니다. 이 스타일의 핵심은, 외적 사물과 사건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영적, 천적 실재를 직접 떠올렸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자연은 상징이 아니라, 곧바로 영적 세계와 연결된 창문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이야기로 구성되었음을 뜻합니다. 창조 이야기, 에덴동산, 초기 족장들의 이야기가 단절된 상징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변화해 가는 하나의 생명 서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스타일은 그들에게 ‘최고의 기쁨’이었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곧 삶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나의 예언과 다윗의 시편이 인용되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높은 말’,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은 난해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뜻합니다. 이 ‘감추어졌던 것’은 악이나 무지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이해를 넘어서는 신적 깊이를 가리킵니다. 즉, 빛이 너무 강해 눈이 부신 상태와 같습니다.
둘째 스타일인 역사적 스타일은, 오늘날 독자들이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역사들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지만, 그 안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즉, 역사성과 상징성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역사로서 참이면서 동시에 내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성경 해석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셋째 스타일인 예언적 스타일은, 많은 독자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분명히 짚습니다. 이 스타일은 ‘연결된 역사 형식’이 아니라, 단절되고 압축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 안에서는 이 파편들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됩니다. 예언서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읽는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예언적 스타일의 특징은 범위의 확장성입니다.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교회의 상태, 하늘의 질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주님 자신까지를 동시에 다룹니다. 그래서 이 스타일은 문자적 차원에 머물러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내적 의미로 들어가야 합니다.
넷째 스타일인 시편은 이 모든 스타일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예언처럼 높고, 그러나 일상 언어처럼 인간적입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의 감정과 경험을 통해 말하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상태와 주님의 왕적 통치를 노래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개인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신앙 고백이 됩니다.
이 글 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말씀은 단일한 방식으로 읽히도록 쓰이지 않았습니다. 스타일을 구별하지 않으면, 의미도 왜곡됩니다. 그러나 스타일을 구별하고, 각 스타일이 가리키는 차원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말씀은 점점 하나의 살아 있는 구조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구조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과 인간의 거듭남이 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