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7,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리고 - 주님의 선을 받아 함께 누리는 화목의 완성’

 

1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는 지극히 거룩하니 2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건제의 번제물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3그 기름을 모두 드리되 곧 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4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고 5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속건제니라 6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라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7속죄제와 속건제는 규례가 같으니 그 제물은 속죄하는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8사람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 곧 그 제사장은 그 드린 번제물의 가죽을 자기가 가질 것이며 9화덕에 구운 소제물과 냄비에나 철판에서 만든 소제물은 모두 그 드린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10소제물은 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니라 11여호와께 드릴 화목제물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12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 13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14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15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6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17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19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20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21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무슨 물건을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 것이요 24스스로 죽은 것의 기름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의 기름은 다른 데는 쓰려니와 결단코 먹지는 말지니라 25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26너희가 사는 모든 곳에서 새나 짐승의 피나 무슨 피든지 먹지 말라 27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9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려는 자는 그 화목제물 중에서 그의 예물을 여호와께 가져오되 30여호와의 화제물은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지니 곧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31그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 것이며 32또 너희는 그 화목제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을지니 33아론의 자손 중에서 화목제물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자는 그 오른쪽 뒷다리를 자기의 소득으로 삼을 것이니라 34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35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아론에게 돌릴 것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 것이니 그들을 세워 여호와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한 날 36곧 그들에게 기름 부은 날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돌리게 하신 것이라 대대로 영원히 받을 소득이니라 37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식과 화목제의 규례라 38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령하신 날에 시내 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령하셨더라 (레7)

 

해설

레위기 7장은 레1부터 시작된 제사의 첫 큰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37절은 지금까지 나온 것을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식과 화목제의 규례’라고 한꺼번에 열거합니다. 그래서 레7은 새로운 제사 하나를 소개하는 장이라기보다 앞에서 배운 제사들을 다시 제사장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특히 화목제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제사의 목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죄를 깨닫고 정결하게 되는 것만이 끝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이 제거된 인간은 마침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웃과 함께 누리며, 주님과 결합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1절로 7절은 속건제를 다시 다룹니다. 속건제물은 번제물을 잡던 곳에서 잡고 피는 제단 사방에 뿌리며,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은 기름, 두 콩팥과 그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을 제단에서 불사릅니다. 이것들은 레3의 화목제에서 이미 만났던 요소들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3(출29:13)은 피를 신적 진리와, 기름을 신적 선과 연결하며, AC.10072(출29:22)는 내장을 덮은 기름을 가장 낮은 것 안에 있는 선과 연결합니다. AC.10074(출29:22)는 콩팥을 자연적 인간의 내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속건제가 단순히 ‘잘못에 대한 벌금’을 지불하는 제사가 아님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실제 삶에서 손상된 것을 바로잡게 하실 뿐 아니라 자연적 인간의 가장 안쪽과 바깥쪽까지 선과 진리의 질서로 다시 세우십니다.

 

6절과 7절에서는 속건제가 ‘지극히 거룩하다’고 다시 선언되며 제사장들이 그것을 먹습니다. 레6에서 보았듯이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닙니다. AC.2187(창18:8)은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을 교통, 결합, 자기 것으로 삼음과 연결합니다.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결해진 자리에 주님의 선이 들어와 인간의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버리는 것은 비움이고, 주님의 선을 받아 살아가는 것은 채움입니다. 레위기의 제사들은 이 두 방향을 계속 함께 보여 줍니다.

 

8절로 10절에서는 번제물의 가죽과 여러 소제물이 제사장에게 돌아갑니다. 이것은 제사의 모든 것이 제단 위에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진 것 가운데 어떤 것은 제사장을 통해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레7:8의 ‘가죽’ 자체를 이 문맥에서 무엇이라고 정확히 상응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이번에 충분한 직접 원전을 확보하지 못했으므로 세밀하게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7절로 10절 전체에 ‘돌아갈 것이요’,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니라’가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제사는 인간이 주님께 무엇을 빼앗기는 행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한 뒤 다시 그분에게서 받아 올바르게 누리는 질서를 가르칩니다.

 

11절부터 장의 중심인 화목제 규례가 시작됩니다. 레3에서 화목제의 기본 구조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화목제가 ‘감사’, ‘서원’, ‘자원’이라는 서로 다른 상태에서 어떻게 드려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가 함께 드려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3절에는 ‘유교병’, 곧 누룩이 들어간 빵도 함께 등장합니다. 레2에서는 누룩을 제단의 화제로 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화목제의 감사 식사에서는 유교병이 함께 놓이는 것입니다. 본문 자체가 감사 화목제에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조심스러운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누룩은 문맥에 따라 거짓이나 불순한 것을 의미할 수 있으며, 무교는 순수함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레7:13의 유교병이 왜 특별히 감사 화목제에 허용되는지를 직접 풀어 주는 강한 AC 원전은 이번 검색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유교병은 정확히 이것을 뜻한다’고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문자적 구조만으로도 중요한 차이는 분명합니다. 번제처럼 모든 것을 불살라 주님께 올리는 제사와 달리 화목제는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이 함께 먹는 제사입니다. 즉 인간의 실제 삶과 기쁨과 감사가 주님 앞의 교제 안으로 들어오는 제사입니다. 이 점은 별도 심화에서 원전상 확실한 부분과 해석상 유력한 부분을 구별하여 더 살펴보겠습니다.

 

15절로 18절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감사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하고 아침까지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서원이나 자원으로 드린 화목제는 이튿날까지 먹을 수 있습니다. 단 셋째 날에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며 남은 것은 불살라야 합니다. 실제 본문은 감사제와 서원·자원제 사이에 이 시간 차이를 명확히 둡니다. 여기에는 ‘오늘의 선을 어제의 것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매우 매력적인 영적 독법이 가능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로 확인되지 않은 세부를 확정적인 상응으로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거룩한 선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데에도 상태와 질서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인간의 proprium이 붙들어 자기 소유로 만들기 시작하면 처음의 거룩한 교통이 변질될 수 있습니다.

 

19절로 21절은 그래서 ‘먹는 사람의 상태’를 강조합니다. 화목제 고기가 부정한 것에 접촉되면 먹지 못하며, 부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거룩한 화목제물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앞에서 ‘먹음’이 교통과 결합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받아들이는가뿐 아니라 ‘어떤 상태에서 받아들이는가’도 중요합니다. 거룩한 진리를 많이 알고 입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거룩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붙든 채 거룩한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면 오히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섞게 됩니다. 그래서 정결은 결합보다 먼저 옵니다. 레4-6의 속죄제와 속건제가 레7의 화목제보다 앞에 놓여 있는 것도 이런 큰 질서와 잘 어울립니다.

 

22절로 27절에서는 레3 마지막에서 이미 보았던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다시 매우 강하게 반복됩니다. AC.5943(창45:18)은 바로 레7:23-26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의 기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 곧 천적인 신성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레3에서 확인했듯이 피는 신적 진리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기름과 피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은 선과 진리를 인간의 proprium이 자기 것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와 연결됩니다. 선은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들을 받아 살아갈 수 있지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선하다’, ‘내가 진리를 소유한다’고 하는 순간 주님에게서 온 것을 proprium의 것으로 바꾸기 시작합니다.

 

28절로 36절은 레7의 절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화목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기름과 가슴을 ‘자기 손으로’ 가져옵니다. 가슴은 여호와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삼고, 기름은 제단에서 불사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아갑니다. 또 오른쪽 뒷다리는 거제로 제사장에게 줍니다. 여기에는 매우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AC.10087(출29:26)은 가슴을 ‘체어리티의 선’, 더 높은 의미에서는 신적 영적인 것과 연결합니다. 가슴이 심장과 폐가 있는 부분이며, 중간 또는 둘째 천국의 영적 선과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슴을 흔드는 것은 그 선이 살아나게 되는 것과 연결됩니다.

 

오른쪽 뒷다리에 대해서도 원전이 놀랍도록 분명합니다. AC.10075(출29:22)는 오른쪽 넓적다리 또는 뒷다리를 가장 내적인 천적 선과 연결하고, 레7:32, 34-35를 직접 인용하면서 가슴은 영적 선, 오른쪽 뒷다리는 천적 선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가슴은 둘째 천국의 체어리티의 선을, 오른쪽 뒷다리는 가장 안쪽 셋째 천국의 천적 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둘이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것은 단순한 제사장의 몫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선과 천적 선의 교통과 받아들임을 표상합니다.

 

더구나 AC.10093(출29:27)은 ‘흔드는 것’과 ‘들어 올리는 것’의 차이까지 설명합니다. 가슴을 흔드는 것은 신적 진리가 ‘인정되어 살아 있게 되는 것’을, 오른쪽 뒷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은 주님에게만 속한 신적 선이 ‘지각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의 차이와 연결합니다. 영적 천국에서는 신적 진리를 이해를 통해 ‘인정’하고, 천적 천국에서는 신적 선을 의지를 통해 ‘지각’합니다. 레7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 요제와 거제의 작은 동작 안에 천국의 두 큰 질서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화목제의 ‘화목’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화목은 단지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다가 제물을 보고 마음을 푸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체어리티와 사랑의 삶으로 자기 것이 되고, 다시 주님께 그 근원을 인정하는 교통과 결합의 상태입니다. 제단에는 기름이 올라가고, 제사장에게는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가 돌아가며, 깨끗한 사람들은 화목제의 고기를 함께 먹습니다. 주님과 제사장과 백성이 하나의 제사 안에서 연결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37절과 38절은 레1-7 전체를 아주 아름답게 닫습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위임식, 화목제가 모두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 506도 레7:1, 11, 37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러한 제사 규례들을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에 속한 것으로 열거합니다. 각각의 제사는 따로 떨어진 종교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하나의 거듭남의 질서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레1의 번제에서 인간 전체가 주님의 사랑에 드려지는 모습을 보았고, 레2의 소제에서 선과 진리가 삶의 예물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레3의 화목제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레4와 5의 속죄제에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레5와 6의 속건제에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실제로 회복하는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레7은 다시 화목제로 돌아와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의 목적은 죄 없는 사람처럼 자신을 관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이 자기 삶이 되고, 그 선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결합의 삶에 있습니다. 그래서 레7의 마지막 모습은 제물을 잃어버린 인간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함께 먹고 누리는 인간입니다. 정결은 화목을 향하고, 회개는 결합을 향하며, 거듭남은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향합니다. (SWC.레7 해설)

 

심화

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SW.레7 심화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SW.레7 심화1.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었을까?’ 레7:12-13은 레2를 읽은 사람에게 아주 뜻밖의 장면입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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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SW.레7 심화2. ‘왜 감사제는 그날 먹고 서원제와 자원제는 이튿날까지 먹었을까?’ 레7의 화목제에는 아주 미묘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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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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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SW.레7 심화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SW.레7 심화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레3의 마지막 말씀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였습니다. 그런데 레7:22-27에서는 같은 명령이 훨씬 더 길고 강하게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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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레7:30-34에는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재미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화목제물을 가져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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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8,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고 - 제사장 위임식에 감추어진 거듭남과 쓰임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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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 ‘제단의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 회복에서 영원한 사랑의 불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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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1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2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3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5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6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릴지며 7만일 그의 예물로 드리는 것이 어린 양이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8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9그는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그 기름 곧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0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1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니라 12만일 그의 예물이 염소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13그것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14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5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7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3)

 

해설

레위기 3장에 들어서면 세 번째 제사인 ‘화목제’가 등장합니다. 레1에서는 번제를, 레2에서는 소제를 살펴보았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고,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더하여 일부를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를 제사장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화목제에서는 다시 동물과 피가 등장하지만, 번제와는 제사의 구조가 다릅니다. 제물 전체를 불사르지 않고 특별히 ‘기름’을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는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레3을 여는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는 ‘왜 화목제에서는 피와 기름이 이토록 중요하게 다루어지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짐승들이 아무 의미 없이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823(창15:9)은 소, 염소, 숫양, 어린양,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 등이 각각 고유한 의미를 가졌으며, 바로 그 때문에 한 종류를 다른 종류로 임의로 바꾸어 드릴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일상의 번제, 안식일과 절기의 제사, 자원제와 서원제, 화목제, 속죄와 정결의 제사마다 특정 동물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각각 다른 천적·영적 상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레3에서는 소와 양과 염소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레1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소 떼에 속한 동물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정서를, 양 떼에 속한 동물은 속 또는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정서를 표상합니다. AC.9391(출24:5)은 소와 송아지가 자연적 인간의 선과 관계하고, 양과 어린양 등이 속 또는 영적 인간의 선과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3의 화목제 역시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결합은 속 사람에서만 이루어지고 겉 사람은 그대로 남는 일이 아니라, 속과 겉이 함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화목제에서는 ‘수컷이나 암컷이나’ 드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번제에서는 수컷을 요구했지만 화목제에서는 둘 다 허용됩니다. 이것이 의미 있는 차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 확보한 직접 원전만으로 레3의 수컷과 암컷을 각각 세밀하게 나누어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물의 종류와 성별까지도 대표교회의 제사에서 아무 의미 없는 규정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원전이 직접 밝혀 주는 데까지만 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머리에 안수합니다. 레1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수는 단순히 손을 얹는 의식이 아닙니다. AC.10023(출29:10)은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전달과 받아들임, 곧 커뮤니케이션과 리셉션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머리는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에는 그 제사가 예배자의 전 존재와 관계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화목은 바깥에서 어떤 의식 하나를 행함으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과 관계합니다.

 

제물을 잡으면 제사장들이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립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제단은 주님의 신적 선과 그분께 드리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것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화목제의 깊은 중심이 드러납니다. AC.10047(출29:16)은 제단 둘레에 피를 뿌리는 것이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인간의 거듭남 역시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과정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화목’을 단순히 ‘하나님께 화가 나셨는데 제물을 드려 마음을 풀어 드린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서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방해하는 것은 주님 편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 안의 악과 거짓입니다. 인간이 진리를 받아 악을 피하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될 때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더 온전히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화목제의 피가 제단 사방에 뿌려지는 장면은 바로 이 ‘진리와 선의 결합’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레3에서 특별히 반복되는 것은 ‘기름’입니다. 소를 드릴 때도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을 떼어내고, 양을 드릴 때도 기름진 꼬리와 내장의 기름을 떼어내며, 염소를 드릴 때도 같은 명령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침내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왜 기름이 이토록 중요할까요?

 

AC.10033(출29:22)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한 답을 줍니다. 제사의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제사의 모든 피가 제단에 드려지고 모든 기름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레3의 기름은 단순히 고대인들이 가장 좋은 부위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기름은 선을,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여기서 레3의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피와 기름이 함께 있습니다. 신적 진리와 신적 선입니다.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은 제단의 불에 올라갑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레2에서도 고운 가루와 기름을 통해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았는데, 레3에서는 그것이 피와 기름이라는 더욱 강렬한 표상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말씀의 진리는 인간을 선으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올바른 형태와 방향을 얻습니다. 거듭남은 이 둘이 인간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기름을 떼어내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어느 부위의 기름인지 매우 세밀하게 지정하신다는 점입니다. ‘내장에 덮인 기름’,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얼핏 보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낯설고 불필요해 보이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세부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AC.10072(출29:22)는 내장을 덮는 기름이 ‘가장 낮은 것들 안에 있는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내장은 자연적 인간의 가장 낮은 것들과 관계하고, 그 위의 기름은 그 가장 낮은 차원까지 내려와 있는 선을 표상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이 인간의 고상한 종교적 생각에만 머물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말투, 습관, 돈을 쓰는 방식, 일상의 관계, 몸과 감각의 즐거움을 다루는 방식처럼 삶의 가장 바깥쪽까지 주님의 선이 내려와야 합니다.

 

간에 덮인 꺼풀도 의미가 있습니다. AC.10073(출29:22)은 그것을 ‘정결하게 된 자연적 인간의 내적 선’과 연결합니다. 간이 몸에서 피를 정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이 표상에도 정결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인 행동만 조금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인간 안쪽에 숨어 있는 동기와 정서까지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이 있습니다. AC.10074(출29:22)는 콩팥이 ‘정결하게 된 자연적 인간의 내적 진리’를, 그 위의 기름은 그 진리에 속한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AC.10032은 콩팥의 기능에서 그 상응을 설명하면서, 콩팥은 살피고 정결하게 하고 바로잡는 진리와 관계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에서도 주님께서 ‘마음과 뜻을 살피신다’고 할 때 원문에서 콩팥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레3의 제단 위에는 단순히 동물의 지방 조직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상응의 언어로 보면 인간의 자연적 삶 가장 깊은 곳까지 선과 진리가 들어와 정결하게 되고, 그 정결해진 선과 진리가 사랑의 불 안에서 주님께 돌려지는 모습입니다. 주님과의 화목은 인간의 일부만 주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상태가 아닙니다. 속 사람에서 시작된 주님의 질서가 자연적 인간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양의 화목제에서는 한 가지 독특한 것이 더 등장합니다.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입니다. 이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세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세세한 부위까지 천국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확보한 직접 원전만으로 레3의 ‘기름진 꼬리’ 자체의 의미를 충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기름 = 선’이라는 확실한 원칙을 넘어 꼬리의 세부 의미를 임의로 만들어 내지 않겠습니다.

 

제사장은 이 기름들을 제단 위의 ‘번제물 위에서’ 불사릅니다. 이 표현도 중요합니다. 화목제가 번제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단 위에 있는 번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번제가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표상한다면, 화목제 역시 그 사랑의 질서 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진정한 화목과 결합은 사랑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실제로 음식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와 번제가 ‘떡’ 또는 음식이라고 불린 이유가 그 안에서 표상된 천적 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AC.10079(출29:23)는 떡이 사랑의 선을 의미하며, 제사와 번제 역시 이러한 이유로 ‘떡’이라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고기와 지방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표상하는 사랑의 선과 그 선에서 나오는 참된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레1과 레2에서 반복해서 만났던 표현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는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주님께서 동물의 타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레1의 번제, 레2의 소제, 레3의 화목제는 서로 다른 제사이면서도 모두 한곳을 향합니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고, 그 사람의 삶이 사랑에서 나오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17절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강력한 명령으로 마무리합니다.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AC.10033은 바로 레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표상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여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신적 선과 신적 진리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영적 삶에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내가 어떤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 알아냈다’고 생각하고, 어떤 선을 행했다고 해서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영적으로 피와 기름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는 위험에 빠집니다. 인간은 선과 진리를 받아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도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레3은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화목제의 핵심은 결국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신적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통해 인간을 정결하게 하시며, 인간 안의 진리와 선을 결합시키십니다. 그 결합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높은 곳에서 자연적 삶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인정합니다. 바로 그때 주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레3 앞에서 우리는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가?’라는 질문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이 물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있는가?’, ‘내 자연적 삶의 가장 낮은 부분까지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려와 있는가?’, ‘나는 내가 행하는 선을 나의 공로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아는 진리를 나의 지혜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레1에서 우리는 전부를 불살라 주님께 드리는 번제를 보았습니다. 레2에서는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하나가 되는 소제를 보았습니다. 이제 레3에서는 피와 기름, 곧 진리와 선이 함께 제단에 드려지는 화목제를 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레3의 마지막 선언은 화목제 전체를 꿰뚫는 고백이 됩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우리의 선도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 선과 진리가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은 주님과 결합하는 화목의 삶이 됩니다. (SWC.레3 해설)

 

심화

1. 화목제의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

 

SW.5 심화 1, 화목제의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

SW.5 심화1. 화목제의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 ‘화목제’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사이가 나빠진 인간이 제물을 드려 하나님과 다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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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SW.5 심화 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SW.5 심화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레위기 3장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가장 낯선 부분은 아마 제물의 내장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내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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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 하셨을까?’

 

SW.5 심화 3,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 하셨을까?’

SW.5 심화3.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 하셨을까?’ 레위기 3장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매우 강한 명령으로 끝납니다. 더구나 이것은 한 번의 제사에만 적용되는 임시 규정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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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6, 레4,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 - 속죄제에 감추어진 악의 인식과 정결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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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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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2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드시 넣도록 한 것입니다. 특히 꿀까지 금지했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성경에서 꿀은 흔히 좋은 것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규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37(출29:40)은 레2:11-13의 규정을 직접 다루면서 누룩은 ‘악에서 나오는 거짓’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악이 먼저 있고 그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제에 누룩을 넣지 않는 것은 주님께 드리는 예배 안에 악에서 나온 거짓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꿀은 조금 다릅니다. 꿀은 그 자체로 언제나 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꿀이 자연적 인간의 즐거움, 외적인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의 즐거움에 오염되어 거룩한 것과 섞이는 경우입니다. AC.5650(창43:11)은 바로 레2:11을 인용하면서 꿀이 세상에서 감각을 통해 오는 외적 즐거움과 관계하기 때문에 소제에서 금지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에는 깊은 기쁨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 때문에 기쁜가?’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 기쁜 것인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서 기쁜 것인지, 종교적인 일을 통해 명예나 영향력을 얻어서 기쁜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웃에게 실제 선이 이루어져서 기쁜 것인지가 다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예배와 선행이라도 그 안에 ‘꿀’이 섞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칭찬을 기대하고 행하는 선, 자기 의를 즐기는 봉사, 인정받지 못하면 금세 낙심하거나 분노하는 헌신이라면 외적인 즐거움이 예배의 동기 속에 깊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레2는 그런 것을 제단의 불에 올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누룩과 꿀을 빼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AC.9207(출22:22)은 레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소금이 ‘진리가 선을 갈망하고 선이 진리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언약의 소금’이라고 부릅니다. 언약은 결합이고, 소금은 그 결합을 향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참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진리는 실제 용서의 선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실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반대로 참된 선은 진리를 원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무엇이 상대방에게 실제로 유익한지 알지 못한다면 선한 의도만으로 잘못된 일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은 진리를 통해 형태와 방향을 얻습니다.

 

그래서 소금은 단순히 ‘변하지 않게 보존한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소금의 핵심은 ‘결합을 향한 갈망’입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예물에 있어야 합니다.

 

레2의 이 세 가지를 나란히 놓으면 놀라운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누룩은 빼라. 꿀도 제단의 불에 올리지 말라. 그러나 소금은 절대로 빼지 말라.’ 악에서 나오는 거짓은 버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물든 외적 즐거움도 예배의 동기로 삼지 말되, 선과 진리가 결합하려는 갈망만은 절대로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와 신앙생활을 돌아보며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내 신앙에는 어떤 누룩이 들어 있는가?’, ‘내가 주님을 섬기면서 은밀히 맛보고 싶은 꿀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 소금이 있는가? 내가 아는 진리가 실제 선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가?’

 

주님께서 찾으시는 소제는 겉으로 화려한 소제가 아닙니다. 거짓이 섞이지 않고, 자기 사랑의 즐거움이 지배하지 않으며,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기를 갈망하는 소제입니다. 그래서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는 짧은 말씀은 우리의 모든 예배와 삶을 관통하는 명령이 됩니다. (SWC.레2 심화 2)

 

 

 

SW.4 심화 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SW.4 심화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와 레위기 2장의 소제 사이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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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SW.4 심화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레위기 2장의 소제를 가장 짧게 표현한다면 ‘고운 가루 + 기름 + 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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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2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레위기 2장의 소제를 가장 짧게 표현한다면 ‘고운 가루 + 기름 + 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를 함께 드리도록 하셨을까요? 단순히 향기롭고 좋은 제물을 만들기 위한 조리법이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세 가지의 결합 속에서 소제의 핵심적인 영적 질서를 봅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은 놀랍게도 레2:1-2를 직접 인용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고운 가루가 진정한 진리를 의미하고,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소제의 세 재료는 단순한 음식 재료가 아니라 ‘진리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함께 있는 예배를 보여 줍니다.

 

고운 가루부터 살펴보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95(출29:2)는 고운 가루를 ‘선에서 나오는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진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선에서 신적 진리가 나오며, 인간 안에서도 참된 진리는 결국 선을 섬기고 선으로 인도합니다. 따라서 고운 가루는 단순히 많이 배운 교리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선하게 만드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고운 가루만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위에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기름은 사랑의 선을 표상합니다. 진리에 사랑이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진리라도 사랑과 분리되면 사람을 살리는 진리가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한 진리,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진리, 지적 우월감을 위한 진리는 고운 가루만 있고 기름이 없는 상태와 비슷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사랑 안에서 사용될 때 그 본래의 목적을 이룹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향이 더해집니다.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과 관계합니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이웃 사랑과 체어리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제 안에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사랑의 선이 오고, 그 선에서 진리가 나오며, 그 사랑과 진리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을 점검하는 매우 좋은 기준이 됩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 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에는 기름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향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더 온유하고 정직하며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는 신앙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면 메마른 지식이 되기 쉽고, 사랑이라고 하면서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으로 선한 것인지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주님 사랑을 말하면서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 사랑 역시 삶에서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한 소제 안에 함께 놓이는 것은 그래서 매우 아름다운 상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사람’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고,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은 하나의 소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사랑과 삶도 하나가 됩니다. (SWC.레2 심화 1)

 

 

 

SW.4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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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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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1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3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4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5철판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6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지니 이는 소제니라 7네가 냄비의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 8너는 이것들로 만든 소제물을 여호와께로 가져다가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가서 9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0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11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12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지 말지며 13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14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되 15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지니 이는 소제니라 16제사장은 찧은 곡식과 기름을 모든 유향과 함께 기념물로 불사를지니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레2)

 

해설

레위기 1장이 피 흘리는 동물의 번제였다면 레위기 2장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피도 없고 짐승의 죽음도 없습니다. 대신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등장하고, 화덕과 철판과 냄비에서 음식을 만들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나 두 장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레1의 번제가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보여 주었다면, 레2의 소제는 그 사랑이 진리와 결합하여 인간의 삶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예배가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소제는 먹을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단순한 곡물 제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결합하여 주님께 드려지는 삶의 예배를 표상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전 가운데 하나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소제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고 유향을 더하여 드리는 제사였다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모두 사랑과 체어리티에 속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표상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레위기 2장 전체가 소제를 어떻게 준비하는지를 다루는 장이라고 직접 언급합니다. 따라서 레2를 읽을 때 우리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을 각각 따로 떨어진 상징으로 보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소제가 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재료는 ‘고운 가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고운 가루가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의미한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AC.9995, 출29:2). 그냥 진리가 아니라 ‘선에서 나오는 진리’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천국의 모든 진리와 선은 주님의 신적 선에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에서 비롯되며, 진리는 선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소제의 고운 가루는 머릿속에 저장된 교리 지식이나 성경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그 선을 표현하고 섬기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고운 가루 위에 반드시 ‘기름’을 붓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기름은 사랑의 선,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함께 있다는 것은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AC.10136(출29:40)은 고운 가루와 기름이 결합된 것을 ‘천적 선으로부터 나오는 영적 선’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진리가 사랑에서 나와 사랑을 섬길 때 그것은 더 이상 머릿속 지식에 머물지 않고 삶을 움직이는 진리가 됩니다.

 

여기에 다시 ‘유향’이 놓입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은 레2:1-2를 직접 인용하면서 소제의 고운 가루는 진정한 진리를,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을,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유향은 이웃을 향한 사랑, 곧 체어리티와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레2 첫 두 절에는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이 있고,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가 있으며,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갑니다. 소제는 이 세 가지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예배가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소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운 가루에는 기름이 부어져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향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에게 무정하다면 아직 소제의 질서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생활에서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 사랑으로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제사장은 그 가운데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여기서 ‘한 움큼’도 의미 없는 양의 규정이 아닙니다. AC.2177은 손이나 손바닥이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 움큼’은 힘을 의미하며, 소제에서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은 온 힘 또는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제단의 불은 사랑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소제의 일부를 한 움큼 취하여 불사르는 것은 인간이 가진 선과 진리가 사랑 안에서 주님께 돌려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것을 본문은 ‘기념물’이라고 부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잊으셨다가 그 연기를 맡고 기억하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제 전체 가운데 주님께 드려지는 부분이 제단의 불 위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레1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불은 사랑을, 향기로운 냄새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제 역시 결국 사랑으로 돌아갑니다. 진리는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과 결합하며,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고, 다시 사랑의 불 안에서 주님께 드려집니다.

 

그런데 소제 전체를 불사르지는 않습니다.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레1의 번제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번제는 전부를 불살랐지만 소제는 일부만 제단 위에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이 먹습니다. AC.2177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소제를 먹는 것이 인간 편에서의 응답과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 바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받아들여 자신의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제에는 ‘주님께 드림’과 ‘인간이 받아 삶으로 삼음’이라는 두 방향이 함께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에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면서 ‘이 선은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삶으로 받아들이며, 다시 주님께 돌리는 이 순환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4절부터는 소제를 만드는 방법이 다양해집니다. 화덕에 굽기도 하고, 철판에 부치기도 하며, 냄비에서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기름을 섞고 어떤 것은 기름을 바르며, 어떤 것은 조각으로 나눈 뒤 다시 기름을 붓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서로 다른 소제의 조리법까지도 각각 천국의 아르카나를 담고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실제로 AC.10137(출29:40)은 화덕, 철판, 냄비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소제를 직접 언급하며, 소제의 모든 세부 규정 안에 신적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현재 확보된 직접 원전만으로 화덕·철판·냄비 각각을 레2의 문맥에서 세밀하게 구별하여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와 준비 방식은 달라도 ‘고운 가루와 기름’이라는 중심 구조가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거듭남의 삶이 똑같은 외적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생각하게 합니다. 각 사람의 환경과 쓰임, 성품과 삶의 형편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양성 안에서 변하지 않는 중심은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어떤 모습의 소제든 고운 가루와 기름이 있어야 하듯, 참된 영적 삶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그 선을 표현하는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11절에서는 매우 강한 금지 명령이 등장합니다.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누룩뿐 아니라 꿀까지 금지한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누룩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도 꿀은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거의 직접 해설합니다. AC.10137은 소제에 누룩과 꿀을 넣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누룩은 ‘악에서 나오는 거짓’을, 꿀은 세상 사랑의 즐거움이 많이 섞여 있는 외적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천국의 선과 진리에 섞이면 그것들을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꿀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꿀이 자연적 선의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그 즐거움이 거룩한 예배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이유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인정받는 즐거움과 성공의 만족, 자기 의가 주는 기쁨, 세상적인 보상을 얻기 위한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은 선행과 예배처럼 보여도 그 안에 무엇이 섞여 있는가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룩과 꿀은 금하면서 모든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치라고 합니다. 더구나 그것을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레2의 가장 아름다운 상응 가운데 하나입니다. AC.9207(출22:22)은 레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모든 예물에 소금을 넣는 것은 모든 예배 안에 ‘진리가 선을 갈망하고 선이 진리를 갈망하는 것’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언약은 결합을 의미하고, 소금은 그 결합을 향한 갈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언약의 소금’이라고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레2 전체의 중심을 다시 밝혀 줍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기를 원합니다. 참된 진리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참된 선은 진리를 통해 무엇이 실제로 선한지를 분별하고 행하기를 원합니다. 이 둘이 서로를 향하는 갈망이 ‘소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하십니다. 예배의 모든 것 안에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려는 갈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4절부터는 ‘첫 이삭의 소제’가 등장합니다. 첫 이삭을 볶고 찧어서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하여 드립니다. 말씀에서 처음 익은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선과 진리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와 깊이 관계합니다. AC.9300(출23:19)은 첫 열매를 여호와의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 교회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주님께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첫 이삭을 드리는 행위에는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입니다’라는 인정이 들어 있습니다.

 

이 점에서 소제는 인간의 공로와 정반대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깨달았을 때 ‘내가 알았다’고 생각하기 쉽고, 선한 일을 했을 때 ‘내가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첫 열매를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 진리도, 그 선을 행할 능력도, 그 선을 사랑하게 된 마음도 근원적으로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유롭게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이제 레위기 2장 전체를 다시 보면 하나의 매우 아름다운 흐름이 나타납니다. 고운 가루가 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 위에 기름이 부어집니다. 사랑의 선입니다. 유향이 놓입니다.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영적 선, 곧 체어리티입니다. 한 움큼이 사랑의 불 위에 올라가고, 남은 것은 제사장이 먹어 인간의 삶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악에서 나오는 거짓인 누룩은 제거되고, 세상 사랑에 물든 외적 즐거움인 꿀도 제단의 불에 섞이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것에 소금이 들어갑니다. 진리와 선이 서로 결합하기를 갈망하는 ‘언약의 소금’입니다. 그리고 첫 이삭을 드리면서 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레1과 레2는 아름답게 이어집니다. 레1이 ‘나의 전부가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드려지는가?’를 묻는다면, 레2는 한 걸음 더 구체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사랑의 기름과 섞여 있는가?’, ‘주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유향으로 나타나는가?’, ‘내 예배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누룩과 꿀이 섞여 있지 않은가?’, ‘내 안의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갈망하는가?’,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소제는 피 없는 제사이지만 결코 가벼운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매일의 삶에 매우 가까운 제사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 품는 사랑, 이웃에게 행하는 선, 일상의 수고와 쓰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누구의 것으로 인정하는가가 소제 안에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운 가루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위에 기름이 부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과 진리가 우리 안에서 실제 삶이 되어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일상은 하나의 소제가 되고, 삶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SWC.레2 해설)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SW.4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SW.4 심화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레위기 2장의 소제를 가장 짧게 표현한다면 ‘고운 가루 + 기름 + 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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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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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SW.4 심화 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SW.4 심화3. ‘왜 소제의 일부만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와 레위기 2장의 소제 사이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습니다. 번제에서는 제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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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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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3, 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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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 해설’(Swedenborg Word Commentary)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C.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1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0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11그가 제단 북쪽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것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12그는 그것의 각을 뜨고 그것의 머리와 그것의 기름을 베어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 벌여 놓을 것이며 13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4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드릴 것이요 15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다가 그것의 머리를 비틀어 끊고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피는 제단 곁에 흘릴 것이며 16그것의 모이주머니와 그 더러운 것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던지고 17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1)

 

해설

레위기를 펼치면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낯선 세계가 나타납니다. 소와 양과 염소를 잡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며,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고, 마침내 제물을 불태웁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레위기 1장은 자칫 오래전에 폐지된 제사 규정을 기록한 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번제와 희생제사의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으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의 영화에 관한 것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은 단순히 짐승을 어떻게 잡고 불사를 것인가를 가르치는 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고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게 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의 첫 장은 인간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먼저 부르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출애굽기 마지막에서 성막이 완성되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한 뒤, 바로 이어지는 레위기의 첫 음성이 ‘부르심’이라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784(출27:20)는 ‘회막’이 주님의 임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출발점은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인간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님입니다. 거듭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아내고 무엇인가를 드려 주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며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인간이 가지고 나오는 것이 ‘예물’입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소의 번제입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들이 아무렇게나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각각의 동물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그리고 서로 다른 예배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특별히 소 떼에 속한 동물들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하며, 수송아지는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이노센스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합니다(AC.9391, 출24:5). 그러므로 번제는 우리의 종교적 생각이나 감정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실제 생활, 곧 말과 행동, 습관과 관계, 일상의 선택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이것 역시 단순한 의식적 접촉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전달과 이전과 받아들임을 표상한다고 설명하며, 머리는 전체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AC.10023, 출29:10). 따라서 이 장면에는 인간 자신과 번제가 표상하는 예배 사이의 결합이라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는 나와 상관없는 짐승 하나가 대신 죽는 외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번제가 표상하는 정결과 거룩하게 됨이 바로 나의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며, 나의 생각과 의지와 삶 전체입니다.

 

그 다음에는 피가 등장합니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피가 신적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하고(AC.10046, 출29:16), 그 피가 제단에 뿌려지는 것은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47, 출29:16). 이것은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막연히 착해지고 싶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우리 삶 안으로 들어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밝히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며 살아갈 때 정결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우리 안의 선과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뿌려지는 피는 단순히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진리가 결합하게 하는 신적 진리의 표상입니다.

 

이제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이 두 행위에도 분명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세한 의식과 절차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으며, 그것들이 인간의 거듭남을 표상한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AC.10057, 출29:18). 그러나 여기서는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죽’이 말씀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바깥의 것을 표상한다는 원리는 확인할 수 있지만, 레1:6의 ‘가죽을 벗기는 행위’ 자체를 스베덴보리가 정확히 어떻게 적용하는지 충분한 직접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각을 뜨는 것’ 역시 의미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상응은 현재로서는 보류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상응은 우리의 상상력이 아니라 말씀 안에 주님께서 두신 질서이므로, 확인되는 만큼만 읽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에서는 다시 매우 분명한 길이 열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내장을 씻는 것이 가장 낮은 것들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AC.10049, 출29:17), 이어 정강이는 자연적 인간의 외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AC.10050, 출29:17). 인간의 가장 낮고 자연적인 부분은 세상과 직접 접촉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감각적 즐거움과 오류에 쉽게 물듭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도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과 관계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악에서 돌이킬 때 자연적 인간도 점차 정결하게 됩니다.

 

여기서 레위기 1장의 거듭남 이해가 매우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자연적 인간을 없애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몸도 없애지 않으시고, 일상생활도 없애지 않으시며,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도 없애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을 씻으십니다. 거짓과 악에 물든 것을 진리로 정결하게 하시고, 자연적 인간이 속 사람을 섬기며 주님의 선을 실제 삶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질서 안에 두십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존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 안에서 바르게 표현되도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질서 있게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씻은 내장과 정강이는 버리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로 드립니다. 여기서 번제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전부’입니다. 머리만도 아니고, 좋은 부분만도 아니며, 속 사람만도 아닙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부분까지 씻긴 후에는 모두 제단의 불 위로 올라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이 주님과 그분께 드리는 예배에 사용될 때 사랑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향기로운 냄새’는 주님께 기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으로부터의 예배라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1:9, 13, 17을 인용합니다(AC.925, 창8:21). 그러므로 번제의 마지막은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인간 전체가 정결해져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가 번제가 지향하는 내적 실재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도 문자적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이 타는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 향기로운 것은 제물의 연기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사랑하며,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변화된 삶이 주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AC.925, 창8:21).

 

10절부터는 양이나 염소의 번제가 이어집니다. 절차는 소의 번제와 매우 비슷하지만 제물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소 떼의 동물들과 양 떼의 동물들을 구별하며, 전자가 겉 또는 자연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면 후자는 속 또는 영적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애정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391). 이것은 번제가 인간의 겉 생활만이 아니라 속의 애정과 의도까지 관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겉으로 선한 일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반대로 선한 뜻을 품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거듭남은 어느 한쪽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속과 겉이 함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소의 번제에서 양과 염소의 번제, 다시 새의 번제로 이어지는 순서를 거듭남의 시간적인 ‘1단계, 2단계, 3단계’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제물이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 및 예배 상태를 표상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레1의 배열 자체를 인간이 차례로 통과하는 세 단계라고 직접 설명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 종류의 번제는 거듭나는 인간 전체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층위와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층위가 결국 하나의 목적, 곧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상태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다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짐승이 아니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가 번제를 드린 창8:20을 해설하면서 레1:3-17을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번제에 사용된 소와 어린양과 염소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각각 특별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으며, 큰 구별에서 짐승은 체어리티의 선을, 새는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AC.922, 창8:20). 또한 비둘기는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신앙의 진리와 선, 특별히 신앙의 이해에 속한 것들과 관계합니다(AC.870, 창8:8-9).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애정만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이해, 곧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능력까지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 역시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진리는 인간을 선으로 인도하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새의 번제도 마지막에는 똑같이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로 끝납니다. 소의 번제도, 양이나 염소의 번제도, 새의 번제도 마지막 목적지는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선과 진리, 서로 다른 인간의 상태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새의 번제에는 ‘모이주머니와 그 더러운 것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던지고’,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라는 매우 특이한 규정도 있습니다. 이것들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절차는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세부 규정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된 원전만으로 ‘모이주머니는 이것이다’, ‘날개 자리에서 찢는 것은 이것이다’, ‘아주 찢지 않는 것은 이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즉시 상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확인된 상응에는 충실하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곳에서는 멈출 줄 아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레위기 1장 전체를 다시 보면 처음 보았던 피와 죽음과 불의 장면 뒤에서 하나의 놀라운 거듭남의 서사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회막에서 인간을 부르십니다.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갑니다.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자신과 그 예배가 결합합니다. 피, 곧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선과 결합합니다. 가장 낮은 자연적 삶까지 진리의 물로 씻깁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함께 주님께 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부’가 불 위에 놓입니다. 인간 전체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전체 과정을 매우 간결하고 실제적으로 정리합니다. 희생제사와 번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 선과 진리의 심음,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AC.10143, 출29:42). 그리고 악과 거짓에서 정결해진다는 것은 그것들을 삼가고 피하며 싫어하는 것이고, 선과 진리가 심어진다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을 생각하고 의지하며 말하고 행하는 것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번제는 종교적 감정의 한 순간이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결단에 머물지 않습니다. 실제 삶 전체가 주님의 선과 진리에 의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희생할 것인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 안에서 아직 진리의 물로 씻기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내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하나가 되어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실제 선한 삶과 결합하고 있는가?’, ‘나의 가장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삶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가?’, 그리고 ‘내 삶 전체는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고 있는가?’입니다.

 

번제와 희생제사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내적 예배를 표상하는 외적 형식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외적 제사가 내적 예배와 분리되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AC.922). 그러므로 오늘날 동물의 번제가 사라졌다고 해서 레위기 1장의 말씀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표상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그 표상 안에 감추어져 있던 내적 실재, 곧 실제 삶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을 읽어야 합니다.

 

레위기 1장의 번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그 안에 심으시며, 그것들을 서로 결합하셔서 마침내 인간의 가장 깊은 애정에서 가장 바깥의 일상생활까지 주님을 향하게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인간의 예배는 더 이상 입술이나 의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삶 전체가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라는 번제의 아르카나이며, 주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SWC.레1 해설)

 

심화

1. ‘왜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명하셨을까?’

 

SW.3 심화 1, ‘왜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명하셨을까?’

SW.3 심화1. ‘왜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명하셨을까?’ 레위기 1장을 처음 읽는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동물을 죽여 제물로 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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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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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3 심화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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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내장과 정강이까지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3 심화 3, ‘왜 내장과 정강이까지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3 심화3. ‘왜 내장과 정강이까지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 규례 가운데 특별히 눈길을 끄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라는 규정입니다.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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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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