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표상으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어, 더욱 생명력을 갖게 했는데, 이런 방식은 그들에게 더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스타일을 가리켜 한나는 예언 가운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 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 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 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이러한 표상들은 시편에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78:2-4) Such representatives are called in David, “Dark sayings of old” (Ps. 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78:2-4)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한 이 모든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 스타일로,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나타납니다. 이 책들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 그대로 나타나 있지만, 그 안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전혀 다른 것들이 내적 의미 안에 담겨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차례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셋째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은 태고교회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겼던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스타일처럼 연속적이고 역사적인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가장 깊은 비밀들이 담겨 있는데, 그것들은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이어지며,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다양한 상태들, 하늘 자체,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넷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로,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다윗이라는 왕의 인격 아래에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 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 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 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이 글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결정짓는, 매우 구조적인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말씀을 하나의 동일한 스타일로 보지 않고,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성경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 전환을 요구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모든 본문을 읽으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스타일로 소개되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오늘날 우리가 ‘신화적’이라고 부르기 쉬운 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신화가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언어입니다. 이 스타일의 핵심은, 외적 사물과 사건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영적, 천적 실재를 직접 떠올렸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자연은 상징이 아니라, 곧바로 영적 세계와 연결된 창문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이야기로 구성되었음을 뜻합니다. 창조 이야기, 에덴동산, 초기 족장들의 이야기가 단절된 상징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변화해 가는 하나의 생명 서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스타일은 그들에게 ‘최고의 기쁨’이었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곧 삶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나의 예언과 다윗의 시편이 인용되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높은 말’,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은 난해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뜻합니다. 이 ‘감추어졌던 것’은 악이나 무지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이해를 넘어서는 신적 깊이를 가리킵니다. 즉, 빛이 너무 강해 눈이 부신 상태와 같습니다.

 

둘째 스타일인 역사적 스타일은, 오늘날 독자들이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역사들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지만, 그 안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즉, 역사성과 상징성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역사로서 참이면서 동시에 내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성경 해석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셋째 스타일인 예언적 스타일은, 많은 독자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분명히 짚습니다. 이 스타일은 ‘연결된 역사 형식’이 아니라, 단절되고 압축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 안에서는 이 파편들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됩니다. 예언서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읽는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예언적 스타일의 특징은 범위의 확장성입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상태, 하늘의 질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주님 자신까지를 동시에 다룹니다. 그래서 이 스타일은 문자적 차원에 머물러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내적 의미로 들어가야 합니다.

 

넷째 스타일인 시편은 이 모든 스타일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예언처럼 높고, 그러나 일상 언어처럼 인간적입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의 감정과 경험을 통해 말하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상태와 주님의 왕적 통치를 노래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개인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신앙 고백이 됩니다.

 

이 글 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말씀은 단일한 방식으로 읽히도록 쓰이지 않았습니다. 스타일을 구별하지 않으면, 의미도 왜곡됩니다. 그러나 스타일을 구별하고, 각 스타일이 가리키는 차원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말씀은 점점 하나의 살아 있는 구조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구조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과 인간의 거듭남이 놓여 있습니다.  

 

 

심화

 

1.삼상2:3

 

 

AC.66, 심화 1, ‘삼상2:3’

AC.66.심화 1. ‘삼상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위 AC.66 첫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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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2-4

 

 

AC.66, 심화 2, ‘시78:2-4’

AC.66.심화 2. ‘시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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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님의 부활로 본 창1

 

 

AC.66, 심화 3, ‘주님의 부활로 본 창1’

AC.66.심화 3. ‘주님의 부활로 본 창1’ 이것으로 창1 AC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모든 작업을 마칩니다. 끝으로, 창1의 모든 내용을 주님의 ‘부활’과 연결해 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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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창1, 'AC.64에 대한 경험적 증언'

AC.65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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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말씀을 내적으로 경험하기

 

 AC.65 본문 중

 

그 내적 의미가 너무도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도 완전하며, 그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켜서, 그들은 그것을 영광(glory)이라고 불렀다

 

라는 내용 말인데요, , 천국과 지옥에도 이런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오는 걸로 기억합니다. 정말 궁금합니다. 주님이 제게도 허락하셔서 저도 이런 걸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5와 ‘Heaven and Hell’에서 말하는 그 ‘영광’의 경험은 ‘특별한 환상이나 감각적 체험’을 주로 가리키기보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면서 주님과 진리가 실제로 인식되고, 그 안에서 깊은 감동과 확신이 생기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눈에 보이거나 들리는 형태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은 ‘내면에서의 분명하고 살아 있는 깨달음’으로 주어집니다.

 

먼저 ‘영광’이라는 표현부터 정확히 보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영광’은 언제나 ‘신적 진리가 드러날 때의 빛’입니다. 즉, 단순히 아름답거나 감동적인 느낌이 아니라, ‘, 이것이 주님의 뜻이구나’, ‘이 말씀이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었구나’ 하고 확연히 보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그것을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어떤 환상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가 완전한 질서와 연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직접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소망, ‘나도 이런 걸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은 매우 자연스럽고, 사실 매우 귀한 방향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은 ‘보여 주기 위한 예외적 방식’이었고, 일반적인 길은 ‘그와 다른 방식의 동일한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이미 우리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그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말씀을 읽다가 어느 순간 그 뜻이 열리면서, 그것이 단순한 글이 아니라 나를 향한 주님의 뜻으로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그때 오는 깊은 울림,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 그리고 마음이 정돈되는 느낌—바로 그것이 같은 계열의 경험입니다. 그것이 작고 조용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경험을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는가?’ AC의 흐름은 아주 분명합니다. ‘삶이 먼저 열려야, 의미가 열린다’입니다. 즉, 진리를 알고 그것을 따라 살려는 마음과 노력이 있을 때, 그다음에 그 진리가 더 깊이 열립니다. 그래서 단순히 ‘보여 달라’는 방향보다는, ‘이 말씀대로 살게 해 달라’는 방향이 더 직접적인 길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말씀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히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이걸 오늘 어떻게 살까’를 붙들고 살아 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말씀이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의미’로 확 열리는 때가 옵니다. 그때 마음이 깊이 감동되고, 동시에 질서가 잡히는 느낌이 옵니다. 바로 그 순간이 ‘영광이 스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그런 경험을 하고 싶다’는 소망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그 방향을 ‘특별한 체험을 보게 해 달라’보다 ‘말씀의 의미 안에 살게 해 달라’로 두시면, 오히려 훨씬 더 실제적이고 깊은 방식으로 그 ‘영광’을 경험하시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는 그 문이 감각적으로까지 열렸던 것이고, 우리 대부분은 ‘의미와 삶의 결합’ 속에서 그 문이 열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영광’의 본질은 같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천사들이 말하는 영광은 특별한 어떤 장면보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려 주님을 실제로 인식하는 상태이며, 그 경험은 삶 속에서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에게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AC.65, 심화 1, ‘원어 연구’

AC.65.심화 1. ‘원어 연구’ 위 AC.65 본문 중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로서 뜻해지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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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심화

 

1. 원어 연구

 

 AC.65 본문 중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로서 뜻해지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라는 내용과, 위 해설 중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집착하는 단어 하나, 문장 구조 하나는 천사적 차원에서는 거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대신 그 말씀이 어떤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는지, 신앙과 사랑의 어떤 질서를 드러내는지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문자에 매달릴수록 오히려 의미에서 멀어질 수 있고, 의미를 향해 마음을 열수록 문자는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라는 내용으로 볼 때, 기독교, 개신교의 원어 연구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 연구에 평생을 바칠 정도로 자신을 쏟아부으며, 그 결과물들에 대해 은근히 어떤 자부심과 권위를 드러내곤 하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5의 관점에서 볼 때, ‘원어 연구’는 분명 유익한 도구이지만, 그것 자체가 말씀의 핵심에 도달하게 하는 길은 아니며, 오히려 잘못 붙들면, ‘문자에 머무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필요하지만 중심은 아니다’가 가장 정확한 평가입니다.

 

먼저 왜 원어 연구가 필요한지부터 공정하게 보셔야 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통해 단어의 뉘앙스, 문맥, 표현의 범위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번역에서 놓치기 쉬운 부분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입니다. 특히 설교나 번역, 주해 작업에서는 도움이 됩니다. 이 점은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AC.65가 말하는 지점은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천사들은 단어와 문장을 이해하지 않고, ‘의미 자체’를 지각합니다. 즉, ‘어떤 단어가 쓰였는가’가 아니라 ‘그 말씀이 어떤 상태와 질서를 말하는가’를 봅니다. 이 기준에서 보면, 원어 연구는 여전히 ‘문자 층위 안에서의 정밀 작업’입니다. 아무리 정교해도, 여전히 ‘겉층’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지점은 여기입니다. 원어 연구가 ‘의미로 들어가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권위와 우월감을 형성하는 영역’이 될 때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나는 이 단어의 진짜 뜻을 안다’는 데 머물고, 정작 그 말씀이 자기 삶과 상태를 어떻게 드러내는지는 놓치게 됩니다. 이때는 오히려 AC.65의 표현대로 ‘문자에 더 깊이 매달리는 상태’가 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이라는 단어의 원어 의미를 깊이 연구합니다. 이것은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삶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 그는 ‘단어는 더 정확히 알지만, 의미에서는 더 멀어질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원어를 전혀 모르지만, 말씀을 읽으며 ‘,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하고 실제로 변화됩니다. AC의 기준에서는 이 사람이 더 ‘말씀의 의미 안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목적은 ‘정확한 해석’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변화와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어 연구는 이렇게 자리 잡는 것이 가장 건강합니다. ‘문자를 더 정확히 이해하도록 돕는 보조 도구’로는 매우 유익하지만, ‘말씀의 본질에 이르게 하는 핵심 수단’으로는 과대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절반도 아닌 것입니다.

 

목회적으로 보면 이 균형이 매우 중요합니다. 원어를 아는 것은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설교의 중심이 되면 청중은 ‘지식’은 듣지만, ‘변화’는 경험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의미와 상태를 중심으로 풀어 주면, 원어를 몰라도 말씀은 살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중심은 언제나 ‘의미, 곧 신앙과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원어 연구는 ‘문자를 더 정확히 보는 눈’을 주지만, 말씀의 핵심은 ‘그 의미가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둘은 대립이 아니라, ‘도구와 목적’의 관계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원어 연구는 유익한 도구이지만, 말씀의 핵심은 단어가 아니라 그 안의 영적 의미와 삶의 변화에 있으며, 그 중심을 놓치면 오히려 문자에 더 깊이 머무를 수 있습니다.’

 

 

 

AC.65, 심화 2, ‘말씀’을 내적으로 경험하기

AC.65.심화 2. ‘말씀’을 내적으로 경험하기 위 AC.65 본문 중 ‘그 내적 의미가 너무도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도 완전하며, 그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켜서, 그들은 그것을 ‘영광’(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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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창1, 'AC.64에 대한 경험적 증언'

AC.65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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