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5, AC.492-495 심화

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룹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물려받으며,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반복한 악을 거기에 더합니다. 반복된 악은 점차 그 사람의 본성처럼 되고, 이렇게 형성된 성향이 다시 자녀와 후손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세대가 계속되면서 유전적 악이 축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내가 조상의 악을 물려받았다면 조상의 죄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하는가?’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히 ‘아니다’입니다. 유전되는 것과 개인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유전적 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악 자체 때문에 책망받지는 않습니다. AC.4563은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유전적 악은 사람이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그것을 실제로 행하기 전까지는 숨어 있으며, ‘주님의 자비로 아무도 유전적인 것 때문에 책망받지 않고 실제적인 것 때문에 책망받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악한 성향과 내가 자유롭게 받아들여 실제로 행한 악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쉽게 분노하는 성향, 지나친 자기중심성, 물질에 대한 강한 집착과 같은 기울어짐을 물려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죄는 아닙니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의도적으로 즐기고 행할 때 비로소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이 됩니다. 그러므로 유전적 악은 우리에게 주어진 출발 조건에 가깝고, 실제적인 악은 그 조건 안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함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만든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아담 한 사람의 범죄에서 모든 인류의 유전적 악이 시작되었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AC.313은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적 악이 최초의 한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각 사람이 실제 죄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에 악을 더하고, 그것이 자녀에게 전달되며, 다시 그 자녀가 자신의 실제 악을 더함으로써 후손에게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인류의 유전적 악은 한 조상의 한 번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법적인 죄책으로 전가되는 구조라기보다, 수많은 세대의 실제 삶에서 형성된 악의 성향이 계속 축적되어 내려오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조상의 죄가 내게 유전된다’는 말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조상이 범한 구체적인 죄의 행위와 그 죄책이 그대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달되는 것은 그 악에서 형성된 기울어짐입니다. 나는 그것을 선택하여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안에서 일어날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행할 것인지, 아니면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물리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나의 자유와 책임의 영역으로 들어옵니다. 이 때문에 유전적 악의 교리는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도 않고, 반대로 조상의 책임을 후손에게 떠넘기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AC.494가 말하는 ‘유전적 악의 증가’는 왜 교회의 쇠퇴와 연결될까요? 한 세대가 악을 반복하여 그것을 본성처럼 만들면 다음 세대는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강해진 악의 기울어짐을 출발점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그것을 다시 실제 악으로 만들고 새로운 악을 더한다면 그 흐름은 더욱 강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세대를 거쳐 일어났고, 그 결과 처음의 온전한 퍼셉션이 점차 변질되어 마침내 소멸하게 되었다는 것이 AC.494의 설명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선택한 악이 세대를 지나며 누적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의 마지막은 결코 숙명론이 아닙니다. AC.494는 유전적 악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감소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악의 성향이 가문과 세대를 따라 내려왔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사람이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에 맞서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바로 이 오래된 악의 흐름이 한 사람 안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새 질서를 세워 가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부모의 책임도 새롭게 보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완전한 상태만을 물려줄 수 없습니다. 자신도 여러 세대로부터 받은 유전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부모에게 절망이나 과도한 죄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서 발견되는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반복하여 굳히느냐, 아니면 주님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거듭남의 길을 걷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허용함으로써 나를 통하여 계속되던 악의 흐름이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어지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유전적 악의 교리는 ‘나는 원래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는 운명론도 아니고, ‘조상이 죄를 지었으니 나도 그 죄에 책임이 있다’는 집단적 죄책의 교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현실을 매우 깊이 인정하면서도 자유와 거듭남의 가능성을 동시에 붙듭니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많은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성향을 자신의 삶으로 확정하지 않고 주님께 돌이킬 때, 세대를 지나며 축적된 악의 힘은 거듭남 가운데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494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 세대의 삶은 그 세대에서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반복하여 자신의 본성으로 만드는 것은 다음 세대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역사가 세대를 넘어간다고 해서 주님의 역사가 거기에서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유전적 악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며, 거듭남은 바로 그 사랑이 한 사람의 자유 안에서 악의 오래된 흐름을 꺾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세워 가시는 역사입니다. (AC.492-495 심화 1)

 

 

 

창5:5, AC.492-495 심화 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창5:5, AC.492-495 심화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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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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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6-491 심화

1,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면 천사들은 변화와 영원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AC.488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선 말을 합니다. 천사들은 지상에서와 같은 시간을 알지 못하며, 날들과 해들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오직 ‘상태와 그 변화’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즉시 질문이 생깁니다. ‘시간이 없다면 천국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나고 다른 일이 나중에 일어나는 순서도 없는가? 천사가 배우고 성장하고 상태가 변한다면 그것 자체가 결국 시간 아닌가? 그리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는 말을 ‘천국에는 변화나 연속성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HH) 154-161은 아예 한 장 전체의 제목을 ‘천국에서 천사들의 상태 변화’로 두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총명의 상태가 계속 변화합니다. 어떤 때에는 사랑과 지혜가 더 충만하고 밝은 상태에 있고, 어떤 때에는 상대적으로 덜 충만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얼어붙어 있는 정지된 세계가 아닙니다. 천사들에게도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이어지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상의 시간과 무엇이 다를까요? HH.162-169는 ‘천국의 시간’을 따로 설명하면서 그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지상에서 우리의 시간은 해와 지구의 운동을 바탕으로 해, 달, 주, 날, 시간 등 일정한 단위로 측정됩니다. 그러나 천국의 해는 그런 방식으로 날과 해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몇 시’, ‘며칠 후’, ‘몇 년 전’이라는 자연적 시간의 관념으로 삶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지상의 시간에 해당하는 것은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없다’는 것은 ‘전후의 연속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연속성을 지상의 시계와 달력의 단위로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아주 희미하게나마 경험합니다. 즐겁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두 시간이 마치 몇 분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고통이나 불안 속에서 기다릴 때에는 몇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객관적인 시간은 같지만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의 길이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험을 시간의 근원이 상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로 설명합니다(HH.168). 천국에서는 자연적 시간의 외적 척도가 사라지고 그 근원에 해당하는 상태와 그 변화가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에게도 ‘먼저’와 ‘나중’에 해당하는 질서는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시계의 숫자가 앞뒤로 배열되는 방식이 아니라 상태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질서입니다. AC.4901도 영들과 천사들의 생명이 ‘시간 안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사람처럼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생명의 상태들’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는 표현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천국에는 지상과 같은 자연적 시간이 없으며, 그에 대응하는 상태의 연속과 변화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AC.488에서 왜 ‘날’과 ‘해’가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날’, ‘해’, ‘오늘’, ‘내일’, ‘어제’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시간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러한 표현에서 그 시간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를 지각합니다(HH.165-166). 아침과 봄은 사랑과 지혜가 새롭게 밝아지는 상태를, 저녁과 가을은 다른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말씀의 문자에 있는 시간 표현이 천국에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던 영적인 실재인 ‘상태’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HH.167은 천사들이 ‘영원’을 사람과 다르게 이해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흔히 영원을 ‘끝없이 계속되는 시간’으로 상상합니다. 지금부터 1억 년, 1조 년,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숫자를 붙여도 그것은 여전히 시간의 연장일 뿐입니다. 천사들은 영원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한한 상태’라는 관점에서 지각합니다.

 

AC.1382도 같은 점을 매우 인상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조차 끝없는 시간으로 상상하기 쉽지만, 천사들에게는 수천 년조차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긴 시간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전혀 단절된 것으로 경험하지 않으며, 그들의 현재 안에는 주님의 영원과 무한에 대한 지각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영원한 생명은 ‘끝없이 오래 버텨야 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새로운 사랑과 지혜의 상태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천사가 ‘영원’을 무한한 상태로 지각한다고 해서 천사가 무한한 존재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한과 영원은 본래 주님께 속합니다. 천사들은 유한한 피조물이며, 다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끝없이 받아들이면서 계속해서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영원은 천사가 어느 순간 완성되어 더 이상 아무 변화도 없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선과 진리를 유한한 존재로서 계속 받아들이며 더 깊은 사랑과 지혜로 나아가는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창5의 ‘날들과 해들’로 돌아오면 AC.486-491의 의도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창5가 ‘팔백 년’, ‘구백삼십 년’과 같은 숫자를 기록할 때 속뜻의 중심은 단순히 지상의 달력으로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AC.487-488이 강조하는 것은 그 ‘날들과 해들’ 안에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지상의 독자는 시간을 읽지만, 천국은 그 시간 안에 담긴 상태를 읽습니다. 이것이 창5의 족보를 단순한 연대 기록을 넘어 교회의 내적 역사로 읽게 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결국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는 말은 천국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천국에는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끊임없는 상태 변화가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를 해와 달과 시계와 달력으로 재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몇 년을 살았는가’를 먼저 묻지만 천국의 관점에서는 ‘어떤 상태를 지나왔으며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남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꾸어 줍니다. 주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신앙생활을 ‘몇 년 했는가’가 아닙니다. 그 세월 동안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던 상태에서 얼마나 주님과 이웃을 향하는 상태로 옮겨졌는지가 중요합니다. 지상에서 우리는 날과 해를 지나지만, 주님은 그 날과 해 안에서 우리의 상태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날들과 해들’은 단순히 오래된 사람들의 기이하게 긴 수명을 기록한 표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실제로 이루어 가시는 것은 ‘시간의 축적’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 곧 거듭남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486-491 심화 1)

 

 

 

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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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1-485 심화

2,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왜 서로 다른 교회인가?’

 

창4:25에도 ‘셋’이 나오고 창5:3에도 ‘셋’이 나옵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당연히 동일한 셋이며, 창5는 창4 끝에 등장한 셋의 후손을 계속 기록하는 족보로 보입니다. 그런데 AC.485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셋은 앞에서 묘사된 셋(창4:25)과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창4와 창5에 각각 등장하는 ‘에녹’과 ‘라멕’ 역시 같은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교회들이라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이름을 사용했을까요? AC.485의 답은 간단하면서도 중요합니다.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진 교회들이 같은 이름으로 일컬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이름이 같다는 사실 자체가 속뜻에서 동일한 교회임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 창4의 라멕과 창5의 라멕이 서로 다른 교회인 것처럼, 창4의 셋과 창5의 셋도 서로 다른 교회입니다.

 

AC.485가 직접 참조하라고 한 AC.435를 보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셋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창4의 장 전체 개요에서도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을 주셨으며 그것을 ‘셋’이라 한다고 요약합니다.

 

그러나 창5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AC.435는 바로 다음 장인 창5:1-4에서 다시 ‘사람과 그의 아내’와 ‘셋을 낳음’이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첫 후대’가 의미된다고 명시합니다. 같은 사람과 같은 출생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서로 다른 것을 다루기 때문에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창1과 창2에서 사람의 창조가 반복되는 것과 비교합니다. 창1에서는 영적 인간의 창조를, 창2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므로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지만 속뜻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제 창4와 창5의 구조가 상당히 흥미로워집니다. AC.337은 창4 전체가 태고교회의 타락, 곧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룬다고 설명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고, 그로부터 여러 이단적 계열이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창4 후반에는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 교회’가 일어나며, 마지막에는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 ‘셋’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창5의 장 전체 개요는 전혀 다른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AC.460은 이 장이 ‘태고교회가 연속되는 세대들을 통하여 홍수에 거의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다룬다고 밝힙니다. 이어 AC.461은 태고교회 자체를 ‘사람’이라 하고, AC.462는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는 않았던 두 번째 교회를 ‘셋’이라 하며, 이후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교회들이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4와 창5를 속뜻에서 하나의 단순한 직선 계보로 이어 붙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창4는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발생하면서 생긴 가인 계열의 이단과 분파, 그리고 그 흐름 가운데 새 교회가 일어나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창5는 다시 태고교회 자체와 그 첫 후대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교회가 노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두 장 모두 셋, 에녹, 라멕이라는 이름을 포함하면서도 그 이름들이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창4의 교회 계열과 창5의 교회 계열이 같은 홍수 이전 시대에 서로 병행하여 존재했던 것인가?’ 이것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가설입니다. 특히 창4가 태고교회에서 생겨난 이단과 분파들을 다루고, 창5가 태고교회 자체의 후대를 따로 추적한다는 설명을 함께 놓으면, 한 계열이 나타났다고 해서 다른 계열이 곧바로 사라졌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AC.337 자체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을 태고교회에서 생겨난 ‘이단과 분파들’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가지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합니다. AC.435와 AC.485가 직접 확정하는 것은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이며,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교회를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AC.337과 창5의 개요가 보여 주는 것은 두 장이 서로 다른 교회적 흐름을 추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창4의 각 교회와 창5의 각 교회를 하나씩 대응시켜 ‘이 교회와 저 교회가 정확히 같은 시기에 존재했다’고 연대기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병행’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홍수 이전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서로 구별되는 여러 교회적 계열과 분파가 전개되었다’는 의미로 제한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4와 창5를 문자적 족보처럼 한 줄로만 읽으면 ‘가인 계열 이후에 셋 계열이 시작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누가 누구 다음에 태어났는가’보다 ‘태고교회로부터 어떤 교회적 상태와 교리가 갈라져 나오고, 어떤 것은 쇠퇴하며, 어떤 것은 보존되어 다음 교회로 이어졌는가’가 중심입니다. 창4와 창5는 동일한 홍수 이전 세계를 서로 다른 교회적 관점에서 비추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에 관한 중요한 의미도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과 같은 이단이 생겨났다고 해서 주님께서 교회 전체를 즉시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흐름이 한쪽에서 전개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다른 형태의 교회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창4의 마지막에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고, 창5에서는 태고교회 자체의 후대가 노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의 타락보다 주님의 보존하시는 섭리가 더 깊고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같은 교회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분명합니다. ‘아닙니다.’ AC.485가 직접 그렇게 밝힙니다. 그러나 그 답은 더 큰 질문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왜 말씀은 서로 다른 교회에 같은 이름을 사용했으며, 왜 창4와 창5에 셋, 에녹, 라멕이라는 이름들이 반복되는가? 그것은 창세기 초반의 계보가 단순한 인물 명단이 아니라, 태고교회 시대에 나타난 여러 교회와 교리와 내적 상태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창4와 창5는 서로 중복되는 족보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쇠퇴와 분화, 보존과 계승이라는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 주는 두 개의 창이 됩니다. (AC.481-485 심화 2)

 

 

 

창5:3, AC.485,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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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1-485 심화 1,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랐는가?’

창5:3, AC.481-485 심화1,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랐는가?’ AC.484는 셋 교회를 가리켜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중요한 차이를 덧붙입니다.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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