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2:15)

 

AC.79

 

천적 인간은 이러한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 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 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 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verse 15).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전개된 에덴동산의 모든 이미지와 구조를 하나의 핵심 원리로 수렴시키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AC.77AC.78에서 천적 인간의 지성과 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질서 있게 묘사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AC.79는 그 풍성함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를 정확히 짚어 줍니다. 천적 인간은 동산과 같지만, 그는 그 동산의 주인이 아닙니다. 바로 이 지점이 천적 상태의 본질을 결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동산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동산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 사람의 내적 상태 자체가 에덴의 질서와 일치해 있음을 뜻합니다. 그의 지성은 동산처럼 살아 있고, 그의 지혜는 강처럼 흐르며, 그의 지식과 이성은 질서 있게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의 공로나 성취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동산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은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라는 선언입니다. 이 문장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가르는 가장 미세하면서도 본질적인 경계선에 해당합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을 ‘내가 선택했고, 내가 지켰고, 내가 이루었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으며, 지금도 주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정교한 표현을 씁니다.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지혜를 누립니다. 그는 선과 진리 안에서 살며, 그 안에서 깊은 기쁨과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겉으로 보면 미묘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하늘과 땅만큼 큽니다.

 

이 ‘소유하지 않음’은 결핍이나 박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천적 인간은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만약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붙잡는 순간, 그는 그 동산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하고, 잃을까 두려워해야 하며, 스스로를 중심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아는 순간, 그는 돌보는 자로서 살게 되고, 주님께서 돌보신다는 평안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것이 곧 ‘일곱째 날의 안식’입니다.

 

이 글은 인간의 자아 개념을 근본에서부터 재정의합니다. 우리는 흔히 ‘내 믿음’, ‘내 신앙’, ‘내 이해’, ‘내 깨달음’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말들은 아직 영적 단계의 언어입니다. 천적 단계에서는 그런 언어 자체가 점점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과 진리, 지혜와 생명이 ‘주님께 속해 있음이 너무나 자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글은 창2:15의 ‘동산을 경작하며 지킨다’는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경작하고 지킨다는 것은 소유권을 행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맡겨진 것을 사랑으로 돌본다는 뜻입니다. 천적 인간은 동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신 질서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그 질서 자체가 동산을 지켜 줍니다. 그의 역할은 지배가 아니라 ‘동참’입니다.

 

이 지점에서 AC.79는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이 지식이든, 이해이든, 신앙이든, 혹은 어떤 영적 통찰이든, 우리는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상태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글은 에덴의 평화로운 풍경 속에, 아주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원리를 심어 둡니다.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둘 때, 인간은 비로소 가장 풍성하게 누릴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소유하려는 순간 줄어들고, 맡길 때 충만해지는 이 역설이 바로 천적인 삶의 비밀입니다.

 

 

 

AC.80, 창2:1-17 개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16-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6, 17)

bygrace.kr

 

AC.78, 창2:1-17 개요, '네 강' (10-14절)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2:10-14)

 

AC.78

 

지혜(Wisdom)는 동산 가운데 있는 강으로 의미됩니다. 그로부터 네 강이 나뉘어 나오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good and truth)입니다. 둘째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knowledge [cognitio])입니다. 이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셋째는 이성(reason)이며, 넷째는 기억-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으로서, 이것들은 겉 사람에 속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혜로부터 나오며, 이 지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옵니다. (10-14) Wisdom is meant by the river in the garden. From thence were four rivers, the first of which is good and truth; the second i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of good and truth, or of love and faith. These are of the internal man. The third is reason, and the fourth is memory-knowledge [scientia],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All are from wisdom, and this is from love and faith in the Lord (verses 10–14).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에덴동산의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을 통해, 천적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삶 전체로 확장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AC.77이 동산 자체를 지성의 형상으로 제시했다면, AC.78은 그 지성이 정체된 공간이 아니라, ‘흘러나가고 분화되는 생명’임을 밝힙니다. 지혜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강으로 표현됩니다.

 

지혜가 동산 가운데에 있다는 말은, 지혜가 지성의 중심이자 출발점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추상적 사유의 산물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지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옵니다. 다시 말해, 지혜의 근원은 사고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신앙 안에 머무를 때, 지혜는 자연스럽게 솟아납니다. 이 점에서 지혜는 획득물이 아니라 ‘유출물’입니다.

 

이 강은 하나로 시작하지만, 곧 네 갈래로 나뉩니다. 이는 지혜가 하나의 단일한 형태로만 작동하지 않고, 인간의 내적, 외적 삶 전반으로 ‘질서 있게 분화’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네 강을 임의로 나열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한 위계와 방향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먼저 속 사람에 속한 두 강이 나오고, 그다음에 겉 사람에 속한 두 강이 나옵니다. 이는 지혜의 흐름이 항상 안에서 밖으로 나아간다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첫째 강이 ‘선과 진리’라는 설명은 매우 압축적이면서도 깊습니다. 이는 선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 곧 천적 상태의 핵심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선은 의지의 선이며, 진리는 이해의 진리입니다. 이 둘이 하나로 흐를 때, 지혜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작동합니다. 이것이 첫째 강이라는 사실은, ‘모든 지혜의 기초가 선과 진리의 결합’임을 뜻합니다.

 

둘째 강은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입니다. 여기서 지식(knowledge [cognitio])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해입니다. 첫째 강이 결합 자체라면, 둘째 강은 그 결합에 대한 ‘자각과 인식’입니다. 이 두 강은 모두 속 사람에 속합니다. 즉, 천적 인간의 지혜는 먼저 그의 내적 삶에서 형성되고, 그곳에서 충분히 질서 잡힙니다.

 

이제 셋째와 넷째 강에서 흐름은 겉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셋째 강은 이성입니다. 이성은 지혜를 외적 삶 속에서 분별하고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은 주인을 자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속 사람에서 흘러온 지혜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성은 셋째 자리에 놓입니다.

 

넷째 강은 기억-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입니다. 이는 경험, 학습, 언어, 문화 속에 축적된 모든 외적 지식입니다. 이것 역시 지혜의 흐름 안에 포함되지만, 가장 바깥 자리에 놓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은 중심이 아니라, ‘마지막에 도달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이 도구 역시 지혜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혼란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을 실제로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네 강의 구조는 인간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여 줍니다. 속 사람의 선과 진리, 그리고 그에 대한 인식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이성과 기억-지식이 따라옵니다. 이 순서가 유지될 때, 인간의 삶은 통합됩니다. 그러나 이 순서가 뒤집히면, 곧바로 혼란이 시작됩니다. 기억-지식이나 이성이 중심이 되면, 지혜는 더 이상 위에서 흘러오지 않고, 아래에서 만들어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락의 끝에서 다시 한번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혜로부터 나오며, 이 지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온다’고 말입니다.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구조 전체를 묶는 결론입니다. 네 강이 아무리 다양해 보여도, 그 근원은 하나이며, 그 하나의 근원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AC.78은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의 삶에는 어떤 강들이 흐르고 있는가, 그리고 그 강들의 근원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선과 진리에서 시작하여 이성과 기억-지식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아니면 기억-지식과 이성에서 시작하여 거꾸로 의미를 만들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덴의 강들을 통해, 인간 지성의 가장 건강한 질서를 조용히 제시합니다.

 

 

 

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과 네 종류 나무의 속뜻' (8-9절)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8, 9)

 

AC.77

 

그다음으로 그의 지성은 ‘동방의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들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들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의미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지식(knowledge [scientiae])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8-9) 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 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 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verses 8–9).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이 본격적으로 ‘천적 인간의 내적 풍경’을 펼쳐 보이는 지점입니다. AC.76에서 생명의 근원이 주님으로부터 ‘불어넣어짐’으로 주어진 뒤, AC.77에서는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지성의 형태로 어떻게 펼쳐지는가’가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성을 추상적 사고 능력으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의 ‘동산’으로 그립니다. 이는 지성이 구조이기 이전에 ‘살아 있는 환경’임을 뜻합니다.

 

에덴동산이 ‘동쪽에 있다’는 표현은 우연한 방향 지시가 아닙니다. 동쪽은 언제나 주님과 사랑이 있는 방향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율적 사고의 영역이 아니라, ‘사랑을 향해 열려 있는 인식의 공간’입니다. 그의 지성은 중립적이거나 냉정한 판단의 장이 아니라, 사랑의 빛 안에서 작동하는 이해입니다.

 

이 동산 안에 있는 나무들은 지성의 내용을 이룹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은 지식이나 개념으로 불리지 않고, ‘퍼셉션(perception)으로 불립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퍼셉션은 배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상태로서 주어지는 인식’입니다. 천적 인간은 진리를 논증으로 파악하지 않고, 선과 진리를 보듯이 압니다. 그래서 그의 지성은 축적된 정보의 창고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들이 자라는 동산입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는 설명은, 진리가 이 사람에게 부담이나 의무가 아니라 ‘기쁨의 대상’임을 보여 줍니다. 그는 진리를 보기 싫어서 억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는 그의 눈에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는 진리가 이미 선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에서 분리된 진리는 차갑고 딱딱하지만, 선 안에 있는 진리는 보기에도 즐겁습니다.

 

한편,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대한 퍼셉션을 뜻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즉, 천적 인간은 선을 단지 옳다고 인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으로 살아갑니다’. 선은 그에게 외적 규범이 아니라, 내적 양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선을 행하면서도 피곤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음식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동산의 중심에 있는 두 나무를 짚습니다. 먼저 ‘생명나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천적 인간의 중심이며, 그의 모든 인식과 행위는 이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생명나무가 동산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사랑이 지성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지성은 사랑을 둘러싸고 있으며, 사랑을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지식(knowledge [scientiae])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한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지식의 차원에 머무는 진리’를 뜻합니다. 신앙은 필요하지만,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천적 인간에게 신앙은 생명나무를 보좌하는 위치에 놓입니다. 신앙이 사랑을 섬길 때, 그것은 건강하지만, 신앙이 사랑을 대신하려 할 때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 대비는 곧 창세기 3장에서 드러날 긴장, 곧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통해 스베덴보리는 천적 지성의 핵심 구조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중심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이 중심에 있을 때, 진리는 아름답고, 선은 양식이 됩니다. 그러나 중심이 바뀌면, 같은 나무들이 전혀 다른 의미를 띠게 됩니다.

 

지금 이 단계에서 창세기 2장은 아직 어떤 갈등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질서 안에 있고, 조화롭습니다. 에덴의 동산은 분열되지 않은 지성의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이상화, 즉 이상적으로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어떤 지성으로 창조되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이 그림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조용히 드러냅니다.

 

AC.77은 그래서 매우 아름다운 글이면서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의 지성은 지금 어떤 동산인가, 그 중심에는 어떤 나무가 서 있는가 하는 질문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신앙이 중심에 서 있는가, 아니면 사랑이 중심에 서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AC.78, 창2:1-17 개요, '네 강' (10-14절)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

bygrace.kr

 

AC.76, 창2:1-17 개요, 주님의 ‘불어넣으심’(breathing)으로 오는 생명(삶)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