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S.006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 - 신적 자비와 정의의 관계

 

해설

이슬람은 알라를 지극히 자비로우시면서도 완전하게 정의로우신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꾸란의 여러 장은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al-Rahman)과 ‘한없이 자애로우신 분’(al-Rahim)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하며, 이러한 표현은 이슬람 신앙에서 자비(慈悲, mercy)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보여 줍니다. 꾸란 7:156은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선언하고, 4:40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도 지극히 작은 불의조차 행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16:90은 하나님이 정의와 선행, 친족에 대한 베풂을 명령하시고 악과 불의를 금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하나님 이해를 엄격한 율법과 심판에만 기초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함께 인정하고, 인간도 그 자비와 정의를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불의나 악을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서로 다른 두 속성으로서 때로는 충돌하거나 서로를 제한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완전히 하나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에서 하나님의 자비는 단순히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며, 잘못을 깨닫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꾸란 6:12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스스로의 원칙으로 삼으셨다고 가르치며, 39:53은 자신의 영혼을 해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를 절망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꾸란은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특히 7:156은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선언하면서도, 그분이 원하시는 자에게 형벌을 내리신다고 말씀합니다. 이슬람 신학에서는 이러한 자비와 정의를 모두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으로 이해하며, 그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학파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부정하고 형벌만 강조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반대로 하나님의 형벌을 단지 인간의 오해에 불과한 것으로 설명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 두 요소는 실제로 이슬람의 계시와 신학 안에 함께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검토해야 할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비 자체이시라면, 그분이 악인에게 형벌을 내리신다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그 형벌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직접 나오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3–4항에서 신적 사랑(神的愛, Divine Love)과 신적 지혜(神的智慧, Divine Wisdom)가 주님에게서 하나로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651항에서는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고 자비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시므로, 어떤 사람에게도 악을 행하실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는 서로 대립하는 두 성향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바라며, 주님의 지혜는 그 사랑이 신적 질서(神的秩序, Divine Order)에 따라 실현되도록 역사합니다. 사랑은 진리를 떠나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으며, 진리 역시 사랑과 분리되어 냉혹한 심판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적 정의(Divine Justice)는 하나님의 자비를 제한하거나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원리가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의 완전한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때때로 자비를 베풀려면 정의를 양보해야 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면 자비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이러한 모순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모든 역사는 사랑에서 비롯되며, 지혜를 통하여 선한 목적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며, 재앙을 내리시는 것으로 표현된 구절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335항에서 주님이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시며 지옥으로 심판하여 보내지 않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자비 자체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선을 거부하고 악을 사랑할 때 스스로 천국과 주님에게서 멀어지므로, 악한 사람의 상태가 정죄와 형벌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3:17은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세상을 심판하여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데 있다고 말씀하며, 이어지는 19절은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이 심판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이 변하여 진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거부함으로써 그것을 고통스럽게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만 머물러 이해하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속뜻(internal sense)을 통하여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간의 영적 상태를 구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악을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모든 행위를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악은 실제로 악이며,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고 선택한 악에 따른 결과를 경험합니다. 영계에서도 악령들이 다른 존재를 해치려 할 때 그들의 행동에는 제약이 가해지며,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형벌과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벌은 주님이 분노를 해소하거나 보복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더 큰 해악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영적 질서를 보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악을 허용하신다고 해서 그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허용(許容, permission)과 의지(意志, will)는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악이 무제한으로 퍼지지 않도록 인도하시는 것이 신적 섭리의 중요한 역사입니다. 따라서 참된 정의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고, 악인을 향한 증오와 보복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선을 보호하고 악을 제한하며, 가능한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 질서 있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이슬람의 자비와 정의에 관한 가르침에 담긴 진리와 신학적 차이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어떤 불의도 행하지 않으신다는 고백은 참됩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며, 악을 피하고 정의와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를 인간의 죄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이나 형벌 의지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의 신적 본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이슬람 신학이 하나님의 정의를 인간적인 분노와 보복으로 설명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슬람에도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다는 가르침과 심판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다만 꾸란에는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시는 주체로 표현된 구절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러한 표현을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인간의 악한 상태라는 관점에서 다시 이해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형벌의 강도나 범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어떤 분이신가 하는 신관(神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기독교인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시므로 죄인에게 반드시 형벌을 내리셔야 한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성부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진노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진노를 대신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서로 충돌하는 속성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인간을 사랑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 역시 바로 그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구속(救贖, redemption)은 본래 자비롭지 않으셨던 하나님을 자비롭게 변화시킨 사건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악과 지옥의 세력을 이기시고 인간을 구원하실 길을 여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적 정의가 신적 사랑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죄인을 미워하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서 선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주님과 결합하여 천국의 생명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결국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라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도 정의와 선행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는 서로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두 속성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 안에서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후자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을 향한 사랑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주님의 정의는 그 사랑이 신적 질서에 따라 역사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대할 때 정의라는 이름으로 보복하려 하지는 않습니까? 또 자비라는 이름으로 악을 묵인하거나, 누군가를 보호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습니까? 참된 자비는 악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참된 정의는 사랑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신가, 정의로운 분이신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자비와 정의가 하나인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바르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 사랑을 이웃에게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IS.006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은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어떤 불의도 행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참된 진리입니다. 인간에게 정의와 자비를 함께 실천하도록 요구하는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인간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이나 형벌 의지로 이해하는 것은 주님의 신적 본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와 자비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시며, 인간이 경험하는 정죄와 형벌은 악을 사랑하고 선을 거부하는 영적 상태 및 질서의 보존과 관련됩니다. 신적 자비와 정의는 서로 대립하는 속성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 안에서 완전히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자비와 정의에 관한 고백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며, 그 관계와 신적 형벌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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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 - 집성제의 통찰과 인간을 지배하는 사랑의 문제

 

해설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괴로워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렵게 얻은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며,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사람이나 재물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명예, 지위와 신념까지도 놓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깊이 관찰하면서 고통의 원인을 외부 환경에서만 찾지 않습니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 곧 고통의 현실과 원인, 소멸, 그리고 그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두 번째인 ‘집성제’(集聖諦, samudaya-sacca)는 고통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핵심에는 ‘갈애’(渴愛, taṇhā), 곧 만족을 얻으려는 목마름과, ‘집착’(執著, upādāna), 곧 어떤 대상이나 견해를 자기 것으로 굳게 붙잡으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교가 단순히 인간에게 욕망이 있기 때문에 모든 고통이 발생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변하는 것에 영원한 만족을 기대하고, 그것을 놓지 못하며, 자신의 존재와 행복을 거기에 의존시키는 과정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집성제는 단순한 금욕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고통을 지속시키는지 밝히려는 가르침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고통의 발생 원인으로 다시 태어남을 지속시키는 갈애를 제시하며, 이를 세 가지로 구별합니다. 첫째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애’(欲愛, kāma-taṇhā)이고, 둘째는 존재하거나 계속 살아 있으려는 ‘유애’(有愛, bhava-taṇhā)이며, 셋째는 존재하지 않거나 소멸하기를 바라는 ‘무유애’(無有愛, vibhava-taṇhā)입니다. 이 구별은 갈애가 단순히 재물이나 쾌락을 탐하는 욕망에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즐거움을 붙잡으려 할 뿐 아니라 자기 존재를 영속시키려 하거나, 반대로 견디기 어려운 상태가 사라지기만을 바라면서 또 다른 집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애를 삶의 모든 의욕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에는 수행과 선행을 향한 건전한 의욕을 뜻하는 ‘찬다’(chanda)라는 개념도 있으며, 깨달음을 위한 바른 노력은 오히려 중요한 수행의 요소입니다. 따라서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가 아닙니다. 고통을 지속시키는 갈애에서 벗어나 지혜와 자비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애와 집착의 관계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 곧 현상들이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난다는 불교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상윳따 니까야’ 12.2는 감각적 접촉에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집착을 조건으로 다시 존재의 형성과 태어남이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갈애는 대상을 향한 목마름이고, 집착은 그 대상을 더욱 강하게 붙잡아 자기 것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불교는 집착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특정한 계율과 의례가 그 자체로 해탈을 보장한다고 여기는 집착, 그리고 고정된 자아에 대한 견해를 붙잡는 집착으로 구별합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자신의 생각과 종교적 신념에 대한 집착입니다. 재물이나 쾌락에 대한 욕망은 쉽게 알아차리면서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과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실은 깨닫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교가 모든 견해나 종교적 실천 자체를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견해와 바른 수행을 해탈의 길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우월감이나 새로운 집착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갈애가 고통의 발생 원인이라는 설명은 모든 질병과 재난, 타인에게서 당하는 피해가 그 사람 자신의 욕망 때문에 일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집성제는 고통과 윤회를 지속시키는 근본적인 조건을 설명하는 것이지, 개별적인 불행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러한 불교의 통찰은 말씀에서 인간의 욕망과 사랑을 다루는 방식과 비교할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6:19)고 말씀하셨고, 이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하셨습니다. 이는 재물을 소유한다는 사실 자체보다 인간의 마음이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를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10284번에서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그가 추구하는 목적을 결정하며, 자기 자신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사랑과 주님 및 이웃을 향한 사랑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으며,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 그의 삶이 형성됩니다. 불교가 고통을 지속시키는 갈애와 집착을 경계한다면,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의 사랑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지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두 설명 모두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인간을 속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갈애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사랑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며, 갈애의 소멸을 곧바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형성이라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살펴야 합니다. 프로프리움은 인간이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다고 여기는 것을 가리키며, 특히 자신의 지혜와 능력, 선과 생명을 독립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자기중심적인 성향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인정받기를 원할 수 있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려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적으로 겸손한 모습을 보이면서 마음속으로는 남보다 거룩하다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5660에서 거듭나는 사람이 처음에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지만, 마침내 자유롭게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주어지는 새로운 의지를 통하여 인간의 삶의 목적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이웃과 공동체, 주님의 나라와 주님 자신을 향하도록 변화한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거듭남은 자기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일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삶의 목적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목적으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불교의 집착 극복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을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찾는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 변화는 단순히 집착을 억누르는 심리적 훈련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영적 변화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욕망을 무조건 억제하거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건강을 돌보며, 일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정당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얻으려 하거나, 자기의 행복과 우월함을 위한 최종 목적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21–22번에서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악을 죄로 여긴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과 신적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에 멀리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악을 멀리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 악을 제거하고 선을 행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수행과 새 교회의 거듭남을 구별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따라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만, 불교는 갈애와 무명의 소멸을 통한 ‘해탈’(解脫, vimutti)을 지향하는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거듭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행복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조금도 거절하지 못하고,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자유라기보다 욕망에 지배받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불교는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날수록 고통의 속박이 약해진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가 밝힌 새 교회의 교리에서 참된 자유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AC.5660은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참된 자유이며, 그 안에 평안과 행복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소유하고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누리는가보다, 어떤 사랑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삶의 최종 목적이 되면 인간은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며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삶의 목적이 되면 재물과 능력, 지식과 사회적 지위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변화는 욕망의 대상을 단순히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지배적인 사랑과 목적이 새롭게 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갈애 분석은 인간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유익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새 교회의 교리는 그 자리에 어떤 사랑이 들어서야 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결국 ‘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집성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변하는 것을 영원한 행복의 근거로 삼고, 자기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며,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붙잡으려 할 때 고통이 깊어진다는 설명에는 분명한 통찰이 있습니다. 특히 재물과 쾌락뿐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신앙적 확신까지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은 종교인에게도 중요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갈애와 집착을 모든 욕망이나 사랑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모든 고난을 개인의 집착 때문에 발생한 결과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단지 원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여기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욕망을 무조건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악을 멀리하고 사랑의 질서가 새로워지는 과정입니다. 자신을 위한 사랑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아래 놓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때 인간은 참된 자유와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교의 집성제가 인간이 무엇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를 묻는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며 누구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지를 묻습니다. 참된 자유는 단순히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선을 기쁘게 선택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BU.005 해설)

 

요약

갈애와 집착이 고통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라는 불교의 집성제는 인간의 욕망과 자기중심성을 깊이 통찰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감각적 쾌락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집착과 자신의 견해에 대한 집착까지 경계한다는 점에서 인정할 만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모든 의욕이나 사랑을 제거하려 한다고 이해하거나, 모든 고난을 개인의 집착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영적 문제는 사랑 자체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질서에 있으며, 거듭남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버리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갈애와 집착에 대한 불교의 통찰을 인정하되, 참된 자유와 행복의 근원은 인간의 자기 통제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에 따라 새롭게 되는 삶에 있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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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다’ - 복종과 자유로운 사랑

 

해설

이슬람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슬람’(Islam)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복종한다는 의미와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무슬림’(Muslim)은 그렇게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꾸란 2:112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면서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상이 있다고 가르치며, 4:125 역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선을 행하며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르는 삶을 높이 평가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복종을 단순히 절대적인 명령 앞에서 생각 없이 굴복하는 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삶의 궁극적인 주인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며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며, 모든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려는 신앙의 방향 자체는 옳습니다. 다만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 복종이 인간의 자유와 사랑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복종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외적 행위뿐 아니라 마음의 진실함과 경건도 포함됩니다. 예배와 금식, 구제와 순례 같은 종교적 실천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구체적인 표현이며, 이러한 행위의 가치는 그것을 수행하는 의도와도 관련됩니다. 특히 꾸란 2:256에는 종교에 강제가 없다는 선언이 있습니다. 이 구절의 구체적인 적용 범위에 관해서는 이슬람 학자들 사이에 해석의 차이가 있었지만, 적어도 종교적 복종을 외부의 물리적 강제와 단순히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이슬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 자발적인 헌신을 강조하는 영적 전통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오직 두려움과 강압으로만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종교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과 그 의무를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 구별됩니다. 인간은 어떤 명령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순종할 수도 있고, 벌이 두려워 순종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위처럼 보여도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의도는 서로 다릅니다. 바로 이 차이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검토 대상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71항에서 인간이 자유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신적 섭리(神的攝理, Divine Providence)의 법칙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자유(自由, freedom)는 단순히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자유방임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이해를 사용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뜻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외부에서 강제로 조종하여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사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같은 저작 129항에서는 종교에 관한 믿음과 사랑이 외적 강제에 의해 형성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강요에 의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내면의 신앙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의 거듭남(再生, regeneration)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진리를 선택하고 선을 행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 주님은 그 자유로운 선택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순종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자유를 자기 뜻대로 살아갈 권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 43항에서 자유에는 지옥적 자유(infernal freedom)와 천국적 자유(heavenly freedom)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도 당사자에게는 자유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악의 지배를 받는 속박입니다. 반면 선을 사랑하여 선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은 참된 자유입니다. 이 가르침은 요8:34에서 주님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분노와 탐욕, 지배욕과 자기중심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행동한다면, 겉으로는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악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계명을 따르기 위해 자기 욕망을 절제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은 외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악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향해 나아갑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순종과 영적 자유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선과 진리에 기꺼이 순종할수록 인간은 더욱 자유로워집니다.

 

이러한 구별은 순종의 동기(動機, motive)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벌이 두렵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악에서 돌아서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141–143항에서 자유는 사랑과 의지에서 비롯되며,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참된 자유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143항에서는 자유롭게 받아들인 것은 인간의 생명 안에 남지만, 강제로 받아들인 것은 그렇게 남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하나님이 계명을 지키는 행위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계명에 담긴 선을 사랑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정직하게 행동하던 사람이 점차 정직 자체를 사랑하고, 처음에는 명령 때문에 이웃을 돕던 사람이 마침내 이웃의 행복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의 순종은 외적 의무에서 내적 사랑으로 깊어진 것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바로 이러한 변화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슬람의 복종 개념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평가하는 보다 근본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참됩니다. 인간이 자기 욕망을 절대화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며, 정직과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복종의 가치를 외적 명령의 이행만으로 판단하거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신앙의 완성으로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러한 문제가 이슬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에서도 목회자의 명령이나 교회의 관습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거나, 질문과 분별을 불순종으로 여기며, 두려움을 이용해 신앙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러한 외적 강제는 참된 거듭남의 원리가 아닙니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의 내적 생명으로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복종을 평가할 때에도 중요한 것은 그 복종이 단순한 외적 의무에 머무는가, 아니면 선과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신학 사이에 남아 있는 더 근본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의 대상인 하나님을 누구로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은 알라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강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시며, 인간은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요14:15에서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잘 보여 줍니다. 참된 사랑은 계명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으며, 계명에 대한 참된 순종 역시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계명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악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여 사랑의 자유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순종의 완성은 단순히 자신보다 높은 권위에 굴복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이신 주님을 알고, 그분의 뜻이 참으로 선하다는 것을 이해하며, 그 선을 자신의 삶에서 기꺼이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다’라는 고백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순종이 어떤 내적 상태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묻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명령을 지키는 사람과,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외적으로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영적으로 같은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의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복종시키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선을 선택하도록 끊임없이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에게서 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선이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 선을 실천할 때,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더욱 깊은 결합(結合, conjunction)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나 철저히 복종하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는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며, 그 순종을 통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내 삶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순종은 자유로운 사랑을 파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IS.005 해설)

 

요약

이슬람이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특히 복종을 진실한 의도와 선행에 연결하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외적 의무의 이행이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굴복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선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실천할 때 거듭납니다. 또한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신학 사이에는 그 순종의 대상인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복종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며, 복종을 강제나 외적 형식으로 환원하는 이해가 문제입니다. 참된 순종은 주님을 향한 자유로운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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