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창4:4)
AC.350
여기서 ‘아벨’(Abel)은앞에서와마찬가지로체어리티를상징합니다. ‘양떼의처음난것’(firstlingsoftheflock, ‘양의 첫 새끼’)은거룩한것을상징하는데, 그것은오직주님께만속한것입니다. ‘기름진것’(fat, ‘기름’)은천적인것자체를상징하며, 이것역시주님께속한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JehovahlookinguntoAbel, andtohisoffering,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는것은체어리티에속한것들과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가주님을기쁘시게했음을뜻합니다. By “Abel” here as before is signified charity; and by the “firstlings of the flock” is signified that which is holy, which is of the Lord alone; by “fat” 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also is of the Lord; and by “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 were well-pleasing to the Lord.
해설
AC.350은 창4:4의 ‘아벨은자기도양의첫새끼와그기름으로드렸더니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은받으셨으나’라는 말씀의 속뜻을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바로 앞 AC.346-349가 가인의 ‘땅의소산’과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와 거기서 나오는 예배를 설명했다면, 이제 아벨의 제물에서는 그와 정반대되는 예배가 나타납니다. 곧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먼저 ‘아벨’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벨이 단순히 ‘선한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는 것과 대응하여, 아벨은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두 제물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물건을 하나님께 드린 사건을 넘어, 서로 다른 내적 근원에서 나오는 두 종류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양떼의처음난것’에서 ‘처음난것’은 거룩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매우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그 거룩한 것은 ‘오직주님께만속한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에게서 거룩한 것을 만들어 내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참된 선과 사랑, 체어리티와 신앙의 생명은 그 근원이 모두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떼의처음난것’을 드렸다는 말씀에는 참된 예배의 중요한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주님께드리는선도본래주님에게서받은것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고 살아내며 주님께 돌려드리지만, 그 선의 최초 근원은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된 예배에서 인간의 공로가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면 자기 의가 들어오지만, 그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면 감사와 겸손의 예배가 됩니다.
이어지는 ‘기름진것’(fat)은 ‘천적인것자체’(the celestial itself)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적인것’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사랑의 선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그 기름진 것을 드렸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품질의 제물을 골라 드렸다는 뜻을 넘어,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한 것과 사랑의 선으로 예배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이것역시주님께속한것’이라고 다시 강조합니다. ‘처음난것’도 주님의 것이고 ‘기름진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짧은 한 문장 안에서 같은 원리를 두 번 반복하는 셈입니다. 참된 예배에서 거룩함의 근원도 주님이고, 사랑의 선의 근원도 주님입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처럼 주님께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인정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며 다시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9의 원리와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것은내적인것들로부터생명을얻으며, 곧그것들을통하여주님에게서생명을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아벨의 제물은 그 원리를 실제로 보여 줍니다. 외적으로는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기름진 것을 드렸지만, 그 외적 제물의 내적 생명은 체어리티와 천적인 선에 있고, 그 모든 것의 생명은 다시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는 말씀 역시 주님께서 어떤 물질적인 제물을 다른 제물보다 선호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속한것들과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가주님을기쁘시게했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주님께서 돌아보신 것은 제물의 외형보다 그 제물 안에 있는 체어리티입니다.
여기서 특히 ‘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참된 예배는 체어리티와 별개의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예배와 삶이 분리되어 한쪽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웃을 향한 사랑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선과 사랑이라는 내적 생명이 예배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단지 예배 외에 추가되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토대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둘 다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예배를했느냐하지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가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고,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왔습니다. 외적으로는 둘 다 예배였지만 내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이 달랐던 것입니다.
AC.348-350을 함께 놓으면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보입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의 행위를 ‘살아있는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예배에 생명을 주며 그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50에서는 바로 그 살아 있는 내적 예배가 아벨의 제물로 나타납니다. ‘체어리티 → 체어리티의행위 → 체어리티에기초한예배’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의 처음과 끝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고, 그 체어리티에서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며, 그 선으로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인간이 자기 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감사와 사랑으로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50의 중심은 ‘왜아벨의제물을주님께서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아벨이라는 개인을 편애하셨거나 양의 제물이 농산물보다 우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양떼의처음난것’은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것’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벨의 제물은 참된 예배의 질서를 아주 짧고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에게서받은선을주님의것으로인정하고, 그선을체어리티의삶으로살아내며, 그체어리티에서주님을예배하는것.’ 이것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를 가르는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제물’(offering)이예배를뜻한다는것은유대교회의표상들에서분명합니다. 그교회에서는온갖종류의희생제물뿐아니라땅과그모든소산의첫열매, 그리고처음난것을드리는것도 ‘제물’(offerings)이라불렀으며, 그들의예배는이러한것들로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이모든것은천국적인것들을표상했고, 모두주님을가리켰으므로, 이러한제물들이참된예배를상징했다는것은누구에게나분명합니다. 표상하는실재가없다면표상이무슨소용이있겠습니까? 또는내적인것이없는외적종교가우상과같은것, 죽은것외에무엇이겠습니까? 외적인것은내적인것들로부터생명을얻으며, 곧그것들을통하여주님에게서생명을얻습니다. 이러한사실로부터표상교회의모든제물은주님을향한예배를상징한다는것이분명합니다. 이에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앞으로이어지는글들에서각각자세히다룰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물’(offerings)이예배를뜻한다는것은선지서전반에서도분명합니다. 말라기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That by an “offering” is meant worship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ves of the Jewish church, in which sacrifices of every kind, as well as the first fruits of the earth and of all its produce, and the oblation of the firstborn, were called “offerings,” in which their worship consisted. And as they all represented heavenly things, and all had reference to the Lord, it must be obvious to everyone that true worship was signified by these offerings. For what is a representative without the thing it represents? Or what is an external religion without an internal but a kind of idol and a thing of death? The external has life from things internal, that is, through these from the Lord. From these considerations it is evident that all the offerings of a representative church signify the worship of the Lord; and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reat in particular in the following pages. That by “offerings” in general is meant worship, is evident in the prophets throughout, as in Malachi:
‘공의로운제물’(offeringinrighteousness)은내적제물이며, ‘레위자손’(sonsofLevi), 곧거룩하게예배하는사람들이그것을드릴것입니다. ‘옛날’(daysofeternity)은태고교회를, ‘고대’(ancientyears)는고대교회를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is an internal offering, which the “sons of Levi,” that is, holy worshipers, will offer. The “days of eternity,” signify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e “ancient years,” the ancient church. In Ezekiel:
‘예물’(Oblations)과 ‘너희가드리는첫열매와너희모든성물’(firstfruitsoftheofferingsinthesanctifyings) 역시주님으로말미암아체어리티로거룩하게된행위를뜻합니다. 스바냐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are likewise works sanctified by charity from the Lord. In Zephaniah:
‘구스’(Ethiopia)는천적인것들, 곧사랑과체어리티와체어리티의행위를소유한사람들을뜻합니다. “Ethiopia” denotes those who are in possession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love, charity, and the works of charity.
해설
AC.349는 AC.346에서 제시한 세 번째 표현, 곧 가인이 ‘여호와께제물로드렸다’는 말씀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제물’이 그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고 간단히 밝혔습니다. 이제 AC.349는 왜 말씀에서 제물이 예배를 상징하는지를 유대교회의 희생 제사와 첫 열매, 처음 난 것을 드리는 제도를 통해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유대교회의 제사 자체를 참된 예배의 본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희생 제물과 첫 열매와 처음 난 것을 드리는 모든 외적 의식은 ‘천국적인것들’을 표상했고, 궁극적으로 모두 주님을 가리켰습니다. 따라서 그 의식의 가치는 동물이나 곡식이라는 물질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 실재에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표상하는실재가없다면표상이무슨소용이있겠습니까?’ 표상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제물이 사랑을 표상한다면 사랑이 있어야 하고, 첫 열매가 주님께 속한 선을 표상한다면 실제 삶 안에 그 선이 있어야 합니다. 표상만 남고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가 사라지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은 더욱 강합니다. ‘내적인것이없는외적종교가우상과같은것, 죽은것외에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AC.348과 AC.349가 정확하게 만납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죽은행위’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를 ‘죽은것’이라고 합니다. 행위도 예배도 외적인 형식만으로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외적인것은중요하지않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외적인 것을 버리는 데 있지 않고 외적인 것에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는 ‘외적인것은내적인것들로부터생명을얻으며, 곧그것들을통하여주님에게서생명을얻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349의 핵심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질서가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사람의 내면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와 행위로 나타날 때 그 외적인 것은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외적 예배의 생명은 외적 형식 자체에 있지 않고, 그 안에서 역사하는 내적인 것에 있으며, 더 깊게는 그 내적인 것의 근원이신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원리는 가인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외적 예배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예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의 AC.346-348에서 보았듯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며, 그의 ‘땅의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그 소산을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문제는 ‘예배를드리지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때문에 더 깊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외적 예배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 예배가 자동으로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의 내적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말3:2-4의 ‘공의로운제물’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레위 자손을 금과 은처럼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시고, 그 후에 그들이 ‘공의로운제물’을 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내적제물’이라고 풀이합니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제단 위에 무엇을 올려놓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을 정결하게 하신 결과로 나오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특히 ‘레위자손’을 스베덴보리가 ‘거룩하게예배하는사람들’로 풀이하는 것은 앞의 AC.342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 레위는 체어리티를 나타냈고, 바로 그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와 체어리티는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배의 거룩함은 외적 의식의 정교함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옵니다.
또한 ‘옛날’이 태고교회를, ‘고대’가 고대교회를 뜻한다는 설명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예배의 원형을 교회의 가장 초기 상태와 연결합니다. 특히 태고교회는 사랑을 중심으로 주님을 예배했던 천적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옛날과고대와같이’ 제물이 다시 기쁨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옛 제사 제도를 복원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배가 다시 그 내적 본질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겔20:40에서는 ‘예물’과 ‘첫열매’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주님으로말미암아체어리티로거룩하게된행위’라고 풀이합니다. 이 표현은 AC.348과 AC.349를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앞에서는 살아 있는 행위가 ‘체어리티로부터행하는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행위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선을 행한다고 해서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의 행위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지만,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 행위가 예물이 되고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습3:10에서 ‘구스’가 천적인 것들, 곧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한다는 설명은 AC.349 전체를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참된 제물은 결국 사랑, 체어리티, 그리고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제물이라는 외적인 형식이 가리키던 실재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46부터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땅의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나타내고, 그 소산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그 행위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의 예배는 외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이 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예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헌금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외적 예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외적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사랑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고, 자기 의를 높이며, 진리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외적 예배와 내적 삶 사이에 분리가 생깁니다.
반대로 참된 예배는 예배 시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께 받은 선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흘러나갈 때 삶 자체가 예배의 연장이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예배와 삶, 신앙과 체어리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은 서로 따로 떨어진 영역이 아닙니다. 내적인 사랑이 외적인 행위와 예배 안에서 표현되고,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때 하나의 살아 있는 질서를 이룹니다.
결국 AC.349의 핵심은 ‘예배의생명은어디에서오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외적 형식이 예배에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내적인 것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단순히 무엇을 주님께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을 다시 삶과 체어리티의 행위로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 영상은 처음부터 매우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이 우주를 연구하면서 블랙홀과 빅뱅과 원자의 세계까지 파고들었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하나의 현상, 곧 ‘내가지금무엇인가를느끼고있다는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색을 보고, 아픔을 느끼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을 ‘내가경험하고있다’고 압니다. 과학은 그 과정에서 어느 뉴런이 활성화되고 어떤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는지를 점점 더 정밀하게 밝힐 수 있지만, 영상이 묻는 것은 그보다 한 걸음 더 깊은 질문입니다. ‘그런물리적과정이왜느낌을동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 제목과 구성에는 리처드 파인만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영상에서 전개하는 ‘의식의어려운문제’, 펜로즈와 해머로프의 미세소관 이론, 의식과 양자현상의 관계 등은 파인만 자신의 의식 이론이 아닙니다. 영상 자체도 미세소관을 이용한 양자의식 이론은 파인만이 세상을 떠난 뒤 등장했으므로 그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을 ‘파인만이말년에의식의비밀을발견했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오히려 파인만은 이 영상에서 하나의 ‘태도’를 대표한다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곧 자연 앞에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아름다운 이론이라도 현실과 맞지 않으면 버릴 줄 아는 과학자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하고 나면 오히려 영상의 진짜 가치가 더욱 잘 보입니다. 영상은 과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이 엄청나게 성공했기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질문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불러주던 자장가를 생각해 봅니다. 음파의 주파수도 측정할 수 있고, 고막의 진동도 분석할 수 있으며, 청각 신경에서 뇌까지 전달되는 전기적 신호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음악을 들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까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뒤 같은 멜로디를 들었을 때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는 ‘그느낌자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영상은 바로 이 틈을 집요하게 바라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이 지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육체만으로 완결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육체와 뇌가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내적 생명은 자연계에서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며, 감각기관과 신경계와 뇌는 그 생명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한 정교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화학적 변화를 발견했다고 해서 영적 인간을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러한변화가일어나도록인간의내적생명이어떻게자연적기관을사용하고있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이 차이는 ‘원인’과 ‘수단’을 구별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현이 진동하고 공기가 떨리며 우리의 고막도 진동합니다. 이 모든 것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아노 내부를 아무리 분해해도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하는 피아니스트의 마음 자체가 그 안에서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피아노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피아니스트가 이 자연계에서 음악을 들려주려면 악기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육체와 뇌도 이와 비슷한 위치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뇌는 하찮은 껍데기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이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놀랍도록 정교한 기관입니다. 그러나 기관의 작동을 완전히 설명했다고 해서 그 기관을 통하여 나타나는 생명의 근원까지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영상이 말하는 이른바 ‘의식의어려운문제’가 스베덴보리와 뜻밖의 접점을 갖습니다. 빨간 사과를 볼 때 빛의 파장과 망막의 반응과 시각피질의 활동을 모두 설명했다고 합시다. 그래도 ‘왜나는빨강을빨갛게경험하는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통증 신호가 척수를 따라 올라가는 과정을 모두 추적했다고 해도 ‘왜그것이나에게아픔으로느껴지는가?’라는 질문은 그대로입니다. 영상은 현대 과학이 바로 이 지점에서 아직 결정적인 답을 갖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서 질문 자체를 조금 바꾸었을 것입니다. ‘물질이어떻게의식을만들어내는가?’라고 묻기 전에 ‘과연물질이의식을만들어내는것인가?’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처음부터 뇌가 의식의 생산자라고 전제하면 연구의 방향은 ‘어떤물질적과정이주관적경험을만들어내는가?’가 됩니다. 그러나 뇌가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이 뇌를 통하여 자연계에 나타난다면, 뇌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신경학적 현상은 의식의 ‘생산과정’이라기보다 의식이 육체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상응하는과정’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상응’을 단순한 비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상응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서로 닮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적인 원인이 외적인 결과 안에서 질서 있게 표현되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을 할 때 특정 뇌 영역이 활성화되고, 어떤 정서를 느낄 때 특정 신경전달물질의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대응 관계가 매우 정교하게 발견될수록 ‘속의상태가겉의기관을통하여어떻게표현되는가?’라는 문제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조차도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는 아닙니다. 이것이 영상의 여러 가설과 스베덴보리의 관점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곳입니다. 영상은 의식이 뇌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혹시 ‘우주의가장근본적인법칙’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양자 붕괴와 의식을 연결하는 가능성까지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까지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양자장이든 미세소관이든 우주의 어떤 물리적 구조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독특하면서도 핵심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생명의유입’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끊임없이 받아 살아갑니다. 궁극적으로 생명 자체이신 분은 오직 주님이며, 인간은 그 생명을 자신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 생명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고, 사랑하고 있고, 선택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이생각도내것이고이생명도내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의 토대라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이 반복해서 말하는 ‘내안에진짜누군가가있다’는 느낌도 새롭게 읽힙니다. 영상은 마지막 부분에서 ‘이말들을듣고있는동안여러분의그몸속안에진짜누군가가존재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인상적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마치 육체라는 상자 안에 영혼이라는 작은 사람이 들어 있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영은 몸 안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물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인간 전체의 내적 차원이 영이고, 육체는 그것이 자연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주어진 외적 형식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가깝습니다.
따라서 죽음 역시 ‘의식이꺼지는사건’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육체라는 자연적 기관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내적 생명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났다고 기록한 사람들은 자신이 여전히 생각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며 살아 있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오히려 자연계에 있을 때보다 자신이 더욱 온전하게 살아 있다고 느낀다고 그는 거듭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뇌와 의식이 그토록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다르게 보입니다. 뇌가 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영이 활동하려면 뇌와 신경계라는 자연적 기관을 통하여야 하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그렇게 긴밀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영상 중간에 등장하는 펜로즈와 해머로프의 ‘조화객관환원’, 곧 Orch-OR 이론도 이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뇌세포 내부의 미세소관에서 양자적 과정이 일어나고, 일정한 순간에 양자상태가 붕괴하면서 의식의 순간이 발생할 가능성을 소개합니다. 동시에 뇌처럼 따뜻하고 습하며 복잡한 환경에서 그런 양자적 상태가 충분히 유지될 수 있느냐는 반론도 소개하고, 설령 양자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왜그것이느낌이되는가?’라는 근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인정이 중요합니다.
양자역학을 영혼의 증거로 사용하려는 유혹은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물리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양자역학을 가져오고, 양자역학이 신비하니 거기에 영혼이나 하나님을 집어넣는 식의 논증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직과학이설명하지못했다’와 ‘그러므로영적세계가존재한다’ 사이에는 논리적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언젠가 미세소관의 양자현상을 완전히 설명한다고 해서 영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Orch-OR 이론이 폐기된다고 해서 영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 실재의 근거를 현재 과학의 미해결 영역에 세워 놓으면 과학이 발전할 때마다 신앙의 자리가 줄어드는 이상한 결과가 생깁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훨씬 근본적인 구별을 요구합니다. ‘물질적과정이얼마나정교한가?’와 ‘생명의근원은무엇인가?’는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과학이 전자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존재론적인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에서 생겨난 독립적 실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의 종착점이며 효과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가장 미세한 양자현상까지 내려간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물질도 여전히 자연적 차원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이 의식을 ‘우주의근본적구성요소’일 가능성으로 확장하는 대목도 흥미롭지만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의식을 단순한 뇌의 부산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의식을 우주 자체의 속성으로 돌려버리면 자칫 범심론적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우주는 스스로 살아 있는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나오며, 피조세계는 그 생명을 질서에 따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주가의식을갖는다’와 ‘모든생명이주님으로부터유입된다’는 말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영상 후반의 동물 의식 이야기도 이 점에서 재미있습니다. 문어와 까마귀와 박쥐와 상어는 인간과 다른 감각세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영상은 이를 통해 인간의 경험만이 의식의 유일한 형태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오만을 낮추는 좋은 지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단순히 ‘의식의양’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적 감각을 넘어 영적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향하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영원한 목적을 향해 형성될 수 있는 내적 차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단순히 인간의 ‘의식볼륨’이 더 크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이 영상에서 특히 AI에 관한 대목이 오늘날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고 봅니다. 영상은 인간의 기억과 행동과 말투를 컴퓨터가 완벽하게 복제한다고 해도 그것이 곧 ‘나’의 의식이 옮겨갔다는 뜻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와 실제로 인간처럼 경험하는 존재를 구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인간은 정보의 집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쓴 글과 설교와 편지와 음성과 영상을 모두 AI에 학습시켰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AI가 그 사람의 말투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가족에게 그 사람이 생전에 했을 법한 말을 하며, 심지어 과거의 기억에 관한 질문에도 정확하게 대답한다고 합시다. 그래도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정체성은 단순한 기억 데이터의 총합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의 중심에는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있으며, 그의 의지와 이해가 있고, 궁극적으로 그의 지배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후에도 인간의 인격을 이루는 중심입니다.
그래서 ‘마인드업로딩’을 통한 디지털 불멸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애초부터 불멸의 방향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보를 컴퓨터에 복사함으로써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갑니다. 문제는 ‘어떻게나를복제하여죽지않을것인가?’가 아니라 ‘나는지금무엇을사랑하는사람으로형성되고있는가?’입니다. 사후에 계속되는 것은 컴퓨터에 저장된 내 정보가 아니라 바로 그렇게 형성된 ‘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영상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 아주 가까운 문 앞까지 옵니다. 영상은 계속해서 ‘정보만으로는부족하다’, ‘구조만으로도충분하지않을수있다’, ‘기계적처리와실제경험은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종이에적힌글씨가가득한책이아니며, 차갑게재생되는녹음기도아니고, 단순히정보만처리하는기계회로도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당신을살아있게하는것은무엇인가?’
바로 여기서 과학의 질문과 영적인 질문이 갈라지면서도 서로를 향해 열립니다. 과학은 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합니다. 그것은 계속 연구되어야 합니다. 뉴런도 연구하고 미세소관도 연구하고 양자현상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연구를 방해하는 대신 훨씬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모든기관을통하여생각하고사랑하고느끼는생명자체는어디에서오는가?’
그의 대답은 ‘주님으로부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과학이 모르는 자리에 ‘하나님’을 집어넣는 답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과학으로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생명자체’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으로부터 존재하며 순간순간 존속합니다. 특히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되었고, 그것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받아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내가살아있다’는 경험은 단순한 생물학적 착각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독립적인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영상의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아름답게 다시 읽힙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어느 순간 문득 ‘아, 내가지금살아있구나’라고 느끼는 평범한 순간을 영상은 ‘우주가숨겨둔가장깊은비밀’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경탄을 굳이 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내가살아있다는것’은 정말 신비로운 일입니다. 다만 그 신비의 최종 목적지는 ‘우주가스스로의식을갖는다’는 데 있지 않고, ‘나는생명자체이신주님에게서지금이순간에도생명을받고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신앙의 문제는 의식의 수수께끼보다 한층 더 깊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왜내가의식을가지고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렇게주어진의식과자유와합리성을가지고나는무엇을사랑하며살아갈것인가?’입니다. 인간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만으로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성과 자기의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을 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의식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형성되는가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의 질문을 ‘스베덴보리의렌즈’를 통과시켜 마지막까지 밀고 가면 질문은 세 번 바뀝니다. 처음에는 ‘뇌는어떻게의식을만들어내는가?’입니다. 그다음에는 ‘과연뇌가의식을만들어내는것인가?’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지금받아누리고있는이생명을나는무엇을위해사용하고있는가?’가 됩니다.
첫 번째는 뇌과학의 질문이고, 두 번째는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영적 질문이며, 세 번째는 거듭남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가장 큰 가치는 어떤 양자의식 이론이 옳다는 데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현대 과학이 인간의 뇌를 그토록 깊이 들여다보고도 마침내 ‘느끼고있는나’라는 문 앞에서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과학은 그 문 앞에서 계속 실험하고 측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문을 지나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 영과 몸, 사랑과 지혜,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이 끊임없이 유입되는 근원을 이야기합니다.
파인만이 칠판에 남겼다는 유명한 문장, ‘내가만들어낼수없는것은내가이해하지못한것이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과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다만 그것을 파인만 자신의 의식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상 역시 당시 파인만이 다른 물리학적 문제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그 문장을 오늘의 의식 문제에 하나의 비유로 가져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뇌의 구조를 모방하고 언어를 생성하는 기계를 만들며 인간 행동의 놀라운 부분까지 재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살아있음’ 그 자체를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어쩌면 그것은 당연합니다. 생명은 인간이 조립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신조차 자기 생명의 원천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소유한 독립적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그 생명을 빌려 쓰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 않으시고 놀랍게도 완전히 ‘나의생명’인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도 있고, 생각할 수도 있고, 선택할 수도 있으며, 그 선택을 통하여 실제로 하나의 인격으로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왜의식이있는가?’라는 현대 과학의 거대한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영혼이있기때문이다’라고 짧게 답하고 끝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놀라운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입니다. ‘당신이지금생각하고사랑하고느끼며살아있다는그모든생명은어디에서오는가? 그리고그것이마치완전히당신자신의것처럼주어진까닭은무엇인가?’
그 질문 끝에서 의식의 신비는 마침내 거듭남의 문제와 만납니다. 생명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의식은 그 자체로 인간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주어진 놀라운 그릇입니다.
그렇게 보면 밤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지금살아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은 정말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경이로움의 중심에는 ‘의식을가진우주’가 아니라 ‘생명을주시는주님과그생명을받아살아가는인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관계 안에서, 과학이 아직 풀지 못한 ‘의식의신비’는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지적 미스터리를 넘어 인간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을 향해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는지를 묻는 영적인 질문으로 바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