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3:22)

 

AC.304

 

이 모든 것으로부터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라는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생명나무에서 따 먹는다(take of the tree of lives and eat)는 것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고, 더 나아가 그것들을 인정하는 것까지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생명들(lives)이 복수형으로 쓰인 것은 사랑과 신앙을 뜻하기 때문이며, ‘먹는다(eat)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안다를 의미합니다. ‘영생한다(live to eternity)는 것은 육체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영원한 정죄 가운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죽은 상태에 있는(dead)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생명이 끝난 뒤 존재가 소멸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죽음(death)은 정죄와 지옥을 의미합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에스겔에서도 살다(live)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 is meant by the words,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To “take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is to know even so as to acknowledge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for “lives” in the plural denote love and faith, and to “eat” signifies here as before, to know. To “live to eternity” is not to live in the body to eternity, but to live after death in eternal damnation. A man who is “dead” is not so called because he is to die after the life of the body, but because he will live a life of death, for “death” is damnation and hell. The expression to “live,” is used with a similar signification by Ezekiel:

 

18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은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는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19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13:18, 19) Ye hunt souls for my people, and save souls alive for yourselves, and ye have profaned me among my people, to slay souls that will not die, and to make souls live that will not live (Ezek. 13:18–19).

 

 

해설

 

앞글인 AC.303에서는 주님께서 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셨는지가 설명되었다면, 본문인 AC.304에서는 ‘영생한다’는 말의 참뜻이 무엇인지가 밝혀집니다. 사람은 흔히 ‘영원히 산다’는 표현을 긍정적인 의미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도 영원히 살고, 지옥에서도 영원히 삽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영생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blessed eternal life)이 아니라, 영원한 정죄의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생명나무에서 먹는다’는 표현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생명들(lives)이 복수형으로 쓰인 것은 말씀에서 참된 생명이 사랑과 신앙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나무를 먹는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가장 깊은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그러한 거룩한 진리를 받아들인 뒤에도 악한 사랑을 버리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profanation의 대상이 됩니다. 이미 인정한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부정하게 되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한 사람 안에 뒤섞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앞글, 그리고 뒤에 나오는 24절에서 주님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이유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본문의 ‘영원히 산다’는 표현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존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삶이 주님과 함께하는 생명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사랑과 거짓 가운데 머무는 ‘죽음의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란 존재가 사라진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지옥의 생명을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죽음’의 개념을 보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사건을 의미하지만, 말씀의 내적 의미로 죽음은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생명이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신앙 안에서 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존재의 유무가 아니라, 어떤 생명을 살아가느냐의 차이입니다.

 

이 때문에 에스겔의 말씀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뒤바꾸어, 주님께 속한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거짓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짓된 안전을 주는 일을 의미합니다. 곧 생명과 죽음의 기준을 사람의 판단으로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AC.304는 생명과 죽음의 참된 의미를 다시 정의합니다. 참된 생명은 단순히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신앙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된 사랑 가운데 영원히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것은 사람에게 생명을 빼앗으시기 위함이 아니라, 가장 거룩한 진리가 profanation 되어 영원한 죽음의 삶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으시기 위한 자비의 섭리였음을 본문은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심화

 

1. ‘13:18-19

 

 

AC.304, 심화 1, ‘겔13:18-19’

AC.304.심화 1. ‘겔13:18-19’ 18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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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5, 창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창3:23) AC.305 ‘에덴동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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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3, 창3:22, ‘AC.301-302의 결론’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3 사람은 자신이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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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3.심화

 

9. ‘내 이야기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질문이 그렇게 절실하고 구체적이었던 것이군요. 목사님께서 자신의 지난 삶을 ‘오만하고 교만하며, 부끄럽고 비겁했다’ 고백하시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예전의 그 삶을 사랑하고 붙들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아닙니다. 사람은 아직 악을 사랑하면서 그 악을 진심으로 수치스러워하지 못합니다. 과거를 미화하지 않고 아파하며, 주님의 자비 없이는 자신에게 아무 소망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회개의 중요한 열매입니다.

 

물론 제가 목사님의 영원한 상태를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적어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따라 말하면, 주님은 목사님의 인생을 ‘90은 실패, 10은 회심’이라는 비율로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오랜 세월 속에서 무엇을 허용하시고, 무엇을 억제하시고, 어떤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마침내 어떻게 목사님을 돌이키셨는지를 모두 함께 보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마지막 10에 불과해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그 10을 위해 평생을 이끌어 오신 것일 수 있습니다.

 

참된 회심은 과거가 없었던 일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를 이전보다 더 분명히 보고, 더 이상 그것을 자기 의로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 앞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상태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계속 아프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정죄의 증거는 아닙니다. 때로는 그 아픔이 사람을 겸손하게 지키고, 다시 proprium을 의지하지 않게 하며, 타인의 연약함을 더 불쌍히 여기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악 자체를 선으로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돌이킨 사람의 통회와 경험을 선한 쓰임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회심 이후 단지 마음속으로 후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말씀을 붙들고 번역하고 해설하며, 예배와 설교를 통해 주님을 섬기는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이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을 산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참된 회심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삶의 방향을 바꾸는데, 목사님의 현재 삶에는 그 방향 전환의 흔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과거의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더 의지하게 된 것도 그 흔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께서 지금 붙드실 말씀은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잘못 살았으니 늦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돌이키셨다’는 사실입니다. 늦게 돌아온 사람도 실제로 돌아왔다면 돌아온 사람입니다. 저녁 무렵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도 주인의 선함 안에 있었고, 탕자도 먼 나라에서 허비한 세월보다 아버지께 돌아온 현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을 값싼 위로나 자동적인 구원 선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주님의 자비를 인간의 시간 계산보다 작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목사님께서 과거를 생각하며 느끼는 부끄러움은 이제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절망으로 향할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겸손으로 향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을 끝없이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미워하고 주님을 따라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목사님이 과거의 무덤 앞에 평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무덤에서 나와 남은 날들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90 : 10’이라는 숫자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씀이 더 먼저 떠오릅니다. 목사님의 소망은 회심의 분량이나 남은 세월의 길이에 있지 않고, 돌이키게 하신 주님의 자비와 그 자비 안에서 오늘도 계속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과거가 크더라도 주님은 더 크십니다. 그리고 진실로 주님께 돌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구원을 스스로 확정하는 오만도,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판결하는 절망도 아니라, 날마다 겸손히 ‘주님, 저는 주님의 자비만 의지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걷는 것입니다.

 

 

 

AC.303, 심화 8, ‘90 : 10’

AC.303.심화 8. ‘90 : 10’ ‘삶’은 돌아보면 참 오만, 교만하고, 부끄럽고 비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와 자비로 돌이켜 ‘회개’했습니다. 이 회개는 참된 회개, 곧 ‘회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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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3.심화

 

8. ‘90 : 10

 

은 돌아보면 참 오만, 교만하고, 부끄럽고 비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와 자비로 돌이켜 회개했습니다. 이 회개는 참된 회개,  회심이었습니다. 전체 비율로는,  : 회심 = 90 : 10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부끄러운 삶으로 보낸 시간이 압도적인데, 전체 삶으로 평가된다면... 과연 구원 받을 수 있나요?

 

 

이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 질문 때문에 ‘삶을 시간의 길이로 재지 않는다’ 여러 곳에서 강조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삶의 대부분은 오만했고 교만했으며, 부끄럽고 비겁했다. 비로소 말년에 주님의 은혜로 돌이켜 참된 회개와 회심을 경험했지만, 전체를 따지면 죄 가운데 보낸 시간이 훨씬 길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결국 내 삶 전체를 보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께서는 사람의 삶을 단순히 시간의 길이나 선악의 횟수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란 단순히 평생 동안 행한 행동들의 합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결국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의 기준은 ‘얼마나 오랫동안 악 가운데 있었는가’가 아니라, ‘죽음을 맞이할 때 그의 의지와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행위의 통계가 아니라 사랑의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참된 회개와 회심이란 단순히 죄를 후회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중심 사랑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위해 살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을 향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proprium을 신뢰하던 사람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비록 인생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어났더라도, 사람 전체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에는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remains)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리메인스는 평생 동안 사람 안에 조용히 간직되어 있다가, 참된 회개가 일어날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말년의 회심은 갑자기 새로운 무엇이 생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보존해 오신 선과 진리가 마침내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과거보다 현재의 상태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물론 과거의 악은 흔적을 남깁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실로 거듭나기 시작하면, 그 과거는 더 이상 그의 중심이 아닙니다. 악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지만, 더 이상 그의 삶을 지배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과거의 죄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사람의 중심이 아니게 되도록 새 사랑을 심어 주십니다.

 

이 점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보낸 세월을 일일이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보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과거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시간의 길이를 재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 : 회심 = 90 : 10’이라는 계산은 인간적인 계산일 수는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심판론은 그와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주님께서는 90의 악과 10의 선을 저울에 올려 어느 쪽이 무거운지를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가? 지금 무엇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참된 회심은 과거의 시간을 지우는 마술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 사랑을 바꾸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누구든지 진실로 거듭난다면 주님께서는 그 새로운 삶을 그의 참된 삶으로 인정하신다고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오히려 눅15의 아버지의 말씀이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을 가장 잘 요약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는 ‘너는 평생 대부분을 잘못 살았으니 그 비율대로 대우하겠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현재의 상태를 선언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과거의 시간 비율보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된 현재의 생명과 그 생명이 영원히 지속될 방향에 따라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AC.303, 심화 9, ‘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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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3, 심화 7,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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