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명 또한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생명이나 쓰임새의 생명이 어떠한가에 따라 퍼셉션의 능력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은 천적인 것입니다. ‘마할랄렐’(Mahalalel)이라 불리는 교회를 이루었던 이들의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로부터 오는 기쁨을 더 선호하는 그러한 상태였는데, 이는 저세상에서 그들과 같은 이들 가운데서의 경험을 통해 나에게 알려진 바입니다. As the perceptive faculty decreased, and from being more particular or distinct, became more general or obscure, so also did the life of love or of uses; for as is the life of love or of uses, so is the perceptive faculty. From good to know truth is celestial; the life of those who constituted the church called “Mahalalel” was such that they preferred the delight from truths to the delight from uses, as has been given me to know by experience among their like in the other life.
해설
이 글은 퍼셉션의 변화가 단지 인식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사랑의 생명과 쓰임새의 방향 변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퍼셉션이 분명하던 상태에서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이동할 때, 그에 따라 삶의 중심도 함께 이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가지를 따로 설명하지 않고,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다룹니다. 사랑의 생명이 바뀌면 퍼셉션도 바뀌고, 퍼셉션이 바뀌면 사랑의 생명도 바뀐다고 말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생명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어디에서 기쁨을 느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태고교회의 더 초기 상태에서는 쓰임새, 곧 선을 행하고 진리를 살아내는 데서 자연스러운 기쁨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때 퍼셉션은 선에서 진리로 나아갔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적 질서라고 부릅니다. 선이 먼저 있고, 진리는 그 선이 자신을 알게 하는 빛과 같았어요.
그러나 ‘마할랄렐’(Mahalalel)의 교회에 이르면, 이 질서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들의 삶에서는 쓰임새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 자체에서 오는 기쁨’이 더 앞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진리를 아는 것, 이해하는 것, 분별하는 것에서 만족과 즐거움을 느끼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지요. 이것은 곧 삶의 무게중심이 행함에서 앎으로 조금씩 이동했음을 뜻합니다.
이 변화는 갑작스러운 전도나 타락이 아닙니다. 여전히 선을 사랑하고, 여전히 교회의 범주 안에 있지만, 기쁨의 근원이 달라졌을 뿐이에요.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을 아주 섬세하게 짚습니다. 쓰임새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쓰임새보다 진리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퍼셉션은 더 이상 개별적이고 살아 있는 분별이라기보다, 점차 일반적이고 덜 생생한 인식으로 변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이 천적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매우 중요해요. 이는 진리를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의 자리가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판단 기준입니다. 진리가 선을 섬길 때, 곧 쓰임새를 밝혀 주는 역할을 할 때 퍼셉션은 살아 있습니다만, 반대로 진리가 그 자체로 기쁨의 대상이 될 때, 퍼셉션은 점차 분명함을 잃게 됩니다.
이 글에서 인상적인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내용을 단순한 이론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저세상, 곧 영계에서 ‘마할랄렐’과 같은 상태에 속한 이들을 직접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그 경험에 따르면, 그들은 선을 행하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선호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교회 상태의 차이가 단지 개념이 아니라, 실제 삶과 성향으로 드러난다는 증거로 제시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매우 날카로운 자기 점검의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신앙 안에서 어디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에요. 말씀을 이해하는 데서 오는 만족인가요, 아니면 그 말씀이 삶에서 쓰임새로 드러날 때의 기쁨인가요. 둘 다 중요하지만, 그 순서와 중심은 신앙의 상태를 깊이 드러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변화는 익숙하게 나타납니다. 어느 시기에는 봉사와 실천이 자연스럽고 기쁘게 느껴지다가, 또 어느 시기에는 말씀 공부와 이해가 더 즐거워질 수 있어요. 이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때 퍼셉션이 어떤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분별하라고 초대합니다. 앎이 삶을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삶이 앎을 섬기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이지요.
결국 AC.511은 태고교회의 다섯 번째 단계에서 나타난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이동을 보여 줍니다. 퍼셉션이 일반화되면서, 사랑의 생명과 쓰임새의 생명도 함께 변했고, 그 결과 진리에서 오는 기쁨이 쓰임새에서 오는 기쁨보다 더 선호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 상태를 비추는 매우 정직한 거울이 됩니다.
AC.510, 창5: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C.510-511)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창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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