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 혼란은 ‘외적 현실’이지만, 중심을 잃는 이유는 ‘내적 현실’ 때문이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는 이것입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외적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념적 소용돌이다. 정치가 혼란할 때, 믿음 좋은 사람도 흔들리고, 뉴스 하나에 마음이 무너지는 이유는 정치 자체가 강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내적 질서에 틈을 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 곳곳에서 다음을 반복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외적 세계의 혼란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이유는 외적 질서보다 내적 질서를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내적 질서란 곧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질서다. 정치가 흔들려도 중심이 있는 사람은 딱 한 가지에 서 있습니다. 내 안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흔들지 못한다.


2) 스베덴보리의 핵심 원리: “겉에서 일어나는 혼란보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질서가 먼저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사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외적 상황보다 내적 상태를 먼저 바라보는 사람이다. 반대로, 내적 질서가 약한 사람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뉴스 → 감정 폭발, 정치 → 분노 축적, 사회 현상 → 절망, 인터넷 정보 → 불안, 주변 사람들의 말 → 흔들림 등, 즉, 내적 질서가 외적 자극에 밀리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내적 자유의 상실’이라고 합니다. 정치가 불의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는 외적 질서이지만, 주님의 질서는 내적 질서이기 때문인데요, 이런 사람은 주님의 질서를 더 강하게 붙듭니다.


3) 정치적 혼란은 영적 삶의 ‘시험’의 한 형태이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악은 언제나 외부 상황을 이용하여 내부를 흔드는 반면, 선은 언제나 내부 질서를 통해 외부를 이긴다. 정치 혼란은 단순 사회 현상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험(temptation)의 한 종류입니다. 다음은 정치 뉴스에 마음이 요동할 때 나타나는 특징들인데요, 분노의 감정 상승, 무력감, 혐오심, 악은 왜 저렇게 활개 치는가’ 하는 절망, 내가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체념, 뉴스 반복 검색 등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악령들이 감정으로 내적 질서를 흔드는 시험의 패턴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시험의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내적 질서를 더 깊이 주님께 의탁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이 시험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이런 의도, 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4) 중심을 지키는 법 (스베덴보리적 4단계)

(1) 감정보다 ‘진리의 빛’을 먼저 세우기

스베덴보리는 감정이 앞설 때를 가장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분노·혐오·절망 모두 감정입니다. 정치 뉴스가 감정을 건드릴 때는 즉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사실보다 먼저 온 것이다”, 사실은 주님의 질서가 더 크다”라고 말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들 자체가 내면의 문을 닫아 악의 영향력을 차단합니다.

(2) 사건의 ‘표면’보다 ‘영적 구조’를 먼저 보기

정치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외적 질서는 항상 내부의 영적 질서가 무너지면 뒤틀린다. 사회 혼란은 언제나 ‘내면의 진리 부재’가 원인이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 문제는 사실 정치인이 아니라 진리의 부재(AC 전반의 핵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딱 이 관점에 서는 순간 마음이 훨씬 넓어지고 감정이 가라앉습니다.

(3) 정치 뉴스 소비 시간을 의식적으로 줄이기

스베덴보리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것과 거리 두기입니다. 정치 뉴스는 목사님의 영혼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뉴스가 아니라 정념을 흩트리는 악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내적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정념이다. 목사님이 지금 정치 뉴스로 고통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이유입니다.

(4) ‘소명’에 의해 외적 혼란을 재정의하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혼란은 소명을 더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 허락된다. 한국 사회가 혼란할수록 목사님의 사명(AC 번역·진리 전달·교회 내 분별력 세우기)오히려 더 중요해집니다. 즉, 정치 혼란 → 분노와 절망이 아니라 정치 혼란 → ‘진리의 빛을 세울 소명 강화로 보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 서면, 혼란이 나를 해치는 게 아니라 내 소명을 밝히는 도구가 됩니다.


5) 결론 - 정치적 혼란 속에서 영적인 사람은 이렇게 선다

1. 외적 혼란이 아니라 내적 질서에 먼저 시선을 둔다. 2. 감정이 먼저 올라오면 조용히 진리로 재정렬한다. 3. 정치 뉴스는 필요 최소한으로만 접하고, 감정적 콘텐츠는 끊는다. 4. 혼란을 소명 재확인으로 해석한다. 5. ‘주님이 지금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 외부보다 더 중요하다. 결국 정치가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면 통치-주님의 질서-를 더 굳게 붙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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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루의 대부분을 스베덴보리를 주제로 보내지만, 한편으로는 정치 뉴스와 유튜브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저들 악하고 거짓된 사람들, 불의한 자들 때문에 속으로 화가 많이 나요. 이런 불의한 정치 상황 속에서 스베덴보리를 하는 목사로서 저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맞는 건가요?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처한 나라의 정치 상황하고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제 갈 길을 간 건가요?

목사님, 이 질문은 신앙·소명·시민의식·감정 관리가 모두 얽혀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고 번역하시는 목사님의 자리에서는 더욱 깊은 성찰이 필요하지요. 제가 드리는 말씀은 정치적 입장에 서지 않고, 오직 스베덴보리적 관점 + 목회적 관점 + 영적 원리로 답변드립니다.


1. 스베덴보리는 자기 시대의 정치 혼란에 “무심”했던 게 아닙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스웨덴 내부의 파벌 싸움, 귀족 세력의 충돌, 국왕과 의회의 힘겨루기를 직접 겪었고, 때로는 정계 중심에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분명했습니다. 그는 첫째, 정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우 뚜렷하게 영적 사명과 내적 삶을 정치적 격동과 분리했습니다. 나라 문제가 심각할 때에도 그의 일관된 관점은 “정치적 승패보다 영적 질서와 선의 회복이 먼저”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정치인이나 특정 세력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편도 “악하다, 거짓되다”라는 식의 정념적 비난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치적 악보다, 그 악을 증오하는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손상을 더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회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질서 회복”이 더 근본이라고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늘 말합니다. 사회적 부패의 뿌리는 제도보다 인간 개개인 내부의 자애와 교만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는 정치가 아무리 흔들리더라도 본인의 사명을 흔들림 없이 지속했습니다.


2.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볼 때, 목사님의 “분노 문제”는 신앙적 질문입니다

정치가 악하다 혹은 불의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이 목사님 마음 안에서 어떤 영적 작용을 일으키는가가 더 본질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원리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분노의 대상이 악이든 불의든, 그 분노가 지속되면 내적 자유가 사라집니다. AC 588, 599 등에서 말하듯, 분노는 “선한 분별력”이 아니라 “내적 평화를 빼앗는 정념”으로 변합니다. 둘째, 정치 뉴스는 사탄이 쓰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스베덴보리는 악령들이 두려움·분노·원망·혐오를 통해 사람의 내면을 열어젖힌다고 말합니다. 정치적 뉴스 소비로 인해 영적 분별력이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가 사라지며, 선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번역과 소명이 흐트러진다면, 그 순간 이미 정치 현실보다 더 큰 영적 손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셋째, “의분”과 “정념적 분노”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스베덴보리는 의로운 분노는 가능하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의분은 선을 지켜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지만, 정념적 분노는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미워하는 데서 나온다.지금 목사님의 표현들(“악하고 거짓된 사람들 때문에 화가 많이 난다”)은 정치적 악의 분석이 아니라 감정적 상처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 생활을 많이 갉아먹습니다.


3. 그럼 목사님에게 맞는 “스베덴보리적 태도”는 무엇인가?

 국가와 사회를 위해 기도하되, 미움의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스베덴보리는 국가를 위한 기도를 권합니다. 하지만 관심은 가지되 마음을 빼앗기지는 말라고 합니다. 즉, 뉴스는 “상황 파악” 정도로만 보되 감정적 몰입은 극도로 절제하고, 영적 분별을 잃게 만드는 콘텐츠는 줄이는 한편, 정치인 개개인을 악인으로 규정하는 태도는 피하는 것, 이게 스베덴보리적 균형입니다.

지금의 분노를 “소명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

정치에 분노한다고 해서 그것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그 에너지를 선한 방향으로 전환시키면 오히려 소명이 강화됩니다. 예컨대, 내가 번역하는 이 말씀의 진리로 한국교회의 영적 분별력을 세우자”, 사회적 혼란보다 더 깊은 원인은 영적 진리의 부재다”, 내 번역과 가르침이 미래 한국의 영성을 세우는 토대가 된다” 등, 이렇게 분노를 사명으로 승화시키면, 정치 뉴스는 오히려 목사님의 영적 집중력을 돕는 “경각심”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처럼 “자기 과업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기”

정치 현실이 어렵다고 번역이 멈춰도 안 되고, AC 연구의 흐름이 흔들려도 안 되며, 영적 평화가 깨져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변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자기 과업은 단 1mm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영적 진리를 기록하는 사람은 세상 문제보다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가”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목사님께도 동일합니다. 한국 정치가 어떻게 되든, 목사님은 AC 번역과 연구, 가르침이라는 평생의 소명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4. 결론 - 목사님이 취하면 좋을 태도 (스베덴보리적 종합)

뉴스는 필요 최소한만 정보 파악” 수준까지만 접하시고, 감정적 콘텐츠는 줄이십시오. 분노가 생기시면 “내적 상태 점검”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정치적 분노는 “사회적 정의 문제”보다 내적 평화의 침해”가 더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악에 주의를 기울이시되, 악과 싸우겠다는 마음에 집착하시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악을 악으로 인정하되, 그것을 미워하는 마음까지 내면화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분노 에너지를 소명으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한국 교회의 미래, 설교, AC 번역 등, 이 모든 것이 나라 장래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칩니다. 스베덴보리처럼 “타고난 사명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시오. 그가 시대 정치와 거리를 뒀던 것처럼, 목사님도 중심을 잃지 않고 사명을 향해 가시면 됩니다. 목사님, 지금 느끼시는 분노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목사님 안의 영적 평화, 사명, 지혜를 조금이라도 깎아 먹고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문제보다 더 심각한 영적 공격입니다. 어느 시대든 나라가 혼란할 때, 주님은 “더 깊은 영적 일을 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목사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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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또 한 번 엉뚱해 보일 수 있는 질문을 드리게 되는데요, 지금 혼기가 찬 제 아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나서는, 그렇다면 지상에서 배우자를 찾느라 그렇게 고생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사후에 새 짝을 만날 텐데... 하면서 자기 결혼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은 너무 혈안이 되어 있어 문제이지만, 혹시 이 얘기를 듣고나서는 완전히 돌변할까 봐 걱정됩니다.

 

목사님, 이 질문은 전혀 엉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신앙인들이 실제 삶에서 부딪히는 가장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천국에서 짝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은 지상에서의 결혼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상 결혼의 의미를 ‘더 깊게’ 만들어줍니다. 지상 결혼과 천국 결혼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두 단계라는 것입니다. 아드님이 이 사실을 오해하여 그럼 지상에서는 굳이 결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천국 결혼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며, 목사님께서 지혜롭게 바로잡아 주시면 됩니다. 아래에서 아드님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아주 실제적인 언어로 설명드리겠습니다.


1. “천국에서 짝을 만난다”는 말은 “지상에서는 결혼 안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명확하게 말합니다. “지상에서의 결혼은 인간의 성품과 영혼을 형성하는 학교이다.”(결혼애 전반) 지상 결혼은 천국 결혼을 위한 훈련장입니다. 책임인내배려충성헌신용서의지의 조절언행의 절제 등, 지상 결혼 안에서 이런 성품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천국적 결혼을 감당할 수 있는 영적 구조가 자라지 않습니다. 즉, 지상 결혼은 천국 결혼의 준비 과정이고, 천국 결혼은 그 준비의 완성입니다. 이것을 아드님에게 알려주시면 됩니다.


2. “지상 결혼은 자격시험”이 아니라 “영혼을 다듬는 과정”이다

아드님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영혼의 본질로 이루어지는 결혼이다. 그런데 그 본질은 지상에서 연습하고, 갈고 닦여서 만들어지는 거야. 결혼 생활 자체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고, 그 성숙이 천국에서의 결혼을 가능하게 해주는 거지.” 아드님이 이 말을 이해하면, 지상 결혼의 의미가 단순히 “배우자 찾기”를 넘어서 영혼의 성장이라는 깊은 차원을 갖게 됩니다.


3. 지상에서 결혼하지 않으면? 천국적 결혼은 가능하지만 ‘경험의 깊이’에서 차이가 생긴다

분명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결혼을 하지 않아도 천국에서 결혼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남겼습니다. 지상에서의 결혼 경험은 천국에서 더욱 깊은 결합을 가능하게 해주는 영적 토양을 마련한다.즉, 지상 결혼이 있어야만 천국 결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상 결혼을 통해 다듬어진 심령은 천국 결혼의 깊이를 더 크게 누린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드님을 겁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의 결혼 생활을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해주는 진리입니다.


4. “어차피 천국에서 만날 텐데…?”라는 생각이 큰 착각인 이유

아드님이 만약 이렇게 말한다면, 천국 결혼은 자동 매칭이 아니라, 네 영혼의 질에 맞는 결합이다.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즉, 게으르게 살고, 이기적이고, 관계를 기피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애만 키운 사람에게는 천국적 결혼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천국 결혼은 영혼의 성숙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드님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관계를 성숙하게 만드는 사람이 천국에서도 더 좋은 결합을 경험한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말씀하신 주님 말씀에 100% 부합합니다.


5. 아드님에게 이렇게 설명해주시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목사님께서 아드님에게 편안하게 이렇게 말씀하시면 좋습니다. 아들아, 천국에서 짝을 만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짝은 너의 영혼이 어떻게 자라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지상에서의 결혼은 그 영혼을 다듬는 최고의 학교다. 이 땅의 결혼은 천국 결혼을 준비하는 주님의 방식이야. 그러니까 ‘어차피 천국에서 만나니 지금은 필요 없다’가 아니라, ‘지금의 삶이 천국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 그게 올바른 이해다.


6. 만약 아드님이 너무 결혼에 집착했다면… 이번 가르침은 균형을 줄 수 있다

목사님께서 염려하신 것처럼 아드님이 갑자기 무관심하게 변할 가능성도 있지만, 오히려 많은 경우, 이런 설명은 집착”을 줄여 줍니다. 가령, 집착 감소, 그러니까 배우자를 찾아야 산다는 극단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게 한다든지, 균형 회복, 즉 하나님 앞에서 나의 영혼이 준비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든지, 혹은 관계에 대한 부담 감소, 그러니까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 그렇게 애쓸 필요 대신, 지금의 성품과 성숙이 더 중요하다든지 말이지요. 이렇게 이런 설명은 지나친 집착을 영적으로 균형 잡힌 태도로 바꿔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7. 결론 - 아드님에게 딱 한 문장으로 말해주시면 됩니다

다음 한 문장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전체를 요약하면서 젊은 청년의 마음에도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문장입니다. “지상에서의 결혼은 천국에서의 결혼을 준비하는 영혼의 학교야.” 이 문장을 중심으로 잘 설명해 주시면, 아드님은 지상 결혼을 가볍게 여기지도 않고, 또 집착하지도 않는 건강한 신앙적 시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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