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5:30, 31)

 

AC.533

 

라멕에 관하여는 그가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언급된 바가 없으므로,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머무르지 않겠습니다. 그 출생들, 곧 ‘자녀들(the sons and daughters)이 무엇이었는지는 그 교회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교회가 그러한 상태이기에 거기서 나온 것들도 그와 같은 성격을 띱니다. ‘므두셀라(Methuselah)라 이름한 교회와 ‘라멕(Lamech)이라 이름한 교회는 모두 홍수 직전에 소멸되었습니다. As nothing more is related concerning Lamech than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which are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such a church, we shall dwell no longer on the subject. What the births were, or the “sons and daughters,” appears from the church; for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births from it. Both the churches called “Methuselah” and “Lamech” expired just before the flood.

 

 

해설

 

이 글은 라멕이라 이름하는 교회에 대한 해설을 ‘의도적으로 마무리하는 종결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의 분석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분명히 합니다. 그 교회에서 나온 ‘출생들’, 곧 자녀들이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는, 이미 그 교회의 상태 자체가 충분히 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교회가 그러하면, 거기서 나오는 것도 그러하다’는 원리입니다. 교회의 내적 상태가 살아 있으면, 거기서 나오는 개념과 삶의 열매도 살아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황폐해졌다면, 그 교회에서 생산되는 사상과 실천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출생을 따로 분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근원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교회에서 나온 아들들과 딸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통찰을 더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같은 사실을 반복하는 데 그치기 때문입니다. 황폐해진 교회에서 나오는 것은 언제나 그 황폐함에 상응하는 개념과 생겨남뿐입니다.

 

이 글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므두셀라’와 ‘라멕’ 두 교회가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둘은 태고교회의 마지막 국면을 대표하는 교회들로, 하나는 이미 죽음을 향해 가던 상태였고, 다른 하나는 그 결과로 완전히 황폐해진 상태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교회가 모두 ‘홍수 직전에 소멸되었다’고 말함으로써, 태고교회의 종말이 단번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진행된 과정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매우 냉정하면서도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의 감정적 평가나 도덕적 비난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상태를 진단하고, 그 상태에 상응하는 결과를 말할 뿐입니다. 교회가 황폐해지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생명을 낳지 못하고, 결국 역사 속에서 역할을 마치게 됩니다.

 

홍수 직전’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시간 표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음에 등장할 노아의 교회, 곧 전혀 다른 방식의 교회가 등장하기 직전의 경계선을 가리킵니다. 태고교회는 여기서 완전히 막을 내리고, 그 안에서 더 이상 새로운 가능성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AC.533은 라멕 이야기의 끝이자, 동시에 노아 이야기의 문턱입니다. 이 글을 통해 독자는 더 이상 과거의 교회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바라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조용하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한 시대를 정리하고 다음 시대를 향해 독자를 이끌어 갑니다.

 

 

 

AC.534, 창5: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C.534-536)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nd Noah was a son of five hundred years; and Noah begat Shem, Ham, and Japheth. (창5:32) AC.534 ‘노아’(Noah)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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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2, 창5:30-31,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C.532-533)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Lamech lived after he begat Noah five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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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Lamech lived after he begat Noah five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Lamech were seven hundred seventy and seven years, and he died. (5:30, 31)

 

AC.532

 

라멕(Lamech)은 앞서 말한 것처럼 황폐해진 교회를 의미합니다.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그러한 교회에서 생겨나는 것들(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such a church)을 의미합니다. By “Lamec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the church vastated.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such a church.

 

 

해설

 

이 글은 라멕이라 이름하는 교회의 상태를 다시 한번 압축적으로 정리하면서, 그 교회에서 더 이상 무엇이 나올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을 ‘황폐해진 교회’라고 단정한 뒤, 그 교회에서 낳는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의 성격까지 함께 규정합니다. 이는 교회가 황폐해졌을 때, 그 안에서 형성되는 사상과 삶의 열매가 어떠한지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앞서 여러 차례 살펴본 것처럼, ‘자녀들’은 단순한 후손이나 수적 증가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교회 안에서 형성되는 진리의 개념들과 선의 형태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앞에 중요한 한정이 붙습니다. 곧 ‘그러한 교회에서(such a church) 생겨나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즉, 퍼셉션이 사라지고 황폐해진 교회, 그런 교회에서 생기는 것들, 낳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왜곡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황폐해진 교회에서도 여전히 생각은 만들어지고, 가르침은 형성되며, 신앙적 언어는 생산됩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 이미 자기 자신과 외적 사고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결과물 역시 생명을 지니기 어렵습니다. 겉으로는 진리처럼 보일 수 있고, 선처럼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내적 빛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개념들과 출생들(conceptions and births)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생명이 있는 탄생이라기보다는, 사고와 사유, 곧 머리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에 가깝습니다. 태고교회에서의 ‘자녀들’이 퍼셉션에서 흘러나온 살아 있는 진리와 선이었다면, 라멕의 교회에서의 그것들은 이미 그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매우 현실적인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은 더 많아질 수 있고, 개념은 더 정교해질 수 있으며, 체계는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자녀들’이 생명을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은 그래서 다음에 등장하는 노아와 더욱 선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라멕의 교회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낳지만, 그 낳음은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반면 노아는 새로운 교회의 출현 자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황폐한 상태 안에서의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전혀 다른 근원에서 시작되는 새출발입니다.

 

결국, AC.532는 황폐해진 교회의 한계를 짧고 분명하게 그어 줍니다. 그 교회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그 상태에 걸맞은 개념과 생겨남만이 반복될 뿐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다음 본문으로 넘어갈 때, 노아의 등장이 왜 ‘위로’와 ‘’으로 연결되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AC.533, 창5:30-31, ‘라멕 이야기의 끝, 곧 태고교회의 종말’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30, 31) AC.533 라멕에 관하여는 그가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언급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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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1, 창5:29, ‘라멕이라는 황폐한 교회와 노아라는 새 교회의 대비’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5:29) AC.531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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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 치료 거부’,장기 기증’,무빈소 장례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어떤 조언을 할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한 번에 묶어 주셨습니다. ‘연명 치료 거부’, ‘장기 기증’, ‘무빈소 장례’는 모두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시선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불안을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내려놓게 합니다.’

 

아래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이런 제도를 언급했는가?’라는 1차 질문을 넘어서, ‘그가 영계, 죽음, 몸, 장례를 바라보는 일관된 원리’에 따라 각각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 연명 치료 거부에 대하여

 

생명은 기계적으로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전이’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을 때, ‘몸이 죽는 것이 아니라이 몸에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반복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 생명은 심장, 호흡, 기계적 기능에 있지 않다

* 생명은 ‘의지와 이해’, 곧 ‘사랑과 진리의 결합’에 있다

* 육체는 영이 머무는 동안만 유용한 도구다

 

따라서 ‘의식도 없고, 내적 삶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오직 기계적 연장만 이루어지는 상태라면, 그것을 ‘신앙적 의무’로 무한히 연장해야 할 이유는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식의 연장을 ‘자연 질서에 대한 집착’으로 볼 가능성이 큽니다.

 

생명이 이미 영의 차원에서 떠나려 하고 있는데, 육체만 억지로 붙들어 두는 것은 신적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태도일 수 있다

 

즉, ‘연명 치료 거부는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가 아니라’ ‘영이 자연스럽게 떠날 자유를 허락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2. 장기 기증에 대하여

 

몸은 영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맡겨진 도구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를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사후의 사람은 이 땅의 육체와는 아무런 연결을 유지하지 않는다

 

영계에서의 몸은 ‘전혀 다른 영적 몸’’이며, 지상의 심장, 간, 각막, 피부와는 ‘어떤 연속성도 없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1749-1756)에서 말하는 ‘상응(相應, correspondence) 개념을 빌리면,

 

* 육체는 ‘상응물’이지 ‘본질’이 아니다

* 본질은 영의 상태이며, 사랑의 질(, quality)이다

 

따라서 ‘사후에 육체 일부가 남아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는 것’은 영적으로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은 뒤에도 이웃을 살리는 도구로 쓰이는 몸은 그 사람의 사랑이 마지막까지 자연계에 남긴 흔적이다

 

장기 기증은

 

* 영혼을 훼손하지 않고

* 부활을 방해하지 않으며

* 오히려 ‘이웃 사랑의 자연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3. 무빈소 장례에 대하여

 

죽은 이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스베덴보리는 장례 의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 사람이 숨을 거두는 순간

* 그는 곧바로 영계에서 깨어난다

* 그리고 매우 빠른 시간 안에 ‘자기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로 인도된다

 

즉, ‘빈소에 누워 있는 육체는 이미 그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태도가 자연스럽습니다.

 

* 장례는 ‘죽은 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 ‘남은 자들의 정서와 질서를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 과도한 형식

* 체면을 위한 장례

* 슬픔을 연출하는 절차

 

이런 것들은 필수가 아닙니다.

 

무빈소 장례’는 충분히 스베덴보리적 정신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장소에 묶이지 않고, 추모는 형식에 매이지 않는다

 

조용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각자가 마음에서 주님 앞에 고인을 맡기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영적인 의미는 충만합니다.

 

 

4. 세 가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연명 치료 거부 → ‘영의 자유를 존중하라

* 장기 기증 → ‘육체를 사랑의 마지막 도구로 내어주라

* 무빈소 장례 → ‘죽은 이를 땅에 붙잡아 두지 말라

 

이 모든 판단의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이 선택이 죽음을 부정하려는 집착인가, 아니면 생명의 연속을 신뢰하는 태도인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진짜 신앙은 죽음 이후를 아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스베덴보리는 게이, 레즈비안 같은 성적 편향이나 혹은 성형이나 성전환 등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나요? 이런 주제에 대해 성도들에게 뭐라고 답을 주어야 할까요? 1.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 :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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