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이 왜 주님께 기쁜 일일까요? 그 이유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와 어린아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우리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늘 한결같지 않다는 겁니다.
어느 때는 교만하여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고, 어느 때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이 됩니다. 전자의 상태일 때는 시험이 오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와 주님께 매달리면 성령이 다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발에 묻은 먼지도 떨어버리라고 하십니다. 발에 묻은 먼지는 악한 사람과 상대할 때, 그로부터 우리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악을 뜻합니다. 발은 겉 사람을 뜻하고, 먼지는 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에게 진실과 선의를 가지고 대하는데,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불쾌감, 또는 실망감을 느끼는데요, 이를테면,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발에 묻는 먼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선하고 순수한 사람들은 그런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상대에게 계속 선으로 대합니다...
...천국은 진리가 신적 질서를 따라 아름답고 질서정연하게 충만하다고 합니다. 천사들은 그런 신적 질서의 나라에서 사는데요, 지금 우리가 이 교리 공부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삶을 미리 살고자 연습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질서를 미리 이 지상에서 충분히 익히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도 조금씩 천국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이것으로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를 마치고, 다음은 5강, ‘신적 본질 그 자체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를 다루겠습니다.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1)’ (DLW.7, 2023/6/16)
‘하나님에 관하여’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의 메인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신(神, the Divine),즉 하나님(God)은 비록 편재(遍在,omnipresent)하셔서지상 모든 사람과 천국 모든 천사,그리고 천국 아래 모든 영과 함께하시지만,그러나 공간(空間, space)안에 계시는 건 아니라는 이 놀라운 사실은 단순한 자연적 사고(思考, a merely natural idea)로는 이해할 수 없고,오직 영적 사고(a spiritual idea)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자연적 사고로는 할 수 없는 이유는,자연적 사고는 공간과 관련되기 때문인데,이 공간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다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세상에 있는 모든 크고 작은 것들은 다 공간을 차지하는데,모든 길이,넓이,높이를 갖는 것들은 공간을 차지합니다.즉 모든 측정,모양 및 형태를 가진 것들은 다 공간이라는 것을 차지하지요.이것이 바로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사고로는 하나님의 편재를 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 하는 걸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하지만 그가 만일 영적 빛에 속한 것에 마음을 열면(admit into it something of spiritual light),이때는 비록 그가 자연적 사고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걸 이해할 수 있는데요,이런 이유로,무엇이든 영적인 걸 먼저 말하고,그걸 가지고 이어서 나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영적 사고는 공간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는 게 없고(Spiritual idea derives nothing from space),대신 모든 걸 상태(狀態, state)로부터 나오게 합니다.상태라는 것은 사랑,생명,지혜,애정(affections) 및 거기서 나오는 기쁨 등,일반적으로 선과 진리의 속성입니다.즉 이런 것들을 다 상태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이런 정말 영적인 것들에 대한 사고(An idea of these things which is truly spiritual)는 공간하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이 사고는 공간적 사고(the ideas of space)보다 높아서 마치 하늘이 땅을 내려다보듯 그걸 내려다보는데요,이 영적 사고는 이렇게 공간적 사고보다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천사들과 영들 역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보기 때문에,그리고 공간이라는 게 없으면 그 대상(objects)을 볼 수 없기 때문에,그래서 비록 천사들과 영들이 있는 영계에 지상의 공간처럼 보이는 공간이 나타나더라도,그것은 실제 공간이 아니고 단지 그렇게 보이는 외관(appearances)일 뿐입니다.이는 지상의 경우처럼 고정되거나 일정하게 정해진 게 아니기 때문인데,영계의 공간은 길어지거나 짧아질 수 있고,바뀌거나 다양하게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영계에서는 공간이라는 걸 이곳 자연계에서처럼 측량이라는 걸 해서 정할 수가 없는데요, 이런 건 그 어떤 자연적 사고로도(by any natural idea)이해할 수 없고, 오직 영적으로만(only by a spiritual idea)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영적으로 공간 간 거리(The spiritual idea of distances of space)는 선 간 거리(distances of good)나 진리 간 거리(distances of truth)와 같은데, 이는 선과 진리의 상태에 따른 친밀한 정도와 닮은 정도(affinities and likenesses)입니다.(DLW.7) That the Divine, that is, God, is not in space, although omnipresent and with every man in the world, and with every angel in heaven, and with every spirit under heaven, cannot be comprehended by a merely natural idea, but it can by a spiritual idea. It cannot be comprehended by a natural idea, because in the natural idea there is space; since it is formed out of such things as are in the world, and in each and all of these, as seen by the eye, there is space. In the world, everything great and small is of space; everything long, broad, and high is of space; in short, every measure, figure, and form is of space. This is why it has been said that it cannot be comprehended by a merely natural idea that the Divine is not in space, when it is said that the Divine is everywhere. Still, by natural thought, a man may comprehend this, if only he admit into it something of spiritual light. For this reason something shall first be said about spiritual idea, and thought therefrom. Spiritual idea derives nothing from space, but it derives its all from state. State is predicated of love, of life, of wisdom, of affections, of joys therefrom; in general, of good and of truth. An idea of these things which is truly spiritual has nothing in common with space; it is higher and looks down upon the ideas of space which are under it as heaven looks down upon the earth. But since angels and spirits see with eyes, just as men in the world do, and since objects cannot be seen except in space, therefore in the spiritual world where angels and spirits are, there appear to be spaces like the spaces on earth; yet they are not spaces, but appearances, since they are not fixed and constant, as spaces are on earth; for they can be lengthened or shortened; they can be changed or varied. Thus because they cannot be determined in that world by measure, they cannot be comprehended there by any natural idea, but only by a spiritual idea. The spiritual idea of distances of space is the same as of distances of good or distances of truth, which are affinities and likenesses according to states of goodness and truth. (DLW.7)
이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는데요, 먼저 사람의 사고가 그저 자연적이기만 하면,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그러나 공간 안에 계시는 건 아니라는 걸 도저히 이해 못 한다는 것과, 둘째, 그러나 천사들과 영들은 반대로 아주 명료하게 이해한다는 것, 셋째, 그 결과, 사람 역시 그가 영적 빛에 속한 것에 마음을 열면, 즉 영적 사고를 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생각하는 주체가 육(body)이 아니라 영(spirit)이기 때문이며, 영적 사고라는 것이 자연적이지가 않고 영적이기 때문입니다.(DLW.8) From this it may be seen that man is unable, by a merely natural idea, to comprehend that the Divine is everywhere, and yet not in space; but that angels and spirits comprehend this clearly; consequently that a man also may, provided he admits into his thought something of spiritual light; and this for the reason that it is not his body that thinks, but his spirit, thus not his natural, but his spiritual. (DLW.8)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걸 이해 못하는데요, 그 이유는 자연에 대한 그들의 사랑, 즉 그들의 사고를 자연에서 영적 빛으로 높이기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로지 공간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공간 안에서만 하는 건 자연의 확장(the expanse of nature)에 대해서 하는 것과 같은 건데요, 예를 들면, 하나님의 편재에 대해 말하면, ‘아, 하나님은 우주만큼 크신 분인가 보다’로 이해하는, 그런 식이지요.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시는 게 아니라는 이 사실이 먼저 전제되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즉 이런 사실에 대한 지식과 나름의 퍼셉션(perception, 지각)없이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 곧 사랑과 지혜에 관해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며, 그래서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 편재하심, 전지하심, 전능하심, 무한하심과 영원하심(divine providence, omnipresence, omniscience, omnipotence, infinity and eternity)등 연이어 다루게 될 주제들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DLW.9) But many fail to comprehend this because of their love of the natural, which makes them unwilling to raise the thoughts of their understanding above the natural into spiritual light; and those who are unwilling to do this can think only from space, even concerning God; and to think according to space concerning God is to think concerning the expanse of nature. This has to be premised, because without a knowledge and some perception that the Divine is not in space, nothing can be understood about the Divine life, which is love and wisdom, of which subjects this volume treats; and hence little, if anything, about divine providence, omnipresence, omniscience, omnipotence, infinity and eternity, which will be treated of in succession. (DLW.9)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1장, ‘창조주’(The Creator)의 세 번째 주제,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7, 8, 9번 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비록 천사들과 영들이 있는 영계에 지상의 공간처럼 보이는 공간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실제 공간이 아니고 단지 그렇게 보이는 외관(appearances)일 뿐입니다’
다음은 오늘 메인 글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먼저 좀 읽어야 하는 그런 글들인데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19장, ‘천국 안의 표상과 외관’(Representatives and Appearances in Heaven), 그리고 22장, ‘천국의 공간’(Space in Heaven)에서 부분 발췌했습니다만 꼭 각 장 전체를 다 읽어보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먼저 ‘외관’(appearances)입니다.
천사들의 내면에 상응하는 모든 것은 그들의 내면을 그대로 그려내기 때문에 ‘표상’(表象, representatives)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그것이 천사들 내면의 각 상태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외관’(外觀, appearances)이라고 불린다. 그렇게 불리긴 해도 사실 천사들 눈에 보이는 것과 그들의 여타 감각에 지각되는 것은 우리가 지상에서 지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생하며, 오히려 더 뚜렷하고 명료하며 사실적이다.(HH.175)
천국 안에 사물이 생기는 방식은 지상에 물질이 생기는 방식과 다르다. 천국의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오며, 천사들의 내면에 상응하여 형성된다. 천사들에게는 외면과 내면이 있다. 그들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과 신앙에, 따라서 의지와 사고력에 관계되어 있다. 의지와 사고력은 사랑과 신앙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외면은 내면에 상응한다. 외면적인 것이 내면에 상응한다는 것은 위 12장,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와 13장, ‘천국은 지상의 모든 것과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the Earth)에서 설명했다. 이러한 사실은 천국의 열과 빛에 대한 기록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즉 천사들은 그들의 사랑의 속성에 상응하는 열을, 그들 지혜의 속성에 상응하는 빛을 지니는 것이다. (cf. 15장, ‘천국의 빛과 열’(Light and Heat in Heaven))천사들의 감각에 느껴지는 다른 모든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HH.173)
다음은 ‘공간’(空間, space)입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이 세상과 똑같이 장소와 공간 안에 위치한듯 보인다. 그러나 천사들은 장소나 공간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 (HH.191)
영계에서의 장소변화는 모두 내면 상태의 변화(changes of state of the interiors)에 따라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장소변화는 바로 상태변화이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나는 주님에 의해 천국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곳을 여행한 것은 나의 영혼이었으며, 내 몸은 지상의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천사들의 모든 이동도 이와 같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거리가 없으며, 거리가 없으므로 공간도 없다. 다만 공간 대신 상태와 그 변화가 있다.(HH.192)
장소변화가 이런 것이기 때문에, 가까운 것은 내면 상태가 비슷한 것이고, 먼 것은 내면 상태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가까이 있는 이들은 비슷한 상태에 있는 이들이고, 떨어져 있는 이들은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이들이다. 천국에서의 공간이란 오직 내면 상태에 상응하는 것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the external conditions corresponding to the internal states)이다. 세 천국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 그 각 천국 내의 공동체들 사이와 그 안의 개인들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역시 같은 원리로 지옥과 천국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지옥은 천국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HH.193)
이 모든 것으로 보아 천국에도 지상과 같이 공간이 있지만 그것이 공간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상태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천국의 공간은 이 세상 척도로 잴 수 없으며, 오직 그곳 천사들의 내면 상태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도 알 수 있다.(HH.198)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주께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사랑과 신앙의 정도에 맞게 임재하시기 때문이며, 주의 임재에 따라 모든 것이 가깝고 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의 임재가 천국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의 임재하심에 따라 천사들은 지혜가 생기고, 그들의 생각이 확산되며, 생각의 확산에 의해 천국의 모두는 서로 교통한다. 한마디로, 이로 인해 그들은 사람이 자연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HH.198)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다시 오늘의 메인 글들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2. ‘천사들과 영들 역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보기 때문에’
사람이 아직 지상에 있을 동안은 그 영은 육체라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만, 사후, 즉 육체의 옷을 벗은 후에는, 이번에는 영체라는 옷을 입게 되지요. 육체에 눈이 있듯, 영체에도 영적 눈이 있습니다. 천사들과 영들은 자신의 영체에 속한 눈으로 천국 모든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천사들과 영들은 반대로 아주 명료하게 이해한다는 것, 그 결과, 사람 역시 그가 영적 빛에 속한 것에 마음을 열면, 즉 영적 사고를 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5:45) 하신 주님 말씀처럼, 주님 비추시는 사랑의 빛, 영적 빛에는 무슨 조건 같은 거 없습니다. 그냥 내가 마음을 열고 마치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듯 주님을 바라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는 입류(入流, influx)에 의해 서서히 내 안에서 영적 사고가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나의 내면의 첫 번째 단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4. ‘퍼셉션’(perception, 지각)
다음은 퍼셉션에 대한 설명입니다.
오늘날은 퍼셉션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퍼셉션은 일종의 무슨 내적 느낌(a certain internal sensation)같은 건데요,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으며, 어떤 게 선인지 진리인지를 아는 것으로, 태고 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가장 잘 알려졌던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것은 천사들한테 있어 가장 퍼펙트(perfect)해서, 그들은 이것으로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무엇이고,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은 무엇인지, 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상대방이 어떤 퀄러티(quality)의 소유자인지를 단지 그의 접근과 그가 가진 생각 한 토막으로 알아차리며 관련 지식을 얻습니다. 영적 인간은 퍼셉션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지요. 많은 사람이 양심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며, 그러니 퍼셉션에 대해서는 더 모릅니다.(AC.104)
영어 ‘perception’을 ‘지각’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퍼셉션’으로 적는 이유는, 우리말 ‘지각’ 하나로 다 담을 수 없는 더욱 많은 의미와 뉘앙스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용어가 몇 개 더 있는데요, 예를 들면, ‘affection’이라든가 ‘charity’같은 것입니다. 각각 ‘애정’, ‘인애’ 등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저는 좀 망설여져서 거의 대부분, ‘어펙션’, ‘체어리티’로 그대로 옮기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위 104번 글을 통해 살짝 느끼셨겠지만 이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엔 사라지고 없는 영적 능력 내지는 통찰력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 내면이 열린 사람들한테는 이 퍼셉션이 나타나고 있어 특히 주님의 아르카나에 대한 이해에 없어서는 안 될 통찰력이요, 빛이지 싶습니다. 제가 매일 이 컴펜디움 작업 때마다 맨 먼저 하는 기도가 바로 이 퍼셉션 기도, 곧 주님의 빛 비추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랍니다.
오늘 작업은 그 분량이 과연 역대급입니다. 이렇게 장편의 내용을 나누는 게 과연 유익이 있을까, 괜히 힘들게 해드리는 건 아닐까 좀 고민도 됩니다...
주님은 천국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천국보다 크셔서 천국 밖, 즉 피조 세계 밖에 계십니다. 그러니 더더욱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지요. 주님이 천국에 사람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건, 아까 살핀 것처럼 ‘표상’, ‘외관’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주님한테서나 주님의 말씀한테서나 주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2)’ (AC.8705, 2023/6/15)
‘하나님에 관하여’ 3강,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 그 두 번째, 아래는 오늘의 메인 본문입니다.
AC.8705
신인(神人)에 대한 무슨 신관(神觀, the idea of a Divine Man)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 하나님(the Divine Itself)을 생각할 때, 그런 사람의 신관은 확실하지가 않으며, 그런 불확실한 신관은 사실 신관이 아닙니다. 또 무한하거나 무한하지는 않은데 희미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우주로부터 신관을 형성하는 사람의 경우도, 그런 신관은 자연 숭배자들의 신관(the idea of the worshipers of nature)과 결합, 결국 자연으로 귀결되는데, 그래서 이 역시 전혀 신관 아닌 게 되는데요,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올바른 신관이 아닌 경우, 하나님과 신앙을 통한, 혹은 사랑을 통한 어떠한 결합도 없다는 게 분명합니다. 모든 결합은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며, 그 결합의 효력은 그 대상의 퀄러티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을 그 신적 인성 측면에서(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중재자’(a Mediator), ‘중보자’(an Intercessor)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중재, 중보하시는 대상은 주님 자신(Himself)이십니다. 하나님 자체(the Divine Itself)는 그 어떤 신관으로도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If anyone without the idea of a Divine Man thinks of the Divine Itself, he thinks indeterminately, and an indeterminate idea is no idea; or he conceives an idea of the Divine from the visible universe without an end, or with an end in obscurity, which idea conjoins itself with the idea of the worshipers of nature, and also falls into nature, and thus becomes no idea.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there would not be any conjunction with the Divine through faith, nor through love. All conjunction requires an object, and the conjunction effected is according to the quality of the object. For this reason 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is called “a Mediator” and “an Intercessor,” but He mediates and intercedes with Himself. That the Divine Itself cannot be apprehended by any idea, is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John: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No one hath ever seen God; the only begotten Son, who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set Him forth (John 1:18).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5:37) Ye have never heard the voice of the Father, nor seen His shape (John 5: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자신들을 기준으로, 혹은 육(肉, the flesh)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해 불확실한, 즉 무슨 확실한 관념이 없는 반면, 자신이나 육이 아닌,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관념, 즉 자신들에게 사람 모습의 신관(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the Divine)을 생각하고 있으며, 고대의 현자들(the wise ancients)역시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그들은 자기들한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the Divine Itself)으로 나타나실 때, 이런 이유로 신인(神人, a Divine Man), 즉 사람 모습을 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AC.8705) Nevertheless, what is remarkable, all who think from themselves or from the flesh about God, think of Him indeterminately, that is without any determinate idea; whereas they who think of God not from themselves, nor from the flesh, but from the spirit, think about Him determinately, that is, they present to themselves 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 So the angels in heaven think of the Divine, and so the wise ancients thought, to whom also, when the Divine Itself appeared, it appeared as a Divine Man; (AC.8705)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The heavenly arcana contained in the Holy Scripture or Word of the Lord unfolded, beginning with the book of Genesis, 1749-1756) 출애굽기 18장,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스라엘의 모든 송사를 모세 혼자 감당하느라 피차 고생하는 걸 보고 지혜로운 권면을 하는 장면인데요,
19절,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네게 방침을 가르치리니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Now hear my voice, I will counsel thee, and God shall be with thee; be thou for the people with God, and bring thou the words unto God.)’ 중 ‘너는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에 대한 라틴 표현인 ‘Deus(God)’ 대신 ‘Divinum(The Divine)’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아마도 deus라는 단어에 내포된, 로마 신화의 다신 숭배적 뉘앙스를 피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라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라틴 버전을 우리말로 옮긴 김은경 교수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2. 오늘 메인 본문의,
‘이런 이유로, 주님을 그 신적 인성 측면에서(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중재자’(a Mediator), ‘중보자’(an Intercessor)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중재, 중보하시는 대상은 주님 자신(Himself)이십니다.’
자연계의 인간은 영계와 자연계로 된 피조세계 밖에 계신 주님과 직접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습니다. 둘 사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이 둘 사이를 잇는 그 무엇으로 오시는 방법뿐이며, 그것이 바로 생육신(生肉身) 하신 주님이시고, 나중에 성육신(聖肉身), 곧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이 되신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말하는 ‘중재자’이며, ‘중보자’이며, 한 분 주님 안에서 주님의 겉인 신적 인성과 주님의 속인 신성, 곧 여호와 하나님 간 커뮤니케이션이 곧 ‘중재’요, ‘중보’인 것입니다.
3. ‘하나님 자신 또는 신성 자체(the Divine Itself)는 그 어떤 신관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아래는 주석 ‘Arcana Coelestia’ 8443번 글인데요, 이 글로 위 표현이 가리키는 바를 살짝 엿볼 수 있지 싶어 인용합니다.
신적 진리(Truth Divine)는 하나가 아닌, 여러 단계(degree, 등급)로 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 두 단계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proceeds immediately from the Lord) 진리인데, 이는 천사들의 이해를 초월(above the angelic understanding)합니다. 셋째 단계에 있는 신적 진리는 가장 내적 천국, 즉 삼층천(the inmost or third heaven)에 있는 진리인데, 이는 인간은 전혀 깨달을 수 없는(cannot in the least be apprehended by) 진리입니다. 넷째 단계의 신적 진리는 중간, 즉 이층천(in the middle or second heaven)에 있는 진리인데, 이 역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neither is this intelligible to) 진리입니다. 다섯째 단계의 신적 진리는 가장 바깥, 즉 일층천(in the ultimate or first heaven)에 있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빛을 받은 사람은 어느 정도 지각할 수 있는(can be perceived in some small measure by man provided he is enlightened) 진리입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그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인간의 언어(human words)로는 표현할 수 없지요. 그러나 만일 인간의 머릿속 아이디어로 떠오르게 되면, ‘아, 그 경우가 이런 거구나!’ 지각, 믿는 역량이 생기게 되는 그런 진리입니다. 여섯 째, 마지막 단계의 신적 진리, 이 진리가 바로 인간에게 맞는, 인간이 수용, 지각할 수 있는(with man, accommodated to his perception) 진리이며, 그래서 말씀의 겉 글자의 뜻이 이것으로 된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구름’(cloud)이 표상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구름 속 영광’(the glory in the cloud)의 표상 역시 바로 이 내적 진리들(the interior truths)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종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신 이유입니다. (AC.8443)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24:15-16)
4.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관념, 즉 자신들에게 사람 모습의 신관(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네, 이것이 오늘의 결론이겠습니다.
이것으로 3강,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를 마치고, 다음은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시지 않는다’(God is not in Space)를 다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