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8

이로부터 사람이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있을 때가 분명해집니다. 이때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그것들을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fishes of the sea), ‘하늘의 (fowl of the heavens) 합니다. 사람이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들을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을 생물(living soul), ‘가축(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신앙으로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fishes of the sea,and thefowl of the heavens.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living soul,and the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image of God,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AC.48은 지금까지 이어진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차이를 짧고 분명하게 정리하는 글입니다. 특히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가 실제로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앞에서는 물고기와 새, 생물과 짐승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 놓고 두 상태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먼저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신앙으로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이미 생명이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다섯째 날의 바다의 물고기하늘의 로 표현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섯 번째 상태를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지 않은 상태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48은 이때 산출되는 것들을 분명히 animate’, 곧 생명이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앞의 AC.39에서도 큰 광명체들이 켜진 뒤 사람이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에 와서 처음으로 영적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지만, 그 생명이 나타나는 중심이 아직 주로 이해에 속한 신앙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이해에 속한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세밀한 변화가 있습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사랑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도 신앙은 그대로 있으며, 거기에 그 신앙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함께합니다.

 

그래서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의 차이를 단순히 아는 단계와 행하는 단계라고만 나누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상태의 사람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AC.48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내적인 것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에서 말하며 그로써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처음 읽으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섯째 상태에는 사랑이 전혀 없고 여섯째 상태에서 갑자기 사랑이 생긴다는 뜻인가?그렇게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8은 거듭남 전체에서 사랑이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섯째 상태에서 사람이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이 글의 초점은 사랑의 최초 존재 여부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신앙과 함께 사랑이 실제 의지에 속한 원리로서 행동의 근원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기존 해설에서처럼 이를 처음에는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애쓰다가 나중에는 좋아서 자연스럽게 한다는 예로 설명하면 어느 정도 감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AC.48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상태에 반드시 심한 억지와 갈등이 있고, 여섯째 상태에 이르면 모든 선행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AC.48이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과 갈등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AC.48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행동의 근원에 관한 변화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이 전면에 나타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과 더불어,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 이제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 아니라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의 원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산출되는 것들이 창1:24-25생물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앞의 AC.44-46에서 이미 이 짐승들이 의지에 속한 것들, 특히 애정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에서 여섯째 날의 생물과 짐승으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피조물의 종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신앙의 상태에서 의지에 속한 사랑까지 포함하는 상태로 깊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AC.48의 절정입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임의로 하나님과 작동 방식이 같아지는 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8 자체가 그 이유를 간단히 제시합니다.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기때문에 영적 인간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서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의 여러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반복하여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신적인 생명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과 사랑이 그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져 삶으로 나타나는 상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AC.47과의 연결도 중요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 자기에게서인 산출하며,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8에서는 그 진행 가운데 여섯째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하게 되고, 사람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용어상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AC.48은 이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AC를 읽다 보면 영적천적이 서로 구별되는 더 세밀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적 인간이라는 말을 보고 곧바로 이후의 모든 영적·천적 구별을 이 한 문장에 끌어와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여섯째 상태에 이른 거듭난 사람을 영적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 창1:26 이하에서 형상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어집니다.

 

AC.48은 결국 다섯째 상태를 낮추고 여섯째 상태만 참된 것으로 만드는 글이 아닙니다. 다섯째 상태도 이미 살아 있는 거듭남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이해가 진리를 알고 신앙으로 확증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나타나고, 사람은 신앙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는 영적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이 글의 흐름을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만 표현하기보다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이 되는 데로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다섯째 날에 살아난 이해에 속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에는 의지에 속한 사랑과 함께 하나의 더 온전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창조의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 사이에서 AC.48이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AC.49, 창1:26, ‘참 사람은 오직 주님 : 사랑과 진리 안에서만 성립되는 사람됨'(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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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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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3.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tender herb), ‘ (herb yield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를 하다가 갑자기 회개의 상태라는 말 등장하기 문에 논리 점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창1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은 갑작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단계에서 준비된 태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 연결을 해하려면 창1에서 말하는 거듭남의 초기 단계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의 첫 부분을 인간 거듭남의 초기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대략 이런 흐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완전히 혼돈과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다음 진리의 빛이 조금씩 들어옵니다. 그리고 진리와 거짓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 사람 안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 곧 식물로 상징되는 단계가 나타납니다. 바로 여기서 나무가 등장합니다. 즉 사람 안에 처음으로 선과 진리의 싹이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회개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자신의 생각과 삶이 괜찮다고 여겼던 것들이 진리의 빛 속에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바꾸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입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말을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의미큰 죄를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연결이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훨씬 더 기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돌아본 ,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고, 그것을 바꾸려는 입니다. 다시 말해 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맞추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의 식물 비유와 회개는 실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은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맺는 채소는 그 진리가 생각 속에서 자라 다른 진리를 낳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는 그 진리가 실제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기 시작하는 바로 그 과정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식물 단계 전체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다가 나는 지금까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듭니다. 이것이 풀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더 배우면서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했을까?, 행동은 옳았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이 씨 맺는 채소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실제 행동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쉽게 화를 냈다면 이제는 참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전에는 남을 비판했다면 이제는 말을 조심합니다. 이것이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바로 이 전체 과정이 회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에서 회개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의 성장 비유가 바로 회개의 실제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그 순간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회개를 거듭남의 매우 초기 단계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거듭난 상태는 아니지만,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삶을 진리의 속에서 고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떤 특별한 감정 사건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자기 삶을 진리에 맞추어 바꾸기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1에서 식물이 처음 자라는 장면이 바로 그 회개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9 심화 3)

 

 

 

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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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 심화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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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이 돋고, 맺는 채소가 나오며, 마침내 가진 열매 맺는 나무까지 등장합니다. 단순히 진리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열매까지 맺는 단계라면 상당히 깊은 거듭남에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것을 아직 생명 없는 것들(inanimate things)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열매를 맺고 있는데도 생명 없는 상태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AC.29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생명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생명 없는이라는 표현은 식물이 자연계에서 생물인가 무생물인가를 말하는 생물학적 구분이 아닙니다. 또한 이 단계의 사람에게 선도 진리도 전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아 무엇인가가 돋아나고 자라며 열매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을 사람이 아직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오는 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아직 이것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단계는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전의 준비 상태입니다. 따라서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만으로 생명의 유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선한 열매가 나타나고 있어도, 사람이 그 선의 생명을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AC.29의 의미에서는 아직 다음 단계의 생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반드시 되갚아 주었는데, 말씀을 배우고 회개하면서 이제는 보복하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겨우 분노를 억제하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험담도 삼가고, 마침내 상대방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실제로 도와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열매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전에는 없던 선한 행동이 실제 삶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많이 변했다. 예전 같으면 절대 이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이제는 사람까지 도와주었다. 이것이 반드시 노골적인 교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실제로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선의 근원까지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바로 이 상태에서부터 이끌어, 나중에는 자기가 행하는 모든 참된 선의 생명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AC.29생명 없는 상태를 가짜 , 쓸모없는 , 혹은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단계는 거듭남에서 반드시 필요한 준비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먼저 선과 진리에 관한 것을 배우게 하시고, 그것에 따라 실제로 행동하게 하시며, 그 과정 가운데 점차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이러한 준비가 실제 삶에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가진 열매 맺는 나무라는 표현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열매가 있다는 것은 선과 진리가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실제 삶에서 무엇인가를 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나무는 셋째 날 안에서는 매우 발전한 모습이지만, 전체 거듭남의 여섯 상태를 놓고 보면 여전히 다음 단계의 생명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점은 내가 선을 행하는가? 선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가 서로 다른 질문임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는 셋째 날에도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악한 행동을 멈추고 선한 일을 시작하며 진리에 따라 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서는 아직 더 깊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안의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고,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니 나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거듭남의 질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택하고 싸우고 행해야 합니다. 다만 점차 깊어지는 거듭남 속에서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능력으로 이렇게 하고 있으며, 자체의 생명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라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셋째 날의 생명 없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죽은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향하여 준비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씨앗은 이미 뿌려졌고, 연한 것이 돋았으며, 씨를 맺고, 마침내 열매까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직 그 모든 것의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참으로 인정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것을 생명 없는 것들이라고 하고, 다음에 비로소 살아 있는 것들이 등장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열매를 맺는데도 생명 없는가?라는 역설은 오히려 AC.29의 핵심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거듭남은 단지 나쁜 행동이 좋은 행동으로 바뀌는 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곳에서는 선의 근원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주님에게 있던 그 근원을 사람이 인정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여기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더 깊이 이끄실수록 그는 자기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셋째 날의 가진 열매 맺는 나무는 결코 하찮은 단계가 아닙니다. 실제 열매가 나타나는 귀중한 회개의 상태입니다. 다만 그 열매를 바라보며 이것은 나의 선이다라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가능하게 한 씨앗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알아 가야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셋째 날의 준비는 다음 단계의 참된 신앙의 생명을 향하여 열리기 시작합니다. (AC.29 심화 2)

 

 

 

AC.29 심화 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 심화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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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 심화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의 ‘연한 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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