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10/1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 찬131, ‘다 나와 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 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6-14)

 

 

제목은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

 

 

이며, 다음은 이 특별한 예배를 위한 ‘3분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 출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를 따라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섯 날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일곱째 날의 안식에 이르러 사랑으로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이끄십니다.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녔으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신의 감각과 ‘프로프리움’(proprium)을 신뢰하면서 이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더 깊은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인 아벨이 죽임을 당했고, 그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하여, 그러나 신앙 자체를 보존하시고,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다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황폐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지난주 시작한 창5에서는 또 다른 계열인 셋 계열을 통해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교회의 계승과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하나였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였습니다. 그러나 셋 교회에 이르면서 그 완전성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변화가 에노스와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어떻게 깊어지는지 살펴봅니다. 특별히 기억할 것은 ‘참된 신앙의 생명은 진리를 아는 데만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496-509 요약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창5:1-5을 통하여, 태고교회가 어떤 교회였으며 그 뒤를 이은 셋(Seth) 교회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오는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신앙과 사랑은 여전히 결합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셋 교회에 이르면서 사랑의 중심성과 퍼셉션의 완전성에는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그다음 말씀인 창5:6-14, AC.496-509를 읽습니다. 여기에는 셋이 에노스(Enosh)를 낳고, 에노스가 게난(Kenan)을 낳으며, 게난이 다시 마할랄렐(Mahalalel)을 낳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나이, 자녀들의 출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족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가 어떻게 서로 다른 상태를 거치며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6절은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라고 합니다. AC.496-498에 따르면 여기서 ‘셋’은 태고교회의 뒤를 이은 두 번째 교회이며, ‘에노스’는 셋 교회로부터 이어져 나온 또 하나의 교회입니다. 셋 교회는 최초의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넘어, 한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어졌다’는 사실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노스 교회는 셋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았지만, 셋 교회와 완전히 같은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앞선 교회가 지녔던 천적 생명과 퍼셉션이 후대의 교회에 그대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것들이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교회가 차례로 생겨났다는 기록이 아니라, 교회의 내적 상태가 세대를 따라 어떻게 달라져 갔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97은 이러한 변화를 ‘교회는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지나면서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 모습이 반드시 먼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이름도 남아 있고, 신앙의 형식도 남아 있으며, 앞선 세대가 전해 준 진리도 상당 부분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어야 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을 행하는 생명,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능력은 점차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어 7절과 8절에서는 셋이 에노스를 낳은 뒤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499는 여기서도 ‘날들’과 ‘연수’는 때와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죽었다’는 것은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셋 교회가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 교회가 일정한 상태들을 지나며 존속했다는 뜻이고,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은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생겨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죽었다는 것은 셋 교회를 특징짓던 고유한 상태가 더 이상 계속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셋으로부터 이미 에노스라는 다음 교회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9절은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00은 에노스를 세 번째 교회, 게난을 네 번째 교회라고 밝힙니다. 에노스는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교회의 천적 상태는 점차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AC.501은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열매와 씨앗’이고, 다른 하나는 ‘뇌와 그 덮개들’입니다. 열매나 씨앗의 가장 안쪽에는 생명을 품고 있는 중심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열매의 열매’, 또는 ‘씨앗의 씨앗’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중심에서 바깥으로 나아갈수록 본질적인 것은 점차 적어지고, 마침내 얇은 껍질과 덮개에 이릅니다. 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내적인 섬세한 조직으로부터 점차 더 일반적이고 조밀한 덮개들이 이어져 마지막에는 두개골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는 태고교회 이후의 교회들이 서로 아무 관계 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앞선 교회로부터 일정한 질서를 따라 이어졌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가장 내적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본질적 생명은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게난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껍질’이나 ‘덮개’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껍질은 열매를 보호하고 덮개는 그 안에 있는 것을 감쌉니다. 문제는 껍질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이 점차 사라지는 데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리와 예배, 신앙의 형식과 전통은 모두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 있지 않다면, 교회는 겉모습을 유지하면서도 그 본질적 생명은 잃어 갈 수 있습니다.

 

AC.502는 이러한 쇠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퍼셉션의 완전성이 감소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인 ‘사람’, 곧 아담 교회와 그 뒤를 이은 셋과 에노스 교회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퍼셉션의 완전성은 서로 달랐습니다. 최초의 교회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매우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지만, 후대의 교회들에서는 그 능력이 점차 약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은 퍼셉션의 범위가 넓어져 더 좋아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선과 진리의 차이와 그 성질을 매우 분명하고 세밀하게 알아차렸지만, 후대로 갈수록 그것을 점점 덜 명료하게, 보다 막연하게 퍼셉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분명했던 것이 점차 흐릿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의 완전성이 ‘명료하게 퍼셉션하는 능력’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능력이 점차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AC.503에 이르면 퍼셉션에 관한 더욱 깊은 가르침이 나타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단순히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능력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무엇이 선인지 분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선을 실제로 행하기를 사랑하고, 선을 행할 때 기쁨을 느끼는 것이 살아 있는 퍼셉션의 본질이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아는 것과 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쓰임’이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마음속에 있는 좋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제로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이러한 쓰임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특히 AC.503은 ‘주님께서는 쓰임으로부터, 쓰임을 통하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생명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원이 인간의 행위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다만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인간 안에서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날 때, 그 사랑과 신앙이 살아 있는 생명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단지 아는 것 자체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곧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데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AC를 읽는 목적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많이 알고, 상응을 정확히 이해하며,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앎이 마지막 목적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에 관한 지식은 많아질 수 있어도 그 안의 영적 생명은 그만큼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지난주 살펴본 ‘천국의 기쁨은 쓰임에 있다’는 가르침과 오늘의 AC.503은 깊이 연결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이웃을 섬기는 데서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태고교회 사람들 역시 선을 행하는 데서 행복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사랑은 선을 행하는 데서 기뻐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생명의 질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했다는 것은 단지 특별한 영적 감각이 약해졌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 퍼셉션에 생명을 주던 사랑과 선한 쓰임의 기쁨 역시 약해져 갔다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의 생명이 약해지면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보는 능력도 함께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10절과 11절에서는 에노스가 게난을 낳은 뒤 자녀들을 낳고,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04-505는 여기서도 앞서 설명한 ‘날들과 연수’, ‘아들들과 딸들’, ‘죽음’의 의미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AC.505는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덧붙입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와 셋, 에노스라는 세 교회는 뒤에 이어지는 교회들과 비교할 때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 뒤에 이어지는 교회들은 그 알맹이를 둘러싼 ‘막과 같은 부분들’에 비유됩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에 하나의 중요한 경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 곧 아담 교회에서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퍼셉션은 점차 감소했지만, 이 세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가장 내적 생명에 가까운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게난부터는 그 상태가 한층 더 외적인 것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12절에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06은 게난을 네 번째 교회, 마할랄렐을 다섯 번째 교회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507에서는 게난 교회의 상태를 더욱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게난은 앞선 세 교회처럼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 포함시키기 어려웠습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비교적 명료했던 퍼셉션이 게난에 이르러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를 둘러싼 ‘첫 번째의 더 부드러운 막’에 비유합니다. 여기서도 변화는 갑작스러운 단절이 아닙니다. 게난 교회가 곧바로 가장 바깥의 딱딱한 껍질처럼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 알맹이에 가까운 부드러운 막에 해당했습니다. 다시 말해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내적 생명으로부터 조금 더 멀어졌지만, 여전히 그 계승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의 상태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선과 진리를 비교적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구체적인 차이와 성질을 이전처럼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퍼셉션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점차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이어질 에녹(Enoch)과 노아(Noah)의 교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점차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훗날 에녹을 통하여 퍼셉션에서 나온 것들이 교리의 형태로 보존되고, 마침내 노아에 이르러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준비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내적 상태가 약해지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달라진다고 해서, 주님께서는 곧바로 인간을 버리시거나 교회의 역사를 끝내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추어 선과 진리를 계속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가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어 13절과 14절에서는 게난이 마할랄렐을 낳은 뒤 자녀들을 낳고,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08은 여기서도 ‘아들들과 딸들’이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게난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 진리와 선을 ‘더욱 일반적인 방식으로’ 퍼셉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앞선 교회에도 진리와 선이 있었고, 게난 교회에도 진리와 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퍼셉션하는 상태는 같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같은 ‘아들들과 딸들’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도, 그 표현이 나타내는 진리와 선의 구체적인 어떠함은 각각의 교회에 따라 달라집니다. ‘죽었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난이 죽었다는 것은 게난 교회를 특징짓던 그러한 퍼셉션의 상태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속했던 모든 선과 진리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게난으로부터 마할랄렐이라는 다음 교회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AC.509는 이 모든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모든 것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이 짧은 문장은 창5뿐 아니라 말씀의 상응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날들과 연수’는 때와 상태들을, ‘죽었다’는 것은 어떤 상태의 끝을 의미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응의 기본 의미를 안다고 해서 그 말씀이 나타내는 구체적인 속뜻까지 모두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아들들’이 진리를 의미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교회에서 나온 진리인지에 따라 그 진리의 질이 달라집니다. 같은 ‘딸들’이 선을 의미하더라도 그 선이 어떤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에 속하는지에 따라 그 어떠함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같은 ‘죽었다’는 말씀도 무엇의 끝인지는 해당 교회의 고유한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상응은 몇 가지 단어의 뜻을 외워서 성경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암호표가 아닙니다. 상응에는 일정한 질서와 기본 의미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전체 문맥과 그것이 관계하는 영적 상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상응의 지식을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상응을 통하여 주님께서 어떤 영적 상태를 드러내고 계시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같은 말씀을 읽더라도 그 말씀이 어떤 사랑과 선, 어떤 신앙과 진리의 상태에 관계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의 AC.496-509를 하나로 모아 보면, 창5의 계보에는 두 가지 흐름이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는 ‘퍼셉션의 점진적인 쇠퇴’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능력이 점차 약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명료했던 퍼셉션이 점점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열매와 씨앗의 알맹이에서 그것을 둘러싼 부드러운 막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교회의 내적 상태도 점차 외적인 것으로 변화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쇠퇴 속에서도 계속되는 주님의 보존과 계승’입니다. 한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가 이어지게 하십니다. 인간이 최초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추어 구원의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그리고 이 두 흐름의 중심에는 오늘 AC.503에서 살펴본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로 ‘참된 영적 생명은 사랑이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의 생명은 단지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선을 행하는 데서 행복과 기쁨을 느끼는 사랑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생명도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 얼마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완전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가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살아 있으며, 그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진리를 배우며 신앙의 지식을 쌓아 갑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선을 행하는 기쁨이 점점 커지고 있는지, 아니면 아는 것은 많아지지만 실제로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은 오히려 약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로 살아가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이 주어져 있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양심이 형성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실제 삶에서 행할 때, 그 진리는 단순한 지식으로 머무르지 않고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특별한 퍼셉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주신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이웃을 판단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는 일을 무거운 의무로만 여기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흘러가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창5:6-14은 우리에게 교회의 쇠퇴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 쇠퇴의 한가운데서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흐려지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약해졌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 자체가 약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달라진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다음 교회를 준비하셨습니다. 셋에서 에노스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다시 게난에서 마할랄렐로 이어지는 계보는 인간의 상태가 변하는 가운데서도 교회를 이어 가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과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처음의 완전한 상태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곧바로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내적 상태가 약해지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흐려질 때에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생명의 길을 마련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때에도 주님을 향한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과 진리를 붙들고,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옮기며, 작은 일에서부터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이 선을 행하는 기쁨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받은 사랑이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나타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창5의 계보는 그렇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를 넘어, ‘내가 아는 진리는 지금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 사랑은 누구를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살아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의 열매가 맺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상태가 변하고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음 길을 준비하시는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오늘 창5:6-14, AC.496-509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퍼셉션은 흐려져도 주님의 사랑과 섭리는 흐려지지 않으며, 참된 신앙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창5:6, AC.496, ‘셋으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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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7, ‘시간이 흐르며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하는 교회’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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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8, ‘셋으로부터 이어져 나온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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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7-8, AC.499, ‘날들과 연수,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죽음의 의미’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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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0,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던 에노스와 그 뒤를 이은 게난’(AC.500-503)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노스’(Enosh)는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셋’(Seth) 교회보다 더욱 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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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1, ‘열매의 속과 씨앗에서 껍질로,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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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2, ‘점차 흐려지고 일반적이 되어 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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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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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4, 창5:10-11,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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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5, 창5:10-11, ’에노스‘, '셋', '사람'(아담)의 퍼셉션 차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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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6, 창5: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C.506-507)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창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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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7, 창5:12, ‘게난’,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창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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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8, 창5:13-14,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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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9, 창5:13-14,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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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6-14, AC.496-509 중 리딩 필독 세 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링크들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창5:9, AC.501, ‘열매의 속과 씨앗에서 껍질로,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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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2, ‘점차 흐려지고 일반적이 되어 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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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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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20261025) 리딩 본문(창5:15-20, AC.510-515)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마할랄렐과 야렛, 그리고 에녹으로 이어지는 교회의 계승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할랄렐 교회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좋아하게 되면서 사랑과 퍼셉션의 생명이 더욱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야렛을 거쳐 에녹에 이르면,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진리들을 후대를 위해 교리로 보존하는 새로운 전환이 나타납니다. 다음 주에는 이 변화를 통하여 ‘진리를 아는 기쁨과 선을 행하는 기쁨 중 무엇이 앞서야 하는가’, 그리고 인간의 퍼셉션이 약해지는 가운데 주님께서 어떻게 진리를 보존하시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18(D1)

 

2673, 2, 창5.2, 2026-10-18(D1)-주일예배(창5,6-14, AC.496-509),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pdf
0.79MB

 

 

 

주일예배(2026/10/11, 창5:1-5, AC.469-495),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

※ 오늘(2026/10/1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7, ‘사랑의 하나님’, 찬130, ‘찬란한 주의 영광은’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첫 번째, 1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469번에서 495번입니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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