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3

 

1579.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Verse 9.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eparate, I pray, from m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and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모든 선을,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ignifies all good.

 

나를 떠나가라’, 그 선은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what is discordant), 함께 할 수 없는 것들,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이 전부 사라지지 않는 한, 나타날 수 없음을,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분리(separation), 헤어짐을 각각 의미합니다. Separate, I pray, from me,” signifies that the good cannot appear unless what is discordant is made non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and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signifies separation.

 

 

1580.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이 표현의 의미가 모든 선(all good)이라는 것은 ‘’(land)이 가지는 어떤 좋은 뜻(a good sense)과, 여기서는 가나안 땅의 의미, 곧, 천적이며, 그래서 또한 선한, 그런 의미임을 볼 때 분명히 그렇습니다. (※ 관련 글은 저 위 566, 620, 636, 662번 글 참조) That this signifies all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land” in a good sense, and here of the land of Canaan, which is the celestial, and therefore also good (concerning which see above, n. 566, 620, 636, 662).

 

※ ‘가나안 땅’은 좋은 뜻으로는 천적인 것, 선, 천국과 교회, 더 나아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 말씀(the Word)에서는 하나의 용어가 완전히 정반대의 의미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좋은 뜻으로는’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은 겉 사람, 특히 겉 사람 안에 있는,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자기 안에 좀 털어버렸으면 하는 무슨 악이 있음을 지각할 때나 시험(temptations) 중, 혹은 갈등(combats) 중일 때 보이는 경향과 같지요. The internal man here addresses the external, but those things in the external man which disagree; as a man is wont to do when he perceives some evil in himself from which he desires to be separated, as is the case in temptations and combats.

 

이런 것은 시험 또는 갈등 가운데 있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 자기 안에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음을 지각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깁니다. 사람들이 이런 영적 갈등, 전투(combats) 중에 있는 한은, 비록 그런 것들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지만, 여전히 분리되길 원하며, 종종 그 악에 대하여 분노, 아주 쫓아내 버리길 원하는 정도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For it is known to those who have been in temptations and combats, that they perceive in themselves things which disagree; from which, so long as there is combat, they cannot be separated; but still they desire separation, and sometimes to such a degree that they are angry with the evil, and desire to expel it.

 

※ 자기한테서 수시로 나타나거나 끈질기게 안 고쳐지는 어떤 악한 습관, 반복된 언행, 태도, 부정적인 사고 등에 대해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겉 사람에 있는 것들이며, 그 중에서도 속 사람과 같이 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게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These are the things that are here signified.

 

 

1581. 나를 떠나가라 Separate, I pray, from me.

 

이 표현은, 선은 자기와 어울리지 못하는 것(what is discordant)이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지(quiescence) 않는 한, 나타날 수 없다는 의미인데요, 이는 방금까지 말씀드린 내용, 곧, 속 사람은 겉 사람 안에 있는,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자신한테서 분리되기를 원한다는, 왜냐하면, 그것이 완전히 분리되기 전까지는, 속 사람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선은 결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good cannot appear unless what is discordant is made null is evident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namely, that the internal man desires that which disagrees, in the external man, should separate itself; for until it has been separated, the good which continually flows in from the internal man, that i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man, cannot appear.

 

그러나 이 분리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분리가 아닌,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알려진 것입니다. But as regards this separation, it is to be known that it is not separation, but quiescence.

 

주님 말고 그 어느 누구도 겉 사람 안에 있는 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With no one, except the Lord, can the evil that is in the external man be separated.

 

사람은 일단 한번 접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의 안에 남습니다. 단지 그게 쥐죽은 듯 조용히 있을 때는 마치 그게 분리된 것처럼 여겨지는데, 그것은 그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가만히 있기 때문입니다. Whatever a man has once acquired, remains; but it seems to be separated when it is quiescent, for thus it appears to be none.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쥐죽은 듯이 있는 상태가 되는 것도,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그런 상태가 되면, 비로소 주님으로부터 선이 흘러들어오며, 이 선이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Neither does it become quiescent so as to appear as none, except from the Lord; and when it does thus become quiescent, then for the first time do goods flow in from the Lord, and affect the external man.

 

이런 상태가 천사들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아는 건 그저 악이 자기들한테서 분리되어 왔다는 것뿐입니다. 사실은 악으로부터 일종의 보류 상태, 그래서 악이 아무 활동도 안 하는 상태에 있을 뿐이고, 그래서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인데 말이지요.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겉으로 보이는 양상, 곧 겉으로 볼 땐, 마치 악과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천사들이 곰곰 생각하면 아는 것입니다. Such is the state of the angels; nor do they know otherwise than that evil has been separated from them; whereas there is only a withholding from the evil, thus a quiescence, so that it appears as none; consequently this is an appearance, as also the angels know when they reflect.

 

 

1582.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and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이 표현이 분리를 의미함은 ‘’(右, the right)와 ‘’(左, the left)의 의미에서 옵니다. That this signifies separa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right” and “the left.

 

우와 좌는 그저 상대적인 용어들입니다. Right and left are merely relative terms.

 

이 용어들은 어떤 고정된 방위나 어떤 장소를 콕집어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서와 동, 북과 남, 어느 쪽도 사람이 어디를 바라보고 서 있느냐에 따라 우 또는 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They do not designate a fixed quarter, or a definite place;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ast as well as the west, the south as well as the north, may be on the right or on the left, according to the way in which one is looking.

 

이건 장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same is true also of place.

 

가나안 땅을 가리켜 오른쪽이다, 왼쪽이다 할 수 없습니다.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The land of Canaan could not be said to be on the right or on the left, except relatively.

 

주님이 계신 곳, 그곳이 어디이든 거기가 중심입니다. 오른쪽, 왼쪽은 거기를 중심으로 해서 정해집니다. Wherever the Lord is, there is the center; and the right and the left are determined from that.

 

그래서 주님을 표상하는 아브람이 이쪽 혹은 저쪽, 어느 쪽으로 물러나든 그는 여전히 주님을 표상하며, 그렇게 또한 땅(land)도 표상합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 안에 있든 어디 다른 데 있든 마찬가지, 같은 것, 곧, 아브람은 주님을 표상합니다. 식탁에 계신 분이 가장 높은 위엄을 가지신 분인 것처럼, 가장 높은 자리는 그 분이 앉는 자리요, 오른쪽, 왼쪽은 그때 정해지는 것입니다. Thus whether Abram, by whom the Lord was represented, withdrew this way or that way, still the representation was with him, and so also was the land; so that it was the same thing whether Abram was in the land of Canaan, or was elsewhere; just as it is with the one at table who is of the highest dignity, the highest place is wherever he sits, and the places to the right and the left are reckoned from that.

 

그래서 우냐 좌냐 하는 것은 선택하라는 한 형태요, 그래서 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To go to the right or the left, was therefore a form of offering the choice by which there was signified separation.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9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속뜻)

주님의 모든 선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이때 겉 사람 안에 이 흐름을 막는 일체의 것, 곧, 주님의 선과 함께 할 수 없는 악이 있으면, 즉, 활동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선이 내 생활 속에 나타나게 하고 싶으면 나는 악에서 물러나야 하며, 악이 내 안에서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게 해야 합니다.

 

※ 주님 말고는 그 어떤 사람도 자기 안에 한번 자리한 악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천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악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게 할 수는 있습니다. 내가 그때마다 꾹꾹 누르거나 그때마다 물러나 악이 내 안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이 내 삶에 나타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28(D1)-주일예배(2243, AC.1579-1582, 창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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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DA76AAMY4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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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8(D1)-제9권48호통431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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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이야기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까지도 이어지는 걸까?’ 1편입니다. 쓰다보니 분량이 많아져 할 수 없이 1, 2편 둘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전에 한번 다룬 것 같아 찾아보니 지난 8월 3일에 간략하게 다루었네요 ^^ 오늘은 원래 생각해 둔 다른 주제가 있었는데, 이번 주, 친인척 부고(訃告) 소식 및 저희 친형님의 25주기 기일도 찾아와 고민하다가 이 주제로 변경했습니다.

 

이 주제를 입체적으로 살필 수 있으려면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먼저 좀 선행학습을 해야 합니다.

 

- 사후(死後), 영이 된다는 것

- 영의 외면과 내면

- 천국을 이루는 수많은 공동체

- 천국의 결혼

- 부모와 자녀의 영적 의미

- 천국과 지상의 상응

- 천국을 이루는 주님의 신성

 

등등...

 

네, 그만큼 쉬운 주제가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그렇다고, 이 주제에 대한 답이 꼭 무슨 저런 걸 다 알고 열심히 추론해야만 알 수 있는, 그런 건 아닙니다. 우리가 사후 천국에 가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 이 지상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답조차도 그걸 이해하려면 위와 같은 사전 이해들이 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은 지난 8월 3일, 나눈 글의 시작 부분입니다.

 

...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까마득한 조상을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하나? 또 나중에,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까마득한 후손이 찾아와 나한테 인사를 하게 되나?’...

 

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비천적(非天的), 비영적(非靈的)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천국을 무슨 이 세상의 연장이요, 확장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

 

답부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상 혈연관계는 지상에서 끝, 천국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천국에선 전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입니다.

 

다음과 같은 순서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임종 및 깨어남

② 영의 외면(exteriors)의 상태변화

③ 영의 내면(interiors)의 상태변화

④ 천국 올라가기 전 오리엔테이션

⑤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

⑥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

 

자, 그럼 먼저, ① 임종 및 깨어남입니다.

 

임종(臨終)은 말 그대로 ‘죽음을 맞이함’입니다. 산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겠지만, 천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참 영의 깨어남’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가족들은 슬피 울고 있지만, 영계에서는 마치 신생아실의 돕는 간호사들처럼 천사들의 극진한 돌봄이 시작됩니다.

 

주님은 신참 영들이 깨어날 때, 마치 지상 신생아 무균실 환경처럼 일체 악한 영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제일 먼저 가장 높은 천사들인 삼층천 내적 천사들을 보내십니다. 이 천적 천사들이 오면 어떤 향기가 진동하는데요, 이 향기로 인해 일체 악한 영들의 접근이 금지됩니다.

 

세간, 가령, 호스피스 등에 종사하시는 분들을 통해 임종을 앞둔 분들의 경우, 무슨 저승사자를 보시곤 한다는 말들을 듣는데요,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분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이 본 삼층천 천사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

 

이 ‘깨어남’(resuscitation, 소생, 부활)의 과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또 많지만... 네, 하여튼 영계에서 막 깨어나는 신참 영은 천적, 영적 천사들의 도움과 보살핌으로 이후 영계에서 첫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다음은, ② 영의 외면(exteriors)의 상태변화입니다.

 

’하면 그냥 ‘’이지 무슨 ‘영의 외면, 내면’이 있다 하나 어리둥절하시지요? ^^ ‘영의 외면’이란 다름 아닌, ‘영의 내면’과 육체(肉, body, 살과 뼈로 된) 사이에서 둘을 연결시켜 주는, 영의 바깥, 겉 부분을 말합니다.

 

우리의 이 살과 뼈로 된 몸은 사실은 우리의 영이 입고 있는 옷입니다. 옷 자체에 무슨 생명이 없듯 사실 우리의 이 몸은 영과 분리된 후엔 그냥 물질일 뿐이어서 바로 썩고 부패하지요. 우리의 모든 기억과 경험, 감각과 감정 중에서, ‘영의 내면’, 즉, 속 사람(internal man)에 속하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또 몸은 아닌, 그런 일체가 바로 이 ‘영의 외면’에 속합니다. ‘영의 내면’에 대해서는 요 바로 다음인 ③번 항목에서 다루겠습니다.

 

영은 사후 몇 차례의 상태변화를 겪으면서 천국, 또는 지옥 갈 준비를 하게 되는데요, 그 첫 번째 상태변화가 바로 이 ‘영의 외면’의 상태변화입니다.

 

영의 외면’이 바로 저런 거여서 사후 신참 영들의 모습은 임종 직전 모습, 즉, 생전 모습과 거의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 외면의 상태에서는 생전에 알던 가족과 친지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생각하던 모습이 아직은 남아있어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무척 반가워들 하지요. 모든 게 낯설고 어리둥절한 신참 영들을 이들 고참들(?)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구경도 시켜주고 이런저런 걸 알려줍니다.

 

여기서 잠깐, 사람 안의 ‘천국’이 무엇이며, 또 ‘지옥’이 무엇인지를 잠깐 생각해야 합니다.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 된 상태가 천국’이며, 이런 사람은 천국의 해당 공동체로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안에서 ‘악과 거짓이 하나 된 상태가 지옥’이며, 이 사람 역시 지옥의 해당 공동체로 떨어집니다.

 

여기서 ‘해당 공동체’라는 것은, 사람은 생전에 이미 그 사람의 ‘중심 사랑’에 의해서, 자기는 모르지만, 그 영은 천국 또는 지옥의 어느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 ‘중심 사랑’이란, 그가 무엇을 하든 결국 그의 모든 행위의 근본 동기가 되는 하나의 사랑이 있는데, 이 사랑을 가리켜 ‘중심 사랑’(ruling love)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심 사랑’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면 천국으로,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상태변화 때, 일어나는 가장 중요 포인트는, 이 영의 ‘중심 사랑’을 통해 형성된 ‘영의 내면’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즉, 선과 진리의 하나 됨, 또는 악과 거짓의 하나 됨이 진행되는 동안, 천국에 갈 사람한테서는 천국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악과 거짓을, 반면, 지옥 갈 사람한테서는 역시 지옥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과 진리를 각각 떼어내는 일이 이때 일어납니다. 이 과정이 진행되면서, 이 영의 모습은 점점 달라지며, 이 첫 번째 과정이 마칠 즈음이면, 즉, 그의 ‘영의 내면’이 본모습을 드러내면, 그 모습은 ‘영의 외면’일 때와 너무도 달라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 영의 외면은 휴면 상태로 들어갑니다.

 

주님의 허락으로 영안이 열려 다른 사람들의 영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어떤 할머니는 등도 굽고, 흰머리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참 볼품없는 외모이지만, 그 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인 반면, 어떤 젊은 여자는 정말 많은 남자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매혹적이지만 그 영은 거의 괴물 수준이더라라고 합니다. 이때 이분들이 본 저들의 영은 사실은 저들의 ‘영의 내면’, 곧, 본모습을 본 것입니다.

 

영의 외면, 내면’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내키지는 않지만 어떤 사정이 있어 누굴 만나거나 할 때, 예의 상, 얼굴이나 태도에 내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나 표정, 행동을 하거나 정 그럴 수 없다면, 그저 무난하게라도 있다 옵니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있고, 도덕과 윤리, 상식과 정서라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 속이 들키지 않게 가려주는 것, 이것이 바로 ‘영의 외면’이며, 그렇다면, ‘영의 내면’은 아무도 안 볼 때, 누구 신경 쓸 일도 없고, 눈치 볼 것도 없을 때, 그때 나타나는 내 본 모습, 그것이 ‘영의 내면’입니다. 즉,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 그것이 ‘영의 내면’입니다.

 

다음 순서들인,

 

③ 영의 내면(interiors)의 상태변화

④ 천국 올라가기 전 오리엔테이션

⑤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

⑥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

 

는 2편으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미니 결론을 미리 좀 말씀드리자면...

 

천국에서는 지상과 같은 ‘생육하고 번성함’이 없고, 대신 ‘주님의 선과 진리의 생겨남’이 있습니다. 지상은 천국의 상응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혈연, 혈육도 이런 관점,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자녀에 대한, 부모에 대한,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탈선하거나 오버하지 않을 수 있으며,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을 통해 ‘주님 사랑’이라는 ‘중심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 사랑은 자녀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 사랑’이며, 부모 사랑 또한 부모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 사랑’이며, 남편 또는 아내에 대한 사랑도 남편 또는 아내의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 ‘주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26(D6)-천국이야기(5),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까지도 이어지는 걸까?(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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