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1-17

 

102.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Verse 9.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scientiae] of good and evil.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진리에 속한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속한 퍼셉션을, ‘생명 나무’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derived)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what is sensuous)에서 나오는 신앙, 곧 그저 기억-지식에 불과한 신앙을 각각 가리킵니다. A “tree” signifies perception; a “tree desirable to behold,” the perception of truth; a “tree good for food,” the perception of good; the “tree of live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103. 여기 ‘나무들’이 퍼셉션을 가리키는 이유는 천적 인간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며, 주제가 영적 인간이면 또 달라집니다. 주제의 성격에 따라 서술되는 것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rees” 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104. 오늘날, 퍼셉션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At this day it is unknown what perception is.

 

※ 여기서 말하는 ‘오늘날’은 1750년대 유럽을 말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내적 감각(internal sensation)으로,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으며, 어떤 것이 참이요, 선인지 여부에 관한 것인데, 태고교회에게는 아주 잘 알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It is a certain internal sensation, from the Lord alone, as to whether a thing is true and good; and it was very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이 퍼셉션은 천사들한테는 아주 완벽한데요, 그들은 이것으로 여러 가지, 곧,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또 어떤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인지, 또 그들에게 오는 아무개가 어떤 자인지, 심지어 그가 다가오는 것만 가지고도, 그리고 그의 한 조각 아이디어만 가지고도 그가 어떤 자인지 등을 깨닫고 아는 정도입니다. This perception is so perfect with the angels, that by it they are aware and have knowledge of what is true and good; of what is from the Lord, and what from themselves; and also of the quality of anyone who comes to them, merely from his approach, and from a single one of his ideas.

 

영적 인간한테는 퍼셉션이 없습니다.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The spiritual man has no perception, but has conscience.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습니다. 무척 많은 사람이 이 양심이 뭔지도 모르며, 퍼셉션이 뭔지는 더더욱 모릅니다. A dead man has not even conscience; and very many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and still less what perception is.

 

 

105. ‘생명 나무’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동산 가운데에는’은 속 사람의 의지 안입니다. The “tree of lives”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in the midst of the garden” is in the will of the internal man.

 

※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란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다 보니 천국을, 영생을 부차적으로 얻는 것입니다. 보통은 천국 가기 위해, 영생 얻기 위해 주님을 신앙하는데 말입니다...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고 하는 이 의지는 사람 및 천사와 함께 주님의 주된 소유(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입니다. The will,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heart,” is 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with man and angel.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의지나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비록 말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탐욕(cupidity)이 사람의 것입니다. 사람은 그걸 의지라고 하지만... But as no one can do good of himself, the will or heart is not man’s, although it is predicated of man; cupidity, which he calls will, is man’s.

 

의지가 ‘동산 가운데’요, 거기는 ‘생명 나무’가 있는 데고, 사람은 의지는 전혀, 대신 오히려 탐욕만 있기 때문에, 이런 정황으로 비추어 볼 때, 이 ‘생명 나무’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랑과 신앙, 곧 모든 생명이 나오시는 분입니다. Since then the will is the “midst of the garden,” where the tree of lives is placed, and man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the “tree of lives” is the mercy of the Lord, from whom comes all love and faith, consequently all life.

 

 

106. ‘동산의 나무’, 혹은, 퍼셉션, ‘생명 나무’, 혹은,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지식의 나무’, 혹은, 감각적인 것에서, 그리고 단지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 등 이들의 본성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다루겠습니다. But the nature of the “tree of the garden,” or perception; of the “tree of lives,” or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nd of the “tree of knowledge,” or faith originating in what is sensuous and in mere memory-knowledge, will be shown in the following pages.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9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속뜻)

주님은 천적 인간의 안에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에 관한 다양한 퍼셉션들을 두셨습니다. 특히, 그의 의지 안에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도 두시고, 감각적인 신앙, 지식에 불과한 신앙도 두셨습니다. 사람의 의지 안에 있는 ‘생명 나무’는 주님은 자비입니다.

 

https://youtu.be/hFjwvb8Pi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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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17

 

98. 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Verse 8.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aboriente]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동산’은 지성(intelligence)을, ‘에덴’은 사랑을, ‘동방’은 주님을 각각 상징하며, 그 결과 ‘동방의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지성, 곧 주님에게서 나와 사랑을 통해 흘러 들어가는 지성을 상징합니다. By a “garden” is signified intelligence; by “Eden,” love; by the “east,” the Lord; consequently by the “garden of Eden eastward” is signified 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which flows in from the Lord through love.

 

 

99. 영적 인간한테서 볼 수 있는 생명과 생명의 질서(order, 순서)는 이렇습니다. 주님이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understanding), 이성(reason) 및 기억(memory, 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 들어가심에도 불구, 아직 그의 겉 사람은 그의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마치 주님이 아닌 그 사람 자신에게서 지식과 이성에 속한 것들을 통해서 지성이 흘러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Life, or the order of life, with the spiritual man, 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 through faith,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in ejus 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 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 but from the man himself, 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 [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 실제로 세상에서는 지성이라는 것이 많은 세상 지식과 학문을 인간 이성으로 잘 다듬으면 나오는 것으로, 이룰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들 알고 있습니다. 그 순서를 잘못 알고 있는, 정반대로들 알고 있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소위 ‘지성인’이라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생명, 혹은 생명의 질서,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사랑에 속한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및 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엔 더 이상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참으로 그렇다는 것을 지각합니다. But the life, or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

 

※ 영적 인간의 경우는 주님이 그의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지식 안으로 들어가시지만, 천적 인간의 경우는 그의 사랑을 통해서 들어가십니다. 즉, 천적 인간의 경우, 그가 무엇을 배우며, 무슨 언행과 생각, 어떤 사유(思惟)를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사랑으로 하지만, 영적 인간의 경우는 신앙 때문에, 교리 때문에, 지적 욕구 때문에 한다는 말입니다.

 

영적 인간일 때는 이 지점까지 뒤집힌 상태였던 질서가 천적 인간이 되면서는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지금 설명하는 중입니다. ‘동방의 에덴동산’은 이 질서, 혹은 사람을 말합니다. 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 and this order, or man, is call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 즉, 천적 인간의 지성이란 이런 질서, 이를 가리켜 ‘신적 질서’, ‘신성한 질서’(the Divine order)라 하는데, 이런 질서를 알며, 시인하고, 그 자신 이런 질서 안에 있는 지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 자신이십니다. In the supreme sense, 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is the Lord himself.

 

가장 내적인 뜻(the inmost sense), 이는 또한 유니버설(universal, 전 세계적인, 보편적인)한 뜻인데, 이 뜻으로는 주님의 나라(the Lord’s kingdom)요, 천국을 의미합니다. 이 천국은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있게 될 그런 곳이지요. In the inmost sense, 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 it is the Lord’s kingdom, 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

 

그때 그의 상태는 천국 천사들과 함께하는 상태, 마치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그런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인데요, 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 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사고(thoughts)와 사고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들, 그리고 심지어 그의 언행(言行)이 모두 오픈 상태이며,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온 것들까지도 오픈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안에는 천적, 영적인 것들이 담깁니다. 그 이유는, 그 하나하나에 다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그는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 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 are open, even from the Lord, 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for each one [of these] has the Lord’s life within it, 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 천적 인간의 상태는 결국 주님의 생명 덩어리인 셈이지요. 그의 모든 사고와 아이디어, 모든 언행 및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의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으니, 이런 상태에서는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받을 수 있지요. 모든 태고교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천사들이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오픈하기 좋아하는데 그것은 그들 안에 오직 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00. ‘동산’이 지성을, ‘에덴’이 사랑을 상징하는 것은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That a “garden” signifies intelligence, and “Eden” love, appears also from Isaiah: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51:3) Jehovah will comfort Zion, he will comfort all her waste places, and he will make her wilderness like Eden, and her desert like the garden of Jehovah; joy and gladness shall be found therein, confession and the voice of singing. (Isa. 51:3)

 

여기서 ‘사막’, ‘기뻐함’, ‘감사함’은 신앙 혹은 사랑에 관련된 천적인 것들을, ‘광야’, ‘즐거워함’, ‘창화하는 소리’는 신앙 혹은 이해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각각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In this passage, “wilderness,” “joy,” and “confession” are terms expressive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relate to love; but “desert,” “gladness,” and “the voice of singing,” of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belong to the understanding.

 

전자는 ‘에덴’, 후자는 ‘동산’과 각각 관련되는데, 그 이유는, 이 선지자는 이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해서 늘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former have relation to “Eden,” the latter to “garden”; for with this prophet two expressions constantly occur concerning the same thing, one of which signifies celestial, and the other spiritual things.

 

에덴동산’의 더욱 깊은 의미에 관해서는 10절에서 다루겠습니다. What is further signified by the “garden in Eden,” may be seen in what follows at verse 10.

 

 

101. 주님이 ‘’(東, east)이시라는 것 또한 말씀에 나오는데요, 에스겔입니다. That the Lord is the “east” also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겔43:1-2, 4) He brought me to the gate, even the gate that looketh the way of the east, and behold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came from the way of the east; and his voice was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the earth shone with his glory. (Ezek. 43:1–2, 4)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였던 유대 교회에서 성전 건물 앞에서 기도할 때, 전통적으로 그들의 얼굴을 동쪽을 향하여 돌렸던 것은 이렇게 주님의 임재가 ‘’이셨기 때문입니다. It was in consequence of the Lord’s being the “east” that a holy custom prevailed in the representative Jewish church, before the building of the temple, of turning their faces toward the east when they prayed.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8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속뜻)

천적 인간 안으로 주님의 신성과 사랑으로 말미암은 지성이 흘러 들어갑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주님의 생명으로 가득하게 되고, 퍼셉션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천국 천사들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 어떤 선, 사랑, 신앙이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려면, 그 안에 천국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이노센스(innocence, 純眞)가 있어야 하듯, 어떤 지성 역시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려면, 그 순서, 질서가 올바른 순서, 질서여야 합니다.

 

즉,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통해 위에서부터 내려와야지, 거꾸로 세상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리를 통해 위로 올라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지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얼핏 비슷해 보여도 그 본성과 정체는 완전 정반대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https://youtu.be/ym-mXRY9pQ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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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17

 

94.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Verse 7.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spiraculum]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겉 사람을 지으심입니다. 그의 겉 사람은 전(before)까지는 사람(man)이 아니었습니다. 5절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To “form man, dust from the ground” is to form his external man, which before was not man; for it is said (verse 5)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시는 것을,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의 겉 사람 또한 살아있는(alive) 상태가 되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To “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is to give him the life of faith and love; and by “man became a living soul” is signified that his external man also was made alive.

 

 

95. 겉 사람의 생명, 즉, 앞의 두 구절에서는 신앙 혹은 이해(understanding)의 생명이, 본 절에서는 그의 사랑 혹은 의지(will)의 생명이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The life of the external man is here treated of—the life of his faith or understanding in the two former verses, and the life of his love or will in this verse.

 

지금까지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굴복, 그를 섬기는 걸 내켜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늘 싸우는 편이었지요. 이런 이유로, 겉 사람은 아직 ‘사람’(man)이 아니었습니다. Hitherto the external man has been unwilling to yield to and serve the internal, being engaged in a continual combat with him, and therefore the external man was not then “man.

 

그러나 이제 천적 인간이 되면서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 그를 섬기기 시작합니다. 신앙의 생명, 사랑의 생명으로 변화되어 가면서(being so rendered) 겉 사람은 또한 ‘사람’이 됩니다. Now, however, being made celestial,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it also becomes “man,” being so rendered by the life of faith and the life of love.

 

그를 준비하는 것은 신앙의 생명이지만, 그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입니다. The life of faith prepares him, but it is the life of love which causes him to be “man.

 

 

9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라고 말씀하신 부분인데요,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As to its being said that “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case is this:

 

고대에, 그리고 말씀에서, ‘’(nostrils, 콧구멍)는 그 향기의 결과, 무엇이든 고마운 것(grateful), 감사한 것으로 이해되었는데요, 그게 바로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In ancient times, and in the Word, by “nostrils” was understood whatever was grateful in consequence of its odor, which signifies perception.

 

※ 이 퍼셉션은 홍수 이후 사람들은 알 수 없게 된, 오직 홍수 이전인 태고교회 사람들한테만 허용된 영적 통찰력입니다. 내적 호흡이라 할 수도 있는, 또는 입류(入流, influx)의 다른 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과 결합할 수 있게 해주는 그 무엇입니다. 천사들은 지금도 이 퍼셉션으로 주님과 결합하고 있습니다. 이 퍼셉션이 사라져서 인류가 더 이상 주님과 결합할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그 빈자리를 ‘양심’(良心, conscience)이라는 것으로 대신하셔야만 했을 정도로 아주 본질적인 것입니다. 인류는 어떤 식으로든 늘 주님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순간이라도 소위 존재, 존속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허용되었던 퍼셉션이 닫힌 것은 그들의 어두워짐,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께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반복되는데요, 가령, 번제(the burnt offerings) 및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현한 것들에게서 주님은 ‘어떤 쉼과 안식의 향기(an odor of rest)를 맡으셨다’ 같은, 그런 기록들입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련된 것들은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 가장 좋아하시는 것, 가장 고마워하시는(most grateful) 것이기 때문에, 이르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하시는 것입니다. On this account it is repeatedly written of Jehovah, that he “smelled an odor of rest” from the burnt offerings, and from those things which represented him and his kingdom; and as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are most grateful to him, it is said that “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출29:18)와 같은 표현들은 정말 자주 반복되지요. 또,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1,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라고 표현했지요.

 

그래서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 곧 주님을 가리켜 ‘콧김’(애4:20)이라 하신 것입니다. Hence the anointed of Jehovah, that is, of the Lord, is called the “breath of the nostrils” (Lam. 4: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애4:20)

 

주님 자신 요한복음에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라 하심으로써 같은 걸 상징하셨습니다. And the Lord himself signified the same by “breathing on his disciples,” as written in John: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22)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ye the Holy Spirit. (John 20:22)

 

 

97. ‘호흡’(breathing)과 ‘’(breath)으로 생명을 묘사하는 이유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지각했기 때문인데요, 이 호흡 상태들은 후에 그 후손들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변했습니다. The reason why life is described by “breathing” and by “breath” is also that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perceived states of love and of faith by states of respiration, which were successively changed in their posterity.

 

이것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오늘날, 이와 관련해서 알려진 게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Of this respiration nothing can as yet be said, because at this day such things are altogether unknown.

 

태고시대 사람들은 이런 것에 매우 친숙했고, 내세의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만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 위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이런 것에 대해 친숙하지도, 접해본 적도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wind)에 비유하는 이유입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well acquainted with it, and so are those who are in the other life, but no longer anyone on this earth, and this was the reason why they likened spirit or life to “wind.

 

주님 또한 사람의 거듭남을 이야기 하실 때, 요한복음에서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does this when speak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in John: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3:8) The wind bloweth where it listeth, and thou hearest the voice thereof, and knowest not whence it cometh, or whither it goeth; so is everyone that is born of the spirit. (John 3:8)

 

다윗의 시편들에서도 So in David: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33:6) By the word of Jehovah were the heavens made, and all the army of them by the breath of his mouth. (Ps. 33:6)

 

29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29-30) Thou gatherest their breath, they expire, and return to their dust;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29–30)

 

’을 사용하여 신앙의 생명, 사랑의 생명을 표현하는 것은 욥기서에도 나옵니다. That the “breath” [spiraculum] is used for the life of faith and of love, appears from Job: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욥32:8) He is the spirit in man, and the breath of Shaddai giveth them understanding. (Job 32:8)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욥33:4) The spirit of God hath made me, and the breath of Shaddai hath given me life. (Job 33:4)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7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속뜻)

주님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을 지으시되 그 안에 주님의 생명, 사랑과 신앙의 생명인 퍼셉션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영적 인간 중이었을 때는 겉 사람이 여전히 속 사람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나 이제 천적 인간이 되고 나서는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사랑하여 자원함으로 순종하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받은 겉 사람은 비로소 생령, 곧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https://youtu.be/11XEbAmyru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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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17

 

90. 5, 6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Verse 5. 6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들의 초목’(the shrub of the field)과 ‘밭의 채소’(the herb of the field)는 보통은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produce) 모든 걸 의미합니다. By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are meant in general all that his external man produces.

 

사람이 아직 영적 인간일 동안은 그의 겉 사람을 가리켜 ‘’이라 하지만, 그가 천적 인간이 되면, 그때는 그의 겉 사람을 가리켜 ‘지면’이라, ‘’이라 합니다. The external man is called “earth” while he remains spiritual, but “ground” and also “field” when he becomes celestial.

 

바로 뒤에 나오는 ‘안개’(mist)라 하는 ‘’는 전투가 그쳤을 때 맛보는 평화의 평온함(tranquility)입니다. Rain,” which is soon after called “mist,” is the tranquility of peace when combat ceases.

 

 

91. 그러나 이들 안에 들어있는 것은,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다, 천적 인간이 된다 하는, 이 인간의 상태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깨달을(perceive) 수 없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만큼 아주 깊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But what these things involve cannot possibly be perceived unless it is known what man’s state is while from being spiritual he is becoming celestial, for they are deeply hidden.

 

사람이 영적 인간일 동안은,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하거나 그를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거기엔 전투가 있지요. 그러나 그가 천적 인간이 되면, 그때는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 섬기기 시작합니다. 자연히 전투도 그치고, 평온함이 뒤따르지요. (cf. 87) While he is spiritual, the external man is not yet willing to yield obedience to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re is a combat;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n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 combat ceases, and tranquility ensues (see n. 87).

 

’, ‘안개’는 이 평온함을 의미하는데요, 이는 마치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수분 공급을 받아 촉촉해지는 일종의 증기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라 하는 것들이 다 이 평온함, 평화의 샘에서 나오는(produce) 것이며, 이들은 특별히 일종의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합리적 마인드와 기억들(the rational mind and of the memory [rationalia et scientifica])에 속한 것들입니다. This tranquility is signified by “rain” and “mist,” for it is like a vapor with which the external man is watered and bedewed from the internal; and it is this tranquility, the offspring of peace, which produces what are called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which, specifically, are things of the rational mind and of the memory [rationalia et scientifica] from a celestial spiritual origin.

 

 

92. 전투, 혹은 탐욕과 거짓들로 인해 쉴 수 없는 사람들(the unrest)에게나 해당하는 그런 상태가 그칠 때, 겉 사람한테 찾아오는 평화로운 평온함의 본성은 어떤 평화의 상태(a state of peace)라는 걸 접해본 사람들이라야만 알 수 있습니다. The nature of the tranquility of peace of the external man, on the cessation of combat, or of the unrest caused by cupidities and falsities, can be known only to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a state of peace.

 

이 상태는 기쁨에 대한 모든 아이디어를 초월하는 그런 건데요, 단순히 전투 종료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내적 평화로부터 시작, 겉 사람을 감동하며 뻗어나가는 그런 생명입니다. 아... 이건 정말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는데요! 신앙의 진리, 사랑의 선도 다 그 생명이 여기서 비롯되고, 그렇게 태어나는, 그런 것입니다. This state is so delightful that it surpasses every idea of delight: it is not only a cessation of combat, but is life proceeding from interior peace, and affecting the external man in such a manner as cannot be described; the truths of faith, and the goods of love, which derive their life from the delight of peace, are then born.

 

 

93. 천적 인간의 상태는 내리는 비로 리프레쉬된 상태, 평화로운 평온의 상태, 악과 거짓의 매임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상태인데요, 이 상태를 가리켜 에스겔서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thus gifted with the tranquility of peace—refreshed by the rain—and delivered from the slavery of what is evil and false,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in Ezekiel: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4:25-27, 31) I will make with them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beast to cease out of the land, and they shall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and sleep in the woods; and I will make them and the places round about my hill a blessing; and I will cause the rain to come down in his season; rains of blessing shall they be. And the tree of the field shall yield its fruit, and the earth shall yield its increase, and they shall be upon their ground in confidence, and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when I have broken the reins of their yoke, and delivered them out of the hand of those that make them to serve them; and ye my flock, the flock of my pasture, ye are a man, and I am your God. (Ezek. 34:25–27, 31)

 

그리고 이것을 호세아서에서는 ‘셋째 날’이라 하여 창세기 본문 ‘일곱째 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십니다. And that this is effected on the “third day,” which in the Word signifies the same as the “seventh,” is thus declared in Hosea: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2-3) After two days will he vivify us;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and we shall know, and shall follow on to know Jehovah: his going forth is prepared as the dawn, and he shall come unto us as the rain, as the late rain watering the earth. (Hos. 6:2–3)

 

에스겔서에서는 이 상태를 ‘들의 성장’, 즉 들 벌판 가득 자라는 풀로 비유하셨는데, 이것은 고대교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And that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growth of the field” is declared by Ezekiel, when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 (겔16:7) I have caused thee to multiply as the growth of the field, and thou hast increased and hast grown up, and hast come to excellent ornaments. (Ezek. 16:7)

 

이렇게도 비유하시고요. And it is also compared to: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사60:21) A shoot of the Lord’s planting, and a work of the hands of Jehovah God. (Isa. 60:21)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5-6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속뜻)

천적 인간의 상태는 모든 전투가 그친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마치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증기와도 같은 상태로 천국 평화, 평온한 상태입니다.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하며, 사랑으로 자원함으로 섬기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전투가 없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질서는 주님-천국-속 사람-겉 사람 순이며, 천적 인간이 바로 이 순서, 이 질서대로 자리 잡고 사는 사람입니다. 영적 인간은 속 사람, 겉 사람 간 순위 다툼이 아직 진행 중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지요. 이 순서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이래야 만이 천국 모든 복과 형통, 주님의 모든 걸 누릴 수 있기 때문이며, 이 질서로 살아가야만 그 내면이 열려 주님의 모든 것, 천국의 모든 것이 내 안에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ezkpqhIPFJ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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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17

 

89. 4절,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Verse 4.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하늘과 땅의 내력’(nativities)은 천적 인간의 형성 과정(formations)입니다.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are the formations of the celestial man.

 

※ 위 ‘내력’에 사용된 영어 nativity는 주님의 탄생을 뜻하는 단어인데 여기 사용되었습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 과정 전반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바로 천적 인간의 형성 과정이라는 것은, 다음 이어지는 모든 내용을 자세히 관찰하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5절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든지, 7절,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와 19절,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만드시는 장면들 등입니다. 이 내용은 이미 앞장에서 다 다루었는데도 말이지요. 이런 정황으로 보아, ‘아, 여기서는 또 다른 사람을 다루고 계시는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That his formation is here treated of is very evident from all the particulars which follow, as that no herb was as yet growing;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s well as that Jehovah God formed man, and afterwards, that he made every beast and bird of the heavens, notwithstanding that the formation of these had been treated of in the foregoing chapter; from all which it is manifest that another man is here treated of.

 

다음을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먼저, 주님을 가리켜 ‘여호와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영적 인간을 다룬 앞장에선 간단히 ‘하나님’이라고만 했지요. 그리고 또, 여기선 ‘’과 ‘’을 함께 언급하는데, 앞에선 ‘’만 언급되었습니다. This however is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act that now for the first time the Lord is called “Jehovah God,” whereas in the preceding passages, which treat of the spiritual man, he is called simply “God”; and, further, that now “ground” and “field” are mentioned, while in the preceding passages only “earth” is mentioned.

 

또 오늘 본문 구절인 이 4절에서는 ‘하늘’이 ‘’보다 먼저 언급되다가 나중에는 ‘’이 ‘하늘’보다 먼저 나옵니다. 그 이유는, ‘’은 겉 사람을, ‘하늘’은 속 사람을 각각 상징하며, 그리고 영적 인간의 경우, 개혁(reformation)이 ‘’, 곧 겉 사람에게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의 경우는, 지금 다루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데요, 속 사람, 곧 ‘하늘’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In this verse also “heaven” is first mentioned before “earth,” and afterwards “earth” before “heaven”; the reason of which is that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and “heaven” the internal, and in the spiritual man reformation begins from “earth,” that is, from the external man, while in the celestial man, who is here treated of, it begins from the internal man, or from “heaven.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4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속뜻)

천적 인간의 형성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은 속 사랑, 땅은 겉 사람이며, 여호와는 주님의 신성의 속 사람, 하나님은 주님의 신성의 겉 사람입니다. 영적 인간은 그 순서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이지만, 천적 인간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입니다.

 

 

※ 주님의 호칭 정리. 주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호칭은 여호와 하나님, 주님의 인성(人性)에 대한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호와, 예수는 주님의 선과, 하나님, 그리스도는 주님의 진리와 연결됩니다. 주님의 신성 중 선과 관련된 신성을 여호와, 진리와 관련된 신성을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며, 역시 주님의 인성 중 선과 관련된 인성을 예수, 진리와 관련된 인성을 그리스도라 하는 것입니다.

 

https://youtu.be/vRRT3bFt5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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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17

 

84. 2, 3절,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Verse 2, 3.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 ‘일곱째 날’인데요, 주께서 육 일간 일하셨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그의 일’(his work)이라 하며, 이때 모든 전투가 그치기 때문에, 주님을 가리켜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시니라’ 하는 것입니다.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which, as the Lord has worked during the six days, is called “his work”; and as all combat then ceases, the Lord is said to “rest from all his work.

 

이런 이유로, 이 일곱째 날은 성별(聖別, sanctify)되었고, 히브리어로는 싸바쓰(sabbath)라 하며, 그 뜻은 ‘안식’(rest)입니다. On this account the seventh day was sanctified, and called the sabbath, from a Hebrew word meaning “rest.

 

이렇게 사람(man)은 창조(create), 형성(form) 및 만들어(make)졌습니다. And thus was man created, formed, and made.

 

이 모든 것이 말씀들로부터 아주 분명합니다. These things are very evident from the words.

 

 

85.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래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일이라 하셨다는 사실은 이때까지 한 번도 밝혀진 적이 없는 아케이나(arcana, 秘義)입니다.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 and called the sabbath, 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

 

천적 인간의 본성을 접해 본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영적 인간의 경우는 약간 있었는데, 앞서 81번 글을 보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 이런 무지의 결과, 그들은 천적 인간 행세를 했습니다. 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 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 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 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 as may be seen in n. 81.

 

일곱째 날과 관련하여,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혹은 ‘안식일’인 것과 관련하여, 이것은 주님 자신, 안식일이시고,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사실로 분명합니다. As regards the seventh day, 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 “seventh day” or “sabbath,” 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 and therefore he says: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2:28)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Mark 2:28)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이 사람 자체(man himself)이시며, 안식일 자체(the sabbath itself)이시라는 것입니다. 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 and the sabbath itself.

 

천국과 지상에 있는 그분의 나라를 일컬어 그분으로 말미암은 일종의 안식일, 혹은 영원한 평화와 쉼이라고 합니다. 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 from him, a sabbath, 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 다뤄지고 있는 태고교회는 이후 이 교회를 계승한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도 더 가장 주님의 안식일이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here treated of, 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

 

주님의 모든 후속(subsequent) 및 가장 내적(inmost) 교회들 역시 일종의 안식일입니다. 모든 거듭나는 사람 역시 그가 천적이 되면 마찬가지인데요, 그것은 그의 모양이 주님을 닮기 때문입니다. 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 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 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

 

먼저 육 일간의 전투 혹은 수고가 선행합니다. 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

 

이런 것들이 유대 교회에서 육 일간의 수고와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도입된 어느 것 하나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대한 표상(representative) 아닌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 and by the seventh day, which was the sabbath; 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같은 설명이 궤(the ark, 여호와의 법궤)로도 표현되었습니다. 궤가 나아갈 때와 궤가 쉴 때로 말이지요. 궤가 광야를 이리저리 다니는 것으로는 싸움과 시험(combats and temptations)을, 그리고 궤가 쉬는 것으로는 일종의 평화(peace)의 상태를 표현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궤가 나아갈 때, 모세는 말하기를 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 and when it rested, 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 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 and therefore, when it set forward, Moses said: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민10:35-36) Rise up, Jehovah, and let thine enemies be scattered, and let them that hate thee flee before thy faces. And when it rested, he said, Return, Jehovah, unto the ten thousands of the thousands of Israel. (Num. 10:35–36)

 

여호와의 산을 떠난 궤를 일컬어서는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라 하였습니다. It is there said of the ark that it went from the Mount of Jehovah “to search out a rest for them.”(민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민10:33)

 

[3] 천적 인간의 쉼을 이사야에서는 안식일을 가지고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The rest of the celestial man is described by the sabbath in Isaiah: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58:13-14) If thou bring back thy foot from the sabbath, so that thou doest not thy desire in the day of my holiness, and callest the things of the sabbath delights to the holy of Jehovah, honorable; and shalt honor it, not doing thine own ways, nor finding thine own desire, nor speaking a word; then shalt thou be delightful to Jehovah, and I will cause thee to be borne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 and will feed thee with the heritage of Jacob. (Isa. 58:13–14)

 

이것이 천적 인간의 질(質, quality)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적 욕구(his own desire)가 아닌, 주님의 선하신 즐거움(the good pleasure of the Lord)을 따릅니다. 이것이 그의 ‘즐거움’(desire)입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 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 which is his “desire.”

 

그 결과, 그는 내적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이것이 위 말씀,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로 표현된 의미이며, 동시에 그는 겉으로도 평온과 큰 기쁨을 누리는데, 이것이 바로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의 의미입니다. 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 “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and 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 which is signified by “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

 

 

86. ‘여섯째 날’이 된(has become) 영적 인간이 이제 천적 인간이 되려고 하는(is beginning to be) 상태가 여기서 먼저 다뤄지고 있는데요, 이때가 유대 교회에서 말하는 ‘안식일 저녁’입니다. 안식일의 거룩함을 저녁부터 지키는 것으로 표현했지요. When the spiritual man, who has become the “sixth day,” is beginning to be celestial, which state is here first treated of, it is the “eve of the sabbath,”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keeping holy of the sabbath from the evening.

 

천적 인간은 이제 말씀드릴 ‘아침’입니다. The celestial man is the “morning” to be spoken of presently.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눅23:54)

 

 

87. 천적 인간을 가리켜 ‘안식일’ 또는 ‘쉼’이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천적이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Another reason why the celestial man is the “sabbath,” or “rest,” is that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다가옵니다. 이들이 있으면 악한 영들은 도저히 머무를 수가 없어 멀리 달아납니다. The evil spirits retire, and good ones approach, as well as celestial angels; and when these are present, evil spirits cannot possibly remain, but flee far away.

 

전투를 치른 사람이 이 사람 본인이 아니라 홀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안식하시니라’ 하는 것입니다. And since it was not the man himself who carried on the combat, but the Lord alone for the man, it is said that the Lord “rested.”

 

 

88.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일’이라 합니다. 주님 홀로 그를 위해 지금까지 싸워오셨고, 지금까지 그를 창조해 오셨으며, 지으시고 만들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하는 것이며, 한 번 더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는 것입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becomes celestial, he is called the “work of God,” because the Lord alone has fought for him, and has created, formed, and made him; and therefore it is here said, “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 and twice, tha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인간은 선지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으로 한 일’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사야에,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By the prophets man is repeatedly called the “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 as in Isaiah, speaking of the regenerat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5:11-12, 18, 21) Thus hath said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Seek ye signs of me, signs concerning my sons, and concerning the work of my hands command ye me.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For thus hath said Jehovah that createth the heavens, God himself that formeth the earth and maketh it; he establisheth it, he created it not a void, he formed it to be inhabited; I am Jehovah and there is no God else besides me. (Isa. 45:11–12, 18, 21)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새 창조, 혹은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new creation, or regeneration, is the work of the Lord alone.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을 다음 두 가지 경우와, 또 창세기 본 장과 앞 장에 아주 특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 구절 중,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하는 부분, 그리고 같은 이사야 다른 구절, 예를 들면,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and to “make,” are employed quite distinctively, both in the above passage—“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and in other places in the same prophet, as: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또 창세기 1장과 지금 2장,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는 부분들입니다. and also in both the preceding and this chapter of Genesis; as in the passage before us: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속뜻을 생각할 때, 이런 용법을 만나면 늘 그 표현을 눈여겨보게 되는데요, 다음 케이스들이 바로 그런 경우들입니다. 주님을 가리켜 ‘창조하시는 분’(creator), ‘빚으시는 분’(former), ‘만드시는 분’(maker)으로 표현하는 경우들이지요. In the internal sense this usage always conveys a distinct idea; and the case is the same where the Lord is called “creator,” “former,” or “maker.”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2-3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속뜻)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육 일간의 일은 주님이 일하신 날이며, 거듭남의 완성, 곧 천적 인간의 상태는 주님이 쉬시는 날, 곧 안식일입니다. 거듭난 당사자는 나 자신이지만 나를 대신하여 싸우신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쉬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성별하사 복되게 하셨습니다.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 하는 표현들은 모두 사람의 거듭남과 관련된 표현들입니다. ‘주님의 일’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입니다.

 

https://youtu.be/GbpdLMyksX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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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17

 

82. 1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Verse 1.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이 구절의 의미는, 사람이 그동안 연단을 받아 이제 ‘여섯째 날’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적인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天, heaven)은 그의 속 사람, ‘’(地, earth)는 그의 겉 사람입니다. ‘만물’(萬物, the army of them)은 사랑, 신앙, 그리고 그에 속한 지식이며, 이는 앞서 큰 광명체들과 별들로 상징된 것입니다. By these words is meant that man is now rendered so far spiritual as to have become the “sixth day”; “heaven” is his internal man, and “earth” his external; “the army of them” are love,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which were previously signified by the great luminaries and the stars.

 

속 사람을 ‘하늘’이라, 겉 사람을 ‘’이라 하는 것은, 앞서 전 장에서 이미 인용된 말씀 구절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그 말씀 중 몇을 다시 인용하면,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42:5)

 

이 구절들에 다음 이사야 말씀들을 추가하면, That the internal man is called “heaven,” and the external “earth,” is evident from the passages of the Word already cited in the preceding chapter, to which may be added the following from Isaiah: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사13:12-13) I will make a man more rare than solid gold, even a man than the precious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mite the heavens with terror,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its place. (Isa. 13:12–13)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6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사51:13, 16) Thou forgettest Jehovah thy maker,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but I will put my words in thy mouth, and I will hide thee in the shadow of my hand, that I may stretch out the heaven, and lay the foundation of the earth. (Isa. 51:13, 16)

 

이들 말씀으로부터, ‘하늘’과 ‘’이 사람(man)에 관한 서술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런 표현들이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고는 있지만, 말씀의 내면들은 다음과 같은 속성, 곧 교회에 관한 언급은 또한 그 교회의 모든 부분에 관한 언급일 수도 있는, 일단 그 자신, 교회가 아니면 그가 교회의 어떤 부분이 되는 건 절대 불가능한, 마치 자신이 주님의 성전이 아닌 자는 성전, 곧 교회와 천국으로 상징되는 그 무엇이 절대 될 수 없는, 그런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words it is evident that both “heaven” and “earth” are predicated of man; for although they refer primarily to the most ancient church, yet the interiors of the Word are of such a nature that whatever is said of the church may also be said of every individual member of it, who, unless he were a church, could not possibly be a part of the church, just as he who is not a temple of the Lord cannot be what is signified by the temple, namely, the church and heaven.

 

※ 천사들의 모임을 천국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천사 하나하나가 사실은 가장 작은 천국이기 때문이라는, 이런 원리와 같습니다. 구성원은 천국이 아닌데, 그걸 다 모으면 천국인, 그런 건 불가능하고, 넌센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태고교회에 대하여 ‘사람’(man)이라는 단수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man,” in the singular number.

 

 

83.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고 합니다. 이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 are said to be “finished,”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 for then faith and love make a one.

 

이렇게 될 때, 사랑이, 신앙 말고, 혹은 다른 말로 천적 원칙(the celestial principle)이, 영적 원칙 말고, 주요 원리(the principal)가 되기 시작하며,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When they do this, love, and not faith, or in other words the celestial principle, and not the spiritual, begins to be the principal, and this is to be a celestial man.

 

※ 즉, 무슨 말을 하고 행동을 해도 사랑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천적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1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속뜻)

거듭남의 영적 단계 마지막인 여섯째 날, 그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사랑과 신앙 및 그에 관한 모든 지식이 다 하나가 됩니다. 이때부터는 모든 언행의 기본 원리와 동기가 사랑이 됩니다. 모든 걸 그는 사랑으로 하며, 거듭남의 피날레인 천적 인간이 됩니다.

 

https://youtu.be/uRIvKS-dt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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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

 

67. 말씀 안에 들어있는 가장 깊은 아케이나, 지금까지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고, 또 내세(來世, the other life)의 본성을 알기 전까지는 알 수도 없는, (말씀의 속뜻(internal sense) 가운데 무척 많은 부분이 내세에 관한 것이거나 설명, 혹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씀의 내적 의미(internal meaning)를 아는 것이 제게 주어진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입니다. 저는 수년 간, 이 기간, 저는 영들 및 천사들과 흔쾌히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그동안 듣고 본, 그리고 지금도 듣고 있고, 보고 있는 것을 이제는 밝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As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iven me to know 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in which are contained deepest arcana that have not before come to anyone’s knowledge, nor can come unless the nature of the other life is known (for very many things of the Word’s internal sense have regard to, describe, and involve those of that life), I am permitted to disclose what I have heard and seen during some years in which it has been granted me to be in the company of spirits and angels.

 

 

68.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은 그가 살아 있어 몸 안에 있는 동안은 영들 및 천사들과 절대 말할 수 없다 할 거라는 걸, 그리고 그들은 또한 그 모든 게 다 판타지라 할 거라는 거, 또 다른 사람들은 제가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고 그러는 거라 할 거고, 또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반대들을 할 거라는 걸 말이지요.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 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 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 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

 

하지만 저는 이런 걸로 단념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동안, 그리고 지금도 직접 보고, 듣고, 감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 for I have seen, I have heard, I have felt.

 

 

69. 사람은 몸 안에 사는 동안 영들 및 천사들과 대화가 가능하도록 주님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실제로 태고 때(太古, the most ancient times)에는 그랬습니다. 영이 몸을 옷처럼 입고 있을 때, 그는 하나, 곧, 영육 간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육체와 세속의 일(corporeal and worldly things)에 자신을 깊이 잠기게 하고, 대신 그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돌아보지 않는 바람에 그만 이 길이 닫힌 것이지요.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하지만 사람이 이 육체의 일(the corporeal things)에서 물러나면 바로 그 원래의 길은 다시 열립니다. 그는 다시 영들 가운데 있게 되며, 일상 가운데 그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70. 지난 수년간 제가 듣고 본, 그리고 지금도 듣고 있고, 보고 있는 것을 이제는 밝혀도 좋다 허락하셔서 여기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이며, 그 내용은 먼저, 사람이 다시 깨어날 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즉, 사람이 몸 안의 삶(the life of the body)에서 저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어떻게 들어가는지 하는 내용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저로 하여금 사람들은 사후(死後, after death)에도 살아 있다는 걸 알게 하시려고, 생전(life in the body)에 저와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친구처럼 대화하고 지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저 하루나 한 주 정도가 아니라 무려 여러 달, 심지어 일 년 정도씩 이어지고 그랬는데요, 저는 그들과 이 세상에서처럼 그렇게 말하고 함께 어울리고 그랬습니다.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그들은 자기들도 몸 안에 사는 동안 그랬고, 정말 많은 사람들 역시, 사람은 사후 이어지는 삶 같은 건 없을 것으로 믿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랬습니다. 실제로는 사람은 사후 그들이 내세에 들기 전 거의 하루도 무슨 단절되는 게 없습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입니다.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 사후에도 이렇게나 생생하게 여전히 살아 있는 자신들을 보면서 굉장히 어리둥절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나 분명한 걸 우리는 생전에 믿지 않았었다고? 우리가 정말 그렇게나 어리석었었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71. 그런데 이런 내용들이 말씀 본문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여기저기 흩어지고, 그래서 연결이 잘 안 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제가 어떤 순서에 따라 이 창세기 각 장 앞뒤로 붙여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지금 이 소개글은 예외로 하고 말입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append them in some order, 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72. 그래서 사람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 어떻게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 하는 내용은 본 장 끝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창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10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73. 사람은 처음에는 죽은 상태였다가 영적(靈的, spiritual) 상태가 되고, 그리고 그 상태에서 이번에는 천적(天的, celestial)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이제부터 다루는 내용입니다. (1절) 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74.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이때 주님은 안식하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75. 안개로 적셔진 땅에서 나는 ‘초목’(shrub, 관목)과 ‘채소’(herb)는 이 천적 인간의 지식(knowledge)과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을 말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76.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는 그의 생명(life)을 말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77. 그후, ‘동방 에덴동산’(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은 천적 인간의 지성(intelligence)을,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는 진리에 속한 퍼셉션(perceptions, 知覺)을, ‘먹기에 좋은 나무’(the trees good for food)는 선에 속한 퍼셉션을 각각 말합니다. ‘생명 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는 신앙을 각각 의미합니다. (8-9절) 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 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 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verses 8–9).

 

 

78. ‘동산을 적시는 강’(the river in the garden)은 지혜(wisdom)를 의미합니다. Wisdom is meant by the river in the garden.

 

네 개의 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과 진리이며, 두 번째는 모든 선과 진리, 혹은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입니다. From thence were four rivers, the first of which is good and truth; the second i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of good and truth, or of love and faith.

 

이 둘은 속 사람에게 속합니다. These are of the internal man.

 

세 번째는 이성(reason), 네 번째는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인데, 이 둘은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The third is reason, and the fourth is memory-knowledge [scientia],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모든 것이 지혜로부터 나오며, 이 지혜는 주님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나옵니다. (10-14절) All are from wisdom, and this is from love and faith in the Lord (verses 10–14).

 

 

79. 천적 인간은 그런 일종의 동산입니다. 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

 

이 동산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천적 인간이 동산 안 모든 것을 즐기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15절) 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 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 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verse 15).

 

 

80.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가지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러나 신앙의 신비에 대한 탐구를 자기 자신과 세상, 혹은 감각(sense)과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런 짓은 그의 천적 본성의 죽음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16-17절)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속뜻

THE INTERNAL SENSE

 

 

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관한 장입니다. 앞 장에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었지요. 영적 인간은 일종의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dead man)으로부터 빚어진 사람입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 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 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그런데 오늘날은 천적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영적 인간에 대해서나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거의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먼저 저로 하여금 그 각각의 본질을 간략히 서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차이점들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 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 or a dead man, 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 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

 

그래서 먼저,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한 설명입니다. 죽은 상태의 사람은 진리와 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대신 오직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만 잘 아는, 그리고 그런 걸 아주 좋아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First, then, 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 and this he adores.

 

다음은 영적 인간입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 천적 진리와 선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일종의 원리(principle)로부터만 알아요. 그의 행위의 기반은 이런 신앙 원리 같은 거거든요. 사랑이 아니고 말입니다. 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 and not so much from love.

 

끝으로, 천적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영적, 천적 진리와 선을 믿고 지각하는 사람입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행위가 뒤따르는 신앙 말고 무슨 다른 신앙 같은 것은 모르는 그런 사람입니다. 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 from which also he acts.

 

※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을 각각 머리 신앙, 가슴 신앙으로 비유해도 좋겠습니다.

 

[2] 두 번째는,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직 육체적, 세상적 목표만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도, 주님이 누구신지도 모릅니다. 혹시 알게 되어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Second: 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 or what the Lord is; or should he know, he does not believe.

 

영적 인간의 경우는 영생입니다. 그 결과는 곧 주님이시지요.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 and thereby the Lord.

 

천적 인간은 바로 처음부터 주님입니다. 그 결과가 주님의 나라와 영생입니다.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 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세 번째, 죽은 상태의 사람들은 삶 가운데 전투가 있을 때, 즉 선악 간 싸움이나 진리, 거짓 간 싸움으로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면 거진 다 매번 집니다. 그렇지 않을 때, 즉 전투가 없을 때, 그때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며, 그래서 그는 그들의 종이 됩니다. Third: 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 and when not in combat, 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 and he is a slave.

 

그의 묶임은 겉으로 드러나는데, 예를 들면, 법, 목숨, 부, 소득, 명성 등 소위 안전한 삶을 위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그런 형태로 나타납니다. His bonds are external, such as the fear of the law, of the loss of life, of wealth, of gain, 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영적 인간은 전투가 있어도 늘 승리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있어 묶임은 내적(內的, internal) 묶임이며, 양심(conscience)의 묶임이라 합니다.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 but is always victorious; 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 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천적 인간에게는 전투가 없습니다. 악과 거짓의 무슨 난폭한 공격이 있어도 그는 그것들을 경멸, 무시해 버리며, 그래서 그를 가리켜 정복자(conqueror), 이긴자라 합니다.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 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 he despises them, 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그는 정말 그 무엇도 그를 속박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유하며,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 but is free.

 

그에게 있어 굳이 속박이라 하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지각능력이지 싶습니다. His bonds, which are not apparent, 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https://youtu.be/ipL2m1CON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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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

 

64. 다음은 말씀의 속뜻, 겉 글자의 뜻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가장 놀라운, 더할나위 없는 생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비록 겉으로는 아무것도 안 나타나지만, 그러나 이 아케이나(arcana, 秘義, 영적, 천적 의미 전반에 관한 통칭)는 사실은 그 속에 담긴 것이 너무나 엄청나 이 정도의 볼륨들 가지고는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여기서는 아주 조금만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것만 가지고도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게 거듭남이며,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질 겁니다.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그들은 글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심지어 단어 하나가 가지는 가장 가까운 의미 조차 전혀 모릅니다. 나라, 도시, 강과 인물 등, 말씀 내 역사, 예언 파트에 아주 자주 나오는 이런 것들 역시 더더욱 모릅니다.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그들은 오직 단어와 이름이 상징하는 것에 관한 어떤 아이디어만 갖고 있을 뿐입니다.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그래서 낙원에 있는 아담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를 지각합니다. 물론,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가 가졌던 주님 신앙을 지각하는 것이지요.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노아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과 함께 살아남아 아브람의 때까지 계속되었던 교회를 지각합니다.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아브라함 하면 천사들은 결코 아브라함을 개인으로가 아닌, 그가 표현한 어떤 구원 신앙을 지각하는... 네, 계속해서 이런 식입니다.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천사들은 이렇게 단어와 이름하고는 완전 별개인 영적, 천적인 것을 지각합니다.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65. 제가 말씀(the Word)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천사들이 천국 뜰 첫 번째 입구로 옮겨져 거기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

 

그들은 말하길, 자기들은 제가 보고 있는 말씀 안 무슨 단어는 고사하고 글자 하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가장 근접한 속뜻이 뭘 상징하는지는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런 일련의 순서로 자기들을 깊이 감동, 감명케 한다고, 그것은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66. 일반적으로 말씀에는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敎會) 스타일입니다. 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그들의 표현 모드는 다음 같은 것이었는데요, 그들은 어떤 지상에 속한(terrestrial) 것이나 세속적인(worldly) 것을 언급할 때, 그것이 표현하는 영적, 천적인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

 

그래서 그들은 그런 것들을 표현할 때, 더욱 생생한 표현이 되게 하기 위해 어떤 대표성을 띤(representatives) 걸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또한 무슨 일종의 역사 시리즈(historical series)로도 만들었습니다. 이런 식의 표현 모드로 그들은 정말 최고 수준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예언이 바로 이런 스타일입니다. 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 위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은 사실 많이 빗나간 번역입니다. 원문을 보면 너무나 다르지요? 태고교회, 고대교회 같은 이런 배경을 전혀 모르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런 표상 표현들(表象, representatives)을 시편에서는,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Dark sayings of old)이라고 했습니다. Such representatives are called in David, “Dark sayings of old” (Ps. 78:2–4).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78:2-4)

 

창조, 에덴동산 등 아브람의 때까지 내려오는 이런 구체적인 내용들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얻었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두 번째 스타일은 역사적 기술이며, 아브람의 때부터 이어진 모세의 책들에서, 그리고 여호수아, 사사 시대, 사무엘, 열왕들의 책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이들 책에서는 역사적 사실들이 글자의 뜻 그대로입니다. 즉, 그 내용 그대로인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속뜻으로는 아주 다른 일들이 그 안에 들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음이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순서대로 보게 됩니다. 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

 

세 번째 스타일은 예언 스타일인데, 이것은 태고교회 시절 아주 높은 존경을 받았던 것에서 나왔습니다. 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

 

이 스타일은 그러나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이어지거나 역사적 형태로 남지 않고 깨어져 속뜻을 제외하고는 이제는 거의 이해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대신 이 속뜻에는 가장 깊은 아케이나(arcana, 秘義)가 들어 있는데, 그 순서가 정말 아름다운 순서, 곧 사람의 겉과 속, 교회의 수많은 상태, 천국 그 자체, 그리고 주님을 향한 가장 내적 의미로까지 연결되는 그런 순서입니다. 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

 

네 번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은 예언 스타일과 일상의 스피치 스타일 간 중간 정도 스타일입니다. 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

 

이 시편 스타일에서 왕으로서의 다윗은 사실은, 속뜻으로는 주님을 나타냅니다. 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 이렇게 해서 창세기 1장을 마칩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진행됩니다. 즉, 본문 주석 앞뒤로 어떤 아케이나들이 곁들여져 성경을 읽는 우리의 이해를 깊게, 아주 깊고 넓게 열어 줄 것입니다.

 

https://youtu.be/ZE-XX1xB0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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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

 

60. 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Verse 31.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앞의 상태들에 대해서는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하는 반면, 이 상태를 가리켜서는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 합니다. 그 이유는,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가 되어, 그래서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 드디어 일종의 결혼의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61. 신앙에 속한 지식과 관련된 모든 것을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과 우리의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사람의 이해(understanding)에, 후자는 사람의 의지(will)에 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62. 사람의 거듭남의 때와 상태는 일반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여섯으로 나뉘며, 이를 가리켜 사람 창조의 날들이라 합니다. 사람의 처음 상태, 그러니까 거듭나기 전 상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상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인데, 그 상태에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 먼저 뭔가가 되고,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여섯째 날까지 이루어 가다가 여섯째 날, 비로소 하나님의 어떤 형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63. 그를 위해 끊임없이 악과 거짓을 대항하여 싸우시는 동안, 주님은 이 영적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서 확실하게 하십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

 

전투의 때는 주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을 가리켜 선지서에서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빚으심이라 하고 있습니다. 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사랑이 원리가 되어 움직일 때, 이때 전투가 그치는데요, 이때까지는 주님은 잠시도 쉬지 않으십니다.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

 

주님이 해 오신 일이 아주 잘 되어 신앙과 사랑 간 결합이 일어날 때, 이때가 바로 ‘심히 좋았더라’입니다. 이때 주님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의 모양(likeness)처럼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 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

 

※ 사랑과 신앙이 하나 되어, 즉, 무엇을 해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하는 모습이 마치 한 분 주님 안에서 세 위가 결혼한 상태와 같아 ‘하나님의 모양’ 같다는 것입니다.

 

이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은 떠나고, 선한 영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천국, 혹은 천적인 낙원(the celestial paradise)으로 인도됩니다. 이곳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64. 다음은 말씀의 속뜻, 겉 글자의 뜻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가장 놀라운, 더할나위 없는 생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비록 겉으로는 아무것도 안 나타나지만, 그러나 이 아케이나(arcana, 秘義, 영적, 천적 의미 전반에 관한 통칭)는 사실은 그 속에 담긴 것이 너무나 엄청나 이 정도의 볼륨들 가지고는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여기서는 아주 조금만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것만 가지고도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게 거듭남이며,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질 겁니다.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그들은 글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심지어 단어 하나가 가지는 가장 가까운 의미 조차 전혀 모릅니다. 나라, 도시, 강과 인물 등, 말씀 내 역사, 예언 파트에 아주 자주 나오는 이런 것들 역시 더더욱 모릅니다.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그들은 오직 단어와 이름이 상징하는 것에 관한 어떤 아이디어만 갖고 있을 뿐입니다.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그래서 낙원에 있는 아담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를 지각합니다. 물론,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가 가졌던 주님 신앙을 지각하는 것이지요.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노아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과 함께 살아남아 아브람의 때까지 계속되었던 교회를 지각합니다.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아브라함 하면 천사들은 결코 아브라함을 개인으로가 아닌, 그가 표현한 어떤 구원 신앙을 지각하는... 네, 계속해서 이런 식입니다.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천사들은 이렇게 단어와 이름하고는 완전 별개인 영적, 천적인 것을 지각합니다.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65. 제가 말씀(the Word)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천사들이 천국 뜰 첫 번째 입구로 옮겨져 거기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

 

그들은 말하길, 자기들은 제가 보고 있는 말씀 안 무슨 단어는 고사하고 글자 하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가장 근접한 속뜻이 뭘 상징하는지는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런 일련의 순서로 자기들을 깊이 감동, 감명케 한다고, 그것은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31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속뜻)

거듭남의 마지막 단계에서 드디어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결혼한 상태에 이르자 주님은 심히 좋아하십니다. 이때 드디어 악한 영은 떠나가고 이 사람은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아멘, 할렐루야!

 

https://youtu.be/0oa9xcZnM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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