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주님은 정치적 좌표로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들이대면 의외로 중요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물론입니다.’ 좌파라는 정치적 성향 자체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며, 우파라는 정치적 성향 자체가 사람을 천국으로 보내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시는 기준은 그 사람이 어느 정치 진영에 속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진리라고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삶으로 살았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좌파와 우파의 사상에는 아무런 영적 차이가 없다’거나 ‘어떤 정치사상이든 모두 똑같이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치사상도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관점에서 분별해야 합니다. 개인의 자유와 책임, 약자 보호, 공동체적 연대, 법질서, 재산권, 국가 권력의 한계 등 정치가 다루는 문제에는 실제로 선과 진리의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정책이나 이념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거짓을 정당화하고, 증오와 폭력을 조장하거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짓밟는다면 그것은 어느 진영에서 나왔든 비판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반대로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고 이웃의 유익을 증진하며 정의와 질서를 세우는 요소라면 어느 진영의 주장인지와 별개로 그 안의 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원리가 등장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거짓’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거짓을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시대와 나라, 가정과 교육, 사회환경에 따라 많은 생각을 받아들입니다. 정치적 신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진심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싶어서 좌파적 정책을 지지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유와 책임, 법질서와 공동체의 안정을 지키는 것이 이웃에게 더 큰 유익이라고 생각하여 우파적 정책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사회문제를 놓고 정반대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해서 어느 한쪽의 영원한 상태까지 정치적 선택만으로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정책 판단에는 사실에 대한 오해도 있을 수 있고, 경제와 사회에 대한 판단 착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가 영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왜 그것을 지지하는가?’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진심으로 돕고 싶어서 복지 확대를 지지하는 것과, 부유한 사람에 대한 증오와 시기 때문에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싶어 하는 것은 외적으로 비슷한 정책을 지지하더라도 내면에서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유시장과 재산권을 인간의 자유와 사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지지하는 것과, 자신의 재산과 특권만 지키면서 가난한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것도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정치적 표어 뒤에 있는 바로 그 ‘사랑’입니다.

 

따라서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곧 ‘우파면 구원받는가?’라는 질문을 불러옵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보수적인 신학을 고백하고, 전통적인 가족관을 지지하고,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며, 공산주의를 강하게 반대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거듭남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가치들을 말하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고, 사람을 멸시하며, 돈과 권력을 사랑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증오한다면 정치적으로 아무리 ‘옳은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해도 그 사람의 내면까지 자동으로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에서 살펴본 원리와 정확히 같습니다.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과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동일하지 않듯,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하는 것’과 ‘천국적인 사랑을 가진 것’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 관한 설명을 적용하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죽을 때 정당 가입증이나 투표 기록을 가지고 영계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자신 안에 형성한 사랑과 그 사랑에 결합된 진리 또는 거짓을 가지고 갑니다. 사후에는 외적 체면과 사회적 역할이 벗겨지면서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연계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던 두 사람이 내적으로는 모두 이웃의 유익을 사랑했을 수도 있고, 같은 정치 진영에서 나란히 활동했던 두 사람이 사후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정치적 신념이 ‘프로프리움’(proprium)과 결합하면 사람은 진리를 찾기보다 ‘우리 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기 쉽습니다. 우리 편의 거짓에는 눈을 감고 상대편의 거짓에는 분노하며, 우리 편의 잘못은 사정을 이해해 주면서 상대편의 잘못은 그 사람 전체의 악함을 증명하는 증거로 사용합니다. 이때 좌파와 우파 가운데 어느 쪽에 서 있는가보다 더 심각한 영적 문제가 생깁니다. 진리 자체보다 ‘내 편’을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어느 진영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든 싫어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든 진리이며, 거짓 역시 내가 지지하는 진영에서 나왔다고 해서 진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정치적 분별을 없애는 렌즈가 아니라 오히려 더 엄격하게 만듭니다. 좌파의 주장도 살피고 우파의 주장도 살피되 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합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확인하고, 거짓은 어느 편의 것이든 거짓이라고 해야 하며, 선한 것은 상대편에서 발견되더라도 선하다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한 사람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원한 내면까지 우리가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책과 사상은 분별할 수 있지만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결국 이렇게 바뀝니다.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좌파든 우파든 무엇이 사람을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드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답은 정치적 진영이 아니라 ‘거듭남’(regeneration)을 향합니다. 사람이 주님을 향하고, 악을 죄이기 때문에 피하며, 진리를 배우고, 체어리티(charity)에 따라 이웃의 실제적인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정치 역시 그런 삶이 표현되는 여러 영역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가장 짧게 답한다면 이렇습니다.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좌파라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우파라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내 정치적 신념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봉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증오와 두려움과 자기 의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자신에게 돌리는 순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꽤 날카로워집니다. ‘상대편이 얼마나 틀렸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정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영적 분별은 바로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SY.118,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 - 재산이 아니라 사랑의 문제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주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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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116,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 교리의 경계보다 더 깊은 주님의 판단 기독교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대개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사람이나 집단’을 뜻합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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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 교리의 경계보다 더 깊은 주님의 판단

 

기독교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대개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사람이나 집단’을 뜻합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구원론, 성경관 등 일정한 교리적 기준에서 벗어나면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교회가 공동체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교리적 경계를 세우는 일 자체는 필요합니다. 모든 가르침이 똑같이 참일 수는 없으며,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이 교리적으로 이단이라고 판정하는 것과 주님께서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시는 것은 같은 것인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는 것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난 나라와 시대, 부모와 교회, 교육과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적 지식을 접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당히 정확한 교리를 배우고도 악하게 살아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불완전하거나 심지어 잘못된 교리를 배웠음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무슨 교리를 알고 있었는가?’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십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별이 생깁니다. ‘거짓을 믿는 것’과 ‘거짓을 사랑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배웠다면 그는 그것을 진심으로 참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이 선을 향하고 있다면 진리를 만나면서 잘못된 생각을 고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성경과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욕망과 지위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외적인 교리는 정통이어도 내면에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참된 이단’이라는 다소 역설적 표현이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가장 위험한 이단은 단순히 어떤 교리 문장을 잘못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악을 선이라고 하고 거짓을 진리라고 하면서 그것을 자기 삶의 원리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비틀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입술로는 정통 신앙을 고백하면서 삶으로는 그 신앙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도 이 역설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주님께 가장 강한 책망을 받은 사람들이 언제나 ‘교리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알고 율법을 가르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이라는 특정 집단을 오늘날의 어떤 교단에 그대로 대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훨씬 두려운 경고입니다.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과 ‘진리대로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21절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은 이 문제를 매우 날카롭게 비춥니다. 여기서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은 적어도 외적으로는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고백 자체를 최종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가 주님의 뜻을 삶으로 받아들였는지를 보십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믿음’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믿음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살아 있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으로 이어져야 하고, 믿는 것은 살아내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이웃을 향한 선과 ‘유용한 일’(use)로 나타나야 합니다. 아무리 정교한 교리 체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자기 우월감과 타인에 대한 멸시, 권력과 이익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면 진리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도 스베덴보리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이 나아갈 방향을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교리는 결국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만 ‘그 사람의 교리가 틀렸다’는 판단에서 ‘그러므로 그 사람은 악하며 지옥에 간다’는 판단으로 건너뛰어서는 안 됩니다. 전자는 우리가 어느 정도 검토할 수 있지만 후자는 그 사람의 내면을 아시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특히 이 원리를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전통적 기독교의 기준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이해, 속죄론, 사후세계, 성경의 속뜻 등에 관한 그의 가르침이 전통적 교리 체계와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베덴보리를 이단이라고 하니 그들이야말로 진짜 이단이다’라고 맞받아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다운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똑같은 칼을 상대에게 돌려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참인가? 이 가르침은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하는가?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가?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는가? 이웃을 사랑하고 유용한 삶을 살게 하는가?’ 그리고 동시에 그 가르침이 실제로 말씀과 스베덴보리의 저작에 부합하는지도 엄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사람이나 집단에 먼저 이름표를 붙이기보다 진리와 삶의 열매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결국 ‘누구’보다 ‘무엇’으로 바꾸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누가 이단인가?’보다 ‘무엇이 사람을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가장 깊은 차원의 이탈은 ‘교단 명부를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선을 알면서 악을 사랑하고, 진리를 알면서 자기 욕망을 위해 왜곡하며,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에서 삶이 갈라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결론은 조금 역설적일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람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 그 진리대로 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을 진리인 줄 알고 붙드는 사람보다,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을 위해 거짓으로 만드는 사람이 더 깊은 어둠에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교단의 이름표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진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최종적 내면은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오류를 발견했다고 그 사람 안의 모든 선까지 부정하지 않고, 진리를 발견했다고 그 사람 안의 모든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는 것, 바로 그 지점이 ‘이단’이라는 매우 날카로운 말을 다룰 때 특히 필요한 ‘스베덴보리의 렌즈’입니다.

 

 

 

SY.117, ‘좌파도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주님은 정치적 좌표로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들이대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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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115, ‘예수님 영접 기도’를 안 하면 구원 못 받나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 기도문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이는 주님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일정한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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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 기도문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이는 주님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일정한 형식의 ‘영접 기도’를 구원의 중요한 순간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합니다’와 같은 기도를 드리고 나면 ‘이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확신시켜 주는 방식입니다. 이 기도는 한 사람이 의식적으로 주님께 마음을 돌이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를 사람의 영원한 구원을 결정하는 조건으로 삼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선 성경 어디에도 특정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영접 기도’를 해야 구원받는다는 명령은 없습니다. 흔히 근거로 드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특정한 기도문을 한 번 따라 읽는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또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이라는 말씀도 자주 영접 기도에 사용되지만, 원래 문맥에서는 불신자에게 전도하면서 예수님을 마음속에 초청하라고 가르치는 구절이라기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 역시 입으로 일정한 공식을 발음하면 그 순간 법적으로 구원이 확정된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명제가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지적 동의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삶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믿음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체어리티(charity), 곧 이웃 사랑과 결합되어야 하며, 그 사랑은 실제 삶의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입으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라고 말하는 한순간의 사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기 때문에 피하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서 우리의 의지와 이해가 점차 주님께 열리는 것이 실제적인 영접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집회에서 영접 기도를 정확하게 따라 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후 평생 다른 사람을 속이고 이용하면서도 그것을 악이라고 여기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사는 것을 사랑했습니다. 그렇다면 수십 년 전에 했던 몇 분간의 영접 기도가 그 사람의 현재 내면과 상관없이 천국을 보장하는 일종의 ‘구원 증서’가 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사후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 어느 순간에 발음했던 문장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아오면서 자신 안에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영접 기도’를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고, 거짓과 불의를 악으로 여기며 피하려 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삶을 사랑했습니다. 단지 어느 전도집회에서 정해진 영접 기도를 따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그를 ‘너는 나를 영접하는 문장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신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구원 역사는 교회의 외적 경계보다 훨씬 넓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아가려 했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문제는 ‘영접’을 지나치게 한순간의 의식으로 축소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분을 단지 마음속으로 ‘초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분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도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보다 주님의 진리가 옳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도 악이라면 버리겠습니다. 내가 싫어하더라도 선이라면 행하겠습니다.’ 이것이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영접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regeneration)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듭남은 어느 날 한 번의 기도로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조금씩 새롭게 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점점 자기 ‘프로프리움’(proprium)을 의지하는 삶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삶으로 옮겨 갑니다. 이것이 훨씬 본질적인 의미의 ‘주님을 영접함’입니다.

 

그렇다고 회심의 순간이나 신앙고백을 가볍게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접 기도를 드린 그날이 실제로 인생의 방향이 바뀐 중요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서며 ‘이제부터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면 그것은 귀한 시작입니다. 다만 ‘시작’과 ‘완성’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씨앗을 심은 날이 중요하지만 씨앗을 심었다는 사실만으로 열매가 이미 맺힌 것은 아닙니다. 그 고백이 이후의 삶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을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훨씬 큰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만일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특정한 방식으로 그분을 고백하는 것이 구원의 절대적인 형식 조건이라면, 역사상 복음을 접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라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분명한 답을 제시합니다. 주님은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시며, 교회 밖에 태어난 사람이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의 가르침과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고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을 가진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사람이 사후에 참된 진리를 배우고 주님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없이도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지만, 주님의 구원 역사를 인간이 만든 외적 절차, 그러니까 종교적 절차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영접 기도는 신앙의 아름답고 의미 있는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구원을 작동시키는 주문이나 천국 입장권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과거에 영접 기도를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주님을 영접하며 살고 있는가?’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입술로 한 번 문을 열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은 한 번 열고 끝나는 문이라기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열려야 하는 문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 악을 죄이기 때문에 피할 때,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울 때 우리는 실제로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러므로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영접 기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영접은 한 번의 기도가 아니라 일생에 걸친 거듭남입니다.’

 

 

 

SY.116,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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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114,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 가는가’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가는가 - 마지막 행위와 영원한 운명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신중하지 못한 말입니다. 자살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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