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https://youtu.be/ycpr_QuUjbc?si=heNUWptbnsCcOZsH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동방정교회에 전해 내려오는 ‘시오도르’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상 소개문 역시 이를 ‘동방 정교회의 성스러운 전설 중 하나인 시오도르의 일화’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동방교회의 여러 여성 수도 성인 전승, 특히 남장을 하고 남자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임신에 관한 누명을 쓰고, 죽은 뒤에야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마리나 또는 테오도라 계열의 성인전과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역사적 인물을 섣불리 특정하기보다, 영상이 부르는 대로 ‘시오도르’라고 하면서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수도적 의미 자체를 살펴보는 편이 안전하겠습니다.

 

이야기는 어머니의 죽음에서 시작합니다. 아내를 잃은 아버지는 재혼하지 않고 수도원에 들어가 하나님께 자신의 남은 생애를 드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딸에게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든지, 수녀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든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딸은 어느 쪽도 원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남자 수도원에 여성이 들어갈 수 없으므로 결국 딸은 남장을 하고 남자 수도사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시오도르’의 수도생활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수도생활의 외적 형식과 내적 본질의 차이입니다. 수도복을 입고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은 외적인 선택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장소와 옷과 생활양식이 아니라 사람의 사랑이 변화되는 일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해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까지 수도원 밖에 두고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고 가정과 직장과 사회 안에서 살아도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내적으로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오도르가 ‘수도원에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갔는가입니다.

 

시오도르는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사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수도원이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몇 명의 수도사가 며칠씩 걸리는 시장으로 내려가 식량을 구해 왔다고 합니다. 시오도르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일을 잘했기 때문에 이 일에 자주 뽑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으로 내려갔던 수도사들이 묵었던 여관 주인의 딸이 임신하게 되고, 그 딸은 수도사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임신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수도원장은 식량을 사러 갔던 수도사들을 불러 누가 그런 일을 했는지 추궁하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야기의 중심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수도원장은 관련된 수도사들을 모두 추방하려 하고, 그러자 시오도르가 자신이 그 일을 했다고 나섭니다. 실제로는 여성이므로 그 아이의 아버지일 수 없지만, 다른 수도사들이 함께 벌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결과 다른 수도사들은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시오도르만 추방되어 수도원 문밖에서 오랫동안 참회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로 이 장면을 매우 깊은 자기희생으로 바라봅니다. 자신이 짓지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다른 사람들을 살린 사람, 자신의 명예와 억울함을 내려놓고 묵묵히 고통을 감수한 수도자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마음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본능적으로 자신을 변호합니다. 특히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누명을 쓰면 더욱 그렇지요. 그런데 시오도르는 오히려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수도 전통 안에서 극단적인 겸손과 자기 부정의 한 모습으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만일 영상이 전하는 것처럼 시오도르가 다른 수도사들이 모두 추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명예를 희생했다면, 그 행동에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무고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려 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갔다는 점은 깊이 생각할 만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역시 자기의 유익보다 이웃의 참된 유익을 사랑하는 데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감동적인 장면 앞에서도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요구합니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과연 선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는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천국적인 삶은 선만 있는 삶도 아니고 진리만 있는 삶도 아니라, 선과 진리가 결합된 삶입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거짓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행위를 그 자체로 영적 완성의 표준으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시오도르가 침묵하거나 거짓된 죄를 인정함으로써 다른 수도사들은 구제를 받았지만, 동시에 수도원장은 거짓된 정보를 진실로 믿게 되었습니다. 공동체 역시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알고 살게 되었고, 실제로 책임져야 할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피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억울해도 참는다’는 것과 ‘진실을 감춘다’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선이 아닙니다. 때로는 침묵이 사랑일 수 있지만, 때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더 큰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믿는 사람은 참아야 한다’, ‘예수님도 변명하지 않으셨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변호하지 않는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절대적인 영적 원칙으로 만들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불의나 거짓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체어리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악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희생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참된 겸손은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인정하고, 하지 않은 일이라면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도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겸손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겸손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거짓되게 낮추는 데 있지 않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실제로 선한 일을 하고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이 더 깊은 겸손입니다.

 

시오도르에게 내려진 벌도 매우 가혹합니다. 그는 수도원 밖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해야 했다고 영상은 전합니다.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를 견디면서 수도원 문밖에서 참회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수도원 안으로 받아들여진 뒤에도 조용히 수도생활을 계속합니다.

 

수도 전통에서는 이런 장면이 인간의 자기 부정과 인내를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고통의 양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춥게 살았는가, 얼마나 굶었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모욕을 견뎠는가가 영적 상태를 직접 결정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때로 proprium을 깨뜨리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고통 자체가 선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 가운데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변화되는가입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시오도르가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 때문에 생겨난 아이와 관련된 책임까지 감당한다는 전승입니다. 여기에서는 이야기가 한층 더 깊어집니다. 그 아이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어른들의 거짓과 욕망 때문에 태어났지만 아이 자신에게 책임은 없습니다. 만일 시오도르가 그 아이를 받아 돌보았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오히려 이 부분이 이야기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모함한 사람에게 복수하는 대신 그 사건으로 가장 약한 처지에 놓인 생명을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관념이 아니라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느끼는 것만으로 체어리티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람에게 필요한 선을 행할 때 체어리티가 삶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를 먹이고 돌보고 키우는 일은 수도원의 극단적인 고행보다 오히려 훨씬 평범하면서도 깊은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특별한 기적이나 영적 체험이 아니라 매일 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씻기고, 보호하고, 책임지는 반복적인 쓰임 속에서 사랑이 실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시오도르는 죽습니다. 수도사들이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시신을 씻기려다가 그제야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영상은 전합니다. 그 순간 그동안의 모든 오해가 풀립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없는 사람이 그 모든 누명과 벌을 말없이 감당했다는 사실이 비로소 밝혀지는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삶’, 평범한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삶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또 하나의 깊은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자연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면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외모와 행동과 소문과 평판을 보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외적인 것이 벗겨지고 그 사람의 실제 사랑과 의도가 드러납니다. 세상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사람이 주님 앞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일 수 있고, 반대로 세상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존경받던 사람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른 내면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참된 상태는 결국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진다’는 교훈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보다 ‘주님 앞에서 나는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평판을 관리할 수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배적인 사랑은 숨길 수 없습니다. 사후에는 자신이 무엇을 사랑했으며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의 핵심도 결국 외적인 수도복이나 고행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의 내적 진실성입니다.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의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조금 다듬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도자의 목표는 인간을 초월하여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오히려 사람이 더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지배될수록 인간다운 질서는 무너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회복될수록 사람은 창조된 본래의 인간다움으로 돌아갑니다. 천사조차 인간과 전혀 다른 종류의 존재가 아니라 지상에서 인간으로 살다가 거듭나 영계에서 천사가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수도자의 위대함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가장 오래 금식한 사람, 가장 오랫동안 침묵한 사람, 가장 큰 누명을 참은 사람이 자동으로 가장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가정에서 배우자를 오래 참고 사랑하고, 자녀를 책임지고,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며,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삶 역시 주님 앞에서는 매우 깊은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수도의 외적 형태는 서로 달라도 거듭남의 본질은 같습니다.

 

특히 이 이야기를 잘못 받아들이면 ‘억울해도 말하지 않는 것이 높은 영성’이라는 결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진실을 말해야 다른 사람이 보호받을 수 있고 공동체의 악이 중단될 수 있다면 침묵은 더 이상 체어리티가 아닐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니지만,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선은 진리와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오도르의 행동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누명을 쓰면 침묵하라’가 아닙니다. 더 깊은 것은 ‘자기 명예를 최고의 선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면 밝히되 자기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상대를 파괴하려 하지 않고, 침묵해야 한다면 침묵하되 그것을 자기 의나 영적 우월감으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 이야기는 proprium의 문제와도 만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즉시 ‘내가 옳다’,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 ‘저 사람이 잘못했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proprium은 반대편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억울한데도 참고 있다’, ‘나는 남의 죄까지 짊어지는 사람이다’라는 영적 자기 의 역시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기 부정은 자신을 높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통해 다시 자신을 높이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님과 이웃의 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오도르 이야기에서 가장 귀하게 남는 것은 극단적인 고행보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는 데 생을 소비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닥친 고통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증오하는 삶으로 빠져들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약한 생명을 돌보았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안에는 분명 체어리티의 향기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아름다운 전승을 그대로 영적 규범으로 만들기보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기준으로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침묵도 진리를 위한 침묵이어야 하고, 희생도 선을 위한 희생이어야 하며, 겸손도 주님을 높이는 겸손이어야 합니다. 고통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사랑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수도사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시오도르의 아름다움은 자신이 하지 않은 죄를 뒤집어쓴 사실 자체에 있다기보다, 자기 명예를 삶의 중심에 놓지 않고 억울함 속에서도 증오와 복수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으며 가장 약한 존재를 돌보는 삶을 살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을 더 보태고 싶습니다. ‘참된 수도는 자기를 무조건 낮추는 데 있지 않고, 자기가 높아지든 낮아지든 그것에 붙들리지 않은 채 주님의 선과 진리가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수도원 안에서든 가정과 직장과 세상 한복판에서든, 어쩌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바라시는 가장 깊은 ‘내적 수도’일 것입니다.

 

 

 

SY.66, 강문호 목사, ‘아토스 수도 자치국’ (201912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어떤 수도사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강문호 목사님이 왜 수도원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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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심화

 

5.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7:15)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출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를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의 이름을 인용한 이유와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고대에는 어떤 새로운 사건이나 상태가 나타났을 때, 그 의미와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앞의 네 사례가 모두 사람의 이름’이었다면, 이번에는 제단의 이름’을 예로 듭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사례는 이름에 의미를 담는 고대의 방식이 사람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장소에도 적용되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7의 배경은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입니다.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우는 동안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으며,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어 마침내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 그 후 모세는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합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제단에 아무 의미 없이 하나의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그 이름에 담아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서 AC.340의 논점은 여호와 닛시’의 속뜻 자체를 깊이 해설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했다’는 명명의 방식입니다.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의 의미를 하나의 이름으로 표현하여 기억하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람에게 이름을 붙일 때 보았던 것과 같은 원리가 이번에는 제단에도 적용됩니다.

 

이 사례가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이름’의 의미를 단순한 개인 이름의 어원 문제로 한정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까지만 예로 들었다면 성경 시대에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출생 상황에 맞추어 이름을 지었구나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사람도 아닌 제단’을 가져옵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닛시’라고 한 것입니다. 이로써 이름은 단순한 사람의 호칭을 넘어 어떤 대상의 성질과 의미, 그와 관련된 상태를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가인’이라는 이름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마치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고 얻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표현하고, 그렇게 나타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닛시’와 가인’이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이름의 속뜻을 서로 연결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비교하는 것은 오직 이름을 붙이는 방식’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승리하게 하신 일을 나타내기 위해 제단에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을 붙였듯이, 태고인들도 새롭게 나타난 어떤 교리와 상태의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AC.340에 나온 사례들을 한꺼번에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의 논증 방식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하갈의 고통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에 담았고, 레아의 괴로움을 여호와께서 보셨다’는 것을 르우벤’이라는 이름에 담았으며, 자신이 사랑받지 못함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을 시므온’이라는 이름에 담았습니다. 또한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를 유다’라는 이름에 담았고,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깃발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제단의 이름 여호와 닛시’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원리에 따라, 태고교회에서 신앙의 교리를 마치 새롭게 얻은 것처럼 여긴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특히 출17:15의 사례는 바로 앞 AC.339와 연결해서 읽을 때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AC.339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인들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나타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40에서는 실제 말씀 안에서 이름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하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보여 줍니다. ‘여호와 닛시’는 그 가운데 마지막 사례로서, 이름이 단순한 사람의 호칭이 아니라 어떤 영적 의미를 담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넓게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출17:15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도우심과 승리를 제단의 이름에 담아 여호와 닛시’라고 한 것처럼, 고대인들은 어떤 새로운 일이나 상태가 나타나면 그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라는 이름 역시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어떤 상태와 교리의 성질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사례에는 한 가지 중요한 효과가 있습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가인이라는 역사적 개인이 왜 그런 이름을 얻었는가?’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단도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을 통해 그와 관련된 상태와 의미를 나타낼 수 있었듯이, 태고인들은 교회에 속한 어떤 교리나 영적 상태에도 이름을 붙여 그 성질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AC.339에서 설명한 창4의 계보를 이해하는 방식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결국 여호와 닛시’는 AC.340에 나온 여러 예 가운데 마지막이면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가장 넓게 열어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단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어떤 것의 성질과 상태를 담아 나타낼 수 있다.’ 이 원리를 확인하고 다시 창4로 돌아가면, ‘가인’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변화를 담아 나타내는 이름이라는 AC.340의 설명이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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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심화 4, ‘창29:35’

AC.340.심화 4. ‘창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29:35) AC.34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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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동엽 목사가 자신을 ‘교회지기’라고 부르며 목회자를 ‘등대지기’에 비유하는 대목입니다. 화려한 강대상 위에서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목회자보다 이름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등대지기가 참된 목자의 모습에 더 가깝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출발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천국의 질서는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보다 ‘어떤 쓰임(use)을 사랑하여 수행하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천사들도 자신의 지위나 영광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사랑하고, 그 쓰임을 통해 이웃에게 선이 흘러가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이름 없이 빛을 비추며 배들의 길을 지키는 ‘등대지기’라는 비유에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 삶의 중요한 한 면이 담겨 있습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이동엽 목사가 과거 자신의 목회적 야망을 돌아보며 ‘그 꿈이 누구의 꿈이었는가?’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그는 웅장한 교회를 세우고 수천, 수만 명을 모으며 능력 있게 설교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꿈’이라기보다 ‘제 자아가 꾸는 꿈’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proprium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그 일을 통해 인정과 명예와 영향력을 얻으려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내면에서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큰 교회를 세웠느냐 작은 교회를 섬겼느냐가 아닙니다. ‘누구를 위해 그것을 원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대형 교회를 섬기면서도 주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출 수 있고,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도 ‘나는 세속적인 대형 교회 목사들과 다르다’는 영적 우월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외적인 규모보다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의 방향’을 봅니다.

 

이 영상의 중심부에서 매우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동엽 목사는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상당히 다른 한 집사님을 만납니다. 그는 전광훈 목사를 강하게 지지하는 보수적 신앙인이었지만, 동시에 이동엽 목사의 설교를 거의 모두 듣고, 그의 구원관과 여러 신앙적 주장에 깊이 공감합니다. 이동엽 목사는 이 만남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내 말에 동조하는 사람’과 ‘동조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보수주의자가 따로 있고, 진보주의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이라는 중요한 통찰에 도달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영계에서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상에서 어느 정치적 진영에 속했는가가 아니라 그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 안에는 수많은 생각과 의견과 지식과 감정이 함께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궁극적으로 하나로 묶는 중심은 그가 무엇을 가장 사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 안에도 진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진보적인 사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어느 쪽에 속하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집단만을 사랑하면서 상대를 멸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은 보수니까 이런 사람’, ‘저 사람은 진보니까 저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한 인간의 내면을 그의 외적인 의견 몇 가지로 축소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이동엽 목사가 경험한 자기반성은 상당히 의미 있습니다. 그는 ‘하나 됨’을 말하면서도 자기 안에 사람을 나누는 마음이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도 바로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의 악을 모두 알고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은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proprium을 조금씩 드러내십니다. ‘나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자신이 사람들을 분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로 그때 회개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이 집사님과의 만남은 단순한 ‘뜻밖의 좋은 만남’이라기보다 이동엽 목사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준 하나의 거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영상은 여기서 정치와 신앙의 관계라는 훨씬 어려운 문제로 들어갑니다. 이동엽 목사는 전광훈 목사의 개인적인 애국심이나 정치 활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 곧 기독교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로 동일시하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질서와 시민적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국가, 법률, 직업, 가정, 사회적 책임은 모두 인간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장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것을 추구하려면 땅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은 자신의 직업과 시민적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그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동엽 목사의 주장에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영상 후반에는 ‘기독교인이 세상의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의 것들을 모두 희생하고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한다’는 방향의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스베덴보리의 관점과는 거리가 생깁니다. 천국을 준비하는 삶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의 의무를 신실하게 수행하되 그것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도구로 만들지 않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상인은 정직하게 장사하고, 공무원은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며, 정치인은 공공선을 위해 정치하고, 목회자는 영혼의 선을 위해 목회합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떤 사랑에서 하느냐’입니다.

 

이 원리는 정치 참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비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의한 제도를 바로잡고 약자를 보호하며 공동선을 위해 행동하는 일은 오히려 이웃 사랑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동원하거나, 특정 정치적 선택을 곧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거나, 자신과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하는 사람을 신앙적으로 열등한 사람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 순간 정치적 확신이 신앙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정치적 확신을 섬기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동엽 목사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땅의 나라를 뒤섞지 말라’는 문제의식에는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단순히 ‘교회와 정치를 섞으면 안 된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이 무엇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면 질서가 바로 서지만,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정치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고 애국심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진영의 승리, 권력, 지배, 증오 같은 자연적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거룩하게 포장할 때 발생합니다. 반대로 정치적 행동이 진실과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고, 그 과정에서도 상대방을 인간으로 존중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면 정치 역시 하나의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정치적 힘과 대조하는 부분도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동엽 목사는 로마의 압제 아래 있던 예수님이 정치적·군사적 힘으로 로마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정치적 비폭력의 모범보다 훨씬 깊은 사건입니다. 주님은 세상 나라를 정복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지옥의 권세와 싸우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며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다시 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싸움은 사람을 죽이는 싸움이 아니라 악과 거짓을 정복하는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를 정치적 승리의 프로그램으로 읽는 것은 복음의 중심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상에서 말하듯 ‘공산당이 싫으면 그들과 맞서 싸우지 말고 그들의 손에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표현까지 그대로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강조하려는 강한 수사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악에 저항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을 보호하기 위해 악을 제어해야 할 때가 있으며, 사회에는 법과 질서와 공적 정의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악한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에 악을 제어하는 것과, 선과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악을 제어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행동은 비슷해 보여도 내적인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악에 저항하지 않는 것’과 ‘악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악을 제어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구약의 전쟁과 진멸을 오늘날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동엽 목사의 지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서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이 이동엽 목사의 문제의식을 훨씬 더 깊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는 속뜻이 있으며, 특히 구약의 전쟁들은 인간 내면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는 본문을 오늘날 다른 종교인이나 정치적 반대자를 공격하라는 명령으로 옮겨 오는 것은 말씀의 영적 목적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멸해야 할 ‘가나안 족속’은 무엇보다 우리 밖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불상을 부수거나 다른 종교의 성소를 훼손하면서 그것을 ‘우상 파괴’라고 부르는 행위에 대한 이동엽 목사의 비판도 훨씬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가장 위험한 우상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형상 자체보다 인간 안에서 하나님보다 높아진 자기애와 세상 사랑입니다. 밖의 우상을 깨뜨리면서 자기 안의 지배욕과 멸시와 증오를 그대로 품고 있다면 그는 영적으로 우상을 제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 열심이라는 이름 아래 proprium을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참된 영적 전쟁의 전장은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있습니다.

 

다만 영상에서 ‘유대교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구약만을 믿는 유대교는 그렇게 투쟁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부분은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유대교 전체를 구약의 진멸 전쟁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가 될 수 있고, 특정 민족이나 종교 전체를 하나의 성향으로 묶는 것은 이 영상 앞부분에서 이동엽 목사 자신이 깨달았던 ‘사람을 하나의 범주로 나누지 말자’는 통찰과도 긴장됩니다. 한 사람을 ‘보수’나 ‘진보’라는 한 단어로 규정해서는 안 되듯, 유대교나 이슬람이나 어떤 종교 집단 전체도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이나 극단적 사례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도 앞부분의 깨달음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기독교 정신은 정말 진보적이다’라는 표현도 그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복음은 현대 정치의 ‘진보’나 ‘보수’ 가운데 어느 한쪽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며 억압을 거부하는 면에서는 오늘날 진보적 가치와 만날 수 있고, 개인의 책임과 도덕적 질서, 가정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보수적 가치와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선과 진리는 어느 정치 진영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양쪽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만 복음에서 가져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보수다’도 위험하지만 ‘기독교는 본래 진보다’ 역시 같은 종류의 환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영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오히려 정치에 관한 결론보다 그 정치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든 ‘만남’ 자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집사님은 자신이 존경하는 목사를 비판한 이동엽 목사의 말을 끝까지 들었고, 이동엽 목사도 자신과 다른 정치적 신념을 가진 집사님의 신앙과 삶을 존중했습니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기 전에 ‘당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적어도 한 사람은 자기 안의 숨은 판단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체어리티가 진리의 차이를 다루는 방식과 가까운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차이가 있다고 해서 곧 교회가 갈라지는 것은 아니며, 체어리티가 중심에 있다면 서로 다른 교리적 견해 가운데서도 하나 됨이 가능하다는 취지의 가르침을 반복합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하면 정치적 견해의 일치가 교회의 하나 됨의 조건일 수는 없습니다. ‘나와 같은 후보를 지지해야 형제이고, 나와 같은 정치적 판단을 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순간 교회는 체어리티보다 정치적 신념을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게 됩니다. 반대로 서로 다른 판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방 안에 있는 선을 인정하고 함께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외적인 차이 아래 더 깊은 하나 됨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을 처음의 ‘등대지기’로 다시 가져오면 영상 전체가 하나의 원을 그립니다. 등대는 바다 위의 모든 배를 자기에게 오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배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옳으니 나에게로 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빛을 비추어 각각의 배가 안전하게 자기 길을 가도록 돕습니다. 참된 목회도 어쩌면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사람들을 자기 정치관, 자기 신학적 취향, 자기 영향력 아래 모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이 사람들의 길을 비추도록 자신은 한 자리에서 묵묵히 쓰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읽을 때 저는 이동엽 목사의 모든 주장에 그대로 동의하는 것보다, 이 영상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더 깊은 방향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큰 목회’를 꿈꾸던 사람이 ‘교회지기’를 꿈꾸기 시작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하나의 정치적 범주로 보던 사람이 ‘그냥 한 사람’을 보기 시작하며, 세상의 힘으로 상대를 이기는 신앙에서 십자가의 자기 비움으로 시선을 돌리는 흐름입니다. 아직 몇몇 표현에는 정치적 이분법이 남아 있고, ‘세상에서 벗어남’이나 ‘악에 저항하지 않음’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보완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서 흐르는 방향, 곧 ‘자기를 높이는 데서 쓰임으로, 판단에서 이해로, 지배에서 섬김으로, 외적인 적과의 싸움에서 자기 안의 악과의 싸움으로’ 향하려는 움직임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방향과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어쩌면 이 영상의 처음에 나온 ‘그 꿈이 누구의 꿈이었는가?’라는 질문이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형 교회를 세우려는 꿈에도 물을 수 있고, 나라를 구하려는 꿈에도 물을 수 있으며, 진보적 사회를 만들려는 꿈에도 물을 수 있고, 심지어 ‘올바른 기독교’를 세우겠다는 꿈에도 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주님의 뜻을 사랑해서 품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세상에 관철하고 싶은 proprium의 꿈인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결국 우리를 상대편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세웁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참된 영적 전쟁과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SY.66, 강문호 목사, ‘아토스 수도 자치국’ (201912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어떤 수도사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강문호 목사님이 왜 수도원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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