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EO.004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 - 영원한 출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해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의 군주성과 함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가르침이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태어났다고 말할 때 그에게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아들이 태어나며, 태어난 아들은 아버지보다 나이가 어리고 자신의 존재를 아버지에게 의존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자연적인 출생의 관념을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어느 시점에 존재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 아니며, 성부보다 나중에 생겨나셨거나 성부보다 열등한 하나님이시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자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시며,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출생은 시간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안의 영원한 관계를 뜻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성자의 신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보존하려는 동방정교회의 핵심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접하면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영원히 태어난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부터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성부에게서 영원히 태어나신 별개의 신적 위격이라는 주장은 반드시 같은 뜻입니까? 바로 이 질문에서 동방정교회의 전통적 삼위일체 신학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동방정교회의 성자의 영원한 출생 교리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당시 아리우스(Arius)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신 분이 아니며, 성부에 의해 존재하게 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견해에서 성자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일 수는 있어도, 성부와 동일한 의미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는 이러한 주장을 배격하고,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창조되신 분이 아니며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때 사용된 중요한 용어가 ‘동일 본질’(homoousios)입니다. 이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성자를 모든 시대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독생자, 빛에서 나온 빛, 참하나님에게서 나신 참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이 표현들은 성자가 성부에게서 기원하신다는 점과 그분 역시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함께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정교회가 말하는 ‘영원한 출생’(eternal generation)은 성자가 만들어지셨다는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신성이 둘로 나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는 신적 본질에서 완전히 동일하시며, 구별되는 것은 성부께서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 나시는 분이시라는 위격적 관계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의 이 교리를 성자가 성부보다 낮은 하나님이라는 주장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교회가 아리우스주의에 맞서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 진리를 거꾸로 해석하는 일이 됩니다.

 

8세기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은 ‘정통신앙 해설’(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제1권 8장에서 이 문제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가 언제나 함께 존재하시므로 성부는 계셨지만 성자는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성부가 처음에는 성부가 아니셨다가 나중에 성자를 낳으심으로써 성부가 되셨다면, 하나님 안에 변화가 발생했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므로,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시는 일도 시작이나 끝이 없는 영원한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불과 빛의 관계를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합니다. 불이 타오를 때 빛이 함께 나타나듯, 성부와 성자는 시간적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는 관계가 아니라 언제나 함께 계시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비유가 하나님의 신비 전체를 설명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불과 빛은 피조된 현상이지만,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창조되지 않은 신적 실재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시는 방식 자체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인정합니다. 결국 정교회의 영원한 출생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내적 생명을 완전히 파악했다는 선언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를 성경과 교회의 신앙고백 안에서 가능한 한 충실하게 표현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성자의 영원한 출생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가장 먼저 살펴볼 본문은 요1:1-3입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만물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이어 요1:14에서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말씀을 통해 성자께서 성육신 이전부터 성부와 함께 영원히 존재하셨으며,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다고 이해합니다. 히1:3에서 아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그 본체의 형상으로 설명하는 말씀도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또한 요5:26에서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는 말씀을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하지만, ‘영원한 출생’이라는 후대의 신학적 공식 자체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말씀의 영원성과 그 말씀을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는 별개의 신적 위격으로 이해하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정교회는 두 내용을 하나의 진리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분별하려면 성경이 무엇을 직접 말씀하는지, 그리고 각 신학 전통이 그 말씀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는지를 신중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19에서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한 전제를 정면으로 검토합니다. 그는 영원부터 계신 성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가르침을 비판하면서, 영원부터 계신 분은 주님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주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니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원부터 존재하신 하나님 자신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 하나님께서 취하신 인성이 성자라고 가르칩니다. 즉, ‘영원부터 계신 주님’과 ‘영원부터 별개의 위격으로 존재하는 성자’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주장은 단순히 성부와 성자라는 명칭의 사용 시기를 다르게 정하자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가 창조 이전부터 서로 구별되는 두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다는 구조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DL.19-20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취하신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영원부터 따로 존재하던 성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인성을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성자의 신성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출생한 별개의 신적 위격이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라 불리는 인성의 근원이 바로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립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이 눅1:35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시므로 태어날 거룩한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성자에 관한 중요한 성경적 증거로 이해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92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보내실 때 취하신 인성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잉태되었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인성의 근원은 피조된 인간의 생명이 아니라 신성 자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성자 이해가 일반적인 인간의 출생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실제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 인성을 생기 있게 하시는 가장 내적인 생명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인성은 여느 인간의 인성과 동일한 출발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으며, 마침내 신성과 완전하게 하나가 된 신적 인성을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성자의 탄생은 신적 존재 하나가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신 성육신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영원부터 계신 성자는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님의 영원한 신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성부와 구별된 영원한 성자 위격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육신 이전에 존재하셨던 ‘말씀’(Logos)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두 전통의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동방정교회는 요1:1의 말씀이 곧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신 성자이시며, 이 성자가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성육신은 영원한 성자 위격이 인간 본성을 취하신 사건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신적 진리로 이해합니다. ‘참된 기독교’ TCR.85-88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적 선과 분리되지 않은 신적 진리로서 세상에 내려오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적 진리는 하나님과 떨어져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신적 실체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신적 지혜이며, 신적 선과 영원히 하나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신적 진리가 하나님과 분리된 또 다른 인격으로 존재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적 선과 신적 진리가 영원부터 하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바로 이 신적 진리가 인간 세계에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뜻이며, 그 과정에서 신적 선이 분리되거나 제외된 것은 아닙니다. 결국 정교회는 영원한 말씀을 성자의 영원한 위격으로 이해하고, 스베덴보리는 영원한 말씀을 한 분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신적 진리로 이해합니다. 두 전통 모두 말씀이 영원하며 신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말씀이 영원부터 별개의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는가 하는 질문에는 서로 다른 대답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반드시 피해야 할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성자의 영원한 위격적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에게 특별한 능력을 받은 인간으로 이해했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신 분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주님의 신적 인성을 피조된 인간의 본성이 신성과 외적으로 결합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완전하게 하나로 이루셨으며, 부활하신 뒤에는 인성에 관해서도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설명은 동방정교회의 성육신 교리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정교회는 영원한 성자 위격이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함께 가지시며, 두 본성이 혼합되거나 변화되지 않으면서 한 위격 안에 결합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취하신 인성이 영화의 과정을 통하여 신적 인성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양쪽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고백하지만, 그 신성이 인성과 결합하는 구조와 영화의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정교회의 성자 이해를 인간 예수를 신으로 높인 가르침으로 묘사해서는 안 되며, 스베덴보리의 성자 이해를 예수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가르침으로 묘사해서도 안 됩니다. 양쪽의 차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신가 하는 문제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어떤 방식으로 계시며 자신을 나타내셨는가 하는 문제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동방정교회가 성자의 영원한 출생을 강조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보존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시점에 성자를 낳으셨다면 그 이전에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신적 친교가 창조 이전부터 완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관심 자체에는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이 나타난 뒤에야 시작된 것이 아니며, 세상의 어떤 존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께 사랑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영원부터 두 신적 인격 사이의 관계를 전제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신적 인격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본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신적 사랑과 지혜는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고 계셨으며, 창조는 그 사랑이 피조물에게 전달되고 피조물이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하시는 신적 목적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세 위격의 상호 관계보다 한 분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서 이해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의 표현을 달리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어떤 구조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차이는 우리의 기도와 예배에도 영향을 줍니다. 동방정교회는 영원하신 성자가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분 안에서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정교회 신자의 예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보다 열등한 신적 중개자가 아니라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성자 신앙을 성부와 성자라는 두 신을 섬기는 신앙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정교회는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위격을 고백하며, 모든 신적 예배가 하나의 신적 생명을 향한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앙인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한 분의 신적 인격을 향한 분명한 관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만일 영원부터 계신 성부와 영원부터 계신 성자를 서로 구별되는 두 신적 주체로 상상하면서 그 두 존재를 하나의 하나님으로 결합하려 한다면,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격적 단일성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그분 안에 계신 성부께 나아가는 것이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부는 주님 밖에 계신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며, 성령도 주님과 별도로 활동하는 독립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기도의 중심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어떻게 구별하여 부를 것인가보다, 신적 삼위일체가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향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정확한 관념을 갖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자의 영원한 출생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한다면, 그의 교리적 지식이 곧 영적 성숙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신론을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교리적 이해를 다른 교회 신자들을 판단하고 멸시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그 역시 주님의 사랑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Sacred Scripture, 1763) SS.92에서 잘못된 교리 자체만으로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되며, 악한 삶과 진리를 파괴하도록 확증한 거짓이 문제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종교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신에게 전해진 모든 교리의 진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더 밝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가 성자의 영원한 출생을 고백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신자들의 내적 신앙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실제로 충돌하는 부분을 마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모호하게 처리해서도 안 됩니다. 진리를 분별하되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교리적 차이를 명확하게 밝히되 상대방 안에 있는 선과 진리까지 부정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십니까? 동방정교회는 성자가 시간 이전부터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는 참하나님이시며,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다고 고백합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이나 성부보다 낮은 존재로 이해하지 않으려는 교회의 신앙적 노력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고백 안에는 주님의 참된 신성과 영원성을 지키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성자가 영원부터 성부와 구별된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영원부터 계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성자가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인성을 영화롭게 하여 신성과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셨고, 그리하여 인성에 관해서도 참으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성자의 참된 신성은 영원한 별개의 위격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과 그분의 영화된 신적 인성의 완전한 일치에서 이해됩니다. 요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선언과 요14:9의 주님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는 선언은 이러한 관점에서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늘 어딘가에 계신 성부와 그분에게서 영원히 태어나신 성자를 각각 상상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바로 그분이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따라야 할 한 분 주님이심을 깨닫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교리의 이해에만 머물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악을 멀리하고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하는 거듭남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EO.004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자가 모든 시간 이전부터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며,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참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은 성자를 피조물이나 성부보다 열등한 존재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영원성을 보존하려는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영원부터 계셨다는 사실과 성자가 영원부터 구별된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다는 주장을 구별합니다. 그의 가르침에서 영원부터 계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며, 성자는 그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을 가리킵니다. 또한 성육신 이전부터 존재한 말씀은 하나님과 구별된 또 하나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신적 선과 영원히 하나를 이루는 하나님 자신의 신적 진리입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성자의 영원한 위격적 존재와 성육신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분의 신성과 신적 인성이 완전하게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 받은 선과 진리를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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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3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 성부의 군주성과 신적 일치의 문제

 

해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특별히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처음 이 말을 들으면 성부 하나님이 성자와 성령보다 더 높으신 분이며,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서 신성을 받아 존재하는 종속적인 신적 존재들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이해를 분명하게 거부합니다. 정교회가 말하는 ‘성부의 군주성’(monarchy of the Father)은 성부가 다른 두 위격보다 더 강하거나 더 높은 신성을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가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의 유일한 인격적 근원이시라는 뜻입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시지만, 세 위격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십니다. 따라서 성자와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며, 성부보다 늦게 존재하기 시작하신 분들도 아닙니다. 정교회는 오히려 성부의 군주성을 통해 하나님의 일치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성부가 신적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일치는 성부라는 한 위격으로부터 설명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신학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은 초기 교부들의 삼위일체 논의, 특히 4세기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대 바실리오스(Basil the Great),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azianzus), 니사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yssa)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완전하게 인정하면서도, 세 위격의 구별과 하나님의 일치를 함께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때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원인’(aitia) 또는 ‘근원’(arche)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이라는 말은 자연계에서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내거나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한 존재가 뒤의 존재를 발생시키는 인과관계와 다릅니다. 성부는 성자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낳으시며, 성령을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원한 발출 근원이십니다. 따라서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서 비롯되지만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동일하게 신성이시며, 동일하게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 미국 정교회(OCA)의 교리 해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까닭을 한 분 성부에게서 설명하면서,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분리되지 않고 동일한 신적 생명 안에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성부가 세 위격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 위격의 영원한 관계를 성부의 근원성으로 설명하는 정교회 특유의 신학적 구조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용어상의 문제를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라는 표현은 동방정교회의 핵심 사상을 전달하지만, 자칫 신적 본질 자체가 성부보다 나중에 생겨났거나, 성부가 어떤 신성을 먼저 소유한 다음 그것을 성자와 성령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정교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개의 신적 본질을 각각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고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십니다. 성부의 근원성이란 이 공통된 신적 본질보다 앞서 존재하는 별도의 원인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각각 성부와 맺는 영원한 위격적 관계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이시고 성령의 발출 근원이시지만, 그 때문에 성자와 성령보다 더 신적이신 것은 아닙니다.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은 그 방식에서 구별되지만, 두 위격의 신성에는 어떠한 등급 차이도 없습니다. 또한 정교회는 성부의 군주성을 강조하면서도 세 위격이 하나의 신적 의지와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공유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부께서 홀로 결정하시고 성자와 성령이 그 결정에 복종하는 세 신적 주체의 협력 구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가르침을 공정하게 이해하려면 ‘성부가 유일한 근원’이라는 말과 ‘세 위격이 동일한 신성’이라는 말을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동방정교회가 이러한 가르침의 근거로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 가운데 하나는 요15:26입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교회는 여기서 성령의 영원한 발출이 성부에게서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을 확인합니다. 또한 요5:26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며, 요1:18에서는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나타내셨다고 증언합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말씀들을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관계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요10:30에서 예수께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기록하며, 요14:9-11에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가르치신 사실을 전합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성부가 근원이시라는 이해를 뒷받침하는 표현과 성부와 성자의 완전한 일치를 증언하는 표현이 함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말씀들이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두 위격적 관계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성육신하신 한 분 주님 안에서 근원적인 신성과 그 신성이 취하신 인성의 관계를 나타내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성경의 본문 자체와 그 본문을 해석하는 신학적 체계를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성경을 읽으면서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163-169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그것을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의 관계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로 이해합니다. 그는 이를 인간의 영혼과 몸과 활동에 비유합니다. 인간에게 영혼과 몸과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 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다고 해서 세 신적 인격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부는 한 분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이시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성육신을 통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고,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특히 TCR.167에서 스베덴보리는 성부의 신성이 주님의 영혼에 해당하고, 성자의 신적 인성이 그 영혼과 하나를 이루는 몸에 해당하며, 성령은 영혼과 몸이 하나 되어 나타내는 활동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의 구조로 축소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본질과 인격 모두에서 한 분이심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성부는 신적 근원이시지만, 그 성부는 성자와 구별되어 영원히 존재하는 별도의 신적 인격이 아닙니다. 성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이시며, 성자는 그 신성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이십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과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이 차이를 이해할 때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성육신과 영화의 관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29-36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취하여 세상에 오셨으며, 지상 생애 동안 자신의 인성을 점차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완전하게 하나로 만드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영화’(glorification)는 단순히 예수께서 부활 후 영광스러운 지위에 오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유한한 인간적 상태를 시험과 승리를 통해 벗으시고, 자신의 근원적인 신성으로부터 신적 인성을 이루신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본래부터 따로 존재하던 두 신적 인격이 영원히 관계를 맺는 구조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서 근원적인 신성과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인성의 관계로 이해됩니다. 요14:10에서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영혼이 몸 밖에 따로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아니듯, 성부는 성자 밖에 계신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신성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단순한 명칭의 차이로 없애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성과 인성의 실제적인 구별과 그 결합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결과가 한 분 신적 인격 안의 완전한 일치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의 신론에서는 성부의 근원성을 성자와의 영원한 위격적 관계보다 주님 자신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정교회가 강조하는 성부의 군주성 안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 안에 둘 이상의 독립적인 신적 근원이 존재할 수 없다는 통찰입니다. 정교회는 성부를 유일한 근원으로 고백함으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 하나님이라는 이해를 거부합니다.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경쟁이나 권력의 서열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생명과 사랑과 의지 안의 완전한 일치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여러 신적 권력으로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러한 일치의 중요성을 강하게 강조합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근원을 성부라는 한 위격에 두면서도 성자와 성령을 별개의 영원한 위격으로 인정하는 구조가 신적 인격의 완전한 단일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봅니다. 동방정교회가 ‘한 근원으로부터 세 위격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설명한다면, 스베덴보리는 ‘한 분 하나님 안에 근원적인 신성과 신적 인성과 신적 역사하심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두 견해를 단순히 같은 진리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교회에서 영원한 세 위격의 실재는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내용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인격적 단일성은 바로 그러한 세 위격의 영원한 구별을 거부하는 핵심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성부께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실제 신앙의 문제에서도 드러납니다. 동방정교회의 예배는 성부께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아가는 구조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보다 열등하므로 인간이 그분들을 거쳐 더 높은 하나님께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등하게 예배하며, 성자를 통하고 성령 안에서 성부께 나아간다는 표현을 세 위격의 구별과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드러내는 전례적 언어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정교회 신자의 기도를 마치 두 신적 중개자를 통하여 멀리 계신 성부의 허락을 얻으려는 행위처럼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인간 사이에 서 계신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의 신성이 그분 안에 완전하게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14:6에서 주님께서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한 신적 인격을 거쳐 다른 신적 인격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하여 그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에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성부를 제외하고 성자만을 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가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시는 주님 자신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성부를 근원적인 신성이라고 부르고 성자를 신적 인성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신성만이 참된 하나님이고 인성은 그보다 낮은 어떤 피조물적 부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더 이상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적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성과 완전하게 결합하여 신적 인성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신성에 관해서만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인성에 관해서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을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진 보이지 않는 절대자로만 생각하지 않도록 합니다. 보이지 않는 신성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성부는 근원적인 신성이시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도 성부가 성자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성과 신적 인성의 결합을 영혼과 몸의 일치에 비유하지만, 그 비유는 신적 인성이 신성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유한하고 피조된 것이지만,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성부는 신성, 성자는 인성’이라는 간단한 공식에 머물지 않고, 성자는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신적 인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계신 두려운 권위자로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자비로운 중보자로 여긴다면, 그의 신앙 안에는 서로 다른 두 신적 성품에 대한 관념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을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에서 직접 도출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 역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신적 사랑과 선과 지혜를 공유하신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단일성이 우리의 실제 생각과 기도 속에서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는 어느 교회에 속한 신자든 살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점에서 한 분 주님께 우리의 이해와 사랑을 집중하도록 안내합니다. 주님께서 사랑이시고 지혜이시며, 그분 안에 근원적인 신성이 완전하게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안에 서로 대립하는 사랑과 의지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이름을 부르거나 하나님의 신비에 관한 올바른 개념을 소유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이고,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치를 고백하면서 자신의 삶에서는 사랑과 진리를 분리한다면, 그 신앙고백은 아직 자신의 내면에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성부의 군주성이라는 어려운 교리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진리는,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인간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정교회의 교부들이 성부의 근원성과 세 위격의 일치를 설명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철학적 개념 속에 완전히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신적 신비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그 계시의 중심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를 분별할 때 우리는 교리적 정확성만으로 상대방의 신앙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정교회의 삼위일체 신앙 안에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선을 교리적 차이만으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신론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교리적 우월성을 주장하거나 다른 신앙인을 멸시하는 근거가 된다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와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교리는 인간을 주님께 인도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신학적 분별은 중요하지만, 그 분별의 최종 목적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십니까? 동방정교회는 성부를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근원으로 고백하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유일성과 세 위격의 완전한 신적 일치를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 안에 독립적인 여러 근원이 존재할 수 없으며, 신적 생명과 사랑과 의지는 하나라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성부의 근원성을 세 영원한 위격 가운데 한 위격의 고유한 특성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성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부의 신성을 참되게 알고자 한다면, 그 신성이 자신을 완전하게 나타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신 요14:9의 선언은 바로 이러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서로 다른 세 신적 인격을 마음속에 조합하여 하나로 생각해야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와 생명을 나타내신 한 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부의 군주성을 설명하는 신학적 공식을 완성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을 깨닫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실제 삶에서 그분과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EO.003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부를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으로 고백하며, 이를 ‘성부의 군주성’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부가 성자와 성령보다 더 높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 위격이 동일한 신적 본질과 의지와 역사하심을 공유하면서도 성부에게서 영원한 관계의 근원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일치를 보존하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부의 근원성을 세 영원한 신적 위격 가운데 한 위격의 특성으로 이해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으로 이해합니다.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함께 강조하면서도, 신적 근원과 삼위일체의 구조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성부의 신성을 성자와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하게 나타나신 한 분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 직접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교리적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EO.004.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

SL.EO.004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 - 영원한 출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해설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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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002.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SL.EO.002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 삼위일체의 일치와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설기독교 신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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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2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 삼위일체의 일치와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심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 가운데 하나는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고백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고백은 어떻게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까? 동방정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본질’(ousia)은 하나님께서 무엇이신가를 가리키고, ‘위격’(hypostasis)은 하나님께서 누구이신가를 가리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시지만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이십니다. 그렇다고 세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동방정교회는 세 위격이 하나의 신적 생명과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시며, 그 일치에는 어떠한 분열이나 대립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것은 하나의 신적 본질이 존재한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 한 분의 신적 인격이시라는 뜻입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의 차이를 넘어,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며 사랑하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공통점과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교부들의 신학적 논의를 통해 정교하게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다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를 고백함으로써 성자가 하나님보다 낮은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했습니다. 이어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성령의 신성과 영광을 명확하게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립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오늘날에도 동방정교회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교회가 삼위일체를 인간의 추론으로 만들어 낸 철학적 공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교회의 신앙이 성경과 예배, 그리고 살아 있는 신앙 경험에 근거한다고 설명합니다. 교부들이 본질과 위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개념 안에 완전히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일치와 성부·성자·성령의 구별을 동시에 보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입장에서 삼위일체는 세 신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가 아니며, 반대로 한 하나님이 단순히 세 가지 이름으로 나타나신다는 주장도 아닙니다. 세 위격은 실제로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의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신다는 것이 정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이해하려면 동방정교회가 ‘위격’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방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격’이나 ‘사람’이라고 말할 때에는 대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의식과 의지와 행동의 주체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교회가 말하는 세 신적 위격을 이러한 인간적 개념으로 그대로 이해하면 세 하나님을 상상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경쟁하거나 협의하여 결정을 내리는 세 신적 개인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세 위격은 하나의 신적 의지와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공유하시며, 성부께서 행하시는 신적 일에 성자와 성령께서 분리되어 계시지 않습니다. 또한 정교회는 세 위격의 구별을 단순히 창조와 구속과 성화라는 서로 다른 역할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부는 성자를 영원히 낳으시고 성령의 발출 근원이 되시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신다는 위격적 구별을 인정합니다. 여기서 ‘낳으심’과 ‘발출’은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신적 관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부가 성자보다 먼저 존재하셨다거나, 성자가 성부보다 열등하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를 비판하거나 비교하려면 먼저 이처럼 정교회 자신이 세 위격의 독립성과 하나님의 단일성을 어떻게 구별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선언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관한 구별된 표현이 함께 나타납니다. 신6:4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심을 선포하며, 사45:5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예수께서도 막12:29에서 이 고백을 다시 확인하셨습니다. 한편 마3:16-17의 예수님 세례 장면에는 세례받으시는 예수님과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는 성령,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이 함께 등장합니다. 마28:19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시며, 요14:16에서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성경의 증언을 통해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들이 곧바로 ‘하나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라는 완성된 교리적 공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공식은 성경의 여러 증언을 종합하고 해석하는 교회의 신학적 언어입니다. 따라서 신학적 분별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이름이 등장하는가 하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이름들이 과연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신적 구별을 나타내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이해와 근본적으로 갈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163-184에서 삼위일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세 위격이 영원부터 구별되어 존재하신다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님의 참된 단일성을 인간의 생각 속에서 훼손한다고 봅니다. TCR.166-169에서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로 설명하면서, 인간의 영혼과 몸과 활동이 한 사람을 이루는 것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에서 성부는 영혼에 해당하는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영혼과 몸과 그 활동을 서로 구별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각각 독립적인 세 사람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신적으로 구별되지만 세 분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55에서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단순한 양태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양태론은 일반적으로 한 하나님이 시대나 상황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다고 설명하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단순한 역할이나 임시적인 가면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 실제적인 신적 삼위일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면서, 그 삼위일체가 세 신적 인격으로 나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동시에 그의 견해가 동방정교회의 세 위격 교리와 양립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구별을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으로 보지만, 스베덴보리는 영원부터 세 신적 위격이 존재했다는 개념 자체를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TCR.170-171에서 스베덴보리는 성육신 이전부터 세 위격의 삼위일체가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입으심으로써 구속주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적 삼위일체가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 안에 어떠한 구별이나 신적 역사도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를 성육신 이전부터 존재한 세 영원한 인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차이는 용어를 조정하여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 두 신학 체계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출발점 자체에 관한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말씀하시고, 성자께서 성부께 기도하시며,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으시는 장면들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그의 설명에서는 성육신하신 주님 안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며, 지상 생애 동안 유전받은 인간적 상태를 통과하시면서 시험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점차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부께 기도하시는 모습은 본래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두 신적 인격 사이의 대화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영화의 과정에 있는 인성과 그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 사이의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14:10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시며, 요14:9에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요10:30에서는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성부와 성자의 일치가 단순히 뜻과 목적의 일치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의 실질적인 신적 일치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바로 이 구절들을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과 상호 내재를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면서도, 두 위격의 구별을 유지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이 특정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는 사실만으로 논쟁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일한 말씀을 어떤 신론적 구조에서 이해하는가가 핵심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하나님을 설명하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신앙과 예배의 실제적인 방향에도 영향을 줍니다. 동방정교회 신자는 성부께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아간다는 전례적 구조 속에서 기도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함께 예배합니다. 정교회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일치는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의 완전한 신적 친교이며, 교회 역시 이러한 일치를 본받아 사랑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부름받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안에 분열이나 경쟁이 없으며, 참된 신앙은 사랑과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기도하고 예배할 때 마음속에 하나의 신적 인격을 향한 분명한 관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만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독립된 세 신적 주체로 상상한다면, 입으로는 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실제 생각 속에서는 세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TCR.172-173에서 이러한 문제를 특별히 비판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정교회 신자가 실제로 세 하나님을 믿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는 바로 그러한 삼신론을 명시적으로 배격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비판은 정교회 신자 개개인의 내면을 판정하는 말이 아니라, 세 영원한 위격이라는 교리적 구조가 인간의 하나님 관념에 가져올 수 있는 문제를 지적하는 신학적 비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누구를 사랑한다는 뜻입니까? 어떤 사람이 성부 하나님을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자로 생각하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심판자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자비로운 중보자로 여기며, 성령을 두 분 사이에서 인간에게 능력을 전달하는 또 다른 신적 존재로 상상한다면, 그의 하나님 이해에는 심각한 분열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이 정교회의 공식 교리에서 필연적으로 나온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 역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의 신적 사랑과 의지와 역사하심을 공유하신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잘못된 관념이 실제 신앙생활에 자리 잡을 가능성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문제를 더욱 근본적으로 다룹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적 인간과 성령의 역사하심은 서로 다른 사랑이나 상충하는 의지를 가진 세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생명 또한 동일한 신적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참되게 안다는 것은 어떤 신적 인격의 자비를 얻어 다른 신적 인격의 진노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충만하게 나타난 신적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인간의 거듭남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단순히 신학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데 그친다면, 그 고백은 인간의 이해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그 사랑과 지혜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신자는 자신의 삶에서도 사랑과 진리가 결합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이웃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섬기는 삶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고백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면서, 이해와 의지가 점차 하나의 영적 생명으로 결합해 가는 과정입니다. 물론 인간의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하나님의 신적 삼위일체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며, 신적 생명을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치를 참되게 인정하는 신앙은 인간 안에서도 분열된 삶을 극복하고, 아는 진리와 행하는 선이 일치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추상적인 신학 논쟁에 머무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어떻게 살아 내는가 하는 실제적인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십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완전한 신성과 하나님의 분리될 수 없는 일치를 보존하려는 오랜 교회의 신학적 노력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단순히 세 하나님을 믿는 교리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교회 신앙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한 본질이시라는 고백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신적 인격에서도 한 분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세 영원한 위격의 일치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의 신적 일치로 이해합니다. 결국 두 전통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사랑의 완전한 일치를 함께 고백하지만, 그 일치의 구조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갈라집니다. 이러한 차이를 분별할 때 우리는 상대 전통의 진지한 신앙고백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성경이 증언하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해 더욱 깊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따라 그 질문의 중심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머릿속에서 세 분으로 나누어 생각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적 사랑과 지혜를 완전하게 드러내신 한 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목적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한 분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EO.002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세 하나님을 인정하는 삼신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일치와 세 위격의 실질적인 구별을 함께 보존하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일치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로 이해합니다. 두 전통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사랑의 일치를 함께 인정하지만, 세 위격의 영원한 실재 여부와 신적 일치의 구조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세 신적 주체로 나누어 상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한 분 주님을 신앙과 예배의 중심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교리적 이해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진리가 하나 되어 실제 삶의 선으로 나타나는 거듭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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