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를 읽다가 상당히 중요한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6의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를 설명하면서 아주 분명하게 ‘conscience dictated’, 곧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AC를 읽으며 배운 교회의 영적 역사를 생각하면 이 표현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conscience)이 아니라 ‘퍼셉션’(perception)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심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홍수 이전인 가인에게 어떻게 ‘양심’이 있을 수 있을까요?

 

먼저 가장 분명한 원칙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내적 구조는 같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오늘날 사람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을 사랑하면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이 천적 구조를 잃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10에서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천적 씨가 아니라 영적 씨가 있으며,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진리의 지식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선에 기초하여 양심을 심어 주심으로써’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홍수 이전과 이후의 인간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 퍼셉션, 고대교회 = 양심’이라는 기본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앞서 AC.224를 해설하면서도 이 문제를 한 번 만났습니다. 창3의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두고 ‘양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표현하면 시대가 뒤섞인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도 ‘양심의 흔적’보다는 ‘퍼셉션의 잔재’, ‘남아 있는 지각’, ‘약해진 퍼셉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정리했습니다.

 

그렇다면 AC.359에서는 왜 스베덴보리 자신이 ‘conscience’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첫 번째로 주의할 것은 ‘가인’을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창4에서 다루는 것은 이미 타락이 시작된 이후의 태고교회 후손들과 거기서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입니다. 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하나로 존재하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 점차 독립된 것으로 여겨지고, 마침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되어 가는 과정을 표상합니다. 즉 가인은 퍼셉션이 가장 충만했던 태고교회의 전성기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천적 질서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 안에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359의 ‘conscience’는 ‘노아 이후 영적 인간의 양심이 이미 가인에게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AC.310에서 스베덴보리가 매우 분명하게 설정한 홍수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무너집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실수로 conscience라고 썼으니 사실 perception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AC.359의 문장은 분명히 ‘conscience dictated’입니다. 따라서 두 진술을 모두 보존하면서 그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실마리가 앞의 AC.224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곳에서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선, 곧 여호와의 얼굴들’이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딕테이트(dictate)의 원인이 되며,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합니다. 즉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시지만 그 내적 딕테이트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퍼셉션을 가진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의 방식으로,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AC.359에 비추어 보면, 여기서 핵심은 ‘conscience’라는 단어 하나를 시대 구분의 기술적 용어로만 읽기보다 ‘Jehovah said’, 곧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가 아직 가인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왜 여기서 특별히 ‘perception dictated’가 아니라 ‘conscience dictated’라고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AC.359 자체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것 이상을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전체 문맥에서 한 가지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이미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에서 상당히 멀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독립되기 시작했고, 그 분리가 교리로 굳어지고 있으며,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고 자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하고 그의 내적인 것들까지 변합니다. 따라서 AC.359의 가인은 태고교회의 온전한 퍼셉션을 가진 사람의 상태를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가인은 오히려 매우 흥미로운 ‘과도기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가인에게 퍼셉션이 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고까지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홍수 후 인간에게 마련된 새로운 영적 구조와 양심의 형성을 명백히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AC.310에 따르면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나 선한 의지가 본래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진리를 이해하고 신앙할 능력은 남아 있으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진리의 지식에 기초하여 양심을 심어 주십니다. 이것이 고대교회와 오늘날 영적 인간에게 속하는 본격적인 양심의 질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conscience’와 홍수 후 영적 인간의 ‘conscience’를 완전히 동일한 구조라고 단정하는 것보다는, AC.359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멀어져 가는 가인에게도 아직 그 잘못을 내적으로 알리는 딕테이트가 있었다’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습니다. 그의 내적인 것들도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AC.359가 강조하는 결정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의 가인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에서 죽은 행위와 예배가 생기고,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분노가 일어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을 때에도 주님의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 말씀을 따라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는 길로 돌아서지 않았고,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라는 더 깊은 원리도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강제로 선하게 만든다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이 사라지고, 따라서 진정한 거듭남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행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통하여 경고하시고, 돌이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십니다. 가인에게 ‘왜 네가 분하여 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러한 장면입니다. 강제가 아니라 딕테이트이고, 심판에 앞선 경고이며, 자유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하도록 하시는 자비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다시 시대를 건너와야 합니다. 우리는 가인 시대의 홍수 이전 인간이 아닙니다. AC.310이 설명하듯 우리는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 구조에 속하며, 주님께서는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왜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이것이 정말 진리를 위한 분노인가, 아니면 내 proprium이 상처받았기 때문인가?’, ‘내가 옳음을 주장하는 동안 체어리티가 떠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내적으로 살피게 될 때, 그 양심의 딕테이트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359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양심의 소리를 반복해서 거스르면 처음에는 ‘잘못인 줄 알면서 하는 것’이었던 것이 점차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경우에도 분노 그 자체가 마지막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분노에서 돌이키지 않자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영적으로는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단순히 죄를 지은 뒤 우리를 괴롭히는 기능이 아니라, 악이 아직 행위와 습관과 지배적 사랑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결국 AC.359의 이 작은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전체를 다시 보게 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고, 그 퍼셉션은 교회가 타락하면서 점차 쇠퇴했습니다. 홍수 후에는 인간의 구조가 달라졌으며, 주님께서는 진리의 지식을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AC.359의 ‘conscience dictated’를 이 두 시대의 구별을 무시한 채 단순하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표현을 지워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구별을 하고 나면 AC.359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가인의 내적 딕테이트를 정확히 어느 시대의 기술적 범주에 넣을 것인가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 뒤, 그러니까 안색이 변한 뒤에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어도 주님의 자비는 먼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악을 향하여 가는 바로 그 길목에서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시고, 보게 하시고,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든,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이든, 그 모든 선한 내적 딕테이트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중요한 순간은 바로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가인처럼 자기 분노를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자기 상태를 보고 체어리티로 돌아서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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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들으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부관계에 비유하면 AC.337의 차이를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 함부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기쁨을 자기 기쁨처럼 여깁니다. 그렇다고 매일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펼쳐 놓고 하나씩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이미 서로를 향한 사랑 안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규칙이나 원칙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원칙들이 사랑 안에 살아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신실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해가 되는 일을 피합니다. 규칙의 내용이 사랑 밖에서 억지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랑과 신앙의 관계도 이와 어느 정도 비슷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것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사랑과 별개로 신앙을 따로 떼어 내어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라고 독립된 체계로 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앙을 따로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다는 스베덴보리의 말은 바로 이 하나 된 질서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제 서로의 마음과 유익보다 조항을 먼저 살피고, ‘나는 20개 가운데 19개를 지켰으니 좋은 남편이다’, ‘당신은 14번을 어겼으니 나쁜 아내다’라고 서로를 평가합니다.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이 규칙만 정확히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본래 관계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사랑에서 나온 원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하고, 마침내 사랑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가인의 시작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면서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창4의 흐름은 이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 분리된 신앙의 예배가 생기며,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 마지막에는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규칙을 조금 더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관계의 생명 자체가 사라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이미 많이 식어 버린 부부에게는 오히려 ‘서로 모욕하지 말자’,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자’, ‘어려울 때 서로 돕자’ 같은 원칙을 다시 배우고 의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더라도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멈추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가운데 관계가 다시 회복될 여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사랑 자체를 단순한 규칙 준수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상태가 달라지면 원칙과 사랑의 관계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AC.337의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명확하게 고백하는 것 자체는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다시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독립된 목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부부간 준수 사항’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듯, 교리와 신앙고백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원칙은 그 사랑을 표현하고 지키는 형식이 될 수 있으며, 사랑이 약해진 상태에서는 올바른 원칙이 다시 관계의 질서를 배우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준수 사항이 사랑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신앙과 교리가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이것만 정확히 믿으면 된다’는 것으로 바뀌면 진리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부의 비유가 보여 주는 핵심은 ‘규칙이냐 사랑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올바른 질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이끄십니다. 어느 경우에도 최종 목적은 규칙이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바로 이 결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신앙을 가진 데 있지 않고,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낸 데 있습니다. 이 비유를 이렇게 이해하면 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에서 그 분리를 ‘엄청난 악’이라고 했는지를 조금 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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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1. 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AC.337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무엇을 믿는지 분명하게 고백하고 올바른 교리를 배우는 것은 오히려 신앙생활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이 교리의 왜곡이었고, 심지어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앙고백 역시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37 자체가 그 답을 줍니다. 태고교회와 오늘날 인간의 영적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고,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하며, 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고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에게 사랑과 신앙은 아직 분리된 두 체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그 사랑으로부터 살아 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를 깊이 사랑할 때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과 ‘나는 내 아이가 소중하다고 믿는다’를 두 개의 별도 체계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알고 있으며, 그 앎이 사랑과 함께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를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아이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면 질서가 달라집니다. 원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앎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시킨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이보다 훨씬 깊은 영적 차원에서 그러한 전도를 의미했습니다.

 

가인의 시작도 ‘사랑을 버리자’는 노골적인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세우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도 온전한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신앙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창4에서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가인 계열의 진행은 바로 이러한 분리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였지만, 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에게 신앙을 따로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 AC.337은 이 점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며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은 후대 인간에게 필요한 과정입니다.

 

여기서 ‘신앙이 앞선다’는 것은 ‘신앙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고,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인간 안에 선을 형성하실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신앙고백이 가인적으로 되는 지점은 신앙을 말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때입니다. 교리를 정확히 안다는 사실이 삶에서의 선을 대신하고, 올바른 신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악을 피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필요를 약화시킨다면 가인의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확한 교리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악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이 악이었다’는 말을 오늘날 모든 신앙고백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때’라고 한 것을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퍼셉션 안에서 하나였던 천적 교회에서는 그것을 처음 분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의 거듭남의 질서가 어떻게 달리 적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후대의 영적 인간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둘 모두를 관통하는 목적은 같습니다. 진리와 선이 결합되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37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 고백하는 신앙은 어디로 나를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그 신앙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자기 자신만을 높인다면 태고교회의 가인에게서 나타난 영적 위험이 오늘 우리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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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가인의 왜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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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에서 특별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순서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그 질서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가장 깊은 생명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직접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밖에서 배운 교리를 하나씩 논증하고 판단하여 ‘이것이 참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천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랑 안에 그 사랑에 속한 진리가 있었고, 진리는 자신을 낳은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말은 단순히 ‘사랑도 하고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사랑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지각했고, 그 진리는 다시 선을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와 ‘어떻게 사는가’를 서로 다른 질문처럼 나누기 쉬운 것과 달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지각과 삶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 천적 질서를 오늘날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왔다’고 해서, 오늘날 사람도 먼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충분히 가진 다음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오히려 먼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진리를 신앙하며, 그것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거듭남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를 가졌지만,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질서가 서로 반대인 것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진리는 결국 선과 결합되어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길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아는 진리는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선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교리와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진리는 거듭남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알지 못하면 올바르게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진리가 선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스스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가인의 원리가 시작됩니다. AC.325는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알면 경계하기 쉽지만, 참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전체적인 질서에서 떼어 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면 자신이 여전히 진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퍼셉션이 약해진 사람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보존하며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교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교리를 많이 알고 성경의 속뜻을 깊이 이해하며 신앙 고백이 정확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게 되는 것은 큰 은혜이지만, 그 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가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를 아는 목적은 남보다 높은 영적 지식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쓰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25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찾으려 하기보다 그 안에 있는 영원한 질서를 붙들어야 합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삶으로 내려오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신앙과 체어리티는 다시 형제로 함께 있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입니다.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이 삶에서 떨어져 독립적인 것이 되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 안의 가인이 태어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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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

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 기능을 누리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상태는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영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찰하는 능력을 허락하시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A second general fact is that a spirit enjoys much more excellent sensitive faculties, and far superior powers of thinking and speaking, than when living in the body, so that the two states scarcely admit of comparison, although spirits are not aware of this until gifted with reflection by the Lord.

 

해설

AC.321은 앞의 AC.320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AC.321에서는 사후의 삶이 단지 지상 삶의 의식이 그대로 계속되는 정도가 아니라, 감각과 생각과 말의 능력에 있어서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두 상태를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이것은 사후의 인간을 희미한 의식이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관념과 정반대입니다. 사람이 육체를 벗었다고 해서 감각과 사고가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으로서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이 훨씬 더 탁월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AC.322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자신의 반복된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영들 자신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능력이 그렇게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320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나’라는 의식의 연속성을 경험합니다.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에 자신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자신의 감각과 사고가 훨씬 더 탁월해졌음에도 그것을 당연한 자신의 상태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이 이 사실을 깨닫는 것도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찰하는 능력을 허락하실 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자기 상태를 돌아보고 그것을 이전 상태와 비교하여 알아차리는 것 역시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생명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생명과 그것을 인식하는 능력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AC.320과 AC.321을 함께 놓으면 사후세계에 관한 매우 중요한 그림이 나타납니다. 죽음 이후에도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계속 살아가며, 그 연속성이 너무 자연스러워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삶은 지상에서보다 희미해진 삶이 아니라,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에 있어서 오히려 훨씬 더 탁월한 삶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의식과 인격이 흐려져 사라져 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전하는 증언입니다.

 

다만 AC.321에서는 아직 이러한 차이가 왜 생기는지, 각각의 감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AC.322에서 훨씬 구체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충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인간은 지상의 인간보다 덜 인간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이 더욱 탁월한 상태에서 계속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이 점은 결국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육체가 죽은 뒤에도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인간 자신이 계속 살아가며, 오히려 그러한 능력이 더욱 탁월해진다면 인간의 본질을 자연계의 육체에만 둘 수는 없습니다. AC.321은 그 사실을 긴 논증으로 설명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함께하면서 거듭 경험한 하나의 일반적인 사실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다음 AC.322에서는 그 증언을 더욱 구체적인 경험으로 펼쳐 보이게 됩니다.

 

 

 

AC.322, 창4 앞,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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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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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거의 나란히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the life of souls’라고 말한 뒤 곧바로 ‘that is, of novitiate spirits’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soul과 spirit을 서로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 이후 계속 살아가는 동일한 인간을 서로 조금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일반적으로 soul은 ‘영혼’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20의 ‘the life of souls’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인간의 생명 또는 인간 자신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단순히 육체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비물질적 ‘부분’으로 생각하면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뜻을 충분히 살리기 어렵습니다. AC.320의 관심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부품으로 나누는 데 있지 않고, 육체가 죽은 뒤에도 인간 자신이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반면 spirit은 ‘영’으로 옮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novitiate spirits’는 죽음 이후 처음 영계에 들어간 사람들을 가리키므로 ‘신참, 신생 영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 ‘영’이 지상에서 살던 사람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AC.320이 이어서 설명하듯 그는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며, 자신을 전과 같은 한 사람으로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AC.320의 첫 문장은 ‘영혼이라는 어떤 것이 죽은 뒤 어떻게 되는가’를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인간은 처음 영계에서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소개하는 문장입니다. ‘soul’이라는 표현으로 사후에 계속되는 인간의 생명을 넓게 제시하고, 곧이어 ‘novitiate spirits’라는 표현으로 지금부터 다룰 대상이 죽음 직후 영계에 들어온 사람들임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영혼’이라고 하면 육체에서 빠져나온 희미한 무엇을 떠올리고, ‘영’이라고 하면 더욱 비현실적인 존재를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죽은 뒤에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AC.320에서도 바로 그 때문에 새로 영계에 들어온 사람이 자신에게 ‘당신은 영입니다’라고 말하면 놀란다고 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며, 전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번역에서는 soul과 spirit의 차이를 완전히 지워 버릴 필요도 없고, 반대로 두 단어 사이에 지나치게 엄격한 존재론적 구별을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soul은 ‘영혼’, spirit은 ‘영’으로 구별하여 옮기되, 이 문맥에서는 둘 다 육체의 죽음 이후 계속 살아가는 동일한 인간을 가리킨다는 점을 기억하면 됩니다.

 

결국 AC.320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soul과 spirit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나인가?’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그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바로 그 사람이 ‘나’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이 사라지고 영이라는 전혀 다른 존재가 생겨나는 사건이 아니라, 육체를 벗은 인간이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임을 발견하는 사건입니다.

 

 

 

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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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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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인간의 proprium에 관해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 영적 인간에게서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 그리고 천적 인간에게서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를 설명하면서 무수히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는 그의 proprium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신의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proprium을 잃으면 자기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그의 proprium은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를 주시고,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러한 앎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라기보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합니다.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proprium을 주시는데, 그것은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모든 퍼셉션 및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 안에 있으며, 동시에 가장 높은 평화와 평온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proprium을 다스리시며, 곧 그들의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이 proprium이야말로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이며, 반면 육체적 인간의 proprium은 지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proprium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겠습니다. Innumerable things might be said about man’s own in describing its nature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with the spiritual man, and with the celestial man.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his own is his all, he knows of nothing else than his own, and imagines, as before said, that if he were to lose this own he would perish. With the spiritual man also his own has a similar appearance, for although he know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consequently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yet this knowledge is rather the profession of his lips than the belief of his heart. But the celestial man discern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for he perceives that it is really so. He never desires his own, nevertheless an own is given him by the Lord, which is conjoined with 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ith all happiness. The angels are in such an own, and are at the same time in 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for in their own are those things which are the Lord’s, who governs their own, or them by means of their own. This own is the veriest celestial itself, whereas that of the corporeal man is infernal. But concerning this own more hereafter.

 

해설

AC.141은 지금까지 이어진 proprium의 설명 가운데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앞에서는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고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인다고 했지만, 이제 스베덴보리는 proprium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성질을 가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에게서 proprium이 각각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구별하며, 마지막에는 천사들의 상태까지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proprium’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악한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먼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는 proprium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AC.123에서 이미 설명된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가 멸망할 것처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이 자기의 삶을 자기의 것으로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proprium을 자기 존재와 생명의 전부로 여기고 그 너머에 있는 생명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를 주시고,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까지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의 한계도 매우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직 ‘마음으로 믿는 것’보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이 위선적으로 말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아직 천적 인간의 퍼셉션처럼 그의 생명 전체에서 직접 지각되는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AC.123에서 천적 인간은 퍼셉션으로 인정하고 영적 인간은 말씀에서 배워 인정한다고 구별했던 내용이 여기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도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단지 배워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AC.139와의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상태로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지만, 참된 천적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proprium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는데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proprium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proprium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퍼셉션 및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proprium을 원하지 않는 것’과 ‘proprium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온 독립적인 proprium을 추구하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proprium을 주십니다. AC.132부터 반복되어 온 ‘허락된 proprium’이라는 표현이 이제 훨씬 구체적인 내용을 갖기 시작합니다.

 

천사들에 대한 설명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 안에 있으면서 가장 높은 평화와 평온을 누립니다. 그 까닭은 그들의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표현입니다. 천사에게 proprium이 없다고 하지 않고, 천사의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없애고 천사를 대신하여 생각하고 행동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proprium을 다스리시며 그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인도와 인간 또는 천사의 고유한 삶은 서로를 제거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것이 proprium 안에 있으면서 그 proprium을 통하여 삶이 이루어지는 관계로 묘사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proprium을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라고까지 말합니다. 반면 육체적 인간의 proprium은 지옥적이라고 합니다. 이 대조를 보면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그것을 언제나 악이나 자기 사랑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proprium이 누구의 지배 아래 있으며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입니다. 육체적 인간에게서는 proprium이 자기 존재의 전부가 되어 지옥적인 성질을 띠지만, 천적 인간과 천사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다스리십니다. 같은 ‘propriu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그 성질은 정반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AC.141은 그래서 지금까지 열어 두었던 질문에 상당한 답을 줍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지만, 그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으며 주님께서 그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인간과 천사에게 자기 자신의 삶처럼 경험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자신이 마지막에 이 proprium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겠다고 했으므로, 여기서 자유와 생명의 유입에 관한 교리 전체를 미리 완성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proprium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그 proprium 안에 무엇이 있으며 누가 그것을 다스리는가’라는 구별입니다. (AC.141)

 

 

 

AC.142, 창2:19-20, ‘짐승과 하늘의 새 - 선의 애정과 진리의 앎을 알게 하시다’ (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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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0, 창2:18, ‘돕는 배필 -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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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영적 인간도 실제로 같은 것을 인정하지만, 입으로 인정할 뿐입니다. 그는 그것을 말씀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 자기 것이라고 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가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he celestial man acknowledges, because he perceives, that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the Lord’s. The spiritual man does indeed acknowledge the same, but with the mouth, because he has learned it from the Word.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neither acknowledges nor admits it; but whatever he has he calls his own, and imagines that were he to lose it, he would altogether perish.

 

해설

AC.123은 바로 앞의 AC.122에서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억지로 자기 것을 포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22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말은 금욕이나 자기부정의 외적 규칙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내적 인식에서 나오는 삶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입니다. AC.104에서는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만 오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에 관한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3은 그 퍼셉션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라는 것은 외부에서 배워 동의한 하나의 교리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사랑과 지혜와 선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내적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도 그에게는 외부에서 강요된 계명이 아니라 자신이 지각하는 생명의 질서에 따르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라는 같은 진리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가 그것을 ‘입으로’ 인정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영적 인간의 고백이 거짓되거나 위선적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그는 그것을 ‘말씀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퍼셉션으로 아는 반면, 영적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는 한쪽은 참말을 하고 다른 쪽은 빈말을 한다는 차이가 아니라, 같은 진리에 이르는 내적 방식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앞서 AC.81 이후 계속 설명되어 온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말씀과 신앙과 양심이 중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천적 인간처럼 직접적인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아는 상태가 아니므로,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시는 것을 받아들여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AC.123의 ‘입으로’라는 표현을 영적 인간의 신앙을 폄하하는 말로 이해하기보다, 퍼셉션에 의한 천적 인식과 말씀에서 배운 영적 인식을 구별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이 질서를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 자신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유는 단순히 재산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앞의 AC.121과 AC.122에서 다룬 것은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을 포함하여 천적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있는 생명과 능력과 선한 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그것들을 독립적인 자기 소유로 여기는 태도 전체가 여기 포함됩니다.

 

마지막의 ‘그것을 잃으면 자기가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표현은 왜 사람이 자기 것을 그토록 붙드는지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자신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자기 존재 자체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내려놓는 것을 생명을 잃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AC.121에서 본 천적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기억에 속한 앎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은 참된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실제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23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세상적·육체적 인간의 차이를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고, 영적 인간은 말씀으로부터 배워 그것을 인정하며,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깁니다. AC.122에서 말한 에덴동산의 삶은 결국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을 실제로 누리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삶입니다. (AC.123)

 

 

 

AC.124, 창2:15,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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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2, 창2:15,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다 - 주님의 것을 누리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창2:15) AC.122‘에덴동산’(garden of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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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29)

 

AC.57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이고, ‘열매 맺는 나무’(tree in which is fruit)는 신앙의 선입니다. ‘열매’(fruit)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씨’(seed producing fruit)는 주님께서 영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 가진 나무가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적 음식을 나무의 열매로 부른다는 사실은, 다음 장에서 천적 인간을 다룰 때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서는 에스겔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만 인용합니다. The “herb bearing seed” is every truth which regards use; the “tree in which is fruit” is the good of faith; “fruit” is what the Lord gives to the celestial man, but “seed producing fruit” is what he gives to the spiritual man; and therefore it is said,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That celestial food is called fruit from a tree,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chapter, where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In confirmation of this we will here cite only these words of the Lord from Ezekiel: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겔47:12) By the river, upon the bank thereof,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there cometh up every tree of food, whose leaf shall not fade, neither shall the fruit thereof be consumed; it is born again in its month; because these its waters issue out of the sanctuary; and the fruit thereof shall be for food, and the leaf thereof for medicine (Ezek. 47:12).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는 ‘성소’(sanctuary)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과 자비를 뜻합니다. ‘열매’(fruit)는 그들에게 음식이 될 지혜이고, ‘잎’(leaf)은 쓰임을 위한 지성입니다. 이 쓰임을 ‘약’(medicine)이라 합니다. 반면 영적인 음식을 ‘풀’(herb)이라 한다는 점은 시편에서도 분명합니다. “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 signify the life and mercy of the Lord, who is the “sanctuary.” “Fruit” is wisdom, which shall be food for them; the “leaf” is intelligence, which shall be for their use, and this use is called “medicine.” But that spiritual food is called “herb,” appears from David: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1, 2)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thou makest me to lie down in pastures of herb (Ps. 23:1–2).

 

해설

AC.57은 바로 앞 AC.56에서 예고한 ‘영적 인간의 음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AC.56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천적 음식이 있고, 영적 인간에게 영적 음식이 있으며, 자연적 인간에게 자연적 음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창1의 문맥에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므로, 창1:29의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그의 음식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57은 이 두 표현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힙니다.

 

첫 번째는 ‘씨 맺는 채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쓰임을 지향한다’는 표현입니다. 단순히 참된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실제 쓰임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곧바로 ‘진리를 배운 뒤 행동으로 옮기면 채소가 된다’는 단계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57은 ‘채소’의 자연적인 성장 특성을 하나하나 분석하지 않습니다. 채소가 빨리 자란다거나 부드럽다거나 낮게 자란다는 특징을 가지고 영적 인간의 성질을 만들어 내지도 않습니다. 직접 말하는 것은 ‘씨 맺는 채소 =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입니다.

 

‘쓰임’이라는 말은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다만 이번 AC.57에서 쓰임의 전체 교리를 펼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진리가 자기 자신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위한 진리라는 정도를 우선 붙들면 좋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단지 아는 데 머무르기보다 삶과 선한 용도를 향합니다.

 

이 점은 ‘씨’라는 표현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씨 = 언제나 진리’라는 고정된 등식을 여기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문장에서 ‘씨 맺는 채소’ 전체를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먼저 그 전체 표현을 그대로 받는 것이 안전합니다.

 

두 번째는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신앙의 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 해설처럼 ‘영적 인간은 아직 선의 가능성만 가지고 있고 천적 인간이 되어야 비로소 선에 이른다’고 읽지 않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나무’ 자체가 이미 ‘신앙의 선’이라고 직접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선’이라는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조금 어렵습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신앙이 행동으로 바뀐 것’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이번 문맥에서는 신앙과 선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 곧 신앙에 속한 선이라고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이후 AC에서 이 표현은 더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그다음 스베덴보리는 ‘열매’와 ‘열매를 맺게 하는 씨’를 구별합니다. ‘열매’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씨’는 주님께서 영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창1:29에서는 ‘씨 가진 나무가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영적 인간 = 씨만 가진 미완성 상태’, ‘천적 인간 = 열매까지 도달한 완성 상태’라고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57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음식이 서로 다르게 표현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앞의 AC.51-53에서 보았듯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은 서로 구별되는 질서를 가지며, 그것을 모든 사람이 거치는 단순한 승급 단계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음식이 왜 ‘나무의 열매’라고 불리는지는 다음 장, 곧 창2에서 천적 인간을 다룰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편집상 중요한 신호입니다. 지금 여기서 천적 인간의 열매와 음식에 관한 모든 교리를 미리 완성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음 장의 몫은 다음 장에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지금 분명합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음식으로 주어지고, 천적 인간에게는 ‘열매’가 음식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 자체가 이번 글의 중요한 중심입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겔47:12를 인용합니다.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 때문에 강 좌우의 나무들이 열매를 맺고, 그 열매는 음식이 되며 잎은 약재료가 됩니다. AC.57은 이 구절을 매우 구체적으로 풉니다. ‘성소에서 나오는 물’은 성소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과 자비를 뜻하고, ‘열매’는 그들에게 음식이 될 지혜이며, ‘잎’은 쓰임을 위한 지성이고, 그 쓰임을 ‘약’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소’가 주님이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생명과 자비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다는 앞의 AC들의 흐름이 계속됩니다. 열매와 잎이 자라는 근원도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 곧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과 자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은 항상 흐르는 진리’, ‘나무는 안정된 영적 구조’, ‘달마다 새 열매는 끊임없는 영적 갱신’, ‘잎이 시들지 않음은 이해가 더 이상 어두워지지 않음’과 같이 겔47:12의 모든 세부를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57이 직접 해설해 주는 부분만 붙드는 편이 좋습니다. 물 =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과 자비, 열매 = 지혜, 잎 = 쓰임을 위한 지성, 그 쓰임 = 약입니다.

 

여기서 ‘지혜’와 ‘지성’이 함께 등장하는 것도 눈에 띕니다. 열매는 지혜이고 잎은 지성입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지혜 = 삶이 된 진리’, ‘지성 = 아직 삶이 되지 않은 이해’라고 고정적으로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7은 그런 대비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두 표현이 서로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열매는 ‘음식’이 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56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있으며, 여기에서는 그 천적 음식이 ‘열매’라고 불리는 것을 겔47:12로 확인합니다. 다시 말해, 이번 인용의 직접 목적은 천적 음식이 ‘열매’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다음 스베덴보리는 영적 음식이 ‘풀’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시23:1-2를 인용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라는 말씀입니다. AC.57이 이 시편을 인용하는 직접 목적은 매우 단순합니다. 영적 음식이 ‘풀’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시23 전체의 목자, 물가, 누움, 평안까지 이번 AC에서 모두 속뜻으로 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다른 AC나 스베덴보리의 다른 설명에서는 그런 표현들도 각각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57이 여기서 실제로 입증하려는 것은 ‘영적 음식은 풀이라고 불린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의 AC.56에서 왜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영적 인간의 음식이라고 했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영적 인간에게 음식으로 주어지는 것은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와 신앙의 선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란 도대체 무엇인가? 진리는 참이면 참인 것이지 왜 반드시 쓰임을 지향해야 하는가? 이것은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고, 앞으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use’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문제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다루겠습니다.

 

다만 지금 메인에서 확실히 해둘 것은 ‘쓰임’이 단순한 효율이나 실용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진리가 당장 돈이 되는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의미의 실용성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 쓰임은 선한 목적과 삶을 섬기는 것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진리가 쓰임을 지향한다는 것은 진리가 자기 과시나 지적 소유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생명을 섬기는 방향을 가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앞의 AC.44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이해가 말씀을 듣고 의지는 그것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한다고 했습니다. AC.57의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도 그런 큰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사람의 이해 안에 고립되어 있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연결 역시 ‘진리를 알았다 → 행동했다 = 쓰임을 이뤘다’는 단순 공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쓰임’은 단순한 행위 하나보다 더 넓은 개념입니다. 지금 AC.57에서는 그 전체 교리를 다루지 않으므로, ‘진리가 선한 목적과 삶을 향한다’는 기본 방향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또 ‘풀’과 ‘열매’를 높고 낮음의 가치표처럼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57은 영적 음식은 풀, 천적 음식은 열매라고 구별합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인간 상태에 맞는 음식의 차이입니다. 풀은 열매보다 열등하므로 빨리 버려야 하고, 영적 인간은 천적 인간이 될 때까지 미완성이라는 결론은 본문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인간에게 ‘씨’가 주어진다는 것을 ‘그에게는 아직 실제 선이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같은 첫 문장에서 ‘열매 맺는 나무’를 이미 ‘신앙의 선’이라고 했습니다. 영적 인간은 단지 진리의 가능성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신앙의 선을 가지고 있으며, 다만 그의 음식은 ‘씨 가진 나무’라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AC.57은 결국 음식의 차이를 통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서로 다른 질서를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와 신앙의 선이 음식이며, 그것들은 씨를 가진 채소와 나무로 표현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열매가 음식이며, 그것은 지혜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음식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겔47:12에서 물은 성소이신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그 물이 생명과 자비를 뜻합니다. 이 점은 AC.57 전체를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음식이든 천적 음식이든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자기 자신에게 공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고, 인간에게 주어지는 진리와 선과 지혜 역시 그 생명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AC.57의 핵심을 ‘풀에서 열매로 성장한다’고 정리하기보다 이렇게 기억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씨 맺는 채소’는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이고, ‘열매 맺는 나무’는 신앙의 선입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천적 인간에게는 열매가 주어집니다. 열매는 지혜이며, 풀은 영적 음식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생명과 자비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심화

1.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란 무엇인가?

 

AC.57, 심화 1,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란 무엇인가?

AC.57.심화1.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란 무엇인가? AC.57의 첫 문장은 처음 읽으면 꽤 낯섭니다. ‘씨 맺는 채소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이다.’ 진리는 참이면 참인 것이지, 왜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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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8, 창1:30, 자연적 인간의 음식 : 들짐승과 새에게 주어진 풀 (AC.58-59)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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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6, 창1:29,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AC.56-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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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6 심화

1.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56에는 비슷한 문장이 세 번 반복됩니다.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천적 음식’이라고 하고,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영적 음식’이라고 합니다. 자연적 인간도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에 속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삶과 일치한다’는 말이 조금 막연합니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내 삶과 일치한다는 뜻일까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면 자연적 인간이고, 말씀 읽기를 좋아하면 영적 인간이며,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면 천적 인간이라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먼저 AC.56이 직접 말하는 것부터 붙들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의 인간이 자기 삶과 일치하는 것들로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치 때문에 그것들을 ‘음식’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쁨은 음식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삶’이라는 말도 단순히 하루 동안 무엇을 많이 하느냐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 때문에 하루 종일 숫자를 보고, 어떤 사람은 집안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설교를 준비합니다. 그런 외적인 활동 자체만으로 그 사람의 천적·영적·자연적 삶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AC.56이 말하는 삶은 그 사람에게 속하며 그와 일치하는 생명의 성질과 관계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데 깊은 기쁨을 느낀다고 해봅시다. 이것은 영적인 기쁨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공부가 재미있다’는 감정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영적 인간이라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을 좋아하는 것 자체는 자연적 차원의 기억 지식에 대한 즐거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도우면서 기뻐한다고 해서 그 기쁨을 곧바로 천적 기쁨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칭찬받는 것이 좋아서 도울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느끼고 싶어서 도울 수도 있으며, 실제로 이웃의 선을 사랑하여 도울 수도 있습니다. 외적으로 같은 행동이라도 그것이 어떤 삶에서 나오는지는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할 때 기분이 좋은가?’만 묻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AC.56의 표현에서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그의 삶과 일치하는가?’입니다. 기쁨은 그 일치에서 나옵니다. 어떤 것이 그 사람의 생명과 어울리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음식이라는 비유와도 잘 맞습니다. 자연적인 음식도 몸이 받아들여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데 사용합니다. AC.56에서 영적인 것들을 ‘음식’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것들이 단순히 사람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과 일치하여 그에게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진리는 내 삶과 일치하지 않으니 나에게 음식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기 악을 드러내는 진리 앞에서 불편함과 저항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리는 때때로 우리가 현재 사랑하고 있는 것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간적인 편안함이나 불편함을 AC.56의 ‘일치’와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특히 중요합니다. 현재 심화에서는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정직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으면 편안하고, 속이는 데 익숙한 사람은 불편해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해를 돕는 예로는 가능하지만 항상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정직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자기의 실제 부정직을 지적받으면 아플 수 있고, 부정직한 사람도 정직에 관한 아름다운 설교를 듣고 감동할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감정과 삶의 실제 성질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AC.56의 ‘기뻐한다’를 심리 테스트처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말씀 읽기가 좋으니 영적 인간이다’, ‘나는 봉사가 즐거우니 천적 인간이다’, ‘나는 공부가 좋으니 자연적 인간이다’와 같은 판정은 이 글이 의도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우리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의미가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장기간에 걸쳐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양식으로 삼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반복해서 찾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받아들일 때 내 삶이 살아난다고 느끼는가, 무엇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사용하는가 하는 질문은 자기 삶의 방향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의 목적은 자기에게 ‘나는 영적 인간이다’, ‘나는 아직 자연적 인간이다’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으로 내 생명을 채우고 있는지를 주님 앞에서 살피는 데 있습니다.

 

자연적인 기쁨도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기뻐하고,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공부와 일에서 성취를 느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을 모두 버려야 영적 인간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56은 자연적인 것들을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자연적인 것들이며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뿐입니다.

 

따라서 천적·영적·자연적 기쁨을 서로 경쟁하는 세 종류의 감정처럼 볼 필요도 없습니다. 한 사람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여러 차원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AC.56이 각각의 인간에게 ‘그의 삶과 일치하는’ 음식이 있다고 구별한다는 점입니다.

 

앞의 AC.51-53에서 보았듯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도 단순히 초급자와 고급자의 차이로만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거듭나면 자연적인 기쁨 → 영적인 기쁨 → 천적인 기쁨 순으로 바뀐다’고 AC.56을 단계표로 만드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글에서 그런 시간 순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56의 문장을 그대로 기억하는 편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로 기뻐한다.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한다.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음식과 기쁨과 삶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사후세계에서 사람의 사랑과 기쁨을 설명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으로 사랑하는가와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는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더 넓은 교리를 AC.56 한 문장 안에 모두 집어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AC.56에서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말은 단순히 ‘내 기분에 맞아서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그 사람에게 속한 삶의 성질과 어울리기 때문에 그것이 그의 기쁨이 되고, 그래서 그의 ‘음식’이라고 불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며 가장 좋은 질문은 ‘나는 천적 인간인가, 영적 인간인가, 자연적 인간인가?’가 아니라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내 삶의 음식으로 삼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역시 자기 판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내 삶의 양식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한 질문이어야 할 것입니다.

 

 

 

AC.56, 창1:29, 영적 인간의 음식 : 무엇으로 기뻐하고 무엇을 양식으로 삼는가 (AC.56-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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