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1:18, 19)

 

AC.38

(day) 선을, (night) 악을 뜻하며, 그래서 (goods) 가리켜서는 낮의 (works of the day)이라 하고, (evils) 가리켜서는 밤의 (works of the night)이라 합니다. 또한 (light) 진리를, 어둠(darkness) 거짓을 뜻합니다.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dayis meant good, by thenight,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lightis meant truth, and by thedarknessfalsity, as the Lord says:

 

19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해설

 

AC.38은 매우 짧지만, 창세기 1장의 속뜻을 읽는 데 중요한 네 가지 대응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은 선, ‘은 악, ‘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비유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언어가 지닌 영적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 ’, 악한 것들은 밤의 이라고 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먼저 낮은 선이고 밤은 악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38은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고 대응 자체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낮에는 빛이 있어 사물들이 드러나고 활동할 수 있으며, 밤에는 어둠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적 모습이 그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은 진리에, ‘어둠은 거짓에 대응합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볼 수 있게 하지만, 거짓은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앞의 AC.37에서는 아침··저녁·밤의 교대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에 비유했는데, 이번 AC.38에서는 곧바로 밤은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의 과 여기의 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말씀의 상응을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사전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이나 상태도 문맥에 따라 강조되는 영적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AC.37에서는 하루와 한 해의 변화가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고, AC.38에서는 낮과 ’,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구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7의 모든 을 곧 악이라고 읽거나, 반대로 AC.38의 밤을 단순한 상태 변화 정도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각각 그 글이 말하는 문맥을 따라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요3:19, 21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다고 말씀하시고, 반대로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빛과 어둠이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고 행하는 인간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이 잘 드러납니다.

 

특히 요3장의 말씀에는 행위가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어둠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이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오는데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입니다. 그러므로 AC.38이 선을 낮의 ’, 악을 밤의 이라고 표현한 것은 선과 악이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개념이 아님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이는지는 결국 삶과 행위에도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행위만 보면 사람의 내적 상태를 모두 있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8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주려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왜 선과 악을 낮과 밤으로, 진리와 거짓을 빛과 어둠으로 표현하는지를 밝히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 대응은 먼저 다른 사람을 분류하는 도구가 아니라 말씀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진리라는 대응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단지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를 받아들여 사는 것은 구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진리가 삶에서 행해질 때에야 비로소 빛이 된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에서 빛은 진리 자체를 뜻합니다. 다만 요3장의 인용이 보여 주듯 사람은 그 빛을 사랑하여 그쪽으로 나올 수도 있고, 자기의 악한 행위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빛이 빛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사람이 그 빛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18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라는 표현도 단순히 자연계의 밝음과 어둠을 나누는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서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분별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어느 쪽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AC.38은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 가지 대응만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 밤은 ,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그러나 이 짧은 대응을 붙들고 창세기 1장을 다시 읽으면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셨다는 말씀이 인간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분명히 구별되어 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심화

1. 넷째 요약, 정리

 

AC.38, 심화 1, 넷째 날 요약, 정리

AC.38.심화1. 넷째 날 요약, 정리 창1:14-19의 넷째 날에 해당하는 AC.30-38을 여기까지 읽고 나면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신앙,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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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창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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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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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7

광명체들로 하여금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합니다. 속에는 지금 당장 펼쳐 보일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문자적 의미만 보면 그런 깊은 뜻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이것만 말씀드리는 걸로 충분한데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일반적으로도, 개별적으로도 교대(alternations)라는 있으며, 이것이 날과 해의 변화(changes) 비유된다는 점입니다. 날의 변화는 아침에서 정오로, 다시 저녁으로, 그리고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진행합니다. 해의 변화도 이와 같아서, 봄에서 여름으로, 다시 가을로, 그리고 겨울을 지나 다시 봄으로 진행합니다. 여기서 열과 빛의 변화가 생기고, 또한 땅의 산물들도 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 역시 이러한 변화에 비유됩니다.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없고, 나아가 퍼셉션, 지각될 수도 없습니다. 이런 교대를 선지자들은 규례(ordinances, [statuta]) 하는데, 예레미야에 보면 나옵니다. It is said that the luminaries shall be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 although in the literal sense nothing of the kind appears. Suffice it here to observe that there ar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which are compared to the changes of days and of years. The changes of days are from morning to midday, thence to evening, and through night to morning; and the changes of years are similar, being from spring to summer, thence to autumn, and through winter to spring. Hence come the alternations of heat and light, and also of the productions of the earth. To these changes are compared th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 These alternations are in the prophets calledordinances” [statuta], as in Jeremiah: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 법도가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5, 36) Said Jehovah, who giveth the sun for a light by day, and the ordinances of the moon and of the stars for a light by night, . . . these statutes shall not recede from before me (Jer. 31:35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f I have not appointed the 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 (Jer. 33:25).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창세기 8 22절에서 말씀드릴 것입니다. But concerning these things, of the Lords Divine mercy, at Genesis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8:22)

 

해설

AC.37은 창1:14징조와 계절과 날과 를 설명하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몇 단어 안에 지금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고 한 가지 원리만 먼저 알려 줍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alternations)가 있으며, 그것이 자연계에서 날과 해가 변하는 모습에 비유된다는 것입니다.

 

교대라는 말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언제나 똑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연의 하루를 보면 아침에서 정오로, 정오에서 저녁으로,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갑니다. 한 해도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고 다시 봄을 맞습니다. 그에 따라 빛과 열이 달라지고 땅에서 나는 것들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인 것들에도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생에도 좋은 날과 나쁜 날이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대와 함께 다양함(varieties)을 말하면서,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결국 생명이라 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더 나아가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될 수 없으며,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영적 생명 자체에 상태의 차이와 다양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서 변화가 없으면 생명이 없다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37은 그 원리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연계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하루가 한 시각에 멈추고 계절도 하나뿐이라면 자연의 생명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빛과 열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땅의 산물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자연의 질서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영적 삶에서도 신앙이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고 사랑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는 것이 모두 정상이며 좋은 것이라는 뜻일까요? 여기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AC.37은 모든 영적 침체와 후퇴, 모든 악과 거짓의 상태를 필요한 겨울이라고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영적·천적인 것들에 교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악이나 신앙의 후퇴를 보고 지금은 겨울이니 괜찮다고 합리화하는 것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바를 넘어섭니다.

 

반대로 영적 상태가 늘 똑같지 않다고 해서 곧 거듭남이 실패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AC.37에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받을 수 있는 중요한 도움입니다. 사람은 한 번 진리를 깨달았다고 언제나 똑같은 정도로 밝게 느끼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주님 사랑을 경험했다고 언제나 같은 정서 상태에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AC.37은 영적 생명을 정지된 한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이 있는 생명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교대를 선과 악의 단순한 반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침은 무조건 선, 밤은 무조건 악이라는 식으로 이 글을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자연의 날과 계절은 영적 상태의 변화를 보여 주는 비교이며, 각각의 구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선과 진리가 분별되거나 구별될 없고,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는 말은 흥미롭습니다.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이 단순히 지루함을 막아 주는 장치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경험하고 분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37은 여기서 그 과정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둠을 경험해야만 빛을 있다’, ‘악을 겪어야 선을 배운다는 식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악 자체가 선을 가르치는 필수 교사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러한 교대를 선지자들이 규례(ordinances)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렘31:35-36과 렘33:25을 인용합니다. 해가 낮을 비추고 달과 별이 밤을 비추는 규례, 주야의 언약과 천지의 규례가 말씀에 등장합니다. 자연계의 일정한 변화가 무질서한 우연이 아니라 정해진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듯,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도 규례라는 말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여기서도 한 걸음 이상 앞서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구절들이 AC.37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서 어떤 영적 겨울이 와도 반드시 봄이 온다는 약속이라고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AC.37이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이유는 교대를 선지자들이 규례라고 부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를 창8:22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예고합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지금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런 대목도 중요합니다. 어떤 표현의 의미를 한 글에서 완전히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다시 돌아와 더 깊이 펼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7에서 지금 붙들어야 할 중심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영적 생명은 언제나 똑같은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아침··저녁·밤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생명에 속하며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퍼셉션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제와 오늘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지나치게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냉각과 후퇴를 영적 계절의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AC.37은 우리에게 영적 생명이 변화 없는 고정 상태가 아니라는 중요한 원리를 먼저 가르치고, 그 교대의 더 깊은 아르카나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고 남겨 둡니다.

 

심화

1. 징조(signs), 계절(seasons), (days), (years)

 

AC.37, 심화 1, ‘징조’(signs), ‘계절’(seasons), ‘날’(days), ‘해’(years)

AC.37.심화1. ‘징조’(signs), ‘계절’(seasons), ‘날’(days), ‘해’(years) 위 AC.37 본문에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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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 하는가?

 

AC.37, 심화 2,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가?

AC.37.심화2.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는가? 위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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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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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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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6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주님을 향한 생각이라고 여기며, 어떤 이들은 신앙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 교리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특히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습니다.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love to the Lord) 이웃을 사랑하는 (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사람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습니다. 점에 대해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셔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계명이 없느니라 (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앞의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시며,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라고 하십니다 (22:37-40).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합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Matt. 22:3741) Thelaw and the prophets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

 

해설

AC.36은 매우 직접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상당히 강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신앙이라고 부르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교리를 머리로 알고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신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여러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종교적인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문은 신앙이 신앙 교리에 포함된 것들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라고 말합니다. 인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스베덴보리는 특히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종AC.36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은 머릿속에 있는 교리로 끝나지 않고, 그 교리가 가르치는 것을 실제 삶에서 따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계명을 지키는 것인가?AC.36은 곧바로 그 오해를 막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순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수많은 규칙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며 사람이 순종해야 할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순종이다라는 말을 명령을 따르는 것이 신앙이다라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어떤 순종인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독립적인 영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6의 논점은 신앙의 고백이나 교리의 인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신 사랑을 삶에서 완전히 떼어 놓는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온전한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AC.36은 스베덴보리 자신의 철학이나 신학 체계를 먼저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12:29-31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시며 이보다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이어 마22에서도 같은 두 계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덧붙습니다. ‘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두 항목을 골라 중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달려 있는 중심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말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는 무엇이 참인지 가르치고,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6의 기준에서는 신앙의 본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진리를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36 자체가 신앙의 교리와 그것이 가르치는 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순종할지를 알려면 먼저 무엇이 참인지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대립시키는 것은 교리냐 사랑이냐가 아니라 삶과 분리된 교리적 신앙사랑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AC.35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5에서는 이해가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가 그 반대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인간의 분열을 다루었습니다. AC.36에서는 그 문제가 신앙의 언어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해로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 교리가 가르치는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은 우리에게 단순히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만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당신의 사랑과 삶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라고도 묻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올바른 고백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AC.36에서 신앙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알고 인정한 진리가 사랑과 만나고, 그 사랑이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순간 신앙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두 큰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심화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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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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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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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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