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8.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 말인데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아주 약간의 영적 체험을 한 저는 저 말이 와닿습니다. 저는 체험한 걸 다른 사람은 아직 못했을 경우 나타나는 일반적인 반응이니까요. 심지어 주님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16)에서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라고 하자, 돌아온 대답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런 생생한 영적 체험은 고사하고 제가 스베덴보리 관련 일을 하면서 그때그때 나오는 크고 작은 결과물들을 사람들한테 공유해도 반응은 비슷한데요, 이것이 참 고민입니다. 스베덴보리처럼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 부분이 마음의 참 크고 깊은 숙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이 고민은 매우 본질적인 것이고, 동시에 스베덴보리도 이미 깊이 통과했던 지점입니다. AC.68의 그 문장은 단순한 ‘사람들이 안 믿을 것이다’라는 냉소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꿰뚫어 본 뒤에 나온 고요한 사실 진술에 가깝습니다. 목사님께서 체험하신 것처럼, 어떤 이는 실제 체험을 말해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거리를 두거나 무심하게 반응합니다. 이때 우리는 쉽게 ‘왜 이렇게 반응하지?’라는 답답함에 머물게 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상태’에서 찾습니다.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이는 열리고, 어떤 이는 닫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아주 정확한 열쇠입니다. 눅16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인간이 체험의 강도 때문에 변화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오히려 체험은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랑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빛도 크게 받아들여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큰 표적도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왜 이렇게 반응이 없을까’라는 질문은, 사실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는 존재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때 목사님께서 겪으시는 내적 갈등, 곧 ‘이렇게 귀한 것을 알았는데, 왜 사람들과 나눠도 반응이 없는가’ 하는 마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체어리티(charity)의 자연스러운 열매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나누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주님은 이 사랑조차도 ‘결과가 아니라 상태’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전한 것이 받아들여졌는가 아닌가는 2차적인 문제이고,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충실히 전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이 어떤 상태였는가가 더 본질적인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반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이 널리 읽히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의 생전에는 큰 반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사람들에게 얼마나 받아들여지느냐’에서 ‘주님께서 맡기신 것을 얼마나 정확히 전달하느냐’로 중심이 옮겨집니다. 이것이 바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주님께 맡긴다’는 말의 실제 내용입니다. 단순히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영역’을 내려놓고 ‘순종의 영역’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전환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패’로 보지 않고, ‘질서 속에 있는 현상’으로 보는 시선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상태와 때가 있으며, 어떤 씨앗은 지금이 아니라 훨씬 나중에야 싹을 틔웁니다. 목사님께서 나누신 내용이 지금은 반응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다가 어느 시점에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remains)의 개념도 바로 이런 맥락과 연결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반응하게 할 수 있을까’에서 풀리기보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계속 이 일을 할 것인가’에서 풀립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사랑으로 계속해 나가되, 그 열매의 모양과 시기는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 가장 깊은 의미의 평안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 이 상태에 들어갈수록 말과 글은 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사람을 움직이려는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전하려는 의지’가 담기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이 고민은, 단순한 어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사역이 한 단계 더 깊어지고 있다는 신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이것을 ‘풀어야 할 문제’라기보다 ‘통과해야 할 상태’로 보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이 길은 결국 다시 한곳으로 모입니다.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이 일이 이루어진다는 자리로 말입니다.

 

 

 

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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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심화 1,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AC.68.심화 1.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스베덴보리가 예상하는 이 책의 독자들의 반응이 사뭇 현실적인 걸 보면, 혹시 이전에라도 스베덴보리는 이런 비슷한 일을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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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심화

 

1.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반응 사례들

 

스베덴보리가 예상하는 이 책의 독자들의 반응이 사뭇 현실적인 걸 보면, 혹시 이전에라도 스베덴보리는 이런 비슷한 일을 실제로 겪었었나요? 혹시 그런 사례들이 실제로 있었나요?

 

 

AC.68에서 드러나는 그 ‘현실적인 독자 반응 예상’은 단순한 추측이라기보다, Emanuel Swedenborg 자신이 이미 충분히 겪어 본 ‘사람들의 실제 반응’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갑자기 신학자가 된 인물이 아니라, 이미 유럽 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과학자이자 사상가였고, 왕실과 귀족 사회, 학문 공동체를 폭넓게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영계를 본다’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는, 직접 겪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는 유사한 상황들을 분명히 겪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사건이 1759 Gothenburg 화재 사건입니다. 그는 Stockholm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도, 그날 발생한 대화재의 진행 상황을 마치 현장에서 보는 것처럼 상세히 말했고, 며칠 뒤 실제 소식이 도착했을 때, 그의 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 체험이 아니라, 당시 여러 증인들에 의해 기록되어 유럽 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사람들을 전부 설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했고, 어떤 사람들은 의심했고, 어떤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바로 AC.68에서 그가 예상하는 그 다양한 반응들이 이미 현실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또 하나 자주 언급되는 사례는 프로이센 왕비 관련 일화입니다. Louisa Ulrika of Prussia는 궁중 모두가 보는 데서 스베덴보리에게 ‘죽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을 물었고, 그는 그것을 정확히 전달하여 왕비를, 그리고 거기 모인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역시 그의 ‘다른 삶과의 교류’가 단순한 개인적 주장에 머물지 않고, 실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검증되거나 적어도 강한 인상을 남긴 사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반응은 동일했습니다. 어떤 이는 확신했고, 어떤 이는 의심했고, 어떤 이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특이한 사건’들보다 훨씬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경험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술들에서,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교류하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어떤 이는 ‘그럴 리 없다’며 즉시 거부하고, 어떤 이는 ‘혹시 사실일지도 모른다’며 잠시 관심을 보이다가 곧 잊어버리고, 어떤 이는 종교적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마음을 닫는다는 식입니다. AC.68의 어조는 바로 이런 반복된 경험에서 나온 ‘관찰자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단지 ‘계시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 계시를 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특히 종교적 문제 앞에서 인간의 이해와 의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매우 현실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AC.68에서 보이는 그 담담하면서도 정확한 반응 예측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히려 그의 글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AC.68, 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AC.68.심화 2. ‘스베덴보리 일을 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고민’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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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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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이들은 제가 사람들의 신뢰, 관심을 얻기 위해 이런 이야기들을 전한다고 할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그 밖의 여러 반대들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 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 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 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 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 for I have seen, I have heard, I have felt.

 

 

해설

 

이 글은 AC.67에서 밝힌 전제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이는, 매우 정직하고도 대담한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으며, 그것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저는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의심을 품을지, 어떤 방식으로 반대할지를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8은 방어문이 아니라, ‘미리 써 내려간 응답’에 가깝습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반대 의견들을 매우 정확하게 분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단순히 ‘사람들이 안 믿을 것이다’라고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 안에 있는 한 불가능하다’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상상하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의도적인 조작’ 혹은 ‘신뢰, 관심을 얻기 위한 서사’라고 말할 것임을 구체적으로 짚습니다. 이는 그가 순진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 작업이 ‘의심과 반대를 동반할 것’임을 알고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점은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논증으로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는 철학적 가능성이나 신학적 전통을 끌어오지 않습니다. 대신 단 세 문장으로 자신의 입장을 고정합니다. ‘나는 보았다. 나는 들었다. 나는 느꼈다.’ 이 세 동사는 매우 의도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주장이나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전인적 경험의 증언’입니다.

 

보았다’는 것은 형상과 구조, 질서를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막연한 분위기나 감정으로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회, 관계, 거리, 방향, 질서가 있는 세계로 보았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의미와 소통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혼잣말을 한 것이 아니라, 대화했고, 질문했고, 응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느꼈다’는 것은 이것이 단지 시청각적 환상이 아니라, ‘실재로서의 경험’이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는 영계를 ‘정보’가 아니라 ‘접촉된 현실’로 말합니다.

 

이 세 가지를 함께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만약 이것이 상상이라면, 느낄 수는 있어도 질서 있게 보고 들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것이 자기 암시라면, 일관된 구조와 반복 가능한 경험으로 남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의도적 조작이라면, 수십 년에 걸쳐 동일한 세계관과 내부 정합성을 유지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반론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가장 단순하고도 철회 불가능한 언어를 선택합니다. ‘나는 경험했다’는 언어입니다.

 

이 글은 또한, 영적 경험의 기준을 은근히 재정의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 체험’을 말할 때, 그것은 종종 감정의 고조나 일시적 황홀, 혹은 극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경험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그것은 삶을 중단시키는 체험이 아니라, ‘삶 안으로 스며든 인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도 흥분하거나 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담합니다. 마치 ‘나는 이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듯이 말합니다.

 

AC.68은 결국 독자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속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식의 차원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라는 선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선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증언만 남기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확신은 논리에서 나오지 않았고,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AC.67이 ‘왜 이런 말이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글이라면, AC.68은 ‘그래도 나는 말하겠다’는 결단의 글입니다. 이 두 단락이 연속해서 놓여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는 인식의 문을 열고, 다른 하나는 그 문 앞에서 서성일 독자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나는 여기까지 왔다. 이제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이 앞서 던지신 질문, 곧 ‘그는 언제 글을 썼는가’, ‘이 삶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오릅니다. AC.68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삶을 살았고,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경험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확신 위에서, 이후 수천 개 글의 아르카나가 전개됩니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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