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The Divine Human) (2025/8/4)

 

어제는 월초 첫 주라 예배 때 성찬이 있었습니다. 아래는 저희가 성찬 때 늘 나누는 메시지입니다.

 

26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6:26-28)

 

주님이 생전에 남기신 두 가지 예전은 침례(세례)와 성찬입니다. 주님의 모든 활동은 세 가지, 곧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으며,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이 두 예전은 바로 이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침례가 그 첫 번째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며, 성찬은 그 두 번째, 천국의 일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대기(大氣)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입니다. 생전에 우리 안에 이 주님의 신성이 형성되어 있어야 사후 우리는 천국의 대기를 호흡할 수 있어 천국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평소 우리 안에 이 주님의 신성 형성하는 걸 ‘주님을 닮는다’ 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주님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은 선(, Divine Good)과 진리(眞理, Divine Truth)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떡으로는 주님의 선을, 잔으로는 주님의 진리를 각각 상징하였고, 또한 각각 주님의 살과 피로 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The Divine Human)을 나타내셨습니다.

 

여기 이 맨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The Divine Human)에 대한 언급이 좀 있었대서 이 글로 정리합니다.

 

그 전에 잠깐 주님에 관한 호칭들을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주님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하나 되신 신(神)이시며, 또한 선과 진리의 속성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선은 천적(天的, celestial), 진리는 영적(靈的, spiritual)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주님의 신성 호칭이며, 이때 ‘여호와’는 선, 곧 천적 호칭, ‘하나님’은 진리, 곧 영적 호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의 인성, 곧 신적 인성 호칭이며, 이때 ‘예수’는 선, 곧 천적 호칭, ‘그리스도’는 진리, 곧 영적 호칭입니다.

 

부활하신 후 주님은 이 모든 호칭을 하나의 호칭인 ‘주님’으로 정하셨습니다. 주님의 인성이 주님의 신성과 하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네, 그럼, 여기서 질문!

 

주님은 왜 그냥 본 모습이신 여호와로 직접 오셔서 상황을 정리하시지 않고, 번거롭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간 과정을 밟으셔야만 하셨나?

 

답은, 여호와는 영계, 자연계를 포함한 이 피조세계 전체조차 감당할 수 없으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우리가 저 하늘의 해를 육안으로 직접 보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가 뜨거운 용광로 곁을 맨몸으로 다가가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가 발전소 전기를 일반 가정집에서 직접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의 오감, 곧 청각, 시각, 후각, 미각, 촉각이 중간에서 그 역할을 대행하는 중간 매체 없이는 외부의 그 어떤 것도 감각할 수 없는 것처럼, 즉 귀라는 대행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소리를 듣겠으며, 눈이라는 대행체 없이 어떻게 사물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이 여호와로 직접 이 피조세계를 방문하시면,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리고 이 세상이든 소멸하고 말기 때문에, 사랑 그 자체이신 여호와께서는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우리의 인지 능력 아득히 저 너머에 계신 신이십니다.

 

이렇게 피조세계가 여호와를 접촉하여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조물에게 맞춤된 중간 매체, 중간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며,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셔서 당시 급했던 영계의 균형을 바로잡으시고, 모든, 우리는 아무도 몰랐던 이 피조세계 전체의 질서를 회복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저 성찬 메시지 맨 마지막 문장, ‘주님의 살과 피로 주님의 신적 인성(神的 人性, The Divine Human)을 나타내셨습니다’로 요약한 것이지요. 이런 엄청난, 어마어마한 일을 하시기 위해 주님은 반드시 마리아로 유전한 유전 악을 극복, 벗어버리심으로써 자신의 인성을 신성으로 회복하셔야만 했고, 우리는 그것을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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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悔改, repentance)란 무엇인가 (2025/7/27)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He who wishes to be saved must confess his sins and do repentance.

 

(AC.8387)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악에 대한 철저한 숙지, 그걸 자기 안에서 보고 시인, 그 결과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긴 후,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 이런 게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To confess sins is to become thoroughly acquainted with evils, to see them in oneself, to acknowledge them, to regard oneself as guilty, and to condemn oneself on account of them. When this is done before God, it is to confess sins.

 

(AC.8388)

 

 

회개한다는 건, 사람이 그렇게 죄를 고백 및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겸손하게 간구한 후, 그런 죄짓는 걸 그치고,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To do repentance is after one has thus confessed his sins and from a humble heart has made supplication for their forgiveness, to desist from them and to lead a new life according to the commands of faith.

 

(AC.8389)

 

 

그가 자신은 남들과 같이 죄인임을 그저 시인만 할 뿐인, 그리고 스스로를 모든 악에 대해 유죄로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을 조사하지는 않는, 즉 자신의 죄를 직시하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고백이라는 걸 하긴 하지만, 그러나 회개의 고백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전에 하던 대로 후에도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He who merely acknowledges that he is a sinner like all others, and who regards himself as guilty of all evils, and does not examine himself—that is, see his sins—does indeed make confession, but not the confession of repentance, for he lives afterward as he had done before.

 

(AC.8390)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날마다 회개하는데요,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반성, 시인 및 대적,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계속해서 넘어지지만, 주님에 의해서는 계속해서 일으키심을 얻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욕망을 품고 악한 걸 생각할 때는 넘어지지만, 그러나 악을 대적할 때는, 그리고 그 결과 악을 행하지 않을 때는 주님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런 게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악 안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넘어지나 주님은 이 또한 끊임없이 이들을 일으키시는데요, 그러나 이는 그들로 하여금 모든 지옥 중 가장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 막으심일 뿐입니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기울어져 가는 자신들을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 만큼이며, 그래서 사실은 그들을 좀 더 온화한 지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He who leads a life of faith does repentance daily; for he reflects upon the evils that are in him, acknowledges them, guards himself against them, and supplicates the Lord for aid. For from himself man is continually falling, but is continually being raised up by the Lord. He falls from himself when he thinks what is evil with desire; and he is raised up by the Lord when he resists evil, and consequently does not do it. Such is the state with all who are in good; but they who are in evil are continually falling, and also are continually being uplifted by the Lord; but this to prevent them from falling into the most grievous hell of all, whither from themselves they incline with all their might; thus in truth uplifting them into a milder hell.

 

(AC.8391)

 

 

자유롭게 행한 회개는 도움이 되지만, 무슨 강압적 상태 속에서 행한 회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압적 상태라는 건, 무슨 큰 병에 걸린 상태라든지, 불행이 닥쳐 몹시 낙담한 상태, 혹은 죽음이 임박한 상태 등, 한 마디로, 건전한 이성의 사용을 방해하는 모든 두려움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강압적 상태에 놓이게 된 악인은 회개를 약속, 선행을 하여 자유로운 상태가 되지만, 그렇게 되면 그는 이전의 그 악한 생활로 돌아갑니다. 선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에게는 그가 정복하는 유혹의 상태가 될 뿐입니다. The repentance that is done in a state of freedom avails; but that which is done in a state of compulsion avails not. A state of compulsion is a state of sickness, a state of dejection of mind from misfortune, a state of imminent death; in a word, every state of fear which takes away the use of sound reason. When an evil man who in a state of compulsion promises repentance and also does what is good, comes into a state of freedom, he returns into his former life of evil. The case is otherwise with a good man, such states being to him states of temptation in which he conquers.

 

(AC.8392)

 

 

입으로 하는 회개, 그리고 삶이 받쳐주지 않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죄는 그런 걸로가 아닌, 삶의 회개, 생활의 회개로 용서받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죄를 계속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은 자비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죄는 여전히 그 사람에게 붙어 있습니다. 아무리 그가 ‘나는 죄 사함을 받았어’라고 할지라도 그가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살지 않는 이상은 죄는 그에게서 제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들 계명에 따라 사는 만큼 그의 죄는 제거되며, 그의 죄가 제거되는 만큼 그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악에서 물러나 선에 머물게 됩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몸 안에 살면서 악에 저항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악에서 물러날 수 있으며, 그가 이 세상 삶을 통해 애정으로 선을 행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선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죄 사함이라는 게 뭔지, 그리고 그게 어디서 오는 건지를 보여 줍니다. 그밖에 무슨 다른 방식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믿는 사람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Repentance of the mouth and not of the life is not repentance. Sins are not forgiven through repentance of the mouth, but through repentance of the life. Sins are continually being forgiven man by the Lord, for He is mercy itself; but sins adhere to the man, however much he may suppose that they have been forgiven, nor are they removed from him except through a life according to the commands of faith. So far as he lives according to these commands, so far his sins are removed; and so far as they are removed, so far they have been forgiven. For by the Lord man is withheld from evil, and is held in good; and he is so far able to be withheld from evil in the other life, as in the life of the body he has resisted evil; and he is so far able to be held in good then, as in the life of the body he has done what is good from affection. This shows what the forgiveness of sins is, and whence it is. He who believes that sins are forgiven in any other way, is much mistaken.

 

(AC.8393)

 

 

사람은 스스로를 살피고, 자기 죄를 시인하며 회개한 후에는 생의 마지막까지 선 안에 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나중에 이전 악한 삶으로 돌아가 거기 빠지게 되면, 그게 바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건데요, 그때 그는 악을 선으로 결합, 그 결과 그의 나중 상태는 이전 상태보다 더 나빠집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After a man has examined himself, and has acknowledged his sins, and has done repentance, he must remain constant in good up to the end of life. If however he afterward falls back into his former life of evil, and embraces it, he commits profanation, for he then conjoins evil with good, and consequently his latter state becomes worse than his former 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12:43-45) When the unclean spirit goeth out of a man he walketh through dry places, seeking rest, but findeth none; then he saith, I will return into my house whence I came out; and when he is come, and findeth it empty, and swept, and garnished for him, then goeth he, and joineth to himself seven other spirits worse than himself, and having entered in they dwell there; and the last things of the man become worse than the first (Matt. 12:43–45).

 

(AC.8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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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멀리할 때 (2025/7/24)

 

참 마음이 아프지만, 조용히 주님 음성 듣고자 귀 기울일 때 떠오르는 글 하나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HH.278,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

 

그리고 영계에서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신기한 현상

 

같은 원리로, 영계에서는 누가 어떤 사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면 그것이 실현된다. 그 사람이 그를 생각 속에서 보고, 그 사람의 상태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누가 어떤 사람에게 반감을 가지면 서로 떨어지게 된다. 모든 반감은 상반된 애정과 생각의 불일치에서 오기 때문에, 영계에서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의견이 같으면 서로의 눈에 보이고, 의견이 달라지는 즉시 시야에서 사라진다. (HH.194, 22장, ‘천국의 공간)

 

유대인들, 특히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성경을 자기들하고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예수’가 얼마나 눈엣가시였을까요? 지난 2천 년 교회사뿐 아니라 구약 선지서들을 보아도 마이노러티(minority)들은 늘 당시 머조러티(majority)들에 의해 핍박과 박해를 받아왔으므로 뭐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런 일이 막상 저에게 일어나는 걸 볼 때, 마음이 참 거시기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혼자 산 걸까요? 그저 주님의 무슨 섭리 있으심이겠지 하고는 저는 오늘도 제게 맡기신 소명에만 집중합니다.

 

아침에 읽은 글 하나

 

‘핏소리’(the voice of bloods)(10)는 체어리티가 사라졌음을, ‘땅에서 저주를’(the curse from the ground)(11)은 왜곡된 교리를,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the 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12)는 거기서 나오는 악과 거짓을 각각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원하여 주님을 외면했기 때문에, 영원한 사망이라는 위험에 빠졌습니다 (13-14). 그러나 체어리티가 이식되는 것은 신앙을 통해서였기 때문에, 신앙은 불가침의 것이 되었습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the mark set upon Cain)는 이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15). (AC.330, 4, 개요)

 

그러니까 ‘천적인 교회, 혹은 천적 인간은 신앙도 사랑으로, 즉 교리가 달라도 사랑부터 하는 반면, 영적인 교회, 혹은 영적 인간은 사랑도 신앙으로, 즉 일단 신앙으로 사랑을 학습한 후 하기 때문’이라는, 전에 제가 첨부한 설명글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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