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AC.404
이모든이름은‘가인’(Cain)이라불린최초의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을의미합니다.그러나그것들에관하여는이름들외에는전해지는것이없으므로,그것들에관하여무엇인가말하는것은불필요합니다.그이름들의어원으로부터어느정도알수있는것이있을수있습니다.예를들어‘이랏’(Irad)은그가‘성읍에서내려온다’(descendsfromacity)는것을의미하며,따라서‘에녹’(Enoch)이라불린이단에서내려왔음을의미합니다.다른이름들도이와같습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which was called “Cain”;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except the names,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for example,“Irad” means that he “descendsfroma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해설
AC.404는 창4:18에 이어지는 가인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왔고, 에녹에게서 이라드가 나왔으며, 그 뒤로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이 이어집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한 가문의 족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이름이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 가인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세대가 이어지는 혈통이 아니라, 최초의 영적 분리가 계속 다른 형태로 파생되어 가는 하나의 교리적 계보로 읽힙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99-400과 직접 연결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이라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그 원리를 더욱 일반화하여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라고 했습니다. AC.404는 바로 그 말이 실제 가인의 계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최초의 분리가 에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여러 이름으로 계속 파생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최초의이단’이라는 표현은 가인의 본래 의미를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표상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를 표상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AC.398의 표현대로 하면 ‘의지대신이해가,사랑대신신앙이지배하게된’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최초의 분리에서 이후의 여러 이단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라드, 므후야엘, 므드사엘 등이 각각 정확히 어떤 교리를 주장했는지 알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스스로 멈춥니다. ‘그것들에관하여는이름들외에는전해지는것이없으므로,그것들에관하여무엇인가말하는것은불필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해석 태도를 보여 줍니다. 속뜻이 있다고 해서 본문이 제공하지 않는 세부 내용까지 자유롭게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름의 의미에서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이라드’를 듭니다. 이라드라는 이름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속뜻에서는 앞의 ‘성읍’, 곧 에녹이라 불린 이단에서 파생되어 내려온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AC.401에서 에녹은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과 연결되었고, AC.402에서 성읍은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라드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것은 앞서 형성된 에녹의 교리적·이단적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가 파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계보에는 상당히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분리가 있습니다. 그 분리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산출됩니다. 에녹은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는 상태와 관련되고, 그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지면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하나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읍’에서 이라드가 내려옵니다. 하나의 분리된 신앙이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교리적인 전체를 이루며, 그 교리적 전체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의 분리가 파생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AC.404에서 말하는 ‘계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앞의 상태가 뒤의 상태를 낳는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400에서 이미 말한 ‘잉태와출생’의 원리와 같습니다. 하나의 교리적 전제가 받아들여지면 그 안에서 다음 결론이 나오고, 그 결론에서 다시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처음의 근본 원리가 계속 후속적인 형태들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절제입니다. 그는 ‘다른이름들도이와같다’고 말할 뿐, 각각의 이름에 대해 상세한 교리적 내용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름의 어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뒷받침할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응을 다룰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상응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자체와 AC의 설명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403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상적유형들’아래 ‘역사형식’으로 배열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에 등장하는 이름들도 영적인 상태들의 연속을 역사적 족보의 형태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표상적 역사라고 해서 모든 이름의 세부 의미가 우리에게 자동으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속뜻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속뜻의 모든 세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AC.404는 한편으로는 매우 강하게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강하게 말하는 것은 ‘이모든이름은가인이라는최초의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을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각각이구체적으로무엇인지는이름외에는자료가없으므로자세히말하지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태도를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교리 이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는 여러 후속적인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진리를 선한 삶에서 분리하며, 이해를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시키는 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리적 형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 속의 모든 교리나 교파를 임의로 가인의 어느 후손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AC.404자체가 그런 과도한 추정을 경계하게 합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더욱 유익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원리를 받아들였을 때 그것이 어떤 후속적인 생각들을 낳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옳다는것이사랑하는것보다중요하다’는 원리가 마음에 자리 잡으면, 거기서 상대를 판단하는 생각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며, 마침내 사랑하지 않는 행동까지도 옳다고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 ‘성읍’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분리가 그 자체에서 후손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에서는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발견되고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여 피할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다시 선과 결합시키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게 되고, 이해는 자기 지성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가인의 계보를 읽는 목적은 단순히 옛 이단의 역사를 분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거나 무너지는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04는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상세히 해독하려 하기보다 그 계보 전체의 성격을 먼저 붙들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나타냅니다. 이라드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이름으로 에녹의 이단에서 파생된 상태를 보여 주듯, 뒤의 이름들도 같은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부 내용이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깊이 읽는 것과 말씀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AC.404는 바로 그 두 가지를 함께 가르쳐 주는 번호입니다. (AC.404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3
이제우리는‘성읍’(city)이무엇을의미하는지를살펴보았습니다.그러나창세기의이부분전체가역사형식(historicalform)으로구성되어있기때문에,문자적의미(senseoftheletter)안에있는사람들에게는가인이성읍을세우고그것을에녹이라불렀던것처럼보일수밖에없습니다.비록문자적의미로부터그들은또한가인이아담의장자에불과했음에도이미그땅에많은사람이살고있었다고생각하지않을수없지만말입니다.역사적연속(historicalseries)에는이러한것이들어있습니다.그러나앞에서살펴본것처럼,태고인들(mostancientpeople)은모든것을‘표상적유형들’(representativetypes)아래‘역사형식’(formofahistory)으로배열하는데익숙했습니다.그리고이것은그들에게지극히즐거운일이었는데,그렇게함으로써모든것이살아있는것처럼보였기때문입니다. We have now seen what a “city” signifies.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and was called Enoch,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But as we observed above,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under representative types,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해설
AC.403은 창세기 4장을 읽는 데서만 중요한 번호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부 전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앞의 AC.402에서는 ‘성읍’이 실제 성읍 자체보다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본문은 마치 실제 인물들이 태어나고, 성읍을 세우고, 그 성읍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역사 이야기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403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세기의이부분전체가역사형식으로구성되어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만을 따라 읽으면 가인이 실제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이 그렇게 보이도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역사 형식을 문자 그대로만 밀어붙일 때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한데도 이미 성읍을 세울 만큼 많은 사람이 땅에 살고 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난점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단순히 ‘가인의아내는어디에서왔는가?’같은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이야기는처음부터실제사건들의연대기적기록만을목적으로쓰인것인가?’하는 것입니다. 그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쪽입니다. 창세기 초반의 이 부분은 영적인 실재를 역사적인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연속’(historicalseries)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가인이 태어나고, 아벨을 죽이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일련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연속된 역사처럼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 속뜻에서는 교회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고, 하나의 교리적 상태가 다음 상태를 산출하며,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는지가 하나의 영적 연속으로 펼쳐집니다. 문자적 역사 형식은 그 영적 연속을 담는 외적 그릇인 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태고인들의 사고방식에서 찾습니다. 태고인들은 ‘모든것을표상적유형들아래역사형식으로배열하는데익숙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표상적유형들’(representativetypes)이란 자연적인 인물, 장소, 사건, 사물 등을 통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형식을 말합니다. 곧 추상적인 교리나 영적 상태를 직접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람과 장소와 사건의 형태로 살아 있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적 성격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추상 개념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느끼고 보았으며, 자연적인 형상들을 통해 천적이고 영적인 실재를 지각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영적 진리를 이야기와 인물과 장소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단순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방식이 그들에게 ‘지극히즐거운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모든것이살아있는것처럼보였기때문’입니다. 이것은 AC.403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 진리를 단지 추상적인 명제와 정의로만 전달하면 개념으로 머물 수 있지만, 그것을 사람과 사건과 장소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진리가 움직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 에덴과 놋, 에녹과 성읍은 단순한 추상어가 아니라 영적 상태들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초반의 서술은 일종의 ‘살아있는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체어리티에서분리되면교리적오류가파생된다’고 한 문장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이야기로 펼쳐 보여 줍니다. 그러면 하나의 교리적 명제가 인간의 선택과 관계와 결과를 가진 살아 있는 서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403을 근거로 ‘창세기초반은역사적의미가전혀없고순전히만들어낸이야기다’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역사형식’과 ‘표상적유형들’입니다. 그의 관심은 문자적 형식 뒤에 있는 속뜻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는창세기이부분을단순한문자적연대기로만읽지않고,영적인실재를역사형식아래배열한말씀으로읽는다’는 정도입니다.
또한 ‘역사형식’이라고 해서 내용이 임의적이거나 무질서하게 꾸며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역사적연속’이라고 부른 것처럼, 사건들의 순서와 관계 자체가 영적 상태들의 질서와 진행을 담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보다 먼저 나오고, 아벨을 죽인 뒤 놋 땅에 거하며, 그 뒤 에녹과 성읍이 나오는 순서는 임의적인 배열이 아닙니다. 각각이 앞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연속을 표현합니다.
이 점은 AC.399-402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되고,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다시 성읍이라는 교리적 전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이것을 추상적인 교리 설명으로만 기록했다면 매우 건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출생과 이름과 성읍 건설이라는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영적 변화가 ‘살아있는것처럼’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AC.403은 우리가 창세기 초반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무시하고 곧바로 속뜻으로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이야기의 흐름을 충분히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역사 형식 자체가 속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 나오고, 누가 누구를 낳고,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세우고, 무엇이라 이름하는지가 모두 영적 연속을 담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동시에 문자적 이야기에서만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깊이는 그 역사 형식 안에 교회의 상태, 인간의 거듭남, 사랑과 신앙의 관계, 선과 진리의 질서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은 경쟁하는 두 층위라기보다, 외적 형식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생명의 관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03의 마지막 표현, ‘모든것이살아있는것처럼보였다’는 말은 우리가 왜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공부하는지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상응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어마다 뜻을 붙여 놓는 일종의 암호 해독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 속 인물과 사건과 장소가 영적 실재와 연결되면서 다시 살아 움직이도록 보는 데 있습니다. ‘가인=신앙’, ‘아벨=체어리티’, ‘성읍=교리’라고 대응표만 외운다면 아직 태고인들이 느꼈던 그 생명성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 관계들이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서사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AC.403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하나의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태고인들은 영적 실재를 ‘표상적유형들’아래 ‘역사형식’으로 배열했고, 그 방식은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은 단순한 이름과 지명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인간 마음의 변화를 살아 있는 역사처럼 보여 주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결국 AC.403이 말하는 것은 ‘역사를버리고상징만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역사적 형식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 형식 안에서 영적 실재가 인물과 사건과 장소를 통하여 살아 움직입니다. 가인의 성읍도 바로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단순히 고대의 한 사람이 세운 도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가르침을 낳고 교리적 세계를 형성해 갔는지를 살아 있는 역사 형식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표상적 서술 방식이며,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기본 관점입니다. (AC.403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2
가인이‘쌓은성읍’(citythatwasbuilt)이그이단에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를의미한다는사실은말씀에서성읍의이름이나오는모든구절로부터분명합니다.그어느곳에서도성읍자체를의미하지않고,언제나어떤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천사들은성읍이무엇인지,또어떤성읍의이름이무엇인지전혀알지못합니다.앞에서보여준것처럼그들의관념은영적이고천적이기때문에성읍에대한어떤관념도가지고있지않으며가질수도없습니다.그들은오직성읍과그이름이무엇을의미하는지만퍼셉션합니다.따라서‘거룩한성’(holycity),곧‘거룩한예루살렘’(holyJerusalem)은일반적으로는주님의나라를,특별히는그나라가그안에있는각개인을의미합니다.‘성읍시온’(city)과‘시온산’(mountainofZion)도이와같은방식으로이해되는데,후자는신앙의천적인것을,전자는신앙의영적인것을의미합니다. That by the “citythatwasbuilt” is signified all the doctrinal and heretical teaching that came from that heresy,is evident from every passage of the Word in which the name of a city occurs;for in none of them does it ever mean a city,but always something doctrinal or else heretical. The angels are altogether ignorant of what a city is,and of the name of any city;since they neither have nor can have any idea of a city,in consequence of their ideas being spiritual and celestial,as was shown above. They perceive only what a city and its name signify. Thus by the “holycity,” which is also called the “holyJerusalem,” nothing else is meant than the kingdom of the Lord in general,or in each individual in particular in whom is that kingdom. The “city” and “mountainofZion” also are similarly understood;the latter denoting the celestial of faith,and the former its spiritual.
[2]천적인것과영적인것자체도‘성읍들’(cities),‘궁전들’(palaces),‘집들’(houses),‘성벽들’(walls),‘성벽의기초들’(foundationsofwalls),‘방벽들’(ramparts),‘성문들’(gates),‘빗장들’(bars),그리고그가운데있는‘성전’(temple)으로묘사됩니다.에스겔48장과The celestial and spiritual itself is also described by “cities,” “palaces,” “houses,” “walls,” “foundationsofwalls,” “ramparts,” “gates,” “bars,” and the “temple” in the midst;as in Ezekiel 48;
여기서‘진리의성읍’(cityoftruth),곧‘예루살렘’(Jerusalem)은신앙의영적인것들을의미하고,‘성산’(mountainofholiness),곧‘시온산’(ofZion)은신앙의천적인것들을의미합니다. where the “cityoftruth,” or “Jerusalem,” signifi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and the “mountainofholiness,” or “ofZio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3] 신앙의천적인것들과영적인것들이성읍으로표상되는것처럼,유다와이스라엘의성읍들은모든교리적인것들을의미합니다.이성읍들은각각그이름이언급될때어떤교리적인것에관한고유한의미를가지지만,그것이무엇인지는속뜻으로부터가아니면아무도알수없습니다.‘성읍들’(cities)이교리적인것들을의미하므로이단들도역시성읍들로의미되며,이경우각각의성읍은그이름에따라어떤특정한이단적견해를의미합니다.지금은다음말씀의구절들로부터일반적으로‘성읍’(city)이어떤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한다는사실만을보여주고자합니다. As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are represented by a city,so also are all doctrinal things signified by the cities of Judah and of Israel,each of which when named has its own specific signification of something doctrinal,but what that is no one can know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As doctrinal things are signified by “cities,” so also are heresies,and in this case every particular city,according to its name,signifies some particular heretical opinion. At present we shall only show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that in general a “city” signifies something doctrinal,or else heretical.
여기서는주님의강림때영적이고천적인것들에관한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다룹니다.또환상의골짜기,곧환상(fantasy)을다루는곳에서는, wher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memory-knowledge of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So again,when treating of the valley of vision,that is,of fantasy:
예레미야에서는‘남방에있는자들’(inthesouth),곧진리의빛가운데있으면서그것을꺼버리는자들을말하면서, In Jeremiah,speaking of those who are “inthesouth,” that is,in the light of truth,and who extinguish it:
여기서‘성벽’(wall),‘방벽’(rampart),‘성문’(gates),‘빗장’(bars)이오직교리적인것들을의미한다는것은누구나볼수있습니다. where anyone may see that by a “wall,” a “rampart,” “gates,” and “bars,” doctrinal things only are meant.
여기서‘혼돈의성읍’(cityofemptiness)은교리의공허함을의미하며,‘거리들’(streets)은여기서도다른곳에서와마찬가지로성읍에속한것들,곧거짓들이나진리들을의미합니다.계시록에서는, where the “cityofemptiness” denotes emptinesses of doctrine;and “streets” signify here as elsewhere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city,whether falsities or truths. In John:
그여자가그러한성격의교회를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보여준바와같습니다. and that the woman denotes a church of that character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402는 가인이 에녹의 이름을 따라 세운 ‘성읍’이 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하여 설명합니다. AC.399에서는 이 의미를 간단히 제시했지만, 이번 번호에서는 거룩한 예루살렘과 시온에서부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시편, 스가랴, 민수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많은 구절을 인용하여 ‘성읍’이라는 표상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많은 성경 인용에 압도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무엇 하나를 입증하기 위해 이 모든 구절을 모으고 있는지를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하나의 명제는 ‘성읍은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말씀에서성읍은어느곳에서도성읍자체를의미하지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설명하는 그의 방식에서 나온 진술입니다. 문자적 의미에서 실제 예루살렘이나 시온이나 여러 성읍이 역사적 장소로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라기보다, 천사들이 받아들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그러한 자연적 장소가 영적인 실재를 표상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근거로 말씀의 문자적·역사적 의미가 무가치하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집중하는 것은 성읍의 ‘속뜻’입니다.
그는 이 점을 천사들의 관념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성읍이 무엇인지 또는 어떤 성읍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그들의 관념은 영적이고 천적이기 때문에 자연계의 성읍에 관한 관념을 갖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퍼셉션하는 것은 그 성읍과 이름이 ‘무엇을의미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자연적 이미지가 말씀을 통하여 천국에 이를 때 천사들은 그 자연적 형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상응하는 영적·천적 실재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거룩한예루살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성, 곧 거룩한 예루살렘이 일반적으로는 ‘주님의나라’를 의미하고, 특별히는 그 나라가 그 안에 있는 각 개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단지 인간 밖에 존재하는 천국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한 사람 안에 세워질 때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예루살렘이라는 성읍은 주님의 나라가 교리와 진리의 질서 안에서 형성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어 ‘시온산’과 ‘성읍시온’을 구별합니다. 산은 신앙의 ‘천적인것’을, 성읍은 신앙의 ‘영적인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은 사랑과 선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영적인 것은 그 사랑과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신앙에 관련됩니다. 산이 높은 곳으로서 사랑의 천적 상태를 나타낸다면, 성읍은 그 안에 질서 있게 배치된 길과 집과 성벽과 문을 가진 구조로서 진리와 교리의 영적 질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2]에서는 성읍뿐 아니라 ‘궁전,집,성벽,성벽의기초,방벽,성문,빗장,성전’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에스겔 48장과 계시록 21장의 거룩한 성이 대표적입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천국 건축물의 설계도가 아니라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지를 자연적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특히 성벽과 성문과 기초는 성읍을 이루고 보호하며 출입을 규정하는 요소들이므로 교리의 진리들과 그 질서에 관련된 표상으로 이해됩니다.
시편의 ‘하나님의성’, 에스겔의 ‘여호와께서거기계시다’, 이사야의 ‘여호와의성읍’, 스가랴의 ‘진리의성읍’도 모두 같은 논증에 사용됩니다. 특히 슥8:3에서 ‘예루살렘은진리의성읍’, ‘시온산은성산’이라고 한 구절은 스베덴보리의 구별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예루살렘, 곧 진리의 성읍을 ‘신앙의영적인것들’로 보고, 시온산을 ‘신앙의천적인것들’로 봅니다. 성읍이 진리와 교리의 질서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인 셈입니다.
그러나 성읍이 언제나 좋은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3]부터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성읍’이라는 상응은 교리적인 것을 나타내므로, 그 교리가 거짓과 악에서 나온 경우에는 이단적인 것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읍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상응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성읍인지, 어떤 문맥에 있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각각의 성읍도 각기 다른 교리적인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속뜻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86에서 확인한 중요한 원리와도 통합니다. 상응은 기계적인 일대일 암호표가 아닙니다. ‘성읍=참된교리’라고 고정할 수도 없고 ‘성읍=거짓교리’라고 고정할 수도 없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성읍은 ‘교리적인것’을 나타내며, 그것의 영적 질은 그 성읍이 놓인 전체 문맥과 이름에 따라 결정됩니다. 거룩한 예루살렘은 주님의 나라와 참된 교리의 질서를 나타내지만, 가인의 에녹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나타냅니다.
[4]와 [5]의 수많은 인용은 바로 이 원리를 양쪽 방향에서 입증합니다. 애굽 땅의 다섯 성읍, 환상의 골짜기의 떠들썩한 성읍, 닫힌 남방의 성읍들, 시온의 성벽과 성문과 빗장, 견고한 성읍, 혼돈의 성읍, 계시록의 큰 성읍과 만국의 성읍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각각의 구절을 별개의 주제로 떼어 심화하기보다, 모두 ‘성읍과그구성요소들이교리적상태를표현한다’는 하나의 증거군으로 읽는 것이 이번 번호의 논지를 가장 잘 살립니다.
특히 사24:10의 ‘혼돈의성읍’은 이해하기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교리의공허함’이라고 풀이합니다. 실제 건물들이 비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리가 사라져 교리가 텅 빈 상태를 성읍의 황폐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의 ‘거리들’은 성읍에 속한 것, 곧 문맥에 따라 거짓이나 진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성읍이 전체적인 교리의 질서를 나타낸다면 그 안의 거리와 성벽과 문과 집들도 그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계16장의 ‘큰성읍이세갈래로갈라지고만국의성읍들이무너졌다’는 말씀도 같은 방식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단순히 어떤 거대한 도시가 물리적으로 세 부분으로 갈라지는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적인 교회 상태와 그 교리적 구조의 붕괴를 나타낸다고 봅니다. 계17:18에서는 그 큰 성읍이 요한이 본 ‘여자’라고 설명되며, 스베덴보리는 그 여자가 그러한 성격의 교회를 의미한다고 연결합니다. 따라서 ‘성읍’과 ‘여자’와 ‘교회’가 서로 다른 자연적 표상을 통하여 하나의 영적 실재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 주게 됩니다.
이제 이 모든 설명을 다시 가인의 성읍으로 가져오면 AC.399-402의 흐름이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분열을 표상합니다. 그 가인에게서 에녹이라는 또 다른 분열이 태어났습니다. AC.401에서는 에녹이라는 이름이 ‘시작되거나형성되기시작한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에녹의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집니다. 즉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새로운 가르침을 낳고, 그 가르침에서 다시 여러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들이 형성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성읍을쌓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뒤집힌 하나의 원리였습니다. 그 원리가 새로운 분열을 낳았고, 그 분열이 가르침이 되었으며, 이제 그 가르침이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형성합니다. 잘못된 영적 원리가 개인적인 생각의 수준을 넘어 전승되고 조직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교리체계’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역시 성읍입니다. 즉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질서 있게 결합되어 이루는 참된 교리도 성읍으로 표상됩니다. 문제는 성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성읍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진리가 질서를 이루면 거룩한 성읍이 될 수 있지만,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원리가 중심이 되면 가인의 성읍이 됩니다.
이 점은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교리는 필요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며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 인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AC.393-398에서 신앙이 ‘인류의쓰임을위하여’보존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교리가 많다는 것도, 교리가 체계적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 교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사람을 실제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끄는지가 중요합니다.
AC.402가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대조는 결국 ‘가인의성읍’과 ‘거룩한예루살렘’입니다. 둘 다 성읍이며 둘 다 교리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형성된 교리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나라가 그 안에 이루어진 교리적·영적 질서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성읍’이지만 그 안에 거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읍의 속뜻을 이해하는 핵심은 건물의 규모나 성벽의 견고함이 아니라 그 성읍을 이루는 진리들이 어떤 선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거룩한 성읍이 됩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될 때에는 아무리 견고한 성벽과 정교한 구조를 갖추더라도 가인의 성읍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C.402가 수많은 말씀의 성읍들을 통하여 가인이 쌓은 한 성읍의 속뜻을 밝혀 주는 이유입니다. (AC.402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