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42.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이 뭔가요?

 

 

스베덴보리에게서 ‘애정(affection)은 단순한 감정(emotion)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향해 움직이느냐를 결정하는 ‘사랑의 방향성’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동물들은 단순 생물이 아니라, 인간 안의 다양한 애정 상태들을 상응적으로 나타냅니다. AC.142에서 ‘짐승(beasts)이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가 영적 애정들을 뜻한다고 할 때도 바로 이런 구조입니다.

 

먼저 ‘천적 애정’은 사랑 자체에 더 가까운 애정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선 자체를 직접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의지와 사랑의 중심에 가까운 층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선한 것을 그냥 사랑하는 상태, 주님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따뜻함과 기쁨이 흐르는 상태, 사랑 자체가 생명의 중심이 되는 상태가 천적 애정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적(celestial)은 언제나 사랑과 의지의 층과 연결됩니다.

 

반면 ‘영적 애정’은 진리와 이해를 통해 움직이는 애정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참인가’를 배우고 이해하며, 그것을 따라 살고자 하는 방향과 관련됩니다. 주님과 선을 직접적인 사랑으로 지각, 그러니까 퍼셉션으로 알기보다는, 말씀과 진리를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쪽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서 ‘영적(spiritual)은 보통 신앙, 이해, 진리, 지성과 연결됩니다.

 

이 차이를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애정은 ‘선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에 더 가깝고, 영적 애정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가려는 마음’에 더 가깝습니다.

 

또는,

 

천적 애정은 ‘사랑이 먼저 움직이는 상태’이고, 영적 애정은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 사랑으로 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142에서 ‘짐승’이 천적 애정들이라고 할 때, 이는 인간 안의 보다 깊고 의지적인 사랑들을 뜻합니다. 반면 ‘하늘의 새’는 생각과 이해를 통해 움직이는, 보다 지성적, 영적인 애정들을 뜻합니다.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영적 애정은 사고와 이해의 영역과 더 가까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 전체의 상응 구조와도 연결됩니다. 짐승은 대개 의지와 사랑의 층을, 새는 이해와 생각의 층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좋은 짐승과 좋은 새는 선한 애정과 참된 생각을 뜻하고, 반대로 더러운 짐승과 새는 왜곡된 욕망과 거짓된 사유를 뜻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애정을 굉장히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결국은 ‘무엇을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생각조차 애정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이 바르고, 영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통해 그 사랑으로 이끌립니다.

 

정리하면, ‘천적 애정들’은 주님과 선 자체를 직접 사랑하는 깊은 의지의 애정들이고, ‘영적 애정들’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선으로 향하려는 이해 중심의 애정들입니다. 그래서 짐승은 보다 깊은 사랑의 층을, 하늘의 새는 보다 이해와 사유에 가까운 애정들을 상응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AC.142, 심화 3, ‘사랑이 바르고’

AC.142.심화 3. ‘사랑이 바르고’ 바로 위에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이 바르고’에서 이 ‘사랑이 바르고’가 무슨 뜻인가요? 여기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이 착하다거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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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AC.142.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가 그것들의 성질(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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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그가 그것들의 성질(quality)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며,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 성질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이름을 주는 게 왜 성질(quality)을 아는 건가요?

 

 

스베덴보리에게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label)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성과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이름을 안다’, ‘이름을 부른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를 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성질(quality)을 가지고 있는지를 분별하고 지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름을 거의 임의적 기호처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철수’, ‘영희’라는 이름 자체에는 본질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 특히 말씀의 상응 구조 안에서는 이름이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습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성격, 기능, 상태, 역할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존재를 안다’는 뜻이 됩니다.

 

이 점은 성경 전체에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단순 개명이 아니라, 존재 상태의 변화입니다. 또 주님께서 ‘내가 너를 이름으로 안다’고 하실 때도, 단순히 호적상 이름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과 상태 전체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142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사자’, ‘’, ‘’ 같은 단어를 붙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동물들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성향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아담이 이름을 준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애정과 성향들의 본질과 질서를 분별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름을 준다 = 성질을 안다’는 연결은, 이름이 곧 그 존재의 quality를 표현한다고 보는 성경적, 상응적 사고에서 나옵니다.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는 영적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AC.142의 흐름 속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은 아직 퍼셉션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 안에 들어오는 애정들과 성향들을 즉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감정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본성과 방향을 압니다. 바로 이 상태를 ‘이름을 준다’는 행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여기서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명칭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나 성향의 본질과 상태, 곧 quality를 지각하고 분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성질을 드러내는 영적 표현입니다.

 

 

 

AC.142, 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AC.142.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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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창2:19-20, ‘이름을 주었으나 여전히 기울어지는’(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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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2:19-20)

 

AC.142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짐승(beasts)은 의지에 속한 것들을, ‘(fowls)는 이해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그가 그것들의 성질(quality)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며,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 성질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한 애정들과 인식한 진리들의 성질을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기의 것, 곧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졌는데, 이것은 앞에서와 같은 말로 표현된,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라는 것입니다. By “beasts” are signified celestial affections, and by “fowls of the heavens,” spiritual affections; that is to say, by “beasts” are signified things of the will, and by “fowls” things of the understanding. To “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is to enable him to know their quality, and his “giving them names” signifies that he knew it. But notwithstanding that he knew the quality of the affections of good and of the knowledges of truth that were given him by the Lord,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which is expressed in the same terms as before—that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해설

 

이 단락은 창2:19-20의 장면, 곧 짐승들과 새들이 아담 앞으로 나오고 그가 이름을 붙이는 장면을 ‘지식의 충만함과 내적 결핍의 대비’로 읽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 앎이 그의 중심을 바꾸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먼저 상징의 구조가 명확히 정리됩니다. 짐승들은 천적인 애정들, 곧 의지에 속한 것들이고, 하늘의 새들은 영적인 애정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이미 등장했던 상응이지만, 여기서는 천적 인간의 내부에서 ‘의지와 이해가 어떤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끌어 가시니’와 ‘이름을 주니라’라는 표현은 인식의 성숙을 뜻합니다. 이름을 준다, 붙인다는 것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라, ‘본질과 질을 분별하여 파악했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한 애정들과 인식된 진리들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이 구절은 무지나 결핍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장이 뒤따릅니다. 그렇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자기의 것, 곧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핵심 문제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중심의 방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아무리 많은 선과 진리를 인식해도, 그것들이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 결합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려는 성향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다시 같은 결론으로 돌아옵니다.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는 말은, 외부의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proprium과 결합할 형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의지와 이해의 내용들은 충만하지만, 그것들이 자기성(自己性)이라는 proprium 속에서 하나로 작동할 구조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로써 다음 단계, 곧 깊은 잠과 갈빗대의 사건이 필연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AC.142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지만, 그 인식만으로는 자기 중심성을 해소하지 못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proprium’이 보다 분명한 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AC.142, 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AC.142.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가 그것들의 성질(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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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AC.142, 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AC.142.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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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랑이 바르고

 

 

AC.142, 심화 3, ‘사랑이 바르고’

AC.142.심화 3. ‘사랑이 바르고’ 바로 위에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이 바르고’에서 이 ‘사랑이 바르고’가 무슨 뜻인가요? 여기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이 착하다거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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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3, 창2:19-20,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 이유’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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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창2:18,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본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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