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칠 배의 벌의 속뜻, 아주 끔찍한 신성모독(a far greater sacrilege)이요, 신성불가침을 심각하게 범하는 것

 

24절,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라는 것은, 이미 15절에서 보여드린 대로, ‘가인’의 분리된 신앙을 폭행하는 것은 신성모독, 신성불가침을 범함이었음을 의미합니다. (cf. 392-396) That Cain’s being “avenged sevenfold” signifies that it was sacrilege to do violence to that separated faith which is meant by “Cain,” has been already shown at verse 15.

 

※ ‘가인’ 신앙은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신앙입니다. 원래 태고교회 신앙은 사랑 하나였습니다. 사랑 따로, 신앙 따로 같은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나, 그 교회에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은 하려는 사람들이 서서히 일어난 것입니다.

 

칠십칠 배의 벌’은 아주 끔찍한 신성모독(a far greater sacrilege)이요, 신성불가침을 심각하게 범하는 것으로서, 그 결과는 지옥이라는 것이 ‘칠십칠’이 의미하는 바를 보면 분명합니다. 이라는 숫자가 거룩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유래하는데요,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 천적 교회, 천적 나라, 그리고 가장 높은 뜻으로 바로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라는 숫자는 말씀 가운데 나올 때마다 거룩한 것, 즉 가장 신성한 것을 의미하며, 이 거룩(holiness)과 신성(sanctity)이 어떤 것인지는 그때 다루어지고 있는 것들에 의해 서술되거나 따릅니다. 일곱 때들(ages)을 구성하는 숫자 칠십의 의미가 여기에서 오는데요, 말씀에서, 한 때는 십 년입니다. 가장 거룩하거나 신성한 어떤 것을 표현해야 했을 때, ‘칠십칠 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그의 형제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그가 죄를 얼마나 짓든지 끝없이, 혹은 영원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그리고 여기, 라멕의 말,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의 의미는 지옥인데, 그 이유는 가장 신성한 것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And that by a “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is signified a far greater sacrileg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damna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ty and sevenfold.” That the number “seven” is holy originates in the fact that the “seventh day” signifies the celestial man, the celestial church, the celestial kingdom, and, in the highest sense, the Lord himself. Hence the number “seven,” wherever it occurs in the Word, signifies what is holy, or most sacred; and this holiness and sanctity is predicated of, or according to, the things that are being treated of. From this comes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seventy,” which comprises seven ages; for an age, in the Word, is ten years. When anything most holy or sacred was to be expressed, it was said “seventy-sevenfold,” as when the Lord said that a man should forgive his brother not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Matt. 18:22), by which is meant that they should forgive as many times as he sins, so that the forgiving should be without end, or should be eternal, which is holy. And here, that Lamech should “be avenged seventy and sevenfold” means damnation, because of the violation of that which is most sacred.

 

마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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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칠 배의 벌의 속뜻, 그들은 신성불가침(sacrilege, sacred ban)이었던 가인 신앙을 폭행, 소멸시켰고, 동시에 신앙을 통해 생겨나야 했던, 훨씬 더 신성불가침(sacrosanct)인 체어리티 또한 소멸시켰다

 

24절,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432

이 말씀들의 의미는, 그들은 신성불가침(sacrilege, sacred ban)이었던 ‘가인’ 신앙을 폭행, 소멸시켰고, 동시에 신앙을 통해 생겨나야 했던, 훨씬 더 신성불가침(sacrosanct)인 체어리티 또한 소멸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지옥, 곧 ‘칠십칠 배의 벌’이 있게 된 것입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y had extinguished the faith meant by “Cain,” to do violence to which was sacrilege, and at the same time had extinguished the charity which should be born through faith, a far greater sacrilege, and that for this there was condemnation, that is, a “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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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상함의 속뜻, 더이상 온전한 것이 없음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431

상처’와 ‘상함’은 더이상 온전한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데, ‘상처’로는 신앙이 황량해졌음을, ‘상함’으로는 체어리티가 황폐해졌음을 의미함이 분명한 것은 ‘상처’는 사람에게, ‘상함’은 소년에게 속한 것으로 서술되고 있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신앙의 황량함 및 체어리티의 황폐함을 이사야에 보면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That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soundness no longer,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and by a “bruise” that charity was devastat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wound” is predicated of a “man,” and “bruise” of a “little one.” The desolation of faith and the vastation of charity are described in the same terms in Isaiah: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사1:6) From the sole of the foot even unto the head there is no soundness in it; but wound and bruise and a fresh sore they have not been pressed out, neither bound up, neither mollified with oil. (Isa. 1:6)

 

이 구절에서, ‘상한 것’은 황량해진 신앙으로, ‘터진 것’은 황폐해진 체어리티로, ‘새로 맞은’은 둘 다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ound” is predicated of faith desolated, “bruise” of charity devastated, and “sore” of b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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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소년의 속뜻, 이노센스, 체어리티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430

말씀에 나오는 ‘어린이’(little one)나 ‘소년’(little child)은 이노센스(innocence, 순진)를 의미하며, 또한 체어리티도 의미합니다. 참된 이노센스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체어리티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노센스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말씀에서는 각각 젖먹이’(sucklings), 걸음마 배우는 아이’(infants)  소년’(little children)으로 구분합니다.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 없이 참된 이노센스는 없기 때문에, ‘젖먹이’, ‘아이  소년은 또한 사랑의 세 단계를 의미하는데요, 즉 엄마나 유모를 향한 젖먹이의 사랑 같은 다정한 사랑, 부모를 향한 아이의 사랑 같은 사랑, 선생님을 향한 소년의 상냥한 사랑과 유사한 체어리티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에는 말하기를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in the Word, signifies innocence, and also charity, for true innocence cannot exist without charity, nor true charity without innocence. There are three degrees of innocence, distinguished in the Word by the terms “sucklings,” “infants,” and “little children”; and as there is no true innocence without true love and charity, therefore also by “sucklings,” “infants,” and “little children” are signified the three degrees of love: namely, tender love, like that of a suckling toward its mother or nurse; love like that of an infant toward its parents; and charity, similar to that of a little child toward its instructor. Thus it is said in Isaiah: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사11:6) The wolf shall dwell with the lamb, and the leopard shall lie down with the kid; and the calf, and the young lion, and the fatling together, and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 (Isa. 11:6)

 

여기 ‘’, ‘염소’, ‘송아지’는 이노센스와 사랑의 세 단계를, ‘이리’, ‘표범’ 및 ‘어린 사자’는 그 반대를, 그리고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에 Here a “lamb,” a “kid,” and a “calf” signify the three degrees of innocence and love; a “wolf,” a “leopard,” and a “young lion,” their opposites; and a “little child,” charity. In Jeremiah: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어찌하여 큰 악을 행하여 자기 영혼을 해하며 유다 가운데에서 너희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젖 먹는 자를 멸절하여 남은 자가 없게 하려느냐 (렘44:7) Ye commit this great evil against your souls, to cut off from you man and wife, infant and suckling, out of the midst of Judah, to leave you no remains. (Jer. 44:7)

 

남자와 여자’는 이해와 의지에 속한, 곧 진리와 선에 속한 것들을, ‘아이와 젖 먹는 자’는 사랑의 첫 번째 단계들을 의미합니다. 아이 어린이가 이노센스와 체어리티를 가리키는 것은 누가복음에 주님 하신 말씀을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 Man and wife” denot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will, or of truth and of good; and “infant and suckling,” the first degrees of love. That an “infant” and a “little child” denote innocence and charity is very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Luke: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8:15-17) They brought unto him little children that he should touch them. And Jesus said, Suffer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shall in no wise enter therein. (Luke 18:15-17)

 

주님 자신 ‘아기’(little one), ‘아들’(child)(사9:6)로 불리십니다. 주님은 이노센스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구절에서 주님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시라 하고 있습니다. The Lord himself is called a “little one,” or “child” (Isa. 9:6), because he is innocence itself and love itself, and in the same passage he is spoken of as “wonderful, counselor, God, hero, father of eternity, prince of peace.”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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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a man [vir])의 속뜻, 신앙(faith)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429

사람’이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본 장 1절, 하와가 가인을 낳고 한 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내가 여호와라는 사람을 얻었다)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사람은 ‘여호와라는 사람(a man, Jehovah)이라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cf. 340). 이런 사실은 또 훨씬 앞서 다룬 (cf. 158, 265), 사람(남자) 또는 남성에 관한 내용을 봐도 분명합니다. 거기서 남자는 이해를 의미하는데, 이해는 신앙에 속한 것입니다. 그는 체어리티 또한 소멸시켰는데요, 여기 뒤이어 나오는 어린이’, 혹은 소년이라고 하는 게 바로 체어리티입니다.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자는 동시에 체어리티 또한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at by a “man” [vir] is signified faith is evident from the first verse of this chapter, in that Eve said, when she bare Cain, “I have gotten a man, Jehovah”; by whom wa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a man, Jehovah.” It is evident also from what was shown above concerning a man or male, that he signifies understanding, which is of faith. That he had also extinguished charity, here called a “little one,” or a “little child,” follows, for he who denies and murders faith, at the same time also denies and murders the charity that is born from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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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멕의 속뜻, 황폐함(vastation)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428

이 본문도 그렇고, 다음 절도 그렇고... 아주 분명한 사실은 ‘라멕’이 황폐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길, ‘내가 사람을 죽였다’, ‘내가 소년을 죽였다’ 하고 있고, 또 가인의 경우는 그 벌이 일곱 배이지만, 라멕의 경우는 ‘일흔일곱 배’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and the following verse, it is very evident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for he says that he had “slain a man,” and a “little child,” and that Cain should be avenged sevenfold, and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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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7(D1)-주일예배(2538, 눅18,1-8),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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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4-07(D1)-주일예배(2538, 눅18,1-8),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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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의 속뜻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18:1-8)

 

 

기도에 의존하면 안 되는 이유는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기도하는 사람은 그가 구하는 것이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는 오직 주님만 아신다고 항상 생각하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들어주실지 말지를 주님께 맡겨야 하고 그에 따라 겟세마네의 가장 쓰라린 시험 가운데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한다. (천국의 비밀 8179, 이순철 역) prayer is not to be relied upon. For in prayer from the Divine it is always thought and believed that the Lord alone knows whether it is profitable or not; and therefore the suppliant submits the hearing to the Lord, and immediately after prays that the will of the Lord, and not his own, may be d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in His own most grievous temptation at Gethsemane (Matt. 26:39, 42, 44).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39)

 

 

오늘부터 18장입니다. 오늘 말씀이 있기 바로 전인, 요 앞 장 17장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은, 교회의 마지막 때 환난과 심판이 있는데, 그때 신앙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는데요, 교회의 마지막 때 모습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4장 1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는 교회의 거짓된 교리를 의미하고, ‘불법’은 교회들이 저지르는 악을 뜻합니다. 교회의 상태가 이렇다 보니, 교회의 마지막 때 신앙인들에게는 시험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분별력을 잃고 거짓 진리에 휩쓸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세상 즐거움에 빠져 신앙을 포기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신앙인들에게 닥치는 시험을 창세기에서는 노아 시대에 큰 홍수가 났을 때, 방주에 오른 사람들이 오랫동안 격랑 속을 떠다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 당시 사도들도 그런 시험을 겪었고, 그리고 오늘 이 시대 우리도 역시 그런 시험 가운데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런 환난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시험을 극복하고 마음속에 주님의 새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요?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험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본문에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로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절과 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어떤 도시에 사는 과부가 재판장에서 가서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는데, 특이한 것은, 그 재판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도시’나 ‘성읍’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니까 과부는 교회의 교리 안에서 생활하는 어떤 신앙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판장은 누굴까요? ‘재판장’은 보통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진리가 아니라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지식,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합니다. 재판장이 진리의 지식을 뜻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는 건 주님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재판장은 사랑 없는 진리, 즉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지식,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합니다. 과부는 누굴까요? ‘과부’는 남편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삶 가운데서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진리가 없어서 잘못 행하는 걸 말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웃의 호의는 받아들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베풀기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선한 행동 같지만, 상대가 원치 않을 때는 자칫 인간관계가 소원해질 수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서도 그게 잘못인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요, 예를 들면 이런 게 모두 선만 있고 진리가 없어서 생기는 일입니다. 신앙인들이 스스로 진리 없음을 느낄 때, 말씀을 통해 또는 교리 공부를 통해 진리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통해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과부가 재판장에게 달려가 원한을 풀어달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한’은 진리가 없음으로 인해 생겼던 모든 어리석은 행동들을 뜻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종류의 과부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과부가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과부라면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과부는 반대로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는 과부입니다.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에 대해 아는 건 많은데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인데요, 이 경우에 ‘과부가 재판장을 찾아가는 것’은 의지가 약한 신앙인들이 진리를 통해 그것을 극복하려고 기도하면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부가 자꾸 찾아가자 마침내 재판장이 마음의 결심을 합니다. 그것에 대해 4절과 5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재판장은 처음 얼마 동안은 과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들이 진리를 통해 영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할 때, 처음에는 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 신앙인들이 처음 가지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관한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은 마치 나무토막과 같은 것이어서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태에서는 영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진리의 지식들은 어떻게 해야 능력 있는 진리로 변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신앙인들이 가진 진리에 관한 애정을 ‘과부가 수시로 재판장을 찾아가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과부처럼 우리도 거듭남에 관한 모든 문제를 재판장인 진리와 그 능력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진리를 통해 거듭남에 관한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쓸 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애정 가운데로 오셔서 죽어 있던 진리의 지식 속으로 주님의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그렇게 해서 그 지식을 살아있는 진리로 만드십니다. 바로 그때가 본문에서 재판장이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제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리라 결심하는 순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라는 것은 사랑 없는 진리가 주님에 의해 사랑 있는 진리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는 건 사랑 있는 진리로 이제는 어떤 시험에서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냅니다. 과부가 품고 있었던 ‘원한’은 뭘까요? 진리 또는 선이 없음으로 해서 그동안 지옥의 영들에게 당했던 수모와 아픔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재판장은 신앙인들이 처음 가지는 진리인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재판장을 불의하다 하는 것은 진리의 지식은 그 자체로 사랑 없는 진리이며, 그러므로 의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비록 사랑 없는 진리라도 신앙인들이 그걸 붙들고 거듭나기를 힘쓸 때, 주님은 그 지식 안으로 오셔서 그것을 살아있는 진리로 만드시고, 그것으로 항상 시험에서 이길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이 말씀의 속뜻은, 말씀의 문자적 진리에라도 순종하면,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재판장의 말을 듣는 것은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십니다. 여기서는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한을 풀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여기 ‘하나님’은 뉘십니까? 말씀의 내적 의미로 다시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말씀의 내적 진리를 통해 그동안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 안에는 지옥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에 대해 이사야서 30장 2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일곱 배’란 그때의 진리의 능력이 전보다 완전하고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진리인, 말씀의 내적 진리를 붙들고 각자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바로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되 오래 참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로 오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미친다면 모든 원한이 속히 풀릴 것입니다. 병이 고쳐지고, 가난에서 건짐을 받을 것이고, 그 밖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주님이 말씀의 내적 진리로 다시 오셨다는 것과, 그 진리 가운데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진리의 능력이 속히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믿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새 교회 가르침 ‘신앙에 관한 교리’ 69항을 보면,

 

인애는 믿음의 생명이고 본질이다. 그러므로 인애에서 분리된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의 교리 69, 이순철 역)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is no faith, because charity is the life of faith: its soul, and its essence. (F.69)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 신앙의 본질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인애, 체어리티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시험에서 번번히 넘어진다면, 자신이 과연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으면 진정한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간단하고 쉬운 일이라도 매일 같이 체어리티를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진실한 믿음이 생기고 그것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와 우리들의 삶을 높이 들어 올릴 것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는 낙심하지 마시고, 과부의 심정으로 재판장이신 주님께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만약 시험에서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다면, 시험을 통해 이루시려는 주님의 목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들의 영적 행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때 막혔던 혈관이 뚫리는 것처럼 진리의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와 모든 문제가 풀릴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아멘

 

2021-11-1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4-0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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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의 속뜻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427

앞서 살핀 대로(cf. 405, 406), ‘라멕’은 황폐함(vastation)을 의미합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말을 들으라’는 죄에 대한 자백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교회라는 게 있는 데서만 할 수 있는 것이며,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cf. 409), 라멕의 ‘아내들’이 의미하는 게 바로 이 교회입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는 그가 신앙을 소멸시켰음을 의미하는데, 여기 사람은 신앙을(cf. 340, 367:1)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은 그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상처 상함은 더이상 온전한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데, 여기 상처는 신앙이 황량해졌음을, ‘상함은 체어리티가 황폐해졌음을 의미합니다.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as before; that he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signifies confession, which can only be made where there is a church, whic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by his “wives.”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faith, for by a “man” is signified faith; “a little one to my hurt”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charity.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no more soundness;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by a “hurt,” that charity was devast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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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속뜻, 자연적 진리

 

22절,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426

’이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에스겔 두로에 대한 말씀을 보면 더 분명합니다. That “iron” signifies natural truth is further evident from what Ezekiel says of Tyre:

 

12다시스는 각종 보화가 풍부하므로 너와 거래하였음이여 은과 철과 주석과 납을 네 물품과 바꾸어 갔도다, 19워단과 야완은 길쌈하는 실로 네 물품을 거래하였음이여 가공한 쇠와 계피와 대나무 제품이 네 상품 중에 있었도다 (겔27:12, 19) Tarshish was thy trader by reason of the multitude of all riches; in silver, iron, tin, and lead, they gave thy traffickings. Dan, and Javan, and Meusal furnished bright iron in thy tradings; cassia and calamus were in thy mart. (Ezek. 27:12, 19)

 

이 구절들뿐 아니라 같은 장 앞뒤 이어지는 구절들을 볼 때 정말 분명한 것은, 이 모든 표현이 천적, 영적 부들에 대한 의미라는 것과, 모든 특정 표현들, 하나하나 언급된 이름들까지 어떤 특별한 의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words, as well as from what is said both previously and subsequently in the same chapter, it is very evident that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are signified; and that every particular expression, and even the names mentioned, have some specific signification,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piritual, and not verbal.

 

[2]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12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3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렘15:12-13) Can one break iron, even iron from the north, and brass? Thy substance [facultates] and thy treasures will I give for a spoil without price, and this for all thy sins, (Jer. 15:12–13)

 

여기 ‘’과 ‘’은 자연적 진리와 선을 의미하며, 그것이 ‘북방(the north)에서 온다는 것은 그것이 감각적이고 자연적임을 의미합니다. 영적, 천적인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짙은 흑암, 즉 ‘북방’과 같기 때문인데, 빛 혹은 ‘남방(the south)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말입니다. 또 그늘과도 같은데, 그늘은 두발-가인의 ‘어머니’인 ‘씰라’로 의미되는 것입니다. 재산 보물은 천적, 영적 부를 의미하는 게 아주 분명합니다. where “iron” and “brass” signify natural truth and good; that it came from the “north”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natural; for what is natural, relatively to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is like thick darkness (that is, the “north”) relatively to light or the “south”; or like shade, which is also signified here by “Zillah,” who is the “mother.” That the “substance” and “treasures” are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is also very evident.

 

[3] 다시 에스겔입니다. Again in Ezekiel: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겔4:3) Take thou unto thee a pan of iron, and set it for a wall of iron between thee and the city, and set thy faces toward it, and let it be for a siege, and thou shalt straiten against it, (Ezek. 4:3)

 

여기도 역시 ‘’이 진리를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강함은 진리의 속성입니다. 진리를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철을 가리켜 다니엘과 계시록에서, ‘부서뜨리다’, ‘깨뜨리다 하는 것입니다. ‘은 진리, 곧 신앙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where also it is evident that “iron” signifies truth. Strength is attributed to truth, because it cannot be resisted, and for this reason it is said of iron—by which is signified truth, or the truth of faith—that it “breaks in pieces” and “crushes”; as in Daniel (2:34, 40), and in John:

 

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2:26–27) He that overcometh, to him will I give sovereign power over the nations, that he may pasture them with a rod of iron; as the vessels of a potter shall they be broken to shivers. (Rev. 2:26–27)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계12:5) The woman brought forth a man child, who should pasture all nations with a rod of iron. (Rev. 12:5)

 

[4] ‘철장’(鐵杖, a rod of iron)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임을 계시록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That a “rod of iron” is the truth which is of the Word of the Lord, is explained in John: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5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계19:11, 13, 15) I saw heaven open, and behold a white horse, and he that sat upon him was called faithful and true, and in righteousness he doth judge and fight; He was clothed with a vesture dipped in blood, and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out of his mouth goeth a sharp sword, that with it he should smite the nations; and he shall pasture them with a rod of iron. (Rev. 19:11, 13, 15)

 

단2:34, 40

34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40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단2:34,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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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리’의 속뜻, 자연적 선

 

22절,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425

오늘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요, 바로 ‘구리’(銅, brass)는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과, 말씀에 나오는 모든 금속은 그 속뜻으로는 어떤 특별한 의미들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金, gold)은 천적 선을, ‘’(銀, silver)은 영적 진리를, ‘’(銅, brass)은 자연적 선을, ‘’(鐵, iron)은 자연적 진리를, 그리고 그렇게 다른 금속들도 그런데요, ‘나무’(木, wood)와 ‘’(石, stone)도 마찬가지입니다. 법궤와 성막, 그리고 성전에 사용된 ’, ‘’, ‘  나무가 그런 건데요, 그 자세한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거기에 이런 의미들이 있다는 것이 예언서들을 보면 아주 분명히 나타나는데요, 예를 들면, 이사야입니다. It is unknown to the world at the present day that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and also that every metal mentioned in the Word has a specific signification in the internal sense—as “gold,” celestial good; “silver,” spiritual truth; “brass,” natural good; “iron,” natural truth; and so on with the other metals, and in like manner “wood” and “stone.” Such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gold,” “silver,” “brass,” and “wood,” used in the ark and in the tabernacle and in the templ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at such is their signification is manifest from the prophets, as from Isaiah:

 

16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17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사60:16-17) Thou shalt also suck the milk of the gentiles, and shalt suck the breast of kings. For brass I will bring gold, and for iron I will bring silver, and for wood brass, and for stones iron; I will also make thy tribute peace, and thine exactors righteousness, (Isa. 60:16–17)

 

이 내용은 주님의 오심과 그의 나라, 그리고 천적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는 자연적 선을 대신하는 천적 선을,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는 자연적 진리를 대신하는 영적 진리를,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는 육적(肉的, corporeal) 선을 대신하는 자연적 선을, ‘철로 돌을 대신하며는 감각적 진리를 대신하는 자연적 진리를 각각 의미합니다. 에스겔입니다. treating of the Lord’s advent, of his kingdom, and of the celestial church. For brass gold,” signifies for natural good celestial good; “for iron silver,” signifies for natural truth spiritual truth; “for wood brass,” signifies for corporeal good natural good; “for stones iron,” signifies for sensuous truth natural truth. In Ezekiel:

 

야완과 두발과 메섹은 네 상인이 되었음이여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 (겔27:13) Javan, Tubal, and Meshech, these were thy merchants, in the soul of man, and vessels of brass they gave thy trading, (Ezek. 27:13)

 

두로(Tyre), 영적, 천적 부를 소유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두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놋그릇’은 자연적 선입니다. speaking of Tyre, by which are signified those who possess spiritual and celestial riches; “vessels of brass” are natural goods.

 

신명기입니다. In Moses: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신8:9) A land whose stones are iron, and out of whose mountains thou mayest hew brass, (Deut. 8:9)

 

여기 또한 ‘’은 감각적 진리를, ‘’은 자연적, 즉 합리적(rational) 진리를, ‘’은 자연적 선을 가리킵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where also “stones” denote sensuous truth; “iron,” natural, that is, rational truth; and “brass,” natural good. Ezekiel saw:

 

5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6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겔1:7) Four living creatures, or cherubs, whose feet sparkled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Ezek. 1:7)

 

여기 다시 ‘구리’는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은 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에게도 같은 식으로 보였습니다. where again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for the “foot” of man represents what is natural. In like manner there appeared to Daniel,

 

5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단10:5-6) A man clothed in linen, whose loins were girded with gold of Uphaz, his body also was like the beryl, and his arms and his feet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Dan. 10:5–6)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 자연적 선을 표현하는 것을 위 다니엘 본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That the “brazen serpent” (Num. 21:9) represented the sensuous and natural good of the Lord may be seen above.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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