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5:6)

 

AC.497

 

‘셋’(Seth)이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인 두 번째 교회라는 사실은, 셋에 관해 위에서 말한 내용(3)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That “Seth”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may appear from what was said above concerning Seth (verse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3)

 

교회들의 경우는, 우리가 말해 온 바와 같이, 위에서 언급한 원인으로 인해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진적으로, 그리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쇠퇴하게 됩니다. The case with churches, as we have said, is that by degrees, and in process of time, they decrease as to essentials, owing to the cause above mentioned.

 

 

해설

 

이 글은 AC.496에서 제시된 진술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원리를 보다 일반적인 교회론으로 확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이 태고교회의 두 번째 교회이며, 부모 교회보다 덜 천적이라는 점을 새로운 주장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며, 이제 그것을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보편 원리’로 정식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라는 규정입니다. 이는 교회의 변화가 흑백 논리로 설명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셋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로 전락한 것도 아닙니다. 본질은 유지되었으되, 그 강도와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다시 말해,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퍼셉션이 작동하는 깊이와 즉시성이 부모 교회에 비해서 좀 약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개인의 타락이나 도덕적 실패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들의 경우는 점진적으로 쇠퇴한다’고 말하며, 이 쇠퇴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필연적 과정’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 특히 유전적 악의 축적이라는 원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처음에는 순수한 상태로 시작하지만, 세대를 거치며 그 순수함을 유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이 ‘점진적 쇠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쇠퇴는 급격한 붕괴나 단번의 배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미세한 변화들이 누적되면서, 본질적인 것들이 조금씩 약화 되는 식이었지요. 사랑이 중심이던 상태에서 신앙이 점점 더 두드러지게 되고, 그렇게 해서 퍼셉션이 처음처럼 즉각적이고 또렷하기보다는 덜 즉각적, 덜 또렷해지는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지요. 셋의 교회는 바로 이런 변화의 초기 단계에 해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쇠퇴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들(essentials)이란 교회의 생명, 곧 주님과의 직접적인 연결과 퍼셉션을 말합니다. 외적 형식이나 제도는 여전히 유지될 수 있지만, 본질적인 것이 약화 될 때, 교회는 이미 쇠퇴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쇠퇴는 외적 변화보다 ‘내적 생명의 변화’로 판단되어야 합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역사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모든 교회의 운명을 암시합니다. 태고교회 다음에 등장하는 교회들 역시, 동일한 원리에 따라 시작과 전성기, 그리고 쇠퇴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차이는 형태와 정도일 뿐, 그 구조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셋의 교회는 단순한 역사적 사례가 아니라, ‘교회 변화의 전형’을 보여 주는 그 첫 사례가 됩니다.

 

이 말씀은 매우 현실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의 쇠퇴를 특정 사건이나 외부 환경 탓으로만 돌리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깊은 원인을 제시합니다. 교회의 쇠퇴는 내부에서, 그것도 본질적인 차원에서 서서히 진행됩니다. 퍼셉션이 약화되고, 사랑이 덜 중심이 될 때, 교회는 이미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진술은 절망적인 숙명론으로 흐르지는 않습니다. 쇠퇴가 점진적이라는 말은, ‘회복 역시 단계적으로 가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셋의 교회가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던 것은,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교회를 단번에 버리지 않으시고, 가능한 한 오래 생명을 유지하도록 인도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초기의 열정과 사랑이 시간이 지나며 변화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다고 그 변화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 속에서도 퍼셉션이 살아 있는지,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셋의 교회는 그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결국 AC.497은 태고교회의 두 번째 단계인 셋의 교회를 통해, 교회의 쇠퇴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단절이나 파멸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본질의 약화’입니다. 이 인식을 가질 때, 우리는 교회의 역사와 오늘의 교회를 보다 차분하고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AC.496, 창5: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 ‘셋’(Seth)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고교회의 부모 교회에 비해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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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5:6)

 

AC.496

 

‘셋’(Seth)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고교회의 부모 교회에 비해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인 두 번째 교회입니다. ‘백오 세에’(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는 앞에서와 같이 시간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에노스를 낳았고’(begat Enosh)는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고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졌음을 의미합니다. Seth,” as was observed,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that he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signifies, as before, times and states;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that was called “Enosh.”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내부 분화를 매우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요약합니다. ‘(Seth)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 내부에서 나타난 ‘두 번째 교회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는 이 교회를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라고 규정함으로써, 단절이 아니라 연속 속의 변화임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는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를 거치며 여러 상태로 분화된 것입니다.

 

덜 천적(less celestial)이라는 표현은 퇴보나 타락을 곧바로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랑이 중심이던 상태에서, 사랑과 결합한 신앙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 방향으로의 이동을 가리킵니다. 즉, 셋의 교회는 여전히 퍼셉션을 지니고 있었지만,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처럼 전적으로 사랑에서 즉각적으로 퍼셉션하는 단계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 안에 속하며, 그 생명은 퍼셉션에 있었습니다.

 

백오 세(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라는 표현은 앞서 반복적으로 확립된 원리에 따르면 연대적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고, 대신 셋의 교회가 ‘어떤 시간과 상태를 거쳐 유지되었는지’를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숫자는 그 상태의 성격을 암시하지만, 핵심은 길이가 아니라 질, 곧 숫자의 겉뜻에서 물러날 때 보이는 속뜻입니다. 셋의 교회는 일정한 기간 동안 고유한 상태를 유지했고, 그 상태 안에서 다음 교회가 준비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셋은 에노스를 낳았고(Seth begat Enosh)는 셋의 교회로부터 또 다른 교회가 출현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낳다’는 말은 생물학적 출산이 아니라, ‘영적 전이와 계승’을 뜻합니다. 한 교회의 상태 안에서 형성된 진리와 선의 퍼셉션이 다음 교회 상태로 이어지는 과정을, 성경은 출산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에노스(Enosh)라 하는 이 다음 교회는 셋의 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 자체가 상태의 변화와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변화 역시 단절이 아니라 연속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점차 다른 형태로 표현되며, 각 단계마다 새로운 교회 상태를 형성합니다. 이처럼 창세기 5장의 족보는,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 ‘영적 계보’를 보여 줍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단순한 붕괴로 이해하는 관점을 교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쇠퇴를 ‘갑작스러운 상실’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와 이동’으로 설명합니다. 셋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부모 교회보다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안에 있었고, 그 관계는 퍼셉션으로 유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변화는 타락이라기보다, 다른 형태의 질서로의 이동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신앙 여정에도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신앙의 상태는 동일하게 유지되지 않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사랑이 중심이 되고, 어떤 시기에는 신앙의 이해가 더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태의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 속에서도 ‘퍼셉션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셋이라는 교회가 에노스라는 교회를 낳았다는 말은, 살아 있는 신앙은 언제나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는 교회는 자신 안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한 토대를 마련합니다. 반대로 퍼셉션이 사라진 교회는 더 이상 ‘낳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5장의 족보가 단순한 과거 기록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와 신앙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이유입니다.

 

결국 AC.496은 태고교회의 연속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셋은 태고교회의 두 번째 교회로서, 부모 교회와 다른 성격을 지녔지만, 여전히 같은 생명의 흐름 안에 있었습니다. 그 흐름의 핵심은 퍼셉션이며, 그 퍼셉션이 이어지는 한, 교회는 형태를 달리하며 계속해서 ‘낳고’ 이어집니다.

 

 

 

AC.495, 창5:5, '교회의 쇠퇴와 퍼셉션의 관계'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 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데요, 왜냐하면 태고교회는 퍼셉션의 교회였고, 그런 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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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5:5)

 

AC.495

 

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데요, 왜냐하면 태고교회는 퍼셉션의 교회였고, 그런 교회는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퍼셉션은, 그러니까 곧 그 구성원들이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주님으로부터, 마치 지금도 천사들이 천국에서 퍼셉션으로 아는 것처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민 사회의 선과 진리가 무엇인가를 본인 힘으로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선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진리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각, 곧 퍼셉션으로 아는 것입니다. 삶으로 확증된 신앙 고백을 통해,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볼 수 있습니다. 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 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 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쇠퇴를 설명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태고교회가 왜 쇠퇴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한 서론이 아니라, 태고교회 이해의 관문과도 같은 선언입니다. 태고교회는 제도나 교리의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태고교회를 이상적으로 그리거나 낭만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교회의 본질이 오늘날의 신앙 형태와는 질적으로 달랐음을 분명히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주로 가르침과 교리, 학습과 이해를 통해 진리를 접하지만, 태고교회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기 이전에,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하는,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으로 직접 아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퍼셉션은 감정이나 직관과 같은 모호한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즉각적으로 아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여 선과 진리를 정하지 않았고, 사회적 합의나 관습을 기준으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과의 내적 연결 안에서,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직접 알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제시됩니다. 퍼셉션의 대상은 시민 사회의 선과 진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정치적 정의나 사회적 윤리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깊은 차원, 곧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선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진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주님께 속한 선인지,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인지를 살아 있는 현실로 퍼셉션, 즉 주님으로 말미암는 퍼셉션으로 직접 알았습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천사들의 상태에 비유됩니다. 천사들은 선과 진리를 추론하거나 토론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그것들을 곧바로 인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천사적 상태와 유사한 방식으로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교회’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퍼셉션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그는 그 기준을 ‘삶으로 확증된 신앙 고백’에서 찾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퍼셉션은 말이나 지식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이 실제 삶과 일치하는지를 보면, 그 안에 퍼셉션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퍼셉션은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사람은 그것들을 단순히 알고 끝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아 냅니다. 태고교회의 쇠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대를 거치며 퍼셉션은 점차 약화되었고, 신앙은 점점 더 말과 형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 고백이 줄어들었고, 퍼셉션의 교회는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오늘날의 교회를 향해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신앙을 얼마나 많이 말하고,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 이전에, 그것을 얼마나 살아 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퍼셉션은 과거의 신화적 능력이 아니라,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여전히 가능한 상태입니다. 다만 그 방식은 태고교회와 다를 뿐입니다.

 

결국 AC.495는 태고교회의 쇠퇴를 설명하는 동시에, 모든 시대의 교회를 향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제도나 전통, 지식 축적에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살아 내는 삶’에 있습니다. 이 기준을 잃을 때, 교회는 겉으로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본질에서는 이미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AC.494, 창5:5, '죽었더라', 해당 교회의 퍼셉션이 끝난 상태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 그가 ‘죽었다’(died)는 말의 의미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임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집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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