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Mahalalel” is signified, as before said, a fifth church; by “Jared” a sixth.

 

 

해설

 

이 글은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태고교회의 흐름이 계속해서 ‘끊김 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해 주는 자리예요. 스베덴보리는 ‘마할랄렐(Mahalalel)과 ‘야렛(Jared)을 더 이상 개인으로 설명하지 않고, 앞선 경우들과 동일하게 교회 상태의 연속으로만 언급합니다. 이는 독자가 이미 해석의 방향을 충분히 익혔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마할랄렐로 상징되는 다섯 번째 교회는, 게난 이후에 형성된 상태를 이어받습니다.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미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고, 삶의 세부를 즉각적으로 비추기보다는 보다 넓은 틀 안에서 작동하는 단계에 해당해요. 이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이 살아 있기는 하지만, 그 분명함은 앞선 교회들보다 더 줄어들어 있습니다.

 

야렛으로 상징되는 여섯 번째 교회는 그 다음 단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여섯 번째 교회를 설명할 때도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아직 노아로 대표되는 결정적 전환 이전이며, 퍼셉션의 잔존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이 퍼셉션은 점점 더 외적인 구조와 매개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처럼 숫자가 늘어날수록 교회는 점점 더 바깥쪽 층위로 이동합니다. 이는 열매의 알맹이에서 막질로, 더 두꺼운 외피로 옮겨가는 과정과 닮아 있어요. 중심의 생명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그것을 감싸는 구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생명은 직접 드러나기보다 보호 속에 머물게 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짧은 글은 신앙의 지속과 변화에 대해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변화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단절이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아요. 마할랄렐과 야렛의 교회는 이전보다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주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그 상태에 맞는 쓰임새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성경 해석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의 의미’를 읽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많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지만, 바로 그 침묵 속에서 흐름을 읽도록 초대합니다. 이미 밝혀진 원리를 따라가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교회의 성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단계들은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신앙이 비교적 안정되고 체계화되어 있지만, 동시에 즉각적인 분별의 예민함은 줄어들 수 있어요.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상태를 부정하거나 억지로 되돌리려 하기보다, 그 상태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퍼셉션과 쓰임새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결국 AC.510은 태고교회의 생명이 여섯 번째 단계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아주 간단한 말로 확인해 줍니다. 이름은 달라지고 상태는 변하지만, 흐름은 끊어지지 않았어요. 이 점을 기억하면, 이후에 등장하는 에녹과 노아의 교회도 훨씬 입체적으로 읽히게 됩니다.

 

 

 

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bygrace.kr

 

AC.509, 창5:13-14,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점입니다. It is here only to be remarked, that all things are determined by their relation to the state of the church.

 

 

해설

 

이 글은 분량은 짧지만,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 전체를 떠받치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어요. 그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 표현도 그 자체로 의미가 고정되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따라 의미가 정해진다고 봅니다. 이 점을 놓치면, 성경은 쉽게 평면적인 기록으로 보이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상태란 제도나 조직의 외형을 뜻하지 않아요. 그 안에 살아 있는 퍼셉션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같은 말씀이 주어져도, 교회의 퍼셉션이 살아 있고 분명할 때와, 퍼셉션이 일반화되었을 때는 그 말씀이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표현 자체보다 상태와의 관계를 먼저 보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 원리는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이름들, 날과 해의 숫자들, 자녀들, 그리고 죽음에 대한 표현까지도, 교회의 상태와 연결되지 않으면 그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아요. 상태를 보지 않고 읽으면 그저 족보처럼 보이지만, 상태를 중심에 두고 읽으면 교회의 생명이 어떻게 이동했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말해 보자면, 성경에 나오는 어떤 표현도 단독으로 선이나 진리, 생명이나 소멸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달라져요. 같은 ‘’이라는 말도 어떤 상태에서는 새 생명의 시작을 가리키고, 다른 상태에서는 쇠퇴나 끝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의미는 표현 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태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원리는 아주 실제적인 기준이 됩니다. 같은 본문을 설교하더라도, 회중의 상태가 다르면 강조점과 적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설교자가 임의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상태에 따라 다르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성경 해석의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적인 방식으로 봅니다.

 

개인의 신앙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돼요. 같은 말씀을 읽어도 어떤 날에는 위로로 다가오고, 어떤 날에는 마음을 찌르는 경고로 들립니다. 말씀의 내용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모든 것은 상태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AC.509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표현을 붙잡고 씨름하기보다, 지금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상태로 이 말씀을 듣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라는 초대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성경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상태에 따라 말하는 말씀이 됩니다.

 

 

 

AC.510, 창5: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C.510-511)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창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

bygrace.kr

 

AC.508, 창5:13-14,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an were nine hundred and ten years, and he died. (5:13, 14)

 

AC.508

 

여기서도 ‘날’(days)과 ‘해’(years)의 숫자들은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퍼셉션하던 진리와 선들을 의미하는데, 다만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러합니다. 그가 ‘죽었더라’(died)는 말 역시 이와 같이 그러한 퍼셉션의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have the same signification here as before. “Sons and daughters” here also signify truths and goods, whereof the members of the church had a perception, but in a more general manner. That he “died” signifies in like manner the cessation of such a state of perception.

 

 

해설

 

이 글은 AC.507에서 제시된 변화의 흐름을 한 단계 더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days)과 ‘(years)의 숫자들이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다시 말하는 것은, ‘게난(Kenan) 이후의 교회 상태에서도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상태의 개념으로 읽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태고교회의 전개는 언제나 상태의 변화로 이해되어야 하며, 연대기적 숫자 계산만으로는 본질인 각 교회의 상태 변화, 곧 퍼셉션의 성격과 그 변화를 읽어낼 수 없습니다.

 

자녀들’, 곧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여기서도 진리와 선들을 뜻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하나 덧붙여집니다. 그것은 이 진리와 선들이 이제는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퍼셉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진리와 선이 보다 개별적이고 분명하게 인식되었지만, 이 단계에 이르면 그러한 인식은 점차 포괄적이고 덜 세밀한 형태를 띠게 됩니다.

 

이 일반화는 퍼셉션의 상실이 아니라, 퍼셉션의 성격 변화입니다. 여전히 교회 안에는 진리와 선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즉각적이거나 생생하지 않습니다. 대신 더 많은 매개와 해석을 필요로 하며, 개별 상황에 대한 분별보다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이 변화는 게난의 교회에서 시작되어 이후의 교회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 위 볼드체 문장은 이 해설 끝을 참조하세요.

 

그가 ‘죽었다’는 표현은 이러한 상태 변화의 종결을 가리킵니다. 이는 개인의 생물학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를 특징짓던 퍼셉션 방식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퍼셉션 양식이 역할을 마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쇠퇴가 단계적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퍼셉션은 먼저 분명함을 잃고 일반화되며, 그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의 상태로서 끝에 이릅니다. AC.508은 이 과정을 간결하게 요약하면서, 독자가 이미 익숙해진 해석 틀을 계속 유지하도록 돕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변화가 언제나 급격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교회 안에 여전히 진리와 선이 말해지고, 그것들이 일정한 쓰임새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퍼셉션의 성격은 이미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상태의 변화를 단순한 지속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또한 이 글은 교회가 진리와 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그 교회의 생명 상태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임을 보여 줍니다. 같은 진리와 선이라도, 분명하게 퍼셉션되는지, 아니면 일반적으로만 인식되는지에 따라 교회의 상태는 크게 달라집니다. AC.508은 이 차이를 짧은 문장 안에 분명히 담아냅니다.

 

개인의 신앙에서도 이 흐름은 그대로 나타납니다. 어떤 시기에는 진리와 선이 매우 구체적으로 마음에 와닿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들이 점차 원칙이나 개념의 수준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이때 신앙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퍼셉션의 방식은 이미 바뀌어 있습니다. AC.508은 이러한 변화를 자연스러운 상태의 이동으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결국 이 글은 태고교회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퍼셉션 상태가 어떻게 일반화되고, 그 상태가 마침내 끝에 이르는지를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이 반복을 통해 독자는 창세기 5장을 읽는 눈을 더욱 안정적으로 갖추게 되며, 이후에 이어질 더 외적인 교회 상태들을 준비된 마음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 아래는 위 ‘대신 더 많은 매개와 해석을 필요로 하며, 개별 상황에 대한 분별보다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제공합니다.

 

 

퍼셉션이 분명하던 상태에서 일반화된 상태로 옮겨갈 때,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인식의 직접성입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가 거의 설명 없이 즉각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그 안에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사랑에 속하는지가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이때의 퍼셉션은 판단 이전에 이미 방향을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일반화되기 시작하면 이러한 직접성이 점차 약해집니다. 이제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판단하기 위해 생각하고, 기억해 둔 기준을 떠올리고, 말씀이나 교훈을 적용하며,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해져요. 이것이 위 해설에서 말한 ‘더 많은 매개와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바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말과 개념, 규칙과 교리 같은 것들이 판단의 중간 단계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 변화는 곧 인식의 초점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퍼셉션이 분명할 때는 각 상황이 고유하게 보였습니다. 이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선이 무엇인지, 이 선택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무엇인지가 상황마다 다르게 분별되었어요. 같은 원칙이라도 적용 방식은 매번 달랐고, 그 차이가 자연스럽게 인식되었습니다. 마치 다음 주님에 대한 말씀처럼 말입니다.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2:24, 25)

 

하지만 퍼셉션이 일반화되면, 개별 상황을 세밀하게 분별하기보다 이미 형성된 이해의 틀 안에서 상황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때 판단은 ‘이건 원칙적으로 옳다’, ‘이건 성경적으로 맞다’, ‘이건 교리와 어긋난다’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쉬워요. 이런 판단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공동체와 질서를 위해 필요합니다. 다만 이 방식은 상황 고유의 미묘함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향을 지니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이해된다’는 표현은 바로 이 점을 가리킵니다.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살아 있는 분별로 즉각 인식되기보다, 이미 갖추어진 틀 안에서 해석되고 적용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뜻이에요. 이는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라, 퍼셉션의 작동 방식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신앙의 초기에는 어떤 분들이 ‘이건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이건 마음이 불편해요’라고 말합니다. 설명은 잘 못 하지만 방향은 분명한 경우지요. 시간이 지나면 표현은 달라집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원칙상으로는’, ‘교리적으로는’이라는 말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 이는 신앙이 약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퍼셉션이 일반화된 상태로 옮겨갔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 변화를 자각하지 못한 채, 틀과 원칙 자체를 생명으로 착각할 때 생깁니다. 틀은 필요하지만, 틀만 남고 살아 있는 분별이 사라지면 퍼셉션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을 조심스럽게 짚어 주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퍼셉션이 일반화된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방식이 직접적 분별에서 매개와 해석을 거치는 방식으로 바뀌고, 그 결과 개별 상황의 고유함보다는 이미 형성된 전체적인 이해 틀 안에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이 설명은 태고교회의 변화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 상태를 비추는 매우 실제적인 통찰이기도 합니다.

 

 

 

AC.509, 창5:13-14,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

bygrace.kr

 

AC.507, 창5:12, ‘게난’,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창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