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을 경험합니다. 국기가 한 나라를 나타내고, 왕관이 왕권을 나타내며, 결혼반지가 부부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표상은 사람이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상징보다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인물이나 장소, 사물이나 행위가 표상한다고 할 때에는 그 외적인 것이 말씀 안에서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제사는 문자적으로는 실제로 행해진 종교의식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제사들이 주님과 주님께 속한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라는 외적인 의식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상적 기능을 합니다.

 

이 점에서 표상과 단순한 비유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는 어떤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을 끌어와 비교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표상은 단지 설명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문학적 장치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이 실제로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상하도록 말씀 안에 배열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집트와 가나안, 성막과 성전, 제사와 절기 같은 것들이 문자적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것이 표상적 의미를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자적 이야기나 역사적 차원을 곧바로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상한다는 말의 핵심은 외적인 것 안에 그것이 나타내는 더 내적인 것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그 문자가 나타내고 있는 영적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에서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것을 몸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과 그 안의 나무와 강, 뱀과 열매 같은 것들도 이후 AC의 해설을 따라가면 각각 태고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에 관한 것을 표상하고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임의로 이것은 이것을 상징한다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질서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상응과 속뜻의 연결을 따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AC.4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안에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문장이 앞으로 AC에서 표상이라는 말을 수없이 만나게 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이 단지 자연계의 대상들로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에 관한 영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표상이 자의적인 상징 놀이가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각각의 표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해당 문맥에서 하나씩 확인해 가야 합니다. (AC.4 심화 1)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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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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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AC.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사람(internal man) 사람(external man)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에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되므로 처음 등장하는 이 자리에서 기본적인 뜻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사람을 단순히 마음속의 , 사람밖으로 보이는 라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구별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몸으로 행동하고 말하며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겉 사람과 관계하고,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사랑은 속 사람과 관계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구별은 단순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의 구별보다 깊습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는 생각과 욕망도 많이 있지만, 그것이 단지 마음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속 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생각하고 원하는 것 역시 내면에서 일어나지만 여전히 겉 사람의 질서에 속할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은 사람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에 의해 형성되고 열리는 내적인 인간과 관계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거듭남에서는 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내적인 것을 통하여 외적인 것을 질서 있게 하시며, 사람이 받은 진리와 선이 실제 삶에 나타나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행동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주님의 질서 아래 서로 연결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AC.3에서 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말씀의 비유로 사용되는지도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이 살아 있으며 겉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죽은 몸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말씀의 문자만을 그 안의 내적인 것과 분리하여 보면 영혼 없는 몸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은 좋은 것이고 사람은 나쁜 이라는 대립이 아닙니다. 몸이 영혼과 결합하여 살아 있는 인간을 이루듯이, 겉 사람도 속 사람과 올바르게 연결될 때 인간의 삶에서 필요한 쓰임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사람을 단순히 양심, 진심, 속마음, 또는 인간의 가장 깊은 중심 하나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를 계속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내적인 것 자체도 여러 방식으로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3에서는 우선 사람은 자연적인 사람보다 내적인 인간이며,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사람을 질서 있게 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정도를 붙들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의 비유도 단순한 몸과 마음의 비유보다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의 겉 사람이 속 사람과 분리되어서는 참으로 살아 있을 수 없듯이, 말씀의 겉 글자 역시 그 안의 내적인 생명과 분리되어서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앞선 AC.2에서 보았듯이 그 모든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AC.3 심화 1)

 

 

 

AC.3, 서문, ‘문자는 몸이고, 속뜻은 생명이다’

AC.3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은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속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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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단지 생명을 주시는 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말씀에 왜 생명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등장하지만, 동시에 스베덴보리가 주님과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주님을 생명 자체라고 할 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처럼 생명을 받아 가지고 계신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 주님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주님에게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생명이 있지만 주님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AC.2에서는 이 깊은 주제를 인간 생명의 구조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꺼낸 것이 아니라 말씀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꺼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생명이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데서 온다고 합니다. 말씀의 가장 깊은 생명과 주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 그분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다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모든 구절에서 문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2 자체가 나름의 방식으로(in its own way) 주님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구약의 어떤 본문은 문자적으로 인물의 생애를 말하고, 어떤 본문은 전쟁이나 율법이나 족보를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외적인 것 안에 있는 내적인 것이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그것이 살아 있고 신성한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생명 자체라는 표현은 이후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으면서 훨씬 더 깊어질 주제입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는 것, 그 생명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도록 허락받는다는 것, 생명이 어떻게 인간에게 유입되는가 하는 문제들은 이후 각각의 문맥에서 더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AC.2 한 번호에서 그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AC.2에서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출발점은 이것입니다. 말씀에는 그 자체로 독립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고 그분을 가리키기 때문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말씀에 생명을 더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이시며, 바로 그분을 향하는 내적인 것이 말씀을 살아 있고 신성한 말씀 되게 합니다. (AC.2 심화 2)

 

 

 

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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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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