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목사님, 이 이야기는 겉으로 보면 ‘강아지 마리 때문에 결혼이 깨진 이야기’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깊이 들어가면 중심은 강아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질서’, ‘서로 다른 애정의 우선순위’, 그리고 결혼 전에 반드시 드러나야 할 내면의 불일치가 드러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원고의 마지막에서 당사자도 결국 ‘ 사람은 자기 인생에 맞는 사람을 고른 것이고, 저는 인생에 맞는 가족을 지킨 ’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표현은 이 사건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보는 것보다 훨씬 본질에 가까이 갑니다.

 

먼저 남자에게 실제 개 물림의 트라우마가 있었다는 사실은 가볍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진돗개에게 물려 응급실에 갔고 흉터까지 남았으며, 지금도 작은 개를 보아도 몸이 먼저 굳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강아지를 싫어하는 편협한 남자’라고 단순하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공포는 머리로 ‘ 개는 나를 물지 않는다’고 이해한다고 해서 곧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털, 침대, 식탁 주변의 동물 등에 대한 위생적 거부감도 분명했습니다. 따라서 ‘반려견과 한집에서 없다’는 그의 결론 자체는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조건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결혼은 상대방에게 자기 애정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몽이는 단순한 취미나 소유물이 아닙니다. 힘들었던 시기에 유기견 보호소에서 만나 5년 동안 함께 살았고, 여성은 몽이를 ‘친구이자 가족’으로 경험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결혼하기 위해 여덟 살 된 몽이를 친정으로 보내라는 요구는 그녀에게 ‘강아지를 어디에 것인가?’라는 단순한 생활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에게 의존해 살아온 존재에 대한 책임을 중간에서 내려놓을 수 있느냐는 양심의 문제가 됩니다. 특히 원고에는 몽이가 분리불안이 있고 노령기에 접어들어 환경 변화가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는 수의사의 설명까지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성이 몽이를 계속 돌보기로 한 선택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으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애정’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삶의 질서가 형성되는 존재입니다. 생각과 말은 바뀔 수 있지만 깊은 애정은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은 ‘강아지를 키울 것이냐 것이냐’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 있던 두 사람의 애정 구조가 몽이라는 구체적인 존재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남자는 결혼하면 부부와 앞으로 태어날 자녀를 중심으로 가정의 질서를 세우고 싶어 했고, 여성은 이미 자신의 삶 속에 가족으로 들어온 몽이를 그 가정 안에서도 계속 책임지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남자가 한 말 가운데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너는 강아지를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야. 그게 잘못됐다는 아니라 너한테는 그게 맞는 거고. 근데 나는 자식을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 필요해.’ 표현에는 다소 거친 면이 있지만, 여기에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동물을 사랑하면 되는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 사이에는 어떤 질서가 있어야 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사상에서 사랑은 무조건 강하기만 하면 선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 배우자에 대한 사랑, 자녀에 대한 사랑,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연과 동물에 대한 애정은 서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제 위치에서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반려동물을 깊이 사랑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을 돌보고, 약한 존재를 보호하고, 자신에게 의존하는 생명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은 오히려 체어리티의 아름다운 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대쪽 질문도 필요합니다. ‘가족이다’라는 말이 곧 ‘인간 가족과 완전히 같은 위치이다’라는 뜻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원고의 여성 자신도 이 문제 앞에서는 솔직합니다. ‘몽이가 아파서 병원 가야 하는 날과 아이 어린이집 행사 날이 겹쳤을 저는 어느 쪽을 먼저 챙겼을까요?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더라고요.’ 저는 오히려 이 대목이 이 영상에서 가장 성숙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강아지를 버리라는 남자 가족을 지키려는 여자’라는 단순한 구도였지만, 여기서 여성은 자기 사랑의 질서까지 돌아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런 자기 성찰이 중요합니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은 선하지만, 사랑은 제자리에 놓여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려동물을 덜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을 더욱 온전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동물을 동물로서 지극히 사랑하고 끝까지 책임지면서도, 배우자를 배우자로 사랑하고 자녀를 자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랑을 모두 ‘누가 1순위인가?’라는 하나의 저울에 올려놓을 필요도 없지만, 서로 다른 관계의 고유한 질서를 없애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남자의 모든 말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강아지 키우는 여자는 거른다’는 인터넷식 표현을 가져온 것은 상당히 아쉽습니다. 앞에서 그가 말한 트라우마, 위생 문제, 결혼생활에 대한 현실적인 우려는 모두 자기 경험에서 나온 진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순간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을 ‘강아지 키우는 여자’라는 유형으로 묶어 버립니다. 이것은 사람을 그의 실제 성품과 삶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범주를 통해 보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말하면 중요한 것은 외적 유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삶입니다. 반려견을 키운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배우자 사랑이나 모성애, 체어리티의 질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친구들의 반응도 전적으로 옳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남자는 강아지가 아니어도 결혼하고 나서 다른 이유로 트집 잡아. 손절해’라는 반응 역시 남자를 하나의 유형으로 규정합니다. 한쪽 인터넷에서는 ‘강아지 키우는 여자를 거르라’ 하고, 다른 쪽 친구들은 ‘그런 남자는 손절하라’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양쪽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사람’을 보지 않고 ‘ 유형’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런 식의 외적 분류보다 훨씬 안쪽으로 들어가 ‘ 말과 선택을 움직인 애정은 무엇인가?’를 묻게 합니다.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은 여성이 몽이의 존재를 결혼 이야기가 상당히 진행될 때까지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악의적인 은폐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작은 문제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결혼 상대에게 몽이가 자신의 삶에서 이 정도로 중요한 존재였다면, 사실은 훨씬 일찍 알려야 했습니다. 반려동물뿐 아니라 종교, 자녀 계획, 부모 부양, 재정, 거주지처럼 결혼 후 공동생활을 근본적으로 좌우하는 문제는 ‘나중에 상대가 이해해 주겠지’ 하고 미룰 사안이 아닙니다. 이 사건이 8개월 뒤가 아니라 처음 몇 번의 만남에서 드러났다면 두 사람 모두 훨씬 덜 상처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이별을 실패라고만 볼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결혼 전에 드러났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만일 여성이 몽이를 친정에 보내고 결혼했다면 남편을 볼 때마다 ‘당신 때문에 내가 몽이를 보냈다’는 원망이 생길 수도 있었고, 반대로 몽이를 데리고 결혼했다면 남편은 털 하나, 짖는 소리 하나, 병원 방문 하나에도 ‘내가 처음부터 된다고 했는데’라는 불만을 쌓았을 수 있습니다. 작은 생활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훨씬 깊은 애정의 충돌이 있기 때문에 결혼 후에는 더 큰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진정한 결혼의 이상은 단순히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내면이 점점 하나의 선과 진리를 향하면서 마음과 삶이 결합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 전에는 ‘우리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만큼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의 질서가 함께 살아갈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 두 사람은 바로 그 지점에서 함께 갈 수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몽이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는 뜻이라기보다, 몽이가 아니었다면 한동안 보이지 않았을 두 사람의 깊은 차이를 드러내 주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질문, ‘5년을 같이 강아지와 8개월 만난 결혼 상대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도 사실 조금 다르게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강아지냐 남자냐’의 양자택일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나에게 맡겨져 의존하며 살아온 생명에 대한 책임과 앞으로 배우자와 이루어 결혼의 책임을 어떻게 함께 질서 있게 세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 질서 자체에 두 사람이 합의할 수 없다면 어느 한쪽이 악해서가 아니라 결혼생활의 중요한 토대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을 결혼 상대로 거르는 것이 합리적인가, 편견인가?’라는 질문에도 같은 답을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동물과 함께 사는 생활을 감당할 없으므로 그런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결혼 조건입니다. 그러나 ‘강아지 키우는 여자는 남편을 2순위로 두고 모성애도 부족하다’고 일반화한다면 그것은 편견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반려동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는 냉정하고 이기적이다’라고 일반화하는 것 역시 편견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가장 귀한 장면은 누가 이겼는가가 아니라, 마지막에 여성이 ‘ 사람은 자기 인생에 맞는 사람을 고른 것이고 저는 인생에 맞는 가족을 지킨 ’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데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나는 몽이를 지켰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몽이를 어떤 질서 안에서 사랑할 것인가? 다음 사람에게는 중요한 사실을 언제 어떻게 알릴 것인가?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사랑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을 어떻게 각각 제자리에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이별은 단지 ‘강아지 때문에 놓친 결혼’이 아닙니다. 결혼 직전에 두 사람이 서로의 깊은 애정 구조를 발견한 사건입니다. 아픈 발견이었지만, 결혼한 뒤에 발견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 사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입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사는 일이기 이전에, 사람의 사랑들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며 함께 살아갈 있는지를 확인하는 ’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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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덟 번째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성 크리스토포로스에 관한 오래된 기독교 전승을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성 크리스토포로스, 곧 영어권에서 ‘Saint Christopher’라고 부르는 인물입니다. 그의 전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강을 건너려는 어린아이를 등에 업었다가 그 아이가 점점 세상보다 무거워지고, 마침내 그 아이가 그리스도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역사적 사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방식보다는 오랜 기독교 전승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중심으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크리스토포로스는 처음부터 ‘가장 강한 존재’를 섬기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 왕이라고 생각하여 왕을 찾아가 섬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이 사탄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다면 사탄이 왕보다 강하구나’ 하고 사탄을 찾아갑니다. 다시 사탄을 섬기다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강한 분이구나’ 하며 그리스도를 찾아 나섭니다. 이 전승의 첫 부분만으로도 한 인간의 영적 여정을 상징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선한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을 하나씩 넘어가면서 마침내 참된 주권자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과정은 인간이 외적인 힘에서 내적인 힘으로 옮겨가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먼저 눈에 보이는 힘을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권력, 재산, 지위, 명예, 육체적 능력 같은 것들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처음 왕을 찾아간 것도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습니다. 왕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왕조차 두려워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의 생각은 흔들립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이 절대적인 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사탄을 찾아갔다는 대목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인간은 선의 능력보다 악의 능력이 더 강해 보이는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것 같고, 탐욕과 폭력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으며, 자기 욕망을 거리낌 없이 좇는 사람이 오히려 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악이 선보다 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악에는 자체적인 생명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악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그것을 뒤틀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그것은 궁극적인 힘일 수 없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마침내 사탄마저 두려워하는 그리스도를 찾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 이야기는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그는 지금까지 ‘가장 강한 자가 누구인가?’를 찾아다녔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은 더 강한 권력자를 찾아가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한 수도사가 그에게 뜻밖의 길을 알려 줍니다. 강가에서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을 업어 건네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섬기다 보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것이다.’ 가장 높은 분을 만나려는 사람에게 주어진 길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을 섬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오래된 전승은 놀랍도록 복음적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세상 끝까지 여행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찾아오는 사람을 등에 업으면 되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한 ‘쓰임(use)과 연결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종교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되고, 체어리티는 구체적인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길을 잃은 사람을 인도하며, 내가 가진 힘과 지식과 능력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토포로스에게는 큰 체격과 강한 육체가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그 힘을 ‘가장 강한 ’를 섬기는 데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힘의 참된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의 힘은 강한 자 곁에 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지 못하는 약한 사람을 등에 업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과 능력은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의 선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될 때 본래의 질서를 찾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아이 하나가 나타나 자신을 강 건너편으로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평소처럼 아이를 등에 업고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아이가 점점 무거워집니다. 강 가운데에 이르자 마치 온 세상을 등에 짊어진 것처럼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집니다. 가까스로 강을 건넌 크리스토포로스가 어떻게 어린아이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느냐고 묻자 아이는 자신이 세상의 죄를 짊어진 그리스도임을 밝힙니다.

 

이 장면은 전승 전체의 중심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을 찾아다녔지만, 정작 그분은 힘센 왕이나 위엄 있는 정복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등에 업을 수 있는 작은 어린아이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아이 안에 세상을 짊어진 무게가 있었습니다. 외적으로 가장 작은 모습 안에 내적으로 가장 큰 능력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보여 주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외형의 크기와 화려함을 보고 힘을 판단하지만 천국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주님께 가까운 천사일수록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지혜가 깊을수록 자신의 지혜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압니다. 선이 많을수록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가장 높은 것은 지배하려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오셨다는 복음의 질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토포로스라는 이름 자체도 이 이야기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Christophoros’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나르는 ’, 곧 ‘그리스도를 짊어진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조금 더 깊이 읽으면 단지 어느 날 어린 예수를 등에 업었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자기 삶 안에 모시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으로 운반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크리스토포로스’가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그리스도를 업고 강을 건넜지만, 실제로는 누가 누구를 지탱하고 있었겠습니까? 겉으로 보면 크리스토포로스가 어린 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크리스토포로스의 생명과 힘 자체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내가 주님을 위해 이것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더 깊이 깨달으면 ‘ 일을 있도록 나를 붙들고 계셨던 분도 주님이셨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이웃을 도왔고, 내가 봉사했고, 내가 헌신했고, 내가 복음을 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이 자유롭게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마친 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선한 것은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공로가 끼어들지 않는 선입니다.

 

이 대목은 수도와 헌신을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합니다. 수도생활이 깊어지고 희생이 커질수록 인간에게는 아주 미묘한 시험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버렸다’, ‘나는 이렇게 희생했다’, ‘나는 평생을 바쳤다’, ‘나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는 자기 공로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든 것을 버렸는데 내적으로는 오히려 더 큰 ‘’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 지점을 매우 엄격하게 봅니다. 참된 자기 부인은 단순히 재산과 지위와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이 행한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마음까지 내려놓는 데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신의 힘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발견했다는 데 있습니다. 가장 강한 자의 곁에서 힘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등에 업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이것은 ‘주님은 어디에서 만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아름다운 답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말씀과 예배와 기도 가운데 만나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쓰임 가운데서도 만나십니다.

 

영상 후반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크리스토포로스가 박해를 받아 신앙을 포기하라는 요구와 여러 유혹을 받았으나 끝까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다는 순교 전승도 소개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칼과 화살 등의 기적적 세부는 성인전의 전승적 성격을 감안하여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영적 중심은 분명합니다. 한번 참된 주인을 발견한 사람은 다시 이전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 역시 거듭남의 과정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강렬한 체험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진리를 발견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했을 때 오히려 그 진리가 실제로 자기 삶의 사랑이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시험들이 찾아옵니다. 진리를 알고 있을 때와 그 진리 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는 다릅니다. 선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와 자기 욕망을 포기해야 선을 선택할 수 있을 때도 다릅니다. 시험은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있는 지식에서 삶에 속한 것으로 옮겨 가게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이야기에서 ‘세상의 지배자는 왕도 사탄도 아니고 우리 예수 그리스도’라는 결론을 끌어냅니다. 이것은 이번 이야기의 중심을 잘 짚은 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라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단순히 입으로 ‘예수님이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의지와 판단과 욕망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 삶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의 계명이 충돌할 때 계명을 선택하고, 내 이익과 이웃의 유익이 충돌할 때 체어리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실제로 그 사람의 삶을 다스리는 왕이 되십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장면은 저는 오히려 화살도, 기적도, 순교도 아니라 ‘강가에서 사람을 업어 건네주는 크리스토포로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특별한 계시도 없었고 천국이 열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 앞에 온 사람을 자기 힘으로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평범한 쓰임 속으로 그리스도가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아주 특별한 체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을 사랑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정직하게 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맡겨진 직분과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곳이 바로 ‘강가’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뒤돌아보면 ‘그때 내가 업고 건넌 사람이 바로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이웃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앞선 영상들과 연결해서 보면 흐름도 흥미롭습니다. ‘연못 이야기’에서는 주님 안에 있어야 산다는 것을 보았고, ‘사과나무 이야기’에서는 자기 지혜보다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을 보았으며, ‘수도사 싸움’에서는 ‘ ’을 내려놓을 때 싸움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에서는 주님께 받은 힘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돌릴 때 그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모습을 봅니다. 서로 다른 수도사 이야기들이지만 ‘주님으로부터 받아 이웃을 향하여 흘려보내는 ’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모입니다.

 

이번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강한 분을 섬긴다는 것은 가장 강한 자의 곁에 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힘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웃의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바로 체어리티의 길에서 인간은 자신이 찾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크리스토포로스가 평생 찾아다닌 ‘가장 강한 ’이 마침내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그의 등에 올라왔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세상은 힘을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래 있는가’로 측정하지만, 주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으로 받쳐 있는가’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그리스도를 등에 업었던 그날, 그의 큰 몸과 힘은 비로소 자기에게 주어진 참된 쓰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거듭남의 중요한 한 모습일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얼마나 커질 것인가?’에서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누구를 건너게 것인가?’로 삶의 질문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SY.74, 강문호 수도사, ‘싸움을 할 수 없었던 두 수도사 - 하나님의 씨와 거듭남’ (20191224)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집트 사막의 어느 수도 공동체에 전해지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강문호 수도사 자신도 이 수도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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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8/2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0, ‘전능왕 오셔서’, 90, ‘주 예수 내가 알기 전입니다.

 

오늘부터 창4 절별 주석을 시작, 오늘은 그 첫 번째, 1절로 2, AC 글 번호로는 338번에서 345번입니다. 먼저 본문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1-2)

 

제목은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38-345 요약입니다.

 

AC.338-345 앞의 AC.324-337에서 제시된 4 전체의 개요를 바탕으로, 이제 4:1-2 표현을 하나씩 풀어 가며가인아벨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본격적으로 밝히기 시작합니다. 여기서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 태고교회를, 그들에게서 태어난가인아벨 교회 안에서 생겨난 신앙과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출생 이야기는 단순히 가정에서 아들이 태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내적 생명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떻게 구별되고, 마침내 서로 분리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338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가인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한 신앙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번째 자손, 처음 신앙이라고 하며, 그것을가인이라 부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는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신앙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에 사랑과 별개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바로 여기에서가인의 분리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이해할 때에는구별분리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날의 인간은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과정을 거칩니다. 문제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랑 없이도 신앙 자체가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본래 사랑을 섬겨야 신앙이 사랑과 독립하여 자기 자리를 주장하기 시작할 가인의 길이 열립니다.

 

AC.339-340 창세기 초기의잉태’, ‘출생’, ‘자손’, ‘아들’, ‘’, ‘이름’, ‘계보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태고인들은 이름을 통하여 어떤 교회적·교리적 실재를 나타냈으며, 그것들의 관계를 자연적인 출생과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자연계에서 자녀가 부모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듯이 교회 안에서도 하나의 교리와 상태가 다른 교리와 상태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4 계보를 단순히 개인들의 생물학적 족보와 시간적 연속으로만 읽어서는 됩니다. 말씀은 이러한 출생과 계보를 통하여 교회의 영적 상태들이 서로 어떻게 생겨나고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러한 원리는 4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이어집니다. ‘아들 교회의 진리와 신앙에 속한 것을, ‘ 선과 사랑에 속한 것을 나타낼 있으며, ‘낳다출생 새로운 교리와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단순히 첫아들이 태어났다는 의미를 넘어, 태고교회의 생명 가운데서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영적 변화를 묘사합니다. 바로 원리를 이해해야 이후에 이어지는 가인의 후손들과 5 계보 역시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교리의 연속으로 읽을 있습니다.

 

AC.341에서는 번째 자손인아벨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아벨형제 체어리티를 상징한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경쟁하는 원리가 아니라형제처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나중에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이는 사건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마침내 소멸시키는 교회의 내적 비극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깊이 있다고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다면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엇이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이며, 진리는 선을 향하고 안에서 살아 있을 비로소 참된 진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완전히 분리되면 겉으로는 여전히 신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안의 생명은 사라지게 됩니다.

 

AC.342-344아벨은 치는 자였다 말씀을 통하여 체어리티의 성격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선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며, ‘ 치는 그러한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벨이 치는 자였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단순한 감정이나 선한 의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체어리티에는 이웃의 선을 바라보고, 그것을 보호하고,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내려는 삶이 들어 있습니다.

 

반대로 AC.345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다 말씀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교회를 의미하지만, 가인이땅을 경작하는 되었다는 것은 체어리티 없이 신앙만을 붙들면서 점차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게 상태를 나타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치는 반면,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외적인 것에 머무는농사하는 됩니다. 이렇게 직업의 차이는 교회적 상태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38-345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가인의 타락 처음부터 극단적인 악의 모습으로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출발점은 매우 미세했습니다. 참된 신앙을 버린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자체로 하나의 으로 바라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분리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은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주장하고, 결국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게 됩니다. 이후 4에서 나타나는 가인의 분노와 안색의 변화, 그리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바로 분리가 점차 심화된 결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내가 무엇을 믿는가?’ 아닙니다. ‘내가 믿는 진리가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는가?’ 중요합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자신의 악을 보고 버리며,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수록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사랑보다 교리적 우월성과 승리를 앞세우게 된다면, 아무리 교리 자체가 참되더라도 안에서가인의 분리 시작될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이러한 분리를 처음부터 강제로 막지 않으신 데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중요한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된 방향을 원하시거나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십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는 강요될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보여 주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돌이킬 길을 마련하시지만 인간이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회복의 길을 계속 마련하신다는 섭리를 함께 보여 줍니다.

 

결국 AC.338-345 중심은가인은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다라는 단순한 대응에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입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을 때에만 참된 신앙입니다. 가인은 결합이 처음 흔들리기 시작한 상태를, 아벨은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체어리티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치는 농사하는 라는 대비를 통하여 길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한쪽은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쪽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점차 외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향합니다.

 

따라서 구간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신앙이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가?’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를 마침내 우리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선과 결합시키는 역사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을 둘은 다시 본래의 질서를 이루게 됩니다. 그때 신앙은 단순히 옳은 것을 알고 고백하는 신앙을 넘어, 실제 삶에서 선을 낳는신앙다운 신앙 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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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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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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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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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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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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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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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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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보충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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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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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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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23(D1)

 

 

2665, 2, 창4.2, 2026-08-23(D1)-주일예배(창4,1-2, AC.338-345),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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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16, 창4, AC.324-337), ‘가인과 아벨,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하여’

※ 오늘(2026/08/1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9,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찬89, ‘샤론의 꽃 예수’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시작 전 먼저 창4 전체 개요를 살피는 ‘창4 본문, 개요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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