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97.심화

 

4.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4:4)

 

 

AC.297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21의 ‘가죽옷’을 해설하면서, 말씀에서 ‘’이 단순한 육체의 의복이 아니라 선을 둘러싸고 그것을 드러내는 영적, 자연적 차원의 것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천적 선은 가장 내적인 것이므로 그 자체로는 옷을 입지 않은 것과 같으며, 그 천적 선에서 나오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그것을 둘러싸는 ‘’이 됩니다. 계4:4의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있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상응을 보여 주기 때문에 AC.297에 인용된 것입니다.

 

먼저 ‘이십사 장로들’은 문자 그대로 스물네 명의 특정 인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열둘은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며, 이십사는 열둘이 배가된 수로서 교회와 천국에 속한 모든 진리와 선을 충만하게 나타냅니다. 또한 ‘장로들’은 지혜 있는 자들, 곧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십사 장로들은 천국과 교회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 또는 그것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선이 진리를 통하여 밝고 순수하게 나타났음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흰색은 빛과 상응하고, 빛은 신적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진리는 선과 분리된 지식이나 교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장로들이 주님의 보좌 주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나왔으며, 주님의 선을 섬기고 드러내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흰옷’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둘러싸고 나타내는 순수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AC.297의 논지와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선 자체가 가장 내적인 것이며,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그것을 둘러싸는 의복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계4:4에서도 장로들의 내적 지혜와 선은 눈에 직접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고, 그들이 입은 ‘흰옷’을 통해 나타납니다. 곧 보이지 않는 내적 선이 보이는 진리의 형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이 진리, 특히 선에서 나온 진리를 의미하는 기본적인 이유입니다.

 

또한 장로들이 ‘보좌들 위에 앉아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앉는다’는 것은 어떤 상태에 확고히 자리 잡는 것을 의미하며, ‘보좌’는 심판과 통치, 더 깊게는 신적 진리에 기초한 질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보좌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 안에 굳게 서 있으며, 그 진리에 따라 판단하고 살아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들의 옷은 단지 그들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형상입니다.

 

머리에 금관을 썼다’는 사실은 흰옷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머리’는 가장 내적이고 지배적인 것을 의미하며, ‘’은 사랑의 선, 특히 천적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머리의 금관은 그들의 모든 지혜와 진리 가장 높은 곳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흰옷이 진리를 의미한다면, 금관은 그 진리를 지배하고 생명을 주는 선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계4:4에는 ‘금관’이라는 선과 ‘흰옷’이라는 진리가 함께 나타나며, 진리가 선을 입혀 드러낸다는 AC.297의 메시지를 완전하게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 창3의 ‘가죽옷’과도 대비되면서 연결됩니다. 창3:21의 가죽옷은 태고교회 사람이 천적 상태를 잃은 뒤, 주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보다 외적인 영적,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을 위한 자비로운 보호의 옷이었습니다. 반면, 계4:4의 흰옷은 거듭난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순수한 진리의 옷입니다. 가죽옷은 인간의 낮아진 상태에 맞추어 주신 외적 보호를 강조하고, 흰옷은 선과 진리가 다시 조화를 이룬 천국적 상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둘 다 내적 생명을 외적으로 둘러싸고 나타내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의 상응에 속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계4:4 AC.297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이 일관되게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의 금관은 가장 내적 사랑의 선을, 흰옷은 그 선에서 나오는 순수한 진리를,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은 그 선과 진리 안에 확고히 세워진 천국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천적 선이 가장 내적 중심에 있고, 영적 선과 자연적 진리가 그것을 옷처럼 둘러싸고 드러낸다는 AC.297의 구조를 매우 선명하게 증명하는 본문입니다.

 

 

 

AC.297, 창3:21, ‘옷‘, 천적 선, 영적, 자연적 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7 천적 선은 옷 입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장 깊고 순진무구하기 때문입니다. 옷 입는 선은 천적 영적 선부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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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7, 심화 3, ‘계3:4-5’

AC.297.심화 3. ‘계3:4-5’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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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7.심화

 

3. ‘3:4-5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4, 5)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and they shall walk with me in white, for they are worthy (Rev. 3:4–5),

 

 

AC.297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죽옷(coats of skin)을 설명하면서, ‘(garments)이 영적 의미로는 무엇을 뜻하는지를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 증명합니다. 그 가운데 계3:4-5는 특히 ‘’이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선과 진리를 밖으로 드러내는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본문이기 때문에 인용됩니다.

 

첫째, 여기서 ‘’은 사람의 외적 삶 전체를 의미합니다. AC.297의 핵심은, 천적 선 자체는 벌거벗은 상태와 같고, 그것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통하여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옷을 입는다’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은 몸을 덮는 천 조각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과 신앙이 외적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 속에 나타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속 사랑이 생활 가운데까지 순결하게 보존되었다는 뜻입니다.

 

둘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였다’는 표현은 진리 자체를 더럽히지 않았다는 의미라기보다, ‘선으로부터 나온 진리의 삶’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옷은 언제나 몸을 덮습니다. 상응으로는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즉 겉이 속을 드러내고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거짓과 악을 받아들이면, 그의 ‘’은 더럽혀지고,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따라 살아가면 그의 ‘’은 깨끗하게 보존됩니다. 겉은 속을 반영하기 때문이지요. 겉을 보면 속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297에서 말하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천적 선의 의복’이라는 설명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셋째, ‘흰옷’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흰색은 빛을, 빛은 진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교리를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이 진리와 생활 속에서 밝게 드러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AC.297에서 말하는 ‘옷은 내적 선을 나타내는 외적 형상’이라는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넷째, ‘나와 함께 다니리니’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에서 ‘걷는다’, ‘다닌다’는 것은 삶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주님과 같은 방향의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흰옷은 단순한 천국 예복이 아니라,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상태 자체를 나타냅니다. 즉, 옷과 걷는다는 두 상징이 함께 사용되어 내면과 외면이 하나 된 신앙의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이 구절은 창3의 ‘가죽옷’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창세기의 가죽옷은 타락한 인간을 위한 주님의 자비로운 보호를 상징합니다. 사람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천적 선 가운데 직접 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라는 ‘의복’을 입혀 주셨습니다. 반면 계3의 흰옷은 그러한 보호 아래에서 다시 거듭난 사람이 입게 되는 순결한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하나는 타락 이후의 보호이고, 다른 하나는 거듭남 이후의 영화로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은 내적 생명을 외적으로 나타내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상응을 가집니다.

 

여섯째, 따라서 AC.297에서 계3:4-5를 인용한 목적은, ‘’이라는 상징이 창세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에스겔에서는 아름다운 의복으로, 이사야에서는 아름다운 옷으로, 그리고 계시록에서는 흰옷으로 표현되지만,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난 외적 형상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말씀 전체가 하나의 동일한 상응 법칙에 따라 기록되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일곱째, 결국 계3:4-5 AC.297의 결론을 더욱 분명하게 확증합니다. 사람을 천국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겉으로 입은 의복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사랑과 신앙이 삶 속에 나타난 영적 의복입니다. 그러므로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흰옷을 입은 자’는 모두 자기 공로로 의롭게 된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천적 선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통하여 순결하게 나타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계3:4-5 AC.297에서 인용, ‘’이란 언제나 내적 생명을 나타내는 외적 진리와 선을 상징한다는 말씀의 일관된 의미를 독자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297, 심화 4, ‘계4:4’

AC.297.심화 4. ‘계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계4:4) AC.297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21의 ‘가죽옷’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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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7, 심화 2, ‘사52:1’

AC.297.심화 2. ‘사52:1’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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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2:1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52:1) Put on thy beautiful garments, O Jerusalem, the city of holiness (Isa. 52:1).

 

 

52:1 AC.297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의복’이 단순한 겉 장식물이 아니라, 내적 선이 밖으로 나타날 때 입게 되는 진리와 외적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앞에서 천적 선은 가장 깊고 순진무구하기 때문에 옷 입지 않지만, 그보다 외적인 천적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의복’에 비유되고, 또 의복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사야의 ‘아름다운 옷’은 이 원리를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속뜻으로 단순히 한 도시를 가리키지 않고, 주님의 교회, 특히 참된 교리 안에 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는 명령은 실제 도시가 화려한 옷을 입으라는 뜻이 아니라, 황폐해졌던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다시 받아 교회다운 상태로 회복되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입는 옷은 교회의 외형을 이루는 참된 교리와 그 교리에 따른 선한 생활입니다.

 

여기서 ‘아름다운’이라는 말은 진리가 선으로부터 나올 때 지니는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이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진리는 차갑고 생명이 없지만, 선을 담고 선을 표현하는 진리는 빛과 조화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옷’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선으로부터 나온 진리들로 교회가 단장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의복은 몸 바깥에 있으면서 몸의 상태와 품위를 드러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리와 외적 예배, 말과 행동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을 밖으로 드러냅니다. 교회의 가장 깊은 생명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이지만, 이것은 교리와 예배, 그리고 삶이라는 의복을 통하여 겉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교회 안의 내적 선이 참된 교리와 거룩한 생활로 표현되는 것을 뜻합니다.

 

거룩한 성’이라는 표현도 ‘아름다운 옷’의 의미를 분명하게 합니다. 말씀에서 ‘’은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거룩함’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거룩한 진리의 교리 안에 있는 교회를 뜻합니다. 그런 예루살렘이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참된 교리와 그 교리에 일치하는 삶으로 갖추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겔16:10과도 같은 흐름에 있습니다. 에스겔에서는 주님께서 교회에 ‘수놓은 옷’, ‘가는 베’, ‘모시’를 입히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이사야에서는 교회가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전자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베푸시는 측면을, 후자는 교회가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를 받아 실제로 입고 살아야 하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의복이 더 외적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또한 ‘입으라’는 명령은 단지 진리를 배우고 기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무엇을 입는다는 것은 그것을 자기 삶에 받아들여 자신의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지식으로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람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실제로 감싸고 형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생활 속에 나타날 때 비로소 그것은 사람의 의복이 됩니다.

 

AC.297에서 사52:1을 인용한 이유는, 천적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말씀에서 ‘의복’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름다운 옷’은 가장 깊은 천적 선 자체가 아니라, 그 선이 진리와 교리, 그리고 선한 생활을 통하여 외적으로 나타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내적 사랑과 체어리티가 참된 진리와 거룩한 삶이라는 아름다운 의복을 입을 때, 교회가 비로소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AC.297, 심화 3, ‘계3:4-5’

AC.297.심화 3. ‘계3:4-5’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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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7, 심화 1, ‘겔16:10’

AC.297.심화 1. ‘겔16: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두르고 모시로 덧입히고 (겔16:10) I clothed thee with broidered work, and shod thee with badger, I girded thee about with fine linen, and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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