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3:18)



AC.239

 

저주(curse)와 황폐(vastation)가 묘사되며, 또한 그들의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도 묘사됩니다. (18) The curse and vastation are described, and also their ferine nature. (verse 18)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창3:18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전체 해설 방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여기서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곧 저주(curse), 황폐(vastation), 그리고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입니다.

 

먼저 ‘저주’는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미워하시거나 벌을 내리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AC.223 등에서 반복해서 보았듯이, 주님은 결코 얼굴을 돌리지 않으시며, 언제나 자비와 평화 가운데 계십니다. 따라서 저주란 인간이 스스로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의 연결이 약해질수록 인간 안의 선과 진리가 점점 말라 가는 상태가 바로 저주입니다.

 

다음으로 ‘황폐(vastation)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황폐란 단순히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본래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가 점차 제거되어 텅 비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처음부터 완전히 악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밝은 지각(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고, 주님과의 살아 있는 연결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과 감각의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그 선과 진리가 하나씩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AC.239는 바로 그 과정을 ‘황폐’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은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거칠고 난폭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ferine’은 야생 짐승 같은, 본능에 지배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원래 인간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에 의해 인도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잃어버리면 점차 더 낮은 수준의 욕망과 충동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과 짐승의 가장 큰 차이를 이성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향해 열릴 수 있는 능력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AC.238에서 보았듯이 이성이 추론(ratiocination)으로 타락하고, AC.239에서 선과 진리가 황폐되기 시작하면, 인간은 점점 더 본능과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짐승 같은 본성’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실제 동물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으로는 여전히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하지만, 내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서도 자기 사랑에 완전히 지배된 사람들을 영적으로는 맹수나 독사와 비슷한 상태로 설명하곤 합니다.

 

따라서 AC.239는 창3의 타락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간 요약과 같습니다.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결과로 저주가 생기고, 그 저주로 인해 선과 진리가 황폐되며, 그 결과 인간은 점점 더 영적인 인간이 아니라 본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어 갑니다.

 

이처럼 AC.239는 단순히 형벌을 설명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저주는 그 결과이고, 황폐는 그 과정이며, 짐승 같은 본성은 그 최종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AC.240, 창3:14-19, ‘19절 개요’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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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8, 창3:14-19, ‘17절 개요’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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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id, Because thou hast hearkened unto the voice of thy wife, and hast eaten of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thee, saying, Thou shalt not eat of it;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in great sorrow shalt thou eat of it all the days of thy life. (3:17)



AC.238

 

그다음에는 이성(rational)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묘사됩니다. 곧 그것이 동의(consent)하였고, 그 결과 스스로를 저주하였으며, 지옥(infernal)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참된 이성(reason)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추론(ratiocination)만 남게 되었습니다. (17) The quality of the rational is then described, in that it consented, and thus cursed itself, and became infernal, so that reason no longer remained, but ratiocination. (verse 17)

 

 

해설

 

이 글은 AC.237의 연속입니다. 앞 구절에서는 교회를 의미하는 ‘여자’가 own을 사랑하게 되어 진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여자를 다스려야 했던 ‘이성(rational) 자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원래 이성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이성(reason)은 자기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이성은 주님의 빛 아래 있을 때 가장 건강하게 작용합니다.

 

그런데 이성은 의지와 애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동의(consent)하였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타락입니다. 감각이 먼저 유혹했고, 의지가 그것을 좋아했으며, 마지막으로 이성이 그것을 정당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성이 스스로를 저주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주님께서 저주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성이 자신의 본래 기능을 버리고, 자기 사랑과 감각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지옥 상태로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reason’과 ‘ratiocination’의 차이입니다. 한국어로는 둘 다 ‘이성’ 또는 ‘추리’로 번역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단어를 엄격히 구분합니다.

 

Reason’은 주님의 빛 안에서 진리를 분별하는 참된 이성입니다. 반면 ‘ratiocination’은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를 사용하는 추론입니다. 다시 말해, reason은 진리를 찾기 위해 생각하지만, ratiocination은 자기 생각을 옹호하기 위해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겸손한 사람은 ‘무엇이 진리인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reason입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내 생각이 왜 옳은가?’를 증명하려 합니다. 이것은 ratiocination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타락 이후 인간에게 이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이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끝없는 추론과 논쟁이 대신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AC.238AC.229-233의 내용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입니다. 처음에는 감각을 신뢰했고, 다음에는 own을 사랑했으며, 이제는 그 잘못된 사랑을 이성이 정당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진리를 찾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타락한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잘못된 전제 위에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성을 진리를 향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이것이 AC.238의 핵심입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단순히 의지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이성까지도 그 타락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참된 의미의 이성(reason)은 남아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추론(ratiocination)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인간 정신이 지옥 상태로 떨어지는 중요한 단계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AC.239, 창3:14-19, ‘18절 개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39 저주(curse)와 황폐(vastation)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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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7, 창3:14-19, ‘16절 개요’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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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sons, and thine obedience shall be to thy man [vir], and he shall rule over thee. (3:16)



AC.237

 

교회는 또한 여자(the woman)에 의해 더 자세히 묘사됩니다. 이 여자는 자기 자신(self) 또는 own을 너무 사랑하게 되어 더 이상 진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이성(rational)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16) The church is further described by the “woman,” which so loved self or the own as to be no longer capable of apprehending truth, although a rational was given them that should “rule”. (verse 16)

 

 

해설

 

이 글은 창3:16의 내적 의미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여자’를 한 개인으로 보지 않고 교회(church)의 한 상태로 봅니다. 이전에도 그는 ‘남자(man)를 이해(understanding) 또는 이성(rational)과 관련하여 설명했고, ‘여자(woman)를 의지(will) 또는 애정(affection)과 관련하여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은 점차 own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perception)했습니다. 그러나 타락이 시작되면서 사랑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주님을 향하던 사랑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여자가 own을 너무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존감이나 자기 보존 본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자기 판단과 자기 욕망을 최고로 여기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더 이상 진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진리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과 결합되어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왜곡되면 이해도 왜곡됩니다. 자기 사랑이 강해질수록 사람은 진리를 진리로 보기 어려워집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보다,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가 더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지각은 잃어버렸지만, 아직 ‘이성(rational)은 남겨 두셨습니다. 그래서 AC.237은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이성이 주어져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스린다(rule)는 건 억압하거나 강제한다는 게 아닙니다. 의지와 애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 초기에는 사랑 자체가 주님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이성적 통제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왜곡되기 시작하자, 주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이성이라는 새로운 수단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celestial man)과 영적 인간(spiritual man)을 구분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통해 선으로 인도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전자의 상태를 잃어버리고 후자의 상태로 이동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AC.237은 단순한 심판 말씀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사랑 때문에 진리를 잃어버린 교회의 비극을 말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아직 이성이라는 수단을 남겨 두셨다는 희망도 보여줍니다.

 

결국 이 구절은 타락 이후 인간 상태의 중요한 변화를 설명합니다. 본래 인간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own이 사랑의 중심이 되자 그 지각은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이성(rational)을 주셔서, 비록 예전처럼 직접 지각하지는 못하더라도 진리를 배우고 분별하며, 다시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이것이 AC.237에서 ‘여자’와 ‘다스리는 이성’이 의미하는 깊은 뜻입니다.

 

 

 

AC.238, 창3:14-19, ‘17절 개요’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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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6, 창3:14-19, ‘15절 개요’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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