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1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 곧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상태에 있었던 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는 천적 결혼(the heavenly marriage)을 나타내기 때문에, 교회는 여기서 결혼(a marriage)으로 묘사되며, ‘생명’(life)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 ‘하와’(Eve)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In this verse is described the first time, when the church was in the flower of her youth, representing the heavenly marriage, on which account she is described by a marriage, and is called “Eve,” from a word meaning “life.”
해설
AC.291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가 묘사된다’고 말합니다. 처음 읽으면 조금 의아합니다. 바로 앞 절에서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심판이 선포되었는데, 갑자기 ‘교회의 젊은 시절’과 ‘생명’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시간의 흐름으로 읽기보다 창세기 첫 세 장 전체의 결론으로 읽으면, 이 표현은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창3:20은 새로운 사건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전 생애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첫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창3:20-24는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다섯 구절로 압축하여 보여 주는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절은 교회가 처음 생명을 받던 때를, 21절은 타락 이후에도 주님께서 보호하시는 섭리를, 22절은 모독을 막기 위한 자비로운 제한을, 23절은 에덴에서의 추방을 통한 교회의 종말을, 그리고 24절은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각각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절은 단순한 다섯 사건이 아니라, 한 교회의 처음과 끝을 요약한 영적 결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20절을 보자마자 교회의 ‘처음’을 말합니다.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상태를 말합니다. 봄에 꽃이 막 피어날 때가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것처럼, 태고교회 역시 처음에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결합한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생명을 직접 받아들이며 살았고, 선과 진리를 분리하지 않았으며, 사랑과 지혜가 하나 된 상태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천적 결혼’(the heavenly marriage)을 나타내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천적 결혼이란 단순히 남녀의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 되는 천국의 질서를 말합니다. 사람 안에서는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바로 천적 결혼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결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참된 교회가 되므로, 성경은 교회를 신부와 아내로 자주 표현하며, 여기에서도 교회를 결혼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담의 아내는 ‘하와’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하와’(Eve)는 ‘생명’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이름이며, 이어지는 말씀에서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설명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생명입니다. 태고교회는 처음에 바로 이러한 생명 안에서 존재하였으며, 그 생명을 통하여 천국과 직접 연결된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하와’라는 이름은 한 여인의 이름을 넘어, 교회가 처음 받았던 주님의 생명을 상징하는 이름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창3:20은 창3:19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흙’과 ‘생명’을 나란히 보여 주면서, 한 교회의 처음과 마지막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생명’으로 시작했던 교회가 결국 ‘흙으로 돌아감’으로 끝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시간적으로 과거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이미 서술된 태고교회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조망하는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C.291에서 스베덴보리가 갑자기 ‘교회의 젊은 시절’을 언급하는 이유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결론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3:20-24 전체를 보면, 태고교회의 역사는 인간의 실패로 끝났지만,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생명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타락 이후에도 가죽옷으로 입히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생명나무를 함부로 범하지 못하게 막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절은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요약하는 동시에,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순간도 교회를 떠나지 않으신 주님의 구원 섭리를 함께 증언하는 아름다운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2026/07/19)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9, ‘주 은혜를 받으려’, 찬85, ‘구주를 생각만 해도’입니다.
오늘은창3일곱 번째, 본문은 창3:16-19이고, AC 글 번호로는 261번에서 279번입니다. 오늘로 창3 전체 세 마디 중 두 번째 마디(창3:14-19)를 마칩니다. 다음 주부터는 마지막 세 번째 마디 시작합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6-19)
제목은
주님을 떠난 사람,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
이며, 다음은AC.261-279입니다. 그전에 먼저 오늘 범위에 대한 요약 설명 후, 전체 글 중 특별히 몇몇 글을 리딩하겠습니다.
먼저 요약입니다.
오늘 읽을 본문은 창3:16-19에 대한 AC.261-279의 해설입니다. 이 본문은 겉으로는 여자의 임신과 출산의 고통, 남편의 다스림, 땅의 저주, 노동의 수고와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내려진 육체적 형벌 기록으로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는 태고교회와 그 교회 안 여러 마음 기능을 표상하며, 이 말씀 전체는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점차 돌아서면서 겪게 된 영적 상태의 변화를 묘사합니다.
먼저 ‘여자’는 교회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순수한 처음 상태의 교회가 아니라 proprium, 곧 자기에게 속한 것을 사랑함으로써 왜곡되기 시작한 교회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선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퍼셉션으로 직접 알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자기 생각과 자기 의지, 그리고 자기 지혜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타락은 외적인 범죄 하나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여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에서 ‘임신’은 마음 안에서 생각과 의도가 형성되는 것을 의미하고, ‘자식을 낳는 것’은 그렇게 형성된 생각으로부터 진리가 생겨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평안하게 지각할 수 있었지만, proprium이 들어온 뒤에는 진리 하나가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삶으로 태어나는 일에도 싸움과 고통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임신의 고통은 진리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의 근심을, 출산의 고통은 그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 내는 과정의 영적 싸움을 뜻합니다.
이 싸움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돌아서기 시작할 때, 악한 영들이 그 사람 안의 감각과 욕망을 강하게 자극하고, 동시에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려고 애쓰면서 일어납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신뢰하게 만들고, 천사들은 사람 안에 보존된 리메인스를 통하여 선한 애정과 참된 생각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영적 유혹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고통을 부과하시는 일이 아니라, 악이 사람을 끌어가려는 가운데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그를 붙드시고 구원하시는 과정입니다. 진리는 이 싸움 없이 사람의 실제 생명이 되기 어렵습니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에서 ‘남자’ 또는 ‘남편’은 rational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에서 남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을 표상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뒤에는 직접적인 퍼셉션과 참된 총명이 크게 손상되고, rational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rational은 총명 자체가 아니라 총명을 닮은 기능이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이어 주는 매개체입니다.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애정과 감각을 질서 있게 인도하면 유익하지만, proprium과 감각의 제안에 동의하면, 오히려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분리시키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라는 말씀은 단순히 남편이 아내의 말을 따랐다는 뜻이 아니라, rational이 proprium에서 나오는 욕구와 감각의 판단에 동의했다는 뜻입니다. 유혹은 감각에서 시작되었지만, rational이 그것을 승인할 때, 사람 전체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그 결과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땅’은 겉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돌아서고 분리됨으로써 저주받은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통로이며, 겉 사람은 애정과 기억, 생각과 행동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삶의 자리입니다. 선과 진리의 씨는 겉 사람의 애정과 기억 안에 심어지지만, 그 생명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옵니다. rational은 이 둘을 연결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rational이 감각과 proprium의 편에 서면, 겉 사람은 속 사람의 빛을 받지 못하게 되고, 사람은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안에 보존된 선과 진리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에서 ‘먹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산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담 개인이 평생 힘들게 농사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태고교회가 그 교회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비참하고 불안한 영적 상태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네 평생에’는 한 개인의 수명이 아니라 그 교회가 존속하는 모든 날, 곧 타락이 시작된 때부터 홍수로 그 교회가 끝날 때까지의 전 기간을 의미합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저주와 황폐를 의미합니다. 열매 맺는 나무와 추수가 선과 진리의 번성을 뜻한다면, 그 반대인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선과 진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악과 거짓이 차지한 상태를 뜻합니다. 황폐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거두어 가신 상태가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계속 거부함으로써 그것들이 삶 속에서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게 된 상태입니다. 열매가 맺혀야 할 겉 사람 안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는 것입니다.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은 사람이 들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참으로 사람 되게 하는 것은 뛰어난 추론 능력이나 육체의 형태가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생명을 받는 데 있습니다.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욕망과 감각, 자기 보존과 쾌락을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들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도 여전히 rational을 사용하여 매우 예리하게 추론할 수 있지만, 그 rational은 주님의 빛을 섬기지 않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됩니다.
마지막으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에서 ‘먹을 것’, 곧 ‘떡’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사람과 천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말기의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것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주님과 신앙 및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을 듣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기쁨과 평안으로 받아들여야 할 천적 양식을 반감과 수고 가운데 받아들이게 된 상태가 바로 ‘얼굴에 땀을 흘려 먹을 것을 먹는’ 상태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역시 단순히 육체가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흙’은 생명이 없는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 곧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정죄와 지옥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주님의 얼굴에서 돌아서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호흡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거듭나기 이전 겉 사람 상태로 되돌아가 마침내 영적으로 흙과 같은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신 결과가 아니라, 사람이 끝까지 주님으로부터 돌아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전체는 하나의 연속된 타락 과정을 보여줍니다. 감각이 천적인 것에서 돌아서고, proprium이 자기 욕구를 사랑하며, rational이 거기에 동의하자,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됩니다. 그 결과 진리는 싸움과 고통을 거쳐야만 태어나고, 삶은 수고와 불안으로 가득해지며, 선과 진리의 열매 대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랍니다. 마침내 사람은 천적인 것을 싫어하고, 자연적이며 감각적인 생명만을 따라 살다가 ‘흙’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단지 인간의 파멸에 관한 말씀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타락한 사람 안에서도 주님께서는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천사들을 통하여 그를 보호하십니다. 유혹과 고통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사람 안에 지켜야 할 영적 생명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생명을 회복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왜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결합,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셔야 했는지를 준비하여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창3의 타락에 대한 이 긴 설명의 중심에는 결국, 스스로 주님에게서 돌아선 사람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결합시키려 하시는 주님의 구원 역사가 놓여 있습니다.
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오늘의 흐름과 예배 리딩의 밀도를 함께 생각하면, 심화까지 포함하여 꼭 읽었으면 하는 글은 다음 세 부분입니다.
첫째는 AC.263과 그 해설입니다. 이 글은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가 왜 영적 싸움을 의미하는지 가장 실제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이 감각의 차원에서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면 악한 영들이 강하게 공격하기 시작하고, 함께 있는 천사들은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애쓴다는 설명은, 오늘 본문의 ‘고통’을 하나님의 형벌이나 단순한 심리적 괴로움으로 오해하지 않게 해줍니다. 또한 진리가 사람 안에 잉태되고, 삶으로 태어나는 과정이 왜 싸움과 근심을 동반하는지도 밝혀 줍니다. 오늘 리딩의 전반부를 이해하는 핵심 글이므로, AC.263 본문과 해설은 반드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둘째는 AC.268과 심화 ‘AC.118’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교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 고른다면 저는 이것을 택하겠습니다. AC.268은 ‘땅’이 왜 겉 사람을 의미하는지, 선과 진리의 씨가 왜 겉 사람의 애정과 기억 안에 심어지는지, 속 사람 안에는 무엇이 보존되어 있는지, 그리고 rational이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한꺼번에 설명합니다. 특히 rational이 본래는 속 사람의 빛을 겉 사람에게 전달하는 매개체이지만, 감각과 proprium에 동의하면 오히려 둘을 분리시키게 된다는 설명은 창3의 타락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여기에 심화 ‘AC.118’을 함께 읽으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 rational, 겉 사람으로 이어지는 본래의 인플럭스 질서와 창3에서 그 질서가 어떻게 무너졌는지가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셋째는 AC.276과 심화 ‘민21:5-6’입니다. AC.276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를 단순한 노동의 고통이 아니라,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싫어하고 멀리하게 된 상태로 해석합니다. ‘먹을 것’, 곧 ‘떡’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천적, 영적 생명의 양식이라는 설명과,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시라는 말씀은 오늘 본문의 결론을 주님 중심으로 모아 줍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 부르며 싫어한 민21:5-6 심화를 함께 읽으면, 천적인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타락한 사람이 그것을 부담스럽고 하찮게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 매우 실제적으로 전달됩니다. 오늘날 사람도 세상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즐거워하면서 말씀과 회개, 그리고 천국의 일은 부담스러워할 수 있다는 적용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리딩 순서는 AC.263, AC.268과 심화 ‘AC.118’, AC.276과 심화 ‘민21:5-6’이 가장 좋겠습니다. 첫 글에서는 영적 싸움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고, 둘째 글에서는 그 싸움이 일어나는 인간의 내적 구조를 이해하며, 셋째 글에서는 타락의 가장 깊은 결과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양식을 싫어하게 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오늘 본문이 단순히 ‘고통, 저주, 노동, 죽음’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돌아설 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어떻게 무너지고, 주님께서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 사람을 보호하고 다시 생명의 떡으로 이끄시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연결된 계시로 들릴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생명의 주님, 오늘도 창세기 3장의 깊은 말씀을 통하여 저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안에도 여전히 주님보다 자신을 의지하려는 proprium이 있고, 감각과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연약함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저희를 버리지 않으시고, 천사들을 통하여 보호하시며,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유혹을 허락,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저희의 rational이 감각과 자기 사랑을 따르지 않고, 언제나 주님의 빛을 받아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아름답게 이어 주는 통로가 되게 하시며, 저희 마음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열매가 자라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신 주님과 주님 말씀을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사모하게 하시고, 말씀을 듣고 배우고 행하는 일이 저희의 가장 큰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받은 말씀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고 저희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 되게 하시며, 이번 한 주간도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 가운데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과 감사를 주님께 올려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사28:15)for you have said,We have cut a covenant with death,and with hell have we made a vision;when the whip of inundation passes through,it shall not come to us;for we will set a lie as our protection,and in falsity will we hide ourselves(Isa. 28:15).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영적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결핍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거짓과 악을 선택,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한 결과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 말씀은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AC.290의 메시지를,그 반대편에서 매우 강렬하게 증언하는 본문입니다.
먼저‘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다’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죽음과 계약을 맺었다는 뜻이 아닙니다.말씀에서‘언약’은 결합을 의미하므로,이것은 사람들이 영적 죽음과 스스로 결합하였음을 나타냅니다.다시 말해,그들은 생명이신 주님과 결합하기보다 악과 거짓을 자신의 삶의 원리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죽음의 본질입니다.
또한‘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라’는 말은 자기 확신과 거짓된 안전감을 의미합니다.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교리,그리고 생활 방식이 자신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믿었지만,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AC.290의 관점에서 보면,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므로,그분을 떠난 모든 안전은 결국 허상에 불과합니다.
이어지는‘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라는 말씀은 더욱 직접적입니다.피난처는 본래 사람을 보호하는 곳입니다.그러나 이들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을 보호막으로 삼았습니다.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거짓은 생명을 전달하지 못하며,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진리의 인플럭스를 막습니다.그러므로 거짓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스스로 차단하는 행위입니다.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다’는 표현도 같은 의미를 반복합니다.사람들은 자신들의 악과 거짓을 인정하지 않고,그것을 정당화하는 거짓된 사고 속에 자신을 숨깁니다.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이러한 은폐가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합니다.오히려 그 거짓은 사람을 더욱 깊은 영적 죽음 속으로 이끌 뿐입니다.따라서 이 말씀은 영적 죽음이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AC.290에서 인용된 요8:21과 요8:24를 잘 보완합니다.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선언하셨고,이사야는 그 죄 가운데 머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그것은 거짓을 진리보다 사랑하고,허위를 안전으로 여기며,결국 사망과 결합하는 삶입니다.따라서 두 본문은 영적 죽음의 원인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바로 뒤에 인용된 사25:8과도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사28:15에서는 사람들이 사망과 스스로 언약을 맺는 모습을 보여 주지만,사25:8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사망을 영원히 멸하신다고 선포합니다.사람은 거짓을 선택,죽음과 결합하지만,주님께서는 진리와 생명으로 그 죽음을 깨뜨리십니다.이 대조는 생명의 근원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오직 주님께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28:15를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영적 죽음의 실체와 그 원인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입니다.사람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주님을 떠나 거짓과 악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는 순간 영적 죽음과 결합하게 됩니다.반대로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진리와 선을 받아들일 때만 주어집니다.따라서 이 구절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떠난 모든 거짓된 의지와 거짓된 신뢰는 결국 영적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오직 주님만이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심을 역설적으로 증언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