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3.심화

 

5. ‘해가 되지 않음에도 여시지 않은 이유

 

 AC.303 본문에 이러한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인 내용이 그들에게 열려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말... 그럼 왜 그때 이런 내적 의미가 그들에게 오픈되지 않았나요?

 

 

많은 사람들이 AC.303을 읽다가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인 내용이 그들에게 열려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왜 그때 이미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시지 않으셨을까?’ 언뜻 보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 전체를 함께 살펴보면, 스베덴보리는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과 ‘공개하신다’는 것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더 이상 위험이 없다고 해서, 그 즉시 더 깊은 진리를 알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 의미의 공개는 단순히 위험의 유무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3:24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막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 알고도 거부하여 profanation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AC.303은 그와 반대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교회가 충분한 황폐(vastation)를 거친 뒤에는 더 이상 거룩한 것을 모독할 가능성이 이전처럼 크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알려져도 예전과 같은 영적 위험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은, 위험이 사라졌다는 것이 곧바로 새로운 계시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03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이제 해가 없으니 공개하자’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이 진리를 받아들여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때가 되었는가’를 함께 보십니다. 다시 말하면, 위험이 제거되는 것은 필요조건일 뿐이며, 새로운 교회의 준비는 또 다른 조건입니다.

 

실제로 유대교회 말기에는 영적으로 심한 황폐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세속적인 메시아관과 문자적 신앙이 매우 강했습니다. 만일 그 시대에 말씀의 내적 의미를 모두 공개하셨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영적 교회를 세우기보다 또 다른 오해와 왜곡을 낳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먼저 성육신하시고, 복음을 주시며, 새로운 교회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그 후에도 내적 의미는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으며, 적절한 때가 이를 때까지 보존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본격적으로 공개된 것은 단순히 어느 개인의 깨달음을 위한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교회를 위한 섭리의 일부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주실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진리를 생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의 기준은 언제나 ‘줄 수 있는 때’가 아니라 ‘받을 수 있는 때’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AC.303의 ‘이러한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인 내용이 그들에게 열려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단순히 위험이 제거되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던 주님의 섭리가 마침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창3:24의 그룹들은 생명의 길을 영원히 닫는 존재가 아니라, 가장 적절한 때까지 그 길을 보호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 보호는 결국 새로운 교회를 위한 준비였으며,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세상에 다시 열리는 날을 향한 자비로운 섭리였습니다.

 

 

 

AC.303, 심화 6, ‘스베덴보리의 시대’

AC.303.심화 6. ‘스베덴보리의 시대’ 그런데, 그렇다고 스베덴보리의 시대가 ‘내적 의미를 수용할 수 있는 영적 상태였다’ 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 싶은데요? 교회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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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3, 심화 4, ‘이사야’

AC.303.심화 4. ‘이사야’ 그런데 그러면 이사야는 이런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또 전하면서 본인은 정말 그 내적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만 전하고 그 내적 의미를 풀어주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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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사야

 

그런데 그러면 이사야는 이런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또 전하면서 본인은 정말 그 내적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만 전하고 그 내적 의미를 풀어주지 않아도 이런 말씀을 전해 듣는 사람들은 알아서 깨달을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가이드 1.0으로 보면, 이 질문은 ‘이사야는 무엇을 알았는가?’를 넘어 ‘말씀은 어떻게 기록되는가?’라는 문제까지 연결됩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사야는 자신이 기록한 말씀의 가장 깊은 내적 의미까지는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야가 아무것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받아 적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문자적 의미와 역사적 사명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 말씀 속에 주님께서 천사들을 위해 담아 두신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적 의미까지는 모두 알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천국의 비밀’ 전체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선지자들이 ‘말씀을 기록하는 도구’였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도구’란 인격이나 의식이 없는 기계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전하는 역사적 메시지와 당시 백성에게 주시는 경고는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백성이 완악하여 회개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감기고 귀를 막는 것이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주님의 섭리’라는 AC.303의 깊은 교리까지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말씀의 신성을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선지자가 모든 내적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 뒤 자기 생각으로 기록했다면,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갖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선지자의 이해를 넘어서는 깊이를 말씀 속에 담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자신도 다 알지 못했던 내용이, 수백 년 뒤 주님께서 마13:13-15와 요12:39-40에서 다시 인용되었고, 다시 18세기 스베덴보리를 통해 그 영적 의미가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이 나옵니다. ‘이사야는 내적 의미를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알아서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가이드 1.0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책임은 사람들에게 내적 의미를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선지자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AC.301-303의 주제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한꺼번에 같은 깊이의 진리를 열어 주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문자, 그러니까 겉으로만 이해하고, 어떤 사람은 도덕적 의미를 깨닫고, 어떤 사람은 영적 의미를 조금씩 보게 됩니다. 이것은 말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받는 사람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내가 다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깨달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께 받은 말씀을 충실히 전한다. 그 말씀을 각 사람 안에서 열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다니엘도 자신이 받은 환상을 다 이해하지 못했고, 천사에게 여러 번 설명을 요청했습니다. 베드로도 환상을 본 뒤 그 의미를 한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한 역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모든 상징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사실들을 근거로, 말씀은 인간 저자의 이해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적 계시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6:9-10을 읽을 때마다 오히려 놀라운 점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사야는 아마 자신도 이 말씀이 수백 년 뒤 주님께서 직접 인용하실 줄은 몰랐을 것이고, 다시 수천 년 뒤 AC.303에서 profanation과 주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핵심 본문으로 사용될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충실하게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중심이 인간 저자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하나의 목회적 원리가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매주 AC를 읽고 설교하시면서 ‘이 내용을 성도들이 지금 다 이해할까?’하는 생각을 하실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책임은 주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열어 주시는 일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사야가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으며, 스베덴보리도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모든 내적 의미를 상대가 즉시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보다, 주님께서 말씀 안에 담아 두신 생명을 신실하게 전달하는 데 충실하면 됩니다. 그 나머지는 각 사람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 안에서, 가장 적절한 때에 열리게 됩니다.

 

 

 

AC.303, 심화 5, ‘해가 되지 않음에도 여시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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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3, 심화 3, ‘Go to Jerusalem’

AC.303.심화 3. ‘Go to Jerusalem’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교회가 참으로 이럴진대 오늘날 ‘Go to Jerusalem’ 하면서 이스라엘의 회개와 회복에 힘쓰는 선교단체 및 그 흐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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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Go to Jerusalem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교회가 참으로 이럴진대 오늘날 Go to Jerusalem 하면서 이스라엘의 회개와 회복에 힘쓰는 선교단체 및 그 흐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가이드 1.0에 따르면, AC.301-303을 읽은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선교단체들이 Go to Jerusalem을 외치며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와 회복을 위해 힘쓰는데,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보았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AC.303 한 단락만이 아니라 ‘천국의 비밀’ 전체와 ‘계시록 해설’, ‘계시록 속뜻’, ‘참된 기독교’에 나타나는 말씀 해석의 원리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구약의 예언을 기본적으로 내적 의미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말하는 ‘이스라엘’, ‘유다’, ‘예루살렘’, ‘시온’은 단순히 혈통적 민족이나 지리적 국가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진리의 교회를, ‘유다’는 사랑의 교회를, ‘예루살렘’은 참된 교리를, ‘시온’은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회복 예언 대부분은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나 특정 민족의 집단적 회심보다,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고, 참된 교리를 회복하시는 일을 가리킨다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AC.302-303은 오히려 현대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이스라엘 종말론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이미 ‘황폐한 상태’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황폐함 가운데 보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그들은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듣고, 자기들의 모든 표상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설명을 들어도 인정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역사적 실패가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주님의 섭리 속에서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유대인을 포기하였거나, 유대인에게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저작 전체를 보면, 구원은 언제나 민족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입니다. 유대인이든 한국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이방인이든, 각 사람은 자기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선한 사람은 사후에도 계속 천사들의 교육을 받아 더욱 깊은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는 어느 민족 전체가 특별한 종말론적 특권을 가진다는 사상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Go to Jerusalem’ 운동도 구분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유대인도 다른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랑과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라면, 스베덴보리의 교리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어느 민족도 복음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대 민족만이 마지막 시대에 특별한 회복을 받는다’,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심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져야 한다’와 같은 혈통적, 국가적 종말론을 전제로 한다면,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시선은 언제나 외적 역사보다 내적 교회에 머뭅니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현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보다 ‘말씀이 말하는 이스라엘’, 곧 진리 안에 있는 교회로 돌립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회복도 궁극적으로는 도시의 회복이 아니라 참된 교리의 회복이며, 성전의 재건도 건물의 재건이 아니라 사람 마음속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AC.301-303을 가이드 1.0에 따라 읽으면, 우리의 기도 역시 달라집니다. 우리는 특정 민족의 종말론적 특권을 기대하기보다, 유대인이든 한국인이든 모든 사람이 자기 상태에 맞는 진리와 선으로 주님께 인도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일관되게 말하는 주님의 보편적 섭리이며, 동시에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말씀의 가장 깊은 영적 의미는 지리적 예루살렘이 아니라, 주님의 참된 교리와 참된 교회로 돌아오라는 초청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이드 1.0에 가장 충실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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