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4:14)

 

AC.385

지면에서 쫓겨나는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hid from thy faces)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된다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be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to behid from thy faces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faith of love; to be a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signifies that all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해설

AC.385는 창4:14의 네 표현을 차례로 해석하면서 가인이 처한 영적 상태가 얼마나 위태로워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지면에서 쫓겨나는 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며,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되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뜻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떨어진 상응들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붕괴가 진행되는 순서를 보여 줍니다.

 

먼저 지면에서 쫓겨나는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은 문맥에 따라 사람 자신, 교리, 그리고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자리 잡은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표현을 교회의 진리와의 단절로 해석합니다. 가인은 신앙을 높이려 했지만, 체어리티에서 신앙을 분리함으로써 결국 교회의 진리 자체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2에서 보았던 역설과 같습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진리의 상실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단지 무엇이 참인지 알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의 선과도 분리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얼굴은 단순한 외적 형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자비, 선의 현존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 때문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저주와도 같은 원리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시고 그에게서 선과 진리를 빼앗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스스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변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표현은 주님의 부재라기보다 인간 쪽에서 일어난 수용 능력의 상실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세 번째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AC.380AC.382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을 의미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이 표현이 다시 나오는 것은 앞의 두 상태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할 방향을 잃습니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많은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지식을 선을 위해 사용할 생명의 중심을 잃으면 무엇이 실제로 선이며 무엇이 실제로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을 의미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이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파괴될 위험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자연적인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영적인 것을 소멸시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384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고백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85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말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존재가 다시 멸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위험을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이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가인의 가 왜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도 AC.384선의 어떤 을 곧바로 전문적인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에게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으며, 이제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파괴할 위험이 있었다는 정도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가인의 표와 보존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본 뒤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이렇게 보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가인의 두려움은 단순한 자기보존의 공포 이상으로 읽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뒤에도 신앙에 속한 어떤 지식과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악과 거짓에 완전히 삼켜지면 그것마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섭리는 단지 완전한 사람이나 온전한 교회만을 보존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아직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시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여기서 앞으로 나올 가인의 의 의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자인 가인을 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지가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가인은 한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남아 있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까지 즉시 소멸되도록 허용하시는 것이 주님의 목적은 아닙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에서도 아직 보존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이 점은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악과 거짓은 주님에게서 오는 어떤 독립된 형벌의 도구가 아닙니다. 악은 선을 파괴하고 거짓은 진리를 왜곡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확증할수록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밀어냅니다. 따라서 악과 거짓에 의한 멸망은 외부에서 임의적으로 부과되는 형벌이라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적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는 과정입니다.

 

AC.385의 네 표현을 다시 연결하면 흐름이 매우 분명합니다. 먼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됩니다. 이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됩니다. 그러자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악과 거짓이 아직 남아 있는 것마저 완전히 파괴할 위험에 이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단순한 교리상의 작은 차이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합을 깨뜨리면 결국 둘 모두를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가장 위태로운 지점에서 창4의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말한 뒤 주님은 그를 즉시 멸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따라서 AC.385는 단지 가인의 멸망을 선언하는 번호가 아니라, 왜 그에게 보존이 필요했는지를 보여 주는 번호이기도 합니다.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고, 모든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가인의 에서는 잘못된 상태를 승인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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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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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4:13)

 

AC.384

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합니다(4:19,23-24). Hence it appears that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 in Cain; but that all the good of charity afterwards perished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Lamech (verses 19, 2324).

 

19라멕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19, 23-24)

 

해설

AC.384는 바로 앞 AC.383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짧은 설명입니다. AC.383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는 말을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것은 가인을 선한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악 때문에 내적인 고통을 느끼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안의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의 어떤 이라는 제한된 표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선이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지 않고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합니다. 즉 악이 크게 지배하고 있었지만 선에 반응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AC.383에서 보았듯이 가인은 자기 상태 때문에 내적 고통을 느꼈고,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했습니다. 만일 선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그러한 내적 고통과 인정조차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작은 반응 가능성이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입니다.

 

이 점은 가인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가인은 ’, 아벨은 이라는 식으로 두 사람을 단순한 도덕적 인물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아닙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매우 심각하게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의 가능성이 한순간에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시작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며, 그 결과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어 가는 과정 가운데에서도 아직 선의 어떤 잔여가 남아 있었던 단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384의 후반부는 곧바로 더 어두운 방향을 예고합니다.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하다고 합니다. 즉 가인에게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이 계속 보존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마침내 라멕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체어리티의 선이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AC.384는 가인의 상태를 설명하는 동시에 창4 후반부의 라멕을 미리 바라보게 하는 연결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창4:19,23-24를 가리키는 것도 이 흐름 때문입니다. 4:19에서는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는 일이 나오고, 23-24절에서는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그리고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라멕의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들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번호에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므로 지금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4에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구절들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된후대의 상태를 보여 주는 근거로 미리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단순히 악한 개인들의 계보가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원리가 세대를 거치며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리적 계보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구별이 있었고, 그 구별이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고 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단계에서는 자기 악에 대한 어떤 내적 고통과 인정이 가능할 만큼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 그 원리가 더욱 악화되어 라멕에 이르면 그것마저 소멸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구별했던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표현을 좀 더 세밀하게 읽게 합니다. 앞 번호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84에서는 다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두 진술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과 주도 원리로서 배척되고 소멸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에 속한 사람들 안에서 선에 속한 모든 흔적과 반응 가능성이 그 순간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원리의 소멸과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의 어떤 것을 구별하여 보고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가인의 를 이해할 때도 중요해질 것입니다. 만일 가인 안에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이미 완전히 소멸되어 아무것도 보존할 것이 없었다면, 왜 주님께서 가인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AC.384는 아직 그 답을 본격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가인의 는 단순히 악인을 보호하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선의 어떤 을 곧바로 리메인스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remain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말합니다. 더 넓은 AC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84 자체가 이것을 전문적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명시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원문이 말하는 만큼,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고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짧은 번호에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사람의 상태가 크게 무너져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 안에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내면을 우리가 판정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인조차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람의 외적인 상태만 보고 그의 내면에 남아 있는 모든 가능성을 우리가 판단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의 내면을 아시고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84는 가인의 이야기에 매우 중요한 미세한 차이를 넣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아직 선의 어떤 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악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하는 내적 고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계속 악화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가인의 타락을 단번에 완성된 상태로 보지 않고 하나의 진행 과정으로 보게 하며,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이후 가인의 와 연결하여 바라볼 준비를 하게 합니다.

 

 

 

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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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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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4:13)

 

AC.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을 의미합니다.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없나이다(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그로 인한 절망을 의미합니다. Cain said unto Jehovahsignifies a certain confession that he was in evil, induced by some internal pain;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signifies despair on that account.

 

해설

AC.383은 창4: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가인의 상태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도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이라고 설명합니다. 완전한 회개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전의 완강한 부인과는 다른 상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a certain confession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자기의 악을 고백했다고 단정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제한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또한 그 고백이 some internal pain’, 어떤 내적 고통에 의해 일어났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바로 참된 회개나 거듭남의 시작이라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자신이 처한 상태 때문에 내적으로 고통을 느꼈고, 그 고통 가운데 적어도 자기가 악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와 비교하면 분명한 변화이지만, 아직 그 악에서 돌이켜 선을 향하는 완전한 회개라고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악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그 고통이 언제나 악 자체를 미워하는 회개의 고통인 것은 아닙니다. 악의 결과가 두렵기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고, 자기에게 닥친 손실이나 형벌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으며, 자기 상태가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참된 회개에서는 때문에 내가 고통스럽다는 데서 더 나아가 이것이 주님을 거스르는 악이므로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AC.383은 아직 가인에게 그 전체 과정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고백이라는 제한된 표현이 적절합니다.

 

이어지는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없나이다그로 인한 절망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가인의 시선은 자신의 악을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것은 이상 제거될 수도, 용서될 수도 없다는 절망으로 내려갑니다. 악을 악으로 보는 것과 나는 악에서 결코 벗어날 없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오히려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악을 보지 않는 것도 위험하지만, 자기 악을 보고 주님의 자비보다 그것을 더 크게 여기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이 점에서 AC.383은 앞의 AC.379-382와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면서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고,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결실하지 못하며,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상태에 놓인 가인이 이제 자기 악의 결과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와의 살아 있는 결합을 잃었기 때문에 그 인식은 곧바로 주님의 자비를 향한 신뢰로 나아가기보다 절망으로 기울어집니다. 악을 깨달았지만 그 악보다 크신 주님의 자비를 아직 바라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한 가지 균형이 필요합니다. AC.383절망을 모든 영적 절망에 대한 일반론으로 곧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는 거듭남 과정의 시험 가운데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는 상태도 다룹니다. 그러한 상태는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이끄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가인의 문맥에서 말하는 절망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은 결과로 나타나는 절망입니다. 따라서 다른 종류의 영적 고통이나 시험과 섞어 해석하기보다 우선 이 문맥 자체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가인이 다시 여호와께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후의 전개를 보기 위해 중요하게 남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악 가운데 있으며 절망한다고 해서 주님과의 모든 관계가 이야기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께 자기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자신의 두려움을 호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를 주시는 주님의 보존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AC.383의 절망만을 보고 가인이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이후의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저주의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저주는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으로 말미암아 선에서 돌아서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돌아섰다고 해서 주님의 자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여전히 그 사람의 보존과 궁극적인 선을 위해 역사하십니다. 가인의 절망은 죄악은 너무 커서 제거될 없다고 느끼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인간의 절망이 주님의 섭리와 자비의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준비를 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는 것은 거듭남에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악을 발견하는 목적은 나는 이렇게 악하니 끝났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으로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 악을 주님의 구원 능력보다 더 크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참된 겸손은 자기 악을 정확히 보면서 동시에 모든 선과 구원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83은 가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를 보여 줍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책임을 부인하던 상태에서 이제는 어떤 내적 고통 때문에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정은 아직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회개로 나아가지 못하고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없다는 절망으로 기울어집니다. 악을 인정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절망이 마지막이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악보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크며, 이후 가인에게 주어지는 보존의 표는 바로 이 절망 뒤에서도 주님의 섭리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게 됩니다.

 

 

 

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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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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