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3:15-19, AC.250-279)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man [vir])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15-19)

 

 

창세기 속뜻 주석설교, 오늘은 창세기 3장 두 번째 단락 두 번째 시간으로, 지난주에 이어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3:15-19) 계속입니다.

 

먼저 개요입니다. (반복)

 

234

홍수로 이어지는 교회의 후속 상태(The subsequent state of the church down to the flood)가 여기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자신을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집니다.



235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거 믿는 걸 내켜 하지 않음으로써, 감각 파트는, 이게 바로 ‘뱀’(serpent)인데, 자신을 저주했고, 즉 그 자체가 저주였고, 그 결과 지옥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14)



236

이런 이유로 온 인류가 지옥을 향해 뛰어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주님은 세상에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15)

 

 

237

교회가 ‘여자’(woman)라는 표현으로 더 깊이 설명되고 있는데요, 이 교회는 더 이상 진리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아(self), 즉 본성(own)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이 본성을 ‘통제하라’(rule)는 합리적 능력(合理, a rational)이 그들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6)

 

 

238

다음은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래셔널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rational)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기 보면, 이 합리적 능력은 자아, 즉 본성에 동의, 저주를 자초하더니 결국 지옥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남아 있는 이성(理性, reason)은 없고, 대신 이성 노릇을 하는 추론 능력(推論, ratiocination)만 남게 된 것이지요. (17)

 

 

239

저주와 황폐함, 그리고 길들여 지지 않은 본성(nature), 즉 야생으로 돌아간, 짐승 수준이 되어버린 그들의 본성에 관한 설명입니다. (18)

 

 

240

다음은,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을 향한 그들의 혐오와,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처음에는 사람이었다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19)

 

 

241

태고인들은, 천적(天的, celestial), 그러니까 상응 능력이 있어서, 땅 위 온 세상 만물을 눈으로, 즉 육안(肉眼)으로 보면서도 속으로는 그 사물이 가리키고 표상하는 천국 신성한 것들을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시각(sight)은 그저 창문 역할, 안경 역할이었을 뿐, 그들이 실제 뭘 봤는지를 알 수 있는 건 그들의 말(speech)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런 걸 알 수 있는데요, 만일 누가 어떤 사람이 하는 말에 깊이 동의가 되면, 그는 실제로 그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마치 말 자체보다는 말에 담긴 의미만 건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심지어 그 말의 의미보다 더 보편적인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후손들은 그들의 선조들하고는 달랐습니다. 이들 역시 땅 위 온 세상 만물을 눈으로 보았지만, 선조들과 달리 이들은 마치 사랑하듯 보았고, 마음과 생각이 거기에 사로잡혔으며, 그걸 가지고 천국 신성한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들과 함께 감각적인 것이 원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선조들한테는 한낱 도구였을 뿐인 것들이 말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속한 것, 땅에 속한 것이 원리가 되면,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걸 이걸 가지고 이성질(理性질, reason)을 하며, 그런 식으로 눈이 머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는 것 역시 각자의 경험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서 정작 그 말의 의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 말에서 건지는 게 거의 없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의미는 더 말할 것도 없으며, 때로는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을 단어 하나 가지고, 심지어 어떤 문법적 특이점을 가지고 판단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절 별 속뜻입니다. 지난주 14절에 이어 오늘은 15절부터입니다.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C.250-260)

 

250

모든 사람이 이 구절을 주님의 강림(降臨)에 관한 첫 번째 예언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워딩을 보면 분명 그렇게 보이며, 그래서 이 워딩과 예언서들로 인해 유대인들조차 어떤 메시아가 오시는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serpent), ‘여자(woman), ‘뱀의 후손(serpent’s seed), ‘여자의 후손(woman’s seed),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head of the serpent which was to be trodden upon),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heel which the serpent should bruise)라는 표현들이 특별히 뭘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들이 먼저 설명되어야만 하는데요, 여기 (serpent)은 일반적으로는 모든 악을, 특별히는 자아 사랑(the love of self)을 의미합니다. ‘여자(woman)는 교회를, ‘뱀의 후손(serpent’s seed)은 모든 부정(不貞, infidelity), ‘여자의 후손(woman’s seed)은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 ‘(he)는 주님 자신을, ‘뱀의 머리(head of the serpent)는 일반적으로는 악의 지배(the dominion of evil), 특별히는 자아 사랑의 지배를, ‘상하게 하다(trample upon)는 암울함(depression),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을지니라(go upon the belly and eat dust), ‘발꿈치(heel)는 자연적(natural as the corporeal)으로 가장 낮은 것, 곧 뱀이 상하게(bruise)할 것을 의미합니다.



251

‘뱀’(serpent)이 일반적으로는 모든 악을, 특별히는 자아 사랑을 의미하는 이유는, 모든 악은 마음의 감각 파트에서, 그리고 처음부터 ‘뱀’(serpent)으로 상징된 기억-지식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며, 그래서 여기 나오는 뱀은 모든 종류의 악, 특히 자아 사랑, 즉 이웃과 주님을 향한 증오를 가리킵니다. 이 악, 곧 증오는 다양, 수많은 속(, genera)과 더욱 수많은 종(, species)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뱀’(snakes, 23:33), ‘독사’(cockatrices,8:17), ‘독사’(asps,32:33), ‘독사’(adders,140:3), ‘불뱀’(fiery serpents,21:6), ‘날으는 뱀’(serpents that fly, 14:29), ‘기는 뱀’(that creep), ‘독사’(vipers, 23:33)등인데요, 독, 곧 증오의 차이에 따른 것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23: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8:17)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라 (32:33)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140:3)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21:6)

 

그래서 이사야에 보면은

 

블레셋 온 땅이여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뱀의 뿌리에서는 독사가 나겠고 그의 열매는 날아다니는 불뱀이 되리라 (14:29)

 

‘뱀의 뿌리’(serpent’s root)는 감각 및 기억-지식과 연결된 마음의 파트나 원리를, ‘독사’(cockatrice)는 거짓의 기원이 된 악을, ‘날아다니는 불뱀’(flying fire serpent)은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탐욕을 각각 가리킵니다. 같은 선지서 또 다른 데들을 보면, 유사한 표현들이 나오는데요,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59:5)

 

여기 창세기에 나오는 뱀을 계시록에서는 ‘큰 붉은 용’(great and red dragon), ‘옛 뱀’(old serpent), ‘마귀, 사탄’(devil and satan), ‘온 천하를 꾀는 자’(deceives the whole world)(12:3, 9; 20:2)라고 하는데요, 또 다른 구절들에서도 여기 나오는 ‘마귀’(devil)는 그 무슨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특별한 마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악한 영들의 무리 전체를, 그리고 악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12:3)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2:9)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20:2)

 

위 ‘여기 나오는 ‘마귀’(devil)는 그 무슨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특별한 마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악한 영들의 무리 전체를, 그리고 악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부분에 대한 보충 설명이 아랫글에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5장,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로 구성된다311번 글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인류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처음부터 천사는 천사로 창조되어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고, 마귀 또는 사탄도 빛의 천사였다가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내쫓겨 지옥을 형성했다고들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에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에 천사들은 무척 놀라고, 천국이야말로 교회 교리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데 더욱 경악한다. 그러나 또한 그런 무지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많은 사실이 기독교 사회의 사람들에게 밝혀지게 되었고, 기독교가 종말을 맞아 어둠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 계시로 인해 그 어둠이 가능한 한 많이 걷히게 되었다고 천사들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2] 그래서 천사들은 내가 그들의 다음 말을 증언해 주기를 원했다. “천국 전체에 처음부터 천사로 창조된 천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지옥에도 빛의 천사로 창조되었다가 쫓겨난 악마는 없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전부 인류가 가서 이룬다. 천국은 세상에서 천국의 사랑과 신앙으로 산 사람들로, 지옥은 지옥적 사랑과 신조로 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 마귀나 사탄은 지옥을 통칭하는 말이다. 마귀는 악마들이 모여 사는 뒤쪽 지옥을, 사탄은 악령들이 모여 사는 앞쪽 지옥을 말한다. 각 지옥의 속성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3] 천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사회가 천국과 지옥의 구성에 대해 잘못 믿는 것은, 해당 구절들을 오로지 글자 그대로 이해했을 뿐, 말씀에서 이끌어 낸 참된 교리로 깨우침이나 설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의 문자 상의 의미는 참된 교리로 설명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오도하고, 이것이 무지한 견해와 이설과 오류를 낳는 것이다.” (HH.311)



252

여자(woman)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건 위 천국 결혼을 다룬 155번 글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이, 결과적으로는 교회가 본성(own)에 있어 주님과 하나 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천국 결혼의 본질(nature)인데요, 이때 천국과 교회, 주님도 각자 자기 본성 안에 있는 만큼 하나가 되는 그런 하나 됨입니다. 본성 없이는 하나 됨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자비로우신 주님이 이노센스(innocence)와 평화, 그리고 선을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들게 하실 때, 이 본성은 자신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여전히 유지하면서도, 천적이며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됩니다. (164번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천적 천사들의 본성의 어떠함과, 자아(self)로 말미암아 지옥 상태, 악마 상태가 된 본성의 어떠함은 도저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차이는 천국과 지옥 같은 차이입니다.



253

교회를 일컬어 ‘여자’(woman), ‘아내’(wife), ‘신부’(bride), ‘처녀’(virgin), 그리고 ‘딸’(daughter)이라 하는 건 교회에게 있는 천국적 천사적 본성(a heavenly and angelic own) 때문입니다. 계시록에서는 교회를 가리켜 ‘여자’(woman)라 하는데요,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 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13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12:1, 4-5, 13)

 

이 구절에서 ‘여자’(woman)는 교회를, ‘해’(sun)는 사랑을, ‘달’(moon)은 신앙을, ‘별들’(stars)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 모두가 악한 영들이 아주 극도로 증오하며 박해하는 것들입니다. 이사야에서도 교회를 일컬어 ‘여자’(woman)라고도 하고, ‘아내’(wife)라고도 합니다.

 

5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6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54:5, 6)

 

‘지으신 이’(maker)를 또한 ‘남편’(husband)이라고도 하는데요, 그 이유는 그 본성과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은 여자’(woman forsaken), ‘어린 아내’(wife of youth)는 특별히 고대교회와 태고교회를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말라기에서도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2:14)

 

계시록에서도 이 여자를 ‘아내’(wife)라고도 하고 ‘신부’(bride)라고도 합니다.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21:2, 9)

 

여러 선지서에 걸쳐 교회를 ‘처녀’(virgin)와 ‘딸’(daughter)로 부르고 있습니다.



254

‘네 후손’(seed of the serpent)이 모든 부정(不貞, infidelity, 특히 배우자에 대한)을 의미한다는 것은 ‘뱀’(serpent)의 상징으로부터 분명합니다. 뱀은 모든 악이기 때문입니다. ‘후손’(seed, 씨앗)은 생산, 즉 출산과 관련되는데, 여기서는 교회에 대한 걸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네 후손’은 교회에 대한 부정, 곧 불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왜곡된 상태의 유대교회를 가리켜 ‘행악의 종자’(seed of evil doers),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seed of adultery), ‘거짓의 후손’(seed of falsehood)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1:4)

 

3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아 너희는 가까이 오라 4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거짓의 후손이 아니냐 5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57:3-5)

 

그리고 다시 거기 루시퍼(Lucifer, 계명성, 12절에 나오는)라 하는 ‘뱀’(serpent) 또는 ‘용’(dragon)에 대해 말하면서

 

19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쫓겼으니 가증한 나뭇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 구덩이에 떨어진 주검들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 20네가 네 땅을 망하게 하였고 네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함께 안장되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들의 후손은 영원히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하리로다 할지니라 (14:19, 20)



255

‘여자의 후손’(seed of the woman)이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을 의미한다는 건, ‘여자’(woman)는 교회를 의미하며, 교회의 ‘후손’(seed)은 신앙 말고는 없다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교회를 교회라 하는 건, 교회에는 주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에 보면, 신앙을 ‘경건한 자손’(seed of God)이라 하고 있습니다.

 

14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15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2:14, 15)

 

이 구절에서 ‘어려서 맞이한 아내’(wife of youth)는 고대와 태고의 교회들인데, 그 ‘후손’(seed), 즉 그 교회들의 신앙에 대하여 선지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에도 역시 교회와 관련하여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4:3)

 

계시록에서는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12:17)

 

그리고 시편에서는

 

3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4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29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36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89:3-4, 29, 36)

 

여기서 ‘다윗’(David)은 주님을, ‘왕위’(throne)는 주님의 나라를, ‘해’(sun)는 사랑을, ‘자손’(seed)은 신앙을 의미합니다.



256

신앙뿐 아니라 주님 자신도 ‘여자의 후손’(seed of the woman)이라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 곧 첫째, 주님은 홀로 신앙을 주는 분이시며, 그래서 주님이 곧 신앙이시기 때문이고, 둘째, 주님은 사람으로 태어나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인데, 여기서 정말 기가 막힌 것은, 이 교회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결과, 아주 끔찍한, 지옥과도 같은 본성으로 거의 굴러떨어진 그런 교회였음에도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주님의 신적 천적 본성과 주님의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주님의 신적 권능으로 결합, 자기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이런 하나 됨이 실현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피조 세계는 완전히 소멸될 뻔하였습니다.

 

천국의 결혼, 즉 천국과 교회, 주님의 본성 간 하나 됨을 다룬 위 252번 글을 참조하세요.

 

이런 사유로, 주님은 여자의 후손이시고, 그래서 ‘그것’(it)이 아닌, ‘그’(he)라 하신 것입니다.



257

‘뱀의 머리’(head of the serpent)가 일반적으로는 악의 지배(the dominion of evil)를, 구체적으로는 자아 사랑의 지배를 의미한다는 건 그 본성(nature)에서 나오는데요, 이 본성은 너무나 지독스러워서 단지 지배를 추구하는 정도가 아닌, 실제로 땅 위 모든 것에 대한 지배와, 그 정도로는 양이 안 차 계속해서 이번에는 천국의 모든 것을, 더 나아가 급기야 바로 주님까지도! 그러고도 여전히 만족을 모르는, 그런 아주 끔찍한 본성입니다. 자아 사랑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곳마다 거기엔 이런 게 잠재해 있습니다. 사람의 사후(死後), 규제가 풀려 하고픈 대로 마음껏 할 수 있게 되면, 이런 본성이 즉시 우리 안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와 점점 자라 높은 데를 지향하게 될 것이라는 걸 우리는 지각하게 될 겁니다.

 

규제가 풀려(freed from restraint)는 아직 몸 안에 사는 이 세상 삶에서는 남의 이목과 사회적 도덕, 윤리, 체면 등이 있어 마음대로 못 하지만, 사후 이 몸을 벗고 영이 되면 그때는 사정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건, 이 ‘뱀’(serpent), 곧 자아 사랑이라는 이 악이 남 지배하기를 정말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그리고 이런 거에 휘둘리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뱀의 머리’(head of the serpent), 곧 자신을 높이며, 그래서 주께서 ‘상하게’(tramples down) 하시는 것, 심지어 땅으로까지 짓밟히게 하시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앞 절에서 기술한, ‘배로 다니며 흙을 먹을지니라’(go upon its belly, and eat dust)인 것입니다. 이사야에서는 이를 ‘루시퍼’(Lucifer)라고 하는, ‘뱀’(serpent)이나 ‘용’(dragon)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14:12-15)

 

계시록에서도 ‘뱀’(serpent)이나 ‘용’(dragon)이 자기 머리를 어떤 식으로 높이는지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9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2:3, 9)

 

시편에서는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6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110:1-2, 6-7)

 

258

‘상하게 할 것이요’(trampling on)나 ‘상하게 할 것이니라’(bruising)가 디프레션(depression, 암담함)을 의미하며, 그래서 ‘배로 다니며 흙을 먹을지니라’(go on the belly and eat the dust) 상태가 되게 하려는 게 지금 분명한 것은 본 절과 선행절들을 보면 됩니다. 이사야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5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6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26:4-6)

 

2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물이 넘침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28:2, 3)

 

 

259

‘발꿈치’(heel)의 의미가 자연적, 혹은 육적(肉的)으로 가장 낮은 거(the lowest natural orcorporeal)라는 사실은, 먼저 태곳적 사람들이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을 이루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던 방식을 알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데요, 그들은 사람의 천적, 영적인 것들은 머리와 얼굴로, 거기서 나오는 체어리티(charity)와 자비는 가슴으로, 자연적인 것은 발, 더 자연적인 것은 발바닥, 가장 자연적, 육적인 것들을 발꿈치로 나타냈는데, 그들은 그저 그렇게 나타내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 일상에서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사유(思惟, reason, 理性)의 가장 낮은 단계의 것들, 곧 기억-지식의 경우 또한 그런데, 야곱이 단과 관련하여 예언한 데를 보면 그렇습니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49:17)

 

시편에서도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49:5)

 

같은 식으로 야곱 관련해서도, 그가 자궁으로부터 나올 때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25:26)

 

‘야곱’(Jacob)이라는 이름은 ‘발꿈치’(heel)에서 나오는데요, ‘야곱’(Jacob)으로 상징되는 유대교회가 발꿈치에 상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뱀은 그것이 독사의 일종이 아닌 한,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것밖에는 상해를 입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높은 차원인, 사람 내면의 자연적인 것은 물론, 더욱 그의 영적인 것과 더더욱 천적인 것은 절대 상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주님은 본인도 모르게 그의 안에 보존, 보관하십니다. 그렇게 주님이 보관하신 걸 가리켜 말씀에서는 ‘남은 자’(remains, 리메인스)라 하고 있습니다. 뱀이 사람 안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 가장 낮은 걸 파괴해 온 방식, 곧, 홍수 전 사람들한테서는 감각의 원리와 자아 사랑(the sensuous principle and the love of self)을 가지고, 그리고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감각적인 것들, 전통들, 하찮은 것들 및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sensuous things, traditions, trifles, and by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을 가지고, 오늘날에는 감각과 기억-지식 및 철학에 속한 것들,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the same loves)으로 역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같은 짓을 반복하는, 뱀이 일하는 이 방식에 대하여 이제부터 쭈욱 들으시게 되는데, 이는 주님의 허락, 곧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260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으로부터 분명한 것은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심이 그 시대 교회에게 계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쉬는 시간)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C.261-260)



261

지금 ‘여자’(woman)는 프로프리움(proprium, 固有本性, 자아, own, self-dependence)의 관점에서 본 교회를 말하는데, 특히 이 교회는 이것을 사랑했습니다.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greatly multiplying her sorrow)는 전투를, 그리고 그로 인한 염려를, ‘임신’(conception)은 모든 생각을,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sons whom she would bring forth in sorrow)는 그녀가 그렇게, 곧 이런 상태에서 낳게 될 진리들을, ‘남편’(man)은 앞서 살핀 대로, 여기서도 교회가 복종하게 될, 그리고 교회를 다스리게 될 래셔널(the rational, 합리적, 이성적 능력)을 말합니다.

 

262

앞서 지금까지 보여드린 교회가 ‘여자’(woman)로 상징되었다면, 여기 나오는 교회는 본성(own)으로 왜곡된 교회입니다. 이 본성은 ‘여자’(woman)로 상징된, 전에는(2:23) 그 자체였던 본성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 다루고 있는 내용이 태고교회의 후손들, 왜곡되어 망가진 후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23)

 

‘전에는 그 자체였던 본성’(the own which was itself formerly), 즉 처음, 곧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2:23) 하던 천적 인간 시절에는 순수하게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던 ‘여자’(교회)가 지금은 ‘망가진 교회’(church which had become perverted)를 가리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때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막 지음받은 따끈따끈한 본성으로 남자의 원래 본성과 너무나 닮아 마치 처음부터 남자의 본성이었던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주님이 남자의 본성으로 선물하신 이 새 본성 덕에 그나마 태고교회의 급속한 타락의 속도를 좀 늦출 수 있었습니다.

 

 

263

그래서 감각 파트가 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리거나 자신을 저주하면, 그러니까 겉 사람으로부터 물러나 속 사람을 섬기려고 하면, 그 결과 악한 영들은 강력하게 싸움을 시작하는 반면, 수행 천사들은 무척 애를 먹는데, 그래서 그때 이 전투, 곧 진리를 생각하고 생산하는 것에 관한 묘사를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in relation to the conception and birth of sons)라 한 것입니다.

 

사람 마음의 감각 파트가 뱀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예를 들어, 금욕적 삶, 참된 영성에 기초한 금욕적 삶을 살고자 하면, 그래서 속 사람을 위해 살고자 하면, 자기들 말 잘 들을 땐 가만히 있던 악한 영들이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괴롭힌다는 말입니다.

 

이 본문은 실제로 아들, 딸, 자식 낳는 본문이 아니라 선악과를 범한 후부터는, 인간이 진리 편에 서서 살아가기가 실제 영적 전투를 치러야만 가능하게 된,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 되었다는 그런 본문입니다.

 

 

264

‘임신과 출산’(conception and birth of sons)은 말씀에서 영적인 뜻으로 사용되는데, 곧 ‘임신’(conception)은 마음의 생각과 계획을, ‘자식’(sons)은 진리를 말한다는 건 호세아를 보면 분명합니다.

 

11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9:11, 12)

 

여기 ‘에브라임’(Ephraim)은 지성, 즉 진리를 이해함을, 그리고 ‘자식’(sons)은 진리 자체를 말합니다. 에브라임에 관한 데는 어디든 다 마찬가지라고들 하는데, 이 에브라임은 지성적이지만 어리석게 되지요.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13:13)

 

이사야에서는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23:4, 5)

 

여기 ‘시돈’(Zidon)은 신앙에 관한 지식이 있었으나 기억-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파괴하여 지금은 척박해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2] 다시 같은 선지서에서 거듭남을 다루면서, 여기서도 신앙의 진리들을 똑같이 ‘아이’(sons)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66:7-9)

 

천국 결혼을 통해 잉태되고 태어나는 선들과 진리들을 가리켜, 그래서 ‘아들들’(sons)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 하신 말씀입니다.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13:37, 38)

 

구원하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the goods and truths of a saving faith)을 가리켜 주님은 ‘아브라함의 자손’(sons of Abraham)(8:39)이라 하십니다. ‘후손’(seed)은 (255번 글에 서술한 대로) 신앙을 가리키는데, 그런 까닭에, ‘후손’(seed)에 속한 ‘자손’(sons)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8:39)

 

이런 이유로, 자신을 ‘후손’(seed) 되게 하신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人子, Son of man), 즉 교회의 신앙(the faith of the church)이라 하셨습니다.

 

 

265

남편(man [vir])이 래셔널(the rational, 합리적 능력)을 말한다는 게 본 장 6절에 나오는데요, 거기 보면, 여자는 자기와 함께 있는 자기의 남자(her man)에게 주었고, 그는 먹었는데, 이는 그도 동의했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내용이 158번 글에 나오는 남자(the man)에 대한 말로도 분명한데요, 거기서 그는 지혜와 지성의 사람(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남자(man)는 그와는 달리 래셔널(the rational)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지식의 나무, 곧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된 결과,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래셔널이라는 건 지성의 모방, 말하자면 겉모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266

모든 법과 수칙(守則, precept)은 참된 출발점인 천적, 영적인 것에서 나오므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이 결혼의 법칙 또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아내, 그러니까 하고픈 걸 하는, 그리고 이 하고픈 건 아내 자신의 본성에 속한 것인데, 이성을 좇아서 하는 게 아닌, 이런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신중함을 따라야 한다는 법칙입니다.

 

실제로는 역할이 뒤바뀐 사례들, 그러니까 오히려 아내가 신중하고, 남편이 자기 본성대로 하는 그런 케이스들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이 큰 줄기, 곧 주님 정하신 이 질서 안에서 주님께 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또한 이는 한 사람 안에서 본성과 이성 간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 늘 어떤 결정에 앞서 본성보다는 이성에 귀 기울일 것과, 그리고 그 이성 또한 늘 주님을 향해 해바라기처럼 있어야 한다는 점,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C.267-271)



26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man hearkening to the voice of his wife)라는 표현은 아담(the man)이라는 남자, 즉 래셔널(rational, 합리적 능력)의 동의를 말합니다. 이 부주의한 동의로 그는 그 자신도 외면받는 저주를 받아 결과적으로는 총체적 겉 사람(the whole external man), 즉 완전한 겉 사람이 되는데, 이것이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의 의미입니다.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eat thereof in sorrow)는 표현은 그의 삶의 앞날의 상태는 비참할 것이며, 이것은 심지어 그 교회의 종말에 이르도록 그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네 평생에(all the days of his life)의 의미입니다.

 

그 자신도 외면받는 저주’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너무 끔찍하여 얼굴을 돌리는 걸 말합니다. 그만큼 주님 대신 자기 본성을 사랑하는 사람의 말로(末路)는 지옥문이 펼쳐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268

(ground)이 겉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earth, 1:1, AC.16), ‘지면(ground, 2:5, AC.90), ‘(field, 2:5, AC.90) 관련, 앞서 서술한 내용들을 보시면 분명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그를 가리켜 더 이상 (earth)이라 하지 않고, 대신 지면(ground)이라고 합니다. 천적 씨(celestial seed)가 그의 안에 심겼기 때문이지요. 그는 또한 말씀 여러 곳에서 대지(ground)에 비교되며, 그를 가리켜 지면(ground)이라고 합니다. 선과 진리의 씨앗들은 겉 사람, 즉 그의 어펙션(affection, 애정)과 기억에 심깁니다. 속 사람이 아니고 말입니다. 속 사람 안에는 그의 본성 관련, 아무것도 없기 때문인데, 사람의 본성과 관련된 것들은 오직 겉 사람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는 속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즉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바로 겉(external), 즉 육(, corporeal)의 상태입니다만, 그러나 주님에 의해 이들은 속 사람 안에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본인도 모르게 말인데요, 겉 사람이 마치 죽을 것 같은 때가 아니면 이들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며, 보통 시험, 불행, , 그리고 임종 상황이 아니면 이들 속 사람 안에 저장, 보관되어 온 선과 진리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래셔널도 겉 사람에게 속하며(AC.118), 실상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 역할을 합니다. 속 사람은 이 래셔널을 통해 육적 겉(the corporeal external)과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래셔널이 동의(同意, consents)하면,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가 되고, 그러면 속 사람의 존재를 더 이상 알 수도, (the internal)에 속한 지성과 지혜도 역시 알 수 없게 됩니다.

 

 

269

여호와 하나님, 곧 주님이 땅을 저주하신(curse the ground), 즉 겉 사람을 저주하신 게 아니라,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외면, 속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그 결과 저주를 자초한 것인데요, 이것은 앞서 본 글(AC.245)을 보면 분명합니다.

 

 

270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eat of the ground in great sorrow)라는 표현의 의미가 삶의 비참한 상태라는 건 앞뒤 내용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먹는 것’(eat)의 속뜻이 사는 것(to live)임을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말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분명한데요, 악한 영들이 싸움을 시작, 수행 천사들(the attendant angels)이 애를 쓰기 시작할 때 이런 삶의 상태가 뒤따른다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런 삶은 그 주도권이 악한 영들에게 있어서 더욱 비참한 상태가 되는데요, 이때는 겉 사람을 다스리는 게 그들인 반면, 천사들은 그저 단지 속 사람만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수행 천사들이 애를 먹는 이유는 속 사람 안에 남아 있는 리메인스가 거의 없어 그 사람을 악한 영들로부터 지키는 데 필요한 영적 무기를 거의 취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과 염려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런 비참과 염려에 좀처럼 예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인데, 비록 그들은 자신을 다른 누구보다도 더 사람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말이지요. 그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 그리고 영원한 삶에 관해 더 이상 짐승들보다 더 아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짐승들처럼 땅의 것들을 향해 아래를,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향해 밖으로 눈을 돌리기 때문인데,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본성(own)에만 호의적이며, 자신들의 성향과 감각에 올인, 미친 듯이 자기들 하고픈 대로만 합니다. 래셔널의 완전한 동의하에 말이죠.

 

래셔널(the rational)은 의지와 지식 사이에 있어 둘을 중재하는 합리적 능력을 말합니다. 마지막 경고등이라 할 수 있는 이 래셔널조차 이들한테는 이미 망가진 상태라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이미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영적 전투나 시험을 전혀 견딜 수 없습니다. 이들이 만일 이것에 노출되면, 이들의 삶은 그 무게로 가라앉게 되며, 그 결과 점점 더 자신들을 저주, 치닫게 하고, 계속해서 더 깊이깊이 지옥의 저주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들은 다른 삶, 곧 지옥이지요, 거기서는 무슨 시험이나 불행으로 죽을 수 있는 위험 같은 건 전혀 없지만, 대신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그런 곳인데, 그런 삶의 입구에 이를 때까지 이들은 잠시 유예되어 이런 삶을 계속 살게 되며, 이런 상태를 본문에서는,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건 아니지만, 그 내면 상태가 사실상의 지옥이어서 사실은 살아도 산 게 아닌, 그런 끔찍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271

네 평생에(all the days of thy life)의 의미가 그 교회 시대의 종말이라는 것은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어느 한 개인이 아닌, 그 교회와 그 상태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로 분명합니다. 그 교회 시대의 종말은 홍수였습니다.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C.272-274)



272

가시덤불과 엉겅퀴(thorn and the thistle)는 저주와 황폐함(vastation),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은 그가 들짐승처럼 살게 될 것을 말합니다.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아주 일반적으로밖에는 뭘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겉 사람과 분리된 상태에 있게 되면, 사람은 그때는 들짐승처럼 삽니다.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는 걸로는 사람이지만, 속 사람과 분리되어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들짐승이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그 자체로는 들짐승과 다를 바 없어 본성, 욕구, 식욕, 공상 및 감각 면에서 비슷하며, 유기적 형태로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보기엔 완전히 자신한테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영적 실체(the spiritual substance)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이걸로 주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인플럭스(入流, the influx of life from the Lord)를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저런 인간, 곧 저런 들짐승 같은 겉 사람 안에서는 반대로 뒤집혀 악한 생명, 곧 죽음이 됩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죽은 자라 하는 것입니다.

 

273

‘가시덤불과 엉겅퀴’(thorn and the thistle)가 저주와 황폐함을 말한다는 건, 추수와 과실나무가 정 반대되는 것들, 곧 축복과 번성을 가리키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가시덤불’(thorn), ‘엉겅퀴’(thistle), ‘찔레’(brier), ‘가시덩굴’(bramble) 및 ‘찔레’(nettle)가 저런 저주, 황폐함을 상징한다는 건 말씀을 보면 분명한데요, 호세아입니다.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9:6)

 

여기 ‘애굽’(Egypt)과 ‘놉’(Memphis)은 신성한 것들에 대한 이해를 자신들과 자신들이 소유한 기억-지식을 가지고 하려는 걸 가리킵니다. 같은 선지서에서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때에 그들이 산 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 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10:8)

 

여기 ‘아웬의 산당’(lofty places of Aven)은 자아 사랑을,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thorn and thistle on the altars)는 신성모독(profanation)을 말합니다. 

 

참고로 이 ‘신성모독(profanation)이라는 주제는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주제인데요, ‘신성모독’이란, 신성한 것을 알고, 시인, 받아들여 놓고는 나중에 부인, 부정, 그와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위험한 이유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섞여 사람의 내면을 찢어놓기 때문이며, 그 결과 사람 안에서 천국과 지옥이 결합, 영원히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차라리 아예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무지’ 상태에 두십니다. 주님의 자비로 말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의 신적 진리를 어설프게 일찍 아는 것은 위험하여 막으시며, 오직 내면이 정말 준비된 자, 참된 회심에 이른 자에게만 오픈하십니다. 제 경우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결국 수년을 가르쳐도 여전히 요지부동인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배신’의 성향이 있어 그를 보호하시기 위해 ‘무지’ 상태에 있게 하시거나 아직 ‘참된 회심’이 없어 기다리시거나 말이지요. 주님의 이 아르카나의 진리를 받으려면 그전에 먼저 정화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주님만이 아시며, 그가 늦게 준비된다고 먼저 받은 우리가 화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 앞에서 천사들처럼 사랑과 기쁨으로 우리 할 도리만 다하면 됩니다.

 

이사야에서

 

12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13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32:12, 13)

 

그리고 에스겔에서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28:24)

 

 

274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eat the herb of the field)의 의미가 거친 음식, 즉 들짐승처럼 사는 것임은 다니엘서의 느부갓네살에 관한 부분을 보면 분명합니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4:25)

 

그리고 이사야에서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27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37:26, 27)

 

여기 ‘들의 풀’(grass of the field), ‘푸른 나물’(green of the herb), ‘지붕의 풀’(grass on the housetops), 그리고 ‘곡초’(field parched)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룬 주제가 홍수 전 시대, 곧 ‘태초’(long ago)와 ‘상고’(days of old)가 의미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AC.275-279)



275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는 천적(天的, celestial)인 걸 싫어하게 되었음을,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return to the ground from whence he was taken)는 거듭남 이전 상태였던 겉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는 그가 정죄를 받고, 지옥과 같은 상태가 됨을 말합니다.

 

276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의 의미가 천적인 걸 싫어한다는 것임은 ‘먹을 것’(bread)의 의미를 보면 분명합니다. ‘먹을 것’(bread)은 영적이고 천적인 모든 걸 의미하는데, 이는 천사들의 양식으로, 만일 이것이 없으면 천사들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도 양식이 떨어지면 그런 것과 완전히 똑같이 말입니다. 천국에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 역시 지상에 있는 양식과 상응하는데요, 이런 사실로 더욱 많은 것이 표상됩니다. 말씀 여러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떡’(bread)이심을, 이는 자신으로부터 모든 천적이고 영적인 것이 나오기 때문인데요, 이 사실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6:58)

 

그래서 또한 빵과 포도주가 성찬(聖餐, the holy supper) 심볼들이 된 것이고, 만나 역시 이 천적인 것을 표상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양식은 천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다음 주님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즉, 천적이고 영적인 모든 것이 나오는 주님의 생명으로부터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2] 홍수 직전까지 존재했던, 지금 여기 다루고 있는 이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은, 신앙의 진리라는 게 무엇이며, 주님이라는 분은 뉘신지, 그리고 그분이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하신다는 말 같은 거 듣기를 더 이상 내켜 하지 않을 정도로, 감각적인 일과 몸에 관한 일에 너무도 철저히 잃어버린 상태, 잠긴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주제들이 언급될 때마다, 그들은 듣기 싫어 외면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는 바로 이런 혐오를 말합니다. 그래서 또한 유대인들은 천적인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오직 세속적 메시아만을 원하는 그런 캐릭터들이 되어버렸고, 그 결과 그들은 만나를 보고 혐오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나는 주님의 표상이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하찮은 음식’(vile bread)이라 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한테 불뱀(fiery serpents)을 불러들이는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21:5, 6)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21:5, 6)

 

더욱 놀라운 사실은, 천적인 것들을 가리켜 그들이 울면서, ‘역경의 빵’(bread of adversity), ‘비참의 빵’(bread of misery), ‘눈물의 빵’(bread of tears)이라고 했을 때, 실제로 천적인 것들은 역경과 비참이라는 상태로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의 구절에서 혐오하면서 받은 것을 가리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bread of the sweat of the face)이라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주치의로서 오랫동안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었던 김승학 장로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감시에도 목숨을 걸고 탐사한, 시내 산을 비롯, 모세의 출애굽기 모든 기록이 담긴 책, ‘떨기나무1, 2를 보면, 사막 한 가운데 이름 모를 히브리 무덤 수천수만 기가 가로세로 질서정연하게 있다고 합니다. 그는 위 민수기 21장 사건을 비롯, 금송아지 사건, 메추리 고기 탐욕 사건 등을 떠올리며, 혹시 이 무덤들이 바로 저렇게 죽어간, 이스라엘 광야 1세대들의 무덤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77

이것은 속뜻입니다. 글자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이 구절을 사람은 자기가 먹을 걸 땅을 일궈 힘들게, 즉 얼굴에 땀을 흘려 힘들게 구해야만 하는 걸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람(Man)은 어떤 한 사람이 아닌,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를 말합니다. ‘(ground)도 땅을, ‘(bread)도 빵을, ‘동산(garden)도 동산을 말하는 게 아니라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보여드린 대로 말입니다.

 

 

278

‘그가 취함을 입은 흙으로 돌아감’(returning to the ground whence he was taken)의 속뜻이 ‘교회가 거듭나기 전 상태였던 겉 사람(the external man)으로 돌아가다’라는 게 분명한 것은, ‘흙’(ground)의 속뜻이 전에 말씀드린 대로 ‘겉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흙’(dust)의 속뜻이 ‘정죄를 받아 지옥과 같은 상태가 되다’라는 것 또한 앞서 뱀에 관해 드린 말씀으로 분명한데요, 이 뱀은 저주를 받아 ‘흙을 먹을지니라’(eat dust)라는 말씀을 듣게 되지요. ‘흙’(dust)의 속뜻에 대해 거기서 보여드릴 수 있었던 것 외에도 시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도 있는데,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22: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104:29)

 

이 말씀의 의미, 속뜻은 사람들이 주님의 얼굴을 외면할 때 그들은 끝나고, 즉 죽고, 그래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return to the dust), 그러니까 정죄를 받아 지옥과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279

일련의 시리즈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모든 구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각 파트가 자신을 천적인 것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했다는 것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4)

 

주님이 그들과 재결합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실 거라는 것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5)

 

겉 사람이 스스로 돌아선 결과, 전투가 일어났다는 것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6)

 

그래서 결국 비참해졌다는 것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7)

 

정죄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8)

 

그리고 결국은 지옥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19)

 

이런 일들이 그 교회 안에서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 말입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3장 두 번째 단락인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 일어난 일(3:14-19)을 지난주 14절에 이어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이며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세기 3장 세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와 태고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3:20-24)을 두 주에 걸쳐 살펴보겠습니다.

 

원고 맨 앞으로 돌아가 본문과 개요를 한 번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설교

2025-11-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17. 2025-11-09(D1)-주일예배(창3,15-19, AC.250-279), 창3.4,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pdf
0.74MB
17. 영문 원본, 창3,15-19, AC.250-279.pdf
0.10MB

 

 

 

16. AC.234-249, 창3.3,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창3:14), 2025/11/2(D1, 성찬)

창3.3,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창3:14, AC.234-249)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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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3:14, AC.234-249)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man [vir])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14-19)

 

 

창세기 속뜻 주석설교, 오늘은 창세기 3장 두 번째 단락(3:14-19) 시작으로, 그 내용은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입니다만, 오늘은 성찬이 있어 그중 창3:14 한 절만 번역, 설명을 곁들이며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로, 위 제목에 ‘3.3’은 창3 3절이 아니라 창3의 세 번째 설교라는 뜻입니다. 특별한 의미는 없고, 단지 원고 관리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 도입했으니 참고하세요.

 

 

먼저 개요입니다.

 

234

홍수로 이어지는 교회의 후속 상태(The subsequent state of the church down to the flood)가 여기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자신을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집니다.



235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거 믿는 걸 내켜 하지 않음으로써, 감각 파트는, 이게 바로 ‘뱀’(serpent)인데, 자신을 저주했고, 즉 그 자체가 저주였고, 그 결과 지옥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14)

 

감각 파트(sensuous part)란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영역, 가령,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감각 등의 여러 영역 중 하나를 말합니다. 사람의 이 모든 구성 요소는 주님을 사랑할 때와 자기를 사랑할 때가 다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할 때는 눈부시게 빛나며 놀라운 생기를 띠고, 2, 3백 프로의 능력을 발휘하며 순기능의 연속이지만, 자기를 사랑할 때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워지면서 죽어가고, 주님이 주신 능력의 10분의 1도 못 쓰는 역기능의 연속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겉보기에 잠깐 반짝할지 몰라도 말입니다. 전자는 모든 것의 원천이요 근원 되신 주님께 붙어있는 삶을 사는 거지만, 후자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중 처지는 시간문제입니다.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5:4-7)

 

11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12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될 것이요 13악인은 잘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8:11-13)



236

이런 이유로 온 인류가 지옥을 향해 뛰어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주님은 세상에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15)

 

 

237

교회가 ‘여자’(woman)라는 표현으로 더 깊이 설명되고 있는데요, 이 교회는 더 이상 진리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아(self), 즉 본성(own)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이 본성을 ‘통제하라’(rule)는 합리적 능력(合理, a rational)이 그들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6)

 

 

238

다음은 이 합리적 능력이라는 래셔널의 퀄러티(The quality of the rational)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기 보면, 이 합리적 능력은 자아, 즉 본성에 동의, 저주를 자초하더니 결국 지옥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남아 있는 이성(理性, reason)은 없고, 대신 이성 노릇을 하는 추론 능력(推論, ratiocination)만 남게 된 것이지요. (17)

 

오늘날에도 아내라는 본성에 사로잡혀 그만 주님 주신 본연의 역할을 포기하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비록 선한 마음으로 그리했을지라도 이런 주님의 질서는 엄정하여 그 값을 치루게 되는데요, 좀 헷갈리고 잘 모르겠을 땐 주님 말씀을 의지하여 결정해야 하는데, 그저 당장 급한 불을 끄고자 서둘러 좋게 좋게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잘 모르겠을 땐 베드로처럼 해야 합니다.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5:4-7)

 

 

239

저주와 황폐함, 그리고 길들여 지지 않은 본성(nature), 즉 야생으로 돌아간, 짐승 수준이 되어버린 그들의 본성에 관한 설명입니다. (18)

 

 

240

다음은,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을 향한 그들의 혐오와,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처음에는 사람이었다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19)

 

 

241

태고인들은, 천적(天的, celestial), 그러니까 상응 능력이 있어서, 땅 위 온 세상 만물을 눈으로, 즉 육안(肉眼)으로 보면서도 속으로는 그 사물이 가리키고 표상하는 천국 신성한 것들을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상응의 사람들이 되면 일단 세상에서 추구하던 모든 세속적인 것들에서 한발 물러나게 됩니다. 즉 무슨 세상 지위를 탐하거나, 무슨 세상 것을 누리려 하거나 소유하려 하는 모든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들의 저급함과, 그 대신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것들의 쓰임새에만 집중합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나의 지위를 높이셔도, 또 무슨 누림이나 소유를 많게 하셔도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합니다. ‘왜 나를 이 자리에 오르게 하셨을까?’, ‘왜 내가 이런 대접을 받게 하실까?’, ‘왜 내게 이런 재산과 명예를 허락하실까?’ 등 말이죠. 천국 천사들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들의 시각(sight)은 그저 창문 역할, 안경 역할이었을 뿐, 그들이 실제 뭘 봤는지를 알 수 있는 건 그들의 말(speech)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런 걸 알 수 있는데요, 만일 누가 어떤 사람이 하는 말에 깊이 동의가 되면, 그는 실제로 그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마치 말 자체보다는 말에 담긴 의미만 건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심지어 그 말의 의미보다 더 보편적인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후손들은 그들의 선조들하고는 달랐습니다. 이들 역시 땅 위 온 세상 만물을 눈으로 보았지만, 선조들과 달리 이들은 마치 사랑하듯 보았고, 마음과 생각이 거기에 사로잡혔으며, 그걸 가지고 천국 신성한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즉, 세상 것, 세상, 세속적 가치관으로 천국에 대한 걸 유추하는 것이지요. 가령,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으니 천국 가면 아랫사람들을 많이 두고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겠네, 천국은 날마다 잔치하는 곳이라 했으니 날마다 큰 연회 베풀어 가장 기름진 음식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겠네, 천국 길은 황금길이요, 집은 보석 집이라 했으니 황금을 비롯, 각종 보석 등 나는 큰 부자가 되겠네 식으로 천국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속화가 오늘날에 생긴 게 아니라 그 기원이 아득히 먼 옛날, 곧 태고교회 그 후손들한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들과 함께 감각적인 것이 원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선조들한테는 한낱 도구였을 뿐인 것들이 말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속한 것, 땅에 속한 것이 원리가 되면,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걸 이걸 가지고 이성질(理性질, reason)을 하며, 그런 식으로 눈이 머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는 것 역시 각자의 경험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서 정작 그 말의 의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 말에서 건지는 게 거의 없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의미는 더 말할 것도 없으며, 때로는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을 단어 하나 가지고, 심지어 어떤 문법적 특이점을 가지고 판단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스베덴보리의 경험에서 나오는 멘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가 처음 세상에 이런 천국 아르카나를 전하기 시작했을 때, 공공장소에서 그는 이런 심한 모욕을 자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뒤로 갈수록 그는 규모 있는 공적 만남은 자제하고, 은둔, 저술에만 전념합니다. 대인 만남은 최대한 조용한 사적 만남으로만 하고 말이지요.

 

 

다음은 절 별 속뜻입니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C.242-249)

 

242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라는 표현은 그들이 자신들의 넘어짐의 원인이 바로 자신들의 감각 파트였음을 지각했다는 의미입니다.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The serpen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라는 표현은 그들의 감각 파트가 그들로 하여금 천적(天的, heavenly)인 것을 거슬러 육체에 속한 걸 향해 스스로 돌아서게 했고, 그렇게 해서 결국 저주를 자초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 ‘가축’(beast)과 ‘들의 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처럼 어펙션(affections, 애정)을 말합니다. ‘배로 다니고’(serpent going upon its belly)라는 표현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감각 파트는 천국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는 대신 그저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만 내려다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eating dust all the days of its life)라는 표현은 이제 감각 파트는 육체와 세상에 속한 걸로만 살아가야 하는, 그러니까 지옥처럼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243

천적이었던 태고인들한테 있어 몸에 속한 감각적인 것들은 그들의 속 사람에게 순응하고 순종하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상 무슨 다른 용도로는 자신들의 감각적인 것들을 케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신들의 감각적인 것들을 속 사람보다 우선시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그것들은 분리되어 육체적이 되더니, 그렇게 해서 결국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쓰라고 인간에게 감각, 곧 시각, 청각, 미각, 후각 및 촉각을 주셨는데, 인간은 엉뚱하게도 이걸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데 쓰느라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24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Jehovah God speaking to the serpent)라는 표현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신들의 넘어짐의 원인이 바로 자신들의 감각 파트였음을 그들이 지각했다는 의미로, 여기에 대해서는 뭐 더 설명할 게 없지 싶습니다.



245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he said to the serpent,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라는 이 표현은 그들의 감각 파트가 스스로를 천적인 걸 향해서는 등을 돌리는 한편, 몸에 속한 걸 향해서는 돌아서게 함으로써 저주를 자초했다는 말이며, 말씀의 속뜻으로부터 이런 의미를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즉 주님은 결단코 누구를 저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절대로 누구에게 화를 내시거나, 절대로 누구를 시험에 빠트리시거나, 절대로 누구를 벌하시거나, 더욱 절대로 누구를 저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모든 것은 지옥의 무리들에 의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코 자비나 평화, 선함의 근원에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과 말씀 여러 다른 곳에서 위와 같은 표현들, 곧 여호와 하나님이 낯을 돌리실 뿐 아니라, 화를 내시고, 벌하시며, 시험하신다는, 그리고 죽이시고, 심지어 저주하신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온 우주 안 모든 것, 심지어 악 자체는 물론, 형벌, 시험들까지도 다스리시며, 정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며, 그리고 사람들이 이런 가장 일반적인 진리를 받아들였을 때라야 그다음에 주님이 악에 뒤따르는 형벌이나 시험 같은 걸 돌이켜 어떻게 선이 되게 하시는지,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르칠 때와 배울 때, 이런 가장 보편적인 진리들이 반드시 가장 먼저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래서 말씀의 겉뜻에 이런 표현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영계와 자연계를 포함, 이 모든 피조세계에 주님의 통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데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주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되실 수 없기 때문이지요. 천국과 지옥, 이 세상, 선과 악, 길흉화복(吉凶禍福) 등 어떤 영역이라 하더라도 모두 주님의 주권 아래 존재합니다. 다만 모든 악과 거짓을 주님이 창조하시지 않은 것처럼 말씀에 나오는 저런 모든 안 좋은 행위들 역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 뿐입니다. 인간은 그 의지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게 말입니다. 다만 그 결과는 오롯이 본인 책임이지요. 이는 마치 인간에게 지능을 주었더니 인간은 그 지능으로 자동차와 컴퓨터를 만들더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동차, 컴퓨터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그걸 어떤 의도로 사용하느냐가 문제이지요.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시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지옥의 존재가 그 증거이며, 아래 산상수훈 말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38-48)

 

인생을 살면서 이런 진리, 곧 ‘주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모든 것은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다’ 하는 이런 진리들을 굳게 붙들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때마다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들, 불확실성과 모호함이라는 인생의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밝고 맑은 천국의 햇빛과 햇볕을 받으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말씀드리지만 곧 좀 더 자세히 깊은 설명을 준비하겠습니다.



246

‘가축과 들의 짐승’(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이라는 이 표현이 어펙션(affections, 애정)을 말한다는 건 앞서 이들을 다룬 글들인 45, 46번 글들과 거기 주님의 허락으로 추가된 시편의 다음 구절을 보면 분명합니다.

 

9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68:9, 10)

 

여기 ‘주의 회중’(wild animal)은 선한 애정을 가리킵니다.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dwell in the inheritance of God)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4, 25절에서는 ‘가축과 땅의 짐승’(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이라 하신 반면, 여기와 또 창세기 219, 20절에서는 ‘가축과 들의 짐승’(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으로 언급하시는 이유는, 이들 구절은 교회, 즉 거듭난 사람을 다루고 있는 반면, 창세기 1장은 아직은 교회가 아닌, 즉 이제 막 거듭남의 과정을 시작하려는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들’(field)이라는 말은 교회, 즉 거듭난 사람들한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 20)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247

‘배로 다니고’(serpent going on his belly), 이 표현의 의미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감각 파트는 천국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는 대신 그저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만 내려다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라는 것임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한데요, 고대에는 ‘배’(belly) 하면 그런 걸 상징한다는 것, 그건 배가 땅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고, ‘가슴’(chest) 하면 땅 위, ‘머리’(head) 하면 가장 높은 곳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건, 감각 파트는, 그 자체로 사람의 본성 중 가장 낮은 파트인데, 이걸 ‘배로 다녔다’(went upon its belly)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속적인 걸 향해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그 배가 땅에까지 착 달라붙음, 그 얼굴에 진토가 날라와 덕지덕지 묻음 등 유대교회에도 이런 유사한 상징이 있었는데,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시편에서 읽는 것입니다.

 

24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44:24-26)

 

여기서도 보면, 분명히 사람이 여호와의 얼굴을 외면하여 등 돌리는 것을 가리켜, ‘그의 배가 땅 먼지에 착 달라붙었다’(cleaves by his belly to the dust and to the earth) 하고 있습니다. 요나서에도 보면, 큰 물고기의 ‘배’(belly)는, 요나가 그리로 던져졌지요. 마찬가지로 땅의 낮은 파트들을 상징합니다. 아래 그의 예언을 보면 말이지요.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2)

 

여기 ‘스올’(hell)은 낮은 땅을 가리킵니다.



248

그래서 사람이 하늘의 일들을 생각할 때는 그를 가리켜 ‘똑바로 서서 걷다’(walk erect), ‘위를 보다’(look upward), ‘앞으로 나아가다’(forward)라고 했는데 같은 의미이지요. 반대로 그가 육적, 세속적 일들을 생각할 때는 그를 가리켜 ‘땅에 엎드려 절하다’(bowed to the earth), ‘아래를 보다’(look downward), ‘뒤로 물러가다’(backward)라고 했습니다. 레위기입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26:13)

 

미가서에도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2:3)

 

예레미야서에도

 

8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13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1:8, 13)

 

그리고 이사야서에서도

 

24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25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징표를 폐하며 점치는 자들을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 그들의 지식을 어리석게 하며 (44:24, 25)



249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eat dust all the days of its life)라는 이 표현의 의미는 이제 감각 파트는 육체와 세상에 속한 걸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그러니까 지옥처럼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말씀에 나오는 ‘흙’(dust)의 상징을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미가서입니다.

 

14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16이르되 여러 나라가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러워하여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며 17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리이다 (7:14, 16-17)

 

‘옛날같이’(days of eternity)는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여러 나라’(nations)는 자기 본성(own)을 의뢰하는 자들로,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they shall lick the dust like a serpent)라고 서술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편에도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72:9)

 

‘광야에 사는 자’(Barbarians)와 ‘원수들’(enemies)은 오직 땅과 세상에 속한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65:25)

 

‘흙’(dust, 아래 마10:14에서는 먼지로 번역)이 영적 천적인 하늘의 일 대신 오로지 육의 일, 땅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들어간 성이나 집이 합당하지 않으면, 반드시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shake off the dust of their feet) 명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0:14)

 

‘먼지’(dust)가 저주를 받음, 지옥 같은 처지가 됨을 상징한다는 건 19절에서 더 깊이 볼 것입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3장 두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 다른 말로는 ‘홍수로 이어지는 교회의 후속 상태(3:14-19) 그 첫 번째 시간을, 오늘은 성찬이 있어 14절 한 절만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이며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엔 본 단락 나머지 전부인 15절로 19절을 다루겠습니다.

 

원고 맨 앞으로 돌아가 본문과 개요를 한 번 더 읽고 마칩니다.

 

(본문과 개요, 한 번 더)

 

 

설교

2025-11-0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16. 2025-11-02(D1)-주일예배(창3,14, AC.234-249, 성찬), ‘창3.3,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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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영문 원본, 창3,14, AC.234-249.pdf
0.08MB
성찬.pdf
0.14MB

 

 

 

17. AC.250-279, 창3.4,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창3:15-19), 2025/11/9(D1)

창3.4,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창3:15-19, AC.250-279)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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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AC.211-233, ‘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눈이 밝아짐’(창3:7-13), 2025/10/26(D1)

‘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눈이 밝아짐’(창3:7-13, AC.211-233)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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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눈이 밝아짐(3:7-13, AC.211-233)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1-13)

 

 

창세기 속뜻 주석설교, 창세기 3장 첫 번째 단락인 3:1-13 오늘은 그 후반부인 7절로 13,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눈이 밝아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설명을 곁들이며 살피겠습니다. 참고로, 창3은 모두 세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개요입니다. (반복)

 

190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세 번째 상태를 다루는데요, 이 상태는 자신의 본성을 사랑할 정도로 원하던(so desired its own as to love it) 상태입니다.



191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들의 감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아무것도 안 믿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본문에서는 감각적인 건(the sensuous part)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은 ‘여자’(woman)로, 그리고 이성적, 합리적인 건(the rational) ‘남자’(ma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92

이런 배경 가운데 ‘뱀’(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 주님 신앙에 관한 것들이 과연 그런지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이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으로, 사람의 이성이 동의한 것은 ‘그도 먹은지라’(the man that he did eat)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6)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을 저런 말로 속일 수는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한테는 저런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런 말에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는 본인이 가진 자아의 퀄러티, 즉 속 사람의 역량 문제인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라면 저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그 자아가 백 퍼센트 주님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의 귀가 어떤 속삭임에 솔깃해하는가를 관찰하면 나라는 사람의 정체, 본성, 내가 하고 있는 이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나오는, 뱀에게 속아 넘어가는 여자는 창2 후반에 나오는 여자와 다른 여자입니다. 저 창2 후반 본문은 두 번째 후손 이야기이지만, 여기는 세 번째 후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안 좋게 변한, 자기 사랑에 더욱 기울어진 상태가 된 후손 이야기인데, 두 번째 후손만 되었어도 안 속았을 저런 속삭임에 이들은 그만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나오는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 그러니까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 등 여러 파트로 구성된 존재로서, 이 중 가장 낮은 파트인 몸에 속한 감각을 ‘’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천적 인간은 이 몸의 감각 또한 거듭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몸의 감각이 더 이상 뱀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육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한테는 지옥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천적 인간이며, 일곱 번째 상태, 곧 안식일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창세기의 실제 역사는 아브라함부터입니다. 창1-창11, 그러니까 태고교회, 고대교회는 실제 역사가 아니고 수천수만 년의 세월을 간추려 마치 무슨 스토리 텔링처럼 기술한 기록입니다.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지구의 나이는 45, 6억 년 정도라고 합니다. 이런 지구에 언제부터 인류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 창세기는 노코멘트합니다. 성경, 곧 말씀은 무슨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아르카나를 지상 언어로 담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여기 두 번째 후손, 세 번째 후손 등의 표현이 나오는데 이 각각의 후손들이 살았던 실제 역사적 기간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창5에 나오는 아담의 계보에 따르면 태고교회는 대부분 8, 9백 년을 살았던 걸 보면, 그리고 그 숫자들 역시 단순 숫자, 그러니까 9백 년을 살았다고 해서 정말로 9백 년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장구한 어떤 세월을 상징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실제로는 수천수만 년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또 여기 등장하는 인물명들 또한 사실은 그 이름으로 불렸던 어떤 신앙, 어떤 신학, 어떤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창11까지는 모든 이름과 숫자가 다 이런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니까요. 주님은 생각하시기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거듭나기 위해 굳이 그런 장구한 옛날 역사까지 시시콜콜 다 알 필요는 없겠다 하시는 것 같습니다.

 

 

193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지각했는데요,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와 그들이‘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hearing the voice of Jehovah)(7, 8)라는 표현을 보면, 그들에게 아직 퍼셉션이 남아 있음과,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고(7), 부끄러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을(8, 9)뿐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모습(10-13)들을 볼 때, 아직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도 남아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연적 선이란 선은 선인데 그 안에 악이 섞여 있는 선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천적이지도, 영적이지도 않은 대부분의 선, 즉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는 대다수 사람들의 선은 순수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절 별 속뜻입니다.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C.211-217)

 

211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는 그들이 어떤 내적 음성(an interior dictate)을 듣고 자기들이 ‘벗은 줄’(naked)을 알게 되었다, 즉 자기들이 더 이상 전처럼 이노센스(innocence)가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자면서도 빛이 없어 자기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자는 줄을 모르던 사람이 어느덧 동이 터 빛이 비치자 그만 깜짝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212

‘눈이 밝아져’(eyes opened)가 무슨 내적 음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들, 가령 발람(Balaam)이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그 구절에서 발람은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나서는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man whose eyes are opened)(24: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 한글 개역 개정에서는 ‘감았던’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위 영역을 보면 분명 ‘’, 혹은 ‘밝아진’입니다. ‘전엔 감았으나 지금은 뜬’, 차라리 이렇게 번역했더라면...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24:3)

 

그리고 요나단인데요, 그는 벌집의 꿀을 조금 맛본 후,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이 악하다는 내적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지요.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eyes saw), 즉 자신의 내적 시야가 열려 전엔 몰랐던 걸 지금은 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더더욱 말씀을 보면, ‘눈’(eyes)은 종종 이해(the understanding)와 거기서 나오는 내적 음성(an interior dictate therefrom)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시편입니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3)

 

여기 ‘눈’(eyes)은 이해를 가리킵니다. 에스겔에서도 보면, 의도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는’(have eyes to see, and see not)(12:2)족속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12:2)

 

이사야입니다.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6:10)

 

위 말씀은 그들로 볼 수 없게 해야지, 안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우리 생각엔 ‘어? 사람들이 깨닫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왜 그걸 막으시는 거지?’ 하지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게,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은 차라리 깨닫지 못하는 게 그들에겐 더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민족적 특성상, 그들은 오히려 깨닫게 되면 나중에 반드시 돌이켜 배신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차라리 몰랐더라면 그냥 그 정도에 머무를 텐데, 알고 나서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게 되면, 그때는 그의 사후 상태가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성모독이며, 이 신성모독의 죄가 정말 무서운 이유는, 이 신성모독의 삶을 산 사람은 그 영이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이 영이 오염된다는 건, 영의 상태가 어느 하나의 상태로 가지를 못하는 것, 즉 하나를 생각하면 곧이어 그 반대되는 게 뒤따라 그 둘 사이에서 찢어지는 고통을 겪게 되는 걸 말합니다. 신성모독은 영적 ‘배신’입니다. 많은 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정말 ‘배신’이라는 거는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29:4)

 

여기서 ‘마음’(heart)은 의지(the will)를, ‘눈’(eyes)은 이해(the understanding)를 가리킵니다. 이사야에서는 주님을 가리켜,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he should open the blind eyes)(42:7)라 하십니다.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42:7)

 

계속해서 이사야에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29:18)라 하십니다.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29:18)



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knowing that they were naked), 자기들이 더 이상 전처럼 이노센스가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데요, 이것은 앞장 마지막 구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2:25)를 보면 분명합니다. 이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를 ‘그들이 벌거벗었다고 부끄러워하거나 하지 아니하니라’(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로 읽고는 이노센스를 의미하는 걸로 보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들의 ‘부끄러워함’(being ashamed)의 의미는 오히려 정반대인데요, 본 절의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아 자신들을 숨겼다’(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라는 데를 보면 말입니다. 이는 이노센스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라는 것은 일종의 스캔들이요, 창피이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악이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이 ‘벌거벗음’이라는 것은 이노센스의 유무에 따라 완전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은 어떤 수치스럽고 악한 걸로 사용되며, 전도된(顚倒, perverted) 교회를 서술할 때 사용됩니다. 에스겔입니다.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23:29)

 

계시록에서는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3:18)

 

그리고 마지막 날에 관하여는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15)

 

신명기에서는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 (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봉사할 때,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입어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안 그러면 죄를 짊어진 채 죽으리라’(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하시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28:42, 43)



214

그들은 자신의 본성(own)만 남은 상태이기 때문에, ‘벌거벗겨졌다’(naked)고 합니다. 본성, 즉 자기 자신만 남은 사람들은 지성과 지혜, 혹은 신앙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며, 그래서 결국 진리와 선에 대하여 ‘벌거벗겨진’(naked) 상태이고, 그 결과는 악 가운데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주님의 진리와 선이라는 옷을 입어야 천국 갈 수 있는데, 반대로 이 옷이 다 벗겨져서 악과 거짓의 알몸 상태가 되면 천국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우리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215

인간의 본성(man’s own)은 악과 거짓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저는 그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영들이 스스로 하는 말, 곧 주님 말씀이 아닌, 영들 본인 생각에서 나오는 말은 그게 무슨 말이든 언제나 모두 악하고 거짓이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음을 제가 알게 될 때마다, 저는 듣는 즉시 그 말은 거짓이며, 심지어 그들이 자기들이 하는 말은 진리임을 자기들은 정말 철저히 확신하고 있으니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영계는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그래도 몸으로 살짝 가릴 수 있어 겉과 속이 달라도 시치미 떼고 살아갈 수 있지만 영계는 몸을 벗고 가는 데라 선이든 악이든 어느 한쪽으로 겉과 속이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영계 체험과 증언을 통해 사람의 자아, 인간 본성이라는 게 실제로는 어떤 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듣는 즉시 그 말은 거짓임을 알았다’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퍼셉션으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퍼셉션은 어떤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은 건지 아닌지를 알게 해 주는 영적 통찰력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즉 자기 생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같은 말인데요, 어떤 사람들이 영적 천적인 일들이나 신앙의 일들에 관하여 이성적 접근을 시작할 때마다, 저는 그들은 의심, 심지어 부인까지 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관한 걸 이성으로 접근한다는 건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아, 곧 그들의 본성으로 말미암는 것이어서 그들은 그저 거짓들 가운데로 가라앉으며, 그 결과 짙은 어둠, 곧 거짓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들이 이 심연 가운데 있을 때는 아주 작은 것 하나로도 수천의 진리들을 압도할 수가 있는 것이, 마치 눈동자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 한 조각만으로도 온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에 관해 눈을 감게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이사야에서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5:21)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47:10, 11)

 

예레미야에서는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51:17)

 

‘만든 신상’(graven image)은 거짓이요, ‘부어 만든 우상’(molten image)은 악, 곧 인간의 본성 속 악입니다.



216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잎을 엮어’(sew leaves together)는 자신들을 변명하는 것, ‘무화과나무’(fig tree)는 자연적 선, ‘치마로 삼았더라’(make themselves girdles)는 부끄러워했다는 것입니다. 태고인들은 이렇게 말했고, 그들은 그 교회의 후손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 묘사는 그들이 전에 즐거워하던 이노센스 대신 이제는 자연적 선만, 곧 그 안에 그들의 악이 들어 있는 그런 선만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런 자연적 선 안에 있게 된 걸 그들은 부끄러워했다는 그런 묘사입니다.



217

말씀에서 ‘포도나무’(vine)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fig tree)는 자연적 선을 상징하기 위한 것임을 오늘날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이 사라졌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이 표현들이 나오는 데들을 보면, 여전히 이런 의미를 뜻하거나 포함하고 있지요. ‘포도원’(vineyard)과 ‘무화과나무’(fig tree)와 관련, 주께서 비유들을 통해 하신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마태복음입니다.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1:19)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그 어떤 선도, 심지어 자연적 선조차도 땅, 곧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 역시 유사한 의미입니다.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2, 13)

 

이 말씀은 모든 선, 곧 영적, 자연적 선이 사라져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타락한 나머지 심지어 부끄러워하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인데요, 마치 오늘날, 악 가운데 있어 자기들의 사악함에도 불구, 얼굴이 붉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걸 자랑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호세아입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 (9:10)

 

요엘입니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22)

 

여기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가리킵니다.



8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C.218-225)

 

21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는 내면의 소리(an internal dictate, an inner dictate, the inner call)입니다. 그들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건데요, 이 소리는 그들이 전에 소유했던 퍼셉션(perception) 가운데 아직 남아 있던 겁니다. ‘그날 바람이 불 때’(the air or breath of the day)는 그 교회가 아직 약간의 퍼셉션을 소유하던 기간을 가리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그 소리를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마치 악을 의식하는 사람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숨긴 곳에 있는 ‘동산 나무 사이에’(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합니다. 여기 가장 안쪽(inmost)을 ‘사이에’(midst)라 하며, ‘나무’(tree)는 앞서 살핀 대로 퍼셉션을 가리킵니다만, 그러나 이제는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어서 마치 유일하게 남은 것인 양 나무를 단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219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는 그들이 두려워한 내면의 소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소리’(voice)가 상징하는 걸 보면 분명한데요, 말씀에서 ‘여호와의 소리’(voice of Jehovah)는 말씀 그 자체, 신앙의 교리, 양심이나 내적으로 주의, 경고하기, 그리고 또 그 결과 이어지는 모든 책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곤 합니다. 그래서 천둥소리를 ‘여호와의 소리’(voice of Jehovah)라고 하는데요, 요한계시록입니다.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10:3)

 

그때 외적, 내적 둘 다인 어떤 소리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10:7)

 

시편입니다.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68:32, 33)

 

‘옛적 하늘들의 하늘’(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은 태고교회의 지혜를 말하며, ‘소리’(voice)는 계시, 그리고 또한 내면의 소리를 뜻합니다. 계속해서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29:3-5, 7-9)

 

이사야입니다.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30:30, 31)

 

 

(쉬는 시간)



220

‘거니시는 소리’(voice going to itself)는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음을, 말하자면 마치 그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다음 절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Jehovah called to the man)를 보면, 거기서도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아담을 부르시며’의 ‘부르시며’는 ‘shouted’에 가까운 ‘called’입니다. 사람이 자기 본성에 깊이 잠긴 상태를 ‘깊이 잠들게 하시매’라 표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죄를 지었으나 양심의 소리가 들리는 사람한테는 이런 소리가 천둥번개의 소리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에서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40:3, 6)

 

‘광야’(wilderness)는 신앙이라는 게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교회를, ‘외치는 자의 소리’(voice of one crying)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수태고지(受胎告知,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곧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모든 소식입니다. 거듭난 사람들과 그 안에 내면의 소리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말이지요.



221

‘그날 바람이 불 때’(the “air” or “breath” “of the day”)는 기간, 곧 교회에 아직 어느 정도 퍼셉션이 남아 있던 기간을 의미함이 분명한 것은 ‘낮’(day)과 ‘밤’(night)의 상징 때문입니다. 태고인들은 교회의 상태를 낮과 밤의 때들과 비교했는데, 교회가 아직 빛 가운데 있었을 때를 낮으로 보았고, 이런 이유로 이 상태가 ‘그날’(of the day)의 숨 또는 바람으로 비교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밤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을 만큼의 퍼셉션이 아직 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밤 상태(they were fallen)는 숨, 호흡, 생명이 없는 상태입니다.

 

주님은 또한 신앙의 상태를 ‘낮’(day)으로, 신앙이 없는 상태를 ‘밤’(night)으로 부르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9:4)

 

같은 이유로, 사람의 거듭남의 상태들을 창세기 1장에서 ‘날들’(days)이라 하였습니다.



222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악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그러듯 그 내면의 소리를 두려워함이라는 것은 그들의 대답인 10절 말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를 보면 분명합니다. ‘여호와의 낯’(face of Jehovah) 혹은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강 및 모든 선이라는 것이 다음 축복의 말씀들을 보면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6:25, 26)

 

시편에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67:1)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그래서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자비를 가리켜 ‘자기 앞의 사자’(angel of faces)라 하고 있습니다.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63:7-9)



223

‘주의 낯’(face of the Lord)은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선이시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주님은 만물을 향해 자비로우시며,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외면하는 분이 아니신 반면, 오히려 사람, 그러니까 악 중에 있을 때 얼굴을 돌려버리는 자는 바로 그 사람 본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하신 이사야 말씀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59:2)

 

와, 그리고 여기 ‘그들이 자기들이 벗었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they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because they were naked) 말씀을 보면 말입니다.



224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선, 즉 ‘여호와의 낯’(faces of Jehovah)은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들 역시 같습니다. 이들 퍼셉션과 양심은 늘 자비롭게 작동하지만, 사람의 상태에 따라 이 둘의 수용되는 정도는 달라집니다. 이 사람의 상태, 곧 태고교회 이 후손의 상태는 일종의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자연적 선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두려워하며 스스로 숨습니다만, 반면, 이 선조차 없는 사람들은 숨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일말의 수치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812, 13절은 이런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위 217번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2, 13)



225

‘동산 나무 사이에’(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는 그 안에 ‘나무’(tree)라 하는 퍼셉션이 조금 있는 자연적 선을 말한다는 것은 전에 천적 인간이 거주했던 곳이 ‘동산’(garden)임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그곳을 경작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모든 선과 진리를 가리켜 ‘동산’(garden)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선은 그 가장 안쪽이 천적이지 않으면 선이 아닙니다. 그곳으로부터이거나 그곳을 통해서 퍼셉션은 주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이 가장 안쪽을 가리켜 ‘사이’(midst)라 하며, 말씀 어디에서나 같습니다.

 

9, 10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C.226-228)

 

226

‘부르시며’(crying), ‘동산에서 나는 소리’(voice in the garden),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being afraid because they were naked), ‘숨었나이다’(hiding themselves)의 의미들은 앞서 지금까지 주욱 설명했습니다. 말씀에서 먼저 사람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무엇을 하느냐 묻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미 다 아시면서 말이지요. 그러시는 이유는 그가 시인하고 자백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227

오늘날(1750년 즈음 유럽)은 퍼셉션, 내적 음성(internal dictate) 및 양심의 기원을 좀 알 수 있었으면 하는 데 비해 실제 알려진 건 거의 없는 상황인지라 제가(Swedenborg, 스베덴보리, 1688-1772) 이 주제로 무슨 말씀을 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엄청난 사실은, 사람은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의 지배가 시작되면, 천사들은 악과 거짓들의 방향을 바꾸느라 애를 쓰며, 이렇게 전투가 발생합니다. 사람이 퍼셉션, 딕테이트 및 양심을 통해 점점 더 민감해져 가는 게 바로 이 전투입니다. 이것들과, 또 시험을 통해 사람은 영들과 천사들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아주 확실히 알 수 있는데요, 그가 영과 천사들에 관한 말들을 듣고도 전혀 안 믿을 정도로 육()의 일들에 아주 깊이 잠긴 그런 사람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지어 이런 영적 전투를 수백 번 느껴도 여전히 말하기를, 그런 건 다 상상이며 마음이 어수선해서 일어나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저는 허락하심을 받아 이런 영적 전투를 느끼고, 수천수만 번 수년 동안이나 지속, 아주 생생하게 감지할 수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이 전투를 일으키는 영들이 누구며 무슨 일을 하고, 그리고 어디 출신인지, 언제 오고 언제 떠나는지 등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들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228

천사들에게는 정말 말로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차원이 다른 정교한 퍼셉션이 있는데요, 천사들은 이걸로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에 반대되는 어떤 것에 들어갈지 말지를 지각합니다. 천사들은 들어가는 것의 퀄리티(quality, )와 언제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그런 것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이 혼자 하는 것보다 수천 배나 더 완벽하게 지각합니다.

 

사람이 혼자 하는 것 보다’라는 표현은 ‘자기에게 와 있는 천사들의 도움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관하여 아래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292번 글을 읽어 보세요.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204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204. 각 사람에게 와있는 천사들과 영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 사람은 영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다. (AC.697, 2796, 2886, 2887, 4047, 4048, 5846–5866, 5976–5993) 자기에게 와있는 영들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AC.5993) 사람은 영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들 또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AC.5862) 영들은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에게 속한, 우리 태양계 내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AC.1880)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생각조차도 천사들은 더욱 풀로(fully) 지각합니다. 사람이 그걸로 할 수 있는 가장 그레이트한 것보다도 더 말이지요. 이런 얘기는 정말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백 프로 사실입니다.

 

 

11-13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C.229-233)

 

229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는 앞서 설명되어 온 내용으로 분명한데요, 즉 인간의 합리적, 이성적인 면이 자아, 본성으로 말미암아 속아 넘어가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인간 자신에게 무척 소중해서, 이걸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는 자기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거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은 뱀하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 실제로 뱀이라는 건 존재하지도, ‘뱀’(serpent)으로 상징된 감각적인 걸 특정하지도 않으셨다는 것이며, 대신 이 구절들에는 다른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이들 감각으로 인해 속았음을 지각했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자기 사랑의 결과, 그들은 주님과 주님 신앙에 관해 귀로 들어온 것들의 사실 여부를 자기들이 믿기 전에 먼저 좀 확인할 수 있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230

이들 네 번째 후손을 지배하는 악은 자기 사랑이었고, 동시에 세상 사랑은 오늘날(1750년대 유럽) 볼 수 있는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소유의 가정과 권속들 내에서 지냈고,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열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231

홍수 전 있었던 태고교회의 악, 뿐만 아니라 홍수 후인 고대교회의 악, 그리고 또 유대교회의 악 및 새 교회, 즉 주님 오신 후 시작된 이방교회의 악, 그리고 또 오늘날 현 교회의 악까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 모든 악은 주님이나 말씀을 안 믿고, 대신 자기 자신과 자신에게 있는 감각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은 신앙이라는 게 없고, 신앙이 전혀 없는 곳에는 이웃 사랑이라는 것도 없으며,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요 악이 된 것입니다.



232

오늘날은, 그러나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더 안 좋은 상황입니다. 고대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기억-지식들, 즉 새로운 과학 지식들 때문에 사람들이 이제는 감각마저 불신하게 된 건데요, 이로 인해 형언할 수 없는 어두움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로 인한 이 어두움의 엄청난 실상을 알면 아마 기절할 듯 놀라 자빠질 겁니다.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는 이 주석을 1749년에 시작, 1756년에 마쳤습니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15세기 후반,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으로 퍼져나가면서 그동안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 세계관으로 세계관의 이동, 가치관의 이동을 이끌었고, 16, 17세기 근대 과학 혁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계시 중심에서 인간 이성 및 실험, 관찰 중심으로 옮겨간 것이지요. 스베덴보리가 이 주석을 기록하던 18세기 중엽 유럽의 상황을 이런 흐름 속에서 생각해 보면, 저 ‘새로운 과학 지식들 때문에 사람들이 이제는 감각마저 불신하게 된 건데요, 이로 인해 형언할 수 없는 어두움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로 인한 이 어두움의 엄청난 실상을 알면 아마 기절할 듯 놀라 자빠질 겁니다’라는 말에 묻어 있는 안타까움이 조금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마저도 2025년 현재의 문명급 과학기술에 비하면 거의 3백 년 전 과학 지식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233

기억-지식들, 곧 세상 학문과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겠다는 것만큼이나, 그리고 갈비뼈 하나로 가슴과 심장의 극히 미세한 근육들을 움직여 보겠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19:24)

 

정말 거칠고 투박한 것, 네, 정말 훨씬 더 거칠고 투박하지요! 그것은 우리의 감각과 기억-지식에 관한 것을 영적 천적인 것과 관련지으려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허락으로 스베덴보리 57세 때 시작,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간 계속된 영계 체험을 통해서 영들과 천사들, 그리고 주님에 대하여 알게 된 그로서는 그에 비해 이 세상 지혜와 지식, 학문적 성과라는 것들이 얼마나 초라하고 하등한 것인지가 아주 생생하게 대비되었던 것 같습니다.

 

자연의 셀 수 없이 많은 비밀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사실은 거의 단 하나도 발견하기 어렵고, 또 잘 알려진 대로, 조사하는 중에 그만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영적 천적 삶 가운데 숨겨진 진리들을 조사하는 동안에는 그럴 가능성이 훨씬 더합니다. 거기에는 자연계에서는 볼 수도 없는 것 하나 안에도 얼마나 많은 무수한 신비들이 존재하는지 모르니까요!

 

[2] 한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면은, 사람은 스스로 악을 행하고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라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이 그러는 것이며, 악한 영들 역시 그들 자신이 그러는 게 아니라 그들이 그동안 자신의 본성으로 만들어 온 악 자체가 그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사람이 악을 행하여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며, 사람이 죄 안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또 한편으로, 사람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도, 주님을 향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천사들에 의해 행해집니다. 그런데 이 역시 천사들이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주님 홀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할 수 있고, 주님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우리가 가진 감각이나 기억-지식, 철학 같은 걸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런 것들에 대한 자문을 구하게 되면, 이 모든 게 사실임에도 불구, 모조리 부정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늘 똑같습니다.

 

[3]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으로 분명한 사실은, 믿음의 문제들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답을 찾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의심과 부인, 즉 깊은 흑암과, 그 결과 온갖 탐욕 가운데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거짓된 것을 믿고 거짓된 것을 행하기 때문이며, 또 그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대신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들만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들은 자아와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하며, 이런 식으로 거짓된 것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모든 탐욕과 악을 행합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3장 첫 번째 단락인 창3:1-13을 오늘은 그 후반부인 7절로 13절, ‘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눈이 밝아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이며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3 두 번째 단락인 14절로 19절을, ‘3,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라는 제목으로 2주에 걸쳐 살피겠습니다. 아, 그리고 다음 주는 월의 첫 주 성찬 있습니다. 다음 주는 벌써 11월이군요. 환절기 감기 걸리지 마세요. 몸의 건강과 관련,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 몸과 천국 간 일대일 상응을 기억하시고, 몸 아픈 부위에 대한 천국 내 해당 공동체들의 활기와 생명, 그리고 사랑이 흘러들어와 머무르기를 어린아이처럼 구하는 상응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본문과 개요, 한 번 더)

 

 

설교

2025-10-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15. 2025-10-26(D1)-주일예배(창3,7-13, AC.211-233), ‘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눈이 밝아짐’.pdf
0.67MB
15. 영문 원본, 창3,7-13, AC.211-233.pdf
0.09MB

 

 

 

 

16. AC.234-249, 창3.3,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창3:14), 2025/11/2(D1, 성찬)

창3.3,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창3:14, AC.234-249)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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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C.190-210, ‘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뱀과 여자’(창3:1-6), 2025/10/19(D1)

‘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뱀과 여자’(창3:1-6, AC.190-210)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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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뱀과 여자(3:1-6, AC.190-210)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1-13)

 

 

창세기 속뜻 주석 설교, 창세기 3장 첫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이야기(3:1-13)를 오늘은 그 전반부인 1절로 6절까지 번역, 설명을 곁들이며 함께하겠습니다.

 

먼저 개요입니다.

 

 

190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세 번째 상태를 다루는데요, 이 상태는 자신의 본성을 사랑할 정도로 원하던(so desired its own as to love it) 상태입니다.



191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들의 감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아무것도 안 믿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본문에서는 감각적인 건(the sensuous part)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은 ‘여자’(woman)로, 그리고 이성적, 합리적인 건(the rational) ‘남자’(ma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92

이런 배경 가운데 ‘뱀’(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 주님 신앙에 관한 것들이 과연 그런지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이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으로, 사람의 이성이 동의한 것은 ‘그도 먹은지라’(the man that he did eat)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6)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을 저런 말로 속일 수는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한테는 저런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런 말에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는 본인이 가진 자아의 퀄러티, 즉 속 사람의 역량 문제인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라면 저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그 자아가 백 퍼센트 주님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의 귀가 어떤 속삭임에 솔깃해하는가를 관찰하면 나라는 사람의 정체, 본성, 내가 하고 있는 이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나오는, 뱀에게 속아 넘어가는 여자는 창2 후반에 나오는 여자와 다른 여자입니다. 저 창2 후반 본문은 두 번째 후손 이야기이지만, 여기는 세 번째 후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안 좋게 변한, 자기 사랑에 더욱 기울어진 상태가 된 후손 이야기인데, 두 번째 후손만 되었어도 안 속았을 저런 속삭임에 이들은 그만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나오는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 그러니까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 등 여러 파트로 구성된 존재로서, 이 중 가장 낮은 파트인 몸에 속한 감각을 ‘’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천적 인간은 이 몸의 감각 또한 거듭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몸의 감각이 더 이상 뱀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육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한테는 지옥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천적 인간이며, 일곱 번째 상태, 곧 안식일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193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지각했는데요,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와 그들이‘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hearing the voice of Jehovah)(7, 8)라는 표현을 보면, 그들에게 아직 퍼셉션이 남아 있음과,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고(7), 부끄러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을(8, 9)뿐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모습(10-13)들을 볼 때, 아직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도 남아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절 별 속뜻입니다.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C.194-197)

 

194

여기 ‘뱀’(serpent)은 인간이 신뢰하고 있는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여기 ‘들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처럼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여자’(woman)는 인간의 본성(man’s own)을 말하며, 뱀이 하고 있는 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는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서 그들은 계시된 것들에 관하여 그것이 과연 그런지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어야만 믿기 시작했습니다. 본 절과 다음 절은 그들의 첫 번째 상태, 즉 의심의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195

태고인들은 인간의 모든 것을 짐승과 새에 비유하는 대신 실제로 그렇게 명명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들의 스피킹은 홍수 후 고대교회에까지도 이어져 이후 선지자들한테까지 전해졌습니다. 사람 안의 감각적인 것을 그들은 ‘뱀’(serpents)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뱀이 땅에 가까이 붙어 지내는 것처럼 감각적인 것들 역시 몸하고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신비에 관한 감각적 증거에 기반을 둔 이성 활동, 즉 신앙의 신비를 감각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일련의 이성적 활동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하였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을 ‘뱀’(serpents)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많은 걸 감각, 즉 보이는 걸 가지고 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하는 것입니다. 이 보인다는 것은 땅에 속한(terrestrial) 거, 육적인(corporeal) 거, 일상적인(mundane) 거, 자연적인(natural) 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주술에 가까운 행위의 결과, 그때 나타나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무슨 학술이나 신학, 영성 세미나를 연다는 식의 이성적 활동들을 말합니다.

 

[2] 그리고 또 시편에 보면 이성(理性)놀이(reasonings)를 통해 사람을 유혹하는 자들에 대해 이르기를,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140:3)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58:3-5)

 

이성(理性)놀이, 이성(理性)질 같은 용어나 표현은 제가 만든 겁니다. 주님이 주신 이성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는 순기능 대신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려는 역기능으로 사용하는 자들의 악한 의도를 비웃기 위한 용도로 말이지요.

 

현자(賢者)가 하는 말이나 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는 그런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의 이성놀이, 이성질을 가리켜 여기서는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 사이에서 ‘뱀이 귀를 막는다’(The serpent stoppeth the ear)는 말이 하나의 속담이 되었지요. 아모스입니다.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5:19, 20)

 

‘손을 벽에 대는 것’(hand on the wall)은 자기가 힘의 근원이라는 것, 그리고 감각적인 것들을 신뢰한다는 의미이며, 여기에 나오는 실명(失明, the blindness)이 이런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3] 예레미야입니다.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46:22-24)

 

‘애굽’(Egypt)은 신성한 것(Divine things), 주님께 속한 일을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 곧 세상에서 학습한 지식으로 헤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짓을 가리켜 ‘뱀의 소리’(voice of a serpent)라 하며, 그로 인해 야기된 실명(the blindness)을 ‘북쪽 백성’(people of the north)이라고 한 것입니다.

 

욥기입니다.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20:16, 17)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Rivers of honey and butter)은 영적 천적인 것들인데 이는 단지 이성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위 본문에서는 이성적이기만 한 것을 일컬어 ‘독사의 독’(poison of the asp), ‘뱀의 혀’(viper’s tongue)라고 합니다. 뱀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14, 15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196

고대에는 계시된 것들에서보다 감각적인 것들에서 더 확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뱀’(serpents)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사정이 더욱 안 좋은데요, 지금 사람들은 자기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안 믿을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과학 지식이라는 걸 가지고 더욱 자신들을 그런 불신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이며, 그 결과 스스로를 더욱더 깊이 눈먼 상태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눈멀게 하는지, 그 결과 나중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지, 이 사람들은 천국에 관한 일들을 감각과 기억-지식, 그리고 철학에 관한 걸로 자신들의 결론을 내리며, 그리고 말씀에서 자주 ‘귀머거리 뱀’(deaf serpents)이요, ‘날아다니는 뱀’(flying serpents)으로 언급되는 사람들인데, 이 경우가 훨씬 더 치명적이지요, 이런 게 사람들에게 알려지도록 우리는 영에 대해 그들이 믿는 게 뭔지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합니다.

 

[2] 감각적인 사람, 즉 오직 감각 증거만을 믿는 사람은 영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가 영을 볼 수 없기 때문인데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내가 그걸 느낄 수 없으니까 당연한 거 아냐? 만약 내가 그걸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면, 그땐 당연히 존재하는 거지. 그걸 내가 왜 모르겠어?’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기억-지식의 사람, 곧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말하기를, ‘영이라는 게, 말하자면 눈앞에서 허공중에 사라지는 수증기나 열기, 혹은 그 밖의 무슨 과학적 실체가 아니면 영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동물에게도 일종의 몸, 감각 및 이성과 유사한 뭔가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동물은 죽지만 인간의 영은 산다고들 하네요’ 이런 식으로 그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3] 철학자들의 경우입니다. 인류의 대부분보다 훨씬 예리한 이들 철학자들도 영에 대해 말할 때는 결과적으로 자신들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말하는데요, 이들은 서로 논쟁하기를, 물질이나 유기물, 혹은 그 밖의 것들에 관한 그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도 이 영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투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들은 영에 대해 머리를 쥐어짜 너무 추상화한 나머지 영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라는 게 결국은 그냥 사라져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그중에서 좀 나은 사람은 영은 생각(thought)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생각에 대한 그들의 소위 이성적이라는 주장을 보면 생각에서 모든 실재(substantiality), 알맹이를 다 분리하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은 결국 몸이 끝나면 영도 사라져야 하는 결론에 도달하지요. 결국 감각에 속한, 기억-지식에 속한, 그리고 철학에 속한 걸 가지고 이성적 사고를 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영의 존재를 부인하며, 영과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하는 모든 말을 전혀 믿지 않지요.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들은 영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자기들은 그게 존재한다는 걸 안다고 해요. 주님 말씀하시기를, 자기들은 사후에도 살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소멸시키는 대신 주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생생하게 하지요.



197

태고인들, 천적 인간들이었지요, 이런 태고인들 가운데서 ‘뱀’(serpent)은 세심함, 신중함(circumspection)을 의미했으며, 또한 감각 파트(sensuous part)를 의미했지요. 이를 통해 그들은 신중함을 훈련, 부상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뱀’(serpent)에 관한 이러한 의미는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 말씀으로도 알 수 있는데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10:16)

 

그런가 하면 또 광야에 세워진 ‘놋 뱀’(brazen serpent)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놋 뱀은 주님의 감각 파트를 상징하는데 주님만이 홀로 천적 인간이시며, 홀로 모두를 돌보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지요. 그래서 이 놋 뱀을 쳐다본 모두가 산 것입니다.

 

놋 뱀 에피소드는 아래 민수기 본문에 나옵니다.

 

4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4-9)



2, 3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C.198-203)

 

198

‘동산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는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 계승된 선과 진리이며, ‘그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는 주님께 속한 신앙의 선과 진리인데, 이는 그들이 자신들한테서 배워서는 안 되는, 즉 세상 학문이나 지식을 가지고 배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지지도 말라’(not to touch it)는 금지입니다. 그들 자신이나 감각, 기억-지식에 속한 걸 가지고 함부로 주님께 속한 신앙의 선과 진리 들여다보는 행위를 금하는 것이지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lest ye die)는 그랬다가는 신앙,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지혜와 총명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199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가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 계승된 선과 진리, 즉 신앙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한데요, 앞서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를 다루던 창2:16에서는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라 한 반면, 여기서는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동산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2:16)

 

우리말 개역 개정에서는 위 창2:16 번역을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라 하여 원전에는 없는 ‘열매’를 첨가했습니다. 원전에는 ‘동산 각종 나무’인데요,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한다는, 이런 속뜻을 알 길이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고?’ 하면서 이 부분을 원전 그대로 번역하기가 굉장히 어색했을 것입니다.

 

위 창2:16본문의 ‘동산 나무’(tree of the garden)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퍼셉션이며, 이 선과 진리는 그 퍼셉션의 산물이기 때문에, 여기서 ‘열매’(fruit)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열매’(fruit)는 자주 이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첫 세대와 두 번째 후손 간,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 간 등 이 세대 간 구분이 실제 역사로는 얼마나 될까요? 보통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를 실제 역사로는 30년으로 봅니다만, 그러나 창5에 나오는 아담의 계보를 보면, 태고교회 후손들이 평균 8, 9백 년씩 살았던 걸 볼 때, 그 장구한 세월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저 후손들의 이름은 사실은 당대를 풍미한(?) 교회의 이름, 교리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며, 저 숫자들 역시 어떤 아르카나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 지질학적 지구 역사는 45, 6억 년이라 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해서이지요.



200

앞서 창2:9에서는, ‘동산 중앙에’(in the midst of the garden)있는 나무는 생명나무이지 지식의 나무가 아니라고 하더니 여기서는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라 하는 이유는, 동산 ‘중앙’(midst)은 가장 내적인(the inmost), 가장 깊은 내면을 상징하기 때문인데 천적 인간, 즉 태고교회의 가장 깊은 내면은 이 ‘생명나무’(tree of lives), 곧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었던 반면, 여기 이 사람, 곧 천적 영적 인간(a celestial spiritual man)이라고 하는, 혹은 그 후손이라고 하는 이 사람한테서는 신앙이 동산의 ‘중앙’, 즉 가장 깊은 내면이었기 때문입니다. 태곳적 사람들의 퀄리티(quality)를 아주 제대로 묘사하는 건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오늘날은 그들에 대해서 알려진 게 전혀 없고, 그들의 지니어스(genius)는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정말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니어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그들은 선을 통해 진리를 알았고 사랑을 통해 신앙이라는 게 뭔지를 알던 사람들이었다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조금은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 세대가 막을 내렸을 때 그다음에 일어난 세대는 완전히 다른 지니어스를 가졌는데요, 그들은 이전 세대처럼 선을 통해 진리를 알거나 사랑을 통해 신앙이라는 게 뭔지를 아는 대신, 선이 무엇인지를 진리를 가지고 습득하거나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사랑에 관한 걸 아는, 즉 선과 사랑을 지식으로 습득, 학습으로 아는 그런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이 지식밖에는 거의 가진 게 없었습니다. 이것이 홍수 후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생긴 변화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201

이렇게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태고인들의 이런 지니어스가 오늘날엔 발견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본문에 들어있는 참된 의미, 곧 속뜻을 제대로 설명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릅니다. 천국에서는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데요, 천적이라고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은 홍수 전에 거듭난 태고인들과 같은(same)지니어스를 지닌 반면, 영적이라고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후 거듭난 사람들과 유사한(similar)지니어스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비록 두 경우 모두 무한히 다양하지만 말입니다.

 

 

202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교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즉 신앙에 속한 걸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배우는 일을 삼가야 할 뿐 아니라, 그 나무를 만지는 것조차, 즉 신앙에 관한 걸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었던 그런 캐릭터였는데요, 안 그러면 그들은 천적 삶에서 영적 삶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의 삶 또한 그런데요, 그들이 더욱 내적, 더욱 천적일수록 신앙이라고 이름하는 경험이나 영적이라고 하는 걸 약간 접해보는 수준의 경험조차 그들에게는 일절 불허됩니다. 이 신앙이라는 말을 남들을 통해 들을 경우, 그들에게는 신앙 대신 사랑의 퍼셉션이 있는데요, 이게 어떻게 다른 건지는 오직 그들만 알지요. 이렇게 무엇이든 신앙에 속한 것을 그들은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기원, 시작합니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그 어떤 이성질(理性질, 이성을 가지고 말장난하는 거)도 정말 굉장히 못 견뎌 하며, 그와 관련된 그 어떤 기억-지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랑으로 퍼셉션, 곧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주님으로 말미암는 퍼셉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퍼셉션으로 어떤 일이 과연 그런지 안 그런지를 즉시 압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신앙에 관한 말을 듣게 되면 그들은 그저 단순히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하는데요,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걸 지각, 즉시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의미, 이유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5:37)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지식의 나무 열매를 만지지 못하게 하셨다는, 즉 ‘너희는 만지지도 말라’ 하신 말씀의 의미, 속뜻입니다. 그들이 그걸 만지면, 그들은 악 가운데 있게 될, 즉 결과적으로 그들은 ‘죽게’(die)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특별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천적 천사들은 다양한 주제에 관해 다른 천사들처럼 서로 대화합니다. 다만 천적 언어(天的, a celestial language)로 하지요. 이 언어는 사랑으로 되어 있고, 사랑에서 나오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더욱 형용, 형언할 수 없는 언어입니다.

 

 

203

영적 천사들도 신앙에 관한 대화를 하는데요, 이들은 신앙에 관한 것들을 심지어 지성과 이성, 그리고 많이 배운 사람들의 언어로 확실히 보여 주지만, 그러나 그들은 신앙과 관련된 일들에 이런 걸로 무슨 자기들만의 결론을 내리는 짓은 절대로 안 합니다.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또한 신앙에 관한 모든 진리의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는데요, 비록 천적 천사들의 것과 같은 그런 퍼셉션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영적 천사들의 퍼셉션은 일종의 양심(conscience) 같은 건데요, 이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력을 갖는, 마치 천적 퍼셉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저 영적 퍼셉션일 뿐인, 그런 겁니다.

 

 

(쉬는 시간)

 

 

4, 5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C.204-206)

 

204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는 신앙에 관한 것을 감각과 지식, 곧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걸 기준 삼아 신앙에 관한 것을 헤아릴 경우, 분명히 말하지만, 오히려 신앙에 관한 게 잘못되었다 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as God, knowing good and evil)은 만일 그들이 그런 짓, 곧 스스로를 기준 삼아 그런 짓을 하면, 그들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양 스스로를 인도하려 할 것이라는, 즉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대신, 오직 자기 힘으로만 살아가려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205

모든 구절에는 교회의 어떤 특별한 상태나 상태의 변화가 들어 있습니다. 앞선 구절들에는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졌음에도 그들, 곧 그 당시 교회는 자신들의 상태가 주님 보시기에 불법이라는 걸 지각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반면, 이 구절들에는 막 시작된 의심, 곧 자신들이 볼 때, 이들은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들인데, 합법적이지가 않다(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자신들의 감각과 세상에서 배운 걸로 봤을 때, 자신들이 그동안 선대로부터 들어온 것들, 곧 주님과 천국,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 교리들이 좀 안 맞는 것 같다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눈이 열렸다는, (사실은 정반대로 오히려 더 눈이 멀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 우리가 너무 교회 중심으로, 교리 중심으로만 살아왔구나. 실제 세상 지식과 감각 경험은 전혀 다른데...’ 하는, 그리고 결국 이런 식의 자기 사랑,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깊어지면서, 그들은 ‘이 정도면 우리 스스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주님과 같아질 수 있지 않을까?’ 여기기 시작했다는 그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게 자기 사랑의 본질인데요, 이는 주님 따르는 건 꺼리고, 대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걸 더 선호하며, 믿음 관련한 일들을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혼자 알아서 하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 번역은 특별히 쉽지가 않아 여러 날 걸렸고, 이해를 돕기 위해 최대한 풀어 번역했습니다.

 

 

206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 사람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고 동시에 세상 배움에 탁월한 사람들, 이 둘 중 누가 더 대단한 믿음을 가진 걸까요? 그러나 사실은 누가 더 눈이 먼 걸까요? 그들에게 단지 질문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은 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기는 고사하고 심지어 알지도 못하며, 영적 천적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낯설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삶을 인정하지 않는데요, 그들은 스스로를 사라질 짐승과도 같은 존재라 믿으며, 주님도 인정하지 않고 대신 오직 자신들과 자연만 숭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좀 신중하게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르기를, 어떤 최고의 존재가 만물을 다스리지만, 자신들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감각 및 기억-지식과 관련된 일들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을 입증할 때 사용하는 원리들이 있는데요, 그들은 맘만 먹으면 온 우주를 앞에 놓고도 그럴 겁니다. 그들은 남에게 신(, gods)처럼, 또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처럼 여겨지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만약 그들의 본성 가운데 없는 게 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그런 건 없다고, 다만 자신들의 본성 전부를 잃게 되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라는 대답들을 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영의 존재를 시인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사후 자기 영의 상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사람에게 맨 먼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빛나는 성취를 이루었어도 정작 그가 자기 영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며 관심조차 없고, 그저 철저히 세속적이며 물질적이기만 한다면, 이 사람에겐 가장 시급한 질문이 바로 이 영, 다른 말로는 그의 본성과 관련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타고난 자연 상태로는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얼른 주님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 새로운 상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런 건 일종의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이라는 걸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건 그저 상상 속 산물로서, 천민들(賤民, the vulgar)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써먹을 수 있는 거라고 할 겁니다.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는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들은 씨익 비웃으며, 그런 건 광적인 쓰레기, 곧 종교 마니아들 간 사용하는 일종의 무슨 싸인 같은 거라고 할 겁니다.

 

스베덴보리 시절인 1750년대 유럽의 영적 분위기가 이랬나 봅니다. 이 하나하나의 사례가 모두 스베덴보리가 직접 겪었던 사례이지 싶은데요, 오늘날 한국 사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신교를 비롯, 거의 모든 기독교가 외적(外的, external) 사고, 즉 ‘겉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데, 말로는 ‘영성, 영성’ 하지만 그 사고의 뿌리는 ‘’에 있습니다. 내적(內的, internal) 사고, 즉 ‘’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말해도 거의 이해를 못 합니다.

 

이런 게 그들의 지혜이며,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소위 ‘눈이 밝아지는 것’(open eyes)입니다.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gods)입니다. 이런 원리들, 그들 생각에는 대낮보다 더 밝은 원리들인데, 이런 원리들을 가지고 그들은 모든 것의 출발점 삼으며, 이런 식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한 이성질(理性질)을 하는데요, 그 결과는 과연 어둠의 깊은 심연밖에 뭐가 더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이런 것이 바로 세상을 꾀는 ‘뱀’(serpents)인 것입니다만,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은 아직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건 본 장 14절로 19절에서 다루게 됩니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man [vir])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C.207-210)

 

207

‘먹음직도 하고’(Good for food)는 탐욕(cupidity)을, ‘보암직도 하고’(pleasant to the eyes)는 환상(fantasy)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은 쾌락(pleasure)을 각각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다 본성(the own), 곧 ‘여자’(woman)에게 속한 것들이며, ‘그도 먹은지라’(husband eating)는 이성의 동의(the consent of the rational)를 의미합니다. (AC.265)

 

즉, 이 세 가지, 탐욕, 환상 및 쾌락은 인간의 본성, 자아의 속성들이라는 말입니다.

 

아래는 265번 글이고, 그 아래는 158번 글입니다.

 

‘남편’(husband or man)이 합리적, 이성적 능력(the rational capacity)을 의미한다는 것이 본 장인 36절에 보면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즉 그도 동의했음을 의미합니다. 같은 내용이 158번 글, 사람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분명한데요, 거기 보면 사람은 지혜와 지성(understanding)을 가진 존재인데요, 하지만 여기 나오는 ‘사람’(man)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the ability to reason)에 머무를 뿐입니다. 지식의 나무,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이성적 능력은 지적 이해(an intelligent understanding)를 모방하는 것, 혹은 그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AC.265)

 

사람(man, 아담)이 내적 인간, 같은 말이지만, 지성과 지혜의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내가 본즉 한 사람(vir)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41:28)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AC.158)

 

위 본문의 ‘사람’은 라틴어로 ‘비르(vir)입니다. 라틴어에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homo)라는 말이 따로 있지만, ‘호모’에 비해 ‘비르’는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에도 보면은,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5:1)

 

여기 ‘정의를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을, ‘진리를 구하는 자’는 지성인을 각각 의미합니다.



208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 이야기인데요, 이들은 자기 사랑(self-love [amore proprio])에 빠져 유혹에 넘어갔고, 비록 계시라 할지라도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확인이 안 되면 계시 믿기를 언짢아하고 싫어했습니다.

 

세상에서 경험하고 학습한 지식과 주님의 계시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후자, 곧 주님의 계시 믿기를 꺼렸다, 내켜 하지 않았다는 말인데요, 이처럼 태고교회도 그 후손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주님 사랑의 반대인 자기 사랑으로 경도되어 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209

여기 사용된,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라는 표현은 저 태고 때 살던 사람들의 지니어스(genius)에 맞춘 표현인데, 특별히 의지(the will)와 관련해서입니다. 그들의 악이 콸콸 흘러나오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의지에서부터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이 나오는 데를 보면, 위 표현들은 의지보다는 이해(the understanding)와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는데요, 이는 태고인들은 선에서 비롯된 진리(truth from good)를 가지고 있었지만,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은 진리에서 비롯된 선(good from truth)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홍수 전 사람들은 그 DNA에 선을 타고났지만, 홍수 후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학습을 통해서만 선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10

인간의 본성(man’s own)이라는 걸 이렇게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인간 본성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주님이나 말씀을 믿는 대신 자기 자신을 믿는, 끝으로 감각과 기억-지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거나 세상 경험과 배움에 비춰볼 때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이 세 가지 태도로부터 샘처럼 솟아나는 모든 악과 거짓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그저 악과 거짓이 되며, 그 결과 모든 걸 반대로 봅니다. 악한 걸 선으로 보며 선한 걸 악으로 보고, 거짓된 걸 참으로 보며 참된 걸 거짓으로 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없다 하고, 없는 걸 그들은 모든 것이라 하지요. 증오를 사랑이라 어두움을 빛이라 죽음을 삶이라 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데요,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다리를 저는 사람들’(lame), ‘눈먼 사람들’(blind)이라고 합니다. 이런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 자체로 지옥이요, 저주받은 것이지요.

 

 

이상으로 창세기 3장 첫 번째 단락인 ‘태고교회의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이야기(3:1-13)를 오늘은 그 전반부인 1절로 6절까지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이며 함께했습니다.

 

지난주부터 설교 중간에 ‘쉬는 시간’을 마련, 예배와 세미나를 믹스한 듯한 새로운 형태의 주석 설교를 시도 중에 있습니다. 보통 매주 설교 원고가 A4 20장 이상이나 되어 부득이한 상황도 함께 고려한 것인데요,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주석 설교의 특성상 어떤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기까지는 일정 기간 다양한 시도가 시행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모두들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함께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전에 드린 말씀 한 번 더 드리면, 창세기 4장만 되어도 그 진도 따라가기가 정말 쉽지 않을 터이니 아직 3장 하고 있을 때 부지런히 복습, 이 내용을 나름 충분히 이해들을 하셔야 합니다. 창1, 2, 3에 대한 이해가 이후 모든 내용 전개에 기초 중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우리의 학창 시절, 대부분의 과목들이 그 앞부분을 얼마나 이해하고 탄탄하게 자기 걸로 소화했느냐에 따라 쭈욱 끝까지 완주하느냐, 아니면 얼마 못 가 그만 포기하느냐 하던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이 주석 설교를 최장 10년 잡고 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제 영혼을 갈아 넣는 중이오니 다들 조금만 진지하게 저의 권면에 귀 기울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크신 축복 있으실 것입니다.

 

원고 맨 앞으로 돌아가 본문과 개요를 한 번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원고 맨 앞으로)

 

설교

2025-10-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10-19(D1)-주일예배(14, 창3,1-6, AC.194-210),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이야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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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원본, 창3,1-6, AC.190-2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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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AC.211-233, ‘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눈이 밝아짐’(창3:7-13), 2025/10/26(D1)

‘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눈이 밝아짐’(창3:7-13, AC.211-233)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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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AC.147-167, ‘창2, 태고교회 두 번째 후손, 여자’(창2:21-25), 2025/10/12(D1)

‘창2, 태고교회 두 번째 후손, 여자’(창2:21-25, AC.147-167)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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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고교회 두 번째 후손, 여자(2:21-25, AC.147-167)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21-25)

 

 

AC 주석 설교 때는 시간에 관하여, 그러니까 설교가 길다, 너무 길다고 힘들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현존 앞에서 시간 보내느라 시간 가는 게 너무 안타깝기를 바라는 마음인데요, 마치 천국을 사모, 주님의 허락을 받아 잠시 천국을 방문하게 된 영들이 천국 그 영광에 넋을 잃다가 다시 돌아갈 때가 되자 너무나 안타까워하더라는 스베덴보리의 경험담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혹시 본문 내용의 흐름상 도저히 중간에 끊어 이번 주 1부, 다음 주 2부 식으로 하는 게 적절치 못할 경우, 중간에 쉬는 시간을 두더라도 가급적 한 번에 다루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새롭게 도입되는, 한결같은교회 주일예배의 이런 변화를 좋게 수용하여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전에 정원 목사님 생전에 헤븐교회 주일예배가 서너 시간이었던 점을, 그리고 유대인들의 예배 또한 그러함을 기억하여 주세요.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여섯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2장 두 번째 단락 중 후반부인 21절로 25절, 글 번호로는 AC.147-167,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입니다.

 

먼저 두 번째 단락 전체(18-25) 및 절 별 개요입니다. 개요는 몇 번을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일종의 큰 그림이요, 지도이기 때문인데, 속뜻 설교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131

태고교회의 후손들, 이들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proprium, own)으로 기울어졌는데, 여기서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창2 후반은 태고교회 두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132

인간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신 자신과 세상, 곧 자기 본성으로 인도받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게 허락된 본성을 여기서 다룹니다. (18)

 

133

그래서 그에게 먼저 선에 관한 애정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알게 하시는데 이것들은 그가 앞서 주님께 받은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 본성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19, 20)

 

 

134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 본성 상태로 들어가며, 그리고 이때 어떤 본성(an own)이 새롭게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걸 여자로 빚어진 갈빗대라 한 것입니다. (21-23)

 

 

135

천적 영적 생명은 인간의 본성과 거의 하나로 보일 정도로 아주 가까이 붙어있습니다. (24)

 

 

136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노센스가 이 새로운 본성 안으로 스며드는데, 이 본성이 완전히 망가져서 도무지 뭐든지 못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25)

 

 

다음은 단락 전체의 배경 설명입니다.

 

 

137

창세기의 첫 세 장은 대체로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처음부터 마지막, 그러니까 사라질 때까지 ‘사람’(man, homo)으로 불렸습니다. 창2 전반부가 이 태고교회가 가장 융성했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던 때를 다루고 있다면, 이제 여기 후반부는 자신들의 본성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상이 개요 및 배경이고, 다음은 본문 절 별 속뜻입니다. 지난주 이어 계속인데, 기억나시라고 지난주에 했던 147번, 148번 글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C.147-150)

 

147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는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그런 본성입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는 그 안에 생기가 있는 본성을, ‘깊이 잠들게’(deep sleep)는 그의 현 상태를 말하는데, 사람이 이 상태가 되면 그는 자신의 본성을 소유하는 게 자기 자신인 줄 알지요. 이 상태는 잠든 상태와 유사한데, 이 상태에 있는 동안은 사람은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이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정신을 차리며 잠에서 깬 상태가 됩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푹 빠져 주님과 천국을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깊이 잠든’ 상태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정말 많은 사람의 상태가 영적으로는 이 ‘깊이 잠든’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48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149

말씀에서도 사람의 고유 본성은 ‘뼈’(bones)와 상응, 실제로 나중에 주님에 의해 살아나는 생생해진 본성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1)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66:14)

 

시편입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35:10)

 

이는 에스겔에서 더욱 분명한데요, 거기 뼈들에 대해 ‘살을 입히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하시는 부분입니다.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37:1, 4-6)

 

[2] 사람의 본성(The own of man)은 천국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뭔가 완전히 뼈처럼 보이는, 못 움직이며 매우 추한,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그 자체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런 본성이라도 주님에 의해 생기를 얻으면 그때는 살처럼 보입니다.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은 그저 죽어있는 어떤 것에 불과합니다. 본인에게는 어떤, 실제로는 모든 것, 전부로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그의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모두 주님의 생명에서 나온 것이며, 만일 이 생명이 사라지면 그는 쓰러져 죽은 상태가 되는데 마치 돌멩이처럼 되고 맙니다.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천국과 지옥’ 9번 글입니다.

 

천사들은 그들의 지혜로 이 사실을 더 깊이 알고 있다. 그들은 선하고 참된 모든 것뿐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그들이 이것을 확증하는 것은 어떤 것도 그보다 먼저 있는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원리를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의 처음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 처음 존재를 모든 생명의 궁극적 존재라 부른다. 같은 원리로 만물은 존속한다. 존속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생겨남이며, 중간 매체들을 통해 처음 존재와 끊임없이 연결되지 않는 것은 그 즉시 사라지고 완전히 소멸되고 만다. 생명의 원천은 오직 하나이며, 사람의 생명은 거기서 나오는 물줄기라고 천사들은 덧붙인다. 따라서 그 물줄기가 끊임없이 원천으로부터 흐름을 공급받지 않으면 즉시 말라 없어진다는 것이다. (HH.9, 김은경 역)

 

사람은 생명의 기관(an organ of life)일 뿐입니다. 이런 게 기관이고, 이런 게 생명의 애정(the life’s affection)입니다. 주님만이 자신의 본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으로 그는 사람을 구속하셨으며, 이것으로 그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주님의 본성은 생명이시며, 주님의 본성으로부터 사람의 본성, 이것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인데, 이 본성이 살아나게 됩니다. 주님의 본성은 또 누가복음의 다음 주님 말씀하고도 상응합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24:39)

 

이는 또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12:46)


150

사람이 자신의 본성 가운데 있거나 가정하기를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라고 하는 상태를 ‘깊은 잠’(deep sleep)에 비유하고 있으며, 실제로 고대인들이 이렇게 했습니다. 말씀에서는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29:10), 그리고 ‘그들이 잠들어’(they sleep a sleep)(51:57)라고 말합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1:57)

 

실제로는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저지르는 것들을 주님은 마치 주님이 하시는 것처럼 기록하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최종 책임자이시며, 모든 악과 거짓조차도 주님과 상관없이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만유의 근원 되시며,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천국과 지옥 등 모든 것이 주님의 컨트롤 하에,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며,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떤 생명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영들의 세계인 중간 영계에서 저는 그동안 매우 분명하게 보아왔는데요, 자신의 본성밖에는 사랑할 줄 모르는, 그리고 자기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간다고 고집, 완강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은, 그러나 실제로 겪어보고 나서야 그게 아니라고, 자신들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게 아니었다고, 인정하긴 싫지만 할 수 없이 억지로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년간 저에게는 사람의 본성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를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알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며, 또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저 스스로는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 모든 생각의 실마리가 외부에서 제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는 것, 그리고 종종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 흘러들어오는지를 저는 알 수 있었다는 것 등의 사실들에 대해 수년간 저는 분명히 지각하며(perceive) 지내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사는 거야 하는 사람은 거짓됨 가운데 있으며, 그걸 믿기까지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악과 거짓에게 내맡기는 셈이 되는데요, 이 악과 거짓은 그가 만일 이 경우의 실상을 알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그런 것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영계에 대해서, 그리고 영계에서 자연계로 흘러드는 입류(入流, influx)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 천사들에게 능력이 있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천사들이 영이고 너무 순수하며, 실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능력이 있을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물의 원인을 보다 내적으로 살피는 사람의 경우는 견해가 다르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의 모든 능력이란 그의 사고와 의지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 두 가지를 떠나서는 몸의 작은 부분도 움직이지 못하므로) 알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고와 의지가 그의 영적 사람이고, 이 영적 사람이 육체와 그 지체를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즉 영이 생각하는 것을 입과 혀가 말하고, 영이 뜻하는 것을 몸이 행하며, 이것이 자유자재로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의지와 사고는 천사와 영들을 통해 주께서 다스리시므로 사람 몸의 모든 것도 그렇게 다스리신다. 몸이 하는 모든 것은 의지와 사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람은 천국에서의 입류가 아니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수없이 많은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했다. 천사들에게 내 발걸음, 행동, 내 혀와 말을 천사들 마음대로 움직이라는 허락이 내려졌었다. 그들은 내 의지와 생각 안에 흘러드는 입류로 나를 움직였다. 그때 나는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천사들은 나에게 모든 사람이 이렇게 다스림을 받는다고 말하고, 이는 교회의 가르침과 성서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비록 교리를 떠나 스스로 생각할 때는 달리 말하고 달리 믿더라도,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 천사를 보내어 인도해 주시고, 발걸음을 이끄시고 가르쳐 주시라고 하고, 또 생각할 바와 말할 바를 알려주시라고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상의 내용은 천사들이 사람에게 어떤 힘을 갖는가를 알리기 위해 언급한 것이다. (HH.228, 김은경 역)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C.151-155)

 

151

‘만드시고’(build)는 쓰러져있던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갈빗대’(rib)는 생명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의 본성을,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갖게 된 사람의 본성을,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he brought her to the man)는 그의 본성인 것, 즉 여자라는 그의 새로운 본성이 그에게 승인,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의 후손은 그들의 선조처럼 천적 인간 되는 걸 원치 않고 대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살아가고자 하였고,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 쪽으로 기울어졌는데 결국은 그런 본성이 그들에게 허락, 곧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갖게 된 본성 역시 여전히 허락되었고, 그래서 이것을 ‘여자’(woman), 나중에 ‘아내’(wife)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본성’(本性)으로 번역해 오고 있는 영어 ‘own(proprium, 라틴, 고유 본성, 자아)NCE(New Century Edition) 역에서는 ‘a sense of self’, ‘selfhood’, ‘a sense of autonomy’, 혹은 ‘identity’ 등으로도 옮기고 있다는 점, 참고하세요.



152

겉 글자의 뜻대로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과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아차렸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깊은 아르카나가 여기 들어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봐도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woman)가 사람의 본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속아 넘어간 사람이 다름 아닌 여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건 자신의 본성, 그러니까 같은 말인데,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3:1-6)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을 저런 말로 속일 수는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한테는 저런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런 말에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는 본인이 가진 자아의 퀄러티 문제인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라면 저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그 자아가 백 퍼센트 주님 편에 선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내 마음의 귀가 어떤 속삭임에 솔깃해 하는가를 관찰하면 나라는 사람의 정체, 본성, 내가 하는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저 창3:6에 나오는, 뱀에게 속아 넘어가는 여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자와 다른 여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후손 이야기이지만, 저 창3 초반은 세 번째 후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안 좋게 변한, 자기 사랑에 더욱 기울어진 상태가 된 후손 이야기인데, 두 번째 후손만 되었어도 안 속았을 저런 속삭임에 이들은 그만 손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참고로, 저 창3에 나오는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 그러니까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 등 여러 파트로 구성된 존재로서, 이 중 가장 낮은 파트인 몸에 속한 감각을 ‘’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천적 인간은 이 몸의 감각 또한 거듭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몸의 감각이 더 이상 뱀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육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한테는 지옥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53

갈빗대를 가리켜 ‘여자를 만드시고’(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시지만 전에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창조하다’(created), ‘짓다’(formed), ‘만들다’(made)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만드는 것’(build)은 쓰러져 있는 걸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 뜻으로 쓰이는 곳마다 ‘만드는 것’(build)은 주로 악에 관한, ‘일으켜 세우는 것’(raise up)은 거짓에 관한, 그리고 ‘새롭게 하는 것’(renew)은 둘 다에 관한 서술일 때입니다. 이사야입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61:4)

 

이 구절과 다른 구절에서 ‘황폐함’(Wastes)은 악을, ‘무너짐’(desolations)은 거짓을 의미하며, ‘쌓는 것’(build)은 전자, ‘다시 일으키는 것’(set up again)은 후자에 적용됩니다. 선지서 이곳저곳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이런 구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예레미야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31:4)

 

 

154

사람의 본성이 아니면서,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 것도 아니면서 악하고 거짓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 그 자체이며, 그 결과 사람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사실임을 저는 영들의 세계에서 계속 보고 있어서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게 제시되는데, 그때 그것들은 너무나 기형적이어서 어떻게 형용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추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본성의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그때 자신의 본성에 속한 것들을 자기 눈으로 보는 사람은 그 실제 모습을 보고는 공포에 휩싸일 정도로 충격을 받아 마치 악마로부터 도망치듯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한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은 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주님께 속한 천적 특성들이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삶을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체어리티를 받거나 체어리티로 소생한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소년, 소녀처럼 보입니다. 또 벌거벗은 유아처럼 이노센스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가슴과 머리 위 왕관을 두른 꽃 화환으로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는데요, 다이아몬드 같은 오로라 가운데서 즐겁게 지내며, 가장 내적인 데서 오는 행복에 관한 퍼셉션을 갖고 살아가지요.

 

그러니까 참으로 속 사람의 모습으로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속 사람은 아직 거시기한데 주님의 보혈로 한순간에 죄 씻음 받고 천국 가는 그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155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a rib was built into a woman)라는 이 말에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글자로 된 겉뜻만 가지고 발견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깊이 감추어져 있는데요,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깊은 뜻에 있어 주님 자신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며, 이 사실에서 말씀의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이 본문에서 그 가장 핵심은 바로 천국의 결혼(the heavenly marriage)입니다. 천국 결혼은 그 본성에 있어 주님에 의해 소생될 때 주님의 ‘신부요 아내’(bride and wife)라 일컬음을 받는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소생된 인간 본성은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관한 퍼셉션을 가지며, 그 결과 표현 불가한 행복과 함께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요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하는 이 소생된 본성은 어떻게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천사들한테서 관찰할 수 있는 사실, 곧 자신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걸 지각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천사들한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비록 그들일지라도 이런 주제를 벗어나 한눈파는 순간 그들 역시 순전히 자신들 힘으로 살아간다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그들에게는 어떤 것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살짝만 벗어나도 그 변화를 지각하는, 그런 본성에 관한 어펙션(affection)이 일반적으로 있는데요, 그 결과 그들은 누구나 자신들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퍼셉션 가운데 있으며, 그때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의 즐거움이 그들 가운데에는 존재합니다. 아래 예레미야에서 말하는 바 역시 바로 이런 본성을 의미합니다.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31:22)

 

이 구절에서도 ‘여자’(woman)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된 본성을 의미하며, 이것을 ‘둘러싸리라’(to compass)라고 표현한 것은 이 본성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마치 갈비뼈가 심장을 둘러싸 보호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쉬는 시간)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C.156-159)

 

156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은 겉 사람의 본성을, 여기서 ‘뼈’(bone)는 이 본성이 생기가 거의 없음을, ‘살’(flesh)은 생기 있는 본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자는 속 사람을 의미, 이어지는 구절에 보면 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결합하기 때문에 여기서 ‘여자’(woman)라고 했던 본성을 거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이제’(Now)는 이 시점에서 이렇게 되었음을 의미하는데요, 이때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개역 개정에는 이 ‘이제’에 대한 번역이 누락 되어 있습니다. 속뜻 전개상 중요한데 말입니다. 주님 말씀은 함부로 더하거나 빼면 안 되며, 그 기준은 속뜻의 흐름상, 곧 속뜻으로 보았을 때입니다.



157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그 안에 속(the internal)이 있는 겉 사람의 본성을 의미하는 한, 그래서 고대에는 자신들의 본성(their own [proprii]), 뿌리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게 한 가족이든 가계이든 기타 어떤 종류의 관계이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라반도 야곱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29:14)

 

그리고 아비멜렉 또한 자기 어머니의 혈육들과 외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9:2)

 

이스라엘 지파들도 다윗에게 자신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158

사람(man, 아담)은 속 사람, 즉 같은 말이지만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내가 본즉 한 사람(man [vir])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41:28)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요.

 

위 본문의 ‘사람’은 라틴어로 ‘비르(vir)입니다. 라틴어에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homo)라는 말이 따로 있지만, ‘호모’에 비해 ‘비르’는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5:1)

 

‘정의를 행하는 자’(One who executes judgment)는 지혜로운 사람을, ‘진리를 구하는 자’(one who seeks the truth)는 총명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 안에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구별되되 실제로는 너무도 구별되어 속 사람, 겉 사람에게 속한 것은 각각 무엇이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해 주님에 의해 어떻게 통치되는지를 천적 인간은 지각합니다. 그러나 이들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는 자신들의 본성, 곧 자신들의 겉 사람에게 속한 본성을 정말 징그럽게도 원한 결과 너무도 변질, 더 이상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속 사람이라는 것이나, 겉 사람이라는 것이나 같은 거 아냐?’ 할 지경이 되었는데요, 이런 일은 사람이 자신의 본성으로 기울어질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AC.160-162)

 

160

‘부모를 떠나’(leave father and mother)는 속 사람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인데요, 겉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cleave unto his wife)는 속이 겉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be one flesh)는 그들, 곧 겉과 속이 거기 같이 있는 겁니다. 전에는 속 사람과 속에서 나온 겉이 영이었지만(were spirit), 지금은 이 둘이 육이 되었기(have become flesh) 때문입니다. 그렇게 천적 영적 생명은 하나처럼 보이는 본성(the own)에 인접해 있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거의 모든 결혼식 주례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본문은 얼핏 참 좋아 보이는 그럴듯한 본문이지만 그러나 그 속뜻을 보면 참 슬픈 본문이기도 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결합한 게 아니라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결합, 결국 겉이 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61

이들 태고교회의 후손은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는데요, 그렇지만 그들은 그러면서도 겉 사람 안, 즉 그들의 본성 가운데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님은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의 자비로 그런 그들 안으로 영적 천적인 것들이 스며들듯 심어지면서 말입니다. 속과 겉이 어떻게 하나로 움직이는지, 어떻게 하나로 나타나는지 하는 건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인플럭스(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入流)라는 걸 모르면 알 수 없는데, 이걸 알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하나 생각해 보면, 어떤 행위에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즉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한,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 즉 신앙의 열매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 사랑, 신앙은 속, 그것이 체어리티의 행위로 표현되는 건 겉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는데요, 천사들은 행위 속 동기를 본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선행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는 반면, 천사들은 그 선행 속 마음의 동기를 본다고 합니다. 우리는 외적 존재여서 어쩔 수 없이 겉으로밖에는 볼 수 없지만,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그 속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다음의 주님 말씀도 이 글의 연장선, 곧 인플럭스의 흐름으로 이해가 됩니다.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7:16-20)

 

우리는 끝까지 안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 안에 무슨 선한 작업, 곧 ‘영적 천적인 것들이 스며들듯 심어지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인플럭스가 하는 일입니다.

 

162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은 그 기원이 천적이거나 천적 인간의 삶, 생활의 질서로 말미암습니다. 천국 전체가 천적 인간이기 때문인데, 이는 주님만이 오직 참으로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모든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것 되시기 때문에, 그래서 이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을 천적이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이 천적 기원, 즉 천적 인간의 삶과 생활의 질서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결혼의 법 역시 그렇습니다. 이는 지상의 모든 결혼이 그 기원을 두거나 따라야 하는 천적 결혼인데, 이는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 즉 한 분 주님과 하나의 교회, 주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가 있는 그런 결혼입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결혼의 법은 한 남편과 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럴 경우, 그 부부는 천적 결혼(the celestial marriage)을 표상하며, 천적 인간의 한 전형(典型)이 됩니다. 이 법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계시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속 사람에게 새겨져 있었는데요, 그래서 그때는 한 남자는 한 명의 아내만 가졌고, 그렇게 그들은 한 가정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속 사람 되기를 중단, 겉 사람이 되면서 그들은 여러 명의 아내와 결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결혼에 있어 천적 결혼을 표상했기 때문에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과 천국의 행복이었지만 그 교회가 기울어졌을 때, 즉 쇠퇴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결혼애가 주는 행복 대신 숫자, 곧 겉 사람의 쾌락인 숫자가 주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하셨는데요, 주님 친히 가르치시기를, 이것이 그들이 여러 명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모세로 하여금 허락하게 하신 이유라 하셨습니다.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5-9)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C.163-167)

 

163

그들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naked and not ashamed)이라는 것은 그들이 순진무구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순진무구함(innocence, 이노센스)을 그들의 본성 안으로 오랫동안 스며들게 하셨기(had instilled) 때문인데요, 그들의 본성이 이런 순진무구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걸 방지하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입니다.

 

 

164

인간의 본성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그저 악할 뿐이며, 만일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날 경우 그야말로 기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들면 그때는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데요, 앞서 154번 글에서 보신 것과 같습니다.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는 그 본성, 즉 사람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안 보이게 가릴 뿐 아니라 마치 없어진 것 같게도 하는데요, 마치 유아들한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아들한테서는 악과 거짓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즐거운 무슨 놀이처럼 보이기까지도 하는데요, 그들이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한, 그리고 자기들의 유아적 이노센스가 드러나는 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처럼 왜 사람이 어느 정도의 이노센스를 소유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지 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0:14-16)

 

 

165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이 이노센스를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증명되는데요, 온전함(integrity)과 이노센스가 떠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었음을 부끄러워했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수치를 느꼈으며, 그래서 자신들을 숨겼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의 세계에 있는 표상으로도 마찬가지인데요, 영들이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고 죄 없음을 증명하고 싶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이노센스를 증언하기 위해 스스로 벌거벗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국에 있는 순진무구한 사람들한테서 이런 게 두드러지는데요, 그들은 그들의 이노센스한 본성에 따라 화환으로 장식된 벌거벗은 유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정도의 이노센스까지는 아닌 사람들은 선지자들이 이따금 보았던 천사들처럼 다이아몬드 실크라 할 수 있는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6

이런 것이 본 장 말씀에 들어있는 일부인데요, 그러나 이것들은 사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었는데 사실 오늘날 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여기서 다룬 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조차 어떤 사람들한테는 모호하고 흐릿하게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67

만일 누군가 말씀 각 구절마다 얼마나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있는지를 안다면 그는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과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이 엄청나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인데요, 이런 사실이 겉 글자 상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걸 좀 간단히 말씀드리면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에서는 말씀의 겉 글자들은 정확히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질서정연하게 생생하게 표현, 표상됩니다. 영들의 세계는 표상의 세계(a world of representatives)이기 때문인데요, 거기서 생생하게 표상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번에는 이층천 천사적 영들(the angelic spirits who are in the second heaven)에 의해 그 표상들에 들어있는 아주 세밀한 것들에 대해서까지 지각되며, 그리고 그렇게 이층천 천사적 영들에 의해 지각된 것들은 이번에는 삼층천 천사들(the angels who are in the third heaven)에 의해 도저히 표현 불가한 천사적 아이디어로 풍성하게, 그리고 꽉 차게 지각됩니다. 최종적으로 이것은 주님의 선하신 즐거움(the Lord’s good pleasure)에 따라 무한히 다양하게 지각되기 때문인데 이런 게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각 천국의 역량마다 감당할 수 있는 지혜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상 언어로 기록된 말씀 안에는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지만, 지상에서 육체로 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지혜는 가장 낮은 등급인 요만큼인 반면, 사후 일, 이, 삼 층 천 천국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확장되고 더욱 크게 초월적이라는 말입니다.

 

어디서는 일, 이, 삼층천 천사들을 모두 천사, 그러니까 자연적 천사, 영적 천사, 천적 천사라 하는 반면, 또 어디서는, 그러니까 이 글에서처럼, 선한 영, 천사적 영, 천사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건 삼층천 천사, 천적 천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천사이며, 삼층천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천국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여섯 번째 시간인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의 속뜻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창세기 2장은 이렇게 마치고, 다음 주부터는 창세기 3장입니다.

 

오늘 본문 및 전체 개요, 그리고 배경을 한 번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원고 맨 앞으로)

 

설교

2025-10-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10-12(D1)-주일예배(13, 창2,21-25, AC.147-167),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pdf
0.60MB
영문 원본, 창2,21-25, AC.147-167.pdf
0.09MB

 

 

 

 

14. AC.190-210, ‘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뱀과 여자’(창3:1-6), 2025/10/19(D1)

‘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뱀과 여자’(창3:1-6, AC.190-210)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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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AC.138-148,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창2:18-21), 2025/10/5(D1, 성찬)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창2:18-21, AC.138-148)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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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고교회 두 번째 후손, 갈빗대와 살(2:18-21, AC.138-148)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18-25)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다섯 번째 시간으로 2장 후반부 중 첫 번째인 18절로 21절,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AC.138-148)입니다.

 

먼저 2장 후반부(18-25) 전체 및 절 별 개요입니다.

 

131

태고교회의 후손들, 이들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proprium, own)으로 기울어졌는데, 여기서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이 창2 후반은 태고교회 두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132

인간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신 자신과 세상, 곧 자기 본성으로 인도받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게 허락된 본성을 여기서 다룹니다. (18)

 

133

그래서 그에게 먼저 선에 관한 애정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알게 하시는데, 이것들은 그가 앞서 주님께 받은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 본성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19, 20)

 

※ ‘’을 생각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긍정적이 되며, ‘진리’, ‘’, ‘올바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반듯한 생각들은 앞서 주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이런 귀한 선물들을 받아놓고도 우리는 그 가치를 모르고 아주 보잘것없는 내 안의 것들, 나의 본성에 주목하면서 주님으로부터는 독립하려고 애를 쓰며 살고 있습니다.

 

 

134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 본성 상태로 들어가며, 그리고 어떤 본성(an own)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걸 여자로 빚어진 갈빗대라 한 것입니다. (21-23)

 

 

135

천적 영적 생명은 인간의 본성과 아주 가까이, 거의 하나로 보일 정도로 붙어있습니다. (24)

 

 

136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노센스가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드는데요, 이 본성이 완전히 망가져서 도무지 뭐든지 못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25)

 

 

다음은 단락 전체의 배경 설명입니다.

 

 

137

창세기의 첫 세 장은 대체로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처음부터 마지막, 그러니까 사라질 때까지 ‘사람’(man, homo)으로 불렸습니다. 창2 전반부가 이 태고교회가 가장 융성했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던 때를 다루고 있다면, 이제 여기 후반부는 자신들의 본성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상이 개요 및 배경이고, 다음은 후반부 본문 절 별 속뜻입니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38

‘혼자’(alone)는 그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해 하지 않았음을, 대신 자아와 세상으로 인도받기를 원했음을,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인간의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여자로 만드신 갈빗대’(rib built into a woman)라 하는 것입니다.

 

 

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들처럼 주님의 가이드 아래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홀로 지내는’(dwell alone) 사람들이라 하였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로 인한 들끓음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유대교회에서도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다 몰아낸 후 그 땅에 홀로 거주하는 걸로 표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종종 주님의 교회를 가리켜 ‘홀로 산다’(alone)고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49:31)

 

모세의 예언에서도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33:28)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 분명하게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여기 ‘여러 민족’(nations)은 악을 말합니다. 이 태고교회의 후손은 홀로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즉 천적 인간이 되려 하거나 그들처럼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려 하지 않고 대신 유대교회처럼 여러 민족 중에 있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걸 원했기 때문에 이르시기를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라 하신 것입니다. 이런 걸 원하는 사람은 이미 악 가운데 있으며 그가 원하는 삶이 그에게 허락됩니다.

 

※ 우리는 보통 자녀가 무슨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그걸 막거나 금지, 못 하게 꾸짖고 책망하는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자원함이 없는 순종, 사랑으로 하지 않는 복종과, 강제로, 억지로 돌이키게 함은 주님 편에서는 하나 마나이기 때문이며, 그런 건 아예 주님의 속성에 배치되기 때문이지요. 아래 이사야 말씀이 생각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42:3)

 

이 말씀의 속뜻은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신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은 오직 거짓과 탐욕밖에 없기 때문인데 만일 이때 이 유일한, 비록 악하고 거짓되더라도, 생명을 건드리게 되면 더 이상의 생명이 없어 사람은 바로 소멸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는’ 대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와 동행, 그가 자의로 주님의 선과 진리 쪽으로 돌이키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역량에 맞춰 강약을 조절하시면서 말이지요. 마치 저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8-15) //

 

 

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본성(man’s own)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본성의 본질(nature)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이 교회 사람을 주님이 좋게 보셔서 그에게 어떤 본성이 허락되었는데, 그게 마치 그의 본성처럼 보이는 그런 것이어서 이르시기를,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 하신 것입니다.

 

 

141

인간 본성(man’s own)의 본질(nature)을 육적(corporeal) 세속적 인간, 그리고 영적 인간, 천적 인간과 함께 설명하려면 그전에 먼저 인간 본성에 관한 수많은 것들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육적 세속적 인간에게는 그의 본성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 말고는 아는 게 없고, 앞서도 말씀드렸듯 만일 이걸 잃으면 자기는 망할 꺼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인간의 경우 역시 그의 본성의 모습은 비슷한데요, 그가 비록 주님은 만물의 생명이시고, 지혜와 이해, 그리고 그 결과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을지라도 그에게 있어 이런 지식은 아직은 마음속 신념이라기보다는 입술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은 만물의 생명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힘 주시는 분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지각(perceives),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는 영적 통찰력으로 천사들처럼 그냥 알기 때문이지요. 그는 결코 자신의 본성을 원치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주님은 그에게 어떤 본성을 주시는데, 그것은 선함과 참됨에 관한 모든 퍼셉션,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하는 본성입니다. 천사들이 이런 본성 가운데 있으며, 동시에 가장 내적인 평화와 고요한 내적 기쁨(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의 본성에는 주님의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주님은 그들의 본성을 다스리시거나 그들의 본성으로 그들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이 본성은 가장 천적인 것 그 자체이지만, 육적 인간의 본성은 끔찍, 곧 지옥 그 자체입니다. 이 본성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다루겠습니다.

 

※ 천적 인간은 천사들처럼 그저 주님의 인도하심만으로 충분, 굳이 무슨 다른 본성을 또 필요로 하거나 찾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본성, 곧 ‘선함과 참됨에 관한 모든 퍼셉션,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하는 본성’을 허락하셨습니다.

 

 

19, 20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 20)

 

142

‘짐승, 가축’(beasts)은 천적 애정을, ‘공중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을 의미하는데요, 다시 말씀드리면 ‘짐승’(beasts)은 의지에 속한 것을, ‘새’(fowls)는 이해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로 하여금 그것들의 퀄리티를 알게 하심이며, 아담이 ‘그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에게 주신 선에 속한 애정의 퀄리티와, 그리고 진리에 관한 지식의 퀄리티를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고유 본성으로 기울어졌는데, 이를 전과 같이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처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이 ‘퀄러티를 안다’는 것은 그것의 본질, 본성을 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이름을 주다’, ‘아무개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다’의 의미가 모두 이렇습니다. 천적 천사들의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상대방의 아우라만 가지고도,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만 가지고도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지각하는 건데요, 이 ‘아담’으로 일컬어지는 천적 인간, 곧 초창기 태고교회 사람들이 바로 이런 능력, 곧 이런 퍼셉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43

고대에는 ‘가축’(beasts)과 ‘짐승’(animals)이 사람한테 있는 애정과 그와 같은 걸 의미했다는 사실이 오늘날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천적 사고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영계에서는 동물을 가지고 그런 거, 곧 애정 같은 걸 표현하며, 실제로도 동물의 생긴 모양대로 해당 애정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말했고, 그때 그들은 그밖에 무슨 다른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서도 짐승들이 언급되는 곳마다 일반적이든 아니든 무슨 다른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언의 말씀 전체가 이런 걸로 가득하며, 그렇기 때문에 각 짐승이 특별히 뭘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 말씀에 담긴 속뜻이 무엇인지를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앞서도 보았듯 짐승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즉 해로운 짐승이 있는가 하면 선한, 즉 무해(無害)한 짐승이 있지요.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 예를 들면 양(sheep), 어린 양(lambs), 비둘기 같은 것들이지요. 여기서 다루는 인간이 천적 인간, 혹은 천적 영적 인간이기 때문에 이들 선한 짐승들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짐승’(beasts)이 의미하는 바가 일반적으로 애정이라는 것을 위, 곧 말씀 몇몇 구절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AC.45, 46) 여기서 굳이 다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144

‘이름으로 부르기’(call by name)는 그 퀄리티를 안다는 의미인데요, 이는 고대인들은 ‘이름’(name)을 가지고 어떤 것의 에센스를 이해했기 때문이며, 무엇을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그 퀄리티에 대해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 어떤 의미를 담아 주었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은 그 안에 무언가 고유한, 그 이름으로부터나 그 이름에 의해서나 자녀의 어떤 기원과 고유 특성을 알 수 있는 그런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원과 특성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하고 있는, 지금 이 아르카나 주석 작업 중반,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는 부분에서 아시게 됩니다. 이름들에는 그렇게 이름하는 것의 근원과 퀄리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를 그밖에 무슨 다른 걸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언어적 관습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걸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은 말씀에 나오는 이름들을 그런 의미들을 부여하며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라실 수도 있겠습니다.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2-35)

 

 

145

말씀에서도 ‘이름’(name)은 어떤 것의 에센스(the essence of a thing)를,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는 그 퀄리티에 관해 아는 걸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45:3, 4)

 

이 구절에서 ‘네 이름을 불러’(call by name)와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surname)는 그 퀄리티를 예견한다(to foreknow the quality)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62:2)

 

앞뒤 구절에 나오는 것처럼, 또 다른 캐릭터가 될 것을 의미하지요.

 

계속해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3:1)

 

그가 그들의 퀄리티를 알고 계셨음을 가리키시면서

 

계속해서 같은 이사야 말씀입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40:26)

 

그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입니다.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4, 5)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8)

 

이들 구절에서 ‘이름’(names)은 결코 말 그대로 이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퀄리티를 의미하는데요, 심지어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이름이 아닌, 그의 퀄리티로만 알려지지요.

 

 

146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그 상징하고 있는 속뜻을 보실 수 있는데, 18절에 보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하시고는 지금은 ‘짐승’(beasts)과 ‘새’(birds)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전에 다룬 적이 있던 것이지요. 그러고는 즉시 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흐름의 속뜻은 이렇습니다. 곧 그가 비록 자신의 퀄리티, 곧 선에 관한 애정과 진리에 관한 지식에 대해 자신의 퀄리티가 어느 정도인지를, 또는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본성을 향해 기울어졌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유 본성을 간절히 원하는 그런 사람들은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 대한 멸시를 시작하기 때문인데 주님에게 속한 것이 아무리 그에게 분명하게 표현되고 보여도 말입니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1)

 

147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는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그런 본성입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는 그 안에 생기가 있는 본성을, ‘깊이 잠들게’(deep sleep)는 그의 현 상태를 말하는데, 사람이 이 상태가 되면 그는 자신의 본성이라 하는 걸 소유하고 있는 게 자기 자신인 줄 알지요. 이 상태는 잠든 상태와 유사한데, 이 상태에 있는 동안은 사람은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이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정신을 차리며 잠에서 깬 상태가 됩니다.



148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두 번째 단락 중 전반부인 18절로 21절 전반, 글 번호로는 AC.138-148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주는 후반부인 21절 후반부터 끝 절인 25절까지입니다.

 

오늘 본문 및 전체 개요, 그리고 배경을 한 번 더 읽고 마치면 좋겠지만 성찬도 있고 원고가 길어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설교
2025-10-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10-05(D1)-주일예배(2618, 창2,18-21, AC.138-148),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pdf
0.44MB
영문 원본, 창2,18-21, AC.131-148.pdf
0.08MB
성찬.pdf
0.14MB

 

 

 

13. AC.147-167,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창2:21-25), 2025/10/12(D1)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창2:21-25, AC.147-167)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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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5-17, ‘에덴동산, 선악과’ (AC.122-130) (2025/9/28, 주일)

‘에덴동산, 선악과’ (창2:15-17, AC.122-130)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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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고교회의 시작, 에덴동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2:15-17, AC.122-130)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5-17)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네 번째 시간으로, 15절로 17절, ‘에덴동산, 선악과’의 속뜻 시간입니다.

먼저 그 개요입니다.

 

79

천적 인간(天的, the celestial man)은 그런 일종의 동산입니다. 이 사람이 동산 안 모든 것을 즐기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건 금하셨습니다. 이 동산은 그 소유권이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15)

80

그는 또한 주님의 허락으로, 주님이 주시는 모든 퍼셉션을 가지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과 세상의 것을 가지고 그러거나, 감각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을 탐구하거나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런 짓을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16, 17)

 

 

아래부터 오늘 본문입니다.

 

15(AC.122-124)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22

‘에덴동산’(garden of Eden)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천적 인간의 모든 걸 말합니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till it and take care of it)는 그가 그 모든 걸 누리게는 하셨으나 자신의 걸로 소유하는 건 금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건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무엇을 자기 걸로 소유하는 덴 별 관심이 없고 대신 그 쓰임새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즉 주님께 무엇을 받았을 때, 그들은 ‘이걸 왜 주셨을까? 왜 허락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이 주신 걸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는 대신 주님을 사랑하는 쓰임새의 삶에만 집중합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글들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357-365) 일부 인용입니다.

 

361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236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선한 쓰임새란 자신과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 그리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선한 쓰임새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사람이 나태한 생활에 빠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나태한 생활은 사람의 생각을 그 타고난 악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에 해롭다. 쓰임새는 그 안에 신성을 담고 있는 만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신과 천국을 바라보고 이 쓰임새에서 유익을 찾으며, 재물은 오직 부수적 유익으로 여기는 정도만큼 선하다.

 

236. 모든 선에는 쓰임새에서 오는, 그리고 쓰임새에 따른 기쁨이 있다 (AC.3049, 4984, 7038). 또 그 퀄러티에서 오는 기쁨도 있다. 그러니까 쓰임새가 그런, 그런 것이 선이라는 말이다 (AC.3049). 삶의 모든 행복과 기쁨은 쓰임새에서 온다 (AC.997). 일반적으로 삶이라는 것은 쓰임새의 삶이다 (AC.1964). 천사의 삶은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으로, 그래서 쓰임새를 수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AC.454). 사람이 마음에 품고 있는 목적들은, 그게 곧 쓰임새들인데, 주님과, 그래서 천사들이 관심 있어 하는 유일한 것들이다 (AC.1317, 1645, 5844). 주님의 나라는 쓰임새들의 나라다 (AC.454, 696, 1103, 3645, 4054, 7038). 쓰임새를 수행하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AC.7038). 모든 사람의 캐릭터는 그가 수행하는 쓰임새들의 캐릭터와 같다 (AC.4054, 6815). 그 예 (AC.7038)

 

362

그러나 신을 믿지 않고 그 마음에서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을 내버린 부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이와 반대다. 그들은 지옥에 있으며, 더러움과 비참함과 궁핍함 속에 있다. 그들이 목적으로 사랑한 재물이 그런 것으로 변한다. 또 단지 재물뿐 아니라 그 재물의 쓰임새 자체도 그렇게 변하는데 그들의 재물은 자기 마음대로 살고 쾌락에 빠지며, 부도덕한 일에 더 많이, 더 자유롭게 몰두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 아니면 그들이 업신여기는 이웃들보다 높아지기 위해서 쓰였던 것이다. 그런 재물과 그 쓰임새에는 영적인 것은 전혀 없고 물질적인 것만 들어 있기 때문에 불결한 것으로 변한다. 부와 그 쓰임새 안에 있는 영적인 목적은 마치 몸 안에 있는 영혼과 같고 습한 땅이 받는 창공의 빛과 같다. 위와 같은 재물과 쓰임새는 영혼이 떠난 몸이나 창공의 빛을 받지 못한 습지처럼 썩는다. 재물의 유혹으로 인해 천국에서 멀리 떠난 사람들은 이와 같다.

 

39장 전체 글이 필요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HH.357, 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HH.357-365)

39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The Rich and the Poor in Heaven 357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일부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들어가고 부자는 못 들어간다고 하고, 또 일부는 부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123

천적 인간은 일반적이든 아니든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그가 그 사실을 지각하기(perceives) 때문이지요. 영적 인간 역시 그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입으로 합니다. 그가 그걸 말씀으로부터 배웠기(has learned) 때문입니다.

 

※ ‘perceive’와 ‘learn’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전자는 천국, 곧 주님으로 말미암아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이고, 후자는 자기 노력으로 배워서 아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전자는 그 답이 하늘에서 오는 것이고, 후자는 그 답을 세상에서 찾는 것입니다.

 

세속적이고 육적(肉的, corporeal)인 인간은 그 사실을 인정(acknowledge)도, 마지못한 시인(admit)도 안 합니다. 자기가 가진 건 뭐든지 ‘이건 내 거야’(his own)라 하며, 만일 그걸 잃게 되면 자기는 완전히 끝나는 줄로 압니다.

 

 

124

지혜,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은 사람에게 속한 게 아닌, 주님에게 속한 거라는 사실은 주님이 가르치신 모든 걸 보면 분명한데요,

 

※ ‘지혜,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을 앞 구절들에서는 에덴에서 발원한 네 강으로 표상했지요.

 

마태복음을 보면, 주님은 자신을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농부들에게 세로 준’(21:33) 집주인으로 비유하십니다.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1:33)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6:13, 14)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3:27)

 

이것이 과연 그렇다는 건 천국 아르카나를 아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한테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6(AC.12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of every tree of the garden)는 네가 임의로 먹되

 

우리말 번역은 원문에는 없는 ‘열매’를 추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라 함으로써 아르카나가 더욱 흐릿하게, 안 보이게 하는 아주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성경 번역자들이 말씀 안에는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한다는, 이런 속뜻을 알 길이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고? 하면서 이 부분을 원전 그대로 번역하기가 굉장히 어색했을 것입니다.

 

비슷한 표현이 창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에 나옵니다. 본 절인 창2:16에서는 ‘나무(every tree)만 나오지만, 이 창3:2에서는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라 하여 ‘열매’까지 나오는 이유는, 전자는 퍼셉션을 가리키지만, 후자는 그 퍼셉션에 의한 산물, 곧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계승된 선과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1-13은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 그러니까 주님 사랑에서 조금씩 벗어나 자기 사랑으로 기울던 태고교회의 두 번째 상태(2:18-25)에서 조금 더 위험해져 간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점점 더 계속해서 심화, 아래 말씀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으로, 이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기억-지식을 박탈당하고, 그들의 본성에는 대신 아주 더러운 사랑들과 신념들(their own filthy loves and persuasions)만 남았는데, 안 그러면, 이들은 신앙에 관한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AC.285)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125

‘각종 나무를 먹는 것’(eat of every tree)은 선하고 참된 것을 퍼셉션으로부터 아는 것, 곧 선하고 참된 것을 퍼셉션을 의지하여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앞서 관찰한 것처럼 ‘나무’(tree)는 퍼셉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곧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퍼셉션을 받았고, 그래서 소중하게 여기던 어떤 기억이 떠오를 때면 그들은 그 기억이 참되고 선한지를 바로 지각했는데, 만일 그 가운데 무슨 거짓된 것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들은 그것을 피할 뿐 아니라 몸서리를 칠 정도였습니다. 그런 게 또한 천사들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태고교회의 이런 퍼셉션이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는 지식으로 대체, 계승되었습니다. 이 지식은 앞서 지금까지 계시되어 온 것들로부터, 그리고 나중에는 말씀에 계시된 것들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17(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26

방금 다룬 16절 설명과 함께 이 말씀을 보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참됨과 선함에 익숙해지는 데 있어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퍼셉션으로는 괜찮지만 자아와 세상으로 말미암는 건 안 된다는 것, 즉 우리가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걸 가지고 조사하는 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랬다가는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은 감각적 증거와 세속적 지식에 의존,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모든 노력으로,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십일 금식기도나 천일 예배, 불교의 참선, 면벽 수련(달마의 구 년 면벽 같은), 오체투지(五體投地, 삼천 배, 오천 배 같은 불교의 절하는 법), 하안거, 동안거 등은 물론, 다양한 종교의 각종 종교적 수행 등인데요, 이는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 五慾: 수면욕, 식욕, 색욕, 명예욕, 재물욕, 七情: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오(惡), 욕(慾), 애(愛)) 문제를 좀 어떻게 건드려서 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신앙의 신비를 좀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세상 지식, 곧 세상에서 지식을 추구하여 학자가 되더니 그 지식으로 신의 세계에 발 담그고자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극 초월적 극기 수행을 한다 하여도, 그리고 아무리 오만가지 세상 지식을 머리가 터질 듯이 추구하여 다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걸로 구원을 추구한다거나 천국 가기를 희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위에서 밝힌 대로 신앙의 천적인 면만 파괴됩니다. 다만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만 전념하고자 모든 걸 내려놓고 완전히 타인을 위한 삶을 살다 간 사람들, 가령 성 프란치스코라든지,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든지 하는 분들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데요, 이런 분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저런 수도적 삶을 추구한 게 아니라 주님만 사랑하기에도 너무 바빠 자기를 사랑할 틈이 없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2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 곧 감각적 증거와 세속 지식에 의존하여 들여다보고자 함, 이것이 바로 다음 장에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와 그를 계승한 후손의 몰락 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모든 교회가 몰락하는 원인입니다. 여기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 또한 나오기 때문입니다.

 

 

128

세속적이고 육적(肉的)인, 곧 세상과 몸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은 속으로 말하길, ‘신앙 및 신앙 관련된 모든 것에 있어 만일 내 감각이 나를 가르쳐 내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지 않거나 팩트가 나를 가르쳐 나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거나 하지 않으면, 나는 안 믿을 거야’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연적인 것, 곧 세상에서 참이라 여겨지는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충돌할 리가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 결과 이 사람은 천적이며 신에 속한 것(what is celestial and Divine)에 대해 자신의 감각을 가지고 좀 배우려고 하는데, 이런 건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겠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합니다. 지혜를 얻고자 감각적 증거를 의존하면 할수록 사실은 자신을 더욱더 소경이 되게 할 뿐이기 때문이지요. 결국에는 아무 것도, 심지어 거기 영적인 어떤 것, 혹은 영생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결과는 처음 그가 세웠던 원리, 출발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선, 악과 관련된 지식의 나무를 먹는 것’(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입니다.

 

비슷한 표현이 창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에 나옵니다. 본 절인 창2:16에서는 ‘나무(every tree)만 나오지만, 이 창3:2에서는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라 하여 ‘열매’까지 나오는 이유는, 전자는 퍼셉션을 가리키지만, 후자는 그 퍼셉션에 의한 산물, 곧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계승된 선과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걸 먹으면 먹을수록 그는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지혜를 구하되 주님으로는 오케이지만 세상으로는 아니기를 원하는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the Word)에서 말씀하신 것들은 반드시 믿어야 해, 왜냐하면 진리이니까!’ 그리고 이 원칙에 따라 그는 자기의 생각을 조정합니다. 그는 이성적 논쟁, 팩트 기반 지식, 감각적 증거, 그리고 물리적 현상을 확신하는 데 사용하며, 반대로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들은 뭐든지 옆으로 치워버립니다.

 

 

 

129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은 사람은 자기가 가정하고 있는 원리, 원칙들, 심지어 그것들이 완전히 거짓이어도 이상하게 그것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지식과 이성(reasoning), 이 경우는 차라리 궤변인데, 이것들은 저 거짓들에 대해 역시 호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을 지지하려는 수많은 고려 사항, 끝없는 뒷받침 논리를 끌어내어 분명 거짓임에도 불구, 그 생각을 컨펌(confirm), 곧 굳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이상하게 세상에 좌파가 많은 모양입니다. 다음은 최근 유행하는 글입니다. 출처 : 독립신문(https://www.ainews1.co.kr)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좌파 왜 하세요? 페미(feminism, 여성주의)세요? 아니면 공산당이세요? 아니면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세요? 뭐 때문에 좌파를 하시는 거예요? 중국 화교세요? 아니면 대진연(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세요? 간첩이세요? 쿠바인이세요? 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세요? 아니면 성소수자세요? 전라도세요? 약쟁이세요? 마약 판매 밀수범이세요? 음주 운전하셨어요? 뭐 때문에 좌파를 하시는 거예요? 25만 원 없으세요? 일 안 하세요? 세금 안 내세요? 태양광 사업하세요? 혹시 중국인하고 결혼하셨어요? 날강도세요? 공짜 좋아하세요? 평생 전월세 사실 거예요? 아니 도대체 좌파를 왜 하는 거예요? 아니면 혹시 간첩님이세요? 진짜 자유가 싫으세요? 도박하세요? 왜 나라를 공짜 밥 먹듯 함부로 하려고 하세요? 사회주의자세요? 김정은 시진핑 존경하세요? 이재명을 사모하세요? 아니면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세요? 종북 빨갱이 맞나요? 코피 꺼리 주시나요? 종간 사상하세요? 문익환 목사랑 교회 다니셨나요? 광주 학살범한테 10구 훈장 욕심난 거 맞죠? 설마 조카가 살인범이신가요? 이거 지금의 좌파잖아요. 좌파 왜 하세요?

 

이 글은 현 시국 관련 글이지만, 그 저변에 흐르는 사상적 기원이 같아 인용합니다. 대한민국뿐 아닙니다. 미국도, 프랑스도 세상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집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유엔 연설을 보니 이런 걸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라고, 뭔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 같아 전 세계 정치지도자들이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라 하더군요. 그 예 중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맹목적 그린 에너지 추구와 이민자 허용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두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 것도 믿어서는 안 돼’라는 걸 하나의 원칙으로 정한 사람은 결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영적 천적인 것들은 결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무슨 마음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된 질서는 사람이 주님으로, 즉 주님의 말씀으로 지혜로워지는 것이며, 그러면 이후 모든 것이 뒤따르면서 이 사람은 눈이 밝아지는데, 심지어 이성(理性)에 관한 것들, 그리고 그동안 습득한 기억-지식에 관한 것들도 그렇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과학이라는 것을 배우면 안 된다가 아닙니다. 과학은 인간의 삶에 유익하며 아주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이 신앙 안에 있다고 해서 세상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면 안 된다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 있는 학자들은 대신 다음의 원리, 곧 ‘주님 말씀을 믿기’라는 원리로 해야 하는데, 그래서 가능한 한 자연적 진리들을 가지고 영적 천적 진리들을 확증, 컨펌하되 학자들 세계에서 쓰는 그런 용어들을 써서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의 모든 출발점은 주님이셔야 합니다. 결코 자기 자신이 아니고요. 전자는 생명이지만, 후자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130

세상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 즉 지혜를 주님이 아닌 세상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 ‘동산’(garden)은 감각 및 기억-지식에 속한 것, 곧 감각적 증거와 팩트 기반 정보입니다. 그에게 있어 ‘에덴’(Eden)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곧 물질 만능주의입니다. 그의 ‘동쪽’(east)은 서쪽, 즉 자기 자신입니다. 그의 ‘유브라데 강’(river Euphrates)은 그가 가진 모든 기억-지식, 곧 그가 배운 모든 팩트 기반 지식인데, 이는 지긋지긋한 지식, 끔찍한 지식입니다. 그의 ‘두 번째 강’(second river), 거기가 ‘앗수르’(Assyria)인데, 정신 나간 이성질(理性질, reasoning)과 그로 인해 생산되는 거짓입니다. 그의 ‘세 번째 강’(third river), 거기는 ‘에디오피아’(Ethiopia), 곧 ‘구스’(Cush)인데, 이것은 악과 거짓을 옹호하는 원리들입니다. 이 원리들은 저런 이성질 가운데서 발전된 건데, 이 원리들이 그가 가진 신앙의 교리문답서입니다. 그의 ‘네 번째 강’(fourth river)은 이런 일련의 결과로 나오는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걸 ‘마술’(magic)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왜 ‘애굽’(Egypt)을 가리켜 기억-지식, 곧 학구적 학식이라 하는지, 왜 오컬트(occult) 지식, 곧 주술적 지식이라 하는지, 그리고 후에 왜 이것을 마술로 채택하는지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 여기저기서 볼 수 있듯, 그가 이런 지혜로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고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모든 게 정확히 정반대임을 봅니다. 영계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주님을 향하든지, 아니면 등을 돌리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 에스겔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29:3, 9)  

 

같은 선지서를 보면, 또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지하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 in hell)이라 하는데, 거기 보면 또한 바로(Pharaoh), 즉 애굽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31:16, 18)

 

여기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은 말씀으로 말미암는 지식들, 곧 말씀으로 말미암는 팩트와 종교적 지식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저들은 짜증 나는 이성질로 그에 맞춰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네 번째 시간인 ‘에덴동산, 선악과’의 속뜻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2 두 번째 단락(2:18-25)을 시작합니다. 첫 번째 단락(2:1-17)이 상태변화, 곧 영적(靈的, spiritual) 상태에서 천적(天的, celestial) 상태로 변화한 태고교회 이야기였다면, 두 번째 단락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proprium, own)으로 기울어져 간, 곧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 맘대로 살고파 하는 태고교회 후손들의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창1은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한 영적 인간 이야기, 곧 한 사람의 거듭남의 이야기입니다.

 

마치기 앞서 한 말씀 더 드리면, 창세기 4장만 되어도 그 진도 따라가기가 정말 쉽지 않을 터이니 아직 2장 하고 있을 때 부지런히 복습, 이 내용을 나름 충분히 이해들을 하셔야 합니다. 창1, 2, 3에 대한 이해가 이후 모든 내용 전개에 기초가 되기 때문인데요, 지금 이 창, 출 속뜻 강해 설교는 대략 10년 마라톤으로 정한 것입니다. 절대 그냥 누가 저절로 떠먹여 줄 줄로 아시면 안 됩니다. 자신의 속 사람 문제는 본인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빛 비추심을 늘 구하면서 이해가 될 때까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읽고 또 읽고 하셔야 합니다. 세상 그 많은 지식으로는 천국 갈 수 없어도 이 걸로는 능히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고 처음으로 가서 오늘 본문과 그 개요를 한 번 더 리뷰하고 마치겠습니다.

 

(맨 앞 본문 및 개요 참조)


설교
2025-09-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9-28(D1)-주일예배(2617, 창2,15-17, AC.122-130), ‘에덴동산, 선악과’의 속뜻.pdf
0.53MB
영문 원본, 창2,15-17, AC.122-130.pdf
0.07MB

 

 

 

창2:18-21,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 (AC.138-148) (2025/10/5, 주일)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 (창2:18-21, AC.138-148)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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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9/21, 창2:10-14),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 (2025/9/21)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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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고교회의 시작, 에덴동산과 네 강(2:10-14, AC.107-121)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17)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세 번째 시간으로, 10절로 14절,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입니다.

오늘부터는 각 단락의 절 별 개요도 다루겠습니다. 이는 마치 지도와 같아 이를 이용하면 그 구절과 단락의 전체 속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를 위해 지난주부터 시작한 2장 첫 단락(1-17) 전체 절 별 개요를 먼저 살피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은 본문을 전체 본문으로 실었습니다.

시작합니다.

 

 

73

죽은 상태에서 사람은 그동안 영적(靈的, spiritual) 상태가 되어 왔고, 이 상태에서 이번에는 천적(天的, celestial)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이제부터 다루는 내용입니다. (1)

 

74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이날 주님은 안식하십니다. (2, 3)

 

75

안개로 축축해진 땅에서 나는 ‘초목’(the shrub)과 ‘채소’(the herb)는 그의 지식과 그의 합리성(rationality), 곧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5, 6)

 

 

76

그의 생명,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을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로 표현, 표상하고 있습니다. (7)

 

 

77

그다음, ‘동방 에덴동산’은 그의 지성(intelligence)을,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진리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s)을,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관한 퍼셉션을 말합니다.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 곧 지식의 나무는 신앙(faith)을 의미합니다. (8, 9)

 

 

78

‘동산을 적시는 강’은 지혜(wisdom)를 의미합니다. 거기 네 개의 강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선과 진리, 두 번째는 선과 진리, 즉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입니다. 이 둘은 속 사람에게 속합니다. 세 번째는 이성(reason), 네 번째는 기억-지식인데, 이 둘은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모든 것은 지혜로 비롯되며, 지혜는 주님 사랑, 주님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10-14)

 

 

79

천적 인간(天的, the celestial man)은 그런 일종의 동산입니다. 이 사람이 동산 안 모든 것을 즐기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건 금하셨습니다. 이 동산은 그 소유권이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15)

 

 

80

그는 또한 주님의 허락으로, 주님이 주시는 모든 퍼셉션을 가지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과 세상의 것을 가지고 그러거나, 감각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을 탐구하거나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런 짓을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16, 17)


어떻게 좀 도움이 되십니까? 항상 숲의 나무 하나하나와 숲 전체를 함께 보아야 중간에 길을 잃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입니다.



10 (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07

‘강이 에덴에서’(river out of Eden)는 사랑에서 나오는, 즉 사랑에서 생겨나는 지혜를 말합니다. ‘에덴’(Eden)은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동산을 적시고’(to water the garden)는 지성이나 이해하는 재능 부여를,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thence parted into four heads)는 이어지는 내용처럼 네 강을 가지고 지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108

태고인들(太古人, the most ancient people)은 사람을 일종의 ‘동산’(garden)에 비유하면서 또한 지혜에도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지혜에 관계된 것들은 ‘강’(rivers)에 비유했지요. 그들은 단순히 비유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불렀는데, 그것은 그런 언어생활이 그들의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후대의 선지자들도 그랬습니다. 선지자들도 종종 그렇게 비유했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0, 11)

신앙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다루면서 말이지요.

 

이번엔 거듭난 사람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24:6)

 

예레미야에서는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17:7-8)

 

에스겔에서는 거듭난 사람들이 동산과 나무에 비유되지는 않지만 그렇게 불리고는 있습니다.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7그 뿌리가 큰 물가에 있으므로 그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31:4, 7-9)

 

이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태고인들이 사람이나 사람의 일들을 하나의 ‘동산’(garden)에 비유할 때 그들은 ‘물들’(waters)과 ‘강들’(rivers)이라는 표현을 보탰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사람이 적셔질 수 있도록, 그리고 이들 물들과 강들을 통해 사람을 성장케 하는 것들을 의미하도록 말입니다.

 

 

109

비록 지혜와 지성이, 보이는 건 사람한테서지만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은 오직 주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에스겔에서는 비슷한 표상으로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2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47:1, 8-9, 12)

여기서 주님은 ‘동’(east)으로, 그리고 물과 강물이 발원하는 ‘성소’(sanctuary)로 상징되십니다. 계시록에서도 그렇습니다.

1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22:1-2)

 

11, 12 (AC.110-115)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10

‘첫 번째’(first) 강, 즉 ‘비손’(Pishon)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지성, 즉 사랑 기반 신앙과 같이 가는, 어울리는 지성을, ‘하윌라 땅’(the land of Havilah)은 마음을, ‘금’은 선을,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금’(Gold)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금이 사랑의 선, 곧 사랑하고 같이 가는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 곧 사랑 기반 신앙과 같이 가는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가 언급되는 이유는, 하나는 사랑의 진리, 곧 사랑에 속한 진리를,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 곧 사랑 기반 신앙에 속한 진리를 각각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천적 인간입니다.

 

 

111

하지만 이런 내용은 속뜻(the internal sense)으로 있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러니까 사랑에 기반한 신앙이라는 게 뭔지, 또 그런 신앙에서 나오는 지혜라든지 지성 같은 게 뭔지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겉 사람들이 아는 거라곤 거의 기억-지식, 그러니까 세속적 팩트(fact)밖에 없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런 걸 가지고 지성이니, 지혜니, 신앙이니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사랑이 뭔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의지와 이해, 즉 지적 능력이 무엇이며, 그리고 이 둘이 한마음을 이루기 위해 결합한다는 게 뭔지를 모릅니다. 비록 실상이 이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 뚜렷하며, 실제로 저마다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갖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신앙의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이점만큼이나 이 온 천국을 마치 수학 좌표처럼 가장 명료하고, 정밀, 정교하게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우리가 희미하다고 해서 주님 지으신 이 피조 세계도 덩달아 흐릿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내적 시야가 열리지 않아 못 보는 것일 뿐, 실제로 주님 지으신 이 모든 세계는 더할 수 없이 세밀하고 명료합니다. 과연 그런지는 자연계는 초 고배율 현미경과 천체망원경으로, 영계는 주님이 사모하는 자에게 점점 허락하시는 내적 시야로 보시면 됩니다. 가령, 전자의 경우, 전에는 천체망원경 기술이 요즘과 같지 않아 저 우주 흐릿한 뭔가가 그저 무슨 큰 별인가 보다 했지만, 최근 제임스웹이라는 우주 망원경을 통해 보니 세상에! 그게 수천 개의 은하가 모여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주님의 세계는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인 것입니다!

 

 

112

모든 지혜는 사랑에서, 그러니까 주님한테서만 나온다는 사실, 모든 지성은 신앙에서, 역시 주님한테서만 나온다는 사실, 또 모든 선은 사랑에서, 마찬가지로 주님한테서만 나오며, 모든 진리는 신앙에서, 이 역시 주님한테서만 나온다는 사실 등, 이런 모든 사실이 더욱더 알려지게 하세요.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 게 아닌, 그러니까 주님한테서 나온 게 아닌데도 버젓이 사랑이다, 신앙이다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다 가짜입니다.

 

 

113

말씀에서 지혜나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데 있어 ‘금’(gold)보다 더 일반적인 것은 없습니다. 법궤, 성전, 금상, 촛대, 대접들 및 아론의 예복 등 이 모든 것에 있는 금은 지혜나 사랑의 선을 표상했습니다. 선지서들에서도 그랬는데, 에스겔입니다.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28:4)

 

여기 분명히 말하기를, ‘금과 은’(gold and silver), 선과 진리가 지혜와 총명(wisdom and intelligence)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법궤와 성전에서처럼 여기 ‘은’(silver)도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입니다.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60:6)

 

그래서 또한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2:1, 11)

여기 ‘황금’(gold)은 선을, ‘유향과 몰약’(frankincense and myrrh)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정말 그레이트한 것을, 그래서 이르기를 ‘여호와의 찬송’(the praises of Jehovah)이라 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런 이유로 시편에서도 이르기를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72:15)

 

 

114

신앙의 진리는 말씀에서 ‘보석’(precious stones)으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아론의 에봇 판결 흉패(the breastplate of judgment)와 두 어깨 위 보석들처럼 말입니다. 판결 흉패에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gold, blue, bright crimson, scarlet double-dyed, and fine-twined linen)은 사랑에 속한 것들을, ‘보석’(stones)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그 사랑에 기반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합니다. 금테에 물릴 호마노 둘, 에봇 두 어깨 위 두 ‘기념 보석’(two stones of memorial)처럼 말이지요.

9호마노 두 개를 가져다가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10그들의 나이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새기라 11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 테에 물리고 12그 두 보석을 에봇의 두 어깨받이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워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13너는 금으로 테를 만들고 14순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고 그 땋은 사슬을 그 테에 달지니라 15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16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17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18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19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20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21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22순금으로 노끈처럼 땋은 사슬을 흉패 위에 붙이고 (28:9-22) 

보석들에 대한 이런 표상은 에스겔에서도 또한 분명한데요, 거기 하늘의 부, 곧 지혜와 지성을 소유한 사람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12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15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28:12-13, 15)

 

이 본문은 보석들이 아닌, 신앙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상하는 말씀임은 누가 보더라도 확실합니다. 맞습니다! 보석 하나하나는 신앙의 어떤 에센셜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115

태곳적 사람들은 ‘땅’(lands)을 말할 때, 땅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이해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가나안 땅과 시온산은 천국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장소들이 언급될 때마다 무슨 물리적 장소가 아닌, 오직 그것이 상징하는 것, 곧 천국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게 본문 ‘하윌라 땅’(land of Havilah)에도 해당합니다. 이 하윌라는 창세기 2518절에도 다시 나오는데요, 이 구절은 이스마엘 자손들 이야기인데, 거기서 그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거주하였더라’(they dwelt from Havilah even unto Shur, which is before Egypt, as thou goest toward Assyria)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25:18)

천국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들에서 나오는 지성과 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들만 지각합니다. 그래서 ‘비손이라는 강이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에 나오는 ‘두르다’(compass) 역시 그들은 흘러들어오는 걸로 지각합니다. 출애굽기 28장 11절에 나오는, 금테로 물린 아론의 에봇 두 어깨의 호마노 역시 그들은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지각합니다.

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 테에 물리고 (28:11)

다른 많은 경우도 그렇습니다.  

 

거듭 진리는 선을 담는, 신앙은 사랑을 담는 그릇입니다. 진리 안에는 선, 곧 주님이 계시며, 신앙, 교리 안에도 사랑, 곧 주님이 계십니다.

 

 

13 (AC.116, 117)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16

‘기혼’(Gihon)이라 하는 ‘두 번째 강’(second river)은 선과 진리, 혹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을, ‘구스 땅’(land of Cush)은 마음이나 역량(力量, faculty), 곧 멘탈 능력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의지와 이해, 곧 지적 능력(intellect)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 강에 대해 말한 것이 의지에 관한 거라면, 이 두 번째 강은 이해, 곧 지적 능력에 관한 것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117

게다가 ‘구스 땅’(land of Cush), 즉 이디오피아는 금, 보석, 그리고 향신료들로 풍부했는데, 이들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선, 진리,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정말 그레이트한 것들, 가령 사랑과 신앙 관련 지식 같은 그런 걸 의미합니다. 이런 사실은 위 113번 글의 인용 구절들인 사60:6, 마2:1, 11, 시72:15 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60:6)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2:1, 11)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72:15)

 

말씀에서 또한 ‘구스’(Cush)나 ‘이디오피아’(Ethiopia), ‘스바’(Sheba)에 의해 유사한 것들이 의미되고 있음은 선지서들, 가령 ‘구스 강’(rivers of Cush)이 언급되는 스바냐 같은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5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9그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10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3:5, 9-10)

 

그리고 다니엘에서, 북방 왕과 남방 왕에 관해 말하면서

 

그가 권세로 애굽의 금은과 모든 보물을 차지할 것이요 리비아 사람과 구스 사람이 그의 시종이 되리라 (11:43)

 

여기서 ‘애굽’(Egypt)은 기억-지식, 곧 세속적 지식을, ‘구스 사람’(Ethiopians)은 지식, 그러니까 종교적 지식을 가리킵니다.

 

[2] 그래서 에스겔에서

 

스바와 라아마의 상인들도 너의 상인들이 됨이여 각종 극상품 향 재료와 각종 보석과 황금으로 네 물품을 바꾸어 갔도다 (27:22)

 

이 역시 같은 식으로 신앙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주님, 결과적으로는 천적 인간에 관한 말을 하면서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10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72:7, 10)

 

이들 본문은 그 앞뒤 이어지는 연결 구절들을 보면 명백한 것처럼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스바의 여왕에 의해서도 유사한 것들이 의미되었는데, 그녀는 솔로몬을 찾아와 어려운 질문들을 하면서 그에게 향신료, 금, 그리고 보석들을 주었습니다.

1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2예루살렘에 이르니 수행하는 자가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실었더라 그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왕상10:1-2) 

선지서 뿐만 아니라 말씀의 역사 파트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아르카나를 의미, 표상 및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역사 파트’란 말씀을 분류할 때 흔히 역사서로 분류하는 말씀들, 그러니까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를 말합니다. 신학교에서는 이 외에도 룻기, 역대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도 포함하지만,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이들 성경은 비록 성경에 포함은 되었어도 ‘말씀’은 아니므로 저 역시 제외하였습니다. 참고로, ‘말씀’이란, 천사들이 읽을 수 있는 아르카나가 들어있어야 ‘말씀’입니다. 저 성경들은 안타깝게도 아르카나가 들어있지 않고, 그래서 천사들이 읽을 수 없어서 ‘말씀’이 아닙니다.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을 천사들이 읽고자 들여다보면 그냥 까맣게만 보인다고 합니다.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들은 그러나 사람들을 위해서는 좋은 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글들이 아르카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성경 확정 작업을 지난 수천 년 동안 해 올 때 성경에 포함되는 걸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아르카나(arcana, 라틴, 복수, 단수는 arcanum, 秘義, 숨겨진 비밀, 비밀스런 뜻, secrets)는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에만 들어있습니다.

 

 

14 (AC.118-121)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18

‘힛데겔 강’(river Hiddekel)은 이성(理性, reason), 즉 이성에 속한 명민함, 통찰력(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명석함입니다. ‘앗수르’(Asshur)는 합리적 마인드(the rational mind), 곧 그런 이성을 발휘하는 마음입니다. ‘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강’(river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hur)의 의미는, 이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이 마인드 안으로, 즉 겉 사람에게 속한 그 안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프라’(Phrath), 즉 ‘유브라데’(Euphrates)는 기억-지식, 곧 팩트에 입각한 지식인데, 이는 종단(終端, the ultimate)이나 경계(boundary), 곧 마음의 최종 경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천적 인간에게 있어 그 마음의 네 가지 영역, 곧 지혜, 지성, 이성 및 지식을 각각 이렇게 비손, 기혼, 힛데겔 및 유브라데라는 네 강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119

‘앗수르’(Asshur)가 합리적 마인드, 즉 인간의 합리적인 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선지서들, 가령 에스겔 같은 데를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31:3, 4)

 

여기서 합리적인 걸 ‘레바논 백향목’(cedar in Lebanon)이라 하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은 기억 지식, 곧 기억 중인, 팩트 기반 정보, 바로 이 곤경(plight) 안에 있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위 말씀 본문의 영어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를 보고,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을 보면... 많이 빗나간 번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운 번역은 ‘굵은 가지들(boughs) 가운데 있는 분지(offshoot)’ 정도가 되겠습니다.

 

여기 ‘in this very plight’라고 영어 ‘plight’를 사용했는데요... 이 단어의 뜻이 ‘역경, 곤경’ 정도여서 좀 난감했습니다. Potts 번역의 시작 연도가 1905년으로, 지금부터 120년 전이어서, 혹시 그 사이 단어의 뜻이 좀 바뀌었나 싶기도 하지만... 저는 그냥 에스겔 31장 전후가 애굽에 대한 안타까운 말씀들이어서 그걸 감안, 그대로 ‘곤경’으로 옮겼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훨씬 더 명료합니다.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19:23-25)

여기와 여러 다른 구절에서, ‘애굽’(Egypt)은 기억-지식, 곧 팩트 기반 정보를, ‘앗수르’(Asshur)는 이성, 곧 이성적 능력을, ‘이스라엘’(Israel)은 지성, 곧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120

‘애굽’(Egypt) 및 ‘유브라데’(Euphrates)는 기억-지식 및 이들 지식이 시작되는 감각적인 것들(the sensuous things), 곧 팩트 기반 세속 지식과 이 세속 지식이 기반을 두는 감각적 인상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속된 말로 뿅 간다고 할 정도로 인간의 오감에 깊은 인상을 주는 그런 것들만 팩트로 받아들이는 지식을 말합니다.

이런 사실은 선지서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미가서 말씀처럼

 

10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 11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12그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7:10-12)

 

그렇게 선지자들은 주님의 오심에 대해 말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사 천적 인간처럼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레미야에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2:18)

여기 ‘애굽’(Egypt)과 ‘유브라데’(Euphrates)는 같이 기억-지식, 곧 팩트를, ‘앗수르’(Asshur)는 거기서 나오는 합리화(reasonings), 곧 그런 걸로 건축되는 합리화를 말합니다.

시편에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80:8, 11)

여기 ‘유브라데 강’(river Euphrates)은 감각적인 것과 기억에 속한 것, 곧 감각적이고 팩트에 기반한 정보를 말합니다. 기억 지식이 영적 천적 인간의 지성과 지혜의 바깥쪽 경계인 것과 같이 유브라데는 이스라엘 영토의 앗수르 방향 경계였기 때문입니다.

내세에 들면, 즉 우리 영이 몸에서 들리면, 우리가 그동안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던 추상 개념들을 직접 영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데 가령 선, 진리, 사랑, 신앙, 의지, 이해, 지혜, 지성, 지식 및 감각 등 수많은 추상 개념들을 이제는 생생하게 마치 영상처럼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속 사람, 곧 내적 존재가 되었으므로 내적 시야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육안으로 보듯 저렇게 명료하게 진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들은 말씀 또한 같은 걸 말합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5:18)

위 두 경계는 같은 걸 말합니다.

 

 

121

이 강들을 통해서 천적 질서의 본성, 즉 생명에 속한 것들의 일 진행 방법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즉 ‘동’(East)이신 주님한테서(from) 출발, 주님으로부터(from) 지혜가, 지혜를 통해서(through) 지성이, 지성을 통해서(through) 이성, 그리고 그렇게 이성을 가지고(by means of) 기억 지식이 생생해진다는 것입니다.

※ 즉, ‘기억-지식’이라 하는 세상 지식도 이 천적 질서 안에 있으면, 주님의 생명으로 생생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돈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요, 다만 그 쓰임새, 용도에 달려 있듯 이 세상, 세속 지식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순서이며 이런 사람들이 천적 인간들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장로들로 천적 인간들을 표상하였기에 그들을 일컬어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받는 자들’(wise, intelligent, and knowing)(1:13, 15)이라 한 것입니다.

13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15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 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 (1:13, 15)

그래서 법궤를 짠 브살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35:31)

1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2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36:1-2)


이상으로 창세기 2장 세 번째 시간인 ‘에덴동산, 네 강’ 본문(2:10-14)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 및 이 부분 개요를 한 번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원고 첫 페이지로)


여러 번 복습하시면서 가능하면 본문도 줄줄 외우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2025-09-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9-21(D1)-주일예배(2616, 창2,10-14, AC.107-121),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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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원본, 창2,10-14, AC.107-121.pdf
0.09MB

 

 

 

주일예배(2025/9/28, 창2:15-17), ‘에덴동산, 선악과’의 속뜻

‘에덴동산, 선악과’의 속뜻 (2025/9/29)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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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9/14, 창2:4-9),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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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 태고교회의 시작, 에덴동산(2:4-9, AC.89-106)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4-9)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두 번째 시간으로, 원래 본문은 24절로 17절, 제목은 ‘에덴동산의 속뜻’이지만 한 번에 다루기에는 너무 길어 세 등분, 3주에 걸쳐 다루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 4절로 9절,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입니다.

여전히 주석 원본과 인용문은 볼드체로, 메시지를 겸한 설명, 곧 추임새는 ‘’로 구분합니다.

시작합니다.

 

4 (AC.89)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89

‘하늘과 땅의 내력’(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은 천적 인간의 형성, 즉 천적 인간을 빚으신 방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이 천적 인간을 빚으심이라는 것은 이어지는 모든 내용을 보면 아주 분명한데요,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이상 5),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7), 나중에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19) 등 이들에 대한 지으심은 이미 앞 장에서 다룬 내용들임에도 불구, 여기서 다시 다루는 걸 보면 분명 여기는 또 다른 사람을 다루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다음 사실들을 보면 더 분명한데요, 먼저 주님을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라는 새로운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영적 인간을 다룬 앞장에선 간단히 ‘하나님’(God)이라는 호칭으로만 불렀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또 여기선 ‘땅’(ground)과 ‘들’(field)(5)을 함께 언급하는 반면, 앞에선 ‘땅’(earth)만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오늘 본문 구절인 이 4절에서는 ‘하늘’이 ‘땅’보다 먼저 언급되다가 나중에는 ‘땅’이 ‘하늘’보다 먼저 나옵니다. 이는 ‘땅’은 겉 사람을, ‘하늘’은 속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 빚으심(reformation), 곧 개혁이 영적 인간의 경우는 ‘땅’, 즉 겉 사람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은, 지금 다루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데, 이 천적 인간의 경우에는 속 사람, 즉 ‘하늘’에서 시작한다는 것 등 이런 여러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분명 여기는 또 다른 사람을 다루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창세기 2장 3절까지를 창세기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바로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들(1:2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과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1:3-2:3)한테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인 ‘하나님’이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것이 창세기 2장 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2장 4절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창1:1-2:3까지가 하나, 창2:4부터가 또 하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래 말씀처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 또한 분명히 나오는 걸로 보아 그렇다면 분명 천적 인간의 시작이기도 하여 좀 어리둥절한 게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이 함께 쓰인 데에는 어떤 아르카나가 있는 건지 아직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공유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두 호칭, ‘여호와’와 ‘하나님’은 각각 선(good)과 진리(truth) 혹은 사랑(love)과 신앙(faith)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 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5, 6 (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90

‘들의 초목’(shrub of the field)과 ‘밭의 채소’(herb of the field)는 보통은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걸 의미합니다. 겉 사람은 사람이 아직 영적(靈的, spiritual)일 동안은 ‘땅’(earth)이라고 하지만,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 되면 ‘땅’(ground) 및 ‘들’(field)이라고 합니다. 바로 뒤에 ‘안개’(mist)로 언급되는 ‘비’(rain)는 싸움이 그친 뒤 오는 천국 평화의 평온함, 고요함(the tranquility of peace, the peaceful calm)을 말합니다.

 

 

91

그러나 여기 이런 것들은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그 상태가 바뀌어 간다는 게 무엇인지를 먼저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지각할 수조차 없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아주 깊이 감춰진 내용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은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하려 하거나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아직 일종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천적 상태가 되면, 그때는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자연히 싸움도 그치고, 평온함이 시작되지요. (AC.87 참조)

지난날 국민 드라마 ‘허준(1999) 생각이 납니다. 거기 보면 주인공 허준과 그가 처음 몸담았던 경남 산청 유의태와 그의 아들 유도지, 그리고 유의태가 걷어 딸처럼 기르는 아름다운 예진 아씨가 나옵니다. 도지는 준의 걸출한 등장과 연모하던 예진의 마음이 준에게로 향하는 데 앙심을 품고 오랜 세월, 심지어 궁궐 내의원에 들어가서까지도 준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내의원으로서 함께 임금을 모시는 입장이면서도 사사건건 준을 대적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함께 노인이 된 후에는 진심으로 준을 아끼고 존경하며 따르게 되지요. 이 겉 사람, 속 사람 관계가 꼭 저들 같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87번 글 앞부분 인용입니다.

천적 인간을 가리켜 ‘안식일’(sabbath), 즉 ‘쉼’(rest)이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천적 인간이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인데, 이때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다가옵니다. 이들이 있으면 악한 영들은 도저히 머무를 수 없어 멀리 달아나기 때문이며, 그래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되고, 또한 그동안 전투를 치른 장본인은 이 사람 본인이 아니라 홀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이 쉬시는 것, 곧 주님이 ‘안식하시니라’(rested) 하는 것입니다.

거듭 성 프란치스코(1182(?)-1226)나 성 분도 요셉 라브르(1748-1783) 같은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이들의 전기를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들은 스베덴보리(1688-1772)를 알지도, 또 스베덴보리처럼 무슨 영계를 수십 년 왕래하며 체험한 바도 없지만, 그리고 지금 이런 아르카나도 접한 적 없지만, 참으로 겉 사람과 속 사람의 하나 됨, 합일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비’(rain), ‘안개’(mist)가 바로 이 평온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수증기와도 같아서 마치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수분 공급을 받아 촉촉해지는 것과 같지요. ‘들의 초목’(shrub of the field)과 ‘밭의 채소’(herb of the field)라 하는 것들, 특별히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합리적인 마음과 기억, 곧 이성적인 생각들과 팩트 기반 지식에 속한 것들이 이 평온함, 평화의 샘(the offspring of peace)에서 나옵니다.

땅에 비가 내리고 안개로 축축해져야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가 자라듯 사람도 심령 상태가 평화, 평온해야 하늘에 기반을 둔 학습 능력과 합리적인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지금 이 번역의 일만 놓고 보아도 분명합니다. 나랏일과 여타 사적 일로 마음이 힘들면 번역도 잘 안 되지만, 심령이 평안하면 주님의 빛도 훨씬 더 환하게 느껴지며, 번역도 참 잘 되기 때문입니다.

 

 

92

탐욕과 거짓 때문에 생기는 싸움이나 불안이 사라질 때, 겉 사람이 맛보는 천국의 평화, 평온의 어떠함은 천국 평화의 상태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제32장, ‘천국 안의 평화의 상태’ 284번 글을 보면,

...천국의 평화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천사들이 누리는 평화를 조금이라도 감지할 수 있다. 사람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은 천국의 평화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느낄 수도 없다. 사람의 지각 능력은 자연계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사고 기능이 몸에서 들려 올라가 영의 차원에 머물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천사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나에게 천국의 평화가 느껴진 것도 그런 방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평화를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이 부적합하여 그 평화 그대로를 말로 옮길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마음의 평안에 비할 수 있을 뿐이다...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참고하세요.

이 상태는 기쁨에 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그런 건데, 단순히 싸움이 끝났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적 평화로부터 뻗어 나가며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런 생명입니다. 평화의 기쁨에서 그 생명이 나오는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 이때 이 상태에서 생깁니다.

 

 

93

천적 인간의 상태, 이 사람한테 선물로 주어진 평화롭고 평온한 상태, 곧 비가 내려 대지가 리프레쉬 되는 걸로 표현된 상태, 그리고 악하고 거짓된 것의 종노릇한 데서 구원받은 상태 등 이런 것이 천적 인간의 상태인데, 그래서 에스겔에서 주님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34:25-27, 31)

그리고 이런 효과가 ‘셋째 날’(third day)에도 있다는 말씀이 호세아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일곱째 날’(seventh)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6:2-3)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 역시 그 속뜻이 있는데, 특히 ‘7’(일곱)처럼 ‘3’(셋)과 ‘12’(열둘)가 비슷하게 ‘완전함’, ‘전부’ 등의 뜻을 갖습니다.

이 상태를 비유하여 ‘들의 풀’(growth of the field)이라 함을 에스겔, 고대교회에 관해 말씀하시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16:7)

이렇게도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60:21)

 

 

7 (AC.94-97)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94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form man, dust from the ground)는 그의 겉 사람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5절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no man to till the ground)를 보면, 그의 겉 사람은 전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는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man became a living soul)는 그의 겉 사람 또한 살아있는(alive)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95

앞의 두 구절, 즉 5, 6절에서는 겉 사람의 생명, 즉 그의 신앙의 생명, 이해(understanding)의 생명을 다루었다면, 본 절에서는 그의 사랑의 생명, 의지의 생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은 속 사람과 함께 지속적으로 전투에 임하면서도 사실은 그를 따르며 섬기는 걸 내켜 하지 않았고, 그래서 겉 사람은 아직은 ‘사람’(man)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적 인간이 되어가면서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 그를 섬기기 시작하며, 신앙의 생명, 사랑의 생명으로 변화되어 가면서 또한 ‘사람’(man)이 됩니다. 그를 준비시키는 것은 신앙의 생명이지만, 그로 하여금 ‘사람’(man)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입니다.

거듭, 신앙은 사랑을 담는 그릇이며, 자원함으로 하는 것이 그의 생명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밭에서 갓 수확한, 흙이 묻고 거친 채소를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인간이라 한다면, 채소, 과일 등 잘 다듬고 정성껏 씻어 준비한 식재료들은 영적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먹기 좋은 훌륭한 음식, 요리가 되려면 최종적으로 열을 가해야 하는데 이 열이 바로 사랑이며, 그렇게 해서 나오는 최종 상태가 바로 천적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9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고대에, 그리고 말씀에서 ‘코’(nostrils, 콧구멍)는 향기(odor)의 결과 감사했던 모든 것, 곧 어떤 향기로운 아이디어(the idea of fragrance)가 떠오를 때 맛보는 모든 즐거운 걸 말합니다. 여기서 향기는 퍼셉션(perception)을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들, 가령, 번제(燔祭, the burnt offerings)나 주님, 주님의 나라에 대한 기록들에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smelled an odor of rest)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신앙에 관련된 것을 무척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르시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 곧 주님이 임명하신 자를 가리켜 ‘콧김’(breath of the nostrils)(4:20)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4:20)

주님 자신 요한복음에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breathing on his disciples)라 하심으로써 같은 걸 상징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0:22)

 

 

97

생명을 ‘호흡’(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지각했기 때문인데, 이는 후에 그 후손들로 내려오면서 연속적으로 변했습니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오늘날 이런 것들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태고 사람들은 이런 것에 매우 친숙했고, 내세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만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wind)에 비유하는 이유입니다. 주님 또한 요한복음에서 사람의 거듭남을 이야기하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3:8)

 

 

8 (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8

‘동산’(garden)은 지성(intelligence)을, ‘에덴’(Eden)은 사랑을, ‘동방’(east)은 주님을 의미하며, 그 결과,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of Eden eastward)은 천적 인간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천적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성을 말합니다.

 

 

99

영적 인간에게 있어 생명이나 생명의 질서(order, 순서)는 이렇습니다. 주님이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및 기억에 속한 것들 안으로 들어오심에도 불구, 아직 그의 겉 사람은 그의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기억과 이성에 속한 것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생명 혹은 생명의 질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이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및 기억에 속한 것들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거기엔 더 이상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실상이라는 것을 지각합니다(perceives). 영적 인간일 동안 이때까지 뒤집혔었던 질서가 천적 인간이 되면서 회복되었다는 걸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질서, 혹은 사람을 가리켜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in Eden in the east)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은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 자신입니다. 가장 내적인 뜻(the inmost sense)으로는, 이는 또한 보편적인(universal) 뜻이기도 한데, 바로 주님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있게 될 그곳이지요. 그때 아직 지상에 있는 그의 상태는 천국 천사들과 함께하는 상태, 마치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그런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인데,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사고(thoughts)와 사고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들, 그리고 심지어 그의 언행도 모두 열린(open) 상태이며,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온 것들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안에는 천적 영적인 것들이 담깁니다. 그 이유는 그 하나하나에 다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이 생명은 그로 하여금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100

‘동산’(garden)은 지성, ‘에덴’(Eden)은 사랑이라는 것은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51:3)

여기 ‘사막’(wilderness), ‘기뻐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이나 사랑과 관련된 것들인 반면, ‘광야’(desert), ‘즐거워함’(gladness), ‘창화하는 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이나 이해에 속한 것들에 관한 표현입니다. 전자는 ‘에덴’(Eden), 후자는 ‘동산’(garden)에 관련되는데, 그 이유는, 이 선지자는 이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해서 늘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garden in Eden)의 더욱 깊은 의미에 관해서는 10절에서 다루겠습니다.

※ ‘에덴동산’에서 ‘에덴’은 천적인 것에, ‘동산’은 영적인 것에 각각 상응한다는 말입니다.

 

 

101

주님이 ‘동’(, east)이시라는 것 또한 말씀에 나오는데요, 에스겔입니다. 

1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43:1-2, 4)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였던 유대교회에서 성전 건물 앞에서 기도할 때, 그들의 얼굴을 동쪽을 향하여 돌렸던 거룩한 관습은 이렇게 주님의 임재가 ‘동’(east)이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려면, 그 안에 천국의 두 키워드 중 하나인 이노센스(innocence, 純眞)가 있어야 하듯, 어떤 지성 역시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려면, 그 순서, 질서가 올바른 순서, 질서여야 합니다. 즉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통해 위에서부터 내려와야지, 거꾸로 세상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리를 통해 위로 올라가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얼핏 비슷해 보여도 그 본성과 정체는 완전 정반대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9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2

‘나무’(tree)는 퍼셉션(perception)을,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tree desirable to behold)는 진리의 퍼셉션, 곧 진리를 알게 하는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tree good for food)는 선의 퍼셉션, 곧 선을 알게 하는 퍼셉션을,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감각적인 것, 즉 그저 기억일 뿐인 지식, 그러니까 감각적 증거, 세속적 지식에 기반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103

여기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상징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제가 영적 인간이면 달라지는데, 주제의 성격에 따라 서술되는 것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04

오늘날은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오늘날’은 1750년대(이 주석의 작성 연대는 1749-1756) 유럽을 말하지만, 퍼셉션에 대해 여전히 무지한 건 270여 년이 지난 오늘날(2025년 현재) 대한민국을 비롯, 전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 여부에 대한 어떤 내적 감각(a certain internal sensation)으로, 태고교회에는 아주 잘 알려져 있던 것입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 이 퍼셉션은 정말 완벽한데 그들은 이것으로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무엇이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인지, 또 그들에게 다가오는 아무개가 어떤 자인지, 심지어 그가 다가오는 것만 가지고도, 그리고 그의 한 조각 생각만 가지고도 그가 어떤 자인지 등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영적 인간한테는 이 퍼셉션은 없고, 대신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으며, 굉장히 많은 사람이 이 양심이 뭔지 모르고, 퍼셉션이 뭔지는 더더욱 모릅니다.

 

 

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며, ‘동산 가운데’(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입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the faith thence derived)이란, 신앙은 신앙인데 사랑으로 말미암는 신앙,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하는 가슴 신앙을 말합니다. 지식에서만 나오는 신앙, 즉 머리 신앙이 아니고 말입니다.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고 하는 이 의지는 사람과 천사한테 있어 주님의 주된 소유(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그러니까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소유, 그 소유권이 주님한테 있는 것들 중 메인이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비록 기술(記述), 즉 적기는 그렇게 적고 있지만, 그러나 의지나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탐욕(cupidity)이 사람의 것입니다. 흔히들 이걸 의지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의지는 생명나무가 있는 ‘동산 가운데’(midst of the garden)인 반면, 사람한테는 의지는 전혀 없고 대신 그저 탐욕만 있기 때문에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랑과 신앙, 곧 모든 생명이 말미암는, 모든 생명의 근원 되시는 분입니다.

 

 

106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곧 퍼셉션, ‘생명나무’(tree of lives), 곧 사랑 및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 증거와 세속적 지식에 기반한 신앙 등, 이 세 종류의 나무들의 본성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두 번째 시간인 ‘에덴동산’의 속뜻 (1)을 번역,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천적 인간의 상태와 주님이 천적 인간을 어떻게 지으시고, 에덴동산을 어떻게 만드시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하는 첫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느끼셨겠지만 우리의 이 주일설교는 일반적인 설교와 다릅니다. 설교라기보다는 무슨 주석 낭독회에 가까운데요, 많은 고민 끝에 결국 이렇게 방향을 잡은 이유는, 원전을 건드리기 싫어서입니다. 어쭙잖은 저의 역량으로 괜히 임의로 풀다가 큰 사고를 칠까 봐서이지요. 역시 느끼셨겠지만, 저는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1749-1756)라는 주석을 주님의 말씀과 거의 동급으로 봅니다. 이 주석이 기록된 방식 때문인데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주석은 주님이 직접 곁에서 계시하시고 스베덴보리는 그걸 그대로 받아적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씀, 곧 선지자들이 말씀을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주님은 그런 중에도 술자(述者), 곧 받아적는 사람의 퍼스낼러티를 허용하셔서 술자, 이 경우에는 스베덴보리, 의 어떤 특성들이 군데군데 스며드는 걸 허용하셨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주일 설교는 마치 굉장한 고액 강의를 수강하듯 들으시며 복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시라고 이 원고와 함께 제 블로그에도 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태도이기 때문인데요, 누구하고는 한 끼 점심 식사 하는데 10억이라는 데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분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만 숨을 못 쉬어도 죽는 이 대기 속 공기, 산소를 그러나 주님은 한 푼도 안 받으시고 거저 우리 모든 인류와 피조물에게 주시지요.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그걸 고마워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말씀에 대한, 그리고 이 아르카나 설교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여 드리고자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전체 본문입니다.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4-9)

여러 번 복습하시면서 가급적 본문도 줄줄 외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설교
2025-09-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9-14(D1)-주일예배(2615, 창2,4-9, AC.89-106),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pdf
0.54MB
영문 원본, 창2,4-9, AC.89-106.pdf
0.08MB

 

 

 

주일예배(2025/9/21, 창2:10-14),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

‘에덴동산, 네 강’의 속뜻 (2025/9/21)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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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9/7, 창2:1-3),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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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 거듭남의 완성, 일곱째 날과 안식일(2:1-3, AC.82-88)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1-3) 1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Gen. 2:1-3)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첫 시간, 천지창조 일곱째 날, 곧 거듭남 일곱 번째 상태인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전히 주석 원본은 볼드체로, 메시지를 겸한 설명, 곧 추임새는 ‘’로 구분합니다.

 

시작합니다.

 

1 (AC.82, 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82

이 말씀은 인간이 이제 영적으로 ‘여섯째 날’이 되었음을, 즉 ‘여섯째 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충분히 영적임을 의미합니다. ‘천’(, heaven)은 그의 속 사람(internal man), 곧 내적 존재(inner being)를, ‘지’(, earth)는 그의 겉 사람(external), 즉 외적 존재(outer being)를 말합니다. ‘만물’(the army of them)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에 대한 지식을 말하며, 이는 앞서 큰 광명체들과 별들로 상징된 것입니다. 속 사람을 하늘’, 겉 사람을 이라 하는 것은, 앞서 전 장에서 이미 인용된 말씀 구절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에 다음 이사야 말씀들을 추가하면,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3:12-13)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6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51:13, 16)

 

이들 말씀으로부터, ‘하늘’과 ‘땅’이 사람에 관한 서술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런 표현들이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고는 있지만, 말씀의 내면들은 다음과 같은 속성, 곧 교회에 관한 언급은 또한 그 교회의 모든 부분에 관한 언급일 수도 있는, 일단 그 자신, 교회가 아니면 그가 교회의 어떤 부분이 되는 건 절대 불가능한, 마치 자신이 주님의 성전이 아닌 자는 성전, 곧 교회와 천국으로 상징되는 그 무엇이 절대 될 수 없는, 그런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태고교회에 대하여 ‘사람’(man)이라는 단수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83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라고 합니다. 이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기 때문, 즉 협력, 제휴, 힘을 합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사랑, 즉 천적 원칙(the celestial principle)이 주요 원리(the principal)가 되기 시작합니다. 신앙이나 영적인 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보다는 사랑이, 영적인 거보다는 천적인 거가 주도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것, 곧 천적인 걸 우선하는 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2, 3 (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23절까지를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이거나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한테는 주님의 신성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가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게 이 2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4절부터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참고로 이 두 호칭은 각각 선과 진리 혹은 사랑과 신앙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 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84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 heavenly person)이 ‘일곱째 날’입니다. 주님이 육 일간 일하신 결과이기에 이 천적 인간을 가리켜 ‘그가 하시던 일’(his work)이라고 합니다. 그때 모든 전투, 곧 갈등, 충돌이 그치며, 그 결과 그런 주님의 상태를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시니라’(rest from all his work)라고 하는데, 이런 이유로 이 일곱째 날을 특별히 성별(聖別), 히브리어로 ‘안식’(rest)이라는 뜻의 ‘שבת’(샤바트, the sabbath)라고 합니다. 이런 과정으로 사람은 창조되고(created), 형성되며(formed) 만들어집니다(made). 이 모든 것이 말씀들로부터 아주 분명합니다.

 

 

85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래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일이라 하셨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밝혀진 적 없는 아르카나(arcana, 秘義)입니다.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고, 영적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 거의 없습니다. 앞서 81번 글을 보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 이런 무지의 결과 사람들은 이 둘을 동일시했습니다. 일곱째 날 관련,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혹은 ‘안식일’(sabbath)인 것과 관련, 주님은 자신이 진정한 안식일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이는 주님이 참 인간이시며, 진정한 안식일이심을 의미합니다.

 

49번 글(1:26)에,

 

주님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그 교회 구성원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더 많은 깊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고요, 이런 이유로, 그들은 아무한테도 ‘사람’(man)이라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주님한테만, 그리고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만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한테도 이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요. 대신 다만 자기들한테 있는 것들 중 모든 사랑의 선과 모든 신앙의 진리 같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고 지각된(perceived) 것들에 한해서만 사용했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 참 인간, 참 사람은 오직 홀로 주님 한 분뿐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그분의 나라를 안식일, 곧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라 하십니다.

 

[2] 여기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는 이후 이 교회를 계승한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도 더 가장 주님의 안식일(the sabbath of the Lord)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주님의 안식일을 후대의 모든 교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모든 이어지는 가장 내적(inmost) 교회들, 즉 후대 교회들의, 주님과 가장 가까운, 가장 깊은 부분 역시 안식일이었다는 말이지요. 모든 거듭나는 사람 역시 그가 천적이 되면, 즉 그가 천국 본성을 발전시키면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그가 주님의 모양(a likeness of the Lord)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먼저 육 일간의 전투 혹은 수고가 선행합니다.

 

59번 글(1:30) 일부 인용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전투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며,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거듭나기 전엔 탐욕이 지배적이기 때문인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전반적으로 그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인데,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 그를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끊임없이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그런 걸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져서 결국은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은 개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이런 것들이 유대교회에서 육 일간의 수고와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상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도입된 어느 것 하나 주님과 주님 나라에 대한 표상(representative) 아닌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설명이 궤(the ark, 여호와의 법궤)로도 표상되었습니다. 궤가 나아갈 때와 궤가 쉴 때로 말이지요. 궤가 광야를 이리저리 다니는 것으로는 영적 전투와 시험(combats and temptations)을, 그리고 궤가 쉬는 것으로는 일종의 평화의 상태(a state of peace)를 표상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궤가 나아갈 때, 모세는 말하기를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10:35-36)

 

위 민수기 본문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을 떠나 ‘그들의 쉴 곳을 찾은’(10:33) 것은 바로 여호와의 언약궤라 하였습니다.

 

[3] 천적 인간의 쉼(The rest of the celestial man)을 이사야에서는 안식일을 가지고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58:13-14)

 

이것이 천적 인간의 질(, quality)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적 욕구(his own desire), 즉 욕망이 아닌, 주님의 선하신 즐거움(good pleasure), 곧 그분의 뜻을 따르는데, 이것이 그의 ‘즐거움’(desire)입니다. 그 결과, 그는 내적 평화와 행복(internal peace and happiness)을 누립니다. 이것이 위 말씀,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의 의미이며, 동시에 그는 겉으로도 평온과 큰 기쁨(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을 누리는데, 이것이 바로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의 의미입니다.

 

천사들한테서 볼 수 있는 이 상태는 천국 그 자체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이 상태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평화와 쉼 가운데 있으며, 주님도 쉼 가운데 계십니다. 그들이 주님과 이미 결합하였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수고롭게 일하지 않는데요, 이는 그들이 모두 이때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천적 인간의 다른 표현입니다.

 

 

86

‘여섯째 날’이 된(has become) 영적 인간이 이제 천적 인간이 되려고 하는(is beginning to be) 상태를 여기서 먼저 다루고 있는데, 이때가 유대교회에서 말하는 ‘안식일 저녁’(eve of the sabbath)입니다. 안식일의 거룩함을 저녁부터 지키는 것으로 표현했지요. 천적 인간은 이제 말씀드릴 ‘아침’입니다.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23:54)

 

※ 유대인의 안식일은 여섯째 날인 금요일 일몰부터 일곱째 날인 토요일 일몰까지입니다. 이와 관련된 걸 하나 말씀드리면, 유대 지역 일몰이 보통 오후 5시라고 할 때, 주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때가 오후 3시쯤이라 두 시간 만에 장례를 치러야 하는 아주 촉박한 상황임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 관련 본문들을 읽으시면 한결 와닿으실 겁니다. 하나 더, 유대인들은 결코 월요일, 화요일... 같은 요일 명칭을 쓰지 않습니다. 그 영어식 표현의 유래가 고대 앵글로 색슨계 신들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단순히 창세기 1장 표현대로 첫째 날, 둘째 날... 같은 명칭을 사용합니다.

 

 

87

천적 인간을 가리켜 ‘안식일’(sabbath) 또는 ‘쉼’(rest)이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천적이 될 때 전투가 그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다가옵니다. 이들이 있으면 악한 영들은 도저히 머무를 수 없어 멀리 달아납니다. 전투를 치른 장본인, 당사자가 이 사람 본인이 아니라 홀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안식하시니라’(rested) 하는 것입니다.

 

※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의지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그리고 이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각각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은 이렇게 천국과 지옥 두 곳에서 각각 파송된 천사들과 지옥의 영들로 이루어지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최소 천사 둘과 지옥의 영 둘이 와 있는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와 이해로 매 순간 일평생 천국 또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다가 이때, 즉,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거듭남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옥의 영들이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입니다.

 

 

88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일’(work of God)이라 합니다. 주님 홀로 그를 위해 지금까지 싸워오셨고(has fought for), 지금까지 그를 창조해 오셨으며, 지으시고 만들어 오셨기(has created, formed, and made)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 하는 것이며, 한 번 더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음이니라’(he rested from all his work)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지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으로 한 일’(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사야에,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45:11-12, 18, 21)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새 창조, 혹은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을 다음 두 가지 경우와, 또 창세기 본 장과 앞 장에서 아주 특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요, 위 구절 중,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 하는 부분, 그리고 같은 이사야 다른 구절, 예를 들면,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그리고 창세기 1장과 지금 2장,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하는 부분들입니다. 속뜻을 생각할 때, 이런 용법을 만나면 늘 그 표현들을 눈여겨보게 되는데요, 다음 케이스들이 바로 그런 경우들입니다. 주님을 가리켜 ‘창조하시는 분’(creator), ‘빚으시는 분’(former), ‘만드시는 분’(maker)으로 표현하는 경우들이지요.

 

 

이상으로 창세기 2장 첫 번째 시간인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을 다루었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안식일 관련, 우리가 흔히 오해할 수 있는 한 가지를 바로잡으면서, 이것을 오늘의 결론 삼아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25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17:24-25)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절대로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고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해야 한다. 천국 천사들의 상태가 바로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즉 자기들로 말미암아서는 그 어떤 것도 의도하거나 행하지 않는다. 심지어 더 나아가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말이다. 그들과 주님과의 결합은 이런 걸로 되어 있다’라는 뜻입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사람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악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선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한테는 모든 것이, 심지어 생명의 지적, 의지적 둘 다 아주 작은 데까지 흘러들어오며, 그 결과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개별적, 전반적인 것들한테까지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모든 것이 말입니다.

 

오늘 전체 본문입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1-3)

 

설교

2025-09-0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9-07(D1)-주일예배(2614, 창2,1-3, AC.82-88),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pdf
0.41MB
영문 원본, 창2,1-3, AC.82-88.pdf
0.08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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