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hey were created. (5:2)

 

AC.475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로 말하는 것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의미하며,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calling their name man)는 말은 그들이 교회였음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특별한 의미에서 ‘사람’(man, homo)이라고 불립니다. By “male and female,” is signified the marriage between faith and love; by “calling their name man,” is signified that they were the church, which, in an especial sense, is called “man” [homo].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5에서 창세기 52절의 짧은 표현 속에 담긴 교회의 본질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말은 생물학적 성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남자는 신앙, 곧 진리를 의미하고, 여자는 사랑, 곧 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열이나 역할 분담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이 발생하는 영적 구조에 관한 말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지 않으면, 그곳에는 교회도, 생명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결혼은 단순한 협력 관계가 아닙니다.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결합이며, 어느 한쪽이 빠지면 다른 한쪽도 그 본래의 성격을 잃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차갑고 메마른 지식으로 남고, 신앙 없는 사랑은 방향을 잃은 감정으로 흩어집니다. 태고교회는 바로 이 결합이 가장 온전하게 이루어진 교회였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언제나 사랑 안에 있었고, 사랑은 신앙을 통해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는 표현을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여기서 ‘사람’이란 단순히 인간 개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사람(homo)은 ‘신앙과 사랑이 결혼된 상태’, 곧 교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는 것은, 그들이 단지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곧 교회 자체였다’는 선언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는 매우 독특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태고교회에서는 오히려 사람이 교회였습니다. 그들의 삶, 사고, 사랑, 인식 전체가 교회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교회에 ‘출석한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살면서 곧 교회였고, 사랑하며 곧 예배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는 말에 담긴 깊은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에서 ‘특별한 의미에서 교회가 사람이라고 불린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인간성은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단지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서, 혹은 도덕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참된 의미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인간은 주님을 향한 신앙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결혼된 상태에서만 나타납니다. 이 결합이 깨어지면, 인간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성경적 의미에서의 ‘사람’은 더 이상 아닙니다.

 

이 원리는 창세기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인간을 둘로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구조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신앙과 사랑의 결합으로 존재하며, 이 결합이 있을 때에만 ‘사람’이라는 이름을 받을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이 결합이 가장 온전했던 시대였기에,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한 이름으로, 곧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사랑과 결혼되어 있는가, 아니면 분리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말하면서도 사랑을 뒤로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사랑을 말하면서도 신앙의 진리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다시 결합될 때, 교회는 다시 ‘사람’이 됩니다. 그때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생명이 되고, 제도가 아니라 관계가 됩니다.

 

결국 AC.475는 교회의 정의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줍니다. ‘교회란 신앙과 사랑이 결혼된 상태이며, 그 상태가 곧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태고교회는 이 정의가 가장 완전하게 실현된 교회였고, 그래서 창세기 5장은 그들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데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남자와 여자’라는 성경의 표현은 단순한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생명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언어로 살아나게 됩니다.

 

 

 

AC.476, 창5:2,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사람’(homo)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로 말하는 것이 신앙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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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4, 창5:1, 태고교회의 ‘번성’(propagation)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태고교회의 출생, 곧 ‘번성’(propagation)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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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1)

 

AC.474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태고교회의 출생, 곧 ‘번성’(propagation)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먼저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르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번성과 계승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Since therefore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birth or propag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is first described as coming from a spiritual to a celestial state, for the propagations follow from this.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4에서 창세기 5장의 전체 흐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단순한 ‘사람의 출생’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출생’, 곧 교회가 어떻게 생겨나고 이어졌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번성(propagation)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번성이란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영적 상태가 다음 상태로 이어지는 계승의 원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5장은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시작이 어떤 질서를 따라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출생을 ‘먼저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르는 것’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출발점은 이미 완성된 천적 상태가 아니라, ‘영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천적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태고교회의 인간도 처음부터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존재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영적 인간으로 세워진 다음, 그 영적 상태가 성숙하여 천적 상태로 이르렀습니다. 이 질서가 먼저 분명히 제시되지 않으면, 그 이후에 나오는 모든 ‘번성’과 ‘계승’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모든 번성과 계승은 상태의 질서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제도를 통해 퍼지는 것이 아니고, 혈통을 통해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언제나 ‘내적 상태의 전달’을 통해 이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먼저 영적 상태로 세워지고, 그 영적 상태가 천적 상태로 성숙될 때, 비로소 그 상태는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번성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단정합니다.

 

이 원리는 태고교회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태고교회의 ‘’, ‘가족’, ‘민족’은 우연히 생겨난 사회적 단위가 아니라, ‘이 영적 질서가 자연스럽게 확장된 결과’였습니다. 한 집은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인식이 천적 상태에 이른 공동체였고, 그 집의 영적 성향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가족과 민족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만일 영적 상태가 천적 상태로 성숙되지 못했다면, 번성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교회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474는 ‘왜 창세기 5장이 먼저 형상과 모양, 곧 영적 상태와 천적 상태를 말하는가’를 분명히 설명해 줍니다. 성경은 곧바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이야기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먼저 인간이 어떤 상태로 만들어졌는지를 밝히고, 그 상태가 어떤 완성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 다음에야 비로소 번성과 계승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서술 순서가 아니라, ‘교회가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여주는 질서입니다.

 

설교적으로 보면,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를 향한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의 성장을 숫자나 활동의 확장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교회의 참된 번성은 언제나 ‘영적 상태의 성숙’에서 시작됩니다. 영적 인간이 천적 방향을 향해 자라지 않는다면, 외적인 확장은 있어도 내적인 계승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적 상태가 주님 안에서 깊어질 때, 교회는 비록 작아 보여도 살아 있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이 구절은 개인의 신앙 여정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열매’와 ‘전달력’은 노력의 많고 적음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영적 상태로 세워지고, 그 영적 상태가 사랑 안에서 성숙해 가는 데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 ‘천적 방향을 향해 가지 않는 영성은 머무를 수는 있어도 퍼질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번성’은 바로 이 점을 가리킵니다.

 

결국 AC.474는 창세기 5장을 읽는 하나의 큰 관점을 제시합니다. 태고교회의 출생과 계승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이 정하신 질서의 결과였습니다. 먼저 영적 인간이 세워지고,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상태로 완성되며, 그 완성된 상태에서 교회의 번성과 계승이 흘러나옵니다. 이 질서를 이해할 때, 창세기 5장은 더 이상 족보의 나열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살아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지도’가 됩니다.

 

 

 

AC.475, 창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AC.475-480)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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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3, 창5:1,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형상’(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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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1)

 

AC.473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영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보였습니다. ‘형상’(image)은 ‘모양’(likeness)을 위한 준비 단계이며, ‘모양’은 실제적인 복제(real replica)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이 주님의 ‘모양’으로서,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That a “likeness of God” is a celestial man, and an “image of God,” a spiritual man, has also been previously shown. An “image” is preparatory to a “likeness,” and a “likeness” is a real replica, for a celestial man is entirely governed by the Lord, as his “likeness.”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1:26)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3에서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아주 분명하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 인간을 뜻하고, ‘하나님의 모양’은 천적 인간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미 앞선 해설에서 충분히 설명되었지만, 여기서는 그 둘 사이의 관계가 한층 더 깊이 드러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형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모양’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준비 단계라는 점입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선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배운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조정해 갑니다. 이 상태는 매우 중요하고 귀하지만, 아직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는 여전히 ‘’와 ‘주님’이 구분되어 있고, 진리를 따르기 위한 선택과 싸움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형상(image)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모양(likeness)은 전혀 다른 차원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준비 단계가 아니라, ‘실제적인 복제(real replica)입니다. 여기서 복제라는 말은 외형적인 모방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인간 안에서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뜻합니다. 천적 인간은 더 이상 진리를 통해 선을 향해 가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곧바로 선을 인식하고 행하는 존재입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계산하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자연스럽게 살아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가리켜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전적으로’라는 말은 자유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에 묶여 있을 때가 진정한 속박이며, 주님의 사랑과 지혜 안에서 움직일 때가 참된 자유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께 강제로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뜻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가 ‘주님의 모양’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보면 ‘형상’과 ‘모양’의 관계는 사다리와 같습니다. 형상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자체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형상은 모양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고, 모양을 향해 성숙해 가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인류의 대부분은 이 사다리의 위쪽에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만이 이 ‘모양’의 상태, 곧 천적 상태에 이르렀고, 이후의 교회들은 주로 ‘형상’의 단계에 머물게 됩니다.

 

이 점에서 AC.473은 우리 신앙을 매우 정직하게 비추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종종 ‘형상’의 상태, 곧 진리를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상태를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 ‘준비’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신앙적 선택을 하는 모든 과정은 결국 한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전적으로 다스림 받는 삶, 다시 말해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 그대로 이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분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단지 ‘알고 애쓰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점점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내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합니다. 형상에 머물면 신앙은 긴장과 분투의 연속이지만, 모양을 향해 나아갈수록 신앙은 평안과 일치의 성격을 띱니다.

 

결국 AC.473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형상’으로만 두시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형상은 모양을 향한 길이며, 모양은 인간 안에 하나님의 질서가 실제로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태고교회는 이 모양의 상태를 살았고,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형상대로, 모양대로’라는 성경의 표현은 더 이상 추상적인 찬사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여정을 정확히 가리키는 언어가 됩니다.

 

 

 

AC.474, 창5:1, 태고교회의 ‘번성’(propagation)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태고교회의 출생, 곧 ‘번성’(propagation)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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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2, 창5:1, ‘창조하다’(create), ‘빚다’(form), ‘만들다’(make)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day in which God created man)가 그가 영적으로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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