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처음부터 매우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이 우주를 연구하면서 블랙홀과 빅뱅과 원자의 세계까지 파고들었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하나의 현상, 곧 ‘내가 지금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색을 보고, 아픔을 느끼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을 ‘내가 경험하고 있다’고 압니다. 과학은 그 과정에서 어느 뉴런이 활성화되고 어떤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는지를 점점 더 정밀하게 밝힐 수 있지만, 영상이 묻는 것은 그보다 한 걸음 더 깊은 질문입니다. ‘그런 물리적 과정이 느낌을 동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 제목과 구성에는 리처드 파인만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영상에서 전개하는 ‘의식의 어려운 문제’, 펜로즈와 해머로프의 미세소관 이론, 의식과 양자현상의 관계 등은 파인만 자신의 의식 이론이 아닙니다. 영상 자체도 미세소관을 이용한 양자의식 이론은 파인만이 세상을 떠난 뒤 등장했으므로 그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을 ‘파인만이 말년에 의식의 비밀을 발견했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오히려 파인만은 이 영상에서 하나의 ‘태도’를 대표한다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곧 자연 앞에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아름다운 이론이라도 현실과 맞지 않으면 버릴 줄 아는 과학자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하고 나면 오히려 영상의 진짜 가치가 더욱 잘 보입니다. 영상은 과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이 엄청나게 성공했기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질문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불러주던 자장가를 생각해 봅니다. 음파의 주파수도 측정할 수 있고, 고막의 진동도 분석할 수 있으며, 청각 신경에서 뇌까지 전달되는 전기적 신호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음악을 들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까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뒤 같은 멜로디를 들었을 때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는 ‘ 느낌 자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영상은 바로 이 틈을 집요하게 바라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이 지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육체만으로 완결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육체와 뇌가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내적 생명은 자연계에서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며, 감각기관과 신경계와 뇌는 그 생명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한 정교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화학적 변화를 발견했다고 해서 영적 인간을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인간의 내적 생명이 어떻게 자연적 기관을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이 차이는 ‘원인’과 ‘수단’을 구별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현이 진동하고 공기가 떨리며 우리의 고막도 진동합니다. 이 모든 것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아노 내부를 아무리 분해해도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하는 피아니스트의 마음 자체가 그 안에서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피아노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피아니스트가 이 자연계에서 음악을 들려주려면 악기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육체와 뇌도 이와 비슷한 위치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뇌는 하찮은 껍데기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이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놀랍도록 정교한 기관입니다. 그러나 기관의 작동을 완전히 설명했다고 해서 그 기관을 통하여 나타나는 생명의 근원까지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영상이 말하는 이른바 ‘의식의 어려운 문제’가 스베덴보리와 뜻밖의 접점을 갖습니다. 빨간 사과를 볼 때 빛의 파장과 망막의 반응과 시각피질의 활동을 모두 설명했다고 합시다. 그래도 ‘ 나는 빨강을 빨갛게 경험하는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통증 신호가 척수를 따라 올라가는 과정을 모두 추적했다고 해도 ‘ 그것이 나에게 아픔으로 느껴지는가?’라는 질문은 그대로입니다. 영상은 현대 과학이 바로 이 지점에서 아직 결정적인 답을 갖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서 질문 자체를 조금 바꾸었을 것입니다. ‘물질이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내는가?’라고 묻기 전에 ‘과연 물질이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인가?’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처음부터 뇌가 의식의 생산자라고 전제하면 연구의 방향은 ‘어떤 물질적 과정이 주관적 경험을 만들어내는가?’가 됩니다. 그러나 뇌가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이 뇌를 통하여 자연계에 나타난다면, 뇌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신경학적 현상은 의식의 ‘생산 과정’이라기보다 의식이 육체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상응하는 과정’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상응’을 단순한 비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상응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서로 닮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적인 원인이 외적인 결과 안에서 질서 있게 표현되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을 할 때 특정 뇌 영역이 활성화되고, 어떤 정서를 느낄 때 특정 신경전달물질의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대응 관계가 매우 정교하게 발견될수록 ‘속의 상태가 겉의 기관을 통하여 어떻게 표현되는가?’라는 문제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조차도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는 아닙니다. 이것이 영상의 여러 가설과 스베덴보리의 관점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곳입니다. 영상은 의식이 뇌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혹시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양자 붕괴와 의식을 연결하는 가능성까지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까지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양자장이든 미세소관이든 우주의 어떤 물리적 구조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독특하면서도 핵심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생명의 유입’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끊임없이 받아 살아갑니다. 궁극적으로 생명 자체이신 분은 오직 주님이며, 인간은 그 생명을 자신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 생명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고, 사랑하고 있고, 선택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 생각도 것이고 생명도 ’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의 토대라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이 반복해서 말하는 ‘ 안에 진짜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도 새롭게 읽힙니다. 영상은 마지막 부분에서 ‘ 말들을 듣고 있는 동안 여러분의 몸속 안에 진짜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인상적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마치 육체라는 상자 안에 영혼이라는 작은 사람이 들어 있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영은 몸 안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물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인간 전체의 내적 차원이 영이고, 육체는 그것이 자연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주어진 외적 형식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가깝습니다.

 

따라서 죽음 역시 ‘의식이 꺼지는 사건’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육체라는 자연적 기관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내적 생명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났다고 기록한 사람들은 자신이 여전히 생각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며 살아 있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오히려 자연계에 있을 때보다 자신이 더욱 온전하게 살아 있다고 느낀다고 그는 거듭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뇌와 의식이 그토록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다르게 보입니다. 뇌가 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영이 활동하려면 뇌와 신경계라는 자연적 기관을 통하여야 하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그렇게 긴밀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영상 중간에 등장하는 펜로즈와 해머로프의 ‘조화 객관 환원’, 곧 Orch-OR 이론도 이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뇌세포 내부의 미세소관에서 양자적 과정이 일어나고, 일정한 순간에 양자상태가 붕괴하면서 의식의 순간이 발생할 가능성을 소개합니다. 동시에 뇌처럼 따뜻하고 습하며 복잡한 환경에서 그런 양자적 상태가 충분히 유지될 수 있느냐는 반론도 소개하고, 설령 양자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 그것이 느낌이 되는가?’라는 근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인정이 중요합니다.

 

양자역학을 영혼의 증거로 사용하려는 유혹은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물리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양자역학을 가져오고, 양자역학이 신비하니 거기에 영혼이나 하나님을 집어넣는 식의 논증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직 과학이 설명하지 못했다’와 ‘그러므로 영적 세계가 존재한다’ 사이에는 논리적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언젠가 미세소관의 양자현상을 완전히 설명한다고 해서 영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Orch-OR 이론이 폐기된다고 해서 영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 실재의 근거를 현재 과학의 미해결 영역에 세워 놓으면 과학이 발전할 때마다 신앙의 자리가 줄어드는 이상한 결과가 생깁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훨씬 근본적인 구별을 요구합니다. ‘물질적 과정이 얼마나 정교한가?’와 ‘생명의 근원은 무엇인가?’는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과학이 전자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존재론적인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에서 생겨난 독립적 실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의 종착점이며 효과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가장 미세한 양자현상까지 내려간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물질도 여전히 자연적 차원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이 의식을 ‘우주의 근본적 구성요소’일 가능성으로 확장하는 대목도 흥미롭지만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의식을 단순한 뇌의 부산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의식을 우주 자체의 속성으로 돌려버리면 자칫 범심론적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우주는 스스로 살아 있는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나오며, 피조세계는 그 생명을 질서에 따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주가 의식을 갖는다’와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유입된다’는 말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영상 후반의 동물 의식 이야기도 이 점에서 재미있습니다. 문어와 까마귀와 박쥐와 상어는 인간과 다른 감각세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영상은 이를 통해 인간의 경험만이 의식의 유일한 형태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오만을 낮추는 좋은 지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단순히 ‘의식의 ’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적 감각을 넘어 영적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향하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영원한 목적을 향해 형성될 수 있는 내적 차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단순히 인간의 ‘의식 볼륨’이 더 크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이 영상에서 특히 AI에 관한 대목이 오늘날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고 봅니다. 영상은 인간의 기억과 행동과 말투를 컴퓨터가 완벽하게 복제한다고 해도 그것이 곧 ‘’의 의식이 옮겨갔다는 뜻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와 실제로 인간처럼 경험하는 존재를 구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인간은 정보의 집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쓴 글과 설교와 편지와 음성과 영상을 모두 AI에 학습시켰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AI가 그 사람의 말투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가족에게 그 사람이 생전에 했을 법한 말을 하며, 심지어 과거의 기억에 관한 질문에도 정확하게 대답한다고 합시다. 그래도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정체성은 단순한 기억 데이터의 총합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의 중심에는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있으며, 그의 의지와 이해가 있고, 궁극적으로 그의 지배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후에도 인간의 인격을 이루는 중심입니다.

 

그래서 ‘마인드 업로딩’을 통한 디지털 불멸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애초부터 불멸의 방향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보를 컴퓨터에 복사함으로써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갑니다. 문제는 ‘어떻게 나를 복제하여 죽지 않을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형성되고 있는가?’입니다. 사후에 계속되는 것은 컴퓨터에 저장된 내 정보가 아니라 바로 그렇게 형성된 ‘’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영상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 아주 가까운 문 앞까지 옵니다. 영상은 계속해서 ‘정보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있다’, ‘기계적 처리와 실제 경험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종이에 적힌 글씨가 가득한 책이 아니며, 차갑게 재생되는 녹음기도 아니고, 단순히 정보만 처리하는 기계회로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여기서 과학의 질문과 영적인 질문이 갈라지면서도 서로를 향해 열립니다. 과학은 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합니다. 그것은 계속 연구되어야 합니다. 뉴런도 연구하고 미세소관도 연구하고 양자현상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연구를 방해하는 대신 훨씬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 모든 기관을 통하여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는 생명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의 대답은 ‘주님으로부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과학이 모르는 자리에 ‘하나님’을 집어넣는 답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과학으로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으로부터 존재하며 순간순간 존속합니다. 특히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되었고, 그것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받아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다’는 경험은 단순한 생물학적 착각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독립적인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영상의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아름답게 다시 읽힙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어느 순간 문득 ‘, 내가 지금 살아 있구나’라고 느끼는 평범한 순간을 영상은 ‘우주가 숨겨둔 가장 깊은 비밀’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경탄을 굳이 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은 정말 신비로운 일입니다. 다만 그 신비의 최종 목적지는 ‘우주가 스스로 의식을 갖는다’는 데 있지 않고, ‘나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지금 순간에도 생명을 받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신앙의 문제는 의식의 수수께끼보다 한층 더 깊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 내가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렇게 주어진 의식과 자유와 합리성을 가지고 나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인간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만으로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성과 자기의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을 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의식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형성되는가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의 질문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시켜 마지막까지 밀고 가면 질문은 세 번 바뀝니다. 처음에는 ‘뇌는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내는가?’입니다. 그다음에는 ‘과연 뇌가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인가?’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 지금 받아 누리고 있는 생명을 나는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가 됩니다.

 

첫 번째는 뇌과학의 질문이고, 두 번째는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영적 질문이며, 세 번째는 거듭남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가장 큰 가치는 어떤 양자의식 이론이 옳다는 데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현대 과학이 인간의 뇌를 그토록 깊이 들여다보고도 마침내 ‘느끼고 있는 ’라는 문 앞에서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과학은 그 문 앞에서 계속 실험하고 측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문을 지나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 영과 몸, 사랑과 지혜,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이 끊임없이 유입되는 근원을 이야기합니다.

 

파인만이 칠판에 남겼다는 유명한 문장, ‘내가 만들어 없는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과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다만 그것을 파인만 자신의 의식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상 역시 당시 파인만이 다른 물리학적 문제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그 문장을 오늘의 의식 문제에 하나의 비유로 가져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뇌의 구조를 모방하고 언어를 생성하는 기계를 만들며 인간 행동의 놀라운 부분까지 재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살아 있음’ 그 자체를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어쩌면 그것은 당연합니다. 생명은 인간이 조립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신조차 자기 생명의 원천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소유한 독립적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그 생명을 빌려 쓰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 않으시고 놀랍게도 완전히 ‘나의 생명’인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도 있고, 생각할 수도 있고, 선택할 수도 있으며, 그 선택을 통하여 실제로 하나의 인격으로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의식이 있는가?’라는 현대 과학의 거대한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짧게 답하고 끝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놀라운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며 살아 있다는 모든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그것이 마치 완전히 당신 자신의 것처럼 주어진 까닭은 무엇인가?’

 

그 질문 끝에서 의식의 신비는 마침내 거듭남의 문제와 만납니다. 생명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의식은 그 자체로 인간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주어진 놀라운 그릇입니다.

 

그렇게 보면 밤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지금 살아 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은 정말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경이로움의 중심에는 ‘의식을 가진 우주’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관계 안에서, 과학이 아직 풀지 못한 ‘의식의 신비’는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지적 미스터리를 넘어 인간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을 향해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는지를 묻는 영적인 질문으로 바뀝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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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한 러시아 수도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에는 이름이 ‘티흔’, ‘티온’ 등으로 흔들려 나오지만, 생애의 연대와 특징을 대조해 보면 인물은 러시아 출신의 아토스 수도자 ‘티혼 골렌코프(Tikhon Golenkov, 1884-1968), 흔히 ‘캅살라의 티혼’ 또는 ‘아토스의 티혼’이라 불리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수많은 수도원을 순례했고, 이후 아토스산에 정착하여 수십 년 동안 매우 엄격한 금욕과 기도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훗날 아토스의 성 파이시오스에게 영적 지도를 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영상 초반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이 머문 수도원을 아토스에서 매우 오래되고 큰 수도원 가운데 하나로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의 ‘이비로 수도원’은 아마 ‘이비론 수도원(Iviron Monastery)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비론은 10세기 말 조지아계 수도사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오늘날 아토스산 20개 주요 수도원 가운데 서열상 세 번째에 해당하는 유서 깊은 수도원입니다. 다만 티혼이 평생 이비론 수도원의 대표 수도사였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아토스산 여러 지역에서 수행하다가 특히 캅살라와 카룰리아 등 은수 지역에서 살았던 러시아 수도자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티혼의 삶에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그의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고, 졸음을 이기기 위해 몸을 불편하게 하며, 딱딱한 곳에서 잠을 자고, 매우 적은 음식을 먹고,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옷도 최소한으로 소유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전승에서도 티혼은 매우 엄격한 금욕가로 묘사됩니다. 긴 시간 기도하고,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으며, 단순한 음식으로 살고, 거친 환경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삶을 접하면 자연스럽게 ‘ 정도로 자신을 절제해야 진정한 수도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외적 금욕과 내적 거듭남을 반드시 구별하게 합니다. 금식과 절제, 그리고 고독은 인간의 욕망을 돌아보고 마음을 주님께 집중시키는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게 먹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딱딱한 침대에서 잔다고 자기 사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추위를 견딘다고 proprium이 자동으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외적 절제는 내적 사랑의 질서가 바뀌도록 돕는 수단일 때 비로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영상에서 티혼은 ‘탐식은 모든 죄가 들어오는 현관’이라는 취지로 말하며, 먹는 것을 극도로 줄였다고 소개됩니다.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는 뜻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적 욕망에 끌려갈수록 그것이 다른 욕망과 결합하여 삶 전체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적 욕구 그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쉬고 몸을 돌보는 것은 창조질서에 속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목적이 되어 사람을 지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음식 자체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쾌락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무질서한 사랑을 바른 위치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극도로 금식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절제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좋은 음식을 감사히 먹으면서도 탐욕에 지배되지 않고 이웃과 나누며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성의 척도는 얼마만큼 먹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인가에 있습니다. 금욕은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천국의 상태는 아닙니다.

 

그런데 영상이 중반으로 들어가면서 티혼의 모습 가운데 훨씬 따뜻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티혼이 동물들을 매우 사랑했다고 전합니다. 쥐가 많은 곳에서 살면서도 동물들을 해치지 않고, 여우와 가까이 지내며, 멧돼지가 와서 새끼를 낳으면 보호하고, 사냥꾼이 오면 다른 곳으로 보내어 동물을 지켜 주었다는 일화들입니다. 실제 티혼의 전승에서도 그가 산짐승들과 친숙하게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동물 세계 역시 인간의 애정과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의 동물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애정과 성향을 표상하며, 창조세계 전체는 영적 세계의 질서를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이 곧 높은 영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창조된 존재를 사랑과 책임으로 돌보는 태도에는 분명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특히 티혼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동물을 단순한 방해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대했다는 전승은 그의 금욕과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줍니다. 영성이 자기 몸을 혹독하게 다루는 데만 머문 것이 아니라 주변 생명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방향으로 나타났다면, 바로 그 부분에서 우리는 금욕의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영성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다른 존재를 더 거칠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온유하게 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가 영상에서 ‘하나님과 합일의 관계’라고 표현하는 대목과도 연결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식의 ‘합일’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will)와 이해성(understanding)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주님과 ‘결합(conjunction)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 그분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의 목표도 특별한 황홀경이나 신비체험 자체라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을 실제로 다스리게 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결합이 깊어지면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진실해지고, 더 온유해지며,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됩니다. 결국 주님과의 결합은 삶의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영상에는 티혼의 초상화를 마른 우물에 던져 넣고 기도했더니 샘물이 솟아올라 초상화가 물 위로 떠올랐다는 기적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에서 성인의 거룩함을 기억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런 기적담을 굳이 하나하나 해부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오히려 그 이야기의 중심이 무엇인지 보면 됩니다. 수도원 공동체가 자신들이 존경하던 수도자의 삶을 기억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했고, 그 경험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보여 주듯, 기적 자체가 영성의 증거는 아닙니다. 물이 솟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수도자의 삶에서 어떤 선이 흘러나왔는가입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기적과 연결되어 있어도 자기 사랑과 지배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이 천국적인 상태를 보증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 기적도 없지만 일평생 조용히 악을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했다면 그 삶은 주님 앞에서 훨씬 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기적담은 사람을 숭배하게 하기보다 그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할 때, 가장 건강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 후반에는 아토스 수도원의 식사 장면이 소개됩니다. 여러 수도사가 함께 앉고, 수도원장이 기도한 뒤 식사를 시작하며, 식사 중에는 말을 하지 않고 한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고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를 ‘입으로는 육신의 양식을 먹고, 귀로는 영의 양식을 먹는다’고 표현합니다. 이 모습은 수도생활의 한 가지 아름다운 질서를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서로 적대시키지 않고, 한 식탁 안에서 함께 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본래 서로 적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표현되고 실현되는 바탕입니다. 육체가 음식을 먹는 동안 마음이 말씀을 듣는다는 장면은 그래서 상징적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식사시간에 반드시 성경을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는 형식이 아니라, 자연적 삶이 영적 삶의 질서 아래 놓여 있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먹고 일하고 쉬고 대화하는 평범한 일상 자체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표현하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는 포도주를 마시는 수도사들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아 옆의 미국인에게 잔을 건네주었다는 일화를 웃으며 소개합니다. 이 장면은 오히려 수도 전통을 지나치게 엄숙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게 해 줍니다. 수도자들도 먹고 마시고 웃고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영성은 인간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인 삶을 바른 질서 안에 두는 것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티혼의 극단적인 수행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오히려 더 오래 붙들고 싶은 것은 그 뒤에 나타나는 온유함입니다. 밤을 새워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보다 동물을 어떻게 대했는가, 얼마나 적게 먹었는가보다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얼마나 많이 고행했는가보다 자기 삶에서 주님을 어떻게 드러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금욕은 겉사람을 다루지만 거듭남은 속 사람의 사랑을 바꿉니다.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도 다시 등장합니다. 수도생활은 세상의 재산과 명예를 버리는 삶이지만, 그것만으로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수행을 한다’, ‘나는 평생을 수도에 바쳤다’, ‘나는 특별한 영적 경험을 했다’는 형태로 proprium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깊은 수도는 외적인 소유를 버리는 것보다 자신이 행한 선과 수행을 자기 공로로 소유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힘써 살아야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삶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도 ‘얼마나 대단한 수도를 했는가?’가 아니라 ‘ 수행을 통해 자기 자신은 얼마나 뒤로 물러나고, 주님의 선이 얼마나 드러났는가?’일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을 직접 방문한 경험 자체에도 큰 감동을 표현합니다. 다른 문화와 전통 속에서 오랜 세월 수도생활을 이어 온 사람들을 직접 보고,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그들의 기도와 생활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기독교 전통을 이렇게 직접 만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개신교가 익숙하게 여겨 온 방식만이 기독교 영성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발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래된 전통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더 깊은 것은 아니며, 극단적인 수행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더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같은 기준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사람 안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자라게 하는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바른 위치로 돌려놓는가? 선과 진리가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나는가?’ 이것이 수도원이든 교회든, 금식이든 기도든, 설교든 신학이든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티혼의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혹독한 금욕의 정도만은 아닐 것입니다. 젊은 시절 수많은 수도원을 찾아다니면서도 단순히 ‘좋은 수도원’을 찾기보다 자신을 제대로 지도해 줄 영적 스승을 찾았고, 이후 오랜 수도생활을 거쳐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점 역시 중요합니다. 실제 자료에서도 티혼은 훗날 아토스의 성 파이시오스에게 영적 영향을 준 인물로 기억됩니다.

 

이것은 영적 성숙이 개인의 완성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는 결국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쓰임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혼자 깊은 동굴에서 기도하는 시간도 귀할 수 있지만, 그 기도가 사람을 더 부드럽고 지혜롭게 만들어 다른 사람을 선으로 이끄는 쓰임으로 이어질 때 그 열매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번 영상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티혼의 엄격한 금욕은 자체가 거룩함의 척도라기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께 온전히 향하려는 하나의 수도적 수단이었으며, 수행의 참된 열매는 극단적인 고행보다 온유함과 사랑, 그리고 다른 존재를 위한 쓰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극한의 수도’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깊은 금식은 음식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proprium 먹고 싶어 하는 자기 명예와 자기 공로를 줄이는 것이며, 가장 깊은 청빈은 물건을 적게 갖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적 금욕이 내적 거듭남으로 이어질 때, 수도는 특별한 사람들의 기이한 삶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걸을 수 있는 ‘내적 수도’의 길을 보여 주게 됩니다.

 

 

 

SY.83,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 이비론 수도원,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 (2020010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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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0, 강문호 수도사, ‘그리심산 수도원, 예수님의 길을 걸으며 비로소 나그네를 보다’ (20191231)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니던 중 그리심산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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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자체로 죽은 행위입니다. 그것들은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관하여 예레미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by thefruit of the groundare meant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ppears also from what follows;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Of such it is written in Jeremiah: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4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렘12:1-2, 4) Wherefore doth the way of the wicked prosper? Thou hast planted them, they also have taken root; they have gone on, they also bear fruit; thou art near in their mouth, and far from their reins;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12, 4)

 

입에는 가까우나 마음에는 멀다’(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뜻하며, 그들에 관하여땅이 슬퍼한다’(the land mourns) 말합니다. 같은 선지서에서는 그러한 행위를행위의 열매’(fruit of works)라고 부릅니다. “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denotes those who are of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concerning whom it is said thatthe land mourns.” In the same prophet such works are called thefruit of works”: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17:9, 10) The heart is deceitful [supplantativum] above all things, and it is desperate, who can know it? I Jehovah search the heart, I try the reins, even to give 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ways, and according to the fruit of his works. (Jer. 17:910)

 

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Micah:

 

그 땅은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미7:13) The land shall be desolate because of them that dwell therein, for the fruit of their works. (Micah 7:13)

 

그러한열매(fruit) 열매가 아니며, 그러한행위(work)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와 뿌리가 모두 멸망하는 것을 아모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That suchfruitis no fruit, or that theworkis dead, and that both fruit and root perish, is thus declared in Amos: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암2:9) I destroyed the Amorite before them,whose height was like the height of the cedars, and he was strong as the oaks; yet I destroyed his fruit from above, and his roots from beneath. (Amos 2:9)

 

다윗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David:

 

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21:10) Their fruit shalt thou destroy from the earth, and their seed from the sons of man. (Ps. 21:10)

 

그러나 체어리티의 행위는 살아 있으며, 그것들에 관하여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다(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선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But the works of charity are living, and of them it is declared that they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as in Isaiah: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37:31) The remnant that is escaped of the house of Judah shall again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Isa. 37:31)

 

위로 열매를 맺는다(bear fruit upward)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를 같은 선지서에서는아름답고 영화로운 열매(fruit of excellence)라고 부릅니다. Tobear fruit upwardis to act from charity. Such fruit is called thefruit of excellence,” in the same prophet: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4:2) In that day shall the shoot of Jehovah be beautiful and glorious, and the fruit of the earth excellent and comely for them that are escaped of Israel. (Isa. 4:2)

 

그것은 또한구원의 열매(fruit of salvation)이며, 같은 선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릅니다. It is also thefruit of salvation,” and is so called by the same prophet: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 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45:8) Drop down, ye heavens, from above, and let the skies pour down righteousness; let the earth open, and let them bring forth the fruit of salvation, and let righteousness spring up together; I Jehovah will create it. (Isa. 45:8)

 

 

해설

 

AC.348은 앞의 AC.346에서 간략하게 밝힌 ‘땅의 소산’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가인이 드린 ‘땅의 소산’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8은 왜 그런 행위가 참된 열매가 될 수 없는지를 여러 말씀을 통해 보여 줍니다.

 

첫 문장이 이 글 전체의 핵심입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자체로 죽은 행위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선행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행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AC.346에서 이미 보았듯이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거두었으며,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보면 ‘행위’도 있고 ‘예배’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죽은 행위’라고 합니다. 그 행위가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 사람’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외적인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체어리티는 결국 자연계에서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문제는 그 외적인 행위가 속 사람의 선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행위라면 외적인 행위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의, 명예, 인정, 보상, 종교적 우월성 같은 목적에서 행한다면 겉으로 아무리 선해 보여도 그 행위에는 천국의 생명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렘12:1-2, 4을 인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외적으로는 아주 성공적입니다. 종교적인 삶도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말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이것은 가인의 예배를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고, 외적으로는 제물을 드리며, 종교적인 행위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사랑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석합니다. 신앙의 말은 입에 있지만 그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는 마음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이 슬퍼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 피해를 입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종교생활만이 아닙니다. 교회 자체가 황폐해집니다. 교리는 남아 있고, 예배도 남아 있으며, 종교적 활동도 활발할 수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선이 사라지면 교회의 내적 생명은 메말라 갑니다.

 

이어지는 렘17:9-10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외적으로 나타난 행위만 보지 않으시고,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행위의 영적 성질을 결정하는 것이 외적인 모양만이 아니라 그 행위가 나온 내적 사랑과 의도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원문의 ‘폐부’(reins)는 고대 성경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자연적인 장기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내면과 애정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만이 아니라 왜 그렇게 했는지, 그 행위의 내적 근원이 무엇인지를 보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에서 ‘행위의 열매’가 중요해집니다. 행위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내적인 사랑은 외적인 삶을 통해 자신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행위와 내면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7:13의 ‘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역시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열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열매가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악한 사랑도 자기에게 맞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열매’라는 말이 나올 때 무조건 선행을 뜻한다고 정해 놓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뿌리에서 나온 열매인지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암2:9의 인용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아모리 사람은 ‘백향목 높이’ 같고 ‘상수리나무’처럼 강합니다. 외적으로는 거대하고 견고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위의 열매’뿐 아니라 ‘아래의 뿌리’까지 멸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열매와 뿌리를 함께 언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열매는 행위이고, 뿌리는 그 행위를 낳는 내적 근원입니다. 뿌리가 악하면 그 열매 역시 영적으로 살아 있는 열매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AC.348은 여기서 놀라운 대조를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는 ‘죽은 열매’를 설명했지만 사37:31부터는 ‘살아 있는 열매’로 전환합니다.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스베덴보리는 ‘위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아주 간결하게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풀이합니다. 이 한 문장이 AC.348 전체를 압축합니다. 참된 열매는 단순히 외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다’는 표현에는 영적 삶의 질서가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저 뿌리가 내려야 보이는 곳에서 열매가 맺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사랑과 선을 심으시고, 그것이 내적 생명이 될 때, 그 생명이 자연적인 삶으로 내려와 말과 행동과 쓰임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행위는 겉에서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앞의 가인과 정확히 대조됩니다. 가인에게도 ‘땅의 소산’이라는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것이므로 ‘죽은 열매’였습니다. 반면 사37:31의 열매는 체어리티라는 살아 있는 뿌리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차이는 ‘행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 행위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있습니다.

 

4:2에서는 이러한 열매를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45:8에서는 그 열매가 ‘구원의 열매’로까지 나아갑니다. 하늘에서 의가 내려오고, 땅이 열려 구원이 싹트며, 공의가 함께 자랍니다. 여기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과 아래에서 열매 맺는 것이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신의 삶에서 열매 맺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로부터 행한다’는 것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한 마음을 만들어 선행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45:8의 마지막 말이 그 점을 분명히 합니다. ‘ 여호와가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살아 있는 열매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선을 심으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그 선을 받아 살아갈 때, 그것이 겉 사람을 통해 행위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보면 AC.348에서 ‘뿌리’와 ‘열매’의 관계는 곧 ‘ 사람’과 ‘ 사람’의 관계와 연결됩니다. 체어리티 없는 행위는 겉 사람에만 머물기 때문에 죽어 있습니다. 반면 살아 있는 행위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체어리티에서 시작하여 겉 사람의 실제 삶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참된 거듭남은 속 사람만 변화시키거나 겉 행동만 고치는 일이 아니라, 속의 선이 겉의 삶으로 흘러나와 둘이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AC.348은 결국 우리가 선행을 바라보는 기준을 바꾸어 놓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보다 먼저 ‘어디에서 그것을 행했는가?’를 묻게 합니다. 예배, 봉사, 헌금, 구제, 전도, 설교, 성경공부 같은 종교적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것은 귀한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 있는 열매가 되려면 체어리티라는 뿌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8의 중심은 ‘행위가 중요하다’거나 ‘신앙보다 행위가 중요하다’는 단순한 주장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와 행위는 하나의 생명 질서 안에 있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끌고, 체어리티는 실제 행위로 열매 맺습니다. 이 연결이 끊어지면 행위가 있어도 죽은 행위가 될 수 있지만, 이 질서가 살아 있으면 사람의 일상적인 작은 쓰임까지도 ‘위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가인의 ‘땅의 소산’과 사37:31의 ‘위로 맺는 열매’는 겉으로는 모두 ‘열매’이지만 영적으로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죽은 열매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살아 있는 열매입니다. 결국 열매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 열매의 외형이 아니라 그 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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