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인데, 그는 전적으로 이런 것들의 사람이며, 이런 것들 안에 완전히 잠긴 사람입니다. 이 상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는 상태로, 그는 무슨 깊음(deep)과도 같은, 뭔가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그런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 여러 곳에서는 표현하기를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이는 말리신(dried up) 상태, ‘황폐해진(wasted)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 상태이지요. 이사야입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데요,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에는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선지서에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이 거듭남의 선행 상태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 수 있기 전에, 그리고 선한 것으로 영향받기 전에, 먼저 이런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옛 사람이 먼저 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 위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표현에 사용된 영어 vastation은 사어(死語)에 가까운 말인지 사전에도 잘 안 나옵니다. NCE(New Century Edition)역에서는 이를 overall spiritual devastation으로 번역했습니다.  

 

 

해설

 

AC.18은 거듭남 이전의 인간 상태를 더욱 세밀하게 설명하며, 창1:2의 표현 “깊음(the deep)이 단순한 혼돈이 아니라 ‘아직 거듭나지 않은 인간 전체를 구성하는 욕망과 거짓의 혼합물’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깊음 위(faces of the deep)라는 표현은 거듭나지 않은 인간 속에 자리 잡은 각종 욕망(cupidities)과 그 욕망에서 비롯된 거짓들(falsities)을 말합니다. 인간은 거듭나기 전에는 선하고 참된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생각과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상태가 바로 “깊음”입니다. 이 상태는 주님의 빛이 없는 완전한 어둠이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할 수 없고, 영적 방향감각 없이 혼란 속에 잠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종종 인간을 “깊음”, “바다 깊은 곳”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인데, 거듭남 이전의 사람은 이러한 깊음이 “말리신(dried up) 혹은 “황폐해진(wasted)으로 묘사됩니다. 이사야 519-11절에서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여호와라고 한 것은, 주님이 인간 안의 욕망과 거짓을 물리치시고, 그 속에서 구속된 자들이 지나갈 길을 여신다는 뜻이며, 곧 주님이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먼저 인간 내부의 혼돈을 제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인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외적 생명은 활발해 보일지라도 영적 생명이 전혀 없을 때 천사들에게는 빛과 생기가 전무한 상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표현은 예언서에서 자주 말하는 “황폐(vastation)의 교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황폐는 주님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과 선한 것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이전의 거짓과 욕망이 제거되거나 약화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즉, 사람 안의 ‘옛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그래야만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도덕적 자멸이 아니라, 주님이 거듭남을 시작하기 위해 허용하시는 내적 정리 작업이며, 진리와 선이 들어올 공간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AC.18은 “깊음”이라는 성경적 상징을 통해, 거듭남의 초기에서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내적 분해와 정화의 과정을 설명하며, 인간의 변화는 언제나 주님의 빛이 깊음 위로 움직이기 전에, 먼저 그 깊음이 드러나고 비워지는 과정을 거침을 가르쳐 줍니다.

 

 

 

AC.19, 창1:2, '수면 위, 리메인스'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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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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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1:2)

 

AC.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혼돈하고 공허한 땅(earth void and empty), 또 거기에 선과 진리가 전혀 파종되지 않은 지면(ground)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직 그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씨 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혼돈(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공허(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결과, ‘흑암(thick darkness) 상태, 즉 어리석은 상태가 되며,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영적, 천적 생명(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속한 모든 것에 무지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4:22, 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AC.17은 창1:2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표현이 인간 개인에게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히 밝히며, 거듭남 이전의 영적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 사실적으로 그려 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거듭남 이전의 사람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earth void and empty)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선과 참된 진리가 아직 그의 내면에 뿌리내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혼돈(void)는 선의 부재를, “공허(empty)은 진리의 부재를 의미하며, 이 둘의 부재가 결합되면 창세기가 묘사한 “흑암”, 즉 영적 어둠과 무지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우둔함(stupidity)과 “신앙의 모든 것에 대한 무지(ignorance)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지적 무지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참된 인식과 천국의 질서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선과 진리에 대해 아무런 기준도 없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지혜롭고 능력 있어 보일지라도 영적 실재를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데는 능숙하고 교활하지만, 선을 행하는 데에는 지식도 의지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렘4:22, 23을 인용하여, 주님이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묘사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여기서 “”은 인간의 외적 삶(겉 사람)을, “하늘”은 내적 삶(속 사람)을 의미하는데, 거듭남 이전에는 겉 사람 안에는 선이 없고, 속 사람 안에는 진리의 빛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는 표현은 사람이 영적으로 무엇이 참된 것인지조차 모른다는 뜻이며, 이때 그는 비록 종교적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참된 의미로 이해하거나 적용할 수 있는 내적 지각(perception)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가 정죄의 상태가 아니라 ‘거듭남이 시작되기 이전 누구나 통과하는 자연적 상태’라고 강조합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빛과 선이 들어오기 전에는 인간의 내면은 언제나 혼돈과 공허 속에 있으며, 주님은 이 상태를 정죄하시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1:2) 것처럼, 이 혼돈과 무질서의 바다 위에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한 준비를 하십니다. 따라서 AC.17은 영적 삶의 출발점이 결코 밝고 지혜로운 상태가 아니라, ‘무지와 혼돈, 선과 진리의 결핍’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혀 주며, 거듭남의 첫걸음은 주님이 임하시기 전 우리의 실제 상태를 자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AC.18, 창1:2, '깊음 위'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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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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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옛날’(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하기도 하고, ‘영원’(days of eternity)이라 하기도 합니다. ‘태초’(beginning)는 또한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첫 번째 시기, 기간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때 사람은 새롭게 태어나고,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new creation)라고도 하지요. 선지서들 가운데 거의 모든 곳에서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은 그 상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다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리고 그래서 같은 선지서에서 주님은 ‘구속자’(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maker) 및 ‘창조자’(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천’(, heaven)은 속 사람을, ‘지’(, earth)는 아직 거듭나기 전인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들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AC.16은 창1:1의 “태초에”라는 한 단어가 담고 있는 영적 깊이를 풀어 주면서, “창조”라는 표현을 문자적 우주 기원에만 묶어 두지 않고 ‘태고교회와 개인의 거듭남’이라는 두 차원에서 동시에 읽도록 길을 열어 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태초(beginning)가 역사적으로는 ‘가장 옛 시대, 곧 태고교회의 시대’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예언서들에서 자주 나오는 “옛날”, “영원”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 시기를 가리키는데,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살던 인류 최초 교회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태초”라는 말이 단지 과거의 어떤 시점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람이 거듭남을 받기 시작하는 첫 시기’도 함께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new creation)라고 부릅니다. 이때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make)라는 표현들은 예언서에 거의 빠짐없이 나오는데, 문자적으로는 세상과 민족의 형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여도, 속뜻으로는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속 사람을 재형성하시며, 겉 사람을 질서 안에 두시는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뜻합니다. 이 단락에서 인용하는 사43:7,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는 말씀은, 주님이 당신의 영광, 곧 사랑과 진리가 드러나도록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창조, 조성, 제작”이라는 세 표현으로 다르게 말해 준 예입니다. 또 같은 예언서에서 주님이 “구속자, 태에서부터 조성하신 이, 만드신 이, 창조자” 등으로 불리는 것 역시, 주님이 사람을 단순히 밖에서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속에서부터 다시 빚으시는 분’임을 드러냅니다. 다윗의 시편에서도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104:30)라고 할 때, 단순히 새로운 민족이 생겨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임하실 때 사람과 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고, 그 결과로 ‘땅의 얼굴’, 곧 인간의 겉 삶과 외적 상태가 새로워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창세기 1장에서 나오는 “하늘”과 “”도 문자 그대로만 보면 우주의 위, 아래를 가리키지만, 속뜻으로는 거듭남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의 두 차원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곧 “하늘”은 사람 안의 ‘속 사람’(내적 인간)을, “”은 ‘겉 사람’(외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이 둘이 혼돈과 공허, 흑암 속에 있을 때 주님이 창조 사역을 시작하시는데, 이것이 곧 인간 개인에게서는 거듭남의 시작이며, 인류 전체에게서는 태고교회와 그 이후 교회들을 세워 가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AC.16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짧은 말씀 속에, (1) 태고교회라는 가장 옛 시대의 시작과, (2) 오늘 여기서 각 사람이 주님 안에서 새로 시작하는 거듭남의 첫 단계,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열려 있음을 보여 주며, 성경의 “창조, 조성, 만듦”이라는 모든 언어가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새롭게 빚으시는 주님의 내적 사역’, 곧 거듭남을 가리키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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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는' (AC.6-15)

AC.15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 무슨 다른 아버지라는 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인데요, 이는 아래와 같이 그분 자신 친히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In the univer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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