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

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뜻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을 주제로 할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rees” 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해설

AC.103은 앞의 AC.102에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나무’라는 대상 자체에 언제 어디서나 ‘퍼셉션’이라는 하나의 뜻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천적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을 주제로 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그 이유를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상응과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만일 ‘나무 = 퍼셉션’, ‘동쪽 = 주님’과 같은 대응 관계만 모아 놓고 그것을 모든 본문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상응은 일종의 암호표가 되고 말씀 해석은 그 암호를 대입하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AC.103은 그렇게 읽을 수 없게 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이라도 지금 무엇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지에 따라 그 대상이 나타내는 것의 성질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한 표현을 이해하려면 그 단어 하나만 떼어 볼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놓인 전체 문맥과 그곳에서 다루는 사람의 상태와 생명의 질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창2:9에서 다루는 사람은 천적 인간입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그 사람 자신도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하는 사람으로 설명되었습니다(AC.99).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의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앞의 설명과 동떨어진 새로운 상응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받으며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천적 인간이라는 주제 안에서 ‘나무들’의 의미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03은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말씀의 속뜻을 안다는 것은 여러 상응의 뜻을 많이 외워서 말씀을 마음대로 풀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뜻을 본문에 먼저 대입하기보다, 지금 이 말씀에서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피고 그 문맥과 질서 안에서 의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응에 관한 지식조차 말씀보다 앞설 수 없으며, 우리가 만든 해석의 공식이 말씀을 지배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앞의 AC.98-99에서 본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사람의 지성이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듯이, 말씀을 이해하는 일에서도 자기 지식과 추론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는 것이 목적일 수 없습니다. 물론 이성과 지식은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섬기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AC.103의 짧은 설명은 상응을 기계적인 해석 도구로 만드는 일을 막으면서, 동시에 말씀 앞에서 자신의 이해를 앞세우기보다 그 말씀 자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겸손히 따라가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따라서 여기서 ‘나무는 퍼셉션을 뜻한다’는 한 가지 상응만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왜 여기서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 말씀에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받고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붙들 때 우리는 상응을 고정된 공식으로 다루는 대신, 말씀의 문맥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주님이 보여 주시는 의미를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AC.103 해설)  

 

심화

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AC.103 심화 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

AC.103 심화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AC.103에서 스베덴보리는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하는 이유가 여기서 천적 인

bygrace.kr

 

 

 

 

AC.104, 창2:9, ‘퍼셉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bygrace.kr

 

AC.102, 창2:9,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2:9)

 

AC.102

‘나무’(tree)는 퍼셉션을 뜻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tree desirable to behold)는 진리의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tree good for food)는 선의 퍼셉션을 뜻합니다.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A “tree” signifies perception; a “tree desirable to behold,” the perception of truth; a “tree good for food,” the perception of good; the “tree of live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해설

AC.102는 창2:9에 나오는 여러 ‘나무’의 속뜻을 먼저 한꺼번에 제시합니다. ‘나무’ 자체는 퍼셉션을 뜻하고, 그 가운데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진리의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의 퍼셉션을 뜻합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에서,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나무’를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교리를 뜻한다고 하지 않고 ‘퍼셉션’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에덴동산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했습니다(AC.98-101). 그러므로 그 동산에서 자라는 나무들도 그 사람 안에 독립적으로 축적된 지식의 목록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와 ‘먹기에 좋은 나무’가 각각 진리와 선의 퍼셉션을 뜻하는 것도 이 문맥 안에 있습니다.

 

특히 ‘생명나무’가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와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사랑이 근원이 되고 신앙이 거기서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곧바로 ‘감각이나 기억지식은 악하다’고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앞의 여러 번호에서도 이성과 기억지식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놓여야 함을 보았습니다. AC.102에서 대비되는 것은 지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신앙의 근원과 질서입니다.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려는 질서가 서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AC.102는 아직 이 각각의 의미를 자세히 증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창2:9의 여러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제시하는 개요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기본 구조를 붙들고, 이어지는 설명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AC.102 해설)  

 

심화

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 심화 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 심화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

bygrace.kr

 

 

 

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뜻

bygrace.kr

 

AC.101, 창2:8, ‘동쪽은 주님을 뜻하며, 기도할 때 동쪽을 향한 표상적 관습’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주님이 ‘동쪽’(east)이시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the Lord is the “eas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관찰한 수많은 부부의 사후 모습들인데요, 이 주제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목사님처럼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 분에게는 특별히 자주 받는 질문일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았지만, 영계를 왕래하며 수천 쌍의 부부를 관찰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사후 상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때로는 고통스러운, 때로는 감동적인 장면들을 통해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습니다. ‘영적으로 맞지 않던 부부는 사후에 자동으로 분리되지만, 서로를 사랑했던 부부는 다시 만나 조용한 이별 또는 새로운 결합을 경험한다. 그리고 영적으로 깊이 맞았던 부부는 천국에서도 진짜 부부가 된다.’

 

 

‘겉으로만 신앙이 있었던 배우자’의 경우, 자연스러운 이별

 

스베덴보리가 가장 자주 본 유형입니다. 지상에서는 교회 다니고, 예배 참석하고, 외적 신앙 행위를 하던 배우자가 실제로는 자기애, 명예욕, 세속 욕망, 이기적 동기 속에서 살았던 경우입니다. 이 부부는 지상에서는 서로 생활을 함께하더라도, 내적 삶(affection)은 이미 다른 방향입니다. 그래서 사후에는 중간 영계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멀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들은 누가 끊어놓은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의 흐름이 없다.’ 이 이별은 다툼도 없고, 원망도 없고, 씁쓸함도 없이 아주 조용하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억지 동거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신앙이 깊고, 다른 쪽은 선한 사람인 경우’, 부드러운 재회와 조용한 결별

 

이 경우는 지상에서 흔히 있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신앙이 깊고, 영적 진리를 사랑했는데, 아내는 신앙은 없지만, 선하고 다정하며 양심이 깊은 경우, 혹은 그 반대인 경우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부부를 중간 영계에서 종종 보았습니다. 이럴 경우, 이들은 먼저 서로를 알아보고, 반갑게 재회합니다. 지상에서 서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서로의 상태를 보고, 깊은 감사가 오갑니다. 지상에서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영적 본질(사랑의 종류)의 차이가 드러나며, 결국 서로 다른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이 과정은 대부분 매우 평화롭게, 슬픔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축복하며 헤어진다.’ 이 흐름은 서로의 내적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지, 관계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한쪽은 깊은 영적 삶, 다른 쪽은 신앙과 선이 전혀 없는 경우’, 짧은 만남, 그리고 이별

 

스베덴보리는 이런 유형의 부부에 대해 약간은 안타까운 사례들을 기록합니다. 지상에서는 법적 부부였지만, 감정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살았거나 사실상 각자 따로 삶을 살았던 부부들인데요, 이들은 사후에 잠시 재회하지만, 서로에게 아무런 영적 끌림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묘사합니다. ‘그들의 만남은 의무감이 아닌, 마치 예절 같은 만남이었다.’ 그러고 나서 둘은 각자 자신의 상태에 맞는 길로 자연스럽게 떠납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어서 생기는 이별이 아니라, 사랑의 종류(본질)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영적 수준 차이가 컸던 부부’, 감동적인 장면들

 

이 경우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먼저 떠난 배우자의 깊은 영적 삶과 뒤따라온 배우자의 아직 미숙한 상태가 중간 영계에서 서로 비교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신앙과 진리의 삶을 깊이 걸었고, 아내는 신앙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 남편을 깊이 애정하고 존중하며 살았던 경우, 또는 그 반대인데요, 이런 경우, 사후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다시 만나 다음과 같은 ‘영적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먼저 상호 감사의 눈물입니다. 지상에서 서로에게 준 사랑과 지지에 대한 감사를 표현합니다. 다음, 영적 차이의 인식인데요, 둘은 서로의 내적 상태 차이를 즉시 느낍니다. 천국 상태의 배우자는 그 상태를 낮추어 상대에게 맞추어 줍니다. 그러나 결국 각자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영적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들의 이별은 아픔이 아니라, 서로의 길을 인정하는 평화였다.’

 

 

‘영적 친화성이 깊었던 부부’, 천국에서도 진짜 부부가 된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감동적으로 기록한 장면들입니다. 이들은 지상에서 서로를 깊이 존중, 서로를 도우며 성장을 도왔고, 서로의 신앙과 양심의 길을 지지함으로써 마음의 깊은 결합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사후에는 중간 영계에서 잠시 정화 과정을 거친 후, 둘이 천국의 같은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보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시 만나 ‘아, 이 사람이 나의 진짜 짝이었구나!’ 하는 환희를 느낀다.’ ‘지상에서는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보지 못했으나, 천국의 빛 속에서는 그 결합이 명백해졌다.’ 이 부부는 천국에서도 실제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일심동체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영혼의 결합이므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참된 하나이다.’ 지상에서 서로 깊이 맞았던 부부는 천국에서도 진짜 부부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최종 결론, 부부 결합은 지상의 법률이 아니라 ‘영적 본질’이 결정한다

 

스베덴보리는 천 명 이상의 부부 사례를 관찰하고 이렇게 결론내립니다.

 

- 영적으로 맞지 않은 부부는 사후에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 사랑은 있었지만, 본질이 다르면 일시적 재회 뒤 조용한 이별이 있다.

 

- 한쪽만 깊은 신앙을 가졌더라도, 선한 자는 천국으로 인도된다.

 

- 천국에서도 부부는 지상의 외적 결혼이 아니라 내적 결합으로 결정된다.

 

- 정말 서로의 영적 본질이 맞는 부부는 천국에서도 영원히 함께 산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주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합이며, 지상에서는 각자 서로를 돕는 길을 걷는 것이다.’

 

 

 

SC.74, ‘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한 경우’

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했지만, 뒤늦게 지상 배우자가 사후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할 경우는? 이 질문은 결코 엉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결혼론과 영계

bygrace.kr

 

SC.72, ‘천국에서의 가족은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는가?’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탐방하면서 ‘천국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가족이 혈연으로 묶여 있지만, 영계에서는 혈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