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4:6)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함으로써,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였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특정 조항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에는 이런 성향이 있어서, 어떤 가지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며, 특히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를 부풀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며,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Cain)이라 하던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자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서로 결탁하여 그들을 생각 가운데 더욱 굳어지게 하였습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Cain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Cain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해설

 

AC.362는 가인의 문제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는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앞의 AC.361에서 우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이제 AC.362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이 생겼으며, 어떻게 그것이 하나의 확고한 교리가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이 전체를 압축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그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고, 그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했습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 내적인 근원이라면 체어리티는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나타나는 삶입니다. 따라서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놓는 순간 그것은 자연스럽게 체어리티에서도 떨어져 나갑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서로 독립된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고대의 한 이단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고에는 어떤 하나의 진리를 붙잡았을 때, 그것을 전체로 만들어 버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단이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히 거짓된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신앙처럼 실제로 중요하고 참된 것을 붙잡고,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울 때 문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시작과 정확히 맞닿습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거짓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하나의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데서 출발했습니다. 문제는 그 구별분리가 되고, 분리된 것이 마침내 주된 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AC.362에서는 바로 그 과정의 심리적 원인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어떤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매우 날카로운 대목이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입니다. 어떤 진리를 단순히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이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내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그 진리가 점차 나의 진리가 됩니다. 그러면 그 진리를 내려놓거나 수정하는 것은 단순히 생각 하나를 수정하는 일이 아니라 를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이 그 교리와 결합합니다.

 

여기에 세상 사랑까지 더해집니다. 어떤 교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것으로 명성을 얻고, 자기 집단의 정체성과 권위를 세울 수 있게 되면 이제 그 교리를 지키는 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함께 작동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진리인가?를 물었지만, 나중에는 내가 틀릴 있는가?’, ‘우리가 틀릴 있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진리를 사랑해서 교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교리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매우 위험한 단계가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그것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이것은 오늘날 말하는 단순한 지적 오류보다 훨씬 깊은 영적 현상입니다. 이미 사랑이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이해성(understanding)이 그 사랑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말씀과 경험과 논리를 모두 그 결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읽습니다. 반대되는 것은 보이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은 작은 것까지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를 잘못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짓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확증된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였지만, 나중에는 이것은 반드시 옳아야 한다가 됩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과 다른 것은 틀렸다가 됩니다. 여기에서 교리적 차이는 쉽게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배척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길입니다. 가인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지나치게 높였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more essential)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표현이 AC.362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수단이 목적보다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앞의 AC.361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는 상태였습니다. AC.362는 그 지배가 어떻게 교리적으로 정당화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본질적이다라고 정하면 체어리티는 자연스럽게 신앙 아래로 내려갑니다. 사랑과 선한 삶은 있으면 좋은 ’, ‘신앙의 결과’, 또는 부차적인 이 되고, 무엇을 믿고 어떤 교리를 고백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결하게 말합니다. ‘ 결과 그들은 사랑 없이 살았다.교리의 질서가 삶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랑보다 신앙을 앞세운 것이 단순한 신학적 순서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실제 삶에서 사랑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그토록 엄중하게 다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의 잘못된 질서는 결국 삶의 잘못된 질서가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랑이 사라진 빈자리가 비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그들을 확증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해성은 그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계속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신앙이 사랑보다 중요하다는 교리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자기 사랑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체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fantasy를 단순히 상상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여기서는 자기 사랑에서 생겨난 왜곡된 사고, 곧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참이라고 여기고, 그에 맞추어 현실과 말씀을 보는 일종의 환상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과 환상이 conspired’, 곧 서로 결탁합니다. 사랑이 거짓된 방향을 원하고, 사고가 그것을 끊임없이 합리화합니다. 결국 악한 사랑과 거짓된 사고가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입니다.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신앙이 체어리티를 싫어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미 그 전에 신앙이 사랑보다 본질적이다라는 교리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교리는 자기 사랑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이제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그 교리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단계는 체어리티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2이단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성경을 버린 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어떤 한 진리를 붙잡아 그것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내고 절대화할 때 생길 수 있습니다. 신앙도 진리입니다. 사랑도 진리입니다. 체어리티도 진리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붙잡아 사랑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종속시키면, 참된 것 하나를 붙잡고서 전체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특정 교리, 성경 번역, 예배 형식, 성례 이해, 종말론, 은사, 교회 정치, 특정 신학자의 가르침 등 무엇이든 그것을 전체보다 앞세우면 같은 위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처음에는 상당 부분 참되더라도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가 되고, 이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잘못되었다가 되고, 마침내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구조적으로 가인의 길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교리가 맞는가?만이 아닙니다. ‘ 교리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교리는 인간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더 충실히 행하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며, 자기 해석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게 된다면, 그 교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이미 가인의 위험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과 퍼셉션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설명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가인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말씀의 속뜻을 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질서를 안다는 생각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자체도 자기 우월성을 확증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AC.362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언제나 그 목적 안에 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섬겨야 하고,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며, 교리는 삶을 섬겨야 합니다. 내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어떤 진리도 전체 말씀과 교회의 질서,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목적 아래 놓여 있어야 합니다.

 

결국 AC.362는 가인의 비극이 신앙을 버린 데서시작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나치게 높인 데서시작되었다는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었으며,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왔고, 자기 사랑에서 나온 환상이 그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렇게 참된 것 하나를 전체보다 앞세운 작은 질서의 뒤집힘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AC.362의 경고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겠습니다. ‘이단은 언제나 거짓을 사랑하는 데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의 진리를 너무 사랑하여 그것을 다른 모든 진리의 질서 위에 올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다만 그때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그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고 소유한 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의 교리는 가인의 교리가 됩니다.

 

 

 

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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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네게 있음을 상징합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체어리티가 없고, 오히려 악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네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없음을 상징합니다. 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signifies that if thou art well disposed, thou hast charity;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signifies that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ou hast no charity, but evil.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signifies that charity is desirous to be with thee, but cannot because thou desirest to rule over it.

 

 

해설

 

AC.361은 창4:7의 속뜻을 한 문장 안에 압축하여 제시하는 개요입니다. 그런데 이 절은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상당히 익숙합니다. ‘선을 행하면 낯을 것이고,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며,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일종의 도덕적 권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가인과 아벨,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체어리티의 관계에 관한 말씀으로 읽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를 죄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없는 상태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네가 선을 행하면에 해당하는 if thou doest well을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외적으로 착한 일을 한다는 뜻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은 if thou art well disposed’,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더 정확하게는 내적 성향과 애정이 선을 향하고 있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시 앞의 AC.346-358과 연결됩니다. 가인도 행위가 있었고, 제물도 드렸습니다. 문제는 외적 행위의 유무가 아니라 그 행위가 어떤 내적인 것에서 나오는가였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라야 살아 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는 것보다 그 행위의 내적 근원인 체어리티가 그 사람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an uplifting’, 들어 올림은 바로 앞의 얼굴이 떨어졌다와 정반대입니다. AC.358에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짐은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들어 올림은 그 반대 상태입니다. 선한 애정이 있고, 체어리티가 있다면 얼굴이 다시 들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떳떳하게 고개를 있다는 심리적 표현을 넘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다시 올바른 질서에 놓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창4:6-7에는 아주 아름다운 대조가 있습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들어 올림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떨어진 얼굴도 다시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직 돌이킬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로 돌아온다면 그의 내적인 것들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한 책망이 아니라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두시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선과 악의 기준을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자리를 중립 상태가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차지합니다. 이것은 가인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그는 신앙이 있기 때문에 체어리티는 없어도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러한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서도 신앙만으로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없습니다. 체어리티를 배제하면, 결국 악이 문에놓이게 됩니다.

 

이라는 표현도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풀리겠지만, 이 개요만 보더라도 아직 악이 완전히 실행된 상태라기보다 바로 들어오려는 경계에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실제 이야기에서도 가인은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분노가 일어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지만,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악이 문에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AC.359-361은 주님께서 악이 완전히 행위가 되기 전에 인간에게 경고하시고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AC.361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개역개정의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를 우리는 자연스럽게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지만 네가 죄를 이겨야 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전혀 다른 장면을 봅니다. 여기서 는 체어리티를 가리키며, ‘그의 소원은 네게 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의 아벨과 가인의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깊은 뜻이 됩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배척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은 본래 함께 있어야 하는 형제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통하여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선인지 알고 행합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둘이 서로 분리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어지는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네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을 없다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 곧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이 먼저이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종속되어야 한다’, ‘교리를 올바르게 믿는 것이 본질이고, 사랑과 삶은 그다음이다라는 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단순한 분리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완전히 없애기 전에 먼저 그것을 지배하려 합니다.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놓고 신앙이 주인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질서의 전도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앞서 AC.342-344에서 보았듯이 신앙의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지배해야지 수단이 목적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AC.361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아벨 살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됩니다. 그다음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됩니다. 이어서 분리된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생깁니다.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고 자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제 체어리티가 자신과 함께 있기를 원함에도 그것을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합니다. 그 지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다음 단계에서 마침내 아벨을 죽입니다. 즉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라는 말씀은 생각보다 매우 애틋한 표현입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도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문제는 가인이 체어리티와 함께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위에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둘러싼 창4 전체의 비극이 응축됩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도 이 말씀은 매우 직접적입니다. 우리는 체어리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가인의 질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도 중요하지요. 선행도 해야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교리가 옳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사랑과 삶을 교리 아래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질서는 그 반대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하여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하여 있으며, 우리가 아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AC.361의 핵심은 선을 행하라는 단순한 도덕 명령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애정을 회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있게 하라. 그러면 떨어진 얼굴이 들릴 것이다.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니 그것을 지배하려 하지 말라.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하지 말고, 다시 체어리티와 하나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가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회복의 초대처럼 읽힙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습니다. 아직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아직 죄는 문에있을 뿐입니다. 아직 떨어진 얼굴은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이후의 비극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이 구절을 더욱 무겁게 읽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이미 그에게 체어리티로 돌아갈 길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AC.362, 창4:6,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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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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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것은 별도의 확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ThatJehovah said unto Cain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needs no confirmation, as a similar passage was explained above.

 

그들이 그날 바람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3:8)

 

 

해설

 

AC.360은 한 문장뿐인 매우 짧은 글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 AC.359에서 우리가 만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양심이 말해 주었다는 해석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별도의 성경 인용을 동원하여 입증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360의 핵심은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AC.359의 해석을 앞에서 이미 세워 놓은 해석 원리에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가 AC.359 심화에서 살펴본 양심(conscience)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360에서도 다시 conscience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순한 번역상의 우연이나 AC.359의 일회적인 표현으로 돌리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인간 안에서 양심이 말해 주는 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근거로 가인은 홍수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과 동일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에 의해 인도되었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에 관한 지식을 기초로 양심이 형성된다는 큰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AC.359-360conscience는 그 시대적 차이를 무시한 채 후대의 양심 개념을 그대로 가인에게 옮겨 놓기보다, 가인의 타락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에 잘못을 알리고 제지하는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다는 문맥에서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히려 AC.360에서 새롭게 눈여겨볼 부분은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설명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성경의 표현이 반드시 외부에서 음성으로 들려오는 말씀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에 따라 퍼셉션이나 내적 딕테이트, 그리고 후대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알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셨다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그때 그 사람 또는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현재 상태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이미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즉 악이 이미 애정 안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그 악을 보게 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내적 경고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9-360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보입니다. 가인의 내적인 상태는 이미 나빠졌지만, 주님과의 모든 접점이 즉시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가인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신의 상태를 돌아볼 기회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내적 경고를 따르지 않고 계속 자기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시대적 차이를 구별하면서 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홍수 후 영적 인간의 질서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에서 배우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고, 그 양심을 통하여 우리의 애정과 생각과 행위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특히 분노나 질투, 자기 의가 일어날 때 그 상태를 정당화하는 목소리만 듣지 않고, ‘이것이 정말 체어리티와 일치하는가?라고 묻게 하는 내적 경고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60은 짧기 때문에 별도의 심화가 필요한 글은 아니겠습니다. 오히려 이미 작성한 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고대교회부터인데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AC.360을 중요한 추가 근거로 반영하면 좋겠습니다. AC.359에서 한 번 사용된 conscienceAC.360에서 다시 확인된다는 사실은 그 심화의 문제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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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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