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5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 어떤 이들이 하늘의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만을 이해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적 의미가 너무도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도 완전하며, 그들을 너무도 깊이 감동시켜서, 그들은 그것을 영광(glory)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 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해설

AC.65는 바로 앞 AC.64와 함께 읽어야 가장 잘 이해됩니다.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말씀의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65에서는 이제 그 설명을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입구 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말씀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었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자신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먼저 이 글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실제 영적 경험으로 제시하는 기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5는 비유를 만들어 천사라면 아마 이렇게 말씀을 읽을 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글이 아닙니다. 저자는 자신이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실제로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들과 대화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해설할 때에는 한편으로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실제 경험으로 제시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독자에게도 반드시 같은 경험이 일어나야 한다거나 우리가 그 영적 경험의 세부 구조를 본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늘의 입구 이라는 표현도 그런 경우입니다. 처음 읽으면 천국의 어느 층인가? 첫째 천국보다 낮은 곳인가?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5는 여기서 천국의 지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 비교적 낮은 단계의 하늘 영역이라고 확정하기보다, 본문 그대로 하늘의 입구 이라고 두고 이 경험의 핵심에 집중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AC.64에서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와 역사적 이름을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사에게는 단어가 전혀 없고 오직 추상적인 의미만 있다는 일반적인 언어 이론까지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65가 직접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읽고 있던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을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는 표현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문자 바로 안쪽의 영적 의미이며 그보다 깊은 곳에는 천적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층위를 확정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과 뒤의 설명들을 함께 보면 말씀의 여러 의미에 관한 더 풍부한 교리가 나오지만, AC.65 자체는 여기서 그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원문이 말하는 그대로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고 두고, 그 의미조차 천사들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게 지각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표현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초보 독자에게도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므로 별도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연속의 질서입니다. 특히 in such order of sequence라는 표현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서로 관계없는 상징들의 모음처럼 지각된 것이 아니라 어떤 연속적인 질서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1을 읽으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빛에서 궁창으로, 식물에서 광명체로, 생물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설명은 각 단어의 뜻을 하나씩 풀어 놓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습니다. 다만 이 창1의 사례는 AC.65연속의 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예이지, 이 한 구절만으로 말씀의 모든 내적 의미가 어떤 구조로 연결되는지를 다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의미는 또한 그들을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도 먼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AC.65는 그들이 왜 glory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에 관한 상응론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광은 언제나 신적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상태이므로 여기서도 정확히 그것을 뜻한다고 이번 한 문장에 완성된 정의를 가져오기보다, 그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완전한 연속의 질서에 깊이 감동되어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영광을 단순히 정말 아름다웠다정도의 감탄사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한 것은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고 감동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말이 어떤 속뜻을 갖는지는 그 표현을 직접 해설하는 관련 AC에서 충분히 살펴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AC.65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고 있었고, 그와 대화한 이들은 하늘의 첫 입구 뜰에서 그 말씀의 단어나 글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 장면은 AC.64에서 말한 인간의 문자와 천사적 지각 사이의 관계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특정 천사들이 동시에 내적 의미를 읽는다는 식으로 모든 세부 작동 방식을 AC.65 하나에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는 동안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말씀의 문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천사들은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인간에게도 단어와 문법과 원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AC.65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과 자연계의 인간이 말씀을 읽는 방식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단어와 문장으로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문자를 통해 말씀을 읽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문자에서 떠난 의미를 지각한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문자를 소홀히 하라는 명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말씀의 문자를 더욱 신중하게 대해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바로 그 말씀 안에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대신, 주님께서 말씀을 문자로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두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원어 연구나 정확한 번역도 그 자체로 속뜻은 아니지만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읽기 위한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AC.65를 읽고 나도 천사들처럼 말씀의 내적 의미를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 자체는 독자에게 그런 경험을 추구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가 경험한 영적 개방과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깊은 깨달음이나 감동을 얻는 일을 곧 같은 종류의 경험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깊이 감동받고 삶이 변화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을 곧 AC.65하늘의 입구 에서 이루어진 경험과 동일시할 근거는 이번 글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특별한 경험은 특별한 경험대로 존중하고, 우리의 말씀 읽기는 말씀 읽기대로 주님 앞에서 충실하게 이어 가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AC.65는 독자의 관심을 신비 체험 자체보다 말씀으로 돌립니다. 이 경험에서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거기서 만난 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그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켜 영광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이 가리키는 중심도 결국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의 목적이 독자로 하여금 나도 스베덴보리처럼 영계를 보고 싶다는 데 머물게 한다면 중심이 옮겨진 것입니다. AC.65가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매일 읽을 수 있는 말씀 안에, 인간의 눈에는 문자로 보이지만 천사들에게는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어 영광이라 불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AC가 중요하다면 바로 그 말씀의 깊이를 열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도 말씀과 AC의 순서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었기 때문에 이 경험이 일어났고, 그들이 지각한 것도 말씀의 내적 의미였습니다. AC.65는 새로운 영적 체험을 말씀 위에 올려놓는 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짧은 글은 AC.64의 설명을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말씀의 단어와 글자가 있고, 그 안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는 그들에게 영광이라 불릴 만큼 깊은 것이었습니다.

 

심화

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 필요 없는가?

 

AC.65 심화 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는 필요 없는가?

AC.65 심화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는 필요 없는가?AC.65를 읽으면 성경을 깊이 공부해 온 독자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천사들은 하늘에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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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 무엇인가?

 

AC.65 심화 2,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란 무엇인가?

AC.65 심화2.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란 무엇인가?AC.65에서 특히 눈에 띄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the nearest interior sense)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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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태고교회, 역사, 예언, 시편

AC.66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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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창1, 말씀의 속뜻 :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과 천사들의 지각 (AC.64-66)

AC.64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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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3. 스베덴보리는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경이라는 말보다 the Word’,  말씀이라는 표현을 매우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경건한 표현일까요, 아니면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용어일까요?

 

AC.64 자체에서는 분명히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말씀의 속뜻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속뜻을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번 문맥에서 the Word는 단순히 책의 일반 명칭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문자 안에 속뜻을 가지고 천사들에게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되는 신적 계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 말씀은 실제 교회생활에서는 상당히 겹쳐 사용됩니다. ‘성경을 읽는다 말씀을 읽는다가 같은 행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라는 말은 낮고 말씀이라는 말만 영적이라고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 단어 자체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the Word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로 가면 말씀의 범위에 관한 별도의 설명이 나오고, 우리가 흔히 성경 66이라고 부르는 범위와 그의 엄밀한 의미의 the Word가 어떻게 관계되는가 하는 문제도 생깁니다. 이것은 실제로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AC.64 한 문장만 가지고 그 전체 정경론을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속뜻이 있는 책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지만 다른 성경책에는 주님의 생명이 없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마치 성경 안에 신적인 책과 비신적인 책이 단순히 둘로 갈리고, 후자는 영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정경과 속뜻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는 관련 본문들을 직접 모아서 따로 다루어야 정확합니다.

 

이번 AC.64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문자적 의미에서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그 말씀을 문자와 이름으로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합니다. 따라서 the Word는 이 글에서 속뜻과 천사의 지각을 함께 품고 있는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합니다. ‘말씀의 속뜻이라고 할 때 중심 명사는 속뜻만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속뜻이 말씀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입니다. 아르카나 역시 AC가 말씀 밖에서 새로 만들어 내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밝혀진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the Word를 우리말로 말씀이라고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고 의미도 잘 살아납니다. 한국 교회에서 말씀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을 가리키는 익숙하고 권위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일상적인 성경이라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거나 잘못된 표현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AC와 성경의 관계를 뒤집지 않는 것입니다. AC.64 말씀의 속뜻을 설명한다고 해서 AC가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주장은 자신이 말씀 밖에 새로운 계시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말씀 안에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아니라 말씀이라고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the Word라고 할 때 그는 단순한 종교 문헌의 명칭보다, 주님에게서 온 계시이며 그 문자 안에 내적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는 성격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확한 범위와 어떤 성경책들이 스베덴보리의 엄밀한 의미에서 말씀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관련 본문을 충분히 확인하여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독법에서는 한 가지를 더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마다 AC를 높이기 위해 성경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AC가 끊임없이 독자를 말씀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AC.64가 말하는 속뜻도, 아르카나도, 천사들의 지각도 모두 말씀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AC.64, 창1, 말씀의 속뜻 :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과 천사들의 지각 (AC.64-66)

AC.64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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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 심화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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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2.  사람(internal man)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 사람(internal man)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혼과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마음이라는 뜻일까요?

 

먼저  사람을 단순히 몸 안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사람으로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람  사람을 말할 때 이것은 육체의 안쪽과 바깥쪽이라는 공간적 구별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과 의식에 서로 구별되는 내적이고 외적인 차원이 있음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렇다고  사람 = 영혼이라고 바로 등식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영혼이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인간의 생명 자체나 사후에도 사는 인간을 가리키는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람  사람과 짝을 이루어 인간 안의 내적 차원을 설명하는 특정한 용어입니다. 따라서 두 말이 관련될 수는 있어도 언제나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동의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 =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면 생각, 감정, 의지 등을 매우 넓게 포함하여 말합니다. 그런데 AC에서는 겉 사람에게도 생각과 욕망과 판단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이나 감정이라고 해서 모두 자동으로  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정신 활동 =  사람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너무 넓어집니다.

 

AC.64에서 특별히 주의할 것은 거듭남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보고 그렇다면 주님의 생명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들어가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질문입니다. AC 다른 곳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가 사람 안으로 유입되는 질서를 설명할 때와, 여기서 사람이 거듭남 가운데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때는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먼저 열리고 그다음  사람이 바뀐다 또는 반대로  사람이 먼저 거듭난 다음  사람이 바뀐다는 한 줄짜리 공식으로 AC.64를 정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이 문장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은 창1에서 다룬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진행과 주님의 유입 질서가 어떻게 함께 성립하는지는 관련 글들을 더 읽으면서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 단계에서 속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가장 안전하게는  사람과 구별되는 인간의 내적 차원이라고 잡아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겉 사람은 자연계와 감각을 통하여 관계하는 인간의 외적 차원이고, 속 사람은 그보다 내적인 인간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이 정의도 앞으로 AC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점차 풍성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 문장으로  정의해 주면 편한데  이렇게 여지를 남기는가?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의 중요한 용어들은 뒤로 갈수록 여러 문맥에서 점점 더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처음 등장한 자리에서 우리가 너무 완성된 정의를 만들어 버리면 오히려 나중의 본문을 그 정의에 억지로 맞추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언제나 선하고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사람은 세상적이고 악하다고 처음부터 단정해 버리면 이후의 설명을 읽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내적이라는 말 자체가 자동으로 선하다를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것을 어떻게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가입니다.

 

AC.64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거듭남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단순히 사람의 외적인 생활 습관 몇 가지가 개선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영혼인가, 마음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겠습니다. 속 사람은 영혼이나 마음과 관련될 수 있지만 그 어느 한 단어와 단순히 동일시하기보다, AC에서 겉 사람과 구별하여 인간의 내적 차원을 가리키는 고유한 용어로 익혀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정확한 구조와 기능은 앞으로 관련 AC들이 설명할 때 하나씩 더해 가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글을 가장 안전하게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AC.64 심화 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64 심화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경’이라는 말보다 ‘the Word’, 곧 ‘말씀’이라는 표현을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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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 ‘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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