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AC.1-5)  1(AC.6-66) 번역, 해설  심화, 목차  색인 포함 with ChatGPT 소개

 

 

이 파일을 처음 열어 보시는 분은 아마 먼저 분량에 놀라실 것 같습니다. 창세기 1장 한 장을 다루는데 500쪽이 넘습니다. ‘천지창조 장을 설명하는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많을까?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분량을 계획했던 것은 아닙니다. 출발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이하 AC)를 처음부터 차례로 우리말로 옮기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을 붙여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AC.1부터 한 글씩 읽어 가면서 번역만으로는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질문들이 계속 생겼습니다. 어떤 질문은 짧은 해설만으로 충분했지만, 어떤 질문은 그 자리에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지 않으면 다음 글로 넘어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번역에 해설이 붙고, 해설에서 다시 질문이 생겨 심화가 붙으면서 지금의 분량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파일은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기획하여 집필한 결과물이라기보다, AC.1에서 AC.66까지 한 걸음씩 걸어가며 남긴 읽기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원문을 번역하다가 표현 하나에서 멈추기도 했고, 스베덴보리가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질문하기도 했으며, 처음 AC를 접하는 분이라면 어디에서 이해하기 어려울지를 생각하면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검토해야 했고,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였던 설명을 AC 전체의 문맥과 대조하면서 고치기도 했습니다. 이 파일에는 그런 과정까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자료의 기본 구성은 번역, 해설, 심화입니다. 먼저 번역은 영어 AC 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기려는 부분입니다. 그다음 해설은 단순히 번역문을 다시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AC가 앞뒤 글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창세기 본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처음 읽는 독자가 어디에서 이게 무슨 뜻이지?하고 멈출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설명한 부분입니다. ‘심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을 다룹니다. 본문을 이해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 가운데 해설 안에 모두 넣기에는 너무 큰 문제들을 따로 살펴본 것입니다.

 

그래서 심화까지 반드시 차례대로 모두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읽으시는 분이라면 먼저 AC 본문의 번역과 해설을 따라가시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읽다가 특별히 궁금한 주제가 나오면 그때 관련 심화를 읽으셔도 됩니다. 반대로 이미 AC를 어느 정도 읽어 오신 분이라면 관심 있는 글 번호나 심화 주제를 찾아 들어가셔도 됩니다. 500쪽이 넘는다고 해서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번에 완독해야 하는 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한 장에서 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을 읽는 방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펼치면 천지창조를 만납니다. 흑암 가운데 빛이 생기고,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이 놓이며, 뭍이 드러나고 식물이 자랍니다.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이 생기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읽는 말씀의 문자입니다.

 

그런데 AC는 그 문자 안에서 또 하나의 창조를 봅니다. ‘사람의 거듭남입니다. 아직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 안에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을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이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AC.6은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섯 날은 서로 무관한 여섯 가지 영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지나가는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처음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조금씩 주님에게서 오는 빛을 받고, 주님에게 속한 것과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이 구별되며, 선과 진리가 생겨나고, 마침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창세기 1장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자연계의 최초의 빛과 함께 안에는 언제 처음 빛이 비치기 시작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궁창이 물과 물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사람 안에서는 무엇이 구별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땅에서 식물이 돋고 씨를 맺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서는 진리가 사람 안에서 어떻게 선한 삶의 열매가 되는가?를 묻게 됩니다.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 짐승과 사람도 더 이상 서로 떨어져 있는 창조물의 목록으로만 보이지 않고, 한 사람 안에 영적 생명이 조금씩 형성되어 가는 긴 흐름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에 관한 말씀이 아니고 인간의 거듭남만을 말한다는 것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이 자료는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는 문자에는 분명 천지와 빛과 물과 땅과 광명체와 생물과 사람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AC가 밝히려고 하는 것은 그 문자를 없애고 다른 이야기를 대신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담긴 속뜻입니다. 이 자료에서도 이 점을 여러 차례 조심해서 구별했습니다. 창조의 말씀을 지우고 거듭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말씀 안에서 인간의 새로운 창조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자료를 읽으실 때 처음부터 모든 상응을 외우려고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빛은 이것, 물은 이것, 나무는 이것, 새는 이것하는 식으로 대응표를 만들어 외우기 시작하면 오히려 창1 전체의 생명 있는 흐름을 놓치기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표현이 하나의 거듭남 안에서 어떻게 서로 이어지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이 이어지고, 둘째 날이 셋째 날을 준비하며, 그렇게 여섯째 날까지 진행됩니다. 실제 파일에서도 1 여섯 날은 속뜻에서 여섯 개의 서로 떨어진 교훈이 아니라 하나의 거듭남이 진행되는 여섯 연속적 상태라는 점을 중요하게 붙들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창1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순서가 곧 거듭남의 질서로 읽히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기 안에 무엇이 어둠인지조차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빛이 비치고, 구별이 생기고, 무엇인가 싹트고, 진리가 자라고, 사랑과 신앙이 점차 생명의 중심으로 들어오며, 마침내 그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 전체가 달라져 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를 이루시는 창조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계속해서 중심에 계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안에 빛을 만들고, 자기 힘으로 선을 생산하고, 마침내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읽어 갈수록 내가 한다고 생각하던 것의 생명이 실제로 어디에서 오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거듭남의 시작도 주님에게서 오고, 선과 진리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며, 시험 가운데 사람을 붙드시고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응답하고 싸우고 살아가지만 그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과 능력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점은 이 자료가 창1의 여섯 날을 읽으면서 계속 되돌아가는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이 자료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남의 단계를 정리하는 교과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지금 몇째 날에 있는가?라고 자기 영적 수준을 판정하려는 읽기를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날은 사람에게 영적 등급표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어떤 질서 가운데 새롭게 하시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실제 삶에서는 여러 상태가 복잡하게 경험될 수 있고, 이미 배운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다시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자료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재는 잣대로 사용하기보다, 거듭남의 방향과 질서를 배우는 데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이 파일에서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질문입니다. AC를 처음 읽다 보면 정말 많은 질문이 생깁니다. ‘ 사람과 사람은 무엇인가?’, ‘리메인스란 무엇인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은 어떻게 다른가?’, ‘ 같은 짐승이 어떤 곳에서는 선한 것을 뜻하고 다른 곳에서는 악한 것을 뜻하는가?’, ‘형상과 모양은 무엇이 다른가?’,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을 즉시 없애지 않으시는가?’, ‘천사들은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가?같은 질문들입니다.

 

이런 질문들을 가능하면 그냥 지나가지 않은 것이 이번 작업의 한 특징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문에 곧바로 거대한 교리 체계를 가져와 답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AC 지금 말하는 만큼만 충분히 말하고, 다음 글의 몫은 다음 글에 남겨 두는 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떤 설명이 스베덴보리의 이 글에 직접 있는 것인지, 관련 AC들을 통해 충분히 뒷받침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설명이나 적용인지도 가능한 한 구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료는 처음 작성한 글을 그대로 모은 것만도 아닙니다. AC.1부터 AC.66까지 다시 검토하면서 번역과 해설, 심화 가운데 지나치게 나간 설명은 줄이고, 처음 읽는 분에게 꼭 필요한 설명은 오히려 보충했습니다. 성경 구절이나 다른 AC 글 번호가 인용되었다고 해서 모두 별도의 심화로 남겨 두기보다, 그 인용이 왜 사용되었는지를 해설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소화했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읽은 독자가 정말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을 품을 만하고, 그 질문 자체로 독립적인 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심화로 남겼습니다.

 

특히 성경과 AC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자료에서 AC는 성경을 대신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표현을 AC에 맞추어 고치는 것도 이 작업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말씀이 있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을 밝히고 설명하는 책이라는 순서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AC의 영어 인용과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의 표현이 다르더라도 의미상 문제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의 표현을 우선했고, 의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할 때에는 성경을 AC의 문장에 맞추어 바꾸기보다 개역개정은 이렇게 되어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고 차이를 밝히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파일 마지막 AC.66의 삼상2:3 심화는 바로 그런 문제를 실제 사례로 다룹니다.

 

AC.64-66에 이르면 창1의 거듭남 이야기는 다시 말씀자체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우리가 읽는 나라와 성읍과 강과 사람의 이름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하고, 자신이 말씀을 읽을 때 그 내적 의미가 얼마나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는지를 영광이라는 표현과 함께 전합니다. 마지막 AC.66에서는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성경의 모든 부분을 똑같은 방식으로 기계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안내도 남깁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을 구별하는 설명은 앞으로 창세기를 계속 읽어 갈 때 매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그러므로 AC.1-66은 창세기 1장의 마지막 절에서 끝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 부분을 다 읽고 나면 오히려 창세기 2장을 읽을 준비가 됩니다.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이 그다음에는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지, ‘일곱째 의 안식은 무엇인지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파일은 하나의 완결된 창1 작업인 동시에 앞으로 계속될 긴 AC 읽기의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이 자료를 처음 읽으시는 분께 한 가지를 권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응 하나하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심화까지 모두 읽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대신 한 가지 질문을 마음에 품고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새롭게 창조하시는가?

 

그 질문을 가지고 읽다 보면 빛이 있으라가 조금 달리 들릴 수 있습니다. 궁창이 나뉘고 땅이 드러나며 씨가 싹트는 모습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빛나고 생물이 살아 움직이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장면들이 먼 옛날의 창조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고, 지금도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새 창조의 질서와 연결되어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에는 ChatGPT가 함께했습니다. 번역을 비교하고, 문장을 다듬고, 앞뒤 AC의 문맥을 살피며,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무엇을 궁금해할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료를 ChatGPT AC 해석해 결과라고 소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AC 원문과 말씀 앞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다시 원문에 비추어 검토하며, 때로는 앞서 쓴 해설을 고치고 다시 쓰는 긴 협업의 결과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이 파일의 제목에도 with ChatGPT라고 적었습니다. ‘by ChatGPT가 아니라 with ChatGPT입니다. 이 작은 차이가 이번 작업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자료는 제 손에서만 읽히는 작업 노트를 넘어, 처음 AC를 접하는 분들과도 나누어 보려 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낯설고, 어떤 대목에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서둘러 받아들이거나 서둘러 거부하기보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천천히 따라가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AC 자체에 머무르기보다, AC가 계속해서 가리키는 말씀으로 돌아가 보셨으면 합니다.

 

500쪽이 넘는 긴 여정이지만, 그 시작은 아주 짧은 한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어쩌면 창세기 1장을 속뜻으로 읽는 긴 여정은 결국 이 한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에서 듣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빛을 주시고, 구별하시고, 생명을 싹트게 하시고, 사랑과 신앙을 자라게 하시며, 마침내 그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과정 말입니다.

 

이 자료가 그 놀라운 말씀의 여정을 조금 더 깊이 따라가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문(AC.1-5) 및 창1(AC.6-66) 번역, 해설 및 심화, 목차 및 색인 포함 with ChatGPT.pdf
3.77MB

 

 

 

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5)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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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란 무엇인가? - AC를 처음 읽는 분들을 위한 소개

※ 본 글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대표 저작인 ‘Arcana Coelestia’(약어 AC)에 대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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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을 경험합니다. 국기가 한 나라를 나타내고, 왕관이 왕권을 나타내며, 결혼반지가 부부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표상은 사람이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상징보다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인물이나 장소, 사물이나 행위가 표상한다고 할 때에는 그 외적인 것이 말씀 안에서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제사는 문자적으로는 실제로 행해진 종교의식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제사들이 주님과 주님께 속한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라는 외적인 의식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상적 기능을 합니다.

 

이 점에서 표상과 단순한 비유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는 어떤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을 끌어와 비교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표상은 단지 설명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문학적 장치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이 실제로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상하도록 말씀 안에 배열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집트와 가나안, 성막과 성전, 제사와 절기 같은 것들이 문자적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것이 표상적 의미를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자적 이야기나 역사적 차원을 곧바로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상한다는 말의 핵심은 외적인 것 안에 그것이 나타내는 더 내적인 것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그 문자가 나타내고 있는 영적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에서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것을 몸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과 그 안의 나무와 강, 뱀과 열매 같은 것들도 이후 AC의 해설을 따라가면 각각 태고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에 관한 것을 표상하고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임의로 이것은 이것을 상징한다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질서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상응과 속뜻의 연결을 따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AC.4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안에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문장이 앞으로 AC에서 표상이라는 말을 수없이 만나게 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이 단지 자연계의 대상들로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에 관한 영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표상이 자의적인 상징 놀이가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각각의 표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해당 문맥에서 하나씩 확인해 가야 합니다. (AC.4 심화 1)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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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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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5)

 

AC.23

말씀에서 (day)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day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백성이 자기 발로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동안 잊어버린 되었다가 칠십 년이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것이라 (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day) 시간을 뜻하는 사용되기 때문에, 또한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Asday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해설

AC.23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day)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해석 원리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가 처음부터 날은 상태다라고 단순하게 등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에서 이 문자적인 하루를 넘어 시간 자체를 나타내는 용례가 매우 흔하다고 설명하고, 이어서 날이 시간을 나타내기 때문에 시간의 상태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23의 논리는 날은 하루가 아니다라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시간 시간에 속한 상태로 깊어지는 구조입니다.

 

첫 번째 증거군은 사13:6, 9, 13, 22와 사23:7, 15입니다. 13장에는 여호와의 ,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들이 이어지며, 특히 마지막에는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고 하여 날들이 나란히 사용됩니다. 여기서 은 단순한 24시간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 제한되지 않고 어떤 사건과 상태가 펼쳐지는 때를 나타냅니다. 23장에서도 옛날, 그날, 왕의 연한 같이 칠십 이라는 시간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두로, , 칠십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 이라는 말이 하루보다 넓은 시간과 시대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AC.23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이 시간을 나타내므로 또한 시간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용되는 첫 구절이 렘6:4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입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실제 하루가 저물어 가는 모습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때의 상황과 상태를 함께 담아냅니다. 바로 앞 AC.22에서 저녁아침이 각각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한 것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따라서 시간의 표현은 말씀 안에서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33:20, 25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 그리고 주야로 때를 잃게 있을진대라는 표현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도 낮과 밤은 실제 자연의 시간 질서를 배경으로 하지만, 스베덴보리가 AC.23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낮과 밤에 가 있으며 시간의 표현이 그에 속한 상태와 결부되어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곧바로 낮과 밤을 시험과 회복의 모든 교대에 일대일로 대응시키거나, 거듭남의 모든 과정에 대한 별도의 섭리 법칙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주제들은 해당 내용을 직접 다루는 다른 AC 문맥에서 살피는 편이 안전합니다.

 

5:21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상태의 관계를 특히 이해하기 쉽게 보여 줍니다. 지나간 달력의 날짜 자체를 다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날들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그 날들에 속했던 삶과 상태가 새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더구나 바로 앞에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는 기도가 놓여 있으므로, 여기서 새롭게 되기를 구하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회귀가 아니라 주님께로 돌이켜지는 삶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다만 AC.23은 여기서 옛적을 곧바로 태고교회라고 해설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의 직접적인 역할도 날들이 날들에 속한 상태를 나타낼 있다는 점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AC.23이 왜 AC.22 바로 뒤에 놓이는지도 분명해집니다. AC.22에서는 저녁아침이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내며,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상태에서 주님께 속한 상태로 나아가는 질서가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AC.23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창1에서 반복되는 자체가 단순한 시간 단위에 머물지 않고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말씀 전체의 용례를 제시합니다. 따라서 창1첫째 , 둘째 과 이어지는 날들을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읽는 것은 이라는 단어에 임의로 새로운 뜻을 붙인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시간과 상태가 결부되어 표현되는 방식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AC.23을 근거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을 언제나 기계적으로 영적 상태라고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곳에서는 실제 하루가 중심일 수 있고, 어떤 곳에서는 더 넓은 시간이나 시대가 중심일 수 있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그 시간에 속한 상태가 함께 표현됩니다. 중요한 것은 문맥입니다. AC.23이 보여 주는 것은 날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상태만을 뜻한다는 상응 사전식 공식이 아니라, 말씀에서 시간의 표현이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함께 담을 수 있다는 해석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창세기 1장의 전체 구조와 만날 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AC.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날을 인간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인 상태라고 이미 제시했습니다. AC.23은 이제 여러 선지서의 용례를 통해 이라는 말 자체가 그러한 읽기를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1의 날들은 단순히 시계로 계산되는 여섯 개의 시간 단위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차례로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의 상태들로 읽힙니다.

 

결국 AC.23의 핵심은 시간을 버리고 상태만 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서는 시간과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간의 이름이 그 시간에 속한 영적 상태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을 읽을 때도 얼마나 시간이었는가?라는 질문에만 머무르지 않고 날은 거듭나는 사람의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가?라고 물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AC.23이 창조의 날들을 거듭남의 날들로 읽도록 열어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AC.23 해설)

 

 

 

AC.24, 창1:6-7(AC.24-25), ‘궁창의 구별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때’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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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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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5)

 

AC.22

이제 저녁(evening)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있습니다. 저녁 모든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늘의 상태, 거짓의 상태이며 신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 모든 이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빛의 상태, 진리의 상태이며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저녁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아침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다윗을 통해 하신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What is meant byeveningand what bymorningcan now be discerned. Evening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morning,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며, 그분이 오시는 때는 신앙이 없기 때문에 저녁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니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s it iseveningwhen there is no faith, andmorning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evening,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여기서 주야에는 원문의 저녁-아침(evening-morning)이라는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에서 아침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morning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해설

AC.2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에서 반복되는 저녁아침을 단순한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언어로 해석하는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저녁은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그늘의 상태, 곧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아침은 이후의 상태로, 빛의 상태, 곧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루가 지나갔다는 뜻을 넘어, 거듭남 가운데 한 상태에서 그 다음 상태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AC.20에서 처음 빛이 나타났고 AC.21에서 빛과 어둠이 구별되었다면, AC.22에서는 그 변화의 방향이 저녁에서 아침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더욱 일반적인 원리로 확장하여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21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낮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밤에 비유된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사람 자신의 것이란 단순히 인간의 개성이나 자연적인 능력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여기는 proprium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여기던 질서에서 그것들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질서로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 원리를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먼저 인용하는 말씀이 삼하23:2-4입니다. 여기서 돋는 해의 아침 , 구름 없는 아침,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이라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AC.22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아침이 빛과 생명이 나타나는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을 말씀 자체에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아침의 빛 아래 새 풀이 돋아나는 모습은 빛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이 나타나는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만을 근거로 을 퍼셉션이나 특정한 영적 기능에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붙드는 중심은 아침입니다. 아침은 주님께 속한 빛이 나타나는 상태이며, 그 빛 아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개인의 거듭남을 넘어 주님의 세상 오심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고, 그분이 오시는 당시의 상태는 신앙이 없었으므로 저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같은 사건을 모순되게 저녁과 아침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기 직전의 상태를 그 근본적인 신앙의 결핍 때문에 저녁이라 하고, 바로 그 상태 가운데 주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된 것을 아침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질서는 한 개인의 거듭남뿐 아니라 교회의 황폐와 주님의 오심이라는 더 큰 차원에서도 적용됩니다.

 

이 대목에서 단8:14, 26이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이천삼백 주야까지니라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표현에는 저녁아침이 들어 있으며 Potts 역시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이라고 옮겨 AC.22의 논지를 드러냅니다. 더구나 단8의 문맥에서는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며 진리가 땅에 던져지는 황폐의 상황과, 이후 성소가 정결하게 되는 회복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단순히 저녁아침이라는 단어가 우연히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신앙과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와 그 뒤의 회복이라는 문맥이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영적 질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다만 단8이천삼백AC.22에서 별도의 예언 시간표로 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기서는 그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초점은 신앙이 없는 상태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는 상태가 아침이라는 데 있으며, 이를 통해 주님의 오심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22에서 단8:14, 26을 읽을 때도 숫자의 계산보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황폐한 상태에서 주님의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되는 구조를 붙드는 것이 본문의 논지에 더 충실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AC.22 전체를 하나로 묶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아침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따라서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모든 오심은 주님의 역사적 성육신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이전의 어두운 상태에 빛이 시작되고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모든 경우에 아침이라는 영적 표현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아침은 새로운 창조의 표현이 됩니다. 1의 창조가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설명과도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22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단순히 어두웠다가 밝아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 자신의 것에서 주님께 속한 것으로,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에서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로 나아가는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오심이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밤을 아침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심으로 아침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교회의 회복에서도 아침이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이유입니다. (AC.22 해설)

 

심화

1. 스베덴보리는 8:14, 26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 심화 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 심화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를 처음 읽을 때 가장 어리둥절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단8:14, 26의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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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 창1:5, ‘날이 뜻하는 시간과 상태 : 거듭남의 날들을 읽는 원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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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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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4, 5)

 

AC.21

(light)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good)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이 선처럼 보였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어둠이며, 단지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proprium 속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아직 남아 있는 것들입니다.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day)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night) 비유됩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말씀에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good,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darkness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day,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night,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AC.21은 바로 앞 AC.20에서 처음 나타난 이 무엇이며, 그 빛이 이전의 어둠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설명합니다. AC.20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고,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AC.21에서는 그 첫 빛이 비침으로써 이전에는 구별할 수 없었던 두 근원이 드러납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4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는 거듭남 가운데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분별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이 선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 주님은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21에서 선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사람이 그것을 얼마나 선하게 느끼는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칭찬받는가, 심지어 종교적으로 얼마나 경건해 보이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AC.20에서 주님이 자체요 진리 자체라고 한 설명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빛이 나타났다는 것은 단지 사람이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지를 분별할 가능성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어둠은 흥미롭게도 처음부터 어둠처럼 보였던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악이 선처럼 보이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둠인 것들이 빛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21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영적인 어둠의 위험은 사람이 언제나 나는 지금 어둠 속에 있다고 느끼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선이라고 여기고 거짓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빛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AC.20의 첫 빛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빛이 비치기 전에는 어둠을 어둠으로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proprium에 속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proprium을 단순히 인간의 개성, 재능, 성격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문맥에서 말하는 proprium은 사람이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에게서 생각하고 의도하며 행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상태와 깊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사람 자신의 이 어둠이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자연적 능력이나 개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것이 영적으로는 빛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표현은 이러한 것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첫 빛을 받았다고 해서 이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AC.20에서도 사람은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AC.21에서도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어둠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달라진 것은 이제 그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빛 사이에 구별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첫 단계는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이전에는 하나처럼 보였던 것을 주님의 빛 가운데 서로 다른 것으로 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창1:4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에서 분별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빛으로 자기 어둠을 완전하게 밝혀내는 것이 아닙니다. AC.20에서 빛 자체가 주님에게서 왔듯이,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를 참으로 분별하게 하는 기준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느낌과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빛 안에서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전에는 선처럼 보였던 악과 진리처럼 보였던 거짓이 무엇이었는지 점차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어 창1: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에 비유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도 기준은 근원입니다. 은 단순히 기분이 밝거나 신앙생활이 잘되는 때를 뜻하고 은 낙심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때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속한 것은 낮이며,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것은 밤입니다. 이 비유가 말씀에 자주 나온다고 스베덴보리가 덧붙이는 것도 빛과 어둠, 낮과 밤의 이러한 구별이 말씀 전체에서 반복되는 영적 언어임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21에서는 아직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의미까지 앞당겨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 AC.2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다룹니다. AC.21의 초점은 먼저 빛과 어둠이 나뉘고, 그것들이 낮과 밤으로 불린다는 데 있습니다. 첫 빛이 비친 뒤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 구별이 없으면 사람은 여전히 자기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어둠을 빛으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21은 거듭남에서 분별이 얼마나 근본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전에는 악이 선처럼,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지만 주님의 빛이 비치면서 그 둘이 나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 자신의 것이 즉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한 번 빛을 보았다는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과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을 구별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AC.20빛의 인식을 말했다면 AC.21은 그 빛으로 비로소 시작되는 빛과 어둠의 분별을 보여 줍니다. (AC.21 해설)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 심화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의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에 악을 언제나 악처럼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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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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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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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1:3)

 

AC.20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이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선이라 여기고, 그러한 사랑들을 지지하는 모든 것을 진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선들이 악이며, 이러한 진리들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로 잉태될 , 그는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며, 또한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주님 자신이 요한복음에서 가르치십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믿지 아니하면 너희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한 주님이 자체, 생명이시며, 진리 자체, 빛이시고, 따라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것이 없느니라 4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 세상에 와서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해설

AC.20에서 창1:3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는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를 나타냅니다. 바로 앞 AC.17-19에서는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고, 깊음이 있으며, 그럼에도 주님의 자비가 사람 안에 보존된 리메인스 위에서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빛은 사람이 스스로 어둠을 헤치고 얻어 낸 깨달음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던 주님에게서 오는 첫 영적 빛입니다. AC.19에서 아직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았던 것이 AC.20에 이르러 비로소 빛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번째 상태를 사람이 선과 진리가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높은 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것을 선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사랑을 지지하는 것을 진리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문제는 그 사람에게 선과 진리에 관한 말이나 지식이 전혀 없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기준으로 선과 진리를 판단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악인 것을 선이라 하고 거짓인 것을 진리라고 여기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시작은 무엇인가를 많이 아는 데서보다 내가 지금까지 선이라고 여긴 것이 정말 선인가?라는 새로운 분별이 시작되는 데서 나타납니다.

 

사람이 새로 잉태될 처음 일어나는 변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즉시 자기의 모든 악을 보고 완전히 버린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 표현의 정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도 인정과 칭찬을 원하고, 선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공로를 마음속에 붙들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AC.20의 직접적인 정의라기보다 그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적용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전에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선을 그대로 선이라고 여겼지만, 이제 처음으로 그 판단 자체가 흔들리고 참된 선의 기준이 자기 자신보다 높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새 생명이 잉태되는 최초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두 번째 인식이 열립니다.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AC.20의 두 인식은 서로 연결됩니다.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절대적인 선과 진리의 기준으로 삼던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0의 빛은 단순한 자기반성이나 도덕적 성찰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빛이 깊어질수록 그 인식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먼저 요8:24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믿지 아니하면 너희 가운데서 죽으리라를 인용합니다.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앞 문장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주님 자신이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AC.20에서 지나치게 넓은 구원론이나 특정 교리의 증명 구절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남의 빛이 결국 주님의 존재와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향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요1:1, 3-5, 9의 인용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앞의 요8:24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1의 말씀은 왜 주님이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이신지를 밝히는 데 사용됩니다.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에서 생명과 빛이 주님 안에 있으며, 세상에 와서 사람에게 비추는 이라는 말씀은 빛의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되었으니라는 말씀은 AC.16에서 시작된 창조의 주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첫 창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새 창조에서도 생명과 빛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특히 Potts 본문에 포함된 요1:5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AC.17-20의 흐름에서 의미가 선명합니다. 앞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었고, 이제 그 어둠 가운데 빛이 비칩니다. 그러나 이것을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모든 표현이 일대일로 상응한다고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AC.2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요한복음 구절들을 인용한 직접적인 목적은 주님이 생명 자체, 곧 선 자체이시며, 빛 자체, 곧 진리 자체이시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참된 선도 진리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빛이 있으라의 속뜻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따라서 AC.20 번째 상태AC.7의 첫 번째 상태와 서로 다른 두 체계처럼 나눌 필요도 없습니다. AC.7은 거듭남의 전체 여섯 날을 개괄하면서 첫 상태를 유아기에서부터 거듭남 직전까지의 상태거듭남이 시작되는 상태로 설명했고, AC.20은 이제 창1:3의 실제 본문을 따라 그 첫 빛이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여기서 사람은 갑자기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절대적인 선과 진리로 여기던 상태에서 깨어나 선과 진리가 자기보다 높은 것이며, 더 나아가 그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20에서 빛이 있으라는 말씀은 거듭남의 매우 작지만 결정적인 전환입니다. 사람은 아직 많은 싸움을 앞두고 있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라진 것도 아니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온전히 행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전에는 어둠을 어둠으로 알지 못했지만 이제 빛이 비치면서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니었음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빛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됩니다. 거듭남의 첫 빛은 결국 자신을 더 선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하는 빛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시선을 돌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게 하는 빛입니다. (AC.20 해설)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 실제 사례들

 

AC.20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심화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문장으로 읽으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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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 심화 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 심화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의 설명을 실제 인간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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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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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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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9

하나님의 (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 품는다(brood) 합니다. 그것이 운행하는 대상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인데, 말씀 전체에서 이것들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 (remnant)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 바로 이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By thespirit of God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move,orbrood,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19는 창1:2의 마지막 말씀,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의 속뜻을 밝힙니다. 앞선 AC.17-18이 거듭남 이전의 인간을 혼돈과 공허, 흑암, 깊음으로 묘사했다면, 여기서는 그처럼 어두운 상태의 인간에게 이미 주님의 자비가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spirit of God)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출발점은 사람이 먼저 자신을 고치거나 주님께 올라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버리지 않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에 있습니다.

 

운행하다(move), 또는 품다(brood)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암탉이 자기 알을 품는 모습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세부적인 상응을 임의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사람 안에 보존해 두신 것들 위에서 계속 역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현재 상태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아무것도 없는 존재처럼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아직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 그 안에 감추어 두시고 보존하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1:2의 마지막 장면은 단순히 흑암 가운데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다는 모습이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생명을 자비로 품고 계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그것이 바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 (remnant)입니다. AC.19는 여기서 그것을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는 우선 그 직접적인 설명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동시에 리메인스를 단순히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좋은 추억이나 종교 지식 전체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사람이 자기 힘으로 모아 둔 영적 자산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후 AC에서는 리메인스가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 순진함과 체어리티에 속한 상태들까지 포함하는 훨씬 깊은 개념으로 펼쳐지지만, AC.19에서는 그 전체 교리를 미리 끌어오기보다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람 안에 무엇인가를 이미 보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은 무엇일까요? AC.19는 여기의 수면이 바로 이러한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1:2의 문자에서는 흑암 아래의 물과 그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 안에 주님께서 감추어 보존하신 것들과 그 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알고 다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를 읽으면, 이 말씀은 창조 이전의 한 장면을 넘어 주님께서 사람의 거듭남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AC.19에는 리메인스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중요한 말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18황폐와 연결됩니다. 아직 사람의 겉에 속한 것들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들이 거듭남의 새로운 생명으로 전면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고도 그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선한 것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공로나 명예로 돌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19가 직접 제시한 사례는 아니지만, 왜 사람에게 속한 것이 물러나는 과정과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이 빛 가운데 나오는 과정이 서로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리메인스 자체가 불안정하거나 쉽게 오염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낼 사람의 외적 상태가 아직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러나 황폐해질 때까지 리메인스가 빛이나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주님께서 그 이전에는 사람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창1:2의 그림은 정반대입니다. 아직 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영은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직 자기 안에서 분명한 영적 빛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주님의 자비는 이미 그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 위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AC.18의 황폐를 단순히 버림받음이나 파괴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쪽에서는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는 것들이 물러나는 과정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주님의 자비가 이미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들 위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9는 리메인스 교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현재 모습만 보고 사람 안에는 아무런 선도 남아 있지 않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다고 해서 그 모든 세월 동안 주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리메인스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의 거듭남을 자동적으로 보장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 사람이 훗날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자비로 준비하고 보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AC.19의 중심은 리메인스라는 개념 자체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자비입니다. 리메인스가 존재하는 것도 주님께서 감추어 보존하셨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훗날 거듭남에 사용되는 것도 주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1:2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어두우면서도 동시에 희망적입니다. 아직 빛은 나타나지 않았고 사람은 여전히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흑암 속에서도 주님의 자비는 이미 사람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 보존하신 것들 위에서 운행하며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말씀에서 마침내 빛이 있으라는 새로운 상태가 시작됩니다. (AC.19 해설)

 

심화

1. 자비(mercy) 은혜(grace)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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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ove brood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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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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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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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뜻하며, 사람은 전적으로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그것들 속에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 상태에서 그는 빛이 없으므로, 깊음(deep), 어둡고 혼란한 어떤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말씀 여러 곳에서 깊음(deeps), 바다 깊은 (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사람의 거듭남 이전에 그것들은 마르거나(dried up) 황폐해집니다(wasted). 다음 이사야 말씀처럼 말입니다. Thefaces of the deep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deep,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deeps,anddepths of the sea,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dried up,orwasted,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러한 사람은 또한 천국에서 ,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 포함하는데, 이는 거듭남에 앞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참된 것을 있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있기 전에,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해설

AC.18은 창1:2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에서 깊음(deep)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17에서 혼돈은 선이 없음, 공허는 진리가 없음, 흑암은 주님 신앙과 영적, 천적 삶에 대한 어리석음과 무지를 뜻한다고 했다면, AC.18은 그 어둠 아래에 있는 사람의 상태를 한층 더 깊이 들여다봅니다. 스베덴보리는 깊음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 욕정에서 생겨나는 거짓(falsities)이라고 설명하며, 사람은 이것들로 전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속에 완전히 잠겨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빛이 없는 이 상태의 사람은 깊음, 곧 어둡고 혼란한 어떤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깊음은 단순히 사람에게 몇 가지 나쁜 욕망이나 잘못된 생각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 이전에는 욕정과 거짓이 그의 삶과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AC.18의 초점은 인간의 어두운 상태를 묘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여러 곳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깊음 또는 바다 깊은 이라고 하며,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이 깊음이 마르거나(dried up) 황폐해진다(wasted)고 말합니다. 여기서 황폐(vastation)AC.18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 자체를 파괴한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것과 선한 것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 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서 직접 말하듯,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으려면 먼저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저항하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황폐는 거듭남과 별개의 파괴 과정이 아니라, 새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람을 준비시키시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이것을 악한 성향의 흔적이 사람에게서 완전히 소멸한다는 뜻으로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더 이상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고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물러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사51:9-11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에는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여호와의 역사가 나옵니다. AC.18의 문맥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깊은 , 바다 깊은 , 말리다, 그리고 그곳에 길을 내다라는 표현입니다. 앞에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과 거짓을 깊음이라고 했는데, 이사야에서는 바로 그 깊은 물이 말라 길이 열리고 구속받은 자들이 그 길을 건너갑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깊음이 그대로 보존된 채 그 위에 새 생명이 덧붙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구속의 길을 가로막는 것을 처리하시고 그 가운데 길을 내신다는 AC.18의 설명을 뒷받침합니다. 거듭남의 길은 사람이 자기 욕정과 거짓을 스스로 헤쳐 나와 만드는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깊음을 마르게 하시고 길을 내심으로 열리는 길입니다.

 

51:9-11의 앞뒤 흐름도 AC.18의 논지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라는 부르짖음 뒤에 바다와 큰 깊음을 말리시는 주님의 능력이 나오고, 그 결과 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한 목적은 단지 깊음이라는 같은 단어가 성경 다른 곳에도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깊음이 마르고 길이 열리며 구속받은 자가 돌아오는 전체 그림이, 황폐가 왜 거듭남에 앞서 필요한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황폐의 목적은 황폐 그 자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욕정과 거짓 가운데 버려두시는 것도 아닙니다. 깊음 가운데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가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인용은 AC.18에서 황폐를 단순한 파괴나 절망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러한 상태의 사람이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자연적 생명이나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천국의 빛에서 볼 때 아직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생명이 그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음을 매우 강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황폐가 등장합니다.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인간의 황폐는 거듭남에 앞서며, 그 이유는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되기 전에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8에서 황폐는 단순히 사람이 고난이나 실패를 겪는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모든 고통을 자동으로 황폐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핵심은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던 것들이 그 지배력을 잃어,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사람 안에 이루실 수 있도록 길이 열리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 옛사람은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AC.18 전체를 압축합니다. 여기서 옛사람의 죽음은 육체적 죽음도 아니고, 인간의 개성이나 자연적 삶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사람을 지배하며 선과 진리의 유입을 거슬러 온 옛 질서가 더 이상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가 아니라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라고 한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AC.18은 아직 거듭남의 완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새 생명이 시작될 수 있도록 먼저 길이 준비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창1:2깊음은 절망의 마지막 자리가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기 직전의 자리입니다. 깊음을 마르게 하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옛사람이 물러나고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AC.18 해설)

 

심화

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 심화 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 심화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깊음’이 마르고 황폐해져야 하며,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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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황폐(vastation, vastatio) 무엇인가?

 

AC.18 심화 2, ‘황폐’(vastation, vastatio)란 무엇인가?

AC.18 심화2. ‘황폐’(vastation, vastatio)란 무엇인가? AC를 영어로 읽다 보면 오늘날에는 다소 낯선 ‘vastation’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AC.18에서 Potts는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인간의 황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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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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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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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1:2)

 

AC.17

거듭남 이전의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 하며, 또한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the ground)이라고 합니다. 혼돈(void) 선이 전혀 없는 곳을, 공허(empty) 진리가 전혀 없는 곳을 뜻합니다. 이로부터 흑암(thick darkness) 나오는데, 이것은 어리석음을, 그리고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결과 영적, 천적 (spiritual and heavenly life)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earth void and empty,and also theground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empty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thick darkness,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4:22, 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AC.17은 창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가운데 먼저 혼돈, 공허, 흑암을 해설합니다. 바로 앞 AC.16에서 창세기의 창조가 사람의 창조, 곧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으므로, 이제 창조가 시작되기 전의 땅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사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람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부르며, 또한 선과 진리가 아직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창1:2는 단순히 창조 이전 우주의 물리적 모습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시기 전 그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혼돈(void)공허(empty)는 막연히 뒤섞이고 텅 빈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말을 정확히 구별하여 혼돈은 선이 없는 상태, 공허는 진리가 없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사람 안에 막연한 종교성을 더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그것들이 사람의 삶 안에서 질서를 이루게 하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선이 없다, 진리가 없다는 이 표현을 근거로 거듭남 이전 사람의 모든 외적 선행이나 모든 자연적 진실성을 무가치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7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거듭남의 관점에서 사람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선과 진리가 아직 생명 있게 자리 잡지 않은 상태입니다. 사람에게 리메인스가 어떻게 보존되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는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밝혀집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가 없는 이 상태에서 흑암(thick darkness)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흑암을 어리석음무지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 지식이 부족하거나 지능이 낮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에 대한 무지인가가 중요합니다. 먼저 주님 신앙에 속한 모든 에 대한 무지이며, 그 결과 영적, 천적 삶에 속한 모든 에 대한 무지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일에는 상당히 영리하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것에는 흑암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AC.17흑암은 지적 능력의 부족보다 주님과 영적 생명에 관한 빛이 아직 사람의 의식과 삶 안에서 밝혀지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렘4:22-23을 인용합니다. 먼저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는 말씀은 AC.17에서 흑암어리석음과 주님 신앙에 관한 무지라고 설명한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곧 주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영적 어리석음과 무지의 근본적인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이어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는 말씀은 사람이 자연적 총명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반드시 영적 선을 아는 지혜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은 AC.17어리석음을 세상적인 무능이나 지적 결핍으로 오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4:23은 창1:2와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고 하는데,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이 창1:2와 거의 그대로 겹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우연한 어휘의 유사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백성과 그들의 영적 상태를 두고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혼돈과 공허가 물질적 우주의 최초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의 언어로도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AC.16에서 창조가 거듭남을 의미한다는 것을 여러 선지서와 시편의 말씀으로 확인했다면, AC.17에서는 혼돈과 공허 역시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킬 수 있음을 예레미야를 통해 확인하는 셈입니다.

 

또한 예레미야는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고 말합니다. AC.16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heaven)이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earth)가 겉 사람을 의미한다고 미리 밝혔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늘에 빛이 없다는 표현도 AC.17흑암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속 사람 자체가 주님에게서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아직 사람에게 영적 빛이 드러나 그의 의식과 삶을 밝혀 주는 상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AC.18AC.19에서는 이 어둡고 황폐한 상태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므로, AC.17만으로 거듭남 이전 인간의 내적 상태 전체를 닫힌 체계처럼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AC.17의 진단은 매우 엄중하지만 절망을 선언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혼돈은 선의 없음, 공허는 진리의 없음, 흑암은 주님 신앙과 영적, 천적 삶에 대한 어리석음과 무지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이야기는 바로 이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사람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빛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빛을 비추심으로써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AC.17은 인간을 정죄하기 위한 인간론이라기보다, 왜 우리에게 주님의 새 창조가 필요한지를 보여 주는 거듭남의 첫 진단이라고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17 해설)

 

심화

1.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앞당겨 수는 없을까?’

 

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 심화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의 ‘혼돈’, ‘공허’, ‘흑암’을 자신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신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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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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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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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태초 또한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시기를 포함하는데, 이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창조(a new creation)라고 합니다.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창조하다(to create), 짓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거듭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각각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the beginning.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days of old[antiquitatis] and also thedays of eternity.Thebeginning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new creationof man. The expressions tocreate,toform,tomake,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내가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러므로 주님은 구속자(the 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the 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the Maker), 그리고 창조자(the Creator)라고 불리시는데, 같은 선지서에서,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redeemer,theformer from the womb,themaker,and also the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heaven) 거듭남 이전의 사람을, (earth)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있습니다. Thatheaven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earth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AC.16부터 스베덴보리는 창1: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기 시작합니다. 첫 표현은 태초(the beginning)입니다. 그는 먼저 태초가 태고, 곧 가장 오래된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선지서에서는 이를 옛날(the days of old) 또는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시간 개념 자체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AC.16에서 중요한 것은 이 태초가 문자적으로 먼 옛 시작을 가리킬 뿐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첫 시기까지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에, 그에게도 하나의 새로운 시작, 곧 영적인 태초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창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앞의 AC.4에서 이미 창세기 1장이 사람의 새 창조, 곧 거듭남을 다룬다고 밝힌 것과 직접 연결됩니다. 1:1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의 시작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생명을 받는다는 말도 육체적 생명을 새로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매여 있던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영적 생명으로 깨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순한 성격 개선이나 종교적 습관의 보완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시는 창조입니다.

 

이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43:7을 인용합니다.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내가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여기서는 한 사람 또는 한 백성을 두고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라는 세 동사가 함께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이유는 선지서의 창조 언어가 단지 우주나 인간의 최초 창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님께 속하도록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동시에 이 세 동사가 모두 같은 뜻으로 무의미하게 반복된 것이 아니라 각각 의미의 차이를 가진다고 밝힙니다. 다만 AC.16에서는 그 차이를 아직 자세히 풀지 않으므로, 여기서 세 동사를 임의로 세 단계에 정확히 배당하기보다는 말씀은 거듭남을 여러 측면에서 창조·형성·만듦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정도로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어지는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는 말씀은 새 창조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더욱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앞에서 주님을 구속자, 태에서부터 지으신 , 만드신 , 창조자라고 부른다고 설명한 뒤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창조자라는 호칭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으로 존재하게 된 사실만을 말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AC.16의 문맥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구속하시고, 형성하시고, 새롭게 만드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이 창조라면 그 창조자는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선택하며 순종하지만, 그 안에서 생명을 주시고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점이 이 인용의 핵심입니다.

 

102:18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는 말씀은 창조가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의 백성은 육체적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창조함을 받을 백성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이 표현은 사람이나 교회가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매우 적절한 증거가 됩니다. 이미 자연적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시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씀 안의 창조에는 최초의 물질적 창조를 넘어선 영적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된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것은 새 창조가 단순한 내면의 심리 변화가 아니라,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향하는 새로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네 번째 인용인 시104:30은 이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기서는 창조새롭게 하다가 한 구절 안에서 나란히 나타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16거듭남은 창조라는 설명과 매우 잘 맞습니다. 주님의 영이 보내어질 때 그들이 창조되고, 그 결과 지면이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붙드는 핵심은 주님의 생명과 역사가 사람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시104:30주의 을 성령론 전체로 확대하거나 지면AC.16의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겉 사람과 반드시 일대일로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에서 이 구절이 담당하는 직접적인 역할은 창조가 곧 새롭게 함과 연결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 네 인용을 함께 놓고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창조라고 한다고 말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43:7에서는 사람이 창조되고, 지어지고, 만들어지며, 43:15에서는 주님이 창조자라고 불리시고, 102:18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백성이 다시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라고 불리며, 104:30에서는 주님의 영으로 창조됨새롭게 이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네 구절은 따로따로 흩어진 증거가 아니라 하나의 논증을 이룹니다. 말씀의 선지적 언어에서 창조는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별도의 인용 구절 심화가 없어도 AC.16에서 왜 이 네 본문을 가져왔는지가 충분히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창1:1(heaven)(earth)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미리 예고합니다. 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는 겉 사람을 의미하며, 그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너무 앞서갈 필요는 없습니다. AC.16이 아직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속뜻에서 읽을 때, 우주 창조의 언어가 동시에 인간의 내적·외적 존재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질서 지어지는 거듭남의 언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AC.16의 중심은 간결합니다. 태초는 사람의 거듭남이 시작되는 첫 시기를 포함하고, 거듭남은 창조이며, 그 새 창조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제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 새 창조가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로 이루어지는지를 하나씩 보여 주게 됩니다. (AC.16 해설)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가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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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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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AC.15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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