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심화

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있었을까?

 AC.31 [3]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키고자 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이 규례의 상응, 상징, 그 내적 의미는 몰랐다고 어디서 읽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요?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출27:20-21에는 순수한 감람유를 가져다가 등불을 켜고 회막 안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것을 보살피도록 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등불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지켰지만, 그 규례가 표상하는 천국의 내적 의미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하는 행위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행위를 통하여 거룩한 것을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표상’과 ‘ 표상을 행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자신도 그 거룩한 상태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제사,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 직무와 의복 등은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표상의 거룩함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은 영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느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제도와 말씀에 부여하신 표상적 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제사장이 등불의 내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해서 등불의 표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제물과 제단과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표상의 의미는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표상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의미를 몰라야 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를 아는 것 자체가 표상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더 오래된 교회들에서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무엇을 상응하고 표상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해야 표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영적 원리는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많은 사람이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강하게 기울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율법과 규례를 주셨고, 그 외적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질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정해진 규례를 수행하는 동안 그 외적 행위는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미를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지킬 있었는가?’라는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명령의 모든 깊은 의미를 알아야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외적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의 무지를 그 자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표상 교회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높은 영적 상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상태 속에서도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시고,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천국의 것들이 표상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상적이어야만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십니다. 유대교회의 외적 예배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를 통하여 주님과 천국에 관한 표상들이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AC.31에서 말하는 ‘항상 타는 등불’은 무엇을 표상했을까요?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만큼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상의 세부적인 의미는 ‘적절한 곳에서’ 설명하겠다고 여기서 유보합니다. 그러므로 AC.31만을 가지고 ‘저녁은 반드시 이런 상태이고, 등불이 밤새 타는 것은 반드시 이런 교회사적 보존을 뜻한다’는 식으로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밝힌 만큼과 우리가 그 원리를 따라 추론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심화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이렇습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규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만 그 규례가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상의 근거는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영적 질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표상을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내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적 예배까지 사용하여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고 보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타는 등불’은 유대인들이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보다, 그 규례를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표상하도록 하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31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이며, 주님께서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고 다시 겉 사람의 삶에까지 나타나게 하시는 질서입니다.

 

 

 

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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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위 AC.31 [2]에서 사60:1-3, 20을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이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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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심화

2. 60  교회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사60:1-3, 20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회라고 하는데, 만일 이 교회를 말하는 거라면, 어휴, 그 시기가 너무도 앞서는 것 같아요...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교회에 관한 ’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 교회’라는 표현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가 훗날 말하는, 현 기독교회의 뒤를 잇는 ‘ 교회(New Church)’, 곧 ‘ 예루살렘’을 벌써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는 먼저 AC.31의 문맥 자체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60을 인용하면서 세 가지를 서로 연결합니다. ‘주님의 강림’, ‘이방인들의 밝아짐’, 그리고 ‘ 교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가 우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주님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빛이 임하고, 이전에 어둠 가운데 있던 이방인들이 밝아지며, 그 결과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사60의 인용 내용과도 잘 맞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위에 임하실 것이며’, ‘나라들은 빛으로 나아오리라’는 말씀은 어둠 가운데 새로운 빛이 임하고 그 빛으로 사람들이 나아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교회’와 연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1의 ‘ 교회’를 곧바로 스베덴보리가 훗날 ‘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새 교회만을 가리키는 전문 명칭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31 자체는 그렇게 특정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교회사의 시대 구분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해와 달과 빛이 사랑과 신앙에 관계된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매우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관한 ’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AC.31에서 사60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교회에 관한 것인 동시에 한 사람의 거듭남에도 적용됩니다.

 

이것은 창1의 속뜻 전체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창조 이전의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여 ‘빛이 있으라’ 하시고, 마침내 넷째 날에는 하늘의 궁창에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가 놓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연계 창조의 역사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주님에게서 빛을 받아 사랑과 신앙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영적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 교회’와 ‘거듭나는 사람’이 함께 언급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는 단지 건물이나 조직의 이름이 아닙니다. 교회의 생명은 결국 사람들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새롭게 되는 것과 한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규모는 다르지만 서로 대응되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어둠 가운데 빛이 임하고, 사랑과 신앙이 새롭게 일어난다는 점에서는 같은 영적 원리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훗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 예루살렘’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후기 저작에서 ‘ 교회’와 ‘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신다는 주제는 그의 교회론 전체를 관통합니다. 다만 그 후대의 교회론을 AC.31의 짧은 ‘ 교회’라는 표현 안에 미리 모두 집어넣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31에서 사60의 ‘ 교회’가 너무 이른 시기에 등장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 교회’라는 말을 보자마자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후기 저작에서 말하는 ‘ 예루살렘’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먼저 ‘주님의 강림으로 새로운 빛이 임하고, 이방인들이 밝아지며, 그로 인해 일어나는 교회’라는 AC.31 자체의 설명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 말씀을 우리 각 사람에게 돌립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주님에게서 빛을 받아 거듭날 때, 그 사람 안에서도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가 새롭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60을 인용한 AC.31의 핵심은 ‘ 교회가 교회사에서 정확히 번째 교회인가?’를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가운데 빛이 일어나고, 그 빛으로 교회가 새로워지며, 동시에 한 사람도 새롭게 창조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1의 표현을 훗날의 ‘ 교회’ 교리와 억지로 분리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그 후기 교리를 이 짧은 구절에 모두 소급하여 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AC.31이 여기서 실제로 밝힌 만큼만 먼저 읽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이후 스베덴보리가 전개하는 교회론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됩니다.

 

 

 

AC.31, 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위 AC.31 [3]의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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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위 AC.31 본문,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and here, that by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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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 본문,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 인간이 감각과 지식만을 의지할 때, 사랑과 신앙은 자연스럽게 소멸된다는 해설도 있지만... 좀 더 와닿는 사례로 설명해 주세요.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겔32:7-8을 인용하면서 바로와 애굽이 여기서는 ‘감각적인 것과 단지 지식적인 것의 원리’를 뜻하며, 그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상태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읽으면 ‘감각도 나쁘고 지식도 나쁘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AC.27-28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기억 속에 먼저 모여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AC.31의 문제는 감각이나 지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사람이 감각적인 것과 자연적인 지식을 가장 높은 판단 기준으로 삼아, 그것을 넘어서는 영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실재한다고 여기고, 자신의 자연적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참일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본래 감각과 지식은 더 높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섬기는 수단이 될 수 있는데, 이제 오히려 그것들이 영적인 것을 판단하는 최종 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내가 수도 없고 측정할 수도 없으니 영혼이나 천국은 있을 없다’고 단정한다고 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질문을 제기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정말 천국이 있는가?’, ‘영혼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탐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신앙을 파괴하는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처음부터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모든 영적 실재를 그 기준으로 재단하는 데 있습니다. 이때 감각은 진리를 탐구하는 도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배척하는 기준이 됩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역사와 언어를 연구하고, 자연과학을 배우고,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는 것 자체는 사랑과 신앙을 소멸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지식들은 바르게 사용될 때 진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내가 이해할 없는 것은 참일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러면 지식이 진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성을 확증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신학 지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과 교리를 매우 많이 알고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는 성경 구절도 잘 찾고 교리도 정교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기보다, 자기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다른 사람을 낮추는 데 사용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문제는 ‘지식이 많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지식이 자기 지성의 우월함을 확증하는 수단이 되면서 사랑과 신앙보다 위에 놓였다는 데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돈, 건강, 성공, 평판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결과를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잘되는 것이 주님의 복이고, 실패하는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증거’라고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자연적 결과를 영적 상태의 최종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기도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러므로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결론짓는 것도 같은 문제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결과가 보이지 않는 섭리를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 된 것입니다.

 

AC.31이 인용하는 겔32의 이미지는 이러한 상태를 ‘하늘의 광명체들이 어두워지는 ’으로 표현합니다. 해와 달과 별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을 나타내는데, 감각적인 것과 단지 지식적인 것이 지배하게 되면 이 광명체들의 빛이 가려집니다. 이는 감각과 지식이 본래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낮은 것이 높은 것을 섬겨야 하는 질서가 뒤집혔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27-28AC.31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지식들이 모여 거듭남을 위한 땅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들이 목적 자체가 되거나 사람이 그것만을 의지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지식은 거듭남을 위한 귀중한 수단이지만 그 자체가 사랑과 신앙의 생명은 아닙니다.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말을 ‘많이 공부하면 신앙이 약해진다’는 경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보다 위에 놓지 말라’는 질서의 문제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감각과 지식이 자기 자리에 있을 때 그것들은 거듭남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는 사람 안에서 점점 어두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도 아니고 ‘나는 감각과 이성을 사용하는가?’도 아닙니다. ‘내가 가진 감각과 지식은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지, 아니면 자기 지성과 자연적인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세우는 데 사용되는지가 중요합니다. 바로 이 차이가 AC.31에서 밝게 빛나는 광명체와 어두워지는 광명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AC.31, 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위 AC.31 [2]에서 사60:1-3, 20을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이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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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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