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23절,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AC.43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어마어마하게 결실하며 번성하는데요(fructifies and multiplies), 몸 안에 사는 이생뿐 아니라 사후 저생(the other life)에서는 정말 어리둥절할 정도입니다. 말씀에서 ‘생육하다’(生育, to be fruitful)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관한, 그리고 ‘번성하다’(繁盛, to multiply)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관한 서술입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에는 ‘씨’(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말미암아 놀랍게 번성합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 들의 풀과 나무, 강과 바다의 물고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꽃 한 송이, 가령 해바라기는 그 넓은 둥그런 꽃 한 판에 얼마나 많은 씨가 있으며, 열매, 가령, 옥수수 한 자루엔 얼마나 많은 알갱이가, 벼나 보리, 수수 같은 곡식들 한 줄기 줄기엔 또 얼마나 많은 낱알이 맺히는지... 나무 한 그루도 보면, 가령 은행, 호도, 대추, 밤, 감, 사과 등등... 얼마나 많은 열매, 과일이 열리는지... 물고기는 또 어떤가요? 명란젓 만드는 명태 한 마리가 낳는 알은, 대구는, 오징어는? 등등... 또한 얼마나 그렇게 어마어마한지... 끝이 없습니다. 참으로 어리둥절할 정도로 아주 심하게 번성합니다 ^^

 

※ 인간과 달리 동, 식물의 경우, 주님의 이 정하신 복, 명령하신 축복이 예외 없이 그대로 시행되는 이유는, 동, 식물의 경우는 본능만 있을 뿐 스스로 무엇이 없어 주님이 정하신 질서를 거역하거나 뒤집거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정하신 쓰임새 그대로 존재하며, 존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 판단하고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최선인 줄을 알면서도 버젓이 악을 행하고, 창조주의 질서를 뒤집어 훼방을 놓고 엇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변수가 많으며, 오히려 주님의 복 받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인간의 삶 가운데 화와 불행은 그 스스로가 자초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오늘 본문 동, 식물의 이런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 가운데 살기를 원한다면... 마찬가지로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과 능력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흘러 들어오게 하면 됩니다.

 

※ 스베덴보리(1688-1772)를 통해 주님이 알리신 이 아르카나가 250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미미하게 세상에서 천대를 받고, 변죽만 울리고 있습니다. 홍수 후 고대교회 초창기에도, 아브라함 이후 유대교회 초창기에도, 주님 성육신 이후 기독교회 초창기에도 늘 시작은 아주 미미했습니다만... 그러나 결국은 저마다 오랜 세월 대하처럼 흐르는 시대별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이 주님의 새 교회도 그럴 것입니다. 각 시대 초기 교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복’(福, blessing)은 풍성한 결실과 번성을 의미하는데요, 이런 생육과 번성이 모두 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 복은 사람 안에 천국이 있는 상태이며, 피조물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문제이지, 주님이 주시고, 안 주시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 지난번 다룬 것처럼 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다릅니다. 즉, 첫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과 두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이 다르며, 두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과 세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이 다릅니다. 그런 식으로 나머지도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 사람의 거듭남 풀코스 가운데서 사람은 비록 주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살피시며 동행하시지만, 그렇다고 늘 하하 호호한 상태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바로 사람의 연약함 때문인데요, 사람은 주님을 바라보다가도 또 어느새 자아를 바라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의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한데요, 심지어 천국의 천사들조차 이런 상태변화를 겪는다 하니 우리는 자신의 이런 연약함의 오르락내리락을 결코 이상하게, 또는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분명한 건, 천사들의 증언처럼, 오히려 이런 굴곡을 통해 더욱 예리해져 가며, 더욱 주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에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이런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반복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욱 성장, 성숙해져 가며, 그래서 어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보다 오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만큼, 그리고 오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보다 내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만큼 그만큼 우리는 더 성장, 성숙해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우리가 우리를 포기할 필요도, 그래서도 안 됩니다. 힘을 다해 공부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사고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 지식에 힘쓰고, 그걸 선용(善用, 쓰임새, use), 천적 지혜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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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13(D1)-주일예배(2499, 눅12,13-21),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pdf
0.40MB

https://youtu.be/E02g6WgaH1k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12:13-21)

 

 

쓰임(uses)이란 자신과 자신의 소유(one’s own)를 위한 음식과 의복, 주거 같은 생활의 필요들을 의미할 뿐 아니라 자신의 나라, 공동체, 동료 시민들의 선 또한 뜻합니다. 사업도 사업 자체가 궁극적 목적일 뿐, 돈은 그저 중간, 부차적일 때, 그리고 사기(fraud)와 악행(bad practices)을 죄로 알고 피하며 싫어할 때는 선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돈이 궁극의 목적이요, 사업은 그저 중간, 부차적일 때는 다릅니다. 이럴 경우, 그런 사업은 탐욕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DP.220:11) By uses not only the necessities of life are meant, such as food, raiment, and habitation for oneself and one’s own, but also the good of one’s country, community, and fellow citizens. Business is such a good when it is the end-love and money is a mediate, subservient love, as it is only when the businessman shuns and is averse to fraud and bad practices as sin. It is otherwise when money is the end-love and business the mediate, subservient love. For this is avarice, which is a root of evils (on this see Luke 12:15 and the parable on it, verses 16–21). (DP.220:11)

 

 

다음은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20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0-28)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어렵고도 험난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요한 형제는 ‘할 수 있나이다’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은 왕이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주님에게 부탁했을 때 다른 제자들이 분하게 여긴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들이 천국의 영화를 모두 독점하려 하는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께 아들들을 부탁한 것이나, 다른 제자들이 그것을 분하게 여긴 것이나 모두 그들 마음속에 탐심(貪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멀리해야 할 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탐심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는 마음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웃의 것을 빼앗아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마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탐심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난 제자들을 향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말씀하심으로 제자들 가운데 불기 시작한 이 탐심을 잠재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탐심 또는 탐욕과 관련된 말씀인데요, 본문 1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말씀에서 형제는 이웃을 뜻합니다. 그리고 유산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인 선과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무리 중 하나가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믿음을 시샘하는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사랑이 많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특별히 깊다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자기도 모르게 시샘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앞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요한의 형제를 시샘했던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본문에서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는 것은, ‘주님, 저 사람에게는 사랑도 주시고, 진리도 많이 주시면서 왜 저에게는 주시지 않습니까?’ 하는 일종의 시샘이며 불평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14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영적 의미로 재판장은 저주하거나, 또는 구원하는 자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옥에 보내거나 천국에 보내는 자’가 재판장인 것입니다. 그러면 나누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애하는 자가 나누는 자입니다. 사람을 편애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 사이를 나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주님은 재판장도 아니시고, 나누는 자도 아니십니다. 주님은 어느 누구도 저주하지 않으시며, 어느 누구도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되물으셨습니다. 누군가를 시샘하는 것은 결국 주님이 공평하지 않으시다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나 자연적인 면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능력이 모두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신 분인 까닭은,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사후에 각자의 쓰임새에 따라 천국에서 봉사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역량에 따라 정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을 더 가까이, 더 많이 누리는 것이고, 주님을 덜 사랑한 사람은 그 역시 그가 주님을 사랑한 그만큼만 주님과의 거리며 누림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더 큰 일을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나 천국에서 주님과 이웃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가진 잔의 크기 만큼만 허락하시되 넘치도록 허락하십니다. 누구나 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도록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신 분입니다. 탐심은 내가 남보다 더 큰 일을 하고, 더 존경받아야만 한다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거리의 청소부보다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단지 그들이 하는 역할만, 그리고 역량, 즉 주님을 사랑하는 정도만 다를 뿐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학력이나 배경, 지위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주님과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가 자기 역량 가지고 감당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각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최선의 것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형의 유산을 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주님께서는 사람의 진정한 생명인 선하고 진실함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소유가 넉넉하다, 많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보통은 세상의 유한한 삶을 좀 더 편하게 사는 데나 필요한 것이지 영원한 삶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서는 이웃을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천국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며, 많이 사랑할수록 그는 그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탐심은 사람을 살리는 약이 아니고 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을 향해서는 장님이 되게 하고, 대신 이 세상에만 집중, 집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탐심에 대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16절로 19절입니다.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말씀에서 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겉으로만 부자이지 속으로는, 내적으로는 부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말씀에 관한 지식일 뿐 진정한 진리, 즉 말씀을 실천할 때 만나게 되는, 그 안에 선이신 주님이 계시는 진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진리가 없는 이유는 속 사람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빛이 흘러 들어와 말씀 깊은 곳에 감추어진 진리를 볼 수가 있는데, 속사람이 닫혀 있으니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자는 말씀에 대해 많이 안다 생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천국에서 영원히 먹고 마시며 살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인간한테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는 천국에서 영원히는 고사, 살 수조차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주님은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라 하시고,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인간의 욕심으로 이룬 것은 그것이 지식이든, 물질이든, 명예든, 사람을 영원히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마다 삶의 목표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표이고, 우리 같은 신앙인들은 사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복되게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포기하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서나 나중에 천국에 가서나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 하고, 큰일 하기를 원합니다. 오죽하면 주님의 제자들도 서로를 비교하며 시샘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잠재적으로 그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인척 가운데 한 분은 어릴 적부터 공부를 아주 잘했다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전문직 자격증을 취득, 큰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한 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그곳에서도 성공, 큰 부를 이뤘다고 합니다. 그는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바에는 제일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든 1등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주님의 나라에도 1등이 있고 2등이 있을까요? 영적인 일이든 세상 일이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무슨 일에나 최고가 되려고 하는 것은 자칫 탐심일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일 자체를 위해 해야지 최고가 되려는 마음, 일을 이용해 마음속 숨은 목표를 이루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 정치인이 되려고 해야지, 자신의 부와 명예 따위를 이루기 위해 정치를 하려고 하면 안 되듯 말이지요. 탐심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탐심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말처럼 탐심을 그대로 두면 거듭남을 방해하는 거대한 악이 됩니다.

 

성(聖) 문서에 보면, 탐심이 아주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재물에 관심이 없는 듯 보이고, 자신의 부를 자랑하지도 않으며 교만한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나 의복, 음식 같은 것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돈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돈을 소유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합니다. 탐심 안에는 그렇게 교활함과 천박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탐심을 그대로 두면 속 사람이 닫히고 나중에는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탐심을 그대로 두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웃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끝절입니다.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신 것입니다. 사소한 일을 하더라도 정성껏 하고 그 일로 인해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일을 큰일로 여기십니다.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섬기는 자의 본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7-28)

 

아멘

 

원본

2020-06-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1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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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C.42

‘물고기들’(Fishes)은, 앞서도 말했듯,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앙(faith from the Lord)으로 움직이는 상태가 된, 그래서 살아있는 상태가 된 기억-지식들을 말합니다. Fishes,” 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

 

※ 무엇이든 주님으로 말미암으면 ‘살아있는(alive), ‘움직이는(animate) 상태이지만, 자신으로 말미암으면 ‘죽은(dead), ‘못 움직이는(inanimate) 상태입니다. 지식이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이 지식의 거듭남입니다. 지식의 거듭남이란, 비록 여전히 세상, 세속 지식이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주님을 향해, 주님을 위해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 특히 세상 지식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다만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모든 상태가 결정됩니다.

 

‘큰 바다짐승들’(whales, 고래, 또는 고래와 같은 거대한 수중 생물들)은 그들, 즉 지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세부 원리들이 이들과 종속 관계에 놓이거나(in subordination to) 말미암는(from) 그런 것들입니다. 이 우주에서는 존재(exist) 및 존속(subsist)을 할 수 있으려면 다 자기의 근원이 되는 그런 더 일반적인 원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래들’(Whales), ‘큰 바다짐승들’(great fishes)이 선지서에서 가끔 언급되는 이유는, 이들이 거기서 기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뜻하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 29장 3절을 보면, 애굽 왕 바로를 가리켜 ‘큰 악어’(great whale)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큰 악어’는 인간의 지혜, 지성, 즉 일반적으로 지식[scientia]을 말하는 것이지요. Whales” 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 “Whales,” or “great fishes,” 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 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 “great whale.” As in Ezekiel: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겔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2] 그리고 다른 데서도 And in another place: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겔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는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 안으로 들어가고자 무척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들인 겁니다, 이사야에서 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 In Isaiah: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는 것은 진리의 일반적 원리들조차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By “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 진리의 일반적인 원리는, 모든 세부, 또는 하부 진리는 일반적, 혹은 상부 진리에서 오며, 이들 일반적, 혹은 상부 진리는 단 하나의 근원,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서 So in Jeremiah: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이는 큰 물고기가 요나에게 한 것처럼, ‘좋은 음식’(delicacies)이라고 한 신앙의 지식들을 그가 삼켰다는 것입니다. ‘큰 뱀’(a whale)은 신앙 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단지 기억-지식들로만 소유하고, 또 그런 식으로만 행동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 “delicacies,” as the whale did Jonah; a “whale” 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 지식 중에서도 신앙에 관한 지식은 아주 값비싼 지식이며, 그중에서도 일반적 지식, 가령,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와 같은 말씀 지식은 가히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너무나도 귀한 생명의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걸 그저 지식으로만, 머리로만 알고 가볍게 여기며, 도무지 무슨 가슴 신앙으로 감동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자기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신앙인이다 하는 이런 사람들을 위 예레미야 본문에서는 ‘큰 뱀’이라 한 것입니다.

 

※ 세상 지식을 학습, 습득하면서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또 그 지식을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사용하여 천국 지성에 이르는 중에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늘 시인하고,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고 싶으시면 그냥 간단히 허락만 하시면 될 것 같은데, 왜 주님은 이렇게 속 사람, 겉 사람, 내면, 외면, 기억-지식, 합리와 이성, 지성 등 복잡하게 조직하시며, 다 일일이 경험하게, 순서대로 모든 단계를 다 밟게 하실까요? 그것은 천국은 내면의 나라, 내적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설령 주님의 허락이 있다 해도 사람은 천국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방열복을 안 입고 용광로 작업을 하는 것과 같아서, 천국에 들어갔는데도 지옥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은 사전에 이렇게 아주 단단히 준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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