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4:16)

 

AC.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사랑의 신앙의 선과 분리되는 걸 의미한다는 건 14절에 관한 설명(AC.387)을 보시기 바랍니다. ‘놋 땅에 거주하더니’(dwell in the land of Nod)가 진리와 선의 바깥을 의미한다는 건, ‘놋’(Nod)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면 분명한데, 이 ‘놋’은 ‘피하며 유리하는 자’(a wanderer and a fugitive)가 되는 것이며,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건 진리와 선을 다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다룬 내용입니다.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은 지적 마인드 근처(near the intellectual mind), 전에 사랑이 다스렸던 곳이며, 또 래셔널 마인드 근처(near the rational mind), 전에 체어리티가 다스렸던 곳이라는 것은 ‘에덴 동쪽’(the east of Eden)의 의미, 곧 ‘동쪽’(the east)은 주님을, ‘에덴’(Eden)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o “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that to “dwell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and that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That “toward the east of 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of Eden,” namely, that “the 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내적 세계인 영계에서는 마인드, 사랑, 체어리티 같은 추상 개념들이 마치 우리가 이 지상에서 자연계 어떤 걸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듯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무슨 근처, 뭐 했던 곳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에덴, 동쪽, , 성읍, 추방, 거주, 방황 등 이 모든 것은 창세기를 비롯, ‘말씀에서는 영적 지리(spiritual geography)입니다.

 

의지(the will)와 이해(the understanding)로 구성되는 마인드가, 태고교회 사람들의 경우에는 하나였습니다. 의지가 모든 것의 전부였고, 이해는 의지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지에 속한 사랑과 이해에 속한 신앙 사이에 아무런 구분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사랑은 모든 것의 전부였고, 신앙은 사랑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Cain)이라 하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 의지는 더 이상 다스릴 수 없게 되었고, 그런 마인드에서는 반대로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다스렸기 때문에, 그는 ‘에덴 동쪽에 거주하였다’(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하는 것입니다. 방금 보신 것처럼, 인류의 유익을 위해 보전될 수 있도록 신앙을 구별하신 것이지요. ‘가인에게 표를 주신’(had a mark set upon it) 것입니다.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 a mark set upon 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기 5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해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라는 말은 이미 앞 절에서 설명되었듯이, 신앙이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의 선과 분리되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놋 땅에 거주하더니(dwell in the land of Nod)라는 표현은, 진리와 선의 영역 안이 아니라 그 ‘바깥에 머무는 상태’, 곧 방황과 불안정의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 이유는 이 ‘(Nod)이라는 말 자체가 ‘방랑자’와 ‘도망자’를 뜻하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 표현은 참과 선을 상실한 상태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가인이 ‘에덴의 동쪽’에 거하였다는 말은, 이 신앙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멀리 버려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성적 영역’, 곧 이전에 사랑이 다스리던 자리와 가까운 곳에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하나였고, 의지가 모든 것이었으며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때는 사랑이 전부였고,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기 때문에 사랑과 신앙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가인으로 상징되는 상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이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다스리지 못하고, 대신 이해가, 다시 말해 ‘사랑 대신 신앙이 마음의 중심에 자리’하게 됩니다. 가인이 에덴에서 멀어지지 않고 ‘에덴의 동쪽’에 머문 것으로 묘사하는 이유가 이것이며, 이를 통해 신앙이 여전히 사랑과 가까운 지성적 영역에 보존되었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표가 주어진 이유를 다시 상기시키는데, 그것은 이렇게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인류의 거듭남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구별되어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398은, 사랑이 떠난 뒤에도 신앙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인간 지성의 영역 안에서 주님의 섭리에 따라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구원의 길이 아직 닫히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AC.399, 창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AC.399-403)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bygrace.kr

 

AC.397,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AC.397-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 다음 말씀들, 곧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4:16)

 

AC.397

 

다음 말씀들, 곧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신앙이 사랑의 신앙의 선(the good of the faith of love)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놋 땅에 거주하더니’(he dwelt in the land of Nod)는 진리와 선의 바깥(outside of truth and good)을,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은 지적 마인드 근처(near the intellectual mind), 전에 사랑이 다스렸던 곳을 각각 의미합니다. By the words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is signified that faith was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he dwelt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toward the east of Eden” i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reigned before.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라는 표현을,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곧 체어리티의 선과 분리된 상태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떠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사랑을 버림으로써 주님의 자비와 선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게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어서 ‘놋 땅에 거주하더니(he dwelt in the land of Nod)라는 말은, 신앙이 더 이상 진리와 선의 영역 안에 있지 않고 그 밖에 머무르게 되었음을 뜻하는데, 놋 땅은 방황과 불안정, 곧 ‘참과 선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에덴 동쪽, 곧 ‘에덴의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에 거했다는 표현은, 신앙이 완전히 멀리 떠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성적 영역’, 곧 과거에 사랑이 다스리던 자리와 가까운 위치에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장차 다시 사랑과 결합될 가능성을 남겨 두셨다는 섭리의 표현입니다.

 

 

 

AC.398,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사랑의 신앙의 선과 분리되는 걸 의미한다는 건 14절에 관한

bygrace.kr

 

AC.396, 창4:15,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 ‘가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6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의 의미는, 가인 신앙이 보존될 수 있도록, 주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구별의 수단이 될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주시는 ‘표’(mark)와, ‘표를 주사’(setting a mark)의 의미를 보면 분명한데요, 그래서 에스겔에 보면, That “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mark,” and of “setting a mark” on anyone, as being a means of distinction. Thus in Ezekiel: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9:4) Jehovah said,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make a mark on (or designate) the foreheads of the men groaning and sighing for all the abominations, (Ezek. 9:4)

 

여기 ‘이마에 표를 그리라’(marking out the foreheads)의 의미는, 그들의 이마에 무슨 표나 선을 그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구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계시록에서도 말씀하시기를 where by “marking out the foreheads,” is not meant a mark or line upon the front part of their heads, but to distinguish them from others. So in John, it is said that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9:4) The locusts should hurt only those men who had not the mark of God on their foreheads, (Rev. 9:4)

 

여기서도 ‘인침’, 즉 표를 받는 것은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lso to have the mark means to be distinguished.

 

[2] 계시록 다른 데도 보면,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13:16)라고 되어 있습니다. And in the same book we read of a “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Rev. 13: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3:16)

 

모세의 책, 관련 내용을 보면, 유대 교회에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 하였는데, 이 역시 같은 걸 표현하는 것입니다. The same thing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binding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concerning which we read in Moses: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6:4, 8) Hear, O Israel, Jehovah our God is one Jehovah; (Deut. 6:4, 8)

 

13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8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11:13, 18) and thou shalt love Jehovah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strength, and thou shalt bind these words for a sign upon thy hand, and they shall be as frontlets between thine eyes. (Deut. 11:13, 18)

 

사랑에 관한 계명을 다른 어떤 계명보다도 더 높이 구별해야 함을 이렇게 표현하였고, 이런 이유로, ‘손목과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의 의미가 확연해지는 것입니다. By this was represented that they should distinguish the commandment respecting love above every other, and hence the signification of “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 becomes manifest.

 

[3] 그래서 이사야에서 So in Isaiah:

 

18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19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66:18, 19) I come to gather all nations and tongues; and they shall come and shall see my glory; and I will set a mark upon them. (Isa. 66:18–19)

 

그리고 시편에서 And in David:

 

16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7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86:16, 17) O turn unto me, and have mercy upon me, give thy strength unto thy servant, and save the son of thy handmaid. Set upon me a mark for good, and they that hate me shall see and be ashamed. (Ps. 86:16–17)

 

이들 여러 구절을 통해서 표의 의미를 이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가인이라고 하는 어떤 특별한 한 사람에게 무슨 눈에 보이는 표를 준 걸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말씀의 속뜻에는 겉 글자의 뜻에 들어있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게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passages the meaning of a mark is now evident. Let no one therefore imagine that any mark was set upon a particular person called Cain, for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contains things quite different from those contained in the sense of the letter.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는 말의 핵심이, 어떤 개인에게 신비한 표식을 새겼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다는 주님의 섭리’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성경에서 ‘(mark)와 ‘표를 주사’라는 표현은 언제나 물리적 표시가 아니라, ‘구별과 식별의 의미’를 지닙니다. 에스겔서에서 예루살렘 가운데서 가증한 일로 탄식하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는 명령은, 실제로 이마에 선을 긋는 행위가 아니라 그들을 다른 자들과 구별하여 보호하겠다는 뜻이었고,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표를 가진 자들이 재앙에서 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씀 역시 같은 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짐승의 표가 손과 이마에 있다고 할 때도, 이는 특정 문양이 아니라 ‘삶의 행위(손)와 생각과 의지(이마)가 무엇에 속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구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징은 이미 모세오경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6:4, 8)라는 가장 큰 계명을 손과 이마에 매라는 명령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몸에 붙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행위와 모든 생각의 중심에 사랑의 계명을 두라’는 영적 명령이었습니다. 이처럼 ‘’란 언제나 주님께 속한 것, 혹은 주님의 질서 안에 보존되어야 할 것을 다른 것들과 분명히 나누어 두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가인에게 주어진 표는 가인을 의롭다 하거나 그의 상태를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구원 섭리 안에서 반드시 보호되어야 할 역할을 지닌 것임을 선언하는 구별의 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어떤 특정 인물 가인의 몸에 표식이 새겨졌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는 언제나 인간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를 다루며, 여기서 ‘가인의 표’는 ‘신앙이 장차 사랑과 다시 결합될 수 있도록 남겨진 보존의 장치’를 가리킵니다. 결국 AC.396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어떤 요소를 제거하시기 전에 먼저 그것을 구별하여 보호하시며, 그 구별을 통해 구원의 길을 끝까지 열어두신다는 깊은 신적 질서를 밝히고 있습니다.

 

 

 

AC.397,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AC.397-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 다음 말씀들, 곧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bygrace.kr

 

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 ‘가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