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이야기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다음은 지난 2월 14일, 함께 나눈 내용입니다.

 

... 최근 창세기 1장 2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와, 이에 대한 AC.44번 내용 중에,

 

사람은, 땅처럼, 먼저 자기 안에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심어 무얼 믿고 무얼 행해야 하는지를 모르고서는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하는 문장에 눈길이 갔더랬습니다. 특별히 땅을 사람의 마음으로 연결하는 표현에 말이지요.

 

특별히 세계테마기행 최근 편 가운데 ‘벼랑 끝을 걷다, 협곡 기행’인 시리즈를 보는 중, 오... 정말 지구 상 어마어마한 협곡들을 소개하는데, 비록 영상으로지만,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양 프랑스령 레위니옹 살라지 협곡, 실라오스 협곡, 그리고 중국의 시링협곡, 언스대협곡,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블라이드리버캐니언 등입니다.

 

이 장엄, 광대, 광활한 장면들을 또 드론으로 말미암아 기가 막힌 영상으로 보여주는데요, 정말 엄청났습니다. 그렇게 계속 감탄에 감탄을 계속하다가...

 

오, 할렐루야! 이 모든 광경, 곧 땅의 모습 이 모든 장관이 주님 보시기에 사람의 마음이겠구나 싶은 겁니다. 주님이 우리 인간의 마음을 보실 때, 저렇게 보이시는가 보다 싶은 순간, 엄청난 전율이 일며, 말할 수 없는 큰 감동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반짝이는 말씀 구절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대하16:9)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8:36)

 

주님이 내 안에 조성하신 마음의 어떠함에 대해 조금, 아주 조금, 그러나 엄청난 무슨 발견을 한 것 같은 아주 흥분된 순간이었습니다...

 

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의 모판입니다. 모형이요, 모델하우스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사람을 위함이며, 오직 사람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럴 듯한 무엇이라 해도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일체의 것은 천국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며, 아무리 사람을 그럴 듯하게 여긴다 해도 사람의 구원, 곧, 천국으로 인도함이 아니면 여전히 천국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 말씀(The Word) 전체가 단 한 가지 목적, 곧,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것이며, 그래서 창세기도, 그리고 창세기 1장도 결국은 한 사람의 거듭남의 전 과정을 아름다운 천지창조 이야기로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첫 단계부터 여섯 번째 단계 가운데 있는 사람, 즉, 아직 거듭남 중에 있는 영적(靈的, spiritual) 인간한테는 주님은 아직 ‘하나님’이셔서 창세기 1장엔 ‘하나님’으로, 그리고 드디어 일곱 번째 단계인 일곱째 날 안식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 즉,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한테는 주님은 비로소 ‘여호와’이셔서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로 각각 호칭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자연계 모든 만물은 사람의 거듭남에 관련되며, 구원에 기여할 때에만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바로 그때가 그 사람한테는 ‘태초’(太初, the beginning)가 되는 것입니다.

 

천지’(天地, the heavens and the earth)는 사람 안의 속 사람, 겉 사람을 말합니다. 이 속 사람, 겉 사람 이야기는 앞으로 대하(大河)처럼 계속 됩니다.

 

말씀에 나오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거듭남을 가리킵니다. (cf. 사43:7)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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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이야기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까지도 이어지는 걸까?’ 1편입니다. 쓰다보니 분량이 많아져 할 수 없이 1, 2편 둘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전에 한번 다룬 것 같아 찾아보니 지난 8월 3일에 간략하게 다루었네요 ^^ 오늘은 원래 생각해 둔 다른 주제가 있었는데, 이번 주, 친인척 부고(訃告) 소식 및 저희 친형님의 25주기 기일도 찾아와 고민하다가 이 주제로 변경했습니다.

 

이 주제를 입체적으로 살필 수 있으려면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먼저 좀 선행학습을 해야 합니다.

 

- 사후(死後), 영이 된다는 것

- 영의 외면과 내면

- 천국을 이루는 수많은 공동체

- 천국의 결혼

- 부모와 자녀의 영적 의미

- 천국과 지상의 상응

- 천국을 이루는 주님의 신성

 

등등...

 

네, 그만큼 쉬운 주제가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그렇다고, 이 주제에 대한 답이 꼭 무슨 저런 걸 다 알고 열심히 추론해야만 알 수 있는, 그런 건 아닙니다. 우리가 사후 천국에 가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 이 지상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답조차도 그걸 이해하려면 위와 같은 사전 이해들이 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은 지난 8월 3일, 나눈 글의 시작 부분입니다.

 

...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까마득한 조상을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하나? 또 나중에,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까마득한 후손이 찾아와 나한테 인사를 하게 되나?’...

 

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비천적(非天的), 비영적(非靈的)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천국을 무슨 이 세상의 연장이요, 확장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

 

답부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상 혈연관계는 지상에서 끝, 천국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천국에선 전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입니다.

 

다음과 같은 순서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종 및 깨어남

영의 외면(exteriors)의 상태변화

영의 내면(interiors)의 상태변화

천국 올라가기 전 오리엔테이션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

 

자, 그럼 먼저, ① 임종 및 깨어남입니다.

 

임종(臨終)은 말 그대로 ‘죽음을 맞이함’입니다. 산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겠지만, 천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참 영의 깨어남’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가족들은 슬피 울고 있지만, 영계에서는 마치 신생아실의 돕는 간호사들처럼 천사들의 극진한 돌봄이 시작됩니다.

 

주님은 신참 영들이 깨어날 때, 마치 지상 신생아 무균실 환경처럼 일체 악한 영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제일 먼저 가장 높은 천사들인 삼층천 내적 천사들을 보내십니다. 이 천적 천사들이 오면 어떤 향기가 진동하는데요, 이 향기로 인해 일체 악한 영들의 접근이 금지됩니다.

 

세간, 가령, 호스피스 등에 종사하시는 분들을 통해 임종을 앞둔 분들의 경우, 무슨 저승사자를 보시곤 한다는 말들을 듣는데요,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분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이 본 삼층천 천사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

 

이 ‘깨어남’(resuscitation, 소생, 부활)의 과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또 많지만... 네, 하여튼 영계에서 막 깨어나는 신참 영은 천적, 영적 천사들의 도움과 보살핌으로 이후 영계에서 첫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다음은, ② 영의 외면(exteriors)의 상태변화입니다.

 

’하면 그냥 ‘’이지 무슨 ‘영의 외면, 내면’이 있다 하나 어리둥절하시지요? ^^ ‘영의 외면’이란 다름 아닌, ‘영의 내면’과 육체(肉, body, 살과 뼈로 된) 사이에서 둘을 연결시켜 주는, 영의 바깥, 겉 부분을 말합니다.

 

우리의 이 살과 뼈로 된 몸은 사실은 우리의 영이 입고 있는 옷입니다. 옷 자체에 무슨 생명이 없듯 사실 우리의 이 몸은 영과 분리된 후엔 그냥 물질일 뿐이어서 바로 썩고 부패하지요. 우리의 모든 기억과 경험, 감각과 감정 중에서, ‘영의 내면’, 즉, 속 사람(internal man)에 속하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또 몸은 아닌, 그런 일체가 바로 이 ‘영의 외면’에 속합니다. ‘영의 내면’에 대해서는 요 바로 다음인 ③번 항목에서 다루겠습니다.

 

영은 사후 몇 차례의 상태변화를 겪으면서 천국, 또는 지옥 갈 준비를 하게 되는데요, 그 첫 번째 상태변화가 바로 이 ‘영의 외면’의 상태변화입니다.

 

영의 외면’이 바로 저런 거여서 사후 신참 영들의 모습은 임종 직전 모습, 즉, 생전 모습과 거의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 외면의 상태에서는 생전에 알던 가족과 친지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생각하던 모습이 아직은 남아있어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무척 반가워들 하지요. 모든 게 낯설고 어리둥절한 신참 영들을 이들 고참들(?)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구경도 시켜주고 이런저런 걸 알려줍니다.

 

여기서 잠깐, 사람 안의 ‘천국’이 무엇이며, 또 ‘지옥’이 무엇인지를 잠깐 생각해야 합니다.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 된 상태가 천국’이며, 이런 사람은 천국의 해당 공동체로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안에서 ‘악과 거짓이 하나 된 상태가 지옥’이며, 이 사람 역시 지옥의 해당 공동체로 떨어집니다.

 

여기서 ‘해당 공동체’라는 것은, 사람은 생전에 이미 그 사람의 ‘중심 사랑’에 의해서, 자기는 모르지만, 그 영은 천국 또는 지옥의 어느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 ‘중심 사랑’이란, 그가 무엇을 하든 결국 그의 모든 행위의 근본 동기가 되는 하나의 사랑이 있는데, 이 사랑을 가리켜 ‘중심 사랑’(ruling love)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심 사랑’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면 천국으로,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상태변화 때, 일어나는 가장 중요 포인트는, 이 영의 ‘중심 사랑’을 통해 형성된 ‘영의 내면’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즉, 선과 진리의 하나 됨, 또는 악과 거짓의 하나 됨이 진행되는 동안, 천국에 갈 사람한테서는 천국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악과 거짓을, 반면, 지옥 갈 사람한테서는 역시 지옥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과 진리를 각각 떼어내는 일이 이때 일어납니다. 이 과정이 진행되면서, 이 영의 모습은 점점 달라지며, 이 첫 번째 과정이 마칠 즈음이면, 즉, 그의 ‘영의 내면’이 본모습을 드러내면, 그 모습은 ‘영의 외면’일 때와 너무도 달라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 영의 외면은 휴면 상태로 들어갑니다.

 

주님의 허락으로 영안이 열려 다른 사람들의 영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어떤 할머니는 등도 굽고, 흰머리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참 볼품없는 외모이지만, 그 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인 반면, 어떤 젊은 여자는 정말 많은 남자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매혹적이지만 그 영은 거의 괴물 수준이더라라고 합니다. 이때 이분들이 본 저들의 영은 사실은 저들의 ‘영의 내면’, 곧, 본모습을 본 것입니다.

 

영의 외면, 내면’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내키지는 않지만 어떤 사정이 있어 누굴 만나거나 할 때, 예의 상, 얼굴이나 태도에 내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나 표정, 행동을 하거나 정 그럴 수 없다면, 그저 무난하게라도 있다 옵니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있고, 도덕과 윤리, 상식과 정서라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 속이 들키지 않게 가려주는 것, 이것이 바로 ‘영의 외면’이며, 그렇다면, ‘영의 내면’은 아무도 안 볼 때, 누구 신경 쓸 일도 없고, 눈치 볼 것도 없을 때, 그때 나타나는 내 본 모습, 그것이 ‘영의 내면’입니다. 즉,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 그것이 ‘영의 내면’입니다.

 

다음 순서들인,

 

영의 내면(interiors)의 상태변화

천국 올라가기 전 오리엔테이션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

 

는 2편으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미니 결론을 미리 좀 말씀드리자면...

 

천국에서는 지상과 같은 ‘생육하고 번성함’이 없고, 대신 ‘주님의 선과 진리의 생겨남’이 있습니다. 지상은 천국의 상응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혈연, 혈육도 이런 관점,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자녀에 대한, 부모에 대한,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탈선하거나 오버하지 않을 수 있으며,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을 통해 ‘주님 사랑’이라는 ‘중심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 사랑은 자녀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 사랑’이며, 부모 사랑 또한 부모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 사랑’이며, 남편 또는 아내에 대한 사랑도 남편 또는 아내의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 ‘주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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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네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를 들어, ‘아담’ 하면 ‘아담’이라는 한 개인을, ‘하와’ 하면 ‘하와’라는 한 개인을, 그런 식으로, ‘아벨’도, ‘가인’도... 다 그렇게 그런 이름을 가진 한 개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말씀(the Word)을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마치 육이 영의 생각, 영의 사정을, 겉 사람이 속 사람의 생각과 사정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뿐 아니라 지난 2천 년 기독교가 말씀의 속뜻에 관한 한, 이런 지독한 어두움 가운데 놓이게 된 데에는, 초대교회의 연약함을 비롯, 니케아 회의의 심의와 칙령(the deliberations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Nice, 325년)및 이후 전개된 교리의 역사 등 역사적 배경 이야기가 좀 있으며, 나중에 필요하면 다루겠습니다. (TCR.206)

 

한 마디로, 상응 지식(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지식이 있어야 말씀의 영적 의미, 곧 속뜻에 접근할 수가 있는데요, 초대교회 이후, 위와 같은 이유로 인류에게 이 지식이 닫힌 것입니다. (TCR.206)

 

하지만 비록 말씀의 겉 글자의 뜻 가운데 살았더라도, 즉, 이런 걸 모르고 살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선과 진리의 삶을 사신 분들에게는 주님의 은혜로 끊임없이 구원이 베풀어졌습니다. 즉, 천국의 대기인 신성(神性, the Divine)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어 천국 생활이 가능했습니다. 천국 가는 길이 그렇게 어렵고, 문턱이 높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주님의 자비로 지금 이 상응 지식이 계시되고(啓示, revealed), 즉 드러나고 있고, 교회에 관한 신적 진리들(the Divine truths of the church)이 빛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진리들이 바로 말씀의 영적인 의미, 곧, 속뜻을 구성하는 진리들입니다. (TCR.207)

 

다시 ‘아담’이라는 이름 이야기로 돌아와서, 요점부터 말씀드리면, ‘아담’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 시대를 대표하는 교회의 이름이며, 신앙의 이름, 신학의 이름이요, ‘하와’ 같은 경우는 어떤 내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아벨’도, ‘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 하면 ‘므두셀라’입니다. 창세기 5장 27절을 보면,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때 이 ‘므두셀라’는 ‘므두셀라’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대표된 어느 한 작은 단위의 교회 시대를 말하며, 또한 여기 이 ‘구백육십구 세’라는 기간 역시 우리가 이해하는 969라는 정량적인 의미가 아닌, 그 교회의 어떤 오랜 존속 기간 동안 있었던 상태와 그 변화들을 뜻한다는 것이지요.

 

창세기 1장부터 11장 ‘에벨’의 때까지, 그러니까 아브람의 등장 전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은 어느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시대 교회와 신앙을, 그리고 어떤 영적 의미를 각각 그 이름으로 일컬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2장 아브람부터가 비로소 실제 역사, 곧 이때부터 나오는 이름들이 비로소 실제 살았던 한 개인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걸 이해하시려면 먼저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래서 오늘은 이 이야기를 좀 해드리겠습니다. 아래 글은 AC.66번 글 전문 인용입니다.

 

먼저, 첫 번째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모드는 이랬습니다. 그들은 땅에 속한, 이 세상의 것을 언급할 때, 그것이 표상하는(represented) 영적,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것을 무슨 대표성을 띤 것(representatives)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역사 시리즈물(historical series)로도 꾸몄습니다. 그렇게 하면, 보다 더 생생하니까요. 이렇게 하는 게 그들에겐 굉장히 차원 높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것이 한나의 다음과 같은 예언에 사용된 스타일입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 개역개정 번역과 영어가 상당히 달라 좀 당황스러운데요... 직역하면, ‘높고 높은 것을 말하며, 입을 벌려 고대의 것이 나오게 하라’가 되겠습니다.

 

이런 대표성을 가리켜 시편에서는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78:2-4)

 

천지창조, 에덴동산 등으로 시작, 아브람의 때까지 이어지는 이들 하나하나에 대하여 모세는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얻었습니다.

 

두 번째는 역사기록물(historical) 스타일로서, 아브람의 때로부터 시작, 모세의 책들 및 여호수아, 사사들, 그리고 사무엘과 열왕들의 책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입니다. 이들 책에서는 역사적인 사실들이 글자의 기록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체가 일반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속뜻으로는 아주 다른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예언적(prophetical) 스타일인데, 이는 태고교회에서 아주 높은 공경을 받던 어떤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스타일은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계속 연결되어 역사적 무슨 형태를 갖추지를 못하고 그만 끊어져, 가장 깊은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들어있는 속뜻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은 거의 이해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 아르카나는 아름다운 순서로 연결되며, 거기에는 겉 사람과 속 사람에 관한 것, 교회의 수많은 상태들 및 천국 그 자체, 그리고 가장 내적으로는 주님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네 번째는 다윗의 시편(the psalms of David) 스타일로서,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 언어 스타일 간 중간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에서 주님은 다윗이라는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속뜻으로는 왕이십니다. (AC.66)

 

어떠신가요? 좀... 어려우시죠? 네, 저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 환히 비추심을 구하며, 황소걸음으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서술 스타일의 관점으로 보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태고교회 스타일로, 그리고 12장부터는 역사기록 스타일로 그 서술 스타일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창세기를 읽을 때,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를 받아들입니다. 대략 45, 6억 년 전후라 합니다. 이 장구한 연대 중 태고교회의 시작, 즉 아담의 등장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때부터 아브람의 때까지가 태고교회 스타일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즉, 일종의 역사 시리즈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지요.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가 됩니다.

 

말씀이 무슨 다큐멘터리나 일지도 아니고... 이 장엄, 장구한 수십억 년 역사를 실제 역사로 기록한다면 얼마나 많은 페이지가 필요하겠으며, 과연 그럴 필요가 있기나 할까요? 그런 기록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천국으로 데려가고자 하시는 일에 무슨, 그리고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이런 이유로, 고대의 역사를 이런 문체, 이런 이야기 스타일로 기록, 인류의 그간 있었던 총 네 번의 교회 시대, 즉,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표상교회라고도 함, 表象) 및 현 기독교회 중 앞 두 교회인 태고교회(아담교회)와 고대교회(노아교회)를 창세기의 맨 앞부분 열한 개의 장으로 압축, 요약, 이야기체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압축, 요약했다고는 하지만, 그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속뜻, 즉 아르카나를 넣어 두셔서 오직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만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주님 지혜의 5, 4, 3등급 지혜라 하겠습니다. 말씀은 6등급 지혜인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이런 말씀 서술 스타일을 이해하신다면 비로소 창세기 첫 열한 장은 겉 글자의 뜻 외에 감추어진 속뜻, 즉 내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 또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또한 창세기 이야기를, 본문을 가지고 제대로 시작하기 앞서 제가 이토록(?) 뜸을 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며, 또 왜 우리의 모든 신앙의 출발을 창세기에서 해야 하는지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내적 존재인 천사들은 그래서 말씀을 내적 의미인 속뜻으로만 읽는다는 사실 또한 아시기 바랍니다.

 

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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