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들은 부활절, 성탄절 같은 기독교 절기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부활절과 성탄절은 ‘폐지해야 할 외적 전통’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 자체로 거룩한 절대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전체 사상을 관통하는 한 가지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곧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기 위해 존재한다’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절기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신적 사역의 상태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고 묵상하게 하는 도구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해, 성탄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역사적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주님이 인간의 마음 안에 새롭게 태어나시는 상태’를, 부활절은 단순히 무덤에서 일어나신 사건이 아니라 ‘지옥과 싸워 이기시고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여시는 상태’를 상기시키는 표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보면, 그는 절기를 중심으로 신앙을 조직하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초점은 ‘거듭남’, 곧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영적 변화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특정한 하루에 감정적으로 고양되는 것보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탄생과 고난과 부활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훨씬 더 본질적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참된 성탄’은 어떤 날짜가 아니라, 사람이 처음으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며, ‘참된 부활’은 사람이 자신의 악과 거짓과 싸워 그것을 이기고 새로운 삶으로 일어서는 모든 순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절기는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수없이 반복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절기를 무시하거나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교회에 출석했고, 성찬에도 참여했으며, 당시 교회의 외적 질서를 존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내적 태도’였습니다. 그는 외적 의식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보지 않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데 쓰일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절기는 ‘지켜야만 하는 법’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향은 매우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이라면, 절기를 두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 층위’로서, 가족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억하고 나누는 시간으로서의 절기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질서의 차원에서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 층위’로서, 그 절기가 가리키는 영적 실재가 지금 내 삶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일 이 두 번째가 없다면, 첫 번째는 공허한 형식이 되고 말고, 반대로 첫 번째를 완전히 버리면 사랑의 교통과 질서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게 부활절과 성탄절은 ‘지켜야 할 날’이라기보다 ‘깨어 있어야 할 의미’였습니다. 그는 날짜를 통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상태를 통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도 방향을 제시합니다. 절기를 잊었다고 해서 영적으로 뒤처진 것이 아니며, 절기를 잘 챙겼다고 해서 자동으로 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주님의 탄생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내 안에서 부활이 일어나고 있는가입니다.
목사님께서 AC를 붙들고 씨름하시는 그 시간 속에서, 만일 혼돈이 질서로 바뀌고, 어둠 속에 빛이 들어오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실제적인 성탄이며, 가장 실제적인 부활입니다. 그 순간이 외적 절기와 내적 실재가 아름답게 하나로 만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삼상2:3)Speak what is high!high!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1 Sam. 2:3).
AC.66을 읽다가 가장 먼저 멈추게 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삼상2:3입니다.개역개정은‘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그런데AC의 영어 인용은‘높은것을말하라,높은것을!옛것이네입에서나오게하라’는 식입니다.단어 몇 개가 다른 정도가 아니라 명령의 방향 자체가 거의 반대로 보입니다.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의 성경을AC영어에 맞추어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삼상2:3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금지를 나타내는 말이 있고,문맥 역시 한나가 교만과 오만을 경계하는 내용입니다.오늘날의 주요 영어 번역들도 대체로‘더이상그렇게교만하게말하지말라’, ‘오만한말이입에서나오지않게하라’는 방향으로 번역합니다.따라서 개역개정의‘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는 히브리어 본문과 일반적인 번역 전통에 잘 맞습니다.
그러므로AC의 영어 문장을 보고‘개역개정번역자들이아르카나를몰라서잘못번역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더구나AC의 영어 인용을‘문자적번역보다더깊은내적의미의번역’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AC.66자체는‘이구절의문자적의미는사실높은것을말하라는뜻이다’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단지 태고교회의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현재 우리가 보는 것과 매우 다른 형태로 삼상2:3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칙 하나가 생깁니다.성경 본문과AC의 인용문이 현저하게 다를 때에는 두 문장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성경은 성경대로 정확하게 제시하고,AC가 어떤 형태로 그 말씀을 인용하는지도 그대로 보여 주며,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그래서 이번AC.66의 한국어 본문에서도 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바로 뒤의 영어 원문에는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인용형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독자는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이처럼 다른 형태의 문장을 인용했을까요?그 정확한 문헌적 배경을 확인하지 않은 채‘스베덴보리가히브리어를영적으로다시번역했기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위험합니다.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당시의 성경 텍스트나 번역 전통,인용 관행을 문헌적으로 더 조사해야 할 문제입니다.현 단계에서 확실한 것은AC.66의 영어 인용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히브리어 본문에 따른 일반적인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런 차이가AC.66전체의 설명을 무너뜨리는 것일까요?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스베덴보리가 이 인용을 사용하는 목적은 태고교회의 스타일이‘높은것’과‘옛것’에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따라서 이 특정 인용이 그의 설명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분명합니다.다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인용된 성경의 실제 문자와AC가 사용하는 인용형을 같은 것처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성경과AC의 관계를 다루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됩니다.AC를 존중한다는 것이 성경을AC의 표현에 맞추어 다시 번역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성경의 문자적 본문을 먼저 존중하고,스베덴보리가 그 말씀을 어떤 방식으로 인용하고 사용하는지를 그 다음에 정확하게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의미 차이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지만,이번 삼상2:3처럼 의미 차이가 너무 크다면 그 차이를 감추지 않고 설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경우에는‘개역개정과AC가운데하나를선택해야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성경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문구를 유지합니다.동시에AC의 원문을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높은것을말하라’는 형태로 인용했다는 사실도 그대로 인정합니다.그리고 그 차이가 왜 생겼는지는 확인 가능한 문헌적 근거 이상으로 추측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례가 성경보다AC를 높이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번역에는보이지않는진짜뜻을AC만알고있다’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말씀의 속뜻을 밝힌다는AC의 역할과 말씀 자체의 권위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AC.66역시 결국‘말씀의네가지스타일’을 설명하는 글입니다.중심은AC의 문장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가장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 읽습니다.AC가 그와 다른 형태로 인용한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습니다.그리고 그 차이를‘성경은낮은문자,AC는높은영적번역’이라는 구조로 만들지 않습니다.바로 이런 태도가 말씀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텍스트도 정직하게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에는전반적으로네가지서로다른스타일이있습니다.첫째는태고교회의스타일입니다.그들의표현방식은이땅의것과세상의것을말할때,그것들이표상하는영적이고천적인것들을동시에생각하는것이었습니다.그래서그들은단지표상으로표현했을뿐아니라,그것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엮어더욱생명력있게하였는데,이런방식은그들에게더없이큰기쁨이었습니다.이런스타일을가리켜한나는예언가운데이렇게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삼상2:3)Speak what is high!high!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1 Sam. 2:3).
창조와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곧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스타일은역사적스타일로,아브람이후의모세오경과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기,열왕기에나타납니다.이책들에서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입니다.그러나그모든것에는전체적으로도부분적으로도내적의미안에전혀다른것들이담겨있는데,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이어지는글들에서그순서대로설명하겠습니다. 셋째스타일은예언적스타일입니다.이스타일은태고교회에서그토록높이존중되던스타일에서생겨났습니다.그러나태고교회의스타일처럼연결된역사적형식은아니고단절되어있으며,내적의미없이는거의이해할수없습니다.그내적의미안에는가장깊은아르카나가담겨있고,그것들은아름답게연결된질서를따라이어지며,겉사람과속사람,교회의여러상태,하늘자체를다루고,가장깊은의미에서는주님을다룹니다. 넷째스타일은다윗의시편에나타나는스타일로,예언적스타일과일상적인언어사이에놓여있습니다.그안에서는왕으로서의다윗이라는인격아래,내적의미에서는주님을다룹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AC.66은 창세기 1장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말씀의 문체와 속뜻의 관계를 한층 넓게 보여 주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64-65에서는 말씀에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66은 말씀 전체를 모두 똑같은 외적 형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 둘째는 역사적 스타일,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 넷째는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입니다. 네 스타일은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AC.66의 관심은 결국 그 서로 다른 외적 형식 안에 어떻게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가에 있습니다.
첫째인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 온 창세기 앞부분과 직접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후대 사람이 자연물 하나를 보고 의도적으로 ‘이것은무엇을상징할까?’ 하고 해석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외적인 것을 말하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함께 생각하는 표현 방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표상들을 단순히 하나씩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만들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한 이유를 그것들에 더 큰 생명력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하며, 그런 방식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와 에덴동산을 비롯한 앞부분을 읽을 때, AC가 그것을 단순한 상징 목록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표상의 이야기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바로 이 문맥에서 한나의 삼상2:3이 인용되는데, 여기서는 잠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은 ‘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라고 되어 있는 반면, AC의 영어 인용은 ‘높은것을말하라,높은것을!옛것이네입에서나오게하라’는 식으로 전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과 오늘날의 일반적인 번역은 개역개정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말을 금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AC의 영어 인용을 근거로 개역개정이 잘못되었다거나, AC가 그 구절의 ‘진짜번역’을 제공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어 본문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여 개역개정 문구를 그대로 두되, 스베덴보리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인용 형태가 우리가 읽는 성경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와 AC.66의 논증에서 이 인용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시78:2-4의 ‘내가입을열어비유로말하며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을드러내려하니’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AC.66은 특별히 이러한 표상들을 다윗이 ‘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굳이 시편의 모든 세부 표현을 하나씩 새로운 상응으로 풀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의 역할은 첫째 스타일의 표상들이 ‘예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78의 인용과 다음 문장은 함께 읽는 것이 좋습니다. ‘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이라는 표현과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표상적 전승이라는 설명이 서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라면 상당히 큰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스베덴보리는창세기1장부터아브람이전까지의내용을모세가직접계시받아처음기록한것이아니라,앞선세대에게서전해받은자료라고보는것인가?’ AC.66의 문장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합니다. ‘창조와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제시하는 상당히 중요한 주장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그러므로창1-11은허구이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에서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이 문제는 AC의 창세기 앞부분 이해에 매우 중요하므로 별도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범위를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로 명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아주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즉 이 둘째 스타일에서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외적 역사를 지우지 않습니다.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내적 의미 안에 ‘전혀다른것들’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66의 둘째 스타일에서는 ‘역사인가상징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속뜻을 갖습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앞부분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에 대해서는 ‘사실들이문자그대로’라고 명시하는 반면, 그 이전 태고교회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엮었다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문장을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66하나만 가지고 창1부터 창11까지 각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세세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첫째와 둘째 스타일을 서로 다르게 설명하며, 아브람 이후의 둘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문자적 역사성을 명시적으로 확인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스타일이 태고교회에서 매우 높이 존중되던 스타일에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연결된 역사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서는문자적으로아무뜻이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scarcelyeverintelligibleexceptintheinternalsense’, 곧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지만, 그 목적은 문자 자체를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그 단절된 표현들의 내적 의미 안에 깊은 아르카나와 아름답게 연결된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65에서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연속의질서’를 가진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도 직접 열거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상태, 하늘 자체를 다루며 ‘가장깊은의미에서는주님’을 다룹니다. 여기서 특히 마지막 표현은 앞으로 말씀의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을 곧 ‘모든성경구절은무조건주님의지상생애에대한암호이다’라는 공식으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AC.66은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여러 차원을 다루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을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관계는 실제 예언서 인용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넷째는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의 중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다윗이라는인격아래에서내적의미로는주님을다룬다’고 합니다. 이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을 읽을 때 다윗의 역사적 인격과 개인적 언어를 곧 지워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 외적 형식 아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룬다는 것이 AC.66의 설명입니다. 따라서 시편의 ‘나’를 만날 때 곧바로 모든 문장을 독자의 개인 감정으로만 읽는 것도, 반대로 문자적 화자를 아무 의미 없다고 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힌 것은 왕 다윗의 인격 아래 주님이 내적 의미에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보면 말씀의 속뜻이 언제나 똑같은 외적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스타일에서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자연적인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습니다. 역사적 스타일에서는 실제 역사적 사실들 안에 전체와 세부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언적 스타일에서는 외적으로 단절되어 보이는 표현들 안에 깊은 아르카나가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되고, 시편에서는 왕 다윗의 인격 아래 내적 의미로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속뜻이있다’는 하나의 원칙만 붙들고 모든 성경 본문을 동일한 방법으로 기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AC.66은 보여 줍니다.
그러나 네 스타일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통일성도 있습니다. 모두 말씀이며, 외적으로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안에는 문자에 다 드러나지 않는 내적 내용이 있습니다. 앞 AC.64에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했고, AC.65에서는 그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가 천사들에게 ‘영광’이라고 불렸습니다. AC.66은 이제 그 속뜻이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스타일 안에서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큰 윤곽으로 보여 줍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낮은단계에서높은단계로발전한네계시수준’처럼 읽는 것입니다. AC.66은 그런 서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스타일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하며, 예언적 스타일은 그 스타일에서 생겨났고, 시편은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 언어 사이에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것을 ‘첫째가가장높고둘째는낮고셋째가다시높다’는 등급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각각 말씀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스타일입니다.
AC.66은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마치는 글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AC를 읽는 방법을 준비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첫째 스타일에 속하는 창조의 표상적 연속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 이후로 가면 둘째인 역사적 스타일을 만나게 되고, AC가 그 실제 역사 속의 모든 것에서 어떻게 내적 의미를 밝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예언서와 시편이 인용될 때도 그들의 서로 다른 스타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에는속뜻이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본문을 똑같은 상징 해독법으로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형식을 존중하면서 그 안의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성경과 AC의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먼저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도, 실제 역사의 스타일도, 예언의 스타일도, 시편의 스타일도 있습니다. AC는 그 차이를 없애거나 성경의 표현을 자기 체계에 맞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말씀 안에 어떤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따라서 AC.66이 가르치는 좋은 독법은 ‘문자를버리고속뜻으로가자’가 아니라, ‘말씀의외적형식을정확히읽으면서그안에주님께서두신더깊은뜻을따라가자’는 방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