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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5

교회에 속한 자들은 주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심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Those who are of the church cannot doubt that the Lord is the God of heaven, for he himself taught,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1:27);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16:15);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17:2) That all things of the Father are his (Matt. 11:27; John 16:15; 17:2).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28:18) And that he hath all power in heaven and on earth (Matt. 28:18).

 

하늘과 땅에서라고 하신 것은, 하늘을 다스리는 분은 땅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지요.(주15)하늘과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선과 신앙에 속한 모든 진리, 곧 모든 지성과 지혜, 그 결과로서의 모든 행복, 한마디로 영원한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He says “in heaven and on earth,” because he that rules heaven rules the earth also, for the one depends upon the other.15 “Ruling heaven and earth” means to receive from the Lord every good pertaining to love and every truth pertaining to faith, thus all intelligence and wisdom, and in consequence all happiness, in a word, eternal life. This also the Lord taught when he said: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the Son shall not see life (John 3:36).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5, 26)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that believeth on Me, though he die yet shall he live; and whosoever liveth and believeth on Me shall never die (John 11:25,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John 14:6).

 

 

15. 천국 전체가 주님의 것이다. The entire heaven is the Lord’s (n. 2751, 7086).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신다. He has all power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s (n. 1607, 10089, 10827). 주님이 천국을 다스리시므로 주님은 또한 천국에 의존하는 모든 것, 곧 지상의 모든 것도 다스리신다. As the Lord rules heaven He rules also all things that depend thereon, thus all things in the world (n. 2026, 2027, 4523, 4524). 주님 홀로 지옥들로부터 떨어트리시고, 악에서 떠나 선 가운데 있게 하시며, 그렇게 해서 구원하시는 권세가 있으시다. The Lord alone has power to remove the hells, to withhold from evil and hold in good, and thus to save (n. 10019).

 

 

해설

 

HH.5는 앞선 글들의 논지를 성경 말씀으로 확증하는 부분입니다. HH.2HH.3에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으로 인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교회에 속한 자들’이라면 이것을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 자신의 말씀 때문입니다. 여기서 ‘교회에 속한 자들’이란 단순히 교적에 이름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알고 읽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말씀 안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만일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들의 것이라면, 신성은 분리된 두 중심으로 나뉘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는 ‘하늘을 다스리는 분은 땅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은 분리된 체계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영적 원인이고, 땅은 그 결과인 외적 표현입니다. 영적 세계가 자연 세계에 유입하고, 자연 세계는 영적 세계에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주권자가 곧 땅의 주권자입니다. 주님이 하늘의 주이시라면, 동시에 우주의 주이십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실질적으로 풀이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통치 권한을 행사하는 왕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하늘을 다스린다는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선과 신앙에 속한 모든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천사들이 지혜롭고 행복한 이유는 그들 안으로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 지성과 지혜,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행복과 영원한 생명은 모두 주님에게서 유래합니다. 이것이 ‘다스림’의 의미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표현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은 단순히 존재를 인정하는 지적 동의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믿음은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분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 흐르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곧 생명과 연결됩니다. 주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가진다는 것은, 그가 이미 주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언은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에 담고 있습니다. 길이라는 것은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이를 수 없다는 뜻이며, 진리라는 것은 모든 참된 인식이 그분 안에 있다는 뜻이고, 생명이라는 것은 존재의 근원이 그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교리적 선택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HH.5는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단지 중개자가 아니라, 생명 자체이시며, 사랑과 진리의 근원이시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심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그분과의 결합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은 천국 이해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인간 생명의 근원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이 글은 설교적으로도 매우 힘이 있습니다. ‘다스림’을 권위가 아니라 ‘생명의 유입’으로 설명하면, 성도들이 주님 통치의 의미를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화

 

1.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HH.5에서 ‘하늘과 땅을 다스린다’는 것이 곧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모든 지성과 지혜, 행복, 영원한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여기서 ‘받는다’는 말은 오해하기 쉬운 표현입니다. 마치 없던 능력이 갑자기 주입되는 것처럼, 혹은 아이큐가 올라가듯 지적 능력이 증가하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받음’은 그런 외적, 기계적 주입이 아닙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전제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생명의 ‘자체 소유자’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의 수용체입니다. 즉, 생명은 본질적으로 주님께 속해 있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는 자주 이런 비유를 씁니다. 태양이 빛과 열을 발할 때, 식물은 그 빛과 열을 받아 자랍니다. 식물은 빛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식물이 기계처럼 자동으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수용 능력과 상태에 따라 성장의 질이 달라집니다.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 수용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사랑과 진리, 곧 선과 지혜를 끊임없이 발하고 계십니다. 천국에서 ‘다스림’은 강압적 통치가 아니라, 이 선과 진리의 지속적 유입입니다. 천사들이 지혜롭고 행복한 이유는, 그들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자유롭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받는다’는 것은 갑자기 지능 지수가 상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이큐는 자연적 사고 능력의 측면에 속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성(intelligence)과 지혜(wisdom)는 영적 차원의 능력입니다. 진리를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선과 결합된 진리를 보는 능력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이해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에서 지혜가 증가한다는 것은 정보를 많이 암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진리를 더 밝게 이해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이 주님을 향할 때, 그에 상응하여 이해도 밝아집니다. 그래서 ‘받는다’는 것은 능력의 외적 증가라기보다, 존재의 투명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자유입니다. 인간은 수동적 파이프가 아닙니다. 주님의 생명은 끊임없이 흘러오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이 자유가 지상 생애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천국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사랑이 이미 주님과 일치해 있기 때문에, 그 유입을 막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더 큰 기쁨과 더 밝은 이해를 ‘받게’ 됩니다.

 

정리하면, ‘받는다’는 것은 없던 두뇌 기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인간이 수용하도록 창조된 생명과 지혜가 방해 없이 흐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창문이 깨끗해질수록 햇빛이 더 잘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빛이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가림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HH.5의 ‘받는다’는 말은 이렇게 풀 수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며,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끊임없이 받아 존재한다. 그리고 그 수용이 깊어질수록 지혜와 행복도 깊어진다.

 

 

아래는 위 심화 해설 중 인간은 생명의 수용체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한 번 더 해설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원리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수용체입니다. 이 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말도 오해하게 되고, 천국의 지혜와 행복이 무엇인지도 왜곡되기 쉽습니다.

 

먼저 근원에 대한 문제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독립적 근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 생명은 순간순간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옵니다. 마치 전구가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류를 받아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전류가 끊기면 전구는 어두워집니다. 전구가 빛의 근원이 아니듯, 인간도 생명의 근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인간은 단순한 기계적 통로가 아닙니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체’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진리가 끊임없이 유입되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유 때문에 인간은 책임 있는 존재가 됩니다. 수용체이되, 능동적 수용체입니다.

 

이제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능력이 덧붙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없던 두뇌 기능이 새로 생기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본래 수용하도록 창조된 구조가 점점 더 열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정화될수록, 이해는 더 밝아집니다. 자기 중심성이 줄어들수록, 진리를 왜곡 없이 보게 됩니다. 이것이 지성과 지혜가 ‘증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이큐와 같은 자연적 지능은 두뇌 기능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성(intelligence)과 지혜(wisdom)는 영적 차원입니다. 그것은 선과 결합된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 보고, 그것을 사랑하며, 그에 따라 사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외적 정보 축적이 아니라, 존재의 투명성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태양은 항상 빛과 열을 발합니다. 그러나 창문이 더럽거나 닫혀 있으면 빛은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창문을 닦고 열면 방은 밝아집니다. 방이 스스로 빛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단지 빛을 더 잘 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는 항상 흘러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 자기 사랑, 왜곡된 관념이 그것을 가립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창문이 맑아지는 과정입니다.

 

천국에서 ‘받는다’는 것은 창문이 거의 완전히 투명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점점 더 깊은 사랑과 더 밝은 이해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정지된 완성이 아니라, 무한하신 주님으로부터 무한히 더 깊이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수용도 끝이 없습니다.

 

결국 이 원리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주님은 근원이시고, 인간은 수용체입니다. 생명, 사랑, 진리, 지혜, 행복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수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 인간다워집니다.

 

 

 

HH.6, 1장, 사람들이 가지는 '천국에 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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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4, 1장,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루는 유아들'

1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4유아들은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루는데, 그들은 모두 주님이 자기들의 아버지이심을 인정하고 믿는 가운데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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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4

유아들은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루는데, 그들은 모두 주님이 자기들의 아버지이심을 인정하고 믿는 가운데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분이 만유의 주이시며, 곧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라나며, 지식을 통해 점점 완전해져 천사적 지성과 지혜에 이르게 되는 일은, 뒤의 장들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Infants, who form a third part of heaven, are all initiated into the acknowledgment and belief that the Lord is their Father, and afterwards that he is the Lord of all, thus the God of heaven and earth. That children grow up in heaven and are perfected by means of knowledges, even to angelic intelligence and wisdom, will be see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Heaven and Hell’ 전체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유아들이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룬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상징적 과장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본 실제 상태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모두 천국으로 가며, 그 수가 매우 많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교회 안팎의 구분이 없습니다. 유아는 아직 스스로 악을 선택하거나 진리를 거부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all initiated into the acknowledgment’라는 표현입니다. 아이들은 이미 완성된 천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되어 들어가게 됩니다’. 즉, 천국은 단번에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성장의 세계입니다. 아이들은 먼저 주님을 ‘아버지’로 배우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교리 교육이 아니라, 관계의 형성입니다. 어린 존재가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 관념은 ‘아버지’입니다. 사랑하고 보호하며 돌보는 분으로서의 주님을 먼저 경험합니다.

 

그다음 단계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이후에 주님이 ‘만유의 주(the Lord of all)이시며 ‘하늘과 땅의 하나님(the God of heaven and earth)이심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격적 친밀성에서 시작하여 점차 우주적 통치의 주님으로 이해가 확장됩니다. 사랑의 관계가 먼저이고, 교리적 인식은 그다음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질서와 일치합니다. 항상 사랑이 먼저이고, 진리의 이해는 그다음입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선언은, 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라난다(grow up)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정지된 상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정체의 세계가 아니라 성장의 세계입니다. 아이들은 지식을 통해 점점 완전해지며, 마침내 천사적 지성과 지혜에 이릅니다. 여기서 ‘지식(knowledges)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이 대목은 또한 인간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지상에서 그 가능성이 충분히 펼쳐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천국에서 계속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아의 죽음은 영적 성장의 단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순수한 환경에서 계속되는 시작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HH.2HH.3에서 ‘주님을 어떻게 인정하느냐’가 천국과의 연결 문제로 제시되었는데, HH.4에서는 유아들이 자연스럽게 주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이는 주님 인식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보여 줍니다. 복잡한 교리 논쟁 없이, 관계적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결국 이 글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자비는 어린 생명들을 완전히 품고 계시다는 것. 둘째, 천국은 완성된 자들의 박물관이 아니라 계속 성장하는 학교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거기서 배우고, 자라고, 지혜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성장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십니다.

 

이 부분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큰 위로를 줍니다.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에게, 혹은 어린 생명의 의미를 묻는 이들에게, HH.4는 깊은 소망의 문을 열어 줍니다.  

 

 

심화

 

1.유아들은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루는데

 

HH.4에서 스베덴보리가 ‘유아들이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룬다’고 말하는 부분은 많은 독자들에게 가장 놀라운 진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그런 비율이 가능한지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전제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비유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계에서 본 실제 상태에 대한 관찰로 제시합니다. 그에 따르면, 세상에서 유아기 혹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은 예외 없이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스스로 악을 확정적으로 선택하거나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부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 분의 일’이라는 규모가 가능한가? 여기에는 몇 가지 현실적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역사적으로 인류의 사망률을 생각해 보면, 특히 고대와 중세, 근대 초기까지는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의료가 발달하기 전에는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성인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살던 18세기에도 유아 사망은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인구 통계적으로 보아도, 인류 전체 역사 속에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인구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둘째,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단일 시대의 공동체로 보지 않습니다. 천국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모여든 모든 세대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인류의 흐름 속에서 축적된 영적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현재 지구 인구 비율과 단순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장구한 역사 전체를 배경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여기에는 신학적 의미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태어날 때는 선과 진리에 대한 가능성을 지닌 상태로 태어난다고 봅니다. 유아는 아직 자신의 자유를 통해 악을 확정적으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형성 중인 존재’로서 천국에서 계속 자라날 수 있습니다. HH.4 다음 부분들에서 그는 아이들이 천국에서 교육받고, 지식들을 통해 점점 완전해지며, 마침내 천사적 지성과 지혜에 이른다고 설명합니다. 즉, 천국은 완성된 자들만 모여 있는 정지된 세계가 아니라, 성장의 세계입니다.

 

여기서 ‘삼 분의 일’이라는 표현을 상징적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과 스베덴보리 저작 전반에서 ‘’은 완전함이나 충만함과 관련된 수입니다. 반드시 정확한 수학적 33.3%를 의미한다기보다, ‘결코 소수가 아니다’,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강조의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대체로 자신이 본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강하므로, 완전히 상징으로만 돌리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균형 잡힌 이해는 ‘매우 많은 수’라는 실제적 진술로 보는 것입니다.

 

이 대목이 주는 목회적 의미는 매우 큽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어린 생명이 짧은 삶을 마치고 떠났습니다. HH.4는 그 생명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순수한 환경에서 성장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멈춘 존재가 아니라 계속 자라나는 존재입니다.

 

결국 ‘천국의 삼 분의 일’이라는 말은 단순한 통계 보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섭리의 광대함을 드러내는 진술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상실처럼 보이는 수많은 생명들이, 영적 질서 안에서는 잃어버려지지 않았다는 선언입니다.

 

 

2.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라나며

 

많은 신앙인들이 막연히 ‘죽으면 상태가 고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면, 영원히 어린 모습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가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HH.4에서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아이들은 천국에서 자라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영적 존재 이해를 뒤집는 선언입니다.

 

먼저 기본 원리를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가 아니라 영으로 존재합니다. 육체는 일시적 외적 형식이고, 영은 참된 인간입니다. 지상에서의 성장은 육체적 성장과 함께 이루어지지만, 본질은 영적 성장입니다. 즉, 사랑과 진리를 배우고, 의지와 이해가 형성되는 과정이 진짜 성장입니다. 그렇다면 육체가 없어졌다고 해서 성장이 멈출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외적 제약이 사라진 상태에서 더 순수한 환경 속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란다는 말은, 그들이 단번에 완성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시작하여, 천국의 질서 안에서 교육받고, 사랑을 배우고, 진리를 배우며, 점점 성숙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장들에서 천국에는 아이들을 돌보는 천사들이 있고, 그들이 매우 부드럽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아이들을 인도한다고 설명합니다. 그 교육은 강압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는 흔히 ‘지상 생애가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상 생애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유와 선택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상 생애가 ‘완성의 전부’는 아닙니다. 특히 아직 자유로운 악의 선택을 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성장이 계속되는 장이 열려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아이는 아직 자신의 영적 방향을 확정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천국에서 펼쳐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놀라는 이유는, ‘죽음 이후는 정지된 상태’라는 관념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살아 있는 세계, 역동적인 세계로 묘사합니다. 거기에는 배움이 있고, 깊어짐이 있고, 점점 더 큰 사랑과 더 밝은 이해로 나아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완성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더 충만해지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분과의 결합도 무한히 깊어질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란다는 것은, 인간의 참된 나이는 육체적 나이가 아니라 영적 상태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천사는 결국 ‘젊음의 상태’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젊음은 사랑과 생명의 충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는 자라서 천사적 성숙에 이르며, 동시에 그 존재는 영원한 생명의 젊음 안에 머뭅니다.

 

결국 이 선언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장은 지상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차원에서 계속된다. 지상은 시작이고, 천국은 그 성숙이 더 순수하게 진행되는 장이다.

 

그러므로 어린 생명의 죽음은 성장이 중단된 사건이 아니라, 다른 환경에서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HH.5, 1장,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심을 증명하는 말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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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3, 1장, '주님을 부인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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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3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고, 아버지만을 인정하며, 그 신념을 스스로 굳힌 자들은 천국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만이 예배받으시는 천국으로부터 어떠한 유입(influx)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점차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도 참된 것을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마침내는 벙어리와 같이 되거나, 어리석은 말을 하며, 관절에 힘이 없는 사람처럼 팔을 축 늘어뜨리고 흔들며 비틀거리게 됩니다. 또한 소키니안들(the Socinians)처럼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분의 인성만을 인정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천국 밖에 있습니다. 그들은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지며, 이렇게 하여 기독교 세계에서 온 다른 이들과 완전히 분리됩니다. 마지막으로, ‘우주의 영혼(the soul of the universe [ens universi])이라 부르는 보이지 않는 신적 존재(an invisible Divine)를 믿는다고 고백하며, 모든 것이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서 주님에 대한 모든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은, 결국 자기들이 아무 하나님도 믿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보이지 않는 신성은 그들에게 있어 자연의 최초 원리와 같은 어떤 속성에 불과하며, 생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주14). 이러한 자들은 이른바 자연 숭배자들 가운데 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 곧 이방인이라 불리는 자들은 이와 다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Those within the church who have denied the Lord and have acknowledged the Father only, and have confirmed themselves in that belief, are not in heaven; and as they are unable to receive any influx from heaven, where the Lord alone is worshiped, they gradually lose the ability to think what is true about any subject whatever; and finally they become as if dumb, or they talk stupidly, and ramble about with their arms dangling and swinging as if weak in the joints. Again, those who, like the Socinians, have denied the Divinity of the Lord and have acknowledged his humanity only, are likewise outside of heaven; they are brought forward a little toward the right and are let down into the deep, and are thus wholly separated from the rest that come from the Christian world. Finally, those who profess to believe in an invisible Divine, which they call the soul of the universe [ens universi], from which all things originated, and who reject all belief in the Lord, find out that they believe in no God; since this invisible Divine is to them a property of nature in her first principles, which cannot be an object of faith and love, because it is not an object of thought.14 Such have their lot among those called nature worshipers. It is otherwise with those born outside the church, who are called the heathen; these will be treated of hereafter.

 

 

14. 어떤 생각으로도 지각될 수 없는 신성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A Divine that cannot be perceived by any idea cannot be received by faith (n. 4733, 5110, 5663, 6982, 6996, 7004, 7211, 9356, 9359, 9972, 10067, 10267).



해설

 

HH.3HH.2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앞 절에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오직 주님 한 분만이 하나님으로 인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원리에 비추어, 주님을 부인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특정 집단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연결이 어떻게 끊어지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천국은 주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주님과의 연결이 차단되면 그 세계와의 유입도 차단됩니다.

 

첫 번째 유형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고 아버지만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하나님을 주님과 분리된 존재로 생각하며, 주님을 단지 중개자나 도덕 교사 정도로 여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런 관념은 천국의 실제 질서와 맞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신성이 주님 안에 있다고 지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천국의 영향, 곧 영적 유입을 받을 통로가 열리지 않습니다. 유입이 끊기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는 ‘참된 것을 생각하는 능력을 점차 잃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 지식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분별하는 내적 힘이 약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마침내 그는 벙어리처럼 되거나, 말이 어눌해지고, 몸이 힘없이 흔들리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 장면이라기보다, 내적 생명력이 빠져나간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빛이 차단되면, 생각과 의지가 힘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소키니안들처럼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만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집단 그 자체보다, ‘주님의 신성을 거부하는 관념’입니다. 주님을 단지 위대한 인간, 도덕 교사, 혹은 예언자로만 인정하고, 그 안에 신성이 거하지 않는다고 보는 관념은 천국의 하나님 이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 세계에서 온 다른 영들과 분리된다고 묘사됩니다.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진다’는 표현 역시 영적 분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빛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더 철학적인 형태입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우주의 영혼’ 혹은 ‘절대적 원리’를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격적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의 최초 원리와 같은 추상적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신앙은 생각의 대상, 곧 인격적 대상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이지 ‘어떤 원리’가 아닙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신 개념은 결국 자연 숭배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자연의 속성으로 환원하면, 신앙은 사라지고 철학적 추상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에서 태어난 이방인들은 이와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출생이나 문화가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고도 주님을 의식적으로 부인한 경우와, 복음을 알 기회가 없었던 경우는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이후에 이방인들이 어떻게 천국에 받아들여지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배타적 선언이 아니라, ‘빛을 알고도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빛을 알지 못한 상태’를 구분하는 설명입니다.

 

결국 HH.3의 중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천국은 주님을 중심으로 한 질서이며, 주님을 부인하는 관념은 그 질서와 연결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추상화하거나, 주님을 단지 인간으로 축소하거나, 신성을 분리된 존재로 상상하는 관념은 영적 유입을 차단합니다. 그리고 유입이 끊기면 진리를 생각하는 힘도 약해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의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경고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단순한 교리 선택이 아니라, 영적 생명과 직접 연결된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심화

 

1.그들은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지며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공간 이동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영계 묘사에서는 ‘공간은 곧 상태(state)’인 점을 감안하면, 이 표현은 지리적 이동이라기보다 ‘영적 상태의 변화와 분리’를 묘사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먼저 큰 원리를 하나 정리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는 우리가 아는 물리적 공간 개념이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가까움’과 ‘멀어짐’은 사랑과 진리의 유사성 혹은 차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빛 쪽으로 간다는 것은 더 큰 진리 인식 상태로 나아감을 뜻하고,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은 더 외적이고 자연적이며, 진리의 빛이 약한 상태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이제 문제의 표현을 보겠습니다.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진다’는 말은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째, ‘오른쪽’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반에서 오른쪽은 보통 ‘진리의 빛’ 혹은 ‘지적 측면’을 상징합니다. 천국에서도 오른편은 진리에 더 밝은 영역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온다’는 것은, 그들의 사상이 어느 정도 진리의 빛에 비추어져 시험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이 가진 ‘주님은 단지 인간일 뿐이다’라는 생각이 천국의 빛 앞에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둘째, ‘조금’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완전히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그 빛에 노출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빛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계에서는 상태가 맞지 않으면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셋째,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진다’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에서 ‘아래’ 혹은 ‘깊음’은 더 외적이고 자연적이며, 때로는 거짓과 자기 확신 속에 머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빛과 조화되지 않는 상태는 자연히 더 낮은, 즉 더 어두운 영역과 결합합니다. 이것은 형벌을 받는 장면이라기보다, ‘유사한 것끼리 모이는’ 영계의 질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 임의적 처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밀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사랑과 신념이 그들을 그에 상응하는 영역으로 이끕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 아래’는 도덕적 서열이라기보다 사랑의 질에 따른 상태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들은 천국의 진리의 빛에 잠시 비추어지지만,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빛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과 상응하는 더 낮은 영적 상태로 분리된다.

 

이 장면은 교리적 정죄의 그림이 아니라, 영계의 ‘상응과 유입의 법칙’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2.생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은 HH.3 전체의 철학적 핵심에 해당합니다. 단순히 ‘추상적 신은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본질 구조’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먼저 하나의 기본 원리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앙은 단순한 동의가 아닙니다. 신앙은 ‘진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향해 마음이 결합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어떤 대상을 향해 의지가 나아가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둘 다 반드시 ‘대상(object)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고, 인식 없는 신앙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제 문제의 표현을 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우주의 영혼(the soul of the universe [ens universi])이라는 개념은 인격적 존재라기보다 철학적 원리입니다. 일종의 ‘자연의 최초 원리’ 혹은 ‘우주적 에너지’ 같은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계 맺을 수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설명을 위한 ‘어떤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논지가 시작됩니다.

 

생각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구체적 인격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함’이라는 추상 개념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선함이 구현된 인격이나 행위를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원리’나 ‘우주의 영혼’은 사고의 구조 속에서 붙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향한 관계적 애정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사랑은 결합을 지향합니다. 사랑은 서로를 향해 나아가고, 응답을 받고, 상호작용을 이루려는 성질입니다. 그런데 비인격적 원리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지를 가지지 않고, 사랑을 돌려보내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개념은 영적 결합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하나님 이해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인격적이십니다. 사랑과 지혜를 가지신 분이며, 관계를 맺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생각될 수 있고, 사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분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단지 ‘자연의 속성’이나 ‘비인격적 절대자’로 이해한다면, 인간의 신앙은 곧 철학적 관념으로 바뀌고 맙니다. 철학은 사유를 자극할 수는 있지만, 사랑을 결합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런 사람들이 결국 ‘아무 하나님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신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연의 질서를 신격화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연은 생각될 수는 있지만, 사랑의 응답을 주는 인격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신은 신앙과 사랑의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생각 속에서 인격적으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사랑과 결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부분은 현대인들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에너지’, ‘우주적 힘’, ‘자연의 법칙’을 말하면서도 인격적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HH.3은 이미 18세기에 그 문제의 영적 구조를 정확히 짚고 있는 셈입니다.

 

 

3.교회 안에 있으면서도’,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

 

HH.3에서 스베덴보리가 굳이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와 ‘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을 구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구원론과 책임 개념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서 ‘교회’는 단순히 제도적 교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란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주님을 알 수 있는 계시의 빛이 주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복음과 말씀을 통해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는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이라는 말은 지리적 소속보다도 ‘계시의 빛 아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구분이 필요한가? 이유는 ‘책임의 정도’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판단됩니다. 더 큰 빛을 받았는데 그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면, 그 거부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 분리’가 됩니다. HH.3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문제 되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고, 이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확정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방향 선택입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 곧 이방인들은 주님에 대한 명확한 계시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경우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들은 빛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빛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이방인들 가운데 선을 사랑하고 양심에 따라 살았던 이들은 사후에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알 기회가 주어지며, 많은 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분은 배타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의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동일한 기준으로 기계적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빛을 알고 거부한 상태와, 아직 빛을 듣지 못한 상태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외적 소속이 아니라 ‘내적 상태’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교회의 내적 본질과 분리된 상태입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 태어났어도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적으로는 교회의 본질에 가까운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에 대한 설명을 뒤로 미루면서, 먼저 ‘빛 아래 있으면서도 그 빛을 거부한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교회 안’은 계시의 빛을 받은 상태를 의미하고, ‘교회 밖’은 그 빛을 아직 받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빛을 받은 후의 거부는 책임이 따르지만, 빛을 받지 못한 무지는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HH.3에서 그 구분을 두는 이유입니다.

 

 

 

HH.2, 1장,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HH.2-6)

1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HH.2무엇보다 먼저,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 다른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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