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2, AC.475-480 심화

2, ‘아담은 한 사람인가, 태고교회인가?’

 

AC.47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인류 최초의 어떤 한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태고교회’라고 합니다. 창세기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읽어 온 독자라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아담을 인류 최초의 한 남성 개인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인가?’

 

먼저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아담’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분명합니다. AC.478에서 그는 히브리어 ‘아담’(Adam)이 ‘사람’(man)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더욱이 창1:26에서는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 곧이어 ‘그들’이라는 복수로 받고, 창5:2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한 남성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함께 포함하는 말이며,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를 가리킵니다. AC.137에서도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사람’(homo)이라 하는 태고교회를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룬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은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DP) 241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밝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세상에 창조된 최초의 인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담이라는 개인에게 태고교회라는 추가적인 상징적 의미도 있다’는 정도의 설명보다 훨씬 강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라는 형상으로 묘사된 대상 자체가 인류 최초의 두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DP.328에서도 같은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스라엘·유대교회 이전의 여러 교회가 역사적인 방식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민족들과 사람들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설명하면서, 그 첫 번째인 태고교회가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AC.478 한 곳에서 우연히 등장하는 특이한 해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일관된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개인 아담의 존재를 부정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여기서는 질문 자체를 조금 정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최초로 창조하신 한 남성 개인이며, 하와는 그와 함께 최초로 창조된 한 여성 개인이라고 스베덴보리가 보았는가?’라고 묻는다면, DP.241에 비추어 답은 분명합니다. 그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는 최초로 창조된 두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개인도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명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의 문제를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의 질문은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 아래 무엇을 계시하셨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명확합니다. ‘태고교회’입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시대 자체를 신화적이고 비역사적인 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114 이하에서는 ‘사람 또는 아담이라 했던 태고교회’에 속했던 이들과 사후세계에서 대화했다고 기록하며, 그 교회의 후대에 속했던 사람들도 언급합니다. 따라서 ‘아담 = 태고교회’라는 해석은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와 그 상태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창5의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의 이름을 단순히 한 가족의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는다면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속뜻을 놓치게 됩니다. AC.470은 이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 곧 여러 교회와 그 상태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AC.485는 창4의 셋과 창5의 셋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고까지 명시합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태고교회에서 이어져 나온 여러 교회와 그 상태의 계승을 기록한 내적 역사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그러므로 역사적 개인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현대적인 문장으로 결론짓지 않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목적은 역사학적 논쟁을 벌이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의 개인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의 ‘아담’이라는 이름 안에 어떤 신적 진리를 담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대신, 훨씬 더 자신의 해석 원리에 맞는 방식으로 ‘아담과 그의 아내는 세상에 창조된 최초의 인간들을 의미하지 않고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DP.241).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두 개인에 관한 전기적 기록의 주인공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태고시대의 실제 사람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 사람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아담을 읽을 때 중심 질문은 ‘최초의 한 남자가 누구였는가?’보다 ‘왜 주님께서는 최초의 교회를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셨는가?’가 됩니다. 그 질문을 따라가면 창1의 창조, 창2의 에덴, 창3의 타락, 그리고 창5의 계보가 모두 한 개인의 전기를 넘어 태고교회의 형성과 천적 상태, 쇠퇴와 후대 교회들의 계승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내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AC.475-480 심화 2)

 

 

 

AC.480, 창5:2, ‘여섯째 날의 끝과 안식일의 시작에 이른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일컬어졌다는 것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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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480 심화 1, 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사람’이라 하는가?

AC.475-480 심화1, 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사람’이라 하는가? 창5:2에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고 되어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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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AC.1-5) 및 창1(AC.6-66) 번역, 해설 및 심화 with ChatGPT

 

 

이 파일을 처음 열어 보시는 분은 아마 먼저 분량에 놀라실 것 같습니다. 창세기 1장 한 장을 다루는데 500쪽이 넘습니다. ‘천지창조 한 장을 설명하는 데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분량을 계획했던 것은 아닙니다. 출발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이하 AC)를 처음부터 차례로 우리말로 옮기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을 붙여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AC.1부터 한 글씩 읽어 가면서 번역만으로는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질문들이 계속 생겼습니다. 어떤 질문은 짧은 해설만으로 충분했지만, 어떤 질문은 그 자리에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지 않으면 다음 글로 넘어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번역에 해설이 붙고, 해설에서 다시 질문이 생겨 심화가 붙으면서 지금의 분량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파일은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기획하여 집필한 결과물이라기보다, AC.1에서 AC.66까지 한 걸음씩 걸어가며 남긴 ‘읽기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원문을 번역하다가 표현 하나에서 멈추기도 했고, 스베덴보리가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질문하기도 했으며, 처음 AC를 접하는 분이라면 어디에서 이해하기 어려울지를 생각하면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검토해야 했고,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였던 설명을 AC 전체의 문맥과 대조하면서 고치기도 했습니다. 이 파일에는 그런 과정까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자료의 기본 구성은 ‘번역, 해설, 심화’입니다. 먼저 ‘번역’은 영어 AC 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기려는 부분입니다. 그다음 ‘해설’은 단순히 번역문을 다시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그 AC가 앞뒤 글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창세기 본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처음 읽는 독자가 어디에서 ‘이게 무슨 뜻이지?’ 하고 멈출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설명한 부분입니다. ‘심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을 다룹니다. 본문을 이해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 가운데 해설 안에 모두 넣기에는 너무 큰 문제들을 따로 살펴본 것입니다.

 

그래서 심화까지 반드시 차례대로 모두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읽으시는 분이라면 먼저 AC 본문의 번역과 해설을 따라가시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읽다가 특별히 궁금한 주제가 나오면 그때 관련 심화를 읽으셔도 됩니다. 반대로 이미 AC를 어느 정도 읽어 오신 분이라면 관심 있는 글 번호나 심화 주제를 찾아 들어가셔도 됩니다. 500쪽이 넘는다고 해서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번에 ‘완독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한 장에서 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을 읽는 방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펼치면 천지창조를 만납니다. 흑암 가운데 빛이 생기고,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이 놓이며, 뭍이 드러나고 식물이 자랍니다.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이 생기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읽는 말씀의 문자입니다.

 

그런데 AC는 그 문자 안에서 또 하나의 창조를 봅니다. ‘사람의 거듭남’입니다. 아직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 안에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을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이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AC.6은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섯 날은 서로 무관한 여섯 가지 영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지나가는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처음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조금씩 주님에게서 오는 빛을 받고, 주님에게 속한 것과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이 구별되며, 선과 진리가 생겨나고, 마침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창세기 1장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자연계의 최초의 빛과 함께 ‘내 안에는 언제 처음 빛이 비치기 시작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궁창이 물과 물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사람 안에서는 무엇이 구별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땅에서 식물이 돋고 씨를 맺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서는 ‘진리가 사람 안에서 어떻게 선한 삶의 열매가 되는가?’를 묻게 됩니다.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 짐승과 사람도 더 이상 서로 떨어져 있는 창조물의 목록으로만 보이지 않고, 한 사람 안에 영적 생명이 조금씩 형성되어 가는 긴 흐름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에 관한 말씀이 아니고 인간의 거듭남만을 말한다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자료는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는 문자에는 분명 천지와 빛과 물과 땅과 광명체와 생물과 사람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AC가 밝히려고 하는 것은 그 문자를 없애고 다른 이야기를 대신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담긴 ‘속뜻’입니다. 이 자료에서도 이 점을 여러 차례 조심해서 구별했습니다. 창조의 말씀을 지우고 거듭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말씀 안에서 인간의 새로운 창조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자료를 읽으실 때 처음부터 모든 ‘상응’을 외우려고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빛은 이것, 물은 이것, 나무는 이것, 새는 이것’ 하는 식으로 대응표를 만들어 외우기 시작하면 오히려 창1 전체의 생명 있는 흐름을 놓치기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표현이 하나의 거듭남 안에서 어떻게 서로 이어지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이 이어지고, 둘째 날이 셋째 날을 준비하며, 그렇게 여섯째 날까지 진행됩니다. 실제 파일에서도 ‘창1의 여섯 날은 속뜻에서 여섯 개의 서로 떨어진 교훈이 아니라 하나의 거듭남이 진행되는 여섯 연속적 상태’라는 점을 중요하게 붙들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창1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순서가 곧 거듭남의 질서로 읽히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기 안에 무엇이 어둠인지조차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빛이 비치고, 구별이 생기고, 무엇인가 싹트고, 진리가 자라고, 사랑과 신앙이 점차 생명의 중심으로 들어오며, 마침내 그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 전체가 달라져 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를 이루시는 ‘새 창조’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계속해서 중심에 계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안에 빛을 만들고, 자기 힘으로 선을 생산하고, 마침내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읽어 갈수록 ‘내가 한다’고 생각하던 것의 생명이 실제로 어디에서 오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거듭남의 시작도 주님에게서 오고, 선과 진리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며, 시험 가운데 사람을 붙드시고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응답하고 싸우고 살아가지만 그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과 능력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점은 이 자료가 창1의 여섯 날을 읽으면서 계속 되돌아가는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이 자료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남의 ‘단계’를 정리하는 교과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지금 몇째 날에 있는가?’라고 자기 영적 수준을 판정하려는 읽기를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날은 사람에게 영적 등급표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어떤 질서 가운데 새롭게 하시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실제 삶에서는 여러 상태가 복잡하게 경험될 수 있고, 이미 배운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다시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자료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재는 잣대로 사용하기보다, 거듭남의 방향과 질서를 배우는 데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이 파일에서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질문’입니다. AC를 처음 읽다 보면 정말 많은 질문이 생깁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무엇인가?’, ‘리메인스란 무엇인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은 어떻게 다른가?’, ‘왜 같은 짐승이 어떤 곳에서는 선한 것을 뜻하고 다른 곳에서는 악한 것을 뜻하는가?’, ‘형상과 모양은 무엇이 다른가?’,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왜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을 즉시 없애지 않으시는가?’, ‘천사들은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같은 질문들입니다.

 

이런 질문들을 가능하면 그냥 지나가지 않은 것이 이번 작업의 한 특징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문에 곧바로 거대한 교리 체계를 가져와 답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이 AC가 지금 말하는 만큼만 충분히 말하고, 다음 글의 몫은 다음 글에 남겨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떤 설명이 스베덴보리의 이 글에 직접 있는 것인지, 관련 AC들을 통해 충분히 뒷받침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설명이나 적용인지도 가능한 한 구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료는 처음 작성한 글을 그대로 모은 것만도 아닙니다. AC.1부터 AC.66까지 다시 검토하면서 번역과 해설, 심화 가운데 지나치게 나간 설명은 줄이고, 처음 읽는 분에게 꼭 필요한 설명은 오히려 보충했습니다. 성경 구절이나 다른 AC 글 번호가 인용되었다고 해서 모두 별도의 심화로 남겨 두기보다, 그 인용이 왜 사용되었는지를 해설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소화했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읽은 독자가 정말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을 품을 만하고, 그 질문 자체로 독립적인 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심화로 남겼습니다.

 

특히 성경과 AC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자료에서 AC는 성경을 대신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표현을 AC에 맞추어 고치는 것도 이 작업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말씀이 있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을 밝히고 설명하는 책이라는 순서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AC의 영어 인용과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의 표현이 다르더라도 의미상 문제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의 표현을 우선했고, 의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할 때에는 성경을 AC의 문장에 맞추어 바꾸기보다 ‘개역개정은 이렇게 되어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고 차이를 밝히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파일 마지막 AC.66의 삼상2:3 심화는 바로 그런 문제를 실제 사례로 다룹니다.

 

AC.64-66에 이르면 창1의 거듭남 이야기는 다시 ‘말씀’ 자체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우리가 읽는 나라와 성읍과 강과 사람의 이름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하고, 자신이 말씀을 읽을 때 그 내적 의미가 얼마나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는지를 ‘영광’이라는 표현과 함께 전합니다. 마지막 AC.66에서는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성경의 모든 부분을 똑같은 방식으로 기계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안내도 남깁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을 구별하는 설명은 앞으로 창세기를 계속 읽어 갈 때 매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그러므로 AC.1-66은 창세기 1장의 마지막 절에서 끝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 부분을 다 읽고 나면 오히려 창세기 2장을 읽을 준비가 됩니다.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이 그다음에는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지, ‘일곱째 날’의 안식은 무엇인지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파일은 하나의 완결된 창1 작업인 동시에 앞으로 계속될 긴 AC 읽기의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이 자료를 처음 읽으시는 분께 한 가지를 권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응 하나하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심화까지 모두 읽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대신 한 가지 질문을 마음에 품고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을 어떻게 새롭게 창조하시는가?’

 

그 질문을 가지고 읽다 보면 ‘빛이 있으라’가 조금 달리 들릴 수 있습니다. 궁창이 나뉘고 땅이 드러나며 씨가 싹트는 모습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빛나고 생물이 살아 움직이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장면들이 먼 옛날의 창조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고, 지금도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새 창조의 질서와 연결되어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에는 ChatGPT가 함께했습니다. 번역을 비교하고, 문장을 다듬고, 앞뒤 AC의 문맥을 살피며,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무엇을 궁금해할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료를 ‘ChatGPT가 AC를 해석해 준 결과’라고 소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AC 원문과 말씀 앞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다시 원문에 비추어 검토하며, 때로는 앞서 쓴 해설을 고치고 다시 쓰는 긴 협업의 결과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이 파일의 제목에도 ‘with ChatGPT’라고 적었습니다. ‘by ChatGPT’가 아니라 ‘with ChatGPT’입니다. 이 작은 차이가 이번 작업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자료는 제 손에서만 읽히는 작업 노트를 넘어, 처음 AC를 접하는 분들과도 나누어 보려 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낯설고, 어떤 대목에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서둘러 받아들이거나 서둘러 거부하기보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천천히 따라가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AC 자체에 머무르기보다, AC가 계속해서 가리키는 말씀으로 돌아가 보셨으면 합니다.

 

500쪽이 넘는 긴 여정이지만, 그 시작은 아주 짧은 한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어쩌면 창세기 1장을 속뜻으로 읽는 긴 여정은 결국 이 한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에서 듣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빛을 주시고, 구별하시고, 생명을 싹트게 하시고, 사랑과 신앙을 자라게 하시며, 마침내 그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과정 말입니다.

 

이 자료가 그 놀라운 말씀의 여정을 조금 더 깊이 따라가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문(AC.1-5) 및 창1(AC.6-6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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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5)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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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란 무엇인가? - AC를 처음 읽는 분들을 위한 소개

※ 본 글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대표 저작인 ‘Arcana Coelestia’(약어 AC)에 대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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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을 경험합니다. 국기가 한 나라를 나타내고, 왕관이 왕권을 나타내며, 결혼반지가 부부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표상’은 사람이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상징보다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인물이나 장소, 사물이나 행위가 ‘표상한다’고 할 때에는 그 외적인 것이 말씀 안에서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제사는 문자적으로는 실제로 행해진 종교의식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제사들이 주님과 주님께 속한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라는 외적인 의식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상적 기능을 합니다.

 

이 점에서 ‘표상’과 단순한 ‘비유’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는 어떤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을 끌어와 비교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표상은 단지 설명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문학적 장치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이 실제로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상하도록 말씀 안에 배열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집트와 가나안, 성막과 성전, 제사와 절기 같은 것들이 문자적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것이 표상적 의미를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자적 이야기나 역사적 차원을 곧바로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상한다’는 말의 핵심은 외적인 것 안에 그것이 나타내는 더 내적인 것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그 문자가 나타내고 있는 영적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에서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것을 몸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과 그 안의 나무와 강, 뱀과 열매 같은 것들도 이후 AC의 해설을 따라가면 각각 태고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에 관한 것을 표상하고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임의로 ‘이것은 이것을 상징한다’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질서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상응과 속뜻의 연결을 따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AC.4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안에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문장이 앞으로 AC에서 ‘표상’이라는 말을 수없이 만나게 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이 단지 자연계의 대상들로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에 관한 영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 ‘외적인 것이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표상이 자의적인 상징 놀이가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각각의 표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해당 문맥에서 하나씩 확인해 가야 합니다. (AC.4 심화 1)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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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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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2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 하고, 그다음에는 사랑을 ‘더 큰 광명체’(greater luminary),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lesser luminary)라 합니다. 또한 사랑을 가리켜서는 ‘낮을 다스린다’(rule by day) 하고, 신앙을 가리켜서는 ‘밤을 다스린다’(rule by night)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바로 아르카나(arcana)인데,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숨겨져 있는 것을 이제 제가 설명해도 좋다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가 있었습니다.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친히 예고하신 바와 같습니다. 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 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 luminary,” and faith a “lesser luminary”; 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 by 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 by night.” 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 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 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29)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 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 (Matt. 24:29).

 

여기서 ‘해’(sun)는 사랑, 곧 어두워지는 사랑을, ‘달’(moon)은 신앙, 곧 빛을 내지 못하는 신앙을, ‘별들’(stars)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the knowledges of faith), 곧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을 뜻하며, 이것들이 바로 ‘하늘의 권능들’(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입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 which is darkened; by the “moon” faith, which does not give light; 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 which fall from heaven, and which are the “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2]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어떤 신앙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떤 신앙도 알지 못합니다. 온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습니다. 모든 천국의 행복이 여기에서 나오는데, 그 크기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어떤 인간의 생각으로도 결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랑과, 그 결과 모든 생명, 곧 사랑에서만 나오는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perceive). 그들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은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큰 광명체, 곧 ‘해’(sun)로도 표현되었습니다. 기록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 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 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 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 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 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 love the Lord from the heart, but yet know, declare, and perceive, that all love, 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 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 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2)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Matt. 17:2).

 

얼굴은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the Lord’s Divine)은 ‘해’(sun), 곧 사랑으로, 그의 인성(his human)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곧 ‘빛’(light)으로 상징되었습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 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 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 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해설

AC.32는 넷째 날의 두 광명체를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앞의 AC.30-31에서 사랑과 신앙이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왜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더 작은 광명체’인지, 그리고 왜 이 사실이 자신의 시대에는 특별히 가려진 아르카나였는지를 설명합니다. 핵심은 사랑과 신앙이 서로 독립된 두 요소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하나의 질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 광명체들’이라고 부르지만, 곧 사랑을 ‘더 큰 광명체’,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라고 구별합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고 신앙은 밤을 다스립니다. 여기서 크고 작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는 중요하고 다른 하나는 덜 중요하다는 가치 평가가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랑이 먼저이며 주된 것이라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AC.30에서 이미 신앙의 마지막 단계가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이라고 설명한 것과 같은 흐름입니다.

 

이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AC.32에서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숨겨져 있던 아르카나’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설명합니다.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순서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얻기 때문에, 사랑이 사라지면 참된 신앙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는 것 자체가 그 시대에는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24:29을 인용합니다. 여기서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의미를 직접 풀이합니다. ‘해’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어두워지고, ‘달’은 신앙이며 그 신앙이 빛을 내지 못하고,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며 그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가지고 별도의 복잡한 종말론적 도식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32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해와 달과 별의 어두워짐이 사랑과 신앙과 신앙에 관한 지식이 무너지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태고교회의 언급은 이 마지막 시대와 정반대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어떤 신앙도 알지 못했다’고 말하며, 천적 천사들도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떤 신앙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역사에 속한 모든 사람이 끝까지 동일한 상태에 있었다거나, 태고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후에 천적 천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본래적인 천적 성격과 천적 천사들의 질서가 나란히 제시되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나아가 ‘온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사랑 자체를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곧이어 그는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모든 사랑과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고,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사랑이 참된 사랑인 이유는 천사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의 근원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29-31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초기에는 자기가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점차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AC.32의 천적 상태에서는 이것이 더욱 분명합니다. 천적 천사들은 자기에게서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이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랑하지 않거나 수동적인 존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주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 사랑의 생명과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지각합니다.

 

마지막 변화산 사건은 이 모든 설명의 절정을 이룹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이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큰 광명체인 ‘해’로 표현되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고 옷은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굴이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은 ‘해’, 곧 사랑으로, 그의 인성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곧 ‘빛’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여기서도 AC.32가 실제로 말한 만큼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변화산의 모든 세부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얼굴과 옷에 관한 전체 상응 체계를 이 자리에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본문에서 필요한 핵심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으며, 그것이 변화산에서 ‘해’라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1의 더 큰 광명체가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단순한 추상적 상징이 아니라 결국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AC.32의 중심은 ‘해 = 사랑, 달 = 신앙’이라는 대응표 자체보다 더 깊습니다. 사랑과 신앙은 둘이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조차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질서가 사라지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이 떨어지는 상태가 되고, 이 질서가 살아 있을 때에는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경우처럼 사랑 안에 신앙이 살아 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었고, 주님의 신적 자비로 다시 설명하도록 허락되었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입니다. (AC.32 해설)

 

심화

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 심화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가리켜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라고 말합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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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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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 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 심화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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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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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1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 사랑과 신앙을 뜻하고, 또한 ‘해와 달과 별’(sun, moon, and stars)이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은 선지자들의 글에서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처럼 말입니다. That the “great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and are also called “sun, moon, and stars,”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Ezekiel: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2:7, 8) 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 (Ezek. 32:7–8).

 

이 구절들은 바로와 애굽을 다루는데, 말씀에서 바로와 애굽은 단지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의 원리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그렇습니다. In this passage Pharaoh and the Egyptians are treated of, by whom are meant, in the Word, 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 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So in Isaiah: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사13:9,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to set the land in desolation, for the stars of heaven and the constellations thereof shall not give their light; the sun is darkened in his going forth, and the moon shall not cause her light to shine (Isa. 13:9–10).

 

요엘에서도입니다. Again, in Joel: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욜2:1-2,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 (Joel 2:1–2, 10).

 

[2] 다시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gain, in Isaiah,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and the enlightening of the gentiles, consequently of a new church, and in particular of all who are in darkness, and receive light, and are being regenerated: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사60:1-3, 20) 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Isa. 60:1–3, 20).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So in David: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5-9) Jehovah in intelligence maketh the heavens; he stretcheth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he maketh great luminaries, the sun to rule by day,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 (Ps. 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148:3, 4) Glorify ye Jehovah, sun and moon, glorify him, all ye stars of light, glorify him, ye heavens of heavens, and ye waters that are above the heavens (Ps. 148:3–4).

 

[3] 이 모든 구절에서 ‘광명체들’(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뜻합니다.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습니다. 그 교회의 모든 규례는 주님을 표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등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all these passages,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It was because “luminaries” represented and signified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at it was ordained in the Jewish church that a perpetual luminary should be kept burning from evening till morning, for every ordinance in that church was representative of the Lord. Of this luminary it is written: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출27:20, 21) Command the sons of Israel that they take oil for the luminary, to cause the lamp to ascend continually: in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ithout the veil, which is before the testimony, shall Aaron and his sons order it from evening even until morning, before Jehovah (Exod. 27:20–21).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뜻임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적절한 곳에서 밝힐 것입니다. That these things signify love and faith, which the Lord kindles and causes to give light in the internal man, and through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hown in its proper place.

 

해설

AC.31은 앞의 AC.30에서 밝힌 ‘큰 광명체들’, 곧 사랑과 신앙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구절들을 연이어 제시하고, 이어서 그것들이 밝아지는 말씀을 인용하며, 마지막에는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까지 연결합니다. 따라서 이 단락의 중심은 단순히 ‘해는 사랑, 달은 신앙’이라는 하나의 대응표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소멸될 때 말씀은 그것을 광명체의 어두워짐으로 표현하고, 사랑과 신앙이 다시 살아날 때에는 빛과 광명체의 밝아짐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첫 번째 겔32:7-8은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바로와 애굽을 다룬다고 하면서, 말씀에서 그것들이 ‘단지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의 원리’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감각이나 기억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자연적 삶과 배움에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과 기억 속 지식만을 최종 원리로 삼아 영적인 것을 그 아래 두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질서가 뒤집힐 때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것으로 묘사되며, 에스겔의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장면이 바로 그 상태를 표현합니다.

 

사13:9-10과 욜2:1-2,10도 같은 방향의 증거입니다. 두 본문 모두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31은 이 자리에서 ‘여호와의 날’이나 각 선지서의 모든 세부 표현을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심판의 구체적인 교리나 별개의 상응을 덧붙이기보다, 사랑과 신앙의 빛이 사라지는 상태가 말씀에서 자연적 광명체의 어두워짐으로 반복하여 표현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창1의 넷째 날에서는 광명체가 나타나 빛을 비추지만, 이 선지서들에서는 그 반대 상태가 해와 달과 별의 어두워짐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AC.31은 어두워짐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사60:1-3,20에 이르면 방향이 정반대로 바뀝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관한 말씀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이라는 표현은 앞의 어두워진 해와 달과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상태가 광명체의 어두워짐이라면,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새롭게 되는 상태는 해와 달이 지속해서 빛나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 교회’를 곧바로 특정한 후대 교단명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1의 직접 문맥에서는 주님의 강림으로 어둠 속에 빛이 임하여 교회가 새롭게 되는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그것을 개별적인 거듭남에도 적용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새로움과 한 사람의 거듭남이 같은 빛의 질서 안에서 함께 언급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어둠 가운데 있는 곳에 빛을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시136:5-9와 시148:3-4의 인용은 이러한 광명체의 언어가 선지서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편의 창조와 찬양의 언어 안에서도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시136은 창세기와 매우 유사하게 하늘과 땅과 물, 큰 광명체, 낮을 주관하는 해, 밤을 주관하는 달과 별을 차례로 말합니다. 시148은 해와 달과 밝은 별들에게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AC.31은 이 자리에서 해와 달과 별 각각의 세부 의미를 더 확장하기보다, 이러한 말씀 전체에서 ‘광명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뜻한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다음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앞의 선지서와 시편에서 확인한 광명체의 의미가 예배의 표상 안에서도 나타났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등불을 계속 켜 두도록 명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등불과 기름과 저녁과 아침의 모든 세부 상응을 지금 미리 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그 상세한 의미는 ‘적절한 곳에서’ 밝히겠다고 유보합니다.

 

다만 AC.31은 그 등불의 가장 중심적인 의미만큼은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0의 마지막과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이, 이제 ‘주님께서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신다’는 표현으로 다시 확인됩니다.

 

따라서 AC.31은 감각과 기억 지식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외적 지식보다 무조건 내적인 감정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과 기억 지식은 제자리에 있을 때 유용합니다. 다만 그것들이 가장 높은 원리가 되어 사랑과 신앙을 지배하려 할 때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때 영적 광명체는 어두워집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사랑과 신앙을 다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실 때,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에게 빛이 임하고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지는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1의 여러 인용은 흩어진 성경 증거들의 나열이 아닙니다. 겔32, 사13, 욜2는 사랑과 신앙의 소멸을 ‘어두워진 광명체’로 보여 주고, 사60은 주님의 오심과 거듭남을 ‘다시 밝아진 광명체’로 보여 주며, 시편들은 동일한 광명체의 언어를 창조와 찬양 안에서 확인하고, 출27의 등불은 그 사랑과 신앙을 실제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1의 해와 달과 별은 단순히 하늘의 천체를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의 빛이 어떻게 살아나고 또 어떻게 가려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의 언어가 됩니다. (AC.31 해설)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 심화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와 애굽에 관하여 ‘단지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의 원리’(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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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심화 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심화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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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AC.31 심화 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AC.31 심화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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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다 : 마지막 시대에 드러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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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 창1:14-17(AC.30-37),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 : 사랑으로 생명을 얻는 신앙의 넷째 날’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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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창1:14-17)

 

AC.30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자라 가는지를 알지 않으면 분명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요한복음에서 밝히신 바입니다. What is meant by “great 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2]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데, 먼저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신앙인 기억 지식의 신앙을 받습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을 받고, 마지막으로는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을 받습니다.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3절로 13절까지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은 20절로 25절까지 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이제 처음으로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을 다루는데, 이것들이 바로 ‘광명체들’(luminaries)입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입니다. 이 두 광명체는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광명체들이 있어’(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라는 라틴어 단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라틴어 복수 표현인 [sint luminaria]가 아니고 말입니다. 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 “luminaries”; love being “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 “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 속 사람 안에서의 사랑과 신앙은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의 열과 빛과 같으므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됩니다. 이런 이유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set in the expanse of heaven)라고 하는데, 이는 속 사람 안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뿐입니다. 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해설

AC.30은 창세기 1장의 넷째 날, 곧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가 나타나는 장면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넷째 날의 광명체들을 단순히 해와 달의 상징으로 바로 풀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무엇이며, 특히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생명을 얻어 가는지를 먼저 알아야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출발점에서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다’라고 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종교적 확신이나 교리 지식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바로 이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요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를 인용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30에 인용된 직접적인 이유는 먼저 ‘달로 상징되는 신앙에는 순종이 포함된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신앙의 생명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에 있으며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개역개정의 후반부가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번역되어 있어 신앙과 삶의 순종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도 생각하게 하지만, AC.30은 여기서 그 어휘를 별도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직접적인 초점은 신앙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새로 창조되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세 상태를 구별합니다. 처음은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fides scientifica’입니다. 사람은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기억하지만 아직 그것이 신앙의 살아 있는 생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음은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입니다. 이제 사람은 단지 기억할 뿐 아니라 자신이 배우는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은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입니다. 이 마지막 신앙은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입니다.

 

이 세 단계는 앞에서 지나온 창조의 날들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이 창1:3-13의 ‘생명 없는 것들’로 표상되고,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은 창1:20-25의 ‘생명 있는 것들’로 표상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생명 없는’이라는 말은 기억 지식이나 이해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필요한 준비입니다. 그러나 아직 신앙의 생명이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움직이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AC.29에서 열매까지 나타났는데도 아직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었던 이유도 이 문맥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제 AC.30에서 처음으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함께 등장하고, 이것들이 ‘광명체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사랑과 신앙’이라고 병렬시키지 않고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신앙은 사랑과 독립하여 스스로 생명을 가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와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 두 광명체가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는 라틴어 표현에서도 읽어 냅니다. 그는 ‘sit luminaria’라는 단수 표현과 ‘sint luminaria’라는 복수 표현을 의도적으로 대조하면서, 사랑과 신앙이 둘로 분리된 영적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 안에서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중요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와 그것과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자연계의 열과 빛에 비유합니다. 속 사람 안의 사랑은 열과 같고, 신앙은 빛과 같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둘의 근원과 수용에 있습니다. 광명체가 ‘하늘의 궁창에’ 놓인다는 것은 속 사람 안에 놓인다는 뜻이며,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놓입니다. 즉 사랑은 의지와 연결되고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아르카나가 나옵니다. 사랑과 신앙이 의지와 이해 안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들의 근원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그것들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날 뿐이라고 말합니다. 햇빛이 물체에 비쳐 그 안에서 보이더라도 빛의 근원이 그 물체가 아닌 것처럼, 인간 안에 나타나는 참된 사랑과 신앙의 생명도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 그릇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자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는 자신이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이 ‘오직 주님의 자비’라는 AC.30 마지막 문장은 바로 이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넷째 날의 전환점은 단순히 ‘신앙을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 속에 있던 신앙이 이해로 나아가고, 마침내 사랑과 결합하여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조차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그 근원이 주님임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앞의 날들에서 준비되었던 모든 것이 이제 사랑이라는 큰 광명체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라는 작은 광명체의 빛 아래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30이 넷째 날의 광명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신앙의 본질과 성장 과정을 밝히는 이유입니다. (AC.30 해설)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AC.30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

AC.30 심화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AC.30 [3]의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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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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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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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창1:11-13)

 

AC.29

‘땅’(earth), 곧 사람이 이렇게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들을 받을 준비가 되고, 선과 진리에 속한 어떤 것을 산출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주님께서는 먼저 어떤 연약한 것이 돋아나게 하시는데, 이것을 ‘연한 풀’(tender herb)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더 유용한 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다시 그 안에 씨를 지니고 있어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라고 합니다. 마침내 선한 어떤 것이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것을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라고 하며, 이 모든 것은 각기 자기 종류대로입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주님에게서 나오므로, 그것들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나중에 그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다만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여기서 생명 없는(inanimate) 것들로 표상되고, 그다음에 오는 신앙의 생명 상태는 생명 있는(animate) 것들로 표상됩니다. When the “earth,” or man, has been thus prepared to receive celestial seeds from the Lord, and to produce something of what is good and true, then the Lord first causes some tender thing to spring forth, which is called the “tender herb”; then something more useful, which again bears seed in itself, and is called the “herb yielding seed”; and at length something good which becomes fruitful, and is calle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each according to its own kind. The man who is being regenerated is at first of such a quality that he supposes the good which he does, and the truth which he speaks, to be from himself, when in reality all good and all truth are from the Lord, so that whosoever supposes them to be from himself has not as yet the life of true faith, which nevertheless he may afterwards receive; for he cannot as yet believe that they are from the Lord, because he is only in a state of preparation for the reception of the life of faith. This state is here represented by things inanimate, and the succeeding one of the life of faith, by animate things.

 

[2] 씨를 뿌리는 이는 주님이시며, ‘씨’(seed)는 그분의 말씀이고, ‘땅’(earth)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친히 밝혀 주셨습니다. (마13:19-24, 37-39; 막4:14-21; 눅8:11-16) The Lord is he who sows, the “seed” is his Word, and the “earth” is man, as he himself has deigned to declare (Matt. 13:19–24, 37–39; Mark 4:14–21; Luke 8:11–16).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마13:19-24, 37-39)

 

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막4:14-20)

 

11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8:11-15)

 

같은 뜻으로 주님께서는 이렇게도 설명하십니다. To the same purport he gives this description: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4:26-28) So is the kingdom of God, as a man when he casteth seed into the earth, and sleepeth and riseth night and day, and the seed groweth and riseth up, he knoweth not how; for the earth bringeth forth fruit of her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ear, after that the full corn in the ear (Mark 4:26–28).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전체 천국을 뜻하고, 덜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참된 교회를, 개별적인 의미에서는 참된 신앙에 속한 모든 사람, 곧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을 ‘천국’(heaven)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천국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누가복음에서 친히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By the “kingdom of God,” in the universal sense, is meant the universal heaven; in a sense less universal, the true church of the Lord; and in a particular sense, everyone who is of true faith, or who is regenerate by a life of faith. Wherefore such a person is also called “heaven,” because heaven is in him; and likewise the “kingdom of God,”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in him,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Luke: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21) Being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Luke 17:20–21).

 

이것이 사람의 거듭남에서 세 번째로 이어지는 단계이며, 곧 그의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 역시 그늘에서 빛으로, 곧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13절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 and in like manner proceeding from shade to light, or from evening to morning; wherefore it is said (verse 13),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해설

AC.29에서는 셋째 날의 거듭남이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앞의 AC.27-28에서는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나는 장면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모이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체가 준비되는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준비된 ‘땅’에서 처음으로 무엇인가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큰 나무와 풍성한 열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연한 풀’이 나오고, 다음으로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마지막으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옵니다. 이것은 거듭남이 단번에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점차 자라게 하시는 질서 있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땅, 곧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씨앗의 근원’입니다. 땅이 씨앗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받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기 안에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셋째 날에 비로소 무엇인가 자라기 시작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땅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은 ‘연한 풀’(tender herb)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처음 돋아나게 하시는 ‘어떤 연약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거듭남의 처음에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 아직 매우 미약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조금 알게 되고 그것에 따라 살고자 하지만 이전의 습관과 자기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도 여전히 강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나타나는 변화는 연한 풀처럼 작고 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작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무엇인가가 주님에게서 오는 씨앗으로부터 사람 안에 돋아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씨 맺는 채소’입니다. 여기서는 처음의 연약한 상태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더 유용한 것’이라고 표현하며, 그 안에 다시 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옵니다. 이제 선한 것이 실제로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따라서 이 세 표현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을 처음 싹트게 하시고, 그것을 점차 자라게 하여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하시는 진행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이 모든 것이 ‘각기 종류대로’ 이루어진다고 덧붙입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1장에서 계속 반복되지만 AC.29은 여기서 ‘종류’의 세부적인 속뜻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그것을 선과 진리의 모든 질서, 영계의 분류, 선과 악의 분리 같은 넓은 교리 전체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소한 AC.29의 문맥에서는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무질서한 혼합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 고유의 성질을 따라 산출된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더 넓은 의미는 이 표현이 이후 다시 나타날 때 함께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29의 매우 중요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 싹트고 열매까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에게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이 단계의 사람은 아직 그것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완성된 영적 생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해야 왜 식물들이 여기서 ‘생명 없는 것들’(inanimate things)로 표상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연계의 식물이 문자 그대로 생명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것은 거듭남의 상태입니다. 셋째 날에는 선과 진리에 속한 무엇인가가 사람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사람은 아직 그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참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다음 단계에서 등장하는 ‘생명 있는 것들’은 신앙의 생명을 실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나무’까지 왔다고 해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셋째 날 전체는 여전히 다음 생명의 단계를 위한 준비입니다.

 

그렇다고 이때 사람이 행하는 선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바로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사람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 ‘내가 악을 버린다’고 느끼며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남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과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AC.29의 셋째 날은 바로 그 인정에 이르기 전의 중요한 준비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씨 뿌리는 비유를 함께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는 씨와 말씀, 뿌리는 자와 씨를 받는 땅, 그리고 결실을 서로 연결하여 설명하십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라고 직접 밝히고, 마가복음에서는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고 하며,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씨를 뿌리는 이를 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창1의 씨와 땅을 거듭남의 말씀으로 읽는 것은 식물 이미지에 임의로 의미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사용하신 씨 뿌림의 언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의 차이도 같은 말씀이 사람에게 주어져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존하며 삶에서 결실하는가가 중요함을 보여 줍니다.

 

막4:26-28의 비유는 이 성장의 또 다른 면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린 뒤 밤낮 자고 깨는 동안 씨는 자라지만 그는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됩니다. 창1:11의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와 각각을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AC.29에서 이 비유가 보여 주는 것은 주님의 나라가 씨 뿌림에서 시작하여 사람이 그 내적 진행을 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점차 결실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거듭남도 사람의 눈앞에서 단번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생명이 점차 자라는 과정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 범위로 설명합니다.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전체 천국이고, 덜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참된 교회이며, 개별적인 의미에서는 참된 신앙에 속한 사람, 곧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각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개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 천국에 속한 질서를 이루시는 일입니다. 눅17:20-21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이 이 문맥에서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C.29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 외적 장소에만 두지 않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신앙의 삶으로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 셋째 단계를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AC.29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여기서 회개를 단지 죄를 슬퍼하거나 잘못을 후회하는 감정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앞에서 기억 속에 받아들인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이제 실제 삶에서 무엇인가를 산출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따라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만 아직 사람은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회개 역시 완성된 거듭남이 아니라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기 위한 준비 상태입니다.

 

그래서 셋째 날에도 다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됩니다’. 사람은 아직 그늘 속에 있지만 빛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며,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던 선과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더 깊은 인식을 향하여 인도받고 있습니다. 연한 풀에서 씨 맺는 채소로, 다시 열매 맺는 나무로 나아가는 성장도 바로 이 저녁에서 아침으로의 진행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완성된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 시작하여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을 싹트게 하시고 점차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AC.29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날의 사람은 아직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참된 신앙의 생명에도 완전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 불완전한 상태를 버리지 않으시고 거듭남의 과정으로 사용하십니다. 사람에게서 겨우 ‘연한 풀’만 돋아나는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작은 시작을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성장의 근원은 땅인 사람에게 있지 않고 씨를 주시는 주님에게 있습니다. 결국 거듭남은 사람이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기 안에서 자라며 열매 맺도록 주님께 이끌리는 과정입니다. (AC.29 해설)

 

심화

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 심화 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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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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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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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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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 창1:14-17(AC.30-37),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 : 사랑으로 생명을 얻는 신앙의 넷째 날’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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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창1:10, ‘물과 바다와 땅 : 지식이 모이고, 생명을 받아들일 거듭남의 그릇’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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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28

말씀에서 ‘물’(waters)로는 여러 지식(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을, ‘바다’(seas)로는 그 많은 물, 곧 지식의 집합을 의미할 때가 참 많은데요, 이사야에 보면, It is a very common thing in the Word for “waters” to signify 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and consequently for “seas” to signify a collection of knowledges. As in Isaiah: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Jehovah, as the waters cover the sea (Isa. 11:9).

 

이사야 또 다른 데 지식의 결핍이 다루어지는 곳을 보면, And in the same prophet, where a lack of knowledges [cognitionum et scientificorum] is treated of:

 

5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 (사19:5, 6) The waters shall fail from the sea, and the river shall be dried up and become utterly dry, and the streams shall recede (Isa. 19:5–6).

 

학개에서 새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In Haggai, speaking of a new church: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2:6, 7)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the dry [land]; and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Hag. 2:6–7).

 

또 거듭나는 중인 사람에 대해 스가랴서에서는 And concerning man in the process of regeneration, in Zechariah:

 

7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14:7, 8) There shall be one day, it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but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and it shall be in that day that living waters shall go out from Jerusalem, part of them toward the eastern sea, and part of them toward the hinder sea (Zech. 14:7–8).

 

시편에도 보면, 황폐해졌다가 거듭나 주님을 경배하게 될 사람을 묘사하면서, David also, describing a vastated man who is to be regenerated and who will worship the Lord:

 

33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시69:33, 34) Jehovah despiseth not his prisoners; let the heavens and the earth praise him, the seas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therein (Ps. 69:33–34).

 

‘땅’(earth)이 그릇(recipient)을 의미한다는 것이 스가랴를 보면 분명한데, That the “earth” signifies a recipient, appears from Zechariah: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슥12:1) Jehovah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 of the earth, and formeth the spirit of man in the midst of him (Zech. 12:1).

 

해설

AC.28은 앞의 AC.27에서 시작된 ‘물’, ‘바다’, ‘땅’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다른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AC.27에서는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들어온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가 기억 지식(scientifica)으로 머물며, 이렇게 모인 지식들이 ‘바다’를 이루고, 겉 사람 자체는 ‘마른 땅’으로 표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28에서는 이것이 창1:9-10에만 적용되는 일회적인 풀이가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여 나타나는 의미임을 보여 줍니다. ‘물’은 여러 지식(cognitiones et scientifica)을, ‘바다’는 그 많은 물, 곧 지식의 집합을, ‘땅’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수용체(recipient)를 의미합니다.

 

먼저 사11:9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는 말씀은 ‘물’과 ‘바다’가 지식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충만함이 바로 ‘물이 바다를 덮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1:10의 모인 물과 바다를 지식들과 그 집합으로 읽는 것은 창세기의 한 구절에 임의로 붙인 상징 풀이가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확인되는 언어의 연결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사19:5-6은 그 반대 상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직접 ‘지식의 결핍이 다루어지는 곳’이라고 소개합니다. ‘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라는 표현은 앞의 사11:9에서 물이 충만한 모습과 대조됩니다. 앞에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충만함이 물의 충만함으로 표현되었다면, 여기에서는 물이 없어지고 마르는 모습이 지식의 결핍을 나타냅니다. 이 두 구절을 함께 놓으면 AC.28에서 말하는 물과 지식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애굽, 강, 갈대와 부들의 세부 상응까지 모두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AC.28의 직접적인 목적은 물과 바다가 지식 및 그 집합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말씀의 용례로 확증하는 데 있습니다.

 

학2:6-7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새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라고 소개하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AC.28은 여기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 각각의 속뜻을 세밀하게 풀이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 교회의 형성을 말하는 문맥에서도 창조의 언어인 하늘, 땅, 바다, 육지가 함께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자연적 창조 언어가 말씀의 다른 곳에서는 교회의 영적 상태와 새로워짐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예로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슥14:7-8에 이르면 스베덴보리는 더욱 분명하게 ‘거듭나는 중인 사람에 대하여’라고 말합니다.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라는 말씀에 이어,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물과 바다가 거듭남의 문맥 속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AC.28은 ‘동해’와 ‘서해’, ‘여름’과 ‘겨울’의 세부적인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이상의 상응을 덧붙이기보다, 물과 바다가 단순한 자연물에 그치지 않고 거듭나는 사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안전합니다.

 

시69:33-34 역시 같은 점을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황폐해졌다가 거듭나 주님을 경배하게 될 사람’을 묘사하는 말씀이라고 직접 소개합니다.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라는 표현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가 거듭난 사람의 상태를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여기에서도 ‘바다 가운데 움직이는 모든 것’을 별도로 ‘살아 있는 지식’이라고 확정하거나, ‘찬송’을 인간 존재 전체의 특정한 영적 상태로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28에서의 직접적인 역할은 하늘과 땅과 바다라는 표현들이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을 경배하는 상태를 말할 때에도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슥12:1은 앞의 인용들과는 조금 다른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들면서 ‘땅’이 수용체(recipient)를 의미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라는 표현에서, AC.28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땅’이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자리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의 AC.27에서 마른 땅, 곧 겉 사람이 드러난다는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사람 안의 심령’을 근거로 거듭남 전체의 세부 구조를 새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28에서 필요한 만큼 말하면, ‘바다’가 지식들의 집합이라면 ‘땅’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수용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물’이 지식을 의미한다고 해서 지식 자체가 곧 영적 생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땅’이 수용체라고 해서 땅 자체가 생명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앞의 AC.27에서 보았듯이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천적이든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것들은 그곳에서 기억 지식으로 머물며,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집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기억에 모여 있다는 것과 그 지식이 실제 선한 삶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은 같은 단계가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다음 창1:11-12와 AC.29로 이어질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물이 모여 바다가 되고 땅이 드러난 뒤에야 그 땅에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28은 아직 거듭남의 열매 자체를 설명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 열매가 나타날 수 있는 질서가 준비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사람은 많은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그것을 삶에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억 속의 지식과 실제 생명의 열매를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28의 핵심은 ‘많이 아는 사람이 곧 영적인 사람이다’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물은 여러 지식이고, 바다는 그 지식들이 모인 집합이며, 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직 다음 단계의 생명을 위한 준비와 질서에 속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창1:10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합니다. 지식이 모이고, 바다가 형성되고, 땅이 드러남으로써 이제 다음 단계에서 생명이 싹트고 열매 맺을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AC.28 해설)

 

심화

1. ‘스베덴보리는 AC 초기부터 어떻게 여러 말씀의 속뜻을 알 수 있었을까?’

 

AC.28 심화 1, ‘스베덴보리는 AC 초기부터 어떻게 여러 말씀의 속뜻을 알 수 있었을까?’

AC.28 심화1. ‘스베덴보리는 AC 초기부터 어떻게 여러 말씀의 속뜻을 알 수 있었을까?’ AC.28을 처음 읽으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이제 겨우 창1을 설명하는 AC.28인데, 스베덴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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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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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 창1:9, ‘물이 모이고 땅이 드러남 : 기억 속에 모인 진리와 겉 사람의 준비’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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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7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둘 다 존재한다는 사실과, 여러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비록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보여도,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 있는 그러한 여러 진리와 선, 곧 참과 선에 관한 여러 지식은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든 것은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또는 천적인 것이든 모두 그곳에 기억 지식으로 머물며,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들이 바로 ‘한곳으로 모인 물’(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바다’(seas)라고 합니다. 그러나 겉 사람 자체는 ‘마른 땅’(dry land)이라 하고, 곧이어 ‘땅’(earth)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내용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 [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해설

 

AC.27은 창세기 셋째 날의 첫 장면인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는 말씀을 거듭남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앞의 AC.24-25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고, 주님께서 사람을 그의 현재 상태에서부터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시는 질서를 살폈다면, 이제 AC.27에서는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들어온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서 어떤 상태에 놓이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이 번호는 앞의 ‘궁창’과 뒤의 ‘바다와 땅’을 연결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하는 전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둘 다 존재하며,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비록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보여도’라고 덧붙입니다. 사람의 의식에서는 자신이 배우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AC.27의 초점은 이러한 인간의 활동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으며, 그것들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이른다는 질서를 점차 알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들어온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가면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의 내용이 자연적인가, 영적인가, 천적인가 하는 것과 그것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 존재하는 방식은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라도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들면 그곳에서는 기억 지식으로 머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관한 지식이나 천국에 관한 지식이라고 해서 그것이 기억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사람의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기억 속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창1:9의 ‘한곳으로 모인 물’이 나타내며, 그것들을 ‘바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물’이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과 연결되고, 그 물들이 모여 ‘바다’가 된다는 것이 AC.27의 직접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바다’를 곧 영적 생명 자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모여 있는 기억 지식의 상태와 관련됩니다. 앞으로 그 지식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겉 사람이 어떻게 생명을 받아 실제 열매를 내게 되는지는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더 전개됩니다.

 

AC.27에서 특히 주목할 표현은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이러한 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거기’는 속 사람 안의 어떤 별도의 리메인스 저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자체의 흐름상 바로 앞에서 말한 겉 사람의 기억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 문장을 ‘주님께서 사람의 모든 기억 작용을 직접 조작하신다’는 심리학적 설명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AC.27이 강조하는 것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단지 인간 자신의 소유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후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리메인스’와도 구별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및 그에 속한 상태들과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AC.27의 이 한 문장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리메인스를 저장소에서 꺼내는 메커니즘’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겉 사람의 기억에 저장된 ‘scientifica’, 곧 기억 지식이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천사들의 매개나 퍼셉션, 양심 같은 특정한 작동 방식 하나로 고정하기보다, 본문이 밝히는 범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 자체를 ‘마른 땅’이라 하고, 곧이어 ‘땅’이라 한다고 말한 뒤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넘깁니다. 이 멈춤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AC.27은 아직 마른 땅이 왜 땅이 되고 어떻게 식물을 내는지를 모두 설명하려는 번호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확정되는 것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에 기억 지식으로 저장되고, 그것들이 ‘한곳으로 모인 물’, 곧 ‘바다’로 표현되며, 겉 사람 자체가 ‘마른 땅’으로 드러난다는 데까지입니다.

 

따라서 AC.27의 셋째 날은 곧바로 열매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물이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납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이 진리를 한 번 듣고 곧바로 완성된 삶의 열매를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 지식 자체가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기억 속에 받아들여진 것들도 이후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AC.27은 바로 이 ‘기억에 모이는 지식’과 ‘드러나는 겉 사람’에서 셋째 날의 다음 단계를 준비합니다. (AC.27 해설)

 

심화

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심화 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심화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에는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것들은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 것이든 모두 그곳에 ‘기억 지식’(scientif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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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창1:10, ‘물과 바다와 땅 : 지식이 모이고, 생명을 받아들일 거듭남의 그릇’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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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과 아침과 날 : 앞서 밝힌 의미의 재확인’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저녁’(evening), ‘아침’(mor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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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사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사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날’(day)이 시간을 뜻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또한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렘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해설

AC.23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날’(day)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해석 원리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가 처음부터 ‘날은 곧 상태다’라고 단순하게 등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에서 ‘날’이 문자적인 하루를 넘어 ‘시간 자체’를 나타내는 용례가 매우 흔하다고 설명하고, 이어서 날이 시간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시간의 상태’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23의 논리는 ‘날은 하루가 아니다’라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날 → 시간 → 그 시간에 속한 상태’로 깊어지는 구조입니다.

 

첫 번째 증거군은 사13:6, 9, 13, 22와 사23:7, 15입니다. 사13장에는 ‘여호와의 날’,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들이 이어지며, 특히 마지막에는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고 하여 ‘때’와 ‘날들’이 나란히 사용됩니다. 여기서 ‘날’은 단순한 24시간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 제한되지 않고 어떤 사건과 상태가 펼쳐지는 때를 나타냅니다. 사23장에서도 ‘옛날’, ‘그날’,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이라는 시간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두로, 왕, 칠십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 ‘날’이라는 말이 하루보다 넓은 시간과 시대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AC.23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날’이 시간을 나타내므로 또한 ‘그 시간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용되는 첫 구절이 렘6:4의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입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실제 하루가 저물어 가는 모습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때의 상황과 상태를 함께 담아냅니다. 바로 앞 AC.22에서 ‘저녁’과 ‘아침’이 각각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한 것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따라서 시간의 표현은 말씀 안에서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렘33:20, 25의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 그리고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라는 표현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도 낮과 밤은 실제 자연의 시간 질서를 배경으로 하지만, 스베덴보리가 AC.23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낮과 밤에 ‘그 때’가 있으며 시간의 표현이 그에 속한 상태와 결부되어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곧바로 낮과 밤을 시험과 회복의 모든 교대에 일대일로 대응시키거나, 거듭남의 모든 과정에 대한 별도의 섭리 법칙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주제들은 해당 내용을 직접 다루는 다른 AC 문맥에서 살피는 편이 안전합니다.

 

애5:21의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는 ‘날’과 ‘상태’의 관계를 특히 이해하기 쉽게 보여 줍니다. 지나간 달력의 날짜 자체를 다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날들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그 날들에 속했던 삶과 상태가 새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더구나 바로 앞에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는 기도가 놓여 있으므로, 여기서 새롭게 되기를 구하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회귀가 아니라 주님께로 돌이켜지는 삶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다만 AC.23은 여기서 ‘옛적’을 곧바로 태고교회라고 해설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의 직접적인 역할도 ‘날들이 그 날들에 속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AC.23이 왜 AC.22 바로 뒤에 놓이는지도 분명해집니다. AC.22에서는 ‘저녁’과 ‘아침’이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내며,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상태에서 주님께 속한 상태로 나아가는 질서가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AC.23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창1에서 반복되는 ‘날’ 자체가 단순한 시간 단위에 머물지 않고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말씀 전체의 용례를 제시합니다. 따라서 창1의 ‘첫째 날’, ‘둘째 날’과 이어지는 날들을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읽는 것은 ‘날’이라는 단어에 임의로 새로운 뜻을 붙인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시간과 상태가 결부되어 표현되는 방식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AC.23을 근거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날’을 언제나 기계적으로 ‘영적 상태’라고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곳에서는 실제 하루가 중심일 수 있고, 어떤 곳에서는 더 넓은 시간이나 시대가 중심일 수 있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그 시간에 속한 상태가 함께 표현됩니다. 중요한 것은 문맥입니다. AC.23이 보여 주는 것은 ‘날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상태만을 뜻한다’는 상응 사전식 공식이 아니라, 말씀에서 시간의 표현이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함께 담을 수 있다는 해석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창세기 1장의 전체 구조와 만날 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AC.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날을 인간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인 상태라고 이미 제시했습니다. AC.23은 이제 여러 선지서의 용례를 통해 ‘날’이라는 말 자체가 그러한 읽기를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1의 날들은 단순히 시계로 계산되는 여섯 개의 시간 단위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차례로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의 상태들로 읽힙니다.

 

결국 AC.23의 핵심은 ‘시간을 버리고 상태만 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서는 시간과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간의 이름이 그 시간에 속한 영적 상태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의 ‘날’을 읽을 때도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가?’라는 질문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 날은 거듭나는 사람의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가?’라고 물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AC.23이 창조의 날들을 거듭남의 날들로 읽도록 열어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AC.23 해설)

 

 

 

AC.24, 창1:6-7(AC.24-25), ‘궁창의 구별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때’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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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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