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에서‘아들들’(sons)과‘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같은것들을의미합니다.그러나교회가어떠한가에따라‘아들들과딸들’(sonsanddaughters)도그러하며,다시말해선들과진리들도그러합니다.여기서말하는진리들과선들은분명하게퍼셉션된것들인데,이는그것들이태고교회,곧다른모든후대교회들의으뜸이며어버이인교회에관하여서술되고있기때문입니다.The same things are signified by “sons” and “daughters” in this chapter (verses 4, 7, 10, 13, 16, 19, 26, 30), but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sonsanddaughters,” that is, such are the goods and truths; the truths and goods here spoken of are such as were distinctly perceived, because they are predicate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
해설
AC.491은 AC.486-490에서 설명한 ‘아들들과딸들’의 의미를 창5전체에 적용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덧붙입니다.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교회에서 그 진리와 선의 질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어떠한가에따라아들들과딸들도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즉 어떤 교회가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교회가 받아들이고 산출하는 진리와 선의 어떠함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상응을 기계적인 대응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아들=진리’, ‘딸=선’이라는 기본적인 상응은 같더라도, 그 진리가 어떤 진리이며 그 선이 어떤 선인지는 그것들이 속한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아들’이라는 표현도 태고교회에 관하여 사용될 때와 후대의 다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될 때 그 진리의 내적 질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어의 기본 의미뿐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교회적 상태와 문맥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은 ‘분명하게퍼셉션된것들’입니다. 이 표현은 창5초반부터 계속 강조되어 온 태고교회의 독특한 성격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선과 진리는 주로 외부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검토하여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 교회의 ‘아들들과딸들’은 바로 그러한 퍼셉션에서 나온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83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 여러 교회가 주로 퍼셉션의 차이에 따라 구별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교회가 낳은 ‘아들들과딸들’ 역시 똑같을 수 없습니다. 각 교회의 퍼셉션이 달랐으므로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와 선의 어떠함도 달랐습니다. 창5에 같은 표현인 ‘아들들과딸들을낳았으며’가 계속 반복되지만, 속뜻에서는 매번 똑같은 진리와 선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 상태에 고유한 진리와 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다른모든후대교회들의으뜸이며어버이인교회’(theprincipalandparentofalltheotherandsucceedingchurches)라고 합니다. ‘으뜸’이라는 말은 태고교회가 최초이면서 가장 근원적인 교회였음을, ‘어버이’라는 말은 이후의 교회들이 그 교회로부터 이어져 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5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낳음’의 언어로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앞선 교회의 선과 진리가 후대 교회에 전해지고, 후대 교회는 그것을 자신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형태의 선과 진리를 산출하는 교회의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지금 우리가 창5를 읽으며 계속 확인하고 있는 중요한 원리도 있습니다. ‘계승’은 ‘동일함’이 아닙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았듯이, 이후의 교회들도 앞선 교회에서 이어지지만 각각 다른 퍼셉션과 다른 상태를 갖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동일한 교회가 이름만 바꾸어 계속되는 과정이라기보다, 앞선 교회로부터 받은 것을 다음 교회가 자신의 상태에 따라 이어받으면서 선과 진리의 어떠함도 함께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가어떠한가에따라아들들과딸들도그러하다’는 AC.491의 짧은 문장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교회의 참된 상태는 이름이나 외적 형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교회 안에서 어떤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어떤 선이 살아 움직이는가, 그리고 그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교회의 내적 어떠함은 결국 그 교회가 ‘낳는’ 진리와 선의 어떠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5:4의 ‘아들들과딸들을낳았으며’라는 짧은 표현 안에는 태고교회의 풍성한 영적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낳은 것은 단순한 후손이 아니라 분명하게 퍼셉션된 진리와 선이었으며, 그 진리와 선은 다시 후대 교회들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들이 태고교회로부터 점차 멀어지면서 퍼셉션의 상태가 달라지는 만큼 그들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선의 질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창5의 반복되는 ‘아들들과딸들’을 단순한 족보의 반복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과 계승의 역사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491해설)
AC.490은 앞의 AC.489에서 ‘아들들은진리,딸들은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한 것 가운데 특별히 ‘딸들’이 왜 선을 의미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글은 짧지만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드러냅니다. 말씀에서 ‘딸’은 단순히 여성인 자녀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과 신앙에서 비롯되는 선, 더 나아가 그러한 선을 지닌 교회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45편에서 왕의 딸과 왕후가 금과 아름다운 옷으로 단장한 모습은 단순히 왕궁의 화려함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AC.490은 이를 ‘사랑과신앙의선과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아름다움이 선과 함께 언급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인 아름다움은 겉모습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진리를 통하여 드러날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의복과 금과 아름다움으로 단장한 딸의 모습은 교회 안의 선이 진리와 함께 아름답게 나타나는 모습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그러므로교회들도선들로말미암아딸들이라한다’는 설명입니다. ‘시온의딸’(daughterofZion), ‘예루살렘의딸’(daughterofJerusalem)같은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교회가 ‘딸’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단순히 문학적인 의인화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를 참으로 교회 되게 하는 것이 그 안에 있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진리도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 진리가 사랑의 선 안에서 살아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가 됩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문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을 때, 진리는 더 이상 본래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딸’이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진리가 궁극적으로 사랑과 선을 섬겨야 한다는 말씀의 질서를 다시 보여 줍니다. ‘아들’과 ‘딸’, 곧 진리와 선은 서로 떨어져 존재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또한 ‘시온의딸’, ‘예루살렘의딸’, ‘두로의딸’, ‘시돈의딸’처럼 어떤 지역이나 도시의 이름에 ‘딸’이 붙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 지역의 여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읽을 수 없는 경우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나 교회에 속한 것을 그 안의 선이라는 측면에서 ‘딸’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딸’이라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문맥에 따라 ‘어떤선이여기서나타나고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창5:4의 ‘아들들과딸들을낳았으며’라는 표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은 단지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을 계속 산출했습니다. AC.489가 ‘아들들’을 진리로 설명했다면 AC.490은 ‘딸들’을 선으로 설명하면서, 특히 그 선이 사랑과 신앙의 선임을 보여 줍니다.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은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데만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선으로 살아나며 계속해서 영적인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AC.490해설)
‘아들들과딸들’(sonsanddaughters)이그들이퍼셉션한진리들과선들을의미하며,특히‘아들들’(sons)은진리들을,‘딸들’(daughters)은선들을의미한다는것은예언서의많은구절에서분명히알수있습니다.말씀에서는옛날에도그러했던것처럼교회의잉태와출생을‘아들들과딸들’이라하기때문입니다.이사야에서는,That by “sonsand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indeed by “sons” truths, and by “daughters” goods,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prophets; for in the Word, as also in olden time,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the church are called “sonsanddaughters,” as in Isaiah:
라고하였습니다.여기서‘이방인의아들들’(sonsofthestranger)은거짓된진리들,곧거짓들을의미하고,‘우리아들들’(oursons)은진리의교리들을,‘우리딸들’(ourdaughters)은선의교리들을의미합니다.where the “sonsofthestranger” signify spurious truths, or falsities; “oursons” signify doctrinals of truth; “ourdaughters,” doctrinals of good.
라고하였습니다.이구절에서‘아들들’은진리들을,‘딸들’은선들을의미하고,‘맹인들’(blind)은진리를보게될사람들을,‘귀먹은자들’(deaf)은진리에순종하게될사람들을의미합니다.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daughters,” goods; the “blind,” those who would see truths; and the “deaf,” those who would obey them.
이라고하였습니다.여기서‘아들들과딸들’은진리들과선들을의미합니다.‘자녀들’(children)과‘아들들’(sons)이진리들을의미한다는것은이사야에서분명히알수있습니다.where “sons” and “daughters” signify truths and goods. That “children” and “sons” signify truths is plain from Isaiah:
라고하였습니다.여기서‘야곱의거룩한이,이스라엘의하나님’(holyoneofJacob, theGodofIsrael)은주님을의미하고,‘자녀들’은거듭난사람들,곧선과진리를이해하는사람들을의미하는데,이는실제로그구절에서설명되어있습니다.where the “holyoneofJacob,theGodofIsrael,” signifies the Lord; “children” signify the regenerate, who have the understanding of good and truth, as is indeed explained.
라고하였습니다.여기서‘홀로된여인의아들들’(sonsofthedesolate)은초대교회,곧이방인들의교회에속한진리들을의미하고,‘남편있는여인의아들들’(sonsofthemarriedwife)은유대교회에속한진리들을의미합니다.where the “sonsofthedesolate” signify the truths of the primitive church, or that of the Gentiles; the “sonsofthemarriedwife,” the truths of the Jewish church.
라고하였습니다.이는사랑에서나오는신앙의진리들을의미합니다.signifying the truths of the faith of love.
해설
AC.489는 AC.486에서 짧게 제시했던 ‘아들들은진리,딸들은선’이라는 상응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입증합니다. 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단순히 ‘아들=진리,딸=선’이라는 대응표를 하나 더 익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첫 문단의 ‘교회의잉태와출생을아들들과딸들이라한다’는 설명이 오히려 이 글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교회가 ‘잉태하고낳는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진리와 선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의 창5:3에서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 것으로 표현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자연적 생명에서는 부모에게서 자녀가 태어나지만, 영적 생명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인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새로운 선과 진리가 생겨납니다. 따라서 창5:4의 ‘아들들과딸들을낳았으며’라는 표현은 단순히 아담에게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녀들이 더 있었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계속해서 진리와 선이 산출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AC.486과 연결하여 이 진리와 선이 그들이 ‘퍼셉션한’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 진리와 선은 단순히 외부에서 배우고 기억하여 보유하는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앞의 AC.483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교회들을 구별하는 주된 특징 자체가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했고, 그렇게 받아들여진 진리와 선이 그 교회의 ‘아들들과딸들’이 되었습니다.
사60:3-5가 좋은 예입니다. 문자에서는 흩어졌던 아들들과 딸들이 돌아오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교회 안으로 진리들과 선들이 모여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들들은먼곳에서오고딸들은안기어온다’는 것은 단순한 가족의 재회가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실 때 진리와 선이 다시 풍성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교회가 살아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시144편의 ‘이방인의아들들’은 거짓된 진리들, 곧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아들’이라는 말 자체가 언제나 참된 진리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보여 줍니다. 무엇으로부터 태어났느냐에 따라 참된 진리가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아들들’은 진리의 교리들을 의미하지만 ‘이방인의아들들’은 거짓을 의미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전체 문맥과 그 근원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사43:6, 8에서 ‘아들들’과 ‘딸들’이 돌아오는 것과 함께 ‘맹인’이 보고 ‘귀먹은자’가 듣게 되는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 회복될 때 그는 비로소 영적으로 보기 시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보는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과 연결되고, ‘듣는것’은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아들들과 딸들의 귀환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의 질서가 회복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54:1의 ‘홀로된여인의아들들’과 ‘남편있는여인의아들들’은 ‘아들’이 실제 혈육의 자녀를 넘어 교회에 속한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를 초대교회, 곧 이방인들의 교회에 속한 진리로, 후자를 유대교회에 속한 진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어떤 여인의 자녀가 많아진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그 교회 안에서 진리가 풍성해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창5의 족보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셋, 에노스, 게난 등의 이름이 각각 교회를 나타내며, 그 연수는 그 교회의 상태와 상태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AC.489는 그 교회들이 ‘아들들과딸들을낳았다’는 반복되는 표현까지 열어 줍니다. ‘이름’은 교회를, ‘날들과해들’은 그 교회의 상태와 변화를, ‘아들들과딸들’은 그 교회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을 나타냅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놓이면 창5의 족보는 단순한 인명과 수명의 목록이 아니라 교회가 이어지고 변화하며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계속 산출되는 영적 역사가 됩니다.
무엇보다 ‘교회의출생’이라는 표현은 진리와 선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영적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선을 생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으로 결합될 때 비로소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창5의 ‘아들들과딸들을낳았다’는 반복되는 말은 태고교회의 생명력이 단순히 오래 존속했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그 안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영적 결실을 맺었다는 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489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