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면, 1:26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걸 정확히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1:24, 25에도 각각 기는 것’, ‘땅에 기는 모든 것이 나오네요...

 

 

성경에서 ‘긴다’는 표현은 현대 한국어 감각으로 읽으면 다소 낯설고, 때로는 가치 판단이 섞인 표현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 2장과 그에 대한 AC의 해설에서 이 표현은 결코 경멸적이거나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움직임의 방식’, 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가 작동하는 높이와 방향’을 나타내는 매우 정밀한 표현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단순히 ‘살아 있다/죽어 있다’로 나누지 않고, 어떻게 움직이고 무엇을 향해 움직이는지를 통해 그 상태를 드러냅니다. ‘긴다’는 말은 바로 그 가장 낮은 움직임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원어에서 ‘기다’로 번역되는 동사들은 공통적으로 땅이나 물에 밀착된 움직임을 뜻합니다. 이는 위로 솟구치거나 공중을 가르는 움직임과 대조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체를 말할 때, 날아다니는 것, 헤엄치는 것, 기어다니는 것을 구분합니다. 이 구분은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라, ‘상응의 언어’입니다. 날아다니는 것은 위를 향한 인식과 사고, 곧 이성적, 이해력의 차원을 가리키고, 물속을 헤엄치는 것은 기억과 지식의 차원을 가리키며, 기어다니는 것은 감각과 즉각적 반응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즉 ‘긴다’는 표현은 인간 안에서 ‘가장 아래층에서 작동하는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기는 것’을 악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AC에서 ‘기는 것’은 아직 정돈되지 않은 상태, 아직 위로 들어 올려지지 않은 상태를 뜻할 뿐, 본질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감각, 습관, 즉각적 욕구, 정서적 반응이라는 층위를 반드시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은 처음에는 땅에 붙어 기듯 작동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먼저 생각하거나 분별하지 않고 반응합니다. 이것이 바로 ‘긴다’는 표현의 핵심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를 보면, 이 구조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빛이 먼저 생기고, 하늘과 물의 구분이 이루어지며, 그다음에 물고기와 새가 등장하고, 마지막에 땅의 짐승과 기는 것들이 나옵니다. 이는 시간 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위의 차원, 곧 진리의 빛과 이해력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 아래 차원의 생명도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만약 이 질서가 거꾸로 되면, 즉 감각과 욕구가 먼저 지배하면, 인간은 ‘기어다니는 삶’에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땅에 기는 모든 것’은 인간 안에서 ‘생각 이전에 움직이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몸의 기억, 자동화된 습관, 감각적 쾌, 불쾌, 즉각적인 분노나 두려움, 설명하기 전에 먼저 반응해 버리는 정서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스스로 위를 보지 못합니다. 시선이 아래를 향해 있기 때문에, 성경은 이것을 ‘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이며, 주님은 이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질서 안으로 넣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점에서 AC의 인간 이해는 매우 통합적입니다. 거듭남은 영혼만 바뀌고 몸은 그대로 두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고상한 생각만 바뀌고 일상의 반응과 습관은 방치되는 과정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의 생명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와 작동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기는 것’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대상이 가장 낮은 층위까지 내려왔다는 표시이며, 인간 전체가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는 증거입니다.

 

설교나 번역에서 이 표현을 다룰 때 특히 조심해야 할 점이 여기 있습니다. ‘기는 것’을 하찮거나 천한 것으로 설명해 버리면, 성경의 의도를 정반대로 전달하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가장 낮은 차원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곳이 주님의 생명이 도달해야 할 마지막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주님은 기는 것을 멸하지 않으시고, 굽히고, 다스리고, 살리신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억압이 아니라 질서 부여입니다.

 

결국 ‘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은 인간을 낮추는 말이 아니라,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 전체를 다루는지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인간의 신앙, 이해, 사랑은 머리에서만 끝나지 않고, 삶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말투, 몸짓, 반사적인 감정, 반복되는 습관, 일상의 선택 속까지 주님의 질서가 스며들 때, 그때 비로소 ‘기는 것’도 살아 있는 혼, 즉 ‘생물’의 일부가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긴다’는 말은 부끄러운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의 마지막 깊이를 드러내는 매우 정직한 성경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6-01-20(D3)

 

 

 

오늘날 기독교, 개신교의 금식 기도와 방언에 대하여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금식 기도를 비롯, 각종 기도와 방언에 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 1. 문제 제기의 출발점 : 왜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열심의 표지’가 잘 보이지 않는가 많은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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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8

 

이로부터 사람이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있을 때가 분명해집니다. 이때 사람은 이해력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그것들을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the fishes of the sea), ‘하늘의 새(the fowl of the heavens)라 합니다. 사람이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이해력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을 ‘생물(the living soul), ‘가축(the 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신앙으로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 of the sea,” and the “fowl of the heavens.”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of 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의미를 한 번에 정리해 주는 요약이자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각 단계를 분리해서 설명해 왔지만, 이 글에서는 그 단계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지고, 무엇이 결정적인 차이인지 명확히 드러냅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신앙의 원리로 말합니다. 이 신앙은 이해력에 속하며, 사람은 그 신앙을 통해 진리와 선을 확인하고 확증합니다. 이때 그의 사고와 말은 더 이상 무생물, 곧 못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 곧 움직이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래서 ‘물고기’와 ‘’가 등장합니다. 이는 기억-지식과 이성적, 지적 사고가 이제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여전히 그 중심이 이해력에 있습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사람은 이해력의 신앙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나온 의지의 사랑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단지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을 통해 삶으로 내려옵니다. 이때 등장하는 상징이 ‘생물’과 ‘짐승’(‘가축’)입니다. 이는 삶의 중심이 생각에서 애정과 행위로 옮겨졌음을 뜻합니다.

 

이 글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여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이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표현입니다. 앞선 단계들에서도 사람은 무언가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이해력의 차원, 곧 신앙의 확증과 말의 차원이었습니다. 이제는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 곧 의지 차원에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생명의 실제적인 시작입니다.

 

그래서 이 단계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 곧 ‘영적 인간’이라 하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형상이라는 말은 단순한 닮음이 아니라, ‘작동 방식의 닮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사랑으로 진리를 통해 행하시는 것처럼, 이제 이 사람도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 움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신앙만으로 말할 때는 아직 다섯 번째 상태이고,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여 삶으로 드러날 때 여섯 번째 상태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사람은 주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사람답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임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글입니다.

 

 

 

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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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7

 

이 말씀들 안에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앞 절에서 땅이 ‘생물, 가축, 땅의 짐승(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을 낼 것이라고 말한 반면, 다음 절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 가축(the wild animal of the earth, the beast)을 만드셨다고 말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그리고 그가 천적 인간이 될 때까지는,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무엇인가를 내놓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이렇게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속 사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여기 다른 순서가 나오는 것이며,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likewise “the 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해설

 

이 글은 창세기 본문의 ‘말씀 순서 변화 자체가 지닌 의미’를 통해, 거듭남의 방향과 구조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단어 하나, 배열 하나도 우연이 아니라고 보며, 특히 순서의 변화는 항상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대상들이 등장하지만, 그 나열 순서가 바뀌는 이유가 바로 그 열쇠입니다.

 

앞 절에서는 땅이 ‘생물 → 가축 → 들짐승’ 순으로 낸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이 자기에게서 무언가를 내놓는 것처럼 느끼는 단계, 곧 겉 사람의 차원에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때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선을 행하고 생명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주님께서 일하고 계시지만, 사람의 퍼셉션은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들짐승 → 가축’ 순으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 순서 변화는, 거듭남의 주체가 점차 사람 자신에서 주님으로 옮겨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사람이 ‘내가 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점점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으며, 천적 인간이 되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방향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라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같은 원리를 강조합니다. 주님은 먼저 겉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고, 그 겉 사람의 활동과 선택을 통해 속 사람을 열어 가십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도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고, 점차 더 깊은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사람의 ‘자기에게서 나온 것 같은 느낌’이 제거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그 착각을 즉시 부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시어 사람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인간의 착각조차도 주님의 섭리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의 순서 변화는 단순한 문체상의 변형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방향 전환의 흔적입니다. 거듭남은 늘 바깥에서 안으로, 자기 자신에서 주님으로 이동하는 여정이며, 창세기의 언어는 그 여정을 가장 정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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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창1:24-25, ‘짐승'(beasts)은 사람의 애정(affections)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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