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3.심화

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수도원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분명 서로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개념을 그대로 같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서로 닮은 영적 지향이 어디에 있으며, 그 지향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AC.13의 일곱 번째 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 창조의 여섯 날은 인간이 거듭나는 상태들을 나타내며, 그 뒤의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안식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휴식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들에서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고 선을 행하는 것처럼 경험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실제로 싸우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더욱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곱 번째 상태의 안식은 인간의 proprium이 주도권을 쥐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된 분이 되시는 질서와 관련됩니다.

 

이 점에서는 기독교 수도원과 신비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서방 기독교 영성에서는 영적 여정을 정화, 조명, 합일이라는 틀로 설명해 온 전통이 있으며, 여기서 합일은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더욱 깊이 일치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자기중심적인 의지가 약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여 그 뜻에 따라 살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안식과 비교해 볼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전통 전체를 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영성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수도원과 신비 전통 안에서도 합일은 황홀경이나 특별한 관상 체험만을 뜻하지 않았으며, 순종과 사랑과 덕의 삶, 기도와 일상생활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도록 변화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흐름이 있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수도원 전통은 체험이고 스베덴보리는 삶이다라고 양분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질서를 설명할 때 특별한 종교적 체험 자체를 그 상태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데서 찾는 편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황홀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자기에게서 한다고 생각하는 상태가 있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살아나기 시작하는 상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사랑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상태를 판단하는 핵심은 특별한 감각적·신비적 경험이 아니라 인간 안의 사랑과 의지와 삶의 질서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에 있습니다.

 

또한 이 상태를 수도원이나 세상과 격리된 특별한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의 실제 무대는 인간의 삶 전체입니다. 가정과 직업과 인간관계와 맡겨진 쓰임 속에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배우며, 선을 행하고, 그 선이 자기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이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일곱 번째 상태를 특정한 생활 형태나 수도 제도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일곱 번째 상태를 누구나 쉽게 도달하는 일반적인 단계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AC.13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사람이 실제로 이 여러 상태 가운데 어디까지 이르는지를 말하면서,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도 드물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상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지만, 실제 인간에게서 그 충만한 상태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일곱 번째 상태의 안식을 이후에는 아무런 시험이나 영적 싸움도 없다는 절대적인 무전투 상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싸움의 주체와 인간의 내적 태도가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악과 싸워 이긴다고 여기기보다 주님께 의지하며, 주님께서 싸우시고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질서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단순히 갈등이 사라진 심리적 평온이라기보다 주님의 질서 안에서 오는 영적 평안과 관련됩니다.

 

이렇게 보면 수도원 전통의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의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비교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인간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변화를 말하며,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일곱 번째 상태를 어떤 특정 수도 전통의 완덕론이나 신비적 합일론과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이라는 말씀의 속뜻 안에서, 인간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마침내 주님께서 주된 분으로 역사하시는 안식의 질서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13을 수도원 영성과 연결하여 읽을 때 가장 유익한 질문은 어떤 특별한 합일 체험에 도달했는가?가 아니라 삶의 주도권이 실제로 누구에게 있는가?일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내 힘과 공로로 붙들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인정하며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도록 내 삶을 맡기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째 날의 안식은 세상을 떠나 얻는 특별한 종교적 경지가 아니라, 인간의 중심이 proprium에서 주님께로 옮겨 가면서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삶을 다스리게 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AC.13 심화 1)

 

 

 

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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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심화

1.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하고, 이어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고 합니다. 또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는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2는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래의 예들은 스베덴보리가 AC.12에서 바로 이런 경우를 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AC.12가 말하는 상태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해해 보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합시다. 그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곁의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 실제로 도와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단지 순간적인 기분이나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면 AC.12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가 말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선한 행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정직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면 훨씬 유리한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거짓을 피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면, 단지 정직이라는 원칙을 알고 있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자기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을 실제 삶에서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을 했으니  사람은 AC.12 여섯 번째 상태에 있다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는 외적인 행동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를 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의 거듭남 단계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한다는 표현이 실제 삶과 무관한 추상적인 말이 아님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이것 역시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기능처럼 기계적으로 나누기보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고 행하는 것이 함께 가는 상태로 이해하면 조금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 사랑한다고 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무엇이 아이에게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고, 필요하면 가르치고 바로잡으면서도 아이의 선을 진심으로 원합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옳고 유익한가를 살피는 것과 실제로 아이의 선을 원하는 것이 함께 필요합니다. 이것 역시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의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무조건 감싸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옳고 그름만 따지면서 상대방의 형편을 전혀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진정한 유익을 바란다면, 우리는 진리와 선이 함께한다는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2의 또 하나 어려운 표현은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착한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정도로 축소해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는 영적 인간의 생명이 무엇을 먹고 사는가를 설명하면서, 자연적 생명은 음식과 물로 유지되고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는 것을 점점 소중히 여기고, 알고 있는 선을 실제로 행하는 삶에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에는 자기 이익과 인정만이 중요했는데,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 소중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2가 직접 제시한 구체적인 사례라기보다 영적 생명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유지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적용입니다.

 

여기서 기쁨도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마다 반드시 감정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으며, 용서하거나 참고 섬기는 일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기쁨을 단순한 감정적 즐거움과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점차 진리와 선에 속한 것들을 향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AC.12에서 특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상태가 앞선 상태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앞선 상태들을 거치면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어 가며, 이제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위의 생활 사례들도  행동 하나를 하면 여섯 번째 상태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와 실제로 사랑하고 행하는 선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처음에는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참된 것을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는 것이 점점 함께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말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 삶 안에서 함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2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표현도 조금 덜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신앙은 머릿속에만 있고 사랑은 막연한 감정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참된 것을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서 선한 것을 원하며 실제로 행하는 삶 속에서 둘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모든 예보다 중요한 것은 AC.12 자체가 말하는 방향입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을 가장 간단히 풀어 말한다면, ‘내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이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점점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AC.12 심화 1)

 

 

 

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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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 무슨 뜻인가?

 

AC.11을 처음 읽으면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라는 표현에서 조금 멈추게 됩니다. 우리말의 확증하다는 보통 어떤 사실이 틀림없음을 증명하거나 확인한다는 뜻으로 들리고, ‘자신을 확증한다고 하면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스스로 옳다고 굳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11의 문맥을 그대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진리와 안에 있음을 확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확증의 중심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자기 생각이 옳다는 증거를 모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신앙으로 말하게 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AC.10과 비교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AC.11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제 신앙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즉 앞에서 받은 신앙이 단지 순간적으로 비추는 빛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말로 나타날 정도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확증한다는 것을 삶의 경험을 통해 진리가 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고 설명해도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AC.11이 직접 내리는 정의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AC.11은 사람이 여러 경험을 해 보고 진리의 효용을 검증한 뒤 확신하게 된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그가 이제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진리를 그렇다고 하니까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진리가 점점 자기 생각과 말의 바탕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길이 여러 번 다니다 보면 점차 익숙한 길이 되는 것처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확증의 정확한 사전적 정의라기보다 AC.11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자신을 확증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진리와 선 안에 세운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부터 계속되는 전체 문맥은 사람의 거듭남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로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표현을 인간이 독립적으로 자기 안에 진리와 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굳힌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확증이라는 말까지 생각하면 또 하나의 구별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확증할 수도 있지만 거짓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확증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좋은 영적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참이라고 받아들이고 무엇 안에서 자신을 굳히느냐가 중요합니다. AC.11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 이므로 좋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확증이라는 단어만 떼어 읽으면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더욱 굳게 믿는 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AC.11에서는 그런 완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아직 거듭남의 마지막 상태도 아닙니다. 바로 다음 AC.12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여섯 번째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11확증을 거듭남의 완성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여섯 상태 가운데 다섯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중요한 변화입니다.

 

따라서 AC.11자신을 확증하다는 표현은 우선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그리고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적용하여 설명할 때에는 배운 진리가 점차 자기 생각과 말의 바탕으로 자리 잡아 간다고 풀어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AC.11에서 왜 신앙으로 말한다는 것과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이 함께 나오는지도 조금 더 쉽게 보입니다.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멀리서 들은 가르침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신앙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안에서 점차 확고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AC.11 심화 1)

 

 

 

AC.11, 창1 개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는 때 :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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