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표현, 그러니까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었을 때’ 같은 수동 표현이 거의 다인데요, 이걸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했을 때’ 처럼 능동 표현으로 바꾸면 무슨 큰 오류일까요? 여기 AC에서는 왜 거의 다 수동 표현을 쓰나요?
먼저 결론부터 분명히 말씀드리면,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었을 때’를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했을 때’로 바꾸는 것이 ‘즉각적인 이단이나 결정적 오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표현 하나로 인해, 스베덴보리가 AC(Arcana Coelestia) 전체에서 지키고자 한 ‘인간 이해의 중심축’이 미세하나마 분명하게 이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문제는 문법이 아니라 ‘주체가 어디로 이동하느냐’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에게서 ‘결합’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 상태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결합했다’는 표현은, 어떤 주체가 의도적으로 두 요소를 묶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예를 들어 ‘생각과 행동을 결합했다’, ‘이론과 실천을 결합했다’ 같은 말은 모두 ‘인간의 능동적 작업’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AC에서 말하는 신앙과 사랑, 이해력과 의지의 결합은 그런 종류의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시도해서 성취하는 통합’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내적 질서의 재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합을 언제나 ‘사건’이 아니라 ‘상태’로 말합니다. 결합은 어떤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오랜 준비, 유입, 허용, 정렬의 결과로 ‘그렇게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점에서 ‘결합되었다’는 표현은, 인간이 무엇을 했다는 느낌을 최대한 제거하고, 변화된 상태 자체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둘째, 영어와 라틴어에서 수동 표현은 ‘주체를 감추기 위한 문법’이 아니라, ‘주체를 보존하기 위한 문법’입니다.
AC의 원문인 라틴어를 보면, 스베덴보리는 굳이 능동으로 쓸 수 있는 자리에서도 반복해서 수동이나 비인칭 구조를 선택합니다. 이는 문체상의 습관이 아니라, 명백한 신학적 선택입니다. 그는 인간이 ‘무엇을 한다’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독자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proprium’(자기 본성)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 생명과 질서의 실제 작용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이 신학적 긴장을 문장 구조 속에 그대로 심어 놓은 것이 바로 AC의 수동 표현들입니다.
셋째, ‘is conjoined’, ‘is vivified’, ‘is regenerated’ 같은 영어 표현은 단순한 문법 선택이 아니라, ‘비인칭 신적 작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영어는 한국어보다 수동 표현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적습니다. 영어 독자는 ‘is conjoined’를 보며 ‘누가 했지?’를 묻기보다, ‘아, 이런 상태가 되었구나’라고 읽습니다. 반면 한국어에서는 ‘결합되었다’라는 표현은 다소 딱딱한 대신, ‘결합했다’라는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번역자는 늘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AC의 영어 수동은, 단순히 ‘자연스러운 표현’을 택한 결과가 아니라, ‘독자의 사고를 특정 방향으로 훈련시키는 장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가 문장을 읽는 동안조차, ‘내가 했다’는 생각보다 ‘이루어지고 있다’는 감각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넷째, 그렇다면 능동 표현은 언제 문제가 되고, 언제 허용될까요? 핵심 기준은 이것입니다. 그 문장이 ‘행위의 근원’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행위의 현상’을 말하고 있는가?
신앙과 사랑의 결합, 생명의 부여, 거듭남, 조명, 인도와 같은 표현은 모두 ‘행위의 근원’을 다룹니다. 이 경우 능동으로 바꾸면, 인간이 그 근원의 주체인 것처럼 읽힐 위험이 큽니다. 반면 ‘그는 말한다’, ‘그는 행한다’, ‘그는 분별한다’처럼 이미 생겨난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할 때는 능동 표현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에서 말한다’는 표현은 비교적 안전하지만, ‘신앙과 사랑이 결합했다’는 표현은 훨씬 더 위험합니다. 전자는 ‘표현의 방향’이고, 후자는 ‘존재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그렇다고 해서 번역에서 항상 수동만 고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습니다. ‘번역 본문과 해설, 설교는 동일한 언어 공간이 아닙니다.’
번역 본문은 독자가 아직 구조를 모를 가능성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동을 유지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반면 해설이나 설교에서는 이미 주체가 누구인지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능동 표현을 사용해도 오해가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수동만 쓰면 한국어가 부자연스러워지고, 독자가 내용을 따라오기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균형이 가장 좋습니다. 본문 번역에서는 ‘결합되었을 때’를 유지하고, 해설에서는 ‘결합했을 때’라고 말하되, 한 번쯤은 ‘이 결합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라고 짚어 주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질문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AC에서 수동 표현은 문법 선택이 아니라 신학적 훈련입니다.’ 독자가 문장을 읽는 동안에도, ‘내가 주체다’가 아니라 ‘나는 수용자다’라는 감각 안에 머물도록 만드는 장치입니다.
그래서 ‘결합되었다’를 ‘결합했다’로 바꾸는 것이 당장 큰 오류는 아니지만, 그 방향이 반복되면 AC 전체의 호흡, 즉 ‘주님 중심–인간 수용자 중심이라는 축’이 서서히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창1:28)
AC.55
태고의 사람들은 이해력과 의지, 곧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 했기 때문에, 그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의 모든 것은 ‘생육’(fruitfulness)이라 했고, 진리의 모든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표현들이 사용되는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입니다. 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 “fruitfulness,” 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 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겔36:11, 12)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 (Ezek. 36:11–12).
여기서 ‘사람’(man)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를, ‘처음’(beginnings)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이 본문에서 진리에 속한 ‘수가 많음’(multiplication)이 먼저 언급되고, 선에 속한 ‘번성’(fruitfulness, 앞에서는 multiplications을 번성으로 번역, 서로 다른 영어를 같은 한글 단어로 번역한 바람에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이 그다음에 언급되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이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By “man” 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 “ancient times,”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The reason why “multiplication,” 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 “fruitfulness,” 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 이해력이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결혼한 땅’(a 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 “a married land,” as in Isaiah: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사62:4) 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 (Isa. 62:4).
이 결합에서 나오는 진리의 열매들을 ‘아들’(sons)이라 하고, 선의 열매들을 ‘딸’(daughters)이라 하는데, 이는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 “sons,” 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 “daughters,” 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3] 땅이 ‘가득 차게 된다’(replenished)는 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그에게 역사하실 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The earth is “replenished,” 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1, 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겨자씨 한 알’(A grain of mustard seed)은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의 선을 뜻하는데, 그것이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다’(the least of all seeds)고들 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가 하는 선을 자기한테서 난 거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한테서 나는 건 실상 악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거듭남의 상태 중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선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가장 작은 선,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일지라도 말입니다. A “grain of mustard seed” 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 “the least of all seeds,” 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 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 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것은 크게 자라 ‘풀’(an herb)이 되고,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a tree)가 됩니다. 그리고 이 나무의 가지에 ‘공중의 새들’(the birds of the heavens), 곧 진리들,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데(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이 가지들은 기억-지식(memory-knowledges)입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때, 그리고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에는 전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는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 “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 “tree,” and then the “birds of the heavens” (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which are memory-knowledges. 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해설
이 글은 앞선 AC.54에서 말한 ‘결혼’ 개념을 한 단계 더 확장합니다. 결혼은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었고, 이제 이 결합에서 ‘무엇이 산출, 곧 나오는가’가 주제가 됩니다. 태고의 사람들은 이 결합에서 나오는 결과를 매우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것은 ‘생육’(fruitfulness), 곧 열매 맺음이라 했고, 진리에서 나오는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즉 열매 맺음은 질의 문제이고, 번성함은 양의 문제입니다.
이 구분은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라, 인간 내적 과정에 대한 정밀한 통찰에서 나온 것입니다. 선은 사랑에 속하고, 사랑은 생명을 낳는 근원입니다. 그래서 선은 ‘열매’로 표현됩니다. 반면 진리는 이해력에 속하고, 이해력은 분별하고 확장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번성’으로 표현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지만, 작용 방식은 다릅니다.
에스겔의 본문에서 ‘수가 많음’(multiplication)이 먼저 나오고, ‘번성’(fruitfulness)이 뒤에 나오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글이 이미 거듭난 상태가 아니라, ‘거듭나고 있는 상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진리가 먼저 늘어납니다. 사람은 먼저 알아야 하고, 분별해야 하며, 진리의 틀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다음에야 선이 그 진리 안에 들어와 생명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과정의 언어에서는 진리가 먼저, 선이 나중에 나옵니다.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서로 결합했을 때, 그 사람을 ‘결혼한 땅’이라 합니다. 여기서 땅은 언제나 인간을 뜻하며, 특히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곧 겉 사람과 속 사람이 하나로 정렬된 상태를 뜻합니다. 땅이 결혼한다는 표현은, 더 이상 갈라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때 인간은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처가 됩니다.
이 결합에서 나오는 산출물의 명명법도 매우 일관됩니다. 진리에서 나온 것은 ‘아들’, 선에서 나온 것은 ‘딸’이라 합니다. 이는 성별 개념이 아니라, ‘출처의 차이’를 말하는 언어입니다. 이해력에서 나온 것은 아들이고, 의지에서 나온 것은 딸입니다. 말씀에서 교회가 딸이나 처녀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 이전에 선의 애정으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 비유는 이 전체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처음의 선은 가장 작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은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작은 선은 자랍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풀로, 나무로 자라고, 마침내 그 안에 수많은 진리, 이해력의 내용들이 깃들게 됩니다. 기억-지식은 이때 비로소 살아 있는 가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영적 인간의 상태를 ‘전투’로 규정합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지배욕이나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내적 질서 회복의 언어’입니다. 아직 완전한 천적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외적인 것들과의 긴장과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이 싸움 속에서 진리와 선은 점점 더 결합하고, 인간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인용 구절 해설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겔36:11, 12)
위 구절은 문자 그대로는 ‘폐허가 된 땅이 다시 사람과 가축으로 가득 차고, 옛날처럼 회복된다’는 회복 예언처럼 보이지만, AC.55의 맥락에서는 ‘거듭남’의 내부 과정을 한 문장으로 압축해 보여 주는 대표 구절로 읽힙니다.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겠다’에서 ‘사람’은 영적 인간, 곧 진리와 신앙의 빛을 받아 ‘이해력’ 중심으로 깨어나는 상태를 뜻하고, ‘짐승’은 의지의 영역, 즉 애정과 사랑의 영역을 뜻합니다.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본문은 ‘수가 많고’(multiply) ‘번성하게 하겠다’(be fruitful)를 함께 말하지만, AC.55는 이 순서를 의도적으로 잡아 ‘진리의 증가가 먼저, 선의 결실은 그다음’이라고 읽습니다. 거듭남이 시작될 때, 사람은 먼저 진리(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주님의 길인지)를 배우고, 분별하며, 기억 안에 쌓습니다. 그다음에야 그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좋아지고’, ‘원하고’, ‘행하고 싶은 것’이 되면서 선으로 열매 맺습니다. 그래서 거듭나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식의 증가’가 먼저 나타나고, ‘성품의 변화’는 그다음에 나타납니다. 또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의 상태, 즉 내적 결혼(이해력과 의지의 하나 됨)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상태를 가리키고, ‘처음’(beginnings)은 홍수 이후 고대교회, 곧 외적인 것이 더 강해져 진리를 통해 길을 찾아야 했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 이 예언은 단지 역사적 회복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 안에 진리와 선을 다시 심으셔서, 옛 질서처럼 살게 하신다’는 거듭남의 약속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사62:4)
위 구절은 AC.55에서 ‘결혼한 땅’이라는 강렬한 표현을 제공하는 구절인데, 이 말은 낭만적 비유가 아니라 ‘분열된 내면의 통합’에 대한 선언입니다.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내적 의미에서 ‘겉 사람(삶, 습관, 감정의 반응, 선택의 자리)’이 더 이상 메마른 수동적 터전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자라는 토양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뀝니다. ‘헵시바’(my delight is in her)는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방향성이 그 안에 생겼다’는 뜻이고, ‘쁄라’(married)는 이해력과 의지가 더 이상 따로 놀지 않고 하나의 삶으로 묶였다는 뜻입니다. 이사야가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거듭남이 단지 머리로 아는 신앙이 아니라 ‘삶의 자리(땅)’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담아내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결혼한 땅’은 ‘교리적으로는 옳은데 삶이 안 따라오는’ 분열 상태의 반대편입니다. 이해력은 진리를 보는데 의지가 반대로 끌어당기는 상태에서는 ‘황무지’입니다. 반대로 이해력이 보는 진리를 의지가 사랑하고 선택하는 상태에서는 그 땅이 ‘결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성도들에게도 아주 직접적으로 적용됩니다. ‘내 생각은 신앙을 말하는데 내 습관과 욕구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상태’가 황무지라면, ‘말과 선택이 같은 방향으로 묶이는 상태’가 결혼한 땅입니다.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1, 32)
위 구절의 겨자씨 비유는 AC.55가 말하는 ‘증가와 결실’의 과정을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살아 있는 선의 시작’을 뜻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왜 가장 작은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느끼는 한, 그 선은 가장 작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선 안에는 여전히 자기 공로, 자기 의(내가 했다), 자기 중심의 기쁨이 섞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선이 완전히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남의 시작 단계에서는 사람이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고, 주님은 그 단계의 ‘작은 선’도 씨앗으로 삼아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란 후에는’이라는 과정 언어가 붙습니다. 진리가 늘고(번성), 선이 의지 안에 자리 잡아(열매 맺음) 둘이 결합하면 작은 씨가 풀(herb)이 되고, 마침내 나무(tree)가 됩니다. 나무가 되었다는 말은 ‘결합이 안정된 상태’, 즉 사랑이 주도권을 잡아 진리들이 그 사랑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라는 말은, ‘이해력에 속한 것들(진리들, 통찰들)이 풍성해지고, 그것들이 기억-지식(가지) 안에 정착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즉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지식이 단지 머릿속 정보가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구조물처럼 자리를 잡습니다. 예전에는 같은 성경 지식이라도 ‘논쟁거리’이거나 ‘기억된 문장’에 머물렀다면, 결합 이후에는 그 지식이 ‘살아 있는 가지’가 되어 새들이 깃들 듯 자연스럽게 쓰임을 얻습니다.
이 세 구절을 한 흐름으로 묶으면, AC.55가 무엇을 말하는지 더 선명해집니다. 에스겔은 ‘거듭나고 있는 사람’에게서 왜 번성이 먼저이고 열매 맺음이 그다음인지 보여 주고, 이사야는 그 결합이 이루어진 상태를 ‘결혼한 땅’이라 부르며, 마태는 그 결합이 어떻게 ‘작은 시작에서 큰 생명 체계로 성장하는지’를 씨앗의 성장으로 보여 줍니다. 그래서 ‘번성’과 ‘열매 맺음’은 단지 좋은 결과를 말하는 미사여구가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결합하는 실제 과정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 안에서는 늘 전투가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난 것처럼 느끼는 선’을 주님께로 돌려 드리고, 진리를 사랑으로 내려보내어, 이해력과 의지가 한 방향으로 묶이게 하는 싸움입니다. 그 싸움의 결과가 바로 ‘황무지에서 결혼한 땅으로’의 변화이고, ‘작은 겨자씨에서 새들이 깃드는 나무로’의 성장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사라지자, 이 아르카나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안에 담긴 행복을 느끼고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내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내적인 것들, 즉 속의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겉의 것들은 눈으로 보기만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겉의 것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생각을 속의 것들, 곧 내적인 것들로, 그리고 거기서 천적인 것들로, 결국에는 그들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해줄 때에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천상의 결혼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력을 남자라 불렀고, 의지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불렀습니다. 그 교회로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로 인해 선에 대한 애정으로 교회를 가리켜 ‘딸’(daughter)과 ‘처녀’(virgin), 곧 ‘시온의 처녀’(the 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the virgin of Jerusalem)라 하였고, 또한 ‘아내’(wife)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장 15절에서 더 보게 될 것입니다. 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3)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를 인간 생물학이나 사회 제도로 읽지 않고, ‘인간의 내적 구조의 언어’로 읽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은 ‘남자’와 ‘여자’를 외적 성별로 보기 이전에, ‘이해력과 의지’, 곧 진리와 선의 관계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상실되면서, 이 깊은 인식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태고교회에서 결혼이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결혼을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천국 결혼의 반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천국 결혼은 주님 안에서의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이 결합을 직접 체험했고, 그래서 결혼은 그 자체로 기쁨이자 영적 인식의 창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외적인 것들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눈으로 사물을 보되,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표지와 통로’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곧 겉의 것들은 생각을 내적인 것들, 곧 속에 속한 것들로, 그다음에는 천적인 것들로, 궁극적으로는 주님께로 이끄는 계단이었습니다. 이 구조 안에서 결혼 역시 외적 관계를 넘어, 천상의 질서를 바라보게 하는 창이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 안에서의 남자와 여자를 명확히 정의합니다. 이해력은 남자이고, 의지는 여자입니다. 이는 우열이나 역할 분담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적 상응’입니다. 이해력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며 비추는 역할을 하고, 의지는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 생명으로 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둘이 따로 움직일 때는 아직 미완의 상태이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를 비로소 ‘결혼’이라 합니다.
이 결혼은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이해력에서 본 진리가 의지에서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때, 인간 안에 내적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핵심 구조이며, 앞선 단락들에서 말해 온 형상과 모양의 완성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단순한 인류 번성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글은 또한 성경 전체에 퍼져 있는 중요한 언어 습관의 뿌리를 설명합니다. 교회를 ‘딸’, ‘처녀’, ‘아내’로 부르는 표현은 단순한 시적 장치가 아니라, 교회를 ‘선에 대한 애정의 주체’로 보았기 때문에 생겨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아는 집단이기 이전에, 선을 사랑하는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내’이며,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결혼의 언어로 묘사됩니다.
핵심 개념 정리
이 글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속뜻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이해력, 여자는 의지이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인간 안에 결혼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결혼은 인간적 발명이 아니라, ‘천국 결혼의 반영’이며, 그 궁극적 근원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결혼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던 이유는, 그들이 그 결혼을 통해 단지 서로를 사랑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창세기 1장의 ‘남자와 여자’는 더 이상 시대에 묶인 문장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인간 구조의 계시로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