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다 모르는 상황이므로, 먼저 그 차이를 알 수 있도록 각각의 어떠함을 간략히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첫째, 죽어 있는 사람, 즉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 겉으로는 살아있으나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죽은 상태인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바로 그것을 숭배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사랑에서라기보다 신앙의 원리에서 인정하며, 그의 행위 역시 주로 그 신앙에서 나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믿고 또한 퍼셉션으로 알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행위 또한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 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 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 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 or a dead man, 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 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 First, then, 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 and this he adores. 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 and not so much from love. 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 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 죽어 있는 사람을 움직이는 목적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만을 향하며, 그러니까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그 목적이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일 뿐이며, 그는 영원한 생명(, life)이 무엇인지도, 주님이 누구이신지도 알지 못하고, 혹 알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향하고, 그로 인해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주님을 향하며, 그로 인해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향합니다. Second: 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 or what the Lord is; or should he know, 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 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 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 죽어 있는 사람은 싸움, 그러니까 영적 전투 중에 있을 때 거의 항상 패하며, 싸움이 없을 때에도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여 그는 종이 됩니다. 그를 묶는 사슬은 외적인 것들로서, 곧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과 재산, 이익, 그리고 명성을 잃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아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항상 승리하며, 그를 붙드는 사슬은 내적인 것으로서, 양심의 사슬이라 불립니다.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에도 그것들을 멸시하므로 정복자라 불립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사슬에도 묶여 있지 않으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사슬이 있는데, 그것들은 드러나지 않는 사슬로서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Third: 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 and when not in combat, 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 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 such as the fear of the law, of the loss of life, of wealth, of gain, 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 but is always victorious; 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 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 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 he despises them, 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 but is free. His bonds, which are not apparent, 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의 해설 가운데서도, 가장 교육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급진적인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상징을 풀지 않고, 은유를 쓰지 않으며, 곧바로 사람의 상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A dead man), ‘영적 인간(The spiritual man), ‘천적 인간(The celestial man)입니다. 이는 인류를 세 부류로 나누기 위한 분류표가 아니라, ‘한 인간이 거쳐 갈 수 있는 세 가지 상태’를 질서 있게 드러내기 위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설명을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는 이미 이 시대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영적 인간’조차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실상 ‘죽은 상태’에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설명이 아니라, ‘인식의 눈을 열기 위한 조정’에 가깝습니다.

 

첫 번째 구분은 ‘무엇을 참과 선으로 인정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과 선으로 인정합니다. 여기에는 악의 의도가 전제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세상에서 유용한 것만을 실제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숭배’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그의 삶의 중심이 됩니다.

 

영적 인간은 여기서 분명히 달라집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인정의 출발점은 ‘사랑’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는 이것이 옳다고 믿고, 그래서 그것을 따릅니다. 그의 행위는 신앙에 의해 유지됩니다. 이는 매우 귀하고 중요한 단계이지만, 여전히 중간 단계입니다.

 

천적 인간은 이 둘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을 퍼셉션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것을 보듯이 압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 다른 신앙이 없습니다. 믿음이 사랑을 앞서지 않고, 사랑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행위는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두 번째 구분은 ‘삶을 움직이는 목적’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목적은 오직 현세적 삶에 있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주님 역시 개념으로는 알 수 있지만, 삶의 중심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은 목적이 분명히 바뀝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그로 인해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목적의 최종점이 여전히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과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목적 자체가 주님입니다. 그는 결과를 위해 주님을 향하지 않고,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결과가 따라옵니다. 그래서 그의 목적은 곧 주님의 나라이며, 영원한 생명은 그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세 번째 구분은 가장 실제적이고도 날카롭습니다. ‘싸움과 자유’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싸움에서 거의 항상 패합니다. 설령 외적으로는 질서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으로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합니다. 그를 붙잡는 것은 법, 처벌, 손해, 체면 같은 외적 사슬입니다. 그는 자유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가장 많은 것에 매여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는 유혹과 갈등을 겪지만, 싸움 끝에 승리합니다. 그를 붙잡는 사슬은 더 이상 외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이라는 내적인 사슬입니다. 그는 자유롭지만, 동시에 책임을 집니다.

 

천적 인간은 여기서 다시 한 단계 올라섭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이 다가오지만, 그것을 심각하게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멸시합니다. 이는 무관심이 아니라, ‘이미 중심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복자’라 불립니다.

 

겉으로 보면, 천적 인간은 아무 사슬에도 묶여 있지 않은 완전한 자유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매우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그에게도 사슬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사슬입니다. 그것은 법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그는 선을 떠올리기 때문에 악을 의도하지 않고, 진리를 보기 때문에 거짓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의 자유는 방임이 아니라, ‘가장 깊은 질서 안에 있는 자유’입니다.

 

AC.81은 그래서 창세기 2장의 모든 내용을 하나의 인간 이해로 묶어 줍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금지 명령, 안식일은 모두 ‘천적 인간’이라는 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서로 다른 얼굴들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신화 속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지향하도록 창조된 상태’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느 상태에 서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판단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길의 구조를 보여 줍니다.

 

 

 

AC.82, 창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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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지식을 얻어야'(16-17절)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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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심화

 

4. 번역가들

 

저는 번역가들이 나무 = 퍼셉션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요...

 

 

그렇게 느끼신 이유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AC의 관점에 익숙해지면 ‘나무 = 퍼셉션’이라는 상응이 너무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왜 번역에서 그걸 살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수 있습니다. 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개역개정 번역자들이 그것을 ‘몰라서’라기보다, 애초에 번역의 기준과 목표가 스베덴보리식 내적 의미를 반영하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시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성경 번역은 기본적으로 ‘원문이 문자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 틀 안에서 전달하는 작업입니다. 특히 개역개정은 Bible 번역 가운데서도 비교적 전통적이고 교회 공용성을 중시하는 번역이기 때문에, 특정 신학 체계, 곧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그것을 반영하여 단어를 바꾸는 방식은 거의 취하지 않습니다. 만약 ‘나무’를 ‘퍼셉션’으로 옮긴다면, 그것은 번역이 아니라 이미 ‘해설’ 혹은 ‘해석’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나무 = 퍼셉션’도 사실은 문자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내적 의미에서의 상응(correspondence)’이라는 점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나무’(עֵץ)는 문자적으로는 여전히 ‘나무’이고, 그것이 내적으로는 ‘퍼셉션’ 혹은 ‘사랑과 인식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계시를 통해 밝혀진 해석입니다. 따라서 일반 번역자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본문 단어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석이나 해설의 영역에 두는 것이 원칙에 맞는 접근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정리하시면 더 균형이 맞습니다. 번역은 ‘나무’를 그대로 두는 것이 옳고, 해설에서는 ‘그 나무는 퍼셉션을 의미한다’라고 풀어 주는 것이 옳습니다. 이 두 층을 섞지 않는 것이 성경 해석 전통 전체의 기본 질서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실제로는 라틴어 본문에서 ‘arbor’(나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 의미를 해설에서 풀어냅니다.

 

다만 목사님께서 느끼신 통찰은 매우 중요한 방향을 짚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열매’로만 이해할 경우, 독자의 관심이 ‘행위’ 쪽으로 더 기울어질 수 있지만, ‘나무’를 의식하면 ‘그 근원, 곧 어떤 인식과 사랑의 상태인가’로 시선이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AC를 읽을 때 매우 큰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실제 목회나 강해에서는 이런 방식이 가장 유익합니다. 본문은 ‘나무’와 ‘열매’를 그대로 읽되, 그 속뜻으로 ‘이 나무는 어떤 퍼셉션을 의미하는가’를 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번역의 질서도 지키고, 동시에 내적 의미도 충분히 살아나게 됩니다.

 

결국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아쉬움은 ‘틀렸다’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과 해설의 역할이 다르다’는 차이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지금 목사님께서 하고 계신 AC 해설 작업의 의미가 더 또렷해진다고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AC.80,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지식을 얻어야'(16-17절)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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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심화 3, ‘열매’(창2:16-17)

AC.80.심화 3. ‘열매’(창2:16-17) 이 AC본문의 말씀인 창2:16-17을 보면,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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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열매(2:16-17)

 

 AC본문의 말씀인 창2:16-17을 보면,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인데요, 분명 영어 표현은 tree of the garden’,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라 하여 우리말 번역인 열매는 없습니다. 한글 개역개정은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요?

 

 

아주 예리하게 보신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영어 성경의 ‘tree’를 우리말 개역개정이 ‘열매’로 옮긴 것은 원문을 틀리게 번역했다기보다, 히브리어 본문 안에 이미 포함된 표현 구조, 곧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관용적 결합을 한국어에서 더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위한 번역 선택이라고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창2:16-17에는 실제로 ‘나무’와 ‘열매’가 함께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2:16은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을 수 있다’라는 구조인데, 여기서 ‘먹는다’는 동사와 결합될 때, 히브리어에서는 ‘나무’가 사실상 ‘그 나무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2:17에서도 ‘선악을 아는 나무로부터 먹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역시 문자 그대로는 ‘나무를 먹는다’가 아니라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뜻입니다. 즉, 원문 자체가 이미 ‘나무 = 그 나무의 열매를 포함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번역, 특히 전통적인 번역들은 이 구조를 비교적 직역에 가깝게 유지해서 ‘tree of the garden’,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영어에서도 실제 이해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로 받아들입니다. 다만 영어는 이런 표현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반면, 한국어에서는 ‘나무를 먹는다’라고 하면 문자적으로 들릴 가능성이 커서 어색함이 생깁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은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열매’를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개역개정의 번역은 ‘의역’에 가까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원문 구조를 그대로 옮기기보다, 독자가 오해 없이 의미를 이해하도록 ‘먹는 대상이 열매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현대 한국어 번역들은 이와 비슷한 방식을 취합니다.

 

그렇다면 AC의 관점에서는 이 차이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나무(tree)와 ‘열매(fruit)가 각각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나무’는 어떤 종류의 사랑이나 인식 전체를, ‘열매’는 그것에서 나오는 삶의 결과나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은 내적으로 보면 ‘그 사랑과 인식 체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열매를 먹는다’는 표현은 ‘그것에서 나온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영어 번역이 유지하는 ‘tree’ 중심 표현은 상징 구조를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점이 있고, 한국어 번역의 ‘열매’ 표현은 실제 행위의 측면을 더 분명히 드러내는 장점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다기보다, 강조점이 다르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리하면, 개역개정이 ‘열매’를 넣은 것은 원문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을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풀어낸 번역입니다. 그리고 AC를 읽으실 때는 이 둘을 함께 보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겉으로는 ‘열매를 먹는다’이지만, 속뜻으로는 ‘그 나무, 곧 어떤 사랑과 인식 자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까지 함께 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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