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이영길 수도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수도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전남 화순의 깊은 산속에서 오랫동안 홀로 수도하던 이영길 수도사를 찾아가 만났고, 그에게 함께 수도하며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영길 수도사는 ‘수도가 완성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수도의 완성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기 안의 ‘음란의 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죄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눈물이 나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강 목사님은 이런 모습을 ‘수도사의 영성’으로 높이 평가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영길 수도사가 오랫동안 여성을 전혀 만나지 않고 살아왔음에도 ‘아직 내 속에서 음란의 영이 빠지지 않았다’고 고백했다는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외적 환경과 내적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통찰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을 만나지 않는다고 음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혹의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그 욕망 자체가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악이 외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기보다 사람의 내적 사랑과 애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들어가 외적인 자극을 차단했다고 해서 내적인 악이 자동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십 년 넘게 여자를 보지 않았는데도 아직 내 안에 음란이 남아 있다’는 고백은 오히려 자기 상태를 정직하게 바라보려는 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음란의 영이 완전히 빠져야 수도가 완성된다’는 표현을 조금 다르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욕망은 어떤 외적 영이 몸속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물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의 악한 애정에는 지옥의 영들이 인플럭스를 주지만, 그들이 사람 안에 어떤 독립된 실체로 ‘들어앉아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어떤 악을 즐거워할 때, 그 악과 같은 사랑을 가진 영적 공동체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그 악을 죄로 인식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기 시작하면 그 연결이 약해지고, 선한 영들과 천국의 인플럭스를 더 자유롭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음란의 영을 빼내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음란한 욕망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거절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순결한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단순한 억압과도 다릅니다. 어떤 욕망이 떠오르지 않도록 환경을 차단하는 것과 그 욕망 자체가 변화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사람은 수도원에 들어가 외적 유혹을 거의 경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악이 내면에 그대로 잠복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한복판에 살면서도 그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이것은 주님의 질서에 반한다’고 인식하고 자유롭게 거절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점차 그 악의 즐거움 자체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이 실제적인 영적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이영길 수도사의 고백에서 귀하게 볼 부분은 ‘나는 이미 수도자가 되었으니 순결하다’고 스스로 완성된 사람처럼 여기지 않고, 오랜 수도생활 후에도 자기 안의 남은 악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악이 완전히 없어져야 수도가 완성된다’는 생각에는 한 가지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거듭남은 이 세상에서 한순간에 끝나는 완제품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거듭나며, 천국에 들어간 뒤에도 영원히 더 완전한 선과 지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어느 날 ‘이제 내 안에는 음란도 없고 자기 사랑도 없고 모든 악이 사라졌으니 수도가 완성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종착점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proprium이 남아 있는지를 더 섬세하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참된 성숙은 ‘나는 완성되었다’는 확신보다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인식의 깊어짐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기준으로 제시된 것은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이영길 수도사는 자신이 본래 죄인이며,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오고, 그렇게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의 눈물이 흐르는 때가 수도의 완성이라고 말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이러한 십자가 사랑과 감사 자체는 귀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와 주님의 구원을 깊이 느끼면서 마음이 녹아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실제적인 종교적 체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눈물이 난다는 현상 자체를 영적 완성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감정의 강도와 영적 상태의 깊이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쉽게 눈물을 흘리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분노와 지배욕과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거의 눈물을 흘리지 않지만,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오랫동안 악을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의 기준은 감정 표현의 강도가 아니라 지배적인 사랑과 실제 삶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십자가를 생각한 결과 내가 악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는가?’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셔야 하는데 그 형벌을 예수님께 대신 내리셨다’는 단순한 형벌 대속의 구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옥 전체와 마지막으로 싸우시고, 그것을 완전히 정복하신 가장 큰 시험이었으며, 동시에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신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깊이 묵상한다는 것은 ‘내가 받을 벌을 주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감격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를 악과 지옥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어떤 싸움을 치르셨는지를 바라보고, 우리 역시 주님의 힘으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우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영상 중 강 목사님은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수정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법적 죄책으로 전가되어 모든 사람이 그 죄 때문에 정죄된다는 전통적인 원죄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책 자체가 아니라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 곧 유전악입니다. 사람은 조상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자유롭게 악을 사랑하고 선택하여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때 그 악과 결합합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유죄가 되었다는 식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는 다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인간의 근본 문제를 ‘아담이 저지른 죄의 형벌을 내가 대신 뒤집어쓴 것’으로 이해하면 구원도 그 법적 형벌을 누군가 대신 해결해 주는 구조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실제적인 악의 사랑과 그로 인해 뒤틀린 삶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구원 역시 단순히 죄책의 장부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악의 권세에서 실제로 건져 내어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 역시 죄책감과 눈물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의 질서가 실제로 바뀌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영상에서 이영길 수도사가 산속에 자신의 무덤을 미리 파 놓고 ‘내가 죽으면 여기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소개됩니다. 이것은 죽음을 기억하며 세상의 소유와 욕망을 내려놓으려는 수도 전통의 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 자체를 반복해서 바라보는 것이 영성의 목적은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끝이 아니라 영계에서의 삶으로 넘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언제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죽은 뒤에도 그대로 가지고 갈 사랑은 지금 무엇인가?’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 재산과 지위와 육체를 모두 남겨 두고 갑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한 것은 가지고 갑니다. 돈을 사랑했다면 그 사랑을 가지고 가고, 지배를 사랑했다면 그 욕망을 가지고 가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했다면 그 사랑 역시 가지고 갑니다. 그러므로 무덤을 파 놓고 바라보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죽음의 준비는 매일 자기 안의 악한 사랑을 살피는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은 결국 ‘지금 내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강 목사님은 이영길 수도사의 모습을 ‘사람 같지 않은 수도사의 모습’으로 묘사하며 큰 감동을 표현합니다. 깊은 산속에서 휴대전화조차 터지지 않는 곳에 십 년 넘게 홀로 머물고, 여성을 만나지 않으며, 자신의 무덤까지 준비해 놓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삶은 분명 현대인의 눈에는 놀랍게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외적 극단성에 대한 감탄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사람이 재산을 모두 버려도 ‘나는 모든 것을 버린 수도자’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자기 생각을 사랑할 수 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도 자기 우월감을 사랑할 수 있으며, 무덤을 파 놓고 죽음을 묵상하면서도 자신의 영성을 특별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재산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며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알고, 자기 이익보다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금욕의 양은 영성의 높이를 측정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영길 수도사의 수도생활을 낮추어 볼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영상에서 아름답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오랫동안 수도했음에도 아직 자기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고백했다는 부분입니다. 만일 그 고백이 진실했다면, 그것은 자기 완성을 과시하는 말보다 훨씬 수도적입니다. 십 년을 수행한 뒤에도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살피는 태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사람이 거듭날수록 자신에게 있는 선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더 많이 보고, 자기 의보다 자신의 proprium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더 깊이 보게 됩니다.

 

다만 이 영상 전체에서 수도의 완성이 ‘음란의 욕망이 완전히 없어지고,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 상태’로 압축되는 것은 조금 아쉽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 존재 전체에 관한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음란도 중요한 악이지만, 교만, 지배욕, 자기 공로, 복수심, 탐욕, 거짓, 타인을 업신여기는 마음 등도 모두 거듭남의 대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적 욕망에서는 매우 자유로워졌어도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하다면 아직 깊은 거듭남의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눈물은 거의 없지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매우 깊은 영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의 완성’은 특정 욕망 하나가 사라지거나 특정 감정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상태라기보다,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이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옮겨 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는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완전한 종착점이 없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도 천사들은 완성된 채 멈춰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사랑과 지혜에서 자라갑니다.

 

이 영상은 수도가 단순한 외적 형식이 아니라 자기 내면과 싸우는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귀합니다. 깊은 산속에 십 년 넘게 홀로 살았어도 자기 안의 음란을 문제 삼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고백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졌을 때에도 같은 사람인가? 외적 환경이 바뀌었을 뿐인데 그것을 내적 변화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악을 정직하게 보고 있는가?’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마지막에 다시 주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수도의 목적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완벽한 수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악을 죄로 인식하고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거절하되, 실제로 악을 이길 힘과 선을 행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수도자는 자기 자신을 정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정화하시도록 자유롭게 협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말하는 ‘수도의 완성’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수도의 완성은 어떤 욕망이 전혀 느껴지지 않거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특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점점 더 정직하게 보고,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면서, 자기 사랑이 차지하던 자리에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점점 더 들어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영길 수도사의 이야기에서 가장 오래 기억할 만한 장면은 어쩌면 깊은 산속 생활이나 미리 파 놓은 무덤보다 ‘십 년 넘게 수도했지만, 아직 내 안에 이것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된 영성은 ‘나는 여기까지 왔다’고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보다, ‘주님, 제 안에는 아직도 주님께서 고쳐 주셔야 할 것이 이렇게 많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더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SY.50, 강문호 목사, ‘이스라엘 첫 수도원, 채리톤’ (20191208)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 이야기 : 채널설립이유’라는 제목으로, 강문호 목사님이 앞으로 자신이 접한 수도사들의 삶과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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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4:1)

 

AC.338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man and Eve his wife)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처럼 태고교회를 말합니다. 그 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가인(Cain)이라 합니다. 하와가 말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는 건,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말입니다. By the “man and Eve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s has been made known; its first offspring, or firstborn, is faith, which is here called “Cain”; her saying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ies that with those called “Cain,” faith wa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해설

 

AC.338부터 스베덴보리는 창4: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이하기 시작합니다. 앞의 AC.324-337이 창4 전체의 개요였다면, 이제부터는 본문을 한 구절씩 따라가며 그 속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다시 개인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태고교회를, 그들에게서 태어난 ‘가인’은 그 교회 안에서 처음 생겨난 어떤 교리적 변화를 나타냅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가인을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이것만 보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가인을 계속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인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태어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안에도 당연히 신앙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사랑과 구별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AC.338의 핵심 표현인 ‘faith wa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뜻을 풀면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AC.337에서 살펴본 ‘가인의 분리’가 바로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누군가가 ‘사랑은 필요 없다’고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들어 있던 신앙을 따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미세한 변화처럼 보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신앙은 본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퍼셉션으로 알았으며, 그러므로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무엇으로 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랑’과 ‘신앙’을 구별하여 바라보고, 신앙을 하나의 독립된 실재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이 단계에서는 체어리티를 노골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이 작은 분리에서 이후의 모든 문제가 시작될 가능성이 생긴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부부간 준수 사항’의 비유가 여기에도 잘 들어맞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존중과 배려와 약속은 원래 사랑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들을 사랑에서 떼어 ‘부부생활 준수 사항’이라는 독립된 체계로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당장 사랑을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 독립적인 중요성을 갖고, 나중에는 ‘사랑이 없어도 이 규칙만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본래의 질서는 완전히 뒤집힙니다. 가인의 시작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죽인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바라본 데서 시작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와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영어 번역은 ‘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고 되어 있는데,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이 새롭게 나타난 신앙을 하나의 중요한 실재로 ‘인식하고 인정했다’는 것을 읽어 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신앙을 거짓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되고 중요한 것으로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가인의 위험성은 처음부터 명백한 거짓의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굳이 사랑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로 세운 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단’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이단은 언제나 처음부터 모든 진리를 부정하면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것 가운데 하나를 떼어 내어 전체보다 높이고, 본래 그것이 연결되어 있어야 할 다른 진리들과 분리하면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것입니다. 교리도 필요합니다. 진리를 알고 고백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이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만드는 순간, 참된 것이 오히려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38에서 ‘처음 난 것’이라는 표현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인이 시간적으로 태고교회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한 개인이었다는 식으로만 이해하기보다, 태고교회로부터 처음 갈라져 나온 교리의 성격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우리가 앞에서 계속 확인했듯 창4와 창5의 계보를 단순한 시간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몇 년 뒤에 누가 태어났는가’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생명에서 어떤 교리의 흐름이 생겨났으며, 그것이 어떤 성격을 갖게 되었는가에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신앙을 구별하는 것’과 ‘신앙을 분리하는 것’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도 오늘날에는 신앙이 먼저이고,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신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을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된 것이 마침내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높일 때, 그것이 가인의 길이 됩니다.

 

따라서 AC.338은 가인의 타락이 이미 완성된 상태를 보여 주는 글이라기보다, 그 타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변화였습니다. 사랑 안에 살아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바라보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분리가 계속 진행되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38은 우리에게도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믿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참된 교리라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확신과 자기 우월성을 강화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 진리는 본래의 질서를 잃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악을 버리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하면서 자신의 참된 생명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38의 핵심은 ‘가인은 신앙이다’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은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그 자체로 독립된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다’라는 데 있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어느 날 갑자기 체어리티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였던 것을 둘로 떼어 바라보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미세한 시작점에서부터 교회의 쇠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이제 창4 본문을 따라 하나씩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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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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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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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배경’ -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이유’

AC.337 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가 왜곡된 것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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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8/1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9,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89, ‘샤론의 꽃 예수입니다.

 

오늘 4 절별 주석 시작 전 먼저 창4 전체 개요를 살피는 4 본문, 개요 및 배경시간으로 AC 글 번호로는 324번에서 337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오늘은 전체 개요이므로 창4 전체를 봉독하겠습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

 

제목은

 

가인과 아벨,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하여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24-337 요약입니다.

 

가인과 아벨,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하여(AC.324-337)

 

AC.324-337은 창4에 기록된 가인과 아벨, 가인의 후손들, 그리고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져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4에 기록된 이름들을 반드시 기록된 순서 그대로 이어진 개인들의 역사나 교회의 시간표로만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이름들을 통하여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여러 교리와 교회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가인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흐름은 하나가 완전히 끝난 뒤 다른 하나가 시작되었다고 보기보다, 태고교회 안에서 서로 구별되어 나타난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AC.324는 이 장 전체의 주제를 먼저 밝힙니다. 여기서는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 곧 이단들을 다루며, 또한 에노스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를 다룹니다. 따라서 창4의 중심에는 처음부터 두 방향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참된 교회의 생명에서 벗어나 여러 이단과 분파로 갈라져 가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을 다시 이루어 새로운 교회를 세워 가시는 흐름입니다.4의 여러 이름은 이러한 교회의 변화를 사람과 족보의 형식으로 보여 줍니다.

 

AC.325-326에서 그 첫 번째 중요한 구별이 가인아벨로 나타납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렇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가인이라 불렸습니다. 반면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것의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 역시 이러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가인의 제물은 사랑과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를,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를 뜻합니다.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는 것은 외적인 예배의 형식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무리 신앙을 고백하고 진리를 많이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AC.327-329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점차 어떤 성격을 띠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의 분노안색이 변함은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악해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다시 선을 행하는 삶과 결합한다면 회복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체어리티 역시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두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분리된 신앙이 끝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게 되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속뜻으로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사람들에게서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음을 뜻합니다.아벨의 핏소리는 그렇게 소멸된 체어리티를 나타내며,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음은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된 것을,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됨은 거기서 비롯된 거짓과 악을 나타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신앙 자신도 참된 생명을 잃고, 결국 방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인을 곧바로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에게 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섭리를 보여 줍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잘못된 것이지만, 신앙에 속한 것 자체까지 완전히 없어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주님께서는 바로 신앙으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실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분리된 신앙을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장차 회복을 위하여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가인의 흐름 안에서는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계속 확대되고 여러 형태로 갈라집니다. 그 확대가 에녹으로,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이 그 후손들의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라멕이라 불리는 마지막 상태에 이르면 마침내 신앙에 속한 것조차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이어 아다와 씰라 및 그 자녀들로 표현되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이 나타나며, 야발은 그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유발은 영적인 것들을, 두발가인은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쇠퇴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계속 새로운 형태로 보존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한편,4에는 이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회의 흐름이 에노스로 나타납니다.은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앙을 뜻하며,에노스는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심어진 교회를 뜻합니다. 따라서 셋과 에노스를 가인과 라멕의 역사가 모두 끝난 뒤에 비로소 등장한 후대의 교회라고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의 흐름을 각각의 이름과 계보 아래 보여 주고 있으며,5에서는 다시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을 별도로 전개합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태고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두 계열 모두 결국 홍수로 표상되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때를 향해 갑니다.

 

AC.337은 이러한 모든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태고교회 본래의 모습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무엇이 왜곡되었는지를 알려면 먼저 왜곡되기 전의 참된 질서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것 외에는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으로부터 주님에게서 신앙을 받았으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말하기조차 원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앙이 이미 사랑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시72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는 사랑을,은 신앙을 상징합니다. 달이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해의 빛을 받아 비추듯, 태고교회의 신앙도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30:26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 역시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마침내 하나의 생명이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가인으로 표현된 최초의 왜곡은 신앙을 없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AC.337은 오늘날의 사람에게 태고교회와 똑같은 질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으로 나아갔지만, 이후의 인간은 먼저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뒤,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길을 걷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앙을 배우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가인적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체어리티로 나아가지 않고,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채 그 자체로 구원의 전부라고 주장할 때입니다.

 

따라서 AC.324-337의 중심은 단순히 신앙보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고, 이후의 인간에게는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질서가 마련되었습니다. 방향은 달라졌지만, 주님의 목적은 같습니다. 사람이 알고 믿는 진리가 마침내 그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선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그 결합이 깨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셋과 에노스는 주님께서 그 결합을 다시 이루어 가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은 인간의 실패 가운데서도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시는 주님의 끊임없는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24, 창4, ‘창4 본문, 개요, 배경’(AC.324-337)

창4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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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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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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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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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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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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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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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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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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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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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AC.333의 ‘그때’에 대한 설명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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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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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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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배경’ -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이유’

AC.337 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가 왜곡된 것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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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보충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

AC.337.심화 2. ‘가인의 분리’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접하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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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4 절별 주석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시작합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16(D1)

 

2664, 1, 창4.1, 2026-08-16(D1)-주일예배(창4, AC.324-337), ‘창4 본문, 개요 및 배경’.pdf
1.09MB

 

 

 

주일예배(2026/08/09, 창3:24-4:1, AC.314-323), ‘사람이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과 영으로 산다는 것’

※ 오늘(2026/08/09)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8,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찬88, ‘내 진정 사모하는’입니다. 오늘은 일종의 쉬어가는 주로 AC 글 번호로는 314번에서 323번입니다. AC 창3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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