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65.심화

 

1.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1-365를 따라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가?라는 비교가 아니라, ‘둘이 어떤 질서로 결합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신앙을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AC.365는 이를 아주 단호하게 정리합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된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의 신앙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진리에 속한 것이고,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가 선에서 떨어져 독립하려 하면 그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곁에 붙어 있는 부수적인 덕목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입니다.

 

이 점을 AC.365는 불꽃과 빛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불꽃에는 열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열은 사랑에, 빛은 진리에 해당합니다. 불꽃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랑에서 진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열과 빛이 함께 있을 때 생명이 자랍니다. 봄과 여름의 햇빛이 그러합니다.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이 함께 있기 때문에 씨앗이 싹트고,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불꽃에서 열을 제거하고 빛만 남기면 어떻게 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이라고 합니다. 겨울에도 분명 빛은 있습니다. 오히려 맑은 겨울날의 빛은 아주 선명할 수 있습니다. 사물의 윤곽도 또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일으키는 열이 없습니다. 그래서 땅은 굳고, 나무는 얼며, 생명 활동은 멈춥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은 있을 수 있고, 교리를 매우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논리적으로는 빈틈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참된 신앙을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다시 묻게 합니다. 흔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 교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하는지, 성경을 얼마나 바르게 해석하는지를 신앙의 중요한 척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선하게 대하며, 자기 사랑을 내려놓고,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의 열을 가진 살아 있는 빛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한다면 그 빛은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너무 높였습니다. AC.362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했지만, 오히려 사랑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했습니다. 그래서 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그것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고 했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을 사랑이 중요하니 교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거나 착하게 살기만 하면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뜻과 거리가 멉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이 참된 선인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쉽게 맹목적인 애정이나 자기 방식의 친절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서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는 분명해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을 사랑하고 행하기 위해 삽니다. 교리는 그 자체로 최종 목적이 아니라 삶을 주님의 질서에 맞추도록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길 때, 신앙은 자기 자리를 찾습니다. 반대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올라서려 할 때, 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는 질서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이 점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는 교리의 정확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경 해석의 정통성을, 어떤 교회는 특정 신앙고백이나 교단적 전통을, 어떤 교회는 성령의 은사나 종말론이나 예배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하나가 전체보다 앞서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입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진리를 가르치는 목적이 이웃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는 것이 되면 이미 겨울의 빛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상응을 알고,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고,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설명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말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지식이 나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진리의 빛은 점점 차갑게 변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위험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AC.365는 신앙의 내용만이 아니라 신앙의 온도를 묻게 합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있는가? 진리는 있는데 사랑이 있는가?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가 있는가? 성경을 많이 아는데 그 지식이 나를 더 온유하게 만드는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다른 사람을 더 살리게 되는가, 아니면 더 쉽게 정죄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이 신앙의 생명을 점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주도한다고 해서 인간의 자연적 친절이나 감정적 따뜻함이 신앙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받아 그것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영적 사랑입니다. 따라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입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선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져 이웃을 향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64 AC.365는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AC.364에서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와 악이 들어오고, 그 악을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유일한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라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즉 체어리티는 단지 신앙을 따뜻하게 만드는 장식이 아니라, 악을 물리치고 신앙에 생명을 주는 실제적인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이 주도하셔야 한다는 말과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체어리티를 만들어 내서 신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선이 신앙과 진리를 질서 있게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인간의 선행이 신앙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인간의 진리를 살아 있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와도 맞닿습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배웁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에서 배웁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앞에서 인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됩니다. 처음에는 옳기 때문에 행하던 것을 나중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게 됩니다. 이때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선 안에서 살아납니다. 마치 빛이 불꽃에서 나오는 것처럼 됩니다. 결국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먼저 사랑하고 나중에 믿는다는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신앙의 최종적인 생명과 목적이 체어리티에 있다는 뜻입니다. 자연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는 경우가 많지만, 그 진리가 결국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완성된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해 가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겨울의 이라는 비유가 더욱 깊어집니다. 겨울의 빛도 빛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보고 나는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위험합니다. 전혀 어둡다면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고 교리적으로 밝다고 생각하면, 그 빛에 열이 없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습니다. 가인 역시 자기 신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362에서 보았듯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자신의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빛은 점점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더 추워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리적 확신과 영적 생명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확신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교리에 매우 확신하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진리를 굳게 붙들면서도 그 진리가 사랑과 선을 향하게 합니다. 참된 빛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살립니다. 그래서 진리가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결국 체어리티와 결합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가인이 아벨과 함께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아벨 위에 서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제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의 결합이 깨졌습니다. 그리고 이 지배욕이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했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비극은 단순히 사랑이 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질서가 뒤집혔다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목적이 되고, 체어리티가 수단이 되었습니다. 진리가 선 위에 올라섰습니다. 교리가 삶보다 앞섰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의 전도가 지속되자, 결국 사랑 없는 신앙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파괴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반드시  믿음은 나를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있는가?와 함께  진리가  안에서 선이 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옳은 교리를 가지고 있는가?와 함께  교리가  이웃을  사랑하게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제자리를 찾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은 체어리티에 빛을 줍니다. 사랑은 진리를 따뜻하게 하고, 진리는 사랑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밝혀 줍니다. 불꽃과 열과 빛이 하나를 이루듯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도 하나입니다. 인간 안에서 그 둘이 다시 하나가 될 때 신앙도 살아 있고, 체어리티도 지혜롭게 됩니다.

 

결국 AC.365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에는 빛이 있는가?가 아닙니다. ‘ 빛에 열이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열은 자기 열심이나 감정적 뜨거움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그 열이 함께할 때 신앙의 빛은 생명을 살립니다. 그러나 그 열이 사라지면 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겨울의 빛이 되어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입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고,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믿는 것이 삶이 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의 빛이 살아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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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하였는데, 이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게 없음을 뜻하며, 이것은 질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the principal of faith)이기 때문인데,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있습니다. 불꽃은 열과 빛의 본질적인 것으로, 열과 빛은 불꽃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리된 상태의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빛에 비유할 있습니다. 실제로 빛은 있지만 그것은 겨울의 빛이며,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게 됩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해설

 

AC.365는 창4:7의 마지막 말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매우 선명하게 결론짓습니다. 앞의 AC.361에서는 이 말씀이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개괄했고,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먼저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에 해당하는 Unto thee is his desire를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밀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신앙과 경쟁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분리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가르치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삶으로 행하게 합니다. 둘은 한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는 가인이 그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상태로 읽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근본적인 질서 전도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 자체가 필요 없다고 처음부터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인정하되 그것을 신앙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신앙을 첫째로 세우고, 사랑과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질서에 어긋난다(contrary to order)고 단언합니다.

 

질서가 무엇인지는 앞의 글들을 통해 이미 드러났습니다.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습니다. AC.362에서는 체어리티를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는 사랑 체어리티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이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첫째가 되려 하면 그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길입니다.

 

그래서 AC.365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은 조금 부족한 신앙이다라거나 불완전한 신앙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아니다(it is not fai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정체성이 단순히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섬기는 진리라야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the principal of faith)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principal을 단순히 중요한 요소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부가되는 여러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도 신앙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인의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이름은 신앙일 수 있어도 그 안에 신앙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설명을 스베덴보리는 아주 아름다운 자연의 비유로 풀어냅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있습니다.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옵니다. 여기서 불꽃은 근원이며, 열과 빛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꽃에서 열을 떼어내고 빛만 남긴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밝아 보일 수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은 사라집니다.

 

이 비유에서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빛이 있습니다. 진리를 보고 이해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빛이 살아 있는 빛이 되려면 불꽃의 열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곧 진리를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상태에도 실제로 빛은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아무런 진리도 없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알 수도 있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매우 논리적인 신학 체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빛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빛에 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the light of winter)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가인의 신앙을 설명하는 데 대단히 적절합니다. 겨울에도 태양은 빛납니다. 사물을 볼 수도 있고 길을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습니다. 땅은 얼어 있고 나무는 굳어 있으며 씨앗은 싹트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8-349와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죽은 행위였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는 죽은 예배였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왜 그것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겨울의 으로 보여 줍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지식과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 행위에도 생명이 없고 예배에도 생명이 없습니다.

 

이 비유를 조금 더 깊이 보면 빛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겨울의 문제는 빛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이 없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나 진리, 교리를 낮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본래의 생명을 되찾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면 겨울의 빛은 생명을 살리는 빛이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고,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며, 아는 것이 삶과 결합될 때 신앙은 비로소 본래의 기능을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말도 사랑만 있으면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와 함께 있습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진리는 선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AC.362의 이단에 관한 설명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참된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참된 것을 질서 밖으로 끌어내어 첫째 자리에 놓자, 그 진리 자체가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되었습니다. 빛을 붙잡았지만, 불꽃에서 떼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그 빛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밝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추운 겨울의 빛이 되어 갔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교리를 공부하고, AC를 읽고, 상응과 속뜻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 때문에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고 낮추며,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밝아 보여도 그것은 겨울의 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고 대충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이 진리를 배우되 진리가 나를 어떻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끄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는 목적도 AC에 관한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삶에서 더 선한 쓰임을 행하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진리의 빛에는 체어리티의 열이 함께 있게 됩니다.

 

이제 AC.361-365 전체를 돌아보면 흐름이 아주 선명해졌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고, 자기 사랑으로 그것을 확증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체어리티가 주도하는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마음의 문 앞에 있게 되지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악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의 문제는 결국 신앙이냐 체어리티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질서로 결합되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 위에 서려고 할 때 둘의 결합은 깨집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깨지면 신앙은 불꽃에서 떨어져 나온 겨울의 빛처럼 되어, 결국 그 안의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AC.365의 겨울빛 비유는 창4의 가인 이야기를 아주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빛이 있는가?만 물어서는 안 됩니다. ‘ 빛에 열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진리가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따뜻함으로 살아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는 빛이라야 살아 있는 신앙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5, 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5.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1-365를 따라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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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AC.366-3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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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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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하였는데, 이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sin lying at the door) 것이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악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일반적으로 마귀(devil) 불리는데, 마귀, 그의 지옥의 무리는 사람이 체어리티가 결여되어 있을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Everybody can see thatsin lying at the door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Sin in general is called thedevil,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해설

 

AC.364는 앞의 AC.363과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설명하면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4에서는 그 반대편을 보여 줍니다.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곧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으며, 그 자리에 악이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두 글을 함께 놓으면 선한 의도와 체어리티그리고 체어리티의 부재와 이라는 선명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가 없다는 상태를 어떤 중립적인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그저 아직 사랑이 부족하다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는 단순히 여러 기독교적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들어와 이웃을 향하여 흘러가는 근본적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그에 따른 악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이라고 풀이합니다. 아직 악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와 모든 것을 차지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악은 문에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가인의 상태와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적인 애정이 생겼지만, 체어리티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다음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경계에서 악이 문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은 매우 의미심장한 경계입니다. 안과 밖이 만나는 자리이며, 무엇인가가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다만 AC.364에서는 아직 의 상응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여기서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한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분명한 것은 악이 인간 안으로 들어오려고 가까이 와 있으며,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가 그 악에게 문을 열어 주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를 일반적으로 마귀(devil)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는 곧이어 마귀, 그의 지옥의 무리(his crew of infernals)라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초점은 악을 단순한 추상적 개념으로만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그와 상응하는 지옥의 악한 영향이 가까이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영계 이해가 배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귀가 와서 사람에게 악을 집어넣으므로 인간은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의 질서에서 인간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으며, 양쪽으로부터 오는 유입 가운데 무엇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와 관련하여 자유를 가집니다. 악한 영들이 가까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자기 의지와 결합하여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에는 한편으로 악의 가까움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이 점에서 바로 앞 AC.359-360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지고 체어리티가 떠난 바로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이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악이 행위로 완전히 굳어진 뒤에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인간의 마음 문 앞에 와 있을 때 미리 알게 하십니다. 가인이 분노를 느낀 것과 아벨을 죽인 것 사이에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섭리의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강제로 악을 제거하시지는 않지만, 악을 보고 거절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선과 진리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AC.364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이 글 전체의 결론이면서 매우 강력합니다.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악과 싸우려면 의지를 강하게 가져라거나 올바른 교리를 확실히 믿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악을 마음의 문에서 물리치는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이야기를 읽어 온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악이 문에 엎드려 있을 때 해결책이 강한 신앙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 다시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질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도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웃을 향한 사랑을 함께 말한 것도 중요합니다. 둘은 서로 분리된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향하여 그 사랑이 흘러가며, 이웃을 향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물리치는 힘이 인간 자신의 선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주님의 선이 인간 안에서 악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와 그의 무리를 몰아낸다는 표현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지옥과 싸워 이긴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그 사랑과 함께할 수 없는 악과 거짓이 물러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싸우시고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악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63AC.364는 한 쌍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선을 의도함 체어리티가 함께 있음 얼굴이 들림이라는 길을 보여 주고, AC.364에서는 선을 의도하지 않음 체어리티가 없음 악이 문에 있음이라는 반대의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 서 있는 가인에게 주님께서는 아직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무서운 경고만은 아닙니다. ‘아직 문에 있다는 것은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고,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으며, 아직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인이 해야 할 일은 문 앞의 악과 자기 힘으로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다시 사랑의 질서 안으로 돌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AC.364가 가르치는 것은 악을 이기는 길 역시 체어리티라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어진 자리에 악이 들어오며, 체어리티가 회복되면 악은 물러납니다. 그래서 창4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점점 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가?라는 교리 논쟁을 넘어 인간 마음의 생명과 죽음의 문제가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악이 마음의 문을 넘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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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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