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

주님이 ‘동쪽’(east)이시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the Lord is the “east” also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1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겔43:1-2, 4) He brought me to the gate, even the gate that looketh the way of the east, and behold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came from the way of the east; and his voice was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the earth shone with his glory (Ezek. 43:1–2, 4).

 

주님이 ‘동쪽’(east)이시기 때문에, 성전이 세워지기 전 표상적 유대교회에서는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거룩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It was in consequence of the Lord’s being the “east” that a holy custom prevailed in the representative Jewish church, before the building of the temple, of turning their faces toward the east when they prayed.

 

해설

AC.101은 AC.98에서 ‘동쪽’이 주님을 뜻한다고 한 것을 에스겔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선지자는 ‘동쪽을 향한 문’으로 인도되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동쪽’을 주님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AC.98의 ‘동쪽 에덴동산’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동산’이 지성이고 ‘에덴’이 사랑이라면, ‘동쪽’은 그 사랑과 지성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듭니다. 따라서 ‘동쪽’이 주님을 뜻한다는 것은 AC.98-99에서 계속 설명한 생명의 질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표상적 유대교회의 한 관습을 언급합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거룩한 관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향 자체에 어떤 독립적인 거룩함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방향이 주님을 표상했다는 점입니다. ‘동쪽’을 향한다는 외적인 행위는 그 표상 안에서 주님을 향하는 내적인 것을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이 관습은 말씀 안의 ‘동쪽’과 예배의 표상이 서로 같은 중심, 곧 주님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AC.98-101의 흐름을 보면 ‘동쪽 에덴동산’의 세 요소가 하나씩 분명해집니다. ‘동산’은 지성이고, ‘에덴’은 사랑이며, ‘동쪽’은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 전체가 나타내는 것은 단순히 아름답고 지혜로운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지성이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입니다. (AC.101 해설)

 

 

 

AC.102, 창2:9,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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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0, 창2:8, ‘에덴은 사랑을, 동산은 지성을 뜻함을 보여 주는 이사야의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0‘동산’(garden)이 지성을 뜻하고, ‘에덴’(Eden)이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도 나타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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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0

‘동산’(garden)이 지성을 뜻하고, ‘에덴’(Eden)이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도 나타납니다. That a “garden” signifies intelligence, and “Eden” love, appears also from Isaiah: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51:3) Jehovah will comfort Zion, he will comfort all her waste places, and he will make her wilderness like Eden, and her desert like the garden of Jehovah; joy and gladness shall be found therein, confession and the voice of singing (Isa. 51:3).

 

이 구절에서 ‘광야’(wilderness), ‘기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을 나타내는 표현들이며, ‘사막’(desert), ‘즐거움’(gladness), ‘노랫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앞의 것들은 ‘에덴’(Eden)에, 뒤의 것들은 ‘동산’(garden)에 관계됩니다. 이 선지서에서는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에덴에 있는 동산’(garden in Eden)이 더 나아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뒤의 10절에 관한 설명에서 볼 수 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ilderness,” “joy,” and “confession” are terms expressive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relate to love; but “desert,” “gladness,” and “the voice of singing,” of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belong to the understanding. The former have relation to “Eden,” the latter to “garden”; for with this prophet two expressions constantly occur concerning the same thing, one of which signifies celestial, and the other spiritual things. What is further signified by the “garden in Eden,” may be seen in what follows at verse 10.

 

해설

AC.100은 AC.98에서 밝힌 ‘동산’과 ‘에덴’의 뜻을 이사야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사51:3에는 황폐해진 시온을 여호와께서 회복하실 때 ‘그 광야를 에덴 같게, 그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에덴’과 ‘동산’이 단순히 같은 아름다운 장소를 반복해서 표현한 말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도 함께 하나를 이루는 두 종류의 것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그는 먼저 ‘광야’, ‘기쁨’, ‘감사함’을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로 보고 이것들을 ‘에덴’과 연결합니다. 반면 ‘사막’, ‘즐거움’, ‘노랫소리’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로 보고 이것들을 ‘동산’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AC.98의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이라는 설명이 이사야의 병행 표현에서도 같은 질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서로 분리된 두 종류의 신앙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가 직접 밝히는 구별은 앞의 것들이 사랑에 관계되고 뒤의 것들이 이해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99에서 천적 인간에게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사랑과 이해는 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함께 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사야에서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난다고 말하는 점입니다. 그는 성경의 이러한 병행 표현을 단순한 문학적 반복으로만 읽지 않고, 한 표현은 천적인 것을, 다른 표현은 영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광야와 사막’, ‘기쁨과 즐거움’, ‘감사함과 노랫소리’, 그리고 ‘에덴과 동산’이라는 짝은 같은 말을 아무 뜻 없이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관계되는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이 함께 말씀 안에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다만 AC.100은 ‘에덴에 있는 동산’의 의미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 더 나아간 의미는 뒤의 10절에 관한 설명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에덴’은 사랑에, ‘동산’은 지성에 관계되며, 이 둘의 결합이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를 나타낸다는 데까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AC.100 해설)  

심화

1. ‘왜 같은 것을 말하는 두 표현을 하나는 천적, 다른 하나는 영적이라고 하는가?’

 

AC.10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51:3의 말씀을 매우 독특하게 읽습니다. ‘광야를 에덴 같게,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신다는 말씀에서 ‘광야’, ‘기쁨’, ‘감사함’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을 나타내고, ‘사막’, ‘즐거움’, ‘노랫소리’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에서는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나며, 그중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것을 말하는 두 표현에 서로 다른 속뜻이 있다고 보는 것일까요?

 

먼저 AC.100이 말하는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라는 말을 ‘두 표현의 뜻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의미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표현은 하나의 주제를 함께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 서로 구별되는 두 측면을 봅니다. 하나는 사랑에 관계되는 천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에 속한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과 ‘동산’도 서로 떨어진 두 주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사랑과 지성을 각각 나타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98-99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동산’은 지성이며,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듭니다. 따라서 사랑과 지성은 하나를 이루지만 그렇다고 서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이고 지성은 지성이며,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도 구별됩니다. 하나를 이루는 것 안에 이러한 구별이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도 같은 하나의 주제를 말하면서 서로 다른 표현을 통하여 그 구별되는 측면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AC.100을 읽는 중요한 실마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병행 표현을 우리가 임의로 둘씩 짝지어 ‘첫째 표현은 천적, 둘째 표현은 영적’이라고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AC.100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은 이사야에서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나며 그중 하나가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가 영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실제 말씀의 문맥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을 따라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을 독자가 마음대로 적용할 수 있는 기계적인 해석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구별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말씀의 속뜻에서 사랑과 이해, 선과 진리,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AC.100의 이사야 인용에서도 ‘광야’와 ‘사막’, ‘기쁨’과 ‘즐거움’, ‘감사함’과 ‘노랫소리’가 하나의 회복을 함께 묘사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 사랑에 관계되는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앞의 것은 ‘에덴’에, 뒤의 것은 ‘동산’에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100은 단순히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이라는 두 단어의 상응을 증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서로 나란히 놓인 표현들이 하나의 내용을 풍성하게 말하면서도 그 속에서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랑에 관계되는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이 서로 구별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반복을 단순한 중복으로만 보지 않고 그 안의 구별과 결합을 함께 읽고 있다는 데까지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이후 AC에서 이러한 병행 표현들이 다시 나타날 때마다 실제 본문 안에서 그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하나씩 확인해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00 심화 1)

 

 

 

 

AC.101, 창2:8, ‘동쪽은 주님을 뜻하며, 기도할 때 동쪽을 향한 표상적 관습’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주님이 ‘동쪽’(east)이시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the Lord is the “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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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창2:8, ‘영적 인간에게 뒤집혀 있던 생명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됨’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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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왕래하면서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느냐’는 질문을 수백 명에게 받았고, 또 실제 장면들을 여러 번 보면서 그 답을 아주 정교하게 정리했습니다. 결론은 단순합니다. 영적 수준, 즉 상태가 달라도 일시적 재회는 가능하다. 그러나 영원한 결합은 오직 영적 친화성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즉, ‘만남은 가능’, 그러나 ‘함께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가지를 매우 정확하게 구분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장면, ‘다른 수준에 살더라도, 사랑하면 찾아온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남성과 어머니의 관계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아들은 지상에서 신앙을 진실하게 살았고, 천국의 한 공동체로 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어머니는 지상에서는 신앙을 고백했지만, 내적 삶은 그렇지 못해 중간 영계에서 오랫동안 정화 과정을 겪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천국 공동체에 이미 소속된 상태였지만, 어머니가 중간 영계의 한 단계에 도달했을 때, 그는 사랑의 인도하심으로 그곳에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록합니다. ‘그는 어머니가 있는 곳에 곧바로 나타났고, 그녀는 즉시 아들을 알아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들이 ‘천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흐름이 그를 어머니의 상태, 즉 어머니와 같은 눈높이로 ‘임재’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의 자연스러운 원리입니다.

 

 

만남은 가능하지만, ‘함께 사는 것’은 영적 친화성에 달려 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사례를 관찰하면서 확인했습니다. 서로 다른 천국 층위에 있어도 서로의 상태에 맞출 수 있으면 만날 수 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수준 차이’가 공간적 거리가 아니라 상태의 밀도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함께 사는 것, 그러니까 거처를 함께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선과 진리의 수준을 가진 이들과 자연히 함께 살게 된다.’ 즉, 잠시 만나는 것은 사랑으로 가능, 그러나 영원한 결합은 본질(affectional state)에 따라 결정된다는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본 세 가지 재회 형태

 

스베덴보리는 수많은 재회 장면을 관찰한 뒤, 이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서로 사랑했지만 영적 수준이 달랐던 가족, ‘일시적 재회는 가능’

 

예를 들면, 신앙적으로 깊이 살았던 자녀와 신앙이 얕았던 부모, 도덕적으로는 선했지만, 신앙적으로는 약한 형제, 경건했던 배우자와 세속적이었던 배우자 등은 중간 영계에서 충분히 서로를 만납니다. 이 만남은 지상에서의 감사, 못다 한 대화, 사랑의 표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후 각자 자기 본질에 맞는 천국의 공동체로 들어가면 영원한 동거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슬픔이 없는 헤어짐’이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간 영혼은 타인의 상태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 수준이 상당히 비슷했던 가족, ‘천국에서도 교류가 계속된다’

 

이 경우는 같은 종류의 선, 같은 방식의 신앙, 비슷한 내적 애정을 가진 가족입니다. 이들은 종종 천국에서도 서로 가까운 공동체에 들어가며, 정기적으로 서로 교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가족은 천국에서 더욱 가까워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영적 친화성이 만들어 내는 결합입니다.

 

지상에서는 가족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경우, ‘만남 자체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지상에서는 가족 관계였지만, 한 사람은 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애, 권력욕, 증오를 사랑했다면, 이 둘은 중간 영계에서도 서로를 자연스럽게 떠나게 됩니다. 이때의 ‘이별’은 지상적 슬픔을 동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인은 악을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할 수 없다. 그 사랑은 천국의 사랑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 수준이 달라서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사랑의 기억’은 존중된다

 

천국의 사람들은 지상의 가족 관계를 완전히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지상적 집착이 아니라 감사와 자비의 형태로 남습니다. ‘그가 나에게 해준 사랑이 있었다.’, ‘우리는 지상에서 함께 걸어갔다.’, ‘그때 나는 보호받았다.’ 등, 이런 기억은 천국에서 빛처럼 따뜻하게 반짝입니다. 그러나 ‘왜 내 가족은 천국에 오지 않았는가?’라는 슬픔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히 말합니다. ‘천국에는 슬픔이 없다. 슬픔을 남기는 기억은 주님이 제거하신다.’

 

 

결정적 통찰, ‘영적 수준 차이’는 재회를 막지 않지만, ‘본질의 차이(사랑의 종류)’는 영원한 결합을 막는다

 

스베덴보리가 수천 건의 사례에서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만나게 되고, 본질(선)은 함께 살게 한다. 그러나 악은 결합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만남은 사랑에 의해, 결합은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법칙입니다.

 

 

 

SC.71, ‘영계에서 가족끼리 자주, 그리고 드물게 만나는 경우’

영계에서는 누구와 자주 교류하고, 누구와는 특별한 때에만 만나고, 누구와는 거의 만나지 않게 되는가? 이것은 모두 내적 상태(state)에 의해 결정된다고 스베덴보리는 아주 일관되게 기록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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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69, ‘가족 중 일부가 지옥 간 경우’

가족 중 일부가 지옥에 간 경우,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관계 이 부분은 많은 성도들뿐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도 깊이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살아 있을 때, 자신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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