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3:2, 3)

 

AC.198

 

동산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는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선과 진리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는 그들이 자기들로부터 배워서는 안 되었던 신앙의 선과 진리를 뜻합니다. ‘만지지도 말라(not to touch it)는 신앙의 선과 진리를 자기들, 곧 감각과 기억 지식[sensuali et scientifico]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며, ‘죽을까 하노라(lest ye die)는 이렇게 하면 신앙, 곧 모든 지혜와 지성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is the good and tru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 i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which they were not to learn from themselves; “not to touch it” is a prohibition against thinking of the good and truth of faith from themselves, or from what i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 et scientifico]; “lest ye die” is because thus faith, or all wisdom and intelligence, would perish.

 

 

해설

 

이 단락은 선악과 금지의 의미를 매우 정확하게 한정합니다. 문제는 ‘선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디로부터 아는가입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는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의 선과 진리를 가리키며, 이는 본래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태고교회는 이 선과 진리를 지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지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신앙의 선과 진리, 곧 가장 중심적인 것들이며, 이것들은 결코 인간 자신한테서 배워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이는 인간이 신앙의 근원을 자기 안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며, 신앙의 출처가 언제나 주님이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먹지 말라’는 명령은 행위의 금지가 아니라, 근원의 금지입니다. 신앙의 선과 진리를 자기 판단과 자기 이해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금지가 더욱 강화되어 ‘만지지도 말라’고 표현되는 것은, 단순한 실천 이전에 사고의 방향 자체를 제한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생각부터가 이미 질서에 속하지 않으면, 행위는 필연적으로 그릇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덧붙이는 것이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부터’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신앙의 문제를 감각적 증거나 학문적 지식의 심문대에 올리는 태도를 직접적으로 겨냥합니다. 신앙의 선과 진리는 그 성격상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판별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들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순간, 이미 중심이 인간 쪽으로 이동합니다.

 

죽을까 하노라’는 표현은 형벌적 위협이 아니라, 필연적 결과에 대한 진술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해하려 하면, 신앙 그 자체가 사라지게 되며, 그 결과 모든 지혜와 지성도 함께 소멸됩니다. 이는 신앙이 지혜의 한 영역이 아니라, 지혜 전체의 생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AC.198은 창3:2-3을 단순한 금지 명령의 기록이 아니라, 신앙 인식의 질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선언으로 제시합니다. 신앙의 선과 진리는 인간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며, 이 질서가 무너질 때 비로소 타락이 시작됩니다.

 

 

 

AC.199, 창3:2-3, ‘나무’와 ‘열매’, 태고교회의 상태 변화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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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7, 창3:1,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진 ‘뱀’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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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7.심화

 

2. ‘21:4-9

 

4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4-9) (AC.197)

 

 

AC.197에서 스베덴보리가 민수기 21장의 ‘놋뱀’을 언급하는 이유는, 앞에서 마10:16을 인용한 것과 같은 목적 때문입니다. 곧 ‘’이라는 상징이 본래부터 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뱀이 본질적으로 악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주님께서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실 수도 없고, 더욱이 광야에서 놋뱀을 통해 백성을 살리실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뱀은 본래 인간의 가장 바깥 단계인 감각 파트를 뜻합니다. 감각은 인간 존재의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문제는 이 감각이 주님의 질서 아래 있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의 own 아래 있느냐입니다. 창3의 뱀은 감각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한 경우이고, 민수기의 놋뱀은 감각이 주님께 복종한 경우를 보여 줍니다.

 

특히 AC.197에서 스베덴보리는 ‘놋뱀은 주님의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 in the Lord)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주님을 생각할 때, 천적이고 신적인 측면만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는 우리와 같은 인간 본성을 입으셨고, 따라서 감각적 차원까지도 가지셨습니다. 다만 그 감각은 우리처럼 자기 own에 지배되지 않았고, 완전히 신적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백성이 뱀에 물렸을 때, 놋뱀을 바라보고 살아난 것은 단순한 기적 사건이 아닙니다. 상응적으로는 자기 own과 감각적 욕망에 물린 인간이, 주님 안에 있는 완전한 인간성, 곧 완전히 질서 안에 있는 감각을 바라봄으로써 치유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병을 일으킨 것도 뱀이고, 치료의 표징도 뱀이지만, 둘은 전혀 다른 상태의 뱀입니다.

 

이 점은 창3과 연결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3의 뱀은 인간이 감각으로 신앙을 판단하도록 유도합니다. 반면 민21의 놋뱀은 인간이 감각을 주님께 복종시킨 완전한 모습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는 아래가 위를 지배하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가 위에 순종하는 상태입니다.

 

또한 놋(brass)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흔히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놋뱀은 단순한 뱀이 아니라, 선 안에 있는 감각적 인간, 질서 안에 있는 외적 인간, 곧 겉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백성이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살아난 것입니다. 그들이 단순히 금속 조각을 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장차 이루실 구원의 표상을 본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197은 놋뱀을 매우 중요한 예로 사용합니다. 앞의 AC.195-196에서 스베덴보리는 뱀의 부정적 의미를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독자는 ‘감각은 나쁜 것이구나’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197은 곧바로 반대 사례를 제시합니다. 감각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한 것은 감각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고, 선한 것은 감각이 주님의 질서 아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민수기 21장의 놋뱀은 창3의 뱀에 대한 해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창3에서는 인간이 감각을 따라 주님을 판단했습니다. 민21에서는 인간이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감각이 치유됩니다. 그래서 AC.19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사건을 인용하는 이유는, 뱀이라는 상징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동시에 인간 안의 감각 파트도 주님 안에서는 완전하게 질서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주님만이 참된 천적 인간이며, 모든 사람을 돌보시고 섭리하시는 분’이라고 결론짓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AC.197, 창3:1,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진 ‘뱀’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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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7, 심화 1, ‘마10:16’

AC.197.심화 1.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10:16)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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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7.심화

 

1.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10:16)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s; be ye therefor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 (Matt. 10:16).

 

 

AC.197에서 스베덴보리가 마10:16을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앞의 AC.195-196에서는 뱀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감각적인 것에 근거하여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추론,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영적 맹목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AC.197에 이르면 갑자기 주님께서 친히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뱀이 언제는 나쁘고 언제는 좋은 것입니까? 바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본래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은 부정적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바깥 단계인 감각 파트를 뜻했지만, 주님의 질서 아래 있는 감각을 의미했습니다. 감각은 원래 적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위험을 감지하고, 현실을 분별하는 능력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이 감각을 사용하여 자신을 보호하고, 외적 위험을 살피고, 삶의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시기의 뱀이 ‘신중함(circumspection)과 ‘분별력(prudence)을 의미했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 의미입니다. 여기서 지혜롭다는 것은 신앙의 신비를 감각으로 판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악과 위험을 분별할 줄 아는 신중함을 뜻합니다. 양이 이리 가운데 들어가면서 아무 경계심도 없이 행동하는 것은 순결이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동시에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감각 자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감각이 주님 아래 있을 때는 유익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감각이 주님 위에 올라앉을 때입니다. 감각이 종일 때는 ‘뱀같이 지혜로움’이 됩니다. 그러나 감각이 주인이 되어 신앙을 심판하기 시작하면 창3의 뱀이 됩니다.

 

그래서 AC.197AC.195-196의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앞의 글들만 읽으면 마치 감각과 이성이 모두 나쁜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감각도, 이성도, 기억 지식도 모두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주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버리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르게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감각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을 통해 현실을 보고 위험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뱀같이 지혜로움’입니다. 그러나 감각이 신앙의 재판관이 되는 순간, 그것은 AC.195의 ‘뱀의 독’이 됩니다.

 

그래서 마10:16AC.197에 인용된 이유는, 성경의 ‘’이 항상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 자체를 뜻합니다. 그 감각이 주님께 순종할 때는 신중함과 분별력이 되고, 자기 자신의 own을 섬길 때는 거짓 추론과 영적 맹목이 됩니다. 같은 뱀이지만 방향이 다르고, 주인이 다르고,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결국 AC.197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뱀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뱀을 제자리에 두는 것이 목적입니다. 감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AC.197, 심화 2, ‘민21:4-9’

AC.197.심화 2. ‘민21:4-9’ 4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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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7, 창3:1,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진 ‘뱀’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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