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0

 

거니시는 소리(the voice going to itself)란 지각(perception)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다만 마치 홀로 존재하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남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음 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담을 부르시며(Jehovah called to the man)라고 하는 것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도 이와 같이 말합니다. By the “voice going to itself,” is meant that there was but little perception remaining, and that alone as it were by itself and unheard, as is manifest also from the following verse where it is said, “Jehovah called to the man.” So in Isaiah: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40:3, 6)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the voice said, Cry (Isa. 40:3, 6).

 

여기서 광야(wilderness)는 신앙이 없는 교회(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를 의미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는 주님의 오심(the Lord’s advent)에 대한 선포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모든 알림(announcement)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the regenerate)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에게는 내적 딕테이트(an internal dictate)가 있기 때문입니다. The “wilderness” is 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 the “voice of one crying” is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and in general every announcement of his coming, as with the regenerate, with whom there is an internal dictate.

 

 

해설

 

AC.220은 창세기 38절의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라는 말씀을 더욱 깊이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앞의 AC.219에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소리’를 양심, 내적 깨달음, 내적 책망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거니시는(going to itself)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타락한 후에도 완전히 모든 영적 지각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음을 의미합니다. 다만 그 지각이 거의 사라져 버렸고, 마치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처럼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남아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음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듣지 못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말씀하시지만, 사람은 더 이상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마치 먼 곳에서 누군가 부르고 있는데도 자기 생각과 욕망에 사로잡혀 그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다음 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숨었지만, 주님은 찾으십니다. 인간은 듣지 않지만,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타락 이후에도 계속되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사야 40장을 인용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신약에서는 흔히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되지만, 스베덴보리는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에게 광야는 단순한 사막이 아니라 신앙이 사라진 교회를 의미합니다. 진리가 메말라 있고 영적 생명이 희박해진 상태입니다.

 

그런 광야에서 들리는 ‘외치는 소리’는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음성입니다. 즉 사람 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양심의 소리, 마지막 진리의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쇠퇴하고 교회가 황폐해져도 주님은 여전히 부르고 계십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난 사람(the regenerate)에게는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perception)과는 다르지만, 양심(conscience)을 통해 주님께서 계속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양심을 자신의 생각이나 도덕 교육의 결과 정도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양심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두신 영적 통로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선을 행하려 할 때 느끼는 내적 권고, 악을 피하려 할 때 느끼는 내적 경고는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이 희미하게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AC.220은 매우 따뜻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주님의 음성을 거의 잃어버렸을 때조차 그 음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거니시는 소리’처럼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었고, 주님은 계속 사람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주님은 양심과 내적 깨달음을 통해 같은 방식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가 아니라, 우리가 그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심화

 

1. ‘40:3, 6

 

 

AC.220, 심화 1, ‘사40:3, 6’

AC.220.심화 1. ‘사40:3, 6’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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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창3: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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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심화

 

6. ‘30:30-31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30:30, 31) Jehovah shall cause the excellency of his voice to be heard, for through the voice of Jehovah shall Asshur be beaten down (Isa. 30:30–31).

 

 

이 구절을 AC.219에서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목소리(voice of Jehovah)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계시와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하며, 그 진리가 인간 own에서 나온 거짓된 추론을 무너뜨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19의 전체 목적은 창3:8의 ‘동산에서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음성을 단순한 청각적 소리로 보지 않고, 양심과 퍼셉션 속에 울리는 주님의 내적 부르심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말씀 전체에서 ‘여호와의 음성’이 언제나 계시와 진리의 작용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30장의 경우, 특히 ‘앗수르(Asshur)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앗수르는 흔히 이성적 능력, 추론 능력, 지성(intellectual reasoning)을 의미합니다. 원래 이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own 안에 머물면서 이성을 주님 위에 두게 되면, 앗수르는 진리를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진리를 재판하는 주인이 됩니다.

 

바로 AC.194-206에서 본 뱀의 길이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는다’가 아니라, ‘내 감각과 내 이성이 납득해야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라는 말은, 신적 진리가 인간 own의 교만한 추론을 무너뜨린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진리 앞에서는 인간의 가장 정교한 논리도 한계를 드러내게 됩니다. 마치 AC.215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 지혜를 절대화한 사람은 결국 거짓의 심연으로 빠지게 되지만, 여호와의 음성은 그 거짓을 드러내고 깨뜨립니다.

 

또한 본문에 나오는 ‘화염’, ‘폭풍’, ‘폭우’, ‘우박’ 역시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표현들은 진리가 인간 안의 거짓과 악을 심판하고 정화하는 다양한 작용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음성은 부드러운 위로의 음성일 뿐 아니라, 때로는 인간의 자기 확신과 교만을 무너뜨리는 음성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창3의 아담과 하와가 들은 음성과도 연결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음성이 자기들의 상태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숨겨진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자기 own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빛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AC.219에서 사30:30-31을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음성’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역사하는 신적 진리이며, 특히 인간 own의 추론과 자기 지혜를 꺾고 진리 앞에 복종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AC.215의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와 이 구절은 서로 짝을 이루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전자는 자기 지혜를 의지하는 인간의 상태를 보여 주고, 후자는 그런 인간적 지혜를 무너뜨리는 여호와의 음성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3의 이야기 전체는 바로 그 두 길, 곧 자신의 음성을 따르는 길과 주님의 음성을 따르는 길 사이의 갈림길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19, 창3: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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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심화 5,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AC.219.심화 5.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영어 성경과 달리 한글 성경에서는 ‘낙태’로 번역한 이유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번역상의 문제라기보다 원문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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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심화

 

5.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영어 성경과 달리 한글 성경에서는 낙태로 번역한 이유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번역상의 문제라기보다 원문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29:9의 히브리어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로 번역되어 왔습니다.

 

첫 번째는 현재 개역개정처럼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라는 번역입니다. 두 번째는 영어 성경들 가운데 적지 않은 번역처럼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하여금 새끼를 낳게 하시고’ 또는 ‘해산하게 하시고’라는 번역입니다. 예를 들어, KJV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voice of the LORD maketh the hinds to calve, and discovereth the forests.’

 

여기서 ‘calve’는 ‘새끼를 낳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라틴어 번역도 바로 이 계열입니다.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hinds to calve and uncovereth the forests.’

 

그래서 AC.219에서 스베덴보리는 ‘암사슴을 새끼 낳게 한다’는 의미를 전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글 성경은 ‘낙태’라고 번역했을까요? 히브리어 원어의 동사 ‘חול(chul) 또는 관련 형태는 본래 ‘몸을 떨다’, ‘산고를 겪다’, ‘해산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고통스러운 진통을 강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부 고대 번역 전통에서는 ‘조산’, ‘유산’, ‘낙태’의 뉘앙스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 번역자들은 문맥상 천둥과 폭풍의 위력을 강조하는 시편 29편의 분위기를 고려하여, ‘여호와의 음성이 너무 강력하여 암사슴마저 놀라 새끼를 떨어뜨린다’는 의미로 번역한 것입니다. 즉 ‘낙태하게 하신다’는 번역은 자연계의 폭풍우가 동물들에게 미치는 충격을 강조한 번역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를 보기 때문에 전혀 다르게 읽습니다. 그에게 암사슴(hinds)은 선한 애정(good affections)을 의미합니다. 새끼를 낳는 것(calve)은 그 애정으로부터 선한 행위와 진리가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음성이 암사슴을 새끼 낳게 한다’는 의미를 취합니다.

 

흥미롭게도 바로 다음 구절이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uncovereth the forests)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내면에 숨어 있던 것들을 드러내신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즉 주님의 진리는 한편으로는 선한 애정이 열매 맺게 하고(암사슴이 새끼를 낳음), 다른 한편으로는 숨겨진 거짓과 악을 드러낸다(숲을 벗김)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19의 문맥에서는 개역개정의 ‘낙태’보다 KJV의 ‘새끼를 낳게 하신다’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 훨씬 잘 맞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저작을 번역하거나 해설할 때는 이 구절을 보통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호와의 음성은 선한 애정들(암사슴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고, 사람 안에 숨겨진 것들(삼림)을 드러내신다.’

 

 

 

AC.219, 심화 6, ‘사30:30-31’

AC.219.심화 6. ‘사30:30-31’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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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심화 4, ‘시29:3-5, 7-9’

AC.219.심화 4. ‘시29:3-5, 7-9’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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