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2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는 유대교회를 통해 있습니다. 유대교회에는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가 모두 있었는데, 내적 교회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로, 외적 교회는 자연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라헬은 내적 교회를, 레아는 외적 교회를 표상했습니다. 그러나 야곱(Jacob), 정확히 말해 말씀에서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그의 후손들은 오직 외적인 것들, 외적인 예배만을 원했으므로, 야곱은 라헬보다 먼저 레아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눈이 흐릿한 레아는 유대교회를, 라헬은 이방인들 가운데 세워지는 교회를 표상했습니다. 때문에 예언서에서 야곱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는 왜곡된 상태의 유대교회를,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가리킵니다. 내적 교회를 의미할 때에는 그를 이스라엘(Israel)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How the case was with this new church may be seen from the Jewish church, which was both internal and external; the internal church consisting of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the external church of natural things. The internal church was represented by Rachel, and the external by Leah. But as Jacob, or rather his posterity understood byJacobin the Word, were such as to desire only external things, or worship in externals, therefore Leah was given to Jacob before Rachel; and by blear-eyed Leah was represented the Jewish church, and by Rachel a new church of the gentiles. For this reasonJacobis taken in both senses in the prophets, in one denoting the Jewish church in its perverted state, and in the other the true external church of the gentiles. When the internal church is signified, he is calledIsrael”; but of these matters,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more will be said hereafter.

 

해설

AC.422는 앞의 AC.421에서 언급한 교회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유대교회를 예로 듭니다. AC.421은 씰라가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두발가인이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나아마가 그 교회 밖에 있는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러한 구별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서로 다른지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를 레아와 라헬,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말씀의 인물들을 통해 설명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가 모두 있었다고 말합니다. 내적 교회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로, 외적 교회는 자연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는 단순히 서로 다른 두 종교 단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번호는 한 교회의 내적 차원과 외적 차원을 구별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천적·영적 차원과, 그것들이 외적인 삶과 예배에서 나타나는 자연적 차원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별을 레아와 라헬에 연결합니다. 라헬은 내적 교회를, 레아는 외적 교회를 표상합니다. 29장의 문자적 이야기에서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여 그를 아내로 맞이하려 했지만, 라반은 먼저 레아를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을 단순한 혼인 순서로만 읽지 않고,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에 관한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기록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레아와 라헬의 구별은 두 여성의 개인적인 가치나 영적 우열에 관한 평가가 아니라, 이들이 말씀 안에서 표상하는 교회의 서로 다른 측면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왜 야곱은 라헬보다 먼저 레아를 아내로 맞이했습니까?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야곱으로 가리키는 그의 후손들이 오직 외적인 것들, 곧 외적인 예배만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야곱이라는 이름은 창세기의 한 인물만이 아니라, 말씀에서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그의 후손들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외적 예배 자체가 아니라,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만을 원하는 상태입니다. 외적 예배는 내적 교회와 연결될 수 있지만, 외적인 형식만을 추구할 때에는 그 관계가 달라집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눈이 흐릿한 레아가 유대교회를, 라헬이 이방인들 가운데 세워지는 새 교회를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29:17은 레아의 눈에 관해 언급하지만, 이번 번호는 눈의 세부적인 속뜻을 따로 풀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눈이 흐릿하다는 표현을 근거로 유대인 개개인의 이해력이나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대상은 말씀에 표상된 교회의 상태입니다. 또한 라헬이 이방인들 가운데 세워지는 새 교회를 나타낸다는 설명은 앞에서 라헬이 내적 교회를 표상한다고 한 내용과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 때문에 예언서의 야곱이라는 이름도 언제나 한 가지 뜻으로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어떤 곳에서는 왜곡된 상태의 유대교회를, 다른 곳에서는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구절의 속뜻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름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었는지, 어떤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지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중요한 주의사항입니다.

 

반면 내적 교회를 의미할 때에는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이 번호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의 구별은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의 구별에 연결됩니다. 다만 이것을 야곱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나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좋다는 식의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번 번호에서 야곱도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의미할 수 있다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외적 교회라는 사실 자체가 곧 왜곡된 교회라는 뜻은 아닙니다.

 

결국 AC.422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교회의 내적 차원과 외적 차원을 구별합니다. 라헬은 내적 교회를, 레아는 외적 교회를 표상하며, 야곱이라는 이름은 문맥에 따라 왜곡된 상태의 유대교회 또는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나타냅니다. 내적 교회를 의미할 때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외적인 예배가 있다는 사실과 그 예배가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별하여 살펴보게 됩니다. (AC.422 해설)

 

 

 

AC.423, 창4:22, ‘두발가인은 왜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이라고 불리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두발가인은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아버지’(father)가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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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1, 창4:22, ‘두발가인과 나아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AC.421-426)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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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4:22)

 

AC.421

앞서 말했듯이, 씰라(Zillah)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놋과 쇠로 온갖 기구를 만드는 자의 스승(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두발가인(Tubal-Cain)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brass) 자연적 선을, (iron)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두발가인의 누이(the sister of Tubal-Cain) 나아마(Naamah) 그와 비슷한 교회,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ByZillahis signified, as previously stated, 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 by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brassdenoting natural good, andironnatural truth. ByNaamah, the sister of Tubal-Cainis signified 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

 

해설

AC.421은 창4:22에 등장하는 씰라와 두발가인, 나아마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앞서 야발과 유발을 통해 사랑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자연적인 것들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두발가인을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로 해석하고, 놋과 쇠가 각각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이로써 라멕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은 교회의 서로 다른 측면을 설명하는 흐름을 이어갑니다.

 

먼저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자연적인 것들은 앞서 다룬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에 비해 사람의 외적인 삶과 관련된 차원을 가리킵니다. 다만 자연적이라는 말이 곧 악하거나 영적인 것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자연적인 것들 안에도 선과 진리가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것을 단순히 극복하거나 버려야 할 대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두발가인놋과 쇠로 온갖 기구를 만드는 자의 스승이라는 설명과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를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발가인을 단순히 금속을 다루는 기술자로 풀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의 문자적 기록은 그가 놋과 쇠를 다루는 기술과 관련된 인물임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기록의 속뜻에서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읽어 냅니다. ‘스승이라는 표현 역시 이번 번호의 해석이 단순한 기술이나 물건이 아니라 교리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번 번호는 두 개념의 구체적인 사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놋과 쇠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만 밝힙니다. 따라서 자연적 선을 특정한 선행 하나로, 자연적 진리를 특정한 지식 하나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우선 자연적인 차원에도 선과 진리의 구별이 있으며, 두발가인이 그 둘에 관한 교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 자연적 선을, ‘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두 금속은 문자적으로는 기구를 만드는 재료이지만, 속뜻에서는 자연적인 차원의 선과 진리를 구별하여 나타냅니다. 앞의 AC.419에서 수금과 퉁소가 각각 영적 진리와 영적 선을 나타냈던 것처럼, 이번 번호에서는 놋과 쇠가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악기와 금속의 의미를 하나의 기계적인 대응표로 만들기보다는, 각각의 말씀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뜻을 따라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아마는 두발가인의 누이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나아마가 그와 비슷한 교회,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교회 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두발가인과 나아마가 모두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련되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나아마는 앞서 말한 교회 밖에 있는, 그와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다만 이번 번호만으로 그 교회가 역사적으로 어떤 집단인지, 왜 교회 밖에 있다고 표현하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교회의 삶이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관한 가르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차원에도 선과 진리가 있으며, 그것들에 관한 교리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이번 번호가 자연적인 선과 진리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라멕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이 교회의 어떤 측면을 나타내는지 밝히는 데 초점을 둡니다.

 

결국 AC.421의 핵심은 두발가인이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놋과 쇠가 각각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하고, 나아마는 그 교회 밖에 있는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짧은 번호를 통해 자연적인 것들 역시 교회의 선과 진리에 관한 설명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AC.421 해설)

 

 

 

AC.422, 창4:22, ‘레아와 라헬은 왜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를 나타내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이 새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는 유대교회를 통해 알 수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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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창4:21, ‘말씀에 여러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언급되며, 각 악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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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심화

3. ‘23:16 잊힌 음녀에 관한 말씀인데 신앙의 지식을 설명하는 인용되었는가?

 

AC.420에서 스베덴보리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그 지식들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사23:16을 인용합니다.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아름답게 연주하고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네가 다시 기억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인용된 시편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것과 달리, 이 구절은 이사야 23장의 두로에 관한 예언 안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문자적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23장은 두로에 대한 경고와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23:15-16에서는 두로가 잊히는 기간에 관해 말한 뒤, 잊힌 음녀가 수금을 가지고 성읍을 돌아다니며 노래하여 다시 기억되게 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음녀가 노래를 통해 다시 사람들의 기억에 남으려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수금과 노래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장면 전체를 곧바로 거룩한 찬양이나 선한 예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왜 이 구절을 인용했을까요? AC.420에서 그가 직접 밝힌 인용 목적은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지식들에 관한 표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두로에 관한 예언 전체를 해설하지도 않고, 잊힌 음녀가 의미하는 바를 상세히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씀의 한 사례로 이 구절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을 이해할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한 범위와 우리가 더 알고 싶은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앞의 AC.419에서 수금은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AC.420에서도 수금과 비파 같은 악기들이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23:16의 수금 역시 이러한 논의 안에서 인용됩니다. 그러나 수금이 진리와 관련된다고 해서 그것을 사용하는 인물이 반드시 참된 진리 안에 있다거나, 그가 부르는 노래가 반드시 선한 찬양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어떤 표현이 진리에 관한 지식과 관련된다는 사실과, 그 지식이 어떤 상태에서 사용되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존 심화에서는 이 구절을 잃어버린 진리의 지식들이 다시 회복되고 기억되는 과정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별도로 검토해 볼 수 있는 해석이지만, AC.420 자체는 그와 같은 회복의 과정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특히 잊힌 음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예언의 문맥을 고려하면, ‘다시 기억되게 하라는 말을 곧바로 영적인 회복으로 확정하는 데에는 추가적인 근거가 필요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과 관련된다는 인용 목적을 분명히 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구절은 말씀의 속뜻을 살필 때 문자적 문맥을 보존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같은 악기라도 찬양 시편에 등장할 수 있고, 두로에 관한 경고의 말씀에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금은 진리라는 대응 관계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 구절 전체의 뜻까지 자동으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표현의 속뜻을 살피는 일과 그 표현이 놓인 문맥을 이해하는 일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밝힌 내용은 그중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에 관련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사23:16AC.420의 다른 찬양 구절들과 달리, 경고와 예언의 문맥 안에서도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에 관련된 표현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수금과 노래의 속뜻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잊힌 음녀의 모든 행동을 선한 예배로 바꾸어 읽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의미를 분명히 붙들면서, 두로와 음녀와 성읍의 더 자세한 속뜻은 해당 예언을 다루는 충분한 근거가 있을 때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20 심화 3)

 

 

 

AC.420, 창4:21, ‘말씀에 여러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언급되며, 각 악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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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심화 2, ‘시150:3-5에는 왜 이렇게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가?’

AC.420 심화2. ‘시150:3-5에는 왜 이렇게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가?’ 시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다양한 악기를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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