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는 사무엘하 121절로 6절, 곧 나단이 다윗에게 가난한 사람의 암양 한 마리를 빼앗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설교의 상당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와 오늘의 정치 현실, 그리고 한국 교회 일부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인물 숭배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전개됩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교회가 붙드는 두 가치를 ‘개혁’과 ‘애민’이라고 말하며, 특히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 ‘상처 입은 사람을 조롱하는 ’,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적 인물을 우상화하여 그의 어두운 면을 보지 않으려 하는 ’을 기독교 신앙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을 우상화하지 않고’, 상처 입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교육의 비전으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설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의외로 이승만도, 명성황후도, 오늘의 정치인들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단이 다윗에게 한 한마디입니다. ‘당신이 사람이라.’ 이 말이야말로 이 긴 설교 전체를 영적인 차원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다윗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즉시 분노합니다. ‘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악은 사실 자기 안에 있는 악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들었을 때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지만, 자기 자신의 삶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다루는 인간의 proprium 문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판단할 때 자기 악을 정당화하고, 변명하고, 때로는 아예 보지 못합니다. 반면 타인의 악은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봅니다. 그래서 남의 탐욕은 탐욕으로 보면서 자기 탐욕에는 이유가 있고, 남의 권력욕은 악으로 보면서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의 권력욕에는 명분을 붙이며, 남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기편의 거짓에는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좌우 어느 한 정치 진영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가진 보편적인 성향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설교의 정치적 메시지는 오히려 정치적 진영을 넘어서는 영적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인간을 우상화하지 마세요’라고 반복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인간을 우상화하는 까닭은 단순히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질서, 내가 원하는 나라, 내가 원하는 성공, 내가 원하는 힘을 어떤 지도자가 대신 구현한다고 느끼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 사람을 통해 확장된 자신’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우상화의 가장 깊은 뿌리에는 결국 자기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 사람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한 인물을 우상에서 끌어내린 사람이 내일 다른 인물을 그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른쪽의 우상을 깨뜨리면서 왼쪽에 새로운 우상을 세울 수도 있고, 왼쪽의 우상을 비판하면서 오른쪽의 인물을 절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누구도 우상화하지 않는다’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정의감을 우상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한 ‘우상 교체’가 아니라 인간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의 방향 전환입니다.

 

이 점에서 다윗 이야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의 죄를 끔찍할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밧세바를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려 하며, 마침내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잘 짚었듯이 성경은 다윗의 ‘앞모습’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을 모두 보여 줍니다. 이것 자체가 인간을 우상화하지 못하게 하는 성경의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이 ‘들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의 악을 자기 악으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출발입니다. 회개는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라는 일반적인 교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악입니다’라고 자기 삶에서 특정한 악을 보고, 그것이 주님의 뜻에 반하기 때문에 물리치려 하는 데서 실제적인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나단의 ‘당신이 사람이라’는 선언은 단순한 고발이 아닙니다. 다윗의 눈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놓는 진리의 빛입니다.

 

여기서 설교 전체를 향해서도 같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승만, 명성황후, 한국 교회의 극우적 정치교육, 특정 정치세력과 지도자들의 문제를 매우 강한 언어로 비판합니다. 박요한 목사가 제시한 각각의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평가는 별도로 검증하고 논의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그들 가운데 누가 악한가?’가 아니라 ‘ 말씀을 듣고 있는 안에는 이것이 없는가?’입니다. 나단의 비유를 듣고 다윗이 ‘저런 놈은 죽어야 한다’고 외치는 데서 끝났다면 아무런 회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의 목적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른 악인을 정확하게 평가하게 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말씀을 듣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설교가 정말 깊은 영적 설교가 되려면, ‘ 정치인들이 사람이다’, ‘ 극우 기독교인들이 사람이다’, ‘ 지도자들이 사람이다’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리고 나도 사람일 있다’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나단의 비유가 오히려 남을 심판하는 도구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것이 들어오면 설교의 정치적 소재 전체가 갑자기 거듭남의 문제로 바뀝니다.

 

박요한 목사가 강조하는 ‘애민’도 같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상처 입은 사람을 조롱하지 않으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와 상당히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상처 입은 자의 손을 만져 주고 안아 있는 따뜻한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설교 후반의 말은 기독교 신앙이 삶의 선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서 귀합니다. 신앙은 사람을 더 잔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선하게 만들어야 하며, 교리가 참이라면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삶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민’과 ‘체어리티’를 완전히 같은 것으로 놓을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한 연민이나 따뜻한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리에 따라 지혜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돕는 것이 체어리티이고, 때로는 악을 제지하는 것이 체어리티이며, 때로는 잘못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도 체어리티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 분노를 쏟아내는가’가 아니라 ‘이웃의 참된 선을 위하여 행동하는가’입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박요한 목사가 약자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거부하면서 ‘기독교인은 써야 언어와 쓰지 않아야 언어가 있다’고 말한 부분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것과 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와 진리를 함께 붙들려는 태도와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준을 박요한 목사 자신의 언어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설교 안에는 정치적 반대편이나 역사적 인물을 향한 매우 거친 표현과 조롱에 가까운 표현들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번 설교가 스스로 제시한 ‘기독교인은 써야 언어와 쓰지 않아야 언어가 있다’는 기준과 긴장을 일으킵니다. 상대편의 조롱을 비판하면서 상대편을 조롱한다면, 주장하는 진리와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 사이에 균열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향한 조롱이냐가 아니라, 그 언어를 움직이는 정서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의 앞에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 약자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체어리티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특히 자기 사랑과 결합하기 쉬운 정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분노’였던 것이 어느 순간 ‘악인이라고 판단한 상대를 미워하는 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정의로운 분노처럼 보이지만 영적 기원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행위의 외형만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박요한 목사가 말하는 ‘애민’은 매우 좋은 출발점이지만, 그것이 참된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민’을 넘어가야 합니다. 내가 정치적으로 동의하는 사람, 내가 피해자라고 인정하는 사람,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가 몹시 싫어하는 사람에게조차 그의 인간됨을 부정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악은 악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 자체를 지옥에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즐기지 않는 것, 이것이 훨씬 어려운 체어리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 후반에 소개되는 어린 학생의 질문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정치인도 사랑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어떤 교회 지도자가 그 정치인을 ‘사탄’으로 규정하고 ‘박멸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대목입니다. 사실 여부와 구체적 맥락은 별도로 확인해야 하지만, 박요한 목사가 이 사례를 통해 지적하는 문제 자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적 상대를 더 이상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 않고 절대적인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신앙은 체어리티를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진영에서 일어나든 동일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사람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은 거부해야 하지만 사람의 구원을 바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지옥적인 것은 악과 거짓이지, 내가 미워하는 특정 인간 집단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악을 선이라고 인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악을 거부하면서도 사람에게 선이 회복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할수록 더욱 어려우면서도 더욱 필요한 기독교적 태도입니다.

 

이제 다시 설교 제목 ‘한국 교회는 어떻게 극우 양성소가 되었나?’로 돌아가 봅니다. 여기서 박요한 목사가 말하는 ‘극우 양성소’는 문맥상 낡고 부패한 종교체제, 권력과 결탁하고 인간을 우상화하는 교회의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옛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악하고, ‘새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참된 새로움은 제도와 간판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의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개혁의 가장 깊은 자리는 교단 총회도, 정치적 입장도, 예배 형식도 아닙니다. 한 사람의 속 사람입니다. 내가 진리를 이용하여 남을 심판하는가, 아니면 그 진리가 먼저 나를 심판하게 하는가? 내가 지지하는 사람의 악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가? 내가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가? 내 신앙은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교회가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는 것이 참된 개혁에 더 가깝습니다.

 

그 점에서 이번 설교의 ‘개혁’과 ‘애민’이라는 두 기둥도 조금 다르게 배열해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개혁과 애민’이 서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가치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의 결합으로 보는 편이 더 깊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드러내고 개혁하게 하며, 선은 왜 그것을 고쳐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진리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으면 개혁은 정죄가 되기 쉽고, 체어리티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사랑은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참된 교회에서는 이 둘이 결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설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결국 정치적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왕궁 안에 홀로 서 있는 나단과 다윗입니다. 한 사람은 진리를 말하고, 한 사람은 그 진리 앞에 섭니다. 다윗에게는 나단을 제거할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단을 제거한다고 자기 안의 악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단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윗에게 다시 시작할 길이 열립니다.

 

우리에게도 ‘나단’은 찾아옵니다.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양심을 통해, 때로는 다른 사람의 지적을 통해, 때로는 실패와 수치를 통해 찾아옵니다. 그때 proprium은 즉시 변명하고 싶어 합니다. ‘ 사람도 그러지 않았는가’, ‘저쪽은 심하지 않은가’, ‘내게도 사정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그 모든 비교를 멈추고 주님 앞에서 ‘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다시 읽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는 길은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의 우상을 깨뜨리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앞에서 안의 proprium 내가 만든 우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물리치며, 자리에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나게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보면 박요한 목사가 마지막에 품었다는 교육의 비전도 의미가 달라집니다. 아이들에게 ‘누가 좋은 정치인이고 누가 나쁜 정치인인가’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절대화하지 않는 법,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잘못도 볼 수 있는 법,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도 인간으로 대하는 법, 약한 사람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안의 악을 발견했을 때 변명하지 않고 돌이키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이라면 그것은 특정 정치 진영의 다음 세대를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말씀 앞에 설 수 있는 양심을 길러 주는 교육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하게 건질 수 있는 결론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세상에 악한 사람이 많아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자기편의 악을 악이라고 부르지 못할 때,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만 적용할 때,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교회 안에서 이미 위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개혁은 언제나 남을 향해 들었던 손가락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순간 시작됩니다.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그렇습니다. 제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심판의 말씀이 오히려 거듭남의 문이 됩니다.

 

 

 

SY.91, 박요한 목사, ‘내가 장로와 당회를 없애버린 이유’ (20260724)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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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5, 박요한 목사, ‘내 어머니 같은 나의 하나님 -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어린아이 같은 신앙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설교는 마태복음 21장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사건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외형적 종교성과 어린아이 같은 신앙, 하나님과의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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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이 처음 던지는 질문은 매우 근본적입니다. ‘예수는 정말 살았는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람인가?’입니다. 도올은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에는 세례 요한이 비교적 분명하게 등장하는 반면 예수에 대해서는 확실한 역사적 자료가 빈약하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와 역사학이 복원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어 복음서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 ‘드라마적 구성’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에 관한 동시대의 외부 기록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풍부하지 않다’는 것과 ‘예수에 관한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더구나 도올 자신도 결국 예수를 완전한 허구의 인물로 돌리지는 않습니다. 그는 예수를 ‘영원한 X’라고 부르면서도, 예수의 죽음 이후 그를 향한 강렬한 기억과 운동을 낳은 어떤 역사적 진원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도올의 실제 관심은 ‘예수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보다 ‘후대 교회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상에서 역사적 인간 예수를 얼마나 분리하여 찾아낼 있느냐’에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와 도올의 방향이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도올은 후대의 ‘그리스도’를 걷어내면서 그 아래 묻혀 있는 ‘인간 예수’를 찾으려 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정반대의 질문을 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라는 인간 안에서 여호와께서 어떻게 자신의 인성을 신성하게 하셨는가?’입니다. 도올에게는 ‘인간 예수 후대에 신화화된 그리스도’라는 방향이 강하다면, 스베덴보리에게는 ‘여호와 인성을 취하심 시험과 승리 인성의 영화 신적 인성’이라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문제는 단순한 ‘위대한 종교인의 전기’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에게 훌륭한 가르침 몇 가지를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영계에 극도로 팽창한 지옥의 세력을 제압하고 천국과 지옥의 질서를 회복하시며, 동시에 취하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성육신 이해에서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기적, 시험, 십자가, 부활 등을 걷어내고 ‘예수의 순수한 말씀’만 남기면 더 본래적인 예수에게 가까워진다는 도올의 생각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주님의 생애에서 가장 깊은 차원을 제거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고 도올의 문제 제기가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기존 기독교가 들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실제로 알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에 관한 교리만 알고 있는가?’입니다. 도올이 바울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바울에게는 ‘예수라는 인간’이 거의 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바울에게 중심은 갈릴리를 걷고, 사람을 만나고, 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비유를 말씀하시고, 죄인들과 식사하신 예수보다 ‘십자가에 박힌 그리스도’라는 신학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 지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도 그냥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교리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를 아무리 정확하게 고백해도 그분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셨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셨으며, 무엇을 선이라고 하셨는지를 삶에서 따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올이 ‘교리화된 그리스도’ 뒤에 가려진 예수의 실제 말씀과 삶을 다시 보자고 요구하는 것은 기존 기독교에 유익한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바울이 ‘예수 운동’이 아니라 ‘그리스도 운동’을 했고, 그 운동을 통해 교회가 형성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초기 교회는 승천한 예수가 곧 다시 돌아와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기다리는 ‘종말론적 회중’이었으며, 심지어 이를 현대의 극단적 휴거 집단과 비교합니다. 예수가 오지 않자 재림을 계속 연기하다가 결국 ‘여기서 궁리를 하자’는 방향으로 신학이 변했다고 풍자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짚어야 할 과장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 강렬한 종말론적 기대가 있었다는 사실과 초기 교회 전체를 현대의 시한부 종말론 집단과 사실상 동일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더구나 ‘처음에는 어느 해에 재림한다고 구체적으로 정했다가 오니 계속 연기했다’는 식의 서술은 이 강의에서 도올이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설명과 강연자의 풍자적 재구성을 구별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도올과 스베덴보리가 뜻밖에 가까워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재림을 주님께서 육체를 입고 구름을 타고 지구로 다시 내려오시는 사건으로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유는 도올과 전혀 다릅니다. 도올은 문자적 재림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신앙 자체를 역사적으로 상대화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가 품고 있는 속뜻을 밝힘으로써 ‘구름을 타고 오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새롭게 풉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그 가운데 나타나는 ‘영광’은 말씀의 내적, 신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은 실패하여 연기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그 의미를 문자적으로 잘못 이해했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도올은 ‘ 왔다’고 말하고,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이 오심의 방식을 잘못 알았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강의의 중반 이후부터 도올의 주장은 더욱 대담해집니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교회가 ‘바울의 철학만으로는 되겠다. 역사적 예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른바 ‘마가 교단’에서 일종의 드라마 팀을 만들어 팔레스타인의 예수 전승을 수집하여 최초의 복음서 드라마인 마가복음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마가가 성공하자 마태가 나오고, 이어 누가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요한이 종합했다는 식입니다. 심지어 복음서가 처음에는 중동의 구전문화나 판소리처럼 ‘챈팅(chanting), 곧 일정한 가락을 붙여 낭송하는 공연적 형태였을 것이라는 설명까지 합니다.

 

이 부분은 특별히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복음서가 구전 전승과 공동체적 전승 과정을 거쳤다는 문제, 마가복음이 공관복음 가운데 이른 시기에 작성되었다는 견해 등과 ‘마가 교단이 드라마 작가 그룹을 팔레스타인에 파견했다’는 이야기는 동일한 수준의 역사적 명제가 아닙니다. 후자는 이 강의만 놓고 보면 도올의 상당히 자유로운 역사적 상상과 재구성이 들어간 설명입니다. ‘재미있는 설명’과 ‘입증된 역사’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귀담아들을 통찰은 있습니다. 복음서가 현대적인 의미의 녹취록이나 CCTV 기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자료를 선택하고 배열하며, 각각의 공동체와 신학적 목적 속에서 예수의 생애를 증언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그러므로 드라마이며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신학적 목적을 가지고 기록했다’와 ‘역사적 사실을 창작했다’ 사이에는 상당히 큰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도올은 이 둘 사이를 때때로 너무 빨리 건너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강의의 중심인 ‘도마복음’이 등장합니다. 도올에게 도마복음은 거의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도마복음에는 예수의 말씀 114개가 어록 형태로 수록되어 있고, 정경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탄생과 활동을 연결하는 서사, 십자가, 무덤, 부활, 승천 등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도올은 바로 이 ‘비어 있음’을 대단히 중요하게 봅니다. 후대 기독교의 신화적 요소가 들어가기 이전의 ‘순결한 예수’가 여기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복음이 사복음서보다 늦다는 견해를 강하게 거부하고, 오히려 이것이 예수 전승의 원초적 형태를 보존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논리적으로도 한번 점검할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문서에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가 ‘없다’는 것과 그 문서가 ‘십자가와 부활 전승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닙니다. 문서의 장르가 ‘어록집’이라면 애초에 서사적 사건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그 장르의 특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마복음에는 십자가와 부활 서사가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후대 교회의 창작이다’라는 결론은 그 사이에 상당한 논증을 더 필요로 합니다. 강의에서는 이 간격이 너무 쉽게 넘어가집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복음서의 ‘말씀’과 ‘사건’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만 진짜이고 사건은 후대에 덧붙은 신화라는 식으로 나눌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생애는 하나입니다. 주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 병자를 고치신 것,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 십자가를 지신 것,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에는 역사적 층위가 있으면서 동시에 주님의 내적 과정, 곧 지옥들과의 싸움과 인성의 영화라는 더 깊은 신적 실재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올이 복음서에서 ‘신화’를 제거하여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 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가 ‘신화’라고 부르는 대목 안에서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발견합니다.

 

특히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전통 기독교의 형벌대속론과 스베덴보리의 십자가 이해는 같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부가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성자에게 대신 가하여 진노를 만족시켰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지옥들과 싸우신 마지막 시험이며, 그 모든 시험을 이기심으로써 취하신 인성을 완전히 영화롭게 하신 과정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도올이 기존 기독교의 ‘우리 죄를 대신하여 벌받은 예수’라는 도식을 문제 삼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비판 가운데 들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후대 교회가 만들어 신화적 예수상이다’로 넘어가면 스베덴보리와는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도마복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아름답고 깊은 예수의 말씀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문헌이 정경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의 모든 내용을 거짓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 말이 사람을 주님께, 선과 진리에, 체어리티의 삶에 이르게 하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그러므로 도마복음이 사복음서보다 순결한 복음이다’라는 주장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히 예수의 육성 어록을 많이 보존했다고 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문자적 의미 안에 천적, 영적 의미가 질서 있게 들어 있고, 그 상응을 통하여 천국과 인간을 연결하는 신적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실제로 하셨을 가능성이 높은 말들을 가장 오래된 형태로 모았다’는 역사비평적 가치와 ‘이것이 신적 말씀인가?’라는 문제는 서로 다른 차원의 질문입니다.

 

이 점에서 도올의 접근에는 흥미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신화에서 해방’하여 원래 예수에게 돌려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그렇게 ‘신화적 요소’를 하나씩 제거하고 나면 마지막에는 오히려 주님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지가 사라질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는 훌륭한 말씀을 남기고 진실하게 살다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위대한 스승으로 남습니다. 실제로 강의 후반에서 도올이 그리는 예수상은 상당히 그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묻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친히 오셔야 했는가?

 

좋은 윤리적 가르침만 필요했다면 선지자를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새로운 철학만 필요했다면 또 하나의 현자를 보내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와 영계 전체의 질서가 무너지고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게 선과 진리를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옥의 세력이 팽창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직접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것을 제거하면 성육신의 우주적 의미가 사라집니다.

 

강의 마지막에 도올은 도마복음을 통한 기독교의 재건을 한국인의 주체성 문제와 연결합니다. 서양에서 수입된 기독교를 마치 강대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처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한국인의 상식과 미학적·신앙적 감각으로 기독교를 새롭게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으로는 21세기를 견딜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 대목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반은 상당히 공감되고 반은 경계하게 됩니다. 신앙을 특정 문화의 옷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옳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 준 신학적 체계 전체를 곧 주님의 진리 자체로 동일시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부터 당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 이신칭의, 형벌대속적 구원 이해 등을 매우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전통이 그렇게 가르쳤으니 그대로 믿어라’는 태도를 스베덴보리 역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기독교’를 벗어난 자리에 ‘한국인의 감각’을 최종 기준으로 세운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서양도 기준이 아니고 한국도 기준이 아닙니다. 보수도 기준이 아니고 진보도 기준이 아닙니다. 도마복음도 기준이 아니고 스베덴보리라는 인간 개인도 기준이 아닙니다. 기준은 주님이며,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이번 강의를 통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깊이 배울 수 있는 지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올에게서 배울 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인에게 익숙한 전제를 낯설게 만들어 다시 질문하게 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 자신과 예수에 관한 신학을 구별해 적이 있는가?’, ‘재림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복음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 정경 밖의 초기 기독교 문헌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는가?’ 이런 질문들은 충분히 유익합니다.

 

그러나 도올에게서 멈추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가 ‘신화’라고 제거하는 것 가운데 실제로는 말씀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역사적 인간 예수’를 되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그 인간 안에 계셨던 ‘여호와’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도올은 교회가 만든 그리스도에게서 역사적 예수를 구해내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예수 안에서 인성을 입고 오신 여호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전자는 우리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으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그분의 선과 진리로 거듭나는 사람’으로 데려갑니다. 예수의 말씀을 존경하는 것과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아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번 도올 김용옥을 ‘틀린 사람’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질문 때문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묻지 않던 것들을 다시 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충분히 따라간 뒤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대어 보면, 기존 기독교와 도올 가운데 어느 한쪽을 단순히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풍경이 열립니다. 전통 기독교가 십자가를 이해한 방식에도 다시 물음을 던지고, 도올이 십자가를 후대의 신화화 쪽으로 밀어내는 방식에도 다시 물음을 던집니다. 문자적 재림론에도 물음을 던지고, 재림 자체를 초기 교회의 실패한 기대처럼 취급하는 데에도 물음을 던집니다.

 

아마 이것이 앞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주님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배우고 싶다’는 마음과도 연결될 것입니다. 누구의 편에 서서 상대방의 오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있는 곳에서는 진리를 기뻐하고, 거짓이 섞인 곳에서는 그것을 분별하되, 그 사람 전체를 그 오류 하나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올의 날카로운 질문도 받고, 그의 지나친 역사적 재구성도 경계하고, 기존 기독교의 소중한 고백도 보존하면서 그 안에 굳어진 인간적 전통 역시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결국 스베덴보리를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는 작업조차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열어 보여 준 말씀과 영계의 질서를 도움 삼아, ‘ 모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가는 작업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오래 붙들수록, 사람을 너무 빨리 ‘우리 ’과 ‘저쪽 ’, ‘옳은 사람’과 ‘틀린 사람’으로 나누고 싶어 하는 우리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SY.90, 도올 김용옥, ‘종교라는 게 도대체 뭐냐?’ (202511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도올은 강의 시작부터 종교가 무엇인지를 아주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죽은 뒤 천당에 가려는 신앙을 ‘도피세적’이라고 비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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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학교’를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출발의 계기와 초기 과정을 직접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앞선 영상들이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일화, 아토스 체험, 수도 영성의 가치 등을 소개했다면, 이번 영상은 그 관심이 어떻게 한국 개신교 안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교육 과정으로 발전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에는 수도학교라는 제도 자체를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보다, 그 출발점에 있었던 ‘거룩한 삶을 배우고 전하고 싶다’는 열망과 그것이 실제로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학교의 직접적인 계기로 제시하는 것은 세겜의 야곱의 우물에 세워진 수도원에서 만난 한 수도사입니다. 영상의 자동자막은 지명과 상황을 상당히 흐트러뜨리고 있어 세부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확정하기 어렵지만, 메시지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사라진 지역에서 홀로 수도원을 지키던 노수도사가 ‘내가 떠나면 이곳에서 예수님이 없어진다’는 취지로 말하고, 이어 강문호 수도사에게 ‘수도사를 양성해서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말을 자신의 표현대로 ‘5 볼트의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받아들였고, 여기에서 수도학교에 대한 구상이 시작되었다고 회고합니다.

 

이 대목에는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반드시 많은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떠나지 않는 ’ 자체가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교회의 생명은 외적 규모나 사람의 수에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안에라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 그리고 그 선을 밝혀 주는 진리가 살아 있다면 그곳에 교회의 본질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떠나면 이곳에서 예수님이 없어진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그 지역에 그 수도사 한 사람만이 주님을 대표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는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신앙적 고백으로 읽으면 상당히 울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은 특정 수도원이나 수도사에게만 계시는 분이 아니며, 어떤 지역에서 마지막 기독교인이 떠났다고 해서 그곳에서 주님까지 떠나시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볼 수 있는 교회의 경계보다 훨씬 넓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양심과 선을 향한 애정이 남아 있고,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려는 삶이 있다면 주님은 그 사람에게도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일화의 가장 깊은 의미는 ‘ 수도사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다’기보다, ‘ 수도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끝까지 살고자 했다’는 데서 찾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강문호 수도사가 곧바로 ‘수도사 파송’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간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선교사 파송에는 교통비와 생활비, 활동비 등 많은 지원이 필요하지만 이미 형성된 수도원에 수도사를 보내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다는 현실적인 장점을 이야기합니다. 이 발상에는 실제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선교의 효율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파송하는가?’입니다. 수도복을 입은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수도사라는 외적 신분을 얻는 것과 그 사람의 속 사람이 실제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어쩌면 ‘수도학교를 만들자’가 아니라 그보다 앞에 있는 ‘거룩한 영을 전하고 싶다’는 열망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거룩’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은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자체도 아니고, 금욕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며, 수도원이라는 특별한 공간에 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거룩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께로 향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조금씩 물러가며,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가 실제 이웃 사랑의 삶으로 나타나는 데 있습니다. 수도생활은 그것을 돕는 하나의 외적 형식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룩은 아닙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처음 열두 명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열두 사도를 훈련하여 보내셨다는 데서 착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틀 만에 열두 명이 모이고, 계속 지원자가 생겨 스물넷, 마침내 서른여섯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과정을 하나님의 인도로 받아들입니다. 이 부분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지고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사실은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뜻을 확증하는 표지는 아닙니다. 반대로 사람이 적게 모였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외적 성공보다 그 일을 움직이는 ‘목적’과 그 목적에서 나오는 ‘수단’, 그리고 마침내 맺히는 ‘쓰임(use)’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분별 기준입니다. ‘사람이 모였는가?’보다 ‘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수도사가 배출되었는가?’보다 ‘그들의 proprium 얼마나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 기까지 이어졌는가?’보다 ‘ 과정을 통하여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수도학교에만 적용되는 기준이 아닙니다. 신학교도, 교회도, 선교단체도, 수도원도,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공부하는 모임도 똑같습니다. 지식과 제도가 커졌는데 자기 사랑도 함께 커진다면 외적 성장은 내적 성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사도 없고, 교수도 없고, 교재도 없고, 공부할 교실도 없었다’며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했다고 회고하는 부분은 그 자체로 존중할 만합니다. 아무 기반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교육 과정을 만들고 교재와 커리큘럼을 마련한다는 것은 상당한 수고를 요구합니다. 고대·중세·현대 수도원, 수도원의 역사와 영성, 아토스와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공부하도록 구성한 것도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기독교 수도 전통을 다시 들여다보게 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의 중심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수도원의 역사와 위대한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수록 자칫 ‘비범한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얼마나 금식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혹독하게 자신을 절제했는지가 수도 영성의 중심이 되기 시작하면 복음의 중심이 조금씩 이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계속해서 우리를 되돌려 놓는 곳은 ‘사람의 위대함’이 아니라 ‘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 주님’입니다. 수도사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수도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강문호 수도사가 영상 말미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젖지 않고 마르는 빨래가 어디 있느냐’는 취지로 초기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대목은 오히려 수도학교의 본질을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영적 훈련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때 무엇을 붙드는 사람인가를 드러냅니다. 시행착오가 없다는 것이 반드시 영적 성숙의 증거도 아닙니다. 자신의 오류를 보고 인정하며 돌이키는 과정까지도 주님은 거듭남의 재료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루었다’는 결론이 아니라 ‘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우리 안의 무엇을 보여 주시고 고치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영상은 이후 수도학교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는지를 미리 가져와 판단하지 않고, ‘출발 당시의 영상’ 자체로 읽는 것이 가장 공정하겠습니다. 이 영상 속 강문호 수도사에게서는 분명한 열망이 보입니다. 자신이 해외 수도원들을 다니며 받은 충격과 감동을 한국 개신교 안에 소개하고 싶었고, 그것을 일회성 세미나로 끝내지 않고 사람을 훈련하는 과정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 열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출발점에 조용히 하나의 문장을 덧붙인다면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수도사를 만드는 것보다 먼저, 주님께서 사람의 속을 새롭게 하시도록 하라.’ 수도복도, 수도학교도, 커리큘럼도, 금욕도, 공동생활도 모두 외적 그릇입니다. 좋은 그릇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그릇 안에 담겨야 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이며, 그것이 일상의 체어리티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가장 정교한 수도 제도도 외적 형식에 머물 수 있고, 이것이 있다면 수도원 밖에서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도 주님 앞에서 깊은 거듭남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시작된 ‘수도학교’의 꿈을 가장 아름답게 완성하는 길은 수도사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이 자기 공로를 낮추고, 자신의 악과 거짓을 살피며, 주님께 모든 선의 근원을 돌리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도학교의 진정한 열매는 졸업생 명단이나 수도원 숫자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거룩한 영을 전하는 학교’라는 강문호 수도사의 처음 소망도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SY.84, 강문호 수도사, 수도원 7년, ‘청빈·거룩·오직 예수’를 다시 생각하다 (2026082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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