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

 

4. 31:27-28

 

다음은 네 번째 인용 구절입니다.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7, 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이 구절은 앞선 것들과 연결되면서도, 한층 더 ‘질서 있게 회복되는 전체 구조’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람의 씨 짐승의 씨를 함께 뿌린다는 것은, 주님이 사람 안에 진리(이해)와 선(의지), 곧 생각과 사랑을 동시에 새롭게 심으신다는 뜻’이며,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 둘은 단순한 민족 구분이 아니라, ‘사람 안의 두 측면’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주로 ‘진리, 곧 이해와 신앙의 영역’, ‘유다’는 ‘, 곧 사랑과 의지의 영역’을 뜻합니다. 이미 여기서 ‘두 축’이 등장합니다.

 

그다음 ‘씨를 뿌린다(sow)는 표현입니다. 씨는 언제나 ‘시작점, 가능성, 생명의 근원’을 뜻합니다. 그래서 ‘씨를 뿌린다’는 것은 어떤 것을 완성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라날 수 있는 근본을 넣어 주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사람 안에 ‘새로운 진리와 새로운 선의 씨앗을 심으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핵심 표현,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입니다. 여기서 ‘사람(man)은 앞서 계속 보셨듯이 ‘이해, 진리, 분별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반면 ‘짐승(beast)은 ‘의지, 애정, 사랑의 움직임’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두 종류의 생물을 늘린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 안에 생각의 씨 사랑의 씨를 함께 심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나옵니다. 왜 굳이 두 가지를 함께 말할까요? 그것은 거듭남이 ‘한쪽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만 심어지면 사람은 알기만 하고 살지 못합니다. 반대로 선만 있으면 방향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사람의 씨(진리)’와 ‘짐승의 씨(선)’를 동시에 심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AC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입니다.

 

이어지는 28절도 같은 흐름입니다. ‘뿌리 뽑고 무너뜨리고 전복하던 것처럼, 이제는 세우고 심는다.’ 이것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이전의 잘못된 구조(거짓과 자기 사랑)를 허무시고, 그 자리에 새로운 구조(진리와 선)를 다시 세우시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근본을 바꾸는 재창조’입니다.

 

이걸 일상적으로 설명드리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자기 생각과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사람 안에 먼저 ‘‘이것이 옳다는 진리(사람의 씨)’를 심으십니다. 동시에 ‘‘이렇게 살고 싶다는 선한 마음(짐승의 씨)’도 함께 주십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함께 자라면서, 그 사람의 삶이 점점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이 말하는 ‘심고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은 사람 안에 진리와 선, 곧 생각과 사랑의 씨를 함께 심으셔서,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고 새롭게 자라게 하신다.’ 이것이 렘31:27-28의 속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것을 알게 하시고, 동시에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도 함께 주십니다.’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는 각각 진리와 선을 뜻하며, 주님이 이 둘을 함께 심으심으로써 거듭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구절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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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73:22

 

괜찮으시면, 나머지 인용 구절들도 하나하나 이런 귀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요, 다음은 세 번째 인용 구절입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이 구절은 앞의 욜2:22와 연결되면서도, 한 걸음 더 깊은 자리, 곧 ‘사람이 자기 상태를 자각하는 자리’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것도 같은 ‘짐승’이지만, 의미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73:22 짐승 의지에 속한 애정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 없이 애정만 남아 있는 상태’, 곧 이해가 비춰 주지 않는 채로 살아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내가 우매무지하여 주 앞에 짐승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은, 단순히 ‘제가 못났습니다’라는 겸손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매무지함’은 스베덴보리 식으로 보면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 곧 이해(understanding)가 어두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상태를 ‘짐승’이라고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이해가 비워진 상태에서 남는 것은 의지, 곧 애정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핵심 연결이 나옵니다. 사람은 원래 ‘이해와 의지’, ‘진리와 선’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데, 이 구절에서는 ‘이해가 빠져 버린 상태’가 묘사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느냐 하면, 생각이나 분별이 아니라, ‘그때그때 올라오는 욕구와 감정’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가 ‘짐승 같은 상태’입니다. 즉, 짐승이 나쁜 존재라서가 아니라, ‘‘이해 없이 애정만으로 사는 상태가 짐승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걸 좀 더 실제적으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기 감정, 자기 기분, 자기 욕구를 따라 행동합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진리의 빛 없이 애정만으로 사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 상태를 시편 기자는 깨닫고, ‘내가 짐승 같았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자책이 아니라, ‘하나의 전환점’입니다. 앞부분에서는 혼란과 비교 속에서 흔들리다가, 주님 앞에 서면서 비로소 자기 상태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드는 고백이 ‘내가 짐승 같았다’입니다. 즉, ‘이해 없이 살던 상태에서, 이제 진리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순간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욜2:22와의 차이가 또렷해집니다. 욜(요엘)에서는 ‘짐승’이 ‘질서 안으로 들어온 애정’, 곧 회복되는 대상이었다면, 시73:22에서는 ‘짐승’이 ‘질서 밖에 있는 상태’, 곧 이해 없이 애정만 남아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같은 ‘짐승’이지만, 하나는 ‘회복될 대상’, 다른 하나는 ‘자각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진리 없이 애정만으로 살던 상태였으며, 그래서 주님 앞에서 짐승과 같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고백의 핵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진리 없이 자기 감정과 욕구대로 살면, 겉으로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짐승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깨닫는 순간, 비로소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구절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깨어남의 고백’이 됩니다.

 

73:22 짐승은 애정 자체가 아니라, 진리의 빛 없이 애정만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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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22

 

두 번째 인용 구절인 욜2: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 역시 설명, 곧 해설에서 짐승은 보다 질서 잡힌, 의지에 속한 애정을 뜻한다는 내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부분이 막히는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짐승=애정’이라는 연결 자체가 우리에게는 거의 직관적으로 납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반드시 한 단계 뒤로 물러나 ‘왜 짐승이 애정을 뜻하는가?’부터 풀어 주어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말씀에서 짐승(beasts)은 사람 안의 살아 움직이는 힘’, 곧 의지와 애정(사랑의 움직임)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짐승은 생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욕구와 본능,  원하는 것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잡아서, 짐승을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움직이게 하는 힘’, 즉 애정의 상응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걸 아주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 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부분(이해), 다른 하나는 좋아하고 원하며 움직이는 부분(의지)입니다. 생각은 머리에서 일어나지만, 실제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원함’, 곧 애정’입니다. 그런데 이 ‘움직이는 힘’이라는 점에서 보면, 사람과 짐승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짐승을 통해 ‘의지와 애정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이제 욜2:22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자연의 동물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애정들, 특히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욕구와 감정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애정들이 왜 ‘두려워하느냐’ 하면, 이전 상태에서는 이 애정들이 ‘질서 없이 흩어져 있거나, 메마르고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곧, 제대로 살아갈 방향과 생명을 공급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들의 풀이 싹이 나고,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은 ‘기초적인 진리와 선’, ‘나무’는 ‘더 성숙한 상태의 선과 진리’, ‘열매’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결과’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전체 흐름은 이렇습니다. ‘말씀의 진리와 선이 다시 살아나고, 그것이 자라기 시작하자, 그동안 불안정하던 애정들이 이제 안정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해설에서 말한 ‘짐승은 보다 질서 잡힌, 의지에 속한 애정’이라는 표현이 풀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질서 잡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애정을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문제는 애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질서 밖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선이 들어오면, 애정이 점점 ‘제자리를 찾고, 올바른 방향으로 정돈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들짐승이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실제적으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즐거움을 추구하는 마음,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짐승’ 같은 애정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이 욕구들이 사람을 끌고 다니며 불안과 두려움을 만듭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리와 선이 들어오면, 이 욕구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바뀌고 자리가 잡힙니다.’ 인정 욕구는 남을 세워 주는 방향으로, 즐거움은 건강하고 선한 방식으로, 소유 욕구는 나눔과 책임의 방향으로 정돈됩니다. 그러면 이 애정들은 더 이상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게 하는 건강한 힘’이 됩니다. 이것이 ‘질서 잡힌 애정’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말씀의 진리와 선이 자라나면, 사람 안의 애정들도 제자리를 찾아 안정되고, 더 이상 두려움 속에 있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욜2:22의 속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없애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바르게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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