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2:5, 6)

 

AC.75

 

그의 지식과 그의 이성(knowledge and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난 관목과 채소(the shrub and the herb)로 묘사됩니다. (5-6)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이 이제 본격적으로 ‘천적 인간의 내적 구조’를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보여 주는 첫 관문입니다. AC.74에서 천적 인간이 곧 ‘일곱째 날’이며 주님의 안식이라고 선언되었다면, AC.75는 그 안식의 상태 안에서 ‘인간의 인식 능력’, 곧 지식과 이성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동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설명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자연적 이미지, 곧 관목과 채소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scientificum’과 ‘rationale’라는 두 층위로 구분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적 능력의 나열이 아닙니다. ‘scientificum’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 쌓인 지식, 다시 말해 겉 사람의 기억과 사고 재료에 해당합니다. 반면 ‘rationale’는 그러한 지식이 질서 잡혀 이해로 올라간 상태, 곧 이성이 작동하는 영역입니다. 천적 인간에게도 이 두 가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자리 잡습니다.

 

이 지식과 이성이 ‘땅에서 난 관목과 채소’로 묘사된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나무가 아니라 관목과 채소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삶에서 지식과 이성이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나무는 높이 자라고 눈에 띄는 존재이지만, 관목과 채소는 땅 가까이에서 자라며 삶을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천적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은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고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이 관목과 채소가 ‘안개에 의해 적셔진다’는 표현입니다. 창2:5-6 본문을 보면, 안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와 달리, 땅에서 은밀히 올라와 전체를 적시는 작용을 상징합니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계시나 교훈이 아니라, ‘내적으로 스며드는 생명의 영향’입니다.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은 외적 교훈의 강압으로 형성되지 않고, 사랑의 상태 안에서 자연스럽게 적셔지고 자라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영적 인간의 단계에서는 진리가 먼저 주어지고, 그 진리를 이해하고 따르기 위해 이성과 지식이 적극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단계에서는 선이 먼저이며, 지식과 이성은 그 선을 표현하고 실행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합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지식을 ‘쌓는다’거나 이성을 ‘단련한다’는 감각이 거의 없습니다. 그것들은 이미 안개처럼 스며드는 생명에 의해 충분히 공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또한, 천적 상태가 결코 ‘무지의 상태’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천적 인간은 지식과 이성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들을 가장 바른 자리에 둔 사람입니다. 지식은 사랑을 섬기고, 이성은 선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지식은 날카롭기보다 온화하고, 그의 이성은 논쟁적이기보다 투명합니다. 관목과 채소가 땅을 덮듯, 그의 인식은 삶 전체에 고르게 퍼져 있습니다.

 

이제 창세기 2장의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안식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더 이상 지식과 이성을 통해 하나님께 도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주님 안에 있으며, 그 안에서 지식과 이성이 자라납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고, 안개가 땅을 적십니다. 이는 천적 삶의 인식 구조가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주입되는 방식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부드럽게 흘러가는 방식’임을 보여 줍니다.

 

결국 AC.75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의 지식과 이성은 나무처럼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는가, 아니면 관목과 채소처럼 삶을 섬기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지식과 이성이 제자리를 찾을 때 인간이 얼마나 고요하고 충만해질 수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 줍니다.

 

 

 

AC.76, 창2:1-17 개요, 주님의 ‘불어넣으심’(breathing)으로 오는 생명(삶)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bygrace.kr

 

AC.74, 창2:1-17 개요, '일곱째 날, 안식' (2-3절)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2:2, 3)

 

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해설

 

이 문장은 짧지만,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고요하면서도 가장 깊은 정점 중 하나를 가리킵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이 ‘죽음에서 소생됨’, ‘영적 상태로 들어감’, 그리고 ‘천적 상태로 나아감’이라는 상승의 운동이었다면, AC.74는 그 운동이 도달하는 ‘멈춤의 지점’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멈춤은 정지나 공백이 아니라, 완성과 평안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멈춤은 ‘일곱째 날’이며, ‘주님이 쉬시는 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곧바로 ‘일곱째 날’과 동일시합니다. 이는 시간의 하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까지는 언제나 움직임이 있고, 분별이 있으며, 싸움과 수고가 있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악을 대적하고, 질서를 세워 가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그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에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이루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 주님의 질서가 사람 안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쉬신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일을 멈추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신적 작용이 ‘방해받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영적 인간의 단계에서는 여전히 인간의 이해와 판단, 선택이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단계에서는 주님의 선이 중심이 되고, 인간의 이해는 그 선을 섬기는 자리에 놓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를 ‘주님의 안식’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 사람 안에서 편히 거하실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다시 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은 여섯 날의 창조로 끝나지만, 그 끝은 완결이 아니라 ‘문턱’입니다. 창세기 21절로 3절에서 비로소 ‘안식’이 언급됩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동일합니다. 사람이 영적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서 곧바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상태는 여전히 진리 중심의 삶이며, 싸움과 선택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삶은 더 이상 투쟁이 아니라 ‘흐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설명할 때, 그 특징을 길게 나열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일곱째 날’이라는 말 속에 이미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날은 빛과 어둠을 나누는 날이 아니고, 물과 물을 가르는 날도 아니며, 생명을 만들어 내는 날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쉼을 누리는 날’입니다. 천적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이미 주어진 진리 안에서, 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갑니다.

 

이 글은 또한, 사후 삶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깊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단순히 ‘행복한 곳’이나 ‘보상의 장소’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천국을 ‘안식의 상태’로 이해합니다. 그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활동이 수고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에게 있어 선을 행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며, 진리를 따르는 것은 부담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호흡입니다.

 

이렇게 보면, AC.74는 독자에게 조용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여섯째 날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일곱째 날을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섯째 날의 신앙은 여전히 필요하고 귀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2장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님이 인간을 결국 ‘안식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안식은 삶을 포기하는 자리가 아니라, 삶이 가장 온전히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AC.74는 다음에 이어질 모든 설명의 기준점이 됩니다. 이후에 나오는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그리고 동산을 지키고 경작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이 ‘일곱째 날의 사람’, 곧 천적 인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안식에 들어간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주님은 그 안에서 어떻게 거하시는가, 그리고 그 상태가 어떻게 유지되는가가 이제 펼쳐질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흐름에서 AC.74는 매우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수고의 신앙에서 안식의 신앙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 있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AC.73, 창2:1-17 개요, 'spiritual(영적)에서 celestial(천적)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73 사람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되고, 그다음에는 그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and all the army of them. (2:1)

 

AC.73

 

사람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되고, 그다음에는 그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 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온 모든 논의를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AC.72까지가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가’를 예고하는 문턱이었다면, AC.73은 이제 그 영원한 삶 안에서도 ‘삶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깊어지고 변화한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삶을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도 분명한 단계와 질서, 그리고 성장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된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죽어있음’은 무엇보다도 ‘영적 무감각과 분리의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이 땅에 살아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죽어 있을 수 있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영적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사후의 변화이면서 동시에, 거듭남의 보편적 구조를 함께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영적 인간이 된 뒤에, 그다음 단계로 ‘천적 인간’이 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분입니다. 많은 신학적 전통에서는 영적 상태 자체를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영적인 상태는 ‘중간 단계’입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신앙의 질서 안에 들어선 상태는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준비된 상태입니다.

 

천적인 상태란, 진리를 ‘아는 상태’를 넘어, 선을 ‘사는 상태’입니다. 영적 인간이 주로 이해와 분별의 차원에 서 있다면, 천적 인간은 의지와 사랑의 차원에 서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상태에서는 진리가 앞서고 선이 그 뒤를 따르지만, 천적인 상태에서는 선이 중심이 되고 진리가 그 안에 자연스럽게 담깁니다. 이 전환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 이동하는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사후에 자동으로 주어지는 변화’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질서와 순서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영적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천적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를 통해 먼저 길이 열리고, 그다음에야 사랑이 그 길을 따라 깊어집니다. 이는 창1에서 빛이 먼저 창조되고, 그다음에 생명이 질서 잡히는 구조와 정확히 상응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2:1을 다루면서, 그 동일한 구조가 사후 삶과 거듭남의 내적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AC.73이 단지 일반론을 말하는 문장이 아니라, ‘지금 해설하고 있는 본문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선언입니다. 창2:1에서 말하는 ‘다 이루어졌다’는 상태는, 단순히 영적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다음 단계인 천적 상태로 들어갈 준비가 갖추어졌음을 포함합니다. 즉, 창2는 영적 인간을 넘어,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하는 장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과 창2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1장은 주로 영적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질서를 다루고, 2장은 그 영적 상태 위에서 ‘천적 삶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다룹니다. AC.73은 바로 이 전환점을 독자에게 명확히 짚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부터 읽게 될 내용은 더 이상 단순한 분별과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글은 또한, 사후 삶에 대한 오해를 조용히 바로잡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곧바로 완성된 상태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후 삶 역시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며, 그 과정은 이 땅에서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영적 삶을 얼마나 성실히 살았는가에 따라, 천적 상태로 들어가는 깊이와 속도도 달라집니다. 사후 세계는 보상과 처벌의 무대라기보다, ‘이미 형성된 삶이 계속 펼쳐지는 자리’입니다.

 

결국 AC.73은 아주 짧은 문장 안에서, 창조–거듭남–사후 삶이라는 세 층위를 하나로 겹쳐 놓습니다. 죽어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이 질서는, 태고교회의 구조이자, 개인의 거듭남의 구조이며, 사후 삶의 구조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서를 지금부터 창2를 통해 차분히, 그러나 매우 구체적으로 풀어 가려 합니다.

 

 

 

AC.74, 창2:1-17 개요, '일곱째 날, 안식' (2-3절)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

bygrace.kr

 

AC.72, 창2 앞,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