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1-2)
개요
AC.325
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습니다.그러나사랑에서신앙을분리한사람들이생겨났습니다.사랑에서분리된신앙의교리를‘가인’(Cain)이라하였고,이웃을향한사랑인체어리티를‘아벨’(Abel)이라하였습니다.(1-2절)The most ancient 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 but there arose 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The doctrine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called“Cain”; and charity, which is love toward the neighbor, was called“Abel.”(verses 1–2)
해설
AC.325는 창4의 속뜻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를 제시합니다. 창4의 가인과 아벨을 단지 인류 최초의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데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어떻게 분리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읽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되는 두 형제의 관계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이기도 합니다.
첫 문장인 ‘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습니다’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사랑을통하여’(through love)라는 말은 단순히 ‘주님을사랑하면서믿었다’는 정도보다 깊은 뜻을 가집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신앙에 나중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신앙이 나오는 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은 서로 독립된 두 가지라기보다 하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고 있었으며, 선을 사랑하는 의지에서 그 선에 속한 진리에 대한 지각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신앙은 어떤 교리 내용을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고, 그 진리를 살아가는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AC.325의 ‘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는 짧은 표현은 바로 이러한 천적 질서를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에서신앙을분리한사람들이생겨났습니다.’ 여기서 창4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신앙 자체가 거짓이거나 악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기 생명의 근원인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으로 서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가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나무의 줄기와 뿌리에서 끊어질 때 생명을 잃는 것처럼, 신앙과 진리도 사랑과 선 안에 있을 때 살아 있지만 그것에서 분리되면 본래의 생명을 잃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상태가 ‘가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인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의교리’라고 규정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가인을 처음부터 단순히 악이나 거짓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사랑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 그 구별이 점차 분리로 굳어져 독립적인 교리가 되어 가는 상태가 가인으로 표상됩니다. 이후 창4에서는 이 분리가 더욱 진행되면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앞세우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친절한 감정이나 몇 가지 구제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으로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은 본래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없애야 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아벨을 가인의 ‘형제’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325는 앞의 AC.324에서 말한 ‘교회에서분리되어나온교리들’이 어떻게 생겨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의 쇠퇴는 언제나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이 밖에서 들어오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참된 것 하나가 전체적인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울 때에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것이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되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지만, 선과 삶에서 분리된 진리가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으로 변하면 가인의 원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날 인간의 거듭남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고 해서 오늘날의 영적 인간도 먼저 완성된 사랑을 가진 뒤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고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질서는 같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을 단순히 ‘악과선’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아직 너무 이릅니다. 창4의 첫 비극은 아벨이 들에서 죽을 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의 살인은 그 내적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AC.325는 창4전체를 읽는 데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줍니다. ‘내가가진신앙은사랑과체어리티안에서살아있는가,아니면그것들과분리되어스스로서려하고있는가?’ 창4는 이제 그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이번 설교는 앞서 살펴본 ‘하나님께 묻는 삶’보다 서사라 목사의 영성을 훨씬 더 깊은 곳까지 보여 주는 설교입니다. 첫 설교에서 중심이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는 삶’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응답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영적 장소를 ‘지성소’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역대하 5장의 솔로몬 성전과 언약궤, 그룹들, 지성소를 출발점으로 삼아 성막의 뜰과 성소와 지성소를 기도의 깊이에 대응시킵니다. 그리고 회개 역시 뜰에서 이루어지는 회개,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회개,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회개가 서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깊은 ‘지성소의 회개’는 단순히 죄를 고백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회개가 아니라, 성령의 강한 역사로 죄를 깊이 깨닫고, 그 죄에서 실제로 돌아서 다시는 그 죄에 지배되지 않게 되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먼저 이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뜰-성소-지성소’라는 구조를 인간의 영적 깊이와 연결하려는 발상 자체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익숙한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던 건축물이 아닙니다. 그 구조와 기구와 재료와 배치 전체가 천국과 주님, 그리고 거듭나는 인간의 내면을 표상합니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내적인 것, 더욱 높은 천국의 것, 궁극적으로 주님에게 속한 것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서사라 목사가 성막을 설명하면서 ‘뜰에 머무는 신앙이 있고, 성소까지 들어가는 신앙이 있으며, 지성소까지 들어가는 신앙이 있다’는 식으로 영적 적용을 시도하는 것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성경 이해와 의외로 가까운 출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출발점에서 곧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서사라 목사는 이 구조를 주로 ‘기도의 깊이’와 연결합니다. 특히 방언으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기도하면서 점점 깊이 들어가, 마침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경험적 구조를 제시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한 시간 정도 기도하면 어느 단계까지 가고, 두세 시간 방언기도를 계속하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경험이 나타날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하며, 이미 오래 훈련된 사람은 더 자주 그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상당히 신중해집니다. 왜냐하면 성막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본질적으로 ‘기도시간의 양적 증가’를 표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그리고 더욱 내적인 천적 차원으로 들어가는 질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몇 시간을 기도했느냐보다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얼마나 주님에게로 돌이켜졌느냐와 관계됩니다. 한 시간 기도한 사람이 뜰에 있고, 세 시간 기도한 사람이 지성소에 있다는 식의 공간적, 시간적 대응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시간 기도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세상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을 주님께 집중하고, 자기 욕망과 잡념을 내려놓으며 기도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내면을 정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의 영적 공식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오래 기도하면 더 깊은 영적 공간에 들어간다’는 공식이 형성되면, 영적 상태의 깊이가 기도시간이나 체험의 강도로 측정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체험의 강도가 아니라 사랑의 질입니다. 천국의 가장 깊은 곳은 가장 강렬한 환상을 보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을 가장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 설교의 중심인 ‘회개’로 들어가면, 서사라 목사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상당히 좁아집니다. 설교자는 회개를 세 단계처럼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입술로 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그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다시 반복하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는 정말 죄를 짓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진심으로 회개하지만,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다시 넘어지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가 ‘지성소에서 드리는 회개’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의 빛 가운데 자기 죄의 실상을 너무나 깊이 깨닫고 통회하며, 그 결과 실제로 그 죄에서 벗어나 다시 그 죄에 지배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부분은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하게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회개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확인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나 순간적인 죄책감을 진정한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살피고, 자기 안에서 특정한 악을 발견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죄임을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실제 생활에서 그 악과 싸워 그것을 피해야 합니다. 결국 회개의 진실성은 ‘얼마나 슬퍼했는가’보다 ‘그 악을 실제로 죄로 여기고 떠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서사라 목사는 심지어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회개가 안 된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진심으로 죄를 자백했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믿어야 하며, 눈물이 나지 않았다고 해서 용서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균형입니다. 설교 전체에는 통곡과 강렬한 성령 체험이 상당히 강조되어 있지만, 적어도 눈물 자체를 구원의 조건이나 회개의 절대 기준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서사라 목사의 설명에서는 가장 깊은 회개가 이루어질 때, ‘회개의 영’이 강하게 임하고, 죄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며, 통곡이 터지고, 그 결과 그 죄를 다시 짓지 않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하고 아름다운 회심 경험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에게 어떤 악의 추함이 갑자기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고, 그것을 진심으로 혐오하게 되어 삶이 크게 바뀌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 전체를 이 한 번의 강렬한 체험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거듭남은 대체로 훨씬 길고 깊은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악을 깨닫고 버리기로 결심했는데도 다시 넘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 싸우고, 또 넘어지고, 다시 주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에게 숨어 있던 더 깊은 동기와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차례로 드러납니다. 자신은 이미 어떤 악을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악의 더 깊은 뿌리가 남아 있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짜 회개를 했으면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는다’는 표현은 회개의 지향점을 말하는 것으로는 매우 좋지만, 거듭남의 실제 과정을 설명하는 명제로 사용하면 지나치게 단순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싸움’입니다.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과 맞서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유혹입니다. 그리고 싸움이 반복되면서 이전에 즐거웠던 악이 점차 싫어지고, 처음에는 힘들게 행했던 선이 점차 자연스러워집니다. 결국 주님께서 인간의 사랑 자체를 바꾸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는 능력이 단번에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처럼 설명하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이성 안에서 끊임없이 역사하시며, 그의 사랑의 질서를 바꾸어 가신다고 보는 것이 더 스베덴보리적입니다.
여기서 ‘지성소’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서사라 목사에게 지성소는 상당히 체험적인 공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때로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는 것을 경험하는 곳처럼 묘사됩니다. 설교 후반에는 자신이 하나님께 ‘얼굴을 보여 달라’고 구했던 개인적 체험까지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임을 깨달았다는 취지로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결론과 조심해야 할 과정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결론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거나 어떤 영적 형상을 경험했다는 문제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훨씬 세밀해집니다. 영계에서는 모든 것이 상응을 따라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빛이나 얼굴이나 인물이나 장소를 보았다고 해서, 그 보이는 형상을 곧바로 하나님의 본체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그 경험을 해석하는 문제는 별개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서사라 목사의 천국, 지옥 체험을 살펴볼 때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무언가를 보았다’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안다’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구별을 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영계의 현상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영계에서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상응을 따라 나타나는지, 영들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지, 인간이 그 경험을 어떻게 오해할 수 있는지를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사라 목사의 체험을 처음부터 ‘거짓이다’라고 배척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직접 보았다니 그대로 사실이다’라고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방언기도를 다루는 부분 역시 같은 원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로마서 8장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말씀을 장시간 방언기도와 연결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더라도 성령께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방언기도 시간을 늘려 갈 것을 상당히 강하게 권합니다. 여기에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겸손한 전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앞 설교의 ‘하나님께 묻는 삶’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높으므로 자기 판단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로마서 8장의 이 구절을 곧바로 장시간 방언기도의 기술적 근거로 연결하는 것은 별도의 해석적 검토가 필요합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바울서신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복음서,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속뜻을 가진 말씀의 범주와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로마서의 한 구절에서 영적 세계의 구조를 세밀하게 끌어내기보다, 서사라 목사가 이 구절을 통해 말하려는 핵심, 곧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지 못하므로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원리를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그리고 이번 설교에서 제가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사실 ‘지성소 체험’도 ‘방언 세 시간’도 아닙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성소 단계의 회개를 설명하면서 ‘나는 정말 다시는 화를 내고 싶지 않았는데 또 화를 내고 말았다’는 식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바로 여기에 거듭남의 실제 현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을 원하지만 옛 욕망이 다시 일어납니다.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것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힘의 한계를 경험합니다. 서사라 목사는 이것을 ‘자기 절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자기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처음에는 ‘내가 결심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싸움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목적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proprium에 대한 신뢰를 꺾는 것입니다. ‘내가 선해질 수 있다’는 자기 의를 내려놓고, 선의 능력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실제 경험으로 배우게 됩니다. 이 점에서는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자기 절망 → 성령의 도움 → 죄를 이기는 능력’이라는 흐름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 사이에 상당히 의미 있는 접점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리메인스’, ‘유혹’, ‘자유’, ‘이성’,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훨씬 긴 과정을 더합니다. 인간의 변화는 어느 순간 강력한 영이 임하여 이전의 악을 단숨에 없애는 사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선과 진리의 상태들, 이후 받아들인 말씀의 진리들, 삶에서 겪는 수많은 영적 싸움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성소는 어떤 황홀한 영적 경험의 ‘최종 방’이라기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깊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설교에서 말하는 ‘뜰-성소-지성소’를 조금 다르게 다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뜰은 아직 외적인 종교생활에 가까운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라고 하니까 죄라고 하고, 회개하라고 하니까 회개하지만, 아직 그 진리가 자기 내면의 사랑과 충분히 연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소로 들어가면 진리가 인간의 이해성과 양심에 들어옵니다. ‘이것은 정말 악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진심으로 깨닫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지성소에 해당하는 더욱 내적인 상태에서는 그 진리가 단지 ‘해야 할 의무’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과 결합합니다. 이제 악을 피하는 이유가 벌이 두렵거나 명령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악 자체가 주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해치는 것이어서 싫어집니다. 반대로 선은 명령받았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가 좋아집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서사라 목사가 말하고 싶었던 ‘지성소의 회개’도 오히려 더욱 깊어집니다. ‘한 번 크게 울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보다 더 깊은 변화가 됩니다.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악을 싫어하게 되고, 선을 억지로 행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외적 행동 하나가 고쳐지는 것을 넘어 그 행동을 낳던 애정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첫 번째 설교와 두 번째 설교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첫 설교에서는 ‘하나님께 물어라’였습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지성소까지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라’입니다. 두 설교 모두 서사라 목사의 영성에서 매우 강한 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신앙을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하나님과의 교통과 경험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설교가 많은 사람에게 강하게 다가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교리적 대상이 아니라 지금 묻고, 듣고,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놀랍게도 하나님을 추상적 교리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순간에 주님에게서 생명이 흘러들어오고 있으며, 천국 전체가 주님의 신성으로 살아 있고, 인간은 그 인플럭스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는 둘 사이에 매우 깊은 공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만남’을 특별한 체험에 집중시키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가장 깊은 결합은 무엇을 보고 듣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안에 받아들여져 그의 삶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지성소까지 들어가라’는 권면의 방향은 귀하지만, 그 지성소를 ‘장시간 방언기도 끝에 도달하는 특별한 영적 체험의 장소’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가장 깊은 사랑에까지 들어가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상태’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러면 ‘지성소에서 드리는 회개’도 달라집니다. 그것은 가장 많이 울어 본 회개도 아니고, 가장 강렬한 임재를 체험한 회개도 아니며, 가장 오래 방언기도한 사람이 도달하는 회개도 아닙니다.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실제 삶에서 그것을 피하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싸우고, 그렇게 오랜 거듭남을 통하여 마침내 이전에 사랑하던 악을 싫어하고, 이전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사랑 안에서 주님과 인간이 결합합니다.
그 의미에서 서사라 목사의 이 설교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무언가를 잘라내기보다 ‘한 단계 더 깊게 가져갈 수 있는 내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회개는 실제로 죄에서 돌아서는 데까지 가야 한다’, ‘자기 힘으로는 그것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신앙은 외적인 종교행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중심 메시지는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뜰-성소-지성소’를 기도시간과 체험의 단계로 고정하고, 강렬한 회개 체험이 곧 악의 완전한 제거를 보증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거듭남의 질서가 중요한 보완을 제공합니다.
결국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언약궤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 ‘얼마나 강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그 선과 진리가 인간의 가장 깊은 사랑 안에 자리 잡고, 거기에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스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성막 전체가 주님의 거처가 되어 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말의 가장 깊고도 실제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창4와 창5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창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이랏,므후야엘,므드사엘,라멕으로 여러 대가 이어지고,라멕에게서 다시 야발,유발,두발가인이 등장합니다.그런데 이 긴 계보가 모두 소개된 뒤 창4:25에 와서 다시‘아담이자기아내와동침하매그가아들을낳아그의이름을셋이라하였으니’라고 합니다.이것을 현대적인 연대기처럼 직선적인 시간순으로만 읽으면,마치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에야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을 해석하는 방식에서는 이러한 계보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개인들의 출생 연대를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가인과 에녹,이랏 등의 이름은 말씀의 속뜻에서 특정한 교리와 교회적 상태를 나타내며,셋과 에노스 및 창5의 여러 이름들 역시 이어지는 교회적 상태들을 나타냅니다.따라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도 먼저‘누가정확히몇년먼저태어났는가?’보다‘말씀이어떤교회적계열과상태의연속을보여주고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4는 특히 태고교회 안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들과 그 변화를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계열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그 구별이 분리로 굳어지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며,그 뒤에도 그 교리적 상태가 여러 형태로 파생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반면 창4마지막의 셋과 에노스,그리고 창5에서 다시 이어지는 계보는 태고교회 안의 또 다른 교회적 계승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창4의가인계열이역사적으로완전히끝난다음창5의셋계열이시작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말씀은 한 계열의 영적 역사를 충분히 보여 준 뒤 서술의 초점을 다른 계열로 옮겨 그 계열의 상태들을 다시 처음부터 펼쳐 보일 수 있습니다.이런 의미에서 창4와 창5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큰 시대 안에서 전개되는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의 서술로 함께 읽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여기서‘함께’또는‘나란히’라는 말을 역사적 동시성에 관한 정밀한 연대표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석이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은 각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적 상태와 그 상태들의 연속이지,가인 계열의 어느 인물이 셋 계열의 어느 인물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살았는지를 확정하는 연대기가 아닙니다.그러므로‘두계열이같은태고교회시대안에서전개되었다’는 것과‘각세대를일대일로맞추어동시대라고확정한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창4:25에서 셋이 등장하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집니다.이것을 반드시‘가인의여러대후손이모두지나간뒤비로소셋이태어났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 없이,말씀의 서술 초점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적 계열에서 셋으로 표상되는 다른 교회적 계열로 옮겨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창5에서는 다시 아담에서 시작하여 셋과 에노스,게난,마할랄렐,야렛,에녹,므두셀라,라멕,노아로 이어지는 계열을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역사로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가인 계열을 단순히‘악한계열’,셋 계열을‘선한계열’이라고 나누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아무런 진리도 없는 순수한 악을 뜻한 것이 아닙니다.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이후 점차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변질됩니다.반대로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 역시 아무런 쇠퇴 없이 처음의 가장 순수한 천적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노아까지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태고교회 전체가 여러 상태를 거치며 결국 그 시대의 종말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태고교회’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태고교회는 단지 가장 처음의 순수한‘아담’상태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그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여러 후속 교회와 상태들을 거쳐 그 교회 시대의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큰 흐름을 가리킵니다.그러므로 그 안에는 매우 높은 천적 상태도 있고,점차 쇠퇴하는 상태도 있으며,본래의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적 상태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창1-9의 속뜻을 당시 지상에 살던 모든 사람의 역사적 상태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가 이 장들에서 직접 추적하는 것은 무엇보다 교회와 그 교회의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물론 그 속뜻에 담긴 영적 원리는 오늘의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우리 안에서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수 있고,한 교리나 지식을 전체보다 높일 수 있으며,주님께서는 그런 상태에서도 다시 생명의 길을 마련하십니다.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적용과 당시 모든 인류가 똑같은 교회적 상태를 동시에 거쳤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결국AC.324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두 가지 흐름입니다.인간 편에서는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 교리들이 독립하면서 여러 교회적 상태가 생겨납니다.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그 분열과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섭리가 계속됩니다.창4와 창5를 이러한 관점에서 함께 읽으면,가인과 아벨,셋과 에노스,그리고 창5의 긴 계보는 단순한 고대 가족사의 연속을 넘어‘교회가어떻게변화하고쇠퇴하며,그가운데서도주님께서어떻게교회의생명을이어가시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