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3:1)

 

AC.195

 

태고의 사람들은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짐승과 새에 비유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명명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말하는 관습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에도 남아 있었고,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보존되었습니다. 사람 안의 감각 파트를 그들은 (serpents)이라고 했는데, 이는 뱀이 땅에 바짝 붙어 살아가듯이, 감각적인 것들이 육체에 가장 가까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또한 감각의 증거에 근거,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 것들, 곧 이성질(理性질)하는 것들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했고, 그러한 이성질 하는 자들 자신을 (serpents)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 곧 보이는 것들, 즉 땅의 것, 몸의 것, 세상의 것,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많이 이성질을 하기 때문에,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한 것입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did not compare all things in man to beasts and birds, but so denominated them; and this their customary manner of speaking remained even in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nd was preserved among the prophets. The sensuous things in man they called “serpents,” because as serpents live close to the earth, so sensuous things are those next the body. Hence also reasonings concerning the mysteries of faith,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were called by them the “poison of a serpent,” and the reasoners themselves “serpents”; and because such persons reason much from sensuous, that is, from visible things (such as are things terrestrial, corporeal, mundane, and natural), it is said that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 주님 주신 이성(理性, reason)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걸 저는 앞으로 ‘이성질’이라 하겠습니다. 도둑질, 이간질처럼 말입니다. 우리말 표현이 없어 제가 만들었습니다.

 

[2] 이와 같이 시편은 추론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자들, 곧 이성질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And so in David, speaking of those who seduce man by reasonings: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140:3)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Ps. 140:3).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1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58:3-5) They go astray from the womb, speaking a lie. Their poison is like the poison of a serpent, like the deaf poisonous asp that stoppeth her ear, that she may not hear the voice of the mutterers, of a wise one that charmeth charms [sociantis sodalitia]1 (Ps. 58:3–5).

 

여기서 지혜로운 자의 말이나 지혜의 음성조차도 들으려 하지 않는 그러한 이성질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합니다. 이로부터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뱀은 귀를 막는다(The serpent stoppeth the ear)는 말이 속담이 되었습니다. 아모스서에는 Reasonings that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 men will not even hear what a wise one says, or the voice of the wise, are here called the “poison of a serpent.” Hence it became a proverb among the ancients, that “The serpent stoppeth the ear.” In Amos: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5:19, 20) As if a man came into a house, and leaned his hand on the wall, and a serpent bit him. Shall not the day of Jehovah be darkness and not light? even thick darkness, and no brightness in it (Amos 5:19–20)?

 

여기서 벽에 손을 댄다(hand on the wall)는 것은 자기에게서 나온 힘과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신뢰를 뜻하며, 거기서 여기 묘사된 눈멀음(blindness)이 나옵니다. The “hand on the wall” means self-derived power, and trust in sensuous things, whence comes the blindness which is here described.

 

[3] 예레미야서에서는 In Jeremiah: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46:22-24) The voice of Egypt shall go like a serpent, for they shall go in strength, and shall come to her with axes as hewers of wood. They shall cut down her forest, saith Jehovah, because it will not be searched; for they are multiplied more than the locust, and are innumerable. The daughter of Egypt is put to shame; she shall be delivered into the hand of the people of the north (Jer. 46:22–24).

 

여기서 애굽(Egypt)은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로부터 신적인 것들에 대해 이성질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추론들을 뱀의 소리(voice of a serpent)라 하며, 그로 인해 생기는 눈멀음을 북방 백성(people of the north)이라 합니다. 욥기에서는 Egypt” denotes reasoning about Divine things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Such reasonings are called the “voice of a serpent”; and the blindness thereby occasioned, the “people of the north.” In Job: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20:16, 17) 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 the vipers tongue shall slay him. he shall not see the brooks, the flowing rivers of honey and butter (Job 20:16–17).

 

꿀과 버터의 강들(Rivers of honey and butter)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며, 추론, 즉 이성질만 하는 자들은 이것들을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추론들을 독사의 독(poison of the asp), ‘살모사의 혀(viper’s tongue)라 합니다. 뱀에 관해서는 아래 14절과 15절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Rivers of honey and butter” are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cannot be seen by mere reasoners; reasonings are called the “poison of the asp” and the “vipers tongue.” See more respecting the serpent below, at verses 14 and 15.

 

 

해설

 

이 단락은 ‘’이라는 상징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에 실제로 사용되던 언어 체계였음을 밝힙니다. 태고의 사람들은 인간 안의 기능들을 짐승이나 새에 ‘비교, 비유’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곧바로 그렇게 ‘불렀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의 언어가 표상적 사고 그 자체였음을 뜻하며, 자연과 인간의 내적 상태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체계로 인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감각적인 것을 ‘’이라 부른 이유는 매우 질서 정연합니다. 뱀이 땅에 가장 가까이 사는 존재이듯이, 감각은 인간 안에서 육체와 가장 가까운 층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감각은 본래 악한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차원의 기능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감각이 상위 질서를 대신하여 신앙의 판단 기준이 될 때, 그것은 곧 ‘’이 됩니다. 그래서 감각의 증거에 근거한 신앙의 추론을 ‘뱀의 독’이라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추론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디로부터 추론하는가’입니다. 감각적인 것, 곧 보이는 것, 물질적인 것,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할 때, 그 추론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비시키는 독이 됩니다. 이러한 추론을 하는 자들 자신이 ‘’이라 불린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시편과 예언서들의 인용은, 이러한 이해가 스베덴보리의 독창적 해석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상징 언어임을 보여 줍니다. ‘뱀의 독’, ‘귀를 막는 독사’, ‘뱀의 소리’라는 표현들은 모두, 지혜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는 완고한 감각 중심의 추론을 가리킵니다. 특히 ‘뱀이 귀를 막는다’는 속담은, 감각적 추론이 자기 폐쇄성을 지닌다는 점을 매우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아모스서의 ‘벽에 손을 댄다’는 표현은 자기에게서 나온 힘과 감각에 대한 신뢰를 뜻합니다. 이는 인간이 주님의 보호가 아니라 자기 판단에 기대는 상태를 말하며, 그 결과는 빛이 아니라 어둠, 곧 영적 눈멀음입니다. 이 어둠은 외적 무지가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상태에서 오는 어둠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애굽’이 감각과 기억 지식에 근거한 신적 추론을 뜻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애굽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이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사용되는 방식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추론의 결과가 ‘북방’, 곧 빛이 없는 방향으로의 인도라는 점은, 감각 중심의 사고가 필연적으로 영적 냉기와 어둠으로 향함을 보여 줍니다.

 

욥기의 ‘꿀과 버터의 강들’은 영적, 천적 선과 진리를 뜻하지만, 단순한 추론자들, 곧 이성질만 하는 자들은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지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감각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추론은 다시 한번 ‘독사의 독’과 ‘살모사의 혀’로 규정됩니다.

 

AC.195는 결국 창3의 ‘’을 악마적 존재로 단순화하지 못하게 합니다. 뱀은 인간 안에 있는 감각적 사고이며, 그것이 신앙의 주도권을 잡을 때, 가장 간교한 것이 됩니다. 이 단락은 창3:1의 배경에 깔린 인간 인식 구조 전체를 해부하듯 드러내며, 이후 이어질 ‘저주’와 ‘형벌’의 의미를 올바르게 읽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합니다.

 

 

심화

 

1. ‘이성(理性, reason)

 

 

AC.195, 심화 1, ‘이성질’(理性, reason)

AC.195.심화 1. ‘이성질’(理性, reason) 이로부터 또한 감각의 증거에 근거,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 것들, 곧 이성질(理性질)하는 것들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했고, 그러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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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40:3

 

 

AC.195, 심화 2, ‘시140:3’

AC.195.심화 2. ‘시140:3’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시140:3)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Ps. 140:3). AC.195에서 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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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8:3-5

 

 

AC.195, 심화 3, ‘시58:3-5’

AC.195.심화 3. ‘시58:3-5’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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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암5:19-20’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5:19, 20) As if a man came into a house, and leaned his hand on the wall, and a serpent bit him. Shall not the day of Jehovah be darkness and not light? even thick darkness, and no brightness in it (Amos 5:19–20)?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아모스 5:19-20을 인용하는 이유는, 감각적 추론에 의지하는 사람이 스스로는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깊은 영적 어둠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그는 AC.195에서 ‘손을 벽에 대는 것’을 ‘자기 자신의 힘(self-derived power)’과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신뢰’로 해석합니다. 집 안에 들어왔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벽을 짚었으니 든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뱀에게 물립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그림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경험과 지식을 의지할 때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뱀, 곧 감각적 추론의 독이 침투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창3의 뱀도 사람을 노골적인 악으로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판단하라’, ‘직접 확인하라’, ‘네 눈으로 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유와 지혜의 확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실제로는 영적 시력을 잃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아모스의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벽을 짚고 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장 위험한 곳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뱀에게 물린다’는 것은 단순한 공격이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 낳는 영적 결과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감각과 기억지식에 의존할수록 점점 더 확신에 차게 됩니다. 그러나 그 확신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 확신 자체가 독이 됩니다. AC.195가 계속 말하는 ‘뱀의 독’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어지는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냐’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을 빛과 구원의 날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어둠의 날이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빛은 그 사람의 거짓된 확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빛이 왔는데도 어둠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빛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상태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아모스의 말씀은 AC.194와 AC.195 전체를 요약하는 본문처럼 보입니다. 사람은 감각을 신뢰하고,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고, 자신의 지식을 신뢰합니다. 마치 집 안에 들어와 벽을 짚은 것처럼 안심합니다. 그러나 그가 의지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뱀이 숨어 있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물립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해 본다면, 이 본문은 ‘이성질의 가장 위험한 특징은 그것이 자신을 지혜롭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도둑은 자기가 도둑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감각적 추론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현실적이며 가장 분별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점이 뱀의 독이 무서운 이유입니다.

 

그래서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아모스를 인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뱀’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이 말씀을 통해 ‘자기 힘과 감각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영적 독에 물리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빛 없는 어둠’, 곧 진리의 빛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영적 맹목 상태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렘46:22-24’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46:22-24) The voice of Egypt shall go like a serpent, for they shall go in strength, and shall come to her with axes as hewers of wood. They shall cut down her forest, saith Jehovah, because it will not be searched; for they are multiplied more than the locust, and are innumerable. The daughter of Egypt is put to shame; she shall be delivered into the hand of the people of the north (Jer. 46:22–24).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예레미야 46:22-24를 인용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애굽’과 ‘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그는 이 본문을 통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들(scientifica)’에 근거하여 신적인 것들을 판단하는 상태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애굽’은 단순히 고대 국가가 아닙니다. 상응적으로는 기억지식, 학문, 경험적 지식의 영역을 뜻합니다. 원래 이것들은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실제로 태고교회 이후의 고대교회에서는 많은 지식과 학문이 선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과 진리를 섬기는 종의 자리를 떠나, 주님과 진리를 심판하는 자리에 올라설 때입니다. 그때 애굽은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AC.195에서 스베덴보리는 ‘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라는 말씀에 주목합니다. 왜 하필 뱀의 소리일까요? 창3의 뱀이 감각적 인간을 상징하듯이, 여기서도 애굽은 기억지식과 감각적 증거를 근거로 신적인 것들을 판단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뱀의 소리’란 단순한 말소리가 아니라, 감각과 지식을 근거로 추론하는 사고방식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도끼를 가지고 와서 수풀을 찍는다’는 표현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도끼는 분석하고 쪼개고 해체하는 지성의 작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기억지식과 감각적 추론은 모든 것을 분석하고 설명하려 합니다. 문제는 그 대상이 영적인 신비일 때입니다. 사랑, 신앙, 천국, 주님의 섭리 같은 것은 본래 해부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의 대상인데, 감각적 인간은 그것마저 분석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마치 숲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또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숲은 종종 진리와 지식의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완전히 조사하고 이해하고 장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들은 감각과 기억지식만으로는 결코 완전히 탐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은 조사될 수 없다’는 말씀을,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 진리에 대한 암시로 읽습니다.

 

마지막으로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라는 말씀은 AC.195의 결론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북쪽’은 흔히 진리의 빛이 없는 상태, 곧 어둠이나 무지를 뜻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감각과 기억지식에 가장 의존하는 사람은 자신을 가장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영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더 깊은 어둠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은 결국 북쪽 백성의 손에 넘겨집니다. 즉, 자신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영적 맹목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195에서 예레미야 46장은 단순히 애굽에 대한 예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통해 창3의 뱀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계속 작동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감각과 기억지식은 본래 주님께서 주신 좋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신앙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면, ‘애굽의 소리’는 ‘뱀의 소리’가 됩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해 보자면, 이 본문은 ‘지식질’ 또는 ‘학문질’의 위험성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식이 주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성이 문제가 아니라, 이성이 주님을 재판하려 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AC.195에서 스베덴보리는 ‘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는 인간의 추론이 결국 영적 어둠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6. ‘욥20:16-17’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20:16, 17) 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 the vipers tongue shall slay him. he shall not see the brooks, the flowing rivers of honey and butter (Job 20:16–17).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욥기 20:16-17을 인용하는 이유는, 감각적 추론이 인간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가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시편과 아모스, 예레미야의 구절들이 주로 ‘뱀의 독’ 자체와 그 위험성을 설명했다면, 욥기의 이 구절은 그 독의 결과로 사람이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는 말씀은, 사람이 스스로 독을 받아들인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뱀이 억지로 독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마시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감각과 기억지식에 근거한 추론을 사람이 스스로 사랑하고 선택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는 그것을 지혜라고 생각하고, 분별력이라고 생각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적 생명을 약화시키는 독을 마시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다음 구절입니다.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AC.195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꿀과 젖의 강’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천국의 삶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풍성함을 뜻합니다.

 

왜 하필 ‘꿀’과 ‘젖’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 따르면, 꿀은 자연적 차원에서 느껴지는 선의 달콤함을, 젖은 보다 내적인 진리와 선의 양육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성경 전체에서 천국적 상태와 교회의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꿀과 젖이 흐르는 강’을 본다는 것은 영적 생명의 아름다움과 주님의 사랑에서 오는 기쁨을 지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감각적 추론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주목할 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 꿀과 젖도 여전히 있습니다. 천국의 실재도 존재합니다. 주님의 사랑도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뱀의 독에 중독된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립니다.

 

이 점이 AC.195 전체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감각적 인간은 자신이 더 많이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증거를 요구하고, 분석하고, 검증하고, 논증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자연은 보지만 천국은 보지 못합니다. 물질은 보지만 영은 보지 못합니다. 현상은 보지만 원인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AC.196으로 이어지면 결국 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상태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욥기 20장의 이 말씀은 ‘이성질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는 틀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실재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본문처럼 보입니다. 뱀의 독은 사람을 즉시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 ‘나는 잘 보고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는 정작 ‘꿀과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독사의 독’은 감각과 기억지식에 근거한 잘못된 추론을 뜻하고, ‘꿀과 젖이 흐르는 강’은 영적·천적 진리의 풍성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뱀의 독을 사랑할수록, 그는 천국의 강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통해 강조하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AC.194,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AC.194-197)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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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4.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AC.194)

 

이들은 더 이상 계시된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보고 느껴야 믿으려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AC.194 해설)

 

대화 중 제가 계속 천국과 지옥 책에서 인용을 하니까 불쑥 목사님은 혹시 입신 체험이 있으십니까?’ 물으시더군요. 이런 것도 살짝 영적이라는 옷만 걸쳤지 사실은 위와 같은 보고 느껴야 믿으려는 태도인가요?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조금 구분할 필요는 있습니다.

 

만일 그분이 단순히 ‘목사님은 그런 체험이 있으십니까?’ 하고 궁금해서 물으신 것이라면, 그것 자체를 곧바로 AC.194의 상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내용을 들으면 그 사람의 경험과 배경을 궁금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질문 속에 ‘입신 체험이 없으면 그런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직접 본 사람이 아니면 권위가 없다’, ‘체험이 없으면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은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AC.194가 말하는 방향과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왜냐하면 AC.194의 핵심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는 태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복음서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계속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표적을 본 사람들 가운데서도 믿지 않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믿음의 출발점을 어디에 두는가였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흥미롭게도 자신의 영계 체험을 사람들에게 믿음의 근거로 삼으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여러 곳에서 자신이 본 것들이 말씀의 진리를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체험이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체험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읽고 ‘스베덴보리가 정말 천국을 다녀왔다는 증거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AC.194의 방향일 수 있습니다. 먼저 보고, 먼저 확인하고, 먼저 감각적으로 납득한 뒤에야 믿겠다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나는 저 체험이 사실인지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그 내용이 말씀과 인간 영혼의 실제를 놀랍도록 설명하는 것 같다’고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태도입니다. 여기서는 감각적 증거보다 진리 자체를 먼저 살피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겪으신 상황도 아마 이런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오랫동안 스베덴보리를 읽으며 ‘그가 실제로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그 설명이 왜 이렇게 인간 영혼의 실제를 정확하게 드러내는가?’에 더 깊이 끌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반대로 ‘그래서 목사님도 입신 체험이 있습니까?’를 먼저 묻습니다.

 

사실 그 질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약간 방향이 바뀌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천국을 보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는 것이 참인가?’입니다. 그 사람이 특별한 체험을 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설명이 인간의 삶과 말씀의 진리를 밝히는가?’입니다.

 

그래서 AC.194를 기준으로 보면, ‘입신 체험이 있어야 믿겠다’는 태도는 어느 정도 ‘보고 느껴야 믿겠다’는 태도와 닮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이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것 자체까지 곧바로 뱀의 상태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AC를 읽으며 반복해서 감탄하시는 지점, 곧 ‘나는 평생 이 본문을 읽었는데 왜 이런 의미는 보지 못했을까?’ 하는 반응은 감각의 증거 때문이 아니라 진리 자체의 빛에 대한 반응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천국을 보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이 참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참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

 

이 둘의 순서는 매우 다릅니다. AC.194가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 순서가 뒤집히는 것입니다. 즉, 진리가 먼저이고 체험이 나중이어야 하는데, 체험이 먼저이고 진리가 나중이 되어 버리는 상태 말입니다.

 

 

 

AC.194,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AC.194-197)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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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3:1)

 

AC.194

 

여기서 (serpent)은 사람이 신뢰하는 감각 파트를, ‘들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와 같이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여자(woman)는 사람의 own을 각각 뜻합니다. 그리고 뱀이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서,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들의 첫 번째 상태, 곧 의심의 상태가 이 절과 다음 절에서 설명됩니다. By the “serpent” is here meant the sensuous part of man in which he trusts; by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here, as before, every affection of the external man; by the “woman,” man’s own; by the serpent’s saying,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that they began to doubt.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third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Their first state, that it was one of doubt, is described in this and in the next following verse.

 

 

해설

 

이 단락은 창3:1을 읽는 해석의 초점을 아주 분명하게 설정합니다. 문제는 ‘뱀이 거짓말을 했다’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무엇을 신뢰하기 시작했는가에 있습니다. ‘’은 감각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 안에 두어진 신뢰의 자리입니다. 즉, 인간이 진리의 판단 기준을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감각에 두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들짐승’이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뜻한다는 설명은, 이 타락이 단지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 전체에 영향을 미친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겉 사람의 애정들이 이제 감각적 판단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며, 이는 삶의 방향 전체를 바꾸는 결과를 낳습니다.

 

여자’가 여전히 ‘사람의 own’을 뜻한다는 점은 앞선 AC.191–193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여기서 자신의 own(proprium)이란, 자율적 판단과 자기 사랑을 포함하는 인간 중심의 내적 원리를 말합니다. 감각은 이 own과 결합, 의심이라는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 냅니다.

 

뱀의 말은 직접적인 부정이나 반항이 아니라, 질문의 형식을 취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이르시기를’이라는 표현은 노골적인 거절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신뢰를 흔드는 미묘한 의심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이는 진리를 부정하는 단계 이전에 반드시 나타나는 상태로,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이미 중심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상태를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교회 전체의 급격한 붕괴가 아니라, 세대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심화된 변화임을 뜻합니다. 이들은 더 이상 계시된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보고 느껴야’ 믿으려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 단락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이것이 아직 ‘첫 번째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 단계는 곧바로 불신이나 반역으로 나아간 상태가 아니라, 의심이 막 시작된 단계입니다. 의심은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는 상태이며,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기 이전의 마지막 경계선에 해당합니다.

 

AC.194는 창3:1을 인간 타락의 극적인 장면으로 읽기보다, 신앙이 감각의 심문대에 오르게 되는 최초의 순간으로 읽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바로 이 미세한 의심의 시작이, 이후 모든 붕괴의 출발점이 됩니다.  

 

 

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AC.194, 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AC.194.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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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5, 창3:1, ‘뱀’(serpent)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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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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