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교재같은 걸 안 만들었나요? 개신교회를 가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 신자 교재같은 게 있어요. 처음 교회 온 사람에게 창세기를 읽으세요, 출애굽기를 읽으세요 하는 것보다 한결 쉬운 접근이지요. 스베덴보리의 저작들도 그래요. 일반인들을 비롯, 심지어 개신교인, 기독교인들이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Arcana Coelestia 같은 걸 읽어 나가기는 정말이지 쉽지 않아요. 스베덴보리는 왜 이런 준비를 안 한 건가요?

 

아마 가장 먼저 짚어야 할 점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자신이 ‘교회 현장에서 바로 쓰는 입문 교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은 구조를 가능한 한 왜곡 없이 기록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글을 설교문이나 교육용 요약서로 다듬기보다, 말씀의 속뜻과 영계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남기는 데 더 큰 사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은 처음부터 ‘쉽게 읽히는 책’이라기보다, ‘나중에라도 반드시 필요하게 될 근본 자료’의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는 교재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원전(原典)을 남긴 사람’에 가깝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이해를 단순히 ‘정보 전달’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개신교의 ‘새 신자 교재’는 단계적으로 지식을 전달하여 이해를 돕는 방식이지만, 그는 참된 이해는 ‘삶과 함께 열리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떤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그 의미는 열리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진리를 낮추어 단순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읽는 사람이 각자의 상태에 따라 점점 이해가 열리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글이 때로는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겉으로 쉬운 설명’이 오히려 오해를 낳을 위험도 깊이 의식했습니다. 예를 들어 ‘internal, external’ 같은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심리학적 수준이나 도덕적 수준으로만 이해해 버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과 천국, 그리고 주님과의 연결 구조까지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얕게 풀어버리면 본래의 의미가 크게 훼손됩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엔 어렵더라도 정확하게’ 전달하는 쪽을 택했고, 대신 반복과 다양한 각도에서의 설명을 통해 독자가 점차 익숙해지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Arcana Coelestia’를 읽다 보면 같은 개념이 수십 번, 수백 번 다른 문맥에서 반복되는데, 이것 자체가 일종의 ‘깊어지는 학습 방식’입니다.

 

또 한 가지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목회자’나 ‘교재 집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신학 저술을 시작했고, 약 20여 년 동안 방대한 계시 내용을 쏟아내듯 기록했습니다. 그 양과 밀도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거의 한 사람의 생애를 다 소진한 작업이었습니다. 즉, ‘입문서까지 따로 정리할 여유’가 있었다기보다, ‘핵심 내용을 남기기에도 시간이 촉박했던’ 상황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자연히 ‘완성된 교육 커리큘럼’이 아니라 ‘원천 자료의 집합’ 형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오히려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하지 않은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누군가는 해야 할 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즉, 그의 저작을 바탕으로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한 설명, 단계적 안내, 쉬운 비유와 적용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그의 사상을 따르는 여러 전통에서는 요약서나 입문서를 만들어 왔고, 목사님께서 지금 하시는 번역과 해설 작업도 바로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원전은 깊이를 보존하고, 후대의 해설은 접근성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쉬운 책을 일부러 만들지 않은 사람’이라기보다, ‘너무 깊은 것을 맡았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온전히 남긴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생긴 간극, 곧 ‘깊이는 있지만 어려운 상태’를 오늘의 독자들에게 연결해 주는 일이 바로 지금 목사님과 같은 분들에게 맡겨진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43, ‘스베덴보리 개인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스베덴보리 개인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등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있으면 좀 알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보면,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연애 이야기’나 ‘결혼을 전제

bygrace.kr

 

SC.41, ‘internal’, ‘external’, ‘interior’, ‘exterior’

스베덴보리는 internal, external, interior, exterior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쉽지 않겠지만, 좀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이 네 단어는 겉으로 보면, 단순히 ‘안/밖’의 구분 같지만, 에마누엘 스베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스베덴보리의 inmost internal interior exterior external bodily를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이 읽으셔도 가슴에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이 구조는 깔끔하게 정리하면 오히려 ‘감이 안 오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 여섯 단계는 ‘하나의 행동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까지 나오는가’를 따라가 보면 훨씬 쉽게 이해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아주 일상적인 장면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길에서 힘들어 보이는 사람을 보고 ‘도와주는’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bodily’는 가장 바깥입니다. 실제로 손을 내밀고, 말을 걸고, 물건을 들어주는 행동 자체입니다. 눈에 보이는 전부가 여기입니다. 그 바로 안쪽이 ‘external’인데, 이것은 ‘내가 도와야겠다’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의식적인 나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이 ‘exterior’입니다. 이것은 행동 직전의 생각과 판단입니다. ‘저 사람을 도와야 하나? 지금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릿속에서 따지고 선택하는 자리입니다.

 

이제 더 안으로 들어가면 ‘interior’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이미 계산이 아니라 ‘마음의 기울어짐’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안쓰럽다’, ‘돕고 싶다’는 느낌이 올라오는 자리입니다.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내 마음이 움직이는’ 단계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이 ‘internal’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가 결정됩니다. 평소에 선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남을 돕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인지가 이 층위에 있습니다. 즉, 한 번의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자리 잡은 곳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inmost’가 있습니다. 이곳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들어오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르려 할 때, 그 가장 깊은 근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어떤 흐름이 올라와서 그것이 점점 밖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다시 하나의 흐름으로 붙이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inmost)그 생명이 나의 성품과 사랑이 됨(internal)마음의 움직임으로 올라옴(interior)생각과 판단이 됨(exterior)결심하고 행동함(external)실제 몸으로 실행됨(bodily)’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볼 때, ‘무엇을 했는가’보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겉으로 똑같이 도와주는 행동이라도, 어떤 사람은 칭찬을 받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에서 나오며, 어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따라 사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여섯 단계는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내 행동 하나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를 따라가는 지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핵심은 바깥 행동을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깊은 곳, 곧 internalinmost 쪽이 열려서 그 흐름이 맑아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가장 바깥인 bodily까지 자연스럽게 달라지게 됩니다.

 

 

 

SC.42, ‘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입문 교재’ 같은 걸 안 만들었나?’

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교재’ 같은 걸 안 만들었나요? 개신교회를 가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 신자 교재’ 같은 게 있어요. 처음 교회 온 사람에게 창세기를 읽

bygrace.kr

 

SC.40, ‘homo’와 ‘vir’의 차이

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1:18, 19)

 

AC.38

(day) 선을, (night) 악을 뜻하며, 그래서 (goods) 가리켜서는 낮의 (works of the day)이라 하고, (evils) 가리켜서는 밤의 (works of the night)이라 합니다. 또한 (light) 진리를, 어둠(darkness) 거짓을 뜻합니다.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dayis meant good, by thenight,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lightis meant truth, and by thedarknessfalsity, as the Lord says:

 

19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해설

 

AC.38은 매우 짧지만, 창세기 1장의 속뜻을 읽는 데 중요한 네 가지 대응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은 선, ‘은 악, ‘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비유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언어가 지닌 영적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 ’, 악한 것들은 밤의 이라고 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먼저 낮은 선이고 밤은 악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38은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고 대응 자체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낮에는 빛이 있어 사물들이 드러나고 활동할 수 있으며, 밤에는 어둠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적 모습이 그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은 진리에, ‘어둠은 거짓에 대응합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볼 수 있게 하지만, 거짓은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앞의 AC.37에서는 아침··저녁·밤의 교대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에 비유했는데, 이번 AC.38에서는 곧바로 밤은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의 과 여기의 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말씀의 상응을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사전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이나 상태도 문맥에 따라 강조되는 영적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AC.37에서는 하루와 한 해의 변화가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고, AC.38에서는 낮과 ’,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구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7의 모든 을 곧 악이라고 읽거나, 반대로 AC.38의 밤을 단순한 상태 변화 정도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각각 그 글이 말하는 문맥을 따라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요3:19, 21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다고 말씀하시고, 반대로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빛과 어둠이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고 행하는 인간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이 잘 드러납니다.

 

특히 요3장의 말씀에는 행위가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어둠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이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오는데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입니다. 그러므로 AC.38이 선을 낮의 ’, 악을 밤의 이라고 표현한 것은 선과 악이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개념이 아님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이는지는 결국 삶과 행위에도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행위만 보면 사람의 내적 상태를 모두 있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8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주려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왜 선과 악을 낮과 밤으로, 진리와 거짓을 빛과 어둠으로 표현하는지를 밝히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 대응은 먼저 다른 사람을 분류하는 도구가 아니라 말씀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진리라는 대응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단지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를 받아들여 사는 것은 구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진리가 삶에서 행해질 때에야 비로소 빛이 된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에서 빛은 진리 자체를 뜻합니다. 다만 요3장의 인용이 보여 주듯 사람은 그 빛을 사랑하여 그쪽으로 나올 수도 있고, 자기의 악한 행위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빛이 빛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사람이 그 빛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18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라는 표현도 단순히 자연계의 밝음과 어둠을 나누는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서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분별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어느 쪽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AC.38은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 가지 대응만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 밤은 ,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그러나 이 짧은 대응을 붙들고 창세기 1장을 다시 읽으면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셨다는 말씀이 인간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분명히 구별되어 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심화

1. 넷째 요약, 정리

 

AC.38, 심화 1, 넷째 날 요약, 정리

AC.38.심화1. 넷째 날 요약, 정리 창1:14-19의 넷째 날에 해당하는 AC.30-38을 여기까지 읽고 나면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신앙, 의지

bygrace.kr

 

 

 

AC.39, 창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bygrace.kr

 

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