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5:4-20)

 

이 본문을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인 오늘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한, 어떤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을 어떻게 아나요? 보통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금식을 하거나 안수를 받거나, 아니면 여러 날 산에 올라 소위 산기도를 하거나 합니다. 성경 읽기도 하고,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하거나 무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라는 책도 보고, 유튜브 등을 찾아보는 등 사안의 중요성이나 심각성에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걸 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것들이지요, 보통 결혼에 대하여, 직장, 직업에 대하여, 거주지에 대하여 등 말입니다. 비슷한 노력을 비기독교인들은 점집을 찾거나 사주를 보는 등 저마다 자기들의 방식으로 애들을 씁니다. 왜들 이럴까요? 잘 모르겠어서이지요 주님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 그러는 겁니다. 비기독교인들의 경우는 신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라고 하겠네요. 이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인인데 왜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의 뜻을 잘 모르는 걸까요?

 

한편으로, 그런데 여러분, 좀 우스갯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럼 천국 천사들도 주님 뜻 알기 위해 우리처럼 금식기도 하고 그럴까요? 이건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지요? 네, 맞습니다.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가 하는 이런 거 안 할 거 같아요. 아니, 안 합니다. 왜죠? 천사들은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알기 때문입니다. 안 그러면 그건 천사가 아니지 않을까요? 네, 맞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우리처럼 이런 거 안 합니다. 안 하고도 늘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압니다. 그리고 우리와는 다르게 그들은 알게 된 그 주님의 뜻을 마음을 다해 즉시 기쁘고 즐겁게 실행에 옮깁니다. 그들이 주님의 뜻을 순종, 즉시 실행에 옮길수록 그만큼 더 그들은 더욱더 주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들은 100% 주님 뜻대로만 삽니다. 그것도 기쁘고 즐겁게 자원하여 삽니다. 천사들과 주님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쌍방은 내 것이 모두 네 것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천사들의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즉 천사들은 즉시 아는데 우리는 왜 모를까요?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차이입니다. ‘퍼셉션(perception)이란, 어떤 일과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 곧 그 일, 그 상황에 대한 그분의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알게 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천, 거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 안에 머무르는 능력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안다는 건, 그 일을 주님의 진리 안에서 실천하여 주님의 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일까? 를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3-16)

 

주님의 이 마태복음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퍼셉션 능력입니다. 우리와 천사의 차이가 바로 이 차이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능력은 각 사람의 ‘착한 행실’만큼 생깁니다. 그리고 이 ‘착한 행실’은 세상 속에서,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즉, 세상을 향해 주님의 빛을 비추며, 세상에 필요한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우리가 감당하면 할수록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천사들처럼 쉽게 알게 하십니다. 퍼셉션이 또렷해지는 것이지요. 우리와 천사들의 퍼셉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주님 뜻을 알면 즉시 순종하는 반면, 우리는 그러지 않거든요. 저들은 주님 뜻 실천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임이 없는데 우리는 안 그러거든요. 그래서 저들은 또렷하지만 우리는 희미하며, 저들은 생생하지만 우리는 흐릿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퍼셉션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 이름들의 순서는 바로 이 퍼셉션이 또렷한가, 흐릿한가의 순서입니다. 저 이름들, 그러니까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이라는 이름은, 그리고 뒤에 더 나오는 므두셀라, 라멕, 그리고 노아까지, 이 이름들은 사실은 어느 한 개인들의 이름이 아니라 해당 시대를 관통하던 퍼셉션의 이름들입니다. 즉 첫 사람 아담 시대를 이끌던 퍼셉션을 일컬어 ‘아담(Adam, 사람)이라 이름한 것이며, 이런 퍼셉션으로 살던 사람들을 가리켜 ‘아담’ 교회라고 하는 것이지요. ‘(Seth), ‘에노스(Enosh)도... 등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첫 교회인 아담의 퍼셉션만 제일 온전했고, 이후 갈수록 점점 더 모호하고 흐릿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하여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분명하게 알은 반면, 반대로 에녹, 므두셀라를 거쳐 라멕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이 중 이 에녹은 특별한데, 이 에녹 이야기는 다음 주에 다룰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이런 퍼셉션의 온도차는 비유하자면, 한 가운데 씨앗이 있는 과일과도 같고, 방 한가운데 전구가 환하게 켜져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과일의 중심으로 갈수록 근원이지만, 반대로 바깥 껍질 쪽으로 갈수록 근원에서 멀어지는 것과 같고, 방 한가운데로 갈수록 빛이 환하지만, 반대로 멀어질수록 빛이 흐릿해지는 것과도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천적 인간이요, 안식일이고, 일곱째 날이었던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한 반면, 반대로, 즉 후손, 후대로 갈수록 흐릿해진 이유는, 아담으로 갈수록 선과 진리는 하나, 곧 앎은 삶을 섬겼던 반면, 그 반대 순서로 갈수록 진리는 선에서 분리되어 앎이 삶을 누르고 머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faith)이 체어리티(charity)의 머리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원래대로라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 체어리티가 입고 다니는 옷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신앙은 단지 그릇일 뿐이고, 정작 중요한 건 거기 담긴 내용인 체어리티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세상 종말은 다른 게 아닙니다. 세상을 떠받치는 건 창조주이신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인데 이것이 남김없이 다 사라진 상태, 그래서 더 이상 퍼셉션이 없는, 완전히 끊긴 상태가 바로 끝, 곧 종말이요, 최후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주님은 항상 각 교회 시대든, 한 국가, 한 개인이든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무슨 새로운 걸 시작하시지 않습니다. 완전히 황폐해져야, 그래서 완전히 자기를 비워내야 그 빈 그릇에 주님의 새것을 담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누가복음 둘째 아들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13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15:13-20)

 

우리는 우리의 무슨 신앙 연수와 상관없이 갈수록 주님의 선과 진리를 즉시, 그리고 생생하게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굳이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깨닫지 말고 웬만하면 그런 무슨 조짐이 보이면 얼른 돌이켜 그 무한 루프, 그 끝없이 되풀이되는 그 악한 패턴에서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탈출이란, 위 누가복음 본문 맨 마지막 말씀처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곧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선택 등 내가 끌어다 쓸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바닥난 후, 드디어 주님을 찾는 것이지요. 이때 반드시 위 둘째 아들처럼 ‘스스로 돌이키는’ 시간, 곧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저는 오늘 설교로 여러분께 드리고 있지만, 사실은 지난날 제 얘기를 주님 앞에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

2026-01-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3, 26. 창5.2, 2026-01-11(D1)-주일예배(창5,4-20, AC.486-515),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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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1/04, 창5:1-3, 신년예배, 성찬), '창5 아담 계보의 속뜻'

2026년 첫 주일입니다. 보통은 신년 주일이라 하여 설교도 그에 맞게 준비하지만, 저희는 당분간 아주 특별한 절기 외에는 오직 이 AC에만 전념하기로 한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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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alel were eight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he died. (5:16, 17)

 

AC.512

 

이 말씀도 앞에 나온 유사한 말씀들과 동일합니다. It is the same with these words as with the like words before.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앞에서 반복되어 온 해석 원리를 다시 한번 분명히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기보다 이미 제시된 틀 안에서 이 구절을 읽어야 함을 조용히 상기시켜요. 즉, 여기서 언급되는 표현들도 모두 시간이나 사건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퍼셉션의 변화를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앞선 구절들에서 ‘’, ‘’의 숫자, ‘자녀들’, 그리고 ‘죽음’이 모두 상태의 언어였던 것처럼, 이 구절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반복은 설명의 부족이 아니라, 독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붙들어 주는 장치예요. 성경을 다시 문자적 이해로 끌어당기려는 유혹을 차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해석의 속도를 잠시 늦추라고 말해 주는 것처럼도 들립니다. 새롭고 인상적인 해석을 계속 덧붙이기보다, 이미 밝혀진 원리가 지금 읽는 말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라는 초대라는 말입니다. 말씀의 힘은 새로운 정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진리가 상태에 따라 반복해서 작동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태고교회의 흐름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마할랄렐 이후의 교회 상태도 앞선 단계들과 동일한 법칙 아래 놓여 있으며, 퍼셉션의 일반화와 쓰임새의 변화라는 큰 흐름 속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결국 AC.512는 해설을 멈추는 글이 아니라, 해석의 방향을 고정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읽어 온 방식 그대로, 상태를 중심에 두고, 퍼셉션과 사랑의 생명, 그리고 쓰임새의 변화를 함께 보라는 조용한 확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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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창세기 본문 중 에서가 자기 아내들을 구하는 장면들입니다.

 

34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26:34, 35)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27:46)

 

6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7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8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9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28:6-9)

 

그리고 아래는 이에 대한 해설입니다.

 

에서의 두 결혼(헷 족속 유딧, 바스맛)과 그로 인한 이삭, 리브가 마음의 ‘근심’, 그리고 리브가가 ‘내 삶이 싫어졌다’고까지 말하는 탄식은, 문자 그대로만 보면 ‘이방(헷)과의 혼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창세기 속뜻의 흐름에서는 ‘가정 내 갈등’ 자체가 핵심이라기보다 ‘교회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합(혼인)’이 어떻게 흐트러지는가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혼인’은 단지 가족사(史)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신앙/교리)가 결합하여 생명이 생겨나는 상태’를 대표적으로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딸(아내)을 맞이했는가’는 ‘어떤 종류의 정서, 욕구, 교리, 삶의 방식과 결합했는가’를 드러냅니다.

 

에서(자연적 선, 혹은 자연인의 강건한 에너지에 가까운 것)는 본래 ‘야곱(진리의 차원, 교리, 질서, 분별)’과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즉 ‘자연의 힘(에서)’은 ‘진리의 인도(야곱)’를 받아 ‘선의 도구’가 될 때 복된 자리에 놓입니다. 그런데 창26–28의 이 결혼 장면들은, ‘자연적 힘이 진리의 인도를 싫어하거나(혹은 무시하거나)’, 그 대신 ‘바깥의 것(외적 매력, 세상적 기준, 감각적, 자기중심적 기쁨)’과 결합해 버릴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입니다. 속뜻으로 말하면, ‘속 사람(이삭의 선, 리브가의 진리)’이 ‘겉 사람(에서의 삶)’의 잘못된 결합과 선택으로 인해 깊은 불일치와 불쾌, 곧 ‘양심의 고통’과 같은 상태를 겪는 것입니다.

 

특히 ‘헷 족속’은 단순히 ‘민족이 이방이다’라는 표지가 아니라,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주님과의 결합에 어긋나는 어떤 요소’—다시 말해 ‘내적 예배(주님 사랑)와 연결되지 않은 외적 예배’, 혹은 ‘진리의 빛이 아닌 감각과 습관이 주도하는 삶의 방식’ 같은 것을 대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은, ‘자연적 삶이 자기에게 편하고 좋아 보이는 방식(외형상 그럴듯한 것)과 결합하는데, 그것이 주님께로 향한 내적 결합을 깨뜨리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겉으로는 결혼이요 가정의 확장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생명(선과 진리의 혼인)이 아닌 다른 결합’이 됩니다. 그러니 리브가가 ‘내 삶이 싫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된 감정 표출이 아니라, ‘진리(리브가)의 입장에서 보아, 선과 진리의 계승이 끊어질 수 있다는 절박함’을 드러내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이라는 대목은, ‘진리의 계열(야곱)이 외적, 감각적 결합을 택하면, 교회(한 사람 안의 교회)의 미래가 사라진다’는 두려움입니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는 ‘리브가가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아내를 맞게 하려는 것’이 단지 ‘민족 순수성’이나 ‘좋은 혼처 찾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진리가 자기에게 합당한 정서, 선의 바탕을 얻어와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밧단아람(아람, 라반의 집)은 흔히 ‘외적 지식들, 기억-지식들, 교리적 재료들’이 모여 있는 영역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즉 야곱이 그곳으로 가서 아내를 맞는다는 것은, ‘진리(야곱)가 주님께서 쓰실 수 있는 선의 바탕(애정, 삶의 습관, 실천의 토양)을 얻어와 결합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나안 사람의 딸’과 ‘헷 사람의 딸’은 ‘겉은 종교, 도덕, 문화로 포장되었으나 내적이 주님께로 열려 있지 않은 결합’을 대표할 수 있고, 반대로 ‘밧단아람에서의 결합’은 ‘진리가 주님의 섭리 아래서 순서를 갖추어 선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상징이 됩니다.

 

28:6-9에서 에서가 보이는 반응은 아주 인간적으로도 설득력 있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아버지가 기뻐하지 못하네. 그럼 다른 방식으로라도 맞춰볼까?’ 그래서 에서는 ‘가나안 딸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 못함’을 보고, 이번에는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겉으로는 ‘수정’이고 ‘효도’ 같은 동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더 섬세한 진단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에서가 깨달은 것’은 ‘주님의 뜻(내적 이유)’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분(외적 신호)’에 머무를 위험이 큽니다. 즉 ‘내적 회개’가 아니라 ‘외적 처방’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가나안이 안 된다면 이스마엘 쪽은 어떨까?’ 하는 선택은, ‘내적 진리의 인도’가 아니라 ‘대안 탐색’으로 움직이는 자연인의 전형적인 움직임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마엘 계열은 성경 전체 상징 흐름에서 종종 ‘영적인 것과 분리된 합리성/지식, 혹은 외적 신앙과 내적 사랑의 불일치’ 같은 것을 대표하는 방향으로 읽힙니다(물론 문자적으로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그 자체로 단순 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본처들 외에’ 또 더한다는 표현까지 보면, 이것은 ‘정리와 순서의 회복’이 아니라 ‘혼합의 확대’에 가깝습니다. 속뜻에서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둔다’는 표상은, ‘한 삶이 여러 종류의 애정/교리를 뒤섞어 품는 상태’, 곧 ‘일관된 중심이 없는 결합’을 드러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시도는 ‘근본 문제의 치유’가 아니라 ‘겉모양의 조정’에 머물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그 기쁨이 ‘주님 안에서의 질서’가 아니라 ‘관계의 표면’에서만 판단되면, 결과적으로 ‘내적 사람의 근심’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이 대목들을 설교자의 관점으로 풀어내면, 성도들에게는 꽤 현실적인 거울이 됩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며 감각적 선택을 밀어붙이는 것도 문제이지만, ‘눈치 보고 반응 보고, 다른 처방을 덧대는 방식’도 동일하게 문제의 뿌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주님이 다루시는 것은 ‘내가 누구를 기쁘게 했는가’가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과 결합했는가’입니다. 즉 ‘내 삶(자연적 욕구, 일상 습관, 즐거움, 자존심, 효율, 성공욕)’이 ‘주님의 진리’와 결합해 주님께로 향하는가, 아니면 ‘겉으로 그럴듯한 외적 기준’과 결합하여 내적 생명을 갉아먹는가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삭, 리브가의 ‘근심’은 단지 부모 마음이 상한 정도가 아니라, ‘내적 교회가 외적 삶의 결혼 선택 때문에 숨이 막히는 상태’를 그립니다.

 

정리하면, (1) 에서의 헷 족속 결혼은 ‘자연적 힘이 외적, 감각적 삶의 방식과 결합하여 내적 선, 진리와 어긋나는 상태’를 보여주고, 그 결과가 (2)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곧 ‘내적 양심의 고통,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불쾌’로 나타납니다. (3) 리브가의 탄식과 야곱의 파송은 ‘진리가 합당한 선의 바탕과 결합하도록 주님이 순서를 세우시는 섭리’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4)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을 추가로 맞이하는 장면은 ‘내적 변화가 아닌 외적 보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연인의 움직임’과 ‘혼합의 확대’라는 위험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단락들은 ‘가정사’라기보다 ‘한 사람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어떤 길로 가는가’—‘주님 중심의 결합인가, 외형 중심의 결합인가’를 깊이 묻는 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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