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7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다루는주제는인류최초의어떤한사람의창조가아니라태고교회’라고 합니다. 창세기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읽어 온 독자라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스베덴보리는아담을인류최초의한남성개인으로보지않았다는말인가?’
먼저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아담’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분명합니다. AC.478에서 그는 히브리어 ‘아담’(Adam)이 ‘사람’(man)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더욱이 창1:26에서는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 곧이어 ‘그들’이라는 복수로 받고, 창5:2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더라’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한 남성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함께 포함하는 말이며,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를 가리킵니다. AC.137에서도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사람’(homo)이라 하는 태고교회를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룬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은 ‘신적섭리’(DivineProvidence, 1764, DP) 241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밝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과그의아내’가 ‘세상에창조된최초의인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담이라는개인에게태고교회라는추가적인상징적의미도있다’는 정도의 설명보다 훨씬 강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그의아내’라는 형상으로 묘사된 대상 자체가 인류 최초의 두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DP.328에서도 같은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스라엘·유대교회 이전의 여러 교회가 역사적인 방식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민족들과 사람들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설명하면서, 그 첫 번째인 태고교회가 ‘아담과그의아내하와’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AC.478한 곳에서 우연히 등장하는 특이한 해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일관된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역사적개인아담의존재를부정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여기서는 질문 자체를 조금 정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창세기에나오는아담은하나님께서세상에최초로창조하신한남성개인이며,하와는그와함께최초로창조된한여성개인이라고스베덴보리가보았는가?’라고 묻는다면, DP.241에 비추어 답은 분명합니다. 그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아담과그의아내’는 최초로 창조된 두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인류역사전체를통틀어아담이라는이름을가진어떤개인도실제로존재한적이없었다’는 명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의 문제를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의 질문은 ‘아담이라는이름을가진사람이역사상단한명도없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창세기의아담과하와라는이름아래무엇을계시하셨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명확합니다. ‘태고교회’입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시대 자체를 신화적이고 비역사적인 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114이하에서는 ‘사람또는아담이라했던태고교회’에 속했던 이들과 사후세계에서 대화했다고 기록하며, 그 교회의 후대에 속했던 사람들도 언급합니다. 따라서 ‘아담=태고교회’라는 해석은 ‘실제로존재했던사람들은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와 그 상태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창5의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의 이름을 단순히 한 가족의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는다면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속뜻을 놓치게 됩니다. AC.470은 이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 곧 여러 교회와 그 상태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AC.485는 창4의 셋과 창5의 셋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고까지 명시합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태고교회에서 이어져 나온 여러 교회와 그 상태의 계승을 기록한 내적 역사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그러므로역사적개인아담은존재하지않았다’라는 현대적인 문장으로 결론짓지 않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목적은 역사학적 논쟁을 벌이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의 개인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의 ‘아담’이라는 이름 안에 어떤 신적 진리를 담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담은존재하지않았다’고 말하는 대신, 훨씬 더 자신의 해석 원리에 맞는 방식으로 ‘아담과그의아내는세상에창조된최초의인간들을의미하지않고태고교회의사람들을의미한다’고 말합니다(DP.241).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두 개인에 관한 전기적 기록의 주인공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태고시대의 실제 사람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 사람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아담을 읽을 때 중심 질문은 ‘최초의한남자가누구였는가?’보다 ‘왜주님께서는최초의교회를‘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셨는가?’가 됩니다. 그 질문을 따라가면 창1의 창조, 창2의 에덴, 창3의 타락, 그리고 창5의 계보가 모두 한 개인의 전기를 넘어 태고교회의 형성과 천적 상태, 쇠퇴와 후대 교회들의 계승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내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AC.475-480심화2)
이 파일을 처음 열어 보시는 분은 아마 먼저 분량에 놀라실 것 같습니다. 창세기 1장 한 장을 다루는데 500쪽이 넘습니다. ‘천지창조한장을설명하는데무슨이야기가이렇게많을까?’ 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분량을 계획했던 것은 아닙니다. 출발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이하AC)를 처음부터 차례로 우리말로 옮기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을 붙여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AC.1부터 한 글씩 읽어 가면서 번역만으로는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질문들이 계속 생겼습니다. 어떤 질문은 짧은 해설만으로 충분했지만, 어떤 질문은 그 자리에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지 않으면 다음 글로 넘어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번역에 해설이 붙고, 해설에서 다시 질문이 생겨 심화가 붙으면서 지금의 분량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파일은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기획하여 집필한 결과물이라기보다, AC.1에서 AC.66까지 한 걸음씩 걸어가며 남긴 ‘읽기의기록’에 가깝습니다. 원문을 번역하다가 표현 하나에서 멈추기도 했고, 스베덴보리가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질문하기도 했으며, 처음 AC를 접하는 분이라면 어디에서 이해하기 어려울지를 생각하면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검토해야 했고,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였던 설명을 AC전체의 문맥과 대조하면서 고치기도 했습니다. 이 파일에는 그런 과정까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자료의 기본 구성은 ‘번역,해설,심화’입니다. 먼저 ‘번역’은 영어 AC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기려는 부분입니다. 그다음 ‘해설’은 단순히 번역문을 다시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그 AC가 앞뒤 글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창세기 본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처음 읽는 독자가 어디에서 ‘이게무슨뜻이지?’ 하고 멈출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설명한 부분입니다. ‘심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을 다룹니다. 본문을 이해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그렇다면이것은어떻게되는가?’라는 질문 가운데 해설 안에 모두 넣기에는 너무 큰 문제들을 따로 살펴본 것입니다.
그래서 심화까지 반드시 차례대로 모두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읽으시는 분이라면 먼저 AC본문의 번역과 해설을 따라가시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읽다가 특별히 궁금한 주제가 나오면 그때 관련 심화를 읽으셔도 됩니다. 반대로 이미 AC를 어느 정도 읽어 오신 분이라면 관심 있는 글 번호나 심화 주제를 찾아 들어가셔도 됩니다. 500쪽이 넘는다고 해서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번에 ‘완독해야하는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한 장에서 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을 읽는 방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펼치면 천지창조를 만납니다. 흑암 가운데 빛이 생기고,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이 놓이며, 뭍이 드러나고 식물이 자랍니다.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이 생기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읽는 말씀의 문자입니다.
그런데 AC는 그 문자 안에서 또 하나의 창조를 봅니다. ‘사람의거듭남’입니다. 아직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 안에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을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이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AC.6은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섯 날은 서로 무관한 여섯 가지 영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지나가는 ‘연속적인상태들’입니다. 처음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조금씩 주님에게서 오는 빛을 받고, 주님에게 속한 것과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이 구별되며, 선과 진리가 생겨나고, 마침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창세기 1장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빛이있으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자연계의 최초의 빛과 함께 ‘내안에는언제처음빛이비치기시작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궁창이 물과 물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사람안에서는무엇이구별되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땅에서 식물이 돋고 씨를 맺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서는 ‘진리가사람안에서어떻게선한삶의열매가되는가?’를 묻게 됩니다.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 짐승과 사람도 더 이상 서로 떨어져 있는 창조물의 목록으로만 보이지 않고, 한 사람 안에 영적 생명이 조금씩 형성되어 가는 긴 흐름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창세기1장은천지창조에관한말씀이아니고인간의거듭남만을말한다는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자료는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는 문자에는 분명 천지와 빛과 물과 땅과 광명체와 생물과 사람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AC가 밝히려고 하는 것은 그 문자를 없애고 다른 이야기를 대신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담긴 ‘속뜻’입니다. 이 자료에서도 이 점을 여러 차례 조심해서 구별했습니다. 창조의 말씀을 지우고 거듭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말씀 안에서 인간의 새로운 창조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자료를 읽으실 때 처음부터 모든 ‘상응’을 외우려고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빛은이것,물은이것,나무는이것,새는이것’ 하는 식으로 대응표를 만들어 외우기 시작하면 오히려 창1전체의 생명 있는 흐름을 놓치기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표현이 하나의 거듭남 안에서 어떻게 서로 이어지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이 이어지고, 둘째 날이 셋째 날을 준비하며, 그렇게 여섯째 날까지 진행됩니다. 실제 파일에서도 ‘창1의여섯날은속뜻에서여섯개의서로떨어진교훈이아니라하나의거듭남이진행되는여섯연속적상태’라는 점을 중요하게 붙들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창1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순서가 곧 거듭남의 질서로 읽히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기 안에 무엇이 어둠인지조차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빛이 비치고, 구별이 생기고, 무엇인가 싹트고, 진리가 자라고, 사랑과 신앙이 점차 생명의 중심으로 들어오며, 마침내 그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 전체가 달라져 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를 이루시는 ‘새창조’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계속해서 중심에 계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안에 빛을 만들고, 자기 힘으로 선을 생산하고, 마침내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읽어 갈수록 ‘내가한다’고 생각하던 것의 생명이 실제로 어디에서 오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거듭남의 시작도 주님에게서 오고, 선과 진리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며, 시험 가운데 사람을 붙드시고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응답하고 싸우고 살아가지만 그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과 능력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점은 이 자료가 창1의 여섯 날을 읽으면서 계속 되돌아가는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이 자료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남의 ‘단계’를 정리하는 교과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는지금몇째날에있는가?’라고 자기 영적 수준을 판정하려는 읽기를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날은 사람에게 영적 등급표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어떤 질서 가운데 새롭게 하시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실제 삶에서는 여러 상태가 복잡하게 경험될 수 있고, 이미 배운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다시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자료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재는 잣대로 사용하기보다, 거듭남의 방향과 질서를 배우는 데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이 파일에서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질문’입니다. AC를 처음 읽다 보면 정말 많은 질문이 생깁니다. ‘속사람과겉사람은무엇인가?’, ‘리메인스란무엇인가?’, ‘영적인간과천적인간은어떻게다른가?’, ‘왜같은짐승이어떤곳에서는선한것을뜻하고다른곳에서는악한것을뜻하는가?’, ‘형상과모양은무엇이다른가?’, ‘천상의결혼이란무엇인가?’, ‘왜주님께서는악과거짓을즉시없애지않으시는가?’, ‘천사들은말씀을어떻게지각하는가?’ 같은 질문들입니다.
이런 질문들을 가능하면 그냥 지나가지 않은 것이 이번 작업의 한 특징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문에 곧바로 거대한 교리 체계를 가져와 답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이AC가지금말하는만큼만충분히말하고,다음글의몫은다음글에남겨두는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떤 설명이 스베덴보리의 이 글에 직접 있는 것인지, 관련 AC들을 통해 충분히 뒷받침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설명이나 적용인지도 가능한 한 구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료는 처음 작성한 글을 그대로 모은 것만도 아닙니다. AC.1부터 AC.66까지 다시 검토하면서 번역과 해설, 심화 가운데 지나치게 나간 설명은 줄이고, 처음 읽는 분에게 꼭 필요한 설명은 오히려 보충했습니다. 성경 구절이나 다른 AC글 번호가 인용되었다고 해서 모두 별도의 심화로 남겨 두기보다, 그 인용이 왜 사용되었는지를 해설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소화했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읽은 독자가 정말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을 품을 만하고, 그 질문 자체로 독립적인 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심화로 남겼습니다.
특히 성경과 AC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자료에서 AC는 성경을 대신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표현을 AC에 맞추어 고치는 것도 이 작업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말씀이 있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을 밝히고 설명하는 책이라는 순서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AC의 영어 인용과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의 표현이 다르더라도 의미상 문제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의 표현을 우선했고, 의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할 때에는 성경을 AC의 문장에 맞추어 바꾸기보다 ‘개역개정은이렇게되어있지만스베덴보리는여기서이런표현을사용한다’고 차이를 밝히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파일 마지막 AC.66의 삼상2:3심화는 바로 그런 문제를 실제 사례로 다룹니다.
AC.64-66에 이르면 창1의 거듭남 이야기는 다시 ‘말씀’ 자체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참된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우리가 읽는 나라와 성읍과 강과 사람의 이름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하고, 자신이 말씀을 읽을 때 그 내적 의미가 얼마나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는지를 ‘영광’이라는 표현과 함께 전합니다. 마지막 AC.66에서는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성경의 모든 부분을 똑같은 방식으로 기계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안내도 남깁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을 구별하는 설명은 앞으로 창세기를 계속 읽어 갈 때 매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그러므로 AC.1-66은 창세기 1장의 마지막 절에서 끝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 부분을 다 읽고 나면 오히려 창세기 2장을 읽을 준비가 됩니다.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이 그다음에는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지, ‘일곱째날’의 안식은 무엇인지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파일은 하나의 완결된 창1작업인 동시에 앞으로 계속될 긴 AC읽기의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이 자료를 처음 읽으시는 분께 한 가지를 권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응 하나하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심화까지 모두 읽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대신 한 가지 질문을 마음에 품고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한사람을어떻게새롭게창조하시는가?’
그 질문을 가지고 읽다 보면 ‘빛이있으라’가 조금 달리 들릴 수 있습니다. 궁창이 나뉘고 땅이 드러나며 씨가 싹트는 모습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빛나고 생물이 살아 움직이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장면들이 먼 옛날의 창조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고, 지금도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새 창조의 질서와 연결되어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에는 ChatGPT가 함께했습니다. 번역을 비교하고, 문장을 다듬고, 앞뒤 AC의 문맥을 살피며, ‘처음읽는사람이라면여기에서무엇을궁금해할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료를 ‘ChatGPT가AC를해석해준결과’라고 소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AC원문과 말씀 앞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다시 원문에 비추어 검토하며, 때로는 앞서 쓴 해설을 고치고 다시 쓰는 긴 협업의 결과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이 파일의 제목에도 ‘withChatGPT’라고 적었습니다. ‘byChatGPT’가 아니라 ‘withChatGPT’입니다. 이 작은 차이가 이번 작업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자료는 제 손에서만 읽히는 작업 노트를 넘어, 처음 AC를 접하는 분들과도 나누어 보려 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낯설고, 어떤 대목에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서둘러 받아들이거나 서둘러 거부하기보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천천히 따라가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AC자체에 머무르기보다, AC가 계속해서 가리키는 말씀으로 돌아가 보셨으면 합니다.
500쪽이 넘는 긴 여정이지만, 그 시작은 아주 짧은 한 말씀입니다.
‘빛이있으라.’
그리고 어쩌면 창세기 1장을 속뜻으로 읽는 긴 여정은 결국 이 한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에서 듣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빛을 주시고, 구별하시고, 생명을 싹트게 하시고, 사랑과 신앙을 자라게 하시며, 마침내 그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과정 말입니다.
이 자료가 그 놀라운 말씀의 여정을 조금 더 깊이 따라가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을 경험합니다. 국기가 한 나라를 나타내고, 왕관이 왕권을 나타내며, 결혼반지가 부부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표상’은 사람이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상징보다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인물이나 장소, 사물이나 행위가 ‘표상한다’고 할 때에는 그 외적인 것이 말씀 안에서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제사는 문자적으로는 실제로 행해진 종교의식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제사들이 주님과 주님께 속한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라는 외적인 의식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상적 기능을 합니다.
이 점에서 ‘표상’과 단순한 ‘비유’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는 어떤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을 끌어와 비교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표상은 단지 설명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문학적 장치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이 실제로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상하도록 말씀 안에 배열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집트와 가나안, 성막과 성전, 제사와 절기 같은 것들이 문자적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것이 표상적 의미를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자적 이야기나 역사적 차원을 곧바로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상한다’는 말의 핵심은 외적인 것 안에 그것이 나타내는 더 내적인 것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그 문자가 나타내고 있는 영적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에서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것을 몸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과 그 안의 나무와 강, 뱀과 열매 같은 것들도 이후 AC의 해설을 따라가면 각각 태고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에 관한 것을 표상하고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임의로 ‘이것은이것을상징한다’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질서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상응과 속뜻의 연결을 따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AC.4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가장작은표현하나까지도’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고,의미하며,그안에품고’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문장이 앞으로 AC에서 ‘표상’이라는 말을 수없이 만나게 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이 단지 자연계의 대상들로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에 관한 영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 ‘외적인것이더내적인것을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표상이 자의적인 상징 놀이가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각각의 표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해당 문맥에서 하나씩 확인해 가야 합니다. (AC.4심화1)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2
사랑과신앙을처음에는함께‘큰광명체들’(greatluminaries)이라하고,그다음에는사랑을‘더큰광명체’(greaterluminary),신앙을‘더작은광명체’(lesserluminary)라합니다.또한사랑을가리켜서는‘낮을다스린다’(rulebyday)하고,신앙을가리켜서는‘밤을다스린다’(rulebynight)고합니다.이런내용이바로아르카나(arcana)인데,특히이마지막시대에숨겨져있는것을이제제가설명해도좋다는주님의신적자비(theLord’sDivinemercy)가있었습니다.이아르카나가특히이마지막시대에가려져있는이유는,지금이세대의종말(theconsummationoftheage)이기때문이며,이때에는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기때문입니다.이는주님께서복음서에서다음과같이친히예고하신바와같습니다.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luminary,” and faith a “lesserluminary”;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by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bynight.”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여기서‘해’(sun)는사랑,곧어두워지는사랑을,‘달’(moon)은신앙,곧빛을내지못하는신앙을,‘별들’(stars)은신앙에관한지식들(theknowledgesoffaith),곧하늘에서떨어지는것들을뜻하며,이것들이바로‘하늘의권능들’(virtuesandpowersoftheheavens)입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which is darkened;by the “moon” faith,which does not give light;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which fall from heaven,and which are the “virtuesandpowersoftheheavens.”
[2] 태고교회는사랑자체외에다른어떤신앙도알지못했습니다.천적천사들역시사랑에속한신앙외에는어떤신앙도알지못합니다.온천국은사랑의천국이며,천국에는사랑의생명외에다른생명이없습니다.모든천국의행복이여기에서나오는데,그크기는어떤말로도설명할수없고어떤인간의생각으로도결코상상할수없습니다.사랑의영향을받는이들은마음으로주님을사랑하지만,동시에모든사랑과,그결과모든생명,곧사랑에서만나오는모든생명과모든행복이오직주님에게서만온다는사실을알고,고백하며,지각합니다(perceive).그들은자신에게서나오는사랑이나생명이나행복은조금도없다는것을분명히압니다.모든사랑이주님에게서온다는사실은주님의변화산사건에서큰광명체,곧‘해’(sun)로도표현되었습니다.기록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love the Lord from the heart,but yet know,declare,and perceive,that all love,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얼굴은가장안쪽의것들을뜻하고,옷은거기서나오는것들을뜻합니다.따라서주님의신성(theLord’sDivine)은‘해’(sun),곧사랑으로,그의인성(hishuman)은사랑에서나오는지혜,곧‘빛’(light)으로상징되었습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해설
AC.32는 넷째 날의 두 광명체를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앞의 AC.30-31에서 사랑과 신앙이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왜 사랑이 ‘더큰광명체’이고 신앙이 ‘더작은광명체’인지, 그리고 왜 이 사실이 자신의 시대에는 특별히 가려진 아르카나였는지를 설명합니다. 핵심은 사랑과 신앙이 서로 독립된 두 요소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하나의 질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광명체들’이라고 부르지만, 곧 사랑을 ‘더큰광명체’, 신앙을 ‘더작은광명체’라고 구별합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고 신앙은 밤을 다스립니다. 여기서 크고 작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는 중요하고 다른 하나는 덜 중요하다는 가치 평가가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랑이 먼저이며 주된 것이라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AC.30에서 이미 신앙의 마지막 단계가 ‘마음에속한신앙,곧사랑의신앙’이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이라고 설명한 것과 같은 흐름입니다.
이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AC.32에서 ‘특히이마지막시대에숨겨져있던아르카나’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설명합니다. 지금이 ‘세대의종말’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순서는 ‘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다’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얻기 때문에, 사랑이 사라지면 참된 신앙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는 것 자체가 그 시대에는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24:29을 인용합니다. 여기서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의미를 직접 풀이합니다. ‘해’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어두워지고, ‘달’은 신앙이며 그 신앙이 빛을 내지 못하고,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며 그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가지고 별도의 복잡한 종말론적 도식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32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해와 달과 별의 어두워짐이 사랑과 신앙과 신앙에 관한 지식이 무너지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태고교회의 언급은 이 마지막 시대와 정반대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사랑자체외에다른어떤신앙도알지못했다’고 말하며, 천적 천사들도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떤 신앙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역사에 속한 모든 사람이 끝까지 동일한 상태에 있었다거나, 태고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후에 천적 천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본래적인 천적 성격과 천적 천사들의 질서가 나란히 제시되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나아가 ‘온천국은사랑의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사랑 자체를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곧이어 그는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모든 사랑과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고,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사랑이 참된 사랑인 이유는 천사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의 근원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29-31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초기에는 자기가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점차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AC.32의 천적 상태에서는 이것이 더욱 분명합니다. 천적 천사들은 자기에게서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이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랑하지 않거나 수동적인 존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주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 사랑의 생명과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지각합니다.
마지막 변화산 사건은 이 모든 설명의 절정을 이룹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사랑이주님에게서온다’는 사실이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큰 광명체인 ‘해’로 표현되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고 옷은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굴이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은 ‘해’, 곧 사랑으로, 그의 인성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곧 ‘빛’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여기서도 AC.32가 실제로 말한 만큼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변화산의 모든 세부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얼굴과 옷에 관한 전체 상응 체계를 이 자리에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본문에서 필요한 핵심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으며, 그것이 변화산에서 ‘해’라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1의 더 큰 광명체가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단순한 추상적 상징이 아니라 결국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AC.32의 중심은 ‘해=사랑,달=신앙’이라는 대응표 자체보다 더 깊습니다. 사랑과 신앙은 둘이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조차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질서가 사라지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이 떨어지는 상태가 되고, 이 질서가 살아 있을 때에는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경우처럼 사랑 안에 신앙이 살아 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었고, 주님의 신적 자비로 다시 설명하도록 허락되었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입니다. (AC.32해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1
‘큰광명체들’(greatluminaries)이사랑과신앙을뜻하고,또한‘해와달과별’(sun, moon, andstars)이라고도불린다는사실은선지자들의글에서분명합니다.에스겔에서처럼말입니다.That the “great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and are also called “sun,moon,andstars,” is evident from the prophets,as in Ezekiel:
이구절들은바로와애굽을다루는데,말씀에서바로와애굽은단지감각과단지기억지식의원리를뜻합니다.여기서는감각과단지기억지식에의해사랑과신앙이소멸되었음을말합니다.이사야에서도그렇습니다.In this passage Pharaoh and the Egyptians are treated of,by whom are meant,in the Word,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and here,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So in Isaiah:
[2] 다시이사야에서는주님의강림과이방인들의밝아짐,따라서새교회와,특히어둠가운데있다가빛을받아거듭나는모든사람에대해말하면서,Again,in Isaiah,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and the enlightening of the gentiles,consequently of a new church,and in particular of all who are in darkness,and receive light,and are being regenerated:
[3] 이모든구절에서‘광명체들’(luminaries)은사랑과신앙을뜻합니다.광명체들이주님을향한사랑과신앙을표상하고뜻했기때문에,유대교회에서는저녁부터아침까지항상타는등불을두도록명했습니다.그교회의모든규례는주님을표상하는것이었기때문입니다.이등불에관해서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In all these passages,“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It was because “luminaries” represented and signified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at it was ordained in the Jewish church that a perpetual luminary should be kept burning from evening till morning,for every ordinance in that church was representative of the Lord.Of this luminary it is written:
이모든것이주님께서속사람안에서사랑과신앙을불붙이시고빛나게하시며,속사람을통하여겉사람안에서도그렇게하신다는뜻임은,주님의신적자비로적절한곳에서밝힐것입니다.That these things signify love and faith,which the Lord kindles and causes to give light in the internal man,and through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hown in its proper place.
해설
AC.31은 앞의 AC.30에서 밝힌 ‘큰광명체들’, 곧 사랑과 신앙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구절들을 연이어 제시하고, 이어서 그것들이 밝아지는 말씀을 인용하며, 마지막에는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까지 연결합니다. 따라서 이 단락의 중심은 단순히 ‘해는사랑,달은신앙’이라는 하나의 대응표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소멸될 때 말씀은 그것을 광명체의 어두워짐으로 표현하고, 사랑과 신앙이 다시 살아날 때에는 빛과 광명체의 밝아짐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첫 번째 겔32:7-8은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바로와 애굽을 다룬다고 하면서, 말씀에서 그것들이 ‘단지감각과단지기억지식의원리’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감각이나 기억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자연적 삶과 배움에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과 기억 속 지식만을 최종 원리로 삼아 영적인 것을 그 아래 두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질서가 뒤집힐 때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것으로 묘사되며, 에스겔의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장면이 바로 그 상태를 표현합니다.
사13:9-10과 욜2:1-2,10도 같은 방향의 증거입니다. 두 본문 모두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31은 이 자리에서 ‘여호와의날’이나 각 선지서의 모든 세부 표현을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심판의 구체적인 교리나 별개의 상응을 덧붙이기보다, 사랑과 신앙의 빛이 사라지는 상태가 말씀에서 자연적 광명체의 어두워짐으로 반복하여 표현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창1의 넷째 날에서는 광명체가 나타나 빛을 비추지만, 이 선지서들에서는 그 반대 상태가 해와 달과 별의 어두워짐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AC.31은 어두워짐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사60:1-3,20에 이르면 방향이 정반대로 바뀝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주님의강림과이방인들의밝아짐,따라서새교회와,특히어둠가운데있다가빛을받아거듭나는모든사람’에 관한 말씀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일어나라빛을발하라이는네빛이이르렀고’, ‘다시는네해가지지아니하며네달이물러가지아니할것’이라는 표현은 앞의 어두워진 해와 달과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상태가 광명체의 어두워짐이라면,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새롭게 되는 상태는 해와 달이 지속해서 빛나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교회’를 곧바로 특정한 후대 교단명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1의 직접 문맥에서는 주님의 강림으로 어둠 속에 빛이 임하여 교회가 새롭게 되는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그것을 개별적인 거듭남에도 적용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새로움과 한 사람의 거듭남이 같은 빛의 질서 안에서 함께 언급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어둠 가운데 있는 곳에 빛을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시136:5-9와 시148:3-4의 인용은 이러한 광명체의 언어가 선지서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편의 창조와 찬양의 언어 안에서도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시136은 창세기와 매우 유사하게 하늘과 땅과 물, 큰 광명체, 낮을 주관하는 해, 밤을 주관하는 달과 별을 차례로 말합니다. 시148은 해와 달과 밝은 별들에게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AC.31은 이 자리에서 해와 달과 별 각각의 세부 의미를 더 확장하기보다, 이러한 말씀 전체에서 ‘광명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뜻한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다음 유대교회의 ‘항상타는등불’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앞의 선지서와 시편에서 확인한 광명체의 의미가 예배의 표상 안에서도 나타났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등불을 계속 켜 두도록 명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등불과 기름과 저녁과 아침의 모든 세부 상응을 지금 미리 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그 상세한 의미는 ‘적절한곳에서’밝히겠다고 유보합니다.
다만 AC.31은 그 등불의 가장 중심적인 의미만큼은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0의 마지막과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이, 이제 ‘주님께서불붙이시고빛나게하신다’는 표현으로 다시 확인됩니다.
따라서 AC.31은 감각과 기억 지식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외적 지식보다 무조건 내적인 감정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과 기억 지식은 제자리에 있을 때 유용합니다. 다만 그것들이 가장 높은 원리가 되어 사랑과 신앙을 지배하려 할 때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때 영적 광명체는 어두워집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사랑과 신앙을 다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실 때,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에게 빛이 임하고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지는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1의 여러 인용은 흩어진 성경 증거들의 나열이 아닙니다. 겔32, 사13, 욜2는 사랑과 신앙의 소멸을 ‘어두워진광명체’로 보여 주고, 사60은 주님의 오심과 거듭남을 ‘다시밝아진광명체’로 보여 주며, 시편들은 동일한 광명체의 언어를 창조와 찬양 안에서 확인하고, 출27의 등불은 그 사랑과 신앙을 실제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1의 해와 달과 별은 단순히 하늘의 천체를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의 빛이 어떻게 살아나고 또 어떻게 가려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의 언어가 됩니다. (AC.31해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창1:14-17)
AC.30
‘큰광명체들’(greatluminaries)이무엇을뜻하는지는,먼저신앙의본질이무엇인지,그리고새로창조되고있는사람들안에서신앙이어떻게자라가는지를알지않으면분명히이해할수없습니다.신앙의본질과생명은오직주님이시며,주님을믿지않는사람은생명을가질수없습니다.이는주님께서친히요한복음에서밝히신바입니다. What is meant by “great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2] 새로창조되고있는사람들안에서신앙이자라가는과정은다음과같습니다.처음에는그들에게생명이없습니다.생명은선과진리안에만있고,악과거짓안에는없기때문입니다.그다음에그들은신앙을통해주님에게서생명을받는데,먼저는기억에속한신앙,곧단지지식에불과한신앙인기억지식의신앙을받습니다.다음에는이해에속한신앙,곧이성적신앙을받고,마지막으로는마음에속한신앙,곧사랑의신앙이며구원의신앙을받습니다.앞의두종류의신앙은3절로13절까지생명없는것들로표현되며,사랑에의해생명을얻는신앙은20절로25절까지생명있는것들로표현됩니다.이때문에여기서는이제처음으로사랑과거기서나온신앙을다루는데,이것들이바로‘광명체들’(luminaries)입니다.사랑은‘낮을다스리는큰광명체’(thegreaterluminarywhichrulesbyday)이고,사랑에서나온신앙이‘밤을다스리는작은광명체’(thelesserluminarywhichrulesbynight)입니다.이두광명체는하나가되어야하므로,‘광명체들이있어’(Lettherebeluminaries, [sitluminaria])라는라틴어단수표현을쓰고있습니다.라틴어복수표현인[sintluminaria]가아니고말입니다.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At first they have no life,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first by faith of the memory,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lastly by faith in the heart,which is the faith of love,or saving faith.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by things inanimate,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by animate things.For this reason love,and faith thence derived,are now here first treated of,and are called “luminaries”;love being “thegreaterluminarywhichrulesbyday”;faith derived from love “thelesserluminarywhichrulesbynight”;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it is said of them,in the singular number,“Lettherebeluminaries” [sit luminaria],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 속사람안에서의사랑과신앙은겉사람의육체적차원에서의열과빛과같으므로,전자는후자로표현됩니다.이런이유로광명체들을‘하늘의궁창에두어’(setintheexpanseofheaven)라고하는데,이는속사람안에놓였다는뜻입니다.큰광명체는의지안에,작은광명체는이해안에말입니다.그러나그것들은태양의빛이그것을받는대상안에서보이듯이,의지와이해안에서그렇게나타날뿐입니다.의지를사랑으로움직이게하고,이해를진리또는신앙으로비추는것은오직주님의자비뿐입니다.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intheexpanseofheaven,” or in the internal man;a great luminary in its will,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해설
AC.30은 창세기 1장의 넷째 날, 곧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가 나타나는 장면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먼저 ‘신앙의본질이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넷째 날의 광명체들을 단순히 해와 달의 상징으로 바로 풀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무엇이며, 특히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생명을 얻어 가는지를 먼저 알아야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출발점에서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신앙의본질과생명은오직주님이시다’라고 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종교적 확신이나 교리 지식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바로 이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요3:36, ‘아들을믿는자에게는영생이있고’를 인용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30에 인용된 직접적인 이유는 먼저 ‘달로상징되는신앙에는순종이포함된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신앙의 생명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에 있으며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개역개정의 후반부가 ‘아들에게순종하지아니하는자’라고 번역되어 있어 신앙과 삶의 순종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도 생각하게 하지만, AC.30은 여기서 그 어휘를 별도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직접적인 초점은 신앙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새로 창조되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세 상태를 구별합니다. 처음은 ‘기억에속한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fidesscientifica’입니다. 사람은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기억하지만 아직 그것이 신앙의 살아 있는 생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음은 ‘이해에속한신앙’, 곧 이성적 신앙입니다. 이제 사람은 단지 기억할 뿐 아니라 자신이 배우는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은 ‘마음에속한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입니다. 이 마지막 신앙은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입니다.
이 세 단계는 앞에서 지나온 창조의 날들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이 창1:3-13의 ‘생명없는것들’로 표상되고,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은 창1:20-25의 ‘생명있는것들’로 표상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생명없는’이라는 말은 기억 지식이나 이해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필요한 준비입니다. 그러나 아직 신앙의 생명이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움직이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AC.29에서 열매까지 나타났는데도 아직 ‘생명없는것들’로 표현되었던 이유도 이 문맥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제 AC.30에서 처음으로 사랑과 ‘사랑에서나온신앙’이 함께 등장하고, 이것들이 ‘광명체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광명체’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밤을 다스리는 ‘작은광명체’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사랑과신앙’이라고 병렬시키지 않고 ‘사랑과거기서나온신앙’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신앙은 사랑과 독립하여 스스로 생명을 가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와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 두 광명체가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는 라틴어 표현에서도 읽어 냅니다. 그는 ‘sitluminaria’라는 단수 표현과 ‘sintluminaria’라는 복수 표현을 의도적으로 대조하면서, 사랑과 신앙이 둘로 분리된 영적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 안에서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중요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와 그것과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자연계의 열과 빛에 비유합니다. 속 사람 안의 사랑은 열과 같고, 신앙은 빛과 같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둘의 근원과 수용에 있습니다. 광명체가 ‘하늘의궁창에’놓인다는 것은 속 사람 안에 놓인다는 뜻이며,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놓입니다. 즉 사랑은 의지와 연결되고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아르카나가 나옵니다. 사랑과 신앙이 의지와 이해 안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들의 근원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태양의빛이그것을받는대상안에서보이듯이’그것들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날 뿐이라고 말합니다. 햇빛이 물체에 비쳐 그 안에서 보이더라도 빛의 근원이 그 물체가 아닌 것처럼, 인간 안에 나타나는 참된 사랑과 신앙의 생명도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 그릇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자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는 자신이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이 ‘오직주님의자비’라는 AC.30마지막 문장은 바로 이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넷째 날의 전환점은 단순히 ‘신앙을더많이아는것’이 아닙니다. 기억 속에 있던 신앙이 이해로 나아가고, 마침내 사랑과 결합하여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조차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그 근원이 주님임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앞의 날들에서 준비되었던 모든 것이 이제 사랑이라는 큰 광명체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라는 작은 광명체의 빛 아래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30이 넷째 날의 광명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신앙의 본질과 성장 과정을 밝히는 이유입니다. (AC.30해설)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창1:11-13)
AC.29
‘땅’(earth),곧사람이이렇게주님에게서오는천적씨앗들을받을준비가되고,선과진리에속한어떤것을산출할수있는상태가되면,주님께서는먼저어떤연약한것이돋아나게하시는데,이것을‘연한풀’(tenderherb)이라고합니다.다음으로는더유용한것이나오는데,이것은다시그안에씨를지니고있어‘씨맺는채소’(herbyieldingseed)라고합니다.마침내선한어떤것이열매를맺게되는데,이것을‘씨가진열매맺는나무’(treebearingfruit, whoseseedisinitself)라고하며,이모든것은각기자기종류대로입니다.거듭나는중인사람은처음에는자기가행하는선과자기가말하는진리가자기에게서나온다고생각합니다.그러나실제로는모든선과모든진리가주님에게서나오므로,그것들이자기에게서나온다고생각하는사람은아직참된신앙의생명을가지고있지않습니다.그렇지만그는나중에그생명을받을수있습니다.왜냐하면그는아직그것들이주님에게서나온다는것을믿을수있는상태가아니며,다만신앙의생명을받아들이기위한준비상태에있을뿐이기때문입니다.이상태는여기서생명없는(inanimate)것들로표상되고,그다음에오는신앙의생명상태는생명있는(animate)것들로표상됩니다. When the “earth,” or man,has been thus prepared to receive celestial seeds from the Lord,and to produce something of what is good and true,then the Lord first causes some tender thing to spring forth,which is called the “tenderherb”;then something more useful,which again bears seed in itself,and is called the “herbyieldingseed”;and at length something good which becomes fruitful,and is called the “treebearingfruit,whoseseedisinitself,” each according to its own kind. The man who is being regenerated is at first of such a quality that he supposes the good which he does,and the truth which he speaks,to be from himself,when in reality all good and all truth are from the Lord,so that whosoever supposes them to be from himself has not as yet the life of true faith,which nevertheless he may afterwards receive;for he cannot as yet believe that they are from the Lord,because he is only in a state of preparation for the reception of the life of faith. This state is here represented by things inanimate,and the succeeding one of the life of faith,by animate things.
‘하나님의나라’(kingdomofGod)는가장보편적인의미에서는전체천국을뜻하고,덜보편적인의미에서는주님의참된교회를,개별적인의미에서는참된신앙에속한모든사람,곧신앙의삶으로거듭난사람을뜻합니다.그러므로그런사람을‘천국’(heaven)이라고도하는데,이는천국이그사람안에있기때문이며,또한‘하나님의나라’라고도하는데,이는하나님의나라가그사람안에있기때문입니다.이에대해주님께서는누가복음에서친히이렇게가르치십니다. By the “kingdomofGod,” in the universal sense,is meant the universal heaven;in a sense less universal,the true church of the Lord;and in a particular sense,everyone who is of true faith,or who is regenerate by a life of faith. Wherefore such a person is also called “heaven,” because heaven is in him;and likewise the “kingdomofGod,”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in him,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Luke:
이것이사람의거듭남에서세번째로이어지는단계이며,곧그의회개(repentance)의상태입니다.이상태역시그늘에서빛으로,곧저녁에서아침으로나아갑니다.그러므로13절에서‘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이는셋째날이니라’고한것입니다.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being his state of repentance,and in like manner proceeding from shade to light,or from evening to morning;wherefore it is said (verse 13),“andtheeveningandthemorningwerethethirdday.”
해설
AC.29에서는 셋째 날의 거듭남이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앞의 AC.27-28에서는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나는 장면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모이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체가 준비되는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준비된 ‘땅’에서 처음으로 무엇인가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큰 나무와 풍성한 열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연한풀’이 나오고, 다음으로 ‘씨맺는채소’가 나오며, 마지막으로 ‘씨가진열매맺는나무’가 나옵니다. 이것은 거듭남이 단번에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점차 자라게 하시는 질서 있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땅, 곧 사람이 ‘주님에게서오는천적씨앗’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씨앗의근원’입니다. 땅이 씨앗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받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기 안에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셋째 날에 비로소 무엇인가 자라기 시작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땅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은 ‘연한풀’(tenderherb)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처음 돋아나게 하시는 ‘어떤연약한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거듭남의 처음에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 아직 매우 미약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조금 알게 되고 그것에 따라 살고자 하지만 이전의 습관과 자기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도 여전히 강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나타나는 변화는 연한 풀처럼 작고 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작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무엇인가가 주님에게서 오는 씨앗으로부터 사람 안에 돋아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씨맺는채소’입니다. 여기서는 처음의 연약한 상태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더유용한것’이라고 표현하며, 그 안에 다시 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씨가진열매맺는나무’가 나옵니다. 이제 선한 것이 실제로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따라서 이 세 표현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을 처음 싹트게 하시고, 그것을 점차 자라게 하여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하시는 진행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이 모든 것이 ‘각기종류대로’이루어진다고 덧붙입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1장에서 계속 반복되지만 AC.29은 여기서 ‘종류’의 세부적인 속뜻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그것을 선과 진리의 모든 질서, 영계의 분류, 선과 악의 분리 같은 넓은 교리 전체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소한 AC.29의 문맥에서는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무질서한 혼합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 고유의 성질을 따라 산출된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더 넓은 의미는 이 표현이 이후 다시 나타날 때 함께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29의 매우 중요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 싹트고 열매까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에게 아직 ‘참된신앙의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이 단계의 사람은 아직 그것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완성된 영적 생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생명을받아들이기위한준비상태’에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해야 왜 식물들이 여기서 ‘생명없는것들’(inanimatethings)로 표상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연계의 식물이 문자 그대로 생명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것은 거듭남의 상태입니다. 셋째 날에는 선과 진리에 속한 무엇인가가 사람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사람은 아직 그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참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다음 단계에서 등장하는 ‘생명있는것들’은 신앙의 생명을 실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열매맺는나무’까지 왔다고 해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셋째 날 전체는 여전히 다음 생명의 단계를 위한 준비입니다.
그렇다고 이때 사람이 행하는 선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바로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사람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내가선을행한다’, ‘내가진리를말한다’, ‘내가악을버린다’고 느끼며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남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과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AC.29의 셋째 날은 바로 그 인정에 이르기 전의 중요한 준비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씨 뿌리는 비유를 함께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는 씨와 말씀, 뿌리는 자와 씨를 받는 땅, 그리고 결실을 서로 연결하여 설명하십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씨는하나님의말씀이요’라고 직접 밝히고, 마가복음에서는 ‘뿌리는자는말씀을뿌리는것이라’고 하며,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씨를 뿌리는 이를 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창1의 씨와 땅을 거듭남의 말씀으로 읽는 것은 식물 이미지에 임의로 의미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사용하신 씨 뿌림의 언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의 차이도 같은 말씀이 사람에게 주어져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존하며 삶에서 결실하는가가 중요함을 보여 줍니다.
막4:26-28의 비유는 이 성장의 또 다른 면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린 뒤 밤낮 자고 깨는 동안 씨는 자라지만 그는 ‘어떻게그리되는지를알지못합니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됩니다. 창1:11의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와 각각을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AC.29에서 이 비유가 보여 주는 것은 주님의 나라가 씨 뿌림에서 시작하여 사람이 그 내적 진행을 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점차 결실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거듭남도 사람의 눈앞에서 단번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생명이 점차 자라는 과정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나라’를 세 범위로 설명합니다.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전체 천국이고, 덜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참된 교회이며, 개별적인 의미에서는 참된 신앙에 속한 사람, 곧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각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개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 천국에 속한 질서를 이루시는 일입니다. 눅17:20-21의 ‘하나님의나라는너희안에있느니라’는 말씀이 이 문맥에서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C.29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 외적 장소에만 두지 않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신앙의 삶으로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 셋째 단계를 ‘회개(repentance)의상태’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AC.29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여기서 회개를 단지 죄를 슬퍼하거나 잘못을 후회하는 감정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앞에서 기억 속에 받아들인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이제 실제 삶에서 무엇인가를 산출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따라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만 아직 사람은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회개 역시 완성된 거듭남이 아니라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기 위한 준비 상태입니다.
그래서 셋째 날에도 다시 ‘저녁이되고아침이됩니다’. 사람은 아직 그늘 속에 있지만 빛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며,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던 선과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더 깊은 인식을 향하여 인도받고 있습니다. 연한 풀에서 씨 맺는 채소로, 다시 열매 맺는 나무로 나아가는 성장도 바로 이 저녁에서 아침으로의 진행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완성된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 시작하여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을 싹트게 하시고 점차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AC.29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날의 사람은 아직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참된 신앙의 생명에도 완전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 불완전한 상태를 버리지 않으시고 거듭남의 과정으로 사용하십니다. 사람에게서 겨우 ‘연한풀’만 돋아나는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작은 시작을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성장의 근원은 땅인 사람에게 있지 않고 씨를 주시는 주님에게 있습니다. 결국 거듭남은 사람이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기 안에서 자라며 열매 맺도록 주님께 이끌리는 과정입니다. (AC.29해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창1:10)
AC.28
말씀에서‘물’(waters)로는여러지식(knowledges, cognitionesetscientifica)을,‘바다’(seas)로는그많은물,곧지식의집합을의미할때가참많은데요,이사야에보면,It is a very common thing in the Word for “waters” to signify 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and consequently for “seas” to signify a collection of knowledges.As in Isaiah:
AC.28은 앞의 AC.27에서 시작된 ‘물’, ‘바다’, ‘땅’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다른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AC.27에서는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들어온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가 기억 지식(scientifica)으로 머물며, 이렇게 모인 지식들이 ‘바다’를 이루고, 겉 사람 자체는 ‘마른땅’으로 표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28에서는 이것이 창1:9-10에만 적용되는 일회적인 풀이가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여 나타나는 의미임을 보여 줍니다. ‘물’은 여러 지식(cognitionesetscientifica)을, ‘바다’는 그 많은 물, 곧 지식의 집합을, ‘땅’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수용체(recipient)를 의미합니다.
먼저 사11:9의 ‘물이바다를덮음같이여호와를아는지식이세상에충만할것임이니라’는 말씀은 ‘물’과 ‘바다’가 지식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여호와를아는지식’의 충만함이 바로 ‘물이바다를덮는것’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1:10의 모인 물과 바다를 지식들과 그 집합으로 읽는 것은 창세기의 한 구절에 임의로 붙인 상징 풀이가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확인되는 언어의 연결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사19:5-6은 그 반대 상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직접 ‘지식의결핍이다루어지는곳’이라고 소개합니다. ‘바닷물이없어지겠고강이잦아서마르겠고’라는 표현은 앞의 사11:9에서 물이 충만한 모습과 대조됩니다. 앞에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충만함이 물의 충만함으로 표현되었다면, 여기에서는 물이 없어지고 마르는 모습이 지식의 결핍을 나타냅니다. 이 두 구절을 함께 놓으면 AC.28에서 말하는 물과 지식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애굽, 강, 갈대와 부들의 세부 상응까지 모두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AC.28의 직접적인 목적은 물과 바다가 지식 및 그 집합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말씀의 용례로 확증하는 데 있습니다.
학2:6-7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새교회에대해말하면서’라고 소개하고, ‘하늘과땅과바다와육지를진동시킬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AC.28은 여기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 각각의 속뜻을 세밀하게 풀이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 교회의 형성을 말하는 문맥에서도 창조의 언어인 하늘, 땅, 바다, 육지가 함께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자연적 창조 언어가 말씀의 다른 곳에서는 교회의 영적 상태와 새로워짐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예로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슥14:7-8에 이르면 스베덴보리는 더욱 분명하게 ‘거듭나는중인사람에대하여’라고 말합니다. ‘어두워갈때에빛이있으리로다’라는 말씀에 이어, ‘그날에생수가예루살렘에서솟아나서절반은동해로,절반은서해로흐를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물과 바다가 거듭남의 문맥 속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AC.28은 ‘동해’와 ‘서해’, ‘여름’과 ‘겨울’의 세부적인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이상의 상응을 덧붙이기보다, 물과 바다가 단순한 자연물에 그치지 않고 거듭나는 사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안전합니다.
시69:33-34역시 같은 점을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황폐해졌다가거듭나주님을경배하게될사람’을 묘사하는 말씀이라고 직접 소개합니다. ‘천지가그를찬송할것이요바다와그중의모든생물도그리할지로다’라는 표현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가 거듭난 사람의 상태를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여기에서도 ‘바다가운데움직이는모든것’을 별도로 ‘살아있는지식’이라고 확정하거나, ‘찬송’을 인간 존재 전체의 특정한 영적 상태로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28에서의 직접적인 역할은 하늘과 땅과 바다라는 표현들이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을 경배하는 상태를 말할 때에도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슥12:1은 앞의 인용들과는 조금 다른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들면서 ‘땅’이 수용체(recipient)를 의미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을펴시며땅의터를세우시며사람안에심령을지으신이’라는 표현에서, AC.28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땅’이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자리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의 AC.27에서 마른 땅, 곧 겉 사람이 드러난다는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사람안의심령’을 근거로 거듭남 전체의 세부 구조를 새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28에서 필요한 만큼 말하면, ‘바다’가 지식들의 집합이라면 ‘땅’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수용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물’이 지식을 의미한다고 해서 지식 자체가 곧 영적 생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땅’이 수용체라고 해서 땅 자체가 생명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앞의 AC.27에서 보았듯이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천적이든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것들은 그곳에서 기억 지식으로 머물며,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집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기억에 모여 있다는 것과 그 지식이 실제 선한 삶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은 같은 단계가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다음 창1:11-12와 AC.29로 이어질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물이 모여 바다가 되고 땅이 드러난 뒤에야 그 땅에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28은 아직 거듭남의 열매 자체를 설명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 열매가 나타날 수 있는 질서가 준비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사람은 많은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그것을 삶에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억 속의 지식과 실제 생명의 열매를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28의 핵심은 ‘많이아는사람이곧영적인사람이다’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물은 여러 지식이고, 바다는 그 지식들이 모인 집합이며, 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직 다음 단계의 생명을 위한 준비와 질서에 속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창1:10은 ‘하나님이보시기에좋았더라’고 말합니다. 지식이 모이고, 바다가 형성되고, 땅이 드러남으로써 이제 다음 단계에서 생명이 싹트고 열매 맺을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AC.28해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창1:9)
AC.27
속사람과겉사람이둘다존재한다는사실과,여러진리와선이주님으로부터속사람을통하여겉사람으로흘러들어온다는사실이알려지면,비록겉보기에는그렇지않아보여도,거듭나는중인사람안에있는그러한여러진리와선,곧참과선에관한여러지식은그의기억속에저장되어‘기억지식’(scientifica)가운데로분류됩니다.왜냐하면겉사람의기억속에스며든것은자연적인것이든,영적인것이든,또는천적인것이든모두그곳에기억지식으로머물며,나중에주님에의해거기에서불러내어지기때문입니다.이러한지식들이바로‘한곳으로모인물’(watersgatheredtogetherintooneplace)이며,‘바다’(seas)라고합니다.그러나겉사람자체는‘마른땅’(dryland)이라하고,곧이어‘땅’(earth)이라하는데,이에대해서는이어지는다음내용에서말씀드리겠습니다.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or through,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from the Lord,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then those truths and goods,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are stored up in his memory,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scientifica];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whether it be natural,or spiritual,or celestial,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gatheredtogetherintoone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해설
AC.27은 창세기 셋째 날의 첫 장면인 ‘천하의물이한곳으로모이고뭍이드러나라’는 말씀을 거듭남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앞의 AC.24-25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고, 주님께서 사람을 그의 현재 상태에서부터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시는 질서를 살폈다면, 이제 AC.27에서는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들어온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서 어떤 상태에 놓이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이 번호는 앞의 ‘궁창’과 뒤의 ‘바다와땅’을 연결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하는 전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둘 다 존재하며,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비록겉보기에는그렇지않아보여도’라고 덧붙입니다. 사람의 의식에서는 자신이 배우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AC.27의 초점은 이러한 인간의 활동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으며, 그것들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이른다는 질서를 점차 알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들어온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가면 ‘기억지식’(scientifica)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의 내용이 자연적인가, 영적인가, 천적인가 하는 것과 그것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 존재하는 방식은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라도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들면 그곳에서는 기억 지식으로 머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관한 지식이나 천국에 관한 지식이라고 해서 그것이 기억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사람의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기억 속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창1:9의 ‘한곳으로모인물’이 나타내며, 그것들을 ‘바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물’이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과 연결되고, 그 물들이 모여 ‘바다’가 된다는 것이 AC.27의 직접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바다’를 곧 영적 생명 자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모여 있는 기억 지식의 상태와 관련됩니다. 앞으로 그 지식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겉 사람이 어떻게 생명을 받아 실제 열매를 내게 되는지는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더 전개됩니다.
AC.27에서 특히 주목할 표현은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이러한 것들이 ‘나중에주님에의해거기에서불러내어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거기’는 속 사람 안의 어떤 별도의 리메인스 저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자체의 흐름상 바로 앞에서 말한 겉 사람의 기억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 문장을 ‘주님께서사람의모든기억작용을직접조작하신다’는 심리학적 설명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AC.27이 강조하는 것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단지 인간 자신의 소유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후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리메인스’와도 구별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및 그에 속한 상태들과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AC.27의 이 한 문장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리메인스를저장소에서꺼내는메커니즘’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겉 사람의 기억에 저장된 ‘scientifica’, 곧 기억 지식이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천사들의 매개나 퍼셉션, 양심 같은 특정한 작동 방식 하나로 고정하기보다, 본문이 밝히는 범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 자체를 ‘마른땅’이라 하고, 곧이어 ‘땅’이라 한다고 말한 뒤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넘깁니다. 이 멈춤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AC.27은 아직 마른 땅이 왜 땅이 되고 어떻게 식물을 내는지를 모두 설명하려는 번호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확정되는 것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에 기억 지식으로 저장되고, 그것들이 ‘한곳으로모인물’, 곧 ‘바다’로 표현되며, 겉 사람 자체가 ‘마른땅’으로 드러난다는 데까지입니다.
따라서 AC.27의 셋째 날은 곧바로 열매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물이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납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이 진리를 한 번 듣고 곧바로 완성된 삶의 열매를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 지식 자체가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기억 속에 받아들여진 것들도 이후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AC.27은 바로 이 ‘기억에모이는지식’과 ‘드러나는겉사람’에서 셋째 날의 다음 단계를 준비합니다. (AC.27해설)
AC.23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날’(day)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해석 원리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가 처음부터 ‘날은곧상태다’라고 단순하게 등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에서 ‘날’이 문자적인 하루를 넘어 ‘시간자체’를 나타내는 용례가 매우 흔하다고 설명하고, 이어서 날이 시간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시간의상태’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23의 논리는 ‘날은하루가아니다’라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날→시간→그시간에속한상태’로 깊어지는 구조입니다.
첫 번째 증거군은 사13:6, 9, 13, 22와 사23:7, 15입니다. 사13장에는 ‘여호와의날’, ‘분하여맹렬히노하는날’, ‘그의날이오래지아니하리라’는 표현들이 이어지며, 특히 마지막에는 ‘그의때가가까우며그의날이오래지아니하리라’고 하여 ‘때’와 ‘날들’이 나란히 사용됩니다. 여기서 ‘날’은 단순한 24시간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 제한되지 않고 어떤 사건과 상태가 펼쳐지는 때를 나타냅니다. 사23장에서도 ‘옛날’, ‘그날’, ‘한왕의연한같이칠십년’이라는 시간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두로, 왕, 칠십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 ‘날’이라는 말이 하루보다 넓은 시간과 시대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AC.23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날’이 시간을 나타내므로 또한 ‘그시간의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용되는 첫 구절이 렘6:4의 ‘날이기울어저녁그늘이길었구나’입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실제 하루가 저물어 가는 모습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때의 상황과 상태를 함께 담아냅니다. 바로 앞 AC.22에서 ‘저녁’과 ‘아침’이 각각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한 것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따라서 시간의 표현은 말씀 안에서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렘33:20, 25의 ‘낮에대한나의언약과밤에대한나의언약’, 그리고 ‘주야로그때를잃게할수있을진대’라는 표현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도 낮과 밤은 실제 자연의 시간 질서를 배경으로 하지만, 스베덴보리가 AC.23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낮과 밤에 ‘그때’가 있으며 시간의 표현이 그에 속한 상태와 결부되어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곧바로 낮과 밤을 시험과 회복의 모든 교대에 일대일로 대응시키거나, 거듭남의 모든 과정에 대한 별도의 섭리 법칙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주제들은 해당 내용을 직접 다루는 다른 AC문맥에서 살피는 편이 안전합니다.
애5:21의 ‘우리의날들을다시새롭게하사옛적같게하옵소서’는 ‘날’과 ‘상태’의 관계를 특히 이해하기 쉽게 보여 줍니다. 지나간 달력의 날짜 자체를 다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날들을새롭게한다’는 것은 그 날들에 속했던 삶과 상태가 새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더구나 바로 앞에 ‘우리를주께로돌이키소서그리하시면우리가주께로돌아가겠사오니’라는 기도가 놓여 있으므로, 여기서 새롭게 되기를 구하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회귀가 아니라 주님께로 돌이켜지는 삶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다만 AC.23은 여기서 ‘옛적’을 곧바로 태고교회라고 해설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의 직접적인 역할도 ‘날들이그날들에속한상태를나타낼수있다’는 점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AC.23이 왜 AC.22바로 뒤에 놓이는지도 분명해집니다. AC.22에서는 ‘저녁’과 ‘아침’이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내며,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상태에서 주님께 속한 상태로 나아가는 질서가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AC.23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창1에서 반복되는 ‘날’자체가 단순한 시간 단위에 머물지 않고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말씀 전체의 용례를 제시합니다. 따라서 창1의 ‘첫째날’, ‘둘째날’과 이어지는 날들을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읽는 것은 ‘날’이라는 단어에 임의로 새로운 뜻을 붙인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시간과 상태가 결부되어 표현되는 방식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AC.23을 근거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날’을 언제나 기계적으로 ‘영적상태’라고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곳에서는 실제 하루가 중심일 수 있고, 어떤 곳에서는 더 넓은 시간이나 시대가 중심일 수 있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그 시간에 속한 상태가 함께 표현됩니다. 중요한 것은 문맥입니다. AC.23이 보여 주는 것은 ‘날이라는단어는언제나상태만을뜻한다’는 상응 사전식 공식이 아니라, 말씀에서 시간의 표현이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함께 담을 수 있다는 해석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창세기 1장의 전체 구조와 만날 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AC.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날을 인간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인 상태라고 이미 제시했습니다. AC.23은 이제 여러 선지서의 용례를 통해 ‘날’이라는 말 자체가 그러한 읽기를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1의 날들은 단순히 시계로 계산되는 여섯 개의 시간 단위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차례로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의 상태들로 읽힙니다.
결국 AC.23의 핵심은 ‘시간을버리고상태만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서는 시간과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간의 이름이 그 시간에 속한 영적 상태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의 ‘날’을 읽을 때도 ‘얼마나긴시간이었는가?’라는 질문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날은거듭나는사람의어떤상태를나타내는가?’라고 물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AC.23이 창조의 날들을 거듭남의 날들로 읽도록 열어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AC.23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