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87.심화

 

1.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한 젊은이가 말 위에 앉아 그것을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by a young man sitting on a horse and directing it toward hell, but the horse cannot move a step. (AC.187)

 

말 위에 앉아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은, 인간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하향적 성향, 곧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의 흔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은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시점의 인간이 아직 그러한 방향으로 실제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보호와 질서 안에 묶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지옥을 향한 가능성은 상()으로는 나타나지만, 그것이 곧바로 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AC.187 해설)

 

자신의 이런 영적 실상을 정작 본인이 지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사람의 영으로서의 첫 출발 모습이 이런 상태라는 기술 앞에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옷깃을 여미게 된다’는 느낌은 AC.187을 바르게 읽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반응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죽은 사람의 영광스러운 첫 출발을 보여 주면서도, 동시에 인간 본성에 대한 매우 냉정한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AC.186에서는 방금 전까지 밝은 흰빛이 아름다운 금빛으로 변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온 기쁨과 행복이 묘사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187에서는 갑자기 젊은이가 말을 타고 지옥을 향해 가려 한다’는 상이 나타납니다. 이 전환은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천사들의 보호 아래 깨어나더라도 자신의 own,  proprium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 악인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AC.186의 흐름상 그는 방금 영원한 생명에 들어온 기쁨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지옥을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인간 본성을 얼마나 깊이 보았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여기서 더욱 인상적인 것은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인간 안에 악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동시에 주님의 보호도 함께 보여 줍니다. 방향은 지옥을 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의도는 있을 수 있으나 실행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가능성은 드러나지만, 현실화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인간이 죽은 직후에 곧바로 자기 본성의 가장 깊은 층까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주님은 먼저 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고, 그 후에야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조금씩 드러내십니다. 마치 의사가 중환자를 수술대에 올리자마자 모든 치료를 한꺼번에 하지 않고, 환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순서대로 진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덧붙이신 정작 본인이 지각하는지는 모르겠다’는 생각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실 AC.187의 문맥을 보면, 이것은 그 사람 자신이 의식적으로 나는 지금 지옥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장면이라기보다, 그의 상태가 영계의 상응 속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장면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을 젊은이로 보고 말을 타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상 전체가 자기 안에 남아 있는 가능성과 성향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자신을 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거의 모릅니다. 주님께서 조금만 빛을 비추시면 놀랄 만큼 많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그 사랑들 때문에 즉시 멸망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이 움직이지 못하듯, 주님의 섭리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187은 인간의 비참함보다 주님의 보호를 더 크게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안에는 여전히 지옥을 향할 수 있는 방향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을 아직 놓지 않으십니다. 말은 지옥을 향해 서 있지만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섭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는 목사님께서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고 하신 그 반응이 AC.187이 의도한 가장 건강한 반응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아, 나도 내 안에 저런 가능성이 있겠구나 하고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오히려 이 장면을 더 깊이 이해한 것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겸손이며, 두려움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 아래 있는 인간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AC.187, 창3 앞, 생명력 넘치는 ‘젊음’의 상태에서 출발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7 그가 다음으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이끌려 가는 것은, 한 젊은이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자신의 글이나 생각,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리를 두지는 않으시는 분의 식사 초대가 있을 시,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했나요?

 

 

스베덴보리의 생애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도 상당히 폭넓게 교류했습니다. 오히려 그가 교류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저작에 깊이 공감한 사람보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 일부만 동의하는 사람, 심지어 비판적인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정치가, 학자, 성직자, 귀족, 외교관들과 식사하고 대화했는데, 그들 모두가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단순히 ‘내 교리를 믿느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람의 이해력보다 의지를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아직 자신의 저작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고, 선하게 살고자 하며,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존중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그의 저작 전반에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살 때 평가받는다’는 사상이 반복됩니다.

 

반대로 그는 교리적으로는 동의한다고 말하지만, 내심은 비웃거나 악의를 품고 접근하는 경우를 훨씬 더 조심스럽게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도 세리와 죄인들의 식사 초대에는 기꺼이 응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의 초대에는 늘 그들의 내적 상태를 보시고 응하셨습니다. 응하시더라도 그 자리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질문하신 경우처럼 ‘동의하지는 않지만, 거리를 두지도 않고, 인간적인 존중과 호의를 가지고 식사를 청하는 사람’이라면, 스베덴보리가 굳이 거절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식사하며 대화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왜냐하면 그런 만남 자체가 주님의 섭리 가운데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다투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진지하게 묻는다면 기꺼이 설명했습니다.

 

목사님의 경우에도 저는 비슷한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가 ‘스베덴보리를 그만두게 하려고’, 혹은 ‘논쟁해서 이겨 보려고’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오랜 인간적 관계 속에서 존중과 호의를 가지고 식사를 청하는 것이라면, 굳이 피하실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보다도, 그 사람을 어떤 애정으로 대할 것인가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천국을 설명하면서, 천사들은 먼저 상대의 교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선의와 진실성을 본다고 여러 차례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가?’보다 ‘그 사람이 진실하고 선한 마음으로 나를 대하는가?’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의하지는 않지만, 거리를 두지 않는 사람의 식사 초대’라면, 스베덴보리라면 아마도 상당히 편안한 마음으로 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그 만남의 목적이 사랑의 교류인지, 아니면 끝없는 논쟁인지 정도는 분별했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피하기보다, 악한 목적을 가진 상태를 조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SC.87, ‘몸의 부활’에 대한, 가톨릭, 정교회, 전통 개신교의 입장

기독교 안에서 ‘몸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생각보다 다양하지만, 큰 틀에서는 대부분의 전통 교회들이 ‘최종적인 몸의 부활’ 자체는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몸이 어떤 몸인가, 현재 죽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7

 

그가 다음으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이끌려 가는 것은, 한 젊은이가 말 위에 앉아 그것을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가 젊은이로 나타나는 것은, 그가 영원한 생명에 처음 들어갈 때, 천사들 가운데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청춘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His being next taken into the society of good spirits is represented by a young man sitting on a horse and directing it toward hell, but the horse cannot move a step. He is represented as a youth because when he first enters upon eternal life he is among angels, and therefore appears to himself to be in the flower of youth.

 

해설

 

이 단락은 사후 초기의 기쁨과 평온 이후에 곧바로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 장면을 제시합니다. 그는 이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이동이 직접적인 설명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적 환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영계에서의 이동과 변화가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로 경험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 줍니다.

 

말 위에 앉아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은, 인간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하향적 성향, 곧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의 흔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은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시점의 인간이 아직 그러한 방향으로 실제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보호와 질서 안에 묶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지옥을 향한 가능성은 상(像)으로는 나타나지만, 그것이 곧바로 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말은 스베덴보리 체계에서 이해 또는 사고의 힘을 상징합니다. 말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그 이해가 아직 악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앞선 단락들에서 계속 강조된 천적 천사들의 보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사후 초기에는 인간이 자기 의지대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가 ‘젊은이’로 나타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한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 상태에 대한 지각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처음 들어간 인간은 천사들 가운데 있으며, 그 상태에서는 노쇠함이나 소진이 아니라, 생명력과 가능성의 충만함이 지배합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늙은 사람으로 느끼지 않고, 청춘의 한가운데에 있는 존재로 인식합니다.

 

여기서 ‘청춘’은 육체적 나이를 뜻하지 않고, 생명의 신선함과 아직 열려 있는 가능성을 뜻합니다. 이는 사후의 삶이 생전의 육체적 조건을 그대로 끌고 가는 연장이 아니라, 내적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자기 인식을 갖게 됨을 보여 줍니다.

 

이 단락은 결국, 사후 여정이 단선적인 상승이나 하강이 아니라, 보호 속에서 자신의 성향이 서서히 드러나고 시험 되는 과정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언제나 생명력 넘치는 ‘젊음’의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심화

 

1.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AC.187, 심화 1,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AC.187.심화 1.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한 젊은이가 말 위에 앉아 그것을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by a young man sitting on a horse and directin

bygrace.kr

 

 

 

AC.188, 창3 앞, 본격적인 ‘배움의 단계’로 들어감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8 그의 그다음 삶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

bygrace.kr

 

AC.186, 창3 앞, ‘영으로서의 삶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됨’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6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삶은 처음에는 행복하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