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3:14)



AC.245

그가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모든 짐승보다, 들의 모든 짐승보다 저주를 받았다(he said to the serpent,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라고 하신 말씀이,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가 천적인 것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몸에 속한 것들을 향한 결과, 스스로를 저주하게 되었다는 뜻임은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곧 주님은 결코 누구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노하지 않으시며, 누구도 시험으로 이끌지 않으시고, 누구도 벌하지 않으시며, 더욱이 누구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모든 일은 지옥의 무리(infernal crew)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며, 자비와 평화, 선의 근원으로부터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여기와 말씀의 다른 곳들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고, 노하시고, 벌하시고, 시험하시며, 심지어 죽이시고 저주하신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먼저 주님께서 우주 안의 모든 것, 심지어 악 자체와 형벌, 그리고 시험까지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는 가장 일반적인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주님께서 그것들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곧 형벌의 악과 시험의 악까지도 선으로 바꾸어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때에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들이 먼저 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이러한 표현들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That “he said to the serpent,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signifies that the sensuous part averted itself from that which is heavenly, turned itself to that which is of the body, and thus cursed itself, may be clearly shown from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Jehovah God or the Lord never curses anyone. He is never angry with anyone, never leads anyone into temptation, never punishes anyone, and still less does he curse anyone. All this is done by the infernal crew, for such things can never proceed from the fountain of mercy, peace, and goodness. The reason of its being said, both here and in other parts of the Word, that Jehovah God not only turns away his face, is angry, punishes, and tempts, but also kills and even curses, is that men may believe that the Lord governs and disposes all and every thing in the universe, even evil itself, punishments, and temptations; and when they have received this most general idea, may afterwards learn how he governs and disposes all things by turning the evil of punishment and of temptation into good. In teaching and learning the Word, the most general truths must come first; and therefore the literal sense is full of such things.

 

 

해설

 

이 글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앞서 AC.212 심화 부분에서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한다’는 설명을 보시고,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 질문하셨던 내용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주님은 결코 노하지 않으시고, 벌하지 않으시며, 시험에 빠뜨리지 않으시고, 저주하지도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비와 평화, 그리고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선 자체에서 악이 나올 수 없고, 사랑 자체에서 증오가 나올 수 없으며, 자비 자체에서 저주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보면 분명히 ‘여호와께서 진노하셨다’, ‘여호와께서 치셨다’, ‘여호와께서 벌하셨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셨다’는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간의 입장에서 표현된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즉 실제로는 인간이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통과 어둠 속으로 들어갔음에도, 인간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주님께서 행하신 일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태양을 등지고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둠은 태양이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가 그런 건 생각 안 하고, ‘태양 때문에 내가 이 깊은 동굴로 들어왔다’며, 태양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태양만 없었으면 안 들어왔을 꺼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고통과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데, 겉으로는 그것을 ‘주님, 왜 이렇게 저를 괴롭히십니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처음부터 ‘사실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교육의 원리에서 찾습니다. 어린아이는 먼저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개념부터 배웁니다. 먼저 ‘모든 것은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그다음에 ‘주님은 악을 직접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 선을 위해 사용하신다’라는 더 깊은 진리를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the most general truths)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나중에는 그 다스림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245는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를 잘 보여줍니다. 주님은 악의 창조자가 아니시지만, 악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것을 선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시험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서 인간을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벌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자초한 결과 속에서도 가능한 한 많은 선을 끌어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AC.245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주님께서 저주하셨다’고 말할 때, 내적 의미로는 ‘인간이 스스로를 저주하였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주님께서 진노하셨다’고 말할 때, 내적 의미에서는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거부한 결과를 경험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먼저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가르친 뒤, 점차 더 깊은 진리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AC.245는 창3의 뱀에 대한 저주를 설명하는 본문인 동시에,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주님의 진노’, ‘형벌’, ‘저주’ 같은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46, 창3:14, ‘들의 모든 짐승’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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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4, 창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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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3:14)



AC.244

앞에서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Jehovah God speaking to the serpent)의 의미가 그들이 자기들의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가 타락의 원인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므로, 이 말씀에 관하여는 더 이상 말할 게 없습니다. Having before shown that by “Jehovah God speaking to the serpent” is signified their perceiving the sensuous part to be the cause of their fall, no more need be said in regard to these words.

 

 

해설

 

이 글은 새로운 내용을 설명하기보다는 AC.242에 대한 짧은 정리와 연결 역할을 하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문자 그대로의 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들의 감각 파트가 타락의 원인이 되었음을 인식하게 된 상태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는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 않고 다음 설명으로 넘어가려 합니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 안에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완전히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자신들의 상태를 알고 있었습니다. 감각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전의 상태에서 멀어졌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사랑이 너무 강해졌기 때문에, 자신들의 감각과 판단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 인간의 영적 상태와도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전혀 몰라서 잘못된 길을 가는 게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며, 내면에서는 경고도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 때문에 그 경고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AC.244는 비록 매우 짧은 글이지만, 타락의 본질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문제는 알지 못함이 아니라, 알고도 자기 사랑 때문에 감각과 own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또한 이 글은 스베덴보리의 해설 방식도 보여줍니다. 그는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이미 확립된 의미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의 상응과 영적 상태를 계속 전개해 나갑니다. 그래서 AC.244는 하나의 결론이라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뱀의 저주’, ‘여자의 상태’, ‘이성의 타락’, 그리고 ‘주님의 구원 약속’에 대한 설명을 연결하는 짧은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45, 창3:14, ‘네가 더욱 저주를 받아’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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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3, 창3:14,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을지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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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3:14)



AC.243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들(the most ancient celestial men)에게 있어서 몸의 감각적 것들(the sensuous things of the body)은 그들의 내적 사람(internal man), 그러니까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는 성격의 것이었으며, 그들은 그 이상으로 그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한 후에는, 감각적인 것들을 속 사람보다 앞세우게 되었고, 그 결과 그것들은 분리되어 육체적인 것(corporeal)이 되더니, 그렇게 하여 정죄(condemned)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elestial men the sensuous things of the body were of such a character as to be compliant and subservient to their internal man, and beyond this they did not care for them. But after they had begun to love themselves, they set the things of sense before the internal man, and therefore those things were separated, became corporeal, and so were condemned.

 

 

해설

 

이 글은 AC.242의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앞에서는 ‘배로 기어간다’, ‘흙을 먹는다’라는 상징을 통해 감각 파트가 하늘을 향하던 상태에서 땅만 바라보는 상태로 변한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변화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들도 감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감각에 지배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감각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을 섬기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감각 자체가 아니라, 감각을 통하여 드러나는 영적 의미와 신적 질서였습니다. 그래서 AC.241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세상을 보면서 천국을 생각하였고, 자연을 보면서 신적인 걸 생각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감각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겼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원래의 질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가장 위에 있고, 그 아래에 속 사람, 그 아래에 이성, 그 아래에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감각은 마지막 단계에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마치 창문이 스스로 목적은 아니지만 빛이 들어오는 통로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긴 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한 후’입니다. 자기 사랑이 생기자, 인간은 더 이상 감각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감각을 기준 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속 사람이 감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속 사람을 판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 ‘느껴지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겠다’, ‘이해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가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감각적인 것들을 속 사람보다 앞세웠다’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 안에 타락의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감각의 존재가 아니라, 감각의 위치입니다. 종이 주인이 되고, 도구가 목적이 되며, 아래에 있어야 할 것이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 결과 감각은 ‘분리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감각 자체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속 사람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원래 감각은 속 사람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하는데, 이제는 그것이 끊어져 독립된 것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감각은 점점 더 ‘육체적인 것(corporeal)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육체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몸에 속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것과 분리되어 오직 몸과 세상만을 실재로 여기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감각은 더 이상 천국을 향한 창문이 아니라, 인간을 세상 속에 가두는 벽이 되어 버립니다.

 

마지막의 ‘정죄(condemned) 역시 주님께서 벌을 내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감각이 본래의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오직 세상과 몸에만 매이게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생명의 원천과 분리된 상태가 된 것을 말합니다. 이전 AC들에서 반복해서 보았듯이, 스베덴보리에게 정죄와 저주는 주님의 행동이 아니라 인간이 질서에서 벗어남으로써 스스로 초래, 자초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AC.243의 핵심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감각을 사용했지만, 감각에 지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생기자, 감각을 속 사람보다 앞세우게 되었고, 그 결과 감각은 영적인 것과 분리되어 순전히 육체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이 바로 인간 타락의 핵심이며, 동시에 ‘뱀이 배로 기어가고 흙을 먹게 되었다’는 말씀의 실제 의미인 것입니다.

 

 

 

AC.244, 창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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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2, 창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AC.242-249)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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