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4 심화

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레위기 4장의 속죄제를 읽을 때 기독교인은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죄를 범한 인간 대신 흠 없는 제물이 죽고 피가 흘려지며, 마지막에는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고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를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무죄한 제물이 대신 받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익숙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레4를 읽으면 강조점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제물의 죽음과 피를 단순한 형벌의 이전으로 읽기보다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는 주님의 구원 역사’로 읽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임의로 속죄제의 뜻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설명에서 레4:3, 8, 14, 20, 21, 24, 25, 29, 33, 34를 직접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 한 문장은 레4를 바라보는 시선을 크게 바꿉니다. 속죄의 핵심이 ‘누가 형벌을 받는가?’보다 ‘인간에게서 무엇이 제거되는가?’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가 나셔서 누군가를 처벌해야만 용서하실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 자신이 악과 거짓 안에 있음으로써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하려면 실제로 악과 거짓이 물러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주님께서 세상에서 겪으신 모든 시험의 마지막이며, 그 시험들을 통하여 지옥을 이기시고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영화롭게 하신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지옥을 정복하시고 당신의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악과 거짓을 이길 능력이 주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제물은 단순히 ‘하나님이 죄인 대신 벌하신 희생물’이라는 그림보다 훨씬 깊게 주님을 가리킵니다. 제사의 가장 높은 의미에는 주님의 영화가 있고, 상대적 의미에는 인간의 거듭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과 지옥의 세력을 이기신 그 신적 역사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 인간 안에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과 거듭남으로 나타납니다.

 

피의 의미도 여기에서 달라집니다. 피는 단순히 ‘누군가 죽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AC.4735는 구약의 성별·속죄·정결 의식에 사용된 피가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발출하는 거룩한 것, 곧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레4:6-7, 17-18, 25, 30, 34를 직접 열거합니다.

 

왜 진리가 속죄에서 중요할까요? 진리가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진리는 단순히 죄를 폭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인간을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AC.2832(창22:13)는 레4의 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규정을 직접 인용하면서 모든 속죄와 정결이 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유는 진리가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사함’도 단순한 법정 선언으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악을 계속 사랑하고 붙들면서도 다른 누군가가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악을 없는 것으로 보아 주신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실제로 구원하기 원하시며, 그것은 인간이 악에서 돌이켜 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물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레4의 피를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는 것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AC.716(창5:24)은 레4:2-3, 6을 직접 인용하면서 일곱이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은 속죄가 오직 주님에게 속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정결의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죄를 깨달아야 하고, 인정해야 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악을 강제로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진리에 응답할 때 악을 물러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레4의 긴 제사 절차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주님 앞에 가져오고, 진리로 정결하게 되고, 악이 제거되고, 선이 회복되며, 그 결과 ‘사함을 받으리라’는 선언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히 후자에 중심을 둡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의 결과가 인간에게 실제로 무엇을 이루는지를 더 깊이 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죄인인데도 죄인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의 지배에서 실제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속죄제의 마지막에 ‘사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함은 악을 사랑한 채 형벌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을 받아 악의 지배에서 풀려나 주님과 다시 결합되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속죄제는 바로 그 정결과 회복의 아르카나를 외적인 제사의 언어로 보여 줍니다. (SWC.레4 심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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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 심화

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죽고 피를 흘린다는 모습이 주님의 죽음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구약의 희생제사를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사건의 예표’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번제는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도 희생제사와 번제의 최고 의미가 주님께 관한 것임을 인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번제와 예수 그리스도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관계는 매우 깊습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는가?’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776(창22:2)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말씀을 해설하면서 ‘번제로 드리는 것’이 주님께서 자신을 신성에 거룩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님께서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신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영화’입니다.

 

따라서 번제의 최고 의미에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성부께서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하시고 성자께서 죄인 대신 그 형벌을 받으셨다’는 장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모든 세력과 싸우시고 시험을 이기시며,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신 구속과 영화의 과정입니다. 십자가는 그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이며 가장 큰 시험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형벌대속의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성부는 진노하여 형벌을 요구하시는 분이고 성자는 그 진노를 대신 받아 인간을 구해 내시는 분처럼 이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구속을 이루신 분은 한 분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붙잡고 있던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인간이 다시 자유롭게 주님을 향할 수 있는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한 신적 위격이 다른 신적 위격을 만족시키기 위한 형벌의 지불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하여 끝까지 감당하신 마지막 시험과 승리의 절정으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보면 레위기 1장의 번제와 십자가의 관계도 훨씬 깊어집니다. 번제물 전체가 불 위에 드려지는 모습은 단지 ‘누군가 대신 죽는다’는 한 장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에 결합시키시는 영화의 전 과정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번제와 희생제사의 세세한 의식들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AC.10057, 출29:18).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의 영화와 우리의 거듭남이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영화와 인간의 거듭남은 서로 전혀 관계없는 두 주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이 가능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지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이제 모든 인간에게 악과 거짓을 이길 수 있는 신적 생명과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되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납니다.

 

그래서 희생제사와 번제는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 인간 안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점차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인성을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게 하셨고,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시험을 통과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 자체를 버려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당하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다만 그 ‘우리를 위하여’를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의 정확한 양을 대신 받으셨다’는 의미로만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지옥과 싸우셨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시험을 이기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고, 그리하여 우리가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 다시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의 번제를 보면서 우리는 분명히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은 성부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희생당하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친히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고 지옥을 이기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화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 안에서도 거듭남이라는 또 하나의 번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님이 다 하셨으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능력 안에서 우리도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과 진리의 삶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의 영화가 우리 안에서는 거듭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번제와 십자가를 함께 바라볼 때 드러나는 더 깊은 연결입니다. (SWC.레1 심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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