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5 심화

1. 화목제의 화목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

 

화목제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사이가 나빠진 인간이 제물을 드려 하나님과 다시 사이좋게 되는 제사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더 강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제사처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91(24:5)은 이스라엘 백성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장면을 해설하면서, 이것이 선으로부터, 그리고 선에서 나오는 진리로부터 드리는 주님에 대한 예배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번제가 특별히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면, 제사는 선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제의 중심에도 선과 진리가 함께 있습니다.

 

3의 의식 자체가 이것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제물의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AC.10033(29:22)은 피가 신적 진리를, 기름이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화목제의 중심에는 신적 진리와 신적 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미워하시다가 제물을 보고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해야 하는 쪽은 인간입니다.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그 결과 인간 스스로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인간에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인간이 그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선을 심으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합되면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목은 단순한 감정적 관계 회복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결합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함으로써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목제에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행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AC.10047(29:16)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리는 것이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거듭남 역시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를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는 제사로만 읽으면 레3의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놓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오히려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당신과 결합시키시는 거듭남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인간 안에서 악과 거짓이 물러가고, 주님의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그 선이 삶의 가장 바깥쪽까지 내려올 때 인간은 점점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결과가 평화입니다. 성경의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서로 싸우던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는 상태와 깊이 관계합니다. 진리와 선이 하나가 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며, 인간의 뜻이 점차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 평화가 옵니다.

 

따라서 화목제는 내가 무엇을 드려 하나님을 편으로 만들 것인가?를 묻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안에서 무엇을 바로잡으셔야 내가 다시 그분의 생명을 온전히 받을 있는가?를 묻게 하는 제사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 의해 변화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진리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며, 마침내 우리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우리는 주님과의 결합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화목제의 깊은 중심입니다. (SW.5 3 심화 1)

 

 

 

SW.5 심화 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SW.5 심화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레위기 3장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가장 낯선 부분은 아마 제물의 내장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내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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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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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5, 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1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2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3그는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5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6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없는 것으로 드릴지며 7만일 그의 예물로 드리는 것이 어린 양이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8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9그는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기름 미골에서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0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1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니라 12만일 그의 예물이 염소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13그것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14그는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5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7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3)

 

해설

레위기 3장에 들어서면 세 번째 제사인 화목제가 등장합니다. 1에서는 번제를, 2에서는 소제를 살펴보았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고,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더하여 일부를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를 제사장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화목제에서는 다시 동물과 피가 등장하지만, 번제와는 제사의 구조가 다릅니다. 제물 전체를 불사르지 않고 특별히 기름을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는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레3을 여는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는 화목제에서는 피와 기름이 이토록 중요하게 다루어지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짐승들이 아무 의미 없이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823(15:9)은 소, 염소, 숫양, 어린양,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 등이 각각 고유한 의미를 가졌으며, 바로 그 때문에 한 종류를 다른 종류로 임의로 바꾸어 드릴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일상의 번제, 안식일과 절기의 제사, 자원제와 서원제, 화목제, 속죄와 정결의 제사마다 특정 동물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각각 다른 천적·영적 상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3에서는 소와 양과 염소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1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소 떼에 속한 동물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정서를, 양 떼에 속한 동물은 속 또는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정서를 표상합니다. AC.9391(24:5)은 소와 송아지가 자연적 인간의 선과 관계하고, 양과 어린양 등이 속 또는 영적 인간의 선과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3의 화목제 역시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결합은 속 사람에서만 이루어지고 겉 사람은 그대로 남는 일이 아니라, 속과 겉이 함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화목제에서는 수컷이나 암컷이나드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번제에서는 수컷을 요구했지만 화목제에서는 둘 다 허용됩니다. 이것이 의미 있는 차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 확보한 직접 원전만으로 레3의 수컷과 암컷을 각각 세밀하게 나누어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물의 종류와 성별까지도 대표교회의 제사에서 아무 의미 없는 규정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원전이 직접 밝혀 주는 데까지만 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머리에 안수합니다. 1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수는 단순히 손을 얹는 의식이 아닙니다. AC.10023(29:10)은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전달과 받아들임, 곧 커뮤니케이션과 리셉션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머리는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에는 그 제사가 예배자의 전 존재와 관계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화목은 바깥에서 어떤 의식 하나를 행함으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과 관계합니다.

 

제물을 잡으면 제사장들이 그 피를 제단 사방에뿌립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제단은 주님의 신적 선과 그분께 드리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화목제의 깊은 중심이 드러납니다. AC.10047(29:16)은 제단 둘레에 피를 뿌리는 것이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인간의 거듭남 역시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과정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화목을 단순히 하나님께 화가 나셨는데 제물을 드려 마음을 풀어 드린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서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방해하는 것은 주님 편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 안의 악과 거짓입니다. 인간이 진리를 받아 악을 피하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될 때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더 온전히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화목제의 피가 제단 사방에 뿌려지는 장면은 바로 이 진리와 선의 결합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레3에서 특별히 반복되는 것은 기름입니다. 소를 드릴 때도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을 떼어내고, 양을 드릴 때도 기름진 꼬리와 내장의 기름을 떼어내며, 염소를 드릴 때도 같은 명령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침내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왜 기름이 이토록 중요할까요?

 

AC.10033(29:22)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한 답을 줍니다. 제사의 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제사의 모든 피가 제단에 드려지고 모든 기름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3의 기름은 단순히 고대인들이 가장 좋은 부위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기름은 선을,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여기서 레3의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피와 기름이 함께 있습니다. 신적 진리와 신적 선입니다.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은 제단의 불에 올라갑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2에서도 고운 가루와 기름을 통해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았는데, 3에서는 그것이 피와 기름이라는 더욱 강렬한 표상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말씀의 진리는 인간을 선으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올바른 형태와 방향을 얻습니다. 거듭남은 이 둘이 인간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기름을 떼어내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어느 부위의 기름인지 매우 세밀하게 지정하신다는 점입니다. ‘내장에 덮인 기름’,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 콩팥과 위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얼핏 보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낯설고 불필요해 보이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세부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AC.10072(29:22)는 내장을 덮는 기름이 가장 낮은 것들 안에 있는 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내장은 자연적 인간의 가장 낮은 것들과 관계하고, 그 위의 기름은 그 가장 낮은 차원까지 내려와 있는 선을 표상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이 인간의 고상한 종교적 생각에만 머물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말투, 습관, 돈을 쓰는 방식, 일상의 관계, 몸과 감각의 즐거움을 다루는 방식처럼 삶의 가장 바깥쪽까지 주님의 선이 내려와야 합니다.

 

간에 덮인 꺼풀도 의미가 있습니다. AC.10073(29:22)은 그것을 정결하게 자연적 인간의 내적 과 연결합니다. 간이 몸에서 피를 정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이 표상에도 정결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인 행동만 조금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인간 안쪽에 숨어 있는 동기와 정서까지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이 있습니다. AC.10074(29:22)는 콩팥이 정결하게 자연적 인간의 내적 진리, 그 위의 기름은 그 진리에 속한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AC.10032은 콩팥의 기능에서 그 상응을 설명하면서, 콩팥은 살피고 정결하게 하고 바로잡는 진리와 관계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에서도 주님께서 마음과 뜻을 살피신다고 할 때 원문에서 콩팥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레3의 제단 위에는 단순히 동물의 지방 조직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상응의 언어로 보면 인간의 자연적 삶 가장 깊은 곳까지 선과 진리가 들어와 정결하게 되고, 그 정결해진 선과 진리가 사랑의 불 안에서 주님께 돌려지는 모습입니다. 주님과의 화목은 인간의 일부만 주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상태가 아닙니다. 속 사람에서 시작된 주님의 질서가 자연적 인간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양의 화목제에서는 한 가지 독특한 것이 더 등장합니다. ‘미골에서 기름진 꼬리입니다. 이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세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세세한 부위까지 천국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확보한 직접 원전만으로 레3기름진 꼬리자체의 의미를 충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기름 = 이라는 확실한 원칙을 넘어 꼬리의 세부 의미를 임의로 만들어 내지 않겠습니다.

 

제사장은 이 기름들을 제단 위의 번제물 위에서불사릅니다. 이 표현도 중요합니다. 화목제가 번제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단 위에 있는 번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번제가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표상한다면, 화목제 역시 그 사랑의 질서 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진정한 화목과 결합은 사랑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실제로 음식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와 번제가 또는 음식이라고 불린 이유가 그 안에서 표상된 천적 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AC.10079(29:23)는 떡이 사랑의 선을 의미하며, 제사와 번제 역시 이러한 이유로 이라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고기와 지방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표상하는 사랑의 선과 그 선에서 나오는 참된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1과 레2에서 반복해서 만났던 표현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는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주님께서 동물의 타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레1의 번제, 2의 소제, 3의 화목제는 서로 다른 제사이면서도 모두 한곳을 향합니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고, 그 사람의 삶이 사랑에서 나오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17절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강력한 명령으로 마무리합니다.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AC.10033은 바로 레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표상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여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신적 선과 신적 진리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영적 삶에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내가 어떤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 알아냈다고 생각하고, 어떤 선을 행했다고 해서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영적으로 피와 기름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는 위험에 빠집니다. 인간은 선과 진리를 받아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도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레3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화목제의 핵심은 결국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신적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통해 인간을 정결하게 하시며, 인간 안의 진리와 선을 결합시키십니다. 그 결합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높은 곳에서 자연적 삶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인정합니다. 바로 그때 주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레3 앞에서 우리는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가?라는 질문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이 물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있는가?’, ‘ 자연적 삶의 가장 낮은 부분까지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려와 있는가?’, ‘나는 내가 행하는 선을 나의 공로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아는 진리를 나의 지혜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1에서 우리는 전부를 불살라 주님께 드리는 번제를 보았습니다. 2에서는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하나가 되는 소제를 보았습니다. 이제 레3에서는 피와 기름, 곧 진리와 선이 함께 제단에 드려지는 화목제를 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레3의 마지막 선언은 화목제 전체를 꿰뚫는 고백이 됩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우리의 선도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 선과 진리가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은 주님과 결합하는 화목의 삶이 됩니다. (SW.5 3 해설)

 

심화

1. 화목제의 화목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

 

SW.5 심화 1, 화목제의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

SW.5 심화1. 화목제의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 ‘화목제’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사이가 나빠진 인간이 제물을 드려 하나님과 다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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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SW.5 심화 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SW.5 심화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레위기 3장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가장 낯선 부분은 아마 제물의 내장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내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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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 하셨을까?’

 

SW.5 심화 3,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 하셨을까?’

SW.5 심화3.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 하셨을까?’ 레위기 3장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매우 강한 명령으로 끝납니다. 더구나 이것은 한 번의 제사에만 적용되는 임시 규정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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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6, 레4,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 - 속죄제에 감추어진 악의 인식과 정결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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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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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심화

3.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와 레위기 2장의 소제 사이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래서 레1에는 반복해서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레2에서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 가운데 일부만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돌립니다. 왜 하나님께 드린 예물을 사람이 다시 먹는 것일까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18:6)은 이 부분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소제를 먹는 것이 인간 편에서의 상호성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을 표상하며, 그로 말미암아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은 인간이 선과 진리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인간의 바깥에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원하고, 행함으로써 마치 자신의 것처럼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야 실제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식탁 위에 놓여 있어도 바라보기만 해서는 몸의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먹고 소화하여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책 안에 있는 진리, 설교에서 들은 진리, 머릿속으로 이해한 교리는 아직 완전히 우리의 삶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 실제로 살아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는 것과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실제로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진리를 아는 것과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다는 교리를 이해하는 것과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실제 선을 행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의지와 행동으로 내려와 삶이 될 때 비로소 영적으로 먹은 이 됩니다.

 

그런데 소제의 일부는 먼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인간이 진리와 선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질서가 먼저 서 있습니다. 내가 선을 행했다고 해서 그 선의 근원이 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그 진리를 내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에는 매우 아름다운 왕복 운동이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가 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삶의 선을 다시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께서 주시고, 인간은 받아 응답하며, 그 응답을 통해 다시 주님과 결합합니다.

 

AC.2177이 이것을 상호성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과 인간의 결합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물론 모든 선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인간이 그 사랑에 응답하며,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인간이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찬과도 매우 깊은 연결을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소제와 전제가 교회와 천국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며, 성찬의 떡과 포도주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10137, 29:40). 성찬에서도 떡을 바라보기만 하지 않고 먹습니다.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자신의 영적 생명으로 삼는다는 표상입니다.

 

그래서 레2에서 제사장이 남은 소제를 먹는 장면은 사소한 제사 규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의 진리가 어떻게 인간의 삶이 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읽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해하는 데서도 끝나서는 안 됩니다. 먹어야 합니다. 곧 받아들여 의지하고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1의 번제가 나의 전부가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2의 소제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내가 실제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과 주님에게서 받아 먹는 것이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순환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그것을 살아 내고, 다시 주님께 돌리는 것, 바로 그 안에서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소제의 남은 것을 먹는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말씀을 읽고 있는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말씀을 먹고 있는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오늘 나의 말과 선택과 관계와 행동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이 될 때,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 살아 있게 됩니다. (SW.4 2 심화 3)

 

 

 

SW.4, 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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