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2.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습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과 두 번호 뒤인 AC.332에서는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존하신 섭리가 결국 실패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가인의 표’를 가인 계열 전체가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도록 보장하신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30에서 보존된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상태 자체가 아닙니다. 장차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는 데 필요할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따라서 ‘보존’은 ‘강제’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반드시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강제하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그 진리를 받아들여 선과 결합할 수도 있고, 계속 분리하고 왜곡하여 마침내 그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그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입니다. 가인에게는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지만, 그 상태가 계속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여러 형태로 변질되면서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특정 교리적 계열이 주님께서 보존하신 가능성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AC.330과 AC.332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섭리가 함께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보존하시지만 인간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설 수 있는 수단은 마련하시되 그 수단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인간의 자유 가운데 두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라멕의 상태를 인류 전체의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AC.332가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교리적 계열의 종말입니다. 라멕 안에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당시 모든 사람에게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창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후속 AC 전체를 보면 주님의 섭리는 훨씬 더 긴 시야에서 움직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가 마침내 지속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때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그 새로운 영적 교회에서는 이전의 천적 인간과 달리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중심이 됩니다.

 

이런 더 넓은 문맥에서 보면 AC.330의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은 가인 계열 하나의 미래만을 말하는 것으로 좁혀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신앙을 통한 체어리티의 길 자체가 사라지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 한 특정 계열이 그 가능성을 잃어버려도 주님의 전체적인 구원의 질서가 함께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와 ‘라멕에서 신앙이 남지 않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여 구원의 길을 남겨 두시는 섭리를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유 안에서 그 보존된 것을 끝까지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어떤 한 사람이나 한 교회적 계열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전체 계획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구원의 길 자체는 계속 보존하십니다. 어떤 교회가 종말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교회와 구원의 역사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라멕은 주님의 계획의 실패를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니라 인간이 주어진 가능성을 얼마나 멀리 거절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반대로 이후 노아를 향해 나아가는 흐름은 인간의 실패보다 더 넓은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한 계열에서 신앙마저 사라질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다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나아갈 새로운 길을 준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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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시 ‘가인의 표’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면 가인은 부정적인 것의 연속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고, 그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 결과 교리는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으며,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켜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 놓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보호하셨을까요?

 

AC.330은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보호받은 것은 그가 잘했기 때문도 아니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주님께 인정받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에 속한 것이 장차 인간의 거듭남에 다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보존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가인의 표’를 단순히 ‘살인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는 도덕적 교훈으로만 읽으면 AC.330이 말하는 더 깊은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물론 문자적 이야기에서는 보호라는 모습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보존’입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이라 하더라도 신앙에 속한 것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에게 심어질 때 바로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을까요? 여기에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이후 인간의 상태 사이의 변화가 배경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적 상태가 상실되어 가면서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받아들여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되는 길이 필요하게 됩니다.

 

다만 AC.330 한 번호만으로 이 이후의 거듭남 질서 전체가 완성되어 설명되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직접 말하는 핵심은 ‘체어리티가 이후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것이므로 신앙이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 이후 영적 인간의 차이는 뒤의 AC에서 더욱 상세하게 전개됩니다. AC.330은 그 큰 전환을 미리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다’는 말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보호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장차 체어리티로 이끄는 기능 때문에 보호받았습니다. 신앙의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그 진리가 삶 안에서 선이 되고 체어리티로 살아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28과 AC.330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보다 높이려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결국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께서는 가인마저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보존하여 장차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될 길을 남겨 두십니다.

 

여기서 창3 마지막 장면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잘못된 상태에서 취하여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이 보호되었습니다. AC.330의 가인의 표와 동일한 상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두 장면 모두 인간의 타락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구원의 길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질서를 무너뜨려도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 맞추어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특히 ‘아벨은 죽었지만 가인은 보존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만 남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AC.330의 의미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가인이 보존된 이유는 아벨이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아벨에 해당하는 체어리티가 인간에게 심어질 길을 남겨 두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의 보존은 체어리티의 포기가 아니라 체어리티의 미래를 위한 보존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연구하며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려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신앙과 지식의 목적은 결국 삶입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는다면 신앙이 보존된 본래의 목적을 잃게 됩니다.

 

특히 아르카나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가인의 표’는 의미심장한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교리를 정확하게 배우는 일은 귀하지만, 그 지식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존하시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까닭은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삶이 변화되고 체어리티가 우리 안에 심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AC.325부터 AC.330까지를 하나로 읽으면 창4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이어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나며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두십니다.

 

인간은 하나였던 것을 갈라놓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것 가운데서도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에 담긴 섭리입니다. 신앙은 신앙 자체를 위해 보존된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 안에 심어지도록 하기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AC.330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인간의 타락보다 한 걸음 앞서 구원의 길을 남겨 두시는 주님의 섭리가 놓여 있습니다.

 

 

 

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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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0-16)

 

AC.330

‘핏소리’(voice of bloods)는 소멸된 체어리티를(10절),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curse from the ground)는 왜곡된 교리를(11절),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는 거기에서 비롯된 거짓과 악을(12절) 각각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처할 위험에 놓였습니다. (13-14절)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으므로,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으며, 이것이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mark set upon Cain)으로 의미됩니다. (15절)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주한 것’(Cain dwelling toward the east of Eden)은 신앙이 이전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을 나타냅니다. (16절) Charity extinguished is called the “voice of bloods.” (verse 10); perverted doctrine, the “curse from the ground.” (verse 11); the falsity and evil originating thence, the “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 (verse 12) And as they had averted themselves from the Lord, they were in danger of eternal death. (verses 13–14) But as it was through faith that charity would afterwards be implanted, faith was made inviolable, and this is signified by the “mark set upon Cain.” (verse 15) And its removal from its former position is denoted by “Cain dwelling toward the east of Eden.” (verse 16)

 

해설

AC.330은 창4:10-16 전체의 속뜻을 한꺼번에 압축하여 보여 주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앞의 AC.325-329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로 시작된 과정은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 곧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AC.330은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소멸된 체어리티는 ‘핏소리’로, 왜곡된 교리는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로, 거기에서 비롯된 거짓과 악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끝까지 진행되면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켜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지점에서 뜻밖의 반전이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십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바로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핏소리’는 소멸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창4:10의 개역개정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원문의 복수형을 살려 ‘voice of bloods’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피라는 물질 자체가 아니라 앞의 AC.329에서 아벨의 죽음으로 표상된 체어리티의 소멸입니다. 따라서 ‘핏소리’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적 상태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는 왜곡된 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신앙과 교리에 속한 것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진리가 선과의 결합을 잃으면 교리 역시 본래의 질서를 잃고 왜곡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길은 단순히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라는 정지된 상태에 머물지 않습니다. 분리가 계속되면서 교리가 왜곡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 결과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로 묘사되는 거짓과 악입니다. AC.330은 이 거짓과 악이 왜곡된 교리에서 비롯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 있을 때 삶의 방향을 제시하지만, 교리가 왜곡되면 생각과 삶 역시 그 왜곡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피하며 유리하는 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가인이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게 되었다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 왜곡된 교리에서 생겨나는 거짓과 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상태는 더욱 심각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AC.330은 ‘그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처할 위험에 놓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서 돌아서셨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돌아선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죽음의 위험’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시는 변덕스러운 심판이라기보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향으로 스스로 나아간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AC.330의 놀라운 반전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생각하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역시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였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AC.330 전체의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인이 보호받은 것은 가인의 상태가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승인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장차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에게 심어질 때 신앙이 그 통로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분리된 신앙에 대한 승인의 표가 아니라 미래의 구원을 위하여 신앙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이 점은 앞의 AC.328과 연결하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세워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질서가 뒤집힌 것이었습니다. 이제 인간 편에서는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신앙마저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장차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길을 남겨 두십니다.

 

여기에는 태고교회 이후의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도 들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되어 감에 따라 이후에는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길이 중요해집니다. AC.330은 아직 그 전체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로 그 이후의 질서를 미리 보여 줍니다.

 

따라서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다’는 말을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신앙이 보존된 이유는 신앙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가 보존되는 이유는 선으로 이끌기 위해서이고, 신앙이 보존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하여 인간이 다시 체어리티의 삶으로 인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주하였다’는 것은 신앙이 ‘이전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도 AC.330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이제 이전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래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에서는 신앙이 사랑 안에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의 분리 이후에는 그 이전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보존되지만 그 위치와 기능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이렇게 AC.330을 전체적으로 보면 두 흐름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인간 편에서는 ‘체어리티의 소멸 → 교리의 왜곡 → 거짓과 악 → 주님에게서 돌아섬 → 영원한 죽음의 위험’이라는 하강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 편에서는 바로 그 무너진 상태 속에서도 장차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신앙을 보존하시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갈라놓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신앙마저 미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AC.330은 단순한 심판의 개요가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 타락보다 더 깊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가인은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언젠가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가인의 표’가 가진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 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 심화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시 ‘가인의 표’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면 가인은 부정적인 것의 연속입니다. 사랑에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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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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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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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에서 처음 읽는 사람을 가장 놀라게 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면 그 안의 욕정과 거짓을 빨리 없애 주시면 될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것들이 한순간에 제거되지 않으며 악한 영들까지 오랫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된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그러실까요?

 

먼저 AC.59 자체가 제시하는 이유를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인간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획득해 온 생명이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자체가 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욕정과 거짓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좋은 것이므로 보존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오면서 자기 것으로 획득한 생명의 상태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가운데 악한 욕정이 지배해 왔다면 욕정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은 몸에 묻은 먼지처럼 간단히 털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실제 삶과 깊이 얽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한순간에 제거하여 사람 자체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악을 그대로 인정하거나 정당화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AC.59의 방향은 분명히 ‘개혁’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악한 영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됩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 ‘허락하신다’와 ‘뜻하신다’입니다. 악한 영들의 악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악을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악한 영들은 자기 성질에 따라 사람의 욕정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용이 마지막 결과를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AC.59은 그렇게 자극된 욕정들이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느슨해지고, 마침내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주어는 결국 ‘주님’입니다. 악한 영들이 욕정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개혁하시고 선을 향해 이끄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왜 욕정을 자극하게 하시는가, 자극된 욕정이 왜 느슨해지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그러나 AC.59은 그 세부적인 과정을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빈칸을 너무 빨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욕정이 드러나야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이 나타나지 않으면 선을 자기 것으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그럴듯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AC.59이 이 자리에서 직접 설명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시험에 관한 다른 AC들을 충분히 살펴본 뒤 더 정확하게 연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데까지 가면 충분합니다. 악과 거짓은 사람의 획득된 생명에 깊이 얽혀 있기 때문에 한순간에 제거되지 않습니다. 악한 영들이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고, 그 욕정들은 여러 방식으로 느슨해지며, 마침내 주님께서 그것들을 선을 향해 기울이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도 피해야 합니다. ‘악이 즉시 없어지지 않는다면 굳이 악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AC.59의 주제 자체가 ‘전투’입니다. 악이 즉시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은 악을 용납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이 실제 전투를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이전의 욕정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곧 ‘나는 전혀 거듭나지 않았구나’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59의 설명대로라면 거듭남의 과정 자체에 옛 생명과의 전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이 욕정도 주님께서 아직 남겨 두신 것이니 괜찮다’며 합리화해서도 안 됩니다. 욕정은 여전히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그것을 선하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또 이 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너무 쉽게 적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도 악을 당장 없애지 않으시니 다른 사람의 잘못도 그냥 두어야 한다’는 목회 원칙이나 교육 원칙이 AC.59에서 곧바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신적 섭리의 방식과 인간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AC.59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한 인간을 얼마나 깊이 아시면서 거듭나게 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에게 얽혀 있는 악과 거짓을 단순히 잘라 내는 대상으로만 보지 않으시고,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마침내 선을 향해 이끄십니다.

 

그리고 악한 영들의 악한 의도조차 주님의 다스림 밖으로 벗어나 마지막 결과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선과 진리를 미워하지만, 그들의 미움이 주님의 목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AC.59에서 ‘악한 영들이 허락된다’는 놀라운 말을 읽을 때 악한 영들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의 중심은 그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작용 가운데서도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옛 생명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마침내 선을 향해 이끄시는 주님이 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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