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4:19-22)

 

AC.333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는데,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가 이를 의미하며,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Jabal), ‘유발(Jubal), ‘두발가인(Tubal Cain)으로 그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야발은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유발은 영적인 것들을, ‘두발가인은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19-22) A new church then arose, which is meant by “Adah and Zillah,” and is described by their sons “Jabal,” “Jubal,” and “Tubal Cain”; the celestial things of the church by “Jabal,” the spiritual by “Jubal,” and the natural by “Tubal-Cain.” (verses 19–22)

 

 

해설

 

AC.333은 가인 계열의 이야기를 읽다가 상당히 뜻밖의 전환을 만나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332에서는 가인으로부터 생겨난 여러 이단들이 계속 변질되어 오다가 마지막 ‘라멕’에 이르렀고,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인 계열은 완전히 종말에 이르렀으므로, 이후에는 더 이상 교회라 부를 만한 것이 나올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333에서 스베덴보리는 놀랍게도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를 ‘아다와 씰라’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창4:19부터는 단순히 라멕의 가족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종말에 이른 이전의 교리적 계열 가운데서 다시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일어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먼저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인 계열이 원래의 태고교회 상태로 회복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계열은 이미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교회에 필요한 것들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앞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한 교리적 계열이 종말에 이른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와 섭리까지 종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종말 가운데서도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그것으로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십니다. ‘아다와 씰라’가 바로 그러한 새로운 교회를 표상합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새로운 교회의 성격이 한 사람의 이름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아다와 씰라’라는 두 여자로 표상된다는 점입니다.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3에서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로서 교회를 의미했던 것과 같은 큰 원리가 여기에도 작용합니다. 다만 아다와 씰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서로 다른 성격의 교회를 의미하는지는 이후 번호에서 더 자세히 밝혀집니다. AC.333의 단계에서는 우선 두 사람이 ‘새로운 교회’를 의미한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의 성격은 아다와 씰라 자신보다 그들의 아들들을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에 의해 그 성격이 묘사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창세기 초기의 ‘낳음’을 단순한 생물학적 계보로만 읽지 않는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교회가 무엇을 낳는다는 것은 그 교회에서 어떤 교리와 예배, 어떤 영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이 발전하여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은 단순히 라멕의 세 아들이 아니라, 이 새로운 교회 안에서 형성된 세 가지 중요한 층위를 나타냅니다.

 

첫째, ‘야발’은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천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사용해 온 스베덴보리의 고유한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히 ‘하늘에 속한 것’이라는 막연한 뜻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 관계된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교회 안에도 사랑과 선에 관계된 천적인 것들이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야발로 표상됩니다.

 

둘째, ‘유발’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과 구별되며, 주로 신앙과 진리에 관계됩니다. 천적인 것이 사랑과 선을 중심으로 한다면, 영적인 것은 그 사랑과 선을 표현하고 인도하는 진리와 신앙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야발과 유발을 함께 보면 이 새로운 교회 안에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곧 선에 관계된 것과 진리에 관계된 것이 다시 일정한 형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두발가인’은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자연적인 것은 사람의 가장 외적인 삶과 관련됩니다. 사랑과 선이 내적으로 존재하고, 신앙과 진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표현한다면, 그것들이 실제 행동과 생활, 외적 예배와 유용한 일들 가운데 나타나는 자리가 자연적 차원입니다. 따라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라는 세 이름을 통하여 새로운 교회가 천적, 영적, 자연적 차원을 갖추고 있었음이 묘사됩니다.

 

이 구조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천적, 영적, 자연적’은 서로 따로 떨어진 세 가지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이 안에서 밖으로 내려와 완성되는 질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안쪽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이라는 천적인 것이 있고, 그것이 진리와 신앙이라는 영적인 것을 통하여 형체를 얻으며, 마침내 자연적인 삶과 행위 속에 나타납니다. 참된 교회라면 이 세 차원이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랑만 말하고 진리가 없어서도 안 되며, 진리만 말하고 삶이 없어서도 안 됩니다. 내적인 선이 진리를 통하여 자연적인 삶에까지 내려와야 교회의 생명이 실제로 완성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33은 앞의 라멕에 관한 설명과 함께 읽을 때 더욱 흥미롭습니다. 라멕에게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직후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고, 그 교회 안에서는 다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 계열이 모든 것을 소진했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까지 소진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종말 가운데서 새로운 것을 일으키시며, 교회가 다시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질서를 갖도록 준비하십니다.

 

다만 여기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것을 곧 ‘가인 계열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AC.334 이하를 읽으면서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표상하는 것들은 분명 교회에 속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이지만, 그것들이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처럼 내적인 퍼셉션에서 직접 흘러나온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상태가 이미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 이러한 것들도 이전과는 다른 방식과 형태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교회’라는 말에는 연속성과 단절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교회에 필요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은 다시 존재하지만, 그것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방식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3,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3.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바로 앞에서 우리가 나눈 질문과 AC.333이 절묘하게 연결됩니다. 라멕에게서 ‘신앙에 속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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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아다와 씰라’라는 새 교회가 일어났을 때의 상황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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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7,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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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이 가인 계열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계속 현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생명 주기가 계속 오버랩되네요...

 

네, 저도 지금 가인 계열을 따라가면서 그 겹침이 상당히 선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을 가인 계열 = 오늘날 개신교’라는 식으로 직접 대응시키기보다는, 4가 보여 주는 교회의 생명 주기’가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살아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진리를 붙듭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점차 신앙에 관한 교리’로 정리됩니다. 이것 자체는 필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교리가 그것을 낳은 생명보다 앞서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가 앞서고, 더 나아가 올바른 교리를 믿는 것 자체가 구원의 중심처럼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AC.325 가인’이 바로 이 지점에서 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이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제거하려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과 말씀, 은혜와 신앙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생명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신앙’이 점점 교리적으로 정식화되고, 무엇을 믿느냐를 둘러싼 논쟁과 분열이 반복되며, 교파와 신조, 신학 체계가 계속 세분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AC.331-332 하나의 이단에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는 구조가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역사적 개신교의 각 교파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단’과 일대일로 대응시키자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될 때, 교리는 계속 증식하고 세분될 수 있다’는 영적 원리가 닮아 보인다는 뜻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AC.332의 라멕입니다. 출발점에서는 신앙을 너무 중요하게 여겨 체어리티보다 앞세웠는데, 마지막에는 오히려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비추어 보면 꽤 묵직합니다. 교회 건물도 있고, 조직도 있고, 신학교도 있고, 교단도 있고, 예배도 있고, 수많은 설교와 성경공부도 있는데 정작 그 모든 것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형은 오히려 훨씬 정교해졌는데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삶, 서로를 향한 체어리티가 약해진다면, 외적 종교의 발전과 내적 교회의 쇠퇴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아다와 씰라 계열이 더욱 흥미롭습니다. 종말을 향해 가는 계열에서도 야발, 유발, 두발가인과 같은 유용한 것들이 계속 생겨납니다. 이것 역시 오늘날 교회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교회 시대가 내적으로 쇠퇴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신학, 찬양, 선교, 교육, 상담, 사회봉사, 성경 연구 같은 훌륭한 것들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면에서는 대단히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의 내적 생명이 건강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교회의 쇠퇴가 보인다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악하다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 구별이 앞으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읽으면서 아주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종말’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교회의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교회 문이 닫히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외적인 교회는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는가, 곧 체어리티와 신앙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그 결합이 사라지면 외적 제도와 교리는 남아 있어도 내적으로는 교회의 저녁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창4를 읽으면서 현 기독교가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을 억지스러운 적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의 속뜻이 가진 보편성 때문이라고 봅니다. 다만 시선을 저 개신교가 가인이다’라고 밖으로 돌리는 순간 이 말씀의 칼날이 무뎌질 수 있습니다. 더 무서운 독법은 내 안에도 가인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고, 스베덴보리를 알고, 속뜻과 상응을 설명하면서도 그것이 실제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바로 그 AC 지식조차 아벨보다 앞서는 가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진리도 이 위험에서 자동으로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지금 창4를 읽으며 느끼시는 겹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4는 단순히 옛 태고교회가 이렇게 망했다’는 과거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교회가 어떻게 교리가 되고, 교리가 어떻게 생명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된 교리가 어떻게 계속 발전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생명을 잃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생명 주기’처럼 읽힙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이야기인데도 이상할 만큼 오늘의 교회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고요.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한 교회의 생명 주기가 끝난다고 주님의 교회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낡은 형식 가운데서도 다음 교회에 필요한 것을 건져 내시며, 다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십니다. 4를 읽으면서 오늘날 개신교가 겹쳐 보인다면, 저는 개신교가 끝났다’는 결론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지금 무엇을 보존하고 계시며, 어디에서 다음 생명을 준비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까지 함께 가져가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AC.332, 창4:17,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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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AC.332.심화 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다음 질문은 진도가 좀 빠른 듯 하지만... 라멕에게서 일어난 아다와 씰라 계열도 썩 괜찮아 보이는데 결국 가인 계열은 셋 계열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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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심화

 

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다음 질문은 진도가 좀 빠른 듯 하지만... 라멕에게서 일어난 아다와 씰라 계열도 썩 괜찮아 보이는데 결국 가인 계열은 셋 계열과 더불어 홍수라는 종말을 맞이하는군요...

 

네, 맞습니다. 진도는 조금 빠르지만, 오히려 지금 이 질문을 미리 붙들어 두면, 곧 만나게 될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읽을 때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특히 말씀하신 것처럼 그 계열을 읽다 보면 뜻밖의 느낌이 듭니다. ‘가인 계열이 계속 타락했다면서, 여기에는 왜 이렇게 쓸 만하고 심지어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생겨나는가?’ 하는 것이지요.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AC.332의 선언만 보면 이후에는 온통 악과 거짓뿐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창4 후반으로 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다에게서 야발과 유발이 나오고, 씰라에게서 두발가인이 나오며,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단순히 악한 것들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야발은 천적이고 거룩한 사랑의 것들’, 유발은 영적 신앙의 것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과 연결되는 상당히 중요한 표상들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하신 대로 얼핏 보면 썩 괜찮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놀랍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그 계열 안에서 어떤 유용한 교리적, 예배적 형식이 생겨났다’는 것과 그 교회 자체가 다시 살아 있는 천적 교회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라멕에게서 원래 가인이 표상했던 신앙의 생명은 종말에 이르렀지만, 그 후손들 가운데서 외적인 것들, 곧 예배와 교리, 자연적 삶에 사용될 수 있는 여러 형식들이 발전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스베덴보리가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설명하면서 상당히 세밀하게 구별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좋은 의미를 가진 것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가인 계열이 다시 원래의 천적 생명을 회복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어떤 교회가 내적으로 쇠퇴해도 그 교회에서 발전한 지식, 예배 형식, 교리, 문화적 유산 가운데 후대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들이 남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들까지 모두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필요한 것들을 보존하여 이후의 교회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이 점은 조금 전 이야기한 가인의 표’와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어떤 교회의 악을 승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을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두 번째 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가인 계열만 홍수로 종말을 맞는 것이 아닙니다. 셋 계열도 자연계의 역사라는 큰 틀에서는 홍수 이전 태고교회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가인 계열은 악했으니 홍수로 멸망하고, 셋 계열은 선했으니 살아남았다’는 식으로 창4와 창5를 나누어 읽으면 곤란합니다. 5의 계보 역시 계속 동일한 상태로 순수하게 유지되는 계보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세대를 거치면서 변해 가고, 마침내 그 시대 자체가 종말에 이릅니다.

 

바로 여기서 노아’의 위치가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노아는 단순히 착한 셋 계열의 마지막 생존자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노아는 이전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를 그대로 이어 가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영적 구조를 가진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표상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었고,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지만, 그 의지 자체가 심각하게 부패하면서 더 이상 그 방식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해를 의지에서 어느 정도 분리하시고,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며, 체어리티에 이르게 하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그것이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홍수는 나쁜 가인 계열을 없애고, 좋은 셋 계열만 남긴 사건’이라기보다 훨씬 큰 사건입니다. 하나의 인류적, 교회적 시대 전체가 끝나는 종말입니다. 가인 계열과 셋 계열로 나란히 이어지던 태고교회는 결국 그 옛 질서 자체로서는 끝납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 전체 가운데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그것을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로 이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속성과 단절이 동시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없어진 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옛 교회가 그대로 계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보존할 것은 보존하시되 거듭남의 질서는 새롭게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아다와 씰라 계열이 썩 괜찮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다. 종말에 이르는 교회라고 해서 그 안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악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내적 생명이 쇠퇴한 뒤에도 주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유용한 것들을 보존하실 수 있고, 후대의 교회를 위해 준비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의 종말’을 모든 사람이 악인이 되고, 모든 진리가 사라지는 순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의 종말은 본질적으로 그 교회를 그 교회답게 하던 내적 생명과 질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4와 창5를 조금 앞서 한눈에 바라보면 꽤 아름다운 구조가 보입니다. 4에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어떻게 여러 교리와 외적 형식으로 발전하고, 마침내 그 계열이 종말에 이르는지를 보고, 5에서는 또 다른 계열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상태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변해 가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둘 다 결국 홍수라는 거대한 경계 앞에 섭니다. 그런데 그 경계 한가운데 노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낡은 질서를 억지로 영속시키지 않으시면서도 그 안의 리메인스를 잃지 않으시고, 그것을 가지고 전혀 새로운 거듭남의 시대를 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목사님께서 느끼신 아다와 씰라 계열도 꽤 괜찮아 보이는데, 결국 모두 홍수라는 종말을 맞는구나’라는 느낌은 앞으로 상당히 중요한 질문으로 발전할 것 같습니다. ‘좋은 것이 남아 있다는 것’과 그 교회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한 교회의 종말’과 주님의 구원 역사의 종말 역시 전혀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두 구별을 붙들고 앞으로 몇 개의 글을 더 읽으시면,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이 왜 가인의 후손인데도 그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가 훨씬 자연스럽게 풀릴 것입니다.

 

 

 

AC.332, 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AC.332.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러면 처음 가인의 때, 그에게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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