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1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게 되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밖에 필요에 따라 부수적으로 언급되는 것들은 별도로 합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append them in some order, 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AC.71은 매우 짧지만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전체 구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새로운 사후세계의 내용을 말하지 않고, 지금부터 그런 내용들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할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다는 사실,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죽음에서 영원한 삶으로의 소생 등 자신이 여러 해 동안 듣고 본 것들을 앞으로 계속 밝히겠지만, 그것들을 창세기 본문의 속뜻을 해설하는 글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러한 내용들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으로 밝힐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들은 서로 관계없는 일화들의 모음이 아니라 일정한 연결과 순서를 가진 하나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절과 구절을 차례로 해설하는 가운데 이 내용들을 조금씩 나누어 삽입하면, 사후세계에 관한 설명 자체의 흐름이 끊기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동시에 창세기 본문 해설의 흐름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의 중심적인 진행 방식은 말씀의 본문을 절별로 따라가며 그 안의 속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계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매번 그 사이에 길게 삽입하면 말씀 해설의 연속 역시 끊어질 수 있습니다. AC.71은 이 두 종류의 내용을 아예 서로 무관한 것으로 분리하겠다는 뜻이라기보다, 각각의 내용이 가진 연속성을 보존하기 위해 배치상의 구별을 두겠다는 설명으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내용들을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덧붙이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AC를 읽다 보면 반복해서 확인하게 되는 독특한 구성입니다. 창세기 한 장의 해설에 들어가기 전이나 그 장을 마친 뒤에 사후세계, 영들과 천사들, 천국과 지옥, 인간과 영계의 관계 등에 관한 별도의 기록들이 이어집니다. AC.71은 그 구조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배열임을 직접 알려 줍니다.

 

여기서 in some order’,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는 사후세계에 관한 경험들을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관련된 내용들을 가능한 한 연결하여 제시하려 합니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아도 그 점이 보입니다. AC.67에서는 왜 다른 에 관한 것을 밝히는지 설명했고, AC.68에서는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을 알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다고 했으며, AC.69에서는 인간이 몸을 입은 이기 때문에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이 인간 본성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님을 설명했습니다. AC.70에서는 마침내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으며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고 말했습니다. 서로 별개의 일화가 아니라 하나의 주제가 조금씩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이후의 AC를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각 장의 처음이나 끝에 나오는 영계 기록을 단순한 부록이나 여담으로 생각해서 건너뛸 필요가 없습니다. AC.67에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과 관계되기 때문에 그 삶의 본성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이 기록들은 창세기 속뜻 해설과 전혀 무관한 덧붙임이 아닙니다. 다만 내용 자체의 연결성을 보존하기 위해 말씀 본문 해설과 구별된 자리에 묶어서 제시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영계 기록을 창세기 본문보다 더 중요한 내용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71의 표현은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게 되면이라고 합니다. 기본적인 진행축은 여전히 말씀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를 절별로 해설하는 작업을 계속하면서, 별도로 사후세계와 영적 세계에 관한 기록들을 일정한 순서로 덧붙입니다. 따라서 AC에는 말씀의 속뜻 해설영계에 관한 경험적 기록이라는 두 흐름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함께 진행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두 흐름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밖에 필요에 따라 부수적으로 언급되는 것들은 별도로 한다고 덧붙입니다. 즉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은 언제나 장의 처음과 끝에서만 등장하는 절대적인 편집 규칙은 아닙니다. 말씀을 해설하는 과정에서도 관련되는 내용이 있으면 부수적으로 언급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1은 기계적인 형식 규칙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는 각 장의 처음과 끝에 관련 내용을 모아 배열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본문 중에도 언급할 수 있다는 편집 원칙을 제시합니다.

 

이 마지막 단서 때문에 기존에 사이, 본문 해설의 중심부에는 철저히 말씀의 문자와 내적 의미만이 놓인다고 설명했던 것은 수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1 자신이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곧 본문 중에도 부수적으로 들어오는 내용이 있다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는 본문에서는 영계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엄격한 분리가 아니라, 큰 덩어리의 설명은 장의 처음과 끝에 모으고 필요에 따라 관련 내용을 본문에서도 언급하는 방식입니다.

 

또 장의 처음이라는 위치에 그 자체로 별도의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장의 처음은 독자의 인식을 열어 주는 자리이고, 장의 끝은 인식을 가라앉히고 확장하는 자리라고 했지만 AC.71은 그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이유는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최종본에서는 그 이유에 머무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은 AC.71에서도 다시 나타납니다. AC.6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자신이 마음대로 영계 경험을 공개하고 배열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들을 일정한 순서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자신의 저술 사명을 개인적인 선택이나 지적 기획만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한 표현에서 어디에 무엇을 배치할지까지 주님께서 직접 지시하셨다거나 AC 편집 배열 전체가 단어 하나까지 직접 계시된 것이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71은 그런 세부적인 계시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밝히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이렇게 배열하여 제시하는 일도 주님의 자비로 허락된것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인식되었는지는 이 글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AC.71은 짧지만 우리의 AC 작업에도 유익한 편집 원칙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내용이 중요하다고 해서 관련되는 모든 것을 한 본문 안에 넣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본문 해설의 흐름과 별도 주제의 흐름이 각각 살아 있도록 구별하고, 꼭 필요한 연결만 적절한 자리에서 하는 것이 오히려 독자가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것은 AC.71의 편집 원칙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적용이지, 스베덴보리가 직접 우리에게 편집 지침을 명령한 것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최종 검토에서 성경 인용이나 다른 AC 번호가 나온다고 매번 별도 심화를 만들지 않고, 본문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경우에만 심화를 남기려는 방향과도 자연스럽게 통합니다. 내용이 많아질수록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본문에 속하고 무엇이 별도의 설명으로 다루어져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AC.71이 직접 말하는 편집 목적도 결국 관련된 내용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되는 것을 피하는 데 있습니다.

 

AC.70AC.71의 관계도 이렇게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고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고 말하며 소생이라는 큰 주제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곧바로 창세기 2장의 절별 해설 사이에 계속 삽입하지 않습니다. AC.71에서 이러한 사후세계 관련 내용들을 별도의 연속된 묶음으로 배치하겠다고 설명하고, 이어 AC.72에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겠다고 예고합니다. 바로 이 편집 원칙이 실제 구조로 적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71의 핵심은 거창한 계시의 질서이론에 있지 않습니다. 훨씬 실제적입니다.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에는 그 자체의 연결과 순서가 있으므로 말씀의 절별 해설 사이에 흩어 놓지 않고,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묶어 제시하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필요한 경우에는 본문 중에도 관련 내용을 부수적으로 언급할 수 있습니다. 이 짧은 설명을 알고 AC를 읽으면 앞으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독특한 구성의 이유를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72, 창2 앞,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다’

AC.72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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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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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여러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제가 있도록,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제가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말하고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도 단지 하루나 동안이 아니라 여러 동안, 거의 동안이나 세상에서와 똑같이 그들과 말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자신들이 그러한 불신 가운데 있었고,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이 죽은 뒤에는 살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불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실제로 육체의 죽음 사람이 다른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AC.70부터 스베덴보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의 본성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고, AC.68에서는 사람들이 그 증언을 상상이라고 하거나 믿지 않을 것을 알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AC.69에서는 사람이 몸을 입은 이기 때문에 본래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0에서는 그 모든 서론을 지나 첫 번째 실제 주제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사람이 소생될 ’,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단어는 소생(resuscitation)입니다. 일상적인 한국어에서 소생이라고 하면 죽을 뻔한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없어진 사람이 새로 창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육체의 삶이 끝나면서 사람이 영으로서의 의식적인 삶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소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AC.72 이하에서 나올 소생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자연적 육체가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 이후 영으로서 깨어나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기억해 두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육체의 부활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오랜 기간 의식 없이 있다가 먼 훗날 다시 육체를 받아 살아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AC.70에서부터 죽음과 영원한 삶을 하나의 연속으로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인간 자체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삶에서 영으로서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AC.70에서는 아직 그 소생이 어떤 단계로 이루어지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 구체적인 과정은 바로 다음 글들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경험한 방식으로 하나씩 설명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을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부분도 매우 직접적입니다. 그는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말하고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루나 한 주에 그친 것도 아니고, 여러 달 동안, 어떤 경우에는 거의 일 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세상에서와 똑같이말하고 교제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후생명을 철학적으로 추론하거나 성경 구절만을 들어 논증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허락된 직접적인 경험을 증언으로 내놓습니다.

 

세상에서와 똑같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후세계의 모든 환경과 조건이 자연계와 똑같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에서 말하는 것은 그가 그들과 말하고 교제한 방식입니다. 즉 죽은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잔상이나 이름만 남은 존재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다시 말하고 함께 지낼 수 있는 살아 있는 인격으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AC천국과 지옥에서는 사후에도 사람이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관계한다는 사실이 훨씬 자세히 설명됩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죽은 뒤 만난 사람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 살 때 죽은 뒤에도 계속 살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지 않는다는 것을 몹시 이상하게여겼다고 합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죽음 이후의 삶이 불확실하거나 믿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는데, 죽은 뒤 자신들이 분명히 살아 있음을 경험하자 과거의 불신 자체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불신을 곧바로 악이나 도덕적 잘못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0은 왜 그들이 그렇게 믿지 않았는지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 AC.69에서 인간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속에 지나치게 잠기면서 영적 세계와의 의식적인 교통의 길이 닫혔다고 했으므로 일정한 배경 연결은 가능하지만, AC.70 자체가 사후생명을 믿지 않는 이유는 모두 사람에게 잠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최종 해설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범위 안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AC.70의 가장 강렬한 문장은 마지막 두 문장입니다. ‘실제로 육체의 죽음 사람이 다른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스베덴보리에게 죽음은 생명과 무생명 사이에 긴 공백이 생기는 사건이 아닙니다. 자연계의 육체적 생명이 끝난 뒤 매우 짧은 과정 안에서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경험합니다. 이 때문에 그는 죽음을 삶의 연속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말을 해석할 때에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후대에 천국에는 자연계와 같은 해와 날과 시간이 없으며, 그곳에서는 시간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AC.70거의 하루를 곧 영계에서 하나의 상태 주기를 뜻하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바꾸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자연계에 있는 독자에게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 안에서의 의식적인 삶 사이가 얼마나 짧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자연적 시간 언어로 하루도 거의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영계의 시간과 상태의 관계는 별도의 문제이며, 이 표현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국과 지옥162-165에서는 천사들에게 자연계의 날과 해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자세히 설명합니다.

 

거의 하루라는 표현을 모든 사람에게 정확히 24시간 이내라는 시간표로 바꾸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70의 관심은 임종 후 몇 시간 몇 분 만에 어떤 단계가 완료되는지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후 AC.72 이하를 보면 소생의 과정에는 질서와 연속이 있으며 여러 천사들이 관여하는 구체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확히 시간이냐보다 육체의 죽음과 영원한 삶 사이에 인간 존재의 단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말은 단순히 죽어도 영혼이 살아 있다는 명제보다 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죽은 뒤 만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새로운 존재나 과거 사람의 복제품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과 다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즉 죽음 전의 와 죽음 후의 사이에는 인격적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사후 기억과 애정, 성품과 지배적인 사랑에 관한 설명으로 점점 더 구체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것이 죽기 전과 그대로다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삶의 연속은 사후에도 아무 변화 없이 자연계 삶이 그대로 반복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육체와 자연적 환경은 벗게 되고, 사람의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는 새로운 과정이 시작됩니다. 다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도 살아가는 주체인 인간 자체가 끊어졌다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인격적 생명의 연속성이 AC.70이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영원한 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들어간다고만 하지 않고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죽음 이후의 삶을 부수적인 후속 삶으로 보지 않게 합니다. 자연계의 삶은 제한된 기간 동안 지속되지만 인간의 영적 생명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삶과 영원한 삶은 서로 상관없는 두 인생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 이어지는 두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연계의 삶을 단순한 대기실이나 가치 없는 짧은 준비기간으로 낮추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사후의 삶이 현재 삶과 연속되기 때문에 지금의 삶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며,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인간의 내적 생명 형성과 관계됩니다. 다만 AC.70은 아직 이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현재 글에서는 우선 사람은 죽어도 계속 산다는 사실과 죽음이 생명의 단절이 아니라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0은 이처럼 앞으로 이어질 긴 사후세계 기록의 첫 글로서 매우 절제된 출발을 합니다. 아직 천국과 지옥의 구조도, 영들의 세계도, 사후의 세 상태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가장 근본적인 사실 하나를 세웁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자신이 세상에서 알던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여러 달 동안 말하고 교제한 경험으로 확인했다고 증언합니다.

 

AC.67부터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AC.67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아르카나가 다른 삶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은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을 알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AC.69는 인간이 몸을 입은 영이기 때문에 영적 세계와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속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70은 마침내 죽음의 문턱을 넘은 인간이 실제로 계속 살아 있다는 증언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70을 읽으면서 당장 사후세계의 모든 교리를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연옥, 최후의 심판,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으로의 최종 귀속 같은 주제들은 뒤에서 각각 더 적절한 자리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먼저 독자에게 보여 주는 것은 훨씬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사람은 죽어 없어지지 않습니다.그리고 그 이유를 이 짧고 강한 문장으로 마무리합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AC.70에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 후 사람이 다른 삶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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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AC의 사후세계 기록은 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있는가?’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게 되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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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창2 앞, ‘사람은 본래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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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면 길이 다시 열린다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69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문장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리고,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며 그들과 공동의  가운데 있게 됩니다. 이 말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육체적인 것들을 물러가게 하면 영들과 천사들을 보고 말할  있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중요한 것부터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AC.69는 여기서 사후에 육체를 벗으면 누구나 영들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을 1차적으로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며 바로 다음 AC.70부터 본격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그러나 AC.69의 직접적인 주제는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천사들과 말할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졌지만 사람들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에 지나치게 잠기면서 그 길이 닫혔고, 그러한 것들이 물러나면 다시 열린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를 곧바로 죽음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도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라고 하여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자연계의 육체 안에 살아 있으면서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의 직접적인 문맥 역시 그러한 개방과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이제 반대편으로 가서 그러면 우리도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과 의식적으로 말하는 것을 일반적인 신앙생활의 목표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국과 지옥 HH.249에서는 오늘날 영들과 말하는 것이 드물게 허락되는 일이며 위험할 수 있다고 분명히 경고합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영들이 자신들이 특정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인간의 생각과 애정에 위험하게 개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69는 영계 개방을 위한 수행법이나 영적 기술을 가르치는 본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면 길이 다시 열린다고 했을까요? 이것은 영적 세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완전히 낯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입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동안에는 자연적 감각과 육체의 기능을 통하여 세상을 지각하지만, 그 내적인 생명은 영에 속합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감각이 영적 지각을 가리고 있는 상태가 특별히 제거되거나 완화될 경우 영적 세계를 의식적으로 지각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AC.69의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바로 그런 특별한 경우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육체적인 욕망을 충분히 정복하거나 어떤 높은 영적 수행에 성공했기 때문에 그 길이 자연스럽게 열린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AC.67부터 그의 표현은 일관되게 허락되었다입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도록 허락되었고,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그것을 세상에 밝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의 경험은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도달한 영적 능력이라기보다 주님의 특별한 목적 아래 허락된 개방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후대 설명을 보면 사람은 이러한 의식적인 개방이 없어도 이미 자신의 영으로 영적 세계와 관계하고 있습니다. AC.5861에서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자신의 내적인 것들, 곧 영으로는 다른 영들과 함께 있으며, 이를 통해 영적 세계와 교통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사람도 영들도 그 관계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AC.5862에서는 영들이 보통 자신들이 특정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에는 주님께서 그의 내적인 것들을 여셔서 영들이 그가 아직 육체 안에 사는 인간임을 알도록 특별히 허락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영적 세계를 의식적으로 보고 영들과 대화하는 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영으로 영적 세계와 관계하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그 관계가 감각적으로 열려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영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지 못하니 영적으로 닫힌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육체적인 것들이라는 말을 몸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건강을 돌보고, 음식을 먹고, 가족을 사랑하며, 직업을 가지고 일하고, 돈을 관리하고, 자연계에서 주어진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 문제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연적 삶은 우리가 쓰임을 수행하는 중요한 장입니다. AC.69의 문제는 사람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겨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우리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하면 영을   있을까?보다  마음은 무엇에 너무 깊이 잠겨 있는가?를 묻는 쪽이 훨씬 안전하고 본질적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소유, 감각적 즐거움과 자기중심적인 관심이 마음 전체를 차지하여 말씀과 주님과 이웃과 영원한 생명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바로 AC.69이 말하는 위험과 연결됩니다. 반대로 자연계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자리에 두고, 주님과 영적인 것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고 해서 영적 시각이나 청각이 열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에게 더 중요한 것은 영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에 따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고, 이웃을 향한 쓰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며,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에게 주어진 정상적인 길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영적 현상을 직접 경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동으로 더 선하거나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에는 천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도 있습니다. 어떤 영이 자신에게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이 곧 주님의 말씀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오늘날 영들과 말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도 이런 문제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을 직접 보고 듣는  자체를 신앙의 높은 단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영적 세계와의 참된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가장 안전한 중심은 주님과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들과 직접 대화하려고 할 필요 없이 말씀을 통해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에 받아들이며, 선과 진리의 질서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우리의 내적인 생명은 이미 영적 세계와 관계하고 있으며, 우리는 의식적인 영계 체험이 없어도 주님의 섭리와 천국의 질서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는 조금 방향을 바꾸어 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계가 열리도록 육체적인 것을 제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특별한 체험을 얻기 위해 감각을 억제하거나 현실생활을 떠나려 하지도 마십시오. 대신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거의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영적 개방을 허락하셔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영역입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그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보여 주시는 선과 진리에 따라 거듭나는 것입니다. 영을 보지 못해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천사의 목소리를 직접 듣지 못해도 말씀의 진리를 들을 수 있으며, 영계를 눈으로 보지 못해도 천국의 질서에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AC.69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깨달음은 인간은 눈에 보이는 육체가 전부가 아니다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몸을 입은 영이며, 지금의 삶은 영원한 삶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감각 너머를 억지로 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연계에서 어떤 사랑을 선택하고 어떤 진리에 따라 살아가며 어떤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길이 다시 열린다는 말씀을 우리의 목표로 삼아 영들과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히 열린 그 길은 그의 고유한 사명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훨씬 평범해 보이지만 더 본질적입니다. 말씀을 읽고, 주님께 의지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쓰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길을 통해 우리의 속 사람은 주님께 열리고, 천국의 질서는 우리 삶 안에 조금씩 이루어집니다.

 

 

 

AC.69, 창2 앞, ‘사람은 본래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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