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5강 1부

말씀을 아는 에서말씀으로 사는 으로 : 연단과 양심의 빛을 중심으로

이번 5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강사가 신앙을 단순히 ‘진리를 알고 믿는 ’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것을 실제 삶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점입니다. 강의의 중요한 명제는 아주 분명합니다. ‘선한 지식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연단을 받는다’, 그리고 ‘선한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연단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말씀대로 실제로 살려고 하는 순간 사람 안에 있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 때에는 사랑하는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분노가 올라오고, 참으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는 동의하지만 실제로 참아야 할 상황이 오면 불평과 짜증이 솟아납니다. 강사는 바로 이 지점을 ‘연단’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이번 강의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되는 지식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의지와 행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렇게 삶이 된 진리만이 사람에게 실제로 속한 것이 됩니다. 사람이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진리가 삶의 구체적인 상황 속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 진리와 반대되는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서 영적 싸움, 곧 시험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말하는 ‘말씀을 실천하려 하면 불편한 환경이 온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구조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불편한 환경을 만들어 보내신다기보다, 섭리 가운데 허용된 삶의 환경을 통하여 이미 사람 안에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난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어떤 사람을 ‘원수’로 만들어 보내신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의 후반에서도 강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그럴 하나님은 반드시 원수를 붙여 주신다’고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말을 조금 다듬는다면, ‘주님은 우리가 받은 진리가 실제 삶이 있도록 섭리하시며, 과정에서 우리 안에 있는 진리와 반대되는 사랑들이 드러나는 상황을 허용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외부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내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내 안에 이미 있던 분노와 자기애가 드러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의 다음 설명이 더욱 의미 있어집니다. 연단받을 환경이 왔을 때 불평과 짜증이 올라오고 그것을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옮긴다면 연단의 기회를 피한 것이라고 강사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 나타나는 것을 철저히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빛의 열매’를 맺는 과정이 영성 훈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연결하여 읽을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단순히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감정적 행위가 아닙니다. 자기 안의 어떤 악을 실제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다시 그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삶에서 악이 드러나는 순간은 반드시 실패의 순간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악을 보고 주님 앞에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는 거듭남의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강의가 말하는 ‘양심의 ’도 이 흐름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양심을 사람의 ‘지성, 감정, 의지’를 밝혀 주는 기능으로 설명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양심의 빛이 밝아진다고 말합니다. 이어 히브리서 5장 14절의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을 인용하여, 말씀을 실천하고 연단받을수록 양심이 밝아져 선과 악을 더욱 선명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진다는 것은 단지 더 많은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던 것을 점차 분별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양심’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을 구별하면 이번 강의를 더욱 정교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있었던 것은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선이며 참인지를 내적인 방식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양심입니다. 양심은 사람이 말씀으로부터 받아들인 진리와 선이 내면에 자리 잡아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절대적인 판별 장치가 아닙니다. 어떤 진리를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양심의 질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인 사람은 그것을 어겼을 때 실제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양심의 소리니까 하나님의 소리다’라고 곧바로 등치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 자체도 말씀의 참된 진리에 의해 형성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연단을 받을수록 양심의 빛이 더욱 밝아져서 선과 악을 더욱 선명하게 분별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좋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따라 살면서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칠수록, 주님께서 그의 내면을 더욱 열어 주시며 결과 선과 , 참과 거짓을 더욱 섬세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밝아지는 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어떤 영적 감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상태입니다.

 

특히 강의가 ‘말씀의 실천’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거예요. 말씀을 실천하는 거예요’라고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그토록 경계하는 것이 바로 사랑과 분리된 신앙, 곧 삶과 분리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선으로 옮겨지고, 선이 행위가 되며, 그것이 반복되어 삶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강의의 ‘말씀 실천 내적 저항의 발견 회개 변화 더욱 밝아진 분별’이라는 흐름은 거듭남의 실제적인 면을 상당히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천국에 들어갈 만큼 100% 완전히 밝아져야 한다’는 강사의 표현에서는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99.9도 되고 100% 완전히 양심이 밝아져야’ 가나안, 곧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간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사람이 지상에서 모든 악의 성향을 완전히 제거하고 완전무결한 상태에 도달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그렇게 수학적인 완전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사랑을 자신의 주된 사랑으로 삼았는가, 다시 말해 그의 생명을 지배하는 사랑이 무엇인가입니다. 사람 안에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proprium이 남아 있으며, 천사들도 자신들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자기 힘으로 100% 정결해진 사람들의 나라’라기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중심이 되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나라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은혜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인간이 자기 안의 악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완벽하게 제거한 다음 그 공로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실제로 악을 물리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승리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인간의 협력과 책임을 조금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구원의 능력과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강의의 ‘연단’이라는 말도 조금 더 깊어집니다. 연단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닙니다.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고 자동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동일한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자기중심적이 되고, 어떤 사람은 더욱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환경 속에서 주님이 보여 주시는 진리를 붙들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악과 거짓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연단의 본질은 ‘고난의 ’이 아니라 ‘ 고난 가운데 이루어지는 내적 선택’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뒤에서 말하는 ‘원수는 다른 있는 아니라 바로 안에 있는 자기가 원수입니다’라는 말은 이번 5강 1부 전체를 꿰뚫는 중요한 문장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악한 영들과 지옥의 인플럭스를 실제적인 것으로 가르치므로 모든 악을 단순히 인간 심리 내부의 현상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지옥이 사람을 강제로 악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악의 인플럭스가 사람 안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 곧 타락한 proprium과 결합할 때 그것이 ‘나의 ’으로 활동합니다. 따라서 영적 싸움의 중심은 언제나 ‘ 사람이 문제다’에서 ‘ 일을 통해 안에서 무엇이 드러나고 있는가’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가장 깊은 연단은 원수가 사라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 때문에 드러난 내 안의 미움, 보복심,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기 의, 우월감과 싸우는 데 있습니다. 상대방을 고치는 것보다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강의 역시 뒤이어 ‘남의 속에 있는 티를 주려고 하기보다는 자신 속에 있는 들보를 자꾸 보고 고치려고 노력해야 된다’고 말하며, 이것을 ‘우리의 옛사람 애굽의 근성을 죽이는’ 과정, ‘자아를 깨뜨려 가시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이 대목 역시 표현상의 차이를 잠시 내려놓으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실제와 매우 가까운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결국 5강 1부에서 건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진리는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낸다.’ 말씀을 읽을 때에는 자신이 사랑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 나타날 때 비로소 내 사랑의 실제 상태가 드러납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다가 무시당했을 때 분노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물질에 초연하다고 생각하다가 손해를 볼 상황이 되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바로 그 순간이 실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 안에 아직 이것이 있다’고 보여 주시는 거듭남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말하는 ‘말씀의 실천 연단 양심의 밝아짐 선악의 분별’이라는 큰 흐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100% 완전 정결을 달성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식의 인간적 완성론으로 가져가기보다, ‘말씀의 진리가 삶이 되고, 속에서 악이 드러나며, 사람이 주님을 의지하여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치는 가운데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성이 형성된다’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훨씬 깊어집니다. 연단의 목적은 사람이 스스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에게서는 아무 선도 나오지 않음을 점점 더 알고, 그러면서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더욱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의 빛이 밝아진다’는 것은 결국 ‘내가 밝아진다’기보다, 내 안에서 주님의 빛을 가리던 것들이 하나씩 물러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또한 더 스베덴보리적입니다.

 

 

5강 2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 ‘광야의 차례 연단 거듭남의 여정

5강 1부에서 강사는 ‘말씀을 실천해야 연단을 받는다’는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없으며, 그 말씀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려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죄성과 정욕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하면서 양심의 빛이 점점 밝아지고 선악을 더욱 분명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의는 이 개인적인 경험을 성경 전체의 거대한 그림 하나에 올려놓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정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단순한 이스라엘 민족의 고대 역사로 읽지 않고 한 사람이 구원받고 성장하여 마침내 ‘익은 열매’가 되는 영적 성장의 모형으로 읽습니다. 특히 광야에서 세 차례의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는 데 주목하면서 이것을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할 ‘ 차례 연단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지고 읽는 독자는 아마 상당히 놀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적 사건을 인간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으려는 기본 방향 자체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 해석의 세부 내용은 앞으로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굽-광야-가나안’을 단지 수천 년 전 민족사의 지리적 이동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과 거듭남의 질서로 읽는다는 발상 자체에는 매우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강사의 도식에서 애굽은 사람이 아직 육적이고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출애굽은 거기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건이며, 광야는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훈련되고 연단받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자리 잡은 상태, 곧 ‘익은 열매’와 ‘이기는 ’의 상태로 연결됩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즉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광야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완성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아주 중요한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사람이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과 실제로 거듭났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거듭남을 위한 필수적인 시작이지만, 그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사랑이 되고 실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반드시 시험이 따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있기만 할 때에는 자기 안에 있는 반대되는 사랑들이 그대로 숨어 있을 수 있지만,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하면 옛 의지와 새로운 의지 사이의 충돌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배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도 읽을 때에는 아름답지만 실제로 깊은 상처를 준 사람 앞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재물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실제 손해가 닥치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일종의 빛과 같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광야가 필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특히 이 광야의 여정을 ‘ 차례 연단’으로 구조화합니다. 첫 번째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는 사건, 두 번째는 아말렉과의 전투, 세 번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강력한 적들과의 전투입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이 세 단계를 요한일서의 ‘아이들-청년들-아비들’의 성장 단계와 연결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는 이스라엘이 거의 싸우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도망가며, 두 번째에서는 실제로 적과 싸워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단계로 성장하고, 세 번째에서는 더욱 강한 적들과 싸우며 마침내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는 단계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에서 흥미로운 것은 영적 성장을 ‘악이 점점 줄어들어 편안해지는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성장할수록 더 깊은 싸움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싸울 힘조차 없어서 도망가던 사람이 조금 성장하면 실제로 싸우기 시작하고, 더 성장하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적과 맞닥뜨립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역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는데 왜 시험이 더 깊어지는가, 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악이 오히려 더 많이 보이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퇴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깊은 층이 열리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도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과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이 속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불일치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속사람을 열어 가실수록, 겉 사람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느 정도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싸움이 있으려면 싸울 두 편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에는 주님께서 심어 놓으신 선과 진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proprium과 결합된 악과 거짓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초기에 별다른 내적 갈등이 없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건강했다는 뜻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갈등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리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보이기 시작하며, 이전에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자기애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양심의 형성과 함께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 차례’라는 숫자를 실제 영적 성장의 고정된 단계처럼 사용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세 번 나타났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정확히 세 차례의 큰 시험을 거친다고 문자적으로 공식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은 말씀의 상응 안에서 완전한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는 것과 관련된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 차례 전투’를 인간 거듭남의 완전한 시험 과정의 표상으로 읽을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의 영적 생애를 정확히 세 번의 시험으로 나누는 심리적 시간표로 고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애 가운데 몇 번의 매우 큰 시험을 경험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작은 시험들이 오랜 기간 계속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동일한 악이 여러 형태로 되풀이되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방식은 그 사람의 유전적 성향, 삶의 환경, 받아들인 진리와 선, 자유의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므로 ‘ 차례’의 깊은 영적 의미를 존중하되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획일적인 단계표로 만들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누가 싸우는가’입니다. 출애굽기의 첫 번째 위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다가 갈라지고 길이 열립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거듭남의 가장 근본적인 비밀 하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은 싸우지만 실제 승리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초기에 사람은 자기 안의 악이 얼마나 강한지조차 잘 모릅니다. ‘앞으로 착하게 살면 되지’, ‘화를 내지 않으면 되지’, ‘욕심을 버리면 되지’ 하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싸움에 들어가면 자기 의지력이 얼마나 약한지 발견합니다.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또 하고, 용서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떠오르면 다시 분노하고,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명예욕이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점점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나는 나를 거듭나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절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홍해를 가른 것이 아니듯, 인간도 자기 힘으로 자기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열린 길을 실제로 걸어가야 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는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원리가 여기에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인간은 실제로 결단하고 싸우고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그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광야는 ‘내가 얼마나 강한 영적 사람이 되는가’를 증명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 힘으로는 없다’는 것을 배우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가 주어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옵니다. 자기 힘으로 생산한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선과 진리는 인간의 고유한 소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선했다고 해서 오늘도 자동으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어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오늘도 자기 힘으로 그 진리를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은 계속 주님에게서 흘러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하는 ‘연단’은 단순한 정신력 강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광야에서 강한 사람이 되어 마침내 자기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새로운 사람이 형성되는 이야기입니다. 외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점점 전쟁을 잘하는 백성이 되지만, 속뜻에서는 인간이 점점 자기 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악과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영적 할례를 받아 흰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 곳간에 추수될 있다’고 말하는 부분도 나옵니다. 이 표현은 이후 강의에서 매우 중요해지므로 지금부터 정확히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 가나안 입성은 상당히 완성된 성화 상태를 가리킵니다. 죄성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을 이루며 ‘이기는 ’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의 세 연단은 그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가나안’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가나안은 주님의 나라, 교회, 천국적인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것을 ‘ 사람 안에서 모든 악의 가능성이 존재론적으로 제거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지배 질서가 바뀌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예전에는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람을 지배했지만, 거듭남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중심을 이루게 됩니다. 악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하는 생명의 중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성화에 대한 태도를 크게 바꿉니다. ‘나는 번째 연단까지 통과했으므로 이제 익은 열매다’라는 자기 인식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자기확신 자체가 새로운 proprium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부족합니다’라고 말하는 겸손조차 자기 영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있을 만큼 proprium은 섬세합니다. 그래서 거듭날수록 사람은 자기 완성도를 측정하기보다 주님께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아이-청년-아비’라는 성장 도식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에서는 아직 자기 힘이 없습니다. 청년의 상태에서는 실제로 싸우기 시작합니다. 아비의 상태에서는 더 깊은 선과 지혜가 형성됩니다. 이것을 기계적인 세 단계로 고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거듭남에 실제로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좋은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남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여러 상태의 연속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의 역사적 이야기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인간의 거듭남을 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여정, 야곱의 삶, 요셉의 이야기, 출애굽, 광야, 가나안 정복이 단지 각각 떨어진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 주님의 영화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연속적인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출애굽과 광야를 인간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으려 했다는 사실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두 방식의 중요한 차이도 나타납니다. ‘핵심진리’는 성경의 여러 사건을 영적 성장의 모형으로 연결하면서도 그 연결을 주로 신앙적 유비와 성경구절 간의 조합을 통해 구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일정한 상응의 질서가 있으며, 인물·장소·숫자·사건 하나하나가 그 질서 안에서 연속적인 속뜻을 이룬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 출애굽을 영적 성장으로 해석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신학적 토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알고 읽으면 오히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을 더 공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와 비슷하니 결국 같은 것이다’라고 성급하게 동일시할 필요도 없고, 세부 해석이 다르다고 해서 그 안의 영적 통찰까지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먼저 ‘ 해석은 무엇을 보려고 했는가’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속뜻의 질서를 통해 어디까지 더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번 부분에서 그 공통된 핵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애굽에서 나왔다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오늘의 신앙 언어로 바꾸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다고 해서 거듭남의 모든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작입니다. 그 진리가 삶이 되어야 하고, 삶 속에서 자기 안의 악이 드러나야 하며,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다. 이 긴 과정이 광야입니다.

 

그렇다고 광야가 구원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광야가 있습니다. 만나도 광야에서 주어졌고, 반석의 물도 광야에서 주어졌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광야에서 함께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의존이 벗겨지고 주님의 인도를 배우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시험을 겪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주님에게서 멀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오히려 주님께서 더 깊은 곳을 다루고 계신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5강 1부에서 다룬 ‘양심의 ’과도 연결됩니다.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의 어둠이 더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나는 점점 훌륭한 사람이 되어 간다’고 느끼기보다 오히려 자기 안의 proprium이 얼마나 깊은지 더 잘 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 주시는 분이 바로 그것에서 건져내시는 주님이심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5강 2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은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며, 광야는 주님께서 진리를 삶으로 만드시기 위해 인간의 proprium을 드러내고 질서 있게 하시는 과정이고, 가나안은 자기 힘으로 완전해진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의 생명을 다스리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말하는 ‘ 차례 연단’도 훨씬 풍성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번째 연단에 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 주님께서 안의 무엇을 보여 주고 계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첫 번째이든 두 번째이든 세 번째이든, 또는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작은 시험 가운데 하나이든, 모든 거듭남의 싸움에서 실제로 싸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그분이 열어 주신 길을 자유롭게 걸어갈 뿐입니다.

 

다음 5강 3부에서는 강사가 이 ‘ 차례 연단’을 훨씬 구체적으로 펼쳐 가는 부분을 따라가겠습니다. 특히 ‘바로의 군대-아말렉-가나안 입성 전의 강적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는지, 그리고 ‘아이-청년-아비’라는 성장 단계와 어떻게 연결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부터는 공용복 선생의 실제 연단 사례도 점차 등장하기 때문에, ‘핵심진리’가 말하는 영적 성장론의 독특한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5강 3부

첫째, 둘째, 셋째 연단 : 싸움의 대상이 점점 깊어지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5강 2부에서는 강사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을 한 사람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는 큰 구조를 살펴보았습니다. 애굽을 떠나는 것은 구원의 시작이고, 광야는 말씀을 실제 삶에 적용하면서 자기 안의 죄성과 정욕이 드러나고 연단받는 과정이며, 가나안은 그 과정을 지나 ‘익은 열매’, 곧 ‘이기는 ’가 되는 상태로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강사는 이 광야의 과정을 조금 더 세분하여 ‘ 차례 연단’이라는 독특한 구조로 설명합니다. 첫째 연단은 애굽에서 나온 직후 바로의 군대에게 추격당하는 사건, 둘째 연단은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는 사건, 셋째 연단은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더욱 강력한 적들과 싸우는 사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전투가 세 번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강사는 이 세 전투를 통하여 신앙이 성장함에 따라 인간이 죄와 싸우는 방식과 깊이가 달라진다고 봅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애굽에서는 오랫동안 종으로 살았고, 이제 막 바로의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 단계에서 백성은 스스로 싸워 승리할 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여셔야 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은 그 길을 지나가며, 뒤따라 들어온 애굽의 군대는 물에 잠깁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갓 출발한 사람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아직 죄와 직접 맞서 싸울 힘이 충분하지 않은 단계입니다.

 

이 그림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깊은 악과 거짓의 습관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충분히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 믿었으니 이제 새사람이 되었다’는 기쁨이 큽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의 성질과 욕망과 습관들이 다시 뒤쫓아오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옛것이 그대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기도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는데 아직도 이런 생각이 올라오는가? 예전 성질이 그대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중요한 구별 하나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겉 사람 안에 축적되어 있던 악과 거짓의 질서가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불일치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속사람 쪽에서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데 겉 사람에는 오래된 습관과 애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이 둘이 실제로 질서를 이루도록 하는 긴 과정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다’는 사실과 ‘애굽이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이스라엘이 자기 능력으로 애굽 군대를 무찌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에 비추어 보면 아주 중요한 원리가 드러납니다. 거듭남의 모든 싸움에서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 실제로 노력해야 하지만,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듭남마저 proprium의 사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연단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다가 갈라졌을 때 이스라엘은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야 했습니다. 가만히 애굽 쪽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이 알아서 가나안으로 옮겨 주시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는 매우 독특한 균형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악과 싸울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워야 하지만,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인플럭스가 여기에서 함께 작용합니다.

 

이제 두 번째 연단으로 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실제로 싸웁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는 도망하던 백성이 이제는 전투에 참여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성장한 ‘청년’의 단계와 연결합니다. 신앙의 초기에는 무엇이 죄인지조차 잘 몰랐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말씀을 알고 선악을 분별하며 실제로 죄와 싸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양심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말렉과의 싸움에는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래에서 싸우고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듭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깁니다. 결국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고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 이 장면은 인간이 실제로 싸우지만 승리의 근원이 인간의 전투 능력 자체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사건에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인물과 사건 하나하나는 상응을 통해 속뜻을 품고 있으며, 아말렉과의 전쟁 역시 단순한 도덕적 교훈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모세의 손을 들면 기도가 강해져 이긴다’는 식으로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현재 강의가 말하려는 영적 성장의 문맥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래에서 실제로 싸우지만 승리는 위에서 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원리와 잘 연결됩니다.

 

여기서 ‘청년’의 영성에는 한 가지 위험도 있습니다. 싸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자신이 강해졌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아무것도 합니다’라고 하던 사람이 몇 가지 욕망을 이기고, 기도생활이 안정되고, 말씀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에게 신앙적인 조언도 할 수 있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나는 이제 영적인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자기애가 종교적인 자기애로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개념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proprium은 반드시 돈과 성욕과 명예 같은 노골적인 욕망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진리를 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깊다’, ‘나는 시험을 많이 이겼다’, ‘나는 성화되었다’는 생각 속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 욕망과 싸우는 것보다 종교적인 모습을 입은 proprium을 발견하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 성장이란 ‘점점 내가 강해지는 ’과 반드시 같은 뜻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실제로 더 절제할 수 있고, 더 분별할 수 있고, 더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오히려 ‘ 모든 것이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를 더욱 깊이 알아 가야 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자기 능력이 커졌다고 느껴 주님에게서 독립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자유롭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 번째 연단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강사의 구조에서 세 번째 연단은 가장 깊고 강한 싸움입니다. 이제 단순히 애굽에서 도망치거나 광야에서 아말렉 하나와 싸우는 정도가 아닙니다. 가나안에 가까워질수록 더 강한 적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강사는 영적으로 성숙한 ‘아비’의 단계와 연결하고, 결국 죄성의 깊은 뿌리까지 다루어 ‘익은 열매’가 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역설이 나타납니다. 가나안에서 멀리 있을 때보다 가나안에 가까워질수록 싸움이 더 어려워집니다. 만일 영적 성장을 단순히 ‘점점 문제가 없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이 층층이 열리는 과정이라고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잘 보이는 악부터 다루어집니다. 거짓말, 음란, 탐욕, 노골적인 분노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질서 안에 들어오면 더 미세한 동기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은근히 낮추는 마음, 선을 행하고도 그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 등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오래했는데 이전보다 자기 안의 악이 더 많이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더 악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더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방에서는 먼지가 보이지 않지만 햇빛이 강하게 들어오면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까지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먼지가 보인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이 점은 5강 1부에서 살펴본 ‘양심의 ’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양심의 빛이 밝아질수록 선악을 더 세밀하게 분별하게 된다는 강사의 설명은 이런 의미에서는 매우 깊습니다. 처음에는 행동의 선악만 보입니다. 그 다음에는 말의 선악이 보입니다. 더 나아가 말과 행동을 낳은 동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옳은 말을 했지만 말을 했는가? 상대를 살리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는가?’라는 데까지 들어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목적’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행위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목적, 그 목적에서 나오는 생각과 수단, 그리고 최종적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외적으로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움직이는 목적에 따라 영적인 질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도 그 사람의 선을 위해서일 수 있고, 자기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헌금도 체어리티에서 할 수 있고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도 주님과 교회를 위해 할 수 있고 자기 명성을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연단을 단순히 ‘ 무서운 사건이 일어난다’고 이해하기보다 ‘ 깊은 사랑의 층이 시험받는다’고 이해하면 훨씬 의미가 깊어집니다. 겉 행동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행동을 움직이는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거듭남의 핵심은 행동 목록 몇 가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사랑이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다만 강사가 이 세 번째 연단을 지나면 ‘죄성의 뿌리가 제거되고 익은 열매가 된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구별을 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실제적이며 매우 깊은 변화입니다.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선이 사람의 생명의 중심이 되는 변화가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소멸하여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어떤 악의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천사도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자기 안으로 주님에게서 선이 흘러들어 온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천사입니다. 만일 주님으로부터의 인플럭스가 한순간이라도 끊긴다면 누구도 스스로 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완성은 ‘이제 나는 완전히 선한 존재가 되었다’가 아니라 ‘나는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자유롭게 인정하며 안에서 살기를 사랑한다’는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이 ‘익은 열매’라는 말을 읽을 때도 중요한 균형이 됩니다. 열매는 분명 익어야 합니다. 진리가 단지 지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선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자기 자신을 익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가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듯 인간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선을 행합니다. 따라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일수록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하셨다’고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강사가 첫째·둘째·셋째 연단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핵심도 결국 ‘싸움 없이 성숙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 부분은 충분히 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단순히 마음의 위로나 천국 입장권으로 이해하지 않고, 실제 인간의 성품과 사랑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고백 이후에도 광야가 있고, 말씀을 실제로 살면서 자기 안의 악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분명하게 합니다. 싸움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고난을 겪었다

 

 

 

5강 4부

속에 거하는 전적 부패 : 죄성은 인간의 가장 깊은 영에 뿌리박힌 실체인가

5강은 이제 연단이 왜 필요한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 안의 죄 문제 그 자체로 깊이 들어갑니다. 앞에서는 말씀을 실천하려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사는 그 ‘숨어 있던 ’의 정체를 ‘죄성’이라고 부르면서 로마서 7장 20절,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속에 거하는 죄니라’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강사의 해석에 따르면 사람이 선을 행하려고 결단했는데도 범죄할 환경이 주어지면 마음속에서 ‘죄의 ’이 일어나 결국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 가장 깊은 곳에 죄성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학적으로 ‘완전 타락’, ‘전적 부패’라고 설명합니다.

 

강사는 이 말을 단순히 ‘사람은 죄를 많이 짓는다’는 정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훨씬 구조적으로 이해합니다. ‘원죄가 속에 뿌리박혀서 범죄할 기회가 주어지면 마음에 죄의 법칙이 능력으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죄의 종노릇하는 상태’가 바로 완전 타락과 전적 부패라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 죄성이 잠잠해 있어서 자신도 그것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특정한 환경이 주어지면 그것이 발동하여 마음을 지배하고 마침내 행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강의에서 든 예를 따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앞으로는 오래 참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진리가 양심에 새겨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참습니다. 두 번째도 참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쯤 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가 폭발합니다. 강사는 바로 그 순간을 ‘죄성이 발동한 ’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을 몰랐을 때에는 그것이 죄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했지만,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하자 오히려 자기 안에 말씀을 거역하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매우 중요한 영적 관찰이 담겨 있습니다. 말씀의 빛이 들어오기 전에는 자기 안의 어둠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성질대로 살면서 화를 낼 때에는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생각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망도 ‘누구나 그렇지’ 하고 지나갑니다.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조금 사실을 왜곡하는 것도 ‘세상살이가 그렇지’라고 합리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실제로 살려고 하면 이전에는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문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진리가 죄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있던 어둠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서도 진리가 이해성 안에 들어오면 그 진리와 반대되는 의지의 상태가 점차 드러납니다. ‘나는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아는데 마음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가?’라는 갈등이 생깁니다. 이것은 오히려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선과 악이 구별되지 않던 상태에서 이제 둘이 서로 분리되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의 인간론과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강사는 죄성을 ‘ 속에 뿌리박힌 ’, 더 나아가 ‘영의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힌 ’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음란성, 시기, 혈기, 아집, 교만 같은 죄성이 인간 안에 뿌리박혀 있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설명하고, 이것을 ‘원죄’, ‘부패성’, ‘유전죄’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의 가장 내적인 영 자체에 악의 실체가 뿌리를 박고 있다는 그림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다듬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곳, 곧 inmost는 악이 뿌리박혀 있는 장소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안으로 유입하시는 가장 깊은 입구와 관련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갖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 자체를 ‘죄악으로 오염된 ’처럼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구조와 잘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인간에게 유전적 악이 있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가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C 전체에서 유전적 악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에 대한 법적 ‘죄책’이 그대로 자손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향한 성향, 곧 악을 사랑하기 쉬운 경향입니다. 따라서 ‘아담이 죄를 지었으므로 죄책이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전가되었다’는 전통적인 원죄론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조상의 죄 때문에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고 자기 삶으로 만든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집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공용복 선생의 설명 가운데 흥미로운 접점도 보입니다. 강의 자료에서 ‘원죄’라고 할 때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행위 자체’를 원죄라고 하지 않고, 그 타락을 통하여 인간에게 들어온 ‘죄성’, 곧 ‘부패성·유전죄’를 원죄라고 구별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행위 자체는 그들의 ‘자범죄’이고, 이후 인간에게 유전되는 죄의 성향을 원죄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죄성이 들어왔다’는 구조는 스베덴보리와 다르지만, 조상의 범죄 행위 자체와 후손에게 이어지는 악의 성향을 구별하려 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차이는 더욱 커집니다. 아담은 지구상 최초의 한 남자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 곧 인류의 가장 오래된 교회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 사람 아담이 역사적으로 선악과를 먹었고 순간 어떤 죄성이라는 것이 인류의 속으로 들어왔다’는 구조 자체가 AC의 창세기 속뜻과는 맞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떠나 감각과 자기 이성, 곧 proprium을 신뢰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타락해 갔는가를 말씀의 속뜻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유전적 악은 일종의 ‘영적 유전자 물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세대를 거쳐 축적되어 내려오는 사랑과 애정의 기울어짐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경향, 세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는 경향을 갖습니다. 이것이 실제 생활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지고 반복될 때 개인의 실제 악이 됩니다. 반대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죄로 여기고 거부하면 그 악은 비록 유전적 경향으로 존재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proprium’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낍니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선하다’, ‘내가 옳다’고 느낍니다. 이 자기 것이라는 감각 자체가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기 위해 필요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실제 자기 소유라고 믿고 주님에게서 독립하려 할 때 proprium은 악과 거짓의 토대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죄론은 ‘ 영의 가장 깊은 곳에 악한 물질이 박혀 있다’는 그림보다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생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주님보다 사랑하려는 proprium의 질서’에 초점을 둡니다.

 

그런데 이 설명을 잘못 들으면 ‘그렇다면 인간에게 악은 별로 심각하지 않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얼마나 깊고 집요하게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지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핵심진리’와 만납니다. 강사는 완전 타락과 전적 부패를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구원할 없는 상태’라고 설명하면서 결국 ‘나는 어쩔 없구나’라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의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도 한 가지 균형을 놓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악과 싸울 때에는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합니다. 분노가 올라오면 말을 삼켜야 하고, 거짓말할 기회가 생기면 진실을 말해야 하며, 탐욕이 올라오면 실제 행동에서 그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뒤에는 ‘내가 의지력으로 이겼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능력을 주셨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 사이의 균형입니다.

 

그래서 강의가 말하는 ‘죄성이 환경을 만나면 발동한다’는 관찰은 스베덴보리의 시험론으로 조금 바꾸어 읽으면 상당히 유익해집니다. 평소에는 자기 안의 어떤 악한 애정을 모르고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손해를 보거나, 무시당하거나, 성적 유혹을 받거나, 권력을 가질 기회가 생기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숨어 있던 사랑이 밖으로 드러납니다. 환경이 그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을 통하여 이미 자기 안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만으로 자기 상태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권력이 없는 사람이 권력욕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고, 돈이 없는 사람이 자기는 돈에 초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비판하지 않을 때 자기가 온유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달라지면 자신도 몰랐던 것이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삶의 환경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범죄할 기회가 주어지면 죄성이 발동한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충분히 건질 수 있는 통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때 올라오는 모든 생각과 충동을 곧바로 ‘ 자체’라고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영계로부터 끊임없는 인플럭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애정과 생각은 천국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유입되고, 악한 애정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유입됩니다. 인간은 그 사이에서 자유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를 선택합니다.

 

이 사실은 죄와 싸우는 사람에게 의외로 큰 자유를 줍니다. 갑자기 악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 영의 가장 깊은 곳이 이것이구나’ 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음란한 생각이 스쳤다고 해서 ‘ 본질은 음란한 인간이구나’,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순간적으로 올라왔다고 해서 ‘ 참된 자아는 살인적인 인간이구나’라고 곧바로 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올라왔을 때 내가 그것을 기뻐하며 붙잡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이것은 주님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는가입니다.

 

이 구별은 정말 중요합니다. 유혹과 죄를 동일시하면 신앙생활은 끝없는 자기혐오로 갈 수 있습니다. 시험 가운데 악한 충동이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와 그 악을 자유롭게 사랑하고 실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오히려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보고 괴로워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한다는 사실은 이미 그 사람 안에 그 악과 싸우는 다른 생명이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싸움이 있다는 것은 양편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의 ‘ 속에 거하는 ’를 ‘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이 죄다’라고 읽는 것과 ‘내가 선을 원하면서도 나를 끌어당기는 악한 성향이 여전히 사람 안에 있다’고 읽는 것은 영적으로 상당히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전자는 ‘나는 본질적으로 덩어리다’라는 자기규정으로 갈 수 있지만, 후자는 ‘ 안에는 내가 싸워야 유전적이고 실제적인 악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악과 나를 분리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고 계신다’는 거듭남의 관점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우리가 AC에서 계속 만나게 되는 ‘리메인스’를 함께 생각하면 더욱 중요해집니다. 인간 안에 악의 경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인간 안에 은밀히 보존하십니다. 인간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 리메인스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완전히 부패하여 안에는 오직 죄밖에 없는 존재’라고만 묘사하면 AC가 말하는 인간의 내적 구조 가운데 매우 중요한 절반을 놓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전적 부패’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사용할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만일 이 말이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선도 만들어 없으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이라면 상당 부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모든 층위가 악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의 리메인스조차 없으며 자유와 합리성도 사실상 파괴되었다’는 뜻이라면 스베덴보리와는 맞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타락한 인간에게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죄성은 마귀의 ’이라는 강의의 설명입니다. 앞선 강의에서 강사는 정욕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보존하도록 주신 기능이지만 ‘죄성은 마귀의 ’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구별했습니다. 이 말은 죄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며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유입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악은 인간의 참된 창조 목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상당히 가까운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악이 마귀에게서 어떤 ‘죄성 물질’처럼 인간의 영 속으로 이동해 들어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영들의 인플럭스는 인간의 자유를 강제로 파괴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그것에 동의하고 사랑하며 반복하여 자기 삶으로 만들 때 그것이 그의 실제 악이 됩니다.

 

이것은 책임의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죄성이 마귀의 것이니 내가 죄를 지은 것은 결국 마귀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자기에게 유입되는 악을 마치 자기 것처럼 느끼면서 그것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도록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 책임이 생깁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악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되 선에 대해서는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이 독특한 구조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말하는 ‘나는 지옥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나는 정말 비참한 신세구나’라는 자기 인식도 어느 지점까지는 의미가 있지만, 그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목적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악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나에게는 주님이 필요하다’로 가야 합니다.

 

더 깊이 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회개의 빛은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 고정시키지 않습니다. 자기 안의 악을 끝없이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보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어둠을 발견한 이유는 빛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보이는 순간에도 동시에 빛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공용복 선생의 ‘죄성’ 개념과 스베덴보리의 ‘유전적 ·proprium·인플럭스’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죄는 훨씬 깊다. 환경만 주어지면 숨어 있던 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기 힘을 믿지 말고 철저히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그렇다. 그러나 악을 당신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과 동일시하지 말라. 당신의 가장 깊은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으며,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자유와 합리성을 지켜 주시면서 악을 당신에게서 분리해 내어 새로운 의지와 이해성을 형성하신다’고 덧붙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보완이 이번 5강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죄성의 깊이’를 강조하는 강의는 자칫 듣는 사람을 ‘ 안에는 죄밖에 없다’는 쪽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의 거듭남론은 인간의 타락을 조금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그보다 먼저,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 안에서 악이 깊다고 해도 주님의 역사는 그보다 더 깊습니다. 인간의 유전적 악이 오래되었다 해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는 그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앞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연단이 가능합니다. 인간이 오직 악뿐이라면 싸움 자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악과 악 사이에는 영적 시험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것과 반대되는 악이 움직일 때 갈등이 생깁니다. ‘나는 화를 내고 싶지만 그러면 된다’, ‘보복하고 싶지만 용서해야 한다’, ‘거짓말하면 유리하지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고통스러운 갈등 자체가 이미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5강 1부의 ‘양심’, 2부의 ‘광야’, 3부의 ‘ 차례 연단’, 그리고 이번 4부의 ‘죄성’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진리가 양심에 들어옵니다. 그러자 그 진리와 반대되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통하여 광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싸움이 깊어질수록 더 깊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사람은 점점 ‘ 힘으로는 이것을 이길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참된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전적 부패’를 ‘나는 존재 자체가 오직 악이다’라는 선언으로 읽기보다, ‘나의 proprium에서는 참된 선이 나올 없으므로 모든 선을 주님에게서 받아야 한다’는 고백으로 읽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절망이 아니라 자기 의존의 종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의존이 끝나는 자리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제 5강은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깊은 죄성이 있다면 성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죄성은 실제로 뿌리째 없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사람이 바로 핵심진리가 말하는 ‘이기는 ’, ‘익은 열매’인가?’입니다. 5강 5부에서는 바로 이 지점을 따라가면서, 공용복 선생의 ‘죄성 제거와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악의 제거, 혹은 악에서의 분리와 거듭남’ 사이에 있는 매우 중요한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5강 5부

이기는 익은 열매’ : 성화의 완성은 죄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인가

5강은 이제 지금까지의 연단론을 하나의 분명한 목표점으로 모읍니다. 강사는 교회시대의 성도들에게 신앙의 목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상태가 아니라,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세 차례의 광야 연단을 통과하면서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고 마침내 ‘이기는 ’가 되는 것입니다. 강의에서는 이런 사람을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 곧 ‘생명수가 흐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성도라고 표현하고, 신앙의 목표를 ‘익은 열매가 되는 ’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한 웨슬리의 ‘완전 성화’, 존 번연의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 여러 성인들의 ‘신인 합일’ 등을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같은 영적 완성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묶습니다.

 

여기서 먼저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은 강사가 구원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믿었다’, ‘구원받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실제적인 성장이 있어야 하고, 죄와 싸우며 사랑과 성품이 변화되고, 결국 삶 전체가 주님의 뜻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기는 ’는 단지 어떤 교리적 자격을 획득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 영적 싸움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강사는 고린도전서의 경주 이미지를 가져와 구원받은 성도가 광야의 연단을 지나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면 ‘이기는 ’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강조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신앙을 단순한 지적 동의로 보지 않고, 진리가 삶이 되어야 하며 악과 거짓을 실제로 물리치는 거듭남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강의는 ‘이기는 ’를 상당히 완결된 상태로 말합니다. 세 차례 연단을 모두 통과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진 성도,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 ‘익은 열매’가 된 사람입니다. 이런 표현을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사람 안에서는 죄성 자체가 완전히 제거되어 이상 악의 뿌리가 남지 않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 사이에 섬세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분명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너를 의롭다고 간주한다’는 외적 선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이 실제로 새로워지고,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 역시 성화나 거듭남을 약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유전적 악과 proprium이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없어지는 ’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사람 안의 악은 주님의 역사로 억제되고 분리되며, 새로운 선의 질서가 중심을 차지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악의 ‘존재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그 사람의 자유롭고 기쁜 사랑의 중심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천사에게 적용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사는 선한 존재이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기 proprium만을 본다면 그 안에는 선이 없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완성은 ‘나는 이제 완전히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자기확신이 아니라 ‘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 안에서 살기를 사랑한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기는 ’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이겼는가’입니다. 단순히 욕망 몇 가지를 억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깊게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질서가 무너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김은 자기 의지력의 승리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바뀐 결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오히려 아주 좋은 비유가 됩니다. 열매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나무가 뿌리로부터 생명을 받아 충분한 시간 동안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거듭남도 한순간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 안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면서 이루어집니다. 익은 열매란 단순히 죄를 많이 안 짓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된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처음 익은 열매’뿐 아니라 ‘ 번째, 번째 익은 열매’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영적 성장이 단일한 한 시점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다른 과정과 시기가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구조로 보입니다. 다만 ‘ 열매’, ‘둘째 열매’, ‘셋째 열매’를 고정된 등급표처럼 이해하면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는 무수한 차이와 상태가 있지만 그것은 인간이 자기 영적 등급을 측정하고 자랑하기 위한 체계가 아닙니다. 각 사람은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진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서로 다른 완전성을 이룹니다.

 

특히 ‘이기는 ’라는 말에는 영적 자부심의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자신이 ‘이기는 ’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새로운 proprium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 ‘나는 번째 연단까지 통과했다’, ‘나는 익은 열매다’, ‘나는 성화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생기면, 자연적 명예욕이 종교적 명예욕으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영적 성숙의 중요한 표지를 오히려 자기 상태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데서 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변화를 전혀 알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용서하지 못했던 일을 이제는 조금 더 빨리 내려놓고, 예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흔들림이 줄고, 예전에는 자기 이익만 보았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선을 함께 생각합니다. 이런 변화는 실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완성되었다’는 자기 판정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의가 웨슬리의 ‘완전 성화’, 존 번연의 ‘전신갑주’, 가톨릭 영성의 ‘신인 합일’을 하나의 큰 그림 안에 배치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전통의 언어 속에서 하나의 공통된 실재를 찾으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곧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출발하여 실제로 변화되고, 더 깊은 내적 연합과 성숙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의 가장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보입니다. 교파별 용어를 그대로 절대화하기보다 그 배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성장’의 구조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태도에 상당한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외적 교파나 교리의 차이만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어떤 선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였는지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신학 전통 안에서도 실제 선을 사랑하고 주님을 향해 살았던 사람은 천국적 상태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다른 표현이지만 어떤 공통된 영적 성장의 실재를 가리킬 있다’는 강사의 직관은 꽤 넓고 포용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인 합일’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을 존재론적인 합일로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천사도 하나님이 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합(conjunction)은 있지만 동일화(identity)는 없습니다. 인간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 주님과 결합하지만, 그 결합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더 분명히 압니다. 따라서 ‘신인 합일’을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자유롭게 흐르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이 생명과 조화를 이루는 결합’으로 이해한다면 상당 부분 대화할 수 있지만, 인간의 존재가 신성과 하나의 본질이 된다는 뜻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점은 ‘내주합일’이라는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본질이 인간의 본질과 혼합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받는 그릇’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진리로 끊임없이 유입하시고,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 참된 인간이 되지만 주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다’고 말할 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표현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 안에 이제 신적인 생명이 본질적으로 자리 잡았으므로 나는 악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읽는 경우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 생명의 중심이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의가 말하는 ‘면류관’의 의미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가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면류관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외적 상급으로만 이해하면 ‘내가 열심히 노력했으니 하나님께서 대가로 상을 주신다’는 공로 사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상급은 선을 행하는 삶 자체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 선의 쓰임 안에서 이미 천국의 기쁨을 맛봅니다. 따라서 면류관은 인간의 공로에 대한 외적 보상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선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익은 열매’와도 잘 연결됩니다. 열매가 익었다고 해서 나무가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받아 맺은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을 행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지만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 생명을 막는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치며 주님의 인플럭스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강의에는 ‘성화는 살아 있을 이루어지는가, 죽은 이루어지는가’라는 문제도 등장합니다. 일부는 성화를 사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강사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성화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납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계의 삶은 사람의 근본적인 사랑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시기입니다. 사후에는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 사랑이 드러나고 확정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실제로 거듭나야 한다’는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에도 선한 영들이 가르침을 받고 외적인 거짓과 오류가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배적 사랑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새로운 회개의 인생이 사후에 다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에서 선을 사랑한 사람은 사후에 잘못 배운 교리를 벗고 더 참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상에서 악을 자기 생명으로 사랑한 사람이 단지 죽은 뒤 진리를 배워 천국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화의 근본적인 방향은 살아 있는 동안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기는 ’라는 말은 미래의 특별한 몇 사람을 가리키는 영적 계급 명칭으로 보기보다, 지금 삶 가운데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물리치고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모든 거듭남의 방향으로 읽는 편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 일찍, 어떤 사람은 더 늦게, 어떤 사람은 더 많은 시험을 거치지만, 핵심은 모두 같습니다. 자기 사랑이 중심에서 내려오고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완전’의 의미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 이상 성장할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서도 지혜와 사랑은 영원히 증대합니다. 피조물은 무한하신 주님을 영원히 더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적 완전은 정지된 완성이 아니라 계속 열려 있는 완전성입니다. 사람의 상태에 맞게 질서가 이루어졌지만 그 질서는 영원히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다시 매우 적절해집니다. 익은 열매는 생명이 끝난 열매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는 열매입니다. 그 안에는 씨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성숙은 종착점이 아니라 더 깊은 생명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큰 시험을 통과했다고 해서 더 이상 배울 것도 자랄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자유롭게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5강 5부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공용복 선생의 ‘이기는 ’ 개념에 덧붙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말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기는 자는 자기 힘으로 죄성을 완전히 소멸시킨 영적 강자가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의 선을 자기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보다 누가 이기게 하셨는지를 더 깊이 압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면 ‘익은 열매’, ‘완전 성화’, ‘전신갑주’, ‘신인 합일’, ‘이기는 ’라는 서로 다른 표현들을 무리 없이 한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모든 표현의 가장 깊은 핵심은 인간의 자기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의 실제 삶 안에서 열매 맺는 것입니다. 악을 하지 않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진리를 행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체어리티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가 ‘신앙의 목표는 익은 열매가 되는 ’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익음’을 자기 상태에 대한 최종 판정으로 사용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얼마나 실제 삶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 ‘익은 열매’는 영적 엘리트의 표지가 아니라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향하는 겸손한 목표가 됩니다.

 

이제 5강은 이 추상적인 ‘이기는 ’의 개념을 실제 인물들의 삶으로 옮겨 갑니다. 강사는 소화 데레사처럼 크고 위대한 일을 하기보다 작은 일에서 자기부인과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이기는 ’가 거대한 영적 업적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잘 감당한 사람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자료에서도 소화 데레사를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감당해서 익은 열매가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5강 6부에서는 바로 이 ‘작은 승리’와 ‘일상의 성화’를 중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5강 6부

작은 에서 이기는 사람 : 소화 데레사와 생활 자기부인

5강은 지금까지 상당히 높은 언어를 사용해 왔습니다. ‘이기는 ’, ‘익은 열매’, ‘완전 성화’, ‘ 차례 연단’,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남’ 같은 표현들입니다. 이런 말들을 계속 듣다 보면 독자는 자칫 영적 성숙을 아주 특별한 체험이나 극적인 희생, 혹은 소수의 사람만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경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강의는 여기서 방향을 아주 현실적인 자리로 돌립니다. ‘ 원수’보다 ‘작은 원수’, ‘ 승리’보다 ‘작은 승리’, ‘위대한 업적’보다 ‘작은 ’을 강조하면서 소화 데레사를 소개합니다. 강사는 생활 속에서 종종 ‘작은 원수들’이 생기며, 그때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같은 말씀을 붙들고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승리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것은 주어지지 않고 작은 것들이 주어진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 대목은 5강 전체의 무게중심을 아주 중요한 방향으로 돌려놓습니다. ‘이기는 ’가 누구인가를 말하면서 거대한 영적 전쟁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의 영적 상태는 대단한 집회나 특별한 체험보다 생활 속의 작은 자극 앞에서 더 잘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나를 무시하는 말 한마디, 내 뜻을 거스르는 작은 일, 피곤한데 누군가 부탁하는 상황, 별것 아닌 섭섭함,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의 반응 같은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사람 앞에 내놓을 만한 ‘영적 업적’도 없고, 누구에게 인정받을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 안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가 더 정직하게 드러납니다.

 

강사가 소화 데레사를 예로 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그녀를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성도가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감당해서 익은 열매가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소화’라는 말이 ‘작은 ’을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자신은 주님을 위해 큰 꽃처럼 화려하고 위대한 일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일들을 통하여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했다고 소개합니다. 강의가 소화 데레사의 전 생애와 신학을 학문적으로 다루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는 ‘작은 일의 충실함’이라는 영성의 한 특징을 예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한 접점을 갖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의 가장 내적인 의지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반드시 자연적 삶의 최종적인 행동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선이 생각 속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실제 행위가 되어야 하며, 진리도 단지 기억과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삶의 진짜 시험장은 결국 일상입니다. 교회 안에서 경건한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가 배우자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맡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작은 ’은 사실 영적으로 작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의 아주 작은 행위 안에 그 사람의 내적 사랑이 최종적으로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의 마지막 그릇입니다. 따라서 마음속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생각을 해도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그 안에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들어 있다면 그 행위는 단순히 작은 외적 행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강의에서는 아주 사소한 예까지 듭니다. 피곤해서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런 순간에도 자기부인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예를 문자적으로 ‘ 시에 일어났느냐’의 영성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훨씬 깊습니다. ‘내가 지금 원하는 ’과 ‘내가 해야 선한 쓰임’이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몸에 필요한 충분한 휴식은 선한 질서에 속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게으름 때문에 맡은 책임을 외면한다면 다른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부인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욕구가 높은 목적을 방해할 때 그것을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을 줄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몸을 돌보고 적절히 쉬며, 건강을 유지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삶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최종 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잠을 줄이고, 음식을 줄이고, 몸을 괴롭게 하는 것 자체가 영적 성장의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기기 위한 질서 안에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이 구별은 소화 데레사 같은 성인의 금욕적 실천을 읽을 때도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 시대와 수도원 전통 안에서 행한 구체적인 수행을 그대로 복제한다고 해서 같은 영적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강의에서도 ‘어떤 영성가는 끼만 먹었다고 하면 나도 먹어야지’ 하는 식으로 따라가는 예가 등장합니다. 이런 열심이 영적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강사는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외적 행위보다 그 행위의 목적과 사랑을 먼저 물어야 합니다. 같은 두 끼 식사라도 한 사람에게는 절제의 훈련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영성을 과시하는 proprium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 후반에는 이 ‘작은 승리’를 아주 직접적으로 풀어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왔을 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반갑게 대하는 것, 집에서 ‘원수 같은’ 사람에게 오히려 반찬을 더 정성스럽게 해 주는 것, 배우자가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했을 때 즉시 방어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 등을 ‘이기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표현은 매우 생활적이고 때로는 웃음을 섞지만, 강의의 핵심은 명확합니다. ‘이긴다’는 것은 큰 악령을 쫓아내거나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바로 눈앞에서 자기 사랑의 충동을 꺾고 사랑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체어리티는 막연한 따뜻한 감정이 아닙니다. 이웃의 실제 선을 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구체적인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호감이 있을 때 잘해 주는 것은 자연적 애정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의 선을 위해 공정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더 깊은 차원의 질서를 요구합니다. 바로 그때 ‘ 기분’보다 ‘무엇이 선한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무조건 잘해 주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는 악 자체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폭력이나 착취를 행하고 있다면 그 악을 멈추게 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과 피해자 모두에게 더 선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가야 합니다. 상대가 하는 모든 일을 참아 주는 것이 곧 사랑은 아닙니다. 때로는 분명하게 경계를 세우는 것이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선 강의에서 남편의 폭력 같은 사례가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중요합니다. 자기부인과 오래 참음을 강조하다 보면 피해자가 폭력을 계속 견뎌야 하는 것처럼 오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기 proprium의 보복심을 물리치는 것과 악한 행위를 방치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악은 악이라고 말할 수 있고, 용서하면서도 안전을 위해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사랑은 무질서한 순응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따른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원수에게 반찬을 맛있게 준다’는 강의의 재미있는 예도 그 행동 자체를 규칙으로 만들기보다 그 안의 영적 원리를 보아야 합니다. 핵심은 ‘ 사람이 싫으니 나도 일부러 못되게 해야지’ 하는 보복의 proprium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적 반감이 올라와도 그 반감이 행동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선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작은 자기부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5강 3부에서 말했던 ‘ 번째 연단’의 깊이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큰 악을 버리는 것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들어가면 훨씬 미세한 proprium이 드러납니다. 표정 하나, 말투 하나, 상대를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 내가 옳다는 것을 꼭 확인받으려는 마음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회적 법으로는 거의 문제 되지 않지만 영적 삶에서는 사랑의 질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작은 ’을 잘 감당한다는 것은 도덕적 완벽주의에 빠져 모든 표정과 감정을 감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방향이 점점 자연적 삶의 작은 부분까지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큰 원칙에서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작은 순간에도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 한마디를 해야 하는가?’, ‘내가 지금 상대를 살리려는가 아니면 이기려는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지금 정말 필요한가?’라고 잠깐 멈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쓰임’이라는 개념은 아주 풍성한 보완을 줍니다. 영적 삶의 중심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악을 발견하고 피한 뒤에는 실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남편에게 화를 안 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 관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사람을 욕하지 않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범위에서 그 사람의 실제 선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을 이기는 것도 ‘나는 나를 이겼다’는 성취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맡겨진 일을 유용하게 행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차이는 영적 삶을 자기수련 중심에서 사랑 중심으로 옮겨 놓습니다. ‘나는 오늘 자기를 부인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부인조차 자기 영적 성취의 목록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주변 사람에게 어떤 선이 실제로 이루어졌는가?’입니다. 자기부인은 그 선을 방해하는 자기 사랑을 비켜 세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화 데레사의 ‘작은 ’이라는 이미지는 아름답게 읽을 수 있습니다. 꽃은 자기가 얼마나 큰지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피어납니다. 주님 앞에서 영적 가치는 세상에서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설교자와 이름 없는 성도, 큰 기관의 책임자와 가정에서 조용히 가족을 돌보는 사람의 외적 규모는 전혀 다르지만, 주님은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과 목적을 보십니다.

 

이것은 천국의 쓰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과도 잘 연결됩니다. 천국은 모두가 같은 일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각 사람은 자기 사랑과 지혜에 맞는 서로 다른 쓰임을 수행합니다. 어떤 쓰임도 전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겉으로 작아 보이는 쓰임이라고 해서 천국에서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그 쓰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에 충실하라’는 말은 ‘작은 사람으로 만족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큰 책임을 맡기시면 그것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다만 큰 책임을 맡았다고 더 천국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책임이 클수록 자기 명예와 지배욕이 섞일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래서 큰 쓰임일수록 더 깊은 자기부인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목회와 사역에도 매우 직접적인 적용이 있습니다. 수천 명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일이 어떤 순간에는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큰 행사에서 사랑을 외치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짜증을 내지 않는 것이 더 실제적인 시험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축복기도를 하면서도 자기와 의견이 다른 한 사람을 속으로 멸시한다면 아직 사랑이 자연적 삶의 작은 곳까지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이 ‘작은 승리’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닌 이유입니다.

 

또한 강사는 ‘작은 정도는 우리가 기도하면서 신경 쓰면 있다’는 취지로 격려합니다. 여기에도 좋은 목회적 감각이 있습니다. 거듭남을 너무 거대한 목표로만 제시하면 사람은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칠 수 있습니다. ‘완전 성화해야 한다’,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너무 크게 들릴 때, 오늘 내 앞에 있는 작은 하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한 번 말을 참는 것, 한 번 먼저 사과하는 것, 한 번 정직하게 말하는 것, 한 번 남의 공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그 작은 선을 행할 때도 ‘ 힘으로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분노를 참았지만 그 힘은 주님에게서 왔고, 내가 친절을 선택했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인정할수록 작은 승리가 proprium의 먹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것도 이기는 사람이다’가 아니라 ‘이번에도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일에 또 화를 냈다고 해서 ‘나는 거듭남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가 보다’라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를 보고 변명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에게 돌아오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작은 원수’라는 강사의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영적 의미에서 그 작은 원수는 외부의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내 안의 반응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한마디 했는데 내 안에서 하루 종일 분노가 계속된다면, 문제의 중심은 그 한마디만이 아닙니다. 인정받고 싶은 사랑, 무시당하기 싫은 proprium, 내가 옳아야 한다는 고집이 함께 움직였을 수 있습니다. 외부의 ‘작은 원수’가 내 안의 더 깊은 원수를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역시 상대방에게 억지로 좋은 감정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감정은 즉시 명령으로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과 별개로 악한 행동을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실제 선을 해치지 않으며, 가능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내 안의 미움과 보복심을 점차 질서 있게 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먼저 의지와 행동에서 시작되어 나중에는 애정 자체까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앞서갑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성내지 말아야 한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그것 때문에 행동을 조절합니다. 아직 마음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주님을 의지하여 진리에 따라 행하면, 어느 순간 선을 행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새로운 애정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억압과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소화 데레사의 ‘작은 ’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작은 고행들의 수집이라기보다 ‘진리가 자연적 삶의 아주 작은 곳까지 선으로 내려오는 ’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식탁에서의 말 한마디, 싫은 사람을 마주쳤을 때의 태도, 누군가의 결점을 보았을 때의 반응 같은 곳까지 주님의 질서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천국은 거대한 관념 속에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자연적 선택들 속에서 인간의 생명에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번 강의를 보면서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핵심진리’의 높은 단계론이 여기서는 갑자기 매우 낮고 평범한 자리로 내려옵니다. ‘익은 열매’가 되려면 엄청난 환상을 보아야 한다거나 거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작은 일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 중요한 중심을 계속 붙들게 합니다. 작은 자기부인의 목적도 결국 자기부인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사랑과 쓰임입니다. 내가 참았다는 사실보다 그 참음으로 상대에게 선이 이루어졌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희생했다는 사실보다 그 희생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부인이 사랑을 위한 길이 아니라 자기 영성을 증명하는 목표가 되는 순간 다시 proprium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5강 6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반드시 전쟁에서 이름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순간마다 자기 사랑보다 선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 작은 승리의 생명조차 자기에게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승리가 이웃을 향한 실제 쓰임으로 이어질 작은 행위 안에 천국의 질서가 자리 잡습니다.’

 

이제 강의는 이러한 ‘작은 승리’에서 다시 더 깊은 자기부인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특히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과 고집,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다르게 대하려는 마음, 그리고 ‘자아가 많이 깨어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원고에서도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더 잘해 주고 자신을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덜해 주고 싶은 마음을 ‘자기’의 문제로 직접 지적합니다. 5강 7부에서는 바로 이 ‘자아가 깨어진다’는 표현과 proprium의 관계를 중심으로 충분히 이어가겠습니다.




5강 7부

자아가 깨어진다 : 남을 보는 사람에서 자기를 보는 사람으로

5강 6부에서는 소화 데레사를 통하여 ‘작은 일에서 이기는 ’을 살펴보았습니다. 큰 순교나 특별한 영적 사건이 아니라,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고, 배우자의 기분 나쁜 말을 보복으로 되갚지 않으며, 일상의 아주 작은 순간마다 자기 유익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영성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강의는 그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자아가 많이 깨어진 사람’과 ‘자아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강사가 여기서 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누구를 먼저 보는가?’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상대를 먼저 보고,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예로 듭니다. 대체로 목회자에게 잘 순종하는 성도도 있지만, 무엇을 하자고 해도 늘 반대하고 ‘들이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성도의 가정에 어려움이 생겨 도움이 필요해졌다고 해 보자는 것입니다. ‘자아가 많이 깨어진 목회자’라면 과거에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주셨구나’ 하고 도울 수 있지만, 자아가 많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마음과 행동 어딘가에 차별이 드러난다고 강사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목회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돌립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잘해 주고 싶고, 나를 들이받는 사람에게는 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있으며, 바로 그것이 ‘자아’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proprium과 상당히 가까운 곳을 건드립니다. 다만 앞서 여러 번 구별했듯 강의가 사용하는 ‘자아’와 스베덴보리의 proprium을 완전히 동일한 용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한 사람을 사랑하고, 나를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선을 베풀고 싶어 하는 마음’, ‘상대의 태도에 따라 사랑의 양이 달라지는 상태’는 자기 사랑의 질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proprium과 매우 밀접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에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닫힙니다. 나를 인정해 주면 더 도와주고 싶고, 나에게 상처를 주면 ‘ 내가 사람까지 도와야 하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적 공정성으로만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상대가 내게 얼마나 유익한가를 기준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 사람이 나에게 어떤 사람인가?’보다 ‘지금 무엇이 선한가?’를 더 중요하게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누가 나에게 아무리 악을 행해도 무조건 똑같이 대해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의 악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거리를 두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책임을 물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단호하게 제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의 내적 목적이 ‘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이 실제 선인가’여야 합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분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보복과 자기 유익이 판단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강의는 이어 더 아픈 예를 듭니다. 오랫동안 정성껏 돌보아 주고 신앙생활을 도왔던 성도에게 목회자가 ‘배신’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은 당연하지만, 강사는 그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내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해서 그랬나 보다’라고 자기 쪽을 먼저 돌아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강합니다. 왜냐하면 사건의 원인을 모두 자기 잘못으로 돌리라는 뜻으로 읽으면 위험하지만, ‘상대가 잘못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일을 통해 드러난 안의 의존과 기대도 있다’는 뜻으로 읽으면 상당히 깊은 자기 성찰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꼭 구별해야겠습니다. 상대방의 배신은 상대방의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의까지 ‘ 자아 때문이었다’고 떠안는 것은 건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특히 폭력이나 착취, 학대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자기 성찰은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자기비난이 아닙니다. ‘ 사람의 악은 사람의 책임이지만, 사건을 통하여 안에서는 무엇이 드러났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과도한 사람 의존, 인정 욕구, 보답에 대한 기대, 자기 판단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악과 나의 proprium을 동시에 구별하여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강의의 또 하나 인상적인 문장은 ‘자아가 깨진 사람일수록 자기를 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설교 시간에 조는 성도를 예로 듭니다. 자아가 강한 목회자는 ‘어떻게 설교 시간에 저렇게 자는가’ 하고 성도를 탓할 수 있지만, 자아가 깨어진 목회자는 ‘ 설교가 부족해서 조는가 보다’ 하고 먼저 자기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반대로 성도 역시 ‘목사님 설교가 형편없다’고 먼저 판단하기보다 ‘내가 기도가 부족한가?’라고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문자적인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설교가 매우 부실할 수도 있고, 성도가 전날 밤새 일했기 때문에 졸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건의 원인을 무조건 자기에게 돌리는 것은 진리의 판단이 아닙니다. 그러나 강사가 말하는 영적 태도의 핵심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자기 결백을 확보하고 상대방의 잘못부터 찾습니다. ‘나는 맞고 사람이 문제다’라는 방향입니다. 그런데 자아가 깨어질수록 그 자동적인 방향이 조금씩 바뀌어 ‘혹시 내가 것은 없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아주 깊게 만납니다. 회개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는 진리에서 시작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 말씀은 우리 장로님이 들어야 하는데’, ‘ 목사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 배우자가 말씀대로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먼저 나를 비추어야 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세상의 잘못된 교회를 찾기 전에 내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있는지를 보고, 바리새인을 읽으며 다른 사람의 위선을 판단하기 전에 내 안의 자기 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자기 성찰이 지나치면 모든 상황에서 ‘ 탓인가?’만 반복하며 신경증적인 자기분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회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분석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악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피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고 난 다음에는 다시 주님과 이웃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자기성찰은 목적이 아니라 거듭남을 위한 수단입니다.

 

강의의 앞부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원리가 이미 나왔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쫓기는 큰 어려움을 겪은 뒤에는 어떤 일이 생기면 ‘누구 때문’이라고 남을 탓하기보다 ‘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하며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혈기와 아집과 고집이 강하고 자기반성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일수록 연단의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이번 7부의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를 본다’는 주제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5강의 성장론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기준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속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의 proprium은 언제나 외부를 향합니다. ‘ 사람이 나를 이렇게 했다’,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내가 화를 것은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물론 외적 원인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그 외적 원인을 부정하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다.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다. 그런데 일이 안에서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켰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이 두 번째 질문이 속사람을 향한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했습니다. 상대방이 무례했던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다면 그 사건은 내 안의 다른 것을 보여 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존중받아야 한다’, ‘ 판단은 인정받아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가볍게 보면 된다’는 사랑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랑 자체를 보는 순간 외부 사건이 영적 거울이 됩니다. 그때 상대방은 더 이상 나의 거듭남을 방해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안의 무언가를 드러내 준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상대방의 악을 정당화하면 안 됩니다. ‘ 사람이 나를 모욕한 덕분에 내가 거듭났으니 모욕은 선한 일이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은 여전히 악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선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결과를 선을 위해 돌리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강의가 모든 생활 환경이 연단과 성장에 사용될 수 있다고 보는 장점은 살리되, ‘그러니 악한 일이 일어난 것도 하나님이 직접 시키신 것이다’라는 식으로 가면 섭리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섭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악을 원하시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그것을 허용하실 수 있으며, 허용된 악 속에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이끌어 내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를 배신한 사건에서 ‘주님께서 사람에게 나를 배신하라고 시키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벌어진 그 사건을 사용하여 내 안의 사람 의존이나 명예욕, 보복심을 보게 하시고 거기서 나를 이끌어 내실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을 하면 ‘모든 것이 연단이다’라는 강의의 언어도 훨씬 안전하고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자아’의 정체를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는 마음과 행실, 곧 ‘옛사람’과 연결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청년의 단계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본격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며,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을 하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심리 현상이라기보다 말과 태도와 반응이 실제로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는 것은 반드시 외적 삶에서 나타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조건 말하지 않아도 되고,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즉시 공격하지 않으며, 상대가 나를 칭찬하지 않아도 선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중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자유로워집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덜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표현 자체도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들으면 인간의 자아 자체를 부수어 없애야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께서 없애시는 것은 인간의 인격이나 자유로운 개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날수록 사람은 더 참된 개인이 됩니다. 사라져야 하는 것은 ‘나에게서 생명이 나오고, 내가 선의 근원이며,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는 타락한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무색무취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사랑의 종류도 다르고, 지혜의 형태도 다르고, 맡은 쓰임도 다릅니다.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할수록 오히려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성이 더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말을 ‘개성이 없어진다’, ‘자기 의견이 없어야 한다’,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번 강의가 목회자에 대한 순종을 예로 들기 때문에 이 구별은 더욱 중요합니다. 목회자에게 잘 순종하는 것이 곧 자아가 깨진 증거도 아니고, 목회자의 의견에 이견을 제시한다고 자아가 강한 것도 아닙니다. 목회자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양심과 진리에 따라 정중하게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동의했느냐 반대했느냐’가 아니라 그 동기를 보는 것입니다. 자기 고집 때문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과 진리를 위해 양심적으로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다릅니다. 반대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무조건 순종하는 것 역시 참된 자기부인은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유와 이성이 거듭남의 필수 조건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강제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여 자기 생명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은 사람의 자유를 대신하여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유롭게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관점이 들어가면 강의가 말하는 ‘순종’도 사람에 대한 맹목적 복종보다는 주님의 진리 앞에서 자기 고집을 내려놓는 것으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귀한 것은 강사가 이 자아의 문제를 목회자에게 먼저 적용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성도를 나중에 차별하지 않는가, 설교 중 조는 성도를 보면서 즉시 그 사람을 탓하지 않는가, 자신이 돌보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미움으로 반응하지 않는가를 묻습니다. ‘자아가 깨어져야 한다’는 말을 성도 통제의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고 목회자 자신의 내면에 적용한다는 점은 분명히 살려서 읽을 만합니다.

 

이것은 앞서 공용복 선생의 제자들에게서 느끼셨다는 ‘핵심진리에 자기 개인의 것을 함부로 섞지 않으려 하는 태도’와도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받은 것을 지키려고 하는 태도가 실제 자기부인과 연결될 때에는 귀한 덕목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전승에 대한 충실함 역시 스스로 진리를 살피는 자유와 분별을 막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7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아가 깨어진 사람일수록 자기를 본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일 것입니다. 이것을 ‘무슨 일이 생겨도 잘못이라고 하라’고 이해하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기에 앞서, 사건을 통해 드러난 안의 악과 거짓을 먼저 살펴라’라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매우 깊이 만납니다. 남의 티보다 자기 들보를 먼저 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가지를 추가합니다. 자기 들보를 본 뒤에는 그것을 붙들고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내가 역시 형편없는 사람이구나’가 회개의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이것이 있음을 봅니다. 이것을 죄로 여기고 피하고 싶습니다. 제게 힘을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실제 삶에서 다르게 행동해 보는 것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해도 맡은 선을 계속하고, 잘못을 지적받으면 한 번쯤 변명하지 않고 들어보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작은 행동들 속에서 proprium의 지배가 실제로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자기를 멸시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삶의 중심으로 삼지 않는 상태라고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나를 칭찬하느냐 비난하느냐, 나에게 유익하냐 손해냐가 선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웃에게 실제로 선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5강 전체의 ‘성화’가 다시 생활 속으로 내려옵니다. 성화는 어떤 특별한 체험 뒤에 ‘나는 이제 성화되었다’고 선언하는 상태보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 유익이 아니라 선을 선택하는 데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익은 열매’라는 거대한 표현이 결국 ‘내게 잘해 주지 않은 사람에게도 필요한 선을 베풀 있는가?’라는 아주 작은 질문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강의에서 매우 귀한 긴장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5강 7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진 사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악을 보면서도 사건을 통해 드러난 자기 안의 자기 사랑을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인다면, ‘ 사람은 자기 잘못을 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실제로 다른 행동을 선택합니다.’

 

이제 강의는 이 ‘자아가 깨어짐’을 더욱 적극적인 사랑의 상태로 연결하면서, 단순히 상대에게 보복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를 묻고, 성화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보는 ‘아가페 사랑’과 실제 인물들의 사례로 옮겨 갑니다. 원고에서도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무시하는 사람과도 화평함을 누리는 ’, 그리고 성화된 성도의 목표가 단순한 건강과 물질의 복이 아니라 그런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는 데 있다는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5강 8부에서는 바로 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과 ‘아가페’, 그리고 그것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및 천적 사랑과 어떻게 구별하여 볼 것인지를 중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5강 8부

원수를 사랑한다 : 아가페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성화의 실제 모습

5강은 이제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을 더욱 적극적인 사랑의 문제로 가져갑니다. 앞에서는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을 먼저 탓하기보다 자기 안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자기 유익을 기준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사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무시하는 사람과도 화평할 있는가’, 더 나아가 그런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강의가 성화의 실제 모습을 매우 높은 신비 체험이나 특별한 은사보다 ‘원수를 사랑할 있는 상태’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앞에서 말한 ‘이기는 ’, ‘익은 열매’, ‘자아가 깨어짐’이 결국 사랑이라는 한 지점으로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5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 차례 연단’과 ‘이기는 ’를 단순히 강한 영적 전사가 되는 과정으로 읽었다면, 여기서 그 의미가 수정됩니다. 무엇을 이긴다는 것입니까? 결국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사랑을 가로막는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혈기와 아집과 고집, 보복심과 자기 의, 인정받으려는 욕망,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고 싶은 자연적 애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의가 말하는 성화의 목표는 ‘나는 죄가 없다’고 선언할 수 있는 상태보다, 자기를 거스르는 사람 앞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 상태 쪽으로 이동합니다. 이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체어리티(charity)를 생각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그 진리가 사람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이 되고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은 이웃을 향한 실제적인 사랑과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매우 깊은 교리를 알고 특별한 영적 체험을 했다고 해도, 가까운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자기에게 손해를 준 사람에게 보복하려 한다면 그 지식과 체험만으로 그의 영적 상태를 높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사랑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시험하는 매우 깊은 말씀이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적인 애정으로도 가능합니다. 나를 인정해 주고 도와주며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갖는 데 반드시 거듭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않는 사람, 심지어 나를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 앞에서조차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랑의 근거가 ‘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에서 ‘무엇이 주님 앞에서 선한가’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이것을 ‘아가페 사랑’이라는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호감이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사랑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아가페’라는 단어 자체에 어떤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다고 보기보다, 그 사랑의 실제 질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 역시 단순한 감정적 호감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본질은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며, 더 깊게는 이웃 안에 있는 주님의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감정의 따뜻함보다 훨씬 깊고 질서 있는 사랑입니다.

 

이 때문에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도 원수에게 반드시 따뜻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떠올렸는데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불편하다고 해서 곧 ‘나는 원수를 사랑하지 못했으므로 거듭나지 않았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정은 기억과 자연적 마음의 상태에 따라 상당 기간 남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이유로 상대에게 악을 행하려 하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보복을 내려놓고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하려 하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심하게 모욕했습니다. 그 일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 사람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님 앞에서 거절하고,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자기 악에서 돌이켜 선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이미 사랑의 방향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를 좋아한다는 것과 다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의 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악에서 벗어나 선 가운데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원수의 악을 용납하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사랑은 악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계속 거짓말하고 사람을 해치고 있다면 그의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의 모든 잘못을 ‘사랑하니까’ 허용한다면 결국 자녀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시 범죄를 방치하는 것이 범죄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제지하고 책임을 묻는 일이 그 사람과 공동체의 선을 위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체어리티는 무분별한 친절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된 사랑입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사랑도 아닙니다. 선한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방식과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의 악을 돕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랑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 안의 악까지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의가 말하는 ‘원수와도 화평한다’는 것도 더욱 정교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평은 반드시 관계를 이전 상태로 복구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신뢰가 깨졌다면 신뢰를 다시 쌓는 데 시간이 필요할 수 있고, 어떤 관계는 안전을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는 할 수 있지만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 상대를 파괴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주님의 질서에 맡길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화평의 중요한 형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앞부분의 가르침과 ‘원수를 사랑한다’는 이번 부분이 연결됩니다. proprium은 상처를 받으면 즉시 자기 정당화를 시작합니다.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있나’, ‘반드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처받았다는 사실 자체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상처는 실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은 그 상처를 붙잡아 자기 의와 보복심을 키우는 재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상처받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받았을 때 그 상처를 무엇으로 만드는가입니다. 자기 의를 강화하는 재료로 만드는가, 아니면 주님께 가져가 자기 안에 일어나는 미움과 보복심을 보게 되는 계기로 삼는가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바로 이 깊은 곳까지 내려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기비난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에게 실제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직 그 사람을 생각하면 두렵고 괴로운데 ‘나는 사랑이 없어서 이렇다’고 자신을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처의 회복과 영적 용서는 서로 관련되지만 반드시 같은 속도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듯, 거듭남의 과정도 사람의 상태를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집니다. 억지로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 거듭남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시작도 중요합니다. ‘ 사람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올라왔을 때 그것을 붙잡지 않는 것,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험담하여 무너뜨리고 싶은 욕망을 거절하는 것, 그 사람에게 실제 선한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일부러 마음속에서 저주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5강 6부에서 살펴본 ‘작은 일에서 이기는 ’의 연장선입니다.

 

그렇게 보면 ‘원수 사랑’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영웅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작은 자기부인이 오랫동안 축적되면서 사랑의 질서가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한 번 보복하지 않고, 내일 한 번 험담하지 않고, 다음에는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조금이나마 바랄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필요할 때 선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진리가 먼저 행동을 이끌다가 점차 새로운 애정이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것을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성에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를 제어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직 마음에서는 미워하면서도 악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주님을 의지하여 진리에 따라 살면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그러면 이전에는 억지로 하던 선을 나중에는 사랑해서 하게 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단지 화를 억누르는 것과 화를 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화를 내면 된다’는 진리 때문에 입을 다물지만, 거듭남이 깊어지면 상대를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 자체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에 용서하려 하지만, 나중에는 상대가 악에서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강의가 말하는 ‘성화된 사람’의 모습과 상당히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는 상당히 가까운 접점이 있습니다. 성화를 단순히 ‘죄성이 제거된 상태’라는 형이상학적 설명보다,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도 선을 원할 있는 사랑이 형성된 상태’라는 실제 삶의 모습으로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훨씬 가까워집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여기에도 끝은 없습니다. 오늘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제 나는 완전 성화되었다’고 판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 안에는 훨씬 더 깊은 자기 사랑의 층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깊어질수록 자신에게 있는 사랑이 얼마나 주님에게서 오는지를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는 ‘나는 사랑이 많은 존재다’라고 자기 사랑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압니다.

 

여기서 강의가 말하는 ‘아가페’와 스베덴보리의 천적 사랑을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적(celestial) 사랑은 단순히 인간적 사랑보다 더 강한 사랑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 사랑이 의지 자체의 중심이 되어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인 상태와 관련됩니다. 영적(spiritual) 인간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반면, 천적 인간은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에 있습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했으니 천적 인간이다’라고 단순히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의가 ‘사랑’을 신앙의 최고 열매로 놓는 방향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정교해도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생명이 없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삶 속에서 체어리티가 될 때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바로 창세기 4장에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깊은 주제와도 연결되는 대목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신앙이 아벨을 죽일 때, 곧 교리가 사랑을 밀어낼 때 교회는 내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문제는 단순히 높은 윤리적 명령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정통 교리를 지킨다고 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증오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안다고 하면서 나를 비판한 사람을 평생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분리입니다. 바로 그 분리를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다시 결합시키십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다른 종교나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와 교리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 안의 선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어떤 종교적 명칭 아래 있었느냐보다 그가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으며 선을 사랑했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물론 거짓은 진리가 아니므로 사후에는 바로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사랑한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으면서 악을 사랑한 사람은 그 지식 자체로 천국적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됩니다. 상대의 오류를 오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그의 멸망을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말하는 목적도 상대를 이기는 데 있지 않고 그 사람의 선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무기로 사용하면 진리 자체는 옳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랑은 지옥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특히 무거운 문제입니다. 설교에서 잘못된 교리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 속에 ‘나는 사람보다 옳다’는 기쁨이 들어 있다면 proprium이 진리를 이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도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진리와 사랑은 함께 가야 합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상처를 주는 칼이 되고, 진리 없는 사랑은 악을 방치하는 감상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결합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실제 생활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와 ‘ 그것을 말하는가’가 결합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필요한 진리를 말하되 그 사람을 낮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선을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사랑이고, 때로는 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자기 감정이 아니라 쓰임과 선입니다.

 

이 관점에서 ‘원수와 화평한다’는 말도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갈등하면서도 내적으로 상대의 선을 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불의를 막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으면서도 그 사람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 오류를 강하게 반박하면서도 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와 체어리티가 함께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기는 ’의 의미가 다시 달라집니다. 이기는 자는 모든 논쟁에서 상대를 굴복시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하면서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멸시를 이기는 사람입니다. 원수를 없애는 사람이 아니라 원수를 대하면서 자기 안의 미움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폭로하는 데 능한 사람이 아니라 그 잘못을 보면서도 자신의 proprium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5강 앞부분에서 강사가 ‘원수는 다른 있는 아니라 바로 안에 있는 자기가 원수’라고 했던 말이 여기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외부의 원수가 사라져도 proprium이 그대로라면 다른 사람이 다시 원수가 됩니다. 오늘 이 사람과 화해해도 자기 사랑이 그대로라면 내일 다른 사람이 나를 건드렸을 때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다루시는 것은 외부의 모든 사람을 내 마음에 맞게 바꾸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대하는 내 사랑의 질서를 바꾸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정만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악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상처를 전혀 받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분명히 보면서도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진리를 붙들면서도 상대를 멸시하지 않으며, 필요하면 거리를 두면서도 그의 파멸을 기뻐하지 않고, 가능한 한 그 사람이 선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체어리티의 훨씬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억지로 ‘나는 원수를 사랑해야 ’라고 자기 감정을 조작해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그 사랑을 막는 자기 사랑과 보복심을 죄로 여기고 피할 때 조금씩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도 결국 은혜이며 동시에 거듭남의 싸움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 말하는 ‘성화’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드러납니다. 성화를 ‘ 안의 죄성이 100% 제거되었다’는 자기 상태에 대한 선언보다, ‘전에는 미워할 수밖에 없던 사람에게 이제 선을 원할 있게 되었다’는 사랑의 변화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실제이고, 삶에서 확인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기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를 인정하게 하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5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도, 상처를 받지 않는 것도, 모든 관계를 이전처럼 회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분별하면서도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하고, 자기 안의 미움과 보복심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며, 가능한 자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랑이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입니다.

 

이제 5강은 이러한 성화와 사랑을 실제 인물들의 삶에 더욱 구체적으로 비추기 시작합니다. 특히 강의 후반의 중요한 축인 이용도 목사의 삶과 영적 체험이 점차 전면에 등장하며, 그의 1929년 체험을 ‘ 번째 연단’의 승리와 ‘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핵심진리’의 틀 안에서 해석합니다. 5강 9부에서는 이 부분을 서둘러 스베덴보리와 동일시하지 않고, 먼저 강의가 이용도 목사의 체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충분히 따라간 뒤 ‘내주합일’, ‘그리스도의 생명’, ‘성화’를 스베덴보리의 ‘결합(conjunction)’ 및 주님의 인플럭스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5강 9부

이용도 목사의생명내주합일’ : 그리스도가 안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5강은 이제 후반부의 중요한 인물인 이용도 목사에게로 들어갑니다. 앞에서 강사는 ‘말씀의 실천-연단-양심의 밝아짐-세 차례 연단-자아의 깨어짐-이기는 자-익은 열매-원수 사랑’이라는 긴 흐름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이용도 목사의 삶과 체험을 이 전체 구조의 실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특히 그의 1929년 무렵의 깊은 영적 체험을 세 번째 연단을 통과한 사건으로 보고, 그 이후 나타난 그의 삶과 메시지를 ‘그리스도의 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언어로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강의의 관심은 단순히 이용도 목사가 얼마나 유명한 부흥사였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깊은 연단을 통과한 뒤 ‘내가 사는 ’에서 ‘그리스도가 안에서 사시는 ’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먼저 강의가 말하는 ‘생명’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생명은 단순히 사람이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생명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신학적 명제를 알고 있다는 지적 신앙도 아닙니다. 강사가 이용도 목사를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결국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제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내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에서 멈추지 않고, 그분의 사랑과 성품이 사람 안에 실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주’라는 말과 ‘합일’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문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리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져 그의 생명이 되는 데 있습니다. 진리가 기억에만 있으면 아직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해성으로 들어오고, 의지와 결합하고, 마침내 행동과 쓰임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때 사람은 진리를 ‘아는’ 사람에서 진리를 ‘사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의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사이에는 분명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주합일’이라는 표현에 들어가면 반드시 하나를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과 주님의 결합이 ‘ 존재가 하나의 존재로 섞이는 ’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결합(conjunction)이 있지만 존재의 혼합이나 동일화는 없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며 주님은 영원히 창조주이십니다. 가장 높은 천국의 천사라 해도 신성 그 자체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할수록 자기에게 있는 선과 진리와 생명이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압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안에 사신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 존재가 그리스도의 존재와 섞여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이해성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점점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결과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주님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결합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할수록 인간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온전해집니다. 이것은 5강 7부에서 살펴본 ‘자아가 깨어진다’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인격을 부수어 무색무취한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인격 자체가 아니라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믿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타락한 proprium의 지배입니다. 그것이 약해질수록 주님께서 창조하신 그 사람의 고유한 인격과 쓰임은 오히려 더 자유롭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천국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과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무수한 천사들이 모두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각각의 사랑과 지혜와 쓰임이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양성이 분열을 만들지 않는 것은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하나의 생명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고유한 쓰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는 상당히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과 그 교리가 실제 생명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는 사랑이시다’라고 정확하게 고백하면서 사람을 미워할 수 있고, ‘십자가’를 설교하면서 자기 명예를 위해 살 수도 있으며, ‘성령’을 말하면서 자기 뜻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위는 결국 생명에서 드러납니다. 무엇을 고백하는가뿐 아니라 그 고백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그토록 심각하게 보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신앙의 진리는 선을 향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삶이 될 때 비로소 사람 안에 영적인 것이 형성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표현을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의 삶으로 변화되는 ’이라고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과 상당히 가까운 지점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을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안에서 하시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수동적인 도구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거듭날수록 사람은 더욱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악의 욕망에 끌려다니는 것은 참된 자유가 아닙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반드시 폭발해야 하고, 탐욕이 생기면 반드시 따라가야 하며, 인정받지 못하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겉으로 자유로워 보여도 실제로는 자기 욕망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나는 화가 나지만 화를 따라가지 않을 있다’, ‘나는 손해를 보지만 정직을 선택할 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악으로 갚지 않을 있다’는 새로운 자유가 생깁니다.

 

그 자유 속에서 주님의 생명이 사람의 생명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표현을 정확히 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이전되어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 교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비유하자면 눈은 빛을 받아 봅니다. 눈 안에 태양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 사랑하고 생각합니다. 거듭남은 그 유입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이 제거되고 그릇이 질서 있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질수록 주님의 생명이 더 자유롭게 나타납니다.

 

이렇게 보면 ‘내주합일’이라는 강한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더 안전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신성과 인간 본질의 합일’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사이의 결합’입니다. 주님은 주님으로 계시고 인간은 인간으로 있으면서,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더욱 충만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은 추상적인 신비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체험을 평가할 때도 체험 자체보다 그 이후의 열매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강렬한 신비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환상을 보았거나 음성을 들었거나 극심한 영적 황홀경을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는 영적 진위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와 인간의 교통 가능성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분별한 영적 체험을 더욱 조심스럽게 다루게 합니다.

 

영적 체험의 진위를 살피는 중요한 기준은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가입니다. 그 체험 이후 사람이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가, 아니면 더욱 겸손해지는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는가, 아니면 섬기는가? 자기에게 주어진 특별한 계시를 자랑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과 선한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원수를 더 미워하게 되는가, 아니면 사랑하려 하는가? 체험이 proprium을 강화하는가, 아니면 그 지배를 약하게 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 기준은 지금까지 5강이 말해 온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 번째 연단을 통과했다’는 증거가 어떤 초자연적 현상 그 자체라면 5강 앞부분의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의는 계속해서 ‘자기를 본다’, ‘자아가 깨어진다’, ‘작은 일에서 이긴다’, ‘원수를 사랑한다’를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용도 목사의 체험 역시 그 체험 자체보다 그것이 그의 사랑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다고 강의가 보는지를 중심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용도 목사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강조가 의미를 갖습니다. 신앙의 중심이 ‘그리스도에 관한 ’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으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착하게 살아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면 그 생명이 반드시 사랑과 선한 행위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선행은 구원의 값을 지불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선행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졌다는 외적 열매입니다. 따라서 ‘행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행위로 구원을 산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사랑이 있으면 행위가 나옵니다. 살아 있는 신앙이면 체어리티가 나타납니다. 열매가 나무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와 오늘날의 ‘십자가 복음’을 이해할 때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십자가는 물론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단지 ‘예수께서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으므로 나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하나의 법정적 공식으로만 축소하면, 그리스도인의 실제 거듭남과 삶이 주변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형벌을 대신 받아 아버지의 진노를 만족시키신 사건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지옥 전체와 마지막까지 싸우시고 이기시며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영화하신 최후의 시험입니다. 그리고 그 승리 때문에 인간은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거듭남은 서로 경쟁하는 두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싸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인성을 영화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구원 사역에 무엇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이 실제 한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과 삶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를 읽으면 상당히 풍성해집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 예수의 생명이 지금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 사랑이 내 원수 관계에서 무엇을 바꾸었는가, 십자가를 믿는다면 자기부인이 내 일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부활을 믿는다면 옛사람과 다른 어떤 새로운 생명이 실제로 자라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나치게 주관적인 내적 체험으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느낀다’는 확신 자체가 객관적 기준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언제나 진리와 선이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진리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강렬한 사랑과 일치감을 느껴도 그것이 말씀의 선과 진리에 반하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며 자기 신격화로 이어진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내주합일’과 ‘신인합일’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이 ‘ 안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이제 말이 하나님의 말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엄청난 영적 위험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이 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 생각과 주님의 진리를 함부로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신적 인플럭스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이 얼마나 쉽게 종교적 언어를 입을 수 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결합에는 오히려 겸손이 따라옵니다. ‘주님께서 안에 계시니 나는 특별하다’가 아니라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선도 행할 없다’는 인식입니다. ‘내가 성화되었다’가 아니라 ‘내게 있는 선은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인식입니다. 천사가 자기 선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 말하는 ‘내주합일’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받아들일 때 가장 중요한 보완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합일’의 깊이는 인간이 얼마나 신적인 존재처럼 느껴지는가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이 얼마나 중심에서 내려오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그의 삶을 움직이는가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기준으로 이용도 목사를 보아야 합니다. 그의 1929년 체험을 정말 ‘ 번째 연단의 완성’이라고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핵심진리’의 해석입니다. 우리는 그 해석을 존중하여 먼저 그대로 이해하되, 스베덴보리의 계시를 근거로 이용도 목사의 사후 영적 상태나 거듭남의 정확한 단계를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그의 말과 삶,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랑의 방향을 보여 주는가 하는 정도입니다.

 

이 절제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사람을 천국과 지옥으로 판정하는 렌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떤 가르침과 삶 속에 있는 선과 진리를 발견하고, 동시에 그것을 스베덴보리가 밝힌 영적 질서 안에서 더 정확하게 구별해 보는 렌즈에 가깝습니다. 이용도 목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그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살려고 했는지를 충분히 듣고, 그 다음 어디에서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의 빛이 보이며 어디에서 신학적인 구별이 필요한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는 우리가 귀 기울여 들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교리가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는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신앙의 궁극적 증거가 사람의 변화된 사랑과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AC의 아주 근본적인 원리와 만납니다. 사람에게 참으로 속한 것은 단순히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고 살아낸 것입니다. 지식은 기억에서 분리될 수 있지만 사랑은 사람의 생명을 이룹니다. 죽음 이후에도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은 그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 지식을 축적했는가가 아니라 그 지식을 통해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안에 사신다’는 말을 가장 실제적으로 확인하는 자리는 특별한 체험의 순간만이 아닐 것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 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 진실을 말하면 불리해질 때입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생명’이 움직이는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지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5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오는 사랑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여 그것이 나의 의지와 생각과 행동 안에서 실제 생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내가 그리스도처럼 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 ‘내게 있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내주합일’의 가장 안전한 표지는 황홀경도, 환상도, 특별한 계시도 아닙니다. 체어리티입니다.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가, 더 진실할 수 있는가, 더 자유롭게 선을 행할 수 있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는가, 다른 사람을 덜 멸시하는가, 그리고 모든 선의 근원을 더욱 주님께 돌리는가입니다. 바로 그 열매에서 결합의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5강의 마지막 10부에서는 이용도 목사의 사례를 포함하여 지금까지의 전체 강의를 한데 모으겠습니다. ‘핵심진리’가 말하는 ‘연단-죄성-자아의 깨어짐-성화-이기는 자-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큰 구조가 어디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깊이 만나는지, 그리고 ‘죄성의 완전 제거’, ‘전적 부패’, ‘ 차례 연단의 단계화’, ‘신인합일’ 등 어디에서는 분명한 구별이 필요한지를 종합하여 5강 전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5강 10부

연단에서 생명까지’ : 5강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과스베덴보리의 렌즈 종합

5강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국 한 가지 질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변화되는가?’입니다. 강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말씀의 실천’, ‘양심의 ’, ‘광야의 연단’, ‘ 차례 연단’, ‘죄성’, ‘전적 부패’, ‘자아의 깨어짐’, ‘이기는 ’, ‘익은 열매’, ‘원수 사랑’, 그리고 마지막의 ‘그리스도의 생명’과 ‘내주합일’까지 긴 흐름을 이어 왔습니다. 이 모든 표현은 서로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성장론 안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이 단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데 머물지 않고, 말씀을 실제로 살면서 자기 안의 죄와 정욕이 드러나고, 그것을 회개하며, 자기중심성이 깨어지고, 마침내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과정을 ‘익은 열매’가 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모든 성도가 연단을 받아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실제 원고에서도 ‘연단을 받아야만 익은 열매가 되고,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있다’는 강한 언어가 반복됩니다.

 

이런 전체 방향을 먼저 충분히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5강의 가장 큰 장점은 신앙을 지식이나 신분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선언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 구원이 당신의 성품과 사랑과 일상에서 무엇을 바꾸었는가?’를 계속 묻습니다.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이 실제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신앙은 사랑과 분리될 때 생명이 없으며, 진리는 선이 되고 행위가 되어야 실제 인간의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5강의 첫 출발점인 ‘말씀의 실천’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중요했습니다. 강사는 말씀을 실천하려 할 때 오히려 자기 안의 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배우면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이 보이고, 인내를 배우면 참지 못하는 성질이 드러나며, 자기부인을 배우면 자기 뜻을 놓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연단’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조금 더 깊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이해성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전에는 구별되지 않던 선과 악이 구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가 악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악을 비추어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은 사람에게 새로운 악을 넣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숨어 있던 것이 나타나는 과정입니다. 강의에는 반복하여 ‘범죄할 환경이 주어지면 죄성이 발동한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표현을 ‘삶의 환경 속에서 인간의 숨은 애정과 지배적 사랑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조금 다듬어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자신이 온유하다고 생각했는데 무시를 당하면 분노가 올라오고, 재물에 초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손해가 생기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환경이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나 5강의 ‘연단’과 스베덴보리의 ‘시험’을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연단시키기 위하여 특정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붙여 주신다는 표현이 상당히 강합니다. 더 나아가 천년왕국 말기에 마귀가 풀리는 것까지 ‘연단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주님의 섭리와 악의 허용을 더욱 세밀하게 구별합니다. 주님은 악을 일으키시지 않습니다. 인간과 지옥의 악을 자유 때문에 허용하시되, 그 허용된 악 가운데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이끌어 내십니다. 따라서 누군가 나를 괴롭혔다고 해서 ‘주님이 사람에게 나를 괴롭히라고 시키셨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이미 발생한 그 사건을 사용하여 내 안의 자기애와 분노를 드러내고 그것에서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5강의 두 번째 큰 축은 ‘ 차례 연단’입니다. 출애굽 직후 바로의 추격, 광야에서의 아말렉 전쟁, 그리고 가나안 입성을 앞둔 강적들과의 전쟁을 인간의 영적 성장 세 단계와 연결했습니다. 실제 강의에서도 가나안 정복까지를 ‘ 번째 연단 과정’, 곧 광야 연단의 마지막 단계로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 구조는 ‘신앙생활이 진행될수록 싸움의 대상이 깊어진다’는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잘 보이는 행동의 죄를 다루지만, 점차 인정욕구, 자기 의, 아집, 자기 영성에 대한 자부심처럼 훨씬 미세한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반드시 ‘시험이 점점 적어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내면이 열리면서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수준의 진리를 배우다가 나중에는 ‘내가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말을 하는가? 상대를 살리려는가, 내가 옳음을 증명하려는가?’라는 목적의 차원까지 들어갑니다. 행동에서 의도로, 의도에서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사람의 거듭남을 문자 그대로 ‘정확히 차례의 연단’으로 공식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은 완전한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는 상응적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을 모든 신앙인의 생애에 적용되는 고정된 영적 단계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시험의 종류와 깊이와 순서는 매우 다릅니다. 그러므로 ‘ 차례’는 영적 성장의 완전한 과정을 보여 주는 하나의 도식으로 받아들이되, ‘나는 지금 번째인가 번째인가’를 판정하는 척도로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5강의 세 번째 큰 축은 ‘죄성’입니다. 강사는 인간이 선을 원하면서도 범죄하는 이유를 ‘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힌 죄성’으로 설명하고, 이것을 ‘전적 부패’와 연결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가장 중요한 인간론적 보정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유전적 악을 매우 심각하게 말하지만, 인간의 가장 깊은 inmost 자체를 악의 뿌리가 박힌 곳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은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유입되는 가장 내적인 입구와 관계됩니다.

 

또한 조상의 죄책 자체가 법적으로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전통적인 원죄론도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유전되는 것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입니다. 그리고 그 성향을 사람이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고 실제 삶으로 만들 때 그것이 그 사람의 악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유전적 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조상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자기 안에 악한 충동이 스쳤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사랑하고 동의하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에 인플럭스의 원리가 들어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유입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것이 모두 자기 생각과 자기 애정처럼 느껴집니다. 이 자유가 있어야 책임과 거듭남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악이 지옥에서 유입된다’는 말이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 않습니다. 유입된 악을 사랑하여 받아들이면 자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5강의 ‘전적 부패’를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옮긴다면 ‘인간의 proprium에서는 참된 선이 나올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때 가장 가까워집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도 전혀 없고,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도 사실상 파괴되었다’는 뜻이라면 스베덴보리와는 크게 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타락한 사람에게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어린 시절부터 리메인스를 저장하십니다.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의 선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그 안에서 은밀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5강의 죄론은 ‘인간의 악이 얼마나 깊은가’를 매우 강하게 보여 주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깊다’는 말을 반드시 붙여야 합니다. 인간의 악만 깊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도 인간 자신이 모르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실제 영적 시험이 가능한 것도 인간에게 오직 악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심어 두신 선과 진리가 그 악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5강의 네 번째 큰 축인 ‘자아의 깨어짐’이 등장합니다. 강사는 자아가 깨어진 사람의 특징을 ‘문제가 생겼을 남을 보기보다 자기를 먼저 보는 ’으로 설명했습니다. 실제 강의에서 목회자가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성도라도 어려움을 당하면 차별하지 않고 돕는 사례,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자기 안의 사람 의존을 돌아보는 사례 등이 나옵니다. 이 통찰은 proprium의 문제와 매우 가깝습니다.

 

다만 ‘모든 문제는 탓이다’라는 자기비난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 실제로 악을 행했다면 그 악은 상대의 책임입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여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잘못을 보면서도 동시에 ‘ 사건을 통해 안에서는 무엇이 드러났는가?’를 살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상대의 악과 자기 proprium을 함께 구별하여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를 점점 외부에 놓기 쉽기 때문입니다. ‘ 교회가 문제다’, ‘ 목사가 문제다’, ‘ 사람이 자아가 강하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언제나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거짓 교리를 비판하면서 자기 안의 자기 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사랑 없음을 지적하면서 자기 안의 냉혹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 자체가 proprium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5강의 다섯 번째 큰 축은 ‘이기는 ’와 ‘익은 열매’입니다. 강사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의 약속들을 매우 중요하게 보고,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에게 이기는 자가 되라는 요청이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또 익은 열매는 말씀을 ‘99%’가 아니라 ‘100%’ 실천하는 사람이며, 빛 가운데 철저하게 회개하여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사람이라고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바로 이 ‘100%’의 언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신앙의 철저성을 강조하는 목회적 언어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문자 그대로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모든 유전적 악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여 절대적 무죄 상태에 도달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천사는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천사의 모든 선도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천국적 완전함은 ‘나는 이제 자체로 완전하다’는 자립적 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여 그 선이 지배적 사랑이 된 상태입니다.

 

이 차이는 ‘악의 제거’라는 말에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이 제거된다는 것은 악이 인간에게서 독립적인 실체처럼 뽑혀 우주 밖으로 사라진다는 뜻이라기보다, 악이 분리되고 억제되어 더 이상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생명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전에는 악을 기뻐해서 행했지만 이제는 그 악을 죄로 여기고 싫어하며 선을 사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실제적이고 깊은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아름답게 읽는 방식은 ‘완전히 무결한 사람’보다 ‘주님의 선이 그의 삶에서 실제 열매를 맺게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자기 공로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받아 맺습니다. 인간도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 행동과 쓰임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진정 익은 사람일수록 ‘내가 이루었다’보다 ‘주님께서 하셨다’는 인식이 깊어질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 중간에 등장하는 아주 소박한 일상 사례들이 오히려 ‘익은 열매’의 의미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강사는 자신도 자주 패배한다고 솔직히 말하며, 가정에서 말 한마디와 혈기 하나를 다루는 것을 실제 ‘이김’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기는 ’가 너무 높은 영적 계급처럼 들릴 수 있는 위험을 생활 속으로 다시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큰 신비 체험보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말을 절제하는 것, 나를 거스르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 작은 관계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이김이라는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의 예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크고 위대한 업적보다 작은 일에서 사랑을 실천한 것을 성화의 사례로 제시했습니다. 이런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거듭남은 종교적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직업, 관계, 일상의 책임 안에서 나타납니다. 진리가 자연적 삶의 마지막 행동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선은 머리 안의 선이 아니라 실제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이 원수 사랑으로 이어졌습니다. 5강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성화’를 죄성 제거라는 추상적인 설명에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선을 원할 있는 상태’라는 삶의 모습으로 옮겨 놓았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신앙의 완성은 결국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만 원수 사랑 역시 무분별한 용납과 같지 않습니다. 악을 악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폭력과 착취와 거짓을 그대로 허용하는 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언제나 진리와 함께 갑니다. 악을 제지하면서도 상대의 파멸을 즐기지 않고, 필요한 책임을 물으면서도 보복심에 지배되지 않으며,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악에서 돌아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현실적인 원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5강이 사랑으로 깊어지는 끝자락에 이용도 목사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수도적인 영성’,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 합일되는 성화·성결의 복음’, ‘그리스도를 온전히 담는 복음’으로 설명하며, 기복신앙과 대조합니다. 이 표현은 5강 전체의 결론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결국 죄를 많이 분석하고 연단의 단계를 공부하는 이유는 죄 그 자체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 안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내주합일’을 결합(conjunction)의 언어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과 존재론적으로 합쳐져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에 받아들여져 그 사람의 삶을 점점 질서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그 생명을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플럭스의 신비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사랑한다고 느끼고 자기 힘으로 생각한다고 느끼지만, 실제 생명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거듭남은 이 인플럭스가 더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인간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물리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안에 있다’는 말의 가장 깊은 표지는 황홀한 체험보다 사랑과 진리의 열매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용도 목사에 대한 강사의 높은 평가도 절제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는 그의 삶과 체험을 ‘ 번째 연단’, ‘성화’, ‘내주합일’의 틀로 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핵심진리’ 전통 안에서의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용도 목사의 정확한 영적 단계나 사후 상태를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외적인 전기와 체험만으로 그의 내적인 지배적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의 기록된 삶과 메시지에서 자기부인과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향하는 열매가 보이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절제는 공용복 선생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핵심진리’에 깊은 진리가 많이 보인다고 해서 공용복 선생의 모든 체계가 스베덴보리와 동일하다고 할 수 없고, 반대로 몇몇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 안의 실제 영적 통찰을 가볍게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5강은 바로 그 균형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말씀을 삶으로 살아야 한다’, ‘자기 안의 악과 싸워야 한다’, ‘자기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원수에게까지 사랑을 넓혀야 한다’, ‘신앙은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상당히 깊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영의 가장 깊은 곳에 죄성이 뿌리박혀 있다’, ‘정확한 차례 연단을 통과한다’, ‘100% 정결한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 문자적인 종말론적 시간표 등을 절대적인 영적 구조로 만드는 부분은 중요한 보정이 필요합니다.

 

특히 종말론의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강의의 전체 성장론은 교회시대, 휴거, 대환란, 천년왕국 같은 문자적인 미래 시간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제 자료에서는 일부 성도의 환난 전 휴거, 후 3년 반 등의 구조를 문자적인 종말 사건으로 설명하고, 천년왕국의 사람들까지 실제 역사적 인구 집단으로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이런 이미지들을 교회의 영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출현을 나타내는 상응적 말씀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체계가 분명히 갈라집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지적하는 목적은 ‘누가 성경적인가’를 놓고 논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각각의 말이 사람의 영적 삶에 무엇을 하려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핵심진리’의 종말론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반드시 정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긴장을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은 그 긴장을 미래의 달력에서 현재의 내적 상태로 가져옵니다. ‘언젠가 대환란이 준비되어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더 근원적으로 ‘오늘 당신 안에서 무엇이 주인인가?’를 묻게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5강을 읽으면 종말의 긴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워집니다. 마지막 심판이 먼 미래의 공포스러운 사건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거짓의 외관이 벗겨지고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질서와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고 영계에 들어가면 자기가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5강 전체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강의는 그것을 ‘죄성과 정욕을 이기고 있는가’라고 묻고, ‘자아가 깨어졌는가’라고 묻고, ‘익은 열매인가’라고 묻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었는가’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질문을 ‘당신의 지배적 사랑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 살아갑니다. 돈을 가장 사랑하면 진리조차 돈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자기 명예를 가장 사랑하면 종교조차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심이 되면 돈과 지위와 지식과 재능은 모두 쓰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무엇이 주인인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기는 ’도 새롭게 이해됩니다. 이기는 자는 강한 의지력으로 모든 욕망을 정복한 영적 영웅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점점 생명의 중심이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여전히 자연적 욕구와 감정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더 이상 주인이 아닙니다.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 아래서 질서를 찾습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과 개성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삶의 최종 중심으로 삼는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며, 맡겨진 쓰임을 더 충실히 행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도 상대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막되 미워하지 않는 것, 진리를 말하되 멸시하지 않는 것, 거리를 두어야 할 때 거리를 두면서도 그의 파멸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진리가 결합된 체어리티입니다.

 

내주합일’도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자기 소유처럼 독립적으로 갖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면서, 그 사랑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 실제 삶으로 표현하는 결합입니다.

 

그리고 ‘익은 열매’ 역시 자기 완성의 자격증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 자연적 삶의 실제 열매까지 내려온 상태입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는 말로 자기 익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듯 삶에서 나타납니다. 말투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자신을 비판한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5강이 이용도 목사의 ‘생명’을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게 느껴집니다. 긴 죄론과 연단론의 마지막 목적이 ‘죄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도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진리를 배우는 것도 결국 그 진리가 선한 삶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에서는 ‘핵심진리’의 5강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이 아주 아름답게 만납니다. ‘악을 피하는 ’이 마지막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 않는 신앙에서 행하는 신앙으로, 행하는 신앙에서 사랑하여 행하는 신앙으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말씀 때문에 참습니다.’ 나중에는 ‘상대를 해치고 싶지 않아서 참습니다.’ 더 깊어지면 ‘ 사람의 선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AC에서 읽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신앙은 필요합니다.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독립적 권위를 가지기 시작하면 ‘가인’이 됩니다. 반대로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삶을 섬기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5강이 그토록 ‘말씀을 실제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이유도 결국 이 문제와 만납니다.

 

그래서 저는 5강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연단을 많이 받아 자기 힘으로 완전한 존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실제 삶에 받아들이면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드러날 그것을 주님의 힘으로 죄로 알고 물리치고,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점점 생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마침내 선을 행하는 것이 자유와 기쁨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여기에 던지는 아주 좋은 질문 하나는 그대로 남겨 두어도 좋겠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말씀은 지금 당신의 생활에서 실제로 무엇이 되었습니까?’ 이것은 AC를 읽는 사람에게도 매우 필요한 질문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과 퍼셉션과 인플럭스와 proprium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과, 그것들이 실제 우리의 말과 관계와 선택을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핵심진리’에 되돌려 줄 수 있는 질문도 있습니다. ‘ 연단과 성화의 모든 과정에서 실제로 생명을 주시고 악을 물리치시는 분이 누구이며, 인간의 자연적 애정 전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어떻게 회복하시는가?’입니다. 이 질문이 들어가면 성화는 자기완성의 긴장에서 벗어나면서도 삶의 변화라는 엄중함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렇게 두 질문을 함께 붙들면 5강의 장점은 더욱 살아나고, 지나치게 단정적인 부분은 자연스럽게 보완됩니다. 인간은 실제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욕망 없는 무감각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격과 자유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 없는 감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과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이 신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결국 한 곳으로 돌아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과 진리와 쓰임으로 나타나는 ’입니다. 이것이 5강의 ‘그리스도의 생명’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깊고도 안전하게 읽을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5강은 10부로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다. 1부의 ‘말씀의 실천과 양심의 ’에서 시작하여, 2부의 ‘출애굽-광야-가나안’, 3부의 ‘ 차례 연단’, 4부의 ‘죄성과 전적 부패’, 5부의 ‘이기는 자와 익은 열매’, 6부의 ‘작은 일의 승리’, 7부의 ‘자아가 깨어짐’, 8부의 ‘원수 사랑과 체어리티’, 9부의 ‘이용도 목사와 생명의 내주합일’을 지나, 마지막 10부에서는 그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실제 삶이 되는 거듭남’이라는 한 중심으로 모았습니다. 앞선 1강부터 이번 5강까지 계속 반복해서 나타나는 ‘핵심진리’의 가장 강한 문제의식도 이제 꽤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무엇을 알고 믿는가’에서 멈추지 말고 ‘ 진리가 실제 당신의 생명이 되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 질문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오래 붙들어 볼 만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SY.59,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6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6강 1부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와 ‘마음밭’이번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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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57,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4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4강 1부‘죄론’의 문을 열다 : 죄를 행위가 아니라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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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4강 1부

죄론 문을 열다 : 죄를 행위가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사랑으로 보기

4강은 앞선 강의들과 연결되면서도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교회시대의 이기는 자, 광야의 연단, 영계의 구조와 사후의 상태 등을 비교적 큰 틀에서 살펴보았다면, 이제 강사는 그 모든 문제를 한 사람의 실제 내면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강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죄론’을 시작합니다. 죄론을 공부하는 목적도 명확하게 밝힙니다.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게 나타나는 어두운 마음과 몸의 행실과 생활’을 세밀하게 분별하고, ‘선과 , 빛과 어둠, 영성과 육성, 영적 행실과 육적 행실’을 구별함으로써 철저한 자기 성찰과 회개생활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도 거듭남은 막연하게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 앞에서 물리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죄론을 ‘기본 진리’ 가운데 하나의 독립된 과목 정도로 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과목들을 꿰는 중심축으로 이해합니다. ‘입문’에서 말하는 휴거 성도의 자격도 죄 문제와 관계되고, ‘교회시대 이기는 ’도 죄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된 성도이며, ‘영계론’에서도 사후 심판과 천국·지옥의 문제가 결국 죄와 연결되고, ‘속죄복음’은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를 다루며,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는 죄 문제를 해결한 성도들의 삶이고, ‘성장론’ 역시 죄와 싸우며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앞서 목사님께서 보여 주신 ‘핵심진리’의 목차와 여러 권의 책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여기서 아주 잘 드러납니다. ‘핵심진리’는 여러 교리를 병렬적으로 모아 놓은 책이라기보다, ‘인간이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변화되는가?’라는 하나의 문제를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는 체계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출발점에는 상당한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 죄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몇 가지 외적인 행위를 먼저 떠올립니다. 거짓말, 음란, 탐욕, 미움, 폭력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처음부터 훨씬 깊은 곳을 보려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범죄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을 낳는 ‘죄성’과 ‘정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4강은 단순한 윤리 강의가 아니라 일종의 ‘내면 해부’로 들어갑니다.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 행동을 하게 만든 안의 무엇이 있는가?’를 묻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은 접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단순히 밖으로 나타난 행위가 아닙니다. 행위 이전에 의지가 있고, 의지 안에는 사랑이 있으며, 그 사랑에서 생각과 의도가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주 경건하고 선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 행위의 목적이 자기 영광, 자기 명예, 자기 이익이라면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은 외관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보잘것없는 행동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안에는 천국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외관을 보지만 주님은 그 행위를 낳은 의지와 목적을 보십니다.

 

이번 강의에는 이것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강사는 자기 자신을 예로 들면서 지금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지만, 마음속에 ‘여러분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여러분들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강단도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인데 거기서 ‘자기 자랑’이 나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뿌리를 ‘타락한 정욕’에서 찾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이번 4강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정욕’이라는 말은 이미 성적 욕망이라는 일상적인 의미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칭찬받고 싶다’, ‘내가 일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정욕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번 강의에서 말하는 정욕은 단순히 육체의 몇 가지 본능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려는 광범위한 애정과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바로 여기서 AC를 읽어 온 우리에게는 ‘proprium’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둘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욕심이 많다’ 정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선을 행한다고 여기는 그 ‘자기 ’, 그리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타락한 의지 전체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음식과 성욕과 재물욕을 상당히 절제하고도 proprium에 깊이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과 달리 정결하다’, ‘나는 영적인 사람이다’, ‘나는 진리를 제대로 알고 있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오히려 훨씬 알아보기 어려운 proprium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강단 위의 자기 자신에게까지 칼날을 돌리는 것은 귀하게 볼 부분입니다. 죄론을 남에게 적용하기 시작하면 금세 위험해집니다. ‘ 사람은 탐욕스럽다’, ‘ 목사는 명예욕이 많다’, ‘ 성도는 육적이다’ 하면서 죄론이 타인을 분류하고 판단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는 나에게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론의 칼날이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의 기본 질서와도 잘 맞습니다. 회개는 타인의 악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살피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강의에는 이 문제를 아주 일상적인 자리까지 끌어내리는 재미있는 경험담도 등장합니다. 강사가 평신도 시절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주간 살아 보자고 했다고 합니다.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물 한 모금을 마셔도 ‘하나님께 영광’, 밥 한 숟가락을 먹어도 ‘하나님께 영광’ 하며 감사했는데,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무렵 그릇 밑에서 죽은 바퀴벌레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평안하게 하나님께 감사하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화가 다소 우스워 보이지만 강사가 하려는 이야기는 상당히 진지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먹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환경 하나가 바뀌자 내면의 상태가 즉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평온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만으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내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는지를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내면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시험 이해에서도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험은 인간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 안에 잠재해 있던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평상시에는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자신이 인내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신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뜻과 반대되는 일이 생기고, 인정받지 못하고, 손해를 보고, 자존심이 상하고,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사랑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시험은 고통스럽지만 거듭남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악은 싸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번 강의의 ‘죄론’이 단순한 죄 목록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 다시 분명해집니다. 강사가 원하는 것은 ‘이것은 , 이것은 아님’이라는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 가운데 사는 행실과 어둠 속에 사는 행실을 세밀하게 분별하는 ’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분별하는 눈을 갖자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것을 왜 하고 있는가, 내가 이것을 얻었을 때 왜 기쁜가, 이것을 빼앗겼을 때 왜 이렇게 화가 나는가,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 왜 마음이 무너지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죄론은 추상적인 조직신학이 아니라 영성생활의 실제가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자기 안을 깊이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나친 자기 관찰은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만 시선을 두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 안에 이런 악이 있구나’를 발견한 다음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 삶에서 그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며,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와 싸우는 일조차 proprium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까지 끊었다’, ‘나는 사람보다 정결하다’, ‘나는 정도로 연단받았다’는 또 하나의 자기 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회개의 방향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을 향합니다. 인간은 자기 안의 악을 보지만 악만 바라보고 앉아 있지 않습니다. 악에서 얼굴을 돌려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으로 행합니다. 악을 제거하는 이유도 ‘아무 욕망도 없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빈집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집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4강 첫머리에 흐르는 ‘정결’이라는 주제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결은 인간성의 삭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과 애정과 기쁨을 하나씩 없애어 무감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난 사람은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사랑하고 더욱 깊게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서 기쁨을 얻는지가 달라집니다. 자기만을 위한 기쁨에서 이웃의 선을 기뻐하는 쪽으로, 소유하는 기쁨에서 유용하게 쓰는 기쁨으로, 인정받는 기쁨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쪽으로 사랑의 중심이 이동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4강의 첫 질문인 ‘무엇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가?’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답한다면, 단순히 ‘욕망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기보다 ‘우리 사랑의 질서가 정결해져야 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 왜 사랑하는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 아래 다른 모든 사랑들이 어떤 질서로 놓여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도 이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4강은 이제 본격적인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죄성’과 ‘정욕’을 구별하기 시작하고, 정욕 자체는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기능인데 타락하면서 자기 만족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정욕을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과 여러 욕망으로 세분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부터는 ‘핵심진리’의 인간론과 스베덴보리의 ‘사랑의 질서’가 상당히 가까이 접근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4강 2부에서 별도의 주제로 충분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4강 1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습니다. ‘죄를 알려면 먼저 행동만 보아서는 됩니다. 행동을 낳고 있는 안의 사랑과 목적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탭니다. ‘ 사랑을 발견하는 목적은 자신을 정죄하는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랑의 질서를 주님께서 바로잡으실 있도록 자유 가운데 악을 죄로 알고 물리치는 있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공용복 선생의 ‘죄론’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상당히 깊은 대화를 시작합니다.

 

 

4강 2부

정욕 처음부터 악한 것이 아니다 : 창조된 애정과 타락한 욕망, 그리고 사랑의 질서

4강 1부에서 강사는 죄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서 찾지 않고, 그 행동을 낳는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2부에서는 그 내면을 움직이는 ‘정욕’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강의가 사용하는 ‘정욕’이라는 말의 범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정욕’이라고 하면 성적인 욕망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 강의에서의 정욕은 훨씬 넓습니다. 강사는 그것을 크게 ‘애정’과 ‘욕망’으로 나누고, 애정에는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 등이 있으며, 욕망에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수면욕 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욕’은 인간의 자연적 삶을 움직이는 광범위한 애정과 욕구를 가리키는 하나의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강의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 하나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정욕 자체가 처음부터 죄악된 것은 아니다’라고 봅니다. 인간에게 애정이 있고 음식에 대한 욕구가 있고, 이성에게 끌리는 마음이 있고,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고 인간관계를 이루며 자연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신 기능입니다. 문제는 타락 이후 이 기능들이 본래의 질서를 잃고 ‘자기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이번 4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핵심진리’의 죄론을 모든 자연적 욕구를 악하게 보는 금욕주의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대목에서 강사가 말하는 것은 ‘배고픔이 죄다’, ‘남녀간의 애정이 죄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죄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정상적인 기능이 타락을 통하여 방향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강의가 문제 삼는 것은 욕구의 ‘존재’보다 욕구의 ‘지배’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야 할 인간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능들이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를 만족시키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연적인 애정과 욕구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쉬는 것, 가족을 사랑하는 것, 직업을 갖고 일하는 것, 재산을 소유하는 것,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런 것들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낮은 사랑이 높은 사랑을 섬기면 선한 질서 안에 있지만, 낮은 사랑이 높은 사랑 위로 올라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면 질서가 전도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목적-원인-결과’의 질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가장 안쪽에는 사람이 무엇을 궁극적으로 사랑하는가라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생각과 판단이 ‘원인’이 되며, 그것이 실제 행동이라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돈을 버는 사람이라도 돈을 버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족을 돌보고 맡겨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며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재산을 얻는 것과, 재산 자체를 최고의 선으로 여기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 위에 서려는 것은 외적으로는 모두 ‘돈을 버는 행위’이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명예나 지위를 갖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그 지위를 통하여 더 큰 유용성을 수행하고 공동체를 섬기기 원한다면 명예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용성은 핑계가 되고 ‘내가 높아지는 ’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때 사람은 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존경을 이용하여 자기 proprium을 만족시키게 됩니다. 1부에서 강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던 ‘말씀을 전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핵심진리’가 말하는 ‘타락한 정욕’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질서가 전도된 사랑’ 사이에는 상당히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 기능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보다 정교하게 ‘사랑들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사랑이 있으며, 그 사랑들은 서로 위아래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는 주님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 아래에는 이웃 사랑이 있으며, 그 아래에서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봉사해야 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도 그 자체로 완전히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랑을 섬기는 위치에 있을 때에는 유용한 기능을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사랑’을 무조건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돌보거나 좋아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신앙은 병적인 자기부정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돌보고, 건강을 지키고, 필요한 것을 얻고, 자신의 직업과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자기 사랑의 악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질서 안에 있다면 오히려 필요합니다. 문제는 ‘’가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기 행복과 자기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때 자기 사랑은 지옥적인 사랑으로 전도됩니다.

 

바로 여기서 ‘핵심진리’가 정욕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자기 만족’이라는 표현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만족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선을 행하고 기뻐하는 만족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돕고 기뻐하는 만족도 있으며, 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느끼는 만족도 있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에게도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국의 기쁨은 자연계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만족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무엇에서 만족을 느끼느냐’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결정적입니다.

 

가령 누군가 어려운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회복되는 것을 보며 기뻐합니다. 그 기쁨 자체는 악한 자기 만족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는 선을 행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중심이 되고, 칭찬을 받지 못하면 섭섭하고, 다른 사람이 더 인정받으면 불편해진다면 그때 숨어 있던 다른 사랑이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동일한 선행이지만 내적으로는 두 사랑이 서로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이 두 가지가 아주 깔끔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순수한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만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도 인정받고 싶고, 봉사하면서도 감사받고 싶으며,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남은 이런 혼합된 동기 속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가진 작은 선한 의도를 붙드시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안에 섞여 있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조금씩 드러내어 정결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 동기가 100퍼센트 순수하지 않으니 나는 위선자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른 결론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혼합된 동기를 발견하는 것이 거듭남의 일부입니다. 어제까지는 ‘나는 주님만을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누군가 나를 인정하지 않자 화가 납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사랑 안에 아직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섞여 있구나.’ 이것을 보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 악을 물리치면서 선한 동기가 점점 더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의 강한 자기 성찰은 매우 유익하면서도 동시에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끝없이 파헤쳐 ‘이것도 정욕, 저것도 정욕, 이것도 자기 만족’이라고만 하면 결국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자기 정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자기 성찰의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선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선해질 수 없음을 알게 될수록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실제 삶에서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proprium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부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처음 읽는 독자는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기라는 것은 없어져야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인격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자유롭게 자기 것처럼 행하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때때로 말하는 ‘천적 proprium’, 곧 주님에게서 받은 새로운 own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사랑하고 행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아는 상태입니다. 거듭남은 ‘’가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라, 거짓된 ‘’에서 참된 ‘’로 변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에서 ‘정욕을 죽인다’는 표현도 이러한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애정 자체를 죽인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죽이고, 부부간의 애정을 죽이고, 음식의 맛을 느끼는 기쁨을 없애고, 일을 성취하는 만족을 제거하는 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애정들이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것은 애정 그 자체라기보다 그 애정을 지배하고 있는 자기중심적 질서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우상’이라는 강한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올라가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성경적으로도 매우 직관적입니다. 우상은 반드시 나무나 돌로 만든 신상일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고, 그것을 잃으면 자기 존재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실제로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지배적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더욱 깊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애정이 있지만 그 모든 애정을 조직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깊은 목적으로 삼으면 다른 자연적 사랑들이 그 아래에서 질서를 찾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가장 높은 목적으로 삼으면 종교적 행위조차 그 사랑을 섬길 수 있습니다.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설교도 하고, 헌금도 하면서 그 모든 것을 자기 명예와 자기 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보는 한 방법은 ‘무엇을 잃을 내가 가장 크게 흔들리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돈을 잃을 때인가, 명예를 잃을 때인가, 사람의 인정을 잃을 때인가,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인가, 가족에 대한 내 뜻이 좌절될 때인가. 이런 순간에 평소 감추어져 있던 지배적 사랑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강사가 정욕의 첫 번째 형태로 ‘혈육간의 애정’을 다루기 시작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매우 깊고 자연스러운 사랑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마태복음 10장 37절, 곧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는 말씀을 가져와, 가족 사랑조차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강의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순위입니다.

 

이 점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혈육간의 사랑은 자연적 사랑이지만, 거듭나면서 그것이 영적 사랑으로 높아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 자녀니까’, ‘ 부모니까’, ‘ 가족이니까’ 사랑합니다. 이것은 자연적 혈연애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면서 ‘ 사람이 주님께 속한 영혼이기 때문에’, ‘ 사람의 영원한 선을 원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더해집니다. 그러면 혈연을 넘어서는 체어리티가 그 자연적 사랑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차이는 실제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서 자녀의 잘못을 무조건 감싸는 것은 영적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며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악의 기준을 바꾼다면 혈육간의 애정이 높은 사랑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랑의 자리를 빼앗은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의 영원한 선을 위해 때로는 바로잡아 주고, 부모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양심에 어긋나는 요구에는 따르지 않는다면 자연적 사랑이 영적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모나 자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적인 사랑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을 더욱 참된 사랑으로 만들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면 결국 자녀를 ‘나의 ’으로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를 주님의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그의 영원한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애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애정의 ‘’을 변화시킵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을 받아들이면서 같은 행동 안에도 전혀 다른 생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난 뒤에도 사람은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음식도 즐깁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더 이상 삶의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더 높은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이번 4강의 ‘정욕’이라는 용어를 독자는 특별히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가 사용하는 넓은 의미의 ‘정욕’을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음란한 욕망’과 동일시하면 강의 전체가 크게 왜곡됩니다. 이 강의에서 정욕은 인간의 자연적 애정과 욕망이라는 넓은 영역을 가리키며, 핵심 문제는 그것이 타락하여 ‘자기 만족’과 결합하고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등의 설명 역시 ‘ 욕구가 존재하는 것이 죄인가?’보다 ‘ 욕구가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작은 차이도 점점 보이기 시작합니다. ‘핵심진리’는 정욕을 ‘십자가에 박고’, ‘끊고’, ‘죽이는’ 언어를 강하게 사용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악한 사랑을 물리치는 싸움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전체 구조를 ‘질서의 회복’으로 설명하는 데 훨씬 강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설명을 함께 놓으면 서로를 보완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핵심진리’의 언어는 악과 실제로 싸워야 한다는 긴장을 일깨우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그 싸움의 목적이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 아래 바른 질서로 되돌리는 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4강 2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욕이 있다’는 사실보다 ‘정욕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는 종의 자리에 있으면 그것은 자연적 삶을 풍성하게 하는 기능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인의 자리로 올라가면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깁니다. 바로 그때 자연적인 것이 육적인 것으로 전도되고, 선물로 주어진 것이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부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거듭남은 사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애정과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천국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사랑이 가장 깊은 중심을 차지하고, 그 사랑 아래 이웃 사랑과 자연적 애정들이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는 것이 천국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가 지금 이 땅에서부터 사람의 내면에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이제 강의는 여기서 한층 더 구체적으로 들어갑니다. 혈육간의 애정을 비롯한 여러 정욕이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보다 앞자리를 차지하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과 ‘사람이 떡으로만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을 통하여 식욕과 인간의 육적 요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강한 표현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지점부터는 ‘절제’와 ‘억압’, ‘시험’과 ‘거듭남’을 구별하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그것을 4강 3부에서 충분히 살펴보겠습니다.

 

 

4강 3부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 : 억압이 아니라 주님 아래로 돌아오는

4강은 ‘정욕’을 인간에게 처음부터 악하게 주어진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망이 타락 이후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강의는 자연스럽게 매우 실천적인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타락한 정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반복하여 사용하는 표현이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 ‘끊는다’, ‘죽인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박았느니라’는 말씀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이 표현은 강렬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그 의미를 조금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있는 모든 욕구와 애정을 없애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거듭남은 곧 자기 억압이나 금욕생활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실제로 겨냥하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식욕도 있고, 성욕도 있고, 가족에 대한 애정도 있으며, 친구와 사물에 대한 애정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능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나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말을 이 강의 자체의 앞뒤 맥락에서 읽어도,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한다는 뜻보다는 하나님보다 앞선 자리를 차지한 욕망의 지배를 끝낸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악은 생각으로 ‘악이구나’ 하고 아는 것만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합니다. 그것도 단지 사회적 평판이 나빠질까 봐, 처벌받을까 봐, 건강을 해칠까 봐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주님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강의의 강한 언어에는 단순히 악을 이해하는 데 머물지 말고 실제로 싸우라는 중요한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과 ‘악한 애정 자체가 사라진 ’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 욕망의 뿌리까지 이미 제거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올라오는데도 말씀 때문에 하지 않는 단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 사람 안에서는 실제 전투가 일어납니다. 한쪽에서는 오래된 proprium의 애정이 끌어당기고, 다른 쪽에서는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그것은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은 바로 이런 내적 충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초기에는 ‘억제’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화가 난다고 즉시 화를 쏟아내지 않고, 욕심이 생긴다고 그대로 따라가지 않으며, 음란한 욕망이 일어난다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을 조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계속 이를 악물고 평생 욕망을 눌러 놓는 상태가 천국적인 상태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더 깊은 일을 하십니다. 인간이 악을 반복해서 죄로 알고 물리칠 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악에 대한 애정 자체가 약해지고 반대로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애정이 강해지도록 하십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십자가에 박는다’는 말이 훨씬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예전에는 하고 싶었던 것을 이제는 원하지 않는 ’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쁜 ’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단순한 행동 교정과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행동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문제를 주님의 광야 시험과 연결합니다. 주님께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뒤 주리셨을 때 시험하는 자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것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강의에서는 이것을 식욕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는 예로 읽습니다. 육체는 떡을 요구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떡보다 더 높은 곳, 곧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적용에는 분명한 실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배고픔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주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필요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 필요에 지배당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음식이 삶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성욕은 결혼과 인류의 지속에 관계된 자연적 기능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자기 만족의 대상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전도될 수 있습니다. 휴식은 몸과 마음의 회복을 위해 필요하지만, 쉼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 맡겨진 유용성을 외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재물 역시 생활과 유용성을 위해 필요하지만, 소유 그 자체가 최고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욕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 욕구가 어떤 질서 아래 있느냐’입니다.

 

다만 주님의 광야 시험을 ‘식욕을 절제하신 사건’ 정도로만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시험들은 한 인간이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절제한 사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계로부터 취하신 유전적 인간성을 통하여 지옥들과 싸우셨고, 계속되는 시험과 승리를 통해 그 인간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영화의 과정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험 역시 지옥 전체와의 신적 전투라는 깊은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에도 말씀의 속뜻에서는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강의의 실천적 적용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층위를 구별하면 됩니다. 문자적 차원에서는 ‘육체의 요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해서는 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의 속뜻에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신적 전투와 영화라는 훨씬 깊은 실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전자의 적용을 폐기하기보다 후자의 깊이를 더해 줍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정욕을 ‘죽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강한 의지력을 가진 사람은 금식할 수도 있고, 술을 끊을 수도 있으며, 성적 욕구를 억제할 수도 있고, 돈과 명예를 포기하고 매우 검소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도 상당한 수준의 금욕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 자체가 거듭남의 증거일까요?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신중합니다. 외적인 절제만으로는 사람의 내적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버린 것처럼 보이면서도 ‘나는 세상을 버린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고, 명예를 포기하면서도 ‘나는 명예를 초월한 영적인 사람’이라는 더 은밀한 명예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겸손 자체를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 욕망 하나를 억제했는데 그 에너지가 더 깊은 proprium으로 옮겨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악과 싸우는 방식은 매우 독특한 긴장을 갖습니다. 사람은 악과 싸울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워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주님께서 알아서 제거하시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결단하고, 피하고, 거절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싸움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유와 인플럭스가 함께 작용하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싸우지만 승리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끊어라’, ‘죽여라’, ‘십자가에 박으라’는 언어에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그 말을 ‘ 의지력으로 나를 정결하게 만들라’고 받아들이면 신앙생활은 엄청난 자기 프로젝트가 됩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은 자기 의에 빠지고 실패한 사람은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악을 물리친다’고 이해하면 인간의 책임과 주님의 역사가 동시에 살아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험’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시험은 단순히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약한지를 알게 되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나는 이것쯤 이길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시험이 오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경험합니다. 그때 사람은 proprium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시험의 목적은 강한 ‘자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새로운 사람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AC의 거듭남 이야기와도 아주 깊이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악한 영들과 선한 천사들의 인플럭스 사이에서 실제적인 영적 싸움을 경험한다고 설명합니다. 악한 영들은 인간의 악과 거짓을 자극하고,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해 선과 진리를 흘려보내십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에게는 그것이 ‘ 생각’, ‘ 욕망’, ‘ 갈등’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그 가운데 자유가 보존됩니다. 인간은 어느 쪽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하며, 반복되는 선택을 통해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어 갑니다.

 

그래서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것은 단 한 번의 극적인 결단으로 모든 욕망이 사라지는 사건이라고 보기보다, 긴 거듭남의 과정으로 보는 편이 좋습니다. 오늘 하나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싸우고, 얼마 뒤 그보다 더 깊은 동기를 발견하고 또 싸우며, 어느 정도 정결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더 은밀한 자기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때로 평생 계속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 생애 전체에 걸친 일이며, 그 깊이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여기에서 ‘완전’이나 ‘성화’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공용복 선생의 전통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앞으로 매우 중요한 대화가 필요해집니다. ‘죄성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두 체계 사이의 거리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유전적 악 자체가 마치 어떤 물질처럼 뽑혀 없어져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악은 주님에 의해 억제되고 사람이 그 악에서 돌이켜 선을 사랑하도록 변화됩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도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기 proprium만 놓고 보면 아무 선도 없음을 압니다. 바로 그 인정 때문에 더욱 자유롭게 주님의 선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화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나는 이제 악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있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내적 인식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점입니다. 거듭날수록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 위대한 존재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욱 깊이 압니다. 동시에 그것이 비참함이나 자기혐오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평안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표현의 궁극적인 방향도 조금 달리 들립니다. 그것은 ‘나는 이제 아무 욕망도 느끼지 않는다’는 상태가 아니라 ‘ 이상 욕망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상태입니다. 배고픔은 있지만 음식이 주인은 아닙니다. 재산은 있지만 재물이 주인은 아닙니다. 가족을 깊이 사랑하지만 가족이 주님보다 위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기쁠 수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선을 행하는 이유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자연적 삶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 위에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실천적 의미를 깊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인간성을 없애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지배가 죽는 자리입니다.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요구, 내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요구, 내가 소유해야 한다는 요구가 주님 앞에서 내려놓아지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악을 끊는 것 뒤에는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이 와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핵심진리’의 강한 금욕적 언어를 굳이 약화시킬 필요도 없고, 반대로 문자 그대로 자연적 욕망의 제거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언어를 ‘사랑의 질서 회복’이라는 더 큰 틀 안에 놓아 줍니다. 정욕과 싸우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적 생명 자체와 싸우지는 마십시오. 악을 끊으십시오. 그러나 선한 애정까지 잘라내지는 마십시오. 자기 사랑의 지배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자기 자신을 돌보는 책임까지 버리지는 마십시오. 핵심은 무엇을 없애느냐보다 ‘누가 주인인가’입니다.

 

그래서 4강 3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애정과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지배를 끝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이 싸움은 단순한 억압에서 사랑의 변화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지만 말씀 때문에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나중에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제 강의는 이 원리를 혈육간의 애정과 가족 관계에 더욱 구체적으로 적용하면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사랑하는 ’,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복음서의 매우 강한 말씀을 다룹니다. 그리고 이 대목을 ‘대환란’이라는 공용복 선생의 독특한 종말론적 틀과 연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가 상당히 가까이 가다가 다시 분명하게 갈라지는 중요한 지점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4강 4부에서 충분히 살펴보겠습니다.

 

 

4강 4부

혈육의 사랑보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 가족애의 제거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 그리고 대환란 대한 중요한 구별

앞선 4강 2부와 3부에서 강사는 ‘정욕’이 처음부터 악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연적 애정과 욕망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욕을 ‘십자가에 박는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욕구를 억압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데까지 왔습니다. 이제 강의는 그 원리를 가장 민감한 영역 가운데 하나인 ‘혈육간의 애정’에 적용합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형제자매처럼 인간에게 가장 깊고 자연스러운 사랑도 주님보다 앞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마태복음 10장 37절의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과 누가복음 14장 26절의 매우 강한 말씀을 가져옵니다. 강의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혈육간의 애정 자체가 악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귀한 사랑이라도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영적 질서가 뒤집힌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자칫 오해하기 쉽습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 ‘자녀에게 정을 떼라’, ‘가족을 멀리할수록 영적이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복음의 방향 자체가 이상해집니다. 예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폐기하신 것도 아니고, 자녀와 배우자를 냉정하게 대하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 사랑하는 ’입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주님 사랑과 충돌할 때 무엇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랑의 양을 줄이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사랑의 질서를 묻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매우 섬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혈연에 기초한 사랑은 자연적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창조 질서 안에 있는 매우 중요한 애정입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랑이라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영적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과 ‘ 사람의 선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자연적 혈연애만으로도 가능하지만, 후자에는 체어리티가 들어옵니다. 거듭남은 전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전자 안에 후자가 들어오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녀가 악을 행해도 무조건 감싸 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부모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반드시 선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악을 도와주고 그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결국 그 자녀의 영원한 선을 해친다면, 사랑처럼 보이는 애정 안에 소유욕과 자기애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 자식이니까’라는 이유로 선과 진리의 기준까지 바꾸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가 당장은 싫어하더라도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해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사랑한다면 자연적 혈연애 안으로 영적 사랑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을 더 바르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을 ‘ ’으로 사랑하는 데서 주님께 속한 한 사람으로 사랑하는 데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배우자도, 자녀도 궁극적으로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모두 주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도록 잠시 관계 안에 맡겨진 것입니다. 이 질서가 세워지면 가족에 대한 사랑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자유로워지고, 상대의 진정한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지상에서의 혈연관계 자체가 영원한 관계의 최종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사랑과 상태가 드러나며, 같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결합합니다. 그렇다고 지상의 부모와 자녀, 부부의 사랑이 무의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의 관계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을 돌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요한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혈연 자체가 영원한 결합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혈육간의 애정을 끊는다’는 강의의 표현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선과 진리보다 앞세우는 자기중심적 애착을 끊는다’고 이해하면 훨씬 안전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자연적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사랑을 영적인 것 아래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4강 전체에서 계속 발견되는 중요한 보완입니다. ‘핵심진리’에서는 ‘끊는다’, ‘죽인다’, ‘십자가에 박는다’는 전투적 표현이 강하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를 ‘질서’라는 언어로 보다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부분부터 강의는 가족애의 문제를 종말론과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현재의 ‘교회시대’에는 사람이 자원하여 말씀에 순종하면서 혈육간의 애정과 여러 정욕을 다룰 수 있지만, 앞으로 ‘7년 대환란’, 특히 ‘ 3년 ’과 같은 극심한 환경에서는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유와 가족과 자기 생명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강의는 ‘반강제적으로’ 행실을 닦게 되는 상황을 말하고, 적그리스도의 통치와 대환란을 실제 미래 역사 속에서 일어날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핵심진리’ 사이의 차이가 상당히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작은 용어 차이가 아니라 말씀을 읽는 기본 방식의 차이와 관계됩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실제 역사적 미래 사건의 시간표와 연결하는 종말론적 틀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서 보여 주신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시대 비교표’에서도 이러한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교회시대’, ‘대환란’, ‘천년그리스도왕국’, ‘ 하늘과 ’ 등을 역사적 순서 안에 배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을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특히 ‘마지막 ’, ‘심판’, ‘ 하늘과 ’은 자연계 우주의 물리적 파괴와 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종결, 심판, 그리고 새 교회의 출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전쟁’도 단순히 미래의 군사전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전투를 나타내며, 숫자와 기간 역시 말씀의 상응에 따라 영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7년’이나 ‘3년 ’을 미래 달력의 정확한 기간으로 놓고 종말의 시간표를 구성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존중하면서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진리’가 종말의 환난을 강조하는 목적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은혜의 때에 자기 신앙을 점검하고, 세상과 육에 붙들리지 말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강력한 목회적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면의 영적 핵심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메시지를 미래에 일어날 특정한 7년의 정치·사회적 재난에만 묶어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시험받고, 기존의 종교적 외관이 무너지고,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드러나는 영적 상태로 더 깊이 읽습니다.

 

특히 ‘반강제적으로 정결하게 된다’는 개념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자유’가 본질적이기 때문입니다. 강제된 것은 인간의 내적 생명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외부의 공포 때문에 악을 하지 않는 것과 악 자체를 죄로 미워하여 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감옥에 있기 때문에 범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악한 사랑이 제거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환란 같은 극단적인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지고, 어떤 사람은 절망하며, 어떤 사람은 주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고난 자체에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신비한 자동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 속에서 인간이 자유롭게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주님께서는 환난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섭리 가운데 선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지만, 환난이 사람의 자유를 대신하여 거듭남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시험과 강제를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시험은 매우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자기 자유가 사라진 것처럼 느낄 만큼 내적인 압박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자유가 보존됩니다. 선과 진리를 붙들 것인지, 악과 거짓에 굴복할 것인지의 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지켜 주십니다.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으면 어떤 것도 인간 자신의 생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원하여 정욕을 끊지 않으면 나중에 환난을 통해 강제로 끊게 된다’는 식의 설명은 목회적으로는 강한 경각심을 줄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지금 자유 가운데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과 싸우는 것이 중요하며, 인간이 그것을 계속 거절할수록 자기 안의 악은 더욱 굳어질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환난은 그 사람의 상태를 드러낼 수 있고, 거짓된 의존을 흔들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을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목회적 차이를 낳습니다. 신앙생활의 동기가 ‘앞으로 대환란이 오니까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두려움에만 놓이면, 신앙의 중심이 자칫 미래의 재난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은 ‘오늘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대환란이 내일 오든 오지 않든, 오늘 내 안에서 자기 사랑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세상의 종말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내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종말론도 갑자기 우리의 현재 삶 가까이로 옵니다. ‘마지막 ’는 단순히 먼 미래의 세계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오래된 영적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과도 상응적으로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의지하던 거짓이 무너지고, 내가 감추어 두었던 악이 드러나며, 주님께서 새로운 진리와 선을 세우시는 과정에는 작은 의미의 심판과 새 창조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개인 심리로 환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무엇보다 교회의 보편적 영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형성을 다룹니다. 다만 그 동일한 신적 질서가 개인의 거듭남에도 반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다시 가족애의 문제로 돌아오면 강의가 왜 이 두 주제를 연결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은 ‘내가 정말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를 드러냅니다. 평상시에는 ‘나는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재산과 명예와 안전과 주님의 진리가 충돌하는 순간이 오면 사랑의 질서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대환란의 세부 시간표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강의가 던지는 실존적인 질문은 그대로 남습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가?’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에게 냉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할수록 사람은 가족을 더욱 선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은 중요하지 않다’며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다면, 그것은 높은 사랑이 아니라 종교적 언어를 입은 proprium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주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맡겨진 이웃 가운데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하여 가족을 버린다’는 식의 극단적인 영성을 경계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관계를 충실하게 돌보는 것도 유용성(use)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가족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는 것과 가족에 대한 책임을 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는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의무를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자기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은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위험이 생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강한 말씀도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를 감정적 증오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를 실제로 미워하라는 뜻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과 충돌하는 경우 어떤 자연적 애정도 최종적인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철저한 우선성을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말하면 모든 낮은 사랑이 가장 높은 사랑 아래에서 질서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서 목사님께서 보여 주신 ‘영적 성장에 대한 도표’를 생각하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핵심진리’는 출애굽-광야-가나안이라는 성경의 역사를 인간의 영적 성장과 연결합니다. 그렇다면 가족, 재산, 명예,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이 흔들리는 경험은 일종의 ‘광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평소 의지하던 것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광야의 목적 역시 단순한 박탈이 아닙니다. 옛것을 빼앗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게서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광야 뒤에는 가나안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어야 하고, 악을 버린 자리에는 선한 사랑이 들어와야 합니다.

 

결국 4강에서 반복되는 ‘끊는다’는 언어를 우리는 계속 이 방향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혈육간의 애정을 끊는다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자기중심적 소유욕을 끊는 것입니다. 식욕을 끊는다는 것은 음식을 즐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지배를 끊는 것입니다. 물욕을 끊는다는 것은 재산을 전혀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명예욕을 끊는다는 것은 모든 책임과 직분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결국 끊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의 기능이 아니라 그 기능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놓은 ‘전도된 질서’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proprium이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무엇이든 ‘나의 ’으로 붙잡으려 합니다. ‘ 자녀’, ‘ 재산’, ‘ 명예’, ‘ 사역’, 심지어 ‘ 신앙’, ‘ 성화’, ‘ 영성’까지 붙잡습니다. 거듭남은 이 모든 것을 물리적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자녀도 주님의 것이고, 재산도 주님께서 유용성을 위해 맡기신 것이며, 사역도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내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인식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맡겨진 것을 더 충실하게 돌볼 수 있습니다.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강 4부의 중심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가족보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것으로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서 더욱 참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의 핵심 역시 고난 자체가 사람을 정결하게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가 드러나고 그 자유 가운데 주님을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부분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 상당히 가까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주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연적 애정은 내려와야 한다’는 데서는 깊이 만납니다. 그러나 미래의 문자적 ‘7년 대환란’과 ‘ 3년 ’을 통해 사람이 반강제적으로 정결해진다는 종말론적 틀에서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이 차이를 어느 한쪽을 조롱하거나 재단하는 방식으로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그 표현을 통해 무엇을 경고하려 했는지를 먼저 충분히 듣고, 그 다음 스베덴보리는 같은 문제를 자유와 사랑, 영적 심판과 말씀의 속뜻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다르게 설명하는지를 보여 주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음부터 지키려 했던 ‘스베덴보리의 렌즈’의 역할일 것입니다.

 

그리고 4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혈육간의 애정에서 다른 정욕들, 특히 인간의 육체적 욕망과 자기 만족의 문제로 시선이 이동하면서 ‘죄성’과 ‘정욕’의 관계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동시에 ‘악을 끊는 ’과 ‘성화된 사람이 되는 ’이 과연 같은 것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도 생깁니다. 이 부분은 4강의 죄론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므로, 다음 4강 5부에서 충분히 이어가겠습니다.

 

 

4강 5부

죄성정욕 어떻게 결합하는가 :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을 지배하는 생명의 문제

4강은 이제 한층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강사는 ‘정욕’을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과 식욕·성욕·물욕·명예욕·수면욕 등으로 넓게 설명하면서, 이것들이 본래부터 죄악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연적 삶을 위해 주신 기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어떻게 죄의 통로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는 ‘죄성’과 ‘정욕’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을 이 둘이 결합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이번 4강의 죄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의 설명을 먼저 그대로 따라가 보면, 정욕은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자연적 기능입니다.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식욕이 있고, 인류가 이어지도록 남녀간의 애정과 성적 기능이 있으며, 가족 공동체를 이루도록 혈육간의 애정이 있고, 자연계에서 살아가도록 사물과 소유에 대한 관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강사는 ‘죄성’은 이와 다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죄성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마귀의 죄악된 성질이 인간에게 들어와 하나님께서 주신 정욕과 결합함으로써 그 정욕을 변질시켰다고 봅니다. 그 결과 본래 생명을 보존하고 질서를 이루기 위한 기능이었던 정욕이 ‘자기 만족’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서 반드시 붙들어야 할 좋은 통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된 인간성’과 ‘타락한 인간성’을 구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몸이 악해서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감정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도 아니며,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원하는 능력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몸과 자연적 욕구 자체를 죄악시하면 구원은 자연스럽게 ‘몸에서 벗어나는 ’, ‘감정을 없애는 ’, ‘욕구를 느끼지 않는 ’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관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처음부터 악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창조된 것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자기중심적으로 사용되는 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자연적 차원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며 자연계의 삶도 버려야 할 저급한 실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것은 더 높은 영적인 것을 받아 표현하는 최종적인 그릇입니다. 그래서 거듭남도 자연적인 것을 폐기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순종하도록 질서를 바로잡는 과정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자기만을 위해 독립적으로 살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며, 속사람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실제 삶으로 표현할 때 자연적인 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자리가 됩니다.

 

다만 ‘죄성은 마귀의 것이 인간 안으로 들어와 정욕과 결합한 것이다’라는 설명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조금 다른 언어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어떤 악한 ‘물질’이나 ‘성질’이 마귀에게서 인간 안으로 옮겨 들어온 것처럼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인간 안에 독립적인 실체처럼 주입되는 어떤 물질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영계로부터 끊임없는 인플럭스가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악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흘러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가운데 자유를 가지고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며, 자기가 사랑하여 받아들인 것을 자기 것으로 삼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귀가 안에 죄성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만 말하면 자칫 악의 책임을 외부로 돌릴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악한 인플럭스가 지옥에서 온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결코 없애지 않습니다. 악이 밖에서 유입된다는 것과 내가 그것을 자유 가운데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반복하여 행하면 그 악은 그의 삶에 습관으로 자리 잡고, 마침내 그의 의지와 결합합니다. 그때 그는 ‘악이 들어왔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그것을 받아들여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에게서 선한 것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고, 악한 것 역시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독립적인 생명이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유입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 ’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이 ‘마치 자기 것처럼’ 느끼는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고, 거듭남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자유 안에서 무엇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죄성과 정욕의 결합’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바꾸어 표현한다면, 자연적 애정과 욕구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욕 자체가 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식욕이 절제되지 않고 오직 자기 쾌락만을 목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재물을 얻는 능력이 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유용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우월감과 안전과 지배의 궁극적인 근거가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기쁠 수 있지만, 인정받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면 진리조차 사람의 박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강사가 반복하는 ‘자기 만족’이라는 말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2부에서 살펴보았듯 모든 만족을 악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선을 행한 뒤 느끼는 기쁨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을 때의 기쁨도 있으며, 맡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을 때 느끼는 만족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기쁨이 없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만족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가’입니다.

 

이것은 죄를 분별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고 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기쁩니다. 그 기쁨이 곧 자기중심적인 정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에게 감사하지 않자 갑자기 화가 나고, ‘내가 너에게 얼마나 주었는데’라는 마음이 올라온다면 그 순간 내 선행 안에 섞여 있던 다른 목적 하나가 드러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선만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 사람에게서 인정과 보답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행한 선을 전부 거짓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동기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흔히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과 악이 처음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나는 순수한 선으로 이것을 했다’거나 ‘전부 악한 동기였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경우보다, 선한 애정과 자기 사랑이 섞여 있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혼합된 상태에서 인간을 이끌어 가십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전합니다. 동시에 설교를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자의 사랑까지 가짜였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어느 날 후자의 동기를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설교를 더 칭찬하거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때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때 비로소 ‘, 안에 이것도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바로 그 발견이 회개의 재료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 성찰은 자신에게서 악을 발견하는 작업이지만, 자기 자신을 끝없이 의심하는 작업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것을 좋아하니 정욕인가? 이것을 먹고 기쁘니 육적인가? 가족을 사랑하니 혈육의 정에 빠진 것인가? 칭찬을 받고 기쁘니 모든 사역이 거짓이었는가?’ 하는 식으로 가면 영적 삶은 자유를 잃고 끊임없는 자기검열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그렇게 인간을 자기 내면에 갇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악을 발견하면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운 뒤, 다시 주님과 이웃을 향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성과 정욕을 찾아낸다’는 강의의 요청을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모든 감정의 밑바닥을 끝없이 파헤쳐 숨은 죄를 찾아내라는 뜻이라기보다, 실제 생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악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내가 계속해서 사람을 깎아내리는가,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가, 돈 때문에 진리를 양보하는가, 가족의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가, 성적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인격이 아니라 대상으로 보는가, 분노 때문에 사람을 해치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악을 주님 앞에서 다루는 것이 회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회개를 매우 실제적인 생활의 문제로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내적 악을 한꺼번에 볼 수도 없고, 그것을 모두 자기 힘으로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싸우면 그 싸움을 통하여 더 깊은 내면이 열립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양파 껍질을 한꺼번에 벗기는 것처럼 일시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상태에서 상태로 진행됩니다.

 

이것을 ‘리메인스’와 연결해서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AC에서 우리가 계속 만나게 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인간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들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에 보존해 두신 선과 진리를 시험과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성과 정욕을 발견했다고 해서 ‘ 안에는 악밖에 없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AC의 인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온 것은 악하지만, 주님께서 인간 안에 심고 보존하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새로운 생명을 위한 토대가 됩니다.

 

이 차이는 죄론의 분위기를 크게 바꿉니다. 자기 안의 악을 보는 일은 분명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발견의 배후에는 이미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악을 보여 주시는 것은 정죄하여 버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입니다.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어둠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의 어둠을 더 선명하게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영적으로 퇴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진리의 빛 아래 드러나기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죄성’이라는 말도 조금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죄성을 인간 존재의 본질 그 자체처럼 이해하면 ‘나는 존재 자체가 악하다’는 결론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은 악 그 자체가 아닙니다.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온 존재이지만, 동시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생명을 받고 있으며 거듭날 수 있도록 자유와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악한 존재를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악의 지배에서 건져내어 새로운 의지와 이해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성을 죽인다’는 표현도 인간의 인격이나 자아 자체를 파괴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나에게서 선이 나온다’, ‘ 지혜로 진리를 안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라고 여기는 proprium의 지배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proprium의 지배가 내려갈수록 인간은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더 참된 개성을 갖게 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지만 서로 똑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애정과 유용성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합니다. 주님에게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획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고유한 모습을 더 온전히 드러냅니다.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죄론이 가진 강한 ‘자기부인’의 언어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이해는 매우 흥미롭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은 인간 안의 죄성과 정욕을 철저히 찾아내어 끊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촉구합니다. 그 강점은 신앙을 지식이나 교리적 동의에 머물지 않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 삶이 변해야 하고, 숨은 욕망과 싸워야 하며, 하나님보다 앞선 것이 있다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진지한 성화의 요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그러나 누가 그것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집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죄성을 제거하여 마침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자유 가운데 악을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후자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싸워야 하지만 승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성화는 쉽게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악이 물러난 자리는 반드시 선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탐욕을 끊었는데 체어리티가 생기지 않았다면 아직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음란을 끊었는데 결혼의 거룩함과 상대방을 인격으로 존중하는 사랑이 생기지 않았다면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명예욕을 끊었는데 유용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빈자리만 생긴 것입니다. 혈육에 대한 소유욕을 끊었는데 가족의 영원한 선을 바라는 사랑이 생기지 않았다면 사랑 자체가 메말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악을 제거하는 과정’인 동시에 ‘선이 심어지는 과정’입니다. 둘은 함께 갑니다. 거짓이 제거되는 만큼 진리가 자리를 잡고, 악한 애정이 물러나는 만큼 선한 애정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단순한 금욕과 거듭남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금욕은 ‘하지 않는다’에서 끝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사랑한다’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여기서 4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강사가 죄론을 공부하는 목적을 ‘선과 , 빛과 어둠, 영성과 육성, 영적 행실과 육적 행실을 분별하고 철저히 자기 성찰하여 회개생활을 하기 위한 ’이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론의 목적은 죄에 관한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실제 삶에서 그 질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그 변화의 가장 깊은 곳에는 ‘지배적 사랑’의 변화가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향해 살아갑니다. 생각은 그 사랑을 섬기고, 지식도 그 사랑을 섬기며, 심지어 종교도 그 사랑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이면 성경 지식마저 자기 우월감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적이면 자연적 재산과 능력과 지위까지 이웃의 유용성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궁극적인 질문은 ‘내게 욕망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 생명의 중심에서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성’과 ‘정욕의 결합’이라는 이번 강의의 설명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더 깊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애정들이 proprium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섬기는 것이 타락의 질서이며, 거듭남은 그 자연적 애정들이 다시 속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같은 식욕, 같은 재산, 같은 가족, 같은 직업, 같은 재능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움직이는 중심 사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목적은 인간을 ‘욕망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사람에게도 애정이 있고 열망이 있으며 기쁨이 있습니다. 오히려 지상에서보다 훨씬 강하고 순수합니다. 다만 그들은 자기만을 위해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고, 남보다 높아지기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유용성을 수행하기를 기뻐하며, 자기 영광보다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질서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4강 5부의 중심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죄성의 문제는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망이 자기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자기 만족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게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욕망들을 하나씩 잘라내어 무감각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다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공용복 선생의 ‘죄성과 정욕을 철저히 다루라’는 요청은 약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단순히 식욕이나 성욕처럼 눈에 잘 보이는 욕망 몇 가지를 절제했다고 안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내가 옳아야 한다’,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 ‘ 뜻대로 되어야 한다’, ‘ 신앙이 높아야 한다’는 proprium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연적 욕망을 이기는 것보다 종교적인 모습을 입은 자기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 때로는 훨씬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핵심진리’의 죄론과 AC의 거듭남 이해가 서로에게 가장 유익하게 말을 걸 수 있는 자리일 것입니다. ‘핵심진리’는 우리에게 ‘실제로 싸우고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에 ‘ 싸움에서 누구의 힘을 의지하고 있으며, 무엇이 당신의 새로운 사랑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라고 한 질문을 더합니다. 두 질문을 함께 붙들면 죄론은 단순한 금욕도, 단순한 교리도 아닌 실제 거듭남의 문제가 됩니다.

 

이제 4강은 이러한 죄성과 정욕의 문제를 더욱 실제적인 생활의 영역으로 가져가면서, 인간이 자신의 행실을 어떻게 살피고 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하는지로 나아갑니다. 여기에서는 특히 ‘성화’를 죄를 하나씩 제거하여 어떤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이 사람의 의지와 삶을 점점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 사이의 공통점뿐 아니라 차이까지 가장 섬세하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4강 6부에서는 바로 그 ‘성화와 거듭남’의 문제를 중심으로 4강의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4강 6부

죽은 행실 회개한다는 : 큰일보다 생활 구석구석, 그리고 성화는 사랑의 열매로 드러난다

4강의 마지막 흐름은 지금까지 다루어 온 ‘죄성’과 ‘정욕’을 다시 매우 평범한 일상으로 끌어내립니다. 강사는 죄론을 연구하는 목적을 단지 인간의 타락 구조를 설명하는 데 두지 않습니다. ‘죽은 행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있다’고 말합니다. 죽은 행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철저한 회개생활도, 영적인 성장도 제대로 이루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론은 결국 ‘ 가운데 사는 행실’과 ‘어둠 속에 사는 행실’을 생활 속에서 세밀하게 분별하기 위한 공부라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서 4강 전체의 초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죄성’, ‘정욕’, ‘타락’, ‘마귀’ 같은 상당히 무거운 단어들이 등장했지만, 강의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거대한 악행 몇 가지가 아닙니다. 평범한 하루 가운데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무엇 때문에 화를 내며,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작은 불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입니다. 죄론을 공부하는 이유가 죄에 관한 전문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생활 구석구석의 죽은 행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강사가 들었던 ‘밥그릇 밑의 죽은 바퀴벌레’ 이야기가 그래서 단순한 웃음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고 결심하여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에도 감사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불쾌한 상황 하나가 나타나자 방금 전까지의 평안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강사는 바로 그런 순간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던 내면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평소에는 숨어 있어서 자신도 모르던 것이 환경의 자극을 만나 ‘행실’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내적인 사랑과 애정은 외적 상황을 통해 모습을 드러냅니다.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진행될 때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온유하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과 다른 일이 생기고, 무시당하고, 손해를 보고, 기대가 좌절되고, 몸이 불편해질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proprium의 일부가 드러납니다. 시험이 인간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바퀴벌레를 보고 불쾌해진 것 자체를 곧바로 영적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꼭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가 불결한 것을 싫어하고 위험한 것을 피하려는 자연적 반응 자체는 창조된 기능입니다. 문제는 그 자연적 반응이 어떤 마음과 결합하여 밖으로 나타나느냐입니다. 불편을 느끼는 것과 그 불편 때문에 사람에게 분노를 쏟아붓는 것은 다릅니다. 싫은 맛을 느끼는 것과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것도 다릅니다. 자연적인 감각과 영적인 악을 그대로 동일시하면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반응을 죄로 의심하는 과도한 자기검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강의 후반부는 오히려 이 문제를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가져갑니다. 식사에서 음식이 조금 짜더라도 짜증을 내기보다 물을 타서 먹든지 덜 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그런 작은 상황에서 ‘입으로 상급을 쌓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상급을 보실 때 ‘ 사업을 했는가, 교회를 목회했는가, 많은 헌금을 했는가’ 같은 외적 규모를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했는가’를 보신다고 강조합니다. 큰일을 했든 작은 일을 했든, 유명한 사람이든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든 생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죄와 정욕을 회개하면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이 4강 전체에서 매우 귀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앞에서 ‘죄성 제거’, ‘정욕을 십자가에 박음’, ‘이기는 ’, ‘익은 열매’ 같은 매우 높은 단계의 언어가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언어만 듣다 보면 독자는 자칫 성화를 어떤 특별한 영적 경지, 평범한 사람이 좀처럼 도달할 수 없는 높은 단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강의의 끝으로 갈수록 성화의 현장이 다시 식탁과 말투와 사람 관계와 작은 불편으로 내려옵니다. 큰일보다 작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생활의 종교’를 생각하면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천국적인 삶은 특별한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직업과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맡겨진 일을 정직하고 충실하게 수행하고, 다른 사람의 선을 바라며, 불의와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것이 영적인 삶의 실제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야 거듭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직업을 버리고 종교적 활동만 해야 천국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연계의 수많은 관계와 책임 가운데서 선과 진리를 삶으로 만들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 교회를 목회했는가’보다 ‘순간순간 사랑의 열매를 맺었는가’라는 강사의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의미 있게 들립니다. 외적 결과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 안의 사랑이 자기 명예와 자기 지배를 향하고 있다면 영적인 성질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이 자기 가족과 이웃에게 정직하고 온유하게 대하며, 자기에게 맡겨진 작은 쓰임을 충실히 행했다면 그 삶 안에는 실제 천국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급’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강의는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 ‘ 상급’을 쌓을 수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상급을 외부에서 별도로 지급되는 보상으로만 이해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된 선의 행위 안에는 이미 그 행위의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선에서 기뻐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상태가 천국적 상급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나중에 상을 받는다’는 계산으로 선을 행하면 아직 자기 유익이 목적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 일이 선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웃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행하고 그것 자체에서 기쁨을 얻는다면 선과 상급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천국은 공로점수를 많이 모은 사람이 더 좋은 상품을 받는 곳이 아니라, 각 사람이 사랑하는 선과 쓰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행복을 받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강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의 내용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말과 행함’은 천국에서 상급받지 못하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버리고 주님께서 칭찬하실 은밀한 선행을 하라는 방향으로 강의가 마무리됩니다. 결국 4강의 죄론이 도착하는 곳은 ‘죄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고 있느냐’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귀결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의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을 조금 더 정밀하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죄성의 뿌리가 제거되고, 영적 할례를 받고, 생명과를 먹으며,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어 ‘익은 열매’가 되는 비교적 분명한 완성 단계가 강조됩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성화가 사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 있는 동안 가능하며, 그런 사람들이 ‘처음 익은 열매’, 곧 이기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거듭남이 단지 죽은 뒤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연계의 삶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분명합니다. 인간이 이곳에서 자유와 이성을 가지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의지와 이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실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공용복 선생의 강한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그러나 ‘완성’을 말하는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 안의 모든 유전적 악이 존재론적으로 뿌리째 뽑혀 다시는 아무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악은 주님에 의해 질서 아래 놓이고 억제되며, 인간은 그 악을 사랑하지 않고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에게서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proprium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선하지 않으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계속 흘러온다는 것을 압니다.

 

이 점은 ‘성화’를 자기 소유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안전장치가 됩니다. ‘나는 죄성 문제를 해결했다’, ‘나는 익은 열매다’, ‘나는 생명과를 먹은 사람이다’라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확정적으로 소유하기 시작하면, 역설적으로 그 순간 proprium이 가장 거룩한 옷을 입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명예욕은 버렸지만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명예’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용복 선생의 전승 안에도 이 위험을 완화하는 매우 귀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앞서 확인했듯 ‘훌륭한 성도는 무엇을 많이 가진 사람도,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라 회개를 잘하는 성도’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를 잘 지키지 못하더라도 진리는 낮추지 말고 그대로 증거하되, 자신의 부족함은 회개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높은 ‘완전’의 언어와 함께 반드시 붙들어야 할 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은 ‘나는 이제 회개할 것이 없다’로 가기보다 오히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짐에 따라 자기 안의 더 미세한 동기까지 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간음과 도둑질 같은 큰 악만 죄로 보였는데, 나중에는 말 한마디 안의 자기 자랑, 사람을 은근히 낮추는 마음, 감사받고 싶은 동기,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아집까지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퇴보가 아닙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 햇빛이 희미할 때는 방 안이 깨끗해 보이지만 강한 햇빛이 들어오면 공중의 먼지까지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 더 깊이 들어올수록 자기 proprium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드러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 ‘나는 안에서 악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오히려 ‘악을 빨리 알아차리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께 돌이키는 ’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공용복 선생의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훌륭한 성도’라는 말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꽤 아름답게 만납니다. 완전함을 자기 무결점의 확신으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빛 앞에서 계속 자기 것을 내려놓으며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상태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화’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영혼을 완성하여 하나님께 제출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자신의 질서를 세워 가시는 과정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회개’도 죄책감을 오래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강의는 죄와 정욕을 ‘철저히 회개’하라고 반복하지만, 스베덴보리의 회개에는 반드시 실제 생활의 변화가 포함됩니다. 악을 보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다음 실제 상황에서 그것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화를 내고 나서 오래 자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한 번 말을 삼키는 것이 회개의 실제 열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강의가 말하는 ‘생활 구석구석’과도 정확히 만납니다. 대단한 순교의 순간이 와야만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찾아오는 작은 선택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끊고 싶을 때 기다려 주는 것, 내 공로를 이야기하고 싶을 때 입을 다무는 것,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즉시 변명하지 않는 것, 불편한 사람에게도 필요한 친절을 베푸는 것,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는 것 같은 작은 선택들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사랑과 진리가 실제 자연적 삶 속에 내려옵니다.

 

다른 강의에서 소화 데레사를 예로 들어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사람이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감당했다’고 설명하고, 생활 속의 ‘작은 원수’ 앞에서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오래 참는다’는 말씀을 적용해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한 것도 바로 이 전통의 일관된 방향을 보여 줍니다. 거대한 ‘익은 열매’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작은 일상의 선택을 통해 익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익은 열매’를 특별한 신비 체험이나 높은 영적 상태의 자기 인식으로만 이해하면 평범한 성도는 언제나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은 관계와 작은 말과 작은 책임 안에서 선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열매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천국적 생명은 특별한 장소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엌과 식탁과 사무실과 교회 복도와 전화 한 통 속에서도 자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자연적 차원에까지 선과 진리가 내려와야 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속으로 좋은 생각만 하고 실제 행위가 없다면 거듭남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선은 의지를 통하여 행위가 되어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적인 행위가 영적인 것의 최종적인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연계에 살아 있는 동안의 실제 행위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자연적 삶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그것이 인간의 생명에 고정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행실’의 반대는 단순히 ‘종교적으로 보이는 행실’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는 행실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진리를 통하여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똑같이 설교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식사하고, 일하지만 그 안을 움직이는 생명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기 인정과 자기 유익이 움직이면 외관은 선해도 내적인 성질은 달라지고, 체어리티와 쓰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하면 일상적인 작은 행동 안에도 천국적 생명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4강 전체가 처음과 끝에서 아름다운 원을 이룹니다. 처음에는 ‘죄론을 공부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답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그렇다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답은 거대한 사건보다 ‘생활 구석구석’입니다. 결국 죄론은 지옥의 죄 목록을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라, 내 삶의 작은 자리들에서 어떤 사랑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를 살피는 공부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4강의 강점을 상당히 높이 보고 싶습니다. 죄를 추상적인 ‘원죄’나 법적인 유죄 상태로만 놓아두지 않고, 사람의 애정과 욕망과 행실까지 들어가 실제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문제는 끝났다’는 식으로 삶의 변화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신앙이 실제 성품과 행동에까지 내려와야 한다는 긴장은 매우 귀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여기에 계속 보태는 것은 세 가지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연적 애정과 욕망 자체를 악으로 만들지 말고 그 ‘질서’를 보자는 것입니다. 둘째, 죄와 싸우는 인간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셋째, 성화를 ‘죄가 전혀 없는 자기완성’보다 지배적 사랑이 변화되어 선과 진리가 삶의 기쁨이 되는 거듭남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특히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과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완전히 같은 표현이 아닙니다. 전자는 두려움이나 억압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후자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단지 악을 못 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자유이고 기쁨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완성 방향은 ‘하지 않음’에서 ‘사랑하여 행함’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의 마지막 찬양의 ‘사랑으로 행하라’는 방향과도 잘 만납니다. 결국 오랜 죄론 강의의 마지막 말이 ‘죄를 무서워하라’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라’가 된다는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벗는 목적이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정욕의 지배를 끊는 목적도 더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자기중심적 만족을 내려놓는 목적도 주님과 이웃의 선에서 기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4강 전체를 관통했던 ‘정욕’이라는 말도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정욕은 이 강의의 용법에서 인간의 애정과 욕망을 넓게 가리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모두 악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자연적 기능으로 주어졌지만 타락하여 자기중심적 방향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자연적 애정들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간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애정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 아래 다시 질서 있게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식욕도 쓰임을 섬기고, 재물도 쓰임을 섬기며, 명예도 쓰임을 섬기고, 가족 사랑도 그 사람의 영원한 선을 섬깁니다. 인간의 자연적 삶 전체가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린다’보다 더 깊은 변화일 수 있습니다. 물건을 버리기는 비교적 쉬울 수 있지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은 훨씬 깊은 질서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칭찬을 전혀 듣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는 것보다 칭찬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영광으로 붙잡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자유일 수 있습니다. 가족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가족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 ’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사랑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 사랑에 지배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거듭남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자연계의 삶과 쓰임을 매우 중요하게 보는 이유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자연계 밖으로 꺼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 안에 천국의 질서를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삶도 무위와 정지가 아니라 쓰임의 삶입니다. 사람은 지상에서부터 그 쓰임의 기쁨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4강의 ‘생활 구석구석’이라는 표현은 아주 좋은 끝맺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영계 지식도, 복잡한 종말론도, 성화의 단계도 결국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생명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특별한 지식이 많지 않아도 하루의 작은 관계들 속에서 악을 죄로 피하고 선을 사랑하며 쓰임을 행하는 사람 안에는 이미 천국의 질서가 형성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훌륭한 성도’라는 말도 다시 떠올릴 만합니다. 완전한 사람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 아래 무엇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훌륭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익은 열매’와 함께 읽으면 ‘핵심진리’의 성화론을 지나치게 딱딱한 완전주의로만 읽지 않게 해 주는 중요한 균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한 문장을 더할 수 있겠습니다. ‘회개를 잘한다는 것은 자기 악을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실제로 돌아서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삶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마지막은 죄책감이 아니라 새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이번 4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죄론의 목적은 인간을 죄에 사로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주님의 생명을 막고 있는지를 발견하여 그것을 회개하고,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게 하는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더하면 이렇게 깊어집니다. ‘ 열매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가운데 악을 물리칠 주님께서 그의 의지와 안에 심어 자라게 하시는 선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해서 4강은 6부로 마무리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처음에는 ‘죄란 무엇인가’에서 출발하여 ‘정욕’, ‘죄성’, ‘사랑의 질서’, ‘십자가에 박음’, ‘가족애와 대환란’, ‘성화와 거듭남’을 지나 마지막에는 ‘생활 구석구석의 사랑의 열매’로 돌아왔습니다. 앞서 한 편으로 너무 압축해서 보았을 때보다, 이렇게 여섯 부분으로 따라오니 이 강의가 단순히 ‘욕망을 죽이라’는 금욕 강의가 아니라 ‘무엇이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것이 실제 생활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묻는 꽤 치밀한 죄론이라는 점이 훨씬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이 이 강의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정욕의 제거’보다 ‘사랑의 질서 회복’, ‘인간의 성취’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쪽으로 한층 더 깊게 열어 줄 수 있다는 것도 보입니다.

 

 

 

SY.58,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5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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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설교는 앞서 살펴본 ‘하나님께 묻는 삶’보다 서사라 목사의 영성을 훨씬 더 깊은 곳까지 보여 주는 설교입니다. 첫 설교에서 중심이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는 삶’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응답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영적 장소를 ‘지성소’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역대하 5장의 솔로몬 성전과 언약궤, 그룹들, 지성소를 출발점으로 삼아 성막의 뜰과 성소와 지성소를 기도의 깊이에 대응시킵니다. 그리고 회개 역시 뜰에서 이루어지는 회개,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회개,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회개가 서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깊은 ‘지성소의 회개’는 단순히 죄를 고백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회개가 아니라, 성령의 강한 역사로 죄를 깊이 깨닫고, 그 죄에서 실제로 돌아서 다시는 그 죄에 지배되지 않게 되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먼저 이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성소-지성소’라는 구조를 인간의 영적 깊이와 연결하려는 발상 자체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익숙한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던 건축물이 아닙니다. 그 구조와 기구와 재료와 배치 전체가 천국과 주님, 그리고 거듭나는 인간의 내면을 표상합니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내적인 것, 더욱 높은 천국의 것, 궁극적으로 주님에게 속한 것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서사라 목사가 성막을 설명하면서 ‘뜰에 머무는 신앙이 있고, 성소까지 들어가는 신앙이 있으며, 지성소까지 들어가는 신앙이 있다’는 식으로 영적 적용을 시도하는 것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성경 이해와 의외로 가까운 출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출발점에서 곧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서사라 목사는 이 구조를 주로 ‘기도의 깊이’와 연결합니다. 특히 방언으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기도하면서 점점 깊이 들어가, 마침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경험적 구조를 제시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한 시간 정도 기도하면 어느 단계까지 가고, 두세 시간 방언기도를 계속하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경험이 나타날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하며, 이미 오래 훈련된 사람은 더 자주 그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상당히 신중해집니다. 왜냐하면 성막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본질적으로 ‘기도시간의 양적 증가’를 표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그리고 더욱 내적인 천적 차원으로 들어가는 질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몇 시간을 기도했느냐보다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얼마나 주님에게로 돌이켜졌느냐와 관계됩니다. 한 시간 기도한 사람이 뜰에 있고, 세 시간 기도한 사람이 지성소에 있다는 식의 공간적, 시간적 대응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시간 기도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세상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을 주님께 집중하고, 자기 욕망과 잡념을 내려놓으며 기도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내면을 정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의 영적 공식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오래 기도하면 더 깊은 영적 공간에 들어간다’는 공식이 형성되면, 영적 상태의 깊이가 기도시간이나 체험의 강도로 측정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체험의 강도가 아니라 사랑의 질입니다. 천국의 가장 깊은 곳은 가장 강렬한 환상을 보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을 가장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 설교의 중심인 ‘회개’로 들어가면, 서사라 목사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상당히 좁아집니다. 설교자는 회개를 세 단계처럼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입술로 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그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다시 반복하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는 정말 죄를 짓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진심으로 회개하지만,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다시 넘어지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가 ‘지성소에서 드리는 회개’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의 빛 가운데 자기 죄의 실상을 너무나 깊이 깨닫고 통회하며, 그 결과 실제로 그 죄에서 벗어나 다시 그 죄에 지배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부분은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하게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회개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확인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나 순간적인 죄책감을 진정한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살피고, 자기 안에서 특정한 악을 발견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죄임을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실제 생활에서 그 악과 싸워 그것을 피해야 합니다. 결국 회개의 진실성은 ‘얼마나 슬퍼했는가’보다 ‘그 악을 실제로 죄로 여기고 떠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서사라 목사는 심지어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회개가 안 된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진심으로 죄를 자백했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믿어야 하며, 눈물이 나지 않았다고 해서 용서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균형입니다. 설교 전체에는 통곡과 강렬한 성령 체험이 상당히 강조되어 있지만, 적어도 눈물 자체를 구원의 조건이나 회개의 절대 기준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서사라 목사의 설명에서는 가장 깊은 회개가 이루어질 때, ‘회개의 영’이 강하게 임하고, 죄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며, 통곡이 터지고, 그 결과 그 죄를 다시 짓지 않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하고 아름다운 회심 경험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에게 어떤 악의 추함이 갑자기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고, 그것을 진심으로 혐오하게 되어 삶이 크게 바뀌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 전체를 이 한 번의 강렬한 체험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거듭남은 대체로 훨씬 길고 깊은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악을 깨닫고 버리기로 결심했는데도 다시 넘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 싸우고, 또 넘어지고, 다시 주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에게 숨어 있던 더 깊은 동기와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차례로 드러납니다. 자신은 이미 어떤 악을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악의 더 깊은 뿌리가 남아 있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짜 회개를 했으면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는다’는 표현은 회개의 지향점을 말하는 것으로는 매우 좋지만, 거듭남의 실제 과정을 설명하는 명제로 사용하면 지나치게 단순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싸움’입니다.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과 맞서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유혹입니다. 그리고 싸움이 반복되면서 이전에 즐거웠던 악이 점차 싫어지고, 처음에는 힘들게 행했던 선이 점차 자연스러워집니다. 결국 주님께서 인간의 사랑 자체를 바꾸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는 능력이 단번에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처럼 설명하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이성 안에서 끊임없이 역사하시며, 그의 사랑의 질서를 바꾸어 가신다고 보는 것이 더 스베덴보리적입니다.

 

여기서 ‘지성소’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서사라 목사에게 지성소는 상당히 체험적인 공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때로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는 것을 경험하는 곳처럼 묘사됩니다. 설교 후반에는 자신이 하나님께 ‘얼굴을 보여 달라’고 구했던 개인적 체험까지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임을 깨달았다는 취지로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결론과 조심해야 할 과정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결론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거나 어떤 영적 형상을 경험했다는 문제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훨씬 세밀해집니다. 영계에서는 모든 것이 상응을 따라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빛이나 얼굴이나 인물이나 장소를 보았다고 해서, 그 보이는 형상을 곧바로 하나님의 본체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그 경험을 해석하는 문제는 별개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서사라 목사의 천국, 지옥 체험을 살펴볼 때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무언가를 보았다’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안다’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구별을 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영계의 현상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영계에서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상응을 따라 나타나는지, 영들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지, 인간이 그 경험을 어떻게 오해할 수 있는지를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사라 목사의 체험을 처음부터 ‘거짓이다’라고 배척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직접 보았다니 그대로 사실이다’라고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방언기도를 다루는 부분 역시 같은 원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로마서 8장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말씀을 장시간 방언기도와 연결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더라도 성령께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방언기도 시간을 늘려 갈 것을 상당히 강하게 권합니다. 여기에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겸손한 전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앞 설교의 ‘하나님께 묻는 삶’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높으므로 자기 판단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로마서 8장의 이 구절을 곧바로 장시간 방언기도의 기술적 근거로 연결하는 것은 별도의 해석적 검토가 필요합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바울서신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복음서,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속뜻을 가진 말씀의 범주와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로마서의 한 구절에서 영적 세계의 구조를 세밀하게 끌어내기보다, 서사라 목사가 이 구절을 통해 말하려는 핵심, 곧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지 못하므로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원리를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그리고 이번 설교에서 제가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사실 ‘지성소 체험’도 ‘방언 세 시간’도 아닙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성소 단계의 회개를 설명하면서 ‘나는 정말 다시는 화를 내고 싶지 않았는데 또 화를 내고 말았다’는 식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바로 여기에 거듭남의 실제 현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을 원하지만 옛 욕망이 다시 일어납니다.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것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힘의 한계를 경험합니다. 서사라 목사는 이것을 ‘자기 절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자기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처음에는 ‘내가 결심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싸움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목적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proprium에 대한 신뢰를 꺾는 것입니다. ‘내가 선해질 수 있다’는 자기 의를 내려놓고, 선의 능력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실제 경험으로 배우게 됩니다. 이 점에서는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자기 절망 성령의 도움 죄를 이기는 능력’이라는 흐름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 사이에 상당히 의미 있는 접점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리메인스’, ‘유혹’, ‘자유’, ‘이성’,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훨씬 긴 과정을 더합니다. 인간의 변화는 어느 순간 강력한 영이 임하여 이전의 악을 단숨에 없애는 사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선과 진리의 상태들, 이후 받아들인 말씀의 진리들, 삶에서 겪는 수많은 영적 싸움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성소는 어떤 황홀한 영적 경험의 ‘최종 방’이라기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깊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설교에서 말하는 ‘-성소-지성소’를 조금 다르게 다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뜰은 아직 외적인 종교생활에 가까운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라고 하니까 죄라고 하고, 회개하라고 하니까 회개하지만, 아직 그 진리가 자기 내면의 사랑과 충분히 연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소로 들어가면 진리가 인간의 이해성과 양심에 들어옵니다. ‘이것은 정말 악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진심으로 깨닫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지성소에 해당하는 더욱 내적인 상태에서는 그 진리가 단지 ‘해야 할 의무’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과 결합합니다. 이제 악을 피하는 이유가 벌이 두렵거나 명령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악 자체가 주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해치는 것이어서 싫어집니다. 반대로 선은 명령받았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가 좋아집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서사라 목사가 말하고 싶었던 ‘지성소의 회개’도 오히려 더욱 깊어집니다. ‘한 번 크게 울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보다 더 깊은 변화가 됩니다.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악을 싫어하게 되고, 선을 억지로 행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외적 행동 하나가 고쳐지는 것을 넘어 그 행동을 낳던 애정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첫 번째 설교와 두 번째 설교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첫 설교에서는 ‘하나님께 물어라’였습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지성소까지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라’입니다. 두 설교 모두 서사라 목사의 영성에서 매우 강한 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신앙을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하나님과의 교통과 경험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설교가 많은 사람에게 강하게 다가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교리적 대상이 아니라 지금 묻고, 듣고,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놀랍게도 하나님을 추상적 교리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순간에 주님에게서 생명이 흘러들어오고 있으며, 천국 전체가 주님의 신성으로 살아 있고, 인간은 그 인플럭스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는 둘 사이에 매우 깊은 공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만남’을 특별한 체험에 집중시키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가장 깊은 결합은 무엇을 보고 듣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안에 받아들여져 그의 삶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지성소까지 들어가라는 권면의 방향은 귀하지만, 그 지성소를 장시간 방언기도 끝에 도달하는 특별한 영적 체험의 장소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가장 깊은 사랑에까지 들어가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상태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러면 ‘지성소에서 드리는 회개’도 달라집니다. 그것은 가장 많이 울어 본 회개도 아니고, 가장 강렬한 임재를 체험한 회개도 아니며, 가장 오래 방언기도한 사람이 도달하는 회개도 아닙니다.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실제 삶에서 그것을 피하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싸우고, 그렇게 오랜 거듭남을 통하여 마침내 이전에 사랑하던 악을 싫어하고, 이전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사랑 안에서 주님과 인간이 결합합니다.

 

그 의미에서 서사라 목사의 이 설교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무언가를 잘라내기보다 한 단계 더 깊게 가져갈 수 있는 내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회개는 실제로 죄에서 돌아서는 데까지 가야 한다’, ‘자기 힘으로는 그것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신앙은 외적인 종교행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중심 메시지는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성소-지성소’를 기도시간과 체험의 단계로 고정하고, 강렬한 회개 체험이 곧 악의 완전한 제거를 보증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거듭남의 질서가 중요한 보완을 제공합니다.

 

결국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언약궤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 ‘얼마나 강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그 선과 진리가 인간의 가장 깊은 사랑 안에 자리 잡고, 거기에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스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성막 전체가 주님의 거처가 되어 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말의 가장 깊고도 실제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SY.55, 서사라 목사, ‘하나님께 묻는 자와 묻지 않는 자의 결말’ (2019010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서사라 목사의 ‘하나님께 묻는 삶’이 설교는 열왕기하 1장의 아하시야 왕 이야기와 마태복음 7장 12절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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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설교는 열왕기하 1장의 아하시야 왕 이야기와 마태복음 712절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의 중요한 태도를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곧 ‘하나님께 묻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병들었을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묻지 않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낸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설교자는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행위이며, 묻지 않는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태도’라고 전개합니다. 설교 후반으로 갈수록 이 ‘묻기’는 단순히 성경을 읽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차원을 넘어 꿈, 환상, 직접적인 말씀, 설교, 다른 사람의 말, 그리고 마음속으로 즉시 들어오는 응답까지 포함하는 매우 구체적인 영적 의사소통으로 발전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이번 설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볼 대목입니다.

 

먼저 이 설교의 중심 명제 자체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상당히 깊게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지혜만으로 살아서는 안 되며, 자신의 삶이 주님에게서 비롯되고 주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영적 오류 가운데 하나는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과 지혜가 나오는 것처럼 여기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마치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의지하며 스스로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사라 목사가 반복해서 말하는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그분이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이라는 가르침에는 상당히 중요한 영적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하시야 이야기를 선택한 것도 이 점에서는 적절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아하시야가 ‘질문을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에 관한 답을 어디에서 구했느냐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이야기에서는 여호와를 떠나 바알세붑에게 묻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를 영적으로 넓혀 읽으면 인간이 삶의 근원과 방향을 주님에게서 찾지 않고 자기 지성, 세속적 판단, 욕망, 미신, 또는 다른 어떤 피조된 것에서 찾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는 질문은 오늘의 신앙인에게도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이 됩니다. ‘나는 실제로 무엇을 최종 권위로 삼으며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또한 설교자가 ‘하나님의 생각과 생각이 다를 있기 때문에 물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부분 역시 중요한 통찰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 애정과 욕망에 따라 사물을 보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는 그 사람의 사랑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참이라고 보고, 무엇을 중요하다고 판단하는지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고 ‘혹시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르지 않은가?’ 하고 자신을 살피는 태도는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의 ‘묻는 사람’은 단순히 신비한 응답을 많이 받는 사람이 아니라, 더 깊게 보면 자기 뜻을 절대시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대목도 있습니다. 서사라 목사는 성경에 이미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 용서를 명한다면 ‘하나님, 제가 사람을 용서할까요?’라고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어디로 이사할 것인가’, ‘어느 대학에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처럼 성경에 구체적인 답이 적혀 있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적어도 여기에서는 개인적 계시나 음성이 성경 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을 존중하려는 질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 묻고 기다리면 ‘’, ‘환상’, ‘직접적인 말씀’, ‘설교’, ‘다른 사람의 ’, 그리고 훈련이 깊어질 경우 질문하자마자 마음속으로 오는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서 답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은 예전에는 응답을 얻기 위해 금식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훈련이 많이 되어’ 물으면 거의 즉시 응답이 온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그리고 청중에게도 자주 묻는 훈련을 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깊어지고 응답을 더 빨리 알 수 있다고 권합니다.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할 것입니다. 영계로부터 인간에게 생각과 애정이 흘러들어온다는 사실 자체는 스베덴보리에게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애정이 인플럭스를 통해 들어온다고 끊임없이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을 ‘생산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흐름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 점만 놓고 보면 ‘마음 안으로 어떤 생각이 들어온다’는 서사라 목사의 경험 자체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곧바로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어떤 생각이 안에 분명하게 들어왔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라는 판단은 전혀 같은 명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는 오히려 이 둘을 매우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천사들을 통한 인플럭스도 있고, 악한 영들을 통한 인플럭스도 있으며, 자신의 기억과 애정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경험되는 수많은 사고도 있습니다. 더욱이 영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사람의 생각 속으로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그 출처를 모르면 그것을 완전히 ‘ 생각’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강렬하거나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주님이 직접 주신 말씀’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서사라 목사의 ‘자꾸 묻다 보면 하나님의 응답 방식을 알게 되고, 훈련되면 거의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을 있다’는 표현은 장점과 위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장점은 분명합니다. 하루의 삶을 주님과 무관하게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작은 일에서도 주님을 생각하며 자기 뜻을 내려놓으려는 훈련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주일예배나 교리적 고백에 가두지 않고 일상 전체로 가져오게 합니다. ‘갈까요, 말까요, 이것을 할까요, 저것을 할까요’ 하는 순간에도 주님을 기억하라는 권면에는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질문 내면의 응답 하나님의 확인’이라는 거의 자동적인 체계로 굳어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사람은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오인할 수 있고, 불안이나 두려움에서 생긴 생각을 계시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반복적으로 어떤 응답을 기대하다 보면 결국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응답’이라고 해석할 위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응답을 얼마나 빨리 듣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이 진리와 선에 의해 얼마나 새로워지고 있느냐입니다. 천국은 음성을 잘 듣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여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는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게 바꾸어 표현한다면, ‘주님의 뜻을 알려 달라고 계속 신비한 신호를 요구한다’기보다 ‘말씀 앞에서 자기 욕망과 판단을 내려놓고, 이성과 자유를 사용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살피며, 그렇게 깨달은 진리를 행할 힘을 주님께 구한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듭니다. 주님은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매 순간 ‘왼쪽으로 가라, 오른쪽으로 가라’ 하며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그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사랑하고 선택하여 마침내 자기 생명처럼 살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섭리를 이해하는 데서도 중요합니다. 설교를 그대로 밀어붙이면 자칫 ‘하나님께 물었으면 실패하지 않았을 텐데, 묻지 않아서 실패했다’는 구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설교자는 ‘우리 인생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취지까지 강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섭리는 이렇게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충실히 사는 사람도 외적으로는 실패할 수 있고, 병들 수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길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에게 항상 외적 성공의 정답을 알려 주는 체계가 아니라, 심지어 인간의 실수와 고난까지도 허용하시면서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악에서 돌이켜 선으로 인도하시는 무한히 깊은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묻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다’보다 ‘묻는 사람은 실패 속에서도 주님에게로 다시 돌아간다’고 말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다윗 역시 늘 완벽한 선택을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고 죄를 범한 뒤에도 다시 주님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돌이켰다는 데 있습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람은 모든 선택에서 초자연적 정답을 미리 전달받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깨달을 때 그것을 자기 합리화로 덮지 않고 주님의 빛 가운데 인정하며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설교 후반의 ‘영에 속한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며, 먼저 묻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자동자막이 심하게 흐트러져 있지만 전체 문맥에서는 이 뜻이 비교적 분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영적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표현하면 겉 사람에게 즉각 솟아나는 충동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속 사람의 더 높은 원리 아래에서 그것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분노가 올라온다고 곧 말하지 않고, 욕망이 생긴다고 곧 행동하지 않으며, 자기 판단이 옳아 보인다고 즉시 결정하지 않는 것, 이것은 실제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다만 그 ‘멈춤’의 다음 단계가 반드시 ‘어떤 내적 음성이 때까지 기다린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 양심, 이성적 숙고,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 책임, 현실적 조건을 함께 살피는 것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보다 낮은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보존하면서 역사하십니다. 사람이 모든 결정을 직접적인 음성에 의존하게 되면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이성과 자유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서사라 목사의 설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에 상당히 흥미로운 대비가 생깁니다. 서사라 목사의 언어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매우 ‘대화적’입니다. 사람이 묻고 하나님께서 답하시며, 그 응답을 알아듣는 능력이 훈련을 통해 발달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끊임없는 교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통은 대부분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으로 선을 흘려보내시고, 천국을 통해 진리를 비추시며, 동시에 인간이 그것을 마치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원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그의 자유를 보존하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강렬한 체험보다 오히려 어느새 선을 사랑하게 되고, 진리를 기뻐하며, 악을 싫어하게 된 변화가 주님의 임재를 더 깊이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서사라 목사의 영적 체험 전체를 앞으로 살펴볼 때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될 것 같습니다. ‘무엇을 보았는가’, ‘무슨 음성을 들었는가’, ‘누구를 만났는가’만으로 참과 거짓을 결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한 걸음 더 들어가 묻게 됩니다. ‘ 체험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가? 자기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하는가, 아니면 더욱 겸손하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가? 외적 현상에 집착하게 하는가, 아니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게 하는가? 개인에게 주어진 말을 절대화하게 하는가, 아니면 말씀의 보편적 진리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하는가?’ 결국 영적 체험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그 체험의 화려함이 아니라 사랑과 삶의 변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설교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중심이 분명히 있습니다. ‘ 인생은 것이므로 내가 알아서 산다’는 태도에서 벗어나, ‘주님이 나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나는 그분의 뜻을 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점입니다. 또한 성경에 이미 명백히 주어진 명령을 개인적 응답으로 뒤집어서는 안 된다는 구분도 중요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말고, 잠시 멈추어 주님의 뜻을 구하라는 권면 역시 거듭남의 실제와 접점이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묻는다’를 ‘내면에서 특정한 문장 형태의 응답을 받아내는 ’과 지나치게 동일시하지 않는 보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양심을 통해, 이성을 통해, 이웃을 통해, 현실의 질서를 통해, 때로는 문이 닫히고 열리는 섭리의 과정 전체를 통해 인간을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인도는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라는 개별 질문에 대한 즉답보다, 그 사람이 선한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버려야 할 핵심 메시지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심은 상당히 소중합니다. ‘주님께 묻고 살아라.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말라.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라.’ 다만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이면 훨씬 온전해집니다. ‘그리고 안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곧바로 주님의 음성이라고 여기지는 말라. 말씀의 진리와 , 이웃 사랑, 이성과 자유 안에서 그것을 살펴라.’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 묻는 ’의 가장 성숙한 모습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이것 할까요, 저것 할까요?’라고 답을 받아 움직이는 삶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랜 거듭남을 거쳐 주님의 뜻이 점차 자기 마음의 사랑이 되고, 그래서 특별한 음성을 듣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진실을 선택하고, 이웃을 배려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게 되는 상태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가 부모에게 매 순간 ‘이거 해도 돼요?’라고 묻지만, 성장할수록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여 묻지 않아도 그 뜻에 합당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신앙의 성숙도 어쩌면 그와 같습니다. 주님께 묻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주님의 뜻이 자기 생명 안에 새겨져 살아 있는 ‘대답’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이번 서사라 목사의 첫 설교가 앞으로 이어질 천국·지옥 체험 해설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이 설교만 보아도 서사라 목사의 신앙세계에서 ‘하나님이 지금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며, 인간은 음성을 실제로 듣고 분별할 있다’는 전제가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의 천국 방문, 주님과의 대화, 천국 인물들과의 만남 등을 살펴볼 때도 결국 핵심 질문은 동일할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경험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멈추지 않고, ‘영계로부터 오는 경험은 어떤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며, 그것을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를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접근할 때 서사라 목사의 증언을 성급히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체험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균형 잡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능하겠습니다.

 

 

 

SY.56, 서사라 목사, ‘지성소에서 드리는 회개’ (2019090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설교는 앞서 살펴본 ‘하나님께 묻는 삶’보다 서사라 목사의 영성을 훨씬 더 깊은 곳까지 보여 주는 설교입니다. 첫 설교에서 중심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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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의 성경적 출발점은 사사기 31절의 매우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시려고’ 몇몇 민족을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에서 곧바로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명제를 끌어내고, 그것을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안보 현실, 북한과 공산주의, 주한미군,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대결에 연결합니다. 이어 사사기 전체를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다시 번성’이라는 순환구조로 설명하고, 이것을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에 적용합니다. 설교의 성경적 골격 자체는 분명히 사사기의 중요한 특징 하나를 포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남, 압제당함, 부르짖음, 사사가 일어남, 구원받음, 다시 타락함이라는 반복 구조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사사기 3장의 ‘전쟁을 알게 하심’은 설교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가리킵니다. 말씀에 기록된 전쟁은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전쟁이지만, 말씀의 속뜻에서 전쟁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 곧 시험을 표상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려면 반드시 이 싸움을 통과해야 합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고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악한 욕망이 일어날 때 그것을 거절하고, 거짓된 생각이 밀려올 때 진리를 붙들며,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전쟁을 배우는 ’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본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졌지만, 모든 적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민족들은 그대로 남겨졌습니다. 자연적 의미만 보면 ‘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셨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놀랍도록 정확한 인간의 영적 현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처음 주님께 돌아왔다고 해서 자기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악을 보게 하시고, 싸우게 하시며, 이기게 하십니다.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악은 당분간 잠잠하게 남겨 두십니다. 그것까지 한꺼번에 드러난다면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악을 좋아하셔서 보존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영적 성장을 위해, 시험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난 여호수아 설교에서 살펴본 ‘허용의 섭리’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지만, 악이 사람에게 드러나고 그것과 싸우는 과정까지 섭리 안에 사용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악이 있는지도 모른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은 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숨어 있던 악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사기 31절의 ‘전쟁을 알지 못한 자에게 전쟁을 알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은 외부의 군사전쟁보다 먼저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설교자가 ‘전쟁을 모르면 인간이라고 없다’고 강하게 표현했는데, 그 표현을 영적으로 바꾸어 보면 오히려 깊은 진리가 됩니다. 거듭남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 싸움을 알게 됩니다. 자기애와 이웃 사랑이 충돌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가 충돌하며, 탐욕과 정직이 충돌하고, 자기 지혜를 믿고 싶은 마음과 주님의 지혜를 의지해야 한다는 신앙이 충돌합니다. 이 싸움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악을 아직 심각하게 대면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전쟁’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다만 그 적은 먼저 북한이나 공산주의자나 특정 정당의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번 설교와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중요한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설교자는 성경의 ‘가나안 전쟁’을 거의 즉시 대한민국의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옮겨 갑니다. 6·25전쟁, 북한, 주한미군, 특정 대통령과 정치세력, 광화문 집회가 계속해서 사사기의 ‘전쟁’과 겹쳐집니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말씀은 밖의 적을 찾아내기 전에 내 안의 적을 찾아내도록 사람을 이끕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블레셋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오늘날의 어떤 정치세력이나 종교집단을 지목하기 시작하면, 말씀은 쉽게 타인을 공격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 안의 블레셋은 무엇인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말씀은 나를 회개시키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이 일관되게 후자를 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주님의 나라와 지옥 사이의 싸움입니다.

 

설교자가 제시한 ‘사사기의 사이클’도 이 관점에서 읽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설교에서는 ‘번성하면 부패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잘되고 형편이 좋아지면 교만해지고, 심지어 ‘여자 하나 가지고 살고 바람을 피게 된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예도 듭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께서 ‘매를 때리시고’, 징계를 받은 사람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사사를 보내 회복시키며, 다시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반복되는 타락을 아주 쉽게 기억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실제 영적 사이클은 단순한 ‘경제적 번성도덕적 부패재난기도경제적 회복’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보면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김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거짓과 악에 사로잡힘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없음을 깨달음주님께 도움을 구함진리를 통한 구원새로운 영적 자유’의 순환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번성’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번성이 언제나 돈이 많아지고 사업이 잘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번성과 증가는 선과 진리가 많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이웃을 섬기는 기쁨이 늘어나며, 말씀을 이해하는 빛이 밝아지는 것이 진정한 번성입니다. 그러므로 ‘번성하는 상태에 계속 있으라’는 설교자의 권면을 영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대단히 좋은 권면이 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말고 계속 주님께 돌려드리라’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타락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평안해지면 여호와를 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생활에서도 반복됩니다. 시험 가운데 있을 때는 간절히 기도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자기 힘으로 해결한 것처럼 느낍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선을 자기 성품과 능력으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proprium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마침내 자기가 선하고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지닙니다.

 

따라서 ‘번성하면 부패한다’는 설교자의 관찰은 영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번성 그 자체가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풍성함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 ’으로 돌리는 순간입니다. 천사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과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주 가진 것이 적은 사람도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며 교만하면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패의 원인은 풍요가 아니라 appropriation, 곧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어 ‘부패하면 하나님이 때리신다’, ‘뒤지도록 맞는다’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성경의 문자에는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가 그렇게 표현되는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분노하시거나 사람을 해치기 위해 매를 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며 자비 그 자체이십니다. 사람이 악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 악 자체가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가능한 한 사람을 구원 쪽으로 돌리십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때리셨다’고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결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게 압제당하는 것도 같은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욕망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욕망이 나를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화를 필요할 때만 낸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분노가 나를 끌고 갑니다. 처음에는 돈을 필요에 따라 추구하지만 나중에는 탐욕이 모든 판단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이방 민족의 압제’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적에게 넘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악이 마침내 그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스라엘은 ‘부르짖습니다’. 설교자가 ‘부르짖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사기의 문자적 흐름을 잘 포착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의 한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주님을 진실하게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주님의 도움을 입술로만 구할 수 있지만, 자신의 무능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면 기도가 깊어집니다. 이 점에서 설교자가 ‘부르짖으라’고 반복하는 데는 목회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큰소리로 주여를 외치면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음량에 있지 않습니다. 통성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고, 아무 소리 없는 묵상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의지의 방향입니다. 말없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한 사람의 마음이 수천 명의 함성보다 더 깊은 기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크게 ‘주여’를 외쳐도 자기 악을 그대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 외침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또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다’는 표현도 내적으로는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향한 주님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입니다. 변하는 것은 사람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등지고 있을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심판처럼 느껴지고, 사람이 돌아서 주님을 향하면 같은 사랑이 자비와 평화로 경험됩니다. 태양이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늘에서 햇빛 쪽으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었다’기보다 사람이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더 깊은 설명입니다.

 

사사기의 다음 단계는 ‘사사를 보내 주심’입니다. 설교에서는 이것을 ‘오늘날의 선지자’를 보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하고, 선지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선지자의 본질은 미래 사건을 예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선지자가 ‘진리의 가르침’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사사는 그 진리에 따라 악과 거짓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주님의 구원 능력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사사를 보내신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카리스마적 지도자 한 사람을 보내신다는 뜻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말씀 한 구절을 통해서도, 양심을 통해서도, 한 사람의 조용한 충고를 통해서도, 때로는 실패와 고난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구원의 진리를 보내십니다. 핵심은 그 사람을 특정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설교를 해설할 때 특별히 중요합니다. 예배 전 기도에서부터 특정 목회자를 ‘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특정 날짜의 광화문 집회와 정치적 승리를 하나님의 뜻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어 설교 중에도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신다는 말과 현재의 정치운동 지도력이 서로 가까이 놓입니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 회중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성경의 사사·선지자오늘의 특정 지도자’라는 연결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구약의 사사나 선지자의 표상을 오늘날 특정 개인에게 직접 이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씀의 표상은 먼저 주님 자신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인간 지도자는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자기애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해도 말씀의 ‘사사’나 ‘선지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선지자는 앞으로 것을 미리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한 부분 역시 수정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참된 예언은 미래의 정치 사건을 맞히는 능력보다 훨씬 깊습니다. 말씀은 ‘악을 계속 사랑하면 결국 악의 종이 된다’, ‘회개하면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자기 사랑의 마지막은 지옥이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마지막은 천국이다’라는 영원한 미래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말씀의 예언적 성격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본문 자체가 놀랍도록 선명하게 ‘영적 전쟁’을 말할 수 있는 본문인데도, 그 전쟁이 거의 전부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밖을 향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사사기 31절은 ‘전쟁을 알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깊이 파고들었다면 ‘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이 필요한가’, ‘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악한 성향을 한꺼번에 없애주시지 않는가’, ‘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반복해서 같은 악과 싸우는가’, ‘시험 가운데 천사들과 악한 영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람의 자유는 어떻게 보존되는가’ 같은 매우 깊은 영적 주제들이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에서는 이 놀라운 내적 전쟁이 6·25전쟁과 북한, 주한미군, 특정 정치인, 광화문 집회로 빠르게 치환됩니다. 정치와 국가 문제를 설교에서 전혀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의와 자유, 국가의 평화와 국민의 안전 역시 이웃 사랑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영적 전쟁을 특정 정치세력과의 전쟁으로 동일시하는 순간,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편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반대편은 가나안 족속이나 마귀의 세력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 안의 무엇이 주님을 거역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저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 안의 간첩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자기애와 탐욕과 거짓과 교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외부의 실제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면 말씀은 자기 성찰의 거울에서 정치적 무기로 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설교에서는 정치적 상대를 향한 매우 강한 욕설과 모욕적 표현이 반복됩니다. 특정 인물을 향하여 ‘개자식’, ‘늙은 새끼’, ‘죽은 ’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일부 정치인이나 공직자에게 극형이 필요하다는 발언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을 단지 설교자의 독특한 화법이나 정치적 열정으로만 넘기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설교의 본문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과 싸우면서 내가 그 악과 같은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과 싸우다가 증오에 빠지고, 불의와 싸우다가 모욕과 복수를 사랑하게 된다면, 외적으로는 적과 싸우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그 적이 상징하는 악에게 패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천국의 선은 악에 단호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거짓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데서 기쁨을 얻지 않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매우 엄하게 책망하셨지만 그들의 영원한 멸망을 즐거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전투성’은 증오가 강한 상태가 아니라, 악을 향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

 

설교 중 ‘성경 전체가 정치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도 위대한 정치가이고 모세도 정치가’라는 주장은 설교자의 정치신학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물론 성경에는 왕과 국가, 전쟁과 법, 사회질서와 권력이 많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중심이 정치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본질을 지나치게 외적 차원으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중심은 주님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국가와 왕, 전쟁과 평화도 결국 이 영적 실재를 표상하기 때문에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모세는 말씀 자체 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율법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단순한 정치 지도자로 읽히지 않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과 그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되어 가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이 인물들을 곧바로 현대 정치 지도자의 모델로 읽는 것은 말씀의 깊이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설교 후반에 다시 등장하는 ‘천년왕국’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전천년·후천년·무천년설을 설명하면서 천년왕국을 매우 강조합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말했듯, ‘천년왕국을 죽은 뒤에만 기다리지 말고 땅에서부터 체험해야 한다’는 직관 자체에는 중요한 영적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 ’을 문자적인 천 년짜리 정치 체제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하고 충만한 어떤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어느 정당이 집권하거나 어떤 국가 체제가 세워졌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이 왕이 되실 때 시작됩니다. 자기애가 내려가고 주님 사랑이 올라오며,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다스리며, 복수하고 싶은 욕망보다 용서와 정의가 우위를 차지할 때 그 사람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가 교회의 내적 모습이며, 궁극적으로 천국의 질서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반복되는 ‘회복’과 ‘번성’도 이 관점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나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나를 번성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인도합니다. 이것이 건강과 물질, 사회적 성공의 회복을 뜻한다면 신앙의 범위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회복은 인간 안에 잃어버린 천국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 거짓말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이 진실을 사랑하게 되는 것, 자기 이익밖에 모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사기의 사이클을 끝내는 길입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사이클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또 타락하고, 부르짖고 또 구원받고, 다시 타락합니다. 사사기 마지막에 가면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결국 인간 사사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구원이 필요합니다. 말씀 전체의 흐름으로 보면 이 반복은 궁극적으로 참된 구원자이신 주님을 기다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거듭남의 과정과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한 번의 회개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더 깊은 악이 드러나고 또 싸웁니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원을 무한히 도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순종한다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험마다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외적인 행동의 악과 싸우고, 다음에는 생각의 거짓과 싸우며, 더 나아가 그 밑에 있는 자기애와 지배욕의 뿌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사이클은 절망의 사이클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주님을 잊어버리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사람이 아무리 반복해서 넘어져도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는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다는 자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설교자가 반복해서 강조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메시지는 소중한 복음적 요소를 지닙니다. 다만 그것을 ‘큰소리로 기도하면 원하는 상황을 바꾸어 주신다’는 차원보다,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 악의 속박에서 건져 주신다’는 차원으로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의 찬송과 통성기도에서도 상당한 생명력은 느껴집니다. 설교자가 ‘찬송은 곡조 있는 설교’라고 표현한 것도 기억할 만합니다. 실제로 찬송은 진리를 정서와 결합시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음악과 노래는 정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가 단지 머리에만 있을 때보다 사랑과 정서에 결합될 때 사람의 생명에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이런 면에서 이 예배가 지적인 강의에 머물지 않고 회중의 정서 전체를 움직이려 한다는 점은 분명한 특징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분별이 필요합니다. 찬송과 통성기도로 마음이 강하게 고양된 직후 특정 정치적 주장과 집단행동이 하나님의 명령처럼 제시되면, 회중은 자신이 느끼는 종교적 감동과 특정 정치적 판단을 구분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강한 정서적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반드시 승리한다’는 표현이 반복될수록 그 위험은 커집니다. 영적 감동이 있다고 해서 그 감동과 함께 제시된 모든 인간적 판단까지 신적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계속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자유와 이성의 보존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믿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이성을 압도하고 자유를 빼앗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여 삶으로 선택할 때 그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 역시 회중에게 강한 감동을 주면서 동시에 각자가 말씀 앞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분별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끝으로 이번 설교 전체에서 가장 아깝게 느껴지는 것은 설교자가 잡은 본문의 핵심 자체는 상당히 좋았다는 점입니다. ‘사사기는 사이클로 되어 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 ‘번성 가운데 부패하지 말아야 한다’, ‘징계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시고 회복하신다’는 각각의 명제에는 깊이 발전시킬 수 있는 영적 씨앗들이 들어 있습니다. 자막에서도 설교자는 이 순환을 반복해서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번성’으로 요약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단계 더 안으로 들어가면, 이 사이클의 무대가 먼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전쟁은 내 안의 선과 악의 전쟁이며, 가나안 족속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악과 거짓이고, 압제는 내가 사랑한 악이 도리어 나를 지배하는 상태이며, 부르짖음은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회개이고, 사사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진리이며, 회복은 주님께서 내 의지와 이해성을 다시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사기는 정치적 전투의 교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책이 됩니다. 왜냐하면 적을 밖에서 찾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가 문제다’, ‘ 정치인이 문제다’, ‘ 세력이 문제다’라고 말하기 전에, 말씀은 ‘ 안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족속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다른 사람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과장은 용납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치인의 교만은 비난하면서 자신의 영적 교만은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반대편 사람을 증오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사사기 3장이 가르치는 가장 깊은 ‘전쟁을 아는 ’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는 사람은 적을 향해 가장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입니다. 강한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외부의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믿고 자신은 선과 진리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지난 여호수아 설교가 ‘땅을 분배받는 ’이었다면 이번 사사기 설교는 그 땅을 받은 뒤 ‘ 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거듭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더 깊은 싸움이 시작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계속 주님의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자기 것으로 취하여 우상을 섬길 것인가 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새롭게 만든다면,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겠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과 악이 싸우는 영적 전쟁을 반드시 알게 되며, 싸움에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사이클’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릴 사람은 악의 지배 아래 들어가지만,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는 진리를 보내어 그를 다시 영적 자유와 선의 삶으로 회복시키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사기의 전쟁을 오늘 우리의 전쟁으로 읽는 가장 내적인 길입니다.

 

 

 

SY.69, 전광훈 목사, 20260816,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1부, ‘하나님의 나라’와 ‘대한민국’이 하나로 겹쳐질 때이 긴 예배와 설교를 처음부터 따라가다 보면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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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8, 전광훈 목사, 20260802,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이 점령한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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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3강 1부

요한계시록 6장의 심판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번 3강은 찬송 ‘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로 문을 엽니다. 강사는 ‘오직 예수님 분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이어지는 기도에서도 ‘진리의 영으로 저희들을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전개되는 복잡한 종말론적 도식보다 먼저 붙들어야 할 이 강의의 영적 중심입니다. 강사가 무엇보다 주님을 삶의 가장 귀한 분으로 모시고자 하며, 말씀을 통해 자신과 청중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출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중심은 어떤 종말 시간표를 정확하게 아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해석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견되더라도, 이 강의의 첫 고백 자체는 소중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앞서 살펴본 요한계시록 4장을 ‘총사령부’, 5장을 어린양이신 ‘총사령관’이 등장하는 장으로 정리한 뒤, 6장을 ‘무엇으로 심판하실 것인가’, 곧 ‘심판의 재료’를 보여 주는 장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일곱 인을 떼는 과정 자체를 7년 대환란으로 보지 않고, 대환란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봅니다. 첫째부터 넷째 인에서는 백마·홍마·흑마·청황마라는 네 가지 심판의 재료가 제시되고, 다섯째 인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채워지며, 여섯째 인에서는 천재지변 가운데 고통받는 인류가 나타나고, 일곱째 인이 떼어질 때 비로소 일곱 나팔과 함께 본격적인 7년 대환란이 시작된다는 구조입니다. 강사는 이를 스가랴 6장의 네 종류의 말과 요한계시록 7장의 ‘사방의 바람’까지 서로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는 강사 자신의 계시록 독법입니다. 이 해석 안에는 주목할 만한 장점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한 절씩 고립시켜 읽지 않고, 4장부터 8장까지의 구조와 스가랴의 환상을 함께 놓고 성경 전체의 연결을 찾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 ‘바람’, ‘’, ‘나팔’과 같은 이미지가 서로 무관한 장식물이 아니라 어떤 영적 의미를 전달한다고 보는 태도는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도 일정 부분 접점을 가집니다. 성경의 환상적 이미지에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찾으려면 다른 말씀과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강사의 해석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갑니다. 차이는 ‘상징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상징을 인정합니다. 진짜 차이는 ‘ 상징이 무엇과 상응하는가’에 있습니다. 강사는 백마·홍마·흑마·청황마를 앞으로 자연계에서 일어날 공의의 심판·전쟁·기근·사망이라는 사건들과 연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말들을 인간의 영적 상태, 더 정확히는 교회 안에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문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부터 같은 요한계시록 6장을 바라보면서도 두 해석은 전혀 다른 풍경을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은 말씀에 대한 이해, 곧 진리를 이해하는 지적 능력과 상응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6장에 갑자기 만들어진 해석 원리가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서 말이 지닌 상응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19장의 백마도 같은 원리로 풉니다.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자가 있으니’라는 환상은 단순히 미래 어느 날 주님께서 실제 흰색 말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광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의 속뜻을 열어 주시고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를 회복시키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백마’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이며, 그 위에 타신 분은 말씀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이 점에서 흥미롭게도 강사와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6장의 백마 탄 자를 ‘사탄’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서는 만납니다. 강사는 백마 탄 자를 공의로 심판하시는 예수님과 연결하면서, 이를 사탄으로 해석하는 일부 종말론적 해석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백마를 악한 존재의 상징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이유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흰색은 진리를 나타내고, 말은 말씀의 이해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째 인을 뗄 때 나타나는 백마는 ‘전쟁을 시작하는 어떤 존재’라기보다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은 각각 따로 떨어진 네 사건이라기보다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쇠퇴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이번 3강 1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스베덴보리의 렌즈’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합니다. 이것이 백마입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선과 사랑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붉은 말입니다. 이어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빈곤해지고 왜곡됩니다. 이것이 검은 말입니다. 마침내 선도 진리도 사라져 영적 생명 자체가 죽은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이 청황색 말입니다. 그러므로 백마 → 홍마 → 흑마 → 청황마의 진행은 외부 세계에서 ‘공의 전쟁 기근 죽음’이 차례로 일어나는 시간표라기보다, 교회가 말씀의 참된 이해로부터 점차 사랑과 진리를 잃어 마침내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둘째 인의 ‘붉은 ’도 훨씬 내면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본문은 붉은 말을 탄 자가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한다고 말합니다. 강사는 이를 실제 전쟁으로 읽고, 나아가 미래의 세계적 전쟁 및 아마겟돈과 연결합니다. 물론 전쟁은 인류의 악이 자연계에 나타나는 참혹한 결과이므로 영적 의미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전쟁’은 더 근본적으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을 나타냅니다. 특히 ‘땅에서 화평을 제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사라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같은 성경을 가지고도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진리는 상대를 살리는 빛이 아니라 상대를 정죄하는 칼이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백마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사랑이 떠나면 신앙의 언어는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 안에서 ‘화평’이 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면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확증과 정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붉은 말은 단지 먼 미래의 세계대전을 예언하는 그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영적 사건입니다.

 

셋째 인을 떼었을 때 나타나는 ‘검은 ’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사는 검은색을 기근과 연결하고, ‘ 데나리온에 되요 데나리온에 보리 ’라는 말씀을 실제적인 흉년과 식량 부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으로 보면 여기서 기근은 단순히 먹을 양식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핍입니다. 성경에서 ‘먹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이며, ‘양식’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영적인 기근은 성경책이 없어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은 여전히 있고 설교도 계속되고 신학도 풍성한데, 그 말씀을 통해 실제로 사랑과 선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를 돌아볼 때 매우 엄중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책이 넘쳐나고 설교와 강의가 인터넷에 가득하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 풍년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악을 보고 회개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실제 삶을 고쳐 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보는 풍성하면서도 영적으로는 기근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경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알고 있는 진리 하나를 붙들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보다 ‘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삶이 되었는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계시록 6장을 ‘심판의 재료를 보여 주는 ’이라고 표현한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달리 받아들이면 뜻밖에도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재료’가 자연계의 전쟁·기근·천재지변이라기보다, 심판 때 드러나는 인간과 교회의 내적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외부에서 갑자기 어떤 재앙을 던져 사람을 파괴하시는 행위가 아니라, 그동안 사람 안에 형성되어 온 것이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사랑했는지,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였는지,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살았는지가 드러나는 것이 심판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인을 떼신다’는 표현도 중요해집니다. 봉인된 것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인이 떼어지면 감추어져 있던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린양께서 인을 떼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파괴하기 위한 재앙을 하나씩 방출하신다는 뜻이라기보다, 말씀과 교회의 내적 상태를 밝히 드러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 앞에서는 감추어진 것이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좋아 보였지만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 진리를 말했지만 그 진리를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했는지, 혹은 부족한 지식 가운데서도 선을 사랑하며 살았는지가 드러납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심판은 ‘폭로’이면서 동시에 ‘분별’입니다.

 

이 지점은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말씀대로 실제로 살아야 한다’는 수도적 영성과도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받은 말씀을 삶에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과 상당히 가까이 다가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말씀을 삶으로 옮기는 과정 자체가 인간 안의 영적 질서를 변화시키는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를 반복할 때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점차 질서 안에 놓으십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6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제3차 세계대전은 언제 일어나는가?’, ‘7년 대환란은 언제 시작되는가?’, ‘첫째 인은 이미 떼어졌는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지금 안의 말은 무슨 색인가?’입니다. 나는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진리를 사랑과 결합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과의 화평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혹은 진리를 많이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영적인 기근 가운데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자기 밖의 미래 사건으로만 돌려놓으면 우리는 구경꾼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비추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요한계시록은 갑자기 현재의 말씀이 됩니다.

 

또 하나 조심스럽게 짚어야 할 부분은 강사가 말하는 ‘7년 대환란은 모든 인류의 죄를 없이 하시는 7년간의 번제 기간’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표현은 강사의 종말론 체계 안에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죄는 외부의 환난을 겪는다고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고난 자체가 악을 제거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선해지고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 속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며, 그 악을 실제 삶에서 피하려 하는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인간의 악을 강제로 뽑아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진리를 보여 주시고 악을 보게 하시며, 사람이 자유롭게 그 악을 거부하도록 끊임없이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목적을 파괴 그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신적 질서의 회복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옥에 보내기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천국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끝내 사랑하는 악을 놓지 않으면, 사후에는 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가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결국 사람이 평생 무엇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았는지가 완전히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강의 중에는 또 ‘성도들의 기도의 분량이 차야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행하신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강사는 요한계시록 8장의 향과 성도들의 기도를 근거로 이것을 심판이 시작되는 조건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도 문자적으로 ‘기도가 일정량 누적되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시작하신다’고 이해하기보다는, 기도가 나타내는 영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향은 예배와 기도, 특별히 주님께 올라가는 영적 애정과 상응합니다. 따라서 향연이 올라간다는 것은 단순한 기도 횟수의 축적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 선과 진리를 향한 애정이 주님께 향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읽으면 요한계시록의 장면은 훨씬 내면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결국 3강 1부에서 강사는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을 앞으로 임할 심판의 네 가지 ‘바람’, 곧 공의·전쟁·기근·사망의 심판으로 읽으며 이를 7년 대환란 직전의 준비 과정에 배치합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같은 네 말을 교회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상태의 변화로 읽습니다. 백마는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 붉은 말은 선과 사랑의 상실, 검은 말은 진리의 황폐, 청황색 말은 마침내 선과 진리가 모두 사라진 영적 죽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두 해석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렸다’는 식으로만 다루기보다, 강사가 외적 역사 속에서 발견하려 한 심판의 질서를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내면과 교회의 영적 역사 속으로 더 깊이 가져간다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차이가 이번 사경회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이유를 가장 잘 보여 줍니다. 강사는 우리에게 ‘다가올 환난에 준비되어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질문을 없애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가져옵니다. ‘ 환난이 오기 전에 준비되어 있는가?’를 넘어 ‘오늘 주님께서 안의 인을 떼어 내면을 보여 주신다면 무엇이 드러나겠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내고 있는가, 신앙을 고백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렇게 보면 요한계시록의 심판은 먼 미래의 공포스러운 사건만이 아닙니다. 말씀의 빛이 오늘 나에게 임하여 내 속의 거짓과 악을 드러내고, 그것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매일의 작은 심판이 먼저 있습니다. 이 심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지막 심판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밝히시는 것은 멸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며, 드러내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3강 첫머리에서 함께 부른 찬송의 고백이 오히려 이 모든 복잡한 종말론을 꿰뚫는 가장 단순하고 깊은 결론이 됩니다. ‘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 사람이 실제로 이 고백대로 살아간다면, 요한계시록이 궁극적으로 준비시키려는 사람도 바로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3강 2부

뿌리는 비유와 가지 마음밭

이번 3강 2부에서는 강사가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배운 ‘핵심진리’를 종합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를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로 읽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서론,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가라지 비유를 본론, 그물 비유를 결론처럼 배열하고, 이것이 앞으로 공부할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과 666을 이해하는 준비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이 사경회의 독특한 종말론적 체계가 이미 상당히 들어와 있습니다. 특히 ‘14만 4천’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성장한 성도들로, ‘666’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어두운 영혼들과 연결하려는 방향이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가운데 먼저 귀하게 받아들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사가 성경 공부의 목적을 단순한 지식 습득에 두지 않고 ‘영적인 목표’, ‘신앙의 방향’, ‘영적 가치관’을 분명히 하는 데 둔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무엇을 추구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세상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영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지배적 사랑, 곧 생명의 중심을 이루는 사랑에 따라 형성되며, 사후에도 바로 그 사랑이 그 사람의 영적 방향을 결정합니다.

 

다만 마태복음 13장을 곧바로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 666’을 해석하기 위한 일종의 암호표로 사용하는 부분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요한계시록 사이에 깊은 내적 연결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연결은 ‘겨자씨 비유 = 14만 4천의 성장’, ‘누룩 비유 = 14만 4천의 행실’, ‘가라지 = 666’과 같이 인물 집단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방식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영적 상태,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따라서 어떤 비유를 특정 종말 집단의 정체를 밝히는 열쇠로 제한하면, 오히려 그 비유가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보편적인 영적 의미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부분의 핵심인 ‘ 뿌리는 비유’로 들어오면 오히려 강사의 설명과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가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강사는 씨를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 씨가 떨어지는 밭을 ‘사람의 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길가·돌밭·가시밭·좋은 밭이라는 네 상태를 사람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마음 상태로 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비유의 문자적 의미에 충실한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라는 표현 자체가 매우 깊습니다. 씨에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땅에 받아들여져야 하고, 뿌리를 내려야 하며, 자라고 마침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듣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기억하는 것도 시작입니다. 이해하는 것도 아직 완성이 아닙니다.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되고, 그 진리로부터 선이 행해질 때 비로소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는 사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이라고 부르는 과정 전체를 놀랍도록 간결하게 보여 주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하면,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되는 인간의 내면입니다. 같은 씨가 뿌려집니다. 씨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다릅니다. 어떤 씨는 새가 먹고, 어떤 씨는 잠깐 자랐다가 말라 버리고, 어떤 씨는 가시에 눌리며, 어떤 씨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합니다. 차이는 씨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그릇’에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동일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강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말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밭이 어디에 해당하는지 스스로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험을 영적 성장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상당히 깊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는 표현의 의미를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적 시험, 곧 temptation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공격을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가운데, 인간 안에 이미 존재하던 것이 드러나고 주님께서 그것을 이기도록 인도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평안할 때에는 자신이 어떤 밭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나는 세상보다 천국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심하게 상했을 때, 손해를 보게 되었을 때,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돈과 명예와 안락함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할 때 비로소 마음밭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가 말하는 ‘시험을 통해 자신의 밭이 드러난다’는 설명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네 가지 밭을 반드시 세상 사람들을 네 부류로 영원히 고정하여 나누는 분류표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하나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어느 시점에서 사람의 주된 상태를 그렇게 구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네 밭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아직 길가 같은 부분도 있고, 돌밭 같은 부분도 있으며, 가시떨기가 우거진 부분도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오래 갈아엎고 준비하셔서 좋은 땅이 된 부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씨 뿌리는 비유가 타인을 분류하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추는 말씀이 됩니다. ‘ 사람은 길가다’, ‘ 사람은 돌밭이다’, ‘나는 좋은 밭이다’라고 판정하는 순간 이 비유의 칼날이 밖으로 향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떤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였다가 어려움이 오자 버렸는가?’, ‘내가 알고 있는 말씀 가운데 세상 염려와 자기애 때문에 열매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이 비유는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먼저 ‘길가’는 말씀이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강사는 길가가 사람들이 계속 밟고 다녀 딱딱해진 땅인 것처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강퍅한 마음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것은 진리가 내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기억의 표면을 스쳐 지나가고 자신의 삶과 무관한 정보로 머문다면, 씨는 아직 ‘땅속’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성경에서 새는 문맥에 따라 생각과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좋은 의미의 새도 있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된 사고, 곧 진리를 빼앗아 가는 잘못된 추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들은 직후 자신의 기존 욕망에 맞추어 ‘ 말씀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요즘 세상에 그렇게 살면 손해만 보지’, ‘그건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야’라고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막 뿌려진 진리가 내면에 들어가기 전에 거짓된 추론에 의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새가 씨를 먹는’ 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다음의 ‘돌밭’은 더욱 미묘합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문제는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상당히 자주 볼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하고,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어떤 진리를 발견하고 크게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자신의 사랑과 의지를 바꾸는 데까지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말씀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견디지 못합니다. 진리가 감정에는 닿았지만 생명에는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뿌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식물의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뿌리가 식물 전체를 지탱합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종교 활동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혼자 있을 때 무엇을 사랑하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진리를 따르는가 하는 내면의 상태입니다. 거기에 진리가 뿌리를 내릴 때 신앙은 외부 환경에 따라 쉽게 말라 버리지 않습니다.

 

강사가 좋은 밭을 설명하면서 ‘ 겸손하고, 충성하고, 인내하고, 온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부분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또한 ‘적당히 천국만 가면 되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세상의 쾌락이나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말고 ‘좁은 ’을 선택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표현의 체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이 실천적 강조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다만 강사가 이것을 ‘생명책이라는 저금통장’에 선행과 인내가 상급으로 적립되는 것처럼 설명하는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달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의 상태는 선행을 많이 해서 점수를 많이 쌓은 결과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형성하신 사랑과 지혜의 상태입니다. 선한 행위는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위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천국의 공로를 적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 속에서 사람의 사랑이 실제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한 것과 이웃의 유익을 사랑해서 한 것은 외적으로는 같아 보여도 내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행위’ 또는 ‘’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공로 사상을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얼마나 많이 했는가’만 계산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부터 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했는가,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원하여 했는가입니다. 결국 행위는 사랑의 외적 형상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실제 행위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말하는 ‘밝은 ’도 이렇게 이해하면 한층 깊어집니다.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단순히 신앙적 업적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그의 이해를 밝히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생활로 흘러나오는 사람입니다. 빛은 진리이고, 그 빛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빛만 있고 따뜻함이 없다면 겨울 햇빛과 같을 수 있습니다. 진리는 많이 알지만 체어리티가 없다면 영적 생명을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거듭남은 이 둘, 곧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열매’가 최종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땅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라고 하시면서 그 결과를 ‘결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씨가 목적이 아니며 싹도 목적이 아니고 줄기와 잎도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열매가 목적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듣는 것, 공부하는 것, 이해하는 것, 교리를 정리하는 것 모두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사람이 선하게 되고, 주님의 사랑이 그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강의가 계속 강조하는 ‘영적 성장’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매우 아름답게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은 특별한 체험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며, 비밀스러운 종말론적 지식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중심성이 조금씩 물러가고 주님의 뜻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던 사람을 용서하게 되고, 자기 자존심 때문에 참지 못하던 것을 진리를 위해 참게 되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보다 그 사람에게 실제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가 바로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번 3강 2부에서 특별히 소중한 것은 ‘14만 4천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려는 종말론적 도식 자체라기보다, 그 도식 아래에서 강사가 계속 붙들고 있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강사는 가장 밝은 빛을 따라 살고, 좁은 길을 선택하며, 세상적 가치보다 영적 가치를 추구하고, 인내와 겸손과 사랑 가운데 성장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 대목을 더 깊이 붙듭니다. 그리고 ‘특별한 종말의 성도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 살아야 한다’기보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원하시는 거듭남의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좋은 ’도 특별한 소수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우월한 마음이 아닙니다. 밭은 갈아야 합니다. 돌을 골라내야 하고 가시를 뽑아야 하며 굳은 땅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을 통하여 그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악을 죄로 알고 피하려고 힘쓰며,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읽으면서 ‘나는 가운데 어디인가?’라고 묻는 것도 필요하지만, 거기에서 멈출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오늘 주님께서 밭의 어느 부분을 갈고 계시는가?’일 것입니다. 아직 딱딱한 길가가 있다면 부드럽게 하시고, 돌이 있다면 드러내어 치우게 하시며, 가시가 있다면 뽑게 하시고, 이미 좋은 땅이 된 곳에는 더 많은 씨를 심으십니다. 거듭남은 단번에 ‘좋은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평생에 걸쳐 인간의 내면을 천국에 적합한 땅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번 3강 2부의 중심은 의외로 단순해집니다. ‘나는 14만 4천에 속하는가?’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이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가?’입니다. ‘마지막 시간표를 얼마나 정확하게 아는가?’보다 먼저 ‘오늘 내게 주어진 진리를 얼마나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사가 서두에서 말한 ‘영적인 목표와 방향’, ‘영적 가치관’이라는 표현과도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결국 좋은 밭의 가장 깊은 특징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씨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씨의 생명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열매를 가능하게 하는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할 일은 그 생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주님께서 일하실 길을 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밭을 내어 드릴 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라는 차이는 있어도 주님께서는 각 사람 안에서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의 천국을 이루어 가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는 종말을 계산하기 위한 비유를 넘어, 지금 이 순간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듭남의 비유’가 됩니다.



3강 3부

돌밭과 가시떨기에서 좋은 땅으로 : 말씀의 뿌리, 시험, 세상 염려와 참된 결실

3강 3부에서는 앞서 살펴본 씨 뿌리는 비유가 한층 더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2부에서 길가와 돌밭, 가시떨기와 좋은 땅이라는 네 가지 마음밭의 큰 구조를 살펴보았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 어떤 사람에게서는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가’, ‘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시험이 오면 넘어지는가’, ‘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열매가 막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사가 이 비유를 단순히 불신자와 신자를 나누는 비유로만 다루지 않고 영적 성장과 시험, 그리고 실제 삶의 열매라는 방향으로 가져가는 것은 이 사경회의 전체적인 영성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곳에서 반복되는 ‘연단’, ‘인내’, ‘순종’, ‘좁은 ’, ‘사랑의 실천’이라는 언어가 씨 뿌리는 비유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돌밭의 특징은 씨를 받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길가와 돌밭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길가에서는 씨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지만, 돌밭에서는 싹까지 납니다. 외적으로 보면 상당히 좋은 신앙의 시작처럼 보입니다. 말씀을 듣고 감동하고, 기도하기 시작하며, 새로운 결심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집회나 수련회에서 큰 은혜를 경험하고 자신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상태에 대해 ‘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넘어지는 ’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처음의 기쁨이 거짓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기쁨이 아직 충분히 깊은 곳까지 내려가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뿌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기억에 들어가는 것과 이해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마침내 의지와 사랑에 들어가는 것은 서로 다른 단계입니다. 어떤 진리를 듣고 ‘맞다’고 인정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 진리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 때문에 자기 욕망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대할 때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아멘 하는 것과 자신의 이익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후자를 선택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여기까지 내려오면 비로소 뿌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험은 말씀을 파괴하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이 어디까지 뿌리내렸는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평안할 때에는 자기 신앙의 실제 깊이를 알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말할 수 있고, 겸손을 말할 수 있으며, 주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욕을 받았을 때에도 상대를 악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는지, 자신의 옳음이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평안을 지킬 수 있는지, 예상하지 못한 손해가 생겼을 때에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할 수 있는지를 통해 그 진리가 단순히 기억과 이해에 있는지 아니면 의지 안으로 내려가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연단’은 씨 뿌리는 비유의 ‘뿌리’와 깊이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시험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더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악을 보내 시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시험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공격이며,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허용하시고 그 가운데 사람을 지키시며 선한 결과를 이루십니다. 인간에게는 시험이 마치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그 시험 가운데 싸울 힘과 진리, 보호와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귀하게 여긴다고 해서 고통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거나 일부러 고통을 찾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고난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주님을 의지하고 악과 거짓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선과 진리를 붙들 때 고난이 거듭남의 쓰임으로 바뀝니다.

 

이 구별은 수도적 영성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금식과 절제, 침묵과 순종, 불편을 감수하는 훈련 자체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외적 훈련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다루고,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구하며, 이웃을 더 사랑하도록 돕는다면 귀한 쓰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만큼 견뎠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많이 희생했다’, ‘나는 깊은 영적 훈련을 받았다’는 자기 공로로 바뀌면 바로 그 수도적 훈련이 새로운 proprium의 토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단의 결과를 판별하는 가장 좋은 기준은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으로부터 이어진 이 사경회의 수도적 강조를 존중하면서도, 그 연단의 내적 목적을 거듭남의 관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돌밭 다음에는 가시떨기가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씨가 싹만 내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 자랍니다. 그러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상태는 어쩌면 돌밭보다 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돌밭에서는 환난이나 박해가 왔을 때 곧 넘어지므로 문제가 비교적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가시떨기에서는 신앙생활 자체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읽으며, 교회생활도 합니다. 씨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른 것들이 함께 자라서 말씀의 생명을 압박한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라는 말도 세상일을 걱정하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자녀를 돌보고, 직업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노후를 준비하는 것은 자연계에서 필요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 삶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영적 삶을 섬겨야 할 질서입니다. 문제는 질서가 뒤집힐 때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목적이 되고 영적인 것이 수단이 되는 순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사업이 잘되기 위해서이고, 기도하는 이유가 건강과 성공을 얻기 위해서이며, 교회생활의 목적이 사회적 관계와 자기 평판을 위한 것이라면 외적으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실제 중심에는 세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돈은 자연계에서 수많은 쓰임을 가능하게 하는 유용한 수단입니다. 가족을 돌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선한 사업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재물의 유혹’, 곧 재물이 주는 안전감과 우월감과 자유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재물을 소유하는 것과 재물이 사람을 소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재산이 많으면서도 그것을 주님께 받은 쓰임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고, 반대로 가진 것이 많지 않으면서도 온 마음이 돈을 향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은 통장 잔액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입니다.

 

가시떨기의 또 다른 특징은 ‘말씀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세상 사랑과 자기애가 반드시 말씀을 공개적으로 부정해야만 진리를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인정하면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뒤로 밀어낼 수 있습니다. ‘맞는 말씀이지. 하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그렇게 살겠다’, ‘지금 문제만 해결되면 그때 주님께 충실하겠다’고 하면서 진리에 따른 삶을 계속 연기할 수 있습니다. 씨는 살아 있지만 가시가 더 빨리 자랍니다. 그렇게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면 신앙의 언어는 남아 있어도 열매가 매우 적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가시떨기를 단순히 ‘세상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판정하기보다 우리 각자의 삶 속에 들어와 보게 합니다. 목회자에게도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성장과 사역의 성취가 어느 순간 주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보다 ‘내가 깊은 것을 안다’는 만족이 커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당연히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를 발견하는 기쁨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고 자신이 더 높은 진리를 가졌다고 느끼는 데 머문다면 귀한 진리의 씨 주변에 아주 미세한 가시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다른 사람을 확대해서 보는 렌즈이기 전에 자기 자신을 비추는 렌즈여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시흥영성수련원 사경회를 해설하는 작업에서도 계속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도식과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다른 곳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의 영적 우월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진리를 접했다면 그만큼 더 겸손하고, 더 온유하며, 더 체어리티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높은 진리가 높은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진리는 지식으로만 남을 수 있습니다.

 

이제 좋은 땅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좋은 땅은 처음부터 아무 돌도 없고 아무 가시도 없는 완벽한 인간을 의미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에서도 좋은 밭은 농부가 손을 대지 않아도 저절로 만들어지는 땅이 아닙니다. 굳은 땅을 갈고,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으며, 물을 대고, 씨를 심고, 오랜 시간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매우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인간의 마음도 주님께서 그렇게 경작하십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악을 드러내시고, 말씀의 진리를 통해 그것이 악임을 알게 하시며, 실제 생활에서 그것을 피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악을 거절할 때 조금씩 돌이 치워지고 가시가 뽑힙니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나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내가 노력해서 나를 좋은 밭으로 만들었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을 설명할 때 반복하는 중요한 원리는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하지만, 실제 능력과 선은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가 없으면 사랑이 형성될 수 없고, 주님의 힘이 없으면 인간은 어떤 악도 실제로 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땅에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이 있다는 것도 경쟁적 상급표처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천국에는 모두가 똑같은 정도의 선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획일성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주님께 받을 수 있는 그릇과 쓰임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삼십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백 배를 맺지만 중요한 것은 각자가 주님께 받은 것에 따라 충실하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천국의 완전함은 모든 천사가 똑같아지는 데 있지 않고, 서로 다른 수많은 선과 쓰임이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 밝은 ’, ‘ 상급’을 향해 나아가라고 권면하는 부분을 이해할 때에도 유익합니다. 그 권면을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영적 경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나는 삼십 배가 아니라 배짜리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 속에 자기 우월감이 들어오면 좋은 밭을 만들려다가 오히려 새로운 가시를 심을 수 있습니다. 참된 천국적 열망은 ‘내가 높은 사람이 되겠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하나도 헛되게 하지 않고 가능한 온전히 받아 이웃을 섬기는 사용하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지옥적 사랑도 높은 곳을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기 위해서’ 높은 곳을 원합니다. 천국적 사랑도 더 큰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 많이 사랑하고 유용하게 섬기기 위해서’ 원합니다. 겉으로는 둘 다 열심이고 희생적일 수 있지만 내적 동기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십니다.

 

강의에서 강조하는 ‘좁은 ’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면 좋습니다. 좁은 길은 일부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길이 아닙니다.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거스르는 길이 좁게 느껴집니다. 복수하고 싶은데 용서하는 길, 인정받고 싶은데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섬기는 길, 자기 이익을 챙길 수 있는데 정직을 선택하는 길,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데 관계의 선을 위해 말을 절제하는 길이 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길을 오래 걸으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좁았던 길이 점점 자유의 길이 됩니다. 악의 욕망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에서 일어나는 ‘즐거움의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이고 자기부인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 의지를 형성해 가시면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용서하는 것이 억지가 아니라 평안이 되고, 섬기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기쁨이 되며,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억압이 아니라 자유가 됩니다. 그때 좋은 땅은 단순히 ‘말씀을 지키는 사람’의 상태를 넘어, 말씀대로 사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상태가 됩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이 강조해 온 ‘연단’도 그 최종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연단의 목적은 평생 이를 악물고 자신을 억누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기 욕망을 거슬러 싸워야 하지만, 주님께서 거듭나게 하실수록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결국 천국에서는 아무도 억지로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수도적 훈련의 가장 아름다운 결실은 ‘나는 이렇게 많이 참았다’가 아니라 ‘이제는 예전과 달리 이것이 기쁘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리메인스’와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이 경험한 순수한 사랑, 선한 정서, 말씀을 통해 받은 진리, 부모나 교사에게서 배운 선한 것들을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보존하십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러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을 악과 거짓에서 끌어내실 때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현재 마음밭이 매우 굳어 보인다고 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 안에 무엇을 보존하고 계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를 크게 바꿉니다. ‘ 사람은 길가니까 된다’, ‘ 사람은 돌밭이라 오래 간다’, ‘ 사람은 가시밭이다’라고 판정하기보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밭을 어떻게 경작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합니다. 오늘은 돌밭처럼 보여도 내일 큰 시험을 통해 돌이 드러나 제거될 수 있고, 오랫동안 가시에 눌려 있던 씨가 어느 순간 주님의 섭리 가운데 다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씨 뿌리는 비유는 사람을 네 종류로 나누는 비유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오래 참고 경작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비유로도 읽힙니다.

 

그렇게 보면 이번 3강 3부에서 강사가 강조하는 영적 성장과 연단, 좁은 길과 결실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하여 더욱 깊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씨가 들어오고, 시험을 통해 돌이 드러나며, 세상 염려와 자기애라는 가시가 드러나고, 사람이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그것들을 피할 때 밭이 조금씩 좋은 땅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좋은 땅에서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실제 삶의 열매가 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 앞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지금 좋은 밭인가 아닌가?’라는 자기 판정만은 아닐 것입니다. 더 살아 있는 질문은 ‘주님께서 오늘 안에서 어떤 돌을 보여 주고 계시는가? 어떤 가시를 뽑으라고 하시는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진리를 이제 실제 삶으로 옮기라고 하시는가?’일 것입니다. 바로 그 질문에 하루하루 응답하는 것이 밭을 내어 드리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강사의 권면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히 가까운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겸손하고, 충성하고, 인내하고, 사랑하라’는 권면을 자기 공로를 쌓기 위한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께서 내 안에 심으신 씨가 충분히 열매 맺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라는 초청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십 배든 육십 배든 백 배든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 열매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좋은 밭은 ‘나는 좋은 밭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께 자기 밭을 내어 드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돌이 드러나면 인정하고, 가시가 보이면 뽑으려 하며, 말씀이 자기 욕망과 충돌할 때 말씀 편을 선택하고,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해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안에서 말씀은 더 이상 머리에만 있는 씨가 아니라 의지에 뿌리를 내리고 삶으로 열매 맺는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사경회가 강조해 온 ‘연단을 통과한 신앙’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깊고 아름다운 의미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3강 4부

겨자씨와 누룩,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 영적 성장의 본질

3강 4부에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시작된 ‘영적 성장’이라는 주제가 겨자씨와 누룩,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를 통하여 더욱 깊어집니다. 앞에서 네 가지 마음밭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질문은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어떻게 자라는가’, 그리고 ‘ 성장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를 서로 연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무엇을 가장 귀한 가치로 발견하며, 결국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사경회가 계속 강조해 온 ‘영적 목표’, ‘연단’, ‘좁은 ’, ‘온전한 사랑’이라는 주제가 여기에서 보다 적극적인 성장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겨자씨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시작할 때에는 매우 작지만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게 됩니다. 강사는 이것을 성도의 영적 성장과 연결합니다. 처음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에는 작고 연약하지만 말씀을 받고 순종하며 시험과 연단을 통과하면서 점차 성장하여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까지 유익을 주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듭남 역시 처음부터 완성된 천국적 인간이 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께서 작은 시작으로부터 사람 안에 새로운 생명을 형성하시고 그것을 점차 자라게 하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작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 지식이 적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거듭남의 시작은 인간에게 매우 미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행동을 어느 날 ‘이것이 정말 주님 앞에서 옳은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작은 양심의 움직임, 미워하던 사람에게 악으로 갚지 않으려는 작은 결심,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기보다 인정하려는 작은 움직임도 겨자씨와 같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 것이고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인다면 그 안에는 천국 전체를 향하여 자랄 수 있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 성장을 평가하는 기준도 바꾸어 놓습니다. 사람은 흔히 눈에 띄는 변화와 특별한 체험을 영적 성장으로 생각합니다. 기도를 오래 하고, 성경을 많이 알고, 큰 사역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성장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근본적인 성장은 사람의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던 사람이 조금씩 이웃의 선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이 주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주 작은 변화처럼 보여도 영계에서는 이것이 훨씬 큰 변화일 수 있습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에서 나무는 사람의 지각과 지식, 그리고 그로부터 형성되는 영적 생명과 관련됩니다. 씨였던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자라 하나의 질서를 이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각각 떨어져 있던 진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연결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라’, ‘용서하라’, ‘정직하라’는 말씀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생명 체계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 이것을 해야 하지?’를 일일이 계산하지 않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하기 시작합니다. 씨가 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든다’는 말씀도 아름답습니다. 앞서 길가의 씨를 먹어 버린 새는 반대 의미에서 거짓된 사고와 추론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좋은 의미입니다. 말씀에서 새는 사고와 이해에 속한 것들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나무의 가지에 새들이 깃든다는 것은 사람 안에 선한 생명이 형성되면서 수많은 진리와 생각들이 그 생명 안에서 제자리를 찾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영적 성장은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과 지식과 이성이 선한 사랑을 섬기도록 질서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적 영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점입니다. 자기부인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개성을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해와 재능과 개성을 자기애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선한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개성이 제거된 사람들의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각 사람이 지상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한 고유성을 가지면서도 그 고유성이 공동의 선을 섬깁니다. 따라서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은 ‘작은 ’가 ‘대단한 ’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생명이 충분히 성장하여 다른 생명들을 품을 수 있는 쓰임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강사가 다루는 누룩의 비유는 영적 성장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어 ‘전부 부풀게’ 합니다. 겨자씨가 눈에 보이는 외적 성장의 이미지라면 누룩은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누룩은 반죽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작용하지만 마침내 반죽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강사는 이것을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행함으로써 사람 전체가 변화되는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 역시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좋은 이미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거듭남은 사람의 종교적 영역 하나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는 부분, 성경 읽는 부분, 기도하는 부분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의 생각과 감정, 인간관계, 직업생활, 돈을 사용하는 태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누룩이 반죽 전체로 퍼지듯 진리가 사람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는 매우 경건하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면 아직 누룩이 반죽 전체에 퍼졌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변화의 주체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뜯어고쳐 천국적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진리에 반대되는 악을 발견할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때 실제로 사람 안의 질서를 변화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변화에 대해 자랑하기보다 더욱 주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 수련해서 이렇게 되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셨다’는 고백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매우 중요한 접점과 동시에 경계선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자기부인과 절제, 순종과 인내를 강조해 온 전통은 사람의 삶 전체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통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훈련이 ‘내가 나를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자기 공로로 돌아가는 순간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참된 수도적 훈련이라면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는 의식보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깊어져야 할 것입니다. 연단이 깊어질수록 proprium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져야 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눈보다 이해하고 품는 사랑이 깊어져야 합니다.

 

이어서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 두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만큼 귀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상인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 가치관의 문제와 연결합니다. 무엇이 정말 귀한 것인지 발견한 사람은 이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경회가 반복해서 강조해 온 ‘세상적인 가치와 영적인 가치’라는 구분이 다시 나타납니다. 사람이 세상의 성공과 재물과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힘을 사용합니다. 반대로 천국과 영원한 생명, 주님과의 관계를 가장 귀한 것으로 발견하면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집니다. 강사가 좁은 길과 희생, 자기부인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가치의 전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보화’와 ‘진주’를 더욱 깊이 말씀의 선과 진리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진주’는 진리를 나타내는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가치는 단순히 희귀한 지식을 알게 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그의 삶을 선하게 만들기 때문에 귀합니다. 따라서 가장 귀한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은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알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새롭게 질서 지을 만큼 주님의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알게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인물과 장소와 숫자가 인간의 거듭남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정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소유를 파는’ 것입니다. 곧 기존의 자기중심적 가치와 생각을 내려놓고 발견한 진리에 따라 삶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아는 것보다 그 아르카나 때문에 한 가지 악이라도 실제로 피하게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기 소유를 판다’는 표현도 문자적으로 모든 재산을 처분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에서 소유는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붙들고 있는 생각과 사랑까지 포함하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버리기 어려운 소유는 때로 돈이 아니라 ‘내가 옳다’는 생각입니다. 자기 명예, 자기 공로, 자기 판단, 자기 방식, 심지어 자기가 오랫동안 붙들어 온 종교적 확신도 주님의 진리 앞에서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가 proprium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과 지혜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느끼고 싶어 합니다. ‘ 생각’, ‘ ’, ‘ 신앙’, ‘ ’, ‘ 공로’를 붙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가장 깊은 질서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팔아 값진 진주를 산다’는 말씀은 가장 깊게는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는 질서를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변화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때 ‘기뻐하여 돌아가’ 자기 소유를 판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천국적 자기부인은 이를 악물고 모든 것을 빼앗기는 상태가 아닙니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전의 것을 기꺼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손에 쥔 돌멩이를 억지로 빼앗기면 울지만, 더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면 스스로 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방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단순히 ‘세상을 사랑하지 마라’, ‘자기를 부인하라’고 강제로 빼앗으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적 사랑의 더 큰 기쁨을 조금씩 맛보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전에 그렇게 중요했던 것들이 점차 덜 중요해집니다.

 

이것은 앞서 3부에서 살펴본 ‘즐거움의 변화’와도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악을 포기하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복수하지 않는 것이 억울하고,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 손해 같으며, 자기 뜻을 포기하는 것이 죽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선한 사랑을 형성해 가시면 그보다 더 깊은 평안과 기쁨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부인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더 귀한 것을 얻기 위한 자유로운 내려놓음이 됩니다.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기뻐하여’ 모든 것을 판다는 말씀은 바로 이 천국적 자유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수도적 자기부인의 건강한 기준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이 사람을 점점 어둡고 경직되고 타인에게 엄격하게 만든다면 그 열매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부인을 통하여 더 자유로워지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워지고, 자기 명예가 손상되어도 이전보다 평안하며, 주님과 이웃의 선을 더 기뻐하게 된다면 그 훈련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빈 껍데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옥적 즐거움을 비우고 천국적 즐거움으로 채우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누룩, 보화, 진주를 하나의 흐름으로 놓으면 이번 3강 4부의 구조가 매우 아름답게 보입니다. 겨자씨는 ‘생명의 시작과 성장’을 보여 줍니다. 누룩은 ‘ 생명이 사람 전체로 퍼지는 변화’를 보여 줍니다.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는 ‘ 변화가 가능해지는 가치의 전환’을 보여 줍니다. 결국 사람이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무엇을 선택할지가 결정되고, 반복된 선택이 그의 사랑을 형성하며, 그 사랑이 그의 영적 생명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사후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살아온 사랑이 사후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지금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지가 중요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이 가장 귀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실제 선택에서는 계속 자기 명예와 이익을 먼저 선택한다면 아직 보화를 충분히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완전하지 않고 자주 넘어지더라도 선택의 방향이 점차 주님과 이웃의 선을 향한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사랑을 변화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영적 목표’를 반복하여 강조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표가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목표를 ‘가장 높은 등급의 성도가 되는 ’이나 ‘특별한 14만 4천에 들어가는 ’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가장 높은 목표는 주님과 결합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자기 생명이 되며, 그 생명으로 이웃에게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위대함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지 않고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은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 배의 결실’도, ‘가장 밝은 ’도, ‘값진 진주’도 모두 다른 사람보다 높은 영적 지위를 얻는 언어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에게서 더 많은 선과 진리를 받아 더 온전히 살아내는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강사가 강조하는 ‘최선을 다해 영적으로 성장하라’는 권면의 힘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자기 공로나 영적 경쟁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목표는 ‘내가 얼마나 높은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이 얼마나 자유롭게 흘러가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사경회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하나의 접점이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으로부터 이어져 온 이 수도적 전통이 ‘세상보다 영적인 것을 택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좁은 길을 가라’, ‘연단을 통과하라’고 반복해 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언어를 거듭남이라는 더 내적인 구조 안에 놓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자연계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 아래 두는 것이고,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를 내려놓는 것이며,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고통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거슬러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수도원에 들어가느냐 세상 가운데 사느냐가 가장 중요한 구분도 아닙니다. 사람은 수도원 안에서도 자기애와 명예욕을 키울 수 있고, 세상 한가운데서 직업과 가정을 돌보면서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외적 장소보다 내적 질서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정한 ‘세상 포기’는 세상의 쓰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랑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천국적 인간일수록 자연계의 맡겨진 책임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그것을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3강 4부를 읽으면서 ‘나는 겨자씨가 얼마나 크게 자랐는가?’라고만 묻기보다 ‘ 사랑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물어야겠습니다. ‘ 안에 누룩이 얼마나 퍼졌는가?’, 곧 신앙이 예배 시간뿐 아니라 가정과 인간관계와 돈과 말과 생각에까지 들어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보화와 진주로 여기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기꺼이 다른 것을 포기하는지를 보면 그가 실제로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겨자씨의 비밀은 크기에 있지 않고 그 안의 생명에 있습니다. 누룩의 비밀은 양에 있지 않고 안에서부터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에 있습니다. 보화와 진주의 비밀은 값비싸다는 데만 있지 않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가치체계 전체를 바꾸어 놓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비유의 중심에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씨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고, 누룩처럼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진리의 힘도 주님에게서 오며, 우리가 발견해야 할 궁극적인 보화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성장이란 결국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었는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처럼 시작된 주님의 진리가 내 안에서 자라고, 누룩처럼 삶 전체로 퍼지고, 마침내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다른 모든 것보다 귀한 보화가 되어 삶의 우선순위 전체가 달라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사람은 억지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여’ 내려놓습니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변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거듭남이며, 이번 3강 4부에서 강사가 말하는 ‘영적 성장’을 가장 깊은 자리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3강 5부

이긴 ’, 맞은 , 14만 4천과 생명수 : 가장 밝은 빛과 주님과의 결합

3강 5부에 이르면 강의의 무게중심이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를 설명하는 데서, 그 비유들을 통해 지금까지 말해 온 ‘영적 성장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쪽으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앞선 강의에서 다룬 ‘영적 성장론’과 성화된 신앙인들의 생애를 다시 불러오면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 반복되는 ‘이기는 ’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특히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권면이 일곱 번 반복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것은 교회 시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긴 ’를 연단을 통과하여 정결해진 성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간 성도,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의 ‘ 맞은 ’과 14만 4천에 연결합니다.

 

여기서 먼저 이 강의의 중심 의도를 충분히 살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14만 4천이라는 숫자 자체에 호기심을 집중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14만 4천에 들어가는가?’라는 질문 아래 실제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말씀을 인내로 지키고, 시험과 연단 가운데 악과 싸우며,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마침내 ‘이긴 ’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성화된 신앙인들의 삶을 ‘이렇게 살아라’고 보여 주는 모델로 제시하고, 영적 성장의 길에는 출애굽에서 완덕에 이르는 과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해설할 때 14만 4천의 숫자 해석만 놓고 스베덴보리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강사가 전달하려는 실천적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기는 ’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다만 누구를 이기는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이겨야 할 대상은 밖에 있는 세상이나 다른 종교인이나 다른 교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스르는 악과 거짓입니다. 그리고 그 악과 거짓의 뿌리에는 proprium, 곧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며 자기를 중심에 놓으려는 인간의 고유한 자기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이기는 ’라는 말은 영적 경쟁에서 다른 성도보다 높은 등급에 올라간 사람이라기보다,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대적하여 그것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가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욱 깊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아주 현실적인 예를 듭니다. 자신이 ‘이긴 ’인지 알려면 극단적으로 말해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해 보면 알 수 있다는 취지의 설명입니다. 평소에는 자신이 상당히 성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생기면 즉시 내면의 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표현은 다소 익살스럽고 강하지만, 그 안에 담긴 영적 통찰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는 평안할 때의 자기평가보다 자기 사랑이 공격받을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통해 더 잘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살펴본 ‘시험’의 의미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말씀을 듣고 ‘나는 용서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모욕을 당했을 때 용서하는 것은 다릅니다. ‘나는 겸손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었을 때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다릅니다. ‘나는 주님만 의지한다’고 고백하는 것과 모든 자연적 안전망이 흔들릴 때에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은 다릅니다. 시험은 사람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사랑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이러한 드러남이 필요합니다.

 

다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참았다’는 외적 행동만으로 이김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악을 이긴 것은 아닙니다. 속에서는 증오와 복수심을 품으면서 체면 때문에 참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분노가 올라왔지만 그것이 죄임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상대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려 싸울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아직 분노를 느꼈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그곳에서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악한 충동이 한 번도 올라오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올라오는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진리에 따라 거절하는 데서 진행됩니다.

 

따라서 ‘이긴 ’는 한 번도 넘어져 본 적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넘어질 때마다 자기 악을 보고 주님께 돌아가 다시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이 거듭될수록 처음에는 억지로 참던 사람이 점차 참는 것을 덜 힘들어하고, 마침내 상대의 선을 실제로 원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기통제와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자기통제는 겉 행동을 억제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사랑 자체의 방향을 변화시킵니다.

 

강사는 이어서 이러한 ‘이긴 ’를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 곧 ‘ 맞은 ’과 연결합니다. 특히 자신이 강조하는 ‘생명수의 부어짐’ 또는 생명수의 강력한 영적 체험을 인 맞은 종의 중요한 표지로 제시하며, 그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대목에서는 허드슨 테일러가 주님과의 깊은 일치와 내면에서 강물처럼 흐르는 생명을 경험했다고 고백한 내용을 소개한 뒤, 이를 ‘생명수 유입’을 경험한 인 맞은 종의 사례로 해석합니다.

 

바로 이 부분은 이번 재해설에서 상당히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생명수’는 주님과의 깊은 결합에서 오는 영적 생명과 충만을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 자체에는 매우 귀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이 단순한 교리적 동의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실제 자기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상태를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안다’에서 ‘주님으로 산다’로 나아가려는 갈망입니다. 수도적 영성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외적 금욕 자체가 아니라 이런 주님과의 깊은 결합이라면, 그 방향은 충분히 존중할 수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생명수’가 매우 중요한 상응이라는 점입니다. 물은 일반적으로 진리를 나타내며, 특히 ‘생명수’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 그리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영적 생명을 나타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그러므로 ‘생명수가 흐른다’는 이미지는 상응의 관점에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생명수의 유입은 반드시 어떤 특별한 감각적·신비적 체험을 경험해야만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내면에서 강물이 흐르는 것 같은 압도적인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의 영적 등급이나 천국의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체험은 실제일 수도 있고, 사람에게 큰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안전하고 본질적인 기준은 그 체험 이후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세계와 인간의 내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강렬한 감정, 환상, 음성, 황홀감, 몸의 특별한 감각이 반드시 그 자체로 천국적 상태를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그런 체험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조용히 자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행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선을 선택해 온 사람이 오히려 매우 깊은 천국적 생명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 맞은 ’을 특정한 신비 체험을 가진 극소수와 동일시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록의 ‘’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어떤 외적인 표식이나 일회적 영적 체험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생명 안에 받아들여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마’ 역시 중요합니다. 얼굴은 인간의 내적 애정을 나타내고, 특히 이마는 사랑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보이지 않는 표식이 영적 신체에 찍혀 있다는 것보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진리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생명의 성격이 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더 내적입니다.

 

이름’도 말씀에서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질과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성품, 곧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그들의 사랑 안에 새겨져 있다는 뜻이 됩니다. 강사는 필라델피아 교회의 이긴 자와 14만 4천을 연결하면서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아름다운 이미지를 외적 신분 표시에서 내적 생명의 형성으로 가져갑니다.

 

그러면 ‘14만 4천’이라는 숫자도 자연스럽게 다시 보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14만 4천이 교회 시대 가운데 가장 밝은 빛으로 살고 연단을 완성하여 큰 환난을 면제받으며 휴거되는 특별한 성도들의 집단입니다. 강사는 이들을 천국에서 가장 큰 상급을 받는 사람들로 설명하고, 시온산 및 새 예루살렘과 연결합니다. 이 체계 안에서 14만 4천은 사실상 영적 성장의 최고 단계에 도달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숫자를 전혀 다르게 읽습니다.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은 자연적 산술로 정확히 144,000명의 특별한 사람을 세는 숫자가 아닙니다. 12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 곧 교회의 모든 것을 나타내며, 12에 12를 곱한 144는 그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여기에 천이 결합되면서 그 의미가 더욱 충만하게 표현됩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특정한 소수 엘리트 성도들의 정원이라기보다, 주님의 새 교회에 속하여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의 완전한 총체를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숫자 해석의 차이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14만 4천을 ‘가장 높은 극소수의 영적 엘리트’로 이해하면 신앙생활이 자칫 등급 경쟁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반 구원만 받아서는 된다. 14만 4천에 들어가야 한다’는 열망은 처음에는 거룩한 열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미세하게 자기 우월감과 결합할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다른 성도보다 연단받았다’, ‘나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 ‘나는 밝은 가운데 있다’는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영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proprium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강사가 말하는 ‘ 높은 것을 사모하라’는 권면 자체를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방향을 바꾸면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은 천국에 가기 위해 거룩해져야 한다’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많은 진리를 받아들이며, 온전히 이웃에게 쓰임 있기 위해 거듭나기를 원한다’가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자기의 높음을 바라보고, 후자는 주님의 선이 더 많이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 ’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높음은 지배의 높음이 아니라 사랑과 쓰임의 깊이입니다. 더 높은 천사는 더 많은 사람을 자기 아래 두는 천사가 아니라, 더 큰 사랑과 지혜로 더 넓은 쓰임을 행하는 천사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선과 지혜가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더욱 분명히 압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높아질수록 오히려 겸손해집니다.

 

이 원리를 적용하면 강사가 반복해서 말하는 ‘가장 밝은 ’도 더욱 아름답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나는 남들보다 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더 잘 보는 사람입니다. 자연계에서도 밝은 햇빛이 들어오면 어두울 때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듯, 주님의 진리가 밝게 비칠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미세한 자기애와 거짓을 더 분명히 발견합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성장은 자기 확신을 크게 만들기보다 회개를 깊게 합니다.

 

강사는 일곱 교회 가운데 특별히 필라델피아 교회를 높이 평가하면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큰 환난의 면제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의 이긴 자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받는 것을 14만 4천과 연결합니다. 이 해석의 역사적·종말론적 도식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다르지만,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부분은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진리를 삶에 보존하는 것입니다. 특히 시험 가운데 진리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사랑하기 어려운 순간에 사랑의 편을 선택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거짓말하면 유리한 순간에 정직을 선택하며,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복수하고 싶은 순간에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때 진리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행위 안에 ‘새겨진’ 말씀이 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참된 ‘인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사가 ‘나는 번까지 참는데 번째에는 참는다. 이제 번째까지 참아 가야 한다’는 식으로 인내를 설명하는 것도 재미있으면서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참는 횟수를 하나씩 늘려 천국 점수를 올리는 과정은 아닙니다. 더 깊은 목표는 ‘참아야 하는 ’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참을 있는 ’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참습니다. 다음에는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참습니다. 더 깊어지면 상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예전 같으면 상처받았을 일에도 자기 자존심이 덜 반응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랑 자체를 변화시키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긴 ’의 가장 깊은 표지는 초자연적 능력이나 특별한 체험보다 사랑의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만 사랑했는데 이제는 불편한 사람의 선도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이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했는데 이제는 이름 없이 섬기는 것을 기뻐하며, 이전에는 자기 옳음을 증명해야 했는데 이제는 상대의 구원과 공동의 선을 위해 자기 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이런 변화가 가장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번 3강 재작업에서 특별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후의 가르침’ 문제로 들어갈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지상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정도의 교리적 지식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깊은 신학을 공부하고, 어떤 사람은 매우 단순한 신앙만 알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환경 자체가 달라 기독교의 교리를 제대로 접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이 지상에서 정확한 교리 지식을 얼마나 많이 습득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사후 중간영계에서 선한 영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은 바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지상에서 몰랐던 ‘구원 공식’을 죽은 뒤에 처음 듣고 그것에 지적으로 동의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사후에 사람의 지배적 사랑이 근본적으로 뒤집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계는 의지와 사랑의 기본 방향이 형성되는 곳입니다. 사후의 가르침은 이미 선을 사랑하는 사람 안에 있는 선과 그에 맞는 진리를 결합하여, 그가 천국의 질서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지상에서 단순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정직하고 자비롭게 살았지만 복잡한 교리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선한 사랑이 형성되어 있다면, 사후에는 그 선과 조화되는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은 진리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 성경과 신학을 많이 알았지만 실제 사랑이 자기애와 지배욕에 있었다면, 사후에 더 많은 진리를 설명해 준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에 맞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가르침은 ‘몰랐던 정답을 외우게 하는 보충수업’이 아닙니다. 이미 사람 안에 형성된 선한 사랑이 그 사랑에 합당한 진리를 만나 완전해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의 결합을 그렇게 중요하게 말하는 이유입니다. 선만으로는 방향을 분명히 알기 어렵고, 진리만으로는 생명이 없습니다. 선은 진리를 원하고 진리는 선을 향합니다. 천국은 바로 그 둘이 결합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오히려 이번 사경회가 그토록 강조해 온 ‘’의 중요성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줍니다. 사후에도 가르침이 있다고 해서 ‘그럼 땅에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죽은 다음 배우면 되겠네’가 되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 자체가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어떤 것을 반복하여 선택하고 사랑했는지가 사후에 어떤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자연계의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연단을 통하여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조와 스베덴보리의 사후 교육은 서로 뜻밖에 깊은 접점을 가집니다. 강사는 지상에서 연단을 통과하여 정결해지고 좋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지상에서 사람의 사랑과 의지가 형성되는 것을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봅니다. 다만 ‘완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지상에서 모든 교리적 이해와 영적 성장을 완전히 끝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향하고 선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생명의 방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후에도 천사들은 영원히 지혜와 사랑 가운데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졸업장을 받은 완성품들이 들어가는 정지된 박물관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더 많은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살아 있는 나라입니다. 천사도 영원히 더 지혜로워질 수 있고 더 깊은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기쁨은 ‘내가 얼마나 높은 천사가 되었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더 많이 받아 더 온전히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14만 4천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꾸어 놓습니다. ‘나는 특별한 안에 들어갈 있을까?’라는 불안이나 영적 경쟁보다 ‘나는 지금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수 체험을 했는가?’보다 ‘생명수가 삶에서 실제 열매가 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생명수가 정말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왔다면 그 물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의 말이 부드러워지고, 판단이 자비로워지고, 자기 고집이 약해지고,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함께 깊어져야 합니다.

 

이 기준은 신비 체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해 줍니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깊은 기도 가운데 주님의 임재와 생명을 강력하게 경험했다면 그것은 귀한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을 자기 영적 신분을 증명하는 훈장으로 삼지 않고, 그 경험으로 인해 더 겸손하고 더 사랑하며 더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비로소 그 체험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체험은 씨가 될 수 있지만 열매는 삶에서 확인됩니다.

 

또한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과 같은 수도적 공동체의 역할을 생각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강사는 혼자서 영적 싸움을 잘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사경회에 다시 모여 ‘충전’하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다시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실제적입니다. 사람은 혼자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그것을 살아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공동 예배와 말씀, 서로의 간증과 권면, 함께하는 기도는 사람이 다시 방향을 주님께 돌리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은 철저히 공동체적입니다. 천사는 혼자 완전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각 천사는 자신과 상응하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천사들과 연결되고, 공동의 쓰임 안에서 더 큰 한 사람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숙을 ‘ 혼자 높은 단계에 도달하는 ’으로 생각하면 이미 천국의 질서와 어긋납니다. 참된 성숙은 사람을 고립시키지 않고 더 깊은 관계와 쓰임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다만 공동체 역시 사람을 대신하여 거듭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충전’되어 돌아가도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악을 만나고 그것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일은 각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강사가 ‘각자 처소에 가서 열심히 영적인 싸움을 해서 이기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집회가 목적이 아니라 삶이 목적입니다. 수도원이 목적이 아니라 거듭남이 목적입니다. 말씀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그 말씀이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3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종합하면, 강사가 말하는 ‘이긴 ’, ‘ 맞은 ’, ‘14만 4천’, ‘생명수’, ‘가장 밝은 ’이라는 여러 표현은 모두 한 중심으로 모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 들어와 그의 사랑과 생각과 삶을 점차 변화시키고, 마침내 사람의 생명의 성격이 되는 ’입니다. 이때 ‘’은 외적인 신분표가 아니라 생명에 새겨진 주님의 질서가 되고, ‘생명수’는 특별한 체험만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삶으로 흘러드는 것이 되며, ‘이긴 ’는 다른 성도보다 우월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해 온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기는가’입니다. 인간의 의지력이 최종적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심에는 언제나 어린양이 계십니다. 사람이 싸우기는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이기게 하는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참된 이김의 마지막 고백은 ‘내가 이겼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밝은 ’을 추구한다는 말도 전혀 다른 울림을 갖습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주님의 빛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이며, 그 빛으로 남을 비추기 전에 먼저 자기 안의 어둠을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 맞은 ’이 되고 싶다는 갈망도 특별한 신분을 얻으려는 갈망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곧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자기 생명에 깊이 새겨지기를 원하는 갈망이 됩니다. ‘생명수’를 원한다는 것도 특별한 신비 체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자기 안으로 흘러와 말과 행동과 관계와 쓰임 전체를 살려 내기를 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3강 5부의 가장 깊은 질문은 ‘나는 14만 4천에 속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이 지금 이마, 사랑에 새겨지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특별한 생명수 체험을 했는가?’보다 ‘주님의 생명이 오늘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이긴 자인가?’보다 ‘오늘 드러난 하나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고 있는가?’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강사가 그토록 강조하는 ‘이긴 자가 되라’는 권면의 힘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가까워집니다. 종말의 어느 날 특별한 성도가 되기 위한 명령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싸움에서 주님 편에 서라는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승리들이 거듭될 때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시고, 생명수를 흐르게 하시며, 마침내 그 사람을 천국의 선과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시키십니다. 사후의 가르침조차 그때 전혀 낯선 무엇을 억지로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지상에서 주님께 향하기 시작한 그 사랑을 더욱 밝은 진리로 완성해 가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이번 3강 5부에서 ‘이긴 ’와 ‘ 맞은 ’을 바라볼 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열어 주는 가장 깊은 지평이라고 하겠습니다.



3강 6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차례의 영적 싸움과이기는 ’ : 거듭남의 과정

3강 6부에서는 지금까지 다루어 온 ‘영적 성장’이 출애굽의 여정과 본격적으로 결합됩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겪은 싸움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고, 이것을 성도의 영적 성장 단계와 연결합니다. 첫 번째는 바로의 군대에 쫓기는 단계, 두 번째는 아말렉과 직접 싸우는 단계, 세 번째는 아모리 왕들과 바산 왕 옥을 비롯한 강한 세력들과 싸우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이를 요한일서의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의 단계와 연결하면서, 처음에는 악의 세력 앞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던 사람이 점차 싸울 수 있게 되고, 마침내 강한 적과도 싸워 이긴 뒤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을 ‘이기는 ’가 되어 가는 영적 성장으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이번 3강 전체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가장 흥미롭게 만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강사가 제시하는 ‘바로의 추격 = 아이 단계, 아말렉 = 청년 단계, 아모리·바산과의 전쟁 = 아비 단계’라는 일대일 도식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역사를 단순한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 이동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영적 성장과 싸움의 과정으로 읽으려 한다는 방향에서는 놀랄 만큼 가까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출애굽기는 그 깊은 속뜻에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악과 거짓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수많은 시험을 통과하여 마침내 선과 진리가 결합된 거듭난 상태로 인도되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강사의 해석을 먼저 충분히 따라가면서 그 아래에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겹쳐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첫 번째 상태는 바로의 군대에 쫓기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싸우지 못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군사적 훈련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합니다. 백성은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아직 영적으로 어린 성도가 악의 세력 앞에서 제대로 싸울 힘이 없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장면이 거듭남 초기의 인간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은 진리를 처음 받아들이고 ‘이제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전의 악한 습관과 사랑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받아들인 뒤에야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악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는 바로의 지배가 일상이었지만, 나오기 시작하자 바로가 추격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거듭남을 시작했기 때문에 싸움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싸움이 생겼다는 것이 반드시 뒤로 물러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악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싸울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 이제 서로 반대되는 두 질서가 만나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갖기 시작한 뒤 자신의 악이 더 많이 보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화를 내면서도 그것이 크게 문제라고 느끼지 않았는데, 말씀을 받아들인 뒤에는 작은 분노까지 마음에 걸립니다. 예전에는 자기 명예를 위해 행동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여겼는데, 이제는 그 동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악이 갑자기 더 많아졌기 때문이라기보다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어둠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모르면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서 ‘나는 신앙생활을 할수록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느껴질까?’ 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거듭남의 초기에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악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배우게 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분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이어서 백성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길을 여시고 인간은 그 길을 걸어갑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이루시지만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열어 주신 길로 자유롭게 걸어가는 응답이 요구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아말렉이 공격해 왔을 때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일방적으로 도망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사람들을 선택하여 직접 싸웁니다.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들고 있고, 여호수아와 백성은 아래에서 전쟁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여 이제 악과 직접 싸울 수 있게 된 ‘청년’의 단계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악 앞에서 두려워 도망치던 사람이 이제는 훈련을 받아 싸워 이기기도 하고 때로는 지기도 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매우 중요한 거듭남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에서 반복되는 핵심 원리입니다. 사람이 ‘주님이 하시니까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하면 자유와 이성이 사용되지 않으며, 악을 자신의 선택으로 거절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 의지력으로 악을 이기겠다’고 하면 proprium에 의존하게 됩니다. 올바른 질서는 ‘나는 최선을 다해 싸우지만 실제 힘은 주님에게서 온다’입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은 이 두 요소를 아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아래에서는 여호수아가 실제로 칼을 들고 싸웁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모세의 손이 들려 있어야 합니다.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기고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깁니다. 문자 그대로만 보면 기이한 전쟁 장면이지만, 상응으로 읽으면 인간의 실제 노력과 주님에게서 오는 능력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은 아래에서 싸워야 하지만 승리의 능력은 위에서 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악습을 끊는 문제를 매우 실제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악습은 성령의 도움으로 비교적 쉽게 끊어지지만, 어떤 악습은 우리의 의지를 들여 계속 싸우면서 끊게 하시는 훈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발의 등이요’라는 말씀을 들고, 주일 설교를 들은 뒤 제목조차 잊어버리는 데서 끝나지 말고 한 주간 그 말씀을 계속 되새기고 묵상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만합니다. 특히 ‘악습에 따라 싸움의 양상이 다르다’는 관찰은 실제 거듭남에서도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악을 한꺼번에 인간에게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차례로 드러내십니다. 어떤 외적 악은 비교적 빨리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 아래 숨어 있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뿌리는 훨씬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이라는 외적 행동을 끊는 것보다 ‘나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깊은 명예욕을 다루는 것이 훨씬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분노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내가 무시당해서는 된다’는 자기 사랑을 다루는 것이 더 깊은 싸움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싸움이 반드시 쉬워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은 악이 드러나면서 전쟁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강사가 말하는 세 번째 단계와도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 같은 강력한 적들과 싸웁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성숙한 ‘아비’의 단계, 곧 더욱 깊은 연단과 싸움을 통과하는 단계로 설명합니다. 초기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과 싸웠다면, 성장할수록 인간의 더 깊은 사랑과 동기 속에 숨어 있는 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초신자보다 자기 자신을 더 부족하게 느끼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상합니다. 더 오래 신앙생활을 했으니 자신이 더 거룩하다고 느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 깊은 영적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반대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이 더 깊이 들어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애와 자기 의, 자기 공로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장은 ‘나는 이제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자기 확신을 키우기보다 주님의 자비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더 깊이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이라는 강사의 구분도 영적 우열의 계급표처럼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국의 성장은 누가 더 높은 계급인가를 겨루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더 깊은 것을 열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어린 단계에는 어린 단계에서 필요한 보호와 은혜가 있고, 청년 단계에는 싸움과 힘이 있으며, 아비의 단계에는 더 깊은 지혜와 사랑이 있습니다. 어느 단계에서도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나안’의 의미가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세 차례의 싸움을 통과하고 가나안에 들어간 성도를 ‘이기는 ’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가나안은 매우 중요한 표상입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나라와 교회, 인간 안에서는 천국적·영적 생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간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의 생명의 중심이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모든 싸움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넌 뒤에 오히려 가나안 족속들과 계속 싸워야 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어느 순간 완덕에 도달하면 이상 악과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로 이해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사람은 지상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거듭납니다. 더 나아가 사후 천국에서도 영원히 사랑과 지혜 가운데 완전해져 갑니다.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하신 주님의 선과 지혜를 끝까지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종착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기는 ’도 완성된 무결점 인간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긴 악보다 내일 더 깊은 악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악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나타날 때 누구의 편에 서는가입니다. 악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고 변호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주님의 질서에 반대됨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거절하는가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씀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더욱 깊어집니다. 영적 싸움에서는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proprium은 놀라울 만큼 자기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것은 ‘정의감’이라고 부르고, 내 고집은 ‘신념’이라고 부르며, 명예욕은 ‘사명감’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은 단순히 싸울 때 힘을 주는 격려문이 아니라 무엇이 실제 선이고 진리인지를 밝혀 주는 빛입니다.

 

주의 말씀은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에서 ‘’이라는 표현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발은 인간의 가장 바깥 자연적 삶, 곧 실제 행위의 차원과 관계합니다. 말씀이 ‘발의 ’이라는 것은 진리가 단지 높은 신학적 사색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오늘 내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빛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이 관계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이 욕망을 따라가야 하는지 거절해야 하는지와 같은 실제 삶의 자리에서 말씀이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강사가 주일에 들은 말씀을 한 주간 계속 되새기라고 권하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영적 훈련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말씀을 단순히 반복해서 기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진리를 기억에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을 실제 상황에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어느 순간 ‘, 바로 상황에서 내가 말씀대로 해야 하는구나’ 하는 때가 옵니다. 그때 진리가 기억에서 삶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 진리를 따라 실제로 행동할 때 진리는 선과 결합합니다.

 

이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입니다. 말씀을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선행만 있으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통해 방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게 하시며, 마침내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이 결합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거듭납니다.

 

이렇게 보면 출애굽 여정 전체는 단순한 ‘연단 코스’보다 훨씬 풍성한 의미를 갖습니다. 애굽은 속박입니다. 홍해는 이전 상태와의 결정적 분리입니다. 광야는 진리를 배우고 시험을 통하여 그것을 삶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만나와 물은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선과 진리입니다. 아말렉과 여러 적들은 거듭남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요단은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경계이고, 가나안은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형성되는 상태입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주체는 인간의 의지력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계속 반복되는 ‘여호와께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지혜로 길을 찾아 가나안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앞서 갔습니다. 만나도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반석의 물도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싸움에서는 그들이 칼을 들었지만 승리는 여호와께로부터 왔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전 과정이 주님의 역사임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애굽에서 나와야 했고, 홍해 앞에서 앞으로 걸어가야 했으며, 만나를 거두어야 했고, 아말렉과 싸워야 했으며, 요단을 건너야 했습니다. 이것이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하는 인간의 자유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돌처럼 끌고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선택하고 선을 행하게 하시며, 그 자유 안에서 주님과 결합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하는 ‘악습을 끊는 훈련’도 매우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직 마음으로는 이것을 좋아하니까 억지로 끊는 것은 위선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악을 좋아하는 욕망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이 죄임을 알고 행하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처음에는 의지와 행동 사이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싸움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해 가시면 언젠가는 이전에 좋아했던 악 자체를 싫어하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 악을 끊었다고 해서 거듭남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술이나 도박이나 음란 같은 눈에 띄는 악습을 끊는 것은 매우 귀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지배욕과 자기애, 교만, 타인에 대한 멸시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외적인 애굽에서 끌어내신 뒤 광야를 지나 더 깊은 적들과 만나게 하십니다. 이 과정이 때로 길고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영적 성장에는 ‘세월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강의 첫머리에서도 복음의 씨가 싹이 되고 이삭이 되고 마침내 익은 열매가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거듭남은 조급하게 완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시면서 수많은 상태와 경험을 통하여 사랑의 질서를 바꾸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은 기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땅 위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겨울 동안에도 뿌리에서는 일이 일어나듯,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도 계속됩니다.

 

이 점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중요합니다. ‘ 사람은 아직 모양인가’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영적 여정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로의 군대 앞에서 떨고 있는 단계인지, 아말렉과 싸우다가 넘어지는 단계인지, 아니면 겉으로는 평범해 보여도 매우 깊은 내적 싸움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보존해 두신 리메인스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론은 다른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를 오래 참고 돕게 하는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이번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연단’, ‘좁은 ’, ‘자기부인’, ‘싸워 이김’을 강조해 온 것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을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하려는 강한 실천적 영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강사 자신도 성결수도회 수도사로서 공용복 선생 시절부터 이 전통 안에 함께해 온 분이라는 배경을 알고 들으면, ‘광야’와 ‘연단’이라는 말이 단순한 강단의 수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삶으로 붙들어 온 언어일 수 있음을 존중하게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수도적 연단을 한 가지 방향으로 더 깊게 가져갑니다. 연단의 목적은 ‘강한 영적 전사’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 의지가 강해져 웬만한 고난은 다 버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 깊이 알고 주님의 힘에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악을 이겨야 한다’고 싸웠다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 아니시면 나는 이길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때 더 힘 있게 싸울 수 있습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를 한 사람의 거듭남으로 읽으면 이것이 선명해집니다. 처음에는 바로가 너무 커 보이고 이스라엘은 너무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정이 계속될수록 사람이 강해진다기보다 ‘여호와께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점점 배우게 됩니다. 아말렉과 싸우면서도 모세의 손이 들려 있어야 하고, 여리고 앞에서는 인간의 군사 전략보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기 능력을 더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시록의 ‘이기는 ’와 다시 만납니다. 이기는 자는 자신의 영적 근육이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린양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기는 사람입니다. 계시록 전체가 결국 보여 주는 승리는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입니다. 사람은 그 승리에 참여합니다. 주님 편에 서서 싸우고, 진리를 선택하고, 악을 거절하면서 주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자기 생명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바로의 추격을 받고,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며, 강한 적들과의 전쟁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의 여정은 단지 성도가 단계의 연단 코스를 통과하여 영적 강자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속박에서 끌어내어 진리를 가르치시고, 시험 가운데 진리를 삶으로 만들게 하시며,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과 거짓을 거절하게 하시는 가운데 실제 모든 승리는 주님께로부터 받게 하시고, 마침내 선과 진리가 결합된 천국적 질서를 사람 안에 이루어 가시는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그리고 이 해설의 끝에서 가장 오래 남았으면 하는 것은 강사의 매우 소박한 권면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훈련을 해야 된다.’ 이 말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생명줄입니다. 광야에서는 길을 잃기 쉽고, 자기 생각이 주님의 뜻처럼 느껴질 때도 있으며, 악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그때 우리의 ‘발에 ’이 됩니다. 아주 먼 미래를 한꺼번에 비추는 탐조등이라기보다, 오늘 내딛어야 할 한 걸음을 보여 주는 등입니다. 오늘 이 사람에게 화를 낼 것인가 참을 것인가, 이 일을 정직하게 처리할 것인가 편법을 택할 것인가, 내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관계의 선을 지킬 것인가, 받은 상처를 붙들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를 비춥니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을 주님의 힘으로 옮길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애굽에서 멀어지고 가나안을 향해 갑니다.

 

결국 ‘이기는 ’가 되는 길은 어떤 거대한 마지막 시험에서 한 번 영웅적으로 승리하는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작은 진리 하나를 실제로 살아내고, 내일 또 하나의 악이 드러나면 그것을 주님 앞에 인정하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그러면서 점점 자기 힘보다 주님의 힘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을 오래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가나안을 향해 걸어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자기 손을 꼭 붙잡고 이끌고 계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강의 첫머리에서 함께 부른 ‘예수님 손을 잡아 주소서’라는 찬송이 그래서 3강 6부 전체의 영적 내용을 뜻밖에 정확하게 압축하고 있습니다.



3강 7부

예루살렘의 이름 시온산, 14만 4천 : 천국의 장소와 상태, 그리고이름이 기록된다

3강 7부에서는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이기는 ’의 문제가 계시록 3장 12절의 약속 가운데 특히 ‘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집중됩니다. 강사는 생활 속의 작은 일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이기는 ’이라고 강조한 뒤,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 이것이 열매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 번째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넘어가, 이기는 자에게 ‘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는 약속을 풀이하기 시작합니다. 이 흐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강사에게 ‘ 예루살렘’은 단순한 종말론적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실제로 연단을 통과하고 이긴 사람이 마침내 들어가게 되는 최고의 천국적 목적지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앞부분에서 강사가 ‘이김’을 거창한 순교나 위대한 업적보다 일상생활의 작은 사랑과 연결한 것은 이번 3강 가운데서도 특히 귀하게 받아들일 만한 대목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났을 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반갑게 인사하는 것, 가족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 오히려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 배우자가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했을 때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 같은 매우 구체적인 예를 듭니다. 강사는 이것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바로 이런 작은 승리들이 쌓여 ‘익은 열매’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큼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대부분 거대한 사건보다 아주 작은 선택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평생 한두 번 경험할 극적인 사건보다 매일 수십 번 만나는 작은 선택들이 그의 사랑을 형성합니다. 말을 한마디 더 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상대의 허물을 들추어낼 것인가 덮어 줄 것인가, 나에게 돌아올 이익을 먼저 생각할 것인가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생각할 것인가, 인정받지 못했을 때 마음속으로 상대를 깎아내릴 것인가 자기애의 움직임을 보고 거절할 것인가 하는 선택들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작은 선택이 단순한 ‘착한 행동 점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 안에는 어떤 자극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반응하려는 오래된 proprium의 경향이 있습니다. 무시당하면 화를 내고 싶고, 손해를 보면 보복하고 싶으며, 자존심이 상하면 상대를 낮추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 순간 말씀의 진리가 떠오르고, 사람이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자기 욕망을 거절한다면 아주 작은 사건 속에서 실제 영적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밖에서 보면 인사 한 번 하고 지나간 일에 불과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자기애가 한 걸음 물러나고 주님의 질서가 한 걸음 들어온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 것보다 생활 속의 작은 것으로 승부를 보자’고 말한 것은 상당히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적 성격은 추상적인 신앙 고백이 아니라 반복되는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의지 안에 형성됩니다. 진리를 한 번 아는 것과 그 진리를 반복하여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기억에 있고, 다음에는 이해에 있으며, 실제로 행하기 시작하면 의지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기쁨이 되면 진리와 선이 결합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이런 흐름 뒤에서 강사는 계시록 3장 12절의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위에 기록하리라’를 다룹니다. 강사는 이 가운데 ‘ 예루살렘의 이름’을 특별히 천국의 특정한 장소와 연결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가나안 전체가 천국을 표상한다면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왕이 거하는 도성, 곧 수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역시 천국 전체가 아니라 ‘천국의 수도’이며, 이기는 자들이 특별히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상당히 구체적인 공간적 천국관을 제시합니다.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말씀을 정육면체의 실제 공간적 구조로 이해하고, 그것을 천국 안의 특별한 중심 도성으로 봅니다. 이어서 구약의 모리아산, 시온산, 예루살렘을 동일한 장소가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 설명하면서, 이것을 천국에도 적용합니다. 지상의 모형에서 모리아산이 시온산이 되고 예루살렘이 되었듯, 현재 천국의 수도가 ‘시온산’이며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면 그것이 ‘ 예루살렘’이라 불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강사의 해석 사이에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어느 쪽을 공격하거나 재단하는 방식보다 ‘말씀의 표상을 어디까지 자연적 공간으로 읽고, 어디서부터 영적 상태로 읽을 것인가’라는 차이로 설명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강사는 가나안과 예루살렘의 지리적 구조를 천국의 실제 지리적 구조에 비교적 직접적으로 대응시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가나안과 예루살렘, 시온을 모두 상응에 따라 영적인 상태와 교회,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읽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 예루살렘’은 특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천국 안에 있는 거대한 정육면체 형태의 수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내려오는 ‘ 교회’를 표상합니다. 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도 어떤 물질적 도시가 우주 공간을 통과하여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이름 자체의 상응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교회를 나타내며, 특히 교회의 교리와 진리의 측면을 나타냅니다. 그곳에 성전이 있고 예배가 이루어지며, 율법과 가르침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새롭게 세우시는 교회, 곧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참된 이해와 그 이해에 따른 생명이 새롭게 형성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먼저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야 할 도시라기보다 ‘어떤 상태인가?’를 물어야 할 영적 실재입니다.

 

이 차이는 계시록 전체를 읽는 방법과 직결됩니다. 계시록의 성, 문, 성벽, 보석, 금, 강, 생명나무, 숫자와 치수를 자연계의 건축물과 동일한 방식으로 읽으면 계시록은 미래 천국의 지리와 건축을 묘사하는 책이 됩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읽으면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와 인간의 상태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영적 그림이 됩니다. 성벽에도 의미가 있고, 열두 문에도 의미가 있으며, 열두 기초석과 각종 보석에도 의미가 있고, 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것에도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는 것은 정육면체의 천국 건축물을 정확하게 측량하도록 주어진 정보라기보다, 새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완전하고 조화로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더 가깝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자연적 산술을 위한 숫자가 아니라 영적 질과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을 몇 리, 몇 킬로미터 크기의 실제 도성으로 계산하기 시작하면 문자적 형상은 선명해질 수 있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아르카나는 오히려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온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사는 시온산을 현재 천국의 수도 이름으로 이해하고, 장차 그것이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시온은 예루살렘과 아주 가까우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일반적으로 ‘시온’은 교회와 천국 가운데에서도 사랑의 선, 특히 주님을 향한 천적 사랑과 관련되고, ‘예루살렘’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교리에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시온과 예루살렘은 단순히 같은 장소의 옛 이름과 새 이름이라기보다 선과 진리,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가르침이라는 서로 구별되면서 결합되는 영적 실재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매우 아름다운 부분입니다. 성경에서 ‘시온과 예루살렘’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단순한 시적 반복만은 아닙니다. 시온은 선과 사랑에 속한 것을, 예루살렘은 진리와 신앙에 속한 것을 나타내며, 둘이 함께 언급될 때에는 교회의 선과 진리가 결합된 전체 상태가 표현될 수 있습니다. 결국 천국의 본질도 장소보다 이 결합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합당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가 천국입니다.

 

따라서 ‘시온산에 14만 4천’이라는 장면도 훨씬 깊어집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14만 4천을 ‘교회 시대 이긴 자들’, 곧 ‘ 맞은 종들’로 이해합니다.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계시록 3장 12절에서도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기록하겠다고 했으므로 양쪽을 동일한 집단으로 연결합니다. 이 논리 안에서 강사는 결국 ‘이긴 = 맞은 = 14만 4천 = 시온산에 서는 사람 =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하나의 체계를 세웁니다.

 

이 체계는 강사의 ‘핵심진리’ 전체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단순히 ‘스베덴보리와 다르다’고 지나가면 강의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강사가 왜 그토록 ‘연단’, ‘이김’, ‘완덕’, ‘익은 열매’를 강조하는지 여기에서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 위한 덕목이 아니라, 그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는 실제로 14만 4천의 ‘이긴 ’가 되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보완을 제공합니다. 계시록의 14만 4천은 정확히 그 숫자만큼의 특별한 사람을 선발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12’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 따라서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수입니다.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이 모두 이 구조 안에 있습니다. 144는 12 곱하기 12이고, 144,000은 그 의미가 충만하게 확대된 것입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구원받은 최고 등급의 정확히 144,000명’이라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새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충만한 전체를 표상한다고 보는 것이 상응에 더 가깝습니다.

 

강사는 실제로 ‘14만 4천이면 너무 적지 않느냐’는 질문을 예상하면서 ‘적지 않다’고 말하고, 그 숫자를 실제 예정된 수로 이해합니다. 또한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고 광야 과정에 있는 사람들과, 가나안에 들어간 14만 4천의 ‘ 맞은 ’을 구별합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체계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당히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성장을 자연적 숫자의 정원과 결합하는 순간 ‘나는 안에 들어가는가?’라는 경쟁적·선발적 신앙이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초점은 천국의 정원 제한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사람을 일정 숫자까지만 받아들이고 문을 닫는 사랑이 아닙니다. 천국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몇 명을 받아 주시는가가 아니라 사람이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었는가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기뻐하는 사람은 천국의 분위기를 기뻐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가장 깊은 분별은 ‘명단에 들어갔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랑이 사람의 생명이 되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계시록 3장 12절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말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나 신분증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어떤 존재의 ‘이름’은 그 존재의 질, 곧 그 성품과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에게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문자적 이름 몇 글자가 영적 이마에 쓰인다는 의미를 넘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생명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 예루살렘의 이름을 위에 기록하리라’는 말씀 역시 ‘ 예루살렘에 입장할 자격증을 붙여 주겠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새 예루살렘이 주님의 새 교회와 그 교회의 진리와 선을 나타낸다면, 그 이름이 사람에게 기록된다는 것은 그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의 질이 그 사람 안에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 자신이 ‘ 예루살렘적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전환입니다. 질문이 ‘나는 죽어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있을까?’에서 ‘ 예루살렘이 지금 안에 내려오고 있는가?’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1장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합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위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와 그의 생각과 사랑과 행위를 새롭게 질서 지을 때, 작은 의미에서 새 예루살렘이 그 사람 안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과 ‘ 예루살렘이 사람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면 사후에는 그 내적 상태와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천국에서 장소는 상태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영계에서는 비슷한 사랑과 진리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가까이 있고, 다른 상태의 사람들은 멀리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영계의 공간은 자연계의 물리적 공간과 동일하지 않고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공간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강사가 말하는 ‘천국의 수도’라는 표현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자연계의 서울이나 워싱턴처럼 중앙정부가 위치한 물리적 수도로 상상하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가장 중심적인 선과 진리가 가장 충만하게 나타나는 영적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는 실제 공동체들이 있고 장소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치는 거리와 좌표보다 사랑과 지혜의 상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중심’이라는 말 역시 영적으로는 주님과의 결합 상태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있다’는 표현이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중요한 것은 ‘시온산의 주소가 어디인가?’가 아니라 ‘어린양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 것은 황금길도, 보석 성벽도, 거대한 도성도 아닙니다. 주님의 임재입니다. 그리고 그 임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14만 4천이 시온산에 서 있다는 말씀의 중심은 특별한 엘리트들이 최고급 천국의 수도에 입성했다는 데 있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교회의 충만한 전체가 어린양과 결합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또 그들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마는 얼굴 가운데에서도 특히 사랑과 의지의 상태와 관련됩니다. 얼굴이 인간의 내적 애정을 나타낸다면 이마는 그 중심적인 사랑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지적 기억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에게서 오는 선이 그들의 지배적 사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3강 7부 앞부분의 ‘작은 승리’와 뒷부분의 ‘이마에 기록된 이름’이 사실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전혀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한쪽에서는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라고 하고, 배우자가 기분 나쁘게 맞는 말을 했을 때 참으라고 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시온산과 새 예루살렘과 14만 4천이라는 거대한 계시록의 환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둘 사이에 놀라운 연결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은 바로 그런 작은 선택들을 통해 사람 안에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영적 이마에 도장이 ‘’ 찍혀 천국의 특별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싶은 순간에 사랑을 선택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고 싶은 순간에 이웃의 선을 생각하고,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순간에 진리를 선택하고, 자기 공로를 주장하고 싶은 순간에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선택들이 쌓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선과 진리가 조금씩 인간의 의지 안에 새겨집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작은 쌓이고 쌓이고 쌓여 가지고 익은 열매가 된다’고 말한 것은 오히려 ‘이름이 기록된다’는 계시록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매우 좋은 실천적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은 단순히 적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집니다. 주님의 이름을 입술로 부르는 것과 주님의 성품이 사람의 생명에 새겨지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의 이름을 생명에 기록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정직과 겸손과 쓰임의 질서가 사람의 실제 선택 속에서 자기 것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자기 것이 된다’는 표현은 조심해야 합니다. 선 자체가 인간의 소유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선은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천사들도 자기 안의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사가 천사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기 안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것을 기쁘게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선이 ‘생명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자기 공로로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이기는 ’ 개념도 한층 부드럽고 깊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영적 전쟁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14만 4천의 제한된 정원 안에 선발되는 사람이기 전에, 날마다 자기 안의 proprium과 싸우면서 주님께서 이기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가장 큰 승리는 ‘내가 이겼다’는 의식마저 내려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승리자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영성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과도 아주 깊은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의 최종 목적은 고통을 많이 견디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영적 등급을 획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질서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중심이 되시는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광야 연단’도 자기 의지를 강철처럼 단련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자기 의지를 주님의 질서 아래 놓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됩니다. 이 사경회의 오랜 수도적 전통을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깊이 보태 줄 수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강사는 이어 ‘광야 연단 과정 속에서 자기 , 자기 행실을 깨끗하게 빨아서 정결해진 행실이 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권세를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매우 귀한 핵심이 있습니다. 계시록의 ‘’이 인간의 삶과 관계된다는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의복은 인간의 내적인 것을 감싸고 표현하는 진리, 그리고 그 진리에 따른 외적 삶과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옷을 깨끗하게 한다는 이미지를 실제 삶의 정결과 연결하는 방향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그 옷을 사람이 자기 힘으로 깨끗하게 만들어 입장 자격을 획득한다고 이해하면 자기 공로의 위험이 생깁니다. 계시록의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합니다. 중심은 언제나 어린양입니다. 인간은 회개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악을 제거하시고 선을 주시는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나는 광야에서 충분히 연단받아 자격을 얻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께서 나를 수없이 넘어지는 가운데 붙들어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익은 열매’의 의미도 바꾸어 놓습니다. 익은 열매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실제 행위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자기 자신에게 먹이려고 맺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존재에게 양식이 됩니다. 따라서 영적 열매의 가장 분명한 표지는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연단을 받았는가보다 그 연단을 통해 내가 얼마나 더 온유하고 자비롭고 정직하고 유용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높은 ’을 생각할 때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천국의 수도이고 14만 4천의 이긴 자들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높음은 지위의 높음보다 사랑과 쓰임의 깊이입니다. 가장 높은 천사는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천사가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 때문에 가장 넓은 쓰임을 기쁨으로 행하는 천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가장 낮게 여깁니다. 자기 안의 모든 선이 주님의 것임을 가장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약속은 어떤 의미에서는 ‘천국 시민권’보다 훨씬 더 큰 약속입니다. 단순히 좋은 장소에 보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와 상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사람을 외적으로 집어넣는다고 천국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안에 천국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선과 진리의 결합이 그 사람의 생명이 되어야 그 사람은 천국의 분위기 속에서 숨 쉬듯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가장 깊은 준비는 새 예루살렘이 먼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내 이해를 새롭게 하고, 그 진리에서 오는 선이 내 의지를 새롭게 하며, 그 선과 진리가 결합하여 내 실제 삶을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은 먼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작은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하신다는 말씀은 연단을 완성한 정확히 14만 4천 명의 특별한 성도가 천국의 물리적 수도에 입성할 자격을 얻는다는 뜻으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자기애와 거짓을 이기시고 사람이 자유롭게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교회의 질서가 그의 사랑과 삶에 새겨지며, 마침내 내적 상태와 상응하는 천국의 공동체 안에서 어린양과 결합하게 된다는 아르카나로 읽을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7부에서는 뜻밖에도 강사가 앞에서 한 아주 소박한 말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작은 쌓이고 쌓이고 쌓여 가지고 익은 열매가 된다.’ 이것은 거대한 새 예루살렘 환상을 우리의 오늘 하루와 연결해 줍니다. 새 예루살렘은 계시록 마지막 장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하는 그 순간, 배우자의 옳은 말을 자존심 때문에 거부하지 않는 그 순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하는 그 순간, 내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선을 먼저 생각하는 그 순간,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한 뒤 ‘내가 잘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도우셨다’고 마음을 돌리는 그 순간, 새 예루살렘의 한 조각이 우리 안으로 내려옵니다.

 

그렇게 작은 선택이 쌓이고,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선이 점차 사랑이 되어 갈 때 주님의 ‘이름’은 더 이상 성경책의 글자에만 있지 않고 사람의 생명에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위에 기록하리라’는 약속의 가장 아름다운 성취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새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를 새 예루살렘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3강 8부

천년왕국, 첫째 부활과 노릇’ : 주님의 나라와 부활의 참된 의미

3강 8부에서는 앞서 다룬 ‘ 예루살렘의 이름’과 14만 4천에 관한 설명에서 자연스럽게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광야의 연단 가운데 ‘자기 ’, 곧 자기 행실을 깨끗하게 하여 익은 열매가 된 이기는 자에게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가 주어진다고 정리한 뒤, 계시록 20장 1절 이하의 천년왕국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종말론적 체계에서는 예수님께서 지상 재림하시고 아마겟돈 심판을 행하신 뒤 이 땅에 실제적인 ‘천년 그리스도 왕국’, 곧 메시아 왕국을 세우십니다. 따라서 이번 8부는 앞서의 개인적 영적 성장론이 본격적인 미래 종말론의 시간표와 결합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눈여겨볼 것은 강사가 ‘천년왕국’을 말하면서 지상의 천국을 주장하는 여러 이단적 재림주 운동과 자기 해석을 분명하게 구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이단들이 쓰는 단골 메뉴’ 가운데 하나가 영계의 천국은 말하지 않고 ‘내가 재림 메시아로 왔으니 땅에 지상천국을 이루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의 주님의 승천과 재림 말씀을 근거로 그러한 자칭 재림주들을 배격합니다. 이 부분은 중요합니다. 강사의 천년왕국론을 단순히 ‘지상천국론’이라는 한 단어로 묶어 버리면 강의 자체가 의도적으로 구별하고 있는 지점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여기서 한 걸음 더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참된 재림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님의 나라는 어디에 어떻게 임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재림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주님께서 자연계의 구름을 타고 지상에 다시 나타나시는 사건이고, 그 뒤 실제적인 메시아 왕국이 이 땅에 천 년 동안 세워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주님께서 다시 육체를 입고 자연계에 오시는 두 번째 성육신이나 자연적 구름을 타고 물리적으로 내려오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의 속뜻이 열리고 그 안에 계신 주님께서 신적 진리로 새롭게 나타나시는 영적 강림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큽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어느 해석은 틀리고 어느 해석은 맞다’는 식으로 처리하기보다, 두 해석이 계시록의 언어를 바라보는 층위가 다르다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강사는 계시록의 사건들을 미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날 일들의 모형과 예언으로 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사건들의 자연적 형상 안에서 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 그리고 주님의 신적 질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봅니다. 앞서 새 예루살렘을 실제 천국의 수도로 보는 것과 주님의 새 교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생겼습니다.

 

계시록 20장의 ‘ ’도 같은 원리로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말씀의 숫자는 대부분 자연적 산술을 목적으로 주어진 숫자가 아닙니다. 특히 ‘’은 정확히 1,000년이라는 시간 단위를 가리키기보다 많음, 충만함, 완전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천년왕국’을 달력으로 정확히 1,000년 동안 존속하는 미래의 지상 정치체제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숫자 ‘’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의 충만함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계시록을 읽는 방향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질문은 ‘천년왕국은 언제 시작되는가?’, ‘휴거 전인가 후인가?’, ‘누가 왕국에 들어가는가?’, ‘그곳에서 누가 노릇하는가?’가 됩니다. 그러나 속뜻으로 들어가면 질문은 ‘주님의 통치가 인간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악과 거짓의 세력이 결박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첫째 부활은 무엇인가?’, ‘주님과 함께 노릇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로 바뀝니다. 계시록의 관심이 미래 연표에서 현재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강사가 지금까지 반복해서 강조한 ‘연단’과 ‘이김’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 내적 독법이 강의의 실천적 중심을 더 깊게 살려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나라가 먼 미래에만 세워지는 것이라면 지금의 영적 싸움은 그 미래 왕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한 준비가 되기 쉽지만, 주님의 나라가 지금 인간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영적 싸움 자체가 이미 그 나라가 임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기애의 요구를 거절하고 주님의 진리에 순종할 때, 바로 그만큼 내 안에서 자기의 왕국이 물러나고 주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은 먼저 장소이기 전에 상태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사랑과 생각을 다스리는 상태가 천국이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지배하는 상태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왕이 되신다’는 것은 단지 먼 미래에 예루살렘에 왕좌를 설치하신다는 의미에 앞서, 인간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지배적인 원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 노릇한다’는 계시록의 표현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왕 노릇은 다른 사람 위에 서서 명령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 노릇’은 그런 지배와 정반대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의 권세는 다른 사람을 자기 뜻 아래 굴복시키는 권세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로 악과 거짓을 다스리고, 그 진리를 통해 선한 쓰임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안 노릇하리라’는 말씀을 어떤 특별한 성도들이 미래 천년왕국에서 정치적 통치권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다스린다는 그림으로만 읽으면 천국적 ‘왕권’의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은 먼저 자기 밖의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무질서를 주님의 진리 아래 두는 것입니다. 분노가 올라와도 분노가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명예욕이 올라와도 명예욕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하며, 탐욕이 올라와도 그것이 삶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다스리고 사랑이 목적이 되는 질서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강사가 강조해 온 ‘이기는 ’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진정한 왕은 다른 사람을 이긴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실제 승리자는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적 진리로 악과 거짓을 굴복시키십니다. 인간은 주님의 편에 서서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웁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이 가장 깊이 아는 것은 ‘ 권세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시록의 ‘보좌’도 단순한 왕실 의자로만 볼 수 없습니다. 보좌는 심판과 통치, 그리고 그 통치를 이루는 신적 진리와 관련됩니다. 사람이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권력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 악과 거짓을 분별하는 상태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천국마저 지상의 권력구조처럼 상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천국은 지상 왕국을 크게 확대해 놓은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질서와 등급과 통치가 있지만, 그 모든 질서는 사랑과 쓰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높은 천사는 낮은 천사를 지배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높은 사랑과 지혜를 가진 만큼 더 넓은 쓰임을 행합니다. 천국의 통치는 자기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가장 높은 자들은 자신을 가장 낮게 여깁니다.

 

이 점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영성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과도 아주 중요한 접점을 가집니다. 자기부인이 깊어질수록 ‘내가 남보다 높은 영적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욕망까지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일 연단과 금욕과 순종을 오래 한 결과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 ‘나는 이긴 자다’, ‘나는 높은 천국에 사람이다’라는 의식이 강해진다면, 외적인 proprium은 억제했을지 몰라도 더 미세한 영적 proprium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깊은 연단을 거친 사람이 갈수록 부드러워지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이해하며,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 연단은 천국적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가 이번 사경회 전체에서 반복하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개회기도에서도 ‘자기와의 싸움’, 환경과의 싸움 가운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고, 순간순간 회개하며 감사함으로 봉사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드려집니다. 이 기도에는 이 사경회의 영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종말론적 시간표가 아무리 상세하더라도 이 공동체가 실제로 요구하는 삶은 결국 자기와 싸우고, 회개하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봉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실천적 중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 공정한 해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계시록 20장의 ‘첫째 부활’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문자적 미래주의에서는 첫째 부활을 미래 어느 시점에 죽었던 특정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먼저 부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강사의 천년왕국 체계에서도 부활은 종말의 시간표 속에 배치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부활 자체를 먼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봅니다. 인간은 자연적 육체가 죽은 뒤 오랜 세월 무덤에서 무의식적으로 기다렸다가 먼 미래에 다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적 몸이 죽으면 영은 영계에서 깨어나 계속 살아갑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 역시 무덤 속 육체가 먼저 일어나는 장면만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깊게는 사람이 자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일어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를 형성하시고, 사람이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영적 죽음과 영적 생명은 자연적 심장이 뛰느냐 멈추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가 영적 죽음이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생명이 되는 상태가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가 하나의 부활입니다. 사람이 회개할 때마다 죽은 부분에서 일어납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옮겨 갈 때 일어나고, 거짓에서 진리로 옮겨 갈 때 일어나며, 자기 공로에서 주님의 은혜로 옮겨 갈 때 일어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시록의 부활은 먼 미래의 기적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야 할 영적 현실입니다.

 

이것은 강사가 앞서 ‘구원이 완성되었다’, ‘광야 과정을 통과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표현한 것과도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어느 순간 인간이 완덕의 선을 넘어 더 이상 거듭날 필요가 없는 완성품이 된다고 보기보다, 주님께로 향하는 지배적 사랑이 형성되고 그 사랑이 계속해서 더 깊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천사들조차 영원히 사랑과 지혜에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구원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상당히 중요합니다. 만일 ‘나는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확신이 ‘이제 나는 익은 열매이며 사람은 아직 광야에 있다’는 판단으로 이어지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동기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주님만이 그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자기 위치를 확정하는 것보다 오늘 주어진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강사가 ‘14만 4천도 많은 숫자’라고 하면서 그 수를 실제로 예정된 수로 이해하는 부분도 앞서 살펴본 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응적으로 다시 읽게 됩니다. 천년이 정확한 1,000년을 반드시 뜻하지 않는 것처럼 14만 4천도 정확한 인원수를 반드시 뜻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숫자는 영적 상태의 질과 충만함을 표현합니다. 이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면 계시록은 ‘ ’, ‘ ’, ‘ ’, ‘ 나라’의 계산에서 벗어나 훨씬 더 깊은 영적 구조를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계시록에서 역사적 사건의 차원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계시록이 교회의 역사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도래를 다룬다고 봅니다. 다만 그 사건들은 자연계의 국제정치 시간표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심판과 교회의 영적 상태 변화라는 차원에서 이해됩니다. 이 점은 강사의 미래주의적 계시록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가장 큰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마지막 심판’은 자연계의 지구가 불타 없어지고 모든 죽은 육체가 무덤에서 일어나 한 장소에 모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심판은 영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죽은 즉시 영으로 살아 있으며, 자신의 지배적 사랑이 드러남에 따라 결국 자신과 상응하는 천국이나 지옥으로 갑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마지막 심판은 영계에 오랫동안 형성되어 있던 거짓된 영적 사회들이 분리되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사건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천년왕국을 지상의 국제정치적 왕국으로 세밀하게 구성해야 할 필요도 줄어듭니다. 주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영적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의 나라가 인간 안에 임하면 자연계에도 결과가 나타납니다. 더 정직한 사회, 더 자비로운 관계, 더 정의로운 제도, 더 선한 쓰임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천국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외적 제도를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도 인간의 사랑이 자기중심적이면 그 제도는 결국 변질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지상천국’에 대한 강사의 경계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뜻밖에 만납니다. 강사는 자칭 재림주가 나타나 ‘내가 땅에 지상천국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을 이단의 전형적 주장으로 경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외적 사회체제를 바꾸는 것만으로 천국을 만들 수 없다고 봅니다. 천국은 인간의 내면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기애와 지배욕이 그대로인데 완벽한 제도만 만들면 그 제도는 결국 그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나라는 먼저 ‘누가 통치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내 삶에서 돈이 왕인가, 명예가 왕인가, 내 의견이 왕인가, 아니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왕인가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는 천년왕국이 더 이상 먼 미래의 종말론적 호기심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내 안에서 어느 나라가 세워지고 있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강사가 개회 설교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를 중심으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리고 빛의 열매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강조한 것도 다시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사실 천년왕국의 가장 깊은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왕이신 나라는 사람들이 종말론적 지식을 많이 가진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빛이 그들의 삶에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나라입니다.

 

강사는 또한 성령께서는 ‘진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강조하고, 흐리고 세상적이며 기복적이고 정욕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순수하고 누룩이 섞이지 않는 밝은 진리’를 통해 영성이 살아나고 삶이 밝아지며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가까운 지점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고 선한 삶으로 인도하는 빛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알았는데 삶이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쉽게 정죄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아직 생명과 결합되지 못한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밝은 진리’를 무엇으로 판별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더 세밀하고 비밀스러운 종말 시간표를 알고 있다는 것이 반드시 더 밝은 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밝음은 그 진리가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얼마나 분명히 드러내고, 인간을 악에서 떠나 선한 삶으로 인도하는가와 관계합니다. 높은 진리는 높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는 오히려 자기 지성의 우월감을 키우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번 사경회 전체를 해설하면서 계속 붙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이 사경회에는 강한 종말론적 확신과 독특한 계시록 해석이 있습니다. 동시에 자기부인, 회개, 사랑, 봉사, 연단, 성결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영적 요청도 있습니다. 이 둘 가운데 후자를 가볍게 여기면서 전자의 교리적 차이만 비판하면 이 사경회의 실제 영성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반대로 실천적 열심이 귀하다고 해서 모든 종말론적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할 일은 좋은 것은 충분히 알아보고, 문자적 해석이 속뜻을 가릴 수 있는 곳에서는 조용히 더 깊은 층을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3강 8부의 ‘천년왕국’은 폐기해야 할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주제입니다. ‘ 년이 정말 1,000년인가?’만 묻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의 통치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누가 그때 노릇하는가?’에서 ‘지금 안에서 무엇이 노릇하고 있는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은 언제 일어나는가?’에서 ‘나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년왕국은 갑자기 오늘의 문제가 됩니다. 화를 내고 싶은 순간에 주님의 진리가 내 분노를 다스리면 그 작은 영역에서 주님께서 왕이 되십니다. 돈 때문에 진리를 타협하고 싶은 순간에 정직을 선택하면 그 자리에서 주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내 의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상대의 선을 먼저 생각하면 자기 왕국이 조금 무너지고 주님의 왕국이 조금 더 세워집니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을 거절할 때 첫째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강사가 말한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 익은 열매가 된다’는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천년왕국과 새 예루살렘이라는 거대한 계시록의 환상이 결국 한 사람의 작은 일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미래에 주님께서 왕이 되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먼저 오늘 자기 안에서 주님께 왕좌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먼저 말씀의 신적 진리가 자기 생각과 사랑 안으로 오시도록 받아들여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새 예루살렘의 선과 진리가 자기 삶 안으로 내려오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천년왕국의 문자적 그림을 내적 의미로 옮기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종말의 긴장감을 약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종말을 훨씬 더 가까이 가져오기 위해서입니다. 자연적 미래주의에서는 종말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날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종말’은 낡은 자기중심적 질서가 끝나고 주님의 새로운 질서가 시작될 때마다 우리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교회 전체에도 그러하고 개인에게도 그러합니다.

 

3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과 첫째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노릇한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미래 어느 시점에 자연계로 다시 내려오셔서 정확히 동안 지상 정치왕국을 세우시고 특별히 선발된 성도들에게 통치권을 나누어 주신다는 시간표로만 읽기보다, 마지막 심판을 통하여 악과 거짓의 거짓된 지배가 무너지고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에서 오는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세워지며, 개인 안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일어나 주님의 선과 진리가 다스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읽을 속뜻이 더욱 깊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번 8부에서 특히 귀하게 남길 것은 ‘ 노릇’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높은 영적 단계에 올라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지옥적 사랑들이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거듭납니다. 그러고 나면 놀랍게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도 점차 잃어버립니다. 천국적 사랑은 지배하려 하지 않고 섬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깊이 거듭난 사람은 ‘나는 왕이 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만이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 지혜도, 자기 의도, 자기 공로도 왕좌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앉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주님과 함께 ‘ 노릇’합니다. 자기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왕이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년왕국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언제입니까?’보다 ‘누가 지금 나를 다스리고 있습니까?’일 수 있습니다. 그 답이 조금씩 ‘’에서 ‘주님’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강사가 말하는 광야의 연단과 이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욱 깊이 읽었을 때 보이는 거듭남의 길이며, 계시록의 천년왕국이 우리의 오늘과 만나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3강 9부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그리고 천년왕국의 부류’ : 부활, 천국의 다양성, 그리고 쓰임의 질서

3강 9부에서는 앞서 살펴본 천년왕국의 논의가 한층 더 구체화됩니다. 강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고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라는 말씀을 근거로 부활의 순서를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이시며, 그 다음에는 주님의 강림 때 그분에게 ‘붙은 자들’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는 자신이 앞서 세운 ‘공중 강림’과 ‘지상 재림’의 구분을 적용하여, 공중 강림 때 휴거되는 성도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이들이 천년왕국에서 ‘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한다고 설명합니다. 나머지는 둘째 부활에 속한다고 구별합니다.

 

이어서 강사는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 부류’로 나눕니다. 이 구분은 그의 ‘핵심진리’ 체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왕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 왕들을 보필하는 사람이 있으며, 일반 백성으로서 땅을 분배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형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갈 때의 구조에서 찾습니다. 곧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는 일반 백성’이라는 세 부류가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세 종류의 성도들을 미리 보여 주는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번 3강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천국에 서로 다른 상태와 쓰임이 있다’는 강사의 기본 직관은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왕-왕을 보필하는 자-일반 백성’이라는 지상 왕국의 신분구조로 이해하는 데서는 상당한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질서정연하지만, 그 다양성은 특권과 신분의 서열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종류, 그리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쓰임’의 차이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먼저 강사의 논리를 조금 더 충분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에 있는 14만 4천을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부르는 데 주목합니다. 만일 익은 열매가 한 종류뿐이라면 굳이 ‘처음’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가 있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익은 열매도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그 수가 세 종류인 이유를 구약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에서 찾습니다.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은 일반 백성이라는 세 종류가 있었으므로 천국에도 세 종류의 익은 열매가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두 번째 익은 열매를 순교자들과 연결합니다.

 

이러한 해석법의 장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구약과 신약, 특히 출애굽-광야-가나안의 구조와 계시록을 하나의 구속사적 그림으로 연결하려고 합니다. 구약의 사건을 단순한 과거 역사로 끝내지 않고 신약의 영적 실재를 미리 보여 주는 모형으로 읽으려는 것입니다. 이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와 성막, 제사장, 레위인, 가나안, 예루살렘 등을 모두 더 깊은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표상한다’는 것이 곧 자연적 구조가 미래에 그대로 재현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한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제사장과 레위인과 일반 백성이 있었으므로 천년왕국에도 정확히 그에 상응하는 세 계급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읽는 것은 ‘모형’을 자연적 차원에서 반복시키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표상의 핵심은 자연적 형상 안에 감추어진 영적 실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질문은 ‘천국에서 누가 제사장 계급이고 누가 레위인 계급인가?’보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각각 어떤 영적 선과 진리, 그리고 쓰임을 표상하는가?’가 됩니다.

 

특히 말씀에서 ‘제사장’과 ‘’은 매우 중요한 두 축을 이룹니다. 제사장적인 것은 선과 사랑에 관계하고, 왕적인 것은 진리와 신앙에 관계합니다. 주님께서 왕이시며 동시에 제사장이신 것도 그분 안에 신적 선과 신적 진리가 완전히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 같은 제사장’이라는 표현 역시 천국에서 다른 사람 위에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특별 계급을 뜻하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 노릇’이라는 표현을 다시 정확하게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8부에서도 살펴보았듯, 천국적 왕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더 이상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주님의 진리가 다스리는 상태입니다. 자연적 왕은 백성을 지배하지만 영적 의미의 왕은 진리로 거짓을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노릇한다’는 것은 천국에서 많은 부하를 거느린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 안에서 악과 거짓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만일 천국을 지상의 왕국처럼 상상하면 신앙생활의 동기 속에 아주 미세한 야망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반 백성보다 높은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나는 첫째 부활에 들어야 한다’, ‘나는 14만 4천 안에 들어야 한다’, ‘나는 예루살렘의 높은 자리에 가야 한다’는 식입니다. 처음에는 거룩한 열심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 자기 높임이 숨어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천국에서 높아진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 위에 올라간다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길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쓰임이 넓어지고, 지혜가 클수록 다른 사람의 선을 더 섬세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높은 천사일수록 자신을 높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모든 선과 지혜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압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 부류’라는 직관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계급’에서 ‘쓰임’으로 옮겨 읽으면 매우 풍성해집니다. 천국에는 실제로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공동체와 쓰임이 있습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천사도 있고, 어린아이를 돌보는 천사도 있으며, 새로 영계에 온 사람을 돕는 천사도 있고, 다른 공동체와 연결되는 쓰임을 맡는 천사도 있습니다. 천국 전체가 한 사람과 같은 ‘가장 사람’, 곧 막시무스 호모(Maximus Homo)를 이루기 때문에 각각의 공동체는 서로 다른 기관과 기능에 상응합니다.

 

사람의 몸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심장과 폐와 눈과 손과 발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심장이 손보다 ‘높은 계급’이고 발이 눈보다 ‘낮은 계급’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몸의 질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 생명을 위해 서로 필요합니다. 손이 눈이 되려고 하지 않고 눈이 심장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쓰임을 완전하게 수행할 때 전체 몸이 건강합니다. 천국의 질서도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제사장, 레위인, 일반 백성이라는 구약의 세 구분 역시 ‘누가 높은가?’보다 ‘각각 어떤 쓰임을 맡았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사장은 성소의 예배와 관련된 쓰임을 맡았고, 레위인은 성막과 제사장의 봉사를 돕는 여러 쓰임을 맡았으며, 각 지파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자기 기업을 받아 생활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이스라엘을 이루었습니다. 누구 하나만으로 이스라엘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강사의 모형론이 훨씬 천국적으로 열립니다. ‘천국에는 계급이 있다’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에는 서로 다른 선과 진리와 쓰임들이 질서 있게 결합되어 있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바로 시흥영성수련원과 같은 실제 신앙 공동체를 생각할 때도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씀을 가르치고, 누군가는 기도하고, 누군가는 식사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청소하고, 누군가는 방문자를 맞으며,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동체를 유지합니다. 천국적 관점에서는 어느 쓰임이 더 화려한가보다 그 쓰임이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에서 이루어지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점은 수도생활에도 특히 중요합니다. 수도적 공동체에서는 오랜 연단을 받은 사람, 가르치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권위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공동체에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천국적 권위는 언제나 쓰임을 위한 권위여야 합니다. ‘내가 오래 연단받았으므로 너보다 높다’가 아니라 ‘내가 많이 받았으므로 많이 섬겨야 한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외적 질서가 내적 천국의 질서와 상응하게 됩니다.

 

이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강사는 첫째 부활을 휴거 성도들, 특히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할 어린양의 신부들과 연결하고, 그 밖의 부활을 둘째 부활로 구별합니다. 이것은 강사의 종말 시간표 안에서는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부활 자체에 대한 전제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람은 죽은 뒤 육체와 함께 무덤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마지막 날에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 육체가 죽으면 영은 영계에서 깨어나 계속 살아갑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자기 자신임을 알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말하고, 다른 영들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온전한 인간적 감각과 사고를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었던 자연적 육체가 먼 미래에 다시 살아나는 것에 중심이 있지 않고, 사람이 자연계의 몸을 벗고 영적 생명으로 일어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20장의 ‘첫째 부활’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특히 중요합니다. ‘첫째 부활’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저 무덤에서 일어나는 한 집단의 육체 부활이라기보다, 주님께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아 천국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부활의 핵심은 몸의 재조립보다 생명의 방향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표현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사람이 자연적으로 살아 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만을 생명으로 삼고 있다면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사람이 되어 갈 때 그는 영적으로 살아납니다.

 

따라서 거듭남 자체가 이미 ‘부활’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부활을 사후의 일에서 현재의 삶으로 끌어옵니다. ‘나는 첫째 부활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는 지금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뀝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자기중심성에서 쓰임으로, 자기 공로에서 주님의 은혜로 옮겨 가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한 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강사가 계속 강조하듯 광야 여정이 있습니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고, 어떤 시험을 통과한 뒤 더 깊은 시험을 만나며, 한때 이긴 줄 알았던 악이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강의에서도 성도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해야 하며, 오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신앙의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권면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직선적인 상승이 아닙니다.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가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고, 밝은 상태 뒤에 어두운 상태가 오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의 교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사람이 언제나 동일한 영적 고양 상태에 있다면 자신의 자유 안에서 선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때로 주님의 임재가 선명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상태를 지나면서 사람의 자유가 보존되고 그의 사랑이 실제로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드러납니다.

 

강사가 ‘ 하나도 응답이 없으면 주님이 싫어질 때도 있다’고 상당히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이런 인간의 실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신앙은 언제나 감정적으로 뜨겁고 확신에 가득 찬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기도 응답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붙들고, 선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과정에서 신앙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첫째 부활’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영적 특권이라기보다 사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지배적이 되어 가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예전에는 자기 뜻이 거절되면 곧바로 화를 냈지만 이제는 잠시 멈출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이제는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 하나하나가 영적 생명이 죽은 proprium을 밀어내며 일어나는 작은 부활입니다.

 

강사는 또한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세 번째 부류 가운데 ‘살아서 육체를 가지고 들어가는 성도들’을 말하고, 이들을 통해 천년왕국의 백성이 다시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는 강사의 천년왕국이 얼마나 구체적인 자연계의 왕국으로 이해되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부활체를 입은 사람들과 자연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한 왕국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자연적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자녀를 낳아 인구가 증가한다는 그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 역시 자연적 미래 사건으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계에서는 자연계와 같은 방식의 생물학적 출산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결혼은 존재하지만 자연계처럼 육체적 자녀를 출산하는 결혼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결혼의 결실은 선과 진리의 새로운 출생, 곧 사랑과 지혜와 쓰임의 증가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열쇠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자녀가 많아지는 것을 뜻하지만 속뜻에서는 선과 진리의 증가를 나타냅니다. ‘생육’은 선의 증가와, ‘번성’은 진리의 증가와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사람들에게 자녀와 후손의 언어가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태어나고 증가하는 것을 표상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에서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것을 영적으로 읽으면 매우 아름다워집니다.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세워질수록 사랑에서 더 많은 선이 태어나고, 그 선을 섬기는 더 많은 진리가 생겨납니다. 한 가지 참된 사랑에서 수많은 선한 행동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사랑에서 인내도 나오고, 용서도 나오고, 배려도 나오고, 정직도 나오며, 필요한 때에는 바르게 권면하는 지혜도 나옵니다. 하나의 선한 사랑이 수많은 ‘자손’을 낳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근거로 ‘대환난을 눈앞에 사람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몰두할 때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적용하는 부분은 강사의 강한 임박한 종말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은 강의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지만, 보편적인 신앙생활의 원리로 곧바로 확대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바울의 특정 권면을 모든 시대의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한 일반적 축소 명령으로 읽으면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결혼과 가정의 선한 쓰임을 충분히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결혼 자체를 매우 높은 영적 표상으로 봅니다. 참된 결혼 사랑은 선과 진리의 결합에 상응하고, 더 깊게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부부 사랑과 가정은 단지 종말이 가까우므로 가능한 한 줄여야 할 자연적 부담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거듭남의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통해 자기애가 드러나고, 용서와 인내와 책임과 섬김을 배우며, 자녀를 통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번 강의 전체에서 강사가 가장 실제적인 연단의 예로 자주 드는 것도 부부와 가족관계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고, 배우자가 맞는 말을 했을 때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고,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이김’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정은 종말을 기다리느라 영적 삶에서 밀어내야 할 영역이라기보다 바로 그 ‘이김’이 가장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광야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둘째 부활’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특별한 성도들과 나머지 둘째 부활 사이에 시간적·신분적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계시록의 ‘첫째’와 ‘둘째’를 단순한 시간표의 두 시점으로만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은 영적 상태의 질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둘째 사망’이라는 표현과 함께 읽으면 이것이 더 분명해집니다. 자연적 죽음은 모든 사람이 겪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자연적 몸의 죽음이 아니라 악과 거짓을 자기 생명으로 선택함으로써 천국의 생명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의 복됨도 자연적 몸이 남보다 먼저 일어나는 특권보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 둘째 사망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은 서로 대조되는 영적 언어가 됩니다. 한쪽에서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나고, 다른 쪽에서는 자기애와 거짓이 그의 지배적 생명이 됩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날마다 이 두 방향 가운데 하나를 향해 자기 생명의 성격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전혀 낯선 판결이 갑자기 외부에서 내려오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평생 자유롭게 사랑해 온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임의로 천국에 넣고 다른 사람을 지옥에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 자신이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그 사람의 영원한 방향을 결정합니다. 다만 그 자유와 생명과 선을 선택할 모든 능력 자체는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원리는 강사가 말하는 ‘ 부류의 익은 열매’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열매의 차이는 천국의 계급장을 의미하기보다 사람이 받아들인 선의 서로 다른 질을 생각하게 합니다. 천국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와 형태의 사랑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이 중심인 천적 선에 속하고, 어떤 사람은 이웃 사랑이 중심인 영적 선에 속하며, 또 어떤 사람은 보다 외적인 순종과 쓰임 가운데 선을 받아들입니다. 천국에는 이러한 무수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세 천국, 곧 천적 천국,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강사의 ‘제사장-레위인-일반 백성’과 기계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두 체계의 출발점과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천국은 단조로운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깊이의 사랑과 진리를 가진 무수한 공동체들이 완전한 질서를 이루는 ’이라는 점에서는 중요한 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경쟁을 만들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는 높은 자리를 보면 올라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각 사람이 자기 사랑과 쓰임에 가장 알맞은 공동체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영적 천사가 천적 천사의 상태를 억지로 차지하려 하지 않고, 어느 공동체도 다른 공동체의 쓰임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쓰임을 행하는 기쁨 자체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급’을 이해할 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좁은 길을 가는 어려움과 함께 ‘상급의 진리’를 강조하는 흐름이 나타납니다. 상급을 말하는 것 자체는 성경적입니다. 문제는 상급을 세상의 보상체계처럼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많이 희생했으므로 높은 자리와 많은 권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급에 자기 공로가 섞입니다.

 

천국의 참된 상급은 선 자체를 행하는 기쁨입니다. 이웃을 사랑한 사람이 천국에서 받는 상급은 ‘사랑했으니 이제 특별한 지위를 받는다’가 아니라, 더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 사람의 상급은 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쓰임을 사랑한 사람의 상급은 더 넓고 깊은 쓰임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상급은 천국적 사랑의 능력이 더욱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 같은 제사장’의 가장 큰 상급도 왕좌가 아닙니다.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지혜롭게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의 왕과 천국의 왕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입니다. 지상의 왕은 많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지만 천국적 왕은 더 많은 사람을 섬깁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 원형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여기서 3강 전체의 ‘연단’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왜 광야에서 연단받는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왜 자기부인을 하는가? 영적 강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proprium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지배하려는 힘을 잃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말씀을 배우는가? 남보다 더 많이 알아 우월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여 실제로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 중 ‘성경은 밀어붙이는 아니에요. 자기를 죽여야 ’라고 말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설교가 맞는지 틀리는지만 검사하는 신앙을 경계하면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축적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자기를 죽인다’는 표현은 다시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인격과 개성, 자유와 이성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유한 개성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보존됩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고,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며, 자기 지혜를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으려는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이 내려갈수록 오히려 주님께서 주신 참된 인간성이 살아납니다.

 

강사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성경 가지고 싸우고 신학 가지고 싸우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진리와 교리는 중요합니다. 잘못된 진리는 삶의 방향도 잘못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목적이 사랑과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사람의 외적 기억에 머물 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생명책도 실제 천국 어딘가에 놓인 거대한 명부에 사람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은 사람의 내적 상태가 기록된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이 사랑하고 의도하고 생각하고 행한 모든 것은 그의 영에 새겨집니다. 그래서 사후에는 숨길 수 없습니다. 자기 생명 자체가 책이 됩니다. 어떤 외부의 심판자가 증거자료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어떤 명단에 등록되었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그 사람의 성품에 새겨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7부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이름과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질을 나타냅니다. 결국 문제는 ‘ 이름이 어느 명단에 있는가?’만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삶에 얼마나 기록되고 있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도, 생명책도, 왕 같은 제사장도, 세 부류의 익은 열매도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종말론의 모든 그림이 결국 인간의 생명으로 돌아옵니다.

 

이 점에서 이번 3강의 강사가 천년왕국과 14만 4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매우 구체적인 미래 시간표로 설명하면서도 계속해서 ‘오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라’, ‘작은 죄까지 철저하게 회개하라’, ‘자기를 죽여야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라’고 삶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교리적 구조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실제 목회적 권면에서는 다시 거듭남의 핵심에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해설할 때 어느 한쪽만 보면 안 됩니다. 천년왕국의 자연적 시간표만 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와의 차이가 매우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표를 통해 강사가 성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보면 ‘끝까지 악과 싸우라’, ‘자기를 부인하라’, ‘작은 죄도 회개하라’, ‘주님을 사랑하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라’는 실천적 중심이 보입니다. 이 중심은 충분히 존중하면서, 그 실천을 떠받치는 계시록의 문자적 도식은 상응의 빛 아래에서 한층 깊게 읽어 볼 수 있습니다.

 

3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같은 제사장과 그를 보필하는 자와 일반 백성, 그리고 종류의 익은 열매라는 강사의 천년왕국 구조는 미래 지상왕국의 신분과 부활 순서를 문자적으로 확정하는 도식으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서로 다른 사랑과 진리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각각의 쓰임에 맞게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일어나 주님의 선과 진리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서로 다른 쓰임을 통해 하나의 천국을 이루게 하시는 영적 질서의 표상으로 읽을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9부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것은 어쩌면 ‘ 부류’가 아니라 ‘ 나라’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제사장도 있고 레위인도 있고 땅을 분배받은 백성도 있지만 모두 하나의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몸에는 눈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지만 모두 하나의 몸입니다. 천국에도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과 자연적 천국이 있고 그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지만 모두 하나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표는 ‘나는 어느 등급까지 올라갈 것인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선과 진리를 가지고 나는 어떤 쓰임을 것인가?’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쓰임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쓰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잊을수록 더욱 천국적이 됩니다.

 

강사가 말한 ‘ 같은 제사장’도 이렇게 읽으면 전혀 다른 빛을 띱니다. 왕관을 쓰고 다른 사람 위에 앉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먼저 자기 안의 악을 다스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왕관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영광의 왕관이 아니라 주님께 돌려 드릴 왕관입니다.

 

결국 첫째 부활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남보다 먼저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무엇으로 살아났는가?’일 것입니다. 자기애로 살아 있는 사람인가,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나는 사람인가. 다른 사람 위에 서고 싶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고 싶은 사람인가. 자기 공로를 쌓는 사람인가,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인정하는 사람인가.

 

그렇게 보면 천년왕국의 ‘ 부류’는 경쟁의 세 등급이 아니라 천국의 놀라운 다양성을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고유한 성품과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서로 다른 선과 진리와 쓰임 안에서 완성해 가십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다름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동일한 계급도, 동일한 지식도, 동일한 수도적 훈련도 아닙니다. 오직 한 분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은 섬기고, ‘제사장’은 자기 공로를 내려놓으며, ‘백성’은 자기 쓰임을 기뻐합니다. 바로 그때 서로 다른 모든 사람이 한 천국을 이루게 됩니다.



3강 10부

종류의 익은 열매에서 두아디라 교회의 약속까지 : 추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

3강 10부에서는 지금까지 길게 이어져 온 ‘이기는 ’, ‘광야 연단’, ‘14만 4천’, ‘순교자’, ‘천년왕국’의 논의가 ‘ 종류의 익은 열매’라는 구조로 최종 정리되고, 이어서 계시록 2장의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약속으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계시록 14장의 14만 4천을 ‘처음 익은 열매’, 교회 시대와 대환난 가운데 순교하는 이들을 ‘ 번째 익은 열매’,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하여 지상 재림하신 주님께 추수되는 성도들을 ‘ 번째 익은 열매’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 세 부류를 구약의 가나안에 들어간 제사장, 레위인, 땅을 분배받은 일반 백성이라는 세 부류와 연결합니다. 그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목적이 익은 열매를 추수하는 있다. 따라서 우리도 처음이나 번째나 번째나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3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가 지금까지 왜 그토록 ‘익어야 한다’, ‘연단받아야 한다’, ‘이겨야 한다’,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는지가 여기에서 하나로 모이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체계에서 신앙생활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어느 정도까지 익었느냐에 따라 마지막 때의 추수와 천년왕국에서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는 이 강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이 핵심을 충분히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신앙의 목적은 단순히 교리를 알고 입으로 믿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가 삶 속에서 선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씨가 뿌려졌다고 농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며, 싹이 났다고 추수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되고,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시험 가운데 그것을 따라 살며, 마침내 선한 삶이 그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하는 ‘익음’은 거듭남과 매우 가까운 실천적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익은 열매’를 세 종류의 종말론적 신분집단으로 고정하기보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실제 생명으로 결합되는 것으로 읽습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매우 자주 선한 행위와 쓰임, 더 깊게는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표상합니다. 나무가 그 본질을 열매로 드러내듯 인간의 내적 사랑도 결국 삶의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신 말씀은 사람의 신앙이 무엇인지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생명을 사는지를 통해 드러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익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아직 설익은 열매와 익은 열매의 차이는 단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진리가 얼마나 의지와 결합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처음에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압니다. 다음에는 그것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말씀 때문에 억지로라도 선하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매우 귀한 시작입니다. 그런데 오랜 거듭남을 거치면서 어느 순간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그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한 것입니다. 열매가 익어 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익음’은 완벽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완덕’, ‘익은 열매’, ‘이기는 ’를 이해할 때 꼭 붙들어야 할 구별입니다. 익었다는 것은 더 이상 결점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는 방향이 주님께로 향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약함이 있고 실수도 할 수 있지만,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의 도움으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선을 억지로만 행하는 데서 조금씩 선 자체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옮겨 갑니다. 강사는 첫 번째 익은 열매인 14만 4천이 추수된 뒤 두 번째 익은 열매인 순교자들이 추수되고, 마지막으로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한 세 번째 성도들이 추수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오순절 이후 교회 시대 동안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했으나 14만 4천의 처음 익은 열매 반열에는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며, 그들의 수가 채워질 때까지 기다린다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천국의 가장 거룩한 곳부터 채워 가시는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강사의 천국관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천국이 일정한 공간적 구조와 등급을 가지고 있고, 그 높은 곳부터 자격을 갖춘 성도들이 차례로 채워진다는 그림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 예루살렘은 천국의 수도’, ‘14만 4천은 그곳에 들어가는 이긴 자들’, ‘ 같은 제사장’이라는 설명도 모두 이 구조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에는 분명히 높고 낮음이 있으며 세 천국과 무수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지상의 신분계급처럼 외적으로 부여되는 차이가 아닙니다. 각 사람이 받아들인 사랑과 지혜의 질에 따른 내적 차이입니다. 더 깊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랑과 상응하는 천국에 있고, 보다 외적인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 선과 상응하는 천국에 있습니다. 어느 누가 행정적으로 사람을 등급별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적 상태 자체가 그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게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거룩한 곳부터 채워진다’는 표현도 ‘먼저 선발된 엘리트들이 최고층 천국의 정원을 채운다’는 방식보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사랑과 선의 질에 따라 가장 적합한 천국의 쓰임과 공동체로 인도하신다는 방향으로 읽으면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천국의 차이는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상응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적 삶에서는 ‘ 사람보다 높은 곳에 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천국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을 원하는 사랑은 이미 자기 우월과 지배의 요소를 포함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자기보다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를 시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선과 쓰임 안에서 완전한 기쁨을 누립니다. 이 원리를 ‘익은 열매’에 적용하면 경쟁의 문제가 사라집니다. 사과가 포도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포도가 무화과가 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선이 충분히 열매 맺는 것입니다. 천국은 똑같은 열매만 가득한 창고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선들이 하나의 주님 아래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특히 ‘순교자’를 두 번째 익은 열매라는 고정된 신분으로 이해하는 문제도 여기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순교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숭고한 신앙의 증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 생명까지 내어놓으면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은 사람들의 충성은 가볍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죽음의 방식 자체가 자동적으로 영적 등급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그 행위가 어떤 사랑에서 나왔느냐입니다. 겉으로 같은 순교처럼 보여도 사람의 내면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것과, 자기 종교집단의 명예나 자기 의를 증명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은 내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외적 사건보다 그 안의 사랑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순교의 영적 가치는 죽음 자체에 있다기보다 그 죽음 안에 있는 사랑과 충성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순교’에는 일상적인 영적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문자적으로 목숨을 잃는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모든 거듭나는 사람은 자기 proprium의 어떤 것을 날마다 죽이는 경험을 합니다.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도 작은 죽음이고,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작은 죽음이며, 미움을 품고 싶은 욕망을 거절하는 것도 자기중심적 생명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반드시 문자적 순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는 삶 전체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이 의미에서 수도적 전통이 강조해 온 ‘자기부인’은 거듭남과 매우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 사랑을 방해하는 자기중심적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강사는 세 번째 익은 열매를 ‘7년 대환난을 인내하고 말씀을 지키며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살아남아 육체로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첫째, 둘째, 셋째 익은 열매가 차례로 추수되어 천국이 채워진다고 정리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강사의 핵심은 결국 ‘끝까지 지키는 신앙’입니다. 이 실천적 중심은 충분히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끝까지’라는 말은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한때 뜨거운 신앙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평생 형성하는 지배적 사랑이 중요합니다. 한때 선한 감정을 느꼈다는 것, 한때 큰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 한때 열심히 봉사했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형성하시는 선이 그의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딘다’는 것도 인간의 이를 악문 의지력만을 의미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나는 반드시 끝까지 버티겠다’고 하면 그 힘 자체가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강의의 시작 기도에서 ‘헌신과 수고를 통한 주님의 나라에 봉사할 하늘로부터 주시는 힘으로 하게 하시고 자기 의지로 하지 않도록 붙잡아 달라’고 기도한 것은 그래서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하게 붙들 수 있는 표현입니다. ‘자기 의지로 하지 않도록.’ 수도적 연단에서 이 한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금식도 자기 의지로 할 수 있고, 철야기도도 자기 의지로 할 수 있으며, 오랜 수도생활도 자기 의지로 견딜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부인조차 ‘나는 이만큼 나를 부인했다’는 새로운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연단보다 더 깊은 연단은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해야 하지만, 실제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이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거듭남에 필요한 자유로운 협력이 사라지고, ‘내가 해냈다’고 하면 자기 공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악과 싸우면서도 승리 후에는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익은 열매’의 매우 중요한 표지일 수 있습니다. 덜 익었을 때에는 자기 선을 자랑하기 쉽습니다. ‘나는 이것을 끊었다’, ‘나는 시험을 이겼다’, ‘나는 이만큼 기도한다’, ‘나는 이런 깊은 진리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분명히 압니다. 열매가 익을수록 가지가 오히려 아래로 숙여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와 겸손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익은 사람은 자기가 익었다고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악을 더 섬세하게 보며 주님의 자비를 더 필요로 합니다. 다른 사람의 미숙함을 보아도 쉽게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얼마나 오랜 시간 주님께 붙들려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이번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중요한 분별 기준이 됩니다. 연단의 결과가 사람을 강퍅하게 하고 다른 신앙인들을 쉽게 ‘ 익은 사람’, ‘광야에 있는 사람’, ‘낮은 반열’로 분류하게 한다면 그 연단에는 다시 살펴볼 부분이 있습니다. 반대로 연단을 오래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약함에 더 인내하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적게 자기 공로를 말하며, 더 많이 섬긴다면 그 열매에는 천국적인 것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공동체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연단’과 ‘자기부인’을 가장 선한 방향으로 이해하려면 결국 이 열매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강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전환을 합니다. ‘요렇게 해서 이제 살펴봤습니다’라고 지금까지의 세 종류의 익은 열매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두아디라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주신 약속으로 넘어갑니다. 두 가지 축복, 곧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계시록 2장 26절 이하의 ‘이기는 자와 끝까지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전환은 3강 전체의 주제인 ‘이기는 ’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누가 익은 열매인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는 ‘이긴 자에게 무엇을 주시는가?’를 다루는 것입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 권세가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실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역시 먼저 내적으로 읽습니다. 말씀에서 ‘나라들’, 곧 ‘만국’은 좋은 의미에서는 선들, 반대 의미에서는 악들과 관계합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영적 의미에서 진리로 악과 거짓을 질서 아래 두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은 다른 민족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받는다는 의미에 앞서, 주님의 진리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다스릴 능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서 ‘ 노릇’의 의미와 같습니다. 천국적 권세의 첫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안에 들어오는 지옥의 영향, 곧 악과 거짓입니다.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자기 분노 하나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천국적 왕권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으면서 명예욕의 명령에는 꼼짝없이 복종한다면 그는 실제로 왕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종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아무 직위도 없는 사람이 자기 안의 탐욕과 미움과 복수심을 주님의 진리로 거절할 수 있다면 영적으로는 왕의 권세를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능력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이 권세를 이기는 자가 ‘얻어낸다’고 하기보다 주님께서 ‘주신다’고 합니다. 이어 ‘철장으로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는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미래의 성도들이 철장으로 이방 나라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는 장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으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열립니다. ‘’은 자연적 차원에 있는 진리, 곧 삶과 행위에 적용되는 강한 진리를 나타낼 수 있고, ‘막대기’ 또는 ‘지팡이’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철장’은 자연적 삶의 차원에서 악과 거짓을 제어하는 진리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질그릇’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릇은 무엇인가를 담는 것이며,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진 가장 외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질그릇을 깨뜨린다는 것은 사람을 폭력적으로 파괴한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외적이고 거짓된 형식들이 무너지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자기 합리화, 잘못된 신앙의 형식, 악을 감싸고 있던 거짓된 논리들이 주님의 진리 앞에서 깨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의 거듭남에 적용하면 아주 실제적입니다. 사람은 자기 악을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질그릇’을 만듭니다. ‘다들 그렇게 산다’, ‘나는 원래 성격이 그렇다’, ‘ 사람이 먼저 잘못했다’, ‘ 정도는 죄가 아니다’, ‘목회를 위해서 어쩔 없다’, ‘좋은 목적이니까 괜찮다’와 같은 합리화들입니다. 악한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는 동안 사람은 그 그릇을 소중히 지킵니다.

 

그런데 말씀의 진리가 강하게 들어오면 그 그릇이 깨집니다. ‘, 이것은 상황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이었구나.’ ‘나는 정의를 위해 화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무시당한 것이 싫었던 것이구나.’ ‘사명을 위한 열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구나.’ 이런 깨달음이 일어날 때 질그릇 하나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장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무서운 통치의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의 매우 정밀한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때때로 우리를 위로하지만 때로는 아주 단단하게 우리의 거짓을 깨뜨립니다. 말씀은 언제나 부드러운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거짓을 깨뜨려야 할 때에는 철장처럼 단호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얽매고 있는 거짓을 파괴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와 가르침에서도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철장’을 문자적으로 모방하여 지도자가 사람들에게 강압적 권위를 행사하면 위험합니다.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너희를 다스릴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종교적 지배욕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드러내지만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인정하고 버리도록 이끄십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권위는 사람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힘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께 자유롭게 순종하도록 돕는 힘입니다. 좋은 목회자는 성도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좋은 영적 스승은 제자가 평생 자기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 앞에 서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수도적 전통의 ‘순종’ 역시 세심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적 순종은 훈련의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최종 목적은 인간 지도자의 뜻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순종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인간의 권위는 그 순종을 돕는 한에서만 영적 권위입니다. 이것이 지켜지면 수도적 순종은 proprium을 내려놓는 귀한 훈련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이 뒤집히면 사람을 지배하는 종교적 권력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의 두 번째 약속이 ‘새벽별’입니다. 이 표현은 이번 3강 전체의 마지막 부분을 아주 아름답게 밝힐 수 있는 상징입니다. 계시록 22장에서 주님께서는 친히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새벽별은 주님 자신과 관련됩니다.

 

새벽별은 밤이 완전히 끝난 뒤 뜨는 별이 아닙니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을 때 나타나 곧 아침이 올 것을 알립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상응입니다.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은 아직 완전한 낮에 있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의 어둠이 있고, 주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며, 무엇이 어떻게 될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둠 가운데 작은 빛이 나타납니다.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고 희망이 생기며 주님의 임재가 다시 느껴집니다. 이것이 새벽별의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은 천사적인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빛과 관련됩니다. 별이 밤하늘을 비추듯 진리의 지식은 아직 완전한 영적 낮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새벽별’은 단순한 지식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에도 이런 새벽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어떤 악과 싸웠는데 전혀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같은 시험이 반복되며, 자신이 정말 변하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전 같으면 크게 화냈을 상황에서 마음이 조금 덜 흔들립니다. 예전에는 미워했던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예전에는 억지로 했던 선을 조금 기쁘게 행합니다. 아직 대낮은 아니지만 새벽별이 뜬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새벽별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매우 개인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기는 사람에게 단지 외적 상급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진리와 사랑, 궁극적으로는 주님 자신의 임재를 주십니다. 상급의 본질이 주님입니다.

 

이것은 ‘상급’에 대한 이번 사경회의 강조를 매우 아름답게 보완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좁은 길을 걸으면 상급이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그 말 자체는 충분히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천국적 상급의 가장 깊은 형태는 더 높은 지위나 더 큰 통치권이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결합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왕좌’가 아니라 ‘새벽별’, 곧 주님 자신입니다. 이렇게 보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이라는 두 약속의 순서도 의미심장합니다. 먼저 악과 거짓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고, 그 다음 새벽별이 주어집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이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거절할수록 내면이 깨끗해지고, 깨끗해진 만큼 주님의 빛을 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악을 버리는 것과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과정의 두 면입니다.

 

단순히 악을 끊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은 아닙니다. 빈집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들어오시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미움을 버리는 목적은 단지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거짓을 버리는 목적은 단지 오류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애의 지배를 내려놓는 목적은 자아가 텅 빈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자리를 채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수도적 자기부인 역시 ‘없애는 ’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자기 욕망을 끊고, 자기 뜻을 내려놓고, 세상 즐거움을 절제하는 것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가가 중요합니다. 더 많은 주님 사랑, 더 깊은 이웃 사랑, 더 넓은 쓰임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부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업적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3강 처음부터 이어져 온 ‘광야’의 의미도 완성됩니다. 광야는 사람이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지나가는 곳입니다. 연단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사랑이 목적지입니다. 자기부인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주님과의 결합이 목적입니다. 싸움도 목적지가 아닙니다. 평화가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싸움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평화와 다릅니다. 악을 모르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 아니라, 악과 싸우면서 주님만이 승리자이심을 배운 뒤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평화입니다. 이것이 거듭남 이후의 안식이며, 창세기의 일곱째 날과도 연결되는 천국적 평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3강을 통해 계속 말해 온 ‘익은 열매’는 매우 좋은 표현입니다. 다만 ‘어느 반열에 들어갈 만큼 익었는가?’보다 ‘무엇으로 익어 가고 있는가?’를 물으면 더욱 깊어집니다. 지식으로 익는가, 자기 확신으로 익는가, 종말론적 정보로 익는가가 아니라 사랑과 쓰임으로 익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무의 크기를 보시기보다 열매를 보십니다. 얼마나 오래 교회에 다녔는지, 얼마나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특별한 체험을 했는지, 얼마나 혹독한 연단을 받았는지 그 자체가 마지막 기준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더 정직해졌는가, 더 온유해졌는가, 더 쉽게 용서하게 되었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더 기뻐하게 되었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이것이 ‘익음’입니다.

 

그래서 3강 10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 14만 4천, 순교자인 번째 익은 열매, 대환난을 살아서 통과하는 번째 익은 열매라는 구분과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다는 말씀은 미래 천년왕국에 들어갈 성도들을 신분으로 나누고 가운데 높은 반열에 특별한 통치권을 부여하는 종말론적 구조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을 그의 고유한 선과 쓰임에 따라 거듭나게 하시고, 말씀의 진리로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의 지배를 깨뜨리시며, 마침내 모든 싸움과 자기부인의 목적이 다른 사람 위에 높아지는 있지 않고 새벽별이신 주님 자신과 더욱 깊이 결합되는 있음을 보여 주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읽을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10부에서, 더 나아가 이번 3강 전체에서 가장 귀하게 남길 수 있는 것은 강사의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절박함 자체를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절박함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줍니다. ‘나는 첫째인가, 둘째인가, 셋째인가?’를 묻기보다 ‘오늘 안에서 주님의 진리가 선한 열매가 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 질문은 훨씬 조용하지만 훨씬 피하기 어렵습니다. 종말 시간표는 공부할 수 있지만, 보기 싫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14만 4천의 정체를 논할 수 있지만, 내 자존심 하나 내려놓는 것은 어렵습니다. 천년왕국의 세 부류를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하기는 어렵습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구별할 수 있지만, 오늘 내 안의 죽은 사랑 하나가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의 최종적인 표지는 지식의 많음보다 사랑의 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익을수록 사람은 이상하게도 자기를 덜 높입니다. 가지가 열매 때문에 아래로 숙여지듯, 주님의 선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이것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도 안전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싶은 욕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새벽별’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빛으로 빛나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고 오직 주님의 빛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3강이 처음부터 말해 온 ‘이기는 ’란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끝까지 버틴 사람도 아니며, 남보다 높은 영적 반열을 차지한 사람도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 앞에서 주님의 진리를 선택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며, 선을 행하되 그것을 자기 공로로 여기지 않고, 마침내 자기 삶의 중심에서 proprium이 내려오고 주님께서 왕이 되시도록 허용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단지 ‘무엇’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십니다. ‘내가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이 약속을 그렇게 읽으면 3강 전체를 관통했던 연단과 자기부인과 이김과 익은 열매와 상급이 마지막에 한곳으로 모입니다. 광야의 끝에 있는 것은 높은 지위가 아니라 주님이며, 이김의 상급도 주님이고, 천국의 기쁨도 주님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마침내 알게 되는 가장 깊은 사실은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붙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았는데, 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SY.57,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4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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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48,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2강 (7/27),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2강 1부‘모형적 진리’와 구원의 여정 - 출애굽은 지나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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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첫 강의를 듣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강의’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출범시키면서 그 정체성을 설명하는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점입니다. 강문호 목사는 한국 개신교 안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수도 전통을 다시 세워 보고 싶다는 상당히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사학교를 단순한 신학교나 성경공부 모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부하고 시험을 치고 책을 읽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놓여 있습니다. 이 선명한 문제의식, 곧 ‘한국 개신교에 수도(修道)가 필요하다. 그리고 수도는 지식을 더 쌓는 일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어야 한다.’ 이것이 첫 강의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이 강의를 상당히 호의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지식의 축적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사람에게 알려지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지만, 아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해한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고, 의지에서 행위로 나오며, 마침내 삶의 습관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훨씬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 따라 어떻게 사는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수도사학교가 처음부터 ‘또 하나의 신학 공부’를 지향하지 않고, ‘사람의 변화’를 지향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장점입니다.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은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 중심적 성공 모델’에 대한 불만입니다. 교회를 크게 하고, 사람을 모으고, 조직을 확장하고, 목회자로서 사회적 위치를 얻는 것과 복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입니다. ‘,,’ 같은 표현을 비롯, 강문호 목사는 교회가 물질과 성공을 좇으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가능성을 상당히 강하게 경계합니다. 이것은 표현의 강약을 떠나서 매우 성경적인 문제제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깊어집니다. 교회의 타락은 먼저 제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히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진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을 소유하기 위해 종교와 진리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 겉으로는 여전히 교회이고, 설교와 예배와 성경이 존재하더라도 속에서는 이미 질서가 전도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문호 목사가 수도를 요청하는 이유를 단순히 ‘가톨릭에는 수도원이 있으니 개신교에도 수도원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더 깊은 동기는 ‘목회 성공이라는 궤도 밖에서 하나님 앞에 한 사람으로 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귀한 문제의식입니다. 목사라는 직함도, 교회의 크기도, 설교 능력도, 학위도 잠시 내려놓고, ‘나는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묻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도 매우 가까운 곳에서 만납니다. 영계에서는 직함이나 사회적 외관이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지 않고,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수도사학교의 방향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강의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훈련과 절제와 고행이 강조됩니다. 수도원 생활의 엄격함, 추위와 배고픔, 단순한 음식, 침묵, 걷기, 불편한 잠자리, 금식과 같은 경험들이 소개되고, 실제 교육과정에서도 독서와 글쓰기뿐 아니라 몸으로 견디고 경험하는 훈련이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강문호 목사가 경험한 여러 수도원과 수도자들의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심지어 수십 년 동안 한 장소에서 수도생활을 한 사람들,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깊은 경외도 느껴집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몸을 가진 존재이고, 삶의 습관을 바꾸려면 일정한 규율도 필요합니다. 자기 욕망을 무조건 따라가지 않는 훈련 역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남에는 반드시 시험이 따르며, 사람은 자기 안의 악한 욕망과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절제와 훈련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 그리스도교가 지나치게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방향으로 흐르면서 삶의 훈련을 잃어버렸다면, 수도 전통이 그것을 일깨워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생깁니다. ‘고생하는 것’과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추운 곳에서 잔다고 자기 사랑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침묵한다고 내면의 교만이 저절로 죽는 것도 아니고, 세상과 떨어져 산다고 세상 사랑이 자동으로 정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수도생활 자체를 자기 공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세상을 버렸다. 나는 금식한다. 나는 고행한다. 나는 수도자다’라는 새로운 형태의 proprium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속적 자아를 버리고 종교적 자아를 얻은 것뿐이지, 진정한 자기 부인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이 강의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생깁니다. 수도사학교가 추구하는 외적 훈련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합니다. 침묵도 수단이고, 금식도 수단이며, 독서도 수단이고, 공동생활도 수단입니다. 심지어 수도원도 수단입니다.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사람이 자기 안의 악을 주님 앞에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물리치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삶 안에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수도원이 도움이 된다면 수도원은 귀한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수도원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첫 학기 과정에서 독서와 글쓰기를 상당히 강조했다는 것도 새롭게 보입니다. 강의 후반부에서 강문호 목사A4 용지를 기준으로 요약하고, 인상 깊은 내용을 정리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쓰게 하는 식의 과제를 설명합니다. 한 달에 일정량의 글을 제출하게 하고, 많은 책을 읽게 하는 상당히 강도 높은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책을 많이 읽으라는 뜻보다 ‘읽은 것이 자기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쓰라’는 중요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진리는 기억에만 머물러서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에 들어온 진리가 이해의 대상이 되고, 자신의 상태를 비추는 빛이 되며, 의지와 행위에 연결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다만 여기에도 한 단계가 더 필요합니다. ‘내 삶과 연결한다’는 것이 단순한 자기성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분석하기 위한 심리학적 도구가 아니라, 무엇이 주님의 질서이고, 무엇이 그 질서에 반하는지를 분별하게 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독서 후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만이 아니라 ‘이 진리가 내 안에서 어떤 악과 거짓을 드러내는가’, ‘나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나를 어떤 선으로 이끄시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단계까지 들어가면 수도사학교의 독서와 글쓰기 훈련은 단순한 인문학적 독서가 아니라 거듭남을 위한 자기성찰로 훨씬 깊어질 수 있습니다.

 

공동체 역시 그렇습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성품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일하고, 불편을 견디며 다른 사람에게 맞추어야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성냄, 경쟁심, 인정 욕구, 지배욕, 질투, 조급함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수도 공동체의 진정한 가치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혼자 산속에 앉아 있을 때는 자신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러 사람과 부딪히며 살아 보면 자신이 얼마나 자기 뜻대로 되어야 편안한 사람인지 금방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공동생활은 매우 강력한 영적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도 한 가지 더 나아갑니다. 공동체 안에서 드러난 악을 단순히 억누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규칙 때문에 화를 참는 것과 화를 내고 싶어 하는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행동 교정일 수 있지만 후자는 거듭남입니다. 수도학교의 엄격한 규칙이 사람을 단정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칙 자체가 사람의 속 사람을 새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속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외적 규율은 그 역사를 위한 질서를 제공할 뿐입니다.

 

이 점에서 첫 강의에서 느껴지는 ‘강한 사람을 만들겠다’는 분위기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고, 많은 책을 읽고, 어려운 훈련을 통과하며,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열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강문호 목사는 과정 중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으며, 끝까지 남는 소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천국적인 사람은 반드시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기 힘을 강하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약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악을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싸우는 힘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어쩌면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성공했을 때일지도 모릅니다. 금식에 성공하고, 침묵에 성공하고, 독서량을 채우고, 남들이 포기한 훈련을 끝까지 견디고, 마침내 ‘수도사’라는 이름까지 얻었을 때, proprium은 그것을 자신의 의로 취하기 쉽습니다. ‘나는 해냈다’가 되는 순간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갈수록 ‘주님께서 하셨다’는 인식이 깊어지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승리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수도의 외적 엄격함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첫 강의 중 역사 부분은 조금 다르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니므롯, 세미라미스, 담무스, 태양신 숭배, 바벨론 종교가 이후의 여러 종교와 기독교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큰 역사적 틀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강문호 목사가 말하고자 하는 영적 메시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하나님 신앙이 인간의 욕망과 권력, 우상숭배와 결합하면서 변질되고, 교회 역시 언제든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 자체는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세미라미스와 담무스를 중심으로 고대 바벨론 종교에서 후대의 가톨릭 및 기독교 관습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역사 서술은 이 자료만으로 사실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역사적 사실성은 별도의 검증 대상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바벨론’을 어떻게 보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바벨론의 핵심은 단순히 어떤 고대 종교의 계보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바벨론’은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종교적인 것을 자기 권력과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바벨론은 밖에만 있지 않습니다. 가톨릭 안에서만 찾을 수도 없고, 특정 교단에만 돌릴 수도 없습니다. 개신교 목사에게도 바벨론이 있을 수 있고, 수도자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나는 타락한 교회를 떠나 순수한 수도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높이려는 순간, 바벨론의 원리는 그 사람 안에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첫 강의의 역사적 도식을 오히려 훨씬 더 날카로운 영적 질문으로 바꾸어 줍니다. ‘어느 교회가 바벨론인가?’가 아니라 ‘내 안의 바벨론은 무엇인가?’입니다. ‘어느 종교가 타락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것을 이용하여 나 자신을 높이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강의에 더해 줄 수 있는 중요한 깊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강문호 목사가 수도 전통을 개신교가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는 방식입니다. 수도원이 가톨릭보다 먼저 존재했던 기독교적 유산이며, 그러므로 개신교가 수도 전통 자체를 가톨릭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버릴 필요가 없다는 문제의식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기도, 침묵, 절제, 독신 또는 단순한 생활, 공동체 생활, 노동과 묵상 등 수도적 요소들은 기독교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어느 교파가 수도원의 소유권을 갖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 안에 어떤 영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수도복을 입는 것도 같은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강의 후반에는 과정을 마친 사람과 수도복, 수도사로서의 정체성 등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수도복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겸손과 헌신을 기억하게 하는 표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특별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강화하는 표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옷이 아니라 애정입니다. 같은 수도복을 입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나는 주님의 종이다’라는 마음으로 입을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나는 보통 신자와 다른 특별한 영적 사람이다’라는 마음으로 입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동일하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여기서 수도사학교의 이름 자체도 흥미로워집니다. 나중에 ‘수도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명칭 변경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수도사’를 만드는 학교보다 ‘수도’를 배우는 학교라는 표현이 오히려 본질에 가까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는 특정 신분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명칭 변경의 실제 이유를 단정하는 말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바라본 의미입니다. 진정한 수도는 ‘나는 수도사다’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데 있지 않고, 날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 앞에 내어놓으며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첫 강의에서 가장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문호 목사는 완성된 체계를 가르치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 안에서 거의 해 보지 않은 일을 ‘우리끼리 시작한다’, ‘전통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도 ‘아무의 전통을 우리가 만들어 가야 되지’라는 취지의 말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는 개척자의 서툶과 동시에 진정성이 있습니다. 이미 정답을 가지고 학생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경험하고 배우면서 길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첫 학기 일정표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완성된 수도원 규칙서라기보다 ‘한국 개신교 안에서 수도적 삶을 어떻게 실제로 가르쳐 볼 것인가’를 처음 실험해 본 흔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것을 전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을 살릴 수 있습니다. 침묵은 자기 말이 얼마나 많은지를 발견하게 할 수 있고, 금식은 욕망의 힘을 보게 할 수 있으며, 공동생활은 proprium을 드러내고, 독서는 이해를 열며, 글쓰기는 자신의 상태를 성찰하게 하고, 노동은 관념적인 신앙을 실제 삶으로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입니다. 이 훈련들이 ‘훌륭한 수도자’를 만드는 방향으로 향하면 자기완성의 종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도록 내 안의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물리치는 삶’으로 향한다면 매우 유익한 외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수도 전통에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이 나옵니다. ‘왜 세상을 떠나야 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에서는 세상에서 맡은 직업과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고,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면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거듭남의 현장은 반드시 수도원이 아닙니다. 가정도 수도원이 될 수 있고, 직장도 수도원이 될 수 있으며, 목회 현장도 수도원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책임을 감당하며 돈을 사용하고 갈등을 해결하고 용서하고 봉사하는 그 복잡한 일상 속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실제 모습이 끊임없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은 거듭남을 위한 특별한 ‘훈련장’이 될 수는 있어도, 거듭남의 최종 목적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수도사학교가 품었던 이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는 생각보다 상당히 넓은 접점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람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 지식을 삶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 자기 욕망을 그대로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물질과 성공에 사로잡힌 종교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 실제 훈련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 등은 서로 깊이 만납니다. 차이는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하는 데서 생깁니다.

 

수도사학교에서는 그것을 상당 부분 ‘훈련을 통한 사람 만들기’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한층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자신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과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고, 새로운 의지를 심으시며,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수도의 가장 깊은 자리는 산속 수도원의 독방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만납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첫 강의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읽어도 좋겠습니다. ‘이 강의는 세상을 버리는 수도자를 만들려는 시도라기보다, 세상에 삼켜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만들고 싶었던 한 개신교 목회자의 몸부림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탭니다. ‘그러나 사람이 정말 버려야 할 것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proprium이며, 사람이 정말 들어가야 할 수도원은 외딴 장소 이전에 주님 앞에 열리는 자신의 내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첫 강의를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역사 설명에는 검토해야 할 부분이 있고, 금욕과 외적 훈련에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으며, 수도자라는 특별한 신분을 강조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흐르는 질문은 매우 진지합니다. ‘목회자가 되고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을 많이 알고도 자기 욕망대로 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가 커지고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수도사학교는 그 답을 ‘수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질문에 아주 깊은 곳에서 답합니다. 다시 시작해야 할 곳은 ‘’입니다. 진리가 기억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행위로 내려와 마침내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proprium이 얼마나 완강한지를 발견하고, 수많은 시험을 통과합니다. 외적으로는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고, 직업을 가지고 살아도 그 사람 안에서는 치열한 수도생활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생 수도원에 살아도 자기 사랑을 붙들고 있다면 내적인 수도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 강의와 첫 학기 일정표를 함께 놓고 보면, 어쩌면 이 학교가 처음부터 찾고 있었던 가장 깊은 것은 ‘수도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갈망은 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갈망을 더 안쪽으로 인도합니다. 수도복에서 삶으로, 고행에서 회개로, 자기훈련에서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에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분리로, 그리고 ‘특별한 수도자’가 되는 데서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된 사람’이 되는 데로 말입니다. 저는 이 첫 강의의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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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설교의 중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를 교회의 성장이나 성공, 은사나 신비 체험, 신학적 지식, 심지어 선교적 업적 자체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자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빌3:14의 ‘푯대를 향하여’를 중심에 놓고,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제사장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 골리앗에게 달려가는 다윗, 아합 앞에 서는 엘리야의 모습을 연이어 제시하면서 이제 막 출발하는 교회가 처음부터 방향을 정확히 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GPS’라는 친숙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출발점에서 좌표가 조금만 어긋나도 먼 훗날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하므로 교회의 좌표를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이 중심 명제는 매우 귀합니다.

 

특히 설교 초반에 제시되는 교회상은 주목할 만합니다. 설교자는 건물이나 숫자보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죄인이 들어와도 과거 때문에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부자나 유명인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특별대우를 받는 대신 연약한 사람이 사랑받고, 서로의 것을 나누며, 직분과 서열보다 겸손과 순결과 거룩함이 존중받는 교회를 꿈꿉니다. 반대로 직분과 권위, 시기와 경쟁, 험담과 배척으로 가득한 교회를 매우 강하게 비판합니다. 표현은 때때로 거칠지만 그가 지향하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외적 규모나 사회적 힘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실제로 살아 있느냐에 따라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곳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본질적으로 건물이나 교단, 조직 자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있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천 명이 모이고 거대한 조직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천국적인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며, 아주 작은 공동체라고 해서 교회성이 약한 것도 아닙니다. 외적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그 외적 형식 안에 내적인 것이 살아 있을 때입니다. 설교자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보다 ‘ 죄인이 회개하는 ’을 더 귀하게 여기자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설교자가 예수님 곁에 세리와 죄인들과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부분도 중요합니다. 그의 요지는 ‘과거가 더러웠던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을 그의 과거를 계속 꼬리표처럼 붙여서는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 이상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사람은 현재 자연계에서 드러나는 이력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과거에 어떤 악 가운데 있었더라도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의 과거를 끊임없이 끄집어내어 현재의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거듭남이라는 복음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가장 힘 있게 전개되는 곳은 바울에 관한 부분입니다. 설교자는 바울에게 선교도, 신유도, 신비 체험도, 신학도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였고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으며 ‘셋째 하늘’에 관한 체험도 있었고 뛰어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를 얻는 ’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3:8 이하의 ‘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를 중심으로 설교가 깊어집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서신은 스베덴보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는 ‘말씀’의 책들과 동일한 방식의 내적 의미, 곧 연속적인 아르카나를 지닌 책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빌3의 각 문구를 창세기나 출애굽기, 선지서나 복음서처럼 상응을 따라 속뜻으로 풀어 가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말이 영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여기서 표현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다’는 신앙적 고백은 매우 귀하며, 그 내용을 주님의 가르침과 스베덴보리가 밝힌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거나 예수님에 대해 뜨거운 감정을 갖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 역시 외적인 행동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의 푯대’라는 선언은 결국 ‘ 사랑의 질서가 주님의 질서를 닮아 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유용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실제 내용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설교가 강조하는 ‘내가 죽는 ’도 조금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기를 원했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난과 죽음을 마치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돌에 맞은 바울이 다시 성으로 들어간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죽고 싶어서’라고까지 표현하고, 뒤에서는 ‘내가 죽기를 미치도록 갈망하고’라는 강렬한 말을 사용합니다. 설교자의 의도가 육체적 죽음이나 자살을 권하는 것이 아님은 문맥상 분명합니다. 그 자신도 이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영적으로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의 지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인격을 살리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 존재를 혐오하라는 말이 아니며, 고통 자체를 사랑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상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는 상태, 자신의 지성과 의를 신뢰하는 상태가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설교 후반의 ‘고통이 오면 뛰어가서 환영하십시오’라는 권면은 그 열정은 이해하면서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통 자체를 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난은 때로 시험의 장이 되고,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통해 우리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시고 정화하시며 선을 더욱 굳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니거나 부당한 학대를 계속 허용하거나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상황을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통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진리와 선을 선택할 때 그 시험이 거듭남을 섬기게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셨으므로 나도 고난받아야 한다’보다 더 깊은 질문은 ‘예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 무엇을 이루셨는가’입니다. 주님의 전 생애는 지옥들과 싸우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계속적인 시험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의 양을 주님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올라오는 악과 거짓의 충동과 싸우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시험과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설교자가 벧전2를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는 것은 천국적 삶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상대방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내가 죽어야 한다’는 설교자의 표현은 신학적으로 구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에 복수하지 않고 그것을 견딜 수는 있으며, 용서하고 그 사람의 회복을 바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악 자체를 내가 대신 담당하여 구속하는 것은 주님께 속한 일입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가운데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용서는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반복적으로 해를 입으면서도 무조건 참는 것이 언제나 사랑인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진리를 말하고 경계를 세우며 악이 더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사랑에는 따뜻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보완된다면 설교자가 말하는 ‘욕을 당하고도 욕하지 않는 ’은 훨씬 건강하고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설교 후반부에서 다시 교회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설교자는 ‘자기 의로 충만한 의인’보다 자기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교회, 큰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큰 자로 여김받는 교회,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보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는 교회를 꿈꿉니다. 여기에는 복음서에서 반복되는 주님의 가르침과 통하는 매우 중요한 직관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지상의 지위와 명성이 질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적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이 어떠한지가 중요합니다. 섬김을 사랑하는 사람은 높아지려 하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천국의 질서 안에서는 큰 자가 됩니다.

 

다만 ‘자기 의는 전혀 없고 죄밖에 없다’는 표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을 인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은 옳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거듭난 인간에게 실제로 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지 죄인으로 남겨 두고 외부에서 의를 덮어씌우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실제로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본래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난 삶의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내가 행하지만 그것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가장 귀한 문장인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문장의 깊이가 훨씬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한 지식을 늘리는 것도, 감동적인 체험을 많이 갖는 것도,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자 자신이 선교와 신유와 신비 체험과 신학을 모두 궁극적 목표에서 내려놓은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천국적이 되는 것도 아니며, 없다고 해서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비 체험 자체를 경계하거나 낮게 보는 방향으로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방대한 영계 경험을 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영적 체험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환상이나 계시나 놀라운 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허락하신 영적 체험이 그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고, 말씀을 더욱 사랑하게 한다면 그 열매를 함부로 멸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냐 이성이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것이 선과 진리의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설교자가 교회의 미래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라고 그리는 마지막 장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말은 ‘모두가 비슷한 종교적 말투와 행동을 갖게 되는 공동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입니다. 각 사람은 서로 다른 성품과 은사와 유용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하나의 중심, 곧 주님을 향합니다. 마치 인체의 서로 다른 기관들이 하나의 생명을 섬기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모두가 똑같아지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따라 서로를 섬기면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이 점에서 설교 초반과 마지막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어떤 교회를 꿈꾸는가’를 묻고, 마지막에는 성도들에게 눈을 감고 그 교회를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습니다. 이것은 목회적 호소로서 힘이 있습니다. 교회의 출발점에서 건물과 숫자와 영향력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것인가’를 묻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름다운 공동체 이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속 사람에서 실제로 거듭남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피하고, 주님께 선을 행할 힘을 구하며, 실제 생활에서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외적인 신앙이 내적인 신앙이 되고, 알고 있던 진리가 삶의 선과 결합합니다. 그때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의 ‘GPS’ 비유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바꾸어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목적지를 ‘예수님’이라고 입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내가 걷는 길이 그 목적지와 일치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가, 아니면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는가. 내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는가, 아니면 유용한 사람이 되려 하는가.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속으로 계속 정죄하는가, 아니면 진실을 분별하면서도 그의 최종 상태는 주님께 맡기는가. 내가 가진 신학과 체험과 은사를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데 사용하는가, 아니면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가. 바로 이런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 실제 GPS의 경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가장 좋은 부분은 역설적으로 가장 단순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 이 문장을 굳이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우리에게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해 간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더욱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것은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며, 신비 체험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신학적으로 누구보다 정확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자신의 실제 삶에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푯대를 향하여’라는 제목도 새로운 깊이를 갖습니다. 푯대는 단순히 저 멀리 바라보는 목표가 아닙니다. 주님은 목적지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향해 내딛는 매 걸음의 생명이십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 애쓸 때, 나보다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보호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할 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우리는 이미 그 푯대를 향하여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전체적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 폐기하거나 경계해야 할 설교라기보다, 상당히 귀한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몇몇 강한 표현들을 거듭남과 시험, proprium,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조금 더 깊고 안전하게 다듬어 들으면 좋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성공보다 예수 그리스도’, ‘직분보다 겸손’, ‘정죄보다 용서’, ‘유명인보다 회개하는 영혼’, ‘자기 자랑보다 섬김’을 앞세우는 방향은 소중합니다. 여기에 ‘자기 죽음’을 자기혐오가 아니라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으로, ‘고난’을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 선과 진리가 굳어지는 시험의 장으로, ‘그리스도를 닮음’을 외적인 고난의 모방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오히려 더욱 풍성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설교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고 있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듭니다. ‘내가 주님을 푯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나의 사랑, 생각, , 판단, 돈의 사용,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용서, 정직, 섬김과 유용한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렇다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영웅이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proprium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삶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일 때, 설교자가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도 비로소 외적인 이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조금씩 드러내는 실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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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 이야기 : 채널설립이유’라는 제목으로, 강문호 수도사가 앞으로 자신이 접한 수도사들의 삶과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들을 한 편씩 소개하겠다는 취지를 밝히는 영상입니다. 공개된 정교회 자료와 예루살렘 교회 관련 자료를 대조해 보면 영상에서 소개하는 첫 인물은 4세기 팔레스타인 수도 전통의 중요한 인물인 성 카리톤(Chariton the Confessor)입니다. 카리톤은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강도들에게 붙잡혀 그들의 동굴에 결박된 채 갇혔고, 강도들이 다시 약탈하러 나간 사이 뱀이 포도주 그릇에 독을 남겼으며, 돌아온 강도들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죽었다는 전승이 전해집니다. 카리톤은 살아남은 뒤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및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고, 자신이 구원받은 그 자리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곳에 파란 라브라(Pharan Lavra)가 형성되었고, 그는 뒤에도 두 곳의 라브라를 더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영상에서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원’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조금 넓은 표현이며, 보다 정확하게는 유대 광야의 초기 라브라 수도 전통을 연 매우 중요한 공동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먼저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적 자체보다 카리톤의 반응입니다. 강도들이 갑자기 죽고 자신이 살아난 사건은 매우 극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승에서 더 중요한 것은 카리톤이 살아남은 뒤, 그 사건을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표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와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으며, 자신이 살아남은 장소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기적을 자신의 명예로 돌리는 대신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영적 체험의 가치는 그 체험이 얼마나 놀라웠는가에 있지 않고, 그 결과 사람의 사랑과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적이나 초자연적 현상이 그 자체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사람은 놀라운 일을 보고 잠시 두려워하거나 감동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지나간 뒤에도 이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 가운데 받아들인 진리와 그것을 따라 변화된 삶입니다. 카리톤 이야기가 영적으로 의미 있는 이유도 뱀이 독을 풀어 강도들이 죽었다는 기이한 사건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살아났다’는 놀라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카리톤처럼 강도의 동굴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지 않았더라도 하루하루 생명을 받고 살아갑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형식입니다.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에게 있으며, 사람은 매 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 생명처럼 느끼도록 창조되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그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 생명을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가 됩니다.

 

카리톤이 강도들의 재물을 자신의 소유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등을 위해 사용했다는 전승도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재물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사랑으로 어떤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같은 재물이 자기 안전과 명예와 지배를 확대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강도들에게 재물은 탐욕과 폭력의 목적이었지만, 카리톤에게 넘어온 뒤 그 재물의 쓰임이 바뀌었다는 점은 상징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 동일한 자연적 재물이 사랑의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초인간적인 이야기’처럼 소개하는 부분은 수도 전통에 대한 강한 감탄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금욕과 고독, 기도와 희생의 삶을 살아간 수도사들의 이야기는 현대인에게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참된 영성은 사람을 ‘초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본래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회복되어 더욱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인간과 다른 종류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에서 살다가 영계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의 위대함도 인간적인 삶을 초월했다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변화된 만큼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십 년 동안 동굴에서 기도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높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수도자가 사막에서 평생 기도하는 삶과 한 사람이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를 책임지고,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며,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 자기 분노와 이기심을 이겨 가는 삶 가운데 어느 것이 주님 보시기에 더 깊은지는 외적인 형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장소와 형식이 아니라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수도원에서 살아도 자신의 proprium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카리톤의 이야기 가운데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들자 더 깊은 고독을 찾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전승입니다. 정교회 자료에는 그가 사람들의 칭찬을 피하고 고독을 원하여 더 깊은 광야로 물러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영적 지도를 구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결국 다른 수도 공동체들도 세웠습니다. 고독을 사랑하면서도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와 쓰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고독은 사람을 이웃으로부터 도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신을 비운 뒤, 다시 이웃에게 더 순수한 쓰임을 행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영상에서 특히 중요한 문장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취지의 표현입니다. 이 말은 잘 이해하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꾸어 말하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진실한 말을 하고 선한 일을 행할 때, 겉으로는 그 사람이 말하고 그 사람이 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자유롭게 행하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난다는 것은 그의 말투가 특별하거나 신비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뒤, 사람들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한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저 목사님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남는 것과 ‘주님은 정말 이런 분이시구나’라는 깨달음이 남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사람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매우 엄중한 영적 문제가 시작됩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말이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나에게서 하나님의 특별한 음성을 듣는다’는 자기 인식으로 바뀌면, 그 순간 주님께 돌려져야 할 것이 proprium으로 돌아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세속적 자랑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적 체험, 말씀 지식, 기도생활, 목회 성공, 심지어 겸손과 희생까지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자기 의식이 생길 수 있을 만큼 proprium은 미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조금 더 완성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나와야 하지만, 정작 그 사람 자신은 그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때에는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선의 근원과 힘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내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거듭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영적 질서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그곳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 기적의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를 모았고, 그것을 앞으로 하나씩 소개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분명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랜 기독교 역사 안에서 실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주님께 돌렸는지를 보는 것은 오늘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이야기’와 ‘하나님 이야기’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기적이 많이 등장한다고 하나님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현상은 거의 없어도 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정직하게 악을 피하고 이웃을 섬겼다면, 그 삶에서 주님의 섭리가 훨씬 깊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도 섭리는 대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입니다. 사람은 극적인 기적에서는 쉽게 하나님의 손길을 찾지만, 평범한 일상의 질서와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섭리는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아주 미세한 방법으로 그를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사들의 기적담을 들을 때에도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구나’에 머무르기보다, ‘그 일을 통해 이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카리톤 이야기도 바로 그렇게 읽는 편이 좋습니다. 독사와 포도주와 강도들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장면이 이야기의 중심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면은 그 이후입니다. 그는 살아남았고, 재물을 나누었으며,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 때에도 자신의 명성을 붙들기보다 다시 고독을 찾았다고 전해집니다. 적어도 전승이 보여 주려는 이상은 ‘기적을 경험한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살아남은 생명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인간입니다.

 

여기에서 수도생활의 본질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수도복 역시 사람의 내적 상태를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고독과 금식과 기도와 노동은 거듭남을 돕는 외적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수단을 통하여 실제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라지 않는다면 수도의 외적 형식만 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복을 입지 않고 세상 가운데 살더라도 자신의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맡겨진 쓰임을 정직하게 감당하며,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는 사람이라면 그는 깊은 의미에서 내적 수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소개된 수도사 이야기를 ‘초인간적인 사람의 놀라운 일화’로만 받아들이기보다, ‘한 사람의 삶의 중심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라는 관점에서 읽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는 더 잘 맞습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보다 살아남은 뒤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하고, 수도원을 세웠다는 사실보다 왜 세웠는지가 중요하며,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들이 그를 통해 누구를 바라보게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이 영상의 가장 좋은 핵심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문장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조건을 덧붙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소리가 날수록 그 사람 자신은 더욱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커지는 만큼 주님의 이름도 함께 커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영적 질서에서는 사람이 투명해질수록 그를 통하여 주님이 더욱 분명히 보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 카리톤의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 다시 받은 생명과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돌렸다는 데 있으며,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특별함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주님의 선과 진리가 드러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상 속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난다’는 표현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마지막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쓰고 싶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소리가 나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들리는 그 선한 소리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SY.65, 강문호 목사, ‘이영길 수도사’ (20191210)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이영길 수도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수도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전남 화순의 깊은 산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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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49, 강문호 목사, ‘갈보리교회 은퇴사’ (20191201)

※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면서 전한 첫 인사입니다.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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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가 충주봉쇄수도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면서 전한 첫 인사입니다.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를 떠나 수도생활에 들어간 뒤, 이전 교회의 성도들에게 영상으로 인사를 전하면서, 후임 목회자와 새로 세워지는 직분자들을 축하하고, 지난 목회를 함께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려는 새로운 사역의 방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어떤 특정한 성경 본문을 강해하는 설교라기보다 한 목회자가 오랜 담임목회를 마치고,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서면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소망을 밝히는 인사말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먼저 영상에서 인상 깊은 것은 이전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애정과 감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영상으로나마 제 얼굴을 보는데 저는 여러분을 보지 못해서 너무 안타깝다’는 첫 인사에는 오래 함께했던 공동체를 향한 그리움이 묻어 있습니다. 이어 후임 목회자를 자신보다 훌륭한 목회자로 기대한다고 축복하고, 장로들과 부목사들, 전도사들, 선교회와 교사들, 찬양대와 성도들에게 감사하면서 ‘모두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이러한 감사는 귀한 태도입니다. 사람은 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수많은 서로 다른 쓰임들이 하나를 이루는 질서이며, 천국에서도 어느 한 존재가 모든 것을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목회 역시 여러 사람의 기도와 노동과 조언과 봉사가 결합되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난 세월을 자신의 업적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함께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천국의 공동체적 질서와도 잘 어울립니다.

 

후임 목회자를 향해 ‘저보다 훌륭해서 잘되리라고 믿는다’는 취지로 말하는 부분도 의미가 있습니다. 한 시대의 자신의 역할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은 영적으로도 중요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직분과 역할은 사람이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떤 쓰임을 위해 일정 기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자신의 사역을 붙잡기보다 새로운 사람에게 기꺼이 넘기고, 그가 더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적어도 표현된 내용 자체로 보면, 자신의 역할을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의 쓰임으로 이해하려는 방향과 맞닿아 있습니다.

 

영상의 중심은 이후 자신의 새로운 삶을 소개하는 부분으로 옮겨갑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제 한 교회의 담임목회라는 범위를 넘어 수도원과 연결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여러 나라의 수도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고, 은퇴한 목회자들이 함께 모여 ‘평생 새벽기도, 평생 연구, 평생 후학들을 가르침, 평생 노동, 그리고 그 노동으로 얻은 것을 통한 평생 선교’를 하며 죽는 날까지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비전을 밝힙니다. 여기에는 은퇴를 사역의 종료로 생각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까지 어떤 쓰임을 계속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쓰임’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의 삶은 무위도식하는 삶이 아니라 끊임없는 쓰임의 삶입니다. 천사들도 각자의 사랑과 지혜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단순히 쉬는 삶만을 이상으로 삼기보다, 기도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노동하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특별히 영상에서 기도와 연구뿐 아니라 ‘노동’을 수도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영적 삶은 머릿속의 명상이나 종교적 감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유용한 삶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쓰임’에서 중요한 것은 그 규모보다 그 내적 목적입니다. 수도원이 몇 개 세워지고, 몇 나라와 연결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하여 실제로 사람 안에 선과 진리가 자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큰 일을 했다는 이유로 더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충실하게 수행한 사람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작은 공동체를 섬기는 일이나 한 사람을 돌보는 일도 그 사랑과 쓰임이 참되다면 큰 조직을 세우는 것보다 결코 영적으로 작지 않습니다.

 

영상에는 ‘봉쇄수도원’이라는 독특한 삶의 방식도 소개됩니다. 일정한 특별한 경우 외에는 수도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사람들과의 접촉도 제한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고독과 침묵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분주한 외적 활동에서 물러나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은 분명 유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때때로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과 활동으로 가득했던 오랜 목회생활을 마친 뒤, 일정 기간 깊은 고독을 선택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외적으로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자체를 더 높은 영적 상태로 보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대부분 실제 삶의 관계와 책임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인내와 겸손을 확인하기가 쉽지만,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의견이 다르며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의 분노와 지배욕,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고독은 거듭남을 돕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수도원의 문을 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사랑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사람과의 만남을 줄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나는 사람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특히 생각해 볼 부분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아져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사람들만 만나느라 분주하면 너를 만나 주지 않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받았다고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선 귀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사역의 분주함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는 자각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끝없이 사람을 만나고 행사를 진행하면서, 정작 자신의 내면은 점점 메말라 갈 수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종교적인 일로 가득하지만, 내적으로는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역설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활동을 줄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려는 결심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개인이 기도 가운데 경험한 어떤 내적 음성이나 생각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확정하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는 여러 근원의 인플럭스가 작용하며, 자연계에 사는 동안 사람은 그 근원을 명확하게 식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강한 내적 감동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는 말씀의 진리, 이성적인 분별, 그리고 그 결과 맺히는 선한 열매를 통해 확인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 체험 자체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의 사역이 한 교회와 한 나라를 넘어 여러 나라의 수도원으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땅을 넘어 하늘까지’, ‘이 세상과 저세상까지’ 연결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영계 교통을 주장한다기보다 자신의 수도 사역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는 포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가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몸으로는 자연계에 살지만 그의 내면은 이미 영계와 연결되어 있고, 모든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흘러옵니다. 따라서 지상의 삶은 영원한 세계와 단절된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계와 영계를 연결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특별한 수도생활이나 어떤 영적 훈련이 인간에게 두 세계를 연결하는 권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으며, 상응의 질서를 통해 영계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저세상과 연결될 것인가’보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선과 진리를 이 세상에서 어떻게 받아 살아낼 것인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영계를 보고 천사들과 대화했지만, 그의 저작에서 영적 삶의 핵심은 영계를 보는 능력이 아니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영상 전체를 통하여 느껴지는 한 가지 강한 흐름은 ‘남은 생애를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오랜 목회를 마치고도 기도와 연구, 후학 교육과 노동과 선교를 계속하며 죽는 날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분명 귀한 면이 있습니다. 사람의 노년 역시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한 시기이며, 그때에도 경험과 지혜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삶의 어느 시기도 그 자체로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조건 안에서 어떤 선한 쓰임을 행하는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수도생활이든 목회든 선교든 모든 외적인 사역에는 하나의 공통된 영적 기준이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나의 자아가 커지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커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속적 성공을 내려놓고도 종교적 성공을 사랑할 수 있고, 물질적 명예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적 명예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형식 자체보다 그 안에 흐르는 사랑의 성질을 봅니다. 수도원이라는 장소도, 기도와 연구라는 활동도, 선교라는 이름도 자동으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한 사랑의 쓰임이 될 때 거룩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 첫 인사 영상은 한 목회자가 자신의 이전 사역을 감사 가운데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가려는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전 교회를 축복하고, 함께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자신은 앞으로 고독과 기도, 연구와 교육, 노동과 선교를 결합한 수도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러한 열망을 먼저 존중하면서도, 수도의 본질을 외적인 봉쇄나 활동의 규모에 두지 않습니다. 참된 수도는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보다 그의 마음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에 있으며, 참된 사역은 얼마나 큰 일을 이루느냐보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얼마나 순수하게 이웃의 유익으로 돌리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첫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담임목회를 마치고 고독과 기도, 연구와 노동, 후학 양성과 선교라는 새로운 쓰임의 삶으로 들어가려는 결심은 귀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참된 수도의 완성은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 물러났는가가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얼마나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SY.50, 강문호 목사, ‘이스라엘 첫 수도원, 채리톤’ (20191208)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수도사로 임명받은 뒤, 수도생활을 하면서 접하게 된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앞으로 유튜브를 통해 하나씩 소개하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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