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08 | 천주교(Roman Catholic)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 지옥을 결정하는 것은 죄의 종류인가, 끝까지 붙든 삶의 사랑인가?

 

해설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이것은 천주교가 죄와 회개,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하여 가르치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인간의 죄를 그 중대성에 따라 ‘대죄’(大罪, mortal sin)와 ‘소죄’(小罪, venial sin)로 구별하며, 대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죽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영원히 상실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도덕적 선택이 단순히 현세의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도 관계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죄가 대죄인지는 누가 결정하며, 그 죄를 지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그 죄를 자신의 삶의 사랑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동일한 것일까요? 또한 죽기 직전에 회개했다는 사실만으로 오랜 세월 형성된 악한 사랑이 즉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을 주님께서 죄인을 던져 넣으시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악한 사랑에 따라 스스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의 대죄와 회개에 관한 가르침은 이러한 이해와 어디에서 일치하고, 어디에서 달라질까요? 이번 명제는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며 참된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854–1855항은 대죄와 소죄를 구별하면서, 대죄는 하나님의 법을 중대하게 어겨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체어리티를 파괴하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하는 죄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소죄는 체어리티를 상하게 하고 약화시키지만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어떤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 반드시 대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교리서 1857항은 대죄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함께 충족되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첫째, 그 행위가 중대한 사안이어야 합니다. 둘째, 당사자가 그 행위가 중대한 죄임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그 행위에 의도적으로 동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동일한 행동을 했더라도 그 사람의 인식과 자유, 의도에 따라 개인적인 책임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리서 1860항은 무의식적인 무지나 외부의 강압, 심리적·병리적 장애 등이 행위의 자발성과 책임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구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 완전하게 판단할 수 없으며, 그의 이해와 의지, 자유로운 선택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대죄가 회개 없이 지속되면 인간을 지옥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61항은 대죄가 체어리티와 성화 은총을 상실하게 하며,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로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033항은 대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영원히 분리되는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1035항은 지옥의 영원성을 가르치면서 그 가장 큰 고통을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1037항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시며, 지옥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상태를 끝까지 고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지옥 교리를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 분노하시어 임의로 지옥행을 선고하시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끝까지 지속되는 회개 거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전통 모두 지옥을 인간의 악한 삶과 무관한 임의적인 처벌로 이해하지 않으며, 인간이 자유 가운데 무엇을 사랑하고 선택하는가가 영원한 운명과 깊이 관련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죄를 지은 사람의 상태를 판단할 때에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어떤 행위가 객관적으로 중대한 악이라는 사실과 그 행위를 저지른 개인에게 대죄의 책임이 완전하게 성립한다는 사실을 구별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61항도 행위 자체의 중대성은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맡겨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대죄의 상태에 있으며, 지금 죽는다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천주교의 공식 교리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실제 목회 현장에서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어떤 내적 갈등과 압력 가운데 있었는지, 자신의 행동을 얼마나 자유롭게 선택했는지를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겉으로는 회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인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심각성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일과 특정한 사람의 최종적인 구원을 판단하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죄를 죄라고 말해야 하지만,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까지 결정하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의지의 중요성을 이해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지옥의 본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545–550항에서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던져 넣지 않으시며, 악한 영이 자신의 악에 따라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HH.5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얼굴을 돌리시고 분노하여 지옥으로 내쫓으신다는 생각을 비판합니다. 주님은 선 자체이시며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시고, 누구도 자신에게서 내쫓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HH.547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악이 곧 그 사람 안의 지옥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자신이 사랑하고 의지한 악을 사후에도 사랑하며, 그 악을 자신의 생명처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와 일치하는 영적 공동체를 찾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지옥은 주님의 자비가 부족하여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악한 사랑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지옥의 존재나 영원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지옥을 매우 실제적인 영계의 상태로 설명하지만, 그 근원을 주님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악한 사랑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죄와 회개가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계된다는 천주교의 핵심적인 경고와 연결되면서도, 지옥이 형성되는 영적 원리를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개념은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입니다. 스베덴보리는 HH.477–480에서 인간의 사후 상태가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HH.480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을 유지하며, 그 사랑이 영계에서 자신의 삶과 행동을 지배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생전에 한 번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탐욕으로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후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피해를 바로잡으며 정직한 삶으로 돌아섰다면, 그의 상태를 그 한 번의 잘못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즐기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참된 상태가 단순한 행동의 목록이 아니라 그 행동을 낳는 사랑과 의지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어떤 죄가 중대한가를 분별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형성된 사랑과 그 사랑에 따른 실제적인 삶을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천주교의 대죄와 소죄의 구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모든 악이 영적으로 동일한 무게를 지닌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속이고 착취하는 악,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악은 매우 중대한 영적 문제입니다. 또한 사람이 어떤 악을 진리와 양심을 거슬러 의도적으로 선택할수록 그 악은 자신의 의지와 더욱 깊이 결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의 중대성과 의도적인 선택을 구별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죄와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천주교의 대죄와 소죄라는 법적·성사적 분류에 그대로 대응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결정적인 것은 특정한 죄목이 어떤 등급에 속하는가보다, 그 악이 인간의 사랑과 의지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그 악을 피하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는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에 들어갑니다. 반대로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고 즐기면서 끝까지 그것을 버리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그 악을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으로 굳혀 갑니다. 따라서 지옥에 관한 참된 경고는 특정한 죄의 등급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인간이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선택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해야 합니다.

 

이제 회개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회개를 단순히 죄를 입술로 고백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51항은 ‘통회’(痛悔, contrition)를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1452항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완전한 통회’(perfect contrition)가 대죄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여기에는 가능한 한 빨리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사망 직전에 고해성사를 받지 못하면 언제나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회개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회개의 필요성을 매우 강하게 강조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520–524항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악을 회개를 통하여 제거하지 않는 한 그 악 안에 머물며, 악 안에 계속 머무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528–531에서는 실제적인 회개가 자기 성찰과 죄의 인정, 주님께 드리는 기도, 그리고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고 악 가운데 머무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에게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이번 명제를 단순히 천주교만의 잘못된 지옥 교리라고 규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망 직전의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더욱 깊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오랜 세월 악을 사랑하며 살다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죄를 두려워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무조건 거짓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아십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워 죄를 후회하는 감정과 실제로 그 악을 미워하고 버리려는 사랑의 변화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거듭남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순간에 죄를 고백했다는 외적인 사실만으로 오랜 세월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이 실제로 달라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사망 직전에 충분한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의 변화를 보여 주지 못했다고 해서 아무런 참된 회개도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회개의 진정성을 가볍게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입니다. 천주교의 완전한 통회에 관한 가르침과 스베덴보리의 실제적인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은 모두 내적인 변화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변화가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상태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는 HH.491–520에서 인간이 죽은 후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를 거쳐 자신의 내적인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즉시 최종적인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영들의 세계에서 겉으로 드러났던 모습과 내적인 사랑이 점차 구별됩니다. 특히 HH.499–511에서 그는 사람이 사후에 자신의 속 사람의 상태로 들어가면서 지상에서 형성된 실제적인 사랑과 의지가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후에 누구나 자유롭게 새로운 삶을 선택하여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에 인간의 내적인 사랑이 드러나고 그에 따른 상태가 전개된다고 설명하며, HH.480에서는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영들의 세계는 생전에 형성된 사랑과 무관하게 구원의 기회를 새롭게 얻는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지상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을 받아들이고 살아왔는지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영원한 운명은 단순히 사망 순간의 외적인 종교적 상태나 마지막 고백의 유무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애를 통하여 형성된 내적인 사랑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이루신 거듭남의 상태가 중심이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목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이미 지옥행이 확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인간이 어떤 악을 사랑하고 고집하더라도 결국 모두 천국에 들어간다고 안심시키는 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여 그가 사랑하지도 않는 선을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따라서 지옥의 가능성은 실제적이며,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할 이유도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최종적인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가 어떤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지,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는지 완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지옥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을 조종하기보다, 악이 인간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가르치고 주님의 자비 안에서 실제적인 회개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처벌을 피하기 위한 외적인 종교 행위에 머물지 않고,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심판은 주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 지옥과 회개를 가르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명제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그 악은 그의 삶을 지배하며, 사후에는 그 사랑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회개하지 않은 악이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단순히 대죄에 해당하는 행동을 저질렀는가, 사망 전에 고해성사나 통회를 마쳤는가 하는 외적인 기준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대죄가 성립하려면 충분한 인식과 의도적인 동의가 필요하며, 개인의 최종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그의 지배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삶의 성격에서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지지 않으시며, 인간이 악을 사랑하는 만큼 스스로 지옥의 상태에 가까워집니다. 반대로 인간이 주님의 도움으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그는 천국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지옥을 피하는 가장 중요한 길은 자신의 죄가 어떤 등급에 해당하는지를 계산하거나 마지막 순간의 회개만을 기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자신의 사랑과 의지를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을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언젠가 죽기 직전에 해결해야 할 종교적 절차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가야 할 거듭남의 삶입니다. 결국 인간을 천국으로 이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을 지옥에 묶어 두는 것은 그가 끝까지 붙들고 버리기를 거부한 악한 사랑입니다. (SL.RC.008 해설)

 

요약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라는 명제는 그 핵심에서 반드시 오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악을 사랑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그 악 안에 머무른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TCR.520–524와 HH.545–550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천주교는 대죄가 성립하려면 중대한 사안과 충분한 인식, 의도적인 동의가 함께 필요하다고 가르치며, 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죽는 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로 이해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시며, 개인의 최종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맡겨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가르침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설명하는 핵심은 대죄와 소죄라는 분류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형성하고 사후에도 유지하는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HH.480은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설명하며, HH.547은 악을 사랑하는 인간이 스스로 그 악에 상응하는 지옥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528–531은 실제적인 회개가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회개하지 않은 악이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는 가르침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특정한 죄목의 분류나 사망 직전의 외적인 고백만으로 개인의 영원한 상태를 확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지옥을 주님께서 분노하여 인간에게 강제로 부과하시는 형벌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천주교의 공식 교리 역시 그러한 단순화를 경계하므로, 이러한 오류를 천주교 전체의 가르침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두 전통의 중요한 차이는 죄와 회개의 필요성보다 인간의 영원한 상태가 무엇에 의하여 형성되고 드러나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사후의 상태는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거듭남에 따라 전개되며, 어떤 사람의 최종 상태를 인간이 임의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악을 사랑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의 상태에 이른다’는 의미에서는 참되지만, 이를 단순한 죄목의 분류와 마지막 종교적 절차에 의하여 운명이 결정된다는 이해로 축소한다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지옥의 두려움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며 지금부터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EO.007.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SL.EO.007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 신적 참여와 주님의 인플럭스 해설동방정교회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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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8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 - 부정신학과 신적 인격의 문제

 

해설

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관하여 끊임없이 강조하는 가르침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며 지혜이시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의 손과 얼굴, 눈과 음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표현들이 아무리 성경적이고 신앙적으로 중요하더라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질을 인간의 생각 속에 완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피조물의 범주를 초월하시며, 인간의 언어와 관념으로 제한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안다고 말할 때, 인간이 이해한 그 내용과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실재를 동일시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적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하나님을 마음속에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인간적인 형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과 언어로 나타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바로 이 질문에서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과 스베덴보리의 신적 인성에 관한 가르침이 중요한 만남과 차이를 드러냅니다.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은 하나님께서 무엇이신지를 인간이 완전히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부정’이란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표현들이 지닌 유한성과 한계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말은 인간이 경험하는 선한 사람의 성품을 무한히 확대하면 하나님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피조물이 경험하는 선함을 무한히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고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제한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지혜의 근원이므로 인간의 지성과 동일한 범주에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 관하여 긍정적으로 말하는 ‘긍정신학’(cataphatic theology)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된 개념을 초월하신다고 말하는 부정신학을 함께 인정합니다. 긍정신학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사랑과 선과 지혜와 거룩함을 고백하고, 부정신학은 그 고백을 인간의 유한한 관념으로 절대화하지 않도록 이끕니다. 따라서 부정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추상적 존재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만든 하나님에 관한 개념을 하나님 자신과 혼동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신의 지식과 이해를 지나치게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신앙적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전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8세기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입니다. 그는 ‘정통신앙 해설’(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제1권 1장과 4장에서 하나님의 신성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며,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피조물이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전적인 무지 속에 남겨 두신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의 근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지식이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파악한 결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몸이 없으시며, 공간의 경계 안에 갇히거나 물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빛이라고 부를 때 그 빛을 자연계의 물리적 광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된 빛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언어는 참된 계시를 전달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더 깊은 실재를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인간의 자연적 감각과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우상과 구별하려는 중요한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동시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인간의 눈에 보이셨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부정신학을 하나님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자신을 나타내실 수 없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연결하여 동방정교회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성화상’(icon)입니다. 정교회 예배당에 들어가면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 여러 성인의 모습을 나타낸 성화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형상을 초월하신다는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 앞에서 공경을 표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적 본질을 그림 속에 가두거나 묘사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실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화상 공경에 관한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중요한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분으로만 남아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 인간으로 나타나셨으므로, 그분의 성육신을 시각적인 형상으로 증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교회는 성화상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를 구별하며, 성화상의 물질 자체를 하나님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성화상 전통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성육신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보존하려는 신앙적 표현입니다. 물론 성화상 공경이 신학적으로 정당한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지만, 정교회가 인간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과 동시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함께 증언합니다. 출33:20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55:8-9에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창1:26-27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며, 창18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의 모습 가운데 여호와의 임재가 증언됩니다. 또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손과 눈, 얼굴과 팔에 관한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모두 자연계의 물질적 신체에 관한 설명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제한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러한 표현들이 단순히 인간의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하나님에 관한 참된 내용을 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이 인간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을 이해하기 어렵게 됩니다. 특히 요1:18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하며, 요14:9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자연적 개념을 초월하시지만, 인간이 자신을 알 수 없도록 영원히 감추어 두신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과 결합할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든 생각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신 방식을 어떻게 올바르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은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과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7-10에서 하나님은 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무한하심을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은 물질적 신체가 우주 전체에 퍼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간을 초월하시며, 그분의 신적 사랑과 지혜는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공급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자연계의 한 장소에 거주하시거나 어떤 물질적인 형상 속에 갇혀 계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 역시 동방정교회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연적 관념을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형상을 초월하시므로 하나님을 형상 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천국적인 하나님 관념의 핵심이라고 가르칩니다. DLW.11에서 그는 천국의 모든 천사가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인간처럼 유한한 육체를 가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모든 인간적 생명의 원형이시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이시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 자체가 하나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인간이시다’(God is very Man)는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간이라고 말할 때에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죽는 유한한 존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하나님을 인간이라고 부를 때에는 이러한 자연적 인간의 한계를 하나님께 적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DLW.285-289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이시라는 사실을 자연적인 공간과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나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지혜 자체이시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십니다. 사랑과 지혜는 아무런 주체도 없는 추상적인 성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의 본질적인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신 하나님은 모든 인간적인 것의 근원이시고, 피조된 인간은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한한 육체와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간 형상을 이루고, 천사들이 모두 완전한 인간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이러한 신적 질서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국의 인간 형상이나 천사들의 인간 형상은 하나님과 별도로 존재하는 우주적 신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천사에게 사랑과 지혜를 공급하시기 때문에 천국 전체가 인간의 형상과 상응하는 질서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인간 형상은 자연적인 육체의 형태가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의 질서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열쇠가 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왜 중요합니까? 그는 DLW.13에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모든 종교적 생각의 중심에 있으며, 참된 하나님 관념이 없으면 천국과의 교통도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신학적 문제를 완전히 이해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기도와 예배에서 실제로 어떤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무런 형상도 없는 무한한 공간이나 막연한 우주적 힘으로만 생각한다면, 인간의 생각은 분명한 인격적 대상을 향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그 사랑을 누구에게서 받아들이는지 알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차 추상적인 관념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분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기도와 사랑을 분명한 대상에게 향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787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하나님 안에 영혼이 몸 안에 있듯 계시며, 인간이 이처럼 나타나신 하나님을 통하여 그분과 상호적인 결합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이는 하나님은 단순히 자연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적 인성 안에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예배해야 할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추상적인 신학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 실제로 결합하는 신앙의 중요한 토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면서 동방정교회가 하나님을 아무런 인격도 없는 추상적인 신적 원리로 이해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하나님을 살아 계신 인격적인 분으로 고백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위격적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시고,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부정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유한한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도록 안내하는 가르침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와 동방정교회 사이에는 하나님의 인격적 일치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교회는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 영원히 구별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성부는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정교회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세 위격의 실재를 함께 고백한다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신적 인격적 단일성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하나님을 묘사하는 언어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어떤 분으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신론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스베덴보리의 ‘상응’(correspondence)에 관한 가르침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손과 얼굴과 눈과 발, 그리고 빛과 불과 구름에 관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모두 자연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신체를 가지셨거나 자연계의 현상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오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따르면 성경의 자연적 표현들 안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손은 신적 능력과 역사하심을,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의 임재를, 빛은 신적 진리를, 불은 문맥에 따라 신적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문맥과 속뜻에 따라 구별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 형상이 영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신다는 이유만으로 그 표현들이 모두 부정확한 인간의 상상력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적인 언어와 형상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인간의 이해를 위해 주어진 외적인 옷과 같으며, 그 안에는 천국의 영적 의미와 주님의 신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자연적인 형상으로 제한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형상 속에서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참된 성경 해석은 형상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 형상을 통하여 주님께서 나타내신 진리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동방정교회의 성화상과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같은 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교회의 성화상은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와 교회의 전례적 전통 속에서 이해됩니다. 성화상에 대한 공경은 그 물질 자체를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이 가리키는 원형을 향하는 행위로 설명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자연계의 대상과 현상들이 영계의 실재와 맺는 관계, 그리고 성경의 문자적 의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두 전통 모두 눈에 보이는 형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를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형상의 권위와 기능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정교회가 성화상을 교회의 예배와 공경 안에서 사용하는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를 밝히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또한 상응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종교적 그림이나 조각이 예배의 대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형상이 영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과 그 형상에 종교적 공경을 드려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성화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비교할 때에는 공통점만을 강조하여 두 개념을 동일시하지 말고, 각각의 신학적 목적과 역할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이후 EO.057-059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신학적 차이가 실제 신앙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분명하게 알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교만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성경과 교리를 충분히 공부했으므로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신학적 설명과 다른 생각을 모두 잘못된 것으로 단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태도는 모두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지만, 인간이 자신을 알 수 없도록 감추어 두신 분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계시하셨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하심 전체를 자신의 지성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은 이러한 점에서 인간에게 신앙적 겸손을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 겸손이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관념에 머물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관념이 중요하다고 하여 그것이 곧 한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는가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교육과 종교적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하나님 관념을 검토하고 그 안에 담긴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신앙의 최종적인 상태까지 자신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모든 개념을 초월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학적 지식을 자랑한다면 그의 고백은 아직 삶의 겸손으로 충분히 이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인간 형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정당화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자신이 아는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성숙은 진리를 얼마나 정교하게 이해하는가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의 사랑과 결합하고, 그 사랑이 실제적인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설명을 소유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선을 사랑하고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교만과 분노와 이기심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하나님 관념은 아직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변화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정직과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에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올바른 하나님 관념은 인간을 자신의 지식에 대한 확신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겸손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동방정교회의 이 가르침에는 인간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유한한 관념과 상상력으로 그분의 본질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참된 형상도 없으시며 인간이 그분을 분명하게 생각할 수도 없다는 주장으로 확대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실제로 동방정교회 자체도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참되게 나타내셨다고 고백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더욱 근본적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의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분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것의 신적 원형이신 참된 인간이시며,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적 인성을 완전하게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개념을 초월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참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분명한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연계의 유한한 인간처럼 생각하거나 자신이 만든 관념 속에 가두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신적 사랑과 지혜가 우리의 의지와 이해 안에 흘러들어와 실제 삶의 선으로 열매 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일은 하나님의 무한하심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과 그분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을 바라보는 일이 함께 이루어질 때 온전한 방향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그분을 인간의 생각 안에 가두는 관념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사랑을 그분께로 이끄는 관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초월성과 신적 인격의 문제입니다. (EO.008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시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자신의 언어와 지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부정신학에는 하나님을 인간의 유한한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려는 참된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나 인격적 관계를 부정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고백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무한하신 분임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형상 없는 추상적인 실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신 참된 인간이시고, 모든 인간적인 것의 신적 원형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된 신적 인성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함께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과 신적 인격의 일치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연적인 육체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신적 사랑과 지혜를 한 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는 겸손과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고 사랑하는 신앙을 함께 보존하며, 그분께 받은 진리를 실제 삶의 선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는 데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EO.007.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SL.EO.007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 신적 참여와 주님의 인플럭스 해설동방정교회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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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8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질 것을 요구한다’ - 하나님의 공의는 형벌의 집행인가, 무너진 신적 질서의 회복인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결코 묵과하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죄인을 용서하기 원하시지만, 동시에 완전한 공의를 지니신 분이므로 죄에 대한 형벌을 그냥 면제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고, 그 형벌이 치러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많은 개신교 신자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하는 가장 익숙한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죄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며, 인간의 악이 반드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고통을 받고 형벌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까? 만일 형벌이 치러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실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죄를 제거하고 그를 회복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죄에 상응하는 고통이 반드시 발생해야 만족되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전통적인 형벌대속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구속 이해를 제시합니다. 그는 죄의 실제적인 결과와 신적 질서의 엄중함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기 위해 반드시 형벌이 집행되어야 한다는 전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 5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과 자기희생을 통해 성부의 공의를 충분히 만족시키셨다고 가르칩니다. 제11장 3항 역시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죄의 빚을 완전히 갚고,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일반적으로 ‘형벌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이라고 불리는 구속론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다만 형벌대속론이 개신교 전체의 유일한 속죄 이해는 아닙니다. 개신교 안에도 그리스도의 승리, 화해, 죄의 용서와 인간의 변화 등을 강조하는 여러 구속 이해가 존재합니다. 또한 정통적인 형벌대속론이 성부는 사랑이 없고 성자만 인간을 사랑한다고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성부께서 사랑으로 성자를 보내셨으며, 성자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것이 그 신학의 중요한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단순히 분노한 아버지가 무고한 아들에게 형벌을 떠넘긴 이야기로만 소개한다면 실제 가르침을 왜곡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가 남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하나라고 인정하더라도,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 형벌에 대한 만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설명 자체가 과연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죄와 형벌의 관계를 강조하는 말씀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롬6:23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선언하며, 갈6:7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히9:22는 율법에 따른 정결 예식의 문맥에서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죄가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오며, 인간이 자신의 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죄에 결과가 따른다는 가르침과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를 처벌하셔야 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특히 히9:22의 피 흘림에 관한 말씀을 모든 죄 사함에 형벌의 집행이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법칙으로 확대하려면, 구약의 제사제도와 그리스도의 희생을 해석하는 신학적 전제가 필요합니다. 반면 겔18:21-23에서는 악인이 자신의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면 살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51:17 역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가 상한 심령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의 목적이 단순히 형벌을 집행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 생명을 얻는 데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를 살필 때 우리는 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용서, 제사의 의미와 인간의 회개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115-117항은 구속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구속은 지옥들을 정복하고, 천국에 질서를 회복하며, 그 결과 새로운 영적 교회를 위한 길을 준비하신 주님의 신적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형벌대속론과 구속을 이해하는 출발점부터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지옥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영계의 질서가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었으며, 그 결과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듭날 수 있는 길이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회복하시기 위해 직접 인성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성을 통해 지옥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시고, 천국의 질서를 회복하셨으며, 인간이 다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속의 본질은 인간에게 내려져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악의 세력을 이기시고, 무너진 영적 질서를 회복하여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시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속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형벌의 이전보다 훨씬 넓은 영적 현실이며, 주님께서 직접 이루신 신적 승리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겪으신 극심한 고난과 죽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스베덴보리는 TCR.126-131에서 십자가의 수난이 주님께서 겪으신 마지막 시험이며, 그 시험을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시는 과정이 완성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구속과 십자가의 수난을 서로 무관한 사건으로 분리하지 않지만,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신 행위 자체를 구속의 본질과 동일시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상에서 끊임없이 지옥의 세력과 싸우셨으며, 모든 시험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그 싸움의 마지막이자 가장 극심한 시험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이기심으로써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에 속한 것을 완전히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영화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미는 성부께서 요구하신 형벌을 성자가 대신 받아 내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악의 모든 세력과 맞서 승리하시고,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영화를 이루셨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132-133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구속 자체와 동일시하는 당시 교회의 가르침을 근본적인 오류로 비판합니다. 이는 십자가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형벌의 대가 지불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주님의 승리와 영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 사53:5의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라는 말씀입니다. 전통적인 형벌대속론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셨다는 표현을 반드시 성부께서 인간에게 내리실 형벌을 성자에게 이전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지옥의 세력과 직접 대면하셨으며, 그 세력의 공격과 시험을 실제로 감당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의 예언자들이 백성의 죄악을 상징적으로 담당했던 것처럼, 주님의 수난은 당시 사람들이 말씀과 신적 진리를 어떻게 거부하고 모독했는지를 드러내는 표상적 의미도 지닙니다(TCR.126-130). 따라서 그분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말은 죄의 결과와 악의 세력을 실제로 상대하시고 이기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해석이 사53장의 문자적 표현에서 아무런 신학적 전제 없이 자동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형벌대속론과 스베덴보리의 구속론은 같은 성경 본문을 서로 다른 신학적 구조 속에서 이해합니다. 그 차이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이 인간의 실제적인 악과 그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형벌이 반드시 집행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다만 이것은 악의 결과가 사라진다거나 악인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696항은 악이 스스로 형벌을 가져오며, 악 안에 그 악에 대한 형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형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해 외부에서 덧붙이시는 고통이 아닙니다. 악을 사랑하고 행하는 존재가 그 악으로 인해 스스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와 그에 따른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해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통해 이미 천국의 사랑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살아갑니다. 그가 그러한 악을 계속 사랑한다면, 그 악은 그의 내면을 속박하고 다른 악한 존재들과 결합시키며 고통과 파괴를 가져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이 서로에게 고통을 가하고 형벌을 경험하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 악이 무제한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고통을 가능한 한 완화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신적 공의는 악에 상응하는 고통의 양을 반드시 채워야 하는 보복적 원리가 아닙니다. 악의 결과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악을 제한하고 선을 보호하며, 가능한 모든 것을 올바른 질서 안으로 회복시키시는 신적 사랑과 지혜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죄 사함의 의미에서도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만일 하나님의 공의가 죄에 대한 형벌을 반드시 요구한다면, 용서는 그 형벌을 죄인 자신이 치르거나 다른 누군가가 대신 치른 뒤에야 가능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TCR.611-614에서 죄 사함을 인간이 거듭나는 만큼 악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죄가 제거된다는 것은 인간이 저지른 악이 존재 자체를 잃고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그 악이 더 이상 그의 생명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선 안에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죄 사함은 단순히 죄에 대한 법적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 이전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 먼저 누군가를 처벌해야 하는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시고 악에서 구원하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계속 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정당화한다면, 주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그의 내면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하나님께서 형벌을 면제해 주시도록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그 악에서 돌아서는 일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변함없이 열려 있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실제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회개와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할 때 또 하나 조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형벌이 공의를 충족한다는 생각은 자칫 고통 자체를 도덕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 수 있습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반드시 그만큼 고통을 당해야 정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도 책임을 묻는 일과 고통을 목적으로 삼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정당한 법적 책임을 묻고, 피해자를 보호하며, 재발을 방지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가해자가 고통을 당하는 것 자체가 정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도 악은 제한되어야 하며 선한 사람들은 보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보복의 만족이 아니라 질서의 보존과 가능한 선의 실현에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인간 사회의 법률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공의를 자신의 분노와 복수심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그가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단정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와 신적 섭리의 모든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보며 형벌의 정당성을 추측하는 일이 아니라, 악을 분별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하고 가능한 도움을 베푸는 일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져야 만족되는 원리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죄의 대가가 지불되기 전에는 용서하실 수 없는 분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사랑과 공의는 서로 다른 요구를 지닌 두 속성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동시에 지혜 자체이시고, 그분의 공의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모든 것을 올바른 질서 안으로 인도하시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인정하지 않으시며, 악이 다른 사람을 파괴하도록 무제한 허용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목적은 악인에게 고통을 가하여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그를 악에서 돌이켜 구원하고 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545-550항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에 던져 넣지 않으신다고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한 악에 따라 지옥의 상태로 향하지만, 주님께서는 가능한 한 그를 그 악에서 돌이키고자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 중단되는 순간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신적 성향이 아니라, 사랑이 지혜와 결합하여 선을 보호하고 악을 제한하며 질서를 회복하시는 방식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질 것을 요구합니까? 전통적인 형벌대속론은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가 죄의 형벌을 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형벌을 대신 담당하심으로써 인간을 위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죄의 심각성과 십자가의 중요성, 그리고 구원이 인간 자신의 공로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기 위해 누군가가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죄의 결과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해 부과하시는 고통이 아니라 악 자체가 가져오는 영적 결과입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는 성부께서 요구하신 형벌을 대신 치르신 사건이 아니라, 지옥의 세력에 대한 마지막 승리와 인성의 영화가 완성된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아야만 용서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인성을 취하시고 모든 시험을 이기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누가 내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치렀는가?’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어떤 악에서 건져 내셨으며, 나는 그분의 구속을 통해 열린 길에서 실제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신적 공의의 목적은 형벌의 완성이 아니라, 악의 지배가 제거되고 선과 진리의 질서가 회복되어 인간이 주님과 결합할 수 있게 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공의와 형벌,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참된 의미입니다. (PR.008 해설)

 

요약

전통적인 개신교의 형벌대속론은 하나님의 공의가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고 인간을 위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에는 죄가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오며,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반드시 형벌이 집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참된 기독교’ TCR.115-117에 따르면 구속은 지옥의 세력을 정복하고 천국의 질서를 회복하여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주님의 신적 역사입니다. 또한 TCR.126-133은 십자가의 수난을 구속의 본질과 동일시하지 않고, 주님의 마지막 시험과 인성의 영화가 완성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천국의 비밀’ AC.696은 악 안에 그 악의 형벌이 있다고 가르치며, 주님께서는 형벌을 가하여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제한하고 고통을 가능한 한 완화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죄의 결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반드시 누군가에게 형벌을 집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죄 사함은 형벌의 대가가 지불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보존하시는 거듭남의 역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TCR.611-614). 결국 신적 공의는 고통의 대가를 요구하는 보복적 원리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악을 제한하고 선을 보호하며 무너진 영적 질서를 회복하시는 방식입니다. 십자가의 참된 의미도 형벌의 대리 집행보다 주님의 승리와 영화, 그리고 인간이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여신 구속의 역사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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