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여섯 단계로 나눌 있으며, 이것들을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사람이 전혀 인간이라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처음에는 겨우 인간이라 만한 어떤 상태가 되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이르러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 되기 때문입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해설

AC.62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지금까지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의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읽어 왔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는 글입니다. 말씀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AC.62는 이 날들을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라고 하며, 그것들을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으로 읽어 온 앞의 모든 설명이 여기에서 매우 간결하게 요약되는 셈입니다.

 

먼저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을 단순히 여섯 개의 종교적 지식이나 여섯 가지 덕목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서 지나가는 상태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는 무엇을 여섯 가지 배운다는 목록이라기보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62는 이것을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이야기이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 역시 하나의 창조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고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앞에서 계속 살펴본 것처럼 거듭남의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는 말에서도 창조의 주체를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어지는 표현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에 전혀 인간이라 없는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으로 사람이 아니라거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AC.49에서도 참 사람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는 만큼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전혀 인간이라 없다는 강한 표현도 그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가는 참된 인간성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다른 사람을 낮추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 사람은 거듭나지 않았으니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은 AC.62의 목적과 전혀 다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다른 사람의 인간 자격을 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거듭남이 얼마나 근본적인 새 창조인지를 보여 줍니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AC.62에서 특히 아름다운 표현은 그 다음의 조금씩 조금씩입니다. 사람은 전혀 인간이라 없는상태에서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겨우 인간이라 할 만한 어떤 상태가 되고, 그 뒤 조금씩 조금씩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거듭남이 점진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간결하게 보여 주는 표현도 드물 것입니다.

 

여기서도 원문이 말하는 만큼 정확하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씩 조금씩이라고 했다고 해서 이번 한 문장만으로 거듭남의 모든 세부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단계에서 무엇이 먼저 일어나고, 얼마나 오래 걸리며, 반드시 어떤 후퇴를 몇 번 겪어야 하는지까지 AC.62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글이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람이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by degrees’, 곧 단계적으로, ‘by little and little’, 곧 조금씩 조금씩 거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AC를 접하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거듭남의 상태로 읽는다고 해서 나는 지금 셋째 날인가, 넷째 날인가?를 판정하는 영적 등급표로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2는 사람에게 자기 단계를 측정하라고 하기보다, 거듭남이 주님의 창조이며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큰 질서를 보여 줍니다.

 

마침내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이 표현은 앞의 AC.26부터 이어져 온 창1:26-27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외모가 하나님과 비슷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이 주님에게서 신앙과 사랑,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특히 AC.51-53형상과 신앙, 이해의 관계를 설명했고, AC.60-61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여섯째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AC.62는 그 흐름을 받아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정리합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는 것을 곧 거듭남의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끝났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여섯째 날 뒤에 일곱째 날로 이어지고, AC 역시 일곱째 상태를 따로 설명합니다. AC.62가 지금 직접 말하는 것은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이 무엇이며 여섯째 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그 내용을 직접 다루는 글에서 살펴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 점을 지키면 그러면 여섯째 날에 완성되었는데 일곱째 날이 필요한가?’, ‘모든 사람이 결국 천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영적 천국에 사람과 천적 천국에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가?같은 질문을 이번 한 문장에서 억지로 모두 해결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이런 질문들은 AC 전체를 읽으면서 충분한 근거가 모였을 때 다루어야 할 큰 주제들입니다. AC.62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글이 아니라 여섯 날의 의미를 요약하는 글입니다.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라는 표현도 너무 빨리 하나의 도식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어도 이 표현을 통해 거듭남의 여섯 상태가 단 한 번의 피상적인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인류 전체의 역사에도 정확히 여섯 단계가 있고, 사람의 생애에서도 같은 여섯 단계가 계속 반복된다는 완성된 체계를 세우기보다는,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어떻게 펼치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AC.62의 핵심은 오히려 아주 단순합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창1:31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라는 말씀도 지금까지의 모든 흐름을 품고 있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첫째 날의 빛에서 시작하여 여섯째 날의 심히 좋았더라에 이르기까지, AC는 이 창조의 말씀 안에서 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밝혀 왔습니다. 그리고 AC.62는 그 긴 흐름을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 가장 오래 기억해 둘 표현을 하나 고른다면 조금씩 조금씩이어도 좋겠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단번에 높은 상태에 뛰어오르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욱 크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마침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데 있습니다.

 

심화

1.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 하는가?

 

AC.62 심화 1. 왜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하는가?

AC.62 심화 1. 왜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하는가?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 여섯 단계로 나뉘며,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

bygrace.kr

 

 

 

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bygrace.kr

 

AC.61, 창1:31,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61 심화

1. understanding  이해라고 번역하는가?

 

AC.61에는 앞으로 AC에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두 단어가 함께 나옵니다. ‘understanding will입니다. 여기서는 각각 이해 의지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분에게는 understanding을 왜 그냥 이해라고 번역하는지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이해라고 하면 흔히  설명을 이해했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다처럼 무엇인가를 알아들은 결과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반면 AC에서 understanding은 그런 한 번의 이해 행위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속한 하나의 능력을 가리키는 용어로 계속 사용됩니다. AC.61에서도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이 인간의 understanding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번역할 때 이해력’, ‘지성’, ‘사고력 같은 표현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각각 장점이 있습니다. ‘이해력은 능력이라는 점을 쉽게 전달하고, ‘지성은 하나의 정신 능력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각각 아쉬움도 있습니다. ‘이해력은 한국어 문장에서 반복되면 다소 딱딱하고 능력의 정도,  이해력이 좋다, 나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지성은 철학적이거나 지적 수준을 뜻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고, ‘사고력은 생각하는 능력 일반으로 범위가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 전체의 기본 번역어로는 간결하게 이해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독자는 여기서 말하는 이해 무엇인가를 알아들은 결과만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신앙에 관한 지식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해라는 번역어 자체를 바꾸기보다 처음 등장할 때 그 뜻을 충분히 설명해 두고, 이후에는 계속 이해라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번역어의 일관성도 유지하면서 처음 읽는 독자의 혼란도 줄일 수 있습니다.

 

특히 will과 함께 놓으면 이 선택의 장점이 더 분명해집니다. AC에서는 understanding will이 자주 짝을 이루어 등장합니다. 이것을 이해와 의지라고 하면 간결하면서 두 용어의 대응 관계도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의지 역시 일상적인 의지력이 강하다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61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이 인간의 의지에 속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의지는 단순히 어떤 목표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정신력보다 훨씬 깊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필요하다면 처음 설명할 때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풀어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정식 번역어로 매번 사용하면 문장이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해하는 능력에 속한다보다 인간의 이해에 속한다가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명을 위해 원하고 뜻하는 능력 정도로 풀 수는 있지만, 정식 번역어는 의지로 유지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특히 의도하는 능력이라고만 하면 의지가 단순히 어떤 행동을 계획하거나 의도하는 기능으로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와 의지를 흔히 머리와 가슴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는 비유로만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understanding will은 신체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에 관한 용어입니다.

 

AC.61 자체가 이 두 용어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은 이해에 속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은 의지에 속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AC에서 이해라는 말을 만날 때 단순히 알고 있다는 뜻으로만 읽지 않고, 신앙에 관한 지식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을 함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의지를 만날 때에는 단순한 결심이나 의지력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와 관계된 능력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해라는 평범한 한국어 단어가 AC 안에서는 점차 하나의 중요한 용어로 자리 잡게 됩니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도 같은 번역어를 일관되게 사용하면서 그 뜻을 차근차근 익혀 가는 편이, 문맥마다 이해력’, ‘지성’, ‘사고력 등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보다 AC 전체의 사유 구조를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understanding은 기본적으로 이해’, will 의지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처음 접하는 독자가 이 말을 일상적인 의미로 너무 좁게 읽지 않도록, 필요한 자리에서는 이해하는 능력’, ‘원하고 사랑하는  관계된 의지라고 풀어 설명하면 충분하겠습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속한 모든 것은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인간의 이해(understanding) 속하고, 후자는 그의 의지(will) 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해설

AC.61은 매우 짧지만 앞으로 AC를 읽는 데 자주 만나게 될 두 용어, 영적(spiritual)천적(celestial)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을 영적이라 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속한 모든 을 천적이라 합니다. 그리고 전자는 인간의 이해, 후자는 의지에 속한다고 합니다.

 

바로 앞 AC.60에서는 창1:31심히 좋았더라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고, 그 결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AC.61은 그 설명에 이어 그러면 영적인 것이 무엇이고 천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아주 간결하게 밝혀 주는 글입니다.

 

먼저 영적이라는 말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영적이다라고 하면 세속적이지 않다거나, 신앙심이 깊다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이 많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AC.61에서 스베덴보리는 훨씬 구체적인 뜻으로 사용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을 영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의 이해에 속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해는 단순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결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과 관계된 말입니다. 이 점은 연결된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반면 천적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속한 모든 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의지에 속합니다. 여기서 의지도 단순히 의지가 강하다’, ‘무엇을 해내려는 의욕이 있다는 일상적인 의미보다 넓게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내적 생명의 한 능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AC.61의 문장을 가장 단순하게 놓아 보면 이렇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이해에 관계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들은 의지에 관계됩니다. 전자를 영적’, 후자를 천적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것은 지식이고 천적인 것은 사랑이니, 영적인 것은 머리에만 있고 천적인 것만 실제 생명이라는 뜻인가?그러나 AC.61을 그렇게 읽으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것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지, 영적인 것을 무가치한 지식으로 낮추고 천적인 것만 참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60에서도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구별되지만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을 단순한 성경 상식이나 교리 암기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아는 것이 포함되겠지만, AC에서 신앙에 관한 지식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관계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해를 단순한 정보 저장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을 단순한 따뜻한 감정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의지에 속한다고 하는 데에는 사람이 무엇을 실제로 원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어떤 대상에 좋은 느낌을 갖는 것보다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너무 쉽게 이해 = 머리’, ‘의지 = 가슴이라고 바꾸는 것도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 설명하기에는 쉬운 비유지만, 이해와 의지는 신체 기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내적 생명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두 근본적인 능력에 관한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에 관한 지식과 이해의 측면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실제로 이웃의 선을 원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여기에는 의지와 사랑의 측면이 있습니다.

 

이 예는 AC.61의 구별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는 것은 무조건 영적이고 행동하는 것은 무조건 천적이다라는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행동의 근원이 어떤 사랑과 의지에 있는지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영적천적을 단순히 신앙의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AC 전체에서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가 매우 중요한 주제로 발전하지만, AC.61 자체는 먼저 영적 인간이 다음 발전하면 천적 인간이 된다는 단계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특히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에 차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천적이라는 하나의 직선적인 승급 과정으로 이해하면 앞으로의 AC를 읽을 때 오히려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AC.61이 말하는 만큼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이고 이해에 속하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속한 모든 것은 천적이고 의지에 속한다.이것이 이 글의 직접적인 정의입니다.

 

그러면 왜 바로 앞 AC.60에서는 이 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했을까요? 이해와 의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서로 완전히 무관한 채 따로 존재하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60은 그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말했고, AC.61은 그 결합을 이루는 두 종류의 것이 각각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속한 모든 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인 것을 설명하면서 막연히 사랑이라고만 하지 않고 그 사랑의 방향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사랑이나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랑까지 단지 사랑이라는 이유로 천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1이 천적이라고 부르는 사랑은 구체적으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점은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사랑을 동일하게 선한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바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속한 모든 을 천적이라고 명시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지에 속한다는 말은 신앙생활에서 사랑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무엇을 실제로 원하고 사랑하는가는 그의 내적 생명과 깊이 관계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를 버리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앞 말씀의 속뜻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결혼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60AC.61을 함께 읽으면 창1:31심히 좋았더라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AC.60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한다고 했고, AC.61은 그 가운데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영적이며 이해에 속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들은 천적이며 의지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을 읽으면서 나는 영적 인간인가, 천적 인간인가?부터 판정하려 하기보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정확히 익히는 것이 좋습니다. 앞으로 AC에서 영적’, ‘천적’, ‘이해’, ‘의지라는 말이 계속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은 여전히 창1:31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AC.61은 말씀을 대신하여 인간에 관한 별도의 철학 체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 AC.60에 이어 이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안에 있는 신앙과 사랑,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결합을 좀 더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심화

1. understanding 이해라고 번역하는가?

 

AC.61 심화 1,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AC.61 심화1. ‘understanding’을 왜 ‘이해’라고 번역하는가? AC.61에는 앞으로 AC에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두 단어가 함께 나옵니다. ‘understanding’과 ‘will’입니다. 여기서는 각각 ‘이해’와 ‘

bygrace.kr

 

 

 

AC.62, 창1:31, 여섯 날의 거듭남 :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

bygrace.kr

 

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