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렙의 반석이신 주님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17:5, 6) And Jehovah said unto Moses, Pass on before the people, and take with thee of the elders of Israel; and thy rod, wherewith thou smotest the river, take in thine hand, and go. Behold, I stand before thee there upon the rock in Horeb; and thou shalt smite the rock, and there shall come waters out of it, that the people may drink. And Moses did so before the eyes of the elders of Israel. (Exdo. 17:5, 6)

 

 

그동안 여러 해 제 설교는 저의 오리지날 설교가 아니고, 지금은 은퇴하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를 원본으로 하여 우리 교회에 맞게 좀 다듬는 설교였습니다. 물론 사전 허락하에 말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제 역량, 곧 말씀을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으로 푸는 역량이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저는 여전하지만, 그러나 몇 주 전부터 이제는 네 힘으로 하라시는 주님의 어떤 퍼셉션이 있으셔요... 그래서 순종, 조금 준비와 연습을 거쳐 오늘부터 이렇게 저의 첫 속뜻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분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등 안정화 기간이 예상됩니다. 정성을 다하겠사오니 많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저의 다른 모든 설교도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계시록 본문은 모두 스베덴보리의 속뜻 주석인 Arcana CoelestiaApocalypse Explained’(혹은Apocalypse Revealed’)를 가지고 준비합니다. 즉 이 주석들의 설명을 좀 더 쉽게 풀어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2018 10월 이후 설교들부터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의 오리지날 설교는 아니었어도 말이지요.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은 말씀을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읽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내적(內的, internal) 존재여서 모든 걸 내적으로 보는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 사람을 볼 때 그들 눈에는 사람의 육은 안 보이고 영, 곧 사람의 속만 보이며, 사람의 어떤 행위도 그 겉은 안 보이고 대신 그 속, 그 동기와 의도만 보이는 식입니다.

 

말씀을 속뜻으로 읽고자 하는 이유와 유익은 참 많고, 그리고 큽니다. 가장 결정적인 건, 사후 우리가 가게 될 나라가 그런 나라, 그러니까 겉이 아닌 속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하자는 것이지요. 우리가 다른 나라 이민을 고려할 때, 미리 그 나라에 대해 알아보고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을 속뜻으로 읽게 되면 시작되는 가장 큰 변화는 그동안 글자로만 있던 말씀이 살아있는 능력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미지의 세계요, 그저 막연했던, 그저 좋은 내용들이기만 했던 말씀의 글자들이 말입니다. 이런 경험은 정말 매력적이어서 마치 ‘극히 값진 진주(13:46)를 발견한 사람처럼,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13:44)를 발견한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는데요, 말씀의 살아있는 능력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비유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그러나 아무나 지금 내가 하는 이 풀이가 속뜻이다 하면 곤란하므로, 주님은 280년 전인 1745년 어느 날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나이 57세 때 그를 찾아오신 후, 1772년 그를 데려가실 때까지 27년간 영계 구석구석, 그리고 수많은 천사와 영들을 만나게 하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라틴어로 기록하게 하셨는데요,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Arcana Coelestia’(1749-1756, ‘천국의 비밀들’)입니다. 이는 창세기, 출애굽기를 속뜻으로 풀이한 주석인데요, 총 10,837개의 글로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이 주석을 집필할 때 주님이 곁에서 말씀하시고, 자기는 그걸 받아적기만 했다고, 자기는 그때 그 어떠한 세상 도서도 참고하지 않았고, 자기 책상 위엔 오직 속뜻 성경 한 권과 속뜻 사전 한 권, 그리고 펜과 종이, 잉크만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황이 곧 이 주석의 영적 권위를 드러내는데요, 이는 곧 신구약 말씀들이 기록되던 정황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현 성경 66권 중 ‘말씀’은 구약 29권, 신약 5권, 총 34권뿐입니다. 속뜻이 들어있는 성경이라야 ‘말씀’이기 때문인데요, 속뜻은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만 들어있습니다.

 

끝으로, 저는 이 주석을 온전히, 그리고 쉽게 풀어 전하는 게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여기에 무슨 개인적 사사로움을 보태어 마치 저의 무슨 그럴듯한 새로운 저작인양하는 행태는 추호도 사양할 작정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종이 한 장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제가 가장 힘쓰는 건 끊임없는 하늘의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푸는 것도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작합니다.

 

지난 본문 끝 절인 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아주 다급한 상황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인 5절로 6절입니다. 먼저 5절,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여기 세 가지를 말씀하시는데요, 첫째, ‘백성 앞을 지나서’, 둘째,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그리고 끝으로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입니다. 이 말씀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백성 앞을 지나서(Pass on before the people)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모세가 그들을 이끌고 가르쳐야 한다(he should lead and teach them)는 것입니다. ‘모세(Moses)의 속뜻은 ‘신성, 곧 여호와로 말미암는 진리(truth from the Divine)이며, 이스라엘 자손을 표상하고 있는 ‘백성’은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church)을 의미하고, ‘앞을 지나서(pass on before)는 이끄는 것, 곧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영적으로 인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인데, 지금 이 백성, 곧 영적 교회에 속한 이들 이스라엘은 물, 곧 진리가 없어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며, 그래서 신성한 진리를 표상하는 모세가 이들을 이끌고 이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백성 앞을 지나서’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험을 당하여 주님께 도우심(aid,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을 구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주님의 진리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진리가 아니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즉각적으로 행동합니다.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이 스마트폰 하나면 다 되니까요. 그래서 무슨 망설임도 없습니다. 머리로는 혹 아, 먼저 주님께 여쭈어야 하는데, 먼저 기도하고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데 할지 몰라도 그러나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저부터도 우선 그럴 때가 많으니까요...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요만큼의 시간도 우리는 주님께 드리지 않습니다.

 

다음은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and take with thee of the elders of Israel)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으뜸되는 진리들, 주된 진리들(from primary truths)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의 속뜻은, ‘선에 일치하고 진리와 일치하는, 지혜와 지성에 속한 으뜸되는 것들(the primary things of wisdom and intelligence which are in agreement with good and with truth)이며, 이는 곧 ‘으뜸되는 진리들, 주된 진리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백성’, 곧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라 하였습니다. 영적 교회는 그 메인이 진리입니다. 천적 교회(the celestial church)는 선이고요. 영적 교회는 신앙이 주된 교회이고, 천적 교회는 사랑이 주된 교회라고 해도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도 신앙과 진리, 말씀을 우선하는 교회는 좀 날카롭고 예민하며 판단하지만, 사랑과 선,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를 우선하는 교회는 한결 따뜻하고, 넉넉하여 품어줍니다. 어느 게 맞다, 틀리다가 아니고, 두 교회의 특성이 그렇다는 것이며, 이는 곧 두 천국의 특성, 두 천국 천사들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으뜸되는 진리의 예를 하나 살피고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으뜸되는 진리의 가장 대표적인 말씀은 바로 아래 주님의 말씀이 아닐까 하는데요,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

 

우리는 어떤 크고 작은 선을 행할 때 대체로 어떤 진리를 가지고 합니다. 가령 교회 봉사를 나가는 경우인데요, 교회 봉사, 즉 어떤 섬김이든 그 자체로는 참 좋은 일이나 그 동기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좀 쉬고픈데 맡은 직급이 있어 억지로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어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 곧 그 동기를 볼 수 없으므로 이 경우, 우리는 그 겉만 보고 저분은 참 귀하시다 합니다. 또한 다른 경우는, 이 경우 역시 좀 쉬고 싶은 건 같지만, 그러나 남들 시선을 의식해서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이고, 후자는 주님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개인적인 사사로움은 내려놓고 오직 주님을 사랑해서 교회와 이웃, 나라와 민족을 섬기는 것, 일상생활 속 크고 작은 모든 상황, 즉 시험들 가운데서 이렇게 하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는 사람입니다. 즉 시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이 가장 큰 진리, 가장 으뜸되는 귀한 계명인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기억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and thy rod, wherewith thou smotest the river, take in thine hand, and go)입니다. 먼저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인데요, 이 표현은 ‘거짓들을 소멸시켜 버린 신성한 능력, 힘(the Divine power by which falsities had been dissipated)을 말합니다. ‘지팡이(a rod)는 힘, 곧 신성한 능력을 가리키는데, 특히 이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로서, 모세는 신성한 진리이신 주님(he Lord as to Divine truth)을 표상하기 때문이며, 또 한 가지, ‘’, 여기 애굽의 강인 나일강은 ‘거짓(falsity)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라는 표현으로 ‘거짓의 소멸(the dissipation of falsity)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신성한 능력으로 거짓들은 소멸되기 때문이지요. 이 진리는 ‘호렙산 반석에서 나오는 물(the water out of the rock in Horeb)을 말합니다. 다음은 ‘손에 잡고 가라(take in thine hand, and go)인데요, 이 표현은 ‘그걸 가지고 권한,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어떤 무장(that equipped therewith he should perform the mandate)을 말합니다.

 

진리의 부족과 결핍으로 야기되는 시험 앞에서 우리는 오직 지난날 우리에게 행하신 주님의 순전하신 진리의 힘과 능력을 기억, 거기에만 의지해야 합니다. 좀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이번 대선 결과와, 그 전에도 여러 번 부정선거로 인한, 진실이 거짓에 먹히는, 이 되풀이되는 현실은 어쩌면 우리 민족, 특히 우리 신앙인들과 그 가운데 특별히 신앙을 가진 지도자들이 ‘오직 지난날 우리에게 행하신 주님의 순전하신 진리의 힘과 능력을 기억, 거기에만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주께 속한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 세월을 허락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저의 지난날 중에서 지금도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 있다면 단연 대학 졸업 후 감히 삼성 그룹공채에 지원, 합격한 일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졸업 평점이 아주 낮아 삼성에 응시원서를 낸다는 건 언감생심, 그래서 처음엔 여러 중소기업 위주로 원서를 냈으나 아무 데서도 연락오는 데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1988년 당시, 전자공학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골방에 들어가 한 달을 주님께 부르짖었는데요, 제 동기들은 이미 엘지, 현대, 대우 등 대기업 여기저기 들어가 신입사원 입문 교육들을 받고 있을 때였지요. 비록 그땐 지금처럼 말씀의 속뜻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오직 네비게이토식 성경 암송과 제자 훈련, 제자 양육이 신앙의 전부인 줄 알던 시절이었지만, 그럼에도 한 달을 골방에서 보냈더니 뭔가 걸러지고 깨끗해지는 느낌과 함께 주님께 백지수표를 내어드릴 수 있는 심정이 되더군요. 그날 오전 기도 후 오늘 조간 1면 하단을 보라시는 분명한 음성인지 생각인지 하여튼,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게 바로 퍼셉션(perception)인데, 그래서 현관에 놓인 중앙일보를 펼쳐 그 1면 하단을 보니 ‘삼성그룹공채 29기 2, 3차 신입사원 모집’ 공고가 있더군요. 그때 솔직히 숨이 좀 막혔으나 눈 딱 감고 순종, 용기를 내어 응시했던 것입니다. 특히 1차 서류전형이라 졸업 평점이 아주 낮은 저로서는 보나마나였거든요. 그러나 적성 검사를 마치고, 사장단 면접과 실제 면접관들 대상 다면 면접 때, 그때그때 대답할 말을 주시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결국 ‘합격’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201이었다는군요. 그날의 감동, 감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 일은 지금 모세와 이스라엘의 르비딤 시험 같은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후 제 삶의 여러 고비마다 주님이 지난날 내 앞이 캄캄했을 때 내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기억, 힘을 낼 수 있었던 정말 고맙고 감사한 개인적 사례여서 특별히 나눴습니다. 지금 모세에게도 주님은 출애굽 전 그와 함께하셨던 열 가지 재앙 중 물을 피로 변케 하셨던 때를 기억하게 하시고 용기를 내게 하신 것입니다.

 

6절입니다.

 

6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먼저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Behold I stand before thee there upon the rock in Horeb)입니다. 이 표현의 속뜻은, ‘신앙의 진리들에 응답하시는 주님(the Lord in respect to the truths of faith)입니다. 여기 ‘반석(a rock)의 의미가 ‘신앙, 여기서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 혹은 신앙에 응답하시는 주님(faith, here faith from the Lord, or the Lord in respect to faith)이기 때문인데, 여호와, 즉 주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그 반석 위에 서리니’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호렙(Horeb)은 ‘신성한 법(the Divine Law)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말씀들로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의 속뜻은 ‘그분의 법, 곧 말씀으로 말미암는 신앙의 진리들에 응답하시는 주님(the Lord in respect to the truths of faith which are from His law, or the Word)입니다.

 

여기서 잠깐, ‘반석’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요, 잠깐 저 유명한 ‘베드로와 천국 열쇠’ 본문을 좀 보고 가겠습니다.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6:18, 19)

 

로마 카톨릭은 이 본문을 글자 그대로 해석,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대로 천국 열쇠를 주셨고, 그리고 자기들은 베드로의 후계자들이니 당연히 자기들한테 이 천국 열쇠의 권한, 곧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신 권한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황한테 이런 권한,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할 경우 마주하게 되는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가 바로 이 경우인데요, 사실 이 오류는 교회사, 세계사 전체에 절대 가볍지 않은 큰 상흔을 남겼기에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 한 인간 베드로에게 저런 엄청난 권세를 주신 적이 없으신데요, 이는 여기서 말씀하신 ‘반석’의 의미, 곧 그 속뜻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반석(rock)의 의미는 ‘신앙에 관한 주님, 그리고 또한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the Lord as to faith, and also the faith which is from the Lord)입니다. 즉 신앙을 말할 땐 주님을, 그리고 사람과 관련해서는 신앙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주님이 반석이시며, 우리가 가진 이 신앙은 우리 것, 곧 우리가 잘나서 우리한테서 나온 게 아니라 주님의 것, 곧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즉 우리의 이 신앙 역시 주님이 주신 것이며, 주님이 주신 신앙으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일체 무슨 사사로움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대단히 오해한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성한 진리조차 거기에 인간의 무슨 사사로움이 섞이면 이토록 타락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주님의 순결하신 진리에 우리의 무얼 섞으려는, 적당히 섞어 자신의 무슨 목적을 관철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사후 무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의 의미는 우리 신앙생활의 반석을 주님께 둘 때, 이스라엘이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신앙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두리번거리거나 주님이 주신 이 신앙의 진리들에다가 잔머리를 굴리며 세상에서 배운 뭘 섞는 짓을 하면 안 되겠습니다.

 

다음은 ‘너는 그 반석을 치라(and thou shalt smite the rock)입니다. 이는 ‘to entreat urgently from a humble heart’, 곧 ‘절박한 심정으로, 그러나 겸손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석을 치는 것입니다.

 

이번 이 르비딤 시험을 오늘 이 출애굽기 본문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로 요약하지만, 아래 민수기 본문은 같은 사건을 좀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오늘 이 출애굽기 본문에서는 주님은 분명히 ‘겸손한 마음(a humble heart)을 명령하셨음에도 아래 민수기 본문을 보면, 실제로 모세와 아론은 그때 ‘완악한 마음(a hard heart)이었다는 것입니다.

 

10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20:10-12)

 

참고로, 이때 모세와 아론은 ‘신성한 진리에 관한 주님(he Lord as to Divine truth)을 표상하는 게 아니라 ‘저들의 지도자들한테서 볼 수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지나치게 종교적인 모습(the religiosity of that nation whose leaders and heads they were)을 의미합니다. 이런 종교성은 필연적으로 완악함을 나타내게 되지요.

 

한 가지, 위 본문은 얼핏 여호와께서 저들을 저주하시는 것처럼 읽을 수도 있으나, 그러나 절대 그런 게 아니고, 오히려 주님은 정성을 다해 인격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expostulated) 것입니다. 차근차근 부드럽게 넌지시(was intimated to him) 말이지요. 주님은 절대로 누구를 저주하시거나 누구에게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아멘!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and there shall come waters out of it)와 ‘백성이 마시리라(that the people may drink)의 속뜻은 각각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진리들(the truths of faith are from Him)과 ‘그들을 기운 차리게 하고, 그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는(which shall refresh them and give them spiritual life)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and Moses did so before the eyes of the elders of Israel)의 속뜻은, ‘으뜸되는 진리들로 인한 결과(the effect by means of primary truths)입니다.

 

이들 풀이는 지금까지 다룬 내용들로 자명, 생략합니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면, 우리가 말하는 소위 ‘영적 깨달음’이나 ‘영안이 열림’, 혹은 ‘내면이 밝아지는 것(enlightenment)은 모두 이들로 인한 효과라는 것입니다. 그들, 곧 으뜸되는 진리들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리들, 이걸 ‘세컨더리(secondary)라고 하는데, 이것들이 이제 밝히 깨달아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 건 알겠는데 실제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딪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는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지를 그동안은 잘 몰랐다면,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우리 신앙의 반석으로 믿고, 모든 것을 반석 되신 주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면, 즉 현재 천사들이 바로 그런 존재들인데, 그들처럼 우리도 일상생활 가운데 아주 해처럼 빛나는 명료함과 능력, 그리고 지혜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입니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17:5, 6)

 

지금까지 시험을 만난 이스라엘과 모세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을 그 속뜻으로 살폈습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을 거듭 되새김질하셔서 그럴수록 속 심령이 뜨거워지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2025-06-1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15(D1)-주일예배(2602, 출17,5, 6, AC.8576-8585), '호렙의 반석이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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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라는 자리는...

 

17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18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4:17, 18)

 

이번 대선 결과로 마음이 너무 힘들어 망연자실 중에도 오로지 말씀에 착념코자 습관을 좇아 오늘도 말씀을 따라가던 중 위 말씀에 시선을 붙들어 매시네요!

 

그러니까 저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기어코 따라 들어간 걸로 이해가 되는데요... 오, 주님!

 

저 자리는,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인도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사는 자리이지만, 자기를 사랑하여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리는 사람한테는 죽는 자리이며, 천국을 향한 거듭남의 길을 꾸역꾸역 가는 사람한테는 사는 자리이지만,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저 자리를 탐하는 사람,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여 태어난 상태 그대로의 삶을 살면서 저 자리를 탐하는 사람한테는 죽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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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한 오멜을 여호와 앞과 증거판 앞에 간수하다 (16:30-36)

 

 

30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출16:30-36) And the people rested on the seventh day. And the house of Israel called the name of it Manna; and it was like coriander seed, white; and the taste of it was like that of a cake in honey. And Moses said, This is the word which Jehovah hath commanded, Fill an omer with it to be kept for your generations, to the end that they may see the bread wherewith I fed you in the wilderness, when I brought you forth from the land of Egypt. And Moses said unto Aaron, Take an urn, and put the omer full of manna therein, and lay it up before Jehovah, to be kept for your generations. As Jehovah commanded Moses, and Aaron laid it up before the Testimony to be kept. And the sons of Israel did eat the manna forty years, until they came to a land inhabited; they did eat the manna until they came unto the border of the land of Canaan. And an omer is the tenth part of an ephah (Exod. 16:30-36).

 

※ 이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스라엘 족속’,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자손’ 등을 모두 ‘이스라엘’ 하나로 통칭하겠습니다.

 

※ 그리고 ‘주님께서’라는 표현은 ‘주님이’, ‘주님은’ 등으로 하겠습니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30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안식일은 선과 진리가 결합해 하나 되는 걸 의미하고, 그러므로 거듭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선과 진리가 결합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진리는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행하는 것이 선, 다른 말로는 선은 실행된 진리라는 말입니다. 진리가 실천될 때, 그것은 곧 선이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주님은 진리는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하셨지요. 그런데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우리 혼자 힘으로는 안 되고, 주님이 절대적으로 도와주셔야 하는데요, 그동안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만나’(Manna)라고 하는 선을 보내주셔서 그걸 가지고 우리의 의지를 끌어 올리셔요. 그러니까 만나라는 선을 받기 전의 우리 의지는 마치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 짐승과 같아서 계속 아래만, 즉 지옥만 바라보는 습성이 있었는데,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이 만나라는 선을 받고는 비로소 우리의 의지가 주님과 천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그때 의지와 생각이 하나 되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만나를 받아먹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만나라고 하는 선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악을 멀리할 수 있게 되고,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만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인데요, 오늘 말씀 31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비로소 만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이스라엘은 만나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는데요, 그처럼 주님으로부터 만나라고 하는 선이 처음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올 때, 우리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 만나가 처음 흘러들어올 때, 그것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이 진리의 선이라고 하는 만나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선하고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는 것은 진리 모양을 한 선이라는 뜻인데요, 그동안 우리가 경험하던 진리가 판단하고 분별하는 냉정한 진리였다면, 이 진리는 따뜻하고 포용하는 그런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일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평화이며 기쁨입니다.

 

※ 예를 들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는’(창2:6) 상태,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시는’(창2:3) 상태, 갓난아이의 순진무구한 상태, 깜깜한 밤을 보내고 고요한 아침이 시작되는 상태, 추운 겨울을 지나 파릇파릇 봄이 시작되는 상태 등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그 이름을 만나라고 했다는 건 그들이 이제 만나의 본질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것에 대한 본질을 이해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 안에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만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건 그들이 만나라는 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며, 그들이 진리를 따라 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라든가 진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의 안에 빛,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 빛은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 빛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고, 말씀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진리와 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하지요.

 

※ 어떤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밑에서 올려다보는 걸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위에서 내려다보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건 세상 진리로 주님의 진리를 판단하려는 거고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주님의 진리로 세상 진리를 살피는 겁니다. 이것이 퍼셉션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잘못된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잘못된 종교나 거짓을 가르치는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자기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만나는 주님이 진실한 사람들에게만 열어주시는 참된 진리이고 선입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본문에서는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씨앗(seed) 또는 흰 것(white)은 진리를 말하는데요,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주님이 씨앗을 진리에 비유하신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깟씨 같이 희고’는 만나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특성을,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는 선의 특성을 말합니다. 과자(cake)는 선을 뜻하는데요, 이것은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26:26)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떡이나 빵, 과자는 모두 영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꿀 섞은 과자’는 선으로부터 나오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뜻합니다. 선 안에는 이렇게 그 자체로 내재 되어 있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못 느낄 뿐이죠. 따라서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만나를 먼저 진리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느낀 그 진리는 이전에 그들이 알고 있었던 교리 지식과는 전혀 다른 진리였습니다. 그 속에는 선이 들어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꿀 같은 기쁨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이제 만나가 주는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32절에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십니다.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여호와께서는 만나에 대해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아시는 것처럼 광야는 시험을 뜻하는데요, 따라서 이 말씀은 거듭나기 위해 내적 싸움을 하는 신앙인들, 곧 영적 전쟁을 하는 신앙인들에게는 만나가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만나에서 나오는 능력, 곧 만나가 주는 기쁨이 없으면 진리를 삶으로, 생활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만나 없는 삶은 마치 죽도록 일을 하는데도 앞이 안 보이는 삶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만나가 꼭 필요합니다.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여기서 ‘항아리’(urn)는 만나라는 선을 담는 그릇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진리를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곧 만나 담는 항아리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들어야 하고요, 시간을 내 말씀을 읽고, 또 교리 공부도 해야 합니다. 그걸 아는 만큼, 그리고 그 지식을 삶으로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만큼 주님은 우리가 가진 진리 속에 만나를 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일상 생활 가운데 살아내는 만큼 만나 항아리가 점점 커진다는 겁니다. 항아리로 표상되는 그 진리 안에 만나라는 선이 담길 때, 비로소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겁니다.

 

오멜’(omer)은 곡식 같은 걸 계량하는 단위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 말씀의 마지막 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그러니까 곡식을 계량하는 단위로 오멜과 ‘에바’(ephah)가 있는데 오멜은 에바의 십 분의 일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ten, 10)이라는 수가 들어가면 ‘충분하다’라는 속뜻을 가집니다. 그 겉 표현이 크든 작든 상관없는데요, 그래서 ‘십 분의 일’(1/10, the tenth part of)도 같은 의미입니다. ‘십 분의 일’ 역시 그 속뜻으로는 ‘충분하다’라는 뜻입니다. 요약, 정리하면, 항아리에 만나를 한 오멜 담는다는 건 주님이 각 사람에게 선을 주실 때 각자의 그릇에 따라 충분히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그릇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말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각자의 그릇에 넘치도록 충분하게 주시는 이유는, 그래야 시험을 이길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는 능력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100도가 되지 않으면, 물이 끓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 이 숫자 ‘10’의 속뜻을 가지고 ‘십일조’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의 십 분의 일만 가지고도 주님은 우리가 사실은 전부를 주님께 드린 것으로 여기시는데요, 이를 알면, 우리가 우리 소득의 십 분의 일, 곧 십일조를 주께 드릴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드려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은 각자의 그릇 크기만큼 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길 수 있는 만큼만 주님은 시험을 허락하셔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충분히 받아야 하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만나를 항아리에 한 오멜을 담으라 하셔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담는다기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역할이 있다는 말씀인데요, 그 역할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먼저 진리를 열심히 배워야 하고요, 그리고 배운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으라’시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만나를 담아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진리나 선은 바로 주님 자신이셔요. 그렇기 때문에 만나라는 선이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올 때, 동시에 주님도 우리 안으로 임하신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간수하라’는 말씀은 기억하라는 뜻이고, ‘너희 대대로’라는 말은, 만나는 영적 교회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 사람들을 뜻하는데요, 이 영적 교회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천적 교회’(the celestial church),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여기서 ‘영적 교회’란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곧 진리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진리가 먼저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만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삶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선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듭날 때까지는 만나가 필요하며, 거듭난 다음에는 만나를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는 이 말씀은 그것이 영적 교회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처방이라는 걸 꼭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34절에서 아론 역시 이스라엘에게 또 비슷한 말씀을 전합니다.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이 말씀은 33절 말씀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33절에서는 만나를 담아 여호와 앞에 간수하라 하고, 34절에서는 증거판 앞에 간수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증거판’(the two tables of the testimony)입니다. 증거판은 여호와, 곧 주님이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하실 때 십계명을 친히 기록하신 돌판(the tables of stone)입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31:18)

 

증거판은 하나님의 법,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증거판이 그렇게 주님을 나타내고 신성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성막 가장 깊은 곳에 증거판을 담은 괘를 안치하지 않았을 것이고, 모세는 증거판 위에 있는 속죄소의 그룹 사이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증거판은 법으로서, 또는 진리로서 주님을 나타냅니다. 반면, 만나를 여호와 앞에 간수하라 할 때 여호와는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이스라엘은 사람이 사는 땅, 즉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만나를 먹었다고 합니다.

 

10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수5:10-12)

 

여기서 사람이 사는 땅, 가나안 땅은 바로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는 매일 같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아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천국을 사람이 사는 땅이라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천국은 선이 충만한 곳이며,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고 선이 사람을 살립니다. 물론 진리와 선이 함께 사람을 살리죠. 그런데 먼저는 선이라는 것입니다. 선으로부터 모든 능력이 나옵니다. 마치 태양의 뜨거운 열기가 있어야 모든 생물이 싹을 내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사람이 사는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천국에 들어가기까지의 삶과 천국에 들어간 이후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표현하는데요, 즉 천국에 들어가기 전의 삶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랑하는 사십(40) 년으로, 그리고 한 주간의 엿새(6)로 표현하고,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 이후의 삶은 가나안 땅에서의 삶으로, 그리고 엿새가 지난 후 일곱째(7) 날, 곧 안식일로 표현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의 인도를 받아 선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거듭난 다음에는 반대로 선의 인도를 받습니다. 즉 선의 인도를 받아 진리를 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나는 거듭나기 전까지만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보낸 40년 동안,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만나를 먹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진정한 진리가 아닐 때가 참 많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도 얼마든지 진실인 것처럼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이 믿는 진리를 입증할 수 있었고, 그렇게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진리로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볼 때 진리를 진리로 알아본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주님한테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새 교회 분이라고 해서, 새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건 아닙니다. 이건 좀 놀라운, 좀 불편한 진실입니다. 진리를 적용할 때는 냉정하면 안 되지만, 그러나 엄격하게는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변에 보면 그것이 엄격하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기술하신 창, 출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21번 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교회의 교리에서 배운 진리에 따라 행하려고 할 때, 그 진리는 그에게 선이 되며 그는 그것을 진정한 진리로 믿게 된다... (이순철 역, 출16:32, ‘깟씨 같이 희고’) The good of truth which is with 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kingdom is implanted in the intellectual part, for there is formed by the Lord in this part a new will, which is that the man wills to do according to the truth that he has drawn from the teaching of his church; and when he wills and does this truth, it becomes with him good, and is called “spiritual good,” and also “the good of truth.” That this is really truth, he indeed believes, because he has faith from the teaching; (AC.8521:2, Exod. 16:32, ‘And it was like coriander seed, white’)

 

그러므로 먼저 진리를 따라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진리를 행해야 합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내적인 것들을 외적인 것 안에 담는 일입니다. 외적인 행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필요 없는 게 절대 아닙니다. 외적인 것이 없는 내적인 것은 기초 없는 집과 같아서 그냥 공중에 흩어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모든 내적인 것이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곳이 바로 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행위가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분별하는 눈이 열립니다. 그러기 전에는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진리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진리는 좋아하는 물건을 모아 두듯 취미 삼아 무슨 소장품 모아 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살아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진리를 사랑할 때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을 수 있고, 또 진리를 알아보는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지성 안에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시는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려는 마음조차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 생각을 우리 조상들부터 했다는 것 자체가 주님이 인간의 지성 안에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우리 안에 새 의지를 심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리 진리를 배워도 그냥 쌓아두기만 하다가 끝날 겁니다.

 

새로운 의지를 따라 진리를 행하려 할 때, 반드시 시험이 찾아오는데 그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바로 만나라고 하는 선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한 싸움을 하는 우리들은 주님께 만나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시험을 이기기에 충분한 만나를 준비해 놓고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만나를 한 오멜 담아 여호와 앞에 두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꼭 머릿속에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십 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었듯, 우리도 매일 같이 만나를 먹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우님들이 이 만나의 맛이 어떤지, 그리고 어느 때 주님으로부터 이 만나가 내 안에 흘러 들어오는지 하는 그 느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교우님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눅5:37-38)

 

아멘

 

원본

2016-06-19(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6-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01(D1)-주일예배(2600, 출16,30-36), '만나 한 오멜을 여호와 앞과 증거판 앞에 간수하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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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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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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