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44.심화

 

1.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

 

위 본문에 차례대로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이 나오는데요, 그냥 같은 걸로 이해해도 될까요? 굳이 이렇게 구분한 이유가 뭔가요?

 

 

그냥 전부 비슷한 말로 뭉뚱그려 읽어도 큰 흐름은 따라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보통 이런 단어들을 꽤 의식적으로 배열합니다. 특히 AC처럼 초기 저작에서는, 비슷해 보이는 단어들을 조금씩 층위를 달리해 사용하면서 인간 존재를 입체적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AC.144의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도 완전히 같은 말이라기보다, 한 존재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비추는 표현들로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성질(quality)은, 어떤 것이 ‘어떠한 상태로 드러나고 있는가’를 말합니다. 가장 바깥에서 드러나는 특징과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사랑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진리를 향하는지 자기 중심인지 같은 ‘드러난 상태’가 quality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서 quality는 상태(state)와 자주 연결됩니다. 쉽게 말하면 ‘그 존재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입니다.

 

본질(essence)은 그보다 더 깊습니다. 이것은 그 존재를 ‘그 존재 되게 만드는 핵심’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성질들 뒤에 있는 중심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천적 인간의 essence는 사랑입니다. 영적 인간의 essence는 진리 안의 신앙입니다. 즉, essence는 존재의 중심 생명에 가까운 말입니다.

 

기원(origin)은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묻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 origin이 자기 자신(proprium)이면 결국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작은 것이라도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무엇인가’만이 아니라 ‘어디서 왔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본성(nature)은, 그 존재가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성과 구조 전체를 뜻합니다. 이는 단순한 순간 상태보다 더 깊고 지속적인 성향입니다. 예를 들어 타락한 인간의 nature는 자기 중심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천사의 nature는 주님께 열려 있습니다. nature는 존재의 ‘작동 방식’과 가까운 개념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보시면 가장 또렷합니다.

 

quality(성질)는 겉으로 어떤 상태로 나타나는가

 

essence(본질)는 그 존재의 가장 중심 생명은 무엇인가

 

origin(기원)은 그것이 어디서부터 나왔는가

 

nature(본성)는 그 존재가 지속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굳이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인간과 천사의 상태를 단순 심리학처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매우 정교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행동의 quality는 선해 보여도, origin이 자기 영광이라면 그 essence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의 순간 상태는 흔들려도, 그의 deeper nature는 여전히 주님 쪽을 향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 이런 단어들을 전부 같은 말로 처리하면, 스베덴보리가 인간 존재를 얼마나 다층적으로 보고 있는지가 잘 안 드러납니다. 반대로 이런 미세한 차이를 살려 읽기 시작하면, ‘, 그는 지금 겉 상태를 말하는 건가, 중심 생명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근원을 말하는 건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AC.144, 심화 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AC.144.심화 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둘은 from을 각각 하나는 ‘으로부터’, 다른 하나는 ‘께로부터’로 번역한 것입니다. 저는 전자가 맞을 것 같은데 당신은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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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4, 창2:19-20, 고대인들에게 있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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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20)

 

AC.144

 

이름으로 부른다(call by name)는 것이 그 성질(quality)을 안다는 뜻인 이유는,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로는 그 성질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들과 딸들에게 이름을 지을 때, 의미되는 것들에 따라 이름을 붙였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에는 그 자녀의 기원(origin)과 본성(nature)을 알 수 있게 하는 어떤 고유한 것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저작의 뒤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게 될 때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들 속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들의 근원과 성질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라는 말은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말하는 방식이었으며,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런 것이 이런 걸 의미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That to “call by name” signifies to know the quality, is because the ancients by the “name” understoo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they understood to know the quality. The reason was that they gave names to their sons and daughters 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 for every name had something peculiar in it, from which, and by which, they might know 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 as will be seen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when,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come to treat of the twelve sons of Jacob. As therefore the names implied 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 nothing else was understood by “calling by name.” This was 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 but one who does not understand this may wonder that such things should be signified.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름 짓기’ 장면을 ‘고대적 인식 구조의 핵심’으로 끌어올립니다. 오늘날 이름은 대체로 표식이거나 구분 수단이지만, 태고의 사람들에게 이름은 곧 ‘본질의 언어’였습니다. 이름은 임의로 붙여진 꼬리표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디서 왔으며, 어떤 성질을 지니는지를 드러내는 요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호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존재의 질을 꿰뚫어 보고, 그 성질을 분별하여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창2:19-20에서 아담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애정들과 인식들의 ‘본성과 질서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관점을 자녀의 이름 짓기 관습으로 설명합니다. 고대에는 이름이 개인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난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 하나에 기원, 성향, 사명까지 담겼습니다. 이후에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룰 때 이 원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이라고 예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점을 모르면, 성경의 이름들은 역사적 정보로만 읽히고 맙니다. 그러나 이름이 본질을 뜻한다는 관점에 서면, 족장들의 이름, 지명, 별명 하나하나가 ‘내적 상태의 지도’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아는 것’은 정보를 축적하는 일이 아니라, 질을 분별하는 일이 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독자를 향한 배려이자 경고입니다. 이 인식 방식을 모르면, 성경이 왜 이런 표현을 쓰는지 이해되지 않고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적 언어의 질서를 이해하는 순간, ‘이름으로 부른다’는 말은 성경 전체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AC.144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어가 아니라 본질이며,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지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질을 알아보는 행위라고 말입니다.

 

 

심화

 

1.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

 

 

AC.144, 심화 1,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

AC.144.심화 1.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 위 본문에 차례대로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및 ‘본성’(nature)이 나오는데요, 그냥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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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AC.144, 심화 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AC.144.심화 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둘은 from을 각각 하나는 ‘으로부터’, 다른 하나는 ‘께로부터’로 번역한 것입니다. 저는 전자가 맞을 것 같은데 당신은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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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AC.144, 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AC.144.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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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AC.144, 심화 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AC.144.심화 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그들이 아들과 딸들에게 이름을 지을 때, 의미되는 것들에 따라 이름을 붙였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에는 그 자녀의 기원(origin)과 본성(nature)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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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3, 창2:19-20,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 이유’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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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3.심화

 

1.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위는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라는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천적 영적(celestial spiritual)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거의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천적(celestial)과 ‘영적(spiritual)을 구분해 놓고, 다시 ‘천적 영적(celestial spiritual)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인간 구조에서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중간 개념입니다.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천적 영적 인간(celestial spiritual man)은 단순히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반씩 섞은 존재가 아니라, ‘사랑이 중심이면서도, 그 사랑이 영적 차원들을 통하여 표현되고 있는 상태의 인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가장 깊은 중심은 천적이지만, 그 작용과 표현은 영적인 층을 통하여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본적으로 인간 안에 여러 층을 봅니다. 가장 깊은 층은 사랑과 의지의 층이며, 이것이 천적입니다. 그다음은 진리와 이해의 층이며, 이것이 영적입니다. 그런데 실제 인간 안에서는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 안에도 영적 요소가 있고, 영적 인간 안에도 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다만 어느 쪽이 중심이냐가 다릅니다.

 

그래서 ‘천적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그 사람의 중심은 천적(사랑 중심)이지만, 그 천적 생명이 영적 기능들(이해, 진리, 지성)을 통하여 나타나는 상태’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좋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이 너무 직접적이고 깊어서, 거의 퍼셉션 자체로 살아갑니다. 반면 ‘영적 인간’은 진리와 이해를 통하여 사랑으로 갑니다. 그런데 ‘천적 영적 인간’은, 사랑이 중심이라는 점에서는 천적이지만, 그 사랑이 이해와 진리의 층을 거쳐 표현된다는 점에서는 영적입니다. 즉, 사랑과 진리가 서로 적대하지 않고, 사랑이 진리를 질서 있게 비추는 상태입니다.

 

이 표현이 AC.143에서 중요한 이유는, 지금 창세기 2장의 상태가 완전히 단순한 ‘순수 천적 상태’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돕는 배필’, proprium, 이름 짓기, 애정들의 구별 같은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만의 직접적 퍼셉션 상태에서, 어느 정도 ‘이해와 분별의 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 인간을 단순히 celestial이라고만 하지 않고, celestial spiritual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천적 상태의 외연 확장’처럼 보셔도 좋습니다. 곧, 가장 깊은 중심은 여전히 사랑과 퍼셉션 안에 있지만, 그 상태가 영적 층들까지 질서 있게 흘러 들어가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나중에 스베덴보리는 천국 구조에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가장 높은 천국은 천적 천국이고, 그 아래는 영적 천국입니다. 그런데 천적 천국에도 영적 요소가 있고, 영적 천국에도 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진리는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적 영적’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천적’은 중심 생명의 성격, 곧 사랑 중심성을 말하고, ‘영적’은 그 사랑이 작동하고 표현되는 이해와 진리의 차원을 말합니다. 즉, ‘천적 영적 인간’이란, 주님 사랑이 중심이면서도, 그 사랑이 진리와 지성 안에서 질서 있게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라고 말입니다.

 

 

 

AC.143, 창2:19-20,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 이유’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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