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2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들이 유대인들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조차 분명하게 듣지 못했으며,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사실도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무지와 둔함 가운데 붙들려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속 사람의 존재나 어떤 내적인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거나, 지금이라도 그것을 알고 인정하게 된다면, 그들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을 profane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다른 생에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뜻입니다. This is the reason why the mysteries of faith were never revealed to the Jews. They were not even plainly told that they were to live after death, nor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to save them. So great were the ignorance and stupidity in which they were kept, and still are kept, that they did not and do not know of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 man, or of anything internal, for if they had known of it, or if they now knew of it, so as to acknowledge it, such is their character that they would profane it, and there would be no hope of any salvation for them in the other life.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Lord in John: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요12:40) He hath blinded their eyes, and stopped up their heart, that they should not see with their eyes, nor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convert themselves, and I should heal them (John 12:40).
또한 주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그 뜻을 설명하지 않으신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And by the Lord speaking to them in parables without explaining to them their meaning, lest (as he himself says),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d understand (Matt. 13:13).
같은 이유로 신앙의 모든 신비는 그들에게 감추어졌고, 그들의 교회의 표상들 속에 숨겨졌으며, 예언서의 문체 역시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알고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정한 뒤에 그것을 모독하고 profane하는 사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ll the mysteries of faith were hidden from them, and were concealed under the representatives of their church, and for the same reason the prophetic style is of the same character. It is however one thing to know, and another to acknowledge. He who knows and does not acknowledge is as if he knew not; but it is he who acknowledges and afterwards blasphemes and profanes, t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해설
AC.302는 앞의 AC.301을 이어받아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먹어 영생할까 하노라’는 말씀을 계속 해설하는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막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profanation에 빠지는 것을 막으시는 무한한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창3:24의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은 바로 그 자비로운 섭리가 실제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주는 표상입니다. AC.302는 그 동일한 섭리가 이후 유대교회와 복음서에서도 계속 작용하였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의 중심은 유대인들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다. 중심은 주님의 섭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인들이 사후 세계나 속 사람, 그리고 메시아에 관한 내적 진리를 분명히 배우지 못했던 이유를 그들의 지적 능력이나 민족적 열등성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들의 영적 상태를 아셨기 때문에,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진리를 일부러 감추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계시를 제한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깊은 영적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요12:40과 마13:13도 이해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구원의 길을 닫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적 진리를 받아들였다가 훗날 그것을 거부하여 profanation에 이르는 일을 막으시려는 자비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표상으로 주어졌고, 예언은 상응의 문체로 기록되었으며, 주님께서도 많은 진리를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모두 창3:22에서 시작된 동일한 보호의 섭리가 역사 속에서 계속 나타난 모습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어떤 진리를 지식으로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 삶과 의지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는 진리를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진리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인정한 사람은, 그 진리와 자신의 내적 생명이 결합된 상태에 있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fanation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알고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무지를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 profanation의 조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단순히 듣거나 배우는 것만으로는 profanation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거룩한 것으로 인정한 후, 다시 그것을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악한 삶과 결합시키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뒤섞이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일관되게 말하는 profanation의 본질입니다.
이 원리는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마12:31-32의 ‘성령을 모독하는 죄’, 히6:4-6의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도 타락한 자’, 히10:26-29의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자’는 모두 같은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서로 다른 본문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 전체 저작을 종합해 보면 모두 하나의 교리를 설명합니다. 곧 인정한 진리를 악과 결합시키는 profanation입니다.
AC.302는 주님의 계시가 왜 사람마다 다르게 주어지는지, 왜 어떤 시대에는 내적 진리가 감추어졌는지, 왜 말씀이 상응과 표상으로 기록되었는지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가능한 한 많은 진리를 주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고, 장차라도 회개하여 구원받을 가능성을 끝까지 지켜 주시는 것을 더 큰 목적으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감추시는 일조차도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며, 창3:22에서 시작되어 창3:24의 그룹과 불칼로 나타난 주님의 자비로운 보호 섭리는 유대교회와 복음서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화
1. ‘가이드 1.0’
AC.302, 심화 1, ‘가이드 1.0’
AC.302.심화 1. ‘가이드 1.0’ ※ 아래는 앞으로 자주 접하시게 될 ‘가이드 1.0’이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가이드 1.0’은 스베덴보리의 한 구절을 그의 전체 저작이 이루는 일관된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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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12:40’
AC.302, 심화 2, ‘요12:40’
AC.302.심화 2. ‘요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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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13:13’
AC.302, 심화 3, ‘마13:13’
AC.302.심화 3. ‘마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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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대인들’
위 내용 중 ‘만일 그들이 내적인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 뒤 다시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라 profanation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인데요, 유대인들이 지난날 어땠기에 주님의 섭리가 이렇게 진행되며,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좀 억울한 거 아닌가요?
좋습니다. 이 질문은 오히려 AC.302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가이드 1.0에 따르면, 이 답은 AC.302만으로는 부족하며, ‘천국의 비밀’ 전체에서 스베덴보리가 유대교회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지난날 어땠기에 주님의 섭리가 이렇게 진행되었나요?’
가이드 1.0에 따르면, 먼저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유대 민족은 본래부터 다른 민족보다 더 악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진리를 감추셨다’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조상들의 죄 때문에 후손들이 영적으로 손해를 보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전체 교리와 맞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랑과 자신의 삶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어느 민족에 태어났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고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AC.302에서 말하는 유대교회의 특별한 상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는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 교회가 점차 쇠퇴해 온 과정과 연결됩니다. 태고교회는 내적 교회였고, 고대교회는 상응을 이해하는 영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점차 내적인 것을 잃고 외적인 것만 붙드는 상태로 기울어졌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마지막으로 세워진 대표, 그러니까 표상적 교회가 바로 유대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유대교회는 처음부터 내적 진리를 직접 가르치기 위한 교회가 아니라, 제사와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과 희생 제물 등 외적 예배를 통해 천국의 신비를 표상하도록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영적 진리를 깊이 이해하는 데 있지 않고, 장차 오실 주님과 천국의 질서를 외적 표상으로 보존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주님의 섭리도 그 교회의 성격에 맞게 진행되었습니다. 만일 그 공동체 전체가 내적 진리를 충분히 알고도 계속 외적 욕망과 자기 사랑 가운데 머물렀다면, 그들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인정한 진리를 스스로 훼손하는 profanation에 빠질 위험이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빛만 허락하시고, 더 깊은 진리는 상응과 비유 속에 감추어 두셨습니다. AC.302가 요12:40과 마13:13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좀 억울한 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가이드 1.0에 따르면,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교회의 역사적 역할’이지 ‘개인의 영원한 운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더 낮은 천국에 가거나 더 적은 은혜를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에서 선한 사람은 죽은 뒤 천사들에게 계속 교육을 받으며, 지상에서 알지 못했던 천국의 진리도 기쁘게 배우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많이 배운 사람이든 적게 배운 사람이든,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빛을 주시고, 다른 생에서도 계속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받은 계시의 양은 구원의 유불리를 결정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AC.302에서 강조하는 것은 정반대의 원리입니다. 사람은 더 많은 진리를 받을수록 더 큰 책임도 함께 받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를 더 많이 열어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직 열어 주지 않으시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빛을 주시는 것이 공평이 아니라, 각 사람이 가장 안전하게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그의 영적 상태에 가장 알맞은 빛을 허락하시는 것이 참된 공평입니다.
결국 AC.302는 유대교회를 낮추려는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창3:22의 ‘생명나무를 막으심’과 창3:24의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 그리고 요12:40과 마13:13을 하나로 연결하면서, 주님께서는 시대와 민족을 막론하고 언제나 사람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계시를 조절하신다는, 하나의 일관된 섭리의 법칙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이것이 가이드 1.0에 따라 AC.302를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01, 창3:22, 두 번째 아르카나,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1 또 하나의 아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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