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Hinduism)가 자신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중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가 ‘사나타나다르마’(Sanātana Dharma), 곧 ‘영원한다르마’입니다. 여기서 ‘사나타나’(sanātana)는 영원한 것,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을 뜻하며, ‘다르마’(dharma)는 질서, 법, 의무, 올바른 삶의 방식 등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나타나 다르마를 단순히 ‘영원한종교’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그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종교보다 넓습니다. 그것은 특정한 시대에 한 사람이 창시한 교리나 특정 민족만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가 따라야 할 근본적인 질서이며, 인간이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닫고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힌두교는 자신이 단순한 종교적 조직이나 신앙 체계를 넘어 인간의 존재와 삶 전체에 관계되는 영원한 진리를 전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어떤 전통이 자신을 ‘영원한진리의길’이라고 이해한다는 사실과 그 전통의 모든 가르침이 실제로 영원한 진리라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힌두교 전통에서 다르마는 여러 차원의 의미를 지닙니다. 우선 우주와 생명이 일정한 질서 안에서 존재한다는 이해와 관련되며, 인간의 삶에서는 도덕적 책임과 사회적 의무, 종교적 수행의 원리를 가리킵니다. 부모와 자녀, 스승과 제자, 통치자와 백성, 개인과 공동체는 각각 자신의 처지에서 따라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러한 의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는 것이 다르마를 실천하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다르마를 단순히 사회적 신분이나 관습에 따라 정해진 의무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힌두교의 여러 전통은 진실함, 비폭력, 절제, 자비, 관대함과 같은 덕목을 인간이 따라야 할 보편적인 원리로 강조해 왔습니다. 특히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다른 생명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이기적인 목적보다 더 높은 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특정 민족이나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에 관계되는 도덕적 요청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만 실제 힌두교의 역사에서는 보편적인 윤리와 신분에 따른 의무가 서로 결합하거나 충돌하기도 하였으므로, 모든 다르마의 가르침을 하나의 일관된 평등주의적 윤리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다르마의 중요성은 힌두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7-8에서 크리슈나(Krishna)는 다르마가 쇠퇴하고 아다르마(adharma), 곧 다르마에 어긋나는 상태가 강해질 때 자신을 드러내어 선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제압하며 다르마를 회복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르마는 단순히 종교적 의식이나 관습을 유지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질서가 무너질 때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신성한 책임과 연결됩니다. 또한 ‘바가바드기타’는 자신의 의무를 행하되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삶을 강조합니다. 인간이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 결과를 자신의 소유로 삼거나 보상을 기대한다면 여전히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자신의 의무를 더 높은 목적에 바치며 수행한다면 그 행위는 영적 해방을 향한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선한 행위의 외적인 모습뿐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이는 내적인 동기가 중요하다는 통찰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통찰이 곧바로 스베덴보리가 가르치는 거듭남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선을 행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서로 만나는 부분이 있지만, 선의 근원과 인간의 영적 변화에 대한 설명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역사적으로도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힌두교인은 사나타나 다르마를 힌두교의 본래 이름으로 이해하며, 자신들의 종교가 태초부터 이어진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역사 연구에 따르면 ‘사나타나다르마’라는 표현이 고대와 중세의 산스크리트 문헌에 나타난다는 사실과 그것이 처음부터 오늘날의 힌두교 전체를 가리키는 고유 명칭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특히 이 표현이 힌두교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종교적·사회적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서구의 식민지 지배와 기독교 선교, 전통 종교에 대한 비판과 개혁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힌두교 내부에서도 무엇이 자신들의 본래적인 종교적 정체성인가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나타나 다르마를 전통적인 종교 질서를 보존하는 표현으로 사용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진리와 영적 자유를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나타나 다르마라는 이름의 오래됨과 그 이름으로 오늘날 힌두교 전체를 설명하는 방식의 역사적 형성 과정은 서로 구별해야 합니다. 이 구별은 힌두교의 신앙적 자기 이해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스스로 주장하는 영원성과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을 혼동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이 따라야 할 참된 질서가 특정한 시대나 민족의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질서의 근원은 비인격적인 우주의 법칙이나 인간 안에 본래 존재하는 독립적인 신성이 아니라, 신성한 사랑 자체이시며 신성한 지혜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섭리’(DivineProvidence)325번에서 주님의 섭리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가능성을 가지며, 하나님을 인정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원받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여기서 모든 종교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가장 보편적인 요소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과 선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선한 삶을 단순히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도덕적 행동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악을 피하되 그것이 자신의 평판이나 이익에 해롭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에 어긋나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피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외적인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과 자신의 내적인 사랑과 의지를 주님의 질서에 맞추어 변화시키는 것이 서로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힌두교가 말하는 영원한 다르마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성한 질서는 모두 인간의 삶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선과 질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가 누구에게서 비롯되며 인간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서로 다른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인간이 진리를 깨닫는 방법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힌두교의 일부 철학 전통, 특히 불이일원론(AdvaitaVedanta)은 인간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Atman)과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Brahman)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해탈의 핵심으로 설명합니다. 반면 비슈누를 최고의 신으로 예배하는 여러 신애 전통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사랑과 헌신, 은총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이처럼 힌두교 안에서도 영원한 다르마를 실현하는 길에 관한 설명은 서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존재이며, 아무리 거듭나더라도 신성 자체가 되거나 주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만큼 그분과 결합하지만, 그 사랑과 지혜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 안에 본래 존재하는 신성을 깨닫는다는 설명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난다는 설명을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참된 변화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의 관심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 변화가 인간 자신의 본래적 신성을 발견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인지에 따라 영적 의미는 크게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다르마가 시대와 민족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진리의 길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판단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진리의보편성’과 ‘특정종교체계의보편적타당성’을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HeavenandHell)308번에서 주님의 교회가 전 세계에 걸쳐 있으며, 신성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교회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참된 교회가 단순히 외적인 종교 조직이나 이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되는 영적 상태와 관계된다고 봅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힌두교 문화권에서 태어나 주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종교 안에서 신성을 진실하게 인정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한다면 주님의 섭리가 그 사람에게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힌두교의 모든 교리가 신성한 진리라는 뜻도 아니고, 모든 종교가 동일한 방식으로 주님을 계시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 318번과 319번에서도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을 설명하지만, 그 근거를 모든 종교의 교리적 동등성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주님의 자비와 섭리, 그리고 각 사람이 자신이 받은 종교적 진리에 따라 형성하는 내적인 삶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보편성은 어느 한 종교가 스스로 영원하다고 선언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섭리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사실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힌두교인뿐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도 중요한 자기 성찰을 요구합니다. 기독교인은 성경을 가지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참된 신성한 질서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510번에서 교회가 인간 안에 형성되는 것은 거듭남을 통해서이며, 거듭남은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멀리하는 회개에서 시작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참된 교회는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소유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고, 그 교리가 인간의 의지와 삶을 변화시키는 데서 실제로 형성됩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고 자신의 탐욕과 교만을 정당화한다면, 그는 참된 종교의 외적인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그 내적인 생명에서는 멀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이해하는 신성한 질서에 순종하려고 노력하고, 악을 멀리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면, 우리는 그 삶에서 주님의 섭리가 역사할 가능성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나 사후의 운명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소속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 어떤 사랑과 선을 형성해 가시는가 하는 문제이며, 그 최종적인 판단은 오직 주님께 속합니다.
결국 ‘영원한다르마는시대와민족을초월하는보편적인진리의길이다’라는 명제에는 인간의 삶이 단순한 욕망과 사회적 관습을 넘어 더 높은 질서와 선을 따라야 한다는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진실함과 자비, 절제와 책임, 다른 생명에 대한 존중은 특정한 시대와 민족만의 가치가 아니며, 이러한 덕목을 영원한 질서와 연결하려는 힌두교의 노력에는 깊이 살펴볼 만한 진리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사나타나 다르마라는 이름 아래 전해지는 모든 철학과 교리와 관습이 영원한 신성의 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인간의 참된 본성과 신성의 관계, 윤회와 해탈, 신의 현현과 구원의 문제는 성경과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계시의 빛에 비추어 각각 분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분명합니다. 진리는 시대와 민족을 초월하지만, 그 영원성은 인간이 만든 종교적 체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진리에 실제로 참여하는 길은 영원한 질서를 관념적으로 이해하거나 자신의 종교적 전통을 자랑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악을 멀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다르마라는 가르침을 대할 때 우리는 그 안의 보편적 도덕 질서를 존중하되 그것을 곧바로 신성한 계시와 동일시하지 않아야 하며, 그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의 진정한 선을 인정하되 모든 교리를 무분별하게 승인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참된 종교의 보편성은 결국 모든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 선한 삶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HI.002해설)
힌두교(Hinduism)를 이해하려 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어려움은 힌두교를 하나의 명확한 교리 체계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슬람교는 무함마드와 꾸란을 중심으로 그 신앙의 역사와 교리를 설명할 수 있지만, 힌두교에는 모든 신자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단일한 창시자도, 하나의 절대적인 신조도, 모든 전통을 통제하는 중앙 종교기관도 없습니다. 힌두교라는 이름 아래에는 인격적인 신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신앙, 궁극적 실재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사상, 명상과 금욕을 통해 영적 해방을 추구하는 수행, 그리고 일상의 의무와 도덕적 삶을 중시하는 전통이 함께 존재합니다. 따라서 힌두교를 단순히 ‘여러신을믿는종교’라고 설명하거나, 반대로 ‘모든신이결국하나라는종교’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느 한 부분을 전체로 확대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힌두교의 다양성은 주변적인 특징이 아니라 그 종교의 역사와 구조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출발점입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힌두교가 오랜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종교적 경험과 철학적 탐구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온 과정과 관계가 있습니다. 베다(Veda)전통에서 비롯된 제사와 찬가, 우파니샤드(Upanishad)의 철학적 사색, 바가바드 기타(BhagavadGita)의 신앙과 윤리, 베단타(Vedanta)의 여러 철학 학파, 비슈누와 시바와 여신을 중심으로 형성된 예배 전통 등이 하나의 광대한 종교적 세계를 이루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전통은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Brahman)과 인간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Atman)의 동일성을 강조하고, 다른 전통은 신과 인간의 영원한 구별을 강조합니다. 또 어떤 신자에게는 경전을 연구하고 명상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다른 신자에게는 신의 이름을 부르고 사랑으로 헌신하는 일이 신앙의 중심입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가르침과 수행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힌두교는 하나의 통일된 교리 체계라기보다 여러 종교적 전통의 집합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힌두교 안에 공통적인 유산이나 정체성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르마(dharma), 카르마(karma), 윤회(samsara), 해탈(moksha)같은 개념은 많은 전통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그 의미와 강조점이 서로 다르더라도 오랫동안 공통의 종교적 언어로 기능해 왔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힌두교의 이러한 다양성이 단순한 혼란이나 교리적 무질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신성한 실재를 이해하고 그 실재와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가 역사와 문화와 개인의 영적 상태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을 인격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이해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절대적 실재를 탐구하며, 어떤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선한 삶을 실천하는 데 집중합니다. 이 가운데에는 인간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통찰도 있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게 하는 오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차이를 관찰하면서 성급하게 모든 전통을 동일하다고 판단하거나, 반대로 서로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담긴 모든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양한 종교적 표현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표현들이 모두 똑같이 참되다는 주장은 서로 구별해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전하신 저작들은 종교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그는 ‘천국과지옥’(HeavenandHell, HH, 1758) 318번에서 기독교회 밖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의 자비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며, 인간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환경에서 태어난 책임을 그 사람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를 통하여 신성을 인정하고 내적인 삶을 살아갈 가능성을 마련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의섭리’(DivineProvidence, DP, 1764) 325번에서는 모든 종교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가장 보편적인 요소로 신성의 인정과 선한 삶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선한 삶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넘어, 악이 신성한 질서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이는 종교의 이름이나 외적인 소속보다 그 종교를 통해 인간의 내면에 어떤 사랑과 삶이 형성되는지가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모든종교의가르침은동일하게참되며,어느종교를믿어도아무차이가없다’는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사실과 모든 종교의 교리가 동일한 진리를 담고 있다는 주장을 구별합니다. 그에게 신성한 사랑과 지혜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생명도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힌두교 안에서 신을 향한 진실한 경외, 이기적인 욕망을 절제하려는 노력, 다른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하려는 태도를 발견한다면, 그 안에 주님의 섭리가 작용할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브라만과 아트만의 동일성, 윤회, 여러 신의 현현, 인간의 수행에 의한 해탈 등의 가르침까지 모두 성경의 진리와 일치한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인간의 영적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문제는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진리의 빛에 비추어 더욱 면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종교적 진정성을 인정하는 일과 교리적 진위를 분별하는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인 자신을 향한 중요한 질문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인지, 어떤 교단에 속해 있는지, 어떤 교리를 고백하는지를 통해 그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 321번에서 기독교 밖의 사람들 가운데 도덕적으로 살아가고, 순종과 상호 간의 체어리티(charity)를 실천하며, 자신의 종교적 믿음에 따라 양심을 형성한 사람들이 사후에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아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반대로 기독교의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그 지식만으로 천국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을 힌두교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힌두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영적 상태를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그가 자신의 종교 안에서 어떤 신성을 인정하고, 무엇을 선으로 여기며,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관찰로도 한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을 완전히 알 수는 없으며, 그 판단은 주님께 속합니다.
그렇다면 힌두교의 다양성은 기독교에 어떤 도전을 던집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진리를 이해하는 방식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기독교 안에도 수많은 교파와 신학적 전통이 존재하며, 동일한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본성, 구원, 성례, 종말 등에 관하여 서로 다른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해석이 동일한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해석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전통에 속한 모든 사람의 신앙까지 거짓이라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진리들은 종교적 다양성을 무조건 찬양하지도, 다양성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종교와 교리 가운데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에 합당한지 분별하고, 진리가 인간의 삶 속에서 선과 결합하도록 인도합니다. 종교의 참된 가치는 그 체계가 얼마나 방대하고 정교한가보다,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절제하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변화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힌두교는하나의종교라기보다다양한신앙과철학을포괄하는영적전통이다’라는 명제는 역사적·종교학적 설명으로서 대체로 타당합니다. 다만 이 표현은 힌두교가 하나의 종교적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정체성이 단일한 창시자나 획일적인 교리보다 오랜 전통과 다양한 실천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됩니다. 인간이 신성을 찾는 길은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다양성 자체가 진리의 기준은 아닙니다.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힌두교의 여러 전통을 살피면서 그 안에 나타나는 진리의 흔적을 존중하되,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고, 무엇보다 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함부로 심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종교를 분별하는 목적은 다른 종교를 정죄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인간을 어떻게 선과 진리의 삶으로 인도하시는지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HI.001해설)
‘창5, AC.449-546번역, 해설및심화 - ChatGPT’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AC, 1749-1756) 가운데 창5에 해당하는 AC.460-536을 중심으로, 그 앞뒤에 배치된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한 설명인 AC.449-459와 AC.537-546까지 번역하고 해설한 책입니다. 창5는 흔히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족보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담이 셋을 낳고, 셋이 에노스를 낳으며, 그 후손들이 차례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에 이르는 장입니다. 각 사람의 출생과 수명, 자녀들과 죽음이 반복되어 기록되므로,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거의 없는 단조로운 계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히 오래 살았던 사람들의 가족사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각각의 이름이 하나의 교회를 나타내며, 그 계보는 태고교회에서 이어진 교회들이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능력인 퍼셉션을 점차 잃어 가는 과정과, 그러한 쇠퇴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시는 영적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오래된 족보를 통해 교회의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 그 생명이 어떻게 약해지며,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무엇을 보존하시는지를 살펴보는 책입니다.
창1에서 우리는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인간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창2에서는 거듭난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살아가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창3에서는 인간이 주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보다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신뢰하고,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사랑하면서 본래의 질서에서 멀어지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이어지는 창4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지, 그리고 그러한 쇠퇴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시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창5는 그 흐름을 더욱 긴 시간과 넓은 교회사의 관점에서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생명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처음의 천적 상태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여러 교회가 나타났으며, 그 교회들마다 퍼셉션의 분명함과 완전함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창5의 계보는 바로 이러한 영적 변화의 기록입니다.
이 장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성경에 기록된 이름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과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이라는 이름들이 각각의 교회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름은 단순히 특정 인물을 부르는 호칭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 이름으로 나타낸 교회가 어떠한 사랑과 신앙을 지녔는지, 선과 진리를 어떻게 지각했는지, 그 영적 생명이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나타냅니다. 또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낳았다는 기록은 한 교회에서 후속 교회가 이어져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읽을 때에는 누가 누구를 낳았는가 하는 관계뿐 아니라, 앞선 교회의 영적 상태가 뒤의 교회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같은 이름이 창4와 창5에 반복해서 등장하더라도 그 이름이 놓인 계보와 문맥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읽는다는 것은 이름마다 고정된 뜻을 하나씩 붙여 외우는 일이 아니라, 각각의 이름이 전체 이야기에서 어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지 이해하는 일입니다.
창5:1의 ‘이것은아담의계보를적은책이니라’는 말씀은 이러한 관점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아담을 한 개인의 이름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처음 태고교회를 나타내는 ‘사람’(homo)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다는 말씀을 인간의 영적인 상태와 천적인 상태에 연결합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과정에 있으며,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 생명의 중심이 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창5의 시작은 단순히 인류의 첫 조상을 다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후속 교회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그 출발점에는 주님께서 인간을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마침내 사랑의 생명 안에서 천적 인간으로 완성하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 책은 그러한 원래의 질서를 기억한 채, 그 질서가 후속 교회들에서 어떻게 변해 갔는지를 따라갑니다.
창5:2의 ‘남자와여자를창조하셨고’라는 말씀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다시 강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를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고, 여자를 의지와 사랑에 속한 것들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실제 남자는 이해만을 지니고 여자는 의지만을 지닌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남자와 여자가 나타내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참된 교회는 이 둘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해와 의지 사이에는 아직 간격이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 사랑 역시 바른 방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창5는 이렇게 사랑과 신앙이 결합된 본래의 교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먼저 밝힌 뒤, 그 내적인 질서가 후속 교회들에서 어떻게 약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형상’과 ‘하나님의모양’의 차이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형상을 영적 인간과, 모양을 천적 인간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진리를 통해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지만, 천적 인간은 사랑이 그 생명의 중심이 되며 그 사랑에서 신앙이 비롯됩니다. 물론 이 구별을 두 종류의 인간이 서로 전혀 관계없는 존재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인간은 주님께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변화하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형상과 모양의 차이는 단순히 영적인 사람들을 등급으로 나누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어떤 질서를 이루고 있으며, 주님께서 인간을 어떤 생명으로 이끄시는지를 이해하도록 돕는 구별입니다.
창5에서 반복되는 긴 수명과 연수도 이러한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아담은 구백삼십 세, 셋은 구백십이 세, 에노스는 구백오 세, 므두셀라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다고 기록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숫자들이 특정 인물들의 실제 생존 기간을 나타내는 데 그치지 않고, 각 교회의 시간과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날은 일반적인 상태를, 연수는 그 안의 개별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수백 년 또는 구백 년이 넘는 수명을 읽으면서 중요한 것은 그 숫자가 현대인의 수명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 이름으로 나타낸 교회가 어떠한 상태를 거쳐 왔으며, 그 영적인 생명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모든 숫자를 자유롭게 분해하여 원하는 상징적 의미를 만들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한 상응과 설명하지 않은 부분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 책에서도 원문이 밝히지 않은 숫자의 개별적인 뜻을 임의로 확정하기보다, 그 숫자가 교회의 시간과 상태를 나타낸다는 기본 원리를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이어서 ‘아들들과딸들을낳았다’는 반복적인 표현에서는 교회 안에서 진리와 선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봅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들들을 진리들과, 딸들을 선들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같은 표현이 반복된다고 해서 모든 교회에서 동일한 완전함을 지닌 진리와 선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교회가 주님께로부터 선과 진리를 얼마나 분명하게 지각했는지에 따라 그 안에서 비롯된 것들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이러한 설명은 창5의 계보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한 교회가 다음 교회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후속 교회가 반드시 더 완전해지거나 이전의 상태를 그대로 보존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장에서는 후속 교회들이 나타날수록 퍼셉션의 분명함과 완전함이 점차 약해지는 과정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교회의 출생과 계승은 단순한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그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떤 상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태고교회에서 이어진 처음 세 교회인 아담, 셋, 에노스는 이 장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교회를 태고교회의 가장 내적인 부분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는 열매와 씨앗의 비유를 사용하여, 처음의 교회들이 열매나 씨앗의 가장 안쪽에 해당하고 후속 교회들은 그 바깥을 둘러싸는 부분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처음 교회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퍼셉션의 생명을 상대적으로 더욱 분명하게 지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세 교회도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교회에서 이어진 퍼셉션은 셋과 에노스의 교회로 계승되면서 조금씩 덜 분명한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창5의 쇠퇴는 처음 세 교회가 끝난 다음에야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후속 교회들 사이에는 퍼셉션의 차이가 있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차이는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여기서 퍼셉션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단순한 직감이나 지적인 추론, 또는 특별한 종교적 감정과 동일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주님께로부터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이며,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그 지각이 사랑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퍼셉션이 뛰어나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거나 복잡한 교리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분명하게 지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의 참된 생명이 선을 행하는 행복과 기쁨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도 중요하지만, 사랑의 생명은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고 실제 쓰임을 이루는 데서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의 완전함을 이해할 때에는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그 앎이 어떤 사랑에서 비롯되고 어떤 삶으로 이어지는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게난 교회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퍼셉션의 변화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비교적 분명하게 지각되던 선과 진리가 점차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열매나 씨앗의 가장 안쪽 부분과 그 바깥을 둘러싸는 부드러운 막의 차이에 비유합니다. 이 설명은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가 반드시 외적으로 더 가난하거나 조직적으로 더 작아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던 내적인 생명, 곧 주님께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능력이 점차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쇠퇴는 외적인 제도나 규모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교회가 오랜 역사를 지니고 많은 가르침을 보존하고 있더라도, 그 안에서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실제로 살아가는 생명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창5는 바로 이러한 내적인 변화를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마할랄렐 교회에 관한 설명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실제적인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교회의 사람들이 선한 쓰임에서 얻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데서 얻는 기쁨을 더 좋아했다고 설명합니다. 이 변화는 퍼셉션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기쁨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주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는 일은 신앙생활에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즐거움이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즐거움보다 앞서기 시작하면, 신앙의 내적인 질서는 달라집니다. 사랑이 진리의 생명이 되어야 하는데, 진리를 아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깊이 돌아볼 만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떤 신학적 설명을 새롭게 이해했을 때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선한 쓰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마할랄렐 교회에 관한 설명은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비추어 줍니다.
야렛을 거쳐 에녹 교회에 이르면 태고교회의 쇠퇴 가운데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녹 교회가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으로 지각하던 선과 진리를 교리로 정리했다고 설명합니다. 이전의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직접 지각했으므로, 그것을 외적인 규칙이나 교리로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속 교회들에서는 그러한 퍼셉션이 점차 약해졌으며, 마침내 이전처럼 직접 지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과 진리를 교리로 정리하는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이는 이전에는 살아 있는 퍼셉션으로 알던 것을 이제는 가르침의 형태로 보존하고 전달하는 변화입니다. 따라서 에녹 교회의 역할은 단순히 새로운 학설이나 종교적 지식을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이전 교회들에 주어졌던 선과 진리가 후세에 전해질 수 있도록 정리하는 데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는 말씀도 이러한 문맥에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과동행함’을 신앙의 교리에 따라 가르치고 살아가는 것으로, ‘여호와와동행함’을 사랑의 삶을 사는 것으로 구별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여호와가 서로 다른 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의 표현을 통해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셨다는 말씀은 에녹 교회가 정리한 교리가 후세를 위해 보존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중심은 에녹 개인에게 일어난 특별한 사건만이 아니라, 퍼셉션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서도 선과 진리에 관한 가르침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해석을 통해 교리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교리가 본래의 퍼셉션이나 사랑의 생명 자체를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다는 점을 함께 살펴봅니다.
에녹 교회의 교리 형성과 보존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인간이 처음의 영적 상태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주님께서 더 이상 선과 진리를 알 수 있는 길을 주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는 내적인 퍼셉션으로 직접 지각하던 것을, 이제는 외적인 가르침을 통해 배우는 길이 열립니다. 물론 두 방식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인 퍼셉션과 교리를 통한 배움의 차이를 빛과 어둠의 차이에 비유할 만큼 크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교리를 통해 배우는 길이 필요해졌다는 사실을 곧바로 주님께서 인간을 버리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지는 가운데서도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선과 진리가 보존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처럼 에녹 교회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약해지는 과정에 속하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위해 필요한 가르침을 보존하는 특별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어서 므두셀라와 라멕 교회에 이르면 태고교회의 쇠퇴가 마지막 단계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므두셀라 교회의 퍼셉션이 일반적이고 흐릿했으며, 그 완전함과 함께 지혜와 이해도 감소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지혜와 이해는 단순히 세상적인 지식이나 지적 능력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지각하는 영적인 능력과 관계됩니다. 라멕 교회에 이르면 그러한 퍼셉션이 너무나 약해져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교회의 ‘황폐화’(vastation)라고 설명합니다. 황폐화란 단순히 교회의 건물이 무너지거나 외적인 조직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를 참된 교회로 이루는 선과 진리의 내적인 생명이 사실상 소멸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라멕 교회는 태고교회의 오랜 계승이 마침내 어디까지 쇠퇴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교회입니다.
특히 창4의 라멕과 창5의 라멕을 비교하는 부분은 이 책을 읽을 때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라멕은 서로 다른 계보에 등장합니다. 창4의 라멕은 가인의 후손인 므드사엘에게서 나왔고, 창5의 라멕은 므두셀라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두 라멕을 같은 인물이나 같은 교회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두 라멕이 나타내는 영적 의미가 서로 가깝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므드사엘과 므두셀라가 소멸해 가는 것을 나타내고, 라멕은 이미 파괴된 것을 나타낸다고 구별합니다. 이 설명은 창4와 창5가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면서도 교회의 영적 생명이 어떻게 소멸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각각의 장이 보여 주는 쇠퇴의 과정과 교리적인 맥락은 구별해야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비슷한 이름이 나타내는 공통점과 서로 다른 문맥에서 비롯되는 차이를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5는 라멕 교회의 황폐화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그 라멕에게서 노아가 태어납니다. 라멕은 노아라는 이름을 지으며,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땅으로 말미암아 수고롭게 일하는 사람들을 이 아들이 안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를 태고교회와는 다른 새로운 교회인 고대교회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이전 교회의 상태가 조금 좋아지거나 옛날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찾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와는 본래의 영적 성격이 다른 새로운 교회가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특히 노아와 관련된 안위는 왜곡된 것을 회복하는 교리와 새로운 거듭남의 길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노아의 출생은 한 계보에 새로운 이름이 더해지는 장면을 넘어, 태고교회의 황폐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선과 진리로 이끄실 길을 마련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전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리메인스’(remains)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점차 쇠퇴하여 선과 진리의 생명을 거의 잃어버리더라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리메인스를 보존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교회의 차원에서는 선과 진리를 지닌 소수의 사람들이 보존되며, 개인의 차원에서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가 그의 영적 생명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둘은 서로 관련되면서도 정확히 같은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의 빛이 주님께로부터 리메인스 안으로, 또는 리메인스를 통하여 흘러들어 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리메인스가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빛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인간 안에 보존하신 것이며, 그 보존을 통해 인간은 다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쇠퇴를 이해할 때에도 인간이 잃어버린 것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여전히 보존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야 합니다.
특히 노아 교회에 보존된 것은 이전 태고교회의 퍼셉션 자체와는 달랐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곳에 퍼셉션의 리메인스가 아니라 완전함에 관한 리메인스가 있었으며,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했던 것들에서 비롯된 교리적인 내용도 보존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아 교회가 태고교회의 영적 상태를 그대로 이어받은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교회에는 이전의 직접적인 퍼셉션과는 다른 방식으로 선과 진리가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앞의 에녹 교회가 정리한 교리와 노아 교회의 출현이 연결됩니다. 에녹 교회는 퍼셉션으로 지각하던 것을 교리로 정리했고, 노아 교회에서는 그러한 교리적인 내용이 새로운 교회의 형성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잃어버린 영적 상태를 그대로 되돌리는 것만이 주님의 섭리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달라진 인간의 상태에 맞추어 새로운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길을 마련하십니다.
노아의 출생과 함께 나타나는 수고와 안위의 대비도 이 장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수고를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진리를 찾아내고 선을 행하려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삼으면, 그 안에서는 참된 영적 생명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진리를 배우려고 노력하거나 실제로 선을 행하려 애쓰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노력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선과 진리가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말씀을 배우고 선을 행하려는 것과, 자기 자신이 독립적으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노아가 나타내는 안위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상태에 새로운 거듭남의 길이 마련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이 책은 인간의 모든 노력을 부정하기보다, 그 노력이 주님을 향한 의존과 신뢰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창5의 마지막 절에서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아들을 노아로 나타낸 고대교회에서 이어져 나온 세 고대교회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태고교회의 쇠퇴를 기록하면서도, 그 마지막에서 다시 새로운 교회들의 계승을 예고합니다. 여기서 노아는 세 교회의 모교회입니다. 또한 노아 교회는 홍수 이전 시대의 끝 무렵에 나타났지만, 홍수 이후에도 존속하는 새로운 성격의 교회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노아 교회를 앞선 태고교회 계열의 단순한 연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의 고유한 생명이 거의 소멸한 상태에서, 이전과 다른 영적 질서를 지닌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창5는 바로 이 지점에서 끝납니다. 겉으로는 한 가족의 족보가 마무리되지만, 속뜻에서는 한 시대의 교회사가 끝나고 새로운 교회사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 책의 앞부분인 AC.449-459에서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에 관한 여러 사례를 살펴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이 천국을 생각할 때 얼마나 쉽게 세상적인 관념을 그대로 가져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을 높은 곳에서 다른 존재들을 내려다보며 다스리는 장소로 상상하고,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권세와 명예를 얻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영원히 쉬는 곳으로, 다른 사람은 찬란한 빛과 아름다운 광경 속에서 끊임없이 즐거움을 느끼는 곳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생각들이 천국의 참된 생명과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외적으로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가, 다른 존재보다 얼마나 큰 권세를 누리는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는 곳에 천국의 생명이 있습니다.
특히 AC.452에서는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작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설명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것은 참된 겸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겸손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보다 진심으로 바라며, 아무런 이기적인 목적 없이 그들을 위해 선한 쓰임을 행하려는 마음과 관련됩니다. 이러한 설명은 천국의 기쁨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천국은 서로 남보다 높아지려는 존재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서로의 선과 행복을 바라는 사랑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위대함을 세상적인 권세나 지위의 기준으로 이해하면, 천국의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AC.454-456에서는 천국의 안식과 쓰임의 관계가 더욱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영원히 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일만 계속하는 것이 천국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행복이 실제로 선한 쓰임을 행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다른 영들을 가르치고 돕고, 인간에게 선한 영향을 주며, 주님의 질서 안에서 각자의 쓰임을 감당합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일도 이러한 사랑의 생명과 분리된 독립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찬양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기를 원하시는 분으로 설명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앙생활의 목적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는 실제 삶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선한 쓰임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또한 이 앞부분에서는 천국의 행복이 모든 존재에게 똑같은 모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이가 있으며, 어느 두 사람이나 영, 천사도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천국의 각 공동체는 저마다 다른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지니지만, 그 다양한 공동체들이 주님께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하나의 전체를 이룹니다. 따라서 천국의 하나 됨은 모든 차이를 없애는 획일적인 동일함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존재와 공동체가 사랑의 질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창5에서 여러 교회가 각각 다른 퍼셉션의 상태를 지녔다는 가르침과도 연결됩니다. 다만 천국의 다양성과 태고교회의 쇠퇴를 동일한 현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다양성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조화와 완전함의 다양성이지만, 창5의 후속 교회들에서는 퍼셉션의 분명함이 실제로 감소하는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책의 마지막인 AC.537-546에서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한 설명이 계속됩니다. 여기서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그곳의 사랑과 기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영들의 사례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많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정작 천국이 무엇인지, 천국의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천국을 어떤 좋은 장소에 들어가는 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천국은 상호 사랑의 생명이며 그 기쁨도 그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천국을 원한다는 사실과 그 사랑을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는 서로 구별됩니다. 어떤 영은 천국의 기쁨을 조금 경험하자 오히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고, 다른 영은 천국의 문턱에서조차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천국 자체가 해롭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국의 사랑과 그 영이 지닌 내적인 상태가 서로 맞지 않을 때 나타나는 불일치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시며, 주님만이 각 사람의 참된 상태를 아신다고 강조합니다. 이 가르침은 다른 사람의 사후 운명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종교적인 행동을 하는지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내면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이 지배하고 있는지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내적 상태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근거로 사용하기보다,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천국의 사랑을 삶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을 향한 소망은 오늘 주님과 이웃을 향해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글들에서는 천국의 참된 기쁨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즐거움보다 얼마나 깊은 것인지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행복을 모르는 영들이 먼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낙원을 경험하지만, 그것조차 천국의 참된 행복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다고 말합니다. 그다음에는 더욱 내적인 기쁨과 평화, 그리고 순진함의 상태를 경험합니다. 여기서 천국의 기쁨은 단순히 외적인 아름다움이나 감각적인 만족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받아들이는 생명입니다. 또한 천국의 평화는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휴식이나 갈등의 부재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순진함 역시 경험이 부족하거나 무엇이든 쉽게 믿는 태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들이 천국의 선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행복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즐거움을 무한히 크게 상상하는 데서 벗어나, 주님께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의 생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특히 AC.543-545에서는 천국의 기쁨에 단계와 다양성이 있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어떤 영에게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내적인 기쁨이 다른 영에게는 그보다 외적인 기쁨에도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각자가 누리는 행복이 반드시 부족한 것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각 영은 자신의 내적 상태와 수용 능력에 적합한 기쁨을 받아들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기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과 애정이 하나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기쁨은 단순히 여러 감정이 많이 모여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수많은 애정들이 천국의 질서 안에서 하나의 살아 있는 기쁨을 이루며, 그 생명이 가장 깊은 내면에서부터 전체에 퍼져 나갑니다. 이 설명은 천국의 행복이 개인적인 쾌락의 극대화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와 조화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지막 AC.546에서는 체어리티가 있는 천국 공동체에 들어간 여러 영들의 상태를 살펴봅니다. 선한 마음을 지닌 영들은 그 공동체에 들어가자 이해가 더욱 밝아졌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순진함을 얻으려는 영들과 자신의 힘으로 이해와 신앙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영들은 서로 다른 표상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스스로 영적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상태를 생명이 없는 조각된 얼굴처럼 묘사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해를 사용하는 것이 잘못이라거나 진리를 배우려는 노력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순진함과 이해와 신앙의 근원이 인간의 프로프리움에 있지 않고 주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창5의 노아에 관한 설명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천국의 행복도 인간이 독립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아들이는 사랑의 생명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창5 본문과 그 앞뒤의 천국에 관한 설명은 얼핏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여러 교회의 출현과 쇠퇴, 퍼셉션의 변화, 교리의 보존과 새로운 고대교회의 형성을 살펴봅니다. 앞뒤의 설명에서는 천국의 기쁨과 상호 사랑, 쓰임과 순진함, 그리고 그 기쁨을 받아들이는 내적인 상태를 살펴봅니다. 그러나 두 부분은 인간의 참된 영적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질문에서 만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생명은 선을 행하는 기쁨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천국의 행복 역시 주님께로부터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선한 쓰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삼고, 진리를 아는 기쁨을 선을 행하는 기쁨보다 앞세우며, 사랑의 생명에서 멀어질 때에는 내적인 쇠퇴가 일어납니다. 따라서 교회의 쇠퇴에 관한 설명과 천국의 행복에 관한 설명은 결국 사랑과 신앙의 참된 질서라는 하나의 주제를 향합니다.
이번 책에서 메인 해설과 심화를 함께 마련한 취지도 이러한 이해를 돕는 데 있습니다. 메인 해설에서는 각 AC 번호가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충분히 밝히고, 처음 읽는 독자도 앞뒤 문맥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필요한 개념을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퍼셉션과 교리의 차이, 교회의 계승과 쇠퇴, 연수와 출생과 죽음의 속뜻, 리메인스의 보존과 고대교회의 출현, 천국의 기쁨과 쓰임의 관계처럼 반복해서 등장하는 중요한 주제들을 단순한 용어 풀이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독자가 별도로 질문할 만한 문제가 메인 해설 안에서 충분히 해결된다면 굳이 독립 심화로 분리하지 않는 원칙을 적용했습니다. 심화는 새로운 분량을 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메인 해설을 읽고도 남는 독립적인 질문을 더욱 깊이 살펴보기 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설명의 양 자체가 아니라, 독자가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더욱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이와 함께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읽는 태도에도 주의를 기울이고자 했습니다. 그가 말씀의 속뜻에 관하여 제시하는 해석과 자신의 영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증언하는 내용은 구별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천국의 기쁨에 관한 설명에는 오늘날 일반적인 역사 연구나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직접 확인하기 어려운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설명했다는 사실과, 그 설명을 독립적인 방법으로 검증했다는 주장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의 저작을 읽으면서 원문이 직접 밝히지 않은 부분에까지 지나치게 확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진지하게 공부한다는 것은 모든 표현에 즉시 답을 붙이는 일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를 정직하게 살피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독자가 해석의 풍부함과 함께 그 해석이 지닌 범위와 한계를 분별하도록 돕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먼 옛날의 교회사로만 읽지 않도록 권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던 퍼셉션이 어떻게 약해졌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말씀과 교리를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많이 알게 되면서도 그 진리를 살아가는 기쁨은 점차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교리의 정교함을 자랑하면서도 가까운 이웃에게 해야 할 선은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자신의 이해와 판단에 점점 더 큰 확신을 가지면서, 정작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은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특정한 시대나 교회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을 오래 읽고 신앙에 관하여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자신의 앎이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는지 더욱 주의 깊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5의 계보는 바로 이 점에서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삶을 비추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찰이 인간의 쇠퇴와 실패에 관한 절망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창5에서 가장 깊이 주목해야 할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얼마나 오랫동안 약해졌는가 하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 쇠퇴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무엇을 보존하셨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에녹 교회를 통해 이전의 퍼셉션에 속했던 선과 진리가 교리로 정리되었고, 그 교리는 후세를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므두셀라와 라멕 교회에서 퍼셉션이 거의 소멸한 뒤에도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셨으며, 노아로 나타낸 새로운 고대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원래의 상태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간을 향한 사랑과 섭리를 거두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아시며, 그 상태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선과 진리를 통해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따라서 창5는 교회의 쇠퇴에 관한 책이면서 동시에, 쇠퇴 속에서도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시는 주님의 섭리에 관한 책입니다.
‘창5, AC.449-546번역, 해설및심화 - ChatGPT’는 이러한 의미에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그 쇠퇴에 관한 책이며, 동시에 리메인스와 교리의 보존, 새로운 고대교회의 출현에 관한 책입니다. 아담으로 나타낸 처음 태고교회, 셋과 에노스의 후속 교회, 게난에서 시작된 퍼셉션의 일반화, 마할랄렐 교회에서 드러난 진리를 아는 기쁨과 쓰임의 기쁨 사이의 변화, 에녹 교회의 교리 형성, 므두셀라와 라멕의 쇠퇴와 황폐화, 노아로 나타낸 새로운 고대교회와 셈·함·야벳으로 이어지는 세 교회의 계승이 이 한 권의 중심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 앞뒤에는 천국의 참된 행복이 권세나 안락함이나 외적인 즐거움에 있지 않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상호 사랑과 체어리티, 선한 쓰임과 순진함에 있다는 설명이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십니다. 이 책을 읽는 목적은 스베덴보리의 해석 체계를 익히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 해석을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깊이 알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과 진리를 오늘의 삶에서 살아 있는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나는진리를아는기쁨보다그진리에따라선을행하는기쁨을더사랑하고있는가?’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며, 주님의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앎이 실제로 우리의 사랑을 변화시키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점차 흐려졌고, 그 가운데서 진리를 아는 기쁨이 쓰임을 행하는 기쁨보다 앞서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물음입니다. 내가 이해한 진리가 나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있는지, 이웃의 선과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게 하는지, 내게 맡겨진 일을 더욱 정직하고 성실하게 감당하도록 이끄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내 안에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더라도 낙심할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의 쇠퇴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우리의 거듭남 역시 우리 자신의 완전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책이 독자에게 오래된 계보의 낯선 의미를 알려 주는 데 머무르지 않고,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그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 내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