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로 지나치게 좁아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적인 사랑과 구별하기 어려우며, 인애라고 하면 현대 한국어에서 뜻이 즉시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은 상당히 가까운 표현이지만, 이것 역시 charity가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나타나는 폭넓은 의미를 언제나 다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과 해설에서는 charity를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라고 음역하여 사용하고, 그 의미를 문맥에서 풀어 설명합니다.

 

체어리티의 가장 기본적인 방향은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주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이웃을 향한 체어리티(charity toward the neighbor)를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웃의 선과 유익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삶의 방향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현대 영어의 charity에서 흔히 떠올리는 자선 행위보다 훨씬 넓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도 체어리티의 한 표현이 될 수 있지만, 체어리티 전체가 그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참된 유익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 역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체어리티를 단순한 착한 행동과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 행동의 동기와 목적까지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닙니다. 칭찬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때로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해 그의 잘못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에는 단순한 감정적 친절을 넘어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진리도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지 어떤 교리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진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후 AC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끊임없이 다루어집니다. 진리가 삶과 분리되어 머릿속 지식으로만 남아 있으면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의 인도 없이 단순한 호의나 감정에 머물러서는 온전한 질서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AC.9에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체어리티의 일들(works of charity)을 언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이제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하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에 속한 선들을 행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앞선 상태보다 큰 진전입니다. 체어리티가 생각 속의 이상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행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AC.9의 핵심 문제는 그 사람이 아직 그 선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9체어리티의 일을 행한다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실제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을 도왔다, 내가 이런 좋은 일을 했다, 나는 사람보다 사랑이 많다는 생각이 중심에 자리 잡으면 체어리티의 외적인 행위 안에도 proprium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선들이 아직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선의 참된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 번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면서 배우고, 자기 안에 섞여 있는 동기들을 발견하며, 점차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선을 선택하고 행하는 가운데 그 사람을 이끄십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한두 번의 특별한 선행보다 삶 전체의 방향과 더 깊이 관련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시간만 체어리티의 시간이 아니라 가정에서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 직장에서 맡은 일을 처리하는 방식, 돈을 사용하는 태도, 다른 사람의 명예를 다루는 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같이 일상의 수많은 선택 속에서 체어리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삶에서 분리된 종교적 활동 하나가 아니라, 이웃의 선과 유익을 향하도록 삶이 질서 잡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번역과 해설에서 영어 charity체어리티라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뜻을 설명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풍성한 의미를 하나의 한국어 단어로 성급하게 축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문맥에 따라 이웃을 향한 사랑, 이웃의 선을 위한 , 체어리티의 행위 등이 무엇을 뜻하는지 풀어 설명할 수 있지만, 기본 용어 자체는 체어리티로 유지합니다. 이렇게 해야 이후 AC에서 신앙과 체어리티, 사랑과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관계가 점점 더 정교하게 전개될 때 동일한 개념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선도, 따뜻한 감정도, 외적인 선행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선과 유익을 바라며 삶으로 행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삶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에 완성된 상태가 아니지만, 사람이 실제로 체어리티의 일을 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는 거듭남의 중요한 진전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선을 행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배우도록 이끄십니다. (AC.9 심화 2)

 

 

 

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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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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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는 내적인 차원인데, 거기서 나온 선이라면 당연히 살아 있는 선이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핵심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사람이 인정한다는 것이 아직 완전히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AC.9의 사람은 이전 상태보다 분명히 진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외적인 규칙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했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는 여전히 내가 선을 생각했고, 내가 선을 선택했고, 내가 선을 행했다고 여깁니다. 선이 안으로부터 나타나고 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이 없다는 말을 그 선행이 전혀 무가치하다거나 실제로 아무 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 행위의 외적인 유익성보다 영적인 생명의 귀속입니다. 선의 생명은 인간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동안에는 그 선을 아직 주님에게서 오는 살아 있는 선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변화만 생각하면 AC.9의 사람은 이미 상당한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선을 행하는가?뿐 아니라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를 묻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한 일을 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가 했다, 내가 옳다, 나는 사람보다 낫다고 자기 공로를 붙들 때에도 proprium은 매우 미묘하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사람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에서 사람은 실제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노력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께서 하실 것이다라고 기다리는 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동시에 선을 행할 능력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 갑니다.

 

이 때문에 AC.9의 세 번째 상태는 지나가야 할 잘못된 상태라기보다 필요한 성장 과정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을 때 자기가 걷는다고 느끼는 것처럼,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도 처음에는 자기가 회개하고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자유감과 자기 활동감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시면서, 점차 선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깨닫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부터라는 표현은 이미 완성된 거듭남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 사람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 영향이 겉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사람의 의식과 귀속은 아직 자기 자신에게 기울어 있을 수 있습니다. AC.8에서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했다면, AC.9에서는 그 구별이 실제 선행 가운데서도 더 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돌아볼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내가 기도하고 봉사하고 이웃을 돕고 말씀을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누구에게 공로를 돌리고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을 때 섭섭해하거나, 자신의 선행 때문에 자신을 더 높은 사람으로 여기거나,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진다면 선한 일을 하는 를 붙들고 있는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했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9는 그러한 발견 자체가 거듭남의 과정 안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서 멈추게 하지 않으시고 점차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이끄십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선을 행하되 점점 더 자기 공로를 내려놓게 됩니다.

 

따라서 AC.9생명이 없다는 표현은 선행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그 선행이 어디에서 참된 생명을 받아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한 진전입니다. 그러나 그 선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려면 사람은 그 생명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결국 거듭남은 내가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마음과 삶으로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AC.9 심화 1)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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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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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심화

1.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져야 하는가?

 

AC.8에는 오늘날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라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왜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있어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는 것일까요? 실제로 주위를 보면 큰 고난을 겪지 않고도 비교적 겸손하고 신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AC.8은 모든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큰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 불행, 슬픔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거듭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원문도 이 상태가 그러한 일들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하지, 절대로 존재할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핵심은 고난의 필연성 자체가 아니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는 에 있습니다.

 

평소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며 자기 힘으로 삶을 이끌어 간다고 느낍니다. 건강, 경제적 안정, 사회적 인정, 자신의 계획과 판단, 익숙한 인간관계와 생활환경 등이 잘 유지될 때에는 이러한 자기 확신이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물론 건강이나 경제적 안정이나 사회적 관계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이 그것들을 자기 삶의 궁극적인 토대로 여기고, 자기 판단과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될 때입니다.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은 때때로 바로 이러한 자기 확신을 흔듭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나거나, 의지하던 것이 흔들리거나, 자기 판단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면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이전처럼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AC.8에서 그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것은 그것들이 완전히 제거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것들의 지배력이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때 이전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것이 나타날 가능성이 생깁니다. AC.8은 속 사람 안에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평소 자기 생각과 욕망과 세상에 대한 관심이 너무 크게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겉 사람의 소리가 잠잠해지면 유아기부터 주님께서 보존해 두신 신앙의 지식과 선한 것들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이 리메인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리메인스는 이미 주님께서 저장해 두셨으며, 고난은 경우에 따라 겉 사람의 지배력이 약해지는 계기가 될 뿐입니다.

 

또한 시험이나 불행이 자동으로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어려움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지고 원망과 자기연민에 빠질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변화의 원인을 고난 자체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거듭남의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시며, 시험과 불행과 슬픔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큰 고난 없이도 비교적 평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바로 이 때문에 AC.8거의 없다라는 표현을 그대로 존중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거듭남의 과정은 동일한 외적 사건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큰 불행이 없어도 사람 안에서는 자기 뜻과 주님의 뜻 사이의 갈등, 양심의 책망, 자기 사랑을 내려놓는 내적 싸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비교적 조용한 방식으로 자기 확신이 낮아지고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외적 형편만 보고 그의 내적 거듭남의 과정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AC.8을 읽으면서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일부러 불행을 주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이 이미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시험과 불행과 슬픔까지도 주님께서는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통하여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속 사람 안에 보존된 리메인스가 사용될 수 있도록 섭리하실 수 있다는 쪽에 초점을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고난의 크기 자체는 거듭남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지나면서 겉 사람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사람에게 고유한 것과 주님께 속한 것을 조금 더 분명하게 구별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시련이 그 계기가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비교적 조용한 내적 갈등과 깨달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거듭남을 이루시는 분은 고난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AC.8에서 시험, 불행, 슬픔을 강조하는 이유는 고난 자체를 영적으로 높이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들이 너무 강하게 활동하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이미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것들이 드러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지배력이 잠잠해질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 자신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조금씩 배우고,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속한 것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8이 말하는 두 번째 상태에서 고난이 갖는 의미입니다. (AC.8 심화 1)

 

 

 

AC.8, 창1 개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는 두 번째 상태’

AC.8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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