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3.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AC.213)

 

 

이 글은 매우 짧은 문장이지만, 인간의 영적 심리를 깊이 꿰뚫고 있는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2:25의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아직 순진무구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함이란 단순히 순수하거나 착한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고,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감출 악의 의도가 없고, 위장할 거짓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진무구함이 사라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 가운데 주님 앞에 그대로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악을 행했다는 것이 아니라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자기 내면을 압니다. 겉으로는 선한 척해도 속으로는 시기하고 있음을 알고, 사랑하는 척해도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 함을 알고, 겸손한 척해도 사실은 칭찬받고 싶어 함을 압니다. 바로 이런 자기 인식이 있을 때 벌거벗음은 수치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남이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상태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주님의 질서와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라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은 일종의 영적 자각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창3의 아담과 하와는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살아 있는 양심과 지각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만일 완전히 악 속에 잠겼다면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상태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알았다는 뜻이며, 따라서 아직 내적 빛이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앞서 자주 말씀하신 own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own 안에 있을수록 자신을 포장하려 하고, 감추려 하고, 정당화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상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own은 언제나 무언가를 덮으려 합니다. 반대로 순진무구함은 숨길 것이 없기 때문에 덮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AC.213의 이 문장은 결국 이런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순진무구함이 있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숨을 것이 없지만, 순진무구함을 잃은 사람은 자기 안의 악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자신을 감추려 한다.’ 바로 그 감추고 싶은 마음이 벌거벗음을 수치로 만들고, 그 수치가 창3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끄러움 자체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정말 위험한 상태는 벌거벗었으면서도 벌거벗은 줄 모르는 상태, 악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선이라고 믿는 상태일 것입니다. AC.206 눈이 열렸다고 생각하는 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반면 AC.213의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점에서 아직 회복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AC.213, 심화 3, ‘겔16:22’

AC.213.심화 3. ‘겔16:22’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겔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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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AC.213.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순진무구’(innocence)는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순진하다’는 말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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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순진무구(innocence)는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순진하다’는 말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경험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innocence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순진무구를 천국 전체의 본질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순진무구란 자신으로부터는 아무 선도, 아무 진리도 나오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순진무구는 무지가 아니라 가장 깊은 지혜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은 인간보다 훨씬 지혜롭지만, 동시에 가장 순진무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순진무구는 AC.210에서 설명된 own과 정반대에 있습니다. own 내가 생각한다’, ‘내가 안다’, ‘내가 한다’, ‘내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순진무구는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순진무구는 단순한 덕목 하나가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관계 자체를 규정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13에서 창2:25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순진무구를 의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았고, 악을 품고 있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 받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가 있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아닙니다. 그러나 순진무구가 사라지면, 사람은 자신을 방어하고, 포장하고, 숨기고, 정당화하려 하게 됩니다. 그때 벌거벗음은 곧 수치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어린아이들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순진무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순진무구의 그림자 같은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순진무구는 어린아이의 무지가 아니라, 많은 것을 알고 경험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이 주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순진무구는 어린아이의 순진함이 아니라 천사의 순진함입니다.

 

목사님께서 AC를 오래 읽으시면서 자주 언급하시는 퍼셉션(perception)도 결국 순진무구와 깊이 연결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직접 지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지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순진무구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인플럭스가 막힘없이 흘러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순진무구는 천국 입장의 필수 조건입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주님께 돌리는 상태입니다. 자신의 지혜가 많을수록 더욱 주님의 지혜를 인정하고, 자신의 능력이 클수록 더욱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며, 자신의 선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결국 AC.213의 문맥에서 순진무구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이며, 더 깊게 말하면 자기 자신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쁘게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순진무구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을 내가 하듯 여기지 않고, 내가 하는 것조차 사실은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사랑으로 인정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AC.213, 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AC.213.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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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창3:7,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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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3:7)

 

AC.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knowing that they were naked), 그들이 이전처럼 더 이상 순진무구(innocence)한 상태에 있지 않고,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 장 마지막 절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더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라고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합니다. 거기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더라(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는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절에서는 그 반대가 됩니다. 여기서는 그들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은 수치와 악의 표상으로 사용되며, 타락한 교회에 대해 말할 때 적용됩니다. 에스겔서에는 By “knowing that they were naked” is signified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themselves to be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as is evident from the last verse of the preceding chapter, where it is said,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and where it may be seen that “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 signifies to be innocent. The contrary is signified by their “being ashamed,” as in this verse, where it is said that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For this reason “nakedness” is used in the Word as a type of disgrace and evil, and is predicated of a perverted church, as in Ezekiel: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요한계시록에서는 In John: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r (Rev. 3:18).

 

그리고 마지막 날 관련, And concerning the last day: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Rev. 16:15).

 

신명기에서는 In Deuteronomy: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 (24:1) If a man hath found some nakedness in his wife, let him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Deut. 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섬길 때, 벌거벗은 살을 가리기 위한 세마포 바지를 입도록 하체를 가리게 하라(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않게 하기 위함(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이었습니다 (28:42-43). For the same reason Aaron and his sons were commanded to have linen breeches when they came to the altar, and to minister, 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Exod. 28:42–43).”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28:42, 43)

 

 

해설

 

이 본문은 창3:7의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히 육체의 벗은 몸을 인식하게 된 사건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영적 상태의 변화로 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변화는 옷이 없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창2:25와 창3:7을 의도적으로 대조합니다. 창2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함이 있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내면에는 숨겨야 할 악 의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들은 같은 벌거벗음 속에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안에 악에 대한 의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깊이 있게 설명합니다. 순진무구함이 사라지면 사람은 자신을 감추고 싶어집니다.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기 두려워하고, 무언가로 가리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곧바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게 됩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 ‘벌거벗음’은 점차 영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는 벌거벗음은 악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타락 이후의 벌거벗음은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 곧 영적 빈곤과 수치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래서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 ‘벌거벗음’은 타락한 교회의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특히 계3:18의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옷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벌거벗음은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이고, 흰옷을 입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문제는 육체의 옷이 아니라 영혼의 옷입니다.

 

또한 출애굽기의 제사장 복장 규정도 같은 원리로 설명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단에 나아갈 때, 벌거벗음을 가리도록 명령받은 것은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니라, 거룩한 것 앞에서는 인간 자신의 own이 드러나지 않아야 함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로 덮여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영적 벌거벗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AC.213의 핵심은 매우 아름답고도 깊습니다. 창2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의 상징이었지만, 창3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같은 ‘벌거벗음’이라는 표현이지만,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에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사실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는 내적 빛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3은 단순히 수치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락 속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지각의 흔적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AC.213, 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AC.213.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순진무구’(innocence)는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순진하다’는 말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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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AC.213, 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AC.213.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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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6:22

 

 

AC.213, 심화 3, ‘겔16:22’

AC.213.심화 3. ‘겔16:22’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겔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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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3:29

 

 

AC.213, 심화 4, ‘겔23:29’

AC.213.심화 4. ‘겔23:29’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겔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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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18

 

 

AC.213, 심화 5, ‘계3:18’

AC.213.심화 5.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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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계16:15’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Rev. 16:15).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16:15)를 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옷(garments)’은 진리와 선을, ‘벌거벗음(nakedness)’은 그것들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벌거벗음’이 단순히 결핍의 상태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적 경계와 깨어 있음의 문제와도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과 영적 심판을 다루는 문맥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깨어 있으라’고 하시며, 동시에 ‘자기 옷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사람이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경계하며 진리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옷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많은 진리를 배우고 깨닫지만, 그것을 삶 속에서 지키지 않으면 점차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으로 벌거벗게 됩니다. 즉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고 자신의 own이 드러나게 됩니다.

 

AC.213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창3장의 아담과 하와와 직접 연결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 알게 되었고, 급히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계16:15에서는 인간이 만든 무화과 잎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옷’을 지키는 것이 강조됩니다. 즉 영적 안전은 자기 변명이나 자기 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 안에 머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부끄러움(shame)’이라는 표현은 AC.213의 핵심 개념과 일치합니다. 창2:25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벌거벗음이 곧 수치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악에 대한 의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란, 자신의 악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 안에서 보호받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더 깊이 보면, 이 구절은 모든 신앙인의 평생 과제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깨어 있으라’, ‘옷을 지키라’는 말씀은 단순히 마지막 날을 준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매일 자신의 사랑과 생각을 살피며 주님께 받은 진리를 잃지 말라는 권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own은 끊임없이 진리의 옷을 벗기려 하고, 자신을 중심에 두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3에서 계16:15를 인용하는 이유는, ‘벌거벗음’이 영적 수치와 결핍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음’과 ‘옷을 지킴’, 곧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 안에 머무는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음을 깨달은 장면이 인간 타락의 시작을 보여 준다면,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그 반대로 영적 경계와 보존의 길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 ‘출28:42-43’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출28:42, 43)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28:42-43)를 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이 단순한 신체 노출이 아니라 영적 결핍과 인간 자신의 own을 의미하며, 거룩한 것 앞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덮여 있어야 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것은 제사장 복장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제사장의 모든 의복이 상응에 의해 영적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제사장은 주님을 표상하고, 제사장의 옷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벌거벗음을 드러낸 채 거룩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단순한 예절이나 품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AC.213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창3장의 벌거벗음과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 후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었고, 그 벌거벗음을 가리려 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벌거벗음은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 들어갈 때 벌거벗음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것(own)이 드러난 상태로는 주님의 거룩함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본문은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육체적 죽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인간 자신의 것만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은 곧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의 것 안에는 사랑 자체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있으며, 진리 자체가 아니라 왜곡된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덮여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기서 속바지가 ‘베(linen)’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세마포나 베는 깨끗한 진리, 특히 선에서 나온 진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베 속바지로 벌거벗음을 가리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자신의 것을 주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진리로 덮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계3:18의 ‘흰 옷을 사서 입으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의와 지혜로는 자신의 벌거벗음을 덮을 수 없습니다. 무화과 잎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주시는 옷, 곧 진리와 선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의 제사장 복장은 바로 그 원리를 의식적으로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그래서 AC.213에서 출28:42-43을 인용하는 이유는, 벌거벗음이 영적으로는 인간 자신의 것과 그로 인한 결핍을 의미하며, 거룩한 것 앞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덮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장의 베 속바지는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으로 덮이는 데 있음을 상징하는 매우 깊은 표상인 것입니다.

 

 

 

AC.212, 창3:7, ‘interior dictate’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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