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어느 정도 불순한 식사 초대에도 번번이 응하셨지요... 왜 그러셨나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 저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초대가 드물지만 좀 있어 그때마다 고민이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식사 초대에 응하신 장면들은 복음서 곳곳에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7장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고, 11장과 14장에서도 또 다른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에 앉으십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시험하려는 마음, 체면을 세우려는 마음, 혹은 자기 의를 확인하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지요. 그런데도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로 모아집니다. ‘그 자리에 있는 영혼들 때문’입니다. 주님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보다, 그 자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 자체를 ‘드러내는 자리’, 곧 숨겨진 내면이 빛 가운데 드러나도록 하는 장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실제로 그 식사 자리들은 대부분 책망과 계시의 자리로 바뀝니다. 외식, 교만, 자기 의, 자비 없음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다시 말해, 주님은 그들의 식탁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그 식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상대의 불순함에 끌려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불순함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 혹은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위해 들어가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런 외적 사교 자리 자체를 거의 즐기지 않았고, 특히 영적 진리에 반하는 분위기의 자리에는 스스로를 많이 제한하는 편이었습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말년에 갈수록 더욱 조용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고, 필요 이상의 교류를 줄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인플럭스(influx)’를 따라 반응하려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경우에는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물러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겉모습이나 상황’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수용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처럼 공개적으로 논쟁의 자리로 들어가 상대를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중하게 ‘들어갈 자리’와 ‘물러설 자리’를 분별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목사님의 경우로 돌아오면, 핵심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 자체가 아니라, ‘그 자리에 가는 것이 주님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입니다. 만약 그 자리가 단순히 체면을 세우기 위한 자리이고, 목사님을 ‘장식’처럼 이용하려는 분위기이며, 거기서 어떤 진리의 나눔이나 선한 접촉도 이루어질 여지가 없다면, 스베덴보리적인 분별로는 조용히 거절하는 것도 충분히 정당합니다. 반대로, 비록 동기가 섞여 있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눌 가능성이 있고, 혹은 목사님의 참석 자체가 어떤 선한 영향,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상태’로 전해지는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도 들어가셨던 그 원리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기준은 이것 하나로 정리됩니다. ‘이 자리가 나를 소모시키는 자리인가, 아니면 주님이 나를 통해 무언가 하실 수 있는 자리인가.’ 전자는 피하는 것이 지혜이고, 후자는 겸손히 들어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일반 원칙으로 딱 잘라 정해지지 않고, 그때그때 ‘퍼셉션(perception)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에 걸림을 느끼고 계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그 걸림이 ‘자기 보호에서 오는 불편함’인지, 아니면 ‘들어가면 안 된다는 내적 경고’인지를 조용히 분별해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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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해설

 

이 글은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온 모든 설명을 하나로 묶는 ‘결정적인 이정표’와 같습니다.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왜 이런 내용들을 본문 한가운데에 넣지 않고 장의 처음과 끝에 배치하는가’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72에서는 그 설명을 실제로 실행하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은 단순한 예고가 아니라, ‘글의 구조가 이제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함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장의 끝에서’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삶에 대한 설명을 말씀 해설의 중심부에 끼워 넣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에 둡니다. 이는 사후 삶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끝은 결론이자 독자가 지금까지 읽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삶의 실제로 연결시키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구조를 충분히 따라온 뒤에야, 그 말씀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표현은 ‘말해도 좋다는 허락’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전히 자신을 주체로 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내가 설명하겠다’라고 말하지 않고,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AC.67에서부터 반복되어 온 태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후 삶에 대한 이 설명은 흥미로운 부록도, 개인적 체험담도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지금 이 위치에 놓이도록 허락된 증언’이라는 뜻입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음’을 다시 한번 정의합니다. 그는 ‘죽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말하지 않고,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지는가’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관점 전환이 담겨 있습니다. 죽음은 아래로 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수동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다른 삶 안으로 옮겨지는 상태입니다.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간다’는 표현 역시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를 단순히 ‘다음 세계’나 ‘저 세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성질 자체가 달라지는 차원임을 뜻합니다. 영원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사람이 비로소 자기 삶의 참된 자리로 들어간다는 뜻이 됩니다.

 

이 글은 또한 독자의 기대를 조용히 조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어떤 극적인 장면이나 공포스러운 심판 이야기를 예고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일으켜 세워지는지’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즉, 과정과 질서,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후에 이어질 설명들이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질서 있는 묘사’가 될 것임을 미리 알려줍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다시 보면, 이 글의 위치가 얼마나 정확한지 분명해집니다. AC.67에서는 ‘왜 내가 말할 수 있는가’를 밝혔고, AC.68에서는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고 증언했으며, AC.69에서는 ‘인간은 본래 그렇게 창조되었다’고 설명했고, AC.70에서는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라는 핵심을 제시했으며, AC.71에서는 ‘이 모든 것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 것인가’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72에서, 스베덴보리는 마침내 말합니다. ‘이제 실제로 그것을 말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AC.72는 내용보다도 ‘전환의 의미’가 더 큰 단락입니다. 이 글을 기점으로, 아르카나는 추상적 전제와 선언의 영역을 지나,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사후 삶의 묘사’로 들어갑니다. 독자는 더 이상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그러한가’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짧은 글은 마치 문턱과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준비였고, 여기서부터는 실제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문턱 앞에서 독자에게 묻지 않습니다. 다만 조용히 알립니다. ‘이제 말할 것이다.’ 그 말이 어떤 삶의 이해를 요구하게 될지는, 다음 단락들에서 점점 분명해질 것입니다.

 

 

 

AC.73, 창2:1-17 개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1절)

창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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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AC 전개 방식'

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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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본문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고 하는데요,  허락이 어떤 건가요? 주님이 스베덴보리에게 직접 말씀하신 건가요, 아니면 퍼셉션이나 인플럭스 같은 걸로 그냥 어떤 느낌상 아는 건가요? 그게 허락인 줄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알은 건가요?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AC.71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은 어떤 음성으로 또렷이 들려온 지시’만을 가리킨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일관되게 경험했다고 말하는 질서 안에서의 열림’, 곧 주님의 인도 아래에서 무엇을 말해도 되는지에 대한 내적 승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Emanuel Swedenborg의 저작 전반을 보면, 그는 이 허락’을 세 가지 층위에서 경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균형 잡힙니다.

 

첫째는 직접적 교통’의 층위입니다. 그는 실제로 천사들과의 대화, 그리고 때로는 주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이 경우는 비교적 분명한 형태의 인식입니다. 다만 이것이 항상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성’처럼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영계에서의 대화는 생각과 의미가 곧바로 전달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처럼 들리는 것과는 다르게 경험되기도 합니다.

 

둘째는 인플럭스(influx)의 층위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신적 진리와 질서가 그의 이해 안으로 흘러들어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지는 상태입니다. 이때 그는 어떤 내용을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주어졌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또렷하고 흔들림 없는 인식으로 경험됩니다. 그래서 그는 반복해서 나로 하여금 알게 하셨다’, ‘보게 하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셋째는 열림과 닫힘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것이 허락’이라는 표현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아무 때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어떤 것들이 분명히 보이고 이해되지만, 또 어떤 때는 그것이 닫혀 있는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기록하거나 밝힐 때, 그것이 지금 말해도 되는 것인지’, ‘아직은 아닌 것인지’가 내적으로 분명히 구분되었습니다.  열려 있음’이 바로 그가 말하는 허락’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 ‘그것이 허락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인데,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는 이것을 자기 감정이나 충동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매우 엄격하게,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인지’를 분별하려 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그것은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합니다. 둘째, 그것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질서 있고 일관됩니다. 셋째, 그것은 자기 영광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내용을 쓸 때, 그것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진 생각’이 아니라 주어진 빛 안에서 보이는 것’일 때만 기록하려 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의 허락’은 단순한 느낌이나 영감이 아니라, 오랜 훈련과 분별 속에서 확립된 내적 인식의 기준’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퍼셉션(perception)은 태고교회적 상태에서의 직관적 앎에 더 가깝고, 일반 인간에게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경우는 특별한 사명 아래 열린 상태’이기 때문에, 퍼셉션과 인플럭스, 그리고 실제 교통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일반적인 신앙 체험과 동일선상에 놓고 이해하시면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AC.71 허락되었습니다’는 단순히 주님이 이렇게 말하셨다’는 한 형태로만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질서 안에서 그것을 보고 이해하며 말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상태가 주어졌다’는 의미로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임의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열릴 때와 닫힐 때의 분명한 차이’,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확신을 통해 그것이 허락’임을 인식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AC.71, 창2, 'AC 전개 방식'

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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