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1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3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중에서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백성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4모세가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 하매 5그들이 나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들을 입은 진영 밖으로 메어 내니 6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니라 7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그리하면 죽음을 면하리라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라 8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너와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10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11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12모세가 아론과 남은 아들 엘르아살에게와 이다말에게 이르되 여호와께 드린 화제물 소제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너희는 그것을 취하여 누룩을 넣지 말고 제단 곁에서 먹되 13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소득과 아들들의 소득인즉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 내가 명령을 받았느니라 14흔든 가슴과 들어올린 뒷다리는 너와 자녀가 너와 함께 정결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소득과 아들들의 소득으로 주신 것임이니라 15 들어올린 뒷다리와 흔든 가슴을 화제물의 기름과 함께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너와 자손의 영원한 소득이니라 16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이르되 17 속죄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18 피는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는 것이었으니 제물은 너희가 내가 명령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했을 것이니라 19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제물을 먹었더라면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 20모세가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10)

 

해설

레위기 10장은 바로 앞 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9:24에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살랐습니다. 그리고 레10:2에서도 다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나답과 아비후를 삼킵니다.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인데 하나는 제물을 받아들이는 불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장을 삼키는 불입니다. 이 충격적인 대비가 레10 전체를 여는 열쇠입니다. 문제는 불이라는 외적 현상 자체가 아니라 어떤 사랑에서 예배가 나오는가입니다.

 

1절에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불을 담고 향을 놓아 여호와 앞에서 분향합니다. 겉모습만 보면 모든 것이 종교적입니다. 그들은 이방 제사장도 아니고 아론의 아들들이며, 향로를 들고 성소에서 향을 피웁니다. 문제는 단 하나,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75(24:1)는 이 사건을 직접 해설하면서 나답과 아비후가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를 표상했으며, 그들이 다른 을 사용한 것은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다른 근원에서 예배와 교리를 세우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불은 사랑의 선을, 향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C.9965(28:43)는 이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제단의 은 신적 사랑,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표상하지만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은 지옥에서 나오는 사랑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AC.10244(30:20)도 레10:1-2를 직접 인용하면서 그들의 행동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에서 나오는 예배를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10다른 은 단순히 불을 잘못 가져온 제의상의 실수가 아닙니다. 예배의 겉모습은 거룩하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내적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 아닌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레9와 레10의 연결이 매우 깊어집니다. 9에서 인간은 제물을 준비하고 제단에 올렸지만 마지막 불은 여호와 앞에서나왔습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그 불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들의 다른 을 가져옵니다. 9의 불은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내려오는 사랑이고, 10의 다른 불은 인간의 proprium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께 올리려는 사랑입니다. 겉으로는 둘 다 불이고 둘 다 예배에 사용되지만 근원은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예배하고 있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나를 예배하게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설교도 다른 불로 할 수 있고, 기도도 다른 불로 할 수 있으며, 봉사와 선교와 성경 연구까지 다른 불로 할 수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영향력을 갖고 싶은 욕망, 자기 교리를 지키려는 집착이 거룩한 행위의 연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향은 같아 보여도 그 향을 태우는 불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이 나답과 아비후를 삼킨 것은 하나님께서 순간적인 실수에 격분하여 두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죽음을 표상적 예배의 소멸과 천국과의 결합이 끊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AC.10244는 당시 이스라엘 교회에서 외적 의식이 내적인 천국의 실재를 정확히 표상할 때 그 표상을 통해 천국과의 결합이 있었으며, 규정된 표상을 깨뜨리면 그 결합을 더 이상 나타낼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다른 사랑에서 나오는 예배에는 천국과의 결합이 없다는 영적 사실을 극적으로 표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의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중에서 거룩함을 나타내겠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이 갈수록 무엇이 주님의 것이고 무엇이 proprium의 것인지 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다루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를 거룩한 것에 섞으면 그것은 더 위험한 혼합이 됩니다. 목회와 말씀 연구와 예배 인도처럼 거룩한 것에 가까운 쓰임일수록 불인가, 주님의 불인가?라는 자기 점검이 더 필요합니다.

 

4절로 7절에서는 나답과 아비후의 시신이 진영 밖으로 옮겨지고 아론과 남은 아들들은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어 애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5:8)은 나답과 아비후가 진영 밖으로 옮겨진 것을 직접 언급하면서 그들의 예배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천국에서 나온 예배가 아니었음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이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가족의 슬픔을 부정하라는 일반 명령이 아니라 표상교회 안에서 천국에 속하지 않은 예배가 밖으로 제거되는 장면입니다. 아론의 잠잠함역시 그의 내면 상태를 우리가 함부로 심리적으로 추측하기보다는 본문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8절부터 장면은 갑자기 포도주와 독주 문제로 넘어갑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이어집니다.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의 규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나답과 아비후 사건 뒤에 우연히 붙은 별개의 음주 규정이 아닙니다. 10의 두 번째 핵심인 분별의 문제입니다.

 

AC.1071(9:21)은 레10:8-9를 직접 인용하면서 술 취함이 신앙의 진리에 관한 오류와 정신적 혼란을 표상하기 때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포도주와 독주가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포도주 자체는 좋은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할 수 있지만, 술 취함은 진리가 거짓과 뒤섞여 올바른 판단을 잃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AC.6377도 포도주가 좋은 의미에서는 영적 사랑과 신앙의 선을, 반대 의미에서는 악에서 나온 거짓을 나타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에 고정된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문맥과 계열 안에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의 핵심은 금주 자체보다 분별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고 그것을 백성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불의 근본 문제도 바로 분별의 실패였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기에게서 나오는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고,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와 다른 근원에서 나오는 교리를 구별하지 못하면 외적으로 아무리 거룩한 예배를 드려도 내적으로는 다른 불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단순히 선한가 악한가를 넘어 선처럼 보이는 것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분별하게 됩니다.

 

12절로 15절에서 모세는 남은 제사장들에게 소제와 화목제의 몫을 규례대로 먹으라고 다시 명합니다. 두 형제가 죽은 직후에도 거룩한 제사의 질서는 계속됩니다. 이것은 냉혹함을 의미하기보다 주님의 질서가 인간의 충격과 혼란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6과 레7에서 보았듯 거룩한 것을 먹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기 삶으로 삼는 것과 연결됩니다. 다른 불이 제거된 뒤 필요한 것은 빈자리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16절로 20절에서 뜻밖의 갈등이 생깁니다. 모세가 속죄제 염소를 찾았는데 이미 불살라져 있었습니다. 규례대로라면 피를 성소 안으로 가져가지 않은 이 속죄제물은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습니다. 모세는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합니다. 그런데 아론은 오늘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데 내가 속죄제물을 먹었더라면 여호와께서 좋게 여기셨겠느냐고 답합니다. 놀랍게도 20절은 모세가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고 끝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레10 전체를 균형 있게 잡아 줍니다. 앞부분만 읽으면 이 장은 규칙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죽는다는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실제 규례에서 벗어난 일이 있었음에도 모세가 아론의 설명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나답과 아비후의 핵심 문제는 단순한 절차상의 사소한 실수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처럼 문제의 중심은 다른 ’, 곧 다른 사랑과 다른 근원에서 나온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론은 비극 가운데서 거룩한 것을 형식적으로 먹는 것이 과연 주님 앞에 합당한지를 묻고 있습니다.

 

다만 이 마지막 사건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레10:19-20을 직접 상세하게 해설한 강한 원전을 이번 검토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론의 슬픔은 정확히 이것을 상응한다거나 모세가 받아들인 것은 정확히 이런 영적 상태를 뜻한다고 세부 상응을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은 문자적 절차의 기계적 실행 규례가 섬기는 거룩한 목적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순종은 자기 뜻대로 규례를 바꾸는 것도 아니지만, 외적 형식만 수행하면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10은 결국 거룩함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라는 장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향을 피웠지만 다른 불을 사용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포도주와 독주를 피하여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규례를 아는 모세와 비극을 겪은 아론 사이에서 무엇이 여호와께서 좋게 여기시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됩니다. 이 모든 장면의 중심에는 분별이 있습니다.

 

9에서 주님에게서 나온 불은 제물을 사르고 백성을 경배하게 했습니다. 10에서 인간이 가져온 다른 불은 예배 자체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 안에 불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닙니다. 뜨거운 열심 자체도 기준이 아닙니다. 그 불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기준입니다. 자기애에서 오는 열심인지, 세상 사랑에서 오는 열심인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인간이 자기 불을 만들어 주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다시 주님을 예배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10의 두 불은 겉으로는 닮아 있지만 그 근원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바로 그 두 불을 점점 더 분명하게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SWC.10 해설)

 

심화

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SWC.레10 심화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SWC.레10 심화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를 읽으면 가장 먼저 드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다른 불이 무엇이었기에 두 사람이 즉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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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같은 여호와 앞의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SWC.레10 심화2, 왜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이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SWC.레10 심화2. 왜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이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레9:24과 레10:2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문장이 반복됩니다. 레9에서는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번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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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는

 

SWC.레10 심화3, ‘왜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

SWC.레10 심화3. ‘왜 제사장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을까? -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한다는 것’ 나답과 아비후 사건 직후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하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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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답과 아비후는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SWC.레10 심화4, ‘나답과 아비후는 왜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SWC.레10 심화4. ‘나답과 아비후는 왜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뒤 모세는 미사엘과 엘사반에게 그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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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답과 아비후는 죽었는데 아론의 규례 위반은 받아들여졌을까?’

 

SWC.레10 심화5, ‘왜 나답과 아비후는 죽었는데 아론의 규례 위반은 받아들여졌을까?’

SWC.레10 심화5. ‘왜 나답과 아비후는 죽었는데 아론의 규례 위반은 받아들여졌을까?’ 레10을 끝까지 읽으면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장의 처음에서는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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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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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 거듭남이 쓰임이 되고 주님의 영광

SWC.레9,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 거듭남이 쓰임이 되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1여덟째 날에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다가 2아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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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9 심화

5.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살랐을까?’

 

9의 마지막은 장엄합니다. 아론이 모든 제사를 마치고 백성을 축복하고,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 다시 백성을 축복하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사릅니다. 백성은 그것을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립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만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나와입니다. 제단에는 이미 불이 있었고 제사장들도 제물을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제사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듯 불이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을 사랑과 매우 깊게 연결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832(3:2)는 불이 좋은 의미에서는 신적 사랑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레6:12-13제단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하라는 말씀을 직접 인용하면서 그 영속적인 제단 불이 신적 선 자체, 곧 신적 사랑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9 마지막의 불을 인간의 종교적 열심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뜨거워져서 제사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불은 여호와 앞에서나옵니다. 예배에 생명을 주는 사랑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레6꺼지지 않는 을 한층 더 깊게 이해하게 합니다. 6에서는 제단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불은 주님의 영원하고 끊임없는 사랑과 자비를 표상합니다. 9에서는 이제 그 불의 출처가 명시됩니다. 그 사랑은 인간에게서 시작되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내려옵니다.

 

인간이 하는 일도 분명히 있습니다. 제물을 가져오고, 잡고, 피를 뿌리고, 씻고, 제단에 올리고, 규례에 따라 행합니다. 거듭남에서도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말씀을 배우고, 선을 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노력 자체가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안에 들어올 때 비로소 선은 살아 있는 선이 됩니다. 같은 구제를 해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할 수 있고 체어리티에서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설교를 해도 자기 지식을 보이기 위해 할 수 있고 사람의 영적 선을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외적 행위가 같아도 그 안에 어떤 이 있는지가 다릅니다.

 

따라서 레9의 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일을 움직이는 불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도 사람을 열심히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불이 내려왔을 때 백성은 아론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모든 예배와 모든 쓰임의 마지막 방향이 여기 있습니다. 참된 신적 사랑이 나타날 때 인간의 proprium은 자신을 높이지 않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8에서 인간의 귀와 손과 발이 준비되었습니다. 9에서 그 준비된 인간이 실제 쓰임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성경은 다시 분명히 합니다. 거듭남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며 쓰임에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제물을 제단에 올리지만 불은 여호와 앞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바로 이것이 레9 마지막 한 절에 담긴 거듭남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입니다. (SW.9 심화 5)

 

 

 

SWC.레9,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 거듭남이 쓰임이 되고 주님의 영광

SWC.레9,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 거듭남이 쓰임이 되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1여덟째 날에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다가 2아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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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심화4, ‘왜 아론은 제사를 마친 뒤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SWC.레9 심화4. ‘왜 아론은 제사를 마친 뒤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레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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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9 심화

4. 아론은 제사를 마친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이 처음으로 실제 사역을 수행한 뒤 행한 마지막 행동이 축복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축복을 단순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비는 종교적 인사로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422(12:3)축복이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천적·영적·자연적 차원의 좋은 것들을 포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론 자신이 복을 만들어 백성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제사장의 쓰임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는 것을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레8의 장면을 기억하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8에서는 아론의 에 위임식의 제물들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손이 레9에서는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즉 먼저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8에서는 손이 주님에게서 받고, 9에서는 그 손이 백성을 향해 축복합니다. 이것이 쓰임의 질서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쓰임의 기준은 내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나를 통해 얼마나 선한 쓰임으로 흘러가는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데 사용해야 하고, 물질을 받았다면 선한 쓰임에 사용하며, 경험과 지혜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론은 손을 들어축복합니다. 손이 능력과 행함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일반적인 상응을 생각하면 축복은 말만의 행위가 아니라 선을 실제로 전달하는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진정한 축복은 받으십시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통해 실제로 이웃에게 선이 전달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레9의 첫 제사장 사역은 자기 영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론이 제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이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리고 곧이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쓰임에 부름받은 사람의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마지막에는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8에서 채워진 손이 레9에서 축복하는 손이 되는 것, 이것이 위임에서 쓰임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SW.9 심화 4)

 

 

 

SWC.레9 심화5, ‘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살랐을까?’

SWC.레9 심화5. ‘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살랐을까?’ 레9의 마지막은 장엄합니다. 아론이 모든 제사를 마치고 백성을 축복하고,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 다시 백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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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심화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SWC.레9 심화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레9에는 같은 약속이 두 번 나옵니다. 6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고 말하고, 23절에서는 모든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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