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그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였다고 기록된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입니다. 이것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지각됩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존재하는데, 이유는 악한 영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amori proprio)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반발을 일으키며, 이것이 분노로 나타납니다. 말씀에서는 분노(anger), 진노(wrath), 심지어 격노(fury)까지도 여호와께 자주 돌려지지만, 그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Cains anger was kindledsignifies that charity had departed is evident from what is afterwards related of his killing his brother Abel, by whom is signified charity. Anger is a general resulting from whatever is opposed to self-love and its cupidities. This is plainly perceived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for there exists there a general anger against the Lord, in consequence of evil spirits being in no charity, but in hatred, and whatever does not favor self-love [amori proprio] and the love of the world, excites opposition, which is manifested by anger. In the Word, “anger,” “wrath,and evenfury,are frequently predicated of Jehovah, but they are of man, and are attributed to Jehovah because it so appears, for a reason mentioned above. Thus it is written in David: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78:49-50)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Ps. 78:4950)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시고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셨다(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덧붙여 말한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에서는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와 다투던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45:24) 말합니다. 이로부터 분노(anger) 악을 상징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Not that Jehovah ever sends anger upon anyone, but that men bring it upon themselves; nor does he send evil angels among them, but man draws them to himself. And therefore it is added, that he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and therefore it is said in Isaiah, “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Isa. 45:24), whence it is evident thatangersignifies evils, or what is the same, a departure from charity.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45:24)

 

 

해설

 

AC.357은 앞의 AC.355에서 짧게 제시했던 ‘분노는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한다’는 말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글은 가인의 분노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분노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악한 영들이 왜 주님께 분노하는지, 더 나아가 성경에서 왜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께 ‘분노’와 ‘진노’가 있는 것처럼 기록되는지까지 연결합니다. 짧지 않은 한 단락 안에 인간의 악, 지옥의 상태, 말씀의 외관이라는 세 주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뜻한다는 근거를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서 찾습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분노했다’는 것은 아직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킨 최종 상태는 아니지만, 이미 체어리티가 떠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것을 죽이는 데까지 이를 내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AC.355에서 보았듯이 가인의 타락은 갑작스럽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교리가 되고,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기며, 이제 체어리티를 향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다음 단계가 아벨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노’의 근원을 매우 날카롭게 설명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자연적인 분노를 무조건 자기 사랑이라고 단정한다는 뜻으로 읽기보다는, 여기서 다루고 있는 영적 의미의 분노, 특히 악에서 나오는 분노의 근원을 밝히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되면 사람은 자기 뜻, 자기 이익, 자기 명예, 자기 판단이 관철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그것을 막으면 반발이 일어나고, 그 반발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 분노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이 왜 분노했는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문제는 단순히 ‘동생의 제물은 받아 주셨는데 것은 받아 주시지 않았다’는 형제간 질투가 아닙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이 옳고 자신이 우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질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질서가 가인의 자기주장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아벨, 곧 체어리티의 존재 자체가 가인에게 불편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종교적 분노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사람은 때때로 ‘진리를 지키기 때문에 화를 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악과 거짓에 분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교리, 자기의 신앙적 위치, 자기의 명예가 위협받았기 때문에 일어난 분노를 ‘진리를 위한 열심’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AC.357은 그때 그 분노의 더 깊은 곳을 살펴보게 합니다. ‘지금 내가 지키려는 것은 주님의 진리인가, 아니면 자신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원리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는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거나 공격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지배적 사랑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며, 그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것에 반발합니다.

 

여기에는 사후세계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존재에게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의 상태에 따라 같은 주님의 질서가 전혀 다르게 경험됩니다. 주님과 천국의 질서를 사랑하는 천사에게는 그것이 기쁨과 평안이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지배적으로 삼은 악한 영에게는 바로 그 질서가 자기 욕망을 제한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께 분노합니다.

 

이 원리가 곧바로 성경의 ‘여호와의 진노’ 문제로 이어집니다.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며, 심지어 격노하시는 것처럼 표현된 곳이 많습니다. 문자적으로만, 그러니까 겉으로만 읽으면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감정이 격해져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7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설명할 때 자주 다루는 ‘외관’의 원리와 연결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서 악 가운데 들어가면, 그 결과로 고통과 심판을 경험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자기를 벌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문자, 즉 겉으로는 인간에게 그렇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속뜻에서는 원인이 주님의 분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에서 돌아선 데 있습니다.

 

78:49-50이 좋은 예입니다. 겉으로만 읽으면 하나님께서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보내시고,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즉시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인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악한 천사들에 관한 설명입니다.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사람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애정에 따른 결합’의 원리와도 맞닿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과 같은 성질의 영적 사회와 연결됩니다. 선과 진리를 사랑하면 그에 상응하는 천국적 영향에 자신을 열고, 악과 거짓을 사랑하면 그와 같은 사랑을 가진 악한 영들과 결합합니다. 따라서 악한 영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형벌을 집행하기 위해 그들을 파견하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 자신의 사랑의 방향이 그들과의 결합을 불러옵니다.

 

이것은 ‘인간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인다’는 말을 단순한 인과응보 정도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의 지배적 사랑이 자기와 같은 성질의 영적 환경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택하면 그것과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과 점점 가까워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이면 천국의 질서와 가까워집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임의적으로 부과되는 상벌 이전에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셨다’는 시78:50의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인간이 선택한 악의 결과가 진행되도록 허용하시는 것을 말씀의 문자에서는, 즉 말씀은 겉으로는 주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표현한다고 봅니다. 주님께서 악을 만들어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악으로 향할 때, 그것을 무조건 제거하여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으십니다. 다만 섭리 안에서 악을 제한하시고, 가능한 한 선한 결과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허용된 것이 겉으로는 때때로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처럼 표현됩니다.

 

이 점에서 AC.357은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에게 사랑과 반대되는 인간적인 분노가 있다고 생각하면, 주님 안에 사랑과 진노라는 서로 상반된 두 상태가 존재하는 것처럼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십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향할 때, 그 사랑을 복으로 경험하고, 등을 돌려 자기 사랑 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동일한 신적 질서를 자기 욕망에 반대되는 것으로 경험합니다.

 

비유하자면 태양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이 빛을 등지고 어둠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둠 속에 들어간 사람이 ‘태양이 내게서 빛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변한 것은 태양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방향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해를 위한 비유이지만, AC.357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분노’의 외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은 다시 가인에게 돌아옵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향하여 분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이 분노합니다. 주님의 질서가 가인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가인이 나타내는 자기중심적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7의 가인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 묘사가 아니라 지옥적 사랑의 원리가 처음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앞의 AC.352-354와 대비하면 더욱 선명합니다. 아벨의 ‘기름’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나타냈고, 그 사랑은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반면 AC.357의 가인에게서는 자기 사랑(amori proprio)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갈등은 결국 이 두 사랑의 질서가 충돌하는 문제로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7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분노’가 ‘’을 상징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상징한다고 결론짓습니다. 이 두 표현은 사실 하나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난 빈자리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기 시작하면, 자기에게 반대되는 것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상태가 생깁니다. 가인의 분노는 바로 그 내적 변화가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결국 AC.357은 우리에게 분노 자체보다 그 분노의 ‘근원’을 보라고 합니다. 무엇이 내 안에서 거슬렸기에 분노하는가,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 반발하는가, 주님의 선과 진리가 아니라 자기의 뜻과 명예와 판단을 지키기 위해 화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분노는 때때로 내 안에서 무엇이 지배적 사랑이 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분노와 악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악한 천사를 보내어 인간을 괴롭히시는 분도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설 때 자기 사랑과 같은 성질의 악을 자기에게 끌어당기며, 그 결과가 마치 주님의 진노처럼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분노하시는 하나님과 반항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서 인간이 체어리티를 떠나 자기 사랑으로 향할 때, 그의 내면과 영적 환경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78:49-50)

 

 

AC.357, 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시78:49-50)

AC.357.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시78:49-50)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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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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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 ‘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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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6

 

가인(Cain)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것이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That byCain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a doctrine that admits of this separation; and thatto his offering he looked notsignifies that his worship was not acceptable,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356은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는 글이라기보다 바로 앞 AC.355의 첫 부분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짧은 연결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두 가지 모두 ‘앞에서 설명했다’고 밝히므로, 여기서는 이미 나온 내용을 길게 반복하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분노’와 ‘안색이 변함’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전제를 다시 세워 놓았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전제는 ‘가인’입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상징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신앙과 사랑의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까지 포함합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실제 삶에서 신앙과 사랑이 조금씩 멀어지는 상태일 수 있지만, 그것이 굳어지면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은 신앙으로 온전히 존재할 있다’는 하나의 교리적 입장이 됩니다.

 

두 번째 전제는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가인이라는 개인에 대한 주님의 거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가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뜻합니다. 바로 앞 AC.349에서 보았듯이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에서 분리된 예배는 외적 형식을 아무리 갖추고 있어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주의할 것은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주님께서는 신앙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체어리티만 기뻐하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AC.353에서는 오히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대비는 ‘신앙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체어리티와 결합된 살아 있는 신앙’의 대비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앞의 AC.341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신앙도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AC.356에서 다시 확인하는 이유는 이제 가인의 더 깊은 내적 변화가 설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사실에 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지 않고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AC.355는 이것을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한 상태라고 미리 밝혔습니다.

 

따라서 AC.356은 짧지만 가인의 타락 과정에서 하나의 경계선과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인이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의 제물은 무엇인가’, ‘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는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부터는 그러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결국 AC.356의 핵심은 이미 확인한 두 사실을 다시 붙드는 데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며, ‘받아들여지지 않은 제물’은 그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다음 단계인 ‘분노’와 ‘안색의 변화’가 생겨납니다. 즉 잘못된 신앙과 예배의 질서는 결국 생각과 교리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애정과 내적인 것들까지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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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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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인(Cain)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합니다.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offering not being looked to) 것은 앞에서와 같이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었음을 상징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그의 안색이 변했다(Cains anger being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alling) 것은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합니다. 분노(anger)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하고, 안색(faces) 내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그것들이 변할 안색이 떨어졌다(fall) 말합니다. ByCain,as has been stated,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such a doctrine as admits of the possibility of this separation; by hisoffering not being looked tois signified as before that his worship was unacceptable. ByCains anger being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alling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Byangeris denoted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by thefaces,the interiors, which are said tofallwhen they are changed.

 

 

해설

 

AC.355부터 창4:5의 속뜻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앞의 AC.346-354에서는 가인과 아벨이 각각 무엇을 드렸으며, 왜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여지고,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말씀의 초점은 ‘ 결과 가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감정적 분노가 아니라, 교회의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과정으로 읽습니다.

 

먼저 ‘가인’에 대한 정의가 조금 더 정밀해졌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상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도 상징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이 사랑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상태를 넘어,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도 참된 신앙일 있다’고 교리적으로 인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처음부터 가인이 극단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AC.347에서는 처음에는 가인이라 불리는 교리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에서 지금처럼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작은 구별이 점차 실제적인 분리가 되고, 이제는 그 분리 자체를 하나의 교리로 인정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따라서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AC.349에서 ‘제물’은 예배를 상징한다고 했으므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는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예배의 형식을 갖추고 있어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생명이 없다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가인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스베덴보리는 이 ‘분노’를 단순히 기분이 상했다거나 질투했다는 자연적인 감정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분노는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인 이야기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왜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나타낼까요? 체어리티가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웃의 선을 기뻐하고 그의 선을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사랑보다 높이고, 자신의 교리적 위치를 지키려 할 때, 체어리티는 점점 설 자리를 잃습니다. 특히 자신의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벨의 예배는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가인이 아벨을 향하여 분노한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이제 그것을 적대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몹시’라는 표현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분리는 이제 단순한 개념상의 구별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뒤, 체어리티를 불편하게 여기고, 마침내 그것을 향해 분노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처음에는 ‘신앙도 사랑과 별개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아닌가?’라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했지만, 그 질서가 계속 뒤집히자, 이제 사랑과 체어리티 자체가 신앙의 자기주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안색이 변했다’는 말씀은 이 변화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나타냅니다. 영어 원문은 ‘his faces falling’, 문자적으로는 ‘그의 얼굴들이 떨어졌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얼굴(faces)을 인간의 ‘내적인 것들’로 해석합니다. 얼굴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애정과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기뻐하면 얼굴이 밝아지고, 슬프거나 분노하면 얼굴이 달라지는 것처럼 얼굴은 내적 상태의 외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가인이 화난 표정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의 관계에 관한 교리적 변화로 시작했지만, 이제 그 잘못된 질서가 인간의 내면 자체를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흐름을 AC.338부터 연결해서 보면 가인의 타락 과정이 상당히 선명하게 보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합니다. 그다음 신앙이 사랑에서 점차 분리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집니다. 그러자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가 나오고, 이제 그 결과로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내적인 것들까지 변합니다. 이후에는 결국 아벨을 죽이는 단계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영적 파국이 아닙니다. AC.355는 그 직전의 내적 과정을 보여 줍니다. 먼저 질서가 생각과 교리에서 뒤집히고, 그 뒤 애정이 변하며, 마침내 삶의 행위로 나타납니다. 잘못된 교리가 단순히 머릿속의 잘못된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면 인간의 애정과 의지까지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는 것은 단지 신학 시험에서 답 하나를 틀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바른 교리를 믿고 있으므로 어떻게 살아가든 신앙 자체는 온전하다’는 생각이 굳어지면, 처음에는 작은 교리적 분리처럼 보여도 점차 삶과 애정의 질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옳음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오히려 방해물처럼 여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분노를 돌아볼 때 AC.355는 날카로운 기준을 제공합니다. 물론 모든 분노가 곧 체어리티의 상실이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악과 불의에 대한 의로운 분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 신앙과 교리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선이 오히려 인정받기 때문에’, ‘내가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분노라면 그 안에 가인의 상태가 들어오고 있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의 분노에서 특히 두려운 것은 그가 여전히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예배를 폐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그 종교성 안에서 체어리티가 떠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외적 종교생활이 계속된다는 사실만으로 내적 상태가 안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진리를 말하고,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체어리티가 떠날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비극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핍니다. 내가 진리를 더 알게 될수록 이웃을 더 사랑하는가, 더 자비로워지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할 수 있는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낮아질 수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는 주님의 선과 결합하고 있다면 사람의 내적인 것들도 점차 주님을 향해 열립니다.

 

결국 AC.355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분노’보다 그 뒤에 있는 ‘내적인 것들의 변화’입니다. 가인의 얼굴이 변하기 전에 그의 내면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면이 변한 근본 이유는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가 교리로 굳어지며, 그 교리에서 예배하고,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향하여 분노하게 될 때, 인간의 내적인 얼굴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AC.355는 가인의 타락이 본격적으로 외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직전의 결정적인 지점을 보여 줍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중립적인 상태로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체어리티가 떠나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합니다. 그리고 다음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내면이 변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주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돌이킬 길을 열어 두고 계심을 이후의 글에서 살펴볼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 ‘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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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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