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4

 

이것이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이며, 그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비밀(arcana)은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풀어내려면 수많은 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다만 극히 일부만 제시되었는데, 그것도 이 말씀이 거듭남을 다루고 있으며, 그 거듭남이 외적 인간(the external man, 겉 사람)에서 내적 인간(the internal man,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들뿐입니다.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 인식합니다. 그들은 문자 속에 있는 것들,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역사서와 예언서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 성읍, 강, 사람의 이름들은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직 그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만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낙원에 있는 아담을 보며 그들은 태고교회를 인식하지만, 그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인식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 가운데 남아 있던 교회, 곧 아브람 시대까지 이어진 교회를 인식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그 개인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그가 대표한 구원하는 신앙을 인식합니다. 이와 같이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직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만을 인식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해설

 

이 글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 출 속뜻 주석, 10,837개 글)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내적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것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인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중요한 점은, 내적 의미가 문자 의미에 덧붙여진 해석이 아니라, 문자 속에 생명처럼 깃들어 있는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문자는 겉모습이고, 내적 의미는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입니다.

 

이 글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내적 의미가 문자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내적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뜻이 아니라, 문자적 시선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문자 의미는 역사와 사건, 인물과 지명을 보여 주지만, 내적 의미는 상태와 질서, 신앙과 사랑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같은 본문을 읽고도, 인간은 역사로 읽고 천사는 생명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자신이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겸손한 수사가 아니라, 내적 의미의 구조 자체가 무한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주님 자신에게서 나왔고, 주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의미 역시 끝이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이 단지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전 과정을 담고 있다는 설명 역시, 그 무한한 의미 중 일부일 뿐입니다.

 

이 글의 중심 전환점은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 인식한다’라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 독자에게 천사의 인식 방식을 직접 소개합니다. 천사들은 문자적 단어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는 천사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라, 그 차원이 이미 문자를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에게 ‘아담’, ‘노아’, ‘아브라함’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각각 특정한 영적 상태와 교회의 국면을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예를 들어, 천사들이 ‘아담’을 인식할 때, 그들은 한 사람이나 한 시대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태고교회가 가졌던 주님에 대한 신앙, 곧 사랑과 직접 결합된 신앙의 상태를 인식합니다. 마찬가지로 ‘노아’는 홍수 생존자의 이름이 아니라,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던 교회의 질서와 그 지속을 뜻합니다. ‘아브라함’ 역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구원하는 신앙의 대표로 인식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말씀의 인물 해석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인물은 천사적 차원에서는 ‘누구’가 아니라 ‘무엇’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상태’이며 ‘어떤 신앙과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곧장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봅니다.

 

이 글은 또한, 거듭남의 방향성을 다시 한번 확증합니다. 내적 의미가 말하는 거듭남은 언제나 외적 인간에서 내적 인간으로 나아갑니다. 문자 역시 외적 차원이고, 내적 의미는 내적 차원입니다. 인간이 문자를 통해 내적 의미로 나아갈 때, 그 사람의 거듭남 역시 같은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구조와 인간의 영적 성장 구조는 서로 정확히 맞물려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독자에게 하나의 초대를 던집니다. 말씀을 더 이상 단지 ‘읽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영적 질서를 인식하라는 초대입니다. 문자에 집착하면 역사에 머물지만, 내적 의미로 들어가면 주님의 역사, 곧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와 거듭남의 생명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말씀은 더 이상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AC.65, 창1, '말씀의 글자나 단어가 우리와 천사들에게 주는 의미를 실제 체험'

AC.65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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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거듭남 여섯째 날의 상태와 그 끝에 가서 일어나는 변화'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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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3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여러 싸움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이 싸움의 시간은 곧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시간이며,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는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기 전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합니다. 이는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 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 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 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 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해설

 

이 글은 거듭남의 여섯째 날이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그 상태가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매우 역동적으로 묘사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거듭남의 전 과정에서 싸움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싸움을 겪지만, 실제로 싸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그 싸움의 현장에 서 있을 뿐이며, 주님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싸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윤리적 갈등이나 심리적 고민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악과 거짓, 곧 인간 본성에 뿌리내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진리와 선에 저항하는 영적 충돌을 의미합니다. 이 충돌이 반복되는 동안 인간은 진리와 선을 더 이상 개념으로만 붙잡지 않고, 삶의 실제 기준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싸움들은 인간을 소모시키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확증하는’ 과정입니다.

 

이 글에서 매우 인상적인 표현은, 이 싸움의 시간이 ‘주님의 역사하심의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혼란과 불안, 실패와 흔들림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사실은 주님께서 가장 적극적으로 일하시는 때라는 뜻이며, 그래서 예언자들이 거듭난 인간을 가리켜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손가락은 세밀하고 정교한 작용을 상징합니다. 즉, 거듭남은 거칠고 강압적인 개입이 아니라, 가장 미세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또 하나의 핵심은, 주님께서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까지’ 쉬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삶을 이끄는 중심 원리입니다. 신앙이 먼저 작동하던 단계에서는 진리가 인간을 이끌지만, 그 진리는 여전히 노력과 긴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주가 되면, 선한 행위는 더 이상 억지로 행하는 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이때 비로소 싸움은 멈춥니다.

 

그래서 신앙이 사랑과 결합했을 때,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여섯째 날에만 사용된 표현으로, 거듭남의 완성을 뜻합니다. 여기서 ‘좋았더라’라는 표현은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질서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는 상태, 곧 인간이 주님의 닮음이 된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날이 끝날 때 일어나는 변화는 매우 결정적입니다. 악한 영들이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말은, 인간의 내적 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더 이상 악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선이 삶의 분위기를 지배합니다. 이때 인간은 ‘하늘(heaven), 곧 ‘천적 낙원(the celestial paradise)으로 인도됩니다. 이는 사후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는 하늘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 부분, 곧 ‘악한 영들이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워딩은 그냥 문학적 표현이 아닙니다. 아래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63) 33장, ‘천국과 인류의 결합(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Human Race, HH.291-302) 292번 글을 보시면 더욱 자세한, 깊은 내용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HH.292, 33장,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HH.291-302)

33천국과 인류의 결합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Human Race 292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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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결국 거듭남을 하나의 완성된 사건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싸움, 인내, 주님의 지속적인 역사, 그리고 마침내 찾아오는 평화까지를 하나의 유기적인 흐름으로 보여 줍니다. 여섯째 날은 끝이 아니라, 참된 안식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문턱이며, 그 문을 여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AC.64, 창1, '천사들이 말씀을 읽는 방식,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AC.64-66)

AC.64 이것이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이며, 그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비밀(arcana)은 너무나 많아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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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창1 '여섯 날'의 의미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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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여섯 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이것들을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사람이 전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처음에는 겨우 인간의 어떤 모습이 생기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이르러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 되기 때문입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요약해 주는 핵심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시간의 길이나 역사적 연대를 뜻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합니다. 여섯 날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상태들, 곧 영적 형성의 단계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창조 이야기를 인간 내면의 재창조 이야기로 읽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여섯 단계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류 전체의 영적 역사 속에서도 이 여섯 단계가 반복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의 삶,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신앙 여정 속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한 번에 완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세부적으로 반복되는 과정입니다.

 

이 글에서 특히 강하게 드러나는 표현은 ‘처음에는 전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이는 육체적 인간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참된 ‘인간’이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 기준에서 볼 때,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아직 인간의 본질을 갖추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는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그 근원은 자기 본성과 자기 사랑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첫 단계에서 인간은 ‘겨우 인간의 어떤 모습’이 됩니다. 이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선과 진리가 자기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이때 인간은 아직 흔들리고 불안정하지만, 더 이상 완전히 닫힌 존재는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 줍니다. 거듭남은 급격한 도약이 아니라, 점진적 형성입니다. 이해력이 먼저 열리고, 그다음 의지가 움직이며, 이 둘이 여러 번의 갈등과 반복을 거쳐 서서히 결합합니다. 이 과정에서 실패와 후퇴도 포함되며, 그 모든 것이 여섯 날이라는 구조 안에 포함됩니다.

 

여섯째 날에 이르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여기서 형상이란, 주님을 닮았다는 외형적 의미가 아니라, 이해력과 의지가 질서 있게 결합되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삶 전체를 다스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진리를 알 뿐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리를 행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여섯째 날의 핵심이며, 창조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여섯째 날이 끝이라고 해서 과정이 멈추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이며,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글은 거듭남의 목적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그 여정이 얼마나 섬세하고 단계적인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인간은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날마다 다시 창조되어 가는 존재라는 것이 이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AC.61, 창1:31,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들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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