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악을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의 스베덴보리적 구조

 

이 항목은 앞의 1-4번 내용이 모두 한 지점으로 모이는 핵심이며, 스베덴보리 전체 사상의 영적 윤리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Ⅰ. 사람은 본질적으로 선의 그릇이며, 악은 그 그릇을 점령한 외래 침입자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람은 주님이 창조하신 기능적 그릇(vessel)이다, 선은 주님에게서 오는 참 생명이고, 악은 사람 안에 기생하는 거짓된 생명(falsified life)이다, 선과 악은 모두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관점, 곧 사람은 빈 용기이고, 선·악은 흐르는 것이라는, 인간의 중심(core)은 선·진리의 용기이며, 악과 거짓은 단지 기생하는 것이라는 이 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 우리는 악을 사람의 정체성으로 오인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내적 분별력이 즉시 흐트러지기 때문입니다.

 


Ⅱ. ‘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영향력이다

 

스베덴보리는 악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악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아적 생명(proprium)의 왜곡이다.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악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외부의 영적 영향력에서 온다. 즉, 악은 그 사람 개인의 고유함도, 무슨 독자적인 것도, 자아의 본성도 아닙니다. 악은 밖에서 흘러들어온 어둠이며, 사람은 그 흐름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악을 사람에게 귀속시키면, 그 순간 분별이 사라진다.

 


Ⅲ.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 왜 영적 오염이 시작되는가?

스베덴보리는 아주 정확히 설명합니다.

 

1. 사람이 악과 동일시되면 분별이 무너진다

 

사람을 악한 존재라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악이 기생한 그릇과 악 자체를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분노는 의분이 아니라 혐오로 변합니다. 의분은 악은 악일 뿐이다에서 멈추지만, 혐오가 시작되면, 저 사람은 악 그 자체다가 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혐오를 가장 위험한 정념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악령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대상화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람을 미워하면 우리의 선한 결합이 끊어진다

 

스베덴보리는 저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강조합니다. 천사는 결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 안에서 일하는 악을 분별하고 그것을 거부할 뿐이다.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면 우리 내부에서 선과의 결합, 평화, 자비, 깨달음이 끊어집니다. 즉, 사람을 미워하면 그 결과는 선과의 단절입니다.

 


3.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 악은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린다

 

스베덴보리는 악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방식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바로 사랑을 거부할 때사람을 미워할 때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악은 미움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가장 쉽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미움은 악령의 상태와 유사한 진동을 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악한 정치인을 미워하는 순간, 그 정치인 안의 악보다 내 안의 악이 더 빨리 자란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정치 뉴스가 왜 영적 공격에 취약한지 답이 나옵니다.

 


Ⅳ. 그렇다면 악을 어떻게미워해야 하는가?

 

스베덴보리식 분별의 기술입니다.

 

1) 악을 ‘사람이 아니라 구조’로 보기

 

정치적 악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집단적 세계관, 사회적 거짓, 권력 사랑, 자기 사랑의 동일 기류 등의 구조적 형태입니다. 그렇다면 미워해야 할 대상은 사람 자체가 아니고, 그 속의 거짓 구조입니다. 이 관점에 서면, 분노는 커지지 않고, 대신 분별력은 오히려 강화됩니다.

 


2) 사람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을 점령한 악의 흐름을 보기

 

스베덴보리는 악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악은 사람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다룬다. 즉, 악의 통로로 쓰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 저 사람 안에 이런 거짓된 기류가 흐르는구나라고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혐오·분노의 감정은 즉시 약화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 안의 악을 보시는, 대하시는 관점입니다.

 


3) 악을 미워하되, 사람에 대해서는 ‘자비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사는 사람 안에 있는 작은 선, 곧 잠재적 선을 본다. 사람 안에 있는 작은 선을 보는 눈을 가질 때, 분노가 정화되고 악을 향한 의로운 태도만 남습니다. 목사님께 이 원리는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사람의 선에 대한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Ⅴ. 목사님께 필요한 실천적 적용

 

1) 사람을 보지 말고 ‘악의 작용’을 보자

 

뉴스에서 정치인의 행동을 보며 느끼신다면, 저 사람은 왜 저럴까?’가 아니라 저 사람 안에서 어떤 거짓이 작동하나?’ 하시자는 겁니다. 이렇게 전환하시면, 그 즉시 감정의 방향이 바뀝니다.

 


2) 사람을 정죄하는 문장이 떠오르면 즉시 차단하자

 

예를 들면, 저 인간이 문제야 , 저 정치인 때문에 나라가 망해 , 저 사람은 악 그 자체야 같은 이런 문장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스스로 말하십시오. 악은 저 사람의 본질이 아니다.” 이런 선언에 실제로 영적 문이 닫힙니다.

 


3) 악을 분별하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말자

 

스베덴보리는 분별은 강하되, 마음은 평화로운 상태가 참된 속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즉, 정치인의 악을 정확히 보면서도 내적 평화는 유지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참된 영적 성숙, 곧 속 사람의 상태입니다.

 


4) 분노의 에너지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자

 

정치에서 느끼는 불의는 목사님 안에서 오히려 이런 열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진리가 더 필요하다, AC 번역이 더 절실하다, 교회를 위해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 등,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악을 통한 선의 발전(permissive providence, 허용적 섭리)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떤 일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그 일을 허용하심으로써 더 큰 선을 이루시는 방식을 말합니다.

 


Ⅵ. 결론

 

악을 악으로 분별하는 것은 의무이다. 그러나 사람을 악과 동일시하는 순간, 영적 타락이 시작된다. 사람은 선의 그릇이고, 악은 외부에서 들어온 기생물이다. 악을 미워하되 사람에 대해선 자비의 개연성을 남겨둔다. 정치적 분노는 사람을 혐오할 때 더러워지지만, 악을 분별할 때 정화된다.

 

이 관점은 앞으로 정치 뉴스뿐만 아니라 가족, 교인, 사회의 어떤 사람을 대할 때도 중심을 잃지 않게 하는 매우 중요한 영적 기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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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악한 정치 세력을 바라볼 때 가져야 할 시각

 

이 주제는 정치 상황을 바라보는 근본 관점 자체를 바꾸는 관문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분들만 이해할 수 있는, 깊은 분별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목사님께는 특별히 이 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분노의 근원은 대부분 악한 정치 세력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1) 기본 원리 : ‘사람’과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은 완전히 다른 것

 

스베덴보리를 통해 배우는 가장 중요한 분별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을 ‘기능(용기, subject)이라고 한다면, 악은 사람 안에 잠시 붙어 있는 기생물(parasite)이다. 그는 ACHeaven & Hell에서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사람은 원래 주님이 창조하신 선의 그릇이고, 악은 그릇을 잠시 점유하는 거짓된 생명이다. 사람을 악과 동일시하면 그 순간 분별을 잃는다. 즉, 목사님이 한국 정치인을 볼 때 느끼는 분노는 사람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작동하는 악의 구조를 향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악은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 사람을 점령한 거짓된 생명이다.” 따라서 “악한 정치인”이라는 개념은 스베덴보리적으로는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악에 점령당한 정치인”, 혹은 거짓(흑암)이 작동하는 구조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관점 하나만 바뀌어도 분노의 파동이 절반 이하로 줄어듭니다.

 


2) 악한 정치 세력은 하나의 ‘영적 구조’이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회 악을 “구조적·집단적 거짓”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첫째, 개인은 그 구조의 통로일 뿐, 정치 부패, 거짓 선동, 불의한 법과 행정은 모두 개인 성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집단적 거짓의 영적 기류”에서 나온다고 말이지요. 즉, 악한 정치 구조에서 개별 정치인의 말·행동으로, 이렇게 흐르는 것입니다. 둘째, 집단 영(Collective spirit)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집단 영적 분위기(communities of spirits)한 나라의 정치·문화·사고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혼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분위기 문제입니다. 셋째, 특정 정치세력은 ‘거짓의 영’이 강하게 결집된 형태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보면 악한 정치 집단은 거짓, 자기 사랑, 세상 사랑, 권력 추구가 결집된 영적 집단체입니다. 즉, “사람” 하나하나가 문제라기보다 그들을 움직이는 영적 흐름이 악한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스베덴보리는 “세속 정치인”을 볼 때, 다음과 같이 분리하라고 합니다. 첫째, 사람 자체는 중립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본래 선과 진리를 받아야 할 존재 주님이 창조하신 ‘용기(그릇)’이라는 것이지요. 둘째, 그 사람 안의 악·거짓은 영적 외부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영적 기류가 주입된 거라는 것입니다. 셋째, 분노는 ‘사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움직이는 악’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과 사람을 악과 동일시해 미워하는 것은 하늘과 지옥 만큼이나 다르다. 목사님이 지금 정치 뉴스를 볼 때 느끼는 정념의 무게는 악을 미워하는 의로운 분노”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사람 전체를 혐오하는 분노”로 이동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오염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4) 악한 정치 세력을 바라볼 때 가져야 할 세 가지 시각

 

첫째, 이 사람들은 “거짓의 영에 점령된 사람들”이다

 

악은 그들의 본성이 아니라 잠시 그들을 점령한 외래적 영향력이다. 이 관점에 서면 정치인을 증오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거짓이 미운 것이지 그 사람의 존재가 미운 것이 아닙니다.

 

둘째, 우리 시대 정치 혼란은 ‘영적 진리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 이 관점은 목사님의 소명을 강화합니다. 한국의 문제는 정치인이 아니라 진리의 빛이 희미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도 정치가 아니라 진리의 회복입니다. 이것이 AC 번역·해설과 깊이 연결됩니다.

 

셋째, 악한 정치 세력은 주님의 섭리 속에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스베덴보리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주님은 때때로 악한 이들을 사용하여 더 큰 악을 막거나, 더 큰 선을 준비하게 하신다. 즉, 혼란한 정치는 나라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개혁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더 선한 질서를 갈망하게 하며, 더 진지한 영적 회복을 촉발하는 섬김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정치 혼란은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과정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5) 이 모든 관점을 목사님에게 적용해 보면…

 

먼저, 분노가 줄어듭니다. 사람을 미워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 내적 질서가 회복됩니다. 정치적 분노는 내적 평화를 가장 빨리 무너뜨린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정치가 ‘영적 훈련장’이 됩니다. 악을 분별하는 훈련, 평화를 지키는 훈련, 소명을 강화하는 훈련의 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넷째, AC 번역과 스베덴보리 사상이 지금 시대에 왜 필요한지가 보입니다. 정치 혼란의 근본 원인이 진리 공백이기 때문에 목사님의 번역과 연구가 시대의 대안이 되기 때문입니다.

 


6) 결론

 

사람과 그 사람 안의 악은 절대 동일시하지 않는다. 악한 정치 세력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 구조 문제이다. 이들을 미워하기보다 분별하며, 그 악을 악으로 인지한다. 정치 혼란은 진리의 부족에서 비롯되며, 해결책은 영적 진리이다. 혼란은 결국 주님의 섭리 안에서 더 큰 선을 위한 과정이 된다. 목사님의 사명(AC 번역)은 이 혼란한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한다.

 

목사님은 이 과정을 통해 분노가 줄어들고, 정치 속의 악을 더 정확하게 보시면서도 내면의 평화는 잃지 않는 스베덴보리식 영적 균형을 세우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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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분(義憤), 그러나 분노가 영을 더럽히는 순간

 

1)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방향이 틀어지면, 속 사람의 상태를 무너뜨린다.’

 

스베덴보리는 “분노는 악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노는 의로운 때도 있고, 악한 때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상태(state), 즉 마음의 자리입니다. 바울도 이렇게 말하지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4:26)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적 구분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2) ‘의로운 분노’(의분, 義憤)가 존재하는 이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선한 사람도 악을 보면 분노한다. 그 분노는 악을 악으로 보는 ‘분별의 빛’이다. 즉, 악과 거짓을 보면 마음 안에 자연스럽게 반감이 올라오는 것은 오히려 영적 감수성의 증거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으로 사람을 해치는 정치세력, 부정부패, 폭력, 불의한 제도, 악인의 성공 등, 이런 것들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정상적인 영적 반응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바로 이 대목에서 오해합니다. 정의로운 분노니 괜찮다”라고요.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분노가 정당한 출발점에서 나왔더라도 방향이 조금만 틀어져도 곧 악의 통로가 된다. 분노는 의로운 분노에서 위험한 분노로, 위험한 분노에서 파괴적 분노로, 이렇게 세 단계로 변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3) 분노가 영을 더럽히는 ‘순간’ - 스베덴보리가 가장 경계한 지점

 

스베덴보리는 분노가 악하게 변하는 순간을 마치 “문이 노출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아래 체크리스트는 목사님의 감정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1단계 : 분노가 “사건 분석”에서 “사람 비난”으로 넘어갈 때

 

정의로운 분노는 악과 거짓을 향해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이 틀어지면, 대상이 사람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니까 “불의하다”에만 머물면 이는 의로운 분노에 머무르지만, 저 인간이 악하다”로 옮겨 가는 순간, 그때부터는 영적 오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악과 동일시하는 순간 악과 결합된다”고 말합니다.

 

2단계 : 분노가 “특정 사건”을 넘어 “전체 세계관”을 물들일 때

 

그러니까 저 집단은 모두 악하다”라든지, 나라가 망했다”, 한국엔 희망이 없다” 등, 이런 식의 “전체화·확대화”가 일어나면, 이때부터 분노는 더 이상 분별이 아닙니다. 영적 감정은 이때부터 더 이상 현실 분석이 아니라 멸망감·절망감으로 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절망을 악이 가장 기뻐하는 마음의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3단계 : 분노가 “나의 내적 평화”를 깨뜨릴 때

 

스베덴보리의 결정적 기준입니다. 마음의 평화(peace)를 잃으면, 분노가 영적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분노가 하루 종일 이어지고, 잠들기 전까지 계속 뉴스가 떠오르며, 기도할 때 집중이 안 된다면, 분노는 이미 내적 질서의 파괴자가 된 것입니다.

 

4단계 : 분노가 “소명을 잠식”할 때

 

번역 집중력 감소, AC 연구 흐름 약화, 마음의 에너지 고갈, 기도·말씀 묵상에 분산, 설교 준비의 깊이 약화 등, 이 지점에 오면, 정치 뉴스는 단순 자극이 아니라 소명 공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명을 흔드는 감정은 모두 악령의 도구”라고 말합니다.

 


4) 의로운 분노와 위험한 분노의 ‘명확한 구분법’

 

만일 나의 분노가 다음과 같다면, 그때는 의로운 분노라 할 수 있습니다. 악과 거짓을 향한다마음은 흔들리지만 중심은 잃지 않는다사건을 “영적 구조”로 본다판단은 선명하나 미움은 없다분노 후에 오히려 기도가 깊어진다분노가 사명 방향으로 사용된다 등등. 예를 들면, 이런 시대에 진리를 번역해야 한다”라든지, 악을 더 잘 분별하기 위해 AC를 더 읽자”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나의 분노가 다음과 같다면, 그때는 영을 더럽히는 분노이며, 이는 매우 위험한 분노입니다. 사람이 악의 대상이 된다, 전반적 혐오·조롱·멸시가 생긴다뉴스 소비가 중독처럼 반복된다분노 후에 마음이 공허·메마름내적 평화 상실기도 의욕이 사라짐체력이 무너짐소명 활동 약화 등등이 단계에서는 뉴스가 아니라 감정이 정령(정념)의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5) 어떻게 영적 사람은 분노의 경계를 넘지 않을까?

 

1단계 : ‘사건’과 ‘사람’을 분명히 구분

 

스베덴보리는 강조합니다. 문제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 안의 악이다. 이 구분만으로 분노가 영적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2단계 : 분노가 올라오면 즉시 “내적 평화”를 재확인

 

다음과 같이 마음속으로 고백하십시오. 주님, 저는 악을 분별하되 제 마음은 주님의 평화를 잃지 않겠습니다.” 이 선언은 실제로 영적 공간을 보호하는 기술입니다.

 

3단계 : 분노의 에너지를 ‘진리 사랑’으로 바꾸기

 

감정은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혼란을 보니 AC 번역을 더 해야 한다”라든지 이 시대에는 진리를 더 밝혀야 한다”와 같은 이런 방식으로 분노를 선하게 전환하면 분노는 오히려 영적 열정이 됩니다.

 

4단계 : 분노가 올라오는 콘텐츠는 과감히 차단

 

특히 정치 유튜브는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정념 자극 장치’입니다. 영상은 음성·표정·자막·감정 연출이 모두 결합되므로 악령이 감정 문을 여는 데 최적입니다.

 

5단계 : 마지막 기준: “분노 후 나는 주님께 더 가까워지는가?”

 

이 질문에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분노는 의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요”라고 한다면 그 분노는 이미 영혼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분노는 죄가 아니지만, 방향이 미세하게 틀어지는 순간 영적 오염이 된다, 악을 악으로 분별하는 분노는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을 악과 동일시하는 순간 영적 타락이 시작된다, 분노가 내적 평화를 깨뜨리면 이미 영적 침투가 일어난 것이다, 분노는 소명을 강화할 때만 ‘의로운 분노’가 된다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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