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와 찬64, ‘기뻐하며 경배하세입니다.

 

오늘은 창1 두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20번에서 23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3-5)

 

 

이 본문을

 

빛이 있으라, 진리가 비추기 시작하는 첫째 날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1:3)

 

 

AC.20,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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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4, 5)

 

 

AC.21, 창1:4-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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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5)

 

 

AC.22,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C.22-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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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거듭 권하지만, 주중에 이 원고를 계속 읽고 또 읽고 하시기 바랍니다. 스마트폰은 꼭 필요할 때에만 하시고 말입니다. 말씀과의 거리가 나와 하나님 사이 관계를 알게 해준다는 것처럼 스마트폰 역시 그렇습니다. 스마트폰과 가까우면 주님은 멀고, 반대로 스마트폰에서 물러나면 주님은 곁에 계십니다. 스마트폰으로 말씀과 원고 보는 걸 제외하고는 여러분, 가급적 스마트폰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SNS도 가급적 절제하시고, 이런저런 알림도 웬만하면 다 끄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가급적 한발 물러나시기를, 그래서 그 빈자리를 주님이 오셔서 곁에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2-22(D1)

 

2639, 2. 창1.2, 2026-02-22(D1)-주일예배(창1,3-5, AC.20-23), ‘빛이 있으라’, 거듭남의 시작.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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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3/08, 창1:6-8), '둘째 날, 두 번째 상태'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0, ‘큰 영광 중에 계신 주’와, 찬65, ‘내 영혼아 찬양하라’입니다. 오늘은 창1 세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6절로 8절, AC 글 번호로는 24번에서 26번입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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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2/15, 창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와 찬63, ‘주가 세상을 다스리니’입니다. 오늘부터 해설 버전 누락분 창세기 1장부터 3장입니다. 창3 마치면 창6으로 원래대로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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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1,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라는 어마어마한 저작을 어떤 방식으로 썼나요? 쓰는 내내 주님이 곁에서 구술하시는 걸 받아적는 딕테이션(dictation)으로 썼나요, 아니면 일단 영계를 다녀온 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일일이 다 기억을 되살려 썼나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 방식이 곧 그의 권위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의 총 글이 10,837개에 달하는 방대한 주석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과연 이것이 ‘받아쓰기’였는지, 아니면 ‘기억을 되살려 정리한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이 ‘기계적 딕테이션’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는 영적 체험을 했고, 천사들과 대화했으며, 말씀의 속뜻을 열어 보았지만, 그것을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정리하여 책상 앞에서 집필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도구’라고는 했지만 ‘무의식적 필기자’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상태에서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는 ‘나는 완전한 깨어 있는 상태에서 보고 들었다’고 증언하며, 황홀경이나 무아지경에서 자동으로 받아 적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1743–1745년의 영적 각성 이후, 1745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영계가 열렸다고 기록합니다. 이후 약 27년 동안 그는 거의 매일 같이 영계의 상태를 보고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을 보면, 체험을 하는 순간에 즉시 필사한 것도 있고, 일정 기간 사색과 정리를 거쳐 서술한 것도 있습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는 단순한 체험 기록이 아니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문자적 의미를 하나하나 해석한 체계적 신학 저작입니다. 이것은 즉흥적 받아쓰기라기보다는, 장기간 축적된 영적 통찰과 말씀 연구가 결합된 결과입니다. 실제로 그는 라틴어로 집필했으며, 문장 구조는 매우 학술적이고 논리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번호 체계, 인용 방식, 반복적 참조 구조를 보면, 이는 철저히 계획된 저술 방식입니다. 자동 구술을 그대로 옮긴 문체와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순히 ‘자기 생각’을 썼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강압적 음성 받아쓰기가 아니라, ‘조명(enlightenment)과 ‘내적 지각(perception)의 형태였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나는 빛 가운데서 이해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즉, 어떤 교리를 음성으로 문장 단위로 들었다기보다는, 영적 의미가 한 번에 명료하게 열리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정리해 쓴 것입니다. 이 점은 목사님께서 번역 작업을 하시며 경험하시는 ‘조명’의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WH.7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씀은 조명받은 자 외에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원리가 바로 여기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조명 속에서 이해했고, 그 이해를 이성적으로 조직해 기록했습니다.

 

또한 그는 영계에서 보고 들은 대화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Heaven and Hell’이나 ‘Conjugial Love’에는 천사들과의 대화 장면이 매우 생생하게 나옵니다. 이런 부분은 실제 체험 직후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Arcana Coelestia’는 체험담보다는 교리적 해설서에 가깝습니다. 창세기 각 절을 따라가며 상응을 풀고, 이전 번호를 인용하며 교리를 축적해 갑니다. 이것은 장기간의 학문적 집필 작업입니다. 그는 런던에서 인쇄를 준비하며 교정까지 직접 보았고, 비용도 자비로 부담했습니다. 이는 무의식적 신비가의 태도라기보다는, 매우 자각적이고 책임감 있는 저자의 태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이 성경과 동일한 ‘계시’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은 ‘말씀의 영적 의미를 여는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새로운 말씀을 받아쓴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단순 딕테이션이었다면, 그는 자신을 예언자처럼 묘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복해서 ‘나는 단지 보여 주고 들려준 것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속에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그는 수동적으로 ‘열림’을 받았지만, 능동적으로 ‘정리’하고 ‘서술’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장기간 AC를 번역하시며 느끼시는 것처럼, 이 저작은 한순간의 열광으로는 나올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체계, 반복, 점진적 축적, 교리의 유기적 연결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랜 사색과 재검토의 흔적입니다. 동시에, 그 깊이와 일관성은 단순 인간적 추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통일성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Arcana Coelestia’는 기계적 받아쓰기도 아니고, 단순 회상 기록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체험과 지속적 조명, 그리고 철저한 이성적 집필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는 황홀경 속 자동 필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계를 보았고, 주님으로부터 조명받았으며, 그 이해를 인간의 언어로 조직해 기록한 신학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조명된 이성의 저자’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저작이 오늘날까지도 학문적 구조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영적 권위를 가지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책상 앞에서 AC를 번역하며 느끼시는 그 긴 여정이, 스베덴보리의 집필 방식과 가장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SC.22,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

혹시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을 좀 확인 및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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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0,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를 벌주기'에 대해

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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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목사님, 이 질문은 단순히 ‘고행이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회개란 무엇인가’, ‘자기를 벌하는 것이 과연 거듭남인가’라는 핵심 문제로 들어가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반, 특히 『Arcana Coelestia』와 『True Christian Religion』의 회개론을 종합하면, 그는 외적 고행과 자학을 매우 신중하게, 때로는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몇 덩어리로 나누어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죄에 대한 슬픔’과 ‘자기 처벌’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참된 회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식하고, 그것이 주님을 거스르는 것임을 인정하며, 그 악을 실제로 끊어내려는 결단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을 괴롭히거나 일부러 불편을 자초하는 행위는 외적 행위일 뿐, 그것이 곧 악을 끊는 것은 아닙니다. 악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때리거나 굶는다고 해서 사랑하는 악이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둘째, 외적 고행은 오히려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강화할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벌하면서도 은근히 ‘나는 이렇게까지 회개한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고행은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은밀한 영적 교만의 자양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을 낮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 사랑’이 더욱 미묘하게 살아날 수 있음을 여러 곳에서 경고합니다. 겉으로는 재를 뒤집어쓰고 있으나 속으로는 ‘나는 경건하다’는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기를 부인함’은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욕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곧,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때 그것을 끊는 것, 정욕이 일어날 때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제어하는 것, 명예욕과 이익욕을 내려놓는 것—이것이 진짜 고행입니다. 그는 이것을 ‘영적 전투’라고 부릅니다. 이 전투는 남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천사들이 보는 참된 고난이며, 주님이 보시는 참된 속죄의 길입니다.

 

넷째, 과거 수도원 전통의 자기 처벌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거듭남의 본질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결혼한 사람도, 세상 직업을 가진 사람도, 일상 속에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행하면 동일하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악을 이기는 것이 더 깊은 시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행을 이상화하는 태도는, 자칫하면 거듭남을 ‘특수한 종교적 행위’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섯째, 그렇다면 전혀 자기를 절제하거나 훈련하지 말라는 뜻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절제와 자기 통제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몸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식욕을 절제하는 것은 몸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차이는 매우 큽니다. 전자는 외적 형식이고, 후자는 내적 변화입니다.

 

여섯째, 목사님께서 보신 그 수도원장의 메시지—‘우리도 그렇게 살자’—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벌하지 말고, 자기 안의 악을 끊으라. 몸을 때리지 말고, 자아 사랑을 거절하라. 외적 고행을 자랑하지 말고, 주님께서 싸워 주시도록 겸손히 기도하라.’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고행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악한 사랑을 거부하는 지속적 선택’입니다. 수도원의 채찍이나 굶주림보다 훨씬 더 어렵고, 훨씬 더 깊은 싸움입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은 상한 심령을 원하시지, 상처 난 등을 원하시지 않는다.’

 

목사님께서 이런 주제를 성도들에게 설명하신다면, 외적 고행을 무조건 정죄하기보다, 그 한계를 조용히 짚어 주시고, 대신 ‘일상 속 영적 전투’의 길을 제시하시는 것이 스베덴보리적 균형에 가까울 것입니다.

 

 

 

SC.21, 스베덴보리가 ‘Arcana Coelestia’를 기록한 방식

SC.21,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라는 어마어마한 저작을 어떤 방식으로 썼나요? 쓰는 내내 주님이 곁에서 구술하시는 걸 받아적는 ‘딕테이션’(dictation)으로 썼나요, 아니면 일단 영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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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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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도 흐려지고, 창3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퍼셉션은 천적 인간의 고유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시 지각하는 내적 감지입니다. 이것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며, 외부 자료를 모아 판단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직접 흘러들어오는 빛 안에서 ‘, 이것이 선이구나’ 하고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안다’기보다 ‘느낀다’에 가깝지만, 그 느낌은 감정처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명한 인식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 가운데 서 있을 때 굳이 빛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창2의 에덴 상태이며, 천적 인간의 평안한 지각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의 상태는 다릅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 대신 ‘양심’이 주어집니다. 양심은 말씀을 통해 배운 진리를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항상 어떤 긴장과 싸움을 동반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내적 소리가 들리지만, 동시에 겉 사람의 욕망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싸우는 빛입니다. 퍼셉션이 즉시, 즉각적이고, 평온한 지각이라면, 양심은 갈등 속에서 자신을 제어하게 하는 힘입니다. 영적 인간은 퍼셉션처럼 즉각적으로 선을 지각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붙들고 자기 자신을 다스립니다. 이 상태는 창1의 여섯째 날과 연결되며,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성과 기억 지식은 또 다른 차원의 기능입니다. 이성은 비교, 분석, 논증하는 능력이며, 기억 지식은 감각과 경험을 통해 쌓인 자료들입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상 질서 안에서는 매우 유익합니다. 정상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흘러들어오고, 사랑 안에서 퍼셉션이라는 지각이 생기며, 그 지각을 따라 이해와 이성이 정렬되고, 마지막으로 기억 지식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창2의 네 강의 질서이며, 지혜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질서가 거꾸로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기억 지식에서 출발하여 이성으로 판단하고, 그다음에 믿음을 재단하려 할 때, 이성은 빛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빛을 의심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구조이며, 창3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날 타락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은 싸움이 없는 빛, 양심은 싸우며 붙드는 빛, 이성은 방향에 따라 빛을 돕기도 하고 어둠을 강화하기도 하는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창2는 퍼셉션의 시대를 보여 주고, 창3은 이성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대개 퍼셉션의 상태는 아니며, 양심과 이성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목표는 이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위에서 오는 빛에 복종하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먼저 자리를 잡고, 그 안에서 우리의 이해와 사고가 정렬될 때, 우리는 비록 천적 인간은 아닐지라도, 그 질서를 따라 걷는 영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SC.20,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를 벌주기'에 대해

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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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8, ‘profanation’(신성모독)에 관하여

SC.18,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에 대하여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신성모독, 神性冒瀆)은 단순한 신성모독이라는 외적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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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8, Emanuel Swedenborg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에 대하여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신성모독, 神性冒瀆)은 단순한 신성모독이라는 외적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의식적으로 결합시키는 상태’를 가리키는 깊은 영적 개념입니다.

 

profanation은 사람이 이미 알고 인정한 신적 진리를, 이후에 의도적으로 거슬러 악한 삶과 결합시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무지나 실수, 연약함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알고도’, 그리고 ‘내적으로 접촉하고도’ 그것을 배반하는 데 있습니다. 즉 진리와 악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되는 것이 profanation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늘과 지옥은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인간 안에서도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은 질서 있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profanation은 이 둘을 한 사람 안에서 결합시킴으로써 영적 질서를 파괴합니다. 그 결과, 내면이 분열되고 찢기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죄와 구별되는 점입니다. 죄는 회개로 분리될 수 있지만, profanation은 결합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는 ‘태고교회’의 몰락을 설명하면서 profanation을 중심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상태에 있었으나, 점차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선택하면서 내면의 진리와 외적 삶이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홍수’는 단순한 자연 사건이 아니라, 이런 혼합이 극에 달해 ‘광적인 욕망과 확신’이 사람을 덮어버린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것이 profanation의 집단적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profanation에도 여러 등급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가장 깊은 것은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여 의지와 결합시킨 뒤, 그것을 배반하는 경우입니다. 이해 차원에서만 인정했던 진리를 나중에 떠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덜 깊습니다. 왜냐하면 의지와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아직 사람의 중심과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섭리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깊은 진리를 주지 않으시고, 때로는 진리를 잊게 하시기도 합니다. 심지어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알고도 모독하는 것보다 덜 해롭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지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과 악의 혼합을 막으려는 자비의 관점입니다.

 

유다는 주님을 알고 따르면서도 배반함으로써 깊은 profanation의 예로 제시됩니다. 반면 베드로는 연약함으로 부인했지만, 내면의 사랑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기에 회복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바벨탑은 신적 진리를 자기 영광과 권세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종교적 profanation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profanation에 빠진 사람은 사후에 선과 악 사이를 오가며 고통받는 상태에 놓일 수 있다고 설명됩니다. 이는 단순한 지옥의 고통과는 다른, 내적 분열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주님의 자비가 끝까지 작용하여 가능한 한 이런 상태를 막으신다고 강조합니다.

 

profanation 교리는 공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삶이며, 삶과 결합된 진리는 거룩합니다. 그것을 자기 사랑의 도구로 삼지 않을 때, 진리는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면 내면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거룩한 것은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겸손히 받고 삶으로 지켜야 한다는 점이 profanation 교리의 핵심입니다.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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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7,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

AC.19(창1:2) 본문 중 리메인스에 관한 설명 가운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AC.19에서 리메인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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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22:7)

 

AC.2803

 

신적 진리는 아들이며, 신적 선은 아버지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489, 491, 533, 1147, 2633 참조). 그리고 아버지는 선을 의미합니다. 또한 진리의 잉태와 출생이 선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진리는 다른 어떤 근원으로부터도 존재할 수 없고 나타날 수 없습니다 (existere). 이는 여러 차례 보인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아들이 신적 진리이고, ‘아버지가 신적 선인 까닭은, 신적 본질과 인성의 결합, 그리고 인성과 신성의 결합이 곧 선과 진리의 신적 혼인, 그리고 진리와 선의 신적 혼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천적 혼인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곧 주님 안에는 무한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관념으로도 파악될 수 없고, 오직 모든 선과 진리의 있음나타남(esse et existere), 곧 선 자체와 진리 자체라는 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 자체가 아버지이며, 진리 자체가 아들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신적 혼인이 있으므로,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That Divine truth is the “son,” and Divine good the “fath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son” as being truth (see n. 489, 491, 533, 1147, 2633); and of a “father” as being good; and also from the conception and birth of truth, which is from good. Truth cannot be and come forth [existere] from any other source than good, as has been shown many times. That the “son” here is Divine truth, and the “father” Divine good, is because the union of the Divine essence with the human, and of the human essence with the Divine, is the Divine marriage of good with truth, and of truth with good, from which comes the heavenly marriage; for in Jehovah or the Lord there is nothing but what is infinite; and because infinite, it cannot be apprehended by any idea, except that it is the being and the coming forth [esse et existere] of all good and truth, or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Good itself is the “father,” and truth itself is the “son.” But because as before said there is a Divine marriage of good and truth, and of truth and good, the father is in the son, and the son is in the father,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John: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10, 11) Jesus saith unto Philip,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10–11).

 

36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10:36, 38) Jesus said to the Jews, Though ye believe not me, believe the works; that ye may know and believe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in the Father (John 10:36, 38).

 

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17:9, 10, 21) I pray for them; for all mine are thine, and thine are mine; and that they all may be one, as thou Father art in me, and I in thee (John 17:9, 10, 21).

 

31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13:31, 32);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7:1)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if God be glorified in him, God shall also glorify him in himself. Father, glorify thy son, that thy son also may glorify thee (John 13:31–32; 17:1).

 

[2] 이로부터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어떠한지(the nature of 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human in the Lord) 알 수 있습니다. 곧 그것은 상호적이고 교호적인(mutual and alternate) 결합, 다시 말해 서로 안에 거하는(reciprocal) 결합입니다. 이 결합이 바로 신적 혼인(the Divine marriage)이라 불리는 것이며, 이로부터 천적 혼인(the heavenly marriage)이 내려오는데, 이것이 곧 하늘에서의 주님의 나라 자체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말씀되어 있습니다. From this may be seen the nature of 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human in the Lord; namely, that it is mutual and alternate, or reciprocal; which union is that which is called the Divine marriage, from which descends the heavenly marriage, which is the Lord’s kingdom itself in the heavens —thus spoken of in John: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14:20) In that day ye shall know that I am in my Father, and ye in me, and I in you (John 14:20).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17:21-23, 26) I pray for them, that they all may be one, as thou Father art in me and I in thee, that they also may be one in us, I in them and thou in me; that the love wherewith thou hast loved me may be in them, and I in them (John 17:21–23, 26).

 

이 천적 혼인이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혼인이라는 것은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2508, 2618, 2728–2729 이하 참조). That this heavenly marriage is that of good and truth, an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n. 2508, 2618, 2728–2729 and following numbers).

 

[3] 그리고 신적 선은 신적 진리 없이 존재하거나 나타날 수 없고, 신적 진리 또한 신적 선 없이 존재하거나 나타날 수 없으며, 둘은 상호적으로 서로 안에 있으므로, 신적 혼인은 영원부터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곧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And because Divine good cannot be and come forth without Divine truth, nor Divine truth without Divine good, but the one in the other mutually and reciprocally, it is therefore manifest that the Divine marriage was from eternity; that is, the son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the son,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John:

 

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17:5, 24) And now O Father, glorify thou me with thyself, with the glory which I had with thee before the world was (John 17:5, 24).

 

영원부터 나신 신적 인성은 또한 시간 안에서도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시간 안에서 태어나 영화롭게 된 것이 바로 그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 간다고, 곧 아버지께 돌아간다고 여러 번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But the Divine human which was born from eternity was also born in time; and what was born in time, and glorified, is the same. Hence it is that the Lord so often said that he was going to the Father who sent him; that is, that he was returning to the Father. And in John: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3, 14)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the Word is Divine truth itself),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the sam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And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1:1–3, 14; see also John 3:13; 6:62).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13)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62)

 

 

해설

 

먼저, 이 글은 스베덴보리 기독론의 핵심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아버지 = 신적 선’, ‘아들 = 신적 진리’라는 상응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밝히는 선언입니다. 신적 선은 ‘있음(esse)이고, 신적 진리는 그 있음이 드러난 ‘나타남(existere)입니다. 사랑은 본질이고, 진리는 그 사랑이 형상을 입고 이해 가능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은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고, 진리는 사랑이 스스로를 표현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선에서 태어나며, 선 없이는 진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결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사랑이 자신을 인식 가능한 형태로 드러낸 것입니다.

 

여기서 삼위에 대한 전통적 오해가 풀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세 위격을 세 존재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본질과 표현’, ‘사랑과 그 사랑의 지혜’, ‘선과 진리’라는 구분을 합니다. 이는 분리가 아니라 구별입니다. 사랑과 지혜가 다르지만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선과 진리는 서로를 전제로 합니다. 사랑은 자신을 알게 하기를 원하고, 진리는 사랑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둘 사이의 친밀함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호 내재, 곧 존재의 상호 침투를 말합니다.

 

이 상호 내재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혼인’입니다. 선이 진리 안에 있고, 진리가 선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조화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본질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선이 진리 안에 있을 때, 진리는 생명을 가집니다. 진리가 선 안에 있을 때, 선은 질서와 방향을 가집니다. 만약 선만 있고 진리가 없다면 그것은 맹목적 충동이 되고, 진리만 있고 선이 없다면 그것은 차갑고 죽은 지식이 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이 둘이 완전하게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며, 동시에 진리 자체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신적 혼인이 영원부터 있었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이라는 말씀은, 시간 이전에 이미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의 완전한 결합이 있었다는 선언입니다. 말씀은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시간 안에서 새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신적 진리입니다. 성육신은 영원한 진리가 시간 속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던 사랑이 눈에 보이게 된 사건입니다. 보이지 않던 선이 인간적 형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영원부터 나신 신적 인성’이라는 표현은, 주님의 인성이 단순한 피조적 육체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영원한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그것이 시간 안에서 점진적으로 영화롭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완전한 신성으로 하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장소 이동이 아니라, 인성의 완전한 신성화, 곧 나타남이 본질과 완전히 하나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교리는 단지 기독론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 거듭남의 원리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신적 혼인에서 하늘의 혼인이 흘러나옵니다. 하늘의 혼인은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인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되, 그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하려 하나, 무엇이 참된지 모르면 그것은 왜곡됩니다. 거듭남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진리가 의지 속으로 내려와 사랑이 되고, 사랑이 다시 진리를 통해 질서를 얻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천적 혼인’이며, 이것이 곧 주님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단순히 ‘예수와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구조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은 지혜로 드러나며, 그 지혜는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말씀은 곧 신적 진리이며, 그것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인간 예수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신적 사랑을 만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설교적으로 말한다면, 주님은 사랑을 말씀으로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 사랑과 결합시킬 때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재는 곧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상태로 이어집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는 말씀은 신비적 표현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질 때 생기는 실제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AC.2803은 삼위 이해, 성육신 이해, 하늘의 구조, 인간 거듭남의 원리를 하나로 묶는 핵심 단락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 아니라, 사랑과 그 사랑의 나타남이라는 한 실재의 두 측면입니다. 그 완전한 결합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결합이 우리 안에서 모형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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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20:7)

 

AC.2533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And now restore the man’s wife

 

이 말이 합리적 요소의 오염 없이(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교리의 영적 진리를 되돌려 놓으라는 뜻임은 아내가 영적 진리(spiritual truth)를 의미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 (2507, 2510 참조). 또한 사람은 교리 그 자체(doctrine itself)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상태에서 주님을 표상하는데, 그가 사람이라 불릴 때에는 천적 기원의 교리, 곧 천적 진리(celestial truth)를 의미합니다. 내적 의미에서 사람은 지성(the intellectual)을 뜻합니다 (158, 265, 749, 915, 1007, 2517 참조). 그러므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는 것은 교리의 영적 진리를 오염 없이 되돌려 놓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합리적 요소의 오염 없이라고 한 것은,그녀를 돌려보내야 할 아비멜렉이 합리적인 것들과 관련된 교리, 곧 교리의 합리적 요소들(the rational things of doctrine)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510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at he should render up the spiritual truth of doctrine 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ife” as being spiritual truth (see n. 2507, 2510);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man” as being doctrine itself; for Abraham (by whom the Lord in that state is represented), when called a “man” signifies celestial truth, which is the same as doctrine from a celestial origin; for in the internal sense a “man” is the intellectual (see n. 158, 265, 749, 915, 1007, 2517). Hence it is evident that to “restore the man’s wife” is to render up the spiritual truth of doctrine without taint. That it means 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is because Abimelech, who was to restore her, signifies doctrine that has regard to rational things, or what is the same, the rational things of doctrine (n. 2510).

 

[2]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앙의 교리는 그 자체로는 신적이므로 인간은 물론 천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안에서는 인간의 이해에 맞게, 합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가르칠 때, 자신은 더 깊고 높은 생각에서 사고하면서도 아이들의 기질과 이해 수준에 맞추어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침이 되지 못하고, 마치 바위 위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저 세상에서 단순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가르치는 천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지혜 안에 있으나, 배우는 이들의 이해를 넘어서 말하지 않고 단순하게 말하며, 점차적으로 그들의 이해가 자라도록 이끕니다. 만일 천사적 지혜의 높이에서 그대로 말한다면, 단순한 자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여 신앙의 진리와 선으로 인도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 안에서 인간의 이해에 맞추어 합리적인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으셨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내적 의미 안에서 천사적 이해로까지 고양됩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가장 높은 상태에서 지각하는 그 의미조차도 신적 본질에 비하면 무한히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 기원과 그 자체에 있어 하늘 전체도 작은 일부조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것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문자로는 사소하고 거칠게 보일 뿐입니다. It was said above that although the doctrine of faith is in itself Divine, and therefore above all human and even angelic comprehension, it has nevertheless been dictated in the Word according to man’s comprehension, in a rational manner. The case herein is the same as it is with a parent who is teaching his little boys and girls: when he is teaching, he sets forth everything in accordance with their genius, although he himself thinks from what is more interior or higher; otherwise it would be teaching without their learning, or like casting seed upon a rock. The case is also the same with the angels who in the other life instruct the simple in heart: although these angels are in celestial and spiritual wisdom, yet they do not hold themselves above the comprehension of those whom they teach, but speak in simplicity with them, yet rising by degrees as these are instructed; for if they were to speak from angelic wisdom, the simple would comprehend nothing at all, and thus would not be led to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The case would be the same if the Lord had not taught in the Word in accordance with man’s comprehension, in a rational manner. Nevertheless in its internal sense the Word is elevated to the angelic understanding; and yet that sense, in its highest elevation in which it is perceived by the angels, is infinitely below the Divine. It is hence manifest what the Word is in its origin, and thus in itself; and that it thus everywhere involves more things than the whole heaven is capable of comprehending, even as to a small part, although in the letter it appears so unimportant and so rude.

 

[3] 주님이 곧 말씀이심은, 말씀이 그분한테서 나오며 그분이 말씀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That the Lord is the Word, because the Word is from him and he is in the Word, is evident in John: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 4, 14)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1:1, 4, 14; see also Rev. 19:11, 13, 16).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19:11, 13, 16)

 

주님이 말씀이시므로 그분은 또한 교리이십니다. 그 자체로 신적인 교리는 오직 그분뿐이기 때문입니다. And as the Lord is the Word, he is also doctrine; for there is no other doctrine which is itself Divine.

 

 

해설

 

이 구절은 창세기 20장의 중심에서 울리는 하나의 영적 명령입니다.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말은 단순히 한 여인을 원래 남편에게 돌려보내라는 역사적 사건의 정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리의 질서를 바로 세우라는 명령이며, 진리와 합리성의 관계를 재정립하라는 하늘의 선언입니다. 여기서 사라는 ‘영적 진리’를 의미하고, 아브라함은 ‘천적 기원의 교리’, 곧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아비멜렉은 ‘합리적 단계의 교리’, 즉 인간의 이해와 사유를 통하여 형성되는 교리적 체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진리가 합리성에 의해 소유되거나 지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합리성은 진리를 소유할 수 없으며, 다만 봉사해야 합니다.

 

오염 없이 돌려보내라’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합리성은 본래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귀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합리성은 스스로를 기준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 납득한 것만을 진리로 인정하려 합니다. 이때 교리는 인간의 사고 구조에 맞추어 재구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진리는 점점 인간 중심적으로 변형됩니다. 이것이 바로 ‘합리적 요소의 오염’입니다. 오염이란 반드시 거짓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인간의 자아와 결합되어 순수성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가 자기 사랑이나 명예욕, 혹은 지적 우월감과 결합될 때, 그것은 이미 순수한 교리의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깊은 신학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신앙의 교리는 그 자체로는 신적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물론 천사조차 완전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교리를 인간의 이해에 맞게, 합리적인 형식으로 내려주십니다. 이것은 교리가 본래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합리적 단계를 거쳐야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은 놀라운 겸손을 보여 줍니다. 무한하신 주님께서 유한한 인간의 이해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말씀은 문자라는 옷을 입고, 인간의 사고 틀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본질은 여전히 신적이며 무한합니다.

 

여기서 부모가 어린 자녀를 가르치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부모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깊이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설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침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고 수준이 아이의 수준으로 낮아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표현이 조정된 것뿐입니다. 천사들이 단순한 자들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천적, 영적 지혜 안에 있지만, 배우는 이의 상태에 맞추어 단순하게 말합니다. 이 점은 목회 사역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설교자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을 듣는 이들의 상태에 맞추어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진리를 변질시켜서는 안 됩니다. 낮추되, 왜곡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질서입니다.

 

이 구절은 말씀의 구조 자체를 보여 줍니다. 말씀은 문자적 의미에서는 단순하고 때로는 거칠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는 천사적 이해로까지 고양됩니다. 그리고 그 천사적 이해조차 신적 본질에 비하면 무한히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겉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 전체가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합니다. 문자만 보고 판단하면 얕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를 인식하면, 그 안에 무한한 질서와 조화가 펼쳐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주님은 곧 말씀이시며, 동시에 교리이시다’라는 선언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이는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교리는 어떤 학파나 신학 체계의 산물이 아닙니다. 교리는 주님 자신에게서 나오며, 주님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곧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리를 왜곡하면, 주님에 대한 인식도 왜곡됩니다. 이 점에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명령은 매우 엄중합니다. 교리의 영적 진리를 인간의 합리성 속에 가두지 말고, 본래의 주인께 돌려드리라는 명령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우리 각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진리를 이해의 틀 안에 가두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해를 진리 아래 두고 있습니까? 합리성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도자가 아니라 도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교리의 영적 진리가 먼저이며, 합리성은 그 진리를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질서이며, 이것이 거듭남의 길입니다.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이 명령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내면에서 반복되어야 할 영적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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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8

 

말씀은 말씀에서 나온 교리가 아니면 이해될 수 없다

The Word cannot be understood except by means of doctrine from the Word.

 

 

교회의 교리는 반드시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3464, 5402, 6832, 10763, 10765). 교리 없이 말씀은 이해되지 않는다 (9025, 9409, 9424, 9430, 10324, 10431, 10582). 참된 교리는 말씀을 읽는 자들에게 등불과 같다 (10401). 참되고 순수한 교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사람들(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from the Lord)로부터 나와야 한다 (2510, 2516, 2519, 2524, 10105). 말씀은 열린 자가 형성한 교리에 의해 이해된다 (10324). 열린 자들은 스스로 말씀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다 (9382, 10659). 교회의 교리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과, 말씀의 겉뜻만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보라 (9025). 교리 없이 말씀의 겉뜻 안에만 있는 자들은 신적 진리에 관한 어떤 이해에도 이르지 못한다 (9409, 9410, 10582). 그들은 많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 (10431). The doctrine of the church must be from the Word (n. 3464, 5402, 6832, 10763, 10765). The Word without doctrine is not understood (n. 9025, 9409, 9424, 9430, 10324, 10431, 10582). True doctrine is a lamp to those who read the Word (n. 10401). Genuine doctrine must be from 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from the Lord (n. 2510, 2516, 2519, 2524, 10105). The Word is understood by means of doctrine formed by one enlightened (n. 10324). They who are in enlightenment form for themselves doctrine from the Word (n. 9382, 10659).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hose who teach and learn from the doctrine of the church, and those who teach and learn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alone (n. 9025). They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without doctrine, do not come into any understanding concerning Divine truths (n. 9409, 9410, 10582). They may fall into many errors (n. 10431).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들은, 성인이 되어 자기 이해로 볼 수 있게 되면, 단지 자기 교회의 교리 안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참된지 아닌지를 말씀으로부터 살핀다 (5402, 5432, 6047).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자기 출생지로부터 진리를 갖게 될 것이며, 유대인으로 태어났든 헬라인으로 태어났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6047). 그러나 말씀의 겉뜻으로부터 신앙에 관한 것이 된 그런 것들은 충분히 살핀 뒤에야 비로소 버려야 하며, 성급히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9039). They who are in the affection of truth for the sake of truth, when they become adults, and can see from their own understanding, do not simply abide in the doctrinals of their churches, but examine from the Word whether they be true or not (n. 5402, 5432, 6047). Otherwise everyone would have truth from another, and from his native soil, whether he were born a Jew or a Greek (n. 6047). Nevertheless such things as are become matters of faith from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are not to be extinguished till after a full view (n. 9039).

 

교회의 참된 교리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교리이다 (2417, 4766, 10763, 10765). 신앙의 교리가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가 교회를 이룬다 (809, 1798, 1799, 1834, 4468, 4677, 4766, 5826, 6637). 교리들은 사람이 그것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것들이 단지 기억과 사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1515, 2049, 2116). 오늘날 교회들에서는 신앙의 교리가 가르쳐지고, 체어리티의 교리는 도덕 철학이라 불리는 학문으로 밀려나 거절되고 있다 (2417).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삶, 곧 체어리티로 인정받는다면 교회는 하나가 될 것이다 (1285, 1316, 2982, 3267, 3445, 3451, 3452). 체어리티의 교리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보다 얼마나 더 우월한지 보라 (4844). 체어리티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은 천적인 것들에 대하여 무지 가운데 있다 (2435). 오직 신앙의 교리만을 붙들고 체어리티의 교리는 붙들지 않는 자들은 오류에 빠지는데, 다음에 그 오류들이 또한 묘사되어 있다 (2383, 2417, 3146, 3325, 3412, 3413, 3416, 3773, 4672, 4730, 4783, 4925, 5351, 7623–7677, 7752–7762, 7790, 8094, 8313, 8530, 8765, 9186, 9224, 10555). The true doctrine of the church is the doctrine of charity and faith (n. 2417, 4766, 10763, 10765). The doctrine of faith does not constitute the church, but the life of faith, which is charity (n. 809, 1798, 1799, 1834, 4468, 4677, 4766, 5826, 6637). Doctrinals are of no account, unless one lives according to them; and everyone may see they are for the sake of life, and not merely for the memory and thought thence derived (n. 1515, 2049, 2116). In the churches at this day the doctrine of faith is taught, and not the doctrine of charity, the latter being rejected to a science, which is called moral philosophy (n. 2417). The church would be one, if they should be acknowledged as men of the church from the life, thus from charity (n. 1285, 1316, 2982, 3267, 3445, 3451, 3452). How much superior the doctrine of charity is to that of faith separate from charity (n. 4844). They who know nothing concerning charity, are in ignorance with respect to heavenly things (n. 2435). They who only hold the doctrine of faith, and not that of charity, fall into errors; which errors are also described (n. 2383, 2417, 3146, 3325, 3412, 3413, 3416, 3773, 4672, 4730, 4783, 4925, 5351, 7623–7677, 7752–7762, 7790, 8094, 8313, 8530, 8765, 9186, 9224, 10555).

 

오직 신앙의 교리 안에만 있고,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 안에는 아닌 자들을 가리켜 옛날에는 무할례자(the uncircumcised), 혹은 블레셋 사람(Philistines)이라고 불렀다 (3412, 3413, 3463, 8093, 8313, 9340). 고대인들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교리를 붙들었고, 신앙의 교리를 그것에 종속시켰다 (2417, 3419, 4844, 4955). They who are only in the doctrine of faith, and not in the life of faith, which is charity, were formerly called the uncircumcised, or Philistines (n. 3412, 3413, 3463, 8093, 8313, 9340). The ancients held the doctrine of love to the Lord and of charity towards the neighbor, and made the doctrine of faith subservient thereto (n. 2417, 3419, 4844, 4955).

 

열린 자가 형성한 교리는 그 후에 이성과 학문적인 것들에 의해 확증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 충만히 이해되고 굳게 세워진다 (2553, 2719, 2720, 3052, 3310, 6047). 이 주제에 관하여는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51번을 보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은 교회 안의 교리적인 것들은 무슨 이성적 통찰 없이 그저 단순히 믿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3394). Doctrine formed by one enlightened may afterwards be confirmed by things rational and scientific; and that thus it is more fully understood, and is corroborated (n. 2553, 2719, 2720, 3052, 3310, 6047). See more on this subject in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 51). They who are in faith separate from charity would have the doctrinal of the church simply believed, without any rational intuition (n. 3394).

 

지혜로운 사람의 표지는 교리를 확증하는 데 있지 않고, 그전에 먼저 그것이 참인지를 보는 데 있다. 이것이 열린 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경우다 (1017, 4741, 7012, 7680, 7950). 확증의 빛은 자연적 빛이다. 영적 빛이 아니며, 심지어 악한 자에게도 있을 수 있다 (8780). 모든 것, 심지어 거짓까지도 진리처럼 보이게 하려고 아주 단단히 확증될 수 있다 (2482, 2490, 5033, 6865, 8521). It is not the mark of a wise man to confirm a dogma, but to see whether it be true before it is confirmed; and that this is the case with 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n. 1017, 4741, 7012, 7680, 7950). The light of confirmation is a natural light, and not spiritual, and may exist even with the evil (n. 8780). All things, even falsities, may be so far confirmed, as to appear like truths (n. 2482, 2490, 5033, 6865, 8521).

 

 

해설

 

말씀은 거룩하지만, 그 거룩함이 사람에게 자동으로 이해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 없이 말씀을 읽으면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말씀보다 위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길어 올린 질서 있는 진리의 체계가 있어야 비로소 말씀의 세부들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교리는 지도와 같고, 말씀은 광대한 땅과 같습니다. 지도가 없이 광야에 들어가면 길을 잃기 쉽듯, 교리 없이 말씀을 읽으면 각 구절이 흩어져 보이거나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사람의 사유에서 임의로 만들어진 체계가 아니라, ‘열림(enlightenment) 가운데 형성된 것이어야 합니다. 열림은 주님께서 이해의 내면, 곧 속을 여시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는 단순한 학문적 산물이 아니라, 삶과 사랑의 질서 속에서 주님께 인도받으며 형성된 것입니다. 이런 교리만이 등불처럼 말씀을 밝혀 줍니다. 반대로 글자만 붙들고, 즉 말씀을 겉뜻으로만, 그리고 교리 없이 읽으면 사람은 자기 애정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고, 심지어 거짓도 진리처럼 확증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성인이 되면 자신이 속한 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말씀으로 그것을 시험합니다. 이것은 반항이 아니라 성숙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태어난 문화와 전통에 따라 자동적으로 ‘자기 교회 진리’를 갖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겉뜻으로 보고 신앙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들은 충분히 살피기 전에는 성급히 버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검토는 파괴가 아니라 정화입니다.

 

WH.8의 중심은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의 참 교리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교리이지만, 교회를 실제로 이루는 것은 신앙의 교리가 아니라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입니다. 신앙이 머리에만 머물면 교회는 분열되지만, 체어리티가 삶이 되면 교회는 하나가 됩니다. 고대 교회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중심에 두고 신앙을 그에 종속시켰다는 말은, 교리의 중심이 사랑이어야 함을 뜻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블레셋과 같고, 지식은 있어도 생명은 없는 상태입니다.

 

또한 열림(enlightenment) 가운데 형성된 교리는 이후 이성과 학문으로 확증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질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열림이 있고, 그다음 이성적 확증이 있지만, 반대로 먼저 확증하고 나중에 진리를 찾으려 하면, 그것은 자연적 빛 안에서의 논증, 논쟁에 머무를 뿐입니다. 확증의 빛은 악한 자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모든 거짓도 체계적으로 세워지면 진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확증할 것인가를 먼저 묻지 않고, 그것이 참인가를 먼저 봅니다. 이것이 열린 자의 표지입니다.

 

결국 WH.8은 말씀과 교리, 사랑과 신앙, 열림과 이성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말씀은 근원이고, 교리는 그로부터 나오며, 체어리티는 교리를 살아 있게 하고, 열림은 그 모든 것을 올바른 질서 안에 두는 하늘의 빛입니다. 이런 질서 안에서만 말씀은 이해되고, 교회는 실제가 됩니다.

 

 

 

WH.7, '말씀은 열린 사람이 아니면 이해가 안 된다'

WH.7 말씀은 열린(enlightened) 사람이 아니면 이해가 안 된다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those who are enlightened. 인간의 이성적 능력(rational faculty)은 주님에 의해 열리지(enlightened) 않으면 신성(Divine)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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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1:2) 본문 중 리메인스에 관한 설명 가운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AC.19에서 리메인스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은, 거듭남의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먼저 ‘리메인스(remains)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몰래 간직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진함, 양심의 흔적, 말씀을 들으며 잠시 감동받았던 기억,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겉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빛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겉 사람이 아직 자기 본성과 세상 사랑에 강하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고, 세상적 성공과 자아 만족을 선이라고 여기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활동할 공간이 없습니다. 햇빛은 이미 떠 있지만, 짙은 안개가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겉의 일들이 황폐해진다’는 말은, 인생이 무너진다는 뜻이 아니라, 겉 사람의 자만과 자기 신뢰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실패, 상실, 유혹, 고난, 양심의 가책 같은 경험을 통해 사람이 자기 힘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겉 사람의 주장들이 잠잠해집니다. AC에서는 이것을 ‘황폐’ 또는 ‘정적 상태’라고 부릅니다. 겉의 소리가 낮아질 때, 속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정리입니다. 겉 사람의 허위와 교만이 약해질 때,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비로소 작용합니다. 그때 사람이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선은 선이지’, ‘그래도 진리는 중요하지’,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등, 이런 깨달음이 바로 리메인스가 빛 가운데 나오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영적 법칙과 같습니다. 낮이 오기 전에는 밤이 있습니다. 씨앗이 싹트기 전에는 껍질이 갈라집니다. 겉 사람의 확신이 무너지지 않으면, 속 사람의 생명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우리 인생을 ‘조용히 비우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중요한 점은, 리메인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아무리 거칠어도, 주님은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겉의 강한 집착이 약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AC.19에 나오는 저 표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혹 지금 어떤 황폐를 겪고 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이 조용해질 때, 속 사람 안의 리메인스가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실제가 됩니다.

 

 

 

SC.18, ‘profanation’(신성모독)에 관하여

SC.18,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에 대하여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신성모독, 神性冒瀆)은 단순한 신성모독이라는 외적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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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6,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게 뭔가요?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게 뭔가요?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가 나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나의 입장을 강화해 주기 때문에, 나를 높여 주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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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와 찬63, ‘주가 세상을 다스리니’입니다.

 

오늘부터 해설 버전 누락분 창세기 1장부터 3장입니다. 창3 마치면 창6으로 원래대로 이번엔 쭈욱 나갑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창1 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16번에서 1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1, 2)

 

 

이 본문을

 

혼돈 위에 임하시는 주님의 영, 거듭남의 시작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AC)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오늘은 창1:1-2에 해당하는 AC.16-19를 그 번역과 해설로 접하면서, 거의 설교와도 같은 해설의 어떠함을 다시 한번 맛보고, 거기서 우리 모두 주님의 음성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1)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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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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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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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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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상입니다. 어떻습니까?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AC 원문 번역과 특히 그 해설을 그대로 읽었는데요,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해설 없이 읽을 때는 정말 어려웠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설로 풀어 주니까 글 하나하나가 다 무슨 설교 같지 않으신지요? 이 AC를 붙들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좀 더 와닿게 풀어 번역할 수 있을까 거의 6, 7년을 솔직히 몸부림을 쳐온 저로서는 뒤늦게 이 ChatGPT라는 AI의 도움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이 헛수고는 아니었던 것이, 그래도 이 AI의 초벌 결과물을 문장 하나하나, 사용된 단어, 표현 하나하나의 적절함과 적당함을 살필 수 있는 안목을 그동안 주님은 제 안에 조성하셔서, 이 AI로 하여금 본연의 비서 역할에만, 도우미 역할에만 머무르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의외로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주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이 ChatGPT라는 AI를 믿고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유능한 비서가 생기는 바람에 그동안 엄두도 못 냈던 나머지, 그러나 무척 중요한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 역시 부지런히 번역 및 해설 작업을 병행, 제 블로그(https://bygrace.kr)에 수시로 올리고 있으니 참고하세요. 지난주 새롭게 시작한 저작들은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1758, LJ), ‘백마(白馬, White Horse, 1758, WH) 등인데, 이 비교적 짧은 글들은 AC가 배경으로 깔고 들어가는 다른 중요한 개념들을 매우 깊고 넓게 다져 주는 글들입니다. 이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의 내면은 탄탄한, 그리고 빛나는 계시의 지식으로 눈부시게 빛날 것입니다.

 

앞으로도 너무 많은 분량만 아니면 가급적 AC를 원본 및 해설 그대로 읽고자 합니다. 사실 말이 해설이지 형식만 조금 고치면 그대로 설교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해설 없이 원본만 읽던 시절도 있었음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런 우리의 우직한 모습을 기뻐하신 주님의 큰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진리를 진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신적 진리들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AC.10578, 10645, 10829)이라는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2-15(D1)

 

2638, 1. 창1.1, 2026-02-15(D1)-주일예배(창1,1-2, AC.16-19),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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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2/22, 창1:3-5), '빛이 있으라', 거듭남의 시작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와 찬64, ‘기뻐하며 경배하세’입니다. 오늘은 창1 두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20번에서 23번입니다. 본문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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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2/08, 창5:32), '노아, 그리고 셈, 함, 야벳의 속뜻'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29, ‘성도여 다 함께’와 찬434, ‘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5장 여섯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32절 한 절, AC 글 번호로는 534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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