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
시간이 가면서 황폐해진, ‘가인’(Cain)이라 하던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이들은 사랑을 시인했음에도 신앙을 머리 삼으며, 사랑보다 신앙을 앞세웠습니다. 이 이단에서 유래한 후대의 이단들은 점점 더 헤매며 방황하더니,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아예 신앙조차 부인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새 빛, 곧 아침이 빛을 발하며, 여기 ‘라멕의 아내들’(wives of Lamech)이라고 하는,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라는 이름을 가진 새 교회가 하나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을 라멕의 아내들이라 하는데요, 라멕은 아무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는데도 말이지요. 이는 마치 유대인들의 내적(內的, internal), 외적(外的, external) 교회와 똑같은 경우인데, 마찬가지로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었던 이들 유대인의 교회를, 말씀에서는 ‘아내들’(wives), 곧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로 표상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레아는 외적 교회, 라헬은 내적 교회를 표상합니다. 이들 교회는 겉으로는 둘로 보이지만 여전히 하나일 뿐입니다. 내적인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외적인 것, 곧 표상적인 것(表象, the representative)은 단지 무슨 우상을 숭배하는 것, 곧 죽은 것인 반면, 외적인 것과 함께하는 내적인 것은 하나의 교회, 여기 아다와 씰라가 그런 것처럼 심지어 하나 된, 같은 교회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곱과 그의 후손은 라멕처럼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교회는 그들 가운데 남아 있을 수가 없어 대신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이들 이방인은 부정(不貞, infidelity) 대신 무지(無知, ignorance) 가운데 살았지요. 교회가 황폐해졌을 때, 그 가운데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 남아 있을 경우는,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물며, 교회는 이럴 경우, 진리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로 이동하는데요, 오히려 이 사람들이 저 사람들보다 더 쉽게 신앙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 “Cain,” 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 “Adah and Zillah,” who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 “wives,” 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 [apud se] 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상징되는 이단적 신앙의 흐름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완전히 황폐(vastation)에 이르는지를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가인의 이단은 처음부터 사랑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사랑을 신앙의 근본으로 두지 않고 ‘신앙을 주된 것으로 세우며 사랑보다 앞세운’ 데서 이미 치명적인 방향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이 초기 왜곡은 이후 파생된 여러 이단들을 통해 점점 심화되었고, 마침내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 자체마저 부정되는 상태’, 곧 교회 안에 더 이상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은 황폐의 극점(極點)에 도달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앞선 글(AC.408)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비치기 시작하며,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이 새 교회가 본문에서 아다와 씰라, 곧 ‘라멕의 두 아내’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라멕 자신은 신앙이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아내들’이 있다고 표현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아내’가 개인의 도덕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내적, 외적 구조’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에 비유하는데, 레아는 외적 교회를, 라헬은 내적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 두 교회는 겉으로는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교회이며, 외적 교회가 내적 교회와 결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 있는 교회가 아니라 ‘우상 숭배적이거나 죽은 형식’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다와 씰라는 각각 새 교회의 천적, 영적 차원과 자연적 차원을 낳는 근원으로서, 함께 있을 때에만 참된 교회를 이룹니다. 그러나 라멕과 야곱의 경우처럼, 교회가 자리 잡은 민족이나 공동체가 신앙을 상실한 상태에 머무를 때, 그 교회는 그곳에 계속 머물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교회가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진다’고 설명하는데,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악의적 불신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지’(ignorance)의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는 새 진리와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만, 이미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거부하고 왜곡한 상태는, 앞서 말한 모독의 위험 때문에 새로운 교회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황폐된 공동체 안에 ‘진리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 머무르지 않으며, 오히려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열린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로 옮겨집니다. AC.409는 이 원리를 통해, 교회의 역사가 특정 민족이나 제도에 고정되지 않고, 언제나 ‘주님의 섭리에 따라 이동하며 새롭게 시작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AC.408, 창4:19, '모독'(冒瀆, profanation)의 속뜻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하나의 교회가 더 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bygrace.kr
'즐겨찾기 > 창4'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교회 안 상태와 교회 밖 인류 역사는 같이 가는 건지? (1) | 2025.12.19 |
|---|---|
| AC.410, 창4:19, ‘황폐’(vastation)의 두 종류 (0) | 2025.12.19 |
| ‘모독’(冒瀆, profanation)을 금하시는 이유 (0) | 2025.12.19 |
| AC.408, 창4:19, '모독'(冒瀆, profanation)의 속뜻 (1) | 2025.12.18 |
| 노아의 등장 시기, 가인 계보의 라멕 이후와 셋 계보의 라멕 이후 중 어느 쪽? (1) | 2025.12.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