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104 심화

1.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

천사들은 악령들과 어떻게 싸우나요? 직접 1:1로 마치 칼싸움하듯 싸우나요, 아니면 천사들의 아우라 범위를 악령들이 침범하지 못하는 건가요?

 

스베덴보리의 묘사를 종합하면 ‘둘 다 아니고, 훨씬 더 내적인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천사와 악령이 마치 육체를 가진 병사들처럼 칼을 들고 1:1로 싸우는 것이 기본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천사의 아우라가 강해서 악령이 접근하지 못한다’ 정도도 아닙니다. 핵심은 ‘선과 진리의 입류(influx)를 통한 영적 전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 천사와 영들은 모두 자신들의 사랑과 사고에 따른 ‘스피어(sphere, 영역·기운)’를 발산합니다. 천사에게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의 스피어가 나오고, 악령에게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 거짓과 악의 스피어가 나옵니다. 그래서 서로 반대되는 스피어가 가까워지면 실제적인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랑과 생각이 자연계의 물리적 힘보다 훨씬 직접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사들이 악령과 싸울 때 중요한 것은 ‘천사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합니다. 악령은 그 진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진리를 말하거나 천사의 스피어가 임하면 악령이 고통을 느끼고 물러가거나 도망치는 일이 생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까이 접근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그림, 즉 ‘천사들의 아우라 범위를 악령들이 침범하기 어렵다’는 표현이 1:1 칼싸움보다는 훨씬 가깝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방어막’처럼 이해하면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천사 개인의 초능력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천사를 통해 임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의 전투를 때때로 ‘전쟁’, ‘무기’, ‘칼’, ‘방패’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영계에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들이 실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표상적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의 실체는 물리적인 근육과 철제 무기의 충돌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충돌’입니다. 성경에서 ‘칼’이 진리를,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뜻하는 것도 이 상응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영계에서 칼싸움 같은 장면이 보인다 해도 ‘천국에는 실제 무기고가 있고 천사들이 칼을 차고 출동한다’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영계론과는 상당히 멀어집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천사들은 악령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싸우지 않습니다. 영은 죽일 수도 없습니다. 천사들의 역할은 악령의 공격을 억제하고, 공격받는 사람이나 영을 보호하며, 악령이 주입하는 거짓에 맞서 진리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시험(temptation)을 겪을 때 이 구조가 선명합니다. 악령들은 인간 안의 악과 거짓, 과거의 기억과 욕망을 자극하고, 천사들은 그 반대편에서 선과 진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싸움이 ‘내 생각과 내 갈등’처럼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의 놀라운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가장 가깝습니다.

 

‘악령 → 인간 안의 악·거짓·두려움·절망을 자극 → 인간 ← 선·진리·소망을 일깨움 ← 천사 ← 주님’

 

그러나 이것조차 최종적으로는 ‘천사 대 악령’의 대등한 전쟁이 아닙니다. 천사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악령이 천사를 두려워하는 것도 천사라는 존재 자체가 무서워서라기보다 그 천사를 통하여 임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능력을 잃는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이걸 조금 전 ‘시티즌 비질란테’와 연결하면 아주 흥미로운 차이가 드러납니다. 비질란테의 방식은 ‘악인을 파괴하여 악을 제거하려는 방식’입니다. 반면 천국의 방식은 ‘악이 더 이상 다른 존재를 해치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분리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천사는 악령을 증오해서 두들겨 패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질서가 임하면 악이 그 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라’라는 표현을 조금 다듬는다면 ‘천사의 스피어(sphere)’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천사의 스피어’조차 천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천사를 통하여 흘러드는 주님의 선과 진리의 스피어’입니다.

 

 

 

SY.104, 씨네마톡, ‘시티즌 비질란테’(Citizen Vigilante, 2026) - 정의가 복수가 되는 순간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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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을 보는 동안 마음이 불편한 까닭은 단순히 폭력적인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불편한 것은 우리가 주인공의 행동을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는 먼저 무고한 사람이 잔혹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고, 법과 제도가 피해자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며, 가해자들이 그 틈을 빠져나가는 상황을 보여 줍니다. 그러고는 비질란테를 등장시킵니다. 사람들은 그를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 ‘무력한 사람들을 돕는 진짜 기사’라고 환호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은 관객에게 위험한 질문 하나를 건넵니다. ‘법이 정의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누군가는 대신해야 하지 않는가?’

 

이 질문이 강력한 까닭은 그 출발점에 분명한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은 악입니다. 강간과 살인, 폭력과 약탈을 ‘그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로 희석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무조건적인 관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체어리티는 악이 계속해서 이웃을 해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을 포함합니다. 사회의 법과 재판과 형벌도 이런 관점에서는 단순한 세속 제도가 아니라 공동선을 보호하기 위한 질서의 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가해자를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하는 렌즈가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분명히 보고, 그것을 제어하고, 무고한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화 중간의 피해자 장면은 특히 곤혹스럽습니다. 비질란테는 피해자에게 재판이 몇 년이나 걸릴 수 있고, 그동안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일을 계속 증언해야 하며,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정의입니까?’ 이어서 ‘정의를 원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그렇다면 저 사람이 처리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하는 마음으로 넘어갑니다. 바로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지점입니다. ‘악에 대한 분노’와 ‘악인에 대한 증오’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지점까지 서로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그 악 때문에 사람이 파괴되고 이웃이 고통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을 증오하면서 그의 고통과 파멸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순간 중심은 더 이상 ‘이웃을 악에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 사람에게 고통을 돌려주는 것’으로 이동합니다. 정의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복수의 쾌감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영화가 섬뜩한 것은 바로 이 변화가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무고한 사람을 보호합니다. 다음에는 범죄자를 응징합니다. 그러다가 경찰에게까지 ‘나를 방해하면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정의를 집행한다고 시작한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이 정의인지 결정하고, 누가 악인인지 판결하고, 형량까지 정하며, 마침내 자신을 막는 공권력까지 제거할 권한이 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장면은 판사를 찾아가는 대목입니다. 비질란테는 미성년자를 집단 성폭행한 가해자들이 엄중한 처벌을 받지 않은 책임을 판사에게 묻습니다. 영화 속 판사는 이들의 범죄를 사회 통합의 실패와 연결하고 가해자들도 일종의 피해자라고 설명합니다. 그러자 비질란테는 그 판사를 피해자를 해친 사람들과 사실상 같은 편에 놓습니다. 관객의 분노를 극대화하도록 만들어진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잘못된 판결을 비판하는 것과 ‘그러므로 내가 그 판사를 심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정의가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개인에게 최종 심판권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질서의 실패가 ‘나 자신이 질서가 되어도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순간, 비질란테는 자기가 싸우던 악의 논리를 닮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집단 성폭행 가해자들을 찾아가는 장면은 이 문제를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 영화는 가해자들이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았다는 정황을 일부러 제시합니다. 한 사람은 피해자가 옷을 그렇게 입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는 취지의 말을 하고, 비질란테는 그 가족에게까지 책임을 추궁합니다. 결국 감옥을 피했던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죽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고 ‘저런 자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것 자체와, 그들이 고통받고 죽는 모습을 즐기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관객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나는 지금 정의가 회복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저 인간들이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가?’ 두 마음은 겉으로 매우 비슷하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근원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심판은 인간의 복수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주님은 악인을 미워해서 지옥에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오직 사랑과 선이며, 심판조차도 질서를 회복하고 선한 자들을 악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옥의 형벌 역시 ‘당한 만큼 갚아 주시는’ 신적 보복이라기보다 악이 다른 존재를 무제한으로 해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질서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에서도 형벌의 정당성은 ‘저 사람이 얼마나 고통받아야 내 분이 풀리는가’가 아니라 ‘악을 어떻게 억제하고 무고한 이웃을 어떻게 보호하며 무너진 질서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똑같이 엄한 형벌이라도 그 내면의 목적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를 단순한 ‘착함’이나 ‘봐주기’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어쩌면 비질란테만이 아닙니다. ‘그를 환호하는 사람들’이며, 더 깊이 들어가면 영화를 보면서 어느새 그를 응원하게 되는 ‘우리 자신’입니다. 작품 속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 저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환호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proprium은 기묘합니다. 처음에는 ‘무고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다음에는 ‘악인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한 걸음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고통을 주어도 된다’고 넘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가 고통받는 것을 보니 속이 시원하다’가 됩니다. 이때 선과 진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 내면에는 이미 복수와 증오가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옥적인 것은 언제나 처음부터 ‘나는 악이다’라고 말하며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나는 정의다’라는 얼굴을 하고 들어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보고 ‘그러니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 내려서도 안 됩니다. 그것 역시 너무 단순합니다. 무고한 아이가 성폭력을 당하고, 사람이 살해되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는데도 아무런 분노가 없다면 그것을 반드시 영적 성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이웃을 파괴하는 악에 대한 거부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거부가 어디를 향하느냐입니다. ‘악이 멈추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악한 사람이 파멸하기를 원하는가.’ 전자는 질서를 향하고 후자는 복수를 향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의 마음에서는 이 둘이 너무나 쉽게 섞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정의라고 즉시 성별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시티즌 비질란테’가 ‘스베덴보리의 렌즈’ 앞에서 던지는 질문은 ‘저 비질란테가 옳은가, 법원이 옳은가?’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훨씬 더 불편한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악을 미워하는가, 아니면 악인을 미워하는가?’, ‘나는 피해자가 보호받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가해자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은가?’, ‘나는 정의를 원하는가, 아니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나의 분노가 허락받기를 원하는가?’

 

이 구별 앞에서는 저 역시 쉽게 자신할 수 없습니다. 끔찍한 악행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법이 그것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렌즈를 내려놓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악을 선이라 하지 않되 악인을 향한 증오에 자신을 내어주지도 않고,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되 복수를 정의로 착각하지도 않으며, 필요한 형벌과 질서는 단호하게 세우되 인간의 최종적인 내면과 영원한 운명에 대한 심판은 주님께 남겨 두는 것, 그것이 이 잔혹하고 불편한 영화를 통과하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어려운 분별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가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역설은 이것입니다. ‘악과 싸우는 동안, 그 악이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악을 처벌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싸움일지도 모릅니다.

 

심화

1.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

 

SY.104 심화 1, 씨네마톡,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

SY.104 심화1.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천사들은 악령들과 어떻게 싸우나요? 직접 1:1로 마치 칼싸움하듯 싸우나요, 아니면 천사들의 아우라 범위를 악령들이 침범하지 못하는 건가요?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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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앞의 영상을 부부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강하게 남는 질문은 ‘우리는 정말 한 팀인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선을 조금 옮겨 부모의 자리에서 바라보겠습니다. 그러면 질문도 달라집니다. ‘결혼한 내 자녀와 그 배우자가 한 팀이 되도록 나는 얼마나 잘 물러나 주고 있는가?’입니다. 영상에는 시어머니의 말, 장모의 개입, 명절 방문 순서, 음식 준비, 용돈, 육아, 제사와 친척 관계 등 수많은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켜고 부모의 자리에서 보면 이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영적인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자녀를 내 삶의 연장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같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결혼에 관하여 매우 놀라운 순서를 제시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여기에는 ‘떠남’이 먼저 있고 ‘합함’이 있으며 그 결과 ‘한 몸’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부모와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이 이루어지는 순간 관계의 질서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이전까지 부모와 자녀가 하나의 가정이었다면 이제 그 자녀는 배우자와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창2:24의 ‘떠남’은 자녀에게만 요구되는 일이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야 한다면 부모 역시 자녀가 떠날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합니다. 어쩌면 후자가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결혼의 본질을 두 마음의 결합에서 찾습니다. 두 사람이 단순히 한집에서 사는 것을 넘어 점차 하나의 삶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렇다면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가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랑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결합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아들과 며느리 사이, 딸과 사위 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우리’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어린 시절에는 보호하고 가르치고 개입하는 사랑이었다면, 결혼 이후에는 상당 부분 ‘물러남으로써 보호하는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까닭은 부모에게는 자녀의 결혼보다 부모-자녀 관계가 훨씬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며느리를 만나기 수십 년 전부터 내 아들이었고, 딸은 사위를 만나기 수십 년 전부터 내 딸이었습니다. 부모에게는 수많은 기억과 희생과 애착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결혼 후에도 ‘내 아들’, ‘내 딸’이라는 감각이 가장 먼저 작동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자녀에게는 이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 생겼습니다.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내’입니다. 부모가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악의가 전혀 없어도 자녀의 결혼생활에 끊임없이 압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명절은 이 질서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이번에는 언제 오니?’, ‘몇 시에 올 거니?’, ‘자고 갈 거지?’, ‘큰아버지가 오시는데 얼굴은 보고 가야지’, ‘명절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니?’ 각각의 말만 떼어 놓으면 크게 잘못된 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부모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자녀를 보고 싶은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요구가 양가에서 동시에 들어오면 자녀 부부는 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부모에게는 ‘조금만 더 있다 가라’는 한마디이지만, 자녀의 배우자에게는 ‘우리 친정보다 시댁이 항상 우선이다’ 또는 그 반대의 메시지로 경험될 수도 있습니다. 영상이 보여 주는 갈등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런 작은 요구들이 반복되면서 생겨납니다.

 

여기서 부모가 특별히 살펴야 할 것은 ‘나는 요구하지 않았다’는 자기평가입니다. 직접 ‘우리 집부터 와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서운한 표정, 반복되는 질문, 다른 집 자녀와의 비교, ‘옛날에는 다 그랬다’는 말, 늦게 왔을 때의 냉랭함으로 충분히 압력을 줄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잘 알기 때문에 부모가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거듭남은 말만 조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마음’ 자체를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proprium은 노골적인 이기심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선한 외형을 입을 때 분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가족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당연하지’, ‘우리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명절에 가족이 모이는 게 뭐가 나쁘니?’ 모두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자녀의 자유와 새 가정을 존중하는 사랑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모이니 이 정도는 받을 권리가 있다’는 자기성이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외적 행동만 보면 둘은 비슷하지만 내적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은 ‘아들이 효도하고 싶은데 며느리가 일을 하고, 딸이 효도하고 싶은데 사위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지적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이것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며느리가 차린 명절상을 받으면서 ‘우리 아들이 참 효자다’라고 생각한다면 실제로 그 효도의 상당 부분을 누가 감당하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딸이 부모에게 좋은 선물을 해왔을 때도 그 비용과 준비가 사위에게 어떤 부담이 되었는지 부모는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의 효도를 기쁘게 받는 것과 자녀 배우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때로는 부모가 먼저 ‘너희가 무리하면서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가족 사랑일 수 있습니다.

 

특히 며느리와 사위를 ‘우리 집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 집 방식에 따라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결혼은 한 사람이 다른 집안으로 편입되어 그 집안의 관습에 복종하는 사건만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 집은 원래 이렇다’는 말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새로운 가족에게 과거의 질서를 그대로 강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소중하지만 사람보다 높을 수는 없습니다. 전통이 사랑을 돕는다면 보존할 가치가 있지만, 전통 때문에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고통받는다면 부모 역시 그 전통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녀 부부에게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 역시 반대 극단입니다. 자녀가 결혼했다고 부모의 지혜와 경험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조언할 수 있고 걱정할 수 있으며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언’과 ‘지배’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조언은 상대에게 자유를 남겨 둡니다. 지배는 내가 원하는 결론을 상대가 선택해야 마음이 놓입니다. ‘내 생각은 이렇지만 결정은 너희 둘이 잘 의논해서 해라’라고 말하고 실제로 다른 결정을 했을 때도 그것을 존중할 수 있다면 조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해 놓고 다른 선택을 하면 서운함과 냉대로 대한다면 사실상 선택권을 준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 부모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은 부부 사이의 갈등에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자녀가 배우자에 대한 불만을 부모에게 털어놓을 때 부모의 본능은 자기 자녀를 보호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부부싸움은 화해하면 끝날 수 있어도 부모의 마음에 새겨진 며느리나 사위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자녀는 다음 날 배우자와 화해했는데 부모는 몇 년 전 들은 이야기를 아직 기억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자녀가 배우자를 흉볼 때 무조건 함께 분노해 주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때로는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래도 그 문제는 너희 둘이 잘 이야기해 보아라’ 하고 자녀를 다시 배우자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그 결혼을 보호하는 부모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처럼, 사랑은 상대가 자기 자리에서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돕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녀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고, 자녀의 배우자와 경쟁하고, 자녀가 자신보다 배우자를 우선할 때 배신당했다고 느낀다면 그 사랑 안에는 소유하려는 자기성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도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동안에는 붙잡아 주는 것이 사랑이었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놓아주는 것이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결혼한 자녀가 ‘이번 명절에는 처가부터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여행을 가려고 합니다’, ‘제사는 이렇게 간소화했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오래 있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때 부모의 마음에 서운함이 생기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감정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 서운함을 자녀에게 죄책감으로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살필 것인가입니다. ‘왜 나는 아이들이 오지 않으면 이렇게 섭섭한가? 내가 원하는 가족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확인받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질문이 부모 자신의 거듭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또 하나의 어려운 시험이 있습니다. 자녀의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입니다. 부모의 눈에는 분명 부족한 점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내 며느리’, ‘내 사위’이기 이전에 자녀가 평생을 함께 살아갈 배우자라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며느리나 사위를 지속적으로 깎아내리면 결국 자녀에게 두 충성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가 배우자를 보호하면 ‘결혼하더니 변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2:24의 질서에서 보면 어느 정도의 변화는 오히려 당연합니다. 부모를 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결혼적 결합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세우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우리 때문에 너희 둘이 싸우지는 마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일은 우리가 감당할 테니 너희 가정을 먼저 잘 세워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욱 깊은 사랑일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만드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가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자녀의 사랑을 붙잡아야만 안심하는 부모가 아니라 자녀가 배우자와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기뻐할 수 있는 부모, 이것은 결코 작은 영적 성숙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모 공경의 의미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효도를 요구하는 것과 자녀가 자유롭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전혀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강요된 효도는 외적 행동을 얻을 수는 있지만 마음까지 얻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부모가 자녀 부부의 자유와 경계를 존중하면 오히려 자녀가 기쁜 마음으로 부모를 찾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사랑은 붙잡을수록 멀어지고 자유를 줄수록 가까워지는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강제로 사랑을 받아내지 않으시는 이유와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명절 역시 이런 의미에서는 부모에게 하나의 거울이 됩니다. ‘아이들이 몇 시에 왔는가’, ‘얼마짜리 선물을 가져왔는가’, ‘며느리가 음식을 얼마나 했는가’, ‘사위가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가’를 평가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는 이들의 결혼을 평안하게 해주는 부모인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며느리가 부엌에서 일하고 있을 때 ‘너도 앉아서 쉬어라’라고 말하고, 사위가 불편하게 앉아 있을 때 자연스럽게 쉴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자녀 부부가 다음 일정 때문에 일어나려 할 때 ‘그래, 얼른 가 봐라’ 하고 보내 줄 수 있다면 그것도 매우 실제적인 체어리티입니다. 거창한 신앙 고백보다 이런 작은 행동 속에서 사랑의 질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결국 부모의 입장에서 이 영상의 핵심 질문은 ‘왜 요즘 자녀들은 명절을 힘들어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자녀가 결혼한 뒤에도 여전히 부모-자녀 관계가 그들의 삶에서 가장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그리고 ‘내가 섭섭하지 않기 위해 자녀의 배우자가 희생하도록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 질문은 부모에게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언제나 이런 불편한 자기 발견을 통과합니다.

 

창2:24의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라는 말씀은 그래서 자녀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자녀에게는 ‘떠날 용기’를 요구하고 부모에게는 ‘보낼 사랑’을 요구합니다. 자녀가 떠나는 것이 거듭남이라면 부모가 보내는 것 역시 거듭남입니다. 어린 자녀에게는 손을 잡아 주는 부모가 필요하지만, 결혼한 자녀에게는 그 손을 조금씩 놓아주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붙잡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이 아이는 내 소유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한 사람이며, 이제 배우자와 함께 새로운 삶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부모의 가장 큰 성공은 자녀가 언제까지나 부모를 가장 먼저 찾게 만드는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들과 며느리가 서로 사랑하고, 딸과 사위가 서로를 보호하며, 그들의 아이들이 평안한 가정 안에서 자라는 것을 기뻐하면서 자신은 한 걸음 뒤에서 그 결혼을 축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 먼저 와라’보다 ‘너희 둘이 의논해서 편한 대로 해라’, ‘며느리가 이것도 안 하느냐’보다 ‘너희 둘이 행복하게 살아라’, ‘결혼하더니 자식이 변했다’보다 ‘이제 정말 자기 가정을 이루어 가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세대 갈등 해결법이 아닙니다. 사랑의 질서를 배우는 일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주님의 손 안에서 계속 변화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품는 사랑이었다가, 가르치는 사랑이 되고, 기다리는 사랑이 되며, 마침내 놓아주고 축복하는 사랑으로 성숙해 갑니다. 어쩌면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한 장면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내 자녀를 얼마나 붙잡고 있는가’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는가.’ 자녀의 결혼을 지켜 주기 위해 기꺼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 그것 역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매우 깊은 사랑입니다.

 

 

 

SY.102, 존버의 경제학, ‘명절 이혼이 많은 진짜 이유’ (20260922)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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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명절이 끝난 뒤 이혼이 늘어나는 현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영상이 실제로 다루는 것은 ‘명절 때문에 이혼하는 부부’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부부 관계의 균열이 명절이라는 특별한 환경에서 한꺼번에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영상의 표현대로 명절은 ‘원인이라기보다 촉매제’입니다. 시댁과 처가, 방문 순서, 음식 준비, 설거지, 육아, 용돈, 제사, 친척들의 질문과 비교가 며칠 안에 집중되면서 평소에는 감추어져 있던 관계의 질서가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영상은 그 수많은 갈등을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읍니다. ‘우리는 정말 한 팀인가?’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켜면 영상에서 말하는 ‘한 팀’이라는 표현이 훨씬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이 공동생활을 하는 계약이 아닙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그는 참된 결혼의 본질을 두 마음(minds)이 하나를 향하여 결합되어 가는 데서 찾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육체적으로 한집에 사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서로의 선과 진리가 결합하면서 두 사람의 삶이 점차 하나의 삶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결혼애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성경의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창2:24)는 말씀 역시 단순히 육체적 결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내적 결합의 질서를 품고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지영 씨를 무너뜨린 것은 정말 전 몇 장이나 설거지가 아닙니다. 영상에서도 정확히 그 점을 짚습니다. 시어머니의 말은 여러 해 견뎠지만 남편이 ‘우리 엄마가 틀린 말했어? 네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순간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 한마디가 그렇게 무거웠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결혼을 통해 형성되어야 할 ‘우리’가 그 순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내가 요구했던 것은 남편이 어머니와 싸워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는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여전히 자신의 원가족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배우자에게 그 질서에 적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외적으로는 결혼했지만 내적인 관계의 중심은 아직 이동하지 않은 셈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2장의 말씀이 놀랍도록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이 말씀에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을 부모를 버리거나 효도를 중단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자적으로도 결혼은 부모와의 관계를 끊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 후 관계의 질서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이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새로운 가장 가까운 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사랑이 배우자와의 결혼적 결합을 지속적으로 침범하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아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사랑들의 ‘질서’가 뒤바뀐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특히 예리한 대목이 바로 ‘내 부모는 내가 챙긴다’는 제안입니다. ‘아들이 효도하고 싶은데 며느리가 일을 하고, 딸이 효도하고 싶은데 사위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선(good)은 단지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행동이라고 해서 선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안에 들어 있는 사랑과 목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선합니다. 그러나 ‘내가 효자가 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우자의 노동과 시간과 감정을 당연한 자원처럼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외형은 ‘효도’이지만 그 안에는 자기 사랑(proprium)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집은 원래 그래’, ‘며느리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사위가 그 정도도 못하나’라는 말에는 전통이라는 이름을 입은 proprium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렌즈를 반대쪽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댁을 비판하기 위한 렌즈도, 며느리나 사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렌즈도 아닙니다. 배우자가 언제나 ‘내 편’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잘못 이해하면 또 하나의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내 배우자니까 내가 옳든 그르든 내 편이어야 해’라는 요구는 결혼애가 아닙니다. 참된 결혼적 결합은 두 사람이 서로의 자기성을 강화해 주는 동맹이 아니라 함께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가는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잘못했으면 부모의 잘못을 인정하고, 배우자가 잘못했으면 배우자의 잘못 역시 사랑 가운데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상의 ‘내 편’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조건 나를 편드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선과 진리를 향해 서는 사람’으로 한 단계 정화되어야 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부당한 말을 했을 때 남편이 ‘우리 엄마 원래 그래. 네가 참아’라고 말하는 것은 배우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내가 ‘당신 어머니가 저런 말을 했으니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마’라고 요구한다면 그것 역시 반드시 올바른 질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장 건강한 반응은 영상이 제안한 것처럼 남편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엄마, 그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라고 경계를 세우면서도 어머니를 미워하거나 모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체어리티(charity)에 가깝습니다. 체어리티는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영원한 선을 바라보며 질서를 세우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모 공경과 배우자 사랑은 본래 서로 경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문제는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각각의 사랑을 어느 자리에 놓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질서의 나라입니다. 높은 사랑이 낮은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을 제자리에 놓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면서도 배우자와 함께 형성한 새로운 가정의 경계를 지킬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세워진 결혼 관계 안에서 부모를 사랑할 때 그 효도 역시 더 자유롭고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희생시켜 부모를 만족시키는 것은 결국 부모와 배우자 모두에게 좋지 않은 열매를 남깁니다.

 

영상에서 명절의 또 다른 특징은 평소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의 관점에서 특히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곤하고, 돈이 들고, 교통이 막히고, 아이가 울고, 부모가 압박하고, 배우자가 예민해지면 평소 숨어 있던 자기 사랑과 지배욕과 인정 욕구가 밖으로 올라옵니다. 그렇다면 명절은 단순히 피해야 할 스트레스 기간만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작은 시험(temptation)의 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 아내가 우리 부모에게 이것밖에 못 하지?’, ‘왜 남편은 우리 친정에서는 저렇게 무뚝뚝하지?’, ‘왜 내가 손해 봐야 하지?’ 하는 감정들이 올라올 때, 우리는 그 감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제목인 ‘존버의 경제학’도 이 렌즈 아래에서는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에서 무조건 오래 버티는 것이 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편함이 생길 때마다 관계를 포기하는 것 역시 결혼의 깊은 의미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참느냐, 떠나느냐’라는 이분법보다 ‘이 관계 안에서 무엇이 거듭나고 있는가?’입니다. 일곱 번의 명절 동안 한 사람이 계속 참고 다른 사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참음이 반드시 거듭남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참음이 사랑에서 나온 인내가 아니라 두려움과 체념으로 굳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갈등을 계기로 남편과 아내가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서로의 고통을 듣고 관계의 질서를 다시 세운다면, 바로 그 갈등이 거듭남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상 마지막의 질문은 매우 좋습니다. ‘오늘 뭐 불편한 거 없었어?’ 겉으로 보면 아주 평범한 한마디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것은 상당히 깊은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 마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알고 싶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적 결합은 상대를 소유하는 데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내면을 존중하며 알려고 하는 데서 깊어집니다. 다만 여기에 한마디를 더 보탤 수 있겠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한 것은 없었어?’입니다. 첫 질문이 상대의 고통을 듣는 질문이라면 두 번째 질문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질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벽에 작은 틈이 생깁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결혼의 최종 목적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완벽한 배우자가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며 각자 자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중심에 배우자만 놓으면 결국 서로에게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참된 중심은 주님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서로에게 흘려보내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행복의 제도가 아니라 거듭남의 매우 깊은 학교가 됩니다. 가장 가까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proprium이 가장 많이 드러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깊은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는 관계입니다.

 

결국 이 영상이 묻는 ‘우리는 정말 한 팀인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팀’이라는 것은 배우자가 무조건 내 편이 되어 부모와 싸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부모를 공경하면서도 서로를 희생시키지 않고, 서로의 잘못을 감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바로잡으며, 각자의 proprium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는 대신 함께 주님의 질서 아래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과 아내가 ‘내 부모’, ‘네 부모’, ‘내 돈’, ‘네 시간’, ‘내 희생’을 넘어 조금씩 ‘우리’가 되어 갈 때, 창세기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은 결혼식 날 읽고 끝나는 문장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명절은 어쩌면 결혼을 무너뜨리는 날이라기보다 결혼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는 날인지도 모릅니다. 시댁도 처가도, 전도 설거지도, 용돈도 방문 순서도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통하여 ‘나는 배우자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배우자를 통해 내 뜻을 이루려 하는가?’, ‘나는 부모를 공경하는가, 아니면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우자를 사용하고 있는가?’, ‘배우자가 힘들다고 말할 때 나는 그의 고통을 듣는가, 아니면 즉시 나도 힘들었다며 자기변호를 시작하는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은 불편하지만 정직한 거울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발견한 것이 아름답지 않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남은 자기 안에 악이 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의 빛 가운데 그것을 발견하고 돌이키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명절에 싸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싸움 이후입니다. ‘누가 옳았는가?’만 묻는 대신 ‘이번 일을 통해 주님께서 내 안의 무엇을 보여 주셨는가?’라고 묻기 시작할 때, 명절의 갈등조차 결혼을 파괴하는 사건에서 두 사람을 조금 더 하나로 만들어 가는 거듭남의 재료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영상을 통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한 번 더 비추어 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

 

 

 

SY.103, 존버의 경제학, ‘명절 이혼이 많은 진짜 이유’ - 부모의 입장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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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기본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IT 개발자로 살던 한 남자가 갑자기 수인들이 살아가는 원시 세계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는 불을 피우는 기술조차 ‘샤먼’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독점하고 있으며, 불씨가 꺼지면 다른 부족에게 많은 식량을 바치고 다시 얻어 와야 합니다. 질병이 생겨도 원인을 알지 못하고, 사냥은 주로 힘과 머릿수에 의존하며, 깨끗한 물과 배설물 처리 같은 기본적인 위생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의 지식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는 불을 직접 피우고, 열병을 치료하고, 창을 만들고, 사냥을 조직화하며, 물을 끓여 마시게 하고, 배설물과 쓰레기를 주거지에서 분리합니다. 한 사람이 가진 ‘지식’이 부족 전체의 생존 방식을 바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식의 해방’입니다. 불을 피우는 방법은 원래 샤먼만 알고 있으며 그 지식은 후계자에게만 전수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것을 모든 부족민에게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의외로 상당히 좋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지식을 권력의 근거로 독점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나누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지식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는 결국 삶을 향해야 하며, 더 정확히 말하면 ‘쓰임’(use)을 향해야 합니다. 무엇을 많이 아느냐보다 그것을 가지고 누구를 살리고 무엇을 유익하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불 피우는 지식이 한 사람의 신비한 권위를 높이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권력이 되지만, 부족 전체가 혹한을 견디게 하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쓰임이 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이 공동체를 강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처음 부족민들은 강함을 거의 육체적인 힘으로 이해합니다. 강한 종족은 큰 짐승을 잡고, 많은 전사를 가진 부족은 더 많은 먹이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전혀 다른 원리를 가르칩니다. ‘정보를 수집하라. 환경을 이용하라. 퇴로를 확보하라. 각자의 장점을 살려라. 무기를 개선하라. 역할을 나누어라.’ 특히 ‘너희가 약했던 게 아니라 사냥 방식이 잘못됐던 거였어’라는 대목은 이 이야기 전체를 압축하는 문장처럼 들립니다. 힘이 부족해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지혜가 없어서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묘하게 접점이 있습니다. 천국 역시 모두가 똑같은 능력을 가진 사회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과 쓰임을 가진 존재들이 하나의 목적 아래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조금 더 깊이 들이대야 합니다. 이 콘텐츠에서 문명 발전의 방향은 거의 일관되게 ‘더 많이 알고,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더 강한 무기를 만들고, 더 잘 조직하고, 더 강한 부족이 되는 것’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보다 강한 적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보하며, 식량을 저장하고, 방어벽과 초소를 세우고, 다른 부족보다 우월한 생존 체계를 갖추는 과정이 곧 ‘진보’로 그려집니다. 여기에서 목사님이 느끼신 중국적 색채도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중화사상’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혼란한 주변 세계를 뛰어난 지식과 질서를 가진 중심 인물이 조직하고 교화하여 더 큰 질서 안으로 편입시킨다’는 서사 구조에 주목하는 편이 정확하겠습니다. 중국 역사문화에서 오래 반복되어 온 ‘문명과 주변’, ‘질서와 혼란’, ‘교화와 편입’의 상상력과 닮은 부분이 분명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인공은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씩 제공하는 조언자가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사람’이 되고, 공동체는 그가 제시하는 방식을 받아들일수록 강해집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 말이 맞을까?’라고 의심하던 이들이 결국 그의 지식과 성과를 경험하면서 그를 신뢰하고 따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오래된 인간의 꿈이 숨어 있습니다. ‘현명하고 유능한 한 사람이 올바른 지식으로 공동체를 이끈다면 세상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 이것은 중국만의 생각도 아닙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에서 현대의 기술관료주의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끊임없이 품어 온 꿈입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에게 인간 사회의 근본 문제는 ‘지식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 좋은지 몰라서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진리마저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조심해서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지식→문명→힘→선’이라는 연결입니다.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고, 병자를 치료하고, 식량을 저장하고, 혹한에서 살아남을 집을 짓는 것은 분명 좋은 쓰임입니다. 반면 더 치명적인 창을 만들고, 독을 이용하고, 더 효과적으로 적을 죽이고, 더 넓은 영역을 확보하는 능력 역시 동일한 ‘지식’에서 나옵니다. 지식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무엇인가에 따라 천국적인 쓰임이 될 수도 있고 지옥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성과 지혜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사용하고, 그 진리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오히려 이 중국 AI 이야기가 의도하지 않은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고 봅니다. 주인공이 부족에게 불을 주고, 의술을 주고, 무기를 주고, 위생을 주고, 조직을 주고, 정착지를 주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그들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법도 주었을까요? 기술이 발전하면 시기와 탐욕도 사라질까요? 식량이 풍부해지면 이웃 부족을 사랑하게 될까요? 무기가 강해지면 그것을 약자를 보호하는 데만 사용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연적 문명과 영적 거듭남은 갈라집니다. 외적인 삶은 놀라울 정도로 문명화되었는데 내면은 여전히 지배욕과 소유욕과 자기 우월감에 붙들려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매우 소박하게 살아도 이웃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천국의 질서에 훨씬 가까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작품을 보면 문명의 진정한 척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얼마나 강한 부족인가?’가 아니라 ‘그 힘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그 지식이 누구를 살리는가?’입니다. ‘얼마나 잘 조직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질서의 중심에 자기 집단의 우월함이 있는가, 아니면 공동의 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입니다. 주인공이 불 피우는 방법을 독점하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는 순간에는 천국적인 원리가 비칩니다. 병든 사람을 살리고, 부족원 가운데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사냥법을 개선하는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기술이 ‘우리 부족을 가장 강하게 만드는 것’으로 중심을 옮기는 순간, 같은 지식 안으로 인간의 proprium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중국식 문명 우월 판타지로만 읽기에는 조금 아깝습니다. 그 안에는 인간 문명의 오래된 모순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불을 발견한 인간은 추위를 이겼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집을 불태울 수도 있게 되었고, 금속을 다루게 된 인간은 농기구와 칼을 동시에 만들었으며, 현대 과학은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과 대량살상 기술을 함께 만들어 냈습니다.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지식을 움직이는 사랑이 바뀌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그 중심의 변화입니다. ‘나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에서 ‘주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누구에게 어떤 쓰임이 될 것인가’로 삶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보면서 느껴지는 ‘중화사상’의 흔적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인의 문제라기보다 인간 proprium의 보편적인 꿈입니다. ‘내가 더 많이 알고, 더 강해지고, 더 잘 조직하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꿈입니다. 주님은 그것보다 훨씬 깊은 곳을 보십니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사랑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아지는 것이 문명의 시작이라면, 그 지식을 자기 자신보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는 것은 천국의 시작입니다. 이 콘텐츠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어쩌면 거대한 짐승을 쓰러뜨리는 순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불 피우는 법’을 더 이상 자기만의 힘으로 붙잡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는 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직접 피우면 되니까 불씨를 얻으려고 음식을 바칠 필요 없어.’ 바로 그때 지식은 권력에서 쓰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가진 불은 누구를 따뜻하게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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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유튜브 채널 ‘말씀의 서사’의 이번 영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기에 상당히 중요한 영상입니다. 주제가 바로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자막 전체를 보면 이 영상은 전통적인 니케아-아타나시우스적 삼위일체론을 대중적으로 아주 쉽게 설명하려는 영상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중간중간 사용하는 비유와 표현 가운데는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부분이 있는 반면,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가 가장 강하게 문제 삼았던 ‘영원 전부터 서로 구별되는 세 신적 위격’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은 단순히 ‘맞다, 틀리다’로 판정하기보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이 무엇을 지키려 했으며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어떻게 다시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이해했는지를 보여 주기에 아주 좋은 자료입니다.

 

영상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사람도 ‘삼위일체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서 출발하며, 이것을 신앙이 얕기 때문이 아니라 삼위일체가 그만큼 깊고 신비로운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위일체가 본래부터 인간의 이해를 초월할 만큼 모순적인 신비인가, 아니면 교회가 하나님을 세 영원한 위격으로 설명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워진 것인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독교에는 반드시 삼위일체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 삼위일체를 ‘세 신적 인격의 연합’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 자체, 신적 인간, 발출하는 신성의 삼위일체로 이해합니다. 영상과 스베덴보리 모두 ‘하나님은 한 분이며 삼위일체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 셋이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길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영상은 신명기 6장 4절의 ‘하나’인 히브리어 ‘에하드’가 창세기 2장 24절의 ‘한 몸’에도 쓰인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가 반드시 단순한 숫자적 하나만을 뜻하지 않고 ‘여럿이 연합된 하나’일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창세기 1장 1절의 ‘엘로힘’이 형태상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라는 점도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하나의 힌트처럼 제시합니다. 다행히 영상도 이것들만으로 삼위일체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데, 이 신중함은 좋습니다. 그러나 ‘에하드’가 집합적 하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이 복수 인격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뜻은 아니며, ‘엘로힘’의 형태 역시 그것만으로 삼위일체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먼저 온전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성은 세 존재가 하나의 목적과 사랑으로 연합하여 이루는 하나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이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를 설명하면서 ‘혼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 안에는 이미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시는 우리가 계셨던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더욱 조심해서 보아야 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창조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의 형성을 다루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창1:26의 ‘우리’를 곧바로 영원 전부터 서로 의논하던 세 신적 위격의 대화로 읽는 것은 AC의 해석과 상당히 멀어집니다. 더구나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시는 우리’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부가 성자에게 말하고 성자가 성부에게 응답하며 성령이 그 옆에 계시는 세 신적 주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에서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생각 속에서는 세 분을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상이 가장 강력한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요단강에서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물속에는 성자,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성령, 하늘에서는 성부의 음성이 있으므로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같은 순간에 각자의 자리에서 동시에 나타났다’고 설명하며, 이것이 한 분이 세 역할을 하는 ‘1인 3역’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삼위일체를 단순한 양태론, 곧 한 하나님이 때로는 아버지 역할을 하고 때로는 아들 역할을 하고 때로는 성령 역할을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상이 경계하는 단순한 ‘1인 3역론’에 스베덴보리를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례 장면이 ‘영원히 서로 구별되는 세 신적 인격’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실제적인 구별이지만 세 하나님 사이의 구별이 아닙니다.

 

특히 주님의 성육신과 영화의 과정에서는 아직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를 시간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임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던 세 인격이 잠시 한 장면에 동시에 등장했다’고 읽으면 성육신과 영화라는 거대한 과정이 사라져 버립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은 단순히 이미 완성된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인간의 옷을 입고 잠시 지상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모친 마리아에게서 취한 인성을 통하여 시험을 겪으시고 악과 지옥을 이기시며 그 인성을 점차 신성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는 이 ‘영화’의 과정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9분대에 등장하는 ‘태양 비유’입니다. 영상은 하나의 태양에서 ‘빛, 열, 생명을 살리는 에너지’가 나온다고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은 셋이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설명하기에 훨씬 적합한 방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를 태양의 열과 빛에 상응시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태양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 신성의 근원이 나뉘어 여러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성이 서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발출합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여기에서 조금만 방향을 달리했더라면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상당히 가까이 갈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비유를 제시한 직후 다시 ‘성부가 계획하고, 성자가 실행하고, 성령이 적용한다’는 세 주체의 분업 구조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삼위일체적 구원을 설명할 때 매우 익숙하고 교육적으로도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칫 ‘성부라는 한 분이 계획하고, 성자라는 다른 분이 지상으로 내려와 값을 치르고, 성령이라는 또 다른 분이 그것을 인간에게 전달한다’는 구조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상의 ‘예수님은 그 한 번의 죽음으로 우리의 값을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갚아주셨습니다’라는 문장은 전통적인 대속·형벌대속적 구원론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십자가는 구속의 핵심적인 마지막 시험이며 영화의 완성이지만, 성부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형벌의 값을 성자가 대신 지불하여 성부의 태도를 바꾸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육신 전에는 진노하시다가 성자의 희생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게 되신 분이 아닙니다. 바로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친히 인간에게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 인간에게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영상 후반에 제시하는 ‘삼위일체를 일상에서 누리는 다섯 가지 실천법’에서도 이 차이는 매우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영상은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를 주관해 주세요. 예수님,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성령님, 오늘 저를 인도해 주세요’라고 각각 부르도록 권하고, 찬송도 1절은 성부, 2절은 성자, 3절은 성령께 드리라고 하며, 하루의 감사 역시 세 분에게 역할별로 나누어 드리도록 권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문제 제기가 실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을 오랫동안 반복하면 신자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세 개의 신적 중심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한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기도할 때는 세 분을 차례로 찾아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교회 신학에서 중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부는 주님 밖에 따로 계시는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주님의 내적 신성이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에서 취하셨다가 영화하신 신적 인간이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신적 진리와 신적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성부를 건너뛰는 것도 아니고 성령을 제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분 주님께 나아감으로써 신성 전체에 나아갑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영상 자체가 14분대에 말한 ‘여러분은 기도할 때마다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와 만나고 있는 겁니다’라는 표현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그것을 ‘세 분이 동시에 기도를 듣는다’고 설명하기보다 ‘한 분 주님 안에 신성의 충만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을 것입니다.

 

영상의 신학적 결론은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창조 이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사랑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넘쳐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이 스베덴보리와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 사랑을 주고받는 세 인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신성 자체가 사랑 그 자체이며 지혜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는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것을 주며, 그 존재와 결합하기를 원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적 사랑은 창조를 향합니다. 인간과 천국을 창조하신 것도 사랑할 대상을 필요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완전한 신적 사랑 자체가 자신의 선과 행복을 다른 존재에게 나누어 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영상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사랑이 되기 위해 하나님 안에 최소한 복수의 인격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단일성은 결핍이나 고독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한한 사랑과 지혜와 생명의 완전한 하나 됨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상을 ‘삼위일체를 잘못 가르치는 영상’이라고 단순하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전통적 기독교가 지키고자 했던 매우 중요한 진리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적이라는 것, 성령은 단순한 비인격적 힘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구원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영상은 진지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또한 고난 속에서 외적 상황의 변화보다 먼저 마음이 변화되고 평안을 얻는다는 후반부의 메시지도 매우 귀합니다. 이것은 ‘문제 해결’ 자체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와 거듭남을 중요하게 보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영상에는 한 가지 일관된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계속 말하면서 실제 설명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을 각각 생각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는 세 신적 주체로 그립니다. 그래서 ‘셋이 완벽하게 하나로 움직인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독자의 내적 사고에는 결국 세 분이 남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론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급진적이면서도 단순한 답을 내놓습니다. ‘삼위일체를 버리지 말라. 그러나 그 삼위를 세 영원한 인격에게 나누지 말라. 그 삼위는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듯, 주님 안에는 성부라 불리는 신성 자체, 성자라 불리는 신적 인간, 성령이라 불리는 발출하는 신성이 있습니다. 이 셋은 세 하나님이 서로 완벽하게 협력하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삼위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핵심 질문도 ‘세 분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에서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 제목 ‘그런데 아직도 어려운 삼위일체’에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답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삼위일체가 어려운 까닭은 반드시 하나님 자체가 모순적인 신비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한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세 분을 생각하도록 배워 왔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흩어져 있던 삼위를 다시 한 분 주님 안에 모읍니다. 그때 성부께 갈 것인가, 성자께 갈 것인가, 성령께 구할 것인가 하는 신자의 오래된 혼란도 새로운 빛 아래 놓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됩니다. 그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번 영상에서 가장 역설적인 부분입니다. 영상은 ‘삼위일체의 안개를 걷어 주겠다’고 시작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그 안개가 완전히 걷히는 지점은 ‘세 분이 어떻게 하나인가’를 더 정교하게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셋이 한 분 주님 안에서 어떻게 하나인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그 순간 삼위일체는 세 하나님을 억지로 하나라고 이해해야 하는 난제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로 계시고, 인간에게 보이도록 오셨으며, 지금도 자신의 영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구원의 한 질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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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에서 강사가 다루는 본문은 역대상 4장 9-10절의 유명한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도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구절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던 기도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경’은 사업의 확장, 재산의 증가, 사역의 성장, 영향력의 확대 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대표적인 ‘복을 구하는 기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강사가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는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서 마지막 구절을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도 읽을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 나를 잘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에서 ‘하나님, 내가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바로 이 방향 전환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자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상 4장 9절에서 야베스의 어머니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말하는데,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오체브’(עֹצֶב)는 고통, 슬픔, 수고 같은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야베스’(יַעְבֵּץ)라는 이름과 이 단어 사이에는 분명한 언어유희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번역과 주석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설명하듯 야베스라는 이름이 단순히 ‘오체브의 자음 순서를 바꾼 단어’라고 어원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본문이 두 단어의 유사한 소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의 이름 풀이에서는 현대 언어학적 어원과 문학적인 언어유희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베스라는 이름과 고통을 뜻하는 오체브 사이에 의도적인 말놀이가 있다’고 하는 정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더구나 고유명사 야베스의 첫 요드(י)를 곧바로 히브리어 미완료형의 접두사라고 분석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유명사가 되면 그 자체로 이름이므로, 일반 동사의 활용형처럼 단순하게 역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저자가 ‘야베스 - 고통 - 근심’이라는 음성적 연결을 독자에게 의식시키고 있다는 강사의 큰 관찰은 옳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10절 끝의 ‘레빌티 오츠비’(לְבִלְתִּי עָצְבִּי)입니다. 여기의 ‘오츠비’는 ‘고통하다, 슬프게 하다’와 관련된 동사의 부정사 형태에 1인칭 단수 접미사가 붙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부정사에 붙은 인칭 접미사는 문맥에 따라 행위의 주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고 객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에, 강사가 소개한 두 방향의 가능성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영어 번역들도 갈립니다. NASB와 NET 같은 번역은 대체로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지 않도록’, 곧 야베스가 고통받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으로 번역하지만, NKJV와 HCSB 계열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내가 고통을 야기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는 임의로 만들어 낸 번역은 아닙니다. 다만 영상에서 ‘킹제임스 번역이 저처럼 해석했다’고 말한 부분은 정확히는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KJV는 ‘that it may not grieve me’, 곧 ‘그것이 나를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이라고 번역하며, ‘that I may not cause pain’이라고 한 것은 NKJV입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히브리어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영상이므로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이 절의 히브리어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웨아시타 메라아’(וְעָשִׂיתָ מֵּרָעָה)라는 부분 자체가 해석상 어려움이 있는 표현입니다. 많은 번역본은 문맥을 따라 ‘나를 악에서 지켜 주시고’,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시고’와 같이 이해하지만, 마소라 본문의 문법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매끄럽지 않습니다. NET 성경도 이 대목의 히브리어가 어렵다는 점을 주석에서 명시하고 다른 본문 가능성까지 논의합니다. 그러므로 10절 마지막을 하나의 문법 분석만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말하기보다는, ‘본문 자체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이해도 실제 번역 전통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오래된 유대교 주석 전통에서는 대체로 야베스 자신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읽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라는 해석은 매우 아름답고 문법적으로 가능한 독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전통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정적 번역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에게 고통이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기복주의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보호와 건강과 평안과 생계와 필요한 자연적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구해지는가입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내 소유를 더 늘려 주십시오’, ‘나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내 사역을 남들보다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적 조건과 능력과 기회를 구한다면 같은 말도 전혀 다른 기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의 핵심은 ‘복을 구했느냐, 복을 구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그 복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입니다. 우리의 proprium은 복조차도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듭니다. ‘주님,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더 인정받게 해 주십시오’, ‘내 이름이 더 높아지게 해 주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지경’을 구하면서 ‘제가 더 많은 사람에게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시고, 더 큰 책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주님께 받은 것을 더 넓게 쓰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똑같은 기도라 하더라도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강사가 마지막 구절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읽은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놀라울 만큼 잘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을 기독교적 삶의 첫째요 본질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신적 섭리’ 265번에서도 악을 죄로 여겨 삼가는 것이 기독교 종교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며, ‘참된 기독교’ 535번에서는 체어리티의 첫째가 악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 제 안에 있는 악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나가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제 말과 행동과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받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악을 단순히 억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주님께 죄임을 보고 돌이키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기도조차 단순한 도덕적 착함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외적 삶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며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악의 욕망을 내면에서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145번은 사람이 악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악한 욕망을 제거하고 선의 애정을 심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야베스의 기도는 ‘제가 남에게 피해를 안 끼치도록 제 성격을 잘 관리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사, 제가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시고, 제 안에서 악을 일으키는 것까지 주님께서 다스려 주십시오’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 가운데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라는 구절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와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게 하십시오’와 ‘악에서 지켜 주십시오’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십시오’를 서로 떨어진 네 가지 소원으로만 읽지 않고 하나의 거듭남의 흐름으로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게 주신 선과 진리의 삶의 영역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제 힘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하게 하십시오. 제 안의 악이 그 넓어진 지경 안으로 흘러들지 않게 하시며, 제가 받은 능력과 영향력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구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읽으면 ‘지경의 확대’는 성공의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가 됩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재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며, 목회자의 영향력이 넓어질수록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영혼을 주님께 연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상 4장 10절에 스베덴보리가 직접 붙인 속뜻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과 쓰임의 교리 안에서 이 기도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열리는 적용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이른바 ‘야베스의 기도 열풍’도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복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칩니다. 성경에는 자연적 복을 구하는 기도가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 삶도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자연적 복을 최종 목적으로 만들 때 신앙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지위와 지식과 능력과 영향력은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버릴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지경을 넓혀 내 것을 크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께서 제게 맡기실 수 있는 쓰임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상의 가장 귀한 문장은 처음과 끝에 반복된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그런 내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고통받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선을 다시 나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그 사람의 악’은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다룰 문제이고, 내가 지금 살펴야 하는 것은 ‘내 안의 악’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고통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내 proprium의 자존심과 지배욕과 인정욕과 탐욕과 분노와 냉혹함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을 보는 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발견한 악을 ‘내 성격이 원래 그래’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이것은 주님께 죄입니다’라고 인정하고 피하려 할 때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을 그토록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강사의 해석을 이렇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어 주해 차원에서는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번역을 유일한 정답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내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이라는 해석 역시 충분한 문법적·번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마소라 본문 자체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영상에서 KJV와 NKJV를 혼동한 작은 오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강사가 야베스의 기도를 자기중심적인 복의 청원에서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기도로 전환한 것은 매우 좋은 신학적 통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게 고통이 없게 하옵소서’와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하옵소서’ 가운데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둘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악으로부터 저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 제가 악의 통로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제 proprium의 지경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갈 쓰임의 지경이 되게 하십시오.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시되, 그 손으로 제 주변의 장애물만 치워 달라고 하지 않게 하시고, 먼저 제 안의 악을 보게 하시며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더 이상 ‘고통 없는 인생과 성공을 보장받는 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을 받을수록 더 선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지경이 넓어질수록 더 많은 쓰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힘이 커질수록 아무도 해치지 않게 하시고, 무엇보다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손을 떠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거듭남의 기도가 됩니다. 저는 야베스의 짧은 기도를 오늘 우리가 다시 드린다면, 바로 이 지점까지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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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은 앞서 다루었던 2020년 1월 5일의 티혼 수도사 이야기와 상당 부분 겹칩니다. 다만 이번에는 티혼 수도사의 극단적 금욕생활뿐 아니라 그가 연결되어 소개되는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 그곳의 공동생활과 식사 규칙, 기도와 금식,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가 실제로 그곳에서 경험한 일들까지 함께 펼쳐집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앞서 이미 살핀 ‘금욕과 거듭남’의 문제를 되풀이하기보다,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 ‘외적 질서와 내적 질서’, 그리고 ‘거룩한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한 가지는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티혼 수도사가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닌 끝에 이비론 수도원에 이르러 그곳에서 수도한 인물처럼 소개됩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는 정교회 자료에서 티혼 골렌코프(1884-1968)는 아토스의 카프살라에서 살았던 러시아계 은수자로, 말년에는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에 속한 성십자가 켈리에서 살았으며, 훗날 성 파이시오스의 영적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2026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이 그를 공식 성인 명부에 올렸습니다. 그러므로 티혼을 이비론 수도원이 ‘배출한 대표적 수도사’로 직접 연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Cloud of Witnesses) 이것은 영상의 영적 메시지를 무너뜨리는 문제가 아니라, 수도원과 인물의 실제 관계를 구별해 두자는 정도입니다.

 

영상의 티혼 수도사 묘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잠들지 않기 위해 목에 끈을 걸고 밤새 기도하고, 아주 적은 음식만 먹으며, 딱딱한 잠자리와 한 장의 담요로 겨울과 여름을 지낸 것으로 소개됩니다. 또한 ‘탐식은 모든 죄가 들어오는 현관문’이라는 생각 아래 배부름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해지는 티혼의 생애에서도 극심한 가난과 지속적인 기도와 금욕은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Cloud of Witnesses) 이런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먼저 그 진지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갈망하여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기도에 생애를 바친 사람의 열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언제나 여기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적게 먹는 것이 곧 탐욕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며, 딱딱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곧 proprium을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하루에 열매 반쪽만 먹으면서도 자기 금욕을 자랑할 수 있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감사와 절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음식의 양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는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육체를 가능한 한 괴롭히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욕망이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이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절제는 내적 거듭남을 돕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배부르면 음란해지고, 배부르면 교만해지고, 배부르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된다’는 영상의 설명도 이런 구별이 필요합니다. 과식과 탐식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영적 집중력을 흐릴 수 있다는 수도 전통의 경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의 근원이 음식이나 배부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의 뿌리는 인간의 proprium 안에서 주님과 이웃보다 자신을 사랑하려는 질서의 전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식을 절제했는데도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기 공로를 높이고, 타인을 업신여긴다면 근본적인 싸움은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음식에 대한 절제도 결국 이러한 내적 악과 싸우는 데 봉사할 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티혼과 동물들의 관계를 전하는 부분은 따뜻합니다. 여우가 찾아오고, 멧돼지 새끼들을 보호하며, 사냥꾼에게 동물을 숨겨 주고, 심지어 곤충들에게 자신의 피를 먹게 했다는 성인전적 이야기까지 소개됩니다. 이런 세부를 모두 역사적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수도자의 거룩함이 인간에게만 친절한 데서 끝나지 않고 피조물 전체에 대한 온유함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에서도 동물은 인간의 다양한 애정들을 표상합니다. 그렇다고 실제 여우나 멧돼지를 곧바로 특정 애정과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인간 안의 거칠고 자연적인 것까지 주님의 질서 아래 평화롭게 놓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으로는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은 이런 혹독한 훈련 끝에 티혼이 ‘하나님과 합일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더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해지는 의미에서 ‘합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생명 자체이시고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유한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내 안의 선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내가 어떤 높은 영적 단계에 올랐다’는 자기의식보다, 자신의 생명과 선이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영상 중간의 우물 이야기에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뭄으로 우물이 말랐을 때 성자의 초상화를 우물에 넣고 수도자들이 기도하자 물이 차올라 초상화가 떠올랐다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기도는 응답이다. 기도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닫힌 문을 연다’는 취지로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을 ‘내가 바라는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능력’으로만 이해하면 기도가 어느새 인간의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의 뜻을 내 뜻에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주님의 섭리와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응답이 내가 요구한 형태로 오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가 오히려 더 깊은 기도의 시험일 수 있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은 이비론 수도원의 공동 식사입니다. 원장이 먹기 시작하면 모두 함께 먹고, 원장이 수저를 놓으면 아직 다 먹지 못했어도 모두 수저를 놓으며, 식사 중에는 한 사람이 성경을 읽어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함께 취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에 담긴 질서와 절제는 충분히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수도원장이 모든 것의 표준’이라는 표현은 영적으로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운영에는 외적 질서가 필요하고 수도자는 자발적으로 그 질서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진리의 최종 기준은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과 말씀입니다. 인간 지도자에게 대한 순종이 주님께 대한 순종을 돕는 수단이라면 좋은 질서가 되지만, 지도자의 의지가 곧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면 외적 순종이 내적 자유를 침범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원 밖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강제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그가 선과 진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가장 깊은 순명은 ‘한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외적 규율이 그것을 훈련해 줄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원장이 숟가락을 놓았기 때문에 나도 숟가락을 놓는 훈련보다 더 깊은 것은, 내 욕망이 ‘조금 더 먹고 싶다’, ‘내 뜻대로 하고 싶다’, ‘나는 예외이고 싶다’고 말할 때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아래 놓는 내적 순종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만난 일본 수도사가 ‘한국에서 온 수도사가 없다. 한국과 아토스의 고리를 만들어 달라’며 자신을 붙들었다는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에도 이런 수도 영성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오랜 열망이 드러납니다. 영상 마지막에도 ‘우리나라에도 이런 교회 수도사들이 많이 배출되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 소망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교회가 활동, 성장, 재정, 조직, 프로그램에 치우칠 때 기도와 절제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자는 요청은 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수도사가 많이 배출되는 것’과 ‘거듭난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수도복을 입은 사람의 수가 많아져도 자기 사랑과 공로의식과 지배욕이 그대로라면 천국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수도사라는 이름을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이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자신의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정직한 쓰임을 행한다면 그는 실질적으로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 영성을 바라보면서 계속 외적 형식과 내적 상태를 구별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하나님하고 가까이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사막이 도시가 된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그곳이 아름답다’는 취지의 말은 상당히 좋습니다. 다만 ‘아름다운 사람’의 기준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 자체가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삶으로 흘러나올 때 그 사람을 통해 천국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아름다움도 천사들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영상은 앞서 살핀 티혼 수도사 이야기보다 조금 더 넓은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거룩한 수도자가 되는 법’보다 ‘거룩한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극단적인 금식, 긴 기도, 엄격한 규칙, 침묵, 수도원장의 권위가 공동체를 특별하게 보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적 공동체의 진정한 표지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며,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의 공을 내려놓으며, 각자의 쓰임을 통해 전체의 선을 섬기는가에 있습니다. 외적 질서가 이러한 내적 질서를 보호한다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외적 질서 자체가 거룩함의 증표가 되는 순간 수도원 역시 세상의 다른 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는 문장은 어쩌면 ‘지독한 훈련 끝에 드디어 하나님과 합일의 단계에 들어갔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지독하게 하면 도달하는 영적 고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악과 거짓을 인식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버리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 의지와 새 이해를 형성하시도록 허용하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인간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 자체를 구원의 원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장 깊이 거듭난 사람일수록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다’보다 ‘주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이끄셨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극단적 금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이 영상에서 우리가 취할 결론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에서 받아들일 것은 ‘하나님을 무엇보다 우선하고 싶었던 갈망’,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으려 했던 절제’, ‘기도를 삶의 중심에 두려 했던 태도’, ‘피조물에게까지 미친 온유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오늘 우리의 형편 속에서 더 내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음식을 조금 덜 먹는 것보다 탐욕을 덜 먹이고, 말을 조금 덜 하는 것보다 자기 자랑을 덜 말하며, 세상을 떠나 동굴로 들어가는 것보다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 더 깊은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아토스의 숲과 수도원이 ‘천국 같은 곳’인 이유가 있다면 건물이나 금식 규칙이나 수도복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서로를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에 천국의 어떤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아토스에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식탁에서도, 작은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병실에서도 주님의 질서가 인간의 의지와 생각 속에 받아들여지면 천국의 어떤 것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도원의 외적 아름다움을 지나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바라보게 하는 더 깊은 수도원, 곧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세우시는 내적 질서일 것입니다.

 

 

 

SY.96, 강문호 수도사,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 (20260901)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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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성막을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시설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 체계로 읽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성막 하나를 제대로 보면 성경 전체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는 영상의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단순한 예표 정도가 아니라, 그 구조와 재료와 기구와 방향과 의식 하나하나가 천국과 주님,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 상응하도록 주어진 거룩한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자세히 설명하는 출애굽기의 긴 기록은 불필요한 건축 설명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어떻게 천국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상은 먼저 ‘미쉬칸’, 곧 장막을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고, 모세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방향은 매우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멀리 계신 하나님을 인간이 힘겹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끊임없이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흘려보내십니다. 문제는 주님이 멀리 계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거기서 나온 거짓들이 그 유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의 ‘우리의 기도가 하늘까지 힘겹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곁에 계신 그분께 건네는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표현은 아름답고도 의미 있는 통찰입니다.

 

그러나 에덴을 설명하는 부분부터는 조금 더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은 아담을 ‘첫 번째 제사장’, 에덴을 ‘첫 번째 성전’으로 설명하면서, 창세기 2장의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표현과 성막 봉사에 사용되는 히브리어를 연결합니다. 성경신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에덴은 무엇보다 실제 지리적 정원이나 최초의 성전 건물을 가리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 곧 사랑과 퍼셉션을 통해 주님과 직접 교통하던 천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에덴이 ‘성전’이었다고 말한다면 건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의 내면 자체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깊습니다. 성막은 잃어버린 에덴이라는 장소를 복원하는 모형이라기보다, 인간 안에서 무너진 천국의 질서를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과정을 표상한다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에 더 가깝습니다.

 

영상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 에덴 동쪽에 그룹과 불칼이 놓였고, 훗날 성막의 휘장에도 다시 그룹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연결하면서 ‘쫓아내신 것으로 끝내신 게 아니라 돌아올 길을 다시 짜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연결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한 단계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그룹은 단순히 화난 하나님께서 인간의 귀환을 막기 위해 세워 놓으신 경비병이 아닙니다.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거룩한 것에 함부로 접근하여 그것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닫힌 길조차 심판만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함에 접근하여 더 깊은 모독에 빠지는 것보다, 한동안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오히려 구원의 섭리인 것입니다. 성막 휘장의 그룹 역시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것의 보호’를 나타냅니다.

 

성막 뜰의 동쪽 문 하나를 강조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제사장이든 평민이든 족장이든 이 문 하나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예수만이 유일한 문’이라는 교리적 공식으로만 읽기보다, 상응적으로 보면 더욱 풍성해집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의 신분이나 지식이나 공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동쪽’은 주님과 주님을 향한 사랑에 상응합니다. 해가 뜨는 방향이라는 자연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영계에서 천사들이 주님을 영적 태양으로 바라보는 질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막의 동쪽 입구는 단지 출입구 하나가 아니라 모든 영적 여정의 시작이 ‘주님을 향함’에 있음을 보여 주는 상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제단에 이르러서는 영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영상은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양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 ‘내 죄가 바로 그 순간 이 양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대속 신학에서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죄가 어떤 법적 실체처럼 한 존재에게서 다른 존재에게 이전된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죄는 인간의 의지와 사랑, 그리고 실제 삶에 속한 것이므로 다른 존재에게 법적으로 옮겨질 수 없습니다. 제물과 피는 죄의 물질적 이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지는 사랑과 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정결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중심은 ‘죄인이 받을 형벌을 동물이 대신 받는다’는 데 있지 않고, 악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의 질서가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고 회복되는 데 있습니다.

 

물두멍 역시 단순한 의식적 세척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물로 씻는 것은 말씀의 진리로 삶을 정결하게 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물은 특히 자연적 차원에서의 진리에 상응합니다. 사람이 주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떤 신비로운 감정만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통해 자신의 실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살피고 고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이 ‘깨끗해져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면 그 자리에서 씻기는 구조’라고 말한 것은 목회적으로는 따뜻한 표현이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합니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인간을 받아 주시지만, 받아 주신 인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성막의 길은 받아들임의 길인 동시에 정결과 거듭남의 길입니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등잔대와 진설병과 분향단이 등장합니다. 영상은 등잔대를 ‘나는 세상의 빛’, 진설병을 ‘나는 생명의 떡’이라는 주님의 말씀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빛은 신적 진리를, 떡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인간에게 적용하면 등잔대의 빛은 이해를 밝혀 주는 진리이며, 떡은 의지를 살리고 영혼을 먹이는 사랑의 선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지혜’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만도 아니고, 사랑만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가 주님 안에서는 완전히 하나이며,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도 이 둘이 다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향 역시 영상이 기도와 연결한 것처럼 성경에서 기도를 표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단순히 인간의 말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인간의 입술에서 나온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주님께 향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향기가 올라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아름다운 문장을 들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을 향하는 선한 애정과 진실한 신앙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말없이 드리는 기도도 기도이고, 때로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는 것조차 주님을 향한 내적 애정이 있다면 깊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지성소와 법궤에 대한 영상의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른 민족의 신전과 달리 이스라엘의 지성소에는 신상이 없고, 그룹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어떤 자연적 형상으로 제한될 수 없는 분’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놀라운 전환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보이지 않는 신성을 ‘아버지’, 나타난 신적 인성을 ‘아들’, 그리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활동을 ‘성령’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임재하시는 여호와와 복음서에서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두 신적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의 계시입니다.

 

여기에서 영상이 속죄소, 곧 카포렛 위에 피가 뿌려지는 장면을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실 때 보이는 건 깨어진 율법이 아니라 그 위를 덮은 피였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특별히 분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감동적이지만, 자칫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제 악은 그대로 두시면서 피를 보고 법적으로 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그런 법적 선언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못 본 체하지 않으시며, 다른 존재의 의를 인간에게 외적으로 덮어씌우지도 않으십니다. 인간이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실제로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덮음’이 있다면 죄를 감추어 하나님께 보이지 않게 하는 덮음이라기보다, 주님의 자비와 선이 인간의 악을 제어하고 정복하며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속죄일의 반복과 그리스도의 ‘단번에’ 이루신 일을 연결하는 영상의 흐름 역시 히브리서에 충실한 전형적인 기독교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단번의 사건’을 형벌 대속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성난 아버지를 달래거나 인간에게 내려질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인간에게 압도적으로 밀려 들어오던 지옥의 세력을 직접 만나 싸우고 정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지상 생애 전체는 연속적인 시험과 승리의 과정이었으며, 십자가는 그 마지막 시험이자 마지막 승리였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입으신 인간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구속’과 ‘영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에서 ‘휘장이 찢어졌다’는 영상의 장면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휘장은 단순히 하나님께 들어가는 법적 장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 사이의 모든 분리가 사라지고, 동시에 인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해 신성에 접근할 수 있는 완전한 길이 열린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알 수 없는 절대자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를 풀어 주신 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심으로 인간과 천국 사이의 질서를 회복하신 결정적인 승리입니다.

 

영상이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를 성막과 연결한 부분은 매우 좋습니다. ‘거하다’에 사용된 헬라어가 장막을 치는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성육신 이해를 풍성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장막 가운데 임재하셨던 여호와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흐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잠시 인간의 옷을 입으셨다가 벗으신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적 요소를 시험과 승리를 통해 차례로 벗으시고, 그 자리에 자신 안의 신성으로부터 오는 신적 인간성을 입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이전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신적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막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영상은 에덴에서 성막으로, 성막에서 성육신으로, 십자가에서 요한계시록 21장의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이 큰 방향은 아름답습니다. 다만 마지막의 ‘더 이상 성막이 필요하지 않은 날’은 단순히 먼 미래에 물리적인 새 지구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산다는 그림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새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교회의 선과 진리 가운데 거하시며, 궁극적으로는 거듭난 인간의 내면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막의 완성은 건축물이 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님의 성전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바라보면, 성막은 ‘죄인이 피를 통해 법적으로 용서받아 하나님께 접근하는 과정’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것을 보여 줍니다.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인간의 겉 사람에서 점점 더 깊은 속 사람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여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놋에서 은으로, 다시 금으로 깊어지는 재료의 변화 역시 자연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다시 천적 차원으로 깊어지는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이며, 등잔대의 빛은 신앙의 진리이고, 떡은 사랑의 선이며, 향은 그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올라가는 예배이고, 가장 깊은 지성소는 주님과 인간의 내적 결합을 향합니다.

 

따라서 영상의 마지막 문장, ‘하나님은 멀리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던 겁니다’는 이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게 건질 수 있는 문장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향해 오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다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막의 목적은 우리가 잠깐 하나님을 방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주님의 거처가 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 에덴에서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안에 살았습니다. 그 질서가 무너지자 주님은 표상적인 성막과 성전을 통해 다시 천국의 질서를 보여 주셨고, 마침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말씀을 통해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 또 하나의 성막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마지막 질문은 ‘성막의 각 기구가 무엇을 예표하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서 주님이 거하실 성막은 어떻게 세워지고 있는가?’

 

성막을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출애굽기의 낯설고 복잡한 치수와 재료와 기구와 의식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은 오래전에 사라진 종교 시설의 설계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한 사람의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그의 가장 깊은 속 사람까지 들어오시며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질서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중심에는 인간의 공로나 제물의 피 자체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성막도 주님을 가리키고, 제사도 주님을 가리키며, 빛도 떡도 향도 법궤도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마침내 인간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결국 성막의 이야기는 ‘어떻게 죄인이 무서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가?’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게는 ‘어떻게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 안으로 다시 들어오셔서 그를 천국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가?’의 이야기입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성막은 건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지도이고, 지성소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며, 휘장이 열리는 것은 단순한 출입 허가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들어올 길이 다시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SY.16, 말씀나침반,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사탄을 창조했다’ (20260329)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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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사도행전 9장의 다비다 이야기를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풀어냅니다. 다비다가 과부들을 위해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주었다는 성경의 짧은 기록에서 출발하여, 바늘의 작음, 꿰매는 기능, 소리 없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 이어 줌, 완성품을 만들어 냄, 흔적을 남김, 한 땀 한 땀 일함, 직접 손에 쥐고 일함, 일을 마치고 사라짐이라는 열 가지 영성을 끌어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자기가 가진 아주 작은 것으로도 주변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최근 영상들 가운데서도 특히 ‘쓰임’(use)이라는 중심 주제와 상당히 가까이 맞닿아 있습니다.

 

우선 다비다의 이야기를 ‘큰일을 한 사람’의 이야기보다 ‘자기 손에 있던 것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은 점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는 왕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며, 거대한 조직을 세운 사람도 아닙니다. 성경이 기억하는 것은 그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는 사실과, 그가 죽었을 때 과부들이 그에게서 받은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과 매우 가까운 장면입니다. 천국적인 삶은 반드시 거대한 일을 해야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능력과 형편을 가지고 실제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데서 나타납니다. 바늘 하나와 손재주가 누군가에게는 추위를 막아 주고, 존엄을 지켜 주며,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랑의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바늘은 작은데 큰 일을 한다’는 비유는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주님의 나라에서는 외적 크기보다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쓰임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수천 명을 움직이는 일을 ‘큰일’이라고 부르고 한 사람의 옷을 꿰매 주는 일을 ‘작은 일’이라고 부르기 쉽지만, 천국의 질서는 그렇게 단순히 규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진실한 체어리티에서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 주님 앞에서는 훨씬 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말자’는 메시지는 단지 ‘작게 시작하면 나중에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성공론으로 끝나기보다, ‘작은 쓰임도 그 자체로 주님의 나라에 속한다’는 데까지 가면 더 깊어집니다.

 

‘바늘은 헤어진 곳을 꿰맨다’는 비유는 더 직접적으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상한 것을 꿰매고,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배고픈 것을 채워 준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호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유익을 행하는 사랑입니다. 누군가의 삶이 찢어진 곳을 발견했을 때 정죄하기보다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이어 주는 것, 관계가 끊어진 곳에서는 화해를 돕고, 가난한 곳에서는 필요한 것을 채우며, 외로운 사람에게는 곁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바늘의 영성’을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영적 삶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바늘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두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님은 드러나고 나는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아주 중요한 원칙입니다. 선을 행하고 나서 ‘내가 이것을 했다’는 공로의식이 강해질수록 선 안에 proprium이 섞이기 쉽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고 인간은 그 선이 흘러가는 그릇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기보다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늘은 옷을 다 만들고 나면 보이지 않는다’는 이미지는 이번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여기에도 미세한 차이는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외적으로 완전히 숨어야 한다는 규칙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쓰임은 공개적으로 해야 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앞에 서야 하며, 지도자는 책임 있게 자신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 문제는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영광을 구하는가’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주님께 공을 돌릴 수 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봉사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나는 참 겸손한 사람’이라고 자기를 높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감추어짐은 외적 익명성보다 내적 비공로성에 있습니다.

 

‘바늘은 이어 준다’는 부분도 좋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다비다와 과부들, 다비다와 예수, 과부들과 천국을 바늘이 이어 주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비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있습니다. 다비다가 만든 옷은 단지 직물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남겼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과부들이 그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은 다비다가 그들의 삶 속에 실제 쓰임으로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실제로 결속시키는 것도 교리적 구호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삶에서 만날 때입니다. 진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 주고, 선은 그것을 행하게 하며, 체어리티는 사람과 사람을 살아 있는 관계로 연결합니다.

 

‘바늘은 완성될 때까지 일한다’, ‘한 땀 한 땀 순서를 지킨다’는 대목은 거듭남과 연결해서 읽을 만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감동이나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질서 있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피하고, 그 자리에 선한 습관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땀 한 땀’은 상당히 좋은 비유입니다. 다만 ‘매뉴얼대로, 규정대로’라는 표현은 영적 삶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지만 모든 사람의 외적 과정이 동일한 매뉴얼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각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따라 놀랍도록 개별적으로 역사합니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에는 실이 남는다’는 표현도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울이 지나간 자리에는 교회가 남고, 사람 역시 어디를 지나갔든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업적을 남겨야 한다’는 쪽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좋은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엇을 남겼는가’보다 ‘어떤 상태를 남겼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 내 이름과 기념물이 남는 것보다, 한 사람이 더 평안해지고, 한 관계가 회복되고, 한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워졌다면 그것이 훨씬 귀한 흔적입니다. 다비다가 남긴 가장 중요한 흔적은 바느질 공동체의 규모가 아니라 과부들이 몸으로 기억하고 있던 사랑이었습니다.

 

‘손은 일하고 마음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아홉 번째 원칙 역시 이번 영상에서 매우 좋은 문장입니다. 이것은 수도원적 영성과 일상적 쓰임을 연결할 수 있는 접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세상 일을 버리고 종교적 명상에만 몰두하는 삶보다, 자신의 직업과 가정과 사회적 의무 안에서 정직하게 쓰임을 행하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므로 바느질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음식을 만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청소하고, 가르치고, 운전하고, 돌보고, 행정을 하는 동안에도 주님의 선을 이웃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비다는 수도원 밖에서 수도 영성의 핵심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영상에는 성경 본문과 설교적 확대를 구별해야 할 부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여제자는 다비다 한 명이다’라는 말은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 실제로 다비다에게 여성형 ‘제자’에 해당하는 표현이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근거로 다비다가 ‘예수님과 행동을 완전히 똑같이 하는 특별한 완전한 종’이라는 하나의 신분명처럼 설명하는 것은 본문보다 많이 나아간 해석입니다. 본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다비다가 제자였고 선행과 구제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은 설교적 적용으로 구별해서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다비다의 회복과 고넬료 사건을 연결하여 ‘다비다의 바늘 하나 때문에 해외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표현도 설교적 연결로서는 흥미롭지만, 사도행전 자체가 그렇게 인과관계를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 사건 이후 욥바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고넬료의 사람들을 만나 가이사랴로 간 것은 본문 흐름상 맞습니다. 그러나 ‘다비다 때문에 이방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단정하면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오히려 ‘다비다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가 욥바에 머무르게 되었고, 바로 그 시기에 고넬료 사건이 이어진다. 하나의 쓰임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예상하지 못한 다음 쓰임과 연결될 수 있다’ 정도로 말하면 훨씬 깊고 안전합니다.

 

죽은 다비다를 두고 사람들이 ‘베드로가 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었다’고 해석하는 부분 역시 본문은 그렇게까지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했다고 기록하지만, 그들이 이미 확실하게 부활을 기대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기도를 통해 다비다가 살아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 사람들의 내면을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었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설교의 감동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 자체와 우리의 아름다운 추론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영상 후반에 강문호 수도사가 다비다에 관한 후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지금부터 이야기는 믿을 게 아니라 참고만 하는 전승, 전설’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가 부활 후 더욱 열심히 구제했고 ‘욥바의 어머니’라 불렸다는 이야기, 사람들이 다비다의 집에 모여 ‘바늘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성경과 같은 권위로 말하지 않고 전승으로 구별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런 구별은 중요합니다. 전승은 영적 묵상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을 계시된 사실과 동일한 층위에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조금 더 주의 깊게 바라볼 부분은 후반전 이야기입니다. 다비다의 전승을 소개한 뒤 강문호 수도사는 모세, 예수, 아브라함을 들어 ‘후반전이 더 커야 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은퇴 후 29년 동안 해외에서 더 크게 일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도 ‘은퇴한 지 7년째인데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자신의 현재 활동을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노년과 은퇴를 소극적 퇴장으로 여기지 않고 남은 삶에서도 쓰임을 찾자는 뜻에서는 매우 귀합니다. 사람은 몇 살이 되었든 주님께서 허락하신 상태 안에서 계속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반전은 앞보다 더 커야 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바꾸어 듣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후반전이 더 ‘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쓰고, 더 많은 나라를 다니고, 더 많은 일을 해야 영적으로 더 큰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후반전은 오히려 외적으로 작아지면서 내적으로 더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수천 명 앞에서 설교하던 사람이 노년에는 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이 마지막 쓰임일 수도 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병상에서 자신의 성급함과 자기의지를 내려놓는 것이 평생의 가장 깊은 거듭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상 안에는 묘한 대비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바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을 다 하면 바늘은 사라진다’, ‘예수님은 드러나고 나는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후반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버지의 큰 사역과 자신의 은퇴 후 활동을 예로 듭니다. 이것을 곧바로 모순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예화로 사용하는 것은 설교에서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조용히 비추어 볼 만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늘의 영성’을 말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시험은 어쩌면 ‘내가 바늘처럼 일했다는 사실조차 말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살피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proprium은 노골적인 자랑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겸손합니다’, ‘나는 주님만 드러내고 싶습니다’, ‘나는 은퇴 후에도 쉬지 않고 일합니다’라는 종교적으로 선한 문장 안에도 아주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참된 ‘바늘의 영성’은 내가 얼마나 많은 천국을 만들었는지를 세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마친 뒤 ‘이 일을 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고, 선을 주신 분도 주님이며, 내가 한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 사용한 것뿐입니다’라고 더 깊이 인정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는 제목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한 번 더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천국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 안에 형성됩니다. 그러나 다비다의 바늘은 그 천국적 선이 자연계에서 하나의 구체적 쓰임으로 나타나는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다비다가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기보다 ‘주님께서 다비다의 사랑과 바늘을 통해 천국의 어떤 것을 이웃의 삶 가운데 나타내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번 영상에서 결국 ‘바늘’보다 ‘옷을 들고 울던 과부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비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기록한 이력서가 남은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쓰임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증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가 ‘저 사람은 굉장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저 사람이 내가 힘들 때 나를 도와주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훨씬 천국적인 흔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영상의 ‘바늘의 영성’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 받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상한 것을 이어 주며, 소리 없이 이웃의 필요를 채우고, 그 선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않은 채, 한 땀 한 땀 끝까지 쓰임을 행하는 것.’ 그렇게 살다가 일이 끝났을 때 바늘은 조용히 놓이고 옷만 남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보면 옷조차 우리의 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손을 빌려 누군가에게 입혀 주신 사랑의 흔적일 것입니다.

 

 

 

SY.97, 강문호 수도사, ‘티흔 수도사’ (20200120)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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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94, 강문호 수도사, ‘미르사바 수도원’ (20200119)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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