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오정현 목사는 로마서 828절을 중심으로 자신의 평생 목회와 삶을 관통했던 신앙의 원리를 풀어갑니다. 설교의 핵심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사람은 미래를 알지 못하고 수많은 고난을 겪지만,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끝까지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설교는 개인적인 고난, 목회의 어려움, 다윗의 삶, 그리고 자신의 인생 경험을 엮어 청중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려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이러한 점은 많은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설교가 끊임없이 ‘영적으로 성공하는 삶’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 성공’은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의 참된 성공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그의 속 사람이 얼마나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갔는가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설교가 성도들의 시선을 세상의 형통보다 하나님께 돌리려 한다는 점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함께 읽어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표현은 단순히 ‘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이 결국 좋은 결과가 된다’는 뜻보다 조금 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은 결코 악을 만드시거나 고난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악은 인간과 악한 영들의 자유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 악마저도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선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즉 선을 위해 악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발생한 악으로부터 가능한 가장 큰 선을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며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에게도 로마서 828절이 그대로 적용될까요? 바울도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조건을 먼저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조건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악을 죄로 여기며 버리고 선을 행하려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섭리는 모든 사람을 향하지만, 그 섭리가 온전히 열매를 맺는 것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려는 사람 안에서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숙명론이나 낙관주의가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 안에서 경험되는 영적 실제가 됩니다.

 

설교 중 오정현 목사는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설명과 상당히 조화를 이룹니다. 사람은 눈앞의 이익은 보지만 영원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는 어떤 고난이 사실은 그의 교만을 낮추고, 이웃을 이해하게 만들며,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재만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십니다. 그래서 섭리는 언제나 영원을 기준으로 일하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설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표현도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의도와 사랑, 그리고 영원한 운명까지 모두 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생각보다 사랑이, 사랑보다 의도가 더 깊은 차원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그 가장 깊은 곳까지 보시며,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천국 쪽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말은 단순한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섭리와 사랑의 문제입니다.

 

한편 이번 설교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 독자라면 한 가지를 자연스럽게 덧붙여 생각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복음서와 창세기 등 말씀 자체에는 천적인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서신은 교회를 위한 교훈과 권면으로 기록되었으며, 동일한 방식의 내적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창세기나 복음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깊은 상응 해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복음서에서 이미 밝히 드러난 주님의 가르침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권면으로 이해하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설교 역시 로마서 자체를 신비롭게 해석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신앙의 원리를 삶으로 연결하려는 설교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번 설교의 중심부에서 오정현 목사는 반복해서 한 문장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 그는 이 한 문장이 다윗의 삶을 지탱했고, 자신의 목회와 인생도 붙들어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그는 시편 139편을 인용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길을 모두 아시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에게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믿음으로 자신을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의미 있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사람의 겉모습보다 그의 가장 깊은 사랑과 의도를 보십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주님은 그 생각을 낳는 사랑까지 아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을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된 위로입니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해도 주님은 이해하시고, 사람은 오해해도 주님은 오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갈 필요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말이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자유를 결코 없애지 않는다고 거듭 설명합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사람은 여전히 매 순간 선택해야 합니다. 악을 버릴 것인가, 자기 사랑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일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는 끝까지 남겨 두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다 아신다’는 신앙은 수동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담대하게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설교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하나님께는 찰떡처럼 붙고 사람에게는 독립하라’는 표현입니다. 오정현 목사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로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독립하려 하고,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상처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자와 부모, 자녀보다 먼저 하나님께 붙어야 인간관계도 건강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단순한 인간관계의 기술이 아니라 신앙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권면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도 놀라울 만큼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참된 사랑에는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며, 셋째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 순서가 뒤집히면 모든 사랑이 왜곡됩니다. 사람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면 결국 그 사랑은 집착이 되고, 소유욕이 되고, 두려움이 됩니다. 반대로 주님을 가장 먼저 사랑할 때 비로소 배우자도, 자녀도, 친구도 주님 안에서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에서 말하는 ‘사람에게 독립한다’는 표현은 사람을 무시하거나 관계를 끊으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하나님 대신 붙드는 우상이 되지 않게 하라는 권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덧붙입니다. 사람에게 독립한다는 것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도 주님의 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랑은 감정의 기복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사랑의 중심이 사람에게서 주님께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설교에서는 ‘이미 결정된 것을 붙잡고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권면이 나옵니다. 부모, 출신 지역, 외모, 학력, 과거와 같은 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므로 거기에 평생 매여 살지 말고, 앞으로 더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상도 사투리와 발음, 서울대학교에 가지 못했다며 한탄하는 성도의 사례 등을 들어 설명하면서, 사람은 과거보다 현재의 선택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잘 연결됩니다. 그는 사람을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존재인가’로 봅니다. 천국도, 지옥도 과거의 실수 하나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사람이 어떤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가가 결정적입니다. 그래서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지금의 사랑은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가능성입니다.

 

결국 이 부분의 설교는 성도들에게 시선을 과거에서 현재로 돌리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한마디를 더 덧붙였을 것입니다. ‘현재’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새로운 기회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섭리가 쉼 없이 사람의 자유 안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과거를 되돌리시지는 않지만, 오늘의 선택을 통해 영원을 새롭게 만들어 가십니다. 따라서 이미 결정된 것을 붙잡고 절망하기보다, 지금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는 작은 선택 하나가 영원 전체를 바꾸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설교는 중반 이후부터 시선을 현재의 삶에서 영원으로 넓혀 갑니다. 오정현 목사는 ‘현재의 모습이 인생의 결론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그는 기독교의 역사관은 시작과 끝이 분명한 역사관이며, 성도는 눈앞의 현실만이 아니라 마지막 결론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실패나 고난을 인생 전체로 판단하지 말고, 주님 앞에 서는 마지막 날을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히 깊은 울림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거의 모든 저작이 결국 하나의 사실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연계의 삶은 영원을 위한 준비 기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육신의 삶을 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삶은 사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지금의 삶은 그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짧은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고난이나 성공은 영원이라는 거대한 시간 속에서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설교에서 말하는 ‘지금은 한 점 같은 인생’이라는 표현은 매우 의미 있게 들립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은 영계에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영계에서는 시간보다 상태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몇 년을 살았는가보다 어떤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현재를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라는 설교의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도 상당 부분 만납니다.

 

설교는 이어 대한민국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할을 언급하며 역사 전체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역사적 해석과 평가가 함께 들어가는데, 이러한 부분은 청중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특정 국가나 시대에 대한 평가보다, 주님의 섭리가 언제나 인류 전체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방향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가 특정 민족이나 국가에만 머무르지 않고 모든 민족과 모든 종교 안에서도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이끌어 가신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역사를 바라볼 때도 한 나라의 흥망보다 인류 전체를 향한 섭리라는 더 넓은 시야를 함께 갖는 것이 균형 있는 접근이 될 것입니다.

 

이후 설교는 죽음을 다루는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오정현 목사는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형벌이 아니라 영광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땅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며 ‘천국이 본향’이라고 설명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죽음은 벽이 아니라 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성도들에게 소망을 심어 줍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더욱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사람이 죽는 순간 존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뜬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곧바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영계에서 삶을 이어 갑니다. 거기에는 계속해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고, 집이 있으며, 일상이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평생 사랑하던 것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세계가 펼쳐집니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차이도 보입니다. 설교는 죽음을 주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표현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조금 더 신중하게 설명합니다. 죽음 자체가 곧바로 천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영계로 들어가는 문이며, 그 이후 사람은 중간영계를 거치면서 자신의 참된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죽음은 목적지가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동시에 지금 어떤 사랑을 선택하며 살아가는가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정현 목사는 다시 로마서 8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에서 말하는 ‘’이 무엇인지 질문하면서, 그 답을 29절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것, 곧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현재의 환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으며, 모든 고난은 결국 우리를 더욱 주님께 가까이 이끄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이번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로마서 828절의 ‘’을 건강이나 성공, 문제 해결, 형통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정현 목사는 그것을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최고의 선은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천국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이며, 그 상태는 바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속에서 형성됩니다.

 

결국 이번 부분의 설교는 성도들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무엇인가?’ 만일 내가 원하는 선이 문제 해결이나 형통에만 머문다면, 고난은 언제나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선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이라면, 지금의 이해할 수 없는 시간조차도 언젠가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설교가 전하려는 중심 메시지이며, 스베덴보리 역시 평생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했던 섭리의 한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정현 목사는 다시 로마서 8장과 고린도후서 4장을 연결합니다. 그는 바울이 말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과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한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성도의 삶에는 결코 의미 없는 고난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누구에게나 질병이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으며, 가족의 문제와 억울한 일들이 있지만, 그것이 마지막 결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사람은 더욱 주님을 닮아 가고, 영원한 영광을 준비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많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실제로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 가운데 하나가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고난을 허락하시는가’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그 질문에 대해, 현재보다 영원을 바라보면 비로소 고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답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오래도록 붙들어 온 중요한 위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를 조금 더 세밀하게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고난 자체를 계획하거나 보내시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악과 고통은 인간의 자유와 지옥의 영향 속에서 발생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이미 일어난 악과 고난 속에서도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가장 큰 선을 이루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다시 말해 고난은 주님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회복해 가시는 대상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의 특징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고난을 직접 계획하셨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사랑의 하나님과 현실의 고통 사이에서 쉽게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은 오직 선만을 원하시며, 인간의 자유 때문에 발생한 악조차 구원의 재료로 바꾸어 사용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설교는 이어서 바울의 말을 인용하며, ‘환난은 가볍고 영광은 무겁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실제로 환난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암 투병도, 가족의 죽음도, 배신도, 실패도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 역시 그것을 몰라서 한 말은 아닙니다. 그는 태장과 투옥, 난파와 박해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환난을 ‘가볍다’고 말한 것은 고난 자체가 가볍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무게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영계를 설명하면서 매우 비슷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자연계에서 수십 년 동안 겪은 고난은 영원의 시간 속에서는 극히 짧은 준비 기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천국의 행복은 자연계에서는 비교할 대상조차 없을 만큼 크다고 여러 차례 설명합니다. 그래서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삶은 씨앗을 심는 계절과 같습니다. 씨앗을 심는 동안에는 땀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열매를 거두는 때가 오면 그 모든 수고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번 설교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영광의 중한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표현입니다. 오정현 목사는 건강이나 물질의 응답은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깊은 영광은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지혜를 얻기 위한 책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기 위한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는 마이크 펜스의 일화를 소개하며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이 부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은 단순히 지식을 늘리기 위한 책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말씀이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진리는 기억 속에 머무를 때는 아직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의지로 내려가 삶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의 것이 됩니다. 그는 이를 ‘진리가 선이 된다’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아는 것보다 말씀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이번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정현 목사는 반복해서 ‘주님을 더 사랑하라’, ‘말씀을 더 순종하라’, ‘현재보다 영원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이 세 가지는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다만 표현과 설명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정현 목사는 복음주의 설교자의 언어로 이를 풀어내고, 스베덴보리는 상응과 섭리, 자유와 사랑이라는 보다 체계적인 영적 원리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두 접근 모두 성도의 시선을 자기 자신보다 주님께 돌리려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사건이 자동으로 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어떤 사건도 결국 영원을 준비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이번 설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과 스베덴보리가 설명한 섭리의 원리를 함께 아우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질문을 향해 나아갑니다. ‘인생의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어떻게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인가?’ 오정현 목사는 자신의 70년 인생과 목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답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다 아신다’, 둘째, ‘지금은 결론이 아니다’, 셋째, ‘최고의 선은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이 세 축을 중심으로 그는 성도들에게 현재의 형편보다 하나님의 섭리와 영원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도 이 설교에는 분명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들이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의 시선을 세상의 성공보다 영적인 성장으로 돌리려는 점,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도록 권면하는 점, 죽음을 두려움이 아니라 영원을 향한 관문으로 바라보게 하는 점은 많은 독자들에게 신앙적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을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의 순종으로 연결하려는 방향 역시 충분히 공감할 만한 부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저작과 함께 읽을 때에는 몇 가지를 조금 더 분명히 구분하면 더욱 균형 잡힌 이해가 가능합니다.

 

첫째는 섭리의 문제입니다. 설교에서는 모든 일이 결국 선을 이룬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선을 이루시는 방식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주님은 악을 계획하시거나 고난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지옥이 만들어 낸 악 속에서도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가능한 가장 큰 선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고난 자체가 선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선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둘째는 ‘주님을 닮아 간다’는 의미입니다. 설교는 그것을 신앙생활의 최고의 선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여기에 깊이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단순한 인격 수양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자신의 proprium을 날마다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자신의 사랑과 의지가 되도록 허용하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겉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의 사랑 자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셋째는 죽음에 대한 이해입니다. 설교는 죽음을 ‘영광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신앙적 소망을 강조하는 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과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죽음 이후 사람은 곧바로 자신의 영원한 처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중간영계에서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곳에서 평생 사랑해 온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지고,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를 향해 자연스럽게 나아갑니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자신의 참된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이번 설교의 본문 자체에 관한 부분입니다. 오정현 목사는 로마서를 매우 깊이 풀어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독자라면 한 가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복음서와 창세기 등 주님께서 직접 주신 말씀에는 천적인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사도들의 서신은 교회의 신앙과 생활을 위한 권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창세기처럼 상응의 층위를 따라 해석하기보다는, 복음서에서 이미 계시된 주님의 가르침을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지침으로 읽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 더 가깝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알고 이번 설교를 들으면, 로마서 자체의 신비를 탐구하기보다 그 권면을 삶에 적용하려는 설교자의 의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설교 전반에 흐르는 목회자의 진정성입니다. 자신의 약점과 실패, 사투리, 고난, 그리고 일흔을 맞는 심정을 솔직하게 나누면서 성도들에게 ‘나도 여러분과 같은 길을 걸어왔다’고 말하는 모습은 설교를 더욱 친근하게 만듭니다. 스베덴보리도 진리는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씀을 증언하려는 태도는 설교의 설득력을 높여 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미리 정해 놓으시는 분이라기보다, 우리가 자유 안에서 겪는 모든 사건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를 천국의 사랑으로 이끄시는 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단순한 낙관주의도 아니고, 운명론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 그 자유가 끝내 천국을 향하도록 쉼 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섭리의 최종 목적은 문제 해결이나 세상적 형통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 참된 천국의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설교는 복음주의 목회자의 언어로 영원을 바라보게 하는 메시지였으며, 스베덴보리의 저작과 함께 읽을 때에는 섭리와 자유, 거듭남과 천국이라는 더 깊은 차원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설교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SY.44, 구원파, ‘사망의 길, 생명의 길’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주제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은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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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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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주제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은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강사는 자신의 신앙 경험을 소개하며, 어느 순간부터 성경이 단순한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청중에게도 무조건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하지 않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이 그러한가’ 직접 확인해 보라고 권합니다. 이 출발점은 매우 건강한 자세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도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까지도 말씀과 대조해 보았다는 점에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성경 자체를 기준으로 삼으려는 태도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자세이며, 특정 교단이나 특정 설교자에게만 의존하지 말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귀 기울일 만한 내용입니다.

 

이어 강사는 성경을 읽다 보면 ‘하라’는 명령들이 많이 나오지만, 계시록 마지막에 나오는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을 예로 들며,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창세기의 선악과와 연결하여,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 부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유가 없다면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다면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의 저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 출 속뜻 주석, 10,837개 글)에서는 인간이 주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 가운데 있어야 하며,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거듭남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의지는 단순히 죄를 선택할 자유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된 가장 거룩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강의에서는 자유의지가 주로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권리’라는 의미로 제시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자유를 보다 깊은 영적 구조 속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은 항상 천국으로부터 오는 선한 영향과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한 영향 사이에 서 있으며, 그 어느 한쪽으로도 완전히 강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거듭남을 위해 끊임없이 유지해 주시는 영적 균형 상태입니다. 즉, 자유는 단순한 선택권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유지되는 영적 평형입니다. 이 차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강사는 이어 인생을 여행에 비유합니다. 누구나 태어나지만, 어디를 향해 가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젊은 사람도 갑자기 죽을 수 있고, 노인도 오래 살 수 있으며, 결국 모든 사람은 죽음이라는 문 앞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마다 사후 세계에 대한 설명은 다르지만, 성경은 분명한 답을 제시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상당히 진지하며, 오늘날 죽음을 철저히 외면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오히려 필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삶의 목적도 깊이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의 삶은 영원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는 죽음을 단순히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관문’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저작들에서는 사람이 육체를 떠나는 순간에도 의식은 그대로 이어지며,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고, 자신의 사랑과 삶의 방향에 따라 자연스럽게 영계에서의 길이 결정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영계로 옮겨 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어디로 갈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마지막 순간의 선언보다도, 평생 형성된 사랑의 방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결과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강사가 가룟 유다를 예로 들며 지옥의 실재를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지옥 자체를 부정하거나 상징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도 있지만, 강사는 예수께서 누구보다 분명하게 지옥을 말씀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 역시 성경 본문을 존중하려는 태도라는 점에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여기에서도 조금 다릅니다. 그는 지옥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시는 형벌의 장소라기보다, 끝까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을 선택한 사람들이 스스로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공동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지옥으로 보내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천국으로 이끄시려 합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천국의 분위기 자체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기 때문에 결국 자신과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과 함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자유를 동시에 보존하려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1부의 전반적인 내용을 정리하면, 이 강의는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야 한다는 권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 삶의 목적, 죽음 이후의 실재를 강하게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오늘날 신앙이 단순한 문화나 습관으로 흐르기 쉬운 시대에 충분히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러한 주제들은 단순히 ‘천국과 지옥 중 어디로 갈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사랑과 의지가 어떻게 주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형성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훨씬 깊은 거듭남의 과정으로 확장됩니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미래의 목적지를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점차 형성되어 가는 삶이라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강의는 점차 ‘인간은 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사람이 단순히 육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 안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본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몸은 늙고 쇠하지만 영혼은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영원을 향한 갈망을 심어 두셨기 때문에 사람은 본능적으로 영원한 것을 찾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전도서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을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존재로 이해하려는 점에서는 충분히 공감할 만한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을 영원한 존재로 설명합니다. 다만 그는 인간을 ‘영과 혼과 몸’이라는 삼분법으로 체계화하기보다, 자연계의 몸과 영계의 몸, 그리고 그 안에서 역사하는 생명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그의 저작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며, 육체는 자연계에서 사용하는 가장 바깥 도구일 뿐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육체를 벗는 것이며, 인간 자신은 곧바로 영적인 몸으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육체가 아니라 사랑하고 생각하는 존재 자체이며, 그것이 바로 영원히 계속되는 인간입니다. 이런 점에서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도 설명의 구조는 상당히 다릅니다.

 

강사는 이어 다윗과 예레미야의 말씀을 인용하며,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길을 가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길을 보고 계신다고 설명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인간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셨으며, 어느 길을 선택할지는 각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강조합니다. 강의 전반에 반복되는 핵심 단어가 바로 ‘’입니다. 사람의 길, 하나님의 길, 생명의 길, 사망의 길이 계속 대비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은 흥미로운 깊이를 더해 줍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은 단순한 이동 경로나 종교적 선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길은 ‘삶의 진리’, 곧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며, ‘사망의 길’은 거짓과 자기 사랑이 지배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길은 교단이나 종교의 이름이 아니라 사랑과 사고방식, 그리고 일상에서의 선택 전체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보다 어떤 사랑 속에서 살아가느냐가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후 강사는 예수님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설명을 이어갑니다. 절벽을 건너는 원숭이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인간은 스스로는 지옥을 넘어설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길이 되어 주셨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그 길을 밟기 위해 태어났고, 진리를 배우기 위해 태어났으며, 결국 영생을 얻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강의 전체에서 가장 중심적인 메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예수님을 유일한 생명의 근원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곧 길이다’라는 말씀을 조금 더 내적으로 해석합니다. 길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진리 자체가 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곧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안다고 해서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삶이 될 때 비로소 그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그의 여러 저작에서 반복되는 ‘선 없는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다’라는 교리와도 연결됩니다.

 

강의는 또한 사람들이 대부분 육체를 위한 양식만을 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셨다고 강조합니다. 현대인의 삶을 돌아보아도 이 말씀은 여전히 큰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대부분 먹고사는 문제, 성공과 건강, 재산과 인간관계에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하지만, 영혼을 위한 양식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강사가 이 점을 강하게 지적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권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말씀은 단순히 정보를 주는 책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과 연결되시는 살아 있는 통로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그 안의 속뜻은 천사들에게는 천국의 언어로 이해되고, 사람에게는 거듭남을 위한 힘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단순히 교리를 배우기 위한 책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사랑과 의지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수단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경을 읽는 목적은 지식을 늘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더 깊이 결합되는 데 있습니다.

 

2부에서 가장 반복되는 주제는 결국 ‘’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그 길은 특정 교단으로 들어가는 길도 아니고, 특정 신앙 체험 하나를 얻는 길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날마다 사람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거듭남의 길이며, 진리를 배우고 선을 실천하면서 사랑이 조금씩 변화되는 긴 여정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 점이 이번 강의와 스베덴보리 신학이 만나는 지점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는 중반부에 들어서면서 점차 핵심 주제를 ‘거듭남’으로 집중시킵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설명했다면, 이제는 ‘그 길에 실제로 들어가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강사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중심으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단순히 종교생활을 오래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성경은 바로 그 거듭남을 위해 기록된 책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 역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거듭남’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다만 양자의 차이는 ‘거듭남이 무엇인가’에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비교적 한 시점에 일어나는 결정적인 변화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후의 삶도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전체적인 강조점은 ‘거듭난 순간’에 놓여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는 영적 성장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안의 자기 사랑이 조금씩 약해지고,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조금씩 자라나는 모든 과정이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가가 훨씬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강사는 이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로다’라는 요한복음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는 성경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영생을 얻게 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성경이 단순한 역사책이나 윤리책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책이라는 점은 기독교 신앙 전체가 공유하는 핵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층 깊은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는 말씀의 모든 부분이 주님을 증거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것은 단지 예언이나 직접적인 메시아 언급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말씀 전체에는 주님의 영화(榮化)와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어떤 본문은 역사처럼 보이고, 어떤 본문은 율법처럼 보이며, 어떤 본문은 예언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모두 주님과 교회, 그리고 인간의 영적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아르카나’입니다.

 

강의는 이어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거듭난 사람만이 그것을 볼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설명과 상당히 가까운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무엇보다도 ‘상태(state)로 설명합니다. 천국은 우선 마음속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일수록 그 사람 안에 이미 천국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자연스럽게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영적 실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시며, 거듭남은 바로 그 천국이 사람 안에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한편 강의는 이 시점부터 구원의 기회를 상당히 긴박하게 제시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으며,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늦는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며, 살아 있는 동안만이 선택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청중에게 긴장감을 주는 설교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전개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연계에서의 삶이 영원을 준비하는 결정적인 기간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가 묘사하는 사후 세계는 조금 다릅니다. 사람은 육체를 떠난 직후 곧바로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는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겉으로만 억눌러 두었던 사랑이 점차 외적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내려지는 형벌보다, 자신이 평생 사랑한 것이 완전히 드러난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심판은 임의적인 판결이 아니라 자기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함께 설명하려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관점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강의 전체에서 ‘영생’이라는 단어가 매우 자주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인간이 태어난 목적을 한마디로 ‘영생을 얻기 위함’이라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이 표현 자체는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영생을 단순히 끝없이 오래 사는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죽은 후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과 결합되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됩니다. 천국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끝없는 사랑의 상태이며, 영생은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3부를 정리하면, 이번 강의는 거듭남과 영생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매우 진지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보면, 거듭남은 단 한 번의 극적인 체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이어지는 영적 성장의 여정이며, 영생은 미래의 보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하는 현재의 실재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나는 이미 거듭났는가’라는 확신에 머무르기보다, ‘오늘도 주님께서 내 안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가고 계시는가’를 날마다 돌아보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강의 후반부에 이르면 설교의 무게중심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강사는 인간의 가장 큰 문제를 ‘성경을 등한히 여기는 것’으로 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음에도 사람들은 세상의 일에는 모든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관심하다고 반복해서 지적합니다. 학교에서는 생존 경쟁과 성공하는 방법은 가르쳐도, 사람이 왜 태어났고 어디로 가는지는 가르쳐 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만이 인생의 답을 가지고 있으며, 성경을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 역시 깊이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그는 저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참 그리스도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에서 말씀을 단순한 종교 서적이 아니라, 주님과 천국이 인간에게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로 설명합니다. 말씀이 거룩한 이유는 종이가 거룩해서도, 문자 자체가 신비해서도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의 신성이 가장 깊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멀리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생활을 소홀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는 일이 됩니다. 이 점에서는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시선이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차이도 나타납니다. 강의는 성경을 읽는 목적을 주로 ‘영생을 얻기 위한 길을 발견하는 것’에 둡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읽는 목적을 조금 더 내면적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은 사람에게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책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동시에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도구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읽는 목적은 ‘천국에 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 이전에, ‘천국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의 사고를 교정하는 동시에 사랑을 변화시키며, 결국 사람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강사는 이어 좁은 문과 넓은 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합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을 특정 교회나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한다고 말하며,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앞선 강의보다 한층 균형 잡힌 설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을 특정 조직이나 종파와 동일시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좁은 문’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문은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진리의 입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좁다는 것은 주님께서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자기 확신을 내려놓는 일이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옳다고 여기고,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천국의 사랑이 들어올 공간이 없습니다. 따라서 좁은 문이란 결국 ‘옛 사람’을 내려놓는 문입니다. 이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자기 자신을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좁게 느껴집니다.

 

강의는 또 하나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아버지의 유언장을 끝까지 듣지 않고 뛰쳐나간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아들을 사랑하여 엄청난 유산을 남겨 두었지만, 아들은 자신의 감정만 앞세우다가 가장 중요한 내용을 듣지 못하고, 모든 유산을 잃게 됩니다. 강사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 인간을 위한 놀라운 축복을 모두 기록해 두셨는데, 사람들은 끝까지 읽지 않고, 끝까지 듣지 않고, 중간에 포기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은 성경 전체를 읽어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자신의 선입견만으로 판단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을 끝까지 읽고 묵상하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다만 그는 한 가지를 더 덧붙입니다. 말씀을 끝까지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삶 속에서 실천될 때 비로소 열립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곳곳에서 그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이해만 하는 사람은 아직 바깥뜰에 머물러 있지만, 말씀을 실제 삶 속에서 사랑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비로소 말씀의 속뜻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말씀은 독서가 아니라 삶이 될 때 가장 깊이 이해됩니다.

 

이 강의를 들으며 한 가지 흥미롭게 느껴지는 점도 있습니다. 강사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자신의 논지를 전개합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가 개인 경험이나 사회 이야기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과 비교하면, 본문 자체를 중심에 두려는 태도는 분명 장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에도 한 가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수많은 성경 구절이 인용되지만, 각각의 본문이 왜 그런 순서로 기록되었는지, 그 안에 공통으로 흐르는 내적 의미는 무엇인지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은 서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인데, 문자적 교훈 중심으로 접근하면 그 유기적인 구조를 놓치기 쉽습니다.

 

4부를 정리하면, 이번 부분은 성경의 권위와 말씀의 중요성, 좁은 문,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삶을 매우 힘 있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보면, 이러한 권면은 더욱 풍성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말씀은 단지 구원의 조건을 알려 주는 안내서가 아니라, 사람 안에 천국을 형성하는 살아 있는 주님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자신의 삶을 조금씩 새롭게 빚어 가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과정입니다. 결국 좁은 문은 어떤 교단의 문이 아니라, 매일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고, 주님의 생명이 들어오도록 마음을 여는 문이라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할 것입니다.

 

 

강의의 마지막 부분은 지금까지 이어 온 모든 내용을 하나의 결론으로 모읍니다. 강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이며, 성경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주어진 책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경험만 붙들고 살아가면, 결국 하나님의 길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고,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받아들이면 비로소 왜 살아야 하는지, 왜 태어났는지를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기도 역시 ‘이번 기회에 거듭날 수 있도록’이라는 간절한 호소로 마무리됩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은 결국 ‘성경으로 돌아오라’, ‘예수께 돌아오라’, ‘영생을 준비하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긍정적으로 볼 부분은, 이 강의가 인간의 삶을 단순히 세상 성공이나 현실적 행복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가 건강, 형통, 축복, 성공에 무게를 두는 반면, 이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 이후의 영원, 하나님의 심판, 거듭남, 말씀, 영생을 이야기합니다. 삶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이러한 시도는 분명 성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한 성경을 직접 읽고 확인하라는 권면 역시, 사람보다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려는 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이 강의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몇 가지 중요한 한계도 함께 드러납니다.

 

첫 번째는 ‘구원’이 지나치게 한 시점의 체험으로 집중되는 경향입니다. 강의는 거듭남을 매우 중요하게 말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거듭난 순간’에 상당한 비중을 둡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평생 계속되는 영적 변화로 설명합니다. 오늘 거듭났다고 해서 내일도 자동으로 같은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일 자신의 악을 보고 버리며,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곳곳에서 거듭남은 한순간이 아니라 인간 생애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주님의 역사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참된 질문은 ‘나는 언제 거듭났는가’보다 ‘나는 지금도 거듭나고 있는가’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 이해가 거의 전적으로 문자적 의미에 머물러 있다는 점입니다. 강의는 수십 개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지만, 대부분 교훈과 논증의 자료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가장 깊은 생명은 문자 아래 감추어진 속뜻에 있습니다. 창세기의 선악과도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변질을 말하며, 생명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애굽은 자연적 지식을, 광야는 영적 시험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응의 세계를 통해 보면 성경은 단편적인 교훈집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일관된 영적 드라마가 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이 다소 외적인 판결처럼 들린다는 점입니다. 강의에서는 죽음 이후 기회가 없으며, 심판을 받아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물론 자연계에서의 삶이 영원을 준비하는 결정적 시기라는 점에는 스베덴보리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는 심판을 하나님께서 임의로 판결을 내리시는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에 평생 형성된 사랑이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게 드러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사랑의 결과이며, 지옥도 사랑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시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천국으로 이끄시려 하시지만, 사람이 끝까지 자기 사랑만 붙들면, 결국 자기와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과 함께하게 됩니다. 심판은 외부의 판결이라기보다 내면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큰 차이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강의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신약성경의 핵심 선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믿는다’는 말을 단순히 교리적 동의나 확신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사랑하며, 실제 행동으로 살아낼 때, 비로소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과 체어리티는 분리될 수 없다’고 끊임없이 말합니다. 신앙은 길을 보여 주고, 체어리티는 그 길을 실제로 걷게 합니다. 둘은 마치 빛과 열처럼 결코 나뉠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강의가 ‘구원파’ 계열에서 나온 설교라는 점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에는 성경에 대한 존중, 영생에 대한 진지한 강조, 회개와 거듭남의 필요성 등 귀 기울일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시각에서는 특정한 구원의 확신이나 결정적인 체험 자체보다, 그 이후 평생에 걸쳐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거듭남의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단번에 완성하시기보다,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사랑과 진리 안으로 조금씩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과거 어느 날의 체험을 기억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오늘도 자신을 살피며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 강의는 ‘영생을 준비하라’는 절박한 외침으로 끝납니다. 스베덴보리도 그 외침 자체는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한마디를 덧붙일 것입니다. 영생은 죽은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이 순간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할 때 시작됩니다. 천국은 미래에만 있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우리의 의지와 삶 속에 자리 잡는 만큼 이미 현재 안에서 형성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도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천국의 사람이 되어 가기 위함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번 강의가 던지는 질문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더욱 깊고 넓은 영적 차원으로 확장해 줍니다.

 

 

 

SY.45, 오정현 목사,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설교에서 오정현 목사는 로마서 8장 28절을 중심으로 자신의 평생 목회와 삶을 관통했던 신앙의 원리를 풀어갑니다. 설교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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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43, ‘목사님 때문에 우리 가정이 망했어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목사님 때문에 우리 가정이 망했어요’라는 충격적인 말로 시작하지만, 이야기의 실제 중심은 어느 가정의 실패 자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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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목사님 때문에 우리 가정이 망했어요’라는 충격적인 말로 시작하지만, 이야기의 실제 중심은 어느 가정의 실패 자체보다 ‘목회자의 사랑이 언제 참된 사랑이 되고, 언제 상대의 자유를 침해하는 과잉 개입이 되는가’에 있습니다. 이야기 속 목사는 처음에는 부부 싸움이 벌어진 밤에 급히 달려가고, 실직한 가정에 구제비를 지급하며, 부부와 자녀의 문제를 함께 고민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표면적으로는 헌신적이고 선해 보입니다. 실제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급한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며, 공동체의 재원으로 곤궁한 이웃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의 중요한 실천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목회자는 성도의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목사가 도왔다는 데 있지 않고, 도움의 방식이 점차 그 가정의 자유와 책임을 대신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인간이 인간답게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보존되어야 하는 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rational, 곧 진리를 이해하고 스스로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강제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시며, 사람의 자유와 rational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이끄십니다.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진리를 살피고,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선은 그 사람의 생명 안에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목사의 말을 잘 따르고 신앙적으로 순종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판단이 자기 안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직 그 사람 자신의 신앙이 아닙니다. 이야기 속 가정은 처음에는 목사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점차 ‘목사님이 허락하시면 하겠습니다’, ‘목사님이 기다리라고 하셨으니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목사는 그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안내자의 자리를 넘어, 사실상 그들의 판단과 선택을 대신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플럭스(influx)의 질서와도 관계됩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사람에게 흘러듭니다. 그러나 그 흐름은 어느 인간 개인이 다른 사람의 내면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말씀을 가르치고, 선과 진리를 제시하고, 함께 기도하며, 가능한 길들을 살펴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는 것은 각 사람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목사가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뜻’처럼 전달하거나, 성도가 목사의 말을 자신의 양심보다 앞세우기 시작하면 영적 질서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의도적으로 사람을 지배하지 않았더라도, 성도가 목회자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를 계속 허용한다면 결과적으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내면을 대신 관리하는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야기 속 목사가 처음 구제비를 지급한 행동에는 선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실직하여 생활비가 막힌 가정을 보고 일주일을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은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회의 승인과 보고 절차를 생략했고, 두 번째 지원 역시 같은 방식으로 집행했습니다. 이 대목은 사랑과 질서의 관계를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은 진리와 결합되어야 참된 선이 됩니다. 선한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선이 지혜롭고 질서 있는 방법으로 실행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재정은 목회자의 개인 재산이 아니므로, 아무리 긴급하고 선한 목적이라 해도 공동체가 정한 절차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절차는 사랑을 방해하는 냉혹한 장벽이 아니라, 사랑이 특정인의 감정이나 편견에 휘둘리지 않도록 보호하는 진리의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물질적 도움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궁핍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은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그러나 모든 요청에 반복적으로 돈을 제공하는 것이 언제나 체어리티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잘해 주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상대 안에 있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이 자라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즉각적인 지원이 필요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일할 기회를 찾도록 돕고, 지출 구조를 점검하고, 부부가 함께 책임을 나누며, 필요한 전문 지원을 받도록 연결하는 것이 더 깊은 사랑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돕지 않고, 계속 대신 책임져 주는 것은 잠시 고통을 줄일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그의 자유와 책임감을 약화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 과정을 ‘목사가 주님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표현합니다. 이 고백에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목사는 성도를 사랑하고 도왔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그 가정의 경제적 문제, 부부 문제, 자녀 교육, 투자, 대출, 심지어 일상의 사소한 결정까지 대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성도들이 자신을 신뢰한다는 사실에서 보람을 느꼈고, 자신의 영향력을 목회적 열매로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는 누구에게나 숨어 있을 수 있는 proprium, 그러니까 주님을 대신하여 자기가 주인노릇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사람을 돕는다는 명분 아래 ‘내가 없으면 저 사람은 바로 설 수 없다’고 느끼는 마음, 나의 조언을 따라야 안전하다고 믿는 마음, 상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서 은밀한 만족을 얻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노골적인 지배욕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희생과 헌신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든 적극적인 목회를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규정해서도 안 됩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책임지고, 목회자가 위기에 빠진 성도를 보호하며, 폭력이나 자해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즉시 개입하는 것은 과잉 지배가 아니라 필요한 사랑일 수 있습니다. 이야기 초반의 부부 싸움 장면에서는 물건이 깨지고, 아이가 떨고 있으며, 이웃들까지 소란을 듣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단순한 의견 충돌이 아니라 가정폭력의 위험이 있는 상황일 수 있습니다. 이때 목회자가 두 사람을 진정시키는 것만으로 사건을 끝내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의 안전을 확인하고, 폭력의 반복 여부를 살피며, 필요한 경우 경찰이나 상담기관, 가정폭력 전문기관과 연결해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기도하면 된다’거나 ‘목사가 물러나야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말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 두 시에 걸려 온 전화를 목사가 두려움 때문에 받지 않고, 다음 날 ‘깊이 잠들어 몰랐다’고 거짓말한 장면도 중요합니다. 이야기는 이것을 목사가 자신의 과잉 개입을 깨닫는 전환점처럼 묘사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 것’ 자체가 건강한 경계 설정은 아닙니다. 참된 경계는 몰래 피하고 거짓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계의 한계와 도움의 범위를 분명하고 정직하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응급 상황에서는 경찰이나 구급대에 먼저 연락하도록 안내하고, 부부 갈등은 정해진 상담 시간에 다루며, 재정 지원은 당회의 공식 절차를 거치고, 목회자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문제는 전문기관과 협력하도록 해야 합니다. 경계는 사랑의 철회가 아니라 사랑이 오래 지속되도록 보호하는 질서입니다.

 

목사가 마침내 그 가정을 찾아가 ‘더 이상 두 분의 결정에 개입하지 않겠다’, ‘물질적 도움도 줄이겠다’고 선언한 것은 필요한 변화였지만, 그 전달 방식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미 목사의 반복적인 지원과 지시에 익숙해진 가정에 갑자기 ‘이제 스스로 결정하라’고 말하면, 그들은 실제로 버림받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목사가 잘못 형성한 의존 관계라면, 그 관계를 바로잡는 책임도 목사에게 어느 정도 있습니다. 따라서 즉시 손을 떼기보다는 단계적으로 결정권을 돌려주고, 구제비는 정식 절차로 전환하며, 직업 상담이나 재정 상담, 부부 상담과 연결하고, 일정 기간 정기적으로 상태를 확인하는 방식이 더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 상대를 홀로 남겨 두는 종교적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에서 목사는 이후 상담을 요청하는 성도들에게 ‘주님께 여쭤보셨나요’, ‘제가 답을 드리면 저에게 의지하게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방향은 목회자가 모든 결정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건강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세심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기도한 뒤,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곧바로 주님의 응답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 음성이나 즉각적인 영감을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직접 계시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주님의 인도는 대개 말씀의 진리, 건전한 이성, 양심, 경험, 공동체의 조언, 현실적인 사실을 통하여 질서 있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주님께 직접 물어보라’는 말은 ‘마음에 떠오르는 느낌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믿으라’는 뜻이 아니라, 말씀과 이성 앞에서 자신의 동기와 선택을 정직하게 살피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목회 상담의 역할은 정답을 대신 내려 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자신의 상태를 분별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목회자는 ‘그 일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단정하기보다, ‘이 선택을 원하는 가장 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결정이 배우자와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줍니까?’, ‘말씀의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부분은 없습니까?’, ‘두려움이나 욕심 때문에 서두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은 어느 정도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성도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rational이 깨어나도록 돕습니다. 선택은 성도가 하되, 그 선택이 무지나 충동에서 나오지 않도록 진리를 제공하는 것이 목회자의 역할입니다.

 

이야기 속 가정이 일 년 후 ‘목사님이 물러나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고, 남편은 취직하고 아내는 일하며 아이도 안정되었다는 결말은 이야기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완성합니다. 다만 이 결말은 실제 삶의 복잡성을 다소 단순화한 서사적 장치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물러난다고 모든 가정이 스스로 기도하며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가정은 더 깊이 무너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경제적·정신적·관계적 지원을 오랫동안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도움을 끊으면 사람이 자립한다’는 공식으로 읽는 것은 위험합니다. 핵심은 도움을 끊는 것이 아니라, 도움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도움의 목적은 상대를 돕는 사람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야기에서 가장 영적으로 의미 있는 부분은 목사가 자신의 외적 헌신보다 그 헌신 안에 들어 있던 사랑의 성질을 돌아본다는 점입니다. 그는 밤중에 달려갔고, 돈을 주었고, 상담했고, 기도했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모두 훌륭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안에 자기 공로감과 영향력에 대한 만족, 다른 사람의 삶을 책임질 수 있다는 과신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행위의 영적 성질은 그 겉모양이 아니라 행위를 낳은 사랑과 목적에 의해 결정됩니다. 같은 구제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할 수 있고, 인정받고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적 행동에는 두 동기가 섞여 있습니다. 거듭남은 선한 일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한 일 속에서 proprium의 동기를 점차 제거하고 주님으로부터 행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물러나야 주님께서 일하십니다’라는 이야기의 결론도 조심스럽게 다듬어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목회자가 움직일 때도 일하시고, 물러날 때도 일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움직이느냐 물러나느냐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행하느냐입니다. 어떤 순간에는 즉시 달려가야 하고, 어떤 순간에는 기다려야 하며, 어떤 순간에는 분명한 조언을 해야 하고, 어떤 순간에는 선택권을 상대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를 분별하게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랑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과잉 개입이 되고, 지혜를 내세우면서 사랑이 없으면 냉정한 방임이 됩니다. 천국적인 체어리티는 사랑과 지혜가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야기에 인용된 서신서들의 말씀은 이 이야기의 목회적 교훈을 설명하는 데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는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서신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복음서와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속뜻, 곧 아르카나를 지닌 ‘말씀’의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해설에서는 서신서의 각 문장을 상응에 따라 깊은 속뜻으로 풀이하기보다, 초기, 초대 교회의 신앙과 생활을 가르치는 교훈적 문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 역시 특정 성구의 아르카나를 밝히는 데 있지 않고, 목회적 관계 안에서 자유와 책임, 사랑과 질서가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목회자에게 ‘더 많이 희생하라’고만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성도를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한 헌신인지, 자신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헌신인지, 성도의 자유와 rational을 세우는 도움인지, 성도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도움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동시에 성도에게도 목회자를 자신의 모든 결정을 대신하는 영적 대리인으로 삼지 말라고 권합니다. 목회자의 조언은 소중하지만, 목회자는 주님이 아니며 개인의 양심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말씀과 기도, 건전한 이성, 공동체의 지혜 안에서 자신의 선택을 책임 있게 감당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이 이야기의 최종적인 교훈은 ‘참된 목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참된 목회는 사람이 주님께로 자유롭게 향하도록 돕고, 진리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게 하며, 필요할 때 곁에 서되 그 사람의 삶을 점유하지 않는 일입니다. 목회자는 사람을 자신의 품 안에 붙들어 두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의 품을 발견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참된 체어리티는 상대의 당장 편안한 상태만을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스스로 설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헌신의 포기’를 말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헌신에서 질서 있는 사랑으로 옮겨 가는 한 목회자의 거듭남을 보여 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SY.44, 구원파, ‘사망의 길, 생명의 길’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주제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은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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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42, ‘목사님, 그동안 제가 낸 헌금 모두 돌려주십시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헌금을 돌려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한 장로와, 그 과정을 통해 관계를 회복해 가는 목회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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