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3:23)

 

AC.284

 

다섯 번째 후손에 대하여. 이들은 모든 선과 진리를 잃어버리고, 거듭나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이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his being sent forth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23) Of the fifth posterity, which was deprived of all good and truth, and was reduced to the state in which they had been previous to regeneration, which is meant by his being “sent forth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verse 23)

 

 

해설

 

AC.284는 태고교회 후손들의 영적 쇠퇴가 이제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앞선 AC.283에서는 네 번째 후손에게서 자연적 선마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다섯 번째 후손에 이르러서는 그 자연적 선마저 완전히 무너지고, 결국 모든 선과 진리를 잃어버리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이 약해졌다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 기반 자체가 거의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모든 선과 진리를 잃어버렸다’는 말은,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는 언제나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신다고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람이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선과 진리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지만, 자신의 삶으로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선과 진리가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거듭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실제로 과거로 되돌아갔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을 통하여 얻었던 모든 영적 유익을 스스로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원래 거듭나기 전의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태고교회 후손들도 처음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누렸지만, 점차 그것을 거절한 결과 다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상태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창3:23에서는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라는 말씀으로 나타냅니다. 여기서 에덴동산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 교통하며 천적 생명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나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더 이상 그러한 생명 안에 머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말씀은 언제나 사람의 상태를 사람의 눈높이에서 표현하기 때문에, 마치 주님께서 내보내신 것처럼 말씀하지만, 실제 원인은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은 사람의 자연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땅을 간다, 경작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천적 퍼셉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외적 차원에서 힘겹게 진리와 선을 배워야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영적 생명이 이제는 수고와 오랜 과정을 통하여 조금씩 회복되어야 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도 함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 다시 땅을 경작하도록 하셨습니다. 경작은 씨를 뿌리고 돌을 골라내며 열매를 기다리는 긴 과정입니다. 이것은 비록 높은 천적 상태는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거듭남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현재 상태에 맞는 길을 마련하시고, 그 길을 따라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람은 때때로 이전보다 신앙이 식고, 말씀의 기쁨을 잃으며, 주님과 멀어진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현재 상태에 맞는 방식으로 다시 진리를 배우고 선을 실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비록 에덴동산의 기쁨은 잃었을지라도, 땅을 경작하는 새로운 삶을 통하여 다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AC.284는 태고교회의 다섯 번째 후손이 가장 낮은 영적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섭리는 그곳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선택으로 선과 진리를 잃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십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는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사람의 현재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구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AC.285, 창3:20-24, ‘창3:24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창3:23) AC.285 여섯 번째와 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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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3, 창3:20-24, ‘창3:22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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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3:22)

 

AC.283

 

네 번째 후손에 대하여. 이들에게서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이 소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새롭게 창조되어, 곧 거듭나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the celestial things of faith)을 배웠다면 오히려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22절) Of the fourth posterity, in which natural good began to be dissipated, and which, had they been created anew or instructed i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would have perished, which is meant by,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verse 22)

 

 

해설

 

AC.283은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가 세대를 거치며, 어떻게 점차 낮아졌는지를 설명하는 연속적인 개요 가운데 하나입니다. AC.282에서 첫 번째 후손에게는 천적 영적 선이 있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에게는 자연적 선이 남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네 번째 후손에 이르러서는 그 자연적 선마저 점차 소멸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성이 약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적 바탕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자연적 선’은 사람의 자연적 삶 안에 나타나는 순박함, 온순함, 정직함, 인정, 이웃에 대한 호의와 같은 선을 말합니다. 이러한 선이 아직 남아 있을 때에는, 비록 높은 퍼셉션이나 천적 사랑을 잃었더라도 주님께서 그 사람을 붙드시고, 더 깊은 거듭남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후손에게서는 감각과 자기 사랑이 점점 강해지면서 이 자연적 선조차 흩어지고 소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매우 놀라운 말을 덧붙입니다. 곧 이들이 만일 거듭나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배웠다면 오히려 멸망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보통은 사람이 높은 진리를 많이 알수록 더 구원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높은 진리를 아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상태가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너무 높은 진리가 주어지면, 그것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모독의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천적인 것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 퍼셉션, 순진, 자비와 같은 가장 높은 신앙의 내용들을 뜻합니다. 이것들은 단순히 머리로 배우는 교리가 아니라, 의지와 삶 전체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룩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자연적 선마저 거의 소멸한 사람에게 이러한 천적인 것들이 주어지면, 그는 그것을 참으로 사랑하거나 살아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입과 지식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마음과 삶으로는 거부하게 됩니다.

 

이것이 왜 멸망으로 이어지는지를 이해하려면 모독(profanation)의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전혀 모를 때보다, 진리를 알고 인정한 뒤에 그것을 부정하고 악한 삶과 섞을 때 더 위험한 상태에 빠집니다. 거룩한 것과 악한 것을 결합하면 사람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뒤섞이며, 그 결과 주님께서 사람을 회복시키실 수 있는 질서 자체가 파괴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모독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진리를 때로는 알지 못하게 하시고, 더 외적인 상태에 머물게 하십니다.

 

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는 말씀도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손을 든다’는 것은 자기 능력으로 취하려는 것을 의미하고, ‘생명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사랑과 그 생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사람이 자기 힘과 자기 지혜로 천적인 것을 차지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한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참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을 거룩한 것과 결합한 상태가 굳어져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을 생명나무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형벌이 아니라 보호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구원에서 제외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깊은 모독과 정죄에 빠지지 않도록 천적인 것에 접근하는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자연적 선마저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는 높은 천적 진리를 직접 주시는 것보다, 더 낮고 외적인 질서 안에 머물게 하시는 편이 그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더 자비로운 조치였습니다.

 

AC.283은 진리가 많을수록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살아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네 번째 후손은 자연적 선이 소멸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직접 받으면 그것을 모독하여 오히려 멸망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심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이 단락은 주님의 섭리가 언제나 더 많은 계시를 주시는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거룩한 것을 가리시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는 깊은 진리를 보여줍니다.

 

 

 

AC.284, 창3:20-24, ‘창3:23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창3:23) AC.284 다섯 번째 후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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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2, 창3:20-24, ‘창3:21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82 그 첫 번째 후손에 관하여, 그 안에는 천적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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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2.심화

 

1. ‘celestial spiritual good’, ‘natural good

 

AC.282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영적으로 낮아지는 과정을 매우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그는 첫 번째 후손에게는 ‘천적 영적 선(celestial spiritual good)이 있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에게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두 표현은 단순히 선의 종류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어떻게 점차 약화되어 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먼저 ‘천적 영적 선’은 가장 높은 수준의 선인 ‘천적 선(celestial good)과는 조금 다릅니다. 천적 선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 자체를 말합니다. 그러나 ‘천적 영적 선’은 그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와 이웃을 향해 나타나는 선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근원이 되고, 그 사랑이 이웃을 사랑하고 진리를 실천하는 삶으로 나타난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후손이 비록 처음 태고교회만큼 높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천적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영적 선 안에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천적 영적 선’은 사랑과 신앙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며, 그 선 안에서 진리를 깨닫습니다. 즉, 사랑이 여전히 중심이고, 신앙은 그 사랑의 표현입니다. 태고교회의 첫 후손들은 처음 교회만큼 퍼셉션이 밝지는 않았지만, 아직 이러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는 더욱 낮은 상태로 내려갑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자연적 선’입니다. 자연적 선이란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는 삶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천적 사랑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을 돕고, 정직하게 살며, 사회 질서를 지키는 것처럼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선한 행위들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은 여전히 선이지만, 그 근원이 천적 사랑보다는 자연적인 성향이나 교육, 양심, 사회적 질서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연적 선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 선도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중요한 바탕입니다. 사람은 먼저 자연적 차원에서 선을 배우고 실천하며, 그 위에 영적 선과 천적 선이 점차 세워집니다. 따라서 자연적 선은 거듭남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안에만 머무르면 외적 도덕성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연적 선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AC.282에서 말하는 교회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질서의 변화입니다. 처음 태고교회는 주님 사랑 자체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다음 세대는 아직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영적 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그 밝음이 약해졌습니다. 다시 그다음 세대는 주님 사랑의 직접적인 퍼셉션을 잃고, 주로 자연적 선에 의하여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선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선의 근원이 점점 더 바깥쪽으로 이동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스베덴보리는 ‘가죽옷(coats of skin)이라는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옷은 사람의 가장 바깥을 덮는 것을 의미하며, 가죽은 더욱 외적인 생명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사람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셨다는 것은, 높은 천적 상태를 잃은 사람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이제 그들의 수준에 맞는, 보다 외적인 선과 진리를 통하여 계속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비록 이전보다 낮은 상태가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여전히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천적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의 차이는 선의 유무가 아니라 선의 근원에 있습니다. 천적 영적 선은 주님에 대한 사랑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선이며, 자연적 선은 그보다 한 단계 바깥에서 나타나는 선입니다. AC.282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점차 높은 영적 상태를 잃어갔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그 수준에 맞는 선과 진리를 마련하시어 끝까지 구원의 섭리를 이어 가셨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AC.282, 창3:20-24, ‘창3:21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82 그 첫 번째 후손에 관하여, 그 안에는 천적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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