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9.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Potts역에는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표현이 개역개정에는 안 보이는 이유

 

 

개역개정에는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에 해당하는 ‘침실’이나 ‘은밀한 방’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개역개정이 어떤 말을 빠뜨린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히브리어 표현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여 번역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절 번호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09의 영어본은 이 대목을 겔21:14-15로 표시하지만, 유대교식 히브리어 성경의 장절 체계에서는 겔21:19-20에 해당합니다. 기독교 성경에서는 앞 장 끝부분의 다섯 절을 겔21에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절 번호가 다섯 절씩 차이 납니다. 개역개정의 겔21:14에 나오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라는 부분이 바로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와 대응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도 해당 표현 자체는 존재하며, 개역개정은 그것을 ‘사람들을 둘러싸고’로 번역한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히브리어는 ‘הַחֹדֶרֶת לָהֶם’, 곧 ‘하호데레트 라헴’입니다. ‘하호데레트’는 동사 ‘חדר’에서 나온 여성 단수 분사형인데, 이 동사는 ‘안으로 들어가다’, ‘꿰뚫고 들어가다’라는 방향으로도 이해될 수 있고, 문맥에 따라 ‘둘러싸다’, ‘사방에서 죄어 오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일부 영어 역본은 칼이 그들의 내실 또는 은밀한 방 안으로 들어간다고 번역한 반면, 여러 현대 역본은 칼이 그들을 에워싸거나 사방에서 들이닥친다고 번역합니다. 실제로 KJV는 ‘privy chambers’로, Young의 직역본은 ‘inner chamber’로 옮기지만, 다른 현대 역본들은 ‘surrounds them’ 또는 ‘closing in on every side’로 처리합니다.

 

따라서 Potts 영어본의 ‘bed chambers’는 히브리어 본문에 ‘’을 뜻하는 별도의 명사가 명백하게 적혀 있기 때문에 생긴 번역이라기보다, ‘하호데레트’라는 동사의 의미를 안쪽으로 침입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한 전통적인 번역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개역개정의 ‘사람들을 둘러싸고’는 같은 동사를 칼이 그들을 사방에서 둘러싸며 몰아붙이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는 원문이 있고, 다른 쪽에는 원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난해한 히브리어 표현을 서로 다르게 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서 AC 연구상 더욱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작성한 영어가 아니라 Potts 영어 번역에 들어 있는 문구입니다. AC 원전은 라틴어이므로, 영어 문구만 보고 스베덴보리의 라틴 원문에도 반드시 ‘침실’이나 ‘내실’에 해당하는 명사가 있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Potts가 라틴 문장을 그대로 직역했을 수도 있지만, 성경 인용 부분을 당시 영어 독자들에게 익숙한 전통적 성경 문구에 맞추어 표현했을 가능성도 따로 검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정확한 비교 순서는 ‘AC 라틴 원문’, ‘Potts 영어 번역’, ‘히브리어 성경 본문’, ‘개역개정’이어야 합니다. AC.309의 라틴 원문이 존재하는 것은 확인되지만, 현재 확보한 온라인 자료에서는 해당 라틴 인용문의 세부 문구까지 안정적으로 열람되지 않아, 라틴 원문에 ‘침실’이라는 명사가 실제로 들어 있다고 여기서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AC.309의 한국어 번역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요?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목적은 칼이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다는 공간적 세부를 특별히 해설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09에서 그가 직접 밝히는 핵심은 칼이 사람을 황폐하게 하여 선과 진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거짓과 그 반대되는 것들만 보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개역개정의 표현을 존중하여 ‘크게 살육하는 칼이 사람들을 에워싼다’고 옮겨도 AC.309의 논지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뒤의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라는 문맥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만 Potts 영어본을 직접 번역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면, ‘크게 살육하는 칼이 그들의 깊은 곳까지 침입한다’로 옮기는 절충안도 가능합니다. 이 번역은 영어의 ‘bed chambers’를 문자적으로 ‘침실’이라고 옮겨 독자에게 불필요한 공간 이미지를 주는 대신, 그 전통적 번역이 담고 있는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뜻을 살립니다. 그러나 AC.309 해설에서 그들의 ‘침실’이나 ‘내실’을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이라고 곧바로 상응 풀이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글에서 그 문구를 따로 해석하지 않았고, 바로 뒤에서 설명하는 것은 ‘’과 ‘넘어짐’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제가 ‘은밀한 방’을 사람의 내면이라고 단정적으로 확장한 것은 본문이 직접 말한 범위를 넘어간 해설이었습니다.

 

심화 원고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는 개역개정에서 ‘사람들을 둘러싸고’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개역개정이 어떤 구절을 생략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하호데레트 라헴’을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일부 역본은 이를 ‘그들의 내실까지 들어간다’는 뜻으로 이해하였고, 현대의 여러 역본은 ‘그들을 에워싸거나 사방에서 몰아붙인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AC 원전은 라틴어이므로 Potts의 영어 표현을 곧바로 스베덴보리 자신의 문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AC.309에서 이 인용의 핵심은 칼이 어느 물리적 장소로 들어가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거짓과 persuasion이 사람을 철저히 황폐하게 하여 더 이상 선과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어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사람들을 둘러싸고’라는 표현을 따르거나, Potts의 뉘앙스를 보존, ‘그들의 깊은 곳까지 침입하는 칼’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절합니다.

 

 

 

AC.309, 심화 2, ‘겔21:9-10, 14-15’

AC.309.심화 2. ‘겔21:9-10, 14-15’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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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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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는 자기 사랑(self love)과 거기서 비롯되는 광적 탐욕과 확신(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결국 육적, 세상적인 것들로 끌려 내려갑니다. 이 사실은 말씀의 매우 많은 구절로 입증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모두 인용한다면 여러 쪽에 이를 것입니다. 여기서는 에스겔의 말씀만 인용하겠습니다. That by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is signified self love with its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which are such that they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ut are carried away to corporeal and earthly things, might be confirmed by so many passages from the Word as would fill pages; but we will cite only these from Ezekiel: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4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21:9-10, 14-15) Prophesy and say, Thus saith Jehovah, Say a sword, a sword, it is sharpened, and also burnished to make a sore slaughter; it is sharpened that it may be as lightning. Let the sword be doubled the third time, the sword of his slain; the sword of a great slaughter,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that their heart may melt, and their offenses be multiplied, I have set the terror of the sword in all their gates. Alas! it is made as lightning (Ezek. 21:9–10, 14–15).

 

여기서 (sword)은 사람이 황폐해져 더 이상 선과 진리를 전혀 보지 못하고, 오직 거짓과 그 반대되는 것만 보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많이 엎드러지게(multiplying offenses)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한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훔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A “sword” here signifies the desolation of man such that he sees nothing that is good and true, but mere falsities and things contrary, denoted by “multiplying offenses.” It is also said in Nahum, of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word, and the flash of the spear, and a multitude of the slain.” (Nahum 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3:3)

 

 

해설

 

AC.309AC.308에서 설명한 ‘그룹’과 ‘두루 도는 불 칼’의 의미를 한 걸음 더 깊이 설명하는 글입니다. 앞에서는 두루 도는 불 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나타낸다고 하였다면, 여기서는 왜 그런 보호가 필요한지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이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침범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 자체보다도, 자기 사랑이 만들어 내는 영적 상태를 더욱 강조합니다. 그는 그것을 ‘광적 탐욕과 확신(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탐욕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소유하려는 내적 충동이며, 확신은 그러한 욕망에서 생겨난 거짓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논리적 검토나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며, 결국 사람을 자기 생각 속에 가두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의 신비를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알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주님께 순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높이고,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는 가장 높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육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결국 위를 향해 올라가려 하지만 아래로 끌려 내려오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겔21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칼은 단순한 전쟁 무기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칼은 진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반대로 진리가 완전히 왜곡되었을 때에는 거짓이 진리를 파괴하는 힘도 의미합니다. 본문의 칼은 후자의 의미입니다. 사람 안에 남아 있어야 할 선과 진리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를 거짓이 차지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칼이 번개처럼 번쩍인다는 표현은 거짓이 매우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방은 사람의 내면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거짓이 단순히 겉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더 이상 선과 진리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 사랑이 원하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이 황폐해졌다는 뜻입니다.

 

많이 엎드러지게’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넘어짐은 단순한 실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악을 선으로 인정하는 영적 전도(顚倒)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새로운 진리를 접할수록 오히려 그것을 왜곡, 자신의 거짓을 더욱 강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신비를 잘못된 상태에서 탐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3을 인용한 이유도 같습니다. 그곳에서는 번쩍이는 칼과 빛나는 창, 그리고 수많은 죽임당한 자들이 등장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이는 거짓 교리와 왜곡된 추론이 사람들의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사람들과 연결합니다. 이는 신비를 탐구하는 행위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 이끌린 상태에서 거룩한 진리를 다루는 태도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창3의 ‘두루 도는 불 칼’은 단순한 형벌의 상징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제한 없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한다면, 가장 거룩한 진리마저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거룩한 것의 모독, profanation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두루 도는 불 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것은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멀리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더 깊은 영적 파멸에 빠지는 것을 막으시기 위한 자비의 섭리였습니다.

 

AC.309의 핵심은 두루 도는 불 칼이 자기 사랑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 불 칼은 자기 사랑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광적 탐욕과 확신이 거룩한 진리 속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주님의 신적 보호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칼과 나훔의 칼은 모두 자기 사랑이 진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창세기의 두루 도는 불 칼은 그러한 황폐가 생명나무에까지 미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AC.309, 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AC.309.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Potts역에는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표현이 개역개정에는 안 보이는 이유 개역개정에는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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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1:9-10, 14-15

 

 

AC.309, 심화 2, ‘겔21:9-10, 14-15’

AC.309.심화 2. ‘겔21:9-10, 14-15’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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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3

 

 

AC.309, 심화 3, ‘나3:3’

AC.309.심화 3. ‘나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나3:3)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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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0, 창3:24, ‘홍수 이전 사람들과 홍수 이후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0 이 절에 나오는 각각의 표현에는 매우 깊은 아르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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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8, 창3:24, ‘그룹들’(cherubim)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과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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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8.심화

 

8. ‘10:2, 7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7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10:2, 7) He said to the man clothed in linen, Go in between the wheel to beneath the cherub, and fill thy palms with coals of fire from between the cherubim, and scatter them over the city; the cherub put forth his hand from between the cherubim unto the fire which was between the cherubim, and took thereof, and put it into the palms of him that was clothed in linen, who took it and went out (Ezek. 10:2, 7).

 

 

10:2, 7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그룹이 단순히 거룩한 것을 지키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섭리가 심판과 정결의 역사까지도 질서 있게 집행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앞의 겔9가 보호와 구별의 질서를 보여준다면, 겔10은 그 보호가 끝난 후, 교회의 황폐함에 대한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장면 역시 창3:24의 그룹과 동일한 영적 원리를 나타낸다고 보았기 때문에 AC.308에서 함께 인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은 그룹 아래, 바퀴 사이에 있는 불을 손에 가득 담아 예루살렘 위에 흩뿌리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어 한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에서 그것을 가져다가 세마포 입은 사람의 손에 건네줍니다. 말씀의 겉뜻만 보면 이것은 심판을 위한 불 전달 장면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으로는 주님의 거룩한 것이 이미 스스로를 거부한 교회에 더 이상 그대로 머물 수 없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불은 단순한 파괴의 상징이 아니라,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최종적으로 분리하는 신적 작용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이 그룹들 사이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심판 자체가 그룹의 본질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심판마저도 주님의 신적 섭리 아래 질서 있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앞선 출애굽기에서는 같은 그룹들 사이에서 주님의 말씀이 들렸고, 민수기에서는 같은 곳에서 모세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에서는 같은 거룩한 중심에서 심판을 위한 불이 나옵니다. 이것은 주님의 신성이 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과 교회의 상태가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의 상태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이 됩니다.

 

이 점은 창3:24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배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겔10에서도 같은 원리가 나타납니다. 거룩한 것이 끝까지 profanation 당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시고, 이미 완전히 황폐해진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과 악한 것을 분리하심으로써 더 이상의 profanation을 막으십니다. 따라서 심판 역시 보호의 반대가 아니라 보호를 완성하는 신적 섭리의 한 작용입니다.

 

본문에서 그룹이 직접 손을 내밀어 불을 건네주는 장면도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그룹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신적 질서를 표상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심판과 모든 분리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질서 있게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룹을 신적 섭리의 표상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불은 말씀의 속뜻에서 언제나 사랑과 연결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불은 본래 신적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생명과 따뜻함이 되지만,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불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흩뿌려지는 불은 주님의 사랑 자체가 변하여 진노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을 거부한 교회의 상태가 그 사랑을 심판으로 경험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 역시 신적 섭리의 질서입니다.

 

9와 겔10을 함께 살펴보면 AC.308의 의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9장에서는 먼저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표를 하여 보호하셨고, 10장에서는 그 보호가 이루어진 후 심판이 진행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보존이 먼저이고, 심판은 그다음입니다. 선한 것을 먼저 보호하신 후, 악을 분리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관된 역사 방식입니다. 그룹은 바로 이 질서를 대표합니다.

 

10:2, 7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그룹이 단순히 생명나무나 언약궤를 지키는 존재를 넘어, 주님의 거룩한 것이 profanation 되지 않도록 끝까지 보호하시며, 필요할 때에는 심판과 분리까지도 질서 있게 집행하시는 신적 섭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성막과 성전, 그리고 에스겔의 환상에 나타나는 그룹은 서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장면 속에 등장하지만, 말씀의 속뜻에서는 모두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고 profanation을 막으시며, 마지막에는 선과 악을 질서 있게 분리하시는 주님의 자비롭고 완전한 섭리를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AC.308, 창3:24, ‘그룹들’(cherubim)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과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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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8, 심화 7, ‘겔9:3-7’

AC.308.심화 7. ‘겔9:3-7’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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