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에게 크게 화를 낸 이유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눅4:23-30)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님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는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더 잘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주님은 당시 교회가 그들에게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오늘날 기독교회라고 불리는 교회 안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기독교회의 교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이지만, 소수의 사람들만 마음으로 주님을 인정하고, 그나마 사랑에서 비롯한 애정으로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숫자가 더 작다. 그러나 교회 밖의 개종한 이교도들은 다르다. 이들은 주님을 그들의 한 분 하나님으로 예배하고 공경한다. (AC.9198:2,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라틴) 9198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 및 Potts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hat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country’ signifies that the Lord, and the Divine truth which is from him, are less received and loved in heart within the church, than outside of it. He spoke to the Jews, with whom the church then was; and it is known that the Lord was less received by them than by the nations outside the church. The case is similar at this day in the church which from him is called the Christian church. In this the Lord is indeed received in doctrine; but only by a few with acknowledgment of heart; and by still fewer from the affection of love. It is otherwise with the converted gentiles outside the church. These worship and adore him as their one only God, (AC.9198:2, Clowes 역)

 

이는 출애굽기 22장 22절,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에 관한 주석 중 ‘과부나’(Any widow)에 대한 내용입니다. //

 

 

그동안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왔는데, 오늘 맑은 하늘을 보니 여러 가지로 기분이 상쾌합니다. 양동룡 부목사님께서 휴가를 가셨는데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17년 7월 30일,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를 원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에는 주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성경을 읽으시고, 사람들은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평화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주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을 질책하시고, 그러는 주님에게 사람들이 화를 냅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 밀쳐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주님과 회당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겉뜻으로는 어리둥절한 이 상황, 그 이유를, 하지만 속뜻을 통해서는 알 수 있는데요, 23절입니다.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주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자기들에게도 똑같이 행하라고 요구할 거라 말씀하십니다. 가버나움에서 주님이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가버나움은 주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신 갈릴리 북쪽에 있는 동네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요, 가령,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도 고치시며, 천정을 뜯고 달아 내린 중풍병자도 고치시는 등 많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이란 그곳에서 행하신 여러 기적을 말합니다. 기적이란 노력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행운이 찾아오거나, 또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주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일들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어가는 심령들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였고, 그러한 역사는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사렛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기적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들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 저는 특히 이 신유(神癒), 즉 병 고침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마 개척 전 부사역자로 있던 중형교회에서의 경험 때문인 것 같은데요, 저는 그때 한 80여 세대를 담당하는 마을사역자였습니다. 거의 웬만한 큰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겪어야만 했었는데요, 그중 열에 일곱은 이 질병과 장애, 장례에 관련된 일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저는 특히 복음서 내용 중 주님의 치유의 현장이 늘 부러웠고, 주목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비밀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아마 ‘나는 내가 안수하는 자마다 낫는다’라는, 치유의 은사로 좀 유명해지고 싶은 공명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지만... 그러나 정확하게는, 마을 목원들의 그 아픔과 안타까운 사정들을 좀 해결해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더랬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수도원 공부를 하게 되고, 그러다가 스베덴보리를 알게 되어 지금은 이 일, 이 길을 소명으로 받아 벌써 햇수로 8년째입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어렴풋이 그 어떤 영적 원리 내지는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은데요, 그것은 바로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라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12장에 나오는 내용 덕분입니다. 즉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며, 천국은 사람의 모든 신체, 곧 머리, 몸, 팔과 다리 등에 상응하는 수많은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그런 천국과 상응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몸 어디가 아프면 그 부분에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들의 인플럭스(influx, 입류)를 통해 그 능력을 공급받으면 되는 것이지요. 좀 엉뚱하고 믿기 어려운 내용이시겠지만... 하여튼 저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쑤욱 들어왔으며, 그러니까 그냥 믿어졌으며, 드러내어 밝히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저는 이렇게 제 몸에 대해 적용, 나름 상당한, 거의 확실하다는 걸 알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물론, 저도 때로는 약도 쓰고, 병원도 다닙니다만, 네, 하여튼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記述)이 믿어지려면 사람의 내면이 열려야 합니다. 내면이 닫히면 천국을 향한 창이 닫혀 천국의 모든 걸 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람의 내면은 세 단계로 되어 있는데, 단계마다 천국에서 흘러들어오는 것들이 차원이 다릅니다. 아마 천국이 삼층천으로 되어 있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고침 받은 복음서 여러 케이스는 그 내면이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확실히 열렸던 사람들이지 싶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내면이 어디까지 열렸는가를 보시고, 엔터키만 치셨던 거 같아요. 여러분도 이 사실을 믿어 내면이 열리고, 그래서 동일한 은혜를 입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 있기 때문에, 속뜻으로는 이방인의 지역을 뜻하고, 또한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건 지난주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으며, 심지어 주님을 배척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나사렛을 주님의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나사렛을 주님의 고향이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세우신 교회를 뜻하기 때문이며, 주님의 고향은 천국, 또는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속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일입니다. 그다음에는 겉 사람을 변화시키시지요. 어떤 방법으로 변화시키십니까? 겉 사람 안에 진리의 씨를 뿌리십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진리의 씨 뿌리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 바로 전 본문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즉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나사렛 사람들이 그 말씀을 경청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한다는 것은 귀의 작용이며, 그러므로 겉 사람 안에 있는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 애정 안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겉 사람 안에 교회를 세우시고, 궁극적으로 그곳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교회가 24절에서 말하는 주님의 고향 나사렛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교회가 가버나움의 기적을 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각 사람의 내면에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는 진리에 대한 애정 위에 세워집니다. 우리 역시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새 교회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가 세워지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계속 발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 가졌던 진리의 애정을 잃어버리게 되니까요. 처음 가졌던 진리에 관한 애정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진리를 악용하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악용한다는 것은 진리를 주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자기 자신을 위해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써야 합니다. 지난번 교리 강좌에서도 우리는 구원을 위해 믿는가, 아니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믿는가? 라는 문제를 서로 얘기했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누구나 구원을 받기 위해 나옵니다. 즉 천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그걸 최종 목적으로 삼는 걸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나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 때 천국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을 생각하는 신앙, 그런 신앙을 새 교회에서는 자연적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가버나움의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 자기들은 그냥 앉아서 또 무슨 신기한 기적이나 구경하고 있겠다 하는 사람들은 자연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이웃을 위한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녀가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를 원하고, 또 질병의 치유를 바라며 사업의 성공을 바랍니다. 그러한 것들이 다 가버나움의 기적 구경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하신 말씀은 자연적 신앙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을 산으로 끌고 가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리려 하는데, 바로 그런 것이 자연적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말씀에서 선지자는 성경, 즉 말씀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가장 큰 선지자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말씀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지자의 고향이란 어디입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가 선지자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은, 자연적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가 자연적 교회였구요, 오늘날에는 기독교회가 자연적 교회입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은 뜻으로는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 있는 자연적 신앙이 자연적 교회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 주님이 들어가실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환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것에 대해 주님은 25절로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여기서 엘리야 선지자 역시 말씀으로서 주님을 표상합니다. 엘리야 시대라고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많은 교회가 각각의 영적 상태에 따라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말씀을 왜곡했고, 어떤 교회는 말씀 안의 진리를 말살했습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교회가 선지자를 핍박, 심지어 죽이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 시대는 영적으로 어떤 상태의 교회일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에서는 그때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으며,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이 닫힌 것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속 사람이 닫혔다는 뜻입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속 사람이 닫혔기 때문에 겉 사람 안으로 진리와 선이 더 이상 흘러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 것들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속 사람이 닫히고 선과 진리의 흐름이 끊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흉년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 내면의 교회가 타락하게 됩니다. 교회가 타락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말씀에서는 삼 년 육 개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3년 6개월은 교회가 타락해 문을 닫기 직전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한 상태를 다른 곳에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단7:25)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한 해와 두 해를 합하면 삼 년이고, 거기에 반년을 더하면 3년 6개월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계시록에서는 ‘천이백육십 일’(계12:6)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를 한 달을 삼십 일로 계산하면 42 개월, 즉 3년 반으로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즉 교회가 영적으로 완전히 타락해 문을 닫는 상태가 되었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교회를 나타내지만, 영적인 교회는 아니고 자연적 교회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교회 안에 영적인 것이 남아 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곳에 과부가 많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 과부는 선이 없는 진리를 나타내거나, 또는 진리가 없는 선을 나타냅니다. 과부는 이렇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본문에 이스라엘의 과부는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진리만 있고 선이 없다는 것은, 진리를 지식으로만 접근할 뿐 실천하지는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읽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내면으로 빛이 흘러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봐도 진리인지를 모릅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어떻게 진리가 보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 과부에게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다는 것은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진리의 깨달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진리의 깨달음을 주실까요? 사렙다의 과부와 같은 사람, 수리아 사람 나아만과 같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사렙다의 과부는 앞에서 말한 이스라엘의 과부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과부가 선이 없는 진리라면, 사렙다의 과부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에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순종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갈구합니다. 주님은 그런 그녀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흉년 내내 부양하게 하셨습니다. 부양한다는 것은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그의 영을 먹이시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과부의 집에 기름과 곡식이 끊어지지 않는 것, 곧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17:16)로 표현했습니다.

 

여기 나아만 이야기는 아래 열왕기하 5장 말씀으로 대신합니다.

 

1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4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5:1-14) //

 

주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자, 사람들이 주님께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려고 합니다. 28, 29절에는 나사렛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주님께 화를 내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우리 역시 그럴 때가 있습니다. 진리를 통해 감추고 싶었던 내면의 악이 드러날 때, 그리고 간절히 원하던 어떤 것을 주님께서 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속으로 불평하거나 원망합니다. 그런 것이 주님께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자연적 신앙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있어 진리가 방해가 될 때는 화를 내며 진리를 밀어냅니다. 여기 ‘그들이 일어나’라고 했는데 이 말은 본래 진리에 대한 사랑이 뜨겁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한 것으로 봐서 그들이 지금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동네는 교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동네에서 주님을 쫓아내는 것은 교리 속에 들어있는 내적 진리를 말살하는 것입니다. 내적 진리란 말씀의 지식 속에 들어있는 선이며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어버리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산은 사랑 또는 선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동네가 건설된 산’이란 교리의 바탕에 있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 마음 가운데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주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즉 교리의 바탕에 있는 사랑을 몰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진리에 대한 사랑은 없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동네가 건설된 산 아래로 주님을 밀어내는 것은 교리로부터 교리의 생명인 사랑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진리를 가지고는 자신은 물론이고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동네가 건설된 산에서 밀쳐 떨어뜨릴 때,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신다는 것은 주님은 어느 곳에나 임재해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나 쫓아내는 사람에게나 주님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가 주님의 손을 잡기를 기다리시면서 항상 임재해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처음 새 진리 안으로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에게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혹시 타성에 젖어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거듭남의 길에서 한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정체가 아니라 후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오리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계속 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고요, 십계명의 법으로 자기를 비춰보면서 자기 안에 있는 거짓과 악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매일 조금씩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나사렛 사람들의 신앙을 기적을 바라는 신앙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렙다의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신앙을 가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본받으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아만은 엘리사가 말한 대로 나병을 고치기 위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었습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따라 자기와 외동아들이 먹을 마지막 양식을 선지자에게 드렸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선량한 이방인들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 전체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버리는 그런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신앙은 자연적 신앙에서 영적 신앙으로, 영적 신앙에서 천적 신앙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출15:26)

 

아멘

 

원본

2017-07-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3(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3. 2023-03-23(D5)-매일예배(2440, 눅4,23-30),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에게 크게 화를 낸 이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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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1.12.87-102.'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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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9:3)

 

 

기쁨이 없는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니고, 생명이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은 기쁨으로부터 나오고, 그것이 이른바 즐거움이다.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자체로 물질이고, 생명이 없는 것이며 죽은 것이다. 그러나 질서에 따라 내적인 것에서 비롯한 기쁨과 그 기쁨에 바탕은 둔 즐거움은 생명을 지닌다. (천국의 비밀 995, 이순철 역) Pleasure without delight is not pleasure, but is something without life, and only from delight is and is called pleasure. Such also as is the delight, such is the pleasure. Corporeal and sensuous things are in themselves only material, lifeless, and dead; but from delights which come in order from the interiors, they have life. (AC.995)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창9:3 중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에 관한 주석 내용 일부입니다.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서울 새 교회 전 담임 이순철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아주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선친께서 저와 동생을 앉혀 놓고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가끔 물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동생은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물쭈물하며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지요. 장래에 뭐가 되겠다든가, 해 보고 싶다든가 하는 꿈을 꿔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시절에 우연히 친구의 집에 갔다가 일제 릴 테이프 녹음기로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일반 녹음기와는 소리가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인생의 꿈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좋은 음향기기로 음악을 듣겠다는 꿈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그렇게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취미일 수도 있고, 일일 수도 있고, 또는 거창한 무슨 이상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에 끌리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기쁨이나 즐거움 때문입니다. 기쁨이 없다면 일도 인생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쁨이나 즐거움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저의 경우는 어릴 때의 꿈을 한동안 좇다가 어느 시점에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꿈을 좇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는데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눈이나 귀, 입 같은 감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새 교회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물질이나 감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차원이 낮은 기쁨, 즉 외적인 기쁨이고, 그보다 차원이 높은 기쁨이 있는데, 그것은 선과 진리로부터 얻는 내적인 기쁨이다. 외적인 기쁨은 내적인 기쁨과 연결될 때 진정한 기쁨이 된다.

 

그러니까 내적이지 않고 그저 외적이기만 한 기쁨은 찰나적이고 공허한 기쁨이며, 그러므로 죽은 기쁨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창세기 9장 3절의 말씀은 바로 이런 것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영어 성경의 번역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땅을 기는 모든 살아있는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먹을 수 있는 풀도 내가 다 너희에게 주노라 Every creeping thing that liveth shall be food for you; as the esculent herb have I given it all to you.

 

이 말씀은 홍수가 끝난 뒤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노아’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아담교회, 즉 태고교회가 무너지고 새로 생긴 고대교회와 그 교회의 사람들을 뜻합니다. 홍수가 끝난 후, 그들이 방주에서 나왔다는 것은 고대교회 사람들이 영적 시험을 모두 이기고 거듭난 것을 의미합니다. ‘홍수’는 거듭나는 과정에서의 시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거듭난 노아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두 가지 먹을거리를 주셨다고 하는데요, 하나는 ‘모든 산 동물’(Every creeping thing that liveth)이고, 다른 하나는 ‘채소’(the esculent herb)입니다.

 

먼저 ‘모든 산 동물’(creeping thing, 땅을 기는 동물)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가장 차원 낮은 기쁨, 즉 감각의 기쁨을 뜻합니다. 땅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몸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감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 그래서 사람을 이루는 몇 가지 중 감각과 관련된 것(the sensuous part)을 ‘’(창3:1)이라 하였고, ‘발꿈치’ 역시 그래서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창25:26) 등이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각의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요? 예를 들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한다든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음악을 듣는 것처럼 오감으로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들은 자칫하면 신앙인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노아교회 사람들에게 그러한 기쁨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들은 저속한 외적 기쁨을 내적 기쁨으로 승화(昇華, 한 단계 더 높은 상태가 됨)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땅을 기는 살아있는 동물을 먹을거리로 삼는다는 것은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 감각의 기쁨까지도 내적인 것, 즉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감각의 즐거움이 그렇게 내적인 것을 위해 쓰임 받을 때 그것은 살아있는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냥 땅을 기는 동물이라고 하시지 않고, 땅을 기는 살아있는 동물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신 것입니다. 먹을거리로 주신다는 것은 그러한 기쁨을 마음껏 즐기도록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통해 주님과 이웃을 섬기려고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좋은 음식이나 좋은 옷, 좋은 집을 주시고, 때로는 좋은 곳을 여행하게도 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에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을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앙인들에게 물질이나 감각의 기쁨을 어느 정도 허락하십니다. 마치 광야를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때로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 즐거움을 허락하십니다.

 

최근 어느 스님이 젊은 나이에 좋은 집에 살면서 값비싼 전자기기를 가지고 일을 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는데 그것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성직자가, 종교인이 무소유의 삶을 살지 않고 호사를 부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새 교회 교리의 관점에서 보면, 성직자라도 지나치게 재물을 많이 모으거나 사치를 부리지만 않는다면 재산이 있다는 게 큰 흠이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일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안락한 삶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인들 가운데는 세속의 것들에 담을 쌓고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누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물질 자체에 빠지면 안 되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데 그것들을 선용해야 합니다. 인생의 홍수를 통과하면서 거듭난 사람들은 이 단계의 삶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김은경 역) 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The Rich and the Poor in Heaven)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먼저 얘기해 둘 것은, 사람은 술책이나 사기가 아니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부를 얻고 쌓아도 되며, 너무 빠져들지 않는 한 고급 음식을 즐겨도 되고, 조건에 따라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조건이 같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오락을 즐기고 세상사를 얘기해도 된다는 사실이다. 또 경건한 사람처럼 슬프고 애통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즐겁고 활기에 넘칠 수 있다. 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것을 주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사람이 세상 사람과 겉으로 보기에 똑같이 살아도, 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올바로 가지며, 이웃에게 신실하고 공정하게 대하기만 하면,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HH.358)

 

사람이 신을 인정하고, 이웃을 선의로 대하기만 한다면, 겉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도 되고, 부자가 될 수도 있으며, 형편과 역할에 따라 풍성한 식탁과 우아한 집과 좋은 옷을 갖추고 살 수도 있고, 즐거움과 만족을 누려도 되며, 직무와 사업을 위해, 그리고 정신생활과 육신 생활을 위해 세상일에 종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결론을 낳는다. 즉 천국에 가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일한 어려움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저항하고, 그 두 사랑이 지배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 두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주의 말씀은 이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 30)

 

주의 멍에는 쉽고 주의 짐은 가볍다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에 저항하는 정도만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물리치고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HH.359)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선한 쓰임새란, 자신과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 그리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선한 쓰임새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사람이 나태한 생활에 빠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나태한 생활은 사람의 생각을 그 타고난 악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에 해롭다. 쓰임새는 그 안에 신성을 담고 있는 만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신과 천국을 바라보고, 이 쓰임새에서 유익을 찾으며, 재물은 오직 부수적 유익으로 여기는 정도만큼 선하다. (HH.361)

 

가난한 사람은 그들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생활에 따라서 천국에 간다. 모든 사람의 생활은 부자이건 가난하건 상관없이 그 사람을 따른다. 어느 한쪽을 선호하는 특별한 자비는 없다. 선하게 산 사람은 들어가고, 선하게 살지 않은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가난도 재물과 전혀 다름없이 사람을 천국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자기 형편에 불만하고,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쓰며, 재물이 축복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재물을 얻지 못하면 화를 내며, 신의 섭리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품는다. 또한 그들은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을 질투하고, 기회만 오면 누구든 속일 태세이며, 불결한 쾌락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와 다른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자기 형편에 만족하고, 성심껏 부지런히 일하며, 태만함보다 일을 사랑하고, 정직하고 신용 있게 행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때로 이 세상에 살 때 하나님을 믿었고, 공정하고 바르게 자기 일을 행한 농부들이나 서민층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았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체어리티와 신앙에 대해 계속 질문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는 신앙에 대해서, 저세상에서는 체어리티에 대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었다. ‘체어리티는 모두 생활에 속한 것이고, 신앙은 모두 교리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체어리티란 모든 일에 있어서 공정하고 바른 것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이며, 신앙은 공정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리와 그에 따른 생활처럼, 또는 생각과 의지처럼 서로 결부되어 있다. 사람이 그가 생각하는 공정하고 올바른 것을 의도하고 행할 때, 신앙은 비로소 체어리티가 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그 사람들은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매우 기뻐했다. 믿는다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생활임을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HH.364) //

 

다음은 ‘채소’(the esculent herb), 즉 먹을 수 있는 풀도 함께 주셨습니다. ‘’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풀을 먹을거리로 주시는 것은 진리를 배우는 기쁨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미 거듭난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선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배우는 기쁨은 거듭난 사람에게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지요. 늘 말씀드리지만,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다음에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거듭나게 되면 먼저 선을 행하고 그러다 보면 진리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진리를 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는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노아에게 풀을 주셨을까요?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냥 풀이라고 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풀’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기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고 ‘살아있는 기는 동물’을 주셨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먹을 수 있는 풀은 내적 기쁨과 연결된 진리의 기쁨을 뜻합니다. ‘내적인 기쁨’이란 쓰임(use)의 기쁨, 쓰임 받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진리의 기쁨은 진리 자체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려고, 쓰임 받으려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그럴 경우, 주님께서는 거듭난 사람이라도 진리의 기쁨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먹을 수 있는 풀을 양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사용하려는 목적이 아니면, 쓰임 받기 위해서가 아니면 진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선을 행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 위 인용글들 중 특히 쓰임새가 나오는 다음 글처럼 말입니다.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들의 모든 기쁨은 감각의 기쁨이든 진리에 대한 기쁨이든 반드시 내적인 것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기쁨이 됩니다. 모든 내적인 것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기쁨을 살아있게 만드는 내적인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인애(仁愛), 즉 이웃에 대한 사랑,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체어리티는 가난한 사람, 소외된 이웃에게 필요한 걸 베푸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기꾼이나 도둑처럼 악한 사람들까지도 포용하는 것이 체어리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 교회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새 교회에서는 진정한 체어리티는 이웃의 진실과 선을 사랑하는 것이지 악과 거짓까지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의 근원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어리티는 한편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체어리티는 또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면서 동시에 체어리티를 행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체어리티를 행한다면 그건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진정한 체어리티는 마음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하고 진리와 선을 사랑해야 합니다. 체어리티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체어리티의 마음을 가지고 물질을 사랑하고 감각에 속한 걸 사랑해야 합니다. 만약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면 겉으로 보여지기 위한 사랑입니다. 또한 체어리티 없는 상태에서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라 지식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것은 읽지 않는 책을 사 모으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일입니다. 또 체어리티 없는 상태에서 감각의 기쁨을 추구하면 영적으로 피폐해집니다. 그럴 경우, 점점 더 자극적인 기쁨을 원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결국 타락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쁨을 추구하든 체어리티의 기쁨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그때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 또는 체어리티와 신앙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몸의 감각과 서로 연결 되어 죽어있던 감각의 기쁨이 살아있는 것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부디 새 교회 모든 성도는 주님 주시는 세상 기쁨을 누리고 즐기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체어리티로부터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아멘

 

2020-11-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16(D1)-주일예배(2589, 창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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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3-16(D1)-주일예배(2589, 창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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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4:14-22)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인성에 있어서는 신적 진리 자체이셨고, 생명의 본질에 있어서는 신적 선 자체이셨다. 그리고 신적 선은 사람에게 아버지의 혼이라 불리는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은 여호와로부터 잉태하셨으며, 말씀에서 ‘여호와’는 모든 생명의 본질인 신적 사랑에서 비롯한 신적 선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본질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셨다. 왜냐하면 신적 선이 주님 안에 있었고, 그 선에서 발현되는 신적 진리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주님의 인성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AC.9954:11,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9954번 글 11번 항에 대한 Clowes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For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in respect to the human, the Divine truth itself; and in respect to the very being of his life, he was the Divine good itself, which with man is called the soul from the father; for he was conceived from Jehovah, and in the Word ‘Jehovah’ denotes the Divine good of the Divine love, which is the being of the life of all. From this it is that the Lord alone was ‘the Anointed of Jehovah’ in very essence and in very performance, because the Divine good was in him; and the Divine truth proceeding from this good was in his human while he was in the world (see the places cited in n. 9194, 9315). (AC.9954:11, Clowes 역)

 

이는 출애굽기 28장 41절,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에 관한 주석 중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40일간 광야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경 구절을 읽으시고, 사람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사실 이 말씀 뒷부분에는 갈릴리 사람들이 주님을 모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렇게 말씀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차이가 있는지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과 다음 주 두 주에 걸쳐 한 구절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4절입니다.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주님은 광야에서 돌아오셨을 때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광야에서 돌아오셨다는 것은 시험에서 이기고 돌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이 시험이 겉으로는 세상 계실 때 주님이 당하신 시험이지만, 속뜻으로는 거듭나는 사람의 내면에서 그 사람과 함께 싸우시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돌아오실 때 주님은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위 광야 시험의 속뜻을 생각할 때,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거듭나는 사람이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주님께서 그들의 겉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속뜻으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거듭나는 사람 안의 겉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잠깐, 겉 사람, 속 사람 등의 용어 정리를 좀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이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아직은 육(肉)을 입고 살아 있는 상태이기에 ^^,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간단하게는 inmost(가장 안쪽), internal(속), external(겉), body(몸)라는 이 네 가지를 이해하시면 되며, 좀 더 명확성을 위해 영어를 그대로 쓰겠습니다. 여기서 앞의 세 개까지가 영, 나머지인 body는 육, 우선은 이렇게 이해하고 계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참고로, 이들 네 가지는 사람 생전엔 모호하지만, 일단 사후, 영이 되면 그때는 아주 명료해지는 그런 거라고 합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영과 육의 분리가 일어나고요, 그때 제일 먼저 body가 분리됩니다. 즉 body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를 그대로 가지고 영계에서 깨어나게 되지요. 사후 첫 번째 상태는 준비상태로, 그동안 bodyinternal 사이에서 수고한 external이 정리, 휴면 상태에 들어갈 준비를, 그리고 internal이 전면에 드러날 준비를 하는 상태입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계의 영원한 삶은 이 internal로 살아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상태 때는 아직은 생전 식구들이나 친구, 지인들이 서로를 알아봅니다. 알아보고 아주 반가워들 하지요. 사후 두 번째 상태가 되면, 이제 external은 휴면 상태로 들어가고, internal 상태가 되는데, 이때는 살아생전 한 식구였던 사람들끼리도 서로 못 알아봅니다. 본인은 물론, 식구들 역시 서로의 영, 그러니까 internal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요, 생전 식구들이 본 서로의 모습은 external이지 internal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말이, 지상 혈연은 지상으로 끝, 영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말씀을 그동안 드린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inmost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네, 우선은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이 처음 거듭날 때는 먼저 속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것을 우리는 개혁(reform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속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졌지만, 겉 사람의 상태는 아직 교회 밖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이를테면 속 사람은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지만, 겉 사람은 주님을 믿지 않고, 심지어 주님을 배척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겉 사람은 마치 이방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다가 겉 사람이 시험에서 한 번 이깁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선 끝에 가까스로 주님 손잡고 시험에서 이긴 것이지요. 그때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교회의 작은 초석을 하나 세우십니다. 그런 과정이 수없이 되풀이되어야 궁극적으로 겉 사람 안에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돌아오시면서 다른 곳으로 가시지 않고 갈릴리로 오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회당’은 속뜻으로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유대 교회의 회당은 교리를 가르치는 곳이었고요, 또 교리의 해석이 다를 때, 그것을 조정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당은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오셔서 새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또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는데, 뭇사람은 겉 사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선한 애정들과 생각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칭송했다’는 것은 애정들과 생각들이 주님이 가르치시는 교리를 잘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지각이 흘러들어올 때, ‘이것이 참 진리로구나!’ 하고 공감하는 것이고요, ‘이제부터는 이대로 살아야 하겠구나’ 하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뭇사람들이 칭송하는 모습입니다. 16절입니다.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셨다’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역시 갈릴리 지역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겉 사람 안의 어느 부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는 말은 주님은 겉 사람 안에서 성장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어떤 분에게는 구유에 갓 태어나신 주님이 계시고요, 어떤 분에게는 성전에서 랍비들과 진리를 토론하는 주님이 계십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청년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각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은 그렇게 성장 정도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성장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이 악을 끊고 선을 행할 때마다, 그것에 비례해 주님도 조금씩 자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나사렛을 주님이 자라나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셨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본래 완전히 거듭나서 더 이상 시험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식일’은 하나의 시험이 끝나고 다음번 시험이 올 때까지의 잠시 동안의 평화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그 기간 동안 주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실까요? 우리에게 말씀을 읽어주시고, 말씀을 통해서 교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시는 교리는 어떤 것입니까? 삶의 다양한 상황에 맞게 진리를 올바르게 적용하는 지혜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원론이라면, 원론에서 파생되는 수없이 많은 각론이 있습니다. 그 각론들이 주님께서 오늘 회당에서 가르쳐 주시는 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사야서 61장을 펴시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17절로 19절입니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하십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은, ‘선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잉태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기름’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럼에도 고대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직분을 받을 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주님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당신 스스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오신 이유에 대해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십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는 누구며, 눈먼 자는 누구일까요? 기본적으로 이들은 모두 선과 진리에 대해 무지하여 악과 거짓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다르게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영적 상태가 조금씩 다르고, 그러므로 구원의 처방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난한 자’는 자신에게 진리와 선의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진리와 선에 대한 지식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고자 했던 나사로와 같은 사람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에 비해 ‘눈먼 자’는 진리와 선을 모르기는 가난한 자와 마찬가지이지만, 주님을 믿지도 않고 진리를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르쳐 주면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포로 된 자’는 악과 거짓의 유혹에 넘어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 중에는 진리를 전혀 몰라 그렇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알면서 악에 빠진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포로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눌린 자’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거짓이 거짓인 줄 모르고, 진리가 진리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진리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눌린 자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진리로 알고 신봉하면서, 진리를 말하면 배척하고 심지어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눌린 자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르지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깨닫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오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참 빛이시기 때문이지요. 참 빛이 있어야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주님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20절입니다.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0절에서 주님은 책을 덮어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셨습니다. 여기서 ‘맡은 자’는 영어 성경의 표현으로는 minister, 즉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실 때, 반드시 섬기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는 우리 안에 있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 섬기는 자들은 주님께서 우리 속으로 오시는 것을 원하며,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 적극적으로 시중을 듭니다. 주님은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말씀을 읽어주시거나 교리를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섬기는 자들이 성경을 주님께 갖다 드려야 읽어주시고요, 그리고 그때 그 말씀에 있는 내적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주님의 모든 선한 역사는, 주님과 우리 안에 있는 섬기는 자와의 교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섬기는 자가 성경을 가져다 드리자 주님께서 성경을 읽으셨고, 성경을 다 읽고 덮으셨을 때, 다시 섬기는 자에게 맡기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앉다, 서다, 걷다라는 말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앉는 것’은 가장 내적인 상태, 그러니까 의지의 상태를 나타내고요, ‘서는 것’은 의지로부터 무엇인가를 의도하는 것을, 그리고 ‘걷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리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겉 사람의 의지 가운데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의 의지 가운데 계실 때, 겉 사람은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습니다. 21절입니다.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앉으셨다’는 말과 ‘너희 귀에 응하였다’는 말은 서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귀에 응하였다’는 것은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귀에서 이루어졌다’입니다. ‘’는 아시는 바와 같이 순종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은 주님의 가르침을 머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제 의지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시험에서 이기고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실 때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시험을 이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끝으로 22절입니다.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이 증언했다’는 것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를 인정하고 고백했다는 뜻입니다. 또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했는데, 이때 ‘요셉’은 신성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요셉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아닙니다. 그러면 야곱의 아들 요셉과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이 사람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고, 이 사람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세상 관점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가 야곱의 아들인지, 마리아의 남편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천사들은 그냥 요셉이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갖는 내적 의미에만 집중합니다.

 

※ 아래는 이런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합니다.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그리고 사도들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갔는지 천사들에게 물어보았다. 천사들은 대답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그렇게 천국에 간 사람은 없고, 모두 이 세상에서의 삶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존경받지 않는다. 그들이 말씀 안에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내적 의미로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을 의미하고, 다윗은 주님의 신적 왕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주의 신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이 사람들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천국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이름을 천사들은 방금 설명한 대로의 주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천국에 있는 말씀(259항 참조)에는 그런 이름들이 나오지 않는다. 천국에 있는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성경 말씀의 내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HH.526:4, 김은경 역) //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요셉과 야곱의 아들 요셉은 천사들이 볼 땐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한 것은, 세상 시각에서 볼 때는, ‘목수 요셉의 아들에게 어떻게 이런 지혜가 있느냐?’라는 뜻입니다만,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진리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나타내고, 아들은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분으로부터 모든 진리와 선이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도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이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광야에서 돌아오신 주님은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나사렛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그런 모습은 우리가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그곳에 교회를 세우시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겉 사람의 의지 안에 말씀의 진리를 심는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을 읽어주시면서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의지 가운데 심어졌다는 뜻입니다. 시험을 이긴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모든 진리가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진리는 최초의 신성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와, 마지막 신성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올 때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세상 자연적인 것 안에 담길 때 가장 힘이 있습니다. 그 자연적인 것이 바로 주님의 인성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두 번째 말씀은, 주님의 인성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능력이 모든 가난한 자와 눈먼 자, 포로 된 자와 억눌린 자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눈먼 자, 포로 된 자, 억눌린 자가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어느 만큼은 가난한 자이고 눈먼 자이며, 그리고 포로 된 자이며 억눌린 자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이가 주님이시고, 치유하시는 이 또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그런 능력이 우리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5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5-36)

 

아멘

 

원본

2017-07-0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2(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2. 2023-03-22(D4)-매일예배(2439, 눅4,14-22), ‘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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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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