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9.심화

 

1. 주님의 호칭들

 

주님의 호칭들,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 ‘구주’, ‘성령’,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 아들’, ‘인자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주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같은 주님을 가리키는 듯한 여러 호칭이 계속 나오는데,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가’, ‘왜 어떤 때는 여호와라 하고, 어떤 때는 주라 하며, 어떤 때는 아들이라 하는가’라고 하면서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게 이 여러 호칭은 ‘서로 다른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 작용, 나타나심, 그리고 인간이 그분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이름들입니다. 다시 말해, 인격이 여럿이라서 이름이 여럿인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충만한 실재가 너무 깊고 넓기 때문에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근본적인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여호와’는 본질적으로 ‘스스로 계시는 분’, ‘존재 자체이신 분’, 곧 신적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단순한 신의 호칭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사랑과 존재의 근원이신 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순수한 신적 존재 자체를 직접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너무 무한하고 너무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실 때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셔야 했고, 그 완전한 나타나심이 바로 성육신,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곧, 여호와와 예수는 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성이 보이는 인성 안에 오신 한 분이십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것은 매우 자주 나오는데,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대개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 또는 ‘신적 존재와 신적 나타나심’이 함께 작용하는 맥락을 드러냅니다. ‘여호와’가 보다 존재와 사랑의 측면을 강하게 띠고 있다면, ‘하나님’은 진리와 질서, 말씀과 판단의 측면을 더 강하게 띠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언제나 기계적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여호와’는 사랑의 이름, ‘하나님’은 진리의 이름으로 더 자주 작용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함께 부를 때는, 사랑과 진리, 선과 지혜, 존재와 질서가 하나로 결합된 주님의 충만한 작용을 암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세기 2장 이후에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두드러지는 것도, 단순 창조가 아니라 이제 인간과의 보다 인격적이고 질서 있는 관계, 곧 거듭남과 동행의 질서가 전개되기 시작하기 때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인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름 자체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특히 인간과 가까이 계시며, 인간의 상태 속으로 들어오셔서 실제로 구원하시는 주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단순히 법적 선언이 아니라, 실제로 지옥의 세력을 이기시고, 인간의 본성을 영화롭게 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역사 속에 오셔서 싸우시고 이기시고 구원하신 주님의 이름입니다. 반면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충만한 뜻을 가진 호칭으로서, 특히 ‘신적 진리’, ‘말씀’, ‘기름부음 받은 진리의 통치’를 더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는, 구원하시는 주님과 진리로 통치하시는 메시아가 하나라는 뜻이 함께 담깁니다.

 

’라는 호칭은 신약과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에서는 ‘’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고 보고, 실제로 ‘’를 거의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며 다스리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는 매우 친밀하면서도 권위 있는 이름입니다. ‘여호와’가 다소 장엄하고 근원적 이름이라면, ‘’는 그 여호와께서 이제 구원과 거듭남의 실제 과정에서 인간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문장들, 특히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같은 표현에서는 ‘’가 곧 우리와 관계하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신학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가장 살아 있는 호칭이 바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주’는 말 그대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이 말도 단지 ‘벌에서 건져내는 자’ 정도로 생각하시면 너무 약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이란 인간 안의 지옥적 질서가 깨지고, 주님의 질서가 그 안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주’란, 우리 대신 서류를 처리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지옥과 싸워 이기시고, 인간 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시며, 거듭남과 안식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구주’라는 호칭에는 주님의 전투, 승리, 해방, 회복, 새 창조의 의미가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가 구원의 이름이라면, ‘구주’는 그 이름의 기능과 사역을 더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호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은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입니다. 전통 교회에서는 흔히 이것을 서로 다른 두 인격처럼 받아들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한 분 주님 안의 ‘신성 자체’와 ‘신성이 입으신 인성’의 관계로 봅니다. 곧 ‘아버지’는 주님 안의 보이지 않는 신성, 근원적 신적 존재를 가리키고, ‘아들’은 그 신성이 세상에 나타난 신적 인간, 곧 성육신하신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은, 마치 하늘에 두 신적 인격이 따로 계셔서 한 분이 다른 분을 파송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성이 보이는 인성으로 세상에 나타나셨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도, 단지 두 분이 대화하신 장면이라기보다, 아직 완전히 영화롭게 되기 전의 인성이 그 안의 신성과 연합되어 가는 실제 과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부활 이후에는 이 구별이 점점 ‘한 분 주님 안의 완전한 연합’으로 수렴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도 바로 이 방향에서 이해됩니다.

 

아들’ 가운데서도 특히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법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은 주님의 ‘신적 인성’, 또는 주님의 신성이 드러난 인성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인자’는 주로 ‘신적 진리’, 곧 말씀으로 나타나시는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진리의 거절, 말씀의 수난, 심판, 계시, 구름을 타고 오심 같은 말씀을 하실 때 ‘인자’라는 호칭이 자주 쓰입니다. ‘인자’는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인간적 겸손 표현이 아니라, 다니엘서의 배경까지 포함해 ‘말씀 가운데 나타나시는 주님’, ‘진리로 오시는 주님’, ‘심판하시는 진리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깊은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하실 때, 그것은 단지 ‘나도 권리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신적 진리이신 주님 자신이 안식의 본질이며 주관자이시다’는 선언으로 열립니다.

 

성령’도 별도의 세 번째 인격으로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사상과 어긋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발출’, ‘주님의 실제 작용’,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는 거룩한 영향’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버지’가 신성 자체이고, ‘아들’이 그 신성이 보이게 나타난 신적 인성이라면,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흘러나와 천국과 교회와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는 신적 영향력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살아 있는 숨결, 진리의 유출, 거룩한 활동이라고 이해됩니다. 주님께서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하신 것도, 떠나시는 주님 대신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내신다는 뜻이 아니라, 영화롭게 되신 후 더 내적으로, 더 보편적으로, 더 능력 있게 자신을 역사하시게 하신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이제 이 여러 호칭을 한데 묶으면, 대체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존재 자체이신 주님의 가장 근원적 이름이고, ‘하나님’은 진리와 질서의 측면에서 보이는 이름이며,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과 진리가 하나 된 충만한 이름입니다. ‘예수’는 구원하시는 인성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진리로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의 이름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진리의 통치가 하나이신 주님입니다. ‘’는 인간에게 가까이 계셔서 실제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이름이고, ‘구주’는 지옥과 악에서 건져내시는 사역적 이름입니다. ‘아버지’는 그 안의 신성 자체, ‘아들’은 나타난 신적 인성, ‘인자’는 말씀과 신적 진리로 나타나시는 주님,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되어 역사하시는 거룩한 영향입니다.

 

성경과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주님에 관한 여러 호칭은 서로 다른 신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 누구이시며,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고,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 주는 이름들입니다.’

 

이 한 문장을 붙들고 읽으시면, 호칭이 바뀔 때마다 ‘주님 안의 어떤 측면이 지금 강조되는가’를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리고 AC.89의 문맥에서는 특별히 이 점이 중요합니다. 창조, 거듭남, 안식, 구원, 말씀, 진리, 자비, 심판, 위로, 인도,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분 주님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이, 바로 이 다양한 호칭들을 통해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AC.89, 심화 2, ‘작용’

AC.89.심화 2. ‘작용’ 위 설명 중, ‘스베덴보리에게 이 여러 호칭은 ‘서로 다른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 작용, 나타나심,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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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9, 창2:4, ‘창2의 시작점’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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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2:4)

 

AC.89

 

하늘과 땅의 내력(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은 천적 인간의 형성입니다. 여기서 그의 형성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어지는 모든 세부 사항으로부터 매우 분명한데요, 아직 풀이 자라지 않았다는 말과,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그러하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과, 그 뒤에 모든 짐승과 하늘의 새를 만드셨다고 한 말도 그러합니다. 이는 그들의 형성이 앞 장에서 이미 다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여기서는 다른 사람이 다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의 사실로부터 더욱 분명해집니다. 곧 이제 처음으로 주님의 호칭을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라 하신다는 점입니다. 앞의 구절들, 즉 영적 인간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단지 하나님(God)으로만 부르셨지요. 또한 이제는 (ground)(field)이 언급되는데, 앞의 구절들에서는 오직 (earth)만 언급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절에서는 하늘(heaven)이 먼저 언급된 뒤에 (earth)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earth)이 먼저 나오고 하늘(heaven)이 뒤따릅니다. 그 이유는 (earth)이 겉 사람을, 하늘(heaven)이 속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영적 인간에게서는 개혁이 (earth), 곧 겉 사람에서 시작되지만,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 하늘(heaven)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are the formations of the celestial man. That his formation is here treated of is very evident from all the particulars which follow, as that no herb was as yet growing;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s well as that Jehovah God formed man, and afterwards, that he made every beast and bird of the heavens, notwithstanding that the formation of these had been treated of in the foregoing chapter; from all which it is manifest that another man is here treated of. This however is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act that now for the first time the Lord is called “Jehovah God,” whereas in the preceding passages, which treat of the spiritual man, he is called simply “God”; and, further, that now “ground” and “field” are mentioned, while in the preceding passages only “earth” is mentioned. In this verse also “heaven” is first mentioned before “earth,” and afterwards “earth” before “heaven”; the reason of which is that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and “heaven” the internal, and in the spiritual man reformation begins from “earth,” that is, from the external man, while in the celestial man, who is here treated of, it begins from the internal man, or from “heave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이 어디에서 새롭게 시작되는지를 분명히 선언하는 전환점입니다. 창2:4에 나오는 ‘하늘과 땅의 내력’이라는 표현은, 흔히 창조 기사 전체의 요약이나 반복으로 오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의 시작’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력(nativities)은 시간적 족보가 아니라, ‘상태의 형성과 전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내력’을 천적 인간의 형성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앞 장에서 다루어진 영적 인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 차이는 사소한 문장 배열이나 단어 선택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본문 전체의 구조 속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아직 풀이 자라지 않았고,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단순한 자연 상태의 묘사가 아니라, ‘새로운 형성이 아직 외적 단계로 나타나지 않았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고, 그 뒤에 짐승과 새를 만드셨다고 다시 말하는 점도 중요합니다. 이는 앞 장에서 이미 다루어진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언급되는 이유는, ‘같은 외적 형상이지만 전혀 다른 내적 상태’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었어도, 그 안에서 언급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이 차이는 하나님의 이름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앞 장, 곧 영적 인간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주님이 단지 ‘하나님’으로만 불리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이름의 변화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사랑과 존재의 근원을, ‘하나님’은 진리와 질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사랑과 진리가 하나로 결합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과 ‘’이 함께 언급되는 점도 중요합니다. 앞 장에서는 오직 ‘’만 언급되었습니다. ‘’은 겉 사람을 뜻하지만, ‘’은 그 겉 사람 안에서 이미 경작과 수용이 가능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이미 속 사람의 질서에 의해 준비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 하나의 섬세한 표지는 단어의 순서입니다. 이 절에서는 ‘하늘’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이 나옵니다. 그러나 곧이어 다시 ‘’이 먼저 나오고 ‘하늘’이 뒤따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서의 변화마저도 의미 없는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형성의 방향’을 보여주는 지표로 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개혁이 겉 사람에서 시작됩니다. 즉, 행동과 사고의 외적 질서가 먼저 정돈되고, 그 뒤에 속 사람이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반대입니다.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에서 시작됩니다. 사랑과 퍼셉션이 먼저 주어지고, 그다음에 겉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 질서를 따르게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두 종류의 사람이 단지 성숙도의 차이가 아니라, ‘형성의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은 외적 순종과 진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지만, 천적 인간은 속에서 주어진 생명과 사랑이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AC.89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앞 장의 연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 곧 천적 인간의 형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선언을 이해하지 못하면,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의 반복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창세기 2장은 반복이 아니라 ‘가장 깊은 차원의 인간 이야기’로 열립니다.

 

이 지점부터 창세기 2장은, 더 이상 질서가 세워지는 과정을 말하지 않고, ‘사랑에서 비롯된 생명이 어떻게 구체화되는가’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AC.89는 그 문을 여는 문장입니다.  

 

 

심화

 

1.주님의 호칭들

 

 

AC.89, 심화 1, ‘주님의 호칭들’

AC.89.심화 1. ‘주님의 호칭들’ 주님의 호칭들, 즉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주’, ‘구주’, ‘성령’,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 아들’, ‘인자’ 등에 대해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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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작용

 

 

AC.89, 심화 2, ‘작용’

AC.89.심화 2. ‘작용’ 위 설명 중, ‘스베덴보리에게 이 여러 호칭은 ‘서로 다른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 작용, 나타나심,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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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작용의 영어 표현

 

 

AC.89, 심화 3, ‘작용’의 영어 표현

AC.89.심화 3. ‘작용’의 영어 표현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가 위에서 설명드린 ‘작용’이라는 말은 특정 어떤 단어 하나를 직역한 것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핵심 용어를 한국어로 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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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0, 창2:5-6, ‘초목과 채소’,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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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8, 창2:2-3, ‘안식’, 정체성의 변화, '하나님의 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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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7.심화

 

2.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이 구절, Book of Isaiah 43:7 AC.88의 흐름에서 매우 핵심적인 선언입니다. 앞서 보신 사45의 말씀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원리를 말한다면, 이 구절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 줍니다.

 

먼저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라는 표현부터 보시면, 여기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주님의 본성과 속성’, 곧 사랑과 진리 전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주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또는 ‘주님과 결합된 상태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겉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적으로 주님과 연결된 상태의 인간을 말합니다.

 

그다음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영광(glory)은 언제나 ‘신적 진리의 빛’, 곧 진리가 드러나고 빛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주님의 진리가 그 안에서 드러나고 살아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단순히 존재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담고 표현하는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가 지었고(formed) 내가 만들었느니라(made)’라는 반복도 의미가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이중 표현을 단순한 강조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른 차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형성하다(formed)는 내적 인간, 곧 의지와 사랑의 영역을, ‘만들다(made)는 외적 인간, 곧 삶과 행위의 영역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주님이 인간의 속과 겉, 내적과 외적 전체를 모두 지으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은 AC.88의 주제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곧,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듭남의 과정, 그러니까 싸움, 변화, 안식 등은 모두 주님의 창조와 같은 성격을 가지며, 그 목적은 ‘주님의 영광’, 곧 진리가 그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우리 안에서 드러나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이 한 문장이 사43:7 AC.88의 핵심을 아주 선명하게 담아 줍니다.

 

 

 

AC.88, 심화 1, ‘사45:11-12,18, 21’

AC.87.심화 1. ‘사45:11-12,18, 21’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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