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sacrilege)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가인(Cain)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과, 일곱(seven)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 알려져 있듯이 일곱이라는 수는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을 의미하며, 안에는 평화와 쉼과 안식일이 있습니다. 때문에 수는 유대교회의 의식에 매우 자주 나타나며 어디에서나 거룩하게 여겨집니다. 또한 이로 인해 크고 작은 기간들이 일곱으로 구분되어 이레들(weeks)이라고 불렸습니다. 메시아가 오기까지의 기간들이 그러합니다(9:24-25). That the words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signify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sacrileg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Cain,” which is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seven,” which is what is sacred. The numbersevenwas esteemed holy, as is well known, by reason of the six days of creation, and of the seventh, which is the celestial man, in whom is peace, rest, and the sabbath. Hence this number occurs so frequently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nd is everywhere held sacred, and hence also both greater and less periods of time were distinguished into sevens, and were calledweeks,” such as the great intervals of time to the coming of the messiah; (Dan. 9:2425)

 

24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9:24, 25)

 

라반과 야곱도 년의 기간을 이레(week)라고 불렀습니다(29:27-28). and the time of seven years called aweekby Laban and Jacob. (Gen. 29:2728)

 

27이를 위하여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나를 동안 섬길지니라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일을 채우매 라반이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27, 28)

 

같은 이유로 일곱이라는 수는 어디에서 나타나든 거룩하거나 침해해서는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For the same reason, wherever it occurs, the number seven is accounted holy or inviolable. Thus we read in David: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119:164) Seven times a day do I praise thee. (Ps. 119:164)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30:26) The light of the moon shall be as the light of the sun, and the light of the sun shall be sevenfold, as the light of seven days, (Isa. 30:26)

 

여기서 (sun) 사랑을, (moon)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하며, 신앙은 사랑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의 기간들이 일곱째, 천적 인간에 이르기 전에 여섯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황폐화의 기간들도 천적인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때까지 그렇게 구분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여러 포로 생활과, 마지막 포로 생활인 바벨론 포로로 표상되었는데, 포로 생활은 일곱 번의 , 칠십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땅이 안식년들 동안 쉬어야 한다는 말도 여러 나옵니다. 같은 것이 다니엘서의 느부갓네살로 표상됩니다. where thesundenotes love, and themoonfaith from love, which should be as love. As the periods of mans regeneration are distinguished into six, before the seventh arrives, that is, the celestial man, so also are the periods of his vastation, up to the time when nothing celestial remains. This was represented by the several captivities of the Jews, and by the last or Babylonish captivity, which lasted seven decades, or seventy years. It is also said several times that the earth should rest on its sabbaths. The same is represented by Nebuchadnezzar, in Daniel:

 

16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23왕이 보신즉 순찰자,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들짐승들과 더불어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4:16, 23, 32) His heart shall be changed from man, and a beasts heart shall be given unto him,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him. (Dan. 4:16, 23, 32)

 

마지막 때의 황폐화에 관하여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ohn, concerning 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

 

1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6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7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대접 일곱을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15:1, 6-8) I saw another sign in heaven, great and marvelous, seven angels, having the seven last plagues; (Rev. 15:1, 68)

 

또한 and that: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동안 짓밟으리라 (11:2) The gentiles should tread the holy city under foot forty and two months, or six times seven. (Rev. 11: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5:1) I saw a book written within and on the back, sealed with seven seals. (Rev. 5:1)

 

같은 이유로 형벌의 엄중함과 가중됨도 일곱이라는 수로 표현되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severities and augmentations of punishment were expressed by the number seven; as in Moses:

 

18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징벌하리라, 21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재앙을 내릴 것이라, 24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배나 치리라,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배나 징벌하리니 (26:18, 21, 24, 28) If ye will not yet for all this obey me, then I will chastise you sevenfold for your sins. (Lev. 26:18, 21, 24, 28)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nd in David:

 

주여 우리 이웃 주를 비방한 비방을 그들 품에 배나 갚으소서 (79:12) Render unto our neighbors sevenfold into their bosom. (Ps. 79:12)

 

이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앙은 쓰임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것입니다. Now as it was a sacrilege to do violence to faithsince as has been said it was to be of serviceit is said that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해설

AC.395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는 창4:15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는 두 상응에 있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배의 벌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가인을 해치면 일곱 배나 더 심한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앙을 함부로 파괴하는 일이 거룩한 것을 침해하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일곱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에서 인간의 거듭남은 여섯 날의 과정을 거쳐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에 이릅니다. 그 일곱째 날에는 평화와 쉼과 안식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이라는 수가 거룩한 이유는 단순히 고대 사람들이 숫자 7을 신비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가장 처음부터 그것이 거듭남의 완성과 천적 상태, 그리고 주님 안에서의 안식을 표상하는 수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유대교회의 여러 의식과 시간의 구분에도 일곱이 반복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메시아가 오기까지의 기간을 다루는 단9:24-25이레들을 들고, 29:27-28에서 라반과 야곱이 칠 년을 한 이레라고 부른 것도 예로 듭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숫자 7을 현대적인 숫자 암호처럼 계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일곱이라는 수가 반복적으로 거룩한 질서와 완결된 기간을 표상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119:164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도 같은 의미에서 인용됩니다. 이것을 반드시 문자적으로 하루에 정확히 일곱 차례만 찬양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상태에서 온전히 주님을 찬양하는 의미로 읽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수는 단순한 산술적 수량을 넘어 영적 상태의 질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30:26은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를 사랑으로, ‘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달이 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과 같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가인 이야기 전체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데 있었습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달이 해에서 빛을 받듯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30:26의 인용은 단순히 일곱이 거룩하다는 사실만 증명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번 문맥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관계까지 다시 보여 줍니다. ‘=사랑’,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상응은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이 궁극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방향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도 신앙이 영원히 사랑에서 분리된 채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사랑과 결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일곱의 의미를 거듭남뿐 아니라 황폐화에도 적용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이 여섯 기간을 지나 일곱째의 천적 상태에 이르는 것처럼, 황폐화 역시 천적인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기간을 거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같은 일곱이 언제나 즐겁고 긍정적인 사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곱이 나타내는 것은 그 과정의 거룩한 질서 또는 완결된 상태이며, 문맥에 따라 거듭남의 완성과 황폐화의 완결 모두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여러 포로 생활과 칠십 년의 바벨론 포로가 이 맥락에서 언급됩니다. 칠십은 일곱 번의 으로서 황폐화의 기간을 표상합니다. 땅이 안식년 동안 쉬어야 한다는 말씀 역시 같은 일곱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안식과 황폐화가 표면적으로는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둘 다 어떤 영적 기간이 주님의 질서 아래 그 정해진 상태에 이르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일곱 가 지나가는 단4장의 말씀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짐승의 마음으로 바뀌고 일곱 때를 지나는 것은 황폐화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15장의 일곱 마지막 재앙, 11장의 마흔두 달, 5장의 일곱 인도 같은 계열에 놓입니다. 여기서도 숫자 자체를 산술적으로 해독하는 것보다, 일곱이라는 수가 말씀 안에서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질서 및 어떤 상태의 충만한 기간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 원리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계11:2의 마흔두 달을 여섯 번의 일곱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창조의 여섯 날과도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숫자 계산 자체를 독립적인 예언 연대표로 발전시키는 것은 이번 본문의 목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모든 예를 드는 목적은 오직 일곱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레26장의 배의 징벌이나 시79:12 배나 갚으소서처럼 형벌의 강화에도 일곱이 사용됩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이유 역시 일곱의 거룩함에서 찾습니다. 거룩한 것을 침해하는 일의 엄중함을 나타낼 때도 일곱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는 단순히 형량을 일곱 배로 계산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위가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제 다시 가인에게 돌아오면 AC.395의 논리가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이미 본래의 천국적 질서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AC.393-394에서 보았듯이 주님께서는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그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뒤에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시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이번 번호 마지막의 since ... it was to be of service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신앙은 쓰임이 있어야 했습니다.여기서 신앙의 쓰임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상태를 영구히 유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지식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신앙을 완전히 파괴하면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까지 파괴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분리된 신앙임에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모독이 됩니다. 이것은 잘못된 교리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의 오류는 이미 매우 분명하게 비판되었습니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오류를 바로잡는 것과 신앙 자체, 특히 주님께서 이후의 구원을 위해 보존하신 신앙의 지식까지 파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 점은 가인의 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신 것은 가인이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타락 속에서도 앞으로 쓰임이 있을 것을 보존하십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악한 일이지만, 신앙에 속한 지식은 이후의 인간이 말씀을 듣고 배우며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오류의 승인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보존의 표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에 관한 매우 깊은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것이 현재 불완전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즉시 없애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안에 앞으로 선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더 나은 질서로 이끄십니다. 가인의 신앙도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으므로 참된 질서를 잃었지만, 신앙의 지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이후 인간이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AC.395일곱은 단순한 성경 숫자 공부의 주제가 아닙니다. 일곱이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왜 가인의 신앙이 함부로 파괴되어서는 안 되었는지를 밝혀 줍니다. 주님께서 구원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신 것에는 거룩한 쓰임이 있었고, 그 쓰임을 파괴하는 것은 모독이 될 수 있었습니다. ‘ 배의 은 바로 그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성격을 표현합니다.

 

결국 AC.395는 창1의 일곱째 날에서 창4의 가인의 표까지 하나의 긴 선을 연결합니다. 1의 일곱째 날은 사랑과 신앙이 하나 된 천적 인간의 평화와 안식을 나타냈습니다. 4에서는 그 결합이 깨어져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고 표를 주어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존의 거룩함을 다시 일곱이라는 수로 표현하셨습니다. 결국 처음의 목적도 마지막의 목적도 같습니다. 신앙이 홀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AC.396, 창4:15, ‘가인의 표는 무엇인가? - 주님께서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신 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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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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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4

이제 이러한 일이 예견되었고,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섭리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가인에게 아무도 폭력을 가해서는 된다고 선언됩니다. 또한 그에게 표가 주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그것이 보존되도록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르카나이며,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결혼과 고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다음 말씀에서도 그것들을 언급하셨습니다. Now as this was foreseen, and was provided, lest the human race should perish in eternal death, it is here declared that none should do violence to Cain, by whom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urther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which mean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o secure its preservation. These are arcana hitherto undiscovered, and are referred to by the Lord in what he said respecting marriage, and eunuchs, in Matthew:

 

어머니의 태로부터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도 있도다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19:12) There are eunuchs who were so born from their mothers womb; and there are eunuchs who were made eunuchs of men; and there are eunuchs who have made themselves eunuchs for the kingdom of Gods sake; he that is able to receive it let him receive it. (Matt. 19:12)

 

천국의 결혼 안에 있는 자들이 고자들(eunuchs)이라고 불립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들(born from the womb) 천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며, 사람에 의해 고자가 자들(made of men) 영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고, 스스로 그렇게 자들(made so by themselves) 천사적 영들과 같은 자들로서, 이들은 체어리티로부터라기보다 순종으로부터 행합니다. Those in the heavenly marriage are calledeunuchs”; those soborn from the womb,are such as resemble the celestial angels; thosemade of men,are such as are like the spiritual angels; and thosemade so by themselves,are like angelic spirits, who act not so much from charity as from obedience.

 

해설

AC.394는 바로 앞 AC.393의 설명을 가인의 표에 직접 적용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없고, 결국 신앙을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분리 때문에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섭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가인에게 아무도 폭력을 가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고 보존하셨다는 것이 이번 번호의 첫 번째 핵심입니다.

 

이 대목은 AC.392에서 이미 제시되었지만, AC.394에서는 그 이유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이유는 그 분리 자체를 승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AC.393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했지만, 이후의 인간은 먼저 신앙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지식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리면 이후의 인간이 체어리티로 인도될 길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서도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있도록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여기서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의 보존은 단순히 어느 한 교리 체계를 역사적으로 존속시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의 구원 가능성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말씀을 듣고 신앙의 지식을 배우며 그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주님께서 구원의 통로를 완전히 끊지 않으셨음을 보여 주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설명을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르카나라고까지 부릅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마19:12고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가져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가인의 표와 고자에 관한 말씀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결혼의 속뜻과 연결하고, 더 깊게는 천적 천사·영적 천사·천사적 영들의 서로 다른 상태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먼저 천국의 결혼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결혼은 가장 깊게는 주님과 천국의 결합을 가리키고, 인간 안에서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문맥에서는 특히 사랑과 신앙이 올바르게 결합된 상태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바로 이 결혼을 깨뜨린 데 있었습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에 대한 설명 뒤에 천국의 결혼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결혼 안에 있는 자들이 고자들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성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9:12의 말씀을 상응적으로 읽으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연적·자기적인 결혼 상태를 벗어나 천국의 결혼, 곧 선과 진리의 결합 안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고자는 육체적 조건 자체보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으로 읽어야 합니다.

 

첫째, ‘어머니의 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들은 천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AC.393에서 설명한 태고교회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천적 천사들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합니다. 그들에게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은 처음부터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과 사랑의 분리를 경험한 뒤 다시 결합되는 방식보다, 처음부터 사랑 안에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래서 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들이라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둘째, ‘사람에 의해 고자가 자들은 영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천적 천사처럼 처음부터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가 아니라, 밖에서 주어지는 신앙의 지식과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들입니다. AC.393에서 말한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질서와 같습니다. 즉 외적으로 들은 진리와 배운 신앙이 수단이 되어 내적으로 체어리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셋째, ‘스스로 그렇게 자들은 천사적 영들과 같은 자들이며, 이들은 체어리티로부터라기보다 순종으로부터 행한다고 합니다. 이 문장은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천사적 영들이 체어리티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행동의 직접적인 출발점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천적 상태는 사랑에서, 영적 상태는 진리와 양심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행하지만, 이 보다 외적인 상태에서는 먼저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므로 행해야 한다는 순종이 더 직접적인 동기가 됩니다.

 

따라서 세 부류는 모두 같은 수준에서 나열된 세 가지 인간 유형이라기보다, 선과 진리가 결합되는 서로 다른 방식과 정도를 보여 줍니다. 천적 천사는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하고, 영적 천사는 배운 진리를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며, 천사적 영은 보다 외적으로 순종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질서의 목적은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보존과 마19:12가 연결되는 이유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상태를 잃었어도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도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영적 길이 열렸고, 더 외적인 상태에서는 순종을 통하여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길도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낮아질 때마다 그 상태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구원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가인의 가 단순한 보호 표지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중요한 상징인 이유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은 인간의 타락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된 신앙 안에 남아 있는 진리의 지식까지 파괴되지 않도록 보존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장 높은 질서를 잃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구원의 모든 길을 닫아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아진 상태에서도 다시 올라올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천국의 결혼이라는 관점입니다. 가인 이야기를 단순히 신앙 대 체어리티의 싸움으로만 보면, 해결책이 어느 한쪽을 제거하는 데 있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결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목표는 분리된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을 다시 결합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것도 바로 그 결합의 가능성을 보존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AC.394는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매우 깊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이 천적 질서를 잃었다고 해서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을 때에도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주실 길을 마련하십니다. 직접적인 퍼셉션이 사라진 뒤에는 양심의 길을, 더 외적인 사람에게는 순종의 길을 사용하시면서, 각 상태에서 인간을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이끄십니다.

 

결국 AC.394가인의 는 단순히 타락한 신앙을 살려 두신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섭리의 표입니다. 그리고 마19:12의 세 종류의 고자에 관한 말씀은 인간이 서로 다른 상태와 방식으로 천국의 결혼, 곧 사랑과 신앙의 결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가장 높은 천적 상태를 잃어버린 인간에게도 주님께서는 영적 질서와 순종의 질서를 통해 다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나아갈 길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에 감추어진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입니다.

 

 

 

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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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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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3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는 성격의 교회였으며, 심지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이러한 성격으로 있을 없고,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여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교리로 만들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그것들이 실제로 분리되도록 허용하시되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섭리하셨습니다. 신앙을 통하여, 다시 말해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을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식(cognitio), 듣는 것이 먼저 오고, 지식 또는 들음을 통하여 체어리티,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게 하셨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없어야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태고교회에 있었던 퍼셉션을 대신하여,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하였는데, 이는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으며, 주님의 강림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이 구별되는 것도 바로 이것에 의해서입니다. Before we proceed to elucidat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s before us, it is necessary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faith.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f such a character as to acknowledge no faith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insomuch that they were unwilling even to mention faith, for through love from the Lord they perceived all things that belong to faith. Such also are the celestial angels of whom we have spoken above.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human race could not be of this character, but would separate faith from love to the Lord, and would make of faith a doctrine by itself, it was provided that they should indeed be separated, but in such a way that through faith, that is, through the knowledges of faith, men might receive from the Lord charity, so that knowledge [cognitio] or hearing should come first, and then through knowledge or hearing,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might be given by the Lord, which charity should not only be inseparable from faith, but should also constitute the principal of faith. And then instead of the perception they ha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ere succeeded conscience, acquired through faith joined to charity, which dictated not what is true, but that it is true, and this because the Lord has so said in the Word.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were for the most part of this character, as also was the primitive or first church after the Lords advent, and by this the spiritual angel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해설

AC.393은 가인의 표에 대한 설명을 잠시 멈추고 신앙의 역사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의 표를 이해하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있었고, 이후 그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한 삽입 설명이 아니라 AC.392에서 말한 분리된 신앙의 보존을 이해하는 교리적 열쇠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에 속한 신앙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두 개의 별도 항목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으면서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이라고 믿은 다음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신앙을 따로 떼어 나는 이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본래적 질서와 맞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천적 천사의 상태 사이에 깊은 상응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이 중심이며 진리는 그 사랑 안에서 퍼셉션됩니다. 진리를 먼저 지적으로 확보하고 그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아니라, 선 안에서 진리를 보는 질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라고 정리해 온 이유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그러한 상태에 머물 수 없을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인간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분리를 원하셨다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리는 인간의 타락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이미 낮아진 상태에서도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섭리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길이 바로 신앙에 관한 지식들에서 체어리티로나아가는 질서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인간에게는 먼저 신앙에 관한 지식이 주어집니다.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배우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들음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주십니다. 따라서 순서는 달라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먼저 지식만 충분히 쌓으면 나중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93은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지식 자체가 체어리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를 듣고 배우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는 수단과 길이 됩니다. 사람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 그 안에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질서에서도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주어진 체어리티가 신앙과 분리될 없어야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순서와 주도권을 명확히 구별합니다. 시간적·교육적 순서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질서와 주도권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된 것입니다. 이것은 AC.363에서 살펴본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신앙이 먼저 배워질 수 있지만, 신앙이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과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이 먼저다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배우는 교육적 순서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이고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AC.393은 첫 번째 의미는 인정하지만 두 번째 의미는 분명히 부정합니다. 지식과 들음은 먼저 올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주된 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가 등장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이 양심은 퍼셉션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정밀하게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한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미묘해 보이지만 매우 큽니다. 퍼셉션을 가진 태고교회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어떤 것이 선하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반면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은 먼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진리이다라는 내적인 딕테이트를 받습니다. 즉 양심이 독립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되고 배운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59AC.370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AC.359에서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 dictated’,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반면 AC.370에서는 같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체어리티에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표현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93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퍼셉션과 이후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해 형성되는 양심이 서로 다른 영적 기능임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앞의 표현 차이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과도기적 상태 안에서 퍼셉션의 어떤 흔적과 양심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특히 AC.393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양심을 시대적으로 무분별하게 섞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의 영적 교회에서는 말씀과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며, 그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구별되는 영적 교회의 질서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홍수 직후 어느 고대 종교집단만의 특수한 구조가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며,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에게서 체어리티를 받고, 그 결과 양심이 형성되는 것은 영적 교회의 기본적인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가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를 구별한다고 말합니다. 천적 천사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고, 영적 천사는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되며 양심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천국이고 다른 하나가 열등하여 천국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만 그 받아들이는 방식과 질서가 다릅니다. 이것이 천적과 영적의 중요한 구별입니다.

 

이제 AC.392가인의 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직접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하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시키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단순히 그 신앙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지식이 보존되게 하시고, 훗날 그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분리를 승인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에게도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질 수 있도록 신앙의 지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보존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타락이지만, 그렇다고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파괴해 버리면 이후의 인간은 무엇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낮아진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마련하십니다.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 말씀을 듣게 하시고, 신앙의 지식을 배우게 하시며,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고,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히 옛날에는 퍼셉션이 있었고 나중에는 양심이 생겼다는 교회사적 설명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길을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더 이상 천적 방식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외적인 길을 통하여 다시 내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AC.393의 핵심은 순서는 바뀌었지만 목적은 바뀌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습니다. 이후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독립하여 생명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수 없으며 신앙에서 주된 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신앙을 보존하신 것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지고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 회복될 수 있도록 길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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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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