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곧 퍼셉션의 본성(nature), ‘생명나무(tree of lives), 그러니까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본성,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인 것과 그저 기억 지식에서 비롯될 뿐인 신앙의 본성에 대해서는 뒤이어 나오는 글들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But the nature of the “tree of the garden,” or perception; of the “tree of lives,” or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nd of the “tree of knowledge,” or faith originating in what is sensuous and in mere memory-knowledge, will be show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이 글은 설명이라기보다 ‘구조적 이정표’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창세기 2 9절을 중심으로, 나무, 동산, 에덴, 중앙이라는 핵심 상징들을 압축적으로 정의해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잠시 멈추어, 독자에게 분명히 알려 줍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결론이 아니라 ‘서론’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세 종류의 ‘나무’가 다시 한번 또렷이 구분되어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산의 나무’, 곧 퍼셉션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가장 일반적인 인식 방식입니다. 둘째는 ‘생명나무’, 곧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입니다. 이는 인간 생명의 중심이자 근원입니다. 셋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지 기억 지식에서 출발할 뿐인 신앙입니다. 이는 질서가 거꾸로 될 위험을 내포한 인식 방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개념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생명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지금까지는 그 윤곽만 제시되었을 뿐이며, 각각이 실제 삶과 영적 과정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지점으로 독자를 이끌기 위해 이 문장을 둡니다.

 

그래서 AC.106은 독자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이해한 것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 하지 말고, ‘앞으로 펼쳐질 설명의 흐름 속에서’ 퍼셉션과 사랑, 그리고 지식의 신앙이 어떻게 서로 갈라지고 또 충돌하는지를 보라고 초대합니다.

 

이 글은 또한 스베덴보리의 글쓰기 방식 자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결코 한 번에 모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핵심 개념을 먼저 심어 두고, 그것이 이후의 설명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점차 분명해지도록 합니다. 에덴동산의 나무들은 이제 막 이름을 얻었을 뿐이고, 그 열매가 무엇인지, 그 열매를 어떻게 대하게 되는지는 이제부터의 이야기입니다.

 

AC.106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지도’를 펼쳐 보았을 뿐이며, 이제부터는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AC.107, 창2:10, '에덴의 강 : 사랑에서 지혜로, 지혜에서 지성으로 흐르는 생명의 질서'(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 ‘강이 에덴에서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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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 창2:9, ‘생명나무 : 인간 의지의 중심에 계신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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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심화

 

4.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답변

 

위 설명을 10년 차 된 저는 이제는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의하지만, 그러나 이런 사실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당황, 혼란스러워하며, 반감을 품을 것 같아요. 소위 말세의 징조 같은 온갖 뉴스가 난무하는 이 시대를 주님이 오셔서 제발 좀 정리, 정돈해 주셨으면들 하거든요.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위와 같은 거룩한 내용을 어떻게 풀어 설명해야 할까요?

 

 

처음부터 ‘새 교회는 보이지 않는 상태다’라는 식으로 바로 들어가면, 대부분의 분들은 자연스럽게 거부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주님이 오셔서 세상을 정리해 주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대 자체를 부정하려 들기보다, 먼저 그 기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공감해 주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사람들은 ‘밖에서 질서를 세워 줄 힘’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서와 의에 대한 갈망’이라는 점에서 건강한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설명은 교정이 아니라 ‘확장’의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질문을 살짝 바꾸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세상을 정리하신다면, 그 정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사람’이라고 답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제도가 바뀌어도 다시 혼란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라고 이어가면, 외적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스스로 납득하게 됩니다. 이 지점이 핵심입니다. 주님의 일하심은 단순히 바깥을 정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 안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방식’이라는 방향을 부드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후에는 성경 자체를 통해 길을 열어주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를 떠올리게 하면 좋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와 세상의 혼란을 끝내 줄 ‘외적 왕’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사람의 마음과 삶을 다루셨습니다. 이 사실을 떠올리게 하면, ‘, 주님의 방식은 원래 이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문이 열립니다. 곧, 주님의 오심은 세상을 뒤집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사람 안에 나라를 세우는 사건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단계에서는 ‘두 층위’를 구분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나는 세상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안의 역사입니다. 세상의 역사에서는 전쟁과 갈등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안의 역사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두 층위를 동시에 다루시지만, 중심은 언제나 ‘사람 안’에 있습니다. 이 설명을 통해, ‘세상이 여전히 혼란스러운데, 어떻게 새 교회가 오느냐’라는 질문이, 사실은 두 층위를 섞어서 생긴 질문임을 스스로 보게 됩니다.

 

여기까지 온 다음에야 비로소 ‘새 교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새 교회’는 눈에 보이는 조직이 먼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 ‘새로운 질서’가 먼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살아나며, 그 신앙으로 이해가 열리는 삶의 방식이 실제로 시작될 때, 그것이 바로 새 교회의 시작이라는 점을 차분히 연결해 주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1퍼센트만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고,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길’로 들리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이 설명이 ‘세상을 포기하라’는 말로 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한 사람이 바로 서면, 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세상은 이미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질서는 항상 안에서 밖으로 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정리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바꾸시지만, 그 방식은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먼저 한 사람 안에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왜 세상은 그대로인데 새 교회를 말하는가’ 하는 반감이 줄어들고, 오히려 ‘그럼, 나부터 시작해야지’라는 방향으로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AC.105, 창2:9, ‘생명나무 : 인간 의지의 중심에 계신 주님의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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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 심화 3,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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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 교회’,  새 예루살렘의 시작

 

그럼 새 교회’,  새 예루살렘은 어떻게 오나요? 그때에도 여전히 세상은 자기가 중심인 사람들로 혼란스러울 텐데... 그런 사람들로 지상의 99%는 어수선함에도 불구, 겨우 1%의 사람들을 가지고 어느 한쪽 구석에서 새 교회는 시작되는 건가요? 노아의 홍수도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일어난 거죠? 태고교회도 당시 교회 안 사람들만 대상으로 한 것이고 말입니다. 석기시대 등을 생각하면, 이렇게 모든 걸 나눠서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

 

 

핵심부터 바로 말씀드리면,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은 어떤 시점에 전 세계가 한꺼번에 바뀌면서 도래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 식의 기대는 성경의 외적 역사 이해에서는 가능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내적 의미에서는 맞지 않습니다. 새 교회는 언제나 ‘상태의 시작’으로 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중심으로 생명의 질서가 회복된 상태’가 시작될 때, 이미 새 교회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하신 것처럼, 겉으로 보면 세상은 여전히 자기중심의 욕망과 혼란 속에 있습니다. 국가 간 대립, 이념 갈등, 개인의 욕망 중심적 삶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본질’과는 다른 층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교회란 제도나 숫자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된 내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는 99퍼센트가 어떻게 사느냐와 직접적으로 경쟁하거나 대치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혀 다른 층위에서, 조용히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고, 흩어져 있으며, 서로를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공통된 하나가 있습니다. 곧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신앙에서 이해가 열리는 질서’가 실제로 살아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교회의 시작입니다.

 

말씀하신 ‘노아의 홍수’ 역시 같은 원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적 물리적 재난이라기보다, ‘교회 상태의 붕괴’와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홍수 이전의 교회, 곧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중심으로 살던 천적 인간의 상태였고, 그 상태가 무너지면서 감각과 기억 지식 중심으로 내려앉는 과정이 홍수로 묘사됩니다. 이 변화는 인류 전체가 동일하게 경험한 사건이 아니라, ‘교회로 불릴 수 있는 상태를 가진 사람들’ 안에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라는 것은 인류 전체와 동일한 범위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된 상태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입니다.

 

이 점에서 석기시대든, 고대든, 현대든, 언제나 인류 전체와 교회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통찰은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같은 입장입니다. 인류 전체는 다양한 상태에 있고, 그중 일부만이 교회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가 소수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소수가 ‘질서의 중심’을 유지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에서는 양보다 질서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들어오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살아 있으며, 그 신앙에서 이해가 열리는 그 구조가 살아 있는 한, 교회는 존재합니다.

 

따라서 새 교회는 ‘어느 한 구석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공간적 의미의 구석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되지 않는 영역에서, 그러나 실제로는 가장 중심적인 영역에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영적 질서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으로 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개인들일 수 있지만, 그 상태가 점점 연결되면서 교회는 형성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늘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선지자 시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도, 그리고 이후 모든 영적 갱신의 시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이 질문의 가장 실제적인 답은 이것입니다. 새 교회는 ‘언제 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 시작되느냐’의 문제이며, 그 ‘어디’는 바깥세상이 아니라 ‘한 사람 안의 질서’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주님 중심으로 돌아서고, 사랑이 중심이 되어 그로부터 신앙이 살아나고, 그 신앙으로 이해가 열릴 때, 그 사람 안에서 이미 새 예루살렘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비록 적어 보여도,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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