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7강 1부
씨 뿌리는 비유와 네 가지 마음밭
이번 강의에서 김경동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 전체를 지금까지 공부한 ‘기본진리’를 종합하는 하나의 체계로 봅니다. 그 가운데 ‘씨 뿌리는 비유’를 서론으로,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가라지 비유를 본론으로, 그물 비유를 결론으로 배치합니다. 무엇보다 강사가 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목표와 방향’이며, 그 중심에는 ‘영적 가치관’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겸손하고 충성하며 인내하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귀중합니다. 다만 강사는 곧 이 구조를 ‘14만 4천’과 ‘666’, 그리고 장차 있을 종말의 사건들과 연결하는데, 이 부분은 뒤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 씨 뿌리는 비유 자체에 집중하면,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질서와 상당히 깊게 만나는 부분이 드러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 3절 이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앗’을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진리, ‘씨 뿌리는 사람’을 복음 전도자, ‘밭’을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이라는 네 가지 밭을 사람들의 서로 다른 마음 상태로 설명합니다. 주목할 것은 강사가 이 비유의 초점을 ‘좋은 땅’과 ‘열매’에 둔다는 점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목적은 씨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얻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목적 역시 사람이 말씀을 알고 기억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매우 가까이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말씀의 ‘씨’는 단순한 종교적 정보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씨는 무엇보다 진리, 특히 사람의 마음속에 심겨 장차 선이 될 수 있는 진리를 표상합니다. 씨에는 이미 식물 전체가 될 가능성이 들어 있지만, 씨가 실제로 땅에 들어가 싹트고 자라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이해 안으로 들어오고, 거기서 의지와 결합하며, 마침내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바로 이 과정입니다. ‘씨’인 진리가 ‘열매’인 선한 삶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누가 구원받고 누가 구원받지 못하는가’를 가르는 네 부류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으면 그 의미가 다소 좁아질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넷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영적 성장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어느 밭인지를 시험하여 드러내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관점에서 보면 네 밭은 서로 다른 네 종류의 사람을 나타내는 동시에, 한 사람 안에서 말씀이 받아들여지는 서로 다른 상태들을 보여 주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완성된 ‘좋은 땅’으로 시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를 드러내시고 제거하시면서 우리 안에 좋은 땅을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타인을 분류하기 위한 말씀이기 전에 ‘지금 내 안에서 주님의 말씀은 어디에 떨어지고 있는가’를 묻게 하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 ‘길가’는 강사의 설명대로 매우 단단한 상태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계속 밟고 다니므로 씨가 땅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강사는 이것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강퍅한 마음, 세상일과 돈에 몰두하여 복음에 관심조차 없는 마음으로 설명합니다. 씨가 떨어져도 마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새’ 곧 악한 자가 와서 빼앗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길가’를 단순히 교회 밖의 불신자에게만 대응시키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길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수십 년 들어도 그 말씀이 내면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으며 교리를 알고 있어도, 그것을 자기 삶과 연결하지 않는다면 말씀은 여전히 마음의 표면에 머물러 있습니다. 특히 자기 확신과 proprium이 단단해져 있을수록 말씀은 깊이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이미 ‘나는 안다’, ‘나는 옳다’, ‘내 판단이 맞다’는 것이 굳어져 있으면, 말씀은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음성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확인하는 자료가 되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길가’는 반드시 무신론자나 불신자만의 상태가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신앙인에게도 생길 수 있는 영적 상태입니다.
여기서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새는 일반적으로 사고와 지적인 것들을 표상하며, 문맥에 따라 참된 사고를 나타내기도 하고 거짓된 사고와 추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씨를 먹어 버리는 새는 사람에게 들어온 말씀의 진리를 거짓된 사고와 추론이 빼앗아 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곧 자기 욕망에 맞는 논리를 만들어 그것을 무효화하고, 불편한 진리를 합리화하여 밀어내며, 결국 말씀을 듣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다’는 것은 단순히 외부에서 마귀가 달려와 무엇인가를 훔쳐 간다는 그림보다 훨씬 내적인 사건이 됩니다. 지옥으로부터 유입되는 거짓과 악이 사람 자신의 proprium과 호응하면서 진리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돌밭’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여기서는 씨가 아예 거절되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없습니다. 강사는 이것을 신앙생활을 시작한 뒤 연단과 시험이 찾아왔을 때 드러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은혜를 받고 기뻐하며 교회도 열심히 다니지만,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그 사람이 실제로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거듭남의 관점에서 중요한 통찰입니다. 처음 진리를 접할 때 느끼는 기쁨과 감동 자체가 곧 그 진리가 자기 생명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가 사람의 것이 되려면 단순히 이해되고 좋아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영적 시험은 사람이 이미 배운 진리가 실제 삶의 선택과 충돌할 때 일어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으며 감동하는 것과 실제로 나를 모욕한 사람 앞에서 자기애를 내려놓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에 아멘 하는 것과 정말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용서하는 것 사이에도 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바로 그 골짜기에서 진리는 뿌리를 내립니다. 따라서 강사가 연단을 영적 성장의 중요한 과정으로 강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시험’에 관한 가르침과 상당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시험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밭이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사람의 모든 상태를 아십니다. 시험은 오히려 사람 자신에게 자기 상태를 드러내며, 동시에 악과 거짓을 분리하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평상시에는 자신이 얼마나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붙들려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위협받는 순간 안에 숨어 있던 것이 올라옵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일종의 영적 진단인 동시에 수술입니다. 단순히 ‘당신은 돌밭입니다’라고 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돌을 걷어 내어 좋은 땅으로 만들기 위한 주님의 섭리 안의 과정입니다.
세 번째 ‘가시떨기’는 더욱 미묘합니다. 길가에서는 씨가 들어가지 못했고, 돌밭에서는 들어갔지만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시떨기에서는 씨가 자랍니다. 문제는 다른 것도 함께 자란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상태라고 직접 설명하셨습니다. 따라서 가시떨기의 가장 큰 위험은 신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랑이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사랑하지만 세상도 사랑하고, 천국도 원하지만 자기 성공도 포기하지 않으며, 말씀을 따르고 싶지만 자기 뜻 역시 놓고 싶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세상 사랑’ 자체를 무조건 악으로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직업을 갖고 돈을 벌고 가족을 돌보고 사회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질서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목적이 되고 주님과 이웃 사랑이 수단이 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반대로 재물과 지위와 능력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수단이 되면 그것들은 선한 용도(use)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시’의 본질은 돈 자체가 아니라 마음을 점령한 사랑의 우선순위입니다. 겉으로 같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이웃을 섬기는 수단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존재의 목적일 수 있습니다. 천국은 외적 소유의 양보다 그 소유를 움직이는 사랑의 질서를 봅니다.
마지막 ‘좋은 땅’에 이르면 이 강의의 핵심이 선명해집니다.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이며, 그 결과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합니다. 강사는 좋은 밭을 가진 성도들이 잘 성장하여 좋은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며, 세상에서 빛과 향기가 되게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이들을 더욱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과 연결하면서, 성도들에게 ‘적당히 천국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더욱 높은 영적 성장을 추구하라고 권면합니다. 더 겸손하고, 더 충성하고, 더 인내하며, 더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고, 편안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길보다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는 좁은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이번 강의에서 특별히 귀하게 받아들일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천국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믿고 죽은 뒤 들어가는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사람 안에 형성된 사랑과 생명의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사랑하고 선택하고 행한 것들을 통해 자기 생명의 형상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중요합니다. 씨가 진리라면 열매는 그 진리가 삶 안에서 선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위구원’과도 다릅니다. 열매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공로를 쌓아 천국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협력하여 살아감으로써 맺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강사가 ‘생명책’을 일종의 ‘저금통장’에 비유하면서 선행을 하면 상급이 쌓이고 더 큰 인내와 희생을 하면 더 많이 저축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교육적으로는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다듬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의 상급은 외적으로 선행의 개수를 계산하여 쌓아 두었다가 사후에 지급하는 보상이라기보다, 선을 사랑하여 행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 안에 형성된 천국적 생명 자체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더 겸손해진 사람은 ‘겸손의 점수’를 적립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천국적 성품이 그의 생명이 된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한 사람은 희생의 공로를 저축한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내적 그릇이 넓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은 단순한 외적 보상체계보다 훨씬 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고 행한 바로 그것의 사람이 되어 영계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좋은 땅을 특별한 목회자나 선교사, 순교자 같은 사람들에게만 연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강사는 좋은 밭을 가진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목회와 선교 같은 ‘하나님의 사업’을 맡기신다고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용도(use)의 관점에서는 평범한 일상생활 역시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는 자리가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고, 직장인이 정직하게 자기 일을 하고, 상인이 이웃에게 정당한 거래를 하며, 어려운 사람을 돕고,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도 모두 체어리티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직분의 크기보다 그 일을 움직였던 사랑의 질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씨 뿌리는 비유 전체를 하나로 묶어 보면 매우 아름다운 거듭남의 그림이 나타납니다. ‘길가 → 돌밭 → 가시떨기 → 좋은 땅’을 단순히 네 종류의 인간 명단으로만 읽지 않고, 주님께서 한 사람의 마음을 경작하시는 과정으로도 읽어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이 내 삶 깊숙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것이 길가입니다. 다음에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아직 자기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돌밭입니다. 그다음에는 말씀도 자라고 있지만 자기애와 세상 사랑도 함께 자라 서로 경쟁합니다. 이것이 가시떨기입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시험과 회개와 순종을 통해 돌을 걷어 내시고 가시를 제거하시면서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비로소 ‘좋은 땅’이 되어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은 타고나는 마음이 아니라 ‘경작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부가 밭을 갈고 돌을 걷어 내고 가시를 뽑고 거름을 주듯, 주님께서는 사람의 평생에 걸쳐 그 내면을 경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그 경작에 자유롭게 협력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진리를 배우며, 배운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고, 넘어지면 회개하여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정말 중요한 질문은 ‘나는 네 밭 가운데 어느 밭인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질문은 ‘오늘 주님께서 내 마음의 어느 돌을 걷어 내고 계시며, 어느 가시를 뽑고 계시는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김경동 강사가 강조하는 ‘영적 성장’, ‘좁은 길’, ‘자기희생’, ‘인내’, ‘온전한 사랑’, ‘육에 속한 삶을 벗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 부분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더 높은 상급을 얻기 위한 영적 실적 쌓기’로 이해하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진리를 선으로, 신앙을 체어리티로, 앎을 삶으로 바꾸어 가시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훨씬 깊어집니다. 좋은 땅의 최종 표지는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결국 씨 뿌리는 비유의 중심에는 ‘말씀이 사람 안에서 어떻게 생명이 되는가’라는 거대한 주제가 놓여 있습니다. 씨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햇빛과 비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밭을 주님께 내어 드리고, 돌과 가시가 드러날 때 그것을 붙들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때 말씀은 단순히 머릿속의 진리로 머무르지 않고 사랑과 행위 속으로 내려와 열매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열매가 그 사람 안에 형성된 천국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가 ‘씨 뿌리는 비유’를 전체 기본진리의 서론으로 놓은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에 나올 겨자씨의 ‘성장’, 누룩의 변화, 진주와 보화의 가치, 가라지와 그물의 분별도 결국 이 첫 질문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뿌리시는 말씀의 씨가 내 안에서 과연 무엇이 되고 있는가?’ 씨 뿌리는 비유는 바로 이 질문을 우리 각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던지고 있습니다.
7강 2부
겨자씨와 ‘장성한 나무’ : 영적 성장의 단계와 다른 생명을 품는 쓰임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가지 마음밭과 좋은 땅의 결실을 살펴본 강사는 이제 마태복음 13장의 두 번째 비유인 겨자씨 비유로 넘어갑니다. 강의 전체의 체계에서 씨 뿌리는 비유가 ‘서론’이라면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가라지 비유는 ‘본론’이고, 마지막 그물 비유가 ‘결론’입니다. 또한 강사는 이 가운데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 비유를 ‘교회 시대 이긴 자들’, 곧 계시록의 ‘14만 4천’과 연결하면서, 겨자씨는 그들의 ‘성장적인 측면’, 누룩은 ‘행실적인 측면’, 진주와 보화는 ‘생명적인 측면’을 각각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 체계는 앞으로 요한계시록 강의로 넘어가기 위한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강사의 영적 성장론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이 어디에서 만나는지를 살피는 동시에, 마태복음의 비유를 계시록의 특정 숫자와 직접 연결하는 방식은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겨자씨 비유는 매우 짧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강사가 특별히 붙드는 것은 겨자씨가 처음에는 매우 작지만 마침내 ‘나무’가 된다는 사실과, 그 나무의 가지에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를 영적으로 성장한 성도가 마침내 다른 성도들을 양육하고 천국 건설을 위해 쓰임 받는 모습으로 풀이합니다. 뒤이어 누룩 비유로 넘어가면서도 겨자씨 비유를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은 장성한 겨자나무로 만들어져 천국 건설 사업에서 성도들을 양육하는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인다’는 내용으로 다시 요약합니다.
이 대목에서 먼저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은 강사가 ‘영적 성장’을 자기완성으로 끝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씨가 자라 나무가 되는 목적은 단순히 ‘나는 이렇게 큰 나무가 되었다’고 자기 성장을 과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 수 있어야 합니다. 곧 다른 생명을 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한 ‘쓰임’의 개념과 만납니다. 천국의 모든 것은 쓰임을 향하며,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들어오는 궁극적인 목적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살아가는 천국적 존재가 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사랑이며, 사랑은 반드시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랑은 완성된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그의 참된 선을 원하며, 그 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은 끝없는 관조 속에서 자기 행복만 누리는 존재들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쓰임을 행하는 존재들입니다. 천국 전체가 하나의 ‘가장 큰 사람’(Grand Man, Maximus Homo)을 이루며, 각 공동체와 천사가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쓰임을 담당합니다. 겨자씨가 자라 가지를 내고 그 가지에 다른 생명들이 깃드는 그림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아름다운 적용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른 성도들을 양육한다’는 말을 곧바로 목회자나 지도자가 되는 것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의에서는 목양적 쓰임이 상당히 강조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은 훨씬 넓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사랑하는 것도 쓰임이고, 교사가 학생에게 진실한 지식을 전하는 것도 쓰임이며, 직장에서 자기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는 것도 쓰임이고, 아픈 사람을 돌보고 외로운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도 쓰임입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나무’로 성장시키셨다고 해서 반드시 그에게 많은 제자를 붙이시거나 종교적 지도자의 자리를 맡기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도 한 사람의 생명이 다른 사람에게 쉴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겨자씨의 모습과 더 잘 어울립니다. 겨자씨는 처음부터 거대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습니다. 천국의 시작도 대개 그렇습니다. 사람이 처음으로 악한 일을 ‘주님께 죄가 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작은 결심, 손해를 보면서도 한 번 정직을 선택하는 것, 미워하던 사람에게 한 번 친절하게 대하는 것, 자기 공로를 드러내고 싶지만 조용히 물러서는 것, 이런 작은 선택들 속에 천국의 씨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 씨 안에는 장차 큰 나무가 될 생명의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와도 생각해 볼 만한 접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어릴 때부터 경험한 사랑과 순진함,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그의 내면 깊은 곳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평소에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훗날 거듭남 가운데 그것들을 사용하십니다. 겨자씨처럼 작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존되었던 주님의 선물이 때가 되면 새로운 영적 생명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겨자씨 비유의 ‘씨’를 곧바로 리메인스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지만, ‘작게 시작된 주님의 것이 훗날 큰 영적 생명으로 자란다’는 질서에서는 아름다운 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러한 성장을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배운 ‘영적 성장론’을 다시 불러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과 광야 여정을 한 사람의 신앙 성장 과정에 대한 ‘모형’으로 읽습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은 세상적·육적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시작이고, 광야는 여러 시험과 연단을 통과하는 과정이며, 마침내 익은 열매가 되어 하나님의 곡간에 들어갈 준비를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과정에서 ‘광야에서 세 차례 연단의 과정을 반드시 받아야 익은 열매가 되어 천국 곡간에 추수될 수 있다’고 말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와 더불어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영적 성장의 단계를 보완해서 보여 주는 자료로 사용합니다.
바로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출애굽과 광야 여정을 인간의 거듭남으로 읽는 기본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입니다. 오히려 ‘천국의 비밀’에서 출애굽기의 속뜻을 따라가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모든 과정은 인간의 구원과 거듭남에 관한 내적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애굽, 바로, 홍해, 만나, 반석의 물, 시내산, 성막, 광야의 여러 사건은 단순히 옛 이스라엘의 민족사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의 여러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광야-가나안’을 신앙생활의 영적 여정으로 읽는 강사의 기본 직관에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것이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과정은 인간이 미리 정해진 몇 개의 단계표를 차례로 통과하는 방식으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특히 ‘세 차례 연단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식으로 고정된 공식을 만드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말씀 안에는 분명 질서가 있지만, 그 질서가 모든 사람에게 외적으로 똑같은 사건과 횟수로 반복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은 훨씬 유기적입니다. 사람마다 지배적 사랑과 타고난 성향, 교육, 환경, 받아들인 진리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시험의 형태와 깊이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매우 격렬한 내적 시험을 통과하고, 어떤 사람은 일상의 작은 선택들을 통해 오랫동안 변화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몇 번째 연단인가?’가 아니라 그 시험 가운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사람이 주님의 도움으로 그것에 저항하여 선과 진리가 더욱 깊이 결합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영적 성장의 단계를 지나치게 외적으로 체계화하면 사람은 자기 상태를 끊임없이 측정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첫 번째 연단인가, 두 번째 연단인가?’, ‘나는 가나안에 들어갔는가?’, ‘나는 익은 열매인가?’, ‘나는 겨자나무가 되었는가?’ 하는 식입니다. 그러다 보면 원래 자기부인을 위해 주어진 영적 성장론이 역설적으로 proprium의 새로운 재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높은 단계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영적 성장을 추구하는 바로 그 열심 속에 자기애가 숨어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영적 성장은 오히려 자기 높이를 잊어 가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사람이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자기가 선의 근원이 아님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천사들이 인간보다 훨씬 지혜롭고 선하면서도 모든 선과 진리를 주님께 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높은 천사일수록 ‘내가 얼마나 높은 단계에 있는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선을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표지는 ‘자기가 큰 나무임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들이 그 가지에서 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가 ‘천로역정’을 끌어오는 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강사는 장망성을 떠난 기독도가 천성을 향해 가는 여정을 신앙의 단계들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로 보고,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과 서로 보완해서 보면 신앙의 각 단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천로역정’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말씀은 아니지만, 한 사람이 죄와 세상의 도시를 떠나 시험과 유혹을 지나 천성을 향해 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신앙 여정에 대한 매우 강력한 비유적 그림을 제공합니다.
다만 여기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가지 구별을 유지합니다. ‘천로역정’은 영적 교훈을 주는 훌륭한 기독교 문학이지만, 창세기와 출애굽기처럼 모든 세부가 신적 질서에 따라 속뜻을 담고 있는 ‘말씀’은 아닙니다. 따라서 ‘천로역정’의 어떤 장면과 출애굽기의 어떤 사건이 비슷하다고 해서 두 텍스트가 같은 상응적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는 인간이 영적 진리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자 안에 연속적인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이 구별을 지키면서 읽으면 ‘천로역정’은 오히려 훌륭한 보조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어 팔복도 영적 성장의 단계와 연결합니다. 원고에서는 이를 ‘8단 진복’으로 부르면서 여덟 복을 여덟 단계의 성장 과정처럼 바라보려는 시도를 합니다. 여기에도 흥미로운 통찰과 함께 주의점이 있습니다. 팔복의 순서가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에서 순서는 우연하지 않으며,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 시작하여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에 이르는 흐름에는 분명 영적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신앙인이 반드시 1단계부터 8단계까지 차례대로 통과해야 하는 외적 성장표로 고정하기보다,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함께 형성되어 가는 천국적 애정들의 질서로 읽는 편이 더 깊습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영적 성장의 초급 단계라는 의미를 넘어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가 나오지 않음을 인정하고 주님을 필요로 하는 상태입니다. ‘온유함’은 일정 단계를 통과한 뒤 획득하는 자격증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를 주님의 질서 아래 두는 천국적 성품입니다. ‘마음이 청결함’, ‘화평하게 함’,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음’ 역시 서로 완전히 분리된 계단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사람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은 사다리처럼 올라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나무가 뿌리·줄기·가지·잎·열매를 함께 이루며 자라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겨자씨 비유 자체가 영적 성장에 관한 더 안전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준다고 봅니다. 겨자씨는 자기 성장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씨 안에 주어진 생명의 질서에 따라 뿌리를 내리고 자랍니다. 땅에서 수분과 양분을 받고 하늘에서 빛과 열을 받아 자랍니다. 인간의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배운 진리를 삶에서 행합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실제 성장을 이루십니다.
여기서 ‘빛’과 ‘열’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언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빛은 신적 진리이고 천국의 열은 신적 사랑입니다. 식물이 자연계의 빛과 열 없이는 자랄 수 없듯, 인간의 영도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사랑 없이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으며, 사랑이라고 하면서 진리가 없으면 방향을 잃습니다.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가 결합될 때 비로소 생명이 성장합니다. 이것은 지금 AC 창세기 4장에서 살펴보고 있는 ‘신앙과 사랑의 분리’라는 문제와도 깊은 곳에서 연결됩니다. 신앙은 독립하여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양적 성장이 아닙니다. 성경을 더 많이 알고, 더 오래 기도하고, 더 많은 사역을 맡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반드시 영적 성장과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나무가 커진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더욱 깊이 결합되고,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실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자라는 것입니다. 영향력은 커졌는데 사랑은 작아질 수도 있고, 지식은 많아졌는데 겸손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적인 의미에서 나무가 자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강사가 반복해서 ‘겸손’, ‘충성’, ‘인내’, ‘온전한 사랑’을 성장의 표지로 말하는 것은 그래서 귀합니다. 외적 규모보다 내적 성품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덕목들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결국 지배적 사랑의 변화에 도달합니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은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보다 ‘무엇이 선한가?’,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이웃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의 실제 방향입니다.
특히 겨자나무의 가지에 새들이 와서 깃든다는 장면은 이 관점에서 아름답습니다. 강사는 이것을 다른 성도들을 양육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이 적용을 살리면서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덧붙이면, 말씀에서 ‘새’는 문맥에 따라 생각, 지적 인식, 진리에 관한 이해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나무처럼 질서 있게 성장하면 그 안에는 여러 진리의 인식과 생각들이 깃들 자리가 생긴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진리 하나를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삶과 결합하면서 점점 더 많은 진리들이 서로 연결되고, 마침내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구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 지식이 많아지는 것과 다릅니다. 처음에는 진리들이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 신앙, 회개, 섭리, 천국, 체어리티, 쓰임 등에 관한 여러 교리를 각각 알고 있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 진리들이 선 안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계명의 중심인지, 왜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는지, 왜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것이 필요한지, 왜 쓰임이 천국적 사랑의 표현인지가 하나의 살아 있는 질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작은 겨자씨가 가지 많은 나무가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무가 되라’는 권면을 ‘큰 사람이 되라’는 말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다른 생명이 쉴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고, 그 곁에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지식을 과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진리를 알면서도 상대의 상태에 맞추어 필요한 만큼만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의 모습에서 겨자나무의 ‘그늘’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참된 영적 권위가 무엇인지도 보여 줍니다. 영적 권위는 다른 사람을 자기 아래 두는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주님을 향하도록 돕는 능력입니다. 자기에게 사람들을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주님께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목양자는 ‘내 제자’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양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나무의 가지에 새들이 깃들지만 새들이 나무의 소유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는 그들에게 잠시 쉴 자리와 보호를 제공합니다.
이 점에서 겨자씨 비유를 ‘14만 4천’과 연결하는 강사의 해석은 그 의도를 이해하면서도 일단 한 걸음 유보하여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사는 겨자씨를 ‘14만 4천의 성장적인 측면’으로 명확히 규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14만 4천은 문자 그대로 특별히 높은 수준에 도달한 144,000명의 영적 엘리트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 숫자는 상응적으로 읽어야 하며, 계시록의 문맥 안에서 주님을 인정하고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충만한 전체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이 부분은 곧 계시록 본 강의에 들어가면 충분히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더 중요한 것은 강사가 왜 겨자씨 비유를 14만 4천과 연결하려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의 관심은 숫자 자체보다 ‘이긴 자’, ‘성숙한 성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겨우 구원받는 수준에서 멈추지 말고, 주님을 닮아 성숙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다른 영혼을 섬길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중심 의도는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더 높은 단계의 성도’라는 언어를 천국의 서열 경쟁으로 바꾸지 않고, ‘더 깊이 자기 자신을 잊고 더 자유롭게 주님의 쓰임이 되는 사람’이라는 방향으로 읽어 주면 훨씬 천국적인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겨자씨 비유의 역설이 빛납니다. 천국에서 ‘큰 사람’은 자기가 커지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기 때문에 큰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에서 시작하여 큰 나무가 됩니다. 천국적 성장은 바로 이 역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기 자신이 커지려 할수록 천국에서는 작아지고,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선이 흘러가도록 할수록 다른 생명을 품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됩니다.
그렇게 보면 겨자씨 비유는 ‘핵심진리’의 영적 성장론을 정화하고 깊게 해 주는 매우 좋은 중심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몇 단계까지 올라갔는가?’보다 ‘얼마나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가?’보다 ‘얼마나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한 쓰임이 되고 있는가?’, ‘얼마나 높은 성도가 되었는가?’보다 ‘얼마나 자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사랑이 지나가는 통로가 되었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겨자씨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성장의 크기’보다 ‘성장의 방향’입니다. 시작은 작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 하나가 마음에 심깁니다. 그 진리를 삶에서 행하면 뿌리가 내립니다. 시험을 통과하면서 뿌리는 더 깊어집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하면서 줄기가 생기고 가지가 뻗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그늘과 쉼을 제공하는 쓰임으로 확장됩니다. 그때 겨자씨는 비로소 ‘나무’가 됩니다.
그러므로 7강 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은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영적 성장은 사람이 높은 단계의 존재가 되어 자기 완성을 이루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작은 선과 진리가 시험과 삶을 통하여 그의 생명이 되고, 마침내 그 생명이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한 쓰임으로 확장되어 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강의는 이 ‘장성한 겨자나무’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나무가 얼마나 자랐는가에서 이제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로 시선을 옮깁니다. 바로 ‘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가 마침내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입니다. 강사도 겨자씨를 ‘성장적인 측면’으로 정리한 뒤 누룩을 ‘행실적인 측면’으로 전환합니다. 다음 7강 3부에서는 이 누룩 비유를 중심으로, ‘행실의 정결’이라는 ‘핵심진리’의 강조가 스베덴보리의 ‘겉 사람의 질서화’, 그리고 선과 진리가 삶 전체로 내려가는 거듭남과 어떻게 만나고 또 어디에서 구별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7강 3부
누룩과 ‘행실의 정결’ : 속에서 시작하여 삶 전체로 퍼지는 거듭남
겨자씨 비유에서 강사가 주목한 것은 ‘성장’이었습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고, 마침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드는 것처럼 영적으로 성장한 성도가 다른 사람을 품고 양육하는 쓰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강의는 마태복음 13장 33절의 누룩 비유로 넘어가면서 시선을 조금 바꿉니다. 겨자씨가 ‘얼마나 자랐는가’를 보여 준다면 누룩은 ‘그 성장이 실제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는가’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를 ‘14만 4천의 행실적인 측면’이라고 표현하면서,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을 영적으로 성장하여 행실이 정결해진 성도의 모습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충분히 살려 볼 만한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신앙은 사람의 머릿속 한 부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의 생활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룩 비유는 매우 짧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강사가 특별히 주목하는 말은 ‘전부’입니다. 누룩은 반죽 한구석만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적은 양이 들어가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죽 전체에 퍼집니다. 그래서 강사는 누룩을 ‘행실’과 연결합니다. 신앙이 깊어졌다고 하면서 종교적인 몇몇 행동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활과 인격 전체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오래 하며 영적인 체험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실제 생활이 이전과 다르지 않다면 그 신앙이 어디까지 생명 안으로 들어왔는지를 다시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속 사람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겉 사람 안으로 내려와 그곳의 생각과 욕망, 말과 행동을 질서 있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처음 진리를 배울 때 그것을 이해성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옳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앎과 삶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해성에서는 용서가 옳다는 것을 알지만 의지에서는 여전히 미워할 수 있고, 정직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 이익이 걸리면 거짓을 선택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아직 사람 전체에 퍼진 것이 아닙니다. 가루 한 부분에 누룩이 들어갔지만 아직 반죽 전체가 변화되지 않은 것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진리가 사람의 더 깊은 곳으로 계속 내려가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고 압니다. 그다음 실제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억제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힘듭니다. 자기 이익을 잃을 수도 있고 체면이 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며 반복하여 악을 죄로 알고 피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정직이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되어 갑니다. 이전에는 ‘거짓말하면 안 되니까 하지 않는다’였다면 점차 ‘거짓 자체가 싫고 진실한 것이 좋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로 변화합니다. 진리가 이해성에서 의지로 내려온 것입니다. 바로 이때 누룩이 더 깊이 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악을 죄로 알고 피하라’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마음을 직접 선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나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결심한다고 해서 곧 겸손한 사랑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만이 실제 행동으로 나오려 할 때 ‘이것은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악이다’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 복수하지 않고, 거짓말하고 싶은 유혹이 올 때 거짓말하지 않으며, 자기 공로를 드러내고 싶을 때 그것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악한 애정을 점차 약하게 하시고 새로운 선한 애정을 형성하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행실의 정결’이라는 강사의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외적 행동이 깨끗해지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술을 마시지 않고, 욕설을 하지 않고,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곧 내면까지 정결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명예를 위해서도 선한 행동을 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도 희생할 수 있으며, 천국에서 큰 상을 받겠다는 자기 유익 때문에도 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 행위가 같아도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의도’를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한 행위의 영혼은 그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선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선은 외관상 비슷해도 영적으로는 서로 다릅니다. 따라서 행실의 정결은 행동 목록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일으키는 사랑이 정결해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누룩이 반죽의 표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속까지 스며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 점에서 누룩 비유는 앞의 좋은 밭 비유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좋은 밭의 특징은 ‘열매’였습니다. 진리가 실제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누룩 비유는 그 열매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다른 방향에서 보여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진리가 사람 안에 들어와 생각과 의지 전체에 퍼지면, 마침내 삶에서도 새로운 행동이 나타납니다. 선한 행동은 외부에서 억지로 붙인 장식이 아니라 안에서 변화된 생명이 밖으로 나타난 열매가 됩니다.
여기서 누룩이라는 상징 자체를 조금 조심해서 볼 필요도 있습니다. 성경을 오래 읽은 독자라면 ‘누룩은 보통 나쁜 것을 뜻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고, 다른 성경 문맥에서도 누룩은 악이나 거짓이 퍼져 나가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은 하나의 사물에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의미만 붙이는 단순한 상징 사전이 아닙니다. 문맥과 관계에 따라 좋은 의미와 반대 의미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직접 ‘천국은 … 누룩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시므로, 누룩의 ‘퍼져 나가 전체를 변화시키는 성질’이 천국의 긍정적인 질서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할 때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돌은 이것’, ‘새는 이것’, ‘물은 이것’, ‘누룩은 이것’이라고 단어 하나에 뜻 하나를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상응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불도 주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고 지옥의 자기애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같은 사자도 주님의 신적 능력을 나타낼 수 있고 파괴적인 거짓의 힘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무엇을 표상하는가는 그 사물이 놓여 있는 말씀의 전체 문맥과 내적 연결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상응은 암호표가 아니라 영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누룩을 ‘행실적인 측면’과 연결하면서 특히 ‘정결’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앞서 계속 설명해 온 연단과 연결합니다. 사람은 여러 시험을 거치면서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들이 벗겨지고, 점차 주님을 닮은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강사가 반복하여 제시하는 덕목은 겸손, 충성, 인내, 사랑, 자기희생 등입니다. 이런 덕목들을 단순히 도덕적 품성 목록으로 보는 것보다 거듭남 가운데 형성되는 ‘새 의지’의 표현으로 보면 훨씬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겸손은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으로 깎아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자기 능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능력의 근원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충성 역시 사람이나 조직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주님 앞에서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인내는 고통을 많이 견뎠다는 영적 실적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서도 선과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사랑 역시 감정적인 따뜻함에 머물지 않고 상대방의 실제 선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말하는 ‘행실의 정결’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매우 깊은 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핵심진리’의 설명에서는 여러 연단을 통과하여 마침내 ‘성화된 성도’, ‘이긴 자’, ‘익은 열매’가 되는 상태가 비교적 뚜렷한 단계처럼 제시됩니다. 그리고 강사는 이들을 계시록의 14만 4천과 연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거듭남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과정이며, 인간이 ‘나는 이제 완전히 정결해졌다’고 자기 상태를 확정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더 깊이 거듭날수록 자기 안에 남아 있는 proprium을 더 섬세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실제로는 더 선해지지만, 자기 눈에는 오히려 자기의 부족함이 더 잘 보일 수 있습니다. 밝은 방에 들어갈수록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빛이 희미할 때는 자기 안의 거친 악 몇 가지만 보이지만, 빛이 밝아지면 이전에는 선이라고 생각했던 행동 안에도 자기 인정 욕구와 공로의식과 지배욕이 섞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거듭남은 ‘나는 이제 성화되었다’는 자기 확신보다 ‘주님 없이는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더욱 깊은 겸손으로 사람을 이끕니다.
따라서 누룩이 ‘전부 부풀게 했다’는 말씀을 인간이 어느 시점에서 완전무결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읽기보다, 천국의 질서가 사람의 삶 전체를 향하여 확장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전에는 신앙이 주일예배와 기도 시간에만 관련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도 들어옵니다. 가족과 대화하는 방식에도 들어옵니다. 직장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들어옵니다. 인터넷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말을 쓰는지에도 들어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었을 때 그것을 퍼뜨리는가 덮어 주는가 하는 데에도 들어옵니다. 진리는 점점 더 많은 삶의 영역을 비춥니다.
이것이 ‘전부’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종교적인 부분만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 전체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모든 것을 없애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것을 질서 안에 놓으십니다. 사람이 가진 재능, 지식, 직업 능력, 인간관계, 재산, 성격까지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새로운 사랑 아래 놓여 쓰임을 위해 사용되게 하십니다. 이전에는 자기 명예를 위해 사용하던 지성을 이제 진리를 섬기는 데 사용하고, 자기 만족을 위해 사용하던 재물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강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육적인 것을 버린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자연계도 주님의 창조이며 인간의 몸과 감각과 자연적 애정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지배하는 데 있습니다. 자연적인 것이 주인이 되면 사람은 보이는 것과 감각적 쾌락과 세상적 이익만을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이루어지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가 자연적 욕망과 생각들을 질서 있게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육을 버린다’는 것을 몸과 세상을 미워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돈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쓰임을 위해 사용하고, 몸은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 도구로 돌보며, 가족 사랑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만 사랑하는 폐쇄적인 사랑에서 더 넓은 이웃 사랑의 질서 안에 놓습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길 때 자연적인 것 역시 선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올바른 질서입니다.
누룩 비유에는 또 하나 아름다운 특징이 있습니다. 변화가 조용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겨자나무는 밖으로 자라는 모습이 눈에 보이지만 누룩은 반죽 안에서 보이지 않게 작용합니다. 거듭남에도 이런 면이 있습니다. 큰 영적 체험이나 극적인 사건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날마다 반복되는 작은 선택 가운데서 주님께서 조용히 사람의 애정을 바꾸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번 참는 것, 한 번 정직하게 말하는 것, 한 번 자기 주장을 내려놓는 것, 한 번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것, 이런 작은 선택들이 수년간 쌓이면서 어느 날 돌아보면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거듭남을 너무 쉽게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누룩은 안에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아직 많은 부족함이 보여도 그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오래 작업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겉으로 매우 경건해 보여도 내면에서는 자기애가 여전히 중심을 차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보시지만 우리는 대부분 외적인 것만 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을 말할수록 타인에 대한 판단은 오히려 줄어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14만 4천’이라는 강사의 표현도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우리 가운데 특별히 성화에 성공한 최상위 성도 144,000명’이라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영적 성장론은 쉽게 서열론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숫자를 상응적으로 읽으면 전혀 다른 방향이 열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수는 자연계의 통계 숫자를 알려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질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문자적 인원수를 세기보다 선과 진리의 충만함, 그리고 주님께 속한 사람들의 완전한 전체라는 방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뒤의 계시록 본 강의에서 충분히 다루겠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강사가 14만 4천에게 부여한 특징 가운데 ‘행실이 정결하다’는 부분을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생명의 변화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신앙만’을 끊임없이 경계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되지 않으면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는 실제 삶의 선한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믿는가?’와 ‘어떻게 사는가?’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순서를 정확히 해야 합니다. 선한 행실을 많이 해서 자기 힘으로 천국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행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시간이 지나면 처음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이 점차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천국적 자유입니다. 악을 하고 싶은데 억지로 참는 단계에서, 선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쁘게 행하는 단계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룩은 ‘외적 도덕성’보다 훨씬 깊은 것을 보여 줍니다. 반죽의 모양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의 상태가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은 사람이 종교적으로 보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 자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지만 점차 주님과 이웃을 중심으로 보게 됩니다. 이전에는 ‘나에게 무엇이 이익인가?’가 첫 질문이었다면 ‘무엇이 선한가?’가 첫 질문이 되어 갑니다. 바로 이것이 지배적 사랑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지배적 사랑이 바뀌면 다른 것들이 따라 바뀝니다. 생각이 바뀌고, 말이 바뀌며, 인간관계가 바뀌고, 돈을 사용하는 방식이 바뀌며,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도 바뀝니다. 이것이 누룩이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는 모습과 같습니다. 사람은 억지로 수백 가지 행동규칙을 외워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 사랑이 변화됨으로써 삶의 여러 부분이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보면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서로 아주 아름답게 보완됩니다. 겨자씨는 생명이 ‘자라는 것’을 보여 주고, 누룩은 그 생명이 ‘스며드는 것’을 보여 줍니다. 겨자씨는 작은 시작이 큰 쓰임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누룩은 작은 천국적 생명이 사람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바깥으로 뻗어 가는 성장이고 다른 하나는 안으로 스며드는 변화입니다. 참된 거듭남에는 둘 다 필요합니다.
사람의 영향력만 커지고 내면이 변화되지 않으면 겨자나무처럼 커 보일 수는 있어도 천국적 나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내면의 경건만 강조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한 쓰임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역시 완전한 천국적 생명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은 안에서는 사랑과 성품을 변화시키고 밖에서는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내적 변화와 외적 쓰임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실의 정결’이라는 말을 가장 깊이 이해하면, 그것은 흠 하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삶 전체를 점점 더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내 지성이 주님의 진리를 위해 쓰이고, 내 말이 다른 사람을 세우는 데 쓰이며, 내 손과 발이 선한 일을 위해 움직이고, 내가 가진 재물과 시간과 능력이 쓰임을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갈수록 누룩은 ‘전부’를 부풀게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의는 매우 자연스럽게 다음 비유로 넘어갑니다. 사람이 그렇게 성장하고 삶 전체가 변화되었다면, 그 변화의 가장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었으며, 무엇이 그렇게 귀했기에 자기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을 강사는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에서 찾습니다. 사람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얻고 싶은 가장 귀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7강 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참된 신앙은 인간의 종교적인 한 부분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흘러들어가 생각과 의지, 말과 행동, 관계와 쓰임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삶 전체를 새로운 질서 안에 놓는 거듭남입니다.’ 누룩은 아주 작지만 마침내 ‘전부’를 변화시킵니다. 주님의 나라 역시 그렇게 사람 안에 임합니다.
이제 7강 4부에서는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를 중심으로 강사가 말하는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어가면 proprium과 아주 깊이 연결됩니다. 무엇을 버려야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가, 외적인 재산과 관계를 버리는 것과 자기 소유의식을 버리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이 어떻게 사람에게 ‘자기 것처럼’ 주어지는가 하는 문제까지 이어질 수 있겠습니다.
7강 4부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것과 하나님의 생명
누룩 비유에서 강사는 ‘행실의 정결’을 보았다면, 이제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비유에서는 그보다 더 깊은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부터 46절에서 한 사람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장사는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한 뒤 역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강사는 이 두 비유가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보고, 특히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표현을 강하게 붙듭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진주의 값은 자기 소유를 몽땅 파는 값’입니다. 하나라도 붙들고 있으면 그 진주를 살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강사는 이 ‘진주’와 ‘보화’를 단순히 복음이나 진리, 믿음, 천국, 구원이라고 해석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보는 것이 비유의 초점에 더 맞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년 이야기를 연결하여, 영생을 얻기 원하는 청년에게 주님께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진주 비유의 보충 설명처럼 사용합니다. 강사의 해석에서 물질적 소유뿐 아니라 ‘죄성과 정욕’까지도 인간이 붙들고 있는 ‘소유’이며, 그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광야 연단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핵심진리’의 성장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진주와 보화는 단순히 귀중한 교리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을 얻기 위하여 자기에게 속한 것을 내려놓는 전체적인 자기부인의 과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proprium의 문제와 아주 깊이 만납니다. 인간에게 가장 깊은 ‘자기 소유’는 반드시 재산이나 물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선’, ‘내 공로’, ‘내 지혜’, ‘내 의’, ‘내 삶은 내 것이다’라고 여기는 모든 자기 소유의식이 더 깊은 차원의 proprium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타락한 인간의 own, 곧 proprium은 자기 자신을 선과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는 상태와 밀접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씀을 거듭남의 깊은 층위에서 읽으면, 단순한 무소유나 재산 포기보다 훨씬 근본적인 자기 포기가 보입니다.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와 생명이 나온다는 착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모든 재산을 버렸다고 해서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다’, ‘나는 남들보다 더 희생했다’는 새로운 자기 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과 책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선한 쓰임을 위해 관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단순히 ‘얼마나 버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사랑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외적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더 깊은 목적은 소유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바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진주의 값은 자기 소유 전부’라는 강한 표현은 영적으로 매우 도전적이면서도, 동시에 문자적으로 적용할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가족과 재산과 직업을 모두 잃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강의의 다른 부분에서는 세 번째 연단 과정의 특징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모든 육적 소유를 걷어가신다’고 말하며 욥의 재산과 자녀 상실을 예로 듭니다. 이 표현을 그대로 일반화하면 매우 무거운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모든 거듭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재산과 가족을 실제로 빼앗으셔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악과 고통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인간에게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허용된 사건들을 선을 위해 사용하실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모든 외적 소유를 잃어야 한다’는 고정된 공식을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실제 물질적 손실이 proprium을 드러내는 시험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명예나 인정욕구, 자기 지혜, 관계에 대한 집착이 훨씬 더 깊은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루시는 것은 외적 목록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붙들고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빈털터리가 되어야 한다’기보다 ‘주님보다 더 높이 두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방향에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돈이 그것일 수도 있고, 명예가 그것일 수도 있으며, 자기 교리가 그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영적 체험이 그것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옳다’는 확신조차 값진 진주보다 더 붙들고 있다면 자기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prium은 종교적인 모습을 입고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강사는 부자 청년의 ‘소유’를 물질뿐 아니라 ‘죄성과 정욕’까지 넓혀 읽습니다. 이 적용의 방향에는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데 실제로 방해가 되는 것은 소유물 자체보다 그것을 향한 애정과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돈을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자기 안전과 가치의 최종 근거로 삼는 것이 문제이고, 몸을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감각적 쾌락이 주님의 질서보다 위에 놓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성과 정욕을 ‘소유’라고 부르는 강사의 언어는 다소 독특하지만,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proprium과 대화할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이 악을 ‘버리는’ 방식도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악을 제거하여 깨끗한 존재가 된 뒤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의 빛으로 악을 악이라고 보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그 악을 행하지 않으려고 할 때 주님께서 실제로 그 악을 분리하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하지만, 승리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내 소유를 다 팔아야 진주를 살 수 있다’는 말씀도 거래처럼 이해하면 안 됩니다. 내가 충분히 희생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하나님의 생명을 구매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산다’는 행위 자체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나타낸다고 보는 편이 좋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가장 귀한지를 발견한 뒤 다른 것의 상대적 가치를 새롭게 봅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여’ 자기 소유를 팝니다. 이 ‘기뻐하여’라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강요당하여 빼앗긴 것이 아니라 더 큰 가치를 보았기 때문에 작은 것을 놓는 것입니다. 천국의 생명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버리는 것이 큰 희생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평안의 가치를 실제로 맛보기 시작하면, 이전에 그렇게 귀하게 붙들던 것들이 점차 작아 보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자기부인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자유가 되어 갑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복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 때문에 억지로 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미움 자체가 얼마나 자신을 묶고 있었는지를 깨닫고, 용서하는 것이 더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정직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이 아깝지만, 나중에는 정직한 양심의 평안이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자기 공로를 내려놓는 것이 허전하지만, 나중에는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편안합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것입니다.
강사는 진주를 찾아다니는 장사의 모습을 광야 길을 가는 신앙인의 모습과 연결합니다.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을 찾아 장망성을 떠나는 ‘천로역정’의 기독도, 광야를 지나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의 여정, 그리고 일시적으로 생명의 내주합일을 경험하는 과정까지 하나의 성장 구조로 연결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찾는 갈망’이라는 강한 중심이 있습니다. 사람이 천국의 진리를 조금 맛본 뒤 그보다 더 깊은 생명을 찾기 위해 계속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는 표현을 조금 조심스럽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안에 독립적인 소유물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천사도 자기에게서 사랑하고 생각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천사와 인간이 그 생명을 완전히 자기 것처럼 느끼도록 하십니다. 그래야 자유와 상호적인 결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옮긴다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점점 더 자유롭고 온전하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표현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양도되어 인간 자신의 독립적 재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내 생명은 내 것이다’라는 proprium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더 자유롭게 흘러들어옵니다. 이것이 매우 놀라운 역설입니다. 자기 것을 붙들수록 빈곤해지고, 자기 것을 내려놓을수록 풍성해집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 proprium’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타락한 proprium은 ‘선은 나에게서 나온다’, ‘지혜는 내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거듭난 사람에게 주시는 새로운 proprium은 전혀 다릅니다. 사람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사랑하고 행하지만, 동시에 그 근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음을 압니다. 그래서 천사는 선을 자기 것처럼 행하면서도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값진 진주를 얻는다는 것은 자기 인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짓된 자기 소유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기성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지고 하나님만 남는다’는 식의 존재론적 합일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 안에서 사람이 더욱 참된 인간이 되어 갑니다. 자기애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사람의 평가에서 더 자유로워지며,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더욱 투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주와 보화의 ‘가치’라는 주제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 다른 것들을 정리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가장 귀하기 때문에 건강과 관계와 양심까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가 가장 귀해서 진실까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가장 귀해지면 돈과 명예와 편안함은 그 아래에 놓입니다. 버려야 할 것이면 버리고, 사용할 수 있으면 쓰임을 위해 사용합니다. 이것이 지배적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를 묻기보다 ‘무엇이 나에게 가장 값진 진주인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훨씬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가,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는가보다, 실제 선택의 순간에 무엇을 더 귀하게 여기는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뜻과 내 체면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택하는가, 진실과 이익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택하는가, 체어리티와 자기 의가 충돌할 때 어느 쪽을 붙드는가가 그 사람의 진짜 보화를 드러냅니다.
강사가 이 비유를 ‘14만 4천의 생명적인 측면’이라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14만 4천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소유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명을 실제로 소유한 ‘이긴 자들’입니다. 이 구조는 뒤의 계시록 해설에서 본격적으로 검토해야겠지만, 지금은 그 안의 영적 의도를 살릴 수 있습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특별한 숫자 집단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실제 내 사랑과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14만 4천’이라는 표지를 붙이는 순간 한 가지 위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생명을 얻었는가’, ‘나는 이긴 자인가’, ‘나는 다른 성도보다 더 높은 단계에 있는가’라는 자기 측정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값진 진주 비유의 방향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진주를 얻으려면 ‘자기 소유’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진주를 얻은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의식 자체가 새로운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깊어질수록 자신의 단계보다 주님의 선하심을 더 바라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도 같은 빛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계명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상당히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가장 깊은 애착을 건드리시자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문제는 그가 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돈이 그의 의지 안에서 주님보다 더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외적인 도덕성 아래 숨어 있던 지배적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우리에게도 ‘네 소유를 다 팔라’는 말씀은 각기 다른 곳을 건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일 수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목회적 성공이나 학문적 명성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나는 이 신학이 옳다고 확신한다’는 자기 지성의 소유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런 것들을 무조건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도 주님보다 위에 두지 않는 질서입니다. 필요하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고, 계속 가지고 있어도 주님의 쓰임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자기 소유를 다 판다’와 ‘자기부인’은 서로 만납니다. 자기부인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거나 인간적 필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내 욕망과 내 판단과 내 유익이 주님의 선과 진리보다 우선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기부인은 사람이 점점 작아져 무기력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애의 속박에서 벗어나 주님의 선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사가 강조하는 ‘좁은 길’과도 연결됩니다. 좁은 길은 고생 그 자체가 영적으로 훌륭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던 것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에 좁게 느껴지는 길입니다. 자기애가 강할수록 그 길은 좁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질서가 바뀌면 같은 길이 자유의 길이 됩니다. 처음에는 ‘잃는다’고 느꼈던 것이 나중에는 ‘벗어난다’고 느껴집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팔았다’는 말과 ‘기뻐하였다’는 말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자기부인과 기쁨은 반대가 아닙니다. 천국적 자기부인은 더 큰 선을 발견했기 때문에 작은 것을 놓는 기쁨입니다. 세상 사랑만 있을 때는 주님의 계명이 손실로 느껴질 수 있지만, 주님 사랑이 자라면 계명은 자유가 됩니다. ‘값진 진주’의 가치를 실제로 안 사람에게는 그 진주를 얻기 위해 내려놓는 것이 궁극적으로 손해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기쁨’ 이해와도 잘 만납니다. 천국의 기쁨은 외적인 보상으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 안에 있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웃의 행복이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값진 진주를 얻는다는 것은 천국적 사랑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으면 이전의 가치 체계가 바뀝니다.
이렇게 보면 진주와 보화 비유는 앞의 겨자씨와 누룩을 한층 더 깊게 묶어 줍니다. 겨자씨는 생명이 자라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누룩은 그 생명이 삶 전체에 스며드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진주와 보화는 ‘왜 그 생명이 그렇게 자라고 퍼질 수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가장 귀한 보화가 되면 사람의 다른 모든 사랑이 그 아래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습니다.
따라서 7강 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외적 소유를 잃어야 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지혜가 나온다고 여기는 proprium과 주님보다 더 귀하게 붙들고 있는 모든 지배적 애착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생명의 가장 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듭남의 결단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가지 역설을 꼭 남겨 두고 싶습니다. 인간은 ‘자기 것’을 내려놓으면 자기를 잃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때 비로소 참된 자기를 얻습니다. 타락한 proprium의 지배에서는 사람이 욕망과 두려움과 인정욕구의 노예가 되지만,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의지 안에서는 선을 사랑하여 자유롭게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값진 진주를 얻는 것은 인간성이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성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비로소 온전히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이제 강의는 이 밝은 세 비유, 곧 겨자씨의 ‘성장’, 누룩의 ‘행실’, 진주와 보화의 ‘생명’과 정반대편에 ‘가라지’를 놓습니다. 강사의 전체 도식에서는 앞의 비유들이 ‘14만 4천’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가라지는 ‘666’의 정체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7강 5부에서는 가라지 비유를 중심으로, ‘알곡과 가라지’, ‘좋은 씨와 악한 씨’, ‘추수와 세상 끝’을 먼저 충분히 살펴보고, 강사가 이것을 왜 ‘14만 4천과 666’이라는 양극적 구도로 읽는지,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에서는 ‘666’과 마지막 심판이 어떻게 전혀 다른 내적 의미로 열리는지를 차분히 살펴보겠습니다.
7강 5부
가라지 비유와 ‘666’ : 빛과 어둠의 분리, 그리고 ‘세상 끝’의 의미
이제 강의는 밝은 쪽에서 어두운 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바꿉니다. 앞의 겨자씨, 누룩, 진주와 보화 비유를 강사는 ‘교회 시대 이긴 자들’, 곧 14만 4천의 성장·행실·생명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 주는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반면 가라지 비유는 그 정반대편에 놓입니다. 강사는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이 빛으로 익은 가장 훌륭한 열매라면, 가라지는 어둠으로 익은 가장 악한 마귀의 종’이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이번 가라지 비유는 단순히 ‘교회 안에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강사의 전체 체계에서는 14만 4천과 666, 빛과 어둠, 익은 알곡과 익은 악의 열매가 서로 갈라지는 결정적인 지점입니다.
강사는 먼저 주님께서 비유 자체를 해설하신 마태복음 13장 후반을 따라갑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 추수 때는 세상 끝, 추수꾼은 천사들이라고 봅니다. 이 기본 틀 자체는 주님의 직접 해설을 따라가는 것이므로 분명합니다. 다만 강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 ‘밭’을 세상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 더 넓게는 교회 공동체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하고, 가라지의 씨를 잘못된 교리, 사상, 정욕적인 사상, 이단적 사상 등으로 연결합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사람 자체에만 붙이는 것보다, 사람 안에 들어와 자라는 거짓과 악의 씨로 보는 것이 훨씬 내적인 독법이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물론 사람의 상태를 가리키지만, 그 상태는 거짓과 악이 그의 생명 안에서 자라 지배적 사랑이 된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처음부터 ‘가라지 인간’으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을 위해 창조하시지만, 인간이 자유 가운데 악과 거짓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그것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 때 점차 악한 상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가라지 비유를 읽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저 사람은 가라지다’라고 쉽게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강사 자신도 이 점을 어느 정도 경계합니다. 교회에서 누군가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서 ‘가라지 같은 사람’이라고 쉽게 부르곤 하지만, 강사가 말하는 가라지는 단순히 행실이 부족하거나 목회자에게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불에 던져지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가리키므로, 사람의 몇몇 부족한 행실만 보고 함부로 가라지라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절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외적 행동만 보고 한 사람의 영원한 내적 상태를 우리가 확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절제를 더욱 강하게 유지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내적 목적과 지배적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처음에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말씀의 심판 이미지는 다른 사람을 분류하기 전에 먼저 자기 안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가라지인가?’보다 ‘내 안에서 지금 어떤 가라지 씨가 자라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자기 의, 명예욕, 교리적 우월감, 사람을 지배하고 싶은 마음, 진리를 사랑과 분리하여 자기 무기로 사용하는 마음도 모두 가라지와 같은 거짓과 악의 씨가 될 수 있습니다.
강사는 가라지가 어릴 때는 곡식과 잘 구별되지 않다가 자라서 열매가 나타나야 비로소 구별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가라지 비유는 ‘영적 성장론’을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릴 때는 잘 모르지만 어느 정도 자라면 벼인지 가라지인지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관찰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의 내적 사랑은 시간이 지나며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한두 번의 행동보다 반복되는 선택과 사랑의 방향이 그 사람의 실제 생명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선과 악 모두에 해당됩니다. 처음에는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이 겉으로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절한데 그 친절이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인지,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한 것인지 바로 알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강하게 말하는데 그것이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인지, 자기 지성을 자랑하기 위함인지 역시 쉽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열매가 나타납니다. 사랑은 반드시 자기와 같은 행위를 낳고, 반복되는 행위는 결국 그 사랑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원리입니다.
강사의 전체 도식에서 가라지는 곧 ‘666’과 연결됩니다. 그는 14만 4천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간 사람들’, 666을 ‘가장 어두운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며 마귀의 종으로 산 사람들’이라고 대비시킵니다. 더 뒤에서는 가라지를 ‘성령님은 떠나고 마귀의 영이 합일된 사람’, ‘배교자, 음녀, 불법을 행하는 자’와 같은 강한 언어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강사의 계시록 독법 사이에 매우 중요한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666은 특정한 인간 집단을 표시하는 숫자나 미래의 어떤 적그리스도 인물의 비밀 번호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숫자는 자연적 숫자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질을 나타냅니다. 특히 ‘짐승의 수’ 666은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여, 신앙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상태와 교리를 매우 깊게 표상합니다. 따라서 ‘666인 사람들’을 외부에서 찾아내는 것보다, ‘내 안에서 신앙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666적 상태가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훨씬 스베덴보리적인 접근입니다.
이것은 지금 AC 창세기 4장에서 읽고 있는 ‘가인’과도 놀랍게 연결됩니다. 가인은 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으면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기 독립성을 주장하며 사랑을 밀어내기 시작하면 ‘가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라지와 666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가장 깊은 경계는 ‘밖에 있는 이단적 사람’을 찾아내는 데 있지 않고, 우리 안에서 진리가 사랑과 분리되고 신앙이 생명에서 떨어져 나가는 상태를 경계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가라지의 정체가 훨씬 가까워집니다. 내가 정통 교리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면서 이웃을 멸시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서 자기보다 다른 해석을 가진 사람을 증오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 아래 자기 의와 분노를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문제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가 사랑과 분리된 것입니다. 진리가 체어리티를 섬기지 않고 proprium을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상태가 계속 자라면 겉으로는 종교적이지만 안에서는 전혀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강사는 ‘추수 때는 세상 끝’이라고 강조하면서, 마지막 때 주님께서 ‘익은 열매를 추수하시고, 죄악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 뒤 죄 없는 천년왕국을 건설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는 것이 종말의 추수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문자적 종말론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그에게 ‘세상 끝’은 미래의 역사적 종말, 대환난, 재림, 천년왕국으로 이어지는 시간표 안에 놓여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상당히 다른 지평이 열립니다. 성경의 ‘세상 끝’ 또는 ‘시대의 완성’은 자연계와 지구가 파괴되는 물리적 종말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교회가 선과 진리를 거의 완전히 상실하여 더 이상 교회로 기능할 수 없게 된 마지막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때 영계에서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교회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세상 끝’은 우주의 끝이 아니라 한 영적 시대의 완성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종말의 날짜를 다르게 보는 정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말씀을 읽는 방식 자체의 차이입니다. 문자적 독법에서는 예언된 사건이 자연계 역사에서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를 중심으로 묻게 됩니다. 반면 상응적 독법에서는 그 자연적 이미지들이 어떤 영적 상태와 교회의 변화를 표상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래서 ‘추수’ 역시 단지 미래 어느 날 지상에서 사람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는 사건이라기보다, 선과 악의 상태가 완전히 성숙하여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게 되는 영적 분리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할까요? 여기에는 매우 깊은 섭리의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악을 즉시 뽑아 없애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이 사람 안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고, 성급하게 하나를 제거하면 아직 형성되지 않은 선까지 손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주님께서는 그의 자유를 보존하시며 선과 악을 점차 구별시키십니다. 어느 것이 정말 선에서 나오는지, 어느 것이 자기애에서 나오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삶에서도 그대로 경험됩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자기 열심이 모두 주님 사랑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속에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 자기 교리가 옳음을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처음부터 모든 자기애를 한꺼번에 제거하셨다면 사람은 감당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질서 있게, 사람이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만큼 드러내시고 제거하십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다가 추수 때 분리되는 그림은 이런 거듭남의 섭리와도 연결해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라지 비유의 심판은 단지 ‘악한 사람을 벌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서 선과 악을 분리하십니다.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무엇인지 완전히 드러나면, 그와 맞지 않는 외관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후 중간영계에서도 중요한 원리입니다. 사람은 죽은 직후 곧바로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점차 벗겨지고 실제 내적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 결과 선을 사랑한 사람은 천국을 향하고 악을 사랑한 사람은 자신과 같은 사랑이 있는 지옥 공동체를 향합니다.
이 점에서 ‘꺼지지 않는 불’도 단순히 하나님께서 밖에서 가하는 물리적 형벌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옥의 불은 자기애와 세상 사랑, 특히 지배하고 파괴하려는 악한 욕망의 불을 표상합니다. 악한 사람이 지옥에 가서 전혀 새로운 형벌을 외부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상에서 사랑하고 형성한 바로 그 욕망 안에서 살아갑니다. 자기애의 불이 그 사람 자신의 삶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임의적으로 형벌을 부과하는 사건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사랑의 질이 드러나고 그것에 맞는 상태로 가는 질서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가라지’를 너무 쉽게 부르면 안 된다고 한 부분은 오히려 더욱 빛납니다. 사람이 아직 자연계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가라지와 같은 거짓을 붙들고 있어도 내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오늘 자기애에 깊이 빠져 있어도 주님의 섭리 가운데 돌이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 ‘너는 가라지다’라고 영원한 판정을 내리는 것은 주님의 자리까지 넘어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교리나 행동의 질을 분별하는 것이지, 한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확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사의 가라지 해설에는 ‘잘못된 교리나 사상, 정욕적인 사상, 이단적 사상’을 씨와 연결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분별 있게 받아들일 만합니다. 거짓 교리는 단지 머릿속의 잘못된 정보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악한 사랑과 결합하면 삶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됩니다. 예를 들어 자기 욕망을 하나님 뜻이라고 합리화하거나, 자기 지도자의 절대 권위를 교리화하여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자기 집단만 구원받는다고 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만드는 교리는 실제 영적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올바른 교리 자체가 자동으로 알곡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도 자기애와 결합하면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알곡’과 ‘가라지’를 단순히 ‘정통교리 대 이단교리’로만 나누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실제 선한 생명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교리는 씨이고, 사랑과 삶이 열매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가라지 비유와 앞의 좋은 밭 비유가 다시 연결됩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했고, 가라지 비유에서는 ‘무엇이 자라 어떤 열매가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처음에 진리를 잘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사랑과 결합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하면 알곡이 되고, 거짓과 자기애가 결합하면 가라지가 됩니다.
강사의 전체 구조에서 14만 4천은 ‘빛으로 익은 사람’, 666은 ‘어둠으로 익은 사람’입니다. 이 표현 자체는 매우 강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숫자보다 ‘익는다’는 말에 주목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반복하여 사랑하고 선택한 것으로 ‘익어 갑니다.’ 하루아침에 천국적 사람이 되지도 않고 하루아침에 지옥적 사람이 되지도 않습니다. 작은 선택들이 쌓이고, 그 선택들이 애정을 강화하며, 애정이 지배적 사랑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오늘의 작은 선택이 중요합니다.
‘추수’는 바로 그 성숙의 끝입니다. 더 이상 외관으로 감출 수 없을 만큼 사랑의 질이 분명해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희망적인 말씀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가라지를 분리하시고 알곡을 보존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때마다 작은 추수가 일어납니다. 자기 안에서 거짓 하나를 발견하고 버릴 때, 악한 욕망 하나를 죄로 인정하여 피할 때, 주님께서 선과 악을 분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만 바라보며 두려워하기보다 지금의 ‘작은 심판’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빛이 오늘 나를 비출 때 변명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문제다’라고 밖을 보기 전에 ‘내 안에 어떤 가라지가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세상 끝’도 단지 미래의 공포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오늘 내 안에서 낡은 영적 질서가 끝나는 사건으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가 끝나고 겸손이 시작될 수 있고, 미움의 시대가 끝나고 용서의 시대가 시작될 수 있으며, 신앙만 주장하던 상태가 끝나고 체어리티와 결합된 살아 있는 신앙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은 미래를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현재의 내적 삶 안으로 끌어옵니다.
그렇게 보면 강사의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는 권면 역시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거나 특정한 국제 정세를 지켜보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준비는 내 사랑의 상태를 살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오신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어느 종말론 도표를 정확히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내 생명이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666’에 대한 태도도 달라집니다. 밖에 있는 악인을 지목하는 숫자가 아니라 내 안에서 신앙을 사랑과 분리시키는 상태, 진리를 자기 지배의 도구로 만드는 상태, 하나님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를 경계하는 표지가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666은 훨씬 불편하지만 훨씬 유익한 말씀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붙이는 숫자보다 자기 안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강사가 가라지를 ‘잘 자라다가 불법을 행하여 가라지가 된 사람’과 연결하는 방식입니다. 뒤의 계시록 강해에서도 그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가 지워지는 사례와 가라지를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구원론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처음 신앙 안에 있었다고 해서 끝까지 자동적으로 안전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악과 거짓을 사랑하면 타락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역시 ‘한 번의 신앙고백’보다 삶의 지속적인 방향을 중요하게 본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을 ‘생명책에 이름이 적혔다가 행실 때문에 지워지는 행정적 기록’처럼 이해하기보다, ‘책’ 자체를 사람의 내적 생명과 기억, 곧 그가 실제로 살아낸 것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이 부족해서 기록을 수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 자체가 그의 영적 책이 됩니다. 사람이 사랑하고 의도하고 행한 것이 영계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생명책은 결국 살아낸 생명입니다.
따라서 7강 5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가라지인가’를 판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씨가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가’, ‘그 씨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내 신앙은 사랑과 결합되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강사의 가라지 비유가 종말론적 분별을 강조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분별을 먼저 인간의 내면으로 가져옵니다.
7강 5부를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가라지는 단지 밖에 있는 악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표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악과 거짓이 사랑되어 생명으로 자라난 상태를 보여 주며, 추수는 그 사랑의 질이 완전히 드러나 선과 악이 분리되는 심판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분리는 두려움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의 가라지를 뽑아 내시고 알곡을 보존하시는 구원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 앞에서 가장 안전한 기도는 ‘주님, 저 사람이 가라지인지 보여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 제 안에서 주님의 씨와 함께 자라고 있는 가라지를 보게 하시고, 그것이 제 생명이 되기 전에 분리하여 주십시오’일 것입니다.
이제 강의는 마지막 ‘그물 비유’로 나아가면서 마태복음 13장 전체를 결론짓습니다. 그물 안에는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함께 들어오고, 마지막에 분리가 이루어집니다. 강사는 이를 다시 14만 4천과 666, 천국에 들어갈 사람과 버려질 사람의 최종 분리로 읽습니다. 다음 7강 6부에서는 이 그물 비유를 중심으로 ‘교회 안에 들어왔다’는 것과 ‘천국적 생명을 가진다’는 것의 차이, 마지막 심판의 실제 의미, 그리고 마태복음 13장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어떻게 종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7강 6부
그물 비유와 ‘추수’ : 교회 안에 모였다는 것과 천국적 생명을 가진다는 것
가라지 비유에서 선과 악이 한 밭에서 함께 자라다가 추수 때 분리되는 모습을 보았다면, 이제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마지막 비유인 ‘그물 비유’로 들어갑니다. 강사 자신도 이 비유를 ‘종합 정리’라고 부릅니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는 말씀을 읽은 뒤, 이 그물 비유는 앞의 추수 비유와 같은 원리이며 ‘천국 건설 사업의 결론적 진리’, 곧 종말론적인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시작한 마태복음 13장 전체가 여기서 하나의 결론을 얻습니다. 씨가 뿌려지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으며, 마지막에는 그 열매의 질이 드러나 분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강사의 해석은 매우 선명합니다. ‘바다’는 세상이고, ‘물고기’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물’은 교회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교회가 시작되어 세상의 영혼들을 복음으로 모으기 시작했고, 그 그물이 가득 찰 때까지가 ‘교회 시대’이며, 세상 끝에 그물을 걷어 올려 그 안의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의 헌신을 그물을 던져 영혼을 모으는 활동으로 보고, 오순절에서 마지막 종말까지를 하나의 ‘그물 치는 기간’으로 이해합니다.
먼저 이 해석 안에서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를 영혼의 구원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자기 조직을 보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사도 바울, 리빙스턴, 허드슨 테일러, 그리고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했던 여러 선교사들의 헌신을 언급하면서, 이런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그물이 넓게 펼쳐졌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 사명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존중할 만한 강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어가면 ‘그물=교회’라는 설명을 조금 더 깊게 볼 수 있습니다. 자연계의 교회 조직 안에 들어왔다는 것과 천국적 생명을 가진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물에는 ‘각종 물고기’가 함께 들어옵니다. 좋은 물고기만 들어오는 특별한 그물이 아닙니다. 그물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사람이 말씀과 교리와 예배와 신앙 공동체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그의 내적 사랑을 천국적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자동으로 거듭난 것도 아니고, 교회 등록을 했다고 곧 천국적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목사나 장로가 되었다고 해서 내적 상태까지 선해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외적 경계 밖에 있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내면에 선과 진리가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의 참된 본질은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선과 진리의 삶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물 비유는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는 그물 안에 있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어떤 물고기가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외적 교회는 사람을 말씀과 예배와 성례의 질서 안으로 모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과 삶으로 만들 것인가는 결국 각 사람의 자유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물은 모으지만 거듭남은 사람의 내면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점에서 씨 뿌리는 비유와 그물 비유가 정확히 연결됩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같은 씨가 여러 밭에 떨어졌습니다. 말씀 자체는 동일했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결과가 달랐습니다. 그물 비유에서는 같은 그물 안으로 여러 물고기가 들어옵니다. 같은 교회에 있고 같은 말씀을 듣지만 영적 생명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 비유가 서로를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강사는 그물이 가득 찬 뒤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골라내는 것을 앞의 알곡과 가라지의 추수와 같은 원리로 봅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라는 구조가 그물에서도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의 후반에서 다시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를 종합하면서, 좋은 밭이 되고 영적으로 성장하며 누룩처럼 전체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과정과 함께, 가라지와 좋은 물고기·나쁜 물고기의 추수를 하나의 큰 틀로 다시 정리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분리’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새로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미 형성된 상태를 드러내고 서로 다른 것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알곡을 그날 갑자기 알곡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물고기를 그날 갑자기 좋거나 나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형성되어 온 생명의 질이 마지막에 분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사후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는 방식과 잘 맞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 완전히 다른 존재로 갑자기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한 자신의 내적 사랑을 가지고 영계에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지상에서 익숙했던 외적 태도와 사회적 습관이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외적인 것이 벗겨지고 그 사람의 실제 지배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선을 사랑한 사람은 선과 같은 이들에게, 악을 사랑한 사람은 악과 같은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주님께서 어느 날 사람에게 전혀 낯선 판정을 외부에서 부과하시는 일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이 드러나는 일입니다. 그물에서 물고기를 꺼내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는 것은 하나님이 자의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각자가 자유롭게 형성한 사랑의 질에 따라 그와 맞는 상태가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심판에 대한 공포를 약화시키기 위한 설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심판을 훨씬 더 현실적으로 만듭니다. 만일 심판이 먼 미래에 하나님께서 갑자기 내리시는 판결이라면 사람은 그날만 준비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사랑하고 선택하고 반복하는 것이 곧 내 영원한 생명을 만들어 간다면, 오늘의 작은 선택 하나가 이미 심판과 연결됩니다.
내가 어떤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반복하면 거짓이 점점 내 성품이 되고, 미움을 붙들고 살면 미움이 내 생명에 깊이 들어옵니다. 반대로 손해가 있어도 진실을 선택하고, 복수할 수 있어도 악을 거부하고, 자기 공로보다 주님을 높이는 선택을 반복하면 선이 점차 내 생명의 방향이 됩니다. 이것이 추수를 준비하는 실제 삶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를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강사는 ‘그물을 처음 칠 때부터 물고기가 가득 찰 때까지’를 교회 시대로 보고, 세상 끝에 그물이 걷히며 추수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문자적·역사적 종말론의 중심 구조입니다. 오순절 이후 일정한 교회 시대가 이어지고, 미래의 지상 재림과 종말적 사건을 통해 그 교회 시대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시대의 끝’은 자연계의 역사가 완전히 멈추는 날이라기보다 하나의 교회가 선과 진리를 상실하여 더 이상 참된 교회로 기능할 수 없게 되는 마지막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때 마지막 심판이 영계에서 이루어지고 새로운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래서 ‘끝’은 모든 것의 소멸이 아니라 한 영적 질서의 완성과 새로운 질서의 시작입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강사의 독법에서는 ‘언제 그물이 가득 차는가?’, ‘언제 교회 시대가 끝나는가?’, ‘그 다음 어떤 종말 사건이 일어나는가?’라는 역사적 시간표가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독법에서는 ‘교회가 언제 내적으로 선과 진리를 잃었는가?’, ‘말씀의 참된 의미가 언제 가려졌는가?’, ‘주님께서 새 교회를 어떻게 일으키시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전자는 외적 역사에 초점을 두고, 후자는 영적 상태에 초점을 둡니다.
그렇다고 강사의 종말론적 긴장 자체를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젠가 분리가 있다’, ‘지금의 삶이 영원한 결과와 연결된다’, ‘신앙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는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긴장을 없애기보다 방향을 조금 바꿉니다. ‘종말의 날짜를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가?’에서 ‘오늘 내 생명이 어떤 방향으로 형성되고 있는가?’로 옮기는 것입니다.
또한 그물 안의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의 구별은 교회의 외적 규모를 보는 눈도 바꾸어 줍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천국의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물 안에 물고기가 많아졌다는 것과 좋은 물고기가 많아졌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참된 성장은 숫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선과 진리 가운데 살아가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은 목회와 선교를 평가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았는가보다, 그 사람들에게 주님의 진리가 얼마나 생명이 되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전도는 사람을 단순히 조직 안으로 이동시키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을 자기에게 붙잡아 두기 위한 그물이 아니라 주님께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 교회의 교리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교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를 알고 그것에 따라 선을 행함으로써 사람이 주님과 결합하도록 돕는 것이 교리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자기 교리의 정확성만을 자랑하면서 체어리티가 사라진다면, 외적으로는 매우 견고한 그물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실제 천국적 생명이 형성되고 있는지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앞서 다룬 ‘14만 4천과 666’의 문제가 다시 연결됩니다. 강사의 구조에서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이 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한 준비이며, 특히 14만 4천과 666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강사는 14만 4천을 최고의 알곡, 666을 가장 악한 쭉정이와 연결하고, 그물 비유를 이 둘이 마지막에 분리되는 결론적 장면으로 봅니다. 이 연결은 강의 전체에서 매우 일관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숫자 중심의 구도를 ‘사랑의 질’ 중심으로 옮깁니다. 14만 4천과 666을 사람에게 붙이는 영적 등급표처럼 보지 않습니다. 14만 4천은 주님에게 속한 선과 진리의 충만한 상태와 전체를, 666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시키는 왜곡된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그물에서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은 ‘누가 특별한 숫자 집단에 속했는가’보다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살아 있는 생명이 되었는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마태복음 13장 전체를 가장 깊게 하나로 묶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보았습니다. 겨자씨에서는 ‘그 진리가 얼마나 자라고 쓰임이 되는가’를 보았습니다. 누룩에서는 ‘그 진리가 삶 전체에 얼마나 스며드는가’를 보았습니다. 진주와 보화에서는 ‘무엇을 가장 귀하게 사랑하는가’를 보았습니다. 가라지에서는 ‘거짓과 악이 어떻게 함께 자라 마침내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물에서는 ‘결국 어떤 생명이 형성되었는가’가 드러납니다.
이렇게 보면 마태복음 13장은 하나의 긴 거듭남의 이야기처럼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말씀의 씨가 인간에게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여러 장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다루시며 좋은 밭을 만드십니다. 생명은 겨자씨처럼 자라고 누룩처럼 안으로 퍼집니다.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어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값진 진주와 보화가 됩니다. 동시에 악과 거짓도 드러나 가라지와 구별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실제 형성된 사랑과 생명의 질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물 비유를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말씀으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 사람은 좋은 물고기, 저 사람은 나쁜 물고기’라고 분류하기 시작하면, 말씀의 빛이 곧바로 밖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첫 목적은 언제나 우리의 거듭남입니다. ‘나는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으로 안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진리를 실제로 살아내고 있는가?’, ‘내 삶에서 가장 지배적인 사랑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먼저입니다.
또한 이 비유는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그물 밖’ 또는 ‘나쁜 물고기’로 보는 태도에도 제동을 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교회 밖에서도 자기 종교 안에서 아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며 선을 사랑한 사람은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 기독교 안에 있으면서 악을 사랑하면 교회 소속 자체가 그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보시는 ‘좋은 물고기’의 기준은 인간이 붙인 종교 명칭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선을 사랑했는가, 아는 진리에 따라 살았는가, 주님에게서 오는 더 밝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인가를 보십니다.
이것은 전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전도의 목적을 정화합니다. 다른 사람을 ‘우리 집단’으로 끌어오기보다 더 밝은 진리를 나누고, 그 사람이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한 것이고 교회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강사가 선교사들의 희생을 언급한 부분도 이런 관점에서 더욱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단지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해 먼 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걸고 자신이 귀하게 여긴 복음을 전하려 했다는 사실에는 분명 숭고한 사랑과 헌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헌신을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 전달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가를 더 분명히 합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서 선이 되고 체어리티가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사의 전체 구조에서 보면, 이 그물 비유를 끝으로 ‘기본진리’의 한 큰 부분이 사실상 마무리됩니다. 강사도 뒤에서 다시 씨 뿌리는 비유에서 그물 비유까지를 요약하며 ‘좋은 밭이 되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누룩처럼 내면 전체가 변화되고, 진주와 보화처럼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며, 가라지와 좋은·나쁜 물고기가 마지막에 추수된다’는 식으로 되짚습니다. 따라서 이 그물은 마태복음 13장 해설의 마지막 비유일 뿐 아니라, 이후 본격적인 요한계시록 강해로 넘어가기 위한 문이기도 합니다.
이 전환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을 가지고 14만 4천과 666, 추수, 마지막 때의 개념을 미리 정돈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바로 그 틀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읽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계시록 해설에서는 ‘핵심진리’의 종말론적 전제가 훨씬 더 직접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14만 4천을 실제 제한된 수의 ‘교회 시대 이긴 자’로 보는지, 대환난과 휴거를 어떻게 배열하는지, 새 예루살렘을 어떤 성도 집단과 연결하는지 등이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실제 강의 후반에는 14만 4천이 모두 인쳐지면 교회 시대가 끝나고 대환난이 시작된다는 매우 구체적인 시간표가 제시됩니다.
따라서 이후 해설에서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는 주님의 말씀 자체이고, 그 안에는 속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근거로 만들어 낸 하나의 종말론적 시간표는 말씀 자체와 구별해야 합니다. ‘핵심진리’의 해석은 존중하여 정확히 따라가되, 그것이 곧 말씀의 아르카나라고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밝힘’과 ‘계시록 해설’에서는 같은 숫자와 장면들이 어떤 영적 상태와 교회의 변화를 표상하는지 차분히 비추면 됩니다.
특히 앞으로는 ‘문자 그대로인가, 속뜻인가’라는 단순한 양자택일보다 ‘문자는 무엇을 담는 그릇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 안에 속뜻이 있고, 그 문자를 통하여 영적·천적 의미가 연결된다고 봅니다. 문제는 문자에서 멈춰 그 안의 모든 자연적 이미지와 숫자와 장소와 사건을 미래의 물리적 사건으로만 읽어 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그물 비유는 이후 계시록을 읽기 전에 매우 좋은 기준 하나를 제공합니다. ‘그물’, ‘바다’, ‘물고기’, ‘물가’, ‘좋은 것’, ‘못된 것’, ‘천사’, ‘불’이라는 자연적 이미지들이 모두 단순한 미래 사건의 소품만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영적 실재를 표현하는 자연적 그릇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이미 그러하다면, 상징과 수와 환상이 훨씬 더 밀집된 요한계시록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7강 6부의 마지막에서 이 질문을 남겨 두고 싶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천사와 말과 짐승과 별과 수와 성과 전쟁은 과연 장차 자연계에 그대로 나타날 사건들을 미리 찍어 놓은 사진일까요, 아니면 주님께서 자연적 형상들을 통하여 영적인 교회의 상태와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보여 주시는 말씀일까요?’ 이제부터 두 독법이 본격적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7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물에 들어왔다는 것은 외적으로 교회의 영향 안에 들어왔음을 보여 줄 수 있지만,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은 교회 소속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말씀의 진리와 선을 받아 어떤 사랑의 생명을 형성했는가이며, 심판은 바로 그 내적 생명의 질이 드러나 서로 같은 것끼리 분리되는 영적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3장의 결론은 ‘교회 안에 있으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결론은 ‘교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네 생명이 되게 하라’입니다. 좋은 밭이 되고, 작은 씨가 자라며, 누룩처럼 삶 전체가 변화되고, 값진 진주를 발견하여 사랑의 질서가 바뀌고, 자기 안의 가라지가 분리되어 마침내 천국적 생명이 형성되는 것, 그것이 이 모든 비유가 향하는 실제적인 방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7강 7부부터는 본격적으로 ‘요한계시록 강해를 위한 기초적 견해들’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지점부터는 ‘핵심진리’의 문자적 종말론과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속뜻 해석 사이의 차이가 훨씬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므로, 이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먼저 강사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다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비추는’ 방식으로 이어가겠습니다.
7강 7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 요한계시록을 읽기 전에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하는가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모두 살펴본 강의는 이제 본격적으로 ‘제2부 요한계시록 강해’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앞선 기본진리와 마태복음 13장 비유 해설이 바로 이 요한계시록을 읽기 위한 준비였다고 봅니다. 특히 그에게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가’, ‘어떤 사건들이 어떤 시간적 순서로 진행될 것인가’를 알려 주는 종말론의 종합적인 책이며, 그 핵심을 풀기 위해서는 14만 4천과 666이라는 두 숫자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가 이미 앞 강의에서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지금부터의 계시록 해설은 단순히 본문 한 절씩을 읽는 작업이 아니라, 지금까지 강사가 구축해 온 ‘교회 시대-이긴 자-14만 4천-대환난-휴거-천년왕국’이라는 전체 구조를 실제 계시록 본문 위에 적용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는 요한계시록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에서 출발합니다. 강사는 이 표현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마지막 때 일어날 일을 주셨고, 예수께서 그것을 천사를 통해 밧모섬의 사도 요한에게 보여 주셨으며, 요한은 다시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한다는 계시의 전달 구조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는 표현에서 ‘반드시’는 이 계시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도 요한에 대해서는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라 매우 신실한 제자이며 이미 ‘이긴 자’의 상태를 지나 ‘완덕의 경지’로 나아가던 사람으로 높게 평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첫 문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오히려 계시록 전체를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무엇보다 ‘적그리스도의 계시’도 아니고 ‘대환난의 계시’도 아니며 ‘세계 종말의 계시’도 아닙니다. 그 첫 이름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따라서 이 책의 중심은 미래의 재난 목록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누구이신지, 주님의 신성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계시되고, 그 진리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가 어떻게 드러나며, 마침내 주님께서 새 교회를 어떻게 세우시는가에 있습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계시록 전체를 읽는 방향을 바꿉니다. 사람은 계시록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언제 전쟁이 나는가?’, ‘누가 적그리스도인가?’, ‘666은 누구인가?’, ‘휴거는 언제인가?’를 묻기 쉽습니다. 강의도 상당 부분 이런 시간적·역사적 질문을 중심에 놓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보다 먼저 ‘이 모든 말씀 속에서 주님이 어떻게 계시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계시록의 궁극적인 주제는 공포가 아니라 주님이며, 파괴가 아니라 구원이고, 세상의 종말 그 자체가 아니라 옛 교회의 마지막과 새 교회의 시작입니다.
강사가 요한계시록을 ‘마지막 때의 비밀’과 ‘마지막 때의 중요한 시간표’가 체계적으로 정돈된 책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이 강의 전체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 종말론에서 익숙한 독법과도 상당히 닿아 있습니다. 여러 장면을 미래 역사에서 일어날 사건들로 보고, 그것들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하여 하나의 종말론적 시간표를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계시록 6장의 인, 7장의 인 맞은 자, 나팔 심판, 대환난, 휴거, 재림, 천년왕국 등을 서로 연결하여 ‘언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밝히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접근과 상당히 다른 길을 갑니다. 계시록은 분명 장래의 일을 다루지만 그 ‘장래’는 자연계의 정치적·군사적 사건을 미리 암호화한 달력이라기보다, 기독교회가 내적으로 쇠퇴하여 마지막에 이르고 마지막 심판을 거친 뒤 새 예루살렘으로 표상되는 새 교회가 세워지는 영적 과정입니다. 계시록의 말, 별, 인, 나팔, 짐승, 용, 바벨론, 전쟁, 천년, 새 예루살렘은 모두 실제 말씀의 형상들이지만, 그 안에 연속적인 속뜻이 있으며 그 속뜻은 교회의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 천국과 지옥의 상태를 다룹니다.
그렇다고 문자적 의미를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문자는 속뜻을 담는 기초이자 그릇입니다. 문자 없이는 속뜻도 인간에게 전달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문자를 문자 그대로 미래의 자연적 사건으로만 고정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별이 땅에 떨어진다’는 말씀을 실제 천체가 지구에 충돌하는 장면으로만 읽으면, 말씀에서 ‘별’이 영적 지식과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는 내적 의미가 가려질 수 있습니다. 계시록이 환상으로 기록된 이유 자체가 자연적 형상 속에 영적 실재를 담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의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영계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목은 매우 눈에 띕니다. 다른 강의 자료에서도 강사는 계시록에 영계에 관한 내용들이 들어 있으며, 영계의 환경과 사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기 어렵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접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요한이 자연적 육안으로만 장면들을 본 것이 아니라 영이 열려 영계의 실제 표상적 장면들을 보았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접점에서 두 해석은 다시 갈라집니다. ‘영계를 알아야 한다’는 전제는 비슷하지만, 그 영계에서 본 장면들을 어떻게 읽느냐가 다릅니다. 강의는 상당수 장면을 다시 자연계에서 일어날 미래 사건의 예고와 연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요한이 영계에서 본 장면 자체가 교회의 영적 상태를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계의 장면을 본 뒤 그것을 다시 지상 정치사의 암호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 자체가 신적 진리를 표상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요한계시록의 독특한 언어가 조금 자연스러워집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며, 용이 여자를 쫓고,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오고, 천사가 큰 쇠사슬로 용을 묶고,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옵니다. 이것을 모두 자연계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일어날 사건의 예고라고 보면 수많은 난점이 생깁니다. 그러나 영계는 자연적 형상이 영적 상태에 따라 즉시 나타나는 세계라는 사실을 알면, 이런 환상은 오히려 영적 실재를 표현하는 매우 정확한 언어가 됩니다.
예를 들어 천국에서 ‘빛’은 단순한 광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에 상응하고, ‘열’은 신적 사랑에 상응합니다. ‘옷’은 사람이 가진 진리와 그 진리로 형성된 외적 상태를, ‘성’은 교리 체계를, ‘성전’은 주님의 신적 인성과 천국과 교회를, ‘산’은 사랑을, ‘바다’는 보다 외적이고 자연적인 지식의 영역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장면은 마치 그림으로 된 신학처럼 읽힐 수 있습니다. 각각의 형상이 서로 상응하면서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르카나’와도 연결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스베덴보리가 명백히 말씀의 속뜻이 있는 성경에 포함시키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읽을 때 단어 하나와 숫자 하나, 배열과 순서까지도 함부로 지나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울 서신을 깊이 읽을 때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사도들의 서신에서는 깊은 신학적 교훈과 영적 적용을 얻을 수 있지만, 각 단어가 연속적인 상응에 따라 천국적·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아르카나의 말씀은 아닙니다. 반면 계시록은 바로 그러한 말씀입니다. 이 때문에 앞으로의 해설에서는 강사의 적용만을 검토하기보다 실제 ‘계시록 밝힘’과 ‘계시록 해설’의 내적 의미를 훨씬 적극적으로 비추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강사는 1장 1절의 전달 구조에서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 천사 → 요한 → 교회와 성도’라는 순서를 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삼위일체 이해와 관련하여 중요한 보완이 생깁니다. 이 표현을 하나님 아버지라는 한 신적 인격이 다른 신적 인격인 예수에게 정보를 넘겨주는 장면처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 신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성 자체, 신적 인성,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신적 활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라는 말씀도 영원부터 서로 분리되어 있던 두 신적 인격 사이의 정보 전달이라기보다, 주님의 신성 자체가 신적 인성을 통하여 계시되는 질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요한계시록 1장을 읽다 보면 곧 매우 중요해집니다.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시작하지만 뒤로 가면 요한이 본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이 구약에서 여호와께 사용되던 표현들과 놀랍게 겹칩니다. ‘처음이요 마지막’, ‘알파와 오메가’, ‘전능한 자’라는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계시록의 주님은 아버지 곁에 있는 두 번째 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성이 당신의 신적 인성 안에서 완전히 나타나신 한 분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단순히 ‘예수께서 알려 주신 미래 정보’라는 뜻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누구이신가가 드러나는 계시’라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영어의 ‘Revelation of Jesus Christ’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는 두 방향을 함께 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씀 전체의 흐름을 보면 두 의미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계시하시는 내용의 중심이 결국 주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은 계시록을 읽는 정서 자체를 바꿉니다. 요한계시록을 펼칠 때 ‘무서운 일이 얼마나 일어날까?’라는 두려움보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과 교회의 상태를 어떻게 드러내시는가?’라는 기대가 앞설 수 있습니다. 일곱 인과 나팔과 재앙조차 공포를 위한 장면이라기보다 선과 진리를 파괴한 교회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신적 진리의 빛입니다. 빛이 어두움을 드러내는 것은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강사가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미래 사건의 확실성과 임박성으로 읽는 것도 자연스러운 문자적 독법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계시록을 2천 년 가까이 읽어 온 독자라면 누구나 느끼는 질문이 있습니다. ‘속히’라면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자적 시간표로만 읽을수록 이 표현은 어려워집니다. 반면 말씀의 영적 의미에서 ‘속히’는 단순한 달력상의 짧은 기간만을 뜻하지 않고 신적 질서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 그리고 상태가 준비될 때 확실하게 일어날 것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말씀의 속뜻은 특정 미래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이 오직 역사 최후의 몇 년 동안 살아갈 사람들에게만 직접 해당되는 책이라면 지난 2천 년 동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변적인 책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계시록이 교회의 영적 상태와 인간 안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싸움까지 품고 있다면 모든 시대의 독자에게 현재적인 말씀이 됩니다. ‘바벨론’은 단지 미래 어느 국가나 종교조직만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이용해 지배하려는 사랑을 경고하고, ‘용’은 단지 미래에 출현할 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세 분으로 나누고 신앙을 삶에서 분리시키는 거짓과 싸우는 교회의 문제를 비춥니다. ‘새 예루살렘’ 역시 미래 어느 날 하늘에서 물리적 도시가 내려오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와 그 안의 새 교리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때문에 ‘시간표’와 ‘상태’의 차이를 앞으로 계속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계시록을 주로 시간의 순서로 읽습니다. 무엇이 먼저, 무엇이 다음, 어느 사건 뒤에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물론 계시록에도 하나의 연속적인 질서가 있다고 보지만, 그 질서는 단순한 역사적 연표보다 영적 상태들의 연속입니다. 한 교회가 어떻게 진리를 잃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떻게 분리되며, 외적인 경건 아래 악이 어떻게 숨고, 마지막 심판을 통해 그것들이 분리되고, 새 교회가 어떻게 주님에게서 내려오는가 하는 상태의 진행입니다.
그렇다고 강사의 ‘시간적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 자체를 가볍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아무렇게나 주제별로 해체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중요한 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배열은 우연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배열의 의미를 자연계 역사에서만 찾을 것인지, 말씀 자체가 보여 주는 영적 상태의 질서에서 찾을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후자에 더 깊은 무게를 둡니다.
사도 요한을 ‘이긴 자’와 ‘완덕’의 사람으로 보는 강사의 높은 평가도 흥미롭습니다. 요한이 주님과 특별히 가까웠고, 밧모섬에서 영이 열려 계시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가 어느 영적 등급에 도달했는지를 외부에서 확정하는 것보다, 왜 바로 요한을 통하여 이 말씀이 기록되었는가를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요한’은 말씀에서 선한 행실 또는 체어리티와 관련된 교회의 모습을 표상하는 중요한 인물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최종적으로 회복되는 새 교회의 계시가 요한을 통하여 주어진 것도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5강과 6강에서 계속 보아 온 한 주제가 다시 돌아옵니다. ‘진리가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사의 계시록 해설이 아무리 문자적 종말론과 연결되어 있다 해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한 미래 예측에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를 알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실천적 긴장이 강의 처음부터 존재합니다. 이것은 충분히 살릴 만합니다. 종말론이 호기심과 공포만 생산하고 사람의 사랑과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 종말론은 신앙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더욱 직접적인 질문을 붙입니다. ‘계시록을 얼마나 정확히 해석했는가?’보다 ‘계시록을 통해 주님의 진리를 받아 내 안의 무엇이 달라졌는가?’입니다. 일곱 교회를 공부하면서 다른 교회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 그칠 것인지, 내 안의 처음 사랑이 식은 에베소 상태와 이름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사데 상태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상태를 볼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용과 짐승을 연구하면서 세상의 특정 인물을 찾을 것인지, 내 신앙 안에서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과 자기 지성을 신성시하는 거짓을 발견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계시록은 먼 미래를 들여다보는 망원경이면서 동시에 지금 자기 내면을 보는 거울이 됩니다. 아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오히려 거울의 성격이 훨씬 강합니다. 계시록에 나타나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가 한 사람의 영적 생명에서도 반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고도 살지 않으면 진리가 점차 생명을 잃고,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중심이 되며, 외적 경건만 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상태를 심판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시는 것이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 역시 단지 세계 역사의 마지막 몇 년만을 가리키는 말로 남지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도 낡은 신앙 상태의 ‘마지막’이 있습니다. 자기 공로를 붙들던 상태가 끝나고 주님에게 모든 선을 돌리는 새로운 상태가 시작될 수 있으며, 교리를 사랑보다 앞세우던 상태가 끝나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거대한 교회의 역사와 한 인간의 거듭남을 서로 상응하는 질서 안에서 함께 비춥니다.
따라서 7강 7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14만 4천이나 666의 세부 해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계시록을 어떤 종류의 책으로 읽을 것인가’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강사는 ‘마지막 때 일어날 사건과 시간표를 밝히는 계시’라는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와 마지막 심판,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실 새 교회를 자연적 형상과 상응으로 계시한 말씀’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두 독법은 같은 계시록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출발점에서부터 상당히 다른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곧바로 대립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강사가 가지고 있는 ‘계시록을 삶과 분리하지 않으려는 긴장’, ‘주님의 재림을 실제로 기다리는 진지함’, ‘성도가 마지막까지 이겨야 한다는 요청’은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이면서, 스베덴보리가 열어 주는 속뜻을 통해 그 긴장을 외적 사건의 공포에서 내적 거듭남의 긴장으로 더 깊게 옮길 수 있습니다.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날짜를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주님의 신적 진리가 내 마음과 교회 안에 오시도록 준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재림 자체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은 자연계의 구름을 타고 다시 육체로 내려오시는 동일한 방식의 재현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이 열림으로써 신적 진리가 새롭게 나타나는 오심입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이며 ‘영광’은 그 안의 내적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속뜻으로 읽기 시작하는 바로 그 작업 자체가 재림의 본질과 깊이 연결됩니다. 계시록을 읽어 장차 주님이 언제 오실지 계산하는 것과, 그 말씀의 속뜻을 통해 지금 주님이 신적 진리로 오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재림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두 방향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첫 문장은 갈수록 더 크게 들립니다. 계시록의 중심은 짐승도 아니고 666도 아니며, 대환난도 아닙니다. 어린양이신 주님입니다. 처음과 마지막이신 주님,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 교회들을 다니시는 주님, 마지막에 새 예루살렘의 빛과 성전이 되시는 주님입니다. 계시록을 제대로 읽을수록 두려움보다 주님이 더 크게 보여야 하고, 악의 세력보다 주님의 승리가 더 크게 보여야 하며, 미래의 사건보다 지금 주님과 결합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보여야 합니다.
7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의 사건을 알려 주는 책이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계시하며, 그 환상과 숫자와 사건들은 말씀의 상응을 통하여 옛 교회의 종말과 마지막 심판,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의 출현을 보여 주는 신적 말씀입니다.’
이제 이 서론을 지나면 강의는 계시록 1장의 ‘인자 같은 이’의 환상과 곧이어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로 들어갑니다. 특히 강사는 일곱 교회 편지의 대상을 ‘그 교회의 목회자에게 해당하는 말씀’, ‘그 교회 안의 특정 성도들에게 해당하는 말씀’, ‘교회 시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보며, 일곱 교회를 일곱 역사적 시대에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해석을 오히려 비판합니다. 이 부분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7강 8부에서는 바로 이 ‘일곱 교회’의 의미와 ‘이기는 자’,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 일곱 교회가 실제로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중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7강 8부
일곱 교회와 ‘이기는 자’ : 교회를 나누는 일곱 시대인가, 인간과 교회의 일곱 영적 상태인가
이제 강의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먼저 일곱 교회 편지를 읽을 때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를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떤 말씀은 그 교회의 ‘사자’, 곧 목회자에게 직접 해당하고, 어떤 말씀은 그 교회 안의 몇몇 특정 성도에게 해당하며, 마지막에 반복되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이라는 약속은 교회 시대의 모든 성도에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머나·버가모·두아디라·사데·빌라델비아·라오디게아를 차례로 일곱 역사적 ‘교회 시대’에 대응시키는 흔한 해석에 대해서는 오히려 ‘상당히 곤란한 해석’이라고 말합니다. 각각의 말씀에는 분명한 대상이 있는데 그것을 모두 시대별 교회로 뭉뚱그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뒤에서는 강사의 문자적 종말론과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이 크게 갈라지지만, 적어도 일곱 교회를 단순한 교회사 연대표로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생각보다 중요한 접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를 본문에 나오는 순서 그대로만 다루지 않고, 자신이 세운 ‘이기는 자’의 체계를 잘 정돈하기 위해 순서를 일부 바꾸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강사 자신도 ‘원래 계시록에는 이 순서로 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긴 자들의 내용을 정돈하고 계시록을 쉽게 해석하기 위해 다른 순서로 살펴보겠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말씀의 순서 자체를 속뜻의 질서로 보는 스베덴보리의 접근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은 단어만이 아니라 배열과 연속도 신적 질서에 속하기 때문에, 일곱 교회의 순서 역시 임의로 바꾸어도 같은 속뜻이 유지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강사의 재배열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설명하려는 ‘이기는 자의 축복’을 교육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방식이지, 말씀 자체의 내적 순서를 밝히는 상응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그럼에도 강사의 관심이 ‘교회 시대를 맞추는 것’보다 ‘누가 이기는 자인가’를 밝히는 데 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 편지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기는 자’라는 표현을 붙들고, 그렇다면 ‘무엇과 싸워 이긴다는 말인가?’를 묻습니다. 그 직전 강의에서도 사람 안의 육적인 애정과 욕망, 세상에 대한 욕심과 자랑, 그리고 그것을 자극하는 마귀의 역사를 영적 싸움의 대상으로 보고, 신앙인이 비록 이겼다가 지기도 하지만 회개하면서 계속 싸워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 ‘점진적으로 점진적으로’ 이겨 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앞 강들에서 계속 보아 온 ‘핵심진리’의 매우 중요한 장점이 다시 나타납니다. ‘이기는 자’를 어떤 교리적 정답을 가진 사람보다 실제로 악과 싸우는 사람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긴다’는 말은 거듭남의 핵심적인 언어입니다. 다만 싸움의 본질을 더욱 정교하게 보면,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마귀를 격파하여 영적 영웅이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적 시험에서 실제로 싸우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마치 자기 힘인 것처럼 받아 악과 거짓에 저항합니다. 인간에게 싸움이 실제 자기 싸움처럼 느껴져야 자유와 결합이 가능하지만, 승리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참된 ‘이기는 자’일수록 ‘내가 이겼다’는 공로의식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게 하셨다’는 인식이 깊어집니다.
이것은 계시록 전체에서도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심적 승리자는 인간이 아니라 어린양이신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지옥 전체를 이기셨기 때문에 인간도 그분 안에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란 특별한 영적 능력으로 자기 자신을 완성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승리를 받아들여 자기 안의 악과 거짓에 끝까지 저항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인간의 시험은 주님의 시험과 승리에서 능력을 받습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 각각의 편지를 매우 실제적인 대상으로 읽으려 합니다. 이를테면 사데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는 한편, 그 교회 안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따로 있어 주님과 함께 흰옷을 입고 다니겠다는 약속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한 교회의 지도자와 그 안의 모든 성도의 영적 상태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관찰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교회의 간판과 지도자의 상태와 개별 성도의 내적 상태는 반드시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조금 더 넓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 조직이 외적으로 쇠퇴하고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안에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선하게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리가 비교적 바른 교회 안에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적 소속만으로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특히 사데 교회의 ‘흰옷’은 강사가 ‘행실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으로 이해하며, ‘이기는 자’에게도 같은 흰옷의 약속이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옷’은 사람이 입고 있는 진리, 더 정확히는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흰색’은 빛에서 오는 진리의 순수함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선행 점수가 높아 천국에서 흰색 예복을 지급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순수한 진리 안에 있게 된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실제 선과 결합되어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천국의 옷이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외적인 ‘행실’만으로 흰옷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행실 안에 있는 사랑과 진리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명예를 위해 매우 깨끗한 행실을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흰옷은 겉으로 흠 없는 도덕적 이미지를 뜻하기보다 주님의 진리가 사람의 선한 생명을 감싸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옷을 더럽힌다는 것도 단순히 몇 가지 도덕적 실수를 했다는 차원을 넘어, 받아들인 진리를 악한 삶으로 훼손하고 거짓과 결합시키는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에 주어진 약속들을 모아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으로 체계화합니다. 그의 강의에서는 이런 축복들을 여러 항목으로 정리하며, 생명나무의 열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음, 감추인 만나, 흰 돌과 새 이름,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흰옷,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됨,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기록받음,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것 등을 서로 연결해 읽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궁극적으로 ‘교회 시대 이긴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봅니다. 강의 후반에는 이 약속들을 종말론적 휴거와 대환난 면제에까지 연결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표현을 계시록 9장의 무저갱 황충의 해에서 면제되는 것, 나아가 대환난에 들어가지 않고 휴거되는 것과 연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강사의 해석이 상당히 갈라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둘째 사망’은 미래 대환난의 특정 재앙에 노출되느냐 면제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사망, 곧 악과 거짓 안에 굳어져 주님과 천국의 생명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되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둘째 사망이 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연계에서 특정 재난을 피한다는 의미보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 있어 지옥적 사랑의 영원한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생명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천국 어딘가에 있는 초자연적인 과일나무에서 특정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 열매를 먹는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생명나무’는 주님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퍼셉션의 생명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한다’는 약속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 누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도 ‘이기는 자’의 상급은 외부에서 덧붙여지는 경품 같은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과 결합하면서 실제로 들어가게 된 천국적 상태 자체입니다.
‘감추인 만나’도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만나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공급하시는 천국적 선과 생명을 표상합니다. ‘감추인’ 만나라고 하는 것은 자연적 감각에는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천국의 선, 주님과의 결합 가운데 경험되는 선의 기쁨을 생각하게 합니다. 따라서 이것 역시 ‘이기는 자’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는 뜻 이전에, 시험을 통과하여 주님과 결합한 사람에게 열리는 내적인 생명의 상태입니다.
‘흰 돌’과 ‘새 이름’ 역시 흥미롭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질과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새 이름’은 천국에서 사용할 새로운 비밀 별명을 받는다는 뜻이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형성하신 새로운 영적 질, 곧 거듭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상태는 실제로 그것을 받아 살아 본 사람 외에는 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사랑하는 사람만 알고, 선을 행하는 천국적 기쁨 역시 그 선을 사랑하는 사람만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한다’는 약속도 강사가 매우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그는 성도들이 하나하나 천국의 건축 재료처럼 모여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되어 간다는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이 적용은 이해하기 쉽고 목회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상응적 의미를 더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성전은 가장 깊게는 주님의 신적 인성을 표상하고, 그로부터 천국과 교회를 나타냅니다. 기둥은 그것을 받쳐 주고 굳건하게 하는 진리와 선의 힘을 생각하게 합니다. 따라서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것은 천국 건축의 물리적 부품이 된다는 의미보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가운데 굳게 서서 그것을 받들고 있는 상태라고 보는 편이 깊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강사의 종말론에서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는 3장 10절의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를 빌라델비아 교회 사자 개인에게만 적용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봅니다. 그 사람은 약 1900년 전 사람인데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대환난에서 어떻게 면제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 사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사실 그를 하나의 ‘샘플’로 하여 교회 시대 전체의 ‘익은 열매’, 곧 이긴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며, 마지막 시대의 이긴 자들은 대환난에서 면제되어 휴거된다는 식으로 확대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계시록 시간표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논리입니다.
이 논리는 강사의 체계 안에서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빌라델비아 사자에게 미래의 대환난 면제를 약속했다면 그 약속이 교회 시대 모든 이긴 자에게 확장되어야 하고, 그 가운데 종말에 살아 있는 이긴 자가 실제로 대환난 면제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시험의 때’를 우선 미래의 몇 년짜리 세계적 대환난으로 고정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시간과 장소는 영적 상태를 담는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때에서 지킨다’는 것은 주님의 진리를 충실히 지킨 사람들이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거짓과 악이 강하게 일어날 때에도 주님의 보호 아래 보존된다는 내적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그 보호는 반드시 자연적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선한 사람들도 박해받고 고통받았습니다.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외적 고난을 면제받지 않았습니다. 천국적 보호의 가장 깊은 의미는 외적 시련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련 가운데서도 영혼의 선과 진리가 파괴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환난 면제=신체적·역사적 고난의 면제’라는 독법과 상당히 다른 방향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큰 환난’에 관한 강사의 해석도 같은 문제를 드러냅니다. 그는 초대교회 시대 두아디라의 영적 음행에 대한 경고를 미래 대환난과 연결하려면 역시 교회 시대 전체를 하나의 묶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의 충성된 상태에는 대환난 면제의 약속이, 두아디라의 영적 음행에는 대환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경고가 교회 시대 전체의 성도들에게 적용된다고 봅니다. 이 해석 역시 강사의 큰 종말론 틀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환난’은 진리가 거짓에 의해 공격받고 선이 악에 의해 시험받는 영적 상태로 읽혀야 하므로 반드시 미래의 동일한 역사 사건에 모두 연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오히려 강사의 매우 귀한 말 하나를 살려야겠습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복된 범죄를 보며 ‘욕할 게 하나도 없다. 그 모습이 내 모습이다’라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곱 교회를 읽는 올바른 태도와도 잘 맞습니다. 에베소의 처음 사랑이 식은 것을 ‘저 교회의 문제’로 읽지 않고 내 안에서 사랑보다 교리와 수고가 앞서고 있지는 않은지 보는 것입니다. 두아디라의 음행을 다른 교파의 타락으로만 읽지 않고 내 안에서 주님 사랑이 다른 사랑들과 섞이고 있지는 않은지 보는 것입니다. 사데의 죽은 상태를 유명한 대형교회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내 신앙이 외적인 이름만 살아 있고 실제 사랑은 죽어 있지 않은지 묻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의 미지근함을 현대교회에만 적용하지 않고 내 안에서 진리를 알면서도 실제로는 편안함과 자기 만족을 더 사랑하는 상태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일곱 교회 해석이 빛을 발합니다. 일곱 교회는 단순한 일곱 역사적 지역교회의 기록만도 아니고, 교회사 전체를 일곱 시대에 나눈 암호도 아닙니다. ‘일곱’은 말씀에서 충만함과 전체를 나타내므로, 이 교회들은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람과 모든 영적 상태를 포괄적으로 나타냅니다. 즉 ‘에베소형 사람’, ‘서머나형 사람’이라는 심리 유형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인정하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 여러 상태 전체가 일곱 교회를 통해 표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는 오늘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에베소처럼 진리를 분별하고 수고는 하지만 ‘처음 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서머나처럼 외적으로 가난하고 시험을 받지만 내적으로 부요할 수 있습니다. 버가모처럼 진리를 붙들면서도 거짓과 악을 일부 허용할 수도 있고, 두아디라처럼 사랑과 선행이 있으면서도 잘못된 애정과 교리를 용납할 수도 있습니다. 사데처럼 외적인 신앙 이름은 살아 있지만 내면은 잠든 상태가 될 수도 있고, 빌라델비아처럼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굳게 서는 상태가 있을 수 있으며, 라오디게아처럼 자기 지혜와 자기 의로 부요하다고 여기면서 실제로는 영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일곱 교회가 매우 가까워집니다. 2천 년 전 소아시아 교회의 문제가 오늘 한 인간 안에서 되풀이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든 상태에 정확히 맞는 말씀을 하십니다. 칭찬할 것은 칭찬하시고, 잘못된 것은 드러내시며, 회개를 촉구하시고, 끝에는 반드시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정죄하기보다 거듭나게 하시려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특히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반복은 주목할 만합니다. 편지는 각각 한 교회에 보내졌지만 결론은 ‘교회에게’가 아니라 복수형으로 ‘교회들에게’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교회의 말씀이 다른 교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강사가 ‘교회 시대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있다고 보는 데에는 바로 이 반복이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더 나아가 각 교회가 교회 전체 안의 하나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므로, 일곱 편지 전체가 모든 거듭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 역시 자연적 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인지하는 것보다 순종하여 받아들이는 것과 깊이 관련됩니다. 진리를 들었는데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적으로는 아직 충분히 들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요청과 ‘이기는 자’라는 약속은 서로 연결됩니다. 진리를 참으로 듣는 사람은 그 진리가 자기 악과 충돌할 때 그것을 따라 싸우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듣는 것-싸우는 것-이기는 것-받는 것’이라는 하나의 질서가 보입니다. 먼저 주님의 진리를 듣습니다. 그 진리가 자기 안의 거짓과 악을 드러냅니다. 그때 시험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주님을 의지하여 악과 거짓에 저항하면 진리가 선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상태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상태 자체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생명나무, 감추인 만나, 흰옷, 새 이름, 성전의 기둥, 보좌는 서로 따로 떨어진 경품 목록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질 때 사람에게 열리는 천국적 생명의 여러 측면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상급’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이기는 자가 생명나무를 받는 것은 전투에서 몇 승을 했기 때문에 상을 지급받는 방식이 아닙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사랑 자체가 그의 ‘생명나무’가 됩니다. 순수한 진리를 받아 선과 결합했기 때문에 그 진리가 ‘흰옷’이 됩니다. 새로운 영적 상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새 이름’을 얻습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진리와 선 가운데 굳건해졌기 때문에 ‘기둥’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지혜에 결합하여 주님의 통치, 곧 선으로부터 진리를 다스리는 질서에 참여하기 때문에 ‘보좌에 함께 앉는다’고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의 가장 깊은 특징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결합된 사람’입니다. 자기 힘이 강해진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기는 자의 축복은 모두 주님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주님이 생명이시고, 주님이 만나이시며, 주님이 성전이시고, 주님이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일곱 교회는 어떤 영적 엘리트를 가려내기 위한 선발시험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말씀입니다. 에베소에도 ‘이기는 자’가 나올 수 있고, 사데에도, 심지어 미지근한 라오디게아에도 회개하여 이기는 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에게만 편지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교회 한가운데서 ‘회개하라’, ‘굳게 잡으라’, ‘죽도록 충성하라’, ‘열심을 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긴 자’는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끝까지 거듭남의 길에 머문 사람입니다.
그래서 강사가 ‘지기도 하지만 회개하면서 계속 이기기를 추구해야 한다’,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점진적으로 이기게 된다’고 말한 부분은 이번 일곱 교회 해설에서 특히 귀하게 들립니다. 이것은 ‘이긴 자’를 완전무결한 성화의 단계로만 보는 긴장을 어느 정도 풀어 줍니다. 실제 거듭남은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악을 정당화하지 않고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더 보탤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싸움이 끝난 영적 영웅처럼 자신을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더 깊이 압니다. 그래서 참된 승리는 proprium이 자기 승리를 자랑할 수 없는 승리입니다. 사람은 싸웠지만 주님께서 이기셨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했지만 선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적 겸손입니다.
따라서 7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일곱 교회는 일곱 개의 교회사 시대를 기계적으로 암호화한 목록이라기보다 주님의 교회와 한 인간의 거듭남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영적 상태를 충만하게 보여 주며, ‘이기는 자’란 자기 힘으로 높은 영적 등급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에 주님의 능력으로 저항하여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대목에서 강사의 해석과 스베덴보리가 의외로 만나는 한 지점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를 시대별 표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경계하고, 편지마다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를 자세히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그 대상들이 어떤 영적 상태를 표상하는가’를 묻습니다. 하나는 본문의 구체성을 보존하고, 다른 하나는 그 구체성 안에서 보편적인 속뜻을 엽니다. 두 접근을 서둘러 적대시키기보다 이 접점에서부터 차분히 계시록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 남은 7강 9부와 10부에서는 강사의 종말론 체계가 훨씬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특히 일곱 교회의 ‘이기는 자’ 약속이 ‘14만 4천’, 하나님의 ‘인’, 대환난 면제와 휴거, 그리고 계시록의 종말 시간표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실제 강의에서 강사는 계시록 7장의 인 맞은 14만 4천을 ‘교회 시대 이긴 자들’로 보고, 교회 시대 동안 그 수가 채워지며 그 뒤 대환난이 시작된다는 매우 구체적인 구조를 제시합니다. 7강 9부에서는 바로 이 ‘14만 4천과 하나님의 인’을 중심으로, 먼저 ‘핵심진리’의 논리를 충분히 따라간 뒤 스베덴보리에게 ‘인침’, ‘이스라엘 열두 지파’, ‘12×12×1000’, 그리고 ‘14만 4천’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7강 9부
‘하나님의 인’과 14만 4천 : 특별한 성도 집단인가,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결합된 교회인가
이제 강의는 일곱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의 약속에서 계시록 7장의 ‘인 맞은 자 14만 4천’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흩어져 있던 강사의 종말론적 구조가 매우 선명하게 하나로 모입니다. 강사는 계시록 7장에 천국에 들어가는 두 부류의 성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인을 맞은 14만 4천’, 곧 교회 시대 동안 만들어지는 ‘이긴 자들’이고, 두 번째는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대환난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땅의 사방 바람을 천사들이 붙잡고 있는 기간을 ‘교회 시대’로 보면서, 하나님의 종 14만 4천이 모두 인침 받을 때까지 대환난의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전체 계시록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14만 4천은 단지 계시록 7장에 갑자기 등장하는 한 집단이 아닙니다. 앞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좋은 밭에 떨어진 씨가 장성한 겨자나무가 되고, 누룩처럼 삶 전체가 변화되며,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자기 소유를 다 내려놓는 사람들, 그리고 일곱 교회 편지에서 ‘이기는 자’라고 불린 바로 그 사람들이 계시록 7장에서는 ‘인 맞은 종들’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강사는 나중에 계시록 14장의 시온산 장면까지 연결하여, 이들의 이마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소유임을 표시하는 ‘도장’이라고 설명합니다.
강사는 이 ‘인’을 매우 실제적인 ‘도장’의 이미지로 풉니다. 인감도장을 문서에 찍으면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이것을 보증한다’는 뜻이 되듯,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마에 당신의 인을 찍으신다는 것은 그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인을 맞은 사람은 죄 문제가 해결되고, 광야 연단을 통과하여 ‘완전한 극상품의 포도 열매’처럼 된 사람이며, 교회 시대의 이긴 자라고 설명합니다. 강의에서는 ‘그 이마에도 하나님의 왕의 도장이 찍혀 있다’, ‘완전한 극상품의 포도 열매가 되었다’는 상당히 강한 표현까지 나옵니다. 이 언어에는 ‘핵심진리’의 성화론 전체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은 단순히 세례를 받았다는 표시도 아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다는 표시도 아니라, 연단과 성화를 통해 생명이 완성된 사람에게 찍히는 최종적인 하나님의 승인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인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다만 여기서부터 두 해석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친다’는 것은 어떤 제한된 숫자의 최고급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최종 인증 도장을 찍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인은 무엇인가가 확정되고 구별되어 보존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특히 이마는 사람의 가장 중심적인 사랑, 곧 지배적 사랑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과 의지가 주님께 향해 있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의 생명에 받아들여져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이름’의 상응과도 연결됩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천국에 가면 실제 이마에 글자가 새겨진다는 뜻보다,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상태가 그 사람의 내적 생명 자체에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은 외적 표지가 아니라 내적 사랑의 질입니다.
그렇다면 강사의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표현과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전혀 만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살아갈수록 그는 실제로 주님의 것이 되어 갑니다. 다만 이것을 법적 소유권 이전처럼 생각하기보다 사랑의 결합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내 것’이라고 도장을 찍으시는 외적 승인보다,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면서 주님과 결합하는 상태가 핵심입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만일 ‘인을 맞았다’를 ‘나는 최종 합격했다’, ‘나는 이미 완성되었다’는 자기 의식으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proprium이 종교적 형태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과 결합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완성을 자랑하기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가장 깊이 ‘인 맞은’ 사람일수록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보다 ‘내 안의 선은 주님의 것이다’라는 인식이 강해질 것입니다.
이제 문제의 핵심인 ‘14만 4천’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강사는 이 숫자를 실제 정해진 숫자로 받아들입니다.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의 숫자가 14만 4천으로 예정되어 있으며, 그 숫자가 다 차면 교회 시대가 끝나고 대환난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실제 강의에서 ‘숫자가 14만 4천으로 예정돼 있습니다’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이들이 시온산의 새 예루살렘에 있는 인 맞은 종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의 해석은 상당히 문자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숫자를 전혀 다르게 읽습니다. 14만 4천은 144,000명의 제한된 개인을 뜻하지 않습니다. ‘12’는 말씀에서 교회의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 또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나타냅니다. ‘144’는 12×12이므로 같은 의미가 더욱 충만하게 나타난 것이고, ‘천’은 많음과 충만함을 더합니다. 따라서 144,000은 주님에게 속한 교회의 모든 사람, 더 정확히는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결합된 사람들의 완전한 전체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의 이 숫자를 문자적인 인원수로 읽기보다 ‘열둘과 같은 영적 의미를 더욱 충만하게 나타내는 수’로 설명합니다. (Swedenborg Foundation)
이때 ‘열두 지파’ 역시 문자적인 유대인 혈통 열두 지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계시록 7장은 유다, 르우벤, 갓, 아셀 등 열두 지파에서 각각 12,000명씩 인침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모든 종류를 표상합니다. 각각의 지파가 서로 다른 천국적·영적 질을 나타내면서, 그 전체가 하나의 완전한 교회를 이룹니다. 따라서 ‘각 지파에서 12,000명씩’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 혈통별로 정확히 숫자를 채우신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의 상태가 빠짐없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충만하게 보존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14만 4천’은 영적 엘리트 집단을 가리키는 숫자에서 ‘교회의 충만한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14만 4천이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산 최고 수준의 성도들’이며, 그 밖에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따로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14만 4천 자체는 주님에게 속한 교회의 모든 상태와 사람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이것은 ‘천국 안의 최상위 144,000명’이라는 별도 계급을 만들지 않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7장 9절 이하의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대환난 통과자들과 연결합니다. 그래서 계시록 7장을 ‘대환난을 면제받은 14만 4천’과 ‘대환난을 통과한 셀 수 없는 큰 무리’라는 두 부류로 나눕니다. 실제 강의에서 이 구분은 매우 분명합니다. 첫째는 ‘큰 환난 면제받은 인 맞은 14만 4천’, 둘째는 ‘큰 환난 통과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14만 4천은 대환난 이전에 이미 영적으로 완성되어 보호받는 특별 집단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이런 식의 ‘환난 전 면제 집단’과 ‘환난 통과 집단’이라는 시간적 구분이 없습니다. 계시록의 ‘큰 환난’은 자연계의 미래 몇 년간 벌어질 세계적 재난만을 뜻하지 않고, 선과 진리가 거짓과 악에 의해 심하게 공격받는 교회의 마지막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환난에서 나온 큰 무리’는 특정 미래 세대의 생존자만을 뜻하기보다, 시험과 거짓의 공격 가운데서도 주님을 붙들고 선과 진리를 보존한 사람들의 상태로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계시록을 ‘시간표’로 읽느냐 ‘상태의 질서’로 읽느냐의 차이가 다시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14만 4천이라는 숫자가 실제로 채워지는 시점이 있고, 그 뒤에 대환난이라는 다음 사건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144,000은 시간표의 ‘정원’이 아니라 교회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영적 수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한 명이 채워져야 종말이 시작된다’는 식으로 읽지 않습니다.
이 차이를 단순히 ‘문자 해석 대 상징 해석’이라고만 표현하면 조금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숫자의 영적 의미는 임의적인 상징화가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작용하는 상응의 질서입니다. ‘12’가 왜 교회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지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 생명나무의 열두 열매 등 말씀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새 예루살렘 성벽의 높이가 ‘144규빗’인 것도 같은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144를 사람 곧 천사의 척도라고 한 계시록 21장의 말씀까지 연결하여, 이 숫자가 자연적 측량보다 교회의 모든 진리와 선의 질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Sacred Texts)
따라서 ‘14만 4천’은 계시록 안에서 고립된 숫자가 아닙니다.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열두 별, 열두 문, 열두 기초, 144규빗 등이 하나의 영적 문법을 이룹니다. 이 숫자들은 모두 주님의 교회가 선과 진리의 충만한 질서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을 알면 왜 요한계시록에서 숫자를 단순한 통계 숫자로만 읽기 어려운지가 분명해집니다.
강사는 14만 4천을 ‘처음 익은 열매’라고도 강조합니다. 계시록 14장에서 이들은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 있고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불립니다. 강사는 여기서 ‘처음’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두 번째와 세 번째 익은 열매도 있어야 한다고 보고, 이를 순교자와 다른 천국 백성의 여러 등급과 연결합니다. 더 나아가 구약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제사장, 레위인, 일반 백성의 세 종류가 있었다는 ‘모형적 이치’와 연결하여 천국에도 세 종류의 익은 열매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핵심진리’ 특유의 모형론이 매우 선명하게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처음 익은 열매’를 우선 시간상 가장 먼저 천국에 들어간 최고 계급이라는 뜻으로 읽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첫 것’, ‘처음 난 것’, ‘첫 열매’는 주님께 속한 것, 가장 중심적인 것, 선에서 나오는 진리 또는 주님에게 성별된 것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을 곧바로 천국 백성의 세 등급을 만드는 근거로 사용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더욱이 제사장·레위인·일반 백성의 구분을 천국의 세 계급과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연속적인 상응 해석과는 다른 ‘핵심진리’의 모형적 적용입니다.
다만 강사가 강조하고 싶은 중심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온전히 드려진 사람’, ‘말씀의 씨가 충분히 익어 열매가 된 사람’, ‘자기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 영적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열망을 없애지 않고 ‘특별 계급에 들어가라’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 생명 안에서 온전히 결합되게 하라’로 방향을 조금 바꿉니다.
여기서 ‘시온산’의 의미도 중요합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을 ‘천국의 수도’, 더 구체적으로는 완성된 새 예루살렘 성과 연결하며, 14만 4천이 어린양과 함께 그곳에 서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시온’과 ‘예루살렘’은 같은 장소의 서로 다른 명칭 정도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시온’은 특히 주님 사랑의 천적 교회, 선의 측면을 나타내고, ‘예루살렘’은 진리와 교리의 측면에서 교회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둘은 서로 깊이 결합되어 있지만 상응상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은 천국 전체의 수도에 해당하는 물리적 성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 21장과 22장의 새 예루살렘을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 특히 그 교회의 새 교리로 해석합니다. ‘새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온다는 것은 주님께서 형성하신 새 천국으로부터 새 교회의 신적 진리가 자연계의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도 새 예루살렘은 명백히 ‘새 교회’를 뜻한다고 설명됩니다. (Sacred Texts)
이 차이 역시 계시록 전체에서 계속 중요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강사는 시온산, 새 예루살렘, 천국, 어린양의 신부 등을 실제 영계 안의 일정한 장소와 성도 집단의 배치로 읽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실제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인정하면서도, 계시록에 나타난 장소와 건축물을 영적인 교회 상태와 교리를 나타내는 상응으로 읽습니다. ‘영계가 실제 존재한다’는 데서는 양쪽이 매우 가까운데, ‘계시록이 그 영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를 읽는 방식에서는 꽤 큰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의 ‘도장’ 비유로 다시 돌아가면 한 가지 귀한 점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을 아무에게나 찍는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의 삶이 실제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강조합니다. 이것은 신앙고백과 실제 삶을 분리하지 않으려는 ‘핵심진리’의 일관된 관심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으니 자동적으로 인 맞았다’가 아니라, 실제 연단과 정결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앙과 삶을 결합하려는 진지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그 중심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완전히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에게 최종 도장을 찍는다’는 식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에 결합되어 그의 지배적 사랑을 이루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조차 사람의 독립적 완성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순간순간 생명을 받아들이는 결합입니다.
이 점에서 ‘인을 맞았다’와 ‘완성되었다’를 너무 쉽게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거듭납니다. 더 깊은 진리가 열릴수록 더 깊은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도 완전해짐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은 ‘이제 더 이상 성장할 것이 없다’는 졸업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 사랑이 주님께 속하고 선과 진리 가운데 보존되는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영적인 서열 의식도 막아 줍니다. 14만 4천을 ‘최정예 성도 144,000명’으로 읽으면 자연스럽게 ‘나는 거기에 들어가는가?’, ‘누가 더 높은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144,000을 선과 진리의 충만한 전체로 읽으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내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선과 진리가 얼마나 결합되고 있는가?’가 됩니다. 경쟁이 아니라 결합의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는 분명 세 천국이 있고 상태의 차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영적 성적표를 경쟁한 결과 만들어진 계급이 아닙니다. 각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른 질서입니다. 천적 천국의 천사가 영적 천국의 천사보다 ‘더 잘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각 천사는 자기에게 맞는 쓰임과 공동체에서 완전한 기쁨을 누립니다. 그래서 천국의 다양성은 서열 경쟁이 아니라 조화입니다.
이것은 14만 4천 문제를 읽을 때 특히 필요한 균형입니다. 강사가 ‘더 높은 영적 목표를 추구하라’고 독려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목표가 ‘남보다 높은 천국에 가는 것’이 되면 proprium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영적 성장의 목적은 더 높은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주님을 사랑하고 더 자유롭게 이웃을 위한 쓰임이 되는 것입니다.
또 강사는 14만 4천이 완성되면 심판이 시작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죄 없는 세상으로 나타날 것을 모든 피조물이 고대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8장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한다’는 말씀을 이 14만 4천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것도 ‘핵심진리’의 전체 종말 시간표 안에서는 이해되는 연결이지만, 로마서의 본문 자체가 계시록 14만 4천을 직접 말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더욱이 스베덴보리에게 바울 서신은 계시록처럼 단어 하나하나에 연속적인 아르카나가 담긴 말씀은 아니므로, 서로 다른 본문들을 이런 식으로 일대일 모형 관계로 연결할 때에는 더 절제가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 하나가 다시 확인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성경 구절을 많이 연결하는 것 자체보다 그 연결이 말씀의 내적 상응에 근거하는가를 봅니다. 비슷한 단어나 주제가 나온다고 해서 자동으로 동일한 영적 실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계시록은 자체의 연속적인 속뜻이 있으므로, 그 속뜻을 다른 문헌이나 서신의 구절로 임의로 재구성하기보다 계시록 자체의 상응적 연속을 따라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이 14만 4천 해설에서 가장 귀하게 남는 질문 하나는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이름을 이마에 가지고 사는가?’입니다. 문자적인 글자나 표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가장 깊은 사랑과 목적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돈의 이름인가, 명예의 이름인가, 자기 의의 이름인가, 아니면 주님의 이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마가 지배적 사랑을 나타낸다면, 결국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의 이름을 영적으로 이마에 쓰고 살아간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침’은 어느 먼 미래의 특별 의식이 아니라 오늘의 선택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의 진리를 알고 그것을 사랑하여 행할 때 그 진리가 점차 내 의지에 새겨집니다. 처음에는 계명을 외적으로 지키지만, 점차 그 계명이 내 사랑이 됩니다. ‘도둑질하지 말라’에서 ‘정직을 사랑한다’로, ‘원수를 사랑하라’에서 실제로 그의 선을 바라는 상태로 이동합니다. 말씀은 돌판에서 마음판으로 옮겨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인은 삶에 새겨지는 신적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7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14만 4천은 문자적으로 정원이 제한된 최상위 성도 집단이라기보다 주님께 속한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결합된 모든 상태와 사람들의 완전한 전체를 표상하며, 이마의 하나님의 인은 외적 인증표가 아니라 주님 사랑과 주님의 진리가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생명에 새겨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Swedenborg Foundation)
강사의 표현을 살려 조금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도장이 찍힌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은 합격이라고 외부에서 판정하셨다’보다 ‘이 사람의 삶과 사랑 안에 주님의 것이 실제로 새겨졌다’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이마에 보이는 글자보다 훨씬 분명하게 삶에서 나타납니다. 사랑에서, 진실함에서, 겸손에서, 쓰임에서, 그리고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않는 데서 나타납니다.
이제 7강의 마지막 10부에서는 이 모든 구조를 한데 모아야 하겠습니다. 강사는 14만 4천을 시온산의 ‘처음 익은 열매’, 새 예루살렘의 성도, 하나님의 인 맞은 종, 이기는 자와 연결하고, 그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 순교자, 천년왕국과 새 예루살렘을 하나의 천국 구조 안에 배치합니다. 여기서 ‘핵심진리’의 천국론과 종말론이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납니다. 마지막 10부에서는 ‘시온산-14만 4천-처음 익은 열매-새 예루살렘-천년왕국’의 연결을 충분히 따라간 뒤, 스베덴보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천년’, 그리고 주님의 재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종합하면서 7강 전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7강 10부
시온산, 처음 익은 열매, 새 예루살렘과 천년왕국 : ‘핵심진리’의 종말론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종합하다
7강의 마지막에 이르면 강사의 전체 구조가 거의 완성됩니다. 지금까지 그는 일곱 교회의 ‘이기는 자’, 계시록 7장의 ‘인 맞은 종 14만 4천’,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선 자들’, 그리고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을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읽어 왔습니다. 강의 후반에서 그는 14만 4천을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의 다른 이름으로 보고, 이들이 시온산에 서 있으며, 이기는 자에게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는 말씀을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권세를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또한 이들은 광야 연단 가운데 자기 옷, 곧 행실을 깨끗이 빨아 ‘익은 열매’가 되었기 때문에 그 권세를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로써 앞선 여러 강에서 반복되었던 ‘좋은 밭-연단-성화-이기는 자-익은 열매-14만 4천’이라는 구조가 이제 ‘시온산-새 예루살렘’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서 강사는 매우 독특한 ‘천국 지리’를 제시합니다. 가나안 땅 전체가 천국의 모형이고 예루살렘은 가나안의 수도였으므로, 새 예루살렘도 천국 전체가 아니라 ‘천국의 수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교회 시대의 ‘이긴 자들’이 그 성에 들어가며, 다른 천국 백성은 그 밖의 ‘만국’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강사는 실제로 ‘천국 전체가 새 예루살렘 성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수도’라고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이긴 자들이 그곳에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은 이후 ‘처음 익은 열매’, ‘두 번째 익은 열매’, ‘세 번째 익은 열매’라는 천국 백성의 세 부류 구분과도 연결됩니다.
강사는 또 모리아산, 시온산, 예루살렘을 역사적으로 같은 장소의 서로 다른 이름처럼 연결합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모리아산, 다윗 시대에는 시온산, 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 성이 완성되면서 예루살렘으로 불렸다는 흐름을 제시한 뒤, 이것을 천국의 모형으로 옮겨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천국의 수도를 새 예루살렘이라 부르지만 그 전까지는 시온산이라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계시록 14장에서 14만 4천이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시온산과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을 사실상 동일 장소의 서로 다른 단계적 명칭으로 봅니다. 이것은 ‘핵심진리’의 모형론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먼저 ‘시온’과 ‘예루살렘’은 말씀에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지만 영적 의미상 단순히 같은 장소의 옛 이름과 새 이름으로만 환원되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시온’은 주님 사랑과 천적 선의 측면에서 교회를, ‘예루살렘’은 진리와 교리의 측면에서 교회를 나타냅니다. 둘은 선과 진리처럼 하나의 교회를 이루지만, 상응적으로는 서로 다른 측면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시온산=미완성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완성된 시온산’이라는 식의 시간적 명칭 변경으로만 이해하면 말씀 안의 선과 진리의 내적 관계가 지나치게 공간적 구조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은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수도’인 거대한 물리적 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 뒤에 세우시는 ‘새 교회’를 표상하며, 특히 그 새 교회의 교리와 그 교리를 받아 살아가는 교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요한이 그 성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 까닭도 중요합니다. 자연계의 특정 지점으로 물리적인 도시가 낙하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새 하늘에서 형성된 신적 진리와 교회 질서가 인간에게 주어짐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천국 안의 특권층이 들어가는 수도라기보다,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새 교회 자체에 관한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중심 해석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공간 해석의 차이가 아닙니다. ‘새 예루살렘에 누가 들어가는가?’라는 질문의 성격 자체가 달라집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긴 자’가 되어 특별한 성화 단계에 도달한 14만 4천이 천국 수도의 거주권을 얻는다는 그림이 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새 예루살렘 안에 있다’는 것이 주님의 새 교회의 선과 진리 안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곧 주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신앙과 체어리티를 결합하여 살며, 말씀의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초점이 영적 특권의 장소에서 교회의 생명과 교리의 질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강사의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영적 긴장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더 높은 천국의 특별 구역에 입성해야 한다’는 방향보다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의 선과 진리를 실제 생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방향으로 옮기면 훨씬 깊어집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사람에게 기록된다는 것도 특정 도시의 출입 자격증이 그의 이마에 찍힌다는 뜻보다, 그 교회의 진리와 생명의 질이 그 사람 안에 새겨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어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이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불리는 데 특별히 주목합니다. ‘처음’이라는 말이 붙었으니 두 번째와 세 번째 익은 열매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세 종류까지만 있는지를 구약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 구조에서 찾습니다.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은 일반 백성이라는 세 부류가 가나안에 들어갔으므로, 천국에도 세 종류의 익은 열매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14만 4천, 두 번째는 순교자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밖의 천국 백성이라는 구조입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성경 해석이 단지 몇 구절의 문자적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모형적 이치’를 통하여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만드는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여기에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흥미로운 접점과 차이가 함께 있습니다. 접점은 ‘처음 익은 열매’, ‘제사장’, ‘레위인’, ‘가나안’ 같은 구약의 표현들이 실제로 더 깊은 영적 실재를 표상한다는 감각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가나안을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는 땅으로 읽고,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도 각각 깊은 상응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성경의 역사적 제도가 영적 실재를 표상한다는 큰 방향은 분명히 만납니다.
그러나 차이는 그 상응을 연결하는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제사장, 레위인, 일반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세 구분을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는 세 계급’으로 대응시키지는 않습니다. 제사장직은 특히 주님의 신적 선과 사랑, 왕직은 신적 진리, 레위인은 그 둘을 섬기며 연결하는 여러 영적 기능과 관련하여 읽힙니다. 이것은 ‘세 종류의 천국 주민 명단’이라기보다 선과 진리의 천국적 질서에 관한 상응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 세 부류가 있었으니 천국에도 정확히 세 종류의 익은 열매가 있다’는 방식은 ‘핵심진리’의 모형론이지, 스베덴보리의 연속적인 아르카나 해석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처음 익은 열매’라는 말도 단순히 영적 성적 순위의 ‘1등 그룹’을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말씀에서 ‘처음 난 것’, ‘첫 열매’는 주님에게 성별된 것, 주님께 속한 것, 선에서 처음 나오는 진리 등과 관련된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불린다는 것은 그들이 다른 천국 백성보다 먼저 입성한 최상위 계급이라는 것보다, 주님에게 온전히 속한 교회의 선과 진리의 상태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처음 익은 열매’를 시간 순서보다 ‘질’의 문제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처음’은 언제나 자연적 달력의 첫 번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심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14만 4천의 ‘첫 열매’를 특별계급론으로 굳히기보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가 교회 안에서 온전한 질서로 형성된 상태라고 읽으면 계시록 전체의 상응적 흐름과 더 잘 맞습니다.
강사의 전체 종말론에서 이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 등장합니다.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강사는 예수님의 재림 목적 가운데 하나를 이 땅의 죄악 세상을 심판한 뒤 ‘불행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와 질서와 행복으로 가득한 천년왕국’을 지상에 세우시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마귀가 천 년 동안 결박되고, 그 기간 동안 죄 없는 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 뒤 이후의 사건들이 계속된다는 문자적인 천년왕국 이해입니다. 이 부분에서 ‘핵심진리’의 재림대망신앙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 20장의 ‘천 년’을 문자적인 1,000년의 지상 왕국으로 읽지 않습니다. 말씀의 수는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천’은 일정하고 충만한 상태 또는 많은 것을 나타내며,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도 자연계에서 정확히 1,000년간 정치적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는 이 ‘천 년’과 첫째 부활 등을 마지막 심판 이전 영계에서 보존되고 보호받았던 선한 영들의 상태와 연결하여 풉니다. 따라서 지상에 사탄이 물리적으로 봉쇄되어 죄가 사라진 정치·사회적 왕국이 천 년 동안 유지된다는 구도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더 근본적으로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물론 천국적 질서가 자연계 사회에도 영향을 주어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왕국 자체는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안에서 선과 진리가 다스리는 영적 나라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을 기다린다는 것도 ‘언젠가 외부 세계가 완벽한 사회가 되기를 기다린다’는 것보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자기애와 거짓의 지배를 꺾으시고 사랑과 진리로 다스리시도록 받아들이는 문제로 더 깊어집니다.
이것은 재림 이해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주님께서 장차 자연계에 다시 오셔서 대환난을 끝내시고 악한 세상을 심판하시며 천년왕국을 세우십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은 주님께서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고 공간적으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열어 신적 진리를 새롭게 계시하시고 그 진리를 통하여 옛 교회를 심판하고 새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의 중심은 물리적 출현보다 ‘신적 진리의 오심’입니다.
여기서 ‘구름을 타고 오심’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영광’은 그 문자 안의 신적 진리, 곧 속뜻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인자가 구름을 타고 권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진리가 말씀의 문자 안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지금 하는 ‘말씀의 속뜻을 여는 작업’은 단순한 성경 연구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재림의 본질과 매우 깊이 연결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7강 전체가 흥미롭게 뒤집힙니다. 강사의 목표는 ‘재림을 준비하도록 계시록의 시간표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재림을 준비하는 길이 미래 시간표를 더 세밀하게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삶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재림은 ‘언제 오시는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말씀을 통하여 내 안에 오실 때 나는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이렇다고 해서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긴장과 깨어 있음을 약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긴장을 더 가까이 가져올 수 있습니다. 미래의 대환난이 몇 년 뒤인지 알 수 없더라도 오늘 죽음이 올 수 있고, 더 근본적으로 오늘 내 안에서 진리와 악이 충돌합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진리를 거절하면 오늘의 작은 재림을 거절한 셈이고, 진리를 받아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면 주님께서 오늘 내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십니다.
강사의 ‘새 예루살렘 성에는 이긴 자들이 들어간다’는 강조도 이렇게 바꾸어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은 특정한 하늘 도시의 입주권을 얻는 것보다 새 교회의 진리와 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입구는 미래에 처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행하는 가운데 열립니다. 사람이 새 예루살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죽은 뒤 주소지가 바뀌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그 사람 안에서 교회의 새 진리와 사랑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새 예루살렘의 크기를 실제 정육면체의 거대한 천국 도시로 이해하려는 부분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말씀을 실제 정육면체 구조로 읽고, 그 방대한 크기를 근거로 천국 수도의 실제 공간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그 측량은 물리적 건축 치수가 아니라 교회의 선과 진리의 질과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길이, 너비, 높이는 각기 영적 차원을 나타내며, 성의 수치들도 모두 상응적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새 예루살렘이 정육면체와 같은 형상을 가진다는 점은 구약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가 정육면체였다는 사실과도 깊은 연결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엄청나게 큰 정육면체 도시’로 보기보다 주님의 임재, 거룩함, 선과 진리의 완전한 결합이라는 영적 질서 안에서 보는 것이 말씀 전체의 상응과 더 잘 맞습니다. 새 예루살렘 전체가 마치 확장된 지성소와 같은 형상을 가진다는 것은 새 교회 안에서 주님의 임재가 얼마나 충만하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천국 수도’라는 감각에는 한편으로 흥미로운 영적 직관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을 ‘주님이 왕으로 계시는 가장 중심적인 곳’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중심성을 공간적 수도보다 사랑과 진리의 중심성으로 옮깁니다. 주님께서 왕으로 계시는 곳은 가장 높은 궁전이 있는 지리적 수도이기 전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가장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교회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사가 말한 ‘우리 같은 사람은 새 예루살렘에 못 들어간다’는 표현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겸손한 자기평가처럼 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새 예루살렘=최상급 성도만 들어가는 특수 구역’이라는 전제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새 예루살렘은 영적 엘리트만을 위한 비밀 도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새 교회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와 같은 쓰임을 갖지는 않지만, 핵심은 ‘나는 최고 등급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천국의 다양성도 경쟁에서 해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세 천국과 무수한 공동체의 차이를 분명히 말합니다.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과 자연적 천국의 상태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쪽이 다른 쪽을 부러워하는 서열 구조가 아닙니다. 각 사람은 자기 지배적 사랑과 쓰임에 가장 잘 맞는 천국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립니다. 손이 눈이 되지 못했다고 불행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가장 큰 사람을 이루는 각각의 기관이 서로 다른 쓰임을 행하면서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더 높은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욕망보다 ‘주님께서 나를 어떤 사랑과 쓰임으로 지으셨는가’를 찾는 것이 훨씬 천국적입니다. 영적 성장도 ‘최상위 14만 4천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선과 진리를 더 충실히 받아 자신의 쓰임을 온전히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강사가 계속 강조해 온 겸손과 충성, 인내와 사랑을 오히려 더 순수하게 보존해 줍니다.
이제 7강 전체를 처음부터 되돌아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보입니다. 이 긴 강의에는 두 개의 흐름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하나는 매우 귀한 ‘생명과 성장’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정교한 ‘종말 시간표’의 흐름입니다. 전자는 말씀을 듣고 좋은 밭이 되며, 겨자씨처럼 성장하고, 누룩처럼 삶 전체가 변화되고, 자기 소유를 내려놓아 값진 진주를 얻으며, 악과 싸워 이기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인이 생명에 새겨지는 과정입니다. 후자는 14만 4천의 예정된 숫자가 채워지고, 대환난이 시작되며, 휴거와 심판과 천년왕국이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이 완성된다는 구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첫 번째 흐름을 상당 부분 귀하게 받아들이면서 두 번째 흐름을 근본적으로 다시 읽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렇게 읽을 때 첫 번째 흐름은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종말의 사건들이 먼 미래의 외적 시간표에서 인간과 교회의 내적 상태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14만 4천’은 제한된 최정예 성도의 인원수에서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결합된 교회의 전체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인’은 최종 합격 도장에서 주님 사랑과 진리가 지배적 사랑에 새겨진 상태로 바뀝니다. ‘시온산’은 천국 수도의 임시 이름에서 주님 사랑과 천적 선의 교회 상태로 깊어집니다.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물리적 수도에서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와 그 교리로 열립니다. ‘천 년’은 자연계의 정확한 천년 통치에서 영적 상태의 충만함으로 바뀝니다. ‘재림’은 미래 어느 날 공간적으로 내려오시는 사건만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 안에서 신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의 현존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핵심진리의 모든 종말론은 틀렸다’고 재단하는 방식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강의가 붙들고 있는 진지함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강사는 사람들이 세상에 취해 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실제로 살며, 자기 욕망과 싸우고, 이기는 자가 되어,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 문제의식은 귀합니다. 우리가 조정해야 할 것은 그 영적 열망이 아니라 그 열망을 담고 있는 성경 해석의 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틀을 바깥에서 안으로 옮깁니다. ‘재림이 언제인가?’에서 ‘주님의 진리가 지금 내 안에 오고 있는가?’로, ‘14만 4천 안에 들어가는가?’에서 ‘선과 진리가 내 안에서 결합되고 있는가?’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에서 ‘새 예루살렘의 선과 진리가 내 생명이 되고 있는가?’로, ‘천년왕국은 언제 시작되는가?’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지금 내 삶을 다스리고 있는가?’로 옮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현재적으로 만듭니다. 먼 미래의 사건은 오늘 미룰 수도 있지만, 현재 내 안에 일어나는 주님의 심판과 재림은 미룰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을 거절할 것인지 받아들일 것인지, 오늘 자기애와 체어리티가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가 이미 영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7강의 처음, 마태복음 13장의 ‘좋은 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사실 7강의 모든 종말론은 그 작은 씨 한 알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의 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결국 겨자나무가 되고 누룩이 되고 진주가 되고 알곡이 되며, 마지막에는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이 됩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가장 실제적인 방법은 계시록의 연표를 완벽히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게 주어진 말씀의 씨를 좋은 땅으로 받아 열매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사의 ‘이긴 자’ 개념도 가장 건강하게 살리는 길입니다. 이긴 자는 종말 시간표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드러날 때 주님의 힘으로 그것을 피하고, 진리를 사랑과 결합하여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승리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승리의 힘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 익은 열매’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심으신 씨가 마침내 사랑과 선한 삶이라는 열매가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익었다’는 것은 지식을 많이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질이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고, 의지가 행동이 되며, 선을 행하는 것이 점차 기쁨이 된 상태입니다. 이런 의미의 ‘익은 열매’를 사모하라는 강사의 권면은 충분히 오래 붙들어도 좋겠습니다.
다만 그 열매를 자기 공로로 재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첫째 열매인가, 둘째인가, 셋째인가’, ‘나는 새 예루살렘 안인가 바깥인가’라고 끊임없이 자기 영적 위치를 계산하기 시작하면, 열매 속으로 다시 proprium이 들어옵니다. 천국적 사람은 자기 등급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천사는 자기 천국의 높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쓰임을 행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렇게 보면 ‘핵심진리’의 영적 성장론에 스베덴보리가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보완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라’보다 ‘더 깊이 주님에게서 받아라’입니다. ‘더 완전한 자가 되라’보다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선을 더 자유롭게 받아들여라’입니다. 그러면 영적 성장은 계속되면서도 자기완성의 긴장은 줄어들고, 겸손과 자유는 오히려 깊어집니다.
반대로 ‘핵심진리’가 스베덴보리를 읽는 우리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게 깊은 속뜻을 알고 있는데, 그 진리가 실제 당신의 행실을 얼마나 변화시켰습니까?’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새 교회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14만 4천의 수의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고, 천년왕국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이 되지 않는다면, 씨는 여전히 열매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7강 전체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대화를 만들어 준다고 봅니다. ‘핵심진리’의 문자적 종말론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속뜻과 크게 갈라지지만, ‘말씀은 반드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그 강한 요구는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를 읽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경고가 됩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속뜻은 ‘핵심진리’의 연단과 종말론이 자칫 외적 단계와 시간표, 영적 등급의 체계로 굳어지는 것을 풀어 주고, 그것을 주님과 인간의 내적 결합이라는 더 깊은 자리로 데려갑니다.
그래서 두 관점을 경쟁시키기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핵심진리’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 자라라, 이겨라, 열매 맺으라’고 강하게 외치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외침에 ‘그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네 안에서 결합되는 거듭남이며, 그 승리와 열매의 모든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고 깊이를 더합니다.
7강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의 종말 시간표를 계산하기 위한 암호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고, 선과 악을 분리하며, 마지막 심판을 거쳐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새 교회를 세우시는 과정을 자연적 형상과 수와 장소의 상응으로 계시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준비는 아주 실제적입니다. 좋은 밭이 되는 것, 말씀의 작은 씨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 진리가 누룩처럼 생활 전체에 스며들게 하는 것, 주님보다 더 귀하게 붙들고 있는 proprium을 내려놓는 것, 자기 안의 가라지를 발견할 때 회개하는 것, 시험에서 주님의 힘으로 선과 진리를 붙드는 것, 그리고 받은 선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쓰임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재림을 대망하는 삶’의 가장 깊은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새 예루살렘은 먼 천국의 수도가 아니라 벌써 우리 앞에 내려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가 말씀에서 열리고, 그 진리를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여 사랑과 삶으로 만들 때 새 예루살렘의 첫 돌이 그 사람 안에 놓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만을 기다리는 동안 놓칠 수 있는 매우 조용한 오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오심이야말로 계시록이 마지막에 보여 주는 가장 큰 소망입니다.
이렇게 해서 7강은 10부로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시작하여 겨자씨의 성장과 쓰임, 누룩의 삶 전체의 변화, 진주와 보화의 자기부인, 가라지와 그물의 분리, 요한계시록의 서론과 일곱 교회의 ‘이기는 자’, 하나님의 인과 14만 4천을 지나, 마지막에는 시온산·처음 익은 열매·새 예루살렘·천년왕국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긴 흐름의 중심에는 결국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심으신 진리가 지금 지식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사랑과 쓰임이라는 생명으로 익어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붙들고 7강을 마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SY.61,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8강 (7/30),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8강 1부‘일곱 인’과 네 말, 그리고 종말을 읽는 두 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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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59,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6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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