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2.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3)

 

저도 이런 기도를 늘 드려야겠어요...

 

 

이 구절은 AC.212를 읽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어려움 가운데 있는 다윗의 탄원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 ’을 이해(understanding)로 읽게 되면, 이 기도는 매우 깊은 영적 기도가 됩니다. ‘주님, 제 이해를 밝히소서. 제가 진리를 진리로 보게 하소서. 제가 제 own의 생각과 판단에 갇히지 않게 하소서. 제가 영적으로 잠들지 않게 하소서.’ 하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최근 AC.194-212를 따라오시며, 계속 말씀하신 내용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감각으로 확인해야 믿으려는 태도’,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태도’, ‘이성질’, ‘own의 교묘한 작용’, ‘악을 선으로 보고 거짓을 진리로 보는 상태 같은 것들을 계속 살펴오셨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보면 시13:3은 단순히 지식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영적 분별력을 잃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처럼 들립니다.

 

더욱이 AC.211 AC.212에 따르면, 타락한 사람들에게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이 바로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작은 빛이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았고, 여호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으며,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의 흔적도 남아 있었습니다. 어쩌면 시13:3의 기도는 바로 그 작은 빛을 꺼뜨리지 말아 달라는 기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자신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혈기와 극단성을 말씀하셨던 것도 생각납니다. 사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혈기가 있는 상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하는 상태일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것을 보고 계십니다. 경계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말을 꺼내기가 두렵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시13:3의 기도가 어느 정도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이 밝아져 있기 때문에 자기 상태를 보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 기도는 길게 할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혹은 AC를 읽기 전에, 혹은 설교를 준비하기 전에 그저 이렇게 기도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주님, 제 눈을 밝히소서. 제가 제 own을 진리로 착각하지 않게 하소서. 제가 악을 선으로, 거짓을 진리로 보지 않게 하소서. 제가 사망의 잠을 자지 않게 하소서.’

 

AC.212를 읽은 사람에게는, 이 짧은 시편 한 구절이 어쩌면 매우 훌륭한 일상 기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보다도, 주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AC.212, 심화 6, ‘겔12:2’

AC.212.심화 6.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겔12:2) 이 구절을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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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4, ‘시13:3’

AC.212.심화 4. ‘시13:3’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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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심화

 

4. ‘13:3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이 단순한 육체의 시각 기관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와 영적 인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다윗은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다윗은 단순히 시력이 좋아지기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육체의 눈만을 뜻한다면, 뒤에 이어지는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두려워하는 것은 육체적 수면이 아니라 영적 무감각과 영적 죽음입니다.

 

그래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는 ‘내 이해를 밝히소서’, ‘내가 진리를 보게 하소서’, ‘내 내적 인식을 깨워 주소서’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사망의 잠’은 거짓과 악 안에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 곧 영적으로 잠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 전체는 ‘주님, 제 이해를 밝히셔서 제가 영적 죽음의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구절을 AC.212에 인용합니다. 창3:7의 ‘눈이 밝아져’ 역시 같은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새로운 시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열리는 것이며,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영적 사물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 시편 구절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잘 연결됩니다. 다윗은 외부 정보를 더 많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빛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조명, 내적 인식, 내적 지시와 매우 가까운 개념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안다고 해서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밝아질 때 비로소 진리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과 ‘생명’, ‘어둠’과 ‘죽음’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이해가 밝아질수록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 있고, 이해가 어두워질수록 영적으로 잠들어 갑니다. 그래서 다윗은 눈의 밝아짐과 사망의 잠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놓고 있습니다.

 

결국 AC.212에서 시13:3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이 이해를 의미하고, ‘눈 밝아짐’은 진리의 빛을 받아 이해가 계몽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밝아져’도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의 작용이며,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적 예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시력을 주소서’가 아니라 ‘이해의 빛을 주소서’라는 기도이며, 바로 그 점 때문에 AC.212의 논증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AC.212, 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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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3, ‘삼상14:29’

AC.212.심화 3. ‘삼상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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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심화

 

3. ‘삼상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적 시력 회복이 아니라 이해와 인식의 밝아짐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보면, 요나단은 전투 중 지쳐 있었고, 숲에서 발견한 꿀을 조금 맛본 뒤 기력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는 몸에 힘이 돌아오고, 정신이 맑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더 깊은 의미를 봅니다. 요나단은 단순히 눈이 잘 보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눈이 밝아졌다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AC.211 interior dictate’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7 그들의 눈이 밝아져’를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내적 인식의 작용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 전체의 사용법과 일치함을 보여 주기 위해 요나단의 말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눈으로 새로운 대상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와 주변 상황을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해가 밝아졌다는 뜻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입니다. 말씀에서 꿀은 종종 선한 즐거움이나 선에서 오는 기쁨을 상징합니다. 요나단은 꿀을 맛본 뒤 활력을 얻고, 판단력이 맑아졌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선과 결합된 기쁨이 이해를 밝게 한다는 원리와도 상응합니다. 그래서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은 더욱 자연스럽게 이해의 계몽(enlightenment)을 가리키게 됩니다.

 

이 때문에 AC.212에서 요나단의 사례는 발람의 사례와 나란히 놓입니다. 발람은 계시와 환상을 통해 눈이 열린 사람’으로 불렸고, 요나단은 꿀을 맛본 뒤 눈이 밝아졌다’고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공통점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내적 인식과 이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말씀에서 ’은 자주 이해를 의미하며,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해가 밝아지고,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3:7 눈이 밝아져’도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는 설명의 근거로 이 구절을 사용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곧 나는 이제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뜻이며, 이것이 AC.212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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