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2:21-25, AC.147-167)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21-25)

 

 

AC 주석 설교 때는 시간에 관하여, 그러니까 설교가 길다, 너무 길다고 힘들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현존 앞에서 시간 보내느라 시간 가는 게 너무 안타깝기를 바라는 마음인데요, 마치 천국을 사모, 주님의 허락을 받아 잠시 천국을 방문하게 된 영들이 천국 그 영광에 넋을 잃다가 다시 돌아갈 때가 되자 너무나 안타까워하더라는 스베덴보리의 경험담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혹시 본문 내용의 흐름상 도저히 중간에 끊어 이번 주 1부, 다음 주 2부 식으로 하는 게 적절치 못할 경우, 중간에 쉬는 시간을 두더라도 가급적 한 번에 다루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새롭게 도입되는, 한결같은교회 주일예배의 이런 변화를 좋게 수용하여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전에 정원 목사님 생전에 헤븐교회 주일예배가 서너 시간이었던 점을, 그리고 유대인들의 예배 또한 그러함을 기억하여 주세요.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여섯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2장 두 번째 단락 중 후반부인 21절로 25절, 글 번호로는 AC.147-167,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입니다.

 

먼저 두 번째 단락 전체(18-25) 및 절 별 개요입니다. 개요는 몇 번을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일종의 큰 그림이요, 지도이기 때문인데, 속뜻 설교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131

태고교회의 후손들, 이들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proprium, own)으로 기울어졌는데, 여기서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창2 후반은 태고교회 두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132

인간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신 자신과 세상, 곧 자기 본성으로 인도받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게 허락된 본성을 여기서 다룹니다. (18)

 

133

그래서 그에게 먼저 선에 관한 애정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알게 하시는데 이것들은 그가 앞서 주님께 받은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 본성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19, 20)

 

 

134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 본성 상태로 들어가며, 그리고 이때 어떤 본성(an own)이 새롭게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걸 여자로 빚어진 갈빗대라 한 것입니다. (21-23)

 

 

135

천적 영적 생명은 인간의 본성과 거의 하나로 보일 정도로 아주 가까이 붙어있습니다. (24)

 

 

136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노센스가 이 새로운 본성 안으로 스며드는데, 이 본성이 완전히 망가져서 도무지 뭐든지 못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25)

 

 

다음은 단락 전체의 배경 설명입니다.

 

 

137

창세기의 첫 세 장은 대체로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처음부터 마지막, 그러니까 사라질 때까지 ‘사람’(man, homo)으로 불렸습니다. 창2 전반부가 이 태고교회가 가장 융성했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던 때를 다루고 있다면, 이제 여기 후반부는 자신들의 본성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상이 개요 및 배경이고, 다음은 본문 절 별 속뜻입니다. 지난주 이어 계속인데, 기억나시라고 지난주에 했던 147번, 148번 글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C.147-150)

 

147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는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그런 본성입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는 그 안에 생기가 있는 본성을, ‘깊이 잠들게’(deep sleep)는 그의 현 상태를 말하는데, 사람이 이 상태가 되면 그는 자신의 본성을 소유하는 게 자기 자신인 줄 알지요. 이 상태는 잠든 상태와 유사한데, 이 상태에 있는 동안은 사람은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이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정신을 차리며 잠에서 깬 상태가 됩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푹 빠져 주님과 천국을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깊이 잠든’ 상태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정말 많은 사람의 상태가 영적으로는 이 ‘깊이 잠든’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48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149

말씀에서도 사람의 고유 본성은 ‘뼈’(bones)와 상응, 실제로 나중에 주님에 의해 살아나는 생생해진 본성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1)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66:14)

 

시편입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35:10)

 

이는 에스겔에서 더욱 분명한데요, 거기 뼈들에 대해 ‘살을 입히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하시는 부분입니다.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37:1, 4-6)

 

[2] 사람의 본성(The own of man)은 천국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뭔가 완전히 뼈처럼 보이는, 못 움직이며 매우 추한,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그 자체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런 본성이라도 주님에 의해 생기를 얻으면 그때는 살처럼 보입니다.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은 그저 죽어있는 어떤 것에 불과합니다. 본인에게는 어떤, 실제로는 모든 것, 전부로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그의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모두 주님의 생명에서 나온 것이며, 만일 이 생명이 사라지면 그는 쓰러져 죽은 상태가 되는데 마치 돌멩이처럼 되고 맙니다.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천국과 지옥’ 9번 글입니다.

 

천사들은 그들의 지혜로 이 사실을 더 깊이 알고 있다. 그들은 선하고 참된 모든 것뿐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그들이 이것을 확증하는 것은 어떤 것도 그보다 먼저 있는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원리를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의 처음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 처음 존재를 모든 생명의 궁극적 존재라 부른다. 같은 원리로 만물은 존속한다. 존속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생겨남이며, 중간 매체들을 통해 처음 존재와 끊임없이 연결되지 않는 것은 그 즉시 사라지고 완전히 소멸되고 만다. 생명의 원천은 오직 하나이며, 사람의 생명은 거기서 나오는 물줄기라고 천사들은 덧붙인다. 따라서 그 물줄기가 끊임없이 원천으로부터 흐름을 공급받지 않으면 즉시 말라 없어진다는 것이다. (HH.9, 김은경 역)

 

사람은 생명의 기관(an organ of life)일 뿐입니다. 이런 게 기관이고, 이런 게 생명의 애정(the life’s affection)입니다. 주님만이 자신의 본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으로 그는 사람을 구속하셨으며, 이것으로 그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주님의 본성은 생명이시며, 주님의 본성으로부터 사람의 본성, 이것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인데, 이 본성이 살아나게 됩니다. 주님의 본성은 또 누가복음의 다음 주님 말씀하고도 상응합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24:39)

 

이는 또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12:46)


150

사람이 자신의 본성 가운데 있거나 가정하기를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라고 하는 상태를 ‘깊은 잠’(deep sleep)에 비유하고 있으며, 실제로 고대인들이 이렇게 했습니다. 말씀에서는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29:10), 그리고 ‘그들이 잠들어’(they sleep a sleep)(51:57)라고 말합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1:57)

 

실제로는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저지르는 것들을 주님은 마치 주님이 하시는 것처럼 기록하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최종 책임자이시며, 모든 악과 거짓조차도 주님과 상관없이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만유의 근원 되시며,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천국과 지옥 등 모든 것이 주님의 컨트롤 하에,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며,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떤 생명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영들의 세계인 중간 영계에서 저는 그동안 매우 분명하게 보아왔는데요, 자신의 본성밖에는 사랑할 줄 모르는, 그리고 자기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간다고 고집, 완강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은, 그러나 실제로 겪어보고 나서야 그게 아니라고, 자신들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게 아니었다고, 인정하긴 싫지만 할 수 없이 억지로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년간 저에게는 사람의 본성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를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알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며, 또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저 스스로는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 모든 생각의 실마리가 외부에서 제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는 것, 그리고 종종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 흘러들어오는지를 저는 알 수 있었다는 것 등의 사실들에 대해 수년간 저는 분명히 지각하며(perceive) 지내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사는 거야 하는 사람은 거짓됨 가운데 있으며, 그걸 믿기까지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악과 거짓에게 내맡기는 셈이 되는데요, 이 악과 거짓은 그가 만일 이 경우의 실상을 알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그런 것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영계에 대해서, 그리고 영계에서 자연계로 흘러드는 입류(入流, influx)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 천사들에게 능력이 있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천사들이 영이고 너무 순수하며, 실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능력이 있을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물의 원인을 보다 내적으로 살피는 사람의 경우는 견해가 다르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의 모든 능력이란 그의 사고와 의지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 두 가지를 떠나서는 몸의 작은 부분도 움직이지 못하므로) 알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고와 의지가 그의 영적 사람이고, 이 영적 사람이 육체와 그 지체를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즉 영이 생각하는 것을 입과 혀가 말하고, 영이 뜻하는 것을 몸이 행하며, 이것이 자유자재로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의지와 사고는 천사와 영들을 통해 주께서 다스리시므로 사람 몸의 모든 것도 그렇게 다스리신다. 몸이 하는 모든 것은 의지와 사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람은 천국에서의 입류가 아니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수없이 많은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했다. 천사들에게 내 발걸음, 행동, 내 혀와 말을 천사들 마음대로 움직이라는 허락이 내려졌었다. 그들은 내 의지와 생각 안에 흘러드는 입류로 나를 움직였다. 그때 나는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천사들은 나에게 모든 사람이 이렇게 다스림을 받는다고 말하고, 이는 교회의 가르침과 성서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비록 교리를 떠나 스스로 생각할 때는 달리 말하고 달리 믿더라도,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 천사를 보내어 인도해 주시고, 발걸음을 이끄시고 가르쳐 주시라고 하고, 또 생각할 바와 말할 바를 알려주시라고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상의 내용은 천사들이 사람에게 어떤 힘을 갖는가를 알리기 위해 언급한 것이다. (HH.228, 김은경 역)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C.151-155)

 

151

‘만드시고’(build)는 쓰러져있던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갈빗대’(rib)는 생명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의 본성을,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갖게 된 사람의 본성을,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he brought her to the man)는 그의 본성인 것, 즉 여자라는 그의 새로운 본성이 그에게 승인,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의 후손은 그들의 선조처럼 천적 인간 되는 걸 원치 않고 대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살아가고자 하였고,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 쪽으로 기울어졌는데 결국은 그런 본성이 그들에게 허락, 곧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갖게 된 본성 역시 여전히 허락되었고, 그래서 이것을 ‘여자’(woman), 나중에 ‘아내’(wife)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본성’(本性)으로 번역해 오고 있는 영어 ‘own(proprium, 라틴, 고유 본성, 자아)NCE(New Century Edition) 역에서는 ‘a sense of self’, ‘selfhood’, ‘a sense of autonomy’, 혹은 ‘identity’ 등으로도 옮기고 있다는 점, 참고하세요.



152

겉 글자의 뜻대로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과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아차렸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깊은 아르카나가 여기 들어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봐도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woman)가 사람의 본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속아 넘어간 사람이 다름 아닌 여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건 자신의 본성, 그러니까 같은 말인데,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3:1-6)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을 저런 말로 속일 수는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한테는 저런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런 말에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는 본인이 가진 자아의 퀄러티 문제인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라면 저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그 자아가 백 퍼센트 주님 편에 선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내 마음의 귀가 어떤 속삭임에 솔깃해 하는가를 관찰하면 나라는 사람의 정체, 본성, 내가 하는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저 창3:6에 나오는, 뱀에게 속아 넘어가는 여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자와 다른 여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후손 이야기이지만, 저 창3 초반은 세 번째 후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안 좋게 변한, 자기 사랑에 더욱 기울어진 상태가 된 후손 이야기인데, 두 번째 후손만 되었어도 안 속았을 저런 속삭임에 이들은 그만 손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참고로, 저 창3에 나오는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 그러니까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 등 여러 파트로 구성된 존재로서, 이 중 가장 낮은 파트인 몸에 속한 감각을 ‘’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천적 인간은 이 몸의 감각 또한 거듭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몸의 감각이 더 이상 뱀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육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한테는 지옥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53

갈빗대를 가리켜 ‘여자를 만드시고’(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시지만 전에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창조하다’(created), ‘짓다’(formed), ‘만들다’(made)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만드는 것’(build)은 쓰러져 있는 걸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 뜻으로 쓰이는 곳마다 ‘만드는 것’(build)은 주로 악에 관한, ‘일으켜 세우는 것’(raise up)은 거짓에 관한, 그리고 ‘새롭게 하는 것’(renew)은 둘 다에 관한 서술일 때입니다. 이사야입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61:4)

 

이 구절과 다른 구절에서 ‘황폐함’(Wastes)은 악을, ‘무너짐’(desolations)은 거짓을 의미하며, ‘쌓는 것’(build)은 전자, ‘다시 일으키는 것’(set up again)은 후자에 적용됩니다. 선지서 이곳저곳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이런 구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예레미야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31:4)

 

 

154

사람의 본성이 아니면서,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 것도 아니면서 악하고 거짓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 그 자체이며, 그 결과 사람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사실임을 저는 영들의 세계에서 계속 보고 있어서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게 제시되는데, 그때 그것들은 너무나 기형적이어서 어떻게 형용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추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본성의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그때 자신의 본성에 속한 것들을 자기 눈으로 보는 사람은 그 실제 모습을 보고는 공포에 휩싸일 정도로 충격을 받아 마치 악마로부터 도망치듯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한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은 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주님께 속한 천적 특성들이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삶을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체어리티를 받거나 체어리티로 소생한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소년, 소녀처럼 보입니다. 또 벌거벗은 유아처럼 이노센스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가슴과 머리 위 왕관을 두른 꽃 화환으로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는데요, 다이아몬드 같은 오로라 가운데서 즐겁게 지내며, 가장 내적인 데서 오는 행복에 관한 퍼셉션을 갖고 살아가지요.

 

그러니까 참으로 속 사람의 모습으로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속 사람은 아직 거시기한데 주님의 보혈로 한순간에 죄 씻음 받고 천국 가는 그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155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a rib was built into a woman)라는 이 말에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글자로 된 겉뜻만 가지고 발견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깊이 감추어져 있는데요,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깊은 뜻에 있어 주님 자신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며, 이 사실에서 말씀의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이 본문에서 그 가장 핵심은 바로 천국의 결혼(the heavenly marriage)입니다. 천국 결혼은 그 본성에 있어 주님에 의해 소생될 때 주님의 ‘신부요 아내’(bride and wife)라 일컬음을 받는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소생된 인간 본성은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관한 퍼셉션을 가지며, 그 결과 표현 불가한 행복과 함께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요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하는 이 소생된 본성은 어떻게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천사들한테서 관찰할 수 있는 사실, 곧 자신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걸 지각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천사들한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비록 그들일지라도 이런 주제를 벗어나 한눈파는 순간 그들 역시 순전히 자신들 힘으로 살아간다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그들에게는 어떤 것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살짝만 벗어나도 그 변화를 지각하는, 그런 본성에 관한 어펙션(affection)이 일반적으로 있는데요, 그 결과 그들은 누구나 자신들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퍼셉션 가운데 있으며, 그때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의 즐거움이 그들 가운데에는 존재합니다. 아래 예레미야에서 말하는 바 역시 바로 이런 본성을 의미합니다.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31:22)

 

이 구절에서도 ‘여자’(woman)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된 본성을 의미하며, 이것을 ‘둘러싸리라’(to compass)라고 표현한 것은 이 본성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마치 갈비뼈가 심장을 둘러싸 보호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쉬는 시간)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C.156-159)

 

156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은 겉 사람의 본성을, 여기서 ‘뼈’(bone)는 이 본성이 생기가 거의 없음을, ‘살’(flesh)은 생기 있는 본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자는 속 사람을 의미, 이어지는 구절에 보면 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결합하기 때문에 여기서 ‘여자’(woman)라고 했던 본성을 거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이제’(Now)는 이 시점에서 이렇게 되었음을 의미하는데요, 이때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개역 개정에는 이 ‘이제’에 대한 번역이 누락 되어 있습니다. 속뜻 전개상 중요한데 말입니다. 주님 말씀은 함부로 더하거나 빼면 안 되며, 그 기준은 속뜻의 흐름상, 곧 속뜻으로 보았을 때입니다.



157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그 안에 속(the internal)이 있는 겉 사람의 본성을 의미하는 한, 그래서 고대에는 자신들의 본성(their own [proprii]), 뿌리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게 한 가족이든 가계이든 기타 어떤 종류의 관계이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라반도 야곱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29:14)

 

그리고 아비멜렉 또한 자기 어머니의 혈육들과 외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9:2)

 

이스라엘 지파들도 다윗에게 자신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158

사람(man, 아담)은 속 사람, 즉 같은 말이지만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내가 본즉 한 사람(man [vir])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41:28)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요.

 

위 본문의 ‘사람’은 라틴어로 ‘비르(vir)입니다. 라틴어에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homo)라는 말이 따로 있지만, ‘호모’에 비해 ‘비르’는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5:1)

 

‘정의를 행하는 자’(One who executes judgment)는 지혜로운 사람을, ‘진리를 구하는 자’(one who seeks the truth)는 총명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 안에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구별되되 실제로는 너무도 구별되어 속 사람, 겉 사람에게 속한 것은 각각 무엇이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해 주님에 의해 어떻게 통치되는지를 천적 인간은 지각합니다. 그러나 이들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는 자신들의 본성, 곧 자신들의 겉 사람에게 속한 본성을 정말 징그럽게도 원한 결과 너무도 변질, 더 이상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속 사람이라는 것이나, 겉 사람이라는 것이나 같은 거 아냐?’ 할 지경이 되었는데요, 이런 일은 사람이 자신의 본성으로 기울어질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AC.160-162)

 

160

‘부모를 떠나’(leave father and mother)는 속 사람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인데요, 겉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cleave unto his wife)는 속이 겉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be one flesh)는 그들, 곧 겉과 속이 거기 같이 있는 겁니다. 전에는 속 사람과 속에서 나온 겉이 영이었지만(were spirit), 지금은 이 둘이 육이 되었기(have become flesh) 때문입니다. 그렇게 천적 영적 생명은 하나처럼 보이는 본성(the own)에 인접해 있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거의 모든 결혼식 주례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본문은 얼핏 참 좋아 보이는 그럴듯한 본문이지만 그러나 그 속뜻을 보면 참 슬픈 본문이기도 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결합한 게 아니라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결합, 결국 겉이 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61

이들 태고교회의 후손은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는데요, 그렇지만 그들은 그러면서도 겉 사람 안, 즉 그들의 본성 가운데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님은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의 자비로 그런 그들 안으로 영적 천적인 것들이 스며들듯 심어지면서 말입니다. 속과 겉이 어떻게 하나로 움직이는지, 어떻게 하나로 나타나는지 하는 건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인플럭스(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入流)라는 걸 모르면 알 수 없는데, 이걸 알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하나 생각해 보면, 어떤 행위에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즉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한,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 즉 신앙의 열매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 사랑, 신앙은 속, 그것이 체어리티의 행위로 표현되는 건 겉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는데요, 천사들은 행위 속 동기를 본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선행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는 반면, 천사들은 그 선행 속 마음의 동기를 본다고 합니다. 우리는 외적 존재여서 어쩔 수 없이 겉으로밖에는 볼 수 없지만,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그 속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다음의 주님 말씀도 이 글의 연장선, 곧 인플럭스의 흐름으로 이해가 됩니다.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7:16-20)

 

우리는 끝까지 안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 안에 무슨 선한 작업, 곧 ‘영적 천적인 것들이 스며들듯 심어지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인플럭스가 하는 일입니다.

 

162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은 그 기원이 천적이거나 천적 인간의 삶, 생활의 질서로 말미암습니다. 천국 전체가 천적 인간이기 때문인데, 이는 주님만이 오직 참으로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모든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것 되시기 때문에, 그래서 이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을 천적이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이 천적 기원, 즉 천적 인간의 삶과 생활의 질서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결혼의 법 역시 그렇습니다. 이는 지상의 모든 결혼이 그 기원을 두거나 따라야 하는 천적 결혼인데, 이는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 즉 한 분 주님과 하나의 교회, 주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가 있는 그런 결혼입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결혼의 법은 한 남편과 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럴 경우, 그 부부는 천적 결혼(the celestial marriage)을 표상하며, 천적 인간의 한 전형(典型)이 됩니다. 이 법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계시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속 사람에게 새겨져 있었는데요, 그래서 그때는 한 남자는 한 명의 아내만 가졌고, 그렇게 그들은 한 가정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속 사람 되기를 중단, 겉 사람이 되면서 그들은 여러 명의 아내와 결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결혼에 있어 천적 결혼을 표상했기 때문에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과 천국의 행복이었지만 그 교회가 기울어졌을 때, 즉 쇠퇴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결혼애가 주는 행복 대신 숫자, 곧 겉 사람의 쾌락인 숫자가 주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하셨는데요, 주님 친히 가르치시기를, 이것이 그들이 여러 명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모세로 하여금 허락하게 하신 이유라 하셨습니다.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5-9)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C.163-167)

 

163

그들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naked and not ashamed)이라는 것은 그들이 순진무구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순진무구함(innocence, 이노센스)을 그들의 본성 안으로 오랫동안 스며들게 하셨기(had instilled) 때문인데요, 그들의 본성이 이런 순진무구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걸 방지하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입니다.

 

 

164

인간의 본성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그저 악할 뿐이며, 만일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날 경우 그야말로 기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들면 그때는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데요, 앞서 154번 글에서 보신 것과 같습니다.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는 그 본성, 즉 사람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안 보이게 가릴 뿐 아니라 마치 없어진 것 같게도 하는데요, 마치 유아들한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아들한테서는 악과 거짓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즐거운 무슨 놀이처럼 보이기까지도 하는데요, 그들이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한, 그리고 자기들의 유아적 이노센스가 드러나는 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처럼 왜 사람이 어느 정도의 이노센스를 소유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지 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0:14-16)

 

 

165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이 이노센스를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증명되는데요, 온전함(integrity)과 이노센스가 떠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었음을 부끄러워했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수치를 느꼈으며, 그래서 자신들을 숨겼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의 세계에 있는 표상으로도 마찬가지인데요, 영들이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고 죄 없음을 증명하고 싶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이노센스를 증언하기 위해 스스로 벌거벗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국에 있는 순진무구한 사람들한테서 이런 게 두드러지는데요, 그들은 그들의 이노센스한 본성에 따라 화환으로 장식된 벌거벗은 유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정도의 이노센스까지는 아닌 사람들은 선지자들이 이따금 보았던 천사들처럼 다이아몬드 실크라 할 수 있는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6

이런 것이 본 장 말씀에 들어있는 일부인데요, 그러나 이것들은 사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었는데 사실 오늘날 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여기서 다룬 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조차 어떤 사람들한테는 모호하고 흐릿하게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67

만일 누군가 말씀 각 구절마다 얼마나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있는지를 안다면 그는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과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이 엄청나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인데요, 이런 사실이 겉 글자 상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걸 좀 간단히 말씀드리면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에서는 말씀의 겉 글자들은 정확히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질서정연하게 생생하게 표현, 표상됩니다. 영들의 세계는 표상의 세계(a world of representatives)이기 때문인데요, 거기서 생생하게 표상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번에는 이층천 천사적 영들(the angelic spirits who are in the second heaven)에 의해 그 표상들에 들어있는 아주 세밀한 것들에 대해서까지 지각되며, 그리고 그렇게 이층천 천사적 영들에 의해 지각된 것들은 이번에는 삼층천 천사들(the angels who are in the third heaven)에 의해 도저히 표현 불가한 천사적 아이디어로 풍성하게, 그리고 꽉 차게 지각됩니다. 최종적으로 이것은 주님의 선하신 즐거움(the Lord’s good pleasure)에 따라 무한히 다양하게 지각되기 때문인데 이런 게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각 천국의 역량마다 감당할 수 있는 지혜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상 언어로 기록된 말씀 안에는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지만, 지상에서 육체로 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지혜는 가장 낮은 등급인 요만큼인 반면, 사후 일, 이, 삼 층 천 천국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확장되고 더욱 크게 초월적이라는 말입니다.

 

어디서는 일, 이, 삼층천 천사들을 모두 천사, 그러니까 자연적 천사, 영적 천사, 천적 천사라 하는 반면, 또 어디서는, 그러니까 이 글에서처럼, 선한 영, 천사적 영, 천사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건 삼층천 천사, 천적 천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천사이며, 삼층천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천국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여섯 번째 시간인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의 속뜻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창세기 2장은 이렇게 마치고, 다음 주부터는 창세기 3장입니다.

 

오늘 본문 및 전체 개요, 그리고 배경을 한 번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원고 맨 앞으로)

 

설교

2025-10-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10-12(D1)-주일예배(13, 창2,21-25, AC.147-167),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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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AC.138-148,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창2:18-21), 2025/10/5(D1, 성찬)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창2:18-21, AC.138-148)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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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2:18-21, AC.138-148)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18-25)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다섯 번째 시간으로 2장 후반부 중 첫 번째인 18절로 21절,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AC.138-148)입니다.

 

먼저 2장 후반부(18-25) 전체 및 절 별 개요입니다.

 

131

태고교회의 후손들, 이들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proprium, own)으로 기울어졌는데, 여기서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이 창2 후반은 태고교회 두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132

인간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신 자신과 세상, 곧 자기 본성으로 인도받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게 허락된 본성을 여기서 다룹니다. (18)

 

133

그래서 그에게 먼저 선에 관한 애정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알게 하시는데, 이것들은 그가 앞서 주님께 받은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 본성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19, 20)

 

※ ‘’을 생각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긍정적이 되며, ‘진리’, ‘’, ‘올바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반듯한 생각들은 앞서 주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이런 귀한 선물들을 받아놓고도 우리는 그 가치를 모르고 아주 보잘것없는 내 안의 것들, 나의 본성에 주목하면서 주님으로부터는 독립하려고 애를 쓰며 살고 있습니다.

 

 

134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 본성 상태로 들어가며, 그리고 어떤 본성(an own)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걸 여자로 빚어진 갈빗대라 한 것입니다. (21-23)

 

 

135

천적 영적 생명은 인간의 본성과 아주 가까이, 거의 하나로 보일 정도로 붙어있습니다. (24)

 

 

136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노센스가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드는데요, 이 본성이 완전히 망가져서 도무지 뭐든지 못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25)

 

 

다음은 단락 전체의 배경 설명입니다.

 

 

137

창세기의 첫 세 장은 대체로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처음부터 마지막, 그러니까 사라질 때까지 ‘사람’(man, homo)으로 불렸습니다. 창2 전반부가 이 태고교회가 가장 융성했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던 때를 다루고 있다면, 이제 여기 후반부는 자신들의 본성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상이 개요 및 배경이고, 다음은 후반부 본문 절 별 속뜻입니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38

‘혼자’(alone)는 그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해 하지 않았음을, 대신 자아와 세상으로 인도받기를 원했음을,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인간의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여자로 만드신 갈빗대’(rib built into a woman)라 하는 것입니다.

 

 

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들처럼 주님의 가이드 아래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홀로 지내는’(dwell alone) 사람들이라 하였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로 인한 들끓음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유대교회에서도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다 몰아낸 후 그 땅에 홀로 거주하는 걸로 표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종종 주님의 교회를 가리켜 ‘홀로 산다’(alone)고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49:31)

 

모세의 예언에서도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33:28)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 분명하게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여기 ‘여러 민족’(nations)은 악을 말합니다. 이 태고교회의 후손은 홀로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즉 천적 인간이 되려 하거나 그들처럼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려 하지 않고 대신 유대교회처럼 여러 민족 중에 있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걸 원했기 때문에 이르시기를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라 하신 것입니다. 이런 걸 원하는 사람은 이미 악 가운데 있으며 그가 원하는 삶이 그에게 허락됩니다.

 

※ 우리는 보통 자녀가 무슨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그걸 막거나 금지, 못 하게 꾸짖고 책망하는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자원함이 없는 순종, 사랑으로 하지 않는 복종과, 강제로, 억지로 돌이키게 함은 주님 편에서는 하나 마나이기 때문이며, 그런 건 아예 주님의 속성에 배치되기 때문이지요. 아래 이사야 말씀이 생각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42:3)

 

이 말씀의 속뜻은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신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은 오직 거짓과 탐욕밖에 없기 때문인데 만일 이때 이 유일한, 비록 악하고 거짓되더라도, 생명을 건드리게 되면 더 이상의 생명이 없어 사람은 바로 소멸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는’ 대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와 동행, 그가 자의로 주님의 선과 진리 쪽으로 돌이키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역량에 맞춰 강약을 조절하시면서 말이지요. 마치 저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8-15) //

 

 

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본성(man’s own)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본성의 본질(nature)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이 교회 사람을 주님이 좋게 보셔서 그에게 어떤 본성이 허락되었는데, 그게 마치 그의 본성처럼 보이는 그런 것이어서 이르시기를,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 하신 것입니다.

 

 

141

인간 본성(man’s own)의 본질(nature)을 육적(corporeal) 세속적 인간, 그리고 영적 인간, 천적 인간과 함께 설명하려면 그전에 먼저 인간 본성에 관한 수많은 것들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육적 세속적 인간에게는 그의 본성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 말고는 아는 게 없고, 앞서도 말씀드렸듯 만일 이걸 잃으면 자기는 망할 꺼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인간의 경우 역시 그의 본성의 모습은 비슷한데요, 그가 비록 주님은 만물의 생명이시고, 지혜와 이해, 그리고 그 결과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을지라도 그에게 있어 이런 지식은 아직은 마음속 신념이라기보다는 입술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은 만물의 생명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힘 주시는 분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지각(perceives),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는 영적 통찰력으로 천사들처럼 그냥 알기 때문이지요. 그는 결코 자신의 본성을 원치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주님은 그에게 어떤 본성을 주시는데, 그것은 선함과 참됨에 관한 모든 퍼셉션,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하는 본성입니다. 천사들이 이런 본성 가운데 있으며, 동시에 가장 내적인 평화와 고요한 내적 기쁨(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의 본성에는 주님의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주님은 그들의 본성을 다스리시거나 그들의 본성으로 그들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이 본성은 가장 천적인 것 그 자체이지만, 육적 인간의 본성은 끔찍, 곧 지옥 그 자체입니다. 이 본성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다루겠습니다.

 

※ 천적 인간은 천사들처럼 그저 주님의 인도하심만으로 충분, 굳이 무슨 다른 본성을 또 필요로 하거나 찾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본성, 곧 ‘선함과 참됨에 관한 모든 퍼셉션,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하는 본성’을 허락하셨습니다.

 

 

19, 20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 20)

 

142

‘짐승, 가축’(beasts)은 천적 애정을, ‘공중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을 의미하는데요, 다시 말씀드리면 ‘짐승’(beasts)은 의지에 속한 것을, ‘새’(fowls)는 이해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로 하여금 그것들의 퀄리티를 알게 하심이며, 아담이 ‘그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에게 주신 선에 속한 애정의 퀄리티와, 그리고 진리에 관한 지식의 퀄리티를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고유 본성으로 기울어졌는데, 이를 전과 같이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처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이 ‘퀄러티를 안다’는 것은 그것의 본질, 본성을 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이름을 주다’, ‘아무개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다’의 의미가 모두 이렇습니다. 천적 천사들의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상대방의 아우라만 가지고도,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만 가지고도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지각하는 건데요, 이 ‘아담’으로 일컬어지는 천적 인간, 곧 초창기 태고교회 사람들이 바로 이런 능력, 곧 이런 퍼셉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43

고대에는 ‘가축’(beasts)과 ‘짐승’(animals)이 사람한테 있는 애정과 그와 같은 걸 의미했다는 사실이 오늘날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천적 사고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영계에서는 동물을 가지고 그런 거, 곧 애정 같은 걸 표현하며, 실제로도 동물의 생긴 모양대로 해당 애정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말했고, 그때 그들은 그밖에 무슨 다른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서도 짐승들이 언급되는 곳마다 일반적이든 아니든 무슨 다른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언의 말씀 전체가 이런 걸로 가득하며, 그렇기 때문에 각 짐승이 특별히 뭘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 말씀에 담긴 속뜻이 무엇인지를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앞서도 보았듯 짐승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즉 해로운 짐승이 있는가 하면 선한, 즉 무해(無害)한 짐승이 있지요.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 예를 들면 양(sheep), 어린 양(lambs), 비둘기 같은 것들이지요. 여기서 다루는 인간이 천적 인간, 혹은 천적 영적 인간이기 때문에 이들 선한 짐승들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짐승’(beasts)이 의미하는 바가 일반적으로 애정이라는 것을 위, 곧 말씀 몇몇 구절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AC.45, 46) 여기서 굳이 다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144

‘이름으로 부르기’(call by name)는 그 퀄리티를 안다는 의미인데요, 이는 고대인들은 ‘이름’(name)을 가지고 어떤 것의 에센스를 이해했기 때문이며, 무엇을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그 퀄리티에 대해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 어떤 의미를 담아 주었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은 그 안에 무언가 고유한, 그 이름으로부터나 그 이름에 의해서나 자녀의 어떤 기원과 고유 특성을 알 수 있는 그런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원과 특성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하고 있는, 지금 이 아르카나 주석 작업 중반,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는 부분에서 아시게 됩니다. 이름들에는 그렇게 이름하는 것의 근원과 퀄리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를 그밖에 무슨 다른 걸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언어적 관습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걸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은 말씀에 나오는 이름들을 그런 의미들을 부여하며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라실 수도 있겠습니다.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2-35)

 

 

145

말씀에서도 ‘이름’(name)은 어떤 것의 에센스(the essence of a thing)를,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는 그 퀄리티에 관해 아는 걸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45:3, 4)

 

이 구절에서 ‘네 이름을 불러’(call by name)와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surname)는 그 퀄리티를 예견한다(to foreknow the quality)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62:2)

 

앞뒤 구절에 나오는 것처럼, 또 다른 캐릭터가 될 것을 의미하지요.

 

계속해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3:1)

 

그가 그들의 퀄리티를 알고 계셨음을 가리키시면서

 

계속해서 같은 이사야 말씀입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40:26)

 

그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입니다.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4, 5)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8)

 

이들 구절에서 ‘이름’(names)은 결코 말 그대로 이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퀄리티를 의미하는데요, 심지어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이름이 아닌, 그의 퀄리티로만 알려지지요.

 

 

146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그 상징하고 있는 속뜻을 보실 수 있는데, 18절에 보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하시고는 지금은 ‘짐승’(beasts)과 ‘새’(birds)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전에 다룬 적이 있던 것이지요. 그러고는 즉시 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흐름의 속뜻은 이렇습니다. 곧 그가 비록 자신의 퀄리티, 곧 선에 관한 애정과 진리에 관한 지식에 대해 자신의 퀄리티가 어느 정도인지를, 또는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본성을 향해 기울어졌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유 본성을 간절히 원하는 그런 사람들은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 대한 멸시를 시작하기 때문인데 주님에게 속한 것이 아무리 그에게 분명하게 표현되고 보여도 말입니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1)

 

147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는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그런 본성입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는 그 안에 생기가 있는 본성을, ‘깊이 잠들게’(deep sleep)는 그의 현 상태를 말하는데, 사람이 이 상태가 되면 그는 자신의 본성이라 하는 걸 소유하고 있는 게 자기 자신인 줄 알지요. 이 상태는 잠든 상태와 유사한데, 이 상태에 있는 동안은 사람은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이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정신을 차리며 잠에서 깬 상태가 됩니다.



148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두 번째 단락 중 전반부인 18절로 21절 전반, 글 번호로는 AC.138-148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주는 후반부인 21절 후반부터 끝 절인 25절까지입니다.

 

오늘 본문 및 전체 개요, 그리고 배경을 한 번 더 읽고 마치면 좋겠지만 성찬도 있고 원고가 길어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설교
2025-10-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10-05(D1)-주일예배(2618, 창2,18-21, AC.138-148),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pdf
0.44MB
성찬.pdf
0.14MB

 

 

 

13. AC.147-167,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창2:21-25), 2025/10/12(D1)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창2:21-25, AC.147-167)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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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5-17, ‘에덴동산, 선악과’ (AC.122-130) (2025/9/28, 주일)

‘에덴동산, 선악과’ (창2:15-17, AC.122-130)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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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 선악과(2:15-17, AC.122-130)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5-17)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네 번째 시간으로, 15절로 17절, ‘에덴동산, 선악과’의 속뜻 시간입니다.

먼저 그 개요입니다.

 

79

천적 인간(天的, the celestial man)은 그런 일종의 동산입니다. 이 사람이 동산 안 모든 것을 즐기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건 금하셨습니다. 이 동산은 그 소유권이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15)

80

그는 또한 주님의 허락으로, 주님이 주시는 모든 퍼셉션을 가지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과 세상의 것을 가지고 그러거나, 감각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을 탐구하거나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런 짓을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16, 17)

 

 

아래부터 오늘 본문입니다.

 

15(AC.122-124)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22

‘에덴동산’(garden of Eden)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천적 인간의 모든 걸 말합니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till it and take care of it)는 그가 그 모든 걸 누리게는 하셨으나 자신의 걸로 소유하는 건 금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건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무엇을 자기 걸로 소유하는 덴 별 관심이 없고 대신 그 쓰임새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즉 주님께 무엇을 받았을 때, 그들은 ‘이걸 왜 주셨을까? 왜 허락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이 주신 걸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는 대신 주님을 사랑하는 쓰임새의 삶에만 집중합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글들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357-365) 일부 인용입니다.

 

361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236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선한 쓰임새란 자신과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 그리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선한 쓰임새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사람이 나태한 생활에 빠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나태한 생활은 사람의 생각을 그 타고난 악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에 해롭다. 쓰임새는 그 안에 신성을 담고 있는 만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신과 천국을 바라보고 이 쓰임새에서 유익을 찾으며, 재물은 오직 부수적 유익으로 여기는 정도만큼 선하다.

 

236. 모든 선에는 쓰임새에서 오는, 그리고 쓰임새에 따른 기쁨이 있다 (AC.3049, 4984, 7038). 또 그 퀄러티에서 오는 기쁨도 있다. 그러니까 쓰임새가 그런, 그런 것이 선이라는 말이다 (AC.3049). 삶의 모든 행복과 기쁨은 쓰임새에서 온다 (AC.997). 일반적으로 삶이라는 것은 쓰임새의 삶이다 (AC.1964). 천사의 삶은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으로, 그래서 쓰임새를 수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AC.454). 사람이 마음에 품고 있는 목적들은, 그게 곧 쓰임새들인데, 주님과, 그래서 천사들이 관심 있어 하는 유일한 것들이다 (AC.1317, 1645, 5844). 주님의 나라는 쓰임새들의 나라다 (AC.454, 696, 1103, 3645, 4054, 7038). 쓰임새를 수행하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AC.7038). 모든 사람의 캐릭터는 그가 수행하는 쓰임새들의 캐릭터와 같다 (AC.4054, 6815). 그 예 (AC.7038)

 

362

그러나 신을 믿지 않고 그 마음에서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을 내버린 부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이와 반대다. 그들은 지옥에 있으며, 더러움과 비참함과 궁핍함 속에 있다. 그들이 목적으로 사랑한 재물이 그런 것으로 변한다. 또 단지 재물뿐 아니라 그 재물의 쓰임새 자체도 그렇게 변하는데 그들의 재물은 자기 마음대로 살고 쾌락에 빠지며, 부도덕한 일에 더 많이, 더 자유롭게 몰두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 아니면 그들이 업신여기는 이웃들보다 높아지기 위해서 쓰였던 것이다. 그런 재물과 그 쓰임새에는 영적인 것은 전혀 없고 물질적인 것만 들어 있기 때문에 불결한 것으로 변한다. 부와 그 쓰임새 안에 있는 영적인 목적은 마치 몸 안에 있는 영혼과 같고 습한 땅이 받는 창공의 빛과 같다. 위와 같은 재물과 쓰임새는 영혼이 떠난 몸이나 창공의 빛을 받지 못한 습지처럼 썩는다. 재물의 유혹으로 인해 천국에서 멀리 떠난 사람들은 이와 같다.

 

39장 전체 글이 필요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HH.357, 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HH.357-365)

39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The Rich and the Poor in Heaven 357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일부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들어가고 부자는 못 들어간다고 하고, 또 일부는 부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123

천적 인간은 일반적이든 아니든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그가 그 사실을 지각하기(perceives) 때문이지요. 영적 인간 역시 그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입으로 합니다. 그가 그걸 말씀으로부터 배웠기(has learned) 때문입니다.

 

※ ‘perceive’와 ‘learn’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전자는 천국, 곧 주님으로 말미암아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이고, 후자는 자기 노력으로 배워서 아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전자는 그 답이 하늘에서 오는 것이고, 후자는 그 답을 세상에서 찾는 것입니다.

 

세속적이고 육적(肉的, corporeal)인 인간은 그 사실을 인정(acknowledge)도, 마지못한 시인(admit)도 안 합니다. 자기가 가진 건 뭐든지 ‘이건 내 거야’(his own)라 하며, 만일 그걸 잃게 되면 자기는 완전히 끝나는 줄로 압니다.

 

 

124

지혜,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은 사람에게 속한 게 아닌, 주님에게 속한 거라는 사실은 주님이 가르치신 모든 걸 보면 분명한데요,

 

※ ‘지혜,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을 앞 구절들에서는 에덴에서 발원한 네 강으로 표상했지요.

 

마태복음을 보면, 주님은 자신을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농부들에게 세로 준’(21:33) 집주인으로 비유하십니다.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1:33)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6:13, 14)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3:27)

 

이것이 과연 그렇다는 건 천국 아르카나를 아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한테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6(AC.12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of every tree of the garden)는 네가 임의로 먹되

 

우리말 번역은 원문에는 없는 ‘열매’를 추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라 함으로써 아르카나가 더욱 흐릿하게, 안 보이게 하는 아주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성경 번역자들이 말씀 안에는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한다는, 이런 속뜻을 알 길이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고? 하면서 이 부분을 원전 그대로 번역하기가 굉장히 어색했을 것입니다.

 

비슷한 표현이 창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에 나옵니다. 본 절인 창2:16에서는 ‘나무(every tree)만 나오지만, 이 창3:2에서는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라 하여 ‘열매’까지 나오는 이유는, 전자는 퍼셉션을 가리키지만, 후자는 그 퍼셉션에 의한 산물, 곧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계승된 선과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1-13은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 그러니까 주님 사랑에서 조금씩 벗어나 자기 사랑으로 기울던 태고교회의 두 번째 상태(2:18-25)에서 조금 더 위험해져 간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점점 더 계속해서 심화, 아래 말씀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으로, 이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기억-지식을 박탈당하고, 그들의 본성에는 대신 아주 더러운 사랑들과 신념들(their own filthy loves and persuasions)만 남았는데, 안 그러면, 이들은 신앙에 관한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AC.285)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125

‘각종 나무를 먹는 것’(eat of every tree)은 선하고 참된 것을 퍼셉션으로부터 아는 것, 곧 선하고 참된 것을 퍼셉션을 의지하여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앞서 관찰한 것처럼 ‘나무’(tree)는 퍼셉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곧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퍼셉션을 받았고, 그래서 소중하게 여기던 어떤 기억이 떠오를 때면 그들은 그 기억이 참되고 선한지를 바로 지각했는데, 만일 그 가운데 무슨 거짓된 것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들은 그것을 피할 뿐 아니라 몸서리를 칠 정도였습니다. 그런 게 또한 천사들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태고교회의 이런 퍼셉션이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는 지식으로 대체, 계승되었습니다. 이 지식은 앞서 지금까지 계시되어 온 것들로부터, 그리고 나중에는 말씀에 계시된 것들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17(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26

방금 다룬 16절 설명과 함께 이 말씀을 보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참됨과 선함에 익숙해지는 데 있어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퍼셉션으로는 괜찮지만 자아와 세상으로 말미암는 건 안 된다는 것, 즉 우리가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걸 가지고 조사하는 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랬다가는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은 감각적 증거와 세속적 지식에 의존,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모든 노력으로,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십일 금식기도나 천일 예배, 불교의 참선, 면벽 수련(달마의 구 년 면벽 같은), 오체투지(五體投地, 삼천 배, 오천 배 같은 불교의 절하는 법), 하안거, 동안거 등은 물론, 다양한 종교의 각종 종교적 수행 등인데요, 이는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 五慾: 수면욕, 식욕, 색욕, 명예욕, 재물욕, 七情: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오(惡), 욕(慾), 애(愛)) 문제를 좀 어떻게 건드려서 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신앙의 신비를 좀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세상 지식, 곧 세상에서 지식을 추구하여 학자가 되더니 그 지식으로 신의 세계에 발 담그고자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극 초월적 극기 수행을 한다 하여도, 그리고 아무리 오만가지 세상 지식을 머리가 터질 듯이 추구하여 다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걸로 구원을 추구한다거나 천국 가기를 희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위에서 밝힌 대로 신앙의 천적인 면만 파괴됩니다. 다만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만 전념하고자 모든 걸 내려놓고 완전히 타인을 위한 삶을 살다 간 사람들, 가령 성 프란치스코라든지,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든지 하는 분들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데요, 이런 분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저런 수도적 삶을 추구한 게 아니라 주님만 사랑하기에도 너무 바빠 자기를 사랑할 틈이 없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2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 곧 감각적 증거와 세속 지식에 의존하여 들여다보고자 함, 이것이 바로 다음 장에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와 그를 계승한 후손의 몰락 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모든 교회가 몰락하는 원인입니다. 여기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 또한 나오기 때문입니다.

 

 

128

세속적이고 육적(肉的)인, 곧 세상과 몸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은 속으로 말하길, ‘신앙 및 신앙 관련된 모든 것에 있어 만일 내 감각이 나를 가르쳐 내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지 않거나 팩트가 나를 가르쳐 나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거나 하지 않으면, 나는 안 믿을 거야’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연적인 것, 곧 세상에서 참이라 여겨지는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충돌할 리가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 결과 이 사람은 천적이며 신에 속한 것(what is celestial and Divine)에 대해 자신의 감각을 가지고 좀 배우려고 하는데, 이런 건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겠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합니다. 지혜를 얻고자 감각적 증거를 의존하면 할수록 사실은 자신을 더욱더 소경이 되게 할 뿐이기 때문이지요. 결국에는 아무 것도, 심지어 거기 영적인 어떤 것, 혹은 영생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결과는 처음 그가 세웠던 원리, 출발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선, 악과 관련된 지식의 나무를 먹는 것’(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입니다.

 

비슷한 표현이 창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에 나옵니다. 본 절인 창2:16에서는 ‘나무(every tree)만 나오지만, 이 창3:2에서는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라 하여 ‘열매’까지 나오는 이유는, 전자는 퍼셉션을 가리키지만, 후자는 그 퍼셉션에 의한 산물, 곧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계승된 선과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걸 먹으면 먹을수록 그는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지혜를 구하되 주님으로는 오케이지만 세상으로는 아니기를 원하는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the Word)에서 말씀하신 것들은 반드시 믿어야 해, 왜냐하면 진리이니까!’ 그리고 이 원칙에 따라 그는 자기의 생각을 조정합니다. 그는 이성적 논쟁, 팩트 기반 지식, 감각적 증거, 그리고 물리적 현상을 확신하는 데 사용하며, 반대로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들은 뭐든지 옆으로 치워버립니다.

 

 

 

129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은 사람은 자기가 가정하고 있는 원리, 원칙들, 심지어 그것들이 완전히 거짓이어도 이상하게 그것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지식과 이성(reasoning), 이 경우는 차라리 궤변인데, 이것들은 저 거짓들에 대해 역시 호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을 지지하려는 수많은 고려 사항, 끝없는 뒷받침 논리를 끌어내어 분명 거짓임에도 불구, 그 생각을 컨펌(confirm), 곧 굳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이상하게 세상에 좌파가 많은 모양입니다. 다음은 최근 유행하는 글입니다. 출처 : 독립신문(https://www.ainews1.co.kr)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좌파 왜 하세요? 페미(feminism, 여성주의)세요? 아니면 공산당이세요? 아니면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세요? 뭐 때문에 좌파를 하시는 거예요? 중국 화교세요? 아니면 대진연(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세요? 간첩이세요? 쿠바인이세요? 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세요? 아니면 성소수자세요? 전라도세요? 약쟁이세요? 마약 판매 밀수범이세요? 음주 운전하셨어요? 뭐 때문에 좌파를 하시는 거예요? 25만 원 없으세요? 일 안 하세요? 세금 안 내세요? 태양광 사업하세요? 혹시 중국인하고 결혼하셨어요? 날강도세요? 공짜 좋아하세요? 평생 전월세 사실 거예요? 아니 도대체 좌파를 왜 하는 거예요? 아니면 혹시 간첩님이세요? 진짜 자유가 싫으세요? 도박하세요? 왜 나라를 공짜 밥 먹듯 함부로 하려고 하세요? 사회주의자세요? 김정은 시진핑 존경하세요? 이재명을 사모하세요? 아니면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세요? 종북 빨갱이 맞나요? 코피 꺼리 주시나요? 종간 사상하세요? 문익환 목사랑 교회 다니셨나요? 광주 학살범한테 10구 훈장 욕심난 거 맞죠? 설마 조카가 살인범이신가요? 이거 지금의 좌파잖아요. 좌파 왜 하세요?

 

이 글은 현 시국 관련 글이지만, 그 저변에 흐르는 사상적 기원이 같아 인용합니다. 대한민국뿐 아닙니다. 미국도, 프랑스도 세상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집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유엔 연설을 보니 이런 걸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라고, 뭔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 같아 전 세계 정치지도자들이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라 하더군요. 그 예 중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맹목적 그린 에너지 추구와 이민자 허용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두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 것도 믿어서는 안 돼’라는 걸 하나의 원칙으로 정한 사람은 결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영적 천적인 것들은 결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무슨 마음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된 질서는 사람이 주님으로, 즉 주님의 말씀으로 지혜로워지는 것이며, 그러면 이후 모든 것이 뒤따르면서 이 사람은 눈이 밝아지는데, 심지어 이성(理性)에 관한 것들, 그리고 그동안 습득한 기억-지식에 관한 것들도 그렇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과학이라는 것을 배우면 안 된다가 아닙니다. 과학은 인간의 삶에 유익하며 아주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이 신앙 안에 있다고 해서 세상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면 안 된다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 있는 학자들은 대신 다음의 원리, 곧 ‘주님 말씀을 믿기’라는 원리로 해야 하는데, 그래서 가능한 한 자연적 진리들을 가지고 영적 천적 진리들을 확증, 컨펌하되 학자들 세계에서 쓰는 그런 용어들을 써서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의 모든 출발점은 주님이셔야 합니다. 결코 자기 자신이 아니고요. 전자는 생명이지만, 후자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130

세상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 즉 지혜를 주님이 아닌 세상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 ‘동산’(garden)은 감각 및 기억-지식에 속한 것, 곧 감각적 증거와 팩트 기반 정보입니다. 그에게 있어 ‘에덴’(Eden)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곧 물질 만능주의입니다. 그의 ‘동쪽’(east)은 서쪽, 즉 자기 자신입니다. 그의 ‘유브라데 강’(river Euphrates)은 그가 가진 모든 기억-지식, 곧 그가 배운 모든 팩트 기반 지식인데, 이는 지긋지긋한 지식, 끔찍한 지식입니다. 그의 ‘두 번째 강’(second river), 거기가 ‘앗수르’(Assyria)인데, 정신 나간 이성질(理性질, reasoning)과 그로 인해 생산되는 거짓입니다. 그의 ‘세 번째 강’(third river), 거기는 ‘에디오피아’(Ethiopia), 곧 ‘구스’(Cush)인데, 이것은 악과 거짓을 옹호하는 원리들입니다. 이 원리들은 저런 이성질 가운데서 발전된 건데, 이 원리들이 그가 가진 신앙의 교리문답서입니다. 그의 ‘네 번째 강’(fourth river)은 이런 일련의 결과로 나오는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걸 ‘마술’(magic)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왜 ‘애굽’(Egypt)을 가리켜 기억-지식, 곧 학구적 학식이라 하는지, 왜 오컬트(occult) 지식, 곧 주술적 지식이라 하는지, 그리고 후에 왜 이것을 마술로 채택하는지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 여기저기서 볼 수 있듯, 그가 이런 지혜로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고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모든 게 정확히 정반대임을 봅니다. 영계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주님을 향하든지, 아니면 등을 돌리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 에스겔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29:3, 9)  

 

같은 선지서를 보면, 또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지하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 in hell)이라 하는데, 거기 보면 또한 바로(Pharaoh), 즉 애굽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31:16, 18)

 

여기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은 말씀으로 말미암는 지식들, 곧 말씀으로 말미암는 팩트와 종교적 지식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저들은 짜증 나는 이성질로 그에 맞춰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네 번째 시간인 ‘에덴동산, 선악과’의 속뜻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2 두 번째 단락(2:18-25)을 시작합니다. 첫 번째 단락(2:1-17)이 상태변화, 곧 영적(靈的, spiritual) 상태에서 천적(天的, celestial) 상태로 변화한 태고교회 이야기였다면, 두 번째 단락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proprium, own)으로 기울어져 간, 곧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 맘대로 살고파 하는 태고교회 후손들의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창1은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한 영적 인간 이야기, 곧 한 사람의 거듭남의 이야기입니다.

 

마치기 앞서 한 말씀 더 드리면, 창세기 4장만 되어도 그 진도 따라가기가 정말 쉽지 않을 터이니 아직 2장 하고 있을 때 부지런히 복습, 이 내용을 나름 충분히 이해들을 하셔야 합니다. 창1, 2, 3에 대한 이해가 이후 모든 내용 전개에 기초가 되기 때문인데요, 지금 이 창, 출 속뜻 강해 설교는 대략 10년 마라톤으로 정한 것입니다. 절대 그냥 누가 저절로 떠먹여 줄 줄로 아시면 안 됩니다. 자신의 속 사람 문제는 본인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빛 비추심을 늘 구하면서 이해가 될 때까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읽고 또 읽고 하셔야 합니다. 세상 그 많은 지식으로는 천국 갈 수 없어도 이 걸로는 능히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고 처음으로 가서 오늘 본문과 그 개요를 한 번 더 리뷰하고 마치겠습니다.

 

(맨 앞 본문 및 개요 참조)


설교
2025-09-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9-28(D1)-주일예배(2617, 창2,15-17, AC.122-130), ‘에덴동산, 선악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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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8-21,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 (AC.138-148) (2025/10/5, 주일)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 (창2:18-21, AC.138-148)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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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9/21, 창2:10-14),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 (2025/9/21)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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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 네 강(2:10-14, AC.107-121)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17)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세 번째 시간으로, 10절로 14절,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입니다.

오늘부터는 각 단락의 절 별 개요도 다루겠습니다. 이는 마치 지도와 같아 이를 이용하면 그 구절과 단락의 전체 속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를 위해 지난주부터 시작한 2장 첫 단락(1-17) 전체 절 별 개요를 먼저 살피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은 본문을 전체 본문으로 실었습니다.

시작합니다.

 

 

73

죽은 상태에서 사람은 그동안 영적(靈的, spiritual) 상태가 되어 왔고, 이 상태에서 이번에는 천적(天的, celestial)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이제부터 다루는 내용입니다. (1)

 

74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이날 주님은 안식하십니다. (2, 3)

 

75

안개로 축축해진 땅에서 나는 ‘초목’(the shrub)과 ‘채소’(the herb)는 그의 지식과 그의 합리성(rationality), 곧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5, 6)

 

 

76

그의 생명,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을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로 표현, 표상하고 있습니다. (7)

 

 

77

그다음, ‘동방 에덴동산’은 그의 지성(intelligence)을,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진리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s)을,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관한 퍼셉션을 말합니다.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 곧 지식의 나무는 신앙(faith)을 의미합니다. (8, 9)

 

 

78

‘동산을 적시는 강’은 지혜(wisdom)를 의미합니다. 거기 네 개의 강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선과 진리, 두 번째는 선과 진리, 즉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입니다. 이 둘은 속 사람에게 속합니다. 세 번째는 이성(reason), 네 번째는 기억-지식인데, 이 둘은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모든 것은 지혜로 비롯되며, 지혜는 주님 사랑, 주님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10-14)

 

 

79

천적 인간(天的, the celestial man)은 그런 일종의 동산입니다. 이 사람이 동산 안 모든 것을 즐기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건 금하셨습니다. 이 동산은 그 소유권이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15)

 

 

80

그는 또한 주님의 허락으로, 주님이 주시는 모든 퍼셉션을 가지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과 세상의 것을 가지고 그러거나, 감각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을 탐구하거나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런 짓을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16, 17)


어떻게 좀 도움이 되십니까? 항상 숲의 나무 하나하나와 숲 전체를 함께 보아야 중간에 길을 잃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입니다.



10 (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07

‘강이 에덴에서’(river out of Eden)는 사랑에서 나오는, 즉 사랑에서 생겨나는 지혜를 말합니다. ‘에덴’(Eden)은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동산을 적시고’(to water the garden)는 지성이나 이해하는 재능 부여를,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thence parted into four heads)는 이어지는 내용처럼 네 강을 가지고 지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108

태고인들(太古人, the most ancient people)은 사람을 일종의 ‘동산’(garden)에 비유하면서 또한 지혜에도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지혜에 관계된 것들은 ‘강’(rivers)에 비유했지요. 그들은 단순히 비유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불렀는데, 그것은 그런 언어생활이 그들의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후대의 선지자들도 그랬습니다. 선지자들도 종종 그렇게 비유했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0, 11)

신앙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다루면서 말이지요.

 

이번엔 거듭난 사람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24:6)

 

예레미야에서는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17:7-8)

 

에스겔에서는 거듭난 사람들이 동산과 나무에 비유되지는 않지만 그렇게 불리고는 있습니다.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7그 뿌리가 큰 물가에 있으므로 그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31:4, 7-9)

 

이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태고인들이 사람이나 사람의 일들을 하나의 ‘동산’(garden)에 비유할 때 그들은 ‘물들’(waters)과 ‘강들’(rivers)이라는 표현을 보탰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사람이 적셔질 수 있도록, 그리고 이들 물들과 강들을 통해 사람을 성장케 하는 것들을 의미하도록 말입니다.

 

 

109

비록 지혜와 지성이, 보이는 건 사람한테서지만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은 오직 주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에스겔에서는 비슷한 표상으로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2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47:1, 8-9, 12)

여기서 주님은 ‘동’(east)으로, 그리고 물과 강물이 발원하는 ‘성소’(sanctuary)로 상징되십니다. 계시록에서도 그렇습니다.

1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22:1-2)

 

11, 12 (AC.110-115)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10

‘첫 번째’(first) 강, 즉 ‘비손’(Pishon)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지성, 즉 사랑 기반 신앙과 같이 가는, 어울리는 지성을, ‘하윌라 땅’(the land of Havilah)은 마음을, ‘금’은 선을,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금’(Gold)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금이 사랑의 선, 곧 사랑하고 같이 가는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 곧 사랑 기반 신앙과 같이 가는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가 언급되는 이유는, 하나는 사랑의 진리, 곧 사랑에 속한 진리를,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 곧 사랑 기반 신앙에 속한 진리를 각각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천적 인간입니다.

 

 

111

하지만 이런 내용은 속뜻(the internal sense)으로 있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러니까 사랑에 기반한 신앙이라는 게 뭔지, 또 그런 신앙에서 나오는 지혜라든지 지성 같은 게 뭔지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겉 사람들이 아는 거라곤 거의 기억-지식, 그러니까 세속적 팩트(fact)밖에 없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런 걸 가지고 지성이니, 지혜니, 신앙이니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사랑이 뭔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의지와 이해, 즉 지적 능력이 무엇이며, 그리고 이 둘이 한마음을 이루기 위해 결합한다는 게 뭔지를 모릅니다. 비록 실상이 이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 뚜렷하며, 실제로 저마다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갖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신앙의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이점만큼이나 이 온 천국을 마치 수학 좌표처럼 가장 명료하고, 정밀, 정교하게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우리가 희미하다고 해서 주님 지으신 이 피조 세계도 덩달아 흐릿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내적 시야가 열리지 않아 못 보는 것일 뿐, 실제로 주님 지으신 이 모든 세계는 더할 수 없이 세밀하고 명료합니다. 과연 그런지는 자연계는 초 고배율 현미경과 천체망원경으로, 영계는 주님이 사모하는 자에게 점점 허락하시는 내적 시야로 보시면 됩니다. 가령, 전자의 경우, 전에는 천체망원경 기술이 요즘과 같지 않아 저 우주 흐릿한 뭔가가 그저 무슨 큰 별인가 보다 했지만, 최근 제임스웹이라는 우주 망원경을 통해 보니 세상에! 그게 수천 개의 은하가 모여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주님의 세계는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인 것입니다!

 

 

112

모든 지혜는 사랑에서, 그러니까 주님한테서만 나온다는 사실, 모든 지성은 신앙에서, 역시 주님한테서만 나온다는 사실, 또 모든 선은 사랑에서, 마찬가지로 주님한테서만 나오며, 모든 진리는 신앙에서, 이 역시 주님한테서만 나온다는 사실 등, 이런 모든 사실이 더욱더 알려지게 하세요.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 게 아닌, 그러니까 주님한테서 나온 게 아닌데도 버젓이 사랑이다, 신앙이다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다 가짜입니다.

 

 

113

말씀에서 지혜나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데 있어 ‘금’(gold)보다 더 일반적인 것은 없습니다. 법궤, 성전, 금상, 촛대, 대접들 및 아론의 예복 등 이 모든 것에 있는 금은 지혜나 사랑의 선을 표상했습니다. 선지서들에서도 그랬는데, 에스겔입니다.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28:4)

 

여기 분명히 말하기를, ‘금과 은’(gold and silver), 선과 진리가 지혜와 총명(wisdom and intelligence)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법궤와 성전에서처럼 여기 ‘은’(silver)도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입니다.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60:6)

 

그래서 또한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2:1, 11)

여기 ‘황금’(gold)은 선을, ‘유향과 몰약’(frankincense and myrrh)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정말 그레이트한 것을, 그래서 이르기를 ‘여호와의 찬송’(the praises of Jehovah)이라 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런 이유로 시편에서도 이르기를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72:15)

 

 

114

신앙의 진리는 말씀에서 ‘보석’(precious stones)으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아론의 에봇 판결 흉패(the breastplate of judgment)와 두 어깨 위 보석들처럼 말입니다. 판결 흉패에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gold, blue, bright crimson, scarlet double-dyed, and fine-twined linen)은 사랑에 속한 것들을, ‘보석’(stones)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그 사랑에 기반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합니다. 금테에 물릴 호마노 둘, 에봇 두 어깨 위 두 ‘기념 보석’(two stones of memorial)처럼 말이지요.

9호마노 두 개를 가져다가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10그들의 나이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새기라 11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 테에 물리고 12그 두 보석을 에봇의 두 어깨받이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워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13너는 금으로 테를 만들고 14순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고 그 땋은 사슬을 그 테에 달지니라 15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16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17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18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19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20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21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22순금으로 노끈처럼 땋은 사슬을 흉패 위에 붙이고 (28:9-22) 

보석들에 대한 이런 표상은 에스겔에서도 또한 분명한데요, 거기 하늘의 부, 곧 지혜와 지성을 소유한 사람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12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15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28:12-13, 15)

 

이 본문은 보석들이 아닌, 신앙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상하는 말씀임은 누가 보더라도 확실합니다. 맞습니다! 보석 하나하나는 신앙의 어떤 에센셜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115

태곳적 사람들은 ‘땅’(lands)을 말할 때, 땅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이해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가나안 땅과 시온산은 천국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장소들이 언급될 때마다 무슨 물리적 장소가 아닌, 오직 그것이 상징하는 것, 곧 천국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게 본문 ‘하윌라 땅’(land of Havilah)에도 해당합니다. 이 하윌라는 창세기 2518절에도 다시 나오는데요, 이 구절은 이스마엘 자손들 이야기인데, 거기서 그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거주하였더라’(they dwelt from Havilah even unto Shur, which is before Egypt, as thou goest toward Assyria)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25:18)

천국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들에서 나오는 지성과 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들만 지각합니다. 그래서 ‘비손이라는 강이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에 나오는 ‘두르다’(compass) 역시 그들은 흘러들어오는 걸로 지각합니다. 출애굽기 28장 11절에 나오는, 금테로 물린 아론의 에봇 두 어깨의 호마노 역시 그들은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지각합니다.

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 테에 물리고 (28:11)

다른 많은 경우도 그렇습니다.  

 

거듭 진리는 선을 담는, 신앙은 사랑을 담는 그릇입니다. 진리 안에는 선, 곧 주님이 계시며, 신앙, 교리 안에도 사랑, 곧 주님이 계십니다.

 

 

13 (AC.116, 117)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16

‘기혼’(Gihon)이라 하는 ‘두 번째 강’(second river)은 선과 진리, 혹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을, ‘구스 땅’(land of Cush)은 마음이나 역량(力量, faculty), 곧 멘탈 능력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의지와 이해, 곧 지적 능력(intellect)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 강에 대해 말한 것이 의지에 관한 거라면, 이 두 번째 강은 이해, 곧 지적 능력에 관한 것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117

게다가 ‘구스 땅’(land of Cush), 즉 이디오피아는 금, 보석, 그리고 향신료들로 풍부했는데, 이들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선, 진리,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정말 그레이트한 것들, 가령 사랑과 신앙 관련 지식 같은 그런 걸 의미합니다. 이런 사실은 위 113번 글의 인용 구절들인 사60:6, 마2:1, 11, 시72:15 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60:6)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2:1, 11)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72:15)

 

말씀에서 또한 ‘구스’(Cush)나 ‘이디오피아’(Ethiopia), ‘스바’(Sheba)에 의해 유사한 것들이 의미되고 있음은 선지서들, 가령 ‘구스 강’(rivers of Cush)이 언급되는 스바냐 같은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5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9그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10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3:5, 9-10)

 

그리고 다니엘에서, 북방 왕과 남방 왕에 관해 말하면서

 

그가 권세로 애굽의 금은과 모든 보물을 차지할 것이요 리비아 사람과 구스 사람이 그의 시종이 되리라 (11:43)

 

여기서 ‘애굽’(Egypt)은 기억-지식, 곧 세속적 지식을, ‘구스 사람’(Ethiopians)은 지식, 그러니까 종교적 지식을 가리킵니다.

 

[2] 그래서 에스겔에서

 

스바와 라아마의 상인들도 너의 상인들이 됨이여 각종 극상품 향 재료와 각종 보석과 황금으로 네 물품을 바꾸어 갔도다 (27:22)

 

이 역시 같은 식으로 신앙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주님, 결과적으로는 천적 인간에 관한 말을 하면서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10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72:7, 10)

 

이들 본문은 그 앞뒤 이어지는 연결 구절들을 보면 명백한 것처럼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스바의 여왕에 의해서도 유사한 것들이 의미되었는데, 그녀는 솔로몬을 찾아와 어려운 질문들을 하면서 그에게 향신료, 금, 그리고 보석들을 주었습니다.

1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2예루살렘에 이르니 수행하는 자가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실었더라 그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왕상10:1-2) 

선지서 뿐만 아니라 말씀의 역사 파트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아르카나를 의미, 표상 및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역사 파트’란 말씀을 분류할 때 흔히 역사서로 분류하는 말씀들, 그러니까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를 말합니다. 신학교에서는 이 외에도 룻기, 역대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도 포함하지만,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이들 성경은 비록 성경에 포함은 되었어도 ‘말씀’은 아니므로 저 역시 제외하였습니다. 참고로, ‘말씀’이란, 천사들이 읽을 수 있는 아르카나가 들어있어야 ‘말씀’입니다. 저 성경들은 안타깝게도 아르카나가 들어있지 않고, 그래서 천사들이 읽을 수 없어서 ‘말씀’이 아닙니다.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을 천사들이 읽고자 들여다보면 그냥 까맣게만 보인다고 합니다.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들은 그러나 사람들을 위해서는 좋은 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글들이 아르카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성경 확정 작업을 지난 수천 년 동안 해 올 때 성경에 포함되는 걸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아르카나(arcana, 라틴, 복수, 단수는 arcanum, 秘義, 숨겨진 비밀, 비밀스런 뜻, secrets)는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에만 들어있습니다.

 

 

14 (AC.118-121)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18

‘힛데겔 강’(river Hiddekel)은 이성(理性, reason), 즉 이성에 속한 명민함, 통찰력(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명석함입니다. ‘앗수르’(Asshur)는 합리적 마인드(the rational mind), 곧 그런 이성을 발휘하는 마음입니다. ‘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강’(river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hur)의 의미는, 이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이 마인드 안으로, 즉 겉 사람에게 속한 그 안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프라’(Phrath), 즉 ‘유브라데’(Euphrates)는 기억-지식, 곧 팩트에 입각한 지식인데, 이는 종단(終端, the ultimate)이나 경계(boundary), 곧 마음의 최종 경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천적 인간에게 있어 그 마음의 네 가지 영역, 곧 지혜, 지성, 이성 및 지식을 각각 이렇게 비손, 기혼, 힛데겔 및 유브라데라는 네 강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119

‘앗수르’(Asshur)가 합리적 마인드, 즉 인간의 합리적인 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선지서들, 가령 에스겔 같은 데를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31:3, 4)

 

여기서 합리적인 걸 ‘레바논 백향목’(cedar in Lebanon)이라 하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은 기억 지식, 곧 기억 중인, 팩트 기반 정보, 바로 이 곤경(plight) 안에 있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위 말씀 본문의 영어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를 보고,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을 보면... 많이 빗나간 번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운 번역은 ‘굵은 가지들(boughs) 가운데 있는 분지(offshoot)’ 정도가 되겠습니다.

 

여기 ‘in this very plight’라고 영어 ‘plight’를 사용했는데요... 이 단어의 뜻이 ‘역경, 곤경’ 정도여서 좀 난감했습니다. Potts 번역의 시작 연도가 1905년으로, 지금부터 120년 전이어서, 혹시 그 사이 단어의 뜻이 좀 바뀌었나 싶기도 하지만... 저는 그냥 에스겔 31장 전후가 애굽에 대한 안타까운 말씀들이어서 그걸 감안, 그대로 ‘곤경’으로 옮겼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훨씬 더 명료합니다.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19:23-25)

여기와 여러 다른 구절에서, ‘애굽’(Egypt)은 기억-지식, 곧 팩트 기반 정보를, ‘앗수르’(Asshur)는 이성, 곧 이성적 능력을, ‘이스라엘’(Israel)은 지성, 곧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120

‘애굽’(Egypt) 및 ‘유브라데’(Euphrates)는 기억-지식 및 이들 지식이 시작되는 감각적인 것들(the sensuous things), 곧 팩트 기반 세속 지식과 이 세속 지식이 기반을 두는 감각적 인상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속된 말로 뿅 간다고 할 정도로 인간의 오감에 깊은 인상을 주는 그런 것들만 팩트로 받아들이는 지식을 말합니다.

이런 사실은 선지서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미가서 말씀처럼

 

10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 11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12그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7:10-12)

 

그렇게 선지자들은 주님의 오심에 대해 말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사 천적 인간처럼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레미야에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2:18)

여기 ‘애굽’(Egypt)과 ‘유브라데’(Euphrates)는 같이 기억-지식, 곧 팩트를, ‘앗수르’(Asshur)는 거기서 나오는 합리화(reasonings), 곧 그런 걸로 건축되는 합리화를 말합니다.

시편에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80:8, 11)

여기 ‘유브라데 강’(river Euphrates)은 감각적인 것과 기억에 속한 것, 곧 감각적이고 팩트에 기반한 정보를 말합니다. 기억 지식이 영적 천적 인간의 지성과 지혜의 바깥쪽 경계인 것과 같이 유브라데는 이스라엘 영토의 앗수르 방향 경계였기 때문입니다.

내세에 들면, 즉 우리 영이 몸에서 들리면, 우리가 그동안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던 추상 개념들을 직접 영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데 가령 선, 진리, 사랑, 신앙, 의지, 이해, 지혜, 지성, 지식 및 감각 등 수많은 추상 개념들을 이제는 생생하게 마치 영상처럼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속 사람, 곧 내적 존재가 되었으므로 내적 시야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육안으로 보듯 저렇게 명료하게 진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들은 말씀 또한 같은 걸 말합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5:18)

위 두 경계는 같은 걸 말합니다.

 

 

121

이 강들을 통해서 천적 질서의 본성, 즉 생명에 속한 것들의 일 진행 방법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즉 ‘동’(East)이신 주님한테서(from) 출발, 주님으로부터(from) 지혜가, 지혜를 통해서(through) 지성이, 지성을 통해서(through) 이성, 그리고 그렇게 이성을 가지고(by means of) 기억 지식이 생생해진다는 것입니다.

※ 즉, ‘기억-지식’이라 하는 세상 지식도 이 천적 질서 안에 있으면, 주님의 생명으로 생생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돈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요, 다만 그 쓰임새, 용도에 달려 있듯 이 세상, 세속 지식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순서이며 이런 사람들이 천적 인간들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장로들로 천적 인간들을 표상하였기에 그들을 일컬어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받는 자들’(wise, intelligent, and knowing)(1:13, 15)이라 한 것입니다.

13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15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 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 (1:13, 15)

그래서 법궤를 짠 브살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35:31)

1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2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36:1-2)


이상으로 창세기 2장 세 번째 시간인 ‘에덴동산, 네 강’ 본문(2:10-14)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 및 이 부분 개요를 한 번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원고 첫 페이지로)


여러 번 복습하시면서 가능하면 본문도 줄줄 외우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2025-09-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9-21(D1)-주일예배(2616, 창2,10-14, AC.107-121),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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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9/28, 창2:15-17), ‘에덴동산, 선악과’의 속뜻

‘에덴동산, 선악과’의 속뜻 (2025/9/29)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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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9/14, 창2:4-9),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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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첫 주 현재 어느 정도 정돈된 양식에 따라 기존 원고들의 틀을 소급 정비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존 녹음은 정비 전 원고 녹음이며, 현 저 하단 첨부파일과 같은 내용입니다. 아래 내용은 새 원고로, 주석 원본 100%이며, 그래서 기존 주석 원본 첨부하던 거는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참고하세요.

 

 

에덴동산(2:4-9, AC.89-106)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4-9)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두 번째 시간으로, 원래 본문은 24절로 17절, 제목은 ‘에덴동산의 속뜻’이지만 한 번에 다루기에는 너무 길어 세 등분, 3주에 걸쳐 다루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 4절로 9절,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입니다.

여전히 주석 원본과 인용문은 볼드체로, 메시지를 겸한 설명, 곧 추임새는 ‘’로 구분합니다.

시작합니다.

 

4 (AC.89)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89

‘하늘과 땅의 내력’(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은 천적 인간의 형성, 즉 천적 인간을 빚으신 방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이 천적 인간을 빚으심이라는 것은 이어지는 모든 내용을 보면 아주 분명한데요,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이상 5),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7), 나중에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19) 등 이들에 대한 지으심은 이미 앞 장에서 다룬 내용들임에도 불구, 여기서 다시 다루는 걸 보면 분명 여기는 또 다른 사람을 다루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다음 사실들을 보면 더 분명한데요, 먼저 주님을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라는 새로운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영적 인간을 다룬 앞장에선 간단히 ‘하나님’(God)이라는 호칭으로만 불렀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또 여기선 ‘땅’(ground)과 ‘들’(field)(5)을 함께 언급하는 반면, 앞에선 ‘땅’(earth)만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오늘 본문 구절인 이 4절에서는 ‘하늘’이 ‘땅’보다 먼저 언급되다가 나중에는 ‘땅’이 ‘하늘’보다 먼저 나옵니다. 이는 ‘땅’은 겉 사람을, ‘하늘’은 속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 빚으심(reformation), 곧 개혁이 영적 인간의 경우는 ‘땅’, 즉 겉 사람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은, 지금 다루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데, 이 천적 인간의 경우에는 속 사람, 즉 ‘하늘’에서 시작한다는 것 등 이런 여러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분명 여기는 또 다른 사람을 다루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창세기 2장 3절까지를 창세기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바로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들(1:2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과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1:3-2:3)한테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인 ‘하나님’이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것이 창세기 2장 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2장 4절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창1:1-2:3까지가 하나, 창2:4부터가 또 하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래 말씀처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 또한 분명히 나오는 걸로 보아 그렇다면 분명 천적 인간의 시작이기도 하여 좀 어리둥절한 게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이 함께 쓰인 데에는 어떤 아르카나가 있는 건지 아직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공유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두 호칭, ‘여호와’와 ‘하나님’은 각각 선(good)과 진리(truth) 혹은 사랑(love)과 신앙(faith)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 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5, 6 (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90

‘들의 초목’(shrub of the field)과 ‘밭의 채소’(herb of the field)는 보통은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걸 의미합니다. 겉 사람은 사람이 아직 영적(靈的, spiritual)일 동안은 ‘땅’(earth)이라고 하지만,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 되면 ‘땅’(ground) 및 ‘들’(field)이라고 합니다. 바로 뒤에 ‘안개’(mist)로 언급되는 ‘비’(rain)는 싸움이 그친 뒤 오는 천국 평화의 평온함, 고요함(the tranquility of peace, the peaceful calm)을 말합니다.

 

 

91

그러나 여기 이런 것들은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그 상태가 바뀌어 간다는 게 무엇인지를 먼저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지각할 수조차 없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아주 깊이 감춰진 내용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은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하려 하거나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아직 일종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천적 상태가 되면, 그때는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자연히 싸움도 그치고, 평온함이 시작되지요. (AC.87 참조)

지난날 국민 드라마 ‘허준(1999) 생각이 납니다. 거기 보면 주인공 허준과 그가 처음 몸담았던 경남 산청 유의태와 그의 아들 유도지, 그리고 유의태가 걷어 딸처럼 기르는 아름다운 예진 아씨가 나옵니다. 도지는 준의 걸출한 등장과 연모하던 예진의 마음이 준에게로 향하는 데 앙심을 품고 오랜 세월, 심지어 궁궐 내의원에 들어가서까지도 준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내의원으로서 함께 임금을 모시는 입장이면서도 사사건건 준을 대적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함께 노인이 된 후에는 진심으로 준을 아끼고 존경하며 따르게 되지요. 이 겉 사람, 속 사람 관계가 꼭 저들 같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87번 글 앞부분 인용입니다.

천적 인간을 가리켜 ‘안식일’(sabbath), 즉 ‘쉼’(rest)이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천적 인간이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인데, 이때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다가옵니다. 이들이 있으면 악한 영들은 도저히 머무를 수 없어 멀리 달아나기 때문이며, 그래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되고, 또한 그동안 전투를 치른 장본인은 이 사람 본인이 아니라 홀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이 쉬시는 것, 곧 주님이 ‘안식하시니라’(rested) 하는 것입니다.

거듭 성 프란치스코(1182(?)-1226)나 성 분도 요셉 라브르(1748-1783) 같은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이들의 전기를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들은 스베덴보리(1688-1772)를 알지도, 또 스베덴보리처럼 무슨 영계를 수십 년 왕래하며 체험한 바도 없지만, 그리고 지금 이런 아르카나도 접한 적 없지만, 참으로 겉 사람과 속 사람의 하나 됨, 합일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비’(rain), ‘안개’(mist)가 바로 이 평온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수증기와도 같아서 마치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수분 공급을 받아 촉촉해지는 것과 같지요. ‘들의 초목’(shrub of the field)과 ‘밭의 채소’(herb of the field)라 하는 것들, 특별히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합리적인 마음과 기억, 곧 이성적인 생각들과 팩트 기반 지식에 속한 것들이 이 평온함, 평화의 샘(the offspring of peace)에서 나옵니다.

땅에 비가 내리고 안개로 축축해져야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가 자라듯 사람도 심령 상태가 평화, 평온해야 하늘에 기반을 둔 학습 능력과 합리적인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지금 이 번역의 일만 놓고 보아도 분명합니다. 나랏일과 여타 사적 일로 마음이 힘들면 번역도 잘 안 되지만, 심령이 평안하면 주님의 빛도 훨씬 더 환하게 느껴지며, 번역도 참 잘 되기 때문입니다.

 

 

92

탐욕과 거짓 때문에 생기는 싸움이나 불안이 사라질 때, 겉 사람이 맛보는 천국의 평화, 평온의 어떠함은 천국 평화의 상태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제32장, ‘천국 안의 평화의 상태’ 284번 글을 보면,

...천국의 평화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천사들이 누리는 평화를 조금이라도 감지할 수 있다. 사람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은 천국의 평화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느낄 수도 없다. 사람의 지각 능력은 자연계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사고 기능이 몸에서 들려 올라가 영의 차원에 머물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천사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나에게 천국의 평화가 느껴진 것도 그런 방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평화를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이 부적합하여 그 평화 그대로를 말로 옮길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마음의 평안에 비할 수 있을 뿐이다...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참고하세요.

이 상태는 기쁨에 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그런 건데, 단순히 싸움이 끝났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적 평화로부터 뻗어 나가며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런 생명입니다. 평화의 기쁨에서 그 생명이 나오는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 이때 이 상태에서 생깁니다.

 

 

93

천적 인간의 상태, 이 사람한테 선물로 주어진 평화롭고 평온한 상태, 곧 비가 내려 대지가 리프레쉬 되는 걸로 표현된 상태, 그리고 악하고 거짓된 것의 종노릇한 데서 구원받은 상태 등 이런 것이 천적 인간의 상태인데, 그래서 에스겔에서 주님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34:25-27, 31)

그리고 이런 효과가 ‘셋째 날’(third day)에도 있다는 말씀이 호세아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일곱째 날’(seventh)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6:2-3)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 역시 그 속뜻이 있는데, 특히 ‘7’(일곱)처럼 ‘3’(셋)과 ‘12’(열둘)가 비슷하게 ‘완전함’, ‘전부’ 등의 뜻을 갖습니다.

이 상태를 비유하여 ‘들의 풀’(growth of the field)이라 함을 에스겔, 고대교회에 관해 말씀하시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16:7)

이렇게도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60:21)

 

 

7 (AC.94-97)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94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form man, dust from the ground)는 그의 겉 사람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5절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no man to till the ground)를 보면, 그의 겉 사람은 전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는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man became a living soul)는 그의 겉 사람 또한 살아있는(alive)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95

앞의 두 구절, 즉 5, 6절에서는 겉 사람의 생명, 즉 그의 신앙의 생명, 이해(understanding)의 생명을 다루었다면, 본 절에서는 그의 사랑의 생명, 의지의 생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은 속 사람과 함께 지속적으로 전투에 임하면서도 사실은 그를 따르며 섬기는 걸 내켜 하지 않았고, 그래서 겉 사람은 아직은 ‘사람’(man)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적 인간이 되어가면서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 그를 섬기기 시작하며, 신앙의 생명, 사랑의 생명으로 변화되어 가면서 또한 ‘사람’(man)이 됩니다. 그를 준비시키는 것은 신앙의 생명이지만, 그로 하여금 ‘사람’(man)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입니다.

거듭, 신앙은 사랑을 담는 그릇이며, 자원함으로 하는 것이 그의 생명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밭에서 갓 수확한, 흙이 묻고 거친 채소를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인간이라 한다면, 채소, 과일 등 잘 다듬고 정성껏 씻어 준비한 식재료들은 영적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먹기 좋은 훌륭한 음식, 요리가 되려면 최종적으로 열을 가해야 하는데 이 열이 바로 사랑이며, 그렇게 해서 나오는 최종 상태가 바로 천적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9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고대에, 그리고 말씀에서 ‘코’(nostrils, 콧구멍)는 향기(odor)의 결과 감사했던 모든 것, 곧 어떤 향기로운 아이디어(the idea of fragrance)가 떠오를 때 맛보는 모든 즐거운 걸 말합니다. 여기서 향기는 퍼셉션(perception)을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들, 가령, 번제(燔祭, the burnt offerings)나 주님, 주님의 나라에 대한 기록들에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smelled an odor of rest)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신앙에 관련된 것을 무척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르시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 곧 주님이 임명하신 자를 가리켜 ‘콧김’(breath of the nostrils)(4:20)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4:20)

주님 자신 요한복음에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breathing on his disciples)라 하심으로써 같은 걸 상징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0:22)

 

 

97

생명을 ‘호흡’(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지각했기 때문인데, 이는 후에 그 후손들로 내려오면서 연속적으로 변했습니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오늘날 이런 것들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태고 사람들은 이런 것에 매우 친숙했고, 내세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만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wind)에 비유하는 이유입니다. 주님 또한 요한복음에서 사람의 거듭남을 이야기하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3:8)

 

 

8 (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8

‘동산’(garden)은 지성(intelligence)을, ‘에덴’(Eden)은 사랑을, ‘동방’(east)은 주님을 의미하며, 그 결과,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of Eden eastward)은 천적 인간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천적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성을 말합니다.

 

 

99

영적 인간에게 있어 생명이나 생명의 질서(order, 순서)는 이렇습니다. 주님이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및 기억에 속한 것들 안으로 들어오심에도 불구, 아직 그의 겉 사람은 그의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기억과 이성에 속한 것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생명 혹은 생명의 질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이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및 기억에 속한 것들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거기엔 더 이상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실상이라는 것을 지각합니다(perceives). 영적 인간일 동안 이때까지 뒤집혔었던 질서가 천적 인간이 되면서 회복되었다는 걸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질서, 혹은 사람을 가리켜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in Eden in the east)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은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 자신입니다. 가장 내적인 뜻(the inmost sense)으로는, 이는 또한 보편적인(universal) 뜻이기도 한데, 바로 주님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있게 될 그곳이지요. 그때 아직 지상에 있는 그의 상태는 천국 천사들과 함께하는 상태, 마치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그런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인데,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사고(thoughts)와 사고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들, 그리고 심지어 그의 언행도 모두 열린(open) 상태이며,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온 것들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안에는 천적 영적인 것들이 담깁니다. 그 이유는 그 하나하나에 다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이 생명은 그로 하여금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100

‘동산’(garden)은 지성, ‘에덴’(Eden)은 사랑이라는 것은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51:3)

여기 ‘사막’(wilderness), ‘기뻐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이나 사랑과 관련된 것들인 반면, ‘광야’(desert), ‘즐거워함’(gladness), ‘창화하는 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이나 이해에 속한 것들에 관한 표현입니다. 전자는 ‘에덴’(Eden), 후자는 ‘동산’(garden)에 관련되는데, 그 이유는, 이 선지자는 이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해서 늘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garden in Eden)의 더욱 깊은 의미에 관해서는 10절에서 다루겠습니다.

※ ‘에덴동산’에서 ‘에덴’은 천적인 것에, ‘동산’은 영적인 것에 각각 상응한다는 말입니다.

 

 

101

주님이 ‘동’(, east)이시라는 것 또한 말씀에 나오는데요, 에스겔입니다. 

1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43:1-2, 4)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였던 유대교회에서 성전 건물 앞에서 기도할 때, 그들의 얼굴을 동쪽을 향하여 돌렸던 거룩한 관습은 이렇게 주님의 임재가 ‘동’(east)이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려면, 그 안에 천국의 두 키워드 중 하나인 이노센스(innocence, 純眞)가 있어야 하듯, 어떤 지성 역시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려면, 그 순서, 질서가 올바른 순서, 질서여야 합니다. 즉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통해 위에서부터 내려와야지, 거꾸로 세상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리를 통해 위로 올라가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얼핏 비슷해 보여도 그 본성과 정체는 완전 정반대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9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2

‘나무’(tree)는 퍼셉션(perception)을,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tree desirable to behold)는 진리의 퍼셉션, 곧 진리를 알게 하는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tree good for food)는 선의 퍼셉션, 곧 선을 알게 하는 퍼셉션을,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감각적인 것, 즉 그저 기억일 뿐인 지식, 그러니까 감각적 증거, 세속적 지식에 기반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103

여기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상징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제가 영적 인간이면 달라지는데, 주제의 성격에 따라 서술되는 것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04

오늘날은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오늘날’은 1750년대(이 주석의 작성 연대는 1749-1756) 유럽을 말하지만, 퍼셉션에 대해 여전히 무지한 건 270여 년이 지난 오늘날(2025년 현재) 대한민국을 비롯, 전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 여부에 대한 어떤 내적 감각(a certain internal sensation)으로, 태고교회에는 아주 잘 알려져 있던 것입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 이 퍼셉션은 정말 완벽한데 그들은 이것으로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무엇이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인지, 또 그들에게 다가오는 아무개가 어떤 자인지, 심지어 그가 다가오는 것만 가지고도, 그리고 그의 한 조각 생각만 가지고도 그가 어떤 자인지 등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영적 인간한테는 이 퍼셉션은 없고, 대신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으며, 굉장히 많은 사람이 이 양심이 뭔지 모르고, 퍼셉션이 뭔지는 더더욱 모릅니다.

 

 

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며, ‘동산 가운데’(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입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the faith thence derived)이란, 신앙은 신앙인데 사랑으로 말미암는 신앙,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하는 가슴 신앙을 말합니다. 지식에서만 나오는 신앙, 즉 머리 신앙이 아니고 말입니다.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고 하는 이 의지는 사람과 천사한테 있어 주님의 주된 소유(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그러니까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소유, 그 소유권이 주님한테 있는 것들 중 메인이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비록 기술(記述), 즉 적기는 그렇게 적고 있지만, 그러나 의지나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탐욕(cupidity)이 사람의 것입니다. 흔히들 이걸 의지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의지는 생명나무가 있는 ‘동산 가운데’(midst of the garden)인 반면, 사람한테는 의지는 전혀 없고 대신 그저 탐욕만 있기 때문에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랑과 신앙, 곧 모든 생명이 말미암는, 모든 생명의 근원 되시는 분입니다.

 

 

106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곧 퍼셉션, ‘생명나무’(tree of lives), 곧 사랑 및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 증거와 세속적 지식에 기반한 신앙 등, 이 세 종류의 나무들의 본성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두 번째 시간인 ‘에덴동산’의 속뜻 (1)을 번역,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천적 인간의 상태와 주님이 천적 인간을 어떻게 지으시고, 에덴동산을 어떻게 만드시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하는 첫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느끼셨겠지만 우리의 이 주일설교는 일반적인 설교와 다릅니다. 설교라기보다는 무슨 주석 낭독회에 가까운데요, 많은 고민 끝에 결국 이렇게 방향을 잡은 이유는, 원전을 건드리기 싫어서입니다. 어쭙잖은 저의 역량으로 괜히 임의로 풀다가 큰 사고를 칠까 봐서이지요. 역시 느끼셨겠지만, 저는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1749-1756)라는 주석을 주님의 말씀과 거의 동급으로 봅니다. 이 주석이 기록된 방식 때문인데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주석은 주님이 직접 곁에서 계시하시고 스베덴보리는 그걸 그대로 받아적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씀, 곧 선지자들이 말씀을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주님은 그런 중에도 술자(述者), 곧 받아적는 사람의 퍼스낼러티를 허용하셔서 술자, 이 경우에는 스베덴보리, 의 어떤 특성들이 군데군데 스며드는 걸 허용하셨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주일 설교는 마치 굉장한 고액 강의를 수강하듯 들으시며 복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시라고 이 원고와 함께 제 블로그에도 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태도이기 때문인데요, 누구하고는 한 끼 점심 식사 하는데 10억이라는 데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분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만 숨을 못 쉬어도 죽는 이 대기 속 공기, 산소를 그러나 주님은 한 푼도 안 받으시고 거저 우리 모든 인류와 피조물에게 주시지요.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그걸 고마워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말씀에 대한, 그리고 이 아르카나 설교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여 드리고자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전체 본문입니다.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4-9)

여러 번 복습하시면서 가급적 본문도 줄줄 외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설교
2025-09-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9-14(D1)-주일예배(2615, 창2,4-9, AC.89-106),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pdf
0.54MB

 

 

 

주일예배(2025/9/21, 창2:10-14),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 (2025/9/21)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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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9/7, 창2:1-3),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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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첫 주 현재 어느 정도 정돈된 양식에 따라 기존 원고들의 틀을 소급 정비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존 녹음은 정비 전 원고 녹음이며, 현 저 하단 첨부파일과 같은 내용입니다. 아래 내용은 새 원고로, 주석 원본 100%이며, 그래서 기존 주석 원본 첨부하던 거는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참고하세요.

 

 

일곱째 날, 안식일(2:1-3, AC.82-88)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1-3) 1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Gen. 2:1-3)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첫 시간, 천지창조 일곱째 날, 곧 거듭남 일곱 번째 상태인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전히 주석 원본은 볼드체로, 메시지를 겸한 설명, 곧 추임새는 ‘’로 구분합니다.

 

시작합니다.

 

1 (AC.82, 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82

이 말씀은 인간이 이제 영적으로 ‘여섯째 날’이 되었음을, 즉 ‘여섯째 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충분히 영적임을 의미합니다. ‘천’(, heaven)은 그의 속 사람(internal man), 곧 내적 존재(inner being)를, ‘지’(, earth)는 그의 겉 사람(external), 즉 외적 존재(outer being)를 말합니다. ‘만물’(the army of them)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에 대한 지식을 말하며, 이는 앞서 큰 광명체들과 별들로 상징된 것입니다. 속 사람을 하늘’, 겉 사람을 이라 하는 것은, 앞서 전 장에서 이미 인용된 말씀 구절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에 다음 이사야 말씀들을 추가하면,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3:12-13)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6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51:13, 16)

 

이들 말씀으로부터, ‘하늘’과 ‘땅’이 사람에 관한 서술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런 표현들이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고는 있지만, 말씀의 내면들은 다음과 같은 속성, 곧 교회에 관한 언급은 또한 그 교회의 모든 부분에 관한 언급일 수도 있는, 일단 그 자신, 교회가 아니면 그가 교회의 어떤 부분이 되는 건 절대 불가능한, 마치 자신이 주님의 성전이 아닌 자는 성전, 곧 교회와 천국으로 상징되는 그 무엇이 절대 될 수 없는, 그런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태고교회에 대하여 ‘사람’(man)이라는 단수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83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라고 합니다. 이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기 때문, 즉 협력, 제휴, 힘을 합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사랑, 즉 천적 원칙(the celestial principle)이 주요 원리(the principal)가 되기 시작합니다. 신앙이나 영적인 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보다는 사랑이, 영적인 거보다는 천적인 거가 주도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것, 곧 천적인 걸 우선하는 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2, 3 (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23절까지를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이거나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한테는 주님의 신성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가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게 이 2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4절부터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참고로 이 두 호칭은 각각 선과 진리 혹은 사랑과 신앙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 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84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 heavenly person)이 ‘일곱째 날’입니다. 주님이 육 일간 일하신 결과이기에 이 천적 인간을 가리켜 ‘그가 하시던 일’(his work)이라고 합니다. 그때 모든 전투, 곧 갈등, 충돌이 그치며, 그 결과 그런 주님의 상태를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시니라’(rest from all his work)라고 하는데, 이런 이유로 이 일곱째 날을 특별히 성별(聖別), 히브리어로 ‘안식’(rest)이라는 뜻의 ‘שבת’(샤바트, the sabbath)라고 합니다. 이런 과정으로 사람은 창조되고(created), 형성되며(formed) 만들어집니다(made). 이 모든 것이 말씀들로부터 아주 분명합니다.

 

 

85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래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일이라 하셨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밝혀진 적 없는 아르카나(arcana, 秘義)입니다.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고, 영적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 거의 없습니다. 앞서 81번 글을 보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 이런 무지의 결과 사람들은 이 둘을 동일시했습니다. 일곱째 날 관련,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혹은 ‘안식일’(sabbath)인 것과 관련, 주님은 자신이 진정한 안식일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이는 주님이 참 인간이시며, 진정한 안식일이심을 의미합니다.

 

49번 글(1:26)에,

 

주님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그 교회 구성원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더 많은 깊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고요, 이런 이유로, 그들은 아무한테도 ‘사람’(man)이라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주님한테만, 그리고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만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한테도 이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요. 대신 다만 자기들한테 있는 것들 중 모든 사랑의 선과 모든 신앙의 진리 같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고 지각된(perceived) 것들에 한해서만 사용했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 참 인간, 참 사람은 오직 홀로 주님 한 분뿐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그분의 나라를 안식일, 곧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라 하십니다.

 

[2] 여기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는 이후 이 교회를 계승한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도 더 가장 주님의 안식일(the sabbath of the Lord)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주님의 안식일을 후대의 모든 교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모든 이어지는 가장 내적(inmost) 교회들, 즉 후대 교회들의, 주님과 가장 가까운, 가장 깊은 부분 역시 안식일이었다는 말이지요. 모든 거듭나는 사람 역시 그가 천적이 되면, 즉 그가 천국 본성을 발전시키면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그가 주님의 모양(a likeness of the Lord)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먼저 육 일간의 전투 혹은 수고가 선행합니다.

 

59번 글(1:30) 일부 인용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전투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며,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거듭나기 전엔 탐욕이 지배적이기 때문인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전반적으로 그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인데,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 그를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끊임없이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그런 걸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져서 결국은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은 개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이런 것들이 유대교회에서 육 일간의 수고와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상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도입된 어느 것 하나 주님과 주님 나라에 대한 표상(representative) 아닌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설명이 궤(the ark, 여호와의 법궤)로도 표상되었습니다. 궤가 나아갈 때와 궤가 쉴 때로 말이지요. 궤가 광야를 이리저리 다니는 것으로는 영적 전투와 시험(combats and temptations)을, 그리고 궤가 쉬는 것으로는 일종의 평화의 상태(a state of peace)를 표상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궤가 나아갈 때, 모세는 말하기를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10:35-36)

 

위 민수기 본문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을 떠나 ‘그들의 쉴 곳을 찾은’(10:33) 것은 바로 여호와의 언약궤라 하였습니다.

 

[3] 천적 인간의 쉼(The rest of the celestial man)을 이사야에서는 안식일을 가지고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58:13-14)

 

이것이 천적 인간의 질(, quality)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적 욕구(his own desire), 즉 욕망이 아닌, 주님의 선하신 즐거움(good pleasure), 곧 그분의 뜻을 따르는데, 이것이 그의 ‘즐거움’(desire)입니다. 그 결과, 그는 내적 평화와 행복(internal peace and happiness)을 누립니다. 이것이 위 말씀,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의 의미이며, 동시에 그는 겉으로도 평온과 큰 기쁨(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을 누리는데, 이것이 바로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의 의미입니다.

 

천사들한테서 볼 수 있는 이 상태는 천국 그 자체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이 상태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평화와 쉼 가운데 있으며, 주님도 쉼 가운데 계십니다. 그들이 주님과 이미 결합하였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수고롭게 일하지 않는데요, 이는 그들이 모두 이때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천적 인간의 다른 표현입니다.

 

 

86

‘여섯째 날’이 된(has become) 영적 인간이 이제 천적 인간이 되려고 하는(is beginning to be) 상태를 여기서 먼저 다루고 있는데, 이때가 유대교회에서 말하는 ‘안식일 저녁’(eve of the sabbath)입니다. 안식일의 거룩함을 저녁부터 지키는 것으로 표현했지요. 천적 인간은 이제 말씀드릴 ‘아침’입니다.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23:54)

 

※ 유대인의 안식일은 여섯째 날인 금요일 일몰부터 일곱째 날인 토요일 일몰까지입니다. 이와 관련된 걸 하나 말씀드리면, 유대 지역 일몰이 보통 오후 5시라고 할 때, 주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때가 오후 3시쯤이라 두 시간 만에 장례를 치러야 하는 아주 촉박한 상황임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 관련 본문들을 읽으시면 한결 와닿으실 겁니다. 하나 더, 유대인들은 결코 월요일, 화요일... 같은 요일 명칭을 쓰지 않습니다. 그 영어식 표현의 유래가 고대 앵글로 색슨계 신들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단순히 창세기 1장 표현대로 첫째 날, 둘째 날... 같은 명칭을 사용합니다.

 

 

87

천적 인간을 가리켜 ‘안식일’(sabbath) 또는 ‘쉼’(rest)이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천적이 될 때 전투가 그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다가옵니다. 이들이 있으면 악한 영들은 도저히 머무를 수 없어 멀리 달아납니다. 전투를 치른 장본인, 당사자가 이 사람 본인이 아니라 홀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안식하시니라’(rested) 하는 것입니다.

 

※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의지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그리고 이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각각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은 이렇게 천국과 지옥 두 곳에서 각각 파송된 천사들과 지옥의 영들로 이루어지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최소 천사 둘과 지옥의 영 둘이 와 있는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와 이해로 매 순간 일평생 천국 또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다가 이때, 즉,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거듭남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옥의 영들이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입니다.

 

 

88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일’(work of God)이라 합니다. 주님 홀로 그를 위해 지금까지 싸워오셨고(has fought for), 지금까지 그를 창조해 오셨으며, 지으시고 만들어 오셨기(has created, formed, and made)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 하는 것이며, 한 번 더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음이니라’(he rested from all his work)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지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으로 한 일’(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사야에,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45:11-12, 18, 21)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새 창조, 혹은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을 다음 두 가지 경우와, 또 창세기 본 장과 앞 장에서 아주 특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요, 위 구절 중,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 하는 부분, 그리고 같은 이사야 다른 구절, 예를 들면,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그리고 창세기 1장과 지금 2장,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하는 부분들입니다. 속뜻을 생각할 때, 이런 용법을 만나면 늘 그 표현들을 눈여겨보게 되는데요, 다음 케이스들이 바로 그런 경우들입니다. 주님을 가리켜 ‘창조하시는 분’(creator), ‘빚으시는 분’(former), ‘만드시는 분’(maker)으로 표현하는 경우들이지요.

 

 

이상으로 창세기 2장 첫 번째 시간인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을 다루었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안식일 관련, 우리가 흔히 오해할 수 있는 한 가지를 바로잡으면서, 이것을 오늘의 결론 삼아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25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17:24-25)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절대로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고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해야 한다. 천국 천사들의 상태가 바로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즉 자기들로 말미암아서는 그 어떤 것도 의도하거나 행하지 않는다. 심지어 더 나아가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말이다. 그들과 주님과의 결합은 이런 걸로 되어 있다’라는 뜻입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사람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악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선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한테는 모든 것이, 심지어 생명의 지적, 의지적 둘 다 아주 작은 데까지 흘러들어오며, 그 결과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개별적, 전반적인 것들한테까지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모든 것이 말입니다.

 

오늘 전체 본문입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1-3)

 

설교

2025-09-0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9-07(D1)-주일예배(2614, 창2,1-3, AC.82-88),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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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9/14, 창2:4-9),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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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8/31, 창1:24-31),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의 속뜻 (2)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의 속뜻 (2)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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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첫 주 현재 어느 정도 정돈된 양식에 따라 기존 원고들의 틀을 소급 정비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존 녹음은 정비 전 원고 녹음이며, 현 저 하단 첨부파일과 같은 내용입니다. 아래 내용은 새 원고로, 주석 원본 100%이며, 그래서 기존 주석 원본 첨부하던 거는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참고하세요.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 (2)(1:28-31, AC.55-63)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4-31) 28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29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30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 31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Gen. 1:24-31)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1장, 천지창조 여섯째 날, 곧 거듭남 여섯 번째 상태에 관한 두 번째 내용이며, 이로써 1장을 마감하게 됩니다.

 

※ 제가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주석 원본을 가급적 원본 그대로 소개하는, 참 재미없고 고리타분할 수 있는, 어찌 보면 요즘 주일 설교라 할 수 없는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쉽게 풀어 전하겠답시고 감히 손댔다가 완전 엉뚱한 소리 하는, 큰 참사가 날까 봐서입니다. 저는 아직은 그냥 살짝살짝 추임새 넣는 정도로도 충분하며, 이마저도 사실 제게 와있는 천사들의 퍼셉션(perception)을 조금 알아듣는 것이어서 안전하고, 그래서 참 감사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그걸 수용하는 사람의 영적 역량, 곧 그 사람의 영적 눈높이에 맞춰 그 깊이가 조절되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 여전히 주석 원본은 볼드체로, 메시지를 겸한 설명, 곧 추임새는 ‘’로 구분합니다.

 

시작합니다.

 

28 (AC.55)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55

태고교회 사람들은 이해(understanding)와 의지(will), 즉 신앙(faith)과 사랑(love) 간 결합을 일종의 결혼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이 결혼의 결과, 태어나는 모든 선(good)을 ‘생육’(fruitfulness), 모든 진리(truth)를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하였습니다.

 

※ 실제로 천국 역시 남녀의 결혼이 있지만, 천국에서는 지상처럼 무슨 ‘아이를 낳는’ 몸 결혼이 아닌, 선과 진리가 생겨나는 마음의 결혼, 곧 전혀 다른 결혼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40장, ‘천국 안의 결혼(Marriages in Heaven)을 읽어보세요.

 

 

HH.366, 40장, '천국 안의 결혼'(HH.366-386)

40천국의 결혼Marriages in Heaven 366천국은 인류로 구성되고, 따라서 천사들도 남자와 여자가 있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남자는 여자를 위해 창조되었고 둘은 서로에게 속한다. 이성에 대한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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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선지서들에서도 그렇게 부르는데 예를 들면, 에스겔입니다.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36:11-12)

 

※ 위 구절 중 일부만 볼드인 이유는 원본에서는 거기만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람’(man)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처음’(beginnings)은 홍수 후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를 말합니다. 먼저 진리에 속한 ‘수가 많고’(multiplication)가 언급되고, 그다음에 선에 속한 ‘번성하게’(fruitfulness)가 언급되는 이유는, 이 구절이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닌, 앞으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 아직 거듭나는 중인 사람은 그 최종 목표가 영적 인간이며, 이때는 늘 진리가 먼저입니다. 그렇다는 건 거듭난 후 일곱째 날인 천적 인간이 되면 이때부터는 선이 먼저라는 말이 되겠지요. 일단은 신앙으로 출발, 나중엔 사랑으로라고 해도 같은 말입니다.

 

[2] 이해가 의지와, 즉 신앙이 사랑과 연합할 때, 주님은 이 사람을 일종의 ‘결혼한 땅’(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62:4)

 

이때 열리는 열매들이 진리에 속하였으면 ‘아들들’이라 하고, 선에 속하였으면 ‘딸들’이라 합니다. 이런 표현은 말씀에 아주 자주 나옵니다.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12:50)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데요, 이렇듯 지상 혈연의 천국 상응을 늘 염두에 두는 태도가 안전합니다. 그러니까 오바(over)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데요, 자기 사랑이라는 욕심에 잠식된 자녀 사랑이 아닌, 오직 주님 사랑 안에 잘 보존된 정말 깨끗하고 순결한 자녀 사랑, 내 자식, 내 손주를 보더라도, 또 내 부모, 내 조부모 등 내 가문을 보더라도 그걸 주님 나라의 선과 진리가 이 세상에 구현된 걸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며, 주님의 열두 제자같이 말입니다. 이건 영적 시야에 관한 문제라, 그리고 혈연이라는 건 평생에 걸친 문제라 정말 중요한 얘깁니다.

 

[3] 진리와 선이 많아졌을 때, 땅은 ‘충만한’(replenished) 상태, 가득 채워진 상태가 됩니다. 주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실 때, 즉 사람을 돌보실 때는 선과 진리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13:31-32)

 

‘겨자씨 한 알’(grain of mustard seed)은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에 갖고 있던 선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씨보다 작은 것’(the least of all seeds)입니다. 그 이유는, 그때는 그가 자기 스스로 그 선을 행하는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사람의 것은 악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던 그가 거듭남의 어떤 상태 가운데 있게 되면서 그의 안에 뭔가 선한 게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작습니다.

 

[4] 결국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으로써 점점 자라 ‘풀’(herb)이 되더니, 마침내 결합이 완성되면서 ‘나무’(tree)가 되어, ‘공중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이 ‘그 가지에 깃들게’(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됩니다. ‘공중의 새들’은 진리나 지적인 것들을, ‘그 가지에 깃들게’는 기억-지식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영적일 때뿐 아니라 영적 인간이 되는 동안은 그는 일종의 전투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이르시기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하신 것입니다.



29 (AC.56, 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56

천적 인간(天的, The celestial man)은 천적인 것들(celestial things)로만 기뻐합니다. 그것들이 그의 생명에 맞기 때문인데, 이르기를 천적 양식(celestial food)이라고 합니다. 영적 인간(靈的, The spiritual man)은 영적인 것들(spiritual things)로 기뻐합니다. 그 이유 역시 그것들이 그의 생명과 맞기 때문이며, 이번엔 영적 양식(spiritual food)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인간(自然的, The natural man)은 자연적인 것들(natural things)로 기뻐합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맞기 때문인데, 이르기를 양식(food)이라고 하며, 주로 기억-지식으로 구성됩니다.

 

※ 그러니까 영적 인간이 자연적 인간더러, 천적 인간이 영적 인간이나 자연적 인간더러 당신은 왜 이런 거에 관심이 없느냐?’, 혹은 ‘당신은 왜 이런 걸 이해를 못하느냐?’라든지, 반대로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이나 천적 인간더러,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더러 ‘당신은 왜 그렇게 사느냐?’, 혹은 ‘당신은 왜 늘 천국, 천국만 하느냐?’라며 무시, 조롱, 비난, 멸시 같은 걸 하면 안 됩니다. 저마다 자기 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것이 선과 진리에 관한 거라면 말입니다.



57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는 쓰임새(use)와 관련된 모든 진리입니다. ‘열매 맺는 나무’(tree in which is fruit)는 신앙의 선인데, 여기서 ‘열매’(fruit)는 주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반면, ‘씨 가진 나무’(seed producing fruit)는 영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며, 그래서 ‘씨 가진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하시는 것입니다. 천적 양식을 나무의 열매라 하는 것은 다음 장을 보면 분명한데요, 다음 장에서는 천적인 사람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 여기서는 에스겔에서 하신 주님 말씀들만 인용합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47:12)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는 ‘성소’(sanctuary)이신 주님의 생명과 자비를 의미합니다. ‘열매’는 그들의 양식이 될 지혜이며, ‘잎사귀’는 ‘약재료’(medicine)라는 이름으로 쓰임 받게 될 지성입니다. 한편, 영적 양식을 ‘풀’(herb)이라고 하는 건 시편을 보면 나옵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1-2)

 

※ 다음은 ‘쓰임새(use)와 관련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42장, ‘천국의 기쁨과 행복(Heavenly Joy and Happiness, HH.395-414) 402번 글입니다.

 

천국의 모든 즐거움은 쓰임새 안에 모아져 있고 나타나 있다. 그것은 쓰임새가 천사들이 지닌 사랑과 이타심에서 비롯된 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천사는 그의 쓰임새에 맞게 그가 쓰임새를 사랑하는 정도만큼 즐거움을 누린다. 천국의 모든 즐거움이 쓰임새에서 나온 즐거움임은 사람 몸의 오감에 비해 보면 알 수 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는 각기 그 쓰임에 따른 고유한 즐거움이 있다. 시각에는 아름다움과 형태가, 청각에는 조화된 소리가, 후각에는 향기가, 미각에는 맛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각각의 감각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고찰에 의해 알 수 있으며, 상응원리를 알면 그 기능을 더 완전하게 알 수 있다. 시각에 고유한 즐거움이 있는 것은 시각이 사고력, 즉 내적 시각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청각에 고유한 즐거움이 있는 것은 청각은 주의집중을 통해 사고력과 의지 둘 다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후각은 뇌와 폐에 작용하고, 미각은 위장을 거쳐 간접적으로 온몸에 영양을 공급하는 기능 때문에 각기 고유한 즐거움이 있다. 촉각의 더 순수하고 정묘한 즐거움인 결혼의 즐거움이 다른 모든 즐거움보다 뛰어난 이유는 그것이 인류의 증가와 그에 따른 천사의 증가에 공헌하는 쓰임새 때문이다. 그런 여러 가지 즐거움이 오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모든 즐거움이 쓰임새 안에 있고, 쓰임새에 달려 있는 곳인 천국이 그 안으로 유입되기 때문이다. //

 

30 (AC.58, 59)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58

동일인, 곧 영적 인간의 자연적 음식을 여기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적 인간의 자연적 속성을 ‘땅의 모든 짐승’(wild animal of the earth)과 ‘하늘의 모든 새’(fowl of the heavens)로 상징하고 있는데, 그런 그에게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 시편을 보면, 거기 그의 자연적, 영적 양식 둘 다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104:14)

 

여기서 ‘가축’(beast)이라는 말이 같은 시편 앞 구절들인 11, 12절에서 언급한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둘 다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11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12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104:11-12)

 

 

59

여기 자연적 인간의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만 말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자연적 인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자연적 속성, 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전투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며,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거듭나기 전엔 탐욕이 지배적이기 때문인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전반적으로 그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교회 안에 별별 사람이 다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이 아주 정상이며, 적어도 본인이 목회자라면 교인 하나하나, 성도 하나하나를 이런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모두 안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악과 거짓의 사람이 선과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태생적으로 지옥에 적합한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 사람은 의지와 이해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의지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그리고 이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각각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은 이렇게 천국과 지옥에서 파송된 두 종류의 천사들과 악한 영들로 이루어지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최소 두 명의 천사와 두 명의 악한 영들이 와 있는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와 이해로 매 순간 일평생 천국이나 지옥을 선택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일생이며,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인데,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 그를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끊임없이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그런 걸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져서 결국은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은 개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인생 막장,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거기서 회심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이지요. 악한 영들이 아무리 끈질겨도 그들이 우리 주님의 한결같으심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무슨 의로운 습관을 결심했지만 반나절이 못 되어 또 넘어지더라도, 그리고 똑같은 결심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하더라도,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나는 나 자신을 정말 못 믿겠다 하더라도 이런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을 믿고 다시 일어서며, 다시 결심, 다시 정진하는 태도, 자세가 필요합니다.

 

※ 주님은 우리와 달리 우리 안의 악을 한방에 어떻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 악조차 우리의 생명이심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놀라우심은 그 악조차 우리를 돌이키시는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선하고 진실한 모든 것, 즉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 오직 이런 것들만 선하고 진실한데요, 이것은 그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 아주아주 극도로 증오하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양식이라고는 고작해야 ‘채소와 푸른 풀’에 비교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들과 달리 주님은 그에게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교되는 양식도 주시는데요, 이는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이며, 주님은 이 양식을 일정 간격으로 사람에게 계속 주십니다.

 

※ 여기서 우리는 악한 영들의 정체와 그들이 주는 달콤한 것의 그 숨은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그것은 그 안에 생명이 없는, 결국은 보잘 없는 ‘채소와 푸른 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곧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있어 우리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하시는, 그래서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에 들게 하시는 분임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즉 악한 영들이 주는 것은 짝퉁, 모조품, 가짜인 반면, 오직 주님이 주시는 것만이 진품, 정품, 진짜라는 것입니다.

 

[2] 주님이 사람을 매 순간, 아니 정말 눈 깜빡할 순간이라도 막아주지 않으셨으면, 인간은 즉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영들의 세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 및 신앙과 관련된 것들을 향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지독한 증오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지난 수년간, (저는 분명히 몸 안에 있었음에도) 저세상의 영들, 특히 아주 못된 영들과 본의 아니게 어울려 왔습니다.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저는 수천의 영들에 둘러싸이기도 했고, 그들은 저를 향해 독을 뱉기도 했습니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은 저를 향해 우글거렸지요. 하지만 그들은 제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릴 수 없었는데, 그것은 제가 주님의 보호 아래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 해 경험으로, 저는 정말 영들의 세계와 그 본성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현재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영생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왜 반드시 견뎌야만 하는지 하는, 영적 전투에 대하여 정말 철저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주제,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도 전혀 의심 없이 믿기에는 일반적인 설명으로는 도저히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이셨는데요, 그것은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다루겠습니다.

 

 

31 (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60

앞의 상태들에 대해서는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하시는 반면, 이 상태를 가리켜서는 ‘심히 좋았더라’(very good)고 하시는 이유는, 지금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마치 서로 결혼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61

신앙의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과 관련된 모든 것을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 사랑, 이웃 사랑(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사람의 이해에, 후자는 사람의 의지에 속합니다.

 

※ 조금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머리 신앙은 영적이요, 가슴 신앙은 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열의 문제라기보다는 태생적 특성에 가깝지만, 하여튼 주님은 천적 천사들은 가까이, 영적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 다음으로 가까이하십니다. 그러므로 본인의 특성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가급적 너무 교리, 교리 하지 마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62

사람의 거듭남과 관련하여 그 시기와 상태를 일반적, 그리고 구체적으로 여섯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 합니다. 전혀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 서서히 그는 먼저 뭔가가 되고,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여섯째 날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이 여섯째 날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 됩니다.

 

※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즉 영적인 사람은 형상, 곧 주님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며, 천적인 사람은 그 영적인 사람 안에 담기는 주님이십니다.



63

그를 위해 악과 거짓을 대항하여 끊임없이 싸우시는 한편, 주님은 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서 확실하게 하십니다.

 

※ 다음은 이 ‘주님이 나를 위해 대신 악과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심’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60장, ‘지옥 영들의 악독함과 입에 담을 수 없는 술책들(The Malice and Heinous Artifices of Infernal Spirits, HH.576-581) 577번 글입니다.

 

 

HH.576, 60장, '지옥 영들의 악독함과 입에 담을 수 없는 술책'(HH.576-581)

60지옥 영들의 악독함과 입에 담을 수 없는 술책들The Malice and Heinous Artifices of Infernal Spirits 576깊이 생각하는 사람과, 마음의 작용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영들이 사람들보다 얼마나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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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지혜와 지성이 있는 것처럼 지옥 영들에게는 그만큼의 악의와 교활함이 있다. 사람의 영은 몸을 벗어나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적 영이 그의 선 안에 있다면, 지옥적 영은 그의 악 안에 있다. 앞에서 자주 설명했듯이 모든 영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인 것은 영이 그 자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적 영은 그의 선에서, 지옥적 영은 그의 악에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악 자체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그 악에 포함된 모든 것으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2] 사람이 몸을 입고 살 동안은 그렇지 않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받는 법의 제재와 이득, 명성, 평판을 얻을 희망 또는 그것을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의 제재로 그 영의 악이 억눌려 있었고, 따라서 그 악의 참모습이 밖으로 터져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때는 사람의 영에 있는 악은 그가 세상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꾸미는 외적인 정직함, 올바름,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 등으로 포장되고 가려져 있다. 이런 가면 뒤에서 그 악은 너무도 단단히 밀폐되고 숨겨져 있어 그 자신도 자기 영이 그렇게 엄청난 악의와 교활함을 숨기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즉 사후에 영이 되면 드러날 자기의 본성이 악마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3] 사후에는 그런 악의가 스스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악하다. 악은 하나에서 수천 가지 종류가 파생하는데 그중에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나는 내게 허락된 수많은 경험으로 그 악들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관찰할 수 있었다. 주께서 내게 영으로는 영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몸으로는 자연계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은 너무도 엄청나서 그 천 분의 일을 기록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증언한다. 그 악이 너무도 커서, 만일 사람이 주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결코 지옥에서 구원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게는 천국에서 온 천사들과 지옥에서 온 영들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위 292, 293번 글 참조). 그러나 사람이 신성을 인정하고 신앙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지 않으면 주께서는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 등을 돌리고 지옥 영들에게 돌아서며, 그렇게 되면 그의 영은 자기와 동질의 악의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을 그가 달라붙는 악에서, 그리고 지옥의 영들과 교류함으로써 스스로 끌어들인다고 할 수 있는 악에서 끊임없이 떼어내신다. 사람이 신성을 부인하면 양심의 내적 제재를 받지 못하는데, 사람이 양심의 내적 제재로 악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외적 제재로 떼어내신다. 외적 제재는 앞에서 말한 대로 법에 대한 두려움과 이득, 명성, 평판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즐거움을 통해서, 그 즐거움을 잃거나 빼앗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서 악에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영적 선으로 인도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영적 선을 대하면 그 즉시 남을 꾀고 속이려고 선함과 정직함과 올바름을 가장함으로써 그 선을 술책과 교활함으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교활함은 그의 영에 들어있는 악과 결탁하여 그 특성을 주입함으로써 악에 형태를 부여한다. (HH.577) //

 

전투의 때는 주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는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빚으신 작품(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그의 모든 행위의 원리가 될 때까지, 이때 전투가 그치는데요,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이 일이 아주 순조롭게 되어 드디어 신앙과 사랑 간 결합이 일어날 때가 바로 ‘심히 좋았더라’(very good) 하시는 때입니다. 이때 주님은 그를 주님의 모양대로(as his likeness)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 거듭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영적 인간은 그릇, 천적 인간은 내용입니다. 그릇보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듯 주님의 목표, 즉 거듭남의 최종 목표는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천적 인간의 상태가 바로 안식의 상태요, 안식일입니다.

 

※ 천적 인간은 가슴 신앙이며, 매사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의 동기가 주님 사랑인 상태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의도하며,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이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은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천국, 혹은 천적 낙원(the celestial paradise)으로 인도됩니다. 이곳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 우리는 악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본성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악을 상대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와 있는 지옥의 영들을 상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는 주님과 악한 영들 간 싸움입니다. 우리가 거듭남의 최종단계에서 이제는 의지로도 주님을 사랑하여 매사에 주님 편에 서면 악한 영들은 더 이상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만 우리를 포기하고 떠납니다. 우리 안에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게 되어 드디어 싸움이 끝나고 쉼이 찾아오는데, 이 쉼은 주님의 쉼입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이 싸워오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주님이 쉬시는 걸 표상한 것이며,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을 가리켜 ‘내 안식일’이라 하신 것입니다.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9:30) //

 

 

이상으로 창세기 1장 여섯째 날에 관한 2주에 걸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섯째 날 전체 본문을 다시 한번 봉독합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4-31)

 

창조의 육(六) 일, 곧 사람의 거듭남 여섯 단계에 관한 이 전체 이야기 중 특별히 말씀드리고자 하는 한가지는 셋째 날 풀, 채소, 나무 창조에서 다섯째 날 수중 생물과 공중의 새, 그리고 여섯째 날 땅의 짐승 창조로 바로 넘어가지 않고, 중간에 넷째 날 두 큰 광명체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잘난 체하는 신앙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애정의 신앙으로 넘어가려면 중간에 사랑과 신앙이라는 불이 켜져야 한다는 것인데요, 이 점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설교

2025-08-3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8-31(D1)-주일예배(2613, 창1,24-31, AC.44-63),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의 속뜻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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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9/7, 창2:1-3),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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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8/24, 창1:24-31),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의 속뜻 (1)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의 속뜻 (1)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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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첫 주 현재 어느 정도 정돈된 양식에 따라 기존 원고들의 틀을 소급 정비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존 녹음은 정비 전 원고 녹음이며, 현 저 하단 첨부파일과 같은 내용입니다. 아래 내용은 새 원고로, 주석 원본 100%이며, 그래서 기존 주석 원본 첨부하던 거는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참고하세요.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 (1)(1:24-27, AC.44-54)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24-27) 24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25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6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27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Gen. 1:24-27)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1장, 천지창조 여섯째 날, 곧 거듭남 여섯 번째 상태에 관한 내용입니다. 내용이 길어 2주에 걸쳐 다루게 되며, 오늘은 먼저 24절로 27절까지이고, 여전히 주석 원본은 볼드체로 구분합니다. 특별히 설명은 ‘’ 부호로 구분합니다.

 

 

24, 25 (AC.44-48)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44

사람은 땅(the earth)처럼 자기 안에 먼저 신앙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이 심기지 않고서는 어떤 선도 생산, 즉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야 그걸 가지고 뭘 믿어야 할지, 뭘 행해야 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understanding)의 일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will)의 일입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행하지는 않는 것은 마치 우리는 믿음대로 살지는 않지만 믿고는 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들음과 행함을 분리, 결국 일종의 나뉜 마음을 갖게 되며, 아래 구절에서 주님이 ‘어리석다’(foolish)하신 사람들처럼 됩니다.

 

24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4, 26)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는 앞서(20) 보여드린 대로 이해에 속한 것들을, 여기 ‘땅은 생물을 내되’, ‘가축과 기는 것’, ‘땅의 짐승’은 의지에 속한 것들을 말합니다.



45

태고 시대(太古, the most ancient times)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에 관련된 것들을 이런 식으로 의미, 이해했는데, 그래서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에서도 늘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가지고 같은 걸 표현하고 있습니다. 짐승은 두 종류가 있는데 사람들을 해치는 짐승은 악하다 하고, 해를 끼치지 않는 짐승은 선하다 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악들은 악한 짐승들, 가령, 곰, 늑대, 개 등으로 표현하는 반면,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같은 본성을 가진 짐승들, 가령, 어린 암소, 양, 어린 양 등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짐승’(beasts)은 선하고 온순한 것들이며, 그래서 애정(affections)을 의미하는데, 이 본문은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더 낮은 것들, 즉 몸(body)과 더 연결된 것들은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이라 하는데, 이는 탐욕과 쾌락(cupidities and pleasures)을 말합니다.



46

‘짐승’(beasts)이 사람의 애정, 곧 악을 수반하는 악한 애정과 선을 수반하는 선한 애정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나오는 수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 먼저 에스겔입니다.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36:9, 11, 거듭남을 다루는)

 

요엘에서는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22)

 

시편에서도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73:22)

 

예레미야에서는 거듭남을 다루면서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7, 28)

 

[2] ‘땅의 짐승’(Wild animals)도 유사한 의미인데요, 호세아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2:18)

 

욥기에서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5:22, 23)

 

에스겔에서는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34:25)

 

이사야에서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43:20)

 

에스겔에서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31:6)

 

이것은 앗수르(the Assyrian)에 관한 말씀인데요,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의미하며, 영적 인간은 에덴동산으로 비유됩니다.

 

시편입니다.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148:2, 7, 9-10)

 

여기서도 같은 것들이 언급되는데요, 바로 ‘용들’(whales), ‘과수’(fruit tree), ‘짐승’(wild animal), ‘모든 가축’(beasts), ‘기는 것’(creeping thing), ‘나는 새’(fowl)입니다. 이것들이 사람 안에 있는 살아있는 원리들(living principles)을 가리킨 게 아니라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도록 호명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3] 선지서들은 ‘가축’과 ‘땅의 짐승들’(wild animals of the earth), 그리고 ‘가축’과 ‘들의 짐승들’(wild animals of the field)을 조심스럽게 구분하는데, 그러면서 사람에게 있는 선을 ‘가축’이라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과 계시록을 보면, 천국에서 주님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을 ‘생물’(animals)이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7:11)

 

AE.462에 의하면, 여기 ‘모든 천사(the angels)는 일층천, 즉 가장 낮은 천국 천사들을, ‘장로들(the elders)은 이층천, 즉 중간 천국 천사들을, ‘네 생물(the four animals)은 삼층천, 즉 가장 높은 천국 천사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19:4)

 

또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을 가리켜 ‘만민’(creatures)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롭게 창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15)

 

47

이들 말씀에 거듭남에 관한 비의(秘義, arcana)가 들어 있다는 것은, 또한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앞 구절인 24절에서는, 땅은 ‘생물, 가축, 땅의 짐승’ 순으로 내라 하시는 반면, 다음 구절인 25절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지요, 즉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만드시고, 마찬가지로 ‘가축’도 만드셨다고 말이지요. 바로 이 순서에 비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 될 때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자기 힘으로 나아가기 때문인데요, 사람의 거듭남은 이렇게 먼저 사람의 겉(the external)에서부터 시작, 차근차근 속(the internal)으로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또 다른 순서가 등장하는 것이며 겉의 일들이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48

그래서 그때, 즉 겉에서 속으로 진행할 때 이 사람을 가리켜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가운데 있다 하는데 이 상태에서는 이 사람은 말을 할 때 이해에 속한, 신앙 관련 어떤 원리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 진리 안에, 선 안에 있음을 스스로 확신합니다. 이때 이 사람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이 ‘움직이는’(animate) 것이며, 이를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가 처음엔 이해에 속한 신앙으로 말을 하다가 드디어 의지에 속한, 거기서 나오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선을 행하기 시작하면 드디어 그는 여섯 번째 상태 가운데 있는 것이며, 이때 그로 말미암는 것들을 가리켜 ‘생물’(living soul), ‘가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그가 신앙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도 행하기를 시작할 때, 그는 영적 인간이 되며,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는데, 이것이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 그러니까 ‘머리 신앙’으로 신앙생활 하던 사람이 드디어 ‘가슴 신앙’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을 가리켜 ‘영적 인간’,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가슴으로 한다는 건 생활 속 모든 말과 행동을 주님 신앙, 주님 사랑으로 하는 걸 말합니다.

 

 

26 (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49

주님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그 교회 구성원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더 많은 깊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고요, 이런 이유로 그들은 아무한테도 ‘사람’(man)이라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주님한테만, 그리고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만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한테도 이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요. 대신 다만 자기들한테 있는 것들 중 모든 사랑의 선과 모든 신앙의 진리 같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고 지각된(perceived) 것들에 한해서만 사용했습니다.

 

※ 처음에 주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시는 걸 본 태고교회 사람들은 이후 자신들을 향해 감히 ‘사람’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말한 이런 것들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었는데요,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은 오직 주님에게만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들에게 있어 ‘사람’은 오직 주님뿐이셨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선지서들에 나오는 ‘사람’(man), ‘사람의 아들’(son of man)은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을, 속뜻(the internal sense)으로는 지혜와 지성, 즉 거듭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3, 25)

 

※ 예레미야 당시 상황, 곧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한 상황에 보니 ‘사람’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든 교회든 그 안에 리메인스, 곧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남아 있어야 사람이요 교회인데 당시 유대와 예루살렘은 그런 게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라는 것이지요.

 

[3]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들에게 사람으로(as a man)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1:26)

 

다니엘은 두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인자’(人子, son of man), 즉 같은 말인데 사람(the man)이라 하였습니다.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7:13, 14)

 

[4] 또한 주님은 자주 자신을 가리켜 ‘인자’(son of man), 즉 사람이라 하시고 다니엘에서처럼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4:30)

 

‘구름을 타고’(clouds of heaven)는 말씀(the Word)의 겉 글자의 뜻(the literal sense)인 반면, ‘능력과 큰 영광으로’(power and great glory)는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인데요, 말씀의 모든 것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나 구체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능력과 영광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지요.

 

※ 태고교회가 주님을 경외하여 감히 자기를 가리켜 ‘사람’이라는 표현 사용하는 걸 삼갔다는 설명이 참 마음에 와닿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이렇게 경외해야 하겠습니다.



50

태고교회는 ‘주님의 형상’(image of the Lord)이라는 표현으로 담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있다는 것과, 모든 사람한테는 영들과 천사들이 최소한 둘씩 와 있다는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 이 사실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아래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3장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를 읽어보세요.

 

 

HH.291, 33장,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HH.291-302)

33천국과 인류의 결합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Human Race 291모든 선이 주께로부터 오고, 사람에게서 난 선은 하나도 없다는 것, 따라서 아무도 어떤 선이든 자기에게 근원을 돌리면 안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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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천사들하고는 천국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영들을 통한 영들의 세계와의 커뮤니케이션 없이는, 그리고 천사들을 통한 천국과, 그리고 천국을 통한 주님과의 커뮤니케이션 없이는 사람은 전혀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전적으로 이러한 결합에 달려 있으며, 그래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떠나가 버리면 사람은 즉시 소멸될 것입니다.

 

※ 여기서 말하는 ‘’들은 중간 영계의 영들을 말하며, 특별히 악한 영들을 말합니다. 중간 영계의 영들은 모두 천국 아니면 지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2] 아직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은 이미 시작한 사람과는 사뭇 다른 다스림을 받습니다.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한테는 그와 함께하는 악한 영들이 매사 천사들보다 더 우위를 점하는 동시에, 이때 천사들은 그가 가장 저급한 악 안으로 거꾸러져 들어가는 대신 어떤 선 쪽으로 구부러지도록 그를 그저 겨우 가이드만 어떻게 해볼 수 있을 뿐이며, 그마저도 사실 그 사람의 탐욕을 가지고 선으로, 거짓된 감각을 가지고 진리로 구부리는 정도입니다. 그는 그렇게 자기하고 있는 영들을 통해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지만 천국하고는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그를 다스리기 때문이며, 이 경우 천사들은 그들의 다스림을 외면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 천사가 뭘 하고 싶어도 사람이 마음을 먹어야만 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은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힌 나머지 오직 악하고 거짓된 것만 마음먹기 때문에 도무지 천사들이 무엇을 할 여지가, 그 결과 도저히 천국하고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애정이 악한 것을 좋아하여 악한 영들과 호흡이 맞는 한 천사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게 되며, 이때 천사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그가 가장 지독한 지옥에서 덜 지독한 지옥으로 갈 수 있도록 돕는 거밖에 없습니다.

 

[3] 그러나 그가 거듭남 가운데 있게 되면 그는 모든 선과 진리에 대해서는 천사들의 다스림(rule)과 격려를 받지만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며 끔찍하게 여기게 됩니다. 겉으로는 천사들이 다스리는(lead) 것 같지만 그들은 단지 사역자들일 뿐입니다.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는(governs)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먼저 복수(the plural number)로 이르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하는 것이며, 그러나 여전히 주님 홀로 다스리시며 다 하시기 때문에 다음 구절에서는 단수(the singular number)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하시는 것입니다. 이 또한 주님이 이사야에서 분명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44:24)

 

천사들은 더더욱 스스로 이렇게들 고백합니다. ‘저희에게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오직 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입니다’

 

※ 위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며 끔찍하게 여기게 됩니다’라는 내용 앞에 양심이 찔립니다. 저는 분명 거듭남 가운데 있는 것 같은데도 악과 거짓에 대해 솔직히 저 정도는 아니거든요.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에 나오는 ‘우리’라는 표현을 저는 그동안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삼위 하나님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세 하나님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인간 창조에 관한 의논을 하시는 줄 알았지요. 삼신(三神)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삼위일체와 삼신 사상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50

‘형상’(image) 관련해서는, 형상은 모양(likeness)이 아니고 모양처럼 생긴 것이며,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하신 것입니다. 영적(靈的, spiritual) 인간은 형상이고,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은 모양, 즉 닮음, 유사함(similitude)입니다.

 

※ 형상, 이미지를 그릇으로 보면, 모양, 닮음은 그 그릇에 담긴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 겉모습만 보면 얼핏 주님의 이미지이지만, 실제 그의 행실, 성품, 인성 등 그 속에 담긴 내용을 가지고 주님을 닮았다, 안 닮았다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은 영적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영적 인간은, 일종의 ‘형상’(image)인데, 주님은 그를 가리켜 ‘빛의 아들’(son of l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12:35, 36)

 

그를 일컬어 ‘친구’(friend)라고도 하시지요.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5:14, 15)

 

그러나 천적 인간은, 이 사람이 ‘모양’(likeness)인데요, 주님은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son of God)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12, 13)

 

 

51

사람이 영적이면 그의 전반적인 경향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말씀에,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신 것입니다. 반면, 그가 천적인 사람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때는 그의 전반적인 경향은 반대로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주님이 시편에서 자신을,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모양인 천적 인간을 묘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6-8)

 

그래서 여기 먼저 ‘들짐승’이, 그리고 차례대로 ‘새’, ‘바다의 물고기’가 언급되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출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의지(will)에 속한 사랑, 즉 무엇을 의도할 때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 인간하고는 다른 점이 영적 인간은 먼저 ‘물고기’와 ‘새’가 나오고, 나중에 ‘들짐승’이 언급된다는 점입니다. 이 물고기와 새는 이해(understanding)에 속하며 이 이해는 곧 신앙에 속합니다.

 

※ 이 ‘영적’, ‘천적’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아래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를 읽어보세요.

 

 

HH.20,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HH.20-28)

4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 20천국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다. 완전히 동일한 사회는 하나도 없고, 심지어 단 한 천사도 다른 이와 똑같지 않다.주27 As there are in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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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53

여기 ‘형상’(image)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자기 형상’(his image)은 신앙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전자인 신앙은 이해(understanding)에 속하는 반면, 후자인 사랑은 의지(will)에 속하는데요,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 있어서는 뒤따라 나오는 거지만 천적 인간에게 있어서는 앞서 나가는 것입니다.



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가 의미하는 것, 그 속뜻을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잃어버리면서 이 비의(秘義, arcanum, 단수, 복수는 arcana) 역시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그들 행복과 기쁨에 있어 최고의 원천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결혼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지각하고자(perceive)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모두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 가령, 햇볕, 곧 해의 빛과 열의 융합을 결혼으로, 자녀들 및 모든 동식물의 자식 및 열매들을 결혼의 결과로, 사람을 영과 육의 결혼으로, 삼위일체를 결혼으로 등등, 가능한 모든 것을 다 ‘결혼’으로 보고 설명할 수 있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또한 그들은 내적(內的, internal)이었기 때문에, 오직 내적인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육안으로는 그저 볼 뿐, 그러나 이게 뭘 표현하는 걸까 그 영적 천적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 이는 참 부러운 특성입니다. 오늘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말이지요. 지금 사람들은 너무나 외적(external)이요, 겉의 사람, 감각의 사람들이어서 영적 천적인 주의 말씀들도 오로지 감각적으로만 이해합니다. 가령, 신령한 사람은 방언도 유창하고 세련되게 해야 하며, 안수 기도를 하면 바로 눈앞에서 병이 척척 낫고, 각종 장애도 바로 나아야 하며, 예언 기도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 받기를 참 좋아하며, ‘’의 참 의미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무지하며, 내적(internal)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를 아예 이해조차 못 하면서도 자기는 믿는 사람이요,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자기는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므로 죽으면 천당 간다고 믿는 그런 현실입니다.

 

외적인 것들은 그들에겐 그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내적인 것들로 돌리게 하는 그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내적인 것들에서 천적인 것들로, 그렇게 그들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로,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자기들 결혼의 행복의 근원으로 지각한(perceived) 천국의 결혼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의 이해를 남자(male), 의지를 여자(female)라 하였고, 이 둘이 하나로 움직일 때, 그걸 결혼이라 하였습니다.

 

※ 태고교회는 어떤 사람의 말과 행실이 일치할 때, 그는 이해와 의지가 결혼한 상태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나중에 관습이 된 말들이 나왔는데요, 선에 관한 교회의 애정으로부터 교회 그 자체를 가리켜 ‘딸’(daughter), ‘처녀’(virgin), 이 경우, ‘시온의 처녀’(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virgin of Jerusalem) 등으로 묘사했지요, 그리고 또한 ‘아내’(wife)라 하였습니다. 이들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오늘 본문의 전반부인 24절로 27절의 속뜻을 살피며, 중간중간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으로 필요한 메시지를 대신했습니다. 후반부인 28절로 31절은 다음 주에 다루겠습니다.

 

거듭남의 최종 목표는 영적 인간, 곧 주님을 사랑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여섯째 날 상태이며, 여기까지 도달해야 비로소 천적 인간, 곧 일곱째 날, 안식일 상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 육일 간의 상태들은 모두 여기까지 오기 위한 단계별 과정들이었으며, 그 하나하나에 있었던 일들은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변화였습니다.

 

이 창세기 1장 설교 원고를 여러 번 숙독, 충분히 이해하셔서 저마다 주님이 돕고 계시는 자신의 거듭남 전 과정에 열심히 협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2025-08-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8-24(D1)-주일예배(2612, 창1,24-31, AC.44-63),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의 속뜻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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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8/31, 창1:24-31),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의 속뜻 (2)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의 속뜻 (2)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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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8/17, 창1:20-23), ‘다섯째 날, 수중 생물들과 새들’의 속뜻

‘다섯째 날, 수중 생물들과 새들’의 속뜻 (창1:20-23)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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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첫 주 현재 어느 정도 정돈된 양식에 따라 기존 원고들의 틀을 소급 정비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존 녹음은 정비 전 원고 녹음이며, 현 저 하단 첨부파일과 같은 내용입니다. 아래 내용은 새 원고로, 주석 원본 100%이며, 그래서 기존 주석 원본 첨부하던 거는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참고하세요.

 

 

다섯째 날, 수중 생물들과 새들(1:20-23, AC.39-43)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1:20-23) 20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21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2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23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Gen. 1:20-23)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1장, 그 다섯 번째 시간, 곧 다섯째 날에 관한 내용입니다. 절로는 20절로 23절입니다.

 

20 (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배치된 후, 그 빛을 겉 사람이 받으면서 일단 사람은 살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선을 행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하는 줄로,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말하는 줄로 여겼는데요, 사람이 이렇게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한, 사람은 소위 살아왔다고 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은 죽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 안에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는 없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든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선 그 자체인 그런 선을 사람은 자기 힘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선한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선한 것을 의도하는 것조차 절대 불가능하며,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선한 것을 절대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를 보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13:37)

 

또 다른 데서 하신 주님 말씀처럼 선은 그 유일하신 참 근원 되시는 분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올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19)

 

[2]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 주님은 사람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로 하여금 생명을 향해 거듭나게 하실 때, 주님은 먼저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걸 허락하시는데요, 그 이유는 그때는 사람이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또 그때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홀로 한 분이신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사실을 믿도록(to believe), 그리고 나중에는 지각하도록(to perceive) 그를 인도할 무슨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그에게 있는 진리와 선은 ‘풀’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곧 못 움직이는 것(inanimate)에 비유되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생해져서(vivified)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말하는 모든 진리를 역사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그는 먼저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이어서 ‘땅 위를 나는 새들’(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끝으로 ‘짐승들’(beasts), 곧 이 모든 움직이는 것들, 그래서 ‘생물’(living souls)이라 하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먼저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좀 살펴보면, ‘하나님’은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도 않았거나 거듭나는 중인 사람이 주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창세기 1장은 그 최종 목표가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 곧 여섯째 날 상태가 되는 것이므로 1장 내내 주님은 ‘하나님’으로만 나오십니다. 반면, ‘여호와’는 거듭남이 완료된 상태, 곧 일곱째 날 안식일 상태가 된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주님을 부르는 호칭이며, 그래서 창세기 2 4절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여호와’와 ‘하나님’은 둘 다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에 대한 호칭이지만, 전자는 신성에 대한 천적 호칭, 후자는 영적 호칭입니다.

 

참고로, 주님의 신적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에 대한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도, ‘예수’는 주님의 신적 인성에 대한 천적 호칭이고, ‘그리스도’는 영적 호칭입니다.

 

천적인 것들은 사랑(love), 선(good), 해(sun) 등이고, 영적인 것들은 신앙(faith), 진리(truth), 달(moon) 등입니다. 가장 내적 천국인 삼층천은 천적 천국인 반면, 중간 천국인 이층천은 영적 천국입니다. 일층천은 자연적 천국입니다. 천적 천국은 주님의 신성 중 선을 더 많이 받아들이는 천사들로 구성되는 반면, 영적 천국은 진리를 더 많이 받아들이는 천사들로 구성됩니다.

 

다음은 전에 작성한 제 블로그 글 일부 인용입니다.

 

 

AC.14 설명, 주님의 ‘호칭’ 관련

AC.14 설명, 주님의 ‘호칭’ 관련 (2024/6/8)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제1장,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를 보면, 이 ‘주님’이라는 호칭 관련,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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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삼아 말씀드리면, 보통 개신교 주일예배 마칠 때 하는 축도를 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고린도후서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인 13 1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에서 시작된 기도문인데요, 저는 이 표현이 어쩐지 삼신 사상을 부채질하는 것 같아 다음과 같이 수정해서 사용합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이지요. 이 표현 안에 구주 되신 한 분 주님, 그리고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령은 어디 계시냐 하시겠지만 다음은 이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True Christian Religion(1771)에 나오는, 성령에 관한 기술 일부 인용인데요,

 

All those of the clerical order who have cherished any right idea of the Lord our savior, when they enter the spiritual world (which generally takes place on the third day after death), receive instruction at first about the Divine trinity, and particularly about the Holy Spirit, that it is not a God by itself, but that the Divine operation proceeding from the one and omnipresent God is what is meant in the Word by the Holy Spirit. (TCR.138)

 

번역하자면,

 

우리 구주이신 주님에 관한 올바른 생각을 그동안 품어온 모든 성직자는 그들의 사후, 영계에 들어올 때, 이는 보통 사후 3일 차 때 일어나는데요, 먼저 신적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 특히 성령(the Holy Spirit)에 대한 소개를 받습니다. 즉 성령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 아니라 유일, 편재하시는 하나님(the one and omnipresent God)으로부터 나와 진행하는 신적 활동(the Divine operation)이며,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성령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영과 육이 있고, 또 활동이 있듯이, 주님도 영 또는 속 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 육 또는 겉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활동이신 성령으로 되어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사람을 자기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신 창조주이시니 사람을 보면 주님을 아실 수 있게 말입니다.

 

아, 그리고 우리가 그러나 분명히 성령을 통해 어떤 인격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이 주님의 어떤 활동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성령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생물’(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새들’(birds)은 보통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rational and intellectual) 것들을 의미하는데 후자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수중 생물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s)이나 ‘물고기들’(fishes)이 기억-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50:2, 3)

 

[2] 계속해서 에스겔서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새로운 성전, 즉 일반적으로 하나의 새 교회 및 그 교회에 속한 사람, 즉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십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모두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47:8-10)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 인간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3] ‘새’(birds)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사야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46:11)

 

그리고 예레미야에서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5)

 

에스겔에서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17:22, 23)

 

그리고 호세아에서 새 교회, 혹은 거듭난 사람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2:18)

 

여기 ‘들짐승’(wild beast)은 정말 들짐승을, ‘새’(bird)도 그냥 새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누가 보아도 분명한 것은, 주님은 이들과 ‘언약을 맺겠다’(make a new covenant) 하시기 때문입니다.

 

41

사람한테나 어울리는(proper to man) 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게 제법 메인으로 보일지라도 천사들이 볼 때는 무슨 딱딱한 뼈나 까만 덩어리로 보이지요.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 천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만일 볼 수 있도록 재현될 때는 휴먼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정말 믿기 어렵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된 사실은 천사 같은 영(an angelic spirit)의 모든 표현 하나, 모든 아이디어 하나, 그리고 모든 지극히 사소한 생각까지도 살아 있는(alive) 상태라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조각들 안에도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애정을 포함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들 안에 주님을 향한 신앙이 들어있기 때문인데요,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생물’(living soul)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일종의 몸을 가지고 있는데 이걸 여기서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what moves itself), ‘기는 것’(creeps)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들 진리는 사람에게는 아직 너무나 깊은 비밀들(deep secrets)임에도 살짝 말씀드리는 것은 본문에 ‘생물’(living soul), ‘스스로 움직이는 것’(thing moving itself)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천사에 대한 세 가지 다른 표현이 가끔 나오는데요, 각각 ‘’, ‘천사 같은 영’, ‘천사’입니다. 이는 각각 일층천, 이층천 및 삼층천에 상응합니다. 아마 처음 천적 천국밖에 없던 시절을 염두에 둔, 그래서 진정한 천사는 천적 천사들뿐이라는 생각으로 사용하던 표현 같습니다.

 

윗글은 ‘그게 무엇이든’, ‘모든 표현 하나’, ‘모든 아이디어 하나’, ‘모든 지극히 사소한’, ‘가장 작은 조각들’ 등 뭔가 가장 작은 걸 표현하려고 애쓰는 걸 봅니다. 아마 ‘분자’, ‘원자’ 단위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은데, 이 ‘분자’라는 개념은 찾아보니 1811년에 처음 시작되었더군요. 스베덴보리는 1772년에 별세하였으므로 그때까지는 없었던 개념이었고, 그래서 이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나 봅니다. 근접한 성경 표현으로는 ‘일점일획’이 있겠습니다.



 

21 (AC.42)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42

‘물고기들’(Fishes)은 앞서도 말했듯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으로 움직이는 상태가 된, 그래서 살아있는 상태가 된 기억-지식들을 말합니다. ‘큰 바다짐승들’(whales, 고래, 또는 고래와 같은 거대한 수중 생물들)은 그들, 즉 기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their general principles)을 말하는데, 이들은 세부 원리들이 이들과 종속 관계에 놓이거나(in subordination to) 말미암는(from) 그런 것들입니다. 이 우주에서는 존재(exist) 및 존속(subsist)을 할 수 있으려면 다 자기의 근원이 되는 그런 더 일반적인 원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래들’(Whales), ‘큰 바다짐승들’(great fishes)이 선지서에서 가끔 언급되는 이유는 이들이 거기서 기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뜻하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 293절을 보면, 애굽 왕 바로를 가리켜 ‘큰 악어’(great whale)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큰 악어’는 인간의 지혜, 지성, 즉 일반적으로 지식[scientia]을 말하는 것이지요.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29:3)

 

[2] 그리고 다른 데서도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32: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는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 안으로 들어가고자 무척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들인 겁니다.

 

이사야에서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는 것은 진리의 일반적 원리들조차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51:34)

 

이는 큰 물고기가 요나에게 한 것처럼 ‘좋은 음식’(delicacies)이라고 한 신앙의 지식들을 그가 삼켰다는 것입니다. ‘큰 뱀’(whale)은 신앙 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단지 기억-지식들로만 소유하고, 또 그런 식으로만 행동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늘날 생물 분류 용어로는 일반적으로 ‘(, Kingdom), ‘(, Phylum 동물, Division 식물), ‘(, Class), ‘(, Order), ‘(, Family), ‘(, Genus), ‘(, Species)이 있습니다. 이중 스베덴보리와 교류가 있었던 린네 때는 ‘’과 ‘’, 두 가지 분류만 있었고, 그래서 스베덴보리도 이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42번 글은 이런 분류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식물계, 동물계, 광물계가 있고, 식물계 아래 또 수많은 분류가 있으며, 맨 아래 ‘’ 아래 수많은 ‘’이, ‘’ 아래 또 수많은 개체가 있듯, 기억-지식을 포함, 주님의 수많은 선과 진리 역시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정리, 정돈되다는 말이지요.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근원, 단 하나의 뿌리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습니다. 모든 분류의 정점에 홀로 주님이 계십니다.

 

22-23 (AC.43)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43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어마어마하게 결실하며 번성하는데요(fructifies and multiplies), 몸 안에 사는 이생뿐 아니라 사후 저세상에서는 정말 어리둥절할 정도입니다. 말씀에서 ‘생육하다’(生育, be fruitful)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관한, 그리고 ‘번성하다’(繁盛, multiply)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관한 서술입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에는 ‘씨’(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말미암아 놀랍게 번성합니다.

 

 

들의 풀과 나무, 강과 바다의 물고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꽃 한 송이, 가령 해바라기는 그 넓은 둥그런 꽃 한 판에 얼마나 많은 씨가 있으며, 열매, 가령, 옥수수 한 자루엔 얼마나 많은 알갱이가, 벼나 보리, 수수 같은 곡식들 한 줄기 줄기엔 또 얼마나 많은 낱알이 맺히는지... 나무 한 그루도 보면, 가령 은행, 호두, 대추, 밤, 감, 사과 등등... 얼마나 많은 열매, 과일이 열리는지... 물고기는 또 어떤가요? 명란젓 만드는 명태 한 마리가 낳는 알은, 대구는, 오징어는? 등등... 또한 얼마나 그렇게 어마어마한지... 끝이 없습니다. 참으로 어리둥절할 정도로 아주 심하게 번성합니다. 이 세상도 이 정도인데 사후 저 천국은 정말 어리둥절할 정도로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인간과 달리 동, 식물의 경우, 주님의 이 정하신 복, 명령하신 축복이 예외 없이 그대로 시행되는 이유는, 동, 식물의 경우는 본능만 있을 뿐 스스로 무엇이 없어 주님이 정하신 질서를 거역하거나 뒤집거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정하신 쓰임새 그대로 존재하며, 존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 판단하고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최선인 줄 알면서도 버젓이 악을 행하고, 창조주의 질서를 뒤집어 훼방을 놓고 엇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변수가 많으며, 오히려 주님의 복 받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인간의 삶 가운데 화와 불행은 그 스스로가 자초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오늘 본문 동, 식물의 이런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 가운데 살기를 원한다면... 마찬가지로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과 능력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흘러 들어오게 하면 됩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복(, blessing)은 풍성한 결실과 번성을 의미하는데요, 이런 생육과 번성이 모두 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복은 사람 안에 천국이 있는 상태이며, 피조물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문제이지, 주님이 주시고, 안 주시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상이 오늘 본문의 속뜻이며, 다음은 그 가운데 특별히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처럼 큰 그림을 보자는 겁니다.

 

이 창세기 1장, 거듭남의 여섯 단계, 즉 상태는 대략적인 것입니다. 사실은 각 단계와 단계 사이 그 사이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태들이 있지만, 큰 틀에서 큼직큼직 주님은 이렇게 보신다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각 단계별 의도하시는 주님의 목표일 수도 있겠어요. 이런 큰 목표, 큰 그림들을 붙들고 가는 것의 유익은, 그래야 사이사이 자잘한 것들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인데요,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을 보면, 사이사이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나는데, 그 하나하나에 너무 진지하다 보면 금방금방 실망하고 낙심하고, 그래서 그만 마음이 쉬 식기 때문입니다. 오래 가려면 멀리, 큰 그림을 보며 가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기억-지식, 곧 세상 지식도 거듭나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속뜻 얘기를 하다 보면 살짝 속과 관련된 것만 중요하고, 겉 관련된 건 모두 별 무가치한 듯한 착각을 할 수도 있는데요, 그게 절대 아닌 것은, 겉이 결국 속의 완성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영이 중요하다고 영, 영만 하면, 결국 사람에 대한 이상한 이해를 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영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육이라는 옷을 입어야만 활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이 중요하긴 하지만, 아직 이 세상 삶에서는 겉이라는 옷을 입어야 하며, 그래서 그 겉의 일부인 이 세상 지식, 곧 기억-지식 역시 기회 있을 때, 부지런히 습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셔도 우리 안에 뭔가 기초가 있어야 그걸 일종의 불쏘시개 삼아 불을 피우실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다만,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세상 지식은 어디까지나 쓰임새, 곧 주님께 쓰임을 받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 지식조차도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세상 지식은 그걸 소유한 사람을 얼마나 망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네, 이렇게 해서 창세기 1장 다섯째 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틈틈이 복습하셔서 창세기 1장부터 다들 전문가가 되시길, 그래서 그 기초를 아주 튼튼히 놓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2025-08-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8-17(D1)-주일예배(2611, 창1,20-23, AC.39-43), ‘다섯째 날, 수중 생물들과 새들’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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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는 오늘 설교의 유튜브 오디오입니다.

 

 

주일예배(2025/8/24, 창1:24-31),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의 속뜻 (1)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의 속뜻 (1)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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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8/10, 창1:14-19), ‘넷째 날, 두 큰 광명체’의 속뜻

‘넷째 날, 두 큰 광명체’의 속뜻 (창1:14-19)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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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마지막 주 현재 어느 정도 정돈된 양식에 따라 기존 원고들의 틀을 소급 정비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존 녹음은 정비 전 원고 녹음이며, 현 저 하단 첨부파일과 같은 내용입니다. 아래는 새 원고로, 주석 원본 100%이며, 그래서 기존 주석 원본 첨부하던 거는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참고하세요.

 

 

넷째 날, 두 큰 광명체(1:14-19, AC.30-38)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1:14-19) 14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15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6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17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8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9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Gen. 1:14-19)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1장, 그 네 번째 시간, 곧 넷째 날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쯤에서 1장 전체 개요를 다시 한번 상기하고 진도 나가겠습니다. 아래는 개요입니다.

 

6

6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가운데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7

첫 번째 상태는, 유아기 상태와 거듭남이 시작되기 직전 상태 둘 다를 포함하는 선행 상태입니다. 이것을 ‘혼돈’(void),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하며, 그 첫 번째 움직임이, 곧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요,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8

두 번째 상태는, 주님에게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들 사이 구별이 생기는 때입니다. 주님에게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라 하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신앙 관련 지식들, 그러니까 유아기 때부터 배워 온, 그리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그러나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를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그런 신앙 지식들을 말합니다. 오늘날엔 이 상태는 쉽게 보기 어려운데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그러니까 인간한테나 어울리는 이런 일시적인 것들에 푹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인생의 큰 시험이나 불행, 혹은 큰 슬픔을 만나면 그제서야 그런 삶이 마치 죽어버리기라도 한 듯 멈추고, 정신이 번쩍 들기 때문입니다. 이때 겉 사람(the ex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이 속 사람(the in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즉 일시적인 것, 썩어 없어질 물질적인 것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때이지요. 이 속 사람 안에 앞서 말한 리메인스가 있는데, 이것은 주님이 이때, 그러니까 이 두 번째 상태 때 쓰시려고 그의 속 사람 안에 차곡차곡 보관하신 것들입니다.

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 말미암아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같은 선을 행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 모든 걸 자기가 하는 걸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이지요. 이런 선을 ‘풀’(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나중에는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스럽고 애정 어린 사람이 되고, 신앙으로 빛나는 사람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 실제로 경건한 담론도 하고, 선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가 수고한, 즉 자초한 시험과 엄격함의 결과이지, 신앙과 체어리티로 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의 애정으로, 그리고 빛을 받은 신앙으로 하게 되었고, 그런 까닭에,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는 그의 속 사람 안에서 활활 불타오르는데, 이를 두 ‘광명체’(two luminaries)라고 합니다.

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의 담론을 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진리와 선 안에 있음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이 살아 움직이는데, 이를 일컬어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birds of the heavens)라고 합니다.

 

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때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일컬어 ‘생물’(living soul)과 ‘가축’(beast)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신앙과 사랑 둘 다를 가지고 바로 행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spiritual man)이 되며, 이런 그를 일컬어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그의 영적 삶(생활, 생명)은 신앙에 속한 지식과 체어리티에 속한 행위로 말미암아 기쁜 삶이 되며, 또 유지됩니다. 이런 지식과 행위를 일컬어 그의 ‘먹을거리’(food)라고 합니다. 반면, 그의 자연적 삶은 몸과 몸의 감각에 속한 것들로 말미암아 기쁜 삶이 되고 유지되는데, 바로 이 지점이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그의 안에서 사랑이 주(, the dominion)가 되며, 그가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될 때까지 말이지요.

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리고 아주 적은(few) 수가 여섯 번째에 이르고, 일곱 번째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은 거의(scarcely) 없습니다.

 

 

이상의 개요를 머릿속에 사진처럼 기억하신 후, 이제 오늘 본문에 대한 절 별 속뜻 들어갑니다. 개요가 중요한 것은 개요는 일종의 길잡이요 가이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속뜻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번도 안 가 본 길이기 때문이지요.



14-17(AC.30-37)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30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의 의미는 먼저 신앙의 본질(the essence of faith)과, 그리고 새롭게 빚어지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그 진행 과정을 알기 전까지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 그 자체이신 분은 한 분 주님뿐이신데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주님 친히 요한복음에서 선언하신 것처럼 생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2] 새롭게 빚어지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신앙의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맨 처음, 그들에게는 생명이라는 게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데요, 먼저는 기억 신앙(faith of the memory)입니다. 일종의 지식일 뿐인 신앙(a faith of mere knowledge[fides scientifica])이지요. 다음은 머리 신앙(faith in the understanding)으로, 일종의 지적 신앙(an intellectual faith)입니다. 끝으로 가슴 신앙(faith in the heart)입니다. 사랑 신앙(the faith of love), 구원 신앙(saving faith)이라고도 하지요. 앞 첫 두 종류의 신앙을 3절로 13절에서는 못 움직이는(inanimate) 것으로, 사랑으로 활기찬 신앙을 20절로 25절에서는 움직이는(animate)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여기서 먼저 다루는 것이며, 이르시기를 ‘광명체들’(luminaries)이라 하시고, 이때 사랑을 ‘낮을 주관하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밤을 주관하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단수로 언급됩니다.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luminaries)be 동사의 라틴어 표현을 보면 sit입니다. 복수 표현인 sint가 아니지요.

 

[3] 속 사람의 사랑과 신앙은 육체를 가진 겉 사람에게 있어서는 열과 빛 같은 건데요, 이런 이유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되며, 이것이 광명체들을 일컬어 ‘하늘의 궁창에 있다’(set in the expanse of heaven), 즉 속 사람 안에 있다 하는 이유입니다. 큰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의지(will)에, 작은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이해(understanding)에 말입니다. 그러나 햇빛은 그 빛의 수용체가 있어야만 볼 수 있듯 이들은 의지와 이해 안에서만 나타납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그리고 이해를 진리, 즉 신앙으로 표현하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입니다.

 

※ ‘의지를 사랑으로 표현한다(affects the will with love)는 것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을 보면 그의 의지, 곧 그가 어떤 마음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31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의미하며, ‘해, 달, 별들’(sun, moon, and stars)이라고도 한다는 사실은 에스겔 같은 선지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7, 8)

 

이 구절에 나오는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말씀에서 그저 감각이요, 지식일 뿐인 원리(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감각과 지식일 뿐인 것들을 통해 사랑과 신앙이 끝나버렸음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그렇습니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13:9, 10)

 

다시, 요엘에서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2:1-2, 10)

 

[2] 다시 이사야에서, 주님의 오심(the advent of the Lord)과 이방인들,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새로운 교회이지요,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받아 거듭나고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이 밝아짐에 관해 말하면서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60:1-3, 20)

 

그래서 시편에서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148:3, 4)

 

[3] 이들 모든 구절에서 ‘광명체들’(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의미합니다.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끊임없이 등불이 타오르게 하신 이유는 바로 이것, 곧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상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교회의 모든 규례가 주님에 관한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었기 때문인데요, 이 등불(luminary, 광명체)에 대하여 기록된 바로는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27:20, 21)

 

이런 것들이 사랑과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 곧 주께서 거기에 불을 붙이셔서 먼저 속 사람에게 빛을 비추시고, 그렇게 속 사람을 통해서 이번에는 겉 사람을 비추시는 이런 주님의 신성하신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대해서 앞으로 해당 말씀에서 보시게 됩니다.

 

32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고 하시다가, 그다음엔 사랑은 ‘큰 광명체’(greater luminary), 신앙은 ‘작은 광명체’(lesser luminary)라 하시고, 계속해서 사랑에 관해서는 ‘낮을 주관하라’(rule by day), 신앙에 관해서는 ‘밤을 주관하라’(rule by night) 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감추어진, 특히 종말의 때(end of days)인 이때 감추어진 아르카나(arcana, 단수 arcanum, 秘義)인데, 이들에 대한 설명이 지금 이렇게 허락된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인함입니다. 이들 아르카나가 종말인 이때 특히 더 봉인된 이유는 지금이 시대의 끝(the consummation of the age), 곧 사랑이라는 게 아주 희귀하고, 그 결과 신앙이라는 것 또한 아주 희귀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 친히 복음서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4:29)

 

여기서 ‘해’(sun)는 사랑을 의미하는데 어두워지며, ‘달’(moon)은 신앙을 의미하는데 빛을 내지 않습니다. ‘별들’(stars)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인데 하늘에서 떨어지며, 이들이 곧 ‘하늘의 권능들’(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입니다.

 

[2]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사랑 그 자체 말고는 무슨 다른 신앙을 인식하지도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天的, The celestial angels) 또한 사랑의 신앙 말고는 신앙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천국 전체가 일종의 사랑의 천국인데요, 천국에서는 사랑의 생명 말고 무슨 다른 생명이라는 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국의 모든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며, 이는 단 한 번도 그 설명이 허락된 적도, 심지어 인류 그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어서 그래서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사랑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선언하고지각하기도 하는데요, 그것은 모든 사랑은,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모든 생명은, 이 생명은 오직 사랑에만 속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모든 행복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며, 자기들한테서는 그 어떤 사랑이나 생명, 행복도 말미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은 또한 기록된 대로 주님의 변모, 변형(變形, transfiguration) 관련, 큰 광명체, 즉 ‘해’(sun)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17:2)

 

내면 가장 깊은 것들이 얼굴로,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것들은 옷으로 상징되는데요, 그래서 주님의 신성(神性, the Lord’s Divine)이 ‘해’(sun), 즉 사랑으로, 주님의 인성(人性, his human)은 ‘빛’(light), 즉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상징된 것입니다.

 

 

33

약간의 사랑이라도 없이는 생명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고서는 기쁨(joy)이라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 이 사실을 아주 잘 아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능력이지요. 사랑, 생명, 기쁨이란 이런 것, 곧 이렇게 서로 본질적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한테서 사랑을, 같은 말이지만 무언가 그가 간절히 원하는 걸 제거한다면 그 순간 그는 그 즉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게 되며, 놀랍게도 무슨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맙니다. 생명에 대해 지금까지 제가 영계, 특히 천국에서 목격했던 장면들처럼 말입니다. 자기 사랑(the loves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the world) 안에도 생명이나 기쁨하고 뭔가 닮은 게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둘은 참된 사랑하고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사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움(hatreds)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그에 비례해서 이웃을, 그리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사람이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 사랑과, 그리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이웃 사랑은 바로 이 참된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이런 까닭에 참된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요, 참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고,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참된 사랑은 단 하나만 있을 수 있으며 참된 생명 역시 그런데요, 이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더할 나위 없는 참된 행복(felicities)이 흘러나오지요. 천국에 있는 천사들에게 속한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34

사랑과 신앙은 분리가 허락된 적이 없습니다. 이 둘은 하나를 이루며 같은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명체들’(luminaries)이 처음 언급될 때 그들은 하나로 여겨졌으며, 그래서 이르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하신 것입니다.

 

※ 라틴어 단수 표현 [sit]에 주목하세요.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Writings)은 라틴어로 저술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다음의 정말 놀라운 세부 내용들을 이런 배경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은 천적 사랑(the celestial love)에 힘입어,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 사랑 안에 있는데요, 신앙 관련 모든 지식에 있어 이 사랑으로 말미암으며, 설명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그런 어떤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신앙의 교리들에 관한 지식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러나 사랑은 없는 그런 영들의 경우, 그들은 천국 마당의 첫 번째 문턱조차 접근은 고사하고 도로 달아날 수밖에 없는, 그런 어떤 냉기 어린 삶이나 희미한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 중 더러는 그분의 계명대로 살지 않았으면서도 말하기를, 자기들은 주님을 믿어왔다고 하는데요, 이것을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1, 22, 끝까지)

 

[2] 그래서 분명한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또한 신앙 안에 있으며, 그렇게 해서 또한 천국의 삶 가운데 있는 반면, 말로는 자기들은 신앙 안에 있다 하면서, 그러나 실제 사랑의 삶 가운데 있지는 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볕(열) 없는 빛과도 같습니다. 겨울철에도 물론 햇빛은 있지만 그 빛 안에 열이 없어 결국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하고 만물이 죽은 듯 무기력해지는 그런 계절처럼 말입니다. 반면, 사랑을 동반한 신앙은 봄철 햇빛과도 같아서 열매 맺게 하는 햇볕 아래 만물이 자라고 번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영적 천적인 것과 관련하여 아주 흡사한데요, 그래서 말씀에서는 보통 지상에 존재하는 것을 가지고 영적 천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시대의 끝, 종말을 예언하실 때 신앙이 없거나 사랑 없는 신앙을 또한 ‘겨울’(winter)로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입니다.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13:18, 19)

 

여기서 ‘이 일’(Flight, 비행, 들림, 휴거)은 마지막 때를,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가 죽는 때를 의미합니다. ‘겨울’(Winter)은 사랑이 결핍된 삶을, ‘환난의 날’(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 삶의 끔찍한 상태를 말합니다.

 

※ 휴거는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인데요, 같은 본문의 마태복음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4:31)

 

AC.4060번 글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갑자기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결정적일 때 쓰신 것입니다. //

 

 

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능력(faculties)이 있는데, 바로 의지(意志, will), 곧 의도하는 능력과 이해(理解, understanding), 곧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이해가 의지의 통치를 받을 때 이 둘은 한마음이 되며 하나의 생명을 구성합니다. 그때 사람은 마음먹고 행하는(wills and does) 것을 또한 생각하고 의도하기(thinks and intends)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불일치할 때, 즉 말로는 신앙을 가졌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신앙과 모순되게 살 때, 이때는 한마음이 둘로 나뉘는데요, 하나는 천국을 향하고자 하고, 다른 하나는 지옥을 향하고자 합니다. 의지는 모든 행위에 있어 행위자(doer)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완전히 지옥으로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만일 주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면 말입니다.

 

 

36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해 온 사람들은 사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을 생각할 때어떤 사람들은 그건 단지 생각일 뿐이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건 주님을 직접 향하는(directed toward the Lord) 생각이라고 합니다. 소수만이 그것은 신앙의 교리(the doctrine of faith)라고 하지요.

 

※ ‘주님을 직접 향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왕 앞에 나아가듯 주님을 직접 알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거의 모든 신앙인이 대부분 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천국에서는 근본적으로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천국과 지옥15번 글입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 개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의도하고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HH.15) //

 

신앙이라는 것은 신앙의 교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일종의 지식과 인정(認定, acknowledgment) 및 뿐만 아니라 특히 그 교리들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일종의 복종입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그리고 사람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주된 포인트는 바로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안에 있는 게 아니라면 그는 신앙 안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마가복음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아주 명료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이 둘 중 첫째를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셨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22:37-40)라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는 신앙 관련, 범 우주적 교리와 말씀 전체를 말합니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

 

 

37

광명체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를 이루게 하라 하십니다. 이들 말씀에는 지금 단계에서 밝힐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들어 있습니다. 글자 상으로는 이런 종류의 아르카나가 전혀 보이지 않아도 말이지요.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 사이에는 교대(alternations), 반복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일반적이든 아니든 말이지요. 날과 해의 변화와도 비교할 수 있겠네요, 네, 이런 사실을 관찰하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하겠습니다. 날의 변화는 아침, 정오, 그렇게 저녁, 밤을 거쳐 다시 아침이지요. 해의 변화도 비슷합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그렇게 가을, 겨울을 거쳐 다시 봄으로 이어집니다. 열과 빛의 교대가 그래서 가능한 것이고, 땅에서 나는 소산물들도 그렇습니다. 영적 천적인 것들 간의 교대를 이들을 가지고 비교할 수 있는데요, 이런 교대와 다양성이 없으면 삶은 천편일률적이 되며, 그 결과, 전혀 삶이라고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선과 진리도 전혀 알아차리지도, 구분, 심지어 지각조차도 할 수 없게 되지요. 이런 교대를 선지서에서는 ‘법도’(ordinances, [statuta])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5, 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5)

 

그러나 이런 것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로 창세기 822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8:22) (AC.930-937)

 

18, 19 (AC.38)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38

‘낮’(day)은 선을, ‘밤’(night)은 악을 의미하며, 그래서 선을 낮의 일, 악을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빛’(light)은 진리를, ‘어둠’(darkness)은 거짓을 의미합니다.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3:19, 21)

 

 

오늘 설교 준비는 유난히 좀 힘들었는데요, 그러나 끝까지 저를 권하셔서 붙들어 주고 계시는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안에, 제 안에 이 사랑과 신앙의 불을 켜주신 주님, 제가 끝까지 이 불빛 아래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2025-08-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8-10(D1)-주일예배(2610, 창1,14-19, AC.30-38), ‘넷째 날, 두 큰 광명체’의 속뜻.pdf
0.49MB

 

아래 링크는 오늘 설교의 유튜브 오디오입니다.

 

 

 

주일예배(2025/8/17, 창1:20-23), ‘다섯째 날, 수중 생물들과 새들’의 속뜻

‘다섯째 날, 수중 생물들과 새들’의 속뜻 (창1:20-23)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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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8/3, 창1:9-13), ‘셋째 날, 풀, 채소, 나무’의 속뜻

‘셋째 날, 풀, 채소, 나무’의 속뜻 (창1:9-13)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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