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6 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이 대목은 AC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새끼와  기름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동물 제사는 좋아하시고 농산물 제사는 싫어하신 것인가? 그러나 AC.326의 초점은 제물의 물질적 종류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두 제물의 차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의 AC.325에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표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 역시 각각의 내적 상태에서 나오는 예배를 나타냅니다.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이고,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차이는 먼저 무엇을 가져왔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성경이 단순히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며, 반대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배와 예배자의 내적 상태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드리는 외적인 행위만 따로 떼어 놓고 그것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예배 안에 어떤 사랑과 의도가 있으며, 그 사람의 삶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가 함께 관련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까닭을 그가  좋은 물건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26이 직접 제시하는 이유는 그 예배가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신앙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것이 문제입니다. 반대로 아벨의 예배가 받아들여진 것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셔서 그의 예배를 임의로 거부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습니다. 달라진 것은 인간 편의 상태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여 결합하는 질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은 변덕스러운 하나님의 감정이라기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와 영적 질서의 문제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예배에도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주일의 예배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찬송하지만 일상에서는 알고 있는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이웃의 선을 외면한다면, 외적인 예배 형식만으로 그 분리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일상에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려고 힘쓰며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고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는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그 삶과 예배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착하게 살기만 하면 신앙이나 교리는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문제는 진리와 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함께 있어야 할 것들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게 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삶 안에서 선으로 살아 있게 합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정확한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창4:3-5에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단순히 두 종류의 제물이 아니라 두 종류의 예배이며, 더 깊게는 그 예배가 나오는 두 가지 내적 상태입니다. 하나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AC.325에서 시작된 사랑과 신앙의 분리 AC.326에서는 이렇게 예배의 분리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창4의 이야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가인은 자신을 돌아보거나 사랑과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기보다 분노하고 안색이 변합니다. 따라서 다음 AC.327부터는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4의 비극은 이제 내적인 분리에서 예배의 분리로, 그리고 다시 분노와 체어리티에 대한 적대로 깊어져 갑니다.

 

 

 

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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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4:3-5)

 

AC.326

각각의 예배가 묘사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가인의 제물(offering of Cain), 체어리티의 예배는 아벨의 제물(offering of Abel) 묘사됩니다. (3-4)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는 받아들여졌으나,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4-5) The worship of each is described, that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by the offering of Cain; and that of charity, by the offering of Abel. (verses 34) That worship from charity was acceptable, but not worship from separated faith. (verses 45)

 

해설

AC.326은 앞의 AC.325에서 제시된 가인아벨의 의미를 이제 예배의 문제로 발전시킵니다. AC.325에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단지 두 가지 교리적 상태로 머물지 않고 각각 그 상태에 맞는 예배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창4:3-4에서 가인도 제물을 드리고 아벨도 제물을 드립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여호와께 예배드리며 둘 다 제물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AC.326은 그 차이가 제물의 외적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worship from charity)입니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예배의 형식이 바르고 교리가 정확하며 기도와 찬송과 헌물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참된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배의 내적 생명이 중요합니다. AC.326에 따르면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외적인 예배 안에 생명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거나 예배 자체를 거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립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도 얼마든지 종교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고 예배를 드리며 교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그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 역시 그 분리를 그대로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는 말씀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두 사람이 가져온 물건을 비교하여 하나는 좋아하시고 다른 하나는 싫어하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속뜻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땅의 소산양의 새끼라는 물질적 차이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각각 어떤 내적 예배를 표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를,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받으셨다받지 않으셨다는 표현도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호의를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임의로 등을 돌리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 편의 상태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결합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주님의 사랑이 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제물은 오늘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하는 매우 엄중한 표상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물을 드리면서도, 그 신앙을 실제 이웃 사랑과 삶에서 분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고 어떤 진리를 알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는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가’, ‘나의 신앙은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나타나는가와 완전히 분리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에서 가인의 원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AC.326교리와 신앙은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도록 인도하고, 그 진리는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 안에서도 신앙과 체어리티는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AC.326아벨의 제물을 단순히 체어리티라고 하지 않고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배와 삶을 분리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예배의 내적 생명은 예배 시간에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평소에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려 할 때 그 삶의 체어리티가 기도와 찬송과 말씀을 듣는 외적 예배 안에도 들어갑니다. 예배의 내적 질은 삶의 방향과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26은 창4의 비극이 깊어지는 두 번째 단계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사랑과 신앙 사이에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AC.326에서는 그 내적 분리가 예배에 나타납니다. 겉으로는 가인도 아벨도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의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심화

1.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AC.326 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AC.326 심화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이 대목은 AC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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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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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에서 특별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믿고,  믿음에 따라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순서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그 질서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가장 깊은 생명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직접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밖에서 배운 교리를 하나씩 논증하고 판단하여 이것이 참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천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랑 안에 그 사랑에 속한 진리가 있었고, 진리는 자신을 낳은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말은 단순히 사랑도 하고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사랑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지각했고, 그 진리는 다시 선을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어떻게 사는가를 서로 다른 질문처럼 나누기 쉬운 것과 달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지각과 삶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 천적 질서를 오늘날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왔다고 해서, 오늘날 사람도 먼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충분히 가진 다음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오히려 먼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진리를 신앙하며, 그것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거듭남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를 가졌지만,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질서가 서로 반대인 것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진리는 결국 선과 결합되어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길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아는 진리는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선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교리와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진리는 거듭남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알지 못하면 올바르게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진리가 선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스스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가인의 원리가 시작됩니다. AC.325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알면 경계하기 쉽지만, 참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전체적인 질서에서 떼어 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면 자신이 여전히 진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퍼셉션이 약해진 사람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보존하며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교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교리를 많이 알고 성경의 속뜻을 깊이 이해하며 신앙 고백이 정확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게 되는 것은 큰 은혜이지만, 그 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가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를 아는 목적은 남보다 높은 영적 지식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쓰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25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찾으려 하기보다 그 안에 있는 영원한 질서를 붙들어야 합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삶으로 내려오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신앙과 체어리티는 다시 형제로 함께 있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입니다.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이 삶에서 떨어져 독립적인 것이 되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 안의 가인이 태어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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