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4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이라는 표현은 처음 접하면 조금 낯설지만, AC를 읽으면서 자주 만나게 되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AC.24의 영어 번역에서 Potts는 라틴어 scientificamemory-knowledges라고 옮깁니다. 여기 붙은 개정자의 주(Reviser)는 이것을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기억 지식은 특별히 신비하거나 영적인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읽어 외적 기억에 축적한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 사실이나 지리 정보, 과학 지식, 언어와 직업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성경에 관하여 배운 사실들도 기억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이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그 내용이 성경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곧 속 사람의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외적 기억에 저장되어 내가 필요할 때 떠올리고 말할 수 있는 지식으로 있는 한, 그것은 기억 지식의 차원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scientifica의 핵심은 단순히 세속적인 지식이라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이 사람의 외적 기억에 속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AC.24가 이 용어를 특별히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궁창 위의 궁창 아래의 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cognitiones라 하고,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scientifica라 합니다. 개정자의 주는 cognitiones를 우리가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것을 안다고 할 때의 앎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구별을 scientifica 죽은 지식이고 cognitiones 살아 있는 지혜다라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AC.24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이 둘이 속하는 층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기억 지식 자체가 나쁘거나 거듭남에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 세계에서 습득하고 기억해 둔 수많은 것들을 사용하여 그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AC.24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여기지만,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것들을 통해서도 그를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겉 사람과 그 안의 기억 지식은 없애 버려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속 사람과 올바른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주님께 쓰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경 지식도 좋은 예가 됩니다. 사람이 말씀의 내용을 많이 기억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주님께서 사람을 가르치시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전에 외워 두었던 한 구절이 어느 순간 자신의 악을 보게 하거나,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게 하거나,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깨닫게 하는 데 쓰일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억 지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높은 질서 아래 놓이고 올바른 쓰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 지식은 쉽게 말하면 외적 기억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것을 단순히 머릿속에 있다는 이유로 경시할 필요도 없고,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곧 영적 지혜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AC.24가 보여 주는 거듭남의 질서는 이러한 겉 사람의 기억 지식과 속 사람 안의 것들이 처음에는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가, 주님께서 그 둘을 구별하시고 각각 제자리에 놓으시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 구별을 나타내는 것이 궁창 위의 궁창 아래의 입니다. (AC.24 심화 1)

 

 

 

AC.24, 창1:6-7(AC.24-25), ‘궁창의 구별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때’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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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심화

1.  스베덴보리는 8:14, 26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를 처음 읽을 때 가장 어리둥절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단8:14, 26의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라고 설명한 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때는 신앙이 없었으므로 저녁이며 주님의 오심 자체는 아침이라고 말하면서 다니엘서를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다니엘서에도 저녁아침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가져온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에는 스베덴보리의 논지가 너무 깊습니다.

 

먼저 개역개정만 읽으면 이 연결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8:14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에는 저녁아침에 해당하는 말이 실제로 들어 있으며, Potts 번역도 AC.22에서 이를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이라는 형태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저녁-아침이라는 표현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단어가 같다는 사실만으로 인용 이유가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단8의 문맥입니다. 8에서는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며, 진리가 땅에 던져지는 황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일정한 저녁-아침 후에 성소가 정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 구절에는 단순한 하루의 반복만이 아니라 거룩한 것들이 훼손된 상태와 그 뒤의 정결 및 회복이라는 구조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AC.22에서 말하는 저녁아침의 영적 의미와 만납니다.

 

AC.22에서 저녁은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이며, 일반적으로는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상태입니다. 아침은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이며 주님께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니엘에서 성소와 진리가 황폐해진 상태는 AC.22의 언어로 보면 저녁의 성격을 가지며, 성소가 다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침의 성격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단8의 문자적 역사 의미를 지워 버리고 다른 뜻을 임의로 덧씌운다는 뜻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적 사건 안에서 동시에 영적 상태를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께서 오시는 때는 저녁이고, 주님의 오심은 아침이다라는 다소 역설적인 표현도 이해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야 할 만큼 신앙이 쇠퇴하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는 저녁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저녁 가운데 주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되기 때문에 주님의 오심은 아침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시점에 저녁과 아침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기 전의 영적 상태와 그분의 오심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상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8:14, 26AC.22에서 매우 적절한 인용이 됩니다. 저녁-아침이라는 표현뿐 아니라 황폐에서 정결로 나아가는 문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이천삼백이라는 숫자의 구체적인 속뜻까지 AC.22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락에서 그 숫자를 해설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저녁아침이 시간의 이름을 넘어 영적 상태의 변화를 나타낸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창세기에서 저녁은 언제나 무조건 A, 아침은 언제나 무조건 B라고 정의되었으므로 말씀 어디에서나 기계적으로 같은 뜻을 대입하면 된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를 사전처럼 치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문맥과 연결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AC.22에서 단8의 인용이 설득력을 갖는 것도 단지 같은 단어가 있어서가 아니라, 신앙과 거룩한 것들의 황폐 그리고 그 뒤의 회복이라는 문맥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단8:14, 26을 인용하는 이유는 저녁과 아침이라는 두 단어의 일치보다 더 깊습니다. 신앙이 없는 저녁의 상태 가운데 주님이 오심으로 아침이 시작된다AC.22의 영적 질서가 다니엘의 황폐와 정결이라는 구조 속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8의 인용은 창1의 저녁과 아침을 단순한 자연의 하루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의 상태로 이해하게 해 주는 중요한 보조 본문이 됩니다. (AC.22 심화 1)

 

 

 

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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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빛처럼 보였던 것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에 악을 언제나 악처럼 느끼고 거짓을 언제나 거짓처럼 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에게서 나오는 어떤 생각과 행동을 선하고 옳은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악이 선처럼 보이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실제 삶에서 빛처럼 보였던 어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다음 사례들은 AC.21의 상태를 판정하는 공식이 아니라, 그 표현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 자기 의로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성실하게 살고 교회생활도 충실히 하며 큰 잘못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삶을 근거로 나는 사람보다 낫다, 나는 적어도 저런 사람과는 다르다는 마음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본인에게는 이것이 바른 삶에 대한 확신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빛 가운데 자신을 보기 시작하면서, 선하게 살았다는 자기평가 안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빛처럼 보였던 것이 더 큰 빛 가운데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인 선행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봉사하고 헌신하며 다른 사람을 실제로 돕습니다. 그 행동의 외적 쓰임 자체를 무조건 악하다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동기는 거듭남 과정에서 여러 요소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정과 칭찬을 얻는 것이 점점 그 행동의 지배적인 목적이 되는 경우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선행 자체를 후회하거나, 다른 사람이 칭찬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면 나는 이웃을 위해서 했다고 생각했던 일 안에 자기 사랑이 얼마나 깊이 섞여 있었는지를 보게 될 수 있습니다. AC.21의 빛은 바로 이런 분별을 가능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신앙적인 열심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교리를 소중히 여기며 진리를 전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는 진리를 알고 있고 사람들은 모른다, 신앙이 높다는 마음이 중심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 자체보다 진리를 가진 가 중요해집니다. 이런 상태는 당사자에게 오히려 매우 밝은 신앙의 열심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빛이 비칠 때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진리를 이용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님을 조금씩 보게 됩니다.

 

네 번째는 이른바 의로운 분노입니다. 불의한 일을 보고 분노하는 것 자체를 모두 자기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과 불의를 보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거나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일어난 분노를 나는 진리를 위해 화내는 것이다라고 포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자기 상처와 진리에 대한 열심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후 더 밝은 빛 가운데 들어가면서 내가 정말 진리를 위해 분노한 것인가, 아니면 proprium 상처받았기 때문인가?라고 묻게 됩니다. 바로 이런 질문 자체가 이전에는 하나로 보였던 빛과 어둠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섯 번째로 목회나 신앙적 봉사에서도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하려는 열망은 선한 목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이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지나친 분노와 좌절이 일어난다면, 주님의 이라고 생각했던 것 안에 내가 이루어야 이라는 자기 소유의 마음이 섞여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역 자체가 어둠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proprium에서 나오는지를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례들을 이해할 때 proprium을 인간의 개성이나 인격 전체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의 문제는 사람이 가진 고유한 성격이나 재능 자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종교적이고 도덕적으로 보이는 일 안에서도 proprium은 작용할 수 있고, 반대로 자연적인 재능과 개성은 주님의 질서 아래에서 좋은 쓰임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안에서 혼합된 동기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모든 선은 가짜였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AC.21은 사람에게서 나온 모든 행동을 분석하여 자기혐오에 빠지게 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전에는 서로 뒤섞여 하나처럼 보였던 것을 이제 구별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구별이 가능해져야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처럼 보였던 어둠을 발견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구나를 깨닫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님에게서 왔고 무엇이 아직 proprium에서 나오는가를 분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20에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했다면, AC.21에서는 그 첫 빛 안에서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것과 참된 빛이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빛과 어둠의 분별입니다. (AC.21 심화 1)

 

 

 

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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