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2에는 하나님께서 ‘남자와여자를창조하셨고...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AC.475-48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태고교회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남자’는 이해(understanding)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따라서 신앙을 의미하고, ‘여자’는 의지(will)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따라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이 둘을 끝까지 ‘남자와여자’라고 따로 부르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의 ‘사람’(homo)이라 합니다. 왜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둘을 하나의 ‘사람’이라 하는 것일까요?
그 출발점은 AC.477의 매우 중요한 선언에 있습니다. ‘가장높은의미로는오직주님자신만이사람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참된 사람이 되는 기준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천적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주님의 ‘모양’이기 때문이고, 영적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와 사람이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들 안에 독립적으로 참된 인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합니까? 남자가 의미하는 신앙은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는 쪽과 관계되고, 여자가 의미하는 사랑은 그 진리를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쪽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해와 의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반대로 선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밝혀 주는 진리와 분리되어 있다면 역시 온전한 질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은 이처럼 나뉘어 있던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를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하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AC.479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주님을향한사랑에서비롯된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장 탁월한 의미로 ‘사람’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두 요소를 반반씩 결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질서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진리를 보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진리인지를 지각하며, 그렇게 알게 된 진리를 다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이 표상하는 상태와 정확히 대조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분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만든 데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중심이었으며,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들을 지각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하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AC.337). 따라서 창5:2의 ‘남자와여자’의 결혼은 창4에서 무너진 바로 그 질서의 본래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476에서 결혼이 이루어진 뒤 더 이상 ‘남자와여자’라 하지 않고 ‘사람’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움직일 때에는 아직 둘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둘을 결합하시면 하나의 삶이 됩니다. 사람이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 아는 것과 원하는 것, 고백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말씀에서 ‘그의이름’이 아니라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 한 것은 바로 이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480은 이 상태를 창1의 여섯째 날의 끝과 일곱째 날의 시작에 연결합니다. 여섯째 날에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며, 그때 사랑이 중심이 되는 천적 상태가 시작됩니다. AC.83도 여섯째 날이 완성되는 때를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 사랑이 중심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의 안식은 단순히 모든 활동이 중단된 상태가 아니라, 사람 안의 질서가 주님을 중심으로 바로잡혀 더 이상 신앙과 사랑이 서로 갈라져 싸우지 않는 천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사람’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의 명칭만이 아닙니다.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를 결합하여 하나의 생명으로 이루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의미로는 오직 주님만이 사람이시고, 교회와 거듭난 사람은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 ‘사람’이 됩니다. 참된 인간성은 많이 아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에서 다시 신앙과 삶이 흘러나오는 데서 완성됩니다. 창5:2의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AC.475-480심화1)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제목만 보면 조금 불편할 수 있습니다. ‘모은돈없는30대여자들의충격적인특징들’이라는 표현은 자칫 특정 성별과 세대를 하나의 유형으로 묶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상 속 ‘윤서씨’를 남자로 바꾸어도 이야기의 본질은 거의 달라지지 않습니다.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카드값이 빠져나가고, 할부와 리볼빙이 이어지고, 주변 사람들의 소비 수준에 맞추며, 여행과 공연에는 ‘경험이니까’라는 이유를 붙이고, 목돈이 생기면 ‘이정도보상은괜찮다’며 써버리는 모습은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욕구와 자기관리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볼 때 이 영상의 제목은 사실 이렇게 바꾸어도 좋을 것입니다. ‘왜나는열심히사는데남는것이없을까?’
영상의 첫 장면은 상징적입니다. 월급 290만 원이 들어오지만 몇 시간 뒤 카드값 190만 원이 빠져나갑니다. 결혼자금 통장에는 남자친구가 100만 원을 넣지만 윤서 씨가 넣은 돈은 없습니다. 문제는 윤서 씨가 명품에 중독되었거나 거대한 빚을 숨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택시 1만 4천 원, 라떼 5천5백 원, 점심 1만 3천 원, 동료들에게 산 커피, 배달음식, 니트 한 벌처럼 각각의 소비에는 모두 설명 가능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돈을 많이 썼다고 생각하지 않은 하루의 지출이 15만 원이 됩니다. 여기에 노트북, 에어컨, 항공권, 코트, 필라테스 할부가 겹치면서 ‘이번달에는아무것도사지않아도’ 이미 42만 원이 나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흥미롭게 작동합니다. 악은 언제나 거대한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 삶을 지배하는 많은 것은 ‘이정도는괜찮아’라는 작은 허용들의 축적입니다. 5천 원짜리 커피 한 잔이 악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여행이나 좋은 식사나 공연을 즐기는 것도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 삶의 전체 질서를 보지 않은 채 순간순간의 욕구마다 ‘이것쯤은괜찮다’고 허락하는 습관입니다. 하나하나는 합리적으로 보여도 그것들이 모여 내 삶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영상 속 윤서 씨에게는 그래서 ‘큰사치’가 없습니다. 대신 모든 소비에 ‘이유’가 있습니다. 택시는 지각하지 않기 위해, 커피는 직장생활을 위해, 비싼 집들이 선물은 초라해 보이지 않기 위해, 브라이덜 샤워는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콘서트와 여행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에, 비싼 월세는 안전하고 출퇴근하기 편하기 때문에, 필라테스는 건강을 위해, 성과급 소비는 ‘1년동안고생한나에게주는보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욕구에이유가있다는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prium을 생각하게 됩니다. proprium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나는이것을원한다’고 드러내기보다 종종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이건사치가아니라경험이야’, ‘사람들과관계를유지하려면어쩔수없어’, ‘열심히일했으니이정도는나에게해줘야지’, ‘다들하는데나만빠질수없잖아.’ 각각의 문장은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사실인가?’만이 아니라 ‘나는왜그사실을지금붙들고있는가?’입니다. 진실은 때때로 욕구를 섬기는 변호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상에서 두 번째 특징으로 지적하는 ‘내월급이아니라주변사람을보고소비수준을정한다’는 문제도 그래서 중요합니다. 윤서 씨는 같은 직장 동기의 집들이에 23만 원짜리 선물을 가져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3만~5만 원 정도의 선물을 가져왔는데도 ‘싸보이는것을들고가기싫어서’였습니다.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빠지면 눈에 띌까 봐 돈을 냅니다. 결국 소비의 기준이 ‘나에게정말필요한가?’에서 ‘다른사람들이나를어떻게볼까?’로 이동합니다.
이것은 돈보다 더 깊은 영적 문제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것의 가치는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용한가가 아니라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비싼 식사, 더 멋진 여행이 필요한 이유도 그것 자체의 유용보다 ‘나는이정도수준의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돈은 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자아를 표현하고 방어하는 수단이 됩니다.
반대로 같은 직장에 같은 시기에 들어가 비슷한 월급을 받은 동기는 해외여행을 포기하고 본가에서 출퇴근하며 차도 사지 않았습니다. 윤서 씨는 그런 동기를 ‘좀재미없게산다’고 생각했지만 몇 년 뒤 그 동기에게는 전세보증금이 생겼습니다. 영상은 이를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날그방에서가장비싼선물을들고온사람이모아둔돈은가장적은사람이었다.’ 지금 보이는 풍요와 실제로 축적된 삶의 기반이 서로 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좋은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누릴 수 있는 좋은 것을 더 큰 선을 위해 스스로 제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행이 나빠서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을 마련한다는 더 큰 목적 때문에 이번 여행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커피가 나빠서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세운 목적을 위해 오늘의 욕구를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제에는 반드시 ‘미래’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의 나뿐 아니라 미래의 나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절제가 가능합니다.
이 영상에서 ‘경험에는돈을아끼지않는다’는 대목은 특히 오늘날의 소비문화를 정확하게 건드립니다. 윤서 씨는 오사카 콘서트에 120만 원을 쓰면서 ‘물건이아니라경험이고평생기억에남을밤’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에 따르면 그는 직장생활 8년 동안 해마다 여러 차례 해외여행을 했고 여행비로만 2천만 원 이상을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휴대전화에는 8년치 여행 사진이 쌓였지만 통장에는 200만 원 정도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행하지말라’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삶은 금욕 자체를 선으로 삼지 않습니다. 문제는 질서입니다. 유용을 위한 휴식, 가족과의 여행, 아름다운 것을 경험하는 기쁨은 충분히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은남으니까괜찮다’는 말 역시 무제한적인 소비를 정당화하는 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경험도 소비입니다. 기억은 남지만 지불한 돈 역시 사라집니다. 따라서 ‘좋은경험인가?’와 함께 ‘지금내형편에맞는경험인가?’도 물어야 합니다.
더 심각한 장면은 어머니가 8년 동안 매달 5만 원씩 넣어준 청약통장을 깨는 부분입니다. 어머니는 ‘이건절대깨지마. 나중에너집구할때쓰는거야’라며 딸의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윤서 씨는 설 연휴 여행 잔금을 내기 위해 그 통장을 해지합니다. 그러면서 ‘어차피결혼하면남자친구쪽에서집은해결되잖아’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 문제는 더 이상 단순한 소비습관이 아닙니다. 자기 미래를 준비해야 할 책임을 다른 사람의 축적 위에 올려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남자친구의 말이 영상 전체를 관통합니다. ‘나는네가돈을못모으는것보다달라질생각이없다는게무서워.’ 그리고 이어서 ‘나는그돈을9년동안모았어. 차도안바꾸고여행도1년에한번만가면서. 그게너랑같이쓰기싫다는게아니야. 같이모을사람이랑결혼하고싶다는거야.’ 이것은 결혼에 관한 상당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결혼은 ‘내것과네것을합치는것’이기 전에 ‘내삶의방향과네삶의방향을합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에게 8천만 원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200만 원밖에 없다는 사실만으로 결혼의 적합성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삶에는 질병, 가족부양, 학업, 실직, 사업 실패 등 수많은 사정이 있습니다. 많은 돈을 모았다고 반드시 성실한 것도 아니며 모은 돈이 적다고 반드시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돈을 대하는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한 사람은 오늘의 만족을 줄여 미래를 준비하고, 다른 사람은 미래의 자원을 끌어와 오늘을 즐깁니다. 한 사람은 ‘먼저모으고남은돈을쓰자’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먼저쓰고남으면모으자’고 생각합니다. 이런 두 사람이 결혼하면 단순히 통장만 합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상의 표현대로 ‘두사람이돈을쓰는방식도한통장안으로들어옵니다.’ 그래서 결혼 전에 서로의 연봉만 확인할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사랑의방향’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바라보는 참된 결혼의 핵심에는 두 마음의 결합이 있습니다. 결혼은 몸과 재산과 주거의 결합만이 아니라 삶의 목적과 의지의 결합을 향해 갑니다. 그렇다면 돈은 결혼의 본질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는 매우 현실적인 창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에 기꺼이 돈을 쓰는지, 무엇을 위해 기꺼이 참는지, 무엇을 위해 저축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어느 정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영상 속에서 가장 흥미로운 숫자는 어쩌면 8천만 원과 200만 원이 아닙니다. 남자친구는 9년 동안 매주 일요일 밤 10분씩 자신이 쓴 돈을 기록했습니다. 반면 윤서 씨는 자신의 월 지출이 월세를 제외하고 약 150만 원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최근 3개월 평균 카드 사용액은 238만 원이었습니다. 배달은 한 달 23번, 택시는 19번이었습니다. 남자친구가 특별한 투자 천재여서 돈을 모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의미심장합니다. 거듭남 역시 먼저 ‘보는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고칠 수도 없습니다. ‘나는그렇게많이쓰지않아’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기록을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화를잘안내’, ‘나는남을판단하지않아’, ‘나는돈에욕심이없어’, ‘나는가족을위해살고있어’라는 자기평가와 실제 하루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이 아니라 실제 자신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가계부와 영적 자기성찰 사이에는 뜻밖의 닮은 점이 있습니다. 둘 다 ‘기록하지않으면모른다’는 것입니다. 돈도 작은 지출들이 모여 큰 흐름이 되고, 영적 삶도 작은 허용들이 쌓여 습관이 됩니다. 5천 원짜리 커피 한 잔이 가계를 무너뜨리지 않듯 한 번의 짜증이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은 선택은 어느 순간 삶의 방향이 됩니다.
그리고 영상 속 윤서 씨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상은 일곱 번째 특징을 ‘돈이없는이유를문제로보지않는다’고 정리합니다. 그는 돈이 없다는 사실 자체보다 ‘결혼하면합치면된다’, ‘집은남자친구돈으로해결하면된다’, ‘혼수는엄마가해주면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삶에서 생긴 문제를 자신의 변화가 아니라 외부의 자원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이것은 돈을 넘어서는 인간의 오래된 성향입니다. ‘환경이좋아지면나는괜찮아질거야’, ‘좋은배우자를만나면행복해질거야’, ‘돈이많아지면절약할거야’, ‘시간이생기면말씀을읽을거야’, ‘상대가먼저달라지면나도달라질거야.’ 그러나 거듭남은 언제나 ‘지금여기의나’에게서 시작됩니다. 주님은 내가 다른 환경에 들어간 뒤의 나를 먼저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작은 것들을 통해 나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볼 때 이 영상의 핵심은 ‘30대여자는얼마를모아야하는가?’가 아닙니다. 더구나 ‘모은돈이적은사람은결혼상대로부적합하다’는 결론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지금까지어떤방향으로살아왔으며, 그방향에문제가있음을보았을때바꿀의지가있는가?’입니다. 남자친구 역시 액수가 아니라 바로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돈이없어서’가 아니라 ‘달라질생각이없어보여서’였습니다.
이것은 주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미 완성된 사람이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고쳐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진리의 빛 가운데 보았을 때 계속 변명하며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 이것이제안에있었군요’ 하며 돌이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상태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장면이 의미심장합니다. 어머니는 딸이 결혼할 때 집을 구하는 데 쓰라고 8년 동안 청약통장을 부어주었지만 딸은 그 돈을 여행과 카드값에 사용했습니다. 딸은 ‘결혼하면남자친구의통장이집이될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상은 이를 ‘엄마는딸이결혼하면그통장이집이될거라고믿고있었고,딸은결혼하면남자친구의통장이집이될거라고믿고있었다. 둘중어느것도남아있지않았다’고 정리합니다.
참 인상적인 문장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사라진 것은 통장만이 아닙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오늘 무엇인가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8년 동안 매달 5만 원씩 미래를 선택했지만 딸은 그 미래를 현재의 여행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차이는 액수의 차이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태도의 차이입니다.
거듭남 역시 그렇습니다. 오늘의 proprium은 언제나 ‘지금’을 원합니다. 지금 인정받고 싶고, 지금 화를 내고 싶고, 지금 즐기고 싶고, 지금 내 뜻대로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더 먼 것을 보게 하십니다. 지금 한 번 참는 것, 지금 한 번 정직해지는 것, 지금 한 번 욕구를 내려놓는 것이 즉시 큰 기쁨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선택들이 모여 영원한 성품을 형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축’은 그 자체가 영적인 선은 아니지만 ‘절제’와 ‘질서’와 ‘미래를위한현재의포기’를 연습하는 매우 현실적인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돈을 많이 모았다는 사실 자체가 영적 성숙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탐욕 때문에 돈을 모을 수도 있고, 이웃을 외면하면서 자기 재산만 쌓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모았는가’보다 ‘무엇을사랑하기때문에모으고, 무엇을사랑하기때문에쓰는가’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보고 통장 잔액보다 먼저 물어볼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무엇에는너무쉽게 “이정도는괜찮아”라고말하는가?’, ‘내가포기하지못하는것은무엇인가?’, ‘나는다른사람의시선을위해얼마나많은것을소비하는가?’, ‘내가오늘누리는것때문에미래의누군가가대가를치르고있지는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를발견했을때나는변명하는사람인가, 방향을바꾸는사람인가?’
‘스베덴보리의렌즈’가 마지막에 비추어야 할 곳은 윤서 씨의 통장이 아니라 결국 우리 자신의 내면입니다. ‘왜이것밖에없지?’라는 질문을 돈에만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내 안에 체어리티는 얼마나 쌓였는가, 수없이 말씀을 읽었는데 내 성품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많은 은혜와 진리를 받았는데 그것들은 실제 삶에서 어떤 선으로 축적되었는가를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돈은 쓰면 사라지지만 선은 행할수록 사람 안에 남습니다. 오늘의 작은 선택이 쌓여 통장의 잔액이 되듯, 매일의 작은 의지와 행동이 쌓여 결국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이 던지는 가장 깊은 질문은 ‘서른세살에얼마를모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지금까지무엇을쌓으며살아왔는가?’ 그리고 ‘지금의방향으로계속간다면내안에는과연무엇이남게될것인가?’입니다.
창1:26에는 ‘우리의형상을따라우리의모양대로우리가사람을만들고’라고 되어 있고, 창5:1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모양대로’ 만드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상’과 ‘모양’을 비슷한 의미의 반복으로 읽기 쉽지만, AC.472-473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표현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하나님의형상’(imageofGod)은 영적 인간을, ‘하나님의모양’(likenessofGod)은 천적 인간을 의미하며, ‘형상은모양을위한준비단계’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AC.472의 ‘창조하다’(create)와 ‘만들다’(make)의 구별과 연결됩니다.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은 거듭나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영적 인간이 된 사람이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은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설명을 함께 놓으면 ‘창조-영적인간-형상’과 ‘만듦-천적인간-모양’이라는 거듭남의 질서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거듭남의 시작과 진행 가운데 주님의 질서가 사람 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상태이고, 하나님의 모양은 그 질서가 사랑과 삶에 더욱 온전히 자리 잡은 상태입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것이 진리임을 인정하며,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로잡아 갑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아직 싸움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고, 진리이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순종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주님의 것이 그의 생각과 삶 안에서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질서가 더욱 깊어집니다. 그는 단지 진리가 명령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행합니다. 그래서 AC.473은 천적 인간이 주님의 ‘모양’인 이유를 ‘전적으로주님의다스림을받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를 외적으로 억압하고 통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의지와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기쁘게 받아들이므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점점 그의 자유와 기쁨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양’이 ‘실제적인닮음’(realreplica)이라는 표현도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되거나 주님과 동일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피조물이고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것을 내려놓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살아갈수록, 그의 생각과 의지와 행위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더욱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은 영적 인간보다 더욱 실제적인 ‘모양’이 됩니다.
그러므로 ‘형상에서모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외형이 점점 하나님처럼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중심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알고 믿고 순종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사람의 사랑과 의지에까지 심으십니다. 마침내 사람은 ‘진리이기때문에억지로행하는상태’에서 ‘선을사랑하기때문에기쁘게행하는상태’로 나아갑니다. 신앙이 사랑으로 들어가고,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외적인 순종이 내적인 기쁨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교회를 ‘천적교회’라고 부르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고유한 상태는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었던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중심으로 살았으며,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창5:1에서 태고교회를 다시 소개하면서 단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모양대로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이 교회의 고유한 천적 상태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차이는 거듭남이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주셔서 먼저 당신의 ‘형상’을 이루시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 진리를 사랑과 결합시키고 우리의 의지와 삶 속에까지 심으셔서, 우리가 점점 당신의 ‘모양’을 닮아 가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단지 올바른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삶이 되어 주님의 선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AC.469-474심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