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첫 주일입니다. 보통은 신년 주일이라 하여 설교도 그에 맞게 준비하지만, 저희는 당분간 아주 특별한 절기 외에는 오직 이 AC에만 전념하기로 한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5장입니다. 오늘부터 6주에 걸쳐 창세기 5장을 살피게 되며,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 1절로 3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1-3)

 

위 본문을 아래

창5 아담 계보의 속뜻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겉으로 보면 무슨 가계 족보의 서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 전체에서 인간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아담의 계보’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이는 한 개인의 혈통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최초의 교회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다음 상태로 넘어갔는지를 말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인간의 기원이 아니라, ‘사람됨의 기원’, 곧 교회의 기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혀 새로울 수 있는 이 관점을 아래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본문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떤 한 사람의 족보를 떠올리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그 기대를 깨뜨립니다.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을 뜻하는 말이며, 성경은 이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복수로 취급합니다. 이는 분명히 어떤 한 개인,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 것이지요.

 

성경에서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 상태를 뜻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 다시 말해 교회가 존재할 때, 그 상태를 성경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곧 ‘사람’이었고, 그 교회에 속한 이들은 개인이기 이전에 교회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의 사고, 사랑, 퍼셉션(perception), 삶 전체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아담의 계보’로 시작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계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상태의 계승’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 ‘그 이름으로 불리던 교회가 어떤 상태로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가’를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며, 나 자신을 한 개인으로 보기보다, 지금 나는 어떤 교회 상태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모양’은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뜻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외적으로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살도록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참인지를 배움과 학습을 통해서 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인식, 곧 지각(perception,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라 부릅니다. 아래는 관련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483에서 창세기 5장에 나열된 이름들, 곧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라멕’(Lamech), ‘노아’(Noah)라는 이름들을 다시 한번 분명히 정리합니다. 셋에서 노아에 이르는 모든 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들 가운데 첫째이자 중심이 되는 교회를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는 앞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가장 온전하게 반영했던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이후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은 이 ‘사람’의 상태에서 파생된 변형들이었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 특징은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이란, 지식이나 판단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내적 지각’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를 배워서 알지 않았고, 명령을 통해 분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곧바로 퍼셉션, 곧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 교회들 사이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나 제도의 차이가 아니라,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이 퍼셉션의 삶은 율법 이전의 삶이었고, 교리 이전의 삶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로 계산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직관적으로 알았던 삶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규범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사랑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인간이 그와 같은 질서 안에 놓였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모양은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 퍼셉션의 삶은 점차 약해졌고, 결국 다른 방식의 교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먼저 이 가장 완전한 상태를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상태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성경은 여전히 그 방향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셋째, ‘셋을 낳았다’는 것은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음을 뜻합니다

 

본문 3절에서 갑자기 시간이 흐르고,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셋’(Seth)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한 사람이 나이 들어 아들을 낳은 것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새로운 교회 상태의 출현’을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완전한 퍼셉션의 상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주님께서는 그 리메인스(remains)를 보존하시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셋’으로 대표, 표상됩니다. 이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동일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이 여전히 중요했으나, 더 이상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했고, 신앙이 점점 더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순수한 상태가 지나가도, 주님은 언제나 그다음 상태를 준비하십니다. 셋은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 ‘섭리의 응답’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교회는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 역시 셋의 교회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살지 못하지만, 사랑과 신앙의 결합 안에서 여전히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사랑이 신앙과 분리되지 않을 때, 교회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무너져도 끝나지 않고, 언제나 다음 상태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계보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삶은 다음 상태를 낳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이 말씀 앞에서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속 사람의 상태’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모두 이 속 사람의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무슨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무엇보다도 자기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매진해야 합니다. 대신 ‘나는 교회 몇 년 다녔어’, ‘나는 예수님 영접 기도한 지 벌써 30년이나 된 사람이야’, ‘나는 교회에서 목사로, 장로로, 권사, 집사로 평생 섬겼어’ 등등 이런 다분히 겉 사람에 치우친 공로에 의지하시다가는 나중에 큰일 납니다.

 

동일한 원리로 우리는 성경도 이제는 겉이 아닌 속으로, 아니 겉도 보고 속도 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삼천포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겉도 중요하지만, 속으로 읽는 훈련, 곧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읽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사랑의 주님,

 

오늘 신년을 맞아 창세기 5장 첫 본문으로 주님 음성에 귀 기울였습니다. 다소 생소하고 낯선 내용들이 혹시 있었을지라도 반발심 대신 주님을 사랑하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저마다 자기 내면을 들을 귀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자 힘써 노력하는 심령들에게는 주님, 아낌없이 놀라운 하늘의 계시를 부어주시옵소서. 그래서 놀라운 일, 곧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의 기적들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렇지 못한 심령들에게도 주님, 저들을 어루만지사 부드러운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그래서 다들 올 한 해 능히 주님의 계시를 받기에 합당한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다음 본문은 창5:4-20(AC.486-515)입니다.

 

 

 

설교

2026-01-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2, 25. 창5.1, 2026-01-04(D1)-주일예배(창5,1-3, AC.469-485, 성찬), ‘창5 아담 계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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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1/11, 창5:4-20),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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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28, 창4:25-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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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

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a different church is here meant by “Seth” from that which was described above (Gen. 4:25), may be seen at n. 43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진 교회들이 같은 이름으로 일컬어졌다는 것은 앞 장에서(창4:17-18) ‘에녹’(Enoch)과 ‘라멕’(Lamech)이라 한 교회들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에녹’과 ‘라멕’이라 하는 다른 교회들(창5:21, 30)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churches of different doctrine were called by the same name, is evident from those which in the foregoing chapter (Gen. 4:17–18) were called “Enoch” and “Lamech,” while here other churches are in like manner called “Enoch” and “Lamech” (Gen. 5:21, 30).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18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창4:17, 18)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1, 30)

 

해설

AC.485는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문자적 족보만 따라 읽으면 창4:25의 셋과 창5:3의 셋은 당연히 동일 인물이며, 창5는 창4 끝부분에서 등장한 셋의 족보를 다시 이어 가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명시합니다.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합니다.

 

AC.485가 직접 참조하라고 한 AC.435를 보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 교회’를 의미하고, 거기서 태어난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반면 창5:1-4에서 다시 등장하는 ‘사람과 그의 아내’와 ‘셋을 낳음’은 ‘태고교회의 첫 후대’를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는 명시합니다. 그는 같은 사람과 사건이 다시 언급되는 것처럼 보여도 속뜻에서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반복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AC.435)

 

따라서 창4와 창5를 하나의 단순한 직선적 계보로 이어 붙이면 속뜻에서 중요한 차이를 놓치게 됩니다. 창4는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발생과 그로부터 나온 여러 이단과 교리적 계열,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서 새 교회가 일어나는 흐름을 다룹니다. 그 마지막에 등장하는 셋은 바로 그 문맥 안에서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반면 창5는 태고교회 자체와 그 후대의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다루며, 여기의 셋은 태고교회에 이어지는 두 번째 교회입니다. AC.460-463의 장 전체 개요와 AC.481-484의 설명도 이 흐름을 일관되게 보여 줍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현상이 ‘셋’ 하나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창4에도 ‘에녹’과 ‘라멕’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과 ‘라멕’이 나옵니다. 그러나 AC.485는 이들도 각각 서로 다른 교회들이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속뜻에서 같은 교회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진 교회들이 같은 이름을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름 자체보다 그 이름이 놓인 문맥과 그 교회가 표상하는 내적 상태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창4부터 계속 살펴 온 한 가지 질문에도 중요한 빛을 던집니다. 곧 ‘가인 계열이 태고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갔다면, 태고교회 자체와 그 후대는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AC.485와 AC.435는 적어도 창4의 셋과 창5의 셋을 하나의 동일한 교회 계열로 합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창4의 마지막은 그 장에서 전개된 교회적 흐름의 결론이고, 창5는 태고교회와 그 첫 후대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별도의 교회적 계승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4와 창5의 모든 교회들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같은 시기에 나란히 존재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85가 직접 확정하는 것은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교회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며, AC.435가 확정하는 것은 창4:25의 새 교회와 창5:1-4의 태고교회 첫 후대가 서로 다른 문맥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두 장을 단순히 하나의 직선적인 교회 계보로 읽는 것은 어렵습니다. 두 계열의 시간적 관계와 서로의 관계는 앞으로 나오는 설명들을 더 모아 보면서 판단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창5의 셋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앞의 AC.484에서 보았듯이 이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사랑이 태고교회에서처럼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으나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창5의 셋은 창4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와 회복이라는 문맥 가운데 나타난 셋과 달리, 태고교회 자체로부터 이어지면서 그 천적 질서가 조금씩 변화해 가는 과정 가운데 나타난 교회입니다.

 

결국 AC.485는 창4와 창5를 읽는 우리의 지도를 수정해 주는 글입니다. 같은 이름이 반복된다고 같은 교회가 아니며, 같은 ‘사람과 그의 아내가 셋을 낳았다’는 서술이 반복된다고 같은 교회적 사건을 단순히 되풀이한 것도 아닙니다. 말씀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이름과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교회와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5를 읽을 때에는 창4의 이름들을 그대로 연결하기보다,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새로운 교회적 계승의 흐름 안에서 각각의 이름과 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85 해설)

 

 

 

창5:4, AC.486, '날들과 해들,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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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4, ‘사랑이 여전히 신앙과 결합되어 있었던 셋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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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

‘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자기의 형상을 따라 낳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고 한 데서 분명합니다. 여기서 ‘모양’(likeness)은 신앙과 관계되고, ‘형상’(image)은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에 있어서 태고교회와 같지는 않았다는 것은 바로 앞에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고 한 데서 분명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모양은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신앙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Seth” was very nearly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is evident from its being said that the man begat in his likeness, according to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the term “likeness” having relation to faith, and “image” to love; for that this church was not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regard to love and its derivative faith, is plain from its being said just before,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as was said above, so that the likeness of this man was to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that is, love was not so much the principal, but still faith was conjoined with love.

 

해설

AC.484는 앞의 AC.481에서 ‘셋’이라는 새 교회가 태고교회와 ‘아주 다르지는 않았다’고 한 말의 의미를 한층 정확하게 밝혀 줍니다. 셋 교회는 태고교회의 성격을 상당히 이어받았지만 태고교회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에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은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참인지를 퍼셉션했으며, 따라서 신앙은 사랑과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의 AC.479에서도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사람’이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본래적인 천적 질서입니다.

 

그런데 셋 교회에 이르러서는 미묘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사랑이 더 이상 이전처럼 압도적으로 ‘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AC.484의 마지막 말 그대로 ‘여전히 신앙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셋 교회는 태고교회의 완전한 천적 상태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라는 본질적인 질서는 아직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창4의 가인과 비교하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것은 사랑 또는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반면 창5의 셋 교회에서는 사랑이 이전만큼 주된 위치에 있지는 않았어도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와 차이가 있지만 그 방향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우위가 약해지면서도 신앙과 사랑의 결합 자체는 유지되는 방향입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창4의 계열과 창5의 계열을 함께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셋 교회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창1의 거듭남의 질서에서 여섯째 날은 사람이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 이른 상태이지만, 완전한 천적 상태를 의미하는 일곱째 날, 곧 안식일과는 구별됩니다. AC.480에서는 여섯째 날의 끝에서 일곱째 날이 시작되며,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484가 셋 교회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연결하는 것은, 셋 교회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그대로 되풀이한 교회가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다른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481의 ‘모양’과 ‘형상’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는 ‘모양’이 신앙에, ‘형상’이 사랑에 관계됩니다. 중요한 것은 두 요소가 모두 셋 교회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사라지고 신앙만 남은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이 여전히 함께 있었습니다. 다만 그 관계에서 사랑이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에서처럼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셋 교회를 단순히 ‘태고교회와 비슷한 또 하나의 교회’라고만 이해하면 이 글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은’ 그 차이를 정확히 짚고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결합은 유지되었으나 사랑의 주도성이 약해졌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후대 교회들이 어떻게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점차 다른 퍼셉션과 영적 상태로 옮겨 가는지를 보여 주는 첫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결국 AC.484에서 셋은 단절보다는 ‘계승 속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앞선 교회의 모든 상태가 그대로 반복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안에 있던 선과 진리를 다음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셋 교회에서는 태고교회의 가장 높은 천적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질서 하나, 곧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독립하지 않고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는 질서는 보존되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셋 교회는 창4의 가인으로 표상된 길과 뚜렷이 구별됩니다. (AC.484 해설)

 

 

 

창5:3, AC.485,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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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3, ‘퍼셉션(perception)의 차이로 구별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뒤이어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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