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22.심화

 

1. ‘6:25-26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6:25, 26)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merciful unto thee;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Num. 6:25–26).

 

 

이 구절을 AC.222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여호와의 얼굴(the faces of Jehovah)이 자비(mercy), 평화(peace), 사랑(love), 그리고 모든 선(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8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는 구절을 해설하면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주님의 얼굴이 진노와 심판을 의미한다면, 아담과 하와가 숨은 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오히려 정반대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와 평강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그는 민수기 6장의 축복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을 비추신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에게 흘러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태양이 빛을 비추듯이,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보내십니다. 따라서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과 나란히 사용됩니다.

 

또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평강(peace)은 단순한 마음의 안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국의 가장 깊은 상태이며,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질서와 조화가 인간 안에 흘러 들어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은 평강의 근원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3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담과 하와는 진노의 얼굴을 피해 숨은 것이 아닙니다. 자비와 평강의 얼굴을 피해 숨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들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고, 악을 의식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주님의 빛 앞에 서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마치 병든 눈이 햇빛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햇빛 자체는 따뜻하고 생명을 주는 것이지만, 눈에 병이 있으면 그 빛이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와 평화이지만, 악을 의식하는 사람은 그 빛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얼굴(face)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복수형인 ‘얼굴들(faces)입니다. 영어 본문도 ‘his faces’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한 가지 방식이 아니라 무수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이라는 표현을 단순한 외형적 얼굴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드러나는 모든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AC.222에서 민6:25-26을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창3에서 아담과 하와가 피한 ‘여호와의 얼굴’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얼굴은 심판의 얼굴이 아니라 은혜의 얼굴이며, 진노의 얼굴이 아니라 평강의 얼굴입니다.

 

결국 이 축복의 말씀은 창3의 장면을 거꾸로 비추어 줍니다. 아담은 그 얼굴을 피해 숨었지만, 주님은 여전히 그 얼굴을 비추고 계셨습니다. 인간은 도망쳤지만, 주님의 자비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민수기의 축복은 단순한 제사장의 축도가 아니라, 창세기 이후 모든 인류를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마음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는 말씀 속에는, 숨은 아담을 찾아 나서신 주님의 사랑이 이미 담겨 있는 것입니다.

 

 

 

AC.222, 심화 2, ‘시67:1’

AC.222.심화 2. ‘시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시67:1)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Ps. 67:1). 이 구절을 AC.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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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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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2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는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를 두려워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악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대답, 곧 다다음 절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라는 말로부터도 분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낯(the face of Jehovah), 또는 주님의 얼굴(the face of the Lord)은 자비(mercy), 평화(peace), 그리고 모든 선(good)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음의 축복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means to be afraid of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is evident from their reply (verse 10):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The “face of Jehovah,” or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as is clearly evident from the benediction: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6:25, 26)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merciful unto thee;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Num. 6:25–26).

 

또 시편에서, And in David: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67:1)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Ps. 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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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ght of thy faces upon us (Ps. 4:6).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비는 이사야서에서 자기 앞의 사자(the angel of faces)라고도 불립니다. The mercy of the Lord is therefore called the “angel of faces,” in Isaiah: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사63:7-9) I will make mention of the mercies of Jehovah; he hath requited them according to his mercies, and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his mercies; and he became their savior. In all their affliction he was afflicted, and the angel of his faces saved them; in his love and in his pity he redeemed them (Isa. 63:7–9).

 

 

해설

 

AC.222는 창세기 38절의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를 설명하면서, 말씀에서 ‘여호와의 낯(the face of Jehovah)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무서워하여 숨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 구절을 해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주님의 얼굴은 진노나 심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비(mercy), 평화(peace), 사랑(love), 그리고 모든 선(good)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주의 얼굴을 비추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만일 주님의 얼굴이 두려움과 심판 자체라면, 아무도 그 얼굴이 자신에게 비추어지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담은 그런 얼굴을 피하여 숨었을까요? 이유는 주님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을 사랑하는 상태에서는 주님의 사랑조차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눈병이 난 사람이 태양 빛을 괴롭게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은 변하지 않았지만, 눈의 상태가 변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현상을 영계에서도 반복해서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선한 영이나 천사가 가까이 오면 악한 영들은 고통을 느끼며 물러납니다. 천사가 그들을 공격하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의 사랑과 평화가 그들의 상태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도망갑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도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실제로 말씀 전체를 보면,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를 향하고 있습니다. 변하는 것은 인간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할 때는 그 얼굴이 평화와 기쁨으로 느껴지고, 자기 사랑과 악 속에 있을 때는 같은 얼굴이 불편함과 두려움으로 느껴집니다.

 

또한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63장의 ‘자기 앞의 사자(the angel of faces)를 주님의 자비의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까이 오시는 사랑의 임재를 뜻합니다. 즉 ‘얼굴’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라 주님의 가장 가까운 현존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결국 AC.222의 핵심은, 아담이 숨은 이유가 주님의 진노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자비와 평화와 선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 사랑을 더 이상 기쁨으로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숨으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피하고 양심의 소리를 듣기 싫어할 때, 그는 실제로 주님에게서 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심화

 

1. ‘6:25-26

 

 

AC.222, 심화 1, ‘민6:25-26’

AC.222.심화 1. ‘민6:25-26’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6:25, 26) Jehovah make 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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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7:1

 

 

AC.222, 심화 2, ‘시67:1’

AC.222.심화 2. ‘시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시67:1)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Ps. 67:1). 이 구절을 AC.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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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6

 

 

AC.222, 심화 3, ‘시4:6’

AC.222.심화 3. ‘시4: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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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3:7-9

 

 

AC.222, 심화 4, ‘사63:7-9’

AC.222.심화 4. ‘사63:7-9’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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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1, 창3:8, ‘그 날 바람이 불 때’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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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1.심화

 

1.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9:4)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ometh when no man can work (John 9:4).

 

 

이 구절을 AC.221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day)은 신앙과 진리의 빛이 있는 상태를, ‘(night)은 신앙과 진리의 빛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주님께서 단순히 시간이 있을 때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시간보다 상태(state)를 봅니다. 그에 따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은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아니라 진리가 비추는 상태이며, ‘’은 해가 진 시간이 아니라 진리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낮에는 일할 수 있다’는 말은 사람이 아직 진리를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양심이 살아 있고, 회개할 수 있으며, 주님의 인도를 따를 수 있는 상태입니다. 반면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다’는 말은 진리의 빛이 거부되고 신앙이 사라져 더 이상 영적 진보가 어려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AC.221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창3:8의 ‘그 날 바람이 불 때(the breath of the day)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표현을 태고교회 후손들이 아직 얼마간의 지각(perception)을 보유하고 있던 상태로 해석합니다. 즉 완전한 낮은 아니지만, 아직 밤도 아닌 상태입니다. 빛은 약해지고 있었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요9:4 AC.221에서 매우 적절한 증거 구절이 됩니다. 주님 자신도 ‘’과 ‘’을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밝은 낮과 같은 퍼셉션 가운데 있었지만, 점차 ‘날의 서늘함’으로 내려왔고, 결국 밤에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거듭남의 과정에도 적용됩니다.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양심의 소리에 응답할 수 있으며,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느낄 수 있을 때가 바로 ‘’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 빛을 거부하면 점차 ‘’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낮이 있을 때 일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창3:8의 아담과 하와는 이미 한낮의 밝은 퍼셉션은 잃었지만, 아직 완전한 밤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고,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여전히 자신들이 타락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 날 바람이 불 때’입니다.

 

그러므로 AC.221에서 요9:4를 인용한 이유는, 말씀의 ‘’과 ‘’이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신앙과 지각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며, 창3:8의 ‘그 날 바람이 불 때’가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영적 빛의 상태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퍼셉션의 빛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한 밤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AC.221, 창3:8, ‘그 날 바람이 불 때’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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