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2.심화

 

1.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

 

위 해설 결론 부분,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이며,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로 이어집니다.’를 설명해 주세요. 만일, 모든 거듭남의 종착지가 일곱째 날이라면, 그러면 왜 영적 천국이 있는 건가요? 전부 천적 천국만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섯째 날이 형상의 완성이고 일곱째 날이 안식’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최고 상태(천적 상태)에 도달한다’는 뜻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길 안에서 질서가 완성되고, 그 위에 주님의 평안이 임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종착지는 모두 ‘안식’이 맞지만, 그 안식의 ‘형태와 깊이’는 사람마다 다르며, 그 차이가 바로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의 구분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이라는 표현부터 정확히 보셔야 합니다. 여기서 ‘완성’은 ‘최고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질서가 바로 섰다’, ‘구조가 안정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중심 아래에서 정렬된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더 이상 이전처럼 끊임없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일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이것을 ‘형상이 완성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다음 ‘일곱째 날은 안식’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싸움이 중심이 아닌 상태’, ‘주님이 주도하시고 사람은 그 안에서 평안히 있는 상태’입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끊임없는 선택과 내적 갈등이 중심이지만, 점점 상태가 정돈되면 ‘억지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선 안에 머무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이제 목사님 질문의 핵심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모든 거듭남의 종착지가 일곱째 날이라면, 왜 영적 천국이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매우 정확한 질문입니다. 답은 이것입니다. ‘안식은 동일하지만, 그 안식에 이르는 방식과 그 안식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해’ 거듭납니다. 먼저 이해가 열리고, 그 이해를 따라 살면서 점점 사랑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그의 안식은 ‘진리가 밝혀져 있고, 그 진리 안에서 안정된 상태’입니다. 그는 여전히 ‘옳고 그름’을 인식하고, 그 인식 속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이것이 영적 천국입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사랑 자체’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굳이 따져서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이미 그의 본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안식은 ‘사랑 자체 안에서의 평안’, 곧 더 깊고 직접적인 결합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천적 천국입니다.

 

그래서 두 천국은 ‘목적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안식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둘 다 일곱째 날의 상태이지만, 하나는 ‘진리를 통해 들어간 안식’, 다른 하나는 ‘사랑 자체 안에 있는 안식’입니다.

 

이걸 아주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게 옳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으며 평안을 누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게 좋다, 이것이 사랑이다’라는 상태 자체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안합니다. 둘 다 평안하지만, 하나는 ‘이해를 통한 평안’, 다른 하나는 ‘사랑 자체의 평안’입니다.

 

그래서 ‘모두 천적 천국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창조되지 않았고, 같은 방식으로 거듭나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통해’ 주님께 나아가고, 어떤 사람은 ‘사랑을 통해’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은 이 둘을 모두 온전한 길로 인정하시고, 각각에 맞는 천국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영적 천국도 결코 ‘덜한 천국’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완전한 천국’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 문장으로 돌아가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은 ‘각자의 방식대로 질서가 완성되는 것’이고, ‘일곱째 날은 안식’은 ‘그 완성 위에 주님의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안은 영적 인간에게도, 천적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그 성질과 깊이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모든 거듭남은 안식(일곱째 날)으로 끝나지만, 그 안식은 진리를 통해 형성된 영적 안식과 사랑 자체에 근거한 천적 안식으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이 함께 존재합니다.’

 

 

 

AC.62, 심화 2, ‘처음부터 타고나는가?’

AC.62.심화 2. ‘처음부터 타고나는가?’ 그럼, 처음부터 ‘영적 천국’에 갈 사람과 ‘천적 천국’에 갈 사람은 타고나는 거군요.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천적’이 될 수는 없는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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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여섯째 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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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여섯 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이것들을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사람이 전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출발, 처음에는 겨우 인간의 어떤 모습이 생기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이르러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 되기 때문입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요약해 주는 핵심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시간의 길이나 역사적 연대를 뜻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합니다. 여섯 날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상태들, 곧 영적 형성의 단계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창조 이야기를 인간 내면의 재창조 이야기로 읽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여섯 단계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류 전체의 영적 역사 속에서도 이 여섯 단계가 반복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의 삶,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신앙 여정 속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한 번에 완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세부적으로 반복되는 과정입니다.

 

이 글에서 특히 강하게 드러나는 표현은 ‘처음에는 전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이는 육체적 인간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참된 ‘인간’이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 기준에서 볼 때,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아직 인간의 본질을 갖추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는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그 근원은 자기 본성과 자기 사랑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첫 단계에서 인간은 ‘겨우 인간의 어떤 모습’이 됩니다. 이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빛이 비치기 시작, 선과 진리가 자기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이때 인간은 아직 흔들리고 불안정하지만, 더 이상 완전히 닫힌 존재는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 줍니다. 거듭남은 급격한 도약이 아니라, 점진적 형성입니다. 이해가 먼저 열리고, 그다음 의지가 움직이며, 이 둘이 여러 번의 갈등과 반복을 거쳐 서서히 결합합니다. 이 과정에서 실패와 후퇴도 포함되며, 그 모든 것이 여섯 날이라는 구조 안에 포함됩니다.

 

여섯째 날에 이르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여기서 형상이란, 주님을 닮았다는 외형적 의미가 아니라, 이해와 의지가 질서 있게 결합,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삶 전체를 다스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진리를 알 뿐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리를 행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여섯째 날의 핵심이며, 창조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여섯째 날이 끝이라고 해서 과정이 멈추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이며,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글은 거듭남의 목적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그 여정이 얼마나 섬세하고 단계적인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인간은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날마다 다시 창조되어 가는 존재라는 것이 이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심화

 

1.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

 

 

AC.62, 심화 1,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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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처음부터 타고나는가?’

 

 

AC.62, 심화 2, ‘처음부터 타고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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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AC.62, 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AC.62.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음... 위 설명은 좀 서로 충돌하는 것 같아요.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구조와 본질은 여전히 영적 방식 위에 있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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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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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심화 4.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네요?’ 그러면...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어요. 천성적으로 ‘사랑스런’ 사람, 처음부터 사랑으로 출발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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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AC.62, 심화 5,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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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여섯째 날이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그 상태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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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 창1:31,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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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심화

 

1.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으로 저는 단순히 이해’(理解)를 선호합니다. 이해력’, 사고력 등 여러 번역이 있고, 그 이유와 배경이 충분히 이해되지만 말입니다.  이해라는 번역이 많이 낯설어 꼭 다른 번역이 필요하다면, 저는 이해하는 능력으로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의지 또한 의도하는 능력으로 같이 바꾸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understanding’을 이해’로 두시려는 방향은 충분히 타당하고, 오히려 AC 전체를 일관되게 읽어 나가는 데에도 좋은 선택입니다. 다만 핵심은 이해’를 단순한 결과(알아진 상태)가 아니라 작동하는 기능(능력)’으로 읽히도록 어떻게 보완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로 두되, 필요할 때 이해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시는 방식은 매우 균형 잡힌 접근입니다.

 

먼저 왜 이해’가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짚어보면 분명해집니다. 한국어에서 이해’는 보통 이미 알아버린 상태’, 즉 결과로 느껴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understanding’은 단순히 알고 있음’이 아니라, ‘판단하고,분별하고, 받아들이고, 연결하고, 형성하는 살아 있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번역자들이 이해력’, ‘지성’, ‘사고력 같은 표현을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번역들도 완벽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해력’은 능력은 살리지만 딱딱하고, ‘지성’은 철학적으로 들리고, ‘사고력’은 범위가 너무 넓어집니다. 반면 이해’는 가장 자연스럽고, 성경 읽는 흐름에도 잘 붙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처럼 이해’를 기본으로 두고, 독자가 오해할 수 있는 지점에서만 이해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는 방식이 실제 목회와 설교에서는 매우 유익합니다.

 

이제 의지’와의 짝을 보시면 더 또렷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는 항상 understanding - will’입니다. 이것을 이해 - 의지’로 두면 간결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기능’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때는 이해하는 능력 - 의도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는 것도 아주 정확한 접근입니다. 특히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이 설명이 훨씬 와닿습니다.

 

다만 한 가지 조심하실 점이 있습니다. 매번 이해하는 능력’, ‘의도하는 능력’으로 풀면 문장이 무거워집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식은 이렇게 보입니다. 기본 텍스트에서는 이해 - 의지’를 유지하고, 처음 설명할 때 한 번만 여기서 이해는 단순한 앎이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입니다’라고 풀어 주고,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이해’로 계속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자와 청중 모두에게 가장 부담이 적습니다.

 

이걸 실제 설교 흐름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해는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의지는 단순한 의욕이 아니라, 무엇을 원하고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이렇게 한 번만 정확히 잡아 주면, 이후에는 이해’와 의지’만 써도 청중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해’라는 번역은 충분히 적절하며, 다만 그것이 살아 있는 기능’이라는 점을 초기에만 분명히 밝혀 주면 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이해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는 것은 매우 좋은 보완 방식입니다. ‘의지 - 의도하는 능력’과의 짝도 구조적으로 잘 맞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understanding 이해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며, 다만 그것이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점을 보완 설명으로 살려 주는 것이 가장 균형 잡힌 방법입니다.’

 

 

 

AC.61, 창1:31,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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