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안에서 모든 것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적이라 합니다.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는 것처럼, 특별히 혼인의 (the law of marriages) 그러합니다. 지상의 모든 혼인은 천적 혼인(celestial marriage), 천국의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혼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합니다. 혼인은 주님과 하나의 천국,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가 있는 그러한 혼인입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혼인의 (law of marriages) 남편과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우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며, 천적 인간의 본이 됩니다. 법은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 계시되었을 아니라 그들의 사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남자가 오직 아내만을 두었고, 그들은 하나의 집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이 사람이기를 그치고 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여러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그들의 혼인에서 천적 혼인을 표상했기 때문에, 부부의 사랑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이자 천국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했을 그들은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다수에게서 오는 쾌락, 사람의 즐거움에서 행복을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하셨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 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It is the celestial (or heavenly) 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 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 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 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 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 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 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 and became external, 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 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 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 but in pleasure from a number, 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This is called by the Lordhardness of heart,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 as the Lord himself teaches: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 8 둘이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5-9) 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Mark 10:59)

 

해설

AC.162는 창2:24둘이 몸을 이룰지로다를 혼인 자체의 질서로 확장하여 설명합니다. 출발점은 지상의 혼인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인간 사회의 편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특별히 혼인의 법이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혼인은 단순한 사회 제도나 생활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질서가 지상에서 표상되는 매우 중요한 형식입니다.

 

이 설명의 중심에는 천적 혼인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의 모든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그 혼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천적 혼인을 설명하면서 먼저 주님과 하나의 천국을 말하고, 이어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혼인의 하나 됨을 이해하는 가장 깊은 기준은 두 인간이 서로에게만 집중하여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 됨의 근원이 한 분 주님에게 있다는 데 있습니다. 천국도 교회도 그분을 머리로 할 때 하나이며, 지상의 혼인도 이 천적 질서를 표상합니다.

 

바로 여기서 한 남편과 한 아내라는 혼인의 법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당시의 관습이나 인간이 만들어 낸 윤리 규정에서 도출하지 않고 천적 혼인으로부터 도출합니다. 한 남편과 한 아내가 혼인을 이룰 때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고 천적 인간의 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부일처는 이 단락에서 단순히 허용된 여러 결혼 형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천적 혼인에서 파생되는 혼인의 질서로 제시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이 법이 외적으로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속 사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한 남자와 한 여자로 하나의 집을 이루었던 것은 단지 외적인 명령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질서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부의 사랑은 일종의 천국이자 천국의 행복이었습니다. 혼인의 외적 형태와 그들의 내적 생명의 질서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혼인에서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다수에게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에서 그것을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내의 수가 바뀌었다는 외적 사실보다 행복을 어디에서 퍼셉션하게 되었는가 하는 내적 변화입니다. 혼인의 외적 변화는 이미 일어난 인간 내면의 변화를 드러내는 결과였습니다.

 

이 때문에 AC.162가 막10:5-9를 인용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세가 허용한 것을 곧바로 창조의 본래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으시고,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그렇게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신 뒤 창조 때로부터의 질서로 돌아가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한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수의 아내가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혼인의 본래 법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허용된 것이 있었지만, 혼인의 기원과 기준은 여전히 천적 혼인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마음의 완악함을 단순히 고집이 세거나 잔인하다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AC.162 자체의 흐름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었으며, 부부의 사랑에서 누리던 천국의 행복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막10장에서 모세의 허용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창조의 처음을 다시 가리키신 것은, 인간의 변화된 상태와 혼인의 본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AC.162는 이렇게 창2:24를 천적 혼인에서 지상의 혼인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질서 안에 놓습니다. 한 분 주님, 하나의 천국과 교회, 한 남편과 한 아내, 그리고 하나의 집이라는 흐름의 중심에는 단순한 숫자상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부부의 사랑이 천국의 행복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혼인이 이 천적 질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혼인의 은 결혼생활에 관한 하나의 규칙을 넘어, 지상의 혼인이 어디에서 그 본과 질서를 받아야 하는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AC.162 해설)

 

심화

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 심화 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 심화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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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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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24)

 

AC.161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 안에서,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셨으며, 다만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안에 스며들게 하셨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보이는지는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없습니다. 이에 관하여 어떤 관념을 갖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 사랑과 신앙이 없고,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행위는 체어리티의 행위 또는 신앙의 열매라고 없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what is spiritual celestial, however, 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해설

AC.161에서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미 악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전의 천적 인간처럼 전적으로 속 사람의 질서 안에서 살기보다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을 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그들을 악한 상태라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이러한 상태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proprium에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곧이어 주님께서 영적 천적인 을 자비롭게 그 안에 스며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고 한 것, AC.154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한 것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proprium 안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생명의 근원이 proprium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면서 하나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유입(influx)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이 실제로 하나의 것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159에서 천적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입을 통하여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이것은 앞서 AC.155에서 천사들의 상태를 설명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곧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과 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AC.161에서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이 스며든다는 설명도 같은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유입을 추상적인 설명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듭니다. 어떤 행위가 겉으로 선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여기서 행위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사랑과 신앙은 그 행위를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AC.161에서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하나 됨은 둘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들어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둘이 몸을 이룰지로다를 해설하면서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고 한 내용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하나처럼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에서 질서 있게 받아들여져 하나의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61은 창2 후반부의 proprium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깊게 만듭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proprium 안에 무엇이 스며들어 있으며, 무엇이 그 삶과 행위의 내적 근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천적인 것이 그 안에 있고, 그것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유입되어 실제 삶에서 나타날 때, 인간은 자기 삶을 자기 삶처럼 살아가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두게 됩니다. 이것이 AC.161이 유입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여 주기 시작하는 중요한 질서입니다. (AC.161 해설)

 

심화

1. influx - 사람과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 심화 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 심화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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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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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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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24)

 

AC.160

부모를 떠나는 (leave father and mother)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는 (cleave unto his wife) 사람이 사람 안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몸이 되는 (be one flesh) 둘이 거기에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사람과, 사람으로부터 나온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되게 되었습니다. Toleave father and mother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 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 tocleave unto his wife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 tobe one flesh,that they are there together;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해설

AC.160은 창2:24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을 앞에서 계속되어 온 속 사람, 겉 사람, proprium의 변화라는 흐름 안에서 해설합니다. AC.159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으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것을 천적 인간이 퍼셉션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겉 사람에 속한 proprium을 원하면서 이 구별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AC.160은 바로 그 변화된 상태를 창2:24의 세 표현을 따라 설명합니다.

 

먼저 부모를 떠나는 은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부모는 자연적인 부모에 관한 교훈에 머무르지 않고, 겉 사람의 근원이 되는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앞 번호에서 천적 인간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질서를 퍼셉션했다고 했는데, 이제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그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아내와 합하는 은 속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겉 사람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사람 안에 있게 되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났다고 해서 속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내AC.156에서 설명했듯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받게 된 표현입니다.

 

몸이 되는 은 그 둘이 거기에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되어 구별이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AC.159가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명시했고, 이번 번호의 마지막도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은 구별 자체의 소멸보다, 변화된 상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있게 된 것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이전에는 사람과, 사람으로부터 나온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이 되었다는 문장은 특별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처음에는 영적이었지만 이제 타락하여 육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일반적인 도식으로 바꾸어 버리면 현재 문맥의 세밀한 흐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을 원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서 으로의 변화도 그 상태 변화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그 의미를 붙들어 줍니다. ‘이렇게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되게 되었습니다.여기서 proprium은 천적·영적 생명 자체가 아닙니다.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결합되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둘이 완전히 동일한 하나가 되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처럼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도 생명의 근원과 그것을 받아 자기 삶처럼 누리는 proprium 사이의 구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AC.135와 매우 밀접하게 이어집니다. AC.135에서도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중요한 것은 결합하나처럼 보임동일해짐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AC.160은 이제 창2:24 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같은 내용을 다시 설명합니다. 천적·영적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그것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됨으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생명과 하나처럼 경험되는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AC.160부모를 떠남’, ‘아내와 합함’, ‘ 몸이 을 각각 떨어진 상응어로 읽기보다 하나의 상태 변화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고,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며, 그 둘이 함께 있게 되고,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는 흐름입니다. 이것은 AC.131부터 시작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 가는 과정의 한 단계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그 proprium을 단순히 버려 두지 않으시고 생명과 결합시키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AC.160)

 

 

 

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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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창2:23,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잃어버린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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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23)

 

AC.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를 쉽게 퍼셉션할 없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사람은 사람과 구별되며, 참으로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사람에게 속하는지,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는 사람에게 속한 그들의 proprium 원한 결과 너무나 달라져, 그들은 이상 사람이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이러한 퍼셉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 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 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 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 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 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해설

AC.159는 앞에서 다루어 온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결합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사라져 둘이 뒤섞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59는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교리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결합이 함께 존재하는 질서였습니다.

 

특히 사람이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주도권의 근원은 겉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겉 사람이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속 사람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창2 전반에서 계속되어 온 천적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와 모든 능력이 주님께 속한 것임을 퍼셉션했습니다. 이제 같은 질서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의 후손들에게서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은 AC.131 이후 계속된 흐름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그 proprium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C.159는 이러한 변화가 단지 자기 것을 갖고 싶어 했다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퍼셉션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후손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하나AC.156에서 말한 올바른 결합과 구별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면서도 주님의 질서 안에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후손들은 그 구별 자체를 잃어버리고 둘을 하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참된 결합은 구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를 다시 proprium과 연결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는 이러한 지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서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를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겉 사람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곧 자기 존재 전체의 생명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159AC.147-155에서 계속 다루어 온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AC.155의 천사들도 특별히 그 근원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반면 여기의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그 질서를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AC.159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는 열쇠는 구별되어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음에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다른 것에 속하지만 분리되어 제각기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심으로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으로 기울면 이 질서에 대한 퍼셉션이 흐려지고, 사람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AC.159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단순한 도덕적 타락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생명의 근원과 내적 질서를 퍼셉션하는 방식의 변화이기도 했음을 보여 줍니다. (AC.159)

 

 

 

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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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창2:23, ‘사람 - 지혜롭고 지성 있는 속 사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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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23)

 

AC.158

사람이 사람을 의미한다는 ,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 분명합니다. That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or what is the same, one who is intelligent and wise, is plain from Isaiah:

 

내가 본즉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이는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레미야에서는, meaning none wise and intelligent. Also in Jeremiah: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성읍을 용서하리라 (5:1) Run ye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and see if ye can find a man, if there be any executing judgment, seeking the truth. (Jer. 5:1)

 

이라고 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사람(One who executes judgment)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one who seeks the truth) 지성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One who executes judgmentmeans a wise person; andone who seeks the truth,an intelligent one.

 

해설

AC.158AC.156에서 제시한 사람은 사람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말씀의 다른 구절들로 확증합니다. AC.156에서는 창2:23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하며,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겉 사람의 proprium이 속 사람과 결합하기 때문에 이제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가운데 사람이 왜 속 사람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속 사람을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람과 같은 의미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속 사람이 단순히 인간의 보이지 않는 안쪽 부분이라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현재 문맥에서 속 사람은 지혜와 지성이 있는 사람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2:23에서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도 단순히 겉 사람의 반대편에 있는 어떤 내부 구조를 가리킨다기보다, 지혜와 지성이 속하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 번째로 인용되는 사41:28에는 사람[vir] 없으며 그들 가운데 모사도 없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그 자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뜻으로 읽지 않고,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특히 원문이 man뒤에 라틴어 vir를 명시한 것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현재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은 단순한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지혜와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5장의 인용은 이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으라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정의를 행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지성 있는 사람으로 풀이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지혜와 지성이 추상적인 능력으로만 제시되지 않습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과 진리를 구하는 것이라는 실제적인 표현을 통해 각각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도 바로 사람이라는 표현 안에 지혜와 지성의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지혜지성을 완전히 같은 말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의 두 표현을 구별하여 정의를 행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지성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그 둘의 차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별도의 체계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두 표현을 의도적으로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보존해야 합니다. 앞에서 AC.107AC.112에서도 지혜와 지성을 구별하여 사용했던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이렇게 보면 AC.158은 앞 번호들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조금 더 분명하게 합니다. AC.156에서 중의 뼈와 중의 은 겉 사람의 proprium이고 사람은 속 사람이라고 했으며, AC.157에서는 그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속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8에서는 그 속 사람이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결합은 단순히 인간 안의 두 부분이 서로 붙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지혜와 지성이 있는 속 사람과 생명을 얻은 겉 사람의 proprium이 결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만 여기서도 사람’[vir]이 말씀 어디에서나 언제나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58이 보여 주는 것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해당 문맥에서 사람이 지혜와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창2:23에서 사람을 속 사람으로 읽는 해석을 뒷받침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확인한 것처럼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은 단어 하나를 고정된 암호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주제와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피는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결국 AC.158의 두 성경 인용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41:28사람이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을 의미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5:1은 그 지혜와 지성을 정의를 행하는 진리를 구하는 이라는 표현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해 줍니다. 이로써 AC.156에서 제시된 사람은 사람을 의미합니다라는 해석이 말씀의 다른 용례를 통해 한층 단단하게 뒷받침됩니다. (AC.158)

 

 

 

AC.159, 창2:23,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잃어버린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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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7‘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속 사람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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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23)

 

AC.157

중의 뼈와 중의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사람이 안에 있는 사람의 proprium 의미했기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 사람들[proprii]이라고 있는 사람들, 집안이나 가족에 속하거나 어떤 정도로든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중의 뼈와 중의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에게, Inasmuch as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signified the own of the external man in which was the internal, therefore in ancient times all those were called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who could be called their own [proprii], and were of one house, or of one family, or in any degree of relationship. Thus Laban said of Jacob,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라고 했습니다. 아비멜렉은 그의 외삼촌들과 외조부의 가족에 관하여, And Abimelech said of his mothers brethren, and of the family of the house of his mothers father,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너희를 다스림과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9:2)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Judges 9:2)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도 자신들에 관하여 다윗에게, The tribes of Israel also said of themselves to David,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라고 했습니다.

 

해설

AC.157AC.156에서 설명한 중의 뼈와 중의 이라는 표현이 고대에는 실제로 어떤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는지를 성경의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 줍니다. AC.156에서는 이 표현이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7은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고대 사람들이 한 집안이나 한 가족에 속하거나 어떤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중의 뼈와 중의 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안에 있는 사람의 proprium이라는 표현입니다. AC.156에서는 중의 뼈와 중의 이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하고,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7은 그 둘을 한 문장 안에서 다시 결합하여, 이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속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뼈와 은 속 사람과 아무 관계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겉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이 그 안에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같은 뼈와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원문의 [proprii]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사용해 온 proprium과 같은 어근에 속하지만, 현재 문맥에서는 한 사람의 내적인 proprium을 그대로 가리키는 전문용어라기보다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곧 자기 집안과 가족과 친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같은 뜻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다는 기본적인 의미가 인간의 proprium과 친족을 가리키는 고대 표현 사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는 라반이 야곱에게 한 말입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너는 참으로 혈육이로다라고 합니다. 야곱이 라반과 친족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아비멜렉은 외가 친족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골육임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나아와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세 본문 모두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속해 있는 가까운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세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2:23의 표현이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중의 뼈요 중의 살이라는 말은 문자에서도 자기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자기에게 속한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이며, 고대의 언어에서도 같은 방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창2의 표현이 속뜻에서 속 사람과 결합된 겉 사람의 proprium을 나타낸다는 해석은 이러한 고대의 언어 사용과도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 AC.157은 앞의 이름에 관한 AC.144-145와도 방법상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표현의 속뜻을 제시한 뒤 그것을 임의의 상징 풀이로 끝내지 않고, 고대인들이 실제로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했는지, 그리고 말씀의 다른 곳에서 그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살핍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고대 표현이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속뜻만을 가진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번호가 확증하는 것은 뼈와 이 자기에게 속한 사람과 밀접한 결합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AC.157은 앞 번호에서 설명한 여자에서 아내로의 변화도 간접적으로 더 이해하게 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이제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AC.157에서는 그 결합이 자기에게 속함이라는 관계의 언어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중의 뼈와 중의 은 단순히 두 부분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proprium이 서로 결합되어 하나에게 속한 것으로 관계 맺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결국 AC.157의 핵심은 뼈와 이라는 표현 안에 들어 있는 자기에게 속함결합의 의미입니다. 라반과 야곱, 아비멜렉과 그의 친족, 이스라엘 지파들과 다윗의 사례는 모두 그 의미를 문자적 언어의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2:23의 속뜻에서는 그 관계가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에 적용됩니다. 이렇게 AC.156에서 제시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 AC.157에서는 고대의 친족 언어를 통하여 한 번 더 확증됩니다. (AC.157)

 

 

 

AC.158, 창2:23, ‘사람 - 지혜롭고 지성 있는 속 사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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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6,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속 사람과 결합한 proprium’ (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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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23)

 

AC.156

중의 뼈와 중의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사람의 proprium 의미합니다. (bone) 생명을 얻은 proprium, (flesh) 생명을 얻은 proprium 의미합니다. 또한 사람은 사람을 의미하며, 다음 절에 언급된 것처럼 사람이 사람과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woman)라고 했던 proprium 여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이제(Now) 상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때 이렇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signify the own of the external man; bone,this own not so much vivified, andflesh,the own that is vivified. Man, moreover,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from his being so coupled with the external man as is stated in the subsequent verse, the own which was before calledwomanis here denominatedwife. Nowsignifies that it was thus effected at this time because the state was changed.

 

해설

AC.156은 창2:23이는 중의 뼈요 중의 살이라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proprium의 의미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로 연결합니다. 먼저 중의 뼈와 중의 은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뼈와 살은 같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는 생명을 덜 얻은 proprium, ‘은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서도 생명의 정도가 구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147-149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이 그 자체로는 죽어 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6에서는 같은 뼈와 살의 구별을 사람의 proprium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제시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뼈를 생명을 얻지 못한proprium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을 얻은proprium이라고 한다는 점도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이 그 차이를 더 설명하지 않으므로 지금 단계에서 그 이유를 별도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창2:23의 사람과 여자는 속뜻에서 단순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인물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사람은 속 사람을,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것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AC.156은 이 proprium이 겉 사람의 proprium임을 명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각각 설명되던 사람’, ‘여자’, ‘proprium’, ‘뼈와 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안에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앞에서 여자(woman)라고 했던 것이 여기서는 왜 아내(wife)라고 하는지가 처음으로 밝혀집니다. 그 이유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AC.151에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여자라고 하고 뒤에서는 아내라고 한다고만 했으며, 그 차이를 아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때 그 차이를 미리 정하지 않고 기다렸던 이유가 여기서 확인됩니다. AC.156에 이르러 스베덴보리 자신이 아내라는 표현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 결합은 AC.155천국의 결혼과도 이어집니다. AC.155에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고 하면서, 그 가장 깊은 내용이 천국의 결혼을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6에서는 현재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는 모습이 사람아내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납니다. 다만 현재 번호는 이 결합과 AC.155의 천국의 결혼 사이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두 표현을 곧바로 완전히 동일한 하나의 교리로 펼치기보다 본문이 제시하는 연결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Now)라는 한 단어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상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때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2:23이는 이제 중의 뼈요 중의 살이라에서 이제는 단순히 사건의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앞의 상태와 다른 새로운 상태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어지고, 그것이 속 사람과 결합하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2를 역사적 사건의 연속으로만 읽는 것과 상태의 변화로 읽는 것의 차이를 다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라는 시간 표현조차 현재 다루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가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갈빗대에서 여자가 지어지고, 여자가 사람에게 이끌려 오고, 사람이 이제 중의 뼈요 중의 이라고 하는 일련의 흐름은 속뜻에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고, 마침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156은 짧지만 앞의 여러 번호를 정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뼈와 살은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서 생명의 정도를 나타내고,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하며,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면서 아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로 이 결합으로 상태가 변화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중심은 개별 상응어를 따로 암기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속 사람과 결합하여 새로운 상태에 이르게 되는 전체 흐름을 보는 데 있습니다. (AC.156)

 

 

 

AC.157,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7‘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속 사람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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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5, 창2:22, ‘주님의 신부와 아내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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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2:2, 3)

 

AC.84

천적 인간은 일곱째 (seventh day)입니다. 주님께서 여섯 동안 일하셨으므로 그것을 그분의 (his work)이라 하며, 그때 모든 싸움이 그치므로 주님께서 모든 일을 마치고 쉬신다(rest from all his work) 합니다. 때문에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안식(rest)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하여 안식일이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말씀 자체로부터 매우 분명합니다. The celestial man is theseventh day,which, as the Lord has worked during the six days, is calledhis work; and as all combat then ceases, the Lord is said torest from all his work.On this account the seventh day was sanctified, and called the sabbath, from a Hebrew word meaningrest.And thus was man created, formed, and made. These things are very evident from the words.

 

해설

AC.84는 창2:2-3일곱째 안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직접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첫 문장에서 천적 인간은 일곱째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일곱째 날은 단순히 여섯 날의 창조가 끝난 뒤 이어지는 시간상의 하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거듭남을 통하여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83과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었을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그 하나 됨 가운데 신앙이 아니라 사랑, 곧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을 일곱째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진행이 아니라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와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여섯 날 동안 이루어진 일을 그분의 , 곧 주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1에서 묘사된 여섯 날 동안 사람 안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AC.84는 그 전체를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하신 일로 돌립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 것과 함께, 그 앞의 여섯 날 동안 이루어진 일이 그분의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은 거듭남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84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것은 여섯 날의 일이 누구의 일이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인간의 자유와 싸움에서의 역할이 어떻게 주님의 역사와 함께 성립하는지는 이후의 더 충분한 설명을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이 번호에서 분명한 것은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형성되어 천적 인간에 이르는 과정 전체의 근원적인 역사가 주님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싸움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81에서 이미 설명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와 직접 연결됩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언제나 승리한다고 했고,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 그것들을 업신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4에서는 그 차이를 일곱째 날의 안식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모든 싸움이 그친다는 것은 천적 인간에게 악과 거짓이 다시는 접근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81은 천적 인간도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 인간처럼 그것들과 싸움 가운데 있지 않고 그것들을 업신여깁니다. 그러므로 AC.84싸움의 그침은 일반적인 삶의 어려움이 모두 사라진다는 뜻도 아니고, 악과 거짓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지금 말하는 것은 거듭남의 문맥에서의 싸움입니다.

 

모든 싸움이 그치므로 주님께서 모든 일을 마치고 쉬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안식을 인간처럼 일을 많이 하신 뒤 피곤하여 쉬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 자체가 주님의 안식을 모든 싸움의 그침과 직접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섯 날 동안 주님께서 일하셨고, 천적 인간의 상태에 이르러 모든 싸움이 그치므로 주님께서 그 모든 일에서 쉬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며, 안식을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하여 안식일이라 하였습니다. AC.84에서 안식일의 의미는 먼저 천적 인간과 싸움의 그침에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단순히 외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날로만 이해하면 이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을 충분히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일곱째 날이 나타내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 주님의 안식이 안식일의 속뜻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습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다는 세 표현이 각각 정확히 무엇을 구별하여 의미하는지는 AC.84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번호만으로 세 동사에 각각 별도의 상응을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설명한 여섯 날의 일과 일곱째 날의 안식을 인간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지는 과정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이 문장은 창1과 창2의 창조 이야기를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다시 확인하게 합니다. 앞 장에서는 죽어 있던 사람으로부터 영적 인간이 형성되는 여섯 날의 과정이 설명되었고, 이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어 사랑이 주된 것이 되면서 천적 인간, 곧 일곱째 날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다는 말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인간의 거듭남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문장입니다.

 

AC.84는 이렇게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사이의 전환을 매우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천적 인간은 일곱째 이며, 그 앞의 여섯 날 동안 이루어진 것은 주님의 입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에서는 모든 싸움이 그치므로 주님께서 모든 일을 마치고 쉬신다고 하며, 이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AC.84 해설)

 

 

 

AC.83, 창2:1,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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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 (16-17)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16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6, 17)

 

해설

AC.80은 창2:16-17의 개요이며,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질서에 하나의 중요한 제한을 제시합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과 같은 사람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아는 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이 금지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금지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알려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2:16-17의 금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등장한다고 해서 지식이나 이성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AC.75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말했고, AC.78에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하며 이것들까지도 지혜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80의 문제는 인간이 알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 및 신앙의 아르카나를 무엇으로부터 알고 판단하려 하는가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AC.77에서는 에덴동산의 보기에 좋은 나무들이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80은 그 퍼셉션의 근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오는 퍼셉션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을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직감이나 자기 확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뜻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그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안 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것들은 인간이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외적인 것들과 관계되고, ‘기억지식은 사람이 배우고 경험하여 기억에 받아들인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AC.78에서 기억지식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AC.80은 자연계의 사실을 관찰하거나 기억지식을 배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적인 것의 진실 여부를 인간 자신이 결정하려는 질서를 경계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는 된다는 말을 질문이나 연구 자체의 금지로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의 속뜻을 밝히면서 끊임없이 설명하고 구별하고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C.80에서 금지되는 것은 탐구라는 행위 자체라기보다, 그 앞에 붙어 있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라는 방식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 하는 것이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80을 반지성주의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자연적인 사실을 감각과 관찰을 통하여 확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것은 신앙의 아르카나입니다. 자연적인 것들을 알아보는 데 사용하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그대로 신적인 것의 최종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가 단순한 인식 방법의 차이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여기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닙니다. 2:17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이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AC.73에서 거듭남 이전의 사람이 죽어 있던상태라고 한 것과 AC.80에서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AC.79AC.80을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도 보입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두 번호 모두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가지거나 아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방향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를 여기서 proprium이나 인간의 자유에 관한 전체 교리로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AC.79AC.80이 보여 주는 직접적인 연결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80은 따라서 창2:16-17의 금령을 알지 말라는 명령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아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할 때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는 것이, 이 개요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16-17에 관하여 먼저 제시하는 핵심입니다. (AC.80 해설)

 

심화

1. 개역개정에는 열매 들어가 있는가?’(2:16-17)

 

2:16-17을 개역개정과 AC에 실린 영어 성경으로 함께 읽으면 작은 차이 하나가 눈에 띕니다. 개역개정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AC에 인용된 영어에서는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이라고 되어 있어 열매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개역개정은 왜 열매를 넣었을까요?

 

먼저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본문에도 이 두 절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별도의 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너는 먹을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먹지 말라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따라서 AC에 실린 영어가 tree를 그대로 살린 것은 히브리어의 표현 구조와 잘 맞습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나무에서 먹는다또는 문맥에 따라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이 독자에게 어색하거나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먹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의 나무의 열매는 이 뜻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전달하기 위해 먹는 대상을 명시적으로 풀어 준 번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열매가 히브리어 원문에 별도의 단어로 있는데 영어 번역이 빠뜨린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개역개정이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임의로 첨가했다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 차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개별 표현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역개정의 열매라는 번역 표현을 근거로 창2:16-17의 속뜻에 원문에 없는 별도의 열매상응을 추가해서는 안 됩니다. AC.80에서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것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알려 하거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AC와 함께 읽을 때는 개역개정의 자연스러운 한국어와 원문의 표현 구조를 함께 기억하면 좋습니다. 예배에서 개역개정을 읽을 때는 그대로 나무의 열매라고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AC의 속뜻을 검토할 때는 히브리어와 AC의 영어가 실제로 나무에서 먹는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번역문에 명시적으로 보이는 단어와 원문에 실제로 있는 단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 번역AC 속뜻 해설이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성경 번역은 원문의 뜻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한국어로 전달해야 하고, AC 해설에서는 그 번역 뒤에 있는 원문의 표현까지 확인하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2:16-17에서는 개역개정의 열매를 그대로 존중하여 읽되, AC의 상응을 판단할 때 그것을 원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어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0 심화 1)

 

 

 

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는데, 앞 장이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룬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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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절) The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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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사람은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 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 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 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verse 15).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5)

 

해설

AC.79는 창2:15의 개요입니다. 바로 앞의 AC.77에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안의 나무들이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78에서는 동산의 강이 지혜이고, 거기에서 나온 네 강이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며, 이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고 그 지혜가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9는 이 모든 설명을 받아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에덴동산은 단지 천적 인간이 들어가 있는 외부의 장소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천적 인간 자신이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앞에서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차례로 언급된 뒤, 이제 그 전체를 천적 인간이라는 하나의 동산으로 묶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매우 중요한 제한을 덧붙입니다. ‘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천적 인간이 동산이라고 해서 그 동산이 천적 인간 자신의 소유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78에서도 네 강으로 묘사된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고, 그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9에서는 그 동산 자체가 주님의 것이라고 명시합니다.

 

이 때문에 이어지는 누리는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의 구별이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 그 동산에 속한 모든 것을 누리는 은 허락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버리거나 사용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누리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 것으로 소유한다는 말을 단순한 물질적 소유의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말하는 동산은 천적 인간 자신과 그의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 등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실제로 가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것인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AC.79의 문장 자체 안에 들어 있습니다. ‘누리는 은 허락되고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인간은 아무것도 받아서는 안 된다거나, 아무것도 자기 삶 안에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천적 인간은 동산에 속한 것들을 실제로 누립니다. 다만 그 동산이 누구의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

 

현행 해설은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 선을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하는 문제, 그리고 proprium의 교리까지 연결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앞으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AC.79라는 개요에서는 아직 그 전체 교리를 미리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자기 것으로 소유한다는 한 표현만으로 이후의 proprium 교리 전체를 이 번호 안에 끌어들이기보다, 우선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누림소유의 대조를 정확하게 보존하는 편이 좋습니다.

 

2:15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씀 역시 아직 여기서 자세히 풀 필요가 없습니다. AC.79는 그 명령의 세부적인 속뜻을 설명하기보다, 천적 인간이 이와 같은 동산이며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가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있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는 개요를 먼저 제시합니다. ‘경작하며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해당 본문의 상세 해설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원리를 곧바로 창3의 타락에 적용하여 에덴의 상실은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한 결과라고 완성해 버리는 것도 아직은 기다려야 합니다. AC.79가 이후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번호 자체는 아직 타락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우선 에덴의 상태에서 무엇이 허락되고 무엇이 허락되지 않는지를 분명히 기억하면 됩니다.

 

AC.79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결국 매우 단순하면서도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그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는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문장으로 천적 인간과 그가 누리는 모든 것 사이에 하나의 분명한 질서를 세웁니다. 인간은 동산을 누리는 자이지만, 동산의 주인은 아닙니다. (AC.79 해설)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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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강,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것들’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입니다. 이것들은 속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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