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2)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눅4:5-13)

 

주님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人性, this human)을 벗으셨을 때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을 입으셨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신약 성경에 여러 번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을 ‘인자’(the son of man)라 부르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 부르셨다. ‘인자’로서 주님은 진리 자체를 뜻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은 선 자체를 뜻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인간 본질(human essence)이 신성하게 되었을 때 그 본질에 속한 것이었다. ‘인자’의 상태는 주님의 겸비(謙卑)와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상태는 주님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 (AC.2159:2,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2159:2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nd when he had put off this human, he put on the Divine human, from which he called himself the ‘son of man’ as we find many times in the Word of the New Testament; and also the ‘son of God’; and by the ‘son of man’ he meant the truth itself, and by the ‘son of God’ the good itself, which belonged to his human essence when this was made Divine. The former state was that of the Lord’s humiliation, but the latter that of his glorification (treated of before, n. 1999). (AC.2159:2, Clowes 역)

 

이는 창세기 18장 3절,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에 관한 주석 중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다음은 창14:1-11입니다.

 

1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4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5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8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9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10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창14:1-11)

 

여기 보면, 아브라함의 아브람 시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연합군과 소돔 왕 베라의 연합군이 싯딤 골짜기에서 전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전쟁은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그돌라오멜을 12년 동안 섬기다가 이듬해 배반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돌라오멜은 주변의 다른 왕들과 손을 잡고 그들을 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돌라오멜의 연합군과 소돔 왕의 연합군이 싯딤 골짜기에서 만났는데, 결과는,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즉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이 소돔 왕의 연합군을 이긴 것입니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 대해 설명하면서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 전쟁이 단순히 가나안 땅에 있었던 왕들의 전쟁만 말하는 게 아니고요, 그 속뜻으로는 어린 시절 주님의 내면에서 벌어진 영적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40일간 광야 시험으로 압축해서 표현한 주님의 시험 안에는 당연히 이 전쟁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주님에게 어떤 시험이었는가를 속뜻을 통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그돌라오멜 왕과 그 친구들은 어린 시절 주님 안에 있었던 선과 진리들인데, 진정한 선과 진리는 아니고 외견상 선과 진리입니다. 그리고 소돔의 왕들은 외견상 선과 진리 안에 감추어진 이기적인 성향을 나타냅니다. 외견상 선과 진리라는 건 이를테면, 젖먹이들의 천진난만함 같은 것이 외견상의 선과 진리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순수하고 선하게 보이는 그것을 외견상의 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천진함 속에 이기적인 것이 숨어있으며, 그러므로 진정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그돌라오멜 왕을 섬겼던 기간은, 이기적인 성향들이 천진난만함 속에 가려져 있는 기간입니다. 그러다가 지각이 점점 발달하면서 이기적인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기적인 것이란, 자기 것을 챙기려 하고, 다른 친구들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것이 이기적 성향이 드러나는 것이고, 소돔의 왕들이 그동안 섬기던 그돌라오멜에게 반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때부터 당신 안의 이기적인 성향과 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일찍부터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의 신성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가르침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당신의 인성(인간성) 안에 이기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 이기적인 것들과 치열하게 싸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돌라오멜 왕의 승리는 그 싸움에서 주님이 승리하신 것을 의미하고요, 그리고 외견상의 선 안에 감추어진 이기적인 것들이 정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소돔 왕의 군대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말씀에는 그들이 산으로 도망했다고 합니다. ‘’은 본래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만, 여기서는 반대로 자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산으로 도망했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들이 그 근원인 자아 사랑으로 돌아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완전히 이기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이런 시험들이 있었다는 것을 배경으로 아시고, 오늘 본문으로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5절로 7절까지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한글 성경에는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로 되어 있습니다. ‘’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산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마귀가 주님의 인성 안 자아에 대한 사랑을 시험하는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시험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가 시험할 단서, 꺼리가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귀가 주님을 산으로 데리고 간 것은 주님의 자아에 대한 시험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 주면서, 그 권위와 영광을 모두 주겠다고 합니다. 여기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라는 말은, 시험은 아주 순간적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생각하면 고맙고 마음이 울컥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다른 마음이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보다 세상 돈이나 명예, 쾌락이 더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마음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잠깐씩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는데요, 그런데 그것이 모두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이 들 때,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그 마음을 덥석 붙잡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마귀에게 절하는 것이 되며, 그래서 그것은 지옥의 노예가 되는 일입니다.

 

※ 가령, 로또의 유혹 같은 것도 여기 해당되지 싶습니다. ‘만약 내게 수억의 현금이 생기면 나는 그 돈을 참 은혜롭게 주님 영광 위해 잘 사용할 텐데...’ 하면서 말이지요...

 

마귀는 주님께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지만, 지옥의 노예가 되는 삶에 무슨 권위와 영광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귀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시험하는 마귀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8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3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 마귀는 주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능력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공격이 좌절되자 마귀는 지체함 없이 바로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합니다. 그 시험에 대해서 9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한글 성경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첨탑 위에 주님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성전’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를 ‘새 예루살렘 교회’라고 부를 때는 그냥 새 교회라는 뜻이 아니고, 이 교회의 교리가 전혀 새로운 교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성전 위의 탑’은 ‘자아에 대한 사랑’, 또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앞 절에서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간 것과 여기서 성전 탑 꼭대기에 주님을 데리고 간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높은 산이나 탑은 모두 우리의 자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자아가 높은 산이나 첨탑과 같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주님을 성전 위 탑 꼭대기로 데리고 간 것은, 주님의 인간 안에 있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안으로 마귀가 들어와 주님을 유혹하는 모습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 표현에는 그냥 뛰어내리라고 한 것이 아니고, 아래로 몸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548번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이 내세에 들면 먼저 천사들이 맞아들여 모든 선한 도움을 주고, 주님과 천국, 천사의 삶에 대해 들려주며 진리와 선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세상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그것을 부인하고 무시해왔으면, 몇 마디 나눠본 후에 그 천사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것을 감지하자마자 천사들은 그를 떠나게 된다.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여러 번 거치고 나서 마침내 그는 자기와 같은 악 안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이렇게 되고 나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돌아서고, 자기가 세상에서 연결되어 살던 바로 그 지옥을 바라본다. 그 지옥 안에는 자기와 비슷한 악에 대한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다. 주께서는 천사를 통해서 그리고 천국에서 나오는 입류를 통해서 모든 영을 당신께로 이끄시지만, 악 안에 있는 영들은 거세게 저항하고, 마치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찢어내듯 하며, 밧줄에 끌려가듯 자기 자신의 악에, 즉 지옥에 끌려간다. 그렇게 끌려가기 때문에, 즉 그들의 악에 대한 사랑이 거기 따라가길 원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자유로 지옥에 뛰어든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그들의 관념 때문에 이것을 믿지 못한다. 사실, 저 세상에서 지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오직 지옥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사람들 자신에게만 그렇게 보인다. 이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악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은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한 채 뛰어드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런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힘에 의해 지옥으로 던져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상 모든 내용은 주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던지지 않으시며, 이 세상에 살 때나 죽은 뒤 영이 된 후에나 사람이 스스로 지옥에 뛰어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HH.548, 김은경 역) //

 

따라서 성전에서 몸을 던지라는 말은 예루살렘 성전, 즉 ‘교회의 교리에서 이탈하라’는 것이고, 그러므로 ‘지옥을 향해 몸을 던지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종종 이와 같은 유혹을 합니다. 마치 뱀이 하와를 시험하듯이 ‘네가 지키려고 힘쓰는 교회 교리는 너를 구속할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 즐거움에 몸을 던져라. 그리하면 네가 자유를 얻을 것이다’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살지 않고 세상의 쾌락에 몸을 맡겨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기록되었으되’라고 한 것은 아래 시편 91편 11, 12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91:11-12)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편의 이 말씀은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 때, 하나님의 영원한 보살핌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금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진리에서 뛰어내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아무 탈 없이 지켜 주실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요, 또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발이 돌에 부딪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발은 우리 몸의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가장 낮은 의식, 또는 가장 바깥쪽의 의식인 자연적인 의식, 즉 겉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돌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마귀는 왜 발에 대해 말했을까요? 사람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은 모두 겉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은 ‘성전, 즉 교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더라도 겉 사람이 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돌에 부딪힌다’ 그랬는데, 영어식 표현은 against stone입니다. stone은 돌이기 때문에 이 말은 돌, 즉 진리에 반(反)한다는 뜻이지요. 즉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은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아무렇게나 행동을 해도 진리에 반(反)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거듭나게 되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더라도 진리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소위 공자가 말하는 ‘종심(從心)의 경지’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동안에는 마음이 원한다고 그대로 하면 안 됩니다. 철저히 진리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금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1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을 달라고 모세를 다그쳤을 때, 그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신6:16)

 

신앙인들은 언제나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뜻대로 해달라고 주님을 다그칩니다. ‘하나님께서 설마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시겠어?’라고 생각하며 진리를 어기려고 합니다.

 

※ 저는 비교적 꽤 최근까지도,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를 알기 전까지는 위와 비슷한 생각과 태도가 제게도 있었는데요, 그것은 주님의 뜻을 잘 모르겠는 일이 생기면 그걸 가지고 충분히 기도하며 주님 뜻 알려고 하는 대신, ‘나는 주의 자녀이니 혹시 내가 하는 이 결정이 잘못된 선택이어도 주님이 수습해 주실 거야’ 하며 어떤 중요한 걸 결정하는, 좀 어처구니없는 태도들이었습니다. 물론 주님은 끝까지 저를 돌보셨지만, 조금 착하고 겸손했더라면,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뜻 구하는 사람이었더라면 훨씬 질러갈 길을 굳이 꾸역꾸역 빙 돌아온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시며,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시험을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서에서는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또는 인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속뜻으로는 선 측면에서 본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인자’는 진리 측면에서 본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인자로서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진리는 공격할 수 있지만, 선은 공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진리를 가지고 따지는 사람들은 자주 시험에 듭니다. 왜냐하면 진리만 가지고는 거짓을 이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이 많은 사람들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선 안에는 주님이 주시는 모든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과 부딪치면 언제나 이깁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주님은 시험을 받으실 때 인자의 상태, 즉 진리의 상태로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에서 마귀는 계속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라고 말하면서 주님에게 절을 요구하고, 성전 첨탑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인자의 상태에 계신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직 진리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님을 이미 선의 상태가 되었다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당신은 이미 전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자기에게 절을 해도,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아무 해가 없을 것이라고 주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선의 상태가 되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진리에 어긋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에게 있는 자아 사랑을 흔드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자신이 많이 거듭났다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유혹이 올 때, ‘잠깐 이것을 즐기자. 그렇더라도 나는 언제든지 다시 본래(진리)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라고 하며, 쉽게 생각하고 자신 있어 하는데요, 그것은 마치 몸에 해로운 기호품을 끊었던 사람이 ‘나는 언제든지 이것을 끊을 수 있어’라고 하면서 다시 그걸 가까이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고요, 교만한 마음입니다. 마귀는 주님에게도 그런 생각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자의 상태에 계신 주님에게 ‘당신은 이미 선의 상태이니 아무 일이나 해도 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유혹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물리칩니까?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기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하고요, 그리고 시험에서 이기겠다는 결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씀 안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이 흘러들어와 모든 부정한 생각들을 흩어버리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와, 또 진리 안에 있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42:1)

 

아멘

 

원본

2017-06-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1(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1. 2023-03-21(D3)-매일예배(2438, 눅4,5-13),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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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1)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눅4:1-4)

 

 

모든 시험은 사람의 사랑에 대한 공격이며, 시험은 그 사랑과 같은 정도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랑이 공격받지 않으면 시험은 없다. 어떤 사람의 사랑을 파괴하는 것은 그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명은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었다. 주님의 그 생명에 대해 시험이 허용되었고, 그것은 주님이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에까지 계속되었다. (AC.1690)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1690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All temptation is an assault upon the love in which the man is, and the temptation is in the same degree as is the love. If the love is not assaulted, there is no temptation. To destroy anyone’s love is to destroy his very life; for the love is the life. The Lord’s life was love toward the whole human race, and was indeed so great, and of such a quality, as to be nothing but pure love. Against this his life, continual temptations were admitted, as before said, from his earliest childhood to his last hour in the world. (n. 1690:3).

 

이는 창세기 14장 10절,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에 관한 주석 중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예배 인도를 담임이 하니까 마치 담임이 모든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가대의 찬양이 있고,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이 계시고,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시는 우리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역할을 할 때,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 경건한 교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진리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이 있는 진리이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선이 있는 진리로서 묵묵히 헌신할 때, 그 진리는 이웃들의 마음에 조용히 젖어 들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 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1-2)

 

사람들 대부분은 이 말씀이 아브라함이 아브람 시절, 여호와를 처음 만나 하란을 떠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속뜻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주님께서 아주 어리실 때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기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주님이신 것이지요.

 

※ 말씀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은 주님의 표상입니다. 심지어 악인도 말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자기 인생을 살다 갔지만, 사실은 마치 무대 위 배우들처럼 주님을 연기한 것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자신이 보통의 어린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지각이 생기면서 당신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로부터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또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아브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거룩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영어로 알파벳 ‘H’자가 그런 뜻이라고 합니다.

 

※ AC 1416번 글 두 번째 항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Concerning Abraham it is said: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17:5) Thy name shall not any more be called Abram, and thy name shall be Abraham, for the father of a multitude of nations have I given thee (Gen. 17:5).

 

The letter h in “Abraham” was taken from the name Jehovah, on account of his representation of Jehovah or the Lord. In like manner it is said of Sarai:

 

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17:15-16) Thou shalt not call her name Sarai, but Sarah shall her name be. And I will bless her, and also give thee a son of her; thus I will bless her, and she shall become nations; kings of peoples shall be of her (Gen. 17:15–16);

 

where “nations” denote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and “kings of peopl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thence derived, which belong to the Lord alone.

 

이는 창세기 12장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에 관한 주석 중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에 나오는 내용으로, ‘아브라함’(Abraham)의 ‘h’는 아브라함이 여호와 혹은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 이름 여호와에서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

 

반대로 ‘아브람’은 거룩하게 되시기 전의 주님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거룩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 그러니까 아주 어린 시절, 주님의 인성 가운데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세겜으로 옮길 때 ‘그 땅에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였다’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서 ‘가나안 사람’은 바로 주님 안에 있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인 것입니다.

 

주님 안에 악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악은 주님 자신이 저지른 악이 아니며, 모두가 마리아로부터 유전된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당신 안에 악이 있도록 허용하셨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몸을 입으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악이 있어야 시험을 불러들일 수 있고요,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해 지옥을 정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이 없으면 시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 안에 악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통해 시험을 불러들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안에 악을 허용하신 세 번째 이유는, 주님은 당신이 시험을 당하고 거룩하게 되신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거듭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스스로 거듭남의 모범이 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그런 사랑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면서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주님은 천국보다 크시고 지옥보다 크셔서 신성 그 자체로 직접 오실 수 없으십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천국도 지옥도 그냥 소멸해 버리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주님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또는 이 세상이든 지으신 이 피조세계에 임하실 때는 피조물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일종의 보호장치를 사전에 마련하십니다. 그것이 예를 들면, 삼층천 천사들에게조차 투명한 얇은 겉옷을 입히신 것이고요, 인성을 입으시고 지옥을 찾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옥, 즉 지옥에 있는 모든 비참한 영들조차 여전히 사랑하시기에 주님의 방문으로 그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라고 합니다. 요단강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강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거나, 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는 신앙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를 의미합니다.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우리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고요, 또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때는 마치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의 상태와 같아서 진리를 배우기는 하는데, 아직 행함은 없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만 있고, 아직 선은 없는 상태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그런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러다 점차 진리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배운 진리를 삶을 통해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진리는 더 이상 지식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 바탕에 선이 있는 진리로 변하게 됩니다. 본문에 주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어린 시절에는 당신 안에 성령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지각할 뿐 아니라 뜨겁게 사랑하면서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셨다’고 합니다. 광야는 시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로 가신 것은 주님에게 시험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에 이끌리셨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성령 충만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시험을 불러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역사, 즉 선이 있는 진리의 역사가 없으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 충만할 정도로 영적으로 성장하실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시험을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단 한 번의 시험도 실패하시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십 일 동안’이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시험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전체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사십 일’은 주님이 아주 어릴 적부터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까지의 모든 기간을 의미합니다.

 

※ 말씀에서 이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번 나옵니다. 노아의 홍수 때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창7:4)라든지, 모세가 호렙산에서 보낸 기간인,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24:18)라든지,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보낸 기간인,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출16:15), 그리고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민13:25) 등을 볼 때,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 ‘사십’이라는 숫자는 ‘전체’, ‘모두’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성경 앱을 열고, ‘사십’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시면 어마어마하게 나오는 걸 보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40일간의 시험은 그 속뜻으로는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즉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이 생기면서부터 주님은 끊임없이 시험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적 성장은 보통의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누가복음 2장 5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2:52)

 

주님이 아주 빠른 속도로 거룩하게 되시는 모습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2절과 3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이 말씀에서 주님을 시험하는 ‘마귀’는 지옥 전체를 의미합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 ‘천국과 지옥’ 544번 글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에는 지옥을 관장하는 한 악마가 있으며, 그는 빛의 천사로 지음 받았으나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믿음이 퍼져있는 것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마귀, 사탄, 루시퍼라는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구절들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와 ‘사탄’은 지옥을 의미한다. ‘마귀’는 악마라고 불리는, 가장 악한 사람들이 있는 뒤쪽 지옥이다. ‘사탄’은 악령이라고 불리는 덜 악한 사람들이 있는 앞쪽 지옥이다. ‘루시퍼’는 바벨 또는 바빌론에 속한 사람들로, 천국까지도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혼자서 지옥 전체를 주관하는 악마는 없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모두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311–317항), 그리고 창조 이래 지금까지 지옥에 간 사람은 무수히 많으며, 그 모두가 다 이 세상 삶에서 신성을 적대한 정도만큼 악마라는 사실이다(311, 312항). //

 

그러니까 지옥 전체가 주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넘어뜨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의 사랑, 즉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음식을 드시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주님께서 광야에서 음식을 드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그런 뜻이 아니고, 시험 가운데서 주님이 영적인 양식을 전혀 섭취하지 못하셨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영적 양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험 중에 그런 경험을 합니다. 자신에게 진리와 선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주님의 보살핌이 없이 혼자 싸운다는 뜻입니다. 그때 지옥은 우리에게 있는 거짓과 악을 들춰내면서 계속 우리를 추궁합니다. ‘너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라고 하면서 우리를 절망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만약 그때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싸움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시험 중에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으시지 않았습니까!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27:46)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무 것도 잡수시지 못한다는 것은 극한의 시험 속에서 여호와께서 당신을 버리시는 것 같이 느끼시는 것이고, 그래서 여호와로부터 진리와 선이 전혀 흘러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을 끊고 선을 행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음은 간절히 원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그런 어려움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느끼시는 허기(虛飢)는 본질적으로는 선에 대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습니다.

 

마귀가 주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은 진리를 의미하고, ‘’은 세상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본래 떡은 영적 양식인 선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양식은 어떤 것입니까? 음식이나 재물, 건강이나 명예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육신의 생명을 살찌울지는 몰라도 영을 살찌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귀는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썩어버릴 떡을 위해서 영원한 진리를 버리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험 중에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나 건강을 잃었을 때, 또는 어떤 욕망에 시달릴 때, 진리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마귀의 시험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주님은 ‘기록된 바’라고 말씀하세요.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는 반드시 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이 있는 말씀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있는 말씀 가운데 선이 깃들고 능력이 생깁니다. 주님은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서에는 주님께서 시험받으셨다는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40일간 광야 시험과 겟세마네 동산의 시험, 그리고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시험, 그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조차도 당신의 시험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광야 40일간의 시험은 주님 생애에 잠깐 있었던 시험이 아닙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었던 모든 시험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시험은 인간의 시험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시험의 강도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비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험이 얼마나 지독하고 가혹한 것이었는지는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모든 시험을 묵묵히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계시는 동안의 모습으로도 주님이 얼마나 진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귀는 허기와 갈증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주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배고픔은 세상의 떡에 대한 갈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에 대한 갈증이며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귀에게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주님의 시험에 대한 것이지만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시험을 이기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할 때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새 교회 식구들과 또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께서는 이 말씀 가운데서 크고 작은 시험들을 이겨내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53:7)

 

아멘

 

원본

2017-05-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0(D2)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0. 2023-03-20(D2)-매일예배(2437, 눅4,1-4),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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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눅4:5-13,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2)'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2)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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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의 속뜻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32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36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눅3:21-38)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장래를 위해 세례의 관례를 만드시기 위함뿐 아니라 당신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영적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주님도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신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TCR.684, 이순철 역)

 

※ TCR(True Christian Religion, 참된 기독교) 위 684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This he did not only that he might institute baptism for the future, himself setting the example, but also because he glorified his human and made it divine, as he regenerates man and renders him spiritual. (TCR.684, Ager 역) //

 

※ 본래 ‘침례’(浸禮)라는 표기가 맞지만, 현 신약 성경에 ‘세례’(洗禮)로 되어 있어,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후 ‘세례’로 통일하겠습니다.

 

※ 신약 성서 원어인 헬라어 원전에 의하면, ‘침례’(浸禮, baptism, 헬, βἀπτισμα)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한글 성경에 ‘세례’(洗禮)가 채택된 것은, 광복 전 성경 한글화 작업으로 각 교단이 모였을 때 침례교만 빠졌기 때문입니다. 침례교 대표가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교단은 효과적 선교를 위해 큰 도시 위주로 움직여 연락이 수월했던 반면, 침례교만 유독 내륙 오지나 바닷가 농어촌 선교에 힘써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런 표기 문제 때문인지 일본어 성경은 그냥 원어를 그대로 표기합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 부근에서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은 그가 혹시 메시아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라며,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속뜻으로 본다면, 요한과 주님은 모두 말씀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과 주님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근본적으로 다른데요, 주님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외적 진리와 내적 진리를 모두 포괄하는 반면,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은 외적 진리, 즉 겉 글자인 문자적 의미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으로 표상되는 진리만으로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 즉 말씀의 문자적 의미로는 주님께로 나아올 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 거듭나서 구원까지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바라보고, 그다음은 더 나아가 악을 끊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의 지식만 가지고는 그런 능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지식 속으로 진정한 진리이신 주님이 오셔야 하며, 그때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성령과 불로 악을 끊고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신다’ 하고, 또 ‘그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한 것입니다. 성령과 불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을 동반한 진리, 즉 진리뿐인 진리가 아니고요, 사랑이 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요한에게 너도나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이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의식이 바뀌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때, 주님께서도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21절입니다.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백성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러나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요한은 주님께서 친히 보내신 선지자인데,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세례를 자청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이 장면에 관한 마태복음의 기록입니다.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3:13-15)

 

주님은 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참된 기독교’ 684번 글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장래를 위해 세례의 관례를 만드시기 위함뿐 아니라 당신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영적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주님도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신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세례의 전통을 세우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세례와 성찬을 통해 거듭나 구원받는 것처럼, 주님 역시 자기 안에 계신 여호와의 능력으로 자신의 불완전한 인성(人性, human), 마리아를 통해 유전한 인성을 신성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인간이 거듭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인성을 거룩하게 하셨고, 그래서 여느 인간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에서 주님의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이 느껴집니다. 아시는 것처럼 유대 교회가 문을 닫으면서 예배와 관련된 모든 표징, 표상들이 사라졌습니다. 이를테면, 성전의 양식이라든가 기물들, 그리고 번제와 희생제물의 영적 의미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께서는 두 가지 상징적 예전만 남기셨는데요, 하나는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식에서 이마에 물을 바르거나 침례식에서 물속에 잠기고, 성찬식에서 포도주와 무교병(떡, 빵)을 먹는 건 그냥 하는 형식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 참고로, 이마에 물을 바르는, 어디서는 손에 물을 따라 머리에 붓는, 세례는 후대에 생긴 것입니다. 좀 쉽고 편하게 하자고 생긴 편법이지요. 주님이 요한에게 받으신 세례는 몸 전체를 물에 담그는 침례(浸禮)였습니다. 영어로는 뱁티즘, 원어인 헬라어로는 밥티조마라 합니다.

 

주님은 이 예전들을 통해서 인간과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례와 성찬은 새 교회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예배 의식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두 가지 예배의 전례(典禮)를 친히 만드셨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속 사람의 개혁과 겉 사람의 거듭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속 사람의 개혁을 의미하고요,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겉 사람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와 성찬을 제정하신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거듭나는 것처럼 주님도 같은 방법으로 영화(榮化, Glorification)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로 결합하는 것처럼,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로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되신 것과 인간이 거듭나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이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일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일어났던 일회적인 일이 아니며,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서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거듭나는 사람들 안에서 치욕을 당하시고 지옥을 이기시며, 계속해서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십니다.

 

※ 우리는 악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악에서 물러나 영적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사실은 우리 안에서 주님이 대신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음 말씀의 속뜻입니다.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진리가 선이 있는 진리, 완전한 진리로 계속해서 바뀌어 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 한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백성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주님도 함께 세례를 받으시고요, 우리가 성만찬을 할 때, 주님도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듭날 때, 주님의 인성도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영화롭게 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는 이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거듭나는 모든 과정에 있어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우리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 하는데요, 이 말씀은 주님과 우리가 함께 세례를 받을 때, 속 사람이 열리며, 천국과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혼자 힘으로 거듭나려는 사람은 속 사람이 닫힙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그에게 오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거듭나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는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 들어옵니다. 그 모습을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거듭날 때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진리와 선이 흘러들어오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비둘기 같다’ 표현한 까닭은, ‘비둘기’는 속뜻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의 진리와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실 때,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Divine Human)을 나타냅니다. ‘신적 인성’이란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아들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신적 인성은 존재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깥으로 드러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일차적인 주님이시라면, 그분의 바깥으로, 겉으로 드러나심인 신적 인성으로서의 주님은 이차적인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이신 주님, 즉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 여호와를 우리는 아버지라 부르고요, 그분에게서 비롯한 이차적이신 주님, 즉 인간이신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대단히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 저는 소위 모태신앙으로 장로교 통합에서 유아세례 및 주일학교를, 그리고 고등학교 때 침례교회에 처음 출석, 침례교인이 되었으며, 이후 침례교 신학을 하여 침례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늦게 신학을 하여 신대원 어느 조직신학 시간에 삼위일체에 대한 시간이었는데, 그때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음 접하고, 무척 감동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거 참... 하며 많이 부끄러운데요, 그러나 여전히 기독교와 개신교 거의 모든 교인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소 좀 뿌연 생각인데요, 수년 전 무슨 금식기도를 배우러 대전 어느 대형 교회 유명 세미나를 다닌 적이 있는데, 그곳 주 강사이신 목사님도 하나님들을 따로따로 부르며 기도하시더군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한 것은,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거듭나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께서 세례의 전례를 직접 선포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23절에서는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가 30세쯤이라고 합니다. 30이란 수는 5와 6을 곱한 수입니다. 그래서 내적 싸움 중에도 작은 싸움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숫자 6은 내적 싸움을 의미하고, 숫자 5는 작은 것, 사소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 나오는 나이와 관련된 숫자들, 가령 창5에 나오는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등의 나이들은 그 이름으로 일컫던 교회들의 때와 상태들(the times and states of the church)을 의미합니다. 특히 가장 기본이 되는 1, 2, 3, 4, 5, 6, 7, 8, 9, 10 등의 수들 및 그 복합수들 역시 어떤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세례를 받으실 즈음의 주님은 이미 대부분의 시험을 이기신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주님이 당하시는 시험들은 아주 사소한 시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에게 남아 있는 큰 싸움이 있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시험과 마지막 십자가의 고난 정도였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본문에서는 주님의 그런 영적 상태를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라고 표현했습니다.

 

24절로 37절까지는 요셉으로부터 조상들에 이르는 가문의 계보가 나옵니다. 사실 요셉은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단지 그가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표면상으로 주님의 후견인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의 아버지로 비쳤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오늘 말씀에서는 무려 14절에 걸쳐 요셉의 가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요셉의 가계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까지 존재했던 모든 교회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37절에 나오는 아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순수했던 태고교회를 상징하고요, 그다음에 나오는 노아는 고대교회를 상징합니다. 또 한참 내려가 야곱이 나오는데, 야곱 역시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30절에 등장하는 시므온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나타내고, 유다는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를 나타냅니다. 시므온으로 표상되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는 진리를 의도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배운 다음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시므온으로 상징되는 교회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 즉 유다는 어떤 상태입니까?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는 진리의 인도를 받지 않고, 선의 인도를 받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애정, 또는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해도 진리에 어긋남이 없는 상태가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입니다. 그것을 선의 인도를 받는 상태라고 하는 것은, 선은 바로 애정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요셉은 영적 교회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24절부터 34절까지에 기록된 요셉의 가계는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23절에서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 한 것은, 그동안 모든 교회를 다스리던 주님은 본질적으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들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주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고, 또한 요셉의 족보를 차례로 기록한 것입니다. 다만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이 혹시 오해를 하지는 않을까 해서, 그냥 ‘요셉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세심하신 배려가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니케아 종교회의(AD 325, 니케아, 현 튀르키예 이즈니크) 당시에 아리우스파 같은 이단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주장했던 것은 ‘예수는 요셉의 자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아는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분이 또 그러세요. 우리나라에서 서너 번째 안에 드는 교파에 소속된 어떤 교인이 주님을 요셉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교회의 교리가 그런 건지, 아니면 그분의 사적 견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이 놀랐습니다.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직접 세례를 받으신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지 세례를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여느 사람들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를 다시 말씀드리면, 첫째는 세례의 전통을 제정하시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주님도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거듭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이 받으신 세례는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시는 것은 거듭남의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셨다’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싸우시고,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무슨 일이든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요12:28)

 

아멘

 

 

원본

2017-05-1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9. 2023-03-19(D1)-주일예배(2436, 눅3,21-38),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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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눅4:1-4,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1)'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1)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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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분봉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눅3:15-20)

 

 

사람은 마지막의 것들 안에 있을 때 천국과 결합한다. 즉 자연적 사람은 세상의 것들 안에 있고, 영적 사람은 천국의 것들 안에 있을 때 천국과의 결합이 일어난다. 말씀이 세상의 것들을 통해 기록되고 그 속에 천국의 것들인 영적 의미가 들어 있는 것, 즉 말씀의 글자의 뜻은 자연적이지만 그 속에 영적 의미가 들어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AE.475:21,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475:21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for heaven is conjoined to man when man is in ultimates, that is, in such things as are in the world in regard to his natural man, while he is in such things as are in heaven in regard to his spiritual man; in no other way is conjunction possible. This is why baptism was instituted; also the holy supper; likewise why the Word was written by means of such things as are in the world, while there is in it a spiritual sense, containing such things as are in heaven, that is, that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is natural, while in it there is a spiritual sense. (AE.475:21, Ager 역)

 

이는 계시록 7장 14절,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에 관한 주석 중 ‘그 옷을 씻어’에 대한 내용 일부입니다. //

 

 

네, 그럼 시작합니다.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와서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무리가 요한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묻자,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 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과 ‘먹을 것’은 겉뜻으로는 우리가 입는 옷과 먹는 음식이지만, 속뜻으로는 영적인 옷과 음식, 즉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것을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말할까요? 여분의 옷과 음식은 주님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에 인간의 생각이나 의도 같은 것들이 섞이면 그 순수함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더 이상 진리 아닌 것이 되고, 선은 선 아닌 것이 되지요. 그래서 주님은 여분의 옷과 음식을 가지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들 중에는 진리를 대할 때, 자기만의 틀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건강해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어떤 틀이 있다는 것은 얼핏 바람직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아의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정보를 이해할 때, 자기만의 틀을 갖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고정관념처럼 굳어져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대단히 유연한 것입니다. 마치 물이 어떤 모양의 그릇에도 담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틀 역시 유연해야 합니다. 그 유연성은 어디서 옵니까? 자아로부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를 내려놓을 때,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 틀조차도 주님이 허락하시는데요, 그렇게 자기가 만든 틀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틀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주님이 열어주시는 그대로의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가끔 설교를 준비하면서 말씀이 이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조바심이 납니다. 이것을 알아야 말씀의 실마리가 풀리는데, 왜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가? 하고 조바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그것이 결국 저를 위한 섭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깨달음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도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여분의 음식과 옷을 갖지 않는 것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는 요한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심경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라는 말은 그들이 요한에 거는 기대를 나타냅니다. 그들이 어떤 기대를 했을까요? 요한이 혹시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기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사상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사실 메시아 사상은 고대교회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유대교회만의 믿음이 아니고 지구상의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있었던 믿음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전통 종교 속에 등장하는 미륵 신앙 역시 메시아 사상입니다.

 

※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인 Arcana Coelestia 4680번 글에는 고대교회에 관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홍수 후 주님에 의해 세워진 고대교회는 일종의 표상 교회로, 예배와 관련, 전반적으로 외적으로는 주님 나라 천적(天的, celestial) 영적인 것들을, 그리고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의 신성 그 자체(the Divine things themselves of the Lord)를 표상하는, 그러면서도 내적으로는 체어리티(charity, 이웃사랑)와 연결되는 그런 속성을 갖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아시아 전역으로, 그리고 거기 있는 많은 왕국을 통해 확산되었습니다. The ancient church which was set up by the Lord after the flood was a representative church, and was of such a nature that all and each of its externals of worship represented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the Lord’s kingdom,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Divine things themselves of the Lord; but all and each of its internals of worship bore relation to charity. This church was spread over a large part of the Asiatic world, and through many kingdoms there; (AC.4680)

 

그래서 아마 한반도에까지 이르러 우리나라에서는 미륵 신앙으로 표현되었나 봅니다. //

 

그런데 고대교회가 몰락하면서 메시아의 의미가 모두 잊혀버렸습니다. 메시아의 의미를 모르기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구해낼, 그리고 그들을 지구상의 어느 민족보다도 우월한 민족, 번영하는 민족으로 만들어 줄 그런 세속적 메시아였습니다. 본문에서 백성들이 요한에게 기대하는 것 또한 그런 것입니다. 즉 그들은 요한이 그런 세속적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기대를 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꿰뚫어 본 요한이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과,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인류를 구원할 영적 메시아라는 사실을 지금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합니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요한’은 말씀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에서 사용하는 ‘’은 그 속뜻으로는 말씀의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말씀의 지식을 통해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 즉 말씀의 지식이 하는 일은 바로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후에는 주님의 세례가 필요합니다. 주님에게서는 성령과 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이구요, ‘’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사랑 또는 선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지식만으로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신적 인성(神的 人性, Divine Human)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인 성령과 불로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는 요한의 말은 주님에 대한 겸손함을 나타내지만, 그것 말고도 내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발은 신체의 가장 아래쪽 발에 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등차(degree, 등급)의 것인 사람의 육체와 감각을 나타냅니다.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주님이 계신 가장 깊은 내면이 있구요, 그 바깥쪽으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차례로 있습니다. 겉 사람은 사람의 육체와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겉 사람을 지배하는 것들은 대개는 육신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욕망과 탐심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속 사람을 먼저 개혁을 하시고, 그리고 속 사람을 통해서 겉 사람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이 아무리 주님을 사모하더라도 육신의 행위들이 거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겉 사람 또는 육체를 영적으로 가장 낮은 등차, 등급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신발 끈’은 특히 육체에서 나오는 불결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신발 끈을 푸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육신에 속한 불결한 것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주님의 신발 끈’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육신으로부터 올라오는 불결한 것들과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도 ‘신발 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입으신 몸은 인간 마리아로부터 받은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순결하거나 거룩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인간 본질은 거룩한 인간(Divine Human)이었으며, 다만 그것을 덮고 있는 외적 인성이 마리아로부터 받은 인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육신에 속한 불결한 것을 벗기 위해서 지옥과 싸우셔야 했습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주님의 신발 끈이 풀리는 것은 주님께서 육신의 한계를 벗으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것을 뜻하며, 동시에 인간의 거듭남과 구원을 뜻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인간의 구원을 동시에 의미하는 까닭은, 주님의 영화 또는 영광스럽게 되시는 일은 2천 년 전에 딱 한 번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거듭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도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거듭나는 사람의 주님께서는 신발 끈을 풀기 위해 지옥과 싸우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신발 끈은 곧 인류의 신발 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는 요한의 고백은 말씀의 지식만으로는 인간을 거듭나게 할 수 없고, 영광스럽게 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선이라야만 인류의 신발 끈을 풀 수 있다는 뜻입니다.

 

17절에서 요한이 주님에 대해 말합니다.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말씀에는 타작마당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타작마당’은 교회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농부가 수확한 것을 도리깨로 쳐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것처럼, 주님께서 선한 것과 악한 것,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리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라는 말씀에서 ‘’은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능력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그 능력으로 교회를 부단히 정화하신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교회이든 외부에 있는 교회이든, 선한 것과 악한 것,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이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세요. 다시 말하면 선과 악을 분리하시고, 진리와 거짓을 분리하십니다. 교회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일종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그 시험이 끝나면 쭉정이는 사라지고 알곡만 남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 거짓과 악한 것들이 사라지고, 점점 신실한 믿음과 주님,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만 남게 됩니다. 이와 같이 교회를 정화하는 일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한 분, 한 분 성도들의 내면에서 교회가 바로 서는 것으로 이 교회가 정화됩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8절에서는,

 

18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요한이 말하는 ‘좋은 소식’, 즉 영어로 good tidings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선지자들이 전하는 좋은 소식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고, 주님의 나라가 지상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주님은 이제는 다시 2천 년 전에 오신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새로운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로 우리 내면으로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매일 같이 우리 속에서 낡은 교회가 무너지고, 주님의 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주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은 대단히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매일 같이 오시고, 매일 같이 새로운 교회를 세워주십니다. 그것이 요한, 즉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 좋은 소식이란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과, 새 교회가 지상에 세워진다는 것과,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교회를 정화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오직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우리에게 늘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마지막으로 19절과 2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19분봉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요한으로부터, 또는 말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그것으로 매일 새롭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지금 19, 20절에 나오는 헤롯과 헤로디아 같은 사람들입니다.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헤롯에게는 빌립이라는 이복동생이 있었습니다. 헤로디아는 본래 이 빌립의 아내였는데, 그가 남편을 버리고, 남편의 이복형인 헤롯과 재혼을 했습니다.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인하여 책망을 받았다는 말은 그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 아래는 이들에 관한 배경 설명입니다.

 

갈릴리 분봉왕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주전4–주후39)로 헤롯 아켈라오스의 친동생입니다. 이 둘은 아버지 대왕 헤롯의 네 번째 아내인 말타케의 소생입니다. 그는 이복형제인 빌립(분봉왕 빌립하고는 다른 인물)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 딸 살로메를 통해 침례 요한을 처형한 자입니다.

 

분봉왕 빌립(주전4–주후34)은 대왕 헤롯과 예루살렘 출신 클레오파트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섯 번째 아내입니다. 위 헤로디아의 전남편인 빌립은 대왕 헤롯과 대제사장 보에투스의 딸 마리암네 2세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마리암네 2세는 세 번째 아내입니다. 참고로, 대왕 헤롯은 아내가 열 명이었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 요한이 그들의 부정한 결혼을 지적한 것입니다. 전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헤롯왕은 타락한 교회를 지배하는 거짓 진리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왕은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헤롯과 헤로디아의 부정한 결혼은 타락한 교회에서 벌어지는 영적 간음을 말합니다. 영적 간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교회가 진리를 왜곡해서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 영적 간음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간음은 진리와 진리 아닌 것, 또는 진리와 악한 것을 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우자와 사랑하는 것은 아주 순수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우자 아닌 사람과 사랑을 하는 것은 불결한 것이고 간음입니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선이 아닌 것과 결합하거나, 또는 비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이 모두 영적 간음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 간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교회가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 교리를 만드는 것이 영적 간음입니다. 또 주님을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거짓 진리를 가르쳐서 그들의 순수한 사랑을 더럽히는 것이 바로 영적 간음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교회의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영적인 간음은 진리와 선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막3:28-29)

 

그러므로 요한이 헤롯과 헤로디아를 부정하다 책망한 것은 말씀의 진리를 통해 영적 간음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즉 오늘날 교회에서 거짓 교리를 만들어 내고, 여러 가지 종류의 우상 숭배가 성행하는 것은 모두 영적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그동안 교회의 마지막 때 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부정하다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밝혀주시는 새로운 진리밖에 없습니다. 그 진리를 통해서만 그것의 부정함이 드러납니다. 헤롯과 헤로디아의 부정이 요한에 의해 밝혀졌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때 진실한 교회라면 어떻게 행동할까요? 참된 진리를 받아들일 것이고,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회개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교회들은 정반대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들은 참된 진리를 부정하고 오히려 이단이라고 배척합니다. 그러므로 헤롯과 헤로디아가 요한을 옥에 가두는 것은 타락한 교회가 참된 진리의 말씀을 부정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가지 악을 더해서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그들이 참된 진리를 파괴하기 위해서 거짓 논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건 진리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여러 구절을 가지고 거짓 논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참된 진리를 대적합니다. 그것이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두는 것이며, 타락한 교회들이 참된 진리의 입을 막는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이 말은 말씀의 지식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말씀의 지식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속으로 성령과 불이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이며, 불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지식만으로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진리의 지식 안으로 주님의 생명이 흘러 들어와 살아있는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성령과 불이 흘러 들어올 때, 그때 우리는 악한 습관을 끊을 수 있게 되고요, 그리고 이웃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으로부터 성령과 불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은 두 벌 옷과 음식을 가지지 말라 하십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두 벌 옷은 자아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거룩한 흐름을 방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자아를 붙잡고 있는 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그리고 온전히 주님께 마음을 열고, 주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성령과 불로 오셔서 우리 안에 교회를 매일 같이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새 교회 모든 성도께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52:7)

 

아멘

 

 

원본

2017-04-2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8(D7)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8. 2023-03-18(D7)-토요예배(2435, 눅3,15-20),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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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눅3:21-38,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의 속뜻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의 속뜻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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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세례) 요한의 메시지

 

 

7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눅3:7-14)

 

물로 씻는 것과 세례는 그 자체로 유대인들에게서 악과 거짓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그러한 것을 표상하고 뜻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국에서 마치 정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유대 교회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통해 천국과 결합했을 때, 천국의 하나님이신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 가운데 거하셨다. (AE.724:8, 이순철 역)

 

※ 이 AE(Apocalypse Explained) 724:8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고,

 

The washing and baptizing itself did not indeed purify them from falsities and evils, but only represented and thence signified purification from them; nevertheless, this was received in heaven as if they were themselves purified. It was thus that heaven was conjoined to the people of that church by means of the baptism of John; and when heaven was thus conjoined to them, the Lord, who was the God of heaven, could manifest Himself to them there, teach them, and abide among them... (AE.724:8, Ager 역)

 

이는 계시록 12장 5절의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남자라’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요단강 근처에서 요한이 회개의 세례, 침례를 가르칠 때, 많은 사람이 침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로 왔습니다.

 

※ 신약 성서 원어인 헬라어 원전에 의하면 ‘침례’(浸禮, baptism, 헬, βἀπτισμα)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한글 성경에 ‘세례’(洗禮)가 된 것은, 광복 전 남한에서 성경 한글화 작업으로 각 교단이 모였을 때, 침례교만 빠졌기 때문인데, 침례교만 빠진 건 침례교 대표가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교단은 효과적 선교를 위해 큰 도시 위주로 움직인 반면, 침례교만 유독 내륙 오지 선교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그래서인지 일본은 그냥 원어를 그대로 표기합니다.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교회의 낡은 교리를 버리고,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진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새로운 말씀을 의미하고, ‘침례’는 말씀을 통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식의 개혁이며, 동시에 신앙의 전향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교회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새로운 진리가 신선해서, 또 어떤 이는 요한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는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자도 있었고, 진리에 대해 무지하지만 순종할 줄 아는 단순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7절입니다.

 

7요한이 침례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의 비밀’ 4533번에는 천국에서는 사기꾼들이나 위선자들이 천사들 앞에 나타날 때 독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4533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라고 내용을 조금 더 추가했습니다.

 

But when the same are looked at by the angels of heaven, that luminosity is instantly dissipated, and they appear with totally different faces, each according to his genius. Some are dusky and black like devils; some have ghastly faces like that of a corpse; some have almost no face at all, and instead of a face there is a mass of hair; some are like grates of teeth; some like skeletons; and what was still more strange, some are like monsters, the deceitful are like serpents, and the most deceitful are like vipers, while others appear differently. (AC.4533, Clowes 역)

 

이는 창세기 34장 주석 클로징 글인 큰 사람의 눈과 빛에 관한 상응 관련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기 ‘큰 사람’이라는 표현은 천국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천국 전체가 한 사람 모습이라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영어로는 ‘The Grand Man’이라고 합니다. //

 

그러니까 요한이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한 것은 무리 전체를 향해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위선자들(the most deceitful)에게 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다시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노하시거나 사람을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진노’란 주님이 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의 내면에 있는 분노와 증오심을 말합니다. 위선자와 거짓말쟁이는 마치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혐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후에 육신의 옷을 벗게 되면 진리에 대한 혐오감과 적개심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피할 수 없다는 진노는 주님의 진노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그들 자신의 분노이며 적개심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발목을 잡아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든다는 그런 뜻입니다.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여기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두 번 나오는데, 앞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뒤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의미가 다릅니다. 먼저 앞의 ‘아브라함’은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는 것은 자기들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오만함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상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 세상만 믿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사실은 우상 숭배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 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즉 뒤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 전 우상을 믿었던 아브라함, 즉 아브람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든다는 돌들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돌들’은 감각의 진리를 뜻합니다.

 

감각의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눈이나 코, 입, 손과 발 같은 감각으로 이해하는 진리가 감각 진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감각은 진리를 이해하는 수단으로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그런데 진실은 어떻습니까? 태양은 그대로 있고 지구가 도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감각을 통해 얻는 정보가 모두 진리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감각의 진리를 믿을까요? 주님보다 자신을 더 믿고, 주님이 주시는 내적 기쁨보다 감각이 주는 쾌감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사29:13)라고 한탄하셨고, 요한 역시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말한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은, 그동안의 위선과 악행을 버리고, 진리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9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말씀에서는 사람을 나무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는 이유는 ‘나무’는 사람의 지성, 즉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는 자연계에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사람을 종종 나무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나무의 뿌리에 도끼가 놓였다고 합니다. ‘도끼’는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는 위선자들이 주장하는 진리의 뿌리에 그들의 자아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는 모두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없으니 당연히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그들을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라 하고,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무마다 찍혀’는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지성을 믿는 사람들이 결국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모두 잃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불에 던져지리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설명할 것도 없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지옥을 불로 표현하는 이유는 그곳이 유황불이 펄펄 끓는 곳이라서가 아닙니다. 그곳 사람들에게서 발산되는 탐욕의 불길이 그렇게 뜨겁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순수하지 않은 어떤 것을 간절히 바랄 때가 있고, 그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지옥의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욕망의 열기가 한도 끝도 없이 발산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말씀에서는 유황불로 표현합니다.

 

※ 다음은 이 ‘지옥불’(infernal fire) 관련, ‘천국과 지옥’ 59장, ‘무엇이 지옥 불이고 이를 가는 것인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지옥의 불’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악을 행하려는 욕망을 의미하고, 이전 장에서 밝힌 것처럼, 지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욕망이 그러하므로 지옥이 열리면, 큰 화재가 났을 때와 같은 연기와 불이 거기 보인다. 자기 사랑이 우세한 지옥에서는 탁한 불이, 세상 사랑이 우세한 지옥에서는 불꽃을 내는 불이 보인다. 그러나 지옥이 닫히면, 이 불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연기가 응집한 것 같은 어두움이 보인다. 그래도 그 불은 여전히 안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것을 거기서 뿜어나오는 열기로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화재 뒤의 폐허에서 나는 열기 같고, 또 다른 곳에서는 가열된 용광로에서 나는 열기 같고, 어떤 곳에서는 뜨거운 목욕탕에서 나는 열기와 같다. 이 열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그의 욕망을 자극하고, 악한 사람 안에서는 미움과 복수심을, 병약자에게는 광기를 일으킨다.

 

이것이 위에 말한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불이고, 열이다. 그들은 몸 안에 있을 때도 영이 그런 지옥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불 속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불은 하나의 외관이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자기가 탄다는 느낌이 없고, 단지 세상에서와 같은 체온을 느낄 뿐이다. 이런 외관상의 불은 상응에 의한 것이다. 사랑은 불에 상응한다. 그리고 영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상응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다. (HH.571) //

 

10절입니다.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요한에게 묻는 사람들은 적어도 말씀을 통해 삶의 지침을 얻으려고 하는 신앙인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독사의 자식’이라 불리는 위선자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저들 독사의 자식들과는 달리 비록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그래도 진리에 순종하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이 말씀은 말 그대로 자기 소유를 이웃과 함께 나누라는 것이지만, 그러나 속뜻으로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은 진리를 말합니다. 왜 옷이 진리를 의미하느냐 하면, 진리는 선의 드러남, 즉 선의 겉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선은 자체로는 보이지 않고 진리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그래서 진리를 옷으로 비유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먹을 것’은 선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양식은 곧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옷 두 벌 있는’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신앙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자아에서 나오는 진리를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는 진실한 것과 자아에서 오는 거짓된 것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옷 두 벌 있는 자’라는 상태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인간의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중에서 인간의 것을 버리라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인간의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0장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보면 전도를 위해 길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역시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진리라야 능력이 있습니다. 그 안에 선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 벌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지팡이’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 중에 세리가 있었습니다. 세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들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리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세리를 거의 매춘을 하는 사람 정도로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12절, 13절 말씀입니다.

 

12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성(聖) 문서에서는 ‘세리’가 무슨 뜻인지를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돈을 거두어들이는 일이고, 그러므로 진리와 선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 진리와 선에 대한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리와 요한의 문답은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배울 때,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대로 받고, 그 이상의 것을 욕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각자의 영적 능력만큼 진리도 주시고, 선도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람이 자기의 영적 역량보다 더 많은 진리를 받을 때, 그것을 더럽히거나 남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선을 남용한다는 것은, 진리를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스스로 높아지려 하거나, 또는 물질적 이득을 보기 위해 진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것을 남용하고 더럽히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 합니다. 그래서 두려운 일이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진리를 욕심낼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마음대로 진리를 추론, 그렇게 해서 왜곡합니다. 주님은 ‘그러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세리들에게 하는 말은 진리를 배우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권고입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는 세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14절입니다.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여기서 군인은 누구입니까? 군인은 영적인 군인을 말합니다. 영적인 ‘군인’은 진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불순한 욕망과 싸우고, 진리에 따르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가고자 하는 유혹과 싸우는 사람이 주님의 군사입니다. 따라서 세리와 군인은 신앙인들의 삶의 두 가지 측면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진리의 지식을 배우는 측면이고, 후자는 배운 것을 실천하는 측면입니다. 그러므로 세리와 군인은 모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이 주님을 대적하는 지옥의 군대로 변합니다. 그것은 유대 교회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그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지옥의 군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라고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는 한글 성경 번역이구요, 영어 성경에는 ‘사람을 폭행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폭행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여기서 ‘사람’은 진리를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사람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폭행하지 말라’는 것은 진리를 모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를 더럽히는 것일까요? 진리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 진리에 위배 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자기 마음대로 추론하고 왜곡하는 것 또한 진리를 더럽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군대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 교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열심히 실천하다 보면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시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생각으로 말씀을 마음대로 추론하여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고 하는 인간의 계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이 이 장로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흠을 잡았습니다. 예를 들면, 식사를 할 때, 손을 씻지 않는다 타박을 하고, 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먹었다 흠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막7:8)며 나무라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들이 모두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며, ‘사람을 폭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아까 바리새인들이 장로의 전통을 어겼다며 주님의 제자들과 주님을 비난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비방하는 행동들입니다. 유대 교회 사람들이 그렇게 진리를 비방하고 욕보이는 것을 말씀에서는 그들이 주님을 때리고, 침을 뱉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주님 당시에만 있었던 일들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새 교회의 진리를 흠집 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표상하는 요한은 군인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주님 편에 서야 할 사람들이 지옥의 편에 서서 진리를 비방하고 욕보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말했습니다. 주님의 군사들이 받는 급료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군사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할 때, 주님은 급료를 주세요. 그 ‘급료’란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진리와 선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진리와 선을 사랑합니까? 진리를 머릿속에 저장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일상의 삶 가운데로 끌어내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아직 진리에 대한 애정은 충분치 않지만, 주님의 군사로서 진리를 위해 싸울 때, 주님께서는 급료를 주세요. 주님의 군대에 합당한 급료를 주십니다. 그 급료가 바로 진리와 선에 대한 애정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물질을 원하고 명예를 원하지만, 우리와 같이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진리와 선에 대한 애정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급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십니다. 족하라, 즉 만족하라는 말씀은 어떤 뜻일까요? 그것을 기뻐하고 다른 세속의 것들을 바라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도 부족하지 않게 주십니다. 다만 세상의 것들을 목적으로 삼지는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온 것처럼, 오늘날에도 새 교회 진리를 혼자 배우거나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스스로 진리를 안다 자부하면서도 진리를 따라 살지는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하지만, 내적으로 보면 위선자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시고, 또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경고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머무르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보다 자기의 지성을 더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진리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아는 만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도 ‘두 벌 옷을 갖지 말라’ 주의를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생각이나 애정을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사랑만 가지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자아의 말을 들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기적인 욕심에 휘둘리게 되고,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멀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어느 만큼은 위선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위선을 벗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참된 기독교 784항에서는 ‘거짓이 있는 곳에 참된 것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거짓의 뿌리가 뽑혀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목회자로부터 시작해 평신도들에 이르기까지 일어나야 한다’ (이순철 역)고 합니다.

 

※ TCR(True Christian Religion, 참된 기독교) 784번 글에 대한 영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For where falsities have already been implanted what is new cannot enter until the falsities have been rooted out, and this will take place with the clergy, and so with the laity; (TCR.784, Ager 역)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교회의 낡은 가르침, 교회의 낡은 습관들이 있다면 그것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진리가 온전하게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가복음 2장 22절에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가졌던 낡은 습관들을 매일 같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새 교회가 세워집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가족과, 또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사62:11)

 

아멘

 

원본

2017-03-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7(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7. 2023-03-17(D6)-매일예배(2434, 눅3,7-14), '침례(세례) 요한의 메시지'.pdf
0.52MB

 

 

 

18. 눅3:15-20,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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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세례)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눅3:1-6)

 

 

주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죄를 제거하는 것은 오직 신적 섭리에 따라 하신다. 그러므로 죄가 사해질 때 제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회개를 통해 죄를 제거하지 않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죄가 사해진다고 믿거나,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교황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 이 같은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직접적인 자비와 즉각적인 구원을 믿는다. 그러나 진리는 그 반대이다. 즉 죄는 제거될 때 사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 사함에 앞서 회개가 있어야 하며, 회개가 없으면 죄 사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죄 사함을 위한 회개를 가르치도록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24:47-48) (DP.280, 이순철 역)

 

※ 이 DP(Divine Providence) 280번 글에 대한 Wunsch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It is also an error of the age to suppose that when sins are remitted they are taken away. This is the error of those who believe that their sins are pardoned by the sacrament of the Holy Supper although they have not removed them from themselves by repentance. Those also commit this error who believe that they are saved by faith alone; those also who believe that they are saved by papal dispensations. All these believe in unmediated mercy and instant salvation. But when the statement is reversed it becomes truth, that is, when sins are removed they are also remitted. For repentance precedes pardon, and aside from repentance there is no pardon. Therefore the Lord bade his disciples: That they should preach repentance for the remission of sins (Luke 24:47-48),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여러 가지로 마음이 아픕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17년 3월 12일 주일 설교입니다. 참고로, 그 이틀 전인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자신만 옳고, 상대는 잘못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지독하게 미워합니다. 사회가 둘로 갈라져서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한마디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진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587번 글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악은 자연적인 사람의 의지 안에 깊이 심어져 있으며, 이때 의지는 이성을 움직여 자기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이 TCR(True Christian Religion) 587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the evils into which man is born are generated in the will of the natural man, and that the will causes the understanding to favor it by thinking in agreement with it...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한마디로 사람의 마음은 이성과 의지로 되어 있는데, 의지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이성이 올바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이성이 사실은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는 악에 의해 철저히 조종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의지 속에 있는 악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고, 원하는 방향으로만 판단하도록 이성을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 2025년 3월 4일 현재, 이 원고를 다듬는 지금도 예를 들어, 헌재를 생각해 보면, 그리고 더불어민주당과 그밖에 조중동, JTBC, 기타 레거시 방송들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밝고 명료한 사실, 진실 앞에서도 어쩜 저렇게나 정반대일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날 정의와 진실을 외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진실한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만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정의를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본문 1절과 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 말씀에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여러 명의 지배자가 등장합니다. 가장 높은 지배자가 누구입니까? 디베료라는 로마 황제이고요, 그리고 그에게 위임을 받은 네 명의 지도자들, 즉 총독 빌라도와 헤롯, 그리고 그 동생 빌립과 루사니아가 유대 땅을 넷으로 분할해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 디베랴는 로마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주전31–주후14)를 이은 2대 티베리우스(주후14–37) 황제를 말합니다.

 

※ 대왕 헤롯(주전37–4)의 사후, 그의 유언장에 따라 수도 예루살렘을 포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매 지역을 할당받은 아들 헤롯 아켈라우스(주전4–주후6)는, 그러나 그 폭정으로 폐위되고, 그의 지역은 훗날 대왕 헤롯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주후37–44) 때까지 로마 제국에 편입, 로마 황제가 파견하는 총독들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됩니다. 본디오 빌라도(주후26–36)는 다섯 번째 총독입니다.

 

※ 갈릴리 분봉왕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주전4–주후39)로 헤롯 아켈라오스의 친동생입니다. 이 둘은 아버지 대왕 헤롯의 네 번째 아내인 말타케의 소생입니다. 그는 이복형제인 빌립(분봉왕 빌립하고는 다른 인물)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 딸 살로메를 통해 침례 요한을 처형한 자입니다.

 

※ 분봉왕 빌립(주전4–주후34)은 대왕 헤롯과 예루살렘 출신 클레오파트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섯 번째 아내입니다. 위 헤로디아의 전남편인 빌립은 대왕 헤롯과 대제사장 보에투스의 딸 마리암네 2세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마리암네 2세는 세 번째 아내입니다.

 

※ 아빌레네의 분봉왕 루사니아는 누가복음 여기 외에는 역사적 기록이 없어 모릅니다.

 

그리고 그때의 제사장은 그 유명한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입니다. 말씀에서 유대 지도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겉으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속뜻으로는 그 이름들 속에 내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聖) 문서에는 그 이름들이 각각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모두 유대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실로부터 그 이름들이 타락한 교회의 여러 가지 거짓 진리들을 나타낸다는 것을 짐작은 할 수 있지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지배자나 ‘’은 으뜸이 되는 진리를 나타내고, ‘유대’는 타락한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으뜸 되는 진리라는 것은, 예를 들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오직 믿음’ 교리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교파들과 구별되는 아주 중요한 교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안나스와 가야바’란 인물들은 무슨 뜻입니까? 이들은 유대교회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 포로기 이후 유대 사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신정 국가의 우두머리이니까요. 이 대제사장의 역사만으로도 유대 역사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대제사장직을 둘러싼 온갖 부정부패의 썩은 냄새가 진동했는데요, 2025년 지금, 대한민국 선거관리위원회처럼 말입니다. 그중에서도 대왕 헤롯의 등장부터 예루살렘 성전 파괴 때(주전37-주후70)까지 107년 동안 28명의 대제사장이 난립하는, 가장 중증 기간에 주님이 오신 것이며, 그 기간의 하이라이트 암세포들이 바로 이들 안나스 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락한 교회의 악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은 본래 선을 의미하지만, 반대로는 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교회의 선을 나타내지 않고, 악을 나타내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체포하고, 심문하고, 또한 십자가에 매달았던 장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죽인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타락한 교회의 악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1절과 2절에 나오는 유대의 지배자들과 성직자들은 모두 타락한 교회의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거짓 진리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왜곡해서 만든 거짓도 있을 것이고, 다른 종교의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섞는 경우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유대의 지배자들을 보면 유대 사람도 있고, 이방인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디베료’나 ‘본디오 빌라도’는 완전한 이방인인 반면, ‘헤롯’, ‘빌립’ 같은 사람들은 이두매 출신 아버지 대왕 헤롯으로 인해 순수한 유대인 혈통은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로 표상되는 거짓 진리는, 말하자면 다른 종교의 교리에서 차용해 섞은 거짓 진리이고, 나머지 ‘안나스와 가야바’는, 비록 혈통은 순수한 유대인이어도 대제사장으로서의 그 부패함이 너무 심한 나머지, 말씀을 왜곡해 만든 거짓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 진리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 모든 악과 거짓은 일반적인 게 있고, 세부적인 게 있습니다. 다음은 이런 이해를 돕는 글인데요,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중 창3:15, ‘’에 관한 내용입니다.

 

‘뱀’이 일반적으로는 모든 악을, 특별히는 자아 사랑을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악은 마음의 감각 파트에서, 그리고 처음부터 ‘뱀’으로 상징된 기억-지식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며, 그래서 여기 나오는 뱀은 모든 종류의 악, 특히 자아 사랑, 즉 이웃과 주님을 향한 증오를 가리킵니다. 이 악, 곧 증오는 다양, 수많은 속(屬, genera)과 더욱 수많은 종(種, species)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뱀’(snakes, 마23:33), ‘독사’(cockatrices, 렘8:17), ‘독사’(asps, 신32:33), ‘독사’(adders, 시140:3), ‘불뱀’(fiery serpents, 민21:6), ‘날으는 뱀’(serpents that fly, 사14:29), ‘기는 뱀’(that creep) ‘독사’(vipers, 마23:33) 등인데요, 독, 곧 증오의 차이에 따른 것입니다. (AC.251)

 

선과 진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요, 다음은 창4:4, ‘기름’에 관한 내용입니다.

 

천적인 것들은 도저히 셀 수 없는 속(屬, genera)과, 그리고 더더욱 종(種, species)에 속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모세가 백성 앞에서 부른 다음과 같은 노래를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신32:14)

 

그 속뜻을 모르고서는 어느 누구도 이들 표현의 상응이 무엇인지를 아는 건 불가능합니다. 속뜻을 모르면, 이런 표현들, 즉 ‘소의 엉긴 젖’(the butter of kine), ‘양의 젖’(the milk of sheep), ‘어린 양의 기름’(the fat of lambs),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the fat of rams and goats, the sons of Bashan), ‘지극히 아름다운 밀’(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포도즙의 붉은 술’(the blood of the grape)은 그저 단어의 나열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럴지라도 이 표현들은 전체로도 개별로도 천적인 것들의 속과 종을 의미합니다. (AC.353) //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라고 합니다. ‘열다섯 해’가 되었다는 말은, 속뜻으로는 교회가 영적으로 새로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숫자 14는 완전함을 뜻하는 7이 두 개가 모인 수이기 때문에 하나의 영적 상태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의 전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5는 14 다음에 처음 시작하는 수로서, 그러니까 ‘교회가 새로 시작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타락한 교회가 문을 닫고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는 때가 바로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라는 말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은 디베료라고 하는 거짓 진리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상태였다면, ‘열다섯 해’라는 때는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위한 말씀을 주시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 말씀에 나오는 숫자 관련,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29장, ‘천국의 글’ 263번 글입니다.

 

나는 또 오직 일련의 숫자만 정렬해 놓은 천국의 글도 보았다. 그 적힌 방식은 마치 글자와 낱말로 된 글과 같았다. 이 글은 가장 내적 천국에서 온 것이며, 그 천국의 글은, 거기 담긴 생각이 흘러 내려오면, 더 낮은 천국들에서는 천사들에게 숫자로 나타난다는 것도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숫자로 된 글은 따라서 비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중 어떤 것은 사고로 이해할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숫자는 상응을 하며, 낱말과 마찬가지로 그 상응에 따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숫자는 일반적인 것을, 낱말은 세부적인 것을 다룬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것 하나가 수없이 많은 세부 사항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숫자로 된 글은 문자로 된 글보다 더 많은 비의를 담고 있다. 이로써 나는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이 낱말들과 마찬가지로 사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3, 4, 5, 6, 7, 8, 9, 10, 12 같은 간단한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고, 20, 30, 50, 70, 100, 144, 1000, 10,000, 12,000 등의 복합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에서 밝힌 바 있다. 천국에서는 이런 글을 쓸 때, 언제나 맨 앞에 주제를 정하듯 하나의 숫자가 오고, 그 다음에 연계성에 따라 일련의 숫자들이 따른다. 그 한 숫자는 다루어진 문제의 목차와 같고, 그에 따르는 숫자들은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HH.263) //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여실 때마다 언제나 새로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교회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으로 표상되는 태고교회가 몰락하고, 고대교회가 시작되었을 때는 상응의 지식을 주셨으며, 고대교회가 몰락하고 유대교회가 세워졌을 때는 구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유대교회 후에 기독교회가 세워질 때에는 신약의 말씀을 주셨고요, 기독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혀 주셨습니다.

 

※ 주님은 스베덴보리(1688-1772)를 그의 나이 57세 때부터 불러 이 일을 맡기셨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위한 말씀을 주시는 것을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말씀을 나타내는데, 말씀 가운데서도 가장 외적인 것, 그러니까 글자의 뜻을 나타냅니다. 요한이 그렇게 말씀의 외적인 것을 상징했기 때문에, 다른 복음서에 그는 메뚜기를 먹고, 석청(꿀)을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1:6)

 

메뚜기’는 외적인 것을 의미하고, ‘석청’은 말씀의 외적인 지식을 취할 때 느끼는 달콤함, 즉 기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외적 의미의 표상인 침례(세례)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지금 빈 들, 즉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몰락하고 있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 영적인 상태가 광야처럼 황폐하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랑과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빈 들이고, 광야입니다. 교회가 그러한 상태일 때, 주님께서 인류에게 새로운 교회를 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요한이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3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단강은 어떤 강입니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경계에 있는 강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의 교회, 또는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교회에 입문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 곧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아야 우리 자신의 내면을 살펴볼 수가 있고요, 또한 잘못을 고치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입문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요단강’은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을 의미합니다. 그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주님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는 사람들이 말씀을 통해 선과 진리를 지각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께서 새 교회를 위해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많은 신앙인들이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면서도 자기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새로운 말씀을 통해 선과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라는 상태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요단강 근처에 있다는 것은 아직도 선과 진리에 대해 완전히는 모르지만, 그러나 어쨌든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지각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를 알 때, 의식이 바뀝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그것을 개혁이라고 하는데요, 개혁은 의지가 바뀌는 것이 아니고, 이성(이해력 또는 이해성이라고도 함, understanding), 즉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때 선과 악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으며, 거짓과 진실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악과 거짓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상태가 바로 개혁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면으로부터 좋지 않은 욕망이 올라올 때, 그것을 제지하고, 그리고 선이나 진실을 선택하도록 하는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 그것이 개혁의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은 거듭남에 앞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는 개혁에서 거듭남으로 옮겨가는 연결 고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는 것이 개혁이라면, 본격적으로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은 거듭남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세례) 요한은 지금 회개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거듭남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물론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십니다. 다 용서하시지만, 그러나 우리가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다면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를 계속 배반하고 악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을 통해 회개를 명령하십니다. ‘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는 바로 그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말씀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다음 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4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 40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라고 한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는 설명할 필요 없이 침례(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침례(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말씀 가운데서도 외적인 글자의 뜻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어떤 의미입니까?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말씀을 통해 이성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개혁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혁의 상태가 될 때, 주님께서 선을 동반한 진리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때 우리는 본격적으로 거듭남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선은 없고, 그냥 진리만 있다면 거듭남이 가능하겠습니까? 악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이웃에게 진실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리만 가지고는 안 되며, 선이 있는 진리, 선을 동반한, 수반한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선이 있는 진리가 누굽니까? 요한이 준비한 길을 따라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성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알 수 있고, 또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이성이 의지가 시키는 대로 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5절에서는 개혁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골짜기가 메워지고’라고 합니다. 골짜기는 무엇입니까? ‘골짜기’는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겉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가장 안쪽에 주님이 계신 극내면(極內面, inmost)이 있고요, 그리고 그 바깥쪽에 속 사람이라는 의식이, 그리고 가장 바깥쪽에 일상의 삶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는 부분, 즉 겉 사람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겉 사람은, 영적으로 보면 가장 낮은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의식은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주님과 천국을 향하며, 겉 사람으로 내려올수록 세상을 향하고, 지옥을 향합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곳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골짜기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골짜기가 메워지고’는 무슨 뜻입니까? 개혁의 상태에서는 겉 사람의 이성 가운데 진리와 선의 지식이 채워지는데, 그것이 골짜기가 메워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낡은 교회의 교리를 통해서는 진정한 진리와 선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선이라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관철하는데 필요한 논리가 진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새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주님의 나라와 이웃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 선이요 진리라고 가르칩니다. 선과 진리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상태가 ‘골짜기가 메워지고’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라고 했습니다. 산은 본래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의미로는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교만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산’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교만할 수밖에 없을까요? 자기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웃의 장점을 보기보다는 허물을 자꾸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비교, 이웃을 업신여기기를 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은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라고 하는 것은, 개혁의 상태로 들어가면 그 교만한 마음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전에는 아무리 선과 진리에 대해 말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말씀의 진리 앞에 자신을 낮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사랑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내세우는 마음이 많이 낮아진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굽은 것이 곧아지고’입니다. 굽은 것은 비뚤어지고 꼬인 것이기 때문에 악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악은 무지에서 비롯된 악입니다.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모를 때 나타나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때는 악을 행하기는 하는데, 알면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모르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의 상태에서는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렇게 해서 악을 멀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굽은 것이 곧아지고’입니다.

 

또한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입니다. 길이라고 하니 이제 그것이 진리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냥 길이 아니라 ‘험한 길’이라고 했기 때문에 거짓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거짓 역시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의 거짓, 즉 무지에서 비롯한 거짓을 나타냅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말씀을 왜곡하거나,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거짓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진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진리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소신이 있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떠도는 소문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적당히 자기의 진리로 삼습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무지에서 비롯한 거짓들입니다. 그럴 경우, 잘못된 종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분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생기면서 더 이상 오류에 빠지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이성이 밝아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이란 본질적으로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6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육체는 인간의 자아를 나타내고, 또한 자아에 매여 있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자아는 어떤 것입니까? 자기 자신과 세상만 바라보는 것이 자아입니다. 따라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는 말씀은 자아에 매였던 사람들이 더 이상 자아에 매여 있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자아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하고 진실한 것에 순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구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지금은 개혁의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구원을 ‘보았다’ 하지 않고, ‘보리라’, 즉 미래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 사랑도 없고, 진리도 없는 상태를 광야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지배하는 악과 거짓 진리를 유대의 지도자와 제사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러한 모든 것들이 유대교회의 몰락을 나타내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속뜻으로는 그동안 있었던 모든 교회의 마지막 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며,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사랑의 가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랑을 가르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광야와 같은 이 시대에 주님께서 당신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내신 요한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새 교회를 위하여 열어주신 말씀의 내적인 의미가 바로 요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우리에게 요한이 외치는 소리는 하나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에게만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일까요? ‘천국의 비밀’ 8389번 글에는 회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고백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고, 그런 다음에 죄짓기를 그만두고, 믿음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 이 AC(Arcana Coelestia) 8389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To do repentance is after one has thus confessed his sins and from a humble heart has made supplication for their forgiveness, to desist from them and to lead a new life according to the commands of faith.

 

주님은 회개하는 사람에게 오셔서 그와 그의 나라 모두를 구원하십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할 줄 압니다. 새 교회 모든 성도에게 주님으로부터 회개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1:7)

 

아멘

 

원본

2017-03-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6(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6. 2023-03-16(D5)-매일예배(2433, 눅3,1-6),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세례)'.pdf
0.59MB

 

 

 

17. 눅3:7-14, '침례(세례) 요한의 메시지'

침례(세례) 요한의 메시지  7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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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열두 살 때 에피소드 (2)

 

 

48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눅2:48-51)

 

 

말씀의 모든 구절에서 언급하는 아버지는 잉태로부터 주님 안에 있던 신성을 뜻한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교리와 일치하는 것이며, 사람의 몸 안에 혼이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신성에서 비롯한 인성 그 자체이다. 이 인성이 신성이 되었으므로, 사람이 오직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각과 신앙과 예배 안에서 아버지와 당신 안에 아버지가 계신 주님을 분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은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것, 주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 모든 사람이 주님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 누구든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셨고, 또한 사람은 주님을 믿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L.32:7, 이순철 역)

 

※ 이 L(Doctrine of the Lord) 32번 글 7번 항에 대한 Pott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In these and all other passages where “the Father” is mentioned, there is meant the Divine which was in the Lord from conception, and which,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of the Christian world, was circumstanced as is the soul in the body with man. The human itself from this Divine is the son of God. Now as this human was made Divine, therefore, in order to prevent man from approaching the Father only, and thereby in thought, faith, and thence in worship, separating the Father from the Lord in whom the Father is, after the Lord had taught that he and the Father are one; that the Father is in him, and he in the Father; that all should abide in him; and that no one cometh to the Father but by him, he taught also that we must believe in him, and that man is saved by a faith directed to him.

 

 

지난 시간에는 요셉, 마리아 부부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과 헤어진 일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누가복음 2장 44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이 말씀에서 ‘친족’은 속뜻으로는 친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선과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선과 진리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세상의 선과 진리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선이라고 하지만 교회의 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을 유익하게 하고, 주님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교회의 선입니다. 그 교회의 선을 말씀에서는 친척이라고 부릅니다. 친척이 교회의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을 뜻하는 것은 누가복음 21장 16절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교회 마지막 때의 징조를 설명하시면서,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눅21:16)

 

라고 예언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은 선과 진리와는 반대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악과 거짓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씀에서는 같은 단어를 가지고 서로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여기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타락한 교회의 악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 진리를 나타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라는 말씀은, 교회가 타락해서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그 교회의 악과 거짓 진리가 신앙인들을 영적으로 죽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친족 가운데서 예수를 찾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신앙인들이 자신의 삶 가운데 진리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나 행동이 다 진리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도 가운데 있는 선이나 악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친족은 결국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말과 행동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진리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지금 요셉, 마리아 부부가 친족 중에서 예수가 있는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결국 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리아와 요셉은 황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룻길이나 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성전에서 랍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이를 발견합니다. 48절에서는 소년 예수와 그 부모가 만나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8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마리아가 하는 말을 통해 주님을 잃어버렸을 때, 신앙인들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일들이 순조로울 때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들이 모두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시련이 있을 때, 삶을 돌아보고 주님이 그곳에 계신지를 살핍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과연 진리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여태까지 한 일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요셉, 마리아 부부가 일행 중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진리를 되찾기 위해 다시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되돌아갑니다. 진리가 있어야 진리의 능력으로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세상을 향하는 마음을 접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의 욕망들을 쫓아다녔고,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주님과 멀어지면 주님으로부터 진실하고 선한 것들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말이나 행동들이 진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관심이나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자존심이나 불순한 욕망 같은 것들을 말이지요. 그래야 요셉, 마리아 부부처럼 주님이 계신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마리아가 말합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여기서는 ‘아이’라고 했지만, 영어 성경의 표현은 son, 즉 ‘아들’입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야’라는 말에서, 마리아가 다시 진리를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진리는 우리가 아는 진리의 지식이 아니고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그 안에 선한 것이 들어있는 진리이지요.

 

계속해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라는, 마리아의 원망 섞인 말이 나옵니다. 우리도 그렇게 원망 비슷한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저를 꼭 잡아주셨더라면 제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강한 팔로 저를 단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시고 경고도 하시지만, 일단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에 억지로 막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버리고 떠난 것이지요. 계속해서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합니다. 한번 진리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것을 되찾을 때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주님과 함께 있을 때 평화가 있습니다. 주님과 떨어져 있을 때에는 뭔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고 일이 잘 안되고 고통과 슬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그동안의 아픔을 격정적으로 토로합니다. 마리아의 말을 들은 예수께서 4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9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여기서 ‘내 아버지 집’은 교회를 말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교회와 함께 계심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있는 곳에는 늘 주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에 대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있는 곳에 주님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신앙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면 주님이 떠나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보다 자신을 더 믿었고, 주님을 사랑하는 대신 오직 자기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 아버지의 집이 없지 않느냐’ 그런 뜻입니다. 50절입니다.

 

50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주님을 만났다고는 하나 아직 그들에게 온전한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聖) 문서에 보면, ‘사람은 온전한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 가운데 있을 때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영의 눈이 열리고,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 마리아 부부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와 관련,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1장 9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요11: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열두’(12)란 수는 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열두 시간’은 우리가 완전한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은 깨달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라는 말씀은, 선을 동반한 진리 안에 있을 때 진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그러면 ‘’은 무슨 뜻일까요? 말씀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이며, 자기 안에 있는 허위를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즉 깨달음의 상태 가운데 있을 때는 진리를 옳게 이해하고, 거짓 진리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 안에 있을 때만 깨달음의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51절입니다.

 

51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이 말씀은 주께서 일상의 삶 가운데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나타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예루살렘 성전은 속 사람 안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이고요, 그리고 주님께서 나사렛에 내려오신 것은, 겉 사람의 삶 가운데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라는 이 말씀은 속 사람 깊은 곳에 계시던 주님이 이제 겉 사람의 삶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동안은 주님을 잊고 살았는데 이제 온전한 진리이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때 예수께서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예수께서 부모에게 순종하신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에게 순종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누구에게 순종하실까요? 주님은 오직 당신 안에 계신, 선 자체이신 여호와께만 순종하십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안의 여호와를 향하여 늘 겸비(謙卑)의 자세를 지키셨습니다. 그러한 겸비와 비움의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실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에 대한 겸비가 없으면 신성과 연결이 되지 않으며, 지옥을 이길 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에서 주님께서 순종하셨다는 말씀은 당신 안에 계신 선 자체이신 여호와께 순종하셨다는 뜻이고, 다르게 표현하면 진리는 오직 선만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선이 진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요, 진리가 선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는 선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의 불덩이에서 빛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태양의 빛이 열기를 자연계에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진리는 오직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순종하신다는 것은 주님의 입장에서는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 당신 안의 신성에게 순종하시는 것이며, 신앙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오직 선한 삶을 위해 쓰인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모든 말’이란 주님한테서 나오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두니라’는 깨우친 진리를 의지 안에 새겼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진리가 선을 위해 쓰일 때 비로소 진리는 의지 안에 새겨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이성적으로 믿는 단계에서 그것을 의도하고 기쁨으로 행하는 단계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는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 바로 갔겠습니까? 여기도 들르고 저기도 들르면서 아들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것처럼 신앙인들도 진리에서 멀어졌다고 느낄 때, 진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 안에 어떤 악과 거짓들이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내면 깊은 곳에서 가까스로 주님을 만나게 되고, 진리이신 주님을 통해 자신의 의도와 행위 가운데 있는 악과 거짓을 봅니다. 주님은 그러한 상태를 낮이요, 열두 시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두 시간은 진리 안에 있는 상태이며, 낮은 그로 말미암아 진리를 분별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삶과 행위 가운데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진리에서 일단 멀어지면 다시 진리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아이의 모습을 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아이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말한 것은 신앙인들의 애통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런 애통함이 있어야 우리는 진리를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진리는 오직 선을 섬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적인 호기심이나, 또는 다른 이유로 진리를 배워서는 안 됩니다. 오직 선을 위해,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그때 진리는 각 사람의 의지 안에 깊이 새겨집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4:10)

 

아멘

 

 

원본

2017-02-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5-06(D7)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5. 2023-03-15(D4)-매일예배(2432, 눅2,48-52), '예수님 열두 살 때 에피소드 (2)'.pdf
0.39MB

 

 

 

16. 눅3:1-6,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세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세례)  1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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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열두 살 때 에피소드 (1)

 

 

41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눅2:41-47)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우주의 모든 것들과 개별적인 것들 안에 질서를 만드셨다. 주님은 질서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세상에 내려오셔서 실제로 사람이 되려고 하셨을 때 수태하고 출생하며 교육을 받고 점진적으로 지식을 획득하며 그렇게 해서 지성과 지혜 가운데로 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주님은 당신의 인성에 있어 사람이셨기 때문에 여느 아기들과 같은 아기이셨고, 여느 소년들과 같은 소년이셨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주님에게는 이러한 성장이 다른 사람들보다 신속하고 충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의 성장이 질서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을 누가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TCR.89, 이순철 역) ...at the time of their creation, and therefore his omnipotence in the universe and in each and all things of it, proceeds and operates in accordance with the laws of his order. (This has already been treated of consecutively, n. 49–74. ) Since, then, it was God who descended, and since (as is there shown) he is order itself, it was necessary, if he was to become man actually, that he should be conceived, carried in the womb, born, educated, acquire knowledges gradually, and thereby be introduced into intelligence and wisdom. In respect to his human he was, for this reason, an infant like other infants, a boy like other boys, and so on; with the sole difference that this development was accomplished in him more quickly, more fully, and more perfectly than in others. That this development was in accordance with order is evident from these words in Luke: And the child Jesus grew and waxed strong in spirit. And Jesus advanced in wisdom, and in the stages of life, and in favor with God and man (Luke 2:40, 52). (TCR.89, Ager)

 

 

오늘 말씀은 예수님 열두 살 되던 유월절에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다가 일어난 일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의미로는 주님이 오시는 것과 구원을 뜻합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 세상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인류는 죄 가운데 깊이 빠져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사는 것과 같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지옥에 억눌려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사적, 그러니까 예수님 성육신 이후로 볼 때, 첫 번째 유월절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시련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이고, 신앙인들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진리를 처음 받아들여 거듭남의 길로 들어섰을 때가 첫 번째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2장 24절에 보면 애굽을 막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출12:24)

 

주님께서 이러한 규례를 정하신 이유는, 모세 때 있었던 첫 번째 유월절은 인류가 지옥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일 뿐 그것으로 완전히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수없이 많은 유월절을 거쳐야만 거듭나고 구원받는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 41절과 42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41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예수께서 열두 살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는 말 그대로, 즉 기록된 겉 글자의 뜻으로는 세상에 오신 주님이시지만, 그 내적 의미, 즉 속뜻으로는 신앙인들이 받아들인 구원의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영적으로 성장하신 모습이고, 또 하나는 신앙인들이 받아들인 진리가 각자의 내면에서 성장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오신 주님의 입장에서 열두(12) 살이 되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에는 열두 지파, 주님의 열두 제자, 십사만 사천과 같이 열둘과 관련된 수가 많습니다. 열둘이라는 수가 그렇게 자주 쓰이는 이유는, 그것이 영적 의미로 모든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열두 살이 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시기에 이미 인류를 구원하는 능력을 거의 갖추셨다는 의미입니다. ‘참된 기독교’ 89번 글은, 주님도 보통의 인간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성장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이 계시다는 것 등을 전혀 모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느 인간과 똑같이 부모님을 통해, 또는 교회의 교리를 통해 배움의 과정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움의 과정은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더 빠르고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그러므로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당신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알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열두 살이 되었다는 의미는 주님께서 이 시기에 이미 구원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또한 능력을 이미 갖추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그것이 완전한 상태는 아니고 적어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한 모든 준비가 열두 살 때에 이미 거의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구원의 능력을 완전하게 갖추신 것은 언제일까요? 십자가의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자 거룩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주님도 우리 인간들처럼 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인성은 인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거룩한 인성입니다. 성(聖) 문서에서는 주님의 인성에 대해, 창조되지 않은(uncreate) 인성이요, 주님 안에 영원 전부터 잠재해 있었던 인성이라고 말합니다. (DLW.233).

 

※ 이 DLW(Divine Love and Wisdom,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 233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윗글은 아래 내용 중에서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in the Lord from eternity, who is Jehovah, before his assumption of a human in the world, the two prior degrees existed actually, and the third degree potentially, as they do also with angels; but that after the assumption of a human in the world, he put on over these the third degree, called the natural, thereby becoming man, like a man in the world; but with the difference, that in the Lord this degree, like the prior degrees, is infinite and uncreate, while in angel and in man they are all finite and created...

 

그 잠재해 있던 인성이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실현되었습니다.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하면, 지옥으로부터 오는 극심한 시험을 이기실 때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한한 인성을 벗으시고,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시던 무한하고, 창조되지 않은 인성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로부터 받은 인간성을 완전히 벗으신 것이 바로 십자가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두 살이 되셨다는 의미는, 주님께서 이때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미 구원의 능력을 가지셨다는 의미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 주님의 내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주님 안에 계신 여호와의 신성과 주님이 입으신 인성이 거의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주님의 진리의 성품과 선의 성품이 거의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시기에 완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이미 선을 동반한 진리 자체가 되셨습니다. 그냥 진리가 아니고요, 선을 동반한 진리, 즉 선이 있는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다음은 예수가 주님을 나타내지 않고 신앙인들이 받아들인 진리를 나타낸다고 할 때,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경우 주님이 열두 살이 되셨다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있는 진리가 계속 성장한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단계까지 진리가 성장했느냐 하면, 개인을 구원하는 진리로서 부족함이 없는 진리, 즉 구원의 모든 능력을 가진 진리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는 교리의 지식으로서 받아들입니다. 마치 학교에서 책에 있는 내용을 흡수하는 것처럼 그렇게 배웁니다. 따라서 그것은 아직 지식일 뿐 진정한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과정을 통해 진리가 될까요? 지행합일(知行合一)이 되어야 합니다. 즉 교리의 지식을 행동으로 하나씩 옮길 때 진리가 됩니다. 그때 주님께서 교리의 지식 안으로 선을 넣어 주시구요, 그렇게 해서 지식은 진리가 됩니다. 진리 안에는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옥에서 올라오는 유혹을 단호하게 끊을 수 있는 힘이 있으며, 또한 좋지 않은 습관들을 거절할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모두 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문서에서는 선이 없는 진리를 겨울의 햇빛과 같다고 말합니다. 겨울의 빛은 열기가 없고 냉냉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연계의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는 진리는 우리를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열두 살이 됐다는 의미는 신앙인들에게 있는 진리가 지식의 차원을 넘어 선이 있는 진리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마리아 부부가 열두 살 된 예수와 동행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면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의식(意識)을 나타낸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두 가지 의식이란,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love to the neighbor; charity)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영적인 교회를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속 사람 안에 있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신앙인들의 마음속에는 다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의 실체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처음에는 속 사람 안에 생기지만 궁극적으로는 겉 사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겉 사람은 보통 주님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좋아합니다. 세상에 즐거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 명예, 그리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쾌락,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것이 겉 사람입니다. 교회가 속 사람 안에만 있고, 겉 사람 안에는 없다는 건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삶이 따라주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겉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요셉, 마리아 부부는 어떤 교회를 나타낼까요? 겉 사람 안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요셉, 마리아 부부로 표상되는 겉 사람의 의식이 속 사람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 신앙인들의 의식은 겉 사람에 머물러 있습니다.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 안에 빠져 있지요.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틈틈이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욕과 소망, 실질적인 행위가 혼합되어 있는 것이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그러한 상태에 있던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것은 겉 사람의 의식을 떠나 속 사람의 의식을 향해 올라간 것입니다. 이를테면 세속적인 것을 떠나 자신의 내면에 깊이 침잠(沈潛), 잠기는 상태, 그런 상태가 지금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속 사람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그때 주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고,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주님에 의해 해결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만큼 우리는 지옥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유월절입니다. 주님께서 해마다 유월절을 지키라 하신 것은 그런 뜻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계속 유월절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셉, 마리아 부부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요셉,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절기를 다 끝내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들의 집이 나사렛이니까 나사렛으로 돌아갔다는 말이겠지요. 여기서 돌아갔다는 말은 속 사람에 머물러 있던 의식이 다시 겉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매일 같이 자기의 내면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속 사람의 상태에 있다가 요셉,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것처럼 다시 겉 사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속 사람에 머무는 것이 내면의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주님의 가르침을 받는 상태라면, 겉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은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 속 사람의 상태에서 깨우친 것들을 활용하고, 실천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마리아 부부가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예수님을 그곳에 두고 왔습니다. 신앙인들은 겉 사람 속에 머물 때라도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모든 행위 가운데 선을 동반한 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예루살렘에 두고 왔습니다. 그것은 겉 사람의 교회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선을 동반한 진리는 없고 그냥 지식만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있어야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힘이 생깁니다. 지식만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요셉, 마리아 부부는 진리를 잃어버린 것을 모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직 진리인 줄 압니다. 그것을 본문 44절에서는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라고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진리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진리가 없다는 것을 알까요? 오늘 말씀에서는 ‘하룻길을 간 후’라고 합니다. 사람이 진리로부터 멀어지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하는 일이 뜻대로 잘 안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자주 삐걱거립니다. 그때 ‘나는 옳게 한다고 하는데 왜 자꾸 실패를 하는 거지?’라고 자문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말과 행동 안에 진실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동안 이웃과 교회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구나 깨닫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교만이고 자기 사랑입니다. 그렇게 깨닫는 것이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의 의미입니다. 그때 우리는 잃어버린 진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다시 시작합니다. 45절에서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라는 말씀은, 잃어버린 진리를 되찾기 위해 우리가 다시 속 사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룻길을 걸어오는 것이 나름에는 진리를 따라 산다 생각하면서 살았던 기간이라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자기 안에 진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속 사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다시 갖는 것이지요. 46절에는 그렇게 해서 요셉, 마리아 부부가 주님을 다시 만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여기서 사흘은 내 속에 진리가 없음을 느끼면서 진리를 찾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는 시간입니다. 잃어버린 진리를 되찾는 과정은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자책과 애통의 마음이 있어야 하고, 진리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충분히 노력하는 것이 사흘입니다. 왜냐하면 숫자 3은 완전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가라앉을 때, 그때 진리이신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주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말씀에는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선생들 중에 앉으사’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생이 무슨 뜻일까요? 선생은 유대 사회의 랍비들을 말하지만, 내적 의미로는 교회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리를 가지고 깊이 묵상할 때, 교리 가운데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생 중에 앉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여기서 지혜란 교리의 가르침을 가지고 깊이 묵상할 때, 주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진리입니다. 또한 주님의 대답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실하고 순수한 것들입니다. 이전에는 분노와 질투와 증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연민과 화해 같은 진실하고 순수한 것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옵니다. 그것이 주님이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낄 때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여기서 ‘놀랍게 여기더라’는 말은 영적으로 새로운 상태가 시작될 때 하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똑같은 상태에서는 아무 놀라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상태로 올라갈 때, 그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주님의 역사에 놀라고, 또 이전의 상태에 비해 새로운 상태가 얼마나 다른지 놀라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 유월절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원래는 52절까지 있는 내용인데 내용이 길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에는 예수님의 부모가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해마다 왕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거주하시는 곳은 나사렛이지만, 그러나 유월절과 같은 절기가 찾아오면 꼭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절기를 지키셨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루살렘은 속뜻으로 영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면 나사렛은 무슨 뜻일까요? 성 문서에는 나사렛의 속뜻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나사렛이 주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의 땅에 있다는 것과 그곳에서 주님이 배척당하셨다는 것 등을 통해 그 의미를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요셉, 마리아 부부가 돌아간 곳, 즉 나사렛은 겉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조심스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겉 사람은 주님을 가장 배척하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교회가 그곳에 세워져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추론을 바탕으로 해서 마리아 부부가 주님과 함께 나사렛과 예루살렘을 오고 가는 것은 우리들의 영적 의식이 수시로 겉 사람 안에 머물기도 하고, 속 사람 안에 머물기도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합니다. 사람의 의식은 겉 사람 속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고, 그때는 보통 주님과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주님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는 때가 있지요. 마음속에 온기 대신 냉기가 흐르거나 진실성이 없다 느껴질 때입니다. 주님과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 부부처럼 진리를 되찾기 위해 속 사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문을 모두 닫고,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해서 진실로 나를 살리는 것, 나를 영원히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때 교리 가운데서 빛나는 주님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요7:31)

 

아멘

 

 

원본

2017-02-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4. 2023-03-14(D3)-매일예배(2431, 눅2,41-47), '예수님 열두 살 때 에피소드 (1)'.pdf
0.45MB

 

 

 

15. 눅2:48-51, '예수님 열두 살 때 에피소드 (2)'

예수님 열두 살 때 에피소드 (2)  48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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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의 축복과 선지자 안나 이야기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9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40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2:34-40)

 

 

시므온은 순종을 뜻하고 또한 신앙을 뜻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사람이 계명에 순종하고 신앙에 따라 행할 때 그의 안에서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는 사람들은 말씀과 교회의 교리와 설교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신앙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그러한 지식들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단지 기억에서 나오는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의지에 속한 것은 없고, 그러므로 사람에 속한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의지는 곧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신앙을 행동으로 옮길 때, 즉 순종할 때 신앙은 의지 속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사람 안에서 신앙이 된다. (계시록 해설 443:3, 이순철 역)

 

※ 위 계시록해설 443:3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으며, 이는 계시록 7장 7절 말씀에 대한 주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Simeon” signifies obedience he also signifies faith, for faith becomes faith in man when he obeys and does the commandments; before this is done the knowledge of such things as man has drawn from the Word, from the doctrine of the church and from preaching, appears as faith, but this is not faith until man does these things; until then it is merely a matter of thought from the memory, in which there is nothing of the will, consequently nothing of the man, for the will is the man himself; it is therefore when a man does this, that is, obeys, that it enters the will, thus the man himself and becomes faith. (AE.443:3)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7:7)

 

 

※ 본 설교부터는 서울 새 교회로 부임(2016년 12월) 후 하신 설교입니다.

 

그동안 출애굽기와 누가복음에 대한 말씀을 한주씩 걸러 전해드렸는데요,

 

※ 이상은 이순철 목사님의 청주 새 교회 시절입니다.

 

며칠 성탄절과 새해 예배가 있어서 시기에 맞는 말씀을 전하다 보니 누가복음 설교를 잠시 쉬었습니다. 오늘은 다시 누가복음 2장 34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리아와 요셉 부부는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유대교회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주님을 찬송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와 요셉 부부는 타락한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를 그렇게 이해하는 까닭은 말씀에서 그들을 갈릴리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나사렛은 갈릴리에 속한 지역입니다.

 

갈릴리는 속뜻으로 이방인을 나타냅니다. 이방인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방인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며, 또는 교회 안에 있지만,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교회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진실한 신앙인들에게 참된 진리와 선을 보내주십니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은 신실한 신앙인들의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진리와 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내면에 교회를 이루고 있는 신실한 신앙인들 속으로 오십니다. 그것이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 아기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 부부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진리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진리가 아니세요. 선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선을 동반한 진리이십니다. 따라서 마리아 부부가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이전처럼 진리만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을 함께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과 신앙에 따르는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신앙과 삶의 진실한 행위로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을 통해 참된 진리를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신앙인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이나 선지자는 그렇게 참된 진리를 만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와 요셉 부부와 같은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바로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34절에서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시므온이란 이름은 히브리말로는 귀로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므온은 ‘듣는 자’, 즉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진리를 그냥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요, 신앙에 따라 선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참 진리를 만날 때,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바로 알아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 안의 선한 애정이 진리를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로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라고 말이지요.

 

한글 성경에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이 아이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세워졌다’라고 말합니다. 많이 다르죠. 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이스라엘로 표상되는 영적 교회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마치 애굽의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지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거듭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거듭난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공격을 홀로 막아내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되찾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구속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이는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라고 하구요,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라고 말했습니다.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라는 말은 지옥의 공격을 홀로 막아내셨다는 뜻입니다. 시므온이 35절에서 계속해서 말합니다.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칼이 마음을 찌르듯 한다고 했는데, 칼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마음의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의지에서 나오는 생각을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종합해 볼 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라는 말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빛이 우리의 의지 속을 비추어 그 속에 있는 것들을 드러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어떤지는 알지만 의지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의지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 신앙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의지는 곧 생명이고, 생명이 맑아지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의지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가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셔서 그것을 통해 우리 의지나 애정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개혁하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음 36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난 사람은 시므온 말고 또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바로 ‘안나’라는 이름의 여인이었습니다. 시므온이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안나 역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안나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중 ‘아셀’ 지파의 딸이라는 것과, 선지자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아셀 지파는 애정을 뜻하고, 선지자는 교회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선지자는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안나가 진리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안나는 교회의 교리를 배우기를 힘쓰고, 교리가 이끄는 데로 선하게 살았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나가 남편과 결혼해 일곱 해를 살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남편은 누구를 말할까요? 말씀에서 남편과 아내는 각각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따라서 안나가 남편과 결혼한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과 진리가 서로 만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진리와 선이 결합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선이 결합해 하나가 되었으니, 그것은 거룩한 상태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숫자 7은 거룩한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나가 남편과 함께 산 기간은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를 나타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와 두 번째 상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진리에 복종, 선으로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진리에 복종하려면 진리에 반하는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좋지 않은 습관을 끊기 위해 자신과 싸워야 하고, 자기의 이익과 이웃의 이익이 서로 충돌할 때,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기 위해서 치열하게 갈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리의 상태에서 선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가 시작됩니다.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가 되면, 진리 행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고, 오히려 기쁨을 느낍니다. 일단 선의 상태로 들어가면, 내면에서 선한 의지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억지로 진리를 행하지 않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한 애정에 따라 행하고요, 그래서 그것이 기쁩니다. 37절은 안나의 두 번째 거듭남의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방금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진리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거듭납니다. 그런데 처음 그 상태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음을 절실히 느낍니다. 혹시 지난주 출애굽기 19장 설교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 도착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것은 영적 교회의 사람들이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 즉 선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광야는 진리가 아직 심어지지 않은 선을 뜻합니다. 본문에 안나가 과부로 사는 것이 그런 상태입니다. 선한 의지는 있는데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제까지 안나가 실천했던 진리는? 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저도 똑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묵상하면서 얻은 결론은 이렇습니다.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고, 일반적인 진리만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신앙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하고, 신앙과 삶의 행위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 악을 먼저 끊고, 그다음에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 같은 진리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선을 행하기보다는 주로 자신의 행위 가운데 숨어있는 악과 거짓을 버리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선을 행하되 소극적으로 행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그때 주님으로부터 받는 진리는 대부분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기 위해 필요한 일반적인 진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로 처음 들어간 사람들은 선한 의지는 있는데 선을 행하는 방법에 대한 진리가 없음을 느낍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안나가 과부로 지내는 상태입니다. 과부는,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거나, 아니면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 안나의 경우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안나를 과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안나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이 표현은 안나가 과부가 된지 팔십사 년이 지났다는 말이 아니라 안나의 현재 나이가 팔십사 세라는 말이겠지요?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숫자 4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84는 4의 배수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숫자 4의 의미와 같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숫자 4는 하나의 상태가 완전히 끝나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는 말은 선만 있고 진리는 없는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새로운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안나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말씀에는 안나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금식과 기도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금식은 애통해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안나는 무엇을 애통해했을까요? 자기 안에 선만 있고 진리가 없음을 슬퍼했습니다. 그러면 기도는 무엇입니까? 주님께 진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안나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선을 동반한 진리가 그에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안나에게 있어 새로운 시작입니다. 38절에서는

 

38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이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진리를 통해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구원을 소망하는 이웃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는 예수님, 즉 진리에 대해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안나와 같이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로 들어간 사람이라야 진리를 제대로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우님들 가운데도 거듭남의 두 번째 단계에 도달한 분이 계실 수 있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아직 누구에게 진리를 가르치기는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라고 말하는데 진리 아닌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 안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진리 안에 선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나는 주님을 만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웃들에게 주님에 대해, 즉 진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39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에 대한 정결 예식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39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교회 안의 신실한 신앙인들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낡고 병든 교회를 폐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실 때, 한동안은 이전 교회의 예배를 그대로 존속시키십니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부부와 같은 신실한 사람들을 모아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교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본 동네 나사렛’은 새로운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보내주시는 새로운 교회의 교리가 곧 ‘본 동네 나사렛’입니다. 왜냐하면 ‘동네’는 속뜻으로 교회의 교리를 나타내고,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 있는 곳이며, 그래서 이방인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신실한 신앙인들의 내면의 교회로 오신 주님은 처음에는 아주 연약한 주님이세요. 주님이 연약한 것이 아니고요, 주님을 받아들이는 우리 신앙이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점점 깊어지면 그에 따라 우리 안에 계신 주님도 점점 자랍니다. 진리에 능력이 생기고, 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40절에서는,

 

40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진리와 거짓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축복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그것을 주님께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주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인간의 때가 묻지 않는 순수한 진리와 선으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마치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정결 예식의 기간이 찬 다음 아기를 바친 것처럼 그렇게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순수한 진리와 선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결혼 후 7년 만에 과부가 된 선지자 안나는 그것을 위해 84세가 되도록 금식과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노력과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가끔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주님은 좀 더 빨리 나를 선하게 만들어주시지 않으시는가? 선에 대한 나의 열정을 모르시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아마 아직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도 안나처럼 자신에게 진리와 선이 없는 것을 슬퍼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간절히 매달려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금식과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이 준비 중이신 모든 새 교회가 바로 설 것이고, 부흥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식구들에게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6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40:6-8)

 

아멘

 

 

원본

2017-01-2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3. 2023-03-13(D2)-매일예배(2430, 눅2,34-40), '시므온의 축복과 선지자 안나 이야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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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눅2:41-47, ‘예수님 열두 살 때 에피소드 (1)’

예수님 열두 살 때 에피소드 (1)  41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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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의 찬송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눅2:28-33)

 

 

주님을 찬송하는 것은 주님을 노래하는 것이며, 주님의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며,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전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주님을 마음으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세속적 선과 또한 물질적인 선으로 축복을 받는다. 이것들은 각각 이러한 질서 안에 있을 때 선이 되며 그 안에 행복이 있다. (AC.1422:2)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총 10,837개의 글로 구성, 라틴어로 기록) 창세기 12장 3절 말씀에 대한 주석 내용입니다. Clowes 역입니다.

 

Here it is evident that “to bless the Lord” is to sing to him, to proclaim the good tidings of his salvation, to preach his wisdom and power, and thus to confess and acknowledge the Lord from the heart. They who do this cannot but be blessed by the Lord, that is, be gifted with those things which belong to blessing, namely, with celestial, spiritual, natural, worldly, and corporeal good; these, when they follow each other in this order, are the goods in which there is happiness.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3)

 

 

오늘 말씀은 지난 시간에 이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므온이 주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두 번째 본문입니다. 주님 탄생의 의미는 여러 번 설명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지만, 워낙 중요한 사항이라 한 번 더 정리,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 이천 년 전, 유대 땅에 오신 것은 성경 기록을 통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탄생의 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5804번 글과 5806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통해 선을 향해 나아갈 때, 그 선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진리를 주시는데, 그 진리는 말씀에서 베냐민으로 표상되는 진리이다. 그리고 그 진리 안에는 선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진리로 인해 겉 사람이 거듭난다. (AC.5804, 5806 요약, 이순철 역) When a man has come to good by means of truth, he is “Israel”; and the truth which he then receives from good, that is, through good from the Lord, is new truth, which is represented by Benjamin while he was with his father. By means of this truth good becomes fruitful in the natural, and brings forth numberless truths wherein is good. In this way the natural is regenerated, and through fruitfulness first becomes like a tree with good fruits, and successively like a garden.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 is meant by new truth from spiritual good. (AC.5804)

 

This truth is that truth which is from spiritual good (which is “Israel”), and which is represented by Benjamin when with his father; but it is a still more interior truth when with Joseph. The truth which Benjamin represents when with his father, and which is called new truth, is that which alone makes man to be the church; for in this truth, or in these truths, there is life from good. That is to say, the man who is in truths of faith from good, he is the church; but not the man who is in truths of faith and not in the good of charity. For the truths with this man are dead, even though they are the same truths. From this it may be seen what is meant by this being the only truth of the church. (AC.5806)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과 베냐민은 모두 선에서 비롯한 진리 즉 새로운 진리를 표상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 두 분은 모두 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 역시 선에서 비롯한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선에서 비롯한 진리’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 안에 선이 들어있는 진리입니다.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진리는 선 없는 진리, 그러니까 지식적 진리였다면 주님께서 노력하는 사람, 구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진리는 사랑이 있는 진리, 즉 선 있는 진리,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흘러들어올 때, 우리는 이전의 잘못된 행동을 다시는 하지 않게 됩니다. 선으로부터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거듭나게 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에서 베냐민은 세상에 오신 주님을 나타낸다는 것, 둘째는, 베냐민으로 표상되는 진리는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빛이라는 것, 셋째는, 그러므로 그 진리 안에는 사랑이 있으며, 그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넷째는, 이 진리는 진리를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것, 다섯째는, 그러므로 진리이신 예수님은 진리를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탄생과 관련된 내적 의미입니다.

 

※ ‘선 없는 진리’, ‘선 있는 진리’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저는 ‘머리 신앙’, ‘가슴 신앙’을 즐겨 쓰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그러면 주님이 신앙인의 내면으로 오실 때, 즉 각 사람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각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신앙이 변하게 됩니다. 전에는 그저 말로만, 지식으로만, 머리로만 주님을 믿었다면, 이제는 마음으로, 의지로 주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의지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계명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이 속에서 일어나고, 그렇게 해서 삶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마음으로는 주님 말씀대로 살아야지 생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신 다음에는 속 사람의 생각과 겉 사람의 행위가 일치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드디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복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신 다음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러한 신앙의 변화를 오늘 말씀에서는 시므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속뜻으로 시므온은 ‘의지에 속한 신앙’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전 신앙이 그냥 진리를 이해하는 데 그치는 신앙이었다면, 이 의지에 속한 신앙은 자기가 믿는 바를 의도하고, 삶으로 옮기는 신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므온은 주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음 말씀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한글 성경은 ‘아기를 안고’로 번역하지만, 영어 성경을 보면, ‘아기를 팔로 들어 올렸다’고 합니다. 팔이 무슨 뜻인지는 새 교회 분들이라면 다 아시지요? 바로 능력입니다. 그리고 ‘들어 올리는 것’은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주님을 온 힘을 다해 높이구요, 자신은 한껏 낮추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팔에 안아 들어 올리는 모습은 마가복음 12장 30절 말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막12:30)

 

하신 주님 말씀과 일치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그런 신앙 가운데 있을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에 대한 찬송이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시므온의 찬송인데요, 그러면 시므온은 어떻게 주님을 찬송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29절입니다.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는 종종 사람의 겉, 즉 겉 사람을 종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은 속 사람을 섬기는 것이 주님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종이구요, 속 사람은 주인입니다. 그런데 ‘종을 놓아주시는도다’ 합니다. 이 ‘놓아주다’라는 말은 한글 번역이고요. 영어 표현은 ‘depart’입니다. depart라는 말은 ‘떠나다’라는 뜻이지요.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이 떠난다’는 말은 속뜻으로는 겉 사람의 상태가 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즉 진리 안에 머물러 있던 겉 사람이 선 안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지못해 진리를 실천하던 사람이 스스로 원해서 진리를 실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종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러한 변화들이 평화롭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평화에 대해서 ‘천국의 비밀’ 8455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 속에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있다. 즉 주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며 또한 선한 목적으로 인도하신다는 신앙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이런 신앙 가운데 있을 때 그에게 평화가 있다. (AC.8455, 이순철 역, 출16:13,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This truth, which is called “the truth of peace,” is the very Divine truth in heaven from the Lord, which universally affects all who are there, and makes heaven to be heaven; for peace has in it confidence in the Lord, that He directs all things, and provides all things, and that He leads to a good end. When a man is in this faith, he is in peace, for he then fears nothing, and no solicitude about things to come disquiets him. A man comes into this state in proportion as he comes into love to the Lord. (AC.8455)

 

그러니까 우리가 시므온의 신앙, 즉 의지에 속한 신앙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주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 가운데 있고, 그러므로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겉 사람의 거처가 진리에서 선으로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진리를 강제하던 상태에서 진리를 사랑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므온의 찬송은 계속됩니다. 30절입니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눈이 보았사오니’는 이제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알았을까요? 모든 구원이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이성적인 신앙 안에 있을 때와 의지적인 신앙 안에 있을 때의 차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이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바뀐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그것은 구원이라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큰 변화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요,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지금 주의 구원을 보았다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31절과 32절에서는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주님의 구원이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여기서 ‘만민’은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을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교회 마지막 때에는 교회 안에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그러므로 선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 밖의 사람들, 즉 이방인들을 통해 새로운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지금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과 관련해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21:42)

 

여기서 건축자는 교회 안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버린 돌은 진리이신 주님이세요. 교회 안의 사람들이 진리를 더럽히고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21:43)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열매 맺는 백성들이란 바로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 ‘이방을 비추는 빛’과 그다음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영광’은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나와서 당신의 교회를 비추는 내적 진리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구원입니다. 33절에서는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부모’는 우리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를 나타냅니다. 부(父), 즉 아버지로 나타내는 것은 선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행위들과 연결되어 있는 개별적인 선이구요, 모(母), 즉 어머니는 개별적인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삶의 행위들과 연결된 개별적 선과 진리라 하는 이유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만이 교회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부모는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이구요, 구체적으로는 삶의 행위들과 연결되어 있는 개별적인 선과 진리들입니다. 그들이 시므온의 말에 놀랐다고 합니다. 이것은 내적 진리로 오신 아기 예수님이 곧 구원이시라는 확신이, 시므온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신앙으로부터 나와, 부모로 표상되는 내면의 교회로 확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확신이 내면의 교회 안에 충만한 것입니다. 부모가 ‘시므온의 말을 놀랍게 여기더라’는 그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속뜻으로, 놀라는 것은 그냥 놀라는 것이 아니고요, 예상치도 못한 변화를 인식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는 말씀은 우리 속으로 오신 내적 진리이신 예수님이 곧 구원이시라는 확신이 내면의 교회 안에 충만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기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중재자로서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중재자로서의 진리는 내적 특성과 외적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진리입니다. 이 두 가지 특성이 모두 필요한 까닭은 외적 특성이 없는 내적 진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다면 그분을 볼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 사람에게 합리적인 면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은 주님의 지혜를 직접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여기이고, 주님은 저 높은 데 계십니다. 사람은 육체이고, 주님은 영이십니다. 직접, 바로, 다이렉트로 이해할 수, 인식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중간 역할을 하는 무엇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주님이 어떤 특별한 준비를 시켜주시면, 사람은 다이렉트로 천사들의 지혜, 주님의 천국 그 찬란한 빛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이며, 보통은 육에서 합리, 이성, 지성을 거쳐 영으로 나아갑니다.

 

반대로 하늘의 것, 모든 영적인 것이 지상에 구현되려면 반드시 무슨 외형을 갖춰야 합니다. 이것이 지상과 천국 간 상응이라는 것입니다. 즉 지상의 무엇을 보면서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천국의 그 무엇을 아는 것입니다. 말씀은 모두 이런 상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지상 만물은 저마다 천국의 그 무엇을 담는 그릇이요, 용기(用器, recipient)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사람의 육체가 영혼을 담는 그릇이듯 말이지요. 태고교회 사람들은 모든 걸 이렇게 상응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일상 가운데 주님의 빛을 구하며, 부지런히 이 상응 훈련을 하면, 점진적으로 내면이 열려 천국과 연결되어 모든 놀라운 삶, 곧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시는 삶이 펼쳐질 줄 믿습니다. //

 

따라서 내적 진리는 외적인 옷을 입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겉 사람의 가장 마지막의 안에까지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겉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중재자로서 세상에 오셨고요, 또 중재하는 진리로 우리 마음속에 오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만난 것은 내적 진리가 의지 안에 심어지는 것이며, 그래서 이성적이던 신앙이 의지적인 신앙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구원을 확신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 구원이 순수한 마음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주님께서 예비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지키고 행하기 위해 말씀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찬송하는 은혜가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사25:9)

 

아멘

 

 

원본

2016-10-23(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2. 2023-03-12(D1)-주일예배(2429, 눅2,28-33), '시므온의 찬송'.pdf
0.40MB

 

 

 

13. 눅2:34-40, '시므온의 축복과 선지자 안나 이야기'

시므온의 축복과 선지자 안나 이야기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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