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듭남의 시작, 첫째 날, 리메인스(remains)(1:1-5, AC.6-23)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1-5) 1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2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3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4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Gen. 1:1-5)

 

 

오늘부터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시작합니다. 창세기 50장, 출애굽기 40장, 총 90장을 달에 한 장씩 하면 살짝 여유롭게 8년 걸립니다. 가끔 절기 설교도 해야 하니 말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 창, 출 속뜻 주석) 마지막 글 번호가 10,837이니 매주 평균 30여 개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마칠 때쯤이면 제 나이 7학년 초중반이 될 테니 아예 할 때 번역도 병행해야 하고 말입니다. 이런 걸 스베덴보리는 8년에 걸쳐 기록했군요. 신기하네요. 기록도 8년, 번역 및 설교도 8년... 컴퓨터도 없던 시절, 오직 종이와 펜으로만 모든 걸 해야만 했던 시절,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풀이를 딕테이션하느라 보냈을 스베덴보리의 8년의 일상이 어땠을지가 눈에 선합니다. 그의 나이 61세에 시작한 일입니다. 더더욱 그는 거의 매일 주님의 부르심으로 영계 체험을 병행하는 가운데 절대적으로 시간도 많이 부족했을 텐데... 하루하루 정말 치열한 삶을 살았음을 안 보고도 알겠습니다. 주님이 250년 전 스베덴보리와 함께하신 것처럼, 오늘 제게도 그리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바로 첫째 날 본문으로 들어가지만, 아무래도 당분간은 전반적인 배경 이야기를 중간중간 좀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도 마치 하얀 백지 위에 점과 선 그려나가듯 처음엔 매우 조금씩, 가급적 자세한 설명, 깊은 배경 이야기는 자제하면서 살살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저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시작합니다.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1장 첫 번째 시간으로, 1절로 5절, ‘첫째 날, 리메인스’의 속뜻 시간입니다. 먼저 그 개요 및 배경 설명입니다. (AC.6-15)

 

6

6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가운데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7

첫 번째 상태는, 유아기 상태와 거듭남이 시작되기 직전 상태 둘 다를 포함하는 선행 상태입니다. 이것을 ‘혼돈’(void),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하며, 그 첫 번째 움직임이, 곧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요,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8

두 번째 상태는, 주님에게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들 사이 구별이 생기는 때입니다. 주님에게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라 하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신앙 관련 지식들, 그러니까 유아기 때부터 배워 온, 그리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그러나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를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그런 신앙 지식들을 말합니다. 오늘날엔 이 상태는 쉽게 보기 어려운데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그러니까 인간한테나 어울리는 이런 일시적인 것들에 푹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인생의 큰 시험이나 불행, 혹은 큰 슬픔을 만나면 그제서야 그런 삶이 마치 죽어버리기라도 한 듯 멈추고, 정신이 번쩍 들기 때문입니다. 이때 겉 사람(the ex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이 속 사람(the in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즉 일시적인 것, 썩어 없어질 물질적인 것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때이지요. 이 속 사람 안에 앞서 말한 리메인스가 있는데, 이것은 주님이 이때, 그러니까 이 두 번째 상태 때 쓰시려고 그의 속 사람 안에 차곡차곡 보관하신 것들입니다.

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 말미암아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같은 선을 행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 모든 걸 자기가 하는 걸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이지요. 이런 선을 ‘풀’(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나중에는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스럽고 애정 어린 사람이 되고, 신앙으로 빛나는 사람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 실제로 경건한 담론도 하고, 선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가 수고한, 즉 자초한 시험과 엄격함의 결과이지, 신앙과 체어리티로 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의 애정으로, 그리고 빛을 받은 신앙으로 하게 되었고, 그런 까닭에,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는 그의 속 사람 안에서 활활 불타오르는데, 이를 두 ‘광명체’(two luminaries)라고 합니다.

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의 담론을 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진리와 선 안에 있음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이 살아 움직이는데, 이를 일컬어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birds of the heavens)라고 합니다.

 

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때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일컬어 ‘생물’(living soul)과 ‘가축’(beast)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신앙과 사랑 둘 다를 가지고 바로 행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spiritual man)이 되며, 이런 그를 일컬어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그의 영적 삶(생활, 생명)은 신앙에 속한 지식과 체어리티에 속한 행위로 말미암아 기쁜 삶이 되며, 또 유지됩니다. 이런 지식과 행위를 일컬어 그의 ‘먹을거리’(food)라고 합니다. 반면, 그의 자연적 삶은 몸과 몸의 감각에 속한 것들로 말미암아 기쁜 삶이 되고 유지되는데, 바로 이 지점이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그의 안에서 사랑이 주(, the dominion)가 되며, 그가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될 때까지 말이지요.

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리고 아주 적은(few) 수가 여섯 번째에 이르고, 일곱 번째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은 거의(scarcely) 없습니다.

 

14

이어지는 글 가운데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 의미합니다. 그분은 앞뒤 무슨 다른 이름을 덧붙이는 거 없이 오직 ‘주님’으로만 일컬음 받으십니다. 온 천국에 걸쳐 그분은 주님으로 인식되시며, 사랑과 공경을 받으십니다. 모든 천국과 지상에서 오직 그분만이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 명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그래서 그분의 부활 후, 제자들은 그분을 오직 ‘주님’으로만 불렀습니다.

 

15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 무슨 다른 아버지라는 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인데요, 이는 아래와 같이 그분 자신 친히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아래부터 오늘 본문입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옛날’(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하기도 하고, ‘영원’(days of eternity)이라 하기도 합니다. ‘태초’는 또한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첫 번째 시기, 기간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때 사람은 새롭게 태어나고,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new creation of man)라고도 하지요. 선지서들 가운데 거의 모든 곳에서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은 그 상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다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를 보면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그리고 그래서 같은 선지서에서 주님은 ‘구속자’(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maker) 및 ‘창조자’(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시편에서는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천’(, heaven)은 속 사람을, ‘지’(, earth)는 아직 거듭나기 전인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들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혼돈하고 공허한 땅’(earth void and empty), 또 거기에 선과 진리가 전혀 파종되지 않은 ‘지면’(ground)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혼돈’(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공허’(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결과, ‘흑암’(thick darkness) 상태, 즉 어리석은 상태가 되며,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영적 천적 생명(삶)(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4:22, 23)

 

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인데, 그는 전적으로 이런 것들의 사람이며 이런 것들 안에 완전히 잠긴 사람입니다. 이 상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는 상태로, 그는 무슨 ‘깊음’(deep)과도 같은, 뭔가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그런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 여러 곳에서는 표현하기를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이는 ‘말리신’(dried up) 상태, ‘황폐해진’(wasted)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 상태이지요.

 

이사야입니다.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데요,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에는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선지서에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거듭남의 선행 상태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 수 있기 전에, 그리고 선한 것으로 영향받기 전에, 먼저 이런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옛 사람이 먼저 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위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표현에 사용된 영어 ‘vastation’은 사어(死語)에 가까운 말인지 사전에도 잘 안 나옵니다. NCE(New Century Edition)역에서는 이를 ‘overall spiritual devastation’으로 번역했습니다.

 

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라든지, 혹은 마치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 ‘품으시다’(brood)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주님이 사람 안에 숨겨 보석처럼 소중하게 보관해 오신 것들을 가리키는데요, 말씀 전반에 걸쳐 이것을 ‘리메인스’(remains), 혹은 ‘남은 자’(a remnant)라 합니다. 이는 참과 선에 관한 지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리메인스라는 것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빛, 즉 낮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 지식을 여기서는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 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20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참이 뭔가 더 높은 것이라는 걸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거의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 그러니까 겉이기만 한 겉의 사람들은 선과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요, 그들은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에 속한 모든 것이 선이며, 그런 사랑들한테 호의적인 게 진리라는 이상한, 뒤집힌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은 악이며, 그런 진리는 거짓임을 그들은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자기의 선은 선이 아니며, 또한 그가 빛 가운데 더욱 들어갈수록, 이 빛은 주님이신데요, 주님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이런 사실들을 그는 처음으로 알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계시다(the Lord exists)는 사실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또 주님은 선 그 자체, 즉 생명이시며, 진리 그 자체, 즉 빛이시라는 사실과,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선도, 진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4, 5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21

빛을 ‘선’(good)이라고 합니다. 빛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님은 선 그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모든 것, 곧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전, 그동안 빛처럼 보여 그런 줄 알았던 모든 걸 말하는데요,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기 전에는 악은 선처럼 보이고, 거짓은 진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실상은 이들 악과 거짓은 어둠,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그래서 여전히 사람 안에 있는 걸로만 구성되는 어둠입니다. 주님에게 속하는 건 그게 뭐든지 다 ‘낮’(day)과 비교됩니다. 빛에 속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사람의 본성(own, proprium, 자아, 고유 속성)은 뭐든지 다 ‘밤’(night)과 비교됩니다. 어둠에 속하기 때문인데요, 이런 비교는 말씀에서 자주 나옵니다.

 

※ 다음은 ‘본성(own, proprium)에 대한 원전(原典, 라틴) 설명입니다.

 

라틴어 proprium은 원전에서 사용된 용어로, 여기와 다른 여러 곳에서 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온 말입니다. propius의 사전적 의미는 형용사로서는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입니다. 이 proprium은 중성인데 명사로 사용되면, ‘possession,’ ‘property’를 의미하며, 또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어 형용사 ‘own’은 웹스터에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를 의미하는 걸로 봐서,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own’이라는 말은 proprius와 매우 정확히 일치하며, 라틴 proprium에 맞는 어떤 명사를 만들면, 아주 가까운 번역 효과를 얻지 싶습니다.

 

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22

‘저녁’(evening)이 의미하는 바와 ‘아침’(morning)이 의미하는 바를 이제 알 수 있는데요,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every preceding state)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그늘 상태, 즉 거짓의 상태, 불신앙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이후 상태(every subsequent state)입니다. 빛이나 진리, 그리고 신앙 지식에 속하는 상태이지요. ‘저녁’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성(own)에 속한 모든 걸 의미하는 반면, ‘아침’은 아래 다윗을 통해 하신 말씀처럼, 무엇이든지 다 주님에게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저녁’은 불신앙의 때요, ‘아침’은 신앙의 때이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심은 ‘아침’, 주님의 떠나심, 그때는 불신앙의 때이므로, ‘저녁’이라 합니다. 다니엘입니다.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8:14, 26)

 

같은 식으로, 말씀에서 ‘아침’은 모든 주님의 오심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곤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새 창조에 관한 표현입니다.

 

23

말씀에서 ‘날’(day)을 가지고 때(time)를 가리키곤 하는 것만큼 더 흔한 것은 없는데요,

 

이사야입니다.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23:7, 15)

 

‘날’을 가지고 때를 가리키곤 하기 때문에 이는 또 그때 상태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곤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0,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21)

 

 

주석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오늘 특별히 이 ‘리메인스(remains)라는 것에 주목했으면 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주님의 자비가 바로 이 ‘리메인스’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원본에 영어 ‘remains’를 그냥 일반명사화해서 그대로 명명하는 게 좀 특이했는데요, 다음은 이와 관련, 전에 제가 정리한 글들이 있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원고가 길어져 아래 링크로 대신합니다.

 

 

AC.8 설명,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에 관하여

AC.8 설명,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에 관하여 (2024/6/1) 그러니까 유형(有形),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진짜라 믿고, 그런 삶을 추구하던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아,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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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글입니다.

 

 

‘십일조’의 속뜻

‘십일조’의 속뜻 ...오늘은 특별히 우리의 헌금생활 중 십일조에 대하여, 그 아르카나(arcana, 秘義, 속뜻)에 대하여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거의 첫 본문이라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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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오늘 본문 중 리메인스가 나오는 부분은 2절,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이렇게 푸는 설교는 아마 처음이시지들 싶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주로 천지창조의 관점으로만 보고 싶어 하지만, 주님은 말씀을 그런 무슨 역사 다큐로 기록하는 거는 관심 없으시고, 대신 사람의 거듭남의 여러 단계를 당시 고대인들의 언어 습관을 따라 재미있게 표상, 상징하기를 원하셔서 오직 상응으로만 기록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아는 천지창조의 육일을 사람의 거듭남의 여섯 단계로 그리신 것이지요. 우리의 관심과 주님의 관심이 참 다릅니다.

 

말씀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았으며, 그래서 거기엔 주님의 주된 관심, 즉 주님과 천국, 교회, 그리고 종교적 신앙에 관한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말씀은 그 일점일획조차도 모두 그 안에 이런 내적 의미들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아르카나(arcana, 라틴, secret, 秘義)라 합니다. 아르카나는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기 때문에 신성(Divine)하며, 생명이 있고, 그래서 아르카나가 들어있는 성경만 말씀입니다. 성경 66권 중, 구약은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29), 신약은 마, 막, 눅, 요, 계 (5) (AC.10325), 이렇게 34권만 말씀입니다.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 줄은 알지만, 실제로 자기 영을 보신 분은 없으신 것처럼,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말씀 또한 그렇게 영과 육으로, 곧 속뜻과 겉뜻으로 기록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영을 처음 보면 무척 낯설 것 같은데, 그런 것처럼 말씀 또한 그 속뜻이 이렇게 낯선 건 어쩌면 당연하지 싶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본인의 간절함, 그리고 사모함으로 이 간격이 빠르게 좁혀질 줄 믿습니다.

 

참고로, 우리가 말씀을 속뜻으로 읽고자 하는 이유는, 첫째는, 우리가 곧 가게 될 본향 언어로 읽고 싶어서입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둘째는, 오리지날 주님의 마음을 알고, 남은 삶을 그렇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말씀을 겉뜻으로 읽어온 지난날은 끝없이 원어가 어떠니, 누가 이걸 어떻게 풀었니 하는 연속이었습니다. 말씀은 세상 지식으로 푸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를 시작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설교

2025-07-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7-20(D1)-주일예배(2607, 창1,1-5, AC.16-23), ‘첫째 날, 리메인스’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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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원본, 창1,1-5, AC.6-23.pdf
0.08MB

 


아래 링크는 오늘 설교의 유튜브 오디오입니다.

 

 

주일예배(2025/7/27, 창1:6-8), ‘둘째 날, 궁창’의 속뜻

‘둘째 날, 궁창’의 속뜻 (창1:6-8)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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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AC.1-5)

1구약 말씀을 단순히 그 겉 글자로만(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즉 기록된 글자로만 읽어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말씀의 이면(裏面, this part of the Word)에는 천국의 깊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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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을 보호하시는 이유 (2025/7/14)

 

다음은 창세기 4장, 저 유명한 가인과 아벨 본문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4:1-17)

 

이 가인 본문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에서는 글 번호 AC.324-403에 걸쳐 다루고 있지만, 오늘은 한 가지, 곧 여호와는 왜 친 아우를 살해한 자를 보호하시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하시는,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의 속뜻에만 주목하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에도 사실 여러 아르카나가 있어, 그리고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하나를 분리해 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한 가지,

 

심지어 그 신앙이, 분리된 신앙, 곧 사랑 따로 신앙 따로 신앙일지라도 신앙에 대한 폭행은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는 이것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 창세기 첫 열한 장, 곧 1장부터 11장까지는,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리신 바에 의하면 실제 역사가 아닙니다. 여기는 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스토리텔링식 역사 서술 방식으로, 지구의 지질학적 나이가 45, 6억 년 정도임을 감안하면, 그리고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 특히 날 수, 연 수의 의미가 상태들과 그 변화임을 감안하면, 그래서 비록 총 11장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수천, 수만, 아니 수십, 수백만 년의 역사일지도 모릅니다. 말씀은,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인류의 출발, 그 첫 등장에 대한 역사적 사실 확인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는 아브라함의 등장부터입니다. 참고로, 그래서 창11까지 말씀에 나오는 인명들은 어느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 이름으로 부른 교회, 교리, 신앙을 말합니다. 즉 예를 들면, 므두셀라가 969세를 살았다는 건, 므두셀라라는 교회, 혹은 교리나 신앙이 숫자 969로 표현하는 어떤 장구한 세월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AC.66,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AC.66)

66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다음과 같았는데요, 그들은 어떤 지상에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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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람 아담은 일곱째 날, 곧 안식일 상태,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말하며, 이는 곧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하나 된 상태입니다. 여기 사랑과 신앙은 주님 사랑, 주님 신앙을 말합니다. 이때는 주님 사랑 안에서만 주님 신앙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던 태고교회가 시간이 흐르자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났는데 이들이 곧 가인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올인하는 대신 주님을 연구하는 일에 올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신비를 탐구, 그걸 교리화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었지요. 당연히 이들의 삶은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를 소홀히 하는 삶이었고, 그러므로 이들은 오리지날 태고교회 입장에서 보면 이단(heresy)이었습니다.

 

반면, 이런 중에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여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아벨입니다. 이들은 주님께 받아들여졌지만, 가인이라는 교회는, 당연한 얘기지만, 주님이 받으실 수 없었습니다. 참고로, 교회가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이 둘 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라는 교회에서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가인이라는 교회는 그럼에도 돌이키는 대신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자신들한테서 완전히 끊어내었는데, 즉 박탈하고 말았는데, 이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 끔찍한 삶이 펼쳐지는데요, 그러자 가인은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소연합니다. 사람은, 교회는 오직 체어리티로만 주님과 결합하는데, 이 유일한 연결고리를 끊어냈으니, 즉 스스로 박탈하고 말았으니, 이제는 철저히 악과 거짓만 남은 상태로 큰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러자 주님은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그걸 이제 알았냐? 너는 선을 넘었으니 어쩔 수 없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니 나는 모르겠다 보통 이럴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예상을 깨고, 주님은 이런 가인일지라도 그를 지키시며, 보호하십니다. 가인은 형제 살해범, 곧 이단인데도 말입니다.

 

이 아르카나의 결론만 말씀드리면, 주님의 섭리는 이후 인류의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가 아벨의 길이 아닌, 결국 가인의 길을 걷게 될 걸 아시고, 비록 그가 이단이지만 그의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셔서, 그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큰 그림을 그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 그의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표현 안에는 사실은 어마어마한 배경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여기서 다루기에는 무리여서 그냥 이렇게만 넘어가겠습니다.

 

※ 창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에 나오는 ‘아담(the man)과 그의 ‘아내(wife)는 앞 19절에 나오는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로 상징된 새 교회를, 이름이 셋(Seth)인 그녀의 ‘아들(son)은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가인의 계보는 역사 속에 사라지고, 아담과 하와로부터 새로운 아들이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가인에 대하여 이런 섭리를 갖고 계시는데, 이런 주님의 계획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인은 이단이야, 가인은 아벨을 죽였어, 그러므로 가인을 죽여야 해 하며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은, 주님 보실 때 신앙에 대한 폭행이며, 곧 신성모독을 범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단지 가인에 대한 소멸만 막으셨을 뿐, 그에 대한 저주는 계속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 저 같으면 시작부터 헝클어져서 에이, 파토났네... 그냥 다 리셋하고, 첨부터 다시 하지 할 것 같은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정말 번거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신 신(The Divine)이십니다. 그런 분이 또 사랑의 신이신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이단을 대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첫째, 이단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교리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독교, 개신교 교리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신앙 따로 체어리티 따로의 삶, 곧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삶을 산다면, 그는 주님이 보실 땐, 그가 오히려 가인의 후예, 곧 정통 이단입니다. 반면, 개신교에서 말하는 이단이라 하더라도 그가 그의 신앙 안에서 체어리티의 삶을 산다면, 그는 주님 보실 때 아벨의 후손인 것이고 말입니다. 이런 분들은 혹시 생전에 회심하지 못해도 사후, 돕는 천사들에 의해 재교육받고, 주님을 영접하여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은 생전에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이지, 속 사람의 상태와 상관없이 무슨 라이센스만 취득하면 무조건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HH.318,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HH.318-328)

36천국에 있는 이교도, 즉 교회 밖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 318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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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단에 속했다고 강제로 무릎 꿇리고, 개종 기도를 시키고, 강요와 윽박, 협박과 위협을 가하는 것은 신앙에 대한 폭행이며, 주님에 대한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이런 일을 주도한 개신교인은 아멘, 할렐루야! 오,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길 잃은 어린양을 구원시켰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착하고 신실할수록, 그리고 굳은 신념의 소유자일수록 더욱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합니다. 무지하기 때문인데요, 자기가 하는 일이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옳고 그름, 선과 진리를 오직 학습으로만 알고, 퍼셉션(perception, 천사들과 주님 간 커뮤니케이션 방법), 곧 하늘의 음성으로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무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하더라도 혹시 주님은? 하며 늘 주님의 눈치 볼 줄은 알아야 합니다. 저런 개신교인은, 아니 어느 종교라 하더라도 자기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저렇게 하는 사람은 평소 그의 삶의 태도가 주님 앞에 어떤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9)

 

천사장 미가엘조차도 심지어 마귀에 관한 일조차 주님 앞에 조심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도 그래야겠습니다. 몰라서 그럴 수는 있으나 겸손해야 합니다. 무의식 중에라도 늘 주님을 경외하며, 모든 언변과 행실을 조심해야 합니다. 경외란 주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결론입니다.

 

가인같은 이단도 주님은 존중하셨거늘, 만일 내가 함부로 대하는 이 사람의 신앙이 오히려 아벨의 신앙이라면, 나중에 그 후과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유대인들도 신념의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 되었고, 사울 시절 바울도 그렇게 교회를 핍박, 박해하였으나 결국 거꾸러지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을 살펴보고 그 열매가 아벨의 열매이면, 비록 내가 믿는 교리와 다르더라도 시비, 훼방, 간섭 등을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오히려 주님 앞에 자기 할 도리만 다 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기 할 도리’는 심지어 전도, 선교, 목회보다도 더 우선합니다. 주님의 나라는 속 사람의 나라인데, 이 속 사람은 자기 할 도리’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굳은 신념으로 함부로 사는 사람보다는 사랑으로 늘 주님 뒤에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랑보다 더 강력한 신념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언행에 있어 항상 나의 이 말과 글, 행위와 행실로 주님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가, 증거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울 시절 바울처럼 바보같이 나의 이 열심으로 오히려 주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 주님을 드러낸다’는 것은, 거기에 주님이 느껴지는가, 사람들이 내 말, 내 글, 곧 일상 중 나를 접하고 주님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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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렉’의 속뜻 (4)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 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14And Jehovah said unto Moses, write this for a memorial in the book, and put it in the ears of Joshua, that blotting I will blot out the memory of Amalek from under the heavens. 15And Moses built an altar, and called the name of it Jehovahnissi. 16And he said, Because there is a hand against the throne of Jah, Jehovah shall have war against Amalek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우리 주변의 악과 거짓에 대하여 보통은 그는 악하다, 그는 거짓되다 정도로만 표현하는 데 비해 이 아말렉은 그 정도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말렉은 한마디로 거짓입니다. 보통은 진리가 선을 담는 그릇이듯 거짓도 악을 담는 그릇일 뿐인데, 이 거짓은 얼마나 지독한지 거짓 자체가 악일 정도인 거짓으로, 그 대표적인 속성은 은밀하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악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건 대부분 겉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눈치조차 챌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가장 이상한, 분명 100% 부정인데도 언론도, 정치권도 아무도 말을 안 하는, 그래서 정말 이상한, 그래서 은밀하게 전 세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망치고 있는 이 ‘부정선거’라는 이슈도 이 아말렉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아야만 비로소 보일 정도로 이 거짓은 은밀한 거짓입니다. 이 덫에 걸리면 우리의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어설픈 신앙으로 적당히 겉과 속 사이를 왔다리갔다리 하는 신앙으로는 말입니다. 평범한 악과 거짓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나 이 아말렉이라는 덫은 오직 100% 주님의 신성하신 진리(The Lord’s Divine Truth)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천사들의 아주 흥미로운 한 가지 속성입니다. (HH.278)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also they do not themselves know what is good for them, the Lord alone knowing this, who looks in all things that he provides to what is eternal.

 

그들이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받는 모든 것의 근원을 주께 돌리기 때문에, 자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As they love nothing so much as to be led of the Lord, attributing all things they receive to him, they are kept apart from what is their own [proprium];

 

저는 아말렉을 생각할 때 늘 이런 천사들의 모습, 속성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제 역량이 아직 많이 미흡할지라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천사들처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아말렉이라는 거짓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도록 철저히 제거되어야 하는데, 이 사실을 싸우는 진리(truth fighting against this falsity, 여호수아)가 듣고 종신(終身)토록 기억할 수 있도록 그를 도우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14)

 

내면의 악에 속한 거짓의 사람들과 하는 이 계속되는 전쟁 중에서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한 예배 안에서 주님의 지시를 기억한다면 말입니다. (15)

 

그들은 주님의 영적 나라(the Lord’s spiritual kingdom)에 폭력을 행사하기 원하기 때문에, 주님의 신성하신 능력(the Lord’s Divine power)으로 그들은 멍에 아래 끌려가 지옥에 던져져 다시는 그곳에서 기어 나올 수 없습니다. (16)

 

오늘 본문이 왜 이런 속뜻을 갖는지는 함께 첨부하는 주석본 원고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 역시 이 전체 주석을 다 살피기에는 너무 무리여서 몇 가지만 살피겠습니다.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write this for a memorial in the book

 

※ 여기서는 ‘’에 대한 특별한 의미만 보고 가겠습니다.

 

말씀에 나오는 생명책의 속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이 심판받게 될 책들의 속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저 하늘에 그런 책들이 있으며, 거기에는 모든 사람의 행위와 그 기억이 보존되어 있다고밖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20:12)

 

라는 말씀을 보면, 사실 이 구절에 나오는 ‘책들(books)은 우리가 아는 일반 종이책들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생전에 행한 모든 일에 대한 기억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은 생전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의 기억, 곧 자기의 생명책을 내세에 가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AC.2474).

 

※ 다음은 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사후 사람의 행위가 드러날 때, 조사하는 일을 맡은 천사는 사람의 얼굴을 살핀다. 이어 양손의 손가락에서 시작해 전신을 살펴본다. 내가 이것을 이상하게 여겼더니,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사고와 의지에 속한 모든 것은 뇌에 새겨져 있다. 뇌에 그 출발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전신에도 새겨지는데, 이는 사고와 의지의 모든 것은 출발점에서 시작해 몸의 모든 부분으로 퍼져나가고, 가장 말초적인 것에 종착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의지와 그에 따른 생각에서 나와 기억에 새겨진 모든 것은 단지 뇌에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에 새겨지는 것이며, 몸의 각 부분의 질서에 따라 거기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사람 전체가 그 자신의 의지와 사고와 똑같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악인은 그의 악이고, 선인은 그의 선인 것이다.265 말씀에 나오는 사람의 생명책이 의미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즉 사람이 행하고 생각한 모든 것은 그 사람 전체에 새겨져 있어 그 기억에서 불러일으키면 책 읽듯이 읽을 수 있고, 천국의 빛으로 그 영을 비추면 그 모든 것이 영상으로 나타난다. 이에 죽은 뒤의 기억에 관한 특기할 만한 점을 덧붙인다. 다만 전반적인 것뿐 아니라 아주 미세한 구체적인 것까지도 기억에 들어간 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곳에서 이 세상 것과 같은 저술을 담은 책들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저자의 기억에서 나온 것이고,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이 쓴 책에서 단 한 글자도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람의 기억에서는 아주 극미한 것까지, 심지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상실한 기억까지도 되살릴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외적 기억과 내적 기억이 있는데, 외적 기억은 사람의 자연체에 속해 있고, 내적 기억은 그 사람의 영체에 속해 있다. 사람이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하고, 심지어 듣고 본 것도 아주 세밀한 것까지 그의 내적, 즉 영적 기억에 새겨지고,266 거기 새겨진 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 모든 것은 영과 영체의 사지에 새겨지고, 그렇게 해서 그 의지에서 나온 생각과 행동에 따라 영의 모습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순되게 들리고, 따라서 믿기 어려운 말임은 나도 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속으로 생각하고, 비밀리에 행한 것이 행여 죽은 뒤에 감춰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낱낱이 백일하에 공개된다는 것을 믿기 바란다.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12:2, 3) (HH.463) //

 

주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도 어떤 사람을 그의 행위를 따라 심판할 수 없습니다. 모든 행위는 깊이 감추어져 있는 최종 원인, 숨은 동기, 이유에서 나오기 때문인데, 사람은 이들 동기, 이유로 심판받으며, 주님 말고는 아무도 그것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심판이라는 것은 오직 그분께만 속한 일입니다.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that blotting I will blot out the memory of Amalek from under the heavens

 

※ 여기는 내용이 중요하여 전부를 보겠습니다.

 

아말렉을 없이하여 기억도 못 하게 하다(blotting out the memory of Amalek)의 의미가 아말렉, 곧 내면의 악에서 비롯되는 거짓을 제거하는 것인 이유는, 이것, 곧 이 아말렉은 제거는 할 수 있지만, 지울 수는, 없앨 수는 없기(can be removed, but cannot be blotted out) 때문입니다. 이 거짓은 영원히 사는 지옥 정령들(infernal genii), 곧 악마들한테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AC.8593). 주님은 이들을 제거, 영적 교회 사람들한테로 흘러들지(flowing into) 못 하도록 막고 계시는데, 그 이유는, 이들은 이해(the understanding)에 속한 사람들의 사고(thoughts), 생각 속으로는 흘러들지 않기 때문에, 즉 지옥 악령들(infernal spirits)이 하듯 신앙에 관한 것 속으로는 흘러들지 않고, 대신 의지(the will)에 속한 사람들의 애정(affections) 속으로는, 그리고 그렇게 해서 체어리티(charity)에 관한 것들 속으로는 흘러들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너무나 은밀하게 진행되어 어디에도 이런 일이 그들로 말미암았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인데요, 그런 까닭에, 만일 이들이 영적 교회 사람 안으로 흘러들면, 이 사람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 사람의 진리와 선에 관한 애정들을 왜곡시켜 그를 완전히 타락시킬 것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들 지옥 정령급 악마들은 주님에 의해 주님의 영적 나라 사람들을 건드릴 수 없도록, 즉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도록 제거, 곧 조치 되는 것입니다.

 

더욱 알아야 하는 것은, 영적 교회 사람한테는 새로운 의지가 그 지적 파트(the intellectual part)에 심겼다는 사실인데요 (AC.895, 927, 1023, 1043, 1044, 2256, 4328, 4493, 5113), 만일 이들 정령들, 그러니까 이들 삼층 지옥 악마들에게 이곳으로 흘러들어도 된다는 허락만 나면, 이들은 저 영적 교회를 철저히 파괴할 겁니다. 이들은 또 옛 의지의 유전 악 안으로도 들어가 그걸 다시 열어보려 하지만, 그러나 그 악은 여전히 닫혀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AC.986, 1667, 2308 참조). 이들 지옥 정령들의 유입을 막기 위한 제거가 이런 식으로 시행됩니다. 이들의 거짓은 내면의 악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자체가 악이며, 이런 악은 실제로 지적 파트 안으로는 유입될 수 없고, 대신 의지 파트 안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적 교회 사람의 새로운 의지는 지적 파트 안에 심겼기 때문에, 이들 정령들은 여기로는 흘러들 수가 없어 결과적으로는 모든 유입에서 제거가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모든 지적인 것에 대해 이들 정령들이 더욱 황폐해지도록 하십니다.

 

※ 지옥이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봐야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즉 미리 아시는 주님은 그들과 직접 싸우시는 대신 전체 설계를 고치셔서 저들로 하여금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게 하십니다.

 

※ 다음은 위 참조 글들 중 일부 인용입니다.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the waters were dried up from off the earth (8:13)

 

이 표현의 속뜻은 ‘그러자 거짓들이 나타나지 않았다’(falsities did not then appear)인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드린 말씀에 있습니다. 특별히 의미하는 바는, 거짓들이 이 교회에 속한 사람의 의지에 관한 것들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땅’(the earth)은 여기서는 인간의 의지를 의미하는데, 이는 탐욕 덩어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라고 한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의 ‘지면’(ground)은 그의 지적 파트(intellectual part)에 있습니다. 여기엔 진리들이 파종되어 있지요. 진리들은 절대로 의지 파트(will part)에 파종되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있어 이 의지 파트는 지적 파트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같은 구절 끝에 가서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로 바뀝니다. 태고 교회에 속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면은 그의 의지 안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주님은 선들을 파종하셨고, 그러자 그 선들로부터 인간은 진리를 알고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방법이 현재까지도 이어졌다면, 인간은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요, 인간의 의지가 철저하게 부패, 오염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파종을 인간의 의지 파트에 하는 경우와, 아니면 지금처럼, 그의 지적 파트에 하는 경우가 어떤 건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하면 분명해집니다. 태고 교회에 속한 사람에게는 그의 유아기 때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이 시작, 계시들이 주어졌는데, 놀라운 것은, 이들 계시가 그의 의지 파트에 파종되었기에 그는 새로운 가르침 없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걸 지각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현대인들이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알아야 할, 그러나 여전히 그 모든 애를 써서도 그 천분의 일도 알 수 없는 모든 특별하고 특이한 것들을 그는 하나의 일반 원리로부터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반면,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의 경우는, 그는 현재 배우고 있는 것밖에는 모르며, 이런 식으로 자기가 아는 걸 참이라 붙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심지어 거짓된 걸 배워도 그것이 자기 마음에 참이라 여겨지면 그는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무슨 다른 퍼셉션이 없어, 그냥 그것이 그렇다고 설득되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양심으로부터 어떤 딕테이트를 받지만, 이 딕테이트라는 게, 어떤 게 참인 이유는, 그렇게 들었고, 그렇게 학습했기 때문이라는, 참 어처구니없는 거라는 거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그들의 양심을 형성하는 것이며, 거짓된 것에 관한 양심을 가진 자들의 경우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 이것이 오늘날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신앙을 학습한 사람들의 영적 실상이며, 정말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사후 이런 정령들, 그러니까 삼층 지옥 악마들이 되는데요, 이들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하고, 이런 악한 생각들이 떠오를 때마다 크게 기뻐하며, 악을 행하면서도 은밀하게, 그리고 타인을 이용해서 하는, 그래서 아무도 이런 짓을 자기들이 하는 줄을 모르게 최대한 조심하면서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겸손하고 예의 바르며, 친구 같고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이는데요, 이들의 평소 말과 일상생활을 보면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은 위선자요, 그 속은 사기성이 농후한 호랑이들입니다. (AC.895, 8:13)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and called the name of it Jehovah-nissi

 

※ 여기서는 특별히 민수기 유명한 놋뱀 본문만 보겠습니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8, 9)

 

놋뱀이 주님을 표상하는 것은 요3:14, 15를 보세요. 이 역시도 보호를 의미함이 분명한데요, 장대에 달린 뱀을 바라봄으로써 나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신앙으로 거짓의 악으로부터 치유되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4, 15)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and he said, Because there is a hand against the throne of Jah

 

※ 한글 성경에는 단순히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이라고만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은 ‘여호와의 보좌를 대적하고자 하기에’라는 본문이 생략된 것입니다. 이 내용 역시 중요하여 전체를 보겠습니다.

 

이 표현의 속뜻은 ‘그들이 주님의 영적 나라에 폭력을 행사하기 원하기 때문에(because they wish to do violence to the Lord’s spiritual kingdom)인데, 그 이유는, ‘누구에게 손대는 것(a hand against anyone)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Jah)의 보좌(the throne of Jah)는 주님의 영적 나라를 각각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Jah)의 보좌’가 주님의 영적 나라를 가리킨다는 것은, ‘보좌’라는 말은 주님의 왕권(royalty)을 서술할 때 쓰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적 나라는 그분의 왕권과 상응합니다. 주님에 관한 서술 관련,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성직(priesthood), 다른 하나는 왕권(royalty)입니다. 천적 나라는 그분의 성직, 영적 나라는 그분의 왕권에 상응합니다. 주님을 신성하신 선(Divine good) 관련해서는 ‘제사장(Priest)으로, 신성하신 진리(Divine truth) 관련해서는 ‘(King)으로 부릅니다. 이 후자, 곧 신성하신 진리는 ‘그리스도(Christ)라는 이름에, 전자인 신성하신 선은 ‘예수(Jesus)라는 이름에 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AC.1728, 2015, 3004, 3009, 6148 참조). ‘보좌’는 주님의 왕권, 그러니까 주님의 영적 나라에 관한 서술에 사용됩니다. ‘(Jah)도 같습니다 (‘보좌’의 의미는 AC.5213, ‘’는 AC.8267 참조).

 

주제 자체, 즉 아말렉으로 표상되는 자들, 이들은 내면의 악으로 말미암는 거짓 안에 있는 지옥 정령들인데, 이들이 주님의 영적 나라에 대해 폭력 행사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위에서(AC.8593, 8622) 이미 보았습니다. 이런 악의 거짓(the falsity of this evil) 안에 있는 자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그분 안에 있는 인성(the human in Himself)을 신성(Divine)으로 만드시기 전까지는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멀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지옥에 갇혔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인플럭스(influx)를 통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은 신앙의 진리에 대해 모호함 가운데 있으며, 그것을 진리로 인정하는 것도 교회가 그렇게 말해와서지, 그가 그걸 진리로 지각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진리는 선이 되며, 결국은 양심 문제가 됩니다. 만약 악성 정령들(malignant genii)이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모호함 가운데로 흘러들게 되면, 이들은 수천 가지 방식으로 저들의 양심을 파괴할 것입니다. 이들은 거기 있는 신앙의 진리를 상대로 행동하지 않고, 저들의 애정 그 자체를 상대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어디서든지 선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감지되는 순간, 잽싸게 그것을 왜곡, 절대 감지될 수 없도록 은폐합니다. 이들은 바로 그 목적을 공격합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악의(malignity)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지만, 뼛속 깊이 관통하는, 안 보이는 죽음의 독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 정령들에 관해서는 각 장 끝에서 다루는 주님의 자비에 관한 경험을 말씀드릴 때 더 다루겠습니다.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Jehovah shall have war against Amalek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이 표현의 속뜻은 ‘그들은 멍에 아래 끌려가 지옥에 던져지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주님의 신성하신 파워 때문에 결코 기어 나올 수 없음(they were brought under the yoke and were cast into hell, from which by reason of the Lord’s Divine power they can never rise up)인데, 그 이유는, ‘여호와가 싸우리라(Jehovah having war)의 의미는 지옥으로 던진다는 것이고, ‘대대로(from generation to generation)의 의미는 영원히 그 상태에 있게 되며,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서 결코 다시 기어 나올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신성하신 파워 때문이라는 것은 바로 위 AC.8625 참조) ‘여호와가 싸우리라(Jehovah having war)의 의미가 지옥으로 던진다는 의미인 것은, 이것이 영원한 승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지옥 정령들은 절대 결코 여호와, 곧 주님을 상대로 전쟁하거나 싸울 수 없습니다. 가끔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을 예속시키느라 그들은 싸우고, 심지어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여호와(the Divine)를 상대로 대항할 힘이 그들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신성하신 파워(Divine power), 주님의 능력이 실린 단 한 번의 끄덕임으로도 저들 악마의 무리 전체가, 심지어 그 수가 수천수만(myriads of myriads)이라 할지라도 즉시 제압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들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저들의 행위가 무슨 쓰임새가 있는 한은, 저들의 악이 주님에 의해 선으로 바뀔 수 있는 한은 말이지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주님의 자비로 다른 데에서 다루겠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사실은,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Jehovah having war with Amalek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가 의미하는 바는 저들을 사로잡아 지옥에 던짐이며, 주님의 신성하신 파워로 그들은 그곳에서 결코 기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지난 4주에 걸친 아말렉 이야기를 마칩니다.

 

이 ‘아말렉’이라는 거짓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1. 겉과 속, 내적(internal), 외적(external), 내면(interior), 외면(exterior)이라는 게 뭔지, 이게 왜 중요한 건지

 

2. 다른 건 진리를 공격하는데 유독 이 아말렉이라는 거짓은 왜 선을 공격한다는 건지, 다른 말로는 왜 이해(understanding)가 아닌 의지(will)를 공격한다는 건지

 

3. 주님이 홍수 이후 인류에게는 왜 그의 의지 파트(will part)가 아닌, 지적 파트(intellectual part)에 새 의지를 임플란트하셨다는 건지

 

4. 홍수 전 인류와 홍수 후 인류의 차이가 뭔지, 도대체 홍수를 초래한 태고교회 후손들은 사람 안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무슨 짓을 했길래 주님이 사람 안의 설계를 변경하셔야만 했는지

 

등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느끼시겠지만, 이들 내용은 결코 간단치가 않습니다. 그렇게 몇 줄 문장으로 답할 수 있는 내용이면 굳이 창세기, 출애굽기 풀이를 총 10,837개의 글, 전체 8권의 볼륨, 8(1749-1756)에 걸쳐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신이십니다. 주님의 사랑과 지혜는 조금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를 통해 남기신 수십 권의 저작도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출 속뜻 주석, 라틴)에서 출발합니다. 이 저작을 어떤 주제, 어떤 안경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때마다 새로운 책이 정돈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이 책, 이 저작으로 돌아가야 하며, 그래서 이제 다음 주부터 이 대하(大河)와도 같은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시작합니다. 다만 그 내용의 장구함으로 인해 일일이 살폈다가는 제 기력이 다할 때까지 끝을 못 볼 것 같아 그건 그때마다 원고로 대신하고 대략적으로 묶어 설교하겠습니다. 다만 이 일에 한결같이 정주행할 수 있도록 주님이 제 주변 안팎을 고요하게 다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복음서에 보면 가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 비유, 돌아온 탕자 비유 등 정말 명쾌, 명료한 쉬운 풀이로 배움과 상관없이 누구나 천국 이 어려운 아르카나를 알아들을 수 있게 가르치셨지만, 그러나 그런 주님조차 어찌하실 수 없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안 들으려고 귀를 틀어막고, 마음에 커텐을 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도 어찌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의지를 억지로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 곧 내면을 열고, 다가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들릴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아멘!

 

설교

2025-07-1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7-13(D1)-주일예배(2606, 출17,14-16, AC.8618-8626), '아말렉'의 속뜻 (4).pdf
0.52MB
2025-07-13(D1)-주일예배(2606, 출17,14-16, AC.8618-8626), '아말렉'의 속뜻 (4) - 주석본.pdf
0.59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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