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의 핵심은 ‘10억을 잃은 장로’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을 믿던 신앙이 무너지고,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비극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의 시험(temptation)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통해 이 사람의 신앙을 더 깊고 순결한 상태로 인도하십니다.

 

주인공은 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 진심으로 주님을 찾았습니다. 외로운 청년 시절, 말씀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교회에서 아내를 만나고, 가정을 이루고, 평생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러한 모든 시작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심어 두신 선한 애정과 리메인스(remains)가 역사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미묘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교회가 제 삶 자체였어요.’ 이 한 문장은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교회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교회라는 외적 형식과 주님 자신이 서서히 동일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살려는 사람들 안에 있다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외적 교회는 내적 교회를 위한 그릇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이 장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섬긴다’는 것과 ‘교회를 떠받친다’는 것을 거의 같은 의미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갔다’, ‘교회를 뒷받침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믿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악해서가 아니라 아직 미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마음은 더욱 교회에 의지하게 됩니다. 집은 텅 비어 있었지만, 교회는 그 빈자리를 메워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봉사도 더 열심히 하고, 새벽기도도 더 열심히 하고, 당회도 빠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이 시기는 동시에 가장 위험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은 위로를 간절히 찾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는 자연스럽지만, 그 위로가 주님에게서 오는지, 사람에게서 오는지를 분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 건축헌금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에 하나님은 반드시 채워 주십니다’, ‘먼저 내어 놓으면 두세 배로 갚아 주십니다’, ‘하늘나라에 쌓는 보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을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이 장로는 돈 때문에 움직인 것이 아니라 아내를 향한 사랑, 주님을 잘 섬기고 싶다는 소원, 40년 동안 교회를 섬긴 충성, 장로로서의 책임감이 하나로 묶여 움직였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선한 애정이 주님께 직접 향하지 않고, 한 사람의 권위와 결합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악은 언제나 선한 것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보다, 선한 것을 이용한다고 설명합니다. 자기 사랑은 거짓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과 경건한 마음까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한 헌금 이야기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이용하는 자기애’라는 영적 주제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장로가 결국 10억 원을 헌금하게 되는 과정은 단순히 ‘사기를 당했다’는 사건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인간 안에 있는 선한 의지와 자기 판단이 어떻게 뒤섞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는 억지로 돈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가운데, 그것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믿는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더욱 깊은 시험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거듭나는 동안 자신의 선과 주님의 선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붙들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흔드십니다. 그것은 사람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장로에게는 그것이 ‘교회’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고, 목사도 사랑했고, 성도들도 사랑했습니다. 그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신앙의 중심축이 주님이 아니라 교회라는 외적 제도에 너무 강하게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둥이 흔들리자 그의 세계 전체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건축비가 예상과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오해일 것이다.’ 그는 오히려 소문을 막으려 했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신뢰해 온 사람을 쉽게 의심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의혹은 점점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건축헌금이 교회 건축보다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고, 자신이 절대 신뢰했던 목회자가 그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이 장로가 받은 충격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닙니다. 돈보다 훨씬 큰 것이 무너졌습니다. ‘내가 평생 믿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내 인생은 무엇이었는가’, ‘내 신앙은 거짓이었는가.’ 이 질문들이 한꺼번에 밀려온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외적인 교회가 무너지는 시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이란 단순히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이 사람 안에서 실제로 충돌하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 장로도 바로 그 상태에 들어갑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쌓아 온 신뢰와 추억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눈앞의 사실이 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부정도 해 보고, 변명도 찾아보고, 기다려도 봅니다. 그러나 결국 사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사랑하던 것을 하루아침에 빼앗지 않으십니다. 먼저 스스로 살펴보게 하시고, 여러 번 확인하게 하시며, 자유롭게 판단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이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결국 법정까지 가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이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여기서부터 진짜 신앙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람을 붙잡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붙잡을 수도 없고, 장로라는 직분도 붙잡을 수 없으며, 교회라는 이름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붙잡을 수 있는 자리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우상이 무엇이든 그것을 허무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크고 참된 것을 주시기 위해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 의지하던 것이 무너질 때, 비로소 주님께 대한 직접적인 신뢰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중심은 ‘10억을 잃었다’가 아니라 ‘주님 외에는 영원히 의지할 분이 없음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환점은 법정 장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마음속에서 깨닫기 시작하는 한 가지 진리입니다. ‘내가 믿은 것은 하나님이어야 했는데, 어느새 사람을 믿고 있었구나.’ 이 깨달음은 매우 아픈 것이지만, 동시에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신앙은 사람이나 조직이나 직분을 통하여 시작될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주님께 직접 연결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은 언제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도 사람이며, 아무리 건강한 교회도 외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잘못 붙들고 있던 지팡이를 허락 가운데 빼앗으십니다. 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부러질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이 고백은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는 교회를 잃었고, 명예도 잃었으며, 평생 모은 재산도 잃었고, 사람들의 신뢰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으로는, 그는 외적인 것들을 잃으면서 내적인 것을 얻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은 외적인 신앙보다 내적인 신앙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예배당이 중요하고, 목회자가 중요하며, 직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점차 주님의 임재는 건물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기도는 특정 장소가 아니라 마음에서 드려질 수 있고, 예배는 형식만이 아니라 삶으로 드려질 수 있으며,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신앙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깊어진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주인공이 결국 모든 목회자를 미워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배신을 경험한 사람은 쉽게 극단으로 갑니다. ‘목사는 다 그렇다’, ‘교회는 다 거짓이다’, ‘신앙 자체가 속임수였다’ 이렇게 결론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까지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까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분별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교회는 언제나 순수한 사람들과 불순한 사람들이 함께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처럼, 외적인 교회 안에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악을 보고 곧바로 주님의 교회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오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거룩한 것의 모독(profanation)이라는 주제도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 헌신과 사랑을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재정 비리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자기 사랑에 종속시키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이 가장 위험한 이유는 세상의 것만 원하는 데 있지 않고, 거룩한 것까지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진짜 비극은 10억 원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순수한 신앙과 헌신이 다른 사람의 자기 사랑에 이용당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여기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선한 것을 이용하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이용당한 선까지도 결국에는 그 사람의 거듭남을 위해 다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던 이 장로는 마지막에는 돈보다 훨씬 귀한 것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을 통하여 믿던 신앙’에서 ‘주님을 직접 믿는 신앙’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간증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깊은 영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SU.1, ‘집사님, 우리 교회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

아래는 어제 본 ‘집사님, 우리 교회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라는 제목의 유튜브입니다. 전반적으로는 지난날 나름의 소목회를 해봤던 저로서는 감동과 함께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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