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 심화

2. 층위 무엇인가?

 

AC.1 해설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말씀의 겉 글자와 그 안의 내적인 것이 단순히 같은 평면에 놓인 두 가지 설명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스베덴보리에게 층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에서 서로 다른 단계와 질서의 구별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겉 사람과 속 사람, 지상과 천국을 단순히 같은 종류의 것이 조금 더 높아지거나 낮아진 것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후기 저작에서는 연속적 단계와 불연속적 단계의 구별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층위라는 한국어는 스베덴보리의 세계를 설명할 때 유용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1 원문 자체가 층위라는 전문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AC.1은 외적인 것들 안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1 해설에서 사용한 층위는 우선 이 차이를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해설어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단계 교리 전체와 동일시하거나, AC.1이 이미 자연적·영적·천적 단계의 완성된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구별은 오히려 층위라는 말을 더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것을 완전히 분리된 두 책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속뜻을 문자적 의미의 조금 더 깊은 해석 정도로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의 말씀 안에서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어떻게 관계하는지는 이후 AC를 읽으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AC.1에서 층위라는 표현은 하나의 유용한 안내어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다만 그 단어 자체를 AC.1 원문의 전문용어로 생각하지 않고, 글자에서 보이는 외적인 것과 안에 존재하는 내적인 것을 구별하여 이해하기 위한 해설상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을 그어 두면 앞으로 스베덴보리의 실제 단계 교리가 등장할 때 그 개념과도 혼동하지 않고 연결할 수 있습니다. (AC.1 심화 2)

 

 

 

AC.1 심화 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심화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해설과 심화 2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원어에서는 층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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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 심화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에서 ‘religious belief’는 말씀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열거하는 가운데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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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1. religious belief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에서 religious belief는 말씀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열거하는 가운데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religious belief,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faith가 아니라 belief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AC 번역에서 faith는 기본적으로 신앙, belief믿음으로 구별하기로 한 원칙을 따르면, religious belief종교적인 믿음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신앙이라고 번역하면 원문에서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 차이가 한국어에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AC.1의 이 한 표현만으로 religious belief의 신학적 범위를 지나치게 크게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 체계만을 가리키는지, 교회 밖에서 신성을 인정하는 종교적 믿음까지 모두 포함하는지, 또는 faithbelief 사이에 스베덴보리가 언제나 일정한 전문적 구별을 두는지까지는 더 많은 용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AC.1은 아직 그러한 구별을 설명하는 문맥이 아니라 말씀 안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넓게 열거하는 서문의 첫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원문의 차이를 보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faith가 나오지 않았는데 익숙한 신학 용어라는 이유로 신앙으로 바꾸지 않고, religious belief종교적인 믿음으로 옮겨 두는 것입니다. 이후 AC를 읽으며 faithbelief의 실제 용례가 충분히 쌓이면 두 단어의 관계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사용을 따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AC.1 심화 1)

 

 

 

AC.1 심화 2, ‘층위’란 무엇인가?

AC.1 심화2. ‘층위’란 무엇인가? AC.1 해설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말씀의 겉 글자와 그 안의 내적인 것이 단순히 같은 평면에 놓인 두 가지 설명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표현하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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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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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  같은 짐승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5 AC.46을 읽다 보면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고 하면서 어떤 곳에서는 선한 애정을, 다른 곳에서는 악한 애정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상응이라는 것은 하나의 자연물이 하나의 영적 의미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짐승 = 애정이라면 선한 애정인지 악한 애정인지도 하나로 정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은 상응을 처음 접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상응을 단순한 영적 암호표처럼 생각하면  = 진리’, ‘나무 = 지각’, ‘짐승 = 애정처럼 하나의 단어 옆에 하나의 뜻을 적어 놓고 모든 성경 구절에 똑같이 대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AC를 읽어 가면 상응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됩니다.

 

AC.46 자체가 좋은 예입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기본적인 연결은 유지됩니다. 짐승은 인간의 애정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애정 자체에 선한 애정과 악한 애정이 있으므로,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문맥과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자연계의 동물들도 모두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AC.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끼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을 구별했습니다. , 늑대, 개와 같은 동물을 악한 애정의 예로 들고, 암송아지, , 어린양 같은 동물을 선하고 온순한 것의 예로 들었습니다. 따라서 동물이라는 큰 범주가 애정과 상응한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동물이 동일한 종류의 애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은 표현도 문맥의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AC.46에서 들짐승이 하나님과의 언약과 평화 속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있는가 하면, 34:25에서는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들짐승이라는 말을 발견하자마자 무조건 선이나 악 가운데 하나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태를 다루는 말씀인지, 그 짐승이 어떤 관계 속에서 등장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응이 임의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본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문맥에 따른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 애정 사이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애정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 안에서 주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하는 애정과, 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악한 애정은 모두 애정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그 질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상응을 읽을 때  자연물의 정확한 정답은 무엇인가?라고만 묻기보다  자연물이 인간의 어떤 영역과 관계되며, 지금  문맥에서는  영역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좋습니다. 짐승의 경우에는 애정과 관계된다는 기본 관계를 먼저 붙들고, 그다음 그 애정이 선한지 악한지, 온순한지 해로운지, 질서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문맥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앞으로 AC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자연물이 긍정적인 문맥과 부정적인 문맥에 모두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스베덴보리가 마음대로 뜻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본적인 상응 관계 안에서도 대상의 질과 상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원리를 근거로 독자가 마음대로 문맥에 맞추어 의미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긍정적인 구절이니까 좋은 , 부정적인 구절이니까 나쁜 이라고 임의로 정하는 것도 상응의 해석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반복되는 용례와 상응의 질서를 통해 이러한 의미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AC를 읽을 때에는 개별 상응 하나를 떼어 자유롭게 응용하기보다, 그가 여러 구절을 서로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AC.46에 그토록 많은 성경 구절이 인용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의 구절만 보고 짐승은 애정을 뜻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과 예레미야와 호세아와 시편과 이사야와 계시록 등 말씀 전체에서 짐승과 생물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 상응은 한 구절에 억지로 끼워 넣는 해석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글 자체가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짐승이 어떻게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짐승 애정이라는 기본적인 상응 관계는 유지되지만, 인간의 애정 자체가 선하거나 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어 하나에 뜻 하나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응이 말씀 전체의 문맥에서 어떤 상태와 질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AC의 상응 해석이 조금 덜 낯설어집니다. 상응은 단순한 단어 사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자연계의 형상들을 통해 표현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AC.46, 창1:24-25, 말씀의 짐승들은 왜 인간의 애정을 뜻하는가?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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