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2, 15:11-32돌아온 탕자와 큰아들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11-32)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기독교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흔히 이 비유를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회개하여 돌아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아 주신다’는 이야기로 읽습니다. 물론 그것이 이 비유의 가장 분명한 문자적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거듭남의 질서에서 이 비유를 다시 살펴보면, 이 이야기는 단순히 집을 나갔다 돌아온 한 청년의 이야기를 넘어 한 인간이 주님에게서 받은 영적 재산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떠났다가 그것을 모두 잃은 뒤,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서 돌아서 주님께 돌아와 다시 진리와 선으로 옷 입혀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펼쳐집니다.

 

무엇보다 이번 비유에는 매우 든든한 직접 근거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9391(24:5)에서 바로 이 돌아온 탕자를 직접 언급합니다. 그는 ‘탕자’가 ‘천국의 부요함,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탕진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께 돌아와 자신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고백한 것은 ‘마음의 회개와 자기를 낮춤’을 의미하며, 아버지가 입혀 준 ‘제일 좋은 ’은 일반적인 진리들을, ‘살진 송아지’는 그 진리들에 상응하는 일반적인 선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비유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는 것은 비유의 세부에 임의의 상응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비유를 직접 그렇게 열어 준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AC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 속뜻 주석, 10,837 )를 뜻하며, 숫자는 글 번호입니다. 괄호 안의 성경 장절은 해당 글이 다루는 말씀의 본문입니다.

 

비유는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벌써 인간의 깊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아들이 가진 것은 본래 아버지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것을 ‘내게 돌아올 분깃’으로 받아 들고 아버지를 떠납니다. 영적으로 보면 인간에게 있는 생명, 이해, 자유, 진리를 아는 능력, 선을 행할 능력은 모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은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느끼고 마침내 ‘ ’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게 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가 있어야 사랑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을 행할 때 그것이 마치 내 선택과 내 행동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선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 것처럼’ 사용하는 것과 ‘내게서 나온 ’이라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아버지와 분리하여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합니다.

 

13절은 ‘ 며칠이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라에 ’라고 합니다. ‘ 나라’는 문자적으로는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이지만, 영적으로 읽으면 주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의 상태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공간적으로 우리에게서 멀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사랑과 삶에서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할수록 사람은 마음의 상태에서 ‘ 나라’로 갑니다.

 

그곳에서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합니다. 여기에서 AC.9391의 직접 설명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탕자가 탕진한 것을 ‘천국의 부요함’, 곧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밝힙니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많은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용서가 무엇인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해 사용하거나 삶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그것을 탕진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진리의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천국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 없앤 ’ 흉년이 옵니다. 이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재산을 다 없앤 뒤 흉년이 왔습니다. 외부에서 갑자기 불행이 닥쳐서 탕자가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진 것을 다 탕진한 상태에서 흉년이 닥치자 그의 내적 빈곤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영적 의미에서 흉년은 선과 진리가 결핍된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계속 삶에서 밀어내면 어느 순간 ‘먹을 ’이 없어집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데도 마음은 굶주리고, 많은 것을 경험했는데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이것이 영적 궁핍입니다.

 

그 결과 둘째 아들은 그 나라 사람에게 붙어 살며 돼지를 치게 됩니다. 유대인의 청중에게 ‘돼지를 친다’는 것은 단순히 가난한 직업을 얻었다는 것보다 훨씬 강렬한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례에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아들로 살던 사람이 이제 먼 나라에서 돼지를 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주님에게서 멀어져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의 지배 아래 내려간 인간의 상태를 아주 강하게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더욱 처참한 것은 16절입니다.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천국의 양식이 아니라 돼지가 먹는 음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것들로 자신을 채우려 합니다. 인정, 소유, 쾌락, 우월감, 원망, 자기 합리화 같은 것들이 잠시 마음을 채우는 듯하지만 영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먹으려 하지만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 이 비유 전체의 방향이 바뀝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개역개정의 이 표현은 참 좋습니다. 외적 환경이 먼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 데려온 것도 아닙니다. 아들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합니다. ‘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거듭남에서도 이 순간은 결정적입니다. 사람은 먼저 자기 상태를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사실, 자기 지혜와 자기 사랑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이며 회개의 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아직 아버지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미 좋은 사람이 된 뒤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보는 순간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것은 단순한 후회와 회개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후회는 돼지우리에서 ‘내가 이렇게 되었지?’ 하고 슬퍼하는 데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일어나 아버지께 가는 ’입니다. 방향이 바뀝니다. 스베덴보리가 AC.9391에서 탕자의 귀환을 ‘마음의 회개와 자기를 낮춤’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돌아서 주님께 향하는 실제적인 방향 전환입니다.

 

18절과 19절의 고백도 중요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여기에는 변명도 자기 합리화도 없습니다. ‘환경이 나빴습니다’, ‘친구들을 잘못 만났습니다’, ‘아버지가 처음부터 재산을 주지 말았어야 했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악을 자기 것으로 인정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려면 먼저 그것이 ‘나의 ’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한 뒤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장면이 길게 나오지 않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들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미 그를 봅니다.

 

이 장면은 이 비유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들이 먼저 돌아서기는 했지만, 그가 아버지께 도착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충분히 회개했음을 증명한 뒤 아버지가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먼저 보고, 측은히 여기고, 달려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깨끗해진 뒤에야 가까이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방향을 돌려 주님께 향하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의 자비는 그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여기에는 심문이 없습니다. ‘재산을 얼마나 남겼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며 조서를 작성하지도 않습니다. 먼저 안습니다. 이것은 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은 이미 자기 죄를 보고 돌아섰습니다.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언제나 있었지만, 이제 아들이 그것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변화가 하나 있습니다. 아들은 돌아오기 전에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고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아버지 앞에 도착해서는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까지만 말합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은 본문에서 사라집니다. 그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아버지가 종들에게 명령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들은 ‘품꾼’의 자리라도 달라고 생각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품꾼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시작하는 일은 ‘아들의 회복’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바로 이 대목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풉니다. AC.9391에서 ‘제일 좋은 ’은 ‘일반적인 진리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9, AE) AE.279(5:1)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제일 좋은 ’은 일반적이고 주된 진리들을, ‘손의 가락지’는 속 또는 영적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의 결합을, ‘발의 ’은 겉 또는 자연적 사람 안에서 그와 같은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둘, 곧 가락지와 신이 함께 ‘거듭남’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이렇게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단순한 환영식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회복 장면입니다. 먼저 옷을 입힙니다. 말씀에서 옷은 진리와 관련됩니다. 벌거벗고 궁핍해진 사람에게 다시 진리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진리는 머리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락지가 ‘’에 끼워집니다. 손은 행위와 능력의 영역과 연결됩니다. 진리와 선이 속 사람 안에서 결합하고 그것이 삶의 행위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에 신을 신깁니다. 발은 자연적 삶의 가장 바깥 영역과 관계됩니다. 즉 거듭남은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신비한 변화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가장 바깥 부분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이야기가 ‘용서받았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다시 입히고, 연결하고, 걷게 합니다. 주님의 용서는 단순히 과거의 죄를 장부에서 지우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을 다시 질서 안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진리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고, 자연적 삶까지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가 직접 해설합니다. AC.9391에서는 살진 송아지가 앞의 진리들에 상응하는 ‘일반적인 선들’을 의미한다고 하며, AE.279에서는 더 분명하게 ‘사랑과 체어리티의 ’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제일 좋은 옷과 살진 송아지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옷은 진리이고 송아지는 선입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진리만 다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향해야 할 선, 곧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먹고 즐기자’는 말씀도 단순한 잔치 장면이 아닙니다. AE.279는 이것을 ‘결합과 천국의 기쁨’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음식 섭취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선을 함께 받아들이고 나누는 결합을 나타냅니다. 아들은 먼 나라에서 쥐엄 열매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집에서는 살진 송아지를 함께 먹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대비입니까? 주님에게서 떠난 proprium의 삶이 주는 음식과 주님과의 결합 안에서 받는 천국의 음식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러므로 24절의 ‘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는 말씀이 비유의 중심에 놓입니다. 아들은 육체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서 떠난 상태가 ‘죽음’이었고, 돌아와 다시 결합된 상태가 ‘’입니다. 영적 죽음과 영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얼마나 활발히 활동하고 성공하고 즐기고 있느냐가 생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느냐가 영적 생명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유가 끝났다면 우리는 훨씬 편안했을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가 서로 끌어안고 잔치를 벌이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야기를 계속하십니다. ‘맏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맏아들이야말로 이 비유를 단순한 ‘탕자의 회개 이야기’에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맏아들은 먼 나라에 가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탕진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 집에 계속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합니다.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외적으로 보면 모범적인 아들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합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아버지 안에 있는 ’과 ‘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는 ’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맏아들은 몸으로는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가 왜 기뻐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동생을 ‘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관계가 끊어져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동생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나는 이렇게 충성했는데 사람에게 잘해 주느냐’는 비교와 공로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문맥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 장은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를 연이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만큼이나 맏아들도 이 비유의 중요한 대상입니다. ‘죄인과 함께 먹는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맏아들에게서 드러납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매우 엄중한 질문이 됩니다. 사람은 외적으로 종교적 질서를 잘 지키면서도 그 중심에 자기 공로가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이라는 말 안에는 순종의 기록이 가득하지만, 동시에 ‘그러므로 나는 받을 자격이 있다’는 자기 의가 숨어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을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공로로 붙잡으면,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자비를 기뻐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동생의 회복을 보면서 기뻐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의 문제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다른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자기 공로를 중심에 놓는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비를 불공평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오래 섬겼는데 사람은 저렇게 살다가 돌아와서 저런 환대를 받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둘째에게 했던 것과 비슷하게 맏아들에게도 ‘나옵니다.’ 둘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달려 나갔고, 맏아들이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아버지가 나와서 권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버지는 먼 나라에 간 아들에게만 자비로운 분이 아닙니다. 자기 의와 분노 때문에 잔치에 들어오지 못하는 맏아들에게도 나아가십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사실 ‘잃어버린 아들’은 한 명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 집 밖의 먼 나라에서 잃어버렸고, 맏아들은 아버지 집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한 사람은 허랑방탕 속에서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다른 사람은 자기 의와 공로의식 속에서 주님의 마음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맏아들이 ‘ 아들’이라고 부른 사람을 다시 ‘ 동생’이라고 불러 줍니다.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 주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체어리티의 본질을 다시 보게 됩니다. 주님께 돌아온 사람을 보면서 ‘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가’를 끝없이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 천국의 기쁨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비유는 맏아들이 결국 잔치에 들어갔는지를 말하지 않고 끝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열린 결말입니다. 둘째 아들의 선택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선택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밖으로 나와 권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자기 공로와 분노를 내려놓고 아버지와 함께 동생의 회복을 기뻐하며 잔치에 들어갈 것인가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읽으며 우리는 둘째 아들에게만 자신을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는 둘째도 있고 맏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내 것이라 여기며 먼 나라로 가려는 proprium도 있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proprium도 있습니다. 하나는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떠나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중심을 ‘탕자’에게만 두면 오히려 가장 중요한 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둘째가 재산을 요구할 때도 아버지가 있습니다. 둘째가 먼 나라에 있을 때도 아버지의 집은 그대로 있습니다. 둘째가 스스로 돌이킬 때 기억해 낸 것도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직 거리가 먼데 먼저 발견한 것도 아버지이고, 달려간 것도 아버지이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춘 것도 아버지입니다.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긴 것도 아버지이며,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시작한 것도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맏아들이 분노하여 밖에 서 있을 때 다시 밖으로 나가 권하는 분도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주님께서 잃어버린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억지로 집에 붙잡아 두지 않으십니다. 둘째가 떠나는 것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떠났다고 사랑을 거두시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선택의 결과를 통해 자기 상태를 보고, 자유 가운데 돌이켜 주님께 향할 때 주님께서는 그를 품꾼으로 강등시키지 않으십니다. 다시 진리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며, 자연적 삶까지 새롭게 하시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 안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이 AC.9391AE.279가 옷과 가락지와 신과 살진 송아지를 통해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전에 우리가 나누었던 질문, 곧 ‘아버지는 둘째 모르게 사람을 보내 그가 사는 형편을 은밀히 살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다시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문자적 이야기 안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더 깊은 답이 보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먼 나라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상태를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여 억지로 데려오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자유 가운데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할 수 있도록 섭리하시면서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방향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사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우리를 잊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를 우리 자신의 거듭남에 놓고 읽으면 질문은 아주 구체적으로 바뀝니다. ‘나는 지금 아버지에게서 받은 무엇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가? 나는 어떤 선과 진리를 목적을 위해 탕진하고 있는가? 마음의 나라는 어디인가? 나는 무엇으로 영혼의 배를 채우려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돼지우리에서 처지를 한탄하고만 있는가, 아니면 실제로 일어나 아버지께 가고 있는가? 그리고 혹시 나는 이미 아버지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자비 때문에 화가 맏아들은 아닌가?

 

그런데 이 모든 질문 끝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결국 우리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주님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이 한 장면 안에 이 비유의 복음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먼 나라에서 돌아오지만, 구원은 인간이 먼 길을 완주하여 마침내 주님께 도달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주님께로 방향을 돌릴 때, 주님께서 그를 향하여 오십니다. 그리고 그를 단지 과거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다시 옷 입히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고, 삶의 가장 바깥까지 새롭게 하여 천국의 기쁨 안으로 들이십니다.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죽어 있던 것이 살아나는 것이며, 잃었던 것이 주님에게 다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기뻐하시는 분은 무엇보다 주님이십니다.

 

 

 

SW.3, 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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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1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13:1-23)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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