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S.006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 - 신적 자비와 정의의 관계

 

해설

이슬람은 알라를 지극히 자비로우시면서도 완전하게 정의로우신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꾸란의 여러 장은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al-Rahman)과 ‘한없이 자애로우신 분’(al-Rahim)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하며, 이러한 표현은 이슬람 신앙에서 자비(慈悲, mercy)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보여 줍니다. 꾸란 7:156은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선언하고, 4:40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도 지극히 작은 불의조차 행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16:90은 하나님이 정의와 선행, 친족에 대한 베풂을 명령하시고 악과 불의를 금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하나님 이해를 엄격한 율법과 심판에만 기초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함께 인정하고, 인간도 그 자비와 정의를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불의나 악을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서로 다른 두 속성으로서 때로는 충돌하거나 서로를 제한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완전히 하나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에서 하나님의 자비는 단순히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며, 잘못을 깨닫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꾸란 6:12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스스로의 원칙으로 삼으셨다고 가르치며, 39:53은 자신의 영혼을 해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를 절망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꾸란은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특히 7:156은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선언하면서도, 그분이 원하시는 자에게 형벌을 내리신다고 말씀합니다. 이슬람 신학에서는 이러한 자비와 정의를 모두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으로 이해하며, 그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학파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부정하고 형벌만 강조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반대로 하나님의 형벌을 단지 인간의 오해에 불과한 것으로 설명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 두 요소는 실제로 이슬람의 계시와 신학 안에 함께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검토해야 할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비 자체이시라면, 그분이 악인에게 형벌을 내리신다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그 형벌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직접 나오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3–4항에서 신적 사랑(神的愛, Divine Love)과 신적 지혜(神的智慧, Divine Wisdom)가 주님에게서 하나로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651항에서는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고 자비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시므로, 어떤 사람에게도 악을 행하실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는 서로 대립하는 두 성향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바라며, 주님의 지혜는 그 사랑이 신적 질서(神的秩序, Divine Order)에 따라 실현되도록 역사합니다. 사랑은 진리를 떠나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으며, 진리 역시 사랑과 분리되어 냉혹한 심판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적 정의(Divine Justice)는 하나님의 자비를 제한하거나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원리가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의 완전한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때때로 자비를 베풀려면 정의를 양보해야 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면 자비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이러한 모순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모든 역사는 사랑에서 비롯되며, 지혜를 통하여 선한 목적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며, 재앙을 내리시는 것으로 표현된 구절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335항에서 주님이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시며 지옥으로 심판하여 보내지 않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자비 자체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선을 거부하고 악을 사랑할 때 스스로 천국과 주님에게서 멀어지므로, 악한 사람의 상태가 정죄와 형벌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3:17은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세상을 심판하여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데 있다고 말씀하며, 이어지는 19절은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이 심판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이 변하여 진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거부함으로써 그것을 고통스럽게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만 머물러 이해하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속뜻(internal sense)을 통하여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간의 영적 상태를 구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악을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모든 행위를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악은 실제로 악이며,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고 선택한 악에 따른 결과를 경험합니다. 영계에서도 악령들이 다른 존재를 해치려 할 때 그들의 행동에는 제약이 가해지며,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형벌과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벌은 주님이 분노를 해소하거나 보복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더 큰 해악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영적 질서를 보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악을 허용하신다고 해서 그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허용(許容, permission)과 의지(意志, will)는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악이 무제한으로 퍼지지 않도록 인도하시는 것이 신적 섭리의 중요한 역사입니다. 따라서 참된 정의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고, 악인을 향한 증오와 보복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선을 보호하고 악을 제한하며, 가능한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 질서 있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이슬람의 자비와 정의에 관한 가르침에 담긴 진리와 신학적 차이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어떤 불의도 행하지 않으신다는 고백은 참됩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며, 악을 피하고 정의와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를 인간의 죄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이나 형벌 의지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의 신적 본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이슬람 신학이 하나님의 정의를 인간적인 분노와 보복으로 설명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슬람에도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다는 가르침과 심판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다만 꾸란에는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시는 주체로 표현된 구절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러한 표현을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인간의 악한 상태라는 관점에서 다시 이해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형벌의 강도나 범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어떤 분이신가 하는 신관(神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기독교인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시므로 죄인에게 반드시 형벌을 내리셔야 한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성부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진노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진노를 대신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서로 충돌하는 속성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인간을 사랑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 역시 바로 그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구속(救贖, redemption)은 본래 자비롭지 않으셨던 하나님을 자비롭게 변화시킨 사건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악과 지옥의 세력을 이기시고 인간을 구원하실 길을 여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적 정의가 신적 사랑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죄인을 미워하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서 선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주님과 결합하여 천국의 생명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결국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라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도 정의와 선행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는 서로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두 속성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 안에서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후자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을 향한 사랑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주님의 정의는 그 사랑이 신적 질서에 따라 역사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대할 때 정의라는 이름으로 보복하려 하지는 않습니까? 또 자비라는 이름으로 악을 묵인하거나, 누군가를 보호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습니까? 참된 자비는 악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참된 정의는 사랑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신가, 정의로운 분이신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자비와 정의가 하나인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바르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 사랑을 이웃에게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IS.006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은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어떤 불의도 행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참된 진리입니다. 인간에게 정의와 자비를 함께 실천하도록 요구하는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인간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이나 형벌 의지로 이해하는 것은 주님의 신적 본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와 자비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시며, 인간이 경험하는 정죄와 형벌은 악을 사랑하고 선을 거부하는 영적 상태 및 질서의 보존과 관련됩니다. 신적 자비와 정의는 서로 대립하는 속성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 안에서 완전히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자비와 정의에 관한 고백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며, 그 관계와 신적 형벌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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