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0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 실제 사례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문장으로 읽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실제 목회 현장에서 이런 변화를 분명하게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옳고 자신이 선하다는 확신은 오히려 더 강해질 수 있고, 봉사와 헌신까지 자기 의를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AC.20이 말하는 첫 빛은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들은 AC.20의 상태를 판정하는 공식이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가장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열심히 봉사하는 신앙인의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자신도 그것을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봉사가 인정받지 못했을 때 예상보다 훨씬 큰 섭섭함과 분노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받으면 질투하고, 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라는 생각이 반복됩니다. 이때 그 사람이 단순히 나도 인간이니까 그럴 있지라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이라고 생각했던 안에도 나를 높이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있었구나라고 보기 시작한다면, AC.20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는 말씀을 이해하는 데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매우 정직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 실수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나는 원래 선한 사람인데 이번에만 잘못했다는 자기상을 지키는 대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자기 사랑이 훨씬 깊게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 역시 자기 자신을 선의 기준으로 삼던 확신에 처음 빛이 비치는 모습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용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신앙인이니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용서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기를 기다리고, 자신이 용서하는 사람이라는 도덕적 우월감까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힘으로는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할 없구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기 시작합니다. 훗날 마음에 실제 변화가 생겼을 때 그것을 자기 의지력이나 인격의 성취로 돌리기보다 이것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느끼게 된다면, 자기 선에서 주님의 선으로 시선이 옮겨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설교하고 가르치고 상담하며 사람을 돕는 일은 그 자체로 선한 쓰임입니다. 그러나 사역의 열매가 보이지 않거나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지나치게 낙심하고 분노한다면, 그 안에 내가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자기 소유의 마음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나는 주님의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문제다라고 끝내지 않고, 선한 사역조차 자기 공로와 자기 성취로 붙들 수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이것도 AC.20을 이해하는 실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례를 보고 자기 동기가 불순함을 발견했으니 사람은 AC.20 상태에 들어갔다고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심리학적인 자기성찰만으로도 사람은 자기 모순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20의 빛에는 방향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할 뿐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아갑니다. 따라서 단순한 자기비판이나 낮은 자존감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선의 근원을 찾던 데서 주님에게로 방향이 옮겨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AC.20은 사람이 자기 안에서 악을 많이 발견하여 점점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선의 허상을 보는 목적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절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선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서 나온 선의 한계를 볼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것이 안으로 들어간다는 방향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이런 변화가 드물게 보인다는 느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난 변화만으로 거듭남의 정도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작은 깨달음처럼 보이는 것이 내적으로 중요한 시작일 수도 있고, 반대로 매우 극적인 회심의 말이 실제 삶의 지배적인 사랑을 아직 바꾸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영적 단계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빛을 가능한 한 분명하게 제시하고,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바라보도록 돕는 것입니다.

 

결국 AC.20의 실제 사례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나는 생각보다 선한 사람이구나라는 자기평가 자체가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변화는 참된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구나라는 방향 전환입니다. 자기에게서 선을 찾던 사람이 자기의 선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그 의심이 단순한 자기비난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아가는 데까지 이어질 때, 우리는 창1:3빛이 있으라가 인간의 삶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0 심화 1)

 

 

 

AC.20 심화 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 심화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의 설명을 실제 인간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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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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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2. move brood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영어만 읽으면 move움직이다, brood는 새가 알을 품다라는 서로 다른 말인데 왜 두 단어가 나란히 나오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 경우에는 Potts의 영어만 가지고 의미를 추측하기보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표현과 창1:2의 성경적 배경을 함께 보는 것이 좋습니다.

 

1:2의 히브리어에서 운행하시니라에 해당하는 동사는 רחף 계열의 말이며, 32:11에서도 독수리가 자기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모습을 표현할 때 용됩니다. 따라서 이 동사는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는 뜻만으로 읽기보다, 무엇인가의 위에서 움직이거나 너풀거리는 이미지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히브리어 단어 자체가 암탉이 알을 품는다는 뜻이다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9에서 결정적인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표현을 어떻게 해설하는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을 주님의 자비라고 밝히면서 그 자비의 운행을 새가 알을 품는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Pottsbrood는 바로 이 설명을 전달하기 위한 말입니다. 따라서 movebrood는 서로 경쟁하는 두 번역이라기보다, 성경 본문의 운행이라는 표현과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풀어 주는 품음의 이미지를 함께 보여 준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라는 비유는 AC.19의 전체 문맥과 잘 맞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감추어 보존하시며, 이것들을 리메인스라고 합니다. 아직 그것들이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았는데도 주님의 자비는 그 위에서 운행합니다. 그러므로 품는다는 그림은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을 보호하고 보존하며 장차 생명이 나타날 때를 준비하는 모습을 매우 자연스럽게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암탉, , 따뜻함 같은 요소 하나하나에 별도의 상응을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AC.19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사용하는 비유의 목적은 주님의 자비가 수동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 위에서 이미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아직 거듭남을 의식하지 못하고 빛이 있으라는 상태에 이르지 않았어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거듭남을 위한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번역에서도 movebrood를 하나의 한국어로 억지로 합칠 필요는 없습니다. 1:2의 성경 표현을 따라 운행하다를 살리고,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는 품다를 함께 제시하면 됩니다. 현재처럼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 품는다(brood)라고 옮기면 두 층위가 모두 드러납니다.

 

결국 movebrood가 나란히 있는 이유를 히브리어 단어에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너무 단순하게 정리하기보다, 1:2 운행이라는 성경 표현을 스베덴보리가 품음의 이미지로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이 두 단어는 어색한 중복이 아니라 AC.19의 핵심, 곧 아직 빛이 나타나기 전부터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을 품고 계시는 주님의 자비를 보여 주는 매우 아름다운 표현이 됩니다. (AC.19 심화 2)

 

 

 

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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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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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1. 자비(mercy)은혜(grace)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에,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반복해서 자비라는 말을 만나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한국어의 자비가 일상적으로 불교와도 자주 연결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차라리 은혜라고 번역하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두 말을 임의로 하나로 합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사용한 말을 구별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에서 영어 mercy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말은 misericordia입니다. 이것은 긍휼, 자비, 불쌍히 여김과 관련된 말입니다. 따라서 Potts가 이를 mercy로 옮겼을 때 한국어로 자비라고 번역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자비가 반드시 불교적 용어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mercy자비라고 하는 것은 다른 종교의 개념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는 기독교적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반면 grace는 일반적으로 은혜라고 번역합니다. 두 말은 서로 매우 가까우며 실제 신앙 언어에서는 겹치는 영역도 많기 때문에 자비는 이것, 은혜는 저것이라고 완전히 분리된 두 개념처럼 정의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뉘앙스에서 mercy는 비참하고 연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grace는 값없이 베풀어지는 호의와 은혜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를 돕는 구별이지 두 단어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교리적 경계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19에서는 특히 왜 자비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지가 본문의 흐름에서 드러납니다. 사람은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고, 깊음으로 표현되는 욕정과 거짓에 잠겨 있습니다. 아직 빛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 수면 위를 운행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사람이 먼저 선해져서 주님의 관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직 그런 어두운 상태에 있을 때부터 주님께서 그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감추어 보존하시고 그 위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런 문맥에서는 자비라는 말이 AC.19의 장면을 매우 잘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작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도 같은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보고 이해하며 인간의 구원과 거듭남에 관한 것을 알게 되는 근원을 자기 지성이나 공로에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는 표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mercy를 사용하는 모든 곳을 하나의 간단한 공식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각의 문맥에서 그 말이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더 깊이 보면 주님의 자비는 주님의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속성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타락하고 연약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 사랑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향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와 긍휼의 언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비를 단순히 불쌍해서 봐주는 감정 정도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AC.19에서 주님의 자비는 실제로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보존하고, 그것들 위에서 운행하며, 장차 거듭남에 사용하시는 적극적인 신적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어 번역에서는 mercy은혜로 바꾸어 익숙하게 만들기보다 자비로 구별하여 두는 편이 좋습니다. 독자에게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도 AC를 계속 읽으면서 주님의 자비가 어떤 문맥에서 반복되는지를 경험하면 그 말의 깊이가 점차 드러납니다. grace가 나오면 은혜, mercy가 나오면 자비라는 기본적인 구별을 유지하되, 둘을 서로 경쟁하는 신학 개념으로 만들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19에서 이 차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그림은 결국 품으심입니다. 아직 빛이 나타나기도 전에 주님의 자비는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며, 사람 안에 감추어 보존하신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새 생명을 만들어 내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그를 떠나지 않고 거듭남을 준비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자비는 단순한 번역어 하나가 아니라 거듭남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AC.19 심화 1)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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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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