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60.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 flesh)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own과 결합되어 하나인 것처럼 되었습니다.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AC.160)

 

 

AC.160은 창2 마지막과 창3 시작 사이에서 인간 상태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특히 여기서 ‘(spirit)에서 ‘(flesh)이 되었다는 표현은 단순 육체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flesh)은 자주 proprium과 결합된 인간 상태, 곧 자기 자신 중심으로 기울 수 있는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생명을 받던 인간이 이제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proprium과 결합된 상태 안으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먼저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다’는 부분입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원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모두 주님의 생명을 직접 반영하는 상태였습니다. 겉 사람조차 속 사람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주님의 질서 아래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과 affection, 그리고 행동은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spirit 상태였습니다. 여기 spirit은 단순 영혼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자유롭게 흐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제 ‘(flesh)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flesh는 단순 물질 몸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proprium이 결합되어, 자기 자신 중심의 감각과 자기 생명 의식이 강해진 상태입니다. 즉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단순히 주님의 흐름 통로로만 느끼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사는 존재’처럼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영이 육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 추락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어서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own과 결합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adjoined’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proprium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천적, 영적 생명을 결합시키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 못하면 자유도, 사랑도, 상호적 결합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함께 흐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that they might be as one’, 곧 둘이 하나인 것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 생명은 여전히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핵심 역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반드시 완전 악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후 말씀에서 flesh는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사랑에 기울어진 인간성을 뜻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살아 있는 인간 전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 문맥에서는 신적 인성의 실제성과 충만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AC.160 flesh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인간 상태’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이 문장은 결국, 인간 존재 구조 안에 새로운 결합이 일어났음을 설명합니다. 원래 인간은 거의 전적으로 spirit 상태였지만, 이제는 proprium과 결합된 flesh 상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상태를 버리지 않으시고, 천적, 영적 생명을 그 안에 계속 결합시키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완전히 독립된 존재도 아니고, 완전히 수동적 존재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입니다. AC.160은 바로 그 놀라운 긴장 구조를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AC.160, 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AC.160.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어느 정도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관점에서는 단순 ‘퇴보’나 ‘열화’(劣化)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더 복합적인 의미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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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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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24)

 

AC.160

 

부모를 떠나(leave father and mother)는 속 사람으로부터 물러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이 겉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cleave unto his wife)는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된다는 뜻이며, ‘한 몸을 이룰지로다(be one flesh)는 그들이 거기서 함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own과 결합되어 하나인 것처럼 되었습니다. To “leave father and mother” 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 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 to “cleave unto his wife” 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 to “be one flesh,” that they are there together;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해설

 

AC.160은 창2:24라는 매우 유명한 구절을, 결혼제도의 기원이나 윤리 규범이 아니라 ‘영적 구조의 변화’로 읽게 만드는 핵심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 절을 한 문장 한 문장 해체하여,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부모를 떠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것처럼 읽히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가리킵니다. ‘부모’는 속 사람의 기원,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명의 근원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떠난다’는 것은, 속 사람이 더 이상 주도권을 유지하지 않고 ‘뒤로 물러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단절이 아니라, 중심 이동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는,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 거처를 두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이 겉 사람을 다스리는 위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 구별이 약화되어 ‘겉 사람 안에 내재하는 방식’으로 바뀝니다. 이때 겉 사람의 own과의 결합이 훨씬 밀접해집니다.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은 이 둘이 함께 있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는 조화로운 협력이라기보다는, ‘분리가 어려운 결합 상태’를 의미합니다. 앞 단락 AC.159에서 말했듯이, 이미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흐려진 상태에서의 결합이기 때문에, 이 ‘하나 됨’은 이전의 천적 결합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 단락의 핵심을 요약합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이었으나, 이제는 ‘’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자기의 own과 밀접히 결합된 상태’를 뜻합니다. 영이란 주님께 열려 있는 상태를, 육이란 자기의 own과 결합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자기의 own과 결합되어, 하나인 것처럼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는 아직 즉각적인 타락은 아니지만, ‘타락이 가능해진 구조’입니다. 생명이 자기의 own과 너무 가까워졌고, 그 결과 구별이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AC.160은 창2의 마지막 문장들이 왜 그렇게 ‘아름답게’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험한 전환점’이 되는지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다음 AC.161-162에서는 이 상태가 어떻게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로 묘사되며, 동시에 어떤 보호막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는지가 이어서 드러나게 됩니다.

 

 

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 flesh)

 

 

AC.160, 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肉, flesh)’

AC.160.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肉, flesh)’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肉,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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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향(下向) 평준화

 

 

AC.160, 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AC.160.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어느 정도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관점에서는 단순 ‘퇴보’나 ‘열화’(劣化)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더 복합적인 의미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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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AC.160, 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AC.160.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그래서 이것은 단순 ‘하향 평준화’라기보다, ‘더 낮고 위험한 상태 안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운 결합 가능성이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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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

 

첫 번째 태고교회는 우리보다 훨씬 더 주님 안에 있었고, 훨씬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지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 (AC.160 심화 3)

 

1에 의하면,2 전반 첫 번째 태고교회 역시 부단한 자기 own과의 싸움, 그리고 그 극복을 통해 저 자리, 저 상태까지 이른 것 같은데... 그래서 윗글 표현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라는 표현은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려는 순간, 아주 단호하게 물러납니다로 고쳐 표현해야 할 것 같아요.

 

 

목사님 지적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AC.16-63까지의 ‘1 거듭남 구조’를 충분히 따라온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 제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대로, 창2의 태고교회 인간 역시 아무 노력 없이 자동으로 천적 상태에 도달한 존재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창1 여섯 날의 과정 전체가, 질서 없는 상태로부터 점차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긴 형성 과정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제안하신 표현, 곧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라기보다, ‘그렇게 느끼려는 순간 아주 단호하게 물러납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은 상당히 통찰력 있습니다. 실제로 천적 인간을 너무 ‘자기감 자체가 거의 없는 존재’처럼 이해하면, 창1 전체의 거듭남 투쟁 구조와 잘 연결되지 않는 면이 생깁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흐름 안에서는 이 둘이 완전히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즉, 태고교회 인간에게도 proprium 가능성 자체는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창2에서 ‘돕는 배필’, ‘깊은 잠’, ‘여자’, 그리고 이후 타락 가능성 자체가 등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도 인간인 이상 자기 자신 안으로 기울 가능성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이는 ‘무게 중심’에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거의 기본 상태 자체가 자기 자신 중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돌이키려면 거꾸로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반면 태고교회 인간은 기본 중심이 주님 쪽에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으로 느끼려는 움직임이 생기더라도, 그것이 오늘날 인간처럼 굳어지고 체질화되기 전에 훨씬 더 민감하게 그것을 감지하고 물러날 수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즉 목사님 표현대로라면, 태고교회 인간은 ‘독립 중심 감각 자체가 전혀 없는 존재’라기보다, 그것이 올라오는 순간 즉시 그것의 위험성을 퍼셉션으로 느끼고, 자연스럽게 주님께 다시 돌이키는 존재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무서운 민감성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사랑이나 자기 의를 느껴도 그것을 상당히 오랫동안 ‘나 자신’으로 붙들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proprium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 안으로 굽어지는 움직임 자체를 거의 영적 통증처럼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훨씬 빠르게 주님 질서로 되돌아갑니다.

 

이 점에서 창1의 여섯 날도 새롭게 보입니다. 그것은 단순 자동 성장 과정이 아니라, 인간 안의 혼돈이 점차 주님의 질서 안으로 정렬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안식 상태 역시 ‘더 이상 어떤 유혹도 없는 상태’라기보다, 주님의 질서가 중심을 잡고 있는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수정 표현은 상당 부분 타당합니다. 특히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적었다’는 말을 너무 정적인 상태로 이해하지 않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순간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로 이해하면, 창1의 거듭남 구조와도 훨씬 잘 연결됩니다.

 

 

 

AC.159, 창2:23, ‘속 사람, 겉 사람을 구별 못하게 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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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심화

 

2. ‘천적 인간의 속 사람, 겉 사람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되어 있으며, 참으로 매우 분명히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한 것인지, 무엇이 겉 사람에 속한 것인지를 지각하고, 또한 겉 사람이 어떻게 주님에 의해 속 사람을 통하여 다스려지는지를 지각합니다.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AC.159)

 

 

AC.159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과 천적 인간 이해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나 ‘신앙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차이를 실제로 지각(perceive)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먼저 ‘속 사람(internal man)은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인간 안의 더 깊은 차원입니다. 사랑, 퍼셉션, 천국적 질서가 자리하는 곳입니다. 반면 ‘겉 사람(external man)은 감각, 일상 사고, 행동, 세상과 접촉하는 자연적 인간의 차원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인간은 이 둘이 거의 뒤섞여 있어서,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생각과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감정과 자기 판단을 거의 곧 자기 자신 전체로 느낍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은 다릅니다. 그는 자기 안에 두 층위가 있다는 것을 단순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분명히 지각합니다. 즉, ‘이것은 겉 사람의 움직임이구나’, ‘이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를 내적으로 압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겉 사람이 자기 독립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까지 지각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바로 ‘through the internal’입니다. 주님은 겉 사람을 직접 억지로 조종하시는 방식으로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먼저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와 사랑을 심으시고, 그것이 점차 겉 사람 안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마치 영혼이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하듯이 말입니다. 천적 인간은 바로 이 흐름을 어느 정도 실제로 느낍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충동이나 생각이 올라오면 거의 즉시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화가 올라오면 ‘내가 화났다’, 욕망이 올라오면 ‘내가 원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자기 안의 겉 사람 움직임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봅니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더 깊은 평안과 질서를 압니다. 그래서 겉 사람의 움직임이 속 사람 질서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을 설명할 때 반복해서 ‘퍼셉션’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단순 추론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무엇이 주님께 속하고,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지를 어느 정도 살아 있는 감각처럼 압니다. 그래서 그는 겉 사람이 속 사람을 거슬러 독립하려 할 때도 그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2의 ‘둘이 한 몸을 이룬다’와도 연결됩니다. 거듭남 이전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되어 있고 충돌합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을 향하려 하지만, 겉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질서 안에서 결합합니다. 겉 사람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래서 AC.159는 단순 심리 설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천국적 인간 상태의 묘사입니다.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너무도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서로 적대하지 않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의 질서 아래 살아 움직이는 상태 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이 바로 참된 인간 질서이며, 천국의 인간 구조입니다.

 

 

 

AC.159, 창2:23, ‘속 사람, 겉 사람을 구별 못하게 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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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AC.159.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창2의 마지막 문장, 곧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이 단순한 축복 선언이 아님을 다시 보게 됩니다. 위 해설 문장을 잃고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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