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08 | 천주교(Roman Catholic)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 지옥을 결정하는 것은 죄의 종류인가, 끝까지 붙든 삶의 사랑인가?
해설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이것은 천주교가 죄와 회개,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하여 가르치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인간의 죄를 그 중대성에 따라 ‘대죄’(大罪, mortal sin)와 ‘소죄’(小罪, venial sin)로 구별하며, 대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죽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영원히 상실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도덕적 선택이 단순히 현세의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도 관계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죄가 대죄인지는 누가 결정하며, 그 죄를 지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그 죄를 자신의 삶의 사랑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동일한 것일까요? 또한 죽기 직전에 회개했다는 사실만으로 오랜 세월 형성된 악한 사랑이 즉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을 주님께서 죄인을 던져 넣으시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악한 사랑에 따라 스스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의 대죄와 회개에 관한 가르침은 이러한 이해와 어디에서 일치하고, 어디에서 달라질까요? 이번 명제는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며 참된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854–1855항은 대죄와 소죄를 구별하면서, 대죄는 하나님의 법을 중대하게 어겨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체어리티를 파괴하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하는 죄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소죄는 체어리티를 상하게 하고 약화시키지만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어떤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 반드시 대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교리서 1857항은 대죄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함께 충족되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첫째, 그 행위가 중대한 사안이어야 합니다. 둘째, 당사자가 그 행위가 중대한 죄임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그 행위에 의도적으로 동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동일한 행동을 했더라도 그 사람의 인식과 자유, 의도에 따라 개인적인 책임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리서 1860항은 무의식적인 무지나 외부의 강압, 심리적·병리적 장애 등이 행위의 자발성과 책임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구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 완전하게 판단할 수 없으며, 그의 이해와 의지, 자유로운 선택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대죄가 회개 없이 지속되면 인간을 지옥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61항은 대죄가 체어리티와 성화 은총을 상실하게 하며,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로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033항은 대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영원히 분리되는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1035항은 지옥의 영원성을 가르치면서 그 가장 큰 고통을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1037항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시며, 지옥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상태를 끝까지 고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지옥 교리를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 분노하시어 임의로 지옥행을 선고하시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끝까지 지속되는 회개 거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전통 모두 지옥을 인간의 악한 삶과 무관한 임의적인 처벌로 이해하지 않으며, 인간이 자유 가운데 무엇을 사랑하고 선택하는가가 영원한 운명과 깊이 관련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죄를 지은 사람의 상태를 판단할 때에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어떤 행위가 객관적으로 중대한 악이라는 사실과 그 행위를 저지른 개인에게 대죄의 책임이 완전하게 성립한다는 사실을 구별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61항도 행위 자체의 중대성은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맡겨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대죄의 상태에 있으며, 지금 죽는다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천주교의 공식 교리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실제 목회 현장에서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어떤 내적 갈등과 압력 가운데 있었는지, 자신의 행동을 얼마나 자유롭게 선택했는지를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겉으로는 회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인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심각성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일과 특정한 사람의 최종적인 구원을 판단하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죄를 죄라고 말해야 하지만,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까지 결정하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의지의 중요성을 이해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지옥의 본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545–550항에서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던져 넣지 않으시며, 악한 영이 자신의 악에 따라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HH.5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얼굴을 돌리시고 분노하여 지옥으로 내쫓으신다는 생각을 비판합니다. 주님은 선 자체이시며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시고, 누구도 자신에게서 내쫓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HH.547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악이 곧 그 사람 안의 지옥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자신이 사랑하고 의지한 악을 사후에도 사랑하며, 그 악을 자신의 생명처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와 일치하는 영적 공동체를 찾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지옥은 주님의 자비가 부족하여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악한 사랑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지옥의 존재나 영원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지옥을 매우 실제적인 영계의 상태로 설명하지만, 그 근원을 주님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악한 사랑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죄와 회개가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계된다는 천주교의 핵심적인 경고와 연결되면서도, 지옥이 형성되는 영적 원리를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개념은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입니다. 스베덴보리는 HH.477–480에서 인간의 사후 상태가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HH.480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을 유지하며, 그 사랑이 영계에서 자신의 삶과 행동을 지배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생전에 한 번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탐욕으로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후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피해를 바로잡으며 정직한 삶으로 돌아섰다면, 그의 상태를 그 한 번의 잘못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즐기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참된 상태가 단순한 행동의 목록이 아니라 그 행동을 낳는 사랑과 의지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어떤 죄가 중대한가를 분별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형성된 사랑과 그 사랑에 따른 실제적인 삶을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천주교의 대죄와 소죄의 구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모든 악이 영적으로 동일한 무게를 지닌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속이고 착취하는 악,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악은 매우 중대한 영적 문제입니다. 또한 사람이 어떤 악을 진리와 양심을 거슬러 의도적으로 선택할수록 그 악은 자신의 의지와 더욱 깊이 결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의 중대성과 의도적인 선택을 구별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죄와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천주교의 대죄와 소죄라는 법적·성사적 분류에 그대로 대응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결정적인 것은 특정한 죄목이 어떤 등급에 속하는가보다, 그 악이 인간의 사랑과 의지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그 악을 피하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는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에 들어갑니다. 반대로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고 즐기면서 끝까지 그것을 버리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그 악을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으로 굳혀 갑니다. 따라서 지옥에 관한 참된 경고는 특정한 죄의 등급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인간이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선택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해야 합니다.
이제 회개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회개를 단순히 죄를 입술로 고백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51항은 ‘통회’(痛悔, contrition)를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1452항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완전한 통회’(perfect contrition)가 대죄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여기에는 가능한 한 빨리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사망 직전에 고해성사를 받지 못하면 언제나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회개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회개의 필요성을 매우 강하게 강조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520–524항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악을 회개를 통하여 제거하지 않는 한 그 악 안에 머물며, 악 안에 계속 머무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528–531에서는 실제적인 회개가 자기 성찰과 죄의 인정, 주님께 드리는 기도, 그리고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고 악 가운데 머무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에게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이번 명제를 단순히 천주교만의 잘못된 지옥 교리라고 규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망 직전의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더욱 깊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오랜 세월 악을 사랑하며 살다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죄를 두려워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무조건 거짓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아십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워 죄를 후회하는 감정과 실제로 그 악을 미워하고 버리려는 사랑의 변화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거듭남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순간에 죄를 고백했다는 외적인 사실만으로 오랜 세월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이 실제로 달라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사망 직전에 충분한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의 변화를 보여 주지 못했다고 해서 아무런 참된 회개도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회개의 진정성을 가볍게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입니다. 천주교의 완전한 통회에 관한 가르침과 스베덴보리의 실제적인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은 모두 내적인 변화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변화가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상태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는 HH.491–520에서 인간이 죽은 후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를 거쳐 자신의 내적인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즉시 최종적인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영들의 세계에서 겉으로 드러났던 모습과 내적인 사랑이 점차 구별됩니다. 특히 HH.499–511에서 그는 사람이 사후에 자신의 속 사람의 상태로 들어가면서 지상에서 형성된 실제적인 사랑과 의지가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후에 누구나 자유롭게 새로운 삶을 선택하여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에 인간의 내적인 사랑이 드러나고 그에 따른 상태가 전개된다고 설명하며, HH.480에서는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영들의 세계는 생전에 형성된 사랑과 무관하게 구원의 기회를 새롭게 얻는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지상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을 받아들이고 살아왔는지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영원한 운명은 단순히 사망 순간의 외적인 종교적 상태나 마지막 고백의 유무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애를 통하여 형성된 내적인 사랑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이루신 거듭남의 상태가 중심이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목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이미 지옥행이 확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인간이 어떤 악을 사랑하고 고집하더라도 결국 모두 천국에 들어간다고 안심시키는 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여 그가 사랑하지도 않는 선을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따라서 지옥의 가능성은 실제적이며,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할 이유도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최종적인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가 어떤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지,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는지 완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지옥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을 조종하기보다, 악이 인간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가르치고 주님의 자비 안에서 실제적인 회개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처벌을 피하기 위한 외적인 종교 행위에 머물지 않고,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심판은 주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 지옥과 회개를 가르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명제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그 악은 그의 삶을 지배하며, 사후에는 그 사랑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회개하지 않은 악이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단순히 대죄에 해당하는 행동을 저질렀는가, 사망 전에 고해성사나 통회를 마쳤는가 하는 외적인 기준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대죄가 성립하려면 충분한 인식과 의도적인 동의가 필요하며, 개인의 최종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그의 지배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삶의 성격에서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지지 않으시며, 인간이 악을 사랑하는 만큼 스스로 지옥의 상태에 가까워집니다. 반대로 인간이 주님의 도움으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그는 천국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지옥을 피하는 가장 중요한 길은 자신의 죄가 어떤 등급에 해당하는지를 계산하거나 마지막 순간의 회개만을 기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자신의 사랑과 의지를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을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언젠가 죽기 직전에 해결해야 할 종교적 절차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가야 할 거듭남의 삶입니다. 결국 인간을 천국으로 이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을 지옥에 묶어 두는 것은 그가 끝까지 붙들고 버리기를 거부한 악한 사랑입니다. (SL.RC.008 해설)
요약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라는 명제는 그 핵심에서 반드시 오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악을 사랑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그 악 안에 머무른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TCR.520–524와 HH.545–550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천주교는 대죄가 성립하려면 중대한 사안과 충분한 인식, 의도적인 동의가 함께 필요하다고 가르치며, 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죽는 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로 이해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시며, 개인의 최종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맡겨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가르침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설명하는 핵심은 대죄와 소죄라는 분류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형성하고 사후에도 유지하는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HH.480은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설명하며, HH.547은 악을 사랑하는 인간이 스스로 그 악에 상응하는 지옥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528–531은 실제적인 회개가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회개하지 않은 악이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는 가르침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특정한 죄목의 분류나 사망 직전의 외적인 고백만으로 개인의 영원한 상태를 확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지옥을 주님께서 분노하여 인간에게 강제로 부과하시는 형벌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천주교의 공식 교리 역시 그러한 단순화를 경계하므로, 이러한 오류를 천주교 전체의 가르침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두 전통의 중요한 차이는 죄와 회개의 필요성보다 인간의 영원한 상태가 무엇에 의하여 형성되고 드러나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사후의 상태는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거듭남에 따라 전개되며, 어떤 사람의 최종 상태를 인간이 임의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악을 사랑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의 상태에 이른다’는 의미에서는 참되지만, 이를 단순한 죄목의 분류와 마지막 종교적 절차에 의하여 운명이 결정된다는 이해로 축소한다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지옥의 두려움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며 지금부터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EO.007.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SL.EO.007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 신적 참여와 주님의 인플럭스 해설동방정교회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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