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하였는데, 이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게 없음을 뜻하며, 이것은 질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the principal of faith)이기 때문인데,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있습니다. 불꽃은 열과 빛의 본질적인 것으로, 열과 빛은 불꽃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리된 상태의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빛에 비유할 있습니다. 실제로 빛은 있지만 그것은 겨울의 빛이며,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게 됩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해설

 

AC.365는 창4:7의 마지막 말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매우 선명하게 결론짓습니다. 앞의 AC.361에서는 이 말씀이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개괄했고,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먼저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에 해당하는 Unto thee is his desire를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밀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신앙과 경쟁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분리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가르치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삶으로 행하게 합니다. 둘은 한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는 가인이 그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상태로 읽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근본적인 질서 전도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 자체가 필요 없다고 처음부터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인정하되 그것을 신앙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신앙을 첫째로 세우고, 사랑과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질서에 어긋난다(contrary to order)고 단언합니다.

 

질서가 무엇인지는 앞의 글들을 통해 이미 드러났습니다.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습니다. AC.362에서는 체어리티를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는 사랑 체어리티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이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첫째가 되려 하면 그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길입니다.

 

그래서 AC.365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은 조금 부족한 신앙이다라거나 불완전한 신앙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아니다(it is not fai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정체성이 단순히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섬기는 진리라야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the principal of faith)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principal을 단순히 중요한 요소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부가되는 여러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도 신앙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인의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이름은 신앙일 수 있어도 그 안에 신앙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설명을 스베덴보리는 아주 아름다운 자연의 비유로 풀어냅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있습니다.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옵니다. 여기서 불꽃은 근원이며, 열과 빛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꽃에서 열을 떼어내고 빛만 남긴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밝아 보일 수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은 사라집니다.

 

이 비유에서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빛이 있습니다. 진리를 보고 이해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빛이 살아 있는 빛이 되려면 불꽃의 열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곧 진리를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상태에도 실제로 빛은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아무런 진리도 없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알 수도 있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매우 논리적인 신학 체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빛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빛에 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the light of winter)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가인의 신앙을 설명하는 데 대단히 적절합니다. 겨울에도 태양은 빛납니다. 사물을 볼 수도 있고 길을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습니다. 땅은 얼어 있고 나무는 굳어 있으며 씨앗은 싹트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8-349와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죽은 행위였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는 죽은 예배였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왜 그것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겨울의 으로 보여 줍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지식과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 행위에도 생명이 없고 예배에도 생명이 없습니다.

 

이 비유를 조금 더 깊이 보면 빛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겨울의 문제는 빛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이 없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나 진리, 교리를 낮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본래의 생명을 되찾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면 겨울의 빛은 생명을 살리는 빛이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고,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며, 아는 것이 삶과 결합될 때 신앙은 비로소 본래의 기능을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말도 사랑만 있으면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와 함께 있습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진리는 선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AC.362의 이단에 관한 설명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참된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참된 것을 질서 밖으로 끌어내어 첫째 자리에 놓자, 그 진리 자체가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되었습니다. 빛을 붙잡았지만, 불꽃에서 떼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그 빛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밝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추운 겨울의 빛이 되어 갔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교리를 공부하고, AC를 읽고, 상응과 속뜻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 때문에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고 낮추며,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밝아 보여도 그것은 겨울의 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고 대충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이 진리를 배우되 진리가 나를 어떻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끄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는 목적도 AC에 관한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삶에서 더 선한 쓰임을 행하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진리의 빛에는 체어리티의 열이 함께 있게 됩니다.

 

이제 AC.361-365 전체를 돌아보면 흐름이 아주 선명해졌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고, 자기 사랑으로 그것을 확증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체어리티가 주도하는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마음의 문 앞에 있게 되지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악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의 문제는 결국 신앙이냐 체어리티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질서로 결합되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 위에 서려고 할 때 둘의 결합은 깨집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깨지면 신앙은 불꽃에서 떨어져 나온 겨울의 빛처럼 되어, 결국 그 안의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AC.365의 겨울빛 비유는 창4의 가인 이야기를 아주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빛이 있는가?만 물어서는 안 됩니다. ‘ 빛에 열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진리가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따뜻함으로 살아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는 빛이라야 살아 있는 신앙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5, 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5.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1-365를 따라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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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AC.366-3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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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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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하였는데, 이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sin lying at the door) 것이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악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일반적으로 마귀(devil) 불리는데, 마귀, 그의 지옥의 무리는 사람이 체어리티가 결여되어 있을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Everybody can see thatsin lying at the door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Sin in general is called thedevil,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해설

 

AC.364는 앞의 AC.363과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설명하면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4에서는 그 반대편을 보여 줍니다.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곧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으며, 그 자리에 악이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두 글을 함께 놓으면 선한 의도와 체어리티그리고 체어리티의 부재와 이라는 선명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가 없다는 상태를 어떤 중립적인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그저 아직 사랑이 부족하다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는 단순히 여러 기독교적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들어와 이웃을 향하여 흘러가는 근본적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그에 따른 악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이라고 풀이합니다. 아직 악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와 모든 것을 차지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악은 문에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가인의 상태와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적인 애정이 생겼지만, 체어리티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다음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경계에서 악이 문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은 매우 의미심장한 경계입니다. 안과 밖이 만나는 자리이며, 무엇인가가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다만 AC.364에서는 아직 의 상응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여기서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한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분명한 것은 악이 인간 안으로 들어오려고 가까이 와 있으며,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가 그 악에게 문을 열어 주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를 일반적으로 마귀(devil)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는 곧이어 마귀, 그의 지옥의 무리(his crew of infernals)라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초점은 악을 단순한 추상적 개념으로만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그와 상응하는 지옥의 악한 영향이 가까이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영계 이해가 배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귀가 와서 사람에게 악을 집어넣으므로 인간은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의 질서에서 인간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으며, 양쪽으로부터 오는 유입 가운데 무엇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와 관련하여 자유를 가집니다. 악한 영들이 가까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자기 의지와 결합하여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에는 한편으로 악의 가까움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이 점에서 바로 앞 AC.359-360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지고 체어리티가 떠난 바로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이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악이 행위로 완전히 굳어진 뒤에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인간의 마음 문 앞에 와 있을 때 미리 알게 하십니다. 가인이 분노를 느낀 것과 아벨을 죽인 것 사이에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섭리의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강제로 악을 제거하시지는 않지만, 악을 보고 거절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선과 진리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AC.364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이 글 전체의 결론이면서 매우 강력합니다.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악과 싸우려면 의지를 강하게 가져라거나 올바른 교리를 확실히 믿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악을 마음의 문에서 물리치는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이야기를 읽어 온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악이 문에 엎드려 있을 때 해결책이 강한 신앙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 다시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질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도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웃을 향한 사랑을 함께 말한 것도 중요합니다. 둘은 서로 분리된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향하여 그 사랑이 흘러가며, 이웃을 향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물리치는 힘이 인간 자신의 선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주님의 선이 인간 안에서 악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와 그의 무리를 몰아낸다는 표현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지옥과 싸워 이긴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그 사랑과 함께할 수 없는 악과 거짓이 물러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싸우시고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악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63AC.364는 한 쌍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선을 의도함 체어리티가 함께 있음 얼굴이 들림이라는 길을 보여 주고, AC.364에서는 선을 의도하지 않음 체어리티가 없음 악이 문에 있음이라는 반대의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 서 있는 가인에게 주님께서는 아직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무서운 경고만은 아닙니다. ‘아직 문에 있다는 것은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고,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으며, 아직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인이 해야 할 일은 문 앞의 악과 자기 힘으로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다시 사랑의 질서 안으로 돌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AC.364가 가르치는 것은 악을 이기는 길 역시 체어리티라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어진 자리에 악이 들어오며, 체어리티가 회복되면 악은 물러납니다. 그래서 창4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점점 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가?라는 교리 논쟁을 넘어 인간 마음의 생명과 죽음의 문제가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악이 마음의 문을 넘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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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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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설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신성종 목사가 죽음을 ‘교리 문제’로 시작하지 않고 ‘사람의 두려움’에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화장장에서 어머니의 유골함을 받아 든 아들이 ‘이렇게 태웠는데 나중에 부활할 어머니 몸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자, 그는 그 질문의 밑바닥에 ‘내가 어머니한테 몹쓸 짓을 것은 아닙니까?’라는 죄책감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묻는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신학적이어도 실제로는 사랑, 상실, 죄책감, 두려움의 언어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좋은 가셨어요’, ‘천국 가셨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실제 유가족에게 별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그의 고백도 진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이런 태도는 충분히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먼저 상대방의 실제 상태를 살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이 두렵다고 해서 신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망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는 설교 후반의 권면도 좋습니다. 신앙을 인간의 자연적 정서 자체를 억압하는 도구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육체를 입고 자연계에 사는 동안 사람에게 죽음은 이별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슬픔 자체가 신앙의 실패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이 절망으로 닫히느냐, 아니면 주님을 향한 신뢰 가운데 통과되느냐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성종 목사의 ‘무섭지 않은 것이 믿음이 아니라 무서운데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표현은 목회적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와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신성종 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몸은 버려지는 껍데기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세우고, 당시 헬라 철학의 영혼-육체 이원론을 비판합니다. 그는 ‘육신의 옷을 벗고 하늘나라로 갔다’, ‘몸은 껍데기이고, 진짜는 영혼이다’ 같은 기독교 장례식의 익숙한 표현 안에 사실 헬라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생각해 볼 만한 문제 제기입니다. 인간을 영혼이라는 ‘진짜 인간’과 아무 가치 없는 육체라는 ‘껍데기’로 단순 분해하는 사고는 분명 조심해야 합니다. 자연계의 몸 역시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섬기고 일하고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제3의 길이 열립니다. 그것은 ‘물질적 몸이 껍데기가 아니므로 물질적 몸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도 아니고, ‘물질적 몸은 아무 가치가 없고 영혼만 진짜다’도 아닙니다. 인간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이며, 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그 몸은 이 자연계의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라 영계의 실체에 상응하는 ‘영적 ’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자연계의 육체는 자연계에 남겨 두지만, 그 사람 자신은 몸 없는 의식이나 구름 같은 영혼이 되어 떠도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지닌 영으로 깨어나고,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사람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의 인간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삶의 연속성을 경험한다고 거듭 설명합니다.

 

이 점에서 신성종 목사가 ‘신령한 ’을 ‘유령 같은 비물질적인 무엇’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지점까지 옵니다. 차이는 그다음입니다. 신성종 목사는 그 ‘신령한 ’을 마지막 날 현재의 육체가 변화하여 얻는 몸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는 순간 자연적 몸을 벗고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는 수천 년 동안 무덤 속에서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영혼이라는 상태가 없습니다. 아담 시대의 사람도, 오늘 죽은 사람도 사후에는 영계에서 인간으로 살아갑니다. 마지막 날에 무덤으로 돌아와 옛 물질을 다시 모아 몸을 만드는 과정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출발점이 된 ‘화장하면 나중에 어머니의 몸은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신성종 목사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화장하든 매장하든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육체 속에 남아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육체는 이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잠시 입었던 몸이며, 죽음과 동시에 인간 자신은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따라서 화장은 부활을 어렵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애초에 사후의 인간이 다시 사용해야 할 몸을 훼손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매장된 시신도 다시 필요한 것이 아니고, 화장된 재도 다시 모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설교의 ‘씨앗’ 비유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다르게 읽힙니다. 신성종 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를 장례와 미래의 육체 부활로 연결합니다. ‘어머니는 지금 땅에 심겨 있는 거네요’라는 유가족의 말은 이 설교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목회적 위로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정확히 말해 ‘어머니가 땅에 심겨 있는 ’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것은 어머니가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육체입니다. 어머니 자신은 이미 영계에서 깨어나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한 위로는 ‘어머니는 사라진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다른 세계에서 사람으로 살아 계십니다’가 될 것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사후세계 이해 전체를 바꿉니다. 전통적 육체 부활론에서는 ‘죽음 영혼의 중간 상태 마지막 육체 부활’이라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죽음 영계에서 깨어남 중간영계에서 내면이 드러남 자신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천국 또는 지옥으로 들어감’이라는 흐름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먼 미래에 있을 사건만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인간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사후의 깨어남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것은 유가족에게 주는 위로의 내용까지 크게 달라지게 합니다. ‘언젠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보다 ‘ 사람은 지금도 주님의 섭리 아래 존재하며 살아 있습니다’라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더욱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신성종 목사는 부활하신 예수가 만져질 수 있었고, 음식을 드셨으며, 못 자국도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우리의 미래 부활 몸 역시 이와 같은 물질적 몸이라는 논증을 펼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일반 인간의 사후 과정과 동일한 사례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처럼 자연적 몸을 버리고 영으로 살아난 분이 아니라, 지상 생애 동안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시는 영화의 과정을 완성하시고, 신적 인성(Divine Human)으로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무덤에 주님의 몸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 인간의 죽음과 다릅니다. 이것을 모든 인간의 시체가 마지막 날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직접적인 모델로 삼으면 스베덴보리의 기독론과 사후세계론에서는 중요한 구별 하나가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이고 만져지고 함께 음식을 드신 사건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영적인 것은 물질적이지 않으므로 실체도 없다’는 우리의 자연적 선입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영계는 희미하고 추상적인 의식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사람, 집, 길, 공동체, 산과 들, 식물과 수많은 환경이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 보고 말하고 살아갑니다. 그것들은 자연계 물질이 아니라 영적 실체와 그 상응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몸이 없으면 어떻게 서로 알아봅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스베덴보리에게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영들은 몸 없는 영혼들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머니를 다시 만나면 알아볼 있습니까?’라는 설교 속 질문에도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적극적입니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천국에서의 재회는 단순히 얼굴을 기억하여 알아보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외면에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는 몸과 사회적 역할과 여러 외적 조건이 사람의 내면을 가릴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점차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실제 성품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진정한 결합은 단순한 혈연만으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사랑과 삶의 상태가 서로 조화를 이루느냐와 관계됩니다. 이 부분은 ‘죽으면 가족이 모두 그대로 모여 영원히 함께 산다’는 식의 단순한 위로와는 구별해야 합니다.

 

설교에서 또 하나 크게 갈라지는 부분은 요한계시록 21장의 ‘ 하늘과 ’입니다. 신성종 목사는 ‘성경의 마지막 그림은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오는 ’이라며, ‘새로워진 몸을 입은 우리가 새로워진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흙냄새, 밥 짓는 냄새, 손을 잡는 감촉, 함께 밥 먹는 시간 같은 자연적 삶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서적으로 매우 따뜻하고 매력적인 그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 하늘과 ’ 해석은 이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 하늘과 ’은 물질 우주가 폐기되고 새로운 물질 지구가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그에 상응하여 자연계에 세워지는 새로운 교회, 곧 새로운 영적 질서를 가리킵니다. ‘ 예루살렘’ 역시 하늘에서 물리적으로 내려오는 거대한 도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새 교회의 교리와 삶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설교에서 가장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천국은 결국 새로워진 지구이며, 우리는 부활한 물질적 몸으로 그곳에서 다시 산다’는 그림은 성경의 문자적 이미지를 매우 충실하게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그 문자 안의 속뜻을 자연적 차원에 고정한 해석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 하늘’, ‘ ’, ‘ 예루살렘’을 자연적 공간과 물질적 도시로 읽기 시작하면, 계시록 전체에 흐르는 상응적 언어를 놓치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성종 목사가 이 교리를 통해 도달한 윤리적 결론은 매우 귀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이 58절에서 ‘그러므로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안에서 헛되지 않은 앎이라’로 끝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교회 화장실을 청소한 사람, 새벽에 난로를 피운 사람, 김치를 담가 홀로 사는 노인에게 가져다준 사람, 수십 년 동안 주보를 접은 사람들의 손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천국을 이루는 것은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알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실제 삶의 유용한 일, 곧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 손이 다시 살아납니다’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관절이 붓고 굳은살이 박힌 바로 그 물질적 손의 원자들이 다시 모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손으로 행했던 사랑과 쓰임이 그 사람의 영원한 인격 안에 남는다고 보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고, 그 사랑을 어떻게 삶으로 행했는지가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는 신성종 목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지금 하는 일이 헛되지 않다’는 결론과 스베덴보리의 ‘사람이 세상에서 형성한 지배적 사랑과 삶의 상태를 가지고 영원으로 들어간다’는 가르침이 뜻밖에 깊이 만납니다. 결론의 영적 방향은 가까운데 그 결론을 설명하는 사후세계의 구조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설교를 읽으며 특별히 눈여겨볼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중심 본문이 고린도전서 15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포함한 사도들의 서신을 복음서나 계시록과 같은 의미에서 ‘말씀’으로 보지 않으며, 그 안에 연속적인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서신이 무가치하거나 읽을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를 가르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권면하는 중요한 교훈이 그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 ‘육의 몸과 신령한 ’을 창세기나 계시록의 상응처럼 하나하나 아르카나로 풀어내기보다, 사도 바울이 당시 교회에 가르치려 했던 교리적 가르침으로 읽고 그것을 말씀 전체와 조화시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더 적절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아주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성종 목사는 ‘ 없는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는 통속적 기독교 관념을 헬라 철학의 영향이라고 비판하면서 성경적 사후세계를 회복하려 합니다. 문제 제기 자체에는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마지막 무덤에서 육체가 부활하여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그림 모두를 넘어섭니다. 인간은 몸 없는 영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 자연적 몸을 내려놓고 영적 몸으로 깨어나며, 그 몸으로 영계에서 완전한 인간의 삶을 계속합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바로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한 분별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처음 화장장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세 관점의 차이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어머니의 몸을 태워 버렸는데 어떻게 부활합니까?’라는 질문에 통속적인 영혼불멸론은 ‘몸은 중요하지 않고 영혼만 천국에 갔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신성종 목사는 ‘ 몸은 씨앗이며 하나님께서 마지막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리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 자신은 유골함 안에도, 무덤 안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자연적 육체는 그곳에 남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나셨습니다’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세 답은 비슷하게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전제합니다.

 

그럼에도 이 설교 전체를 오류 때문에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정죄하지 말자’, ‘유가족의 슬픔을 억누르지 말자’, ‘화장 때문에 죄책감을 갖지 말자’, ‘몸으로 행한 작은 사랑의 수고를 하찮게 여기지 말자’, ‘죽음이 마지막이므로 현재의 삶이 허무한 것이 아니라 영원이 있으므로 오늘의 사랑과 수고가 중요하다’는 목회적 메시지는 충분히 귀합니다. 특히 이름 없이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돌본 사람들의 작은 수고를 기억하는 부분은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스베덴보리의 핵심 가르침과 매우 아름답게 만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설교에 던지는 질문은 ‘신성종 목사의 부활 신앙이 옳으냐 그르냐’ 정도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부활이란 정확히 무엇인가?’입니다. 자연적 육체의 재생인가, 아니면 인간이 죽음을 통과하여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참된 몸으로 깨어나는 것인가? ‘ 하늘과 ’은 미래의 물질 우주인가, 아니면 주님이 이루시는 새로운 영적 질서와 새 교회인가?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우리 육체 부활의 단순한 견본인가, 아니면 주님의 인성이 완전히 영화되어 신성과 하나 된 유일무이한 사건인가? 이 질문들 앞에서 신성종 목사의 설교는 오히려 좋은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목회적 고백을 그대로 귀하게 남겨 두어도 좋겠습니다. ‘무섭지 않은 것이 믿음이 아니라 무서운데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붙드는 소망은 ‘언젠가 흩어진 육체의 원소가 다시 모일 ’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소망은 ‘죽음조차 주님이 주신 생명의 연속을 끊을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과 함께 무(無)로 사라졌다가 먼 훗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 영계에서 계속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장례는 한 사람의 존재가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눈에서는 닫히지만 그에게는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경계가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설교가 품고 있는 따뜻한 목회적 위로와 스베덴보리의 놀라울 만큼 구체적인 사후세계의 가르침이 서로 만날 수 있다고 봅니다.

 

 

심화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SY.93, 신성종 목사, 심화 1,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SY.93, 심화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앞의 신성종 목사의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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