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3:1)

 

AC.196

 

고대에는 계시된 것들보다 감각적인 것들에 대해 더 큰 신뢰를 두는 자들을 (serpents)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었는데, 이제는 보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지식들[scientifica]로 그러한 불신을 스스로 확증함으로써, 자기 안에 훨씬 더 큰 정도의 시력 상실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각의 것, 기억 지식의 것, 그리고 철학으로부터 하늘의 일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자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눈멀게 하여, 이후에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이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귀머거리 뱀(deaf serpents)일 뿐 아니라 훨씬 더 해로운 날아다니는 뱀(flying serpents)이기도 함을 알 수 있도록, 우리는 그들이 영에 대해 무엇을 믿는지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In ancient times those were called “serpents” who had more confidence in sensuous things than in revealed ones. But it is still worse at the present day, for now there are persons who not only disbelieve everything they cannot see and feel, but who also confirm themselves in such incredulity by knowledges [scientifica] unknown to the ancients, and thus occasion in themselves a far greater degree of blindness. In order that it may be known how those blind themselves, so as afterwards to see and hear nothing, who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heavenly matters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who are not only “deaf serpents,” but also the “flying serpents” frequently spoken of in the Word, which are much more pernicious, we will take as an example what they believe about the spirit.

 

[2] 감각적인 사람, 곧 오직 감각의 증거만을 믿는 자는, 영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영의 존재를 부인하며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니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It is nothing because I do not feel it: that which I see and touch I know exists)라고 합니다. 기억 지식의 사람[scientificus], 곧 기억 지식들로부터 결론을 내리는 자는 말하기를, ‘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기체나 열기 같은 것이거나, 혹은 자기 학문 속의 어떤 다른 실체일 뿐이며, 곧 허공으로 사라질 것 아닌가? 동물들도 몸과 감각과 이성, 그리고 그 유사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죽는다고 하면서, 어찌 사람의 영만은 산다고 말하는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The sensuous man, or he who only believes on the evidence of his senses, denies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ecause he cannot see it, saying, “It is nothing because I do not feel it: that which I see and touch I know exists.” The man of memory-knowledge [scientificus], or he who forms his conclusions from memory-knowledges says, What is the spirit, except perhaps vapor or heat, or some other entity of his science, that presently vanishes into thin air? Have not the animals also a body, senses, and something analogous to reason, and yet it is asserted that these will die, while the spirit of man will live. Thus the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3] 철학자들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예리하다고 자처하지만, 사실상 그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영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은 영에 대해 논쟁하며, 물질적이거나 유기적이거나 연장된 것에서 무엇이든 취하는 표현은 하나도 영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을 자기 관념에서 지나치게 추상화하여, 마침내 그것을 상실해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다소 건전한 이들은 영을 사고(thought)라고 말하지만, 사고에 대해 추론하면서 거기서 모든 실체성을 분리해 버리기 때문에, 결국에는 육체가 죽을 때 사고도 함께 사라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감각의 것, 기억 지식의 것, 철학으로부터 추론하는 모든 자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하며, 그 결과 영과 영적인 것들에 관해 언급되는 어떤 것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the simple in heart)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영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자기들은 영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고 말하는데, 이는 주님께서 죽은 후에도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하여 자기 이성을 소멸시키는 대신, 주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살아 있게 합니다. Philosophers also, who would be more acute than the rest of mankind, speak of the spirit in terms which they themselves do not understand, for they dispute about them, contending that not a single expression is applicable to the spirit which derives anything from what is material, organic, or extended; thus they so abstract it from their ideas that it vanishes from them, and becomes nothing. The more sane however assert that the spirit is thought; but in their reasonings about thought,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rom it all substantiality, they at last conclude that it must vanish away when the body expires. Thus all who reason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and therefore believe nothing of what is said about the spirit and spiritual things. Not so the simple in heart: if these are questioned about the existence of spirit, they say they know it exists, because the Lord has said that they will live after death; thus instead of extinguishing their rational, they vivify it by the Word of the Lord.

 

 

해설

 

이 단락은 ‘’이라는 상징을 시대적 변화 속에서 더욱 날카롭게 확장합니다. 고대에는 계시보다 감각을 더 신뢰하는 상태만으로도 ‘’이라 불렸는데,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의 상태를 그보다 훨씬 심각한 것으로 진단합니다. 이제 인간은 단순히 감각에 의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동원하여 자신의 불신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고 확증합니다. 그 결과 생기는 시력 상실은 고대보다 훨씬 깊고 완고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지식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감각적 불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용될 때 발생합니다. 고대인들에게는 없었던 ‘scientifica’, 곧 체계화된 자연 지식과 학문은 본래 질서 안에서는 유익하지만, 계시를 배제하는 도구가 될 때 오히려 인간을 더 깊은 영적 어둠으로 끌어들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날아다니는 뱀’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단순히 땅에 붙어있는 감각적 사고보다 훨씬 빠르고 널리 해를 끼치는 사고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예로 ‘영에 대한 믿음’을 선택합니다. 감각적인 사람은 영을 보거나 만질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합니다. 여기서 감각은 판단의 최종 기준이 되며, 존재의 조건은 물리적 접촉 가능성으로 축소됩니다. 이는 영적 실재를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거하는 태도입니다.

 

기억 지식의 사람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영을 자기 학문 체계 안의 개념으로 환원합니다. 영은 기체, 열기, 혹은 어떤 일시적 현상으로 설명되며,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도 지워지며, 영의 영속성은 부정됩니다. 이는 감각적 불신이 지식의 언어를 빌려 체계화된 모습입니다.

 

철학자들의 경우는 더욱 미묘합니다. 이들은 영을 지나치게 순수한 개념으로 만들기 위해, 물질성, 조직성, 실체성을 모두 제거합니다. 그 결과 영은 사고라는 이름으로 남지만, 그 사고조차 실체가 없으므로 육체와 함께 소멸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영은 논리적으로 ‘없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이는 지성의 승리가 아니라, 지성이 자기 대상을 스스로 말살한 결과입니다.

 

이 모든 경우의 공통점은, 감각, 지식, 철학이 각각 다른 옷을 입고 있으나, 동일한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영과 영적인 것들에 관해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됩니다.

 

이에 대비되어 제시되는 것이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the simple in heart)입니다. 이들은 철학적 정의나 과학적 증명을 제시하지 않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영이 존재함을 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단순함은 무지가 아니라, 질서의 보존입니다. 이들은 이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 이성을 살아 있게 합니다.

 

AC.196은 결국, 타락의 마지막 단계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무지나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계시를 무력화시키는 상태입니다. 동시에 이 단락은 참된 이성이 어디에서 살아나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이성은 감각과 철학으로 강화될 때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살아 움직입니다.

 

 

심화

 

1. ‘오늘날(the present day)

 

 

AC.196, 심화 1, ‘오늘날’(the present day)

AC.196.심화 1. ‘오늘날’(the present day)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었는데, But it is still worse at the present day, (AC.196) 본문의 ‘오늘날’(the present day)과 이 글을 쓰고 있는 2026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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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식들(knowledges, [scientifica])

 

 

AC.196, 심화 2, ‘지식들’(knowledges, [scientifica])

AC.196.심화 2. ‘지식들’(knowledges, [scientifica])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지식들[scientifica] knowledges [scientifica] unknown to the ancients, (AC.196)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45, 6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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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태고교회는 석기시대였을까?

 

 

AC.196, 심화 3, ‘태고교회는 석기시대였을까?’

AC.196.심화 3. ‘태고교회는 석기시대였을까?’ 저는 ‘태고교회라고 무조건 석기시대 비슷한 문명일 거라는 생각 대신 어쩌면 오늘날에 버금가는 찬란한 문명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지구 나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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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5, 창3:1, ‘뱀’(serpent)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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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5.심화

 

6. ‘20:16-17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20:16, 17) 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 the vipers tongue shall slay him. he shall not see the brooks, the flowing rivers of honey and butter (Job 20:16–17).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욥20:16-17을 인용하는 이유는, 감각적 추론이 인간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가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시편과 아모스, 예레미야의 구절들이 주로 뱀의 독 자체와 그 위험성을 설명했다면, 욥기의 이 구절은 그 독의 결과로 사람이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는 말씀은, 사람이 스스로 독을 받아들인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뱀이 억지로 독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마시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감각과 기억 지식에 근거한 추론을 사람이 스스로 사랑하고 선택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는 그것을 지혜라고 생각하고, 분별력이라고 생각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적 생명을 약화시키는 독을 마시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다음 구절입니다.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AC.195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꿀과 젖의 강’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천국의 삶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풍성함을 뜻합니다.

 

왜 하필 ’과 ’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 따르면, 꿀은 자연적 차원에서 느껴지는 선의 달콤함을, 젖은 보다 내적인 진리와 선의 양육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성경 전체에서 천국적 상태와 교회의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꿀과 젖이 흐르는 강’을 본다는 것은 영적 생명의 아름다움과 주님의 사랑에서 오는 기쁨을 지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감각적 추론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주목할 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 꿀과 젖도 여전히 있습니다. 천국의 실재도 존재합니다. 주님의 사랑도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뱀의 독에 중독된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립니다.

 

이 점이 AC.195 전체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감각적 인간은 자신이 더 많이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증거를 요구하고, 분석하고, 검증하고, 논증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자연은 보지만 천국은 보지 못합니다. 물질은 보지만 영은 보지 못합니다. 현상은 보지만 원인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AC.196으로 이어지면 결국 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상태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욥기 20장의 이 말씀은 이성질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는 틀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실재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본문처럼 보입니다. 뱀의 독은 사람을 즉시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 나는 잘 보고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는 정작 꿀과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독사의 독’은 감각과 기억 지식에 근거한 잘못된 추론을 뜻하고, ‘꿀과 젖이 흐르는 강’은 영적, 천적 진리의 풍성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뱀의 독을 사랑할수록, 그는 천국의 강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통해 강조하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AC.195, 창3:1, ‘뱀’(serpent)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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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5, 심화 5, ‘렘46:22-24’

AC.195.심화 5. ‘렘46:22-24’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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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5.심화

 

5. ‘46:22-24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46:22-24) The voice of Egypt shall go like a serpent, for they shall go in strength, and shall come to her with axes as hewers of wood. They shall cut down her forest, saith Jehovah, because it will not be searched; for they are multiplied more than the locust, and are innumerable. The daughter of Egypt is put to shame; she shall be delivered into the hand of the people of the north (Jer. 46:22–24).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렘46:22-24를 인용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애굽’과 ‘’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그는 이 본문을 통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scientifica)에 근거하여 신적인 것들을 판단하는 상태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애굽’은 단순히 고대 국가가 아닙니다. 상응적으로는 기억 지식, 학문, 경험적 지식의 영역을 뜻합니다. 원래 이것들은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실제로 태고교회 이후의 고대교회에서는 많은 지식과 학문이 선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과 진리를 섬기는 종의 자리를 떠나, 주님과 진리를 심판하는 자리에 올라설 때입니다. 그때 애굽은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AC.195에서 스베덴보리는 ‘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라는 말씀에 주목합니다. 왜 하필 뱀의 소리일까요? 창3의 뱀이 감각적 인간을 상징하듯이, 여기서도 애굽은 기억 지식과 감각적 증거를 근거로 신적인 것들을 판단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뱀의 소리’란 단순한 말소리가 아니라, 감각과 지식을 근거로 추론하는 사고방식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도끼를 가지고 와서 수풀을 찍는다’는 표현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도끼는 분석하고 쪼개고 해체하는 지성의 작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기억 지식과 감각적 추론은 모든 것을 분석하고 설명하려 합니다. 문제는 그 대상이 영적인 신비일 때입니다. 사랑, 신앙, 천국, 주님의 섭리 같은 것은 본래 해부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의 대상인데, 감각적 인간은 그것마저 분석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마치 숲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또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숲은 종종 진리와 지식의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완전히 조사하고 이해, 장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들은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결코 완전히 탐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은 조사될 수 없다’는 말씀을,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 진리에 대한 암시로 읽습니다.

 

마지막으로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라는 말씀은 AC.195의 결론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북쪽’은 흔히 진리의 빛이 없는 상태, 곧 어둠이나 무지를 뜻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감각과 기억 지식에 가장 의존하는 사람은 자신을 가장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영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더 깊은 어둠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은 결국 북쪽 백성의 손에 넘겨집니다. 즉, 자신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영적 맹목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195에서 예레미야 46장은 단순히 애굽에 대한 예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통해 창3의 뱀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계속 작동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은 본래 주님께서 주신 좋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신앙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면, ‘애굽의 소리’는 ‘뱀의 소리’가 됩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해 보자면, 이 본문은 ‘지식질’ 또는 ‘학문질’의 위험성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식이 주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성이 문제가 아니라, 이성이 주님을 재판하려 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AC.195에서 스베덴보리는 ‘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는 인간의 추론이 결국 영적 어둠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195, 심화 6, ‘욥20:16-17’

AC.195.심화 6. ‘욥20:16-17’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욥20:16, 17) 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 the viper’s tongue shall 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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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5, 심화 4, ‘암5:19-20’

AC.195.심화 4. ‘암5:19-20’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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