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상당히 거친 어조로 오늘날 신학생들의 공부 태도를 비판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성서학자들의 수십 연구를 뛰어넘을 없다’,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한심하다’, ‘개론서도 소화하지 못하면서 특정 주제만 파고드는 것은 잘못된 독서다’, ‘영어도 하지 않으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겉핥기로 다루어서는 된다’는 것입니다. 표현만 떼어 놓고 보면 다소 모욕적으로 들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친 표현을 잠시 걷어내고 중심 문제의식만 보면 귀담아들을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열정을 표현하는 일이 아니며, 오랜 시간 축적된 지식과 연구 방법을 배우고, 자신의 생각을 검증받으며, 무엇보다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가는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도 영상의 문제의식과 상당 부분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식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생애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한 학문적 탐구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광산학, 금속학, 수학, 천문학, 해부학, 생리학, 철학 등 여러 분야를 깊이 연구했고, 훗날 신학 저술을 시작한 뒤에도 성경 원문과 당시 이용할 수 있었던 여러 학문적 자료를 폭넓게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거나 ‘기도만 많이 하면 학문적 훈련 없이도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있다’는 식의 태도를 스베덴보리에게서 정당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성 역시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이 ‘기초’를 강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개론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곧바로 어려운 주제나 독창적인 해석으로 뛰어드는 것은 신학에서만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분야든 기초 개념과 기존 연구를 알지 못하면 자기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미 오래전에 논의된 내용인지, 혹은 오래전에 반박된 주장인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1층도 없는 건물의 2층을 짓는다’는 영상의 비유는 꽤 적절합니다. 신학 역시 역사, 언어, 문헌, 교리, 철학적 배경을 차근차근 익히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학문적으로 많이 아는 ’과 ‘말씀을 참으로 이해하는 ’은 과연 같은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영상의 주장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상당히 중요한 긴장이 나타납니다. 영상에서는 성서학자와 신학자의 오랜 연구가 일종의 지적 권위로 제시됩니다. 물론 전문 연구자의 축적된 지식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히 인간의 역사와 언어와 문헌을 연구하여 그 의미를 완전히 밝혀낼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가 있고, 그 문자 안에는 영적 의미가 있으며, 더 깊은 차원에는 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내적 의미는 천국과 연결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을 향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완벽하게 알고, 고대 근동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연구하고, 교회사와 신학사의 방대한 문헌을 독파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공부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문을 무시하는 신앙주의’도 위험하지만 ‘학문이 말씀의 모든 것을 해명할 있다고 생각하는 지성주의’ 역시 위험합니다. 전자는 이성을 버리고, 후자는 계시의 깊이를 인간 이성의 범위 안에 가두기 쉽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살펴볼 대목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들 성서학자들의 수십 년의 연구물을 뛰어넘는 성경 이해를 갖출 없습니다’라는 주장입니다. 이 말을 ‘기도가 학문 연구를 대신할 없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충분히 타당합니다. 성경의 역사적 배경이나 원문의 문법을 알고 싶으면서 기도만 하고 사전과 주석과 연구서를 펼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건이라기보다 게으름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경을 참으로 이해하는 깊이는 전문 연구자의 학문적 수준을 넘어설 없다’는 뜻으로 확대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말씀의 참된 이해에는 지식 이상의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한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의지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할 때 비로소 그것은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래서 지성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 말씀에 관한 수많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말씀의 영적 본질에는 멀리 있을 수 있고, 반대로 학문적 지식은 많지 않은 사람이 자신이 아는 작은 진리를 성실하게 살아냄으로써 그 진리의 본질에 더 가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학의 학문적 서열만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차원이 있습니다.

 

이 점은 영상의 두 번째 주장, 곧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이야기에 그렇게 귀를 기울이느냐’는 주장과도 연결됩니다. 전문성의 가치를 강조하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학이나 법학에서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판단을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듯이 신학 역시 전문적 훈련을 존중해야 합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우연히 들은 주장 하나를 수십 년 연구한 학자의 견해보다 무조건 높게 평가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특히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것과 정확하게 아는 것을 혼동하기 쉬우므로 전문성에 대한 존중은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한심하다’는 데까지 나아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진리는 학위에 의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장이 참인지 아닌지는 말한 사람의 학위가 아니라 그 내용과 근거를 통해 검토해야 합니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기존 종교 엘리트의 제도적 권위를 통해서만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부르신 제자들 가운데 당시의 전문적인 랍비 교육을 받은 종교 엘리트가 중심을 이루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문성을 존중하는 것과 전문성을 진리의 최종 보증으로 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 자신은 매우 흥미로운 사례가 됩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신학교 출신 전문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자연과학과 철학을 연구한 학자였으며, 그의 인생 후반부에 전혀 다른 차원의 소명을 받아 성경과 신학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만일 ‘신학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신학적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한심하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스베덴보리의 신학 저술은 애초에 읽어 볼 가치조차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그가 어느 신학교를 졸업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말했으며, 그것이 말씀과 얼마나 일관되게 연결되고,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어떻게 밝히는가?’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권위를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멈춘다면 그것 역시 이 영상이 비판하는 맹목성과 다른 형태일 뿐입니다. 그의 주장도 읽고, 비교하고, 문맥을 살피고, 말씀과 연결하여 숙고해야 합니다. 다만 처음부터 ‘비전공자’라는 이유로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을 내용에서 신분으로 옮겨 버리게 됩니다.

 

영상에서 영어 공부를 강조하는 부분은 상당히 현실적인 조언입니다. 번역은 언제나 선택과 해석을 동반하기 때문에 원문이나 원서를 직접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신학 연구에서 분명 큰 장점입니다. 영어권에서 생산되는 방대한 신학 연구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역본은 매우 유용하지만 영어 번역본을 서로 비교하고, 필요하면 라틴어 원문까지 확인할 수 있다면 한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훨씬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어 공부를 경시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언어는 ‘도구’이지 ‘진리 자체’는 아니라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어를 잘한다고 구약의 영적 의미가 자동으로 열리는 것도 아니고, 헬라어를 잘한다고 복음서의 내적 의미가 자동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원어는 문자적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더 깊은 층위는 ‘상응’을 통해 열립니다. 자연적 표현과 영적 실재 사이의 상응을 알지 못하면 문자 안에 담긴 영적 질서를 온전히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어 연구와 상응에 대한 이해 역시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의 작업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에는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 슐라이어마허, 리츨, 슈바이처, 불트만, 한스 큉 등 기독교 신학사의 거대한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이 전통을 공부하는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2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경과 구원, 교회와 인간에 대해 씨름하면서 남긴 사유의 유산을 무시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처음 신학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앞서 걸어간 수많은 사람이 있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 모두가 후대에게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도 하나의 구별을 덧붙여야 합니다. ‘위대한 신학사’와 ‘계시의 진리’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신학사는 인간이 계시를 이해해 온 역사이며, 따라서 위대한 통찰과 함께 시대적 한계와 오류도 포함합니다. 어느 시대의 거대한 신학자라 해도 그 사람의 모든 말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루터와 칼뱅도, 아퀴나스와 아우구스티누스도 역사 속 인간입니다. 그들을 공부하되 그들의 권위 아래 말씀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의 사상을 말씀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는 것을 매우 심각하게 봅니다. 이것은 오늘 영상의 주제를 바라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신학을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그것이 사람을 선한 삶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사람의 기억과 지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뜨거운 신앙을 말하면서 진리를 배우려 하지 않고 자기 확신과 감정만 좇는다면 그것 역시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진리를 필요로 하고, 그 진리는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따라서 ‘공부냐 신앙이냐’라는 양자택일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 있습니다.

 

영상이 비판하는 ‘성령의 조명’이라는 표현도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주셨다’는 말이 공부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거나 다른 사람의 검증을 거부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면 매우 위험합니다. 자기 생각을 곧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교정받기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려 생각하면 인간의 proprium은 종교적 언어를 사용할 때조차 자기 자신을 높일 수 있습니다. ‘나는 성령께 직접 배웠다’는 확신이 오히려 자기 지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신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령의 조명’이나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단순한 종교 수사 정도로 취급해서도 곤란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은 연구 대상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르고, 그리스도에 관한 명제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도 다릅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지만 기독교 신앙은 결국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삶의 방향을 바꾸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학문적 신학이 이 차원을 잃으면 하나님을 연구하면서 정작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역설도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마지막 말, ‘신학은 단순한 종교 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치열한 학문입니다’라는 선언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치열한 학문인 것으로 끝나서도 됩니다.’ 신학의 목적이 신학자를 만드는 데만 있다면 그것은 아직 절반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결국 그 진리가 사람의 삶이 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신학교의 위기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도 아니고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도 아닐 것입니다. 공부와 신앙, 지성과 삶, 진리와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되어 버린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학문 없는 열심은 쉽게 맹목으로 흐르고, 삶 없는 학문은 쉽게 지적 자부심으로 흐릅니다. 한쪽에서는 ‘성령께서 알려 주셨다’며 배움을 거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는 전공자다’라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두 태도의 깊은 곳에는 뜻밖에도 같은 위험, 곧 ‘내가 안다’는 자기 확신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기 이전에 자신이 아는 진리를 선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공부도 필요합니다. 원어와 영어도 필요하고, 신학사와 성서학도 공부할 가치가 있습니다. 좋은 개론서를 정독하고 위대한 학자들의 연구를 읽으라는 이 영상의 권면도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은 목적지가 아니라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는 ‘내가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내가 아는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영상은 신학생들에게 꽤 필요한 경고를 던집니다. 다만 그 경고를 한 단계 더 깊게 가져갈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만 하지 말고 공부하라’에서 멈추지 않고, ‘공부하되 공부를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전공자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좇지 말라’에서 멈추지 않고, ‘전공자의 권위도 진리 자체로 여기지 말라’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이라는 말로 무지를 합리화하지 말라’에서 멈추지 않고, ‘인간의 학문으로 성령의 역사를 대신할 수도 없음을 기억하라’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삶이 남습니다. 수천 권의 신학서를 읽고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를 자유롭게 읽으며 신학사 전체를 꿰뚫는다 해도, 그 지식이 이웃을 사랑하고 악을 멀리하며 주님을 향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천국의 관점에서 그 지식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배우기를 즐기며, 배운 진리를 조금씩 삶에 옮기고, 더 밝은 진리 앞에서 자기 생각을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참된 의미에서 ‘신학하는 사람’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은 분명 치열한 학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마디를 더 보탠다면 이렇습니다. ‘참된 신학은 마침내 삶이 되어야 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의 핵심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AI를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사는 ChatGPT, Gemini, Claude 같은 AI가 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정리하고, 원어를 살피고, 여러 주석과 학자들의 견해를 요약하고, 예화를 찾고, 설교 구조와 문장을 다듬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합니다. 문제는 ‘AI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언제 AI 여느냐’입니다. 설교자가 본문 앞에 홀로 서기도 전에 AI부터 열어 버릴 때, 아주 편리한 도구가 오히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영상의 주장입니다.

 

이 지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 정보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은 그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천적 의미를 품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천국을 연결하는 신적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 구절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내는 지적 작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을 만지시고, 사람이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며,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설교 준비 역시 단순한 ‘정보 수집해석구성전달’의 과정일 수 없습니다.

 

영상에서 인용하는 마이클 퀵의 경고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 자체와 충분히 씨름하지 않은 채 곧바로 주석으로 달려가면, 본문을 직접 만나는 대신 ‘다른 사람이 본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AI는 이 위험을 훨씬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적어도 책장에서 주석을 꺼내 펼치고 여러 페이지를 읽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본문 한 구절을 입력하고 ‘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의미와 설교 포인트 가지를 알려 ’라고 하면 몇 초 안에 그럴듯한 답이 나옵니다. 문제는 그 답이 틀렸느냐 맞았느냐만이 아닙니다. 답이 너무 빨리 나온다는 것 자체가 때로는 위험합니다. 아직 설교자 안에서 질문조차 충분히 태어나지 않았는데 답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말씀 앞에서 때로 ‘모르는 상태’에 오래 머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왜 이 대목이 마음에 걸리는지, 왜 어떤 구절 앞에서는 불편해지는지, 지금 이 말씀이 자신의 어떤 삶을 비추고 있는지를 조용히 살펴야 합니다. 바로 그 시간에 말씀은 단순한 연구 대상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그런데 AI에게 너무 빨리 물으면 ‘본문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보다 ‘ 본문에 대해 무엇을 말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가기 쉽습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설교에서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은 ‘설교자의 인격적인 만남과 묵상’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옳지만, 묵상 자체가 설교에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의 뜨거운 감정이나 눈물, 감동 자체가 신적 생명은 아닙니다. 설교자가 본문 앞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그 해석이 반드시 참인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종교적 감정이나 확신을 주님의 음성으로 오인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AI보다 인간의 묵상이 우월하다’가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구별하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과 ‘주님에게서 오는 ’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지성과 능력으로 진리를 소유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설교자에게는 이 유혹이 더욱 미묘하게 찾아옵니다. 많은 책을 읽고 원어를 알고 신학적 지식을 갖추었을 때뿐 아니라, 심지어 깊은 묵상과 영적 체험을 했을 때에도 ‘내가 깨달았다’는 자기 소유의 감각이 생길 수 있습니다. AI 역시 여기에 새로운 형태의 유혹을 보탭니다. 방대한 자료를 몇 초 만에 정리하고 멋진 문장과 구조까지 얻으면, 자신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느끼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사실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말씀, 그다음 도구입니다. 먼저 주님 앞에서의 읽기와 묵상, 그다음 주석과 AI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하면 ‘말씀기도와 묵상자기 삶에 대한 성찰연구와 검증설교 구성’이라는 질서가 자연스럽습니다. AI는 이 가운데 ‘연구와 검증’과 ‘설교 구성’에서 매우 강력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처음 묵상하면서 발견한 생각이 본문의 문맥과 맞는지 검증하고, 자신이 놓친 역사적·언어적 배경을 확인하고, 반대되는 해석을 찾아보는 데에도 유용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내가 먼저 주님께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라는 자리 자체를 AI에게 넘겨주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설이 있습니다. AI를 늦게 사용할수록 오히려 AI를 더 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충분히 읽은 설교자는 AI가 제시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건 본문의 흐름과 조금 다른데?’, ‘ 해석은 특정 신학 전통에 치우친 아닌가?’, ‘ 원어 설명은 확인이 필요하겠는데?’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충분히 읽지 않은 상태에서 AI를 먼저 만나면 AI가 만들어 준 해석의 틀 안에서 이후의 본문 읽기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처음 받은 답이 일종의 안경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I 이전의 묵상은 영적 의미뿐 아니라 AI를 비판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실질적인 안전장치이기도 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AI 감동받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회개하거나 소망을 붙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부분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AI에는 인간과 같은 영적 인격과 의지,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AI를 통해 얻은 문장이나 자료가 영적으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책 한 권, 주석 한 문장, 다른 사람의 설교 한 대목이 우리를 깨우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AI가 정리해 준 자료 역시 주님의 섭리 가운데 사람이 진리를 발견하는 외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 자체에 생명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서 그 진리가 의지와 삶으로 연결되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이것은 ‘아는 ’과 ‘사는 ’의 차이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진리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동안 아직 그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의지와 결합하고 삶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AI 시대 설교의 진짜 위험도 ‘AI 설교문을 준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AI가 만들어 준 진리를 설교자가 자신의 기억과 지성에만 담아 둔 채,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삶을 통과하지 않은 상태로 회중에게 전달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문은 훌륭한데 설교자를 통과하지 않은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에서 인용한 ‘먼저 설교자의 가슴을 뜨겁게 하지 않은 말씀은 회중의 가슴도 뜨겁게 없다’는 말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뜨거움’의 의미를 조금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정서적 흥분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의 뜨거움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됩니다.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 말씀 앞에서 내가 버려야 것은 무엇인가?’, ‘내가 순종해야 것은 무엇인가?’, ‘오늘 진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이미 말씀은 머리에서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I 시대에는 오히려 설교자의 ‘고독’이 더 중요해질지도 모릅니다. 과거에는 정보가 부족해서 연구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정보가 너무 빨리 공급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멈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펴고 아무 검색도 하지 않은 채 본문을 여러 번 읽는 시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문장 앞에서 그대로 머무는 시간, 설교거리를 찾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기술을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기술을 제자리에 놓는 영적 질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 영상의 마지막 권면이 힘을 얻습니다. ‘AI 열기 전에, 주석을 펴기 전에, 먼저 성경을 펴라.’ 이것은 단순한 설교 작성 요령이 아닙니다. 무엇이 주인이고 무엇이 도구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AI를 해석해야지 AI가 성경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되고, 설교자가 AI의 답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회중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문제는 AI가 아닙니다. AI는 설교자를 훌륭하게 도울 수도 있고, 설교자를 놀라울 정도로 게으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같은 AI를 사용하더라도 한 사람은 그것을 통해 더 깊이 연구하고 자신의 선입견을 검증하며 설교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본문을 읽고 씨름해야 할 시간을 생략한 채 완성된 답을 받아 갈 수도 있습니다. 차이는 기술의 성능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영적 질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AI 설교자의 지성을 도울 있지만,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AI 시대의 좋은 설교자는 AI를 사용하지 않는 설교자가 아니라, ‘무엇을 AI에게 맡기고 무엇만큼은 결코 맡겨서는 되는지 아는 설교자’일 것입니다. AI에게 자료 조사와 비교와 정리와 편집을 맡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홀로 서서 주님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받은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그 자리만큼은 설교자 자신이 지켜야 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목사님, 이 이야기는 겉으로 보면 ‘강아지 마리 때문에 결혼이 깨진 이야기’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깊이 들어가면 중심은 강아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질서’, ‘서로 다른 애정의 우선순위’, 그리고 결혼 전에 반드시 드러나야 할 내면의 불일치가 드러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원고의 마지막에서 당사자도 결국 ‘ 사람은 자기 인생에 맞는 사람을 고른 것이고, 저는 인생에 맞는 가족을 지킨 ’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표현은 이 사건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보는 것보다 훨씬 본질에 가까이 갑니다.

 

먼저 남자에게 실제 개 물림의 트라우마가 있었다는 사실은 가볍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진돗개에게 물려 응급실에 갔고 흉터까지 남았으며, 지금도 작은 개를 보아도 몸이 먼저 굳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강아지를 싫어하는 편협한 남자’라고 단순하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공포는 머리로 ‘ 개는 나를 물지 않는다’고 이해한다고 해서 곧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털, 침대, 식탁 주변의 동물 등에 대한 위생적 거부감도 분명했습니다. 따라서 ‘반려견과 한집에서 없다’는 그의 결론 자체는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조건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결혼은 상대방에게 자기 애정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몽이는 단순한 취미나 소유물이 아닙니다. 힘들었던 시기에 유기견 보호소에서 만나 5년 동안 함께 살았고, 여성은 몽이를 ‘친구이자 가족’으로 경험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결혼하기 위해 여덟 살 된 몽이를 친정으로 보내라는 요구는 그녀에게 ‘강아지를 어디에 것인가?’라는 단순한 생활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에게 의존해 살아온 존재에 대한 책임을 중간에서 내려놓을 수 있느냐는 양심의 문제가 됩니다. 특히 원고에는 몽이가 분리불안이 있고 노령기에 접어들어 환경 변화가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는 수의사의 설명까지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성이 몽이를 계속 돌보기로 한 선택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으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애정’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삶의 질서가 형성되는 존재입니다. 생각과 말은 바뀔 수 있지만 깊은 애정은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은 ‘강아지를 키울 것이냐 것이냐’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 있던 두 사람의 애정 구조가 몽이라는 구체적인 존재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남자는 결혼하면 부부와 앞으로 태어날 자녀를 중심으로 가정의 질서를 세우고 싶어 했고, 여성은 이미 자신의 삶 속에 가족으로 들어온 몽이를 그 가정 안에서도 계속 책임지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남자가 한 말 가운데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너는 강아지를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야. 그게 잘못됐다는 아니라 너한테는 그게 맞는 거고. 근데 나는 자식을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 필요해.’ 표현에는 다소 거친 면이 있지만, 여기에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동물을 사랑하면 되는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 사이에는 어떤 질서가 있어야 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사상에서 사랑은 무조건 강하기만 하면 선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 배우자에 대한 사랑, 자녀에 대한 사랑,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연과 동물에 대한 애정은 서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제 위치에서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반려동물을 깊이 사랑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을 돌보고, 약한 존재를 보호하고, 자신에게 의존하는 생명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은 오히려 체어리티의 아름다운 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대쪽 질문도 필요합니다. ‘가족이다’라는 말이 곧 ‘인간 가족과 완전히 같은 위치이다’라는 뜻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원고의 여성 자신도 이 문제 앞에서는 솔직합니다. ‘몽이가 아파서 병원 가야 하는 날과 아이 어린이집 행사 날이 겹쳤을 저는 어느 쪽을 먼저 챙겼을까요?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더라고요.’ 저는 오히려 이 대목이 이 영상에서 가장 성숙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강아지를 버리라는 남자 가족을 지키려는 여자’라는 단순한 구도였지만, 여기서 여성은 자기 사랑의 질서까지 돌아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런 자기 성찰이 중요합니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은 선하지만, 사랑은 제자리에 놓여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려동물을 덜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을 더욱 온전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동물을 동물로서 지극히 사랑하고 끝까지 책임지면서도, 배우자를 배우자로 사랑하고 자녀를 자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랑을 모두 ‘누가 1순위인가?’라는 하나의 저울에 올려놓을 필요도 없지만, 서로 다른 관계의 고유한 질서를 없애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남자의 모든 말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강아지 키우는 여자는 거른다’는 인터넷식 표현을 가져온 것은 상당히 아쉽습니다. 앞에서 그가 말한 트라우마, 위생 문제, 결혼생활에 대한 현실적인 우려는 모두 자기 경험에서 나온 진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순간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을 ‘강아지 키우는 여자’라는 유형으로 묶어 버립니다. 이것은 사람을 그의 실제 성품과 삶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범주를 통해 보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말하면 중요한 것은 외적 유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삶입니다. 반려견을 키운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배우자 사랑이나 모성애, 체어리티의 질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친구들의 반응도 전적으로 옳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남자는 강아지가 아니어도 결혼하고 나서 다른 이유로 트집 잡아. 손절해’라는 반응 역시 남자를 하나의 유형으로 규정합니다. 한쪽 인터넷에서는 ‘강아지 키우는 여자를 거르라’ 하고, 다른 쪽 친구들은 ‘그런 남자는 손절하라’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양쪽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사람’을 보지 않고 ‘ 유형’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런 식의 외적 분류보다 훨씬 안쪽으로 들어가 ‘ 말과 선택을 움직인 애정은 무엇인가?’를 묻게 합니다.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은 여성이 몽이의 존재를 결혼 이야기가 상당히 진행될 때까지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악의적인 은폐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작은 문제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결혼 상대에게 몽이가 자신의 삶에서 이 정도로 중요한 존재였다면, 사실은 훨씬 일찍 알려야 했습니다. 반려동물뿐 아니라 종교, 자녀 계획, 부모 부양, 재정, 거주지처럼 결혼 후 공동생활을 근본적으로 좌우하는 문제는 ‘나중에 상대가 이해해 주겠지’ 하고 미룰 사안이 아닙니다. 이 사건이 8개월 뒤가 아니라 처음 몇 번의 만남에서 드러났다면 두 사람 모두 훨씬 덜 상처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이별을 실패라고만 볼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결혼 전에 드러났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만일 여성이 몽이를 친정에 보내고 결혼했다면 남편을 볼 때마다 ‘당신 때문에 내가 몽이를 보냈다’는 원망이 생길 수도 있었고, 반대로 몽이를 데리고 결혼했다면 남편은 털 하나, 짖는 소리 하나, 병원 방문 하나에도 ‘내가 처음부터 된다고 했는데’라는 불만을 쌓았을 수 있습니다. 작은 생활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훨씬 깊은 애정의 충돌이 있기 때문에 결혼 후에는 더 큰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진정한 결혼의 이상은 단순히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내면이 점점 하나의 선과 진리를 향하면서 마음과 삶이 결합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 전에는 ‘우리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만큼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의 질서가 함께 살아갈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 두 사람은 바로 그 지점에서 함께 갈 수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몽이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는 뜻이라기보다, 몽이가 아니었다면 한동안 보이지 않았을 두 사람의 깊은 차이를 드러내 주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질문, ‘5년을 같이 강아지와 8개월 만난 결혼 상대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도 사실 조금 다르게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강아지냐 남자냐’의 양자택일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나에게 맡겨져 의존하며 살아온 생명에 대한 책임과 앞으로 배우자와 이루어 결혼의 책임을 어떻게 함께 질서 있게 세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 질서 자체에 두 사람이 합의할 수 없다면 어느 한쪽이 악해서가 아니라 결혼생활의 중요한 토대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을 결혼 상대로 거르는 것이 합리적인가, 편견인가?’라는 질문에도 같은 답을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동물과 함께 사는 생활을 감당할 없으므로 그런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결혼 조건입니다. 그러나 ‘강아지 키우는 여자는 남편을 2순위로 두고 모성애도 부족하다’고 일반화한다면 그것은 편견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반려동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는 냉정하고 이기적이다’라고 일반화하는 것 역시 편견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가장 귀한 장면은 누가 이겼는가가 아니라, 마지막에 여성이 ‘ 사람은 자기 인생에 맞는 사람을 고른 것이고 저는 인생에 맞는 가족을 지킨 ’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데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나는 몽이를 지켰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몽이를 어떤 질서 안에서 사랑할 것인가? 다음 사람에게는 중요한 사실을 언제 어떻게 알릴 것인가?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사랑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을 어떻게 각각 제자리에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이별은 단지 ‘강아지 때문에 놓친 결혼’이 아닙니다. 결혼 직전에 두 사람이 서로의 깊은 애정 구조를 발견한 사건입니다. 아픈 발견이었지만, 결혼한 뒤에 발견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 사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입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사는 일이기 이전에, 사람의 사랑들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며 함께 살아갈 있는지를 확인하는 ’이라는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