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 (1758)

 

1. 최후 심판의 날은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is not meant by the day of the last judgment

 

1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보이는 세계의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그때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그때 무덤에서 일어나며, 선한 자는 악한 자와 분리된다고 말하는 등 같은 취지의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견해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자연적이며, 신적 질서의 가장 바깥 단계에 있고, 그 안에는 각각 그리고 모든 부분마다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문자적 의미에 따라서만 이해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견해로 이끌릴 수 있으며, 실제로 기독교 세계에서 수많은 이단이 그렇게 생겨났고, 각각이 또한 나름 말씀으로부터 확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씀 전체와 그 모든 부분 안에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영적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에 대해 이제 말씀드리는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보이는 하늘이나 사람이 거주하는 땅이 멸망하지 않으며, 둘 다 지속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이란 하늘과 땅 모두에 존재하는 새로운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늘에도 교회가 있다고 하는 것은, 하늘에도 땅과 마찬가지로 말씀이 있고 설교가 있으며 신적 예배(Divine worship)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곳의 모든 것은 더 완전한 상태에 있는데, 이는 그들이 자연 세계가 아니라 영적 세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의 모든 존재는 세상에 있을 때처럼 자연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러함은 Heaven and Hell에서, 특히 말씀을 통해 하늘이 인간과 결합되는 것에 관한 항목(303–310)과 하늘에서의 신적 예배에 관한 항목(221–227)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ose who have not known the spiritual sense of the Word, have understood that everything in the visible world will be destroyed in the day of the last judgment; for it is said, that heaven and earth are then to perish, and that God will create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In this opinion they have also confirmed themselves because it is said that all are then to rise from their graves, and that the good are then to be separated from the evil, with more to the same purport. But it is thus said in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because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is natural, and in the ultimate of Divine order, where each and every part contains a spiritual sense within it. For which reason, he who comprehends the Word only according to the sense of the letter, may be led into various opinions, as indeed has been the case in the Christian world, where so many heresies have thus arisen, and every one of them is confirmed from the Word. But since no one has hitherto known, that in the whole and in every part of the Word there is a spiritual sense, nor even what the spiritual sense is, therefore they who have embraced this opinion concerning the last judgment are excusable. But still they may now know, that neither the visible heaven nor the habitable earth will perish, but that both will endure; and that by “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 is meant a new church, both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t is said a new church in the heavens, for there is a church in the heavens, as well as on the earth; for there also is the Word, and likewise preachings, and Divine worship as on the earth; but with a difference, that there all things are in a more perfect state, because there they are not in the natural world, but in the spiritual; hence all there are spiritual men, and not natural as they were in the world. That it is so, may be seen in Heaven and Hell, in a special article there, on 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 by the Word (n. 303–310); and on divine worship in heaven (n. 221–227).  

 

 

해설

 

이 첫 문장은 스베덴보리가 왜 ‘마지막 심판’을 새롭게 설명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일종의 문을 여는 선언입니다. 그는 먼저 전통적 기독교가 품어 온 ‘우주적 파괴’의 상상을 지적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마지막 날에 별이 떨어지고 지구가 불타 사라지며, 죽은 육체가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는 장면을 실제 물리적 사건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이해가 문자에만 머문 결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전환이 나타나는데, 곧 말씀은 자연적 층과 영적 층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입니다. 문자만 붙잡으면 파괴의 종말이 보이지만, 영적 의미를 보면 그것은 ‘상태의 변화’, 곧 교회의 쇠퇴와 새로운 교회의 탄생을 말합니다. 이는 종말을 공포의 사건이 아니라 섭리 속 갱신의 과정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이 대목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이단’에 대한 그의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단이 단순히 악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가 아직 열리지 않았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그는 과거 교회를 정죄하기보다 ‘지금은 더 깊이 이해할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스베덴보리적인 태도인데, 섭리는 언제나 인류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진리를 드러낸다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에 대한 문자적 신앙은 거짓이라기보다 ‘불완전한 단계’였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또 하나의 핵심은 ‘새 하늘과 새 땅 = 새 교회’라는 선언입니다. 성경에서 ‘하늘’은 내적 차원의 교회, ‘’은 외적 차원의 교회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주의 재창조가 아니라 신앙의 구조가 새로워지는 사건입니다. 교회가 사랑과 신앙을 잃고 형식만 남을 때 영적 세계에서는 이미 심판이 일어나며, 그 결과 새로운 영적 공동체가 세워지고 그 영향이 결국 지상의 교회에도 흘러들어옵니다. 이런 관점은 역사를 ‘하늘과 땅이 서로 호응하는 유기적 과정’으로 보게 합니다.

 

특히 ‘하늘에도 교회가 있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천국을 단지 안식의 장소로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 역시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그곳에는 말씀, 설교, 예배가 있으며 단지 더 완전할 뿐입니다. 이는 죽음 이후에도 인간의 영적 성장이 계속됨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더욱 깊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역동적 질서입니다.

 

여기서 설교적으로 매우 풍성한 적용이 가능해집니다. 마지막 심판은 미래 어느 날 갑자기 오는 우주적 재난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 안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분리의 사건’입니다. 사랑에서 나온 것과 자기 사랑에서 나온 것이 갈라지고, 진리와 왜곡이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날짜를 계산하거나 재난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이 하늘에 속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는 삶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목회적으로 큰 위로를 줍니다. 세상이 무너질 것이라는 공포 대신, 주님은 언제나 ‘새 교회’를 준비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끝이 아니라 전환이며, 황혼 뒤에는 새벽이 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심판은 파괴보다 정화에 가깝습니다. 불은 태워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금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숨은 주제는 ‘말씀의 깊이’입니다. 문자 아래에는 언제나 더 높은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가 열릴 때 종말은 두려움의 교리가 아니라 희망의 복음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LJ의 첫 문장은 단순한 종말론 설명이 아니라 독자를 영적 의미의 세계로 초대하는 선언이며,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마지막 심판은 이미 영적 세계에서 일어났다’는 거대한 논증의 기초를 놓는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LJ.2, '새 하늘', '처음 하늘'의 속뜻

1. 최후의 심판 날이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2 말씀에서 하늘과 땅의 파괴가 언급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passages in the Word, in which mention is made of the destruction of heaven and earth, 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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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2:5, 6)

 

AC.92

 

싸움이 그치거나, 혹은 욕망들과 거짓들로 인해 일어났던 불안이 사라질 때에, 겉 사람이 누리는 평화의 평온함(the tranquility of peace)이 어떠한 것인지는, 오직 평화의 상태를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 상태는 모든 기쁨에 대한 관념을 능가할 만큼 즐거운 것이어서,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일 뿐만 아니라, 내적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미치는 상태입니다. 이때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나는데, 그것들은 평화의 기쁨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The nature of the tranquility of peace of the external man, on the cessation of combat, or of the unrest caused by cupidities and falsities, can be known only to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a state of peace. This state is so delightful that it surpasses every idea of delight: it is not only a cessation of combat, but is life proceeding from interior peace, and affecting the external man in such a manner as cannot be described; the truths of faith, and the goods of love, which derive their life from the delight of peace, are then born.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설명되어 온 ‘안식’과 ‘평온함’을, 가장 내밀한 체험의 언어로 풀어 주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평온함이 무엇인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정의하거나 전달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라, ‘오직 알게 되는 상태’, 곧 직접 겪은 사람만이 아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는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이 평온함은 단순히 싸움이 없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싸움이 없다는 것은 소극적 설명일 뿐입니다. 이 상태의 본질은, ‘내적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이것은 공백이나 정지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 가장 깊은 근원에서부터 자유롭게 흐르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가 모든 기쁨의 관념을 능가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과장이나 수사가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기쁨은 감정적 흥분이나 만족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제자리를 찾았을 때 오는’ 기쁨입니다. 욕망과 거짓으로 인한 불안이 사라졌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방어하거나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로 오는 기쁨은, 무엇을 얻어서 생기는 기쁨이 아니라, ‘방해가 사라져서 드러나는’ 기쁨입니다.

 

이 평온함의 핵심은, 내적 평화가 겉 사람에게 ‘미친다(affecting)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내적 평화는 속 사람 안에 머무는 추상적 상태가 아니라, 겉 사람의 사고, 감정, 행동 전반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합니다. 강요나 명령, 규범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자연스러운 생명의 흐름’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는 겉 사람이 더 이상 긴장하거나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무엇이 옳은지를 따로 증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의 평화를 그대로 받아, 그 안에서 움직입니다. 이 때문에 이 상태는 설명될 수 없고, 오직 체험될 수만 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상태에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앞서 영적 단계에서 다루어졌던 진리와 선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이전에는 진리와 선이 노력과 선택의 산물이었다면, 이제는 ‘평화의 기쁨에서 태어나는 생명’입니다.

 

여기서 ‘태어난다(are born)라는 표현이 결정적입니다. 이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외부에서 주입되거나 학습된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은 신앙의 논리나 도덕적 결단이 아니라, ‘평화 자체의 기쁨’입니다. 평화가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이 진리와 선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상태에서의 삶은, 더 잘 싸우는 삶이 아니라, ‘싸움이 끝난 뒤에 비로소 시작되는’ 삶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특징은 고요함이지만, 결코 무기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깊고 충만한 생명 활동입니다.

 

AC.92는 안식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정의합니다. 안식은 멈춤이 아니라, 평화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 전체를 적시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 속에서, 진리와 선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기쁨에서 태어난 열매’가 됩니다.

 

 

 

AC.91, 창2:5-6, ‘안개’, 천적 상태의 평온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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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2:5, 6)

 

AC.9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무엇을 내포하는지는,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되어 가는 동안 그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결코 인식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매우 깊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으므로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적 상태가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치고, 평온함이 따르게 됩니다. (87번을 보십시오) 이 평온함이 안개로 의미됩니다. 이는 그것이 마치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이 물을 받아 적셔지는 수증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평온함, 곧 평화에서 태어난 이 상태가, ‘들의 초목밭의 채소라 불리는 것들을 산출합니다. 이것들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온 이성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입니다. But what these things involve cannot possibly be perceived unless it is known what man’s state is while from being spiritual he is becoming celestial, for they are deeply hidden. While he is spiritual, the external man is not yet willing to yield obedience to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re is a combat;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n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 combat ceases, and tranquility ensues (see n. 87). This tranquility is signified by “rain” and “mist,” for it is like a vapor with which the external man is watered and bedewed from the internal; and it is this tranquility, the offspring of peace, which produces what are called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which, specifically, are things of the rational mind and of the memory [rationalia et scientifica] from a celestial spiritual origin.

 

 

해설

 

이 단락은 AC.90에서 언급된 ‘안개 같은 평온함’이 무엇인지를, 인간의 내면 상태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말합니다. 이 모든 설명은,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옮겨 가는 중간 국면’을 알지 못하면 이해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개념 설명이 아니라 ‘경험적 전이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긴장이 존재합니다. 겉 사람은 진리를 알고 인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기쁘게 섬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 방식, 자기 판단, 자기 습관을 고집하려 하고, 속 사람의 질서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싸움이 생깁니다. 이 싸움은 선과 악 사이의 추상적 대결이 아니라,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매우 실제적인 긴장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적 상태로 들어서면, 이 관계가 바뀝니다. 겉 사람이 더 이상 억지로 굴복하는 위치에 있지 않고, 속 사람을 섬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순종이 강요가 아니라 기쁨이 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싸움은 끝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맞서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의 질서를 자기 생명의 질서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렇게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상태가 바로 ‘평온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평온함을 단순한 정서적 안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계가 바로잡힌 결과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위계와 질서가 회복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따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평온함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질서의 결과’입니다.

 

이 평온함이 ‘’와 ‘안개’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비는 폭우나 강수량 많은 비가 아닙니다. 곧 ‘안개’라고 불릴 만큼 부드럽고 은은한 것입니다. 이는 겉 사람이 외적 교훈이나 명령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조용히 흘러나오는 생명의 영향으로 적셔진다는 뜻입니다. 겉 사람은 이제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긴장하지 않고, 이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이 비유는 매우 섬세합니다. 안개는 소리를 내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며, 모든 것을 고르게 적십니다. 천적 상태에서의 평온함도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어떤 결단의 순간이나 극적 체험으로 드러나지 않고, 어느새 삶 전체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부터 싸움이 끝났는지를 정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이미 평온 속에 머물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평온함, 곧 평화에서 태어난 상태가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를 산출합니다. 이는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이 더 이상 자기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이제 겉 사람의 생각과 행위는, 속 사람에서 흘러나온 생명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이성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이성과 기억 지식이 ‘천적 영적 기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같은 이성, 같은 지식이라도, 그 근원이 다릅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성과 지식이 진리를 분별하기 위한 도구였다면, 천적 단계에서는 사랑을 섬기기 위한 도구가 됩니다. 이성은 더 이상 판단의 주인이 아니라, 사랑의 봉사자가 됩니다.

 

그래서 AC.91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거나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평온 속에 있으며, 그 평온함이 이성과 기억 지식을 적셔 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모든 외적 산출물은, 억지로 만들어진 선이 아니라, ‘평화에서 태어난 열매’입니다.

 

이 글은 천적 상태의 깊이를 가장 조용한 언어로 보여 줍니다.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것은 공백이 아니라, 평화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삶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안개처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겉 사람 전체를 적셔 갑니다.

 

 

 

AC.92, 창2:5-6, 평화의 기쁨에서 태어나는 ‘들의 초목, 밭의 채소’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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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0, 창2:5-6,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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