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했지만, 뒤늦게 지상 배우자가 사후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할 경우는?

 

 

이 질문은 결코 엉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결혼론과 영계 질서의 핵심을 정확히 찌르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네, 그런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다만 그 만남은 비극도 아니고, 충격도 아니고,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재회가 이루어진 뒤, 각자의 길을 가는 형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장면을 분명히 보았고, 그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장면을 여러 번 관찰했습니다.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국에 먼저 간 사람은 이미 ‘자기 본질에 맞는 짝’을 찾았다

 

천국에서의 혼인은 지상의 법률적 혼인이 아니라 영적 본질(affectional essence)이 맞는 두 존재의 결합입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함께 살았던 부부라도 영적 본질이 전혀 맞지 않았다면, 천국에서 부부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중간 영계에서 정화된 뒤, 자신과 영적으로 가장 잘 맞는 ‘진짜 짝’을 만나 천국적 결혼을 이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예비하신 진짜 짝’이라고 표현합니다.

 

 

이후, 지상 배우자가 죽어 중간 영계에 도착한다

 

이때 중간 영계에 들어온 지상 배우자는 먼저 천국에 올라간 배우자가 ‘다른 천국적 짝’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대부분 처음에는 죽음의 평안 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상태, 천사의 안내, 중간 영계의 분위기 등 이런 것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먼저 천국 간 배우자가 중간 영계 배우자를 보러 오는가?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천국에 간 사람은 ‘굳이 내려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둘 사이에는 더 이상 영적 친화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영적 친화성이 없는 존재는 서로에게 끌림이 생기지 않는다.’ 즉, 주님이 그 마음 안에서 집착을 제거하셨기 때문에 억지로 가서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일시적 만남’은 허용된다

 

중간 영계에 새로 도착한 지상 배우자가 강하게 보기 원하거나 서로에게 아직 ‘남은 질문’이 있다면, 천사들이 그 만남을 잠시 허용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아주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그 만남은 대부분 다음과 같습니다. 둘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러나 이전처럼 강한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로 ‘아, 당신이 오셨군요.’ 정도의 자연스러운 인식이 있습니다. 대립도, 갈등도, 원망도 없습니다. 은근한 감사, 또는 담담한 정서가 흐릅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 말합니다. ‘당신도 당신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맞는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헤어집니다.

 

 

그 이별은 슬픔이 아니라 평화에 가깝다

 

스베덴보리는 강조합니다. ‘영계에서의 이별은 지상의 감정적 상실이 아니다. 상태가 맞지 않는 둘은 자연스럽게 헤어진다.’ 즉, 천국에 있던 배우자도 슬퍼하지 않고, 중간 영계에 도착한 배우자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간 영계에서는 이미 지상적 집착(attachment)이나 소유 의식이 천사들에 의해 부드럽게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만남은 억지도, 슬픔도, 미련도, 적대도 없이 단지 ‘아주 조용한 고별’ 같은 이런 정서로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평화로운 결별 장면’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간 영계에 도착한 그 배우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는 자신에게 가장 맞는 영적 상태를 향해 중간 영계에서 정화 과정을 거치며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정화가 충분해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진짜 짝, 즉 자신의 본성에 가장 잘 맞는 이성(異性)을 만나게 됩니다. 그 결합은 지상 결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밝고 평화롭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혼의 진짜 결혼’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재회와 결별은 ‘비극’이 아니라 ‘질서’이다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영적 질서이며, 불일치한 둘이 억지로 함께 있는 일이 없다.’ 그리고 또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지상에서의 결혼은 과정이고, 천국에서의 결혼은 본질이다.’ 즉, 지상에서는 의무, 상황, 문화, 정, 책임이 부부를 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영혼의 본질이 같아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처럼 ‘만나더라도 평범하게 헤어지는 경우’가 맞습니다

 

네, 목사님 말씀이 정확합니다. 이미 천국에서 다른 짝을 만난 쪽은 한때의 지상 배우자를 따뜻한 기억으로만 바라보며,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한 배우자와는 조용히 재회하고, 조용히 인사하고, 조용히 각자의 길을 가는 그런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의 감정적 분위기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별에는 고통이 아니고, 서로의 길을 인정하는 평화가 있다.’

 

 

 

SC.75, ‘지상에서 배우자가 없었던 사람의 천국에서의 결혼은?’

지상에서 배우자가 없었던 사람의 천국 결혼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바로 스베덴보리의 경우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주님이 정해주신 짝을 만나 결혼했겠지요? 목사님, 이 질문은 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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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3, ‘부부 중 한 사람만 신앙이 깊은 경우,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관찰한 수많은 부부의 사후 모습들인데요, 이 주제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목사님처럼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 분에게는 특별히 자주 받는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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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곧 퍼셉션의 본성이 어떠한지, ‘생명나무’(tree of lives), 곧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의 본성이 어떠한지, 그리고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본성이 어떠한지는 뒤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But the nature of the “tree of the garden,” or perception; of the “tree of lives,” or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nd of the “tree of knowledge,” or faith originating in what is sensuous and in mere memory-knowledge, will be show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106은 창2:9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짧게 정리하면서, 이 절에서 등장한 세 가지 중요한 주제가 앞으로 더 자세히 밝혀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곧 ‘동산의 나무’인 퍼셉션, ‘생명나무’인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지식의 나무’인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입니다. AC.102에서 먼저 제시했던 세 가지 의미를 AC.103-105에서 일부 설명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으로 이 주제들이 모두 설명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금 창2:9을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안내가 됩니다. 특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아직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그것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을 뜻한다는 데까지입니다.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 사람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이후의 타락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앞으로 이어지는 설명을 더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지식의 나무’를 지식이나 이성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아직 하지 않은 말을 앞질러 하는 것이 됩니다.

 

‘생명나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C.105에서는 그것을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하면서, 마침내 ‘주님의 자비’라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06은 그 생명나무의 ‘본성’ 역시 뒤에서 더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붙들어야 할 중심은 생명나무를 어떤 교리적 정의 하나로 완전히 파악했다는 생각보다,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 있다는 지금까지의 질서입니다.

 

퍼셉션 역시 아직 다 밝혀진 것이 아닙니다. AC.104에서 그것은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중요한 설명이지만, AC.106은 그 ‘본성’이 앞으로 더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낯선 개념을 처음 만났을 때 즉시 익숙한 개념으로 바꾸어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점차 어떤 내용을 더해 가는지를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AC.106은 내용은 짧지만 독자에게 중요한 여백을 남깁니다. 주님의 말씀과 그 속뜻을 이해하는 일은 한 표현의 뜻을 한 번 확인하고 끝내는 일이 아니라, 이어지는 말씀 안에서 그 뜻이 점차 열리고 서로 연결되는 과정을 따라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창세기 첫 부분처럼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하게 읽어 온 말씀을 전혀 다른 깊이에서 다시 접할 때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기 이해 안에 넣으려 하기보다 지금 밝혀진 만큼 충실히 받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은 기다리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AC.106에서 우리는 퍼셉션과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에 관한 결론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턱에 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분명해진 것은 참과 선을 퍼셉션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의 근원도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신앙의 근원을 찾는 문제는 앞으로 더 밝혀질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에게 결론을 서두르게 하지 않고, 이어지는 말씀과 설명을 따라 그 차이를 더 분명히 보도록 이끕니다. (AC.106 해설)

 

 

 

AC.107, 창2:10,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뜻함’ (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에덴에서 흘러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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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 창2:9,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 의지의 중심에 있는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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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며, ‘동산 가운데’(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의지는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서 가장 먼저 소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으므로,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에 관하여 말해지기는 하지만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탐욕이며, 이것이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지가 생명나무가 놓여 있는 ‘동산 가운데’(midst of the garden)이고,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으므로,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주님의 자비이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옵니다. The “tree of lives”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in the midst of the garden” is in the will of the internal man. The will,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heart,” is 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with man and angel. But as no one can do good of himself, the will or heart is not man’s, although it is predicated of man; cupidity, which he calls will, is man’s. Since then the will is the “midst of the garden,” where the tree of lives is placed, and man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the “tree of lives” is the mercy of the Lord, from whom comes all love and faith, consequently all life.

 

해설

AC.105는 창2:9의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라는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가장 깊은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고, 그것이 있는 ‘동산 가운데’는 속 사람의 의지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이 의지를 ‘마음’이라고도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서 가장 먼저 소유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명나무가 동산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의 생명의 중심과 관계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설명은 매우 강합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으므로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니며, 사람이 자기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탐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능력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선한 의지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선을 원하고 행하게 하는 선의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앞의 AC.99와 AC.104에서 계속 밝혀진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의 지성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하며, 퍼셉션 자체도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05는 그보다 더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의 지성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선을 원하는 의지의 생명 역시 그 근원이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인간이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있는 것은 ‘단지 탐욕’이라고까지 말할까요? 이 표현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철저히 구별하려는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생명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AC.105가 가리키는 생명의 질서는 그 반대입니다. 선한 의지와 사랑과 신앙과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며, 인간은 그것들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갑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나무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뜻한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모습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사람에게서 생명을 요구하시면서 그 생명을 스스로 만들어 내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선한 의지를 만들어 내어 먼저 주님께 가져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AC.105가 말하는 질서에서는 오히려 주님께서 그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사랑도 주님으로부터 오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도 주님으로부터 오며, 따라서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명나무’를 마지막에는 ‘주님의 자비’라고까지 풀이합니다. 생명나무의 중심에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없애기보다, 우리가 가진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묻습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사랑하고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AC.105가 보여 주는 천적 질서와 맞닿아 있습니다. 에덴동산 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결국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중심에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자비가 계셔야 함을 보여 줍니다. (AC.105 해설)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 심화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에서 가장 강하게 들리는 문장은 아마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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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6, 창2:9, ‘퍼셉션과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의 본성은 뒤에서 더 밝혀진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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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4, 창2:9, ‘퍼셉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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