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2:11, 12)

 

AC.114

 

말씀에서 신앙의 진리는 귀한 보석들(stones)로 의미 및 표상됩니다. 예를 들면, 판결 흉패(the breastplate of judgment)에 있던 보석들, 그리고 아론의 에봇(ephod) 어깨에 있던 보석들이 그러합니다. 흉패에서는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gold, blue, bright crimson, scarlet double-dyed, and fine-twined linen)이 사랑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였고, 귀한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온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에봇 어깨에 있던 두 개의 기념 보석(stones of memorial)도 그러했는데, 그것들은 금 테에 물린 호마노들(onyx stones)이었습니다 (출28:9–22). The truth of faith is signified and represented in the Word by precious “stones,” as by those in the breastplate of judgment, and on the shoulders of Aaron’s ephod. In the breastplate, “gold, blue, bright crimson, scarlet double-dyed, and fine-twined linen,” represented such things as are of love, and the precious “stones” such as are of faith from love; as did likewise the two “stones of memorial” on the shoulders of the ephod, which were onyx stones, set in ouches of gold (Exod. 28:9–22).

 

9호마노 두 개를 가져다가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10그들의 나이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새기라 11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 테에 물리고 12그 두 보석을 에봇의 두 어깨받이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워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13너는 금으로 테를 만들고 14순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고 그 땋은 사슬을 그 테에 달지니라 15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16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17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18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19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20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21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22순금으로 노끈처럼 땋은 사슬을 흉패 위에 붙이고 (28:9-22)

 

이와 같은 보석의 의미는 에스겔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늘의 재물, 곧 지혜와 지성을 소유한 사람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This signification of precious stones is also plain from Ezekiel, where, speaking of a man possessed of heavenly riches, which are wisdom and intelligence, it is said:

 

12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15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28:12-13, 15) Full of wisdom, and perfect in beauty, thou hast been in Eden, the garden of God; every precious stone was thy covering, the ruby, the topaz, the diamond, the beryl, the onyx, and the jasper; the sapphire, the chrysoprase, the emerald, and gold; the workmanship of thy tabrets and of thy pipes was in thee; in the day that thou wast created they were prepared; thou wast perfect in thy ways from the day that thou wast created (Ezek. 28:12–13, 15),

 

이 말씀들이 실제 보석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이는 신앙에 속한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참으로 각각의 보석은 신앙의 어떤 본질적인 요소 하나하나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which words it must be evident to everyone do not signify stones, but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yea, each stone represented some essential of faith.

 

 

해설

 

이 글은 AC.113에서 ‘금 = 사랑의 선’이 확정된 뒤, 그와 짝을 이루는 ‘보석 = 신앙의 진리’라는 질서를 분명히 세워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선과 진리는 늘 함께 등장하지만, 결코 섞이지 않습니다. 금은 선이고, 보석은 진리입니다. 선은 생명이고, 진리는 그 생명을 형상화하고, 분별 가능하게 하는 빛입니다.

 

먼저 판결 흉패가 언급됩니다. 흉패는 대제사장이 가슴, 곧 ‘심장’ 위에 착용하던 것으로, 주님 앞에서의 판단과 분별을 표상합니다. 여기서 흉패의 바탕 재료인 금과 여러 색의 실은 사랑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고, 그 위에 박힌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이는 진리가 사랑 위에 놓여 있고, 사랑을 떠난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는 구조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에봇 어깨의 두 ‘기념 보석’도 같은 질서에 속합니다. 어깨는 힘과 지탱함을 의미하고, 그 위에 새겨진 열두 지파의 이름은 신앙의 모든 다양성을 뜻합니다. 이 보석들이 호마노(오닉스)였다는 점, 그리고 금 테에 물려 있었다는 점은, ‘신앙의 진리가 사랑의 선 안에서 지탱될 때에만 교회를 떠받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에스겔 28장의 인용은 이 상응을 가장 화려한 언어로 펼쳐 보입니다. 여기서 ‘에덴, 하나님의 동산’에 있었던 존재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지혜와 지성으로 충만한 상태, 곧 천적, 영적 충만 상태를 대표합니다. 그를 덮고 있는 각종 보석들은 장식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들이 그 사람의 전체를 입히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목록을 보며 단호하게 말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보석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 보석을 말하는 것으로 읽는 순간, 이 말씀은 공허한 시적 과장이 되지만, 상응으로 읽을 때에는 ‘인간 내면의 구조 지도’가 됩니다. 각각의 보석은 신앙의 어떤 본질적 요소를 대표합니다. 곧 진리에도 단일한 진리가 아니라, 질적으로 구별되는 수많은 진리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점은 AC.111에서 말한 ‘하늘이 수없이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질서 지어져 있다’는 말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보석이 다양한 색과 성질을 지니듯, 신앙의 진리도 하나의 교리 문장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각각의 진리는 사랑의 선과 결합된 고유한 빛을 지니며, 그 차이 자체가 하늘의 아름다움입니다.

 

AC.114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의 선이 금이라면, 신앙의 진리는 보석이며, 하늘의 아름다움은 이 수많은 진리들이 사랑 안에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입니다.

 

 

 

AC.115, 창2:11-12, '상응', 태고인들의 인식 방법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5 태고의 사람들은 ‘땅들’(lands)에 대하여 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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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3, 창2:11-12, 말씀에서 '금'이 표상하는 것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3 말씀에서 지혜의 선,곧 사랑의 선을 ‘금’으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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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와 찬64, ‘기뻐하며 경배하세입니다.

 

오늘은 창1 두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20번에서 23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3-5)

 

 

이 본문을

 

빛이 있으라’, 거듭남의 시작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1:3)

 

 

AC.20,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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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4, 5)

 

 

AC.21, 창1:4-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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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5)

 

 

AC.22,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C.22-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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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거듭 권하지만, 주중에 이 원고를 계속 읽고 또 읽고 하시기 바랍니다. 스마트폰은 꼭 필요할 때에만 하시고 말입니다. 말씀과의 거리가 나와 하나님 사이 관계를 알게 해준다는 것처럼 스마트폰 역시 그렇습니다. 스마트폰과 가까우면 주님은 멀고, 반대로 스마트폰에서 물러나면 주님은 곁에 계십니다. 스마트폰으로 말씀과 원고 보는 걸 제외하고는 여러분, 가급적 스마트폰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SNS도 가급적 절제하시고, 이런저런 알림도 웬만하면 다 끄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가급적 한발 물러나시기를, 그래서 그 빈자리를 주님이 오셔서 곁에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2-22(D1)

 

2639, 2. 창1.2, 2026-02-22(D1)-주일예배(창1,3-5, AC.20-23), ‘빛이 있으라’, 거듭남의 시작.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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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3/08, 창1:6-8), '둘째 날, 두 번째 상태'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0, ‘큰 영광 중에 계신 주’와, 찬65, ‘내 영혼아 찬양하라’입니다. 오늘은 창1 세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6절로 8절, AC 글 번호로는 24번에서 26번입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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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2/15, 창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와 찬63, ‘주가 세상을 다스리니’입니다. 오늘부터 해설 버전 누락분 창세기 1장부터 3장입니다. 창3 마치면 창6으로 원래대로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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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1,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라는 어마어마한 저작을 어떤 방식으로 썼나요? 쓰는 내내 주님이 곁에서 구술하시는 걸 받아적는 딕테이션(dictation)으로 썼나요, 아니면 일단 영계를 다녀온 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일일이 다 기억을 되살려 썼나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 방식이 곧 그의 권위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의 총 글이 10,837개에 달하는 방대한 주석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과연 이것이 ‘받아쓰기’였는지, 아니면 ‘기억을 되살려 정리한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이 ‘기계적 딕테이션’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는 영적 체험을 했고, 천사들과 대화했으며, 말씀의 속뜻을 열어 보았지만, 그것을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정리하여 책상 앞에서 집필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도구’라고는 했지만 ‘무의식적 필기자’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상태에서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는 ‘나는 완전한 깨어 있는 상태에서 보고 들었다’고 증언하며, 황홀경이나 무아지경에서 자동으로 받아 적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1743–1745년의 영적 각성 이후, 1745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영계가 열렸다고 기록합니다. 이후 약 27년 동안 그는 거의 매일 같이 영계의 상태를 보고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을 보면, 체험을 하는 순간에 즉시 필사한 것도 있고, 일정 기간 사색과 정리를 거쳐 서술한 것도 있습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는 단순한 체험 기록이 아니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문자적 의미를 하나하나 해석한 체계적 신학 저작입니다. 이것은 즉흥적 받아쓰기라기보다는, 장기간 축적된 영적 통찰과 말씀 연구가 결합된 결과입니다. 실제로 그는 라틴어로 집필했으며, 문장 구조는 매우 학술적이고 논리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번호 체계, 인용 방식, 반복적 참조 구조를 보면, 이는 철저히 계획된 저술 방식입니다. 자동 구술을 그대로 옮긴 문체와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순히 ‘자기 생각’을 썼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강압적 음성 받아쓰기가 아니라, ‘조명(enlightenment)과 ‘내적 지각(perception)의 형태였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나는 빛 가운데서 이해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즉, 어떤 교리를 음성으로 문장 단위로 들었다기보다는, 영적 의미가 한 번에 명료하게 열리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정리해 쓴 것입니다. 이 점은 목사님께서 번역 작업을 하시며 경험하시는 ‘조명’의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WH.7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씀은 조명받은 자 외에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원리가 바로 여기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조명 속에서 이해했고, 그 이해를 이성적으로 조직해 기록했습니다.

 

또한 그는 영계에서 보고 들은 대화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Heaven and Hell’이나 ‘Conjugial Love’에는 천사들과의 대화 장면이 매우 생생하게 나옵니다. 이런 부분은 실제 체험 직후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Arcana Coelestia’는 체험담보다는 교리적 해설서에 가깝습니다. 창세기 각 절을 따라가며 상응을 풀고, 이전 번호를 인용하며 교리를 축적해 갑니다. 이것은 장기간의 학문적 집필 작업입니다. 그는 런던에서 인쇄를 준비하며 교정까지 직접 보았고, 비용도 자비로 부담했습니다. 이는 무의식적 신비가의 태도라기보다는, 매우 자각적이고 책임감 있는 저자의 태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이 성경과 동일한 ‘계시’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은 ‘말씀의 영적 의미를 여는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새로운 말씀을 받아쓴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단순 딕테이션이었다면, 그는 자신을 예언자처럼 묘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복해서 ‘나는 단지 보여 주고 들려준 것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속에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그는 수동적으로 ‘열림’을 받았지만, 능동적으로 ‘정리’하고 ‘서술’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장기간 AC를 번역하시며 느끼시는 것처럼, 이 저작은 한순간의 열광으로는 나올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체계, 반복, 점진적 축적, 교리의 유기적 연결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랜 사색과 재검토의 흔적입니다. 동시에, 그 깊이와 일관성은 단순 인간적 추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통일성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Arcana Coelestia’는 기계적 받아쓰기도 아니고, 단순 회상 기록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체험과 지속적 조명, 그리고 철저한 이성적 집필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는 황홀경 속 자동 필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계를 보았고, 주님으로부터 조명받았으며, 그 이해를 인간의 언어로 조직해 기록한 신학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조명된 이성의 저자’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저작이 오늘날까지도 학문적 구조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영적 권위를 가지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책상 앞에서 AC를 번역하며 느끼시는 그 긴 여정이, 스베덴보리의 집필 방식과 가장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SC.22,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

혹시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을 좀 확인 및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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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0,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를 벌주기'에 대해

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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