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8

나는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곧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서 그렇게 했습니다. 비록 내적인 음성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처럼 분명한 음성으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때로 우리 대화의 주제는 사후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삶이 끝난 뒤에도 사람이 이와 같이 살아간다는 사실을 육체의 삶 동안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것을 몹시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삶이 계속되며, 그것도 사람이 희미한 삶에서 밝은 삶으로 옮겨 가는 방식으로 계속되고,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밝아지는 삶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려 달라고,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는 그들의 친구들의 상태에 관해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이야기해 주었던 것처럼, 자신들의 상태가 어떠한지도 글로 써서 친구들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친구들에게 이런 것을 말하거나 글로 써 보낸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망상이라고 하고 비웃으며, 믿기 전에 표적이나 기적을 요구할 것이므로, 나는 단지 그들의 조롱거리가 될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참되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아마도 매우 적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영들의 존재를 부정하며,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누군가가 영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말은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영들에 관하여 이와 같은 불신의 상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추론(crazy ratiocination)을 통해 영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하며, 자신들의 정의와 가정으로 영에게서 모든 감각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리고 더 학식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할수록 더욱 그렇게 합니다. I have conversed with many who had been known to me in this life (and this I have done for a long time—for months and years), in as clear a voice, although an inward one, as with friends in this world. The subject of our conversation has sometimes been the state of man after death, and they have wondered exceedingly that during the bodily life no one knows or believes that he is so to live when the bodily life is over, when yet there is then a continuation of life, and such a continuation that the man passes from an obscure life into a clear one, and those who are in faith in the Lord into a life that is more and more clear. They have desired me to tell their friends that they are alive, and to write and tell them what their condition is, even as I had related to themselves many things about that of their friends here. But I replied that were I to tell their friends such things, or to write to them about them, they would not believe, but would call them delusions, would scoff at them, and would ask for signs or miracles before they would believe; and I should merely expose myself to their derision. And that these things are true, perchance but few will believe. For at heart men deny the existence of spirits, and even those who do not deny it are unwilling to hear that anyone can speak with spirits. In ancient times there was no such state of belief in regard to spirits, but so it is now when by crazy ratiocination men try to find out what spirits are, and by their definitions and suppositions deprive them of all the senses, and do this the more, the more learned they desire to be.

 

해설

AC.448은 AC.443부터 이어져 온 체험 기록을 마무리하면서, 이 단락 전체의 출발점이었던 ‘사후에도 인간은 실제로 살아 있는가?’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번에는 일반적인 영들과의 대화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이 세상에서 실제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죽은 뒤 그들과 다시 대화했다고 보고하는 체험을 제시합니다. 더욱이 그것이 잠깐의 체험이 아니라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비록 ‘내적인 음성’이지만 이 세상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처럼 분명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체험으로 보고하는 증언이라는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크게 놀라워한 것은 단순히 ‘죽은 뒤에도 삶이 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 안에 살 때에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이처럼 계속 살아간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놀라워했습니다. 그들 자신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이며, 생각하고 말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47의 초보 영이 자신이 이미 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던 장면과도 이어집니다. 육체의 삶 동안에는 몸을 자기 존재 자체와 너무 강하게 동일시하기 때문에, 몸을 벗고도 ‘나’가 그대로 존재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후의 삶을 ‘희미한 삶에서 밝은 삶으로’(from an obscure life into a clear one) 옮겨 가는 것으로 묘사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AC.443과 정확히 호응합니다. AC.443의 사람은 육체의 생명이 사라지면 영에게는 희미하고 불분명한 삶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마지막인 AC.448에서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삶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한 상태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443에서 시작된 문제가 AC.448에서 다시 돌아와 하나의 결론을 이룹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사람의 사후 상태가 동일하게 밝아진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희미한 삶에서 밝은 삶으로’ 옮겨 간다고 한 뒤, 특별히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들’(those who are in faith in the Lord)은 ‘더욱더 밝아지는 삶’(a life that is more and more clear)으로 들어간다고 구별합니다. 적어도 이 글의 표현만 놓고 보면, 사후에 의식과 지각이 더욱 분명해진다는 것과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의 삶이 계속해서 더욱 밝아진다는 것은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다만 AC.448 하나만으로 천국과 지옥을 포함한 모든 사후 상태를 상세히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죽은 이들이 살아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들의 상태를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는 대목도 눈길을 끕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친구들도 그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그런 사실을 전하거나 글로 써 보낸다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고, 망상이라고 하거나 비웃으며, 믿기 전에 표적이나 기적을 요구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증거를 하나 더 제시하면 누구나 믿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의 존재 자체를 마음속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증언이나 체험을 전해 주어도 그것이 곧 믿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마지막 부분에서 AC.445-446의 논의와 다시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영의 존재를 입으로는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누군가가 영과 대화할 수 있다고 하면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배경 가운데 하나로 당시 사람들이 영에 관해 만들어 낸 지나치게 추상적인 관념을 지적합니다. 영이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정의와 가정을 거듭하면서 오히려 영에게서 모든 감각을 제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실제 존재가 아니라, 이름만 남은 추상적 개념에 가까워집니다. AC.444의 ‘단지 생각’, AC.445의 ‘추상적 생각’, AC.446의 연장과 실체를 둘러싼 논쟁이 여기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더 학식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할수록 더욱 그렇게 한다’는 마지막 표현 역시 학문이나 깊은 사고 자체를 부정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42에서는 오히려 태고 시대 사람들의 사고가 오늘날보다 훨씬 깊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AC.446에서 문제가 된 것도 지성 자체가 아니라 ‘지성을 향한 길을 막는’ 추상적 논쟁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비판받는 것은 배움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정의와 가정을 실제보다 앞세운 나머지 영을 살아 있는 존재로 이해할 가능성 자체를 없애 버리는 사고입니다. 지성은 실재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길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인간의 개념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길 때에는 오히려 실재를 가리는 장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AC.443-448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드러납니다. 영적 삶은 육체가 사라진다고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며(AC.443),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유기적 실체이고(AC.444), 영혼을 추상적 생각으로만 만들면 결국 사후 존속 자체를 믿기 어려워지며(AC.445),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연장과 실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고(AC.446), 인간에게서 실제로 감각하고 생각하는 주체는 몸이 아니라 영이며(AC.447), 육체의 죽음 뒤에도 바로 그 인간의 삶이 계속됩니다(AC.448). 그러므로 이 여섯 글이 궁극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죽은 뒤에 무엇이 있는가?’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살아 있는 나는 본질적으로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답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며, 따라서 육체의 죽음은 인간 자신의 소멸이 아니라 그 생명이 계속되는 상태의 변화입니다. (AC.448 해설)

 

심화

1. 그렇다면 사후의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사람’인가?

 

AC.448 심화 1, 그렇다면 사후의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사람’인가?

AC.448 심화1. 그렇다면 사후의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사람’인가? AC.443-448을 모두 읽고 나면 한 가지 큰 질문이 남습니다. 육체는 죽어 땅에 남는데도 사후의 존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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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9, 창5 앞, '천국과 천국의 기쁨은 왜 세상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가' (AC.449-459)

천국과 천국의 기쁨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49 지금까지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어떠한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들에 관하여 생각해 본 사람들도 너무나 일반적이고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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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7, 창4 뒤, ‘감각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사람 안의 영이다’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7어떤 초보 영(novitiate spirit)이 내가 영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자신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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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7

어떤 초보 영(novitiate spirit)이 내가 영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자신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영이란 무엇입니까?’(What is a spirit?)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모든 사람 안에는 영이 있으며, 사람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고, 몸은 단지 사람이 땅 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살과 뼈, 곧 몸 자체는 전혀 살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기에, 나는 그에게 영혼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영혼이란 무엇입니까?’(What is a soul?)라고 되물으며, ‘나는 영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I do not know what a soul is)라고 대답했습니다.그때 나는 그에게 지금 그 자신이 영혼, 곧 영이라는 사실을 말해 줄 수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가 내 머리 위에 있으며 땅을 딛고 서 있지 않다는 사실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것을 지각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달아나면서 ‘나는 영이다! 나는 영이다!’(I am a spirit! I am a spirit!)라고 외쳤습니다. A certain novitiate spirit, on hearing me speak about the spirit, asked, “What is a spirit?” supposing himself to be a man. And when I told him that there is a spirit in every man, and that in respect to his life a man is a spirit; that the body is merely to enable a man to live on the earth, and that the flesh and bones, that is, the body, does not live or think at all; seeing that he was at a loss, I asked him whether he had ever heard of the soul. “What is a soul?” he replied, “I do not know what a soul is.” I was then permitted to tell him that he himself was now a soul, or spirit, as he might know from the fact that he was over my head, and was not standing on the earth. I asked him whether he could not perceive this, and he then fled away in terror, crying out, “I am a spirit! I am a spirit!”

 

어떤 유대인은 자신이 전적으로 몸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좀처럼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영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는데도,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자기는 사람이라고 고집했습니다.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몸에 몰두하여 살아온 사람들은 이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를 훨씬 더 많이 덧붙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사람 안에서 감각을 행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 몇 가지 사례만 제시했습니다. A certain Jew supposed himself to be living wholly in the body, insomuch that he could scarcely be persuaded to the contrary. And when he was shown that he was a spirit, he still persisted in saying that he was a man, because he could see and hear. Such are they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ve been devoted to the body. To these examples very many more might be added, but these have been given merely in order to confirm the fact, that it is the spirit in man, and not the body, which exercises sensation.

 

해설

AC.447은 AC.443부터 계속되어 온 논의를 매우 직접적인 명제로 모아 줍니다. 앞에서는 사후의 삶이 희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유기적 실체라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실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 안에서 실제로 감각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 그 답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사람 안에서 감각을 행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영’입니다.

 

첫 번째 사례의 ‘초보 영’(novitiate spirit)은 사후 세계에 막 들어온 영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미 몸을 떠나 영으로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여전히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영에 관해 이야기하자 ‘영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 부족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바로 자신이 영인데도 영을 자기 자신과는 별개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영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만큼 생전의 영혼과 영에 대한 관념도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모든 사람 안에는 영이 있다’고 한 뒤, 더욱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몸은 사람이 땅 위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살과 뼈로 이루어진 몸 자체가 독립적으로 살거나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몸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오히려 몸에는 분명한 역할이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지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과 사고와 감각의 주체가 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 이 글의 요점입니다.

 

초보 영이 ‘나는 영이다! 나는 영이다!’라고 외치며 달아나는 장면은 이 차이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죽은 뒤에도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느끼고 있었고, 생각하고 대화하며 주변을 지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육체를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지금까지 ‘나’라고 느끼며 보고 듣고 생각하던 존재가 바로 영이었다는 사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AC.443에서 사후의 삶이 희미해지지 않는다고 했던 이유와 AC.444에서 영을 단순한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던 이유가 이 사례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두 번째 유대인의 사례도 같은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그는 사후에도 보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보고 듣는다’는 것과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너무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이 사례를 제시하는 이유는 정반대의 결론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몸을 떠난 뒤에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설명 안에서는 감각의 근원적 주체가 육체 자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몸에 몰두하여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모든 육체적 삶이나 육체에 대한 관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사례에서 문제는 인간 자신을 사실상 몸과 동일시하여, 몸을 떠난 뒤에도 살아 있고 생각하며 감각하는 영적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생전에 ‘나는 곧 이 몸’이라는 관념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으면, 사후에도 자신의 감각이 계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몸을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AC.447 전체를 읽는 열쇠입니다. ‘감각을 행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영’이라는 말은 눈이나 귀 같은 육체의 감각 기관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몸은 영이 이 자연계에서 보고 듣고 느끼기 위한 기관으로 기능합니다. 그러나 감각 기관 자체가 지각의 최종 주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이 ‘보는 나’인 것도 아니고 귀가 ‘듣는 나’인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는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듣는 주체가 사람의 영이며,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벗은 뒤에도 영은 자신의 세계에서 계속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443-447은 하나의 질문을 점점 더 깊게 파고들고 있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삶이 희미해지는가, 영은 단지 생각에 불과한가, 보이지 않는 영을 실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는 주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47의 답은 매우 선명합니다. 인간은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며, 육체는 지상 생활을 위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나’라는 감각하고 생각하는 주체가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라, 그 주체가 지상 생활을 위해 사용하던 육체를 벗는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바로 이것이 초보 영이 자신이 이미 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토록 놀랐던 이유이며, 스베덴보리가 이 사례들을 통해 확인하려는 사후 인간의 연속성입니다. (AC.447 해설)

 

 

 

AC.448, 창4 뒤, ‘육체의 삶보다 더 밝고 분명하게 이어지는 사후의 삶’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8나는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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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6, 창4 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실재를 부정하는 오류’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6나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곧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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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6

나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곧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as])으로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존재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에 관하여 영들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영에게 연장(extension)이 있다는 것뿐 아니라 영이 실체(substance)라는 것까지 부정하며, 실체가 무엇인지를 두고 논쟁합니다. 그리고 영에게 연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실체에 대해서도 논쟁하기 때문에, 영이 어떤 장소에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하며, 그 결과 영이 인간의 몸 안에 있다는 것도 부정합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자기 몸 안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자, 비교적 단순한 영들이었던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그렇게 어리석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부분 없는 부분들’(parts without parts)과 그 밖의 이와 비슷한 논쟁의 표현들을 듣고는, 그런 것들을 터무니없고 우스우며 익살스러운 말이라고 하면서, 그런 것들은 지성을 향한 길을 막기 때문에 마음을 조금도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I have discoursed with spirits concerning the common opinion that prevails among men at the present day, that the existence of the spirit is not to be credited because they do not see it with their eyes, nor comprehend it by their memory-knowledges [scientias], and so they not only deny that the spirit has extension, but also that it is a substance, disputing as to what substance is. And as they deny that it has extension, and also dispute about substance, they also deny that the spirit is in any place, and consequently that it is in the human body; and yet the most simple might know that his soul or spirit is within his body. When I said these things, the spirits, who were some of the more simple ones, marveled that the men of the present day are so foolish. And when they heard the words that are disputed about, such as “parts without parts,” and other such terms, they called them absurd, ridiculous, and farcical, which should not occupy the mind at all, because they close the way to intelligence.

 

해설

AC.446은 AC.444-445에서 다룬 ‘영의 연장’과 ‘영의 실체’ 문제를 한 단계 더 밀고 나갑니다. 앞에서는 영을 아무런 연장도 없는 ‘추상적 생각’으로 보는 관념을 다루었다면, 여기서는 왜 사람들이 그런 관념에 이르게 되는지를 지적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영을 육안으로 볼 수 없고 자신들이 가진 기억 지식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존재 자체를 믿기 어려워합니다. 곧 감각으로 확인하거나 기존 지식의 틀 안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만 실재한다고 여기는 태도가 문제의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as])이라는 표현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식이나 학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감각을 통해 얻고 기억 속에 축적한 지식의 범위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영적 실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연장이 없고, 연장이 없으니 실체라고 할 수 없으며, 실체가 아니니 어떤 장소에도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논리가 이어집니다. AC.446은 바로 이러한 추론의 연쇄를 보여 줍니다.

 

특히 ‘연장 → 실체 → 장소’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사람들은 영에게 연장이 없다고 전제한 뒤 영이 실체라는 것도 의심하고, 다시 영이 실체가 아니라면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자기 몸 안에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마저 철학적으로 설명하기 곤란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가장 단순한 사람’도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복잡한 추상적 논의가 오히려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점에서 AC.446은 단순한 사람과 학식 있는 사람을 흥미롭게 대비시킵니다. 여기서 ‘단순한’ 사람이나 영은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추상화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제 삶과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문맥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영이 존재하고 자신이 영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영의 실체와 장소를 끝없이 논쟁한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이상하게 여깁니다. 학문적 정교함이 언제나 더 분명한 이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부분 없는 부분들’(parts without parts)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런 추상적 논쟁의 한 예로 제시됩니다. AC.446 자체는 이 용어가 어떤 철학적 전통에서 어떤 엄밀한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 배경을 임의로 덧붙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어떤 목적으로 인용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교적 단순한 영들은 이런 표현들을 듣고 ‘터무니없고 우스우며 익살스럽다’고 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특정 철학 용어를 하나하나 논박하는 데 있기보다, 그런 추상적 논쟁이 오히려 영적 실재를 이해하는 길을 막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의 ‘지성을 향한 길을 막는다’(close the way to intelligence)는 말이 이 글의 중요한 결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생각이 깊어지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AC.442에서는 오히려 태고 시대 사람들이 오늘날보다 훨씬 깊이 사고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비판하는 것은 실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사고가 아니라, 말과 개념을 계속 추상화한 끝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오히려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사고입니다. 영은 보이지 않으므로 연장이 없고, 연장이 없으므로 실체가 아니며, 실체가 아니므로 어디에도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면 결국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없고, 살아 있지만 아무런 실체도 없는 영’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념만 남게 됩니다.

 

AC.444-446을 함께 읽으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바로잡으려 하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이며, 아무런 실체도 없는 추상이 아니라 ‘유기적 실체’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실재성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후의 인간은 자신을 실제 존재로 경험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글의 초점은 철학을 배척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철학과 지식이 실제 영적 존재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 주는가, 아니면 지나친 추상화로 오히려 그 길을 막고 있는가를 묻는 데 있습니다. (AC.446 해설)

 

 

 

AC.445, 창4 뒤, ‘영혼을 추상적 생각으로만 여길 때 생기는 문제’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5더 나아가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학자들은 죽은 뒤에도 살아갈 영혼, 곧 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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