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3:22)

 

AC.298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 처음에는 단수로 언급되었다가, 이어서 복수로 언급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주님을, 그리고 동시에 천사들의 천국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선과 악을 아는 것(knowing good and evil)은 그가 천적 인간이 되었으며, 그 결과 지혜롭고 총명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하는 것은, 그는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런 신비들까지 배우게 된다면, 그는 영원토록 결코 구원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영생할까(live to eternity)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The reason “Jehovah God” is first mentioned in the singular, and afterwards in the plural number, is that by “Jehovah God” is meant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the angelic heaven. The man’s “knowing good and evil” signifies that he had become celestial, and thus wise and intelligent;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means that he must not be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for then never to all eternity could he be saved, which is to “live to eternity.”

 

 

해설

 

이 글은 창3:22의 가장 난해한 부분 가운데 하나를 설명합니다. 겉으로만 읽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 영생하는 것을 막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의 의미를 밝힙니다. 주님께서 막으신 것은 영생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더 깊은 영적 파멸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심판보다도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에는 단수로, 이어서는 복수의 의미를 띠게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주님은 결코 천사들과 분리되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천국 전체는 주님의 신적 생명이 흘러드는 하나의 큰 사람(Maximus Homo)이며, 천사들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주님만을 의미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의미합니다. 여기서 복수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판단과 섭리가 천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질서를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선과 악을 아는 것’에 대한 설명은 겉, 그러니까 표면적인 이해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AC.298은 여기서 말하는 ‘아는 것’이 단순한 경험이나 지식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천적 지각(perception)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즉, 천적 인간은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직접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지혜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죄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다음 말씀입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라는 말씀을 기록된 겉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영생하는 것을 막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풉니다. 여기서 생명나무는 주님과 사랑의 생명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미 타락, 자기애와 세상 사랑 가운데 빠진 사람이 그 거룩한 신앙의 신비들까지 충분히 알게 되면,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모독(profanation)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식적, 의도적인 거부가 되므로, 영적 상태는 훨씬 더 회복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진리를 아끼셔서 숨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상태가 아직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더 깊은 진리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오히려 자비라는 뜻입니다. 이는 앞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를 설명한 AC.301 이하의 내용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함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아직 모르는 상태에 머무는 편이 영적으로 훨씬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할까’도 겉뜻인 육체의 생명을 끝없이 유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생명은 언제나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 ‘영생할까’는 주님과 결합된 생명 가운데 영원히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신비를 모독하게 되면, 그 사람은 그러한 영원한 생명에 이를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영생을 막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영생의 가능성을 끝내 잃게 되는 상태를 막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글은 창3 전체의 중요한 결론 가운데 하나를 보여 줍니다. 타락 이후에도 주님의 목적은 결코 인간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더 깊은 악과 모독에 빠지지 않도록 그의 영적 상태에 맞추어 진리를 허락하시고, 때로는 더 높은 진리를 잠시 감추시며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심’은 은혜를 거두신 사건이 아니라, 장차 다시 생명에 이를 수 있도록 인간을 보존하시는 자비로운 섭리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AC.298은 창3:22를 심판의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섭리가 가장 깊이 나타난 말씀 가운데 하나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심화

 

1. ‘생명나무의 열매(the tree of lives)

 

 

AC.298, 심화 1, ‘생명나무의 열매’(the tree of lives)

AC.298.심화 1. ‘생명나무의 열매’(the tree of lives) 창3:22에 보면, 영역은 ‘the tree of lives’인데, 한역은 ‘생명나무의 열매’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창3:22의 Potts 영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lest he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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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AC.298, 심화 2, ‘우리’

AC.298.심화 2. ‘우리’ 또 어떤 경우에는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의미합니다. 여기서 복수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판단과 섭리가 천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질서를 암시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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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9, 창3:22, ‘두 가지 아르카나’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299 여기에는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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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7, 창3:21, ‘옷‘, 천적 선, 영적, 자연적 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7 천적 선은 옷 입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장 깊고 순진무구하기 때문입니다. 옷 입는 선은 천적 영적 선부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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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7.심화

 

4.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4:4)

 

 

AC.297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21의 ‘가죽옷’을 해설하면서, 말씀에서 ‘’이 단순한 육체의 의복이 아니라 선을 둘러싸고 그것을 드러내는 영적, 자연적 차원의 것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천적 선은 가장 내적인 것이므로 그 자체로는 옷을 입지 않은 것과 같으며, 그 천적 선에서 나오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그것을 둘러싸는 ‘’이 됩니다. 계4:4의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있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상응을 보여 주기 때문에 AC.297에 인용된 것입니다.

 

먼저 ‘이십사 장로들’은 문자 그대로 스물네 명의 특정 인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열둘은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며, 이십사는 열둘이 배가된 수로서 교회와 천국에 속한 모든 진리와 선을 충만하게 나타냅니다. 또한 ‘장로들’은 지혜 있는 자들, 곧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십사 장로들은 천국과 교회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 또는 그것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선이 진리를 통하여 밝고 순수하게 나타났음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흰색은 빛과 상응하고, 빛은 신적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진리는 선과 분리된 지식이나 교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장로들이 주님의 보좌 주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나왔으며, 주님의 선을 섬기고 드러내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흰옷’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둘러싸고 나타내는 순수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AC.297의 논지와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선 자체가 가장 내적인 것이며,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그것을 둘러싸는 의복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계4:4에서도 장로들의 내적 지혜와 선은 눈에 직접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고, 그들이 입은 ‘흰옷’을 통해 나타납니다. 곧 보이지 않는 내적 선이 보이는 진리의 형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이 진리, 특히 선에서 나온 진리를 의미하는 기본적인 이유입니다.

 

또한 장로들이 ‘보좌들 위에 앉아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앉는다’는 것은 어떤 상태에 확고히 자리 잡는 것을 의미하며, ‘보좌’는 심판과 통치, 더 깊게는 신적 진리에 기초한 질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보좌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 안에 굳게 서 있으며, 그 진리에 따라 판단하고 살아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들의 옷은 단지 그들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형상입니다.

 

머리에 금관을 썼다’는 사실은 흰옷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머리’는 가장 내적이고 지배적인 것을 의미하며, ‘’은 사랑의 선, 특히 천적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머리의 금관은 그들의 모든 지혜와 진리 가장 높은 곳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흰옷이 진리를 의미한다면, 금관은 그 진리를 지배하고 생명을 주는 선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계4:4에는 ‘금관’이라는 선과 ‘흰옷’이라는 진리가 함께 나타나며, 진리가 선을 입혀 드러낸다는 AC.297의 메시지를 완전하게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 창3의 ‘가죽옷’과도 대비되면서 연결됩니다. 창3:21의 가죽옷은 태고교회 사람이 천적 상태를 잃은 뒤, 주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보다 외적인 영적,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을 위한 자비로운 보호의 옷이었습니다. 반면, 계4:4의 흰옷은 거듭난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순수한 진리의 옷입니다. 가죽옷은 인간의 낮아진 상태에 맞추어 주신 외적 보호를 강조하고, 흰옷은 선과 진리가 다시 조화를 이룬 천국적 상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둘 다 내적 생명을 외적으로 둘러싸고 나타내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의 상응에 속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계4:4 AC.297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이 일관되게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의 금관은 가장 내적 사랑의 선을, 흰옷은 그 선에서 나오는 순수한 진리를,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은 그 선과 진리 안에 확고히 세워진 천국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천적 선이 가장 내적 중심에 있고, 영적 선과 자연적 진리가 그것을 옷처럼 둘러싸고 드러낸다는 AC.297의 구조를 매우 선명하게 증명하는 본문입니다.

 

 

 

AC.297, 창3:21, ‘옷‘, 천적 선, 영적, 자연적 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7 천적 선은 옷 입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장 깊고 순진무구하기 때문입니다. 옷 입는 선은 천적 영적 선부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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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7, 심화 3, ‘계3:4-5’

AC.297.심화 3. ‘계3:4-5’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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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7.심화

 

3. ‘3:4-5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4, 5)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and they shall walk with me in white, for they are worthy (Rev. 3:4–5),

 

 

AC.297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죽옷(coats of skin)을 설명하면서, ‘(garments)이 영적 의미로는 무엇을 뜻하는지를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 증명합니다. 그 가운데 계3:4-5는 특히 ‘’이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선과 진리를 밖으로 드러내는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본문이기 때문에 인용됩니다.

 

첫째, 여기서 ‘’은 사람의 외적 삶 전체를 의미합니다. AC.297의 핵심은, 천적 선 자체는 벌거벗은 상태와 같고, 그것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통하여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옷을 입는다’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은 몸을 덮는 천 조각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과 신앙이 외적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 속에 나타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속 사랑이 생활 가운데까지 순결하게 보존되었다는 뜻입니다.

 

둘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였다’는 표현은 진리 자체를 더럽히지 않았다는 의미라기보다, ‘선으로부터 나온 진리의 삶’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옷은 언제나 몸을 덮습니다. 상응으로는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즉 겉이 속을 드러내고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거짓과 악을 받아들이면, 그의 ‘’은 더럽혀지고,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따라 살아가면 그의 ‘’은 깨끗하게 보존됩니다. 겉은 속을 반영하기 때문이지요. 겉을 보면 속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297에서 말하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천적 선의 의복’이라는 설명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셋째, ‘흰옷’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흰색은 빛을, 빛은 진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교리를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이 진리와 생활 속에서 밝게 드러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AC.297에서 말하는 ‘옷은 내적 선을 나타내는 외적 형상’이라는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넷째, ‘나와 함께 다니리니’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에서 ‘걷는다’, ‘다닌다’는 것은 삶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주님과 같은 방향의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흰옷은 단순한 천국 예복이 아니라,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상태 자체를 나타냅니다. 즉, 옷과 걷는다는 두 상징이 함께 사용되어 내면과 외면이 하나 된 신앙의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이 구절은 창3의 ‘가죽옷’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창세기의 가죽옷은 타락한 인간을 위한 주님의 자비로운 보호를 상징합니다. 사람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천적 선 가운데 직접 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라는 ‘의복’을 입혀 주셨습니다. 반면 계3의 흰옷은 그러한 보호 아래에서 다시 거듭난 사람이 입게 되는 순결한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하나는 타락 이후의 보호이고, 다른 하나는 거듭남 이후의 영화로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은 내적 생명을 외적으로 나타내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상응을 가집니다.

 

여섯째, 따라서 AC.297에서 계3:4-5를 인용한 목적은, ‘’이라는 상징이 창세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에스겔에서는 아름다운 의복으로, 이사야에서는 아름다운 옷으로, 그리고 계시록에서는 흰옷으로 표현되지만,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난 외적 형상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말씀 전체가 하나의 동일한 상응 법칙에 따라 기록되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일곱째, 결국 계3:4-5 AC.297의 결론을 더욱 분명하게 확증합니다. 사람을 천국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겉으로 입은 의복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사랑과 신앙이 삶 속에 나타난 영적 의복입니다. 그러므로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흰옷을 입은 자’는 모두 자기 공로로 의롭게 된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천적 선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통하여 순결하게 나타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계3:4-5 AC.297에서 인용, ‘’이란 언제나 내적 생명을 나타내는 외적 진리와 선을 상징한다는 말씀의 일관된 의미를 독자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297, 심화 4, ‘계4:4’

AC.297.심화 4. ‘계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계4:4) AC.297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21의 ‘가죽옷’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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