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
‘가인이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갔다’(CainwentoutfromthefacesofJehovah)는신앙이사랑의신앙에속한선에서분리되었음을의미합니다.‘그가놋땅에거하였다’(hedweltinthelandofNod)는진리와선밖에있음을의미합니다.‘에덴동쪽’(towardtheeastofEden)은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intellectualmind)가까이에있음을의미합니다.By the words “CainwentoutfromthefacesofJehovah” is signified that faith was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hedweltinthelandof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towardtheeastofEden” is near the intellectual mind,where love reigned before.
해설
AC.397부터 가인의 이야기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앞의 AC.392-396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것이 ‘가인의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창4:16에서는 그렇게 보존된 가인이 ‘여호와앞을떠나서에덴동쪽놋땅에거주’합니다. 속뜻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보존된 이후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첫째, ‘가인이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갔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의신앙에속한선’에서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얼굴’은 앞의 AC.387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얼굴’이 주님의 자비를 의미하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인을 내쫓아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사랑에 속한 선에서 스스로 분리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얼굴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얼굴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신앙을 분리하면 그 자비에서 흘러오는 선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갔다’는 표현을 주님의 거절이나 버림으로 읽기보다 인간 쪽에서 일어난 영적 분리로 읽어야 합니다.
둘째, ‘놋땅에거하였다’는 것은 ‘진리와선밖에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표현의 강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모든진리와선이완전히소멸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진리와선밖에있었다’고 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보존되었지만,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참된 진리와 선의 질서 안에 거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2에서 가인이 ‘피하며유리하는자’가 되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참된 방향과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진리에 관한 지식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 무엇이 실제로 선인지 올바르게 분별하는 능력이 흐려집니다. 그러므로 ‘놋땅’은 단순한 지리적 망명지가 아니라 신앙이 선과 진리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동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가까이에있음’이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전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에덴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 곧 사랑이 지배하던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았으며,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했습니다. AC.393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신앙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은 더 이상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 안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에덴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지 않고, ‘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가까이에’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AC.393-396에서 설명한 신앙의 보존이 다시 연결됩니다. 분리된 신앙은 본래의 천적 질서를 잃었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은 에덴 안에 있을 수는 없지만,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곳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사라진 뒤에는 사람이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지식은 사랑 자체는 아니지만 다시 사랑과 결합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 가까이에 있다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intellectualmind’, 곧 ‘이해의마음’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옛 천적 상태의 지리적 경계 가까이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전에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마음’가까이에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련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그 이해가 사랑 아래 있었고 사랑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해가 독립적으로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사랑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보았습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신앙, 곧 진리에 속한 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이해의 기능과 신앙의 지식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그것이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보존하셨습니다. 따라서 ‘에덴동쪽’이라는 위치에는 과거의 천적 질서와 현재의 분리된 신앙 사이의 거리와 연결 가능성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가까이에있다’는 말을 곧 ‘곧바로다시에덴으로돌아갈수있었다’거나 ‘가인의신앙이거의정상적인상태였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는 분명히 가인이 ‘진리와선밖에’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상태의 단절은 실제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단절이 완전한 소멸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진리와 선 밖에 있었지만, 주님의 섭리에 의해 보존되어 여전히 과거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AC.397은 앞의 ‘가인의표’설명과 이후의 가인 계보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가인의 표를 통하여 신앙이 보존되었고,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이 에덴 밖 놋 땅에서 하나의 새로운 상태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에녹과 성읍, 그리고 가인의 후손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보존된 신앙이 점차 하나의 교리적 계보와 체계로 전개되는 과정으로 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AC.397자체에서는 아직 그 이후를 앞당겨 설명하기보다 ‘분리되었으나보존된신앙이어디에놓여있는가’를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397에는 매우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가인은 ‘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갔습니다.’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는 ‘놋땅’에 거합니다. 진리와 선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에덴동쪽’에 있습니다.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완전히 에덴 안에도 아니고,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에도 아닙니다.
바로 이 상태가 주님의 보존 섭리 아래 있는 가인의 신앙을 잘 보여 줍니다. 인간은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주님께서는 그 실패 때문에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이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될 가능성을 남겨 두셨습니다. 따라서 ‘에덴동쪽놋땅’은 단순한 추방의 장소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되어 진리와 선 밖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과거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보존되어 있는 신앙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AC.397해설)
※오늘(2026/09/13)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3, ‘영원한하늘나라’, 찬93, ‘예수는나의힘이요’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네 번째, 9절로 15절, AC글 번호로는 370번에서 396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창4:9-15)
제목은
가인의표,인간의실패보다더깊은주님의섭리
이며, 다음은 지난주부터 시작한 ‘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AC.85의 첫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천적 인간이‘일곱째날’이고 그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아르카나라면,왜 이것은 처음부터 좀 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을까요?말씀에 이 정도의 설명이라도 함께 주어졌다면 안식일과 창조의 날들을 둘러싼 많은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AC.85가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를 곧바로 설명합니다.‘천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이아무도없었고,영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도거의없었기때문’이라고 합니다.그리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AC.85가 직접 주는 첫 번째 답은 분명합니다.‘일곱째날’과‘안식일’의 속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바로 그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모르면 왜 영적 인간의 형성이 여섯째 날과 연결되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과 연결되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앞의AC.67에서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 안에는‘다른삶의본성이무엇인지알지못하면결코알수없는’아르카나들이 있다고 한 것과도 닮아 있습니다.어떤 속뜻은 단어 하나의 암호를 알아내듯 풀리는 것이 아니라,그 속뜻이 가리키는 영적 실재 자체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AC.85의 안식일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천적 인간이라는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면 일곱째 날이 왜 천적 인간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그렇다면주님께서는왜천적인간의본성을처음부터모든사람에게명백하게설명하지않으셨는가?’라고 물으면,AC.85한 번호만으로는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AC.85는‘왜이아르카나가알려지지않았는가’에 관하여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왜주님께서그것을더일찍명시적으로계시하지않으셨는가’라는 더 큰 섭리의 문제까지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자유,인간의 수용 상태,말씀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속뜻의 보존,신적 섭리와 계시의 때 같은 스베덴보리의 다른 가르침들을 곧바로AC.85의 확정적인 해답으로 끌어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그러한 주제들은 이 질문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지만,각각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확인하면서 연결해야 합니다.
또 하나 조심할 것은‘속뜻이처음부터명백하게쓰여있었다면교회사적혼란이없었을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그렇게 생각할 충분한 인간적인 이유는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명백한 설명이 언제나 명백한 수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이 문제는 주님의 계시 방식에 대한 우리의 추측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히는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처음의 질문을 접어 둘 필요는 없습니다.오히려 매우 중요한 질문으로 남겨 둘 가치가 있습니다.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지금까지알려지지않았다’,‘밝히는것이허락되었다’,‘이것은아르카나이다’라고 말하는 곳들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그때마다‘왜이제야밝혀지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그런 본문들이 충분히 쌓이면 우리는 한 번호의 추측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의 여러 설명을 서로 대조하면서 더 신중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AC.85에서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먼저 가는 것이 좋습니다.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안식일이라는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던 직접적인 이유는 천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적 인간의 본성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보다 더 깊은 질문,곧‘왜이러한영적실재가오랫동안알려지지않도록허용되었는가?’는 여기서 성급하게 닫지 않고,앞으로AC가 그 답을 열어 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질문입니다.(AC.85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