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7.심화

 

6. ‘창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8:22)

 

 

이 구절이 AC.37에 인용된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영적 상태의 교대’가 일시적이거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한 결코 중단되지 않는 주님의 보편적 질서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37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반드시 교대가 있으며, 이것이 자연계의 아침과 저녁,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에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8 22절은 바로 그 원리를 가장 압축적으로 선언하는 구절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 말씀은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질서를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따라 이것을 인간의 영적 생명에 관한 말씀으로 읽습니다. ‘심음과 거둠’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이 삶 속에서 열매 맺는 과정을 뜻하며, ‘추위와 더위’는 사랑과 신앙이 약해지는 상태와 강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여름과 겨울’은 사랑이 충만한 상태와 사랑이 식은 상태를, ‘낮과 밤’은 진리가 밝게 보이는 상태와 상대적으로 어두운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흔히 영적 생활이 항상 밝고 뜨겁고 확신에 찬 상태로 유지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서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낮이 있으면 밤도 있고, 여름이 있으면 겨울도 있으며, 심음이 있으면 거둠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생활에도 기쁨의 시기와 시험의 시기, 깨달음의 시기와 혼란의 시기, 풍성함의 시기와 메마름의 시기가 반복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패나 후퇴의 증거가 아니라 생명 자체의 법칙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구절을 AC.37의 결론 부분에 인용합니다. 영적 생명은 직선적으로만 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을 교대하는 상태들 속으로 인도하시며, 그 과정에서 선과 진리를 더 깊이 인식하게 하십니다. 사람이 늘 빛 가운데만 있다면 빛의 가치를 알 수 없고, 늘 여름 가운데만 있다면 생명의 풍성함을 제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대는 생명의 결함이 아니라 생명의 조건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사람뿐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적용됩니다. 교회에도 봄 같은 시대가 있고 겨울 같은 시대가 있으며, 밝은 시대와 어두운 시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교대마저 섭리 안에서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나 개인이 일시적인 겨울이나 밤을 경험한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 안에서는 겨울 뒤에 봄이 오고, 밤 뒤에 아침이 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창세기 8 22절이 AC.37에 인용된 이유는, 영적 상태의 교대가 주님의 영원한 규례이며, 인간이 세상에 있는 동안 결코 중단되지 않는 생명의 리듬이라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자연계에 대한 약속인 동시에, 거듭남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적 약속이기도 한 것입니다.

 

 

 

AC.37, 심화 5, ‘렘33:25’

AC.37.심화 5. ‘렘33:2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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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심화

 

5. ‘33:2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f I have not appointed the 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 (Jer. 33:25).

 

 

이 구절이 AC.37에 인용된 이유는, 영적 상태의 교대가 단지 자연계의 현상에 비유될 뿐 아니라, 실제로 주님께서 세우신 언약’이며, ‘법칙’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37에서 스베덴보리는 아침과 저녁,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변화가 영적 삶 속에서도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늘 같은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밝음과 어두움, 확신과 의심, 위로와 시험, 사랑의 충만함과 메마름 사이를 오가며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에 포함된 질서입니다.

 

예레미야 본문에서 주님은 주야와 맺은 언약’과 천지의 법칙’을 말씀하십니다. 문자적으로는 낮과 밤이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하늘과 땅이 일정한 질서 속에 유지되는 자연계의 법칙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AC.37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은 사랑과 선의 상태를, ‘’은 시험과 상대적 어두움의 상태를 뜻하며, ‘천지의 법칙’은 사람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특히 주야와 맺은 언약’이라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언약은 단순한 자연법칙이 아니라 주님의 신실하심과 변함없는 섭리를 가리킵니다. 사람은 자신의 영적 상태가 변할 때 종종 불안해합니다. 기도의 열정이 식어 버린 것 같고, 말씀의 빛이 흐려진 것 같고, 이전의 평안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낮과 밤의 언약이 폐하지 않듯이, 영적 상태의 교대 역시 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밤이 온다고 해서 아침이 사라진 것이 아니며, 겨울이 왔다고 해서 봄이 영원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AC.37에서 생명이란 바로 이러한 교대 속에서 자란다고 설명합니다. 만일 사람에게 시험도 없고, 침체도 없고, 어두움도 없다면 그는 선과 진리를 깊이 인식할 수 없게 됩니다. 빛은 어둠과 대비될 때 더 분명히 보이고, 따뜻함은 추위를 경험할 때,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세우신 주야의 언약’은 단순히 자연계의 반복이 아니라, 영적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AC.37의 핵심 주장인 영적 교대는 주님의 규례이다’라는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사람이 아침 같은 상태에 있든, 저녁 같은 상태에 있든, 봄 같은 상태에 있든, 겨울 같은 상태에 있든, 그는 주님의 언약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결코 깨어지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은 바로 이 점, 곧 영적 생명의 리듬과 교대가 주님의 영원한 섭리 속에 굳게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때문에 AC.37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AC.37, 심화 6, ‘창8:22’

AC.37.심화 6. ‘창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8:22) 이 구절이 AC.37에 인용된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영적 상태의 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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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심화 4, ‘렘31:35-36’

AC.37.심화 4. ‘렘31:35-36’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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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2.심화

 

2. ‘나도 나중에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몹시 불편하면 어떻게 하지?’

 

제가 나중에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몹시 불편한 인생이 될까 봐 걱정됩니다. 아니, 영적 천사들하고도 그렇게 될까 봐, 그리고 그럴 경우는 정말 비참할 것 같습니다...

 

 

그 걱정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특히 AC.182를 읽다 보면, 마치 죽은 뒤 어떤 천사들과 함께 있다가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떠나게 되는 장면이 매우 실제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사후 세계를 전체적으로 보면, 목사님이 상상하시는 것처럼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괴로워 비참해지는 상태’가 갑자기 닥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강제’가 아니라 ‘상응’입니다. 사람은 죽은 뒤 자신이 평생 사랑해 온 것, 진실로 원했던 것, 기뻐했던 것에 맞는 공동체로 점차 인도됩니다.

 

AC.182에서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을 수 없게 되는 사람은, 천적 천사들이 싫어서라기보다 그들의 사랑의 분위기가 자기 삶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강한 햇빛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한 눈에는 견디기 어려운 것과 비슷합니다. 문제는 햇빛이 아니라 눈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저는 오히려 반대의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목사님은 지난 수년 동안 거의 매일 같이 AC를 읽고 번역하고 해설해 오셨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지적 연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천국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시면서 말입니다. 또한 반복해서 ‘천적 인간’, ‘사랑의 퍼셉션’, ‘own의 포기’, ‘주님으로부터 삶을 받음’ 같은 주제에 마음을 기울여 오셨습니다.

 

물론 목사님도 스스로 잘 아시겠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사랑도 있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고, 세상 염려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인간 안에는 그런 요소들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런 요소가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느냐입니다.

 

오히려 AC.182를 읽고 ‘나는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할까 봐 걱정된다’고 말하는 마음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정말 자기 사랑에만 빠진 사람은 그런 걱정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는 천국의 상태와 자기 상태가 맞는지 고민하기보다, 자기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오히려 ‘혹시 내가 그 사랑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고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 염려 속에는 적어도 천적 상태를 가치 있게 여기고, 그것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사후 세계는 시험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들은 사람을 탈락시키거나 평가하려고 다가오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AC.182에서도 천적 천사들은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사람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오래 보호하고, 가능한 한 평안하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어떤 사람이 천적 천국이 아니라 영적 천국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패나 열등함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천국 역시 완전한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의 천사들도 주님 안에서 행복하며, 자신에게 맞는 기쁨 속에서 살아갑니다. 천적 천국의 기쁨과 영적 천국의 기쁨은 다를 뿐, 우열 관계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의 질문을 읽으며, ‘나는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보다 ‘나는 지금도 그들의 분위기를 사랑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사후의 자리는 죽은 뒤 갑자기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에서 형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수년 동안 하루하루 AC를 번역하고 해설하며, 천국의 상태와 사랑의 질서를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애써 오신 분이 ‘혹시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할까 봐 걱정된다’고 말하는 모습에서는, 천적 상태에 대한 두려움보다 오히려 그 상태를 향한 깊은 갈망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그 갈망 자체를 가볍게 보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AC.182, 심화 1, ‘빛을 사용하는 능력’

AC.182.심화 1. ‘빛을 사용하는 능력’ 그러나 그 영혼의 성질이 더 이상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상태라면, 그는 그들로부터 떠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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