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1:29)

 

AC.57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이고,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는 신앙의 선입니다. ‘열매(fruit)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씨(seed producing fruit)는 주님께서 영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 가진 나무가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적 음식을 나무의 열매로 부른다는 사실은, 다음 장에서 천적 인간을 다룰 때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서는 에스겔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만 인용합니다. The “herb bearing seed” is every truth which regards use; the “tree in which is fruit” is the good of faith; “fruit” is what the Lord gives to the celestial man, but “seed producing fruit” is what he gives to the spiritual man; and therefore it is said,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That celestial food is called fruit from a tree,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chapter, where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In confirmation of this we will here cite only these words of the Lord from Ezekiel: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47:12) By the river, upon the bank thereof,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there cometh up every tree of food, whose leaf shall not fade, neither shall the fruit thereof be consumed; it is born again in its month; because these its waters issue out of the sanctuary; and the fruit thereof shall be for food, and the leaf thereof for medicine (Ezek. 47:12).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는 ‘성소(the sanctuary)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과 자비를 뜻합니다. ‘열매(Fruit)는 그들에게 음식이 될 지혜이고, ‘(the leaf)은 쓰임을 위한 지성입니다. 이 쓰임을 ‘(medicine)이라 합니다. 반면 영적인 음식을 ‘(herb)이라 한다는 점은 시편에서도 분명합니다. 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 signify the life and mercy of the Lord, who is the “sanctuary.” “Fruit” is wisdom, which shall be food for them; the “leaf” is intelligence, which shall be for their use, and this use is called “medicine.” But that spiritual food is called “herb,” appears from David: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1, 2)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thou makest me to lie down in pastures of herb (Ps. 23:1–2).

 

 

해설

 

이 글은 앞선 AC.56에서 말한 ‘영적 인간의 음식’을 한층 더 정밀하게 풀어 줍니다. 핵심은 ‘같은 생명이라도 인간의 상태에 따라 주어지는 양식의 형식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풀, 나무, 씨, 열매라는 식물의 세부 이미지를 통해 영적, 천적 차이를 구분합니다.

 

먼저 ‘씨 맺는 채소’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라고 정의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쓰임’입니다. 진리가 진리로 머무르지 않고, 삶에 적용되고 이웃과 교회를 향해 나아갈 때, 그 진리는 더 이상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양식이 됩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이라고 합니다. 풀은 먹을 수 있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지만, 아직 열매를 맺는 나무만큼 깊은 근원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반면 ‘열매 맺는 나무’는 ‘신앙의 선’이라고 합니다. 선은 더 이상 쓰임을 향한 방향성에 머무르지 않고, ‘삶 그 자체로 굳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선은 나무이고, 그 결과는 열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구분합니다. 열매 자체는 천적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영적 인간에게는 아직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주어집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인간은 선의 가능성을 지닌 상태이지, 선 그 자체에 완전히 거한 상태는 아닙니다.

 

이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이 바로 에스겔 4712절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본문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강으로 인해 온 땅이 회복되고 생명이 충만해지는 환상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AC의 관점에서 성소는 언제나 주님 자신을 뜻합니다. 따라서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과 자비입니다. 이 물로 인해 자라는 나무들은 인간 안에서 자라는 생명의 원리들입니다.

 

이 본문에서 열매와 잎이 구분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열매는 ‘지혜’로 해설되고, 잎은 ‘지성’으로 해설됩니다. 지혜는 삶 그 자체와 결합한 진리이며, 그래서 ‘음식’이 됩니다. 반면 지성은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으로, 삶을 직접 살게 하지는 않지만, 삶을 보호하고 회복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잎을 ‘’이라고 합니다. 즉 지성은 생명을 낳기보다는, 생명이 병들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천적 인간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에게 음식은 ‘열매’입니다. 그는 진리를 이해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지혜로 삽니다. 그래서 그의 양식은 나무에서 맺힌 열매이며, 그 열매는 달마다 새로워집니다. 이는 천적 상태의 생명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의 음식이 ‘’로 불린다는 점은 시편 23편에서 확인됩니다. ‘푸른 풀밭’은 단순한 위로의 이미지가 아니라, 영적 인간이 진리의 양식을 공급받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풀밭은 방목지이며, 여기서 양은 인도함을 받습니다. 이는 영적 인간이 여전히 인도를 필요로 하며, 진리를 통해 방향을 잡아 가는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결국 이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이라도, 영적 인간에게는 , 천적 인간에게는 열매로 주어집니다. 풀은 쓰임을 향한 진리이고, 열매는 삶이 된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차이입니다.

 

영적 인간은 여전히 성장 중이고, 천적 인간은 사랑 안에 거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 사람의 상태에 맞는 음식을 주십니다.

 

 

 

AC.58, 창1: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AC.58-59)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

bygrace.kr

 

AC.56, 창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1:29)

 

AC.56

 

천적 인간은 오직 천적인 것들로 기뻐하는데, 이것들은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천적 음식(celestial food)이라 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이것들 역시 그의 삶과 일치하므로 이르기를 ‘영적 음식(spiritual food)이라 합니다. 자연적 인간도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는데, 이것들은 그의 삶에 속하므로 이르기를 ‘음식(food), 곧 ‘먹을거리’라 하며, 주로 기억-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적 음식을 표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와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로 묘사되며,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씨 가진 나무(the tree yielding seed)라 합니다. 그의 자연적 음식은 다음 절에서 설명됩니다. The celestial man is delighted with celestial things alone, which being in agreement with his life are called celestial food. The spiritual man is delighted with spiritual things, and as these are in agreement with his life they are called spiritual food. The natural man in like manner is delighted with natural things, which, being of his life, are called food, and consist chiefly of memory-knowledges. As the spiritual man is here treated of, his spiritual food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as by the “herb bearing seed,” and by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called, in general, the “tree yielding seed.” His natural food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

 

 

해설

 

이 글은 인간을 ‘천적 인간영적 인간자연적 인간’이라는 세 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의 인간이 무엇을 ‘먹을거리’, 곧 ‘음식’으로 삼아 살아가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음식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그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고 기쁘게 하는 것’, 곧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핵심 개념입니다.

 

먼저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로 기뻐합니다. 천적인 것들이란 사랑 그 자체,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더 이상 진리를 통해 매개되지 않고, 삶과 즉각적으로 일치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천적 음식’이라 합니다. 음식이라는 말은 외부에서 주어져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삶과 완전히 합치되어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 인간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습니다. 그는 영적인 것들, 곧 진리와 신앙의 내용으로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 진리들은 아직 사랑 그 자체는 아니며, 사랑과 결합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을 가리켜 ‘영적 음식’이라 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영적 음식 역시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음식이라 불린다는 점입니다. 즉 단순히 많이 아는 지식이나 교리라면 음식이 될 수 없고, ‘삶과 연결될 때만 음식’이 됩니다.

 

자연적 인간의 음식은 자연적인 것들입니다. 이것은 감각적 즐거움이나 세상적 관심만을 뜻하지는 않지만, 주로 기억-지식, 곧 외부 세계에서 축적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기억-지식들 역시 ‘음식’이라 부르는데, 이는 자연적 인간에게 그것들이 실제로 삶의 만족과 기쁨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음식은 가장 바깥층의 음식이며, 그 자체로는 영적 생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여기서 다루는 대상이 영적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의 음식은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창세기의 표상 언어를 통해 설명됩니다.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와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는 모두 ‘생명이 있지만 아직 완전하지는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풀은 자라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고, 나무는 열매를 맺지만, 아직 천적 사랑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씨를 맺는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씨는 앞으로 더 자랄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즉 영적 인간의 음식은 단순히 현재를 유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장차 더 깊은 생명으로 나아갈 잠재력’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음식들은 ‘씨 가진 나무(the tree yielding seed)라는 하나의 묶음으로 불립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가 일부러 말을 멈추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자연적 음식은 다음 절에서 설명된다고 밝힘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외적 인간, 곧 겉 사람의 삶과 내적 인간, 곧 속 사람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계속 따라오게 만듭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질서가 인간 내면의 질서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 주는 구성입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먹고 살지만,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이 됩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을 먹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먹으며, 자연적 인간은 기억-지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이란,먹는 음식이 점점 바뀌는 과정입니다.

 

 

 

AC.57, 창1:29, ‘받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양식’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29) AC.57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

bygrace.kr

 

AC.55,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이런 표현, 그러니까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었을 때같은 수동 표현이 거의 다인데요, 이걸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했을 때처럼 능동 표현으로 바꾸면 무슨 큰 오류일까요? 여기 AC에서는 왜 거의 다 수동 표현을 쓰나요?

 

 

먼저 결론부터 분명히 말씀드리면,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었을 때’를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했을 때’로 바꾸는 것이 ‘즉각적인 이단이나 결정적 오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표현 하나로 인해, 스베덴보리가 AC(Arcana Coelestia) 전체에서 지키고자 한 ‘인간 이해의 중심축’이 미세하나마 분명하게 이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문제는 문법이 아니라 ‘주체가 어디로 이동하느냐’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에게서 결합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 상태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결합했다’는 표현은, 어떤 주체가 의도적으로 두 요소를 묶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예를 들어 ‘생각과 행동을 결합했다’, ‘이론과 실천을 결합했다’ 같은 말은 모두 ‘인간의 능동적 작업’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AC에서 말하는 신앙과 사랑, 이해력과 의지의 결합은 그런 종류의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시도해서 성취하는 통합’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내적 질서의 재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합을 언제나 ‘사건’이 아니라 ‘상태’로 말합니다. 결합은 어떤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오랜 준비, 유입, 허용, 정렬의 결과로 ‘그렇게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점에서 ‘결합되었다’는 표현은, 인간이 무엇을 했다는 느낌을 최대한 제거하고, 변화된 상태 자체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둘째, 영어와 라틴어에서 수동 표현은 주체를 감추기 위한 문법이 아니라, 주체를 보존하기 위한 문법입니다.

 

AC의 원문인 라틴어를 보면, 스베덴보리는 굳이 능동으로 쓸 수 있는 자리에서도 반복해서 수동이나 비인칭 구조를 선택합니다. 이는 문체상의 습관이 아니라, 명백한 신학적 선택입니다. 그는 인간이 ‘무엇을 한다’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독자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proprium’(자기 본성)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 생명과 질서의 실제 작용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이 신학적 긴장을 문장 구조 속에 그대로 심어 놓은 것이 바로 AC의 수동 표현들입니다.

 

셋째, ‘is conjoined’, ‘is vivified’, ‘is regenerated 같은 영어 표현은 단순한 문법 선택이 아니라, ‘비인칭 신적 작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영어는 한국어보다 수동 표현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적습니다. 영어 독자는 ‘is conjoined’를 보며 ‘누가 했지?’를 묻기보다, ‘, 이런 상태가 되었구나’라고 읽습니다. 반면 한국어에서는 ‘결합되었다’라는 표현은 다소 딱딱한 대신, ‘결합했다’라는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번역자는 늘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AC의 영어 수동은, 단순히 ‘자연스러운 표현’을 택한 결과가 아니라, ‘독자의 사고를 특정 방향으로 훈련시키는 장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가 문장을 읽는 동안조차, ‘내가 했다’는 생각보다 ‘이루어지고 있다’는 감각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넷째, 그렇다면 능동 표현은 언제 문제가 되고, 언제 허용될까요? 핵심 기준은 이것입니다. 그 문장이 행위의 근원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행위의 현상을 말하고 있는가?

 

신앙과 사랑의 결합, 생명의 부여, 거듭남, 조명, 인도와 같은 표현은 모두 ‘행위의 근원’을 다룹니다. 이 경우 능동으로 바꾸면, 인간이 그 근원의 주체인 것처럼 읽힐 위험이 큽니다. 반면 ‘그는 말한다’, ‘그는 행한다’, ‘그는 분별한다’처럼 이미 생겨난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할 때는 능동 표현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에서 말한다’는 표현은 비교적 안전하지만, ‘신앙과 사랑이 결합했다’는 표현은 훨씬 더 위험합니다. 전자는 ‘표현의 방향’이고, 후자는 ‘존재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그렇다고 해서 번역에서 항상 수동만 고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습니다. ‘번역 본문과 해설, 설교는 동일한 언어 공간이 아닙니다.’

 

번역 본문은 독자가 아직 구조를 모를 가능성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동을 유지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반면 해설이나 설교에서는 이미 주체가 누구인지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능동 표현을 사용해도 오해가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수동만 쓰면 한국어가 부자연스러워지고, 독자가 내용을 따라오기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균형이 가장 좋습니다. 본문 번역에서는 ‘결합되었을 때’를 유지하고, 해설에서는 ‘결합했을 때’라고 말하되, 한 번쯤은 ‘이 결합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라고 짚어 주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질문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AC에서 수동 표현은 문법 선택이 아니라 신학적 훈련입니다.’ 독자가 문장을 읽는 동안에도, ‘내가 주체다가 아니라 나는 수용자다라는 감각 안에 머물도록 만드는 장치입니다.

 

그래서 ‘결합되었다’를 ‘결합했다’로 바꾸는 것이 당장 큰 오류는 아니지만, 그 방향이 반복되면 AC 전체의 호흡, 즉 ‘주님 중심–인간 수용자 중심이라는 축’이 서서히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창1에 나오는 ‘기는 것’, ‘땅에 기는 모든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창1:26에 ‘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걸 정확히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창1:24, 25에도 각각 ‘기는 것’, ‘땅에 기는 모든 것’이 나오네요... 성경에서 ‘긴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