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
다음 말씀들, 곧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신앙이 사랑의 신앙의 선(the good of the faith of love)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놋 땅에 거주하더니’(he dwelt in the land of Nod)는 진리와 선의 바깥(outside of truth and good)을,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은 지적 마인드 근처(near the intellectual mind), 전에 사랑이 다스렸던 곳을 각각 의미합니다.By the words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is signified that faith was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he dwelt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toward the east of Eden” i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reigned before.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라는 표현을,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곧 체어리티의 선과 분리된 상태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떠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사랑을 버림으로써 주님의 자비와 선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게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어서 ‘놋 땅에 거주하더니’(he dwelt in the land of Nod)라는 말은, 신앙이 더 이상 진리와 선의 영역 안에 있지 않고 그 밖에 머무르게 되었음을 뜻하는데, 놋 땅은 방황과 불안정, 곧 ‘참과 선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에덴 동쪽, 곧 ‘에덴의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에 거했다는 표현은, 신앙이 완전히 멀리 떠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성적 영역’, 곧 과거에 사랑이 다스리던 자리와 가까운 위치에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장차 다시 사랑과 결합될 가능성을 남겨 두셨다는 섭리의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창4:15)
AC.396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의 의미는, 가인 신앙이 보존될 수 있도록, 주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구별의 수단이 될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주시는 ‘표’(mark)와, ‘표를 주사’(setting a mark)의 의미를 보면 분명한데요, 그래서 에스겔에 보면,That “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mark,” and of “setting a mark” on anyone, as being a means of distinction. Thus in Ezekiel: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하시고 (겔9:4)Jehovah said,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make a mark on (or designate) the foreheads of the men groaning and sighing for all the abominations, (Ezek. 9:4)
여기 ‘이마에 표를 그리라’(marking out the foreheads)의 의미는, 그들의 이마에 무슨 표나 선을 그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구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계시록에서도 말씀하시기를where by “marking out the foreheads,” is not meant a mark or line upon the front part of their heads, but to distinguish them from others. So in John, it is said that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하시더라 (계9:4)The locusts should hurt only those men who had not the mark of God on their foreheads, (Rev. 9:4)
여기서도 ‘인침’, 즉 표를 받는 것은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where also to have the mark means to be distinguished.
[2]계시록 다른 데도 보면,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계13:16)라고 되어 있습니다.And in the same book we read of a “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Rev. 13: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계13:16)
모세의 책, 관련 내용을 보면, 유대 교회에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 하였는데, 이 역시 같은 걸 표현하는 것입니다.The same thing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binding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concerning which we read in Moses: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신6:4, 8)Hear, O Israel, Jehovah our God is one Jehovah; (Deut. 6:4, 8)
13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8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신11:13, 18)and thou shalt love Jehovah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strength, and thou shalt bind these words for a sign upon thy hand, and they shall be as frontlets between thine eyes. (Deut. 11:13, 18)
사랑에 관한 계명을 다른 어떤 계명보다도 더 높이 구별해야 함을 이렇게 표현하였고, 이런 이유로, ‘손목과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의 의미가 확연해지는 것입니다.By this was represented that they should distinguish the commandment respecting love above every other, and hence the signification of “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 becomes manifest.
[3]그래서 이사야에서So in Isaiah:
18내가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19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사66:18, 19)I come to gather all nations and tongues; and they shall come and shall see my glory; and I will set a mark upon them. (Isa. 66:18–19)
그리고 시편에서And in David:
16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17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86:16, 17)O turn unto me, and have mercy upon me, give thy strength unto thy servant, and save the son of thy handmaid. Set upon me a mark for good, and they that hate me shall see and be ashamed. (Ps. 86:16–17)
이들 여러 구절을 통해서 표의 의미를 이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가인이라고 하는 어떤 특별한 한 사람에게 무슨 눈에 보이는 표를 준 걸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말씀의 속뜻에는 겉 글자의 뜻에 들어있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게 들어있기 때문입니다.From these passages the meaning of a mark is now evident. Let no one therefore imagine that any mark was set upon a particular person called Cain, for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contains things quite different from those contained in the sense of the letter.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는 말의 핵심이, 어떤 개인에게 신비한 표식을 새겼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다는 주님의 섭리’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성경에서 ‘표’(mark)와 ‘표를 주사’라는 표현은 언제나 물리적 표시가 아니라, ‘구별과 식별의 의미’를 지닙니다. 에스겔서에서 예루살렘 가운데서 가증한 일로 탄식하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는 명령은, 실제로 이마에 선을 긋는 행위가 아니라 그들을 다른 자들과 구별하여 보호하겠다는 뜻이었고,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표를 가진 자들이 재앙에서 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씀 역시 같은 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짐승의 표가 손과 이마에 있다고 할 때도, 이는 특정 문양이 아니라 ‘삶의 행위(손)와 생각과 의지(이마)가 무엇에 속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구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징은 이미 모세오경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 8)라는 가장 큰 계명을 손과 이마에 매라는 명령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몸에 붙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행위와 모든 생각의 중심에 사랑의 계명을 두라’는 영적 명령이었습니다. 이처럼 ‘표’란 언제나 주님께 속한 것, 혹은 주님의 질서 안에 보존되어야 할 것을 다른 것들과 분명히 나누어 두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가인에게 주어진 표는 가인을 의롭다 하거나 그의 상태를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구원 섭리 안에서 반드시 보호되어야 할 역할을 지닌 것임을 선언하는 구별의 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어떤 특정 인물 가인의 몸에 표식이 새겨졌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는 언제나 인간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를 다루며, 여기서 ‘가인의 표’는 ‘신앙이 장차 사랑과 다시 결합될 수 있도록 남겨진 보존의 장치’를 가리킵니다. 결국 AC.396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어떤 요소를 제거하시기 전에 먼저 그것을 구별하여 보호하시며, 그 구별을 통해 구원의 길을 끝까지 열어두신다는 깊은 신적 질서를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창4:15)
AC.39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라는 말씀의 의미는, 심지어 그렇게 분리되었을지라도 신앙을 폭행하는 것은 신성모독(sacrilege)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인’(Cain)의 의미가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라는 점, 그리고 ‘칠’(7,seven, 일곱)의 의미는 신성함(what is sacred)이라는 점을 볼 때 분명합니다. 숫자 ‘칠’(seven)은 잘 알려진 대로 아주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육일간의 창조에 이은 일곱 번째 날, 이날이 곧 천인(天人,the celestial man)이요, 그 안에 평화와 쉼, 그리고 안식일(the sabbath)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숫자는 유대교회의 예전에서 아주 자주 나오며, 이 숫자가 나오는 곳마다 신성함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 기간이 아주 길든지 짧든지 둘 다 칠들(sevens)로 구별했는데요, 아래 다니엘 본문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가리키는 아주 장구한 시간 간격을 가리켜 ‘이레’(weeks)라 한 것처럼 말입니다. (단9:24-25)That the words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signify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sacrileg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ain,” which is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 which is what is sacred. The number “seven” was esteemed holy, as is well known, by reason of the six days of creation, and of the seventh, which is the celestial man, in whom is peace, rest, and the sabbath. Hence this number occurs so frequently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nd is everywhere held sacred, and hence also both greater and less periods of time were distinguished into sevens, and were called “weeks,” such as the great intervals of time to the coming of the messiah; (Dan. 9:24–25)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단9:24-25)
라반과 야곱은 칠 년이라는 기간을 ‘칠 일’이라 하였습니다. (창29:27, 28)and the time of seven years called a “week” by Laban and Jacob. (Gen. 29:27–28)
27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28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창29:27, 28)
같은 이유로 어디서든 이 ‘칠’이라는 숫자는 거룩 혹은 신성불가침(inviolable)으로 여겨집니다.그래서 시편을 보면For the same reason, wherever it occurs, the number seven is accounted holy or inviolable. Thus we read in David: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시119:164)Seven times a day do I praise thee. (Ps. 119:164)
이사야에서In Isaiah: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사30:26)The light of the moon shall be as the light of the sun, and the light of the sun shall be sevenfold, as the light of seven days, (Isa. 30:26)
여기 ‘해’(sun)는 사랑을, ‘달’(moon)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신앙(faith from love)을 가리키는데, 사랑처럼 될 신앙입니다. 사람의 거듭남의 기간이 일곱 번째 날, 곧 천인, 천적 인간이 되기 전, 숫자 ‘육’(6,six)으로 구별되듯, 그가 황폐해지는 기간, 곧 천적인 것이 전혀 남지 않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 또한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의 여러 번 포로 생활 및 마지막, 즉 바벨론 유수(幽囚,captivity), 곧 십 년씩 일곱 번, 즉 칠십 년간 지속된 기간은 이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땅은 안식년을 가져야 한다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역시 같은 내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where the “sun” denotes love, and the “moon” faith from love, which should be as love. As the periods of man’s regeneration are distinguished into six, before the seventh arrives, that is, the celestial man, so also are the periods of his vastation, up to the time when nothing celestial remains. This was represented by the several captivities of the Jews, and by the last or Babylonish captivity, which lasted seven decades, or seventy years. It is also said several times that the earth should rest on its sabbaths. The same is represented by Nebuchadnezzar, in Daniel:
16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23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일곱 때를 지내리라하였나이다,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일곱 때를 지내서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단4:16, 23, 32)His heart shall be changed from man, and a beast’s heart shall be given unto him,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him. (Dan. 4:16, 23, 32)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 때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에 관하여And in John, concerning 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
1또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6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8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계15:1, 6-8)I saw another sign in heaven, great and marvelous, seven angels, having the seven last plagues; (Rev. 15:1, 6–8)
그리고 계속해서and that: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11:2)The gentiles should tread the holy city under foot forty and two months, or six times seven. (Rev. 11:2)
내가 보매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계5:1)I saw a book written within and on the back, sealed with seven seals. (Rev. 5:1)
같은 이유로 징벌의 가혹함과 더함을 모세의 책에서처럼 숫자 ‘칠’(7)로 표현했습니다.For the same reason the severities and augmentations of punishment were expressed by the number seven; as in Moses:
18또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21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4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레26:18, 21, 24, 28)If ye will not yet for all this obey me, then I will chastise you sevenfold for your sins. (Lev. 26:18, 21, 24, 28)
그리고 시편에서And in David:
주여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시79:12)Render unto our neighbors sevenfold into their bosom. (Ps. 79:12)
자, 정리하자면, 신앙을 폭행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sacrilege)이었기 때문에,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하십니다. 그동안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은 예배에 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Now as it was a sacrilege to do violence to faith—since as has been said it was to be of service—it is said that “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 비록 이 가인이라는 신앙이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류는 이 가인이라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섭리 안에서 주님도 보호하시는 가인이라는 신앙을, 한 치 앞도 못 보는 우리가 나서서 손대는 건 그 자체로 주님을 대적하는 거, 곧 신성모독이 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신앙이 내가 알던 교리와 다를 때, 그저 교리만 다를 뿐 그 안에 주님을 사랑함과 주님을 신앙함이 분명히 보이면, 그러면 직접 나서는 대신 주님께 맡기고, 대신 내가 믿는 교리를 성실히 실천, 주님과 결합하는 일에만 마음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이 단순한 형벌의 과장이나 위협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신성모독(sacrilege)’임을 선언하는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 근거는 두 가지 상징에 있습니다. 첫째, ‘가인’은 이미 밝혀진 대로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을 뜻하며, 둘째, ‘칠’(seven)이라는 수는 성경 전반에서 ‘거룩하고 침범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칠이라는 수가 거룩하게 여겨진 이유는 창조의 여섯 날과 그 완성인 일곱째 날, 곧 안식과 평화의 상태,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의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유대교회의 예식과 율법 전반에서 칠이라는 수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긴 시간의 구분 역시 ‘이레’(weeks)라는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메시아의 때를 가리키는 큰 기간들이 ‘이레’로 구분된 것(단9:24, 25)이나, 야곱이 라반을 위해 봉사한 일곱 해가 한 ‘이레’로 불린 것(창29:27, 28)이 그 예입니다. 또한 시편에서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시119:164)는 표현, 이사야에서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는 표현(사30:26)은 모두 ‘사랑과 신앙이 충만해진 완성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거듭남의 과정이 여섯 단계를 거쳐 일곱째에 이르는 것처럼, 황폐(vastation)의 과정 역시 일곱 단계에 이르러 더 이상 천적인 것이 남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데, 이것이 유대인의 여러 포로기, 특히 칠십 년에 걸친 바벨론 포로로 대표됩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일곱 때가 지나가도록 짐승의 마음이 주어진 사건(단4:16, 23, 32)이나,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인(계5:1), 일곱 재앙(계15:1, 6-8), 여섯 곱하기 일곱의 기간(계11:2) 역시 모두 ‘신적 질서의 완결성과 침범 불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는 형벌의 엄중함이나 완전성을 표현할 때도 ‘칠 배’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비록 생명력은 없을지라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반드시 보존되어야 할 역할을 지니므로’, 그것을 폭력적으로 제거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는 거룩한 질서를 훼손하는 중대한 죄라는 뜻입니다. 즉, 신앙은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봉사의 수단으로 남겨져야 하기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칠’이라는 표지로 둘러 보호하시며, 그 침범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