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7 심화

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레7의 화목제에는 아주 미묘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하며 아침까지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서원이나 자원으로 드린 화목제는 그날뿐 아니라 이튿날에도 먹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의도적으로 두 경우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감사는 하루이고 서원과 자원은 이틀일까요? 이것 역시 현재 확인된 스베덴보리의 1차 원전에서 레7:15-16의 차이를 직접 풀어 주는 강한 대목은 찾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첫째 날은 정확히 무엇, 둘째 날은 정확히 무엇’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응 원리에서는 중요한 방향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날’은 단순한 24시간보다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제물을 먹을 수 있는 날의 차이도 단순한 식품 보관 규정 이상의 대표적 의미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특히 감사는 이미 받은 선을 즉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응답입니다. 어떤 은혜를 경험하고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바로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감사는 살아 있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어제 받은 감사를 저장해 두었다가 오늘 자기 공로처럼 꺼내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서원과 자원에는 인간의 의지와 약속이라는 요소가 조금 더 들어옵니다. 서원은 앞으로 행할 것을 약속한 뒤 이루어진 상태와 관련되고, 자원제는 인간이 자유롭게 드리는 응답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감사제와 정확히 같은 시간 규정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세 종류의 화목제가 서로 다른 영적 상태를 표상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감사제는 더 높고 서원제는 더 낮다’는 식으로 순위를 매길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다양한 선한 상태를 하나의 획일적인 방식으로 다루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즉각 솟아나는 감사도 있고,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도 있으며,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공통된 한계가 있습니다. 셋째 날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선이라도 인간이 그것을 붙잡아 proprium의 소유로 만들기 시작하면 처음의 살아 있는 교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의 선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여지고 누려져야 합니다.

 

따라서 레7:15-16은 거듭남이 ‘한 번 받은 은혜를 저장하여 평생 소비하는 삶’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언제나 살아 있으며 인간도 날마다 새롭게 그것을 받아야 합니다. 감사든 서원이든 자원이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선이 현재의 삶 안에서 살아 있는 선이 되는 것입니다. (SWC.레7 심화 2)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bygrace.kr

 

SW.레7 심화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SW.레7 심화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레7:12-13은 레2를 읽은 사람에게 아주 뜻밖의 장면입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WC.레7 심화

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레7:12-13은 레2를 읽은 사람에게 아주 뜻밖의 장면입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를 드립니다. 여기까지는 레2와 익숙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라고 합니다. 레2에서는 ‘누룩을 넣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누룩 있는 빵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본문상 이 차이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무교는 순수하고 정결한 것을 나타내며, 누룩은 여러 문맥에서 거짓이나 불순한 것이 섞이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레2의 소제에서 누룩이 금지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제단에서 여호와께 화제로 올라가는 것은 순수한 선과 진리를 표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7의 유교병에 대해서는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제가 확인한 범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레7:13을 직접 들어 ‘감사 화목제에 유교병을 넣은 이유는 정확히 이것이다’라고 해설하는 강한 원전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누룩 = 악이므로 화목제에 악도 함께 드린다’와 같은 식의 해석은 피해야 합니다. 그것은 상응을 기계적으로 역산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화목제의 전체 구조는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번제는 전부 제단에서 불살라지지만 화목제는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이 함께 먹습니다. 즉 화목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의 실제 삶과 공동체의 기쁨 안으로 들어와 함께 누려지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레7의 감사제에는 제단에 직접 올라가는 거룩한 부분과 인간이 함께 먹는 부분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화목제가 ‘인간이 이미 완전히 천사처럼 순수해진 뒤에만 가능한 교통’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직 자연적 인간의 삶을 살아가며 불완전함이 남아 있는 사람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레7:13에 대한 직접적인 스베덴보리의 해설이 아니라 화목제 전체와 누룩의 일반 상응을 바탕으로 한 ‘유력한 독법’ 정도로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오히려 이 구절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조심스러운 경계에 있습니다. 레2의 무교 소제는 주님께 드려지는 선과 진리의 순수함을 강조하고, 레7의 감사 화목제는 그 선이 인간의 실제 생활 속 기쁨과 교제 안으로 내려오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자연적 삶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주님의 질서 안으로 데려오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완전해진 사람이 마지막에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아직 거듭나는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이 주님께서 주신 선을 발견하고 ‘이것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라고 인정하며 누리는 것이 감사입니다. 레7의 무교병과 유교병이 한 상에 놓이는 장면은 그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그 이상의 세부 상응은 원전이 더 발견될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장 정직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SWC.레7 심화 1)

 

 

 

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레7의 화목제에는 아주 미묘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bygrace.kr

 

SW.레7,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리고 - 주님의 선을 받아 함께 누리는 화목의 완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