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22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Verse 22.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자기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을 가진 모든 피조물은 엄청나게 결실하며(fructify), 번성합니다(multiply). 몸 안에 사는 동안뿐 아니라 내세에서조차 어리둥절할 정도로 그렇습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말씀에서, ‘생육하다’(生育, to be fruitful)라는 건 사랑에 속한 걸, 그리고 ‘번성하다’(繁盛, to multiply)라는 건 신앙에 속한 걸 각각 말하는 겁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 안에는 ‘씨’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말미암아 놀랍게 배가합니다.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 들의 풀과 나무, 강과 바다의 물고기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꽃 한 송이, 가령 해바라기는 그 넓은 둥그런 꽃 한 판에 얼마나 많은 씨가 있으며, 열매, 가령, 옥수수 한 자루엔 얼마나 많은 낱알갱이가, 벼나 보리, 수수 같은 곡식들 한 줄기 줄기엔 또 얼마나 많은 낱알들이 맺히는지... 나무 한 그루도 보면, 가령 은행, 호도, 대추, 밤, 감, 사과 등등... 얼마나 많은 열매, 과일이 열리는지... 물고기는 또 어떤가요? 명란젓 만드는 명태 한 마리가 낳는 알은, 대구는, 오징어는? 등등... 또한 얼마나 그렇게 어마어마한지... 끝이 없습니다. 참으로 어리둥절할 정도로 아주 심하게 번성합니다 ^^
※ 인간과 달리 동, 식물의 경우, 주님의 이 정하신 복, 명령하신 축복이 예외 없이 그대로 시행되는 이유는, 동, 식물의 경우는 본능만 있을 뿐 스스로 무엇이 없어 주님이 정하신 질서를 거역하거나 뒤집거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정하신 쓰임새 그대로 존재하며, 존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 판단하고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최선인 줄을 알면서도 버젓이 악을 행하고, 창조주의 질서를 뒤집어 훼방을 놓고 엇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변수가 많으며, 오히려 주님의 복 받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인간의 삶 가운데 화와 불행은 그 스스로가 자초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오늘 본문 동, 식물의 이런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 가운데 살기 원한다면... 마찬가지로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과 능력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흘러 들어오게 하면 됩니다.
※ 스베덴보리(1688-1772)를 통해 주님 알리신 이 아케이나가 250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미미하고 세상에서 천대를 받고 변죽만 울리고 있습니다. 홍수 후 고대교회 초창기에도, 아브라함 이후 유대교회 초창기에도, 주님 성육신 이후 기독교회 초창기에도 늘 시작은 아주 미미했습니다만... 그러나 결국은 저마다 오랜 세월 대하처럼 흐르는 시대별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이 주님의 새 교회도 그럴 것입니다. 각 시대 초기 교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복’(福, blessing)은 풍성한 결실과 번성을 상징합니다. 이런 ‘생육’과 ‘번성’이 모두 ‘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 이 원리가 동, 식물에게만 적용되겠습니까? 우리 사람도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으면, 마찬가지로 그 하는 모든 일에 형통, 크게 번성, 번창할 줄 믿습니다. 요셉이 주님으로 말미암게 되자 그 안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지혜가 흘러 들어가 바로의 애굽 전역은 물론 주변국들까지 구원하는 큰일이 일어남을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 복은 주님이 주시고, 안 주시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 중심적으로 볼 때, 태양(해)의 질량은 지구의 약 33만 배, 즉 지구는 그만큼 정말 보잘것없는 행성입니다. 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지구 하나를 비추고 덥히기 위해 그 큰 태양을 태우는 건 정말 큰 낭비가 아닐 수 없지요.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그것도 언제나 늘 변함없이 그렇게 하십니다. 해는 늘 이 지구를 비추지만 지구의 자전으로 어디는 낮일 때, 어디는 밤이 되고, 또 지구의 공전으로, 어디는 여름일 때, 어디는 겨울이 됩니다.
즉, 주님의 빛과 복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주님 책임이 아니라 우리 책임이라는 겁니다. 지구가 해를 바라볼 땐 낮이요, 봄, 여름이듯,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땐 주님의 빛과 복이 내 삶에 흘러 들어오는 것이며, 그게 바로 복 받는 삶인 것입니다.
23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Verse 23.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 지난번 다룬 것처럼 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다릅니다. 즉, 첫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과 두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이 다르며, 두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과 세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이 다릅니다. 그런 식으로 나머지도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거듭남 풀코스 가운데서 사람은 비록 주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살피시며 동행하시지만 그렇다고 늘 하하호호한 상태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바로 사람의 연약함 때문인데요, 사람은 주님을 바라보다가도 또 어느새 자아를 바라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의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한데요, 심지어 천국의 천사들조차 이런 상태 변화를 겪는다 하니 우리는 자신의 이런 연약함의 오르락내리락을 결코 이상하게, 또는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분명한 건, 천사들의 증언처럼, 오히려 이런 굴곡을 통해 더욱 예리해져 가며, 더욱 주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에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이런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을 통해, 우리는 더욱 성장, 성숙해져 가며, 그래서 어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보다 오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만큼, 그리고 오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보다 내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만큼 그만큼 우리는 더 성장, 성숙해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2-23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속뜻)
주님은 마치 해가 잘 보이지도 않는 지구를 위해 늘 모든 정성을 다하듯 지으신 땅 위 모든 피조물을 위해, 즉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속 사람, 겉 사람을 위해 한결같으십니다. 주님의 질서 아래 있는 모든 동, 식물이 자기들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생육하고 번성하듯, 속 사람, 겉 사람 안에 거듭나는데 필요한 모든 지식과 이해, 이성과 합리, 지성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사람은 여전히 또 자아를 향해 눈을 돌림으로 저녁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아 밤은 없습니다. 곧 다시 새벽이 오며, 아침이 될 것입니다. 이는 거듭남의 완성, 곧 안식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그러나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우리는 더 성장하고 성숙해져 갈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우리가 우리를 포기할 필요도, 그래서도 안 됩니다. 힘을 다해 공부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사고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 지식에 힘쓰고, 그걸 선용(善用, 쓰임새, use), 천적 지혜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 주제는 ‘교회에 속했던 적이 없는데도 천국에 있는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인데요, 오늘 이야기를 끝으로, 이런 일대일 카톡 형태의 나눔 대신 제 개인 블로그(https://bygrace.kr/)를 통한 나눔 형태로 전환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1. 이렇게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데 일방적으로 보내는 건 ‘모든 건 자원(自願)함으로!’라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에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평소 늘 여겼기 때문이며,
2. 그래서 일종의 신앙, 사랑을 빙자한 폭력이요, 자칫 스토킹일 수도 있고,
3. 솔직히 말씀드리면, 보내고 나서도 매번 좀 마음고생 하는 것에 이젠 지쳤기 때문입니다.
4. 부연하여 하나 더 말씀드리면, 어쩌면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 같은데요, 이 이야기 공유를 정례화하다 보니 정작 제가 소명으로 받은 번역의 일에 전념할 수가 없게 되어 가고... 그래서 고민, 이건 아니다 판단,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동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오신 분들 계시면, 그분들껜 정말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글을 안 쓰겠다는 게 아니고, 단지 지금까지 일일이 보내드렸던 것을 대신, 앞으로는 제 개인 블로그에 올려 놓겠습니다 하는 것이니, 앞으로도 생각나실 땐 언제든 방문하여 보시면 되겠습니다.
또한 그동안 정말 원치 않으셨는데 차마 말씀은 못 하시고 꾹꾹 참으셨던 분들께는 정말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저로선 ‘이 사실은 모두가 알아야 해!’ 하며,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가 받은 모든 걸 나누고자 하였어도 그것이 상대방에겐 신앙을 빙자한, 사랑을 빙자한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사42:3)시는 주님을, 그리고 탤런트 김혜자 씨의 책 제목,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를 많이 생각한 며칠이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제 36장을 주로 레퍼런스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 특히 개신교인들은 거의 대부분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살아생전, 예수를 안 믿으면, 죽은 후 바로 지옥 가는데 아... 이걸 어째? 주님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하셨으니 내가 다소 좀 무례하더라도, 욕을 먹더라도 어떻게든 교회를 다니게, 예수를 믿게 해야겠다. 그것이 참된 도리요, 효도고, 우정이요, 사랑이다!’
꼭 이대로는 아니어도 거의 많은 전도와 선교의 동기와 시도가 이런 비슷한 아이디어에서 연유하지 싶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27년간 수시로 천국을, 영계를 왕래하면서 그는 거기서 정말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천국에 와 있음을 보았으며, 또 그들과 교류하였다는 사실인데, 그러면, 이는 어찜이며, 이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 행하는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눅13:29-30)
하신 것을 보면, 분명 살아생전 기독교 개신교인이 되어 예수영접기도를 해야만 천국 가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바람직한, 그 사람의 내면이, 속 사람이 그 기도를 받쳐주는 한, 가장 좋은 경우이겠지만 말입니다.
비기독교인으로서 천국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은 살아생전 선한 삶을 살았으며, 이웃을 사랑했고, 비록 그땐 몰라 주님 아닌 자기들의 무슨 우상을 경배하였지만, 그 경배는 과연 제대로 된 경배였으며, 기독교인들의 경배보다 훨씬 더 거룩하였고, 그들의 영의 상태가 신앙의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것을 내적 애정으로 흡수할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사랑에서 우러난 자비가 있었고, 그들의 무지에는 이노센스(innocence, 천진난만, 순진무구)가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모든 것을 즉시 기쁨으로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책 36장 본문에서 메인 아이디어를 얻어 최대한 간략하게, 그리고 요약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
1. 천국은 신성(神性, the Divine)으로 충만한 나라다.
2. 주님의 신성은 사랑의 선(善, the Divine good)과 신앙의 진리(眞理, the Divine truth)다.
3. 진리(교리)는 선을 담는 그릇(recipient)이다.
4. 중요한 건, 그릇이 아니라 거기 담기는 내용물이다.
5. 단지 기독교의 그릇, 교리가 권장되는 이유는, 기독교에는 주님과 직접 결합할 수 있는 말씀(the Word)이 있기 때문이며, 그 말씀 아래 살아생전, 이미 밝고 환한 빛 가운데 천국 생활에 꼭 필요한 선으로 명료하게 준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이에 비해 타 종교는 흐린 초롱불이며, 초라한 그릇들이어서 어쩔 수 없다면 몰라도 가능하다면 이 밝은 빛 아래서, 이 좋은 그릇 안에서 신앙 생활하자 권하는 게 전도요, 선교다.
7. 주님의 마음, 주님의 시야는 온 세상이다.
※ 참고로, 전 세계 현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략적으로, 기독교 25억, 이슬람교 18억, 힌두교 11억, 불교 5억, 중국 전통 신앙 3억 9천 4백만, 부족 신앙 3억, 아프리카 전통 1억, 시크교 2천 3백만, 스피리티즘 1천 5백만, 유대교 1천 5백만 등, 이 외에도 계속되며,
여기서 기독교만 보더라도
가톨릭 53%, 개신교 40% (이중 주류 교단 17%, 독립교회, 초교파 19%), 성공회 4%, 정교회 11%, 기타 1.3% 등...
이 자료는 위키피디아 현재 자료에서 참조했습니다.
8. 비기독교인들, 생전에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들, 말씀을 들어본 적도, 접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은 그럼 어찌 되는가?
그들의 구원이 단순히 예수를 안 믿었다는 걸로,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았다는 걸로 결정된다면... 그건 너무 불공정하지 않을까? 믿음이라는 거, 신앙이라는 거는 단지 그릇, 교리의 문제일 뿐인데, 그 그릇의 문제 때문에 천국을 못 간다면, 주님이 그런 신이시라면, 그건 너무 불공정하지 않을까? 만인에게 공정한,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보다 시스템적인 구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누구라도 ‘선’으로 준비되었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시스템! 왜? 천국은 ‘선’의 나라이므로...
9. 생전에 주님을 몰랐지만 자기 종교의 교리라는 그릇 안에서 ‘선’한 삶을 살며, ‘선’으로 준비된 자들은 천국 오리엔테이션 때, 천사들을 통해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한 정성을 다한 안내를 받고는,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다! 그것도 아주 흔쾌히, 아주아주 기뻐하며, 감사하며...
이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가 거기서 이루어지며 완성된다!
10. 주님은 심지어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영원히 사랑하신다. 그래서 지옥의 기운이 전체 피조 세계의 균형을 흔들 때, 그냥 쉽게 바로 지옥에 내려가 직접 교통정리를 하실 수 있는 분이 불편(?)을 감수하시고, 인성을 입으시고 지옥을 방문하신 것! 왜? 그래야 지옥이 소멸되지 않으니까...
주님은 천국보다 지옥보다 크신 분! 천국이든 지옥이든, 또 이 세상이든 주님이 여호와의 신성 그 자체로 만일 이 피조 세계에 훅 들어오시면, 주님의 방문을 받은 그 세계는 그냥 바로 소멸됨!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삼층천 천사들조차 사실은 주님이 얇은 막을 입히셔서 소멸되지 않게 보호하신다는 사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신데, 하물며 전 세계 67%에 육박하는 비기독교인들, 그리고 기독교 안에서도 6, 70%에 육박하는 비개신교인들을 외면하실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은 개신교인들만의 하나님이실까?
...
네, 이상으로 저 36장의 내용을 제 나름대로 좀 풀어보았습니다. 좀 더 생생하고 실제 영계 체험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저 책 36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3년 전, 처음 저 내용을 접하고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으며, 몇 번이고 읽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얼마나 편협한 기독교 개신교 침례교인이었는지 말입니다!
저는 지금은 장로교 통합 측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태생부터 밝은 빛 아래 말씀으로 양육 받을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셨던 주님께 무한감사를 드립니다. 요즘 흔한 말로는 금수저도 이런 금수저가 없지요!
저 역시 그러나 그동안 이런 주님의 은혜를, 다른 입장, 다른 그릇이라는 환경 가운데 태어나 그런 신앙, 그런 종교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정죄하고 이단이다, 삼단이다 하는 일에 힘썼던 지난날을 고백합니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던 신앙적 철부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 천국이 어떤 곳이며, 주님은 어떤 분이시고, ‘말씀’이란 오직 주님이 하신 말씀이라야만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말씀’(the Word)임을 시인, 고백하게 된 지금은 오직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에 힘쓰며,
※ ‘말씀’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사도들, 특히 현 기독교 교리의 상당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바울의 편지에서 자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바울을 비롯, 신약성경 사도들의 서신서들, 그리고 구약성경의 여러 글들, 가령, 룻기, 역대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잠언, 전도서 등... 은 주님의 말씀을 환히 비추어 주는 조명등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이 조명등들이 비추는 주님을 바라보아야지 이 조명등들을 보면서 거기서 교리를 추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처럼, 곧 주님은 현 좌파를 비롯, 우파나 중도 안에서도 여전히 불의한 자들이 있지만 변함없이 햇볕과 비를 공평하게 내리시는 주님처럼 선한 삶, 사랑의 실천, 변함없으시고 한결같으신 주님 앞에 나의 할 도리 다 하는 데에만 집중하고자 합니다.
체어리티의 삶, 주님 사랑으로 이웃 사랑하기에 여념이 없으신 분들을 보면, 그분들은 이단, 삼단 어쩌고 하실 겨를도 없으시며, 아무리 자기가 듣기에 많이 낯설고 좀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천사들처럼 그 속 사람, 곧 상대방의 내면의 선만 보십니다. 그릇이 아닌, 그 안에 담긴 내용에만 주목하시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천국은 내면의 나라, 내적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에, 주님과 천사들은 사람의 내면, 속 사람, 영의 참모습만 보십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42. 21절,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Verse 21.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made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물고기들’은 앞서도 말했듯,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으로 움직이고, 그래서 살아있는 상태가 된 기억-지식들을 상징합니다. “Fishes,” 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
※ 무엇이든 주님으로 말미암으면 ‘살아있는’(alive), ‘움직이는’(animate) 상태이지만, 자신으로 말미암으면 ‘죽은’(dead), ‘못 움직이는’(inanimate) 상태이기 때문이며, 지식들이 이런 상태가 된다는 것은, 비록 세상, 세속 지식이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주님을 향해, 주님을 위해 쓰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식, 특히 세상 지식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다만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선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큰 바다짐승들’(whales, 고래, 또는 고래와 같은 거대한 수중생물들)은 기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상징하는데, 세부 원리들이 이 원리들을 향하기도, 또 들어오기도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주님 지으신 이 피조 세계에서는 어떤 지식이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은 채, 무슨 낙동강 오리알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존재하고 또 존속할 수 있으려면 다 자기의 근원 되는 그런 더 큰 원리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Whales” 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
‘고래들’, ‘큰 바다짐승들’이 바로 그런 겁니다. 이들이 선지서, 예언서에서 가끔 언급되는 이유는, 이들이 바로 그 본문에서 다른 기억-지식들의 무슨 근원적인 역할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Whales,” or “great fishes,” 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
예를 들면, 애굽 왕 바로를 가리켜 ‘큰 악어’라 할 때, 그것은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즉 일반적으로는 지식 [scientia]을 가리켜 ‘애굽의 바로 왕이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 “great whale.”
에스겔에서는 As in Ezekiel: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겔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2] 또 다른 곳에서도 And in another place: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겔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는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고자 무척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들인 겁니다, 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는 것은 진리의 일반적인 원리들 조차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By “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 진리의 일반적인 원리는, 모든 세부, 또는 하부 진리는 상부 진리에서 오며, 상부 진리들은 단 하나의 근원 되는 진리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서는 So in Jeremiah: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이 말씀의 의미는 그가 신앙의 지식들을 삼켰다는 것입니다. 위 말씀에서는 ‘좋은 음식’으로 표현되었는데요, 이걸 마치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듯 그렇게 삼켰다는 것입니다. ‘큰 뱀’(a whale)은 신앙 관련 지식들의 일반적 원리들을 단지 기억-지식들로만 소유하고, 또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 “delicacies,” as the whale did Jonah; a “whale” 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 지식 중에서도 신앙에 관한 지식은 아주 값비싼 지식이며, 그중에서도 일반적 지식, 가령,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와 같은 말씀 지식은 가히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너무나도 귀한 생명의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걸 그저 지식으로만, 머리로만 알고 가볍게,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 도무지 무슨 가슴 신앙으로 감동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위 예레미야 본문에서는 ‘큰 뱀’이라 한 것입니다.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1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속뜻)
주님은 사람의 겉과 속, 겉 사람과 속 사람 안에 모든 기억-지식과 합리, 지성을 가득하게 하시되 근본원리에서 특별원리로, 일반원리에서 세부원리로 아주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질서대로 쌓이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선입니다.
※ 세상 지식을 학습, 습득하면서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또 그 지식들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천국 지성에 이르는 중에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늘 시인하고,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고 싶으시면 그냥 간단히 허락만 하시면 될 것 같은데, 왜 주님은 이렇게 속 사람, 겉 사람, 내면, 외면, 기억-지식, 합리와 이성, 지성 등 복잡한 일을 또 치밀하게 조직적으로 하실까요?
그것은 천국은 내면의 나라, 내적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여도, 속으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설령 주님의 허락이 있다 해도 사람은 천국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방열복을 안 입고 용광로 작업을 하는 것과 같아 천국에 들어갔는데도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는 상태를 맛보게 되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은 사전에 이렇게 아주 단단히 준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39. 2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Verse 20.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큰 광명체들이 속 사람 안에 자리를 잡고 불이 켜지면, 겉 사람은 그들로부터 빛을 받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처음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 속 사람 안 두 큰 광명체는 사랑과 신앙입니다. 이렇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준비가 끝난 사람이라야 생명이 시작되었다 말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 되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 알고 살아왔다면, 또 무슨 진리를 말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다면, 그는 그동안 ‘살아온’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그는 ‘죽은’ 상태이며, 그의 안에는 악과 거짓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그게 무엇이든 사실은 모두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그 자체로 선인 그런 선을 사람이 자신으로 말미암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 오직 주님만이 선하시며, 주님만이 선의 근원이십니다.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반사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주님의 선을 반사만, 전달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선을 마음먹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사실은 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선을 행한다는 것은 도저히,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 가르침을 보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 그만큼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부터 정말 철저히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은 그 유일하신 참 근원 되시는 분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올 수 없습니다. 다른 데서 하신 주님 말씀입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이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를 거듭나게 하셔서 생명을 얻게 하실 때, 주님은 먼저 사람이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때는 사람이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생각할 수도, 무슨 다른 방법으로 인도함을 받아 믿을 수도, ‘아,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말미암는구나!’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 김혜자 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 이름이 생각납니다. 주님은 비록 그것이 옳고 정당하다 하더라도 만일 우리가 그 지적, 그 비판을 힘들어하며, 아파하겠다 여겨지시면, 대신 빙 돌아가며 기다리는 편을 택하십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자원함으로 주님 편으로 돌아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간에 그저 수수방관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불꽃 같은 두 눈으로 늘 우리를 붙드시며, 전능하신 섭리로 영원히 우리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그의 선과 진리들은 ‘풀’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될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은 ‘못 움직이는’(inanimate), 즉 생물은 생물인데 움직이지 못하는 생물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은 사랑과 신앙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말하는 모든 진리를 행하시는 분은 사실은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는 이제는 먼저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 그 다음 ‘땅 위를 나는 새들’, 끝으로 ‘짐승들’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움직이는’(animate) 것들이며, 그래서 언급하기를 ‘생물’이라 하는 것입니다.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생물’은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뜻합니다. ‘새들’은 보통은 합리적(rational)이고 지성적인(intellectual) 것들을 뜻하는데, 이 중 후자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수중 생물들’이나 ‘물고기들’이 기억-지식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사50:2-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 에스겔서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새 성전, 혹은 일반적으로는 어떤 새 교회 및 그 교회에 속한 사람이나 어떤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시는데, 누구든지 거듭난 사람은 다 주님의 일종의 성전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겔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어부들’은 자연적인(natural)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 주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4:19)
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
[3] ‘새’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상징한다는 것은 예언서들, 가령,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사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예레미야에서는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서에도 In Ezekiel: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17:22-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호세아서에서는 어떤 새 교회나 거듭난 사람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 ‘들짐승’은 정말 들짐승을, ‘새’는 그냥 새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누가 보아도 분명한 것은, 주님은 이들과 ‘언약을 맺겠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41. 사람에게나 적절한 것들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게 얼핏 보기에 무슨 메인인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저 딱딱한 무슨 뼈나 까만 덩어리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들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 천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만일 눈에 보이게 나타날 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
믿기 어렵겠지만, 그러나 정말 사실입니다. 천사 스피릿을 가진 모든 표현 하나, 모든 아이디어 하나, 그리고 모든 생각의 조각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살아 있으며, 지극히 작은 조각들조차 그 안에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애정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 사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그 모든 언행에서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며, 빛처럼 뿜어져 나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목격하며, 생명력을 경험합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 그것들 안에 주님을 향한 신앙이 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여기서 ‘생물’(living soul)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생물들은 또한 일종의 몸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것이 여기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 ‘기는 것’이 가리키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들 진리들은 사람에게는 아직 너무 심오한 비밀들이어서, 여기서는 단지 ‘생물’, ‘스스로 움직이는 것’ 정도로만 표현되고, 또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 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 moves itself” or “creeps.” 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 soul,”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re treated of.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0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속뜻)
우리는 비록 겉 사람의 일일지라도 열심히 기억-지식을 습득하여 그것들로 주님을 향한 신앙의 징검다리들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빛을 구하여 주님 주신 모든 합리와 지성, 이성과 지혜로 우리의 속 사람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 우리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준비되며,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지를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은 기억-지식으로, 속 사람은 합리와 지성으로 채워지며, 번성,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생물’, 곧 주님을 향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어야 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지식, 합리, 지성은 참 지식, 참 합리, 참 지성이 아니며, 거기엔 생명이 없어 사실은 ‘죽은’ 것입니다.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모든 공과 영광을 홀로 오직 주님께만 돌리는 것, 그것이 ‘사는 것’이요, 바로 ‘생명’, ‘생물’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39. 2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Verse 20.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큰 광명체들이 속 사람 안에 자리를 잡고 불이 켜지면, 겉 사람은 그들로부터 빛을 받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처음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 속 사람 안 두 큰 광명체는 사랑과 신앙입니다. 이렇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준비가 끝난 사람이라야 생명이 시작되었다 말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 되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 알고 살아왔다면, 또 무슨 진리를 말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다면, 그는 그동안 ‘살아온’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그는 ‘죽은’ 상태이며, 그의 안에는 악과 거짓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그게 무엇이든 사실은 모두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그 자체로 선인 그런 선을 사람이 자신으로 말미암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 오직 주님만이 선하시며, 주님만이 선의 근원이십니다.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반사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주님의 선을 반사만, 전달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선을 마음먹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사실은 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선을 행한다는 것은 도저히,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 가르침을 보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 그만큼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부터 정말 철저히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은 그 유일하신 참 근원 되시는 분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올 수 없습니다. 다른 데서 하신 주님 말씀입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이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를 거듭나게 하셔서 생명을 얻게 하실 때, 주님은 먼저 사람이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때는 사람이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생각할 수도, 무슨 다른 방법으로 인도함을 받아 믿을 수도, ‘아,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말미암는구나!’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 김혜자 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 이름이 생각납니다. 주님은 비록 그것이 옳고 정당하다 하더라도 만일 우리가 그 지적, 그 비판을 힘들어하며, 아파하겠다 여겨지시면, 대신 비록 빙 돌아가며 기다리는 편을 택하십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자원함으로 주님 편으로 돌아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중간에 그저 수수방관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불꽃 같은 두 눈으로 늘 우리를 붙드시며, 전능하신 섭리로 영원히 우리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그의 선과 진리들은 ‘풀’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될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은 ‘못 움직이는’(inanimate), 즉 생물은 생물인데 움직이지 못하는 생물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은 사랑과 신앙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말하는 모든 진리를 행하시는 분은 사실은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는 이제는 먼저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 그 다음 ‘땅 위를 나는 새들’, 끝으로 ‘짐승들’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움직이는'(animate) 것들이며, 그래서 언급하기를 ‘생물’이라 하는 것입니다.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시작하기 전에, 저희가 곧 첫 손주 볼 날이 다가와 며느리 배가 남산만 하고, 배에 손 대고 안수 기도하는 일들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잠깐, 이 ‘안수’의 의미를 말씀 통해 살펴 보았습니다 ^^
개역개정 성경으로는, 이 ‘안수’라는 키워드가 처음 나오는 데가 아래와 같습니다.
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오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지며 (출29:10)
복음서에는 주님의 이 안수, 곧 손을 통한 접촉으로 병을 낫게 하시고, 고치신 기록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가령,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마9: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막8:25)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막7:33-35)
등, 이 외(外)에도 참 많지만 략(略)하고...
이 안수와 같은 ‘접촉’의 행위, 표현은 사실은 천국의 어떤 것에 대한 표상(表象)인데요, 그것은 ‘비슷하면 가까이, 다르면 멀리’, 곧 ‘생명이 같으면 함께 결합, 교류, 교통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안수를 해도 왜 누구는 병고침을 비롯, 기도가 응답되는 반면, 누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이는 사실, 저의 오랜 의문점이었는데요, 이 천국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이런 비밀을 깨닫게 되었지요 ^^
안수 받는 자의 속 사람이 천국과 같은 심성, 천국과 같은 생명, 곧 주님의 선(the Divine good)과 공명(共鳴)할 수 있는 속 사람이어야 천국의 모든 것, 곧 주님의 생명과 능력, 권능이 그의 안에 흘러들어가 그를 고치며,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의 심성, 우리의 생명, 특히 기도 받는 며느리와 아들의 속 사람이 주님과 공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부분, 이 두 사람,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몸’이라 여겨지므로, 주의 종들의 모든 안수 통해 주님의 생명과 능력, 하늘의 권능이 아이 부모를 통해 아이 안으로 흘러들어가게 하심을 확실히 믿습니다! 아멘아멘, 주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본문 시작합니다.
※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 ‘Arcana Coelestia’ 글 번호 24번에서 26번까지를 주로 레퍼런스하였습니다.
창조 둘째 날입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6-8)
아래는 위 본문말씀에 대한 아케이나이며, 중간중간 저의 설명을 덧댔음을 밝힙니다.
창조 첫째 날, 곧 거듭남 첫 번째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으로 표현된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가 ‘낮’ 안에 참과 선에 속한 지식을 낳으시고, 빛을 처음으로 주십니다.
‘낮’은 주님께 속한 것을, ‘참과 선에 속한 지식’은 리메인스(remains)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창1:5)
이 빛은 곧 주님이시며, 선 자체, 진리 자체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 어떤 선과 진리도 있을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후에,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어떤 구별을 두시는데요, 그 결과,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들(knowledges, [cognitiones])과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들(memory-knowledges, [scientifica]) 사이에 일종의 구별이 생깁니다.
속 사람 안에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습니다. 반면, 겉 사람 안에는 오직 사람으로, 세상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반면, 겉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세상으로 말미암은 지식입니다. 특히, ‘기억-지식’이라는 표현은, ‘학습을 통해 머릿속에 저장된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속 사람을 ‘궁창’(穹蒼, an expanse)으로,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로,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로 각각 표현하셨습니다.
사람은 거듭남이 진행되기 전에는 무슨 속 사람 같은 게 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속 사람 같은 내면세계는커녕, 오히려 겉 사람의 본성과 퀄리티 같은 거에 더 익숙해져 있지요. 그는 생각하기를, ‘속 사람, 겉 사람은 서로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합니다. 그 자신 이미 감각적이고 세속적인(bodily and worldly) 일에 푹 잠겨 있으므로, 속 사람 같은 내면의 일들 역시 그런 식으로, 혼란스럽고 모호한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 하시고, 이어서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십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라’ 하십니다. 뒤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말이지요.
이렇게 주님은 사람의 거듭남 그 초기 단계 때,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 사이를 구별, 구분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전체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이제 다음으로 관찰하게 되는 사실은, 먼저 속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속 사람에게 속한 일들은 선과 진리이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이라는 사실 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듭나고 있는 가운데 재미있는 사실은, 겉 사람의 경우, 그 본성상, 사람은 지금 자기가 행하는 선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안다는 것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남이 시작되었어도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주님은 처음부터 감안하고 계십니다. 그는 자기 것으로 이렇게 하는 줄 알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이런 착각까지도, 그의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사용하셔서 결국은 그를 주님 쪽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궁창 아래의 물’이 먼저 언급되고, ‘궁창 위의 물’이 뒤를 따르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신비입니다. 사람의 미련함, 어리석음, 연약함과 그에 따른 오류 같은 것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어 선과 진리의 일들로 구부려지는 신비,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들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전체적이든 세부적이든, 겉 사람에게서 속 사람까지, ‘땅’에서 ‘하늘’까지 주님의 섭리 아래 한 사람의 거듭남으로 인도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비 중 신비입니다.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예언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공통구와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24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또 주의 오심을 드러내어 말하는 아래와 같은 구절을 보면,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42:3)
즉, 주님은 사람들의 오류나 틀린 생각을 바로잡으시지도, 재산이나 권력 등에 대한 탐욕을 끄지도 않으시고 대신, 그것들을 진리와 선 쪽으로 방향을 구부러지게 하십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지요. 주님은 우리를 아프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5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42:5)
내용이 같은 구절들은 반복해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저녁’, ‘아침’, ‘날’의 의미는 앞서 5절에서 다룬 것과 같습니다.
오늘 중요한 메시지는, 사람의 거듭남 초기 단게 때, 이제 빛을 받은 단계에서 사람은 전에 안 하던 말과 행동, 곧 기특한 언행을 시작하는데, 그런데 그걸 자기가 하는 줄로 안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런 자기를 대견하게, 대단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미성숙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찌 보면 좀 눈에 거슬리는 모습이지요. 교회 안에도, 주위에도 제법 많습니다. 우리는, 아니 저는 전에는 그런 걸 바로 지적하고, 훈계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을 보니 주님은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중 그런 단계가 있음을 감안하시고 잠자코 다음 단계로 그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자신을 포함, 교인이나 주위 다른 분들의 그런 미성숙한 모습을 주님이 우리를 품으시는 것처럼 품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그가 아직 미성숙할지라도 그의 안에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속 사람, 곧 주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음을 기억하고, 그의 겉 모습과 함께 동시에 영의 눈도 켜져서 그의 속 사람 또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거듭되는 넘어짐과 악습에 다시 발담그는 그런 연약함에도 불구, 주님이 나를 받으심 기억하시고, ‘아마 내일도, 모레도 나는 어쩌면 또 넘어지겠지만,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나는 조금 더 성장한 상태에서 그러고 있을꺼야. 비록 계속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겠지만, 어제의 저녁과 아침이 아닌, 좀더 나아진, 좀더 위를 향해 나아간 중에 맞이하는 저녁과 아침일꺼야!’라고, 자신을 향해 긍정하는 그런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 정도로 둘째 날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을 주님, 주님의 빛, 천국 빛으로 환히 비추사 내면이 밝아져 환히 깨닫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38. 18절,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Verse 18.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낮’은 선을, ‘밤’은 악을 의미하며, 그래서 낮의 활동을 선이라, 밤의 활동을 악이라 합니다. ‘빛’은 진리를, ‘어둠’은 거짓을 의미합니다. 다음은 주님 말씀입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19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Verse 19.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18-19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속뜻)
주님은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사랑과 신앙이라는 두 큰 광명체를 두어, 환히 비추어, 이것으로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인도하며,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선입니다. 거듭남의 전체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은 충만과 결핍, 밝음과 어둠을 번갈아 가며 더욱 탄탄, 강건해져 갑니다.
109. 식물계 상응의 경우 역시 여러 사례를 들 수 있는데요, 아주 작은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 나무가 되어 잎을 내며,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그리고는 그 안에 다시 씨앗을 저장하고 하는, 이런 일들은 몇 마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 놀라운 일들이 연속적으로 어떤 질서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지요. How the things in the vegetable kingdom correspond can be seen from many instances, as that little seeds grow into trees, put forth leaves, produce flowers, and then fruit, in which again they deposit seed, these things taking place in succession and existing together in an order so wonderful as to be indescribable in a few words.
이런 일들은 아마 책 몇 권으로도 못 채우지 싶으며, 설사 그럴지라도 그 깊은 쓰임새에 관련된 더욱 심오한 아케이나는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으로는 도저히 밝혀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Volumes might be filled, and yet there would be still deeper arcana, relating more closely to their uses, which science would be unable to exhaust.
이런 일들 역시, 영계, 즉 앞의 해당 챕터에서 이미 확인한 것처럼, 사람 형태인 천국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이 식물계 내 모든 하나하나도 일부 지식층들이 알고 있듯, 사람한테 있는 어떤 것들과 관련성을 가집니다. Since these things, too, are from the spiritual world, that is, from heaven, which is in the human form (as has been shown above in its own chapter), so all the particulars in this kingdom have a certain relation to such things as are in man, as some in the learned world know.
이 식물계 안 모든 것 또한 상응물들이라는 사실을 저는 많은 경험을 통해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That all things in this kingdom also are correspondences has been made clear to me by much experience.
저는 종종 정원에서 거기 있는 나무와 열매들, 꽃과 식물들을 보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저는 그것들이 천국의 무엇과 상응하는지를 알 수 있었고, 그 상응하는 바를 지닌 영들과 대화하면서, 그것이 어디서 비롯된, 어떤 것들인지를 배우곤 하였습니다. Often when I have been in gardens and have been looking at the trees, fruits, flowers, and plants there, I have recognized their correspondences in heaven, and have spoken with those with whom these were, and have been taught whence and what they were.
110. 그러나 오늘날은 아무도 천국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의 영적인 것이 이 세상 자연적인 것과 상응한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 상응 지식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But at the present day no one can know the spiritual things in heaven to which the natural things in the world correspond except from heaven, since 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is now wholly lost.
그래서 여기서 제가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 상응의 본질에 대해 좀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But the nature of the correspondence of spiritual things with natural I shall be glad to illustrate by some examples.
땅 위 동물은 보통은 애정(affection)에 상응합니다. 순하고 유용한 동물은 선한 애정에, 사납고 무익한 것들은 악한 애정에 말이지요. The animals of the earth correspond in general to affection, mild and useful animals to good affections, fierce and useless ones to evil affections.
구체적으로는, 소와 송아지는 자연적 마인드에 관한 애정에, 양과 어린양은 영적 마인드에 관한 애정에, 반면, 새는 그 종에 따라 자연적 혹은 영적 마인드에 관한 지성적인 것들에 각각 상응합니다.78 In particular, cattle and their young correspond to the affections of the natural mind, sheep and lambs to the affections of the spiritual mind; while birds correspond, according to their species, to the intellectual things of the natural or the spiritual mind.78
이런 이유로, 다양한 동물들, 소와 송아지, 어린양과 양, 수염소와 암염소, 수양과 암양, 또한 비둘기와 멧비둘기 등이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였던 고대 이스라엘 교회에서 성례용(聖禮用, a sacred use)으로 바쳐졌고, 희생제물과 번제(燔祭, burnt offerings)가 이것들로 드려졌습니다. For this reason various animals, as cattle and their young, rams, sheep, he-goats, and she-goats, he-lambs and she-lambs, also pigeons and turtle-doves, were devoted to a sacred use in the Israelitish church, which was a representative church, and sacrifices and burnt offerings were made of them.
그것들은 그런 쓰임새로 영적인 것들과 상응하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그것들을 그 상응에 따라 이해했습니다. For they correspond in that use to spiritual things, and in heaven these were understood in accordance with the correspondences.
게다가 동물들이 그 분류와 종에 따라 애정인 것은 그것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동물의 생명은 오직 애정에서 오며, 애정과 일치함 가운데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동물에게는 그 생명의 애정과 일치하는 어떤 선천적 지식, 타고나는 본능이 있습니다. Moreover, animals according to their kinds and species, because they have life, are affections; and the life of each one is solely from affection and in accordance with affection; consequently every animal has an innate knowledge that is in accord with its life’s affection.
사람은 그의 자연적 면에 있어서는 동물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보통들 말할 때, 동물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친절하면 양 또는 어린양 같다 하고, 사나우면 곰이나 늑대, 교활하면 여우, 뱀 등과 같다 하는 것입니다. Man is like an animal so far as his natural man is concerned, and is therefore likened to animals in common speech; for example, if he is gentle he is called a sheep or lamb, if fierce a bear or wolf, if cunning a fox or serpent, and so on.
111. 식물계에도 일종의 비슷한 상응이 있습니다. There is a like correspondence with things in the vegetable kingdom.
일반적으로, 뜰, 정원은 천국의 지성과 지혜에 상응합니다. 그래서 천국을 하나님의 정원, 낙원79이라고 하며, 사람들은 천국을 하늘의 낙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In general, a garden corresponds to the intelligence and wisdom of heaven; and for this reason heaven is called the Garden of God, and Paradise;79 and men call it the heavenly paradise.
나무는 그 종류별로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과 지식에 상응하며, 이 선과 진리에서 지성과 지혜가 나옵니다. Trees, according to their species, correspond to the perceptions and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which are the source of intelligence and wisdom.
고대인들은 상응에 친숙했으므로 산림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80. 같은 이유로, 말씀에서 나무가 그렇게 자주 언급되고, 천국과 교회, 사람이 나무에 비유되는 것입니다. 포도 나무, 올리브, 백향목 등등, 그리고 선행이 열매에 비유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For this reason the ancient people, who were acquainted with correspondences, held their sacred worship in groves;80 and for the same reason trees are so often mentioned in the Word, and heaven, the church, and man are compared to them; as the vine, the olive, the cedar, and others, and the good works done by men are compared to fruits.
또 나무에서 나는 먹을 것, 특히 들에서 거두는 곡식은 선과 진리에 대한 여러 애정에 상응합니다. 지상의 양식이 자연적 생명에 영향을 주듯81,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은 영적 생명에 영양을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삶을 지탱하는 주요 식량이며, 음식 전체를 상징하는 떡(빵)은 일반적으로 모든 선에 대한 애정에 상응합니다. Also the food derived from trees, and more especially from the grain harvests of the field, corresponds to affections for good and truth, because these affections feed the spiritual life, as the food of the earth does the natural life;81 and bread from grain, in a general sense, because it is the food that specially sustains life, and because it stands for all food, corresponds to an affection for all good.
이 상응에 따라 주님도 당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셨고, 유대교는 덩어리 빵을 성물로 삼아 성막 상 위에 두고 진설병이라 불렀습니다. 희생과 번제로 드린 모든 거룩한 제사 역시 떡이라 이름하였습니다. It is on account of this correspondence that the Lord calls himself the bread of life; and that loaves of bread had a holy use in the Israelitish church, being placed on the table in the tabernacle and called “the bread of faces”; also the Divine worship that was performed by sacrifices and burnt offerings was called “bread.”
더욱이 이 상응 때문에, 떡과 포도주로 행하는 성찬식이 기독교의 가장 거룩한 성례인 것입니다.82 Moreover, because of this correspondence the most holy act of worship in the Christian church is the Holy Supper, in which bread is given, and wine.82
이 몇 가지 보기들로 상응의 본질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From these few examples the nature of correspondence can be seen.
112. 천국과 세상이 상응에 의해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해서도 몇 마디 언급하겠습니다. How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world is effected by means of correspondences shall also be told in a few words.
주님의 나라는 목적의 나라이고, 그 목적은 쓰임새입니다. 쓰임새의 나라이고, 그 쓰임새가 목적이라고 해도 같은 말입니다. The Lord’s kingdom is a kingdom of ends, which are uses; or what is the same thing, a kingdom of uses which are ends.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우주를 창조하실 때, 우주 어디에서나 쓰임새가 물질의 옷을 입고, 행동 또는 결과로 나타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먼저 천국에, 그 다음엔 이 세상에, 그렇게 단계적이고 연속적으로 내려와 자연계라는 최종단계에 이릅니다. For this reason the universe has been so created and formed by the Divine that uses may be everywhere clothed in such a way as to be presented in act, or in effect, first in heaven and afterwards in the world, thus by degrees and successively, down to the outmost things of nature.
따라서 쓰임새를 통해 자연계와 영계, 즉 세상과 천국이 상응하고 결합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쓰임새가 입고 있는 형상은 그것이 쓰임새의 형상인 정도만큼만 상응이 되고, 결합의 수단이 됩니다. Evidently, then, the correspondence of natural things with spiritual things, or of the world with heaven, is through uses, and uses are what conjoin; and the form in which uses are clothed are correspondences and are conjunctions just to the extent that they are forms of uses.
자연계에 존재하는 것 중 질서에 맞는 것은 모두 쓰임새의 형태이고, 쓰임받기 위해 그 용도대로 형성된 결과물입니다. 이것이 자연계에 있는 것들이 왜 상응물인가 하는 이유입니다. In the nature of the world in its threefold kingdom, all things that exist in accordance with order are forms of uses, or effects formed from use for use, and this is why the things in nature are correspondences.
그러나 사람은 그가 신적 질서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사랑하고 , 이웃을 사랑하는 정도만큼만 그의 행위는 쓰임새의 형상이 되고, 또 그를 천국과 연결시켜 주는 상응물이 됩니다. But in the case of man, so far as he is in accordance with Divine order, that is, so far as he is in love to the Lord and in charity toward the neighbor, are his acts uses in form, and correspondences, and through these he is conjoined to heaven.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쓰임새를 수행하는 것입니다.83 To love the Lord and the neighbor means in general to perform uses.83
나아가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자연계를 영계에 연결하는 수단, 즉 결합의 매개체라는 사실입니다. (※ 57항 참조) 그러므로 사람은 영적인 정도만큼 그만큼 결합의 매체가 되지만, 반면 자연적이기만 하고 영적이지 않은 사람은 결합의 매체가 되지 못합니다. Furthermore, it must be understood that man is the means by which the natural world and the spiritual world are conjoined, that is, man is the medium of conjunction, because in him there is a natural world and there is a spiritual world (see above, n. 57); consequently to the extent that man is spiritual he is the medium of conjunction; but to the extent that a man is natural, and not spiritual, he is not a medium of conjunction.
그러나 사람을 통하지 않아도 따로 신성의 입류가 계속 세상으로 흘러들며, 이 입류는 사람의 물질적 측면 안으로는 유입되지만 사람의 합리적 기능 안으로는 유입되지 않습니다. Nevertheless, apart from this mediumship of man, a Divine influx into the world and into the things pertaining to man that are of the world goes on, but not into man’s rational faculty.
113. 신적 질서에 따르는 모든 것이 천국에 상응하듯, 신적 질서에 어긋나는 모든 것은 지옥에 상응합니다. As all things that are in accord with Divine order correspond to heaven, so all things contrary to Divine order correspond to hell.
천국에 상응하는 것은 선과 진리에 관련되고, 지옥에 상응하는 것은 악과 거짓에 관련됩니다. All things that correspond to heaven have relation to good and truth; but those that correspond to hell have relation to evil and falsity.
114. 상응 지식과 그 용도에 대해 한 가지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Something shall now be said about 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and its use.
앞에서 밝혔듯, 영계 즉 천국은 상응에 의해 자연계와 결합합니다. 그러므로 상응을 통해서 사람은 천국과 교류할 수 있도록 허용된 것입니다. It has been said above that the spiritual world, which is heaven, is conjoined with the natural world by means of correspondences; therefore by means of correspondences communication with heaven is granted to man.
천국의 천사는 사람이 하듯 자연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 사람은 상응 지식이 있으면 그 마음속 생각이 천사들과 함께 할 수 있고, 따라서 그의 속 사람은 천사와 연합할 수 있습니다. For the angels of heaven do not think from natural things, as man does; but when man has acquired a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he is able, in respect to the thoughts of his mind, to be associated with the angels, and thus in respect to his spiritual or internal man to be conjoined with them.
천국과 사람이 결합되게 하려고 성경은 순전히 상응으로만 기록되었습니다. 즉 성경 안의 모든 말씀은 전체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상응인 것입니다.84 That there might be such a 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 the Word was written wholly by correspondences, each thing and all things in it being correspondent.84
따라서 만약 사람이 상응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성경말씀의 영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결과 문자적 의미로서는 알 수 없었던 비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If man, therefore, had a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he would understand the spiritual sense of the Word, and from that it would be given him to know arcana of which he sees nothing in the sense of the letter.
성경에는 문자의 의미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문자의 의미는 세상에 속한 것으로, 영적 의미는 천국에 속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For there is a literal sense and there is a spiritual sense in the Word, the literal sense made up of such things as are in the world, and the spiritual sense of such things as are in heaven.
천국과 세상의 결합이 상응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상응으로 이루어진 성경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85 And such a Word, in which everything down to the least jot is a correspondence, was given to men because 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world is effected by means of correspondences.85
115. 내가 천국에서 알게 된 것은, 지구 최초의 사람들, 태고인들은 천적인 사람들이었으며, 상응 자체로 생각했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자연적인 것은 상응에 따라 생각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특성 때문에 그들은 천사와 교류하고 대화했으며, 따라서 그들을 통해 천국은 세상과 결합되었습니다. I have been taught from heaven that the most ancient men on our earth, who were celestial men, thought from correspondences themselves, the natural things of the world before their eyes serving them as means of thinking in this way; and that they could be in fellowship with angels and talk with them because they so thought, and that thus through them heaven was conjoined to the world.
이런 까닭에 그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불렀으며, 수많은 고대문인들이 ‘그때는 하늘에 사는 이들이 사람과 함께 지냈고, 친구처럼 서로 사귀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For this reason that period was called the Golden Age, of which it is said by ancient writers that the inhabitants of heaven dwelt with men and associated with them as friends with friends.
그러나 이들의 시대가 끝나고 그 뒤를 이은 사람들은 상응 자체를 가지고 생각하지 않고, 상응에 관한 지식에 의해 생각했다. 이 시대에도 천국과 세상이 결합은 되어 있었지만 그리 직접적이지 못했습니다. But after this there followed a period when men thought, not from correspondences themselves, but from a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and there was then also a conjunction of heaven with man, but less intimate.
이 시기를 은 시대라고 하였습니다. This period was called the Silver Age.
그 후대 사람들은 상응 지식은 어느 정도 있었으나 그 지식에 의해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영적 선 안에 있었지만 이들은 자연적 선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After this there followed men who had a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but did not think from that knowledge, because they were in natural good, and not, like those before them, in spiritual good.
이 시대를 동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This period was called the Copper Age.
그 후 사람은 점차 외면적이 되어가다가 끝내 육체적이 되어, 상응에 관한 지식은 완전히 사라졌고, 그와 함께 천국에 대한 참된 개념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After this man gradually became external, and finally corporeal, and then 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was wholly lost, and with it a knowledge of heaven and of the many things pertaining to heaven.
위의 시대들을 금, 은, 동86으로 이름한 것도 상응에 따른 것입니다. 상응에 의하면, 금은 태고인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천적 선을, 은은 그 다음 고대인들이 지녔던 영적 선을, 구리는 그 후예들의 자연적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철은 가장 나중 시대에 붙여진 이름이며, 선에서 떠난 진리를 의미합니다. It was from correspondence that these ages were named from gold, silver, and copper,86 and for the reason that from correspondence gold signifies celestial good in which were the most ancient people, silver spiritual good in which were the ancient people that followed, and copper natural good in which were the next posterity; while iron, from which the last age takes its name, signifies hard truth apart from good.
※ 각주
78. 상응으로 말미암아 동물은 애정을 의미함. 순하고 유용한 동물은 선한 애정을, 사납고 무익한 것들은 악한 애정을 의미 (n. 41, 45, 46, 142, 143, 246, 714, 716, 719, 2179, 2180, 3519, 9280) 영계의 경험을 통한 설명 (n. 3218, 5198, 9090) From correspondence animals signify affections; mild and useful animals good affections, fierce and useless ones evil affections (n. 41, 45, 46, 142, 143, 246, 714, 716, 719, 2179, 2180, 3519, 9280); illustrated by experience from the spiritual world (n. 3218, 5198, 9090).
동물의 생명으로 유입되는 영계의 입류 (n. 1633, 3646) Influx of the spiritual world into the lives of animals (n. 1633, 3646).
소와 송아지는 상응에 의해 자연적 마인드에 관한 애정을 의미 (n. 2180, 2566, 9391, 10132, 10407) Cattle and their young from correspondence signify affections of the natural mind (n. 2180, 2566, 9391, 10132, 10407).
양이 의미하는 것 (n. 4169, 4809), 어린양의 경우 (n. 3994, 10132) What sheep signify (n. 4169, 4809); and lambs (n. 3994, 10132).
나는 피조물(flying creatures)은 지성적인 것을 의미 (n. 40, 745, 776, 778, 866, 988, 991, 5149, 7441), 영계의 경험으로 알게 된, 그것들의 속(屬, genera)과 종(種, species)에 따른 차이 (n. 3219) Flying creatures signify intellectual things (n. 40, 745, 776, 778, 866, 988, 991, 5149, 7441);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ir genera and species, from experience in the spiritual world (n. 3219).
79. 상응에 의해 정원과 낙원은 지성과 지혜에 상응 (n. 100, 108), 경험으로부터 (n. 3220) From correspondence a garden and a paradise signify intelligence and wisdom (n. 100, 108); from experience (n. 3220).
어떤 상응을 갖는 모든 것이 말씀에서도 동일한 중요성을 가짐 (n. 2896, 2987, 2989–2991, 3002, 3225) All things that have a correspondence have in the Word the same significance (n. 2896, 2987, 2989–2991, 3002, 3225).
80. 나무는 퍼셉션과 지식을 의미함 (n. 103, 2163, 2682, 2722, 2972, 7692) Trees signify perceptions and knowledges (n. 103, 2163, 2682, 2722, 2972, 7692).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은 그 상응을 따라 나무 숲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림 (n. 2722, 4552) For this reason the ancient people held Divine worship in groves under trees according to their correspondence (n. 2722, 4552).
식물계의 갈래, 가령 나무와 식물 안으로 흘러드는 천국의 입류 (n. 3648) Influx of heaven into subjects of the vegetable kingdom, as into trees and plants (n. 3648).
81. 상응으로, 먹을 것은 영적 생명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그런 것을 상징 (n. 3114, 4459, 4792, 4976, 5147, 5293, 5340, 5342, 5410, 5426, 5576, 5582, 5588, 5655, 5915, 6277, 8562, 9003) From correspondence foods signify such things as nourish the spiritual life (n. 3114, 4459, 4792, 4976, 5147, 5293, 5340, 5342, 5410, 5426, 5576, 5582, 5588, 5655, 5915, 6277, 8562, 9003).
82. 빵은 사람의 영적 생명에 영양을 공급하는 모든 선을 상징 (n. 2165, 2177, 3478, 3735, 3813, 4211, 4217, 4735, 4976, 9323, 9545, 10686) Bread signifies every good that nourishes the spiritual life of man (n. 2165, 2177, 3478, 3735, 3813, 4211, 4217, 4735, 4976, 9323, 9545, 10686).
이것이 성막 안 떡상 진설병의 상징 (n. 3478, 9545) Such was the signification of the loaves that were on the table in the tabernacle (n. 3478, 9545).
희생 제물을 일반적으로 빵이라 하였음 (n. 2165) Sacrifices in general were called bread (n. 2165).
‘빵’ 하면 모든 먹을 것을 일컬음 (n. 2165) Bread includes all food (n. 2165).
그래서 빵은 모든 천국적, 영적 양식을 상징 (n. 276, 680, 2165, 2177, 3478, 6118, 8410) Thus it signifies all heavenly and spiritual food (n. 276, 680, 2165, 2177, 3478, 6118, 8410).
83. 모든 선은 그 쓰임새로부터, 그리고 쓰임새에 따른, 즐거움뿐 아니라 퀄러티를 가짐. 그런 것이 쓰임새요, 그런 것이 선임 (n. 3049, 4984, 7038) Every good has its delight as well as its quality from use and in accordance with use; therefore such as the use is, such is the good (n. 3049, 4984, 7038).
천사같은 삶은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 즉 쓰임새를 수행함으로 이루어짐 (n. 454) Angelic life consists in the goods of love and charity, that is, in performing uses (n. 454).
주님은, 그리고 결과적으로 천사들은 사람한테서 오직 그 목적, 곧 쓰임새만 보심 (n. 1317, 1645, 5854) The Lord, and consequently the angels, look only, in regard to man, to ends, which are uses (n. 1317, 1645, 5854).
주님의 나라는 쓰임새의 나라, 곧 목적의 나라 (n. 454, 696, 1103, 3645, 4054, 7038) The Lord’s kingdom is a kingdom of uses, that is, of ends (n. 454, 696, 1103, 3645, 4054, 7038).
주님을 섬기는 것은 쓰임새를 수행하는 것 (n. 7038) Serving the Lord is performing uses (n. 7038).
사람의 하나하나와 모든 것이 쓰임새를 위해 창조됨 (n. 3626, 4104, 5189, 9297) 또한 쓰임새로부터, 즉 쓰임새가 사람의 겉 모습보다 먼저. 사람의 이 신체는 쓰임새를 수행하기 위한 것 쓰임새는 천국을 통해 주님이 흘러들어오시는 것 (n. 4223, 4926) Each thing and all things in man have been formed for use (n. 3626, 4104, 5189, 9297); also from use, that is, the use is prior to the organic forms in man through which the use is performed, because use is from the inflowing of the Lord through heaven (n. 4223, 4926).
더욱 사람의 내면은 그가 성장하여 성인이 될 때, 그의 마인드를 구성하는데, 쓰임새로부터, 그리고 쓰임새를 위해 형성됨 (n. 1964, 6815, 9297) Moreover man’s interiors, which constitute his mind, when he grows to maturity are formed from use and for use (n. 1964, 6815, 9297).
결과적으로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쓰임새와 같은 그런 존재 (n. 1568, 3570, 4054, 6571, 6935, 6938, 10284) Consequently man is such as are the uses with him (n. 1568, 3570, 4054, 6571, 6935, 6938, 10284).
쓰임새는 쓰임새라는 목적과 같은 것 (n. 3565, 4054, 4104, 6815) Uses are the ends for the sake of which (n. 3565, 4054, 4104, 6815).
쓰임새는 처음과 나중, 곧 사람의 모든 것 (n. 1964) Use is the first and the last, thus the all of man (n. 1964).
84. 말씀은 온전히 상응으로 기록됨 (n. 8615) The Word was written wholly by correspondences (n. 8615).
말씀에 의해, 사람은 천국과 결합함 (n. 2899, 6943, 9396, 9400, 9401, 10375, 10452) By means of the Word man has conjunction with heaven (n. 2899, 6943, 9396, 9400, 9401, 10375, 10452).
85. 말씀의 속뜻에 관하여는 계시록에 관한 내용 중 ‘백마’(白馬, White Horse)라는 소책자를 참조 Concerning the spiritual sense of the Word see the little work White Horse referred to in Revelation.
86. 상응에 의해 금은 천적 선을 의미 (n. 113, 1551, 1552, 5658, 6914, 6917, 9510, 9874, 9881) Gold from correspondence signifies celestial good (n. 113, 1551, 1552, 5658, 6914, 6917, 9510, 9874, 9881).
은은 영적 선, 즉 천적 기원으로 말미암은 진리를 의미 (n. 1551, 1552, 2954, 5658) Silver signifies spiritual good, that is, truth from a celestial origin (n. 1551, 1552, 2954, 5658).
동은 자연적 선을 의미 (n. 425, 1551) Copper signifies natural good (n. 425, 1551).
철은 질서의 가장 바깥에 있는 진리를 의미 (n. 425, 426) Iron signifies truth in the outmost of order (n. 425, 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