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2:21)

 

AC.147

 

갈빗대(rib)는 가슴의 뼈로서, 생명력(vitality)이 거의 없는 사람의 own(proprium)을 뜻하며, 동시에 그에게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는 own을 뜻합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는 생명력이 있는 own을 뜻합니다. ‘깊은 잠(deep sleep)은 그가 자기의 own을 가진 것처럼 느끼도록 허락된 상태를 뜻하는데, 이 상태는 잠과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그 상태에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이 자기로부터, 그러니까 스스로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여길 뿐,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그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일어나게 되며, 그렇게 비로소 잠에서 갠 상태가 됩니다. By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 is meant man’s own, in which there is but little vitality, 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 by “flesh in the place of the rib” is meant an own in which there is vitality; by a “deep sleep” is meant the state into which he was let so that he might seem to himself to have what is his own, which state resembles sleep, because while in it he knows not but that he lives, thinks, speaks, and acts, from himself. But when he begins to know that this is false, he is then roused as it were out of sleep, and becomes awake.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 후반부 가운데서도 ‘가장 정밀한 인간 의식 분석’에 해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갈빗대’, ‘’, ‘깊은 잠’이라는 상징을 통해, 인간이 자기의 own, 곧 자신의 proprium을 어떻게 경험하며 살아가는지를 거의 현상학적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갈빗대’입니다. 갈빗대는 뼈이며, 뼈는 생명력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사람의 own이 본질적으로는 ‘생명을 담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이 자기의 own은 인간에게 매우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자기성(自己性)의 역설입니다. 생명은 없지만, 가장 나 자신처럼 느껴지는 것, 가장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own(라틴 proprium)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갈빗대를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그 자리에 ‘’을 채우십니다. 이는 인간의 자기성이 완전히 비생명적인 것으로 방치되지 않고, ‘생명력을 띠도록 허락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생명력은 자기의 own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흘러 들어와 own과 결합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로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깊은 잠’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무의식이나 혼수 상태가 아니라, ‘자기로부터 산다고 느끼는 의식 상태’를 뜻합니다. 이 상태에 있는 동안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기는 걸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오류가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허락하신 상태입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하려면, 이렇게 느끼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는 ‘’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상태에서는 생명의 실제 근원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말합니다. 사람이 ‘이것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곧 자신이 자기로부터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그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됩니다. 이것이 영적 각성입니다.

 

이 각성은 자기의 own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own의 위치를 바로 잡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는 나로 느끼며 살지만, 그 생명의 근원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상태, 이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own, 즉 proprium을 가지되, 그것을 생명의 주인으로 착각하지 않습니다.

 

AC.147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느끼는 상태는 필연적으로 ‘’과 같지만, 그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자기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아는 데 있으며,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비로소 참으로 깨어 있게 된다고 말입니다.

 

 

 

AC.148, 창2:21, 더 깊은 상응으로 본 '갈빗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8 사람의 own(proprium), 곧 그에게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는 own을 ‘갈빗대’(r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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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6, 창2:19-20, '창2:18-20의 전체 구조'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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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6.심화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말인데요, his quality the affections of good knowledges of truth, 이 두 가지로 결정되네요?

 

 

네, 바로 그렇습니다. AC.146의 이 표현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핵심을 아주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인간의 ‘quality’, 곧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결국 두 축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선의 애정들(affections of good)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의 지식들(knowledges of truth)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선행과 지식’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매우 의도적으로 affections knowledges라는 말을 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히 무엇을 알고 있느냐만으로 규정되지 않고,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의해 훨씬 더 깊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affections of good’, 곧 ‘선의 애정들’은 인간 안의 사랑의 방향을 뜻합니다. 어떤 선을 기뻐하는가,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가, 어디에 마음이 끌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층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affection은 단순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의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선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quality를 결정합니다.

 

반면 ‘knowledges of truth’, 곧 ‘진리의 지식들’은 그 사랑이 어떤 진리 안에서 형성되고 인도받는가를 뜻합니다. 여기서 knowledges는 단순 암기 정보가 아니라, 진리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내용들입니다. 인간은 사랑만으로는 방향을 잃기 쉽고, 진리만으로는 생명이 메마르기 쉽기 때문에, 선의 애정과 진리의 인식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AC.146의 이 표현은, 인간의 quality가 결국 ‘무엇을 사랑하는가’와 ‘무엇을 참이라고 알고 있는가’라는, 이 두 가지의 결합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순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affections of good을 두고, 그다음 knowledges of truth를 둡니다. 이것은 인간의 중심이 결국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진리의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섬길 때 살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진리를 알아도, 어떤 사람은 자기 우월감을 위해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사용합니다. 겉 지식은 비슷해도 quality는 완전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quality의 중심에는 affection, 곧 사랑의 방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146은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 단순 학문 수준이나 외적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실제 quality는, 그 사람이 어떤 선을 사랑하고 있으며, 어떤 진리 안에서 그 사랑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AC.146, 창2:19-20, '창2:18-20의 전체 구조'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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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6, 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AC.146.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왜냐하면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 및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업신여김을 시작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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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6.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왜냐하면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 및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업신여김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for those who are such as to desire what is their own, begin to despise the things of the Lord,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

 

위 본문에서 맨 끝 영어,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가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여기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는 직역하면, ‘그것들이 그들에게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진다 하더라도’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represented shown이 단순 반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 문맥에서 ‘represented’(표상되다)는 단순히 눈앞에 나타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영적 진리나 주님의 것이 상징과 표상, 상응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즉, 말씀, 교회의 예식, 자연 속 질서, 천사적 상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주님의 진리와 선이 인간 앞에 ‘표상적으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반면 ‘shown’(보여지다)은 그것이 단지 상징 속에 숨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이해 가능하도록 드러나고 밝혀지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 표상만이 아니라 설명되고 드러나며, 어느 정도 인식 가능한 상태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단순히 ‘아무리 설명해 줘도’ 정도보다 더 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상태로 기울기 시작하면, 주님의 진리와 질서가 상징적으로나 직접적으로나 아무리 분명하게 드러나도 점점 그것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즉,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라는 뜻입니다. 진리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 안의 중심 사랑이 자기 자신 쪽으로 굳어질 때, 그 사람은 점점 주님의 것들을 하찮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풀면 대략 이런 뜻입니다.

 

자기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진리와 선이 상징과 계시를 통해 아무리 분명히 드러나고 실제로 보여진다 해도, 점점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

 

여기서 ‘plainly’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희미하게 암시된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명백하게 드러난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도 proprium이 중심이 되면,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46의 이 문장은, 타락의 핵심이 단순 무지가 아니라 ‘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함’에 있다는 점을 아주 날카롭게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AC.146, 심화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AC.146.심화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말인데요, his quality가 the affections of good과 knowledges of truth, 이 두 가지로 결정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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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6, 창2:19-20, '창2:18-20의 전체 구조'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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