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2.심화

 

4. ‘13:3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이 단순한 육체의 시각 기관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와 영적 인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다윗은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다윗은 단순히 시력이 좋아지기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육체의 눈만을 뜻한다면, 뒤에 이어지는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두려워하는 것은 육체적 수면이 아니라 영적 무감각과 영적 죽음입니다.

 

그래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는 ‘내 이해를 밝히소서’, ‘내가 진리를 보게 하소서’, ‘내 내적 인식을 깨워 주소서’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사망의 잠’은 거짓과 악 안에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 곧 영적으로 잠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 전체는 ‘주님, 제 이해를 밝히셔서 제가 영적 죽음의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구절을 AC.212에 인용합니다. 창3:7의 ‘눈이 밝아져’ 역시 같은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새로운 시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열리는 것이며,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영적 사물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 시편 구절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잘 연결됩니다. 다윗은 외부 정보를 더 많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빛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조명, 내적 인식, 내적 지시와 매우 가까운 개념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안다고 해서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밝아질 때 비로소 진리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과 ‘생명’, ‘어둠’과 ‘죽음’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이해가 밝아질수록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 있고, 이해가 어두워질수록 영적으로 잠들어 갑니다. 그래서 다윗은 눈의 밝아짐과 사망의 잠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놓고 있습니다.

 

결국 AC.212에서 시13:3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이 이해를 의미하고, ‘눈 밝아짐’은 진리의 빛을 받아 이해가 계몽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밝아져’도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의 작용이며,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적 예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시력을 주소서’가 아니라 ‘이해의 빛을 주소서’라는 기도이며, 바로 그 점 때문에 AC.212의 논증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AC.212, 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AC.212.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저도 이런 기도를 늘 드려야겠어요... 이 구절은 AC.212를 읽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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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3, ‘삼상14:29’

AC.212.심화 3. ‘삼상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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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상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적 시력 회복이 아니라 이해와 인식의 밝아짐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보면, 요나단은 전투 중 지쳐 있었고, 숲에서 발견한 꿀을 조금 맛본 뒤 기력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는 몸에 힘이 돌아오고, 정신이 맑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더 깊은 의미를 봅니다. 요나단은 단순히 눈이 잘 보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눈이 밝아졌다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AC.211 interior dictate’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7 그들의 눈이 밝아져’를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내적 인식의 작용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 전체의 사용법과 일치함을 보여 주기 위해 요나단의 말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눈으로 새로운 대상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와 주변 상황을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해가 밝아졌다는 뜻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입니다. 말씀에서 꿀은 종종 선한 즐거움이나 선에서 오는 기쁨을 상징합니다. 요나단은 꿀을 맛본 뒤 활력을 얻고, 판단력이 맑아졌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선과 결합된 기쁨이 이해를 밝게 한다는 원리와도 상응합니다. 그래서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은 더욱 자연스럽게 이해의 계몽(enlightenment)을 가리키게 됩니다.

 

이 때문에 AC.212에서 요나단의 사례는 발람의 사례와 나란히 놓입니다. 발람은 계시와 환상을 통해 눈이 열린 사람’으로 불렸고, 요나단은 꿀을 맛본 뒤 눈이 밝아졌다’고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공통점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내적 인식과 이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말씀에서 ’은 자주 이해를 의미하며,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해가 밝아지고,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3:7 눈이 밝아져’도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는 설명의 근거로 이 구절을 사용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곧 나는 이제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뜻이며, 이것이 AC.212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AC.212, 심화 4, ‘시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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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AC.212.심화 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24:3) 영어로는 ‘눈이 열린’을 한역(韓譯)에서는 왜 ‘눈을 감은’으로 번역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민24:3은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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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24:3)

 

영어로는 눈이 열린을 한역(韓譯)에서는 왜 눈을 감은으로 번역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민24:3은 번역본마다 차이가 상당히 큰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AC.212를 읽다가 보면 ‘스베덴보리는 분명 눈이 열린 사람(man whose eyes are opened)이라고 인용하는데, 왜 한역(韓譯, 한글 번역)은 개역개정이든 개역한글이든 다 눈을 감았던 자라고 번역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문제는 히브리어 원문에 있습니다. 민24:3의 해당 표현은 해석상 논란이 오래된 구절입니다. 전통적으로는 ‘눈이 열린 사람’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영어 KJV는 ‘the man whose eyes are open’이라고 번역했고, 스베덴보리도 이 전통적 번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히브리어 연구에서는 이 단어를 ‘감긴’, ‘닫힌’, ‘덮인’ 쪽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 번역은 ‘눈을 감았던 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잠을 잤다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환상이나 계시를 받는 특별한 상태에 들어갔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같은 장 4절을 보면 더 흥미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엎드려서 눈을 뜬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들 가운데는 ‘falling into a trance, but having his eyes open’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육체적으로는 황홀경이나 깊은 영적 상태에 들어가 있지만, 영적으로는 오히려 눈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AC.212에서 이 구절을 인용할 때 관심을 두는 것은 히브리어 문법 논쟁이 아닙니다. 그는 발람이 영적 환상과 계시를 받는 상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단순한 육체의 시각이 아니라 내적 인식과 이해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흥미롭게도, 설령 한역의 ‘눈을 감았던 자’를 따른다 해도 AC.212의 논지는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발람은 결국 환상 가운데서 영적 사실을 보게 된 사람으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핵심은 ‘눈이 감겼느냐 열렸느냐’의 문자적 표현보다, 발람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AC.212의 문맥에서는 KJV 계열의 ‘눈이 열린 사람’이 스베덴보리의 논증에 더 직접적으로 사용되지만, 한역의 ‘눈을 감았던 자’도 결국은 환상과 계시를 받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크게 멀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상응 해석의 측면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눈이 열린 사람’ 쪽이 AC.212의 ‘ = 이해, 인식’이라는 논지와 훨씬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AC.212, 심화 3, ‘삼상14:29’

AC.212.심화 3. ‘삼상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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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1, ‘민24:3’

AC.212.심화 1. ‘민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24:3) 이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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