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라는 표현은 AC.2의 가장 중요한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뿐 아니라, 뒤에서 계속 만나게 될 인간과 주님, 천국과 거듭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명’, ‘ 생각’, ‘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느끼고,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며, 내가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생명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이며,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생명을 가지고 계시다가 그 일부를 떼어 인간에게 나누어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주님에게서 독립된 작은 생명 하나를 자기 안에 소유하고 있는 존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와 다릅니다. 인간은 매 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생명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고, 인간은 그 생명의 수용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을 아무 의지도 없는 그릇이나 기계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자기 것처럼느끼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선택한다고 경험합니다. 자기 것처럼의 상태가 있어야 인간에게 자유가 있을 수 있고, 자유가 있어야 선을 받아들이고 악을 거절하는 일이 사람 자신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을 단지 움직여지는 도구로만 느낀다면 사랑도 신앙도 거듭남도 자유로운 인간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가르침과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가르침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가야 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자기 것처럼 받아 생각하고 의도하고 행동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 뒤에는 내가 했다고 자랑하지 않고 모든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릴 수 있으며, 동시에 악을 행하고서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책임을 돌릴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어려운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는가?생명 자체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악은 주님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이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뒤틀고 변질시킬 때 악과 거짓이 나타납니다. 햇빛 자체는 깨끗하지만 그것이 통과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따라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다만 이 비유에서도 햇빛을 주님 자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고, ‘근원에서 오는 것은 선하지만 수용하는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만 이해하면 됩니다.

 

이제 다시 AC.2로 돌아오면 왜 스베덴보리가 여기에서 갑자기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말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의 직접적인 관심은 인간의 생명론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말씀에는 생명이 있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바로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생명은 종이와 잉크에 어떤 신비한 힘이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사람을 영적으로 살게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말씀 안에 있는 신적 진리와 선이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주님을 향하며, 주님께서 그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질서 있게 하실 때 말씀이 그의 삶에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알고 외우는 것과 그 말씀이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듭남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거듭남은 이미 가지고 있던 자연적 생명을 조금 개선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고 강제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자기 안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선을 행하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모든 과정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그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의 실제 삶이 됩니다.

 

이제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라는 말을 처음보다 조금 다르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창조의 과거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존재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진리를 이해하며,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수용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지를 바로 알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AC.2가 말하는 말씀의 생명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말씀은 우리를 말씀 자체에 붙잡아 두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 말씀 안에서 주님을 향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갈 때, 말씀의 생명은 단지 책 안에 있는 교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열리기 시작합니다.

 

 

 

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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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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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라는 표현은 얼핏 보면 단순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큰 줄거리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지만 세부 표현들은 그것을 꾸며 주는 문학적 요소에 불과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말씀은 전체로서뿐 아니라 그 안의 개별적인 것들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품고 있다고 봅니다.

 

전체적으로라는 말은 말씀 전체나 한 책, 한 장, 하나의 이야기처럼 비교적 큰 단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앞으로 창세기 1장을 해설하면서 스베덴보리는 그 장 전체를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에 관한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개별적으로라는 말이 붙으면서 이야기가 훨씬 깊어집니다. 창세기 1장의 전체 줄거리만 거듭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 저녁과 아침,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 해와 달과 별, 동물과 사람 등 각각의 표현도 그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AC.2에서는 이것을 더욱 강하게 표현하여 가장 작은 세부적인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하나에 이르기까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어느 부분은 신적이고 어느 부분은 단순한 부수적 기록이라고 나눌 수 없다는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를 보여 줍니다. 역사처럼 보이는 부분, 족보처럼 보이는 부분, 반복되는 이름과 숫자, 장소와 방향 같은 세부까지도 말씀 안에서는 전체의 내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든 단어에 하나씩 고정된 비밀 암호가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단어 하나를 떼어 놓고 임의의 영적 의미를 붙이는 방식이 아닙니다. 각각의 표현은 그것이 놓여 있는 문맥과 다른 표현들과의 관계, 그리고 말씀 전체의 내적 질서 안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같은 자연적 대상도 문맥에 따라 그 상응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며, 하나의 절을 이해하기 위해 앞뒤의 여러 절과 관련된 수많은 표현을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의 진짜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전체개별이 서로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체의 내적 의미가 개별 표현들을 통해 펼쳐지고, 개별 표현들은 서로 연결되어 전체의 의미를 이룹니다. 창세기 1장이 전체적으로 거듭남을 말한다면, 그 안의 각각의 날과 창조물과 순서도 서로 무관하게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질서 안에서 연결됩니다.

 

그리고 AC.2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하는지를 밝힙니다. 그 중심은 인간의 거듭남 자체도, 천국 자체도, 교회 자체도 아닙니다. ‘생명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말은 단순히 성경의 모든 부분에 의미가 있다는 주장보다 더 깊습니다. 말씀의 모든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모든 연결의 가장 깊은 중심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원리를 알고 나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왜 그렇게 세밀한 책인지도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이름 하나, 숫자 하나, 방향 하나, 반복되는 말 하나까지 오래 붙드는 것은 세부에 집착해서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그 세부 역시 말씀에 속하며, 따라서 전체의 내적 생명에서 떨어져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앞으로 AC를 읽는 하나의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큰 줄거리를 보면서 작은 표현을 놓치지 않고, 작은 표현을 살피면서 전체의 흐름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갈수록 결국 말씀 전체와 그 모든 세부가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AC.2가 이 짧은 표현 안에 담고 있는 중요한 뜻입니다.

 

 

 

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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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4. 신적 진리(Divine Truth)

 

진리’와 ‘신적 진리’가 같은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체계 안에서는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구별부터 말씀드리면, ‘진리(truth)는 넓은 범주의 말입니다. 수학의 진리도 있고, 역사적 사실도 있고, 일상의 옳은 판단도 있습니다. 즉, 무엇이 사실이며 옳은가에 대한 인식 전반을 가리킵니다. 반면 ‘신적 진리(Divine Truth)는 그 출처가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뜻합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진리입니다. 단순히 옳은 정보가 아니라, 신적 생명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적 진리’는 단순한 교리 문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존재가 표현된 방식입니다. 그는 자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은 ‘신적 사랑(Divine Love)과 ‘신적 진리(Divine Truth)로 인간에게 나타나신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본질이고, 진리는 그 사랑이 드러난 형식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 것이 신적 진리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인간의 이해 속에 담길 수 있지만, ‘신적 진리’는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교리를 배워 알게 되면, 그것은 그의 이해 안에 있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의 사랑에서 나와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질 때, 그것은 ‘신적 진리’와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배워 알고 있다면, 그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주님의 사랑에서 나와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실제로 삶을 바꾸는 힘으로 작용한다면, 그때 그는 신적 진리를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이는 단순한 정보와 생명력의 차이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적 진리’는 곧 ‘말씀(the Word)과 깊이 연결됩니다. 말씀은 단지 종교 문헌이 아니라, 신적 진리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 안에 주님이 현존하신다고 말합니다. 신적 진리는 문자 안에 숨어 있지만, 그 본질은 주님 자신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진리는 넓은 의미의 옳음과 사실입니다. ‘신적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며, 사랑과 결합되어 인간을 살리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고, 신적 진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시는 빛입니다.”

 

그래서 AC.1에서 ‘신적 진리’라는 표현이 나오면, 그것은 단순한 교리 설명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빛을 가리킨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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