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

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이 다루어집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의 생명이, 이 절에서는 그의 사랑 또는 의지의 생명이 다루어집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고, 속 사람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으므로, 그때의 겉 사람은 ‘사람’(man)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적 인간이 되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며,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으로 그렇게 되어 겉 사람도 ‘사람’(man)이 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시키지만,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man) 되게 합니다. The life of the external man is here treated of—the life of his faith or understanding in the two former verses, and the life of his love or will in this verse. Hitherto the external man has been unwilling to yield to and serve the internal, being engaged in a continual combat with him, and therefore the external man was not then “man.” Now, however, being made celestial,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it also becomes “man,” being so rendered by the life of faith and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prepares him, but it is the life of love which causes him to be “man.”

 

해설

AC.95는 바로 앞 AC.94에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이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한 설명을 더욱 세밀하게 풀어 줍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의 생명을 두 측면으로 나눕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신앙 또는 이해의 생명’이 다루어졌고, 이제 창2:7에서는 ‘사랑 또는 의지의 생명’이 다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은 단순히 인간이 가지고 있는 두 종교적 요소가 아니라 각각 이해와 의지에 관계하며, 천적 인간의 형성에서는 이 둘이 일정한 질서 가운데 하나로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이 ‘사람’이 아니었다는 설명은 AC.91과 직접 연결됩니다. 영적 인간의 상태에서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둘 사이에 계속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은 육체적으로 인간이 아니었다거나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의 질서에 온전히 순응하지 않아, 주님께서 의도하신 천적 질서 안에서 참으로 살아 있는 겉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천적 인간이 되면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바로 그때 겉 사람도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겉 사람을 그렇게 ‘사람’ 되게 하는 데에는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이 함께 관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시킨다’고 합니다. 이는 창1에서 설명해 온 영적 인간의 형성과도 연결됩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며 신앙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과 이해의 생명은 겉 사람을 질서 안으로 이끌고, 속 사람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결코 불필요하거나 천적 상태에 이르면 폐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을 위한 준비의 역할을 하며, 앞의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룰 때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던 설명과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그러나 AC.95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 되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번 번호의 핵심입니다.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천적 인간의 완성이 아닙니다. 이해한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사람이 그것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서 자발적으로 행하게 될 때 비로소 겉 사람도 속 사람과 하나의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앞에서는 속 사람이 요구하는 것과 겉 사람이 원하는 것 사이에 싸움이 있었지만, 이제 사랑이 의지의 생명이 되면 겉 사람이 억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기꺼이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싸움이 그치고 앞에서 말한 ‘평화의 평온’이 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의 생명이 사람 되게 한다’는 말을 신앙보다 사랑이 중요하므로 신앙은 결국 필요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은 오히려 둘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신앙의 생명은 준비시키고, 사랑의 생명은 사람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준비가 없으면 완성으로 갈 수 없으며, 준비 자체가 완성도 아닙니다. 신앙을 통하여 이해가 준비되고, 그 진리가 사랑 안으로 들어가 의지의 생명이 될 때 인간은 아는 진리와 원하는 선이 서로 갈라져 있지 않은 상태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변화입니다.

 

이 점은 AC.94의 ‘생명의 숨’이 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지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셔서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된다는 것은 단지 신앙의 진리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그 진리가 사랑의 생명이 되어 의지에까지 이르고, 마침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는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 살아난 상태가 아니라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살아 있게 되는 상태로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AC.95는 창1부터 이어진 거듭남의 흐름을 매우 간결한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시키지만,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 되게 합니다.’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거듭남의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인간을 준비시키시고, 마침내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의 생명이 되어 사람이 선을 기꺼이 행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때 겉 사람은 더 이상 속 사람과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그것을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신앙이 사랑 안에서 살아 움직일 때, 그리고 이해한 진리가 의지하는 선이 될 때, 인간은 천적 질서 안에서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AC.95)

 

 

 

AC.96, 창2:7, ‘코와 향기와 퍼셉션 -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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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창2:7,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다’ (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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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창2:7)

 

AC.94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form man, dust from the ground)는 것은 그의 겉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5절에서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no man to till the ground)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는 것은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는 뜻이며,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man became a living soul)는 것은 그의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form man, dust from the ground” is to form his external man, which before was not man; for it is said (verse 5)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To “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is to give him the life of faith and love; and by “man became a living soul” is signified that his external man also was made alive.

 

해설

AC.94는 창2:7의 세 표현을 차례로 해석하면서 천적 인간의 형성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첫째는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둘째는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 셋째는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을 각각 겉 사람의 형성,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음, 그리고 마침내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됨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히 육체를 만들고 거기에 생물학적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의 속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의 겉 사람에까지 이르는 천적 인간의 형성을 묘사합니다.

 

먼저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겉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지면’은 앞의 AC.90과 직접 연결됩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있는 동안에는 그의 겉 사람이 ‘땅’이라 불리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 또는 ‘들’이라 불린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이 형성된다는 것은 이미 천적 인간의 문맥 안에서 겉 사람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앞 AC.89에서도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으므로, 이것은 겉 사람이 자기 힘으로 새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질서에 따라 겉 사람이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겉 사람이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상당히 강하게 말합니다. 그 근거가 창2:5의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전에 육체를 가진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속뜻에서 아직 겉 사람이 천적 질서 안에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참된 의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을 넘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 있는 인간이라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도록 형성되어 갈 때 비로소 그것도 ‘사람’이 됩니다.

 

다음으로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의 AC.76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AC.76에서도 천적 인간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고 했는데, AC.94는 이제 그 생명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생명의 숨’은 단순히 호흡이나 육체적 생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입니다. 앞서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면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고 했던 흐름도 여기와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도’가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되지만 그 생명이 속 사람에만 머물러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AC.91에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며,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마치 비와 안개처럼 겉 사람을 적신다고 했습니다. AC.92에서는 그것을 ‘내적인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94에서는 그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이르러 겉 사람 ‘또한’ 살아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내려와 전체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살아 있음’도 자연적 생존과 구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의미에서는 아직 참된 생명을 받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참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AC.94에서는 그것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생명이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흘러들 때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삶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을 표현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AC.94는 AC.89 이후의 흐름을 매우 선명하게 완성합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되고(AC.89),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 되어 속 사람의 질서 아래 놓이며(AC.90),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AC.91),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을 받아 선과 진리를 산출합니다(AC.92-93). 그리고 이제 ‘생명의 숨’, 곧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이르러 그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겉 사람까지 형성하시고 살리시는 거듭남의 완성을 묘사합니다. (AC.94)  

 

심화

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 심화 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 심화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에는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것은 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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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명의 숨은 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가?

 

AC.94 심화 2, 생명의 숨은 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가?

AC.94 심화2. 생명의 숨은 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가? 창2:7의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말씀은 흔히 인간의 육체에 생물학적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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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5, 창2:7, ‘신앙의 생명은 준비시키고, 사랑의 생명은 사람 되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이 다루어집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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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창2:5-6, ‘평화의 언약과 복된 비 - 악과 거짓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천적 인간’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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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93

이와 같이 평화의 평온을 부여받고, 비로 새롭게 되며, 악하고 거짓된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주님께서는 에스겔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thus gifted with the tranquility of peace—refreshed by the rain—and delivered from the slavery of what is evil and false,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in Ezekiel: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겔34:25-27, 31) I will make with them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beast to cease out of the land, and they shall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and sleep in the woods; and I will make them and the places round about my hill a blessing; and I will cause the rain to come down in his season; rains of blessing shall they be. And the tree of the field shall yield its fruit, and the earth shall yield its increase, and they shall be upon their ground in confidence, and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when I have broken the reins of their yoke, and delivered them out of the hand of those that make them to serve them; and ye my flock, the flock of my pasture, ye are a man, and I am your God (Ezek. 34:25–27, 31).

 

그리고 이것이 ‘셋째 날’(third day)에 이루어지며, ‘셋째 날’은 말씀에서 ‘일곱째’(seventh)와 같은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호세아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And that this is effected on the “third day,” which in the Word signifies the same as the “seventh,” is thus declared in Hosea: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2, 3) After two days will he vivify us;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and we shall know, and shall follow on to know Jehovah: his going forth is prepared as the dawn, and he shall come unto us as the rain, as the late rain watering the earth (Hos. 6:2–3).

 

그리고 이 상태가 ‘들의 성장’(growth of the field)에 비유된다는 것을 고대교회에 관하여 말씀하는 에스겔에서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And that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growth of the field” is declared by Ezekiel, when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겔16:7) I have caused thee to multiply as the growth of the field, and thou hast increased and hast grown up, and hast come to excellent ornaments (Ezek. 16:7).

 

또한 다음과 같은 것에도 비유됩니다. And it is also compared to: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사60:21) A shoot of the Lord’s planting, and a work of the hands of Jehovah God (Isa. 60:21).

 

해설

AC.93은 AC.90-92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여러 선지서의 말씀으로 확증합니다. 앞에서는 싸움이 그치면서 평화의 평온이 오고, 그 평온이 ‘비’와 ‘안개’로 나타나며,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생명이 흘러들어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에스겔, 호세아, 이사야의 말씀 안에서 평화와 비, 땅과 들의 성장, 생명과 주님의 손으로 하신 일이 서로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먼저 겔34의 ‘화평의 언약’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매우 풍성하게 보여 줍니다. 악한 짐승이 그치고, 사람이 평안히 거하며, 복된 비가 내리고,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냅니다. 또한 멍에가 꺾이고 종으로 삼던 자의 손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이것은 AC.93의 첫 문장이 말한 ‘악하고 거짓된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상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평화는 단순히 위험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열매를 맺는 상태입니다.

 

특히 ‘복된 소낙비’는 앞의 AC.90-92와 직접 연결됩니다. AC.91에서는 ‘비’와 ‘안개’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는 평화의 평온이라고 했고, AC.92에서는 그것이 단순한 싸움의 그침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에서 비가 내리자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고 땅이 소산을 내는 것은, 평화의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쳐 거기에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생명을 얻어 산출되는 앞의 설명을 성경 본문으로 보여 줍니다.

 

호6:2-3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상태가 ‘셋째 날’에 이루어지며,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셋째 날’이 ‘일곱째’와 같은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앞에서 일곱째 날은 싸움이 그치고 주님께서 쉬시는 천적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에서도 셋째 날에 사람이 살아나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살며, 주님의 나타나심은 새벽과 같고 비와 같이 임합니다. 따라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은 숫자 자체가 같다는 뜻이 아니라, 이 문맥에서 생명과 완성 및 새로운 상태에 들어감을 함께 가리키는 말씀의 표현으로 제시됩니다.

 

호세아의 ‘새벽’은 AC.86에서 보류했던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안식일의 저녁’이라 하고, 천적 인간은 곧 설명할 ‘아침’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호세아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살리시고 일으키시는 것과 함께 그분의 나타나심이 ‘새벽빛’에 비유되고, 이어서 땅을 적시는 비가 나옵니다. 따라서 ‘아침’은 밤이라는 시간대가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나타나고 평화의 비가 내려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93은 ‘아침’의 상응을 독립적으로 정의하는 번호는 아니므로 그 이상의 세부 의미를 여기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들의 성장’과 ‘여호와께서 심으신 가지’, ‘여호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이라는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앞의 관목과 초목이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서 산출되는 것이라는 설명과 연결되는 동시에, AC.88의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이라는 원리도 다시 확인합니다. 사람이 생명을 얻고 자라며 열매 맺는 모든 과정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93에 인용된 여러 성경 구절은 서로 흩어진 증거 구절들이 아닙니다. ‘평화의 언약’, ‘복된 비’, ‘땅의 소산’, ‘셋째 날’, ‘새벽’, ‘들의 성장’, ‘주님의 심으심과 손으로 하신 일’이 모두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줍니다. 싸움과 종살이가 그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이 겉 사람을 적시며, 그 생명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자라나는 상태가 바로 여기서 묘사되는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AC.93 해설)  

 

심화

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 심화 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 심화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에서 스베덴보리는 호6:2-3을 인용하면서 천적 인간의 이 상태가 ‘셋째 날’에 이루어지며, ‘셋째 날’은 말씀에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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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새벽’, ‘비’, ‘들의 성장’이 천적 인간의 상태를 함께 묘사하는가?

 

AC.93 심화 2, 왜 ‘새벽’, ‘비’, ‘들의 성장’이 천적 인간의 상태를 함께 묘사하는가?

AC.93 심화2. 왜 ‘새벽’, ‘비’, ‘들의 성장’이 천적 인간의 상태를 함께 묘사하는가? AC.93에 인용된 말씀들을 보면 서로 다른 선지서에서 ‘새벽’, ‘비’, ‘들의 성장’, ‘여호와께서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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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창2:5-6, '평화는 싸움의 그침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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