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4:13)

 

AC.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자기가 악 가운데 있었다는 어떤 고백을, 이 고백은 무슨 내적 고통(internal pain)으로 나온 것입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는 그로 인한 절망(despair)을 의미합니다. Cain said unto Jehovah” signifies a certain confession that he was in evil, induced by some internal pain;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signifies despair on that account.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는 구절을 매우 깊은 영적 장면으로 해석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대화를 나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어떤 ‘자백(confession)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진리(신앙)가 사랑(체어리티)을 떠나 버린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내적 통증(internal pain)에 의해 일어난 고백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인이 아직 회개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체어리티라는 사랑을 죽인 신앙”이라는 자신의 상태를 처음으로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의식을 “고통을 동반한 자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고통은 외적 형벌의 두려움이 아니라 ‘영적 생명(아벨)이 사라진 데서 오는 내적 비어 있음’이며, 이것이 가인으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 입을 열게 만든 것입니다.

 

이어서 가인은 말합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단순히 죄책감의 표현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 말은 ‘절망(despair)을 뜻합니다. 즉, 자신의 상태가 너무 깊이 무너져서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없다고 느끼는 영적 절망감’입니다.

 

여기에는 사랑 없이 존재하려는 신앙의 비극적 논리가 나타납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은, 하나님과의 연결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 존재의 토대가 무너졌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순간 인간은 하나님께 버려졌다고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실제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체어리티라는 사랑을 잃어 하나님을 인식할 능력을 스스로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절망은 신앙의 붕괴라기보다, 사실은 ‘회복의 첫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절망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보게 되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AC.383은 바로 이 점을 드러냅니다. 가인의 고백은 아직 회개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향한 첫 미세한 움직임’, 즉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영적 통증의 인정’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움직임을 통해 회복의 길을 여시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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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본성(own, proprium)에 대한 원전(原典, 라틴) 설명입니다.

 

라틴어 proprium은 원전에서 사용된 용어로, 여기와 다른 여러 곳에서 ‘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온 말입니다. propius의 사전적 의미는 형용사로서는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입니다. 이 proprium은 중성인데 명사로 사용되면, ‘possession,’ ‘property’를 의미하며, 또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어 형용사 ‘own’은 웹스터에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를 의미하는 걸로 봐서,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own’이라는 말은 proprius와 매우 정확히 일치하며, 라틴 proprium에 맞는 어떤 명사를 만들면, 아주 가까운 번역 효과를 얻지 싶습니다. 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 “own.” 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 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 “possession,” “property”; also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 The English adjective “own” is defined by Webster to mean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 so that our word “own” 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해설

 

이 주석은 스베덴보리 저술의 핵심 용어 가운데 하나인 ‘proprium’(프로프리움)—한국어로 흔히 “자기 고유한 것”, 혹은 “본성”(本性)—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언어학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먼저 라틴어 ‘proprius’는 형용사로 “자기 자신의”, “고유한”, “특유의”, “다른 것과 구별되는”이라는 뜻을 가지며, 그 중성형 명사 ‘proprium’은 “자기 소유물”, “고유성”, “특징”, “독자적 성질”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proprium은 어떤 존재에게서 고유하게,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 “own”은 편집자가 지적했듯이 “자기 자신의”, “특유의”, “배타적으로 속한”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proprius의 뜻과 거의 완전하게 일치합니다. 문제는 거듭남을 다루는 스베덴보리 신학 안에서는 proprium이 단순한 개인의 개성이나 특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분리된 인간 자신의 고유한 성향’을 뜻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일관되게 “사람 자신의 것(own, proprium)은 본질적으로 악이며, 거짓으로 기울어 있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평가라기보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느끼는 모든 생각, 판단, 욕망은 영적 실재에서 보면 빛이 없는 상태이며, 그래서 proprium은 항상 어둠, , 흑암, 죽음과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반대로, 사람 안에서 선하고 참된 것은 모두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인간의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의 proprium(신적 본성)’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proprium은 철저히 부정적 개념”임을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proprium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것을 ‘굴복시키고, 재배열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재구성’할 때에만 인간은 참된 영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언어학적 주석은 proprium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자기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론 전체의 기초 용어임을 보여 주며, 번역 시에도 자기 고유한 것, 자기 본성, 자기에게서 나온 것과 같은 표현으로 신중하게 옮겨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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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4, 5)

 

AC.21

 

빛을(good)이라고 합니다. 빛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님은 선 그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모든 것, 곧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전, 그동안 빛처럼 보여 그런 줄 알았던 모든 걸 말하는데요,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기 전에는 악은 선처럼 보이고, 거짓은 진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실상은 이들 악과 거짓은 어둠,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그래서 여전히 사람 안에 있는 걸로만 구성되는 어둠입니다. 주님에게 속하는 건 그게 뭐든지 다 (day)과 비교됩니다. 빛에 속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자아,고유 속성)은 뭐든지 다 (night)과 비교됩니다. 어둠에 속하기 때문인데, 이런 비교는 말씀에서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AC.21은 창1: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영적 의미를 풀어 주며, 거듭남 과정에서 ‘빛과 어둠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빛이 ‘좋다’고 불린 것은 그 빛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시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참되며 생명을 주는 것이기에, 영적인 빛은 곧 주님의 선의 작용입니다. 반대로 “어둠”은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스스로 가지고 있던 모든 사고와 감정 상태를 뜻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본래 어둠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종종 빛처럼 보입니다. 즉, 악이 선처럼, 거짓이 진리처럼 보이는 자기중심적 착시가 거듭남 이전의 자연적 인간을 지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사람의 고유 본성(man’s proprium)의 본질이며, 주님의 빛이 없을 때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지혜를 마치 빛인 것처럼 의지하지만, 실제로는 영적 실재와 전혀 맞닿아 있지 않은 어둠 속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비추시는 진정한 빛이 들어오면,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자기 지혜와 자기 사랑의 판단들이 모두 어둠으로 드러납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는 주님에게 속한 모든 것을 “(day)에 비유하고,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것을 “(night)에 비유합니다. 낮은 주님의 빛 안에서 분별과 생명이 있는 상태이고, 밤은 주님의 빛이 없고 자기 고유의 상태만이 작용하는 어둠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낮과 밤의 비유는 시편과 예언서, 복음서 등 성경 전반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며, “빛과 어둠”, “낮과 밤”의 구분은 곧 ‘주님에게 속한 것과 인간에게 속한 것의 영적 구분’을 뜻합니다. AC.21은 그래서, 창세기의 첫 창조 행위인 빛의 분리가 곧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영적 분별—주님의 것과 자기 고유의 것의 분리—임을 강조하며, 거듭남의 근본 원리가 바로 이 구별에서 시작됨을 보여 줍니다.

 

 

 

AC.20, 창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참이 뭔가 더 높은 거라는 걸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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