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어떠한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생각해 본 사람들조차도, 그것에 대해 매우 일반적이고 거친(gross) 개념을 형성하였을 뿐이어서, 거의 개념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이 이 주제에 관해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세상에서 막 사후 세계로 넘어온 영들로부터 제가 매우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 마치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Hitherto the nature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has been known to none. Those who have thought about them have formed an idea concerning them so general and so gross as scarcely to amount to any idea at all. What notion they have conceived on the subject I have been able to learn most accurately from spirits who had recently passed from the world into the other life; for when left to themselves, as if they were in this world, they think in the same way. I may give a few examples.
해설
이 글은 이후 이어질 긴 설명의 ‘출발점이자 문제 제기’에 해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단호한 진단을 내립니다. 천국과 천국의 기쁨은 지금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과장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구조 자체에 대한 평가입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생각한다고 말할 때,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그것은 실제로는 거의 생각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개념이 너무 일반적이고, 너무 거칠어서, 실제로는 아무 내용도 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하다’, ‘편안하다’, ‘좋은 곳이다’ 같은 말들은 천국의 실재를 가리키기에는 지나치게 평면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판단을 추측이나 신학적 논증으로 내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후 세계로 막 들어온 영들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확인합니다. 이 영들은 아직 내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생각하던 방식 그대로 생각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의 생각은 인간이 천국을 어떻게 상상해 왔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순수한 표본’이 됩니다.
즉, 이 영들은 실제로는 죽은 뒤 다른 세계에 와 있지만, 인식의 틀은 아직 지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품고 있는 천국에 대한 생각은, 인간이 살아 있을 때 품던 생각과 거의 동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통해, 인간이 천국을 얼마나 지상적 범주 안에서만 이해해 왔는지를 정확히 파악합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가 하려는 말은 분명합니다. 천국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 방식 자체가 천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은 알려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고, ‘아무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매우 중요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해 익숙하게 사용하는 언어와 이미지들이, 실제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신앙을 이야기할 때, 신앙은 쉽게 관념이나 희망 사항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제 ‘예를 들겠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예시의 예고가 아니라, ‘인식의 전환을 위한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는 추상적 설명 대신, 실제 영들의 생각과 반응을 하나하나 보여 주면서, 인간의 천국 이해가 어디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드러내려 합니다.
AC.449는 이렇게 읽힙니다. ‘천국이 멀어서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익숙한 방식으로만 생각해 왔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는 선언으로 말입니다. 이 선언 위에서, 이후의 모든 천국, 기쁨, 퍼셉션 논의가 시작됩니다.
앞선 글들에서 홍수 이전 존재하였던 교회들이 지녔던 퍼셉션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날에는 이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것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지속적인 계시의 한 형태로 상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인간에게 본래 심겨진 어떤 것으로 여기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the faith of love)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바로 그 천적인 것이며, 보편적 천국(universal heaven) 안에는 무한한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천국에 존재하는 주요한 퍼셉션의 종류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As in the foregoing pages much has been said about the perception possessed by the churches that existed before the flood, and as at this day perception is a thing utterly unknown, so much so that some may imagine it to be a kind of continuous revelation, or to be something implanted in men; others that it is merely imaginary, and others other things; and as perception is the very celestial itself given by the Lord to those who are in the faith of love, and as there is perception in the universal heaven of endless variety: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ay be among men some conception of what perception is, of the Lord’s Divine mercy I may in the following pages describe the principal kinds of perception that exist in the heavens.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는 동시에, ‘이후 전개될 매우 중요한 설명을 위한 문턱’을 형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 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퍼셉션은 더 이상 살아 있는 경험이 아니라, 개념조차 모호한 대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퍼셉션을 오해하는 여러 방식들을 차분히 나열합니다.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마치 끊임없이 주어지는 계시처럼 생각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외부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초자연적 정보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퍼셉션을 인간에게 본래부터 심겨진 본능이나 직관 정도로 여깁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퍼셉션이라는 말 자체를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치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오해가 퍼셉션이 더 이상 지상 교회의 경험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는 여기서 퍼셉션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인 것입니다. 즉, 퍼셉션은 인간의 능력도 아니고, 훈련의 산물도 아니며, 타고난 감각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과의 결합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의 상태 안에서 주어지는 인식입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계시와도 다르고, 본능과도 다르며, 상상과는 더더욱 다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 단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국 전체에는 끝없는 다양성을 지닌 퍼셉션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획일적인 기준이나 동일한 느낌이 아니라, 각 천적 공동체와 각 개인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살아 있는 인식임을 뜻합니다. 앞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고 설명되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글의 중요한 전환점은, 스베덴보리가 이제 ‘설명 방식 자체를 바꾸겠다고 선언’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주로 지상 교회, 특히 태고교회의 상태를 통해 퍼셉션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퍼셉션의 종류들을 직접 설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추상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며 질서와 구조를 지닌 인식이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신비화하지도 않고, 도덕화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능력으로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퍼셉션을 ‘주님께서 주시는 천적 질서의 일부’로 다루며, 가능한 한 오해 없이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달 방식 역시, 계시적 선언이 아니라 설명과 분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글은 또한 독자에게 하나의 약속처럼 읽힙니다. 퍼셉션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스베덴보리는 가능한 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실체를 보여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퍼셉션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퍼셉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 함으로써, 오늘날의 신앙이 스스로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도록 돕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AC.536은 단순한 서론이 아니라, 이후 천국론과 인식론 전체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 고리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퍼셉션이 무엇이었는지를 바르게 알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신앙적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노아’(Noah)라 하는 교회를 홍수 이전의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은, 29절에서 그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고 한 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 ‘위로’(comfort)란, 그 교회가 살아남아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관해서는, 이후 주님의 신적 자비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Noah” is not to be numbered among the churches that were before the flood, appears from verse 29, where it is said that it should “comfort them from their work and the toil of thei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The “comfort” was that it should survive and endure. But concerning Noah and his son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해설
이 글은 노아의 교회가 태고교회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이미 다른 질서에 속한 교회’임을 명확히 선 긋는 대목입니다. 앞서까지의 흐름만 보면, 노아가 태고교회의 연속선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말합니다. 노아의 교회는 홍수 이전의 교회들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 근거는 29절에 나오는 ‘위로’라는 표현입니다. 이 위로는 단순히 고통을 덜어 주는 의미가 아니라, ‘존속과 지속’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노아의 교회는 사라질 교회가 아니라 남겨질 교회이며, 심판을 통과해 이어질 교회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태고교회는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역할을 마쳤고,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라는 표현이 다시 언급되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는 이 수고와 고됨이 교회 자체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에게서는 같은 표현이 ‘위로’와 연결됩니다. 이는 상태가 같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조건 속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교회의 성격에서 나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에 기반한 교회였기 때문에, 퍼셉션이 사라지면 교회 자체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노아의 교회는 교리에 기반한 교회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조건 속에서도, 교리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고 신앙을 보존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수고와 고됨’ 속에서도, 노아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지속됩니다. 참고로, 여기 ‘수고와 고됨’은 주님의 선과 진리 아는 일이 예전엔 퍼셉션으로 즉시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점점 기울다가 라멕의 때쯤 이르자 ‘수고와 고됨’의 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회복판이 아니라, ‘전혀 다른 교회 유형의 시작점’입니다. 따라서 노아를 태고교회의 한 인물로 설교하거나, 태고적 신앙을 되살린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어긋납니다. 노아는 퍼셉션을 되찾은 사람이 아니라, 퍼셉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된 교회의 대표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지점에서 자세한 설명을 미루고, ‘뒤에서 더 말씀드리겠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단순한 후속 인물이 아니라, 고대교회의 구조 전체를 설명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위치만 정리하고, 본격적인 내용은 이후에 펼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535는 짧지만 결정적입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의 끝이 아니라, ‘홍수 이후를 살아갈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 한 문장을 통해, 독자는 창세기 전반부의 큰 전환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이제 이야기는 멸망을 향해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존과 지속,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전개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And Noah was a son of five hundred years; and Noah begat Shem, Ham, and Japheth.(창5:32)
AC.534
‘노아’(Noah)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를 의미합니다. ‘셈, 함, 야벳’(Shem, Ham, and Japheth)은 세 고대교회를 의미하는데, 이들의 부모가 되는 교회가 바로 ‘노아’라 하는 고대교회입니다. By “Noa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the ancient church. By “Shem, Ham, and Japheth” are signified three ancient churches, the parent of which was the ancient church called “Noah.”
해설
이 글은 노아 이후 전개될 교회 역사의 ‘기본 구조를 한 문장으로 제시하는 핵심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노아를 하나의 교회 상태로 규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노아 교회가 이후 여러 교회의 ‘부모’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고대교회가 단일한 형태로 오래 지속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성격의 교회들이 갈라져 나왔음을 뜻합니다.
앞서 태고교회에서는 하나의 중심적 교회 흐름이 여러 단계로 약화되며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노아 이후의 고대교회에서는 양상이 달라집니다. 동일한 교리적 토대 위에 서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향과 강조점을 지닌 교회들이 동시에 존재하게 됩니다. 셈, 함, 야벳은 바로 그 분화를 대표하는 이름들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세 교회가 서로 무관하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모두 노아 교회에서 나왔으며, 같은 뿌리를 공유합니다. 즉, 퍼셉션의 교회가 아니라 교리의 교회라는 공통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차이는 그 교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는 매우 현실적인 교회 이해를 제공합니다. 하나의 참된 교회에서 출발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교회 형태들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분화 자체가 아니라, 그 분화가 여전히 같은 근원에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셈, 함, 야벳을 모두 고대교회로 부르며,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글에서 ‘부모’라는 표현은 다시 한번 중요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지는 않지만, 생명과 구조를 제공합니다. 마찬가지로 노아 교회는 이후 교회들이 존재할 수 있는 기본 틀과 신앙 구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후의 교회들은 이 틀 안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그래서 AC.534는 단순한 족보 설명이 아니라, ‘고대교회 전체를 조망하는 지도’와도 같습니다. 노아라는 하나의 중심에서 셈, 함, 야벳이라는 세 갈래가 뻗어 나가고, 이 세 갈래는 이후 인류 영적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교회 유형의 원형이 됩니다.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28, ‘복의 근원 강림하사’와 찬433,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5장 다섯 번째 시간, 25절로 27절이며, AC 글 번호로는 526번에서 533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8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29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28-31)
이 본문을
노아, 인류를 위한 주님의 위로
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퍼셉션’(perception)이 나옵니다. 이 창5를 하면서 계속 다루었지만, 여전히 알쏭달쏭, 흐릿합니다. 그렇다고 안 다룰 수도 없습니다. 창5를 끝으로 퍼셉션의 교회인 태고교회가 막을 내리고, 창6부터는 이제 전혀 새로운 교회인 노아의 고대교회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득불 오늘도 이 퍼셉션 이야기를 살짝이라도 좀 먼저 드리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오늘은 2월 첫주, 성찬이 있으므로 가급적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퍼셉션을 한 문장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퍼셉션은 생각을 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방향을 잡았더니 저절로 알게 되는, 그런 상태다.
무엇을 새로 알 때 우리는 보통 이렇게 압니다. ‘배워서 → 이해하고 → 판단하고 → 행동한다.’ 이 순서가 너무 익숙해서, 이것 말고 다른 앎의 방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거의 전부 이 방식으로 삽니다. 노아의 고대교회도 기본적으로 이쪽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이 순서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사랑이 먼저 있고 →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옳은지가 보이고 → 그 보임대로 산다.’ 여기서 핵심은, ‘보인다’는 말입니다. 논리로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라, 마치 방향 감각처럼 즉각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얼굴을 볼 때를 생각해 보세요. 비록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아이는 엄마가 지금 슬퍼하신다는 걸 엄마 얼굴을 보고 그냥 ‘즉시 압니다.’ 무슨 학습을 해서 아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이건 추론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서 생긴 ‘직관적 인식’입니다. 퍼셉션은 이와 비슷하지만, 대상이 더 깊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이 선인가?’, ‘지금 이 선택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인가?’를 ‘생각을 거치지 않고’ 아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에는 이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첫째, 퍼셉션은 ‘정보’가 아닙니다.
퍼셉션은 지식이 쌓여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리로 가르칠 수도 없고, 말로 정리해도 생기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퍼셉션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둘째, 퍼셉션은 ‘판단’이 아니라 ‘방향 감각’입니다.
우리가 길을 걸을 때, 인공지능 로봇들처럼 ‘왼쪽으로 가면 15도 각도고, 오른쪽은...’ 이러면서 걷지 않듯이,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과 진리를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쪽이다’가 보였습니다.
셋째, 퍼셉션은 ‘나한테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퍼셉션은 ‘내가 잘 훈련해서 얻는 능력’이 아닙니다. 사랑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을 때, ‘주님 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계시의 한 형태’라고도 말하지만, 오늘 우리가 상상하는 ‘특별한 음성’이나 ‘신비 체험’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주 조용하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이게 특별한 건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럼, 왜 오늘 우리는 퍼셉션을 거의 모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의 질서,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는 ‘사랑 → 인식 → 삶’의 구조였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걸 사랑으로, 사랑에서 출발했다면, 노아 이후의 고대교회, 그리고 오늘의 우리는 ‘배움 → 이해 → 선택 → 삶’의 구조입니다. 즉 머리로, 지식에서 출발합니다. 이건 타락이라기보다, ‘상태의 변화’입니다. 주님은 퍼셉션을 잃은 인간에게 퍼셉션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노아 교회는 퍼셉션이 아니라 교리, 기억, 훈련, 순종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오해 하나를 풀어야 합니다. 퍼셉션이 ‘더 ‘고급’해서’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게 아닙니다. 퍼셉션은 ‘지금 우리에게 맞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눈으로 길을 보던 시대에서 지도와 표지판을 쓰는 시대로 온 것과 비슷합니다. 눈이 나빠졌다고 길을 포기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의 안내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성인’(聖人)이라 하는 사람의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은 그러니까 이 ‘머리’의 시대에 태고교회처럼 ‘가슴’, 즉 ‘사랑’의 삶을 살다 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퍼셉션을 이해할 때,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퍼셉션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그랬던 적이 있었음을 이해해야 할 상태’입니다. 이걸 이해해야 노아의 고대교회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왜 교리가 필요한지, 왜 믿음과 순종이 강조되는지 비로소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짧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퍼셉션이란 ‘주님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가 생각 없이 보이던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퍼셉션을 잃은 인간을 위해 주님께서 새로 여신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비교가 가능합니다. 퍼셉션의 교회 → 노아의 교회로, 보는 교회 → 배우는 교회로, 그리고 즉각적 인식 → 점진적 거듭남으로 말입니다.
네, 그럼, 몇 주에 걸친 퍼셉션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치고, 이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만 간략하게 나누고 이후 순서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창5:28-31은 태고교회의 계보가 끝나고, 전혀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직전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 줍니다. 라멕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교회 상태는 이미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을 전혀 보존하지 못한 상태에 이르렀고, 그 안에서 노아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본문은 한 개인의 출생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교회가 준비되는 결정적인 전환의 순간을 증언합니다.
첫째, 라멕의 상태는 수고와 저주로 가득 찬 교회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라멕이 노아의 이름을 지으며 말한 고백을 보면,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이는 얼핏 농사나 노동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그게 아니고, 선과 진리를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라멕으로 상징되는 이 교회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너무도 일반적이고 흐릿해져서 사실상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무엇이 옳은지 알기 위해 늘 애써야 했고, 선을 행하기 위해 고된 노력을 해야 했으며, 그 결과는 기쁨이 아니라 피로와 좌절이었습니다. ‘수고’와 ‘손의 고됨’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뜻하며, ‘저주받은 땅’은 그러한 시도에서 나오는 것이 결국 거짓과 악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영적 현실을 보여 줍니다. 이 상태는 회복을 위한 과도기가 아니라, 이미 내부적으로는 끝에 도달한 상태였습니다.
둘째, 노아라는 이름은 새로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위로의 선언입니다.
라멕은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짓고, 그가 우리를 안위하리라 말합니다. 여기서 ‘안위하다’라는 말은 단순한 감정적 위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교회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교리적 위로, 곧 새 교회를 통해 주어질 영적 쉼과 질서의 회복으로 해석합니다. 노아로 상징되는 교회는 태고교회처럼 퍼셉션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대신 에녹을 통해 보존된 교리와, 주님께서 남겨 두신 리메인스(remains) 위에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즉, 더 이상 즉각적으로 아는 교회가 아니라, 배우고 기억하고 순종함으로 거듭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태고교회의 연장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방식의 시작입니다. 이 시작은 인간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예전 기준을 요구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됩니다. 퍼셉션을 잃은 인류에게 더 이상 퍼셉션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대신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길을 여시는 것이 바로 노아교회입니다.
셋째, ‘칠백칠십칠’(777)이라는 숫자는 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의 완결을 말합니다.
라멕의 수명이 칠백칠십칠 세였다는 기록은 우연한 숫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숫자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일곱은 거룩함과 완결을 뜻하는 수이며, 그것이 반복된 777은 한 질서가 완전히 마무리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인간적 성취의 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아야 할 상태가 비로소 정리되었음을 뜻합니다. 라멕의 죽음은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태고교회 계열 전체의 종결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노아가 등장합니다. 주님은 어떤 교회나 교회 시대가 종말을 향해 갈 때, 그 교회나 교회 시대를 그 무너진 상태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항상 다음을 준비하십니다. 라멕의 끝은 노아의 시작을 위한 자리 마련이며, 홍수는 파괴만이 아니라 새 교회의 토양을 정화하는 과정이 됩니다.
참고로, 교회뿐 아니라 각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러나 각 개인은 특별히 본인 의사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무리 한 개인의 인생이 망가져도 눅15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돌이켜 거듭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국 끝까지 돌이키지 않아 파국을 맞는, 그래서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지 싶습니다. 우리는 혹시 지금은 방황하고 연거푸 실수해도, 그래서 지금은 앞이 캄캄하고 숨 막히는 상황이더라도 어린 시절을 비롯, 지금도 주님이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쟁여놓으시는 리메인스, 곧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있음을 기억, 그것을 활용하여 더 늦기 전에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 ‘수고와 고됨’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주님께서 준비하신 새로운 쉼의 질서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한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한계를 정확히 아시고,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교회를 여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자비의 이름입니다. 수고의 끝에서 시작되는 쉼, 저주받은 땅 위에서 다시 세워지는 교회,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입니다.
이 본문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나 반복되는 주님의 섭리의 방식입니다. 한 시대가 끝날 때마다, 주님은 언제나 노아를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그 노아는 늘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안위’를 가져옵니다. 주님의 신실하심과 사랑, 그리고 자비로우심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혹시 오늘 우리가 이 시대 노아들이어도 이 길 끝에 천국 있음을 기억하고, 주님 맡기신 쓰임새의 삶, 저 노아들처럼 잘 살다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