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7)

 

 

AC.127

 

감각적인 것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의 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타락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 거짓들만이 아니라, 삶의 악들까지도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A desire to investigat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was not only the cause of 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chapter, but it is also the cause of the fall of every church; for hence come not only falsities, but also evils of life.

 

 

해설

 

이 단락은 AC.126에서 제시된 원리를 ‘역사적, 보편적 차원’으로 확장합니다. 앞 단락이 ‘허락과 금지의 질서’를 설명했다면, AC.127은 그 질서를 어겼을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오해나 이론적 오류가 아니라, ‘타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언급합니다. 이는 창세기 3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사건을 가리키며, 선악과 사건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미리 밝혀 줍니다. 타락의 핵심은 불순종이라는 도덕적 문제 이전에, ‘앎의 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의 퍼셉션을 떠나, 감각과 기억 지식을 통해 신앙의 신비를 파헤치려는 욕망이 생긴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시야를 넓혀 말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교회’의 타락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시대와 문화, 교파를 막론하고, 교회가 무너질 때에는 언제나 같은 패턴이 반복됩니다. 곧, ‘믿기 위해 살기보다,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 거짓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짓들뿐만 아니라 삶의 악들’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날카로운 통찰입니다. 잘못된 신학은 반드시 잘못된 삶으로 이어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다루기 시작하면, 신앙은 점점 삶을 다스리지 못하고, 오히려 삶이 신앙을 이용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되는가 하면, 감각과 기억 지식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내가 보고’, ‘내가 이해하고’, ‘내가 소유한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 기준이 신앙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주님 중심의 질서는 무너지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삶의 악입니다.

 

이 단락은 우리에게 불편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신앙의 신비를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배우고 연구하고 설명하려는 노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님께 의존하는 겸손 안에 있는가’, 아니면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변질되었는가가 관건입니다.

 

AC.127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의 타락은 언제나 삶의 문제이기 이전에 인식의 문제이며,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다루려는 욕망이 자리 잡는 순간, 거짓과 악은 함께 자라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심화

 

1. ‘믿기 위해 살기보다,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는 태도

 

 

AC.127, 심화 1, ‘믿기 위해 살기보다,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는 태도’

AC.127.심화 1. ‘믿기 위해 살기보다,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는 태도’ 이 표현은 굉장히 날카로운 구분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믿기 위해 산다’는 것은 ‘선과 사랑을 먼저 살고, 그

bygrace.kr

 

 

 

AC.128,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의 속뜻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 세상적이며 육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보고 믿을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

bygrace.kr

 

AC.126,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26.심화

 

1. ‘사랑과 신앙의 내적 실재

 

위 해설, 신앙의 신비 사랑과 신앙의 내적 실재라고 하는데 이게 뭔가요? 이것을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접근 시, 신앙의 천적인 것의 파괴를 불러온다고 하는데 왜죠?

 

 

목사님,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 전체 사상의 중심을 정확히 건드리는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신앙의 신비’, 혹은 사랑과 신앙의 내적 실재’라는 것은 머리로 이해되는 어떤 교리 내용’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상태’,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흘러 들어오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가 스스로 빛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것은 설명되는 것’이라기보다 경험되는 것’, 더 정확히는 열리는 것’입니다.

 

조금 더 풀어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신앙’을 무엇을 믿는다’는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는다’, ‘말씀을 믿는다’와 같은 식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걸 신앙의 껍질로 봅니다. 그 안쪽에는 전혀 다른 차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 안에서 진리가 스스로 참으로 보이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이 이건 맞는 것 같다’라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건 틀릴 수가 없다’고 느끼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 확신은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가 빛나는 상태’가 바로 신앙의 내적 실재’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신비’라는 표현은, 어떤 숨겨진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상태가 어떻게 사람 안에서 가능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인플럭스로 들어오고, 그 사랑이 사람의 속 사람을 열며, 그 안에서 진리가 살아 움직이게 되는 이 전체 과정이 바로 신비’입니다. 인간의 감각이나 이성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 왜 이것을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접근하면 천적인 것의 파괴’가 일어나는가를 보겠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접근의 방향’입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은 기본적으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방식’입니다. 보고, 듣고, 읽고, 비교하고, 판단해서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을 최종 기준’으로 삼을 때 생깁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내적 실재’는 안에서 밖으로 열리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즉, 먼저 사랑이 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이것을 붙잡으려고 하면, 순서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이게 맞나 틀리나를 내가 판단하겠다’는 태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사람은 이미 중심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판단’에 두게 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 곧 사랑의 상태 안에 있을 때는, 진리가 비교적 단순하게 들어옵니다. ‘이건 해야 한다’, ‘이건 하면 안 된다’가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걸 분석하기 시작하면, ‘왜 그래야 하지?’, ‘다른 해석은 없나?’, ‘이게 꼭 맞는 건가?’ 하면서 점점 흐려집니다. 이것이 바로 감각과 기억 지식이 개입하는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파괴’라고까지 표현하는 이유는, 이 과정이 단순히 이해가 흐려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 그렇게 되면, 결국 사랑 없이 진리를 다루는 상태’,  차가운 신앙’으로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진리가 더 이상 삶을 살리는 힘이 아니라, 판단하고 논쟁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천적인 것의 파괴’입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과 하나이기 때문에, 사랑이 빠지는 순간 그 본질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핵심은 지식을 쓰지 말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지식이 위에 올라타면 안 되고, 사랑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설명하는 도구이지, 판결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기준이 되고, 지식은 그 사랑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사용될 때, 비로소 질서가 맞습니다.

 

목사님이 지금 하고 계신 작업과 연결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목사님은 지금 지식을 쌓아서 신앙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신앙의 길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 주는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이 둘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위험하지만, 후자는 매우 필요합니다. 다만 항상 중심이 사랑에서 시작되는 신앙’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점만 분명히 붙들고 계시면 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사랑 안에서 진리가 스스로 빛나는 상태이며, 이것을 감각과 지식으로 먼저 판단하려 들면 중심이 뒤집혀 사랑이 사라지기 때문에 천적인 것이 무너진다’입니다.

 

 

 

AC.126,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2:17)

 

 

AC.126

 

이 말씀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함께 볼 때, 주님에게서 나온 모든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할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These words, 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 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17절,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명령의 ‘핵심 원칙’을 가장 직접적으로 제시합니다. 금지의 대상은 ‘’ 그 자체가 아니라, ‘앎의 출처와 방식’입니다.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디서부터 알려고 하느냐, 무엇을 통해서 알려 하느냐가 문제의 본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주님에게서 나온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허락됩니다. 이는 AC.125에서 말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지속적인 퍼셉션을 받았고, 그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를 자연스럽게 알았습니다. 이 흐름은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금지된 것은 다른 방식입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고 하는 것, 곧 감각과 기억 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AC.118–120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 질서의 전도(顚倒)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경계이며 마지막이지, 출발점이 아닙니다. 그 경계를 출발점으로 삼는 순간, 질서는 뒤집힙니다.

 

여기서 ‘신앙의 신비’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한 교리 정보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내적 실재’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것들은 감각과 기억 지식의 도구로는 결코 포착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그 방식으로 이해하려 들 때, 결과는 ‘부분적 오해’가 아니라, ‘신앙의 천적인 것의 파괴’입니다.

 

파괴된다’는 표현은 과격해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이 강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천적인 신앙은 추론과 분석의 대상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천적인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생명에서 개념으로, 퍼셉션에서 소유물로 전락합니다.

 

이 단락은 AC.122–124에서 말한 ‘소유하지 않음’의 원리를 다시 불러옵니다.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탐구하려는 태도는, 결국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시도’입니다. 이해했다, 파악했다, 설명할 수 있다는 느낌은 곧 주인의식을 낳고, 그 순간 천적 질서는 무너집니다.

 

이 말씀은 태고교회에만 해당되는 경고가 아닙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교리를 배우는 일 자체는 필수적이지만, 그것을 ‘신앙의 근원으로 삼는 순간’ 문제가 시작됩니다.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며, 말씀과 교리는 그 유입을 담는 그릇입니다.

 

AC.126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의 신비는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여 살아야 할 생명이며, 그 생명을 감각과 기억 지식의 손으로 붙잡으려 할 때, 가장 귀한 것이 먼저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심화

 

1. ‘사랑과 신앙의 내적 실재

 

 

AC.126, 심화 1, ‘사랑과 신앙의 내적 실재’

AC.126.심화 1. ‘사랑과 신앙의 내적 실재’ 위 해설, ‘신앙의 신비’를 ‘사랑과 신앙의 내적 실재’라고 하는데 이게 뭔가요? 이것을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접근 시, ‘신앙의 천적인 것의

bygrace.kr

 

 

 

 

AC.125, 창2:16, ‘퍼셉션(perception, 지각)의 허락’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 ‘모든 나무의 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