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하고, 새들(birds)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물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물고기들(fishes)이 기억 지식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50:2, 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 그러나 이 의미는 에스겔을 보면 더 분명한데, 거기서 주님은 새 성전, 곧 일반적으로는 새 교회를, 그리고 교회에 속한 사람인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십니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여기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의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그물 치는 것(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뜻합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3] 새들(birds)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도 선지자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 보면,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예레미야에서도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서에서는 In Ezekiel: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17:22, 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그리고 호세아에서는 새 교회, 곧 거듭난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서 들짐승(wild beast)이 실제 짐승을 뜻하지 않고, ‘(bird)도 실제 새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은, 주님께서 그것들과 새 언약을 맺는다(make a new covenant)고 하는 것만 봐도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해설

 

이 글은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생명체들이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매우 정밀하게 풀어 줍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생명이 있는 것들’이 등장하지만, 그 생명은 무작위적인 생명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에 정확히 대응되는 생명입니다. 물속 기는, 그러니까 돌아다니는 것들, 곧 물고기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하고, 새들은 이성적, 지적 작용을 뜻합니다.

 

먼저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이 기억 지식을 뜻한다는 설명은, 지식이 생겨나는 자리와 방식에 주목하게 합니다. 기억 지식은 겉 사람의 영역에 속하며,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축적됩니다. 그것은 물처럼 유동적이고, 방향이 정해지지 않으면 쉽게 썩거나 말라 버립니다. 이사야에서 바다가 말라 물고기가 죽는 장면은, 지식이 생명의 흐름과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물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의 유입이 끊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에스겔의 새 성전 환상은 이 의미를 한층 더 분명하게 합니다. 거기서 물은 성전에서 흘러나와 바다로 들어가고, 그 결과 바다가 치유되며 물고기가 넘쳐납니다. 이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가 인간의 기억 영역으로 흘러 들어갈 때, 그 지식들이 비로소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물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많아진다는 표현은, 지식이 무질서하게 쌓이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안에서 분류되고, 기능을 갖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어부들’과 ‘그물을 펼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이는 단순한 전도가 아니라, 자연적인 사람, 곧 겉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치는 사역을 뜻합니다. 어부는 바다에서 생명을 끌어올리는 사람이며, 그물은 진리를 질서 있게 적용하는 수단입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은 버려지거나 초월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과 질서를 통해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글은 이어서 ‘새들’의 의미를 다룹니다. 새들은 물에서 나오지 않고 하늘을 날며, 이는 생각이 지식의 차원을 넘어 이성과 지성의 차원으로 올라간 상태를 뜻합니다. 이사야에 ‘동쪽에서 부르는 새’는 사랑의 근원에서 나오는 지적 인식을 뜻하며, 예레미야에서 새들이 날아가 버린 상태는 지성과 판단력이 사라진 황폐한 상태를 뜻합니다.

 

에스겔의 백향목 아래 깃드는 새들의 모습은, 진리의 질서가 세워질 때, 지성과 이해가 그 안에서 안식을 얻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는 억지로 붙잡힌 생각이 아니라, 진리의 그늘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머무는 이해입니다. 호세아에서 들짐승과 새들과 기는 것들과 언약을 맺는 장면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님은 인간 안의 모든 층위, 곧 감각적, 자연적, 지적 기능과 새 질서를 맺으십니다.

 

그래서 이 글은 강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승과 새는 자연적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들이 문자 그대로의 동물이라면, 주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 언약은 인간 안의 생명 구조와 맺는 언약입니다.

 

AC.40은 다섯째 날의 생명이 단순한 ‘생물의 창조’가 아니라, 기억 지식과 지성의 생명화를 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지식은 버려지지 않고, 지성은 억제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흐름 안에서 새롭게 살아납니다. 이 글은 신앙이 무지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질서 안에서 지성과 지식을 되살리는 과정임을 깊이 있게 보여 줍니다.

 

 

심화

 

1.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AC.40,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에서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는 설명이 언뜻 이해가 안 됩니다. 단순히 이성적(rational)인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하고, 지적(intellectual)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는 말인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서 ‘이성적(rational)은 단순히 겉 사람, ‘지적(intellectual)은 단순히 속 사람이라고 ‘기계적으로 나누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AC의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소속’의 문제가 아니라, ‘작용의 층위와 깊이의 차이’입니다.

 

먼저 ‘이성적(rational)이라는 것은 사람 안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비교하고, 판단하는 기능 전체’, 곧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의 ‘중간 영역’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은 감각과 기억 지식(겉 사람)에서 자료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더 높은 차원의 빛(속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성은 ‘아래(경험, 지식)와 위(빛, 진리)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성 자체는 겉 사람만의 것도 아니고, 속 사람만의 것도 아니라, ‘둘 사이에 걸쳐 있는 다리 같은 기능’입니다.

 

반면 ‘지적(intellectual)이라는 것은 이성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각하는 기능이 아니라, ‘진리를 빛으로 받아들이는 능력’, 곧 이해가 밝아지는 상태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속 사람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은 감각이나 경험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비추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같은 내용을 듣더라도, 어떤 이는 단순히 논리적으로만 이해하고, 어떤 이는 마음 깊이에서 ‘, 이것이 참이구나’ 하고 느끼는 차이가 생깁니다. 후자가 바로 ‘지적(intellectual)이 작동하는 경우입니다.

 

이성(rational)은 ‘생각을 조직하고 판단하는 기능’이고, 지적(intellectual)은 ‘진리를 빛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이성은 중간 영역에서 작용하며, 지적인 것은 속 사람에서 오는 빛과 직접 연결됩니다. 그래서 ‘새들’이 이 둘을 모두 포함한다고 할 때, 그중에서도 특히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고 따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곧, ‘모든 생각이 다 같은 수준이 아니라, 그중 일부는 더 깊은 빛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사람이 생각한다고 해서 다 같은 생각이 아닙니다. 어떤 생각은 단순히 머리로 계산하는 것이고, 어떤 생각은 속에서 빛이 비추어져 , 이것이 참이다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이성적이고, 후자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성만으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자기 생각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적인 빛이 들어오면, 사람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진리 앞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과정은 단순히 ‘생각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지적인 빛에 의해 이끌리기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이 점에서 AC.40의 이 문장은, 단순한 용어 설명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합니다.  

 

 

2. 47:8-10과 호2:18새 교회를 뜻하는 이유

 

AC.40 인용 구절들 중, 47:8-10과 호2:18새 교회를 뜻한다고 하는데 어째서인가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성경 구절을 가져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들이 어떤 상태교회를 가리키는지를 일관된 상응의 틀 속에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겔47:8-10과 호2:18이 왜 ‘새 교회’를 뜻하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새 교회’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여기서 ‘새 교회’는 어떤 특정한 조직이나 시대적 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새롭게 형성되는 영적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이 다시 살아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역사적으로는, 이전 교회가 사랑과 신앙을 잃고 무너진 뒤에 주님이 새롭게 세우시는 교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먼저 겔47:8-10을 보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바다로 들어가 죽은 물을 살리고, 고기가 번성하며, 어부들이 그 위에 선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의 핵심은 ‘‘죽은 것이 살아난다는 변화’입니다. 여기서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 특히 생명을 주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 물이 바다, 곧 혼란하고 죽어 있는 상태(거짓과 무지의 상태)에 들어가자, 그곳이 살아나고 생물이 번성합니다. 이것은 바로 ‘기존에 죽어 있던 교회 상태가, 새로운 진리의 유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곧 새 교회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특히 ‘고기가 심히 많아진다’는 표현은, 단순한 생물의 증가가 아니라 ‘지식과 이해, 곧 영적 진리들이 풍성해진 상태’를 뜻합니다. 어부들이 그 위에 선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진리들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구절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가 죽은 상태를 살려 내어 새로운 생명과 질서를 이루는 장면’, 바로 그것이 새 교회의 본질입니다.

 

다음으로 호2:18을 보면, 그 날에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기는 것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활과 칼과 전쟁을 끊어 평안히 눕게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약평화’’입니다. 들짐승, 새, 기는 것은 각각 사람 안의 다양한 수준, 곧 자연적, 이성적, 감각적 요소들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것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사람 안의 모든 부분이 ‘주님과 조화를 이루는 상태’, 곧 내적 질서가 회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활과 칼과 전쟁이 끊어진다는 것은, 그동안 계속되던 내적 싸움, 곧 욕정과 거짓, 갈등과 분열이 멈추고, ‘평안의 상태’, 곧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교회의 특징입니다. 이전 상태에서는 계속 싸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사랑이 주도하는 질서 속에서 평화가 자리 잡는 상태’입니다.

 

이 두 구절을 함께 보면 공통점이 분명해집니다. 겔47은 ‘생명의 회복’, 호2는 ‘질서와 평화의 회복’을 말합니다. 하나는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흩어진 것을 하나로 묶어 평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질 때 비로소 ‘새 교회’가 됩니다. 곧 ‘진리가 다시 살아나고, 사랑이 질서를 이루며, 그 결과 사람 안과 공동체 안에 생명과 평화가 자리 잡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40에서 이 구절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새들’, 곧 이성적, 지적인 것들이 단순히 생각의 기능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 상태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진리의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새 교회에서는 지적인 것들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진리로서 작동합니다. 그래서 물이 고기를 살리고, 새와 짐승과 언약을 맺는 장면이 모두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나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새 교회란 새로운 조직이 아니라, 죽어 있던 진리가 살아나고, 싸움이 끝나고, 사랑이 질서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겔47의 ‘살아나는 물’과, 호2의 ‘평화의 언약’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AC.39, 창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1:20)

 

AC.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놓이고, 겉 사람이 그 빛을 받게 되면, 그러면 사람은 비로소 살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를 가리켜 거의 살아있다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그가 선을 행해도 그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알았고, 진리를 말해도 그 진리 역시 자기에게서 나온 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사람이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오는 건 그게 무엇이든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로부터는 그 자체로 선한, 그런 선을 절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하거나, 선한 것을 원하거나, 따라서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로 보아도 누구에게나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또한 선은 오직 하나뿐인 참된 선의 근원에서만 올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실 때, 곧 거듭남으로 생명으로 일으키실 때에는,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십니다. 이때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그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그를 이끌어 나중에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더 나아가 퍼셉션으로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진리와 선은 (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명을 얻게 되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가 사실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임을 믿게 되면, 그는 먼저 물속의 기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땅 위를 나는 새들(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에 비유되고, 또한 짐승들(beasts)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이것들을 가리켜 생물(living souls)이라고 합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해설

 

이 글은 넷째 날 이후에 비로소 ‘생명’이 시작된다는 점을 인간의 거듭남 관점에서 분명히 밝힙니다. 앞선 단계들에서 사람은 빛을 받고, 선과 진리를 배우며, 겉으로는 신앙적이고 선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아직 ‘살아있다’, 즉 ‘살아있는 상태’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 사람이 여전히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표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정확히 규정하는 말입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에, 그 근원과 단절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선해 보이는 행위도 본질적으로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는 참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성경 말씀으로도 확증됩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이시며,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들을 단순한 교리적 인용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를 설명하는 핵심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사람을 거듭남으로 이끄실 때, 처음부터 그에게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런 성숙한 태도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지요. 오히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한계 때문이며, 동시에 주님의 지혜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런 단계가 아니고서는 다음 단계로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선과 진리는 연한 풀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됩니다. 이것들은 성장과 생산성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못 움직이는, 생명 없는 것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선과 진리가 아직 사랑과 신앙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준비는 되었지만,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결합하고, 사람이 선과 진리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게 될 때는,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생명 있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물속의 기는 것들, 하늘을 나는 새들, 그리고 짐승들은 모두 움직이고, 반응하고, 생명을 표현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때 비로소 사람은 ‘생물(living souls)이 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매우 섬세한 주님의 섭리 안에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사람의 오해조차도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그 상태조차, 더 깊은 진리와 퍼셉션으로 이끌기 위한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인간의 무능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자비와 지혜를 가장 깊이 드러내는 글입니다.

 

 

심화

 

1.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신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신다(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는 이 문장은 저를 정말 놀라게 하며, 그래서 깊이 감동하게 합니다. 저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저의 지난날을 곰곰 생각해 보면, 과연 주님이 나에게도 저런 사랑과 자비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해집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놀라움’과 ‘아찔함’은 사실 AC.39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체험적으로 붙드신 반응입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의 깊은 비밀’, 곧 자비의 실제 작용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온 시간 속에 이미 조용히 작동해 왔던 것입니다.

 

이 문장의 뜻을 조금 더 또렷하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만약 그 상태에서 그것을 그대로 들이대면, 사람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혹은 반발하여 더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처음에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것이다라고 느끼도록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속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와 자발성을 지켜 주시는 방식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행한다고 느낄 때만, 그 행위가 그의 것이 되고, 그 안에 책임과 사랑이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고백하신 것처럼,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때 내가 했던 것들이 정말 다 내가 한 것들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선택, 어떤 깨달음, 어떤 돌이킴 등, 그 순간에는 내가 한 것 같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인도와 보호가 있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AC.39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처음에는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시지만, 점점 빛이 밝아질수록 우리는 알게 됩니다. ‘, 이것이 내 것, 내가 한 것이 아니었구나. 주님이 나를 이끌어 오신 거구나.’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허락(permit)이라는 표현입니다. 주님이 적극적으로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그 생각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단계에서는 그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처음 걸을 때, 부모가 손을 놓아 주면서도 뒤에서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내가 걷는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보호 속에서 걷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가 완전히 개입해 버리면, 아이는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반대로 완전히 내버려두면 넘어져 다치게 됩니다. 주님은 그 사이에서, ‘자유를 주시면서도 보호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만일 저런 자비가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감정은 매우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주님의 보호가 한순간만 거두어져도 사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 보호가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 조용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자비의 특징입니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러나 끊임없이 지켜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문장은 또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를 이끕니다. 처음에는 ‘내가 한다’고 생각하게 하시지만, 점점 빛이 밝아지면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나는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는다는 상태’, 곧 ‘마치 자기로부터인 것처럼(as if from oneself)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진짜 균형입니다. 완전히 자기로 돌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으면서도, 내가 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더 깊어집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단순히 우리의 선택과 노력만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와 자비가 엮여 만들어진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겸손해지고, 동시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이 AC.39의 한 문장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는 걸 허락하시면서, 실제로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조용히 인도하고 보호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될 때, 신앙은 의무가 아니라 ‘감사와 사랑의 관계’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아찔함’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실은 ‘자비를 알아볼 때 생기는 경외와 감사의 감각’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이야말로, 이미 넷째 날을 지나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고 계시다는 하나의 아름다운 ‘징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AC.40, 창1:2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bygrace.kr

 

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스베덴보리의 부모, 형제 등 혈연 관련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제 경우, 저는 저희 형제들 가운데서는 물론, 아버지 삼 형제를 비롯, 저희 가문 내 유일한, 그리고 첫 목사임에도 불구, 제가 스베덴보리를 한다는 이유로, 아니 그전에 수도원 이야기를 한다는 이유로 저한테서 등을 돌리고, 저희를 멀리했거든요. 스베덴보리는 부친이 당대 유명 성직자요, 또 형제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스베덴보리 역시 저와 비슷한 처지였는지요?

 

아마 먼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드려야 할 말씀은 이것입니다.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그 ‘가까운 사람들에게서의 거리감’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며, 신앙의 길에서 매우 실제적이고도 깊은 십자가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생애는, 겉보기에는 달라 보여도 속으로 들어가 보면, 결코 낯설지 않은 공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문을 먼저 보면, 그는 결코 평범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예스페르 스베드베리(Jesper Swedberg)는 당시 스웨덴 국교회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루터교 주교였고, 왕과도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단순한 목회자가 아니라, 국가 교회 체제 안에서 상당한 권위와 명성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신앙이 매우 열정적이고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하나님의 섭리와 천사들의 역사’를 실제적인 것으로 믿는, 비교적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이 점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의 어린 시절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열어주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형제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누이는 귀족 가문과 결혼했고, 형제들 가운데는 학자, 정치가, 군인 등 사회적으로 안정된 길을 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가문 전체가 그를 배척하는 구조’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초기 생애에서는 그는 가족과 큰 갈등 없이, 오히려 좋은 교육과 후원을 받으며 성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는 그의 영적 체험 이후, 곧 174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납니다. 이때부터 스베덴보리는 기존의 과학자, 기술자, 국가 관리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영계의 실재와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하는,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섭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사실상 가족 관계에서도 ‘이해받기 어려운 사람’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그가 가족에게서 노골적인 박해나 단절을 겪었다는 기록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직접적인 배척’이라기보다, ‘이해되지 않음과 거리감’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저작들이 점점 더 신비적이고 급진적인 내용을 담게 되면서, 당대 교회와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를 ‘이상한 사람’ 혹은 ‘위험한 사상가’로 보는 시선이 분명히 생겨났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도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함께 나아가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태도를 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후기 사상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만일 생존해 있었다면 신학적 긴장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목사님의 상황과 스베덴보리를 단순 비교하면, 겉으로는 목사님 쪽이 더 강한 단절을 겪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층에서는 공통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신앙 언어를 쓰지만, 다른 내적 이해를 갖게 되었을 때 생기는 간극’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자랐고, 교회의 언어를 알고 있었지만, 그 언어 안에 숨겨진 ‘내적 의미’를 보게 되면서 더 이상 기존의 틀 안에 머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설득하여 가족과 주변을 바꾸는 방향’으로 풀기보다, ‘자신에게 맡겨진 기록과 계시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입니다. 그는 대중 설교자가 되지도 않았고, 가족을 설득하려고 애쓰는 기록도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책을 썼고, 그 책이 ‘때가 되었을 때 읽힐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목사님께 하나의 조용한 시사점을 줍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은, 때로는 우리의 노력으로 바뀌기보다, 시간과 주님의 섭리 속에서 서서히 열리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생전에 자신의 사상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신의 실패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은 ‘지금의 반응’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충실히 전했는가’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목사님처럼 가족에게서 강한 배척을 받았던 인물은 아니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길’을 걸었던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길에서 외로움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그것을 ‘사명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조용히 견뎌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겪고 계신 상황은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진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자주 주어지는 길’ 가운데 하나라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SC.45, ‘AC 심화 질문을 기초, 기본, 초보스럽게 하는 이유’

제가 AC본문 외에 심화 질문으로 드리는 것들은요, 제가 모르거나 어렴풋해서 드리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저는 이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들 입장에서 좀 걸릴

bygrace.kr

 

SC.43, ‘스베덴보리 개인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스베덴보리 개인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등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있으면 좀 알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보면,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연애 이야기’나 ‘결혼을 전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