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1:28)

 

AC.55

태고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 했기 때문에,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의 모든 것은 생육(fruitfulness)이라 했고, 진리의 모든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표현들이 사용되는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입니다. 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fruitfulness,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 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것이라 너희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36:11, 12)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 (Ezek. 36:1112).

 

여기서 사람(man)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지위(ancient times) 태고교회를, 처음(beginnings)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본문에서 진리에 속한 수가 많음(multiplication) 먼저 언급되고, 선에 속한 번성(fruitfulness, 앞에서는 multiplications 번성으로 번역, 서로 다른 영어를 같은 한글 단어로 번역한 바람에 헷갈릴 있으니 주의해야) 그다음에 언급되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이제 거듭나게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Byman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ancient times,the most ancient church; bybeginnings,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The reason whymultiplication,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fruitfulness,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 주님께서는 사람을 결혼한 (a 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a married land,as in Isaiah: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땅이 결혼한 것처럼 것임이라 (62:4) 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 (Isa. 62:4).

 

결합에서 나오는 진리의 열매들을 아들(sons)이라 하고, 선의 열매들을 (daughters)이라 하는데, 이는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sons,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daughters,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3] 땅이 가득 차게 된다(replenished) 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 그에게 역사하실 , 선과 진리는 헤아릴 없이 증가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The earth isreplenished,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31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13:31, 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겨자씨 (grain of mustard seed)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의 선을 뜻하는데, 그것이 모든 가운데 가장 작다(the least of all seeds)고들 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가 하는 선을 자기한테서 거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한테서 나는 실상 악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거듭남의 상태 중에 있기 때문에, 안에는 선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가장 작은 ,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일지라도 말입니다. Agrain of mustard seed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the least of all seeds,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 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 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것은 크게 자라 (herb) 되고,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tree) 됩니다. 그리고 나무의 가지에 공중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 진리들,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데(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가지들은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입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 그리고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에는 전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tree,and then thebirds of the heavens(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which are memory-knowledges. 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해설

AC.55는 앞의 AC.54에서 설명한 결혼에서 무엇이 나오는지를 다룹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AC.55에서는 그 결혼을 이해와 의지의 결합, 또는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고 다시 말하면서, 그 결합에서 산출되는 선과 진리를 창1:28생육하고 번성하라와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의 사람들이 이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에 속한 모든 것을 생육(fruitfulness)이라 하고,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번성또는 증가(multiplications)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육 = , 번성 = 과 같은 일반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AC.55가 직접 제시하는 대응은 선과 진리입니다. 결혼에서 선이 산출되는 것을 생육이라 하고, 진리가 산출되는 것을 번성이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3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에서도 생육하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5는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제시된 생육과 번성의 의미를 이제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혼과 연결하여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결혼에서 선과 진리가 나온다는 표현도 자연적인 출산을 그대로 영적인 과정에 옮겨 놓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결합에서 산출되는 것들도 결혼에서 생겨나는 열매의 언어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결합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산출하는 살아 있는 결합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보여 주기 위해 먼저 겔36:11-12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 지위는 태고교회를, ‘처음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리고 특히 증가(multiplication)가 먼저 나오고 생육(fruitfulness)이 뒤에 나오는 순서에 주목합니다.

 

왜 진리에 속한 증가가 먼저이고 선에 속한 생육이 뒤에 나올까요? AC.55의 답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이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거듭나게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AC.52-53에서도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사랑에 속한 것이 뒤따른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도 그 질서와 연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거듭남의 모든 초기 단계에서는 반드시 지식의 양이 먼저 늘어나고 나중에 선이 들어온다는 세밀한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55가 직접 밝히는 것은 겔36의 이 문맥에서 진리에 속한 증가가 먼저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순서에 의미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한 문장을 모든 사람의 거듭남에 대한 획일적인 시간표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사62:4에서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사람을 주님께서 결혼한 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을 쁄라라 하리니’, 결혼한 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땅은 언제나 인간을 뜻한다고 고정적으로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5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가 말씀에서 결혼한 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앞의 AC.54에서 시작된 결혼이라는 주제를 이어 줍니다.

 

그 결합에서 나오는 열매들 가운데 진리에 속한 것은 아들’, 선에 속한 것은 이라고 한다는 설명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우선 AC.55가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아들 = 진리에 속한 열매’, ‘ = 선에 속한 열매입니다. 이를 곧바로 현실의 남성과 여성의 성질에 대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대목은 바로 앞 AC.54에서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 ‘처녀’, ‘아내라고 불린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말씀에서 가족과 결혼의 언어는 단순히 자연적인 혈연관계를 넘어 인간 안의 선과 진리 및 그 결합과 산출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다만 각각의 표현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뜻한다고 설명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다음 창1:28땅에 충만하라가 설명됩니다. 땅이 가득 차는 은 진리와 선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곧 그에게 역사하시는 것이며, 그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생육과 번성의 주체를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증가의 근원은 주님의 복과 역사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 이후 계속 이어진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사람에게 참으로 살아 있는 선과 진리가 있다면 그것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43에서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가진 것은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5에서는 같은 원리가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실 때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풍성해집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13:31-32의 겨자씨 비유를 인용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AC.55가 겨자씨를 무엇이라고 해석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겨자씨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의 이라고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바로 처음 주어진 작은 진리라고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 선이 모든 가운데 가장 작은 일까요? 사람은 그때 자신이 선을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이 거듭남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어떤 선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가장 작은 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대목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밖에 없다면, 어떻게 사람 안에 선이 있을 있는가?하는 질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선의 근원과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는 상태를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 가운데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그 안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앞의 AC.39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생각하도록 허용된다는 설명과 함께 읽으면 이해하기가 조금 쉬워집니다.

 

그 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에 따라 그것이 자라 이 되고, 마지막으로 그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가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C.55가 직접 제시한 진행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작은 선으로 표현된 겨자씨가 있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자라 풀이 되며, 그 결합이 완성될 때 나무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 진리’, ‘ =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진리’, ‘나무 = 완전히 안정된 영적 구조라는 별도의 단계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번 문맥에서 겨자씨는 스베덴보리가 명시적으로 이라고 했습니다. ‘에 대해서도 AC.55는 식물 자체의 성질을 하나하나 영적인 특징과 대응시키지 않습니다. 풀이 부드럽고 잘 흔들린다는 자연적 특징에서 겸손이나 유연성을 끌어내는 것은 흥미로운 묵상이 될 수는 있지만 AC.55의 해설로 제시할 근거는 없습니다.

 

나무가 되었을 때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새들이 진리들 또는 지적인 것들을 뜻하고, 가지들은 기억 지식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작은 선에서 시작된 것이 신앙과 사랑의 결합 가운데 성장하면서, 마침내 진리와 지적인 것들이 기억 지식이라는 가지에 깃들 수 있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이것을 보면 AC.55에서 지식과 기억 지식은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앞의 AC.40에서도 기억 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살아 있게 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여기에서도 기억 지식은 나무의 가지가 되어 진리와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 자리가 됩니다. 문제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생명과 결합하여 어떤 질서 안에 놓이는가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새로운 주제를 엽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 그리고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에는 전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이 덧붙여진다.’ 여기서 창1:28정복하라다스리라가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말을 자연계나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욕의 정당화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55의 속뜻에서는 영적 인간의 전투 상태와 관계됩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으로 전투의 대상과 방식, 시험의 전체 구조를 세세하게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것은 영적 인간에게 전투가 있으며, 그 때문에 정복하라다스리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이 전투를 단순히 아직 천적 인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싸움이라고 정리하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AC.55의 직접 표현은 영적 인간일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전투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의 관계는 이후 AC가 더 설명하도록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55 전체를 다시 보면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먼저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는 결혼이 있습니다. 그 결혼에서 선과 진리가 산출되어 생육번성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역사하실 때 그 선과 진리는 크게 증가하여 땅에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은 그 과정에서 전투를 겪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창1:28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속뜻에서 단순히 무엇인가가 많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 안에서 선과 진리를 산출하고 풍성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풍성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성취가 아니라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사람 안에 역사하실 때 이루어지는 증가입니다.

 

 

 

AC.56, 창1:29,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AC.56-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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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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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속뜻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태고교회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사라지자, 아르카나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비교할 있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안에 담긴 행복을 느끼고 인식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내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내적인 것들, 속의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겉의 것들은 눈으로 보기만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겉의 것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생각을 속의 것들, 내적인 것들로, 그리고 거기서 천적인 것들로, 결국에는 그들의 모든 되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해줄 때에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누리는 행복이 바로 거기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understanding) 남자라 불렀고, 의지(will) 여자라 불렀으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 그것을 결혼(marriage)이라 불렀습니다. 교회로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로 인해 선에 대한 애정으로 교회를 가리켜 (daughter) 처녀(virgin), 시온의 처녀(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virgin of Jerusalem) 하였고, 또한 아내(wife) 부르게 되었습니다.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23절과 3 15절에서 보게 것입니다. What is meant bymale and female,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daughterandvirginas thevirgin of Zion,thevirgin of Jerusalemand also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아담이 이르되 이는 중의 뼈요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23)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머리를 상하게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것이니라 하시고 (3:15)

 

해설

AC.54는 창1:27의 마지막 표현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를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뜻에서는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창조를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남자와 여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태고교회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르카나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태고교회 사람들이 결혼과 자연계의 외적인 것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길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가 주의할 것은 AC.54가 자연적인 남녀나 실제 결혼을 부정하고 그것을 단지 인간 심리의 비유로 바꾸려는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실제 결혼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매우 큰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혼이라는 자연적 현실을 통해 더 내적인 결합을 보았습니다. 자연적인 결혼과 그 속뜻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 안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다는 것이 이번 글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혼의 행복을 지각했습니다. 오늘날 독자에게는 조금 낯선 표현이지만, 이 문장은 태고교회가 결합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바라보는 방식은 외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AC.54는 그들을 내적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외적인 것들을 눈으로 보았지만, 생각으로는 그것들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외적인 것 자체가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말은 자연계의 사물이나 삶을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요점은 외적인 것이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보면 그들의 생각은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으로 향했고, 내적인 것에서 다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이 흐름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응과 표상이라는 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좋은 사례입니다.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것만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 안에서 더 내적인 것을 보았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연계는 막다른 곳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생각을 그 자체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실재를 향하게 했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의 결혼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그보다 더 내적인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고,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바로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이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천국에 가면 이루어지는 남녀의 결혼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실제 남녀의 결혼과 아무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심리 현상으로만 이해해서도 곤란합니다. AC.54 자체에서는 이 용어의 전체 교리를 아직 펼치지 않습니다. 다만 태고교회 사람들이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을 더 높은 결합에서 오는 것으로 퍼셉션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앞으로도 AC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설명을 거쳐 스베덴보리는 마침내 창1:27남자와 여자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힙니다.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를 여자라 불렀으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그것을 결혼이라 불렀다.이것이 AC.54의 핵심 문장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현실의 모든 남성은 이해를 대표하고 모든 여성은 의지를 대표한다는 심리적 성별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이해와 의지입니다. 한 인간 안에 있는 두 기능을 남자와 여자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성에게는 이해만 있고 여성에게는 의지만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AC.54의 속뜻에서 한 영적 인간 안에 이해와 의지가 있고, 그 둘의 관계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현실 남녀의 지적 능력이나 감정적 성향을 분류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을 지나치게 기계적인 사전처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1:27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태고교회의 결혼에 대한 인식과 영적 인간 안의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연결합니다. 이후 다른 문맥에서 남자’, ‘여자’, ‘남편’, ‘아내등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AC.54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해와 의지가 각각 따로 있다는 사실보다 둘이 하나로 작동할 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해와 의지의 구별은 결합을 위한 구별입니다. 둘이 없어져 하나의 기능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53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AC.53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4에서는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할 그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앞에서는 둘의 질서를 구별했다면 이번에는 둘의 결합에 시선이 놓입니다.

 

그렇다고 이해에 들어온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사랑이 되면 그것이 결혼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거듭남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특히 영적 인간의 진행을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표현일 수 있지만, 앞의 AC.52-53에서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4의 더 근본적인 요점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한다는 데 있지 않고,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우리가 앞에서 보아 온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생명은 한쪽 기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AC.54 자체는 이해 = 진리 = 신앙’, ‘의지 = = 사랑이라는 모든 대응 관계를 한꺼번에 체계화하는 글은 아닙니다. 지금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만큼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스베덴보리는 이 태고교회에서 하나의 언어 습관이 비롯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교회 자체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처녀’, 예를 들어 시온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라고 불렸으며 또한 아내라고도 불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교회가 여성적 표현으로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여기서도 교회 = 여자라는 하나의 고정된 공식만 기억하기보다 왜 그런 표현이 사용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54가 직접 밝히는 이유는 선에 대한 애정입니다.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과 관련되기 때문에 딸·처녀·아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창2:23과 창3:15에서 더 보게 될 것이라고 직접 예고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아내로서의 교회’, ‘여자와 여자의 후손’, ‘남편과 아내의 모든 상응을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 자체가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하므로 그때까지 남겨 두는 것이 오히려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좋은 독법입니다.

 

AC.54에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상응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외적인 것을 보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을 생각했고, 거기서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주님께로 생각이 향했습니다. 상응은 그들에게 외워 둔 상징 사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AC를 읽으며 상응을 공부할 때에도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고 외우는 것만으로 태고교회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의 시선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께 향합니다. 상응의 목적은 자연적인 상징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내적인 것과 주님을 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서 결혼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들의 실제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 행복의 근원을 더 높은 천상의 결혼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로 다른 둘이 각자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채 하나로 작동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AC.54의 중심을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정적이다라는 자연적 성별 구분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실제 결혼은 중요하지 않고 인간 내면의 이해와 의지만 중요하다고 읽어서도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자연적인 결혼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는 귀한 표상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결국 AC.54는 창1:27남자와 여자를 통해 인간 안의 두 기능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와 의지는 구별되지만 하나로 작동할 때 결혼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 결혼의 언어는 인간 개인 안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를 ’, ‘처녀’, ‘아내라고 부르는 말씀의 표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결합의 시선은 더 깊이 들어가면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모든 이셨던 주님께 향합니다.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심화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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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창1:28, ‘결혼의 열매 :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서 생육과 번성이 일어나는 거듭남의 확장'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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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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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1:27)

 

AC.53

여기서 형상(image) 언급되는 이유는, 이해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his image)이라 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서 나옵니다. The reason whyimage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image of God.

 

해설

AC.53은 매우 짧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 AC.51-52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의 관계를 창1:27의 문장 자체와 연결하는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에 주목하는 것은 형상이라는 말이 한 절 안에서 왜 두 번 반복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1:27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합니다. 영어로도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이라고 하여 image가 두 번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반복으로 읽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번의 형상을 서로 구별하여 읽습니다.

 

첫 번째 형상’, 자기 형상(His image)이해에 속한 신앙을 가리키고,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의지에 속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것이 AC.53이 직접 말하는 중심입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자기 형상이라는 우리말 표현입니다. 한국어만 보면 자기가 사람 자신을 가리키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상은 아직 사람이 자기 이해와 판단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어 원문은 His image이며 여기서 His는 사람(man)이 아니라 하나님(God)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자기 형상을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나 proprium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표현 안에서 스베덴보리는 첫 번째를 신앙, 두 번째를 사랑과 연결할까요? 바로 앞 AC.51-52의 설명이 배경이 됩니다. AC.51에서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구별했고, AC.52에서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설명했습니다. AC.53은 그 구별을 창1:27의 두 번 반복되는 형상에 적용합니다.

 

첫 번째는 이해에 속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영적 인간의 질서와 관계됩니다. AC.52에서 영적 인간을 나타내는 창1:26의 순서에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하는 물고기와 새가 먼저 나오고, 의지와 애정에 관계되는 짐승이 뒤에 나왔습니다. 이제 AC.53도 같은 질서를 이어서, 이해에 속한 신앙을 첫 번째 형상과 연결합니다.

 

두 번째는 의지에 속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사랑이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선다고 합니다. 이 한 문장은 AC.52의 설명을 거의 압축해서 다시 말한 것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앞섭니다.

 

여기서 뒤따른다앞선다는 표현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AC.48에서 이미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을 신앙만 있는 사람’, 천적 인간을 사랑만 있는 사람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둘의 차이는 신앙과 사랑 가운데 하나가 있고 하나가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둘의 질서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간단하게 영적 인간 = 신앙 사랑’, ‘천적 인간 = 사랑 신앙이라고 적으면 어느 정도 기억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완전한 정의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53이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랑이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선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 전체는 이후 AC에서 더욱 세밀하게 설명됩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첫 번째 자기 형상아직 중심이 사람 쪽에 있는 상태’,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중심이 하나님 쪽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AC.53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첫 번째의 자기역시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인간 중심 하나님 중심의 변화로 읽는 것은 본문의 문법과도 맞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의 형상하나의 형상이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발전하는 단계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53형상이 둘인가 하나인가를 논하려는 글이 아니라, 두 번 반복된 표현이 각각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설명하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 짧은 문장에서 형상의 완성이라는 별도의 교리를 만들어 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구별을 따라가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신앙과 사랑이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영적 인간은 신앙과 사랑으로 함께 행동하는 사람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AC.54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이해와 의지의 결합, 곧 일종의 결혼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53은 신앙과 사랑을 둘로 갈라놓기 위한 글이라기보다, 서로 결합될 두 요소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는 글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AC.53은 다음 글로 넘어가는 매우 자연스러운 다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합니다. 이어지는 AC.54에서는 창1:27남자와 여자를 통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설명합니다. 즉 먼저 둘을 구별하고, 이어 그 둘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흐름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신앙보다 중요하다는 뜻인가?AC.53만으로 두 가지를 경쟁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어느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와 결합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섭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이 앞서므로 진리를 배우거나 신앙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52에서도 천적 인간을 나타내는 순서에서 짐승 뒤에 새와 물고기가 계속 존재했습니다. 사랑이 앞선다는 것은 이해와 신앙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질서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먼저라고 해서 그의 신앙이 단순한 지식이나 지적 동의라는 뜻도 아닙니다. AC.48에서 이미 그가 신앙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살아 있는 영적 인간임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거듭남과 분리된 죽은 지식이 아니라 이해에 속하면서 사랑과 결합되어 가는 신앙입니다.

 

AC.53은 이런 점에서 앞의 여러 글을 단 한 문장에 압축합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라는 구별이 창1:27의 두 번 반복되는 형상안에 담겨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 형상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은 의지에 속한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섭니다.

 

따라서 이번 글의 핵심을 자기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발전한다거나 신앙 중심에서 사랑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형상이 완성된다고 정리하기보다, 원문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의지에 속한 사랑이 있으며, 두 번의 형상은 이 둘과 관계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섭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AC.54에서 이 두 요소는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을 통해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53은 어떤 완성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어떻게 구별되고 다시 결합되는지를 보여 주는 다음 아르카나로 들어가는 짧고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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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창1:26, ‘순서에 깃든 아르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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