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가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단어를 단순한 동의어의 반복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 안에서는 서로 비슷해 보이는 표현도 각각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며, 스베덴보리는 이 세 동사 역시 거듭남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나타낸다고 봅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AC.16 자체는 그 차이를 여기서 자세히 정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창조는 생명을 처음 넣어 주는 단계, 형성은 생명을 질서 있게 만드는 단계, 만듦은 그것을 행동으로 구현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세 동사를 하나의 고정된 순서표로 확정하는 것은 AC.16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런 설명은 이해를 돕는 비유로는 사용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AC.16에서 그렇게 정의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창조하다는 거듭남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날 때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에 거듭남 자체를 창조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창조는 자연적 인간이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일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실제로 뒤의 AC에서도 창조하다는 사람이 새로 창조되거나 거듭나는 것과 특별히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만들다 역시 단순한 물건 제작의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뒤의 설명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가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경우 만들다라는 표현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들다를 단순히 외적인 행동으로 구현하는 단계라고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시작하신 거듭남의 역사가 사람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측면까지 포함한다고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짓다 또는 형성하다(form)도 고유한 뜻을 갖습니다. 이 말은 이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것이 일정한 형식과 질서를 갖도록 형성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AC.16 한 번호만으로 세부 의미를 완전히 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여러 곳에서 형성하다를 다른 표현들과 구별하여 사용하며, 각 문맥에서 그 속뜻을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가 모두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를 말하지만 서로 같은 뜻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43:7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라고 한 사람을 두고 세 동사가 연속하여 사용됩니다. 만일 세 말이 완전히 같은 뜻이라면 이런 반복은 단순한 수사적 장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에 속뜻의 차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세 동사 역시 한 사람의 거듭남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나타낸다고 읽습니다.

 

AC.88에서도 이 원칙은 다시 확인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주님의 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그를 창조하시고, 형성하시고,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세 표현이 말씀에서 아주 구별되게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대목에서도 각 단어를 간단한 세 단계 공식으로 정의하기보다는, 말씀에서 각각 고유한 관념을 전달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AC.16을 읽을 때도 가장 안전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세 동사의 차이를 기억할 때는 첫째는 이것, 둘째는 이것, 셋째는 이것이라고 너무 빨리 고정하기보다, 거듭남은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형성하시며, 마침내 온전하게 이루어 가시는 전적인 역사이고, 말씀은 역사를 여러 고유한 표현으로 구별하여 말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후 AC에서 이 단어들이 다시 나타날 때마다 그 문맥에서 구체적인 뜻을 확인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한 의미의 차이가 점차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세 동사가 함께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거듭남의 주체가 주님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하지만, 사람 자신이 스스로를 새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시고, 형성하시고,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AC.16에서 이 세 단어의 차이를 묻는 일은 단순한 어휘 연구가 아니라, 거듭남 전체가 누구의 역사인가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AC.16 심화 1)

 

 

 

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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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심화

1. 주님 예수 그리스도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뜻한다고 말하면,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익숙한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보다 높은 분이라는 뜻인가?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삼위 가운데 한 위격을 다른 두 위격보다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신적 삼위일체는 그 한 분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영원 전부터 서로 구별되는 세 신적 인격으로 생각하고, 그 셋을 다시 한 하나님이라고 이해하려는 방식입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에는 신적 삼위일체가 있다고 보지만, 그것을 한 분 하나님 밖에 따로 존재하는 세 분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신적 삼위일체는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구별은 신성 자체, 신적 인간, 발출하는 신성입니다. 성부는 주님 안에 있는 신성 자체, 곧 모든 것의 근원이신 신성을 가리키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에 오셔서 취하시고 영화하신 신적 인간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인간과 천사에게 역사하는 신성을 가리킵니다. 이것들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이라는 말은 성부를 제외하고 성자만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며, 주님에게서 성령이 발출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다음 AC.15에서 스베덴보리가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C.14AC.15는 따로 떼기보다 서로 이어서 읽을 때 스베덴보리의 의도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성육신 이전과 이후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신성 자체는 영원부터 계셨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인간성을 취하셨고 그 인간성을 영화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외적인 모습이나 임시적인 육체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신적 인간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권세를 받은 피조된 중개자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스베덴보리가 때때로 사람의 영혼과 몸과 활동을 비유로 사용하는 것도 이 하나 됨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성 자체와 신적 인간과 발출하는 신성은 세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만 이 비유 역시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구조로 축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삼위가 한 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14에서 왜 주님이라는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적용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삼위 가운데 성자라는 한 위격만을 선택하여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구원을 이루신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성부를 지나쳐 성자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기도와 예배에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부를 따로 생각하고 그분께 나아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중간 단계처럼 통과하는 구조가 중심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까이 오신 분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경배한다는 것은 하나님 가운데 한 분만을 골라 예배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그분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간 안에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14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이라는 선언은 성부와 성령을 밀어내는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 삼위일체를 한 분 하나님 안에서 다시 붙드는 선언입니다. 성부는 주님 안의 신성 자체이며, 성자는 그분의 신적 인간이고, 성령은 그분에게서 발출하는 신성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선은 세 분 사이를 오가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 향합니다. 그분 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있으며, 그분에게서 모든 신적 생명과 사랑과 진리가 인간에게 옵니다. (AC.14 심화 1)

 

 

 

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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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심화

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수도원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분명 서로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개념을 그대로 같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서로 닮은 영적 지향이 어디에 있으며, 그 지향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AC.13의 일곱 번째 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 창조의 여섯 날은 인간이 거듭나는 상태들을 나타내며, 그 뒤의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안식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휴식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들에서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고 선을 행하는 것처럼 경험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실제로 싸우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더욱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곱 번째 상태의 안식은 인간의 proprium이 주도권을 쥐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된 분이 되시는 질서와 관련됩니다.

 

이 점에서는 기독교 수도원과 신비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서방 기독교 영성에서는 영적 여정을 정화, 조명, 합일이라는 틀로 설명해 온 전통이 있으며, 여기서 합일은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더욱 깊이 일치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자기중심적인 의지가 약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여 그 뜻에 따라 살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안식과 비교해 볼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전통 전체를 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영성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수도원과 신비 전통 안에서도 합일은 황홀경이나 특별한 관상 체험만을 뜻하지 않았으며, 순종과 사랑과 덕의 삶, 기도와 일상생활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도록 변화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흐름이 있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수도원 전통은 체험이고 스베덴보리는 삶이다라고 양분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질서를 설명할 때 특별한 종교적 체험 자체를 그 상태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데서 찾는 편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황홀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자기에게서 한다고 생각하는 상태가 있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살아나기 시작하는 상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사랑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상태를 판단하는 핵심은 특별한 감각적·신비적 경험이 아니라 인간 안의 사랑과 의지와 삶의 질서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에 있습니다.

 

또한 이 상태를 수도원이나 세상과 격리된 특별한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의 실제 무대는 인간의 삶 전체입니다. 가정과 직업과 인간관계와 맡겨진 쓰임 속에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배우며, 선을 행하고, 그 선이 자기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이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일곱 번째 상태를 특정한 생활 형태나 수도 제도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일곱 번째 상태를 누구나 쉽게 도달하는 일반적인 단계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AC.13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사람이 실제로 이 여러 상태 가운데 어디까지 이르는지를 말하면서,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도 드물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상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지만, 실제 인간에게서 그 충만한 상태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일곱 번째 상태의 안식을 이후에는 아무런 시험이나 영적 싸움도 없다는 절대적인 무전투 상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싸움의 주체와 인간의 내적 태도가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악과 싸워 이긴다고 여기기보다 주님께 의지하며, 주님께서 싸우시고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질서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단순히 갈등이 사라진 심리적 평온이라기보다 주님의 질서 안에서 오는 영적 평안과 관련됩니다.

 

이렇게 보면 수도원 전통의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의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비교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인간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변화를 말하며,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일곱 번째 상태를 어떤 특정 수도 전통의 완덕론이나 신비적 합일론과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이라는 말씀의 속뜻 안에서, 인간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마침내 주님께서 주된 분으로 역사하시는 안식의 질서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13을 수도원 영성과 연결하여 읽을 때 가장 유익한 질문은 어떤 특별한 합일 체험에 도달했는가?가 아니라 삶의 주도권이 실제로 누구에게 있는가?일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내 힘과 공로로 붙들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인정하며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도록 내 삶을 맡기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째 날의 안식은 세상을 떠나 얻는 특별한 종교적 경지가 아니라, 인간의 중심이 proprium에서 주님께로 옮겨 가면서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삶을 다스리게 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AC.13 심화 1)

 

 

 

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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