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1)

 

AC.296

 

새끼 염소와 양, 염소, 그리고 해달(badgers)과 숫양의 가죽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속뜻으로부터 분명합니다. 이 사실은 야곱에 관한 말씀과 성막에 관한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야곱에 대하여는 그가 에서의 옷을 입고(clothed with the raiment of Esau), 맨살이 드러난 손과 목에는 염소 새끼의 가죽(with skins of kids of the goats)을 두른 것으로, 그리고 이삭이 그 냄새를 맡고 말하기를,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the smell of my son is as the smell of a field)(27:15, 16, 2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That the skins of kids, sheep, goats, badgers, and ram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s, is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ere Jacob is treated of, and also where the ark is treated of. Of Jacob it is said that he was “clothed with the raiment of Esau,” and on his hands and on his neck, where he was naked, “with skins of kids of the goats,” and when Isaac smelled them, he said, “the smell of my son is as the smell of a field” (Gen. 27:15, 16, 27).

 

15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7:15, 16, 27)

 

이 가죽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 대목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밝히게 될 것입니다. 또 성막에 대하여는 장막 덮개를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으로(of rams’ skins and badgers’ skins) 만들라 하였고 (26:14, 36:19), That these skin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s,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een in that place. Of the ark it is said that the covering of the tent was “of rams skins and badgers skins” (Exod. 26:14; 36:19),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26:14; 36:19)

 

이스라엘 자손이 길을 떠날 때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법궤를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었으며, 상과 그 모든 기구,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 금 제단과 섬기는 데 쓰이는 모든 기구와 번제단도 모두 해달의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4:6-14). and that when they set forward Aaron and his sons covered the ark with a covering “of badgers skins,” and likewise the table and its vessels, the candlestick and its vessels, the altar of gold, and the vessels of ministry and of the altar (Num. 4:6–14).

 

6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7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8홍색 보자기를 그 위에 펴고 그것을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9청색 보자기를 취하여 등잔대와 등잔들과 불 집게들과 불똥 그릇들과 그 쓰는 바 모든 기름 그릇을 덮고 10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를 해달의 가죽 덮개 안에 넣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1금제단 위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고 그 채를 꿰고 12성소에서 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를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3제단의 재를 버리고 그 제단 위에 자색 보자기를 펴고 14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 곧 불 옮기는 그릇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부삽들과 대야들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두고 해달의 가죽 덮개를 그 위에 덮고 그 채를 꿸 것이며 (4:6-14)

 

이 가죽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 역시 그 대목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밝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법궤와 성막, 곧 회막 안에 있는 모든 것, 더 나아가 거룩한 의복을 입은 아론에게 속한 모든 것이 천적이며 영적인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저마다의 표상이 없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will in that place also be seen that these skin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 for whatever was in the ark, the tabernacle, or the tent, yea, whatever was upon Aaron when clothed with the garments of holiness, signified what is celestial spiritual, so that there was not the least thing that had not its own representation.

 

 

해설

 

AC.296은 앞글에서 말한 ‘가죽옷’의 의미를 더욱 확장, 설명합니다. 앞에서는 주님께서 타락한 사람에게 입혀 주신 ‘가죽옷’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이 의미가 창세기 한 곳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상응 원리임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가죽이라는 상징은 우연히 사용된 것이 아니라, 말씀 전반에 걸쳐 일관된 영적 의미를 지닌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예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형 에서의 옷을 입고, 손과 목에는 염소 새끼의 가죽을 둘렀습니다. 겉으로만 읽으면 이것은 단순한 변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행위에도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가죽은 사람의 가장 바깥을 감싸는 것이므로, 사람 안에 있는 선이 외적 삶 속에서 드러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염소 새끼의 가죽은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겉 사람 안에 자리 잡아 사람의 삶을 감싸고 보호하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 예는 성막입니다. 성막은 주님과 천국, 그리고 거듭난 사람을 대표하는 가장 거룩한 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막의 가장 바깥 덮개가 숫양의 가죽과 해달(badgers)의 가죽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가장 거룩한 것조차 세상 가운데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호하는 가장 바깥층이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천적이고 영적인 것을 단순히 둘러싸는 외피가 아니라, 그것을 세상 속에서 보존하고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민수기에서 법궤와 상, 등잔대, 제단 등 모든 거룩한 기구를 이동할 때마다 해달 가죽으로 덮었던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이동하는 동안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거룩한 것의 보호였습니다. 상응으로 보면 사람 안에 있는 주님의 선과 진리 역시 일상의 삶 속에서 보호받아야 합니다. 그 보호막이 바로 영적 선과 자연적 선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만 있으면서 생활 속에서 선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쉽게 손상되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죽은 단순한 덮개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존하는 삶의 실제 모습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숫양과 해달 같은 동물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가죽입니다. 살아 있는 동물은 애정과 선의 다양한 상태를 상징하지만, 그 가죽은 그러한 선이 가장 바깥의 생활 속에 정착, 사람의 삶을 감싸고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신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타락 이후 사람은 더 이상 천적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라는 새로운 보호막을 마련, 사람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습니다.

 

글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는 법궤와 성막, 회막, 그리고 아론의 거룩한 의복에 이르기까지 ‘가장 작은 것 하나도 고유한 표상이 없는 것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이 일부 상징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성막의 재료와 색깔, 기구와 의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천국의 실재를 나타내도록 마련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깊이 이해하려면 이러한 표상과 상응의 질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AC.296은 성경의 여러 본문을 하나의 상응으로 연결하면서,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사람의 가장 바깥 삶을 형성하고 보호하는 주님의 선물임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잃은 뒤에도 주님께서 가죽옷을 입혀 교회를 보존하신 것처럼, 성막과 법궤도 가죽으로 보호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주님께서는 말씀을 배우고 선을 실천하는 일상의 삶을 통하여 우리 안의 영적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십니다. 이처럼 가죽은 단순한 외피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내적 생명을 세상 가운데 안전하게 보존하시기 위하여 마련하신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의 보호막을 의미합니다.

 

 

심화

 

1. ‘27:15, 16, 27

 

 

AC.296, 심화 1, ‘창27:15, 16, 27’

AC.296.심화 1. ‘창27:15, 16, 27’ 15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bygrace.kr

 

2. ‘26:14; 36:19

 

 

AC.296, 심화 2, ‘출26:14; 36:19’

AC.296.심화 2. ‘출26:14; 36:19’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출26:14; 36:19) 스베덴보리가 AC.296에서 출26:14와 출36:19를 인용한 이유는

bygracetistory.tistory.com

 

3. ‘4:6-14

 

 

AC.296, 심화 3, ‘민4:6-14’

AC.296.심화 3. ‘민4:6-14’ 6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7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

bygrace.kr

 

 

 

 

AC.295, 창3:21,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5 그들을 가리켜 ‘가죽옷을 입었다’(clothed with a coat of skin)고 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을 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95.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첫 번째 후손들 가운데는 아직 태고교회의 선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에게서는 그 선이 더욱 외적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그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선과 진리를 아는 그런 상태는 아니었지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부여받아 교회의 상태를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위 해설 내용 중 나오는 위 표현은 거의 오늘날 우리 모습과 같아 보이는데요, 그렇다면 태고교회 범주에 속하는 저들과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기독교회를 거치며, 거의 그 끝자락에 있는 것 같은 오늘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언뜻 보면 AC.295의 설명은 오늘날 신앙인들의 상태와 거의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연결해서 보면, 둘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남아 있는 선의 출처’입니다.

 

태고교회의 첫째, 둘째, 셋째 후손들은 비록 퍼셉션은 잃었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라는 거대한 생명의 줄기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천적 생명의 흔적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받은 영적 선과 자연적 선도 태고교회의 천적 선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심은 아직 살아 있었고, 외적인 층만 점차 두꺼워진 것입니다.

 

반면 오늘날 우리는 태고교회의 생명에서 유구한 세월을 지나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그리고 기독교회를 거치면서 인류 전체의 상태는 계속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를 스스로 직관하는 능력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과 교리, 양심을 통하여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후손들과 오늘 우리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또 하나의 차이는 ‘리메인스의 성격’입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에게 남아 있던 것은 태고교회의 실제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각 사람의 일생 동안 조금씩 심어 주시는 선과 진리입니다. 어린 시절 순수한 애정, 부모를 신뢰하던 마음, 진실을 사랑했던 경험, 이웃을 불쌍히 여겼던 마음 등을 주님께서 보존하셨다가 거듭남의 기초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리메인스는 태고교회의 유산이라기보다, 각 사람 안에서 새롭게 마련되는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차이는 ‘교통의 방식’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천사들과 거의 끊임없이 교통하였습니다. 퍼셉션을 잃은 뒤에도 그 교통은 아직 상당 부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은 일반적으로 천사들과 의식적으로 교통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 교통을 의식 밖에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양심을 통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며, 자유롭게 선택하는 가운데 인도받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사람이 반드시 더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주님께서는 각 시대에 맞는 구원의 길을 마련하신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필요했고, 고대교회에는 표상과 상응이 필요했으며, 유대교회에는 의식과 희생 제사가 필요했습니다. 기독교회에는 말씀과 신앙이 주어졌고, 새교회에는 말씀의 속뜻이 열렸습니다. 시대마다 주어지는 은혜의 형태는 달라도,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시려는 목적은 언제나 같습니다.

 

그래서 AC.295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조금 다른 빛이 보입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은 천적 선을 잃은 뒤, 사실은 희미해진 뒤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입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처음부터 퍼셉션을 모르고 태어나지만, 주님께서는 말씀과 리메인스, 그리고 양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형성해 가십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그들이 ‘천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내려온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올라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방향이 정반대인 것입니다.

 

이 점이 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은 높은 산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도 아직 산의 공기를 품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오늘 우리는 골짜기에서 출발하여 주님의 인도를 따라 조금씩 산을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두 경우 모두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중요하지만, 하나는 잃은 것을 보호받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없는 것을 새롭게 형성 받는 과정입니다. AC.295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오늘 우리 역시 주님께서 각자의 상태에 맞는 ‘가죽옷’을 입혀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어느 시대의 사람도 그의 상태에 맞는 선을 마련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며, 그 선을 통하여 언제나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AC.295, 창3:21,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5 그들을 가리켜 ‘가죽옷을 입었다’(clothed with a coat of skin)고 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을 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1)

 

AC.295

 

그들을 가리켜 가죽옷을 입었다(clothed with a coat of skin)고 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은 순진무구함(innocence)으로 인해 벌거벗었다(naked)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걸 잃었을 때,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는데, 이 역시 벌거벗음(nakedness)이라 합니다. 모든 것이 역사적으로 서로 이어져 보이게 하기 위해, 그러니까 태고교회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에 따라, 여기서는 그들이 벌거벗지 않도록 옷을 입었다(clothed lest they should be naked), 다시 말해 악 가운데 있지 않도록 옷을 입었다 한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이 31절로 13절까지 그들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내용으로 분명하며, 또한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Jehovah God made them a coat of skin, and clothed them) 한 사실로도 분명합니다. 여기서는 그 교회의 첫 번째 후손들, 그리고 특히 두 번째, 세 번째 후손들을 다루는데, 그들은 이러한 선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The reason why they are said to be “clothed with a coat of skin,” is tha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said to be “naked,” on account of their innocence; but when they lost their innocence they became conscious that they were in evil, which also is called “nakedness.” That all things might appear to cohere historically (in accordance with the way of speaking of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are here said to be “clothed lest they should be naked,” or in evil. Their being in spiritual and natural good is evident from what was remarked above concerning them, from verse 1 to 13 of this chapter, as well as from its being here related that “Jehovah God made them a coat of skin, and clothed them”; for it here treats of the first—and more especially of the second and third—posterities of the church, who were endowed with such good.

 

 

해설

 

AC.295는 ‘가죽옷’이라는 표현이 왜 사용되었는지를 먼저 태고교회의 ‘벌거벗음’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이 벌거벗었다는 것은 단순히 옷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악을 감추거나 선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마음이 없었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의지에는 위장과 꾸밈이 없었으므로, ‘벌거벗음’은 수치가 아니라 순진무구함(innocence)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태고교회 사람들이 순진무구함을 잃게 되자 ‘벌거벗음’의 뜻도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살았으므로 자기 상태를 감추려 하지 않았지만, proprium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악과 수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 이후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이 아니라 선이 결여된 상태, 곧 악 가운데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이야기가 역사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벌거벗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외적 서술, 그러니까 무슨 스토리 텔링 같은 이런 서술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 방식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영적인 것들을 자연적인 사물로 표현하던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벌거벗음’, ‘가죽’, ‘’, ‘입히심’은 모두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벌거벗지 않도록 옷을 입혔다’는 것은 그들을 악 가운데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옷은 사람의 내면을 덮고 보호하는 외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이 천적 선과 퍼셉션을 잃은 뒤에도 주님께서는 그가 완전히 선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더 외적인 선을 주셨습니다. 그 선은 이전의 순진무구함과 같은 내적 선, 곧 천적 선은 아니었지만, 악을 억제하고 사람을 보존할 수 있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여기서 ‘가죽’은 인간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죽, 그러니까 피부가 몸의 외부를 덮듯이, 가죽옷은 속 사람의 천적 생명이 사라진 뒤 인간에게 남겨진 겉 사람의 선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외형적 착함이나 세상에서 인정받는 도덕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남아 있는 상태에 맞추어 주신 선이며, 이를 통하여 인간이 더 깊은 타락으로 빠지지 않도록 붙드시고 보호하신 것입니다.

 

AC.295는 이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가운데 있었다고 말합니다. 영적 선은 신앙의 진리에서 비롯,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하는 선이며, 자연적 선은 그러한 영적 선이 겉 사람의 생활과 행동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선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질서 있고 유익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선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서로 분리된 두 선이라기보다, 속에서 받은 선과 그것이 생활 속에 나타난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교회 자체보다 그 교회의 후손들을 다룬다고 밝힙니다. 첫 번째 후손들 가운데는 아직 태고교회의 선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에게서는 그 선이 더욱 외적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그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선과 진리를 아는 그런 상태는 아니었지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부여받아 교회의 상태를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가죽옷’은 바로 이처럼 교회의 생명이 내적인 것에서 점차 외적인 것으로 옮겨 간 상태를 보여 줍니다.

 

AC.295는 ‘여호와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말 속에 타락한 인간을 향한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순진무구함과 천적 선을 잃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벌거벗은 채, 곧 악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외적인 영적 선과 자연적 선으로 그를 덮고 보호하셨으며, 그 선을 통하여 새로운 교회의 후손들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AC.295, 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AC.295.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첫 번째 후손들 가운데는 아직 태고교회의 선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에게서는 그 선이 더욱 외적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bygrace.kr

 

 

 

AC.296, 창3:21, ‘가죽‘의 상응 원리, 성경 전체를 관통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6 새끼 염소와 양, 염소, 그리고 해달(badgers)과 숫양의 가죽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bygrace.kr

 

AC.294, 창3:21, ‘가죽옷‘과 체어리티, 그리고 양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4 또한 ‘가죽옷’(coat of skin)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도, 속뜻의 계시와 함께, 이어지는 말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